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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 우리말 <동짓달>과 우리말의 위엄 임규찬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문학평론가 1 우리말을 생각하니 쇼펜하우어가 자신의 모국어, 독일어 를 두고 한 말이 떠오른다. 단 한마디라도 존재하는 모국어를 삭제하는 것은 한 명의 동족을 살해하는 것과 같은 범죄이다. 훔볼트의 유명한 언명대 로, 언어는 명백히 인간만이 소유하는 이성의 기관(Organ)으로, 인간 의 모든 사유 세계를 이끌어 갈 뿐만 아니라 인간의 감성적 행위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한다. 말하자면 세계를 이해하는 인간의 모든 행위 자체 가 언어를 통해 실현되므로 언어는 곧 인간 이다. 그런 언어와 관련하여 최고의 헌사는 아마도 시인이나 작가에게 가 장 많이 주어질 것이다. 따라서 해당 민족이나 국가가 가장 자랑하는 문학 작품이야말로 그 나라의 최고 언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 리고 거기서 발견되는 언어의 맛과 깊이, 특성이야말로 한 나라 언어의 위엄과 개성을 드러내 주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말을 대표할 불후의 명작 으로 우리는 어떤 작품을 내 세울 수 있을까. 흔히들 하나의 작품이 불후의 명작 으로 추앙받기 위 해서는 탁월한 미적 상상력과 언어적 형상화를 통해 정신적 위대함이 문학 속 우리말 117

작품에 담겨 있어야 하며, 또 그러한 예술적 사유와 감동의 도수를 가늠 하고 흡입할 수 있는 폭넓은 독자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아마도 이쯤 이면 황진이의 시조 <동짓달>이 떠오르지 않을까.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른 작품들에서 찾아보기 힘든 최고의 찬사를 쏟아 놓은 바 있다. 가 령 진이는 여기서 시간을 공간화하고 다시 그 공간을 시간으로 환원시 킨다. 구상과 추상이, 유한과 무한이 일원화되어 있다. 정서의 애틋함 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수법이야말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154수 중 에도 이에 따를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라고 칭송한 피천득, 또는 우 리가 물려받은 몇 천 수 시조를 몽땅 내어놓고 바꾸자 해도 바꿀 수 없 는 시조 라고 극찬했던 이병기,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나는 가람보다 한술 더 떠서 이 시는 세계적이라고 믿는 사람 이라는 최원식의 찬사만 으로도 이 작품의 경지를 충분히 짐작할 터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동짓달>에서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위엄, 문학 적 성취를 충분히 만족할 만큼 공유하는 것일까. 사실 문학, 특히 시를 이해하려고 할 때 가장 큰 문제는 외형적으로 먼저 비일상적인, 비산문 적인 어떤 특이성으로 접근하고, 그렇게 껍질을 벗기고 나서는 태연하 게 일상적, 산문적으로 독해하는 이율배반성이다. 사람들은 먼저 시어 자체에서 나타나는 특별한 수사학적 특성에 주목한다. 비유의 사용이 나 언어적 특징, 짜임새들이 특정한 내용을 문학적으로 만든다는 생각 이다. 그러므로 시다움 은 무엇을 말하느냐 가 아니라 어떻게 말하느 냐 에 있게 된다. 언어가 갖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관계나 진실성의 탐 사보다 언어로 표출하는 외형적 틀 형식에 우선권을 준다. 황진이의 시조 <동짓달>도 대체로 그러했다. 밤의 허리, 춘풍 이불 등의 기발한 비유와, 시간을 공간으로, 관념을 물질로 치환하는 놀라운 상상력, 서리서리와 굽이굽이 등의 맛깔스러운 어휘를 활용한 대조 기 118 새국어생활 제24권 제4호(2014년 겨울)

법 등을 하나같이 앞세운다. 그러고 나서 일정한 산문으로, 자기만의 일면적 이야기로 시를 풀이해 나간다. 가령 이런 식이다. 애인과 떨어 져 있는 황진이에게 밤은 한없이 길다. 더구나 그 밤은 한 해 가운데 밤 이 가장 긴 동짓달의 밤이다. 그러나 그 밤은 애인과 함께라면 너무나 빨리 새 버릴 밤이다. 이렇게 지겹도록 넘쳐 나는 밤의 시간이 막상 애 인이 오고 나면 그때는 그 반대로 너무나 모자랄 것이다. 그녀는 그 밤 을 저축해 놓고 싶다. 애인 곁에 있게 됐을 때 모자라게 될 밤에 대비해 서. 그러니까 그 모자란 밤을 보충하기 위해서. 그녀는 밤을 한 토막 잘 라 내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어 놓기로 한다. 애인이 온 날 밤에 굽이굽 이 펴기 위해. 왜냐하면 그날 밤이 너무 짧을 것이 분명하므로. 시 역시 읽기 위해 존재한다. 읽는다는 것은 이해를 뜻하고, 또 이해 한다는 것은 해석을 뜻한다. 제아무리 난해하고 의미를 거부하는 시라 해도 어떤 방식으로든 해석되고, 이해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해와 해 석이 산문과 다르다는 데 시적 특성이 있다. 예술에서 관념은 물질화되 며, 물질 자체가 의미처럼 다루어진다는 것은 하나의 상식이다. 그런 만큼 시는 산문적 의미보다는 시적 심상(images)이며, 시적 심상은 사 유도 아니고 사물도 아닌 의식과 대상 사이의, 세계와 그것의 개념화 이 전의 최초 표상 사이의 가장 원초적 그물망을 형성한다. 이런 단계에 이 르면 시는 단순히 무엇을 의미하거나 표현하거나 표상하기를 멈춘다. 문학이 우리를 사로잡는 이유는 특정한 언어가 우리의 감정을 자극 하고 흥분시켜서가 아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하기 힘든 사물, 사 건, 사실을 상상을 통해 사유할 수 있게 함으로써 세계와 인간을 보는 우리들의 시각을 넓혀 주어서이다. 이 말은 곧 작품 전체를 하나의 유 기체, 즉 살아 있는 예술품으로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작품에서 보여 지는 단편적 성분을 예술성이란 이름으로 끄집어내어 적당히 처분해서 문학 속 우리말 119

는 안 된다. 우리가 문학 언어 라고 할 때는 단편적 조각으로서 언어가 아니라 언어를 매개로 조직된 하나의 유기체로서 전체 작품이다. 따라 서 작품 내의 언어들은 해당 언어가 유기체로서 작품 전체에 어떤 활동 을 하며, 대체할 수 없는 필연성의 고리로 언어들끼리 어떤 관계를 맺 고, 그리하여 어떤 세계를 창조하느냐에 있다. 2 동짓달( 冬 至 ㅅ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여 춘풍( 春 風 )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얼운 님 오신 날 밤이여드란 구뷔구뷔 펴리라 어휘 수준에서 보자면 <동짓달>에 아주 독특한 혹은 아주 새로운 말 은 없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아주 기발하다고 하는 걸까? 니체의 말대 로 진짜 독창적인 사람은 모든 사람들의 눈앞에 있으나 아직 알아차리 지 못해 이름조차 가지지 못한 것을 알아보는 눈을 가지고, 그것에 새로 운 이름을 부여한다. 동짓달, 밤, 허리, 춘풍, 이불 등 그 자체는 너 무도 흔하다고 여겨지는 말들이다. 겨울밤이 가장 길고 봄바람이 따스 하다는 것도 누구나 하는 생각이다. 그런데 그런 빤한 말과 생각을 바 탕으로 전혀 새로운 형상화로 창조했으니 그런 마음의 눈, 창조의 힘이 야말로 언어의 참 본질에 부합한다. 사실 언어적 차원에서 시를 이해하는 일은 작품 속 언어와 언어적 연 계, 비유 등이 만들어 내는 중층적 다의적 의미와 이야기, 그런 집중 과 확산을 통해 상상할 수 있는 작품 세계의 넓이와 깊이를 다시금 개별 120 새국어생활 제24권 제4호(2014년 겨울)

언어들이 끌어안음으로써 끊임없이 다시 살아나는 시적 운동, 언어의 활동을 놓치지 않는 일이다. 따라서 최종 정리된 형식의 분석에서는 완 결된 의미, 의미의 고정 으로서 언어가 아니라 활동하는 존재, 존재의 활동 으로서 언어를 얼마만큼 잘 운용하느냐가 그만큼 중요하다. 동짓달 혹은 동짓달 기나긴 밤을 은 사실상 특별한 설명 없이도 특 정한 정서를 일으킨다. 밤이 가장 길고 가장 추운 때, 혼자의 외로움이 계절과 때에 맞물려 상승한다. 그런데 돌연 한 허리를 버혀내여 로 시 는 비약한다. 가장 강력한 시적 사건이자 상상의 열림이다. 그리고 이 것은 시 전체의 목적어 로 시를 이끈다. 그렇게 보면 동짓달 이란 말도 여러 겹이다. 동지 가 있는 음력 11월, 가장 밤이 길 때라는 일반적인 사실만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당장 동짓달 기나긴 밤을 에 대한 해석부터 단순치 않다. 특정한 하루 가 아 닌 달 이라면 이 밤 은 복수의 밤 이다. 낮이 짧다는 사실 자체까지 지 워 버린 밤의 세계 로 동짓달 은 당긴다. 그러한 밤이 지속되는데 돌연 한 허리 를 베어 낸다. 그렇다면 화자는 동짓달 긴 밤을 통과한 연후에 그가 살아온 밤들의 한 허리 를 베었다. 한 허리 는 동짓달 한가운데 밤 의 밤. 비유의 자장( 磁 場 )은 갈수록 가운데로, 가운데로 모아지고 응축 된다. 동짓달 동짓날의 자시( 子 時 ). 그런데 이런 시간만의 흐름을 허용 치 않는다. 시간 이 허리 로 물질화, 육체화하면서 정신적인 것이 덩달 아 일어선다. 기나긴 밤 이 잠을 못 이루는 밤, 아니 어둠 속에서 환하 게 깨어나는 밤 으로, 그리하여 외로움이 그리움으로 성숙하는, 육신과 마음이 하나 되는 뜨거운 합류가 거기 있다. 여기서 통상 버혀내여(베어 내어) 를 많이 쓰는데, 이것 대신 둘헤내 여(둘로 끊어 내어 혹은 나누어) 를 더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가령 최원 식은 일반적으로는 둘헤내여 (둘로 끊어 내어) 대신 버혀내여 인데, 문학 속 우리말 121

후자의 살기( 殺 氣 )는 사무침 속에서도 따뜻하기 그지없는 이 시의 전 체적인 기품과 썩 어울리지 않아, 나는 전자를 옹호한다. 라고 말하기 도 한다. 그러나 맥락상 한 허리 와 어울리는 것은 버혀내여 이다. 또 황진이의 작품 전체가 보여 주는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하고, 섬세하면 서도 활달한 면모를 생각하면 버혀내여 가 훨씬 강한 이미지를 선사한 다. 한 길 사람 속의 심중( 心 中 ) 심연( 深 淵 )을 날카로운 단애처럼 당당 하게 보여 주겠다는 장부의 이미지가 서늘하다. 이육사의 겨울은 강철 로 된 무지갠가 보다. (<절정>)를 연상케 하는 말이다. 흔히 <동짓달>을 단면적으로 해석할 때 가장 많이 마주치는 것이 밤 의 한 반쯤을 떼어 내어 이불 아래 넣었다는 말 그대로 산문적 풀이이 다. 거기에다 겨울 긴 밤 의 한 자락을 짧은 봄 밤 에 이어 붙이겠다는 산술적 풀이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이는 한 허리 의 육체성, 그리고 거 기에 깃든 정신성을 생생하게 포착하지 못한 표피적, 기계적 해석이라 할 것이다. 동짓달 가장 긴 밤의 한가운데를 시인 자신의 깊은 마음으 로 치환하는 놀라운 언어적 마술. 최원식의 말대로 이 시조를 나직이 읊조리다 보면, 저절로 과연! 이란 탄식이 터져 나오게 마련이다. 얼마 나 골똘했기에, 시인은 동짓달의 그 차고 긴 밤의 허리를 볼 수 있었을 까? 를 함께하는 일이다. 그럴 때 중장의 춘풍 이불 아래 에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시간과 자 기 자신(의 마음)을 한데 묶는 절묘한 감각적 심상의 세계가 눈부시다. 단순히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는 식이 아니라 스스로 겨울[ 冬 ] 을 봄 [ 春 ] 으로 만든, 나아가 사물화된 밤 을 생명의 동력인 바람 으로 일으 켜 세우는 자기 자신의 성숙이 여기 안받침하고 있다. 이불 아래 넣는 것이 나와 거리가 있는 또 다른 객관물이 아니라 나와 함께하는 생명의 시간과 그리움의 마음이라는 주체적 표상의 생성이야말로 작품의 진정 122 새국어생활 제24권 제4호(2014년 겨울)

한 가치가 아닐까. 그리고 이 지점에서 동짓달 은 더 큰 세계로 이끈다. <농가월령가>에서 노래한 일양시생지( 一 陽 始 生 地 ) 로서 동짓달이다. 주역 에서 말한 복괘( 復 卦 )로, 태양의 죽음과 부활로 상징화되는 전 환점이다. 음의 기운이 극에 달해 양의 기운이 싹트는 반전( 反 轉 )이다. 온 누리에 꽉 들어찬 음의 기운이 줄어들고 이제 사랑과 꿈의 불씨를 지 피는 양의 기운을, 시인은 제 마음이 키워 온 사랑의 바람으로 일구는 우주적 시이기까지 하다. <동짓달>이 비유와 대조, 연결의 수사법을 탁월하게 구사하고 있다 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단순한 수사법이 아니라 질적인 운동의 자연스러운 전개와 만나는 내용의 형식화, 형식의 내용화이다. 가령 동짓달 기나긴 밤 은 종장의 얼운 님 오신 날 밤 과 자연스럽게 연 결되는데 그 사이 중장의 춘풍 이 길을 연다. 그것으로 초장과 종장의 밤 이 달라지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실제로 초장은 중 장과 긴밀하게 연결되고, 중장은 종장과 긴밀히 이어지는데, 다시 되돌 아가면 초장과 종장 사이는 질적 비약과 고양으로 한껏 확장된다. 중장 의 '서리서리'는 종장의 구뷔구뷔 와 절묘하게 짝을 이뤄, 홀로 안으로, 안으로 압축하고 응축시킨 것을 드디어 사랑하는 님과 함께 팽창, 폭발 시키려는 삶의 환희로 출렁인다. 좁은 방 안, 한 길 사람 속에서 웅장한 자연, 큰 세상을 향한 대서사시다. 서리서리 는 고종석의 말대로 우리 가 가진 최고의 사랑 부사어 이다. 언어적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사전 속의 분할되고 단편화된 해석 모두를 함께 끌어안고 움직인다. 1. 국수, 새끼, 실 따위를 헝클어지지 아니하도록 둥그렇게 포개어 감아 놓은 모양. 비녀는 또다시 댕그랑 소리를 내어 떨어지고 머리 쪽은 서리서리 풀어진다. 출처: 박종화, <다정불심> 문학 속 우리말 123

2. 뱀 따위가 몸을 똬리처럼 둥그렇게 감고 있는 모양. 뱀이 몸을 서리서리 감고 있다. 3. 감정 따위가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는 모양. 가슴속에 서리서리 얽힌 한 그 순간 그녀는 마음에 서리서리 슬픔이 뒤엉켰다. 목 타는 그리움과 슬픔과 분노가 서리서리 맺혀 있는 그 땅을 쉽 게 떠날 그가 아니었으나. 출처: 김성동, <풍적> - 표준대국어사전 (국립국어원) 오히려 온전한 내용의 합일까지 <동짓달>은 이룩한다. 감정 따위가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는 부정적 모양을, 원래의 국수, 새끼, 실 따위를 헝클어지지 아니하도록 둥그렇게 포개어 감아 놓은, 빈틈없이 꽉 찬 마 음의 모양으로 멋지게 바꾸어 놓는다. 이런 서리서리 의 감흥을 온전히 안고 마지막 종장으로 갈 때 구뷔구뷔 의 실감도 그만큼 커진다. 종장의 얼운 님 의 표기 역시 한 번쯤 곱씹어 볼 말이다. 이 말은 어 룬, 어른, 정든 등 여러 형태로 표기하는데, 얼우다 란 옛말을 다시 되 살리기 위해서라도 얼운 님 으로 표기하는 것이 좋겠다. 이 말은 잘 알 려진 대로 <서동요>에도 있는 말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섹스하 다, 성교하다, 씹하다 등과 비교해 보더라도 한결 아름답고 멋스럽 다. 더구나 어르다, 어루만지다, <춘향전>의 업음질 등 유사 연관어 를 떠올리면 더 정겹다. 물론 요즘 쓰는 어른 의 어원에 해당하는 말이 므로 이미 고어( 古 語 )가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어른 으로 충족되지 않는, 한자 정인( 情 人 ) 을 연상케 하는 순우리말로서 절묘하다. 임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진솔하게 나타낸 대표적 고려가요 <만전춘별사> 를 보자. 124 새국어생활 제24권 제4호(2014년 겨울)

얼음 위에 댓잎자리 보아 임과 나와 얼어 죽을망정 얼음 위에 댓잎자리 보아 임과 나와 얼어 죽을망정 정( 情 ) 준 오늘밤 더디 새오시라 더디 새오시라 얼음, 얼우다, 정 주다, 얼다 등 말의 활용이 절묘하다. 얼다 는 말에는 물이 얼다 는 뜻 이외에도 남녀가 얼다, 곧 남녀가 사랑하다 는 뜻이 있다. 따라서 뒷부분에 나오는 얼어 죽을망정 은 추워서 죽는다는 뜻도 되고, 사랑하다 죽는다는 뜻도 된다. 이 맥락에서 황진이 <동짓달>의 얼운 님 도 물이 얼다 의 뜻까지 살 려 차디찬 바깥세상에서 고생하는 낭군을 은유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 다. 실제로 작품이 끌어안고 있는 시간을 한겨울만으로 한정해도 좋다. 춥고 외로운 겨울 에 뜨거운 사랑 으로 이겨 나가는 사랑의 시, 하나의 상상적 현실, 또는 선취( 先 取 )된 현실로서 님과의 황홀한 합일로 읽을 수 있다. 말하자면 깊은 사랑을 육체와 함께 느낄 수 있는, 마음과 육체 모두가 행복해지고 황홀해지는 이런 사랑의 시를 어디서 보겠는가. 이 렇게 보면 황진이의 <동짓달>은 춥고 고통스러울수록 더 깊어지면서 깊어진 만큼 생생하게 살아나는 삶의 방법, 사랑하고 사랑하여 온전히 하나가 되는 사랑의 방법을 이야기해 주는 인생의 시이기도 하다. 뛰어난 작품은 앞선 작품들을 끌어안고 넘어서며 더 우람한 산맥을 형성하는 법, <만전춘별사> 외에도 <동동>, <이상곡>, <육자배기> 등 을 떠올리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동지 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라는 <밀양 아리랑>의 앞뒤 안 맞는 요구도 황진이의 <동짓 달>을 연상하면 자연스레 가능한 세계이다. 사랑의 황홀경, 존재의 충 만감을 위엄 있게 그려 낸 불후의 명작 <동짓달>이 있기에 가능한 일 이다. 문학 속 우리말 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