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해항도시문화교섭학 14 인간생활의 영역화 된 모든 차원을 포괄하는 문화는 혼종적이며, 역 사적으로 변화하며, 역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문화 사이 의 교섭은 동화나 대결이 아니라, 창조적 변용으로 사유된다고 한 다. 이러한 문화는 교섭과 분리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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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 해항도시문화교섭학 14 부산과 왜관음식이 비슷해지는 이유와 달라지게 된 배경과 주요 음 식 및 독자적 음식문화로 굳어져 토착화하게 배경을 시대, 지역, 맛, 재료 등으로 구분하여 비교 분석한다. 연구의 범위는 조선시대 부산지역의 이문화간 교류, 수용, 변용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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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일반논문 - 초량왜관을 중심으로 -* 金康植** 1) Ⅰ Ⅱ Ⅲ Ⅳ. 머리말. 음식문화. 생활문화. 맺음말 Ⅰ. 머리말 해항도시는 열린 공간으로서 비교적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되는 지 역이다. 해항도시는 문화의 혼종적 교섭적 성격 규명에 관심을 기 울이는 문화연구에서 관심을 집중시킬 만한 대표적인 접촉지대이 다. 조선후기에 해항도시 釜山의 모습은 海港과 軍港이라는 두 측 면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생활체계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복잡한 상호작용 체계이며, 1) 2) 이 논문은 2008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08-361-B00001). ** 한국해양대학교 국제해양문제연구소 HK교수(ks1592@hanmail.net). 1) 정문수 외(2004), 해항도시문화교섭학 연구방법론, 도서출판 선인, 187188쪽. 2) 조선시대 해항도시 부산의 모습 중에서 해항의 모습은 초량왜관, 통신사, 永嘉臺, 漂民授受所에서 찾을 수 있으며, 군항의 모습은 慶尙左水營, 7鎭의 부산 집중 등에서 찾을 수 있다. *

162 해항도시문화교섭학 14 인간생활의 영역화 된 모든 차원을 포괄하는 문화는 혼종적이며, 역 사적으로 변화하며, 역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문화 사이 의 교섭은 동화나 대결이 아니라, 창조적 변용으로 사유된다고 한 다. 이러한 문화는 교섭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교섭과 하나일 수밖 에 없다. 따라서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문화의 혼종적 교섭을 이 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 문화의 혼종과 교섭의 현상을 강하게 드러냈던 경계지대의 역사적 중요성이 재발견 되고 있는데, 문화 접촉지대의 대표적인 공간은 메트로폴리스, 항구, 경계지대라고 한다. 조선후기에 해항도시 부산에 있었던 초량왜관 은 대표적인 항구 속의 경계지대였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초량왜관에 대한 연구는 제도사, 경제사, 사회사(생활사), 문화사, 건축사 측면에서 다양하게 연구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최 근에는 통제되어야 할 공간과 일상적인 삶의 장소라는 시각에서 연 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문화접촉의 공간과 장소성에 주목한 연구성 과가 축적되고 있다. 즉 조선후기의 해항도시 부산에 존재했던 초량 왜관은 닫힌 공간 속의 열린 무대 라는 통제 속의 제한적 공간이었 지만, 실제 동래 지역민들은 국가의 각종 통제를 무릅쓰고 접촉과 교류를 행하였던 공간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구체적으로 조선후기 에 문화접촉의 공간이었던 초량왜관의 장소성에 대한 연구도 진전 3) 4) 5) 6) 7) 8) 9) 정문수 외, 위의 책, 180쪽. 정문수 외, 위의 책, 182쪽. 정문수 외, 위의 책, 180쪽; 피터 버그 저, 강상우 옮김, 문화혼종성, 서울: 이음, 111-113쪽. 6) 한일관계사학회 편(2002), 한일관계사연구의 회고와 전망, 서울: 국학자료 원; 한일관계사연구논집 편찬위원회 편(2002), 통신사 왜관과 한일관계, 한일관계사논집 6, 서울: 경인문화사. 7) 田代和生(1981), 倭館-鎖國時代の日本人町, 日本: 文藝春秋; 金東哲(2001), 17-19世紀の釜山倭館周邊地域民の生活相, 年報都市史硏究 9, 都市史硏 究會; 김동철(2010), 조선후기 통제와 교류의 장소, 부산왜관, 한일관계 사연구 37, 한일관계사학회; 양흥숙(2009), 조선후기 東萊 지역과 지역민 동향-倭館 교류를 중심으로-, 부산대 박사학위논문. 8) 김동철(2010), 위의 논문; 양흥숙(2009), 위의 논문. 3) 4) 5)

163 되고 있다. 조선후기에 초량왜관은 공식적으로 유일한 대일 접촉지대로서 일 본 외교사절을 접대하고 수용하는 客館이자, 대일 무역소로서 접대 처, 유숙처, 교류처, 무역처 등의 다양한 기능을 하는 공간이었기 때 문에 다양한 문화교류와 접촉이 일어면서 충동한 공간이었다. 때 문에 초량왜관에서의 문화접촉과 교류는 전근대시기의 각종 통제 책에도 불구하고 문화의 혼종화로 나타나면서 지역사회로 전파되어 나갔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초량왜관에는 공식적인 국가 차원의 접촉 외에 도 조선인과 일본인이 접촉할 수 있는 공간이 형성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 초량왜관 주변의 草梁村, 朝市 참여, 屯田 경작 등이었 다. 그러나 각종의 문제가 발생하자, 양국 일반인의 접촉을 막기 위 해서 각종의 규제 시설을 설치하였다. 대표적으로 돌담, 설문, 수문 등이었다. 이러한 규제와 차단은 역설적으로 양국민의 접촉이 다양 하게 진행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본고에서는 초량왜관이 문화교섭이 발생하는 해항도시 속의 통제 된 경계지대였지만, 조선인과 일본인의 교류와 접촉을 통해서 문화 접변이 일어나고, 문화 혼종화의 과정이 일반인에게도 진행되어 나 가는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이를 위해서 국가 사이의 공식 10) 11) 12) 양흥숙(2013), 범죄를 통해 본 왜관 주변 사람들의 일상과 일탈, 로컬의 일상과 실천, 서울: 소명출판. 10) 장순순(2008), 조선후기 倭館에서 발생한 朝日 양국인의 물리적 마찰 실태와 처리, 한국민족문화 31,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손승철 (1993), 倭人作拏謄錄 을 통하여 본 倭館, 항도부산 10, 부산직할시 사편찬위원회; 제임스 루이스(1997), 釜山倭館을 중심으로 한 朝 日交流交奸事件에 나타난 權力-文化의 葛藤-, 정신문화연구 66, 한국정신문화 연구원. 11) 대표적으로 지금까지 金聲振의 연구가 주목된다(김성진(1998), 조선후기 金海의 생활상에 미친 일본문물, 인문논총 52, 부산대 인문학연구소; 김성진(1998), 19세기 초 김해인의 생활을 침식한 倭風, 지역문학연구 3, 부산경남지역문학회). 12) 김동철(2010), 앞의 논문, 6-28쪽; 양흥숙(2009), 앞의 논문, 207-247쪽. 9)

164 해항도시문화교섭학 14 적인 문화교류와 접촉보다는 일반인들의 생활 속으로 전파되는 일본 문화의 접촉, 접변, 혼종화의 과정에 대해서 음식문화와 생활문화를 중심으로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Ⅱ. 음식문화 문화는 인간이 집단을 이루어서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이러한 문 화는 교류와 접촉 속에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런데 영향이 크 면 흡수하고, 적으면 동화되면서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게 된다. 이러 한 현상을 문화혼종 또는 문화변동이라고 한다. 그런데 문화의 혼종 성을 구별하는 경계는 다른 집단과의 만남을 통하여 서로 대조되는 상황에서 다른 집단과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부각되고, 구성되고 유 지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문화의 혼종성은 추상적 개념으로 인 종, 계급, 성별, 민족 등의 문화적 차이에 기반을 두고 설명하는 개 념이고, 혼종화는 혼종성이 나타나게 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러 한 문화의 혼종화는 통합, 동화, 분리, 주변화 등으로 구분할 수 있 다. 조선후기에 해항도시 속의 경계지대 초량왜관에서도 분화 혼종 화는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우선 조선후기에 초량왜관에서 음식문화가 교류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초량왜관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음식재료를 구입하는 과정에 서 조선인과의 접촉이 나타나면서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조선후기 에 초량왜관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먹는 음식 재료는 동관의 수문 앞 에서 서는 朝市에서 구입했다. 여기에는 두모포, 沙道, 大峙 등 왜관 인근 마을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수확한 야채와 생선 등을 가지고 왜 13) 14) 13) Bank, Marcus(1996), Ethnicity : anthropological constrictions(london & New York : Routledghe), 12-13. 14) 쪽 혼종문화는 구체적인 사회 문화적 실천의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문화양 상을 말한다고 한다(이화인문과학원 편(2013), 문화 혼종과 탈경계 주체, 서울: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9-27쪽).

165 관으로 오면, 왜관 주민들은 쌀로서 구입을 했다고 한다. 당시 국 가에서 朝市를 공식화한 조처에서 알 수 있다. 15) 몰래 민가에 나간 왜인이 매번 생선과 채소를 매매한다고 둘러대는 것은 진실로 몹시 고약한 일이지만, 영구히 그 길을 막는다면 왜인들 이 살아갈 길 또한 몹시 절박하므로, 우리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생선 이나 채소, 과실, 쌀과 같이 날마다 쓰고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은 날마 다 아침 전에 관문 밖에서 팔게 하면 왜인들도 역시 守門 밖에서 물건 을 사 가지고 즉시 들어갈 것이요, 절대로 전과 같이 민가에 드나들지 않을 것이다. 16) 조선후기의 해항도시 부산의 초량왜관에는 500명 내외의 일본인 이 상시 거주하고 있어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문화적 교류와 접촉은 은 양국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며, 문화 혼종화의 실 제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조선후기에 초량왜관을 통하여 보급된 일본음식 가운데 대표적인 것을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勝歌妓이다. 조선후기에 일본의 음식문화가 유입되어 전국 적으로 전파되어 나가고 있었다. 이런 문화전파이자 문화의 혼종화 과정이기도 했다. 李學逵의 초량왜관사 에 승가기가 언급되어 있 는데, 승가기는 당시 알려진 대표적인 일본음식이었다. 승가기는 17) 18) 田代和生(2005), 앞의 책, 231쪽. 增正交隣志 권4, 志, 約條, 숙종 4년(무오). 이학규의 호는 洛下生 또는 洛下이다. 그는 강진과 김해의 유배에서 풀려 난 뒤에도 김해지방을 내왕하며, 이곳의 문사들 및 중인층과도 계속 관계 를 유지하면서 김해 지역의 문화의식과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에 기여를 했다고 한다. 아울러 그는 조선후기에 김해에 유배 와서 초량왜관을 내왕 하면서 일본문화의 유입을 목도한 지식인이었다. 그의 저서로는 필사본 洛下生藁 手寫本 등을 합한 20여 책이 있다. 국내외로 흩어져 그의 유 고를 1985년에 수합하여 낙하생전집 3권으로 영인 발간했다. 그의 저 서는 조선후기에 초량왜관을 통한 일본문화의 전파를 보여주는 소중한 자 료이다. 18) 金聲振(1998), 조선후기 金海의 생활상에 미친 일본문물, 인문논총 52, 부산대 인문학연구소, 296쪽. 15) 16) 17)

166 해항도시문화교섭학 14 맛있는 국의 이름인데, 만드는 법은 본래 대마도에서 나온 것으로 고을의 부호들이 많이 즐겼다고 한다. 조선후기에 초량왜관에서는 조선과 일본의 음식문화 교류가 빈번했다. 그것은 국가적 차원의 연 회, 개별적인 만남과 접대 등 다양하였다. 그래서 조선에서도 스기야 키를 먹는 풍조가 유행하게 되었다. 조선후기에 초량왜관이 음식문화의 변화에 영향을 준 부분은 洛 下生全集 에 자세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가운데 草梁倭館詞 와 金官竹枝詞 에 묘사되어 있다. 19) 20) 가. 接慰使 돌아갈 때 객관 식사 돌아보니, 神仙爐에 불사르고 늦게까 지 술 마셨네. 신선로 국물이 歌妓만 못함을 근심치 말고, 새로 동 쪽바다에서 물꿩이 오는 것을 찾아 보시게. 나. 승가기 국물은 가기보다 낫다고 하는데, 만드는 법은 앞서 일본으 로부터 전해졌네. 21) 22) 이처럼 勝歌妓는 조선후기에 초량왜관을 통해서 우리나라에 알려 진 대표적인 일본음식이었다. 승가기는 국의 이름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승가기는 음식문화 가운데서도 국 문화가 발달해 있던 조선 인들이 받아들이기에 수월했을 것이다. 그런데 승기악에 대해서는 1748년(戊辰) 通信使行 때의 정사였던 申維翰도 언급하고 있는 대표적인 일본음식이었지만, 조선인의 입맛 에는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23) 이기문은 일본의 스기야키가 조선시대 勝妓樂湯, 勝伎樂湯, 勝技冶岐로 음 차하였음을 밝히고 있다(이기문(2007), 어원탐구, 승기악탕, 새국어생활 제17권 1호, 118쪽). 20) 李學逵, 洛下生全集 中, 海榴菴集(己卯), 金官紀俗詩. 勝歌妓美臛名 造 法本出對馬州 邑中富豪多嗜之. 21) 낙하생전집 上, 因樹屋集, 草梁倭館詞. 慰使歸時館餉廻 神仙鑪爇晩銜杯 不愁鑪臛輸歌妓 新覓東洋水雉來. 22) 낙하생전집 上, 因樹屋集, 金官竹枝詞. 勝歌妓臛出歌妓 造㳒先從黍齒傳. 23) 田代和生(2005), 앞의 책, 231쪽. 19)

167 영조 24년 3월 20일에, 島主가 바야흐로 사행에게 勝妓樂을 보내 니, 점심은 잠시 천천히 드십시오. 하더라 한다. 승기악이라는 것은 저들의 가장 맛좋은 음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윽고 들으니, 사자가 거느려 와서 왜인이 손수 만들어 바친다고 한다. 마치 우리나라의 이 른바 悅口資雜湯과 같은 것인데, 그 빛이 희고 탁하며 장맛이 몹시 달 지만, 특별히 별미인지는 모르겠다. 일기도의 왜인은 음식에 가장 박 하며 日供의 간도 다 맞지 않아서, 일행이 모두 이 때문에 괴로워한 다. 24) 한편 승가기에 대한 이야기는 甲申 通信使行(1764) 때의 정사였던 趙曮도 언급하고 있는데,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먼저 조선후기에 지 식인들에게 일반화되고 있었던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일본 의 승기악보다 우리나라의 열자구탕이 낫다고 비교하기도 했다. 이른바 勝妓樂은 일명 杉煮인데, 생선과 나물을 뒤섞어서 끓인 것이 다. 저들은 이를 일미라고 하여 승기악이라고 이름한 것이지만, 그 맛 은 어찌 감히 우리나라의 열구자탕을 당하겠는가. 25) 그리고 1747년 통신사 종사관으로 다녀온 曺命采가 쓴 奉使日本 時聞見錄 에서는 勝妓樂이라 기록되어 있다. 통신사절 등 다양한 경로로 조선에 전파되고 있던 승가기는 조선후기에 초량왜관을 통 해서 승기악기는 일본에서의 유래를 파악할 정도로 널리 소개되고 있었다. 勝其岳伊는 가장 珍味로 여기는 것인데, 도미ㆍ熟鰒(손질하여 다듬 거나 부드럽게 한 복어)ㆍ달걀ㆍ미나리ㆍ파를 익혀서 잡탕을 만드는 曺命采, 奉使日本時聞見錄 乾, 3월. 島主方送勝妓樂於使行 午飯姑徐進 云 勝妓樂者 彼中之第一味云者 俄聞使者領來 而倭人親爲調進 若我國所謂 悅口資雜湯之類 而其色白而濁 醬味甘甚 殊未知爲異味也 壹歧倭人 最薄於 飮食之節 日供鹹淡 皆不適宜 行中以此爲悶. 25) 趙曮, 海槎日記 中, 계미년 11월 29일조. 所謂勝妓樂 一名杉煮 雜以魚 菜而煎湯者 彼人謂之一味 名以勝妓樂 而其味何敢當我國悅口子湯也 24)

168 해항도시문화교섭학 14 것이다. 한 마을 사람들이 삼나무[杉木] 밑에 모여 앉을 때에는 각각 제집에서 한 가지를 가져와서 이것을 만들기 때문에 杉煮라고 부른다 한다. 26) 원래 일본에서 勝其岳伊는 가장 珍味로 여기는 것인데, 倭名도 이 와 같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승기악탕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즉 초량왜관에서 도미ㆍ熟鰒ㆍ달걀ㆍ미나리ㆍ파를 익혀서 잡탕을 만드 는 것이었다. 한 마을 사람들이 삼나무[杉木] 밑에 모여 앉을 때에는 각각 제집에서 한 가지를 가져와서 이것을 만들기 때문에 杉煮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문제는 勝妓樂湯을 숭어 또는 잉어, 조기, 도미, 소고기, 닭 등을 구워 여러 가지 채소와 고명을 넣어 함께 끓인 한국의 요리라고 보 기도 한다는 점이다. 27) 饌品은 杉煮로서 아름답다 하는데, 魚肉과 채소 백 가지 물건을 섞 어서 술과 장을 타서 오래 달인 것인데, 우리나라의 잡탕 등속과 같은 것이다. 옛적에 여러 왜인들이 杉木 밑에 비를 피하다가 배가 고파 먹 을 것을 생각하여 각기 가진 바 물건을 가지고 한 그릇에 집어넣어 삼 목을 가지고 불을 때어 달였는데, 그 맛이 매우 좋았으므로 인하여 杉 靑莊館全書 권65, 蜻蛉國志 2, 物産 飮食. 勝其岳伊 最爲珍味 以鯛魚 熟 鰒鷄卵芹蔥 煮爲襍羹 有一村人 會坐杉木下 名絜其家一物 爲此因名杉煮. 한편 번역문의 주에서는 勝其岳伊는 鋤燒 또는 杉燒를 우리나라에서 음 역한 말이라고 하였다. 원문의 설명을 보면 전자를 말한 것이며, 스끼[鋤, 가래]에 올려놓고 구웠으므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고, 스키는 스꾸 [剝, 잘게 자르다, 저미다]의 명사형으로 魚肉ㆍ채소 등을 저민다는 뜻에 서 나왔다고 한다. 杉煮는 곧 스기야끼[杉燒]를 말하는 것인데, 스기야끼 는 스기야키와 달라서, 어육을 삼나무 널빤지 위에 올려놓거나 삼나무 상 자에 넣어 익혀서 삼나무의 향기가 스며들게 하는 음식을 말한다. 원문에 서는 스키와 스끼의 음이 비슷한 데에서 나온 착오로 말미암은 일설을 인 용한 것이라고 하였다. 27) 五洲衍文長箋散稿 人事篇, 服食類., 諸膳. 又勝其岳伊羹者 最爲珍味 倭 名如是 我人改名勝妓樂湯 以鯛魚熟鰒雞卵芹蔥 煮爲雜羹 有一村人會坐杉 木下 各絜其家一物爲此 因名杉煮云. 26)

169 煮라 하였다. 왜인의 방언에 삼목을 勝技라 하므로 俗에 이 음식을 승 勝技冶技라 하니 야기는 굽는다는 말의 訛音이다. 28) 이처럼 승기악탕은 기록마다 그 명칭과 재료가 다르지만, 조리법 과 어음이 비슷하므로 같은 음식으로 취급하였다. 勝佳妓湯 혹은 勝 只雅湯 등이 주류이며, 도미를 이용했을 경우, 그저 도미찜이라고 부 르기도 한다. 이처럼 조선후기에 초량왜관에서 제공하는 스기야키는 생선요리 의 왕자인 도미를 중심으로 색깔 배합과 포만감을 주는 달걀, 그리 고 맛도 맛이지만 씹는 맛이 일품인 전복을 반드시 사용하고 있었 다. 이처럼 개량된 왜관판 스기야키 요리는 일본요리과 조선요리의 장점을 결합한 두 나라 음식문화가 교차하는 왜관에 잘 어울리는 음 식이었다고 하였다. 이렇게 초량왜관에서 전파된 스기야키는 조선 의 인근 지역으로 전파되어 나갔는데, 조선의 국 문화의 혼종화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화의 혼종화는 혼종성이 나타나게 되는 과정을 의미하는데, 초량왜관과 주변 지역을 거쳐 전국적으 로 나타나고 있었다. 둘째, 국수이다. 이학규는 對馬島의 가락면과 蕯州의 신선로라 고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초량왜관 蘆酒屋에서 술을 마실 때의 일을 기술한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 집에서는 가락면을 蕯州 에서 들여온 신선로에 끓여먹고, 또 대마도의 밀감을 그릇에 담아 29) 30) 31) 32) 33) 海遊錄 下, 附聞見雜錄. 饌品以杉煮爲美 用魚肉菜蔬百物 和酒醬爛煮 如 我國雜湯之類 昔有群倭避雨於杉木之下 飢甚思食 各以所有之物 合投於一 器 而炊杉木以煮 其味便好 因爲得名 方言謂杉曰勝技 故俗呼勝技冶岐 冶岐 又煮之訛音也. 29) 田代和生(2005), 앞의 책, 231쪽. 30) 田代和生(2005), 앞의 책, 235쪽. 31) 이화인문과학원 편(2013), 문화 혼종과 탈경계 주체, 서울: 이화여자대학 교출판부, 29-32쪽. 32) 낙하생전집 下, 欲是齋再集, 前浦行. 馬州條麪 薩州鑪. 33) 낙하생전집 下, 欲是齋再集, 上二首. 上二首 叙蘆花屋夜飮時事. 28)

170 해항도시문화교섭학 14 내놓았다고 한다. 조선후기의 기록에는 倭麪의 제조법이 소개되어 있다. 즉 왜면은 素麪이라고도 했다. 19세기 초 閨閤叢書 와 李圭景의 五洲衍文長 箭散稿 에 倭麪이라는 말이 나오고, 이것이 요즘 먹는 素麵을 설명 하고 있기 때문에 소면은 일본에서 유입된 것으로 본다. 素麵은 본 래 양념을 가하지 않는 국수를 뜻하며, 肉食이 아닌 菜食을 素라고 도 하므로, 고기 양념을 넣지 않고 간단한 채소류만을 넣은 국수라 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보통 음식점에서 말하는 素麵은 후자를 말한다. 이처럼 조선후기에 초량왜관을 통해서 알려진 소면에 대해서 구체 적인 素麪의 제조 방법이 소개되고 있었는데, 이것은 왜면이 조선후 기에 광범위하게 전파되었음을 말해준다. 索餠은 素麪인데, 밀가루를 소금물에 반죽하여 기름을 섞어 매끄러 움을 이용하여 가는 가닥을 만들어 실처럼 늘여 대나무에 걸어 말렸다 가, 쓸 때에는 삶아서 거품 곧 기름기 을 제거하며 거품이 다 없어지 면 좋은 국물이 되는데, 그것을 먹는다. 34) 한편 국수에 대해서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반의 기록인 빙허 각 李氏의 閨閤叢書 에서도 倭麪, 즉 메밀 소면을 요리하는 법이 정리되어 있다고 한다. 35) 靑莊館全書 권65, 蜻蛉國志 二, 物産 飮食. 泥索餠 素麪也 用麪和塩水 溲之和油 乘滑作細條 捵引之如絲 掛竹乾之 用時煮之 去沫乃油氣也 沫盡 爲佳蘸 汁食之. 한편 번역문의 주에서는 원문에는 삭병이 곧 소면이라 하였으나 사실은 다르다. 사꾸베이[索餠]는 일명 무기나와[麥繩ㆍ麥索]라 하는 과자로, 밀가루와 보릿가루를 반죽하여 쪄서 이겨 새끼 모양으로 꼬 아 만든 것이며, 소어멘[素麪ㆍ索麵]은 국수의 일종으로 밀가루를 소금물 로 반죽하여 늘여서 線狀으로 잘라 볕에 말려 두었다가 찌거나 삶아 먹는 것이다. 원문의 설명은 두 가지 혼동한 듯하다고 하였다. 35) 양흥숙(2009), 앞의 논문, 179 180쪽. 34)

171 삶아 즉시 쓰면 짠맛이 있어 좋지 않으니, 오래 담가 우려 짠맛을 빠진 후 다시 씻어 오미자국이나 깻국에 쓰나니라. 36) 이러한 기록들은 조선후기에 초량왜관을 통해서 조선과 일본 교류 에 있어서 음식문화의 접촉과 변용이 많이 일어났음을 말해준다. 아 래 기록은 국수의 종류에 대해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국수는 絲麵과 索麵이 있으니, 약간 가는 것은 삭면이라 하고, 지극 히 가는 것은 사면이라 하는데 칡가루에다 메밀을 섞어 만들어서 가닥 이 길어서 끊어지지 아니하고 접어서 사리[卷]를 만들었고, 국물에 타 서 빛깔이 흰데 맛이 아름답다. 37) 한편 국수의 보급은 왜면을 선물로도 주고받게 하였다. 조선후기 에 기장에 유배 왔던 沈魯崇은 인근 고을의 鄭童璞으로부터 왜면을 선물 받았다고 한다. 왜면이 조선의 광범위한 지역으로 전파되었 음을 알 수 있다. 주목할 점은 조선후기에 초량왜관을 통해서 전파 된 일본의 倭麪이 조선에서는 絲麪과 索麪으로 구분되면서 국수의 전파를 말해주고 있다. 문화접변이 문화의 혼종화를 가져오고 있음 을 말해준다. 한편 丁若鏞은 다산필담 에서 수령과 서리들의 부패상을 언급하 면서 倭麪을 기록해 두고 있다. 이 역시 조선후기에 왜면의 광범위 한 전파 상황을 보여준다. 38) 감사가 廉問할 경우에는 친한 빈객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헌 신할 수 있는 사람을 써서 남몰래 촌락을 순행하게 해야 백성들의 숨 은 고통을 알 수 있고 수령의 잘못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요즈음은 빙허각 이씨, 閨閤叢書 酒食議. 申維翰, 海遊錄 下, 附 附聞見雜錄. 麪則有絲麪索麪 稍細曰索 至細曰絲 葛粉和蕎麥而爲之 縷長不絶 帖而成卷 調湯色白 其味亦佳. 38) 南遷日錄 上, 南遷日錄 四, 辛酉 十一月 初九日. 九七村鄭童璞來見. 贈 倭麪一封 報以西草半斤 午後 與泰詹登屋後 少坐而歸. 36) 37)

172 해항도시문화교섭학 14 감영의 이서들을 심복으로 보아 염문할 적에는 모두 이 무리들을 보내 는데 이 무리들이 본래 각 고을의 크게 간활한 아전들과 서로 내통 결 탁하여 안팎으로 얽혀 있는 줄을 모른다. 매양 겨울과 여름에 있는 褒 貶 때나 봄과 가을에 있는 순행 때가 되면 이른바 廉客이 기일에 앞서 기별을 보내고 그 고을의 일을 담당한 아전도 기일에 앞서 화사하게 꾸민 방에 꽃자리를 깔고 대야며 안석이며 책상을 산뜻하게 정돈해 놓 고 倭麵과 燕餳, 그리고 蔚山의 전복과 耽羅의 조개, 살찐 쇠고기와 연 한 돼지의 등살, 구운 자라 고기와 잉어회 등 갖가지 귀한 음식들을 차리고 휘황하게 촛불을 켜 놓고 염객을 기다린다. 39) 셋째, 과자의 전파이다. 조선후기에 초량왜관에서 조선이 일본 항응요리에서 극찬을 한 것은 과자였다. 조선후기에 초량왜관에서 조선인이 설탕이나 과자를 원하면 왜관 안의 가게[纏房]에서 원하는 대로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과자는 어느 것보다도 문화접변과 전 파가 빨랐다고 할 수 있다. 과자는 식사 도중에 먹어도 좋지만, 선물로 가지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한 예로 아사이 요자에몽[浅井与左衛門]이 왜관 체 재 중 찬합에 담아서 보내는 향응용 혹은 증답용으로 이용한 과자류 가운데 배합을 완전하게 파악할 수 있는 20회 분에 총 32종의 과자 가 연 101회 이용되고 있었다고 한다. 1회 평균 5종류의 과자가 이 용되었다. 당시 가장 많이 이용된 과자는 五花糖, 落雁, 오베리야스, 비자열매는 특히 조선인이 좋아하던 과자였다고 한다. 특히 당시 조선에서는 감미료로 벌꿀이나 엿을 이용하고 있었다. 40) 41) 42) 牧民心書 吏典 6조, 제5조 察物, 監司廉 不可使營吏營胥. 茶山筆談云 監司廉問 宜用親賓 死士潛行村野 乃得民隱 乃得官疵 今也營下吏胥 視爲 腹心 一應廉問 皆遣此輩 不知此輩本與列邑巨猾 關通締交 表裏糾結 每至 冬夏褒貶 春秋巡歷之時 所謂廉客 先期飛報本縣 當事之吏 先期張設粉壁花 筵 敦匜几案 整齊芳潔 倭麪燕餳 蔚山之鰒 耽羅之蛤 肥牛之腱 幺豱之脊 炰鼈膾鯉 種種珍異 熒煌之燭 以待廉客. 40) 田代和生(2005), 앞의 책, 243-245쪽. 41) 田代和生(2005), 앞의 책, 243쪽. 42) 田代和生(2005), 앞의 책, 243-245쪽. 39)

173 그래서 사탕은 남방에서 나는 것으로 좀처럼 손에 넣기 어려운 것이 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의 과자는 값비싼 사탕, 그 중에서도 품 질이 가장 뛰어난 백사탕을 이용하였다. 이에 일본 과자를 한 번 맛 을 본 조선사람은 매우 맛이 좋습니다., 얼음사탕과 오화당은 별품 입니다 라고 칭찬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이처럼 조선후기에 초량왜관에서 이용된 과자 중에서 가장 많이 이용된 종류는 五花糖, 落雁, 오베리야스, 비자열매였다. 이 가운데 오화당은 일본이 사무역을 통해서 조선에 수출하던 물품인데, 증 답용으로 호평을 받던 과자였다. 오화당은 시로사토[雪糖], 즉 백설 탕으로 만드는 것이 인기의 비결이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糖化, 渾平糖 등으로 불리는데, 꽃 모양의 작은 입자로 된 사탕과자였다. 오베리아스는 카스테라와 마찬가지로 유럽풍 南蠻 과자였다. 어원 은 네덜란드어 과자명 오빌레(obili)에서 온 것인데, 일본에서 오이라 야스, 오베리이, 오페리이 등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구워낸 모양이 꽃 모양처럼 보이기 때문에 하나[꽃]카스테이라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당시 대마도는 중개무역, 조선의 표류민 송환을 위해서 나가 사키의 네덜란드 商館 데지마 건너편에 藩邸를 설치해 두고 있었는 데, 이곳을 통해서 남만과자를 접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조선후기의 통신사절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43) 44) 45) 46) 47) 48) 후추[胡椒]ㆍ丹木ㆍ雪糖ㆍ五花糖 같은 것과 朱紅孔雀羽ㆍ黑角畫器 는 비록 흔한 물건이긴 하나, 모두가 일본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고 南蠻ㆍ南京 등지의 산물로서 長崎로부터 들어온다고 한다. 49) 田代和生(2005), 앞의 책, 243쪽. 국사편찬위원회 편, 通譯酬酢 ; 田代和生(2005), 앞의 책, 243쪽. 田代和生(2005), 앞의 책, 243-245쪽. 田代和生(2005), 앞의 책, 243쪽. 交隣須知 ; 田代和生(2005), 앞의 책, 244쪽. 田代和生(2005), 앞의 책, 243-245쪽. 任守幹, 東槎日記 坤, 聞見錄. 如胡椒丹木雪糖五花糖朱紅孔雀羽黑角畫器 等物 雖是賤物 而俱非日本所產產 於南蠻南京等地 自長崎入來云 43) 44) 45) 46) 47) 48) 49)

174 해항도시문화교섭학 14 이 가운데 일부가 초량왜관을 통해서 조선으로 전파된 것으로 추 정된다. 이러한 오베리아스에 대해서는 조선후기에 제조법이 소개되 고 있을 정도로 전파되어 일반화 되어 나가고 있었다. 加須底羅는 정한 밀가루 한 되와 백설탕 두 근을 달걀 여덟 개로 반 죽하여 구리남비에 담아 숯불로 색이 노랗도록 익히되 대바늘로 구멍 을 뚫어 불기운이 속까지 들어가게 하여 만들어 꺼내서 잘라 먹는데, 이것이 가장 상품이다. 50) 특히 오화당은 조선후기에 통신사들에 의해서 알려지기도 했다. 任守幹이 1710년 통신사절로 일본을 갔다 온 기록에도 나오는데, 오 화당이 일본에 보급된 양상을 알 수 있다. 差倭의 배 9척이 가까운 포구에 대고 바람을 기다리는데, 아침에 술 과 생선을 보내어 存問하더니, 저녁에는 왜인 都船主가 五花糖과 新田 草畫磁杯와 五寸鏡 등의 물건을 바치고, 大差倭가 六寸鏡과 剪刀刀子 ㆍ倭燈ㆍ琉璃甁 등의 물건을 바쳤다. 51) 그러나 이처럼 조선인들이 일본 과자류를 직접적으로 접하게 된 계기는 초량왜관에서의 문화접촉의 과정에서 나온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후기에 초량왜관에서는 공식적인 선물 외에도 사사로 靑莊館全書 권65, 蜻蛉國志二, 物産. 加須底羅淨麪一升 白沙糖二斤 用 鷄卵八箇 溲和以銅鍋 炭火熬 令色黃 用竹針刺孔 使火氣透中 取出切用最 爲上品. 한편 번역문의 주에서는 카스테라는 포르투갈 말인 Castella의 음 역어인데, 일본에서는 가스데이라라 하며, 加壽天以羅 또는 粕底羅 등으 로도 쓴다고 하였다(한편 五洲衍文長箋散稿 人事篇, 服食類, 諸膳. 加 須底羅淨麪一升 白沙糖二斤 用雞卵八箇溲和 以銅鍋炭火熬令色黃 用竹針 刺孔 使火氣透中 取出切用 最爲上品. 라고 오베리아스가 소개되어 있다). 51) 東槎日記 坤, 國書, 使行留釜山時 從事所錄,. 差倭九船來泊近浦候風 朝 送酒魚存問 夕間倭人都船主 呈五花糖新田草畫磁杯五寸鏡等物大差倭呈六 寸鏡翦刀刀子倭燈琉璃甁等物. 50)

175 이 주고받는 선물이 많았다고 한다. 1629년 宣慰使로 동래에 왔던 鄭弘溟은 飮氷行記 에 왜관에서 받은 선물을 기록해 놓았다고 한 다. 조선후기에 과자의 전파 정도를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조선후기에 초량왜관은 양국의 문화가 교류하는 장소였다고 한다. 선물이 증정되는 날은 삼짓날, 단오, 백중, 구중절 등 절기에 이루어 졌다고 한다.. 조선에서 絶品이라고 칭찬하는 것이 일본의 과자였 다. 화려한 왜관의 향응요리는 과자류의 다채로움에서도 살필 수 있 다. 과자는 식후에 내놓은 경우가 많았다. 그 자리에서 먹어도 좋지 만, 선물로 가지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 또 단독으로 증답용으로서 이용되기도 했다. 조선 측 관리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기도 하여 일본 물품이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초량왜관을 통한 문화접촉과 교류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문화전파가 매우 빨랐을 것 으로 여겨진다. 특히 조선후기에 사탕은 남방에서 나는 것이기 때문에, 좀처럼 손 에 넣기 어려운 귀중품 취급 받았다. 당시 조선에는 흑설탕류는 전 혀 없어서 모든 과자에 다 꿀을 쓰는데, 설탕이나 흑설탕이나 또는 얼음설탕, 五花糖, 그 외의 일본의 과자류는 초량왜관에 가면 廛房에 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다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조선후기에 초량왜관에서의 빈번한 음식문화의 교류는 상호 이질 적인 음식문화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새로운 교류의 장을 여는 바탕이 되었다. 조선후기에 초량왜관을 중심으로 한 음식문화의 접 변은 조선의 음식문화와 혼종화되기도 하면서 전국으로 보급되어 나 갔다. 52) 53) 54) 55) 56) 52) 53) 54) 55) 56) 田代和生(2005), 앞의 책, 243-245쪽. 田代和生(2005), 앞의 책, 243쪽. 양흥숙(2009), 앞의 논문, 164쪽. 田代和生(2005), 앞의 책, 243-245쪽. 양흥숙(2009), 앞의 논문, 176쪽(W.G.Aston 舊藏本, 漂民對話 ).

176 해항도시문화교섭학 14 Ⅲ. 생활문화 문화는 생활체계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복잡한 상호작용 체계이며, 인간생활의 영역화된 모든 차원을 포괄한다. 문화는 교섭과 분리 된 것이 아니라 교섭과 하나이다. 때문에 문화교섭은 문화의 교류, 접변, 변용, 혼종 등의 과정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할 수 있다. 조선후기의 초량왜관에서는 다양한 문화접변과 변용이 나타났으며, 지역과 전국으로 전파되어 나갔다. 文化接變, 혹은 文化變容이란 상이한 문화집단 간에 주로 직접적 인 접촉관계로 인하여 어느 한쪽이나 상대 모두의 문화에 변동이 일 어나는 것을 말한다. 모든 문화접변은 문화전파의 결과이며 전파를 수반함으로써 문화교류를 촉진시킨다. 문화접변은 문자 그대로 상이 한 문화간의 접촉에 의해 일어나는 변화이기 때문에 관련 문화, 특 히 피전파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문화접변으로 인해 산 생되는 결과는 크게 적극적 결과와 소극적 결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적극적 결과란 문화접변으로 인해 새로운 유형의 문화가 창조 될 뿐만 아니라 전통(자생)문화를 발전시키고 풍요롭게 하는 결과를 말한다. 이에 반해 소극적 결과란 피전파문화로 하여금 자율성이나 독자성을 상실케 함으로써 문화의 融合이나 同化를 초래하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조선후기에 초량왜관에서도 생활용품의 보급으로 전형적이며 실질적인 문화 접변과 전파의 양상이 나타났다. 조선후 기의 초량왜관에서는 다양한 문화접변과 변용이 나타났는데, 대표적 인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후기에 美濃紙가 널리 사용되었다. 미농지는 일본의 57) 58) 59) 60) 정문수 외(2014), 해항도시문화교섭학 연구방법론, 도서출판 선인, 172 쪽. 58) 정문수 외, 위의 책, 182쪽. 59) 정수일, 실크로드 사전, 창비, 2013. 60) 일본산으로 조선인의 생활에 보고된 물품은 부채, 풍경, 양산, 칼, 종이, 자 기, 모기장, 도박, 분재, 술병, 귤 등이었다(김성진(1998), 19세기 초 김해 57)

177 美濃州에서 나는 종이로 일본의 최상품이다. 미농지는 닥나무 껍질 로 만든 썩 질기고 얇은 종이의 하나인데, 墨紙를 받치고 글씨를 쓰 거나 장지문 따위에 바르는 데에 쓰는 일본 종이이다. 일본의 岐阜 縣 美濃 지방의 특산물이기 때문에 봍여진 이름이라고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1764년 甲申使行 때 제술관 일본으로부터 받은 선물로 받은 물품 가운데, 종이류가 미농지 1,230斤을 포함하여 5,650근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미농지는 통신사행을 통해서 조선으로 전 파되어 들어왔다. 그만큼 일본종이가 조선의 문화생활에 깊숙이 들 어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다양한 색과 문양을 지닌 일본종 이의 수요가 많았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생활의 변화를 보여주는 문 화 접변의 모습이다. 한편 통신사 趙曮의 海槎日記 에는 太守近族 11명의 회례품목이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2명이 紅白絹 21필과 20필을, 3 명이 色羽를 각각 15필, 20필, 5필을 보내었으며, 4명이 美濃紙를 각 각 300첩씩 보내었고, 1명이 色絹 20필을, 1명이 色杉原紙 15속을 보 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太守近族인 源正溫과 源正名이 각각 美濃紙 3백 첩이었다 적혀 있다. 이런 경로를 통해서 입수된 미농지는 조선에 전파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미농지는 초량왜관을 통해서 조선 전역으로 전파되어 나갔 다. 한 예로 동래의 鶴巢臺 아래에 사는 동래지역 향리 출신이었던 金彙源은 미농지에 붓을 휘두른다고 하였다. 이처럼 초량왜관 주 위의 사람들이 書畵에 일본의 미농지를 사용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 라 일본종이 백 더미를 새로 재단하네라는 구절에서 보면, 일본종 61) 62) 63) 64) 65) 인의 생활을 침식한 倭風, 지역문학연구 3, 부산경남지역문학회). 金聲振(1998), 조선후기 金海의 생활상에 미친 일본문물, 인문논총 52, 부산대 인문학연구소, 68쪽(南玉, 日觀記 ). 62) 增正交隣志 권5, 志, 일행이 받은 私禮單. 63) 海槎日記 各處 書契 및 禮單, 各處私禮回禮單. 64) 낙하생전집 中, 菜花居集, 갑술, 歲暮有囊金彙源. 振筆美濃牋 (原註)倭 牋 出美濃者 品佳. 65) 낙하생전집 下, 秋樹根齋集, 次韻宋景三假梅贈李玄對. 倭牋百疊翦裁新. 61)

178 해항도시문화교섭학 14 이의 수요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둘째, 日本刀의 사용이다. 조선후기에 일본도는 日本刀歌 등으 로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널리 시적 소재가 되었다. 진 나라 徐福(徐市) 일행이 秦始皇의 명을 받고 신선을 구하러 바다로 갔다 가 돌아오지 않았는데, 일설에는 일본에 정착하였다 한다. 歐陽脩의 日本刀歌에 보면, 당시 서복 일행이 칼과 焚書 이전의 많은 책들을 가지고 가서 지금까지 전한다고 하였다. 조선후기에 초량왜관에서는 여러 차례 도난사고가 발생했다. 그 가운데 일본도를 훔쳐나가는 사례도 발생했다고 한다. 일본도 가운 데서 작은 칼(와키사시)가 자주 도난을 당했다고 한다. 1696년(숙 종 22)에는 칼을 두 자루 도난당했는데도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 하 여 분실신고를 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1706년에는 옷을 넣는 장 롱 등이 도둑을 맞은 적이 있는데, 그 안에 큰 칼(가타나)을 비롯하 여 크고 작은 칼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조선후기에 李學逵는 호쾌한 일이란 제주도산 말을 타고, 홀가분 한 복장에 일본도를 차는 것이네라고 노래하였다. 이처럼 일본도 가 호사가의 기호품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동 래부 사람이었던 金景華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그는 칼을 좋아하는 습벽이 있어 일본 단도 한 자루를 순금 30냥 값을 치루고 구입하였 다고 하였다. 일반인이 일본도를 시중에서 구입할 수 있었음을 보 여주는 사례로 주목된다. 한편 조선후기의 지식인들은 일본도를 입수해 소지하고 있었으며, 그 성능을 극찬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許穆이 일본도를 언급한 66) 67) 68) 69) 70) 71) 72) 星湖僿說 권26, 經史門, 日本刀歌. 田代和生(2005), 앞의 책, 195-200쪽. 田代和生(2005), 앞의 책, 196-197쪽. 田代和生(2005), 앞의 책, 243-245쪽. 낙하생전집 上, 因樹屋集 己巳, 雜詩. 快事耽羅馬 輕裝日本刀. 김성진(1998), 앞의 논문, 129쪽. 金鑢, 潭庭叢書 桃花流水館小藁, 市奸記. 金景華 東萊府人也 有刀癖 以 庸金三十兩 貨一短劍於倭. 66) 67) 68) 69) 70) 71) 72)

179 내용이다. 조선후기에 일본도의 보급과 전파 상황을 보여주는 사례 이다. 眉叟는 白湖 林悌의 외손자이다. 백호가 일본 상인[賈客]에게 古劍 한 개를 얻었는데, 나중에는 이 칼이 허 씨에게로 돌아갔다. 내가 일찍 이 이 칼을 보았는데, 눈빛처럼 흰 광채가 사람을 쏘았다. 한여름에 칼 집에서 뽑아 벽에 걸어 놓으면 칼 끝에 이슬방울이 맺혀서 떨어진다 한다. 五行에서 金이 맨 처음이다. 금이란 水를 내기 때문에 해설자는, 금과 鐵을 불에 녹이면 물이 되는 까닭에 칼 끝에 물이 맺힌다. 한 다. 만약 그렇다면 세상에 滔滔히 흐르는 것은 모두 물인데, 이 모든 물은 어디에서 나는가. 지금 이 칼로써 징험해 보니, 금이 물을 낸다는 것을 과연 믿겠다. 추측컨대, 쇠붙이란 모두 불에 달궈서 만들기 때문 에 그 본질을 잃게 되지만, 오직 그 地四의 정기가 완전히 갖춰진 것 만은 본질이 오히려 있는 까닭에 그런 것인가. 그렇다면 흙 속에서 물 이 나는 것도 그 실은 土가 비로소 금의 정기를 양성하고 금은 水를 낳게 된다. 이 금이 아니면 토가 어찌 수를 낼 수 있겠는가. 대개 돌도 흙에서 나니, 돌이란 즉 금 따위인 까닭에 빛깔이 희게 된다. 鐵도 반 드시 沙石 사이에서 생산되니, 그 본질이 같은 따위임을 알 수 있고, 물도 보면 대개 땅속 돌구멍에서 난다. 내가 지금 金이라고 하는 것은 黃金ㆍ黑鐵ㆍ白石을 모두 포함해 말한 것이다. 73) 이렇게 조선후기에 초량왜관을 통한 생활문화의 전파는 편리성과 호기심 때문에 동래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에 전파되어 나갔다. 대표 적으로 기장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沈魯崇이 동래 읍내장에서 구매 74) 星湖僿說 권5, 萬物門, 日本刀. 眉叟乃林白湖悌外孫 白湖得一古劒扵日 本賈客 後劒歸許氏 余曽見之 色白如雪光射人 暑月㧞鞘掛壁 凝露滴其尖云 夫五行首金 金則生水 說者 謂金鐡火鎔成水 故云爾 若然世之㴞㴞流者 皆 水 此何従而生 今以此劒驗之 金之生水信矣 意者 銕皆火鍜 失其本性 惟其 得地四真精者 本性猶在故然耶 然則土中生水 其實土始飬成金精 金又生水 非金則土 何由生水 盖石生扵土 石即金類 故色白 銕必産沙石之間 可見其 性類也 水又生扵土中石竇 余謂言金 則黄金黒銕白石 皆舉之耳. 74) 심노숭은 호가 夢山居士 孝田이라고 한다. 1801년 2월에 機張縣으로 유배 와서 6년의 유배기간 동안 38책의 孝田散稿 를 지었다. 특히 南遷日錄 에는 동래장에서 거래된 상품들이 자세히 언급되고 있다. 73)

180 해항도시문화교섭학 14 한 물품이나 선물 받은 倭物貨를 南遷日錄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심노숭은 趙童 집안을 통해 찬합, 칼, 倭爐 등의 일본 물품을 접하였 다. 이처럼 초량왜관을 통해서 들어온 일본 물품은 동래, 기장, 김해 를 비롯한 인근 지역에 유통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모습은 문화접변을 통한 보급과 전파를 말해주는 사례이다. 셋째, 忽空伊라는 도박이 유행 전파되었다. 조선후기에 초량왜관 을 통해서 놀이문화로는 세 짝의 주사위로 도박을 하는 이른바 忽空 伊라는 일본풍의 도박이 퍼져 나갔다. 놀이문화는 일반인에게 전 파되는 속도가 빨라 문화전파의 보편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놀이는 생활상의 이해관계를 떠나서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목적이 없는 활동 으로서 즐거움과 흥겨움을 동반하는 가장 자유롭고 해방된 인간활동 이다. 따라서 막연한 휴식은 놀이가 아니다. 놀이는 인간으로서의 삶 의 재미를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즐기고자 하는 의지적인 활동이다. 그런데 도박은 유희성이 있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놀이이며, 어디부 터가 범죄에 해당하는 도박인지 판별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지만, 이는 경우에 따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놀이문화는 문화전 파가 빠르다고 할 수 있다. 홀공이의 전파에 대해서는 조선후기에 초량왜관의 牙牌로 된 세 짝의 주사위에, 한 번에 백만금을 던지고도 넉넉하다 하질 않네라 고 할 정도였다. 그리고 김해부의 衙前들은 호탕하고 사치로움이 한 고을에 소문나서 한 끼니에 오백 냥을 쓰는가 하면, 한 판 내기에 예사로 만 냥을 달기도 하였다고 한다. 당시 유행했던 홀공이는 일종의 馬弔戱인데, 手鬪라고도 했다. 그 75) 76) 77) 78) 김동철(2015), 조선후기 동래지역의 유통기구와 상품, 역사와 경계 97, 부산경남사학회, 226-231쪽. 76) 김성진(1998), 앞의 논문, 140쪽. 77) 낙하생전집 上, 因樹屋集 金官竹枝詞, 倭館牙牌三隻骰 一拋百萬未云 優. 78) 낙하생전집 上, 己庚紀事詩. 聞有府中胥 豪侈一邑傳 一餐動五百 一博常 十千. 75)

181 리고 고을의 서리들이 부패한 원인이 될 정도로 빠져서 행하던 놀이 이자 도박이었다. 府中에서 馬弔戱가 성행하는데, 80개의 패를 쓰며 이를 手鬪라고 한 다. 또 세 짝의 주사위를 만들어 쓰는데, 이를 忽空伊라 하며, 이는 東 倭에서 흘러들어 온 것이다. 여러 고을에서 한 번에 열 냥 백 냥을 던지고, 가산을 기울여 파산하기도 하니, 부의 서리들이 逋欠을 많이 하는 것도 대개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79) 이처럼 이학규가 김해 지역의 풍속을 소재로 한 金官竹枝詞 와 金官紀俗詩 에서 언급하고 있는 놀이문화는 일반화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조선후기에 문화접변되어 초량왜관에서 전파되어 전국으로 확산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문화 전파의 일반화에 대해서는 다음 기록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청컨대 대마도의 저울로 절 사랑한다는 그대 마음 달아 보세요. 청 컨대 海倉의 斛으로 그대 사랑하는 내 마음을 재어 보세요. 80) 여기서 대마도의 저울은 실제보다 에누리해서 양을 말한다는 뜻이 며, 해창의 곡은 실제보다 부풀려서 잰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문제는 여기서 대마도의 저울이 조선의 모내기 노래 구절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것은 부채에 일본 무늬가 그려지고, 홀공이라는 일본식 도박이 성행하는 것과 함께 일본풍이 일반 대중 의 생활문화에 상당 부분 전파되어 들어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 81) 낙하생전집 中, 海榴菴集 金官紀俗詩. 萬錢一擲男兒 手鬬諳時事事奇 不道大家家壁立 邇來兼曉忽空伊 府中盛行馬弔戲 用八十葉曰手鬬 又造三 隻骰子 名忽空伊 自東倭流傳 列邑一擲十百 傾家破產 府胥之多逋槩多由 此. 80) 낙하생전집 下, 秧歌五章. 請將馬州秤 秤汝憐儂意 請將海倉斛 量儂之恩 義. 81) 김성진(1998), 앞의 논문, 308쪽. 79)

182 해항도시문화교섭학 14 한 모습은 문화접변을 통해 문화가 급속하게 전파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고 할 것이다. Ⅳ. 맺음말 조선후기에 해항도시 부산에 존재했던 초량왜관은 문화교섭의 측 면에서 보면, 항구라는 경계지대 속의 통제된 공간이었다. 하지만 전 근대시기에 각종의 통제책과 방어시설에도 불구하고 해항도시의 특 징이었던 교류성, 혼종성이 나타나고 진행되었던 문화교섭의 공간이 었다. 비록 초량왜관이 높은 담장과 수문과 설문으로 경계를 구분지 어 열린 공간으로서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지만, 상시적으로 500명 내외의 異國人 일본인이 거주하였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조선인과 일 본인의 공존의 공간과 접촉의 면이 항상적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었 다. 특히 초량왜관의 담장과 설문 사이의 공간은 조선인과 일본인의 공존의 공간이었는데, 이곳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문화교류와 접촉이 진행될 수 있었다. 조선후기에 초량왜관을 중심으로 전개된 문화교류와 접촉은 다양 한 문화의 접변과 혼종화를 낳았다. 초량왜관에서의 문화교류와 접 촉은 정상적인 형태와 비정상적인 형태로 전개되었다. 정상적인 교 류와 접촉의 기회는 朝市 참여, 왜관 작업 참여하는 雇工, 왜관 구경 등이며, 비정상적인 형태는 闌出, 交奸, 밀수 등이 있었다. 그런데 문 화접변과 혼종화의 시각에서 초량왜관을 바라보면, 중앙 정부의 입 장에서는 불법, 탈법, 범법의 행위들이었지만,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는 이문화를 접하고 배우는 문화교류와 접촉의 과정이었다. 조선후기에 초량왜관에서의 문화 교류와 접촉은 다양한 문화접변 과 혼종화를 낳으면서 동래를 거쳐 전국으로 전파되어 나갔다. 이러 한 움직임은 새로운 문화의 전파이자 혼종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 다. 초량왜관에서 문화접변과 호종화가 일반인에게 보급되는 양상은

183 음식문화와 생활문화에서 급속히 진행되어 나갔다고 보아진다. 대표 적으로 음식문화에서는 勝妓樂, 국수, 과자 등이 양국인의 교류와 접 촉과정에서 조선으로 전파되어 문화접변이 나타나고, 나아가 음식문 화의 혼종화 양상을 낳기도 하였다. 생활문화에서는 미농지의 사용, 홀공이라는 도박, 일본도의 소유 등으로 나타났다. 특히 이러한 생활 문화는 편리성과 기능성 때문에 조선으로의 전파가 매우 빠르게 진 행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문화교섭의 측면에서 조선후기에 해항도시 부산의 경계지대에 놓 여 있던 초량왜관은 동아시아 최대의 문화접변과 혼종화의 공간이 자, 일본문화의 전파지였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작은 문 화교류와 접변은 조선에 수용되어 전국적으로 전파되면서 커다란 문 화적 변화를 낳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84 해항도시문화교섭학 14 참고문헌 權以鎭, 有懷堂集 ; 金世濂, 海槎日記 ; 南玉, 日觀記 ; 빙허각 이씨, 閨閤叢書 ; 李鈺, 桃花流水館小藁 ; 李學逵, 洛下生全集 ; 趙曮, 海槎日記 ; 邊例輯要 ; 肅宗實錄 ; 英祖實錄 ; 東萊府 志 ; 日省錄 ; 草梁畵集 ; 日觀記 ; 裁判記錄 ; 增訂交隣 志 ; 記聞叢話 ; 靑莊館全書 ; 五洲衍文長箋散稿 ; 국사편찬위 원회 편, 通譯酬酢. 金東哲(1998), 조선후기 왜관 개시무역과 동래상인, 민족문화 21, 한국민족문화연구소. 김동철(2001), 17-19世紀の釜山倭館周邊地域民の生活相, 年報都市史 硏究 9, 都市史硏究會. 김동철(2010), 조선후기 통제와 교류의 장소 부산왜관, 한일관계사 연구 37, 한일관계사학회. 김동철(2015), 조선후기 동래지역의 유통기구와 상품, 역사와 경계 97, 부산경남사학회. 김상보(2004), 조선통신사를 통해 본 한국과 일본의 음식문화, 문화 전통논집 12, 경성대 한국학연구소. 金聲振(1998), 조선후기 金海의 생활상에 미친 일본문물, 인문논 총 52, 부산대 인문학연구소. 김성진(1998), 釜山 인근지역의 생활에 미친 釜山倭館의 영향, 동양 한문학연구 12, 동양한문학회. 김성진(1998), 부산왜관과 한일간 문화교류, 한국문학논총 22, 한 국문학회. 김성진(1998), 19세기 초 김해인의 생활을 침식한 倭風, 지역문학연 구 3, 부산경남지역문학회. 金容旭(1962), 釜山倭館考, 韓日文化 1집 2권, 부산대 한일문화연 구소, 1962. 金義煥(1977), 李朝時代に於ける釜山の倭館の起源と変遷, 日本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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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해항도시문화교섭학 14 국문초록 - 초량왜관을 중심으로 - 金康植 조선후기에 해항도시 부산에 있었던 초량왜관은 조선 내에 존재한 유일한 일본인 거주공간이자, 동북아시아 최대의 외국인 거주공간이 었다. 때문에 500명 내외의 일본인이 상시 거주했던 초량왜관은 대표 적인 문화 접촉지대였던 해항도시 속의 경계지대였다. 이에 초량왜관 에서는 조선과 일본은 문화교류와 접촉이 제한적인 각종의 조처에도 불구하고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조선후기에 초량왜관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문화교류와 접촉은 양 국인의 접촉 과정에서 나타났는데, 정상적인 경우와 불법적인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일반인의 경우 朝市 참여, 왜관 작업 참여, 密貿易, 欄 出, 交姦 등을 통해서 일본인과 접촉하면서 다양한 일본 문화를 접촉 하고 수용해 나갔다. 그리고 초량왜관에서의 문화접변과 혼종화는 이 국문화의 수용 단계 이후 지역사회를 거쳐서 전국으로 전파되어 나갈 수 있었다. 초량왜관에서 문화교류와 접촉을 통한 문화접변과 혼종화 양상은 중앙 정부의 입장에서는 불법, 탈법, 범법의 행위였지만, 초량 왜관과 주변의 공간에서는 자연스럽게 다양한 방법으로 지속되었다. 특히 음식문화와 생활문화는 조선과 일본에 많은 영향과 직접적인 변 화를 가져다 주었다. 때문에 초량왜관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각자의 문 화를 전달하고 수용하여 문화접변이 진행되었던 동북아시아 최대의 경계지대이자, 문화 혼종화가 진행된 상생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주제어: 해항도시, 초량왜관, 문화교섭, 문화접변, 문화 혼종화

187 Abstract An Aspect of Culture Interaction in Busan of Seaport City during Late Joseon Dynasty : Choryang Waegwan Kim, Kang-Sik Located in Busan, the seaport city, Choryang Waegwan was the only Japanese residential area during the late Joseon dynasty, but also an expatriate residential area, the largest one in Northeast Asia. During the late Joseon dynasty, Choryang Waegwan, was an open stage in a closed space. The official contact between Joseon and Japanese citizens happened in Choryang Waegwan through open market trading, receptions for diplomats, banquets and participation in works such as repairing the Waegwan. The cultural hybrid and embracing of foreign cultures occurred in Choryang Waegwan spread beyond the local society, out across the country. From central government s perspective, it was illegal, evasions of law and criminal activities, but diverse contacts and exchanges naturally occurred in Choryang Waegwan and its neighboring areas. Given all of that, Choryang Waegwan served as the largest venue of co-existence in Northeast Asia, where cultural exchanges and adaptations between Japan and Joseon occurred, creating a cultural hybrid. 草梁倭館), cultural Key Words: Busan, seaport city, Choryang-Waegwan( interaction, culture acculturation, cultural hybrid 투고(접수)일자(2016.03.10) / 심사(수정)일자(2016.04.15) / 게재확정일자(2016.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