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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준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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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민주화운동 오승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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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목 차 제1장 머리말 06 제2장 4 19혁명 Ⅰ. 들어가는 말 Ⅱ. 제1단계 반독재민주화투쟁의 시기 1. 4월 19일 이전 상황 2. 반독재민주화투쟁의 폭발(4월19일~4월26일) 1) 광주지역 2) 전남지역 Ⅲ. 제2단계 사회민주화 및 민족통일운동의 시기 1. 진보세력과 7 29선거 2. 청년운동: 통일민주청년동맹 전남도맹과 전남대 민통련 3. 민족통일운동: 민족자주통일협의회 전남협의회 Ⅳ. 광주 전남지역의 4월 혁명: 유산( 流 産 ) 혹은 미완( 未 完 )? 45 Ⅴ. 맺음말 49 제3장 한일회담반대운동 56 Ⅰ. 들어가는 말 56 Ⅱ. 한일회담의 전개과정 1. 이승만 정부 하의 한일회담 2. 장면정부 하의 한일회담 3. 박정희 정부 하의 한일회담 4. 한일회담의 성격 Ⅲ. 한일회담 반대운동 1. 한일회담반대운동의 전개 과정 2. 한일협정 비준반대운동 Ⅳ. 광주 전남지역의 한일회담 반대운동 년의 한일회담 반대운동 년 협정비준반대운동
6 Ⅴ.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대한 평가 1. 전국적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대한 평가 2. 광주 전남지역의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대한 평가 3. 한계 제4장 유신시대와 반유신운동 97 Ⅰ. 들어가는 말 97 Ⅱ. 유신체제의 형성 배경 98 Ⅲ. 유신체제의 형성과정 104 Ⅳ. 유신체제의 특징: 대통령 1인지배의 제도화와 긴급조치 106 Ⅴ. 1970년대의 사회운동과 반유신운동 112 Ⅵ. 유신시대 광주 전남의 민주화운동 1. 함성지 사건 2.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3. 침체기의 학생운동들 4.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 5. 전남대 학생상담지도관실 방화사건 Ⅶ. 맺음말: 유신시대 지역 민주화운동 평가 139 제5장 1987년 민주화운동 141 Ⅰ. 들어가는 말 141 Ⅱ. 6월항쟁의 전개과정과 의미 1. 6월항쟁의 전개과정 2. 6월항쟁의 주도세력 3. 6월항쟁의 평가와 의미 Ⅲ. 광주지역의 6월항쟁 1. 6월항쟁의 배경: 대중운동의 성장
7 2. 광주지역의 6월항쟁 173 Ⅳ. 전남지역의 6월항쟁 1. 목포 2. 순천 3. 여수 4. 기타 지역 5. 전남지역 항쟁의 특징 Ⅴ. 맺음말 214 제6장 91년 5월투쟁 218 Ⅰ. 들어가는 말 218 Ⅱ. 91년 5월투쟁의 전개과정 1. 투쟁의 개시 및 확산기(4월 26일-5월 4일) 2. 투쟁의 고양기(5월 9일-5월 18일) 3. 투쟁의 퇴조기(5월 25일-6월 29일) 4. 91년 5월투쟁 소결 Ⅲ. 광주전남의 91년 5월투쟁 1. 광주에서의 91년 5월투쟁: 박승희 분신 2. 운암동 투쟁 3. 윤용하와 김철수, 정상순의 분신 Ⅳ. 전남에서의 1991년 5월투쟁 237 Ⅴ. 91년 5월투쟁 평가 1. 91년 5월투쟁 특징 2. 91년 5월투쟁에 대한 평가 Ⅵ. 맺음말 248 제7장 민주화 이후 시대의 민주화운동: 결론을 대신하여 257 참고문헌 261
8 제1장 머리말 정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가 이제는 불가역(irreversible)의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에 대해 이견을 제시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1987년 민주화 선언 이후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제도화를 통한 민주주의 공고화 과정을 지속적으로 거쳤고,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도 경험했다. 물론 민주주의가 확립되었다는 것과 확립된 민주주의에 만족한다는 것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문제다. 권위주의에는 싱가포르의 연성권위주의에서 유신체제와 같은 초권위주의가 있듯이, 민주주의에도 다양한 층위의 민주주의가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하고 있다. 최근에는 민주주의 체제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민주주의의 품질 (quality)을 통해 설명하려는 이론적 시도가 있다. 정치체제의 범주를 억압성이나 민주성이라는 단순한 준거로 더 억압적인 정치체제 혹은 덜 억압적인 정치체제로 구분하거나, 더 민주적인 정치체제 혹은 덜 민주적인 정치체제 등과 같이 구분하는 것보다는 정치체제의 품질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정치체제를 구분하려는 시도에 대한 공감대가 넓어지고 있다. 즉 민주주의의 제도화와 실천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품질 높은 민주주의와 제도화는 진전되었지만 제도 내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적 실천이 제도디자인의 의도와 일치하지 않는 품질 낮은 민주주의 등으로 구분하여 각 체제의 특성을 설명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정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의 불가역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존재하지만 민주주의는 고정물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생물과 같다. 다양한 사회세력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모양이 조금씩 변하고 상태도 달라지는 유기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민주화가 필요하고, 또 중요하다. 민주화란 일반적으로 정치체제 안에서 민주주의가 확대되는 과정이라고 할 때 민주주의의 민주화란 민주주의를 이념형에 가깝게 끊임없이 발전시키고 확대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불가역적이란 말과 민주주의의 민주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은 전혀 모순적이지 않다. 정치체제에서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방법은 선거와 의회를 통한 절차적 방식이 있고, 집회와 시위 등의 항의를 통한, 운동적 방식이 있다. 그런데 해당 사회가 권위주의적이고 억압적인 체제, 즉 체제 내에서 민주주의가 억압되고 왜곡되어 있을 때 절차적 방법(방식)을 통한 민주주의의 확대나 정상화는 기대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럴 경우 대개 운동적 방식, 거리의 정치와 같은 또 다른 수단을 통한 민주화가 필요하고 효과적이다. 과거 우리 정치체제의 진화과정을 보더라도 전자의 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9 방식보다는 후자의 방식을 통해 정치체제 내에서 민주주의를 확대해왔다. 이 연구의 목적은 정치체제 내에서 민주주의를 확대해온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민주화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정치체제가 권위주의였던 관계로 제도적 방식의 민주화의 역사보다는 운동적 방식의 민주화, 체제 저항적 방식의 민주화운동의 역사가 논의의 중심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민주화운동이란 1964년 3월 24일 이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여 헌법이 지향하는 이념 및 가치의 실현과 민주헌정질서의 확립에 기여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 신장시킨 활동 이라고 정의함으로써 민주화운동을 매우 제한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동법 시행령에서 항거는 직접 국가권력에 항거한 경우 뿐 아니라 국가권력이 학교 언론 노동등 사회 각 분야에서 발생한 민주화운동을 억압하는 과정에서 사용자나 기타의 자에 의하여 행하여진 폭력 등에 항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가권력의 통치에 항거한 경우 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민주화운동에 대한 법률적 보수적 정의이며, 정치적 적극적으로 해석할 경우에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정부 수립 이후 정치체제 내의 민주주의, 보다 구체적으로는 우리 헌법이 명시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를 문란케 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통치와 정치적 행위에 저항했던 모든 정치적 실천은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리고 민주화운동의 출발점도 위 법이 규정하고 있는 1964년 3월 24일, 그러니까 한일회담반대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3 24시위 부터가 아니더라도 이미 1995년 시행된 <국가유공자등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에 따라 4.19의거 가 4.19혁명 으로 전환됐으며 4.19의거희생자유족회 등 4.19관련 단체도 4.19혁명희생자유족회 등 혁명이란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4.19혁명도 민주화운동의 법률적 범주에 포함하더라도 학술적으로 전혀 문제가 될 부분은 없다. 다만, 민주화운동이란 헌정질서로부터 유래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현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의 활동은 민주화운동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고, 포함되어서도 안 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이 연구의 출발점은 정부 수립 후 최초의 대규모 사회운동이지 민주화운동이었던 4 19혁명으로 정리된다. 민주화운동 기술의 출발점을 언제부터로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다음 문제는 민주화운동의 종기( 終 期 ) 문제다. 민주화운동 관련자에 대한 법률적 판정을 담당했던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는 일부 예외사례에도 불구하고 통상적으로 노태우정부 시기까지를 권위주의정권으로 보고 해당 시기까지의 항거행위를 민주화운동 및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해왔다. 권위주의적 통치는 권위주의정권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형식논리를 따른 결과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도 동 위원회의 심의결과를 존중하여 민주화운동의 종기를 노태우정권 하의 항거 행위 혹은 활동으로 제한했다. 물론 이런 판단의 배경에는 또 다른 요인도 있다. 1992년 5월투쟁 이 종료된 이후 한국사회의 사회운동은 민주화운동 세력이 민주화운동 7
10 중심이 된 민주화운동보다는 시민운동이 사회운동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고, 민주화운동보다는 시민운동이라는 범주에서 김영삼 정부 이후의 사회운동을 기술하는 것이 민주화운동의 시각에서 기술하는 것보다 더 합리적일 것이다. 1) 따라서 이 연구는 노태우정부 하의 민주화운동까지, 보다 구체적으로는 1991년 5월투쟁까지의 민주화운동만을 다룰 것이다. 세 번째로 정리가 필요한 문제는 연구대상으로서의 지역 이다. 모든 지역연구에서 선결과제는 그 대상을 적절하게 호명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통칭 지역이라고 부르는 대상은 이론적 관점과 접근방법에 따라 지역, 지방, local area, region 등 여러 가지 개념이 있다. 언뜻 유사한 것 같지만 이는 지역의 단위, 규모, 성격 등을 어떻게 규정하고 분류하는가에 따라 그 의미와 사용되는 맥락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로컬(local)은 국가중심의 하부인 국지적 영역, 글로벌/로컬, 전체와 부분을 표현한다. 즉 물리적인 공간경계에서 추상적인 인식의 경계까지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다. 이러한 구분과 범주가 지역학 연구에서 개념화하는 지역과 어떻게 닮아있고,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나아가 중심화와 전지구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로컬을 어떻게 설정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의견도 다를 수 있다. 그렇지만 최근의 연구경향을 거칠게 요약하면, 로컬리티라고 하는 것이 그 둘레를 선으로 쉽게 경계를 그릴 수 있는 그런 범역이 아니라고 보는 주장이 더 힘을 얻고 있다. 기본적으로 로컬리티라는 것은 문제가 되는 어떤 특정한 사회적 프로세스, 또는 사회적 관계가 이루어지는 현장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 관계, 사회적 프로세스가 로컬리티마다 다르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한국에서 지방 이라고 할 때는 중앙에서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 다시 말해서 중앙에서 지방 을 바라보는 시선이 지방 에 내재화되어 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을 대상으로 한 연구들은 지역을 만들어가는 외부와의 권력관계 등을 간과한다. 그래서 지역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지역을 구속하는 권력의 연결망을 찾아보기 어렵다. 결국 물리적인 공간으로서의 지역에 대한 연구가 보다 큰 의미를 획득하려면 지역을 어떻게 담론화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고, 지역이라는 개념이 갖는 고유한 특성에 대한 적절한 이해도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지역연구가 모든 지역은 다 고유하다는 인식하에 지역의 고유한 특성을 기술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각 지역이 고유하다는 것은 인정하고, 그 고유한 것을 단순히 기술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론화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지역의 고유성이 어떻게 생성되느냐에 대해서도 전통적인 지역학 연구에서는 각 지역의 고유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 지역이 가지고 있는 상이한 자연 인문적 조건이 서로 결합되어 형성된다고 봤는데, 각 지역의 고유한 특성은 다른 지역과의 관련성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보다 큰 상위 스케일 속에서 각 하위 1) 시민운동 영역은 민주장정 100년 지역사회운동사 연구 의 또 다른 연구주제이기도 하다. 2) 서울 올라간다, 광주 내려온다 와 같이 일상에서 별다른 문제없이 사용되면서 지방 은 중앙의 타자로서 계속 만들어져 간 다고 할 수 있다. 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1 스케일의 지역들이 어떤 특정한 역할을 부여받거나, 다른 지역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지역의 고유성이 생성된다고 보는 시각이 필요하고, 지역민주화운동을 기술하고, 해석하고, (이 연구의 후속작업을 통해) 이론화해야 한다. 이 연구, 특히 지역민주화운동에 대한 연구와 기술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고, 이 작업이 갖는 학술적 역사적 의미 또한 여기에 있다. 다만 이 연구는 통사적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진 않다. 일종의 다섯 개의 큰 사건 혹은 계기를 중심으로 4 19혁명부터 91년 5월투쟁까지의 지역 민주화운동을 조망하고 있다. 이러한 접근법의 치명적인 약점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시계열적 서술의 장점을 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통사적 서술의 장점이 발현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민주화운동사 서술이 각 년도 별로 발생한 사건을 빠짐없이 서술하는 생활사가 아닌 이상 정치적 의미와 역사적 의미를 갖는 사건들을 중심으로 서술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비록 통사적 접근법을 취하고 있진 않지만 지역 민주화운동사의 큰 흐름은 모두 언급하고 있다. 오히려 이 연구에서 채택하고 있는 계기적 접근법은 지역 민주화운동의 전환점을 파악하는데 매우 유용한 접근법일 수 있다. 즉 민주화운동의 흐름이 시작 복원되는 흐름과 단절되는 흐름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러한 흐름과 단절을 설명하는데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5 18항쟁은 이 책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것은 5 18항쟁이 민주화운동이 아니어서가 결코 아니며 오히려 5 18민주화운동이 광주 전남지역 나아가 한국사회에서 차지하는 정치적 의미와 비중이 남다르기 때문에 독자적인 지면에서 5 18민주화운동에 대한 탁월한 전문성을 가진 연구자가 별도로 기술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비록 이 책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광주전남의 민주화운동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던 5 18항쟁이 지역민주화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정치적 역사적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연구는 크게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록 5 18민주화운동 부분이 별도 연구로 독립하면서 빠지긴 했지만, 광주 전남의 주요 민주화운동을 다루고 있다. 4.19혁명, 한일회담반대운동, 반유신운동, 87년 6월항쟁, 91년 5월투쟁이 이 연구에서 다루는 민주화운동 관련 주요 사건들이다. 연대기적 서술을 따르고 있진 않기에 계기적 운동사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이 연구에서는 민주화운동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판단을 위해 전국적 흐름과 지역적 운동 흐름을 균형 있게 기술하고자 노력했다. 민주화운동 9
12 제2장 4 19혁명 Ⅰ. 들어가는 말 4 19에 대한 기억과 자료를 발굴하는 작업이 쉽지 않다. 3) 광주 전남지역에서 4 19혁명은 잊힌 혁명이기 때문이다. 4) 애초에 광주 전남지역 4 19와 관련된 자료가 많지 않고, 자료의 부족을 대신하여 4 19를 기억하고 진술해줄 이들의 수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기존 역사서에서 서울과 기타 지역 의 형태로 서술되어온 방식도 지역 차원의 4 19에 대한 관심을 이완시키고, 기록의 보존을 어렵게 했던 요인 중의 하나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이 글은 광주 전남지역 4 19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고찰로서는 미흡하다. 이 글의 작성과정에서 활용한 자료가 제한되어 있고, 채록한 구술도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논리적 허점과 사실의 누락 가능성도 열려 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공개 혹은 미공개된 광주 전남지역의 4 19혁명에 대한 자료들을 동원하여 4 19혁명의 사상( 事 狀 )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보고자 한다. 광주 전남지역 4 19의 전개과정과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두 가지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하나는 4 19의 명칭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4 19의 시종( 始 終 ) 문제다. 사건 발생일을 사건명으로 정하는 관행에 따라 일반적으로 4 19라고 부르지만, 4 19에 따르는 명칭은 의거( 義 擧 )에서부터 항쟁( 抗 爭 ), 봉기( 蜂 起 ), 혁명( 革 命 ) 등에 이르기까지 4 19를 바라보는 주체들의 시선 과 이념 에 따라 다양하다. 5 16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세력은 불법적인 쿠데타를 혁명으로 격상시키기 위해 4 19를 의거로 격하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4 19의거라는 표현은 이미 사건이 발생했던 당시 언론과 제도권 정치인들(주로 야당)이 선호하던 명칭이었음은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5 16쿠데타 세력이 4 19를 의거로 격하했기 때문만은 아니더라도 4 19를 의거 로 부르기에는 한국현대정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크고, 이후 3) 이하 4 19혁명에 대한 기술은 필자의 광주전남의 4월혁명 (정근식, 권형택 편 2010)을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혀둔다. 4) 4월 혁명 당시의 행정구역 편제로 보면 전남지역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그렇지만 4월 혁명이 주로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현재의 전남지역에서는 매우 제한적으로 발생했기 때문에 광주 전남지역을 구분한다. 단, 4월 혁명 관련 1차 자료나 관련자 구술 인용에서 전남지역으로 표기한 부분은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광주지역을 포함한다. 1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13 한국사회의 변화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다. 부정선거에 대한 국민적 저항, 이승만 정부의 하야라는 정치적 승리뿐만 아니라 철저한 사회개혁 요구, 자립적 경제구조의 건설, 종속적 자본주의 위기 극복, 분단체제 하에서 억눌려 있던 민족통일운동 전개 등 보다 근본적인 사회변화의 흐름이 존재했기 때문에 우리는 4 19를 의거가 아니라 혁명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다만, 여기서는 4 19혁명이라는 명칭이 혁명의 발생일 만을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고, 혁명의 외연을 조금이라도 확장하기 위해 4월 혁명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자 한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계승과 발전은 제대로 된 이름 부르기 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살펴볼 문제는 4월 혁명의 시종( 始 終 ) 문제다. 4월 혁명을 1960년 4월 대한민국에서 이승만의 자유당 정부가 저지른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을 중심으로 시작한 시위가 이루어낸 혁명 등으로 규정할 경우 4월 혁명은 4월 19일에 시작되어 이승만이 하야성명을 발표한 4월 26일에 끝난 사건이 된다. 그렇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4월 혁명을 이승만의 하야를 초래한 학생 및 시민들의 봉기와 더불어 제2공화국 시기에 전개된 학생 민중 혁신정치세력들의 사회변혁운동으로 보다 폭넓게 정의할 경우 4월 혁명은 1960년 2 28민주항쟁에서부터 1961년 5 16쿠데타 직전까지의 시기로 확장된다. 즉 4월 혁명은 4월 19일 피의 화요일부터 4월 26일 승리의 화요일까지의 일주일이 아니라, 이승만의 하야가 발표된 바로 그 순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박태순의 용법을 따른다면, 의거로서의 4 19는 역사적 소임을 완수한 것이 되고, 혁명으로서의 4 19는 그로부터 새롭게 그리고 끈질기게 진행되어나가야 했던 하나의 원점 역할을 했다(박태순 1983). 이렇게 4월 혁명을 접근할 경우 4월 혁명의 성공적 측면(이승만 하야와 새 정부의 출범)보다는 실패의 측면(5 16쿠데타로 사회민주화 요구 좌절)만을 부각시킬 수 있다는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4월 혁명을 통해 창출된 이른바 4 19공간 (박태순의 표현임)의 역사적 의미를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는 장점이 있다. 이 글에서는 후자의 시각을 채택하여 광주 전남지역의 4월 혁명 전개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4월 혁명의 전개과정을 보다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4월 혁명을 2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1단계는 3 15부정선거에 대한 대중적 저항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60년 2월 28일부터 이승만의 하야성명이 발표된 4월 26일까지의 시기가 해당된다. 이 시기는 반독재민주화투쟁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학생과 시민들이 4월 혁명의 주체로 부상하고, 반독재민주화투쟁이 혁명의 이념으로 정립된다. 제2단계는 이승만 하야 이후부터 5 16군사쿠데타 직전까지의 시기로서 혁명의 주체가 분화하고, 혁명의 과제가 심화된다. 진보세력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던 사회민주화 요구와 한미경제협정반대투쟁, 2대악법 반대투쟁, 조국통일운동 등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물론 이 기간 동안 4월 혁명이 모든 지역에서 동일한 규모로 전개되었던 것은 아니다. 광주 전남지역도 마찬가지였는데, 주로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4월 혁명이 발생했고, 목포와 여수, 순천, 그리고 나주(영산포)에서 제한적인 규모의 저항이 표출되었다. 11 민주화운동
14 이 글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위의 시기구분에 따라 광주 전남지역의 4월 혁명의 전개과정을 서술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광주 전남지역에서 전개된 4월 혁명의 지역적 특징을 살펴보는 것이다. 특히 전국적으로 전개된 4월 혁명과 지역에서 전개된 4월 혁명의 공통점과 차이점, 4월 혁명이 광주 전남지역에 미친 영향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Ⅱ. 제1단계 반독재민주화투쟁의 시기 1. 4월 19일 이전 상황 적어도 4월 19일 이전까지 광주 전남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조용했다. 4월 19일 시위에서 광주학생은 살아 있다, 광주학생만세 등의 구호가 나왔던 이유는 대구, 마산, 서울 등지에서 이미 학생들의 시위가 발생했을 때 광주지역의 학생들이 동참하지 못한 것에 대한 마음의 빚이 표출되었던 것이다. 비록 4월 19일 이전까지 광주 전남지역에서 3 15부정선거와 이승만 정부에 대한 저항의 빈도와 강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약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의미 있는 저항활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3월 15일 광주에서 발생한 민주주의 장송 데모 였다.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는 이승만 정부가 국가권력을 총동원하여 기획한 유례없는 폭력과 부정선거였다. 광주 전남지역에서도 대리투표, 사전투표, 3인조 투표 등이 실시되었고, 민주당 참관인이 곳곳에서 내쫓겼다. 광주 전남지역 4월 혁명과정에서 민주당이 독자적으로 수행했던 역할은 부정선거 감시운동 이었다.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의 학생들을 조직하여 부정선거감시단을 조직했고, 이들이 광주지역 각 투표소에 배치되어 자유당과 정부의 관권부정선거를 감시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나 이러한 소극적인 활동도 이승만 정부는 용인하지 않았다(김시현 구술, ). 이에 민주당 전남도당은 투표소에 배치했던 부정선거감시단 및 참관인을 철수시켰다. 민주당 전남도당 사무실에 모인 민주당원들은 오전까지의 부정선거실태로 보건대 이미 선거결과는 명약관화하다고 판단하여, 오후에는 폭력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시위에 나설 것을 결의했다. 5) 민주당 전남도당 사무실에 모인 사람들은 시위 전개 방법을 논의한 결과 부정선거 규탄 거리시위를 하자는데 의견이 모아졌고, 오후 12시 50분경 곡 민주주의( 哭 民 主 主 義 ) 라고 쓴 만장을 앞세우고 거리시위에 나섰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편 2005, 11-12). 6) 광주에서 발생한 민주주의 장송 데모는 마산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발생한 부정선거 규탄시위였다. 이날 민주당 마산시당은 오전 10시 30분경에 선거무효를 선언했고, 민주당 중앙당사에서는 오후 4시 30분에 선거 무효를 5) 이런 상황은 3 15사태 로 불렸던 제1차 마산시위와 비슷하다. 6) 이 때문에 이날 시위를 민주주의 장송 데모 라고 부른다. 1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15 선언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2008, 112). 곡 민주주의 라고 쓴 만장을 든 민주당원들이 민주당 전남도당 사무실을 나와 금남로로 진출하자 경찰은 즉각 제지에 나섰고, 경찰과 민주당원 및 시민들 간에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경찰은 곤봉을 들고 시위대를 무차별 구타했는데, 당시 경찰들은 선거질서 유지를 위해 카빈총을 소지하고 있었고, 시위 진압과정에서 카빈소총 개머리판으로 시위대를 폭행하기도 했다. 당시 전남일보는 이 시위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15일 민주당 전남도당부에서는 각종 부정 사실을 지적, 투표소 참관인의 철수를 지시한 후, 이날 상오 열두시 오십 분경 곡 민주주의 라는 만장을 선두로 흰 두건을 쓴 약 오십여 당원들이 지프차와 트럭 그리고 일부는 도보로 이필호의원이 앞장서서 금남로 소재 당부통령 선거사무소를 출발 도청 쪽으로 데모 하였다. 민주주의는 죽었다 고 소리높이 외치며 눈물을 흘리면서 곡성을 울린 이들이 법원 앞을 조금 지나자 경찰관과 백차가 출동 제지하였으나 이들은 억세게 데모 를 계속 경찰국장 관사 앞에 이르렀다. 이때 두 대의 소방차도 출동 물세례를 퍼붓기에 이르렀는데, 경찰과 민주당원이 한 동안 옥신각신 끝에 부상자도 냈었다. 무저항으로 데모 를 계속했던 이들은 물세례로 다시 금남로로 길을 되돌아 출발 지점인 사무소에 해산되었으나 그곳에도 잠시 동안 옥신각신이 벌어졌다(전남일보, ). 3월 15일 부정선거 규탄 시위 이후 광주 전남지역에서 후속 규탄시위가 있었다는 기록을 찾기는 어렵다. 일부 구술을 통해 도청을 중심으로 소규모의 시위를 계속했다는 진술은 있지만(김시현 구술; 이문규 구술),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언론보도나 관련 기록은 찾기 어렵다(호남 년사 편찬위원회 1995, 152). 다만, 광주시내 고등학생들이 4월 16일 정오를 기해 시위에 나설 계획이었으나 경찰과 학교 측의 감시로 무산되었다는 기록은 있다(전남일보, ). 4월 18일, 광주고의 상록회, 하이 Y 와 같은 서클이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특히 이공범(당시 광주고 졸업생), 문순태(광주고 3학년), 이홍길(광주고 3학년) 등은 4월 초부터 시내에 <정의의 투사 학생들은 모두 궐기하자> 제하의 벽보를 밤에 몰래 붙이곤 했다. 또 광주시내에서 4월 들어 학생시위가 발발할 것이라든가, 발발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에는 반정부적 성향을 대표하는 조직이 광주지역의 대학이나 고등학교 등에 조직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학생들은 학급단위로 모여서 시위를 계획했는데, 그것도 학급 전체가 아니라 학급에서 친한 친구들을 중심으로 소수의 학생들이 모여 시위를 계획했다고 한다(호남 년사 편찬위원회 1995, 157). 13 민주화운동
16 2. 반독재민주화투쟁의 폭발(4월 19일-4월 26일) 1) 광주지역 광주의 4 19 시위는 광주고에서 시작했고, 참여자도 가장 많았다. 이홍길의 증언에 따르면, 광고생은 농촌 출신이 많아 자취 하숙생이 많았고, 그래서 친구들끼리 모여 시국과 시위에 관한 토론이 활발했다 고 한다(호남 년사 편찬위원회 1995, 157). 당시 광주에는 전남대학교, 조선대학교, 사범대(광주교대 전신)가 있었지만, 고등학교는 광주고, 광주공고, 조대부고, 광주상고, 광주농고, 수피아여고, 숭일고, 광주사범학교, 광주일고, 전남여고, 광주여고 등 11개의 학교가 있었다. 고등학생의 수적 우위와 조직적 동원이 용이한 조직구조, 일제 강점기 광주학생독립운동부터 이어진 운동역량의 축적이 고등학생 주도의 4월 혁명을 초래했던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4월 혁명의 폭발은 4월 19일 시위에서부터다. 4월 18일 밤 이홍길, 김신담, 김병욱, 홍갑기 등은 19일을 기해 시위를 벌이고자 결의하고, 그 구호는 3 15부정선거를 다시 하라, 마산의 발포 경찰을 처단하라, 서울 등지의 구속 학생을 석방하라, 경찰은 학원에 간섭하지 말라 의 4가지로 정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편 2005, 12). 당시 상황에 대해 이홍길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18일 밤 홍갑기, 김병욱 등과 함께 하숙방에 모였는데, 10명이었다. 우리는 19일 1교시가 시작하는 데로 운동장에 집결하기로 약속하였다. 부서를 정하여 1, 2, 3학년 각반에 난타의 종소리가 들리면 전부 운동장에 집결할 것이며, 이를 미리 학우들에게 알려두라고 했다. 몸집이 큰 신강식, 조병수가 타종수를 맡았다. 7) 이날 밤 모임에는 조선대 부속고등학교의 전만길이 참여하여 광주고가 시내에 진출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조대부고생을 이끌고 나오겠다고 약속했다. 19일 아침 어떻게 알았는지 교장선생님이 우리들의 모의 사실을 알고 모의 학생과 학교의 대표학생 전체를 교장실로 불러들였다. 교장선생님은 자중하고 대학입시에 전념하라는 훈화말씀을 하였다. 우리들은 우리들끼리 협의할 기회를 달라고 부탁하여 시간을 얻어 회의를 진행한 끝에 데모할 것을 결의하였다. 교장실에서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사이에 난타의 종소리가 들렸고, 전교생들은 속속 운동장에 집결했다. 그들은 우리들, 그러니까 대표 학생들이 교장실에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교장에게 제지만 받고 있을 수가 없어서 창문을 넘어 밖으로 나갔다. 1960년 4월 19일 10시 조금 못되어서였다(호남 년사 편찬위원회 1995, ). 광고생들은 운동장에 집결했으나 정문은 이미 경찰에 의해 봉쇄되었다. 정문이 막히자 광고생들은 김선담, 조병수 등이 앞장서서 후문으로 진출했다. 당시 시내로 진출한 학생은 1백 50명 정도였다. 후문을 통해서 계림동 광고 앞길로 나오자 경찰은 이들 학생들을 곤봉으로 구타했고, 경찰의 7) 이홍길의 진술과는 다르게 신강식은 타종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호남 년사 편찬위원회 1995, 159). 1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17 곤봉세례에 광고생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 시위대의 주력이 되는 한 대열은 계림동 파출소 쪽으로, 다른 한 대열은 경양방죽 쪽으로 향했다. 계림파출소 앞에 이른 시위대는 대기하고 있던 경찰 백차에 저지당하면서 수십 명이 파출소로 연행되었다. 이때 연행된 학생은 총 48명이었다. 경찰이 사위학생들을 무차별적으로 연행하자 학생들은 10명 단위로 흩어졌는데 이들은 인근 학교를 돌며 시위 참가를 호소했다(김효중 1960). 이들 시위대가 가장 먼저 찾은 학교는 전남여고였다. 전남여고 앞에서 시위 학생들은 전남여고생들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외쳤으나 반응이 없자 광주여고로 향했다. 광주여고에는 이미 경찰이 배치돼 있어서 시위대는 광주공고(지금의 광주시 동구청 자리)로 향했고, 이 과정에서 학생 일부가 경찰에 연행되었다. 광주여고생 1백 50명 정도는 운동장에 집결하여 학교 밖으로 나가려고 했으나 교사들의 제지와 교문 밖을 지키고 있던 경찰의 봉쇄와 엄포로 다시 교실로 들어갔다(호남 년사 편찬위원회 1995, 159). 한편 경양방죽 쪽으로 향한 광고생들은 광주일고로 향했다. 이들은 일고생 나와 라고 외쳤으나 당시 광주일고는 편입시험이 있어서 1, 2학년은 이미 하교했고, 3학년은 교사의 감시와 제지로 움직이지 않았다. 광주일고생과의 합류에 실패한 시위대는 금남로를 지나 광주세무서 앞에 이르렀고, 여기서 광주여고와 광주공고생을 불러내던 또 다른 광주고 시위행렬과 합류했지만, 합류한 시위대는 그 규모가 20여명에 불과했다. 광고생들은 다시 광주농고로 갔다. 광주농고 교사들이 학생들을 제지했으나 이미 광고생의 시위 소속이 알려져 술렁이고 있던 광주농고생들은 누군가가 친 타종을 신호로 거리로 나서게 된다(호남 년사 편찬위원회 1995, 161). 경찰의 제지 속에 농고생들은 대열이 흩어졌고, 시위대열의 일부는 도청으로 향했다. 19일 오전 시내로 진출한 광고생 일부는 광주상고에 와서 시위 동참을 외쳤다. 이들은 상고에서 반응이 없자 물러갔으나 오후 2시경에 다시 찾아왔고, 시위대가 던진 돌에 광주상고 교실 유리창이 깨지는 순간 광주상고생들은 교문을 나와 금남로를 향했다. 금남로로 향하는 와중에 광주상고 시위대는 광고생들과 합류한다. 금남로 성결교회 앞에서 경찰이 제지했으나 학생들은 경찰의 제지를 뚫고 도청을 향했다. 시위대에 포위된 경찰은 도망가고, 학생들은 쓰리쿼터 8) 와 백차 9) 등 진압 차량들을 부숴버렸다(호남 년사 편찬위원회 1995, 162). 광주공고생들은 3월 15일에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계획한 바 있었다.4월 19일 광주공고생들도 전날의 고대 4 18시위 소식과 정치깡패에 의한 고대생 테러 소식을 듣고 들떠 있는 상태였고, 광주시내 일원의 시위 분위기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광고생들의 일부가 광주공고로 가서 시위 동참을 호소했고, 광주공고생들 역시 나설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교문은 교사와 경찰이 8) 미군이 사용하던 군용트럭을 민간용으로 개조한 소형 트럭으로 적재량이 Three Quarters 즉, 3/4톤이라는 데서 명칭이 유 래했다. 9) 군용 지프차를 개조하여 경찰에서 순찰용으로 사용하던 차량으로서 차량 색깔이 흰색이었던 탓에 백차로 불렸다. 15 민주화운동
18 지키고 있어서 나설 수가 없었다. 광주공고 3학년이었던 정방섭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계속 교사들이 제지하자 우리는 정문 아닌 다른 돌파구를 찾았어요. 서석국민학교와의 경계가 판자울타리였는데, 이걸 밀어 넘어뜨렸어요. 막상 모두 힘을 합쳐 밀고 나니 금방 넘어져버리더군요. 우리는 서석국민학교로 쏟아져 들어갔다가 광주여고 후문 쪽으로 나갔어요. 거기에서 금남로는 지척 아닙니까?(호남 년사 편찬위원회 1995, 163) 광주 4 19 당시 집단적으로 시위에 참여한 유일한 여고였던 광주여고는 4 19시위에 적극적이었다. 계림파출소를 거쳐 광고생 일부가 시위 동참을 요구하며 나타났고, 이들을 추적하는 경찰 백차가 광주여고 후문 쪽에 등장하자 광주여고생들은 돌을 던지며 맞섰다. 학생 일부는 거리로 나서려고 했으나 교사들이 제지하자 여고생들은 후문 판자울타리를 밀어 넘어뜨리고 시내로 진출했다. 거리로 나간 광주여고생들은 노동청 사거리에 모였다. 경찰은 소방차를 동원해 노란색 물감을 탄 물을 뿌려댔다. 여학생들은 구호를 외치다가 일부는 물러섰고, 일부는 흩어졌다. 경찰이 강력하게 막고 나서자 많은 여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갔다. 그 후 점심때부터 광주여고생들은 다시 학교 밖으로 나가 시위에 참여한다. 광주여고생들은 거리에 나서면서 시내로 진출하는 광주공고생들과 합류했다. 조대부고는 전만길 등이 광주고의 이홍길, 홍갑기 등과 18일 밤에 연합 시위 모의를 가질 정도로 조직적이었고, 광주 시내에서 발생했던 4 19시위의 전 과정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0) 조대부고생들이 거리에 나설 때 숭일고생들도 금남로로 향했다. 19일 오후 2시경 금남로는 고교생들이 운집했다. 광고생, 조대부고생, 광주공고생, 광주농고생, 광주상고생 그리고 광주여고생이 학교별로 시위대를 형성했다. 광주일고, 살레시오고, 수피아여고, 광주사범학교 학생들도 개인적으로 거리에 나섰다. 이 무렵부터 경찰의 최루탄 발포가 시작되었다(호남 년사 편찬위원회 1995, 164). 19일 오후에 이르도록 시위 학생은 대부분 고교생들이었다. 그렇다고 1960년 4월 19일 오후 충장로, 금남로 시위에 고등학생만 참여하고 있지는 않았다. 당시 전남일보는 학생들은 시위를 벌였고, 시민들도 연도에서 이따금 박수를 쳐대며 응원했다 는 식의 시위보도를 계속했다(전남일보, ). 즉 주역은 학생이었고, 시민들은 조연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보도와는 다르게 볼 수 있는 부분도 있다. 19일 밤 광주에서는 8명이 사망했는데, 시위대가 7명 사망했고, 경찰이 1명 사망했다. 8명을 10) 당시 전남일보 김효중기자의 광주학생 4 19의 발자취 연재기사( 어느 부고생 )에는 조대부고생들이 4월 19일 시위 내내 가장 열정적으로 참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김효중 1960). 1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19 직업별로 분류해보면 공원(노동자) 2명(김준호, 김순희), 취업준비 중인 속성학원생 2명(이귀봉, 장기수), 경찰관 1명(최금동), 3명 무직. 학생은 단 1명도 없었다. 이들 희생자들이 19일 밤 사격을 전후하여 시위대에 합류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 분명 19일 오전은 고등학생들만의 시위라고 볼 수 있지만, 오후 들어 시내로 시위대가 진출하면서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했음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다. 1960년 4월 당시 이발소에 근무했고, 19일 밤 경찰 곤봉에 중상을 입었던 정동채의 증언에 따르면(호남 년사 편찬위원회 1995, 167), 많은 시민들이 19일 오후부터 시내를 중심으로 시위가 본격화되자 시위에 참여했다. 고교생들이 주축이 되고 시민들도 다수 참석한 가운데 시위대는 도청 앞에 집결한다. 곧 시위대는 1천명을 넘어서는 대규모로 발전했다. 시위대 중 일부가 충장로로 향하자 경찰이 제지했고, 이때 시위대는 경찰에 돌을 던지며 맞섰다. 오후 2시 10분경 충파는 시위대의 투석으로 인해 유리창이 깨졌다. 충장로 파출소 투석 이후 시위대는 파출소가 보이면 공격해서 유리창을 부수곤 했다. 시내 쪽 파출소(충장로, 계림동, 대인동, 학동 등)는 모두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충파를 투석한 시위대의 주력은 충장로를 타고 내려가 서중의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에 이른다. 여기서 광주학생만세를 3창했다. 시위대는 기념탑 앞에서 잠시 머문 후 시위대열은 광주소방서 앞에 이르렀다. 소방서 앞에 도착하자 시위대는 살수차와 소방서에 돌을 던졌다. 시위대가 소방서를 공격한 이유는 당시 경찰이 시위 진압을 위해 소방차를 동원했기 때문이었다. 마산시위 때는 소방차의 물에 빨간 잉크를 타서 시위대에 뿌림으로써 시위자 색출을 용이하게 했는데, 이런 방식이 전국적으로 사용되었다. 또 소방차를 동원해 시위대에 물을 뿌림으로써 기세를 꺾는 효과도 노렸던 것으로 보인다(김효중 1960). 시위대의 소방서 습격으로 소방서 대원 1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에 조광범 경비과장의 지시로 최루탄이 발사됐다. 최루탄이 발사되자 소방서 주위의 시위대는 퇴각했다. 이때가 오후 3시경이었고, 이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경찰의 계속되는 최루탄 발사로 시위대의 대응도 더 격렬해졌다(김효중 1960). 자유당사와 서울신문사 전남지사를 파괴한 시위대는 충장로를 타고 내려갔고 여기서 금남로 3가의 시위대와 합류했다. 합류지점은 충장로 파출소 앞이었다. 소방서에서 퇴각했던 광고생 중심의 시위대는 동명동으로 향해 김일도 전 광주시장 관사에 돈을 던진 후 금남로로 진입했다. 충장로, 금남로는 시위대로 가득 찼고 시민, 대학생들이 고교생 중심의 시위대에 속속 합류함으로써 시위는 광주시민이 나선 시민투쟁 양상으로 바뀌었다. 이때가 오후 5시였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 5대 도시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시간이었다(김효중 1960). 5시 20분경, 경찰이 공포탄을 쏘기 시작했다. 공포탄과 함께 최루탄도 발사했다. 시위대는 도청으로 서서히 전진해 나갔고, 도청 쪽에서는 소방차 2대가 진격해왔다. 소방차는 붉은 소화수를 뿌리면서 시위대의 전진을 저지시키려 했다. 시위대와 소방차가 맞붙는 곳은 경찰국장 관사 앞이었다. 경찰국장 관사 앞쪽에는 경찰의 방어벽이 설치돼 있었다. 시위대와 경찰 간에 투석전이 전개되었고, 인근의 경찰국장 관사, 호남신문사의 유리창이 깨져나가고 쏟아지는 돌멩이에 17 민주화운동
20 경찰바리케이트가 파손되기 시작했다(김효중 1960). 시위대는 도청 앞에서 금남로 1가 쪽에 포진하고 있었다. 경찰은 광주경찰서 쪽에 집결해 있었다. 경찰은 계속 공포탄과 최루탄을 쏘아댔고 시위대는 투석전을 전개했다. 시위대는 더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밤이 되자 더욱 격렬하게 투석전을 전개했다. 이럴 즈음 남광주역 주변에 있었던 시위대는 학동파출소 앞으로 모여들었다(호남 년사 편찬위원회 1995, 173). 학동 파출소 습격 중 강정섭은 총탄에 맞고 사망했다. 8시 30분경 학동파출소를 습격한 시위대는 8시 40분경 양림동 파출소로 향했다. 양림파출소가 장악되자 시위대는 도청 앞을 거쳐 광주경찰서 앞으로 갔다. 이때 밤 9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금남로 1가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던 시위대는 충장로, 금남로 일원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계속하다 점차 광주경찰서 쪽으로 다가갔다. 당시 시위대는 폭력 경찰 때려죽여라, 민주 역적의 소굴 경찰서를 쳐부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광주경찰서를 향해 행진했다. 시위대는 경찰서 주변에 모여들었고, 경찰은 최루탄과 공포탄 발사로 저지하고 있었다. 후퇴와 진격을 되풀이하던 와중에 경찰의 실탄사격이 시작되었다. 경찰은 시위대의 머리 위로 실탄을 발사하며 위협사격을 가했다. 시간은 밤 9시를 넘어서고 있었다(김효중 1960). 당시 시위대는 광주 학생의 피는 끓고 있다. 몽둥이 경찰 죽여라. 선량한 민주의 사도, 연행 학생을 즉시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19일 밤 9시 25분, 40명으로 구성된 경찰 돌격대는 시위대를 향해 돌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물러서지 않았다. 경찰을 지휘하던 구서칠 도경 보안과장, 조광범 도경 경비과장 등은 최후의 방법을 쓰기로 했다. 실탄사격이었다. 광주발포사건 재판기록(1960년 광주지검 형제2031호)에 따르면, 사격은 9시 40분에 이뤄졌다. 4월 19일 밤,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8명이 사망했다(호남 년사 편찬위원회 1995, ). 이날 발포책임자에 대한 재판기록에는 당시 상황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오후 9시 30분경부터 동 10시경까지 사이에 경찰서 앞에 밀려온 약 1천 명 가량의 학생 데모 대원을 해산시킴에 있어서 실탄을 발사하여 동 데모 대원에 대한 살상이 있을 것을 예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장경찰부대에게 실탄 발사를 명령하여 동 경찰부대로 하여금 경찰서 앞으로부터 YMCA 앞, 고등법원 앞 4거리 505특무대 앞을 거쳐 광주 충장로 2가 화인약방 근처까지 진격하면서 칼빈 실탄 86발을 무차별 발사케 함(광주지방검찰청 공소장, ) 1960년 4월 20일 광주는 무장한 계엄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광주 시내 모든 학교는 휴교상태였으며, 19일 밤에 다친 사람들은 응급처치를 하고 몸을 숨겨야 했다. 20일 오전 10시 전남대입구(태봉산이 있던 자리로 지금의 광주 신안동)에서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가 형성됐다. 19일 시위를 주도했던 고교생들과는 달리 조직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던 이들은 계엄령 속에서 학교 정문 근처에 모인 것이다. 전남대생들이 모이자 광주농고생들이 이 시위대열에 1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21 합세했다. 학생들은 플래카드를 펼쳐놓고 협잡선거 다시 하여 민주 대한 이룩하자 라고 혈서를 썼다. 시위대는 스크럼을 짜고 광주역(지금의 구역 사거리)으로 갔다. 이 시위에는 4월 19일 시위에 참가하지 않았던 많은 대학생들이 참여했다. 11) 시위대는 구역 사거리에서 충장로 4가 입구로 갔다. 이때 최초로 장갑차(GMC) 12) 10대가 등장했다. 시위대는 금남로로 전진하지 못하고 흩어졌고, 재집결을 시도했으나 장갑차의 돌격에 흩어지고 말았다. 장갑차의 공격으로 시위대는 대열을 형성하지 못한 채 일부는 충장로 1가로, 다른 일부는 금남로 1가 쪽으로 향했다가 지산동으로 쫓겨 갔다. 13) 충장로 1가에 이른 시위대는 광주우체국 옆에서 군대와 잠시 충돌했다. 시위대중 몇 명이 벽돌과 기와를 군인에게 던졌으나 무장 군인에 의해 진압 당했다. 일부 학생이 군인들에게 벽돌을 던지자 즉각 위협사격이 개시되었다. 시위대는 광주공원 쪽으로 쫓기다가 흩어지고 말았다. 시위대가 흩어진 뒤 시내는 무장군인들이 완전히 장악했다. 4월 24일에는 4 19희생자 합동위령제 가 열렸다. 오후 3시부터 진행된 합동위령제는 4 19 당시 산화한 김재복, 이귀봉, 박순희, 구중석, 장기수, 김주호를 대상으로 열렸는데, 이 합동위령제는 자유당 산하 기관인 국민회가 주체했기 때문에 시민적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날 위령제는 오후 4시에 끝났는데, 국민회 전남도 본부회장 김철주가 제주를 맡아 제문을 읽은 것이 전부였다. 14) 학생대표의 조사는 없었고, 헌화만 있어서 더욱 4 19 주체들로부터 비난을 샀다(전남일보, ). 이날 오후에는 민주당원들이 노인환 광주시장의 사퇴를 권고했다. 25일 새벽 5시 계엄사령부 광주지구 계엄사무소(소장, 박현수 육군소장)는 국무원 훈령 제85호에 의거 비상계엄을 경비계엄으로 전환한다고 발표했다. 경비계엄에 의해 광주지구 계엄사무소는 포고문 제8호를 통해 언론출판의 사전 검열 폐지, 야간 통행금지 시간의 계엄선포 이전 복귀를 발표했다. 오후 2시 이하영 전남도지사는 부상 치료자에게 위문편지를 발송했다. 광주경찰서에는 광주 시위의 주동자로 구속했던 이현주, 강동기, 김영갑, 김숙, 박정용 등 5명을 전원 석방했다. 26일에 전남도경찰국 간부 일동은 경찰 중립화를 결의했다. 도경 경감 급이 주동이 된 이 결의에서 일당 일파의 사병이 되지 않겠다고 밝혔다(전남일보, ). 이날 11시경 전남일보는 호외 제2호를 배포했는데, 이승만의 하야 발표가 알려져 시민들은 크게 고무됐다. 오후 6시 광주지검 조희채 검사는 민주당 전남도당 피습사건과 관련하여 광주경찰서 사찰계 이송학, 김재수 순경을 구속했다(호남 년사 편찬위원회 1995, 184). 11) 당시 대학생 시위는 전남대에서 김시현, 정환담, 김충룡, 김규룡, 송성우, 윤재차, 임세택 등이었고, 조선대에서는 김수용, 김주호 등이 참여했다(호남 년사 편찬위원회 1995, 182). 12) 정확한 명칭은 M40 Gun Motor Carriage로서 2차 대전 당시 미군이 사용하던 105mm포를 장착한 장갑차다. 13) 이 당시 유인학(당시 전남대 법대 3학년)은 계엄군에 연행되어 6일 동안 감금당했다고 한다(호남 년사 편찬위원 회 1995, 183). 14) 제문( 祭 文 )은 재천의 영령들이여, 자연계의 모순으로 동지들의 가슴은 꽃피는 이 나라 민주주의의 거름이 될지어다 라고 되어 있다(전남일보, ). 19 민주화운동
22 4월 27일 12시 30분경 광주에서는 광주상고 2 3학년 학생 50명이 주축이 돼 시위를 벌였다. 많은 시민들이 동참했던 이 시위대는 도청 앞에서 3 15 부정선거 앞잡이 이하영 도지사는 물러나라. 살인경찰의 책임자 경찰국장을 처단하라. 살인경찰의 지휘자 광주시장을 즉각 처단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상고생이 주축이 된 시위대에 50여명의 전남대 시위대가 합세했다. 이들은 광주경찰서로 가서 경찰서장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자 광주경찰서장은 이미 4월 20일 사표를 제출했다면서 시위대에게 사과했다. 학생들은 계속 구호를 외치다가 1시 50분경에 해산했다. 이 시위는 광주지역의 4월 혁명의 마지막 시위였다. 규모는 크지 않았으나 책임자 처별을 강력히 요구함으로써 향후 책임자들의 재판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호남 년사 편찬위원회 1995, 184). 이날 오전 11시 조선대학교 학도호국단 대표들은 박현수 계엄사 광주사무소장을 방문해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15) 조선대학교 학도호국단 대표들은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을 시 시위를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사퇴가 권고됐던 노인환 광주시장이 이날 사표를 제출했으며, 전라남도에서는 부상자를 돕기 위해 문교사회국장실에 구호 본부를 설치했다(전남일보, ). 4월 21일 이후 광주지역 시위는 대체로 사태추이를 주시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광주경찰서 앞의 19일 밤 발포가 널리 알려지면서 시민들은 분노했으나, 이미 학교는 휴교령이 내려진 상태였고, 당시의 야당을 비롯한 반정부단체는 조직적인 저항을 지도할 만한 역량을 지니고 있지 못했다. 4월 혁명 기간 각 학교별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 같다. 1 전남대학교(50주년 4 19혁명기념사업회 전남대학교. 4 19혁명사(상권), pp ) 이전의 상황 1959년 11월 3일 오전 10시 제7회 학생의 날 광주학생독립운동 3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전국 155개 학생위원장들은 광주일고 교정에 마련된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참배를 마친 후, 전남대학교 통학버스로 도청 앞 희망예식장에서 전국학생위원장회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3 15부정선거의 획책 징후 및 자유당 독재정부 부패상에 대해 국가안위를 걱정하고 나라를 바로 잡는데 대학생들이 앞장서야 한다는 결의를 다졌다. 11월 4일에는 어제의 결의를 재확인하기 위해 대학생 위원장단이 통학버스를 이용해 전남대학교를 방문했다. 당시 주관자는 전남대학교 총학생위원장 및 상과학생위원장 김평수, 문리과대학 학생위원장 겸 총학생회 총무부장 최흥열, 공과대학 학생회위원장 김충용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위 대화를 마친 위원장들은 광주시내 귀거래다방 및 여명반점, 왕자관 등에 나뉘어 모임을 가졌다. 이들은 연락망을 구축하면서 수시로 만나 정보교환 및 자유당 정부에 항거하자는 의지를 다졌다. 15) 요구사항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호남 년사 편찬위원회 1995, ). 경찰의 학원 간섭을 반대한다. 경찰 발 포자는 처단해야 한다. 여수, 광산지역 민주당원 피살범인은 엄단해야 한다. 해당 지역의 경찰서장을 파면하고 지역의 재 선거 일정을 공고하라. 2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23 전남대학교 대표 김평수, 최응열, 김충용 등과 조선대학교 대표 정을배, 고제현, 류경현 등이 한얼회를 조직해서 매주 여명반점 및 왕자관에 모였다. 겉으로는 전공을 발표하는 것으로 위장하면서 실제로는 대학생 결집과 자유당 정부에 항거하자는 집회를 가진 것이다. 3 15부정선거를 획책한 자유당 정부는 당시의 전남도당 위원장(정명섭 국회의원)을 통해 김평수, 최흥열, 김충용 등을 불러 회유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았다. 전남대학교 총회장 김평수와 문리대 회장 겸 총무 최흥열, 그리고 공과대학 위원장 김충용은 1960년 1월에서 3월초까지 당시 연세대 총학생위원장 유영철(당시 한국학생운동자협의회 회장), 전북대학교 총학생회 회장 김용화 등과 수시로 서울 종로 1가 왕실다방 등에 모였다. 서울, 전주, 광주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운동방향 등을 숙의하면서 부패정부 타도에 앞장서기로 결의를 더욱 굳건히 하게 되었다. (당시 참석자 민병천, 신달선, 조창도, 남호명, 정원찬 등) 4 19 당시 활동 상황 1960년 2월 28일 대구 학생사태로 고무된 상황 속에서 뒤이어 마산사태가 터졌다. 전남대학교의 김평수, 최흥열, 김충용 등은 마산사태 위문금 모금을 빙자해 광주시내 고등학생들과 연계해 4월 7일 정오 북동 천주교회 앞에서 집결하기로 모의했으나 정보당국의 탐지로 무산되었다.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소식을 접한 전남대학교는 4월 19일 광주역 광장에 모여 집회를 가진 뒤 고등학생, 일반 시민과 합세했다. 공대위원장 김충용이 학생들을 독려해가며 시위를 시작했다. 금남로 4가, 충장로를 거쳐 도청 쪽으로 향한 시위대에 총위원장 김평수, 문리대위원장 최흥열이 감시망을 피해 합류하여 우체국에 도달할 무렵, 경찰과 충돌했다. 경찰의 무차별적인 곤봉세례와 완강한 제지로 부상자가 속출했다.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연행되었으며, 시위대는 광주공원 쪽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김평수, 김충용은 내일을 기약한 후 피신했다. 최흥열은 연행되어 서석초등학교로 이송되는 도중에 감시망을 피해 탈출했다. 4월 19일 오후 5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20일 밤늦게 시위대에 가담했던 7명(공원, 속성학원생, 무직 등)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소문을 접한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태봉산에 긴밀히 모여 다시 시내로 진입하고자 시도했으나 이미 계엄령 하의 군인들이 진압봉과 최루탄으로 봉쇄하므로 다른 방도가 없어 일단 해산했다. 대신 소그룹으로 흩어져 도심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시위를 했다. 전남일보 벽보판을 읽는 척하면서 시민들과 합세하여 시위하기도 했으나 워낙 강력한 경찰들의 제지에 밀려 더 이상의 대규모 시위는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21 민주화운동
24 4 19 이후의 상황 시위가담으로 계엄군에 의해 당시 서석초등학교에 연행되었던 전남대생들은 대학 당국에 의해 1960년 4월 21일 밤 10시경 석방되었다. 36명이 석방되었고, 부상자 7명은 전남대학 부속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24일과 25일 양일간에 걸쳐 전남대 학생회 대표(김평수, 최흥열, 김충용) 등과 대학당국은 4 19희생자와 부상자를 위한 가두(금남로, 충장로) 모금을 했고, 모금액은 곧바로 유족 및 77국군통합병원에 전달했다. 26일 이승만대통령의 하야 성명과 동시에 광주시내는 일시적 무정부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학생대표들과 뜻있는 사회단체, 종교단체 대표들이 YWCA 소강당에 모여 회의를 열었다. 사회질서 유지를 깊이 있게 논의한 것이다. 전남대학교에서는 김평수, 최흥열, 김충용이 참석했고, 백영흠목사, 국기열, 사회단체, 그리고 신문사 편집국장등이 참석했다. 곧이어 최흥열은 군에서 제공한 지프차를 이용하여 시내 가두방송을 하면서 사회질서 유지와 생업에 돌아가자는 호소로 시민들을 선도하며 진정시키는데 앞장섰다. 27일 김평수, 최흥열 등은 4 19발포로 희생당한 김재복(광주 서동), 김준호(광주 양동), 고용석(광주 계림동), 장기수(광주 금남로) 등의 집을 찾아가 위로했다. 2 광주고등학교(50주년 4 19혁명기념사업회 광주고등학교. 4 19혁명사(상권), pp ). 광주 YMCA와 YWCA에서는 광주 각 고등학교 기독학생 동아리인 hi-y(남고생)와 y-teen(여고생)을 소속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당시 광주 YMCA 총무는 김천배-이영생으로 이어졌고, YWCA 총무는 조아라여사였다. 광주고등학교 hi-y 동아리 지도 선생은 광주고 영어교사였던 이종수 선생님(충남대 해직교수)이었고, 광주고 hi-y 학생회장은 김선담이었다. YMCA 김천배 총무, YWCA 조아라 총무는 hi-y나 y-teen 또는 합동예배나 모임시 자유당 정부의 독재와 부패를 비판하였고, 특히 이종수 선생은 당시 노총각으로서 독재와 부패 불의에 대하여 신랄히 비판하며 오직 희망은 학생들에게 있으며, 특히 학생운동의 본거지인 광주학생들에게 있다고 역설하였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정의감이 투철한 고등학생들은 광주학생들이 분연히 일어서야 하고, 그것도 어느 특정 학교만이 아니라 광주 전체 고등학교가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광주고 hi-y 들이 앞장서서 광주 각 학교 hi-y 와 y-teen 동아리를 주축으로 조직을 하고 극비 속에 연락망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막상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던 중 대구에서 2 28학생사건이 터졌다. 이에 광주 YMCA, YWCA학생들은 크게 환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학생운동의 발상지인 광주가 먼저 일어서지 못한데 대한 허탈감과 반성이 있었다. 2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25 그 당시 광주에서는 3 1절 행사를 광주서중학교 학생탑 앞에서 거행했는데, 이때 YMCA와 YWCA 소속의 hi-y와 y-teen은 각 학교 대표회의를 소집하여 3 1절 행사가 끝나고 학생들이 각 학교로 돌아갈 때 학생들을 금남로로 인도하여 집결시키고 도청과 경찰서로 향하는데 대대적인 데모를 하기로 모의하였다. 그러나 이 정보를 입수한 도 학무과(현 교육청)에서 3 1절날 아침 각 학교로 전문을 보내 3 1절 행사는 각 학교단위로 분산하여 행할 것을 긴급 지시했다. 이리하여 광주 3 1절 데모계획은 무산되었다. 3 15부정선거가 실시되자 그 동안 학생들은 부정선거를 비판하는 전단을 만들어 돌리고 벽보를 붙이는 등 소규모 행동들이 연달아 발생하여 경찰당국은 초긴장 상태에 있었다. 잡히면 살아나기 힘든 저항운동이었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든 광주 전체 고등학생들이 일어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당시 광주고등학교에는 자연발생적인 학생동아리들이 많이 있었는데, 각 동아리 별로 불의에 항쟁하는 여러 사건들이 있었다고 한다. 예컨대 상록수 동아리(이홍길, 박상욱 등)에서는 독재와 부패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전단을 만들어 시내 여러 곳에 벽보를 붙였다. 마산 김주열 사건이 터지고 4 18 고대데모가 터졌다. 이에 충격을 받은 광고생들은 광주 전체 고등학생이 도이에 데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고려대가 했던 것처럼 광주고가 먼저 데모를 하고 광주 전 고등학교에 이를 알려 광주 전체 학생데모로 유도키로 하고 4월 18일 저녁 광주고 각 동아리대표들이 이홍길 자취방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광고생 11명과 부고 1명(전만길)이 4월 19일 아침 데모를 거행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들은 데모 결의문을 작성하고 데모의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예를 들면 몇 시에 누가 종을 치며, 누가 각 학급을 돌며 데모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데모의 대열과 선봉은 누가 맡으며, 광주 각 고등학교에 데모소식을 누가 전달하는가 그리고 누가 선생님을 막고 어떻게 경찰 저지망을 뚫고 나갈 수 있는가 등등 세부적인 작전을 짰다. 그들은 이홍길 집에서 함께 밤을 지새우고 4 19 아침 일찍 등교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데모정보가 새어나갔는지 아니면 학생들의 데모조짐을 알아냈는지 등교하자마자 학생간부들을 교장실로 불러 모아 감금하였다. 이에 김선담이 먼저 배탈이 나서 설사중이라며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는 핑계로 빠져나와 각 교실을 돌며 비상종을 치면 수업을 포기하고 교정으로 모이라고 알렸다. 한편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교장실 유리창을 깨고 튀어나온 간부 학생들(정원채, 김병웅 등)이 학교종을 난타하므로 전교생이 쏟아져 나왔다. 순식간에 데모 대형이 만들어져 주모자들이 제일 앞서고 키가 큰 학생들부터 그 뒤에 서는 대열이 형성되었다. 일부 학생들은 선생님들의 앞을 막고 학교 정문을 거꾸로 밀어 열고 나가 진을 치고 있던 경찰 저지선을 뚫고 1차 데모를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경찰의 군화발과 곤봉에 맞아 쓰러지고 피를 흘렸으며, 연행되기도 했지만 시민들의 협조로 경찰의 손에서 벗어나는 등 그야말로 전투 아닌 전투가 벌어졌다. 23 민주화운동
26 너무 많은 경찰과 너무 잔인한 곤봉세례와 연행, 물대포 등으로 시청과 도청에 진출하지 못한 채 계림동 오거리에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교감선생님이 나와서 연행학생 전원 석방 등 주모자를 처벌하지 않는다는 등의 조건으로 학교로 돌아갈 것을 종용하였다. 경찰에서 고문과 구타와 회유를 당한 경험이 있는 주모자 11명의 학생들은 연행된 학생들이 걱정이 되어 연행학생을 데모현장으로 데려오면 철수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연행학생들이 버스에 실려 데모현장에 도착하는 것을 본 데모대는 일단 학교로 돌아옴으로 1차 데모는 이렇게 끝이났다. 그러나 학교에 도착한 학생들은 다시 교정에 집합하여 경찰이 막고 있는 정문은 놔두고 학교 후문(골목길)길을 통하여 2차 데모에 돌입, 전교생이 빠져나가 광주시내 금남로에 집결하였다. 4월 18일 저녁에 각 임무를 배정하였지만 뿔뿔이 흩어져 이행이 안 됨으로 학생대표 정원채, 김선담 등은 광주여고, 광주공고, 광주부고, 전남여고, 광주일고, 광주농고, 광주상고 등을 돌며 광주고등학교가 데모를 시작했는데, 많은 학생이 부상당해 피 흘리고 있으며 연행되었으니 빨리 금남로로 모여 데모에 참여하라고 전하면서 외쳤다. 특히 광주여고 같은 경우는 남학생이 못 들어가고 면회가 안 됨으로 김선담, 정원채 등이 학교 밖에서 크게 외치고 모자를 흔들므로 2층 학생들이 보고 듣고 전교생이 정문으로 나오려다 교문이 막혀 담장 목책을 무너뜨리고 나와 데모에 참여했다. 소식을 들은 광주공고, 광주여고, 전남여고, 조대부고, 광주농고, 광주제일고, 광주상고, 수피아고, 숭실고 등과 일부 시민들이 금남로로 집결하여 자유당 정부의 앞잡이인 광주경찰서로 진입을 시도하는 가운데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과 물대포, 총포 발사를 통하여 7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수많은 부상자가 속출하는 등 4 19 저녁 내내 일진일퇴가 거듭되는 처절한 살육의 밤이 계속되었다. 3 광주숭일고등학교(50주년 4 19혁명기념사업회 광주숭일고등학교. 4 19혁명사(상권), pp ). 4월 14일 광주숭일고등학교 학생 김귤근, 최영길, 윤승웅, 김용석 등이 학교 옆 할머니빵집 에 모여 우리 선배들은 항일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하고 적극 참여한 자랑스러운 기록이 있는데, 지금 3 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런 시기에 우리만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있느냐 며 데모하자는데[시위를 조직하자는데] 의견을 모으고 구체적인 실행방법을 의논했다고 주장한다. 2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27 이 자리에서 이들은 학생동원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각 학년별, 각 학급별 주동자를 먼저 선정하기로 했다. 정보가 새어나갈 염려가 있으므로 주동자 선정은 충분한 검토를 해서 엄선하기로 하고 다음 날(4월 15일) 10여명이 다시 비밀리에 모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학생동원 책임은 최영길, 플래카드 및 구호 문구 작성은 윤승웅이 책임지기로 했으며, 19일에 전교생이 데모에 참여할 수 잇도록 모두가 재학생 설득작업을 계속하기로 했다. 19일 오전 수업을 마치자 최영기 등 주동자들이 각 교실을 돌며 모두 운동장에 모이라 고 소리를 치자 학생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운동장으로 뛰어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낌새를 알아차린 선생님들이 교무실에서 나와 학생들은 교실로 들어가라고 소리쳤지만 벌써 일부 학생들이 정문으로 몰려 나가고 또 다른 학생들은 학교 뒷담을 넘어 양림동 오거리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경찰들이 나와 학생들 집회를 저지하자 학생들은 동방극장 앞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며 경찰의 저지를 뿌리치고 일부는 사직교 쪽으로 일부는 양림교를 지나 동방극장을 향해 달렸다. 오후 2시경 동방극장 앞에는 3백여 명의 숭고생들이 모여 부정선거 다시 하라, 폭력경찰 물러가라 는 구호를 위치며 금남로를 향해 전력 질주하고 있는데 충장로 1가 쪽에서 부고생 등 타교 학생들이 몰려와 박수를 치며 함께 구호를 제창했다. 그들 학생들도 뛰쳐나와 데모에 돌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숭고생들이 금남로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벌써 광주고교, 광주공고, 광주여고, 광주상고 학생들이 경찰들과 대치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금남로에 학생들 수가 늘어나자 경찰도 인원수를 늘려 강력한 저지를 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학생들도 더욱 격렬해지고 있었다. 학생들의 데모가 과격해지자 그때부터 경찰은 폭력을 가하면서 잡히는 데로 연행하기 시작했다. 충장로 쪽으로 후퇴한 학생들도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때 숭일고 최영길이 충장로 파출소를 공격하자고 소리치자 돌멩이와 각목을 든 학생들이 충장로 파출소에 몰려갔는데 경찰들은 이미 모두 도망치고 텅 비어 있었다. 흥분한 일부 학생들이 파출소 기물을 부수기도 했지만, 곧 물러나와 광주일고 학생탑에 참배하고 금남로로 올라와 경찰과 다시 대치,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가운데 부상자가 발생하고 연행되어간 학생 수도 늘어났다. 이런 과정에 서로간의 감정도 격화되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밤 9시경 흥분한 학생들이 붙들려간 학생들을 구출하자며 각목과 돌멩이를 들고 광주경찰서로 몰려가자 경찰이 드디어 발포를 하기 시작했다. 갑자가 공포탄이 아닌 실탄 발사로 총을 맞은 몇몇 학생들이 도로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것을 본 학생들의 감정도 격화되었으며 경찰도 더욱 과격해져 닥치는 대로 무차별 구타를 하고 총탄을 발상하여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때는 시위학생들이나 경찰 모두 이성을 잃어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결국 경찰에 쫓긴 광주숭일고생 일부는 불로동 쪽으로 후퇴한 후 내일 다시 교정에서 만나기로 하고 그날은 일단 해산했다. 25 민주화운동
28 2) 전남지역 16) 4월 18일부터 민주당 목포시당에서는 농성투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원래 목포시당은 3 15부정선거 규탄시위 계획을 목포경찰서에 제출해 공식적으로 시위를 벌이려 했으나, 이 시위가 불허되자 목포시당사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김상태 목포시의원이 3 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가 공식 허가될 때까지 농성하겠다는 선언서를 낭독하고 농성을 시작했는데, 19일에도 계속됐다. 4월 19일 새벽 1시 백여 명의 경찰은 민주당원의 집회는 불법으로 행해진 것 이라면서 민주당사로 난입했으나, 1시간에 걸친 밀고 당기는 몸싸움 끝에 물러나고 말았다. 이때 민주당원 8명이 부상당했다. 19일 아침 이 소식을 전해들은 학생들이 찾아왔고, 여러 장의 혈서를 써서 민주당사 창문에 붙여놓기도 했다. 19일 오전에는 이재용 전남도의원이 참가했고 농성자 수는 50여명으로 불어나 4월 혁명 기간 중 농성투쟁을 지속했으며, 4월 26일 목포시위를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4월 26일에는 목포와 여수에서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었다. 목포 시위는 4월 26일 오전 10시 달성국민학교에서 고교생 연합 시위대 5백여 명이 집결함으로써 시작됐다. 시위대는 목포경찰서 앞으로 가서 연좌데모를 벌였다. 학원을 간섭하지 말라. 우리는 민주주의를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 10여분 동안 연좌데모를 벌인 시위대는 경찰 기동대 소속의 백차 2대 선도에 맞춰 평화극장 앞 도로를 행진한다. 이 와중에 계속 민주주의 만세를 외쳤다. 1시 20분 서울발 목포행 열차에 김부련 군의 시체가 도착했다. 김부련은 무안군 흑산면 가거도 출신으로 서울 서라벌 예술고교 재학생이었는데, 4 19 당시 서울에서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시민들은 시신이 도착한 목포역으로 몰려들었고, 시신 인도를 놓고 경찰과 민주당 목포시당원들 사이에 설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목포역에 모인 군중들은 김부련의 시체 이송을 목격한 후 목포 시내를 행진했는데, 목포경찰서, 자유당 목포시당, 역전파출소, 자유당 시당 위원장 유정도의 집 등을 공격한다. 시위는 격렬했으나 경찰은 정면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시위대가 목포경찰서 최중옥 서장과 면담하여 경찰은 모든 간섭과 불법을 행하지 않는다 는 약속을 받아냈고, 경찰을 이를 끝까지 지켰다. 여수에서도 4월 26일 시위가 전개되었다. 12시를 기해 민주당 여수시당에서 당원과 시민들을 규합해 시위를 벌였다. 시위가담자는 2백여 명이었고 대다수의 시민들은 연도에서 박수를 치며 시위대를 지지했다. 시위대는 여수 중심가를 행진하며 구호를 외쳤다. 이승만 대통령은 부정선거를 책임지고 즉시 물러나라. 고 김용호 동지의 살인 공범자와 사주자를 즉시 체포하라 등이 여수 시위에서 시위대가 외친 구호였다. 여수의 시위대는 여수시 중앙로터리에 이르러 민주당 여수시장 부위원장의 만세 삼창을 끝으로 해산했다. 여수시위는 경찰과의 충돌은 없었으며, 격렬한 시위로 발전하지도 않았다. 학생이 아닌 민주당원 중심의 시위여서 시민들의 참여가 적었기 때문이다. 순천에서는 27일 대규모의 학생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의 규모는 1천5백여 명 규모였다고 한다. 시위대는 순천시 중앙로에서 집결해 11시에 대오를 갖췄다. 시위대 일부는 순천경찰서 앞에서 연좌 16) 전남지역의 4월 혁명 전개과정은 호남 년사 편찬위원회(1995, )의 내용을 참조했다. 2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29 농성을 했고, 일부는 자유당원 집에 돌을 던지기도 했다. 시민들이 참여한 시위는 밤까지 이어졌고, 학생들이 마련한 횃불을 들고 행진하며 민주주의 만세를 외쳤다. 경찰은 별다른 저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양측이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4월 29일에는 전라남도 영산포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밤 9시경 학생과 읍민 약 150명이 평화적인 시위를 벌였고, 영산포 지서장이 나와서 만세를 선창했다. 30일에도 영산포에서는 남녀중학생 5백 명이 오전 10시경 역전에 모였다. 여기서는 지역에서 지탄받는 인사가 퇴진해야 한다는 구호가 나왔다. 이사형 자유당 소속 민의원, 이 씨의 숙부였던 영산포 읍장, 선거대책위원장 이상만 등이 영산포 주민들의 지탄대상이었다. 학생대표들은 읍장과 회동하여 거론된 인사들의 퇴진을 요구한 후 해산했다. Ⅲ. 제2단계 사회민주화 및 민족통일운동의 시기 1. 진보세력과 7 29선거 4월 혁명의 본격적인 전개는 이승만의 하야 이후부터다. 4월 19일부터 4월 26일까지의 시기가 이승만 정부의 독재와 부정부패에 맞선 정부반대투쟁이었다면 이승만의 하야를 기점으로 정부교체 이후 전개되는 사회민주화 투쟁과 통일운동은 4월 혁명의 주체와 과제를 확장했다. 이러한 과정의 중심에는 혁신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혁신세력은 4월 혁명의 제1단계에서는 혁명의 주체 세력으로 부상할 수 없었지만, 이승만 하야 이후 4월 혁명 주체세력의 분화과정에서 자연스럽게 4월 혁명의 주체세력 중의 하나로 부상했다. 이승만 하야 이후 민주당은 이미 사회혁명의 대상으로 변질되었고, 학생세력도 분화를 거듭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4 19 직후 결성된 혁신정당의 분화과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7) <표 1> 혁신정당의 분화과정 4 19 이전 4 19 당시 5 16 군사쿠데타 직전 건준(여운형) 인민당 사로당 근 로인민당(5당 캄파계) 민족자주연맹(김규식) 진보당(조봉암) 사회대중당 창당준비위 사회당(5당 캄파계, 최근우) 혁신당(진보당계 일부, 장건상) 사회대중당(진보당계 일부, 김달호) 통사당(진보당계 일부, 민주혁신당, 한국사회당, 민족자주연맹, 민사당, 사회혁신당 17) 이하 혁신세력 및 혁신정당의 분화과정, 그리고 전남지역 혁신정당의 분화과정에 대한 설명 부분은 오승용(2008, ) 의 내용을 일부 수정했다. 27 민주화운동
30 한국전쟁 이후 지하화 진보당 해산(조봉암 법살) 7 29 선거에 대비하기 위한 선거정당 결성 이념 계보에 따른 분화와 대중운동과의 결합 시도 혁신세력 침체 잠복기 범혁신세력 통합기 분열과 재통합 모색기 * 자료 : 정태영(1995, 538)을 재구성.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혁신정당은 4 19혁명을 기준으로 침체 잠복기를 거쳐 범혁신세력 통합모색기, 분열과 재통합 모색기를 거쳤다. 우리가 여기서 살펴보려는 것은 4 19 직후부터 5 16 군사쿠데타 직전까지의 기간 동안 전남지역에서 결성되었던 혁신정당들이다. 1960년 5월 12일 발기한 사회대중당은 이승만 정부가 퇴진한 후 4월 혁명의 열기가 고조되던 시점에서 결성준비가 자생적으로 이루어진 정당이다. 18) 사회대중당은 경상남도, 경상북도, 전라남도의 순으로 도당 창당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어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에서도 우여곡절 끝에 도당창당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각 지역에서 도당창당준비위 결성대회를 마치자 1960년 6월 17일 삼일당(구 진명여고 강당)에서 범혁신세력의 집결체인 사회대중당 창당준비위 결성대회가 치러졌다. 사회대중당 전남도당의 결성에 참여한 인사들은 크게 보면 진보당계와 비진보당계로 나눌 수 있다. 진보당계열로는 임춘호, 조중환, 박세원 등이 참여했고, 비진보당계열로는 조선공산당 간부로 이정윤계인 강석봉, 한길상, 조극한, 이기홍 등 반박헌영계 인사들, 건국준비위원회 전라남도 부위원장을 지낸 국기열, 김철 등 28명이 발기인이 되어 사회대중당 전남도당결성준비위가 구성되었다(김세원 1993a, 328). 전남도당 결성준비위를 통해 사회대중당 전남도당의 지도부가 선출되었는데, 도당위원장 국기열, 총무부장 조중환, 조직부장 박세원, 선전부장 임춘호였으며, 그밖에 강석봉, 한길상, 이기홍, 서동열, 김철중, 정균형, 김주섭, 임무창 등이 임원으로 참여했다. 7 29총선에 입후보할 후보자들에 대한 공천심사는 박세원, 조중환, 임춘호가 주로 담당했다고 한다(김세원 1993a, 330). 사회대중당 전남도당의 활동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평가할 수 있는데, 하나는 1960년 7 29선거에서의 성공 여부, 다른 하나는 혁신 4당으로 분열된 이후의 활동이다. 우선, 제5대 민의원선거에서의 성공 여부를 살펴보자. 제5대 민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은 민의원 43명, 참의원 8명을 공천했고, 혁신세력의 통일전선이었던 사회대중당은 전남지역 32개 선거구 중 22개 선거구에 23명의 후보자를 공천했다. 19) 18) 사회대중당 발기인으로는 최근우(근민당), 김달호(진보당), 김성숙(근민당, 민혁당), 유병묵(근민당), 유한종(한독당, 근민 당), 이동화(민혁당), 이훈구(민족주의민주사회당), 박기출(진보당), 서상일(민혁당), 윤길중(진보당), 윤우현(부산혁신세력 총집결) 등이다(정태영 1995, 539). 19) 7 29총선 당시 전남지역의 각 선거구에서 출마한 후보자들의 득표현황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역대선거정보시스템 ( 참조하라. 2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31 <표 2> 전남지역 정당 단체별 입후보자 수 입후보자수 민주당 자유당 무소속 사회 대중당 통일당 헌정 동지회 혁신 동지연맹 민의원 참의원 * 자료 : 연합연감(1961, 139 & 141) 제5대 민의원 선거에서의 당선자를 보면 전남지역 32개 선거구 중에서 민주당은 29개 선거구에서 당선자를 배출했으며, 무소속 후보가 2개 선거구에서, 통일당 후보가 1개 선거구에서 당선되었다. 사회대중당은 22개 선거구에 후보자를 공천했지만 단 1명의 후보도 당선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득표율도 민주당이나 자유당, 통일당에 뒤졌다. 전남지역 32개 선거구 중에서 비( 非 )민주당 후보가 당선된 경우는 제22선거구(영암)에서 통일당의 김준연후보가 무소속 박종오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사례와 제15선거구(고흥)에서 무소속 서민호후보가 역시 무소속인 지영춘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사례가 있는데, 이 지역은 전남 32개 선거구 중 민주당이 유일하게 공천을 하지 않았던 선거구였다. 또한 제20선거구(해남)에서는 무소속 홍광표후보가 당선되었다. 이들 비민주당 소속으로 당선된 3인의 당선자 중 통일당의 김준연은 1928년 동아일보 편집국장 재직 시 제3차공산당사건(ML당사건) 에 관련되어 7년간의 옥고를 치른 경력이 있지만, 해방 이후 한민당에 입당하여 제3대와 제4대 민의원을 역임하는 등 통상적인 혁신계 정치인들과 계파는 물론 정치행적 자체가 달랐다. 서민호 역시 1967년 대중당 소속으로 대통령후보로 출마하는 등 혁신세력과 일정한 연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반공주의자였고, 보수적인 이념을 포지했던 인사였다. 해남에서 당선된 무소속 홍광표 당선자는 혁신세력과는 무관한 정치인이었다. 결국 전남지역 32개 선거구에서 범혁신세력의 통합정당인 사회대중당은 단 1명의 당선자도 배출하지 못했으며, 득표율 역시 민주당이나 무소속 후보의 합계와 비교할 때 뒤진다. 7 29총선에서 사회대중당은 전국적으로 541,021표를 득표해 5.96%를 득표했고, 이는 민주당의 41.71%, 무소속 합계 46.80% 보다 크게 낮고, 20) 전남지역만 보더라도 민주당 46.01%, 무소속 합계 40.82% 보다 낮은 8.16%의 득표율에 그치고 있다. 22개 선거구에 후보자를 공천한 정당의 득표율치고는 너무 낮은 득표율이다. 20) 7 29총선이 4 19 직후 치러진 관계로 상당수 자유당 출신 내지 자유당 성향의 후보가 무소속 후보로 출마한 것을 고려 할 때 실제 사회대중당은 자유당의 득표율보다 낮았을 수 있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29 민주화운동
32 7 29총선 당시 전남지역 선거구의 각 정당별 입후보자 수와 득표현황은 아래와 같다. <표 3> 정당별 득표현황 합계 민주당 자유당 사대당 한사당 통일당 한독당 기타 무소속 전국 (득표율) 9,077,835 3,786,401 (41.71%) 249,960 (2.75%) 541,021 (5.96%) 57,965 (0.63%) 17,293 (0.19%) 26,649 (0.29%) 149,366 (1.65%) 4,249,180 (46.81%) 전남 (득표율) 1,271, ,030 (46.01%) 41,109 (3.23%) 103,731 (8.16%) 14,878 (1.17%) 7,630 (0.60%) 519,027 (40.82%) * 출처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역대선거정보시스템( 7 29총선에서 사회대중당의 실패는 당의 분열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7 29총선을 앞두고 범혁신세력이 선거참여를 위해 급조한 성격이 강했던 사회대중당은 선거 실패로 당을 유지 결속시킬 구심점을 상실했고, 이에 덧붙여 사회대중당으로의 범혁신세력 결집 및 통합의 과정에서 잠복해 있던 당 지도부의 이념 및 노선, 계파간의 갈등이 총선 실패를 계기로 노골화되면서 당은 결국 분열했다. 사회대중당 중앙의 분열과정과 마찬가지로 사회대중당 전남도당의 분열과정 역시 그 출발점은 구 진보당 계열의 이탈로부터 시작된다. 총무부장 조중환, 조직부장 박세원, 선전부장 임춘호, 전남도당 준비위원이었던 노응상, 이명하 등 구 진보당 계열의 인사들이 사회대중당을 이탈했는데, 이들은 후에 통일사회당 전남도당을 결성한다. 21) 구 진보당계열이 사회대중당 전남도당에서 이탈하자 도당위원장 국기열을 중심으로 김철, 강석봉, 조극환, 이기홍, 서동열, 이호면, 임무창, 김규남, 홍정희, 조규선, 염동호, 임우택, 김철중 등이 향후 사회대중당 전남도당의 진로와 관련한 문제를 논의했으나(김세원 1993a, 337), 결국 김철중 등 김달호 계열의 인사들을 제외하고 다수는 사회당 전남도당 창당준비위원회로 합류한다. 끝까지 사회대중당을 지켰던 김철중은 1960년 5월 20일 사회대중당 전남준비위원회를 조직한 후 총무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사회대중당 결성과 함께 중앙위원에 피선되었다. 7 29총선 당시 사회대중당 공천으로 전라남도 제25선거구(무안군)에 출마했으나 2,225표에 그쳐 낙선한 뒤 사회대중당의 분열과정에서 통일사회당이나 사회당으로 합류하지 않고 끝까지 사회대중당에 남아서 활동한다. 특히 장면정부가 정부반대세력에 대한 탄압을 노골화하기 위해 2대 법안을 발의하자 2대악법반대 전남공동투쟁위원회 의 지도위원으로 활동하다 5 16 군사쿠데타 이후 전라남도사회대중당사건 으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는다(한국혁명재판사편집위원회 1962b, 21) 김세원에 따르면(1993a, 337), 당시 사회대중당 전남도당의 분열은 선거실패 외에도 당 공천기탁금의 착복 시비도 한 몫 했었다고 한다. 3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33 ). 사회대중당 전남도당의 결당은 몇 가지 의미를 갖는다. 사회대중당은 4 19혁명 직후에야 정치활동을 개시한 혁신세력이 제5대 민의원선거를 맞이하여 선거에 참여하기 위해 결성한 선거정당이었다. 사회대중당을 선거정당으로 규정할 경우 사회대중당의 성과와 한계는 보다 분명해진다. 결당준비위 출범에서 총선까지 1달여의 짧은 시간밖에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범혁신세력 최초의 통합을 성사시켰다는 점에서 긍정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1948년 단정 수립 이후 지하화 되었던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 남로당, 빨치산 참여 인사들과 진보당사건으로 정치활동의 제약을 받았던 김규식과 조봉암계열의 민족주의적 인사들에 이르기까지 범혁신세력이 4 19라는 특수정세에서 합법적으로 결성한 정당으로서 제도정치권 내부의 권력경쟁에 대규모로 참여했다는 사실은 가벼이 넘겨서는 안 된다. 다만 이념적 지향이 강했던 사회대중당이 무소속으로 대거 출마한 구( 舊 )자유당 계열의 후보자들이나 민주당 후보 및 정책과의 차별성 제시에 실패했고, 특히 민주당의 색깔공세에 무기력하게 대응하는 등 급조된 선거정당으로서 지도력의 한계도 그대로 노정하고 말았다. 이러한 한계들은 결국 7 29총선에서 사회대중당이 실패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특히 선거 실패 이후 당 내부의 리더십 갈등이 재현되고, 내부 파벌들 간의 이념적 정책적 차이와 거리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최초의 통합정당이 최후의 통합정당이 되어버린 점은 사회대중당의 역사적 한계라고 할 수 있다. 통일사회당은 1961년 3월 24일 19시경 광주시 남동에 위치한 통사당 전남도당 인권옹호위원장인 박세원의 집에서 통사당 당무위원회 부위원장이자 통사당 전남지역 임시 조직책 이명하의 주도로 최운기, 정해룡, 조중환, 임춘호, 박세원, 노응상, 정길문 등 통일사회당 전남도당 결성준비위원 18명이 회동하여 전남도당 결성준비위원회를 개최했다. 해당 모임에서는 우선 통사당 전남도당 준비위원회의 임원을 선출하고 부서를 결정했다. 통일사회당 전남도당결당준비위의 임원은 아래와 같다. 전남도당 위 원 장 최운기 부위원장 정해룡(정치위원 겸임) 조중환 조직국장 노응상 당무위원장 임춘호 인권옹호위원장 박세원 이하 미상 통일사회당 전남도당의 활동은 크게 2대악법반대투쟁과 관련한 정치 강연회의 개최와 중립화 31 민주화운동
34 통일 전남도연맹 결성과 관련되어 있다. 22) 1961년 3월 24일 개최한 통사당 전남도당 준비위원회 모임은 중앙당의 지방유세 개최를 위한 준비모임의 성격도 동시에 띠고 있었는데, 바로 다음날인 3월 25일 14시에 광주공원 앞 광장에서 통사당 주최의 정치 강연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정치 강연회 행사준비와 관련해서는 지역 조직책 이명하가 행사의 취지와 주요 내용을 설명하고, 행사개최를 위한 도당준비위의 임무를 분담하는 논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23) 이날 모임에서는 이명하가 전달한 동서냉전의 희생에서 해방되고 미소양국의 세력 전에서 벗어나는 정치적 군사적 완충지대, 즉 영세중립화통일조국을 수립하는 중립화만이 통일독립을 가능케 한다 는 취지의 영세중립화조국통일총연맹 발기선언문 100여부를 참가자들이 분배 회람한 후 동시에 영세중립화조국통일총연맹 전남도맹 결성을 합의하여 최운기를 전남도맹 위원장으로 선임했다. 이명하가 전달한 유인물은 정해룡을 통해 같은 해 4월과 5월경 통사당원인 정길문과 손성훈 등을 통해 보성군 지역에 배포하는 것을 비롯하여 결당준비위원들이 동 유인물을 배포하여 한국 영세중립화 통일론의 확산을 모색했다. 1961년 3월 25일 14시경 광주공원 앞 광장에서 개최된 통사당의 정치 강연회에서는 통사당(중앙당) 정치위원장인 이동화가 연사로 나서 민주사회주의 노선의 역사적 임무 제하의 연설을 하고, 통사당 특별위원회인 통일촉진위원회 위원장인 김기철이 중립화 통일에 대하여 제하의 연설을 했으며, 통사당 조직국장이자 민의원인 박권희가 2대법(반공법과 데모규제법)을 반대한다 제하의 연설을, 선전국장 고정훈이 국내의 정세보고 제하의 연설을, 전남 조직책이자 당무위원회 부위원장 이명하가 우리는 어떻게 하면 살 것인가 제하의 연설을 했다. 통사당 주최의 이 정치 강연회에는 10,000여명의 시민이 참석했다고 하는데, 행사 참석자들에게 영세중립화조국통일총연맹 발기선언문을 배포했다. 이 정치 강연회에서 연설한 연사들은 집권당인 민주당의 무능과 장면정부의 비민주성, 2대악법이 혁신정당을 탄압하고 보수정책의 도구화하려는 시도라는 점, 한국의 영세중립화 통일안이 한국의 정치적 특수성과 국내정세의 제반사정에 비춰 대한민국의 진정하고 유일한 통일방안임을 천명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통사당 전남도당은 통민청이 주최한 4 19혁명 1주년 기념식 에도 참여했는데, 통사당 부위원장인 조중환은 1961년 4월 18일 13시경 통일사회당 전남도당 당사에서 통일민주청년동맹 전남도맹 위원장 김시현 등과 만나 통민청 주최로 4월 혁명 1주년 기념행사시에 별도로 2대악법 반대 성토대회 및 시위를 진행할 계획을 전달받고 김시현 등에게 행사 준비를 위해 통사당 전남도당 사무실을 사용케 하고, 통사당 전남도당 사무실에서 4 19혁명 1주년 22) 통일사회당 전남도당의 활동내용은 정해룡의 3남 정길상이 제공한 통일사회당 사건 재판기록을 통해 정리한 내용임을 밝 혀둔다. 인용을 허락해준 정길상씨에게 감사드린다. 23) 통사당 전남도당준비위는 3월 25일 광주공원에서 개최예정이던 정치 강연회 행사를 위해 일체의 준비를 분담했는데 정해 룡은 사회를 담당하기로 결정됐고, 박세원은 행사장의 설비책임을, 조중환은 자동차와 마이크 준비 책임을 각각 분담했다. 3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35 기념행사에 사용할 피켓(구호판) 및 플래카드 등에 학원의 자유를 달라, 데모가 이적이냐 악법이 이적이냐, 배고픈 백성에게 악법보다 빵을 달라 는 등의 구호 등을 기재한 후 다음날인 4월 19일 광주공원 앞 광장에서 거행된 2대 악법 반대 성토대회 및 시가행진에 동참했다. 통사당 전남도당준비위는 준비위 단계로 활동하다 5 16군사쿠데타로 도당준비위 임원들이 구속되면서 조직이 와해되었는데, 5 16 군사쿠데타 직후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위반으로 구속된 통사당 간부들은 정해룡, 조중환, 임춘호, 박세원, 노응상 등 5명이었다. 이들은 재판과정에서 혁명검찰부의 기소내용과 같이 정치 강연회를 개최한 것은 사실이고, 김기철이 중립화 통일에 대한 연설을 한 것도 사실이나 그 내용이 1954년 제네바 유엔총회 때 한국대표 변영태가 제안했던 14개 조항을 기초로 한 유엔 감시 하 인구비례제의 총선거와 미국 상원의원 맨스필드의 의견이 한국중립화 통일에 대한 전망을 종합하여 설명하고 국민의 여론에 묻고자 한다는 요지의 연설이었음을 항변했다. 또한 정치 강연회가 합법적인 절차를 수속한 정당 활동임을 강조했으나 혁명재판부는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통사당 전남도당준비위원회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다른 혁신정당들과 비교할 때 재정적으로는 가장 안정된 기반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점을 활용하여 통사당 전남도당준비위는 독자적인 사업을 전개하기보다는 통민청 등 청년운동조직과의 연계를 통해 공동투쟁 및 연대활동을 전개하는 방식을 택했다(김시현 구술, ; 이문교 구술, ). 전남지역에서 전개되었던 2대악법 반대 공동투쟁 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통일운동에 있어서는 통사당(중앙당)이 민자통에서 이탈 중통련을 결성하며 독자적인 통일운동을 전개했던 관계로 민자통 전라남도협의회에 참여하지 않았고, 이와 관련된 행사에도 민자통 전남협의회와는 별개로 독자적인 행사를 모색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고 한다(김시현 구술, ; 이문교 구술, 2007, ). 사회당 창당 준비위원회의 핵심간부는 주로 조선공산당, 남로당, 근로인민당계 인사들이었다. 전남지역에서 사회당 창당준비위에 참여한 인사로는 김철(70세, 3 1운동 주도, 45년 인민당 전남도당위원장, 건준 전라남도 부위원장), 강석봉(1926년 제3차 조선공산당 전남도당책, 45년 건준 전라남도 부위원장), 한길상(3 1운동 참가 투옥, 제3차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45년 건준 전라남도 산업부장), 이기홍(1929년 광주학생운동 참가 제적, 1934년 적색 농민운동사건 투옥, 45년 건준 광주시 노동부장, 조공 남로당원, 49년 남북로동당 합당시 탈당), 성시백(특수공작선 멤버, 53년 구국투쟁동맹 노장환 사건 투옥), 서동열(만주 공청에서 항일운동, 45년 남로당, 53년 구국투쟁동맹), 최백근(항일운동, 1932년 투옥, 45년 근로인민당, 1948년 해주에서 개최된 남북협상회의에 근민당 대표로 참가, 1949년 4월 월북, 근민당 재북 당무부장에 취임하여 체류하다가 6 25 당시 조국통일민족전선 정치공작원으로 남하, 9 28 월북, 1952년 9월 대남공작원으로 남파, 1952년 12월 피검 투옥, 1955년 만기출옥), 국기열(동아일보 정치부장, 45년 33 민주화운동
36 건준 전남부위원장), 이호면(구국투쟁동맹사건으로 투옥), 그리고 김세원 등이었다(김세원 1993a, ). 사회당의 강령은 민주사회주의에 입각한 새 역사의 창조, 독재세력을 타도하여 자유를 수호, 계획적 경제체제와 현대적인 복지국가 건설, 인간의 지능과 창조력을 배양 개발, 우방 제국과의 긴밀한 제휴로서 민주적 조국통일의 주체가 된다는 내용의 5개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권희경 1989, 93), 24) 정치운영(4개조) 경제정책(13개조) 사회문제(5개조) 국방정책(2개조) 현대화(6개조) 등 각 부문별 정책을 제시했다(권희경 1989, 93-97). 사회당 전남도당 결성준비위원회의 임원구성을 보면, 위원장은 국기열, 당무위원장 이호면, 조직위원장 서동열(실질적인 조직위원장은 이기홍), 선전위원장 김세원(청년학생 지도책), 도당 부위원장 겸 재정위원장 강석봉, 부위원장 한길상, 도당 고문 김철, 선거대책위원장 임무창, 총무부장 이영복, 부녀부장 김주 등이었다. 사회당 전남도당은 독립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의 원로들로 구성되었는데, 이기홍이 실질적으로 조직을 맡아 조직화를 담당했고, 이기홍이 지역적 연구가 없는 지역 혹은 빨치산활동 경력자와의 연계가 없던 지역이었던 화순군과 장흥군, 보성군의 경우에는 김세원이 조직을 담당했다(김세원 1993a, 344). 중앙 사회당과 마찬가지로 결성준비위원회 출범 직후 사회당 전남도당은 크게 세 가지 활동에 주력한다. 하나는 2 8 한미경제협정체결반대 공동투쟁위원회 활동이며, 다른 하나는 2대악법 반대공동투쟁위원회 참여, 마지막으로 민자통 결성이다. 물론 사회당 전남도당이 이러한 투쟁을 독자적으로 추진해 나갔던 것은 아니다. 사회당의 외곽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통민청 전남도맹과 긴밀히 연계하여 조직화와 대중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사회당 전남도당 역시 다른 정당에 비해 수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 대중투쟁을 독자적으로 주도해 나갈 정도로 광범위한 대중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대중투쟁의 중심은 사회당을 비롯한 혁신정당이었다기보다는 학생운동 혹은 청년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사회당의 역할은 실제 대중투쟁을 기획하며 대중시위를 주도하기보다는 의제를 설정하고 청년운동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하는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통민청에 대해서는 사회당의 원로급 인사들이 직접 지도를 담당했다. 당시 사회당 전남도당이 주도했던 대표적인 정치활동은 2 8한미경제협정반대투쟁이었다. 통민청 출범 직후 첫 번째 정치활동도 광주공원에서 개최한 2 8한미경제협정반대성토대회였다. 당시 성토대회는 전남지역의 혁신계 정당들이 분열된 후 처음으로 2 8한미경제협정반대 전라남도공동투쟁위 를 결성하여 연대를 모색했던 첫 행사였다. 그러나 당시 전남지역의 24) 김세원에 따르면(김세원 1993a, ), 사회당 결성 당시 당헌 기초소위원으로 최백근, 유병묵, 김진한, 김세원 등이, 당 강령 규약은 최백근, 김진한, 김세원이, 선언문은 유병묵이 작성했다고 하는데 아직까지 공인된 주장은 아니다. 실제 김 세원의 비트(1993a)에 언급된 사회당의 강령내용은 자료로 전해지는 사회당의 강령내용과 많이 다르다. 3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37 혁신정당들, 특히 사회당은 내적으로 조직역량이 뛰어났지만 외부행사를 개최할 여력까지는 없었으며, 통민청이 앞장서 일을 추진하면 사회당이나 통사당, 사회대중당이 뒤에서 원조하는 형태로 거의 모든 행사나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고 한다. 또한 한 가지 문제를 가지고 행사를 개최하려면 힘드니까 한번 행사를 개최하면 (한미)경제협정 문제부터 통일문제까지 여러 문제들을 결합해서 투쟁하는 형태였다고 한다(김시현 구술, ; 박익수 구술, ; 이규영 구술, ). 당시 전남지역의 혁신정당들과 통민청 사이에는 일종의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는데, 혁신정당들은 자금동원, 인력지원 등을 전담하고 통민청은 전면에 나서 대중행사를 주관했다고 한다. 통민청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단체는 사회당과 민자통이었고, 이들 중 상당 수 인사들은 공안기관의 감시로 공개 활동이 자유스럽지 못한 인사들이었기 때문에 통민청이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김시현 구술, ; 박익수 구술, ). 결국 사회당 전남도당결성준비위는 통민청을 후방에서 지원하는 형태로 당면한 이슈에 대응했는데, 2대악법반대투쟁도 마찬가지였다. 사회당은 4 19 이후 나타났던 혁신정당들 중에서 가장 급진적인 정당이다. 사회당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과거 조선공산당, 남로당, 근로인민당계 인사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전남지방은 사회당 참여자가 많을 수밖에 없는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고, 25) 한국전쟁 당시 입산자, 즉 빨치산 참가자가 많았던 지역이었다. 대구와는 달리 인민군의 완전 점령 지역이었던 관계로 좌익운동 관계자들이 완전히 노출되었고, 인민군과 국군의 점령이 거듭되면서 과거 독립운동에 참가했던 인사들이나 좌익운동 관계자들은 대부분 정치활동을 억압당했다. 4 19혁명은 이들에게 합법적인 공간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사회대중당은 이들이 최초로 활동을 개시한 정당이었고, 7 29총선 실패 이후 대중운동을 통한 조직화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당이 결성되었고 이들 세력이 결집한 사회당이 다른 혁신정당에 비해 이념적으로나 정책방향에 있어 가장 급진적인 것은 당연했다. 또한 사회당은 통민청과의 연계를 통해 당의 활동능력을 배가시켰다. 다른 혁신정당들이 선언문이나 성명서 발표 수준에서 활동을 전개할 때 사회당은 통민청이라는 청년운동단체에 대한 지도와 민자통이라는 대중적 통일운동조직의 건설을 통해 대중들과의 접촉면을 넓혀가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사회당의 활동이 미처 정상궤도에 오르기도 전에 5 16 군사쿠데타가 발생하면서 사회당의 모든 활동은 정지당하고 말았으며 사회당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옥고( 獄 苦 )를 치러야만 했다. 25) 일제 때 광주학생운동을 비롯하여 무수한 저항운동이 발생했던 지역이며, 많은 독립 운동가를 배출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또한 박헌영이 일제 경찰의 검거를 피해 해방되던 시점까지 광주 백운동의 한 벽돌공장에서 은거하면서 인근 화순탄광 등 을 거점으로 비밀리에 조직화를 전개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해방 직후에도 미군정과 민중들과의 대립이 매우 치열했 던 지역 중의 하나이며, 그 과정에서 곳곳에서 양민들이 학살당하는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35 민주화운동
38 2. 청년운동: 통일민주청년동맹 전남도맹 26) 과 전남대 민통련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은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에 비해 결성 시점도 늦을 뿐만 아니라 조직의 강령, 통일방안, 변혁노선, 조직원 등에 대한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통민청은 민민청과 함께 청년운동의 중심축을 담당했던 조직으로서 이후 학생운동은 물론 진보운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통민청 전남도맹은 1961년 2월 14일 결성회의가 개최된다. 2월 14일은 여러 가지 정치적 행사가 개최되었던 날이다. 서울에서는 사회대중당 당사에서 2 8한미경제협정반대 공동투쟁위원회가 결성되던 날이었고, 전남에서는 민자통 전남도협의회 결성을 위한 준비회의가 최종적으로 개최되었다. 통민청 전남도맹의 결성은 전남대학교 김시현이 주도했는데, 최초 결성 모임에 참석한 인원은 9명이다. 27) 통민청 전남도맹 결성을 지원했던 중앙통민청 전남조직책 박익수, 김시현, 이문교, 김수영, 박복규, 박명서, 최준섭과 사회당의 김세원, 그리고 한길상 등 총 9명이 결성회의에 참석했다. 이들 중 최준섭과 김세원은 당시 학생이 아니었고, 나머지 5명은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 학생들이었다. 28) 이들이 통민청을 결성하게 된 1차적 계기는 민주당 정부에 대한 실망과 불신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대개 4 19혁명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경력이 있던 학생들이었다. 당시에도 서울을 제외하고 운동역량과 조직이 가장 강력했던 지역 중의 하나였고, 특히나 남로당 출신과 구 빨치산 경력자들이 많이 생존해 있던 전남지역에서 민민청이 조직되지 않았던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전남지역의 학생운동 및 청년운동세력들은 7 29총선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을 혁신세력의 분열에서 찾고 있었다. 따라서 청년운동만은 지역에서 비슷한 성격의 조직들을 만들어 투쟁역량을 분열시킬 필요가 없고, 그래야만 통일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매진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김시현 구술, ; 이문교 구술, ). 29) 통민청의 조직목표는 크게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통일세력의 결집이었고, 다른 하나는 기존 정치세력을 대체하는 새로운 정치세력, 보다 구체적으로 청년운동이 중심이 된 새로운 집권세력의 구축이었다. 이들은 기존 정당과 기존 정치세력들을 전부 배제하고 청년학생들이 앞장을 서서 새로운 통일세력과 집권세력을 구축하자는 결성취지문에 찬동했기 때문에 통민청에 가입했고 이러한 26) 이하의 기술은 통민청 전남도맹 위원장 서리 김시현과 선전국장 이문교, 그리고 통민청 맹원이었던 이규영과 박익수와의 구 술내용에 크게 의존했는데, 이는 통민청 전남도맹 관련 자료나 연구가 거의 전무하기 때문이다. 27) 재판자료나 다른 논문 등에는 10여명으로 나온다. 28) 김시현은 조직을 하는데 장소가 어디 대외적으로 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사회당 의원 한길상씨 댁에서 우리가 통민청을 조직했 다고 증언하고 있다(김시현 구술, ). 29) 이문교는 우리가 수차례 모임을 거듭하고 전남에서 청년학생조직의 중심세력으로 모든 역량을 여기에 집결 통일시키기로 하고 전남 통민청을 결성했습니다. 말하자면 전남에서는 통민청 외의 다른 청년조직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이고, 전남에 서 청년학생들은 전부 통민청으로 하나의 조직 속에 묶어서 집결시키자는 그런 취지의 우리 결의가 여기 있었(다) 고 증언 한다(이문교 구술, ). 3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39 조직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열성적으로 활동했었다고 한다. 따라서 당시 통민청을 단순히 사회당의 하부조직만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김동춘 1991, 123), 통민청의 조직목표나 활동수준을 볼 때 사회당과 긴밀히 연계된 것은 사실이지만, 사회당의 하부조직이나 사회당이 조직한 청년운동조직이라는 평가는 정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통민청의 역할이 자체의 조직화와 학생운동 지원, 민자통의 운영을 담당하는 수준을 넘어 기존의 정치세력을 대체하는 대안세력의 중심, 새로운 정치조직을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통민청(민민청도 마찬가지)은 혁신정당 외부에서 혁신정당을 채찍질하며 독자적인 활동영역을 구축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앙통민청과 통민청 전남도맹과의 연계는 중앙통민청의 박익수, 박현채와 통민청 전남도맹의 김시현을 통해 이루어졌다. 김시현의 증언에 따르면(김시현 구술, ), 박현채는 가끔 한 번씩 들르면 전화통화, 서신 일체 안 해. 실제 만나서 가지고 있는 자료, 우리가 했던 것, 유인물이라든지 포스터라든지 실질적으로 논의를 해 가지고 또 거기서 내용을 우리한테 알려주는 형태로 전남통민청과 중앙통민청과의 유기적 연계를 모색했다고 한다. 통민청 전남도맹의 조직구성을 보면, 위원장 서리 겸 동원국장에 김시현, 사무국장에 김수영, 선전국장에 이문교, 교양국장 박복규, 투쟁국장에 박명서 그 외에 최준섭, 박동희, 오택명, 김상태, 안태순, 나기주 등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 학생들이 운영에 중추적으로 참여했다. 통민청 전남도맹은 중앙통민청의 조직화방식과 마찬가지로 군 단위 지방조직의 결성을 시도했다. 비록 5 16 군사쿠데타가 발발하면서 전체 군 단위로 확산되지는 못했지만, 이문교가 우선적으로 자신의 고향인 완도지역을 중심으로 계몽활동 당시 교류하던 청년학생들을 접촉한 후 통민청의 취지와 유인물 등을 전달하고 그 필요성에 대해 동의를 받은 후 완도읍의 정기탁을 책임자로 정해 인근 해남군과 강진군을 하나로 묶는 조직결성을 추진했었다고 한다(이문교 구술, ). 그러나 5 16 군사쿠데타 직후 이문교가 통민청 활동을 이유로 경찰에 검거되면서 통민청 전남도맹의 군 단위 조직화가 무산되었다. 통민청은 원래 서울과 전남 중심의 조직이었는데, 이는 사회당의 세력권과도 대체로 일치한다. 통민청 전남도맹의 회원은 증언자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나는데, 이문교는 내 기억으로는 140~150명이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가는데, 5 16이 터지자 (회원명부를) 모두 없애버렸어요. 김시현이가 그걸 보관했어요. 아마 김시현이가 가장 잘 알거예요 라고 증언하고 있고, 김시현은 꽤 많았어. 대략 내가 명부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 백여 명이 넘었으니까. 민통련은 사실 별로 얼마 안됐어. 통민청은 (구속이 된 사람만) 80-90명 가까이 됐으니까. 150명은 넘고, 전체 규모라면 한 명쯤 될 것 같아 (김시현 구술, ). 회원구성을 보면, 전남대학교 학생을 주축으로 조선대학교, 광주사범학교(현 광주교육대학교), 광주여고, 전대사대부고, 청년부의 기세문, 안태순, 오택명과 박동환 등 종연방직(현 전남방직) 37 민주화운동
40 노조원까지 통민청 전남도맹의 활동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었다(기세문 구술, ; 박동환 구술, ). 기세문의 증언에 따르면, 사회당 선전부장이자 청년부 조직책이었던 김세원이 자신에게 통민청 위원장을 권유했지만, 자신은 국가보안법으로 옥고를 치르고 비전향으로 출소한 상태에다가 병역기피문제까지 걸려 있었기 때문에 외부에 노출되는 활동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어서 전면에 나서지 않고 측면에서 협조하기로 했다고 한다. 30) 이 부분은 김세원의 수기 비트 에서도 확인된다(김세원 1993a). 당시 통민청은 통민청 발기인이자 중앙위원이었던 이규영이 통민청의 기관지격인 신세대 라는 잡지를 발간했는데, 이규영이 직접 가지고 내려온 적도 있고(이문교의 증언), 박익수나 박현채를 통해 전달되기도 했다고 한다(김시현 구술, ; 이문교 구술, ; 박익수, ). 31) 통민청 전남도맹은 주로 민자통과 사회당에서 지원을 받았는데, 정치이념은 사회당 소속의 강석봉, 이기홍, 김세원, 김철, 기세문 등의 지도를 받았고, 민자통의 한길상, 문태곤 등으로부터는 통일노선 및 정책과 관련한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지도의 형태는 오늘날 이야기하는 사상학습의 형태와 유사한데, 주로 비밀리에 이들의 집에 모여 당면 정세를 토론하거나 교양하는 형태의 지도였다고 한다. 통민청 전남도맹의 활동은 크게 민자통 결성대회 참가와 2대악법 반대투쟁, 남북학생회담촉진 전남학생대회 개최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32) 통민청 전남도맹 위원장 서리 김시현은 1961년 2월 19일 광주시 금남로 2가 YMCA회관에서 개최된 민자통 전남협의회 결성대회에 통민청 전남도맹 대표로 참가하여 민족자주적인 평화통일과 남북경제문화교류, 서신왕래 등을 주장했던 민자통 전남협의회에 가입한 후 학생부장으로 선임되었다. 김시현은 또한 2월 25일 서울 천도교대강당에서 개최된 중앙민자통 결성대회에 통민청 전남도맹 대표로 박복규, 유광원 등과 함께 참석하여 남북한 민주민족 주체 세력의 협상을 통한 평화통일과 완충지대에 우체국설치, 남북한의 경제 문화 인사 등의 교류 등의 투쟁목표 채택을 결의했다. 3월 4일에는 광주시 불로동 한길상의 집에서 통민청 전남도맹 간부회의가 소집되어 김시현이 참석자들에게 민자통의 취지를 역설하여 참석자 전원의 찬동을 받고 중앙의 혁신단체 연사를 초청하여 조국통일촉진강연회를 개최함으로써 전남도민들에게 평화통일 등을 내용으로 하는 통일정책을 선전할 것을 결의한다. 통민청은 3월 12일 광주공원 광장에서 청중 약 6,000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조국통일촉진강연회를 개최했는데, 전남도맹 교양국장 박복규의 사회로 시작하여 중앙 민자통 조직국장 김배영, 중앙 통민청 교양국장 박익수, 집행위원 김영광, 혁신당 선전위원장 유병묵, 민족일보사사장 조용수 등이 참석하여 중립화통일, 남북협상, 남북평화통일 등과 함께 30) 이 부분은 기세문의 미간행원고인 과도기의 론리, 우리 민족의 살길 의 160쪽을 인용했다. 31) 기관지 신세대 는 후에 신시대 로 제호를 변경하고 월간지 형태로 발간했다. 32) 통민청 전남도맹의 활동내용은 한국혁명재판사편집위원회(1992b, )에서 관련 내용을 발췌했다. 3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41 장면정부를 비판하는 취지의 강연을 실시했다. 3월 28일에는 민자통 전남협의회 주최로 전남 광산군 송정읍 공회당에서 개최한 조국통일촉진강연회에 통민청 전남도맹 간부인 박명서 및 안태순 등이 통민청 대표로 참석해 청중 약 500여명 앞에서 평화통일을 민족의 지상목표로 남북한의 협상과 교류가 시급히 요청된다 는 취지의 강연을 했다. 1961년 3월 22일경 김시현, 김수영, 박복규, 박명서 등 통민청 간부 10여명은 광주시 양림동 김시현의 집에 모여 당시 정부가 국회에 제출하려고 준비 중이던 반공임시특별법안과 데모규제법 등 2대특별법안은 국민의 자유권을 침해하고 혁신운동을 억압하기 위한 악법으로서 이를 2대악법으로 규정하고 이를 반대하는 투쟁을 조직할 것을 결의한다. 이 결의에 따라 통민청 전남도맹은 2대악법반대 전라남도 공동투쟁위원회 명의로 4월 1일 광주공원에서 청중 약 6,000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2대법반대시민궐기대회를 개최했는데, 당시 김시현은 전라남도 공투위의 연락위원 겸 기획위원으로 참가하여 2대악법제정반대격문을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 등에 배포했고, 통민청 전남도맹 회원이었던 최준섭은 2대법반대시민궐기대회 석상에서 사회를 담당하고, 박명서는 성명서를 낭독했고, 김시현은 2대법은 국민의 권리를 억압하고 통일을 방해하려는 악법이다 는 요지의 결의문을 낭독했다. 같은 날 오후 3시경부터는 궐기대회에 참석했던 시민들과 함께 반민주공장송데모 라는 명목으로 상여를 선두에 세우고 장면 정부 물러서라, 배고픈 사람에게 악법보다 빵을 달라, 데모가 이적이냐 악법이 이적이냐 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광주공원에서 남광주역에 이르는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4월 14일에는 김시현의 집에서 통민청 전남도맹 간부회의가 다시 개최되었는데, 이날 간부회의는 다가오는 주년 기념일에 광주공원에서 고등학생 및 대학생을 규합하여 4월혁명 완수 촉진 성토대회 를 개최하기 위한 준비모임이었다. 이날 모임에서 통민청 전남도맹은 관변단체에서 주최하는 주년 기념식을 거부하고, 4월혁명 완수 촉진 성토대회 를 민자통과 공동개최하기로 결의한다. 또한 이날 행사에서는 2대법반대학생성토대회 및 시위행렬도 같이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시내 각 고등학교에 연락하여 플래카드 등을 작성 지참하고 대회에 참가하도록 했다. 그 결과 4월 19일 광주공원 광장에서 광주시내 각 대학 및 고등학생 및 일반시민 약 2,000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4월혁명 완수 촉진 성토대회 가 개최되었는데, 이문교의 개회사에 이어 식순에 따라 2대법제정반대성토대회를 마치고 오후 3시경부터 광주시내 고등학교 및 대학교학생들과 더불어 학원의 자유를 달라, 악법을 철회하고 실업자를 구하라, 통일만이 우리의 살길이다, 데모기 이적이냐 악법이 이적이냐 는 등 구호를 외치며 시내에서 가두행진을 전개한다. 33) 33) 이문교의 증언에 따르면, 우리 통민청이 내가 내 이름으로 집회 시위 신고를 했는데, 나중에 경찰서에 가보니까 시위하는 길(충장로)은 통사당이 누구 다른 사람이름으로 (신고가) 되어 있어요. 시위 장소는 통사당 사람들이 경찰들의 압력에 굴복 했던가, 타협을 했던가 뭐 그렇게 되어 있더라고. 그래서 충장로를 못 지나고 지금 말하면 금남로로 지났었죠. 그때만 해도 금남로는 한가했으니까 (이문교 구술, ). 39 민주화운동
42 통민청 전남도맹은 자주, 민주, 통일을 지향하는 4 19정신의 구체적 실현을 위한 청년조직이었다. 자주적이고 평화적 통일을 위한 다음 세대의 중추세력으로 뿌리내리기 위한 조직목표를 설정하고,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화를 진행했다. 통민청은 기존정당이나 정치세력을 부정부패하고 반민주, 보수수구집단으로 규정하고, 이를 대체할 대안적 세력을 자임하기도 했다. 통민청 전남도맹은 4 19혁명 이후 5 16 군사쿠데타 직전까지 전남지역 청년운동은 물론 혁신세력 정치활동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당시 활동한 인사들이 일사회 를 조직해서 이홍길, 김동원, 홍갑기, 박석무로 이어지는 1960년대 중후반 전남대 학생운동의 지도세력이 되었으며(김시현의 구술, ), 이들이 성장하여 1970년대 전남대는 물론 광주지역 학생운동의 지도세력을 육성하게 된다. 통민청 전남도맹의 결성은 전남지역에서 사회운동 주체역량의 선순환적 재생산구조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통민청 전남도맹은 전남대 민통련과도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었다. 통민청 위원장 서리였던 김시현이 전남대 민통련 대의원회 의장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민통련에서 주창했던 남북학생회담 성사투쟁에도 통민청이 참여했다. 비록 민통련이 전남대에서 결성되었지만, 민통련 회원 대부분이 통민청 전남도맹 회원이었기 때문이다. 1961년 5월 14일 통민청 전남도맹 위원장 서리 김시현이 주도하여 광주시 금남로 2가 YMCA회관에서 광주시내 각 고등학교 및 대학교 학생 약 300여명의 참석하여 남북학생회담촉진 전남학생대회 가 개최되었다. 동 행사는 전남대 민통련의 결성식이기도 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전남대 민통련 간부 김철의 사회 하에 광주여고생 김혜란이 남북학생회담을 희구한다 는 요지의 선언문을 낭독했고, 전남대 민통련 위원장 유인학, 전남대 민통련 간부 정종협, 김만우, 김명자 등이 다음날 판문점 학생 회담에 우리 모두 참석하자 는 요지의 강연을 했다. 그러나 전남대 민통련은 전남지역에서 독자적인 활동을 하지는 못했다. 민통련은 학교단위로 조직되었고, 회원도 대학생만 가입할 수 있었지만, 통민청은 시 도 행정단위로 조직화되었고, 대학생이 아니더라도 청년과 학생(고교생, 대학생)이 모두 가입 참여할 수 있었다. 조직화의 대상과 범위에 있어서 통민청과 민통련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또한 민통련은 조선대학교에서는 결성되지 못함으로써 활동의 상승효과를 발휘할 수 없었다. 조선대학교는 4 19혁명에 참여했던 핵심운동역량이 박철웅총장 퇴진투쟁으로 퇴학조치를 당하면서 학내의 운동역량이 대부분 소실되고 말았다(전남대학교 1982; 전남대학교 2002). 전남지역 대학 중 유일하게 결성된 전남대 민통련도 5 16 군사쿠데타 이틀 전인 1961년 5월 14일에야 결성된 관계로 실질적인 활동을 전혀 전개할 수도 없었다. 전남대 민통련의 유일한 공식 활동이 전남대 민통련 결성식날 개최한 남북학생회담촉진 전남학생대회 였다. 더욱이 전남대 민통련 회원 상당수가 이미 통민청에 가입해서 활동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민통련만의 독자적인 사업대상과 활동영역을 구축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어려웠다. 이러한 이유로 민통련은 4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43 당시 전남지역의 청년운동에서 평가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이는 역으로 통민청 전남도맹이 4 19 이후 전남지역 청년운동에 있어 얼마나 독자적이고 중요한 조직이었는가를 입증해준다(전남대학교 1982; 오승용 2008) 3. 민족통일운동: 민족자주통일협의회 전남협의회 민족자주통일협의회(민자통)는 1960년 9월 30일 한국전쟁 이전에 활동했던 진보적인 인사들이 민족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의 통일을 표방한 민족자주통일촉진회를 발기하여 조직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것이 1960년 9월말에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로 개칭되었다. 여기에 진보적인 정당 사회단체들이 참여하여 1961년 1월 15일에는 민자통중앙협의회결성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1961년 2월 25일, 21개 정당 사회단체가 참여하여 민자통중앙협의회 결성대회를 갖고, 34) 외세에 의존한 사대노예들의 난무를 일체 배격하고 민족통일역량을 총집결하여 통일에 매진할 것을 결의했다(민족일보 ). 민자통은 정당 사회단체 및 개인으로 민주역량을 총집결하여 3 1의 독립정신에 입각한 민족자주통일달성을 선언 했다. 35) 이 과정에서 통일사회당, 혁신당, 삼민당, 광복동지회, 천도교, 대종교는 1961년 2월 21일 민자통중앙협회의와 결별을 선언하고, 중립화조국통일총연맹발기준비위원회 를 구성했다(민족일보 ). 이들은 결별성명서에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의 통일방안은 구체성이 없다고 주장하고, 영세중립국으로 통일하기 위해 범국민운동을 전개할 것을 천명했다. 민자통은 이들의 결별성명에 대해 상습적 분열주의자들의 행동 이라고 비난했다. 민자통이 결코 중립을 배격 혹은 부정하지 않았고, 다만 통일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국민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통사당 등 중통련 세력은 민자통이 통일방안에 대한 기본태도의 결정을 기피하고 결성대회만을 서둘러 무원칙한 국민운동으로 일부간부들이 오도하고 있다 고 비난하면서 이 결별이 갖는 의미는 혁신세력의 통일정책단일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됨과 동시에 통일정책과 관련한 본격적인 좌우논쟁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민족일보, ; 민족일보, ). 민자통은 각 지방에 민자통 지역협의회 결성을 서두르면서 명실상부한 전국조직화를 실현해 나갔다. 민자통중앙협의회가 결성되기 전까지 전남, 전북, 경남, 경북의 4개 지방조직이 결성이 34) 민자통 결성 당시 참여한 정당 사회단체로는 사회당, 사회대중당, 혁신당 일부, 동학당 일부, 삼민당, 광복동지회 일부, 구 국동지회, 민족건양회, 민민청, 통민청 준비위, 천도교 일부, 천도교 부녀회, 유도회 일부, 4월학생혁신연맹, 피학살자유족 회, 교원노조 일부, 출판노조 일부, 교수협의회 일부, 사회문제연구회, 학사회, 사회과학연구회 등이다(민족일보, ). 일부에서는 혁신당, 삼민당, 광복동지회, 천도교, 대종교 등 중통련으로 합류한 5개 단체를 제외한 16개 정당 사회단 체로 기술하고 있으나(정기영 1990, 140), 당시 민족일보의 보도내용을 보면 이들 단체 회원 모두가 불참한 것은 아니었으 며 일부 당원 및 회원들은 여전히 소속 단체의 이름으로 민자통 결성식에 참여했다. 35) 당시 민자통이 발표한 결의문 전문은 민족일보( )를 참조하라. 41 민주화운동
44 완료된 상태였으며, 충남지역은 민자통중앙협의회가 결성된 이후에 조직되었다. 보도에 따르면, 17개 군 지역에 각각 군협의회준비위가 구성되어 있었고, 해외동포를 중심으로 한 지부의 결성도 구상하고 있었다고 한다(민족일보 ). 민자통의 지방조직은 중앙협의회를 포함하여 도 군 면 단위는 협의체 조직이며, 동 리는 단일조직으로 구성되었다. 민자통은 조직에 가입한 회원의 수가 경북 2만여 명, 경남 2만여 명, 전북 5백여 명, 전남 1천여 명, 경기 2백여 명, 서울 5백여 명, 충북 5백여 명, 충남 5백여 명 등이며, 여기에 정당관계자 1만여 명, 사회단체관계자 4만여 명을 합산하여 전체 회원이 약 10만 명에 달한다고 밝히고 있다(민족일보 ). 민자통의 지방협의회 조직은 대개 사회당과 민민청 통민청 등의 구성원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다. 이는 전국적인 차원에서 조직구성이 가능한 단체가 바로 이들 정당 사회단체였기 때문이다. 또한 각 지역조직의 주요 구성원들은 대개 해방 이후부터 중간파 혹은 좌파계열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거나 혁신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이 많았다. 한미경제협정반대운동, 2대악법반대운동, 남북학생회담지지운동 등의 대중운동을 각 지역의 정당 사회단체가 연합하여 이끌면서 민자통의 전국적 세력화와 조직화가 용이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민자통 전남협의회는 1961년 2월 14일 결성준비회의에서 조직결성의 윤곽이 그려진다(김세원 1993a, 352). 이날 민자통 전남협의회 준비회는 박석진의 집에서 개최했는데 오지호, 김창선씨 등을 비롯해서 임금택, 서동열, 노응상, 김세원 등의 인사들이 참여했다(한국혁명재판사편집위원회 1962c, 137). 이날 모임에서 구성된 민자통 전남협의회 임원은 아래와 같다. <표 4> 민자통 전남협의회 주요 간부의 직책 및 주요 경력 성명 직책 주요 경력 김창선 오지호 상임의장 (선전위원장 겸임) 의장(도대표, 총무위원장 겸임) 구례출신, 공무원, 족청 참여, 47년 호남신문사 편집국장, 전라남도의회의장, 남도일보이사장 전남 화순, 조선대 미술과 교수, 한국전쟁 당시 농민위원회 위원, 화순 백아산 입산, 빨치산 전남지구 총사령부 출판위원 길 문 조직부장 남로당 전남도당 장흥 유치면 당책 박석진 임금택 재정부장 총무위원회 부위원장 무안, 48년 한국미곡창고주식회사 사장, 민자통 전남협의회 준비위원 김시현 학생부장 * 출전 : 한국혁명재판사편집위원회(1962c, 137). 전남대 상대 재학, 전남대 민통련 대의원회 의장단, 통민청 전남도맹 위원장 서리 4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45 2월 14일 준비회의에 따라 2월 19일 민자통 전남협의회 결성식이 거행된다. 결성식은 광주시 금남로 2가 YMCA 회관에서 개최된다. 이날 결성식은 사회대중당 전남도당, 사회당 전남도당, 통민청 등의 단체가 주요 정당 사회단체가 참여했는데, 200여명 정도가 행사에 참여했다고 한다. 결성식에서 감창선과 오지호가 의장단에 피선되고, 김창선은 연사로, 오지호는 의장단 도 대표로, 임금택은 회의록작성서기로 임명되었는데, 김창선은 남북평화통일, 남북협상, 문화교류, 민자통 조직 강화 등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연설을 수행했고, 김태홍은 우리는 외원( 外 援 )에 의존하는 민족이 되고 말았다. 경제자립이 없는 곳에 국가의 독립이 있을 수 없다. 민족세력 결집하여 외세의존 배격하자 및 통일만이 살길이다. 우리는 조국도 하나이며 민족도 하나다 라는 내용의 통일선언문을 낭독했다(한국혁명재판사편집위원회 1962c, 137). 1961년 3월 8일 장면정부는 집회와시위운동에관한법률(안) 을 각의에 상정하기 위해 심의 중에 있으며, 내무 법무장관이 반공을위한특별법 을 별도로 구상중이라고 밝혔다. 장면정부의 2대법안 구상에 대해 <민족일보>는 사설을 통해 민주주의에 도전하는 장 내각의 폭거 라고 비판했고(민족일보 ), <영남일보>는 우리 사회를 일대 공포분위기로 몰아넣을 가능성이 크다 며 반대 입장을 표명했으며(영남일보 ), 중도적 성격의 <한국일보>도 공산당이 아닌 사람들을 공산당으로 만들어내는 법률 이라며 비판했다(한국일보 ). 장면정부의 2대법안 구상에 대해 혁신정당과 장면정부에 반대했던 재야단체와 학생운동세력들은 2대악법의 직접적인 적용대상이라는 점에서 즉각적으로 반발했다. 이들은 이러한 반대를 장면정부에 대한 대정부투쟁과 대중적 조직화라는 두 가지 차원을 동시에 충족시킬 목적으로 2대악법반대 공동투쟁을 전개했다(손병선 1990, ). 전국적인 2대악법반대투쟁에 대해 강경진압으로 일관했던 장면정부는 1961년 4월 9일 금회기의 국회통과를 포기하고 다음 회기에 야당의 협조를 얻어 통과시킬 것 으로 방침을 변경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반공특별법과 데모규제법의 제정을 계속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2대악법 반대궐기대회가 금방 중지되지는 않았다. 악법반대궐기대회와 성토대회를 지속시키면서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발기위원회 와 악법반대전국학생공동투쟁위원회 는 진명여고의 강당인 삼일당에서 악법은 통일금지법, 단결로써 민권을 지키자 는 현수막을 걸고 통일촉진, 악법반대강연회를 개최하여 2대악법반대투쟁을 통해 축적된 투쟁역량을 통일운동으로 전환시키면서 2대악법반대투쟁은 마무리된다(손병선 1990, 140). 민자통 전남협의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2대악법반대투쟁은 1961년 3월 중순 광주시 충장로 서동열의 집에서 김창선, 오지호, 임금택 등 민자통의 주요 간부와 사회대중당 전남도당 대표 김철중 등 10여명이 회의를 개최하여 집회와시위운동에관한법률(안) 과 반공을위한특별법 을 2대 악법으로 규정하고, 2대악법반대 전남공동투쟁위원회 를 조직하고 김창선을 지도위원으로, 임금택을 총무위원으로 선출하는 한편, 민자통 결성사실과 반외세 민족자주통일을 천명하기 43 민주화운동
46 위해 3월 28일 전남 광산군 송정읍 공회당에서 조국통일촉진강연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3월 28일에는 민자통 전남협의회 주최로 개최한 통일촉진강연회에서는 통민청 전남도맹의 박명서 및 안태순 등이 통민청 대표로 참석해 평화통일을 민족의 지상목표로 남북한의 협상과 교류가 시급히 요청된다 는 취지의 강연을 했다. 4월 1일 민자통 전남협의회는 광주공원에서 2대악법반대 전라남도 공동투쟁위원회 명의로 2대법반대시민궐기대회를 개최한다. 이 궐기대회에서 김창선은 2대악법은 혁신계인 야당을 탄압하고 선량한 국민의 인권을 유린( 蹂 躪 )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며, 장면정부의 무능과 부패를 은폐하려는 것이다 라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통민청 전남도맹 위원장 서리이자 민자통 학생부장인 김시현은 2대법은 국민의 권리를 억압하고 통일을 방해하려는 악법이다 는 요지의 결의문을 낭독했고, 결의문 낭독이 끝나자 반민주공구 를 상여에 장치하고 김철중을 비롯한 7-8명이 상여를 메고 광주공원광장을 출발하여 남광주역 광장에 이르기까지 2대법은 공산당을 잡는다 라는 구호 아래 야당과 혁신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악법이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민자통 주도의 시위대는 남광주역 광장에 이르자 역 광장에 운집한 청중들 앞에서 선전위원장 김창선이 조국통일만세 삼창을 선창하고 반민주공장송상여를 불태웠다(한국혁명재판사편집위원회 1962c, 137). 민자통 전남협의회 총무위원회 부위원장 임금택은 1961년 4월 19일 통민청 주최로 광주공원에서 열린 주년 기념식인 4월혁명완수촉진성토대회 겸 2대악법반대성토대회 에 참석해 2대악법이 국민기본권을 박탈하고 혁신세력탄압을 목적으로 입법하는 것이라는 취지의 연설을 한 후 이 행사에 동참한 민자통 회원들과 함께 통일만이 우리의 살길이다, 데모기 이적이냐 악법이 이적이냐 는 등 구호를 외치면서 광주공원을 출발해 금남로로 이어지는 시위행진을 벌이기도 했다(한국혁명재판사편집위원회 1962c, 138). 36) 민자통 전남협의회 결성의 의미는 한국전쟁 이후 지방에서 결성된 최초의 민족자주화운동을 지도하는 대중운동의 집결체라는 점이다. 민자통은 통일운동을 위한 협의체로 출발했으나 자주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한 통일전선체의 성격을 의식적으로 지향하는 조직이었다. 또한 민자통은 혁신세력 재통합 논의의 산물이다. 비록 민자통의 결성과정에서 통사당을 비롯한 일부 세력들이 중통련을 결성함으로써 혁신정치세력의 재통합 시도는 실패했지만, 통일운동을 위한 협의체를 통해 분열되었던 혁신세력의 재통합을 모색하면서 동시에 대중운동과의 결합을 모색했던 의미 있는 시도였다. 그 결과 민자통은 1961년의 3대 투쟁이라고 할 수 있는 2 8한미경제협정 반대투쟁, 36) 박동환의 증언에 따르면, 이날 행사에서 종연방직 노조원들을 대거 참가해 피켓과 플래카드를 들고 항의시위를 전개했다 고 한다. 이날 행사에 2천여 명 정도가 참가했는데, 그중에 종연방직 여성노조원들이 3백여 명 정도 됐을 거라고 진술하고 있다(박동환 구술, ). 4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47 2대악법반대투쟁, 남북학생회담 지지투쟁 등을 주도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 특히 2대악법반대투쟁은 장면정부가 국회상정을 결국 포기했을 정도로 민자통이 주도했던 투쟁 중 가장 성공적인 투쟁이었다. 2대악법투쟁을 통해 민자통을 비롯한 혁신세력은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세력으로, 제2공화국 민주주의의 방향을 전환시킬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정치세력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Ⅳ. 광주 전남지역의 4월 혁명: 유산( 流 産 ) 혹은 미완( 未 完 )? 5 16 쿠데타의 발발은 4월 혁명의 중단을 의미했다. 일부 혁신세력들은 박정희의 과거 경력을 볼 때 군사쿠데타가 오히려 부패하고 무능한 장면정부를 대체하여 새로운 민족민주혁명의 과업의 수행을 대리할 수 있는 세력으로 기대하기도 했지만, 그러한 기대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가는 혁명공약에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37) 과거 좌익과 연계가 있었던 박정희에게 있어 혁신세력은 박정희 자신의 약점이자 감추고 싶은 과거를 속죄해줄 수 있는 희생양이었다. 박정희는 자신의 과거와의 단절을 보다 분명하고 철저히 표현하기 위해 법의 이름으로 공산주의자를 만들어 처벌하고자 했다. 그 구체적인 조치가 바로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제정 , 법률 제644호) 이었다. 이로써 4월 혁명은 유산된 혁명 혹은 미완의 혁명으로 남게 되었다. 특별법 제6조는 특수반국가행위에 대해 정당 사회단체의 주요 간부의 지위에 있는 자로서 국가보안법 제1조에 규정된 반국가단체의 이익이 된다는 정을 알면서 그 단체의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하거나 또는 기타의 방법으로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고 규정하고 있다(법제처 종합법령정보센터 더욱이 이 법은 위헌적인 성격이 강한 소급법( 遡 及 法 )으로서 동법이 공포된 날로부터 3년 6월까지 소급하여 적용됨으로써 이승만 정부하의 부정선거에서부터 4 19 이후 혁신세력의 모든 활동이 동법에 의해 단죄되었다. 특별법 적용자들의 처리를 위해 혁명재판소와 혁명검찰부가 설치되었다. 38)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에 따라 혁신정당과 혁신계 단체들이 직접적인 처벌대상이 되었는데, 이와 관련된 주요 사건들로 사회대중당 창준위 사건, 혁신당 사건, 사회대중당 사건, 통일사회당 사건, 사회당 사건 등 혁신정당과 관련된 사건만 14건이고, 통민청 사건, 민민청 사건, 민통련 사건 등 청년학생운동 관련 사건이 5건, 통일운동과 관련하여 민자통 사건이 8건, 사회단체 피학살자유족회사건 8건, 2대악법반대공동투쟁위사건 2건, 기타 민족일보 37) 혁명공약 제1조는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 지금까지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이다. 38) 설치의 법적근거는 국가재건비상조치법 제22조였다. 국가재건비상조치법 제22조는 1국가재건최고회의는 5 16 군사혁명 이전 또는 이후에 반국가적 반민족적 부정행위 또는 반혁명적 해위를 한 자를 처벌하기 위하여 특별법을 제정 할 수 있다. 2전항의 형사사건을 처리하기 위하여 혁명재판소와 혁명검찰부를 둘 수 있다 고 규정하고 있다(한국혁명재 판사편집위원회 1962a, 2). 45 민주화운동
48 사건, 교원노조사건 11건 등 총 48건이 혁신세력과 관련된 사건들이다. 이들에게는 3년에서 15년형이 선고되었고, 민족일보의 조용수, 사회당 최백근 등에게는 사형이, 송지영, 안신규 등은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뒤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민통련사건 관련 학생들에게는 6년에서 15년 형이 선고되었으며, 통민청과 민민청 관련 청년운동 관련자들에게도 5년에서 7년형이 선고되었다(한국혁명재판사편집위원회 1962b; 한국혁명재판사편집위원회 1962c). 전남지역 혁신정당과 혁신세력들이 연루된 사건만을 살펴보면, 7 29총선 당시 제11선거구(광양군)에 혁신동지총연맹 공천으로 출마했다 낙선한 최백근이, 사회대중당 사건으로 김철중이, 통일사회당 사건으로 정해룡, 조중환, 임춘호, 박세원, 노응상이, 민자통사건으로 오지호, 김창선, 임금택이, 통민청 사건으로 김시현이 혁명재판소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39) 4 19혁명 이후 혁신정당 활동과 청년운동, 통일운동을 주도했던 혁신계 인사들이 대거 혁명검찰부에 구속되면서 혁신정당과 혁신운동단체들은 즉각적으로 활동이 중단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직이 와해되었고, 검거를 피한 조직원들이 도피함으로써 다시금 4 19혁명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된다. 군사정부 하에서 혁신세력들은 활동을 포기하고 제도권 정당 사회단체로 편입하든지, 아니면 지하화해서 활동을 계속하던지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1963년 1월 1일을 기해 정치활동이 재개됨에 따라 혁신세력 내의 명망가 그룹들은 세 가지 부류로 갈라지게 된다. 하나는 합법적인 혁신정당을 재건하자는 그룹으로서 김철, 안필수, 이봉학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통일사회당을 재건하여 제6대 민의원 선거에 참여했지만 단 한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고 당도 곧바로 해체되고 만다. 두 번째 그룹은 혁신운동을 포기하고 기성정당에 편입된 그룹으로서 이동화, 박기출, 임갑수, 이명하, 조헌식, 한왕균, 김성숙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보수야당인 신한당에 합류한다. 마지막 그룹은 합법적인 혁신정당 활동이 불가능한 상태에서는 그것이 가능해질 때가지 기다려야 하고 우선은 복역 중인 혁신계 인사들의 석방운동에 주력해야 한다는 그룹으로서 조규택, 정태영, 안준표, 황빈 등이 대표적이다(정태영 1992, 46-47). 그러나 이들 역시 석방된 혁신계 인사들과 함께 5공화국에서 민정당에 입당하거나 기성보수야당에 편입됨으로써 실제로 혁신정당 활동의 맥을 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람들은 제도권 편입이냐 지하화냐의 갈림길에서 지하화를 선택한 그룹이다. 많은 혁신정당 출신 인사들이 제도권에 편입되는 길을 선택한 반면 특히 청년운동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지하화의 길을 선택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른바 통민청, 민민청, 민통련에서 활동했던 다수의 인사들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이들의 지하활동이 최초로 사건화 되었던 사례가 바로 1964년 발생한 제1차 인민혁명당사건 이었다. 39) 이들 사건 중 정해룡, 조중환, 임춘호, 박세원, 노응상 등이 연루된 통일사회당 전남도당 사건은 한국혁명재판사편집위원 회 발행 한국혁명재판사 에 수록되어 있지 않은데, 이는 통일사회당 전남도당 사건이 혁명재판부에서 심판된 것이 아 니라 광주지방법원에서 심판되었기 때문이다. 4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49 이들이 지하활동을 전개한 기저( 基 底 )에는 4 19혁명공간의 복원이라는 사회운동의 목표가 전제되어 있다. 즉 한국전쟁 이후 최종 봉합된 기형적인 보수 독점적 이데올로기 지형이 4 19혁명을 통해 일정 부분 파열되면서 획일화된 보수정치에 반대하는 혁신정치세력들이 합법적으로 등장해서 활동할 수 있는 정치공간이 열렸다. 이를 4 19혁명이 창출한 정치공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러한 4 19혁명공간은 5 16 군사쿠데타가 발발하면서 다시 폐쇄되고 말았다. 다시금 반공을 국시로 하는 보수주의 정치세력들의 독점적 정치구조가 복원되었다 군사쿠데타가 반공에 기초한 보수주의 독점적 정치구조의 복원을 위한 쿠데타였다면, 5 16 군사쿠데타 이후 지하화된 혁신세력 내지 청년 운동가들의 목표는 5 16 군사쿠데타로 폐쇄된 4 19혁명공간의 복원이었다. 제1차 인민혁명당 역시 이러한 사회운동의 목표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제1차 인민혁명당 관련자들의 공통된 인식은 군사독재를 극복하고 민주적 사회주의 건설, 대외 의존적 종속경제가 아닌 자립적 민족경제의 건설, 그리고 분단 상태의 극복을 최우선적 과제로 설정하고 있었다. 이들이 조사과정에서 진술했던 제1차 인혁당의 강령이 사회당의 강령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이후 통일혁명당이나 제2차 인민혁명당 사건(인혁당 재건단체 사건), 남민전 사건 등은 모두 4 19혁명공간에서 활동했던 혁신정당 참여자나 통민청, 민민청, 민통련 등에서 활동하던 청년 운동가들이 중심세력을 형성했다. 이 사실 역시 5 16 군사쿠데타 이후 1970년대 말까지(광주민중항쟁 이전) 사회운동의 큰 테마 중의 하나가 4 19혁명공간의 복원투쟁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광주 전남지역의 4월 혁명과 다른 지역 4월 혁명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우선 공통점은 다른 지역의 4월 혁명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민주화운동 2대악법 반대투쟁, 학원민주화운동, 민족통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전남대와 조선대를 중심으로 전개된 학원민주화운동은 1960년대 학생운동의 활성화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전남대의 경우, 1960년 5월 2일 학생총회를 통해 대학민주화에 대한 결의안을 채택했는데, 학도호국단 해체 1인 독재 교학방침 지양 어용학자 및 교권문란교수 사퇴 총장 사퇴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전남대학교 1982, ). 조선대의 경우 박철웅의 총장 및 이사장직 사퇴를 요구하며 조선대학교 학원정화학생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학원민주화 투쟁을 전개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편 2005, 37-44).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할 부분은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다. 광주전남지역과 다른 지역의 4월 혁명 전개과정의 차이점은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광주 전남지역의 4월 혁명은 초기에 고등학생이 중심이 되어 혁명이 진행되었는데, 다른 지역에서처럼 대학생이 조직적으로 참여하여 혁명의 주체 세력으로 부상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고등학교가 대학교보다 수적으로 많았고, 고등학교가 대학교보다 급작스런 조직적 동원에 유리한 조직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광주지역의 사회운동 역량이 대학교보다 고등학교에 집중되었던 점 등에서 찾을 수 있다. 47 민주화운동
50 둘째, 광주 전남지역 4월 혁명은 통민청을 필두로 청년운동이 사회민주화투쟁의 전면에 서고 혁신정당이 배후에서 지원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민주당 전남도당은 새 정부 구성 이후 혁명의 주체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지 않았다. 민통련과 같은 대학생 조직의 활동이 활발하지 않았던 점, 청년운동이 2단계 4월 혁명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점 등은 역으로 혁명의 주체역량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취약했음을 반증하는 근거로 볼 수도 있다. 셋째, 이승만 정부의 붕괴 이후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노동운동이 광주 전남지역에서는 관찰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광주 전남지역의 취약한 산업기반에서 전적으로 연유한다. 노동운동이 전개될 수 있는 물적 기반 자체가 광주 전남지역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목포지역 항만부두노조가 4월 혁명 전후에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정작 4월 혁명 기간 동안에는 별다른 활동이 없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편 2005). 넷째, 교원노조가 결성되었지만, 활발한 활동을 하지는 못했다. 원래 교원노조운동은 1960년 5월 29일 경북지부를 시발로 7월 초까지 경남, 전남, 충남, 전북, 경기, 제주에서 도연합회를 결성했으나 서울, 충북, 강원도에서는 도 단위 연합회가 결성되지 못했다. 과도정부가 1960년 6월 하순 교원노조 해체를 지시하는 등 교원노조의 결성 및 활동을 탄압하자 교원노조의 합법화투쟁이 전개된다. 전남지역의 교원노조 결성은 5월 28일 목포지구, 6월 10일 광주지구 교원노동조합이 결성되는데, 나주, 순천 등지에서도 결성되었는다는 기사는 있지만 언제, 어떻게 결성되었는지를 확인할 수는 없다. 광주 전남지역 교원노조의 활동 중 다른 지역에서 중점적으로 추진했던 학원정화투쟁에 관한 기록 역시 찾을 수 없다. 그렇지만 나주, 순천, 광주 등에서 법정수당 쟁취투쟁을 전개했다는 기록은 전남일보(1961년 1월 12일~28일)의 보도를 통해 확인 가능하다. 40) 다섯째, 한국전쟁 당시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지역이지만, 4월 혁명 기간 동안 피학살자유족회의 결성과 활동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경주, 경산, 마산, 창원, 밀양, 김창(김해, 창원), 동래, 산청, 제주4 3진상규명동지회, 문경, 고창 등 주로 경상남북도와 제주도 민간인학살지역을 중심으로 피학살자유족회 활동이 이루어졌으나 광주 전남지역에서는 피학살자유족회의 활동이 거의 없었다(한상구 1990). 유일하게 함평양민학살유족회가 4월 혁명 시기에 활동을 했는데, 41) 한국전쟁 당시 피해규모나 다른 지역의 유족회 활동과 비교한다면 의외의 결과다. 이처럼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학살 피해규모가 컸던 광주 전남지역에서 피학살자유족회 40) 1월 11일에는 전남교육회 제5차 대의원대회에서 교원들의 처우를 개선하라는 요구사항을 발표했고, 1월 26일에는 순천 과 나주교직원 법정수당투쟁위원회, 1월 28일에는 광주교육회의 법정수당지급 요구 궐기대회 등이 개최되었다(민주화운 동기념사업회 편 2005, 34). 41) 원래 함평유족회는 1951년에 구성되어 활동해왔다. 이후 1960년도 4대 국회 때 정부가 민주당으로 바뀌자 전국적으로 양 민학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해 달라고 청원을 해서 국회가 전국적으로 일제 조사에 들어갔다. 그때 함평도 조사를 했는데 그 때 나온 학살자 수가 541명이다. 그러다 5 16군사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유족회 활동가들이 잡혀 들어가고 유족회도 해산 되었다. 이후 1993년도가 돼서야 유족회를 다시 구성해서 처음으로 합동위령제를 지냈고 지금까지 14년 동안 위령제를 지 내오고 있다(노컷뉴스, 2010년 1월 18일). 4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51 활동이 거의 부재한 것은 빨갱이 담론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의 구조에 대한 기피의 결과라고 추정할 수 있다. 경상남북도 지역의 피학살자유족회 활동은 빨갱이로부터 양민을 분리함으로써 피학살자와 그 가족들의 신원 회복 운동에 집중했기에 가능했다. 인민군이 점령하지 않았던 지역에서는 이러한 신원회복운동이 가능했을지 몰라도, 인민군 점령 하에서 좌와 우, 피와 아가 분명하게 각인되어버린 광주 전남지역에서는 4월 혁명 기간 중에도 피학살자유족회 활동을 전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이승만을 계승한 장면 정부 역시 반공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Ⅴ. 맺음말 광주 전남지방은 조선말 갑오농민전쟁에서부터 일제 강점기 광주학생독립운동 등 무수한 저항운동이 발생했던 지역이다. 해방 직후에도 광주 전남지역은 미군정과 민중간의 갈등이 매우 첨예하게 전개되었던 지역이었다. 어떤 지역보다도 한국전쟁 전후에 입산자가 많았던 지역이었으나, 인민군과 국군의 점령이 거듭되면서 과거 독립운동에 참가했던 인사들이나 좌익운동 관계자들은 대부분 제거된다. 남로당과 북로당의 합당으로 결성된 조선노동당과 노선을 달리하여 그들로부터 소외된 과거 전남 건준 활동에 참가한 경력을 가진 중도좌익세력들, 이정윤계의 공산주의자들이 일부 살아 남아있었으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4월 혁명 이전까지는 공개적인 정치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이들이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제도정치권에 등장했던 시기가 바로 4월 혁명이었다. 비록 5 16쿠데타 이후 이들은 다시 지하화 되었지만, 박정희 정부 하에서 전개된 한일회담 반대운동, 반유신운동 등 사회운동의 기저를 형성했음은 주지하는 바다. 사회운동 주체역량의 계승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광주 전남 4월 혁명은 지역사회에 존재하던 저항운동의 역사와 정신을 계승한 사건임은 분명하다. 지금까지 4월 혁명은 주로 4월 19일부터 4월 26일까지 발생한 사건을 중심으로 논의되었고, 이 기간 동안 고등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활동을 중심으로 역사적 평가가 이루어져왔다. 그러나 4월 혁명의 범위는 좀 더 확장될 필요가 있다. 오히려 이승만의 하야 이후 혁명 혁명주체 세력의 분화와 대중적 조직화 수준의 제고, 사회민주화를 위한 국민적 요구의 분출 등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4월 혁명을 진정 혁명의 시각에서 분석하기 위해서는 이승만 하야 이후 전개된 활동에 오히려 더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각이 소위 4월 혁명 1단계의 성과를 폄하하거나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역사상 민중봉기에 의한 최초의 정부교체, 새로운 정치시스템으로의 전환 등 4월 혁명 1단계의 의미는 충분히 긍정되어야 한다. 다만, 이 글에서 필자는 기존에 주목하지 않았던 2단계의 역사적 의미를 좀 더 강조해보자는 취지다. 49 민주화운동
52 그래서 이 글에서는 4 19혁명의 전개과정을 2단계로 나누어 1단계의 시기를 반독재민주화의 시기로, 2단계를 사회민주화 요구와 민족통일운동의 시기로 규정하여 각 시기별 전개과정을 살펴보았다. 1단계는 3 15선거에 대한 대중적 저항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60년 2월 28일부터 이승만의 하야성명이 발표된 4월 26일까지의 시기로서 광주고생들을 시발로 고등학생들이 시위를 주도하고 시민들이 여기에 참여하면서 4월 혁명의 주체가 형성되고, 반독재민주화투쟁이 4월 혁명의 이념으로 정립되던 시기였다. 제2단계는 이승만 하야 이후부터 5 16군사쿠데타 직전까지의 시기로서 사회민주화투쟁과 통일운동의 시기로서 혁명의 주체가 분화하고, 혁명의 과제가 심화되는 시기다. 진보세력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사회민주화 요구와 2대악법반대투쟁, 조국통일운동 등이 전개되었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광주 전남지역에서도 4월 혁명은 불균등하게 전개되었는데, 주로 광주지역이 중심이 되었고, 전남지역은 목포, 여수, 순천, 나주(영산포)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전개되는 수준에 그쳤다. 4월 혁명에 대한 기록을 찾고, 관련자들의 기억을 되살리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발견한 사실 중의 하나는 4월 혁명의 망각이다. 광주 전남지역에서는 특히 그 정도가 심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4월 혁명보다 훨씬 규모가 컸고, 피해자가 많았으며,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했던 5 18의 존재가 4월 혁명의 존재를 잊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지만, 지나친 국가화와 정치화(4월 혁명 주체들의 명분 없는 제도정치권 편입 등)가 4월 혁명의 정신을 훼손시킴으로써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 망각되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충분히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해 무엇을 배울 것인가 인데, 특히 4월 혁명과 5 18은 국가화와 정치화 경향에 있어 큰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잊혀진 4월 혁명 50주년을 넘긴 현실에서 5 18은 무엇을 배울 것인가? 광주 전남 지역사회가 꼭 풀어야 할 과제다. [광주 전남의 4 19혁명 일지] 일자 광주 전남 3월 9일 여수에서 민주당원 피살 오후 7시 40 분경 여수시 교동 민주당 여수시당 재 정부장 김봉채, 민주당원 김용호 등이 괴한 11명의 습격을 받았다. 괴한 7-8 명은 맥주병과 곤봉, 철봉 등 흉기로 이들을 구타하여 김용호가 현장에서 뇌진탕으로 졸도하였다. 김용호는 여 수시내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10일 새벽 0시 30분 사망하였다(동아 일보, ; 3.11). 5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53 3월 11일 전남 광산군 송정읍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이상근)에 대해 자유당과 민주당 은 피해자가 서로 자기 당원이라며 상 반된 성명서 발표(조선일보, ) 3월 15일 선거수행의 참관을 포기한 민주당 광주시당부는 낮 12시 50분경, 70여 참관인과 100여명의 민주당원 및 1천여 명의 남녀시민 및 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민주주의 장송 시가행진 을 거행. 민주당 전남 선 거사무장 이필호 의원의 지프를 선두로 광주시당 본 부인 금남로 4가에서 출발하여 시위를 시작, 곡 민 주주의 장송 이라고 쓴 만장을 들고 민주주의는 절명하였다!, 우리의 자유를 찾자 고 외치며 도 청으로 향함. 시위대는 YMCA 앞에서 무장경관 200 여명과 소방차의 출동으로 오후 1시 15분경 충돌을 일으켰다. 이 충돌로 인하여 민주당 광주시당 선전부 장 김녹영을 비롯해 염성웅, 조계현, 이정근, 양계식 등이 전치 2주일 이상의 부상을 입었다. 민주당 당원 과 200여명의 군중은 경찰대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도청 앞까지 전진. 그러나 1시 25분경 소방차가 뿌리 는 물로 인해 시위대가 민주당 선거사무소로 강제로 쫓겨 오면서 시위는 해산. 이 때 경찰은 이필호를 비 롯하여 김석주, 염성웅, 오영수 등 4명을 연행하였다 가 2시 10분경 모두 석방조치함. 광주에서는 번호표를 달라는 유권자를 때려 중태에 빠트리거나 선거가 끝나면 죽인다는 협작을 가하며 번호표를 주지 않는 사례가 많았다(전남일보, ). 전남 각 시군에서는 무더기 투표를 위해 대학생들과 노인 및 친민주당계 인사의 번호표가 배부되지 않았 으며 양동의 한 투표소에서는 한 여성유권자가 번호 표를 달라고 요구하다 괴한에게 멱살을 잡혀 쫓겨났 다(동아일보, ) 광주에서는 상무대 내 군인들이 집단대리투표를 했다 고 육군화학학교 정형수 상병이 폭로했다. 정상병은 오전 9시 40분경 문서반 완장을 달고 민주당 광주선 거사무소에 도착하여 영내의 집단 대리투표상황을 폭 로(동아일보, ) 전남지방에서는 투표 시작시간 1시간 전인 오전 6시부터 공무원들이 조별로 투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민주당 참 관인은 법정투표시작시간이 안 되었다 는 이유로 공무원들의 투표상황을 참 관하지 못했다(조선일보, ) 민주당 참관인이 경찰이 보고 있는 투 표소 안에서 괴한에게 폭행당한 후 축 출되었거나 경찰에 연행된 사례 발생 (목포, 나주, 광주) 전남 광산군 송정읍 제8투표소의 민주 당 참관인은 투표소 광경을 촬영했다 는 이유로 괴한 20여명에게 폭행을 당 했다(동아일보, ). 전남의 투표소에서 행해진 공개투표의 방법은 선거사무 종사원에게 번호표 를 주면서 기표한 투표용지를 보여주 는 것이었다. 번호표를 받은 종사원은 비밀투표자의 번호표는 오른쪽 주머니 에 넣고 왼쪽 주머니에 넣은 공개투표 자들과 구별하였다(전남일보, ). 전남도당에서는 10시 20분 민주당 운동원, 민주당 참관인, 민주당 선거위 원은 전원 상오 10시를 기하여 도내 일제히 연락이 된 데까지 철수하고 있 다 고 발표(전남일보, ). 51 민주화운동
54 3월 19일 오후 4시 30분경 민주당 목포시당원 들은 남교동 공설시장 정문 앞에서 시 위를 감행했다. 이들은 3 15선거 는 강탈선거다 라는 구호를 외치며 3 15정 부통령선거는 불법이며 무효 라는 구호가 적힌 삐라 약 50 매 가량을 살포했으나 시위는 경비중 인 경찰들에 의해 좌절되었다. 민주당 원들은 시당 사무소로 되돌아가면서 대한민국 만세 를 외쳤다. 경찰은 민주당 목포시당 부위원장 외 11명을 연행하였다(전남일보, ) 3월 22일 민주당 전남도당, 부통령선거 사후대 책위 구성(전남일보, ). 민주당 전남도의회 소속위원, 이하영 도지사 파면 건의안 제출(조선일보, ). 3월 28일 민주당 목포시당위원장 김문옥은 3 15정 부통령선거에서 부정투표 등 13개 항목에 달하는 위법사실을 지 적하고, 목포시 선거위원장을 포함한 25명의 선거관계종사원을 광주지방검 찰청 목포지청에 선거법 위반혐의로 고소(조선일보, ) 4월 4일 민주당 여수시당원 김용호 살해사건에 대해 김용호의 장인인 민주당 정재완 의원은 4일 오후 민주당 중앙당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자회견에서 정 재완 의원은 김용호 살해사건은 경찰 의 관여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조 선일보, ) 5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55 4월 18일 4월 18일 밤 이홍길의 하숙집에서 이홍길, 김신담, 김 병욱, 홍갑기 등이 9일을 기해 시위를 벌이자고 결의 구호는 3.15부정선거를 다시 하라, 마산의 발포 경 찰을 처단하라, 서울 등지의 구속 학생을 석방하라, 경찰은 학원에 간섭하지 말라 의 4가지 4월 19일 4월 19일 오전 10시 40분 광주고 학생 약 500여명이 수업을 중지하고 운동장으로 나와 시위 약 80여명의 상급생들이 동문을 지나 교외로 진출한 가운데 50여명은 시내로 30여명은 경양방죽 쪽으로 진출 오후 1시 20분 200여명 가량의 광주여고생들도 시내로 진출 500여명의 광주공고생들과 합류금남로 1가와 4가에서 경찰과 충돌) 오후 1시 50분경 500여명의 광주상고 학생들도 1천 여 명의 광주고 학생들과 합류하여 금남로 2가에서 경찰과 충돌 오후 3시 15분경 시위대는 이승만 사진이 걸려있는 자유당 전남도당 사무소 공격 후 유문동 파출소공격 오후 5시 20분경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시점에서 경 찰의 공포 사격 시작 경찰과 시위대간의 투석전이 격 렬해짐 오후 6시 경찰 시내 선무방송에 맞서 시위대 소방차 투석, 광주학생사건에 봉기했던 선배들의 뒤를 따 르자 외치며 행진 오후 6시 30분경 금남로 법원 앞에서 경찰과 시위대 충돌 후 시위대 일부 월산동으로 이동 오후 7시경부터 역전 파출소에 살레시오, 광주농고 학생 등으로 구성된 새로운 시위대 형성되어 학동파 출소 방향으로 이동 학동파출소 앞에서 경찰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경찰총 격으로 강정섭(최초 사망자) 사망 오후 9시경 광주경찰서 앞에서 시위대와 경찰 충돌, 경찰 시위대에 일제 사격 가함. 이 과정에서 10여명 의 시위대 사상, 300여명 체포 오후 10시경까지 광주법원 앞 광장에서 농성이 계속 되었고, 경찰은 시위대에 총격 53 민주화운동
56 4월 20일 광주 시내에는 완전 무장한 군인들이 진주 광주일고 학생 200여명 학내 집회 전남대학교 입구에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대 형 성( 협잡선거 다시 하여 민주대한 이룩하자 는 구 호 외침) 시위대가 전남대에서 충장로 4가까지 진출하자 계엄 군 진압 개시 시위대 일부 충장로1가 진출, 충장로2가, 광주우체국 앞에서 군대와 충돌 계엄군의 무력진압으로 시위대 해산 4월 21일 4월 22일 4월 23일 4월 24일 오후 3시, 광주 중앙국민학교 교정에서 4월 19일 희 생된 학생들을 추모하는 [4.19희생자 합동위령제] 개 최 자유당의 조직인 국민회가 주최하였기 때문에 시민적 분노 유발 유가족과 학생들의 반발 위령제는 오후 4시에 끝났는데, 국민회 전라남도본부 회장 김철주가 제주를 맡아 제문 낭독한 것이 전부였 음 이날 오후에는 민주당원들이 노인환 광주시장의 사퇴 를 권고 4월 25일 국무원훈련 제85호에 의거 비상계엄을 경비계엄으로 전환 (포고문 제8호를 통해 언론출판의 사전검열 폐 지, 야간통행금지 시간의 계엄선포 이전시간으로의 복귀 발표) 오후 2시 이하영 전남도지사는 부상 치료자에게 위문 편지발송 광주경찰서에서는 광주시위의 주동자로 구속했던 이 현주, 강동기, 김영갑, 김숙, 박정용 등 5명 석방 5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57 4월 26일 전남도경찰국 간부일동경찰중립화결의 일당 일파 의 사병이 되지 않겠다 ) 오전 11시경 이승만의 하야를 발표하는 전남일보 호 외 발행 오후 6시 광주지검은 민주당 전남도당 피습사건과 관 련하여 광주경찰서 사찰계 이송학, 김재수 순경을 구 속 4월 26일 목포에서는 달성국민학교에 서 고교생 연합 시위대 5백여 명이 집 결 목포경찰서 앞까지 진출하여 연좌 데모 ( 학원을 간섭하지 말라, 우리는 민주주의를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 ) 여수에서는 4월 26일 12시를 기해 민 주당 여수시당에서 당원과 시민들을 규합해 시위 전개 (학생이 아닌 민주당 원 중심의 시위로 이승만의 하야 요구) 4월 27일 오전 11시 조선대 학도호국단 대표들은 박현수 계엄 사 광주사무소장을 방문해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12시 30분경 광주에서는 광주상고 2.3학년 학생 50 명이 주축이 돼 시위, 전남대 시위대 합류 광주경찰서 앞에서 시위대 시위, 광주경찰서장에게 요구사항 전달 시위대는 이하영 도지사 사퇴, 살인경찰 책임자 경찰 국장 처단, 상인경찰의 지휘자 광주시장 즉각 처단 등 요구 노인환 광주시장 사퇴, 전라남도에서는 부상자를 돕 기 위해 문교사회국장실에 구호 본부 설치 순천에서는 4월 27일 1천5백여 명의 학생시위경찰서 앞에서 시위, 자유당 원 집 공격) 4월 29일 4월 29일 영산포에서 남녀중학생이주 도적으로참여한시위전개자유당 소속 정치인 퇴출 주장) 55 민주화운동
58 제3장 한일회담반대운동 Ⅰ. 들어가는 말 5 16쿠데타는 전후 한국사회의 갈림길에 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부를 거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democracy)와 경제개발(development)이라는 두 가지 국가적 목표가 동시에 추진된 적은 없었다. 이승만 정부는 민주주의도, 경제개발도 성공하지 못한 정부였다. 4 19혁명의 성공으로 집권한 장면정부는 최소한 형식적으로는 혁명과업이었던 권위주의 청산과 민주주의 실현의 과제를 외면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전후 복구의 완료와 경제개발의 전략적 추진이라는 과제에 골몰할 수밖에 없었다. 장면정부에서 입안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정치체제의 기본운영원리로서 민주주의와 국가기획 경제발전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병행 달성하려했던 최초의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장면정부는 민주주의의 완성도 경제개발의 추진과업도 제대로 착수해보지 못한 채 5 16쿠데타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5 16쿠데타는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와 경제개발의 병행발전전략에 대한 폐기였고, 경제개발을 통해 민주주의 억압을 대체하려했던, 반쪽 불구화된 국가발전전략 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민주주의와 병행하는 경제개발(Development with democracy)이 아닌 민주주의 없는 경제발전(development without democracy) 전략의 시작이었고, 한일회담을 통한 한일국교정상화는 민주주의 없는 경제개발을 추진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정부차원에서 일본과 협상을 시도했던 것이다. 물론 한일국교정상화를 둘러싼 미국, 일본, 한국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던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한일회담을 통한 한일국교정상화에 대해 국민의 감정은 박정희 정부의 의도처럼 그렇게 동조적이지 않았다. 더구나 회담 추진과정에서 드러난 박정희 정부의 굴욕적 협상태도는 국민적 반대를 초래한다. 박정희 정부는 국민적 반감과 저항을 물리적 탄압과 진압이라는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대응함으로써 5 16쿠데타 이후 최대의 국민적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이 장에서는 박정희 정부 출범 이후 최초의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이었던 한일회담 반대운동의 정치사적 맥락과 함께 우리 5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59 지역의 한일회담반대운동을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한일회담은 1951년 10월 20일 예비회담을 시작으로 7차에 걸친 공식회담과 수많은 비공식 접촉을 거쳐 1965년 6월 22일 종결되었다. 한국과 일본 양국은 일제강점과 일본의 태평양전쟁 패배 등에 따른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고 양국 간의 국교정상화를 위해 한국전쟁 와중이던 1952년 2월 15일 제1차 한일회담을 개최했으나 양국 간의 감정대립과 회담의제에 대한 이견이 커서 난항을 거듭한 채 별다른 성과 없이 마무리되었다. 이후 이승만 정부 하에서 한일회담은 미국의 압력에 마지못해 회담에 임하는 모양새만 갖췄을 뿐 실질적인 회담의 이루지 못한 채 국내정치적 필요에 따라 회담이 악용되기도 했다. 5 16쿠데타의 최종적 성공이 민주주의에 대한 포기 대가로서 경제개발의 성공이라고 했을 때, 박정희 정부는 한편으로는 정당성이 부재한 정부에 대한 국제적 승인 필요성,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개발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개발자금 도입의 절박성 등을 안고 회담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회담은 최고 권력자 차원의 포괄적 합의를 기초로 속전속결로 진행돼 1965년에 청구권 협정 등 4개 협정에 서명하여 13년 8개월이 걸린 길고 험난한 외교협상을 마무리 지었다. 한일회담을 통한 한일국교정상화만큼 한국 현대사에 미친 영향이 지대한 사건도 드물 것이다. 식민지 지배와 그로부터의 해방의 과정에서 단절된 한일 양국 간의 국교를 정상화하기 위한 논의는 한국전쟁이 진행되던 때부터 지속되었던 언젠가는 해결해야할 일이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한일국교정상화는 한국과 일본 양국 간의 문제가 아니었으며, 동북아질서의 재편이라는 국제관계적 맥락에서 추진되었고, 이러한 국제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한일회담의 국가적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한일회담 반대운동의 역사적 평가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참여했던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이 한일회담 그 자체, 한일국교정상화 그 자체에 반대했다기보다는 굴욕적이고 졸속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했다는 사실이다. 한일회담이 가진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회담반대운동을 펼쳤던 주체들도 인식하고 있었지만, 미국의 압력과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 필요성으로 속도전 양상으로 전개된 한일회담에 대해 국민과 야당의 굴욕적이고 졸속적인 한일회담은 수십 년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완전한 청산을 위한 것이어야 함에도 이를 경제적 보상의 형태,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경제개발을 위한 종자돈 마련에 치중한다는 인상을 받았고, 에 대한 국민들의 정당한 항의에 대한 정부의 강압적 진압태도에 분노하면서 회담반대가 정권반대로 비화된 측면이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할 것이다. 광주 전남지역에서 전개된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 5 16쿠데타로 단절된 사회운동의 맥을 되살리고, 사회운동의 새로운 주체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던 사건이다. 4 19혁명으로 폭발했던 지역의 운동역량은 5 16쿠데타를 계기로 퇴조하는데, 4 19혁명을 경험하고 주도했던 세력들이 대학에 진학하여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통해 운동세력으로 형성되고 새로운 운동세력들을 재생산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의미에 초점을 맞춰 광주 전남지역 한일회담 57 민주화운동
60 반대운동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또한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대학이 민주화운동의 중심지가 되는 전형을 창출했는데, 우리 지역에서 전개된 한일회담 반대운동의 과정과 방법들도 아울러 조명해 보고자 한다. Ⅱ. 한일회담의 전개과정 1. 이승만 정부 하의 한일회담 최초 한일회담(예비회담)의 개시는 한국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상황에서 미국의 압력으로 1951년 10월 20일, 동경의 연합국 최고사령부(SCAP) 회의실에서 이루어졌다. 42) 미국이 한일 양국에 압력을 행사했던 배경에는 공산주의의 확장을 방어하고자 하는 군사 외교적이 있었다. 당시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미국은 극동지역의 대공산권 동맹 구축 전략의 일환으로 한일 양국이 식민지 지배에 대한 앙금을 덜어내고 조속히 국교를 정상화하도록 한일 양국 정부에 전 방위적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의 발발은 미국으로 하여금 대공산권 동맹 구축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는 계기가 되었고,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전쟁 중이라는 절박한 상황 때문에 한일국교정상화의 적기라는 판단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51년 예비회담에서 한일 양국은 한일국교정상화 회담을 위한 6개의 의제를 확정하고, 각 의제별 분과위원회의 설치를 합의한다. 1952년 2월에 개최된 제1차 회담에서 양국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의제는 청구권 문제 와 기본관계 수립 문제였고, 이승만 정부 하에서 다소 일방적으로 선포한 평화선 문제는 박정희 정부 하의 한일회담에서 특히 논란이 되었다. 1952년 2월 20일 개회된 청구권 위원회 제2차 회의에서 한국은 한일 간 재산 및 청구권 협정 요강 을 제출했다. 이승만 정부는 정부수립 직후부터 대일배상 및 보상요구를 제기해 왔고, 그 결과 1949년 대일배상요구조서 를 완성했는데, 이는 한국이 강화조약의 정식 서명국이 된다는 전제하에 전쟁 배상 요구를 담고 있었다. 즉 현물 반환요구, 중일전쟁 및 태평양 전쟁으로부터 기인하는 인적 물적 피해, 일본의 저가수탈에 의한 손해 보상 및 배상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요구는 한국의 강화조약 참가가 좌절되면서 후퇴하여 기존의 배상 및 보상요구는 재산 청구권 요구로 축소 조정되었고, 결국 제1차 회담에서 한국이 제기한 8개항의 요구는 1한국에서 반출된 고서적, 미술품, 국보 등의 반환, 21945년 8월 9일 현재 일본정부의 대조선총독부 채무 변제, 42) 해방 후 한일회담 연구에서 한국과 일본 정부의 외교문서 이외 필수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또 하나의 자료는 미국 정부 문 서이다. 그동안의 한일관계 연구가 보여주었듯 한일관계는 양국관계 뿐 아니라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국의 동북아시 아정책 속에서 한국, 일본, 미국이라는 3국관계 속에서 조망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은 강력한 중재를 통 해 1951년 한일예비회담을 개최하게 만들었고, 이로써 한일회담이 시작되었다. 또한 한국과 일본 정부는 한일회담 과정 에서 끊임없이 미국의 지지를 요청했고, 미국은 사안에 따라 개입과 유보, 중재 등의 형태로 한일회담에 개입하였다(박진 희 2014, ). 5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61 31945월 8월 9일 이후 한국에서 송금된 금액의 반환, 41945년 8월 9일 현재 한국에 본사 또는 주사무소가 있는 법인의 재일재산 반환, 5한국법인 또는 자연인의 일본 및 일본국민에 대한 일본국채, 공채, 일본은행권, 피징용 한국인의 미수금 등 한국인의 청구권 변제, 6한국 법인 등 소유의 일본 법인주식 또는 증권의 법적 인정 등이었다. 이에 대해 일본은 <청구권 위원회> 제5차 회의( )에서 재산청구권 처리에 관한 협정 기본요강 을 제시하여, 한국 내의 일본재산 가운데 국공유재산 외에 일본 민간인 재산은 협의의 대상으로 해야 함을 명시하면서 일본인의 한국 내 사유재산에 대해 청구권이 남아 있다 는 역청구권 을 주장했다. 즉 일본 측의 입장은 한국이 일본에 청구할 권리가 있다면, 일본도 재한 일본인 재산에 대하여 그 권리를 요구할 수 있다는 논리였는데, 이것은 식민지 피점령국의 청구권 요구를 명시적으로 거부하겠다는 의사표시였고, 사실상 한일 간에 의미 있는 협상을 진척시킬 의사가 없다는 것을 피력하는 요구 조건이었다. 이에 한국은 경악과 충격 속에 일본의 주장을 반박하긴 했지만, 한일 간의 협상은 접점을 찾지 못한 채 일본의 역청구권에 대한 지루한 논쟁만 반복되면서 양국 간의 의견차가 해소되지 못한 채 회담은 공전되었다. 43) 양국이 대립한 또 하나의 의제는 한일기본조약 의 체결을 둘러싼 문제였다. <기본관계 위원회>에서 일본이 제출한 초안에는 과거 식민통치에 관한 사죄나 반성 뿐 아니라 과거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었다. 양국이 제시한 안은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구체적으로 양국의 안이 어떤 견해 차이를 보였는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은 조약의 명칭을 우호조약 으로 할 것을 주장한데 반해, 한국은 기본조약 으로 할 것을 주장했다. 일본은 한일 양국의 장래를 위한 우호조약체결에 목적을 둔 데 반면, 한국은 과거를 청산하기 위한 평화조약을 희망했던 것이다. 일본이 과거청산에 대한 부담 없이 미래의 선린관계를 유지하는데 방점을 찍었다면 한국의 과거문제의 해결을 통한 미래 동반자 관계 형성에 주안점을 두었던 것이다. 과거청산을 피해가는 우호선린관계를 추구했던 일본과 과거청산을 통한 동반자관계 형성을 추구했던 한국의 시각은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둘째, 한국이 제시한 안 제3조는 대한민국과 일본국은 1910년 8월20일 이전에 구 대한제국과 일본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이 무효임을 확인한다 고 되어있으나 일본은 해당 조항의 삭제를 43) 장박진에 따르면(장박진 2011, ), 한일회담 청구권 교섭에 관한 주된 연구에서도 대일 8항목 요구 중 세부 항목의 움직임에 초점을 맞추어 심층적으로 그 흐름을 분석한 연구는 아직 전무하다. 그러나 청구권 교섭의 전모를 밝히기 위해서 는 청구 대상이 된 가장 기초적인 요소들에 대한 치밀한 해부가 불가결한데, 한일 양국의 공식문서에 파고들어 우선 대일 8항목 요구중의 제5항을 분석한 결과 청구권 토의는 1951년 가을 예비회담부터 시작되었으나 한일회담에서 이른바 청구 권 으로서 항목 및 금액이 정식으로 제기된 것은 제6차 회담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제6차 회담 토 의 시 일본에 제기된 세부 항목 및 금액들이 한국정부의 최종적인 청구권 요구라고 간주하고 그에 이르는 항목과 금액의 흐 름을 고찰했다. 청구권으로서 일본에 제기된 제5항의 세부 항목들이 배상요구의 내용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것, 배상 으로부터 청구권으로의 변화에 따라 세부 항목들이 영향을 받은 일은 없었다는 것, 청구권의 정식요구 시 한국이 의거한 것 은 한일회담 개시 이전에 확정된 미국과 일본의 문서였다는 것, 그리고 피징용자의 보상 문제는 일본국민에 대한 보상 문제 에 불과했다는 것이 장박진의 결론이다. 59 민주화운동
62 주장하면서, 수정안으로 일본국과 구 대한민국 사이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일본국과 대한민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효력을 갖지 않는 것을 확인한다 라는 문장을 삽입했다(김영미 2010, 148). 44) 대한민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과 대한제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는데, 그러나 한국은 합방조약이 애초부터 원천무효라는 입장을 양보하지 않았고, 이 문제에 대한 양국의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아니 이루어질 수 없었다. 제1차 회담이 결렬된 직접적인 원인은 재산청구권 문제였으며, 타 위원회의 논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역청구권 주장을 둘러싼 대결로 인해 회담전체가 중단되고 말았다(장박진 2009, 210). 45) 한일회담은 미국의 중재로 1년 후인 1953년 4월 제2차 회담이 재개되었으나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한 채, 한국전쟁의 종전에 따른 제네바협정 체결관계로 순연되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한국이 휴전협정을 체결한 후인 1953년 10월 제3차 한일회담이 재개됐으나 3차 회담 <재산청구권 위원회> 제2차 회의( )에서 일본 수석대표인 구보타가 한국의 홍진기 대표와 논쟁하다 일제통치가 조선에 기여했다 는 망언으로 회담이 파행을 겪게 되었고 이후 4년간 표류하게 된다. 한국의 홍진기 대표는 일본의 재한 재산은 미군정령 33호에 의해 접수되었다. 본래 한국은 36년간의 일본지배 하에서 받은 피해, 예를 들면 애국자의 투옥 학살, 한국인의 인권박탈, 식량의 강제공출, 노동력의 착취 등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나 그것을 요구하지 않고 순수한 법률적 청구권만 제출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여 우리는 일본이 한국에 대한 청구권 주장을 철회할 것을 희망한다 고 발언했다(김영미 2010, 150). 이에 대해 구보타 대표는 일본도 보상을 요구할 권리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일본은 36년간 철도를 건설하는 등 많은 이익을 한국인에게 주었다 며 한국 측 홍진기 대표의 발언을 반박했다. 이에 홍진기 대표는 일본에 점령당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인은 스스로 근대국가를 만들었을 것이다 고 발언하자, 구보타 대표는 일본이 진출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은 중국이나 러시아에게 점령되어 더욱 비참한 상태에 놓였을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 한국대표단은 구보타 발언을 회담의 44) 일본은 의도적으로 대한민국 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병합조약이 원천적으로 효력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부 터 독립한 이후 한국에 대해서만 효력을 상실하였다는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45) 김영미(2010, )는 초기 한일회담에 참가한 한국 측 대표단을 분석한 글에서 한일회담에서 대통령뿐만 아니라 회 담을 이끌어갔던 대표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음을 밝히고 있다. 특히 정부 조직이 갖추어지지 않은 초기 회담에서 대표단 의 능동적인 역할은 더욱 두드러졌다. 김영미는 공개된 한일회담 회의록 자료를 분석하여 회의 상황, 참가자들, 그들의 역 할, 식민지 경력 등을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초기 한일회담은 회담 이전부터 자발적으로 한일 과거사 처리에 관심을 가졌 던 지식인 관료 그룹들에 의해 주도되었음을 밝혔다. 유진오 홍진기로 대표되는 이들은 대일강화조약 초안이 한국 측에 불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미국을 상대로 초안을 개정하도록 요구하였다. 한일회담은 한국이 강화조약에 참가하지 못하 는 현실에 직면하여. 일본의 주권 회복 이전에 한일 현안을 유리하게 해결하고자 한 이들의 능동적인 노력의 산물이기도 하 였다. 이들은 선박문제. 재일조선인 법적지위문제. 청구권문제 등에 대해서 한일회담 이전부터 그 해결 방안을 준비해왔다. 이들의 적극적인 활약이 있었기에 한일회담에 임해서 한국 측은 강대국 일본을 상대로 밀리지 않는 협상을 전개해나갈 수 있었다. 초기 한국인 대표단은 과거 경력으로 볼 때 식민지하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전문직이나 관료로 진출한 소위 친일파 라 분류될 수 있는 인물들이 상당수이다. 유진오의 사례를 통해서 볼 때. 이들은 한일회담에서 대한민국의 國 益 을 적극적으 로 실현함으로써 친일이라는 과거 경력에 대한 면죄부를 얻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6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63 기본정신을 망각한 망언으로 규정하여 구보타 발언의 철회와 잘못 시인을 요구하였으나, 구보타는 끝내 자신의 발언을 철회하지 않았고 결국 제3차 회담은 결렬되었다(김영미 2010, 151; 이성우 2006, 530). 이승만 정부는 일본을 침략 근성을 버리지 못한 군국주의 국가로 규정하고, 평화선 수역을 침범하는 일본 어선을 무조건 나포하고 일본에서 들어오는 밀수품을 강력하게 단속하는 등 강경한 대일정책으로 맞섰다. 이를 계기로 한일회담은 4년여 동안 전면 중단되어 한일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미국의 적극적인 중재에도 불구하고 한일회담은 1957년까지 열리지 못했다(박진희 2014, 443). 제4차 회담은 일본 측이 1957년 12월 역청구권 주장을 철회하고 구보타 망언을 정식 취소함으로써 1958년 4월 15일 재개되었다. 그러나 재일교포 북송 문제가 대두되면서 일본 내 강경론자들이 일본의 한국접근정책에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46) 또한 1960년 한국에서 발생한 4 19혁명으로 회담이 중단되면서 회담은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 재임 기간에 열린 1-4차 한일회담은 일본 측과 극심한 감정 대립만 낳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미국이 한일회담 과정에서 한일 간 현안 문제에 대해 보여준 인식과 대응은 각각 달랐다. 일본의 역청구권과 한국의 평화선 선포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입장을 표명하였다. 미국은 일본의 역청구권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밝혔고, 한국의 평화선 선포는 공해상의 자유로운 항해를 보장하는 국제법을 위반한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반면 한일회담을 장기간 결렬상태로 몰아넣은 구보타 망언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논평조차 내놓지 않았다. 일본의 재일조선인 북송에 대해서는 한국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인도주의라는 명분을 내세워 동의하였다. 미국이 한일관계에서 최우선으로 고려한 것은 동북아시아 반공진영 강화라는 전략의 관철과 이를 위한 한일관계의 개선이었다. 따라서 한일 간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과 청산이라는 역사문제가 투영될 수밖에 없었던 한일회담의 의제들에 대해서는 충분히 성찰하지 않았고, 오히려 정치적으로 타협되기를 기대하였다(박진희 2014, ). 47) 46) 북한이 조총련 등과 연대하여 한일회담을 저지하고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기 위해 1959년부터 1961년까지 벌 인 재일교포 입북운동을 말한다. 47) 이는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2차 대전 종전 이후 한국의 대일강화회의 참가를 둘러싸고 미 국무성은 기로에 서 있었다. 미국 국무성은 한국의 대외적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한국의 참가를 상정하고 있었 으나 일본과 영국이 이에 적극 반대하였다. 결국 임시정부의 국제법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영국의 강력한 반대와 공산세 력에 대한 방어막의 역할을 할 일본을 중시하는 국무성의 정책에 의해서 한국은 대일강화조약의 서명국이 될 수 없게 되었 다. 이에 무치오 주한미국대사는 한일 간의 문제는 관계정상화를 기대하기 어려운 한일양국에 맡겨 두어서는 안 되며, 대일 강화조약과 같은 국제적 협약의 틀에서 해결해야 하며, 그것이 어려우면 미 국무성이 한일회담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주 장하였다. 이에 동의한 국무성은 한일회담에 있어 準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모색하기는 했으나, SCAP의 시볼드 외교국장의 반대에 부딪혀 쉽게 불간섭주의로 선회하게 되었다. 당시 외교국이 한일회담에 있어 미국의 중립을 강력히 주장한 것은 한 일정상화에 소극적이었던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미국정부도 한일 간의 문제에 적극 관여할 의사가 없었다. 한국정부는 대일강화조약에 참가하려 하였으나 결국 미국의 선택에 의해 배제되게 되었다. 조약의 서명국 으로서 한국이 참가할 수 없었던 것을 단순히 미국의 정치적 선태 때문이었다고만 평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당시의 한국 의 대외적 위치와 전쟁상태라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고려한다고 해도 대일강화조약에 임하는 한국정부의 미숙한 외교적 대 응도 결과적으로 그와 같은 결과를 낳게 한 요인으로 인식해야 한다(김태기 1999, ). 61 민주화운동
64 2. 장면 정부 하의 한일회담 1960년대에 한일 양국에 새 정부가 등장하면서 한일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듯 보였다. 이승만 정부가 붕괴되고 적극적인 대일 정책을 천명한 장면정부가 수립됨과 동시에 일본에 이케다 내각이 들어서자 한일관계는 회담 조기타결 분위기로 전환되었다. 1960년 10월 25일부터 7개월간 제5차 회담이 개최되어 한일 양국은 한국이 제시한 8개 항목의 청구권을 항목별로 심도 있게 논의했고, 합리적 접근으로 실리를 추구하였으나, 1961년 발발한 5 16군사쿠데타로 회담은 다시 중단되고 말았다. 제5차 한일회담은 양국의 국내 정치 상황과 현격한 입장차로 큰 진전은 없었지만, <청구권위원회>가 32회나 열려 항목별로 토론이 진행되는 등 청구권 문제에 관한 세부적인 토의가 이루어졌던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48) 5 16 군사쿠데타 직전 미국대사관이 국무부에 보고한 문서 내용에는, 한일 간의 경제 유대가 동북아시아 냉전 전략 수행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견해가 분명히 드러나 있다. 이 보고서는 일본이 오래 전부터 한국의 자연스러운 무역 상대국이었고 일본의 경제 부흥도 이미 궤도에 오른 만큼, 장기 투자차관이나 기술 지원을 포함해 한국에 원조를 공여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고 논하고 있다. 게다가 한일 간 무역 구조는 보완적이지 않지만 노동 구조는 보완적일 수 있으며, 한국의 경제개발 계획을 수행하는데 일본의 자본과 시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도 지적되었다(이현진 2008). 케네디 행정부는 1961년 3월 6일 주한미국파견단(U.S. Operations Mission in Korea)의 팔리(Hugh D. Farley) 보고서가 제출된 직후부터 대한 정책을 심각하게 재고하기 시작했다. 코머(Robert W. Komer)와 러스토(Walt W. Rostow)도 같은 달 15일 팔리 보고서를 내부적으로 검토한 다음 비슷한 문제의식을 내비쳤고, 케네디에게는 한국을 보는 참신한 시각 (fresh look)이 필요하다는 건의가 제출되었다.15 마침내 케네디 정권은 미국의 대한 정책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기로 하고, 1961년 5월 15일 국가안보회의에서 극동문제 담당 국무차관보 매커너기(Walter 48) 미국은 한국의 경제 발전과 자국이 부담할 비용의 최소화라는 이중의 과제에 직면하여, 일본은 한국의 경제 발전을 돕는 방 식으로 한국 및 동아시아 전체의 안정에 기여해야 한다 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미국은 한일과의 지속적인 접촉을 통해 회 담의 중지를 가능한 한 막고, 공적인 강제나 개입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가운데 한일 양국이 생각하는 금액 차이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이처럼 미국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사실상 한일회담의 관계자 로서 기능하면서 결과적으로 김종필-오히라 합의가 타결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케네디 정권이 한일 간 청구권 문제의 타결을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 이면서 사실상 신중한 개입 을 시작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과 일본에 대한 미국의 압력은 비대칭적으로 행사되었음을 주 장한다. 일본은 미국의 동아시아 안보 전략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비해 대미 교섭에 있 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위치에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청구권 교섭의 주도권은 주로 일본이 쥐게 되었으며, 경제협력 방 식 에 의한 해결을 주장하는 일본의 입장에 미국이 동조하고 이를 한국에 설득시키는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이렇게 미국의 압력이 비대칭적으로 작용할 수 있었던 것은 청구권 문제 해결이라는 과제 자체의 난점뿐만 아니라, 국내정치적 상황, 일본 의 대미 교섭력 강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조아라 2014, ). 6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65 P. McConaughy)를 수장으로 하는 한국문제에 관한 대통령 태스크포스 (Presidential Task Force on Korea)를 출범시켰다. 이 태스크포스에서는 같은 해 5월 중순부터 보고서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했고, 이 내용이 국가안보회의 심의를 거쳐 6월 13일 미국의 공식적인 대한 정책 문서로 제출되었다. 이 보고서의 골자는, 한국 정부가 경제개발 계획을 세우고 효과적으로 추진해 나갈 수 있도록 미국이 경제 원조를 통해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후 미국의 대한 원조는 규모 면에서 축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소비재 위주의 무상 원조에서 경제 개발을 위한 차관형 원조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 문제는 이런 원조 효율화 정책 만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진정한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기존의 군사 원조 중심의 공여정책에서 벗어나 경제 원조에 역점을 두어야 할 뿐만 아니라 자국의 원조부담을 나누어 질 수 있는 파트너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긴급한 상황에서 미국이 더욱 적극적인 일본의 역할을 요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조아라 2014, ). 이와 같은 미국의 정책 전환은 한국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60년대 들어 장면 저부가 종래 이승만 정부의 반일 정책을 버리고 한일회담의 타결을 향해 급속한 정책 전환을 보인 것은, 미국의 대한 원조 정책의 변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3. 박정희 정부 하의 한일회담 5 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집권 이후 불안한 정치적 기반 확충을 위하여 한일 국교정상화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동북아 안보환경 변화와 함께 한일 양국은 1961년 10월 20일 동경에서 제6차 한일회담을 시작했다. 제6차 한일회담의 협상의제는 청구권의 근거 및 내용,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 어업 문제 등이었다. 그 해 11월 22일 박정희는 방일하여 이케다 총리와 면담하고 조속한 국교정상화에 합의했으나 청구권 문제의 실무교섭에서 양국의 상이한 입장은 좁혀지지 않은 채 답보상태에 머물렀다. 이에 조기타결을 서두르고 있던 군사정부는 고위급 정치회담을 열어 청구권 문제를 일거에 정치적으로 타결하기로 방침을 정한다. 49) 1962년 8월부터 정치회담을 위한 예비절충 작업이 진행되었다. 1962년 10월 21일 회담에서 일본의 오히라 외상은 3억 달러를 일본 측이 제공할 수 있는 최대치로 제시했다. 이에 대해 김종필 49) 1961년 11월 한일관계 정상화에 적극적이던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일본에서 이케다 하야토( 池 田 勇 人 ) 총 리에게 일본이 성의를 보여주면 법률적인 근거가 있는 청구권만 요구하고 정치적인 배상은 요구하지 않겠다 는 탄력적인 태도를 보였다. 박정희는 다음해 김종필 특사에게 보낸 훈령에서 평화선 문제에서 양보할 뜻이 있음을 일본에 전달하라 고 지시했다. 그러나 일본이 과거 잘못을 인정한다는 뜻인 청구권 명목이 아니라 독립 축하금이나 경제 원조금 명목으로 3억 달러를 주겠다고 제의한 데 대해서는 그런 명목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고 단호히 거부했다. 3억 달러는 그때까지 일본이 제시하던 금액보다 훨씬 많은 돈이었다. 63 민주화운동
66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이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액수이며 한국은 적어도 6억 달러를 상정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50) 이어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과 오히라의 두 번째 회담에서 청구권의 명목과 금액에 관한 최종 담판을 벌였다. 이 청구권 문제 의 최종적인 타결 결과를 기록한 것이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 다. 51) 이 메모는 일본 측이 한국에 제공할 금액으로서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차관 1억 달러 이상 (무상 3억 달러 10년간 제공, 유상 2억 달러 차관 10년 제공하되 연리 3.5%에 7년 거치 20년 상환)이라는 총액의 대강을 정하고 있다. 그러나 자금제공의 명목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며, 이는 한일 양 정부가 대내적으로 이 금액의 명목을 편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기 위함이었다. 이후 한국정부는 이 금액을 청구권 자금 또는 사실상의 배상 으로 설명하였고 일본정부는 경제협력자금 혹은 독립축하금 으로 해석하였다. 추가 실무접촉에 의해 확정된 합의 문서에는 일본의 무상 유상자금 제공의 수반적인 결과로서 청구권문제가 해결되었다 는 규정이 채택되었다. 이처럼 10여년의 한일회담의 최대 초점이었던 청구권 문제는 한일 간의 역사청산이라는 본질과는 괴리된 채 경제협력 이라는 왜곡된 형태로 타결을 보게 되었다. 당시 한국 측이 청구권문제를 반드시 타결지으려한 것은 1962년 1월 13일 제1차 경제개발계획이 성안되고 6월 10일 제2차 통화개혁이 실시되어 많은 자금이 필요했던 한국 내 사정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이후 회담의 쟁점은 어업문제로 넘어갔으나, 1963년 10월 15일 대통령 선거와 제3공화국 출범 등 한국의 정치상황이 긴박해짐에 따라 협상이 지체되었다. 1964년 초부터 미국의 한일회담 조기타결에 대한 기대가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1월 18일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이 내한하여 한일회담과 군사 경제원조에 대해 합의하였고, 1월 29일 러스크 국무장관이 내한하여 박 대통령과 요담을 통해 한일회담의 조속한 타결은 한일 양국뿐 아니라 전 자유세계의 이익에 공헌할 것 이라 했으며, 2월 28일 러스크 국무장관은 주미 한일 양국 대사를 초치하여 한일회담과 극동아시아 안정에 관해 논의하기도 했다. 미국의 이러한 움직임은 중공의 국제무대 등장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서, 1964년 1월 27일 프랑스는 중공을 승인하고 외교관계를 수립한다고 발표하였다. 50) 한편 쿠데타로 집권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한일협상과 1963년 대선을 놓고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정부는 어업전관수역 범위를 당초 40해리에서 일본 측 요구대로 12해리로 축소하기로 내부 방침을 정한 뒤에도 대선에서 어민 표 가 감소할 것을 우려해 대외적으로는 알리지 않았다. 그해 8월 31일 열린 대책회의에서 중앙정보부 국장은 그 사실에 대 한 보안 유지를 우려하며 인격 대 인격으로 신문사에 호소하자 고 제안한다. 이에 외무부 정무국장은 한국일보는 응해 주는 방향이니 동아, 조선, 경향을 우선 설득하겠다 며 언론 통제 시도를 드러냈다. 10여 일 뒤에 열린 9월 11일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대선 전에는 안을 내지 말자고 합의했다. 정보부 국장은 정권이냐, 한일문제냐 양자택일의 문제 라고 말했다. 51) 그런데 이에 앞서 박정희 의장이 김종필에게 보낸 긴급훈령에는 다음과 같은 지시가 내려졌다. 청구권 명목을 독립축하금 또는 경제협력으로 하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어디까지나 우리 국민이 청구권에 대한 변제 또는 변상으로서 지불 받는다는 것을 납득할 수 있는 표현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할 것. 지불금액에 있어서는 순변제와 무상의 합계가 차관액보 다 많아야 하며 이의 총액이 6억불이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양보하는 것은 곤란함 (외교부, 대일절충에 관한 박의장의 김 부장에의 훈령( ). 미정리 한국비밀외교문서 )이라고 적시되어 있다. 6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67 1964년 3월 10일 한일 양국의 농림장관이 전관수역 설정문제, 공동 규제수역 설정문제, 어업협력자금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만났다. 김종필은 3월 23일 일본에서 오히라와 만나 3월 타결, 5월조인 원칙에 합의했다. 그러나 한일 간 협상내용 및 정치과정에 대한 국민의 누적된 불만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부는 당시 김-오히라 메모 를 포함한 회담 전 과정을 비밀에 부쳤고, 결국 청구권 자금 3억 달러에 민족의 자존심을 팔았다 는 비난을 야당으로부터 받았다. 범야권이 1964년 3월 9일 대일굴욕외교 반대투쟁위원회 를 결성하여 한일회담 즉각 중단과 청구권 27억 달러, 평화선의 기선 30해리를 전관수역으로 할 것 등 대안을 제시하면서 반대투쟁을 전개하였고, 52) 3월 24일 학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일본의 경제침략을 규탄하고 김종필의 귀국을 요구하는 등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6월 3일 학생 시위대가 중앙청까지 몰려드는 등 한일회담 반대를 넘어 격렬한 반정부 시위로 정권의 존속을 위태롭게 하자( 6 3항쟁 ), 박정희 정부는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결국 청구권 액수, 평화선, 기타 독도 영유권 등에 관한 근본적인 견해차와 국내의 한일회담 중단 요구 시위로 제6차 한일회담이 결렬되고 말았다. 53) 1962년 11월 청구권 문제 타결( 김-오히라 메모 ) 이후 정체상태였던 회담이 1964년 말부터 다시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한다. 양측의 협상재개 분위기를 고무시킨 것은 미국의 강한 압력이었다. 주한 대사 브라운은 박정희 러스크의 합의에 따른 경제 및 군사원조를 계속 강화하고, 한일 현안의 조기타결을 위해 노력한다 는 브라운 각서를 작성했고, 미 국무성 극동담당 차관보 번디는 9월 28일 일본 외상, 외무차관 등에 대해 한일회담 재개를 종용하고, 10월 2일 방한하여 미국정부 방침을 재확인했다. 그 결과 1964년 12월 3일 제7차 한일회담이 재개되기에 이른다. 제7차 회담의 초점은 기본관계 문서의 작성에 모아졌는데, 기본관계를 둘러싸고 한국은 1910년의 한국합병조약 및 그 이전의 협약이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입장을 관철하고자 한 반면, 일본 측은 합병조약은 일본의 패전 혹은 대한민국의 성립까지는 유효하며 일본의 한국통치가 합법적이었다는 관점을 고수했다. 결국 최종 타협안은 구 조약은 이미 무효이다(already null and void) 라는 문구를 채택하였는데, 이는 양국 각각이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즉 구 조약의 무효시점을 이미 무효 라고 애매하게 규정함으로써, 한국정부가 이미 라는 시점을 구 조약의 체결시점부터로 해석한 반면, 일본정부는 식민통치가 종결된 일본의 패전이후로 52) 1952년 1월, 대한민국 정부는 동해상에서 한국 어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대한민국 관할권이 미치는 범위를 규정하는 평화선을 선포했다. 이승만 라인 이라고도 불리는 평화선의 선포는 한국과 일본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나 국제법의 발전 과 관련하여 평화선이 지니는 보다 광범위한 중요성은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다. 김하양은 현대 해양법의 지침으로서 평화 선이 가지는 중요성을 검토하며 20년 후에 배타적 경제수역이라는 이름을 얻은 체제를 예측하고 오늘날에도 유효한 경계 획정 관행을 사용한 평화선은 해양법 발전의 중요한 단계로서 서구 학자들로부터 지금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김하양 ). 53) 한 일간 어업 문제의 주요 핵심은 평화선 문제였다. 평화선 선포 과정에서부터 실질적으로 폐지되기까지의 과정 속에서 한국 측 협상 참여자들의 인식 변화가 교섭과정과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평화선 폐지를 둘러싸고 농림부와 외무부의 마찰이 있었음을 외교문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조윤수 2011, 145). 65 민주화운동
68 해석하였다. 1965년 2월 17일 시이나 외상이 방한하여 불행한 과거를 깊이 반성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에 가조인함으로써 한일협정에 전기를 마련했고, 같은 해 4월 3일 청구권 및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어업에 관한 협정 등에 양측 대표들이 서명함으로써 가조인이 이루어졌다. 국내에서는 대일굴욕외교 성토대회 를 비롯한 끊임없는 반대데모가 일어났다. 6월 22일 이동원 외무장관과 시이나 외상이 일본총리 관저에서 한일협정 에 서명함으로써 한일회담은 종지부를 찍었다. 8월 14일 임시국회에서 야당의 불참 하에 한일협정 비준동의안 이 통과되어 한일협상은 14년 만에 완결되었다. 일본 측은 11월과 12월 중의원과 참의원 비준을 각각 마쳤으나 한일협정은 한일합방이 원천무효임을 명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독도 및 정신대 문제, 재일교포 법적 지위 등에 대한 명확한 규정을 하지 않음으로써 거센 비판을 받았다. 4. 한일회담의 성격 한일협정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문제는 크게 한일 국교정상화의 의의와 그 기본적 방향을 담은 기본관계조약, 대일 재산청구권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나 대우에 관한 협정, 한일 어업협정 등이었다. 우선 기본관계조약 관련하여, 한일합방이 원천무효 이며 잘못된 과거사였음을 명시하지 않은 점은 한일협정의 커다란 결함이었다. 일본은 회담 내내 식민 지배 36년에 대한 사죄와 반성은 고사하고 망언을 서슴지 않았는데도, 박정희 정부는 회담을 밀어붙이는 데 급급하여 일본의 식민통치를 합법화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둘째, 대일 재산청구권 관련하여, 식민지 지배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침략주의를 인정하면서 일본의 전략에 말려들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이승만 장면 정부도 대일 청구권은 포기하지 않았는데, 박정희 정부에 와서 청구권 이라는 용어가 사라지고 대신 무상 공여, 차관, 경제협력 이라는 용어로 대치되었다. 이는 권리 요구 의 입장에서 도움 과 원조 를 구걸하는 입장으로 물러난 것이며, 그 결과 얻은 것은 무상공여 3억 달러, 유상재정차관 2억 달러, 민간차관 3억 달러였다. 미얀마, 필리핀, 월남 등에 명백한 배상 의 뜻을 밝히며 수억 달러를 지불하였던 일본이, 36년간 수탈한 한국에 대해 내놓은 금액으로는 턱없이 부족했을 뿐 아니라 그것도 경제협력 차원의 제공이었다. 무상 공여 3억 달러 도 현금이 아닌 일본에서 생산된 기자재와 용역 서비스의 제공이었다. 이는 한일회담이 굴욕적인 협상이었다는 비판세력의 주장이 근거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이 협정으로, 박정희 정부는 일본 자본의 본격적인 한국 진출과 한국 경제의 대일 종속 가속화의 서막을 열게 되었으며, 협상 과정에서 추후에 발생하는 청구권에 대한 문제는 각자 국내 6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69 문제로 한다 고 함으로써, 훗날 일제하 강제동원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 행사에 불리한 빌미를 제공하였다. 셋째, 재일교포의 지위 와 관련하여, 일본 식민지배의 희생양으로 전쟁터나 군수산업의 생산현장으로 끌려 간 강제 징용자들은 비참한 생활 속에 해방 이후에도 수십만 명이 일본에 남게 되었는데, 박 정부는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 및 대우 문제를 일본 정부의 임의적 처분에 맡겨 버리는 협정을 체결하였다. 한국은 당초 1951년 10월 한일예비회담에서, 재일한국인의 특수한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여 특수한 법적 지위와 처우가 부여될 것, 귀국을 희망하는 자는 자신의 전 재산을 반출할 수 있어야 하며, 일본에 영주할 경우, 교육, 사회보장, 재산권 등에 있어서 일본 국민과 동등한 처우를 받을 것 등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한일협정 체결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재일교포들은 영주권 문제, 강제 퇴거 등의 문제가 생길 때마다 차별대우를 받아왔고, 취업, 진학, 영업 등에서도 차별과 불이익을 받았다. 넷째, 한일어업협정 은 박정희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자금을 얻어내기 위해 우리 어민들에게 유리한 평화선을 포기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그것은 기존의 평화선을 무시하고 한국 어민들만이 어로할 수 있는 전관수역을 12해리로 축소시켰고, 공동규제수역을 설정하여 한국 연해어장이 일본과 공동소유임을 밝힘으로써, 일본의 불법어로 침탈행위를 적법한 것으로 만들어 줬으며, 일본 어부들이 협정이외의 수역에서 불법 어로작업을 하면 일본 정부가 자국 법에 의해 재판하겠다는 기국주의 실시에 합의하였다. 이로써 정부는 바다를 팔아넘겼다 는 강력한 비난에 직면하였다. 한일협정에 대해서는, 한편에서 경제협력자금 을 받아 한국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가 없지는 않으나, 그로 인해 막중한 역사부채 청산의 명분과 기회를 희생시켰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이다. 한일협정은 한일합방조약의 무효화나 일제 강제동원피해자 보상 문제에서부터, 일본군위안부, 문화재 반환, 재일교포 법적 지위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한일 과거사 라는 이름으로 제기되고 있는 중대한 문제들을 야기했다. 특히 한국의 대일청구권 을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배상 요구를 경제협력 차원으로 떨어뜨린 이 협정은 식민지 시대의 고통과 치욕을 잊지 못하는 국민들을 깊은 절망과 분노에 빠트렸고, 한일회담반대 투쟁의 불씨가 되었다. Ⅲ. 한일회담 반대운동 한일회담반대운동의 저변에는, 박정희 정부가 한일회담을 이용하여 일본 정계와 재계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아 정부를 유지하려고 한다는 의혹도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음. 실제로 박정희 정부가 67 민주화운동
70 한일협정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일본 기업으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는 등 뒷거래를 한 사실이 최근에 드러났다. 54) 1. 한일회담반대운동의 전개 과정 1963년 여름을 거치면서 국민들의 관심은 윤보선과 박정희가 경쟁하던 대통령 선거에 집중되고 있었다. 각 대학 지도부와 졸업한 선배 운동권 그룹들은 한일회담반대투쟁을 대대적으로 벌여 박정희 정부 타도 투쟁의 계기로 삼기로 결의했다. 1963년 2학기가 시작되자 각 학교에는 연구회 형태의 학술 서클, 즉 서울대 문리대의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서울대 법대의 사회법학회, 고려대의 우리문화연구회, 성균관대의 민족문제연구회 등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학술 서클들은 군사정부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온건한 노선과 목표를 가진 학술단체를 표방했다. 이러한 학술서클들 중에서도 특히 서울대 문리대의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는 1964년부터 시작되는 한일회담반대투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는 1964년 1월 10일 연두교서에서 자유진영 상호간의 결속의 강화로써 극동의 안전과 평화유지에 기여한다는 견지에서 한일회담을 조속히 타결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정부는 이를 위해 어민들의 생존권이 달린 평화선 문제까지 대폭 양보했다. 이에 1월 21일 어업 단체들은 평화선 사수대회 를 개최하는 등 평화선 양보 결사반대에 나섰고, 2월 10일 야당이 성명서를 발표하여 평화선 양보하는 한일회담 반대 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어민들과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부는 3월 타결, 4월 조인, 5월 비준 이라는 한일회담 조기타결 방침을 밀어붙였다. 이에 민정당, 삼민회 등 야당은 3월 9일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범투위)를 구성하고 한일회담 즉시 중지, 일본의 반성과 사과, 평화선 수호 를 요구하면서 전 국민의 궐기를 호소하였음. 3월 15일 범투위 가 부산 경남중학교에서 개최한 대일굴욕외교반대 강연회 에는 약 3만여 명이 모였고, 목포에서 열린 한일회담반대 유세에는 약 2천 명의 시민들이 운집했다. 3월 15일부터 20일까지 전국 12개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한일회담 반대집회를 연 범투위 는, 3월 21일 서울고등학교 교정에서 함석헌, 윤보선, 장준하 등을 연사로 대일굴욕외교반대 강연회 를 열었다. 강연회에 참석한 연사들은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대일협상은 일본의 경제식민지화를 초래할 수 있다 며 박정희 정부를 성토했다. 3월 23일 일본 동경으로 간 김종필은 5월 초순 한일협정 조인 을 재차 강조하였고 이 발언은 국내의 투쟁열기를 더욱 가열시키는 작용을 했다. 3월 24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김종필과 일본 수상의 허수아비 화형식이 진행되었고, 학생들은 민족 반역적 한일회담을 즉각 중지하고 동경 54) 이하의 서술은 6 3동지회(2001)에서 발간한 자료에 크게 의존하여 서술하고 있음을 밝혀둔다. 6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71 체재 매국정상배는 일로 귀국하라,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어선을 해군력을 동원하여 격침하라, 한국에 상륙한 일본 독점자본의 척후병을 축출하라, 친일 추구하는 국내 매판 자본가를 타살하라, 미국은 한일회담에 관여하지 말라, 제국주의 일본 자민당 정부는 너희들의 파렴치를 신의양화를 입어 속죄하라, 박 정부는 민족 분노의 표현을 날조공갈로 봉쇄치 말라, 오늘 우리의 궐기는 신제국주의자 에 대한 반대투쟁의 기점임을 만천하에 공포한다 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종로5가까지 진출한 시위대는, 2시 30분경 서울대 법대생 3백여 명과 합류하여 곤봉 등으로 진압하는 경찰에 맞섰다. 같은 날 오후 3시경, 고려대생 1천여 명도 주체성을 잃은 굴욕적인 대일외교 반대선언문 을 채택하고 일제히 교문을 나섰고 불어난 시위대가 종로4가까지 진출하였으며 경찰이 최루탄을 터뜨리며 진압에 나섰다. 고대생들의 시위를 응원하던 대광고교생 2백여 명도 반도호텔 앞에서 대일굴욕외교 반대 를 외치며 연좌시위를 벌였으며, 연세대생 2천 300여명도 교내 집회를 가졌다. 국회의사당을 향해 시위대가 계속 밀려들었고, 서울 시내는 늦은 저녁까지 5천여 명의 시위대와 시민들, 최루탄과 곤봉으로 저지하는 경찰들로 가득했다. 이날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한일회담반대투쟁에 나선 학생들과 시민들의 숫자는 총 8만여 명이었는데, 3 24 시위는 4 19혁명 이후 최대의 시위이자 5 16쿠데타 이후 최초의 대규모 시위였다. 다음날인 25일에도 수많은 학생들이 시내로 진출했다. 배명, 성동, 송파중고생 약 2천여 명도 대학생들의 시위대열에 합류했고, 부산, 대구, 전주 등 지방의 각 급 학교 학생들도 굴욕적인 한일회담 즉각 중지를 요구하며 가두로 진출했다. 이날 시위는 별다른 충돌 없이 진행되었으나, 시위대가 청와대 쪽으로 향하자 청와대 앞에 저지선을 구축하고 있던 경찰들이 최루탄을 발사하며 전진을 막았다. 이날 오전 11시 중앙청에서 서울시내 56개 대학 학생 대표 92명이 참석한 가운데 정부 학생 간담회가 열렸으나 결렬되었다. 퇴장에 앞서 학생들은 한일회담 즉각 중지, 일본에 체류 중인 대표 소환, 대통령 면담, 구속 학생 전원 석방 등을 요구했다. 3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한일회담 협상에는 추호의 흑막도 없다 면서 흔들림 없이 수행할 것임을 강조하여 학생들의 한일회담 즉각 중지 요구를 사실상 거부했다. 이날 서울에서는 고교생들이 주동이 되고 대학생들이 참가하는 형식의 시위가 전개되었다. 고교생들이 한일회담반대 투쟁의 전면에 뛰어들면서 시위 규모는 2만5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치안당국은 4 19혁명을 방불케 하는 시위 진압을 위해 경기도경의 경찰력에다 수도경비사령부의 공수단 병력까지 동원했다. 3월 26일 시위를 끝으로 시위는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지만 5월 말 들어 다시 시위가 격화된다. 5월 20일 민족적민주주의 장례식이 그 계기가 되었다. 시체여 너는 오래 전에 이미 죽었다. 죽어서 썩어가고 있었다. 넋 없는 시체여! 반민족적 비민주적 민족적 민주주의 여. 종잡을 길 없는 막연한 정치이념, 끝없는 혼란과 무질서와 굴욕적인 사대근성, 방향감각과 주체의식과 지도력의 상실, 이것이 곧 너의 전부다. 시체여! 69 민주화운동
72 5월 20일 오후 1시,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는 조사가 울려 퍼졌다. 김지하의 위 조사는 박정희 정부의 모토였던 민족적 민주주의 를 시체로 규정하면서 5.16쿠데타정부를 비판하였다. 서울대, 동국대 등 5개 대학 한일굴욕회담반대 투쟁위원회 의 연합조직 한일굴욕회담반대 학생총연합회 (학총련)가 거행하는 민족적민주주의 장례식 이었다. 집회에 참가한 4,000여명의 대학생과 시민들은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이라는 만장을 드리웠고, 민족적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검은 관을 선두로 한 시위대의 물결은 교문을 향해 돌진하여 무장경찰과 충돌했다. 격렬했던 이 날의 시위는 많은 연행자와 부상자를 낳았음. 학생들은 박정희 정부를 4 19혁명 정신을 근본적으로 부정한 친일 친미 정부로 규정하였다. 5 20시위를 기점으로 한일회담반대 투쟁은 경제적 문제, 정치적 억압, 외세 의존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목표로 하는 반정부운동으로 전환되었다. 5 20시위로 박정희는 장례식을 주최한 학총련 간부들을 전국에 현상 수배하였고, 5 20시위로 연행된 학생들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21. 새벽에 무장한 공수부대원들을 법원과 담당 판사(양헌)의 집에 보내 협박을 가했다. 데모하는 놈들을 잡아 놓았으니 즉각 구속하라. 그렇지 않으면 수류탄을 터뜨려 여기서 죽여 버리겠다 며 협박한 이 사건은 권력이 법 위에 있음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전 국민적으로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5 21법원난입사건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자, 박정희 정부의 위기감도 고조되었다. 그러나 5 20시위와 5 21법원난입사건을 계기로 박정희 정부는 정치적 반동화의 길로 들어선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법원난입사건에 대해 앞으로도 데모가 계속된다면 이 같은 군인들의 집단행동이 없으리라고 보장할 수 없다 고 발언하였다. 5월 20일 김지하의 조사를 낭독한 서울대 정치학과 3학년 송철원은 남산의 건물로 끌려가 손가락 사이를 담뱃불로 지지는 등 고문을 당했다. 그가 정부기관의 학원사찰조직인 YTP(Young Thought Party: 청사회)의 내막을 폭로했기 때문인데, 당시 YTP는 중앙정보부가 운영하던 학생 프락치 조직이었다. 이들은 운동권 학생들에게 온갖 위협을 가하거나 장학금과 유학을 미끼로 유혹하였는데, 1964년 4월 학내에 프락치 소문이 떠돌자 송철원이 학원사찰조사위원회를 만들어 YTP의 실태를 조사하고 그 내막을 폭로했던 것이다. 중앙정보부 조사실에서 간신히 풀려난 송철원은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에 대한 불법 가혹행위사건과 YTP사건의 전모를 자료와 함께 샅샅이 공개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반정부시위는 갈수록 거세어졌다. 초기에 참가하지 않았던 대학이나 고등학생들까지 한일회담반대투쟁 대열에 속속 가담하기 시작했고, 5월 25일 전국 대학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난국타개궐기대회 가 열렸다. 이 궐기대회는 한일굴욕회담반대 학생총연합회 가 주최한 전국규모의 첫 집회였다. 학총련 학생대표 32명은 구속 중인 애국학생 즉시 석방, 독점매판재벌의 엄단 등을 요구하면서, 5월 30일까지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지 7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73 않으면 4.19혁명 정신으로 실력행사도 불사하겠다 고 선언했으나 총리는 학생들이 무질서하고 격한 행동을 삼가주기 바란다 면서 계엄선포 가능성을 비쳤으며, 내무부 장관은 20일 이후의 데모에는 서울대의 용공적 색채가 농후한 서클인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소속 학생들이 주동이 되었으며 일부 정치인과 혁신계 인사들이 물심양면으로 방조하였다 고 발표함으로써, 용공으로 한일회담반대 투쟁에 쐐기를 박고자 했다. 5월 27일 전남대생들은 애국충정 있거든 하야로 보답하라 는 구호를 외치는 등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구호가 학생시위에 등장함. 이 날, 서울대 전체교수협의회는 군의 정치적 중립과 학원의 자유 보장, 구속 학생 석방, 학원자치에 위배되는 교육법 개정 등을 요구하며 간접적으로 한일회담 반대의 뜻을 밝혔다. 5월 29일 서울 시내 34개 대학 대표들은 정부는 우리의 외침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회유정책이나 매카시 수법으로 그 초점을 흐리고 있다. 이에 우리는 지난번의 구국비상결의 선언대로 행동할 것 이라며 최후통첩을 보내고 행동에 돌입했다. 5월 30일 서울대 문리대생들은 박 정부 하야, 공포 정치 지양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박정희 정부의 타도 없이는 한일회담반대 운동도 무의미하다 는 결론을 내리고,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2-30명으로 시작된 단식농성대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학생들의 주장도 날로 강도가 높아졌고, 학생들의 처절한 단식투쟁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시위가 전국적 봉기의 양상으로 치달았다. 6월 1일 전북대생들과 청주대생들이 구속학생 석방과 박정희 정부의 하야를 요구하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서울시내 약 6천여 명의 대학생들이 반정부 성토대회를 열고 시내 곳곳에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서울대 문리대 교수 30여명이 학생들이 굶고 쓰러져 있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 당국이 교수들의 사태수습 건의를 외면하면 스스로 사퇴할 것 이라고 강력한 입장을 밝힌 가운데, 학생들의 극한투쟁과 정부의 무력탄압 강경책이 평행선을 달렸다. 서울대 문리대 단식농성단의 숫자가 300명으로 불어난 6월 2일 밤, 농성 학생들 앞에 3.24 서울문리대시위 선언문의 작성자였던 수배 중인 김중태 등이 나타나서 우리의 학생운동을 민족혁명의 차원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민족 최후의 보루인 단식투쟁을 릴레이 식이라도 계속해 달라 며 열변을 토한 후 경찰에 자진 출두했는데, 김중태 등의 극적인 등장과 자진출두는 용공으로 몰리고 있던 한일회담반대운동 세력들의 투쟁에 이념적 정당성과 함께 투쟁의 활력을 불어넣었고, 결국 이튿날인 6월 3일의 대규모 시위로 연결되었다. 6월 3일 서울에서는 한양대, 서울대, 고대, 연대, 동국대, 성균관대 등 18개 대학 15,000명의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고, 수원에서는 서울대 농대생 600여명이 도보로 경수가도를 달려 서울로 진입했다. 서울 시내로 몰려나온 학생과 시민 약 5만여 명은 무단정치 박정부는 민족을 위해 물러나라, 썩고 무능한 박 정부 타도 를 외치며 청와대로 향했다.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하고 공수부대 풍차까지 동원하는 등 시위대의 전진을 막았으나, 시위대는 경기도청과 중앙청 정문 앞을 71 민주화운동
74 뚫었음. 수천 명의 시민들도 시위대열에 합류해 구호를 외쳤고, 국회의사당과 청와대에 이르는 거리는 시위대로 가득 찼다. 이 과정에서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시위대에 의해 경찰서 2곳, 소방서 1곳, 파출소 7곳, 시경 순찰대 시설과 차량이 파괴되었으며, 경찰 백차, 수도경비사 트럭 등 17대가 탈취되었다. 특히 건국대 초급대학 농경과 1학년 이윤식은 시위대가 빼앗은 군용 트럭에 탔다가 떨어져 중상을 입었음(7. 2. 사망). 시민과 학생들의 시위는 봉기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고, 오후 7시경부터는 4.19혁명 당시와 마찬가지로 시위의 주체가 도시의 하층 청소년들로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7시 30분경, 조달청 앞으로 밀려든 시위대는 수경사 군인들의 강력한 저지로 더 이상 진출하지 못했다. 한편, 청와대 외곽의 방위선을 돌파한 시위대가 청와대를 경비하고 있던 중무장한 공수부대를 포위함으로써 6 3시위는 절정에 이르렀다. 청와대를 포위한 시위대는 박정부는 하야하라, 민족 분열 일삼는 독재정부 물러가라, 데모가 난동이냐, 쿠데타가 난동이냐, 몰수하자 매판자본 등의 구호를 외쳤다. 6월 3일 저녁 9시 40분 서울 일원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는데, 박정희는 담화문에서 계엄기간 중 난동, 파괴, 불온한 언동, 유언비어 조작을 비롯한 범법행위와 혼란을 틈탄 일체의 공산세력은 단호히 엄단될 것 임을 경고했다. 비상계엄 선포로 출동한 군 병력은 중앙청 앞에 운집해 있던 시위 군중들을 세종로 방면으로 밀어붙였고, 자정 무렵에는 시위를 완전히 진압했다. 이날 경찰에 연행된 인원은 대학생만 63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비주카포와 총검이 부착된 소총으로 무장한 군대는 주요 도로에 기관총을 설치하였고, 헬멧과 방독면을 쓴 채 서울 시가지를 순찰했다. 6월 4일자 조간신문들의 지면은 정부의 공식적인 포고나 발표를 제외하고는 모두 까맣게 칠해져 있었다. 집회나 시위가 완전히 금지되고, 야간통행이 금지되었으며, 각 급 학교가 휴교에 들어갔다. 6월 4일 경희대생 200여 명이 교내에서 시위를 시도하였으나, 출동한 군인들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부산, 대전, 광주, 목포 등 지방에서도 격렬한 시위가 이어지자, 정부는 지방학생들도 난동을 벌인다면 정부는 비상계엄을 지방에까지 확대하지 않을 수 없다 고 경고하였고, 시위는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다. 2. 한일협정 비준반대운동 계엄으로 한일회담반대운동을 진압한 박정희 정부는 국민의 민주적 기본권을 노골적으로 제한하기 시작했다. 언론의 사전 검열을 실시하고 비판적인 언론인을 구속하였으며, 동아일보에 군인들을 침투시킴 계엄이 해제되자, 공화당은 학원보장 입법 과 언론윤리위 법안 을 단독 상정했다. 6 3시위 당시 구속된 학생들에게는 내란죄 가 적용되었고, 계엄이 선포된 6월 3일부터 8월 22일까지 총 352명의 학생들이 징계를 받았고, 구속된 학생은 224명에 달했으나 박정희 정부의 법적용에 무리가 있다고 판단한 재판부와 검사들이 구속된 학생들을 계속 석방시켰다. 7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75 1964년 말까지 석방이 이어져, 이명박, 김실, 박원규 등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된 이후에는 6 3시위는 한 명의 실형자도 남기지 않게 되었다. 학생운동 세력을 압박하기 위해 박정희 정부는 서울대 불꽃회사건, 인민혁명당사건 과 같은 조직사건을 연달아 발표하기도 했다. 1964년 8월 14일 중앙정보부가 북한의 지령을 받아 국가 변란을 꾀해 온 지하조직을 적발했다 며 대대적으로 발표한 인민혁명당사건은 의혹투성이였다. 인혁당 사건 조작설과 피의자들에 대한 혹독한 고문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중앙정보부로부터 사건을 넘겨받은 서울지검은 20일간의 추가 수사를 벌인 끝에 인혁당이란 반국가단체는 중정의 조사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며, 아무런 증거가 없는 허구 라는 결론을 내렸다. 1964년 6 3시위 이후 답보상태였던 한일회담은 1965년 1월 18일 재개되었고, 2월 17일 시이나 일본 외상이 한일협정의 기본조약 가조인을 위해 내한하자 한일회담반대 운동이 다시 고조되었다. 이에 서울시 경찰국은 2월 17일부터 일본 외상이 한국에 머무는 2월 20일까지 서울 전역에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2월 17일 일본 외상이 머무는 조선호텔 앞에 평화선은 한민족의 생명선이다 라는 플래카드가 걸리면서 기습 시위가 벌어졌다. 한일협정의 기본조약 이 가조인된 2월 20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수천 명의 인파가 한일회담반대 성토대회 에 참가하여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다. 3월 20일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범투위)가 서울운동장에서 개최한 성토대회에 3만여 명이 참가했다. 3월 26일 동국대, 3월 31일 전남대에서 성토대회가 개최되었는데, 학생들은 삼천리강토와 한국 민족을 일제의 잔악한 무리 앞에 내놓고, 수억 불의 돈으로 정치 흥정을 하려 드는 정부 처사를 규탄한다 고 외치면서 경찰에 맞서 투석전을 벌임. 박 정부는 집회와 시위 기간 내내 강력히 대응하였고, 특히 전남대 시위 학생들에 대해서는 사후에 관련자를 구속하고, 학교 측에 엄벌을 요구하여 총학생회장 정동년 등 7명을 제적시켰다. 4월 1일 학생평화선사수투쟁위원회 를 결성한 서울시내 13개 대학 학생대표 40여명은 한일회담 가조인 무효화, 평화선 사수 등을 내걸고, 합법적인 투쟁에 돌입할 것임을 천명했다. 반대투쟁 세력의 강력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부는 4월 3일 한일기본조약과 부속협정에 가조인함으로써 한일회담을 일단락 지었다. 그러자 4월 10일 범투위 가 지방유세에 나서면서 전국에서 산발적인 반대시위가 벌어졌고, 4월 13일부터는 고대, 경희대, 연대생 3,000여 명이 한일회담 가조인 무효 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시민들도 시위에 합류함. 이 날 대한극장 앞길에서 시위를 벌이던 동국대 농학과 3학년 김중배가 경찰 곤봉에 맞아 두개골 골절상을 당하였고, 결국 15일에 사망했다. 16일, 동국대생 2천여 명은 교내에서 김중배 위령제를 마치고 가두시위를 전개했고, 경기고 학생 1,000여 명은 평화선 암매! 을사년은 통곡한다 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였으며, 서울대 법대생 50여 명은 5일간의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4월 16일에는 건국대, 이화여대, 중앙대, 경희대 등 8천 5백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으며, 73 민주화운동
76 서울대 법대에 이어 상대생들도 농성에 돌입했다. 4월 17일 서울 시내 3개 고교생 3천여 명이 신을사조약 반대, 김중배 군의 사인 규명, 매국 조약 폐기 를 외치며 시위에 참가했다. 같은 날, 범투위 는 4만여 명의 시민, 학생들이 참가한 효창운동장에서 시민궐기대회를 개최했는데,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시위대를 자극하였고, 분노한 시위대는 파출소를 점거함. 궁지에 몰린 박정희 정부는 각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효창운동장 집회를 폭동으로 규정하는 등 공세를 강화했다. 한일회담반대 운동은 잠시 소강상태 후, 6월 22일 일본 동경에서 있을 한일협정 조인일이 다가오면서 대학가에 다시 긴장감이 흘렀다. 6월 12일 서울대 법대생 2백여 명이 한일회담 반대 등을 외치며 시위를 벌이자, 6월 18일 서울대 상대생들과 고대생들이 시위에 나섰고, 6월 19일 서울대 각 단과대 학생회장들이 모임. 법대에서 시작된 단식농성은 문리대, 상대, 사대 학생들까지 가세하여 6월 19일에는 600명을 넘어섰다. 조인을 하루 앞둔 21일에는 서울시내 12개 대학과 대광, 숭실, 양정 등 3개 고교생을 포함한 1만여 명이 매국외교 반대 시위를 전개함. 조인 당일인 22일에는 조기방학과 휴교 조치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거의 모든 대학에서 조인반대시위가 전개됨. 경찰은 거의 대부분의 병력을 투입하여 학생들의 가두 진출을 봉쇄했다. 마침내 오후 5시, 동경의 일본 수상 관저에서 일본 외상과 한국 측 수석대표가 기본합의서 및 부속문서 등에 서명함으로써 14년을 끌어온 한입협정은 온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식으로 조인되었고, 이제 남은 것은 국회의 비준동의 절차밖에 없었기 때문에 반대세력의 투쟁도 비준반대투쟁으로 모아졌다. 6월 23일 성균관대, 서강대, 가톨릭 의대생들이 성토대회를 갖는 등 전국적인 조인반대 시위가 전개되었다. 6월 26일 경찰의 폭력적인 시위 진압에 분노한 이화여대 교수들이 젊은이들의 불타는 순수한 애국지성을 짓밟지 말라 고 강력히 항의하였고, 대한교련도 경찰이 시위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학원의 자주성을 유린하고 있다 며 반발했으며, 종교계와 예술계도 나서 강원룡 등 개신교 목사 100여 명은 영락교회에서 한일회담비준반대 성토대회 를 열었고, 7월 9일에는 예술원장을 비롯한 문인 82명이 한일 조약 파기 를 주장했다. 7월 12일 서울시내 대학교수 354명은 한일회담의 기본조약이 일본제국주의를 합법화시키고, 우리의 주관을 약화시키며, 불평등 협정과 국가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 며 강력히 비판했고, 7월 13일. 그간 학생운동권의 반대투쟁과 거리를 두어 왔던 서울시내 6개 대학 학생회장단이 공동투쟁을 다짐하는 등 비준반대 운동은 정치, 종교, 문학, 예술, 교육 등 우리 사회 각 분야로 점점 그 범위를 넓혀갔다. 특히 7월 14일 김홍일, 김재춘, 송요찬, 최경록 등 예비역 장성 11명의 회담반대 성명은 반대운동 진영에 큰 힘이 되었다. 대부분 과거 군정과 박정희 정부 하에서 최고위원이나 장관을 역임하면서 박정희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사람들이었기에, 이들의 성명 발표는 더욱 의외였다. 7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77 얼마 후, 이 예비역 장성들을 포함한 학계, 종교계, 문화계, 경제계 대표 38명은 비준저지를 위한 연합전선 구축에 합의하게 되는데, 그 결과가 바로 7월 31일 서울 대성빌딩에서 각계 인사 250여 명이 결성한 조국수호국민협의회 였다. 윤보선의 민정당과 박순천의 민주당이 대여 투쟁을 위해 통합해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6월 14일 통합민중당이 출범하였으나, 7월 20일 대통령과 영수회담을 가진 박순천이 52회 임시국회에서 한일협정비준 동의안을 다룬다 는 내용을 포함한 5개항의 시국수습안에 합의함으로써 통합민중당은 다시 분열하여, 윤보선계가 탈당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박정희 정부는 8월 16일 박순천 중심의 민중당의 암묵적 동의하에 국회에서 비준동의안 처리를 강행하여 통과시켰다. 여름방학이 끝나면서 학생들은 곧 비준무효화 투쟁 에 들어갔다. 8월 21일 서울대 법대생 300여 명은 공화당 일당의 비준안 강행 처리는 민주 헌정의 근본이념을 뒤흔든 행위라고 규탄했다. 비준무효화 투쟁은 일부 지방대학과 고교생들까지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고 8월 23-24일 1만여 명의 인파가 한일회담 비준 무효, 일당 국회 해산 및 총선 실시 등을 요구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에 내무부는 범투위 와 조국수호국민협의회 등 8개 단체를 미등록 불법단체로 몰아갔고, 마침내 대통령은 정부를 내놓는 한이 있어도 데모 만능의 풍토를 뿌리 뽑겠다 고 선언했고, 박정희 정부는 8월 26일 서울 일원에 위수령이 발령했다. 성균관대, 이대, 고대 등 대학학생들은 즉각 박정희의 특별담화를 성토하는 집회를 열었지만 위수령에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전국의 대학가에는 시위주동자, 배후조종자에 대한 일제 검거령이 내려지고, 고대와 연대에 휴교령이 떨어짐. 결국 1964년 3 24시위 이후 줄기차게 이어져 온 한일회담반대 운동은 그 막을 내렸다. Ⅳ. 광주 전남지역의 한일회담 반대운동 년의 한일회담 반대운동 광주지역에서도 1964년 3월 26일부터 한일굴욕외교 규탄시위가 시작되었다. 26일 오전 8시 30분경 시내 계림동파출소 옆 버스정류장에 모여 있던 약 700여명의 전남대생들이 미리 준비한 대일굴욕외교를 반대한다, 사수하자, 평화선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가두시위를 전개한 것이다. 그러나 시위대와 진압경찰들이 정면충돌했던 서울과는 달리 광주지역에서는 경찰들이 시위대의 주위를 경계만 할뿐 저지하지는 않아 큰 충돌은 없었다. 경찰의 호위 속에 시위대는 금남로 도청 앞 광장 충장로 사직공원 광장에 이르는 도로를 구호를 외면서 평화적인 시가행진을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학생들의 뜻을 정부에 충분히 전달하겠다는 김효영 부지사의 다짐을 받고 광주서중에 있는 학생운동기념탑을 참배한 뒤 10시 30분경 통학버스 편으로 귀교했다. 75 민주화운동
78 이후 전남대는 한일회담에 관한 일관된 입장을 견지하기 위하여 1964년 4월 10일 한일문제 세미나 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날 초청연사는 국회의원 강문봉(민정당), 언론인 박동운(한국일보), 사상계 사장 장준하, 국회의원 백남억(공화당) 등 4명이었는데, 이에 관한 학생들의 높은 관심을 반영하듯 성황리에 세미나가 마무리되었다. 대회명은 세미나였으나 실은 강연회로 진행되었으며, 이들의 강연주제는 강문봉은 한일문제의 개요, 박동운은 국제정세와 한일국교정상화, 장준하와 백남억은 한일회담의 문제점 에 대해 강연을 했다. 이날 강연에서 장준하는 한일회담에 임하는 정부의 외교적 자세를 강하게 비판한 다음 정부가 옳은 길을 가지 않을 경우 학생들은 어떤 태도로 나아가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극한투쟁도 사양하지 않아야 한다 고 대답하여 대다수 학생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와 같이 전 국민적인 반대운동에 직면한 한일회담은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다. 그러나 최초 정부가 가졌던 한일회담의 필요성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고, 군사정부의 체면상 국민들이 반대한다고 해서 최초의 결정을 번복할 수도 없었다. 단지 반대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주도하는 인사들을 제거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려 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4월과 5월에 들어서면서 정부와 학생간의 대립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한편에서는 서울대학교 괴소포사건 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학원에 대한 사찰을 강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한일회담의 타결을 1년 시한부로 공약하는 개각을 단행했다. 정부 측의 이러한 움직임은 무장군인 법원난동사건, 육군참모총장의 경고발언 등으로 고조되다가 박정희대통령의 광주발언에서 절정에 달하게 된다. 정부의 이러한 움직임에 따라 학생들의 시위도 더욱 격화된다. 5월 11일 연세대학교 학생들의 대대적인 가두시위가 있은 후 15일에 서울 시내 각 대학이 연합하여 한일굴욕외교 반대투쟁학생총연합회가 결성되었다. 학총련은 5월 19일 미8군에게 최루탄 공급 중지를 요구하면서 20일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개최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학생을 중심으로 한 반대투쟁 진영은 점차 운동의 목표를 한일회담 반대에서 박정부의 하야로 변경하고 총력투쟁을 선포하게 된다. 그 최초의 계기는 5월 27일 전남대생들의 시위에서 비롯된다. 27일 오전 8시경 계림파출소 옆 버스정류장에서 전남대생 200여명은 법은 법대로 준수하라, 신망 잃은 박정부의 하야를 권고한다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박정부 하야 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에 돌입한다. 그러자 급히 출동한 경찰이 곤봉을 휘두르며 시위를 저지하려 하였고, 이에 학생들은 투석전으로 맞서면서 순식간에 유혈전에 전개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때마침 학교에서 달려온 200여명의 학생들이 합세하면서 경찰의 저지선이 붕괴되었고, 시위대는 권고, 권고, 하야권고, 배고파 못살겠다 는 구호와 해방의 노래 등을 부르면서 충장로 전남대 의대 광주세무서 광주경찰서를 지나 도청 앞에 이르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어서 이들 시위대는 도청 앞 광장을 점거한 채 연행된 10여명의 학생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하면서 연좌농성을 벌이기 7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79 시작했다. 결국 경찰에서 그날 연행한 10여명의 학생을 풀어주고 학생들이 경의문과 선언문을 낭독하면서 오후 1시경에 해산하였다. 당시 부상을 당한 사람은 학생 10명, 경찰 5명이었다. 한편 이날 광주학생구국투쟁위원회 명의로 나온 결의문에는 5 16군사쿠데타 후의 부정부패와 매판자본, 난동 군인들을 규탄하고 있는데 특히 학원자유 보장하여 민주기틀 마련하라는 요구가 있어 학생운동이 재건학생회로 지칭되는 침체기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이날 함께 낭독된 선언문에서는 이 난국을 타개할 새로운 개혁과 일대 혁신이 없는 한 오늘 당장 과감한 용단을 내려 하야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혁신이나 하야의 용단이 내려질 때까지 여하한 저지나 압력에도 굽힘없이 극한 실력투쟁을 전개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전남대의 시위에 자극받아 5월 30일에 열린 서울대 문리대생들의 자유쟁취궐기대회 에서는 반매판, 반외세, 반봉건, 반전제가 한일굴욕외교반대 학생투쟁의 기본이념이자 실천적 목표임을 천명하면서 이제 운동은 스스로의 이념과 목표를 갖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6월 1일 전남대 학생들의 시위를 선두로 2일부터는 박정희 정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대적인 가두시위가 전개되었다. 이제 그 동안의 굴욕외교 반대, 학원자유 수호 라는 구호 대신에 박정부 하야 가 투쟁의 제일 목표가 되었다. 6일이 되면서 학생시위대는 5 16군사쿠데타 이후 최대 규모인 2만여 명에 이르게 되었고, 그날 오후부터는 시위대에 일반시민이 가세하면서 공격목표가 청와대가 되었으며, 시위대에 경찰이 밀리기 시작하는 등 4 19항쟁과 비슷한 양상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른바 6 3항쟁 이 시작된 것이다. 한편 광주의 6 3항쟁은 5천여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6월 4일을 정점으로 5일까지 계속되다가 5일 오후 4시를 고비로 진압 당했다. 계엄령해제를 주장하며 시위가 전개된 4일에는 전남대, 조선대, 교육대학 등 당시 광주지역의 모든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부 고등학생들까지 시위에 가담하여 시위대의 규모는 5,000여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이들 시위대는 수십 발의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는 경찰과 충돌, 돌멩이로 응수하는 한편, 군 트럭을 탈취하여 도청 앞의 바리케이드를 돌파하는 등 험악한 사태가 빚어졌다. 또한 같은 날 오후 2시부터는 사직공원, 4 19기념탑 앞에서 100여명의 전남대생들이 경찰들에게 모두 연행되기도 하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광주지역의 대학들과 고등학교는 자체적으로 임시휴교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휴교령에도 불구하고 5일 아침 계림파출소 앞에 집결한 150여명의 학생들은 연행학생의 석방을 요구하며 데모에 돌입하였다. 이어서 300여명의 교대생들이 쏟아져 나오고, 흰 가운을 입은 학생들이 들것과 약상자를 들고 개에 물린 학생 석방하라 는 플래카드를 앞세운 전남대 의대생들이 경찰서로 밀어닥쳐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오 무렵 무장군인을 싣고 앞에 기관총을 장착한 20여대의 군 트럭이 시내로 들어오면서 학생들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여기에 간곡하게 시위대의 해산을 권유하는 학생들의 설득이 주효하여 시위대의 일부가 귀가하기 77 민주화운동
80 시작하였다. 그리고 귀가를 거부하고 현장에 남아 있던 나머지 학생들은 2시 30분경 도청 앞에서 경찰에 포위되어 거의 전부가 연행되었다. 당시 광주지역 학생시위의 주도자는 4 19혁명 당시 광주의 고등학생 시위를 주도했던 이들로서 전남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홍길, 홍갑기 등이었다. 이렇게 사태가 급작하게 돌아가자 저부는 미국 측의 동의하에 6월 3일 하오 8시를 기해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동시에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1,500여명의 무장병력으로 시위 군중을 해산시켰다. 또한 정부는 계엄실시와 함께 6월 5일을 기해 전국의 모든 대학들을 임시 휴교 조치하였으며, 동시에 대대저인 학생징계를 단행했다. 6월 4-5일의 시위로 광주지역에서는 총 338명이 연행되었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6월 중에 석방되었고, 8명이 구속 입건되었으며, 47명이 불구속 입건되었다. 구속된 8명 중 6명이 전남대생이었다. 한편 시위 주동자인 이홍길, 홍갑기는 시위 직후 도피하여 검거를 모면하였고, 박종희 등 6명이 구속되었다가 구속적부심에서 풀려났다. 그 후 검찰의 수사과정에서 총 71명이 관련자로 지목되어 이중 66명은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풀려나고 전남대학생 5명만 불구속기소를 당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에 대해서도 검찰이 공소를 취하하여 이 사건의 형사적인 문제는 광주지역에서 만큼은 일단락되게 된다. 불구속 기소된 사람은 이홍길(전남대 사학과 4학년), 김창호(전남대 상학과 4학년), 박종희(전남대 정외과 4학년), 민강수(전남대 농학과 4학년), 안청수(전남대 농학과 4학년) 등이었다 년 협정비준반대운동 정부는 한편으로는 대국민 강경책으로 반대투쟁의 기세를 억누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과의 비밀협상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국내의 소요가 진정되었다고 판단된 1964년 12월 제7차 한일회담을 속개했다. 제7차 한일회담은 기본관계 문제와 어업문제가 중심으로 다루어졌지만,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1965년 2월 20일에는 양국의 아주국장 사이에서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에 대해 가조인이 이루어졌다. 1965년 2월 20일에 체결된 한일 양국 간의 가조인은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으로 정식 조인되었다. 한일협정은 기본조약과 재일교포 법적 지위 및 대우에 관한 협정, 어업협정, 한일재산 및 청구권 문제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한일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등의 4가지 협정과 이와 관계되는 교환공문 9개, 합의의사록 2개, 왕복서한 1개 등으로 되어 있다. 한일협정의 체결 및 그에 따른 한일국교정상화는 그 과정과 내용, 결과 모두가 문제점을 안고 있기에 굴욕적 협정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한일협정의 문제점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일본의 반성과 배상이 전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청구권 문제가 배상이 전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청구권 문제가 배상이 아닌 경제협력의 문제로 타결된 것이라는 반대세력의 주장이 힘을 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재정리 7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81 둘째, 국교정상화의 본래의 의미라고 할 수 있는 양국의 주권이 보장받는 상호호혜적인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주된 이유로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우선 회담의 타결과정에 미국이 깊숙하게 개입하고 있어서 미국의 세계전략이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는 양국의 관심이 한국의 경우는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본이었고, 일본의 경우는 경제적 정치적 진출의 대상지를 찾는 것이었다는 사실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한일협정이 조인되던 말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거의 누구도 조인 내용에 만족할 사람이 없는 가운데 우리 자신과 우리 후손의 살림에 비관적인 영향을 미칠 역사적인 전환이 이루어지려고 하고 있다. 야당의 극한적인 반대, 교문폐쇄와 학생들의 단식, 데모가 계속되는 가운데 삼엄한 경계를 펴면서 조인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민족적인 비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일국교정상화가 갖는 이러한 굴욕적인 성격 때문에 한일협정은 조인된 이후에도 대대적인 반대여론에 직면하였다.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조인되는 것을 전후하여 종교인 문인, 대학교수 등 각계각층 인사들이 한일협정 조인 및 비준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또한 3-4월 시위 이후 소강상태에 있던 학생들의 시위도 재개되었다. 당시 학생들은 시위 초기에는 6 3항쟁의 교훈을 살려 체제대결적인 주장을 삼가는 대신에 평화선 사수, 굴욕외교 반대 등 민족적 감정에 호소하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점차 투쟁이 고양되면서 또 다시 박정부 하야라는 구호와 회담의 배후에 있는 미국을 비판하는 구호가 등장하고 있다. 1965년 한일회담이 비준단계에 들어가면서 개학과 함께 학원가는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1965년의 학생시위에 처음 불을 댕긴 것은 광주에서 일어난 전남대학교의 시위였다. 3월 31일 전남대에서는 오전 9시부터 학교 대운동장에서 800여명의 학생이 집결한 가운데 총학생회 주최로 매국외교 결사규탄 의 성토대회를 개최하였다. 총학생회장 정동년이 삼천리강토와 한민족을 일제의 간악한 무리 앞에 내어놓고 수억 불의 금액으로 흥정하는 현 정부의 처사를 규탄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낭독한 다음, 10시경부터 매국외교 결사규탄, 김 오히라 비밀흥정 이완용을 웃긴다 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에 들어갔다. 스크럼을 짜고 민족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사수하자는 구호와 전우가를 부르면서 시위대가 임동 쪽으로 진출하자 대기 중이던 300여명의 경찰이 곤봉을 들고 진압을 시도하였고, 여기에 학생들은 투석으로 맞서면서 또 다시 혼전이 일어나고 말았다. 결국 경찰과 학생들 중 상당수가 부상당하고,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 중 32명이 연행당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이날 연행된 32명 중 29명은 4월 2일 새벽, 과료 및 구속 기각, 행정면제처분 등을 받고 석방되었으며, 심우철(임학과 1학년)은 집회 및 폭력에 관한 법률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되고 김광일(법학과 1년) 외 1명은 2일간의 구류처분을 당했다. 그리고 정종희 등 4명의 전남대 졸업생들이 배후조종 혐의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또한 전남대는 문교부의 강력한 주동학생 징계지시에 따라 4월 1일 오후 2시 반 학장회의를 소집하여 전날의 시위를 불법집회시위 및 수업방해 로 인정하고, 주동학생 7명을 2일자로 제적처분하였다. 당시 제적된 79 민주화운동
82 학생은 김재홍(철학과 2학년), 김영우(정치학과 1학년), 전성훼(정치학과 1학년, 전홍준으로 개명), 안일근(정치학과 2학년), 송종호(정치학과 2학년), 정동년(화학과 4학년), 서병수(법학과 1학년) 등이었다. 1965년 8월 26일 또 다시 서울 일원에 위수령이 발동되어 시위진압에 군대가 동원되었고, 2개 대학교가 휴교조치를 당했으며, 학생운동 세력과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참가했던 지식인들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고 있다. 이와 함께 정부는 국회에서의 비준을 서둘렀다. 1965년 7월 14일 국회에서 여야 간의 난투극이 벌어지는 가운데 한일협정 비준안은 발의되었다. 그리고 학생들이 움직이기 곤란한 여름 방학 기간 중인 8월 11일 밤 11시 10분 공화당은 특별위원회에서 비준안을 1분 만에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야당의원들은 이에 항의하여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였으나 국회의장은 이들의 의원직 사퇴서를 반려하였다. 8월 14일 국회는 공화당 110명, 무소속 1명이 참가한 가운데 비준안을 통과시켰다. 이렇게 해서 한일협정은 발효되었으며, 그에 따른 제반 문제는 역사의 장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당시 전남대에서도 한일회담 비준을 규탄하는 성토대회가 열렸다. 8월 23일 오전 7시부터 이학부 앞에 플래카드를 걸어놓고 모인 60여명의 학생들이 오전 9시께 200여명으로 늘어나면서 본관 앞에서 성토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이들이 채택한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1일단 국회에서의 한일협정 비준은 무효다. 2국회는 즉시 해산하라 3야당의원들은 탈당하라 4미국은 한일문제에 간섭하지 말라. 이날 성토대회의 주동자는 박석무(법대 3년), 전성훼(정치학과 2년), 박동근(정치학과 1년) 등인데, 이들은 모두 대회 이후 경찰에 연행되었다. Ⅴ.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대한 평가 1. 전국적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대한 평가 1951년에 시작하여 1965년에 종결된 한일회담은 과거에 대한 철저한 평가와 반성과 배상을 통해 민족의 상처를 치유하고 한일 양국의 관계가 거듭나는 과정이어야 했으나 불행히도 한일회담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 한국은 교전당사국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여 참가하지 못했다. 미국의 연합국 명단 초안에는 한국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1951년 4월 23일 일본 총리가 한국이 조인국이 되면, 일본은 터무니없는 규모의 청구금액에 묻혀버릴 것 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한국이 제외된 것이다. 필리핀 등 일본의 교전국으로 인정된 국가에게만 8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83 전쟁배상이 이루어지도록 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따라, 한국은 북한과 함께 전후 일본에서 분리된 지역 으로 규정되어 배상이 아닌 별도의 청구권 논의만 이루어지게 되었다. 동 조약은 이후의 한일회담 과정에서, 일본으로 하여금 전쟁 배상을 회피토록 한 국제법상의 근거로서 한국의 발목을 잡았다. 한일협정은 한국, 일본, 미국이 각기 자국의 이익을 위한 대외정책의 수립과정에서 나타난 일치된 노선의 결과였다. 한일협정을 타결시킨 것은 전후청산이 아닌 냉전 과 경제 논리였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경제개발계획은 물론 시급한 민생고 해결이라는 공약조차 지킬 수 없게 되어 정부 유지마저 위협받는 상황에 이르자 정치 경제적 위기를 한일회담 타결로 극복하고자 했다. 미국은 일본에게 대한경제원조의 부담을 떠넘김과 동시에 동서냉전에 따른 대소봉쇄의 거점으로서의 한일 양국의 조속한 협상을 재개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일본은 전쟁의 패자나 가해자의 입장이 아닌 냉전의 대미협조라는 유리한 입장에 서는 한편, 일본재계가 경제 진출의 돌파구를 열려는 관점에서 한일관계 조기 타결을 서둘렀다. 이처럼 한일회담은 본래 과거청산을 통한 전후처리에 그 목적을 두고 있었음에도 냉전 과 경제 논리에 이끌려 정치적 흥정으로 종결되고 말았다. 박정희 정부의 정책결정 추진과정의 조급성과 협상태도의 문제점이 만족스럽지 못한 협상결과를 초래하였고, 더욱이 박정희 정부의 권위주의적 특성이 협상의 진행과정에서 국민여론의 참여를 물리적으로 배제시켰다. 또한 박정희 정부는 한일회담을 이용하여 일본 정계와 재계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아 정부를 유지하려 한다는 의혹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결국, 박정희 정부는 일본의 자금 확보라는 실리에 급급한 나머지 한일 관계 정상화의 절대적 조건이어야 할 일제 식민지 피해 청산 이라는 우리 민족의 절체절명의 과제를 외면하고 일본에 면죄부를 주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1964년부터 1965년까지 2년에 걸쳐 국민들의 커다란 호응을 얻으며 전개된 한일회담반대 운동은 가해자 일본을 경제 원조의 시혜자 로 탈바꿈시킴으로써 근대화 경제성장 의 이름으로 민족 전체의 염원을 좌절시키고, 앞에서는 일제하 강제 동원 피해자들의 보상 명목으로 청구권 자금 협상을 벌이면서 뒤로는 정치자금을 받아 챙긴 박정희 정부에 대한 학생들과 국민들의 분노와 저항이었다. 또한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5.16군사정부에 대한 최초의 대중적인 저항운동으로서 군부 독재의 본질을 드러낸 운동이었다. 계엄령과 위수령 발동 등 군사정부의 무력으로 한일회담반대 운동은 좌절되었지만, 맨주먹으로 군부정부의 무력에 대항했던 학생들의 순수한 모습은 많은 이들을 고무시켰고, 이 투쟁의 경험 속에서 운동세력은 군사정부의 본질을 명확하게 인식하였으며, 그것은 다시 1970년대 유신독재의 탄압에 저항해 반독재투쟁을 일으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한일회담 반대운동의 성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일회담반대 운동의 핵심은 대일굴욕외교 반대 였다. 반대세력들은 한일회담 자체를 81 민주화운동
84 반대한 것이 아니라 굴욕적인 한일회담의 추진을 반대했던 것이다. 한일협정에서 한일합방이 원천무효이며 잘못된 과거사였음 을 명시하지 않은 점은 크나큰 결함이었다. <한일기본조약> 체결에 있어서, 일본 측은 처음부터 과거 식민통치에 관한 사죄나 반성 뿐 아니라 과거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었음. 일본 정부는 사죄와 반성은커녕 회담 내내, 일제통치가 조선에 기여했다, 일본이 진출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은 중국이나 러시아에게 점령되어 더욱 비참한 상태에 놓였을 것이다 라는 망언을 일삼으며, 야만적인 한국 침략과 점령을 정당화했다. 이에 반해 우리는 애당초 한일회담 시작단계(1951. 예비회담)에서부터 과거 청산을 위한 평화조약을 희망했고, 대한민국과 일본국은 1910년 8월20일 이전에 구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이 무효임을 확인한다 는 안을 작성했을 뿐 아니라 합방조약이 애초부터 원천무효 라는 입장을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한일관계 정상화의 전제조건이 되이어야 할 일본의 반성과 과거청산을 뒤로 한 채, 회담을 밀어붙이는데 급급해 굴욕적 저자세로 회담에 임했음. 한일협정은 일제 식민지배 청산이라는 절실한 민족적 과제를 외면함으로써 일본의 과거 식민통치를 합법화하고 면죄부를 주었을 뿐 아니라, 가해자를 시혜자로 탈바꿈시킴으로써 민족 전체의 염원을 좌절시킨 굴욕적 회담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야만적인 한국 침략과 점령을 정당화하고 망언을 일삼는 일본에 대하여 단 한 줄의 과거청산 문구도 삽입하지 않은 채 졸속 굴욕외교를 단행하였던 것이다. 둘째,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대일청구권을 포기한 박정희 정부에 맞선 정당한 저항이었다. 이승만 정부와 장면정부는 종래 한일회담 과정에서, 일본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의식이나 인도적 배려조차 없이 줄곧 경제협력 운운하는 것에 대해, 대일청구권 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자금 마련의 목적으로 대일청구권 을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배상요구를 경제협력 차원으로 격하시켰다. 청구권 이라는 용어는 사라지고 무상 공여, 차관, 경제협력 으로 바뀌면서, 한국은 일본에게 도움 과 원조 를 구걸하는 입장으로 전락한 것이다. 더욱이 협상과정에서 추후에 발생하는 청구권 문제는 각자 국내 문제로 한다고 함으로써, 이후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 행사에 불리한 빌미를 제공하였음. 나아가 일본 자본의 본격적인 한국 진출과 한국 경제의 대일 종속을 가속화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구제문제를 피해자의 입장에서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었음은 물론 오히려 권력이 개인의 권리를 박탈한 셈이었고, 마침내 경제협력자금 명목의 수억 달러에 민족의 희생을 팔아넘겼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박정희 정부는 협상 진행과정에서 국민여론의 참여를 물리적으로 배제하였고, 일본으로부터 정치자금 수수 의혹을 야기하기도 했다. 박정희 정부는 김-오히라 메모 를 포함한 회담 진전 과정을 일체 비밀에 부쳤으며, 또한 한일회담을 이용하여 일본 정계와 재계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을 사기도 했다. 이에 김종필의 귀국을 요구 하는 등 한일 간 협상 내용 및 8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85 정치과정에 대한 국민의 누적된 불만이 폭발한 것은, 불투명하고 국민여론을 무시한 채 비민주적 협상을 전개한 권위주의 정부에 항거하고, 협정체결과정에서 뒷거래로 일본 기업으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아 불법 정부를 유지하고자 한 매국적 정부에 항거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정치적 반동화에 대한 저항이었다. 1964년 5월 20일 서울대 문리대에서의 민족적민주주의 장례식 시위 및 이후 벌어진 5.21 법원난입사건 (위 시위로 연행된 학생들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무장 공수부대원들을 법원에 보내 협박한 사건)을 계기로, 박정희 정부는 최대 위기를 맞았고 정치적 반동화의 길로 들어섬. 총리는 계엄선포 가능성을 내비쳤고, 내무부 장관은 시위학생들이 대학의 용공적 서클 소속이며 혁신계 인사들의 개입이 있었다고 발표하는 등 용공으로 시위를 제압하고자 했다. 이에 반정부 시위가 거세어지면서, 군의 정치적 중립, 학원 자유 보장, 구속학생 석방 등을 요구하며 박 정부 하야, 공포 정치 지양 등의 구호를 외치고, 박 정부의 타도 없이는 한일회담반대 운동도 무의미하다 면서 단식농성에 돌입하는 등의 행위는 武 力 으로써 사법부를 협박하여 구속을 명하는 등 권력을 통해 법을 무력화하고, 용공으로써 한일회담반대 투쟁에 쐐기를 박고자 한 박정희 정부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넷째, 국민의 민주적 기본권 제한한 정부에 대한 저항이었다. 1964년 6월 3일 청와대로 몰려가 박정부는 하야하라, 민족 분열 일삼는 독재정부 물러가라 등을 외치는 등 6 3시위 가 일어나자 정부는 서울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집회 및 시위, 야간통행 등을 완전히 금지했다. 계엄으로 한일회담반대운동을 진압한 박정희 정부는 국민의 민주적 기본권을 노골적으로 제한하기 시작했다. 언론의 사전 검열을 실시하고 비판적인 언론인을 구속하였으며, 동아일보에 군인들을 침투시키고, 6 3시위로 구속된 학생들에게 내란죄 를 적용하는 등 민주적 기본권을 제한하고 법치주의를 훼손함으로써 민주헌정질서를 문란하게 한 것으로 볼 수 있고, 이에 맞선 한일회담반대시위는 민주헌정질서를 문란하게 한 권위주의 통치에 항거한 행위였다. 넷째, 1965년 비준무효화 투쟁 역시 한일회담 반대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공화당의 강행처리에 맞선 민주화운동이었다. 1965년 8월 이후 학생들은 비준무효화 투쟁 에 들어갔는데 서울대 법대생들은 공화당 일당의 비준안 강행처리는 민주헌정의 근본이념을 뒤흔든 행위라고 규탄하였고, 비준무효화 투쟁은 한일회담 비준 무효, 일당 국회 해산 및 총선 실시 등을 외치는 지방대학생들과 고교생들까지 가세한 대규모시위로 이어졌다. 이에 박정희 정부는 범투위, 조국수호국민협의회 등 운동단체들을 불법단체로 몰아갔고, 8월 26일 서울 일원에 위수령을 발령했다. 비준무효화 투쟁은 일당에 의한 비준안 강행처리 등 민주헌정질서의 근간을 뒤흔든 권위주의 통치에 대한 항거행위였다고 볼 수 있다. 다섯째,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성장을 상징한다. 한일협정비준반대투쟁을 거치면서 한국은 민주화운동은 질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는데, 반대운동 과정에서 집단 단식농성, 83 민주화운동
86 대학 연합 시위, 화형식 장례식 마당극과 같은 퍼포먼스, 투쟁가 등 새로운 운동양식과 운동문화를 창출하게 된다. 또한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계기로 5 16군사쿠데타 이후 극도로 약화된 운동주체가 다시금 조직화되고 역량을 성숙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굴욕적 저자세 한일회담 반대차원에서 투쟁에 나선 경우도 있었지만, 단순한 정책에 대한 반대수준을 넘어, 이념적 지향이 강한 민족주의를 주창하면서 운동주체의 역량이 이념과 결합되는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결국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운동이지만 군부독재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이라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전형을 창출했다는 점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운동으로 기록될 것이다. 2. 광주 전남지역의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대한 평가 1964년 3월, 광주에서도 다른 지역과 발을 맞추며 한일굴욕외교 규탄데모를 벌였다. 먼저 전남대생들이 대일굴욕외교 반대 와 사수하자, 평화선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에 나섰다. 학생들은 평화적인 행진을 하며 자신들의 의사를 표명하였으며, 광주학생운동기념탑에 참배하며 결의를 다졌다. 특히, 5월 하순의 전남대 학생들의 시위에서 박정권 하야 라는 구호가 전국에서 처음으로 제시되었다. 한편, 1964년 5월, 서울시내 각 대학의 학생들은 한일굴욕외교반대투쟁학생총연합회(학총련) 을 결성하였다. 학총련은 미8군에게 최루탄의 공급을 중지해줄 것을 요청하며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을 주최했다. 6월초 학생들은 박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며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로부터 정부와 학생간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학생의 시위에 시민들이 가세하면서 공격목표는 청와대로 바뀌었으며, 경찰이 시위대에 밀리는 등 마치 4. 19민주혁명과 비슷한 양상이 나타났다. 이른바 6. 3항쟁 이 시작된 것이다. 사태가 급박하게 전개되자, 박정권은 서울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서 수천 명의 군인들을 동원하여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광주의 대학생들은 6월 4일에 가두시위에 나섰다. 일부 고등학생들도 가담한 약 5천명의 시위대는 도청 앞에서 군경과 맞서 격렬하게 맞서 싸웠다. 당시 광주지역 학생시위의 주도자는 4. 19민주혁명 당시 고등학생으로 시위에 나섰던 전남대학생 이홍길과 홍갑기 등이었다. 이 날의 시위로 3백여 명이 연행되었다. 그 가운데 66명은 기소유예로 풀려났으며, 5명이 불구속 기소되었으나 검찰의 공소취하로 마무리되었다 한일회담이 비준단계에 들어서자, 학생들은 다시 술렁거렸다. 3월말, 전남대학생들은 시위에 처음으로 불을 댕겼다. 8백여 명의 전남대학생들은 매국외교 결사반대 를 외치며 경찰과 충돌했다. 수십 명의 학생들이 연행 또는 제적되었으나, 학생회장 정동년만 실형을 선고받았다. 학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65년 6월에 한일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받지 못했으며, 재일동포의 법적 지위문제와 8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87 강탈해간 문화재의 반환도 거의 해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의 경제적 침투를 촉진하는 계기를 마련해줌으로써 심각한 무역역조와 경제적 종속을 자초하고 말았다. 따라서 협정이 조인된 후에도 박정권은 대대적인 반대운동에 직면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종교인. 문인. 교수 등과 야당이 격렬하게 저항하자, 박정권은 위수령과 휴교조치, 날치기에 의한 국회 비준 등과 같은 폭력적인 대응으로 일관했다. 시위로 얼룩진 채 조인된 한일협정은 현재까지도 한일관계 정상화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것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박정권의 과욕에서 비롯된 것이다. 광주 전남지역에서 년까지 전개된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첫째,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4 19혁명 당시 미성숙했던 민주화운동 주체 세력의 형성과 성장의 중요한 계기였다. 4 19혁명으로 폭발했던 지역의 운동역량은 5 16쿠데타를 계기로 퇴조하기에 이른다. 4 19혁명을 경험하고 주도했던 세력들이 대학에 진학하여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통해 운동세력으로 형성되고 새로운 운동세력들을 재생산하는 계기가 되었던 사건이 되었다. 둘째,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대학이 민주화운동의 중심지가 되는 전형을 창출했다. 고등학생들이 중심이 되었던 4 19혁명이 가진 한계 중의 하나는 지역 대학생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참여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인식하고 4 19혁명 이후 민통련과 통민청 등이 결성되어 대학생 이상의 청년운동이 조직화를 모색했으나 5 16쿠데타로 좌절되고 말았다.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대학생들이 반대운동의 선두에 서고, 고등학생과 시민들이 동참하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전형을 창출했으며, 광주 전남지역에서도 이러한 운동 모델이 작동하였다. 셋째,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민주화운동세력의 단절을 극복하고 서클적 형태를 통해 민주화운동세력들이 재생산되는 계기가 되었던 운동이다. 한일회담 반대운동과정에서 한일문제연구회, 밀알회 등이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고, 이러한 서클적 형태의 조직들이 분화 발전하면서 이후 민주화운동 활동가의 재생산 구조를 창출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박정희 정부와 미국은 한일회담 반대운동이 4 19혁명과 같은 사태로 전개되는 것을 방지하고, 이 운동이 반정부, 반미, 반일투쟁으로 번지는 것을 무엇보다도 염려하였다. 이를 위해 박정희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내려 대학, 고교 등의 강제휴교를 실시하는 등 강경조치를 취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계엄령 실시를 위해 한국군의 작전통제권 해제에 동의함으로써 보조를 맞추었다. 그렇지만 박정희 정부가 가장 염려했던 반정부투쟁으로의 전환의 불씨를 당긴 투쟁이 바로 전남대 학생들의 한일회담반대시위였다. 광주 전남지역의 시위가 회담반대운동 수준에 머물고 있던 시위의 양상을 정권반대운동의 차원으로 격화시켰던 것이다.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군대 동원과 진압으로 좌절되었다. 비록 반공체제와 냉전체제의 본질에 대한 비판은 미약했지만, 4 19혁명의 정신과 지향을 계승하고, 박정희 정권의 반민족적 성격을 폭로한 대중적 저항운동이었는데, 광주 전남의 한일회담반대운동은 그 정점에 있었다. 85 민주화운동
88 3. 한계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항쟁을 이끌어가는 지도핵심 역량이 빈약했다. 학생세력을 시하여 대부분의 사회운동세력들이 독자적인 전국적 조직과 대중적인 조직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는데, 서울지역의 학생연합체는 5월말에나 결성되었고, 그 지도력은 빈약하여 각계각층의 국민들을 투쟁에 참여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지 못해 4월 혁명과 같은 범국민적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해 사실상 학생들과 지식인의 투쟁으로 한정되었다. 한일회담 비준반대운동과 관련하여 야당의 분열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민중당을 비롯한 야당은 이전 집권당 시절 자신들이 추진했던 정책이었기 때문에 반대투쟁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윤보선을 비롯한 급진파와 박순천, 유진산 등 온건파 간의 분열양상을 초래했다. 한일 협정 조인 후 한일 회담 반대 운동은 비준 반대 운동, 비준 무효화 운동으로 이어졌다. 7월 3일 대학생 200여 명은 한일 협정 비준 반대 성토대회 를 열었다. 12일에는 서울시내 16개 대학교 교수 345명이 한일 협정 비준 반대 선언문 을 발표했다. 8월 14일 국회가 비준안을 변칙적으로 통과시키자, 8월 17일 학생들은 비준안 국회통과 무효 선언식을 갖고 18일 성토대회를 재차 열었다. 그렇지만 이미 회담반대운동의 진압으로 반대세력의 규모나 반대의 강도가 현저하게 약화된 상황에서 비준반대운동은 정부와 국회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1964~1965년에 걸친 한일회담반대 운동은 4 19 혁명보다 훨씬 조직적으로 장기간 진행했다. 처음에는 서울대 민족주의비교연구회 등을 중심으로 서울지역과 각 지역의 대학들이 연계를 했지만, 뒤로 갈수록 다양한 학생(회) 조직이 폭넓게 참여하였다. 한일 회담 반대 운동을 장기간 조직적으로 할 수 있던 것은 4 19 혁명 이후 활성화한 학생회, 학회 등 여러 학생 조직의 활동 덕분이었다. 4 19혁명 이후 학생들 사이에 뿌리내린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이념적 지향 역시 한일회담반대 운동의 원동력이었다. 그렇지만 미국과 일본, 한국 3국의 군사 외교 경제 정치적 이해관계 절충 속에서 전개된 한일협정체결을 막기에는 조직적 역량이 부족했고, 이를 진압하는 정부의 물리력과 의지가 너무 강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일회담반대운동은 광주 전남지역 학생운동이 민족민주운동의 중심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하는 계기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어떠한 근거도 없다. 8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89 [한일회담 반대운동 관련 일지] 날짜 광주 전남지역 정부정책/타 지역 쿠데타 세력 일본에 조속한 회담 재개 제의 제6차 한일회담 재개 김종필 오히라 메모(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 간차관 1억 달러 이상) 미 법무장관 로버트 케네디 방한(한일회담의 조속한 타 결 종용 미 국무장관 딘 러스크 방한(한미공동성명 발표, 회담의 조기 타결 촉구) 야당과 재야세력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 회 결성 한일 각료급 정치회담( 3월 타결, 4월 조인, 5월 비준 설 확산) 서울대 문리대, 고려대 연세대 학생들이 5 16 이후 최 초의 대규모 가두시위 전개(1시30분 서울대 문리대생 5 백여 명, 오후 3시 고려대생 2천여 명, 오후 4시 연세대 생 3천여 명 거리 시위) 문교부, 외교부, 내무부장관과 36개 대학 96명의 학생대 표 참여 간담회 개최 전남대생 한일굴욕외교규탄시위 (오전 8시 30분경 계림동파출소 옆 버스정류장에 모여 있던 약 7 백여 명의 전남대생들이 대일 굴욕외교 반대한다, 사수하 자, 평화선 등의 플래카드를 들 고 가두시위 광주농고생들 한일굴욕외교규탄 시위에 참여 박정희대통령 특별담화(학생들의 우국충정은 이해하지 만 자신은 재임 중 부과된 임무를 확고한 신념과 명확한 목표 하에 추호도 변동 없이 수행할 것) 전국 11개 도시 6만여 명 시위 참가 개 도시에서 30여개 학교가 시 위에 참가한 가운데 고등학생들 이 대대적으로 참여했으며, 목포 에서는 목포고, 문태고, 목포농고, 목포상고가 시위 전개 김종필 소환, 시위 소강상태 87 민주화운동
90 박정희, 서울 시내 11개 종합대학 대표들과 면담 목포 광주 여수에서 한일회담 반대 유세(연사: 유옥우) 전남대 총학생회, 1천여 명이 참 가한 가운데 매국외교 결사 규 탄 성토대회 개최 후 투석전 전 개, 100여명 부상, 32명 연행. 전남대 총학생회장 등 7명의 학생 을 31일 규탄대회를 이유로 제적 38개 대학 학생 대표 57명에게 김종필 오히라 메모 공개 조재천 의원 괴소포 배달 서울대 김중태, 현승일에게 괴소포 배달(미화 100달러와 함께 당신의 영웅적 행동을 찬양한다. 계속 박정부 타 도에 힘써 달라 편지 동봉) 고려대 박정훈, 서진영, 연세대 안성혁에게까지 괴소포 배달(위와 동일)되자 언론에 폭로, 학원사찰의혹 제기 전남대 한일문제세미나(초청연사 반대 측 강문봉, 장준하, 찬성 측 박동운, 백남억) 내무부장관 학원에 경찰이 배치되어 있고 사찰 비슷한 것을 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앞으로는 절대 없을 것 천명 서울대생 200여명 학원사찰 중지와 구속학생 석방 요구 시위(청사회(YTP) 해체 요구) 기념시위(전남대생을 중심 으로 광주시내에 진출하여 확성 기, 플래카드를 동원하여 4 19 기념 및 한일회담반대) 주년 기념식(시청 앞, 서울대 등 17개 대학 1천 여 명 참가) 서울대, 성균관대, 동국대 대규모 시위(학원사찰 중지, 한 일회담 반대) 정부 서울시내 대학 총학장회의 소집(강경조처 지시) 8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91 서울대 문리대 학원사찰조사위 학원사찰 규탄성토대회 개최( 학원사찰 및 학원분열에 대한 보고서 공개) 동국대생 1천여 명 학원사찰 성토대회 서울시내 28개 대학 총학장 모임(학생들의 학원복귀와 정부의 학원자유 보장 요구) 광주 고교생 1천여 명 한일회담 반대성토대회 개최. 11명 연행, 2 명 구속 광주숭일고생 수백 명 한일회담 반대 시위 광주공원에서 3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한일굴욕외교에 반대하는 시민궐기대회 개최. 기동경찰과 대치하며 투석전 전개 범국민투위 서울에서 시국강연회 개최(약 2만여 명 참가) 정부 시국수습을 위한 전면 개각단행(국무총리 겸 외무 부장관 정일권,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장기영 임명, 돌격내각 출범) 쿠데타 3주년 시국강연회(박정희 퇴진 요구) 서울대에서 황소식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개최(서 울대, 고려대, 동국대, 성균관대, 건국대, 경희대, 한양대 등 참가) 법원에 무장군인 난입, 시위관련자들에게 영장을 발부하 라고 판사 협박 청사회(YTP) 폭로와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조사를 읽 었던 서울대 송철원린치사건 발생 고려대 법대생 군인들의 법원 난입 규탄시위 서울대 법대생 수호 궐기대회 야당 박정희 퇴진 요구 전국 31개 대학 학생회 난국타개 학생대책위원회 결성 후 난국타개궐기대회 개최 89 민주화운동
92 내무부장관은 민비연을 4 19직후 민통련과 관련을 가 진 사회주의 찬동자로 규정하고 배후에 혁신계와 야당이 있다고 주장 오전 8시경 계림파출소 옆 버스 정류장에서 전남대생 2백여 명은 법은 법대로 준수하라, 신 망 잃은 박정부의 하야를 권고한 다, 애국충정 있거든 하야로 보답하라, 권고, 권고, 하야 권고, 광주 발언 취소하고 네 책임 네 가져라 등 구호를 외치 면서 시위를 벌였는데, 4 19 이 후 군사정부의 퇴진과 대통령 하 야를 요구하는 구호가 학생시위 에 등장했던 것은 이날이 처음이 었음(충장로, 전대의대, 광주세무 서, 광주경찰서를 지나 도청에 이 르는 시위 전개). 광주학생국국투쟁위원회 명의 결 의문에는 5 16군사퀘타 후의 부정부패와 매판자본, 난동군인 들을 규탄( 학원자유 보장하여 민주기틀 마련하라, 혁신이 나 하야의 용단이 내려질 때까지 여하한 저지나 압력에도 굽힘없 이 극한 실력투쟁을 전개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는 내용 포함) 서울대 교수 200여명 군의 정치적 중립과 학원자유 보장 을 요구하는 난국수습결의문 채택 개 대학 학생회장 난국타개대책회의 개최 박정부 퇴진을 요구하는 전남대 생 시위(시위규모 미상) 대책회의 대표 6명 정일권 총리 방문(30일 밤 12시까지 요구사항 관철되지 않을 땐 실력행사) 서울대 문리대학생회 민비연과 연합으로 자유쟁취궐 기대회, 최루탄박살식 개최 후 집단단식농성 돌입 단식 24시간 돌파기념 반민주요소 소각식 및 풍자 극 위대한 독재자 공연 난국타개 학생대책위 소속 32개 대학 대표 35명 집결, 19개 대학 31명이 청와대 앞에서 집단 단식농성 시도 중 연행 집단단식농성 중이던 서울대 문리대생 40여명은 국민 총궐기호소대회 및 학원침입 민생고 책임자 매장식 진행 전북대생 5백여 명, 청주대생 4백여 명 구속학생 석방, 민주주의 유린하는 군인깡패 엄단 요구하며 시위 전개 9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93 전남대생 5백여 명 난국타개 성토대회 개최(박종희, 최상진, 서병수 등 주도) 2개 대학과 2개 고등학교 학생 1 만여 명이 최루탄을 터뜨리는 경 찰에 맞서 2개 파출소와 도청건 물 민주공화당 본부에 투석 전남대, 조선대, 광주교육대 등 광 주지역 대학 학생과 고등학생 5 천여 명 계엄령 해제 등을 외치며 경찰과 충돌 오후 2시 전남대생 1백여 명 사 직공원 4 19기념탑 앞에서 단 식농성 시도 해산(전남대 밀알회 주도) 광주지역 대학, 고등학교 임시휴 교령 전남대생 등 학생 시위(계림파출 소 앞에 집결한 150여명의 학생 들은 연행학생의 석방을 요구하 며 데모에 돌입하자 3백여 명의 교대생들이 합류, 희 가운을 입 고 약상자를 든 전대 의대생들이 개에 물린 학생 석방하라 는 플래카드를 들고 경찰서 항의 방 문 기관총으로 무장한 군 병력 시위 진압에 투입 2시 30분경 도청 앞에서 시위대 강제해산 목포지역 학생 시위 고려대 구국투쟁위원회 주도 가두시위(국회 앞까지 진출) 서울대 법대 상대생 가두시위 서울대 문리대교수 시위주도학생에 대한 징계무효, 사 태가 수습되지 않으면 사퇴할 것을 결의 동국대생 5백여 명 교내 집회후 30여명 집단 단식농성 서울 농대생(수원) 상경 투쟁으로 6 3항쟁 개막 고려대생 2천여 명 신설동과 안암동로터리에서 경찰과 충돌 후 시내 진출 국회의사당 진출 연세대생 2천여 명, 홍익대생 1천여 명 아현동로터리에 서 경찰과 대치 후 국회의사당 진출 성균관대생 1천여 명 종각 진출 후 연행학생석방 요구하 며 동대문경찰서 앞 대치 동국대생 2천여 명, 서울대음대생 150여명 경찰저지선 뚫고 을지로에서 국회의사당 앞 진출 중앙대생 8백여 명, 숭실대생 5백여 명 노량진에서 한강 을 건너 광화문에서 연좌시위 서울대 의대(시청 앞), 치대(국회의사당 앞), 사대(신설동 방면), 문리대(송철원 들것에 들고 거리시위), 법대(시청 앞) 충남대 농대생 4백여 명 박정희 정부성토대회 밤 9시 50분 비상계엄령이 8시로 소급되어 선포 경희대생 2백여 명 시위 동아대생 3천여 명 연행학생 석방 요구 서부산경찰서에 서 투석전 한일회담반대투쟁 계엄령 선포 이후 군대를 동원한 물리 적 탄압으로 좌절 91 민주화운동
94 중앙정보부 불꽃회 사건 발표 중앙정보부 인민혁명당 사건 발표 제7차 한일회담 재개 박정희, 연두기자회견에서 한일회담 연내 타결 공언 한일 양국 한일기본조약 합의 기본조약 가조인 위해 일본 외상 시이나( 推 名 悅 三 郞 ) 방한 시이나 외상 숙소인 조선호텔 앞에서 야당 당원과 학생, 시민이 계란을 던지며 일장기 찢으려다 14명 연행 대학생 이토 히루부미( 伊 藤 博 文 ) 성토대회 후 가두시위 범국민투위 시청 앞 성토대회 개최 한일기본조약 가조인 야당 제7차 한일회담 중지에 관한 결의문 제출 범국민투위 서울운동장에서 성토대회(일장기 소각) 후 가두시위? 목포고생들이 주도한 목포 성토 대회( 사이) 개최 6 3항쟁 이후 최초의 가두시위 오전 9시부터 학교 대운동장에서 8백여 명의 학생들이 매국외 교결사규탄성토대회 개최. 매 국외교 결사규탄, 김 오히 라 비밀흥정 이완용을 웃긴다, 빼앗긴 평화선, 아이고 아이 고, 평화선 철폐여부를 국민 투표에 물으라 등의 구호를 외 치면서 가두시위 중 경찰과 투석 전(시위 주동자 7명 제적, 4명 강 제징집) 어업, 청구권, 재일한인의 법적 지위 등 3개 현안 일괄타 결(협정문 가조인) 평화선사수투쟁위원회 성명서 발표(전남대 구속학생 석 방과 복교, 한일회담 가조인 무효와 평화선 사수, 일본제 국주의 재침 우려, 4월 9일부터 투쟁 시작) 동국대생 5백여 명 한일회담 가조인 무효 9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95 서울대 법대생 2백여 명 매국외교반대 성토대회 후 가두시위 10개 대학 50명의 학생이 서울 곳곳에서 모여 시위 모의 하다 연행 4천5백여 명 학생들이 대학별로 성토대회 개최 후 가두 시위 전개(528명 체포, 11명 구속) 중앙대, 성균관대생 가두시위 고려대, 외국어대 등 대학생은 물론 경기고 학생 1천여 명 시위 서울대 법대생 50여명 단식농성 시위도중 부상당한 동국대생 김중배 사망 동국대생 2천여 명 김중배 추도식 후 가두시위 중앙대, 한양대, 건국대, 경희대, 이하여대 등 집회와 시위 정부 4월말까지 휴교할 것을 각 급 학교에 지시 배제고, 보성고, 마포고 학생들 가두시위 범국민투위 주최 한일회담반대 시민궐기대회 서울대생 5백여 명 4 19기념탑에서 기념식, 한일협정 가조인 무효를 선언한 후 침묵시위 범국민투위 부산에서 궐기대회(3개항 결의문 채택) 광주고, 숭일고 학생 시위 범국민투위 광주 궐기대회(3만여 명 시민 참여) 후 가두시위 광주 숭실고와 광주고생 시위 목포고 학생 1천여 명 굴욕외교 반대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 린든 존슨과의 회담을 위해 박정희 출국 서울대의 3개 단과대학(문리대, 사범대, 법대) 학생들 성 토대회(법대생들 Friendship Yes, Interference No 플래카 드 들고 시위), 서울대 당국 시위주도 12명 무기정학처분 후 휴강조치 법대생 학생총회 후 학원자유보장과 학원사찰금지를 요 구하며 3일간 동맹휴학 93 민주화운동
96 범국민투위 대일매국외교성토 민중시위대회 개최 서울대 법대생 2백여 명 시위(한미행정협정 체결에 있어 서 호혜평등을 관철하라 주장) 고려대생 1천여 명 가두시위 후 단식농성 결의 서울대 상대생 3백여 명 시위 서울시내 12개 대학과 3개 고등학교 학생 1만여 명 학교 주변에서 시위 정부 당국 휴교 및 조기방학 실시 한일기본협정 조인(오후 5시, 도쿄) 서울에서 14개 대학 1만여 명 학생들이 학내집회 후 시 위(고려대, 연세대, 인하공대 등) 이화여대, 숙명여대, 성균관대, 서강대, 국민대, 서라벌예 대 학생들 한일협정조인무효와 비준반대 성토대회 및 가 두시위 일본에서 한일협정 조인한 이동원 귀국 숙명여대생 1천5백여 명, 성균관대생 2백여 명 가두시위 연세대 매국노 황제폐하 귀국 환영대회, 이화여대 한일협정비준반대 서명운동 전개 연세대생 3천여 명 한일협정반대성토대회 후 가두시위 (일본상품 불매 범국민운동 전개 결의) 고려대생 3백여 명도 한일협정 무효선언 및 협정문 화형 식(Yankee Keep Silent 구호 등장)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동국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2백 여 명 학생 토론회 개최(대학연합조직 결성 논의를 통해 한일협정비준반대 각대학연합체(한비연) 결성) 경찰의 시위과잉진압에 대해 대한교련 항의 성명발표 한경직 등 개신교목사 1백 명은 영락교회에서 한일회담 비준반대성토대회 대한변협경찰의 과잉진압 규탄 성명 서울제일변호사회 경찰의 폭력으로 인한 기본권 억압 규탄 역사학 관련 3개 단체 공동성명 문인 84명 전체 국민의 단결과 궐기 호소 9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97 서울지역 18개 대학교수 354명 서울대에 모여 한일협정 비준반대 선언 연세대에서 한비연(학생회와 투쟁위원회가 결합된 조직 형태) 발족 대회 김홍일, 김재춘, 송요찬, 손원일 등 예비역장성 11명 한 일협정반대 성명서 발표 유교 불교 개신교 대표들 한일협정국회비준을 즉 시 보류하고 혼란한 민심을 안정 시키라는 내용의 권유 문 대통령과 국회의장에게 송부 조국수호국민협의회(조국수호협) 발족, 비준 전 총선 실 시 주장 매국 국회해산촉구대회(한일협정 폐기와 국회 해산 후 총선실시 주장) 한일협정비준동의안 통과 서울대 법대 합일협정비준무효화 선언식 경기대, 경희대생 2천여 명 성토대회 동아대생 2천여 명 성토대회 서울대, 동국대, 한양대, 고려대, 연세대생 3천여 명 집회 와 시위 전남대생 100여명 일당 국회 에서 통과된 한일조약 비준은 무 효, 한일협정 체결의 주범은 바로 미국이다, 우리들은 월 남의 사태에 양키들의 총알 방패 가 될 수 없다 라는 요지의 결의 문 채택하여 공화당에 전달 연세대생 나라팔고 축배 드는 매국정부 물러가라 며 박정희 정부 타도 구호 중앙대, 동국대, 숭실대, 한양대, 외국어대, 건국대, 명지 대학생 매국국회 해산을 요구하며 시위 충남대, 전북대생 매국국회 해산 요구하며 시위 서울지역 8개 대학 1만여 명 가두시위 정부 당국 학생시위 엄단 천명 시위진압에 군 병력 투입 무장군인 고려대 난입, 학생들 교내철야농성 박정희 대국민담화(학교를 폐쇄하는 한이 있더라도 학생 시위를 뿌리 뽑겠다) 후 위수령선포 6개 대학, 2개 고교 6천여 명의 학생들이 한일협정비준 무효, 학원자유 등을 외치며 가두시위 95 민주화운동
98 서울지역 대학생 1천5백여 명 고려대에서 학원방위 학생총궐기대회 개최 정부당국 시위주동학생 14명 제적, 28명 무기정학처분 정부 시위 주동자와 배후인물에 대한 대대적 검거 실시 (구속한 50명 이외에 추가로 140여명 지명수배, 검거자 들에게 반공법 및 내란선동혐의 적용) 서울대생 학내에서 전서울대학교 학원방위단 결성대 회 후 동맹휴학 결의했으나 주도 학생 1백여 명 무장 군인에 연행 정일권 총리 7개 항의 시책발표(정치만을 일삼는 학생, 정치교수를 모조리 학원 밖으로 몰아내어 선량한 학생과 교수, 학원을 보호하겠다) 2차 민비연사건 및 정부 민비연 공식 해체 명령, 위수령 해제(한일협정반대투쟁의 종결 상징) 9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99 제4장 유신시대와 반유신운동 1. 들어가는 말 새로운 시대 가 시작되었다. 그 새로운 시대는 물론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의 전환이 아니었다. 권위주의에서 초권위주의로의 이행 혹은 권위주의 체제의 질적 도약이라고 지칭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억압성의 강도는 이전 시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고, 형식적으로나마 유지되던 절차적 민주주의도 대폭 후퇴했다. 국가는 대통령 1인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대통령의 선택이 체제의 운명을 결정하는 기행적인 구조로 바뀌었다. 정치체제론적 관점에서 보면 1인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어 작동하는 1인지배체제의 등장, 권력분리와 견제와 균형의 원리 등 민주주의의 기본적 통칭원리를 훼손하는 반민주적 체제의 등장, 체제와 공식화된 조직, 절차에 따른 통치라는 정치적 근대화의 방향에 역행하는 정치체제가 등장했다. 사회운동의 관점에서 보면 민주성은 최소화된 반면, 억압성과 권위주의성은 극대화된, 그럼으로써 정상적인 사회적 불만의 수용이 체제와 민주적 절차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비제도적인 저항의 동원을 통한 정치적 의사의 관철이 지배적인 체제가 등장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신시대는 역설적으로 체제 자체의 결함으로 인해 사회운동을 체제와 정치의 중심으로 인도한 체제다. 유신시대는 민주화운동의 주체적 역량과 저항의 다양한 행태와 경로를 혁신시킴으로써 사회운동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사회운동의 도덕적 정당성과 정치적 영향력을 형성시켜주었다. 유신체제 하의 한국 사회는 암울했던 한국 현대사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면서, 다른 한편으로 급속한 경제성장을 통해 오늘날 한국의 원형을 만들어 놓았던 시기이기도 했다(박태균 2013, 19). 이 장에서는 유신시대를 형성시킨 동력을 살펴보고, 유신시대의 정치가 어떤 특성을 갖고 있었으며, 유신시대의 사회운동, 특히 민주화운동에는 어떤 운동들이 발생했으며, 광주와 전남지역에서 발생한 민주화운동은 어떤 운동들이 있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사항은 유신시대의 사회운동, 특히 유신시대의 민주화운동은 유신헌법과 유신체제의 극복이라는 추상적 목표로 설정했다기보다는 유신의 심장 이랄 수 있는 박정희 극복, 그리고 유신의 현실적 실체인 긴급조치와의 싸움이 주된 대치선이었다. 97 민주화운동
100 박정희 정부는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 2호를 선포한 이래로 모두 9번의 긴급조치를 선포했는데, 특히 긴급조치 9호( )는 그 동안의 모든 긴급조치의 내용을 총괄하고 적용범위를 더욱 확대했을 뿐 아니라 처벌 규정을 한층 강화했는데, 박정희의 사망으로 유신체제가 형식적으로 막을 내릴 때까지 4년 6개월 동안 지속되면서 1천명 이상의 전과자를 양산하고, 많은 시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했다. 유신시대의 민주화운동은 긴급조치하의 민주화운동이었고, 유신헌법이 설정한 긴급조치권으로 인해 민주화운동과정에서 다수의 피해자들이 발생하였다. 이 장에서는 위와 같은 유신체제 형성의 맥락을 전제로 보다 구체적으로 유신체제의 형성배경과 메커니즘 구명에서부터 유신체제에 대한 전국적인 저항운동은 물론 광주 전남의 반유신운동을 순차적으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Ⅱ. 유신체제의 형성 배경 유신체제의 형성을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는 키워드는 위기 일 것이다. 위기의 주체는 대통령 박정희와 박정희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남한의 냉전반공체제였다. 대통령의 정치적 위기, 냉전분단국가의 안보위기, 세계경제의 위기에 따른 한국경제의 위기, 산업화 과정에서 심화된 계층격차의 심화로 인한 계층통합 및 사회통합의 위기 등이 유신시대의 형성과 작동을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다.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유신의 등장은 위기에 대한 대응이었으며, 위기의 원인은 차치하더라도 위기의 성격을 파악하면 유신체제가 왜 그처럼 괴물 같은 체제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유신체제의 형성에 대한 연구는 정치군사적 관점에서 안보위기에 대한 대응에서 유신체제의 형성을 파악하는 연구(배긍찬 1999; 신종대 2005), 박정희에 초점을 맞춰 그의 권력의지와 장기집권욕망 등 정치적 요인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연구(오창헌 2001; 임혁백 2004), 관료적 권위주의 체제 개념을 채택하여 그러한 체제의 등장을 구조적으로 견인했던 한국사회의 사회경제적 위기에 초점을 맞추는 연구(강민 1983; 마인섭 2000) 등 다양한 시각과 이론에 기초하여 설명이 이루어진바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론적 접근들에 대한 평가는 옳고 그름의 차원으로 접근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닌 것은 확실하다. 강조점의 차이일 뿐 이러한 시각과 이론들이 모두 유신체제에 대한 진실의 일면들을 설명하고 있고, 다만 유신체제에 대한 접근과 설명대상이 조금씩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필자는 유신체제를 관통하는 핵심키워드로 위기 라는 개념을 채택하여 다른 요인들과의 연관성을 고려하여 유신체제의 형성을 설명해 보고자 한다. 55) 55) 홍석률 역시 유신체제의 형성을 각 원인들을 변수 로 분리해서 양자택일적 문제로 접근하기보다는 상호연결 하에서 접근하면서 각 국면마다 그것이 결합되는 양상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것 이 올바른 접근이라고 보고 있다(홍석률 2005, 53). 9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01 위기의 관점에서 유신체제의 형성 원인을 설명할 때 가장 먼저 언급할 수 있는 것은 안보위기의 도래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안보의 위기라 하면 정치군사적인 관점에서 설명하는 관행이 있는데, 안보의 위기는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다. 국가안보, 정부안보, 인간안보가 그것이다. 다만 인간안보는 환경오염과 과학기술발달에 따른 재난적 사고위험의 증가 등 생명 생존의 위기이기 때문에 여기서의 논의사항은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안보위기는 국가안보와 정부안보의 위기에 국한된다. 유신의 형성을 설명할 때 가장 먼저, 매우 비중 있게 언급해야 할 부분이 바로 안보위기가 도래했다는 점이다.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 56) 에 의해 촉발된 1970년대 안보위기는 주한미군 감축으로 본격화되었다. 닉슨 독트린에 따라 미국은 베트남에 이어 한국에 대해서도 한국 안보의 한국화(Koreanization of Korea Security) 를 추진했고,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 미군 철수 및 감축을 추진한 것이다. 이러한 미국 정부의 방침은 미국과 한국 정부 간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분명한 사실은 미국 정부의 주한미군 감축과 포괄적 핵우산 체제 유지방침은 한미동맹 관계에 크게 의존하던 박정희 정부에게 위기로 인식되었고, 이러한 위기의식은 군부와 정부 내부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에 광범위하게 공유되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은 박정희 정부가 북한의 남침위협을 과도하게 강조하도록 했고, 57) 이를 빌미로 대내적 통제력을 강화하며 권력을 집중시키고자 했다. 58) 안보위기에 대응하는 강력한 동원체제의 구축은 박정희 정부가 군사적 안보위기에 대응하는 매뉴얼이었다. 그렇지만 정부안보에 대한 위기감 없이 단지 군사적 안보위기만으로 유신체제의 형성을 설명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박정희 정부가 유신체제를 만들었던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정부안보의 56) 미국의 리처드 닉슨(Richard Milhous Nixon) 대통령이 1969년 7월 25일 해외 순방 중 괌에서 발표한 대외 안전보장책의 하나로, 아시아에 대한 새로운 안보 전략이다. 발표된 곳의 지명을 따서 괌 독트린(Guam Doctrine)이라고도 불린다 년대의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서냉전체제는 1970년을 전후해서 자유진영과 공 산진영간에 평화공존체제가 형성 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국제정세 변화는 닉슨 행정부의 등장과 함께 급속히 진전되어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기에 이르렀 다. 1970년 2월 닉슨은 하원에 외교교서를 보내어 닉슨 독트린을 천명했다. 그 내용은 아시아 각국이 스스로 안보를 책임 질 수 있어야 하고, 미국은 다만 동맹국이나 중요한 관계가 있는 국가들에 핵우산을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월남전 의 개입 실패와 국제적 데탕트 무드에 따라 가능한 한 국제적 분쟁에 개입을 하지 않고, 이미 약화된 미국의 군사적 부담을 경감하고자 하였다. 닉슨 독트린은 아시아 방위책임을 일차적으로 아시아 국가들이 담당하고, 미국은 핵우산을 제공함으 로써 대소봉쇄전략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아시아 각국에 보다 축소된 역할만을 수행하려는 미국의 전략은 '베트남전의 베 트남화(Vietnamization of the Vietnam War)'라는 표현으로 대표된다. 닉슨독트린과 동아시아 권위주의 체제의 등장과 관 련해서는 배긍찬(1988) 참조. 57) 대표적인 것이 박정희 정부와 군 수뇌부가 유포시킨 수령님 환갑(1972년)은 서울에서 하자 는 루머였으며, 정부 차원에 서 북한의 남침위협 증가는 언론보도의 단골메뉴였다(홍석률 2005, 65). 58) 박정희 정부와 미국은 한반도 안보 상황에 대한 평가에서 심각한 견해 차이가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북한의 군사적 우 위에 대한 평가(압도적 우위 vs. 상대적 우위)의 차이와 이를 견제할 수단(지상군 유지 vs. 핵우산)의 효과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존재했고, 이러한 군사력 열세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이후 박정희 정부가 핵무기 개발에 관심을 갖 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 마치 데자뷰처럼 당시 핵무기에 대한 박정희 정부의 관심과 유사하게 북한의 핵무기 개발도 북한 의 군사적 열세와 미국의 봉쇄정책으로 인한 안보위기 상황에서 이를 돌파할 수단으로 고려되고 있다는 점에서 1970년대 안보상황의 데자뷰라고 할 수 있다. 99 민주화운동
102 위기감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특히 정상적인 선거였다면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었을 1971년 대통령선거를 경험한 후 박정희는 현재의 헌정질서 하에서 재집권 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재집권의 위기 인식에 봉착했고, 59) 게임의 규칙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만이 정부연장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헌법에 따라 국민들이 보유하고 있던 대표선출의 권한을 박탈하는 것에서부터 입법, 행정, 사법의 삼권분리 및 견제와 균형의 원리 등 최소한의 형식적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작동원리를 폐기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권위주의적인 체제였던 유신체제가 등장하게 되었다. 60) 유신체제의 형성을 박정희대통령의 장기집권 욕망에서 찾는 연구들은 이미 1960년대 말부터 박정희대통령의 장기집권 욕망은 삼선개헌 을 통해 공공연하게 표출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의 김대중 돌풍은 이러한 박정희 정부의 권력욕망에 위협을 가하는 일대사건이었고, 박정희 정부는 이에 대해 두 가지 대응을 한다. 하나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민의 직접 선출이라는 대통령 선출방식을 간접 선출방식으로 변경함으로써 직접 선거의 번거로움과 민심 변화로 인한 재집권 위험요인을 제거했다. 다른 하나는 역대 독재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최대의 정적을 선거외적 방식을 통해 제거하는 방법이었다. 이승만 정부의 조봉암 법살이 그랬고, 61) 박정희 정부 하의 김대중납치사건이 62) 모두 비선거적 방식으로 정적을 제거하는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세 번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경제위기다. 60년대 후반~70년대 초반 기간은 강력한 59) 당시 김대중의 선전에는 후보로 지명된 직후부터 강연회 명목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실질적인 선거유세를 조직한 점과 당시 로서는 혁신적인 남북교류 공약(신문기자, 스포츠팀, 서신교환 등), 미 소 일 중 4국이 한국에서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을 공동 보장하는 방안과 향토예비군제 개혁, 대중경제론, 자립적 경제의 토대 구축, 빈부격차 완화 등의 정책들이 국민 들에게 크게 반향을 일으킨 결과로 보인다. 60) 브라운 대사의 언급은 유신시대의 등장이 갖는 한국적 특수성을 잘 설명해준다. 우리는 한국인들과 매우 특별한 관계를 갖고 있다. 우리가 아니고선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한국의 군대가 작동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는 모든 중요한 경제적 결정에 참여하고 있다. 경제기획원 중앙의 은밀한 곳에는 항상 미국인들이 있다. 각 지역의 도지사들에게는 미국의 자문관이 배치되어 있다. 우리는 정보의 측면에서 유별난 연계를 맺고 있다. 미군은 항상 한국의 국방비에 대해 검토하고 있다. 한국의 어느 곳이든 중요한 자리에는 미국인들이 있다. 이들은 종종 그들의 위에서 자문하는 사람들이며, 유능한 사 람들이다. 종종 그들의 주요한 활동은 바람직하지 않은 한국의 정치적 압력에 의해서 견제를 받는다. 지금까지는 한미관계 는 어렵지 않게 풀렸으며, 상호보완적이었다. 한국은 아직도 많은 지역과 많은 문제들에서 우리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 나 이러한 관계가 계속되어지거나 계속되어야만 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특히 지난 2년간(1964년에서 1966년) 표출되었던 것처럼 한국의 경제성장, 정치적 성숙, 그리고 국제적 경쟁력이 높아지면서 이러한 관계는 변화될 수도 있다 문제는 비정상 적으로 가까우면서 좋은 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우리가 어떻게 두 주권 국가 사이의 일반적으로 존재하는 보 다 가까운 정상적인 관계로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까?(박태균 2013, 26-27에서 재인용). 61) 독립운동가였던 조봉암 선생은 광복 후 초대 농림부장관에 이어 두 차례 국회 부의장을 지내고 진보당을 창당한 중견 정치 인이었다. 그는 1958년 1월 간첩 양명산(본명 양이섭)을 통해 북한으로부터 지령과 자금을 받았다는 간첩혐의로 전격 구속 됐다. 1심 재판을 맡은 서울지방법원은 그 해 7월 그에게 간첩혐의 무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는 유죄로 인정해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이후 2심을 맡은 서울고등법원은 1958년 10월 국가보안법 위반에 형법상 간첩죄까지 얹어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 고했다. 이어서 1959년 2월 대법원이 조봉암에 대한 사형을 확정하자, 변호인단은 대법원에 재심을 청구했지만 대법원은 7월 30일 이를 기각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7월 31일 사형이 집행돼 구속 후 1년 6개월 만에 모든 것이 종료됐다. 그에 대한 사형은 대법원이 변호인단의 재심신청을 기각한 지 고작 18시간 만에 집행된 것이다(박태균 2011). 62)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에서 한국 야당지도자 김대중이 납치되어 한 일간의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된 사건이다. 사건발 생 당시 김대중은 통일당 당수 양일동을 만나러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 갔다가, 대기하고 있던 한국 정보기관 요원 5명에게 납치, 수장( 水 葬 ) 직전 극적으로 구출되어 사건발생 129시간 만인 8월 13일 밤 10시 집으로 돌려보내졌다(김삼웅 2004; 이완범 2007). 10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03 중화학공업화 정책의 착수기로서, 그 정책 효과가 가시화되지는 못한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 중 중화학공업의 생산, 수출비중이 상당히 높아진 것은 정책 여하와는 별도로 경제적 측면에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의 이행 과정에서 중화학공업화 정책이라는 강력한 충격이 가해지게 되었다. 정책의 내용은 국내외 자원의 동원과 중화학공업에의 집중적 투자, 전략부문별 산업기지 건설,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등이었고, 필요한 재원 조달을 위해 외자도입 확대, 국민투자기금의 설치 등 금융, 재정상의 대대적 지원조치가 강구되었다. 1970년대 전반기의 정책기조가 강력한 중화학공업화의 추진에 있었고 그것은 경제의 내재적 논리가 정치적 논리에 의해 왜곡됨으로써 외연적 성장과 공업구조고도화에는 기여한 반면 자원낭비, 경제력 집중, 구조적 불균형과 대외의존성 심화 등의 문제를 잉태하고 있었다. 63) 산업별 수출비율을 보아도 1970~1975년간에 화학이 6.2%에서 10.5%, 금속공업이 7.2%에서 17.4%, 기계공업이 9.5%에서 29.2%로 급속히 높아져 중화학공업의 수출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수출비율의 증가는 중화학공업 완제품이 주도한 것이며, 거기에 소요되는 중간재는 주로 수입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0~1975년간에 음식료품을 제외한 경공업부문의 수입중간재 투입률은 상당히 낮아졌고, 특히 수출의 대종을 점하고 있던 섬유는 19.0%에서 13.5%로 대폭 낮아졌다. 하지만 같은 기간 중 화학은 30.5%에서 40.1%로, 기계는 24.2%에서 26.3%로 높아졌으며, 금속은 32.0%에서 27.7%로 다소 낮아졌으나 이는 1966년과 비슷한 수준으로 여전히 매우 높은 편이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내외적 경제 환경의 변화로 말미암아 기존의 고도 경제성장에도 제동이 걸리게 되자 박정희는 경제문제를 안보위기만큼 강조하였고, 경제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노동통제를 강화하고, 국가의 통제와 간섭을 강화하는데 유신체제 하의 경제 및 노동통제정책은 강력한 국가주도성과 노동부문에 대한 최고의 배제를 특징으로 한다. 64) 유신시대 하에서 특히 열악한 근로조건이 더욱 악화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박정희 정권의 노동자에 대한 무자비한 봉쇄정책이 63) 1973년 1월 12일 대통령 연두기자회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공업화선언 을 하였다. 그 내용은 수출 100억 달 러, 1인당국민소득 1천 달러 달성을 위해 중화학공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한국의 중화학공업화 정책은 1973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한국의 중화학공업화는 두 차례의 석유위기(오일쇼크) 등으로 위기를 맞이하 기도 하였으나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1977년에는 수출 100억 달러가 달성되었고(1977년 12월 22일 오후 4시 100억 1,600 만 달러 수출 달성), 1인당국민소득(GNP)도 1,008 달러가 달성되었다. 적어도 중화학공업화의 최종목표라는 측면에서 보 면 중화학공업화의 목적은 1977년 달성되었다. 한편 다른 목표였던 제조업 부가가치의 50%를 중화학공업으로 한다는 것 은 1979년 52.1%로 달성되었다. 모든 목표는 원래계획인 1981년 계획을 앞당긴 것이었다. 1979년 이후 중화학공업화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고 박정희 대통령 사후 박정희=중화학공업화로 비판이 고조되어 중화학공업화정책은 중화학공업 조 정으로 중단되었다. 64) 1970년대 들어 노동자의 숫자가 크게 늘어난 데 비해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1970년 최저생계비 의 61.5%였던 임금은 1980년 44.6%로 낮아졌다. 국세청 통계에 의하면 1978년 3월 말 모든 노동자 가운데 근로소득세 납 부에서 제외되는 5만 원 미만의 저임금 노동자가 76.7%에 달했고, 전체노동자의 88.6%가 월 10만 원 이하의 저임금에 시 달리고 있었다. 반면 노동시간은 세계에서 가장 길었다. 1970년 주당 평균 51.6시간이었던 노동시간은 1975년 잠시 줄어 들었다가 1980년에는 다시 51.6시간으로 늘어났다. 이 중 제조업 분야 노동시간은 1970년 53.4시간에서 1974년 49.9시간 으로 줄었다가 1980년에는 53.1시간으로 다시 늘었다. 1978년 생산직 노동자의 노동시간은 무려 월평균 252시간에 달했 다. 1970년대 이 땅의 노동자들은 상상할 수 없이 열악한 근로조건 하에서 노동해야만 했다. 101 민주화운동
104 있었다. 외국인 투자기업에서 노동조합의 결성과 쟁의를 불법으로 만들었던 박정희 정권은 1972년 10월 유신독재를 출범시키면서 노동자들의 모든 기본권을 박탈하였다. 태생부터 한계를 갖고 있었던 한국노총은 박정희 정권의 무력에 굴복해 유신독재를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국가가 있어야 노동운동도 있다 는 논리로 간판만을 유지하고 있던 한국노총은 한 발 더 나아가 삼원, 반도, 동일방직 등에서처럼 중앙정보부, 자본가와 결탁하여 노동조합을 폭력으로 탄압하는 일선행동대가 되기까지 했다. 65) 마지막으로 사회통합의 위기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가 자신의 정통성 부재를 만회하는 유일한 방법은 경제개발이었다. 박정희는 혁명공약에서부터 반공을 국시로 내걸어 정부를 안정화시키고, 당면과제였던 대다수 국민의 절대적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선 건설 후 통일, 자립경제 등의 구호 하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에 필요한 막대한 재원은 미국의 동북아전략에 힘입어 해결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전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굴욕적인 한일국교 정상화를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도입된 외국자본을 중심으로 수출주도형 공업화정책을 펴나갔는데, 수출의 급증으로 경제성장률의 수치는 높아졌으나, 그 이상으로 수입이 늘어나 무역적자폭은 더욱 커지고 외채의 악순환은 반복되어 60년대 말부터는 경제전반에 위협을 가해왔다. 66) 이러한 고도성장의 이면에서는 부익부 빈익빈의 상대적 빈곤 속에서 허덕이는 민중들의 불만과 저항이 높아져갔고, 저곡가정책과 미국의 잉여농산물 수입으로 인해 파탄한 농민들은 이농 탈농의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도시주변의 달동네 라는 도시빈민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경제성장의 주역인 노동자들을 저임금 장시간 노동이라는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내몬 반면, 군사정부와 독점재벌의 주머니는 더욱 두터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1967년 제6대 대통령으로 재집권한 박정희는 1968년 1월 무장공비침투사건과 미국 첩보함 푸에블로호 납북사건 등으로 조성된 반공정세를 이용하여 장기집권을 위한 3선 개헌 을 65) 전태일은 죽음으로써 노동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급속히 확산시켰고, 경제성장이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본가 특히 소수 재벌들을 위한 것임을 폭로했다. 전태일의 죽음은 종교인, 지식인들에게는 산업역군이라는 허울뿐인 공 치사에 희생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계기를 부여했다. 66) 발전국가론과 그것의 제도주의적 수정인 개발독재론( 開 發 獨 裁 論 ) 은 경제성장과 정치적 독재를 박정희 정부의 공과( 功 過 ) 로 평가하는 보수적 입장을 사실상 긍정함으로써 의도와 관계없이 산업화 세력 과 민주화 세력 의 역사적 화해를 추구하 는 보수적 입장을 강화하고 있다. 최근 학계의 박정희 체제에 대한 재평가작업은 노무현 정부가 직면하고 있는 한국자본주 의의 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왜냐하면 현재 자본과 정권은 부르주아 민족주의를 사회통합( 社 會 統 合 )의 이데올로기로 삼아 한국자본주의의 위기를 돌파하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데, 일부 진보 학계 의 이러한 재평가는 부르주아 민족주의를 정 당화함으로써 자본과 정권의 전략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르주아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는 한국계 초국적 자본의 아 ( 亞 )제국주의적 대외팽창을 위해 이 땅의 노동자 민중을 희생시키는 자본독재( 資 本 獨 裁 )를 더욱 강화시키면서 사회적 불 평등의 악화에 따른 사회적 불안을 더욱 증가시킬 것이다. 10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05 추진했고, 67) 이에 따라 1971년 7대 대통령으로의 재집권에 성공했다. 이러한 박정희 군사정부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은 한일회담반대투쟁으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60년대 사회운동은 주로 청년 학생들이 중심이 됨으로써 산업화과정의 모순구조를 피부로 느끼는 민중들과 올바르게 결합하지 못해 끊임없는 좌절과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허구적 성장논리에 희생당해온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 민중들은 더 이상 조국근대화, 선성장 후분배 라는 이데올로기적 담론에 굴복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1970년 11월 13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는 외침과 함께 일어난 청계피복노동자 전태일의 분신과 잇따라 터진 광주대단지사건 등 도시빈민의 운동은 장기간의 군사독재정부와 독점재벌에 맞서 투쟁하는 70년대 민중운동의 신호탄이 되기에 충분했고, 개발독재와 재벌중심경제로 인한 양극화의 사회적 격차의 급격한 심화로 인한 사회통합의 위기를 가져와 1970년대 민주화운동에 자양분을 제공하게 된다. 68) 제3공화국 하에서 박정희 정부는 국가에 도전하는 정치사회의 야당과 시민사회의 반대세력에게 자유민주주의의 원리에 걸맞은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부는 조국근대화라는 경제개발 프로젝트를 자신들의 정통성의 기반으로 설정하고 이를 위해 모든 권한을 경제기획원에 집중시킴으로써 시민사회의 요구와 관계없이 경제정책의 결정을 독점했다. 입법부의 다수를 차지한 공화당을 통해 국회에서 자신들의 정책을 법제화함으로써 입법부의 견제로부터 상당한 자율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67) 푸에블로 호는 1968년 1월 23일 정오경 1척의 북한 초계정으로부터 무전으로 국적을 밝히라 는 요구를 받고 미국 소속 이라고 답변했다. 이에 북한 함정은 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 고 위협해 왔고, 미 해군은 공해상에 있다 는 답전으로 이를 거절하였다. 약 1시간 후 북한 함정의 지원을 받고 3척의 무장 초계정과 2대의 미그기가 도착하여 포위하였다. 북한 미그기들이 주변을 선회하고 있는 동안 한 척의 북한 초계정이 접근하였으며 무장군인들이 푸에블로 호에 승선하였다. 이 때가 12:40분이었다. 푸에불로 호는 무력 저항을 하지 않았다 면서 원산항으로 끌려간다고 보고하였다. 이 사건이 발생하 자 즉각 미국은 일본에서 월남으로 항해중인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와 3척의 구축함을 진로를 변경시켜 원산만 부근 에서 대기토록 하였으며, 25일에는 해공군의 예비역 14,000여 명에게 긴급 동원령을 내리고, 전투기를 비롯한 항공기 372 대에 대한 출동태세를 갖추도록 했으며, 오산과 군산기지에 2개 전투기대대를 급파하는 등 군사적 조치를 위해 나갔다. 28 일에는 추가로 2척의 항공모함과 구축함 1척 및 6척의 잠수함을 동해로 이동시킴으로써 한반도에는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 였다. 결국 이 사건은 30여 차례의 비밀회담 끝에 납치된 승무원들이 325일 만인 1968년 12월 23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함 으로써 마무리되었다. 당시 미국은 반전 여론 때문에 월남전에서 철수를 고려하고 있는 시기여서 한반도의 긴장상태를 원 치 않았으므로 많은 양보를 하면서 협상하였다. 납북사건이 발생한 31년이 지난 1999년 북한은 원산항에 있던 것을 김정일 지시에 의해 1999년 10월 대동강 충성의 다리 근처로 옮겨 반미교육으로 활용하고 있다. 68) 60년대 경제개발 정책의 직접적 피해자인 이농민들이 도시빈민으로 전화되면서 무허가 판자촌에 집단 거주하다가 정부의 철거이주 정책의 강행으로 광주대단지에 이주하게 되고, 여기에 이주민들의 생존권을 부정하는 정부정책에 대해 대규모적 이고 격렬한 저항사건이 발발한 것이다. 이 사건을 시발로 하여 도시빈민을 둘러싼 모순이 가열되어 71년 연희동 아파트 주 민농성, 74년 청계천변과 송정동 주민 시위, 77년 영동 철거민 사건, 79년 해방촌 주민 농성사건 등 70년대의 빈민 투쟁이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한편, 이 사건은 사회에 큰 충격을 주어 진보적 지식인들과 종교인들이 빈민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빈민현장 활동을 시작하게 하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빈민운동의 본격적인 태동은 60-70년대 기독교의 성직자 및 평신 도들의 신앙이었다. 성서와 신학을 바탕으로 소외지역인 빈민을 위한 활동에 불을 지폈다. 단순한 신앙고백을 넘어 사회 적, 경제적, 정치적 문제를 인식하였다. 종교운동에 있어서 해방신학 외에 빈민 활동에 도움을 준 이론은 '알린스키의 공동 체 조직이론과 프레리의 민중교육론'이었다. 그리고 전태일의 분신사건이 대단히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빈민 활동가에게 는 알린스키의 조직이론과 방법론이 신선하고 매력적이었고, 프레리의 교육론 중에 사회구조, 체제에 대한 분석에 매료되 었다. 전자는 시민 운동적 관점으로 후자는 계급의식을 담보하고 있다. 103 민주화운동
106 또한 박정희 정부는 중앙정보부와 같은 정보기구를 이용하여 정치인, 대학, 언론기관 등을 사찰했을 뿐만 아니라, 경찰과 군을 동원하여 한일국교정상화 반대투쟁이나 1968년 부정선거반대운동 등 반대세력의 활동을 억압했다. 69) 이처럼 박정희 정부는 점점 증가하는 사회적 저항으로 인한 사회통합의 위기를 저항과 불만의 원인을 제거하기 보다는 저항행위와 불만의 목소리를 표출하는 것 자체를 통제함으로써 이제껏 등장했던 어느 정부보다도 강력한 국가적 통제기제로 유지되는 체제를 만들었다. 유신체제는 계급 계층갈등으로 인한 사회통합의 위기에 직면하여 갈등의 원인인 사회적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정책을 수립하는 방향과는 거리가 먼, 갈등과 불만의 표출 자체를 봉쇄하는 강력한 통제체제와 동원 체제를 확립하는 방향을 선택했는데 이는 유신헌법 및 유신체제로 귀착되었다. Ⅲ. 유신체제의 형성과정 체제를 둘러싼 정치 경제 군사 사회적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던 유신헌법의 형성과정은 매우 은밀하게 준비되었고, 일단 외부에 공개하자 속도전으로 추진되었다. 유신체제의 출범을 위해 한편으로 남과 북이 이른바 데탕트 국면을 조성하여 4월 혁명 이후 통일 분위기와 비교될 정도로 국민들의 시선과 관심이 남북화해와 통일 가능성에 맞춰졌지만, 그 이면에서는 중앙정보부 정책연구실에서 신직수의 주도로 김기춘 등이 참여하여 유신헌법이 기획되고 있었고, 북한에서는 사회주의 역사에서도 유례없는 개인숭배체제인 수령체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적대적 상호의존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7 4남북공동성명 으로 상징되는 남북화해국면을 조성하여 내부 반대세력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닉슨 독트린 이후 핑퐁외교로 상징되는 중미관계 정상화 과정에서 조성된 세계적 화해무드에 부응하여 정치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는 시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남한과 북한 모두 현존하는 독재체제를 더욱 강화하고 보다 근본적인 정통성 강화의 기제를 찾기 위해 북한은 종교적 이미지까지 풍기는 69) 1972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하고 국내 정세가 혼탁해지면서,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사 건들이 대거 발생한다. 김대중 납치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 코리아게이트 등이 그것이다. 1973년에는 박정희 정권에 반 대하고 반유신 활동에 매진하던 정치인 김대중이 일본에서 납치되는 일이 발생한다. 당시 정권은 이 납치와 한국 정부의 관 련성을 부정하였으나, 오늘날 이 사건은 당시 중앙정보부가 중앙정보부 요원을 동원하여 벌인 사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당시 목적이 단순 납치가 아니라 김대중을 살해하는 것이었다는 설도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 있다. 유신 선포에 이은 김대중 납치사건 등으로 국내 여론이 부정적으로 치달아가자, 1974년 박정희 정권은 민주청년학생총연맹 이란 불법단체 가 불순단체의 조종을 받고 있다고 발표하고 긴급조치 4호를 공포한다. 이어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을 정부를 전복하려는 세력이라 발표하였고,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부는 추가 발표를 통해 여기에서 인혁당 재건위라는 조직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대법원에서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로서 기소된 21명 중 8명은 사형, 7명은 무기징역, 나머지 사 람들은 15~20년을 선고받게 되는데, 이중 사형 판결을 받은 8명에 대한 형이 바로 다음 날 집행되었다. 이 판결은 국제적 으로도 사법살인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으며,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불린다. 10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07 수령이데올로기를 구축하고 남한은 헌법을 개정하여 권위주의적 통제체제의 정당성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남과 북 모두에서 보다 강력한 독재체제의 등장은 남과 북의 독재체제를 더욱 강화하는 매우 설득력 있는 논리를 제공해주었다(역사문제연구소 1995). 그래서 유신체제의 형성과정에서 데탕트와 남북관계의 진전은 그 자체로는 매우 획기적이고 기념비적 합의이긴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매우 정략적인 것이었다. 1971년 7월 닉슨의 베이징 방문 이후 동북아 데탕트 국면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여기에 영향을 받아 남북대화가 시작되었다. 데탕트와 남북대화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한 기회가 될 수 있었지만, 박정희는 국제정세의 불확실성과 북한의 남침위협을 강조하며 역시 이를 위기 상황으로 몰고 갔으며, 급기야 1971년 12월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유신체제는 안보위기에 대처하고, 통일을 추구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보장하고, 대통령에게 무제한적인 비상대권을 보장하는 정치체제다. 역설적인 사실은 유신체제는 데탕트와 남북화해모드를 배경으로 탄생했지만, 유신체제의 출범은 국내외적인 변동 속에서 한국이 처한 안보문제를 해결하고, 남북대화를 추진하는 데에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야말로 유신체제 형성의 역설이다. 본격적인 유신체제의 출범을 알린 사건은 10 17특별선언 이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갑자기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하는데, 그 내용은 국제정세의 변화가 한국의 안전에 위험을 가져오며 민족중흥의 위대한 기초 작업이며 민족 웅비의 대설계 인 한반도의 평화, 이산가족의 재결합, 그리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예지와 용기와 단결 및 기존 체제의 유신적 개혁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동아일보, ). 70) 유신체제는 정부권력을 대통령에게 집중시켰을 뿐 아니라 자유박탈, 노골적인 폭력, 국민의 신체에 대한 억압, 강제적인 동원 등을 통해 자유민주주의의 절차적 측면까지 부정한 노골적인 반민주적 정치체제였다. 다른 권위주의체제들이 최소한 법적으로라도 절차적 민주주의의 요건을 갖추었지만 유신체제는 이것조차 부정했다. 유신체제는 무엇보다도 한미관계와 남북관계, 그리고 박정희식 경제성장의 문제였다. 먼저 한미관계는 다른 아시아 지역과는 다른 특수성을 갖고 있었다. 미군의 주둔 문제는 일본이나 필리핀, 그리고 베트남 전쟁 시기 태국과 동일한 상황이었지만, 한국전쟁을 경험한 한국에서의 주한미군은 또 다른 특수성을 갖고 있었다. 주한미군 사령관은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는 한국군의 군사적 활동뿐만 아니라 한국군의 정치적 활동에도 주한미군 사령관이 개입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개입도 개입이지만, 개입하지 않는 것도 개입이 되는 특수한 상황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한국전쟁 이후 재건 과정에서 미국의 경제적, 사회적 원조는 한국이 생존할 수 있는 70) 구체적인 내용은 비상계엄령 선포, 국회 해산, 정치활동 금지, 헌법 일부의 효력이 중단되고 그 기능은 비상 국무회의가 대 행, 10월 26일 새로운 헌법개정안 공고, 헌법개정안이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되면 1972년 말까지 헌정질서 정상화였다(동 아일보, ). 105 민주화운동
108 절대적 조건이 되었기 때문에 미국의 개입은 전 사회적 차원에서 일어났다. 홍석률의 글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겉으로는 개입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유신을 전후한 상황에서도 미국은 깊숙이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으로서는 내부적으로 심각한 재정 위기를 맞고 있으면서도, 동아시아 지역에서 자신의 위신을 지켜야만 했기 때문이다. 박정희시대 전체를 통해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은 이승만 시대보다 더 세련된 모습을 보인다. 박정희 정부는 단순한 북진통일이 아니라 선 건설 후 통일, 근대화론 등 한 단계 진전된 통일 이론을 내세웠고, 대북관계에서도 충돌과 갈등 일변도에서 대화를 병행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와 관련해서 과연 박정희 정부의 북한과의 대화 정책이 전술적 차원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전략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적극적 대북정책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고 북한과의 대화 정책이 단지 수사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지만, 스스로의 한계로 인해 성과를 낼 수 없었다는 사실은 유신시대의 남북관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포인트다. Ⅳ. 유신체제의 특징: 대통령 1인지배의 제도화와 긴급조치 박정희 대통령의 권력연장은 고도로 사 인화된 권력구조로 나타났다. 이는 사회의 준군사적 동원체제와 맞물려 정치적 반대세력과 시민사회에 대해 매우 억압적인 정치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래서 유신체제의 제1특징은 제3공화국에서 존재했던 민주주의 제도의 위축 및 폐지라고 정리할 수 있다. 71) 그나마 제3공화국에서는 권력획득을 위해 경쟁하는 야당이 존재했고,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가 경쟁적으로 실시되었다. 형식 민주주의의 요건들이 갖추어진 정치체제였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3공화국은 準 경쟁적 체제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롭게 제정된 유신헌법은 대표 직접선출, 삼권분리, 정기적인 대표의 교체 가능성 등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를 전적으로 왜곡했다. 유신체제는 권력구조의 사인화와 정치사회의 위축, 총력안보체제로 불린 준군사적 동원 체제, 71) 유신시대의 등장과 메커니즘을 설명하는데 있어 일반적으로 의존하는 관료적 권위주의론 은 대표적인 구조적 결정론이다. 오도넬(G. O Donnell)의 관료적 권위주의론을 한국에 적용하여 유신의 기원을 산업화의 위기로 보고 있다. 이에 의하면 유신은 노동집약적 비내구성소비재 중심의 수출지향 산업화의 모순을 극복하고 생산구조의 수직적 통합을 목표로 하는 산 업화의 심화 (deepening)를 위해 취해진 조치라는 것이다.60년대의 수출 지향적 산업화의 모순은 노동계급으로부터의 반 발과 이에 동조하는 민중부문과 지식인 학생 부문의 저항사태로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관료적 권위주의론에 의하면 한국의 노동집약적 비내구성소비재 중심의 후발 산업화는 1960년대 1970년대 초에 이르면 포화상태 (saturation point) 에 도달하게 되고, 중화학공업화로 표현되는 자본재 중심의 산업구조로의 전환이 요구되었고 이를 위해 박정희를 정점으로 하는 군부 지배엘리트와 재벌 간의 관료적 권위주의 연합이 형성되었고 이 연합은 이에 반발하는 민중연합을 억압하고 관 료적 권위주의체제를 수립했다는 것이다. 후발 산업화의 심화의 필요라는 구조적이고 기능적인 필수조건(structural and functional prerequisites)이 집권자가 누군가에 상관없이 관료적 권위주의로의 체제전환을 필수적으로 요구했다는 것이 다(임혁백 2004, 229). 10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09 시민사회에 대한 국가통제의 강화로 그 특징을 요약할 수 있다. 72) 우선 유신헌법은 제3공화국 헌법의 대통령선출방식 및 권한을 변경했는데,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은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선출한 대의원들에 의해 간접적으로 선출되었다.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 임기는 4년에서 6년으로, 중임제한 규정 없이 무제한으로 재선될 수 있게 되었다. 유신헌법은 사실상 박정희가 자발적으로 물러나지 않는 한 영구집권을 보장해준 헌법이었다. 유신헌법은 대통령출마를 위해 정당의 공천 없이 친정부인사로 구성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00명 이상의 추천을 요구했고, 재적 대의원 과반수의 지지를 얻으면 대통령에 당선되도록 규정하고 있다. 박정희 정부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통한 대통령선출제도를 미국식 대통령선거인단(electoral college) 제도로 호도( 糊 塗 )했지만 경쟁적 선거과정이 전제된 대통령선거인단제도와 대통령이 임명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통한 간접선출은 근본적으로 다른 제도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통한 대통령선출로 대통령선거는 국가권력획득을 위한 경쟁으로서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한 형식적 절차로 전락했고, 대통령은 더 이상 국민에게 책임지지 않아도 되었다. 미국식 대통령선거인단은 완전한 경쟁의 보장이 전제된 간접선거인데 반해 유신체제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은 어떠한 경쟁도 없이 사실상 대통령 추대의 거수기 역할만을 담당했던 기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유신헌법에서 대통령의 권력은 사회나 다른 정부기관에 비해 더욱 강화되었다. 73) 국회의 국정감사권은 박탈되었고, 반대로 대통령에게는 국회 해산권을 부여하여 비대칭적 권력구조를 만들었다. 국회의 대통령탄핵소추권은 박탈되었고, 국회의원 2/3만을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하고 나머지 1/3은 대통령이 임명한 후보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추인(대통령의 입법부 장악을 제도적으로 보장)함으로써 입법부를 통법부로 격하시켰다. 국회가 가진 권한은 최대한 약화시키는 대신 대통령이 보유한 권한은 최대한 강화시킴으로써 대통령의 절대적 권력 우위를 헌법으로 보장했다. 입법부와의 비대칭적 권력구조 뿐만 아니라 사법부를 권력의 시녀로 격하시키는 조치도 72) 남미의 관료적 권위주의 정권 탄생이 보다 방어적이고 예방적인 것, 즉 민중 계층의 집권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유 신체제의 탄생은 보다 공격적이고 선제적인 것, 이미 확립된 권위주의 통치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김영명 1985, 183). 73) 임혁백에 따르면(임혁백 2004, 237), 박정희의 유신은 단순히 구조적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나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박정 희는 구조적인 정치적, 경제적, 안보적, 국제 경제적 위기를 통해 때로는 위기를 조성하여 유신을 구축하여 자신의 꿈을 실 현해 나간 것이다. 따라서 유신은 역사적 필연이 아니다. 유신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구조에 의해 유인되고 결정된 것 은 아니다. 10월유신을 전후로 한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이 박정희로 하여금 유신체제를 수립하도록 몰아간 것이 아니다. 박정희는 고통 속에서 유신체제를 수립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몰린 것은 아니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의 상황 은 박정희에게 자신이 꿈꾸었던 나라로 개조 ( 惟 新 )하기 위한 기회를 제공하였던 행운의 여신(fortuna) 이었다. 그리고 그 기회를 현실로 바꾼 것은 박정희의 역량 (virtu)이었다. 유신은 박정희의 프로젝트이다. 구조는 박정희의 선택의 한계를 형 성해주었지만 동시에 박정희는 선택의 구조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만들어나갔다. 박정희 외에 다른 대안이 없는 상 황이 아니었으나, 박정희는 그러한 상황을 만들었으며 몰아나갔다. 이러한 임혁백의 유신체제 등장에 대한 해석은 위기에 대한 수동적인 대응으로 유신체제의 등장을 해석하던 기존의 해석과 달리 마키아벨리의 개념을 차입하여 상당히 흥미로운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한다. 107 민주화운동
110 이뤄졌다. 대통령에게 대법원장 임면권, 법관임면권을 부여했으며, 헌법위원회를 설치하여 위헌법률심사권, 탄핵결정권, 위헌정당해산권 등을 부여하되 대통령이 헌법위원회 위원 9인중 3인을 선임하는 동시에 국회에서 선출하는 3인과 대법원장이 지명하는 3인을 임명하도록 했다. 대통령이 대법원장 임면권을 갖고 있고 여당의 총재인 상황에서 이는 결국 9명의 헌법위원 중 8명을 대통령이 임명하고, 유일하게 국회에서 야당 몫의 헌법위원 1인을 임명할 수 있었다. 유신헌법은 사법부 역시 대통령에게 완전 종속되는 구조를 만들었다. 결국 유신체제는 대통령에게 입법부와 사법부에 대한 실질적 통제권을 부여함으로써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인 삼권분리를 무력화시켰다. 유신헌법에 의한 권력분리와 견제와 균형 원리의 침해는 긴급조치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었다. 유신헌법은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 국정 전반에 걸쳐 긴급조치권을 선포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약할 수 있는 권한을 합법적으로 부여했다. 긴급조치는 사법심사의 대상도 되지 않았고, 국회는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 긴급조치 해제를 대통령에게 건의할 수는 있지만 대통령이 그 건의를 수용할 의무는 없었다. 유신체제 하의 긴급조치는 반대세력을 탄압하는 주된 법적 도구로 기능했고 유신체제를 유지시킨 강제력을 대표하는 제도적 수단이었다. 유신헌법은 원칙적으로 유신체제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반대도 반국가적 행위로 간주하여 허용하지 않았다. 유신헌법에서 반유신과 반국가는 동일한 의미였다. 결국 유신체제 하의 사회운동이 곧 긴급조치와의 싸움이 되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통령은 유신체제와 박정희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저항도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처벌했다.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원칙적으로 유신헌법은 대통령의 동의 없이는 개헌이 불가능한 헌법이었다. 대통령이 제안한 개헌안은 국민투표에 부의할 수 있었지만, 국회에서 제안한 개헌안은 재적의원 2/3 이상의 찬성을 받아 가결되더라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재적 대의원 과반수의 찬성에 의해 승인되어야 했다. 유신체제 하에서는 사실상 민주적 체제 전환의 수단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선거도, 탄핵도, 개헌안 발의도 존재하지 않거나 유효하지 않았다. 유신체제는 박정희 1인을 위해 존재하는 체제였고, 그 1인만이 유신체제를 종식시킬 수 있었다. 지금까지 논의된 유신헌법의 특징과 의미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국가권력 조직화 및 능률극대화가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워 국가권력을 대통령에게 집중, 헌법상 국가권력은 국민과 통일주체국민회의, 헌법위원회에 분산되어 있고 통치 권력은 국회, 정부, 법원에 분산되어 있었지만 동시에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권과 전체 법관 및 국회의원 1/3임명권, 긴급조치권을 부여한 것은 실제로 대통령에게 입법, 사법, 행정 등 국가기구의 통제권을 부여했음을 의미했다. 유신체제는 정치구조의 측면에서 대통령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는 초권력집중형 권위주의 체제 였다. 긴급조치는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는 민주주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초유의 조치였다. 유신시기 중 유신반대운동에 대해 박정희 정부가 시행한 가장 강력한 탄압조치는 1974년부터 시작된 10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11 긴급조치였다. 유신체제 선포 이후 위축되었던 민주화운동은 1973년 4월 22일 남산 부활절 예배에서 민주회복과 언론자유 등을 촉구하는 유인물의 배포로 다시 시작되었고, 학생운동에 의해 본격적으로 부활했다. 박정희 정부는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 2호를 선포한 이래로 모두 9번의 긴급조치를 선포했는데, 특히 긴급조치 9호는 그 동안의 모든 긴급조치의 내용을 총괄하고 적용범위를 더욱 확대했을 뿐 아니라 처벌 규정을 한층 강화했는데, 박정희의 사망으로 유신체제가 막을 내릴 때까지 4년 6개월 동안 지속되면서 1천명 이상의 전과자를 양산하고, 많은 시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했다. <표 1> 유신시대 하의 긴급조치 긴급조치 1호( ) : 오전 10시 1.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2. 대한민국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3.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4. 위의 호에서 금한 행위를 권유, 선동, 선전하거나 방송, 보도, 출판, 기타의 방법으로 이를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언동을 금한다. 5. 이 조치에 위반하는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하는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 이 경우에는 15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 할 수 있다. 6.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하는 자는 비상 군법 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 7. 이 조치는 1974년 1월 8일 17시부터 시행한다. 긴급조치 2호( 오후 5시)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자를 심판하기 위한 고등 군법회의와 비상 보통 군법회의의 설치 및 구성에 관한 내용. 긴급조치 3호( ) 1. 저소득층의 부담을 경감하기 위하여 가. 근로 소득세, 사업 소득세 및 주민세를 1974년 1월부터 12월까지 면세 또는 대폭 경감한다. 나. 국민 복지 연금 및 교원 연금제도의 실시를 1년간 연기한다. 2. 버스 등의 대중 교통수단의 요금 인상을 최소한으로 억제하기 위하여 통행세를 감면한다. 109 민주화운동
112 3. 농가 소득의 증대와 적정 미가의 유지를 위하여 1973년산 미곡 수매 가격을 가마당 500원씩 인상하여 그 수매량을 대폭 늘리고 이미 정부가 수매 완료한 분에 대해서도 동액을 추가 지급한다. 4. 영세민의 취업 기회를 보장하기 위하여 긴급 취로 대책비 1백억 원을 확보한다. 5. 중소 상공업에 대하여 특별저리 금융자금 3백억 원을 지원하고 이에 필요한 예산 조치를 한다. 6. 임금의 우선 변제제를 신설시행하고 임금채불, 부당해고, 및 근로조건의 악화를 방지하기 위하여 악덕 기업가에 대하여는 가중처벌 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 7. 재산세의 면세점을 인상하고 각종사치성입장세, 보석, 텔레비전, 냉장고, 고급주류, 고급주택, 자가용승용차에 대한 조세를 중과한다. 8. 유류를 절약하기 위하여 휘발유에 대한 세율을 인상한다. 9. 공무원의 급여 인상과 급여 체계의 조정을 앞당겨 1974년 2월부터 실시한다. 10. 이상의 조치와 아울러 정부의 관계 각 부처는 다음 사항을 지체 없이 추진할 것을 지시한다. 이하 각 세부사항은 생략. * 출처 : 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 이러한 유신헌법을 통해 나름대로의 정통성을 확보했던 유신체제는 다른 어떤 체제와도 비교할 수 없는 특징을 갖고 있다. 정치적 측면에서 유신체제는 삼권분립의 정신을 훼손한 채 대통령에게 국가권력이 집중되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할 수 있었고, 전체 법관과 국회의원의 1/3을 임명할 수 있었으며, 국회의 동의 없이 긴급조치를 발동할 수 있었다. 유신체제는 대통령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는 초권력집중형 권위주의 체제였다. 경제적 측면에서 유신체제는 제3공화국과 마찬가지로 정부가 경제정책을 입안하고 공공 금융기관과 자원의 독점을 통해 민간 기업을 통제하는 등 경제에 대한 포괄적인 개입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경제기획원의 역할이 축소되고 대통령 비서실의 권한이 강화되는 등 경제에 대한 대통령의 권한이 더욱 강화 집중되었다. 유신체제는 배제적 노동정책을 더욱 심화시켰다. 1960년대의 노동정책은 본질적으로 1953년 노동법의 체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70년대에 들어 결정적인 변화가 초래되었다. 70년대 단결정책의 체계상의 특징은 노동조합법 등의 노동관계제법이 폐지되지 않고 존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단결권(파업권 포함)이나 단체교섭제도를 사실상 부인하는 특별법이 제정 시행되어 기축적인 노동정책으로 기능했다. 외국인 투자기업의 노동조합 및 노동쟁의에 관한 11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13 임시특례법 (70년 1월 1일)과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9조)(71년 12월 27일)이 그것이다. 이러한 특별법에 의해 종래의 노동관계 제법은 그 가장 핵심적인 정책수단의 측면에서 그 기능이 정지되었으며, 단지 이러한 특별법의 보완적인 노동입법으로 그 지위가 전락하였다. 유신헌법(72년 12월 27일)상의 노동3권의 보장 규정(제29조)은 권리의 보장 형식( 법률유보 )이나 단체행동권의 보장 범위에서 60년대의 헌법 규정에 비해 그 입법 여하에 따라 노동자의 단결권이 더 엄격하게 제한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유신헌법의 성립에 앞서서 제정된 이러한 특별법은 이와 같은 헌법상의 노동3권 보장마저도 형해화하는 것이었다. 74) 1972년 이후 노동정책은 민간부문, 공익사업체, 현업기능직 노동자의 경우 노조 결성 자체(협의의 단결권)가 금지되지는 않지만,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이 부인됨으로써 그 본질적인 기능이 전혀 인정되지 않는 사실상의 단결금지의 정책체계이다.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등 노동자의 기본권을 극도로 축소시켰고, 75) 노사관계에 대한 행정기관의 개입과 노동쟁의에 대한 규제를 한층 강화시켰다. 76) 체제유지를 위한 수단의 동원 측면에서 유신체제는 한국적 민주주의 가 지향하는 국정의 효율화를 위해 통일주체국민회의와 유신정우회라는 새로운 기제를 도입했다. 자신의 대표를 선출할 국민의 권리를 박탈했고, 국회의 행정부 견제 기능을 약화시킴으로써 대의 민주주의를 무력화시켰다. 한국적 민주주의에 필수적인 총화단결을 저해하는 정치적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긴급조치를 새롭게 도입하여 합법적으로 정치적 자유를 억압했다. 유신체제는 총력안보태세의 확립을 명분으로 74) 국가보위법 은 동년 12월 6일에 이미 선포한 국가비상사태 의 법적 근거를 부여하는 성격의 것인데(부칙 2),이 법률에 의 해 대통령은 국무회의의 심의 절차를 거치는 것만으로 인적 물적 자원에 관한 국가동원령을 내리고(제5조), 기본적 시민 권(경제적 기본권 포함)을 광범위하게, 또 근본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무한정한 비상권한 을 갖게 되었던 것이 다. 제정 당시의 헌법체계를 근본적으로 유린하는 이 법률은 한시입법으로 제정되었으나 1981년 12월 27일에야 폐지되었 으며, 소위 유신체제 를 지탱하는 추요의 입법이었다. 아니 국가(권력)와 시민과의 관계에서 보면, 유신헌법을 포함하여 헌 법 자체를 부정하는 無 憲 法 時 代 (age of no constitution)를 열어 놓는 것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유신헌법은 더 이상 헌 법 이 아니며, 유신시대는 헌정이 부정된 시대였다. 75) 국가보위법에서 노동에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조문은 제9조의 단 한 개 조문이다. 근로자의 단체교섭권 또는 단체행동권 의 행사는 미리 주무관청에 조정을 신청하여야 하며, 그 조정 결정에 따라야 한다(1항). 대통령은 국가기관 또는 지방자치 단체, 국영기업체, 공익사업, 국민경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사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단체행동권을 규제하기 위한 특 별조치를 할 수 있다(2항). 후자의 제2항은 72년의 개정헌법( 유신헌법 )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여기에서 결정적으로 중 요한 것은 1항의 규정이다. 입법 형식은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 자체의 부인이 아니라 그 권리 행사의 절차에 대한 규 제이다. 그러나 행정조정 의 운영방식 여하에 따라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이라는 단결권의 본질적인 내용을 전면적으 로 부인할 가능성을 갖고 있음을 일단 확인 할 수 있다. 이 조문은 관련 시행령도 제정되지 않은 채 오로지 노동청의 예규와 같은 행정처리지침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76) 노동조합의 설립신고 등의 제 조항에서 노동부장관에 신고하게 되어 있는 전국적인 규모를 가진 노동조합 이 연합단체인 노동조합과 2개도 이상에 걸치는 노동조합 으로 그 표현이 변경되고, 전국적인 규모를 가진 노동조합의 산하노동단체 라 는 용어가 삭제되었다. 이 개정에 의해 1963년 노조법개정 이래 전국적인 규모를 가진 노동조합 과 그 산하노동단체 (또 는 산하지부 )라는 용어에 의해서 상정되고 있었던 단일조합으로서의 산업별노조라는 조직형태가 정책상으로 법률 차원에 서 방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전국적 산업별조합은 기업별 또는 사업장별 단위조합의 연합체로 인식되고 있다. 이는 1963 년 개정노동법이 법적으로 강제한 유사산업별조합체제 를 방기한 것으로 63년법 체계 하에서 노동청의 예규 등을 통해서 통달된 사실상의 기업별조합체제를 최종적으로 추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11 민주화운동
114 국민들을 동원하고 통제하는 새로운 기제들을 도입했는데, 향토예비군, 민방위대, 학도호국단 설치, 교련교육 실시, 민방위 교육, 반상회제도 재정비했다. 박정희는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을 의식하여 유신을 한국적민주주의 로 호도했지만 결국 한국적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유신이 단행된 이후 수많은 민주투사들이 강탈당한 민주주의를 탈환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해야 했고, 널리 알려진 인혁당 사건이나 민청학련사건 같은 대규모 간첩조작사건에 연루되어 수 많은 민주인사들이 빨갱이로 몰려 살해당하거나 투옥되기도 했다. 유신체제는 학교생활에도 많은 변화를 주었다. 가장 눈에 띠는 변화는 학생자치회가 사라지고 기존의 학교를 군대체제로 개편시켰다. 유신이 단행될 당시 나는 중학생이었지만 각 학년의 대표를 대대장에 임명하였고, 전체 학생 대표는 연대장에 임명되었다. 물론 각급 제대장들은 학생 자치로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일방적으로 임명하는 것 이었다. 이전까지 학교의 학생자치회 투표는 미래 사회의 구성원들이 민주주의를 학습하는 아주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유신독재는 민주주의의 싹을 근본부터 말살하려 시도한 것이다. 이렇게 군대처럼 조직된 학교의 운동장 조회는 마치 군대의 행사를 방불케 했다. 각 제대장 별로 서는 자리가 달랐고 대대장과 연대장은 허리에 의식용 칼까지 착용한 채 열병과 심지어는 분열 같은 군대 의식을 진행하며 국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유신체제는 중정과 경찰을 통해 총화단결 및 산업평화를 저해하는 정치적 반대세력과 노동운동 세력을 탄압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조항을 헌법에 삽입함으로써 반민주적 조치들을 합법화하고, 정보기관들은 자유롭고 정당하게 정치적 반대세력을 탄압했다. 유신체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국가권력의 조직화 및 능률의 극대화가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의민주주의를 왜곡하고 대통령 일인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켰다는 점, 국민의 기본권 제한을 헌법 조항에 삽입하여 합법적으로 정치적 반대세력을 탄압했다는 점, 그리고 총력안보태세의 확립을 위해 학생은 물론 성인 남성들까지 준군사조직으로 편재하고 다양한 기제들을 통해 국민들을 일상적으로 동원하고 통제했다는 점이다. 77) Ⅴ. 1970년대의 사회운동과 반유신운동 1970년대는 유신시대로 시작해서 유신시대의 종결된 시기다. 따라서 1970년대 사회운동은 77) 총력안보는 일제가 1937년 중일전쟁에 돌입하면서 구축한 전시동원체제(총후국방)와, 현대전은 전선과 후방이 따로 없는 총력전이라는 개념을 결합한 것이다. 총력안보란 군관민이 지도자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른바 국론통일이 필요했다. 반대를 허용하지 않기 위해 전가의 보도처럼 동원된 수단은 냉전 이데올로기였다. 유신의 최 후 보루로서 반공 방첩은 정권안보를 위한 무소불위의 도구로 기능했다. 유신정권은 문인간첩사건, 민청학련 사건, 인혁 당 재건위 사건, 재일동포유학생간첩단 사건 등 수많은 조작사건을 통해 위기감을 조장했고, 불평불만 한마디에 간첩이 되 는 막걸리 보안법 의 피해자를 다수 양산했는데, 조직사건과 막걸리보안법이야말로 유신시대 총력안보의 민낯이었다. 11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15 반유신운동으로 시작해서 탈유신과 민주회복운동으로 종결되었다고 규정할 수 있다. 유신헌법하의 사회운동은 결국 거시적으로는 유신체제, 미시적으로는 박정희와 박정희 정부를 수호하는 긴급조치에 반대하는 투쟁이 중심이었다. 1970년대 사회운동을 해방 직후의 변혁운동 흐름과 단절시켜 4월 혁명 이후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성장해온 민주화운동이 1970년대 민중의 생존권투쟁과 결합해 나가면서 그 방향이 민중지향의 흐름으로 전개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주류다. 이 견해를 채택할 경우 1970년대를 민주화운동으로서 반유신투쟁과 민중의 생존권 투쟁이 결합되어 나간 시기라고 정리할 수 있다. 야당과 지식인 등이 주도하는 반정부운동의 한계가 오히려 민중의 생존권투쟁을 자극하여 1980년대의 대중운동의 수준을 진전시킨 시기가 바로 1970년의 사회운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의 흐름이 한국전쟁으로 단절되지 않고 계승되면서 각 시기의 객관적 조건과 운동과제를 해결하면서 성장했으며, 1970년대 대중운동도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을 해결하는 사회적 변혁을 위한 투쟁으로 당시의 투쟁국면에 맞게 전개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조희연 1998; 조희연 2001). 1960년대 말 이후 한국의 민족민주운동에는 획기적인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지도와 대중의 결합방식에서 종래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발전양상들이 나타났다고 주장했다(도진순 정창현 1990). 이 시기 사회운동은 지도핵심조직의 육성과 강화를 전제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부문운동으로 결합되고 반민중적 유신반대투쟁전선의 결집에 초점을 두었다. 각 분야별로 1970년대의 사회운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장 먼저 살펴봐야할 부문운동은 노동운동이다. 1970년대 노동운동은 한국전쟁 이후 우리사회의 전면에 나서는 계기를 이루었으며 노동조합의 임금인상 등 근로조건 개선투쟁, 신규노조결성투쟁, 노조민주화투쟁 등 노동조합운동의 내실을 이루었으며 발전한 시기로 이해된다. 1970년대 노동운동을 1도시빈민운동(광주대단지사건), 2영세중소기업에서의 노동운동(전태일사건과 청계피복노조의 투쟁), 3폭력적인 대규모 노동쟁의(파월한진노동자의 KAL빌딩 방화사건, 현대조선소 2만 노동자투쟁, 부마항쟁에서의 노동자투쟁), 4기성노조가 주도하는 합법적 방법에 따른 근로조건의 유지 개선운동(시그네틱전자 임금인상쟁의, 국제방직사건), 5 신규노조결성투쟁(2,500여개의 신규 노조결성), 6노동조합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원풍모방, 동일방직)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지속적, 조직적, 단계적으로 전개되어온 장점이 있음에 반해, 1970년대 노동대중의 직접적, 폭발적 실력투쟁운동은 법의 테두리를 뛰어넘는 운동으로서 체제 자체에 대한 위협적 성격으로 인해 한꺼번에 많은 요구를 달성할 수 있었다. 양자의 통일적 결합이야말로 1980년대 노동운동의 새로운 방향이었다. 1970년대 노동운동을 상징하는 민주노조에 대한 다양한 평가를 역사적 현재성에 입각하여 살펴볼 필요도 있는데, 민주노조의 개념을 민주주의를 지향하여 이를 실현해나가는 대중훈련 및 113 민주화운동
116 대중투쟁의 기반으로서의 노동자 조직으로 규정하고, 제한적 의미에서는 그 기능을 공제적 기능 및 산업적 기능에 한정하되 자본과의 관계가 일방적인 종속관계가 아닌 노동조합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1970년대 한국의 민주노조는 제한적 의미에서 비어용 노조라고 파악하면서 1970년대는 민주적인 노동조합을 많이 조직하고 이를 토대로 활발한 경제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주였던 시기였다. 1970년대를 대표하는 노동운동은 아이맥스전자(71. 2), 주한미대사관 경비원(71. 4), 한국화이자(72. 2), 한국모방(72. 7), 삼립식품(73. 9), 반도상사(74. 2), 종근당제약(74. 8), 풍천화섬(76. 9), 인선사(77. 4), 제일제당(77. 10), 아리아악기(78. 1), 동일방직( ), 방림방적 노동자들의 부활절 예배장 확성기 탈취투쟁(78. 3), YH무역(79. 8) 노동쟁의 및 노동운동이 대표적이다. 1970년대 초 가톨릭 농민회를 필두로 자주적 농민조직이 생성되면서 농민운동은 새롭게 전개되었다. 1972년 새롭게 운동방향을 정립하고 조직을 정비한 가톨릭농민회는 1970년대의 농민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면서 농민운동의 고양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크리스천 아카데미의 농민교육 프로그램은 1974년부터 1979년에 이르기까지 거의 1,000여명에 이르는 농민운동을 위한 인적기반을 길러내어 농민운동의 역량을 강화하는데 이바지했고, 1977년대 중반 이후 가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회운동의 지도자 육성에 큰 기여를 했다. 농민운동의 조직적 성장이 가시화된 것은 1976년에서 1978년에 이르는 함평고구마 피해보상투쟁이었는데, 이 투쟁은 비록 광범위한 지역에서 진행되지는 못했지만, 농성과 시위과정에서 정부의 기만적인 정책과 기층 민중에 대한 탄압을 다른 계급계층과 연대하여 선전한 점, 불완전하게나마 성공하였다는 점, 특히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농민시위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1970년대의 농민운동은 독점자본의 농민수탈구조에서 독재 권력이 말단관료조직을 통하여 농민을 수탈, 억압하는 것에 대한 저항이었기 때문에 주로 농협민주화, 강제농정, 부당 농지세 부과 등과 싸우는 형태로 전개되었고, 운동방식 역시 성당에서의 기도회, 성명서, 진정서 등의 방법을 사용했으며, 투쟁과정에서 농민대중의 자주적 단체를 조직했던 점이 1970년대 농민운동의 최대의 성과였다. 1970년대 농민운동의 문제점으로는 1양적인 면에서 광범위한 농민의 참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2농지문제가 심각했음에도 운동과제로 제기된 경우가 없었다. 3당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다른 운동과의 연대가 부족하여 연합운동을 형성하는데 있어 농민운동이 가진 역량을 발휘하거나 활용하는 데 미흡했다. 4당시 농민운동을 가톨릭농민회나 기독교농민회 등 종교적 외피를 쓴 농민운동으로 인하여 전 농민적 이해를 실현하는데 미약했던 측면이 있었고, 이로 인해 농민운동은 다소 교회 내 소시민적 농민운동에 그치고 말았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결국 1970년대의 농민운동은 전국적인 단위에서 통일적으로 진행되기에는 아직 역량이 미흡했다. 1970년대를 통해 가톨릭농민회의 성격을 둘러싼 갈등이 계속되었는데, 선교차원에서 운동을 바라보는 입장, 11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17 농민운동의 발전을 위하여 교회의 지원을 활용 내지 보위력을 높이는 조건으로 이용하자는 입장, 자주적 농민운동론자 등으로 나뉜 채 새로운 운동조직의 결성이나 운동력의 배가를 이루어내지 못했다. 학생운동은 1960년대 말 청년학생들의 정치의식과 그들의 운동에는 획기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자신들의 운동노선과 비조직적 운동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제기되었고, 그 결과 각지에서 합법, 비합법의 사상 이념서클들이 조직(서울대 한국사회연구회, 이론경제학회, 후진국사회연구회, 문우회 등)되었고, 학생들의 투쟁이 점차로 조직화되고 목적의식적으로 전개되었다. 1970년대 학생운동은 제1기(1960년대 말-1972년 10월 유신), 제2기(10월 유신-1975년 긴급조치 9호), 제3기(긴급조치 9호-10 26사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970년대 학생운동의 역사적 성격으로는 첫째, 민중 지향적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 둘째, 학생운동의 인식, 조직, 실천면에서 많은 발전이 있었다는 점. 셋째, 유신체제의 고도화된 탄압에 따라 학생운동에 임하는 자세가 보다 철저하게 된 점 등을 지적할 수 있다. 이 시기 대표적인 학생운동은 교련철폐투쟁이었다. 1970년대 학생운동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투쟁이자 박정희 정부의 이데올로기적 존립근거를 그 근저로부터 파괴하려는 시도였다. 냉전체제의 해체를 그 기조로 하여 전후 세계질서의 재편성 과정에 들어서고 있는 오늘날의 세계대세에 역행하면서 시대착오적인 냉전체제로의 복귀를 획책하는 것이며, 민족 안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정부안 보를 위한 병영 국가적 통치 질서의 중요한 일환이다. 국내적 제 모순을 대외적 긴장완화로 상쇄하려는 의도에서 취한 위기조작을 위한 독재 권력의 상투적 정부안보책이다(교련철폐투쟁선언문). 1971년 4월에 시작되어 2학기까지 계속된 반대투쟁은 10월 14-15일 전국 각 대학에서 5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투쟁으로 발전하였고, 그 과정에서 6 3항쟁 이후 배출된 젊은 청년학생세력을 중심으로 민주수호청년협의회가 결성되어 민족자주의식을 고취했다. 이에 박정희 정부는 위수령을 발동하고 군인들을 학원에 진주시켜 1889명의 학생들을 연행하여, 이중 119명이 구속되었고, 각 대학의 서클 74개가 해체되었으며, 많은 간행물들이 폐간 조치되었는데, 이는 공개적인 학생운동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었다. 유신철폐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73년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는 교내 4 19기념탑 앞에서 비상총회를 열고 선언문을 낭독한 후 2시간여 동안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했다. 이들은 1정보 파쇼통치 즉각 중지, 자유민주체제 확립. 2대일 경제예속관계 즉각 중지, 국민생존권 보장. 3중앙정보부 즉각 해체. 4김대중씨 사건 진상규명 등 4개항을 주장했다. 유신 이후 최초로 단행된 이 공개시위는 유신통치체제의 장벽을 허무는 역할을 하였는데, 김대중 납치사건이라는 이슈를 포착하여 박 정부의 본질을 폭로한 투쟁이었다. 서울대 문리대의 유신체제 반대시위는 전국적인 유신철폐 개헌서명운동으로 발전했고, 유신정부는 대통령 긴급조치 1호, 2호를 115 민주화운동
118 선포하여 초강경으로 대중운동을 탄압했다. 학생운동은 1974년에 들어서면서 전국적인 투쟁조직인 민청학련을 결성하여 한 단계 높은 투쟁으로 이행하려 했으나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면서 민청학련사건과 2차 인혁당 사건이라는 엄청난 탄압을 감내해야 했다. 1973년 8월 김대중( 金 大 中 )납치사건에 국내외 여론이 크게 자극되어 반유신체제운동이 일어났다. 9월 개학과 더불어 대학생들의 시위사태는 점차 반독재 반체제 움직임으로 성격이 바뀌면서 전국 고등학교에까지 파급 확대되었으며, 일부 야당인사 지식인과 종교인들은 민주헌정의 회복 및 공화당정부의 인권탄압을 규탄하면서 본격적인 개헌서명운동을 벌였다. 이러한 학생들의 서명운동에 대처하기 위하여 박정희는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 2호를 공포하고 일체의 개헌논의를 금지하였으며, 위반자를 심판할 비상 군법회의를 설치했다. 이로 인하여 학생들의 운동은 교내에서 지하신문 발행과 동맹휴학 등의 방법으로 계속되었고, 종교계 일각에서는 일부 지식인과 교회에서 시국선언문을 채택하는 등 비밀 개헌서명운동을 추진했다. 4월 3일 박정희는 반체제운동을 조사한 결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불법단체가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고 있었다는 확증을 포착하였다 고 발표하면서 긴급조치 제4호를 발동, 학생들의 수업거부와 집단행동을 일체 금지했다.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을 중심으로 180명을 구속 기소했다. <표 > 1974년 4월 25일 신직수 중정부장의 발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의 주동 학생들은 4단계 혁명을 통해 이른바 노동자, 농민에 의한 정부를 세울 것을 목표로 과도적 통치기구로서 민족 지도부의 결성까지 계획했으며 이 민청학련의 배후에는 1과거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혁당 조직과 재일 조총련계 일본공산당, 2국내 좌파 혁신계가 복합적으로 관련, 학 생을 포함한 1,024명이 조사를 받고 이중 253명을 군법에 송치하여 54명이 1차로 기소됐다. <표 >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민청학련의 배후 1인혁당 당수로 지하 활동을 하다 복역했던 도예종( 都 禮 鍾 ) 등은 71년부터 73년 11월까지의 경북대 데 모를 배후조종, 학생폭거를 통한 사회주의 정부수립을 기도했으나 당국의 저지로 실패하자 전국학생민족 자주통일 중앙협의회 경희대 위원장 이수병 등을 통해 10.2 서울대 데모를 주도한 이철 등에 접근, 민청 학련의 구성과 활동을 배후조정하고 자금을 지원해 왔고, 2재일조선인총연맹의 비밀조직원 곽동의의 조종을 받은 일본의 주간현대 등 주간지 자유 기고가인 다짜가와 마사기( 太 刀 正 樹 )와 일본 공산당원인 하야가와 요시루( 早 川 嘉 映 ) 등이 관광 목적으로 우리나라 를 왕래하면서 이철 등과 접촉, 폭력혁명 계획을 지원해 왔으며, 3좌파 혁신계로 복역한 적이 있는 류근일( 柳 根 一 ) 등은 이들 대학생들에게 자금지원, 유인물 원고 제공 등 민청학련 활동을 지원해 왔고, 4한국기독학생연맹 간부들도 민청학련을 적극 지원, 참여키 위해 교회청년연합회를 조직, 4월 반정부 데모가 실패한 경우 2단계로 이 연합회가 나서기로 했었다. 11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19 이러한 배후관계설은 민청학련 중심인물들이 법정에서 전면 부인했는데, 특히 인혁당 관계는 학생들과 분리하여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라는 사건으로 경합하여 재판을 진행할 정도였다. 민청학련 사건 관련 학생들은 법정에서 순수한 학생운동을 공산주의자들의 사주 운운으로 학생운동을 근저에서 탄압하려고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였으며, 강신옥 변호사가 민청학련사건 변론 중 내가 차라리 피고인석에 서겠다 는 발언으로 법정 구속되기도 했다. 비상군법회 검찰부의 기소장에 의하면, 이들은 1973년 12월부터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전국적 민중봉기를 획책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인민혁명당계 지하공산세력, 재일조총련계열, 불순학생운동으로 처벌받은 용공세력, 국내의 반정부인사 및 그리스도교인 중 일부 반정부세력과 결탁, 4월 3일을 기하여 정부를 전복하고 4단계혁명을 통하여 노동자와 농민에 의한 공산정부 수립을 기도하였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1974년 6월 9일 보통군법회의 그리고 9월 7일 비상고등군법회의는 민청학련사건 주모자급 48명과 두 일본인 등 50명에 대해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내란 선동 등의 죄로 선고공판을 열고 사형 8명, 무기징역 9명, 12년 이상 20명을 선고했다. 구속된 180명은 비상 군법회의에서 인혁당계 23명 중 8명이 사형을, 민청학련 주모자급은 무기징역을, 그리고 나머지 피고인들은 최고 징역 20년에서 집행유예까지를 각각 선고받았으나 1975년 2월 15일 대통령특별조치에 의하여 대부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2005년 12월 7일에 국정원과거사건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는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 의 조사결과 발표문에서 민청학련 사건은 순수한 반정부데모를 대통령이 직접 나서 공산주의자들의 배후조종을 받는 인민혁명 시도로 왜곡하여 1천여 명을 영장 없이 체포, 구금하였으며 7명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수십 명을 무기와 10년 이상의 장기형에 처한 대한민국 최대의 학생운동 탄압사건 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민청학련사건은 1970년대 후반 학생운동이 노동자, 농민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하여 1960년대의 학생운동과는 다른 발전적인 모습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은 그 동안의 산발적이고 자연발생적인 학생운동에 운동의 현실적 발생형태인 조직성을 부여하는 학생운동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했다.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은 1974년 인혁당 관련자들이 국가 전복을 기도했다는 혐의(국가보안법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등)로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자 18시간 만에 처형된 사건이다. 인혁당 은 1964년8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북괴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 지하조직으로 국가 변란을 획책한 인민혁명당을 적발해 일당 57명 가운데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수배 중이다 라고 밝히면서 세상에 알려졌는데, 10년 뒤 중앙정보부는 유신 반대 투쟁을 벌인 민청학련을 수사하면서 배후 세력으로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했고, 이를 북한의 지령을 받은 지하조직으로 규정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에는 1,024명이 연루됐으며 이중 253명이 구속됐으나 이철, 김지하 씨를 비롯한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1975년2월 감형 또는 형집행정지로 대부분 석방되었다.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23명은 석방에서 제외됐고, 117 민주화운동
120 대통령긴급조치 제2호에 따라 설치된 비상 군법회의에서 수사와 기소, 재판을 받았는데, 이 가운데 우홍선, 송상진,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도예종, 여정남, 김용원씨가 1975년 4월8일 대법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이튿날 오전 6시부터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로 인해 이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사법살인 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고, 스위스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의 사형이 집행된 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 로 선포되기도 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은 2005년 12월27일 법원에서 재심 개시 결정이 난 후 무죄판결을 받았다. 국정원 과거사위 발표에 따르면 1964년 발표된 인혁당 은 중정 발표와는 달리 당 수준에 이르지 못한 서클형태에 불과했고,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들이 북한 방송을 듣고 녹취한 노트를 돌려본 점 등에 대해 반공법을 엄격하게 적용해도 징역 1~2년에 불과했다고 발표했다. 민청학련 사건은 긴급조치 4호 선포의 원인이었고 유신시대를 대표하는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학생운동은 곧 긴급조치 9호 시기의 학생운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정도로 학생운동이 폭발적으로 전개되었던 시기는 바로 긴급조치 9호 시기였다. 긴급조치 9호 시기 학생운동은 두 가지 입장으로 분리되는데, 하나는 정부의 공세로부터 운동의 지속성을 담보할 수 있는 활동공간을 고려한 공개기구운동으로의 편입을 주장한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정통적인 비합법 비공개운동만이 전체운동을 활성화시킬 수 있으며 그것은 전위핵심의 육성 강화에 의해 가능하다는 입장이 그것이다. 전자의 입장은 교회라는 상대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조직에서 학습과 실천의 계기를 마련했고, 학내에서는 종교서클을 중심으로, 학외에서는 민청협, 기청협 등을 중심으로 상황에 대처하고자 했음. 이들 그룹은 교회와 공개운동기구를 통해 조직원을 양성해 나갔고 기도회, 강연회 등을 통해 대중선전과 반정부투쟁을 전개해갔으며, 민중노선을 자기논리로 수용하면서 산업선교회 등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을, 가톨릭농민회를 중심으로 농민운동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으나 점차 학생운동으로부터 배제되었는데, 그 이유는 유신폭압체제에 맞서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성명서의 발표, 자료의 수집과 배포, 교육학습의 장 제공 등 제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후자의 입장은 학내의 비공개 이념서클 및 조직에서 활동했던 인자들이 사회운동에 투신하면서 직간접적으로 기존의 지도핵심차원의 인물들과의 연결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었다( 현장론 노동야학, 생활야학운동). 또한 이 시기에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의 골간조직의 하나인 청년학생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그 산하에 민주구국학생연맹을 결성했다. 1970년대 학생운동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가 가능하다. 조직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합법, 비합법 서클을 조직하여 과학적인 이론학습을 강화 년대에 일시적이고 부분적이었던 서클이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대부분의 학교로 파급되었고, 이러한 서클을 통하여 지속적인 학습과 투쟁을 담보할 수 있었다. 투쟁 양상 면에서 1960년대의 이슈 중심의 불연속적인 투쟁양식에서 벗어나 연속성과 강고함을 보였는데, 비록 유신체제 선포를 전후한 시기나 긴급조치 9호 선포 11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21 직후의 시기에 일시적으로 후퇴하는 양상을 보였지만 전반적으로 1970년대를 통하여 학생운동이 지속되었음은 주지의 사실. 이들은 또한 강제징집이나 제적, 구속 등을 감수하는 자기희생적 투쟁을 통하여 민주화투쟁의 대중적인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의식적인 측면에서 사회과학적 인식을 심화시키고 민중성을 본격적으로 획득하는 단계. 1960년대 후반 학생운동 인자들의 전위조직 참여경험은 남한 사회변혁의 주체로서 기층 민중을 설정할 수 있는 경험을 가져다주었으며, 여기에 1970년대 초반의 전태일 분신 사건을 비롯한 기층 민중운동의 활성화는 학생운동 내부의 이론을 한 단계 발전, 심화시켰다. 1970년대 말 한국의 정치경제적 위기는 한층 심화되었고, 유신체제의 억압성과 반민주성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한 시기였다. 국민들의 유신체제에 대한 불만은 1978년 12월에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여당인 공화당보다 1.12% 더 많은 득표율을 기록한 데서 잘 나타난다. 박정희 정부는 체제 유지를 위해 강압정치를 강화하여 야당총재의 국회의원직 박탈, 제명 등 극단적인 정치행태를 보였다. 1970년대 사회운동은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지식인, 정당인, 종교인 등 광범위한 각계 민중 속에 투쟁이 확산되었다. 사회운동이 전민중적인 대중투쟁의 양상을 보였는데, 여기에는 종교인, 언론인, 문인, 법조인, 정당인 등 이른바 재야세력의 형성 및 활동이 두드러졌다. Ⅵ. 유신시대 광주 전남의 민주화운동 1. 함성지 사건 1972년 12월 9일 밤 광주시내 여러 학교에 뿌려진 유인물 함성 은 박정희 정부의 유신선포를 정면으로 공격하고 반대한 최초의 함성이었다. 박석무의 증언에 따르면(박석무 2003, ), 함성지는 전남대 농과대학 3층 강의실에 50여매, 상과대학 2층 강의실에 50여매, 문리대 이학부와 문학부의 강의실과 벤치에 90여매, 광주고등학교, 전남여고, 광주여고, 광주공고, 광주일고 등에 각각 20-30매씩 뿌려졌다고 한다. 119 민주화운동
122 <표 > 함성지 사건 개요와 내용 - 함성지 사건일지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함성 지가 전남대와 광주 시내에 배포 관련 학생 7명과 배후조종 혐의로 박석무(고창고 교사) 구속 관련자들 구속 관련자들 구속 광주지법, 1심 선고 (박석무, 이강, 김남주를 제외한 구속자 6명 집행유예로 석방) 항소심에서 나머지 구속자 3명이 석방(박석무 무죄) 대법원 피고인들의 상고를 모두 기각 - 함성지 내용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씨와 그 주구들은 권력에 굶주린 나머지 종신집권 야망에 국민의 귀와 군에 총 부리를 겨누었으며, 한국적 민주주의란 가면을 쓰고 국민의 고혈을 강취하고 있다. 세상은 관절이 빠져 가고 있는데 우리가 아픈 조국을 고치기 위하여 태어났다. 권력층의 학대와 농민수탈에 시달려 도끼와 죽창으로 봉기했던 1894년의 동학혁명, 사이비 애국자, 중상모리배, 매판자본가, 민족사라는 심판대의 피고석에 앉히노라. 자학과 어둠 속에 허탈을 일삼고 있는 언론인, 문화인, 청년 학생, 시민이여! 우리의 함성이 들리지 않는가? 역사적 장전을 소각시키고 한국적 민주주의를 날조한 반민족, 반민주세력의 무 서운 음모가 그칠 사이 없는 독재자의 복마전을 향하여 4 19정신으로 총궐기하자. * 출처 : 박석무(2005, 249) 박정희 정부의 유신 선포는 함성지 사건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비상조치 를 발표하였다. 국회해산과 헌법 중지, 헌법개정안 공고 및 국민투표회부, 72년 말 헌정질서 정상화 등을 골자로 하는 것이었다. 각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진 가운데 10월 27일 열린 비상 국무회의에서는 전문 및 12장 126조 부칙 11조로 된 헌법개정안을 의결 공고하였다. 11월 21일 유신헌법은 국민투표로 의결되었고, 12월 13일 비상계엄령이 해제되었다. 11월 22일 곽상훈 등 515명의 추천으로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후보로 등록, 12월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8대 통령으로 박정희를 선출하였다. 12월 27일 박정희는 제8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한국적 민주주주의 또는 민족적 민주주의 로 포장된 10월 유신 은 사실상 박정희의 일인 집권을 영구화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대통령에게 거의 무제한적인 권한을 집중시킨 채 일체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한국적 파시즘 이었다. 이러한 유신독재에 대항하여 전국 최초로 이를 비판하는 내용의 함성( 喊 聲 ) 지가 전남대와 광주 시내 일대에 뿌려졌다. 1972년 12월 9일 유신체제를 비난하는 함성 지가 전남대를 비롯해 광주 시내 고등학교에 배포되었다. 최초로 유신헌법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이었다. 이것을 주도한 것은 당시 12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23 전남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강과 김남주였다. 이강은 1972년 여름 카투사 근무를 마치고 제대하였다. 이강은 1969년 전남대 3선 개헌 반대시위를 주도한 뒤 그해 9월 군에 입대하였다. 이강과 김남주는 해남중 동기로 이강의 제대 이후 함께 살다시피 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함성에서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씨와 그 주구들은 권력에 굶주린 나머지 종신집권 야망에 국민의 귀와 눈에 총부리를 겨누었으며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가면을 쓰고 국민의 고혈을 강취하고 있다. 권력층의 학대와 수탈에 시달려 도끼와 죽창으로 봉기했던 1894년 동학혁명의 정신으로 사이비 애국자, 정상 모리배, 매판 자본가를 심판대의 피고석에 앉히노라. 자학과 어두움 속에 이탈을 일삼고 있는 청년 학생 시민이여. 우리의 함성이 들리지 않는가. 독재자의 복마전을 향하여 4,19정신으로 총궐기하라 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강은 경찰의 감시와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인쇄 관련 용품을 화순, 담양 등지를 돌며 하나씩 구입하였고, 중고 줄판을 광주 양동시장 부근 고물상에서 구입했다. 한꺼번에 사면 흔적이 남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함성의 글은 김남주와 이강이 번갈아 가며 작성했지만 김남주가 주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인쇄는 이강의 자취방에서 이뤄졌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12월 8일 밤이 되어서야 인쇄가 마무리되었다. 이강은 동생 이정(22세)과 이황(17세, 광주농고 3년), 조카 이정호(21세, 전남대 물리학과 2학년)가 묵지에 필사 하였고, 밤새 번갈아 등사기를 밀었다고 한다. 함성지는 10월 17일 선포된 비상계엄 때문에 휴교 중이던 대학들이 12월 10일을 기해 개교하자 개교 당일 학생들이 읽을 수 있도록 12월 9일 배포되었다. 8절지 500여매를 줄판으로 긁어 등사판에 인쇄하여 배포한 뒤, 이강은 동료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했다고 한다. 비상계엄은 친위 쿠데타이며 국회해산은 헌법의 파괴이고 민주주의에 대한 폭거다. 헌법 개정의 저의는 남북통일이 아니고 일당 독재와 장기집권을 구축하려는 데 있는 정치적 폭거이므로 이를 전복하여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합법적 투쟁으로는 이겨낼 수 없고 오로지 4 19적 혁명이 아니고서는 안 된다. 따라서 뜻을 같이하는 각급 학생들을 규합 선동하고 조직하여 4 19적 혁명과 같이 데모에서부터 폭동을 유발시켜 현 정부를 타도하고 제4공화국을 무너뜨린 후 새로운 체제의 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박석무 2005, 250). 함성 이 뿌려지자 정보기관은 주모자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이는 최초로 유신을 비판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며칠 뒤인 12월 15일 통일주체대의원 선거, 12월 23일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경찰은 탐문 수사를 계속했으나 주모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경찰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계속 수사를 하고 있었고 다음해 3월 중순 이강과 김남주의 행적에 주목하던 경찰에게 이강이 서울에 있던 김남주의 편지가 발견되었다. 당시 김남주는 73년 3월 초순 광주를 찾아 이강을 만났다. 둘은 함성에 이어 전국 대학에 뿌릴 고발 지를 만들기로 하였다. 121 민주화운동
124 고발 발간은 유신으로 인해 얼어붙은 전국 대학가에 반유신의 신호탄을 올리자는 뜻이었다. 또 전남대로 좁혀진 경찰의 수사망을 전국 단위로 키워 혼란시킬 목적도 컸다. 다음은 이들이 계획했던 고발지의 요지이다. 1972년 10월 17일을 기하여 권력에 굶주린 한 사나이에 의해 총칼로써 무참하게 유린당하고 있다. 4 19의 넋으로 무장한 우리의 고발 은 여러분의 고막을 울릴 것이요, 탐욕에 어두운 독재자의 눈에는 가시가 되리라. 자유의 적에 대하여는 끝까지 항거하고 피로써 투쟁하는 육신으로 혁명할 것을 선언한다. 제사( 第 死 )공화국의 운명의 날은 멀지 않았다. 젊은 얼은 눈을 떠라. 동학의 얼로 너의 투혼을, 4 19 넋으로 용맹을 갖추어라. 자유의 전리품으로 쌓아올린 독재자의 불안한 권력, 단 한 번의 유혈투쟁이면 와우 아파트보다 쉽게 무너질 숙명을 가진 제사공화국, 가난한 민중의 고혈을 빨아 모은 권력층, 단 한 번의 민중봉기면 불타는 대연각 보다 더 쉽게 한줌의 재로 사라진다. 너의 젊은 반골( 反 骨 )이 백골이 되기 전에 창으로 적의 심장을, 염통을 찔러라. 피로써 이 땅에 피를 내리게 한 결전의 그날, 이 땅을 쓸어버릴 그날 4월 혁명을 상기하자(박석무 2005, 251). 고발 은 이강의 주도로 그해 3월 15일 경에 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강과 동생 이황은 고발지 500매를 만든 뒤 이불보따리에 넣어 화물회사를 통해 김남주에게 우송하였다. 배달되는 주소는 김남주의 광주일고 동창인 이개석(서울대 동양사학과 2년)의 자취방이었다. 이강은 이어 전국대학 학생회 사무실에 고발지를 우송하라 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가 경찰에 포착되었다. 경찰의 주도로 화물회사에서 이불보따리가 수거되었다. 73년 3월 20일 오전. 이강은 학교 등굣길에 붙잡혔다. 이강은 담뱃불을 빌리자 며 접근한 4-5명의 사내에 붙들려 전남도경 대공 분실(광주시 금남로 현 전남경찰청 주차장 자리) 지하실로 연행되었다. 이강과 함께 했던 상과대학의 이평의, 김정길, 문리과대학의 이정호, 윤영훈, 법과대학의 김용래 등은 반국가단체를 구성하기 위한 예비음모라는 죄목으로 구속되었고, 이강과 김남주는 함성을 함께 작성 제작하고, 덧붙여 이강은 고발 을 작성 제작했다는 죄목으로 국가보안법 제1조의 반국가단체구성 예비음모라는 죄명으로 구속되었다. 사건이 이렇게 커진 데는 학생들의 반유신운동을 철저하게 색출하여 제거하려던 경찰의 의도도 작용했다. 이강과 김남주 등의 함성 고발지 제작 배포와는 별도로 3월 말 또는 4월 초 반유신 시위를 하자는 움직임이 전남대학교 내에 있었다. 당시 전남대학교 내에는 삼민회(김용래 주도), 그린트리(이정호 주도), 교양독서회(김정길 주도) 등 교내 서클이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수사 당국은 함성, 고발지 사건과 전남대생들의 반유신 시위 준비를 연계시켰다. 반국가단체 예비음모로 몰아가기 위해 조직의 수괴 로 박석무가 정해졌다. 이강, 김남주가 사실상 관련자의 전부였던 12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25 함성지 사건이 반국가단체 음모혐의로 바뀌었다. 이강, 김남주, 박석무 등 9명이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되고 6명이 불구속 기소되었다. 4월 19일 검찰에 송치될 때까지 한 달여 동안 고문이 계속되었다. 3월 30일, 4월 6일, 4월 12일 세 차례에 걸쳐 광주지검은 박석무, 이강, 김남주 등 전남대학교 졸업생 또는 재학생 9명을 구속하고 그밖에 6명을 불구속 입건하였다. 이들은 1개월여에 걸쳐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과 모진 폭력을 받았고, 유신을 비난하고 유신타도를 위해 젊은 학생들이 궐기해야 한다는 내용인 유인물을 국가를 전복할 목적으로 작성한 예비음모죄를 적용받았고, 구체적인 범죄행위와 전혀 관련성이 없이 단지 그 유인물을 보고 고지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불구속 기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박석무는 당시 대학원을 마치고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었는데, 사건 자체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단지 6 3학생운동 이후 전남대학교 학생운동의 선배그룹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후배들을 지령한 수괴로 지목되어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함성 고발지 사건과 관련하여 홍남순, 이기홍, 윤철하 변호사가 무료 변론을 맡았다. 1973년 9월 25일 광주지법은 1심 선고를 내렸다. 박석무, 이강, 김남주를 제외한 구속자 6명이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그리고 그 해 12월 27일 열린 항소심에서 나머지 구속자 3명이 풀려나왔다. 애초부터 관계가 없던 박석무는 법정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수괴가 무죄판결을 받고 종범은 유죄판결을 받은 기묘한 재판이었다. 대법원은 76년 6월 22일 피고인들의 상고를 모두 기각했다. 2.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은 전남대 함성 고발지 사건 이후 73년 4월 박형규 목사와 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F, 회장 나상기) 남산 부활절 예배 사건을 거쳐, 10월 서울 문리대 사건을 계기로 전국 대학가와 지식인 종교인 재야인사 등 까지 확산되었다. 소위 서울대 문리대 데모는 박형규 목사의 제일교회에 다니던 나병식, 황인성이 문리대 학생회장 도종수와 함께 주도했는데, 서울대 법대와 서울대 상대가 뒤따랐고 11월에는 연대, 고대, 이대, 한신대, 경북대 등으로 급속도로 번져갔으며 급기야 11월 5일에는 서울 YMCA에서 천관우 함석헌, 김재준, 계훈제, 홍남순, 지학순, 법정, 김지하, 이재오, 이호철 등 15인 지식인 시국선언으로 이어졌다. 이 시국선언은 이후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장준하 백기완 주도하에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으로 발전되어 유신체재에 대한 투쟁방식이보다 구체화되고 조직화 되게 된다. 이에 당황한 박 정부는 100만인 개헌 청원 서명운동을 겨냥해 74년 1.8 긴급조치 1, 2호를 선포하고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장준하 백기완을 구속했다. 이렇게 70년 후반 긴급조치 9호까지 그 악명 높은 긴급조치 시대는 시작되었다. 73년 후반의 이런 전국적 흐름들 속에서 대학생들은 10월 서울대 문리대 시위를 평가하면서 분산 고립된 투쟁의 한계를 극복하고 전국 대학을 조직화해서 집중된 투쟁을 해야 하며, 학생과 지식인들만의 투쟁이 아니라 민중투쟁으로 발전시켜야 유신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데 의견을 123 민주화운동
126 모으고, 전국을 서울 대구 광주 권으로 나누었다. 서울은 서울대, 대구는 경북대, 광주는 전남대를 중심으로 조직을 해 나가되, 전국적으로 강력한 조직적 연계를 갖기로 했다. 이러한 방침에 발맞추어 광주지역의 운동세력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전남지부장을 맡고 있었던 홍남순 변호사의 궁동 사랑방에는 박민기, 이기홍 등 야당 정치인은 물론 다수의 재야인사들이 모여 홍남순 변호사가 참여했던 지식인 15인 시국선언과 100만인 개헌 청원 서명운동의 실천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박석무, 양성우, 전홍준 등 전남대 학생운동의 소위 선배 그룹들은 서울지역의 조영래, 장기표 등과 연계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다. 74년 4월, 소위 민청학련으로 가는 길은 단순히 학생들만의 움직임이 아니라 재야, 지식인, 종교인 등 할 것 없이 전국의 모든 민주세력들이 반 유신투쟁의 깃발아래 뭉치기 시작했다. 73년 11월 20일, 전남대에서는 김세곤(법학과) 이철환(법학과) 등이 시국성토대회를 준비하다 서부경찰서에 연행되었으며 12월 3일에는 전영천(문리대)등이 교내 시위를 주도했다. 윤한봉은 농대를 중심으로 교양독서회 회원들과 만나고 있었고 문리대에서는 제대 후 복학한 김상윤과 윤강옥 등이 움직이면서 자연스럽게 신학기 대규모 조직적 투쟁의 분위기가 모아지고 있었다. 이제 조직적 체계와 골간만 세우면 되었다. 74년 3월 윤한봉은 서울대 문리대의 황인성과 만나 전국적 연대를 통한 반유신운동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다. 이후 전남 지역은 윤한봉을 중심으로 조직화되기 시작했는데, 전남대의 경우 김상윤(농대 등 일부 단과대 윤한봉)을 중심으로 조직화가 진행되었고 조선대 의대는 안상선, 전남대 의대 심재삼 등이 이들과 함께 했다. 윤한봉은 전남지역과 함께 전북대학교 등 전북지역 학생들과의 연대를 모색했으나 긴급조치 4호 선포 이후 다수의 전북대 학생들이 자수함으로써 전북대 학생들의 조직적 시위 참가는 없었다고 한다. 3월 20일 경 경북대 시위를 출발 신호로 전국 대학이 시위를 시작하기로 했는데 출발부터 실패였다. 정보기관에서 대학의 움직임을 낱낱이 파악하고 검거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급기야 청와대는 4월 3일 대통령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해서 소위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 전원 검거에 나섰다. 검찰 발표문을 통해 민청학련은 이철, 유인태 등 평소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던 몇몇 불순 학생들이 핵심이 되어 서도원, 도예종을 중심으로 한 인민혁명당계 지하 공산세력의 사주를 받아 일부 종교인과 반정부인사들이 결탁하여 유혈 폭동으로 정부를 전복하고 과도 연립정부를 거쳐 공산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다고 발표했다. 1974년 초 서울대, 경북대 그리고 전남대 학생들이 주모하여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학련)을 조직하였는데 이 지역에서는 전남대 윤한봉이 전남북 총책을, 전남대 김상윤이 전남대 연락책으로 활동하였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들은 같은 해 4월 9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그 날 아침 유인물 등을 뿌리며 학생동원에 들어갔으나 미리 정보를 알고 대기 중이던 경찰에 의해 모두 12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27 체포되었다. 이들은 화염병 투척 등 격렬하고 치밀한 시위계획을 세우고 행동에 들어갔는데, 정부는 이미 이 계획을 사전에 알고 초강경 조치를 취하여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4월 3일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여 자수를 권유하였으며, 사건이 터진 후에도 재판에서 최고 사형에서 대부분 10년 이상의 중형을 언도할 정도로 강경책으로 대응하였다. 전남대의 윤한봉과 김상윤은 내란음모와 긴급조치 1호, 4호 위반으로, 나머지 관련자들은 긴급조치 1호, 4호,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관련자 전원이 전남대학교 당국으로부터 제적처분을 받았다. 이 사건 이후 각 대학 안에는 소위 상담지도관실이 새로 설치되어 학생들의 움직임을 파악, 감시하고 정부 정보기관의 지시를 실행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분담지도교수제 등 학생지도 및 감시체제를 강화시켰다. 민청학련사건 관련자들은 계엄령이 내려져 있는 상황에서 모두 비상보통 군법회의에 기소되었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피고인 등은 오늘날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처해있는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용기와 활력을 제시한 2차적인 정치적 결단인 10월 유신에 대하여 이를 곡해한 나머지 현 정부는 유신체제와 대통령 긴급조치 등으로 언론 및 학원의 자유 등을 비롯한 국민의 자유를 억압, 말살하고 있다고 오산하여 이를 성토하는 대대적인 학생데모를 전개할 것을 기도했다 고 기소이유를 밝혔으며, 또 이들이 유신체제와 긴급조치는 국민을 탄압하고 독재하려는 악법이니 좌시할 수 없다. 우리 학생의 힘으로 이를 폐지시켜야 하며, 나아가 우리가 원하는 새로운 체제의 정부를 세우기 위하여 전국 대학이 연합체를 형성하여 조직적인 데모를 감행해야 하는데, 우리 전남대학교도 데모대를 조직하여 정권타도를 위해 투쟁하자 고 호소했다는 혐의를 중요시하였다.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 기소된 이 지역 전남대 학생들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 윤한봉(축산학과 4학년,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 이강(법학과 2학년, 징역 15년), 김정길(경영학과 2학년, 징역 15년), 김상윤(국문학과 3학년, 징역 12년), 최철(농학과 1학년, 징역 10년), 박형선(농학과 3학년, 징역 10년), 문덕희(수의학과 4학년, 징역 10년), 윤강옥(사학과 4학년, 징역 10년), 하태수(국문학과 2, 징역 10년), 이학영(국문학과 3, 징역 10년), 이훈우(경제학과 2, 징역 10년), 정환춘(건축학과 2학년, 징역 10년), 유선규(수학교육학과 3학년, 징역 10년), 박진(철학과 3학년, 징역 7년), 성찬성(영문학과 3학년, 징역 3년), 전영천(국문학과 2학년, 징역 7년), 이현택(농학과 3학년, 기소유예), 김윤봉(농학과 3학년, 집행유예) 이들은 1975년 2월 모두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으나 복학이 되지 않고 있다가 유신체제가 붕괴된 10 26이후 1980년에 이르러서야 복학이 되었다. 민청학련은 학생시위나 민중봉기로서 실패한 투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민족민주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 이후에 최초로 학생들만이 아닌 지식인 종교인 혁신계 인사 등 전민주세력이 연합하여 반유신 투쟁을 전개했다. 둘째. 투쟁의 공간을 캠퍼스와 거리만 아니라 감옥과 법정에까지 넓혔다. 민청학련 사건은 125 민주화운동
128 1024명이 조사를 받았고 그 중 253명이 군법회의에 송치되었다. 이제 감옥은 고립 격리된 공간이 아니라 동지를 확인하는 공간이고 운동가로서 단련과 학습의 장이 되었다. 셋째. 대량의 직업 운동가가 배출되었다. 단순한 민주화 운동의 영역을 넘어 민주주의와 민족통일, 사회변혁까지 운동내용을 심화시키고 낭만적 일시적 운동이 아닌 전 생애를 걸고 투신 결단하는 운동가들이 양산되었다. 넷째. 유신체제가 정치적 도덕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박 정부는 민청학련 사건을 통해 전 민주세력을 용공분자로 몰아 발본색원 하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인혁당계 인사와 학생 주모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고문이 전 세계에 폭로되고,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등 종교계 인사까지 모두 구속 하면서 세계 양심들의 분노를 샀다. 때 마침 미국 카터 행정부의 인권정책과 맞물려 국내외적 고립을 자초하고 결국 사형 무기형 20년형을 언도하고도 인혁당계 인사를 제외하고는 1년도 못되어 풀어 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3. 침체기의 학생운동들 민청학련 사건은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전국적인 규모의 반유신운동으로서 박정희 정부를 긴장하게 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유신선포 이후 움츠려들었던 재야 등 반유신세력의 존재감을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국적인 규모의 학생 시위가 급작스럽게 전개되는 과정에서 입은 손실도 만만치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민청학련 사건 이후 정부는 학생운동을 비롯한 제반 사회운동을 억압하고 일인 장기독재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하는 한편, 1975년 중반기부터 학도호국단을 조직하고 자치성격의 학생회를 폐지했다. 또한 그해 여름부터는 방학을 이용하여 일반 학생들에게도 병영집체교육이 실시되었다. 결국 1970년대 후반기는 학생운동이 또 한 번 침체되는 시기로 평가된다. 이 시기의 청년학생운동은 민청학련 이전의 불분명했던 노선이 긴급조치 발동으로 완전한 억압상태에 빠져들면서 현실운동에 기반을 둔 두 가지 입장으로 표면상 명확히 분리되었다는 특징을 갖는다. 하나는 정부의 공세로부터 운동의 지속성을 담보할 수 있는 활동공간을 고려한 공개운동기구로의 편입이었다. 다른 하나는 정통적인 비합법 비공개운동만이 전체 운동을 활성화시킬 수 있으며, 그것은 전위 핵심의 육성 강화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그 연장선상에는 학생운동 출신자들의 노동현장 투신이 포함된다. 전자는 교회라는 상대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조직에서 학습과 실천의 계기를 잡아갔고, 학내에서는 종교서클을 중심으로 학외에서는 민주청년협의회, 기독청년협의회 등을 중심으로 억압상태에 대처했던 그룹의 논리였다. 이들은 학생운동권이 스스로의 재생산구조를 못 갖춘 상태에 있을 때 교회와 공개운동기구를 통해 조직원을 양성해 나갔고 기도회, 강연회 등을 통해 대중선전과 반정부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12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29 또한 민중노선을 자기논리로 수용하면서 산업선교회 등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을, 가톨릭 농민회를 중심으로 농민운동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더불어 긴급조치 시절 학생운동은 교회조직을 통해 양성된 인자들이 학내로 들어가 학생운동을 활성화, 운동화 하는 측면이 강했으며, 신앙결단적인 민주투쟁을 지속해 나갔다. 그러나 공개운동기구 노선은 이후 각 대학의 사회과학서클이 장기정립하고 현장노선이 강화되면서 학생운동으로부터 점차 배제되어갔다. 공개운동기구 노선이 약화된 결정적인 이유는 그것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성명서의 발표, 자료의 수집과 배포, 교육학습의 장 제공 등 다른 운동권을 지원하는 일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합법 비공개 활동을 중심으로 한 운동의 흐름은 주로 학내의 비공개 이념서클 및 조직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여러 형태로 사회운동에 투신하면서 기존의 핵심인물과의 직 간접적인 연결을 통해 확대 재생산 되었다. 이들은 당시 대세를 이루었던 공개운동기구의 활성화에 대하여 외곽체계에 불과하다고 혹평하면서 과학적으로 조직된 전위조직만이 전체 운동을 올바르게 지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현장을 강조하였으며, 주로 야학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확대하고 있었다. 이 시기 지역의 학생운동은 두 흐름이 모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현상적으로 네 갈래의 흐름으로 분화하였다는 평가가 있다. 첫 번째는 학생을 동원하여 학내 투쟁에서 운동의 기점을 삼으려는 입장이고, 두 번째는 종교계의 사회운동 단체를 통하여 나름대로의 운동을 전개하려는 입장이 있었고, 세 번째는 지하화한 이념적 전위조직을 중심으로 현상적으로는 야학 등과 연결되면서 현장을 중시하는 입장이고, 마지막으로는 문화운동 소조의 선전적인 문화투쟁을 활동의 지침으로 정한 입장이 있었다. 이들 각각의 입장들은 서로 명확하게 구별되는 조직을 구성했던 것은 아니며, 서로 중복되기도 하고 하나의 두 조직이 여러 가지 입장으로 나눠지기도 했다. 이 시기에 전개된 반유신운동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민청학력 사건 이후 전개된 최초의 반유신운동은 1974년 10월 14일 발생한 전남대 반유신 시위다. 1974년 10월 14일 전남대 학생 700여명은 구속학생 석방, 언론자유 보장, 학원사찰 중지, 부정부패 등을 외치며 계림동까지 진출해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기동경찰의 제지를 받고 투석전으로 맞섰으나 소식을 듣고 달려온 교수들의 만류로 해산하였다. 한편 10월 18일 전남대에서는 이날의 시위와 관련해 주동자 6명의 학생들을 무기 및 유기정학에 처하였다. 이 시위와 관련하여 김선흥(영문학과 3학년), 김병한(정외과 3학년), 장비(철학과 3학년) 등 3명이 무기정학을 허신석(법학과 3학년), 노춘헌(법학과 3학년), 송삼렬(법학과 3학년) 등 3명이 유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전남대는 휴강이 계속되다가 10월 25일부터 의대를 제외하고 무기휴강에 들어갔다. 1974년 11월 19일에는 전남대 의대 본과 1, 2, 3학년생 150여명 교내시위 후 해산한 사건이 발생했다. 11월 20일에는 전남대 의대 본과 4학년과 간호학과를 제외한 1, 2, 3학년생들에게 무기한 127 민주화운동
130 휴강조치가 내려졌다. 11월 19일 낮 12시 30분경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본과 1, 2, 3학년 학생 150여명은 전남대 의대 제1강당에 모여 국민인권 존중하고 언론자유 보장하라, 부정축재자를 엄단하라 는 등 7개항의 요구조건을 인쇄한 유인물을 배포하며 교내시위를 전개하다 교수들의 제지로 해산하였다. 이 시위로 인하여 배춘상(의학과 1학년)이 무기정학, 김흥수(의학과 1학년)와 김철수(의학과 1학년) 등이 유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한편 전남대 의과대학 당국은 11월 20일부터 본과 4학년과 간호학과를 제외한 1, 2, 3학년생들에게 무기한 휴강조치를 내렸다(전남대학교 30년사편찬위원회 1982, 708).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반유신 시위가 발생한지 열흘 후 전남대 간호전문학교 반유신 결의문 배포 사건이 발생한다. 11월 29일 전남대 간호전문학교에서는 구속학생 언론인 종교인 석방, 유신헌법개정 등 5개항의 결의문을 기숙사 앞에서 채택한 뒤 각 강의실에 배포하였다. 이날의 유인물 배포사건으로 인해 교수회의에서는 주동자인 이성자, 김상숙 두 학생을 무기정학 조치했다(전남대학교30년사편찬위원회 1982, 708). 1974년 12월 11일에는 그해의 마지막 반유신 시위가 발생했다. 그해 55일간의 휴강을 마치고 전남대학교가 12월 5일 개강했다. 개강한 지 일주일 만인 12월 11일 전남대 학생 약 200여명은 오전 10시부터 구속학생 석방, 유신헌법 개정, 학원사찰 중지, 언론자유보장, 생존권보장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시위를 전개한 뒤 전남대 동문을 빠져나가 출동한 기동경찰과 대치한 뒤 다시 교내로 돌아와 도서관 앞 잔디밭에서 농성을 전개하였다. 학생들은 오후 6시경 다시 동문을 거쳐 진출하다가 교수들의 만류로 해산하였다. 이날의 시위는 오전 10시 문리대 문학부 앞에서 선언문을 낭독한 20여명의 학생들이 상대를 경우 교학과, 농대, 법대, 공대, 사대를 거치는 사이 200여명으로 늘어났다. 학생들은 정부의 시녀 국회는 국민을 우롱하지 말라 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대학본부로 향하여 선언문을 채택한 뒤 유신헌법이 개정될 때까지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시위를 계속하기로 결의하였다. 경찰은 귀가중인 학생 60여명을 연행하였으나, 이동훈(농업경영학과 3학년)을 제외한 모두를 귀가시켰다. 이날 시위의 주모자로 이동훈(농업경영학과 3학년), 동경선(농업경영학과 4학년) 등은 무기정학, 신관표(축산학과 3학년)는 유기정학 처분을 받았다(전남대학교30년사편찬위원회 1982, 708). 학생이 주동이 된 운동이 아닌 대표적인 사건은 제2명동사건 이다. 원래 명동사건 은 1973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3 1절 기념미사를 빌미로 정부가 재야의 지도급 인사들을 정부전복선동 혐의로 대량 구속한 3 1민주구국선언사건 을 지칭한다. 사건 직후 검찰은 일부 재야인사들이 반정부분자를 규합, 민주회복국민회의 갈릴리교회 등 종교단체 또는 사회단체를 만들어 각종 기도회 수련회 집회 등 종교행사를 빙자하여 수시로 회합 모의하면서 긴급조치 철폐, 정부퇴진 요구 등 불법적 구호를 내세워 정부전복을 선동했다 고 발표했다. 이 사건의 직접적 발단이 된 것은 이날 기도회의 마지막 순서로서 1이 나라는 민주주의 기반 위에 서야 12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31 한다. 2경제입국의 구상과 자세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3민족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진 최대과업이다 라는 내용의 <3 1민주구국선언> 낭독이었으나, 그 배경에는 1월 23일의 원주기도회사건 및 원주선언, 2월 16일 전주기도회에서의 김지하 관계발언과 유인물 등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기소된 사람은 정치인 윤보선 김대중 정일형을 비롯하여 <씨알의 소리> 발행인 함석헌, 윤반웅 문익환 목사, 함세웅 신현봉 김승훈 신부, 이문영 서남동 교수, 박형규목사 등이 국가내란예비음모 등 반공법,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는 등 모두 18명에 달했고 재판부에 대한 기피신청, 변호인단 총사퇴 등 파란을 일으킨 끝에 문익환 김대중 윤보선 함석헌에게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이 선고되는 등 관련자 전원에게 실형이 선고되었다. 이 사건은 피고들이 사회의 지도급 인사라는 점에서 내외에 미친 파장이 컸으며 재판과정에서 정치적 법률적 체제공방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등 유신체제에 대한 집중적 거부와 항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지만, 한편 70년대 명망가 중심의 운동을 대표하는 사건으로 그 한계가 지적되기도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재야와 정치인, 신교와 구교,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의 연대가 강화되었다. 1976년 3월 1일에 발생한 남산 부활절 예배사건은 기독교회의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권력 당국에 의한 선교침해로 이해되었으며, 이에 한국기독교장로회는 또다시 이러한 선교침해가 발생할 것을 대비하여 선교활동자유수호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974년 12월 13일 전남노회는 총회의 지시에 따라 광주시 양림교회에서 기장 전남노회는 선교활동자유수호위원회를 발족시켰다. 1976년 3월 1일 민주구국선언서가 발표되고 명동사건 이라는 민주구국선언사건이 발생, 성직자 6명, 평신도 1명 등 다수의 기장 소속 인사들이 구속자에 포함되자 기장은 이 사건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며 관찰하였다. 기장 전남노회도 구속인사들의 선언선 발표 행위가 정치적 야심이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신앙적 고백행위였음을 알게 되었고, 당국의 고의적인 사실왜곡 보도에 대항하여 교회의 입장을 밝힐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1976년 3월 18일 목포 연동교회에 모인 기장 전남노회 임시노회는 이 사건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는 결의문을 작성 발표하기로 결정하고 문안작성을 위한 선교활동자유수호위원회에 위임하였다. 위임을 받은 동위원회는 7인 기초위원(조홍래, 윤기석, 임기준, 강신석, 고민영, 유기문, 배성룡 목사)을 선정하여 문안을 기초케 하였다. 7인위원회는 노회의 일치된 입장을 정리하여 문안을 작성한 후 개인서명을 하여 3월 26일 이를 노회 산하 140여 교회에 발송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를 사전에 알게 된 경찰이 이를 압수함으로써 결의문 발송은 좌절되었다. 4월 22일 광주 한빛교회에서 정기노회가 열리자 기초위원들은 결의문 내용을 좀 더 선명하게 하기 위해 유신헌법 철폐하고 민주헌정 회복하라 는 항목을 첨가, 4개항의 결의사항을 포함한 결의문을 작성하여 이를 임기준 목사가 낭독하고 130여명의 노회원들이 만장일치의 박수로 채택함으로써 경찰의 제지로 저지당했던 노회 입장 천명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이후 이 결의문을 기도회 등 기회 있을 때마다 낭독하기로 하였다. 5월 18일 양림교회에서 열린 임시노회에서 배성룡 목사가, 7월 8일 함평군 함평읍 교회에서 129 민주화운동
132 모인 기도회에서 윤기석 목사를 이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8월 10일 광주 양림교회에서 기장 전남노회 임시노회가 개최되었다. 임시노회에 앞서 선교활동자유수호위원회 주최로 고난 받는 자들을 위한 기도회가 있을 예정이었다. 이날 교통 혼잡으로 설교자가 지각을 한 관계로 기도회는 오전 11시 30분에 시작되었다. 임기준 목사의 사회로 시작된 기도회에서 고민영, 이한철 목사와 이성학 장로가 기도를 시작하였고, 장광섭 목사가 선교자유와 인권문제를 내용으로 설교한 후 찬송가를 부르고 강신석 목사가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참석자들은 박수로 이를 채택하였고, 이준묵 목사의 축도로 기도회가 끝났다. 이어 조홍래 기장 전남노회장이 등단하여 임시노회가 개최되어 오후 3시경 폐회하였다. 모든 일정이 끝나자 참석자들은 교회 주변의 분위기로 보아 결의문 낭독자인 강신석 목사의 신변 위협을 예감하고 상호 인사교환 등 산만한 분위기를 틈타 그를 밖으로 피신시켰다. 끝가지 남은 20여 노회원들은 교회 친교실에 모여 대책협의를 하였다. 그리하여 구속사태가 발생할 경우 3일후 기도회를 가지는 한편, 모두 함께 들어가자는 데 합의하였다. 이런 도중 기관원들이 해산을 종용하였고, 노회원들은 수사기관이 먼저 해산하라고 요구하였다. 노회원들이 밖으로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수십 명의 기관원들이 기도회 순서를 맡은 사람들은 남아줄 것을 종용해 임기준, 조홍래, 윤기석 목사와 이성학 장로가 광주경찰서를 거쳐 광주서부경찰서에 연행되었다. 이날 오후 5시경 이 같은 연행사태에 항의하기 위해 은명기, 서용주, 윤제현 목사 등이 광주경찰서로 찾아가자 경찰은 은명기 목사를 서부경찰서로 연행하였다. 그 후 이한철, 고민영, 장광섭 목사 등이 연행되고 8월 11일 오전 9시 30분경 강신석 목사가 서용주, 유재현 목사와 함께 자진 출두하였다. 8월 12일 오전 목포에서 유기준 목사가 연행되었다. 대부분의 노회원들은 임시노회가 끝난 후 가마미 해변에서 수양회를 가질 예정이었기 때문에 그곳으로 갔으나 강신석 목사 수배를 이유로 기관원들이 검문검색을 하는 등 분위기가 어수선하여 모두 흩어졌다. 박종철, 김현식 목사 등 9명이 여관에 모여 대책을 협의한 후 임명흥 목사를 기장 총회에 보고하기 위하여 긴급 상경시키고, 양림교회에서 8월 14일 비상임시노회를 소집하기로 합의하였다. 8월 14일 오전 11시 당국의 회유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소식을 전해 듣거나 비상연락망을 통하여 소식을 접한 목사 40명, 장로 20명을 포함한 신도 200여명이 광주의 한빛교회에 모여 기도회와 임시노회를 개최하였다. 이날의 임시노회는 8.10선언사건 9인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12시 30분경 제1차 대책위원회를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하고 8개항의 결의사항을 채택하였다. 13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33 - 대책위원회 고문:이준묵 목사 위원장:안동해 장로. 총무: 이서하 목사 위원: 유재현 목사, 박재봉 목사, 김해동 목사, 임병흥 목사, 양병환 목사, 김의용 목사, 조아라 장로 - 결의사항 선언사건에 의하여 구속된 동역자들의 주장은 우리 전남노회 전원의 신앙고백이요, 주장임을 확인한다. 2. 우리 10여명의 노회원을 연행, 구속한 것은 분명한 신앙자유의 침해로서 지극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3. 구속된 성직자를 즉시 석방하라. 4. 우리 노회는 구속자가 전원 석방될 때까지 노회원 전원과 전교회는 구속자의 고난에 동참하며 위하여 기도한다. 5. 본 대책위원회의 필요한 재정은 노회에서 지원해준다. 6. 본 대책위원회의 필요하고 시급한 정책은 본 대책위원회에 일임한다. 7. 오늘 임시노회에 참석한 전회원도 구속자가 석방되기까지 계속 농성 기도한다. 8. 당국과 필요한 기관의 방문과 대화를 위하여 본 대책위원회의 4인 대표위원(대표 안동해, 김해동, 박재봉, 조아라)을 선정하고 대처하도록 한다. 이 결의에 따라 임시노회 참석자들은 농성기도에 들어갔는데, 경찰은 이날 오후 은명기, 고민영, 장광섭, 이한철, 유기문 목사와 이성학 장로를 석방하였다. 이에 대책위원회는 오후 6시 다시 모임을 갖고 기도회는 오후 9시까지 계속한 후 일단 해산하고 8월 16일 오전 11시 한빛교회에서 속회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박재봉 목사를 공식 대변인으로 선정하였다. 또한 8월 10일 오후 6시 전화통보를 받은 기장총회는 8월 11일 오전 10시에 김익선 부총무를 광주로 보내 사태를 파악하는 한편 전남도경찰국을 방문하여 은명기 목사의 자택수색과 연행에 대하여 항의하였다. 8월 14일 오전 8시 교회와사회위원회가 모여 대책을 협의하고 이영민 총무, 권영진 부회장 등을 광주로 파송하여 사건 진행을 조사케 하였다. 기장 전남노회 임시노회가 열리는 8월 14일 민주구국선언사건 피고인 가족 10여명이 한빛교회를 방문, 연행된 사람들의 가족들을 위로 격려하고자 광주에 도착하였으나 광주고속버스터미널에서 기관원 100여명과 대치, 결국 서울로 강제 송환되었다. 8월 15일 대책위원회는 3차 대책위원회를 갖고 다음의 사항을 결의하였다. 131 민주화운동
134 1. 구속자의 시무교회 강단은 해당 시찰회에서 책임지고 강구하도록 한다. 2. 구속자가 시무하던 교회에 예배, 행정, 기타 문제를 해당 시찰장이 책임지고 돕도록 한다. 3. 구속자의 시무교회에서 구속된 목사가 석방되기까지 계속해서 생활비를 드린다. 4. 본 노회 모든 교회는 예배시간마다 8.10사건에 대한 기도를 한다. 5. 8월 29일 주일에 8.10사건 구속자를 위한 헌금을 실시하도록 한다. 6. 각 노회에 8.10사건에 대한 보고활동과 기도와 협력을 부탁하도록 한다. 7.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호소하여 세계교회에 8.10사건을 알리고 협력을 구하도록 한다. 8. 8월 16일 밤은 참석노회 전원이 철야기도회를 가지도록 한다. 9. 8월 16일 오전 예배순서 담당자에 설교 은명기 목사, 사회 박재봉 목사, 기도(구속자를 위하여) 김해동 목사, 기도2(선교자유를 위하여) 임명흠 목사, 8.10사건 경과보고 이서하 목사 등을 선정한다. 10. 경찰이 모든 집회를 방해하지 않도록 강력 대책과 항의하도록 한다 월 16일 철야기도회 인도자(김연재 목사, 김경식 목사, 양태운 목사, 박종삼 목사, 김덕조 목사, 유기문 목사, 서용주 목사)를 선정한다. 12. 변호인을 협력단체와 협의하여 선정하도록 준비한다(이기홍 변호사 등). 이날 오후 6시에는 양림교회에서 광주기독교 연합회 주최로 8.15기념예배가 열렸는데, 참석자들은 고난 받는 자들을 위해 헌금하였으며 8.10선언사건의 진상이 보고되었다. 그리고 광주 시내의 광주 기독교연합회 목사들과 연합단체 지도자들은 비공개로 순회하며 갖다가 7월 8일부터 공개한 목요기도회를 확대하기 시작하였고, 지방 교회들도 1일 철야기도회를 가지고 주일예배를 통해 8 10사건을 보고하고 기도하였다. 8월 16일 예정대로 광주 한빛교회에서 기도회가 열렸다. 당국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위협, 회유, 노골적인 저지 등의 수단을 강구하였으나 신도들은 이 같은 방해를 피해 속속 모여들었다. 무안읍교회는 8월 15일 주일밤 철야기도회를 강제 해산하려는 경찰과 맞서느라 소란이 발생하였고, 비상노회의 연락을 받은 해남 강진 장천교회 김경식 목사는 감시하는 기관원의 눈을 피해 뒷문으로 교회를 빠져나와 광주에 도착했으며, 남창교회 임명흠 목사는 새벽에 들이닥친 경찰들을 식당으로 안내한 뒤 식당 뒷문을 빠져나와 광주에 도착하였다. 강진읍교회의 60여 교인들은 경찰이 강제 연행하려 하자 해산한 뒤 40여명이 각기 다른 길로 광주에 도착하였다. 그밖에도 많은 신도들이 광주에서 열린 비상노회 기도회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당국은 이날 강신석, 임기준, 조홍래, 윤기석 목사를 구속, 송치하였다. 이에 8월 19일 기장 전국청년연합회 교육대회 참가자 일동은 8월 10일 광주에서의 목사님들의 선언을 진정한 민중의 소리로, 민중을 위해 십자가에 희생된 예수를 따르는 신앙고백임을 고백한다 고 천명하였다. 당국은 13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35 성직자의 구속이 사회적 관심사로 부각되자 이 사건에 대한 대책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다. 한편, 10월 26일 한국기독교장로회 제61회 총회는 동 사건에 대한 견해를 밝히면서 구속된 전남노회 소속 목사들은 조속히 석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같은 석방 요구에도 불구하고 당국은 오히려 탄압을 가하였다. 구속자들의 변호인 및 가족들의 면회를 통제하거나, 기장총회의 문서가 담긴 우편물들을 검색해 그 내용물을 빼내는 불법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이에 NCC인권위원회와 기장 전북노회는 각기 건의문과 항의서한을 발표하였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11월 31일 첫 공판이 열렸다. 6차에 걸친 1심 재판에서 검사는 피고인들에 대해 긴급조치 9호를 적용 징역 10년과 자격정지 10년씩을 구형하였고, 재판부는 12월 31일 임기준, 조홍래 목사에게 각각 징역 6년, 자격정지 6년, 윤기석, 강신석 목사에게는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하였다. 항소심에서 검사는 1심고 같은 형량을 구형하였고, 1877년 4월 2일의 선고공판에서 광주고등법원은 임기준, 조홍래 목사에게 징역 4년, 자격정지 4년, 윤기석, 강신석 목사에게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하였다. 피고인들은 이에 불복해 상고하였으나 1977년 7월 26일 대법원은 이들의 상고를 기각하였다. 이어 1977년 8월 15일 네 명의 목사들을 모두 석방하였고, 8월 23일 전남노회는 출옥 환영 예배를 보았다. 한편 자신의 석방소식을 접한 임기준 목사는 8월 13일부터 학생들을 먼저 석방하라 며 금식에 들어갔다. 제2의 명동사건 에 대한 당국의 보복조치는 사건 관련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파급되었다. 채방웅은 제2의 명동사건 으로 연행되었던 10인 중의 한 명인 이성학 장로의 사위로서 1960년 경찰에 투신해 고흥경찰서 두원지서의 지서장이었는데, 1977년 2월 24일 느닷없이 전남도경찰국의 하명이라며 고흥경찰서는 사표제출을 강요받았다. 한편 대책활동 중 8월 23일 연행되었던 광주기독교 연합회 회장 류연창 목사는 1976년 12월 23일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고 출감하였다(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1987, ). 4.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 은 1978년 6월 27일 전남대학교에서 김두진 김정수 김현곤 명노근 배영남 송기숙 안진오 이석연 이방기 이홍길 홍승기 등 11명의 교수가 국민교육헌장을 비판하는 <우리의 교육지표>를 공동으로 발표하려 했던 사건이다. 이들 교수들은 오늘의 교육의 실패는 민주주의에 우리 교육이 뿌리박지 못한 데서 온 것 이라고 주장하고, 1인간존중의 교육, 진실을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을 위한 일상생활 및 학원의 인간화 민주화 2교육자 자신의 인간적 양심과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적 정열에 의한 교육 3외부간섭 배제, 구속학생 석방 및 제적학생 복적을 위한 노력 43 1정신과 4 19정신의 계승 전파, 자주평화통일을 위한 민족역량 함양의 교육 등 4개 항에 합의하고 그 실천을 다짐했다. <우리의 교육지표>에 서명한 11명의 교수는 이로 인해 133 민주화운동
136 모두 해직되었으며, 이 사건과 관련하여 송기숙 교수와 연세대 성내운 교수가 구속되었다. 1978년 6월 27일 전남대 김정수, 김현곤, 명노근, 배영남, 안진오, 이석연, 이홍길(이상 문리대), 김두진, 홍승기(이상 사범대), 이방기(법대) 등 총 11명의 교수들 우리의 교육지표 성명을 발표하여 중앙정보부 전남지부로 즉각 연행되었다. 6월 28일에는 이화여대 이효재 교수가 우리의 교육지표와 관련하여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1978년 6월 29일 전남대 학생 700여명이 6 27 양심교수 연행에 항의하며 도서관 2-3층을 점거하고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양심교수의 석방과 어용교수의 퇴진, 학원사찰 중지 등을 요구하자 경찰은 페퍼포그를 동원하여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경찰과 학생들의 투석전이 벌어지고 100여명의 학생이 연행되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전남대 교수들의 6 27선언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송기숙 교수의 즉각 석방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6월 30일 전남대 학생들은 6 27 양심교수 연행에 대한 전남대 민주학생 선언문 을 낭독하고 도서관 점거농성을 개시했다. 이에 경찰은 도서관에 폭력적으로 난입하여 학생들을 진압했다. 광주 YMCA 앞 등 광주 시내 전역에 걸쳐 산발적으로 가두시위 계속되었고, 이에 대응하여 경찰의 폭력적 진압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남녀 학생 100여명 부상을 입었고, 6월 29일과 30일 이틀 동안 500여명의 시위자가 연행되었다. 7월 4일 전남대 송기숙 교수는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구속되고, 11명 교수 전원이 해직되었다. 조선대 학생 김용출, 박형중, 양희승, 유재도 등 4명도 전남대 학생들과 함께 데모를 진행하려다 실패하고, 교내에 반정부 유인물 500여장을 배포하고, 교내 곳곳에 페인트로 유신철폐구호를 쓴 혐의로 구속되었다. 8월 28일 광주지방법원 합의 3부는 송기숙 교수에게 징역 및 자격정지 4년형을 선고했다. 12월 28일 성래운 전 연대교수가 전남대의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사건과 관련하여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고, 이튿날인 12월 29일 광주고등법원 항소심에서 송기숙 교수의 항소가 기각되었다. 1979년 12월 23일 박정희의 암살 이후 최규하의 대통령 취임식 때 송기숙, 성래운 교수가 특별사면을 받았다. 이 선언에는 전남대 교수 11명과 연세대 해직교수 성래운 교수 외에도 전국의 대학 교수들이 참여하기로 계획되었다. 송기숙 교수는 서울대 영문과에서 이미 해직된 백낙청 교수를 78년 초 찾아갔다가 그의 소개로 교수선언에 동의해줄 만한 몇몇 현직 또는 해직교수들을 만났다. 해직교수협의회 대표인 성래운(전 연세대 교수), 서울대 교수 안병직 등이 그들이었다. 각 대학별로 동조자를 모색하되 70명 정도가 될 때 선언문을 발표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송기숙은 6월 12일 전남대 교수 11명을 서명자로 확보하였다. 그러나 6월 서울에 온 송기숙은 선언의 대표자를 맡겠다는 사람이 없으며 별도 선언문을 채택하겠다는 학교가 많다는 소식을 들었다. 6월 26일 광주로 돌아간 송기숙 교수는 6월 27일 광주에 온 성래운 교수로부터, 박정희 정부의 정보 수집능력으로 볼 때 13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37 계획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고 그러면 계획이 무산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날 송기숙과 성래운은 말을 맞추어 서명 참여 교수 이외의 이름은 끝까지 비밀에 부치기로 약속한 후 헤어졌다. 이는 선언문 초안 작성자이자 창작과 비평사를 맡고 있는 백낙청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6월 26일 성래운 교수는 전남대 교수 11명의 이름으로 된 선언문을 AP통신, 아사히 등 외국 언론사에 보내고, 서울대를 비롯한 몇몇 대학교수들에게도 이를 우송하였다. 다음날 광주에서는 전남대 교수 11명 명의로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이 발표되었다. 이 성명서가 발표되자 그 날로 서명한 교수들은 중앙정보부 전남지부로 연행되어 이틀간 조사를 받았고, 그 가운데 국문과 교수이자 소설가인 송기숙 교수는 7월 4일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구속되었으며 서명교수 전원 해직되었다. 서울에서 서명한 이화여대 이효재 교수가 수사기관으로 연행돼 조사를 받았고, 성래운 교수는 수배를 받던 중 1979년 1월 체포되어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 8월 28일 광주지방법원 합의3부(재판장: 문영택 판사)는 송기숙 교수에게 징역 및 자격정지 각 4년을 선고하였다. 12월29일 광주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선고공판과 1979년 3월 27일의 대법원 상고심에서도 항소와 상고가 기각되었다. 한편 연행되어 광주로 이송된 성래운 교수는 1심에서 징역 및 자격정지 각 2년형을 선고받고 항소와 상소심에서도 기각되었다. 송기숙 교수와 성래운 교수는 광주교도소에서 복역하던 중 송기숙 교수는 1979년 7월 17일에, 성래운 교수는 8월 15일에 각기 석방되었다. 이들은 1979년 12월 23일 최규하 대통령 취임식 때 특별 사면되었다. 135 민주화운동
138 우리의 교육지표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 한 마디로 인간다운 사회는 아직도 우리 현실에서 한갓 꿈에 머물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현실을 바로 알고 그것을 개선할 힘을 기르는 일이야말로 인간다운 인간을 교육하는 길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 역시 이 사회에서는 우리 교육자들의 꿈에 머물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마구 누르고, 자손대대로 물려줄 강산을 돈을 위해 함부로 오염시키는 풍조가 만연한 가운데 진실과 인간적 품위를 존중하는 교육은 나날이 찾아보기 어려워가고 있다. 무상의 의무교육은 빈말에 그치고 중고등학교에 진학한 학생들도 과밀교실과 이기적 경쟁으로 몸과 마음을 동시에 해치고 있으며 재수생 문제와 청소년범죄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사회문제가 된 지 오래다. 그리고 온갖 시련과 경쟁 끝에 들어간 대학에서는 진실이 외면되기가 일쑤고 소중한 인재가 번번이 희생되고 교육적 양심이 위축되는 등 안타까운 수난을 거듭하고 있다. 대학인으로서 우리의 양심과 양식에 비추어볼 때 오늘날 교육계 안팎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자발적 일치를 이룩할 수 있게 하는 민주주의에 우리 교육이 뿌리박지 못한데서 온 것이다. 국민교육헌장은 바로 그러한 실패를 집약한 본보기인 바, 행정부의 독단적 추진에 의한 그 재정경위 및 선포절차 자체가 민주교육의 근본정신에 어긋나며 일제하의 교육칙어를 연상케 한다. 뿐만 아니라 그 속에 강조되고 있는 형태의 애국애족교육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있다. 지난날의 세계역사 속에서 한 때 흥하는 듯 하다가 망해버린 국가주의 교육사상을 짙게 풍기고 있는 것이다. 부국강병과 낡은 권위주의 문화에서 조상의 빛난 얼을 찾는 것은 잘못이며, 민주주의에 굳건히 바탕을 두지 않은 민족중흥의 구호는 전체주의와 복고주의의 도구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 또 능률과 실질을 숭상한다는 것이 공리주의와 권력에의 순응을 조장하고 정의로운 인간과 사회를 위한 용기를 소홀히 하는 결과가 되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교육이 선행되지 않은 애국애족교육은 진정한 안보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실천이 결핍된 채 민주주의 보다 반공만을 앞세운 나라는 다 공산주의 앞에 패배한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지 않는가? 이 땅에 인간다운 사회를 실현하고자 하는 우리는 격동하는 국내외의 역사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슬기롭게 생각하고 용기 있는 행동할 사명을 띠고 있다. 이에 우리 교육자들은 각자가 현재 처한 위치의 차이나 기타 인생관, 교육관, 사회관의 차이를 초월하여 다음과 같은 우리의 교육지표에 합의하고 그 실천을 다짐한다. 1. 물질보다 사람을 존중하는 교육, 진실을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하여 교육의 참 현장인 우리의 일상생활과 학원이 아울러 인간화되고 민주화되어야 한다. 2. 학원의 인간화와 민주화의 첫 걸음으로 교육자 자신이 인간적 양심과 민주주의에 대한 현실적 정열로써 학생들을 가르치고 그들과 함께 배워야 한다. 3. 진실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대한 외부의 간섭을 배제하며, 그러한 간섭에 따른 대학인의 희생에 항의한다 정신과 4 19 정신을 충실히 계승전파하며 겨레의 숙원인 자주평화통일을 위한 민족역량을 함양하는 교육을 한다. 1978년 6월 27일 전남대학교 교수 일동 13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39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은 미수 사건 이었다. 그렇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서명에 참여한 교수들이 구속되거나 해직되었고, 이에 맞서 학생들이 조직적인 저항에 나섰던 전남대 6 29 시위의 배경이 되었다.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으로 교수들이 연행되자 이에 자극 받은 학생들이 교수들의 석방과 함께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시위를 6월 29일 격렬하게 전개하였다. 6월 27일 저녁 전남대 재학생 10여명이 광주시 계림동 한 자취방에 모였다. 시위행동 강령 및 역할에 대한 얘기가 오가게 되었다. 28일 오후 1시 30분 전남대 중앙도서관 앞 잔디밭에서는 2백여 명의 학생이 모여 앉아 연행된 교수를 위한 기도회 를 열었다. 이날 오후 7시에는 광주 YWCA강당에서 연행교수와 학원민주화를 위한 기도회 가 열렸다. 6월 29일 낮 12시 노준현(화공2)의 주도로 중앙도서관 앞에 모여든 5백여 명 학생이 우리의 교육지표 와 6 27양심교수 연행에 대한 전남대 민주학생 선언문 을 낭독하고 민주교육선언교수를 즉각 석방하라 학원사찰 중지하고 교내상주 기관원은 즉각 물러가라 등을 외치며 시위에 들어갔다. 이날 1백여 명 학생이 서광주경찰서(현 광주서부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들 중 구속 기소된 학생들은 노준현(화공2; 징역5년), 조봉훈(농공4; 기소중지), 박현옥(영문4;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비롯한 10 여명이었다. 또 유인물 인쇄로 사건과 관련된 김경천(YMCA 간사) 및 인쇄소 책임자 정호철 등이 구속, 기소되었다. 6월30일과 7월1일 1천 여 명이 참가한 학생시위는 3일간에 걸쳐 70년 이후 최초로 대규모 가두시위로 이어지고 5백 여 명이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다. 6 29시위사건 으로 노준현, 조봉훈(농경4), 이영송(국문3), 안길정(영문2), 박현옥(영문4), 이택(철학4), 박병기(철학4), 김선출(사회3), 신일섭(사학3), 정용화, 박몽구(인문1), 김윤기(법3), 최동열(법1), 문승훈(국사2), 한동철(무역4) 등 15명이 실형선고를 받아 제적되었다. 박준구(인문1), 양강섭(인문1), 허민숙(인문1), 이종록(인문3), 최혁(영문4), 엄창수(철학3), 이미숙(의상1), 신영일(국사2), 송인동(영어교육2) 등 9명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유인물 인쇄에 참여한 김경천 광주 YWCA간사와 인쇄업자 정호철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이어 7월3일 조선대 학생들이 본관 4, 5층에서 민주학생 선언문 과 조선대학교 당국에 보내는 글 을 낭독하고 시위에 돌입, 박형중, 유재도, 양희승, 김용출 등 4명이 구속되었다(전남대학교30년사편찬위원회 1982, ). 137 민주화운동
140 6 27 양심교수 연행에 대한 전남대 민주학생 선언문 그동안 우리 기독학생회 및 전남대생 일동은 끊임없는 정치적 자유의 유보와 이에 따른 국민생활의 질곡 및 학원의 정부 놀음적 시녀화를 주시해왔다. 여기서 특히 우리는 학원을 무대로 삼은 정보기관원의 상주 및 이에 따른 교수, 학생의 학문적 양심의 타락에 대하여 꾸준히 고민해왔다. 오늘날 전국 각지에서 양심 있는 대학생들이 자유와 사회정의를 외치다가 투옥되고 학원을 영원히 떠났을 때에도 우리는 보도기관의 통제로 눈멀고 귀먹어야 했다. 우리가 학원의 시녀화 및 신민화를 규탄하는 까닭은 학원이 곧 미래의 조국번영의 온상이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서 노예가 배출된다면 이 나라는 망하고, 자각된 사명감을 지닌 사람이 나타나면 이 나라의 미래는 동해바다처럼 밝아올 것이다. 학우여! 야원 주먹일망정 굳게 쥐고 일어서자. 이미 우리 조국은 경제적으로 일제의 재식민지화의 제물이 되어 있고 자주성을 상실한 정부는 반민족적 세력의 선봉이 되어 있지 않느냐! 그동안 침묵만 하고 있는 줄 알았던 우리의 스승들이 민주교육선언에 일어선 쾌거는 암흑을 깨치고자 일어선 자각이요 양심의 회복이었다. 그런데, 최근 며칠에 걸쳐 송기숙, 명노근, 배영남 교수 등 11명의 교수들이 연행된 사태는 학원의 민주화가 짓밟히고 학생은 이와 같은 불법적 처사를 직시하며 즉각 연행된 교수님들을 석방함은 물론 제반 학원민주화를 조속히 달성할 것을 선언한다. 6천 학우여! 7백만 근로대중이 질곡에 처해 있음은 물론 우리들 젊음의 터전 전남대학교는 정보기관의 발바닥 밑에 깔려 있으며, 전 국민적 신망을 잃은 정부의 시녀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것에 맞서서 일어설 사람은 없다. 우리들의 흘린 피가 아니고는 없다. 일제히 일어서서 먹구름 뒤의 푸른 하늘을 보자! - 우리의 요구 - 1. 민주교육선언 교수를 즉각 석방하라. 2. 교수재임명제를 폐지하라. 3. 상담지도관실을 폐지하라. 4. 학원사찰 중지하고, 교내 상주 정보기관원은 즉각 물러가라. 5. 어용교수 정득규, 박하일, 이돈주, 김영수, 오갑동, 손광은은 즉각 물러가라. 이상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우리는 수업거부, 시험거부, 단식농성 등의 투쟁을 계속할 것을 민주학생의 긍지를 가지고 결의한다. 1978년 6월 29일 전남대학교 민주학생 일동 13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41 5. 전남대 학생상담지도관실 방화사건 1979년 10월 3일 전남대 학생상담지도관실이 학생들에 의해 불이 나 집기 일부를 태우고 꺼진 사건이 발생하였다. 밖에서 석유를 뿌리고 방화하였는데, 얼마 후 박유순(철학과 4학년)이 저질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사건과 관련해 고희숙(영어교육과 3학년),김경희(영어교육과 3학년),신영일(국어교육과 3학년) 등이 구속되었다(전남대학교30년사편찬위원회 1982, 710). 전남대 학생상담지도관실 방화사건으로 전남대의 학생운동세력들의 타격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소규모의 반유신 시위는 계속되었다. 1979년 4월경부터 박병기(철학과 4학년 제적), 장석웅(국사교육과 4학년) 등이 유신독재 타도, 구속인사 석방 등을 담은 유인물을 작성해 전남대 학생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당국은 발신인을 몰라 긴장하였고, 1979년 9월 27일 신민정(교육학과 4학년)이 유신독재타도, 대학생 궐기 등의 내용을 화장실에 낙서했으나 발각되지 않았다. 이 무렵 조순형(농대 3학년), 최영추(농대 3학년), 이세천(국문과 4학년), 윤만식(농대 3학년), 박병섭(국사교육과 4학년) 등은 10여 차례 모여 학생들의 시위를 모의하고 있었다. 방화사건을 계기로 이 사건들이 모두 밝혀져 30여명이 연행 수사를 받았으며, 윤한봉(축산과 4학년. 제적)은 박병기에게 5만원을 준 사실이 있어 배후조종자로 구속되었다(전남대학교30년사편찬위원회 1982, 710). 1979년 11월 30일 김정희(영교과 3학년), 전용호(경제학과 3학년) 등이 주동이 되어 학생식당에서 최규하 내각 사퇴, 계엄령 해제, 구속인사 석방 등을 주장하는 유인물을 낭독 배포하였다. 학생들은 점심시간에 학생식당 문에 식당의 의자로 바리케이드를 쌓아 바깥출입을 차단하고 식당에 와있는 학생들을 상대로 유인물을 낭독하고 구호를 외쳤다. 즉시 경찰이 출동하여 주모 학생들을 연행하였다. 유인물을 읽은 김정희는 구속되어 1심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고, 전용호는 도피하였다. 김정희는 학교로부터 무기정학을 당하였다(전남대학교30년사편찬위원회 1982, 711). Ⅶ. 맺음말: 유신시대 지역 민주화운동 평가 유신체제 등장 이후 체제와 저항, 정권과 재야의 관계는 마침내 전부 또는 전무의 관계로 진입하였다. 민주화운동 세력의 투쟁의제 역시 반유신독재로 단일화 되었다. 양자의 인식에서 더 이상 공존과 공생의 영역은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긴급조치 선포 이후 박정희 정부와 민주화운동 세력은 어느 하나의 승리와 다른 하나의 패배를 향하여 전진해나갔다. 함성지 사건에서부터 전남대 학생상담지도관실 방화사건에 이르기까지 우리 지역에서 발생한 유신시대의 반유신운동은 정부와 민주화운동세력, 정부와 반유신세력간의 제로섬적 관계를 잘 보여준다. 139 민주화운동
142 개인적 저항에서부터 조직적 저항, 전국적 반유신 연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준의 투쟁양상들이 나타났으며, 유신정권의 탄압으로 좌절되었지만 반유신운동의 흐름은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는 것이다. 특히 함성지 사건이나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은 전국의 반유신운동의 흐름형성에 영향을 미쳤던 선도적 투쟁이라는 특징이 있다. 긴급조치 9호의 선포는, 유신체제의 출현으로서도 저항을 막지 못하였기 때문에 더 강력한 억압체제가 등장했음을 의미했다. 즉 긴급조치 9호는 국민에게 유신체제와 민주주의 양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한 것이었다(이광일 1998, 182). 그러나 재야는 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민주구국선언 을 발표, 긴급조치 9호를 간단히 무시하였다. 긴급조치에 대한 시민불복종 운동으로서 재야인사들은 일부러 이를 위반하며 감옥을 갔다. 우리 지역의 반유신 민주화운동들이 대개 긴급조치 9호 하의 저항운동이었음이 이를 입증해준다. 반유신 민주화운동세력과 유신정권간의 충돌은 국가와 재야 사이에 타협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민주구국선언 의 논리와 긴급조치 의 논리는 둘의 대립적 세계관을 잘 보여준다. 제도정치 영역의 축소는 온건 반대세력들조차 강경 반대세력으로 전화시키면서, 반유신 독재 라는 단일 저항의제를 중심으로 이들과 재야의 연대를 가능케 해주었다. 1960년대 한국 의회- 정당정치영역은 정치쟁투의 의제가 수렴되고 여과되는 주요기제였다. 그러나 70년대 들어 국가기구 내에서 억압적 국가기구의 역할은 증대된 반면 선거, 의회, 정당을 비롯한 대표 메커니즘의 역할은 크게 축소되었다. 대통령 직접 선거권의 박탈, 1/3 의회구성 권한의 대통령 귀속, 긴급조치의 남발은 말할 필요도 없었고, 국가기구 내에서의 권력 분포 역시 정보기구와 경찰, 군부의 역할이 훨씬 더 증대되었다. 이미 유신체제 초기에 김대중이 이끄는 정치세력은 의회와 재야의 영역에서 동시에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유신체제 후반기로 넘어가면서 김영삼이 이끄는 온건 반대세력조차 강경반대세력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럴수록 재야는 확장되어갔다. 권력의 경화와 저항의 강화가 거의 동시에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가의 강경대응은 김대중-김영삼의 연대를 가능케 했고 다시 이들 의회세력과 재야의 연대를 가능하도록 촉진하였고, 이는 지역민들의 정치적 의식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부마항쟁과 5 18항쟁이 공통적으로 양김의 정치적 탄압에서 기인한 측면이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가 크다. 14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43 제5장 1987년 민주화운동 Ⅰ. 들어가는 말 세칭 6월항쟁으로 불리는 1987년 6월의 민주화운동은 4 19혁명, 5 18민주화운동 등과 더불어 한국사회의 민주화 과정에서 기념비적 위치를 차지하는 반독재 반권위주의 민주화운동이다. 더구나 6월항쟁은 4 19혁명과 5 18민주화운동을 밑거름 삼아 발생한 전국민적인 항쟁으로서 4 19혁명처럼 성공한 민중항쟁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는 반면, 4 19혁명이나 5 18민주화운동이 5 16쿠데타와 신군부의 집권과 같이 결정적인 반전을 겪었던 것에 반해 6월항쟁은 이러한 정치적 반전을 겪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6월항쟁 혹은 1987년 6월의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한국사회 민주화의 대세가 되돌릴 수 없는 사회적 흐름으로 확립되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은 6월 10일 군사정부가 민주정의당 전당대회를 열고 대통령후보 지명을 강행하여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염원을 짓밟은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의 정치변동을 이끌어온 주요한 정치적 쟁점은 개헌문제 였다. 이 문제는 현상적으로는 군사독재의 장기집권 의도에 대한 보수야당의 대응문제로 보였지만, 본질에서는 독재와 민주의 대립축을 중심으로 외세, 군부정부에 대한 보수야당을 포함하는 일체의 민족민주세력의 공방전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1986년 5월 3일 인천집회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났듯이 반독재민주화운동이 직선제 쟁취와 민주정부 수립을 주요한 내용으로 하면서도 그것이 반외세문제까지를 포괄하면서 발전하고 있었다. 여기서 군부독재정부는 대중적 개헌투쟁에 대한 강력한 탄압을 벌이는 한편, 민족민주운동 역량 파괴를 위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말기적 탄압공세가 정국을 주도하면서 군부독재정부는 4 13개헌 유보조치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국민의 민주개헌에 대한 소망을 물리치고 단행된 4 13호헌조치와 전두환 정부의 부도덕성을 폭로한 박종철 고문은폐조작사건은 범국민적 저항을 불러왔다. 여기서 5월 27일 결성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민통련, 통일민주당 등 모든 반독재민주역량을 총망라하여 6 10에서 6 18, 6 26으로 이어지는 범민중항쟁의 구심점을 141 민주화운동
144 형성하였다. 4 13호헌조치의 철폐, 군사독재타도, 민주헌법쟁취, 미국의 내정간섭 반대 등을 주된 슬로건으로 하여 전개된 6 10국민대회는 전국 22개 주요 도시에서 24만여 명의 학생,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다. 6 10국민대회에서 폭발적으로 표출된 전체 민중들의 민주화 열기는 6월 10일 밤부터 15일까지 6일 동안 명동성당에서 진행된 학생, 시민들의 농성투쟁을 계기로 15일경부터 전국적으로 새롭게 발화하기 시작하였으며, 국민운동본부가 주최한 6 18최루탄추방대회를 전후하여 정점을 향해 나아갔다. 이러한 열기는 정부, 여당의 전-김 회담 발표(22일)를 전후한 대화공세, 민주당의 동요 등의 정치적 분위기에 일정하게 영향을 받아 일시적으로 잠복하는 듯 하강곡선을 그렸으나 6 26평화대행진에서 더욱 많은 대규모의 시민들이 행진에 동참함으로써 항쟁의 폭발국면을 조성했다. 지역적으로는 대구와 정읍이가 6월 10일 이후 26일까지 거의 매일 대, 소규모의 치열한 시위를 계속하였으며, 부산, 영남, 대전지역이 15일 이후 21일까지 1주일간 연인원 1백만여 명에 이른 대규모 시위로 6월 민주화투쟁을 선도하였다. 광주 전남지역은 6 18최루탄추방대회를 전후하여 시위를 전개하기 시작하여 6월 23-25일의 일시적인 소강상태를 제외하면 26일 평화대행진에 이르는 10일간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전주와 정읍 지역은 22일 이후 전반적인 소강국면에서 연인원 20여만의 총력투쟁을 전개하여 26일에 이르는 막바지 시기의 긴장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6월 26일 전국 34개 도시와 4개 군( 郡 )에서 같은 시각에 시작된 국민평화대행진 은 경찰의 원천봉쇄 방침에도 불구하고 1백만 명의 애국시민, 학생이 참여한 대규모 가두시위로 발전하였다. 이날 경찰은 전국적으로 10만의 병력을 배치하였으나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효과적인 진압작전을 펴지 못했다. 진압경찰의 무차별 최루탄 난사와 폭력진압에도 불구하고 시민, 학생들의 투석 등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대응은 독재 권력의 물리적 통치능력 상당 부분 무력화시키기에 충분했다. 한편 이날의 투쟁에서는 대행진발대식 또는 대중정치집회를 조직하여 국민들의 반독재미주화투쟁의 열기를 하나로 모아 나가기도 하였다. 가두에서의 대중정치집회는 시위대의 도로 또는 광장 점거, 연좌시위의 형태로 시작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여기서는 연설 등이 어우러져 진행되었다. 이러한 사태의 발전 속에서 한국 민주의 광범위한 반독재연합전선의 형성과 강화에 직면하여 군부의 개입만으로는 사태해결이 어렵다고 판단한 미국은 레이건의 친서 전달, 더위스키 국무차관, 시거 차관보의 방한 등 미 행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한국의 장래권력 재편에 새로운 대책(6 29선언)을 수리하게 된다. 6월항쟁은 외세와 군부독재를 반대하고 국민의 민주주의적 권리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역사적인 범국민적 투쟁이었다. 이하에서는 6월항쟁의 전개과정과 그 의미를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14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45 Ⅱ. 6월항쟁의 전개과정과 의미 1. 6월항쟁의 전개과정 1987년 1월부터 시작된 민주화운동의 과정은 4년간에 걸친 시행착오적인 권력경쟁을 통하여 형성된 전략적 대안들이 단기간에 걸쳐 재격돌하는 과정이었다. 다시 말해 1987년 이전에 권위주의정부에 대한 도전을 저해했던 야당세력과 사회운동세력간의 전략적 경쟁과 갈등이 약화되었고, 마침내 도전연합의 권력동우원이 지배세력을 압도함으로써 지배세력으로부터 정치적 양보를 이끌어냈으며, 그 결과 민주화 이행의 출구를 열었던 것이다. 1) 박종철고문치사사건 1987년 1월 14일 오전 8시,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은 학교 근처 신림동 자취방 앞에서 사복차림 형사들에게 연행되었다. 그들은 신원을 밝히지도 않았으며 이유를 말해주지도 않았다. 박종철은 1985년 미문화원 점거농성을 지원하는 가두시위로 붙잡혀 구류를 살았고, 1986년에는 청계피복노조의 합법성 쟁취를 위한 노동자들의 집회와 가두시위에 참여한 일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그해 7월 15일에 출소하였다. 당시 그는 언어학과 학생회장이었다. 그는 지하철 1호선 남영역 철로변 근처의 진회색 벽돌로 된 건물로 끌려갔다. 일반 회사 이름으로 위장하고 있었지만 치안본부가 대공혐의자를 수사할 때 쓰는 남영동 대공 분실이었다. 사오명의 수사관은 다짜고짜 그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대라고 추궁했다. 박종운은 박종철의 동아리 선배로 전두환 타도를 선동하는 각종 시위를 주도한 주요 인물이었으며 경찰이 오래 전부터 수배한 학생이었다. 박종철은 자신과 관련한 일이 아님을 알고 잠시 안도한 후 모른다고 대답했다. 사실은 다른 친구와의 연락을 부탁하기 위해 박종운은 두 차례 박종철의 방에 다녀간 적이 있던 터였다. 수배학생을 체포하면 일 계급 특진에 현상금까지 붙어 있는지라 이에 눈이 먼 수사관들은 수사실 안의 욕조에 물을 가득 채우고 박종철의 양손과 양발을 묶은 채 겨드랑이를 잡고 등을 누른 상태로 머리를 욕조 속으로 반복해서 넣었다가 올리는 물고문을 시작했다. 그러나 박종철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자 수사관들은 박종철의 다리를 들어 올려 상체를 물속에 더 깊이 처박았다 꺼내기를 반복했다. 이런 고문이 10여 시간 이상 지속되었고 그 강도는 점점 더해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박종철이 숨을 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황급히 인근 중앙대 용산병원 응급실 의사를 불렀다. 그러나 이미 박종철은 숨을 거둔 후였다. 그들은 당황했다. 증거 인멸을 위해 우선 시신을 감쪽같이 없애버리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서울지검에 시신 화장을 신청해보았으나 거절당했다. 그리고 1월 15일 아침이 밝았다. 사건은 감쪽같이 영원히 묻혀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143 민주화운동
146 이날 중앙일보 법조 출입기자 신성호는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오전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검찰 간부의 방을 지나치다가 어느 방에서 흘러나오는 탄식소리를 접했다. 경찰 큰일 났다는 독백이었다. 당시에는 석간이었던 중앙일보는 그날 사회면 2단 기사로 경찰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 라 기사를 보도했다. 15일 밤 9시, 부검이 실시되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1과장 황적준은 물고문 도중 욕조에 목이 눌려 질식사 한 것 같다는 소견을 밝혔다. 경찰은 황적준에게 사인을 심장마비로 해 줄 것을 요청하고 은근히 협박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동아일보가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부검에 참여한 박종철 삼촌의 증언을 인용해 고문 의혹을 강력히 제기했던 것이다. 언론의 대대적 보도로 여론이 들끓어 오르자 경찰은 하는 수 없이 자체 수사에 들어갔다. 치안본부장 강민창은 박종철의 사망 사실을 시인하면서 이렇게 해명했다. 어젯밤 술을 많이 마셔서 밥맛이 없다고 냉수를 달라고 하여 냉수를 몇 잔 마신 후 10시 15분경부터 심문을 시작, 박종운의 소재를 묻던 중 책상을 탁 치자 억하고 소리 지르며 쓰러져 중앙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에 사망했다.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는 삼척동자도 비웃을 수밖에 없는 경찰의 발표는 가뜩이나 고조된 고문 의혹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 되었다. 그동안 총칼 앞에 숨죽이던 신문들이 일제히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자 전 국민의 이목이 이 사건에 날카롭게 집중되었다. 1월 19일, 경찰은 하는 수 없이 고문 사실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고문에 참여한 조한경과 강진규는 고문치사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때 구속 수감되는 고문경찰의 얼굴을 숨겨주기 위해 경찰은 똑같은 베이지색 두툼한 방한복을 입고 모자를 눌러 쓴 동료경찰 10여 명을 차내에 같이 태웠다. 승합차 안에 얼굴을 반이나마 가린 채 똑같은 모양으로 웅크려 앉은 10여 명 가운데 누가 고문 경관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이 같은 동료 감싸주기 행태는 국민의 맹비난을 스스로 불러들였다. 침묵을 지키던 대한변호사협회는 1월 19일 유례없이 강력한 비난 성명을 채택했다. 변협은 검찰을 질타했다. 천인공노할 고문살인 범죄의 당사자인 경찰에게 자체 수사를 맡긴 것은 인권옹호 직분을 스스로 포기한 처사 임을 비난하면서 국가공권력이 야만적인 가혹행위와 살인의 도구로 변한 이 시점에서 우리 헌법의 이념인 민주적 기본질서와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기 위하여 고문 근절을 위한 전 국민적 결단과 노력이 있어야 함을 호소했다.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목숨을 국민의 혈세로 유지되는 공권력이 앗아간 끔직하고 처참한 비극적 사태를 향해 전 국민적 분노가 가장 극단적으로 표현되어야 하며 각 사회단체와 정당, 종교인들은 이러한 고문범죄의 근절을 위해 대대적인 운동에 나서야 함을 촉구했다. 그리고 곧 이어 민주화운동청년연합 김근태 의장을 고문한 김 전무(후일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 밝혀짐)와 그 일당 8명의 고문경관에 대한 재정 신청서를 서울고등법원에 제출했다. 그리고 1월 27일에는 고문공청회를 개최해 그동안 고문 받은 이들의 증언을 국민 앞에 공개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고문살인 종식을 위한 우리의 선언 을 통해 박종철의 죽음이 이 14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47 어두운 시대를 외면한 우리 모두의 양심의 죽음 이라고 규정하고 진실의 철저한 규명, 고문수사기관의 해체, 전두환 정부의 퇴진을 요구했다. 분노는 사회 각계각층과 전 국민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민주화운동 세력은 힘을 모아 2월 7일과 박종철군 49재 날인 3월 3일을 기해, 고 박종철군 범국민추도회 를 개최했다. 서울의 종로 등 몇 곳에서 집회가 열렸으나 경찰의 한결 더 삼엄해진 경비와 대규모 최루탄 발사로 대회는 국민적 분노를 폭발시키는 수준까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전국의 대학생 조직은 국민과 함께 하는 투쟁만이 군사독재를 물리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들은 분산된 투쟁역량을 한데 모아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전국 대학생 조직을 하나의 연합체로 묶어세우는 노력에 진력하기 시작한다. 1987년 1월에 발생한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은 군부권위주의 체제의 폭압적 성격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잠재된 구조적 모순이 극적이고 상징적으로 표출되었던 사건이다. 더구나 지배세력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야당세력과 사회운동세력이 제각기 분산된 채 탈 동원되었던 시점에 발생함으로써 쇠진해 가던 민주화 이행을 돌이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고문치사사건은 군부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국민적 공분을 야기했지만, 곧바로 도전연합의 동원을 이루어내지는 못했다. 민추협의 주도 하에 신민당과 사회운동세력 간의 재연합이 시도되었던 2 7 추도대회와 3 3고문추방민주화국민대행진은 물리적 국가기구에 의해 완전히 봉쇄되었다(기사연 1987, 5). 왜냐하면 사건 자체가 돌발적으로 발생했던 탓도 있지만, 지배세력이 신속하게 수습조치를 취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이유는 도전연합의 동원을 주도할 세력들이 내적 구심력을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사회운동세력은 1985년 이후 급진 과격화되면서 대중과 유리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지배세력의 지속적인 탄압으로 그 조직력이 철저하게 붕괴되어 있었으며, 방학으로 인해 학생운동세력의 동원이 불가능하였다. 둘째, 제도야당은 개헌의 방향을 둘러싸고 극심한 내홍을 겪고 있었다. 더구나 야권 내부의 직선제개헌세력들은 당 내외에서 고립되어 있었다. 지배세력의 내각제 개헌 입장이 요지부동인 상황에서 미국뿐만 아니라 일부 국내 인사들이 내각제 개헌의 수용을 권유하였고, 당내에서는 이민우 총재가 비민추세력들의 지원 아래 민주화 조치의 선행을 통한 내각제 개헌입장을 표명하고 있었다. 따라서 직선제 개헌이 당론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직선제 개헌 세력들이 전당대회를 통해 당권을 장악해야 했지만, 이 역시 낙관할 수 없었던 상황이다. 만일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지배세력은 내부의 정치일정에 따라 1-2월 중에 내각제와 현행 헌법 사이에서 개헌방안을 확정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추도회 및 국민대행진이 크게 확산되지 못하고 끝난 이후에도 신민당의 공식지도부가 전당대회 이전에 민정당과 내각제 개헌에 합의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이에 직선제 개헌세력은 신당창당을 결행함으로써 불안정한 145 민주화운동
148 교착상황을 돌파하고자 시도하였다. 신당창당은 야당세력이 단일한 전략목표를 중심으로 내부분열을 극복하였다는 점에서 도전연합의 실현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야당세력이 지배세력과 전면적 대결 전략으로 선회하는 결과를 낳았다. 반면 지배세력은 제1야당과의 협상을 통한 내각제 개헌의 가능성을 완전히 포기해야 했다. 즉 지배세력들이 1986년 청와대 회동 이후 추진해왔던 사회운동세력에 대한 억압과 신민당 고립화, 신민당의 정치체로의 복귀, 이에 기초한 내각제 개헌 협상추진 등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지배세력들은 적어도 이 당시까지는 직선제 개헌을 수용할 수 없었던 탓에 비타협적 억압전략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지배세력은 4 8탈당사태 이후 불과 5일 만에 합의개헌 실패의 책임을 양김에 돌리면서 이른바 4 13호헌조치를 발표하게 된다. 2) 4 13호헌선언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4 13호헌조치로부터 국민운동본부가 출범하여 6 10국민대회가 열리기까지의 과정을 개관해보면 저항세력의 잠재적 구성세력들은 다양한 가능성을 탐색하면서 동원의 범위와 강도를 높여가고 있었던 반면, 지배세력은 비타협적 억압전략으로 일관함으로써 저항세력의 권력동원을 실질적으로 촉진시키는 전략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먼저 4 13조치는 개헌논의 유보, 현행 헌법을 통한 정부이양, 대통령선거의 연내실시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는데, 지배세력은 이를 통해 시민사회 내의 개헌논의 자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지배세력이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 된 배경에는 다름과 같은 요인들이 있었다. 첫째, 지배세력은 신민당과 사회운동세력의 정치적 연합에 의해 추진된 2 7추모대회와 3 3대회를 성공적으로 봉쇄함으로써 스스로의 통치력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둘째 신생 통일민주당을 철저하게 억압함으로써 탈동원시킬 경우 밑으로부터의 도전을 차단하고 스스로의 정치일정을 순조롭게 추진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셋째, 학생운동 등의 급진과격성을 공격하여 정국주도권을 장악하였던 년의 경험을 과도하게 강조함으로써, 사회운동세력이 이미 선도적 정치투쟁노선에서 온건대중노선으로 변화하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하였다. 넷째, 조직화된 세력인 신민당과 사회운동세력의 동원을 각각 와해시켜, 그 정치적 영향력의 성장과 확산을 차단할 경우 시민사회의 요구가 조직화되거나 동원될 수 없으리라고 판단하였다.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양 대회가 대규모의 대중동원으로 확산되지 못했던 원인은 지배세력의 통치력이 여전히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잠재적인 도전연합의 구심세력들이 내부적인 재편과정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통일민주당의 창당, 학원의 개학, 사회운동세력의 전략변경 등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상황은 급변하고 있었다. 정부는 민주당이 폭력난동과 민중봉기를 획책하고 있다 는 구실로 4 13호헌조치를 14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49 정당화하였고, 김대중의 가택연금, 민주당 의원의 구속, 창당과정의 폭력사태, 김영삼 총재 발언시비, 민주당의 통일정강정책 수사 등 일련의 억압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그러한 조치들은 지배세력의 의도와는 달리 시민사회의 공분을 초래함으로써 스스로의 정당성을 더욱 훼손시켰으며, 통일민주당에 대한 국민들의 정치적 지지를 확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중요한 점은 동요하던 통일민주당을 제도권 내부의 권력경쟁에서 완전히 배제함으로써 이들로 하여금 시민사회와 정치적으로 접합하게 하는 최악의 결과를 낳은 사실이다. 지배세력은 또한 사회운동세력의 동원력 저하기 조직력 와해와 더불어 전략변경으로 인한 일시적 침체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사회운동세력은 이미 1986년 후반기부터 온건대중노선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학생운동의 경우 1986년 10월의 애학투련 결성식에서 이른바 대중노선이 제기되었고, 이후 건국대사태에 대한 학생운동 내부의 반성으로 점차 정착되어갔으며, 그 결과 일부 학생들이 신민당 개헌 현판식 서울대회(11 29)에 적극 참여하는 양상이 나타났다(최연구 1990, 258). 1987년에 들어서면서 민족해방그룹을 중심으로 대중노선은 더욱 활성화되었다. 이들은 학원민주화투쟁을 기치로 총학생회를 강화하고 지역별로 대학 간 연합조직을 건설하게 되는데, 이러한 변화들이 훗날 6월항쟁을 이끌어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되고 있다(정영국 1993, ). 노동운동 역시 서노련과 인노련의 해소 이후 온건화 되었다. 재야운동의 구심체인 민통련 역시 호헌조치 이후에는 범민주세력의 연대를 강조하였으며, 다른 사회운동세력들 역시 국민운동본부의 발족 시에 제도권 정당의 직접적 참여문제 에 대해 개방적 태도를 취하기에 이르렀다. 더욱 주요한 사실은 정치적 개방 이후 급속하게 성장한 비조직화된 시민사회 내부에도 자생적인 동우원의 잠재력이 일정하게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지배세력의 판단과는 달리 4 13호헌조치에 대해 시민사회의 중간계급분파가 즉각적으로 반응했다는 사실에서 그러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발표 당일에 대한변호사협회는 즉각 반박성명을 냈고, 다음날 김수한 추기경은 개헌의 꿈이 깨져 국민에게 슬픔을 안겨주었다 는 부활절 메시지로 가톨릭교회의 입장을 대변하였으며, 한국기독교회협의회도 호헌조치를 비난하고 개헌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종교계 외에도 민통련,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여성단체연합,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등 사회운동세력, 언론인, 연극인, 해직교사, 영화인, 미술인 등의 시국선언으로 이어졌다. 특히 광주교구 신부들의 단식기도를 시발로 전국 각지의 재야인사, 신부, 목사, 청년, 학생들로 확산된 단식투쟁과 기도회는 호헌조치에 대한 반대를 전국적으로 확산시켰고 고려대 교수들의 시국선언을 시발로 전국 48개 대학 1510명의 교수들이 시국성명에 참여했다. 요컨대 지배세력의 비타협적 억압전략은 제도야당세력, 사회운동세력, 비조직화된 시민사회 각각의 부문에서 군부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전면적 거부를 증폭시켰고, 그러한 내부적 동원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이제까지 잠재적으로 존재하였던 저항연합이 점차 가시적으로 형성되는 147 민주화운동
150 결과를 낳았다. 또한 그 과정에서 이 세력들은 내부의 이견과 갈등을 극복하고 직선제 개헌을 공동의 전략적 목표로 설정하는데 성공하였다는 점이다. 직선제 개헌에 대한 제도야당세력의 입장은 2 12총선 이후 일관되게 지속되었고, 시민사회의 일부에서도 민주당의 직선제 개헌에 대한 지지와 민주당의 대표성에 대한 승인을 표명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운동세력 역시 온건대중노선에 입각하여 직선제 개헌을 수요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4 13호헌조치 이후 신생 민주당에 대한 억압, 고문치사사건의 축소은폐조작 등 지속적으로 강화된 지배세력의 억압전략으로 인해 개헌문제는 지배세력과 신민당 및 사회운동세력으로 이루어지는 광의의 정치권을 벗어나 지배연합과 저항연합 혹은 도전연합 간의 전 사회적인 대립으로 확산되었다. 3) 저항연합의 동원과 전국적 확산 통일민주당은 호헌조치가 발표된 직후에는 매우 유동적으로 대응하였고, 이러한 태도는 정치화된 중간계급 분파들의 단식기도, 서명, 시국성명 등을 통해 사회적 동원이 상승하고,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4 13조치의 제고를 촉구하는 대한결의안이 통과되는 상황에서도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5월 17일-18일 명동성당의 김승훈신부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고문치사사건이 은폐 축소 조작되었다는 성명을 연이어 발표하였고, 이어 검찰조사에서 사실로 확인되면서 사태는 급박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23일에 재야인사 134명이 박종철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 범국민대회 준비 위원회 를 발족하여 6월 10일에 규탄대회를 갖기로 결의하자 민주당은 이제까지의 입장을 변경해야 했다. 사회운동세력 역시 시민사회에 대한 민주당의 정치적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고, 일련의 시국선언에서 명시적으로 확인되었듯이 야당세력의 일관된 전략이었던 호헌조치 철회와 직선제 개헌의 열기가 대중적으로 확산되었다는 사실을 중시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사회운동세력은 이전의 경험을 통해 정치적 급진주의와 대안부재의 전략이 스스로를 국민대중과 유리시킬 뿐만 아니라 지배세력에게 물리적 탄압의 구실을 제공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문치사은폐조작사건에 대한 국민적 공분을 직선제 개헌이라는 현실적인 대안과 결합시킬 수 있었다. 야당과 사회운동세력의 이러한 전략적 선택과 이에 기초한 연대의 결과로서 5월 27일에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발족하게 되었다. 즉 지배세력의 비타협성에 의해 제도권 정치로부터 배제당한 제도야당세력, 이전의 경험을 통해 온건대중노선으로 전략을 변경한 사회운동세력 그리고 시민사회의 정치화된 중간계급 분파들의 자생적 동원 등이 결합한 결과 최대 규모의 도전연합을 지도할 정치적 구심체로서 국민운동본부가 출범하게 되었고, 이로써 한국의 민주화 이행의 결정적인 전기가 마련되었다. 그렇다면 국민운동본부를 구심체로 하는 저항연합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를 14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51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조직구성과 결성과정을 살펴볼 때, 국민운동본부는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의 연대 기구였다. 일부에서는 국민운동본부를 시민사회만의 혹은 시민사회 주도의 연대기구로 파악하기도 한다. 물론 시민사회가 그 결성과정을 주도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운동세력의 개헌입장이 대중적 검증을 거치면서 민주당의 직선제 개헌으로 수정되었다는 점, 국민운동본부에 참여하고 있는 정치인의 비중이 비교적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영향력은 유지되었다는 점, 당시 김대중과 김영삼을 비롯한 민주당의 정치세력들은 정치사회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와 연계가 강했다는 점 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시민사회가 결성과정을 주도했다고 하더라도 시민사회만의 연대기구로 보기는 어렵고 정치사회의 민주당 세력과 시민사회 내의 사회운동세력 등 다양한 세력들이 연대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국민운동본부의 결성선언문 역시 당면한 민주화의 과제가 시민권의 확장이라는 자유화의 측면보다는 정부선택권과 정통성 있는 정부의 수립이라는 민주화의 과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민사회와 정치사회는 거의 같은 비중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국민운동본부의 6월항쟁에서의 역할은 제도언론의 비상한 관심으로 인해 제고될 수 있었는데, 이는 민주당의 정치적 영향력이 국민운동본부에 실렸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6 29 이후 정치사회가 국민운동본부로부터 이탈하면서 국민운동본부가 실질적으로 와해되었다는 사실은 정치사회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시민사회만의 기구로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을 입증하고 있다. 국민운동본부가 최초로 주도한 6월 10일의 박종철군 고문치사소작은폐규탁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 는 6만에 이르는 경찰이 봉쇄진압작전으로 서울에서는 무산되었지만, 상대적으로 경찰력이 미약한 지방에서는 전국 22개 지역에서 40만여 명이 참가하는 동시다발적 시위투쟁으로 전개되었다(기사연 1987, 8). 또한 시위대의 일부가 경찰의 진압에 밀려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농성을 계속하면서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6월 15일까지 지속된 명동성당농성은 경찰의 강경탄압조치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의 불씨를 지펴나갔다. 국민운동본부는 6월 18일을 최루탄 추방의 날로 정하고 전국의 주요 대도시에서 최루탄 추방대회를 열었는데, 전국 16개 지역에서 50여만 명이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특히 부산에서는 30-40만 명의 시민이 참여하여 경찰이 진압을 포기할 정도였다. 이후 3일간은 6월항쟁의 절정기였다. 지배세력은 기존의 분할지배전략을 지속시켰다. 한편으로는 민주화 시위에 대한 강경탄압의 기조를 유지하면서 민주당에 대해서는 화해 몸짓을 취하면서 사회운동세력과의 연계를 차단시키고자 시도하였다. 전두환으로부터 정국주도권을 위임받은 노태우는 기자회견에서 88년 올림픽 이후 빠른 시일 내에 내각제 합의개헌, 야당지도자들과의 조기회동 등의 의사를 표명하였고, 민정당도 시위에는 강경 대응하되 각급 레벨의 여야대화를 추진할 것을 결의하기도 했다. 반면에 사회 운동권에 대해서는 6 10대회와 관련하여 양순직 민주당 부총재와 박형규 목사 등 국민운동본부의 핵심간부 13명을 구속하는 등 전국에서 220명을 구속하였고 이웅희 문화공보부장관은 6월 149 민주화운동
152 12일에 6 10불법집회 및 폭력시위에 대한 정부견해 를 발표하였으며, 12일과 13일에는 시국대책회의를 열어 사태가 심각해질 경우 계엄령과 정당해산 등 헌법상의 모든 조치의 발동 가능성을 시사 하면서 군부개입의 가능성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민주당이 실질대화를 재확인하면서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6 10관련 구속자 전원석방, 김대중의 연금해제, 민정당의 정치일정 백지화를 제시하면서 타협은 결렬되었다. 4) 대중동원의 확산과 정치권 내부협상 6월항쟁은 6월 18일 최루탄 추방대회 이후 3일간의 절정기를 거쳐 6월 22-25일간에 소강기에 접어들게 된다. 이 기간 동안은 정치권 내부의 협상기로 특징지을 수 있다. 지배세력은 6월항쟁 초기에는 년에 걸쳐 구사했던 분할지배전략에 입각하여 사회 운동권을 강력하게 탄압하는 한편 민주당을 제도권 정치사회 안으로 견인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호헌조치가 민주당의 제도권 복귀를 어렵게 하고 있었고, 재야운동권이 온건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타협안이 제시되지 않는 한 그러한 전략이 수용될 리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강경입장을 6월 19일을 고비로 양보론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이렇듯 지배세력이 전략을 수정하게 된 첫 번째 계기는 저항연합의 응집력이었다. 6월항쟁 초기에 제의한 여야대화에 대해서 민주당은 실질적인 대화를 요구하며 거부하였고, 20일에는 여야대화의 징후에 대해 국민운동본부가 제동을 걸었다. 뿐만 아니라 국민운동본부의 입장에 대해 대중들이 보여준 호응도 역시 지배세력의 미봉적인 대화조치를 제약하였다. 둘째, 투쟁의 격렬성에 비추어 요구수준이 온건했다. 국민운동본부의 슬로건뿐만 아니라 대중들의 시위구호 역시 직선제 개헌의 선을 넘지 않았기 때문에 요구수준이 더 진전되기 이전에 통제 가능한 수준에서 차단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더구나 이 시기에 이르러 지배세력 내부에서는 직선제를 통한 재집권에 대한 긍정적인 견해들이 대두되고 있었다. 셋째, 시위대중의 성격으로 볼 때 저항연합의 주요한 구성부분이었던 중간계급을 지배세력은 자신들에 대한 정치적 지지세력 혹은 암묵적 동의의 기반으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억압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중간계급, 특히 무정형적인 중간계급대중의 참여야말로 전두환 정부의 양보를 이끌어내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중간계급이 침묵을 지키고 사회운동세력이나 노동계급만이 동원되었더라면 설사 요구수준이 온건했다 할지라도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민주당은 기본적으로 제도권 내부의 협상을 통한 해결방식을 선호하였다. 국민운동본부에 참여하여 시민사회를 동원하였던 전략적 목표는 지배세력의 타협을 강제함으로써 제도권 내의 협상에서 유리한 입지를 선점하는데 있었다. 민주당은 군부가 개입하거나 사회운동세력의 주도권이 강화되면서 제도정치 자체가 붕괴하거나 설사 그렇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사회운동권 일부가 제도정치 내로 진입하는 상황을 가장 우려하고 있었다. 그 결과 국민운동본부에 참여한 후에도 제도정치권 내에서 해결방식에 가능성이 보일 때마다 동요하였다. 민주당은 6 10대회 15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53 이후에도 국민대회에 대한 정부의 물리적 탄압에 대해 논의할 것을 민정당에 제의하는 한편, 김영삼은 실질대화로서 여야 영수회담을 촉구하고 있었다. 또한 6 10대회 구속적 석방과 김대중의 연금해제를 선행조건으로 여권의 대화제의를 수용할 의사를 밝혔는가 하면 긴급총재단회의 성명을 통해 폭력시위의 자제를 호소하였다. 6월 21일-22일에 걸쳐 연 이틀간 김영삼은 국민운동본부의 지도부를 만나 대행진의 연기를 요청하였는데 그 근거로서 현 시국은 여야 영수회담 등 정치대화로 풀어야 하며 대행진의 강행은 여권의 강경조치에 명분을 줄 우려가 있다 는 점을 내세우고 있었다. 24일 전두환과의 회담에서도 김영삼은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지 않고 4 13 철회 선택적 국민투표, 사면복권을 요구하고 있으며, 김대중은 역시 이에 호응하여 선택적 국민투표, 거국내각 운영 등을 요구하고 있었다. 민주당은 이러한 전략에 서 있었기 때문에 6 29선언으로 제도정치권 내부의 협상이 가능해지자 즉각적으로 시민사회 동원을 중지하고 정치사회로 복귀하였던 것이다. 민통련으로 대표되는 사회운동세력은 1986년 하반기까지는 군사독재퇴진 민주헌법 제정 민주정부 수립이라는 전략에 서 있었고,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될 당시에는 명시적으로는 군사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정부를 수립하자 는 전략을 견지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직선제 개헌과 민주헌법 쟁취 대통령선거 군사독재 종식과 민주정부 수립이라는 3단계 전략구상 즉 이른바 선거를 통한 혁명 의 구상을 취하고 있었다(정대화 1995, 104). 이에 따라 5월 30일경부터는 호헌조치 철회와 민주개헌쟁취에 주력하게 되었다(기사연 1987, 19). 이후에도 국민운동본부는 지배세력과 민주당간의 여야대화 등 정국추이를 염두에 두면서 정부에 대한 완력의 완급을 조절해나갔다. 이러한 사실들은 국민운동본부가 민주당과 사회운동세력과의 연대기구라는 점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재야운동 등 사회운동세력이 스스로를 정치적 협상의 한 주체라고 인식하기보다는 최종적인 문제의 해결을 정치사회에 일임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여야협상이 성사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시기에 이르러 대중들의 동원양상이 이미 조직된 주요세력들의 통제력을 벗어나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에 지배세력은 지속적으로 억압을 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비상조치를 운운하면서 국민들을 협박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여야대화를 빌미로 저항연합의 해체와 시간 벌기에 급급하였다. 반면 야당세력은 시위대의 폭력자제를 호소하고 여야영수회담을 제의하고 적절한 여야협상을 시도하는 등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6월 22일에 새로운 주가 시작되면서 제도권정치 내부의 대화분위기가 무르익어갔다. 전두환- 김영삼 회담이 성사단계에 이르고 민주당이 이에 부응하여 평화대행진의 연기를 강력히 희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중적 분위기는 대회강행으로 기울고 있었고, 결국 국민운동본부는 6월 23일에 6 26평화대행진 에 강행의지를 분명히 하는 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그러나 정치권 내부의 협의가 이루어지던 기간에 민주화투쟁이 전체적으로 하강곡선을 그리면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고, 평화대행진의 참여를 촉구하는 소규모의 산발적 집회와 시위가 이어졌을 뿐이다. 6월 24일의 전두환-김영삼 회동은 예상대로 별 성과 없이 끝났다. 따라서 정치권 내부의 협상과 151 민주화운동
154 시민사회와의 정치적 접합 사이에서 동요하던 민주당도 즉각 회담결렬을 선언하고 평화대행진에 적극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6월 25일의 양김회동에서는 지배세력의 개헌논의재개를 거부하고 정부여당이 최소한 선택적 국민투표를 통해 개헌을 매듭짓고 새 헌법 아래서 연내에 선거를 실시, 내년 2월에 민주정부로 이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야 4 13조치의 철회라고 볼 수 있다 는 점에 합의하였다. 반면 민정당은 전-김회담에서 4 13조치는 사실상 철회 되었다고 보고 노-김 회담 등 여야 대표회담을 조속히 개최할 것을 제의하며 현재 여야 간 쟁점이 되고 있는 권력구조문제 등에 관해 실질적 협상을 할 수 있는 여야정치회담을 공식적으로 제의하였다. 한편 국민운동본부는 영수회담을 통하여 위기에 처한 현시국의 타개를 바라는 국민의 희망을 저버릴 수 없어 두 차례나 평화대행진을 연기했었다고 밝히면서 전두환 대통령이 김영삼 총재가 제시한 시국수습안은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고 개헌논의를 국회에서 재개하라는 일방적 통고로 회담을 끝나버렸다고 비판했다. 5) 저항연합의 재결집과 지배세력의 양보 6월 24일에 있었던 전두환-김영삼 회동이 결렬된 후 저항연합은 다가오는 평화대행진에 총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6월 26일에 열린 국민평화대행진은 국민운동본부의 주도하에 전국 34개 시 4개 군, 270여 지역에서 총 140여만 명이 참여하여 군부독재의 타도를 외쳤다. 이날 경찰은 전국적으로 10만의 병력을 배치하였으나 시위대들을 진압하기는 역부족이었다. 경찰력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던 서울, 광주, 부산 등 대도시의 일부 지역에서는 시위 대중들과 경찰력이 팽팽히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시위대에 의해 경찰병력이 완전히 무력화되거나 경찰이 시위대의 공간을 열어주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경찰집계에 따르면 이날 시위과정에서 무려 3467명의 학생과 시민이 연행되었던 반면, 경찰서 등 관공서, 민정당사, 경찰차량 등이 다수 불에 타거나 일부 파손되었다. 그 결과 3일 후인 29일 정부의 대폭적인 양보조치인 이른바 6 29선언 이 나오게 되었다. 6 29선언은 모두 여덟 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시민사회의 시민적 자유의 확장과 관련된 항목으로 기본적 인권의 신장, 언론자유의 창달, 자치와 자율의 확대(지방자치와 교육자치의 확대), 사회정화 조치가 있고, 제도정치권 내부의 경쟁규칙을 개방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대통령직선제개헌, 대통령선거법 개정, 김대중 등 시국관련 사범의 사면복권, 정당 활동의 자유보장 등을 제시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에서 특히 대통령직선제의 수용은 가장 핵심적이고도 가시적인 타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6 29선언이 정치사회의 민주당과 시민사회의 중간계급의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민주화투쟁의 의미를 최소화하고 그 투쟁의 주체를 민주당과 중간계급으로 한정시키고 그들을 체제 내로 흡수함으로써 탈동원화하고 나아가서 사회운동세력과 기타 사회계급들을 분리시키려는 시도였다는 점이다(기사연 1987, 96-97). 실제로 사회운동세력이 6월항쟁 기간에 반군부독재연합전선의 강화를 위하여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던 15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55 쟁점들, 가령 고문치사 및 은폐조작, 민주화를 통한 민족통일, 집시법, 언론기본법 등 반민주적 악법의 민주적 개정, 자유언론의 쟁취뿐만 아니라 노동자, 농민들에게 주요한 현안이었던 노동3권의 보장, 해고노동자의 복직, 농민들의 부채탕감과 농축산물 수입금지 등의 문제들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6 29선언은 도전연합의 정치적 동원에 대한 양보의 의미도 있는 한편, 향후 권력재생산을 도모하기 위한 적극적인 전략이라는 의미도 같이 담고 있었다. 6 29선언과 함께 한국의 민주화 이행은 지난한 첫 발자국을 내딛게 되었으며, 이를 압박하였던 시민항쟁은 막을 내렸고 정치지형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저항연합의 구성원이었던 민주당은 제도정치권 안으로 복귀했고, 국민운동본부의 권력동원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이었던 도시의 중간계급은 일상의 삶을 찾아갔다. 사회운동세력은 다시금 새로운 전략을 모색해야만 했다. 6월항쟁에 참여하지 못했던 다른 세력들은 열려진 공간에서 스스로의 요구를 표출해야만 했다. 그러나 6월항쟁의 저항연합의 제한성으로 말미암아 모든 세력을 접합할 수 있는 민주화 협약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2. 6월항쟁의 주도세력 모든 사회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운동이 어떤 세력에 의해 수행되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현재의 시민운동이 어떤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으며 주로 참여하는 층이 누구인가를 파악해 본다면 표방한 이념, 운동방식, 가능성과 한계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6월 항쟁도 그것을 주도한 세력은 누구이며 주로 참여한 사람들이 어떤 계급 계층인가를 밝혀 본다면 그 성격과 특성, 성과와 한계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6월항쟁에 참여한 세력들의 이념적 혹은 정치적 지향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6월항쟁의 주체를 이념적 지향성에 따라 구분해서 이해하는 접근방법이다. 왜냐하면 동일한 노동자 혹은 학생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지향하는 사회상이나 전략, 정치적 입장에 따라 상황에 대한 해석과 대응이 다르며 운동의 결과에 대한 평가도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6월항쟁의 주체를 한편으론 이념적 정치적 스펙트럼에 따라서 다른 한편으로는 계급적 구성이란 면에 따라서 이해함으로써 운동의 주체에 대한 다면적 파악이 가능할 것이다. 우선 6월항쟁의 주체에 대한 계층적 분석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 구성을 주도세력과 참여층으로 나누어 파악해 보려고 한다. 우선 6월 항쟁을 주도한 세력은 한마디로 말하면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라고 할 수 있다. 국민운동본부는 학생과 재야인사, 야당세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구체적으로 국민운동본부의 발기인, 공동대표, 상임공동대표, 집행위원의 구성을 표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윤상철 1997, 128). 표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종교 세력과 재야단체(주로 지식인 및 문화계인사들로 추정됨), 정치인의 비중이 크다는 점이다. 이는 80년대까지의 사회운동에서 종교인사와 재야인사, 야당정치세력의 153 민주화운동
156 역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구분 지역 종교 재야 단체 정치인 부 문 운 동 노동 농민 도시빈민 기타 합계 발기인 ,191 공동대표 상임 공동대표 집행위원 * 출처 : 윤상철(1997, 128) 위의 표에서 보면 노동, 농민, 빈민 등의 계급운동은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부문운동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적다. 하지만 표에서 잘 포착되고 있진 않지만 국본의 간부진 구성에서 재야인사와 명망가 중심으로 되어 있다 할지라도 학생운동의 주도적 역할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당시 6월항쟁에서 주된 동원력은 학생운동에 있었고 이런 점에서 그들의 입장은 국본에서 영향력이 컸다. 결론적으로 6월항쟁의 주도세력은 학생, 야당, 종교 세력과 재야인사로 요약할 수 있다. 현실에서 대중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은 야당이 컸으며, 6월항쟁의 주체들 내에서는 학생집단의 영향력이 결정적이었다. 6월 항쟁에서 제기한 민주주의의 내용과 구호는 이렇듯 민주세력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었으며 그에 의해 성공과 한계가 규정되는 운동으로 볼 수 있다. 민중민주주의에 기반을 두어서 군사독재타도와 민주정부수립을 지향했던 학생들과 정권교체를 바라는 야당정치인 사이에 가능한 합의는 직선제 쟁취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구호는 당시 국민대중의 의식과 역량에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6월 항쟁의 참여세력은 앞서의 주도세력을 제외하면 주로 청년학생대중과 사무전문직 노동자, 그리고 비조직 군중들이었다. 100만의 대열을 형성했던 6.10, 대회의 구성은 지역마다 달랐고 또 민주항쟁이 진행됨에 따라 달라졌지만 기본적으로 대열을 조직적으로 구성했던 핵심세력은 학생들이었다. 초기 학생, 재야, 야당정치인 중심의 대열에 대도시의 경우 점차 사무전문직 노동자들이 동참하게 되었고 중소도시의 경우 조직되지 못한 노동자들이 가세하는 15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57 경향을 보였다. 이런 점에서 6월항쟁의 주된 참여세력은 학생과 사무전문직 중심의 중간계층 78) 과 비조직된 생산직 서비스직 노동자들로 볼 수 있다. 어떤 사회운동도 중간층의 호응이 있을 때 대중화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항쟁의 핵심대열을 학생이 구성했다 할지라도 중간층이 얼마나 동참하는가가 대중적 확산의 지표가 된다. 한편 기층민중의 조직적 참여 정도는 그 운동이 보다 철저하고 비타협적으로 지속될 수 있는가의 여부를 결정짓는다. 6월항쟁이 제한적이나마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중간층이 동참하거나 지지를 보냈기 때문이며 동시에 6월항쟁이 6.29에서 머무르게 된 것은 기층민중의 조직적 참여가 부재했기 때문이다. 운동세력의 이념의 불철저성을 문제 삼을 수도 있지만 문제는 실현가능한 역량을 갖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학생들이 초기의 군사독재타도 란 구호에서 직선제 쟁취 구호로 변하게 된 것은 실제로는 국민대중이건 학생들이건 군사독재를 물리적으로 타도할 만큼의 조직화된 역량을 갖지 못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주체적 조건에서는 의도와 상관없이, 이념적 지향이 어떻다 할지라도, 현실적으로는 직선제 개헌의 쟁취와 선거를 통한 군사정권의 종식을 가능한 경로로 설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점을 전제로 항쟁 주체의 이념적 지향을 살펴보기로 하자. 많은 사람들은 다음의 질문을 던진다. 왜 6월항쟁 이후 운동은 더 발전되지 못했는가? 왜 6월항쟁의 성과가 YS, DJ를 비롯한 시민운동세력으로 흡수되었는가? 그리고 이렇게 평가하기도 한다. 87년 6월항쟁 이후 7,80년대 운동에 몸바쳐온 세력은 자신의 투쟁 경력, 연대감, 조직적인 힘을 정치적 힘으로 전화시키는데 실패 했다(김동춘 1997, 66).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일차적으로는 항쟁주체의 이념적 지형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사실 6월항쟁의 주체가 이후의 정치과정에서 정치적 세력으로 진출하지는 않더라도 일종의 사회적 헤게모니를 가졌어야 했다. 그러나 87년 이후의 과정에서는 그렇게 되지 못했다. 이는 87년 항쟁의 과정 혹은 이념과도 일정한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87년 이후의 분열양상은 근본적으로 87년 민주항쟁 주체들의 이념이 안고 있던 수준에서 기인한다. 87년의 이념은 독재타도, 민주쟁취였고 구체적으로 민주주의의 내용은 호헌철폐, 민주쟁취였다. 87년 민주화운동은 무엇에 대한 반대란 점에서 일치했으나(공동의 적) 건설할 사회상에 대해서는 일치된 합의가 없었다. 쟁취할 과제는 정책적 수준이었으며 최소강령의 수준이었다. 다시 말하면 모든 민주 세력의 연대를 가능하게 하고 국민적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던 최소강령은 호헌철폐, 78) 사무전문직 노동자들을 어떻게 분류하는가에 따라 의견이 다양할 수 있다. 조희연 교수는 사무전문직 노동자들은 중간층 이라기보다는 노동자로 보고 있다. 따라서 그는 6월항쟁을 야당 및 중간층이 주도했다는 견해를 반박하며 민중주도에 의한 운동으로 보고 있다. (앞의 책, 6월민주항쟁의 이념, 주체, 전략, 161쪽) 그러나 중간계층에 대한 엄밀한 규정은 미루 더라도 사무전문직 노동자들이 급진적인 노동자의 속성을 대표한다고 보긴 힘들 것이다. 소득 수준을 기준으로 볼 때 그들 은 중간계층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생산직 노동자들과는 다른 온건함과 정치적 유동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민중주도와 구분 되는 중간층 주도란 표현이 적절하다고 본다. 155 민주화운동
158 직선제 쟁취였다. 그것이 군사독재의 재집권을 저지하고 문민정권을 수립할 수 있는 당시의 가능한 유일한 방편이었다. 즉 절차적 민주주의의 실현, 직접민주주의의 진전이라는 형식적 민주화를 통해 문민정권의 수립이라는 목표를 실현할 수 있다는 데 대한 일반적 합의가 당시 민주세력의 통일성을 가능하게 한 지점이었다. 물론 당시의 민주 세력은 다양한 이념적 지향을 가지고 있었다. 민중민주주의의 지향을 가진 사회주의세력, 민족해방변혁을 통한 사회주의 실현을 지향하는 주체사회주의세력과 시민 민주주의적 합리성을 지향하는 자유주의세력, 그리고 뚜렷한 이념적 지향을 갖지는 않은 채 계속되는 군사독재의 폭력적 통치에 반대하는 대다수의 국민 대중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세력의 결합이 6월항쟁의 주체였다. 6월항쟁 이후 민주세력의 분열이 그 세력의 조직적 이념적 헤게모니를 상실케 한 원인이 된다는 분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분열은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근본적으로 민주세력이 분열하게 된 것은 이미 6월항쟁의 주체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세력이었다는 점에 원인이 있다. 그리고 6월 항쟁의 성과가 정치적으로는 김영삼과 김대중의 정치적 지도력으로 편입되고 한편으로는 시민운동의 약진으로 드러나게 되었는데, 이는 6월항쟁에 분기한 국민들의 의식발전의 정도가 항쟁의 주도세력의 사회주의적 지향과는 달리 대체로 군사독재 반대 와 직선제의 쟁취 라는 지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향은 시민 민주주의적 세력 즉 자유주의적 세력과 친화력이 있는 것이었다. 6월을 통해 표출되고 대세로 형성된 민주화의 담론과 국민적 지향은 시민운동세력의 약진을 위한 좋은 토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민중민주주의세력과 민족해방운동세력의 급진적 경향과 그 양대 세력의 근본적 분열(사회구성체논쟁이후 고착된)이란 문제는 87년 이후 그들이 국민의식을 한 단계 상승시키기 위한 구심을 형성하고 새로운 대중적 정책을 생산해내기에는 기본적 한계로 나타났다. 여기에다 80년대 후반에 급격히 전개된 동구권의 붕괴는 진보적 사회운동진영에 혼란을 가져왔고 새로운 상황에 맞는 능동적 적응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또 한편으로 90년대 초 중반까지 계속되었던 노동운동의 약진은 한국 사회운동의 변혁적 전망을 모색하는 데 관심을 쏟기보다는 노동자주의(workerism)에 입각한 노동운동에 대한 양심적 지원에 자족하는 경향을 만들기도 하였다. 3. 6월항쟁의 평가와 의미 1987년 6월항쟁은 한마디로 직선제 쟁취, 군부독재의 퇴진과 민간민선정부의 수립을 위한 투쟁이었다. 이것이 갖는 의미는 87년까지 한국의 정치, 사회적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 분명해 진다. 6월항쟁에서 제기한 요구들의 정치사회적 의미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6월항쟁은 최소한 선거에서의 절차적 민주주의 실현을 요구하는 투쟁이었다. 87년 이전 한국정치의 기본문제 중 하나는 정권의 출발과정부터 존재하는 비민주성이었다. 쿠데타나 부정선거, 15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59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간접선거 등 비정상적 방식에 의한 집권으로, 정권은 태생적으로 정당성의 문제를 안고 있었으며 국민적 의사를 반영할 최소한의 통로인 선거마저 전면적으로 차단당한 상태였던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보다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기본적으로 차후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게 된다. 최소한의 국민 참여의 통로이자 기초적 의사표현의 수단인 선거의 정상화가 민주주의의 실질적 진전을 위한 선결과제였다. 특히 대통령 중심제 아래에서 대통령 선거에서의 절차적 민주주의 실현은 선결적 과제였다. 민주주의에서 형식은 민주주의의 내용을 가능케 하는 최소한의 토대가 될 수 있다. 자본주의가 제도화시켜 놓은 민주주의가 형식에만 그치고 민주주의의 실질적 내용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형식적 민주주의 79) 의 한계에 대한 지적은 일면 타당하다. 하지만 당시 한국 상황에서는 주요한 정치과정에서 최소한의 민주적 형식조차 존재하지 않았고 이는 정치, 사회문화 전반의 비합리성, 게임규칙의 부재상황을 재생산해 내고 있었다. 정권이 행하는 영장 없는 체포, 감금, 고문, 언론자유의 압살, 출판 및 사상의 자유에 대한 탄압 등의 민주주의에 대한 억압은 국민적 견제와 정권 교체 가능성이 없는 상황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일부의 비판적 사회운동은 폭력으로 진압하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헌법 위에 군림하는 절대 권력을 제어하는 일차적 방법은 국민의 선거를 통한 정권의 교체가 가능할 때이다. 이런 의미에서 군부독재의 퇴진과 민선정부의 수립이라는 과제를 직선제 개헌이라는 실천 강령으로 제기했던 것이 당시의 상황에서는 현실적인 요구사항이었다. 직선제는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 를 의미한다. 당시에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 를 놓고 개량적 방법이란 비판도 존재했었다. 그러나 앞서도 지적했듯이 선거가 아닌 전민항쟁의 방법으로 군사정권의 폭력에 대항하며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현실적인 힘이 없는 상황에서 국민들은 물론 민주항쟁의 지도부가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 를 실현 가능한 정책으로 채택한 것은 타당한 판단이었다. 80) 79)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주로 형식적으로 민주적 절차와 기회를 부여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제기된다. 따라서 이는 내용적 민주주의의 문제와는 구분된다. 내용적 민주주의란 민주주의의 형식적, 제도적 틀을 보장하는가와 그렇지 않는가의 수준을 넘어서서 진정으로 국민대다수가 정치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실질적 여건(경제적, 정치적)이 마련될 때 가능한 것이 다. 결국 이는 정치권력을 국민대다수가 장악할 때만이 완성될 수 있다. 따라서 내용적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제도를 질적으 로 넘어서는 새로운 민중적 사회제도에 의해서만 뒷받침될 수 있다. 80) 여에 대해서 조희연은 군부독재 타도에 대한 범민중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확산되는 혁명적 상황 속에서 직선제 개현 이란 민주화투쟁의 궁극적 목표가 아닌 군부독재 청산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고 본다(조 희연 1997, 170). 그러면서 그는 직선제 개헌 요구가 현명한 현실적 선택 (임혁백)이라는 견해를 비판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미국이 광주항쟁 경험 때문에 개입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았으며, 이런 조건에서는 6.26 대행진에서 나타난 민 중의 힘을 지속적인 비타협적 투쟁을 통해 군부독재퇴진/타도 로 연결시켜 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나 군이 개입을 하지 않았으리란 가정은 조희연 스스로도 조심스럽게 하고 있을 뿐 현실적으로 정권을 타도할 정도였다면 군의 개입의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6.26행진에서도 확인되었듯이 아무런 준비 없는 비조직적인 100만 군중들의 청와대 앞 시위가 다연발탄 몇 발로 쉽게 와해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조직되지 않는 군중이라는 주체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채 군사정권의 타도를 기본적 노선으로 강조하는 것은 모험적 발상으로 보인다. 157 민주화운동
160 87년 직선제 개헌 실시를 계기로 한국정치는 전반적으로 절차적 합리성이 실현되는 과정에 있다. 선거에 의한 정권의 교체 가능성이 제도적으로 확보됨으로서 초헌법적 통치권자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정권교체가 현실화되면서 퇴임 후의 부정비리와 정치적 실책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심판이 내려짐으로서 절차적 민주성, 합법성, 합리성을 강제하는 기제로 작용하게 되었다. 87년을 계기로 한국정치가 전근대성을 벗고 근대적 성격을 확립하는 출발선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둘째, 87년 6월항쟁은 개인의 자유마저 극도로 침해하는 폭력 통치방식을 극복하고 개인과 집단의 자유의 폭을 확대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전근대적 권력은 통치의 수단에서 이데올로기적 통제보다 폭력통제에 주로 의존한다. 물론 이는 정치의 주인이라는 대중적 각성이 낮은 조건과 맞물려 있다. 정권의 통치방식이 변화하는 것은 첫째로는 인권 및 자유에 대한 각성이 높아지는 것 둘째로는 국민들이 스스로를 통치의 대상이 아니라 국가의 주인이라는 민주의식을 갖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국민의 자유에 대한 각성, 국가의 주인이라는 자각은 전근대적 통치방식 즉 폭력에 주로 의존하는 통치를 이데올로기적 통제로, 나아가 동의와 설득에 의존하는 통치로 변화시켜 나가게 한다. 87년 이전의 한국사회는 폭력적 통제가 사회전반을 지배하고 있었다. 군사 독재정권은 이런 폭력성을 상징하고 있었으며 민간정권이 될 수 없었던 이유도 폭력에 의한 물리력을 주로 군부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84년부터 시작된 유화국면을 계기로 이런 폭력적 지배방식이 완화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사회통제의 수단은 물리적 폭력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화국면 이후 열린 공간 속에서 민주화세력의 대중접근성이 높아지면서 사회전반의 민주의식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 그 결과 점차 힘에 의한 통치는 개인의 자유과 합리성을 심각하게 유린하는 것으로 국민 대중에게 다가왔다. 특히 80년 광주의 유혈진압은 군사정권의 폭력성의 상징이었다. 87년 6월항쟁에서 제기된 독재의 퇴진과 민간정부에 대한 요구는 이런 폭력적 통치의 정점에 있는 군부독재를, 국민적 동의에 기초한 정치가 기대되는 민간정부로 변화시켜 보고자 한 것이었다. 87년에 우리 국민이 직선제와 같은 제도적 변화와 더불어 군부에서 민간으로의 인적 변화를 갈망한 것도 핵심은 통치방식의 변화를 바라는 열망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87년 6월항쟁의 결과 비록 군 출신인 노태우정권이 들어섰지만 국민들의 이런 요구를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 따라서 여전히 군부출신이었지만 보다 유연한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구체적으로는 폭력적 통치방식을 언론 등을 활용한 이데올로기적 통치방식으로 변화시켜 가는 과정을 밟게 된 것이다. 그 결과 87년 이후 사회운동진영에 대해서는 선별적으로 폭력을 사용하면서도 일반 국민에게는 언론을 통한 이데올로기적 통제, 소위 여론을 통한 지배를 중시하는 변화를 보였던 것이다. 이런 경향은 김영삼 정권의 등장 이후 특히 강화된다. 가시적 폭력이 현저히 줄면서 공권력에 의한 국민의 사생활에 대한 침해는 과거보다 줄어들었고 소극적 의미에서의 자유 즉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는 15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61 이전보다는 확대되었다. 81) 그 결과 대중의식에서도 자유주의가 과거보다 훨씬 강화되었다. 셋째, 87년 6월항쟁은 사회전반의 권위주의적 지배질서의 청산을 위한 투쟁이었다. 전근대적 지배질서의 하나인 권위주의는 물리적 폭력과 함께 87년 이전 한국 사회를 유지하는 이념적 토대가 되었다. 정권의 비합리적이고 비민주적 지배에 순응하는 사상 정신적 토양이 바로 권위주의였던 것이다. 이런 전근대적 권위주의의 정점에 군부정권이 있었던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민중의 요구에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87년 6월항쟁 이후 군부정권의 권위주의적 지배질서에도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당시의 노태우 대통령이 다른 사람의 손에 들리게 했던 가방을 직접 들고 다니는 모습을 일부러 보인다든지 사각탁자가 아닌 원탁에서 회의를 한다든지 하면서 의식적으로 권위주의적 냄새를 없애려는 가시적 제스추어를 보인 것도 이런 대중적 요구를 거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권이 칼국수를 먹으며 오찬회동을 한 것 등도 모두 이런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폭력적 통치방식이 여론에 의한 통치방식으로 바뀌는 속도보다 권위주의적 지배질서가 변화하는 속도는 훨씬 더디다. 이것은 단순한 절차와 제도, 법의 문제를 넘어서서 사람들의 사상 정신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면 정치적 영역뿐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영역 즉 학계, 법조계, 언론계, 경제계 등에서 권위주의적 상하질서가 더 뿌리 깊게 남아있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따라서 아직 사회전반의 권위주의적 풍토는 쉽게 극복이 되지 않고 있다. 그런 문화적 정신적 풍토 속에서 주체화 된 세대들의 경우 특히 변화의 속도가 더디다. 권위주의의 청산은 정치 영역이든 사회 영역이든 세대의 교체를 통해서 확연하게 가능할 것이다. 어쨌든 87년 6월항쟁은 그 권위주의 청산의 출발에 서 있음은 분명하다. 1) 6 29선언 6월 27일 국민운동본부는 상임공동대표회의를 갖고 현 정부는 이제 국민의 뜻에 승복, 새 헌법에 의한 정부이양 일정을 구체적으로 밝히라 고 요구하고, 위대한 민주 승리의 날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라고 천명했다. 이날 오후와 밤에도 대구, 광주, 청주, 인천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6월 28일 천주교 부산교구, 대한예장, 서울제일교회, 새문안교회 등에서 기도회 및 시위가 있었고, 청주와 군산에서도 학생들이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다. 다음 날 전두환 정부는 6월항쟁에 굴복해 6 29선언을 발표했다. 6 29선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81) 소극적 의미의 자유는 무엇으로부터 구속받지 않을 자유를 말한다. 적극적 의미의 자유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삶을 실현할 수 있는 자유이다. 적극적 의미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기회와 조건이 요구된다. 따라서 적극적 의미에 서의 자유는 기회의 균등이나 사회경제적 조건의 보장이 뒤따라야 가능하다. 159 민주화운동
162 첫째,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토해 1988년 2월 정부 이양을 실현한다. 둘째, 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도록 대통령선거법을 개정한다. 셋째, 김대중씨 등을 사면 복권하고, 시국 관련 사범들을 석방한다. 넷째, 국민의 기본권을 신장시키기 위해 제도적 개선을 촉구하며, 인권침해를 시정한다. 다섯째, 언론자유의 창달을 위해 관련 제도와 관행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며, 언론기본법은 개정되거나 폐지되어야 한다. 여섯째, 지방자치제와 대학의 자율화 및 교육자치제를 조속히 실현한다. 일곱째, 정당의 건전한 활동을 보장하며, 대화와 타협의 정치풍토를 마련한다. 여덟째, 과감한 사회정화 조치를 강구한다. 전두환과 노태우 중 누가 6 29선언을 주도한 것인가 하는 문제는 관계자들의 증언이 다르기 때문에 확언하기 힘들다.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6월 15일경 직선제를 수용하라고 애기했다고 주장하고(김성익 1992, 450), 6월 17일 검토해보라고 했다는 설도 있으나(오병상 1995, 59), 노태우는 전두환이 6월 24일 처음으로 말했다고 증언했다(조갑제 2007, 160). 6 29선언문 안을 작성한 노태우직계 박철언은 23일 노태우가 자신에게 그 전날 전두환 대통령이 직선제를 하자고 하더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했다(박철언 2005, 261). 이들의 주장으로 미루어볼 때 전두환이 노태우에게 6월 15일이 아니면 그 직후 직선제도 생각해보라고 했지만, 적극적으로 직선제 수용문제를 검토하도록 말한 시점은 22-24일 경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두환과 노태우는 6월 24일 전두환과 김영삼이 회동할 때도 직선제 수용을 굳히지는 않았다. 직선제 수용이 확고했더라면 6 26평화대행진을 막고 김영삼과 재야세력, 학생들을 분리시키기 위해서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의사표현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전두환은 22일부터 26일까지 야당 대표와 종교계 지도자 등 사회 중요 인사들과 만나 의견을 들었다. 그리고 노태우와 전두환 양측은 6 26평화대행진을 목도하고 27, 28일 문안을 검토해 29일 아침에 발표했다. 노태우건 전두환이건 직선제를 수용한 것은 직선제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자신한 점이 작용했다. 직선제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김대중과 김영삼 두 사람 다 출마해야 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직선제 애기를 꺼낼 때 전두환과 노태우는 김대중을 사면, 복권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생각했다는 점이다. 전두환은 6월 27일 아침에 이종율과 김성익 두 비서에게 앞으로 상황이 어려우면 적절한 시기에 직선제를 해버리자 라고 말했다(김성익 1992, 428). 6월 28일 아침에는 다음 날 노태우대표가 직선제를 발표할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양김이 대통령 선거에 안 나올 리가 없다고 단언했고, 그날 오후에는 김대중을 풀어주면 김영삼과 부딪치게 돼 직선제를 받는 것은 야당과 언론의 급소를 찌르자는 거야 라고 말했다고 한다(김성익 1992, 440). 16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63 2) 6월항쟁의 실천적 의의 많은 연구자들이 6월항쟁과 3 1운동의 유사성을 지적한다. 3 1운동이 한반도 방방곡곡에서 일어났다면 6월항쟁은 남한의 거의 모든 도시와 일부 군청소재지에서도 일어났다. 또 6 10국민대회와 6 18최루탄추방대회, 6 26평화대행진은 전국 각 도시에서 같은 시간에 일어났던 바, 1986년 이전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이었다. 3 1운동에는 여러 계층이 참여했다. 극소수 친일파와 대지주를 제외하고는 각계각층이 들고일어났다. 6월항쟁은 3 1운동과 달리 농민은 전주 등 몇 군데에서만 참여했지만, 각계각층이 참여했다고 말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인천과 성남 등 노동자들이 많은 도시에서는 노동자가 집단적으로 참여한 것과 과거에는 보기 드문 경우였다. 3 1운동에서는 종교인이 여러 지역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교당이나 교회가 거점이 되기도 했는데, 6월항쟁에서는 천주교, 개신교, 불교의 사제, 목회자, 승려, 신도가 다수 참가했고, 그것도 조직적으로 참여한 경우가 많았으며, 성당과 교회, 사찰, 그 밖의 종교 관련 기관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거나 도시의 중요 거점 역할을 했다. 6월항쟁에는 시민들이 다수 참여하거나 동조했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4월 혁명 이후 30여 년 동안 시위가 빈번했지만, 대개는 학생운동의 성격이 강했고, 시민들이 참여한 것은 부마항쟁과 5 18민주화운동을 꼽을 수 있을 정도다. 6월항쟁에 시민이 참여한 데는 년 3년간에 GNP 성장률이 연평균 13%를 오르내리던 경제적 호황도 작용했다. 4월혁명, 부마항쟁, 5 18민주화운동은 경기침체나 경제악화가 시민참여의 한 요인이 되었지만,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나 일반 시민들이 6월항쟁에 다수 참여한 것은 전두환의 통치방식이 자신들의 생활수준과 맞지 않는다는 감각 혹은 인식이 한몫했다. 6월항쟁에는 넥타이부대로 불린 20 30대의 화이트칼라층과 중간계층이 열성적이었다. 6월항쟁에 참여한 학생과 이들 중간계층, 넥타이부대는 이후 민주주의 확장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고 시민운동에도 참여했다. 시민운동이 6월항쟁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6월항쟁은 한계도 있었다. 1986년의 개헌운동에서도 그랬지만 김대중, 김영삼 등 정치인은 직선제 개헌 이외의 주장을 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러나 직선제는 1972년 유신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서대협 등 학생운동세력은 반미 등을 외치긴 했으나 민주대연합을 기계적으로 추수하였다는 인상을 주었고, 평소 주장대로 야당이나 재야세력을 견인 하지 못했다. 기독교 보수세력이 6월항쟁에 참여한 것도 전두환 정부 부정, 직선제 쟁취 수준을 넘어서는데 제약요인이 될 수 있었다. 국민운동본부도 서대협보다 급진적일 수는 없었다. 6월항쟁이 끝났을 때 사실상 활동이 종료되었던 점도 국민운동본부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점들이 실질적 민주주의를 심화시키는 데 어려움을 조성했다. 독소조항이 남겨진 채 노동법이 개정되었고, 국보법 개폐문제도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였으며,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유산을 청산하는데도 무력했다. 김대중과 김영삼의 분열을 막지 못했던 점도 한계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161 민주화운동
164 3) 누가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누가 주도했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크게 중산층주도론 과 민중주도론 으로 대별된다. 6 10국민대회의 형식적 주체는 국민운동본부였다. 그리고 국민운동본부의 명망 있는 재야인사들의 상징적 지도력이 어느 정도 대중들을 동원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국민운동본부에 참여했건 안했건 서대협과 서학협 등 전국 각 시도 지역 학생회연합조직의 지도를 따르는 젊은 대학생들의 헌신적 투쟁이 없었다면 6월항쟁의 지속적 확산은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학생들은 거의 매일 대학별 철야농성과 교내 출정식 등을 통해 투쟁의지를 가다듬고 지역별 연합가두시위를 주도함으로써 대중들에게 투쟁의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또한 가두에서 대중과 함께 정치집회를 조직해내고 정치적 선전과 선동을 통해 투쟁의 당위성과 전망에 대한 확신을 심으려고 노력했다. 젊은 대학생들이 지난 6월항쟁의 전 과정에서 선도적 역할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은 3-4우월의 학내민주화투쟁을 통해 이른바 학생운동의 지도 역량과 학생 대중들이 긴밀히 결합했기 때문이다. 1987년 3-4월의 학생운동은 학내외 비민주적 요소 척결, 학생들의 복지증진 등을 전면ㅇㄴ에 내세우면서 끈기 있게 대중들의 자주적 참여를 이끌어내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4 13 조치 이후 대학교수들의 잇따른 시국성명이 발표되는 고양된 정세에 이르러 호헌철폐 독재타도 의 기치를 내걸었을 때 대중으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투쟁의 선봉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학생운동과 함께 투쟁의 선봉에 서서 헌신적으로 투쟁한 또 다른 조직역량으로는 80년대에 들어 새롭게 성장한 청년들 중심의 민주화운동단체들을 들 수 있다. 서울의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을 비롯하여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의 지역운동단체협의회를 구성하는 전국 각 시도별 민주단체들의 청년 활동가들은 6월투쟁의 전 과정에서 학생운동과 긴밀히 결합하여 이들을 실질적으로 지도하고 국민운동본부의 중간 실무역량으로 기능함으로써 전국 규모의 투쟁을 총체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이들 민주단체들은 각계각층의 청년 대중을 자기조직의 대중적 토대로 갖추고 있지 못하였고 학생들의 동원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안고 있었는바, 크게 보아 학생운동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6월항쟁을 선도한 세력은 잘 조직된 학생운동세력이었지만, 이를 전 민족적 항쟁으로 이끌어나간 실질적인 주체는 대중들이었다. 아무런 조직적 기반도 갖지 못한 이들 대중들은 6월투쟁의 초기에는 국민운동본부나 대학생들의 선도에 따라 소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성금을 모아 전달하고 경찰들의 무차별 폭력과 연행으로부터 젊은 학생들을 보호해 주었다. 일부 영세 상인들이나 젊은 사무직 노동자들로 구성된 넥타이부대는 시위대에 합세하였다. 이들은 투쟁의 성과가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점차 적극적으로 투쟁의 현장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투쟁이 장기화되고 더욱 격렬한 양상으로 발전해가면서 이들 투쟁의 주역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대중들은 학생들보다 먼저 집결장소에 나와 독자적인 시위대열을 형성하기도 하고 돌과 화염병을 손에 들고 대열의 16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65 선두에 서기도 했다. 시기적으로 보아 6월 18일의 최루탄 추방대회 이후에는 이들 스스로 빈병을 모아 즉석에서 화염병을 만들어 사용하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이들 가두대중의 폭력시위는 수십 수백 대의 트럭과 택시를 앞세운 부산과 광주지역의 차량시위에서 그 정점을 이루었다. 더 이상 학생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조직되지 않은 대중의 급격한 가두진출은 군부정부를 굴복시킨 핵심요인이었다. 6우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에 참여한 시위대의 규모는 6 10국민대회에 비해 무려 4배 이상 증가한 것이었다. 학생들의 수에는 급격한 변동이 없었다고 본다면 가두대중의 양적 증가는 4배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 가두대중의 계급적 구성은 어떠하였는가? 이들은 우리사회의 중간계층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소지가 많다. 한 주장에 따르면 이들은 결코 중간층이 아니었다(기사연 1987, ). 기사연 리포트는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판단되는 부상자, 구속자, 연행자들에 대한 직업별 분류를 7개의 도표로 만들어 제시하고 분석했는데, 이 도표는 이들이 오히려 기층 민중들임을 증명하는 자료가 되었다. 이 도표에 따르면, 구속자 또는 부상자들 가운데 학생을 뺀 나머지 중에서 일반적으로 중간층으로 분류할 수 있는 회사원이나 상업인의 수는 기층 민중으로 분류되어야 할 노동자, 농민, 식당종업원, 신문배달원 및 무직자의 수에 비해 훨씬 적다. 6월항쟁이 주로 도시의 중심지에서 진행되었고 학생들이 주도하였으며, 더구나 우리 사회의 기층 민중들의 정치의식화 정도나 조직화의 수준이 매우 미흡하다는 등의 비실천적 논거가 그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중산층 주도론은 7-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의 확산을 설명하지 못하는 치명적 약점도 가지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생산직 노동자, 농민이 대거 참여한 민중항쟁으로까지 격상시켜 이해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실제로 6월항쟁에 광범위하게 참여한 미조직 가두대중을 선도한 세력은 학생운동세력이었고, 어느 정도 조직화되어 있던 노동운동단체들의 역량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러한 이해의 연장선상에서 성급하게 전국적 노동자정치조직을 거론한다든지 하는 편향도 극복되어야 한다. 국민운동본부는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6월항쟁의 원동력이었다. 70년대와 80년대 민주화운동을 통해 꾸준히 민중들의 신뢰를 축적해온 다양한 개인과 집단들이 하나의 상설적 지도조직으로 묶였다는 것, 더구나 2-3월의 이민우 파동을 거치면서 독재타도와 직선제 개헌 쟁취의 선명한 의지를 내보인 김대중과 김영삼씨가 이끄는 통일민주당까지 하나의 조직에 묶였다는 것, 그리하여 신뢰할 수 있는 강력한 조직적 무기가 마련되었다는 것이야말로 6월항쟁을 이끌어낸 주체적 조건이자 원동력이었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 대다수의 민주의지를 모아 민주헌법을 쟁취하고 이를 권력의지로 끌어올려 민주정부를 수립할 것을 공통의 정치 강령으로 내걸고, 모든 계급과 계층의 의사를 전국 규모로 반영시키고자 하는 조직체계를 갖추었다는 점에서 국본은 그 이전의 어떤 공동투쟁조직보다 강력한 모습으로 국민들에게 인식되었다. 실제로 국본은 전국운동본부를 결성하면서 그 산하에 각도, 특별시, 직할시본부, 시군구지부, 읍면동 위원회를 두는 것으로 163 민주화운동
166 규정하고, 운영체계로서 상설의결기구와 집행위원회를 구성함으로써 전국 규모의 상설적 연합전선조직의 체계를 갖추었으며, 국민운동의 목표로서 민주헌법을 확립하고 그를 토대로 하는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규정하고 그를 위한 최소한의 충족요건으로서 정치강령의 성격을 띠는 7개항의 요구를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나섬으로써 정치적 대체세력의 결집체임을 선언했다. 5 18항쟁에 대한 살인진압을 통해 집권한 전두환 정부는 쿠데타 학살 고문 폭행 은폐조작 타락 독직 용공조작 등으로 점철된 전형적인 비민주적 군사정부이었다. 이는 전두환 정부가 국제수지 흑자 등 경제성장의 치적에도 불구하고, 광주학살이라는 태생적 원죄와 연루된 정당성 결여와 부도덕성으로 인해 광범한 민심이반에 직면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1987년 4월 13일 대통령간선제를 고수하겠다는 전두환 대통령의 4 13 호헌선언은 단임 헌법에 따라 7년을 기다려왔던 한국 국민들의 민주화 염원에 찬물을 끼얹은 것으로서 국민들로 하여금 배신감 박탈감 분노를 한꺼번에 분출시키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전두환 정부의 연장이냐 아니면 전면 거부냐의 양극화된 대결의 초기 국면에서는 남북한 긴장구도 상황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고 또 현대화된 막강한 물리력을 독점하고 있는 전두환 정부가 상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1987년 5월 특정 국면에서 우연히 발생한 사건인 동시에 군부독재의 부산물이기도 한 박종철 사건은 예기치 않게 노신영 총리와 장세동 안기부장을 사퇴시키게 된다. 이로써 전두환 정부 내부의 권력관계에서 전두환 사후보장파가 퇴조하고 민정당의 정부재창출에 우선권을 두는 분파가 득세하게 되었다. 동시에 1987년 5월 18일 7년 전의 5 18 광주민주화운동의 희생자를 추도하는 모임에서 국민들로부터 도덕성과 신뢰를 받고 있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특별 성명을 발표하였다. 즉,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전두환 정부에 의해 은폐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 사건은 일약 박종철 개인의 고문치사라는 단순한 죽음을 넘어서서 전두환 정부의 부도덕성과 기만적 행태를 다시 전면에 드러내 보여주는 정치적 쟁점이 되는 사건으로 변하였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은폐되고 조작되었음이 폭로 확인되면서 고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어 범국민적 연대기구로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가 결성되어 박종철 사건 규탄과 4 13 호헌조치의 철회 및 민주개헌 쟁취를 목표로 1987년 6월 10일 대대적인 국민운동을 전개해나간다. 6월 10일 이후 10~16일 간의 명동성당 내 농성투쟁, 18일의 최루탄 추방대회 그리고 26일 전국에서 130여만 명이 참여하는 국민평화대행진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전두환 정부의 집권연장을 막는 6월민주항쟁이 전개된다. 6월항쟁은 투쟁의 규모를 볼 때 전국적으로 20~30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되었고 연인원 4~5백만 이상의 국민대중이 참여하였다. 투쟁의 지속성이라는 측면에서는 19일 동안 지속적으로 진행되었고, 투쟁방식의 다양성에서는 일반 국민들의 정치적 진출이라는 측면 외에도 대학생들의 헌신적인 투쟁, 가두시위의 다양한 전술의 개발, 지역별 시위에서의 '상징적 중심지'의 16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67 형성, 민주화 대연합으로서의 국민운동본부의 결성과 지도력 창출, 가톨릭과 개신교의 지도부 역할이라는 특징을 보여주었다. 6월항쟁이 폭발적으로 전개되어 나가는 역동적 상황에서 한편으로는 광주학살의 경험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군부 내 장성들의 소극적 입장과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이 처한 국제 정치경제적 맥락과 한미관계의 특수성으로부터 연원하는 미국의 압력으로 인해 전두환 정부는 새로운 위기타결책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특히 1987년의 시점에서 전두환 정부에 대한 국제적 압력과 관련해서는 한국 경제 사회의 개방적이고 대외의존적인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제기되는 구조적인 압력 이외에도 1988년 서울올림픽의 순조로운 개최 진행을 위해서도 정치의 민주적 안정이 요구되었다. 또한 1987년 6월의 한국 정치상황과 관련하여 미국 의회가 한국 민주주의 법안 을 제출하고 레이건 대통령의 경고친서가 전달되는가 하면 개스틴 시거 미 국무성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차관보 등이 한국 군부의 정치개입을 반대한다는 명확하고도 반복된 입장을 표명하는 등 미국의 직 간접적인 압력은 6월항쟁의 활력을 뒷받침해주는 데 손색이 없었다. 6월항쟁은 1987년을 전후한 시기의 한국 경제가 3저 호황이라는 세계 경제적 요인에 편승하여 급속한 경제성장을 구가하고 있었던 경제적 호황으로부터 많은 덕을 보았다. 경제호황에서 터져 나온 6월항쟁은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제기되는 계급갈등 등의 경제적 쟁점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4 13 호헌의 철회와 대통령직선제의 실시 등과 같은 정치적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제도권정치의 역할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6월항쟁은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선두 주자였던 김대중 김영삼 두 야당정치인의 합심과 제휴를 통한 정치적 대안의 존재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실제로 통일민주당은 6월항쟁의 정점이었던 일련의 국민대회와 공청회, 평화대행진이 개최될 때마다 1985년 2 12총선에서 돌풍을 몰고 왔던 양김의 주도 하에 정치적 대안으로서의 수권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부결속과 전열정비에 박차를 가해나갔다. 또한 통일민주당은 재야운동권 세력들과의 공동보조 하에 전두환 정부에 대한 민주항쟁의 공세에 있어서도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함으로써 6월항쟁에 있어서의 제도권 야당의 몫을 지켜나가는 데 성공을 거둔다. 6월항쟁이 폭발적으로 전개되어 나감에 따라 일각에서는 군부의 전격적 퇴진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강하게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6월항쟁에서 폭력이나 강제로 군부정부를 퇴진시키는 것이 아닌 보다 온건하고 안정적인 형태의 민주주의 이행으로 타협과 조율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데에는 다음과 같은 요인이 작용했다. 첫째, 현실적인 물리적 저항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6월항쟁의 주도세력은 군부의 즉각적인 퇴진을 강제할 만큼의 물리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둘째, 여전히 타협과 조율이라는 합법적 투쟁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간주되는 한 군부정부와의 전면적인 물리적 대결을 벌일 어떤 구실도 165 민주화운동
168 정당화하기가 어려웠다. 셋째, 남북한 분단의 냉전적 대결구도가 상존하고 있는 안보적 상황은 어떤 형태의 전면대결도 부당하고 자기파멸적인 것으로 화하도록 하고 있었다. 1987년 6월 민주화 열기가 극에 달하고 있는 역동적 상황에서 군부의 즉각 퇴진이라는 화끈함과 조급성에 휘몰리지 않고 6월항쟁이 대통령 직선제 실시라는 온건한 형태의 합법적인 요구로 자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민주화운동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데 크게 일조를 하였다. 6월항쟁의 목표는 군부정부의 즉각적인 퇴진이라든가 급격한 체제변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 대통령직선제의 실시라는 보다 온건한 형태를 띠었다. 이에 따라 대통령직선의 승산 여부와 관련하여 양김 동시출마 필승론 으로 재집권이 가능하다는 전략적 계산이 권위주의 지배연합 내부에서도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헌법에 의해 7년 단임의 임기가 끝나는 것을 무리하게 연장하려 하기보다는 전두환 대통령의 기획과 김용갑, 이종률, 허삼수 등이 제시한 이른바 대통령직선제의 적극 수용이라는 반전이 제시되는데, 1987년 노태우에 의한 6 29선언이 그것이었다. 정치엘리트 간 정치협약의 시동을 가져온 1987년의 6 29선언은 상징조작의 차원에서 보면 민주화운동에 굴복한 항복 선언이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집권세력의 주도면밀한 계산과 시나리오에 따라 보다 적극적으로 위기를 타개해나가려는 역공세의 정치책략이었다. 6 29선언은 불확실성과 불확정성을 특징으로 하는 대통령직선을 둘러싸고 정치세력들 간의 협약에 의한 민주화를 가져오도록 한 정치적 전환의 계기였다. 결국 6 29선언의 정치조작에 의한 집권세력의 통제와 이해관계의 조정 하에서 진행된 1노 3김(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간의 4파전 대통령선거는 노태우가 당선되는 것으로 귀결되고 6월항쟁의 요구와 열기는 마무리된다. 6월항쟁은 1979년의 부마항쟁이나 1980년의 광주항쟁과는 달리 한국의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권위주의 지배연합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체제전환을 이루어 나가는, 이른바 엘리트 간 협상에 의한 정치협약이라는 중요한 정치적 궤적을 남겼다. 정치엘리트 간 협약에 의한 1987년 민주화는 노태우 정부를 경유하여 김영삼 김대중 정부로의 순조로운 흐름 속에서 높은 생존가능성과 정치안정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행의 안정에 대한 대가로 독점재벌이 주도하는 경제 질서와 권위주의 지배연합이 계속 건재함에 따라 보다 광범위하고 민중지향적인 자기변혁의 가능성은 그만큼 제약을 받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직접적인 정치 참여가 중요하며 민주화운동 진영은 그에 대한 준비를 해나가야 한다는 점을 자각시켜준 계기였다. 한국 사회는 87년 이후 절차적 민주주의의 진전, 자유화와 권위주의가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 속도는 더디고 기득권세력의 저항도 적지 않다. 또한 낡은 세대에 의한 보스중심, 계파정치의 관행, 당원중심의 당 운영 부재 등 전근대적 정당구조의 관행 역시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권의 민주화가 어느 영역보다 더딘 것 또한 사실이다. 정치권력은 사회변화를 가로막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사회의 변화와 사람들의 변화를 촉진할 수 16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69 있는 유리한 수단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진보적 사회와 그를 운영할 수 있는 사람들을 형성해 나가는데서 직접적인 정치 참여는 중요하다. 정치권력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정치권력을 통한 교육의 변화, 언론의 변화, 제반 사회제도의 변화와 그를 통한 국민대중의 보다 진보적이고 공동체적 변화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참여형 정치운동은 이런 정치세력을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교체해 나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 즉 진정 국민의 벗으로 국민의 이익을 위해 정치를 하는 전혀 새로운 세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참여형 정치운동은 실지로 지역대중 속에 뿌리박고 지역주민을 위한 실천적 대중운동 속에서 대중의 벗으로 새롭게 거듭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지역의 현안 문제를 지역주민들과 함께 해결하는 속에서 새로운 사회를 위한 깨끗하고 믿을 수 있는 세력으로 인정받고 기성의 정치세력과 달리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는 보다 인간적이고 공동체적인 정치세력임을 그들의 삶과 실천을 통해 확인될 때 새로운 대안세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Ⅲ. 광주지역의 6월항쟁 1980년 5 18항쟁을 경험하고 난 이후 광주와 전남지역의 민주화운동세력의 역량은 상당 부분 손상되었다. 대규모 항쟁을 겪고 난 이후 사회운동의 지도급 인사들과 핵심 활동가들은 체포, 구금, 수배 등으로 사회운동의 주체역량이 초토화 일보직전까지 진행되었다는 평가는 결코 과장이 아닐 정도로 5 18항쟁은 지역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항쟁의 진압 이후 지역의 민주화운동세력은 무엇보다도 5 18항쟁 과정에서 자행된 학살의 충격과 대규모 구속과 수배 등으로 인한 운동역량 상실의 충격에서 벗어나 5 18항쟁의 진상 혹은 진실을 규명하는데 주력했다. 최초에 5 18항쟁의 유가족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진상규명운동은 후에 오월운동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 민주화운동의 한 축을 형성했다. 5 18항쟁의 진상규명은 바꿔 이야기하면 민주화운동의 동력과 주체역량을 복원하는 과정과 동시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 운동가들을 중심으로 고립무원의 5 18항쟁을 자성하며 새로운 지역운동을 조직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학생운동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사상 이론적으로 새롭게 준비하고 새로운 조직 활동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전남대에서는 5 18항쟁이 끝난 직후인 8월경부터 노준현, 이재의, 신영일, 전용호 등 학생운동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학생운동 조직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비밀리에 추진되었다. 5 18항쟁 직전부터 학생회의 와해와 탄압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준비해온 제2의 학생조직재건 이라는 이름으로 준비된 조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80년 12월 12일 충장로에서 김대중 최후진술 유인물 배포사건 이 일어나고 이 사건을 주도한 이재의, 조양훈, 박동석 등 10여명이 검거되면서 제2의 학생조직재건 167 민주화운동
170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비록 학생조직 재건을 위한 시도가 일시적으로 실패하긴 했지만 전남대학교 내부에서는 한국사연구회, 고전독서연구회, 사회조사연구회, 근대사연구회, 민족문화연구회, 후진국경제학회, 여성문제연구학회 등 10여 개의 학회조직이 재정비되거나 창립되었고, 이러한 학회조직들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의 주체역량을 복원하려는 장기적인 과업이 실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민주화운동의 역량복원은 결국 민주화운동의 주력군이었던 학생운동 활동가 역량을 복원하는 작업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이 반영된 흐름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자료에 따르면(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7, 340), 학생운동 진영에서는 학생들을 교육하고 조직하며 투쟁에 동참하도록 하여 독재정권과 맞서 싸우기 위한 진영을 갖추려 노력했고, 대학에서 제적당하거나 졸업한 활동가들은 노동현장, 농촌 현장에 진출하여 대중의 삶에 기반을 둔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이끌려는 분위기가 전파되고 있었다. 1. 6월항쟁의 배경: 대중운동의 성장 학내민주화운동이 기지개를 펴기 시작하던 1984년은 개학 직후부터 시국토론회와 집회가 잇따라 개최되면서 총학생회장을 직선제 방식을 통해 선출하자는 요구가 분출되었다. 경찰의 캠퍼스 철수와 학내민주화의 활성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던 시점에서 제적학생들의 복교조치는 학내민주화운동이 더욱 탄력을 받아 진행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전남대학교의 경우 총 85명의 복교 대상자 중 67명의 학생이 복교를 희망하여 복적되었는데 이들은 복학생협의회를 결성하여 학교 당국과 접촉하는 등 학생운동 및 학내민주화운동에 대한 조직적 대응을 모색했다 주간을 전후하여 1천여 명의 학생들이 추모식에 이어 침묵시위를 전개한 다음, 중앙도서관 앞에 1천 5백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학자추)를 공식 결성했다. 학자추는 직선 총학생회 부활 등 학원자유화 요구를 중심으로 4월 23일부터 26일까지 전남대학교 교내에서 시위를 전개했고, 악법개정요구 등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4 19혁명 24주년을 전후한 상황에서 시작된 학원민주화투쟁이 확대되자 전남대생들은 5월 1일 학자추를 해체하고 민주회복추진위원회를 결성한 후 이 조직을 중심으로 5 18위령제 및 추모식 을 거행했다. 이들은 5월 15일부터 26일까지를 5 18추모기간 으로 정하고 추모식 등을 했으며, 5월 18일에는 금남로에서 2천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참여하는 가두시위를 전개하기도 했다. 5월 16일부터 22일까지 8일간에 걸친 5 18추모비 건립요구 단식투쟁(선대원, 양혜단, 김장홍 등 1백여 명 참여)을 전개하기도 했다. 10월 12일부터 박관현 2주기 추모주간을 설정하고 시위를 하던 중 신정호학생이 경찰이 던진 돌에 머리를 맞아 중태에 빠지자 10월 15일부터 20일까지 중간고사를 거부한 채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기도 했다. 11월에는 학교당국과의 합의로 총학생회장 직접선거가 실시되었고, 학생운동권이 중심이 되어 민주적 총학생회 건설을 목표로 선거운동에 16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71 참여하게 된다. 한편 조선대에서는 1984년 9월 민주화자율추진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해 수차례 집회를 시도했으나 이 대학 체육학과 교수들과 교직원들의 거센 저지로 무산되고 산발적인 교내 시위를 시도하는데 그친 바 있다. 1982년 12월에는 5 18항쟁과 관련하여 구속된 사람들이 대부분 석방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정권의 엄격한 통제 하에서 활동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는데, 개별적인 접촉과정을 통해 조직적 결사체를 만들자는데 합의하고 1984년 8월에 5 18 유가족과 부상자가 주축이 된 협의체 조직으로 광주의거구속자협의회 (구협)를 결성한다. 구협 결성 이후 노동자, 농민, 대학생 등이 참여하는 보다 광범위한 5월투쟁 내지 오월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오월투쟁의 확산을 도모했다. 광주의거구속자협의회는 5 18항쟁 종료 이후 최초이자 가장 넓은 사회적 연대에 기초해 결성된 협의체였지만, 협의체 성격의 한계는 물론 권위주의정권의 견제와 통제라는 제약을 극복하기 쉽지 않았다. 결국 애초 구협을 결성하면서 기대했던 행동력 내지 활동력을 보여주지 못한 채 장기적인 오월운동의 전망이나 민주화운동 주체역량의 복원 양성과 같은 과제를 실천하는데도 일정한 한계를 보이고 말았다. 명망가 중심의 조직, 내부적 이견의 외화 등의 한계를 인식한 이들은 구협의 한계를 대체할 새로운 조직적 형태를 구상하게 되었고, 이러한 새로운 조직구상은 전남민주청년운동협의회(전청협) 구성으로 이어지게 된다. 전청협은 1984년 11월 18일 결성되었다(1986년 11월 전남민주주의청년연합, 전청련으로 개칭됨). 전청협 결성에 참여한 인사들은 1980년 5 18항쟁에 참여했던 전력이 있는 인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재야에서 활동해왔던 활동가들이 참여했는데 약 150여명이 참석하여 광주YMCA 백제실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전청협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정상용, 김종배, 정용화를 비롯해 학생운동 출신의 신영일, 송재형, 김양래, 김상집, 전용호, 양희승, 장갑수, 이재의, 조양훈, 김창중, 이춘희, 이춘문, 정재호 등 청년활동가들이 주축이 되었고, 청년운동과 지역운동을 결합한 새로운 사회운동의 모델을 만들고자 했는데, 1980년 5 18항쟁 이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의 침체기를 벗어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세력으로 부상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1984년 12월 8일에는 전남사회운동협의회(전사협)가 결성되었다. 전사협은 명망가 중심의 지역운동을 민중운동 중심의 지역운동으로 재편하기 위한 목표를 갖고 출범했다. 11월 23일 임동성당에서 열린 추사감사제 및 농민대회 에서 농민 2천여 명과 청년 학생운동이 연대하여 본격적인 청학연대투쟁의 출발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대회는 전청련의 신영일과 가톨릭농민회(가농)의 김창중이 주도했던 투쟁으로 알려져 있다. 전사협에는 가농과 전청련을 비롯하여 기농 기농련 기청 광주민중문화운동협의회 목포민청 나주민청 순천민청 518 부상자회 등의 단체들이 참여했고, 배종열, 최성호, 전계량, 문병란 등이 공동대표를 맡고 노금노, 최평지, 김창중 등 기층대중운동가 출신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69 민주화운동
172 전사협은 민중운동 단체들 간의 상호연대 및 지원과 더불어 지역 차원에서 요구되는 각종 공동투쟁을 결의하고, 이를 광주구속자협의회(구협, 회장 홍남순)와 협의해 지역 차원의 공동여론과 투쟁으로 승화시키는 일을 주로 담당했다. 전사협은 1980년대 중반기에 지역운동의 협의기구이자 실질적인 지도부로서 기능하려 했고, 6월항쟁 과정에서도 국민운동본부의 산파역을 담당했던 측면이 있으며, 배종열, 오병윤, 최평지, 김창중 등이 비상대책위를 통해 집회와 가두투쟁을 주도했다. 전청협은 정치투쟁의 선봉대역할과 더불어 지역민의 구체적인 삶과 요구에 맞는 민중생존권 투쟁을 지원함으로써 지역에서의 대중적 토대를 강화해가는 활동을 벌여나갔다. 1985년 1월에 있었던 광양만 김양식장 피해조사, 광주 신가리 주민 시위사건 조사활동과 3워에는 광천동 KM사 노동자 탄압에 대한 연대재원투쟁, 9월에는 함평무안농민 소값 파동과 농축산물 수입개방 반대투쟁에 참여하고, 11월에는 부당 상하수도세 시정요구운동 등을 전개해 나갔다. 1987년 6월항쟁 발생과 보다 직접적인 연계를 갖는 사건은 신민당이 1986년 2월 12일부터 시작했던 직선제 개헌 1천만 서명운동이었다. 신민당은 개헌추진을 위해 각 지도별 개헌현판식 개최를 추진했는데, 전남지역 현판식은 개헌추진위 전남도지부 결성대회 라는 명칭으로 3월 30일 오후 2시 광주YMCA에서 열렸다. 이 행사는 재야인사들의 정치활동기구였던 전남민주회복국민협의회(회장 홍남순)가 야당과 공동으로 개최했다. 개헌현판식을 앞둔 3월 28일 전사협은 행사에 동참하기로 결정하고 전청련 회원을 중심으로 민주헌법쟁취 투쟁위원회 를 결성하고, 개헌현판식장을 대중투쟁 공간으로 활용키로 결의했다. 전청련 지도부는 29일 송재형을 비롯하여 신영일, 이춘문, 이춘희, 김전승, 정순철 등이 모여 3 30대회 를 위한 대책회의를 열기도 했다. 3월 30일 결성대회는 당초 예상보다 훨씬 많은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치러졌다. 주최 측이 공식행사를 끝내려 하자 신영일은 YMCA 옥상에서 마이클 잡고 현 정세와 직선제 개헌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이에 시민들이 도청으로, 도청으로 를 외치며 시가행진하는 상황이 연출된다. 시위를 준비했던 전청련은 김전승, 정순철, 위성삼으로 현장팀을 구성하여 시위대열에 개입했다. 전청련 소속 활동가 중 위성삼, 김태찬이 시위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신영일, 김전승 등은 수배조치가 내려졌다. 이런 와중에도 전청련은 서울의 민통련과 함께 대구와 대전, 인천으로 이어지는 개헌현판식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한다. 광주지역 노동운동 역시 1980년대 중반에 이르면 투쟁의 횟수와 강도가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19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노동운동은 합법적 활동공간이 없었다. 정치적 시민권이 없었던 것이다. 노동운동이 활동할 수 있었던 혹은 의탁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공간은 종교 시설이었다. 종교단체의 부문활동으로서 노동운동은 시작되었고, 유지될 수 있었다. 지오세(JOC)로 불렸던 가톨릭노동청년회(정향자, 김성애 등이 주도)를 필두로 산업선교회(이양현, 최연석 등이 주도)가 소모임과 교육활동을 통해 현장에서 조직을 만들고, 민주노조 설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들 단체와 17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73 노동운동가들의 활약에 힘입어 삼양제사, 로케트전기, 일신방직, 전남제사, 남해어망, 남양어망, 광주어망, 전일섬유, 한일섬유, 화천기공, 광산잠사, 나주잠사, 화순잠사, 인초공장 등의 사업장에서 민주노조가 들어섰다. 로케트 전기의 경우는 1979년에 민주노조가 탄생하면서 회사와 갈등이 본격화되었고, 80년대에는 노동자, 농민, 시민사회가 함께하는 연대의 틀이 구성되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학생운동 출신의 현장 이전이 본격화되기 시작해 자칭 과학적 이론으로 무장한 활동가들이 중심이 된 노동운동이 시작된다. 주로 학생운동을 하다 제적되거나 감옥에 갔다 온 활동가들이 위장취업의 형태로 현장에 들어갔다. 그들은 공장 내 소모임 활동으로 민주노조의 설립 기반을 마련하는 동시에 지역 단위 노동활동가 조직의 틀을 정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1986년 1월에는 광주지역 민주노동자 생활임금쟁취 투쟁위원회 (민생투위)가 결성돼 최초로 임금인상투쟁을 조직적으로 수행하는 등 노동운동 활성화에 기여한다. 임금인상투쟁의 대표적 사례로 1986년 4월 광주 세화전자 노동자 60여명이 3일간에 걸친 파업농성으로 임금인상을 쟁취하기도 했다. 1986년 8월에는 무등양말에서 회사 측이 구사협의회를 결성하여 노동조합원에게 조합 탈퇴를 강요하는 등 노동운동 탄압과 노조 와해를 시도했고, 심한 겨우 공장폐쇄 조치를 취하는 사업장도 간혹 등장했다. JOC와 가톨릭노동사목 등이 민주노조가 구성된 사업장을 중심으로 연대활동을 활발히 전개했고, 민생투위 가 해체된 후에는 광주노동자공동위원회가 연대운동의 틀을 계승했고, 이러한 연대운동을 틀을 통해 19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을 전개하는 조직적 틀로 기능하게 된다. 농민운동의 대중적 조직화 경향도 6월항쟁의 조직적 기반으로서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84년까지 전개된 농가부채 해결 전국농민투쟁위원회(위원장 배종렬)를 결성하고 신민당사를 점거하여 농성에 들어가면서 시작되어 1987년까지 이어졌던 농가부채탕감 투쟁 이 대표적인 농민운동의 투쟁사례라고 할 수 있다. 농민운동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학생운동에 이르기까지 주체역량의 복원과 성장은 투쟁의 경험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지 사상학습과 결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5 18항쟁 이후 잠잠하던 농민운동의 대중적 기반이 넓어진 계기가 되었던 사건이 바로 농가부채탕감투쟁이었던 것이다. 투쟁은 투쟁을 조직화하는 결사체에 의해 이루어지고 결사체가 공고하게 형성될수록 투쟁도 장기간 지속시킬 수 있고, 투쟁의 결과물 역시 투쟁주체들이 원하는 방향에 접근해 갈 수 있다. 기농과 가농은 농민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복원하고 확장하는데 있어 조직적 구심이 되었다. 대중적 조직기반이 만들어지자 1980년대 중반 이후 농민들의 투쟁이 봇물 터지듯 전개되었다. 쌀생산비보장운동 및 농지세 현물 납부 투쟁, 농협강제출자시정 운동, 강진 쇠똥물 투척시위, 불량사료 진상규명 및 근절투쟁, 해남의 뻘세 투쟁, 벼품종 강요와 못자리 훼손 등 강제농정과 관료주의적 농정에 대한 저항 등 수많은 농민투쟁은 단순히 농민들의 권익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을 넘어 대중적인 사회운동,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항거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던 171 민주화운동
174 투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기농과 가농의 존재는 엄혹한 군사권위주의정부 하에서 사회운동이 생존할 수 있는 울타리 내지 그늘막 역할을 했다. 종교는 사회운동 활동가들에게 언제다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그렇지만 종교라는 외피를 입고 이루어지는 사회운동이 갖는 한계 역시 자명했다. 농민운동의 대중적 기반이 약할 때는 기농과 가농 중심의 농민운동이 불가피했지만, 대중적 기반과 주체역량이 성숙해질수록 농민대중조직 건설의 과제 역시 부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 효시가 되었던 투쟁이 1984년 함평 무안농민대회였는데, 이 대회에서는 농가부채 탕감과 함께 전두환 방일 반대 등이 구호로 등장함으로써 농민운동 영역과 정치투쟁의 결합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기존에 교회에서 개최되었던 시위가 아닌 함평장터에서 시위가 개최되었다는 점에서도 농민운동의 발전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평가가 가능하다. 특히 6월항쟁 1년 전인 1986년부터 농민운동 내에서 소몰이시위, 수입개방 반대시위 등 그 동안 전개된 농민운동에 대한 평가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를 토대로 독립적인 농민운동조직의 건설이 주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것은 6월항쟁 이후 1987년부터 2-3년간 전국적인 규모로 치열하게 전개된 수세투쟁과 고추제값받기투쟁으로 나타났고, 이러한 투쟁의 과정에서 시군지역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대중적인 농민운동 조직건설의 열망이 1988년 목포에서 발전된 전남농민운동 통일을 위한 소위원회 와 1989년 전남농민운동연합 과 전국농민운동연합 건설의 성과로 나타났으며, 마침내 1990년에는 전국농민회총연맹이 건설되어 명실상부한 자주적인 단일대오를 가진 전국적인 농민운동 건설이 실현된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종교계의 움직임이다. 1980년대 기독교운동은 초창기 기도회와 성명서 등을 통해 주로 교회 안에서 이루어졌으나 점차 민중운동으로 외연을 확대해 나갔다. 전남대 기독학생회(KSCF)를 중심으로 하는 학생운동 출신들이 점차 노동운동과 농민으로 이전해가고, 야학과 농활 등을 통해 점차 세력이 커지면서 대중조직이 등장하게 된다. 기독교농민회, 한국기독교노동자 광주지역연맹, 기독학생회, 기장청년회, 예장청년회, 기독청년협의회, 기독교문화선교회, 목회자 정의평화실천협의회, 광주NCC인권위원회 등으로 각기 독립된 대중조직 체계를 갖추면서 자연스럽게 기독교사회운동협의회를 만들어 시국에 대해 공동대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천주교 역시 정희평화위원회(정평위)를 중심으로 사회참여와 사회정의 실현에 주력하면서 1987년 5월부터 전국 주요도시에서 5 18 사진전을 개최하여 뜨거운 호응을 얻었으며, 가농노동청년회, 가농, 노동사목, 가톨릭청년연합회와 가톨릭대학생생연합회 등을 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라는 새로운 조직적 틀로 재정비하여 가톨릭 사회운동의 지평을 마련하게 되었다. 불교계는 80년대 초 민중불교운동의연합 창립, 정토구현 전국 승가회 구성 등 불교계의 적극적 사회참여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광주전남 불교운동계는 스님들과 재가 불자를 중심으로 민불련, 승가회와 연대활동을 통해서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특히 광주 문빈정사 지선을 17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75 중심으로 형성된 무등민족문학회와 문빈정사 청년회, 원각사 불일청년회,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전남지부 등은 1986년 9 7해인사 승려대회 82) 이후 불교자주화와 사회민주화는 둘아 아니라 하나라고 보고, 시국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1987년 6월항쟁 과정에서도 불교운동이 항쟁의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2. 광주지역의 6월항쟁 1987년 1월 26일 전남대에서 고 박종철 학우 추모제 및 애국민주세력 탄압 폭로대회 가 학생 약 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1987년 2월 7일에도 박종철 추도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집회 및 시위와 관련하여 1명이 구속되고, 3명이 구류처분을 받았다(전대신문, ). 1987년 82) 사무전문직 노동자들을 어떻게 분류하는가에 따라 의견이 다양할 수 있다. 조희연 교수는 사무전문직 노동 자들은 중간층이라기보다는 노동자로 보고 있다. 따라서 그는 6월항쟁을 야당 및 중간층이 주도했다는 견해 를 반박하며 민중주도에 의한 운동으로 보고 있다. (앞의 책, 6월민주항쟁의 이념, 주체, 전략, 161쪽) 그 러나 중간계층에 대한 엄밀한 규정은 미루더라도 사무전문직 노동자들이 급진적인 노동자의 속성을 대표한 다고 보긴 힘들 것이다. 소득 수준을 기준으로 볼 때 그들은 중간계층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생산직 노동자들 과는 다른 온건함과 정치적 유동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민중주도와 구분되는 중간층 주도란 표현이 적절하다고 본다.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주로 형식적으로 민주적 절차와 기회를 부여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제기된 다. 따라서 이는 내용적 민주주의의 문제와는 구분된다. 내용적 민주주의란 민주주의의 형식적, 제도적 틀을 보 장하는가와 그렇지 않는가의 수준을 넘어서서 진정으로 국민대다수가 정치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실질적 여건(경 제적, 정치적)이 마련될 때 가능한 것이다. 결국 이는 정치권력을 국민대다수가 장악할 때만이 완성될 수 있다. 따라 서 내용적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제도를 질적으로 넘어서는 새로운 민중적 사회제도에 의해서만 뒷받침될 수 있다. 여에 대해서 조희연은 군부독재 타도에 대한 범민중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확산되는 혁명적 상황 속에서 직선제 개 현이란 민주화투쟁의 궁극적 목표가 아닌 군부독재 청산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고 본다 (조희연 1997, 170). 그러면서 그는 직선제 개헌 요구가 현명한 현실적 선택 (임혁백)이라는 견해를 비판하고 있다. 그 에 의하면 미국이 광주항쟁 경험 때문에 개입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았으며, 이런 조건에서는 6.26 대행진에서 나타 난 민중의 힘을 지속적인 비타협적 투쟁을 통해 군부독재퇴진/타도 로 연결시켜 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 국이나 군이 개입을 하지 않았으리란 가정은 조희연 스스로도 조심스럽게 하고 있을 뿐 현실적으로 정권을 타도할 정도 였다면 군의 개입의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6.26행진에서도 확인되었듯이 아무런 준비 없는 비조 직적인 100만 군중들의 청와대 앞 시위가 다연발탄 몇 발로 쉽게 와해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조직되지 않는 군 중이라는 주체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채 군사정권의 타도를 기본적 노선으로 강조하는 것은 모험적 발상으로 보인다. 소극적 의미의 자유는 무엇으로부터 구속받지 않을 자유를 말한다. 적극적 의미의 자유는 자신의 의지에 따 라 삶을 실현할 수 있는 자유이다. 적극적 의미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기회와 조건이 요 구된다. 따라서 적극적 의미에서의 자유는 기회의 균등이나 사회경제적 조건의 보장이 뒤따라야 가능하다. 이 부분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6월민주항쟁기념사업회 주도로 발간한 기록(2007)에 많이 의존했음을 밝혀둔다. 1986년 들어 재야운동권을 중심으로 개헌 논의가 본격화됐다. 전두환 정권에 대한 국민적 저항도 확산됐다. 불교계 소장 파 스님 152명은 5월9일 시국선언 을 발표하고 사회 민주화와 개헌을 촉구하고 나섰다. 시국선언에 나섰던 스님들은 같은 해 6월 정토승가회 를 창립하고 사회문제에 대한 스님들의 목소리를 하나로 결집시켰다. 민불련과 정토승가회의 역할 확대는 불교계 내부에서 불교 자주화와 사회 민주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이런 분위기는 1986년 9 7해인 사 승려대회 에서 정점을 찍었다. 해인사 승려대회는 불교관련 악법철폐의 요구에서 시작됐지만 결과적으로 대정부 투쟁 의 성격이 강했다. 불교신문(1986년 9월17일자) 에 따르면 이날 승려대회에는 당시 총무원장 의현 스님을 비롯해 전국 에서 2000여명의 스님들이 참석했다. 집행위원장 월주 스님은 이번 승려대회는 단순히 불교관계법 개폐를 위한 것이 아 니라 이 땅의 진정한 민주화와 민족의 정통성 회복을 위한 자리 라고 말해 승려대회가 추구하는 목표를 분명하게 제시했 다. 해인사 승려대회는 불교계 안팎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서울을 비롯해 지방과 해외에서까지 승려대회를 지지하는 시 위가 이어졌다. 불교계 내부에서도 개운사와 봉은사에서 군부독재를 규탄하는 대회가 열렸다. 해인사 승려대회는 불교계 가 1987년 6 10민주항쟁 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계기도 됐다. 이에 대해서는 법보신문( news/articleview.html?idxno=80949) 참조. 173 민주화운동
176 2월 19일에는 2 7추도회 보고대회 및 고 박종철 학우 49제 준비 위원회 발족식 이 학생 약 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준비 위원회 위원장으로는 총학생회 부회장인 이용빈(의학과 1학년)이 맡았다(전대신문, ). 그리하여 1987년 3월 3일에는 고 박종철 학우 49재 및 용봉학우 평화대행진 을 학생 약 800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하였다. 집회 후 학생들은 도심에서 평화대행진을 벌였는데. 총 46명이 연행되었다. 이 가운데 10명이 구속 및 구류 처분을 받았다. 1987년 3월 17일 오후 1시 전남대에서 학생 약 5백 명이 참석한 가운데, 반외세반독재구국 학생투쟁위원회(이하 구학투) 가 출범하였다. 이날 개최된 행사의 명칭은 표정두 열사 추모제 및 반외세반독재구국학생투쟁위원회 출정식 이었다. 제1부에서는 표정두 열사 투쟁정신 계승제 가, 제2부에서는 반외세반독재구국학생투쟁위원회 출정식 이 이루어졌다. 구학투 는 산하에 장기집권음모내각제분쇄투쟁위원회 와 민중생계쟁취지원투쟁위원회, 그리고 미국내정간섭반대투쟁위원회 등 3개의 위원회를 두었다. 이들이 주장한 내용의 핵심은 장기집권 획책하는 군부독재 끝장내자 등 5개항이었다(전대신문, ). 구학투 는 3월 30일에는 주년 시국대토론회 를 대강당에서 학생 약 3백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하였다. 이 행사의 주된 내용은 1986년 3월 30일 광주에서 발생했던 신민당 개헌 현판식 사건 이후 개헌국면에 관한 내용을 고찰하기 위한 것이었다.(전대신문, )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정부는 4 13호헌 을 발표한다. 이에 전남대 총학생회와 구학투 는 13일 오후 장기집권음모 호헌분쇄를 위한 학생총회 를 개최하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14일에도 제2차 학생비상총회를 개최하는 한편, 총학생회장을 비롯하여 20여 명의 학생들이 단식농성을 시작한다. 단식은 17일까지 계속되었는데, 이 기간에 학생들의 호헌반대 집회 및 시위, 그리고 4 19혁명 계승투쟁 등이 함께 진행되었다. 단식이 참가한 학생들은 전체 학생들과 함께 집회와 시위를 전개할 것을 다짐하고 농성을 풀었다. 경찰은 4월 18일 9시부터 21일 9시까지 전국에 갑호비상령을 내렸다(전대신문, ; 전남대학교 1987, ) 5월이 다가오자 전남대 구학투 는 산하 기구로 5월학살원흉처단 및 호헌분쇄특별투쟁위원회(이하 5월투위) 를 결성한다. 이 기구는 5월 7일 5월학살원흉처단 및 호헌분쇄를 위한 5월투쟁 선언식 을 통해 발족하였는데, 1987년 전남대의 5월투쟁을 전남대 총학생회 및 구학투 와 함께 주관하였다.(전대신문, ; 전남대학교 1987, ). 1987년 5월투쟁이 전개되는 기간 즉, 5월 15일부터 18일까지의 집회 및 시위와 관련하여 총 120여 명이 연행될 정도로 치열하게 학생운동이 전개되었다.(전대신문, ) 1987년 3월 6일 표정두는 서울 세종문화회관 근처 하적장 부근에서 캐로신을 몸에 끼얹고 불을 붙인 후 내각제 개헌 반대, 장기집권 음모 분쇄, 박종철을 살려내라, 광주사태 책임지라 는 구호를 외치면서 주한미대사관 앞으로 30미터 가량 달리다 쓰러졌다. 이때 행인 2명이 발견하고 웃옷을 벗어서 불을 끄려고 했으나, 끄지 못하고, 교통경찰 2명이 근처 가게에서 17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77 분말소화기로 불을 껐다. 이후 고려병원으로 이송되어 담당의사에게 나는 광주 사람이다. 광주 호남대학을 다니다가 돈이 없어서 그만두고 하남공단에 있는 신흥금속에서 근무 중인 노동자다 라고 말하며 집 전화번호와 유서를 인근 다방에 놓아두었다고 밝혔다고 한다. 분신 당시의 가방 속에는 내각제 반대, 장기집권반대 라는 쪽지와 슐츠의 방한이 대대적으로 보도된 신문 뭉치 등이 들어 있었다(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1997, 42). 1987년 4월 24일 전남대에서 학생들이 전방입소에 관한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토론회에 참석한 학생들은 수업의 연장인 전방입소에는 일단 응당하고, 그 속에서 분단현실을 확인하며, 조국통일을 위한 열정을 갖기로 하였다. 4월 27일 아침 6시 30분 학생들은 고 이재호, 김세진의 추모식을 갖고, 광주역 앞 광장까지 함께 가기로 약속하고 토론회를 마쳤다. 4월 27일 학생들은 양키용병 거부한다, 민족염원 말살하는 신호헌론을 분쇄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전방부대 및 경계근무교육 에 입소하였다. 학생들은 부대 안에서 이재호와 김세진의 추모식을 거행하려고 하였으나, 이를 거부당하자 37명이 자진 퇴소하여 학교로 돌아오던 중 광주서부경찰서로 연행되어 철야조사를 받게 된다. 이에 전남대 학생들은 4월 28일 전남대 5 18광장에서 집회를 갖고, 강제연행에 대한 국방부장관, 경기도경국장, 서부경찰서장, 5사단장의 공개사과를 요구하는 한편, 연행한 학생들의 빠른 석방을 주장한다. 29일 오전 10시 30분 경 연행된 학생 37명 가운데 31명이 학교로 돌아왔으나, 나머지 6명이 계속해서 조사를 받자 집회와 농성을 하게 된다. 결국 2명의 학생들이 구속되었다(전남대학교 1987, 232; 전대신문, ). 제2기 전방입소 교육에서도 1명이 퇴소하여, 1987년 전방입소 교육 반대에 참가하여 자진퇴소한 사람은 총 38명이었다.(전대신문, ) 1987년 6월 10일 전남도청에서 한국은행 광주지점 앞과 금남로 4거리까지의 모든 도로들이 차단되고 차량 및 사람들은 출입통제 상태에 놓이게 된다. 대회장 주변에는 29개 중대 4천여 명의 전경이 배치되었다. 일부 택시회사에서는 기사들이 국본 전남본부의 국민행동요령에 따라 오후 6시 국기 하강식에 맞춰 경적을 울리는 것을 막기 위해 경음기 연결부분을 미리 떼어내기도 했다. 전국적인 대회예정시각이 오후 6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후 2시 무렵부터 중앙교회 사거리에서 집회가 시작됐다. 집회 시작 전까지도 거리에서 대중은 많이 눈에 띄지 않았지만 2시가 넘어서자 수백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긴박한 상황에서 국본 집행부는 간이연단을 설치하려 했고 배종열 상임대표가 대회사를 위해 연단으로 다가서자 경찰이 최루탄을 쏘아대기 시작하여 집회는 무산되었다. 그 뒤 곧바로 중앙교회 측에서 종탑 부분의 2층과 3층을 개방해주어 대회 지도부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교회 2층에서 외부방송시설이 갖춰지자 김영진 장로 등이 시민들을 향해 연설을 했고, 배종열 국본 상임대표가 가두의 대중을 향하여 인사말을 했다. 경찰은 일시 후퇴하여 전남도청에서 가톨릭센터 앞과 금남로와 중앙로 사거리까지를 방어했다. 오후 6시 박종철군 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 및 호헌철폐 범국민대회가 시작되었다. 가톨릭센터와 175 민주화운동
178 중앙교회에서 옥외방송을 통해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5천여 명의 시민들이 삽시간에 몰려들었다. 국본 전남본부 측은 유인물과 가두홍보를 통해 오후 6시 국기 하강식을 기해 애국가를 제창하자고 홍보했었다. 수천 명의 시민들은 금남로를 점거한 채 애국가를 불렀다. 원각사 앞에서도 2백여 명이 애국가를 부르고 금남로 4가 국민은행 광주지점 앞 2백여 명도 태극기를 흔들며 연좌시위를 벌였다. 5분 뒤 가톨릭센터에서 몰려나온 1백여 명의 신부와 수녀, 신자들이 연좌농성을 시도했다. 광주우체국, 원각사, 미문화원, 충장파출소 등 경찰의 1차 저시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수백 명 단위로 무리를 지어 호헌철폐 독재타도, 광주시민 대동단결 군부독재 물리치지, 장기집권 호헌책동 군부독재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도청을 향해 행진해갔다. 6시 30분경 황금동 4거리에 있는 충장교회 옥상에 군사독재 타도하자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리고 김병균 목사 주도 하에 구호들이 확성기를 통해 터져 나오면서 시민들에게 도청 앞 광장으로 나아갈 것을 호소했다. 1천 5백여 시민들은 열렬한 박수로 이에 호응했다. 경찰은 최루탄을 난사했다. 김병균 목사는 6월항쟁 기간 내내 휴대용메가폰을 들고 다니며 곳곳에서 군중연설을 하며 시위를 독려했다. 오후 7시경 도청으로 진출하던 시위대는 미문화원 앞에서 최루탄 공세에 밀려 광주공원 쪽으로 퇴각했다. 주력부대가 공원 쪽으로 밀려났지만, YMCA와 궁동 문화방송 앞에서는 3천여 명의 시민들이 끈질기게 저항했다. 7시 반경 궁동 문화방송 앞에서 2천여 명의 시민들이 시위를 벌였다. 이 문화방송 앞 시위대는 경찰에 쫓겨 인근 전남여고로 피하려다 담이 무너지는 바람에 수십 명이 부상을 입고 다수가 연행되었다. 이 시각 광주시내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이와 같은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시위대는 2백-5백 명 단위로 무리를 지어 도로를 따라 이리저리 이동하면서 시위를 계속했다. 8시경에는 하교한 중고생과 퇴근한 노동자들이 시위군중과 합세하여 열기가 고조되었고, 마침내 중앙대교를 사이에 두고 5만여 시민이 운집하여 경찰과 대치하며 연좌농성에 돌입했다. 시위대는 최루탄 발사에 맞서 물을 뿌렸고, 시민들은 박수로 응원했다. 조흥은행과 금남로 사이의 맞은편 골목에서는 투석전이 벌어지고 화염병이 투척되었다. 이들 각지의 시위대는 밤 9시경 광주공원으로 총집결하였다. 2만여 명이 넘는 시위대가 결집했다. 시위대는 연좌한 후 대중 집회를 열고 도청진출을 결의했다. 집회가 끝나자 시위대는 스크럼을 짜고 시내 쪽으로 향했으나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는 경찰과 중앙대교를 사이에 둔 채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밤이 깊어지면 소규모화된 시위대는 공용터미널, 시청, 산수오거리, 월산동 등지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월산동 쪽으로 간 시위대 일부는 민정당사로 몰려가 경찰과 싸움을 전개했다. 시민들은 다시 공원으로 모여들었고, 버스로 귀가 중이던 시민과 중고생들이 중앙대교 쪽 시위대에 합류했다. 지하도 쪽에 모여 있던 시민들은 시내버스를 막아서서 구호와 노래를 부르며 경찰과 대치하던 중 학생들이 버스 1대를 잡아타고 경찰을 향해 나아가자 1만여 명이 이를 따라갔다. 중앙대교 부근에 포진해 있던 경찰들이 공원광장 쪽으로 최루탄을 발사하자 시민들은 흩어지지 17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79 않고 보도블록을 깨뜨려 던졌다. 경찰은 10시 40분경 공원을 향해 다연발 최루탄을 발사, 시민들을 해산시켰다. 이런 상황은 12시 40분경까지 이어져 2만여 명이 여기저기 흩어져 산발시위를 벌였다. 밤이 깊어지자 시위자 수가 줄어들고 시위대는 소규모로 줄었다. 새벽 1시경에는 공용터미널에서 3백여 명이 시청 쪽으로 나아가며 시위를 벌였다. 경찰의 무차별적인 연행과 최루탄 난사에 시위대는 새벽 4시 30분경 지산동파출소를 급습하여 유리창 등이 파손되었다. 이와 같은 산발적 시위는 새벽 5시 30분경에야 완전히 끝났는데 13시간에 걸친 장시간의 투쟁이었다. 6월 14일 운림동 문빈정사 불교승려 신도 1백여 명이 민주쟁취 및 구속자석방을 위한 결의대회를 제외하면 6 10대회가 끝난 뒤 광주지역은 소강국면으로 접어든다. 시위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이유는 전남대의 경우 6월 9일부터 11일까지 용봉대동제가 열러 호헌철폐 투쟁에 동참하지 못했고, 조선대도 학내민주화투쟁 등 학내문제에 집중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전남대 학생들은 6월 15일 1천여 명의 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제1차 비상총회를 개최하고 이한열사망사건과 관련 기말고사 연기를 결의했다. 16일 오후 4시에는 제2차 전남대 민주학생 비상총회 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서 총학생회장과 여학생회장 등 23명의 학생이 삭발을 하며 4 13호헌철폐와 직선제 쟁취 투쟁의 의지를 다졌고, 삭발식이 끝난 후 2-30명의 학생들이 손을 깨물어 민족민주만세 독재타도, 이한열 살려내라, 직선제 개헌, 호헌철폐 등의 혈서를 쓰기 시작했다. 16일 집회에 이어 17일에는 5천여 명의 학생들이 도서관 주변을 가득 메운 가운데 호헌철폐 및 최루탄추방을 위한 특별위원회 가 결성됐다. 집회가 끝난 후 시내로 진출하여 시민들의 호응을 받았다. 전남대생들의 6 16삭발 혈서시위 는 침체에 빠져 있던 광주지역 6월투쟁을 일거에 투쟁국면으로 반전시키면서 광범위한 학생대중의 동참을 불러일으켰다. 학생들의 시위는 6월항쟁을 시민과 대학생의 결합이라는 상황으로 전환시켰다. 20일과 21일 광주에서는 대재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20일 시위의 발단은 전남의대생 3백여 명이 가운을 입고 거리행진을 시작했고, 이 행렬에 인턴과 간호사 일부가 참여했다. 오후 7시 10분께 중앙대교 앞에서 스크럼을 형성한 5백여 명의 학생시위대 주변에 시민들이 급속히 가세하여 1만여 명으로 증가했다. 오후 8시 30분께부터 화염병이 등장, 충파 앞길이 불길에 휩싸였고 경찰과 대치하고 있던 시위대가 1시간여 동안 3만여 명으로 늘어나 중앙로(충파) 앞 도로를 완전히 장악했다. 밤 9시께 원호청 앞에서 광주은행 사이에는 20만여 명의 시위대가 운집, 지하상가와 서현교회 사이 도로를 가득 메웠다. 일요일인 21일에도 오후 5시께부터 시민 학생들이 태평극장 사거리에 모여들면서 근처에 있던 광주천변 난간을 뜯어 방어벽을 치고 시위를 벌였다. 오후 7시 20분께 2천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군부독재 종식시켜 민주정부 수립하자 는 내용의 대자보를 근처에 붙이고 유인물을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밤 10시 50분부터는 시위군중이 1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횃불 시위를 하며 시위대가 해산할 기미를 보이지 177 민주화운동
180 않자 경찰은 밤 11시 30분부터 최루탄을 난사했다. 밤 11시 55분경 금남로 5가 서울신탁은행 앞길에서는 택시 40여대가 한꺼번에 모여 1분가량 경적을 울리고 흩어지기도 했다. 이미 시민참여는 절정을 향하여 있었다. 국본은 다시 투쟁계획을 천명했다. 26일 오후 6시를 기해 국민평화대행진을 결의했다. 국본전남본부 측도 주말 시위 이후 대규모 시위를 준비했다. 26일 오후 전남 각지에서 올라온 농민 2백여 명이 광주공원 광장에서 사전집회를 갖고 왜 농민들이 여기까지 올라왔는가 등에 관해 대중연설을 했고, 전남기독교농민회(전남기농)는 전남농민 격문을 시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5시 30분 금남로 4가 중앙교회 앞에서 유동삼거리까지 폭 30미터, 길이 1킬로미터의 도로에 시민들이 운집했다.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경찰의 진입에 맞섰다. 같은 시간 서현교회와 중앙대교, 광주천변에도 5만여 명의 시민들이 도청 진출을 위해 경찰과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특히 선현교회 주변에는 고교생들이 시위대의전면에 서서 투쟁을 전개했다. 고교생들은 고등학생 이라는 깃발을 만들어 집단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고교생들은 시위현장에 같은 또래의 애들과 매일 마주치고 서로 낯이 익자 자연스럽게 함께 모여 투쟁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때부터 집회가 있는 곳이면 고교생들은 고등학생이란 깃발 아래로 모여서 시위를 했던 것이다. 그들은 시도교육위원회의 하교시간 조정, 학교 측의 시위 참가 방해에도 불구하고 오후 3시경 학교를 나와 시위대열에 합류하였다. 고등학생들은 주로 서현교회에서 모였는데, 당시 광주지역 고등학생 민민투 라는 이름으로 집단적으로 시위에 참가한 학교는 동신여고, 중앙여고, 광주상고, 광주고, 대동고, 숭신공고, 석산고, 진흥고 등 19개 학교의 학생들이었다. 6월항쟁에 참여했던 고교생들은 후에 전교조 결성과정에서 광주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광고협) 이란 연합조직체를 건설, 교사들의 참교육투쟁에 동참하기도 했다. 경찰의 원천봉쇄 속에 진해된 6 26평화대행진은 밤이 되면서 수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항쟁으로 발전해나갔다. 오후 8시 무렵 공용터미널에는 7천여 명이 집결해 독재타도 직선제 쟁취 등의 구호를 제창했다. 그 동안 호헌철폐 독재타도 라는 구호대신 직선제 쟁취가 주된 구호로 등장, 시민들의 직선제 개헌임을 분명히 했다. 시위는 금남로 4가 일대, 공용터미널, 서현교회 주변, 전대의대 등 광주시내 곳곳에서 2-3만 명 단위로 진행됐다. 주로 금남로 4가와 중앙교회에는 선도적인 투쟁을 펼친 대학생들이 서현교회 주변에는 고교생과 광주지역 노동자들이 투쟁을 벌였다. 시위는 자정을 넘기고 새벽 4시가 되어서야 해산했다. 새벽 3시 15분에는 서현교회에 사복경찰이 투입되어 30여명을 연행했다. 기독교운동단체들은 6월항쟁에서 기독선봉대를 조직하여 활약했다. 범교파적 청년 학생조직인 교회대학생선교회와 기독교장로회청년회(기청), 광주기노련으로 구성된 기독선봉대는 15개조 150여명에 달했고, 항쟁기간동안 서현교회를 중심으로 눈부신 활약을 한다. 교회라는 거점과 대중동원능력 때문에 6월항쟁 기간 동안 기사협은 항상 금남로 중앙교회나 중앙로 서현교회를 맡았다. 한편 기독학생청년회(기청)와 교회대학생선교회(교대선) 여성들은 서현교회 앞에서 짱돌을 만들어 시위대에 나르는 역할을 담당했다. 17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81 천주교운동단체들도 4월에 사제들의 가톨릭센터 단식투쟁을 뒷바라지하며 정의평화위원회를 중심으로 김양래, 홍성담, 임무택 등에 의해 5월 사진전이 기획되었고, 세 벌의 사진들을 제작하여 광주와 서울과 부산에서 5 18기간을 전후하여 동시에 전시되었다. 5월 사진전은 광주학살을 딛고 탄생한 전두환 정부의 실체를 사진을 통해 적나라하게 알리고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정부를 연장하려는 정부의 의도를 알리기 위해 기획되었는데, 이 전시회를 관람하기 위하여 전시장인 가톨릭센터 건물 밖 5백여 미터 이상까지 줄을 서야 했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렸고, 더구나 가톨릭센터 입구를 전경이 막고 있었지만 시민들의 발길을 막지는 못했다. 또한 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 소속이었던 가농 노동청년회 노동사목 청년연합회 대학생연합회 등의 단체들은 사제단 단식의 지지집회부터 결합하여 가두투쟁에 적극 참여했고, 수녀님들까지 가세하여 거리에 나섰다. 특히 6 10대회 때는 타종과 함께 징을 치며 가두행진을 시작하여 당시 시위대와 함께 했다. 한편으로 정의평화위원회는 교구 내 모든 성당과 시내 곳곳에 동장에서 대통령까지 우리 손으로 라고 쓰인 스티커 30만 장을 제작하여 붙이고, 리플렛 5만부를 제작하여 광주전남의 성당을 중심으로 배포하여 범교회적 차원에서 대부분의 신자들이 참여하는 적극적인 개헌투쟁을 전개했다. 6월 29일 오후 7시에 광주대교구 사제단은 윤공희 대주교의 주례로 남동성당에서 특별미사를 드리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6 29선언이 발표되지 긴급히 사제총회를 열고 미사 후에 계획했던 장백의 차림으로 가두행진을 유보하고 성당 앞마당에서 6 29선언 이행을 촉구하는 대회를 열었다. 불교계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은 4 13호헌철폐 서명운동을 확대하고 반독재 투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각계와 공동으로 투쟁전선을 구축한다. 특히 6월 11일 오전에 서울성공회성당에서 6 10국민대회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던 지선, 진관 스님 등 국민운동본부 대표자 11명이 경찰에 연행되자 6월 14일 광주 문빈정사에서는 스님과 문빈정사 청년회 회원 등 청년 학생 재가신도 1백여 명이 모여 민주쟁취 및 구속자 석방을 위한 결의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이후 계속된 6월항쟁에 광주에서도 많은 불자들이 적극 참여하여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위해 투쟁했다. 6월항쟁에 참여한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이 불교의 자주화와 민족의 자주 민주 통일을 목표로 하는 정토구현광주불교협의회를 창립했다. 창립대회 후 법성스님과 박현채 교수의 강연회가 열렸으며, 지선스님과 법성스님을 공동의장으로 선출하고 무등민족문화회, 근본불교연구소, 대한불청 광주지부, 대불련 전남지부의 간부 및 회원들이 참여해, 이후 광주지역 불교계의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이밖에도 광주전남 여성회 준비모임은 6월항쟁 기간 동안에 시위대에게 먹을 것을 제공했다. 의료팀을 구성해 랩과 치약을 가지고 다니면서 6월항쟁에 참여한 시위대들에게 눈가에 치약을 바르고 랩으로 덮어주었다. 노동운동에 참여했던 여성 노동자들은 동림동 산동교 아래에서 가두투쟁 진출을 위한 훈련을 하고 임동성당에 모여 금남로로 진출하였다. 일꾼마당은 광천동, 소천동, 본촌동 179 민주화운동
182 등 노동현장 회사정문에서 노래와 춤으로 문화선전대 역할을 했다. 또한 말바우시장, 대인시장, 양동시장 상인들을 대상으로 수시로 홍보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2) 광주지역 6월항쟁 일지 <6월 10일> 경찰병력 29중대 4천여 명이 대회장 등 시내요소를 철저히 봉쇄한 가운데, 시민 종교인 학생 등 수만 명이 오후 5시경부터 다음날 새벽 5시까지 금남로, 충장로 일대 등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시민 다수가 부상하였으며 총 239명이 연행되었다. 17:00 가톨릭센터 옆 골목과 경찰의 1차 저지선 밖인 금남로 4 5가에 모인 1천여 시민 학생 목사들 시위 시작. 경찰은 최루탄을 터뜨리며 이들을 해산. 목사 다수 연행 17:45 광주 우체국 앞, 1천여 명 시위. 18:00 가톨릭센터에서 녹음된 타종을 방송. 이에 맞추어 도청 앞에서 미문화원에 이르는 보도에 5 천여 명의 시위 군중들이 모여 애국가 합창, 호루라기 소리에 맞추어 시위. 18:05 가톨릭센터에서 나온 1백여 명의 신부 수녀 및 신도들, 연좌농성 시도하였으나 최루탄에 밀려 다시 들어감. 신부 수녀 부상. 18:00 광주 가든백화점 앞에서 호남 신학교 학생 3백여 명 30여 분간 시위. 19:00 광산동 미문화원 앞에서 1천여 시민 학생 시위를 벌이다가 최루탄에 밀려 광주공원 쪽으로 분산 퇴각. 이들은 광주천 옆 도로의 군중들과 합세 5천여 명으로 불어나자 도청 앞으로 라는 구호와 함께 광주세무서, 미문화원 앞으로 진출, 경찰과 대치하면서 격렬한 시위 전개. YMCA앞에서 1천여 명 시위 19:30 원호청 앞에서 2천여 명 시위. 장동 전남여고 앞에서도 1천여 명 시위. 이 과정에서 최루탄을 피하려다 전남여고 블록담 20여 미터 붕괴. 22:00 광주공원 부근에서 1시간 이상 1만여 군중 시위. 경찰은 22:40분경 다연발 지랄탄 발사하며 시위 진압. 이후 다음날 새벽 5시까지 도심 곳곳에서 산발 시위. 18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83 <6월 14일> 17:30 광주시 동구 운림동 문빈정사에서 불교승려와 신도 1백여 명이 민주쟁취 및 구속자 석방을 위한 결의대회 를 가짐. 이들은 19:15 사찰에서 1백 미터 떨어진 시외버스 종점까지 나왔다가 경찰저지에 의해 연좌종성을 30여 분간 한 후 사찰로 돌아가 해산. <6월 16일> 15:40 전남대생 2천여 명 교내 중앙도서관 앞에 모여 제2차 전남대 민주학생 비상총회 를 개최. 이때 총학생회장 김승남, 총여학생회장 박춘애 등 23명이 삭발을 했으며 20여명 이상의 학생들은 민족 민주 만세 독재타도 등의 혈서를 씀. 20:30 학교 정문 앞에서 연좌해 있는 학생들에게 경찰이 최루탄을 쏘고, 교문 앞에서 학생 5 명을 연행하자 주변의 시민들이 경찰차를 가로막고 석방을 요구, 20:50경 연행학생들은 모두 풀려남. 평화적 시위를 끝낸 학생들 중 2-3백여 명은 중앙도서관에 들어가 철야농성. 전남대생, 호헌철폐 및 최루탄 추방을 위한 특별대책위원회 를 구성 <6월 17일> 15:30 특별위 주도로 비상학생 총회. 이후 교내에서 4천여 명 평화대행진, 경찰 학내진입, 해산 19:55 전남대생들, 교내에서 호헌철폐 및 최루탄 추방을 위한 특별대책위원회 결성식 마친 뒤 시내로 진출. 19:55부터 21:45까지 중앙국교 후문 앞과 그랜드호텔 앞 등 시내 10여 군데에서 비폭력적으로 산발시위를 벌임. 23시경 1백여 명의 학생들은 전남대 중앙도서관 신관2층에서 철야농성을 하고 18일 08:10경 자진해산. <6월 18일> 20:00 전남대생 5백여 명이 충장로 1가 무등극장 앞길을 점거하며 시위를 시작, 시민 3천여 명과 함께 도심지 20여 곳에서 최루탄 발사에 항의하는 평화시위를 벌임. 22:50 4백여 명의 학생 시민들, 동구 호남동의 남동성당으로 들어가 철야농성. <6월 19일> 경찰은 이날 광주에서 모두 63회에 연인원 4만5천여 명이 시위에 참여한 것으로 집계. 이날 시위도중 19시경 중앙로에서 임선택군(10)이 최루탄 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고 전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았고 20일 새벽 1시경 태평극장 앞에서 전남대생 오정규군(21)이 최루탄 파편에 맞아 4 주 상처를 입는 등 50여명의 학생과 시민이 부상을 입고 경찰도 157명 부상. 181 민주화운동
184 17:10 시청4거리와 동구 대인동 공용터미널, 학동 전남대 의대 앞 5거리 등 시내 10여 곳에서 시위 시작. 19:00 시내 금남로4가 원각사에서 있은 호헌철폐 및 구속자 석방을 위한 법회 가 경찰의 삼엄한 통제 속에서 1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됨. 20:00 학생 시민 등 5백여 명이 동구 계림동파출소를 점거, 집기 등을 밖으로 꺼내 소각. 22:00 시민들의 대거참여로 1만 여명 이상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원각사 앞 중앙로 일대와 금남로 3 4가, 공용터미널, 충장로 일대 등에서 20일 아침 8시경까지 철야시위. <6월 20일> 14:00 전남의대생 3백여 명 가운 입고 시위, 인턴과 간호원 일부가 참여. 16:00 광주 우체국 앞, 공용터미널, 구역4거리, 대성약국 주변, 황금동 중앙국민학교 사거리, 가든 뒤쪽 등에서 여 명씩의 학생 시민 등이 모여 산발적인 시위 전개. 19:10 공용터미널-한미쇼핑 사이 도로에 5천여 명의 시민 학생 운집하여 점거 시위. 19:35 중앙대교 앞에서 스크럼을 형성한 학생중심의 5백여 시위대에 주변 시민들 급속히 가세하여 시위대열 1만 여명으로 증가. 20:32 중앙대교 앞에서 전경과 대치하고 있는 시위대는 약 3만 여명으로 증가하여 중앙로( 충장로파출소)앞까지의 도로를 완전 장악. 20:42 중앙로(충장로파출소)-대성국교 사이 지역에 10만 여명 운집, 메가폰과 마이크를 사용하며 시위 계속. 21:00 원호청 앞에서 광주은행 사이 운집한 시민은 약 20만 명으로 추정됨. 지하상가-서현교회 사이 도로를 가득 메움. 이 사이에도 우체국 앞, 공용터미널 뒤쪽, 한미쇼핑, 가톨릭센터 주변, 금남로 5가 등에서 5백-2천여 명 규모의 시위대가 산발적으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 진입으로 흩어진 후 다시 모여 시위를 벌이는 형태가 반복됨. 21:47 중앙로 일대의 시위대, 경찰 진압으로 해산되면서 한일은행 4거리 쪽으로 이동. 22:05 원호청-대성국교 앞 약 8만 여명 운집. 22:45 소나기가 쏟아져 금남로 3 4 5가 잠시 소강상태. 23:00 시민 2만 여명 금남로 완전 점거. 23:05 중앙로-광주공원 사이 2만 여명 경찰과 대치 중. 23:20 광주공원 쪽 시위대 2만 여명은 금남로와 교보 양쪽 방향으로 갈라짐. 18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85 23:45 대한투자금융 앞 4거리, 시민 1명이 2만여 시위대에게 열변을 토함, 꽹과리 동원됨. 중앙로에서 5만 여명이 시위를 벌였으며, 시내 곳곳에서도 시위 진행 중. 시위는 21일 새벽으로 이어짐. <6월 21일> 01:13 공원 쪽 시위대가 중앙로 시위대에 합류, 10만 여명 운집. 01:58 시내 곳곳에 대자보가 붙어 있고, 시민들은 시국토론회 계속 02:00 중앙로에서 4-5만 여명 측면 공격 당하여 치열하게 투석전 전개, 60여명 연행됨. 경찰은 5분 정도씩 계속하여 다연발탄을 쏘아댐. 02:30 중앙로에서 해산한 시위대 중 일부가 광주천변으로 모이기 시작. 02:50 시내 곳곳에 경찰 사복 연행조 배치됨. 03:20 광주천변을 중심으로 수백 명씩 산발적인 시위. 04:20 호남동 천주교회 부근에서 시민들이 스스로 화염병 제작, 학생들은 비폭력을 주장했으나 시민들은 화염병 사용의 정당성을 주장. 04:33 KBS 방송국 옆 등에서 경찰은 골목까지 쫓아 다니면서 잔인하게 최루탄을 쏘아댐. 황금동 술집 등에서도 최루탄 발사. 07:25 서현교회 앞 시위대 150여명 함께 어우러져 해방춤을 추고 구호를 외치며 시위. 07:50 서현교회 앞 시위대 500여명 경찰 진입에 인근골목으로 흩어짐. 10:15 서현교회 앞에서 30여명 연좌하며 계속 시위. 21일 새벽 2시경부터 백운동 로터리, 수피아 쪽, 미문화원 앞, 공단입구, 불로동 다리, 태평극장 다리부근, 서현교회 앞 등에서 수백 명씩이 산발적 시위 계속. 13:20 고등학생 350여명이 모여 광주지역 고등학교 민민투 결성. 15:30 광주우체국 앞에서 학생 시민 등 300여명 시위. 15:50 충장로 3가에서 2백여 명 연좌농성. 16:00 동해물 약국 앞에서 8백여 시민학생 연좌시위. 16:40 시민 학생 5백여 명 중앙대교 운집. 18:00 태평극장 앞 시민 학생 1천여 명 스크럼 형성. 19:20 광주공원에 학생 시민 1만 여명 전경과 대치. 최루탄을 발사하면 흩어졌다가 다시 모임. 21:04 광주공원에서 밀린 시위대 3천여 명 광주제일고등학교 다리에서 시위. 183 민주화운동
186 21:35 서현교회 안에 최루탄 발사. 광주공원 주변 골목골목마다 전면 봉쇄되어 대열 형성이 어려운 상태. 광주 복개상가 앞 학생 5백여 명, 시민 1천여 명 운집하여 시위. 경찰은 최루탄 발사. 21:50 서현교회 앞에 시민 수천 명 운집한 가운데 3백여 명의 시위대가 중심이 되어 경찰과 대치 중. 22:10 중앙대교, 광주공원 일대에 시민 학생 등 3만 여명 운집. 22:12 적십자병원 일대 시민 5천여 명 중앙로 쪽으로 이동. 22:30 중앙로 쪽 시위대와 공원부근 시위대가 서현교회 방면에서 합류, 1천여 명의 대열 형성. 이곳에서 이날 처음으로 화염병 사용됨(시민들이 제작한 것임). 미문화원 앞 축대 공사장 쪽에서 1,500여명이 모여 드럼통 등을 사용하여 석유로 불을 지름. 22:40 사복 경찰조 투입으로 그랜드호텔 앞 시위대 해산됨. 22:55 중앙로 3만 여명 시민 전경과 대치 중. 23:05 서현교회 앞에서 1만 여명 경찰과 대치(횃불사용, 화염병 투척, 투석) 23:10 구 시청사거리 2백여 명 시위 중 사복조 투입으로 해산. 23:40 중앙로에 있던 시위대 해산하여 공원, 불로동 다리 서현교회 쪽으로 이동. 23:50 공원 앞에 5천여 명 집결. 자정을 넘어서도 시내 곳곳에서 시위 계속. <6월 22일> 00:20 7천여 시민 서현교회 앞에서 시위. 00:27 중앙교회 앞에서 택시가 중심이 된 차량시위. 00:55 중앙로 중앙대교에서 350여명 연좌시위. 01:00 공용터미널 뒤편에서 철근으로 무장한 고등학생 50여명, 화염병 던지며 시위. 01:20 경찰들, 자가용 승용차를 타고 다니면서 시민들을 향해 최루탄 투척. 대인시장에서 고교생 30여명이 자체 토론(다른 고교생 20여명이 호위한 상태) 01:40 고등학생 민민투 중심의 시민 1백여 명, 화염병과 철근을 들고 광주신역에서 공용터미널 쪽으로 진행, 시위에 가담하지 않는 자는 모두 적 이라고 주장함. 02:20 시내 전역의 시위는 완전히 해산됨. 10:40 이때까지 중앙교회에서 50여명 철야농성. 11:30-12:45 운암아파트 앞 고속도로 입구, 전남대 의대 앞 5거리 등에서 여명 연좌시위. 18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87 13:00 전남대 의대생 400여명 한병근 형(전대 의대생)을 살려내라 는 플랜카드를 들고 의대 앞 호남동 광주천변으로 행진하며 시위. 13:35 전남대 의대생, 치대생 합세하여 의대 앞 로터리에 재집결, 일반 시민 가세하여 1천여 명 연좌시위. 학생들 경적 이라 쓰인 종이를 들어 보이자 차량들 계속 경적으로 호응함. 16:00 전대 의대생 300여명 연좌시위, 영안실 입구 도로 차단. 17:00 학생 500, 시민 4000으로 시위대 규모 증가. 차량 경적, 드러누운 채 시위. 18:20 중앙교회(금남로)앞, 4천여 명 시위 시작, 전경대 교회내로 최루탄 투척. 19:10 현대극장-공원다리 1.500여명 투석전. 19:40 서현교회 태평극장 중앙대교 사이에서 여명 시위. 중앙대교 양쪽 사복전경 배치. 20:20 중앙로 시위대 4-5천여 명으로 증가. 충장로파출소 쪽으로 전경 후퇴. 20:25 중앙교회-한일은행 간 금남로 시위대 4천여 명 가두 진출, 투석. 20:40 1만5천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 최루탄 난사에 대항하여 화염병, 각목, 투석전 전개. 21:05 중앙로에 1만 명, 광주천변에 1만5천명 시위대 운집. 21:20 전경에 밀려 금남로 쪽에서 광주천변 소방서 쪽으로 시위대 이동. 21:45 한일은행 앞(금남로) 시위대 규모 5천여 명으로 줄어듦. 22:15 까치고개, 태평극장 앞에서 전경에 밀려 2천여 명 시위대 숨바꼭질 시위, 화염병 투척, 횃불시위. 22:45 현대극장 부근 4천여 명 광주공원 쪽으로 밀리면서 30분 정도 시위. 23:00 전경들 시위대에 밀려 광주공원에서 현대극장-충장로 5가 쪽으로 후퇴. 23:05 양동시장 시위대 해산, 50여 시위 군중 누문동 광주역 방면으로 독재타도 등 구호 시위. 23:30 금남로 5가 도청 방면으로 횃불 50여 개 선두로 하여 시위. 23:35 금남로 4가 시위대 밀려나며 대성약국 앞에서 2백여 명 시위. <6월 23일> 00:20 현대극장 앞 4-500명 시위. 00:30 한일은행 뒤-광주천 5-6천명 화염병 투척전 전개. 01:50 현대극장 앞 시위대 해산, 전경 최루탄 난사. 01:55 서현교회 앞 400여 시위군중 해산, 전경 최루탄 난사, 사복조 추격, 연행.(광주고속 유동삼거리 금남로 도청 앞) 185 민주화운동
188 16:00 중앙극장 앞 3백여 시민 운집한 가운데 신흥택시 140대 경적. 16:30 중앙로 4거리-조흥은행 간 택시로 도로 완전 점거. 연도에 7천여 시민 운집, 독재타도 구호 외침. 17:20 중앙로 4거리 택시시위대 도청 쪽으로 이동, 시위대 만여 명 택시 뒤에 쓰인 독재타도 뒤 따라 가며 시위, 경찰은 최루탄 발사 자제. 17:30 신흥택시 20여대 비상라이트 켜고, 경적 울리면서 백림약국 서방 쪽으로 이동하고 30여대 기사 60여명은 금남로 동명로타리로 진행하며 시위. 18:55 중앙교회 앞 학생들, 전경에 의해 포위된 상태. 충장로-금남로 간 500여 시민들 운집. 19:00 신광성결교회, 시위 독려하는 옥외방송 시작. 광주상고생 200여명, 서방사거리 산장입구 광고입구로 독재타도, 최루탄 추방 구호 외치면서 시위. 19:05 중앙대교 시민 학생 천 여명, 경찰에 밀려 다리 건너편으로 후퇴 이동. 19:20 중앙극장 앞 시위 군중 만 여명, 한일은행 쪽을 일진일퇴. 19:25 광주상고생들, 산장입구에서 교사로 보이는 사람에게 플랜카드 최루탄을 추방하자 를 빼앗기고 해산, 삼삼오오 중앙극장 쪽으로 이동 중. 20:25 광주공원 뒤-월산파출소 간 도로에서 4천여 명 시위 계속. 21:20 시위대 금남로 3-5가 사이 도로를 점거하고 시위. 22:05 중앙교회 시위대, 전경과 대치하며 농성, 대자보 내고 있음. 22:30 한일은행 4거리 명 도로 점거 연좌시위. 23:00 한일은행 앞 시위대 최루탄 발사로 해산하여 반도상가 앞에 재집결. 23:25 불로동 다리 부근에서 200여명 구호 노래 시위 중. 23:30 중앙교회 앞 시민들 연좌하여 교회 내 농성자들 격려. 23:55 불로동 시위대 2백여 명 구호 외치며 황금동으로 시위. 24일 새벽에도 철야 시위 계속 <6월 24일> 00:00 서현교회 앞 횃불시위 주력 5백 명, 시민들 3천명. 01:40 서현교회 앞 시위대 화염병 투석전. 13:00 조선대 시위 중 경찰 진입. 중앙교회 쪽으로 가두 진출 시도함. 15:40 전대 의대생 250여명 의대 본관 앞에서 경찰 측 사과를 요구하며 농성 중. 18:50 한일은행 4거리(금남로 4가) 300여명 시위. 19:30 중앙극장 앞 5천여 명 시위. 20:15 한일은행 4거리 만 여명 연좌, 고교생 50명 집단참여. 18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89 20:20 고교생 백여 명 집단적 참여, 시위대 2만 여명으로 증가하여 4 13철회만이 아닌 군사독재 타도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으로 시민토론회 개최. 21:25 경찰에 의해 시위대 현대극장, 유동 계림동 등으로 해산. 22:00 중앙교회 앞 5천여 명 연좌시위. 22:10 서현교회 앞 5백여 시민 연좌시위, 2백여 고교생 시위. 22:30 지산동 파출소 타격. 중앙성결교회 예배 후 피켓, 플랜카드 들고 금남로로 촛불시위를 시도하였으나 최루탄 발사로 교회로 되돌아 옴. 옥외방송 계속. 22:35 중앙교회 앞 학생 백여 명, 시민 1천여 명 스크럼 타고 시위하자 곧 시민운집, 5천여 명으로 증가. 대중토론, 구호제창, 노래합창하며 시위. 22:55 중앙성결교회 앞 100여명 해산 시위 되풀이. 23:30 태평극장 앞에서 시위대 500, 시민 700여명 고교생 중심으로 시위. 23:40 중앙교회 앞 금남로 시위대 2천여 명 해산. 23:50 태평극장 앞 시위대 500여명, 시민 2천여 명 연좌시위 계속. <6월 25일> 00:20 금남로 5가 시위대 전원 해산, 2명 연행. 00:50 중앙대교 앞 1천 5백여 명 연좌시위. 01:15 경찰, 사복조 투입하여 시위대 해산시킴. 01:40 3백여 명의 시위대 광주공원 소음시위 중 사복조와 전경 최루탄에 밀려 해산됨. 03:55 서현교회 앞 해산, 100여명 교회에서 철야농성. 18:00-19:00 중앙대교 앞, 광천동, 월산파출소 부근 등에서 산발 시위. 19:25 3천여 명의 시위대 중앙교회 앞 금남로 장악, 시위. 20:00 1천여 명의 시위대 연좌 대토론회 개최. 신탁은행-중앙교회 간 시민들 운집 중 노래 연습. 20:40 시위대 전경에 밀려나면서 시위, 중앙대교를 지나 서현교회까지 후퇴. 21:25 조흥은행 앞 1천여 명 연좌토론회 개최, 고교생들 적극 참여의지 밝힘. 21:40 서현교회 앞 3백여 명 시위대 중 고교생이 절반 이상을 차지. <6월 26일> 17:15 공용터미널 부근 경찰차 1대 및 대형버스 1대 전소. 187 민주화운동
190 17:25 한일은행 4거리 시위대 5백여 명 노상 점거, 시위. 17: 부상자, 고흥 보성지역 민주당원 광주공원으로 집결, 시위. 17:45 중앙여고 동신여고생 2백여 명 등 시민 5백여 명 일부 연좌시위. 한미쇼핑 앞 5인 1조로 검문검색. 18:00 한일은행 4거리 2만 여명, 화염병 투척하며 시위. 18:10 원각사 앞 5 18유족회, 국민운동 전남본부 중심으로 2천여 명 시위. 18:35 원각사 앞 최루탄 무차별 난사로 시위대 해산. 18:55 한미쇼핑-계림파출소 간 5천여 명 운집, 경찰과 대치. 19:20 한일은행 사거리 일대 10만 여명 운집, 시위. 19:30 가톨릭센타 농성자 옥외방송. 20:00 공용터미널 7천여 명 시위. 20:23 중앙교회 옥외방송 시작. 20:25 의대 앞 시위대 해산, 한미쇼핑으로 합세. 20:50 한미쇼핑에서 밀려서 소방서 앞에 이른 6-7천명의 시위대(상고생 70여명)격렬 시위. 21:20 수창국교 앞 고교생 시위대 공원으로 이동하면서 시위. 21:30 중앙교회에서 100여명의 목사, 도청으로 행진코자 가두로 나옴. 21:40 한일은행 앞 시위대, 전경 최루탄 난사로 밀려나면서 일부는 중앙대교, 일부는 유동삼거리로 후퇴. 22:05 시위대, 금남로에서 구역까지 노동3권 보장 요구하는 플랜카드를 내걸고 시위. 22:10 양동시장 복개상가 3백여 명 시위. 22:20 유동3거리 3천여 명 도청방향으로 시위. 22:40 중앙교회 앞에서 일고 4거리까지 시위대, 노상점거 시위. 22:45 시위대, 민청회관에 10분간 투석, 유리창 모두 깨짐. 전경에 밀려 시청 쪽으로 행진하면서 시청에 투석. 23:10 시위대원 중 한 명 스쿨버스 몰고 가다가 최루탄 맞아 크게 부상 후 경찰에 연행됨. 금남로 4 만여 명 시위. 27일 새벽까지 산발시위 계속. 26일의 시위는 20-30만에 달하는 최대 규모의 시위였음. <6월 27일> 00:40 전경 협공에 금남로 시위대 해산. 18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91 02:00 서현교회 앞 3만여 시위대 화염병 시위 계속, 차차 시민들 귀가하면서 시위대 급속 감소. 03:15 서현교회 앞, 사복경찰 투입하여 30명 정도 연행. 시민 한 명이 사복경찰의 거친 연행에 항의하다가 집단구타로 실신함. 서현교회 안에서 150여명 농성. 03:30 사복경찰에 의해 시위대 완전 해산. 18:00 한일은행 앞에서 1천여 전남대생들 중심으로 화염병 투척시위 시작됨. 이후 곳곳에서 다수의 고교생 적극 참여하여 투석전 전개. 19:00 1천여 명의 시민들 광주공원 앞에 운집하여 아리랑 등 부르며 대중정치집회. 19:30 중앙교회 부근 옥상에서 금남로 노상에 화염병 투척. 독재정부 타도, 민주정부 수립 등을 주장하는 옥외방송 계속. 금남로 일대는 전경 및 사복경찰에 의해 완전 차단상태이며 수백여 시민들이 주위에 운집하여 중앙교회 쪽을 바라보면서 호응. 이날 경찰은 더욱 무자비하게 시위대를 진압 연행하였으며, 특히 사복경찰은 대부분 유난히 몸집이 좋은 사람들로만 편성된 것으로 보임. 3) 광주지역 6월항쟁 평가 첫째로 광주지역의 6월항쟁 투쟁에서는 반독재투쟁과 결합하면서 반미자주화투쟁이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반미자주화 투쟁의 중요성은 전단과 각종 성명서, 대자보에서 확인되고 있고 특히 전남대 호헌철폐 및 최루탄 추방을 위한 특별대책위(특대위)와 전청련의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서 반독재투쟁과의 결합이 강화되어 왔다. 대표적인 구호로서는 독재 지원 내정간섭 미국놈들 몰아내자, 군부독재 지원하는 미국은 물러가라 등이 널리 선전되었다(특대위의 6월 16일자 현 시기 정세와 올바를 투쟁방향을 위하여, 전청련의 광주의 소리 45-50호 등 참조). 그러나 아직, 미국의 간섭이 독재정부에 대한 지원을 넘어서서 서민대중의 일상적인 삶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가에 대한 논리적 설명 및 홍보물의 개발 등은 충분히 뒷받침되고 있지 못했다. 반미의 문제를 선전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구호 제창, 화형식, 성명서 상에서의 지적을 넘어서서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에게 즉흥적으로 전달될 수 있도록 미국깃발의 등장 등을 통한 시각적 상징물의 개발 등이 뒤따르고 있지 못하였다. 둘째로 타 지역의 어느 도시에서보다도 시민들의 광범한 호응 및 참여가 이루어졌다. 대학생은 물론이고 민주당원, 교수 및 교사, 목사, 신부, 상인, 노동자, 농민 할 것 없이 매우 광범한 계층이 성금기증, 비닐랩 음식제공, 연행학생 구출, 전경들의 최루탄 발사에 대한 항의 행위에서 나타나듯이 시위대열에 호의적이었다. 특히 고교생들은 도교위의 하교시간 조정, 학교당국 및 장학사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광주지역 민민투를 결성하여 조직적으로 시위에 참가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80년 5월의 고교생들의 적극적인 활동을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 서현교회의 농성과정에서 밝혀진 것처럼 참가 고등학교는 19개교에 이른다는 이야기는 재고한다 치더라도 실제 시위과정에 189 민주화운동
192 조직적 집단적으로 참여한 학교만도 동신여고, 중앙여고를 비롯하여 숭신공고, 광주상고, 광주고, 대동고, 석산고, 진흥고, 문성고 등을 들 수가 있다. 이처럼 시민적인 참여가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80년 5월의 시민군을 중심으로 하는 시민공동체의 경험에서 비롯된다. 광주시민 대동단결 이라는 구호야말로 80년 시민공동체의 경험을 집약한 표현임에 틀림없다. 셋째로 시민들에 대한 시위대의 통제도 강화되고 있다. 전경들과의 최루탄-화염병 투석전 싸움에 있어서 시위대는 지속적으로 그리고 유리하게 싸움을 이끌어 가기 위해서 때로는 시민들에게 여러 가지의 반강제적인 협조를 요청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최루탄 난사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시민들로 하여금 호스로 물을 끌어대게 함으로써 노상의 최루탄 냄새를 없애는 것 등이다. 실제로 이번 과정을 통해서는 금남로 주변의 대형빌딩에서조차 호스를 끌어내 물을 뿌려서 아스팔트 바닥에 물이 흥건하게 괴어 폭우가 쏟아지고 난 후의 길바닥처럼 시위현장이 유지되곤 하였다. 이와 같은 사정은 충장로의 좁은 골목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어쩌다가 호스를 끌어내지 않은 상점이 있으면 시위대는 곧장 새시를 두드려 협조를 요청하곤 했다. 택시의 운행에 대한 통제도 마찬가지로 시위대열 가까이 오는 택시가 라이트를 켠 채로 달려오면 즉각적으로 시위대의 제지를 받게 된다. 이와 함께 시위대에 비우호적인 경우에는 시위대의 제재조치가 뒤따르곤 하였는데, 사장이 48세의 군 고위 장교 출신이라는 수범업체 신흥택시는 승객인 전남대 교수들의 언동을 밀고했다는 이유로 시위대로부터 거친 제재를 받았던 것이다. 나아가서는 7만 2천여 명의 호남 각 지역으로부터의 성금으로 설립된 조선대를 사유물화 해버린 자칭 호남의 페스탈로치 박철웅 총장의 집에 대한 시위대들의 투석 및 화염병 공격, 그리고 전경들의 음료수를 보관하고 부상전경들의 치료를 전담한다는 이유로 투석세례를 받은 서석병원 등의 사례도 일종의 아래로부터 형성된 시민 자치적 권력행사(제재조치)라 할 것이다. 그런데 광주지역이 시위는 서울에서의 명동성당 농성시위, 부산에서의 6월 15일로부터 20일에 이르는 격렬한 시위, 대전에 있어서의 6월 18, 19일의 과격한 시위에 비하여 6월 19일에야 과열되기 시작하였다. 그 이유로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로 광주지역 경찰의 시위진압 능력은 상대적으로 큰 반면 시위의 실질적인 주력이라 할 수 있는 학생운동의 대응태세가 뒤늦게야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부산 대구 등에 있어서는 금년 봄 1-2만의 대규모 확대집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냈던데 반해서 광주의 대학들에서는 5월투쟁 과정에 있어서도 변변한 가두투쟁을 조직해내지 못함으로써 대규모 학생대중의 동원 가능성을 확신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광주시내의 학생운동은 2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형성된 5 18추모집회(남동성당), 5월 24일의 금남로 노상에서의 개신교 14개 교단이 참여한 나라를 위한 연합기도회 (2-3만 운집), 5월 27일의 원각사 최루탄 난사사건(5 18 추모법회 당시)에 대한 항의법회(1만 여명 운집)등에서 주도적인 싸움을 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6월 9일 최루탄에 피격된 광주출신 이한열의 동문들(진흥고)에 의한 총학생회의 시급한 투쟁 촉구, 명동성당 농성 19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93 및 부산 진주 대전 등지에서의 시위격화에 자극받은 시민들의 고무된 반응에 영향을 받으면서 6월 16일이래 총학생회 간부들의 삭발, 20여 학생의 혈서 등을 통해 학내 대중의 열기를 급속히 고조시키게 된다. 둘째로는 국민운동 전남본부의 실질적인 대응태세가 다소 늦었기 때문이다. 전남본부는 5 18 망월동 묘지에서 전국 최초로 결성되었다고 하지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전남본부의 역할, 5 18추모 사업회와의 관계 설정을 둘러싸고, 논의가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상태였다. 6월 25일 남동성당에서의 전남본부 재편성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이 가능하게 된다. 실제로 5 18 결성 당시에 비해 6 25의 재편에 의해서 본부의 상징성, 대중동원 능력에는 현저한 개선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결성당시 본부의 주요 인사로는, 고문에 조아라(YWCA 명예회장), 윤기석(목사), 조비오(신부)였던데 비해 홍남순 변호사(전민협회장)가 새로이 참여하였고 공동의장단도 11인으로부터 23인으로 대폭 확대되는 한편 공동대표 가운데 강신석(목사), 남재희(신부), 배종렬(사회운동), 지선(불교계), 정동년(청년), 김영진(전민협), 이기홍(재야 미구속자협의회)을 상임공동대표로 결성하였다. 이와 같은 신부, 목사, 변호사, 공개 사회운동 대표들로 중심을 이룬 고문, 공동대표의 보강재편과 아울러 사무국 등 실무진의 보강이 뒤따르고 있음은 물론이다. 본부의 결성을 둘러싼 이와 같은 혼선은 일반 학생대중 및 시민들에 대한 선전력을 현저히 약화시킬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학생운동의 대응방식도 자연히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음, 학생운동 및 국민운동 전남본부를 제외한 여타의 시위주체들의 사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청년 운동권은 원칙적으로 국민운동본부와 학생 운동권을 매개하는 동시에 노동, 농민운동과의 연계관계 속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바와 같은 본부 내부의 논의과정, 학생운동 내부의 대응태세 정비가 선행되지 않아 그 역할 또한 초기과정에 있어서는 제약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위가 치열하게 전개되어감에 따라 청년운동은 활발한 대자보 부착, 광주의 소리 의 제작 배포를 통해서, 그리고 본부내의 실무 보조요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전청련은 몇 차례의 시위과정, 광주의 소리 제작배포와 관련하여 장갑수 부의장 등 몇 명의 핵심 간부들이 구속되어 있었다. 종교계 내부의 움직임 속에서도 기독계의 반독재 민주화투쟁에의 적극적인 참여는 시민들로 하여금 학생중심의 시위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몫을 하였다. 전국에서 가장 먼저 4월 21일에 광주대교구의 12명의 신부들은 단식농성에 돌입함으로써 급기야 전국 각지로, 그리고 목사 교수 교사 간호원 등의 여러 계층의 서명 및 단식농성을 이끌어 내었다. 전남지역에 있어서만도 4월 27일 전남목회자 정의평화실천협의회 소속 목사 27명의 단식기도, 4월 22일 한국기독교장로회 전남노회주도의 가두예배 시위와 농성이 뒤를 이었으며, 5월 10일 예수교장로회 소속 목회자와 신도 8백여 명의 4 13조치 철야 구국기도회 (광주 서남교회), 5월 15일 순천지역 예수교장로회 신도 1천 5백여 191 민주화운동
194 명의 민주화기도회 가 계속되었다. 또한 남동성당에서의 5 18추모집회, 5월 24일의 2-3만 시민이 운집한 금남로 노상예배( 나라를 위한 연합기도회 )와 함께 가톨릭센타에서 개최한 광주항쟁 사진전시회는 10만여 명의 시민들이 관람함으로써 반군사독재 민주화투쟁의 열기를 고양시켜 갔던 것이다. 한편 광주지역의 일부 교회들은 열흘 이상의 연속시위 과정에서 선도적 시위대의 농성장으로 활용됨으로써 전 기간을 통하여 시위대의 센터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천주교의 호남동성당 등이 그러하였으며, 특히 중앙교회(합동 변한규 목사), 서현교회(통합 변남주 목사)는 민주화, 민족해방을 갈구하는 하나님의 백성인 지역주민에 개방된 교회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냈다. 중앙교회는 선도적인 대학생 시위대에 의해서, 그리고 서현교회는 고교생 및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농성장으로서 활용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특정교회에서의 장기점검농성은 예배장소로서의 고유기능을 가지고 있는 해당교회에 과도한 부담을 안겨 줌으로써 이와 같은 짐을 지역 내의 여타 교회들이 어떻게 분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앞으로의 해결과제로서 남겨 놓았다. 이와 함께 교회의 적극적 참여는 운동권 학생들 중심의 시위대에 대한 시민들의 이질감을 해소케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것은 5 24의 금남로상의 연합기도회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즉 이날의 예배에는 소위 진보교단으로 보수교단들에 의해 비판받아 온 기독교장로회 중심의 목사들만이 아니라 예장통합측 목회자는 물론 예장내의 보수적인 합동, 고신파(고려신학)목회자, 성결교회, 구세군, 기독교성회, 순복음교회, 침례교까지도 합세하여 호헌철폐 독재타도 를 요구하였던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개신교단 내부에 있어서의 이런 움직임과는 달리 광주제일교회 한완석 목사는 얼마 전 광주 신양파크호텔에서 있은 정주영 현대그룹회장 초청 조찬기도회를 개최하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6월 하순 63빌딩에서 개최한 보훈조찬기도회에서 광주사태 와 관련하여 발언한 내용 등을 문제 삼아 호남신학교 학생들의 지탄이 있었다. 또한 그가 목사로 시무하고 있는 광주제일교회에 대해서는 투석, 전화항의가 있었다. 또한 불교계는 1986년 해인사 법회 이래의 민주화 열기를 반영하여 원각사 법당 내에서의 5 18추모집회, 광주사암연합회 주최로 1만여 시민이 참여한 금남로 노상법회(원각사 법당 내에 최루탄을 난사한데 대한 항의법회), 6월 14일 문빈정사에서의 법회 등을 개최, 경찰의 폭력성을 규탄하는 등 광주민주화 투쟁 대열에 적극 참여하는 모습을 보였다. 노동자들은 4 14호헌조치 반대 투쟁과정에 있어서 시위대열의 맨 앞에 서서 가장 헌신적으로 열심히 싸웠으나 아직 그 조직 역량은 타 부문 운동(특히 학생운동)을 지도할 만큼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조직된 노동자그룹은 서현교회 내에서 농성하는 소수에 그쳤을 뿐이어서 선두에 서서 가장 치열한 싸움을 두려움 없이 수행해 내는 방식을 제외하면 타 부문에 대한 조직적인 영향력 행사는 아주 제약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광주 전남지역노조는 겨우 192개, 조합원은 5만9천명에 지나지 않고 그 가운데 광주지역 19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95 제조업체 노조는 겨우 25개에 불과하며 그것도 회사 측의 통제가 용이한 대기업 노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반면 중소기어의 조직률은 미미하기 짝이 없다. 금속의 아시아자동차, 로켓트, 화천기공, 대우전자, 금성알프스, 섬유의 일신방직, 전남방직, 화학의 금호타이어 노조 등이 모두 대기업 노조들이고 중소기업 노조로는 남선선반, 남해어망, 광주어망, 하남전자와 택시노조 외 몇 개에 불과하다. 대기업 노조는 어용적인 것이 대부분이고 노동운동에 참여하는 노조는 이들 몇 개의 중소기업 노조에 국한된다. 따라서 이와 같은 상황 아래서는 미조직 노동자들의 싸움이 통상 그러하듯이 지속성이 없고 계획성이 없는 싸움으로 귀결된다. 일시적 간헐적인 투쟁은 잘하지만, 미조직 노동자들로서는 타 부문에 대한 일상적 지도력 발휘는 힘들게 된다. 운동권으로부터의 조직적 통제도 약하고 어용노동조합으로부터의 통제도 약하기 때문에 시위 참여에 이르는 과정은 쉽지만 퇴각과정 또한 개별적이고 민활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제도권 정치가들에 대한 과도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일상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은 노자간의 모순에 관한 과학적 세계관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지역차별로 인해 생겨나는 문제를 많이 듣기 때문이다. 4 13조치에 대한 한국노총의 지지발언(4 23)에 대해서 서울 13개 금융노조의 반박성명(5 8)에 뒤이어 5월 14일 광주지역에서의 4개 노조(남해어망, 광주어망, 삼양건업, 성화제망)의 반박성명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당시 민주노조에 대해 통제가 매우 심했고, 이 성명도 서울 등과 은밀히 연락을 취해 임미령 남해어망위원장이 매우 열악한 여건 속에서 추진하여 성명에 참여했던 점은 고려할 필요가 있다. 농민들의 참여는 박종철 고문살인 사건 등으로 농민대중들의 반독재 민주화투쟁 열기가 크게 고양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6월이 한창 바쁜 농번기철이라는 점 때문에 개별적으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장성 담양 해남 등지로부터 10-20명씩 광주의 시위(특히 6 26)에 참여하였다고는 하나, 무안의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지역현장에서 반군사독재 민주화투쟁과 생활상의 요구를 결합시키는 선전 작업들이 독자적으로 활발히 진행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서울의 국민운동본부에의 참여와 마찬가지로 전남본부에도 기농, 가농 등 농민단체의 기구적 참여는 원활하게 이루어져 왔다. 한편, 국민운동본부 무안군지부는 6 26의 시위를 통해서 국민들은 기만술책에 지나지 않는 전두환 독재정부와 김영삼 민주당 총재와의 대화와 타협을 원치 않는다, 합의개헌을 여야에 맡겨 놓아서는 안 되고 실질적인 민주헌법쟁취 투쟁에 나서자 고 주장하고 있다. 이날 무안군 지부는 7월 4일 마늘 양파값 폭락에 항의하는 마늘 양파 생산비 보장대회를 열 것임을 널리 알렸다. 상인들, 특히 양동상가의 3백여 노점상들은 5월 20일까지의 철거통보, 5월 30일까지의 철거시한 연장 통보를 받으면서 6월 1일에는 60여명이 올림픽 경기를 이유로 내건 철거에 반대하여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들은 1백여 명의 철거반원과 몸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2명이 실신하여 입원하는 193 민주화운동
196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이들은 6 10대회에서 6 26에 이르는 시위과정에서 자발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양동상가 부근에서의 시위에 동참하였음은 물론이다. 이들은 수십만 원 이상의 성금을 모금하여 국민운동 전남본부에 기탁하기도 했다. 충장로, 중앙로 등지의 상인들도 전경들의 최루탄 발사에 항의하면서 장사 좀 하게 해 달라 고 아우성이었다. 이들 소자산가인 상인들 또한 대외종속의 심화와 독점의 심화에 의해 사정이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광주지역 상권은 농촌지역에 둘러싸여 있는데 80년대 들어와 농촌사정의 악화와 부채증가 등으로 인해 경기가 좋을 수가 없는 형편이다. 민주당은 신기하 의원, 유준상 의원(벌교, 고흥)등이 시위에 참여하고 지구당 사무실 등에서 옥외방송을 하는 등 일정한 기여를 해 왔다. 한편, 광주지역 투쟁에서는 투쟁주체들의 조직적 역할분담의 상당한 진전(선동 홍보 구호 및 모금 등)과 함께 다양한 전술들이 소개되었는데, 예를 들면 꽹과리, 횃불이 동원되었으며 광범하게 대자보의 제작 및 부착이 행해졌고, 스프레이에 의한 벽담장 또는 아스팔트 위에 페인트 작업, 다양함 형태의 전단 배포, 옥외방송, 소음시위 등이 행해졌다. 최루탄 발사가 일상화됨으로써 비닐 랩이나 1.000원에 살 수 있는 물안경은 일상 휴대용품화되어 버렸다. 심지어 나들이한 가족들이었는지 어린이들에게까지 물안경을 부착한 3-4명의 일행들이 보이기까지 하였다. Ⅳ. 전남지역의 6월항쟁 1987년 4 13 호언조치와 6월 항쟁 전후 대학 내에서 헌법 개정을 촉구하고 전 사회의 민주화를 앞당길 것과 대학 내 민주화를 주장하는 교수들의 서명운동이 발생한다. 이에 자극을 받은 목포대학 교수들 사이에서도 사회에 대해 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조류가 흐르기 시작했고, 마침내 일단의 교수들이 신중하게나마 공개적으로 사회적인 발언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호헌조치 이후 대학 내에서 민주화를 주장하는 서명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목포대 교수들도 아침이면 휴게소에 모여 오늘은 어느 대학에서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는 등 신문기사를 화제로 삼아 조금씩 움직임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의 정부가 워낙 포악한데다 공무원인 국립대학 교수의 신분으로 인해 시국성명을 선뜻 발표하기에는 주저함이 있었다. 그러나 전국의 여러 대학에서 하나둘씩 시국을 우려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성명들을 잇달아 발표하자 목포대학 교수들 사이에서는 사회에 대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데서 오는 자괴감과 냉소가 흐르기도 했다. 이러한 미묘한 상황에서 당시의 시국에 대한 명쾌한 진단과 처방을 담은 목포대학의 성명서가 1987년 5월 8일에 발표된 것은 교수들의 열망을 대표한 사건이었다. 이 성명서는 당시 국문과에 재직 중이던 이용(필명, 동하) 교수(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가 초안을 작성했던 것이다. 이용 19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97 교수는 국내 소설계의 중견 작가로 국문과에서 소설론과 소설 창작에 대한 강의를 맡고 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고뇌에서 비롯된 성명서를 스스로 작성하게 되었다. <이용 교수의 성명서 초안( )> 1. 오늘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불안과 혼란의 가장 큰 원인은 정통성이 결여된 정부와 정치적 후진성에 있다는 점에 우리는 인식을 함께 한다. 따라서 이의 근본적 시정 없이는 다른 어떤 조치도 기만술이거나 미봉책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는 선언한다. 2. 국민적 합의에 의한 개헌의 요청은 무엇보다 우선하는 시대적 과제임을 우리는 천명한다. 이는 88올림픽의 성공적 수행에도 필요조건임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민족중흥 및 통일 과제와도 밀접히 관련된다는 점에 우리는 생각을 함께 한다. 3. 그러므로 오늘의 시점에서 즉각적인 개헌 논의의 요청은 어떤 명분으로도 가려질 수가 없으며, 오히려 각계각층으로 하여금 이에 대한 폭넓은 의사표현이 보다 자유롭고 활발하게 개진되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을 함께 한다. 4. 우리는 어떠한 폭력도 반대한다. 국민의 자유로운 정치적 소신의 피력을 억압하거나 봉쇄하려는 일체의 강권 조치를 반대함은 물론, 또한 극단적인 폭력적 시위 책동도 우리는 엄격히 배제할 것을 당부한다. 또한 편파 보도를 넘어 지극히 자의적으로 여론을 오도하고 있는 일부 언론의 맹성을 우리는 충언한다. 1987년 5월 일 목포대학 서명교수 일동 이 성명서를 받아든 인문학부의 일부 젊은 교수들이 내용을 약간 다듬는 작업에 착수했다. 사학과 이해준, 박혁순, 신상용 등이 완성한 최종 성명서는 이교수의 성명서 초안 내용을 대체로 살리면서도 문체만을 완곡하게 다듬었다. 195 민주화운동
198 <오늘의 시국 상황에 대한 우리의 견해( )> 민족의 장래에 대해 대학이 지고 있는 책임을 깊이 인식하는 우리는 최근 일부 대학에서 발생한 폭력 사태와 개헌 논의에 관한 4 13조치 및 그로 인한 오늘의 시국 상황에 대해 공통된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1. 국민적 합의에 의한 개헌의 요청은 무엇보다 우선하는 시대적 과제이며 즉각적인 개헌 논의의 재개와 함께 그동안 갈구되어 왔던 민주화의 폭넓은 의사표현이 보다 자유롭고 활발하게 개진되어야 하며, 이는 결코 국력 소모가 아니라 진정한 나라 사랑의 행위임을 우리는 의심치 않는다. 2. 민주화의 제반 조처와 함께 시급한 것은 대학의 자율성을 제고하는 일이다. 대외적인 힘에 의해 대학의 자율이 제어 받는 현실에서 우리는 이 같은 민주화 노력이 대학의 자율성을 신장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리라고 믿는다. 또한 이러한 자율은 대학의 주체인 교수와 학생 간의 신뢰가 그 밑바탕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대학인 간의 대화 분위기 회복이 절실히 요구된다. 3. 우리는 어떠한 폭력도 반대한다. 국민의 자유로운 정치적 소신 피력을 억압하거나 봉쇄하려는 일체의 강권 조치를 반대함은 물론 학원 내의 모든 폭력 행위도 엄격히 배제할 것을 촉구한다. 또한 편파 보도를 넘어 지극히 자의적으로 여론을 조작하고 있는 일부 언론의 맹성을 우리는 충언한다. 4. 우리는 이 같은 견해의 표명이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견해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이로 인해 대학 내의 또 다른 갈등과 불신이 야기되지 않기를 바란다. 1987년 5월 8일 목포대학 서명교수 일동 발표를 위해 작성된 성명서가 회람되자 교수들의 반응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교수가 있는가 하면, 자리를 피하거나 거절하는 교수도 있었다. 당시의 서명 작업은 자신의 신분에 대한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전체 교수 전원의 서명을 받아내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결과 20명의 교수들이 서명에 참여하게 됐다(상세 명단은 관련인사 항목 참조). 시국성명서가 발표되자 문교부는 대학을 통해 당 교수들에게 신중한 행동을 당부하는 경고 조처가 뒤따랐다. 이 서한문 일자가 성명서를 발표한 날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대학과 문교부 당국에서 미리 성명서 발표 분위기를 감지하고 미리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19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99 이 시국 성명서 작성 및 발표는 그동안 침묵했던 대학 교수들이 비로소 사회 현실에 대해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는 계기가 마련한다. 뿐만 아니라 현실 문제에 개입하기를 꺼렸던 태도에서 벗어나 이후 전개된 학내 민주화를 위한 교수평의회 설립과 직선학장 쟁취투쟁 등과 같은 직접적인 행동에 참여하는 기본적인 원동력이 되었으며, 이 과정에 참여한 일부 교수들은 향후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또한 성명서 내용에는 학원 자율화 및 민주화 과정에 대학의 주체를 교수와 학생으로 규정하고 대화해야 할 필요성을 지적하는 대목도 있는데, 이 역시 이후 직선학장 쟁취투쟁과 종합대학 승격투쟁에서 학생진영과 연대하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평가할 수 있고, 6월항쟁으로 가는 발판을 마련한 사건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1. 목포 (1) 시위진행과정 6월 10일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목포시민대회 는 당국의 조직적인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80년 5월 이후 처음으로 대규모 인파가 목포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만들었다. 당국은 대회 하루 전인 9일부터 주최단체인 목포사회운동 청년연합과 민주회복국민회의, 목포대학총학생회, 목포기독교회협의회 등 각 사회 종교단체의 목사 재야인사 등을 가택 연금했다. 10일 오전 9시경 안철 기독청장장년운동본부장은 자택에서 연행되었다. 대회당일 오후 3시경에는 전경과 사복을 포함한 일반경찰 그리고 인근 신안지역에서 동원된 경찰 및 행정공무원들을 대회장 주변과 관공서 등지에 집중 배치했다. 학교당국은 오후 4시경에 중고등학생들의 수업을 중단시키고 모두 귀가토록 했다. 학생들에게 빨리 귀가토록 종용하면서 시내에서 깡패 소탕작전이 있으므로 절대 시내를 배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고 당부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교사들을 동원하여 학생생활지도라는 명목 하에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건드리지 말고 중고생은 한 사람도 시위에 가담하지 않도록 단속할 것을 각 급 학교에 시달했다. 그러나 이런 억지를 비웃기나 하듯 많은 교사들과 중고생 심지어 초등학생들까지도 시위에 참여했다. 오후 5시 20분쯤 2호 광자에서 목포대생 1백여 명이 살인정부 물러가라 호헌철폐 독재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성명서, 전단 등을 배포했다. 약 5백여 명의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열기는 계속 고조되어갔다. 이때 목사, 재야인사, 시민 등 1백여 명이 주변에서 4 13철회하라, 구호를 외치며 경찰과 몸싸움을 벌였고, 경찰은 끝내 최루탄을 발사했다. 시위대가 가두행진을 계속하자 많은 시민들이 이에 가담했다. 이때 2백여 명의 청년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시위를 주도했다. 6시 20분경 1천 5백여 명의 시민들이 시민회관 앞 광장에 운집, 시위를 계속했다. 한편 여기저기 모여 있던 시민들은 경찰과 실랑이를 벌였고 최루탄이 발사되면 흩어졌다가 시민회관 쪽으로 이동했으며, 소규모 투석전도 전개했다. 197 민주화운동
200 주변 건물에서 시위를 지켜보던 다방 아가씨들이 얼음과 삶은 계란을 시위대에 나누어 주는 등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6시 30분경 시민 1천5백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청년 학생들의 주도로 대회가 진행되었고, 시민들은 계속 불어났다. 대회 후반 집회를 주도하던 목포대 학생들이 역전진출을 시도하면서 최루탄이 무차별 난사됐다. 시내 곳곳에서 분산시위를 계속하던 시민 학생들은 8시로 예정된 연합예배와 미사참석을 위해 연동교회와 연동성당 쪽으로 이동했다. 교회와 성당에 각각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나라를 위한 기도회가 진행되었고, 일부는 거리에서 싸움을 계속했다. 10시경 연합예배가 끝난 뒤 참석자들은 다시 시내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일부는 연동성당 쪽으로 가서 합세했다. 성당의 미사가 끝나자 시민들은 가톨릭회관 앞까지 평화적 행진을 하기로 결의한 후 신부 수녀들이 앞장선 가운데 2호광장 입구까지 진출, 대기 중이던 경찰에게 평화적 행진임을 강조하고 길을 열어줄 것을 요구했으나 경찰은 최루탄을 무차별 난사, 시위대를 분산시켰다. 주변상가가 모두 철시한 가운데 오히려 2천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가 2호광장으로 집결하여 경찰과 다시 대치상태에 들어갔고, 신부들은 재차 평화적 시위를 약속하며 경찰과 협상을 벌였다. 40여 분간의 대치 끝에 마침내 경찰이 길을 열어주자 시위대는 송홍철신부 주도로 애국가, 선구자, 님을 위한 행진곡 등의 노래를 부르며 십자가를 앞세우고 행진했다. 5천여 명으로 불어난 연도의 시민들은 시위대와 함께 호헌철폐 독재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3호광장 쪽으로 나아갔다. 시민들은 계속 불어나 3호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1만여 명을 훨씬 넘어섰다. 자정 무렵 가톨릭회관 앞에 도착한 시위대는 5천여 명의 시민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살인정부 규탄 및 개헌쟁취 결의대회를 갖고 자진해산을 결의했다. 시민들은 열렬한 박수와 환호로 이를 지지했다. 그렇지만 일부 시민들은 귀가하지 않고 계속 자리를 지켜며 당일 연행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농성에 돌입했다. 한편 교회와 성당에서 나온 일부 시위대는 역전과장 쪽으로 가두행진을 감행, 경찰과 격렬한 공방을 벌였다. 한때 역 광장을 점거하기도 한 시위대는 2천여 명의 시민들의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 시위는 자정까지 산발적으로 계속됐다. 이날 시위로 역전, 대성동, 남교동 등 6개 파출소가 시위대의 투석에 의해 파손되었다. 17일에도 목포대생 50여명이 30분가량 가두시위를 벌이며 전단을 살포하고 매일 6시 역전광장에 모이자고 시민들에게 호소했다. 18일 오후 6시 역 앞 광장이 봉쇄된 가운데 시민회관 앞(목포극장 주변)에 3백여 명이 1시간가량 집회를 가진 뒤 역 앞 진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때 시민들은 1천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이들은 다음날 새벽 3시 30분경까지 산발시위를 계속했는데 4개 팀으로 갈라져 파출소를 습격, 역전파출소가 파괴됐다. 19일 시위가 다시 격화되기 시작하여 21일까지 매일 목포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19일 오후 6시경 전날처럼 역전과장이 봉쇄된 가운데 수문당제과점 앞에서 1백여 명이 모여 군부독재 타도를 19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01 외치면서 시위가 시작됐다. 4백여 시민들은 시민회관 앞에서 경찰과 대치한 가운데 대중 집회를 가졌다. 시민들은 양파 2백여 개를 전경들에게 던지며 농산물값 폭락에 항의했다. 8시경 역전 진입을 시도하다 실패한 시위대는 2개 대열로 분산하여 2호광장으로 향했다. 2천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전경 약 1백여 명을 5분여 동안 포위하고 대치했으나 최루탄 난사로 흩어져 유달중학교, 3호광장, 연동성당 등 3개 방향으로 나뉘어져 산발 투석전을 계속했다. 9시 반 경에는 시민 2백여 명이 길가에 세워둔 전경버스를 둘러싸고 불을 질렀으나 잘 타지 않자 파괴해버렸다. 11시 반경에는 연동육교 밑에서 대중집회를 연 뒤 경찰과 격렬하게 싸웠다. 이러한 산발시위는 다음날 새벽 2시 반경까지 계속됐다. 20일부터 고등학교가 다시 단축수업에 들어갔다. 6시 30분경 시민회관 앞에 모인 2천여 시민들은 또 다시 역전광장 진입을 시도한 두 흩어져 11시경까지 조직적인 시위를 벌였다. 그 후 새벽 2시 반경까지 산발시위를 벌이던 중 11시 반경에는 목포 고교생 2-3백여 명이 시위에 가담하기도 했다. 북교동성당에는 150여명이 철야농성한 후 새벽 6시경에 자진해산했다. 21일 오후 6시경부터 시작된 시위는 8시경 3천여 시민들이 도로를 가득 메운 가운데 대중 집회로 이어졌다. 9시 반경 역전광장 진입이 시도됐으나 실패하자 다시 집회를 가졌다. 한편 같은 시각에 NCC 산하 목사들이 모여 시위대에 가담하기 위해 집회장으로 향했다. 경찰은 5거리 중앙교회를 차단하고 목사들의 시위가담을 저지하려 했으나 시민 2백여 명이 목사 32명을 호위하고 집회장으로 왔다. 1만여 명의 시위대는 문화패들의 탈춤과 품바 약식공연에 열광하며 가두시위를 전개하고, 전신전화국 앞에서 경찰과 대치했다. 경찰이 최루탄을 난사하자 목사와 선두대열은 2호광장 방면으로 후미는 남교동으로 나뉘었다. 경찰의 무차별 최루탄 난사로 부상자가 속출하자 참다못한 일반 시민들이 밖으로 나와 경찰을 향해 분노를 터뜨렸다. 시민들은 격노한 나머지 최루탄 쏘지 말고 주먹으로 1:1로 싸우자 고 소리쳤으며 고교생들도 폭력을 행사하려 해 대학생들이 이를 만류했다. 이 무렵 목포시 당국은 9시 반이 지나면 시가지의 가로등을 꺼버렸고, 경찰은 자정이 자나면 본격적으로 시위자들을 집단폭행한 뒤 연행해갔다. 이날 시위는 새벽 4시까지 산발적으로 계속됐다. 비상조치설에 아랑곳하지 않고 독재정부에 맞서 싸웠던 광주 목포 순천시민들의 투쟁은 광주민주화운동정신을 그대로 계승하는 것이었고, 전국적인 시위의 파고를 극대화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26일 오후 6시부터 시위가 동시다발로 시작됐다. 2호광장에서는 재야인사들이 중앙교회에서는 개신교 목사들이, 남교로 시민회관에는 청년학생들이 중심되어 시작된 시위는 6시 30분경부터 조직적으로 전개되어 2만여 명이 2호광장까지 진출했다. 이때까지 최루탄을 쏘지 않던 경찰은 이날 최초로 역전광장이 시위대에 의해 점령당하자 후미를 끊은 뒤 최루탄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다시 10여 곳으로 흩어진 시위대는 격렬한 투석전을 전개했다. 8시 30분경 시민회관 앞에 재집결한 3천여 군중은 다시 역전광장으로의 진출을 기도했으나 저지당하자 1시간여 동안 투석적은 전개했는데, 199 민주화운동
202 이때 처음으로 화염병이 등장했다. 화염병이 등장하기 시작하자 쫓겨 다니던 시민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고, 계속 화염병 투척을 요구하는 등 시민무장을 주장했다. 11시 반경까지 투석적은 계속한 뒤 북교초등학교 앞까지 밀린 시위대는 4곳으로 분산되어 새벽 4시까지 산발시위를 계속했다. 27일에는 경찰의 과잉진압이 극에 달했다. 이날도 오후 6시에 시민회관 앞에서 학생 20여명이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하자 사복경찰 40여명이 들이닥쳐 난투극이 벌어졌다. 피해의식에 젖은 4백여 시민들은 이를 지켜보기만 했고 곧 달려온 시민들이 전경에게 욕설을 퍼붓고 멱살을 잡는 등 실랑이가 벌어졌다. 9시경 학생 2백여 명이 화염병 2개씩과 각목으로 무장하고 중소기업은행 앞에 집결했다. 시민들은 무장을 요구했었으나 실제로 이에 적극 가담하지는 않았다. 시위대들은 약 30분간 대주집회를 가진 뒤 역 앞 광장 진출을 시도했다. 이때 시민들이 사복조 4명을 잡아 폭행을 가했다. 경찰과 시위대 사이에는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고 자정 무렵 시위대는 밀려나 재집결한 뒤 다시 역전으로 나아갔다. 시위대는 이런 과정이 되풀이되는 가운데 소파 등을 모아놓고 불을 질러 바리케이드를 설치했고, 시민들은 최루탄이 터지면 옥상에 올라가 물을 뿌렸다. 이때 대성동 파출소가 1백여 시위 군중에 의해 전소되었다. 새벽 1시경 2호광장에서 3호광장으로 밀려난 시위대는 2시경 경찰이 적극 공사로 나오자 흩어져 새벽 4시까지 격렬한 산발시위를 전개했다. 한편 새벽 3시경 트럭운전사가 시위자 20명을 태우고 역 앞으로 진입했다. 이들 20명은 교통통제와 역전파출소를 전소시킨 뒤 모두 연행돼 심하게 폭행을 당했다. 이때 경찰은 밖에 나와 있던 모든 시민들을 무차별 폭행한 후 연행했다. 28일에도 밤 10시경 1백여 명이 2호광장에 집결, 전경들과 1시간 여 동안 몸싸움을 벌여 그중 30여명이 연행되고 나머지는 흩어져 새벽 1시까지 산발시위가 벌어졌다. 29일은 세무서를 주 공격목표로 삼고 6백여 개의 화염병이 준비됐으나 이른바 6 29선언으로 화염병 사용은 취소되었다. 고교생들은 이날까지 단축수업을 받았다. 목포시민들은 시위가 없는 날도 관성적으로 집결지에 나와 항상 6-700여명이 모여 있었다. (2) 목포지역 시위 일지 <6월 10일> 경찰은 오전 9시경 기독청장년운동본부장 안철씨 자택(동아약국)을 수색하여 유인물과 자료를 다량 압수하고 안 씨를 대공 수사과로 연행하였다. 대회장인 목포역은 봉쇄된 상태. 운동본부 집계로는 2만 여명의 시민이 참여하여 11일 새벽 1시까지 산발적인 가두시위 전개. 이 날 목포 역전 파출소, 연동 파출소 등 4개 파출소가 돌에 맞았다. 20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03 18:00 역전에서 수백 명이 40분간 시위를 전개. 19:30 목포대생 3백, 목포시청 앞에서 시위. 19:40 공설시장(중앙시장)앞에서 약식으로 규탄대회를 개최. 애국가 제창, 결의문 낭독 등의 순서서 20분가량 진행되었다. 20:00 이후 경찰과 대치하면서 산재하여 개신교는 연동교회로, 구교는 명동성당에서 합동미사를 진행하였고 다시 역전에 모여 6-7백여 명의 시민이 동참. 21:20 대학생 차림 20여명이 연동파출소에 투석, 시위. 01:01( 11일) 새벽 1시까지 목포역 주변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계속되었다. 이날 시위에서 28명이 연행되어 6명이 훈방되고 22명은 구속 중이다. <6월 19일> 제1차 목포시민 궐기대회 18:00 대학생 시위대 1백여 명 남교동 수문당 제과점 앞에서 군부독재 타도하자 라는 구호( 목포대학 반제민족자주화 반파쇼 민주화투쟁위원장 선창)를 외치며 시위 시작. 19:00 양파 2백여 개를 전경에게 던지며 농산물값 폭락에 항의. 연좌농성 전개. 20:00 시민 학생 2천여 명 전경의 최루탄에 대항하여 역전입구 남교시장 2호광장 3호광장 등 주요 간선도로 점거 시위. 전경의 최루탄 난사로 인해 여러 갈래로 나뉘어 연동. 대성동 남교동파출소에 투석, 이후 산발시위. 02:00(20일) 3호광장에서 시위대 해산. 가톨릭 회관에서 30여명 철야농성. <6월 20일> 제2차 목포시민 궐기대회 22:00 목포대 총학생회 주도로 7-8백 명 연동성당에서 집회 개최. 23:10 목포대생 2백여 명 용당동 3호광장에서 시위 후 용호파출소, 연호파출소에 투석. 23:30 2호광장(육교 쪽)에서 해산 후 시내방향을 향해 3-4백 명 집결. 목포고 2-3백 명 시위에 참여. 23:35 시민들 호남약국 앞 육교에 나붙은 홍보용 플랜카드 철거 불태움, 01:40(21일) 시민회관 앞 5백여 명 독재타도 등 구호 외치며 시위. 02:30 북교동 성당에서 150여명 철야농성 전개. 06:00경 자진 해산. <6월 21일> 제3차 목포시민 궐기대회 18:30 50여명의 학생들 구호를 외치면서 시민회관 앞에 운집. 201 민주화운동
204 19:50 시위대 1천여 명으로 불어나자 남교로에서 최루탄 발사하여 시민들 흩어짐. 20:20 목포대생을 중심으로 민요를 부르며 시위대 재집결. 한 시민이 시위대에 음료수 기증함. 시위대는 해방춤, 4박자 춤을 추며 놀이마당 벌임. 시위대 규모가 2천여 명으로 불어나면서 평화적인 행진 재개. 20:50 문화패 갯돌에서 탈춤과 품바의 약식 공연을 갖자 연도의 시민들의 열광적인 호응 계속됨. 시위대 1만 여명으로 늘어나고 시내 행진 재개, 연도의 시민들의 환호와 박수 소리로 떠나갈 듯함. 22:30 목포 중앙교회에서 기도회를 마친 목사(32명), 기독청년회원 신도 등 3천여 명 횃불 들고 꽹과리, 북을 치며 평화 행진하여 2호광장으로 재집결. 23:40 최루탄 무차별 난사로 인해 시위대 해산. 연동철로 봉쇄하고 시위. 이후 다음날 새벽 2 시까지 시내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 계속. <6월 25일> 20:30 산정천주교회에서 7백여 신도 구국기도회 후 26일 새벽 2시까지 교회 앞에서 4 13 철회 등을 외치며 연좌 농성. <6월 26일> 17:50 1호광장에서 5백여 명 집결예정지인 목포역을 향해 가두시위. 21:00 시위대 6천여 명으로 늘어나자 경찰은 최루탄 발사하여 해산. 시위대는 화염병 투척 및 투석으로 응전. 22:18 시위대 2백여 명 연동 건널목에서 서울발 목포행 통일호 열차의 운행을 봉쇄, 7분 동안 연착케 함. 23:00 시위대 민정당사 시교육청 남교동파출소에 화염병 투척 및 투석하여 유리창 등 파괴. 27일 새벽 3시까지 시내 곳곳에서 산발적 시위가 계속됨. 2. 순천 (1) 순천지역 6월항쟁 전개과정 6월 9일 순천노회 회관에서 청년 70-80명이 참석한 가운데 나라를 위한 기도회 가 열려 다음날의 6 10대회를 위한 준비와 결의를 다지고 대회참가를 호소하는 전단을 살포했다. 이 20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05 청년들은 순천대 대의원회와 서클연합회 그리고 순천노회 청년회 연합회 소속 청년들이었으며, 이날은 순천 6월항쟁의 큰 시작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6월 10일 순천 YMCA(간사 이학영)를 중심으로 민주인사들이 집회를 계획했으나 경찰의 봉쇄가 삼엄했다. 순천대생 5백여 명은 오후 1시 30분경 고문조작 호헌철폐를 위한 순천대 출정식 을 순천대 민주광장에서 갖고 종철이를 살려내라, 호헌철폐, 독재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학내집회를 시작했다. 학생들은 학내시위를 가진 뒤 3시 30분경 가두진출을 시도했다. 무장경찰과의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계획되었던 예정시간보다 많이 늦었지만 2백여 명의 학생들이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고 순천의료원 앞까지 진출하여 전날 약속한 대로 순천대학생, 순천노회 청년회 연합회 회원, 지역시민단체의 연합시위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들 시위대는 시내로 진출하여 시청 주변에서 산발적 시위를 벌였고, 이 과정에서 학생 16명이 연행되어 그중 9명은 석방되었다. 시위는 그 다음날인 6월 11일에도 이어졌다. 오전 10시경 150여명의 학생들이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오후 1시쯤에는 4백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가 스크럼을 짜고 전경과 대치한 가운데 공방전을 벌였다. 6시경이 되자 시위학생 수는 1천여 명으로 불어나 연행자 석방을 요구했고, 만약 석방하지 않을 경우 기말시험을 거부하겠다고 결의했다. 경찰은 연행자 모두를 석방했고 시위는 일단 종료되었다. 6월 11일 이후 17일까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던 순천대 학생들은 시험기간 중임에도 불구하고 18일부터 다시 농성시위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날 3백여 명의 학생들은 교내 민주광장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위한 출정식 을 가진 뒤 학교 앞 도로를 1시간 30분가량 점거한 채 농성에 들어갔다. 이때 주변에 모인 시민들이 박수를 치며 이를 응원하자 경찰은 무차별적으로 최루탄을 난사, 시민들을 강제해산시켰으나 학생들은 아예 그 자리에 드러누워 버렸다. 학생들의 결사적인 항쟁에 당황한 경찰은 이들에게 더 이상 최루탄을 발사하지 못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순천시내의 전투경찰병력은 1개 중대 정도로 보잘 것 없었다. 그나마 젊은 층들은 모두 광주 등 시위다발지역으로 차출돼 나간 상태였다. 그 결과 처음 며칠간은 병력 절대 부족에다 최루탄마저 동이 나버려 저지선이 쉽게 무너지기도 했다. 6월 19일 순천대 대의원회와 서클연합회를 중심으로 오후 3시 30분경부터 출정식이 거행됐다. 국민의례와 결의문, 성명서 낭독을 끝낸 학생 2천여 명은 교문을 사이에 두고 최루탄을 쏘며 선제공격을 가해오는 전경들과 대치했다. 5시 40분경 학생들은 치열한 교문 앞 직격 최루탄과 화염병, 투석전의 공방전을 격렬하게 진행하면서 축구골대 1개로 학교 담을 허물어 밀고 나가고, 또 1개는 교문을 통해 밀고 나가 마침내 교문 저지선을 뚫어버리고 치열한 공방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으며 4차선 도로를 전대미문의 축구골대 2개로 방패삼아 전경들을 밀어내었고, 축구골대를 그대로 밀고 시청 앞 광장까지 진출했다. 203 민주화운동
206 이 과정에서 격렬한 투석전이 벌어졌고, 전경들은 후퇴했다. 학생들은 KBS 방송국을 점거하고 공정한 보도를 요구했다. 학생들이 시청 앞으로 진출했을 때 시위군중은 2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전혀 예상 밖의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시위지도부는 엄청난 인파에 경악했다. 이런 사태에 대한 상황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지도부는 약식으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위한 제1차 범시민궐기대회 를 선언했고, 애국가 와 민주열사에 대한 묵념, 애국시민에게 드리는 글 을 낭독하고 힘차게 노래와 구호를 외쳤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5공의 폭력, 폭압, 살인정부를 성토하는 구호를 외칠 때마다 우렁찬 함성이 순천의 어두운 밤의 정적을 깨우면서 자발적인 질서정리와 시민들의 훈훈한 성금모금이 시작되었다. 시위대는 다음날 새벽 2시 30분경에야 완전히 해산했으며, 60여명은 지속적인 투쟁을 계획하면서 매곡동 성당에서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6월 20일 매곡동 성당에서 나온 시위대는 순천의료원 로터리에서 집회를 시작했다. 천경과 시위군중 간에는 사전에 협상을 통해 비폭력적인 한 평화시위를 보장한다는 약속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경찰 측은 이를 금방 파기하고 최루탄을 무차별 난사했다. 1백여 명이 도로에 드러누워 저항했다. 그러나 경찰은 이들 가운데로 최루탄을 난사, 20여명이 부상당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때까지 주로 도로 양편에서 지켜보고 있던 시민들이 이 광경을 목도하고는 격분한 나머지 시위에 가담하기 시작했고, 순천의료원, 남교로터리, 아래시장을 거쳐 시청 앞까지 진출한 시위대는 그 수가 2만 5천으로 불어나 있었다. 엄청난 수로 불어나 기세를 올린 시위대는 그 수가 2만 5천으로 불어나 있었다. 엄청난 수로 불어나 기세를 올린 시위대 일부가 평소 원성의 대상이었던 미성사 를 공격목표로 삼고 몰려갔다. 옥상에서 시위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미성사안경원 주인인 김추길(민정당 중앙대 간부)의 부친 김형은은 분노한 시위군중이 몰려오자 충격을 받고 실신, 추락사했다. 김 씨의 죽음으로 미성사는 파괴를 면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독재정부 지원하는 미국은 물러가라, 5월학살원흉 전두환을 처단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던 군중은 순천시청을 점거했다. 이 보다 앞서 경찰 측은 무기를 인근 군부대로 빼돌려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7시 50분경 시청 3층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는 시민들의 외침이 들리고 수십 명이 청사 안으로 돌진했다. 시위대는 각목 등으로 카메라를 박살내 버렸다. 이어 시위대는 유리창을 박살내고 전두환 사진액자를 끄집어내 화형식을 가졌다. 9시부터 마이크가 설치되고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위한 범시민궐기대회 가 시청 앞 광장에서 진행되었다. 대회 후 시위대는 횃불시위를 벌이며 매곡당 성당으로 행진, 연좌시위를 전개하면서 사물놀이 해방춤을 곁들인 성토대회를 열었다. 새벽 2시 30분경 3백여 명의 진압부대가 최루탄을 쏘며 시위대를 덮친 뒤 방패를 휘두르며 군화발로 짓밟는 등 시위대를 무차별 난타하고 강제로 해산시켰다. 결국 46명이 성당 내로 들어가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이때 다수의 고교생들이 농성에 참여하고자 했으나 농성자들은 이들을 돌려보냈다. 고교생들은 돈을 걷어 농성에 사용토록 전달했으며, 이밖에도 많은 시민들이 필요량을 20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07 넘는 음식물을 보내와 이들을 지원했다. 6월 21일 오후 7시 40분경 남교 5거리에서 다시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날 시위는 비록 시위군중 수에서는 26일보다 적었지만 순천시 6월항쟁의 최고 절정을 이루었으며 경찰 오토바이 2대가 전소되었으며, 중앙동, 남문, 북문파출소 등이 시위대에 의해 전소되거나 파괴되었다. 이날은 지도부가 따로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만여 명의 시민들은 스스로 지도부를 형성하고 질서정연하게 움직였다.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정치인들이 인기발언을 할라치면 시민들은 심한 야유를 보내며 제지했고 술 취한 사람들이 난동을 부리는 것도 규제했다. 시위에 기름을 부은 것은 재수생을 비롯한 고교생들이었다. 고교생들은 학교 측의 철저한 참가 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약 5백여 명이 시위에 가담했다. 시위 초기 시청 옆 나무호텔 앞에서 수천 명의 군중이 1개 소대정도의 전경들에게 이리저리 쫓겨 다녔는데 이때 한 고교생이 시위그룹의 선두에 서서 열렬히 지휘하고 있었다. 흩어져 달아나기만 하는 시위 군중을 보다 못한 주위의 시민들이 그 고교생에게 저 전경들을 몰아서 옷을 벗겨버려라 고 외치자 전경들을 향해 돌진했다. 졸지에 전세가 역전된 전경들은 도주하기 시작했고 3명이 붙들려 집단 폭행을 당했다. 그중 1명은 중상을 입어 뇌수술까지 받았는데 당시 폭행을 당한 전경이 중상을 입자 시민들이 근처의 소방서로 달려가 구급차를 요청했으나 소방서 측은 이에 불응, 시민들이 유리창 하나를 박살내가 그때서야 구급차를 내주기도 했다. 한편 노인과 어린이들이 포함된 2백여 시민들이 제일교회에서부터 1킬로미터의 거리를 행진해가자 경찰을 최루탄을 난사,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1만여 시위 군중들이 아래시장을 돌아 시청 앞으로 진출하자 전경, 예비군, 공무원들이 이들을 저지했고 양측은 협상에 들어갔으나 경찰 측은 해산을 종용했다. 이 과정에서 최루탄이 바닥난 경찰들이 시위대에 맞서 투석을 하기 시작, 무방비상태의 시위대 중 양복점 직원 한 사람이 벽돌에 머리를 맞아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에 옮겨졌다. 이 사람은 상태가 위중해 뇌수술까지 받았으나 정신이상 증세를 나타내는 등 증세가 악화됐다. 이날 병원들은 최루탄으로 인한 부상자들에 대해서는 치료를 거부하는 등 비인도적 작태를 일삼았다. 시청 앞에서 재집결한 시위대 2천여 명은 자정을 넘어 다음날 새벽까지 시위를 계속했다. 공수부대 투입, 계엄령 선포 등 엄습해오는 유언비어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향한 수천시민의 열망을 식을 줄 몰랐다. 시위대는 시청 유리창을 박살내고 집기들을 부쉈다. 새벽 2시경 경찰 지원버스 3대가 도착, 시위대를 포위했다. 경찰은 최루탄을 난사하면서 운동복 차림의 체포조를 대거 투입, 무차별 연행에 나섰다. 이때 시위 주도자급들은 다 빠져나갔으나 일반 시민 89명이 연행됐다. 6월 26일 전국적으로 국민평화대행진이 벌어진 이날 3시 20분 무렵 남교 5거리에서 3백여 명의 연좌농성으로 시작된 시위는 순천지역 6월항쟁 사상 최대의 인파인 5만여 명을 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했다. 시위대가 저지선을 뚫고 전진하자 급격히 불어난 연도 시민들이 대거 시위에 가담, 205 민주화운동
208 압도적 다수 군중의 위세에 눌린 경찰은 피하면서 길을 터 주었다. 이날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하지 않았다. 순천시내 곳곳을 누비며 기세를 올린 수만 명의 시민들은 9시경 시청 앞에 집결,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위한 제3차 범시민궐기대회 를 열었다. 시위의 불은 순천대생이 당겼으나 이날 시위도 초등학생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연령 계층의 사람들이 참가한 시민대회였다. 밤 10시경 잔류 시위대들은 철야농성을 위해 매곡동 성당을 향해 이동하여 성당문을 열어줄 것을 요구했으나 성당측은 이를 거절했고 시위대들은 대부분 해산했다. 남은 시위대와 시민들은 다시 제일교회로 갔고 거기서 1백여 명이 농성에 들어갔다. 농성이 계속되자 순천경찰서 수사과장이 사람을 보내 귀가하면 안전을 보장하겠다며 농성자들을 설득했다. 농성자들이 이에 불응, 해산하지 않자 이번에는 수사과장이 직접 제일교회에 나타나 책임지고 안전귀가를 보장하겠다며 해산을 종용했다. 경찰들은 교회 안으로 사복경찰을 대거 미리 진입시켜 놓고, 교회 옆에 전경버스를 숨겨둔 채 수백 명의 경찰관계자들이 잠복해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밤 12시경 철야농성과 자체해산을 놓고 농성자들의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철야농성을 결의했으나 조직정비를 하는 동안 어수선한 틈을 이용해 경찰이 난폭하게 농성장에 진입했다. 불시에 기습을 당한 농성자들은 혼란에 빠졌고, 26명이 강제 연행되었다. 경찰은 강제진압과정에서 6월항쟁이 시작된 이래 가장 강력한 폭력수단을 사용했다. 날이 밝자 제일교회 관계자들이 경찰서로 달려가 항의했고, 25명이 석방되었다. 그러나 시위를 주도한 순천대 대의원회 의장 박성호는 풀려나지 못했고, 6 29선언이 발표된 직후 구속되었다. (2) 순천지역 항쟁일지 <6월 18일> 14:00 전남 순천대학생 4-5백여 명 학내시위. 18:00 가두진출, 장청회원과 합류. 20:00 순천시장 앞에서 4천명(시민 학생)이 호헌철폐 민주쟁취 구호를 외치며 연좌 농성중. 경찰병력 5백여 명으로써 최루탄 발사를 못하고 있음. <6월 19일> 15:30 순천대학생 3백여 명 교문 밖 도로에서 경찰과 대치하며 최루탄 추방시위를 벌임. 16:40 KBS 순천방송국에 돌과 화염병을 투척. 20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09 <6월 20일> 18:40 오전부터 남교로터리 등 시내 세 곳에서 분산시위를 벌인 학생 시민 5백여 명이 순천시청 앞 광장에서 연좌농성. 시청 내 시장실 기물을 부수고 횃불시위를 벌임. 19:00 이날 시위를 구경하던 시민 김형은씨(66)가 3층 건물 옥상에서 10미터 아래 도로로 추락하여 병원으로 옮기던 중 사망. <6월 21일> 19:40 일요일 저녁예배 후 순천대생 시민 교인들 2천여 명 중앙시장과 남교로터리에서 4 13조치 철회 등 구호 외치며 격렬한 야간시위, 남문 중앙파출소 등 2개 파출소와 중앙동 사거리 교통 센터가 소실 파손되고 시청이 23:45, 22일 01:30 두 차례 공격을 받아 유리창 3백여 장 파괴, 책상 의자 등 집기 훼손. 최루탄 쏘고 경찰 측이 시청 옥상 등에서 직격탄과 돌멩이 던져 부상자 발생. 김윤배(21, 양복점원) 직격탄을 머리에 맞아 Y자로 머리가 쪼개져 인근병원에서 응급조치 받고 큰 병원으로 옮겨 긴급 수술. 장문기(23, 시민) 전경이 던진 돌에 맞아 부상. 지성진(26, 상업) 전경이 던진 돌에 맞아 앞이마 7cm 찢어지는 부상. 순천 시민회관 뒷길에서는 시위대가 경찰 1개 소대를 포위, 방석복 3개 압수(22일 00:10) 전투경찰(4대 정도)의 증원으로 시위 해산. 새벽 2시 30분경 해산. <6월 26일> 18:00 학생 시민 등 1천여 명 영옥동 대한교보 앞길에서 연좌농성. 22:10 3천여 시위대 경찰저지를 뚫고 1.5km의 시가지를 구호 외치며 행진. 23:00 7천여 명으로 늘어났으나 시종 비폭력 시위로 일관. 대부분 새벽 1시경 자진 해산. 그러나 3 백여 명은 새벽3시경까지 천주교 매곡성당과 저전동 제일교회를 오가며 시위. 3. 여수 (1) 여수지역 6월항쟁 전개과정 6월항쟁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적으로 타오른 가운데 여수지역의 주민들도 마침내 궐기하기 시작했다. 5만여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군사독재의 부패를 규탄하고 퇴진을 외치기 시작했다. 시위가 시작되자 어린아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연령, 계층의 시민들이 참가했다. 분출구를 찾은 시민들의 의식은 급격히 변해갔다. 처음에는 호기심 반, 냉소 반으로 지켜보던 시민들은 급기야 시위에 적극 가담하거나 즉석에서 돈을 걷고 빵, 약품 등을 모아 시위대에 제공했다. 6월 23일 전남민주회복국민협의회 여수 여천지부와 전청련 여수지역위원회 연합 주최로 207 민주화운동
210 오후 5시부터 교동5거리 한길화랑(전민협 전청련 여수사무실)에서 호헌분쇄 민주화 촉구 범시민 궐기대회 가 개최되었다. 주최 측은 대회전전에 미리 대회개최를 알리는 전단과 궐기를 촉구하는 유인물들을 배포했다. 대회시간이 되자 주최 측은 사무실 밖으로 확성기를 설치하고 옥외방송을 시작했다. 방송은 이 땅의 모든 비극적 요소, 즉 살육과 고문살인, 공권력에 의한 강간, 날조, 은폐조작 등은 민중을 배반한 몰이념 독선아집 이기주의의 야욕만으로 무장된 일부 세력이 통치 권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군부독재의 비리를 한 시간여 동안 폭로한 후 궐기할 것을 호소했다. 삽시간에 모여든 3천여 군중들은 민주화행진을 시작, 교동에서 경찰의 1차 저지를 받았으나 이를 뚫고 다시 오거리로 돌아와 즉석에서 시국토론회를 열었다. 이들이 다시 중앙로를 향해 전진을 시작하자 시민들이 대거 이에 가세했다. 6시 30분경에는 시위대가 약 1만여 명으로 불어났고 중앙로와 중앙동로터리 그리고 민정당사인 김재호의원사무실 앞을 거쳐 다시 중앙동 로터리에 집결했을 때인 7시 30분경에는 2만여 시민들이 연도를 완전히 메웠다. 여기서 30분가량 호헌철폐, 독재타도, 군사독재 타도하여 민주헌법 쟁취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고 투사의 노래 등을 부르며 대중 집회를 가진 시위대는 다시 시청을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이때 경찰은 최루탄을 쏘다가 역부족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여수에는 1개 중대 병력의 전투경찰이 배치돼 있었으나 그 4분의 3 가량이 광주, 순천지역으로 파견되어 1개 소대 정도가 남아 있었다. 경찰은 이 지역에서 이러한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일어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점에는 주최 측도 마찬가지였다. 투석전을 전개하며 경찰 저지선을 돌파한 시민들은 수만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군중 속에서 시청과 경찰서를 점거하자는 외침들이 터져 나왔다. 당시 상황으로는 쉽게 점령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주최 측은 이를 만류하고 대중 집회 개최로 유도했다. 구호들이 제창되었고,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일어나 열변을 토했다. 9시경 3만여 군중들은 다시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며 여수역 쪽으로 행진했다. 거리는 온통 사람들로 메워졌다. 여수역에 도착한 시위대는 전열을 정비한 후 또 다시 시청으로 향했다. 시위대 앞에는 지역 운동단체 회원들과 학생들(서울, 광주 증지로 유학 갔다 귀향한 학생 50여 명 포함), 민주당 지역당원들이 나섰다. 이 무렵 10시경 광주, 순천 등지로 지원 나갔던 경찰병력이 급보를 받고 황급히 원대 복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시위대가 시청 앞에 도착했을 때는 훨씬 많은 수의 전경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때까지 시위는 별다른 충돌 없이 평화적 행진을 계속했고, 질서 있게 움직였다. 평화를 깬 것은 무장한 경찰병력이었다. 시위대가 중앙동 로터리 쪽으로 진출하려 했을 때 경찰은 갑자기 최루탄을 무차별 난사하기 시작했다. 무방비 상태의 시위군중은 다수의 부장자를 내고 흩어졌다. 분노한 시민들은 이때부터 여기저기서 산발시위를 벌이며 투석전을 전개했고, 역 광장에는 20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11 2만여 명이 재집결하여 경찰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다. 시청 앞 중앙동 로터리, 서교동로터리 등지에서도 시위대와 경찰의 대치가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민정당사, 남산동 파출소, 충무동, 중앙동 파출소 등이 파괴되었다. 시위는 새벽 3시 무렵 서교동 로터리 충돌을 끝으로 일단락됐다. 이날 시위로 김충조 전민협 여수지역 의장 등 34명이 경찰서로 연행되었으나 새벽 4시경 모두 석방됐다. 6월 24일 오후 8시경 중앙동 로터리에 다시 1만여 시민들이 집결하여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경찰은 이날 처음으로 최루탄을 난사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했으나 시위대는 분산과 재집결을 되풀이하며 중앙동 로터리, 민정당사, 서교동 로터리 사이를 오가며 시위를 계속했다. 중앙동과 남산동, 충무동, 광무동 파출소 그리고 민정당사가 전날에 이어 또 다시 크게 파손됐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최루탄이 난사되고 사복 체포경찰들이 진압에 투입되었으나 2만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투석으로 맞서며 저항을 계속했다. 자정이 지나자 시위대의 일부는 서교동을 거쳐 광무동 파출소, 버스터미널로 진출했다. 이때 터미널 파출소가 파괴됐다. 시내 곳곳에서 산발시위를 계속하던 시위대는 새벽 3시경에야 자진 해산했다. 이날 시위로 시민 40여명이 연행되었고, 30여명이 부상당해 전남병원, 한독병원 등 여수시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6월 25일 성광, 중부, 은현교회 청년 등 1백여 명의 오후 8시경 성광교회를 출발하여 광무동 소재 전남병원까지 평화시위를 벌였다. 시위도중 경찰이 이를 저지하자 연도에 운집한 5백여 명의 시민들이 시위대에 가서 호헌철폐 독재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시민회관 앞 광장으로 진출했다. 이들은 여기서 다음날 26일 오후 5시에 시민회관 광장에 모이기로 결의하고 만세삼창을 한 후 11시경에 해산했다. 경찰은 이날 최루탄을 발사하지 않았다. 6월 26일 오후 2시경 이날 시위를 준비 중이던 전청련 의장과 선전부장이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다. 오후 6시경 전청련 회원과 다수 시민이 오거리를 출발, 서교동 로터리를 거쳐 시민회관 광장에 도착한 후 더욱 불어난 시민과 함께 구호를 제창한 후 결의문을 채택하고 일단 해산했다. 8시경 다시 1만여 시민이 운집, 교회청년과 학생들의 횃불 시발로 하여 구호를 외치며 경찰과 대치했다. 이런 가운데 시위 참가 시민이 점점 불어나 10시경에는 약 5만을 헤아리기에 이르렀다. 이때까지 경찰과 대치해 있던 시위대 중 3백여 명이 경찰의 1차 저지선을 돌파하자 경찰은 최루탄을 난사하며 시민들을 무차별 연행해 가기 시작했다. 시위대도 이에 맞서 시내 전역에서 격렬한 싸움을 전개했다. 거의 모든 시민들이 참여한 이날 시위는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이어졌다. 이날 시위로 31명이 연행되었는데 경찰은 연행과정에서 시민들을 무차별 구타했고, 부상자들은 다음날 정오까지 조사 명목으로 방치하다 병원으로 이송했다. 이날 시위에서는 특히 시민들 스스로의 손으로 작성된 전단 2종류가 뿌려져 관심을 모았다. 209 민주화운동
212 (2) 여수지역 항쟁일지 <6월 23일> 17:00 교동 5거리에서 민주헌법쟁취 시민궐기대회 개최. 이대성씨(전청연 여수지역위원회 위원장)등 청년회원 4명과 김충조씨(전남 민주회복 국민협의회 전민협 여수지부 의장) 등 재야인사 4명이 주도함. 전청연 여수지역위 사무실에서 확성기로 군사독재 타도하여 민주헌법 쟁취하자, 반민주적인 4 13조치 철회하라 등 구호와, 투사의 노래, 5월의 노래, 우리의 소원은 통일 등을 부르자 시민들 3천여 명 운집함. 시위대도 100여명으로 증가. 18:30 진남로 일대(여수시내에서 가장 번화가)를 오가며 구호, 노래 등을 부르며 시위. 19:00 중앙시장 앞 차도 점거하고 시위, 시위 군중 500여명으로 늘어나고 연도시민 5천여 명 운집. 19:30 전경1개 중대와 몸싸움 끝에 중앙동로터리를 넘어 진남관 밑까지 밀어내고 중앙동로터리 노상 점거. 군중 1만 여명 운집. 19:40 시위대는 민정당 사무실(김재호 의원)에 투석, 유리창 10여장 파괴. 20:05 시청 경찰서 쪽으로 진행 중 진남관 밑에서 대기 중이던 전경과 맞붙어 시위대 분산, 최루탄 10여 발 발사. 20:20 경찰이 최루탄을 계속 발사하자 시위대 투석으로 응전. 20:30 경찰서 시청 앞 간선도로 장악. 시위군중 5천여 명 연도시민 2만 명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군사독재 타도하여 민중생존권 보장하라 등 구호를 외침. 연도시민 3만으로 증가. 21:40 시위대 5천여 명 시청 앞에서 1km 거리의 역전까지 시위행진 후 경찰서 앞 광장으로 돌아옴 (22:20), 연도시민 다시 3만 정도로 증가. 23:40 최루탄 50여 발 난사하여 시민들 골목길로 피신, 전경들과 투석전. <6월 24일> 00:00 시청 민원실 유리창 50여장 투석으로 파괴. 이후 중앙동로터리, 서교동로터리, 역전로터리, 경찰서 앞 등 시내 곳곳에서 새벽 4시경까지 산발적인 투석전. 18:00 학생 시민 통일민주당 당원 전청연 민헌연 등 재야단체 3천여 명이 중앙동로터리, 여객선터미널 등지에서 군부독재 퇴진 등 내세우며 산발적인 시위. 이날 밤 남산 충무 중앙 광무파출소 등에 투석, 유리창 200여장 파괴, 광무파출소는 화염병에 의해 내부 일부 소실, 여수에서만 34명 연행. 21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13 <6월 26일> 19:00 중앙동로터리에서 7천여 명 시위를 시작하여 시청 및 경찰서 방면으로 진출코자 경찰과 치열한 몸싸움. 경찰은 최루탄 발사로 시위대 해산. 새벽 3시 15분경까지 서교동로타리, 국동 등지에서 산발적인 시위 계속. 4. 기타 지역 (1) 항쟁전개과정 무안은 군단위로는 전국적으로 가장 치열하게 항쟁이 발생했던 지역이다. 이는 70년대부터 다져진 농민운동의 조직기반이 잘 짜여 있었기 때문이다. 가농과 기농 회원 및 재야인사들은 2월 3일 고 박종철 열사 무안군 추모위원회를 꾸리고 무안천주교회에서 집회를 열었고, 3월 10일에는 무안군 민주화 및 농민생존권운동협의회를 결성 민주헌법쟁취와 농민생존권보장 등을 요구했다. 4 13호헌조치 이후 무안군 민주화 및 농민생존권운동협의회, 기독교농민회와 가톨릭농민회 주최로 5 18추모제와 농가부채해결 및 마늘 양파 생산비보장을 위한 무안군민 공청회 를 열고 이를 방해하는 군청 공무원과 경찰에 맞서 농민가를 부르며 마늘 양파 생산비 보장하라!, 장기집권 획책하는 4 13호헌조치 철회하라 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했는가 하면 <무안농민의 소리>를 발간하여 정부의 농가부채해결 등 농민의 요구와 아울러 호헌의 부장성에 대해 널리 홍보했다. 6월 26일에는 무안군농민회 활동가 다수가 주축이 되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무안군지부 를 결성하고, 독재타도, 민주헌법쟁취 를 외치며 2백여 명이 읍 버스터미널 앞 등 시가지에서 국민평화 대행진을 1시간 동안 벌이다 저녁에 목포로 가서 3호광장 시위에 합세했다. 완도에서는 26일 오후 6시를 기해 전민협 회원 등 250여명이 연행된 이인선 민주당원 등 2명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시작하자 8천여 군민들이 동참하여 1시간 반 가량 시위를 전개했는데, 각 면 단위에서 참가한 일부 인사들과 완도읍소재 주민들 다수가 시위에 가담했다고 한다. 광양에서는 민주당원과 가톨릭신자 등 1백여 명이 신시장 입구에서 애국가를 부르며 시위를 시작하여 수많은 시민들이 호응하는 가운데 밤 9시 넘어서까지 계속되었다. 강용재씨(음식점 경영)가 시위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광양경찰서에 연행되어 수사과장실에서 수사과장 박현오 경감 등 경찰관 4명으로부터 머리 부분을 집단 구타당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광양성당은 28일 밤 9시부터 29일 아침 7시 30분까지 1백여 명의 신도가 모임 가운데 폭력경찰 규탄 철야기도회 를 갖고 최루탄 추방 등 5개항을 주장하였다. 광양성당에서는 28일 밤 9시부터 29일 아침 7시 30분까지 1백여 명의 신도가 폭력경찰규탄 철야기도회 를 갖고 최루탄 추방 등 5개항을 주장하기도 했다. 담양에서는 농민회 주최로 1월부터 농협이용고 배당, 비료출고료 해결 대책위원회 명의의 211 민주화운동
214 성명서발표를 시작으로 적십자회비, 농지세, 농협문제, 농가부채, 농촌공해문제 등을 주제로 매월 토론회를 개최했고, 6월에는 농민회원들을 중심으로 6 10국민대회와 6 26국민평화대행진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이 전개되었다. 장성에서도 장선농민 대동단결하여 농민세상 이룩하자 는 구호 아래 농민교육을 병행하며 농민대회를 했다. 농민회는 <장성농민신문>을 제작 배포했고, 매일 장성읍에서 버스나 각자의 교통수단을 이용해서 ㅇ광주에서 시위대와 합류했다. 특히 농민목회자들인 백운교회와 옥천교회를 중심으로 치열한 투쟁을 전개했다. 수세거부, 미국농축수산물 수입반대, 쌀값보장 등 전량 수매 등을 요구하면서 6월항쟁에 적극 참여했다. 화순에서는 신민당 인사들을 중심으로 성당 입구인 자치샘거리에서 4 13호헌조치에 반대하는 기습적인 시위가 벌어져 일부 인사가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6월초부터 신민당 지구당 간부와 5 18동지회, 농민회원 등에 의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결성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며, 6 10국민대회에 광주로 통학하는 학생들과 가톨릭농민회원 등 청년들, 민주당원, 5 18동지회원, 일부 탄광노동자 등 30여명이 참여하려다 검문소에서 경찰들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이후 수십 명의 청년학생과 5 18동지회원들이 매일 버스를 타고 광주로 나가 시위에 참여하곤 했고 도암면 등 농민회원들이 있는 일부지역에서는 청년들은 물론 면 직원들까지 퇴근 후에 합류하여 도청 앞 등 광주 시위에 참여하곤 했으며, 6 26국민평화대행진에도 다수의 주민들이 참여했다. 함평에서는 4월 7일 농가부채토론회를 개최하려 했으나 경찰의 대회장 봉쇄로 무산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농민회원들과 충돌이 있었고, 경찰은 공동대책위원장인 노금노를 함평농우회 기관지에 실린 기사를 문제 삼아 전격 구속했고, 5월 초에는 함평군농민운동탄압대책위원회가 이를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장흥에서는 가톨릭농민회 장흥지역위원회를 중심으로 3월부터 유령세금거부운동 을 벌였다. 해남에서는 4월 30일 기독교농민회 회원 12명이 북일면, 송지면 등 24개 마을에 어민문제와 수협문제와 관련된 유인물을 배포했고, 이를 문제 삼아 농민 4명에게 구류처분이 내려지자 정광훈 등 전남기농 전회장 등이 4 13호헌조치에 반대하는 단식농성을 했다. (2) 기타지역 항쟁일지 <무안> 6월 26일 18:00 기독교농민회, 가톨릭농민회 회원들 2백여 명 군청 앞에서 1시간 동안 시위. 21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15 <완도> 6월 26일 전민협 회원 등 250여명 연행된 민주당원 이인선씨 등 2명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 한때 시위대열 수천 명으로 증가. 경찰이 시위대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자 21:10 경 해산. <광양> 6월 26일 18:20 민주당원 가톨릭신자 등 1백여 명 신시장 입구에서 애국가를 부르며 시위, 21 시경 해산. 5. 전남지역 항쟁의 특징 전남지역 시군에서 전개된 시위는 시지역과 군지역간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참여주체다. 목포, 순천, 여수지역은 사회단체와 학생들(대학생, 고등학생 일부)이 주요 참여주체였지만, 군 지역에서는 농민운동가와 농민, 신민당원들이 주도하면서 전개되었다. 목포, 순천 이외 지역에서의 시위는 6월 18일-19일경에 가서 확산되기 시작했고, 26일에 가서는 완도, 무안, 광양 등의 읍 단위 군청소재지에까지 시위가 확산되었다. 그밖에 시군의 농민회원들은 참가자들을 모아서 대도시로 진출하여 시위에 참여하곤 했다. 지역에서의 시위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전개되었다. 첫째, 80년대 중반 이후 활성화된 각 지역의 농민조직들이 직접 시위를 계획하거나 인근 도시지역의 시위에 조직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이다. 80년 5 18항쟁에 농민진영이 조직적으로 책임 있게 참여하지 못하고 광주만의 고립무원의 상태를 극복하지 못했던 반성에서 출발하여 시군 단위 지역농민운동이 자주적인 대오를 준비하며 투쟁력을 일부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여수순천지역의 경우 해방공간의 여순사건 이후 침묵으로 일관하던 대중들이 경찰 병력의 저지선이 뚫리기 시작하자 대거 시위대열에 합세하여 치열하게 투쟁을 전개했고, 패배의식을 떨쳐낼 수 있었다. 셋째, 역시 초기 단계에서는 사회단체들이 시위의 구심체 역할을 수행하지만 점차 대학생, 고등학생들이 실질적으로 시위를 주도해갔으며, 기층대중들이 점차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대단히 폭력적으로 경찰의 물리력과 맞서 싸웠다는 점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시위 주도세력이 자연발생수준의 대중의 열기를 수렴해내지 못하고 시종 끌려 다닌 점에서 한계였다고 할 수 있다. 전남지역(광주 제외)은 목포에서의 6 10시위를 빼놓는다면 5월 18-19일에 가서야 순천, 목포 등지에서 시위가 시작된다. 이들 지역에서의 시위는 명동성당 농성의 장기화, 부산 대전 등지에서의 213 민주화운동
216 시위 격화의 조짐 등에 영향 받은 바 크다. 그리고 6월 23-24일에 가면 여수에까지 시위가 파급되며 26일에 가서는 완도, 광양, 무안 등의 읍 단위 군청소재지에까지 지위가 확산된다. 그런데 이들 중소도시에 있어서의 시위형태 및 운동의 전개과정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였다. 첫째로 공개단체들이 시위를 촉발시키는 매개자가 되고 있다는 점이 쉽게 드러나고 있다. 들판의 메마른 풀잎 위에 불씨가 떨어져 커다란 불길을 이루듯이 이들 공개단체들, 예컨대 민헌연, 전민협, 통일민주당, 개신교 교회, 성당(천주교) 및 기독청년단체, 일반청년단체(전청련 등)들은 시위의 초기단계에서 구심체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목포 순천 여수 등 중소도시에 있어서는 대학생들이 실질적으로 시위를 주도해 가면서 시위, 인근 양파 주산단지 무안군, 함평군 농민들과의 연대투쟁을 모색하고 있다. 셋째로 기층대중운동의 역량은 매우 낮은 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들은 시위를 주도해 간다기보다는 학생운동권 및 공개운동 단체들이 조성한 시위현장에서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대단히 폭력적으로 경찰의 물리력과 맞서 싸우곤 한다. 시위 참가자의 이야기에 의하면 이들 점원, 정비공, 철공소 공원 등 노동자들은 시위에 자발적,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는 것이다. 대학생들을 주축으로 한 시위대는 특히 순천에서는 5월 19-21일에 걸쳐서 KBS순천 방송국에 대한 화염병 투척, 투석과 시청진입 등의 시위 양상을 보였고, 목포에서도 연동 호남선철로의 봉쇄, 연동 역전 대성동 남교동 용호 연호파출소 등을 투석, 화염병 투척으로 파괴시켰다. 전남지역 시위대에 대응한 경찰의 시위진압 방식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경찰력의 한계가 노출되어 시위대의 규모가 클 때에는 평화시위를 보장한다. 둘째, 시위대 규모가 작을 때는 최루탄 발사 등의 폭력적이고 물리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해산시킴으로써 산발시위만을 가능케 한다. 셋째, 다수 시위 대중으로부터 특정 인물을 분리, 격리시킨 후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한다. 넷째, 주요 방어물에 대한 경찰의 방비태세는 단호하다. 6월 21일의 순천 시청 옥상으로부터 전경들은 직격탄, 돌멩이를 던지는 등 무자비한 진압을 서슴지 않았다(한국기독교 사회문제연구원 1987, ). Ⅴ. 맺음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수사종결 후 4개월여가 흐른 5월 18일, 정국을 뒤흔드는 또 하나의 사실이 폭로되고 말았다.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범이 따로 있다는 내용의 충격적인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사제단의 폭로는 정국 조기수습을 노리던 정권에 심대한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은 또한 들끓는 국민들의 가슴에 불을 붙이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18일 같은 날 광주에서는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2가지 일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었다. 하나는 21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17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의 주최한 오월 그날이 오면 이라는 5.18 사진전과 4.13 호헌조치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된 4.13호헌조치 반대 및 민주헌법쟁취 범도민운동본부 가 그것이었다. 몰래 1980년 당시의 사진 몇 장이 유포되기도 했지만 시민들을 상대로 5.18 사진전이 열린 것은 이때가 최초였다. 작업은 그만큼 어렵고 결단을 요구한 것이었다. 나경택 기자(80년 당시 전남매일신문 기자) 등이 귀한 자료를 내 줬고, 홍성담, 임무택 작가 등이 같이 고생했다. 경찰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웃돈을 주고 야간 인화를 맡기는가 하면 직접 인화기까지 구입해 작업하기도 했다. 보름 일정의 사전전은 전국에서 쏟아지는 열기에 힘입어 한 달 동안 연장 전시를 해야 했다. 초반 센터 입구를 막아선 경찰도 방패만 들고 있을 뿐 더 이상 시민들의 발길을 돌릴 순 없는 지경이었다. 또 하나의 조직화 계획이 5.18 제2주기 추모식이 거행되는 망월동 묘역에서 결행됐다. 장차 6월항쟁의 조직적 구심이자 지휘부였던 국본 (민주헌법쟁취 범국민운동 본부)의 모태, 범도민운동본부 가 그것이었다. 광주는 이제 본격적인 대중투쟁의 길로 접어들었다. 민주화에 대한 열기는 범 종교계로 확산됐다. 이는 다시 그동안 대학생이 중심이 된 시위대열에 자연스럽게 시민들이 동참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특히 3만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5월 24일 금남로에서 개최된 연합기도회는 각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기독교장로회 뿐 아니라 소위 예장 내 보수교단들까지 총 망라해 연합 기도회를 가진 것이다. 특히 이날 경찰의 대응은 치를 떨게 할 정도였다. 무차별적으로 최루탄을 난사해 참가자 모두가 머리에 하얀 최루탄 가루를 뒤집어쓰게 된 것이다. 최루탄으로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가운데서도 개신교 여성신도들은 도로에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기도로 군부독재의 만행을 온 몸으로 맞서 싸웠다. 지켜보던 시민들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의 불퇴전의 의지와 용기에 대학생들마저도, 진압에 나선 경찰마저도 혀를 내 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광주는 이미 거대한 폭발을 예고하고 있었다. 남은 것은 언제 어떻게 터질 것이냐는 것이었다. 바야흐로 6월항쟁의 전야였다. 광주지역에서의 6월 항쟁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조직적이고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 배경에는 5월 항쟁의 도시 특유의 반독재 시민의식에 힘입은 바 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80년 5.18 이후 암흑기와 암중 모색기를 거쳐 84년 이후부터 공공연하게 재구성된 광주 전남지역 민주화세력의 효과적인 결집과 투쟁에 따른 것이기도 하였다. 특히 83년 12월 자율화조치 이후 조성된 상대적 유화국면 을 활용하여 84년 하반기에 공공연한 반합법 대중정치조직을 표방하며 결성된 전청련 과 한 달여 사이를 두고 잇따라 발족한 전사협 의 등장은 광주 전남지역 민중단체와 민주화 세력의 조직적인 투쟁과 연대의 질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전청련의 활약으로 개헌국면에서 신민당 개헌 현판식 날을 이용해 대중적 반군사독재 개헌투쟁인 3.30 투쟁을 선도적으로 조직함으로서 이후 전국 각 곳에서 대중적 개헌투쟁이 대규모로 전개될 215 민주화운동
218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전사협은 노동자, 농민, 청년, 5.18 관련 단체 등 민중운동 제 단체 간 상호 연대 및 지원과 더불어 지역 차원에서 요구되는 각종 공동투쟁을 결의하고, 이를 광주구속자협의회(약칭 구협, 회장 홍남순 변호사)와 협의해 지역 차원의 공동 여론과 투쟁으로 승화시키는 일을 주로 담당하였다. 87년 5.18 추도 및 기념식에 맞추어 발족을 선언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광주전남본부는 광주 전남지역 운동세력의 주체 조건과 개헌국면이라는 객관정세를 반영하는 한편, 이를 타개하기 위한 조직적 모색의 결과로 결성되었다. 광주지역 6월 항쟁은 학생운동 세력의 가두투쟁과 비상대책위원회 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대중의 폭발적 분출상황에서 대중운동의 실질적 구심으로 준비되지 못한 국본지도부가 조직차원의 대응을 하지 못하고, 국본의 틀 밖에서 전사협 그룹과 학생그룹, 민청세대 일부 등이 공식 또는 비공식적으로 참여하여 구성한 비상대책위원회 를 중심으로 지역 공동투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비상대책위원회는 긴장된 정세 속에서 기존 공개단체 체제의 활동이 쉽지 않게 되고, 또 긴박한 정세에 따른 집중적 공동투쟁 요구에 부응하는 한편, 발족 이후 조직을 정비 중이던 국본을 새로운 지역 공동투쟁의 정치적 구심으로 세워나가기 위한 과도기적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비상대책위원회는 농민, 청년, 전사협 사무국 등 소수의 실무소위원회(간사 전사협 사무국) 을 통해 6월 투쟁의 긴박한 정세에 대응하였다. 6월 항쟁 기간 동안 슬로건과 투쟁방법, 투쟁 역량의 배치, 선전 등의 제반 투쟁이 실무소위 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이 실무소위는 항쟁 기간 동안 투쟁 현장인 시내가 가까운 백운동 소재 안전가옥에서 밤마다 회합하며 투쟁을 비밀리에 조직하였다. 항쟁은 시내 각 곳에서 전개되었으나 특히 시내 중심 인근의 중앙로와 서현교회를 중심으로 시민들의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항쟁 기간 동안 날마다 투쟁 현장에 국민운동본부의 깃발이 올려지고, 실무소위 의 선전물 등을 통해 시민 속에 널리 회자되면서 국본 이 비로소 대중적 정치 구심으로 자리잡아가게 되었다. 학생과 민중운동 세력에 의해 촉발된 투쟁은 점차 시민항쟁으로 발전해 갔다. 그리고 그 성과는 6월항쟁 이후 서현교회를 중심으로 항쟁에 참여했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서광주민주시민연합 과 지역의 깃발을 들고 움직였던 남광주민주청년회, 역시 6월항쟁의 지역청년주역들이 모인 북광주민주청년회 등 새로운 시민정치조직이나 주민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6월항쟁 과정에서 광주전남지역의 투쟁은 여러 특징들을 보여주었다. 그 중 하나는 타 지역의 어느 도시보다도 시민들의 광범한 호응 및 참여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대학생은 물론, 민주당원 교수 교사 목사 신부 상인 노동자 농민 할 것 없이 매우 광범한 계층이 시위대에 호의적이었고, 특히 고교생들이 조직적이고 집단적으로 참여한 것은 매우 특기할 만하다. 이는 80년 5월의 시민군을 중심으로 하는 시민공동체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것이고 광주시민 21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19 대동단결 이라는 구호가 시위대열에서는 자연스럽게 나왔던 것이다. 광주전남지역의 시민들은 5.18의 피해의식을 딛고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를 쟁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하자 급속히 참여하기 시작하였고, 5.18당시의 경험이 6월항쟁 과정의 밑받침이 되었다. 누구나 물심양면으로 하나가 되었으며 시위진행자가 시민들의 자발적 통제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금남로나 충장로 등 시위현장에서 빌딩건물주나 상점 주인들은 최루분말을 청소하기 위해 호스를 끌어내 달라는 시위대의 반강제적 요청에도 불평 없이 기꺼이 응하였다. 교통협조도 잘 이루어졌고 시위 때 마다 차량들이 경적으로 호응하였으며, 야간시위대열 가까이 오는 택시가 라이트를 켠 채로 달려오다가 시위대가 제지하면 즉각 라이트를 끄고 통제에 따르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217 민주화운동
220 제6장 91년 5월투쟁 Ⅰ. 들어가는 말 1988년 말 노태우 정부는 체제수호선언과 민생치안에 관한 특별지시로 정국 반전의 분위기 조성을 시도하였다. 주지하듯이 1988년 초만 하더라도 전반적으로 민주화 분위기가 우위를 점하는 유화 국면의 시기였다. 민주화에 대한 다분히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분위기는 1988년 12월 28일 노태우 대통령의 소위 민생 치안에 관한 특별 지시 이후 크게 바뀌었다. 공식적으로 이 특별지시는 법과 질서 확립을 위한 공권력 행사 강화로 요약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실질적으로는 민주화운동 및 변혁운동에 대하여 기존의 유화정책을 파기하고 강경정책을 정책을 펼치겠다는 신호탄의 성격이 강했다. 실제 노태우 정부는 위의 특별 지시 이후 분쟁 중인 노동 현장에 경찰과 전경 등 공권력 을 투입하여 물리적이고 폭력적인 탄압을 가하였다. 1989년 1월 1일에 서울 성동구 광장동에 있는 모토로라코리아 사업장에, 그리고 1월 2일 새벽에 방위산업체인 풍산금속 안강공장에 병력을 투입한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이에 맞서 민주화운동세력은 1989년 1월 21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을 결성했고, 전민련 산하 조국통일위원회는 북한에 범민족대회 개최를 제의하기도 했다. 2월 13일에는 여의도 농민시위, 24일 현대 파업노동자들의 상경투쟁, 3월 16일 지하철노조 파업 등 기층 민중의 투쟁이 연이어 벌어졌고, 전민련을 중심으로 한 재야세력은 노태우 정부의 대선공약인 중간평가를 앞두고 노태우대통령 불신임투쟁을 전개했다. 1989년 공안정국이 계속되는 가운데, 1990년 3당 합당으로 거대여당 민주자유당이 탄생함으로써 보수대연합이 완성되었다. 이런 흐름에 대해 재야단체와 대중운동조직들은 보수대연합이 기본적으로 민중진영을 비롯한 모든 민주세력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이에 민중의 생존권과 민주적 기본 권리를 지키기 위해 모든 민주세력이 결집한 대중투쟁전선 구축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1990년 4월 21일 민중운동세력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대중정치투쟁을 전개해 나가기위한 한시적인 상설 공동투쟁체인 민자당 일당독재 분쇄와 민중기본권 쟁취 국민연합 (약칭 국민연합)이 전민련, 전노협, 전농, 전빈련, 전교조, 전대협 등 10여 개 단체가 21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21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국민연합은 스스로의 위상을 당면 민자당 일당 독재 분쇄와 민중기본권 쟁취를 위한 한시적 공동투쟁체로 설정하고 구성 원칙을 전국적으로 조직된 기층민중이 중심이 된 대중운동단체를 중심으로 여성, 언론, 정교, 법조 등 단체와 시민 및 개별 인사를 광범위하게 참여시키는 것으로 확정했다. 결성 이후 국민연합은 물가, 토지, 주태문제 해결을 위한 캠페인, KBS, 현대중공업 노동자 지원투쟁 과 1991년 5월투쟁의 과정을 주도해나갔다. 1988년 2월부터 다섯 해 동안 계속된 노태우 정부 시기를 규정하는 대표적인 용어는 공안정국 이라고 볼 수 있다 선언 에 명시된 대통령직선제는 야당들과 재야세력뿐 아니라 대다수 국민이 원하던 것이었으므로 그런 방식의 선거에서 승리 한 노태우는 합법성을 지닌 국가원수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그렇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그는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진 군사독재의 후계자였다. 그런 속성은 그의 임기 내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1991년 5월투쟁은 노태우 정부를 정치적 위기로 몰아간 6공화국 최대의 대중투쟁이었다. 이른바 백골단에 의해 강경대 사망사건이 발생한 4월 26일부터 투쟁지도부가 명동성당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6월 29일까지 약 60여일에 걸쳐 전개되었다. 1991년 5월투쟁은 명지대생 강경대 군 치사사건이 대중적 공분을 획득하면서 이를 계기로 노태우 정부 집권 후반기에 집중적으로 표출된 공안통치적 폭압과 각종 비리와 실정(수서비리 사건과 페놀오염사건 등), 그리고 물가폭등과 주택문제 등 민생파탄의 지속에 대한 누적된 분노가 반독재민주화투쟁과 결합되어 표출된 사건이다. 노태우 정부의 공안통치는 반정부활동을 경찰기구와 안기부, 기무사 등 정보기구의 물리력으로 제압하면서 반공, 반북 이데올로기 공세를 강화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공안통치의 대상에는 야당도 포함되었는데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총재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기소한 것이 대표적이다. 83) 이러한 공안통치는 1989년 상반기에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노동운동과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의 방북을 계기로 통일운동이 상당히 고양된 시점에 본격화되었다. 공안통치는 1990년 상반기 민자당 출범 이후에 더욱 강화되었는데, 계속되는 실정에 따라 쌓인 국민들의 불만을 정부여당은 공안통치의 강화로 억누르려고 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공안통치는 노태우 정부가 추진하려 한 내각제 개혁의 사전 정비작업을 위한 유력한 수단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각제 개헌문제를 둘러싼 민자당 내 계파 간의 권력다툼은 기득권 83) 검찰은 1989년 8월 25일 김대중 총재에게 국가보안법상의 불고지와 외국환관리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서울 형사지방 법 원에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은 또 평민당 김원기 원내 총무에게는 불고지 혐의를 이철용 의원에 대해서는 불고지( 不 告 知 ) 와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를 각각 적용해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은 김대중 총재에 대한 공소장에서 김 총재가 1988년 9월 서경원으로부터 만 달러를 받고 10일 안에 은행에 예치하지 않았으며 89년 4월 서의원의 입북 사실을 보고받 고도 당국에 신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김 총재에게 적용된 불고지 혐의는 5년 이하의 징역. 2백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으며 외국환 관리법 위반혐의는 10년 이하의 징역. 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 김 총재에게는 최 고 징역 15년의 구형이 가능했다. 민주화 이후에도 제1야당 총재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기소하던 상황이 공안통치 시대 의 한국정치였다(MBC뉴스, ). 219 민주화운동
222 제도정치에 대한 대중들의 불신을 심화시켰다. 정치권에 대한 대중들의 반감을 더욱 부추긴 것은 수서비리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통해 6공의 경제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누적되었다. 더욱이 비리사건에 민자당과 함께 신민당이 관련됨으로써 제도정치권 전체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을 불러일으켰고, 이러한 국민들의 정서는 기초의회와 광역의회 선거에서 낮은 투표율로 표현되었다. 84) 한편 노태우 정부의 경제정책은 서민들의 기본적인 생존과 생활을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했다. 강경대 사망사건은 대중적 분노와 투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계속되는 물가폭등, 부동산문제, 수입개방 압력, 공공요금 인상과 같은 민생문제와 페놀사건에 이은 원진레이온 공장에서 산업재해로 노동자가 사망한 사건과 같은 공해문제가 국민들의 일상생활에서 불만으로 잠복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서민들의 생활고는 대단히 열악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노동자와 농민들의 생존권 투쟁이 고양되었고, 다수 도시 서민들이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불만이 누적된 상태에서 강경대 사망사건을 비롯한 위기정국이 촉발되었기 때문에 국민적 분노가 확산되었다. 이처럼 1991년으로 접어들면서 의원외유사건, 수서비리사건, 페놀사건과 계속되는 물가고 등의 악재에 시달리며 10% 미만의 지지율을 기록하던 민자당이 기초의회 의원선거를 정면 돌파하여 겨우 숨을 돌린 직후에 발생한 강경대 사망사건은 노태우 정부를 최대의 정치적 위기로 몰아갔다. 더욱이 11명이나 분신자살하는 전례 없는 사건이 이어지면서 정국은 첨예하게 경색되었다. 그 와중에 발생한 한진중공업 박창수의 의문사와 성균관대생 김귀정이 시위 도중 사망한 사건은 노태우 정부를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1991년 5월투쟁은 공안통치와 3당 합당을 통해 권위주의적 통치로 회귀하던 노태우 정부를 최대의 위기로 몰아간 6공화국 최대의 대중투쟁이다. 이른바 백골단에 의해 강경대 사망 사건(상세는 별도 항목 참조)이 발생한 4월 26일부터 투쟁의 지도부가 명동성당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6월 29일까지 전개된 투쟁을 일컬으며, 노태우 정부 집권 후반기에 집중적으로 표출된 공안통치적 폭압과 수서비리 사건(상세는 별도 항목 참조)과 페놀 사건, 민자당 당권 다툼 등 각종 비리와 실정, 그리고 물가 폭등과 주택 문제 등 민생 파탄의 지속에 대한 누적된 분노가 반독재 민주화투쟁과 결합되어 표출된 사건이다. 이 기간 동안 전국적으로 2,300여 회의 집회가 열렸고, 해체 민자당, 퇴진 노태우 라는 구호 아래 대규모의 시위들이 잇따라 터져 나왔다. 그 과정에서 학생, 빈민, 노동자 등 11명이 분신했고, 한진중공업 박창수 노조위원장의 의문사와 강경진압으로 인한 김귀정 성균관대생의 죽음까지 포함하여 모두 13명이 사망하였다. 이하에서는 91년 5월투쟁을 크게 투쟁의 개시 및 확산기(4월 26일~5월 4일), 투쟁의 고양기(5월 9일~5월 18일), 투쟁의 퇴조기(5월 25일~6월 29일) 등 3시기로 구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84) 91년 2월 수서비리사건에 연루됐던 정치인은 민자당 김동주, 이태섭, 오용운과 신민당의 김태식, 이원배 등 5명이었는데, 이 들 중 김태식은 항소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고, 나머지 4명은 유죄선고를 받은 뒤 사면 복권됐다(동아일보, ). 22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23 Ⅱ. 91년 5월투쟁의 전개과정 1. 투쟁의 개시 및 확산기(4월 26일-5월 4일) 이 시기는 길게는 1989년 공안정국과 1990년 3당 합당을 통한 여소야대 정국의 해소 이후부터다. 1991년 상반기 노태우 정부의 탄압에 의한 반독재민주화운동 진영의 침체와 수세적 상황이 강경대 사망사건을 계기로 공세로 전환되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6공화국 공안통치의 폭력성에 초점을 맞춰 투쟁의 접점이 형성되는 시기였으며, 이 시기에 운동진영은 정부의 초기 무마책을 무력화하고 주저하던 야당을 견인해내어 의식적으로 투쟁을 고양시켜갔다. 4월 24일 상명여대의 학원자주화 집회에서 지지 연설을 하고 돌아오던 명지대 총학생회장 박광철이 불법으로 연행되자, 명지대 학생들은 총학생회장의 석방을 요구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26일 학원자주화 완전 승리와 노태우 군사 정부 타도 및 총학생회장 구출을 위한 결의대회 에 동료 학생 300여 명과 함께 참석한 강경대는 경찰과 대치하던 중 시위자를 검거하기 위해 교내로 진입한 사복체포조인 백골단 을 피해 정문 옆 허물어진 담장을 넘으려다 경찰에 붙잡혀서 그들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집단 구타당하였다. 학생 100여 명이 화염병을 던지며 몰려가자 백골단은 강경대를 놓아두고 달아났다. 강경대는 인근 성가병원으로 옮기던 중 숨졌다. 강경대를 검진한 성가병원 박동국 외과 과장은 숨진 강경대의 오른쪽 눈썹 위가 둔기로 맞은 듯 사선 방향으로 7cm가량 찢어졌고 두개골 일부가 함몰된 상태였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오후 6시쯤 강경대의 시체를 연세대 부속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다. 강경대의 시신이 안치된 영안실은 출입이 통제되었고, 명지대생과 서총련 소속 학생 등 2,000여 명이 영안실 주변과 연세대 정문 등에서 항의시위를 벌였다. 4월 26일 명지대에서 시위 도중 사복체포조인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의해 강경대 치사사건이 발생했는데, 전국을 한 달 남짓 태풍정국 으로 내몰았던 강경대 치사사건은 등록금 인상반대투쟁을 벌이다 전격 구속된 명지대 총학생회장의 석방을 요구하며 교문시위를 벌이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4월 26일 명지대 학생 강경대는 대학 교문을 사이에 두고 경찰과 충돌, 백골단에 의해 집단구타를 당하고 길에 쓰러진 뒤 동료 학생들에 의해 신촌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하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은 강경대의 죽음이 우연적인 치사가 아니라 정부여당이 통치 말기의 권력누수현상을 막고 장기집권 구상을 관철하기 위한 6공화국의 이른바 공안통치에서 비롯되었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노태우 정부는 공안통치를 통해 국민들의 불만을 억압하고 민주화운동세력의 노태우 정부 반대운동을 탄압해왔기 때문이다. 다음날인 4월 27일 고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 대책회의 (범국민대책회의)가 결성된 것을 시작으로 규탄집회와 가두시위가 이어졌다. 전국적으로 약 20여만 명이 참여한 5 4살인규탄집회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상황전개는 급격한 투쟁의 고양을 221 민주화운동
224 주도한 운동진영의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운동진영은 규탄투쟁의 수위를 조절하고 비폭력을 중심으로 한 투쟁전술을 구사함으로써 야당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투쟁주체를 형성하고 대국민 호소력을 확장하려 하였다. 강경대 사망사건 직후부터 규탄집회와 가두시위가 이어졌으며, 연세대에서 규탄대회가 열린 것을 비롯하여 부산, 광주 등 전국 20개 대학에서 강경대의 폭행치사에 항의하는 집회와 시위가 잇따랐다. 이에 서울지검은 경찰로부터 27일 이형용 일경, 김영순 상경 등 전경 4명의 신병을 넘겨받고, 이들 외에 같은 소대 소속 김형두 상경이 강경대 구타에 가담한 사실을 밝혀냈다. 이어 28일 오후 이형용과 김영순 등의 구속영장을 법원으로부터 발부받아 구속을 집행했다. 4월 29일 오후 6시 연세대에서 3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강경대 구타치사 사건을 규탄하는 폭력살인정부 규탄 범국민결의대회 가 열린 것을 비롯하여 전국 60여 개 대학에서 규탄집회가 열렸다. 범국민결의대회 참석자들은 노태우 대통령의 대국민 공개 사과와 내각 총사퇴, 이종국 치안본부장 등의 책임 경찰 간부 구속을 요구했다. 집회를 마친 학생들은 교문을 나가 경찰의 저지를 뚫고 가두행진을 벌였으며, 일부 학생들은 시내 곳곳에서 폭력 정부 퇴진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밤늦게까지 시위를 계속했다. 같은 날 강경대 치사사건 규탄과 공안통치 분쇄를 위한 범국민대회 를 치르던 전남대생 박승희가 분신하여 5월 19일 사망했다. 국민연합 전대협 신민당 등 44개 단체와 정당으로 구성된 고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 는 5월 4일까지 강군 추모 기간 중 각종 규탄대회와 추모행사를 열기로 하였다. 고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 는 5월 2일 발표한 노태우 대통령의 사과에 대해 현 상태에 대한 본질을 직시하지 못한 채 국민을 기만하고 있다 며, 노 대통령이 진정 이번 사태에 대해 책임을 진다면 국민에게 공개 사과하고, 공안내각 총사퇴와 내무부장관 등 관련자 5명 구속, 백골단 해체 등 3개의 요구사항에 대해 납득할만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백골단과 전투경찰의 살인적 폭력에 대한 범국민적인 분노를 모아 백골단을 해체시키고 현 정부의 퇴진을 위해 각계각층과 공동투쟁해가는 계기를 만들 기 위해 1991년 5월 4일 오후 서울, 부산, 광주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 백골단 전경 해체와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회 를 열었다. 이날 강경대 구타치사에 항의하는 가두시위에는 전국 21개 도시에서 수 만여 명이 참가하여 밤늦게까지 시위를 벌였다. 5월 8일에는 여성단체연합이 명동성당 앞에서 백골단 전투경찰 해체 및 폭력정부 규탄 여성대회 를 개최하였다. 강경대 사망사건 발생 직후부터 규탄집회와 가두시위가 이어졌으며,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의 잇따른 분신 등으로 투쟁은 확산되어 갔다. 4월 29일 명지대 서울대 부산대 전남대 등 전국 60여 개 대학에서 5만 명이 각 학교별로 규탄집회와 시위를 전개하였으며, 이어 서울에서는 고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과 공안통치 분쇄를 위한 범국민결의대회 가 5만 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참가한 22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25 가운데 열렸다. 이어 5월 1일에는 노동자, 학생들이 메이데이 투쟁과 결합하여 전국적으로 집회와 가두시위를 벌였고, 서울의 경우 2만여 노동자와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투쟁을 전개하였다. 5월 4일 백골단 전경 해체와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궐기대회 가 서울 부산 광주 등 전국 21개 지역에서 20여만의 학생, 재야, 시민들의 참여와 호응 속에 진행되었다. 이렇듯 시일이 경과하면서 투쟁은 점차 전국적으로, 전 계급계층으로 확대 발전되어 나가는 양상이었지만, 여전히 투쟁의 중심세력은 학생운동으로 기층 대중운동과의 결합은 사안적 연대 또는 계기적 결합 수준을 뛰어넘지 못했다. 2. 투쟁의 고양기(5월 9일-5월 18일) 노태우 정부에 대한 이 시기 규탄 투쟁의 수위가 정부퇴진투쟁으로 상향조정된 이후 연일 대규모의 반정부시위가 전국적으로 계속되었다. 5월 9일 민자당 해체와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결의대회 는 전국적으로 42개 시 군에서 30여만 명이 참여한 6공 이후 최대 규모의 조직적 시위였다. 또한 이 날의 시위는 규모 면에서뿐만 아니라 시위 참여자의 면에서도 일정한 변화와 발전을 보여주었다. 부산지역의 경우 10만여 인파가 시위에 동참, 서울에서 지역으로의 확산을 보여주었다. 전교조는 전국 4천여 개의 학교에서 점심시간 토론회 이후 초 중 고등학교 교사 2만5천 명이 참여하였다. 특히 전노협의 경우 소속 98개 노조 4만4천 명은 시한부 파업을, 360개 노조 18만 명은 점심시간 집회와 잔업 거부를 하는 등 458개 노조 22만 명이 집회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5월투쟁이 학생 중심에서 여타 계급계층으로 확산되어 가는 양상을 보여준 것이다. 그렇지만 학생운동과 민중운동의 조직적 연대는 취약했다(조현연 1993, 273). 이 같은 투쟁의 확대는 노태우 정부의 폭력성과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기본 동력으로 하면서, 6월 박창수 노조위원장의 의문사, 김기설 윤용하 김철수 이정순의 잇따른 분신, 전경의 양심선언, 각계각층의 서명운동과 성명서, 단식농성들을 계기로 확대되면서 더욱 고조되어 갔다. 그 와중에 5월 13일 전대협 구국결사대 소속 서울대 연세대 서강대 등 7개 대학생 47명에 의해 민자당 중앙당사 점거농성이 발생했다. 학생들은 강경대를 이대로 보낼 수 없다 고 쓴 대형 플래카드를 내건 뒤 해체 민자당 타도 노태우 등의 구호를 외치며 농성하다가 전원 연행되었다. 한편 5월 14일로 예정되었던 강경대 장례식은 경찰의 저지로 치러지지 못했다. 그러나 전국 30만의 학생, 시민, 재야인사들이 규탄시위에 참가하여 정부의 강경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투쟁이 여전히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각계각층의 시국선언이 잇따르는 가운데 15일, 16일, 17일 연일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집회와 가두시위가 전개되었다. 5월 18일 5 18국민대회와 2차로 치러진 강경대 장례식은 전국 81개 시 군의 40여만 학생 노동자 농민 재야 정당 등 각계각층의 참여 속에 전개되어 5월투쟁의 최정점에 이르렀다. 9만여 노동자의 총파업과 시 군 223 민주화운동
226 단위에서 농민의 참여가 이루어졌고, 전교조 전노협 여성연합 예술인 등 각계각층의 시국선언과 서명운동이 잇따랐다. 강경대 장례식이 끝난 5월 18일을 전후하여 범국민대책회의 는 공안통치 분쇄와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 로 명칭을 변경하고, 10대 강령을 내걸고 명동성당 농성투쟁에 돌입하였다. 5 18광주민중항쟁 11주년인 5월 18일 노태우 정부 퇴진 제2차 국민대회 (고 강경대 열사 장례식)가 거행되고, 서울과 광주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 5 18 추모집회와 함께 강경대 치사 사건을 규탄하는 가두시위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강경대의 장례 행렬은 신촌로터리에서 시청 앞 노제를 저지하는 경찰과 충돌하여 4시간 이상 대치한 끝에 이날 저녁 마포구 공덕동 로터리로 장소를 바꿔 노제를 치른 뒤 사망 23일 만에 장지인 광주로 행했다. 광주에 도착한 장례 행렬은 16시간이나 경찰과 대치한 끝에 자정을 넘긴 심야에 노제를 치렀다. 운구차가 도착한 금남로 3이 일대는 학생들과 시민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10만여 명의 인파로 메워졌으며, 학생과 시민들은 경찰의 강제 해산에 맞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날 연세대 앞 철길에서 이정순 분신 사망, 전남 보성고생 김철수 분신 사망, 광주 운전기사 차태권 분신사건이 잇달아 일어났다. 이 시기에 노태우 정부는 수세적 상황을 돌파하고 국면을 공세적으로 전환하기 위한 시도를 하였다. 즉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강경대 치사-열사분신정국 을 선거정국으로 전환하면서 대중의 정치적 관심을 선거공간으로 몰아가고 거리로부터 야당의 이탈을 가속화함으로써 투쟁 공간 축소와 운동진영의 고립화를 모색한 것이다. 또한 투쟁의 수위를 낮추기 위해 노재봉 내각을 부분 개편하고 투쟁의 확산과 국민대중과의 결합을 차단하기 위해 언론공작을 강화했다. 주목할 것은 고양되는 정세 속에서 전면적이고 노골적인 탄압 대신에 투쟁의 발전을 차단하고 냉각시키는 언론조작과 이데올로기 공세가 치밀한 계획아래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3. 투쟁의 퇴조기(5월 25일-6월 29일) 이 시기는 5 18대회 이후 범국민대책회의가 상설연대기구로 재편되고 명동성당으로 투쟁의 중심을 옮겨 투쟁의 새로운 국면이 형성된 시기이다. 그와 동시에 투쟁의 열기가 점차 약화되는 시점에 노태우 정부의 수세국면 돌파시도가 본격화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노태우 정부는 투쟁지도부인 범국민대책회의에 대한 공개수사와 강기훈유서대필 사건 을 통해 민중운동진영과 공방을 벌이는 등 대중들과 투쟁지도부를 분리시키고 개각에 이은 광역의회 선거로 제도야당을 선거 국면으로 전환하도록 유도했다. 이런 와중에 민중운동진영은 김귀정 압사사건 을 새로운 정치쟁점으로 삼아 대정부공세를 지속하려 했지만, 투쟁력은 점차 약화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범국민대책회의의 농성투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진행된 5월 25일 폭력살인 민생파탄 노태우 정부 퇴진 제3차 국민회의 는 경찰의 원천봉쇄로 광주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성사되지 못했고, 전국적으로 뜨거웠던 5월투쟁의 열기는 현저하게 축소되고 있었다. 22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27 5월 20일 새벽 광주에서 권창수가 경찰의 곤방에 맞아 의식불명 상태로 병원에 실려 가고, 5월 25일 김귀정의 죽음으로 다시금 긴장이 고조되고 있을 때인 6월 3일, 때마침 정원식 총리서리 계란 투척 사건 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패륜행위 라는 이름으로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노태우 정부에게는 정세 역전의 호재가 되어 이를 계기로 5월투쟁은 급격히 퇴조했다. 1991년 5월 24일 정원식은 국무총리서리로 임명이 되었고, 6월 3일 한국외대 교육대학원에서 마지막 강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원식 씨는 문교부장관 시절 전교조결성에 참여한 1500여명의 교사들을 해직, 파면시켰으며, 학원민주화를 요구하여 수업을 거부한 세종대학교 학생들을 모조리 유급, 퇴학 등 징계조치를 취했었다. 그 뒤 조치를 완화시켜 복교시켰지만 다수의 교사들이 유급과 징계, 정학을 당했다. 전교조 교사 1500명 해직과 파면, 강경대 경찰폭행 치사사건, 김귀정 시위대 압살사망사건 등으로 저항이 최고조에 이르고 있던 대학 내의 운동세력들에겐 정원식의 국무총리서리 임명은 수용할 수 없는 조치였다. 6월 3일 정원식은 예정대로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강의를 마치고 나오던 중 학생들에 의해 밀가루, 계란세례와 함께 주먹과 발길질을 당하는 등 집단폭행을 당했다. 이는 그가 문교부장관시절 월권행위에 대한 일종의 분노표출이었다고 학생들은 주장했다. 강의를 마친 정원식은 분노한 학생들과 마주쳐야 했고, 군사독재의 앞잡이라는 소리를 듣는 등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당시 정씨는 학생들을 향해 교사는 정치적이어서는 안 되고, 노동자일 수 없으며 전교조 문제에 대한 내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 고 외쳤다. 이 말에 학생들은 더더욱 분노하여 멱살 잡고, 구타하고, 계란, 밀가루, 소주, 맥주병이 날아왔고, 급기야는 인분까지 가져와 정원식에게 던졌다. 이를 말리던 수행원과 조교역시 학생들한테 구타당했다. 정원식은 수행자들에 의해 아이스박스로 얼굴을 가리고 겨우 외대 교문 밖으로 빠져 나갔다. 정원식 씨와 수행원들은 교문까지 겨우 도착하였지만 이미 교문 근처에 숨어있던 학생들이 나타나 학교 안으로 다시 끌고 가려고 몸싸움을 벌였다. 정원식과 그의 수행원들은 기자들, 전경들, 학생들이 뒤엉킨 중에 겨우 나와 지나가던 택시를 잡고 탈출했다. 투쟁정국은 그날 저녁부터 일순간 반전되었다. 그날 학생들의 행동은 고스란히 신문과 텔레비전에 보도되었다. 정원식 총리 봉변사건은 다음날 아침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고, 이 사건은 해외까지도 보도되었다. 보수언론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학생들의 행동은 과거 민주화 운동했던 것까지 싸잡아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학생 운동권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순식간에 퍼졌다. 당시 유교이데올로기가 잔존했던 사회분위기를 이용해 보수 세력들은 이 사건을 공론화 시켰다. 사건직후 전투경찰을 한국 외대에 배치하였고, 6월4일 노태우는 스승의 마지막 강의를 폭력으로 짓밟은 오늘의 학원폭력사태에 개탄을 금할 수 없다 며 이 사건에 대해 특별조치를 지시한다. 당초 노태우 정부는 경찰수사 선에서 마무리 지으려고 했지만 보수 세력의 반발로 검찰수사로 사건을 225 민주화운동
228 확대했다. 당시 정구영 검찰총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정원식 집단폭행사건은 국가 공권력에 대해 중대한 도전 이라며 주동자 및 가담자들을 가려내 엄단할 것을 시울지검에 지시하였다(동아일보, ). 학생 310명에 대한 구속과 동시 사건 직후 종적을 감춘 한국외대 총학생회장 정원택, 부회장 김경하, 편집장 홍용희, 문화구방 백경인, 상경대학 학생회장 박상우 5명을 공개 수배했다. 학교 당국은 수배 24시간도 안되어 이들을 제적처리했다. 사건 이후 자취를 감춘 정원택과 김경하가 체포되기 전까지 서울특별시내에는 특별검문이 계속 되었다. 5명 중 1명은 자수했고, 2명은 불심검문에 검거되었고, 끝까지 피신 중이던 정원택과 김경하는 11월2일에 청량리에서 검거, 12월에 송치되어 재판을 받았다(한국일보, ). 노태우 정부에 대단히 불리했던 5월투쟁 국면의 정세를 역전시키는데 결정적으로 쐐기를 박은 것은 6월에 치러진 광역의회 선거였다 쿠데타 이후 지방자치를 통일 이후로 유예하는 내용의 제3공화국 헌법이 도입되고, 제5공화국에서는 지방의회를 재정자립도에 따라 설치하도록 했지만 결국 설치되지 않고 있던 상황이었다. 6월항쟁 이후 개헌이 될 때 지방의회의 설치가 헌법에 규정되면서 지방선거가 부활되었다. 오늘날과 달리 기초의원과 광역의원을 선출하는 시기가 달랐고 지방자치단체장 직선제는 아직 실시되지 않고 있었다. 본래 1992년 6월에 단체장 선거를 치를 예정이었지만 당시 대통령 노태우가 1월 연두 기자회견에서 경제에 미치는 부담을 이유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3년 후로 연기한다고 발표했던 것. 노태우가 공약했던 중간평가 역시 1989년 이미 유야무야 되었다. 이런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91년 지방선거는 분명히 중간평가 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한편, 지방의원 선거는 1961년 이후 기존의 시읍면단위에서 시군단위로 행정 사무를 처리하는 제도가 도입되었으므로 부활되기 전과 달리 기초의원은 시군단위로, 광역의원은 시도단위로 선출했다. 기초의원선거는 3월 26일, 광역의원은 6월 20일 선출하였다. 3월 26일에는 선거일을 맞아 학교가 쉰다고 도롱뇽 알을 채집하러 간 초등학생들이 실종되는 개구리 소년사건이 일어나 충격을 주기도 했다.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 5월에 일어나면서 선거 분위기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기초의원 선거결과는 보수진영의 우세로 나타났다. 무엇보다 6월 광역의원 선거에서도 민자당이 868석 가운데 564석을 얻었고, 지역적으로도 호남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압승을 거두었다(단, 득표율은 40.6%). 반대로 신민당(평민당의 후신, 신민주연합당)과 민주당(1990년)(별칭 꼬마 민주당 )은 후보 분열과 투표율 저조로 참패를 당했다(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91). 결과적으로 이 지방선거는 신민련에게 민주당과의 합당 없이는 정부교체가 불가능하다는 교훈을 주었다. 합당해도 불가능했지만, 일단은 가능할 것처럼 보였으니까 결국 1991년 민주당(1991년)이 창당되었으며, 다음해 14대 총선의 결과는 민자당의 득표가 비슷한 상황에서 (통합)민주당의 득표는 29.2%로 7%를 더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꼬마 민주당은 참패를 거둔 것만은 아니었다.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바로 앞 선거인 22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29 13대 총선과 비교하면 득표율에서는 민자당이 결코 이득을 본 선거가 아니었던 것. 13대 총선에서 4당의 득표는 민정당 34%, 통민당(민주당) 24%, 평민당 19%, 공화당 16%였다. 이 상황을 그대로 대입한다면 민자당은 = 74%의 어마어마한 득표를 얻어야했다. 그러나 실상은 지방선거의 특성상 무소속에 22.4%가 쏠리면서 민자당의 득표는 고작 40%에 그쳤다. 신민당은 21.9%로 고작 3%를 더 득표하며 부진했던 반면, 꼬마 민주당은 전국적으로 14.3%라는 혁혁한 득표를 올렸다. 옛 통일민주당 득표의 절반 정도를 흡수한 것이다. 진보정당인 민중당이 42명이 출마하여 상당히 높은 득표율을 확보했지만(선거구당 13.3%) 전국적으로 출마한 것이 아닌데다가 당시 광역의원 비례대표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강원도에서 광역 1석을 확보하는데 그쳤다. 전체 득표로는 0.8%에 그쳤다. 민중당은 14대 총선과 대선에서 백기완(무소속 출마)을 내세웠는데, 거의 비슷한 1% 대를 득표하며 재야 세력의 한계를 드러냈으며, 이후 15대 대선까지 5년 간 재야, 노동세력의 존재감은 거의 사라졌다. 선거가 집권여당인 민자당의 압승으로 끝나면서 어느 해보다 길었던 1991년 5월과 6월의 투쟁은 종결되었다 년 5월투쟁 소결 91년 5월투쟁은 집권세력에 의한 민주주의 왜소 불구화 또는 일종의 민주주의 역전과정이 성공하는 대신, 민주주의를 향한 변혁적 열기가 가라앉는 분수령이 되었다. 이 기간에 전국적으로 2,361건의 집회가 열렸다는 기록이 있고, 해체 민자당, 퇴진 노태우 구호 아래 대규모의 시위들이 잇따라 터져 나왔다. 그 과정에서 학생, 빈민, 노동자 등 11명이 분신했고, 한진중공업 박창수 노조위원장의 의문사와 강경진압 과정에서 압사한 성균관대 김귀정의 죽음까지 포함하여 모두 13명이 사망하였다. 5월투쟁 정국은 공안통치의 폭압에 의해 침체를 벗어나지 못해온 범민주진영이 강경대 치사 사건을 계기로 정부에 대한 도전과 공세를 강화하는 것을 한편으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에 맞서 노태우 정부가 자신이 처한 정치적 수세를 이른바 민심수습 방안 으로 돌파하고 광역의회 선거 국면으로의 전환을 통해 정세주도권을 재장악해 가는 양상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처럼 6공화국을 위기로 몰고 간 91년 5월투쟁은 한 대학생의 죽음이 가져다준 대중적 공분이 그동안 잠재해 있던 정부에 대한 불만과 결합하여 촉발된 대규모 투쟁이었다는 것, 대중조직에 기반을 둔 의식적이고 조직적인 투쟁이자 가두에서 벌어진 대중투쟁이었다는 점, 전국적이고 대규모적으로 완강하게 진행되었다는 점, 야당의 역할이 축소되고 민중운동이 주도권을 행사한 투쟁이었다는 점, 분신이라는 극한적인 선택까지도 불사했다는 점 등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5월투쟁의 의미나 특징을 떠나 투쟁과정 속에서 발생한, 역사상 전례 없는 타살과 자살의 비극적 반복이 대중들에게 준 충격은 실로 큰 것이었다. 젊은이들의 죽음과 분신은 노태우 정부의 공안통치에 대한 저항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투쟁의 의미는 정당화될 수 227 민주화운동
230 있을지 몰라도, 분신이라는 수단은 절대 합리화될 수 없다 는 여론이 형성되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노태우 정부는 운동진영의 도덕성과 신뢰성의 붕괴에 초점을 맞춰 5월투쟁을 소멸시키는 정세 역전의 카드로 활용하였다. 한편 5월투쟁은 노태우 정부의 집권 후반기 정국 운영 및 정부 재창출 계획에 일정한 타격을 주기도 했는데, 집권세력 내부의 역학관계를 변화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하여 김영삼의 입지 강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22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31 Ⅲ. 광주전남의 91년 5월투쟁 1. 광주에서의 91년 5월투쟁: 박승희 분신 명지대생 강경대 학생이 쇠파이프에 타살당한 1991년 4월 26일 이전까지 광주 전남지역 민주화운동 진영은 민주연합의 이름으로 5월을 재조명하고 정신을 계승하는 방향으로 오월투쟁을 준비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강경대학생의 타살 소식이 전해질 당시 민주연합은 동구 궁동에 있는 민주연합사무실에서 5월 행사의 추진을 위한 구체적인 논의를 하고 있었다. 강경대 타살은 돌발사고라기보다는 3당 합당 이후 노골화된 노태우 정부의 공안통치가 가져온 불행하면서도 필연적인 사건이라는 인식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다만 당시 민주연합 내부 구성원들이 강경대 타살 시점에서 사건의 구체적인 성격이나 향후 대응의 방향을 명확하게 확립하고 있지는 못했던 것 같다. 노태우 정부가 강경대 치사 사건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 강경대의 가족들과 학생운동진영은 어떻게 대응 할 것인지. 그리고 서울의 민주세력들이 엄혹한 공안정국 상황에서 발생한 대학생 치사사건에 어떤 대책을 세울 것인지를 기다렸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광주 전남 민주연합은 대응책 모색이 매우 제한된 상황(정보의 부족, 독자적인 대응의 한계, 활동의 중심이 남총련의 대응, 그리고 주말이라는 시기적 제약 등의 조건에서 구체적인 방향을 결정해서 무엇인가 즉각적인 대응책을 내놓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의장단과 부문단체의 대표자회를 소집하고 성명을 통해 광주 전남의 입장을 밝히자는 의견을 모은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홍광석의 증언에 따르면, 4월 27일 아침까지도 서울의 상황은 전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까지만 해도 서울 대책회의가 제대로 굴러가지 못했기 때문에 상황 전파가 늦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 광주전남 민주연합 사무처 회의에서는 오후에 소집된 의장단과 부문단체 대표자회의에 상정할 안건을 검토하였는데 분향소 설치, 대자보를 통한 시민홍보, 비상대책회의 기구를 설치하는 방안만 논의했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5월 1일 노동자 집회에서 정부의 폭력성을 규탄하자는 제안과 광주에서도 당장 농성에 돌입하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결정은 유보되었다(광주in, ). 27일 오후 늦게, 강경대 치사 사건이 발생한지 24시간이 넘어서야 광주전남 민주연합 의장단과 부문 단체의 대표자회의가 열렸다. 간략한 상황 보고와 함께 사무처 회의 결과 보고가 있은 후 대책을 논의하였으나 내용은 사무처 회의 수준을 넘지 못하였다. 29일 오전 11시에 민주연합의 비상 중앙집행위를 소집하여 단계적인 투쟁 계획을 수립하고 그것을 5월투쟁과 결합하여 추진한다는 것과 30일 기자회견을 통해 광주 전남 민주연합의 입장을 천명하자는 것이 주요 결정 내용이었을 뿐인데, 당시 남총련 건준위 정책위원장이던 이양재의 증언에 따르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연합의 재정과 투쟁동력의 절대적인 부분이 남총련에서 나오는데, 남총련 내부에서도 강경대 사건에 229 민주화운동
232 대한 투쟁방침이 확고히 서지 않았기 때문에 연합도 구체적인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을 것이 라고 증언하고 있다(이양재 구술, ). 홍광석의 표현대로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분노는 하고 있었으나 광주가 사건의 현장이 아니었고, 또 서울의 상황과 대책을 아직 몰랐기 때문에 깊이 있는 논의를 할 수 없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4월 27일까지도 광주 전남민주연합은 강경대 치사 사건에 대한 대응의 정확한 방향을 잡지 못한 채 서울에서 대책이 수립되어 하달되기만 기다리고 있었던 측면도 있고, 윤영덕의 증언처럼 남총련 내부에서도 4월 26일 강경대 사건이 알려지고 나서도 우리는 그 사건에 대해서 특별하게, 아주 민감하고 예민하게 반응하기 보다는 그것이 공안탄압 과정에서 90년대에 (노동현장에서 돌아가신 분들이 많아) 일상화되다 보니까 그렇게 아주 중요한 계기로 생각 하지는 않았 기 때문이기도 했다(윤영덕 구술, ). 이러한 인식과 상황에 일대 전환을 가져온 사건이 박승희의 분신이었다. 1991년 4월 29일 오후 3시 15분께 전남대 제1학생회관 앞 잔디밭에서 식품영양학과 2학년 박승희가 강경대를 살려내라, 2만 학우 단결하여 노태우 정부 타도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온몸에 시너를 끼얹고 분신하였다. 박승희의 분신이야말로 1991년 5월을 뜨겁게 달군 분신정국 의 신호탄이었다(전라남도 2003, 395). <표 1> 박승희 유서 (유서1) 사랑하는 내 친구들아 나는 항상 너희들이 자랑스러웠다. 옆에서 아무리 우리를 흉봐도 그들이 우리가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시새움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더 한층 너희가 자랑스러웠다. 슬퍼하며 울고 있지만은 말아라. 그것은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다. 너희는 가슴에 불을 품고 싸워야 하리. 적들에 대한 증오와 불타는 적개심으로 전선의 맨 앞에 나서서 투쟁해야 하리. 그 싸움이 네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라 2만 학우 한 명 한 명의 손을 잡고 하는, 함께 하는 싸움이어야 하리. 내 항상 너희와 함께 하리니 힘들고 괴롭더라도 나를 생각하며 힘차게 전진하라. 내 서랍에 코스모스 씨가 있으니 2만 학우가 잘 다니는 곳에 심어 주라. 항상 함께 하고 싶다. 통일진군 승희 23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33 (유서 2) 사랑하는 용 편 식구들에게 이 시대에 우리는 눈물을 흘릴 여유가 없다. 지금 우리에게 열사는 필요 없고 전사가 필요한 때다. 이 두 마디 말이 항상 마음에 남아 있었습니다. 끝까지 살아남아 열심히 싸우지 못하고 먼저 떠남을 그 어떤 말로도 사죄를 구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제 길이 2만 학우 한 명 한 명에게 반미의식을 심어주고, 정권타도에 함께 힘썼으면 하는 마음에 과감히 떠납니다. 불감증의 시대라고도 하고, 무관심의 시대라고도 하는, 지금 명지대 학우의 죽음에 약간의 슬픔과 연민을 가지다가 다시 제 자리로 안주해 커피를 마시고 콜라를 마시는 2만 학우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적들이 원하는 것이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최후의 발악이라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적들은 앞으로 어떤 탄압을 해올지 짐작이 갑니다. 이 싸움은 쪽수 싸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2만 학우의 손을 차례차례 잡고 열심히 싸워주십시오. 편집실의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다하지 못하고 남겨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리고 우리 귀여운 지영이, 용미, 수미, 기현, 인식이가 이 일로 충격 받고 우리의 길을 함께 하지 않고 옆길로 샐까하는 걱정도 해봅니다. 91수습위원 아이들아, 나를 대신해 내 몫까지 편집실의 주인으로서 힘차게 살아가라. 학기야, 너 혼자 남겨두고 가서 미안하다. 외롭고 쓸쓸하겠지만 열심히 생활하고, 또 바로 90이 들어오면 서로 힘이 되어주면서 살아줬으면 한다. 무덤가의 산제비 꽃처럼. 선배님들 죄송합니다. 선배들께 힘 되어주는 후배는 못되었던 것 같습니다. 무거운 짐만 지워드리고 떠나는 것 같지만-올해 일정을 흩뜨려 놓을 수도 있고, 마음을 아프게 해주는-살아남은 자의 의무를 다 해 주십시오. 먼저 갑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통일진군 승희 * 자료 :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1997, 320) 박승희는 1990년 2월 목포 정명여고를 졸업하고 전남대에 입학하였다. 고교재학 중 학생회장에 출마했고, 1989년 전교조 파동을 경험하면서 사회문제에 일찍 눈을 떴다. 대학에 입학해서는 교지 용봉 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학생운동에 열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분신 전날 목포 집에 가서 부모님을 끌어안고 가족들을 사랑한다 고 하였다. 박승희의 유서내용은 1991년 5월투쟁의 성격과 한계를 보여준다. 231 민주화운동
234 제 길이 2만 학우 한 명 한 명에게 반미의식을 심어주고 정권타도에 함께 힘썼으면 하는 마음에 과감히 떠납니다. 불감증의 시대라고 하고 무관심의 시대라고도 하는 지금 명지대 학우의 죽음에 약간의 슬픔과 연민을 가지다가 다시 제자리로 안주해 커피를 마시고 콜라를 마시는 2만 학우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전라남도 2003, 396). 박승희는 6월항쟁 이후 야권의 분열로 권위주의 세력이 재등장하면서 반민주 질서로의 회귀에 대한 직접적인 반대의사의 표시로 분신을 선택하였던 것이다(전라남도 2003, ). 당시의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85) 1991년 4월 29일 오후 3시 15분경 전남대 5.18광장에서는 남총련 건준위 주최로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 집회가 열리는 중이었다. 본관 뒤편 주차장 쪽에서 불기둥이 솟구치더니 집회를 하는 학생들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분신한 박승희는 정부 규탄 과 용봉인의 대동단결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총학생회실이 있는 제1학생회관 앞 인도에서 박승희는 쓰러지고, 학생들이 달려들어 점퍼를 벗어 불을 끄고, 지나가던 신문방송학과 교수의 차에 실려 전대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 민자당일당독재분쇄와 민중기본권쟁취 광주 전남민주연합(이하 민주연합) 을 중심으로 강경대 타살에 대한 투쟁방향을 논의하던 상황이 박승희의 분신으로 급변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다는 홍광석의 증언에 따르면 민주연합 사무실로 돌아오니 방송을 듣고 달려온 단체의 대표자들이 어떻게 할 줄을 모른 채 한숨만 쉬고 있었다. 겨우 강경대학생의 타살에 따른 방안을 협의하던 중이었는데 구체적인 투쟁 일정도 정리하기 전에 터진 승희의 분신은 우리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고 증언하고 있다(광주in, ). 응급실 후송 당시 박승희의 화상상태는 전신 3도 90% 이상으로 매우 위험한 상태였기 때문에 박승희의 회복에 대한 비극적 판단이 지배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승희는 분신 후 약 20일 동안 병상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5월 19일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그날 새벽에는 강경대의 운구가 광주에 도착하였다. 박승의 장례식은 5월 25일 시민 약 10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하였다(전라남도 2003, ) 86) 2. 운암동 투쟁 전남대 학생 박승희(4월 30일)를 필두로 안동대 김영균, 경원대 천세용의 잇따른 분신이 이어지면서 투쟁은 확대 발전해갔고, 정국은 첨예하게 긴장되어다. 4월 29일 전남대, 명지대, 85) 이하의 진술은 홍광석의 <광주in> 기고( ) 내용을 참조해서 재구성했는데, 다른 자료와 차이가 있어 검증이 필 요한 부분은 삭제했다. 86) 박승희가 분신한 전남대학교 제1학생회관 앞 교정에는 조그만 기념물이 설치되어 있고, 2004년 11월 27일 박승희 정신 계승 사업회 가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23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35 서울대, 부산대 등 전국 60여개 대학에서 5만여 명이 각 학교별로 규탄집회와 시위를 전개하였다. 또한 5월1일에는 노동자, 학생이 메이데이 투쟁과 결합하여 전국적으로 집회와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5월 4일에는 백골단 전경해체와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 궐기대회가 광주를 비롯한 전국 21개 지역에서 개최되었다. 이러한 투쟁은 5월 9일 민자당해체와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결의대회로 더욱 확대되었고,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시위가 계속적으로 전개되었다. 한편, 광주민중항쟁기간이 되자 5 18국민대회와 경경대의 장례식이 겹치게 되면서 전국 81개 시군의 40여만 학생 노동자 농민 재야 정당 등 각계각층에서 시위와 시국선언, 서명운동이 잇따라 전개되었다. 특히 강경대의 장지를 광주의 망월동 묘지로 결정되면서 5월투쟁의 중심은 서울에서 광주로 옮겨졌다. 서울역 노제를 지내고 도청 앞 노제를 지내기 위해 5월 19일 밤늦게 고속도로로 내려온 강군의 운구행렬이 광주에서 처음 만난 것은 시내 진입을 막는 경찰이었다. 이효계 당시 광주시장은 이와 관련해 이미 17일에 강군 운구행렬의 광주도심 진입은 허용하지 않겠다 고 밝혔고 여관구 당시 전남도경국장도 역시 강군 운구행렬의 시내 진입을 불허하겠다 며 시 외곽에서 망월동으로 유도하겠다 고 말했다. 경찰이 고속도로에서 망월동으로 통하는 길만 열어놓고 시내 진입로를 봉쇄하자 5월 20일 오전부터 운암동으로 장례행렬을 마중 나왔던 시민 학생들이 수백여 명의 전경들을 무장해제 시켰다. 그리고 고속도로변의 넓은 배수로를 메우고 야산의 나무들을 뽑아내며 길을 열어 결국 도청 앞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계기로 당시 시민들은 운암동에서 이루어진 전투적 상황을 운암대첩 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날은 노동자들이 하루 동안 시한부파업에 돌입하고 각 대학 대학생들이 일제히 교내에서 출정식을 가진 후 가두투쟁에 나섬으로써 6공화국 이후 최대집회 및 시위 가 이어졌다. 20일 오후 3시 광주시 동구 전남도청 앞 금남로에서는 수만 명이 모인 가운데 집회를 가졌으며, 이에 앞서 전남지역총학생회연합(남총련) 소속 13개 대학 1만여 명이 오후 1시 광주교대에서 국민대회 출정식을 갖고 거리로 나서 노태우 퇴진을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또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광노협) 소속 근로자들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와 연대한 시한부파업에 동참, 작업을 거부한 채 이날 오후 2시 광주공원 앞 광장에서 노동운동 탄압 분쇄와 5 18 정신계승 노동자 대회 를 갖고 금남로에서 거행되는 국민대회에 합류했다. 이날은 특히 분신했던 박승희 열사가 숨을 거둔 사실이 알려져 투쟁의 열기는 더욱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3. 윤용하와 김철수, 정상순의 분신 박승희의 분신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분신정국의 신호탄이 되었다. 1991년 5월 12일 윤용하가 전남대 대강당 앞에서 분신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윤용하는 가정 형편상 어려서부터 중국집 배달원, 가방공장 공원 등의 노동일을 하였다. 1989년 초 대학출신 현장 활동가를 233 민주화운동
236 만나면서 열악한 노동현실에 관해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서울 민주화직장청년연합의 풍물강습반에 등록해 활동하였다. 그는 평소에 망월동 참배를 원했으며, 1991년 5월에는 5월 9일 국민대회에 맞춰 광주로 갔고, 5월 9일 분신해서 투병 중이던 전남대 박승희의 문병을 가기도 했다고 한다(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1997, 128). 윤용하는 1991년 5월10일 조국의 참된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많은 젊은이들이 노태우 정부의 사냥감이 되고 만다는 유서를 남기고 전남대학교 대강당에서 분신했다. 그는 분신 이틀 후인 12일, 노동해방을 위해 분신을 생각했다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운명하였다(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1997, 128). 윤용하의 장례 주체는 한국 청년 단체 협의회(한청협) 과 광노협(광주지역 노동자협의회) 가 맡았다. 장례의 명칭은 민주청년 고 윤용하열사 민주노동자장 으로 정했으며 장례위원장은 오종렬 대책회의 공동의장이, 집행위원장은 이철우목사가 맡았다(광주in, ). 장례위원 선정, 준비물 점검, 운구행렬의 배치, 운구행로 확정, 발인식 및 영결식의 순서, 도청노제와 전대 노제의 순서, 도청 노제를 쟁취하기 위한 전술 등은 광주 전남 민주연합에서 도맡아 진행했다. 5월 16일 오후 1시 30분 발인제와 영결식을 끝내고 전대병원을 출발한 윤용하의 운구행렬은 지금의 동구청 앞에서 더 이상 나갈 수 없었다. 당국에서는 도청 앞 노제를 원천봉쇄하겠다면서 운구행렬이 조대 앞을 거쳐 순환도로를 타고 망월동으로 가 주기를 희망했다. 대책회의 측은 명분상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기 때문에 싸움은 예정된 것이었다. 상여를 맨 시민 학생들을 막아낼 자신이 없던 당국은 몸싸움을 할 틈도 주지 않았다. 장례의 대열이 도청 쪽으로 꺾는 순간 대기하고 있던 페퍼포그는 불을 뿜었다. 페퍼포그에서 쏘아댄 최루탄은 상여 뒤를 넘어 가족들이 있는 곳까지 날아왔고 윤용하가 살아온 삶만큼이나 고달픈 장례식이 되었다. 대치가 지속되다 결국 저녁 8시 20분 절충안으로 도청 앞 노제를 포기하는 대신 노동청 앞 노제를 지내는 것으로 합의하면서 윤용하의 장례식을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다. <표 2> 윤용하의 유서 유고의 글 현 정부는 김기설 열사의 분신을 그 책임을 이른바 운동권 세력에게 돌리려 한다. 누가 분신을 배후조종한단 말인가.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그 누가 버리라고 한단 말인가. 그렇다. 바로 살인을 만행하는 현 정부 노태우,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총칼 휘둘러 온 현 정부 뿐이다. 민주화를 외쳐대는 우리 청년학우여, 우리는 그렇게 당했다. 대학생, 노동자, 농민 아니 우리의 4천만 아니 7천만 겨레를 죽였다. 우리는 자본가들에게 끝까지 싸우리라 노태우는 국민 앞에 사과하고 퇴진하라. 강경대를 살려내라. * 출처 :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1997, 128) 23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37 윤용하의 분신이 있는지 일주일 만에 고교생 김철수가 분신하게 된다. 1991년 5월 18일 보성고등학교 운동장에서는 학생회 주최로 5 18 기념행사를 치렀다. 당시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철수는 운동장에서 노태우 정부 퇴진 을 외치며 분신했다. 온몸에 불을 붙인 채 행사장으로 달려가면서 친구들에게 잘못된 교육을 계속 받을래? 라고 절규하며 쓰러졌다.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에는 우리의 소원 을 친구들에게 불러달라고 하였다. 전신 3도 화상을 입은 김철수는 박승희 분신 이후 죽음을 각오했다. 우리나라 전 고등학교가 인간적인 학교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제 전국의 고등학생들이 일어나 투쟁해야 한다 는 내용의 유서를 썼으나, 분신 중 불탄 것으로 보인다. 김철수는 분신 2주 만에 사망하였다(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1997, 325). 김철수의 장례는 애국 고등학생 고 김철수 열사 민주 국민장 으로 명칭을 정하고, 7일장을 결정하였으며 주체는 전교조와 보성군대책회의가 맡았다. 장례위원장은 전교조 정해숙위원장이 맡았다. 김철수의 장례식에는 대학생들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고등학생들의 역할이 컸다. 보성고등학생은 물론 광주 전남 지역의 많은 고등학생들이 참여하여 준비 과정의 궂은일을 도왔다. 당시 해직 교사였던 이종영선생이 학생들을 조직 편성하고 현장 상황을 통제했다. 6월 7일, 김철수의 운구는 그가 다녔던 보성고등학교로 옮겨졌다. <표 3> 김철수의 유서 왜 죽은지 너희들은 알아야 한다. 친구들아 12년이란 긴 세월 목이 메어 우리 쇠사슬에 쥐꼬리만 한 명예와 권력을 위해 공부벌레가 되어 주길 바라는 기성세대 및 벌건 대낮에 강경대 동지가 백골단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져도 심장이 터질 듯 한 분노의 가슴을 잃어버린 우리 배움의 학도들을 깨우치기 위함이다. - 분신현장에서 타나 남은 종이 중에서 * 출처 :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1997, 325) 1991년 5월 22일에는 김철수의 보성고등학교 선배였던 정상순이 전대병원 영안실 건물 옥상에서 분신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정상순은 일용 노동자로서 여러 직종에 종사하였다. 1991년 계속되는 분신에 괴로워하던 중 김철수가 분신하여 전남대학교 부속병원에서 투병을 하자 병원을 찾아와 두 번씩 울고 갔다고 한다. 그는 5월 22일 전남대 병원 영안실 위에서 노동자여 투쟁하라. 시민들이여 함께 호흡하고 함께 외치고 투쟁하자 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분신 후 투신하여 5월 29일 전남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운명했다(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1997, 428). 235 민주화운동
238 사실 정상순의 죽음은 대책회의로서는 난감한 일이었다. 그가 보성출신이라는 사실만 밝혀졌을 뿐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마저도 정상승으로 발표했다가 나중에 정정할 정도였다. 다행히 정상순이 투신했던 전대병원 영안실 옥상에 그가 벗어놓은 상의가 발견되면서 정상순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유서와 주민등록증 그리고 자동차 운전면허증이 상의 속에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상순은 보성 겸백 출신으로 순천공고를 졸업한 스물일곱의 청년이었다. 김철수를 애타게 불렀지만 김철수와는 같은 보성출신이었을 뿐 일면식도 없었다. 한참 박승희 장례준비에 여념이 없고 아직 김철수는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상황에서 또 정상순이 분신한 것이다. 박승희의 장례준비 때문에 바쁘기도 했지만 다른 분신자들에 비해 정상순에 대한 대책위원들의 관심은 눈에 띄게 차이가 났다. 박승희의 일에는 어떻게든 얼굴을 내고 싶어 하던 사람들이 같은 의미의 분신임에도 대상에 따라 관심의 정도를 달리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인데, 이는 당시 남총련 간부였던 안평환과 이기훈도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부분이다(안평환 구술, ;이기훈 구술, ). 5월 29일 밤 8시 45분, 정상순이 사망했다. 그런데 정상순의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의사와 간호사들을 원망하며 울고 있었다고 한다. 의사와 간호사들마저 다른 환자들에 비해 성의를 덜 보여주었다고 가족들은 서러워했다. 정상순의 장례는 7일장으로 하고 장례의 명칭은 애국청년 고 정상순열사 민주 국민장 으로 결정하였다. 장례위원장은 오종렬의장으로 결정한 것 까지는 별다른 이의가 없었는데 장례의 주체를 세우는 문제는 난감했다고 한다. 광주에 연고도 없고 소속 단체도 없는 서러움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고민 끝에 대책회의와 남총련을 주체로 결정하였다. 대책회의가 주체를 맡는 것도 격에 맞지 않았지만 학생도 아닌데 학생들이 주체가 된 것 역시 불가피한 현실이었다(광주in, ). <표 4> 정상순의 유서 모든 시민이 동참하는 푸른 5월 하늘에 부끄럼 없는 자기 자신에게 끓어오르는 분노는 다 같이 전사가 되는 길뿐이라고... 내 자신은 아직도 망월동 영령들의 참배를 하지 못했다. 겉치레보다는 그 분을 생각한다면 스스로 실천하여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광주시민이여! 왜 고통을 받아야 하나. 공안통치 속에서 핍박받으며 이 시대에 태어나서 이렇게 꺼져 가는 등불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이 젊음 태워서 모든 사람에게 가슴속에 와 닿는 느낌이 되겠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불효자식을 용서하십시오! 형님, 누나, 전인, 영희, 행복하기를. 23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39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시면 합니다. 제가 죽으면 화장을 해서 도로에다 뿌려주십시오. 전사들이 제 육신을 발로 밟아 가면서 투쟁하고 저도 항상 투쟁하며, 죽어서까지도 승리하렵니다. 시민들이 제 육신을 발로 밟으며 가슴 가슴에 뜨거운 5월에 하늘을 불사를 겁니다. 뭉치자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진실한 사람으로 안녕, 가진 자들의 땅도 없어야 함께 더불어 사람세상. 노동자여 투쟁하라. 이 사회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돈, 명예, 다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 다정다감한 한 시대의 동반이다. 시민들이여 함께 호흡하고 함께 외치고 함께 투쟁하라! 그리하여 승리하자 슬프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한줌의 재가 되어 바람에 휘날려 5월의 영령 그 분들과 같이 하고 싶다. 활활 타오르는 횃불이 되고 싶어라. 민자당 각성해야 한다. 하늘도 무심하구나.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젊은 열사, 전사에게 은총을 철수야, 철수야 이 못난 선배 용서해다오. 철수야, 철수야. 나는 알고 있습니다. 오월 영령들의 외침의 숨소리. * 출처 :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1997, ) Ⅳ. 전남에서의 1991년 5월투쟁 전남지역의 91년 5월투쟁은 자료상으로 확인되는 부분이 많지 않다. 1991년 4월 30일 여수수산대 민주광장에서 김용대 학우 불법연행과 강경대 살인 규탄대회 를 약 500명의 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함. 학생들은 안기부 해체, 백골단 해체 등을 주장하며 가두시위를 전개하려다 경찰과 충돌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수수산대 본관 1층에 강경대의 분향소가 설침 되었다. 5월 1일 여수수산대 학생들이 체육대회를 진행하던 중 안동대 김영균이 분신을 한 소식이 전해지자 6개 학과가 비상총회를 개최하고, 노태우 정부 퇴진과 백골단 해체 등을 주장하며 학생과 점거농성팀에 합류하였으며,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다음날인 5월 2일에는 각 학과별로 비상총회를 개최하고, 강경대 살인만행규탄 대회 를 개최함. 8개 학과 학생 4백여 명은 가두진출을 벌였고, 시민들에 유인물을 나누어주기도 했다. 5월 3일 오전에는 언론인과 비대위가 주최한 약식집회가 열렸다. 오후에는 교수협의회(회장 237 민주화운동
240 김행길 교수)가 시국성명서를 발표했는데, 성명서의 내용은 민주화에 역행하는 공안정국 철회와 반민주 억압 철폐, 불법연행 금하고 평화시위 보장, 학생 분신과 같은 외골적 행동 자제, 학생은 학내에서 무력사용을 금하고 도덕적 우월성을 회복할 것 등 이었다. 5월 4일에는 여수수산대 민주광장에서 폭력살인 노태우 정부 타도와 백골단 해체를 위한 여수 여천 범시민대회 가 여수 여천사회운동협의회 주최로 개최되었다. 약 200명이 참석한 이날 시위에서 각 단체의 입장과 앞으로의 투쟁방향을 밝히고, 5월 9일 민자당 창당 1주기를 맞아 범시민대회를 개최할 것을 결의했다. 5월 6일에는 여수수산대 총학생회가 확대운영위원회를 개최하고 고 강경대 열사 정신계승 및 김대용 학우 구출을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를 결성하기도 했으며, 5월 7일에는 여수수산대 총학생회 주최로 고 강경대 천세용 김영균 열사 정신계승 및 김대용 학우 구출을 위한 청경학우 결의대회 를 500여 명의 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했다. 5월 8일에는 여수수산대에서 고 강경대 천세용 김영균 열사 정신계승 및 김대용 학우 구출을 위한 청경학우 제2차 결의대회 를 개최하고, 시가행진을 했고, 5월 9일에는 여수수산대 민주광장에서 오전에는 자주학원건설과 민자당 타도를 위한 투쟁본부 출범식(의장: 조민중) 을, 저녁 7시에는 여수 시내에서 여수 여천 사회운동협의회 가 주최하는 여수 여천 범시민대회 가 약 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1991년 5월 18일에는 여수 여천 사회운동협의회와 여수수산대 총동아리연합회는 살인폭력 노태우 정부 타도와 광주항쟁계승 제2차 여수 순천 범시민대회 를 여수 교동 사거리에서 개최하려고 했으나 경찰의 차단에 공안통치분쇄 와 미국반대 등을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이는데 그쳤다. 여수지역의 91년 5월투쟁은 강경대 사망 이후 계속된 분신 정국에서 1991년 5월투쟁이 격화되었고, 각종 집회와 시위는 민자당 및 노태우 정부 타도, 백골단 해체 등으로 모아졌다(됨.(여수수산대신문, ). Ⅴ. 91년 5월투쟁 평가 정원식 사건을 계기로 대학생, 고등학생까지 참여한 노태우 살인독재 퇴진, 군사정부퇴진 등의 구호는 일순간에 사라져 버렸고, 순식간에 역적이 된 학생들에게는 어떠한 반론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의 정국의 상황은 급반전 되었고, 동시에 공안정국조성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매주 토요일 서울시내의 아수라장이 되었던 시위는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무엇보다도 2주 뒤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집권 민자당이 호남을 제외하고 승기를 잡아 정국주도권을 장악했으며, 학생운동에 호의적이었던 시민들도 동시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일부는 1998년 IMF를 기점으로 각 대학 내 학생운동권이 몰락하는 데 이 사건을 학생운동권 몰락의 시발점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23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41 1. 91년 5월투쟁 특징 1991년 5월투쟁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91년 5월투쟁은 국가폭력 네트워크의 강고함과 이에 대한 대중의 침묵적 동의가 동시에 관찰된 사건이었다. 항상 사회의 지배적인 계층은 보수화라는 필연적인 변화를 겪게 되어있다. 그것이 민중들 을 통한 혁명적인 방법이건 점진적 개혁을 통한 것이건, 아니면 안정적인 선거를 통한 것이건 보수화는 마찬가지 이다. 그러한 보수 계층들은 사회의 발전보다는 사회의 안정에 대해 고민하고 더 낳은 방향을 위해 달려간다. 하지만 그건 합리적인 보수 계층들의 이야기이고 한국현대사에서 보인 보수 세력들은 폭력적인 네트워크를 작동시켜 반체제적인 사람들에게 일격을 가하는 형식으로 공포와 폭압의 정치를 일삼아 왔다. 91년 5월투쟁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한국현대사에서 점철되어 왔던 국가폭력의 네트워크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리나라의 분단이라는 특이한 상황을 바탕으로 국내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폭력 네트워크를 너무나도 쉽게 작용하였고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맛본 우리 국민들은 그러한 폭력 네트워크에 너무나도 쉽게 허물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로인해 남북관계는 통치사상, 체계적 차원의 적대적 상호의존관계를 형성해 왔으며 개인과 집단등 사회적 모든 관계가 극우적으로 규정되어져 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폭력 네트워크는 작동된다. 국가폭력 네트워크는 이념, 실행집단, 법제적 기반에서 출발하며 확대재생산의 기제로서의 교육체계와 지식인들, 언론으로 귀결되어져 있다. 이념은 분단체계의 고착화에서 꽃피운 레드 콤플렉스이다. 실행집단은 국정원으로 되어있는 옛 안기부를 이르는 말이고 법제적 기반은 당연히 국가보안법이다. 확대재생산으로서의 교육체계는 두말할 나위가 없고 해바라기성 지식인과 언론은 현 시점에도 이미 붉어져 나온 문제로서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잘 알거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 보수정치사회는 반체제적 인사들에게 우선 레드 콤플렉스를 동원해 공공의 적을 생산 해낸다. 위기체제에서의 보수지향적인 일반 대중들에게 레드 콤플렉스는 오래전 전쟁을 바탕으로 확대되어오는 적이며 레드 콤플렉스의 굴레가 씌워지면 다른 폭력네트워크의 동원 없이도 사실상 결론지어지는 것이 현대사의 극우적 모습이었다. 이후 안기부로 끌려가 고문을 통해 허위자백을 유도시켜 사상적 기반을 확고히 해놓고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반체제를 봉쇄하고 귀향 보내 놓는다. 언론을 바탕으로 한 해바라기성 지식인들은 사건의 본말을 무시한 채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하고 다니고 교육체계는 이러한 콤플렉스의 씨를 청소년들에게 뿌린다. 이러한 완벽한 네트워크 속에서 91년 5월 항쟁도 특징 지여진다. 명지대 강경대군의 죽음과 함께 대중적 봉기의 움직임이 보이자 국가폭력 네트워크는 어느새 가동하여 운동권에게 레드 콤플렉스를 입혀놓은 뒤 국가보안법을 바탕으로 붕괴시켜 놓고 결정적으로 언론과 지식인들의 극우적인 모습으로 완전히 그 힘을 잃게 만들어 놓았다. 국가의 노골적인 폭력네트워크로 인한 물리적 폭력에도 그러한 방법이 통용될 수 있었던 것 은 239 민주화운동
242 일반국민들이 침묵하고 방관했음을 그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역사적 실 체험과 역사적 기억, 공포에 의해 강요되어져온 사회적 침묵, 확대 재생산된 교육기재의 영향으로 국가폭력에 대해 헤게모니적 정당성을 두고 반체제에 대한 적대감을 조성하였다. 또한 민중들이 1945년 해방 이후 폭발적인 정치참여를 실천했으나 그 결과가 남북분단과 친일파를 기반으로 한 정부가 들어섰고 4.19로 그 모순을 타파하려 하였으나 박정희 군부에 의해 그 열망이 짓밟혔다. 5 18항쟁을 거쳐 6월항쟁까지 국민의 정치참여는 모순이 극대화 될 때마다 이루어졌지만 6월 직선제 쟁취이후 가시적인 성과에 만족하며 정치에서 무관심으로 돌려진 것이 91년 5월에 폭발적인 항쟁의 연료에서 제외되었다. 둘째, 6월항쟁과 91년 5월투쟁은 차이가 있다. 91년 투쟁이 있기 4년 전인 87년 6월은 전 국민이 봉기하여 호헌조치를 철폐하고 직선제를 쟁취한 대한민국 민주주의 항쟁의 위대한 순간 중 하나였다. 이러한 87년의 승리의 기억은 정치적 한계성에서 양김의 분열로 패배의 아픔으로 번져나갔다. 91년 강경대가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죽은 이후에 대중적인 저항이 일어나면서 제2의 6월항쟁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다. 그러나 운동권 내지는 지도부 체계에서나 현실의 상황은 91년을 87년과 같은 상황으로 진척시키지 못했다. 국민적인 공감대를 끌어낼 수 있던 적절한 목표가 설정되어 있던 6월항쟁과는 달리 91년 5월투쟁은 노태우 정부 퇴진 을 비롯한 여러 슬로건들이 난립하고 명확한 대안체제가 부재하였다. 또한 6월항쟁과는 다르게 명확한 지도체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국민운동본부가 대부분의 투쟁을 이끌었던 6월항쟁과는 달리 범국민대책회의는 그 지도적 역할을 명확히 설정하지 못했다. 투쟁의 참여세력에서는 중산층보단 학생과 도시빈민, 저소득 노동자, 농민들이 주체세력으로 부각되었다. 이것은 중산층의 소외감을 불러오게 되었고 언론과 국가권력의 네트워크에 중산층이 포획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6월항쟁과 91년 5월투쟁은 여러모로 많이 비교가 되어왔다. 투쟁의 계기는 이한열, 박종철과 강경대로 연상되는 열사의 탄생으로 촉발되었고 대중적 봉기로 표현될 만큼 많은 인원이 참가한 항쟁이었으나 6월항쟁의 대중적 목표였던 직선제 개헌은 쟁취해 내었던데 반하여5월투쟁의 명확한 목표는 설정되어 있지 않았다. 셋째, 소위 학생운동권의 정치적 영향력과 신뢰가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다. 강경대 사망과 박승희 분신으로 시작된 5월투쟁은 김기설 유서대필사건과 6.3외대사건으로 치환되었다. 학생 운동권에 대한 도덕 붕괴형식으로 언론이 몰아가면서 87년 민주화 정신 계승의지는 무산되게 되었고 현재에까지 보수권에서 운동권을 규정짓는 큰 틀이 되었던 사건이다. 노태우는 국민의 정치참여 열기가 폭발적으로 진행되던 87년 직선제를 통해 대통령에 오른 뒤 유화정책을 유지해왔으나 89년부터는 공안정국을 가동하기 시작하여 노동운동, 학생운동을 탄압했다. 이러한 노태우 정부의 의지는 즉각 반발을 불러왔지만 점점 잔인해지는 공권력 앞에 투쟁의 주체들은 점점 질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때 강경대의 사망이 발생하였으며 이러한 죽음이 24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43 대중적 지지를 얻고 박승희의 분신으로 탄력을 얻자 투쟁의 속도는 점차 가열되고 주체가 된 범국민대책위원회의 주체세력중 하나인 학생운동권의 역량은 점점 강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학생 운동권을 꺾을 필요성을 느낀 노태우 정부와 언론의 수구성이 빚어낸 작품 첫 번째가 바로 유서대필사건이었다. 이전에 권력재창출만을 전제로 한 원칙 없는 3당 합당과 수서지구 특혜비리사건으로 도덕성에 문제를 입은 노태우 정부는 투쟁주체의 공세에 밀릴 수밖에 없었고 영안실의 시체를 벽을 뚫고 훔쳐간 치명적인 공권력 부도덕으로 인해 투쟁주체는 더욱 노태우 정부를 밀어붙였다. 이때 김기설이 유서를 쓰고 분신을 하였는데 노태우 정부는 이 유서를 강기훈이 대필하였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이 확인되지 않은 정부의 주장은 수구언론에 의해 즉각 기정사실화 되었고 과정을 공개하지 않은 감식의 결과가 옳은 것으로 판명되자 강기훈에게 수배명령이 떨어졌다. 결국 강기훈의 자진 검찰출두와 함께 거의 5월투쟁이 종결될 정도로 그 영향력은 매우 컸다. 이러한 유서대필사건의 언론의 거짓선전으로 분신정국의 성격이 규명되게 되었다. 김지하의 말대로 이 사건은 자살특공대 의 공격이며 또 다른 파시즘 의 발현이었다. 결국 이와 같은 언론과 지식인들의 네트워크의 발휘로 운동권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게 되면서 분신에 대한 많은 일반 시민들의 관점이 반 투쟁으로 전환되게 되었다. 또 하나의 언론의 수구적 공작은 6.3외대사건이었다. 정원식 국무총리가 외대에 가서 강연을 하고 돌아오던 중에 외대생들에게 계란세례를 받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당시 노태우 정부에 붙어 국가폭력을 이끄는 정치인에게 계란세례를 퍼부었다는 학생 측의 주장과 제자가 스승 을 구타하고 린치 하였다는 언론의 주장이 맞부딪히게 되었는데 당연히 결과는 언론의 압승 이였다. 수구언론들은 이 사건에 대한 본질적인 성격규명은 무시한 채 제자와 스승 이라는 대립구도만을 부상시켜 이 사건의 성격을 노스승과 패륜적인 제자들의 대립 으로 규정지었다. 이러한 언론의 성격규명으로 외대사건의 본질이 꺾어졌으며 운동권의 몰락을 선언하는 순간이 되었다. 이제는 노태우 정부의 도덕성뿐만 아니라 운동권의 도덕성도 언론의 화려한 공조 앞에 시민들의 신뢰를 받을 수 없었다 년 5월투쟁에 대한 평가 91년 5월투쟁의 주체자들의 평가는 대부분 5월투쟁을 실패한 투쟁으로 보고 있다. 투쟁의 전개과정에서 그들의 요구-노태우 정부의 퇴진-를 성사시키지도 못하였으며 이후 운동권에 심각한 타격을 줄 만큼 그 투쟁의 전개과정에 있어서의 방법, 즉 분신자살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선택하게 됨으로서 일반대중들과의 거리감을 벌려놓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야 어찌되었건 죽음이라는 키워드의 담론은 폭발적인 관심의 인식으로 모여지기도하지만 그 정도가 지나쳤던 5월투쟁의 경우에는 언론의 공작과 맞물려 일반대중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241 민주화운동
244 91년은 세계정세의 흐름에 있어서 소련이 무너졌던 가장 중차대한 시기이다. 냉전의 20세기가 끝나가고 데탕트에 접어들면서 세계의 흐름이 점점 변해가기 시작하더니 5월투쟁이 있고 몇 달 뒤인 12월 31일을 기해 소련이 해체됨이 선포되었다. 무엇보다 냉전의 영향을 심하게 받았던 한반도의 특성상 87년 이후나 되서야 비로소 마르크스나 레닌 등의 서적이 대학가의 커리큘럼으로 선정된 시점이었기 때문에 소련의 해체와 91년 5월투쟁의 패배가 겹쳐져 진보운동에 맥이 끊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패배는 투쟁직후 이루어진 지방선거에서 여당의 압승으로 표시되었으며 1년 후 선거에서 김영삼의 당선으로 종결되었다. 1) 실패원인 91년 5월투쟁의 실패원인을 살펴보면 첫째, 자살이라는 극단적 방식이 계속되면서 그것의 숭고한 의미보다는 오히려 죽음의 담론이 비관적으로 형성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둘째, 지도체계의 오류다. 범국민대책회의는 정치적으로 또는 비정치적으로의 성격을 규정짓지 못할 만큼 존재자체가 애매했으며 명확한 목표를 설정하지 못했다. 범국민대책회의 내부에서도 알력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투쟁에 참여한 이들을 하나로 묶어내지 못했다. 셋째, 세대의 전환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세계적인 바람을 타면서 우리나라에도 X세대라 불리는 신세대가 등장하고 그들은 예전의 87년 세대와는 달리 탈조직, 탈이념, 탈정치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세대였으며 이러한 세대가 몇 년간 한국사회에 중요한 이슈가 되어져왔다. 이러한 신세들의 등장에 비해 91년 5월투쟁은 산발적인 조직으로 묶여져서 나갔으며 87년에 비해 자발적인 대중의 흐름이 없었다. 즉 자발적 흐름을 조직하지 못했다. 넷째, 이에 따른 필연적인 인과관계로서 정부의 강경대응에 대한 맞대응 부족이다. 정부는 폭력적인 시위진압을 했을 뿐만 아니라 학사경고제도의 전 대학 부활 등 학원자율화방침을 규제함으로서 학내운동권에 대한 탄압을 서둘렀다. 그러나 투쟁세력들은 조직력 부족으로 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결국 1991년 5월투쟁은 실패한 투쟁이고 이러한 패배감과 전환이 이후 한국 상황에 큰 영향을 끼쳤다. 죽음으로 점철된 폭력에 대한 반발은 정부와 운동권 모두에게서 상호비방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후 시민들은 다신 거리로 나오지 않고 사회적 이슈의 문제를 두 집단사이의 갈등으로 돌려버리는 모습을 띄었다. 80년대와 90년대의 결절점이 바로 91년 5월투쟁이었으며 투쟁이후 탈 구조화에 따른 포스트모더니즘의 열풍으로 90년대는 흘러갔다. 2) 91년 5월투쟁 이후의 변화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주화운동진영은 정치적 분화가 시작되었다. 하나의 흐름은 기존의 보수정당체제로 지칭되던 제도정치권에 진출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노동운동과 같은 계급 기반적 운동보다는 사회적 문제에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포괄적인 주체의 조직화에 기초한 시민운동 24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45 영역에 관심을 갖는 흐름이었다. 전자의 흐름은 다시 두 가지 경향으로 분화되었는데, 하나는 재양입당파로 대표되는 기성정당 참여론이고, 다른 하나는 기성정당은 한계가 자명하기 때문에 독자적인 정당을 창당하여 새로운 정치적 실천을 모색하자는 흐름이었다. 재야입당파는 평화민주통일연구회에서 범민주통합수권정당추진회의, 민주연합, 민주개혁정치모임으로 이어졌다. 평화민주통일연구회(약칭 평민연)는 13대 대선에서 비판적 지지론을 옹호했던 문동환, 박영숙, 조순형, 서경원, 양성우, 박석무, 김영진, 이철용, 이상수, 정상용, 이해찬 등 98명의 재야인사들이 1988년 2월 3일 평민당에 입당하여 결성한 단체였다. 이들은 1988년 13대 총선에서 15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함으로써 처음으로 제도정치에 입문했고, 민주당에 입당한 강신옥, 노무현, 이인제 등도 국회로 진출하여 재야입당파의 합법 정치활동의 문을 열었다. 한편 1989년 8월 18일 영등포 을구 재선거 참여를 직접적인 계기로 전민련 내부에서 합법 진보정당 결성논의가 본격화되었다. 합법정당 결성을 둘러싸고 찬성론과 반대론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전민련을 탈퇴한 합법정당 건설론자들은 민중의 정당 건설을 위한 민주연합추진위원회 (약칭 민연추)를 결성하였다. 민연추의 경우 제도 야당과의 관계정립 순서를 둘러싸고 선통합론과 선창당론의 갈등이 있었으며 5월 30일 선통합파가 탈퇴함으로써 논쟁은 강제로 마무리되었다. 민연추를 탈퇴한 이부영, 제정구, 유인태 등 선통합파가 야권통합을 주장하며 추진한 통추회의는 1990년 12월 21일 공식적으로 해체되었으며, 이후 이부영과 유인태는 민주연합을 거쳐 이기택 중심의 옛 민주당과 통합하고 제정구는 신민-민주당 통합 이후 민주당에 입당하였다. 다음으로, 노태우 정부 시기의 독자적 창당운동은 민중의 당과 한겨레민주당-민연추- 민중당-통합민중당의 정치실험으로 이어졌다. 재야의 독자적인 정당운동은 1988년 민중의 당 및 한겨레민주당 창당과 특히 1989년 8월 영등포 을구 재선거 참여를 계기로 이루어진 합법정당 결성논의로부터 시작되었다. 1988년 3월 6일 1987년 대선 당시 독자후보운동의 추진주체들이 결성한 민중의 당은 1988년 4 26총선 당시 10여개 지역구에서 후보를 냈지만 한 명도 당선되지 못했고, 득표율 0.33%밖에 얻지 못해 정당법상 해산 조치되었으며, 총선 이후 민중정당재건추진위원회 로 전환되었다. 1990년 4월 13일 민연추가 출범하였다. 민연추는 각계각층의 지지자들이 모이는 가운데 6월 21일 6대 창당원칙-민중주체, 민주쟁취, 민권수호, 민주세력연합 주도, 민중재정 확립, 진취적 당풍 확립을 천명하였으며, 민중당 창당준비위원회로 탈바꿈하였다. 1990년 9월부터 10월에 이르기까지 각 지구당 창당대회를 거쳐 11월 10일 2,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민중주체 민주주의의 기치 아래 민중당이 정식 출범했다. 전당대회를 통해 상임대표위원에 이우재, 대표위원에 김상기, 김낙중 등이 선출되었고, 백기완을 당 고문에 추대했다. 한편 1991년 7월경 민중민주주의(PD) 계열의 비합법 노동운동 조직체 중에서 243 민주화운동
246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 가 결성되었다. 여기서 노동자계급이 중심이 되어 독자적인 합법정당을 건설하고 이러한 합법정당을 통해 의회민주주의의 정치공간을 활용함으로써 민주적 계급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겠다는 이른바 신노선이 천명되었다. 이러한 논의 결과에 따라 합법적 노동자정당을 건설하는 것으로 방향전환을 할 것을 결의하고 1991년 12월 15일 한국노동자당 건설추진위원회 (약칭 노정추)를 발족하였다. 이어 1992년 1월 19일 5,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위원장 주대환)가 공식 발족했다. 1992년 3 24총선은 민중당이나 한노당 창준위는 서로 통합한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했다. 정치적으로 명확히 구별되는 서로 다른 두 세력이 서로의 필요조건에 의해 선거를 불과 50여일 앞두고 통합을 성사시킨 것이다. 1992년 3 24총선은 민중당이나 한노동 창준위 모두에게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할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그러나 통합민중당은 51명의 후보를 내세웠지만 국회 진출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득표율에 있어서도 그 성과가 미약했다. 전국적으로 31만 9,041표를 얻어 득표율 1.5%를 획득하는데 그쳐 법적 해산을 당하게 된다. 이후 이들 독자정창 추진의 흐름은 1992년 14대 대선에서 전면적 독자후보론을 주창하며 백기완을 민중독자후보로 선출하여 선거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지만, 전노협 등 기층 대중조직의 적극적인 지지를 획득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그리고 득표 면에서도 전체 투표자의 1% 수준은 23만7천여 표를 얻는데 그쳤다. 기성정당 입당 혹은 독자정당 창당으로 표출된 기성정당 참여흐름과는 별개로 민주화운동세력의 분화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새로운 운동 흐름은 시민운동이라는 이름으로 형성되었다. 19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사무총장 서경석)과 한국공해추방운동연합(공추련, 공동위원장 최열) 창립을 필두로 시민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여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했다. 경실련은 1989년 11월 4일 부동산투기에 따른 불로소득이 다수의 성실히 일하는 사람들을 박탈감과 생계위협 속에 몰아넣고 있는 상황에서 공정한 시장경제질서와 경제정의 및 실사구시의 기치를 내걸고 시민운동의 첫발을 내디뎠다. 경실련은 창립 당시 팽배했던 이념적 사회운동과는 다른 방식의 활동을 전개할 것을 선언했는데, 예컨대 경제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비폭력적이며 평화적인 시민운동을 대중적이고 합법적인 방식으로 전개하고자 했다. 경실련은 부동산 투기, 정경유착, 불로소득과 탈세를 공인하는 금융가명제, 극심한 소득차, 불공정한 노사관계, 농촌과 종소기업의 피폐 및 이 모든 것들의 결과인 부와 소득의 불공정한 분배, 그리고 재벌로의 경제적 집중, 사치와 향락, 공해 등 이 사회에 범람하고 있는 경제적 불의를 척결하고 경제정의를 실천함은 이 시대 우리 사회의 역사적 과제 라는 전제 아래 결성되었다. 금융실명제 운동은 경실련의 대표적인 활동이었으며, 출범 당시에 벌인 토지공개념 입법운동은 1990년 들어 부동산투기 근절과 공평과제 확립을 위한 세제개혁과 함께 음성적이고 투기적인 24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47 불로소득을 차단하기 위한 운동의 출발이었다. 경실련은 1990년 3월 4일 임대료 인상 규제촉구 시민대회 를, 3월 16일 도시빈민 주거안정 촉구를 위한 시민대회 를, 12월 1일에는 불로소득 척결을 위한 세제개혁 촉구 시민대회 를 개최하였다. 1991년 들어와서는 2월 23일 수서사건 재수사 촉구 및 정경유착과 부패척결을 위한 시민대회를, 11월 16일에는 각계 20여개 시민사회단체와 공동으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경제개혁 촉구 시민대회를, 12월 5일에는 미국대사관 정문 앞에서 쌀시장 개방반대 캠페인을 진행하였다. 1992년에는 7월 18일 정보사 땅 부정 진상규명대회 및 금융실명제 실시 촉구 시민대회를 열었으며, 11월 6일 정책 대결의 선거문화를 위한 밤 행사를 열고 금융실명제 즉각 실시 재벌의 소유 분산 및 소유와 경영 분리 등 차기정부 13개 개혁과제를 발표하기도 했다. 경실련과 공추련으로 대표되는 시민운동은 민중운동이 독점하고 있던 반정부운동 내지 사회개혁운동의 새로운 대안세력으로 급속하게 성장해 가는데 이처럼 시민운동이 대안사회운동으로 자리매김하는데 민중운동 진영의 무능과 시민운동의 새로운 운동의제 설정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모두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 광주전남의 91년 5월투쟁 학계에서 91년 5월투쟁은 실패한 투쟁으로 정리되고 있다(강정인 2002; 전재호 2004; 이광일 2007; 김정한 2011). 그렇지만 모든 지역의 5월투쟁이 다 실패라는 하나의 단어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거시적 맥락에서 본다면, 91년 5월 투쟁이후 학생운동의 시대는 마지막 불꽃을 태우며 저물기 시작했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초중반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진보주의를 이끌어 가는 핵심 동력이었던 학생운동은 분열과 자기혁신의 실패를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30년 넘게 한국사회에서 차지하던 위상을 더 이상 유지하기 힘들어졌다. 87) 정근식이 지적한 것처럼, 학생운동은 전통적인 유교문화에서 학생들이 누리던 특권적 전통에 의존하면서 정치적 맥락에서는 국가에 저항하던 가장 강력한 투쟁권력이었지만(정근식 2013, 45), 정원식사건은 학생운동이 보유하고 있던 도덕적 특권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고, 유서대필사건 은 그 진위여부와 무관하게 민주화운동세력의 도덕성을 흠집 내는 수단으로 악용되었다. 양 사건이 현실적 정치적 지도력의 실종과 함께 도덕적 지도력까지 상실하는 모멘텀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물론 학생운동의 침체와 지도력 상실이 순수하게 학생운동만의 책임은 아니다. 1989년 공안정국부터 침체기를 벗어나지 못한 학생운동은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의 등장과 더불어 개혁담론이 사회운동을 지배하면서 대안담론을 제시할 수 있는 기회와 능력을 포착하지 못했다. 1980년대와 같이 포괄적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적 동의기반과 학생회를 통한 공동실천은 1990년대 87) 이에 대해서는 이호룡 정근식(2013)의 책에 포함된 정근식(2013)의 글과 이창언(2013)의 글을 참조할 수 있다. 245 민주화운동
248 초반부터 그 균열이 나타났는데, 특히 1991년 5월투쟁의 패배와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운동대오에서 이탈하는 활동가와 학생이 늘었고, 대학사회 전반에 정치적 무기력과 무관심이 나타난 시점도 이 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외부적 환경의 변화와 시대의 변화에 따른 국민정서의 변화도 학생운동의 침체와 지도력 상실을 가져온 중요한 요인으로 함께 고려해야 할 요인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사회운동의 쇠퇴는 사회운동의 고양( 高 揚 ) 수준에 따라 불균등하게 이루어진다. 예컨대 사회운동세력의 조직화나 영향력이 크지 않은 지역은 운동의 퇴조도 급격하게 이루어지는 반면, 사회운동세력의 조직화 수준이나 영향력이 큰 지역일수록 운동의 퇴조도 서서히 진행될 수밖에 없다. 광주전남지역이 후자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지역에서 학생운동이 쇠퇴하는 속도와 강도에 비해 광주 전남지역에서 학생운동이 쇠퇴하는 속도와 강도는 불균등했다. 바로 이러한 운동사적 맥락에서 91년 5월투쟁이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 혹은 효과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먼저, 광주 전남지역의 91년 5월투쟁은 사회운동의 쇠퇴가 불균등하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다. 1987년 6월항쟁은 전민중적 항쟁의 구심점으로서 국민운동본부가 있었던 반면 91년 5월투쟁은 국민운동본부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조직적 구심이 없었다. 이는 1989년 결성된 전민련 등이 내부 논쟁과 정부의 탄압으로 약화되어 효과적인 지도를 할 수 없었던 사정과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광주전남 민주연합이나 대책위가 존재하긴 했지만 1987년 국민운동본부처럼 전국적 연결망을 확보하여 유기적으로 투쟁을 지도하고 조율하는 기능을 갖고 있진 못했다. 1989년 1월에 결성된 전민련이 있었지만 참가단체들의 노선과 입장에서 조금씩 차이가 있었던 데다 가입단체들의 역량 역시 높지 않았고, 그나마 역량의 불균형이 심하게 나타났다. 88) 공안정국이 정점에 달한 시점에서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지도단체의 공백은 91년 5월투쟁이 87년 6월의 민주화운동처럼 민중투쟁의 성과물을 남기지 못하고 흐지부지 마무리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로 꼽을 수 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달 가까이 계속된 이른바 분신정국에서 91년 5월투쟁이 지속될 수 있었던 데는 광주 전남 지역민들의 신뢰와 지지가 밑바탕이 되었다. 광주 전남지역 주민들의 신뢰와 지지는 91년 5월투쟁 이후 전민련을 대체하여 결성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의 구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전국연합의 무기력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하여 전국연합 결성을 위한 상설연합 준비위가 1991년 10월 22일 구성되었다.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전국농민회총연맹, 한총련의 전신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등 14개 운동단체와 13개 지역운동단체 등이 포함돼 있었다. 고광석 전빈련 의장, 지선 전민련 공동의장, 윤정석 대구경북 추진위원회 대표가 준비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91년 12월 1일 88) 전민련은 영등포을 재선거 참여를 둘러싸고 입장이 엇갈리고 이것이 합법정당 논쟁으로 이어지며 분열을 재촉했다. 여기에 이부영 상임의장을 비롯해 조성우, 이재오, 이창복, 배종렬, 지선 등 주요 간부들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 등으로 구속돼 구 심력을 잃었고, 정치력 및 투쟁역량이 위축돼 1991년 12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이 결성되면서 해체됐다. 24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49 연세대학교에서 각 운동 부문, 지역 대의원 및 시민 5천여 명이 창립 대의원대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대의원들은 강령 등을 확정했다. 89) 창립 대의원대회는 고광석 전빈련 의장, 권종대 전농 의장, 지선 전민련 의장 등을 공동의장으로 선출했다. 90) 91년 5월투쟁은 전민련의 전국연합으로의 재편에 영향을 미쳤던 것은 분명하나 그것이 반드시 긍정적인 요인들만 작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보다 많은 단체들이 전국연합의 조직적 틀로 묶였지만 바꾸어 이야기하면 이는 각 단체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이전보다 축소되었다는 점을 상징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각자의 영역에서 정치적 직능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민주화운동 단체들이 공안정국과 91년 5월투쟁의 실패로 새로운 조직적 연대의 틀로 재편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이 형성되었으며, 이는 광주 전남지역의 민주화운동 및 사회운동단체의 재편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지역 사회운동단체들에게 있어서도 91년 5월투쟁의 경험은 새로운 연대조직으로의 재편과 조직적 혁신이라는 과제를 부여했다. 셋째, 91년 5월투쟁은 새로운 장소성, 새로운 상징공간의 출현을 가져왔다. 전남대병원, 운암동 등은 80년 5월로 상징되는 민주, 정의, 공동체정신이 압축적으로 표출된 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공간의 의미는 공간에서 발생한 사건들에 의해 규정된다. 1980년 5 18항쟁이 도청과 금남로라는 공간을 민주주의와 인권의 장소로 상징화했다면 91년 5월투쟁은 전남대병원과 운암동을 새로운 민주주의의 장소로 상징화했다. 91년 5월투쟁의 공간은 80년 5 18항쟁이 만든 민주주의와 공동체정신의 공간을 확장한 측면이 있다. 특히 전남대병원 상황실은 1980년 5월의 도청과 유사한 공간적 상징성을 부여받는다. 광주시민들은 전남대병원 상황실로 쌀, 부식 등을 자발적으로 가져와 제공했고, 상황실 자원봉사자들이 이를 나눠먹으며 투쟁을 전개하고, 서로 격려해주는 투쟁의 공동체가 형성된 공간이었다. 마치 1980년 5월 도청이 그랬던 것처럼 전대병원 상황실은 91년 5월투쟁을 조직하고 지도하는 공간이었고, 투쟁과 공동체 정신이 융화되는 공간이었다. 도청 앞 분수대를 중심으로 한 공간이 시민들의 광장으로서 항쟁공동체 형성의 거점이었다면 전남대병원 앞 도로 및 로터리 역시 도청 앞 분수대 공간이 수행했던 역할을 담당했다. 넷째, 91년 5월투쟁은 1980년 5 18항쟁의 데자뷰였다. 특히 91년 5월 운암대첩 은 5월항쟁과 가장 유사한 기시감을 보여주었다. 즉 운암대첩은 광주 시민들의 역동성. 헌신성, 공동체성 등 80년 5월을 또다시 보여주는 광주 지역의 압축적인 5월의 또 다른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주먹밥을 나누던 1980년 5월의 경험은 김밥을 나누는 91년 5월로 현상( 現 像 )되었다. 금남로와 도청 앞 분수대의 시민학생궐기대회의 모습은 1달여 동안 전남대병원 앞에서 진행된 추모와 89) 전국연합은 그 동안 분열됐던 재야세력을 사실상 하나로 모으면서 민족민주운동진영 투쟁의 구심이자 정치적 대표체로서 자 기 역할을 규정했다. 이를 위해 민중생존권 수호, 사회 전영역의 민주개혁 실현, 민족자주권 쟁취와 한반도의 자주적 통일을 주요 활동방향으로 설정했다. 출범 당시 전노협 전농 한총련 등 14개 부문 운동단체와 서울 부산 광주 등 13개 지역 운동단체를 포함해 모두 27개 전국단체가 참가했으며, 결성 이후 1총선 및 대선에 대한 공동대응 2범민족대회 참여 등 통 일운동의 대중화 3노동자 농민 등 기층민중의 생존권투쟁 지원 4국가보안법 노동법 등 악법개폐운동 등을 전개했다. 90) 전국연합은 1997년 이후 지도부가 붕괴되면서 사실상 해소됐다. 1991년 출범 당시 참여한 인사가 각자도생한 것이다. 247 민주화운동
250 공안정국 규탄의 집회로 현상되었다. 계엄군의 퇴각으로 형성된 해방의 공동체는 운암대첩을 통해 일시적으로나마 재현될 수 있었다. 91년 5월투쟁은 80년 5 18항쟁을 현상함으로써 광주시민들에게 오월항쟁의 데자뷰를 경험하도록 했다는 점에서 민주화운동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투쟁이었다. 마지막으로는 91년 5월투쟁은 신세대, X세대, 오렌지족 으로 불리는 90년대 세대가 80년대 세대의 유산과 접속될 수 있게 하는 결절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 세대가 이룩한 산업화와 선배 세대가 이룬 민주화의 과실을 즐기며 호황의 정점에 섰던 80년대 말에 교복 자유화와 전교조 1세대로 학창 시절을 보냈고, 이들은 대학에 들어와서도 자유를 만끽했다. 1991년 5월투쟁을 거친 후 학생운동은 급속도로 세가 약해졌지만 투쟁의 경험은 인식체계 속에 고스란히 남았고, 결정적으로 97년 IMF세대 와 종별성을 갖게 만들었다. 91년 5월투쟁은 호황과 공안정국이라는 모순적 현실에서 희망과 죽음의 고통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도록 했고, 이로 인해 우리사회의 문화적 자양분이 되었다. 90년대 세대에게 91년 오월투쟁은 87년 6월항쟁 이후 공안정국의 탄압 속에서 위축되었던 권위주의적 정부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광범위한 투쟁을 조직화하는 경험을 분신 이라는 절체절명의 수단을 통해 제공했다. Ⅵ. 맺음말 1991년 5월투쟁은 공안통치와 3당 합당을 통해 권위주의적 통치로 회귀하던 노태우 정부를 최대의 위기로 몰아간 6공화국 최대의 대중투쟁이다. 이른바 백골단에 의해 강경대 사망 사건이 발생한 4월 26일부터 투쟁의 지도부가 명동성당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6월 29일까지 전개된 투쟁을 일컬으며, 노태우 정부 집권 후반기에 집중적으로 표출된 공안통치적 폭압과 수서비리 사건과 페놀 사건, 민자당 당권 다툼 등 각종 비리와 실정, 그리고 물가 폭등과 주택 문제 등 민생 파탄의 지속에 대한 누적된 분노가 반독재 민주화투쟁과 결합되어 표출된 사건이다. 이 기간 동안 전국적으로 2,300여 회의 집회가 열렸고, 해체 민자당, 퇴진 노태우 라는 구호 아래 대규모의 시위들이 잇따라 터져 나왔다. 그 과정에서 학생, 빈민, 노동자 등 11명이 분신했고, 한진중공업 박창수 노조위원장의 의문사와 강경진압으로 인한 김귀정 성균관대생의 죽음까지 포함하여 모두 13명이 사망하였다. 5월투쟁은 크게 투쟁의 개시 및 확산기(4월 26일~5월 4일), 투쟁의 고양기(5월 9일~5월 18일), 투쟁의 퇴조기(5월 25일~6월 29일) 등 3시기로 구분할 수가 있다. 4월 26일 명지대에서 시위 도중 사복체포조인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의해 강경대 치사사건이 발생했는데, 전국을 한 달 남짓 태풍정국 으로 내몰았던 강경대 치사사건은 등록금 인상반대투쟁을 벌이다 전격 구속된 명지대 총학생회장의 석방을 요구하며 교문시위를 벌이는 24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51 과정에서 발생했다. 4월 26일 명지대 학생 강경대는 대학 교문을 사이에 두고 경찰과 충돌, 백골단에 의해 집단구타를 당하고 길에 쓰러진 뒤 동료 학생들에 의해 신촌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하고 말았다. 다음날인 4월 27일 고 강경대열사 폭력살인 규탄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 (범국민대책회의)가 결성된 것을 시작으로 규탄집회와 가두시위가 이어졌으며,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의 잇따른 분신 등으로 투쟁은 확산되어 갔다. 민주연합은 박승희 분신사건이 발생하자 강경대열사 폭력살인규탄과 박승희학생 분신 광주전남대책회의 를 구성하여 전남대학교병원에 대책위 사무실을 꾸리고 매일 대책회의를 열어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과 박승희 분신 사건에 대한 홍보와 투쟁을 계획했다. 4월 29일 명지대 서울대 부산대 전남대 등 전국 60여 개 대학에서 5만 명이 각 학교별로 규탄집회와 시위를 전개하였으며, 이어 서울에서는 고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과 공안통치 분쇄를 위한 범국민결의대회 가 5만 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이어 5월 1일에는 노동자, 학생들이 메이데이 투쟁과 결합하여 전국적으로 집회와 가두시위를 벌였고, 서울의 경우 2만여 노동자와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투쟁을 전개하였다. 5월 4일 백골단 전경 해체와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궐기대회 가 서울 부산 광주 등 전국 21개 지역에서 20여만의 학생, 재야, 시민들의 참여와 호응 속에 진행되었다. 이렇듯 시일이 경과하면서 투쟁은 점차 전국적으로, 전 계급계층으로 확대 발전되어 나가는 양상이었지만, 여전히 투쟁의 중심세력은 학생운동으로 기층 대중운동과의 결합은 사안적 연대 또는 계기적 결합 수준을 뛰어넘지 못했다. 5월 9일 민자당 해체와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결의대회 는 전국적으로 42개 시 군에서 30여만 명이 참여한 6공 이후 최대 규모의 조직적 시위였다. 또한 이 날의 시위는 규모 면에서뿐만 아니라 시위 참여자의 면에서도 일정한 변화와 발전을 보여주었다. 부산지역의 경우 10만여 인파가 시위에 동참, 서울에서 지역으로의 확산을 보여주었다. 전교조는 전국 4천여 개의 학교에서 점심시간 토론회 이후 초 중 고등학교 교사 2만5천 명이 참여하였다. 특히 전노협의 경우 소속 98개 노조 4만4천 명은 시한부 파업을, 360개 노조 18만 명은 점심시간 집회와 잔업 거부를 하는 등 458개 노조 22만 명이 집회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5월투쟁이 학생 중심에서 여타 계급계층으로 확산되어 가는 양상을 보여준 것이다. 이 같은 투쟁의 확대는 노태우 정부의 폭력성과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기본 동력으로 하면서, 6월 박창수 노조위원장의 의문사, 김기설 윤용하 김철수 이정순의 잇따른 분신, 전경의 양심선언, 각계각층의 서명운동과 성명서, 단식농성들을 계기로 확대되면서 더욱 고조되어 갔다. 그 와중에 5월 13일 전대협 구국결사대 소속 서울대 연세대 서강대 등 7개 대학생 47명에 의해 민자당 중앙당사 점거농성이 발생했다. 학생들은 강경대를 이대로 보낼 수 없다 고 쓴 대형 플래카드를 내건 뒤 해체 민자당 타도 노태우 등의 구호를 외치며 농성하다가 전원 249 민주화운동
252 연행되었다. 한편 5월 14일로 예정되었던 강경대 장례식은 경찰의 저지로 치러지지 못했다. 그러나 전국 30만의 학생, 시민, 재야인사들이 규탄시위에 참가하여 정부의 강경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투쟁이 여전히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각계각층의 시국선언이 잇따르는 가운데 15일, 16일, 17일 연일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집회와 가두시위가 전개되었다. 5월 18일 5 18국민대회와 2차로 치러진 강경대 장례식은 전국 81개 시 군의 40여만 학생 노동자 농민 재야 정당 등 각계각층의 참여 속에 전개되어 5월투쟁의 최정점에 이르렀다. 9만여 노동자의 총파업과 시 군 단위에서 농민의 참여가 이루어졌고, 전교조 전노협 여성연합 예술인 등 각계각층의 시국선언과 서명운동이 잇따랐다. 강경대 장례식이 끝난 5월 18일을 전후하여 범국민대책회의 는 공안통치 분쇄와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 로 명칭을 변경하고, 10대 강령을 내걸고 명동성당 농성투쟁에 돌입하였다. 범국민대책회의의 농성투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진행된 5월 25일 폭력살인 민생파탄 노태우 정부 퇴진 제3차 국민회의 는 경찰의 원천봉쇄로 광주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성사되지 못했고 전국적으로 투쟁의 파고가 현격하게 축소되었다. 5월 20일 새벽 광주에서 권창수가 경찰의 곤방에 맞아 의식불명 상태로 병원에 실려 가고, 5월 25일 김귀정의 죽음으로 다시금 긴장이 고조되고 있을 때인 6월 3일, 때마침 정원식 총리서리 계란 투척 사건 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패륜행위 라는 이름으로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노태우 정부에게는 정세 역전의 호재가 되어 이를 계기로 5월투쟁은 급격히 퇴조했다. 정세 역전에 결정적으로 쐐기를 박은 것은 6월의 광역의회 선거였다. 선거가 집권여당인 민자당의 압승으로 끝나면서 어느 해보다 길었던 1991년 5월과 6월의 투쟁은 종결되었다. 5월투쟁 정국은 공안통치의 폭압에 의해 침체를 벗어나지 못해온 범민주진영이 강경대 치사 사건을 계기로 정부에 대한 도전과 공세를 강화하는 것을 한편으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에 맞서 노태우 정부가 자신이 처한 정치적 수세를 이른바 민심수습 방안 으로 돌파하고 광역의회 선거 국면으로의 전환을 통해 정세주도권을 재 장악해 가는 양상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처럼 6공화국을 위기로 몰고 간 91년 5월투쟁은 한 대학생의 죽음이 가져다준 대중적 공분이 그동안 잠재해 있던 정부에 대한 불만과 결합하여 촉발된 대규모 투쟁이었다는 것, 대중조직에 기반을 둔 의식적이고 조직적인 투쟁이자 가두에서 벌어진 대중투쟁이었다는 점, 전국적이고 대규모적으로 완강하게 진행되었다는 점, 야당의 역할이 축소되고 민중운동이 주도권을 행사한 투쟁이었다는 점, 분신이라는 극한적인 선택까지도 불사했다는 점 등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5월투쟁의 의미나 특징을 떠나 투쟁과정 속에서 발생한, 역사상 전례 없는 타살과 자살의 비극적 반복이 대중들에게 준 충격은 실로 큰 것이었다. 젊은이들의 죽음과 분신은 노태우 정부의 공안통치에 대한 저항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투쟁의 의미는 정당화될 수 25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53 있을지 몰라도, 분신이라는 수단은 절대 합리화될 수 없다 는 여론이 형성되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노태우 정부는 운동진영의 도덕성과 신뢰성의 붕괴에 초점을 맞춰 5월투쟁을 소멸시키는 정세 역전의 카드로 활용하였다. 한편 5월투쟁은 노태우 정부의 집권 후반기 정국 운영 및 정부 재창출 계획에 일정한 타격을 주기도 했는데, 집권세력 내부의 역학관계를 변화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하여 김영삼의 입지 강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91년 5월투쟁 연구에 전념해온 김정한은 91년 5월투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는데(김정한 2011), 필자는 김정한 이 언급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맺고자 한다. 5월 투쟁의 배신자였던 386세대 는 대부분 야당과의 상층연합에 매진하여 제도정치권으로 진입했고, 10년 동안 민주정부에서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주도했으며, 기성 정치인들보다 더 탈민주적이고 대중들의 이해를 대표하는 데 무능력한 정치계급 으로 변모했다. 5월 투쟁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려는 후386세대 는 사회운동 내의 군사 문화, 위계적 조직 질서, 과도한 중앙 집중화, 정당 의존성, 성차별, 폭력성( 우리 안의 파시즘 ) 등을 성찰하고, 사회운동의 과제와 방식을 새롭게 고민하면서 기존의 민중운동이 몰락한 정세에서 새로운 운동 주체를 형성했다. 하지만 5월 투쟁의 역편향으로 지도부에 대한 신뢰의 상실이 지도부의 모든 권위를 배격하려는 아나키즘으로, 운동 문화에 실망이 조직적인 집단 행위보다 개인 활동을 중시하는 자유주의적 성향으로, 5월의 죽음과 폭력에 대한 트라우마가 비폭력 저항에 대한 무조건적인 선호로 나타난 측면도 존재한다. 251 민주화운동
254 [1991년 5월투쟁 일지] 01월04일~09일 조선대 총학생회 1.8결사항쟁 3주기 계승주간 으로 설정 01월07일 조선대 총학생회 1,8항쟁 3주기 계승 및 학원자주 완전쟁취와 내각제 개헌 결사저지를 위한 대동한마당 01월08일 조선대 총학생회 학원자주화 완전승리 및 민중생존권 쟁취를 위한 2만 학우 결의대회 개최 01월14일 ~ 20일 광산, 장성, 함평, 완도, 화순 등지에서 동계 농촌활동. 겨울철 근로, UR저지와 농촌발전대책의 허구성을 선전 01월28일-02월02일 여수YMCA 핵발전소 건설반대를 위한 반핵주간 선포. 01월31일 고흥 농민 벼 야적시위(벼 35가마 태워) 02월09일 순천대에서 전남지역총학생회연합 건설 준비 위원회 간담회 개최 02월26일 전남지역 총학생회 연합 소속 대학생 2백여 명, 오후 5시10분 광주지검에 화염병 1백여 개 던지며 격렬한 시위벌이다 20분 만에 해산 03월00일 여수YMCA 결성된 여수 여천지역사회운동협의회 에 참가함. 03월06일 조대병원의 아버지를 문병하고 있던 최호범(91년 정외과 졸업,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수배) 이 경찰에 연행. 조선대 총학생회 인간의 기본적 도리마저 무참히 짓밟고 애국민중을 탄압하는 노태우 정부를 결코 용서할 수 없으며 통일인사 석방투쟁과 국가보안법 철폐투쟁에 분연히 일어날 것 이라는 성명 발표 03월09일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남여성농민회 결성대회를 전남대 대강당에서 개최 03월12일 얼굴 없는 노동자 시인 박노해(본명 박기평 고흥출신) 검거(8.20 사형 구형) 03월16일 수서비리은폐조작 노태우 정부퇴진 국민대회 가 경찰의 원천봉쇄로 무산되자 남총련 소속 학생들 시내에서 산발적인 시위. 학생들은 결의문을 통해 수서비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노태우 정부 퇴진 및 민주정부 수립 등 4개항을 결의, 정부, 상무대 부지 내 시민공원개발 10만평 중 5만평 광주시에 무상 양여 밝혀 03월18일 여수YMCA공정선거 및 의정감시단 모집 / 부정선거고발센터 개설 03월20일 남총련 소속 2백여 명 미문화원 기습 타격. 한반도 긴장격화, 영구분단 가속화 팀스피리트 훈련 즉각 중지 주장 03월20일 ~ 21일 조선대 총학생회 출범식. 민족대학 사수와 민주총장 추대 승리, 조국의 자주민주통일투쟁의 힘찬 전개, 과학생회 활성화를 통한 전학대회 기초 마련 을 정책으로 제시함 03월24일 전남대에서 국민의료보험법 쟁취 및 90,91 쌀 전량수매 쟁취를 위한 전국 농민대회 25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55 개최. 이날 새벽 5시 30분경 대회 예정 장소인 조선대에 대한 경찰의 압수 수색, 시위용품 압수 및 13명 연행 03월26일 30년만의 지방자치제 실시에 따라 시 군 구 기초의회의원 선거 실시. 목포 녹색운동협의회 등 시민단체들, 물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의 모임 결성 (목포상수원인 영산강 되살리기 운동 전개) 03월27일 순천대학 민주광장에서 제4기 여수 순천지구 대학생대표자 협의회 출범식 개최 03월28일 호남에틸렌노동조합운동 제1차 임금교섭 시작. 04월02일 민주조선 편집위원이었던 조성국(89년 금속공학과 졸업)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2년 및 자격정지 1년 선고 04월03일 제1기 전남지역 총학생회 연합 건설 준비 위원회(이하 남총련 건준위) 를 조선대학교에서 5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함. 04월06일 영광어민 1백여 명 해상시위(실뱀장어 완전피해 보상 요구) 04월08일 여수여천지역사회운동 협의회 창립대회 04월17일~20일 4,19 계승주간 04월18일 4,19 혁명정신계승 마라톤 대회, 91학년도 학원자주화 완전승리를 위한 투쟁선포식 개최 04월20일 여수YMCA 4 19이념과 우리의 자세 라는 주제로 학생 약 20명이 참석한 가운데 4 19 기념식 개최. 04월29일 명지대생 강경대군 전경 구타로 사망 04월30일 전남대생 박승희 분신. 여수수산대 민주광장에서 김용대 학우 불법연행과 강경대 살인 규탄대회 를 약 500명의 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함. 학생들은 안기부 해체, 백골단 해체 등을 주장하며 가두시위를 전개하려다 경찰과 충돌함. 여수수산대 본관 1층에 강경대의 분향소가 설치됨. 05월01일 박승희 분신으로 대학생 시민 광주 도심서 비폭력 시위(1만여 명 참가). 여수수산대 학생들이 체육대회를 진행하던 중 안동대 김영균이 분신을 한 소식이 전해지자 6개 학과가 비상총회를 개최하고, 노태우 정부 퇴진과 백골단 해체 등을 주장하며 학생과 점거농성팀에 합류하였으며, 가두시위를 전개함, 노동절 기념집회 05월02일 여수수산대 각 학과별로 비상총회를 개최하고, 강경대 살인만행규탄 대회 를 개최함. 8 개학과 학생 4백여 명은 가두진출을 벌였고, 시민들에 유인물을 나누어줌. 05월03일 여수수산대 오전에 언론인과 비대위 주최 약식집회를 개최함. 오후에는 교수협의회(회장: 김행길 교수) 가 시국성명서를 발표함. 성명서의 내용은 민주화에 역행하는 공안정국 철회와 반민주 억압 철폐, 불법연행 금하고 평화시위 보장, 학생 분신과 같은 외골적 행동 253 민주화운동
256 자제, 학생은 학내에서 무력사용을 금하고 도덕적 우월성을 회복할 것 등 이었다. 05월04일 폭력살인 노태우 퇴진 및 백골단 해체 2차 국민대회 를 광주은행 사거리에서 치를 예정했으나 경찰의 원천봉쇄로 무산되자 시내 곳곳에서 가두시위, 여수수산대 민주광장에서 폭력살인 노태우 정부 타도와 백골단 해체를 위한 여수 여천 범시민대회 가 여수 여천사회운동협의회 주최로 개최됨. 약 200명이 참석한 이날 시위에서 각 단체의 입장과 앞으로의 투쟁방향을 밝히고, 5월 9일 민자당 창당 1주기를 맞아 범시민대회를 개최할 것을 결의함. 05월06일 여수수산대 총학생회가 확대운영위원회를 개최하고 고 강경대 열사 정신계승 및 김대용 학우 구출을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를 결성함. 05월07일 여수수산대 총학생회 주최로 고 강경대 천세용 김영균 열사 정신계승 및 김대용 학우 구출을 위한 청경학우 결의대회 를 500여 명의 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 05월08일 전민련 간부 김기설 분신 사망, 여수수산대에서 고 강경대 천세용 김영균 열사 정신계승 및 김대용 학우 구출을 위한 청경학우 제2차 결의대회 를 개최하고, 시가행진을 벌임. 05월09일 여수수산대 민주광장에서 오전에는 자주학원건설과 민자당 타도를 위한 투쟁본부 출범식 (의장: 조민중) 이 거행됨. 저녁 7시에는 여수시내에서 여수 여천 사회운동협의회 가 주최하는 여수 여천 범시민대회 가 약 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됨. 05월00일 여천군 화양면 이목리에 원전건립에 반대하는 제2차 반핵투쟁전개. 05월10일 강경대 치사 규탄대회, 광주 등 전국 87곳서 20여만 명 참가, 노동자 윤용하 분신 사망(5월 16일 장례) 05월12일 윤용하(성남피혁 노동자) 분신사망사건 조국의 참된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많은 젊은이들이 노태우 정부의 사냥감이 되고 만다는 유서를 남기고 전남대학교에서 분신 05월13일 전대협 민자당사 점거. 치사사건 책임자 처벌, 백골단, 전경해체, 민중생존권 보장, 노태우퇴진, 민자당 해체, 미국의 공안통치 사주와 시장개방 압력 중단, 유엔단독가입 철회, 비핵지대화 등을 요구 05월15일 조선대 총학생회 산하 민주총장추대를 위한 학생 특별위원회(위원장 : 노경환, 총학생회 부회장) 출범 05월17일 살인정부 노태우 정부 퇴진을 위한 반미구국투쟁위원회(위원장: 장경우, 유전자공학과 4 학년) 05월18일 5 18 광주민중항쟁 11주년 맞아 망월동 묘지에 1만여 명, 금남로 추모행사에 10만여 명 참가. 오전 10시 30분 보성 읍 보성고교에서 이 학교 3년 김철수(18) 온몸에 신나 뿌리고 분신자살 기도 중태 노태우 정부 퇴진 을 외치며 김철수(보성고생) 분신. 여수 25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57 여천 사회운동협의회와 여수수산대 총동아리연합회는 살인폭력 노태우 정부 타도와 광주항쟁계승 제2차 여수 순천 범시민대회 를 여수 교동 사거리에서 개최하려고 했으나 경찰의 차단에 공안통치분쇄 와 미국반대 등을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임. 05월19일 강경대 장례식 05월20일 강경대 운구 행렬 광주 도착, 광주 시내 곳곳서 6공 최대 공방(학생 경찰 4백여 명 부상) 10 만여 군중 5 18 계승대회 가짐 05월22일 시위대 권창수(22) 구타사건 수사 중인 광주지검, 전남도경 기동대 3중대 2소대 김형기상경 (21)등 전경 5명 구속. 오후 7시25분 전남대병원 영안실 옥상에서 정상순(26 보성군 겸백면 사곡리) 분신 투신하여 3m 아래로 추락 중태 05월25일 박승희 장례식. 성균관대생 김귀정 경찰의 진압 도중 사망 05월28일 조선대 대자협 산하 제2대 민주총장 추대를 위한 특별위원회(위원장 : 문병란 교수) 총장 추대 5개 원칙 합의(1. 구경영체제의 복귀를 완전히 배제할 수 있는 분, 2. 지성인으로서의 민주적 양심과 민주적 소신이 투철하신 분, 3. 대학 구성원의 총의를 반영하고 이의 수렴을 위해 적극 노력할 수 있는 분, 4. 덕망과 학식을 겸비하고 대학 경영능력을 갖춘 분, 5. 본교 설립동지회의 설립이념과 취지를 적극 공감하고 이의 발전적 구현을 위해 전력할 수 있는 분. 조선대생 심재령(전자계산학과 2학년), 경찰의 직격탄에 맞아 실명 05월29일 정상순(노동자) 투신사망사건 노동자여 투쟁하라. 시민들이여 함께 호흡하고 함께 외치고 투쟁하자 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분신 후 투신하여 5월 29일 전남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운명하였다. 06월00일 도 교육위원회는 구 신명학원 재단에게 학원정상화와 관련된 조치를 이행할 것을 담은 확약서 를 제출받고, 복귀를 승인했으나, 또 다시 부정과 비리가 자행되면서 교육민주화운동이 재개됨. 06월03일 정원식 총리 마지막 강의 중 외국어대생들에게 폭행당함 06월04일 조선대 총학생회 성명 발표. 길현이와 재령이의 눈을 앗아간 동부서장 구속 처벌, 치료 경비 일체 국가 부담, 현 정부의 장기집권 분쇄투쟁 등을 결의 06월08일 남진교통 노동조합 위원장 강대식이 회사가 조합원과 비조합원에 대한 차별대우를 하자 사장 김용현에게 시정할 것을 요구함. 사장이 부정적으로 대응하자 분신을 함. 강대식의 분신 소식이 전해지자 이를 항의하는 여수지역 노동자들의 시위가 10일에도 전개됨. 06월14일 호남에틸렌노동조합 조합원 90%의 찬성을 얻어 파업을 단행함. 06월18일 광주, 택시 파업으로 운행 중단 06월28일 광주 미문화원 점거. 남총련 5백여 명 화염병 기습, 현관 옥상서 반미 구호 06월29일 정부, 광주 보상금 국고서 충당 발표 255 민주화운동
258 07월08일 광주직할시 전남도 의회 개원 07월10일 자신의 아들인 강경대 치사사건 공판정에서 난동을 벌인 혐의로 사전구속 영장이 발부된 강민조(50), 전남대총학생회 사무실에서 기자회견 갖고 떳떳하게 진실을 밝히기 위해 자진 출두하겠다 고 밝힌 후 검찰에 출두 구속 25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59 제7장 민주화 이후 시대의 민주화운동: 결론을 대신하여 본문에서 기술된 주요 민주화운동의 의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4.19혁명은 광주 전남지역의 4월 혁명의 전개과정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서울 등의 상황과는 다른 광주 전남지역에서 전개된 4월 혁명의 지역적 특징을 살펴보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전국적으로 전개된 4 19월 혁명과 지역에서 전개된 4 19월 혁명의 공통점과 차이점, 4 19월 혁명이 광주 전남지역에 미친 영향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이 연구에서는 4 19혁명의 전개과정을 2단계로 나누어 1단계의 시기를 반독재민주화의 시기로, 2단계를 사회민주화 요구와 민족통일운동의 시기로 규정하여 각 시기별 전개과정을 살펴보았는데, 특히 우리 지역에서 청년운동의 효시로 알려진 통민청 활동을 정리한 것은 다른 연구에서 이루지 못한 중요한 이론적 성과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본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5 16쿠데타는 전후 한국사회가 갈림길에 선 상황에서 발생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모든 신생독립국가에서 민주주의(democracy)와 경제개발(development)은 반드시 달성해야 할 국가적 목표다. 그런데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정부 하에서 민주주의와 경제개발이라는 두 가지 국가적 목표가 동시에 추진된 적은 없었다. 아니 동시에 추진될 수 없었다. 이승만정부는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이나 의지도 없었고, 경제개발 역시 마찬가지였다. 철저하게 미국의 원조에 의존한 종속형 국가유지가 전략이라면 전략이었다. 결국 이승만정부는 민주주의도, 경제개발도 추진하지 못한 정부였다. 4 19혁명의 성공으로 집권한 장면정부는 최소한 형식적으로는 4월혁명의 과업이었던 권위주의 청산과 민주주의 실현의 과제를 외면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전후 복구의 완료와 경제개발의 전략적 추진이라는 과제에 골몰할 수밖에 없었다. 장면정부에서 입안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정치체제의 기본운영원리로서 민주주의와 국가기획 경제발전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병행 달성하려했던 최초의 시도였다. 그렇지만 장면정부는 민주주의의 완성도 경제개발의 추진과업도 제대로 착수해보지 못한 채 5 16쿠데타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5 16쿠데타는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와 경제개발의 병행발전전략에 대한 폐기였고, 경제개발을 통해 민주주의 억압을 대체하려했던, 257 민주화운동
260 반쪽 불구화된 국가발전전략 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민주주의와 병행하는 경제개발(Development with democracy)이 아닌 민주주의 없는 경제발전(development without democracy) 전략의 시작이었고, 한일회담을 통한 한일국교정상화는 민주주의 없는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마련을 위한 정부차원의 시도라는 의미를 갖는다. 물론 한일국교정상화의 추진은 이를 둘러싼 미국, 일본, 한국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던 측면이 있었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일회담을 통한 한일국교정상에 대한 국민적 감정은 박정희정부의 의도처럼 그렇게 동조적이지 않았고, 회담 추진과정에서 드러난 박정희정부의 졸속적 굴욕적 협상태도로 인해 국민적 반대에 부딪치게 된다. 박정희정부는 국민적 반감과 저항을 물리적 탄압과 진압이라는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대응함으로써 박정희정부 출범 이후 최대의 국민적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이 장에서는 박정희정부 출범 이후 최초의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이었던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살펴보았다. 지역차원에서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4 19혁명 당시 미성숙했던 민주화운동 주체 세력의 형성과 성장의 중요한 계기였다. 4 19혁명으로 폭발했던 지역의 운동역량은 5 16쿠데타를 계기로 퇴조하기에 이른다. 4 19혁명을 경험하고 주도했던 세력들이 대학에 진학하여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통해 운동세력으로 형성되고 새로운 운동세력들을 재생산하는 계기가 되었던 사건이 되었다. 둘째,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대학이 민주화운동의 중심지가 되는 전형을 창출했다. 고등학생들이 중심이 되었던 4 19혁명이 가진 한계 중의 하나는 지역 대학생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참여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인식하고 4 19혁명 이후 민통련과 통민청 등이 결성되어 대학생 이상의 청년운동이 조직화를 모색했으나 5 16쿠데타로 좌절되고 말았다.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대학생들이 반대운동의 선두에 서고, 고등학생과 시민들이 동참하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전형을 창출했으며, 광주 전남지역에서도 이러한 운동 모델이 작동하였다. 함성지 사건, 민청학련 사건 등으로 대표되는 광주 전남지역의 반유신운동은 기본적으로 폭압적인 유신체제로 인해 강요되었던 침체기의 사회운동을 대표한다. 건국 이래 가장 엄혹한 통제가 자행되었던 유신시대 하의 운동이었던 만큼 운동의 규모와 범위가 다른 시대와 비교할 때 폭발적이지 못한 측면이 있지만, 모두가 숨죽이고 있을 것을 강요당한 엄혹한 시절에 저항했다는 점에서 그 남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1987년 6월의 민주화운동은 4 19혁명, 5 18민주화운동 등과 더불어 한국사회의 민주화 과정에서 기념비적 위치를 차지하는 반독재민주화운동이다. 더구나 6월 항쟁은 4 19혁명과 5 18민주화운동을 밑거름 삼은 새로운 성취로서 선행했던 민주화운동이면서 이들 운동이 5 16쿠데타와 신군부의 집권과 같이 결정적인 반전을 겪었던데 반해 이러한 정치적 반전을 겪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다. 6월 민주화운동의 결과 한국사회 민주화의 대세가 확립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1980년 5 18항쟁을 경험하고 난 이후 광주와 전남지역의 민주화운동세력의 역량은 상당 25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61 부분 손상되었다. 대규모 항쟁을 겪고 난 이후 사회운동의 지도급 인사들과 핵심 활동가들은 체포, 구금, 수배 등으로 사회운동의 주체역량이 초토화 일보직전까지 진행되었다. 5 18항쟁의 진압 이후 지역의 민주화운동세력은 무엇보다도 5 18항쟁 과정에서 자행된 학살의 충격과 대규모 구속과 수배 등으로 인한 운동역량 상실의 충격에서 벗어나 5 18항쟁의 진상 혹은 진실을 규명하는데 주력했다. 최초에 5 18항쟁의 유가족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진상규명운동은 후에 오월운동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 민주화운동의 한 축을 형성했다. 5 18항쟁 이후 지역의 사회운동은 민주화운동의 동력과 주체역량을 복원하는 과정과 동시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생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종교운동, 교육운동, 여성운동 등 각 분야의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고립무원의 5 18항쟁의 실패를 자성하며 새로운 지역운동을 조직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사상 이론적으로 새롭게 준비하고 새로운 조직 활동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이 87년 6월항쟁을 가능케 했던 지역사회운동의 동력이었음을 설명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1991년 5월투쟁은 공안통치와 3당합당을 통해 권위주의적 통치로 회귀하던 노태우 정부를 최대의 위기로 몰아간 6공화국 최대의 대중투쟁이다. 광주전잠지역에서 전개된 91년 5월투쟁은 1980년 5 18항쟁의 데자뷰였다. 특히 91년 5월 운암대첩 은 5월항쟁과 가장 유사한 기시감을 보여주었다. 즉 운암대첩은 광주 시민들의 역동성. 헌신성, 공동체성 등 80년 5월을 또다시 보여주는 광주 지역의 압축적인 5월의 또 다른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주먹밥을 나누던 1980년 5월의 경험은 김밥을 나누는 91년 5월로 현상( 現 像 )되었다. 금남로와 도청 앞 분수대의 시민학생궐기대회의 모습은 1달여 동안 전남대병원 앞에서 진행된 추모와 공안정국 규탄의 집회로 현상되었다. 계엄군의 퇴각으로 형성된 해방의 공동체는 운암대첩을 통해 일시적으로나마 재현될 수 있었다. 91년 5월투쟁은 80년 5 18항쟁을 현상함으로써 광주시민들에게 오월항쟁의 데자뷰를 경험하도록 했다는 점에서 민주화운동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투쟁이었다. 이 책은 4 19혁명에서부터 91년 5월투쟁까지 5개의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광주 전남지역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민주화운동은 한국사회의 질적 도약을 가져온 원동력이었다. 굳이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 시대라는 구분법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정당성과 한국사회와 광주 전남지역에 미친 지대한 영향은 따로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지금의 시대는 산업화의 논리로 국민에게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요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정치적 정당성과 인지적 합리성이 없다면 어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담론과 정책, 요구도 통하지 않는 시대다. 마찬가지로 민주화된 정치체제에서 권위주의 시대에 더 잘 부합하는 민주화운동, 예컨대 거리의 정치나 동원의 정치가 무조건적으로 사회적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다. 259 민주화운동
262 지금은 가공할 독재나 살인적인 착취의 시대가 아니라 다양한 이해가 분출하는 시대, 분출된 이해가 충돌하면서 갈등의 충돌이 일상화되는 시대다. 독재나 착취는 공격해야 할, 비난해야 할 대상이 눈에 확실하게 보이기 때문에 저항을 주창하거나 참여를 조직하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했다. 비록 인신의 고통이 수반되더라도 사후적 정당화와 사회적 명예 명성의 획득도 가능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해와 갈등의 시대다. 혹자를 이를 포스트 민주주의 시대 혹은 민주화 이후 시대라고 호칭하고 있다. 민주화가 정치체제 내에서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포스트 민주주의 시대 혹은 민주화 이후 시대에도 민주화운동은 소멸하지 않는다. 아니 새로운 방식과 새로운 방향의 민주화운동이 더 절실히 요구된다. 새로운 방식, 새로운 시각의 민주화운동을 정립하기 위한 선결과제는 이전 시기 민주화운동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이다. 다소 거친 정리이긴 하지만, 이전 시기의 민주화운동이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반대였다면, 민주화 이후 시대 민주화운동은 체제(regime) 수호적 운동일수도 있고, 극단주의(extremism)에 대한 반대운동일수도 있다. 민주주의체제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한 운동은 현존하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운동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체제 수호적인 성격을 갖는다. 극단주의에 대한 반대운동은 민주주의 시대에 도처에서 분출하는 이해갈등을 해결하지 못할 때 등장하는 정치적 극단주의에 대한 반대일 수 있다. 이미 우리는 뉴라이트, 어버이연합,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의 등장과 같은 우파 극단주의자들의 출현을 목도하고 있고, 미국 대사에 대한 테러를 감행한 김기종과 같이 우파 극단주의의 거울이미지인 또 다른 형태의 극단적 행동주의자들의 출현도 목격하고 있다. 좌우 이념의 틀에 갇혀 있지 않은 타진요(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와 같은 극단주의 역시 언제든 정치적 이념과 결합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 의한 권위주의적 통치가 사라진 지금 정치적 극단주의는 좌와 우를 넘어 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민주주의의 적일 수도 있고, 민주주의 이후 시대의 새로운 민주화운동이 대응해야 할 직면한 위험이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민주화운동의 역사에 대한 정리일 것이다. 역사에 대한 성찰을 통해 민주화 이후 시대의 민주화운동의 미래 방향을 정립해야 한다. 26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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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 박흥주 년대 전반기 서울지역의 풍물운동계열 작품에 나타난 굿성 연구 : 1980~1987 년 6월항쟁 사이의 작품을 중심으로. 실천민속학연구 제23집 배긍찬 닉슨 독트린과 동아시아 권위주의 체제의 등장. 한국정치학회보 제22권 2호. 배긍찬 년대 전반기의 국제환경 변화와 남북관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년대 전반기 정치사회변동. 서울: 백산서당. 배성인 월, 그 날이 다시 오면 : 1991년 5월투쟁, 그 기억상실의 극복을 향하여. 진보평론 제12호 배성인 년 5월 투쟁과 기억의 정치 : 단절과 연속의 변증법. 진보평론 제50호 백낙청 월항쟁 이후 20년, 어디까지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황해문화 2007년 6 월호. 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부산 민주운동사. 부산: 부산광역시. 서중석 선개헌반대. 민청학련투쟁. 반유신투쟁. 역사비평 1988년 여름호(통권 제3 호). 서중석 월 혁명운동기의 반미 통일운동과 민족해방론. 역사비평 1991년 가을호( 통권 제16호). 서중석 년 이후 학생운동의 특징과 역사적 공과. 역사비평 1997년 겨울호(통권 41호)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상). 서울: 역사비평사. 서중석 한국 현대사 60년. 서울: 역사비평사. 서중석 유신체제와 전두환 정권을 뒤흔든 두 총선- 1978년 12 12총선과 1985년 2 12 총선. 대한민국 선거이야기. 서울: 역사비평사. 서중석 박정희 유신체제는 왜 7년 만에 붕괴되었나? 내일을 여는 역사 손병선 대악법 반대운동. 4월혁명연구소 편. 한국사회변혁운동과 4월혁명2. 서울: 한길사. 손승호. 유신체제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인권이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소식 손호철 정해구 제2공화국 시민사회와 사회운동. 백영철 편. 제2공화국과 한국민주주의. 서울: 나남출판. 송남헌 정태영 서중석 대담: 고초로 점철된 혁신계 50년. 역사비평 1995년 봄호 (통권 30호). 송은영 유신체제기 사회적 공간의 위계화와 동경-원한 의 감정구조. 역사문제연구 26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69 제29호 신광영 월 항쟁과 그 이후의 사회 변혁 운동. 문학과 사회 제2권 3호 신병식 박정희시대의 일상생활과 군사주의 : 징병제와 신성한 국방의 의무 담론을 중심으로. 경제와 사회 제72집 신욱희 이승만의 역할인식과 1950년대 후반의 한미관계. 한국정치외교사논총 26집 1호 신일섭 년 교육지표 사건 의 역사적 의의. 민주주의와 인권 제8집 3호 신종대 유신체제 수립 원인에 관한 재조명: 북한요인을 중심으로. 사회과학연구 제13 집.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신종대 유신체제 수립을 보는 북한과 미국의 시각과 대응. 아세아연구 제55집 3호 신치호 박정희 정권하의 국가와 노동관계. 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 노동연구 제 16집 안소영 한일관계와 비정식접촉자( 非 正 式 接 觸 者 ) : 국교정상화 성립 전후로부터 1970 년대 초반까지. 한국정치외교사논총 33집 1호 여수기독교청년회. 1996, 여수YMCA 50년의 발걸음. 여수기독교청년회. 여수YMCA 50년의 발걸음 역사문제연구소 남북한 독재체제의 성립과 분단구조: 남한 유신체제와 북한 유일체제의 비교. 역사비평사 편. 분단 50년과 통일시대의 과제. 서울: 역사비평사.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편 한국적 민주주의 와 유신체제.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근현대. 서울: 역사비평사.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편 월항쟁 시기 NL CA논쟁.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서울: 역사비평사.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편 한일회담 반대파동.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근현대. 서울: 역사비평사. 오오타 오사무 한일회담에 관여한 한국 관료의 일본인식.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오진곤 유신체제기 한국영화 증언 (1974)의 영화적 특징과 시대적 특수성. 영화연구 제50집 오창헌 유신체제 제도화의 실패에 관한 연구 : 정치적 제도적 변수를 중심으로. 한국정치학회보 제28집 2호 민주화운동 267
270 오창헌 유신체제의 동태와 미국의 영향. 국제정치연구 오창헌 유신체제와 한국현대정치. 서울: 도서출판 오름. 유병용, 공화당정부와 한일회담. 근현대사강좌, 제6호, 윤석인 월민주항쟁의 몇 가지 특징. 창작과비평 제16집 2호 윤선자 유신체제하 범국민 민주화운동 선언문. 한국근현대사연구 제22집 윤선자 광주항쟁과 1980~199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 민주주의와 인권 제5 권 2호 이갑윤 제2공화국의 선거정치: 7 29총선을 중심으로. 백영철 편. 제2공화국과 한국민주주의. 서울: 나남출판. 이광일 년 체제, 신자유주의 지구화 그리고 민주주의의 위기. 진보평론 제32호 이기훈 유신체제 성립의 정치적 배경과 7.4성명. 역사비평 제42집 이덕인 박정희정권기의 사형제도에 대한 실증적 분석과 비판 : 제3공화국 및 유신체제의 일반 형사사건을 중심으로. 형사정책연구 제25집 4호 이상우 민족일보 인혁당 사건의 전말. 신동아 6월호. 이성우 한일관계에 있어서 협력과 분쟁에 대한 경험적 분석: 일본 망언의 득실. 일본학회보 제69호. 이완범 김대중 납치사건과 박정희 저격사건. 역사비평 제80호. 이우관 에서 7 29총선까지. 4월혁명연구소 편. 한국사회변혁운동과 4월혁명2. 서울: 한길사. 이원덕 한일회담과 일본의 전후처리 외교, 한국과 국제정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Vol. 12, 이원덕 한일회담에서 나타난 일본의 식민지지배 인식. 한국사연구회. 한국사연구 이원덕 일본 측 한일회담(1945~1965) 외교문서 중 독도 관련 문서의 검토. 동북아역사재단. 영토해양연구 이재오 해방 후 한국 학생운동사: 1945년부터 1979년까지. 서울: 형성사. 이종석 월혁명 주도세력의 변천과정. 4월혁명연구소 편. 한국사회변혁운동과 4월혁명 1. 서울: 한길사. 이준식 박정희의 식민지 체험과 박정희시대의 기원. 역사비평 제89집 이창언 유신체제 하 학생운동의 집합적 정체성과 저항의 관계 : 대학 내 네트워크의 역할을 중심으로. 역사연구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71 이창언 NL(민족해방)계열 학생운동의 주류화와 한계. 이호룡 정근식 편. 학생운동의 시대. 서울: 도서출판 선인. 이태호 년대의 현장. 서울: 한마당. 이하나 유신체제기 민족문화 담론의 변화와 갈등. 역사문제연구 제28호 이현진 한일회담과 청구권 문제의 해결 방식 : 경제협력 방식으로의 전환과정과 미국의 역할을 중심으로. 동북아역사재단. 동북아역사논총 임혁백 유신의 역사적 기우원: 박정희의 마키아벨리적인 시간(상). 한국정치연구 13 집 2호. 임혁백 박정희에 대한 정치학적 평가 : 리더십. 근대화. 유신. 그리고 몰락. 고려대학교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평화연구 제20집 2호 임휘철 월항쟁 이후 한국경제 10년의 평가 경제민주화의 현주소. 동향과 전망 제34 집 장박진 한일회담에서의 피해보상 교섭의 변화과정 분석 : 식민지관계 청산에 대한 배상. 청구권. 경제협력 방식의 연속성 을 중심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신문화연구 31집 1호 장박진 한일회담 개시 전 한국정부의 재일한국인 문제에 대한 대응 분석 :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과 재일성 ( 在 日 性 )의 기원.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아세아연구 52(1) 장박진 한일회담 청구권 교섭에서의 세부 항목 변천의 실증분석 : 대일 8항목 요구 제5항의 해부.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신문화연구 제34집 1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전대협, 1991, 돌베개.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전국민족민주열사 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민족민주열사 희생자 자료집, 전남대학교 30년사 편찬위원회 전남대학교 30년사, 광주: 전남대학교 출판부. 전남대학교. 용봉 (제16호), 전남대학교. 용봉 (제17호), 전남대학교. 용봉 (제18호), 전남대학교. 용봉 (제22호), 전남대학교 전남대학교 30년사 전남대학교 전남대학교 50년사 전남대학교30년사편찬위원회 전남대학교 30년사, 전남대학교 출판부, 민주화운동 269
272 전남동부지역 사회연구회 지역과 전망 (제1집), 일월서각, 전남동부지역 사회연구회 지역과 전망 (제3집), 일월서각, 전남민주청년운동협의회 광주 (제2호), 전남민주청년운동협의회 광주 (창간호), 전남사회문제연구소 광주 전남민족민주운동(자료집), 전남사회문제연구소 광주 전남 민중민주운동(자료집), 전남사회문제연구소, 전남사회문제연구소 년 상반기 광주 전남 민중민주운동(자료집), 전남사회문제연구소. 전남사회문제연구소 전사연회보 (창간호), 전남사회연구회 지역사회연구 (제3호), 전남지역 대학생 대표자 협의회 선전국 남대협 신문(제2호), 전라남도, 전남여성 100년,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전라남도지 (제9권), 삼화문화, 전상숙 한 일 국교정상화의 출발점, 과거사 인식. 박진희 편. 한일회담- 제1공화국의 대일정책과 한일회담 전개과정. 서울: 선인. 전재호 년 5월 투쟁과 한국 민주주의 : 실패의 구조적 원인과 그 의미. 한국정치학회보 제38집 5호 전정호, 광주문화 제3호, 정근식 학생운동 연구를 위한 방법론 모색. 이호룡 정근식 편. 학생운동의 시대. 서울: 도서출판 선인. 정근식 권형택 편 지역에서의 4월혁명. 서울: 선인. 정기영 월혁명의 주도세력. 4월혁명연구소 편. 한국사회변혁운동과 4월혁명1. 서울: 한길사. 정대성 제2공화국 정부 국회의 일본관과 대일논조 : 한일관계, 한일통상, 한일회담, 재일교포 를 둘러싼 담론.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정대화 한국 민주주의와 시민운동의 관점에서 본 지방선거 : 6월 항쟁을 넘어서. 시민과 세계 제9호 정병준 미국 정보기관의 독도관련 자료와 독도문제 인식: 중앙정보국(CIA) CREST 비밀해제 자료를 중심으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정상호. 6월항쟁과 시민사회운동. 내일을 여는 역사 제28호 정유경 부산지역의 부마항쟁에 관한 고찰 : 지역사회운동의 관점에서,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한국민족문화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73 정일준 유신체제와 한미관계 : 미국문서를 통해 본 한미관계와 한국사회. 한국사회학회 사회학대회 논문집 정일준 한국 지식인의 대일인식과 한일회담. 한국사연구 131집 정일준 유신체제의 모순과 한미갈등 : 민주주의 없는 국가안보. 사회와역사 정일준 전두환 노태우 정권과 한미관계 : 광주항쟁에서 6월항쟁을 거쳐 6공화국 등장까지. 역사비평 제90집 정주신 월항쟁의 정치사적 특징. 민주주의와 인권 제4권 2호 정준영 스포츠공화국의 귀환, 1987년 6월항쟁과 스포츠. 역사비평 제78집 정진상 갑오농민전쟁, 3 1운동, 4월혁명, 6월항쟁의 비교분석: 6월항쟁과 한국의 변혁운동. 역사비평 제38집 정창현 월민중항쟁 직후 혁신정당운동과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연구반. 한국현대사 2. 서울: 풀빛. 정철희 중위동원과 6월항쟁 : 사회운동조직의 구조적 문화적 통합. 한국사회학 제 30집 정철희 민중담론과 6월항쟁의 문화적 기원. 한국사회학회 사회학대회 논문집 정태영 쿠데타 이후 혁신세력은 어떻게 존재하였나? 역사비평 1992년 가을호 (통권 제20호). 정태영 한국 사회민주주의 정당사. 서울: 세명서관. 정태영 조봉암과 진보당: 한 민주사회주의자의 삶과 투쟁. 서울: 후마니타스. 정태운 년대 공안사건 의 전개양상과 평가.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연구반. 한국현대사3. 서울: 풀빛. 정해구 한일회담과 박정희, 근현대사강좌, 제6호, 정해구 월민주항쟁의 전개. 역사문제연구소 편저. 20세기 한국사: 전두환과 80년대 민주화운동. 서울: 역사비평사. 조선대학교. 민주조선 창간호 조선대학교50년사편찬위원회. 조선대학교50년사, 호남문화사, 조선대학교사료편찬위원회. 조선대학교 사료집 (제3집), 호남문화사, 조아라 한일회담 과정에서의 미국의 역할 : 케네디 정권기 청구권 교섭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일본비평 제10호 조윤수 한국 교섭 참석자의 일본인식 변화와 한 일회담: 어업 및 평화선 위원회를 민주화운동 271
274 중심으로. 영토해양연구 제1권. 조윤수 한일회담과 독도 : 한국. 일본. 미국의 대응을 중심으로. 동북아역사재단. 영토해양연구 제4집 조윤수 년 한일어업협상의 정치과정. 동북아역사재단. 영토해양연구 조희연 유신체제와 긴급조치세대 민청세대 긴조세대 의 형성과 정치개혁 전망. 역사비평 제32집 조희연 한국의 국가 민주주의 정치변동. 서울: 당대. 조희연 년대 민족민주운동의 전개과정에 관한 연구. 한국사회운동사. 서울: 한울. 조희연 한국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의 동학. 서울: 나눔의집. 조희연 영구집권을 위한 유신체제의 등장.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 서울: 역사비평사.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역대선거정보시스템 ( 차기벽 , 과도정부, 장면정부의 의의. 강만길 고영복 외. 4월혁명론. 서울: 한길사. 차성환 유신체제와 부마항쟁 : 지배와 저항의 사회심리적 기제를 중심으로. 역사연구 채만수 월 항쟁과 민주주의, 그리고 노동자계급. 정세와 노동 제26호 채만수 월 항쟁과 민주주의 그리고 노동자계급. 피억압의 정치학(상). 서울: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천주교 광주 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편 광주시민 사회의식 조사: 광주민중항쟁을 중심으로, 빛고을 출판사 천주교인권위원회 엮음 사법살인-1975년 4월의 학살. 서울: 학민사. 최용호 년대 전반기 경제정책과 산업구조의 변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년대 전반기의 정치사회변동. 서울: 백산서당. 최웅 이석연 이홍길 이종범 최영태. 1989a. 한국에서의 혁신주의 정당운동의 전개와 그 성격(Ⅰ). 전남사학 제3집. 최웅 이석연 이홍길 이종범 최영태. 1989b. 한국 혁신주의 정당운동의 전개와 그 성격 (Ⅱ). 전남사학 제4집. 최익현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 6월항쟁 학술대회를 보고. 창작과비평 제 25집 3호 최장근 일본정부의 대일평화조약 시기의 죽도 영유권 인식 : 일본의 국회의사록을 27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75 중심으로. 한국일본문화학회. 일본문화학보 최장집 한국민주주의의 이론. 서울: 한길사. 최장집 제2공화국하에서의 민주주의의 등장과 실패. 백영철 편. 제2공화국과 한국민주주의. 서울: 나남출판. 최종길 전학련과 진보적 지식인의 한반도 인식 : 한일회담 반대 투쟁을 중심으로. 일본역사연구 제35집 최치원 민주화운동에 대한 하나의 실존적 해석 : 어두운 시대 에 감추어진 악의 평범성 문제. 민주주의와 인권 제11권 3호 한경남 년대 이후. 민족민주운동에서 노동운동의 위상변화. 전태일기념사업회 편. 한국노동운동20년의 결산과 전망. 서울: 세계.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 한국교회산업선교25주년기념대회자료편찬위원회, 노동현장과 증언: 1970 년대, 풀빛,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년대 민주화운동: 기독교 인권운동을 중심으로 Ⅲ, 한국기독교협의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년대 민주화운동(Ⅰ~Ⅷ).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년대 민주화운동: 기독교 인권운동을 중심으로Ⅲ. 서울: 한국기독교협의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년대 민주화운동Ⅳ,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6월민주화대투쟁, 민중사, 한국사료연구소(이정식 집필) 한국현대정치사(제3권): 제2공화국. 서울: 성문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년대 후반기의 정치사회변동. 서울: 백산서당. 한국정치외교사학회 유신체제의 수립과 전개 한국정치외교사논총 제15집 한국혁명재판사편집위원회. 1962a. 한국혁명재판사, 제2집. 한국혁명재판사편집위원회. 1962b. 한국혁명재판사, 제3집. 한국혁명재판사편집위원회. 1962c. 한국혁명재판사, 제4집. 한국혁명재판사편찬위원회, 한국혁명재판사 제3집,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현대사 사료연구 1,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광주5월민중항쟁자료총서, 출빛, 한상구 피학살자 유가족 문제. 4월혁명연구소 편. 한국사회변혁운동과 4월혁명2. 서울: 한길사. 함동주 전후일본의 역사인식과 한일회담. 일본사학회. 일본역사연구 민주화운동 273
276 홍석률 유신체제의 형성. 안병욱 외. 유신과 반유신. 서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석률 유신체제와 한미관계. 역사와현실 제88호 홍인숙 한일협정 체결 30년 특집 : 새로운 한일관계 위한 한일협정 재검토 한일회담에 대한 미 일의 구도와 대응. 역사비평 제30집 황 건 민통련과 민족통일운동. 4월혁명연구소 편. 한국사회변혁운동과 4월혁명2. 서울: 한길사. 황병주 유신체제의 대중인식과 동원 담론. 상허학보 제32집 황병주 년대 유신체제의 안보국가 담론. 역사문제연구 황병주 유신의 파산. 유신의 유산. 내일을 여는 역사 제48호 황병주 박정희 체제의 대중정치와 공안통치. 내일을 여는 역사 제53호 황병주 유신체제기 평등-불평등의 문제설정과 자유주의. 역사문제연구 제29호 황인성 뜨거운 함성의 현장에서 투쟁의 구심,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역사비평 제39 집 월간 말 (제17호), 월간 말 (제18호), 월간 말 (제55호), 월간 신동아 월간 예향 (제56호), 월간 예향 (제87호), 월간중앙 전남일보, 광주일보 전대신문 조대신문 한겨레 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제정 , 법률 제633호)( 27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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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7 8 9 1 12 13 14 15 1-1 16 17 1-2 18 1-3 19 1-4 20 2 22 23 24 25 2-1 26 2-2 27 2-3 28 2-4 29 2-5 30 3 31 32 33 34 3-1 35 3-2 36 3-3 37 3-4 38 4 39 40 41 42 4-1 43 44 45 4-2 46 47 4-3 48 49 4-4 50
4 7 7 9 3 3 4 4 Ô 57 5 3 6 4 7 Ô 5 8 9 Ô 0 3 4 Ô 5 6 7 8 3 4 9 Ô 56 Ô 5 3 6 4 7 0 Ô 8 9 0 Ô 3 4 5 지역 대표를 뽑는 선거. 선거의 의미와 필요성 ① 선거의 의미`: 우리들을 대표하여 일할 사람을 뽑는 것을 말합니다. ② 선거의 필요성`: 모든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지역의 일을 의논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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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가을 24호 2_ . 02 03 04 08 10 14 16 20 24 28 32 38 44 46 47 48 49 50 51 _3 4_ _5 6_ _7 8_ _9 10_ _11 12_ _13 14_ _15 16_ _17 18_ 한국광복군 성립전례식에서 개식사를 하는 김구(1940.9.17) 將士書) 를 낭독하였는데, 한국광복군이 중국군과 함께 전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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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총선과 남녀유권자의 정치의식 및 투표행태에 관한 연구 - 여성후보 출마 선거구 조사를 중심으로 - 2004. 7 여 성 부 제17대 총선과 남녀유권자의 정치의식 및 투표행태에 관한 연구 - 여성후보 출마 선거구 조사를 중심으로 - 2004. 7 여 성 부 연구요약 표 주제 및 연도별 여성유권자 연구 현황 표 출마한 여성후보 인지시기 투표후보여성
(중등용1)1~27
3 01 6 7 02 8 9 01 12 13 14 15 16 02 17 18 19 제헌헌법의제정과정 1945년 8월 15일: 해방 1948년 5월 10일: UN 감시 하에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 제헌 국회의원 198명 선출 1948년 6월 3일: 헌법 기초 위원 선출 1948년 5월 31일: 제헌 국회 소집. 헌법 기 초위원 30명과 전문위원 1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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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2006 Vol. 01 CONTENTS 02 Special Theme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Beautiful Huneed People 03 04 Special Destiny Interesting Story 05 06 Huneed News Hune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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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제 의식의 원칙 논문은 주제 의식이 잘 드러나야 한다. 주제 의식은 논문을 쓰는 사람의 의도나 글의 목적 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2) 협력의 원칙 독자는 필자를 이해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다. 따라서 필자는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말이 나 표현을 사용하여 독자의 노력에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3) 논리적 엄격성의 원칙 감정이나 독단적인 선언이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2 목차 편집자의 말 ------------------------------------------------------------------------------------- 3 한국의 * 상1 개괄 한국의 병역거부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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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3 4 290 5 291 1 1 336 292 340 341 293 1 342 1 294 2 3 3 343 2 295 296 297 298 05 05 10 15 10 15 20 20 25 346 347 299 1 2 1 3 348 3 2 300 301 302 05 05 10 10 15 20 25 350 355 303 304 1 3 2 4 356 357
(012~031)223교과(교)2-1
0 184 9. 03 185 1 2 oneclick.law.go.kr 186 9. (172~191)223교과(교)2-9 2017.1.17 5:59 PM 페이지187 mac02 T tip_ 헌법 재판소의 기능 위헌 법률 심판: 법률이 헌법에 위반되면 그 효력을 잃게 하거 나 적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 탄핵 심판: 고위 공무원이나 특수한 직위에 있는 공무원이 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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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입대하기 전까지만 해도 왜 그렇게까지 군대를 가려고하냐, 미친 것 아니냐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선택한 길이기에 후회는 없다. 그런 말을 하던 사람들조차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군대는 하루하루를 소종하게 생각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점점 변해가는 내 모습을 보며
나하나로 5호
Vol 3, No. 1, June, 2009 Korean Association of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 Korean Association of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KACPR) Newsletter 01 02 03 04 05 2 3 4 대한심폐소생협회 소식 교육위원회 소식 일반인(초등학생/가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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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60년기념전 시련과 전진 주 최 :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주 관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중앙일보 후 원 : SK Telecom, (주)부영, 다음 일 정 : 2005.8.14(일) ~ 8.23(일) 장 소 : 대한민국 국회 1. 내용의 일부 혹은 전체를 인용, 발췌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저자와 출처를 밝혀 주셔야 합니다. 2. 본 자료는 http://www.kdemocracy.or.kr/kdfoms/에서
p529~802 Á¦5Àå-¼º¸í,Ç×ÀÇ
제5장 >>> 성명서 선언문 항의 - 건의서 및 각종 공한 取材妨害 正 副統領 選擧 取材기자 暴行사건(서울)에 대한 聲明 1960년 2월 14일 / 聲明書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13일 영등포구청 앞 노상에서 한국일보 趙鏞勳기자와 미국 CBS서울주재 韓永道기자가 취재임무 수행중 수명의 폭력한들에게 피습된 불상사의 진상을 검토한 끝에 이는 한국의 민주주의 사상에
Gwangju Jungang Girls High School 이상야릇하게 지어져 이승이 아닌 타승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텔에 여장을 풀고 먹 기 위해 태어났다는 이념 아래 게걸스럽게 식사를 했다. 피곤하니 빨리 자라는 선생님의 말 씀은 뒷전에 미룬 채 불을 끄고 밤늦게까지 속닥거리며 놀았다. 몇 시간 눈을 붙이는 둥 마 는 둥 다음날 이른 아침에
152*220
152*220 2011.2.16 5:53 PM ` 3 여는 글 교육주체들을 위한 교육 교양지 신경림 잠시 휴간했던 우리교육 을 비록 계간으로이지만 다시 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우 선 반갑다. 하지만 월간으로 계속할 수 없다는 현실이 못내 아쉽다. 솔직히 나는 우리교 육 의 부지런한 독자는 못 되었다. 하지만 비록 어깨너머로 읽으면서도 이런 잡지는 우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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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Shipping Association 조합 뉴비전 선포 다음은 뉴비전 세부추진계획에 대한 설명이다. 우리 조합은 올해로 창립 46주년을 맞았습니다. 조합은 2004년 이전까 지는 조합운영지침을 마련하여 목표 를 세우고 전략적으로 추진해왔습니 다만 지난 2005년부터 조합원을 행복하게 하는 가치창출로 해운의 미래를 열어 가자 라는 미션아래 BEST
할렐루야10월호.ps, page 1-12 @ Normalize ( 할 437호 )
www.hcc.or.kr [email protected] Hallelujah News PHOTO NEWS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제437호 2007년 10월 7일 (주일) 화요청년찬양부흥회 날짜: 10월 16일, 11월 6일, 11월 20일 12월 4일, 12월 18일 (매달 1 3주 화요일) 장소: 할렐루야교회
학부모신문203호@@
02 05 06 08 11 12 2 203 2008.07.05 2008.07.05 203 3 4 203 2008.07.05 2008.07.05 203 5 6 203 2008.07.05 2008.07.05 203 7 8 지부 지회 이렇게 했어요 203호 2008.07.05 미친소 미친교육 촛불은 여전히 건재하다! 우리 학부모들은 근 2달여를 촛불 들고 거리로
대학생연수용교재 선거로본대한민국정치사
대학생연수용교재 선거로본대한민국정치사 1 ----------------------------------- 1 2 -------------------- 3 1. -------------------------- 3 2. ------------------------------ 5 3. ------------------------------ 7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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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0 http://www.homeplus.co.kr 11 http://www.homeplus.co.kr 12 http://www.homeplus.co.kr 13 http://www.homeplus.co.kr Interview 14 http://www.homeplus.co.kr Interview 15 http://www.homepl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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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140242-000001-08 2013-927 2013 182 2013 182 Contents 02 16 08 10 12 18 53 25 32 63 Summer 2 0 1 3 68 40 51 57 65 72 81 90 97 103 109 94 116 123 130 140 144 148 118 154 158 163 1 2 3 4 5 8 SUMMER
감사회보 5월
contents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동정 및 안내 상장회사감사회 제173차 조찬강연 개최 상장회사감사회 제174차 조찬강연 개최 및 참가 안내 100년 기업을 위한 기업조직의 역 량과 경영리더의 역할의 중요성 등 장수기업의 변화경영을 오랫동안 연구해 온 윤정구 이화여자대학교
광복60 년 종합학술대회 ( 제6 차) 올바른 과거청산을 위한 전국순회 심포지엄 종합자료집 청산하지 못한 역사, 어떻게 할 것인가? 주최 주관 : : 올바른과거청산을위한범국민위원회 올바른과거청산을위한범국민위원회 소속 지역단체 후원 :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1. 내용의 일부 혹은 전체를 인용, 발췌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저자와 출처를 밝혀 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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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면 2012.7.25 6:14 PM 페이지1 2012년 8월 1일 수요일 16 종합 고려대장경 석판본 판각작업장 세계 최초 석판본 고려대장경 성보관 건립 박차 관계기관 허가 신청 1차공사 전격시동 성보관 2동 대웅전 요사채 일주문 건립 3백여 예산 투입 국내 최대 대작불사 그 동안 재단은 석판본 조성과 성보관 건립에 대해서 4년여 동안 여러 측면에 서 다각적으로
120~151역사지도서3
III 배운내용 단원내용 배울내용 120 121 1 2 122 3 4 123 5 6 124 7 8 9 125 1 헌병경찰을앞세운무단통치를실시하다 126 1. 2. 127 문화통치를내세워우리민족을분열시키다 1920 년대일제가실시한문화 통치의본질은무엇일까? ( 백개 ) ( 천명 ) 30 20 25 15 20 15 10 10 5 5 0 0 1918 1920 (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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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Group 2006 AUTUMN Volume. 02 Focus Group 2006 AUTUMN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나는 두 길 모두를 가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그 곳에 서서 한쪽 길이 덤불 속으로 감돌아간 끝까지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쪽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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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책임자 가나다 순 머 리 말 2006년 12월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원장 - i - - ii - - iii - 평가 영역 1. 교육계획 2. 수업 3. 인적자원 4. 물적자원 5. 경영과 행정 6. 교육성과 평가 부문 부문 배점 비율(%) 점수(점) 영역 배점 1.1 교육목표 3 15 45점 1.2 교육과정 6 30 (9%) 2.1 수업설계 6 3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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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국민과 경찰이 함께 하는 역사와 체험의 복합 문화공간입니다. 국립경찰박물관은 우리나라 경찰 역사의 귀중한 자료들을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 졌습니다. 박물관은 역사의 장, 이해의 장, 체험의 장, 환영 환송의 장 등 다섯 개의 전시실로 되어 있어 경찰의 역사뿐만 아니라 경찰의 업무를 체험해 볼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멀고 어렵게만 느껴지던 경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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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도서관총서 1 경기도 도서관 총서 경기도도서관총서 1 지은이 소개 심효정 도서관 특화서비스 개발과 사례 제 1 권 모든 도서관은 특별하다 제 2 권 지식의 관문, 도서관 포털 경기도 도서관 총서는 도서관 현장의 균형있는 발전과 체계적인 운 영을 지원함으로써 도서관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간되 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를 통해 사회전반의 긍정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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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Journal of the Korea America Friendship Society (KAFS) Journal of the Korea America Friendship Society (KAFS) LASTING FRIENDS Journal of the Korea America Friendship Society (KAFS) LASTING FRIENDS
allinpdf.com
이책은북한에대한이해를돕기위해통일교육원에서발간한교재입니다. 각급교육기관등에서널리활용하여주시기바랍니다. 차례 Ⅰ. 북한이해의관점 Ⅱ. 북한의정치 차례 Ⅲ. 북한의대외관계 Ⅳ. 북한의경제 Ⅴ. 북한의군사 Ⅵ. 북한의교육 차례 Ⅶ. 북한의문화 예술 Ⅷ. 북한의사회 Ⅸ. 북한주민의생활 차례 Ⅹ. 북한의변화전망 제 1 절 북한이해의관점 Ⅰ. 북한이해의관점 Ⅰ. 북한이해의관점
이발간물은국방부산하공익재단법인한국군사문제연구원에서 매월개최되는국방 군사정책포럼에서의논의를참고로작성되었습니다. 일시 장소주관발표토론간사참관 한국군사문제연구원오창환한국군사문제연구원장허남성박사 KIMA 전문연구위원, 국방대명예교수김충남박사 KIMA객원연
이발간물은국방부산하공익재단법인한국군사문제연구원에서 매월개최되는국방 군사정책포럼에서의논의를참고로작성되었습니다. 일시 2017. 6. 22 장소주관발표토론간사참관 한국군사문제연구원오창환한국군사문제연구원장허남성박사 KIMA 전문연구위원, 국방대명예교수김충남박사 KIMA객원연구위원송대성박사前 ) 세종연구소소장방효복예 ) 중장前 ) 국방대학교총장남성욱박사고려대행정전문대학원장이원우박사前
2020 나주도시기본계획 일부변경 보고서(2009).hwp
2020 나주도시기본계획일부변경 2009 나주시 목 차 Ⅰ. 나주도시기본계획변경개요 1. 도시기본계획변경의배경및목적 1 2. 도시기본계획변경의기본원칙 2 3. 도시기본계획변경의범위 3 4. 추진절차 4 Ⅱ. 도시현황및특성 1. 도시현황및특성 5 2. 역사적 문화적특성 20 3. 도시세력권 24 4. 도시기능 25 5. 상위및관련계획검토 26 6. 개발잠재력분석
Drucker Innovation_CEO과정
! 피터드러커의 혁신과 기업가정신 허연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Doing Better Problem Solving Doing Different Opportunity ! Drucker, Management Challenges for the 21st Century, 1999! Drucker, Management: Tasks, Responsibil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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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 객사(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8호) 객사는 영조 35년(1759년)에 지어진 조선 후기의 관청 건물입니다. 원래는 가운데의 정당을 중심으로 왼쪽에 동대청, 오른쪽에 서대청, 앞쪽에 중문과 외문 그리고 옆쪽에 무랑 등으로 이 루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정당과 동대청만이 남아있습니다. 정당에서는 전하 만만세 라고 새 긴 궐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2010_04.... ....
2010 JC SEOUL 2010 JC SEOUL 2010년 4월 12일 월요일 2010 JC SEOUL Welcome night 참석한 회원을 소개하는 배상우 내무부회장 신승섭 회장이 Welcome Night에 참석한 회원들에게 환영 인사를 하고 있다. 축하인사를 하고 있는 이와다JC 다츠히코 이소다 회장 축하인사를 하고 있는 사이다마주오JC 히로유키 노자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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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노사관계 모델의 탐색 제 절 머리말 제 절 시장체제와 민주주의 자본주의 정치경제체제 유형 제 절 박정희 시대의 자본주의 정치경제체제 시장 형성적 권위주의 제 절 전두환 정권의 자본주의 정치경제체제 시장순응적 권위주의 제 절 노태우 김영삼 정권 하에서의 자본주의 정치경제 규제되지 않은 개방 경제 시장 민주주의 발전국가의 쇠퇴와 국가규율의 약화 재벌체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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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보호수사준칙개정안에 대한 국가인권위원회의 의견 국가인권위원회는 국가인권위원회법 제20조 제1항에 따른 법무부의 인권보호 수사준칙개정안에 대한 국가인권위원회의 의견 요청에 대하여 검토한 결과 국가인권위원회법 제19조 제1호에 의하여 아래와 같이 의견을 표명한다. 1. 개정안 제12조의 체포 등에 대한 신속한 통지조항에서 지체없이 라는 용어는 명확성의 원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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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ㅣ반딧불이ㅣ뒤엉켜 버린 삶, 세월이 흘러도 풀 수 없는.. 실타래 벌써 3년째 시간은 흘러가고 있네요. 저는 서울에서 엄마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에 가족들과 제주로 내려오게 되었답 니다. 몸과 마음이 지쳐있었고 우울증에 시달리며, 엄마의 죽음을 잊으려고 하였습 니다. 그러다 여기서 고향 분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 분들의
기본소득문답2
응답하라! 기본소득 응답하라! 기본소득 06 Q.01 07 Q.02 08 Q.03 09 Q.04 10 Q.05 11 Q.06 12 Q.07 13 Q.08 14 Q.09 응답하라! 기본소득 contents 16 Q.10 18 Q.11 19 Q.12 20 Q.13 22 Q.14 23 Q.15 24 Q.16 Q.01 기본소득의 개념을 쉽게 설명해주세요. 06 응답하라
단양군지
제 3 편 정치 행정 제1장 정치 이보환 집필 제1절 단양군의회 제1절 우리는 지방자치의 시대에 살며 민주주의를 심화시키고 주민의 복지증진을 꾀 하고 있다. 자치시대가 개막된 것은 불과 15년에 불과하고, 중앙집권적 관행이 커 서 아직 자치의 전통을 확고히 자리 잡았다고 평가할 수는 없으며, 앞으로의 과제 가 더 중요하다는 진단을 내릴 수 있다. 우리지역 지방자치의
A000-008목차
1 농어촌 지역과 중소도시 및 대도시 낙후지역에 150개의 기숙형공립 고교를 설립하여 학생의 80% 정도가 기숙사에 입주할 수 있는 시설을 준비하겠습니다. 농어촌 지역과 중소도시 등 낙후지역에 150개의 기숙형공립고교를 설립 학생의 80% 정도가 기숙사에 입주할 수 있는 시설을 준비하고, 기숙사비는 학생의 가정형편을 반영한 맞춤형 장학금으로 지원하여 더 이상
60-Year History of the Board of Audit and Inspection of Korea 제4절 조선시대의 감사제도 1. 조선시대의 관제 고려의 문벌귀족사회는 무신란에 의하여 붕괴되고 고려 후기에는 권문세족이 지배층으 로 되었다.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새로이 신흥사대부가 대두하여 마침내 조선 건국에 성공 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조선양반사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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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02 8 9 32 33 1 10 11 34 35 가족 구조의 변화 가족은 가족 구성원의 원만한 생활과 사회의 유지 발전을 위해 다양한 기능 사회화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의 행동 가구 가족 규모의 축소와 가족 세대 구성의 단순화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 1인 또는 1인 이상의 사람이 모여 주거 및 생계를 같이 하는 사람의 집단 타나는 가족 구조의
어린이 비만예방 동화 연극놀이 글 김은재 그림 이 석
캥거루는 껑충껑충 뛰지를 못하고, 여우는 신경질이 많아졌어요. 동물 친구들이 모두 모두 이상해졌어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멧돼지네 가게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요? 염소 의사 선생님은 상수리나무 숲으로 가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했답니다. 상수리나무 숲에는 어떤 비법이 숨겨져 있는 지 우리 함께 숲으로 가볼까요? 이 동화책은 보건복지부의 국민건강증진기금으로
2002report220-10.hwp
2002 연구보고서 220-10 대학평생교육원의 운영 방안 한국여성개발원 발 간 사 연구요약 Ⅰ. 연구목적 Ⅱ. 대학평생교육원의 변화 및 외국의 성인지적 접근 Ⅲ. 대학평생교육원의 성 분석틀 Ⅳ. 국내 대학평생교육원 현황 및 프로그램 분석 Ⅴ. 조사결과 Ⅵ. 결론 및 정책 제언 1. 결론 2. 대학평생교육원의 성인지적 운영을 위한 정책 및 전략 목
1. 이 사건 공소사실의 요지 이 사건 공소사실의 요지는 피고인 함선주, 김 영은는 삼성에스디아이(SDI)주식회사(이하 삼성SDI'라고 함)의 협력업체인 영 회사 소속 근로자였고, 피고인 강용환는 또 다른 협력업체인 명운전자 주식회사 소 였다. 삼성SDI는 세계 디스플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위반 [울산지법, 2008.6.10, 2008고정204] 판시사항 [1] 근로자 1인이 고용보장을 위해 회사 앞에서 벌인 소위 1인 시위 가 집회 법률 제2조 제2호의 시위 에 해당하는지 여부(소극) [2] 집회 또는 시위에 공모공동정범이론을 적용하여 미신고 옥외집회나 시위의 참가자 집회 또는 시위의 주최자로 볼 수 있는지 여부(소극) 판결요지
내지(교사용) 4-6부
Chapter5 140 141 142 143 144 145 146 147 148 01 02 03 04 05 06 07 08 149 활 / 동 / 지 2 01 즐겨 찾는 사이트와 찾는 이유는? 사이트: 이유: 02 아래는 어느 외국계 사이트의 회원가입 화면이다. 국내의 일반적인 회원가입보다 절차가 간소하거나 기입하지 않아도 되는 개인정보 항목이 있다면 무엇인지
0.筌≪럩??袁ⓓ?紐껋젾001-011-3筌
3 4 5 6 7 8 9 10 11 Chapter 1 13 14 1 2 15 1 2 1 2 3 16 1 2 3 17 1 2 3 4 18 2 3 1 19 20 1 2 21 크리에이터 인터뷰 놀이 투어 놀이 투어 민혜영(1기, 직장인)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 가치가 있는 일을 해 보고 싶 어 다니던 직장을 나왔다. 사회적인 문제를 좀 더 깊숙이 고민하고, 해결책도
2015년9월도서관웹용
www.nl.go.kr 국립중앙도서관 후회의 문장들 사라져 버릴 마음의 잔해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이번 해에도 배추농사에서 큰돈을 남은 평생 머릿속에서 맴돌게 될 그 말을 다시 떠올려보 만졌다 하더라도 지난 여름 어느 날 갑자기 들기 시작한 았다. 맺지 못한 채 끝나버린 에이드리언의 문장도 함께. 그 생각만은 변함없을 것 같았다. 같은 나이의 다른 아이 그래서
가해하는 것은 좋지 않은 행동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불쌍해서이다 가해하고 나면 오히려 스트레스를 더 받을 것 같아서이다 보복이 두려워서이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화가 나고 나쁜 아이라고 본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런 생각이나 느낌이 없다 따돌리는 친구들을 경계해야겠다 남 여 중학생 고등학생 남 여 중학생 고등학생 남 여 중학생 고등학생 남 여
2014학년도 수시 면접 문항
안 경 광 학 과 세부내용 - 남을 도와 준 경험과 보람에 대해 말해 보세요. - 공부 외에 다른 일을 정성을 다해 꾸준하게 해본 경험이 있다면 말해 주세요. - 남과 다른 자신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지 말해 주세요. - 지금까지 가장 고민스러웠던 또는 어려웠던 일과 이를 어떻게 해결하였는지? - 자신의 멘토(조언자) 또는 좌우명이 있다면 소개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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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Sanhak Foundation News VOL. 150 * 2011. 12. 30 논단 이슈별 CSR 활동이 기업 충성도에 미치는 영향 : 국가별 및 산업별 비교분석 최 지 호 전남대 경영학부 교수 Ⅰ. 서론 Ⅰ. 서론 Ⅱ. 문헌 고찰 및 가설 개발 2. 1. 호혜성의 원리에 기초한 기업의 사회적 투자에 대한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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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M작물실용화사업단 인식조사 및 실용화 방향 설정 GM작물 인식조사 및 실용화 방향 설정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 김욱 박사 1. 조사목적 GM 작물 관련 인식조사는 사회과학자들을 바탕으로 하여 국내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GM 작물 관련 인식 추이를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모니터링하여 인식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를 탐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2. 조사설계 2.1.
1960 년 년 3 월 31 일, 서울신문 조간 4 면,, 30
1960 년대 1960 년 35 1960 년 3 월 31 일, 서울신문 조간 4 면,, 30 36 37 1960 년 [ è ] 1851 1 [ ] 1 é é é 1851 É 1960 년 2 1 2 11 1952 22 38 1961년 1961년 39 1961 년 3 월 14 일, 한국일보 4 면, 2 3 2 3 40 1962년 1962년 41 1962 년 1
갈등관리 리더십 연구결과 보고서.hwp
- 3 - - 4 - - 5 - - 6 - - 1 - - 2 - 김영삼정권 (1993-1997) 김대중정권 (1998-2002) 노무현정권 (2003-2007) 이명박정권 (2008-2012) 93 94 95 96 97 98 99 00 01 02 03 04 05 06 07 08 09 10 11 12 방폐장건설갈등사례 (1991-2005.11) == == ==
61..
61 2012 1 2 호 년 월호 사진으로 보는 독립정신 2011년 7월 21일 대한민국의 오늘날이 있게 한 당신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그리고 당신들이 바친 청춘이 있었기에 바로 오늘날 대한민국의 청춘들이 있습니다. 조국 광복을 향한 그 외롭고 험난한 여정에 청춘을 바쳤던 독립투사들의 숭고한 희생과 큰 뜻에 마음이 절로 숙연해집니다. 2012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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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평등 캠퍼스 문화 조성을 위하여... 고려대학교 양성평등센터 는 2001년 6월에 제정된 성희롱 및 성폭력 예방과 처리에 관한 규정 에 의거하여 같은 해 7월에 설치된 성희롱및성폭력상담소 를 2006년 10월 개칭한 것입니다. 양성평등 센터 로의 개칭은 교내에서 발생하는 성피해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과 상담 제공뿐만 아니라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한 양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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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연구 http://www.kbc.go.kr/ 프로그램 선택은 다단계적인 과정을 거칠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 본 연 구는 TV시청을 일상 여가행위의 연장선상에 놓고, 여러 다양한 여가행위의 대안으로서 TV시청을 선택하게 되는 과정과, TV를 시청하기로 결정할 경우 프로그램 선택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지는지 밝히고자 했다. 27) 연구 결과, TV시청
인천개항장역사기행
History Road Map 2 14 28 32 34 36 38 40 43 44 47 51 55 56 58 64 66 67 69 70 72 79 86 88 89 92 93 96 99 100 103 104 105 107 108 110 114 115 117 119 124 126 127 129 131 131 133 135 136 137 140 141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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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이 스승님이 스승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씀하시기를 말씀하시기를 알라는 위대하다! 위대하다! 알라는 알라는 위대하다! 특집 특집 기사 특집 기사 세계 세계 평화와 행복한 새해 경축 세계 평화와 평화와 행복한 행복한 새해 새해 경축 경축 특별 보도 특별 특별 보도 스승님과의 선이-축복의 선이-축복의 도가니! 도가니! 스승님과의 스승님과의 선이-축복의 도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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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s p x f p (x) f (x) VOL. 46 NO. 12 2013. 12 43 p j (x) r j n c f max f min v max, j j c j (x) j f (x) v j (x) f (x) v(x) f d (x) f (x) f (x) v(x) v(x) r f 44 r f X(x) Y (x) (x, y) (x, y) f (x, y) VOL.
10월추천dvd
2011 10 DVD CHOICE dvd dvd?!!!! [1] [2] DVD NO. 1898 [3] Days of Being Wild 지금도 장국영을 추억하는 이는 많다. 그는 홍콩 영화의 중심에 선 배우였고,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거짓말 같던 그의 죽음은 장국 영을 더욱 애잔하고, 신비로운 존재로 만들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 이 장국영을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5월전체 :7 PM 페이지14 NO.3 Acrobat PDFWriter 제 40회 발명의날 기념식 격려사 존경하는 발명인 여러분! 연구개발의 효율성을 높이고 중복투자도 방지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국 26
5월전체 2005.6.9 5:7 PM 페이지14 NO.3 Acrobat PDFWriter 제 40회 발명의날 기념식 격려사 존경하는 발명인 여러분! 연구개발의 효율성을 높이고 중복투자도 방지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국 26개 지역지식재산센터 를 통해 발명가와 중소기업들에게 기술개발에서 선진국은 첨단기술을 바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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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읽는 우리 과학 교사용 지도서 자연 6-1 초등학교 교육과정 해설(Ⅱ) STS 프로그램이 중학생 과학에 관련된 태도에 미치는 효과 관찰 분류 측정훈련이 초등학생의 과학 탐구 능력과 태도에 미치는 영향 국민학교 아동의 과학 탐구능력과 태도 향상을 위한 실 험자료의 적용 과학사 신론 중 고등학생의 과학에 대한 태도 연구 과학사를 이용한 수업이 중학생의 과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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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1 융합 과학 2011년도 1학기 중간고사 대비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1 빅뱅 우주론에서 수소와 헬륨 의 형성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4 서술형 다음 그림은 수소와 헬륨의 동위 원 소의 을 모형으로 나타낸 것이. 우주에서 생성된 수소와 헬륨 의 질량비 는 약 3:1 이. (+)전하를 띠는 양성자와 전기적 중성인 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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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분당판 21권 7호 2015년 2월 15일 생명순활동상황 생명순활동상황 생명순 보고는 토요일 오전까지 마쳐주십시오. 보고자 : 김연호 목사 010-9251-5245 보고 : 각 교구 조장님께서 교구 사역자에게 보고해 주세요. 분당판 21권 7호 2015년 2월 15일 생명순활동상황 전도실적은 전도 한 분이 소속한 교구의 생명순에 전도한 인원수를 추가합니다.
1. 상고이유 제1점에 대하여 구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2009. 2. 6. 법률 제9444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이하 구 도시정비법 이라 한다) 제4조 제1항, 제3항은 시 도지사 또는 대도시의 시장이 정비구 역을 지정하거나 대통령령이 정하는 경미한 사항을 제외한
대 법 원 제 1 부 판 결 사 건 2012두6605 사업시행계획무효확인등 원고, 상고인 원고 1 외 1인 원고들 소송대리인 법무법인(유한) 태평양 담당변호사 이인재 외 2인 피고, 피상고인 서울특별시 종로구청장 외 1인 소송대리인 정부법무공단 외 3인 원 심 판 결 서울고등법원 2012. 2. 2. 선고 2011누16133 판결 판 결 선 고 201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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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구번호 가구번호 - 한국종합사회조사 성균관대학교서베이리서치센터 종로구성균관로 전화
조사구번호 가구번호 - 한국종합사회조사 성균관대학교서베이리서치센터 종로구성균관로 전화 [email protected] http://src.skku.edu http://kgss.skku.edu 인사말씀 안녕하십니까 저희성균관대학교서베이리서치센터 에서는지난 년이래해마다한국종합사회조사 를시행하고있습니다 이조사는한국사회를종합적으로파악하고세계의주요국가들과비교연구하는데필요한자료를만들어내는목적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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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ex-police.or.kr 2 3 4 5 6 7 시도 경우회 소식 2008年 4月 10日 木曜日 제1362호 전국 지역회 총회 일제 개최 전남영광 경우회 경북구미 경우회 서울양천 경우회 경남마산중부 경우회 경북예천 경우회 서울동대문 경우회 충남연기 경우회 충남예산 경우회 충남홍성 경우회 대전둔산 경우회 충북제천 경우회 서울수서 경우회 부산 참전경찰회(부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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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분당판 20권 21호 2014년 5월 25일 생명순활동상활 생명순활동상황 생명순 보고는 토요일 오전까지 마쳐주십시오. 보고자 : 김연호 목사 010-9251-5245 보고 : 각 교구 조장님께서 교구 사역자에게 보고해 주세요. 분당판 20권 21호 2014년 5월 25일 생명순활동상황 전도실적은 전도 한 분이 소속한 교구의 생명순에 전도한 인원수를 추가합니다.
12 December 소비자의날안전점검의날 (273 차 ) 무역의날 대설 ( 大雪 )
2019 C A L E N D A R 12 December 110.24 2 3 4 5 6 7 8 10.25 소비자의날안전점검의날 (273 차 ) 무역의날 10.29 대설 ( 大雪 ) 11.2 9 10 11 12 13 14 15 11.3 11.4 11.5 11.6 11.7 11.8 11.9 16 17 18 19 20 22 11.10 11.11 11.12 11.13
1. 보고서의 목적과 개요 (1) 연구 목적 1) 남광호(2004), 대통령의 사면권에 관한연구, 성균관대 법학과 박사논문, p.1 2) 경제개혁연대 2008.7.23. 보도자료, 경제개혁연대, 사면심사위원회 위원 명단 정보공개청구 -2-
8.15 :. 서울 종로구 운니동 65-1 오피스텔월드 606호 02-763-5052 www.ser.or.kr -1- 1. 보고서의 목적과 개요 (1) 연구 목적 1) 남광호(2004), 대통령의 사면권에 관한연구, 성균관대 법학과 박사논문, p.1 2) 경제개혁연대 2008.7.23. 보도자료, 경제개혁연대, 사면심사위원회 위원 명단 정보공개청구 -2- (2)
2저널(11월호).ok 2013.11.7 6:36 PM 페이지25 DK 이 높을 뿐 아니라, 아이들이 학업을 포기하고 물을 구하러 가를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 본 사업은 한국남동발전 다닐 정도로 식수난이 심각한 만큼 이를 돕기 위해 나선 것 이 타당성 검토(Fea
24 2저널(11월호).ok 2013.11.7 6:36 PM 페이지25 DK 이 높을 뿐 아니라, 아이들이 학업을 포기하고 물을 구하러 가를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 본 사업은 한국남동발전 다닐 정도로 식수난이 심각한 만큼 이를 돕기 위해 나선 것 이 타당성 검토(Feasibility Study) 등을 수행하여 인니전력 이다. 공사(PLN)를 비롯한 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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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위면직자 취업제한 업무편람 2004 부 패 방 지 위 원 회 편람이용안내 비위면직자 취업제한 제도 - 1 - 1. 제도개요 가. 제도의의 나. 법적근거 - 3 - 2. 적용대상공직자 및 부패행위의 정의 가. 공공기관(부패방지법 제2조제1호) - 4 - 나. 공직자(부패방지법 제2조제2호) - 5 - - 6 - 다. 부패행위(부패방지법 제2조제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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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한 나날을 그리다 안전한 나날을 그리다 01 16 22 28 32 36 40 44 50 54 58 02 62 68 90 94 72 98 76 80 102 84 03 04 106 142 110 114 118 122 126 130 134 148 154 160 166 170 174 138 05 178 182 186 190 194 200 204 208 212
성인지통계
2015 광주 성인지 통계 브리프 - 안전 및 환경 Safety and Environment - 광주여성 사회안전에 대한 불안감 2012년 46.8% 2014년 59.1% 전반적 사회안전도 는 여성과 남성 모두 전국 최하위 사회안전에 대한 인식 - 2014년 광주여성의 사회안전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면, 범죄위험 으로부터 불안하 다고 인식하는 비율이 76.2%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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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P. Vol. SUMMER Vol. WINTER 2015. vol 53 Pearl S. Buck Foundation Korea 4 Pearl S. Buck Foundation Korea 5 Pearl S. Buck Foundation Korea 프로그램 세계문화유산 걷기대회 Walk Together 탐방길곳곳에서기다리고있는조별미션활동! 남한산성 탐방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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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 2. 3. 4. 제2장 아동복지법의 이해 12 4).,,.,.,.. 1. 법과 아동복지.,.. (Calvert, 1978 1) ( 公 式 的 ).., 4),. 13 (, 1988 314, ). (, 1998 24, ).. (child welfare through the law) (Carrier & Kendal, 1992). 2. 사회복지법의 체계와
복지백서내지001~016화보L265턁
Photo S tory 사진으로 보는 서울의 사회복지 1950년대 아동복지시설 연합 체육대회 (창경원) 3 1950년 삼성농아원 초창기 구화교육 (이진주 선생) 1928년 용정부녀자합동급식소 (명진보육원 전신) 1920년대 초기 태화유치원 교육 1930년대 무산아동운동장 (태화여자관 전경) 1936년 경성양로원 (1927년 설립, 1954년 현재의 청운양로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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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B553003-000001-08 함께하자! 대한민국! Summer COVER STORY Contents www.pcnc.go.kr facebook.com/pcnc11 instagram.com/pcnc_official youtube.com/pcnctv cover story communication people culture news & epilogue 2016
04 특집
특집 도서관문화 Vol.51 NO.5(2010.5) 시작하는 말 18 특집 : 소셜 네트워크를 활용한 도서관 서비스 소셜 네트워크란? 19 도서관문화 Vol.51 NO.5(2010.5) 20 특집 : 소셜 네트워크를 활용한 도서관 서비스 소셜 네트워크, 환경에 따라 변모하다 21 도서관문화 Vol.51 NO.5(2010.5) 소셜 네트워크와 도서관을 결합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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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v vi vii viii ix x xi 61 62 63 64 에 피 소 드 2 시도 임금은 곧 신하들을 불러모아 나라 일을 맡기고 이집트로 갔습니다. 하 산을 만난 임금은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말했어요. 원하시는 대로 일곱 번째 다이아몬드 아가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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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기자저널 한국방송기자클럽 발행인 양영철 편집인 박노흥 월간 발행처 2015 8August 1990년 6월 20일 창간 서울시 양천구 목동동로 233(목동) 방송회관12층 TEL. 02) 782-0002,1881 FAX. 02) 761-8283 www.kbjc.net 제197호 Contents 02~03 방송이슈 한국방송대상 작품상 33편 개인상 24인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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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도서관정책제안자료집 2010. 7 02-529-7310, Fax: 02-6442-7310, E-mail : cultureandlibrary@ gmail.com - 2 - 1. 강원도 [ 표 1] 2008 년말기준전국공공도서관 1 관당지표 도서관수 ( 관 ) 연면적 ( m2 ) 장서수 ( 권 ) 직원수 ( 명 ) 사서수 ( 명 ) 예산 ( 천원 ) 자료구입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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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파 방송의 여성인력 현황 및 전문화 방안 연구 한국여성개발원 발간사 Ⅰ....,.,....... .. Ⅱ. :...... Ⅲ.,,. ..,.,.... 9 1 1.. /.,. PD,,,,, / 7.93%. 1%... 5.28% 10.08%. 3.79%(KBS MBC), 2.38 %(KBS MBC) 1%...,. 10. 15. ( ) ( ), ( ) ( )..
2013 국토조사연감 075 전국 대기오염도(SO2) 0.020 0.018 1995년 대기오염도(SO2) (ppm) 0.018 0.016 0.014 0.012 0.010 0.008 0.007 0.006 0.006 2010년 2012년 0.004 0.002 0.000 1
제1장 국토조사 개요 제2장 주요 국토지표 제3장 주요 통계자료 요약 제4장 부록 074 SECTION 6. 환경과 방재 대기오염도(SO2, 아황산가스) 제 2장 주요 국토지표 지표명 대기오염도(SO2) 개념(산정식) 단 위 대기 중 이산화황의 농도 ppm 제공연도 1990~2012 공간단위 시도, 시군구 자료출처 환경부 대기오염도현황 대기오염물질 중 아황산가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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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5 6 7 여행 스테인드글라스 을 노래했던 하느님의 영원한 충만성을 상징하는 불꽃이다. 작품 마르코 수사(떼제공동체) 사진 유백영 가브리엘(가톨릭 사진가회) 빛은 하나의 불꽃으로 형상화하였다. 천사들과 뽑힌 이들이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하며 세 겹의 거룩하심 가 있을 것이다. 빛이 생겨라. 유리화라는 조그만 공간에 표현된 우주적 사건인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