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代國家의 成長과 交通路 - 155 - 다고 보겠다. 그러면 고구려가 양맥을 격파하고 고구려현을 점령하면서 장악한 교통로는 어떠한 것인가? 고구려에는 요동 방면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통로가 2개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다 음의 기사가 그것이다. 겨울 10월에 燕王 慕容皝이 龍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立威將軍 翰이 皝에게 청하기를 먼 저 고구려를 取한 연후에 宇文을 멸해야만 中原을 도모할 수 있다고 하였다. 고구려에로는 두 길이 있었는데 그 北道는 평탄하고 넓었으며 南道는 험하고 좁았기 때문에 군사들이 北 道로 가려고 하였다. 翰이 말하기를 敵들이 상식으로 헤아린다면 반드시 대군이 北道로 오리라고 하여 마땅히 북쪽에 치중하고 남쪽을 가볍게 여길 것이니 왕은 마땅히 정예 병력을 거느리고 南道로 나 가서 그들을 치면 뜻하지 않은 때에 나가게 되는지라 北道는 족히 取할 것도 못된다. 별도 로 소부대를 北道로 나아가게 하면 설령 실수가 있다 하더라도 그의 심장부가 이미 무너졌 으므로 四肢는 힘을 쓰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皝이 그 말을 좇았다. 11월에 皝이 친히 强兵 4만을 거느리고 南道로 나와서 慕容翰과 慕容覇로 선봉을 삼고 따로 長史 王寓 등을 보내어 군사 1만 5천을 거느리고 北道로 나와 침입하였다. 왕이 아우 武를 시켜 정예 부대 5만을 거느려 北道를 방어하게 하고 자신은 약한 군사를 거느리고 南 道를 방비하고 있었다. 이때 모용한 등이 먼저 와서 싸우고 皝이 대군으로써 이어오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左長史 韓壽가 우리 장수 阿佛和度加를 베니 諸軍이 이긴 것을 타서 드디어 환도성으로 들어 왔다. 왕이 單騎로 斷熊谷으로 달아나 들어가니 (燕 나라) 장군 慕 輿埿가 뒤미쳐 쫓아오면서 왕의 어머니 주씨와 왕비를 붙잡아 돌아갔다. 이때 王寓 등은 北 道에서 싸우다가 모두 敗沒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皝은 더 추격하지 않고 사신을 보내 왕을 불렀으나 왕이 나가지 않았다 73) 즉, 南北道가 있었다는 것인데, 남도는 험하고 좁은데 비해 북도는 평탄한 것으로 알려 져 있다. 남북도의 路程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제기되고 있는데74), 兩 道路의 종 착점이 집안인 만큼, 집안으로 들어오는 통로를 통해서 逆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그 것을 구명할 수 있는 한 방법이다. 고구려 수도인 국내성 곧 집안으로 들어오는 요충지인 관마장과 망파령에는 遮斷城이 설치되어 있다. 관마장 차단성은 집안에서 서북쪽으로 65 떨어진 산골짜기에 소재한 목선두산과 약황정자산 사이에 생긴 좁고 험한 골짜기에는 집안과 그 남쪽 지방을 연결하는 도로가 나 있다. 관마장 차단성은 이 골짜기에서 가장 좁은 남쪽과 북쪽 길목 목선두 골짜기 어귀에 각각 하나씩 쌓았다. 망파령 차단성은 집안 쌍차에서 서북쪽으로 10 떨어진 곳에 소재하였는데, 신개하 연안에서 가장 험준한 망 파령 마루에 축조되어 있다.75) 요컨대 관마장과 망파령의 차단성은 수도의 입구를 방비 73) 三國史記 권18, 故國原王 12年條. 74) 余昊奎, 앞의 논문, p.5를 參照하기 바란다.
- 156 - 國史館論叢 第74輯 하는 중요한 관방시설인데, 이들 고개를 따라 교통로가 나 있는데, 혼하 소자하 부이강 혼강 新開河로 이어지는 南道와, 혼하 상류 柳河 輝發河 渾江 葦沙河로 이어지는 北道 通路를 설정한 佟達의 견해가76) 현재로서는 가장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한편 광개 토왕릉비문 永樂 5年條에 의하면 因過襄平道 東來 城 力城 北豊 77)라고 하였는데, 광 개토왕은 대흥안령산맥 부근 혹은 시라무렌강 유역에 거주하는 稗麗를 정벌한 후 回軍할 때 지금의 遼陽으로 이어지는 襄平道를 이용하여 南下하다가, 平坦하므로 노획한 牛馬群 羊을 몰고 가기에 편리한 北道로 방향을 잡았다고 판단되므로, 지금의 심양에서 동쪽으로 꺾어져 移動 回軍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세기 중엽에 고구려는 北平 漁陽 上谷 太原 등지를 습격하고 있는데78) 이 들 지역은 지금의 북경 근방이 되겠는데, 그 출발 지점을 현도군이 소재한 무순의 동북쪽 으로 잡는다고 하더라도 왕복 6~7천리에 해당하는 대원정이 된다.79)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고구려 군대는 이곳까지 진출할 수 있었을까? 기동력을 수반하는 기병 부대가 아니 고서는 어렵다고 판단되는 만큼, 이들이 이용한 교통로는 險路는 아니었다고 보이지만, 현재로서는 그 진출로를 구명하는 게 용이하지 않다. 이는 그로부터 5년 후 遼西에 10개 성을 축조하여 중원대륙 진출의 교두보로 삼았던80) 문제와 상호 연계된 사안으로서, 요 동과 요서에 이르는 기병부대의 통과가 가능할 정도의 넓은 교통로가 개척되었음을 의미 해 준다. 고구려의 요동 진출과 관련하여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西安平 공격이 되겠다. 서안평 은 신의주와 요동반도를 연결짓는 통로인 지금의 요녕성 丹東이다.81) 이곳은 낙랑군의 치소인 평양 지역에서 청천강을 지나 중국대륙과 연결되는 유일한 육상통로였다. 따라서 고구려는 서안평을 장악하여 낙랑군과 중국대륙과의 육상교섭을 차단시켜 고립시키려고 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고구려 태조왕 때의 남쪽 경계가 지금의 청천강을 가리 키는 살수였던 만큼82) 육로는 이미 청천강 하류까지 장악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므로 낙랑군은 선박을 이용하여 대동강에서 압록강 하구의 단동에 이르는 코스를 이용하여 요 75) 고구려문화 (1975) pp.33~34. 76) 佟達, 關于高句麗南北交通道 ( 博物館硏究 3집, 1993) pp.34~38. 이 견해는 余昊奎에 의해 치밀하게 보완 발전되어 설득력을 더 해준다. 77) 韓國古代社會硏究所,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p.9. 78) 三國史記 권14, 慕本王 2年條. 79) 손영종, 고구려사 (1990) p.95. 80) 三國史記 권15, 慕本王 3年條. 81) 曹迅, 靉河尖古城和漢安平瓦當 ( 考古 1980-6) pp.566~567. 82) 고구려의 남쪽 경계인 살수를 집안과 만포로 해서 남하하는 통로인 희천 방면, 즉 살수 상류 방면까지로 설정해 볼 수도 있다.
古代國家의 成長과 交通路 - 157 - 동 현도군과 교섭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곳은 낙랑군과 요양의 요동군을 연결하는 통로 였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이곳을 차단할 목적으로 서안평을 공격한 것으로 보겠다. 게다 가 고구려가 서안평을 점령하게 된다면 압록강을 온전하게 이용하여 집안에서 출발한 고 구려 선박이 황해를 누빌 수 있게 되어 낙랑군을 직접 위협하는 게 가능해진 것이다. 고 구려는 242년에 서안평을 공격하였고, 311년에는 이곳을 점령하였다. 서안평을 점령한 지 2~3년 후에 고구려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각각 점령하여 이들 郡을 한반도에서 축출 할 수 있었다. 427년 평양성으로 천도한 이후에 고구려는, 요동에서 평양성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확대시키는 한편 그와 관련한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7세기에 접어들어 고구려와 隋 唐 과의 전쟁 과정을 통해 새로운 교통로가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현도성 백암성 봉황성 압록강 하구 통로, 신성 남소성 목저성 창암성으로 나왔다가 남쪽으로 내려오 는 통로, 비사성 건안성(혹은 요동성 안시성) 오골성 봉황성 압록강 하류로 통하는 3 개의 교통로를 제시할 수 있다. 압록강 하류로부터 평양성 사이에는 2개의 통로가 연결 되어 있다. 즉, 의주 선천 곽산을 연결하는 통로와, 구련성 창성 구성 태천을 연결 하는 통로였던 것이다. 평양성 중심의 고구려 종심 방어체계는 압록강 이북에서는 여러 갈래로, 압록강 이남에서는 대체로 두 갈래로 형성되었다.83) 2. 남진경영과 육상교통로의 확대 고구려가 낙랑군과 대방군을 장악하게 됨에 따라 동서를 연결하는 간선도로가 추가되 었다. 즉, 평양에서 원산만으로 이어지는 동서 교통로가 되겠는데, 그럼으로써 고구려는 평양을 중간거점으로 하여 개성 방면으로 진출할 수 있는데, 당시 개성에서 평양으로 통 하는 길은 개성 평산 서흥 황주 평양으로 이어지는 통로와, 개성 평산 신계 수안 상원 평양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었다.84) 고구려는 동시에 원산을 통하여 동해안로 를 따라 신라 지역으로 진출하는 게 가능해졌다. 고구려는 새로 확보한 남북 교통로를 통 하여 여전히 반독립적인 상태로 존속한 낙랑 대방 故地85)에 대한 경영을 강화하여 그 주민들을 체계내로 흡수해 나가는 동시에 비옥한 농경지로부터의 곡물에 대한 공납을 증 대시켜 나갈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백제 지역으로의 군사적 진출을 촉진시켜 양국간의 간단없는 충돌의 서곡을 알렸다. 83) 박창수, 고구려의 성 분포와 서북 방어체계 ( 력사과학론문집 15, 1990) pp.253~255. 84) 대현산성 답사기, p.43. 85) 孔錫龜, 高句麗의 領域擴張에 대한 硏究 ( 韓國上古史學報 6, 1991).
- 158 - 國史館論叢 第74輯 고구려는 원산에서 남하하는 동해안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곳은 백두산에서 산출되 는 黑耀石으로 제작한 연모가 강원도 양양군 오산리에서 출토될86) 정도로 신석기시대 이 래의 유서 깊은 교통로였다. 그럼에 따라 고구려는 강원도 북부 지역에서 동해안을 따라 영일만 방면까지 미쳤던 東濊에87) 대한 장악을 가능하게 하였다. 동시에 고구려는 이 교 통로를 이용하여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가능해졌던 관계로, 371년에는 신라 로 하여금 조공을 바치게 하는 한편, 이후 양국간의 관계로 宗主 臣屬의 관계로까지 발 전하게 되었다.88) 4세기 후반부터 고구려는 기후가 온난하여 농경에 적합할 뿐 아니라, 인구조밀 지역인 한반도 중남부 지역으로의 진출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와 관련해 고구려는 평양성을 축으 로 한 대규모 군대의 이동과 물자의 輸送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광활한 남진 교통로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것을 암시해 주는 자료가 광개토왕릉비문 이다. 광개토왕은 영락 6년인 396년에 宿敵인 백제에 대한 정벌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 다. 여기에는 첩보전과 기만술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감행하기 어려운 의표를 찌르는 水軍 작전이 주효하였다고 본다. 광개토왕릉비문 에 의하면 광개토왕이 직접 수군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일제히 상륙하여 백제 왕성을 포위 함락시켜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내 었다. 이는 속전속결에 의한 기습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하겠다. 즉, 요로마다 포진 하고 있는 성곽을 일일이 깨뜨리면서 진격해야만 하는 육로공격은 시간이 많이 소요될 뿐 아니라 부담이 실로 큰 전투가 아닐 수 없었다. 반면 뱃길을 이용한 수군작전은 신속 한 기동력을 바탕으로, 예상치 못한 그 배후의 심장부인 백제 왕성을 강타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백제의 지형지세와 방어망에 대한 사전 탐지가 이루어 졌어야만 가능하다. 역시 첩보전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생각하기 어렵다. 게다가 欺瞞戰 까지 복합되었으리라고 본다. 고구려의 소단위 부대가 정면 돌파식으로 육로 공격을 시도 하여 백제 군대의 주력을 북쪽 변경에 묶어둔 다음, 虛를 찌르는 수군작전이 전격적으로 단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89) 이때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노획한 58성의 소재지는 경기만 일부 지역도 포함하면서 대부분 남한강 상류 지역으로 비정할 수 있다.90) 86) 서울大學校博物館, 鰲山里遺蹟 (1984) p.66 69. 任孝宰, 江原道 鰲山里 新石器 遺蹟의 發掘成果와 課題 ( 古文化 34, 1989) pp.125~129. 87) 梅原末治, 晋率善穢伯長銅印 ( 考古美術 8-1, 1967) pp.263~264. 88) 李道學, 高句麗의 洛東江流域 進出과 新羅 伽倻經營 ( 國學硏究 2, 1988) p.91. 89) 李道學, 광개토왕의 군대는 왜 강했는가 ( 꿈이 담긴 한국고대사 노트 상, 1996) pp.227~228. 90) 李道學, 앞의 논문(1988), pp.87~107. 한편 李仁哲은 阿旦城으로 비정되는 단양군 영춘면의 溫達城에 고구려성에 나타난다는 雉 가 있으므로, 百濟城이 아니라고 주장한다(李仁哲, 廣開土好太王碑 守墓人 烟戶條를 통해 본 고구려의 남방경영 ( 廣開土好太王碑硏究 100年, 1997, p.730). 그러나 雉 는 백제토기편
古代國家의 成長과 交通路 - 159 - 고구려가 396년에 백제로부터 할양받은 남한강 상류 지역은 신라와 가야경영을 위한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 즉, 고구려가 소백산맥 이남 지역으로의 진출 통로를 확보할 목적 으로 광활한 補給 輸送路인 그 이북의 충주와 단양, 제천을 비롯한 강원도 내륙 지역을 장악한 것으로 보겠다. 이와 연관된 전투가 영락 8년조의 帛愼土谷에서의 抄略 기사가 되겠다. 광개토왕릉비문 영락 8년조에 의하면 398년 고구려는 소단위 부대를 파견하여 백신토곡을 시찰하고 남녀 3백인을 잡아가지고 왔는데, 이로써 다시금 조공을 바치고 복 종하겠다고 한 내용이다. 여기서 백신의 위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영락 6년 백제 정벌의 여파로 이해하는 동시에 백신토곡을 백제와 인접한 한강 유역이나 강원 도 지방의 濊地로 간주하는 견해91)를 취한다면 이 기사의 성격은 드러난다. 즉, 고구려 가 소백산맥 이남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남한강 상류의 충청북도와 강원도 지역의 예인 거주 지역을 통과해야만 하는데, 반발의 소지가 큰 예인을 견제한다는 측면, 그러니 까 한반도 중심부를 관통하는 내륙 교통로의 안전을 점검하기 위한 일종의 무력시위이지 정복전쟁은 아닌 것이다.92) 그로부터 불과 2년 후 고구려는 신라 구원을 명분삼아 步騎 5萬 名의 대병력을 소백산맥을 넘어 낙동강 유역으로 출병시키는데, 광활한 장거리 교통 로의 개척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문제라고 하겠다.93) 이 성안에서 출토될 정도로 명백한 백제성인 온달성을 고구려가 점령한 후 增築한 것일 수 있 고, 또 雉 는 신라성인 三年山城이나 백제의 甕山城으로 비정되는 대전의 鷄足山城에도 나타 나고 있다. 그러므로 雉 의 存否를 가지고 성곽의 國籍을 논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로서, 氏 論調의 전반에서 확인되고 있듯이 아마도 특정인의 說을 부셔야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나온 무리수로 여겨진다. 또 氏는 永樂 6年條의 고구려 군대가 점령한 구간을 연천 포천 파주 인천을 잇는 線 以 南으로 내려오지 않았으며, 다만 광개토왕이 이끄는 소수 병력이 포천을 지나 漢江을 건너와 백제 왕성을 함락시키고 아신왕을 생포했으나, 退路가 걱정이 되어 항복만 받고는 백제군 포 위망을 뚫고 황급히 돌아온 것으로 상상하였다(李仁哲, 위의 논문, pp.735~736). 이러한 氏 의 주장은 마치 國王이 앞장선 特攻作戰에 의한 前代未聞의 어설픈 要人 人質劇을 연상시키는 데, 氏는 광개토왕이 用兵에 能했다( 三國史記 권25, 辰斯王 8年條) 는 기사를 酷信한 것 은 아닐까? 91) 浜田耕策, 高句麗廣開土王陵碑文の硏究 ( 古代朝鮮と日本, 1974) p.58. 王健群, 好太王碑硏究 (1984) p.170. 필자가 이 견해를 取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전쟁의 명분격인 전치문이 없다는 점에서, 영 락 8년조는 독립된 전쟁 기사라기 보다는 영락 6년조 백제 정벌 기사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 는 게 타당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92) 李道學, 高句麗의 洛東江流域 進出과 新羅 伽倻經營, p.92. 93) 李道學, 위의 논문, pp.92~93.
- 160 - 國史館論叢 第74輯 3. 육상과 수상 교통로의 연결점, 충주 지역 경영 국내성 도읍기의 고구려는 남진경영을 효율적으로 전개할 목적으로 別都를 설치하였다. 4세기 중반경에 백제경영을 비롯한 전체 남진경영을 총괄하기 위해 고구려는 평양성에 별 도를 설치하였다. 그런데 5세기에 접어들자 고구려는 평양성만으로는 한반도의 중심부까지 급속히 확대되는 남진 경영을 극대화시킬 수 없었다. 396년에 이미 고구려는 남한강 상류 지역까지 진출한 상황이었다. 400년의 出兵 이후 그 정치적 영향력과 영토는 신라 지역과 낙동강 하류까지 깊숙히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남한강 상류 지역을 교두보로 한 소백산맥 이남의 신라경영만을 전담할 또다른 별도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 결과 400~427년 사이 어느 때에 당시 고구려 수도였던 국내성과 같이 都城 의 의미가 내 포된 國原城이라는 행정지명을 忠州에 부여하여 이곳에 별도를 설치하게 되었다.94) 고구려 가 충주에 별도를 설치한 배경은 다음과 같은 정인지의 慶迎樓記 에서 시사받을 수 있다. 충주는 남방의 咽喉를 질려 막은 곳에 자리잡았다. 지역이 넓고 戶口가 많다. 이 때문에 公文書가 구름처럼 쌓이고 賓客이 모여들어 참으로 밝고 지혜로움이 남보다 뛰어난 人材가 아니면 그 번잡한 것을 다스려 낼 수가 없다 이 고을의 세워진 것이 가장 오래되어 三韓의 다투는 땅이 되었다 95) 실제 신라의 진흥왕이 충주에 國原小京을 설치한 바 있고 통일 후에는 5小京의 하나인 中原小京이 되었던 사실을 생각할 때 충주에 고구려의 별도가 설치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 점은 문화적인 측면은 물론이고96) 지리적인 측면에서 충주 는 교통의 要地라는 전략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소백산맥 남북로를 잇는 양대 교통 로인 계립령과 직접 통할 뿐 아니라 죽령과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충주는 이 러한 내륙 교통로를 다시금 남한강을 이용한 수운으로 연결시켜 주는 위치에 있다. 고려 의 12漕倉의 하나인 德興倉과 조선의 可興倉이 있던 충주는, 경상도 북부 지역과 충청북 도 전역에 걸친 세곡을 모았다가 남한강의 수운을 이용해서 개성 및 서울의 경창으로 운 반하는 역할을 맡은 바 있기 때문이다.97) 충주 지역에 대한 별도 설치와 더불어 고구려는 소백산맥 이남의 신라 지역을 경영하 94) 李道學, 永樂 6年 廣開土王의 南征과 國原城 ( 손보기박사 정년기념 한국사학논총, 1988) p.105. 95)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4, 忠州牧, 樓亭 條. 96) 李道學, 永樂 6年 廣開土王의 南征과 國原城, p.101. 97) 李道學, 위의 논문, p.101.
古代國家의 成長과 交通路 - 161 - 였다. 그 행정통치가 직접 미친 곳은 영주 봉화 예안 청송 청하 영해 영덕에 이르 는 구간이었다.98) 이들 구간은 고구려 군대의 주요한 남하 통로인 죽령의 동남 지역에 해당한다. 즉, 죽령을 통한 400년 고구려 군대의 남하로에 위치한 지역으로서, 군량미 조달이나 輸送 등과 관련하여 1次的으로 고구려와 관련을 맺게 된 것을 기화로, 점진적 으로는 이 지역을 발판으로 동해안 방면으로 영토를 넓혀 나간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고 구려의 남부 교통로는 평양성을 기점으로 할 때, 평양 곡산 원산 강릉 울진 청하 경주에 이르는 것과, 평양 수안 신계 안협 평강 춘천 원주 제천 충주 단양 영 주 임하 청송 영일만 경주에 이르는 교통로가 개척되었다. 427년 평양성천도 이후 고구려는 남진경영을 활기있게 추진해 가면서 도로망 또한 정 비 확대시켰다. 이러한 선상에서 평양을 軸으로 하여 남으로 이어지는 북 남 교통로의 확장을 가져왔다. 집안 혹은 평양에서 남쪽으로 뻗은 도로의 한 갈래는 평강의 분수령을 넘고 남쪽으로 충청도 지방을 지나 경상도 동북방의 여러 郡縣들을 연결하였다.99) 게다 가 475년 백제의 수도인 한성공략에 성공한 후 이곳에 南平壤城을, 그 후에는 황해도 재 령(지금의 신원)에 漢城을 설치하여 이곳을 중간거점으로 하는 동시에 각 지방 행정단위들 을 연결하면서 그 관하의 촌락들을 통제하여 중앙 집권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교통망을 사방으로 확대시켜 나갔다.100) 고구려는 한반도의 지형조건상 개척이 비교적 용이한 西北~東南 방향의 교통로에 대 한 일단의 완결을 지었는데, 국내성(집안) 의주 평양성 개성 남평양성(서울) 국원성 (충주) 죽령 영주 안동 의성 영천 경주에 이르는 路線이 되겠다. 東北~西南 방향 의 교통로는 옛 북옥저 방면에서 동해안을 타고 함흥 원산 추가령구조곡 서울 천안 아산만에 이르는 路線을 개척하였다. 그럼에 따라 한반도 全域을 거의 X字型으로 관 통하는 광대한 규모의 幹線道路網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러한 고구려의 남하 교통로는 戰線으로 군사력과 물자를 집중시킬 수 있는 교통로의 끊임없는 개척을 가져와 兩國 군 대가 대치한 최전방 군사기지로까지 연속되었다. 이는 554년 고구려 군대가 지금의 충 청남도 공주로 짐작되는 熊川城까지 진격한데서101) 잘 확인되어진다. 또, 고구려는 소 백산맥 이남의 신라 지역과 지금의 호남 지역으로 진출하는 요충지인 청주의 娘臂城을 공략하여 장악하였을 정도로102) 남진경영의 진척과 맞물려 남과 북을 잇는 교통로는 꾸 준히 확장되어 갔다. 98) 李道學, 高句麗의 洛東江流域 進出과 新羅 伽倻經營, pp.94~95. 99) 장국종, 앞의 논문, p.12. 100) 장국종, 위의 논문, p.14. 101) 三國史記 권19, 陽原王 10年條. 102) 三國史記 권4, 眞平王 51年條.
- 162 - 國史館論叢 第74輯 4. 수상 교통로의 확보 고구려가 그 이전에도 황해를 이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311년에 압록강 하구에 자리잡은 서안평을 장악한 후에 그 선박이 황해를 활발하게 누비게 된다. 요동반도 연안 에서 산동반도 연안으로 이어지는 고구려의 항해로는 남중국 연안과 그리고 한반도 서해 안 일대로까지 확대되었다. 이러한 선상에서 볼 때 396년에 광개토왕이 수군에 의한 백 제 왕성을 목표로 하는 대규모 군사작전을 감행할 수 있었던 배경이 풀리게 된다. 일단 造船術을 비롯하여 지리학과 水理學이 발전하였음을 생각하게 한다. 동시에 규모가 큰 선 박과 뛰어난 항해술을 보유하였음을 알려준다. 通典 에 의하면 지금의 압록강인 馬訾水 를 설명하면서 고구려에 큰 선박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103) 게다가 고구려 수군은 강성 하였는데, 광개토왕릉비문 영락 14년조의 帶方界 전투에서 보듯이 왜군을 궤멸시키는 혁혁한 전과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데 힘입어 고구려는 연안항로를 차단하여 백 제 개로왕이 한동안 北魏에 사신을 보내기 어렵게 하였다. 476년에 남중국의 劉宋에 보 낸 백제 선박이 고구려 선박의 방해로 되돌아 갈 정도였다. 고구려의 항해로 장악은 한 때 한반도의 최남단인 제주도 방면까지 미쳤다. 다음의 기 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데, 珂는 碼 를 가리키거니와104) 제주도로 비정되는 섭라에서 마노가 확인되기 때문이다.105) 正始 연간에 世宗이 東堂에서 고구려 사신 芮悉佛을 引見하니, 悉佛이 나아가 말하기를 高麗는 하늘과 같은 정성으로 여러 대에 걸쳐 정성을 다하여 땅에서 나거나 거두어들이는 것을 조공으로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황금은 부여에서 산출되고 珂는 涉羅에서 생산됩 니다. 지금 부여는 勿吉에게 쫒겨났고, 섭라는 백제에게 병합되었는데, 국왕인 臣 雲은 끊어 진 나라를 잇는다는 의리를 생각하여 모두 저희 영토로 옮겼습니다. 두 가지 물건을 王府에 올리지 못하는 것은 실은 두 도적들 때문입니다 106) 위의 기사는 고구려가 황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였음과, 육상교통로 못지 않게 수상 교 통로 개척에도 주력하여 거대한 水路를 확보한 사실을 알려준다. 즉, 고구려는 백제를 외 교적으로 고립시키는 동시에 종전에 백제의 영향권에 있던 島嶼 지역을 장악하여 공물을 징수하면서 얻어진 특산물을 대중국외교에 활용하였던 것이다. 103) 李道學, 광개토왕의 군대는 왜 강했는가, pp.231~232. 104) 大東韻府群玉 권6, 下平聲. 105) 大東韻府群玉 권11, 上聲 및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8, 濟州牧 土産 條. 106) 魏書 권100, 高句麗 條.
古代國家의 成長과 交通路 - 163 - 고구려는 수상 교통로를 크게 이용하였던 바, 육상전과 수상전을 배합하여 전투를 펼치기 도 하였다. 391년 고구려의 백제 북변 요새지인 關彌城에 대한 공격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관미성은 사방이 절벽이요 바닷물이 둘러져 있기 때문에 광개토왕이 군대를 일곱길로 나누어 공격한 지 20일만에야 함락시킨 성이다. 관미성의 위치에 관해서는 강화도 혹은 강화도 북편 의 교동도에 소재한 성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쳐지는 지금의 통일전망대 가 자리잡은 파주의 오두산성이나 예성강 중류 남쪽 기슭에 소재한 것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그 밖에 조선 세종대에 축성 논의가 있었던 옹진성 곁의 토성을 추가할 수 있다.107) 여하간 이러한 선상에서 고구려가 396년에 지금의 충주 지역을 장악한 후 당시 수도였던 國內城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 國原城이라는 행정지명을 부여하여 別都를 설치한 배경은, 소백산맥 이 남의 신라와 가야 지역을 경영하기 위해 대동강에서 서해연안과 한강 그리고 충주를 중간 거 점으로 하여 낙동강을 연결하는 거대한 전략수로를 확보하려고 한 것이다.108) 지금까지 살펴본 바, 고구려는 자국내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자의 보충을 위해 주변 지 역으로 관심을 돌리게 된 결과, 교역의 활성화와 정복전쟁을 촉진시켰다. 이는 교통로의 개척을 크게 진척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고구려의 초기 교통로는 요동 방면에서 북옥저 방면인 두만강 하류에 이르는 국토의 東西를 연결하는 도로와, 북부여 방면에서 국내성인 집안을 지나 평양성 혹은 동옥저 방면으로 미치는 南北 교통로가 개척되었다. 4세기 후 반에는 別都인 평양성을 거점으로 하여 원산만에 이르는 東西 교통로와, 동해안을 따라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 이르는 南北 교통로가 확보되면서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켜 나갔다. 이러한 선상에서 평양에서 충주를 중간 거점으로 하여 죽령을 넘어 경주에 이르 는 원대한 남진경영로가 개척되었다. 요컨대 교통로의 개척과 확대는 財富의 집중을 가져 왔고, 집권국가 체제의 확립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107) 옹진성은 성이 낮고 얕은 데다가 응암산이 동남쪽을 누르고 있어 적의 화살이 미칠 수가 있 고, 성 밖에서도 성 안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곁에 옛 토성 자리가 있는데 3면이 바다에 닿고 지세가 험해서 의지할 만합니다. 이곳에 성을 쌓는 것이 좋겠습니다( 세종실록 권55, 14년 정월 신묘일) 라는 기록이 있다. 옹진반도에 소재한 이 토성은 관미성의 지세에 대한 그 성은 사면이 절벽이요 바다가 둘러져 있다 는 묘사에 어긋나지 않는다. 게다가 이 토성은 인천 앞바다의 덕적도 부근에서 연평도와 백령도 연안을 지나 황해도 은율 앞바다에 소재한 椒島를 중간 기항지로 하여 올라 가는 老鐵山水道나, 황해연안을 따라 올라 가다가 椒島에서 꺽어져 산동반도 끝의 赤山으로 직통하는 적산항로라는 중국대륙과 통하는 양대 수로를 관장 할 수 있는 要鎭이었다. 그러므로 옹진반도 끝에 축조된 이 성곽이 海島는 아니면서도 바다까 지 통제할 수 있는 요진이요 軍港이었으므로 관미성일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李道學, 漢 城百濟의 歷史와 文化, 1995, pp.85~86). 108) 이러한 전략 통로는 그 길이를 크게 단축시키고 있는데, 이 통로에 해당되는 陸路인 嶺南大 路만 하더라도 총연장이 380Km로서 조선시대에는 漢陽과 東萊를 잇는 최단 코스였으며, 현 재의 京釜國道나 京釜線 鐵路보다 70~80Km나 거리가 짧다(崔永俊, 앞의 책, p.16)는 점에 서도 그 전략적 효과를 가늠해 볼 수 있다.
- 164 - 國史館論叢 第74輯 Ⅴ. 백제의 성장과 교통로 1. 북방 교통로의 개척 백제의 왕성이 소재한 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일대는 한강의 兩大 支流인 남한강과 북 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근접하였으며, 嶺西山地와 경기평야의 접촉부이다. 그리고 서울 지역은 한강과 임진강 그리고 예성강이 거의 하나의 地理區를 형성하였으며, 한반도의 북 부 지방과 남부 지방을 연결하는 漸移地帶로서 많은 陸路가 집중되며, 水路交通의 要地로 서 각 지역 산물이 집중된 교역 중심지였다.109) 이러한 지정학적 조건에서 백제가 集權國家를 성립시키기까지의 역사발전은 읍락단계 (1세기) 국읍단계(2~3세기 경) 국읍연맹단계(3세기 중엽 경) 부체제단계(4세기 중엽) 집권국가단계(4세기 후반)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110) 백제는 읍락과 국읍단계에서 2개의 남북 교통로에 크게 의존하였다. 원산에서 평강을 지나 경기도 북부 지역으로 이어지는 추가령구조곡과, 지금의 서울에서 개성 이북을 연결하는 청목령로가 되겠다. 전자의 경우 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기 기사에 등장하는 말갈로 표기된 동예의 백제 침공로이다. 물론 말갈과의 戰場으로서는 개성 방면으로 추정되는 靑木山도111) 포함되고 있는 만큼, 추가령구조곡만 이용되지는 않았다. 게다가 낙랑이 침공해 오기도 하였는데, 백제는 禿山 과 狗川에 柵을 설치하여 낙랑으로부터 오는 도로를 차단하였다.112) 109) 崔永俊, 앞의 책, pp.76~77. 110) 李道學, 백제 고대국가 연구 (1995) pp.131~146. 111)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 開城府(상), 山川 條. 112) 三國史記 권23, 溫祚王 11年條. 이 낙랑은 三國史記 권23, 溫祚王 13年條에 의하면 나라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서 자주 영토를 침범해 오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라고 하여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소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지금의 대동강 유역에 소재한 중국의 낙랑군을 염두에 둔다면 위치가 맞지 않는다. 백제의 북쪽에 낙랑군이 소재한다고 쓰여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는 삼국사기 에 등장하는 낙랑관계 기사가 되겠다. 백제본기에는 낙랑이 침입해 와 위례성을 불태우는 등 침공 기사가 보인다. 신라본기에도 낙랑이 신라 북쪽 변경을 침공한 기사가 있고 심지어는 그 수도인 경주까지 쳐들어 오기도 하였다. 경주를 침공 한 낙랑 군대가 경주의 북쪽 내인 알천에서 지금의 불국사와 석굴암이 자리잡은 토함산의 동 쪽 일대를 거쳐간 흔적이 확인되었다. 이것을 보아 낙랑 군대는 동해변을 이용하여 내려 왔음 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대동강 유역의 낙랑군일 가능성은 일단 희박해지는데, 고구 려의 호동왕자가 옥저에 놀러 갔다가 낙랑왕 최리를 만나고 있다. 이 옥저는 지금의 함흥평야 에 자리잡은 동옥저로 짐작되므로, 삼국사기 의 낙랑은 함경남도나 강원도 북부에 소재한 세 력으로 보인다. 이러한 위치는 나라의 동쪽에 낙랑이 있다 은 온조왕대의 기사와 크게 어긋나 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책계왕 7년(292)에 백제 군대가 樂浪西縣 즉, 낙랑 서쪽에 자리잡
古代國家의 成長과 交通路 - 165 - 그런데 백제는 말갈이나 낙랑과 시종 전투만 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주로 침 략자로만 나타나는 말갈이지만, 良馬 10필을 백제에 바쳤고 백제에서는 말갈사신을 우대 하여 보내기도 하였다.113) 그렇듯이 백제는 척박한 산간지대에 거주하는 말갈의 침공 배 경이기도 한 경제적 욕구를 수용하는 선에서 和好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또, 그러한 맥락에서 양자간에는 교역이 행하여졌을 것으로 믿어진다. 백제는 말갈을 통하여 바다표 범 가죽이나 물개, 혹은 海藻類를 비롯한 동해안의 해산물이나 과하마와 같은 말도 매입 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백제는 이렇게 매입한 물산을 마한의 맹주인 目支國에 헌상하는 형식을 통하여 연맹 내에서의 그 입지를 강화시켜 나갔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 와 낙랑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는 개성 이북을 연결하는 청목령로를 통하여 낙랑군의 통제가 느슨해진 틈을 타고 남하하는 舊古朝鮮系 주민들을114) 흡수하는 한편, 선진적인 문물도 섭취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2. 소금 통로의 확보 국읍연맹단계에서 백제는 水系를 개척하게 된다. 소금은 인간생활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 식품이었던 만큼 국가의 성장 또한 富의 요체가 되는 소금산지의 확보와 불가분의 관련을 맺었다.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백제의 경우에도 그것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따라서 백제의 영토팽창 과정에서 최우선적으로 지목한 복속 지역이 소금 생산과 관련한 서해안 일대였으리라고 간파된다. 백제가 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관내의 왕성을 기준으로 할 때 가장 가까운 서해안 일대를 개척하여 소금산지를 확보하였거니 와, 그것의 증산과 원활한 수송을 위한 통로개척에 각별히 주력하였으리라고 상상하기 는 어렵지 않다. 백제가 공급받았던 소금과 관련해 그 왕성인 몽촌토성을 기준으로 할 때, 인천에서 생 산된 소금은 경기만을 거슬러 올라가 한강수로를 이용하면 백제 왕성 구간으로 용이하게 운송될 수 있다. 혹은 육로를 이용하여 김포 지역까지 운송된 소금은 한강수로를 이용한 은 현을 습격하여 빼앗았다고 한다. 당시 낙랑군 밑의 황해도 지역에는 대방군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틈을 보이지 않는 이상 백제가 낙랑군과 직접적인 충돌을 빚기는 어려울 뿐 아니라, 낙랑군의 서쪽을 공격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이처럼 낙랑군과 구분되는 또 하나의 낙랑은 32년에 고구려에 멸망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여하간 그 존재가 확인되고 있으므로 樂浪郡 東部都尉의 殘影이 아닐까 생각된다(李道學, 漢城百濟의 歷史와 文化, pp.39~40). 113) 三國史記 권24, 古爾王 25年條. 114) 三國志 권30, 韓 條.
- 166 - 國史館論叢 第74輯 다면 손쉽게 백제 왕성 구역에 이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백제가 서해안 방면에 진출하 여 개척하였을 여러 소금산지 가운데서도 그 최고 지배층이 공급받았던 소금은, 한강수로 와도 연결이 가능한 인천 일원이 産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인천 에 거점을 두었다는 비류계세력과 서울 지역의 온조계세력을 연결시키고 있는 형제설화 가 반영하는115) 연맹결성은, 백제가 진출하여 가장 먼저 부딪쳤을 소금 생산이나 그 통 로의 확보와 관련지어 이해될 소지가 없지 않다. 백제의 왕성을 기준으로 해서 가장 근거리에 있는 서해안 지역은, 계양산 너머에 있는 지금의 인천시 서구 공촌동 일원이다. 공촌동 일원에서 채취된 소금은 백제 왕성으로 운 반되는 과정에서 먼저 계양산 서쪽 지역과 지금의 인천시 북구 계산동을 이어 주는 통로 인 장명이고개[景明峴] 를 넘어야만 한다. 이러한 소금 통로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는 방 어시설이 경인 지역에서 가장 높은 350m 고지에 테뫼식으로 축조된 계양산성인데, 한강 하구와 주변이 한눈에 들어오는 요충지이다. 해방 전까지만 하더라도 공촌동 지역에서 생 산된 소금은 계양산 밑의 장명이고개를 넘어 신정동토성 옆을 지나 서울로 운반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백제 때의 소금통로 또한 이같은 노정을 밟았으리라고 짐작되어진다. 실 제 장명이고개를 제외하고는 공촌동 지역과 서울로 이어지는 통로가 없었을 뿐 아니라, 이 통로를 사이에 두고 계양산성과 衆心城이 축조되어 있는 것도 그 비중을 일깨워 주고 있다.116) 결국 이 통로를 거쳐 신정동토성 구간으로 운송되어 온 소금은, 다시금 육로로 써 한강까지 수송되어 선편으로 지금의 강남구 삼성동토성 구간을 비롯하여 하남시 일원 까지 도달한 것으로 짐작된다. 장명이고개와 이어지는 서울시 양천구 신정동의 신트리 마을 야산(해발 82m)에는 둘레 약 540m 규모로 토성이 축조되어 있다.117) 신정동토성이 되겠는데, 북쪽으로는 한강과 연결될 뿐 아니라 동쪽으로는 안양천과도 근접하고 있어 일찍부터 강변생활권의 거점이 었던 것으로 보인다.118) 신정동토성은 게다가 인천시 서구 공촌동 지역과 시흥시 蘇來 방면의 소금길을 모두 장악하는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다. 백제는 인천 지역을 장악하여 얻어지는 소금을 교역의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백제가 소금을 공급할 수 있는 대상은 우선적으로 해안을 끼고 있지 못한 한반도 중부내륙 지역 가운데서도 水路를 배경으로 교역이 발달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북한강과 남한강수계 지 115) 이 설화는 당초 백제국과 미추홀 세력간의 연맹을 반영하고 있지만, 뒤에 인천 지역이 비류 계와 연관을 맺게 되었으므로, 인천 지역이 비류계의 故地 인양 문헌에 등장하게 된 것으로 해석된다. 116) 李道學, 伯濟國의 성장과 소금 交易網의 확보 ( 백제연구 23, 1992) p.13. 117) 韓宗燮, 위례성 백제사 (1994) p.150. 118) 신정동토성에 관해서는 李道學, 앞의 논문(1992), pp.11~12를 참조하기 바란다.
古代國家의 成長과 交通路 - 167 - 역들이 백제로부터의 직접적인 소금공급 대상이었으리라고 짐작된다. 이들 지역은 인천 일원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한강수로를 이용하여 육로보다 비교적 용이하게 공급받을 수 있는 유리한 조건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육상교통은 한반도의 남북을 이어주는 간선도로가 확보되어 가는 과정이었던 만큼, 소금과 같은 대규모 물자의 수송이 가능한 동서연결 통로의 존재는 취약한 형편이 었다. 게다가 육로수송에는 통행세의 부과와 같은 경제적 부담과 더불어 침탈과 같은 위 험성도 함께 고려되어야만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제는 자연 수로를 선호하게 되었을 터인데,119) 소금 교역권은 可航水路인 북한강 상류 지역의 춘천 방면과 남한강상류 지역 인 영월 방면까지 미쳤음은 의심할 나위 없다.120) 소금은 백제로부터 직접 공급받은 강변 지역에서 내륙 요지로, 여기서 다시금 벽지로 까지 먹이사슬식으로 해서 실핏줄처럼 뻗어 나갔을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대규모 유통망 의 형성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운송로가 개설되기 마련이고, 소금공급의 단계에 따라 정치적 우열관계도 연쇄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단계는 실핏줄마냥 복잡하 게 얽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체로 말한다면 피를 공급하고 생산하는 심장마냥 백제 가 자리하면서, 소금공급을 매개로 중부내륙 세력들을 점증적으로 예속시켜 나갔으리라고 본다. 한강을 대동맥으로 하여 공급되는 소금의 가격은 그 상류로 갈수록 상승하였던 만 큼121) 백제는 지리적 遠隔性을 뛰어넘어 중부내륙의 벽지세력들에까지도 통제력을 행사 하는 게 가능하였음을 암시해 준다. 이처럼 백제는 남 북한강의 내륙수로를 이용한 소금 공급을 통해 세력성장의 기본토대를 마련해 나간 것이다. 백제가 소금공급로로 이용한 남 북한강의 길이는 자그마치 한반도 전체 수로의 약 1/4에 이르는 규모였으므로122) 그 유역에 미치는 백제의 영향력을 헤아리기는 어렵지 않다. 요컨대 백제를 축으로 한 소금교역로의 확대는 자원의 지역적 재분배를 촉진시키는 역할, 이를테면 문물의 활발한 교류를 가져왔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한 만큼 한강을 중 심으로 한 동일 문화권 형성의 한 요인으로도 작용한 것 같다. 이는 일본의 大和政權이 소금통로를 개설하고 난 후 문화의 傳播路가 형성되어 문화의 지역성을 잃어버렸다는123) 지적을 통해서도 뒷받침되지 않을까 한다. 백제의 독점적인 소금교역의 이익은 경제적인 측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소금통로 또 119) 이 점은 고구려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여겨지는데, 美川王(乙弗)이 즉위 전에 船便을 이용하여 압록강을 따라 소금장사를 하던 데서 알 수 있다( 三國史記 권17, 美川王 즉위년조). 120) 擇里志 卜居總論, 江居條. 121) 崔永俊, 南漢江水運硏究 ( 地理學 35, 1987) p.76. 122) 朝鮮總督府, 朝鮮土木事業誌 (1928) pp.176~178. 123) 平島裕正, 鹽 (法政大學 出版局, 1990) p.106.
- 168 - 國史館論叢 第74輯 한 단순한 교역로에 그치지 않고 군사적으로 중요한 전략로가 되었던 만큼 소금교역망의 보호를 위한 關防施設을 한강 연변에 축조하였다. 남한강수계만 보더라도 양평으로부터 영월에 이르는 강변을 따라 많은 성곽들이 분포하고 있다. 이들 성곽은 水路 뿐 아니라 소금 荷役場인 渡津까지를 보호하는데 있었다.124) 백제는 이 밖에 안산을 비롯한 서해연안을 따라 계속 잠식해 가면서 소금산지의 독점 뿐 아니라 중국과의 교통로까지 장악하는 성과까지 올렸다. 그럼에 따라 백제는 노령산맥 이북의 마한제국이125) 개별적으로 누리고 있던 중국과의 교역창구에 대한 독점까지 가능 하게 되었다. 이것이 지금의 경기도 전역과 충청도 그리고 강원도 일부 지역에까지 직접 적인 무력의 행사없이, 백제가 비교적 용이하게 세력을 미칠 수 있었던 요인이라고 하겠 다. 백제의 세력확장 비결은 여기에서 찾을 수 있으며, 소금을 자체 조달할 수 없었던 중 부 내륙 지역에 대한 장악 배경은 이러한 선상에서 보아 크게 틀리지 않으리라고 본다. 요컨대 백제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 통합의 규모는, 소금통로를 통한 그 교역체계의 범위 에 의해서도 규정되어진다. 백제는 내륙수로를 통한 소금의 독점적인 공급과 병행하여 서해연안을 장악해 나갔다. 그 장악 방식은 전면적인 해안선 통제라기 보다는 對중국교역로, 그러니까 항구에 대한 지배라는 거점 지배 형태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굴곡이 많은 서해의 해안선을 모 두 통제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그 자체 의미가 없는 만큼, 경기도 화성군 남양이나 서 산 대천 군산과 같은 港口 위주의 장악을 시도하여 點在的 식민도시를 해안 요로마다 건설하였을 가능성을 제기해 준다. 즉, 해안선을 따른 點의 지배 형태라고 하겠다. 3. 광활한 동남아시아 海路의 개척 백제가 자리잡은 한반도의 서남해안 일대는 굴곡이 매우 많은 까닭에 육상교통은 불편 한 반면 도처에 港灣이 발달하여 이른 시기부터 해상교통은 편리하였다. 이러한 지정학적 조건을 이용하여 馬韓諸國은 중국대륙과 활발하게 교섭을 전개하였다. 마한제국의 일원인 124) 崔永俊, 앞의 논문(1987) pp.58~59. 이와 관련해 백제의 왕성이 소재한 지금의 서울 지역을 기준으로 하여, 그 윗쪽인 한강하구 지역의 경기도 고양군을 達乙省, 그리고 그 아래 쪽인 남한강 상류 지역의 충주를 未乙省이라 고 불렸던 점이 주목된다. 여기서 達乙省은 高烽 으로, 未乙省은 底烽 의 뜻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 지명은 한강 수계를 따라 형성된 봉수체계선상에서 달을성은 그 首點에, 미을성은 그 終點에 자리잡고 있는데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李道學, 고대 중세의 역사 ( 일산 새도시 개발지역 학술조사보고 2, 1992, pp.13~14). 125) 백제가 노령산맥 이남 즉 영산강 유역을 영토적으로 직접 장악한 시기는 5세기말로 간주한다 (李道學, 百濟의 交易網과 그 體系의 變遷, 韓國學報 63, 1991, pp.77~78).
古代國家의 成長과 交通路 - 169 - 백제의 왕성인 서울의 몽촌토성에는 西晋의 錢文磁器片이, 서울의 석촌동 고분에서는 東 晋의 靑磁와 배젓는 櫓가, 그리고 풍납동토성에서는 동진의 鐎斗가 출토되었다. 그 밖에 백제 영역이었던 강원도 원주와 충청남도 천안 등지에서도 중국제 자기와 초두가 확인된 바 있다. 이러한 물품들은 백제의 해상활동 능력을 반영해주고 있는데, 일본열도로의 진 출은 사족을 불허할 정도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126) 백제는 남중국에도 거점을 확보하였는데, 宋書 百濟 條의 晋平郡과 百濟郡 가운데 전자는 지금의 福建省 福州市 혹은 廣西壯族自治區內로, 후자 또한 廣西壯族自治區로 비 정되어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崔致遠이 지은 上大師侍中狀 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 시절에는 강한 병사가 백만 명이나 되어 남쪽으로는 吳越을 침범하였다 라고 한 구 절과, 신 구당서 에서 백제의 서쪽 경계를 越州 즉, 지금의 浙江省 紹興市 부근이라 한 것은 까닭 있음을 알겠다. 백제는 한반도의 서남해안 요동반도 발해만 산동반도 남경으로 이어지는 항로를 이용하였으나, 항해상 어려움이 따르기는 하지만 남양만에서 산동반도로 直航하거나 혹은 흑산반도를 거쳐 江淮 지방으로 가는 항로도 개척하였다. 그 밖에 백제는 오키나와를 기 항지로 하여 인도지나반도와 인도에 이르기까지 항로를 확대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미 륵불광사사적기 에 의하면 성왕대의 백제 승려인 謙益은 항로를 이용하여 中印度에 들어 가 불경을 얻어 귀국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서기 흠명 4년(543)조에 의하면 인도지나 남부의 메콩강 하류 지역에 있던 지금의 캄보디아인 扶南과 교역한 기사가 그것을 뒷받 침해 주고 있다. 또, 554년에 백제가 왜에 보낸 물품 가운데 羊毛를 주성분으로 하는 페 르시아 직물로서 북인도 지방에서 산출되는 탑등(Taptan)의 존재가 보이는 점에서도 입 증이 된다. 이 무렵 백제의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교역루트는, 제주도 북큐슈 오키나 와 대만 필리핀 군도 인도지나 반도 인도에 이르는 선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는 발달 한 항해술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문제라고 하겠다. 때문에 백제는 독점적인 동남아시아 교역으로써 對倭 관계의 정치적 주도권까지 여전 히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 백제는 왜와의 독자적 교섭을 시도한 동남아시아의 일 부 지역인 昆崙의 사신을 바다에 밀어 넣어 죽이기까지 하였다. 6세기 중반 백제 문화의 성격은 다음과 같은 자료에 잘 응결되어 있다. 즉, 일본 奈良市에 소재한 백제적인 요소 가 강한 후지노키(藤ノ木)고분의 부장품 가운데 남방 동물인 코끼리가 투조된 馬鞍具가 그것이다. 이 마안구야말로 중국 대륙과 한반도 일본열도 및 동남아시아 지역과 연결되 는 백제 문화의 국제성을 압축해 주는 물증이기 때문이다. 백제에는 신라 고구려 왜인 126) 李道學, 백제 고대국가 연구 (일지사, 1995) pp.178~182.
- 170 - 國史館論叢 第74輯 들 뿐 아니라 중국인까지 거주하고 있다 는 隋書 백제 조의 기록 또한 이러한 분위기를 잘 나타내준다.127) 部體制 단계의 백제는 남쪽 영역이 금강선이었다. 이 단계에서 백제의 교통로는 원주 방면으로 진출하는 嶺西山間路와, 천안을 분기점으로 하여 온양과 장항까지 이어지는 교 통로와, 천안에서 청주와 대전 방면으로 이어지는 것이 있었다. 천안시와 원주시에서 東 晋製 靑磁와 鐎斗가 출토될 수 있었던 배경은, 이들 지역은 백제가 호남과 영서 방면으로 진출하는 要路에 위치하고 있는 만큼 지역적 비중을 헤아린 결과 이들 호족에게 賜與한 것으로 생각되어진다.128) 4. 가야 지역 진출 통로의 개척 집권국가를 지향하는 369년, 백제는 마한과 가야 지역에 대한 경략을 단행하였다. 마 한과 가야 경략은 상호 별개의 사안이 아니라 한 戰役에서 있었던 것인데, 이 전쟁의 大 尾를 장식한 終場이 마한의 忱彌多禮였다. 침미다례는 지금의 해남으로 비정되므로, 백제 군대는 낙동강 유역에서 西進하여 이곳에 이른 것으로 보겠다. 그리고 백제와 왜와의 교 섭이 경상남도 창원의 탁순국을 매개로 한 것을 볼 때129) 가야 지역으로 진출하는 교통 로가 설정되었음을 생각하게 한다. 물론 해로의 존재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백제 大軍 은 지금의 大田 방면에서 추풍령을 넘어 낙동강 수계를 따라 남하하여 가야제국을 격파 한 후 계속 西進하여 지금의 섬진강 하류를 통과하여 한반도의 서남 모서리인 해남까지 진출한 것으로 보겠다.130) 백제가 특별히 해남 지역[忱彌多禮] 장악을 南征의 大尾로 삼 은 것은 한반도 서남 해안의 해로의 장악과 관련된 안전한 寄港地의 확보와 연관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해남 지역에는 강대한 세력이 성장해 있었을 뿐 아니라, 군곡리패총에서 新의 화폐인 화천이 출토되었을131) 정도로 대외교역의 요충지에 소재하고 있었기 때문이 다. 특히 낙랑군과 대방군이 소멸된 이후 기존의 삼한 영역에서 중원대륙과의 독점적인 교역을 확보한 백제로서는, 백제를 축으로 하여 가야와 왜로 이어지는 거대한 海路를 통 하여 財富의 집중을 기하는 동시에, 그 권력범위의 확대를 기하고자 한 것이다. 4세기 후반 백제는 기본적 생존자원에 대한 생산수단인 저수지와 같은 대대적인 수리 시설의 축조를 단행하였다. 그럼에 따라 확보되는 물적자산은 백제가 군사 경제적으로 127) 李道學, 백제 고대국가 연구, pp.111~112 백제장군 흑치상지 평전 (1996) pp.41~52. 128) 李道學, 백제 고대국가 연구, pp.220~221. 129) 金泰植, 加耶聯盟史 (1993) p.186. 130) 李道學, 백제 고대국가 연구, p.142. 131) 木浦大學校 博物館, 海南 郡谷里 貝塚 I(1987) p.63.
古代國家의 成長과 交通路 - 171 - 중요하다고 판단한 지방의 거점에 축성한 檐魯132)를 통하여 중앙으로 조달되었을 것이 다. 여기에는 자연 물량이 늘어나는 공납 수취물의 원활한 운송을 위한 도로망의 확장을 가져오게 마련이었다. 백제 영역 내의 간선 도로망은 이미 소금공급을 통하여 개척되어 나갔었겠지만, 담로체제의 실시에 따라 도로망은 정비되었을 것이며 나아가 郵驛의 설치 도 생각하게 한다. 결국 담로는 官道 라고 하는 전국적인 도로망의 확장 정비와 짝을 이 루면서 거점 지역에 축조된 官城 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백제의 수리권 장악은 담로를 거점으로 하여 중앙 권력의 범위를 확대시키는 요체인 동시에 지방세력을 통제하는 관건 으로도 유효하게 기능하였다. 475년 백제는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지금의 공주로 천도함에 따라 영산강 유역으로의 진출에 박차를 가하였고, 5세기말 이 지역을 영토로 편제시켰다.133) 이러한 영토 편제는 백제가 노령산맥 이남으로 본격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대규모 교통로의 확보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백제의 남방 진출 통로는 익산 전주 임실 남원 곡성 순천으로 이 어지는 통로와, 익산 김제 부안 고창 영광 함평 나주 영암 강진 해남, 그리고 김 제에서 分岐하여 정읍 장성 광주 화순 보성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개척되었다고 보겠다. 요컨대 백제의 교통로는 소금 교역망의 형성을 통하여 조성되었는데, 즉 한반도 중부 내륙 수계인 한강 임진강 예성강을 따라 物流의 이동이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거대한 水路의 개척에 따라 중원대륙과 일본열도를 잇는 교역체계의 확립을 가져왔으며, 나아가 그것을 인도지나 반도까지 확대시켰다. 육상교통로의 경우는 지금의 서울을 중심으로 北 으로는 개성 이북과 원산만, 동남쪽으로는 춘천을, 南으로는 금강 유역에서 4세기 후반에 는 古阜까지 미쳤다. 또, 加耶通路도 개척되었다. 5세기말 이후 백제는 노령산맥 이남으 로의 교통로를 확대시켰는데, 남원을 지나 경상남도 咸陽의 八良峴을 넘는 東쪽 가야로의 진출로 또한 활발하게 개척되었다.134) Ⅵ. 신라의 성장과 교통로 경주분지에서 국가를 형성한 신라는 진한연맹내의 諸國들과 교류를 가졌고, 급기야 정 복해 나갔는데, 이러한 맥락에서 교통로를 설정하는 게 가능하다. 신라는 일찍부터 단층 132) 李道學, 漢城後期의 百濟王權과 支配體制의 整備 ( 百濟論叢 2, 1990) p.308. 133) 李道學, 백제 고대국가 연구, pp.142~143. 134)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1, 咸陽郡 形勝 條에 의하면, 팔량현 위에는 신라때의 陣터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기원은 백제가 이곳에 진출하였을 때까지 소급할 수 있으며, 백제는 중요한 교통로상에 군사적 방어망을 구축하였음을 시사해준다.
- 172 - 國史館論叢 第74輯 구조선이 발달한 형산강 지구대를 따라 영일만으로 나와 동해안을 따라 북상해 갔다. 동 옥저에서 사신이 와서 良馬 20필을 바쳤다 135)는 기사와 지금의 함경남도 영흥에 소재한 華麗縣과 안변에 소재한 不耐縣136) 주민의 신라 北境 침공137) 기사를 놓고 보더라도 신 라는 동해안로를 따라 지금의 함경남도 해안 지역과 교류를 가졌음을 알게 된다. 신라는 강릉선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는데, 이는 北溟人이 밭을 갈다가 濊王의 印을 얻어 王에게 바쳤다 138)라고 한데서 알 수 있듯이 지금의 강원도 강릉 지역과 신라 수도인 경 주를 잇는 동해안로의 개척과, 동해안로를 통한 교역으로써 물산의 경주 집중을 시사하고 있다. 신라는 동해안로를 통하여 소금과 해산물을 확보하는 동시에, 강릉 이북에 소재한 말갈로 등장하는 東濊139)와도 교역을 행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정복활동은 이후 낙동강 중 상류 지역에 소재한 감문국이니 사벌국 소문국과 같은 진한제국 全域에 미치게 되었다. 그럼에 따라 신라는 소백산맥 남북을 연결하는 통 로의 장악에 나서게 되었을 것인데, 예전부터 物流의 이동이 있어서 개척이 용이할 뿐 아 니라 힘을 적게 들이고 넘을 수 있는 고개를 찾았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계 립령로와 죽령로가 개통되고 있다. 立嶺路를 개통시켰다.140) 봄 3월에 竹嶺을 개통하였다.141) 雞 여기서 계립령로는 삼국사기 에 떠날 때 맹세하기를 계립현과 죽령 서쪽의 땅을 우 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 하고 나가 신라 군사들과 阿旦城 아래서 싸우 다가 流矢에 맞아 넘어져서 죽었다 142), 麻木峴과 竹嶺은 본시 우리나라 땅이다 143)라고 하여 보이는데, 현재의 충주시 상모면에서 미륵대원을 지나면 하늘재라는 고개가 나타난 다. 이 고개가 계립령으로서 충주에서 수안보를 지나 문경새재의 동편으로 이어지는 교통 로이다. 죽령은 경상북도 풍기 북쪽에 소재한 고개가 되겠다. 신라가 삼국사기 기록처럼 2세기 중엽에 이들 고개를 개통시켰는지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이러한 교통로가 존재하였을 가능성은 제기되는데, 고조선 유민의 소 135) 三國史記 권1, 赫居世居西干 53年條. 136) 李丙燾, 韓國史 古代篇(1959) p.161. 137) 三國史記 권1, 儒理尼師今 17年條. 138) 三國史記 권1, 南解次次雄 16年條. 139) 三國史記 권5, 太宗武烈王 5年條. 140) 三國史記 권2, 阿達羅尼師今 3年條. 141) 三國史記 권2, 阿達羅尼師今 5年條. 142) 三國史記 권45, 溫達傳. 143) 三國史記 권41, 金庾信傳.
古代國家의 成長과 交通路 - 173 - 백산맥 이남으로의 移住는 문헌이나 고고학적으로 뒷받침되어 진다고 할 때144) 그 통로 는 계립령로와 죽령로였음은 거의 분명하다고 본다. 그렇다고 할 때 신라의 이들 교통로 에 대한 개통 기사는 진한연맹의 맹주로서 嶺路開拓에 힘을 기울였음을 뜻한다. 또 이들 고개를 장악하여 일종의 통행세를 거두어들이는 동시에 物流의 이동을 통제하였을 가능 성을 제기해 준다. 신라는 종전까지 낙동강 하구에 소재한 김해의 금관가야가 장악하다시피 하였던 소백 산맥 중심부를 관통하는 낙동강 水路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럼에 따라 소백산맥을 넘어 오는 물류는 낙동강 수로를 통해 신속하게 경남 해변 지역까지 미치는 게 가능하였다. 더 욱이 5세기대부터 고구려 군대가 신라에 진출하게 됨에 따라 도로망이 정비 확충되어 나갔다. 특히 400년에 5만에 달하는 고구려군 보병과 기병의 대규모 이동은, 마차와 같 은 수레의 운송을 가능하게 하도록 그것을 촉진시켰다고 보겠다. 이러한 선상에서 신라는 487년에 처음으로 사방에 郵驛을 설치하고 所司에게 명하여 官道를 수리하게 하였다 145)라고 하였듯이, 전국적인 도로망의 확보와 그에 짝하여 국가 의 법령과 그에 부수된 인적요원이 일사불란하면서 신속하게 지방에 하달 파견될 수 있 게끔 하였다. 逆으로 정비된 官道를 통하여 지방으로부터의 공물이 속속 올라오는 동시에 인적자원의 신속한 진출이 가능하게 되었다. 신라는 관도를 따라 지방통치의 거점인 산성 을 축조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시킬 수 있었는데, 지방 말단의 촌락 가운데 山城이 축조되어 나갔다. 산성의 축조는 교통로의 개척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는데, 대규모 노 동력의 동원과 石材와 建築機資材의 운송에 필요한 牛馬와 수레의 통행이 가능한 村落에 는 縣城이 축조되어, 그 주변의 촌락을 지배하게 하였던 것이다. 5세기대 이후 신라는 계립령로 방비에 박차를 가하였는데, 지금의 문경에서 계립령로 에 이르는 곳곳에 자연지세의 險固함을 이용하여 布陣한 성곽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문경시내에는 깍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소재한 麻姑城 부근을 지나 상주 방면으로 진출 하기 위해서는 문경 시내 남쪽 9Km에 소재한 水崖石路인 串岬遷을 지나야만 한다. 문경 지역 3大 險阻處의 하나인 관갑천은 묶어놓은 듯한 兩 山峽의 가운데를 관류하는 하천인 데, 이 하천 옆 벼랑에는 3Km에 이르는 棧道가 나 있다. 더욱이 관갑천 兩岸은 신라가 축조한 姑母城과 姑父城이 應對하고 있는 天險의 요충지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의 險絶함 은 방비한 시설은 函谷關같이 壯하고 가기 힘들기는 蜀道처럼 險하다 146)라고 한데서 잘 144) 三國史記 권1, 赫居世居西干 卽位年條. 경주 조양동 토광묘와 그 유구에서 출토된 前漢鏡 등이 대동강 유역과의 연관성을 방증해 주고 있다. 145) 三國史記 권3, 照知麻立干 9年條. 146)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9, 聞慶縣 形勝 條.
- 174 - 國史館論叢 第74輯 나타나고 있다. 후일 고려 태조가 南征할 때 이곳에서 길을 잃어 苦戰했다는 俗傳과 懲 毖錄 을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147) 요컨대 신라는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여 계립령로 주변에 성곽을 축조하였을 뿐 아니라, 소백산맥 이북과의 교섭은 물론이고, 고구려 세력 의 남진을 저지해 나갔던 것이다. 신라가 소백산맥을 완점하게 되는 6세기 중반경에는 소백산맥 동서 교통로가 활성화 된다. 신라는 470년에 三年山城을 축조하여 금강 상류와 남한강 지류인 達川 상류 지역 으로 진출할 수 있는 橋頭堡格인 보은과148) 추풍령 방면을 통하여 백제와의 물류가 이루 어지게 하였고, 합천과 함양 그리고 남원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통해서 가야 지역을 비롯 하여 백제와의 교류를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와 동시에 신라는 소백산맥 북쪽을 넘어 한 강 유역을 점유하게 되는데, 지금의 서울 일원에 新州를 설치함에 따라 신정복지와 수도 인 경주간에는 물류의 증대가 이루어져 남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대규모 水路가 運送路로 서 활기를 띠게 되었던 관계로, 赤城路의 개척을 통해 소백산맥 남북 교통로의 물류 증대 를 보완하고자 했다. 적성로는 지금의 예천군 용문면과 문경시 산북면에서 시작하여 문경시 동로면 간송리 에서 합쳐져 북쪽으로 이어지다가 문경시 동로면 赤城里에서 分岐되어 서쪽으로는 계립 령로에 이르는 교통로이다. 이 도로는 북쪽으로는 단양 赤城에 이르게 되는데, 적성리의 벌재 라는 고개만 넘으면 거의 평지에 가까운 도로가 단양까지 계속된다. 이 적성로는 당 초 예천 지역 수장의 관할이었으나 6세기 중반 신라 군대가 소백산맥을 넘어 단양 적성 으로 진출할 때 이용한 도로로 추정될 정도로 전략적 비중이 만만치 않았고, 실제 그 路 邊에는 성곽들이 곳곳에 축조되어 있다.149) 그 밖에 소백산맥 남북을 잇는 交通路로서 低首嶺 島嶺 伊火嶺을 넘는 小路들이 개척된 것으로 보인다.150) 신라의 교통로 확장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6세기 중반 이후 신라가 국방상의 요충 지에 주둔시킨 6停이라는 軍團의 성격이다. 停이라는 용어는 중국의 秦代에 交通驛傳에 설치되었던 亭151)을 연상시키는데, 신라의 6停 또한 수도인 경주와 지방으로 진출하는 중간교통 거점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느낌을 준다. 이는 6停의 주둔지를 통해서 유추되는 것인데, 그 면면은 上州停(상주 김천 선산) 貴幢 新州停(하남시) 比列忽停(안 147) 李道學, 高句麗의 洛東江流域 進出과 新羅 伽倻經營, pp.98~99. 148) 崔永俊, 앞의 책, p.82. 149) 李道學, 新羅의 北進經略에 관한 新考察, pp.30~32. 벌재 곧 赤城 이라는 지명은, 고구려가 丹陽을 지배하던 때의 행정지명인 赤山 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겠다. 그러므로 赤山 과 관련한 類似地名들이 그 인근에 散在하게 되었는데, 단양으로의 진입로인 벌재[赤城] 또한 赤城境域內로의 進入路임을 뜻하는 지명이라고 하겠다. 150) 이에 관한 상세한 조사는 朴相佾, 앞의 논문, pp.151~207을 참고하기 바란다. 151) 王綿厚 李健才, 앞의 책, p.19.
古代國家의 成長과 交通路 - 175 변) 悉直停(삼척) 下州停(창녕 합천 경산)이 된다.152) 이들 停은 6세기 중반 이후 신라 의 수도인 경주를 축으로 하여 전국으로 뻗어나간 幹線道路上에 위치하고 있다. 즉, 상주 정은 경주 김천 선산 상주에서 청주 방면으로, 신주정은 경주 영천 의성 영주 죽 령 충주 하남 개성 방면으로, 비례홀정은 경주 삼척 강릉 고성 안변 함흥 방면으 로, 실직정은 비례홀정과 마찬가지로 동해안에 소재하고 있으며, 하주정은 경주 양산 창녕 합천 남원 방면으로 뻗어가는 교통로상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선상에서 통일신라는 경주를 축으로 한 北海通 鹽池通 東海通 海南通 北傜 通과 같은 5개의 간선도로가 확립되었는데, 5通은 5街道의 의미로서 수도에서 각 지역으 로 그것도 9州의 州治와 5小京으로 통하는 중요한 軍事 行政道路로 정비되었다.153) Ⅶ. 맺음말 교통 시설과 그 수단 險山峻嶺이 많은 만주와 한반도라는 지형에서의 교통로 개척은, 큰 산맥마다 嶺路를 뚫고 도로를 개척하는 것이었던 만큼, 자연을 극복하면서 전개되는 국가적인 대규모 토목 공사였다. 그러한 사업에 있어서 천연의 장애물 가운데 하나가 河川이었다. 육상교통의 장애물인 하천을 건너기 위해서는 나룻배를 이용하기 마련이고, 그와 더불어 渡津이 곳곳 에 생겨나게 되었다. 그런데 나룻배를 이용한다는 것은 운송량에 있어서 일정한 제약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그 속도마저 육로운송보다는 더디어 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제 약을 극복하기 위해 곳곳에 橋梁이 가설되었는데, 498년에 백제의 수도인 웅진성에 금강 의 남북을 연결해 주는 熊津橋가 가설되었음154)이 문헌에 보인다. 최근 충청남도 부여의 능산리 절터에서 567년경에 축조된 木橋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교량은 백제에만 국한되지 않는 것으로서,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에도 나타나고 있다. 즉, 413년에 平壤 州에 大橋가 완공되었다155)고 하였거니와, 대동강의 청호동쪽 기슭에서 발견된 고구려 때 木橋 遺構가 그것이다.156) 고구려의 별도였던 황해도 재령(현재의 신원군)의 도시 유적 152) 末松保和, 新羅史の諸問題 (1954) pp.323~347. 153) 井上秀雄, 新羅史基礎硏究 (1974) p.400. 그런데 氏의 개별적인 교통로 지목에는 誤謬가 적지 않다고 본다. 가령 氏가 北海通으로 지목했던 경주에서 安邊으로 이어지는 海岸路는 東 海通이 타당하다. 氏는 경주에서 충주를 지나 황주로 이어지는 통로를 鹽池通으로 지목하였지 만 北傜通이 타당하다. 또 北傜通으로 지목했던 경주에서 남양에 이르는 통로는 北海通으로, 海南通으로 지목했던 경주에서 남원과 나주로 이어지는 통로는 鹽池通이 타당하다. 마지막으 로 氏가 東海通으로 지목했던 경주에서 晋州로 이어지는 통로는 海南通이 온당하다. 154) 三國史記 권26, 東城王 20年條. 155) 三國遺事 권1, 第十一 實聖王 條.
- 176 - 國史館論叢 第74輯 에서도 고구려 때의 石造橋梁 유구가 확인되었다.157) 신라의 왕성인 반월성 앞의 月精橋 유구 또한 발굴된 바 있다. 고구려는 국경지대로부터 종심 깊은 곳까지, 해안선에서부터 수도에 이르기까지 정연 한 체계를 갖추고 烽燧들을 조밀하게 배치하였다.158) 이는 삼국 모두에 해당되는 것으로 서, 방어상의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교통로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였던 통신 수단이었다. 교통로의 발전과 불가분의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은 수레의 보급이었다. 신라의 수레형 토기 뿐 아니라 三年山城 西門址에 남아있는 중심 거리가 1.66m인 수레바퀴 자국이 이 것을 시사하고 있다. 게다가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牛馬車 그 림은 운송 수단으로서 수레의 보편적인 이용을 의미하는 동시에, 道路 幅을 비롯하여 교 통망의 전국적인 정비와 확대를 뜻한다고 보겠다. 고대국가는 당초 연맹의 일원으로서 출발하였는데, 연맹내의 諸國間에는 이들을 횡적 으로 엮어주는 교통로가 상존하고 있었고, 이들 諸國의 교통로는 縱的으로는 盟主國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이러한 교통로는 정치적인 성격보다는 오히려 교역활동을 위한 통로로 써의 의미가 컸다. 그런데 연맹내 諸國間의 통합운동이 촉진됨에 따라 기왕의 교역기능을 담당했던 교통로는 정복활동의 촉진에 따라 軍事路로 크게 확대되었다. 즉, 영토확장을 위한 군대의 이동과 그에 수반되는 물자의 수송을 위해 交通網의 정비와 확대를 가져왔 다. 이것은 나아가 지방에 대한 효과적인 통치의 수단으로서 십분이용되었던 바 중앙집권 국가 확립의 요체로 작용하였다. 지방관으로서 道使라는 관직이159) 고구려와 신라에 공 히 보이고 있는 것은160) 도로망의 개척이 곧 지방에 대한 지배 수단이었음을 의미하는 유력한 증좌라고 하겠다. 이러한 교통망의 정비는 거대한 古墳이나 대규모 石築山城을 축 조할 수 있는 강력하고도 집권적인 정치세력의 태동과 불가분의 관련을 맺고 있다. 험준한 산지대를 개척하면서 뻗어가는 도로망과 관련하여 그 교통상의 요충지에는 거 점들이 형성되었고, 거점을 軸으로 한 행정단위들이 조성되어 갔다. 지방통치 거점들은 物流의 수송과 정보교환을 촉진하는 교통망의 집중도에 따라 상 하급 행정단위로 편제 되어 갔다. 또, 이 부근에는 軍團이 주둔한 관계로 기왕의 상업적 기반 위에 군사적 중심 156) 안병찬, 새로 발굴한 고구려의 다리 ( 력사과학 1982-3) pp.46~48. 157) 최창빈, 신원에서 고구려 시기의 큰 도시유적 발견 ( 력사과학 1985-4) p.47. 158) 김정현, 고구려의 봉수체계에 대하여 ( 력사과학 1978-3) pp.30~33. 159) 못뚝의 우두머리 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堤上 의 경우도 비슷한 사례에 해당될 소지가 큰 데(李道學, 백제 고대국가 연구, p.175), 그렇다면 고대국가는 기본적 생존자원의 생산수단 인 저수지의 지배권과 짝하여 物流의 移動手段인 道路를 장악함으로써 집권체제를 확립한 것 으로 보겠다. 160) 武田幸男, 高句麗史と東アシ ア (1989) pp.329~330.
古代國家의 成長과 交通路 - 177 - 지로서의 성격마저 띠게 되었다. 교통망의 정비는 전국적인 도로망에 대한 郵驛制의 실시로서 일단의 완결을 보게 된 다. 신라는 487년에 우역제가 실시되었는데, 고구려의 경우는 이보다 훨씬 이전에 시행 되었으리라고 본다. 669년(總章 2)에 唐將 李勣이 勅命을 받들어 작성한 目錄에 의하면 평양에서 이곳(국내)까지는 17驛이다 161)라고 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불완전한 문구이기는 하지만 이것을 놓고 볼 때, 정비된 교통망의 확보를 짐작하게 하는 우역제의 실시를 생각하게 한다. 陸上交通路의 확대 정비와 짝하여 造船術의 발전에 따라 水上交通路 또한 크게 확대 되어 갔다. 수상교통로의 확대는 교역권의 광역화를 촉진시키는 요인이 되었고, 그럼으로 써 중앙으로 집중되어지는 珍物과 財富는 권력의 집권화를 크게 앞당겨 주었다. 이와 관 련해 水路를 관장하는 관부가 설치되었는데, 신라의 船部162)와 一名 海干이라고 불리었 던 波珍粲이 그러한 비중을 시사해 준다. 이상과 같이 하여 고대국가 성장의 한 요체로서 교통로와 그것의 확대가 지닌 의미를 살펴 보았다. 그리고 이와 짝하여 이루어진 교통수단의 발전에 대한 체계적 연구의 필요 를 절감하면서 본고를 맺는다. 161) 三國史記 권37, 雜志(地理 4), 高句麗 條. 162) 三國史記 권7, 文武王 18年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