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편 제 1 장 역사 단양의 선사문화 44 45 균 강수량은 1,702mm 내외이며 침엽수림과 혼효림(混淆林)이 잘 발달되어 있고, 강원도 경기도 매포읍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측백나무 집단 자생지(천연기념물 제62호, 1962 년 12월 3일 제정)가 있다. 단양군 충청북도 충 청 남 도 제3절 경상북도 대전 <그림 1> 단양의 선사유적 위치도 ❶ 상시유적 ❷ 구낭굴유적 ❸ 안동리유적 ❹ 금굴유적 ❺ 각기리선돌유적 ❻ 수양개유적 구석기문화 제3절 1. 한데유적 1) 단양 수양개 유적(사적 398호) 충북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에 있는 수양개 유적(사진 1)은 충주댐 수몰지역 문화 유적 발굴조사로 충북대학교 박물관 팀이 1983~1985년까지 4차에 걸쳐 후기 구석 기 문화층을 중심으로 1,250m2를 발굴하였으며(수양개 Ⅰ지구, 사진 2), 다시 영월군, 동쪽으로 경상북도 영주시, 남쪽으로 경상북도 예천군과 문경시, 서쪽으 로 충청북도 제천시와 접한다. 산악지대라서 단양팔경 등 아름다운 계곡이 많으며, 시멘트 공업의 중심지로 유 명하다. 단양읍 매포읍 2개 읍과 단성면 대강면 가곡면 영춘면 어상천 면 적성면 6개 면이 있다. 대부분이 산악지대이므로 집단취락과 도시지역만 일부의 분지와 구릉으로 되 1995~1996년에 3차례(5~7차) 발굴조사(수양개 Ⅱ지구)를, 그리고 2001년에 시굴조 사(8차, 수양개 Ⅲ지구)를 하여 모두 8차례에 걸쳐 Ⅰ Ⅱ Ⅲ지구를 조사하였다. 지금까지의 발굴조사로 본다면 전기(Ⅲ지구) 중기 구석기 문화층(Ⅰ지구 Ⅴ 층)~청동기 문화층(Ⅱ층) 삼한시대 문화층(Ⅱ지구)이 각기 Ⅰ Ⅱ Ⅲ지구의 층위로 있음이 밝혀졌다. 수양개박물관 건립을 위한 사전조사로 실시된 8차 조사 에서 확인된 Ⅲ지구는 해발(MSL) 55m에 발달된 고기(古基) 3단구에 형성(약 30만 어 있다. 주 수계인 남한강이 강원도 영월군으로부터 흘러들어 군내를 동서로 관 류하며, 남한강 동쪽에는 소백산맥이 뻗어 도솔봉(1,314m) 국망봉(1,421m) 연 화봉(1,394m) 용두산(994m) 도락산(964m) 등의 고봉이 솟아 있고, 연화봉과 도솔봉 사이의 안부(鞍部)에는 죽령(竹嶺)이 있다. 장년기 산맥의 모습을 띤 험한 지세 때문에 인접한 경상북도와의 소통은 예로부터 죽령 고갯길을 통해서만 이루 어졌다. 남한강 북쪽으로 뻗어 있는 태백산맥 지맥에는 금수산(1,015m) 등 준봉이 솟아 있다. 대부분의 하천은 남한강에 합류하는데, 경상북도 황장산에서 발원한 단양 천은 단성면 하방리에서, 죽령과 도솔봉에서 발원한 죽령천은 단양읍 현천리에 서, 금수산 등에서 발원한 매포천은 도담(嶋潭)에서, 연화봉에서 발원한 금곡천 (金谷川)은 단양읍 고수리에서 남한강에 합류한다. 그 밖에 동대천 임현천 남조천 등 20여 개의 하천이 있으며 하천 유역의 평야 는 극히 적으나 경치가 아름답다. 단양팔경을 비롯한 수많은 명승지가 있으며, 석 회암지대이기 때문에 도처에 카르스트 지형이 발달되어 있다. 기후는 내륙 산간지대에 있어 기온의 교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이다. 연평균 기 온 11.6 내외, 1월 평균기온 4.7 내외, 8월 평균기온 26.1 내외이다. 연평 <사진 1> 수양개유적 전경
제 1 편 제 1 장 역사 단양의 선사문화 46 47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출토된 석기 가운데에는 다양한 형식의 주먹도끼와 전형적인 찍개도 있으며 특히 슴베찌르개와 좀돌날 몸 돌이 매우 특징적인 유물로 해석된다. 슴베찌르개는 일본 규슈지방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과, 또 일정한 범위 안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된다는 사실이 주목된다(사진 5). 그리고 좀돌날 몸돌(細石核)은 제작 수법으로 보 아 크게 Ⅰ Ⅱ Ⅲ형식으로 구분되는데 Ⅱ형식(일 본의 유우베스기법과 유사)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 <사진 5> 슴베찌르개 출토 모습 하고 있다. 좀돌날 몸돌에 관한 연구결과 공주 석장리에서 영향을 받아 좀돌날 몸돌 <사진 2> 수양개유적 Ⅰ지구 전경 (4차, 1985) 의 제작기술을 발달시켜, 한 줄기는 남쪽의 전남 승주 곡천, 화순 대전에서 일본 큐슈로, 또 한 줄기는 북쪽의 평양 만달리를 거쳐 선 년 전)된 전기 구석기 문화층이 발굴되었다. 두께 7m 이상의 자갈층에서 확 인된 석기는 주먹대패, 사냥돌 등이 있으나 시굴 성격상 조사의 넓은 면적을 발굴하지 못하여 전체 성격을 파악하지 못하였다. Ⅰ지구의 2단구는 해발 15m를 기준으로 발달된 자갈층에 있는데, 이 자갈 층의 1m 깊이에서 긴 구덩으로 확인된 중기 구석기층(Ⅴ층)이 확인되었다. 여기에는 사암과 같은 굵은 입자의 자갈돌을 돌감으로 이용하여 직접떼기로 만든 긁개 찌르개 주먹대패 등과 같은 다목적 석기가 출토되었다. <사진 3> 수양개 주먹도끼 만드는 사람 (김수현 이융조 제작) <사진 4> Ⅰ지구3호석기제작소 후기 구석기 문화층(Ⅳ층 18,630bp 16,400bp)은 찰흙층으로 우리나 라의 구석기유적 가운데 단일 면적으로 가장 큰 발굴유적(1,250m2)으로 진행되 어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 돌감은 90% 이상이 셰일 모난돌이 이용되었는데, 이 돌(석재)들은 수양개 유적에서 약 1.5km 떨 어진 산제골에서 날라다가 직접떼기와 돌날 떼기 눌러떼기와 같은 간접떼기의 방법을 사용하여 석기를 제작하였음이 밝혀지고 있 다(사진 3). 50군데의 석기제작소(사진 4)를 중심으로 석 기를 만들었음이 발굴 결과로 밝혀졌다. 모룻 돌을 중심으로 하여 석제에서 석기를 만들기 위하여 떼어낸 돌 조각을 점돌 이라고 하며, 이 점돌 142점 가운데 18점이 부합하므로 이로 보아 석기 제작행위에 있어 직접떼기가 많이 봉 굴포리, 우스티노브카, 사할린, 일본 홋카 이도 전파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된다 (사진 6). 이러한 연모 이외에 이 유적의 중요성을 더하여 주 <사진 6> 좀돌날 몸돌 (쐐기모양, Ia형식, 길이 1.9cm) 는 것은 몸돌에서 떼어낸 격지들이다. 여러 곳에서 많 은 격지가 그대로 발굴되어, 돌망치 모룻돌 등과 같 이 석기제작 행위의 복원에 대한 결정적인 자료가 되 고 있으며, 이 행위의 중심지는 적어도 50군데 이상으 로 유적지에 넓게 펼쳐져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처럼 그들의 식량 채집 사냥에 따른 직접적인 석기 자료 이외에 첫소의 정강이뼈에 물고기모양 을 새긴 예술품(사진 7, 8.2 3.5cm)이 발굴되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 발견된 줄새김(線 刻)예술품으로 유일한 자료이며, 당시 사람들의 사냥 대상물에 관한 풍요기원이 나 주술예술의 표현으로 보여 당시 문화 해석과 복원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수양개선사박물관의 건립지를 시굴 조사한 Ⅲ지구에서는 이른 3단구 또는 4단 구에 발달된 석기문화층을 찾아서 적어도 30만 년 전의 문화 특징을 찾게 되어 수 양개 구석기문화의 편년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이곳에 2005년까지 수양개선사박물관을 건립할 목표를 세우고 지금 건축 사업을 벌이고 있다. 수양개유적은 유물의 종류 제작 수법 및 유물 수에서 국내 최대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구석기유적지로서 우리나라 선사유적의 교육장으로 활용 가치가 크다. <사진 7> 물고기 모양을 새긴 예술품
제 1 편 제 1 장 역사 단양의 선사문화 48 49 물관의 개관 기념으로 열린 특별전(명치대 예산부담, 2억 엔)의 제목이 한국의 수양개유적과 일본의 구석기시대 (2004. 4. 1~5. 31)로 개최되었고 제9회(5. 15~18) 수양개 국제회의도 함께 열렸다.(사진 9) 이것은 제3회 북경(1998년), 제8회 워싱턴, 제9회 동경에 이어 앞으로 제11회 (2006년)는 폴란드 우찌시(市)에서, 제12회(2007년)는 러시아 크라스노얄스크시 (市)에서, 제13회(2008년)는 일본 구주에서, 제14회(2009년)는 아프리카 탄자니아 에서 열릴 예정에 있다. 이러한 국제회의는 수양개 선사문화를 아시아는 물론 세 계 고고학계에 차지하는 국제적 위상을 높여 줄 것으로 기대된다. 또 한 가지 반가운 소식은 일본의 세계적 고고학 잡지인 고고학 저널 (No. <사진 8> 제8회국제회의(2003. 6. 21~26, 미국 워싱턴 D.C) 527, 2005년 3월호 增大號)의 표지사진으로 수양개에서 출토된 슴베찌르개 사진 과 필자의 글(윤용현 공저)을 게재하여 수양개 문화의 의미를 한껏 높여 주었다는 <사진 10> 고고학 저널 표지사진 (No. 527, 2005년 3월호 증대호) 사실이다(사진 10). 이제 수양개 Ⅱ지구로 명명 된 유적의 발굴성과를 살펴보 기로 하겠다(사진 11). Ⅰ지구에서 하류로 약 500m 떨어져 있는 보리밭(조사 당시 에는 보리밭으로 변하여 있었 다)에서 많은 양의 토기조각과 석기(뗀석기와 간석기 포함)들 이 채집되므로 발굴의 필요성을 <사진 9> 제9회 국제학술회의 (2004. 5. 15~18, 일본 명치대학) 여러 차례 강조한 끝에 드디어 수양개 5차(1995. 7. 6~8. 14) 6차(1996. 6. 7~7. 6) 7 <사진 11> 수양개유적 Ⅱ지구 전경(7차, 1996) 차(1996. 9. 18~11. 17) 조사를 통하여 Ⅱ지구에 넓게 펼쳐져 있는 집터들을 발굴할 수 1996년부터 [수양개와 그 이웃들]이라는 주제로 국제회의를 매년 개최하였고,1) 세계 각국의 저명한 학자들이 이 회의에 참가하여 수양개를 비롯한 다른 유적들 과 비교 검토하는 자리를 가졌다. 특히 2003년의 제8회 회의는 제5회 세계고고학대회(워싱턴 D.C.)에서 한 분과 (分科)로 인정받아 동일한 주제( 수양개와 그 이웃들, Suyanggae and Her Neighbours)로 국제회의(2003. 6. 21~26)를 갖게 되었는데, 이것은 수양개의 국 제적 위상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사진 8) 또한 일본 구석기 연구를 개척한 명치대학의 개교 123주년 기념으로 건립한 박 있었다. 약 3만 평 유역의 거의 전 면적에 분포된 것으로 확 인된 가운데 모두 26기의 집터들을 찾았다. 이들은 중도기 라고2) 분류되는 문화상의 특징을 갖고 있는 凸 형(形)모양 집터들인 것으로 밝혀졌고, 화덕자리 또한 비슷하며 연대도 중도와 같은 시기인 2,000~1,900 년 전으로 측정되어 같은 문화 성격인 것이 과학적으 로 확인되었다. 유구의 분포와 유물출토 범위로 보아 적어도 500채 이 상이 있는 대단위의 취락지인 것이 밝혀져 수양개유적이 1) 이 국제회의는 김재호 회장(단양 향토문화연구회)과 이건표 군수(단양군)의 특별한 관심과 배려가 있 었기에 가능하였다. 특히 김재호 회장은 사재를 들여 제 1, 2회를 주최하였고 그 뒤에도 많은 예산을 부 담하여 매년 열리는 국제회의 행사를 개최할 수 있게 하여 주었다. 그리고 단양군은 제 4~7회(4회)를 주최하여 자치단체로서의 수양개 유적에 관한 큰 관심을 보였고, 수양개선사박물관 건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이 점 크게 감사한다. 2) 강원도 춘천시에 있는 중도(中島)섬에서 발굴된 약 2000년 전의 집터 화덕자리 토기 등을 일괄하여 부르는 문화상의 용어이다. <사진 12> 수양개선사박물관 조감도
제 1 편 제 1 장 역사 단양의 선사문화 50 51 충북의 기념물(제101호)에서 사적(제398호)으로 승격되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또한 유 적 박물관(사진 12) 건립의 기회를 부여한 것이기도 하기에 앞으로 세워지는 박물관에 는 수양개 Ⅱ지구의 문화상도 진열 소개하여 수양개 유적에서 차지하는 고고학상의 위치를 확보하고 아울러 학계에서 갖고 있는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기를 바란다. 2. 동굴유적 <표 1> 금굴유적 문화층의 문화특징과 연대 문화층 문화특징 연대구분 7 민무늬토기 간석기 청동기 4,000 6 빗살무늬토기 뼈송곳 돌그물추 신석기 5,670 5 잔석기 짐승화석(5과 5종) 중석기 11,000 4 돌날떼기수법 밀개 새기개 짐승화석(10과 14종) 후기 구석기 26,600 3 홈날 톱니날 석기떼기수법 발달, 짐승화석(20과 37종) 중기 구석기(7만 12만 년 전) 107,450 2 주먹도끼 불사용 짐승화석(5과 5종) 전기 구석기(35만 45만 년 전) 185,870 1 휘인날 주먹도끼 짐승화석(1종) 전기 구석기(60 70만 년 전) 1) 단양 금굴유적(충북기념물 제102호) 충북 단양군 단양읍 도담리에 있는 석회암 동굴인 단양 금굴은 충주댐 수몰지구 이러한 자료들은 2문화층이 상대연대보다 약간 젊은 자료(늦은 연대)를 얻은 것 문화유적 발굴의 일환으로 1983~1985년까 이외에는 문화해석의 연대와 절대 연대가 거의 맞아 떨어져, 앞으로 단양지역은 지 3차에 걸쳐 연세대학교 손보기 교수팀에 물론 우리나라 선사문화의 연대 결정에 중요한 기준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사진 13). 이렇게 잘 발달된 선사문화가 층위를 이루면서 한 유적에 있는 것은 세계 선사 이 유적은 전기 구석기시대(약 70만 년 학계에서도 매우 드문 일이다. 따라서 발굴이 다 되지 못한 구역을 다시 조사하고 전)부터 청동기시대(약 3천 년 전)까지의 연구도 계속하여서 중원문화에서의 시원문화(始原文化) 성격의 위치를 차지하는 선사시대 전 시대에 걸친 유물층을 갖고 있 위상을 세우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다. 이렇게 한 유적이 각 시기의 층위에 대 한 자연환경 자료와 석기의 발달에 대한 계 통 자료를 갖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뿐만 아 <사진 13> 금굴유적을 방문한 학자들 (제5회 수양개 국제회의 참가자들, 2000. 12. 9) <사진 14> 금굴 출토 주먹도끼(Ⅰ문화층) 니라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발굴 결과로 밝혀진 7개 문화층 가운데 전기에 속하는 1문 2) 단양 구낭굴유적(충북기념물 제103호) 단양군 가곡면 여천리에 있는 석회암동굴로 임광훈 선생(당시 매포중학교 역사 담당 교사)의 제보로 충북대학교 박물관팀에 의해 3차(1986 1988 1998)에 걸쳐 발굴되었다(사진 15, 16). 화층(Ⅷ층), 2문화층(Ⅶ층)에서 유럽의 가장 대표적 전기 구 발굴 결과 석회암동굴로서는 드물게 파괴 교란되지 아니한 완전한 상태였으며, 3 석기문화인 아베빌리앙형식의 문화 특징이 확인되었다. 즉 차까지 조사로 종 분류가 가능한 뼈 이빨 등의 동물화석을 많이 찾았는데 그중 약 여기서 나온 석기들은 외날 긴찍개 휘인날 주먹도끼(사진 70% 정도가 사슴과(말사슴, 꽃사슴) 짐승뼈로 판별되었다. 14) 긁개 자르개 등인데, 만듦새나 뗀 면이 매우 간단하며 또한 석기 뼈연모 등의 유물 및 많은 양의 동물화석이 약 3만~6만 년 전으로 크고 무거운 것이 특징이고, 수법은 부딪쳐떼기와 직접떼기 연대 측정된 제2퇴적층(3문화층)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어, 이 층이 구낭굴 가 사용되었다. 중기 구석기에는 아슐리안 르발루아형식의 석기와 동물 화석이 3문화층(Ⅳㄴ ~Ⅳㄱ층)에서 발굴되었는데, 두께로 보아 금굴에서 가장 길게 살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후기 구석기층(4문화층)에는 짧은 시기 동안 살았고, 중석기층(5문화층) 은 그 흔적만을 찾을 수 있었다(표 1). 이와 같이 5개의 구 중석기문화층 위에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층(6문화 층)과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층(7문화층)이 있는 금굴 유적은 적어도 7개의 문 화층이 확인되고, 각기 문화상을 알 수 있는 석기 짐승뼈 토기 조개류 등의 다양한 고고학 유물들이 층위별로 확인되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선사문화연구 의 표준유적(type site)이라고 할 수 있다. 절대연대(bp) <사진 15> 구낭굴 발굴 모습(제3차, 1998. 12) <사진 16> 현장발표회 모습(1998. 12. 28)
제 1 편 제 1 장 역사 단양의 선사문화 52 53 <사진 20> 구낭굴유적 출토 사람 발목뼈 사람뼈대가 발굴될 것으로 기대된다(사진 20, 21). 이 동굴은 층위가 분명하고 잘 보존된 사람뼈 화 석과 많은 뼈연모 짐승뼈 등을 갖고 있어 선사시 대의 교육장으로 제 몫을 다할 것으로 기대된다. 앞 으로 구낭굴은 새로 찾은 굴 입구를 중심으로 연차 <그림 2> 구낭굴의 연대 측정 자료와 측정 위치도 적인 발굴이 이루어지고, 전시관을 세워 이 구낭굴 <사진 21> 구낭굴유적 출토 사람 발가락뼈 이 학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올바로 알려야 할 것이다. 의 주된 문화층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사진 17, 그림 2).3) <사진 17> 구낭굴유적 퇴적단면 3문화층을 분석한 결과 구낭굴 사람들은 주로 사슴을 사 냥하여 주된 식량원으로 삼았다. 사냥된 사슴의 이빨분석 결과4) 구낭굴 사람들은 사슴을 선별하여 잡았음을 알 수 있 었다. 잡은 짐승의 절반 이상이 어린 짐승이었으며 그중에 서도 한 살 미만의 아주 어린 새끼 사슴을 많이 잡았던 것으 로 밝혀져서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사슴의 계절 분석을 통해 이 구낭굴유적이 일 년 내내 사람들에 의 <사진 18> 곰 둘째발가락에서 관찰되는 찍힌 자국 3. 바위그늘유적 해 점유되었던 곳(base camp site)이 아니라 가을에서 봄에 이르는 동안의 계절적 주거(temporal hunting site)의 한 유 1) 상시 바위그늘유적 1981년 7~8월에 연세대학교 박물관팀이 발굴한 단양군 매포읍 상시리에 있는 유적이다. 이 유적에 있는 3개의 바위그늘은 모두 시기를 달리하여 사람이 살았는 데, 1그늘 - 구석기, 2그늘 - 신석기~청동기, 3그늘 - 늦은 구석기~신석기시대의 문 <사진 23> 상시1그늘유적 나들이문 화가 있음이 밝혀졌다(사진 22, 23). 형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사진 18, 19). 그리고 짧은꼬리 원숭이는 이빨의 모양과 크기 비교에서 큰원숭이와의 친연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어, 홍적 세 기간 중 따뜻한 시기에 우리나라에 유전적으로 고립되었 던 종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 층에서는 30대 초반의 남자 손가락 발가락뼈와 복사뼈 등이 발굴되어, 앞으로의 조사 결과에서 보다 중요한 <사진 19> 사슴뼈에서 관찰되는 도살 해체 자국 3) 이 연대는 서울대학교 AMS연구실 김종찬 교수와 염종권 박사(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전임연구 원)등이 측정하였다. 4) 사슴은 5월 하순~6월 초순에만 분만하며 이빨분석으로 나이와 달 수를 계산할 수 있어서 많은 동물 고 고학자들이 이 방법을 이용하여 사냥 계절을 해석하고 있다. <사진 22> 상시1그늘유적 전경
제 1 편 제 1 장 역사 단양의 선사문화 58 59 기시대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으며 중석기 문화 연구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셋째, 신석기유적(금굴 상시유적)에서 출토된 빗살무늬 덧띠무늬 토기 등으 로 보아 남해안 신석기 문화와의 연결이 가능하나 출토되는 가리비조개로 보면 동해안과의 이동 교류도 점칠 수 있어서 당시 사람들의 문화 교류 연구에 큰 자 0 40cm 료를 제공하고 있다. 넷째, 단양 각기리선돌은 남성선돌이 여성선돌보다 큰데 이러한 현상은 신석기 후기에는 여성선돌이 크다가 청동기시대로 내려오면서 점차 남성선돌이 커지는 양상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0 30cm 그러나 이런 성과와는 다르게 조사가 완전히 끝난 유적이 거의 없으며, 여기에 따른 연구가 미진하고 유적에 대한 보존 조치가 미비한 상태에서 일부 훼손되고 <사진 27> 각기리 선돌 <그림 4> 단양 각기리선돌(위 1호 선돌, 아래 2호 선돌) 있음은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호 선돌 앞에 돌을 쌓아 만든 제단이 있어서 제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암 수 모두 한쪽에 갈거나 쪼아서 만든 구멍이 있는데, 1호는 15개, 2호는 27개이 제7절 며 구멍의 크기는 2~12cm로 다양하다. 맺음말 단양지역에서 발굴된 선사문화는 남한강과 석회암동굴을 배경으로 형성된 각 제6절 제6절 단양지역 선사문화의 특징 각의 시대별 문화 성격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학자들의 비상한 관 심 대상이 되고 있다. 70만 년 전으로 해석되는 금굴 Ⅰ문화층으로부터 청동기시대의 각기리 선돌에 여기에서는 단양에서 발굴된 선사유적의 문화상의 해석에 대해 시대별로 간략 히 살펴보기로 한다. 이르기까지 이들이 갖고 있는 독특한 문화 특징들이 잘 보존되어 있고, 이러한 일 련의 연구 성과가 학술조사로 밝혀졌음은 우리나라 선사학계를 위해서도 무척 다 첫째, 단양지방의 구석기문화는 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수양개 유적이 세워지는 선사박물관은 단지 수양개 ① 금굴과 구낭굴의 발굴로 우리나라 구석기시대의 가장 이른 문화가 밝혀지게 유적만이 아닌 단양의 모든 선사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에 대해서 체계적인 전 되었으며, 이미 멸종된 옛 짐승화석을 비롯한 많은 뼈화석이 출토되어 우리 시 체제를 갖춘다면 이 지역과 우리나라 선사문화 연구와 전달에 선도적인 역할 나라는 물론 아시아의 고 동물상 연구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을 맡게 될 것으로 믿어진다. ② 금굴 수양개 등의 유적에서 출토된 많은 양의 유물이 각 시기의 문화상을 여기에 걸맞게 관계기관의 지속적인 관심으로 단양지역이 갖고 있는 선사문화 특징지을 수 있고, 인접한 공주 석장리나 중국의 묘후산 금우산, 일본의 구 상의 위상을 세울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노력도 주지방 북해도와 비교하여 당시 사람들의 문화상을 연구할 수 있는 단초를 같이 병행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제공하였다. ③ 유적의 발굴조사를 통해 찾아진 사람뼈 짐승뼈 석기 뼈연모 불땐 자 리 집터 등의 다양한 자료들은 전공학자들에게 구석기시대의 문화상을 연 구하는 대상이 되고 있다. ④ 상시 구낭굴에서 옛 인류화석이 출토되어, 우리 겨레의 뿌리 연구에 훌륭한 자료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둘째, 중석기문화는 금굴의 5문화층에서 그 존재가 확인되어 구석기시대와 신석 지금까지 살펴본 각 시대의 문화적 성격과 자료들은 단양지방에서만 보이는 독 특한 양식과 특징, 형식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선사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러한 선사시대의 많은 문화유산들 가운데 고인돌과 선돌을 제외한 전체가 매 장문화재로서 지표조사에서부터 발굴과 연구에 이르기까지 많은 과학적인 연구 와 노력을 필요로 한다. 학제간의 연구가 필요한 이 분야에 많은 학자들이 협력하 여 훌륭한 연구 성과가 있기를 기대하여 본다. 제7절
제 1 편 역사 제5장 근현대의 단양 구완회 집필 제1절 한말 격동기 단양지역의 모습 제1절 1. 한말 단양지역의 사회 경제구조 앞서 보았듯이 1909년에 파악한 단양의 호구 결과는 3,862호이고, 총인구가 15,681명(남 8,416, 여 7,265)이며, 같은 시기 영춘의 호구는 2,936호, 인구는 11,654명(남 6,223, 여 5,431)이었다. 전통적인 자료의 수치에 비하여 큰 차이가 나 는 이유는 짧은 기간 자연적인 인구증가의 몫도 있었을 것이지만 전통적인 호구 와 인구 파악이 가지는 한계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농업과 관련한 비교적 신뢰할 만한 자료도 같은 시기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1909년에 통감부에서 조사한 자료에는 단양 영춘 지역의 농민들이 얼마만한 면 적의 토지에 어떠한 곡물을 재배하고 있었는지가 나타나 있다. <표 1> 단양 영춘의 농업 상황( 한국충청북도일반(2),1909) 경지면적(평) 단양 생산량(석.두) 경지면적(평) 영춘 생산량(석.두) 쌀 보리 밀 콩 합 1,756,100 818,500 342,150 445,000 3,361,750 3,350.00 2,548.00 513.00 710.00 7,121.00 (47.0%) (35.8%) (7.2%) (10.0%) (100.0%) 634,000 629,370 339,210 722,600 2,325,180 1,750.10 1,847.00 610.00 1,347.08 5,554.18 (31.5%) (33.3%) (24.3%) (11.0%) (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