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차사적분과위원회회의록
단기계획 (1 단계 ) (2016 년 -2020 년 ) 중기계획 (2 단계 ) (2021 년 -2024 년 ) 장기계획 (3 4 단계 ) (2025 년 -2035 년 ) 경상감영 1 단계기본정비 ( 감영의기본축복원 ) 2 단계복원준비 ( 경상감영인지도확대 ) 2 단계복원을위한종로초등학교, 우체국이전 추가확보된공간연구및발굴조사 ( 감영및부아공간확대정비 ) 경상감영및부아복원정비경상감영역사문화사관완공
(4)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가치 절의를 중시했던 역사적 인물인 야은 길재 를 주향으로 하고 있는 금 오 서원 - 구미 금오서원은 고려 후기에 절의를 지킨 고려삼은(三隱) 으로 꼽혔던 야은 길재(1353 1419)를 주향으로 모시는 서원임. 1567년 사림에 의해 서원 건립이 청원되어 1570년(선조 3)에 금오산에 초창되었으며, 1575년 (선조 8)에 사액을 받았음. 임진왜란 중에 전소되어 1602년(선조 35)에 지 금의 자리로 이건해 왔으며, 1609년(광해 원년)에 다시 사액을 받았음. 사 액을 받으면서 김종직, 정붕, 박영을 추향하였고, 1642년(인조 20)에는 장 현광을 추향하면서 현재까지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음. 임란을 거치면서 중수되긴 했지만 야은 길재를 배향하기 위해 초창기에 건립된 서원의 전 통을 이어오고 있다. ㅇ 대원 군 서원철 폐 령 에 훼 철 되 지 않 은 서원 - 길재를 상징하는 대표 문화유적이자 구미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으로서 1871년(고종8) 일인일원의 원칙에 의한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전 국 47개소 사액서원 중 하나이며 우리나라 서원발달사의 초기에 건립된 서원으로서 서원의 변천과정을 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기념물임. ㅇ 조선 중기 서원 배치의 전형을 볼 수 있는 서원 - 구미 금오서원은 남산자락의 산비탈 경사면을 자연 지세에 맞춰 크게 3단 의 평지를 형성하고, 좌향을 남향으로 두고 있고 건물 진입 순서에 따라 남쪽의 낮은 곳에서부터 북쪽의 높은 곳을 따라 진입공간과 강학공간, 제 향공간을 일직선의 축으로 배치하였음. 경사면에 조성된 공간으로 인하여 토축과 석축이 기단에 접하여 있으며, 건물과 건물사이의 공간도 평지의 서원보다 좁은 편임. 건물 주변에는 한식 토석담장이 설치되어 있고 서원 우측으로 관리사와 아래채가 자리 잡고 있으며, 관리사 진입구간에 목조 화장실이 위치하고 있으며, 관리동 우측으로 근래에 정비된 주차장이 있음. - 서원의 맨 아랫단에는 누각인 읍청루(挹淸樓)와 동재 서재, 가운데의 단에 는 강당인 정학당(正學堂)을 배치하였고, 맨 윗단에는 사당인 상현묘(尙賢 廟)가 위치하고 있음. 누각과 강당 그리고 사당이 일직선상에 있고, 강당 앞에 동재와 서재가 대칭으로 서 있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 조를 이루고 있음. - 진입과정에서의 공간의 고저(高低) 차는 공간의 위계성(位階性)을 보여주 며 주축(主軸)을 따라 진입할수록 지반(地盤)의 높이가 점차적으로 높아 ㅇ
지고 각 건물의 배치형태에 의해 자연스럽게 공간의 흐름이 유도되고 있 으며, 또한 각 영역간에는 담장 구획을 통한 제향-강학-부속공간의 독립 적 영역성을 확보하고 있는데 이는 조선 중기 서원 배치의 전형을 엿볼수 있는 사례임. ㅇ 조선 중기의 건축 수법을 볼 수 있는 서원 - 금오서원 각 건물을 구성하는 부재의 치목수법이나 부재의 결구수법 등에 서 18세기 이전의 양식을 확인할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금오서원의 강당, 사당의 공포에서 보이는 헛첨차의 사용임. - 강당과 사당의 공포 구성방법을 살펴보면 기둥 위에는 창방을 연결하고 그 위에 주두를 얹은 후에 첨차를 놓아 주심도리 장혀를 받게 하였음. 주 두 아래에 헛첨차를 끼어 두공을 받게 하였으나 헛첨차만 쇠서형으로 하 고 두공머리는 운두각(雲頭刻)으로 장식하였으며, 헛첨차와 두공의 뒷몸은 대들보를 받고 있는 보아지가 되었음. 보머리는 주심도리 받침장혀 위에 얹어지고 보머리를 판 후에 주심도리를 얹었으며, 보머리의 끝은 단절하 였고, 길이는 두공과 같이 하였음. 이러한 공포양식은 주심포계의 건물이 나 그것은 광의로 보았을 때 그렇게 분류되는 것이고 좀 더 세분화되었을 때에는 주심포와 익공계의 절충식 공포 양식으로 분류되는데, 주심포와 익공계의 절충식 공포는 조선 중 후기의 건축으로 시대적 추이를 볼 수 있음. - 그리고 정학당 창호에서는 중간설주가 사용됨. 중간설주는 대청 배면의 3 칸 마루칸과 양 협칸 온돌방 전면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18세기 이전 의 건물에서 확인되는 고식의 기법으로 특히 온돌방에 사용된 중간설주는 하부에 원산을 박아 사용하고 있음. 이와 같이 온돌방의 외벽에 설치된 영쌍창에 원산을 사용한 예는 경주 독락당의 계정, 경주 향단, 안동 탁청 정 등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한 자료로서 건축사 연구에 있어 건축적 가 치가 큼. ㅇ 강학 서원 운 영 인적구성 중수 관련 자료가 풍부 히 보존 되 고 있음 - 구미 금오서원에는 18점의 고문서가 남아있음. 강학관련 자료인 <금오서 원강학계안>, 운영 및 인적구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인 행임록(行任 錄) (2책), 금오서원집사분정기(金烏書院執事分定記) 등 당시 서원의 활동 내역을 규명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들이 잘 남아있음. 또한 중수 관련 자료인 금오서원중수일기록(金烏書院重修日記錄) <신묘(辛卯)>, 금오서원중수일기록(金烏書院重修日記錄) <무오(戊午)>, 금오서원
중수계안(金烏書院重修契案), 금오서원중수운(金烏書院重修韻), 금 오서원중수수전안(金烏書院重修收錢案), 금오서원중수찬조록(金烏書院 重修贊助錄) 등에서 금오서원의 변천을 살펴 볼 수 있는 사료를 찾을 수 있음. 교지(敎旨) 를 받은 문서나 완의(完議), 홀기(笏記) (2 책) 등에서 지켜야할 규례나 행해진 제례 등을 알 수 있는 사료를 고문서 에서 찾을 수 있음. - 서원에서는 별도의 서적을 간행했던 것으로 보이며, 야은 길재의 행록(行 錄)인 야은선생언행습유(冶隱先生言行拾遺) (단권), 농암(籠巖) 김주(金 澍)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 경은(耕隱) 이맹전(李孟專)의 사적(事蹟)을 기록한 삼인록(三仁錄) (단권), 신당(新堂) 정붕(鄭鵬)과 송당(松堂) 박 영(朴英)의 사적(事蹟)인 양현연원록(兩賢淵源錄), 야은선생언행습유 함께 판각된 야은집(冶隱集) 등의 서적이 남아있음. 그리고 각 건물에는 1607년(선조 40) 사액 당시에 내려진 금오서원(金烏書院) 현판을 비롯하 여 읍청루, 정학당, 숙묘어제어필, 시민재, 시민재명, 일건재, 일건재명칠 조, 서원중수기(2개), 금오서원중수기(2개), 서원중수의연록, 금오서원읍청 루중수기, 상현묘 등 총 15개의 현판이 남아있음. (5) 지정 대상 및 범위 검토 ㅇ 사적 지정 신청은 문화재구역 1필지(5,577 ) 및 5동의 건축물(상현묘, 정학당, 읍청루, 동재, 서재)을 신청함. 구 미 금오서원 지적도 구 미 금오서원 지적도
미보 및 지역문화자원인 독동의 반송, 낙산고분군, 봉화대 등이 있어 낙 동강 및 구미보의 경치를 느낄 수 있는 산책로임. 또한 낙동강 제8경(두 루미의 군무), 구미보 하류의 뛰어난 경관을 볼 수 있다 금오서원 녹색길 지킴이 발대식 <활용 프로그램 개발 예시> 프로그램 금오서원 녹색길 주요 내용 예시 - 서원제향의례 등 유교의례 이벤트 프로그램 현대의 만남, 유림과 대화, 의미 해설체험 교육의례 (체험) -- 단순제례 전통과 교육의례 : 강학, 시회 - 향약, 향음례, 향사례, 향회, 새로운 의례의 발굴 개발 - 서원교육 및 학문활동과 관련한 프로그램 교육과정, 교과서, 운영 실제, 재정, 규약(고문서, 현판 자료) 전통교육 (체험) -: 고강(시험), 동서재 기숙 등등 서원생활문화 체험 - 유림과의 토론(대화)
라. 현지조사의견( 16.12.07/문화재위원 ㅇㅇㅇ, ㅇㅇㅇ, 전문위원 ㅇㅇㅇ) (1) 종별 및 명칭(안) 검토 ㅇ 종별 : 사적 ㅇ 명칭(안) : 파주 파산서원(坡州 坡山書院)으로 신청함. 검토의견 : 지정명칭 부여 기준인 지역명+문화재명에 의해, 파주 파산서 원(坡州 坡山書院) 적절한 것으로 사료됨. (2) 입지현황 및 역사문화환경 ㅇ 파산서원(坡山書院)은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파산서원길 24-40(눌노리 235)에 위치한다. 청송로에서 파평우체국 방향 좌측 서원교를 지나 좌측 으로 난 파산서원길을 따라가면 파산서원에 다다른다. 파산서원의 앞쪽으 로는 눌노천(옛명칭 : 우계(牛溪))이 흐르고, 뒤로는 무정산(武丁山)이 가 파른 형세로 자리 잡고 있다. 파산서원 경내로 들어가는 진입로 우측편 한귀퉁이에 하마비(下馬碑)가 있고, 정면으로 홍살문(紅箭門)이 서있다. 홍 살문을 기준으로 정면에는 삼문(三門)과 전통담장으로 둘러싸인 사당이 있고, 좌측편에는 재실인 찰륜당(察倫堂)이, 우측편에는 재직사(齋直舍)가 위치하고 있다. 현재 재직사는 서원을 관리하는 관리인 (1명)의 살림집으 로 사용되고 있다. 이와 같이 서원의 중심건축물은 총 3개로 이루어져있 다. 서원 주변유적으로 찰륜당 좌측편에 조감(趙堪), 성문준(成文濬), 신민 일(申敏一) 등 3인의 덕행을 기리기 위한 제단과 비석이 있는 경현단(景 賢壇)이 있으며 이곳에서 좌측편으로 약 70m부근에 청송선생유덕기념비 (聽松先生遺德記念碑)와 우계서실비(牛溪書室碑)가 서있다. 파산서원은 가파른 무정산을 뒤에 두고 눌노천(우계)를 앞에 둔 배산임수 의 형태이며, 서원의 좌우로 너른 들이 형성되어 있어 지형적으로 매우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옛 우계서실터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서실이 있었다는 비석만이 남아 있다.
(3) 연혁 유래 및 특징 파주 파산서원의 연혁 년 도 내 용 비고? 우계서실을 짓고 강학을 시작한 것이 파산서원의 시초가 됨 이이(李珥) 등 발의, 청송(聽松)성수침(成守 1568년(선조 1년) 백인걸(白仁傑), 琛)을 제향하고 청송서원(廳松書院)으로 창건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 이연구(李延龜), 오윤겸(吳允謙), 황신(黃愼), 1611년(광해군 3년) 신응거(申應渠), 정효(鄭曉) 등 발의, 재건 1628년(인조 6년) 성수침의 아들 우계(牛溪) 성혼(成渾) 추가 배향 1650년(효종 1년) 백홍우(白弘佑)의 상소로 파산(破山) 으로 사액을 받음. 1686년(숙종 12년)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 추가 배향 1694년(숙종 20) 성혼 복향으로 재사액 받음 1740년(영조 16년) 절효(節孝) 성수종(成守琮)을 추가 배향 창건, 조감(趙堪), 성문준(成文濬), 신민일(申 1807년(순조 7년) 경현당(景賢堂) 敏日)을 기리는 비(碑) 존치 1808년(순조 8년) 경현당 사액 받음 1868년(고종 5년) 대원군 서원훼철 시 유존 1950년 6 25전쟁 때 소실 1966년 도유사(都有司) 이열택(李烈澤)의 주도로 사우 6칸 중건 1976년 재실인 찰륜당(察倫堂) 8칸을 중건, 재직사((齋直舍) 건립 1983년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0호로 지정(9월 19일) 1986년 지방비 보조금으로 담장 개수 1990년 서원 기와 보수, 화방벽 보수 및 단청 1995년 관리사((齋直舍) 신축 1996년 관리사((齋直舍) 담장, 자연석축, 협문설치 1997년 찰륜당 기와보수 및 석축설치 1988년 경현당 비각(碑閣) 건립 및 담장 설치 1999년 수해로 인하여 건물들 대부분 소실 2001년 소실된 건물들 중수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 2013~2014 삼문 보수(철근콘크리트 구조를 목조구조로 보수) (4)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가치 ㅇ 파주 파산서원은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에 이은 세 번째 사액서원으로 서원 으로는 두 번이나 사액을 받은 유일한 서원이다. 1650년(효종 1) 백홍우 (白弘佑)의 상소로 파산(破山) 으로 첫 번째 사액을 받았고, 1694년(숙종 20) 성혼이 복향(復享)되면서 재사액 된 것이 바로 그것이다.
(7) 보존 정비 및 활용 착안사항 격 ㅇ 문화재의 진정성 및 가치 고양 : 문화재의 원형 보존에 중점을 두고, 학 술연구와 고증자료 등을 바탕으로 문화재의 진정성 및 가치가 유지되도 록 보수 정비계획을 수립하고 기준이 모호한 과잉복원은 지양함. ㅇ 파산서원 종합정비계획의 성격 : 사적 종합정비계획의 수립 및 시행에 관한 지침에 따라, 문화재의 체계적인 보존과 함께 서원 주요 건물과 배 수로, 수목 정비 등의 시설물을 정비하고운영프로그램 개발을 통해 효율 적인 활용방안을 마련하고자 함. ㅇ 파산서원 활용계획의 성격 : 파산서원에 대한 문화재적 가치 고양 및 인 지도 제고를 통해 대중들에게 친숙한 역사문화자원으로 조성하고, 율곡 이이와 구봉 송익필 등 파주 기호학의 주요 인물 유적과 연계하여 관광 자원으로 적극 활용하고자 함. 1) 계획의 기본방향 및 성 2) 종합정비(안) ㅇ 현재의 파산서원은 임란과 한국전쟁의 원인으로 소실된 것을 일부 건축 물만을 복원한 상태로, 현재 복원된 건축물들도 이전의 건물과는 상이한 형태이고, 아직 우계서실, 강학당, 동 서재, 청계정 등 많은 건축물들의 위치나 형태 등이 조사를 통해 복원되어야 할 부분임. 우계서실의 경우 는 그 건축형태가 강학을 위해 특수하게 지어진 건물로 건축사적으로도
매우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으며, 문헌상으로도 건축구조에 대한 설명 이 남아있어서 발굴조사와 병행하여 옛 건축물을 그대로 복원할 수 있는 단초도 제시되어 있음. 우계서실은 세칸구조로 강학을 위한 방과 대청이 각 2/3, 1/3을 차지하고 있고, 남쪽으로 판자를 대어 마루를 넓게 만들었 으며, 북쪽면과 좌우면에는 벽을 설치하였고, 화덕에서 용마루까지 흙을 쌓아 건물을 덥히는 구조로 일반적 당시 건축과는 다른 특이하고, 매우 실용적인 형태의 건축구조를 나타내고 있음. 이는 강학을 위한 특별한 건축물로서 다시 복원된다면 또 하나의 특별한 사원의 건축구조로 자리 매김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중요한 사안인 것임. 1933년 동아일보에 실린 파산서원 사진을 면밀히 살펴보면 현재 사당 및 부속건물들도 원건축과 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사진을 보면 지붕의 구조, 건물의 입지, 건물의 동수가 판이하게 다름. 이 또한 정밀한 고증을 거쳐 바로잡 아야할 것으로 파산학, 우계학파의 중심점인 파산서원으로 거듭나 현재 우리 현실에 맞는 서원의 기능을 발휘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할 것임. 아일보 사진 유적번호 유적이름 행정구역(주소) 면적( ) 유적성격 조사기관의견 비고 파주시 파평면 206.3 정자터 시굴조사 1 청계정지 경지도 눌노리 232-1 입지양호 경지도 파주시 파평면 2 우계서실지 눌노리 268-25 7,084.6 건물지 시굴조사 주변에서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1,198.3 건물지 시굴조사 유물수습 3 파산서원부속 건물지 눌노리 268-25 일원 계 전체면적 : 10,000 / 조사예정면적 : 8,489.2 1933. 10. 1 동
3) 문화재 활용 방안 ㅇ 구분 율곡 이이 우계 성혼 구봉 송익필 파주의 삼현 탐방, 삼현의 성리학 발자취 탐방 : 파주 성리학의 대표적 인 인물인 파주삼현(율곡 이이, 우계 성혼, 구봉 송익필)과 관련된 인물 유적을 연계하는 유적 답사 및 활용 프로그램을 시행하여 파주 성리학에 대한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탐방코스를 운영하고 있음.특히 2016년에는 삼현의 편지글인 삼현수간 발간을 추진중에 있으며, 매년 10월경 파 주 삼현과 관련된 유적 및 인물에 대한 다양한 주제의 학술대회를 발전 시켜 나갈 예정임. 파주의 삼현 탐방코스(안) 관련유적 위치 주요내용 파주 이이 유적 법원읍 동문리 율곡 이이 선생을 포함한 가족묘와 자운서원 (자운서원, 산5-1 이 위치한 율곡 이이 선생 관련 대표 유적 이이선생묘 등) 파평면 율곡리 율곡 이이 선생이 자주 들러 시를 짓고 명상 화석정 산100-1 을 하며 학문을 연구하던 곳 파산서원 파평면 눌노리 235 우계 성혼 선생을 제향하는 서원 파주읍 향양리 조선 성리학의 대가인 우계 성혼 선생의 묘소 성혼선생묘 산8-2 성리학의 대가인 구봉 송익필 선생의 세 심학산(구봉산) 산남동 산58-9 조선 거지 파주의 삼현 탐방루트(안)
ㅇ 활용 프로그램 구상(안) : 주요 프로그램 사업내용 대상 시기 나를 돌아보는 시간 중학생, 고등학생 3 7월, 9 11월 인성 힐링(Healing) 캠프 (20명) (월1회, 년 8회) 성리학과 함께하는 대학생, 일반인 4 6월 인문학 강좌 (30명 내외) (월1회, 년 3회) 파주삼현 학술대회 유림, 일반, 6월, 11월 율곡, 성혼, 송익필 삼현을 학자,대학생 등 (년 2회) 그리다 중학생 3 11월 파주삼현 유적 답사 초등학생, (각 20명) (월1회, 년 10회) 장소 파산서원 파산서원 파산서원, 자운서원 파산서원, 자운서원 추진주체 파주시, 파산서원 파주시, 파산서원 파주시, 파산서원 파주시, 파산서원, 자운서원 - 나를 돌아보는 시간 인성 힐링(Healing) 캠프 : 파산서원에서 하루 동안 지내며 옛 선비의 모습 체험, 충(忠) 효(孝) 예(禮)를 주제로 올 바른 인성을 배양할 수 있는 서원 스테이 기간 : 3~7월, 9~11월, 매월 3주 주말(년 8회, 1박 2일) 장소 : 파산서원 대상 : 중학생 고등학생(20명) 내용 : 청소년들에게 바른 가치관과 올바른 소양을 배양하기 위하여 원 규에 따라 파산서원에서 하루를 머물며 전통체험, 인성 예절교육 등을 통하여 심신을 치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 특히, 율곡 이이 선생과 관련된 충(忠) 효(孝) 예(禮)를 주제로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올바른 인성교육의 장으로 활용함. 구분 충(忠) 효(孝) 예(禮) 힐링(Healing) 캠프 주요 내용 주요내용 우리나라 국기인 태권도(율곡틀) 습득을 통해 건강한 신체를 배양하기 위한 수련 실시 그의 대표 저서 중 하나인 선비행장(先妣行狀)을 통하여 신사임당에 대한 율곡 이이 선생의 지극한 효심을 배우고 가족애를 고양할 수 있는 기회 마련 자운서원 원규에 따라 옛 선비의 모습을 체험하고, 전통체험 예절교육 등 을 통하여 올바른 인성에 대한 교육 실시 인성
태권도 수련 예시(좌: 도산서원, 우: 병산서원) * 자료: 네이버 블로그(2015) 서원 스테이 예시(좌: 소수서원, 우: 병산서원) * 자료: 네이버 블로그(2015) 학과 함께하는 인문학 강좌 : 파산서원 내에서 율곡 이이 선생의 성리학을 주제로 인문학 강좌 실시 기간 : 4~6월, 매월 1주 토요일(년 3회) 장소 : 파산서원 대상 : 대학생 일반인(30명 내외) 내용 : 최근,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성혼 선생의 성리학을 주제로 대학생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정기적인 인문학 강좌를 개설하여 인성 치유의 기회를 마련함. - 성리 인문학 강좌 예시(좌: 나주향교, 우: 돈암서원) *자료: 네이버 블로그(2015)
파주 삼현 학술대회 율곡, 성혼, 송익필 삼현을 그리다 : 정기적인 학술대회 개최를 통해 파주 삼현의 가치 재조명 기간 : 6월, 11월(년 2회) 장소 : 파산서원, 자운서원 대상 : 학자, 유림, 일반인, 대학생 등 내용 : 율곡 이이, 우계 성혼, 구봉 송익필 파주 삼현을 주제로 정기적 인 학술대회를 개최하여 파주 삼현의 가치를 재조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지속적인 학술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함. - 학술대회 예시(좌: 파주시, 우: 오죽헌) (8) 종합 의견 ㅇ 파주 파산서원은 1568년(선조 1) 이이 백인걸 등 파주 지역 유생들에 의 해 창건된 후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경기도의 유서 깊고 중요한 서원임. ㅇ 파산서원은 건축적 가치보다는 이곳에 배향된 인물(성수침(成守琛), 성수 종(成守琮), 성혼(成渾), 백인걸(白仁傑))이 당대 기호사림의 대표적 대학 자들로 성리학에서 경기도가 차지했던 중요한 위치를 보여주는 곳임 ㅇ 서원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후 복원과 소실을 반복하였으며 현 재의 사당 건물은 1966년 복원되었고 후에 강당과 단소 건물을 건립한 상 태로서 건축적인 가치를 논하기는 어려움. 그리고 현재 파산서원은 병렬배치로 특이한 배치를 하고 있으나, 서원에 대한 조사없이 복원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배피가 전형저인 서원의 배치를 가진 것인지를 알수 없음. 게다가 1933년 동아일보의 사진 자료와 도 상당히 상충되게 배치되고 건축어 원형을 찾기 어려움. ㅇ 따라서 이러한 점을 종합하여 고려할 때, 국가 지정 사적으로 지정하기보 다 현재의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존속하는 것이 적절한 것으로 판단됨.
유존하였으며, 기능을 유지하다가 1974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제51호)로 지정된 이후 지역 유림과 문중이 발의하여 복원사업을 추진, 동 서재, 문 루, 전사청, 관리사, 숭모각 등을 건립하여 서원으로서 면모를 갖추어 오 늘에 이르고 있다. 연대 내 용 관 련 1583 회연초당 및 백매원 건립 한강 정구 1592~1597 임진왜란으로 소실 1605 회연초당 중건 한강 정구 1622 서원 건립 착공 석담 이윤우 등 문인 중심 1627 서원 완공, 한강 정구 위패 봉안 초대 원장 죽헌 최항경(1560-1638) 우복 정경세(1563-1633), 창석 1628 동강 김우옹 위패 봉안 이준(1560-1635) 주도 1668 신도비 서원 경내로 이건 묘소의 이장(창평산 인현산) 1677 석담 이윤우 종향 성천(成川) 사인(士人)의 상소 및 1690 회연서원 사액 목내선(睦來善)의 역할에 의함 1729 동강 김우옹 위패 이안 청천서원 훼철 강당은 지참관(支站館)으로 도한기(1836-1902)의 1868 유지 읍지잡기(邑誌雜記) 기록 1974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1호 지정 1975이후 복원사업 연차적으로 추진 정부지원, 지방 유림, 문중 등 보수정비 이 력 1975년 사당, 사주문, 일각문 건립 1976년 동 서재 건립 1990년 문루, 유물전시관 건립, 배수로 및 담장 설치 1999년 강당 기와고르기, 사주문 보수,(구)사당 보수 2005년 지경재, 명의재 보수 2014년 강당 해체 보수 (4)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가치 ㅇ 회연서원은 1583년(선조 16)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의 한 사람인 한강 정구가 제자를 기르기 위해 건립한 회연초당(檜淵草堂)에서 비롯되 었다. ㅇ 회연서원에 주향으로 배향하고 있는 한강 정구는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두 사람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하여 융합하였을 뿐 만 아니라 관직생활보다는 지역에 머물면서 회연초당 등의 학문연구와 강
(7) 보존 정비 및 활용 착안사항 1. 문화재 활용 계획 절, 1일, 1박 2일 등 코스별 문화관광상품 개발 - 회연서원 주변의 전통적인 경관 요소인 무흘구곡을 거치는 트래킹 코스 를 발굴 개발하여 활성화 한다. - 무흘구곡, 가야산의 등산로를 개발하여 활성화 한다. - 무흘구곡, 가야산 등의 역사문화를 체험하는 스토리텔링을 활용한다. - 성주 유교 문화권 관광 코스와 같은 주변 문화유산 및 관광명소와 연계 를 통한 관광상품 개발로 회연서원 방문을 활성화 한다. 2 회연서원과 역사문화 탐 방 회연서원에서 출발하는 무흘구곡 역사문화 트레킹 코스와 회연서원을 중심 으로 사방으로 역사문화 트레킹이 가능하다. 회연서원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역사문화유산이 남아있다. 특히 무흘구곡의 제1곡으로서 역사적인 경관적인 가치가 높다. 회연서원을 중심으로 서북쪽 으로는 무흘구곡이 펼쳐지고, 1.4km의 동쪽에는 경상북도 지정문화재인 한 강종택과 중매댁 등이 자리잡은 갖말 마을, 그리고 동북쪽의 고개를 넘어서 는 동강 김우옹의 역사문화유적이 다수 자리 잡고 있다. 서쪽으로는 가야산 ㅇ 반나
험단지 스탬프 트레일 - 스탬프 트레일이란 지역의 관광명소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학습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한 것으로, 스탬프 트레일 책자를 소지한 학생이나 시민이 관광명소를 찾아가면 그 기념으로 스탬프를 찍어주는 행사이다. - 성주의 명소뿐만 아니라 관광자원과 연계한 스탬프 트레일을 개발하여, 스탬프 트레일을 완성한 사람에게 소정의 사은품을 지급하고, 명예홍보 대사로 위촉하는 등 자발적인 홍보가 이루어지도록 한다. ㅇ 성주 전통문화체 (8) 종합 의견 ㅇ 성주 회연서원은 1583년(선조 16)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의 한 사 람인 한강 정구가 제자를 기르기 위해 건립한 회연초당(檜淵草堂)에서 비 롯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재건되었다가, 한강 정구의 사후 1622년 서 원이 건립되고 1690년에 사액을 받게 된다. ㅇ 이후 대원군 서원 철폐령에 의해 회연서원은 1868년 철폐 되었으나. 당시 훼철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강당은 2015년 해체수리 과정에서 발견된 종도리 상량문에 의해 1622년 건립하고 1896년에 중건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현재 서원의 건축물은 1975년 이후 건립된 것이다. ㅇ 성주 회연서원에는 90건의 고문서가 소장되어 있는데 대부분 한강 정구를 비롯하여 정창지(鄭昌旨) 정동리(鄭東里) 정규석(鄭奎錫) 정위(鄭煒) 정사용(鄭思容) 정재선(鄭在璇) 정두호(鄭斗鎬) 등 후손들의 교지(敎 旨) 교첩(敎牒) 시권(試券) 유지(諭旨) 등이다. 서원의 숭모각에 소장하였던 책판을 통해 보면 서원에서는 판각 등을 통 하여 별도로 서적을 간행했던 것으로 생각되며, 한강 정구의 문집인 한 강선생문집(寒岡先生文集) 과 그의 저서인 심경발휘(心經發揮) 와 태 극문변(太極問辨) 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設分類) 을 비롯하여 상 곡선생문집(相谷先生文集) 백곡선생문집(栢谷先生文集) 만오선 생문집(晩悟先生文集) 지애선생문집(芝厓先生文集) 등 총 1,343장이 남아 있다. 한편 서원의 각 건물에는 회연서원(檜淵書院), 현도루(見道樓), 숭모각 (崇慕閣), 옥설헌(玉雪軒), 망운암(望雲庵) 등 14개의 현판이 남아 있으 며, 이 중 회연서원 은 조선 중기의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濩)의 글씨라 전해지나 확인되지 않았으며, 옥설헌, 망운암 은 미수(眉叟) 허목(許穆) 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임고서원 배치 평면도 / 구서원 신서원 영역 (3) 연혁 유래 및 특징 ㅇ 1553년 포은 정몽주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 1554년에 소수서원 다음 으로 사액됨. ㅇ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3년 현 위치에 이건, 재 사액을 받음 ㅇ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1879년 존영각을 건립하여 포은영정 을 봉안하고 향사를 지냄 ㅇ 1965년 복원하고 1979년 묘우인 존영각을 건립함. 1991년부터 중건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신서원, 포은유물관, 충효관 및 기타 부대시설을 건축하 고 지역의 대표 전통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 임고서원 연혁 년대 내 용 진사 노수(盧遂), 생원 김응생(金應生), 향노 정윤량(鄭允良), 생원 정거(鄭 1553년(명종 8) 琚) 등 영천 유림이 협모하여 임고면 고천리 부래산에 창건, 매년 음력 2 월과 8월 중정(中丁)에 향례를 봉행함 1554년(명종 9) 임고서원 사액(賜額)됨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서원 전소, 포은영정 이봉함 1600년(선조 33) 구지(舊址)에 초가 1칸을 지어 포은영정 봉안하고 향사 재계 영천
1986년 1991년 1992년 1993년 1994년 1994년 1996년 1999년 1958년 1963년 1970년 1975년 1979 1980년 1980년 1986년 1987년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1993년 1995년 1996년 2001년 2004년 2011년 2015년 존영각 보수 임고서원중건성역화사업추진위윈회 발족, 중건계획 수립 임고서원 전적 보물 제1109호, 정몽주 초상 보물 제1110호로 지정됨 성역화 사업 1차 공사인 묘우 및 강당 준공함, 포은영정 을 별당으로 이안 성역화 사업 2차 공사인 문루와 심진각 준공함 성역화 사업 3차 공사 준공함 성역화 사업 4차 공사인 유사실, 관리실, 화장실과 담장 공사 준공함 성역화 사업 5차 공사인 신도비 준공함, 포사 2동 준공함 임고서원 사적비 준공, 포은선생 모부인의 백로가(白鷺歌)와 선생의 단심 가비(丹心歌碑) 건립, 임고서원 성역화 사업 준공 및 학술대회 개최함 보수ㆍ정비 및 현상변경 이 력 구서원 정문 및 포사 개축 구서원 경당 단청 및 담장 보수 구서원 경당 단청 구서원 강당 및 지붕 보수 구서원 사당 삼문 신축, 담장공사, 강당 기단 보수 구서원 고직사 일원 보수, 강당 일원 보수 구서원 존영각 보수 구서원 축대 및 대문 보수 구서원 화장실 신축, 강당 보수 진입로 포장 관리사 증축 신서원 강당, 내삼문, 사당 신축 신서원 전사청, 동재, 서재, 담장, 배수로 공사 유사실, 고직사, 강당, 화장실 2동, 담장 신축 신도비각, 행랑채, 문간대 신축, 담장 공사 구서원 사당 지붕 보수 구서원 강당 보수 구서원 사당 보수 구서원 강당 보수중 (4)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가치 충신이자 동방이학의 조종인 포은 정몽주를 배향하는 서원 - 영천 임고서원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충신 및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종 (祖宗)으로 존숭(尊崇)된 문충공(文忠公)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조선 명종 9년(1554)에 임고면 고천리(부래산)에 창건했다. ㅇ
에서 소수서원 다음으로 사액된 서원 - 창건이후 우리나라 최초 사액서원인 영주 소수서원 다음으로 사액서원이 되었다. 선조 26년(1593) 임진왜란으로 서원이 소실되자 동왕 33년(1600) 에 포은영정(圃隱影幀) 만 봉안해 오다가 동왕 36년(1603)에 임고면 도일 동(우항리)로 이중건하고 재사액을 받았다. 그뒤 인조 21년(1643) 장현광 (張顯光), 정조 11년(1787)에 황보인(皇甫仁)을 추향하였다. 고종 8년 (1871)에 훼철되었으나 1965년에 서원을 복원하여 위패를 봉안했습니다. 1985년 경상북도 기념물 제62호로 지정되었고, 1990년부터 1999년에 걸쳐 임고서원성역화사업을 추진하여 정비했습니다. 2001년 사림의 공의로 황 보인을 다시 재배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ㅇ 영 남 사 림 을 대표하는 존현 및 교육 기관 - 조선 전 후기에 걸쳐 영남 사림를 대표하는 존현 및 교육기관으로 그 역 할을 다 해 왔습니다. 특히 이황(李滉)을 비롯한 영남 기호지방의 문인의 존현적 행보와 관인층의 심원 알묘 및 경제적 지원이 지속되어 존현예법 (尊賢禮法)과 존현행정(尊賢行政)이 훼철 전까지 유지되었습니다. 아울러 지산 조호익(曺好益), 여헌 장현광(張顯光), 한강 정구(鄭逑)의 문인을 중 심으로 한 교육과 자체 출판을 통해 학문이라는 서원 본연의 기능을 충실 히 수행해 왔습니다. ㅇ 조선조 서원제도 연구 에 귀 중한 보물 2점( 임 고서원 전적, 포은 영정)을 ㅇ 우리나라 소장하고 있는 서원 - 임고서원에는 조선 전 후기 임고서원의 운영 족적 및 당시 유교문화와 서 원제도 연구에 귀중한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은 인문학적 유산을 많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현재 42종 200여 책의 전적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중 10종 25책은 임고서원 전적(新編音點性理群書句解, 會纂宋岳愕武 穆王精忠錄, 論語諺解, 尋院錄, 考往錄, 錢穀什物凡例謄錄, 獎學稧案 附 節 目, 環城寺決立案, 凡規, 書院規範) 으로 보물 제1109호 로 지정되어 있 습니다. 그리고 인조 7년(1629)에 화사 김육(金堉)이 이모한 정몽주 초 상 3점은 보물 제1110호로 지정되어 고려 말 공신도상의 양식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문화재입니다. 그 외 숙종대왕 어제어필 시판을 비롯해 서원 운영과 관련된 다양한 책판과 고문서를 많이 보유하고 있음.
(7) 보존 정비 및 활용 착안사항 1) 임고서원의 보존 및 활용 기본계획 (1) 계획목표 및 방향설정 ① 기본목표 설정 ㅇ 포은 정몽주 성역화사업 기본계획은 영천시 임고면에 위치하고 있는 포은선생의 생가지와 포은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임고서원 을 비롯해 정몽주 관련유적이 다수 산재해 있으나 그 정비가 임고서원 일원에 한정되어 이루어지고 있다. 생가터를 비롯해 유허비, 부래산, 부모 묘소 등 관련유적의 균등한 정비와 유적을 연계할 수 있는 프로 그램을 개발함으로 관광네트워크를 구축하고자하는 영천시의 잠재적인 목표를 지향하고자 한다. 첫째, 선비와 충절의 표상이며, 동방이학(東方理學)의 비조(鼻祖)로 존 숭(尊崇)되어지고 있는 포은 정몽주선생의 정신과 학문을 후대에 전할 수 있는 공간 확보가 절실히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임고면 일대에 산재해 있는 임고서원, 정몽주선생 생가터, 유허비, 부모 묘소 등 선생 과 관련된 다수의 유적에 대한 정비가 이루어져야 한다. 단순한 시설 물정비 및 프로그램 개발보다는 관련 스토리텔링 개발을 선행하고 개 발된 스토리텔링을 바탕으로 시설물정비 및 프로그램개발이 진행되어 야 선생의 정신과 학문을 후대에 널리 알릴 수 있는 역사적 공간으로 만들어 질 것이다. 또한 현대인에 맞는 프로그램을 접목 시킨다면 21 세기에 맞는 미래지향적 문화공간이 창출될 것이고 영천문화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 제고가 이루어 질 것이다. 둘째, 대외적으로 경쟁력 있고 매력 있는 관광 상품을 개발하여 외래 관광객 유치와 고부가가치 수익 창출에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야 할 것 이다. 포은 정몽주 성역화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임고면 일대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전통가옥을 비롯해 선원리 전통마을 등 많은 문화관 광자원과 임고강변 수변공원과 주변 산지의 경관 및 연못을 연계한 자 연경관자원을 서로 연계하여 영천시 임고면만이 가질 수 있는 특화된 관광프로그램을 개발하고, 파급효과가 높은 시장을 설정하여 이들 수 요자 욕구에 맞는 차별화된 관광 상품을 개발하여야 할 것이다.
② 계획의 방향 설정 ㅇ 포은 정몽주 선생과 관련된 스토리텔링을 기본 바탕으로 역사서등과 같은 관련문헌에 나타나는 시설물 및 수목을 계획에 반영하고, 대상지 의 현황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대상지에서 실현가능한 시설물계획을 도출하고자한다. 또한 유사정비사례를 조사 분석하여 본 성역화사업 의 계획에 반영하고, 포은 정몽주 선생 관련 유적 및 인접지역의 자연 환경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최대한 살리면서 외부적 기회요인을 적극 활용하고, 지역의 약점을 보완하면서 다각적인 위협요인을 극복할 수 있는 계획을 하고자 한다. - 포은 정몽주 선생을 소재로 한 다양한 스토리리텔링을 통한 관광자원화 포은 정몽주 선생을 설명하는 단어를 살펴보면, 동방이학의 비조, 충절의 표상, 삼년상의 시초가 되는 인물 등 다양한 단어들이 나타 난다. 이러한 것들을 스토리로 만들어 계획에 반영해 후대에 포은선 생의 정신과 사상을 전하는데 큰 역할을 하도록 한다. - 포은 정몽주 선생 관련 스토리를 구현할 시설물과 공간 조성 개발된 스토리텔링을 형상화하는데 목적을 두고 시설물 및 조경을 계 획하여 지역주민과 관광객에게 제공하여 체험 및 관람의 전달성을 극 대화할 수 있도록 한다. - 자연자원 및 전통문화자원을 연계한 관광자원화 현재 진행중인 임고강변정비 및 임고서원 주변 산지와 같은 자연환경 과 주변 문화재를 연계하여 다양한 관광자원을 개발하도록 한다. 또한 현대인에 맞는 프로그램을 접목 시켜 미래지향적 문화공간을 창 출하여야 한다. 관광객의 욕구 충족과 관광자원의 가치 증대를 위하여 관광자원 연계 할 수 있는 관광 교통체계 동선을 구축한다. - 정체성 있는 역사문화 테마시설 및 관광 상품개발 복합적 역사문화관광 인프라 확충을 위해 수용력을 증대시키고, 체험 형 테마시설을 조성하여 외래 관광객유치 전략에 활용한다. 충효문화에 대한 관광자원화를 통해 지역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미래 관광시장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한다. - 주민과 함께하는 관광개발로 실현성 제고 주민의 참여를 유도하고 주민의 이익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안을 모 색하고 주민이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한다.
2) 계획의 구상 ① 중심설화에 따른 구상 스토리텔링 : [달가의 꿈] 달가(達可)여! 달가(達可)여! 달가여! 달가여! 어이하여 달가(達可, 달가는 포은선생의 字)라 하셨습 니까? 내 이름 높아지고 빛나서가 아니라, 본성을 곧게하여 의를 좋아하고 말 과 얼굴빛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고, 신중히 생각하고 겸손하며 그 릇된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오. 달가여! 달가여! 어째서 포은(圃隱)이 되셨습니까? 자신의 수양을 본의로 하여 생활하기를 꿈꾸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더 라도 성내지 않으며, 그저 자신을 닦아 물과 같이 낮은 데로 흘러 세상 을 풍요롭기를 꿈꾸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오. 아! 선생께서는 별들이 잔치를 벌이는 별의 도시 영천에서 어깨에 북두 의 형상을 지니고 학문하셨고, 그 학문 드높아 모습이 북두칠성과 같았 습니다. 집에서 효도와 우애로움을 행하시고 나라에서는 충의를 성실히 하셨으며, 부모님 돌아가심에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무덤가에서 3년 을 지키는 예를 행하셨으며, 5부 학당을 세우고 향교를 설치하여 학문을 일으키셨습니다. 또한, 선생은 학문을 하실 때 눈이 녹아 땅속에 완전히 스며들 듯이 완전히 이해하고 환하게 알 때까지 숙고 하셨고, 이를 몸소 실천하였으며, 성리학을 우리나라에서 열어 사람들이 선(善)한 심성을 회 복하고 도덕을 실천하여 사회질서가 재편되기를 희망하셨습니다. 안타깝 게도 나라가 망함에 이르러서는 살기를 바라서 의리를 해치지 않고 자 신을 죽여서 인(仁)을 이루었으며, 죽음에 이르러서도 의로움을 변하지 않으셨으니, 달가 는 진정 마음과 행동이 맑고, 곧으며, 옳은 것을 좋아 한 달인(達人)이 아니겠습니까.
3) 기본 구상 포은 정몽주 선생 성역화사업 기본구상도 영천과 포은 정몽주, 7개의 테마를 별 의 이미지와 연계하여 표현 북두칠성으로 형상화 한 7개의 테마 기록을 통해 찾아 볼 수 있는 포은선생 어깨 사마귀 7개와 영천을 대표 하는 별을 연계하여 북두칠성으로 형상화 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공 간계획 및 시설계획을 수립하고자 한다. 임고면에 위치한 포은선생 유적 중 생가지, 유허비, 임고서원, 전망대, 도일지, 부모묘소, 부래산 7곳을 선정하여 정비계획을 수립한다. 스토리텔링을 바탕으로 시설물 계획 7곳의 선정지 각각에 포은선생의 삶과 관련된 테마를 부여하고, 테마별 스토리텔링을 개발하여 정비계획에 반영하고자 한다. 개발된 포은선생 스토리텔링을 역사문화콘텐츠와 결합해 포은선생의 인 품, 성품, 학문, 효성 등 선생의 인물성과 나라에 대한 충절, 신념 등 선 생의 사회성을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프로그램 개 발 및 시설계획을 하고자 한다. 테마별 특색이 있는 정비계획 수립 각 테마별 스토리의 특성에 따라 대상지만이 가질 수 있는 특색 있는 정비계획을 수립하고자 한다.
각 계획지 연계성 극대화 각 유적의 상관성을 고려한 연결프로그램을 개발을 통해 연관성을 극대 화 시킬 수 있도록 계획을 수립한다. 또한 영천이 가지고 있는 지역성과 관광아이템, 특산물 등을 관광객에 알릴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시설물을 계획한다. 공간 및 시설물을 사용하는 주된 연령층은 청소년으로 계획하되, 모든 연령층이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참여 지향적인 공간 및 시설물을 계획 하여 체험 및 학습공간이 될 수 있도록 계획한다. 친환경 친경관적 시설 계획 임고강변의 수려한 자연경관 및 문화유산의 보존을 위해 관련 법 제도 를 고려하여 가급적 소규모의 가용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고, 자연경관 과 조화된 시설디자인과 배치를 통해 친환경 친경관적인 시설을 계획하 도록 한다. 4) 테 마별 공 간 구상 각 대상지별 스토리텔링 및 기본구상 계획 대상지 스토리텔링 기본구상 관람 및 배향시설, 공원시설 마련 테마1. 생가지 포은 선생의 탄생 휴게 편의시설 마련 마련 테마2. 유허비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과 절개 공원시설 관람 편의시설 마련 및 학습, 레져공간 마련 테마3. 임고서원 동방 유학의 종조 포은선생 교육 휴게 편의시설 마련 문화시설, 레포츠 체험시설 마련 테마4. 전망대 호연지기 휴게 및 조망시설 마련 공연시설, 탐방 및 관람 시설 마련 테마5. 도일지 포은의 시문학 전망 및 휴게시설 마련 탐방시설 마련 테마6. 부모묘소 포은선생 효행, 삼년상 참배 및 전시시설 마련 탐방시설 마련 테마7. 부래산 포은 경세의 정신 편의시설 마련 포은선생 생가지는 임고면 우항리 211, 212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생가지터에는 밀양 박씨 문중의 산소가 3기가 위치하고 있으며,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생가에 대한 흔적은 나타나고 있지 않으나 추후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가지 입구 정자 생가지 입구 연지 계획대상지 일대 전경 주차장 계획대상지 스토리텔링 주제 : 포은선생의 탄생 기본구상 생가지터에는 포은 정몽주 선생의 탄생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계획 포은선생의 생가중창 및 영당 건립 동상건립을 통한 상징성 부여 포은 정몽주 선생의 한시를 전시할 수 있는 시비공원 조성 주변 정비를 통한 장소성 부각 (2) 테 마2 _ 포은 정 몽 주 유허비 테마-2. 포은 정몽주 유허비 기본구상도
(3) 테마3_임고서원 테마-3. 임고서원 기본구상도 현황 경북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462번지 위치하고 있는 임고서원(臨皐書 院)은 경상북도 기념물 제6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임고서원에서 관리 하고 있다. 임고서원은 2011년 현재 성역화 1차 정비 사업이 진행 중이다. 임고서원의 북측으로 임고성당, 임고초등학교, 임고면사무소가 위치하 고 있으며, 동측으로 69번 지방도로인 포은로가 지나가고 있다. 스토리텔링 주제 : 동방 유학의 종조 포은선생 기본구상 현재 진행중인 임고서원 정비사업과 중첩되지 않고 연계성 도출 대상지는 부모묘소, 전망대, 도일지를 가기위한 관문적인 장소 수변공간을 이용한 광장조성 관광객과 지역주민의 휴게공간 조성 야외체험장은 청소년체험 프로그램인 성년식을 치를 수 있는 공간 MTB학습장을 통한 자전거(MTB)체험 공간조성
탐방로내체육시설물 탐방로내성황당
스토리텔링 주제 : 호연지기(浩然之氣) 기본구상 전망대와 주변산지의 탐방로 활용 임고서원, 전망대, 부모묘소를 연결하는 탐방동선을 계획 전망대를 계획 및 휴게공간을 조성 및 관광객 쉼터로 활용 일부구간의 공터와 자연지형을 이용한 레저활동 구간 마련 탐방로 코스계획 및 주변 식재관리 계획 마련 (5) 테 마5 _ 도일지 현황 테마-5. 도일지 기본구상도 도일지 현황 제방 현황
임고서원 방향조망 도일지 진입 농로 임고서원에서 북서쪽으로 1.2 정도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주 변 농지에 농수로 이용하기 위해 제방을 설치하여 조성한 연못이다. 임고서원 영역의 북서쪽 골짜기를 따라 농경지가 넓게 분포하고 있으 며, 차량 및 농기계의 이동을 위한 농로가 있다. 도일지 옆으로 농로가 지나며, 수풀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다. 스토리텔링 주제 : 포은의 시문학 기본 구상 도일지주변의 정비는 포은선생의 한시를 주제로 활용 도일지 외곽 공간활용 및 주변 정비 주제(한시)가 있는 공간 마련 수변데크에서 조망을 활용한 공간 조성 식생계획 및 탐방로 계획 자연식물 관찰이 가능한 공간 조성 (6) 테 마6 _ 부모 묘 소 테마-6. 부모묘서 기본구상도
부래산 주변 가옥 부래산 주변 농경지 부래산 안내판 현황 부래산 진입부 현황 스토리텔링 주제 : 포은의 경세(經世)의 정신 기본구상 부래산 주변은 포은선생이 나라를 경영하던 경세의 정신을 바탕으로 프로그램개발과 대상지를 정비 부래산 주변 정비 및 수목 식재 관광객 및 지역주민의 쉼터 공간 마련 관광객 편의시설 및 휴게시설 마련 5) 탐 방 동선 구상 대상지별 연계동선 마련 임고서원 부래산 생가터 유허비 : 차량 및 강변 탐방로 이용 구간별 효율적인 탐방로 마련 임고서원 일대 : 탐방공간 및 녹지공간 포은 정몽주 성역화 공원 : 보행자 관람동선 단심로 내 보조동선 확보 포은 정몽주 부모묘소, 수변공원, 임고강변 등 탐방동선 유동성 확보
ㅇ 임고서원에는 조선 전 후기 임고서원의 운영 족적 및 당시 유교문화와 서 원제도 연구에 귀중한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은 인문학적 유산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특히, 현재 42종 200여 책의 전적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 중 10종 25책은 임고서원 전적(新編音點性理群書句解, 會纂宋岳愕武穆 王精忠錄, 論語諺解, 尋院錄, 考往錄, 錢穀什物凡例謄錄, 獎學稧案 附 節目, 環城寺決立案, 凡規, 書院規範) 으로 보물 제1109호 로 지정되어 있다. 그 리고 인조 7년(1629)에 화사 김육(金堉)이 이모한 정몽주 초상 3점은 보물 제1110호로 지정되어 고려 말 공신도상의 양식적 특성을 잘 보여주 는 문화재이다. 그 외 숙종대왕 어제어필 시판을 비롯해 서원 운영과 관 련된 다양한 책판과 고문서를 많이 보유하고 있다. ㅇ 이렇게 영천 임고서원의 가치와 현황을 종합하여 고려할 때, 대원군 서원 철폐령에 훼철된 후, 1965년에 복원되어 건축적 가치를 논하기 어려워 경 상북도 기념물인 현황을 유지하되, 서원 앞 은행나무가 노거수로서 위치 하는 점과 옛터에 서원이 복원되고 그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아, 추가적인 조사를 통해 지정이 재 검토될 필요가 있을 것으로 판단됨. 마. 참고사항 (1) 현지조사의견('17.03.29/문화재위원 ㅇㅇㅇ, ㅇㅇㅇ, ㅇㅇㅇ, ㅇㅇㅇ) (가) 문화재위원 ㅇㅇㅇ, ㅇㅇㅇ, ㅇㅇㅇ ㅇ 영천 임고서원은 포은 정몽주 등을 모신 서원으로서 임란때 소실된 후 현재의 구서원 위치로 1603년 축조된 것으로 알려짐. 그러나 구서원도 1965년 복원됨. ㅇ 대원군의 서원철폐 시 훼철되었다가 1879년 존영각을 짓고 포은 영정을 봉안한 바 있음. ㅇ 1990~1999년 사이에 구서원 옆에 신서원을 새로 지어 운영하고 있는 상 태임. ㅇ 상기와 같은 구서원의 복원 건축 상황(1965년 복원 및 근거부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서 문화재 지정여부에 대한 위원회의 신중한 검토가 필요함. (나) 문화재위원 ㅇㅇㅇ ㅇ 복원과정 중에 본래의 제향대상인 포은, 여현, 지봉 가운데 여현을 임의 배제하여 역사성을 훼손 ㅇ 사적 가치라면 구서원의 비중이 큰데, 실제 구서원은 제향을 하지 않는
안건번호 사적 2017-04-045 6. 부여 창렬사 사적 지정 검토 가. 제안사항 충청남도 부여군 소재 부여 창렬사 의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지정 신청 사항을 부의하오니 검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나. 제안사유 ㅇ 충청남도 부여군에 위치하고 있는 부여 창렬사 의 국가지정문화재(사적) 로의 지정 가치 등에 대해 검토하고자 함. ㅇ 테마별 사적(서원 사우) 공모 결과 접수된 36건 중 전문가 심사('15.7월)를 통해 지정조사 대상으로 선정되었음. ㅇ '17년도 사적분과 제2차 위원회('17.02.15.)에서 추후 재검토 사유로 보류 되었으며, 다시 부의함. 다. 주요내용 (1) 신 청 인 : ㅇㅇㅇ (2) 대상문화재명 : 부여 창렬사(扶餘 彰烈祠)(충청남도 기념물 제22호, '79.12.19. 지정) ㅇ 소 재 지 : 충청남도 부여군 구룡면 금사남로 78(금사리) (3) 지정신청 명칭 : 부여 창렬사(扶餘 彰烈祠) (4) 지정신청 범위 : 붙임 지정 면적조서 참조 ㅇ 신청면적 : 문화재구역 1필지 75.3, 보호구역 2필지 1,686.7 (5) 관리단체(안) : 부여군 (6) 신청사유 ㅇ 숙종 43년(1717년)에 창건되어 조선시대 삼학사(三學士)인 윤집, 오달제, 홍익한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서원 철폐 시(고종 8년)에도 충절인을 제향하는 곳이라 하여 훼철되지 않고 온존한 사우로 가치가 높으므로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 관리하고자 함.
라. 현지조사의견('16.11.11/문화재위원 ㅇㅇㅇ, ㅇㅇㅇ, 전문위원 ㅇㅇㅇ) (1) 종별 및 명칭(안) 검토 ㅇ 종별 : 사적 ㅇ 명칭(안) : 부여 창렬사(扶餘 彰烈祠)로 신청함. 검토의견 : 지정명칭 부여 기준인 지역명+문화재명에 의해, 부여 창렬사 (扶餘 彰烈祠)는 적절한 것으로 사료됨. (2) 입지현황 및 역사문화환경 ㅇ 부여군 구룡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금사리는 구룡천이 서북에서 동남으로 굽이쳐 흘러내려가고 있고 구룡면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은산면과 구룡 서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내산면 사이의 만신산에서 남쪽으로 흘러 내리는 산자락이 구룡천을 만나면서 약한 경사의 구릉을 이룸. 창렬사는 구룡면의 서쪽 끝부분 구룡천 인근에 자리잡고 있는데 동쪽으로 구룡평야, 서쪽과 남쪽으로 약한 구릉지, 북쪽으로 구룡천이 서에서 동으로 흘러가고 있음. ㅇ 창렬사는 약한 구릉을 배경으로 2개의 구역으로 나위는데 모든 건물의 배치는 동남향을 하고 있으며 하나는 사당과 강당을 담으로 둘러 하나의 구역으로 하고, 그 동측에 별도로 떨어져 수복실을 또 하나의 구역으로 함. 사당구역 배치는 경내를 크게 2단으로 정지하여 전면에 외삼문과 강당을 두는 강학공간으로 하고, 그 후면에 내삼문과 사당을 두는 향사공간으로 전학후묘식 배치임. (3) 연혁 유래 및 특징 ㅇ 창렬사는 윤집, 오달제, 홍익한 등 삼학사(三學士)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조선시대 사우로, 1717년(숙종 43년)에 창건되었으며 경종 1년 창렬사 라는 사액을 받았음. 영조35년에 중수 기록이 남아 있으며 고종8년 서원 철폐 시에도 충절인을 제향하는 곳이라 하여 온존하였음. 1988년 1990년 2000년 2006년 2007년 2010년 보수ㆍ정비 현황 사당 지붕번와, 담장보수 내삼문 지붕번와, 기단정비, 배수로 정비 관리사 신축 내삼문정비, 사당훈증, 외삼문 기단정비, 홍살문 설치 사당, 도해각 단청, 내삼문 보수 도해각 단청
(4)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가치 ㅇ 부여 창렬사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의 화의에 반대하고 결사항전을 주장하 다가 죽임을 당한 삼학사(三學士)(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절의정신을 기 리기 위해 세운 사우(祠宇)로, 1871년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많은 서원을 철폐할 때 훼철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사우 가운데 하나임. ㅇ 그러나 현재 사우와 관련된 기록물로는 게판(揭板)된 10여 개의 중수기 (重修記)가 남아 있을 뿐이고 문서로 남은 것은 거의 없으며, 전하는 것도 중요도가 떨어진데다 20세기의 것이 대다수임. (5) 지정 대상 및 범위 검토 ㅇ 사적 지정 범위는 문화재구역 1필지 75.3, 보호구역 2필지 1,686.7 임. 창 렬사 지정구역 및 보호구역
안건번호 사적 2017-04-046 7. 나주 미천서원 사적 지정 검토 가. 제안사항 전라남도 나주시 소재 나주 미천서원 의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지정 신청사항을 부의하오니 검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나. 제안사유 ㅇ 전라남도 나주시에 위치하고 있는 나주 미천서원 의 국가지정문화재 (사적)로의 지정 가치 등에 대해 검토하고자 함. ㅇ 테마별 사적(서원 사우) 공모 결과 접수된 36건 중 전문가 심사('15.7월)를 통해 지정조사 대상으로 선정되었음. ㅇ '17년도 사적분과 제2차 위원회('17.02.15.)에서 추후 재검토 사유로 보류 되었으며, 다시 부의함. 다. 주요내용 (1) 신 청 인 : ㅇㅇㅇ (2) 대상문화재명 : 나주 미천서원(羅州 眉泉書院)(전남기념물 제29호, '77.10.20. 지정) ㅇ 소 재 지 : 전라남도 나주시 미천서원길 14-11(안창동 383) (3) 지정신청 명칭 : 나주 미천서원(羅州 眉泉書院) (4) 지정신청 범위 : 붙임 지정 면적조서 참조 ㅇ 신청면적 : 문화재구역 1필지 1,370 (5) 관리단체(안) : 나주시 (6) 신청사유 ㅇ 허목과 채제공을 배향한 미천서원은 조선시대 서원의 구조와 규모를 갖추고 있고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217호로 지정된 기언(記言 목판 등의 보관처 이며, 당시 호남지역 남인세력의 상징적인 구심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으므로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 관리하고자 함.
라. 현지조사의견('16.11.16/문화재위원 ㅇㅇㅇ, ㅇㅇㅇ, 전문위원 ㅇㅇㅇ) (1) 종별 및 명칭(안) 검토 ㅇ 종별 : 사적 ㅇ 명칭(안) : 나주 미천서원(羅州 眉泉書院)으로 신청함. 검토의견 : 지정명칭 부여 기준인 지역명+문화재명에 의해, 나주 미천서원 (羅州 眉泉書院) 적절한 것으로 사료됨. (2) 입지현황 및 역사문화환경 ㅇ 미천서원은 영산포 안창동마을 안쪽 높은 곳에 남서향으로 자리하고 있으 며 뒤쪽(북동쪽)으로는 비교적 낮은 야산이 서원을 감싸고 있음. 배치는 전학후묘 형식으로 앞쪽에는 강당과 장판각이, 뒤쪽에는 영당과 구 장판 각이 배치되어 있음. 서원의 입지가 자연 구릉지이므로 외삼문부터 안쪽 사당까지 여러 단의 계단을 두었으며, 외삼문과 강당, 내삼문, 사당으로 이루는 축은 거의 일직선에 가깝게 축조되었고, 각 영역은 모두 담장을 둘러 구분하였음. 나주 (3) 연혁 유래 및 특징 미천서원 위치 ㅇ 미천서원은 17세기 巨儒인 眉叟 許穆(1595 1682)과 미천서원 13대 원장 을 지낸 樊岩 蔡濟恭(1720 1799)를 배향. ㅇ 1690년(숙종 16) 호남유림 650명의 연명상소에 의해 건립, 그 3년 후인 1693년(숙종 19) 사액되었음. ㅇ 1705년(숙종 31) 초대 원장 沈檀이 원중절목 18조목을 정립하고, 1711년 (숙종 37) 원이 洪重夏가 1차 중수, 1715년 별유사 이양승을 주축으로 하
여 강당과 재실을 중수. ㅇ 1724년(경종 4) 갑오 이후에 창건된 사우는 훼철하라는 칙명으로 그 이전 에 창건되었음에도 불구, 서인계 인사의 계책으로 인해 1차 훼철된 후 복 설되었음. ㅇ 1771년(영조 47)에는 원이(院貳) 채홍원이 사우를 중수하였고, 1778년에는 원장 채제공이 양사재를 중수. ㅇ 고종 대 서원철폐령에 의해 2차 훼철되었다가, 1893년(고종 30) 현 위치 (옛 자리)에 복설되고 강당이 중건되어 오늘에 이름. ㅇ 미천서원 장판각에 보관된 미수 기언 책판 861매와 완산이씨세고 34판, 1940년에 간행된 미천서원실기 등은 보존상태가 매우 좋음. 미천서원 연혁 연 대 내 용 비 고 1690년(숙종 16) 호남 유림 650명의 연명상소로 사우 건립, 미수 허목 배향 錦江 眉泉 위에 건립 1692년(숙종 18) 허목에게 文正 시호 하사 1693년(숙종 19) 眉泉書院 사액 1705년(숙종 31) 초대원장 沈檀이 원중절목 18조목 정립 1711년(숙종 37) 院貳 洪重夏 1차 중수 1715년(숙종 41) 별유사 이양승 주축으로 강당과 재실 중수 1724년(경종 4) 1차 훼철 1767년(영조 43) 원이 洪名漢 미천서원 재건 1771년(영조 47) 원이 蔡弘遠 사우 중수 1778년(정조 2) 蔡濟恭(1720~1799) 양사재 중수 채제공(13대 원장) 1794년(정조 18) 왕명에 의해 미수 眞像 3매 완성 1799년(정조 23) 문숙공 蔡濟恭 추배 추배 1804년(순조 4) 미수 영정 봉안 미수 허목 영정 봉안 2차 훼철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으로 영당마을로 이설 훼철 후 삼영동 영당마을로 영당과 장판각 이설 1893년(고종 30) 현 위치(옛 자리)에 영당 복설, 강당 중건 원래의 위치 복설 1930년 曺基重에 의해 강당 일부 중수, 모현계 결성 1937년 후손 許永奎가 추진하여 대대적으로 서원 중수 1977년 전라남도 기념물 제 29호로 지정 1977년 10월 20일 1985년 남산공원 내 건물을 옮겨와 복원 후 장판각으로 사용 1998년 장판각 1동 증설 1999년 미천서원 記言 木板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17호로 지정 1999년 7월 5일
1984년 12월 1985년 1986년 1989년 1990년 1992년 2000년 보수ㆍ정비 및 현상변경 이 미천서원 강당 보수 장판각 이축 협문, 담장, 우물 보수(태풍 피해) 장판각 신축, 동서재 보수 등 력 (4)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가치 ㅇ 미천서원은 1690년(숙종 16) 許穆을 배향하기 위해 호남유림의 연명상소 로 건립된 후, 1693(숙종 19)년 사액되었으며, 1799년(정조 23)에는 13대 미천서원 원장을 지낸 번암 채제공을 추배하였음. 창건 후 경종4년(1724) 에 갑오 이후(1714)에 창건한 사우를 훼철하라는 칙령을 빌미로 1차 훼철 되었다가 이후 복설되었고, 다시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으로 2차 훼 철을 당하였음. 서원이 훼철되자 영당과 장판각은 허목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는 나주시 삼영동 선산 아래 영당마을로 옮겨졌다가 1893년에 다 시 옛 터인 지금의 자리에 복설되었으며 이 때에 강당도 함께 중건됨. ㅇ 미천서원은 강당, 구장판각 2동, 신장판각 2동, 강당, 내삼문, 외삼문, 관리 사로 이루어져, 조선시대 서원의 전형적인 구조와 규모를 갖추고 있어 조 선시대 서원연구에 중요한 자료임. 특히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17호로 지정된 記言 木板 등이 보관되어 있는 장판각이 제향공간 내에 위치한 점은 서원건축에 있어 매우 드문 사례라고 할 수 있음. ㅇ 미천서원은 두차례 훼철을 당하는 과정에서 영정과 목판이 잠시 다른 곳 으로 옮겨지기도 하지만, 1893년에 원래의 자리에 복설되어 공간의 역사 성을 가지며, 건축적으로는 경사지를 이용하여 제향공간과 강학공간, 관리 공간을 갖춘 서원으로서 조선시대 서원의 구조와 격식을 갖추고 있음. ㅇ 또한 미천서원 장판각에는 記言 책판 861매 외에도 완산이씨세고 34판, 1940년에 간행된 미천서원실기 등이 보관되어 있고, 이 중 記 言 木板은 眉叟 許穆의 시문집으로 숙종 15년(1689)에 판각한 것임. 전체 93권 25책으로 예학에 밝았던 허목의 행적을 알 수 있으며, 오래된 연대 의 것이나 보존상태가 매우 좋고 누락된 부분이 없어 역사적 문헌적 가 치가 큼. (5) 지정 대상 및 범위 검토 ㅇ 사적 지정 신청은 문화재구역 1필지(1,370 )를 신청함.
화유산과 자연자원에 대한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사업이 필요하다. 주제별 연구의 결과가 발표되어 홍보와 교육을 동시에 할 수 있도록 한다. 매년 1회로 개최하되 주제와 관련연구자 동원은 심화(테마별) 연구와 학술총서 발간 계획과 함께 검토한다. ㅇ 교육 홍보자료 개발 - 미천서원을 비롯한 서원, 사우, 원림, 정자, 문화유산의 대중적 이해를 위 해서 개설서 편찬이 필요하다. 누구든 쉽게 나주의 문화유산을 접할 수 있는 계기는 학술대회나 전문연구와 별도로 대중적인개설서(청소년용 교 양서)이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 아울러 서원문화 유산의 해설 책자도 발간되어야 한다. 유적을 탐방하거 나 체험학습으로 하는 학생들, 그리고 일반 관광객을 겨냥한 다양한 홍보 기록물과 교육 자료의 체계적 개발이 계획되어야 한다. ㅇ 종합적 자료관리 체계 구축 - 조사 정리된 자료, 계승된 문화유산의 보존관리, 새로운 연구와 교육 자료 의 개발, 문화교육 프로그램의 홍보, 학생 및 교사의 질의와 응답, 연구 자료의 제공 등등이 상시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체계적, 종합적 자료관리 체계 구축이 필요하다. 온라인 상태에서 서원문화의 내용과 의미가 일반 인에게 제공되려면 이러한 종합적인 관리 체계가 도입되어야 한다. 이들 을 포괄적으로 관리 활용하는 자료관도 필요하다. (8) 종합 의견 ㅇ 미천서원은 17세기 문신(文臣)이며 거유(巨儒)였던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690년에 창건하였으며, 1693년 사액되었다. 1724년(경종 4)에는 1714년 이후 건립된 서원들을 대 상으로 한 철폐령에 의하여 그 이전에 세워진 서원임에도 불구하고 1차 훼철을 당하고, 1771년 홍명한이 사우를 중수하였으므로, 1771년 이전에 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799년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 을 추배하였고 1868년 서원훼철령으로 2차 훼철되었다가 1893년 옛자리에 영당과 강당을 복설하였다. ㅇ 현재 건물로는 영당, 舊 동 서장판각, 新 동 서장판각, 강당, 내 외삼문 이 있으며 1977년 전라남도 기념물 제 29호로 지정되었다. 그 후 1868년 서원훼철령으로 2차 훼철을 당하게 된다. 서원이 훼철되자 후손들이 살고 있는 나주시 삼영동 선산 아래의 영당마을로 영정과 장판 각을 옮겼으며, 영정과 장판각에 보관 중이던 記言 板刻도 영당 옆에
초가 3칸을 지어 보관하였다. 이후 1893년 다시 미천서원의 옛 자리인 나 주 안창동에 영당이 복설되어, 영정을 移安하고, 강당도 함께 복설하였다. 眉泉講堂重建記 에 의하면 강당은 1930년에 중건되었으며, 상량문이 종도리 장혀 하부에 묵서로 남아있다 孔夫子庚戌後二千四百八十一年庚午 二月二十一日(己巳)定礎二十六日(甲戌)立柱三月初七日(乙酉)辛巳時上樑. ㅇ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17호로 지정된 <기언(記言)> 목판 등이 보관되 어 있는 장판각이 제향공간 내에 위치한 점은 서원건축에 있어 매우 드문 사례이다. 장판각에는 기언 책판 861매 외에도 1940년에 간행된 미 천서원실기 등이 보관되어 있다. 이 가운데 기언 목판은 미수 허목의 시문집으로 숙종 15년(1689)에 판각한 것이다. 전체 93권 25책으로 예학에 밝았던 허목의 행적을 알 수 있으며, 오래된 연대의 것이나 보존상태가 매우 좋고 누락된 부분이 없어 역사적 문헌적 가치가 크다. ㅇ 그러나 미천서원이 1893년 옛 자리에 복설될 당시, 예전의 배치나 규모 등은 알 수 없으며, 현 강당도 1930년에 세워진 것으로, 원래의 규모 형식 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또한 서원 내에 새로운 장판각이 들어섰으며, 구 장판각은 보수에 의해 원래의 형태와는 다르게 되어 있다. ㅇ 따라서 이러한 현황을 종합하여 볼 때, 본래 미천서원의 특징과 가치를 파악할 수 있을 때까지 전라남도 기념물 제 29호를 유지하는 것이 적절한 것으로 판단됨. 마. 참고사항 (1) 사적(신청지) 지정 면적 조서 ㅇ 문화재구역 문화재 지정대상 및 범위 설정(안) 문화재가 토지인 경우(문화재지정구역) ㅇ 문화재지정구역 소유자 연번 소재지 지번 지목 면적( ) 지정면적 ( ) 성명 주소 계 1필지 1,370 나주시 1 안창동 383 대지 1,370 1,370 383 (면적: ) 관리자 성명 주소
라. 현지조사의견('16.11.16/문화재위원 ㅇㅇㅇ, ㅇㅇㅇ, 전문위원 ㅇㅇㅇ) (1) 종별 및 명칭(안) 검토 ㅇ 종별 : 사적 ㅇ 명칭(안) : 순천 정충사(順天 旌忠祠)로 신청함. 검토의견 : 지정명칭 부여 기준인 지역명+문화재명에 의해, 순천 정충사 (順天 旌忠祠) 적절한 것으로 사료됨. (2) 입지현황 및 역사문화환경 ㅇ 정충사는 순천시 전전동 뒷산의 하단 경사지에 동향(東向)으로 자리하고 있다. 사우 전면으로는 주택가로 형성되어 있고 우측으로는 바로 담장을 사이에 두고 1974년에 건립된 본 사우와 비슷한 규모의 태사묘(太師廟) (張氏 시조 張貞弼 위패 봉안)가 위치하고 있다. 우측 담장 아래쪽으로는 태사묘와 연결되는 협문이 있다. ㅇ 사우의 전체 배치모습은 외삼문 전면과 강학구성과는 약 3.8m의 지반차 를 두고 사우를 꾸민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형태로 되어 있다. 강당 후면에서 제향구성으로 오르는 사이는 몹시 경사가 급해 16단의 돌 계단 으로 처리하였으며 외삼문 전면도 막돌 바른층 쌓기의 축대를 두고 7단의 계단을 두었다. ㅇ 각 건물의 중심축(中心軸)은 일직선(一直線)에 놓여 있는 듯 하나 일치하 지 않고 약간씩 틀어져 있다. 본 사우는 전체적으로 규모는 작으나 관리 상태 등은 비교적 양호하다. (3) 연혁 유래 및 특징 ㅇ 장윤(1552~1593)은 1582년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있던 중 부친의 병환 으로 낙향했다가 사천현감으로 복직하였다. 그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 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전라좌의병 부장(副將)으로 활동하였다. 1593년 6 월, 일본군이 다시 진주성을 공격하자 이를 사수하기 위해 진주성으로 출 동하였다. 당시 일본군의 기세에 눌려 진주목사 이하 장수들이 도주하자, 비분강개한 장윤은 충청병사 황진(黃進),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 창의 사 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10배 이상 많은 일본군과 힘을 다해 싸우다 순절하였다. ㅇ 순천 정충사는 임진왜란 의병장 장윤(張潤, 1552~1593)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683년(숙종 9) 순천유림에 의해 창건되었다. 그 뒤 1686년(숙종 12) 전라도 유림의 청액상소에 따라 사액을 받은 사액사우이다. 1812년(순조 12)에 중건된 후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36년
복설되어 전라남도 기념물 제 232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정충사는 처 음 세워진 그 자리(순천시 저전동 276번지)에서 333년의 연륜을 지켜온 역사유적이다. 순천 정충사 주요연혁 이건, 사액, 훼철, 복설, 연대 내용(창건, 관련인물 추숭, 문집 발간 등) 1682 창건 순천지역 유림 및 향유 1686 액호를 받음 정충이라는 액호를 받음 1810 중건 승평속지와 충민공사실등에 기록 1868 훼철 서원철폐령 1907 복설 장현석 등 후손이 옛자리에 복설 1946 중수 후손들에 의해 중수 2005 도기념물지정 2005.7.13 전라남도 기념물 제232호 지정 장윤의 의병활동과 2013 장윤의 의병활동과 정충사 책자발간 승평지방사연구원에서 관련된 책자 발간 명칭 창건 중수 규모(m²) 변 천 개 략 (기 록) 사당 1907 1972 30.1 1972년 단청, 2013년 보수 강당 1907 1946 42.9 정면 4칸반, 측면 1칸의 팔작집 외삼문 1987 17.7 1987년 건립, 정면 3칸 (4)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가치 충렬서원이자 사액서원 - 1649년(인조 27) 순천부 쌍암면 서정西亭에 장윤의 충신정려가 세워졌다. 이후 1683년 인제산 밑에 마침내 정충사 貞忠祠란 이름의 사우로 완성되 었다. 중요한 것은 재지유림들의 뜻과 그들의 노력에 의해서 장윤의 사우 가 건립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공기관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 니라 모두 지방민의 의지에 의해서 이룩되었다는 것이다. 1686년(숙종 12) 5월 11일에 숙종은 예조좌랑都處亨을 파견하여 旌忠 이 란 사액을 내리고 致祭하였다. 그리고 1871년 사액서원 철훼할 때에는 훼철되고 말았던 것이다. ㅇ 진주성 전 투 의 명장, 장 윤 - 정충사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장윤을 배향하고 있다. 장윤(張潤, 1552 1593)의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학봉(鶴峯), 본관은 목천(木川)이다. 1552년 (명종7) 순천부 쌍암면 학구정(현재의 승주읍 봉덕리 학구촌)에서 선전관 장응익(張應翼)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ㅇ 가장 전형적인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순천에서 군사 3백여명을 모아 의병을 일으킨 다음 읍성을 지키면서 혼란에 빠진 민심을 수습하였다. 임진년 8월 장윤은 의병장 임계영과 함께 휘하의 장졸들을 거느리고 순천 으로부터 구례를 거쳐 남원에 주둔한 뒤, 당시 담양 순창을 거쳐 역시 남원까지 진군해온 전라우의병과 합세하여 본격적인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 경상도에 진군하여 영남의병장 정인홍 김면의 군사들과 연합전선 을 구축, 오랫동안 왜적의 소굴이 되어 있었던 성주성을 수복하였다. 뿐만 아니라 1593년 2월에는 단독으로 군사를 인솔하여 개령의 毛利輝元군(軍) 본부를 공격, 2백여명의 적병을 참살하고 조선인 포로 4백여명을 구출해 냈다. 이로 인해 막대한 타격을 입은 毛利輝元 휘하의 왜군은 개령에서 마침내 철수하게 되었고, 장윤은 선산까지 적병을 추격함으로써 호남의병 의 기세를 더욱 크게 떨쳤다. 그 뒤 1593년 6월, 관군은 물론 곽재우가 이끄는 영남의병까지 모두 피해 달아나버린 진주성에 들어가 김천일 최경희 황진 등과 함께 최후까지 제2차 진주성전투를 주도하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ㅇ 사액서원 운 영, 서원의 건립, 훼 철, 복 설 등과 관련 된 일련의 자료가 남아있는 정충사 - 정충사에는 서원 건립 이전 장윤의 포양과 관련된 기록, 순천 지역 유림 의 공론 결집을 통한 서원 건립 및 사액 과정, 사액 이후 장윤에 대한 증 직, 증시, 부조지전 등의 특은이 내려지게 된 전말, 그리고 서원 훼철 이 후 복설과 운영에 대한 자료가 풍부하게 남아있다. 아울러 이와 관련된 내용이 각종 연대기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1593년 8월 장윤을 형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증직하는 교지, 1596년 6 월 장남 장홍도에게 내려진 교첩이 남아있다. 또 순천시 승주읍 서평리에 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장윤의 충렬을 기리는 정려가 보존, 관리 되고 있다. 아울러 1718년(숙종 44) 장윤을 다시 병조판서에 추증하는 교 지, 1751년(영조 37) 장윤에서 忠毅 라는 시호를 내리는 교지, 1859년 숭 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하는 교지 등이 남아있다. 다음으로는 서원의 유지, 운영과 관련된 자료도 다수 남아있다. 정충사집 강안 과 같은 자료는 서원의 운영을 담당했던 임원들의 명단이 들어있다. 그리고 지역 유림등이 연명하여 관찰사에게 정충사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 는 상서도 남아있다. 현재 목천장씨 충의공파 종가에는 이때의 상서가 남 아있다.
그리고 복설 이후 1936년부터 정충사의 운영과 관련된 자료들도 풍부하게 남아있다. 이를 통해 건립에서 복설에 이르는 일련의 자료들이 남아있어, 서원에 대한 구체적 연구를 가능하게 하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ㅇ 정충사는 순천시 저전동 뒷산의 하단 경사지에 동향(東向)으로 자리하고 있다. 사우 우측으로는 바로 담장을 사이에 두고 1974년에 건립된 본 사 우와 비슷한 규모의 태사묘(太師廟)(張氏 시조 張貞弼 위패 봉안)가 위치 하고 있다. 정충사 권역내에는 사당(祠堂), 강당, 외삼문(경의문, 景義門), 관리사가 건 물이 자리하고 있다. 정충사의 사우의 전체 배치모습은 전학후묘(前學後 廟)의 배치형태로 되어 있다. 각 건물의 중심축(中心軸)은 일직선(一直線) 에 놓여 있는 듯 하나 일치하지 않고 약간씩 틀어져 있다. 본 사우는 전 체적으로 규모는 작으나 관리상태 등은 비교적 양호하다. (5) 지정 대상 및 범위 검토 ㅇ 사적 지정 신청은 문화재구역 4필지 2,899 를 신청함.
(7) 보존 정비 및 활용 착안사항 가. 정비 및 활용의 기본원 1) 정 칙 충사 활용의 방향 및 계획수립 프로그램 호국 교육의 장 도심권 문화유적 답사지 전통문화 체험 및 전승의 장 기존 공간활용 국난극복 호국 교육관 건립 내 용 - 장윤의 인물연구, 교육 프로그램으로 특화 -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의 시대적 사건의 교육 - 장윤의 생애와 사상 스토리텔링 : 장윤의 결백론, 의병활동, 우국충절 등 재조명 - 순천지역의 왜란당시 국난극복의 노력 스토리텔링 - 장윤 관련 유적 탐방 - 저술, 생애, 일화 등 - 정충사의 記文, 詩文자료의 조사와 번역 정충사의 상시 개방 및 일반 답사 - 정충사 및 장윤 관련 답사 코스개발 - 순천지역 왜란극복 관련 답사 코스 개발 - 순천지역 유교문화 관련 답사코스 개발 - 정충사 제향의례 등 유교의례 공개 및 동참 유도 - 전통제례 전통과 현대의 만남, 제례의 의미 해설 - 의례교육 : 예절교육, 전통재례, 전통관례 - 새로운 의례의 발굴개발 및 보급 : 재례, 관례 - 정충사 교육 및 학문 활동과 관련한 프로그램 - 교육청과 연계하여 주변 학교들과 문화재 지킴이 활동 학교 교육과 연계, 문화교육 행사장으로 적극 활용 - 기존 문화 유적최대 활용, 주제별 답사와 체험 - 고전 강독, 한문, 족보특강, 정신 학술 교육 등 - 대학, 연구소, 학술 행사유치 교육청과 연계 - 일반인 및 학생들을 대상으로한 교육활동 - 장윤의 생애와 사상, 지역 왜란사, 의병사 등 연구활동 - 소장 유물의 보존관리 및 전시 - 자료 종합 정리(교양서 안내서발간) - 학술세미나 비 고 ㅇ 정충사문화의 본질, 종합성 활용 - 고품격 선택된 철학적의 미와 경관요소를 최대한 특화 - 소규모를 지향하되 도제식 전문 인력의 도움으로 운영되는 교육 및 체 험 프로그램 개발 - 효과적인 교육자료의 제작 등 수요층과 주제별 보조아이디어 개발 - 정충사의 기문, 시문자료의 조사와 해석을 통한 다중매체를 이용한 활 용방안 강구 ㅇ 다양한 콘텐츠의 확보와 개발 - 정충사과 연관된 건축물외 유 무형의 모든 자원에 대한 총괄 조사 - 정충사의 특정, 개성적인 문화소재를 활용한 프로그램의 개발
- 지역의 지성사적 전통, 학문, 강학 유서를 반영한 프로그램 개발 ㅇ 역동적, 체험적 프로그램의 접목 - 실제적인 체험형 프로그램 - 연령, 성별, 수요자의 성격 등을 고려한 맞춤형 프로그램 - 조선사회를 이끌은 지성인들의 삶과 생활문화권 자원으로 재생 활용 ㅇ 경쟁력 있는 문화체험공간의 활용 - 과거식 교육방식 - 정충사 품위에 맞는 활용법 ㅇ 정충사 활용 프로그램의 개발유형 2) 정 충 사 활용을 위한 시설물의 설치 및 사용 ㅇ 정충사 활용위한 시설물 설치시 고려사항 - 정충사 내 별도로 지정된 단위 문화재는 원형보존을 원칙으로한다. - 건축물의 높이와 규모는 과도하게 초과해서는 아니된다. - 건축물의 전체적인 형태는 정충사의 경관에 어울리도록 하여야 한다. - 외부로 노출되는 기단부와 초석은 반드시 석재를 사용하되 건축물의 기 능과 용도, 규모에 맞게 하여야 한다. - 건물 외부로 현대재료가 노출되지 않도록 한다. - 이미 원형을 훼손한 건물은 원형으로 복원한다. - 구조골 변경하는 경우에는 문화재청장과 협의하여야 한다. - 인위적으로 변형된 자연경관은 가능한 원형을 회복한다. 3) 정 충 사 건축물을 사용 및 활용시 고려사항 ㅇ 사당, 재실, 전사청의 활용 : 제향 인물에 대한 향사 ㅇ 강당, 재실의 활용 : 정충사측과 집단학습을 목적으로한 예절교육 등 분 석 활 용 관 리 조 사 문화재 활용 순환구조 보 존 정 충 사의 문화재 활용 개 념 발 굴 연 구 복 원 충사 활용방안 1) 호국 교육 의 장 으 로서의 활용 ㅇ 왜란 및 의병장 장윤 항왜 의병활동 교육 - 정충사 배향인물인 장윤과 그 시대적 배경인 임진왜란을 소개하고 일반 나. 정
인들에게 널리 일릴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서 활용 - 왜란 당시의 장윤과 의병들의 혁혁한 전과를 정리하고 소개 - 임전불퇴의 정신으로 목숨을 걸고 진주성 수성을 포기하지 않았던 우국 충절의 정신을 강조하여 교육함 ㅇ 스토리텔링을 통한 문화재에 대한 이해와 애국심 함양 - 장윤의 일대기를 정리하여 생애 중요 포인트를 스토리텔링하여 일반인 들에게 쉽고 감동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함. - 장윤이 주장한 결백론(潔白論)을 현대적 가치로 재조명하고 이를 청렴 한 관료의 표상으로 삼고 공무원 기본교육 답사과정에 포함 - 지역의 왜란 및 국난극복 노력을 담은 스토리텔링 프로그램 개발 ㅇ 각종 교육을 위한 교육관 건립 운영 - 장윤의 웅국충절을 교육할 수 잇는 교육공간 조성 - 왜란과 국난국복의 활동을 소개하고 교육 - 정충사 소장 장윤 관련 유물 등을 전시하여 소개 - 정충사의 유래와 역사를 소개 - 사액사우로서 정충사 건립을 위한 지역 유림들의 노력과 과정 등을 소개 - 정충사 소장 유물을 통한 조선시대 정충사 건립 및 운영관리 소개 2) 도심권 문화 유적 답 사지로서의 활용 ㅇ 순천부 읍성 중심의 야행 및 순천 도심권 문화유적 답사를 확대 ㅇ 2016년 8월 성공적으로 개최되었던 2016 순천달빛야행 행사를 구 도심 권으로 확대하여 다양한 문화유적을 일반에게 소개하고 체험할 수 있도 록 함. ㅇ 현재 도심권 유적답사를 통한 순천의 역사문화 탐방 코스가 기존의 순 천부 읍성 중심으로 구성되어있는 것을 좀 더 확대하고 주제별, 권역별 로 재편 ㅇ 정충사의 사적 지정을 통한 문화재적 가치 고양하고 역사 도시 순천의 이미지를 재고함 ㅇ 순천 CITY TOUR 에 필수 답사코스로 편성, 또는 주제별 코스 개발 ㅇ 왜란 관련 유적지들을 연계한 답사코스 발굴 및 홍보 - 충무사, 왜성, 검단산성, 이순신 백의종군길 등 관내 왜란 관련 유적지 와 연계하여 왜란 승전지 순천, 국난극복 및 호국의 도시 순천으로서의 위상을 재고함 - 순천 남도삼백리 코스에 (가칭)국난극복의 길 을 추가 구성
ㅇ 순천 향교와 옥천서원 등 다수의 유교문화 유산을 연계한 답사 코스 발 굴 및 홍보 - 순천 관내 소재하는 2개의 향교와 9개의 서원과 연계하여 조선시대 유 교문화를 접할 수 있는 주제 답사 코스 구성 ㅇ 독특한 사역 구성에 대한 건축사적 가치를 재조명 - 전형적인 조선 중기 정충사의 서원 및 사당으로서의 전학후묘형의 기본 구성에 대한 답사 - 1900년대 초 복설되면서 시대차를 확인할 수 있는 건축답사지 - 정충사와 더불어 동측으로 바란히 배치된 태사묘의 건립 배경 및 의의를 홍보함으로서 호국정신을 되짚어 볼수 있는 유적지로서의 가치 재조명 ㅇ 안내판 정비 및 홍보물 제작 배포 - 경내 안내판을 정비하여 정충사의 문화재적 가치 홍보 - 문화재 안내판 이외에 인물 및 사건에 대한 안내를 함께할 수 있는 종 합안내판 설치로 정충사와 장윤의 문화재적 가치와 함께 역사적 의의를 함양함. ㅇ 정충사 관련 유적지 연계 답사 코스 발굴 홍보 - 순천시 승주읍 사휴정, 장윤 정려, 신도비, 장윤 묘소 등 3) 전통문화 체 험 및 전 승 장 으 로서의 활용 ㅇ 지역사회의 중요 문화유산으로서 지역과 소통하는 프로그램 운영 ㅇ 문화유산이 지역사회 일원으로서의 역할 수행 ㅇ 문화유산과 지역민과의 친밀도를 높이고 이를 통한 애향심, 문화재에 대한 관심 고취 ㅇ 어린이 및 청소년 예절교육 - 토요일 관내 주변 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예절교실을 운영, 정충사의 강학기능 복원 - 하절기 및 동절기 예절학교 운영 ㅇ 청소년 전통관례 행사 실시 - 지역의 향교 등과 연계하여 매년 성인의 날에 전통의식으로 추진 ㅇ 전통재례 홍보 및 교육 - 정기 배향일 행사를 개방하고 일반인들의 참관이 가능하도록 하여 전통 제례 - 매년 추석 전 15일경 전통 재례 및 현대화된 가정의례를 보급하는 대민 홍보 교육 실시
ㅇ 문화유산 보존 체험의 현장으로서의 활용 - 교육청과 연계 인근의 학교들과 MOU체결을 통한 적극적인 문화재 지 킴이 활동 전개 - 문화재 지킴이 활동을 통한 지역의 역사와 인물, 문화유산에 대한 청소 년들의 관심 고취 다. 시설정비계획 난극복 호국 교육관 건립 ㅇ 정충사 전면 주차장 맞은편에 상시 교육이 가능한 교육관 건립 ㅇ 장윤 생애와 사상 교육을 위한 컨텐츠 개발 ㅇ 지하 1층, 지상 1층 규모 ㅇ 운영사무실, 강당, 세미나실, 영상실, 전시실, 수장고, 기계실 ㅇ 교육관 일부에 소규모 전시시설을 설치하여 정충사 소장 유물을 전시하 여 교육효과 극대화 ㅇ 경내 소장중인 유물의 안전한 보관을 위한 소규무 소장시설 설치 ㅇ 보안시설 설치 ㅇ 패스브 기술과 액티브 기술을 접목한 Zero-House 수준의 에너지 자립 시설을 지향하여 추진 1) 국 층 지상 1층 지하 1층 2) 안내판 정비 구 분 강당 세미나실 준비실 운영사무실 전시실 화장실 소계 수장고 기계실 창고 계단실 Dry area 소계 계 면 적 99 (30坪) 33 (10坪) 16.5 (5坪) 33 (10坪) 49.5 (15坪) 33 (10坪) 264 (80坪) 49.5 (15坪) 33 (10坪) 66 (20坪) 16.5 (5坪) 66 (20坪) 231 (70坪) 990 ㅇ 기존 안내판 철거 및 문화재청 공용 디자인 적용 비 고
ㅇ 가독성 높은 안내판으로 정보전달기능 강화 ㅇ 韓美中日 4개국어로 작성하여 외국 탐방객에게도 정보 전달 ㅇ 문화재 QR-code 내용 보강 및 4개 국어 작성 ㅇ 건물별 안내판 제작 및 배치 3) 기존 시설의 보존 및 정비 ㅇ 지속적인 문화재 보수 사업을 통한 문화 유적의 관리 라. 사회적 일자리 창출 1) 문화유산을 활용한 사회적 일자리 창출 ㅇ 관리 및 교육 인력의 운영 - 각종 교육 및 체험, 답사 프로그램 운영을 통한 교육사의 수요 창출 - 지역의 관련 문화재 단체와 연계하여 운영프로그램 개발 및 진행으로 교육사의 역할 확대 - 교육 및 체험 프로그램 운영에 따른 문화유산해설사, 자원봉사자의 배 치 운영 ㅇ 연구 및 출간사업등을 통한 지역의 관련 학계 연구원들의 연구활동 후원 2) 정비사업 등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로 간접 적인 일자리 창출 ㅇ 정충사의 보존 관리계획에 따른 지속적인 정비사업을 통한 지역 근로자 들의 일자리 창출 (8) 종합 의견 충렬서원이자 사액서원 - 1649년(인조 27) 순천부 쌍암면 서정西亭에 장윤의 충신정려가 세워졌다. 이후 1683년 인제산 밑에 마침내 정충사 貞忠祠란 이름의 사우로 완성되 었다. 중요한 것은 재지유림들의 뜻과 그들의 노력에 의해서 장윤의 사우 가 건립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공기관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 니라 모두 지방민의 의지에 의해서 이룩되었다는 것이다. 1686년(숙종 12) 5월 11일에 숙종은 예조좌랑都處亨을 파견하여 旌忠 이 란 사액을 내리고 致祭하였다. 그리고 1871년 사액서원 철훼할 때에는 훼철되고 말았던 것이다. ㅇ 진주성 전 투 의 명장, 장 윤 - 정충사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장윤을 배향하고 있다. 장윤(張潤, 1552 1593)의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학봉(鶴峯), 본관은 목천(木川)이다. 1552년 (명종7) 순천부 쌍암면 학구정(현재의 승주읍 봉덕리 학구촌)에서 선전관 장응익(張應翼)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ㅇ 가장 전형적인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순천에서 군사 3백여명을 모아 의병을 일으킨 다음 읍성을 지키면서 혼란에 빠진 민심을 수습하였다. 임진년 8월 장윤은 의병장 임계영과 함께 휘하의 장졸들을 거느리고 순천 으로부터 구례를 거쳐 남원에 주둔한 뒤, 당시 담양 순창을 거쳐 역시 남원까지 진군해온 전라우의병과 합세하여 본격적인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 경상도에 진군하여 영남의병장 정인홍 김면의 군사들과 연합전선 을 구축, 오랫동안 왜적의 소굴이 되어 있었던 성주성을 수복하였다. 뿐만 아니라 1593년 2월에는 단독으로 군사를 인솔하여 개령의 毛利輝元군(軍) 본부를 공격, 2백여명의 적병을 참살하고 조선인 포로 4백여명을 구출해 냈다. 이로 인해 막대한 타격을 입은 毛利輝元 휘하의 왜군은 개령에서 마침내 철수하게 되었고, 장윤은 선산까지 적병을 추격함으로써 호남의병 의 기세를 더욱 크게 떨쳤다. 그 뒤 1593년 6월, 관군은 물론 곽재우가 이끄는 영남의병까지 모두 피해 달아나버린 진주성에 들어가 김천일 최경희 황진 등과 함께 최후까지 제2차 진주성전투를 주도하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ㅇ 사액서원 운 영, 서원의 건립, 훼 철, 복 설 등과 관련 된 일련의 자료가 남아있는 정충사 - 정충사에는 서원 건립 이전 장윤의 포양과 관련된 기록, 순천 지역 유림 의 공론 결집을 통한 서원 건립 및 사액 과정, 사액 이후 장윤에 대한 증 직, 증시, 부조지전 등의 특은이 내려지게 된 전말, 그리고 서원 훼철 이 후 복설과 운영에 대한 자료가 풍부하게 남아있다. 아울러 이와 관련된 내용이 각종 연대기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1593년 8월 장윤을 형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증직하는 교지, 1596년 6 월 장남 장홍도에게 내려진 교첩이 남아있다. 또 순천시 승주읍 서평리에 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장윤의 충렬을 기리는 정려가 보존, 관리 되고 있다. 아울러 1718년(숙종 44) 장윤을 다시 병조판서에 추증하는 교 지, 1751년(영조 37) 장윤에서 忠毅 라는 시호를 내리는 교지, 1859년 숭 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하는 교지 등이 남아있다. 다음으로는 서원의 유지, 운영과 관련된 자료도 다수 남아있다. 정충사집 강안 과 같은 자료는 서원의 운영을 담당했던 임원들의 명단이 들어있다. 그리고 지역 유림등이 연명하여 관찰사에게 정충사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 는 상서도 남아있다. 현재 목천장씨 충의공파 종가에는 이때의 상서가 남 아있다.
그리고 복설 이후 1936년부터 정충사의 운영과 관련된 자료들도 풍부하게 남아있다. 이를 통해 건립에서 복설에 이르는 일련의 자료들이 남아있어, 서원에 대한 구체적 연구를 가능하게 하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ㅇ 정충사는 순천시 저전동 뒷산의 하단 경사지에 동향(東向)으로 자리하고 있다. 사우 우측으로는 바로 담장을 사이에 두고 1974년에 건립된 본 사 우와 비슷한 규모의 태사묘(太師廟)(張氏 시조 張貞弼 위패 봉안)가 위치 하고 있다. 정충사 권역내에는 사당(祠堂), 강당, 외삼문(경의문, 景義門), 관리사가 건 물이 자리하고 있다. 정충사의 사우의 전체 배치모습은 전학후묘(前學後 廟)의 배치형태로 되어 있다. 각 건물의 중심축(中心軸)은 일직선(一直線) 에 놓여 있는 듯 하나 일치하지 않고 약간씩 틀어져 있다. 본 사우는 전 체적으로 규모는 작으나 관리상태 등은 비교적 양호하다. ㅇ 이렇게 순천 정충사의 가치와 현황을 종합하여 고려할 때, 대원군 서원 철폐령에 훼철된 후, 1936년 복설되어 그 서원의 전형적인 배치나 건축적 가치를 논하기 어렵다. 따라서 국가 사적으로 지정하기보다 도기념물로서 현황을 유지하는 것이 적절한 것으로 판단됨. 마. 참고사항 (1) 사적(신청지) 지정 면적 조서 ㅇ 문화재구역 문화재 지정대상 및 범위 설정(안) 문화재가 토지인 경우(문화재지정구역) ㅇ 문화재지정구역 연 소재지 지번 지 번 목 1 순천시 저전동 276 대 2 순천시 저전동 277-1 대 3 순천시 저전동 278 대 4 순천시 저전동 278-1 대 계 (면적: ) 관리자 점유자 설정근거 면적 지정면 소유자 ( ) 적( ) 성명 주소 성명 주소 성명 주소 및 사유 정충사 1,471 1,471 권역 정충사 866 866 권역 정충사 410 410 권역 정충사 152 152 권역 2,899 2,899
안건번호 사적 2017-04-048 9. 광주 포충사 사적 지정 검토 가. 제안사항 광주광역시 소재 광주 포충사 의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지정 신청사항을 부의하오니 검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나. 제안사유 ㅇ 광주광역시에 위치하고 있는 광주 포충사 의 국가지정문화재(사적)로의 지정 가치 등에 대해 검토하고자 함. ㅇ 테마별 사적(서원 사우) 공모 결과 접수된 36건 중 전문가 심사('15.7월)를 통해 지정조사 대상으로 선정되었음. ㅇ '17년도 사적분과 제2차 위원회('17.02.15.)에서 추후 재검토 사유로 보류 되었으며, 다시 부의함. 다. 주요내용 (1) 신 청 인 : ㅇㅇㅇ (2) 대상문화재명 : 광주 포충사(光州 褒忠祠)(시기념물 제7호, '74.5.22. 지정) ㅇ 소 재 지 :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776 (3) 지정신청 명칭 : 광주 포충사(光州 褒忠祠) (4) 지정신청 범위 : 붙임 지정 면적조서 참조 ㅇ 신청면적 : 문화재구역 2필지 44,623, 보호구역 28필지 29,736 (5) 관리단체(안) : 광주광역시 (6) 신청사유 ㅇ 임진왜란 때 의병인 고경명, 유팽로 외에 고종후, 고인후, 안영을 배향 하였으며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았고, 관련 기록유산을 많이 보유한 중요한 사우이므로 국자지정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하고자 함.
라. 현지조사의견('16.11.4./문화재위원 ㅇㅇㅇ, ㅇㅇㅇ, 전문위원 ㅇㅇㅇ) (1) 종별 및 명칭(안) 검토 ㅇ 종별 : 사적 ㅇ 명칭(안) : 광주 포충사(光州 褒忠祠)로 신청함. 검토의견 : 지정명칭 부여 기준인 지역명+문화재명에 의해, 광주 포충사 (光州 褒忠祠)가 적절한 것으로 사료됨. (2) 입지현황 및 역사문화환경 ㅇ 褒忠祠는 호남의 대표적 호국선열 유적지로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제봉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호남의병의 선봉장으로 금산전투 에서 순절한 高敬命(1533~1592) 高從厚(1554~1593) 高因厚(1561~1592) 3父子와 柳彭老(1554~1592) 安瑛(1564~1592) 등 5位를 배향한 사우이다. 이곳 霽峯山은 고경명이 자호를 霽峯이라 지을 정도로 좋아했던 곳이다 ( 포충사지 상 : 그 기지는 계산이 아주 명료하고 임목도 매우 아름다 운데 이곳은 선대부(고경명)께서 살아계실 때 자호를 霽峯이라고 한 이 제봉산 남쪽기슭이다 ). ㅇ 현재 경내는 옛 사우영역과 신 사우영역으로 분리되어 있다. 옛 사우는 원래의 위치(신 사우 좌측편 언덕 위)에 원형을 유지하며 동남향으로 자 리하고 있다. 사우 주변은 송림으로 둘러쌓여 있고 전면의 조망도 매우 좋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건물은 사당(31.6, 9.6坪), 동재(28.7, 5.2坪), 서재(28.7, 5.2坪), 내삼문(8.6, 2.6坪), 외삼문(13.7, 4.1坪) 등이다. 원 래 있었던 충효당 전사청 청사영당 고직사 등의 건물은 1977년에 정비되었고 이 때에 동재와 서재는 보수되었으며 내삼문과 외삼문은 개축 하였다. 사당 내에는 晴沙影堂과 忠孝堂, 典祀室 등의 7개의 편액과 함께 포충사중수기 등 약 22개의 기문이 보존되어 있다. 외삼문과 내삼문은 20m의 거리를 두고 같은 축선상에 있으며 내 외삼문 사이에는 동 서재를 마주보도록 배치하였다. 사당은 내삼문 안쪽 정 중앙 에 앉혔다. 담장은 외삼문 좌우로 해서 사당 후면까지 장방형으로 반듯하 게 둘러놓았다. ㅇ 신 사우는 1978년에 새롭게 건립되었으며 경내에는 사당과 유물전시관(정 기관), 그리고 내삼문, 외삼문 외에도 전면으로 주차장 중앙광장 휴게 소 관리사무소 등이 배치되어 있다. 건물들은 모두 콘크리트 구조에 한 식기와를 올린 형태이다. 특히 유물전시관(정기관)에는 霽峰의 문집과 포 충사 운영관련 문서, 교지 등이 보관되어 있다.
나주 (3) 연혁 유래 및 특징 미천서원 위치 ㅇ 광주 포충사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순절한 제봉 고경명(1533 1592)을 비롯한 고인후(1561 1592), 고종후(1544 1593) 3부 자와 월파 유팽로(1544 1592), 청계 안영(1564 1592) 등 충절인물 5위를 배향한 호국인물 역사유적이다. ㅇ 1601년(선조 34) 호남유생들의 건의로 왕의 승낙을 받아 광주 서쪽 제봉 산 밑 현 위치에 사우를 건립하였다. 유사경과 사림, 전라도 관찰사 한준 겸 등이 협력하였다. ㅇ 1602년에는 문인 박지효 등 65명의 연명 상소로 1603년 褒忠 의 사액을 받았다. 사액례에는 사제관 조엽이 파견되었고 광주목사 여우길, 제독관 조팽년, 능선현령 구심, 경양찰방 송이창 등이 참여했다. ㅇ 1616년, 1618년, 1879년, 1919년, 1927년에 중수를 하였고 1978년에 국가지 원으로 추진한 포충사 정화사업으로 신사당을 건립하였다. ㅇ 광주 포충사는 1601년 건립 이래 현재까지 원위치에 그대로 원형 유지되 어 오고 있으며 사액과 제례, 중수와 개수, 사우의 운영과 활용, 배향인물 의 관련 자료와 저술(문집, 목판), 고문서 등이 보관되어 있다. 이 중 제봉 고경명이 임진왜란 때 의병 거의 당시 쓴 친필마상격문은 귀중한 사료이 다.
연대 1601~ 1602년 1603년 1605년 1626년 1635년 1734년 1772년 1796년 1810년 1812년 1832년 1839년 1868년 1879년 1892년 1902년 1919년 1926~ 1927년 1933년 1959년 1970년 1974년 1978년 1986년 1992년 1994년 표 1. 포 충사 연혁 내 용 비 고 (선조 34~35) 포충사 건립 고경명, 고종후, 고인후, 유팽로, 안영 배향 (선조 36) 褒忠 사액 - 유생 65명의 연명상소 사액례제관 호조정랑 趙曄 (선조 38) 고경명 선무원종공신 1등 책봉 예관을 보내 치제토록 함 (인조 4) 예관을 보내 치제토록 함 예관 예조정랑 申達道 (인조 13) 충렬 시호 하사 (영조 10) 예관을 보내 치제토록 함 (영조 48) 예관을 보내 치제토록 함 (정조 20) 예관을 보내 치제토록 함 청사영당 건립 (순조 12) 예관을 보내 치제토록 함. (순조 32) 예관을 보내 치제토록 함 (헌종 5) 고경명 연보 완성 간행 청사영당 철훼 포충사 중수 (고종 29) 예관을 보내 치제토록 함. 포충사 중수 포충사 중수 포충사 중수, 충효당 서쪽 건물 중수 후 見承軒이라 명명 포충사 경내에 廟庭碑 건립, 포충사 보존계 결성, 견승헌 중수 포충사지 간행 포충사 중수 포충사 중수, 청사영당 중수 전라남도 지방기념물 제7호로 지정 新포충사 건립, 기념관(정기관) 건립, 舊포충사 정비, 충효당, 견승헌, 청사영당, 고직사 등 정비 전라남도에서 광주광역시로 이관,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 <제봉문집목판>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 지정 <포충사 소장 고경명 문적>(교지 외 4종 7점) 광주광역 시 유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 보수ㆍ정비 이 력 1879년, 1902년, 1919년, 1970년 등 중수 1978년 포충사 정화 보수(사당, 동재, 충효당 지붕해체 보수 등) 1999년 내외삼문 번와 보수
(4)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가치 ㅇ 조선시대 사액 사우(1601년 건립, 1603년 사액)로 조선후기 서원철폐 당시 철폐를 면한 전국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임. ㅇ 임진왜란 湖南三倡義(고경명, 김천일, 유팽로)로 알려진 고경명과 유팽로 외에 고종후, 고인후, 그리고 안영을 배향한 임란 충절 사적임. ㅇ 고경명 친필 마상격문과 제봉문집 252매를 비롯한 목판 493매와 포충사중 수기 등 현판 30여매가 보존되어 있어 호국인물유적의 기록유산으로 가치 가 큼. ㅇ 광주 포충사 기록유산으로는 현판류, 고문서류, 금석문류 등이 있음. 현판은 서재와 전시관에 남아 있는데, 전시관에 전시된 3개의 현판은 1614년에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지은 포충사우가(褒忠祠宇歌[幷 引]), 4종의 사제문(列聖朝賜祭文茶錄)(선조 36년 1603년, 선조 38년 1605 년, 영조 10년 1734년, 영조 18년 1772년)을 새긴 현판, 그리고 일문충효 만고강산(一門忠孝萬古綱常, 春菴 李堈(의친왕, 1877~1955)필)임. ㅇ 그리고 서재 안에는 20개의 기문과 7개의 편액이 있는데, 사제문(1796, 1812, 1832, 1892)과 비망기 등 관찬 기록, 9종의 포충사 중수기, 견승헌 등 건물 기문과 제영, 포충사 보존계와 방명록 등 다양함. 편액은 영당(影 堂), 전사실(典祀室), 성인문(成仁門), 청사영당(晴沙影堂, 宋成鏞), 충효문 (忠孝門, 槿園 具哲祐(1904~1989)), 견승헌(見承軒), 충효당(忠孝堂) 등임. (5) 지정 대상 및 범위 검토 ㅇ 사적 지정 신청은 문화재구역 2필지 44,623, 보호구역 28필지 29,736 를 신청함. (6) 문화재 보존 영향 행위기준(안) 검토 검토의견 : 원의 경관을 구성하고 있는, 배면과 전면은 적절한 제어가 필 요하지만, 서원 측면은 적절한 건축허용이 필요함.
미천서원현상변경처리 ( 안 )
(7) 보존 정비 및 활용 착안사항 1. 종합 정비 계획 1) 보존정비 계획 구사당 정비에 중점을 둔다. 특히 철거된 충효당, 청사영당, 전사청, 고직사 등의 건물의 위치와 매장된 잔존상태를 학술조사를 통해 확인한 후, 적절 한 보존 대책을 세워 공개하도록 한다. ㅇ 보존방법 ① 복원 : 발굴조사 후 확인된 양상을 기반으로 여러 분야의 고증을 통해 소멸된 건물을 옛모습대로 복원한다. ㅇ 보존방법 ② 복토원형보존 : 발굴조사 후 노출된 유구가 심하게 훼손된 상태일 때 유구를 재매장 복토하고, 발굴결과에 따라 건물의 정확한 위치와 크기를 표토 위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시한다. ㅇ 보존방법 ③ 노출원형보존 : 발굴조사 후 노출된 유구가 양호한 상태일 때, 노출된 모습 그대로 보전처리 후 노출시켜 개방한다. 이 외에 발굴 후 노출된 유구의 상태에 따라 일부는 복토하고 일부는 노출하는 방식의 보존처리를 한 예도 있음. 2) 방문객 편의시설 확 충 ㅇ 문화재 활용프로그램 시행을 위한 시설 정비 ㅇ 관광객 야외 쉼터 설비 3) 역사문화공원조성 ㅇ 포충사, 고경명 생가, 고씨삼강문(정려), 제봉산 등을 포괄한 고경명 공 원 조성 2. 활용계획 1) 목적 ㅇ 각각의 눈높이에 맞춘 체험 프로그램으로 바른 역사관을 가진 미래 인 재 육성 ㅇ 문화재의 현대적 가치 창출 ㅇ 문화재를 통한 지역민 공감대 형성 ㅇ 종합적 관리체계 구축 2) 주요내용 ① 포충사와 연계된 문화관광 탐방루트 개발 - 포충사(제봉산), 지산재, 고싸움테마파크 등 주변 문화재외 연계한 문화 관광 탐방루트 개발 - 포충사를 중심으로 지석천변 자전거 도로 활용 문화재 탐방 루트 개발
- 포충사(제봉산) 주변 부용정, 양과동정, 만귀정, 주변 민속자료 등을 활 용한 역사 민속탐방루트 개발 - 고경명 관련 유적 탐방 프로그램 ② 포충사 내 프로그램 개발 - 교육 및 홍보자료 발간 - 현대 시각에 맞는 새로운 주제로 어린이 및 청소년 의병 조직 - 선비 체험 제례의식 체험 등 전통문화교육 프로그램 개발 ③ 여러 종류의 문화 활동 장소 제공 - 지역민의 구심점이 될 수 있도록 지역민을 위한 갖가지 문화동아리 활 동장소 제공 - 야외 공연장 제공 : 각종 지역 공연, 창작 공연 대회 등 (8) 종합 의견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지켜낸 고경명을 기리는 광주 포충사 - 임진왜란 당시, 금산전투와 진주성전투에서 순절한 고경명과 고종후, 그리 고 고인후 삼부자 외에도 고경명의 두 아우 경신과 경형도 왜적에 항거하 다 순절하였고 고경명의 차녀와 질녀 또한 정유재란 때 왜적을 만나 항거 하다가 순절하였다. 이와 더불어 충노 봉이와 귀인이 또한 고경명과 함께 항거하다 죽음에 이르렀으니 일문에서 9명이 節死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선조 27년 갑오년에 왕세자의 賜祭가 내려졌고, 그 이듬해인 선조 28년 (1595)에는 3부자에게 정문이 내려졌으며 또 특명으로 부조의 하명을 받 았다. 또한 같은 해 유생들이 고경명의 사우를 건립해야한다는 상소를 올 린 후 전쟁이 끝난 선조 35년(1602)에 임금의 재가를 얻어 사우가 건립되 었다. 사우의 건립에는 광주 사림, 고경명의 내외손, 지방관(전라감사와 수령) 등의 도움이 있었다. 이후 고경명의 문인인 박지효를 비롯한 65명 의 연명상소로 褒忠이라는 액호를 하사받고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 때 사 액례의 제관은 호조정랑 趙曄였다. 선조 38년(1605)에 고경명은 선무원종 공신 1등에 책봉되었고 이 때 선조는 예관을 보내 치제토록 하였다. ㅇ 전국 서원사우 훼 철령 에 도 살아남 다 - 18세기와 19세기를 거치는 동안 서원의 남설은 새로운 사회문제로 대두었 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고종 2년(1865) 3월에 시행된 만동묘 철폐를 시작으로 고종 5년(1868) 8월에는 미사액서원이 철폐되었고 뒤이어 고종 8년(1871)년 3월에는 전국 47개 서원사우를 제외한 모든 서원사우를 철폐 하도록 하였다(辛未存置). ㅇ
이 당시 철폐를 면한 47개 서원사우는 문묘에 종향되어 있는 설총 등 16 인이 주향인 서원 16개소와 충절대의의 묘 서원 사우 31개소였는데, 포충 사는 철폐를 면한 전국 47개 서원사우 중 하나였다. 이렇듯 포충사가 존 치된 이유는 一門雙節, 一門忠孝 萬古綱常 으로 평가되는 고경명 부자 의 충절을 조정에서 높이 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ㅇ 조선 초 기의 건축적 수법을 보이는 포 충 사 - 사당인 포충사의 공포는 초각 형태와 결구 기법에서 주심포계와 익공계 양식의 절충적 특징을 보이고 있으며, 종대공 받침재의 단부 초각 형태도 비교적 이른 시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ㅇ 제 봉 문 집 252매 외 목판 493매 를 소장하다 - 포충사는 도서를 간행하고 보관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 고경명과 그 후 손들의 문집을 여러차례 간행하하였고 아직까지 그 목판들을 보관하고 있 다. 포충사에 보관되어 있는 목판은 모두 493매로, 고경명은 문집인 제 봉문집 252매, 고경명의 창의 사적과 관련하여 아들인 고유후, 고용후가 편찬 간행한 正氣錄 71매, 창의할 때 손수지은 手草檄文 7매, 무등 산 유람할 때 지은 遊山錄 10매, 11세손이 판각한 世篤忠貞四字訓 2매와 屛書遺墨 7매, 그리고 아들 고용후의 문집인 晴沙集 54매, 손 자인 고부천의 문집인 月峯集 59매, 선조때 홍문관 부제학을 지냈고 고경명과 道交를 맺은 辛應時의 문집인 辛白麓集 31매 등이다. 조선시대 사액사우에서 출판과 도서관 기능을 했음을 보여주는 유물로서 중요하며 16세기 호남 유림의 확충에 대한 기록유산으로서도 중요하다. ㅇ 고문서와 기문, 현판, 편액 등 다 양 한 기록 유산을 소장하다 - 포충사에는 건립과 사액, 향사와 운영, 중수와 개수, 각종 편액, 사액제문, 시문과 제영 등에 관한 고문서와 기문, 현판, 편액 등이 다수 소장되어 있 다. 유물전시관이 건립되어 교육 자료로도 활용되고 있다. 조선시대 사액 사우의 건립과 운영, 호남유림의 학문과 교육활동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 학술적,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ㅇ 1978년, 원래의 원사당은 일부 건축물이 철거 축소 되 고 기 능 을 하지 않 게 되었으며, 콘크리트 건축물인 신사당으로 모든 역할이 이관됨. - 1977년 원래의 사당, 수리 공사를 계획 하던중, 국가의 지원에 의해 원사 당의 기능을 축소하고, 콘크리트 건축물로 신사당을 건립하게 된다. 1978년 원사당의 영역은 현재의 배치와 비교할 때 별도 영역으로 구획된 청사영당과 삼문이 철거된 것이며, 정면 5칸의 충효당, 고직사, 원직사, 헛
안건번호 사적 2017-04-050 11. 경주 동궁과 월지 서편 건물터 복원 실시설계(안) 검토 가. 제안사항 경상북도 경주시 소재 사적 제18호 경주 동궁과 월지 의 서편 건물터 복원을 위하여 경주 동궁과 월지 복원 실시설계(안)을 부의하오니 검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나. 제안사유 ㅇ 1975 ~ 1976년 발굴조사 후 문화재청 승인을 얻어 호안석축 복원 정비와 제 1, 3, 5호 건물복원, 모형제작 등을 통해 복원에 대한 기반을 마련하였고, ㅇ 역사적 고증 복원에 대한 연구가 축적되었으며, 2015년 12월 경주 동궁과 월지 종합정비 기본계획, 경주 동궁과 월지 복원 세부계획 수립 및 기본설계 에 대한 문화재청의 조건부 승인에 따라 경주 동궁과 월지 복원 실시설계 를 완료하여 검토 받고자 하는 사항임 다. 주요내용 (1) 신 청 인 : ㅇㅇㅇ (2) 대상문화재명 : 경주 동궁과 월지(사적 제18호 / 1963.1.21 지정) ㅇ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인왕동 26번지 (3) 신청내용 ㅇ 위치/면적 : 경북 경주시 인왕동 26-1번지 일원/177,172 ㅇ 사업내용 : 경주 동궁과 월지 서편 건물지 복원을 위한 실시설계 - 주요 건물지 7개소(A, B, C, D, E, F, G), 중문지 1개소, 협문지 3개소, 회랑지 실시설계 (건물지 면적 11,894 / 건물 연면적 3,546.7 ) - 토목, 전기, 통신, 소방, 통합방재 등 실시설계 - 조건부 승인 연구용역 결과 실시설계에 반영함 수종, 단청, 기와고증, 기와하중, 당호, 전통조경정비계획 - 자체 추가 연구용역 진행하여 실시설계에 반영함 물리탐사, 지반조사, 금구고증, 건축양식고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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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건번호 사적 2017-04-051 12. 나주읍성 북망문 복원 관련사항 검토 가. 제안사항 전라남도 나주시 소재 사적 제337호 나주읍성 북망문 복원 및 주변정비 공사와 관련하여 성문의 복원 형식에 관한 사항을 부의하오니, 검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나. 제안사유 ㅇ 발굴조사 약보고서('13.3)를 바탕으로 설계용역 추진과정에서 자문의견을 수렴하여 발굴유구 및 고문헌(1872년 고지도)을 바탕으로 정면은 홍예식 배면은 평거식으로 구성하기로 함 ㅇ 그러나, 공사 추진간 개거식이라는 의견 제기가 있어 2차례 기술지도 자문 회의를 개최하여 의견을 수렴한 결과 명확한 결론을 도출하지 못함 ㅇ 사적분과 문화재위원회('16.3.9) 검토결과 보류 결정됨에 따라 소위원회를 구성 검토('16.4.5)한 후 문화재위원회('16.5.11)에 상정하여 조건부 가결 되었음 ㅇ 승인 조건에 따라 연구용역 실시 후 문화재위원회('16.9.7) 상정결과 보류 결정되어 소위원회 재검토('16.10.25)한 후 문화재위원회('16.11.9)에 재상정 하여 부결 되었음 ㅇ 문헌자료 중 근대 나주읍지인 續修羅州誌 에 북망문 형태가 虹門 이라는 기록이 있어 해당 자료를 토대로 사적분과 문화재위원회( 17.2.15) 검토결과 보류 결정됨에 따라 관련 문헌 신뢰도 등을 조사한 후 재상정하는 건임 다. 주요내용 (1) 신 청 인 : ㅇㅇㅇ (2) 대상문화재명 : 나주읍성(사적 제337호) ㅇ 소 재 지 : 전남 나주시 남내동 2-20 (3) 신청내용 ㅇ 나주읍성 북망문 성문 복원 형식 검토 - 1안 : 홍예식 + 평거식 - 2안 : 개거식 - 3안 : 홍예식
연결되는 적심열이 전혀 확인되지 않아 선대(先代)의 유구로 판단됨 (2) 고지도 및 문헌 분석 ㅇ 고지도 분석 - 1871년의 호남읍지 <나주목여지승람> 내 지도와 1872년에 제작된 조선후기지방지도 <나주지도>에 모두 북망문이 홍예식으로 표현되어 있어, 발굴조사 고증결과와 동일한 결론이 도출됨 - 그러나 1899년 나주군읍지 내 지도에는 북망문이 개거식으로 표현됨 호남읍지 나주지도(1871년) 조선후기지방지도(1872년) 나주군읍지 지도(1899년) - 위 3종의 읍지도에 대한 자문위원의 의견은 다음과 같음 ① 전국적 사업으로 시행된 1871년의 읍지 편찬과 1872년의 군현지도 및 관방지도의 제작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외세의 침입에 따른 전국의 군 사시설의 점검과 방어라는 군사적 목적에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지도 와 지리지가 19세기 후반의 지역별 군사시설의 가장 정확한 모습을 전해주 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음. 특히 읍지에 수록된 지도들이 작은 지면에 그 려 상세함에 한계가 있는 반면에 1872년에 제작된 군현지도는 읍지 속
지도에 비해 3배, 면적으로는 9배 이상 큰 축척이므로 더욱 정교하고 정확 하게 그렸다고 할 수 있으므로 가장 신뢰도가 높은 자료로 판단할 수 있음 ㅇㅇㅇ(ㅇㅇ대) 자문의견서 내용 중 ② 문제가 되는 1899년 지도(나주군읍지, 1899, 규10781 : 이하 <1899 년 지도>로 약칭)는 1871년 지도(호남읍지의 나주목지도. 규12175 : 이하 <1871년 지도>로 약칭)를 저본으로 한 일종의 모사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 다 우선 <1871년 지도>를 1872년 지도인 나주지도(1872년, 규10483 : 이하 <1872년 지도>로 약칭)와 비교해 보면 동남북문을 홍예문으로 묘사 하고 있는 점. 동문과 남문 위 지붕을 두층으로 묘사하고 있는 점에서 동 일합니다. <1872년 지도>가 네 문으로 옹성같은 것을 묘사한 점이 가장 달라 보입니다. 말하자면 옹성 표현 유무를 근거로 본다면 <1871년 지 도> 와 <1872년 지도> 는 전혀 모사관계에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도 이 두지도가 동문 남문 북문을 홍예문으로 표시한 것, 동문 남문의 지 붕을 두층으로 그린 점을 동일합니다. 한해 차이나는 두 개의 지도가 전혀 모사관계에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동일한 표현을 했다는 것을 최 소한 이 두 개의 지도 중 한 개는 북문의 형태를 포함한 당대의 나주읍성 실태를 잘 반영하고 있다는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 에서 보면 <1871년 지도>와 <1899년 지도> 중 당시의 실제를 잘 반영한 것은 역시 <1871년 지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ㅇㅇㅇ(ㅇㅇ대) 자문의견서 내용 중 - 위 자문의견과 더불어 <1871년 지도>는 새롭게 그려서 上送한 것으로 실상에 가까운 자료로 판단됨, <1872년 지도>는 사실에 가까운 유일무이 한 자료로 평가됨, <1899년 지도>는 내용상 매우 부실한 점이 엿보이며, <1871년 지도>와 표현방법 등이 매우 유사한 것으로 보아 <1871년 지 도>를 모사하여 편집한 것으로 판단됨 이라는 자문의견도 있었음(국립중 앙도서관 고문헌과 이기봉박사) - <1899년 지도>는 <1871년 지도>의 오기를 그대로 베꼈으며, 1896년 광 무개혁 이후의 지방재편 상황을 반영하지 않고, 이전 행정구역을 그대로 표현함 사례 ① : 지명의 오기
1871년 지도 공수면 1872년 지도 공수면 1899년 지도 공수면 사례 ② : 1896년 광무개혁 지방개편과 1899년 기록 오류 1896년 행정개편 32개島 지도군으로 이양 원정, 금마, 비음, 종남 4개면 영암군으로 이양 적량, 장본, 여황 3개면 함평군으로 이양 조산 1개면 광주군으로 이양 대화 1개면 장성군으로 이양 삼향 1개면 무안군으로 이양 1899년 지명표기 이양사실 기록 1871년 내용과 동일 1871년 내용과 동일 1871년 내용과 동일 1871년 내용과 동일 1871년 내용과 동일 - <1899년 지도>에서는 <1871년 지도> <1872년 지도>와 달리 鎭營 위치, 주요도로 등의 오류가 확인됨 사례 ① : 鎭營 위치 오류 上 1871년 지도, 下 1899년 지도 사례 ② : 나주천과 도로의 위치 오류 上 1872년 지도 下 현재 지도
上 1871년 지도, 下 1899년 지도 上 1872년 지도 下 현재 지도 사례 ③ : 東倉으로 향하는 주도로 표기 오류 上 1871년 지도, 下 1899년 지도 1872년 지도 - <1899년 지도>에는 이전 지도에 비해 지명의 표기오류가 많음
1871년 지도 본문 空樹面 艅艎面 지도 赤良面 章本面 公水面 余艎面 1872년 지도 지도 空樹面 艅艎面 赤良面 章本面 1899년 지도 본문 空樹面 余艎面 赤良面 章本面 지도 公水面 艅艎面 積粮面 獐本面 ㅇ 문헌기록 - 발굴조사 고증 내용을 보완하기 위해 문헌자료(읍지, 개인문집, 근대자료 등)를 대상으로 검토한 결과, 續修羅州誌 에서 북망문이 虹門 이라는 기록이 확인됨 - 續修羅州誌 는 나주목사 谿谷 張維(재임 1629 1630)가 완성하지 못한 지리지를 300년 후에 나주군수 이우규(재임 1896 1897)가 지 역 유지들과 뜻을 모아 금성읍지 (1897년) 로서 완성하였고, 이를 일제강점기인 1920년에 증보하여 편찬한 나주 지리지임 - 續修羅州誌 는 1920년까지의 나주의 다양 한 변화상을 상세히 기록한 자료로써 내용상 의 신뢰도가 매우 높은 기록물임 - 또한 續修羅州誌 에는 동점문과 남고문, 북 망문에 虹門 이라 덧붙이고, 서성문은 단순히 西門 이라고만 하여 성문형태에 대한 차이를 표현하고 있음 속수나주지 (1920) - 이에 대한 자문위원의 의견은 다음과 같음 ① 1920년에 간행된 속수나주지 관아 조에는 북망문이 홍예문이 며, 1920년 당시에는 이미 훼손되어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20년 당시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과거 사대문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어서 중요한 참고자료가 될 수 있을 것임 ㅇㅇㅇ(ㅇㅇ대) 자문의견서 내용 중 ② 이번 학술용역에서 활용되고 있는 속수나주지 는 민간 개인이 독
자적으로 편찬한 지방지가 아니라 군 당국의 지원과 감독 아래 편찬된 지 방지입니다. 특히 이 지방지는 이전 시기 읍지의 내용들을 대거 수록 보완 함으로써 당시 지방 실정을 구체적으로 고증할 수 있는 자료입니다. 나아 가 성문관련 기술내용은 이전의 읍지 관련 내용을 상세하게 인용 보완 수 록함으로써 사료로서의 신뢰성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범례는 이를 잘 보여 줍니다. 이에 이 성문을 복원하는데 이 자료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됩니다. ㅇㅇㅇ(ㅇㅇ대) 자문의견서 내용 중 ③ 더구나 <속수나주지>(1920)가 북문의 형태 뿐만 아니라, 동문 남문 의 형태(홍예문), 동문 남문의 지붕형태(복층)에 관해서 1870년대의 상황을 충실히 반영한 두 개의 지도들(<1871년 지도>, <1872년 지도>)과 동일한 정보를 전해준다는 점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이미 사라져버렸을 성문의 형태에 대해 지도를 제외한 읍지들 중에서 다른 어떤 기록이 확인되지 않 는데도 <속수나주지>에서 이렇게 기록될 수 있었다는 것은 지역의 전문이 전승된 결과일 것입니다. 그것은 <속수나주지>가 국가 편찬명에 따라 제 작된 이전의 읍지와는 달리 현지인의 시선을 담아 만들어낸 사찬읍지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ㅇㅇㅇ(ㅇㅇ대) 자문의견서 내용 중 ㅇ 관찬읍지와 사찬읍지의 신뢰성 검토 私撰邑誌 : 續修羅州誌 (1920)의 北望門 虹門 (홍예식) 기록 官撰邑誌 : <1899년 지도>의 북문 표현(개거식) - 관찬과 사찬의 개념 官撰邑誌 : 朝令에 의하여 일정한 체제와 양식 하에 전국적으로 동시에 작성된 읍지이다. 중앙으로부터 하달된 편찬 범례에 따라 일정한 규식하 에 일률적인 체제로 편찬되므로 지역간의 특성을 파악하거나 비교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그러나 간략화한 것들이 많고 그 중에는 형식에 치우 쳐 내용이 빈약한 경우나 새로 작성하지 않고 기왕의 읍지들을 轉寫하는 경우도 많으며 국가적인 필요성에 따라 작성되어 지방 사정에 대한 풍부 한 사실이 누락되는 단점도 있다. 私撰邑誌 : 鄭逑 尹斗壽 李睟光 李植 許穆 張維 등 명망있는 인물들
이 지방 수령으로 파견되어 지방 읍지를 편 찬하던 데에서 시작되었다. 편찬 목적은 향 촌질서의 재편과 안정, 재지사족들의 지위 顯揚, 지역의 전통과 문화에 대한 자긍심의 발로 등이다. 사찬읍지는 편찬자의 편찬 의 도와 성향, 그리고 지역의 차이에 따라 관 찬지리지 보다 다양성을 지니며 편찬 욕구 를 뚜렷하게 가진 지방 거주자들이 작성하 므로 내용의 정확성, 풍부함에서도 뛰어난 지리지가 많다. 그러나 광역에 걸친 공시적 <황성신문> 대한 광무3년(1899년) 인 기록이 못되는 점, 편찬자의 주관이 깊 4월 26일 3면기사 게 작용하는 점, 일관된 체제가 아닌 점 등은 단점으로 지적된다. - 1899년 나주군읍지는 광무3년의 지방제도 개혁(광무개혁) 후 지방실정을 정리 파악해 보려는 목적으로 시행되었으나, 30일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지도와 함께 작성해 올리라는 상송령 때문에 여타 읍지에 비해 부실하게 작성되었음 邑誌修上 內部에셔 十三道에 訓令ᄒᆞ기를 各郡邑誌를 各其府로 都聚修正ᄒᆞ야 輸送本 部ᄒᆞ야 以爲 乙覽케ᄒᆞ고 亦復存案ᄒᆞ라신 志意를 奉承ᄒᆞ얏기 玆以訓令ᄒ ᆞ노니 令到卽地에 轉飭管下各郡ᄒᆞ야 誌與地圖를 各二件式 不日 精書ᄒᆞ야 令 到後三十日內로 趕速修呈ᄒᆞ라ᄒᆞ얏다더라 - 官撰과 私撰에 대한 자문위원의 의견은 다음과 같음 ① 1899년에 편찬된 나주군읍지 에 북문(북망문)이 단층문루를 가진 개거식 성문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음 - 첫째, 1872년 이후 1899년 사이에 성문이 훼손되었거나 수리를 했을 가 능성 있으나, 관련 기록은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함. 1894년 동학군과의 전투가 있었으나 나주의 경우 나주목사 민종렬의 활약으로 전라도에서 유일하게 수성을 했던 지역임. 금성정의록 에 의하면 서문 지역에서 전투가 많았고 북문 전투의 경우 북문 밖에서 이루어지고 동학군이 대 패함
ㅇ 앞서 제시된 자료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음 북망문의 최후 유구 형태는 외문구조임 - 삼문구조(초 중기)에서 외문구조(후기)로 구조 변경됨(유구에서 확인) - 적심 등 삼문구조 당시(초 중기)의 유구도 확인됨 발굴결과 문지도리석과 석벽의 거리는 동점문(홍예식)의 형태와 유사함 각 개별유구의 높이(level)차와 상관관계 등의 요소 - 개거식으로 판단할 수 없음 북문형태 : 홍예식 <1871년 지도> 지도와 읍지 따로 제작 상송 官撰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이후 국방과 치안을 위한 관제 및 군 제개편을 위한 군사시설 파악을 목적으로 제작 북문형태 : 홍예식 <1872년 지도> 고지도 조선시대 관찬지도의 마지막 성과물로 평가 官撰 각 지방의 모습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사료로서 가치가 큼 북문형태 : 개거식 <1899년 지도> 읍지와 지도 동시 제작 상송(30일 기한) 官撰 광무개혁 후 지방 행정상황 파악 목적 1871년 지도 모사(誤記, 1896년 행정변화 반영되지 않음) 城池 邑城 石築周回九千九百六十六尺高九尺女堞二千四百 羅州牧輿地勝覽 十二堞池二一在軍器內一在東門內井二十泉十二水溪一其源出 自錦城山景賢洞來 (1871년) 樓亭 東樓 卽城東門樓二層鐵扉牧使金係熙廣築邑城遂重新 官撰 其舊址 이전기록과 같음 羅州牧邑誌 읍사례 - 지방재정파악 목적 (1895년) 邑城 및 문루 관련 기록은 없음 官撰 (읍성문은 장소를 설명하기 위한 기준으로 사용) 城郭 邑城 石築周三千一百二十六尺高九尺內有井二十泉十 二小溪一東南東部地西南西部地 錦城邑誌 官舍 東漸門 州城東門二層鐵扉牧使金係熙廣築邑城遂重新 (1897) 其舊址 南顧門 州城南門也 西成門 州城西門也 北望門 문헌기록 私撰 州城北門也 성곽條와 관사條 내용 모두 이전 기록 수정 보완 城池 邑城 石築周回九千九百六十六尺高九尺女堞二千四百 羅州郡邑誌 十二堞池二一在軍器內一在東門內井二十泉十二水溪一其源出 自錦城山景賢洞來 (1899년) 樓亭 東樓 卽城東門樓二層鐵扉牧使金係熙廣築邑城遂重新 官撰 其舊址 1871년 나주목여지승람 기록과 같음 城郭 邑城 石築周三千一百二十六尺高九尺內有井二十泉十 續修羅州誌 二漢水洞水西出東流廣灘 (1920) 官舍 東漸門 州城東門二層虹門 南顧門 州城南門二層虹門 私撰 西成門 州城西門 北望門 州城北門虹門已上四門幷爲今无 성곽條와 관사條 모두 금성읍지 내용 수정 보완 ㅇ 이상의 나주 북망문에 대한 고증 연구 결과를 사적분과 위원회에 상정하여 적절한 복원방식을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