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적으로 민보군 지도자 맹영재( 孟 英 在 )는 기전소모관 겸 지평현감이 되었 다. 지평민보군은 경기도와 충청도 여러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을 견제하면서 그 지도자들을 체포하였다. 10월 22일 벌어진 풍암리전투는 수천여 명 의 동학농민군을 맹영재가 이끈 홍천 여주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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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군과 풍암리전투 신영우* 국문초록 강원도는 동학 교주 최시형이 은도기에 탄압을 피해서 교세를 보존하고 확 대한 지역이었다. 1894년 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을 축출하려는 무장봉기를 준비하면서 경기도까지 가서 부자들에게 돈과 곡식을 강제로 거 둬들였다. 경기도 지평에서는 민보군을 결성해서 그런 활동을 적극 제지하였 다. 그리하여 두 차례에 걸쳐 강원도 홍천까지 가서 동학농민군을 공격하였 다. 동학 근거지를 기습하고 많은 동학농민군을 죽였다. 이러한 내용은 고종실록 에 간략하게 실려 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다. 다행히 최근에 연구에 활용하기 시작한 갑오군정실기 는 더 많 은 내용을 전해주고 있다. 홍천에서 벌어진 사건은 이 자료에 의해 여러 가지 를 보완할 수 있게 되었다. 홍천 서부의 동학 지도자 고석주 등은 팔봉과 필곡을 거점으로 홍천 경내는 물론 경기도 지평까지 활동무대를 넓혔다. 무장봉기를 위해 돈과 곡식을 모 으면서 양반유생들과 심각한 갈등이 벌어졌다. 홍천의 동학농민군이 경기도에 세력을 확대했다면 서울도 위협을 받았을 것이다. 지평의 민보군은 9월 12일 팔봉을 기습해서 그런 위협을 제거하였다. * 충북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군과 풍암리전투 73

2 그 공적으로 민보군 지도자 맹영재( 孟 英 在 )는 기전소모관 겸 지평현감이 되었 다. 지평민보군은 경기도와 충청도 여러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을 견제하면서 그 지도자들을 체포하였다. 10월 22일 벌어진 풍암리전투는 수천여 명 의 동학농민군을 맹영재가 이끈 홍천 여주 양근 지평 춘천 등의 포군 1,000여 명 이 공격한 전투였다. 동학농 민군이 패배한 이 전투는 강원도 일대의 상황을 결정지었다. 풍암리전투 이 후 강원도의 동학농민군은 이전과 같은 기세를 보이지 못하였다. 풍암리의 동학농민군을 지휘한 대접주 차기석은 정성과 평창전투 이후 홍천민보군이 체포해서 처형하였다. 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싸우지도 못하고 지평의 민보군에 게 제압된 것은 비극이었다. 경복궁을 점거해서 국왕을 인질로 잡은 외적을 앞에 두고 서로 싸운 것이기 때문이다. 주제어 : 동학농민군, 민보군, 강원도 홍천, 경기도 지평, 무장봉기, 새로 운 사료 논문 투고일 12월 3일 심사일 12월 7일 게재 확정일 12월 14일 1. 머리말 강원도는 동학이 이른바 은도기에 관헌의 탄압을 피해서 교주 최시형이 교세를 보존하고 확대해서 재건에 성공했던 지역이었다. 최시형이 피신하 면서 포교를 해왔던 주요 근거지는 영월 직동과 소밀원, 정선 고한의 적조암 무은담, 인제 갑둔리 등이었다. 동학교도가 늘어나면서 경전을 보급할 필요 성이 높아지자 1880년 5월 인제 갑둔리에서 동경대전 을 간행하였다. 74 동학학보 제37호

3 전국에 걸쳐 봉기한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경군에 맞서 싸우다가 패산 한 1894년 말에 최시형이 피신처를 찾아서 강원도로 들어왔다. 오래 동안 원주와 여주 일대에서 교단의 간부들과 함께 은신하고 있었으나 결국 여주 관아의 포교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봉기했을 때 강원도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강원 도 일대에서 결집한 동학농민군은 경기도와 충청도 그리고 경상도까지 다 니면서 활약하였다. 전국에서 가장 먼저 무장봉기에 나선 세력도 관동포에 속한 동학 조직이었다. 대접주 이원팔이 이끌던 관동포는 충청도 황산에 집 결한 후 보은으로 가서 북접농민군의 주력이 된 후 공주 우금치전투에도 참 여하였다. 대접주 차기석이 지휘하던 내면포를 중심으로 하는 동학농민군은 강원도 에서 봉기하여 주로 홍천과 정선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차기석의 동학농민 군을 공격한 주력은 경기도에서 온 맹영재의 지평민보군이었다. 일본군 혼성제9여단이 경복궁을 기습 점령하고 국왕을 인질로 삼은 6월 말 이후 홍천의 동학 조직이 지평까지 가서 강제로 군량과 돈을 모으자 양 반 유생들이 민보군을 결성해서 공격했던 것이다. 지평의 민보군은 경기도 로 오는 길목만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홍천 근거지를 기습하였다. 9월 12일에는 홍천 감물악면의 팔봉리 동학접소를 공격해서 양호도순무영의 주 목을 받았다. 맹영재는 소모관이 되어 도계를 넘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군권을 부 여받았다. 최시형의 기포령 이후 홍천에서 대규모로 집결한 차기석 휘하의 동학농민군은 맹영재가 지휘한 민보군의 공격을 받게 된다. 홍천 서석면 풍 암리에서 10월 22일에 일어난 전투는 격렬하였다. 강원도의 동학농민군에 관한 연구는 다른 지역에 비해 적은 편이다. 상세 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군과 풍암리전투 75

4 한 내용을 전해주는 사료도 드물다. 풍암리전투에 관한 기록도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와 같이 보고문서가 간략하게 전재된 것뿐이었다. 1 중요한 자 료로 활용되어온 동비토론 과 임영토비소록 은 풍암리전투의 전개과정 을 소개하지 않고 있다. 2 다행히 최근에 새로 발굴한 갑오군정실기( 甲 午 軍 政 實 記 ) 를 연구에 이용 할 수 있게 되었다. 갑오군정실기 는 양호도순무영에서 주고받은 문서들 을 묶어놓은 공문서집으로 홍천 관련 기록가 다른 자료와 비교해서 자세한 편이다. 이 글은 이 새 자료를 소개하면서 홍천의 동학농민군과 서석면 풍 암리전투에 관해서 살펴보려는 것이다. 그 과정에 진압군 주력이었던 지평 민보군과 이들을 이끈 맹영재의 활동도 점검해 볼 것이다. 이 글에서는 사료를 인용하는 방식으로 논지를 전개하려고 한다. 갑오년 에 작성한 보고서 등 사료의 문장이 당시의 사정을 생생하게 전해주기 때문 이다. 2. 지평민보군의 9월 12일 홍천 필봉 기습 1894년 강원도에서 활약한 동학농민군의 전모를 알려주는 상세한 연구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우선 대접주 조직도 상세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동학 1 동학농민혁명 관련 사료에는 관찬사료가 많다. 관찬사료는 조선의 관치질서 속에서 행정 절차에 따라서 작성되었다. 동학농민군의 무장 활동이나 봉기는 병란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이런 사건이 일어나면 일차로 해당 군현의 지방관이 단속하는 동시에 즉각 감영에 알리면서 조정에도 보고를 해야 했다. 감사는 해당 군현의 지방관이 올린 보고를 장계로 정부에 전하면서 지방관에게 전후 사실을 캐어묻거나 직접 영병을 보내 무력으로 제압하면서, 그 결과를 조정에 보고해야 했다. 국 왕에게 올린 요약 보고가 고종실록 등에 실려 있다. 이런 사료를 통해 주요 사건들을 파악할 수 있지만 지나치게 간략해서 전모 파악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2 동비토론 임영토비소록 ( 동학농민혁명사료총서 12권 수록) 76 동학학보 제37호

5 의 접포 조직은, 교구와 같이 지역별로 설치된 것이 아니라, 인맥에 따라 연 결되었다. 기본 단위인 접 조직은 보통 50호라고 한다. 그런데 75호 이상 확 대되면 접을 나누어서 새로운 접 조직을 만들고 접주를 임명하였다. 여기서 더 접 조직이 확대되면 상위에 접주들이 층층이 있게 된다. 1890년대가 되면 동학 교세가 크게 확대되어 여러 접주를 예하에 두는 대 접주가 있었다. 보은 장내리 취회에서 교주 최시형은 여러 접 조직을 관할 했던 큰 접주를 대접주라고 부르게 했고, 각기 포의 이름을 부여하였다. 3 천도교서 와 동학도종역사 등 동학 관련 문헌을 보면 강원도에서 활약 하던 여러 명의 대접주가 확인이 된다. 4 그중의 한 사람이 홍천 내면 5 의 차기 석이다. 차기석은 온건한 동학 지도자로 소개되고 있다. 6 내면( 內 面 )에 있는 비도들의 괴수 차기석( 車 箕 錫 )이 스스로 득도했다고 하 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고 회유하니 그 무리가 1,000여 명이 되었다. 전하는 말에, 자신들은 호비( 湖 匪 )의 무리와 같지 않고 다만 학업을 하며 의 롭지 않은 행동은 하지 않는다 라고 했으나, 이것은 한갓 그들 무리를 보호하 려는 말로 참으로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내면은 오대산 서북쪽에 자리잡고 있어 길이 막히고 멀고 산과 계곡이 험준하여 가서 토벌하기가 어려웠다. 또 한 현저하게 나쁜 행적이 없어 잠시 그대로 두었으나 식자( 識 者 )들은 그것을 3 취어 (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 2. 33쪽). 十 八 日 探 知 築 二 石 城 於 十 山 下 平 地 建 旗 幟 整 二 十 日 探 知 中 旗 忠 義 善 義 尙 功 淸 義 4 대접주 이름과 포명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關 東 包 大 接 主 李 元 八. 內 面 包 大 接 主 車 箕 錫. 洪 川 包 大 接 主 沈 相 賢. 麟 蹄 包 大 接 主 金 致 雲. 旌 善 包 大 接 主 劉 時 憲. 5 內 面 은 서석면 동쪽에 접경한 깊은 산골 지역이었다. 본래 강릉에 속했는데 1906년 인제군에 넘 어갔다가 다시 1945년 홍천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6 임영토비소록 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군과 풍암리전투 77

6 걱정하였다. 차기석이 이끌던 동학도 7 의 수가 1,000명이라고 했다. 전후 상황을 보면 1894년 2차봉기 이전에 내면의 동학도들이 세력을 키우는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차기석의 동학도가 전라도와 충청도의 동학도와 같지 않다고 표현한 것은 1차봉기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차기석은 동학 교단이 관 아에 죄를 짓거나 불법행위를 하지 말라고 강조한 지침을 따라서 활동하였 다. 동학의 수도를 의미하는 학업을 하며 의롭지 않는 일을 하지 않는다 고 한 표현이 그것이다. 이 기록에서 현저하게 나쁜 행적 이 없었다는 것은 봄에서 여름 사이의 평가였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한 6월 21일(양력 7월 23일) 이후 사정이 달 라졌다. 강원도 여러 군현에서 청일전쟁이라는 갑오년의 격변을 비교적 일 찍 알게 되었다. 청국군 패잔병들이 강원도를 통과해서 지나간 것을 보게 된 것이다. 충청도 충주를 지나 강원도로 들어온 청국군은 민폐를 끼쳐 민 심이 동요되었다. 다음은 승정원일기 7월 21일자 기사이다. 8 강원도와 함경도의 객병( 客 兵 )이 지나간 지역에서 각 해당 지방관들이 군 량, 말먹이, 소, 말 등의 물건을 민간에 배분시켜 거두어들임으로써 크게 민 읍의 소요를 불러일으켰다고 합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애당초 의정부에서 통지하지 않았는데, 연로의 각 고을에서 어찌 감히 제멋대로 행하여 민폐를 7 필자는 봉기 이후에는 동학농민군으로 규정해서 용어를 사용하고, 봉기 이전은 동학도라고 표현 하고 있다. 8 승정원일기 1894년 7월 21일. 군량 등을 민간에서 거두어들인 강원도와 함경도의 도신을 추 고할 것 등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78 동학학보 제37호

7 끼친단 말입니까 도신은 모두 추고하고, 각 해당 지방관은 죄명을 지닌 채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청국군이 함경도로 이동해갈 때 군량은 물론 소나 말까지 강원도의 백성 들에게 거둬서 제공했다고 하였다. 갑자기 곡식 등을 마치 세금처럼 배분하 자 반발을 사게 되었다. 정부에서도 강원감사와 지방관이 허락도 없이 민폐 를 끼쳤다고 징계를 논의할 정도였다. 이런 징계 논의는 실상을 모른 탁상공론과 같은 것이었다. 청국군은 군수 지원을 받지 못했던 패잔병으로 행군 연로의 마을을 침범해서 극심한 약탈 을 자행하였다. 지방관은 물론 감사도 제어가 불가능하였다. 목격자들이 기 록한 참상을 알지 못했던 경관들은 청국군의 접대에 곤욕을 치른 지방관을 벌주는 문제만 논의하였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일본군의 경복궁 점거와 국정 간섭 소식이 강원도의 동학조직을 동요시킨 사태였다. 강원도에서도 동학조직은 일본군을 축출하 기 위한 봉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 동학 세력이 크게 확대되었 고, 이를 양반유생들이 우려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전라도나 충청도처럼 무 장봉기를 하거나 불법행위를 하는 등의 현저하게 나쁜 행적 을 남기지 않았 던 동학조직은 관아에서 탄압하려고 하지 않았다. 홍천이 동학을 탄압할 무력이 없었던 곳은 아니었다. 홍천은 영장( 營 將 )이 파견된 군현이었다 년에 홍천에 영장이 폐지되기도 했지만 10 도적이 횡행하거나 호환( 虎 患 )이 일어나는 문제 때문에 1885년에 복설되었다 연려실기술 별집 8권, 官 職 典 故. 10 고종실록 1883년 1월 17일. 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군과 풍암리전투 79

8 년 5월에 한택리( 韓 澤 履 )가 영장으로 임명된 기록이 있지만 갑오년에 영장이 동학을 제어했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11 차기석은 내면포 대접주였다. 갑오년에 내면은 홍천이 아니라 강릉에 속 해 있었다. 서쪽으로 홍천 서석면, 북으로는 인제, 남으로는 평창과 횡성, 동 으로는 양양과 경계를 했다. 6개 군현의 한 중간에 위치한 곳이 내면이었다. 또한 내면은 오대산 서북쪽에 자리잡고 있어 길이 막히고 멀고 산과 계 곡이 험준하여 관군이 통제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내면에는 소양강 상류 를 이루는 내린천 계방천 조항천 자운천 등이 흐르고, 응복산(1,359m) 오대산 (1,563m) 계방산(1,577m) 등 거대하고 험준한 산들이 연봉을 형성하고 있다. 내면포의 동학 세력이 호대해지자 6개 군현 어느 관아에서도 탄압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관군이 멀리 있는 것은 아니었다. 홍천과 인접한 춘천에 는 400명 병사로 편성된 친군진어영( 親 軍 鎭 禦 營 ) 12 이 있었다. 진어영 병정들 은 춘천에서 모집하였고, 1894년 3월 친군에 편입될 정도로 정비된 병영이 었다. 진어영은 홍천 내면까지 가서 동학을 금지하려는 시도를 하지 못하였 다. 강원도에 거점을 둔 관동포는 전국에서 가장 먼저 무장봉기를 시작하였 다. 대접주 이원팔의 조직은 충청도와 경상도 군현에서 무장봉기를 준비하 면서 양반유생이나 향리들과 대립하였다. 재봉기 이전인 8월 28일 경상도 예천의 읍내 공격이나 9월 4일 강릉 점거는 관동포가 벌였던 일이었다. 일 11 승정원일기 1894년 5월 17일. 이날의 兵 批 에 張 基 弘 을 春 川 中 軍 으로, 韓 澤 履 를 洪 川 營 將 으로 임명한다는 기사가 나온다. 12 일성록 1894년 3월 19일; 주한일본공사관기록 3권, 一. 通 常 報 告 附 雜 件 (10) 東 學 亂 徒 蜂 起 및 春 川 府 新 兵 營 등에 관한 件. 春 川 留 守 인 閔 斗 鎬 씨가 직접 모집 훈련한 병정은 이제 크게 숙 련되고 또한 그 營 制 도 정비되었기 때문에 지금부터 이 영을 親 軍 에 편입시켜 親 軍 鎭 禦 營 이라고 칭하라는 취지의 왕명이 있었다. 갑오군정실기 10월 22일. 춘천유수 임상준( 任 商 準 ) 첩보 80 동학학보 제37호

9 본군 장교 다케노우치가 죽게 되는 산양집회와 처음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 던 예천 석문전투도 관동포 조직이 관여해서 벌어졌다. 강원감사 김승집( 金 升 集 )도 우려한 원주 영월 평창 정선 4개 군현의 동학 조직은 관동포가 중심이었다. 13 갑오년 여름과 가을 사이에 먼저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동학의 이름을 내 걸고 일어났다. 본도( 本 道 )의 원주 영월 평창 정선 4개 읍도 점점 그 피해를 입어 종종 동학의 접( 接 )을 설치하는 곳이 있게 되었다. 동학도는 겉으로 학 을 숭상한다고 하면서 안으로는 재물을 탈취하려고 했으며, 몇 달만에 그 무 리가 번성하여 곧바로 세상을 뒤덮으니 참으로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9월 4일에 영월과 평창, 정선 등 5개 읍의 동학의 무리 수천 명이 부사가 바뀌는 때를 엿보아 일제히 읍내에 들어와서 삼정을 바로잡을 것을 사칭하고 백성 을 구제하겠다고 핑계를 대었다. 동학농민군의 강릉 점거는 실패였다. 양반유생들이 반격을 가하자 밀려 나오게 되었고, 다시는 강릉 점거를 시도하지 못하였다. 그뿐 아니었다. 강 릉부사로 발탁된 선교장 주인 이회원( 李 會 源 )이 소모사가 되어 강릉을 비롯 해서 평창 정선 등지의 민보군까지 이끌게 되었다. 그 이후 동학 조직은 여 러 군현에서 예전과 같이 활동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9월에 들어오면 홍천의 동학 조직도 활동을 격화시켰다. 봉기 준비는 일 정한 모습을 띠고 진행되었다. 첫째 많은 사람을 동학 조직에 들어오게 하 는 것이고, 둘째는 화승총 등 무기와 화약, 창칼을 확보하는 것이며, 셋째는 13 동비토론 9월 8일. 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군과 풍암리전투 81

10 돈과 곡식을 모아서 무장봉기에 필요한 경비와 군량을 마련하는 것이다. 홍 천의 주요 동학 근거지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동학도들은 부농 지 주들에게 돈과 곡식을 강제로 헌납을 받았다. 이런 활동은 관아는 물론 양 반유생들에게 위협으로 비쳐졌다. 홍천의 동학 조직은 강원도의 도계를 넘어 경기도 지평까지 넓혀나갔다. 홍천의 경내는 동서로 길게 펼쳐져 있었다. 동쪽은 큰 산줄기가 겹쳐져 있 는 오대산 거봉까지 포함되고, 서쪽은 홍천강 줄기가 흘러가는 골짜기로 이 어진다. 홍천의 감물악면( 甘 勿 岳 面 )은 바로 경기도 지평의 단월면과 경계를 하고 있다. 홍천 감물악면의 동학 근거지는 팔봉과 필곡이었다. 팔봉은 홍천강이 굽 이쳐 흐르는 8개의 봉우리가 유명한 팔봉산 아래의 골짜기에 이루어진 마 을이고, 필곡은 붓골 또는 붓고지라고 부르는 팔봉리 서쪽의 마을이다. 고 석주( 高 錫 柱 ), 이희일( 李 熙 一 ), 신창희( 申 昌 熙 ) 등 동학 지도자는 이 마을에 동학 조직의 접을 설치했다. 무장봉기를 준비하는 접소에는 무기와 식량을 모으 는 많은 사람들이 출입하였다. 동학 조직은 본래 포교를 통한 인맥으로 연결되었다. 지평 일대에서 홍천 에서 온 동학도들이 활동한 것은 두 지역의 동학 조직을 아우르는 대접주가 있는 것을 의미한다. 14 대접주 아래의 수접주나 접주들도 도의 경계를 넘어 서 세력을 확대하였다. 지평에서 활동한 동학 조직의 거점이 홍천의 팔봉과 필곡이었다. 14 지평의 주요 동학 지도자들의 이름도 확인된다. 거괴로 표현되는 이인오( 李 寅 五 )와 함께 신재규( 申 載 奎 )와 정사원( 鄭 士 元 )가 나오고, 상동면( 上 洞 面 )의 비도( 匪 徒 ) 이지신( 李 之 信 )과 접사 이원구( 李 源 求 )와 그의 형 이풍구( 李 豊 求 ) 등이 전해진다. 이들이 홍천의 동학 접소를 오가며 활동했을 수도 있다. 82 동학학보 제37호

11 대일 항전을 위해 돈과 식량을 모으는 집단행동은 양반유생들이 보기에 겁략하고 잔학을 저지르는 폐해 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지평까지 홍천 의 동학도들이 들어와서 강제로 재물을 빼앗고 잔학한 행동까지 하게 되자 양반 유생들 속에서 민보군을 결성하자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지평의 상동 면에 세거하는 전 감역 맹영재가 중심이었다. 맹영재는 김백선( 金 伯 先 )을 위시한 사포군( 私 砲 軍 ) 300명을 규합하였다. 지 평현감 안욱상( 安 昱 相 )은 민간인의 군사활동을 지원하기 위해서 맹영재를 부 약장( 副 約 長 )을 삼고 관포군 20명도 함께 지휘하도록 하였다. 지평 경내의 동 학도들을 제어하는 일과 홍천에서 오는 길목을 막아내는 것이 임무였다. 지 평현감과 양반유생들은 경내를 망라하는 향약을 실시하면서 현감은 약장, 맹영재를 부약장으로 정했다. 현감은 부약장이 포군을 지휘해서 동학도들 을 제압하는 활동을 관권으로 뒷받침해 줄 수 있었다. 맹영재는 적극적이었다. 경내뿐 아니라 홍천 동학 근거지까지 들이치기 로 결정하였다. 9월 12일 맹영재는 관포군과 사포군 100여 명을 이끌고 현 의 경계를 넘어서 홍천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감물악면 팔봉으로 직행해서 동학 지도자를 붙잡아 처형하였다. 경기감사는 장계로 그 사실을 알렸다. 그 보고는 고종실록 과 승정원일 기 9월 26일자에 실렸고, 여러 관찬사료와 오하기문 3필에도 전재되었 다. 원본은 양호도순무영이 작성한 갑오군정실기 9월 26일자에 실렸다. 고종실록 과 오하기문, 그리고 갑오군정실기 의 해당 기록을 비교해 본다. 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군과 풍암리전투 83

12 고종실록 1894년 9월 26일 방금 경기감사 신헌구( 申 獻 求 )가 올린 장계의 등보( 謄 報 )를 보니, 지평현의 비적( 匪 賊 ) 수백 명이 홍천에 소굴을 만들어 놓고 들락날락하면서 재물을 약 탈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으므로 본현에 사는 감역 맹영재( 孟 英 在 )가 부약장 ( 副 約 長 )으로서 관청 15 과 사포군( 私 砲 軍 ) 1백여 명을 거느리고 홍천에 이르러 그 괴수 고석주( 高 錫 柱 ), 이희일( 李 熙 一 ), 신창희( 申 昌 熙 )를 사로잡고, 혹은 목 을 베고 혹은 쓰러뜨려 그 무리 5명을 죽이자 나머지는 다 사방으로 흩어졌 습니다. 버리고 간 창( 槍 ) 58병( 柄 )은 거두어 군고( 軍 庫 )에 바쳤고, 포군 김백 선( 金 伯 先 )은 적들에게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맹영재가 의리를 내세워 비적 들을 목 베고 사로잡은 것과 포군들이 힘을 다해 싸움에 달려 나간 것에 대 해서는 응당 표창하는 은전이 있어야 하니, 묘당( 廟 堂 )에서 품처( 稟 處 )하게 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오하기문 3필 경기감사 홍순형 16 이 보고하기를 지평현의 도적 수백 명이 홍천 땅에 접 장을 설치하자, 감역을 지냈던 맹영재가 부약장으로 관군과 민간 포병 백여 명을 거느리고 그 우두머리 고석주ㆍ이희일ㆍ신창희를 사로잡아 혹은 목을 베기도 하고 혹은 죽이기도 하였으며, 그 일당 다섯 명도 목을 쳐죽였더니 나머지는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맹영재가 의를 내세워 목을 베고 사로잡 은 일은 포상 받을만합니다. 의정부에서 제의하여 처리하도록 하고 맹영재 를 소모관에 임명하여 계속하여 토벌하는 일에 전념토록 하고 지방수령의 15 고종실록 번역에는 관청으로 나오나 관포군을 의미한다. 16 오하기문 에는 홍순형으로 나온다. 이것은 잘못 쓴 것이다. 이때 경기감사는 신헌구였다. 84 동학학보 제37호

13 자리가 나면 임명할 일입니다 라고 하였다. 갑오군정실기 1894년 9월 26일 경기감사 신헌구가 원본을 베껴서 보고합니다. 이번에 지평현감 안욱상 ( 安 昱 相 )의 보고를 받아 보니, 동도( 東 徒 ) 수백 명이 홍천의 팔봉( 八 峯 )과 필곡 ( 筆 谷 ) 등에 접( 接 )을 설치하여, 겁략하고 잔학을 저지르는 폐해가 이르지 않 는 곳이 없기 때문에, 지평현의 관포군( 官 砲 軍 ) 20명과 사포수( 私 砲 手 ) 300여 명 모두에게 그들을 막아서 지키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또한 상동면에 사 는 전 감역 맹영재를 부약장으로 삼고 방편을 세워서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9월 12일에 맹영재가 관포군과 사포군으로 이루어진 100여 명을 거느리 고 홍천에 이르러서 남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변복( 變 服 )하고 그들을 유인하 였습니다. 먼저 그들 무리인 김철원( 金 鐵 原 ) 등 10명을 사로잡았는데, 7명은 타이르고 풀어주었고, 김철원 등 3명은 오히려 향도로 삼아 곧바로 팔봉으 로 향하였습니다. 그들의 우두머리인 고석주 이희일 신창희 3명을 사로잡아서, 고석주는 그 자리에서 참수하고, 이와 신 두 놈은 총을 쏘아 죽였습니다. 또 총이나 돌을 맞아 죽은 자가 5명입니다. 나머지 무리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그들이 버린 창 58 자루는 군고( 軍 庫 )에 수납하였습니다. 이들 비류들이 창궐하는 시기에 방어하는 것을 배로 늘려 단속하였고, 포 군( 砲 軍 )이 사용할 군량과 반찬을 약환( 藥 丸 )과 함께 별도로 조치하여 나누어 주라고 하였습니다. 군량과 반찬은 경기감영에서 차례로 도와주고, 약환은 지평현의 것을 사용하되, 방략을 마련하여 토벌하여 쓸어버리도록 엄하게 명했습니다. 맹영재가 의로움을 따라서 그들을 찔러 죽이거나 생포한 일과 포군들이 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군과 풍암리전투 85

14 충성을 다하여 어려운 일임에도 나아간 것에 대해서는 마땅히 포상하는 은 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묘당이 임금께 아뢰어야 할 일입니다 라고 하였습 니다. 갑오군정실기 의 기록이 본래 지평현감이 보고한 원문이다. 고종실록 이나 오하기문 은 내용은 이 보고를 줄여서 전재한 것이다. 종래 맹영재가 이끄는 지평민보군이 홍천의 동학 근거지를 공격한 배경 을 알 수 없었지만 갑오군정실기 는 그 원인을 보여주고 있다. 홍천의 동 학도들이 경기도 지평에 와서 겁략하고 잔학을 저지르는 폐해 가 원인이었 다는 것이다. 맹영재가 이끄는 100여 명의 지평 관포군과 사포군이 홍천에 들어간 후 변복을 했다고 하였다. 변복한 곳은 처음 진입했던 필곡이 아닌가 한다. 17 관포군이나 민보군은 흰옷 위에 검은 도포 등으로 구분했는데 색깔이 있는 옷을 벗어 농민들처럼 변장하고 기습하였다. 그리고 동학도인 김철원 등 3 인을 붙잡아서 길안내를 하도록 하고 곧바로 팔봉으로 갔다고 하였다. 팔봉에서는 우두머리 고석주 이희일 신창희 3명을 붙잡아서 고석주는 참 수하고 다른 2명은 총살하였으며, 또 5명을 총과 돌로 죽였다고 하였다. 동 학 접소에 보관한 무기는 창 58자루였다. 동학지도자가 처형되고, 무기도 몰수해서 지평관아의 무기고에 넣었다. 맹영재가 이끄는 사포군 300여 명 은 지평 경계를 방어하는 일이 주된 임무였는데 그 경비는 적지 않아서 경 기 감영에서 군량을 지원하고, 화승총의 화약과 연환은 지평현에서 공급받 는다고 하였다. 17 필곡은 팔봉 서남쪽에 있는 두미리에 있다. 86 동학학보 제37호

15 갑오군정실기 는 홍천 서부의 감물악면과 지평현의 갑오년 사정에 대해 서 새로운 사실들을 전해준다. 이와 함께 주목할 점은 사태가 벌어진 시점 이다. 9월 12일은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과 청일전쟁이 일어난 날부터 약 3 개월이 지난 시기이다. 그리고 강릉을 점거했던 동학농민군이 민보군의 반 격을 받아 퇴각한지 5일째 되는 날이었다. 또한 동학 조직이 전국에 걸쳐 재 봉기할 날을 기다리는 때이면서 무기와 식량을 확보하는 활동이 격화되던 때이기도 했다. 동학교주 최시형이 기포령을 내린 날은 9월 18일이었는데 그 직전까지 교 단의 지침을 따르던 동학 조직이 봉기한 지역은 경상도 예천과 강원도 강릉 뿐이었다. 예천에서는 8월 28일 쌍방 수천 명이 동원된 공방전이 벌어졌고, 18 일본군과 충돌한 사건인 태봉병참부의 다케노우치 대위 피살건과 석문전 투와 함께 벌어진 예천의 소야근거지 기습도 그 전후에 일어났다. 19 강릉에 서는 9월 4일 강릉 관아가 점령되었고, 9월 7일에는 민보군의 반격으로 강 릉에서 밀려났다. 20 지평민보군의 팔봉 기습은 9월 12일에 일어났다. 기포 령 직전 벌어진 주요 사건이 바로 관동포와 내면포의 활동에서 비롯된 것이 었다. 지평민보군의 결성과 활동은 두드러졌다. 예천과 강릉을 제외하고 아직 민보군을 결성하려는 시도가 없었다. 누구도 강력한 동학 세력에게 감히 맞 서려고 하지 못했던 때였다. 그러나 지평에서는 민보군이 결성된 직후 강력 한 활동을 시작했다. 전 감역 맹영재와 사포군 지도자 김백선과 같은 인물 이 지평에는 있었다. 또 민보군 결성을 적극 지원한 지평현감 안욱상이 있 18 갑오척사록 19 신영우, 1894년 영남 예천의 농민군과 보수집강소 동방학지 44, 동비토론 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군과 풍암리전투 87

16 었다. 경기감사가 9월 26일에 올린 장계는 정부가 처음 받는 승전보였다. 이 소 식은 양호도순무영을 고무시켰다. 이때 삼남은 물론 경기도까지 동학도들 의 집결 사태가 보고되었지만 정부는 적절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이제 민보군 동원이 핵심 방책으로 부각되었다. 정부는 9월 22일 양호도순무영을 설치하였다. 신설 도순무영은 동영( 東 營 ) 자리에 병영을 설치하고, 중군과 종사관을 선임하면서 소모사 소모관을 임 명하기 시작했다. 먼저 지평현감 안욱상이 요청한 포상 은전 으로 9월 27일 맹영재를 기전소모관에 임명하였다. 21 지평현에 사는 전 감역 맹영재가 대의를 내세워 포를 설치하여, 비도를 죽이거나 생포하여 좋은 결과를 얻었으며 어려움에서 구원한 의리는 매우 가상하다. 그래서 임금께 포상할 것을 아뢰어 기전소모관( 畿 甸 召 募 官 )으로 임 명하고 전령을 가지고 가서 주니, 도착 즉시 조정에서 장려하고 권하는 도리 를 직접 전하여 선포하되, 하루빨리 비도들을 무찌를 계책 또한 지평현에서 방략을 의논하여 잘못되는 폐해가 없도록 하라. 그뿐 아니었다. 9월 28일에 지평현감 안욱상을 안산군수로 전임시키고 22 다음날 맹영재를 지평현감에 임명하였다. 23 지평 관아의 인력과 물력을 동 원해서 스스로 동학농민군을 평정하라는 것이었다. 21 갑오군정실기 9월 27일. 지평현감 안욱상에게 전령함[ 傳 令 砥 平 縣 監 安 昱 相 ] 22 일성록 1894년 9월 28일. 23 위 자료, 1894년 9월 29일. 10월 22일에는 소모관인 지평현감 맹영재의 참모관으로 유학 한용익 ( 韓 用 翼 )을 선임해서 보냈다. 88 동학학보 제37호

17 양호도순무영이 설치되기 이전에 결성된 지평과 금산( 錦 山 ), 예천과 강릉 의 민보군은 모범사례가 되었다. 정부는 왕명으로 전국에 소모사 소모관 조 방장 등을 임명하였다. 민보군 조직을 지시한 조치였다. 지평현감 겸 기전 소모관 맹영재에게는 특별 지시를 내렸다. 도의 경계를 넘는 것에 구애받지 말라 는 전령이었다. 24 경기감사에게도 관문을 보내서 그 사실을 알렸다. 지금 이후부터 만일 비적을 쳐서 물리치는 일로 충청도 산골[ 湖 峽 ]이나 강 원도 등지를 왕래할 때, 경계를 넘어가는 것에 구애받지 말라 경기감영 에 비밀 관문을 보낸 후에 전령을 보냈으니, 도착 즉시 거리낌 없이 거행함이 마땅하다. 춘천의 친군진어영에도 전령을 보내 맹영재가 동학의 우두머리를 잡은 홍천 팔봉에 가서 뒷마무리를 하면서 효유하도록 하였다. 25 춘천의 병영에 전령해서 민보군이 제압한 지역에 가서 뒷수습을 하도록 한 것이다. 진어영 관할 하에 있는 여러 읍의 비도들이 소란을 일으켜 마치 불이 붙 기 시작하는 것 같았으나, 소모관인 지평현감 맹영재가 홍천의 팔봉( 八 峰 )에 서 비도를 무찌르고 생포하였다. 이후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비록 이미 모두 24 갑오군정실기 9월 29일. 9월 26일 본영( 本 營 )에서 지평현감 맹영재를 기전소모관으로 임명하 도록 임금께 아뢰어 처결을 받았다. 지금 비류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어수선한 시기에 소모하는 직 임은 가벼운 것이 아니다. 만일 비류들을 초토하는 일로 충청도 산골이나 강원도 등지를 왕래하게 되더라도 경계를 넘는 것을 구애받지 말고 편의에 따라 힘을 다하도록 하게 하는 것이 진실로 이 치에 맞는다. 그러므로 이에 비밀히 관문을 보내니, 이로써 해당 현감에게 명령하여 알게 하고 편 의에 따라서 왕래하도록 함이 마땅하다. 25 위 자료, 9월 30일. 진어병방( 鎭 禦 兵 房 ) 장기홍( 張 基 弘 )에게 전령함 ; 10월 5일. 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군과 풍암리전투 89

18 섬멸되었을 지라도, 여당들은 오히려 빠져 나간 자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이에 전령이 도착한 즉시 직접 가서 효유하여, 그들이 귀순하여 편안한 마음 으로 생업에 종사하도록 하라. 또 9월 26일 강릉민보군을 이끈 전 승지 이회원( 李 會 源 )을 부사로 선임하고 10월 22일에는 관동소모사( 關 東 召 募 使 )를 겸무시켜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 도록 하였다. 홍천과 인접한 횡성에서도 소모관을 선임했다. 횡성현감 류동 근( 柳 東 根 )은 토포사를 겸하고 있었는데 그를 돕도록 주사( 主 事 ) 정준시( 鄭 駿 時 )를 9월 30일 관동소모관에 임명하였다 기전소모관 맹영재의 경기도 일대 순회 지평현감 겸 기전소모관 맹영재의 활약은 양호소모영의 기대 이상이었 다. 우선 소모관 임명 이전인 9월 24일에 600명으로 늘어난 포군을 이끌고 여주로 직행하였다. 27 여주목사 이재윤( 李 載 允 )의 보고를 보니, 그 내용에 9월 24일 지평현감 맹 영재가 포군을 이끌고 여주에 도착하여 곧바로 수계면( 首 界 面 ) 신지( 新 池 ) 동 쪽에 있는 동학도들이 사는 곳으로 향하였으며, 접주인 임학선( 林 學 先 )의 아 버지 임황록( 林 黃 祿 ) 및 하백양( 下 白 羊 )에 사는 접주 김화춘( 金 化 春 ), 장흥( 長 興 ) 26 고종실록 1894년 10월 1일. 27 갑오군정실기, 9월 30일. 경기감사 신헌구가 원본을 베껴 보고합니다. 이번에 여주목사 이재 윤( 李 載 允 )이 보고한 것을 보니, 9월 24일 오시( 午 時 )에 지평현에 사는 전 감역인 맹영재가 의병포 군( 義 旅 砲 軍 ) 600여 명을 이끌고 여주에 도착하였습니다. 90 동학학보 제37호

19 에 사는 접주로 성명 부지의 3놈을 모두 총을 쏘아 죽였다 고 합니다. 수계면 28 신지는 여주 동학의 중심인물인 임학선이 세거해온 마을이었다. 읍내 관아와 가까운 마을이었지만 1894년 9월에 이르기까지 신지의 동학도 들은 거침없이 활동하였다. 동학 세력이 관아를 압도했기 때문이었다. 지평 민보군은 신지로 바로 들어가 수색하였다. 대접주 임학선은 마을에 없었으 나 그 아버지를 대신 처형하였고, 다시 길천면 29 하백양으로 가서 접주 김화 춘을 총살하였다. 신지리에 거주하던 임학선 등은 맹영재가 민보군을 이끌고 오자 황급히 충주로 몰려갔다. 동학농민군 집결지인 황산 인근의 무극 등지는 맹영재의 민보군에게 밀려온 경기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30 신지에 살던 임동호는 만년에 그런 내용을 술회하였다. 포덕 35년에 교장( 敎 長 )직으로 시무하다. 같은 해 8월 하루밤에 700인까지 전교하다. 같은 해 9월 22일에 맹감역이라는 사람이 포군 400여 명을 거느 리고 동학도인을 총살하면서 본리( 本 里 )에 침략함으로 음성 무극장으로 일반 도인 수만 명이 집회함에 참가하여 10여 일 머물다가 ---- 경기감사를 통해 그 성과를 보고 받은 양호순무영은 긴급한 사태가 벌어 진 지역에 맹영재의 민보군을 급파하였다. 9월 29일 양호도순무영은 경기 28 수계면은 1914년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 영릉 서쪽을 뜻하는 능서면( 陵 西 面 )으로 면 이름을 바꾸 었다. 29 길천면은 흥천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30 균암장 임동호씨 약력 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군과 풍암리전투 91

20 도 남부지역의 사태를 맹영재에게 전하고 죽산과 안성에 파견된 경군과 협 력하도록 전령하였다. 31 그리고 각 군현 관아에도 전령을 내려서 맹영재의 민보군에게 군량과 말 먹이 등을 미리 준비해서 제공하도록 하였다. 필요한 경비와 군량은 공전과 공곡 즉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사용하고, 화약과 연환( 鉛 丸 )도 관아에서 보관 한 것을 쓰도록 하였다. 또한 탁지부에서 광목 10동을 보내 겨울 군복을 만 들어 입도록 하였다. 32 맹영재의 지평민보군은 특별대우를 받았다. 그것은 9월 하순부터 10월 초까지 사태가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전라도는 관치질서가 마비된 지 오래 였고, 충청도에서도 무기가 탈취된 군현이 잇달았다. 태안에서는 부사 신백 희( 申 百 熙 )와 종친부 파견 관원 김경제( 金 慶 濟 )가 피살당했고, 서산에서도 군 수 박정기( 朴 錠 基 )가 살해되었다. 33 경상도는 상주와 선산이 점거되었고, 청 주는 공방전을 벌이며 화급한 구원 요청을 보내왔다. 경기도 군현의 관아도 무기가 탈취되었다. 이제 도성도 위태롭게 생각되었다. 31 갑오군정실기, 9월 29일. 소모관 지평현감 맹영재에게 전령함. 지금 안성의 비도들이 충주 진 천 광혜원에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어서, 장차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는 말을 들었 다. 그래서 이미 죽산 안성 2개 읍에 있는 행진소( 行 陣 所 )에 전령을 내려, 그들로 하여금 비도들을 상대하도록 하였다. 그러니 죽산과 안성의 진영에 보낸 공문이 도착하면, 서로 날을 정하여 진을 움직여 응대하면서 때에 따라 적을 물리치고 사로잡으라. 32 위 자료, 10월 12일. 소모관 지평현감 맹영재가 충청도 산골과 강원도 등지에서 동비를 무찌르 는 일로 편의에 따라 왕래할 때, 군량이나 말에게 먹일 콩 등과 같은 것을 충분히 미리 준비하여 기다리도록 하였다. 또한 그가 이끄는 포군들이 약환( 藥 丸 )이 모자란다고 들었다. 각 고을에서 가 지고 있는 군물 중에서 소모관을 따라서 명령하고 알려서 거행한 후에, 필요한 물력은 얼마의 공 전과 공곡 중에서 사실대로 사용한 것을 성책하여 보고할 것이며, 이를 회감하는 것이 마땅하다. 경기 소모관 맹영재가 ---- 이끄는 포군( 砲 軍 )은 관병이 의지할 수 있는 것과 비교할 것이 못된다. 이렇게 날씨가 추운 때에 그들이 입고 있는 것은 얇은 옷 하나로 매우 걱정스럽다. 탁지목( 度 支 木 ) 10동을 특별히 조치하여 나누어 보내, 순무영에서 내려 보내 조정이 특별히 보살피고 있다는 뜻 을 보여주라. 33 고종실록 1894년 10월 13일, 10월 22일. 92 동학학보 제37호

21 10월 초순 충청감사 박제순은 청주 상당산성을 비롯 제천 단양 청안 영동 천안 회인 진천 목천 직산의 관아 점거와 무기 탈취 보고를 보내왔다. 또 서 천 결성 아산 태안 영춘 단양 당진 문의에서도 무기 탈취 보고가 잇달았다. 경기도에서도 관아 점거 사태가 일어났다. 동학도들이 읍내를 점거한 안 성과 죽산에는 경군 영관을 지방관으로 임명해서 경리청과 장위영 병정들 과 함께 부임하도록 하였다. 음죽현감은 동학농민군 집결지에 관한 심각한 보고를 올려왔다. 34 음죽현감 김종원( 金 鍾 遠 )의 보고에 근일에 비류들이 죽산 광혜원 충주 황 산 무극장( 無 極 場 ) 등지에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어서, 모인 무리들이 수십만이 될 정도입니다 월 25일 유시( 酉 時 ) 동도 수천 명이 각기 총과 창 및 환도( 環 刀 )를 가지고 관사( 官 舍 )를 둘러싸고 군기고를 부수어, 남은 군물 ( 軍 物 )은 모두 빼앗아 갔으며, 서리와 군교 10여 명은 그들을 막다가 매를 맞 아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9월 하순에 가장 우려했던 동학농민군은 충주 황산과 청풍, 광혜원 등지 에 집결했던 대규모 세력이었다. 도순무사 신정희는 안성에서부터 충주 진 천 광혜원 등지에 널리 퍼져 있는 동학농민군을 지평민보군의 맹영재와 죽 산부사 이두황, 그리고 안성군수 성하영에게 협력해서 진압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맹영재의 민보군은 경군 장위영과 경리청 병대와 대등하게 거론되 었다. 34 갑오군정실기, 9월 30일. 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군과 풍암리전투 93

22 지금 안성의 비도들이 충주 진천 광혜원에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여서 장 차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이미 죽산 안성 2 개 읍에 있는 행진소( 行 陣 所 )에 전령을 내려, 그들로 하여금 비도들을 상대하 도록 하였다. 그러니 죽산과 안성의 진영에 보낸 공문이 도착하면, 서로 날 을 정하여 진을 움직여 응대하면서 때에 따라 적을 물리치고 사로잡으라. 그러나 죽산부사 이두황은 즉시 명령을 따르지 많고 머뭇거렸다. 그 사이 에 진천 광혜원과 충주 황산에 집결했던 동학농민군은 괴산을 거쳐 보은으 로 향해서 집결지는 비어 있었다. 아무도 없는 집결지로 접근하던 죽산부사 이두황과 안성군수 성하영은 지평민보군을 기다렸다, 그런 보고를 받은 양호순무영은 소모관 맹영재는 이미 다른 곳으로 보내 졌으니, 반드시 기다릴 필요는 없다 고 전해왔다. 맹영재는 여주 점량면 덕 곡리로 가서 충주 소식을 탐지하였다 월 12일 신시( 申 時 ) 무렵에 여주 점량면( 占 梁 面 ) 덕곡리( 德 谷 里 )에 도착하 여 충주 무기촌( 無 基 村 ) 36 및 진천 광혜원 등지를 자세히 탐지하였더니, 동도 가 모두 도망하여 흩어졌다가, 다시 몰래 괴산을 습격하여 읍내에 불을 지르 고 모두 태웠습니다. 10월 13일 오는 길에 활산( 活 山 )의 접사 최제팔( 崔 齊 八 )을 잡아 덕실촌( 德 實 村 ) 앞에서 죽였으며, 10월 14일 죽산 안광리( 安 光 里 ) 접괴( 接 魁 )인 출신 박성 익( 朴 性 益 )과 구계동( 九 溪 洞 )의 접사인 이춘오( 李 春 五 ) 모두를 죽산부의 대로변 에서 죽였습니다. 구산리( 九 山 里 )의 동도 장태성( 張 太 成 )은 동학에 들어가 그 35 갑오군정실기, 10월 17일. 36 무기( 無 基 )는 동학농민군 집결지였던 無 極 의 오자로 보인다. 94 동학학보 제37호

23 의 상전을 결박하여 혹독하게 무수히 장을 쳐서 정강이뼈가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그 또한 대로변에서 죽였습니다. 맹영재의 지평민보군은 도망한 비도들은 반드시 여주와 지평 등지로 갈 것이다. 요충지로 회군하여 가로막되, 상황에 임하여 잘 처리하도록 하라 는 명을 받고 회군하였다. 회군길에 여주 이천 음죽 죽산을 순회하면서 동 학 근거지를 수색하고 접주 등을 체포하였다. 37 맹영재의 민보군은 잔혹하 였다. 접주와 접사 등을 잡으면 즉시 처형하였다. 노비 신분으로 양반 상전 에게 해를 입힌 경우에도 용서가 없었다. 그러나 경기도 일대의 동학농민군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일본군이었 다. 충주 가흥에서 장호원, 그리고 이천과 곤지암과 송파의 병참부에 배치 한 1개분대에서 1개소대의 병력이 인근의 동학농민군을 공격하였다. 그리 고 10월에 서울에 주둔한 후비보병제6연대 제6중대를 경기도와 충청도로 파견하였다. 10월 중순 시모노세키 수비를 맡던 후비보병 제19대대가 증파되었다. 동 학농민군 진압을 맡은 전담부대였다. 19대대의 3개중대는 동로분진대 중로 분진대 서로분진대로 나누어 남하하였다. 동로군은 이천-장호원-가흥-충주 로 직행했고, 중로군은 용인-양지-죽산-진천-청주로 갔으며, 서로군은 진위- 양성-직산-천안-덕평-공주로 행군하였다. 강원도는 동로군이 충주를 거쳐 진입해서 충청도에서 들어오는 동학농민군을 막도록 하였다. 강원도를 통 해 북상하여 러시아로 갈 경우 국제문제화하는 것을 우려하였다. 38 일본군은 강원도의 동학농민군 진압에 병력 증파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 37 양호우선봉일기 10월. 38 駐 韓 日 本 公 使 館 記 錄 1, 四. 東 學 黨 에 關 한 件 附 巡 査 派 遺 의 件 一 (39) 後 備 步 兵 第 19 大 隊 運 營 上 의 訓 令 과 日 程 表. 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군과 풍암리전투 95

24 다. 그래서 서울에 주둔한 후비보병제18대대의 1개중대를 보냈다. 39 이 대 대는 공사관 및 부산과 인천의 영사관과 일본거류민 보호를 위해 파견되었 으나 40 이시모리 요시나오( 石 森 吉 猶 ) 대위가 지휘하는 1개중대를 빼내서 강원 도로 직행시켰다. 강원도 원주 등지는 후비보병제18대대와 제19대대의 2개 중대가 동학농민군을 추적하였다 월 20일에 가흥병참부로 내려온 이노우에 공사와 이토 병참감이 연명 한 훈령은 이시모리 대위의 제18대대 소속 중대가 강원도에서 진압을 맡도 록 하였다. 동로군은 처음 계획대로 경상도 병참부를 경유해서 전라도로 가 라고 하였다. 이시모리 요시나오( 石 森 吉 猶 ) 대위가 지휘하는 1개중대는 정선과 평창 등 지를 순회하였으나 홍천까지 올라갈 필요는 없었다. 지평현감 맹영재가 지 휘하는 민보군이 10월 하순 홍천의 동학농민군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4. 홍천에 집결한 동학농민군과 풍암리전투(10월 22일) 강원도에서 대규모 세력을 가졌던 대접주는 차기석이었다. 강릉 양양 원 주 횡성 홍천 5개 군현의 접주 42 차기석은 10월에 들어와서 휘하의 동학 조 39 후비보병제19대대가 스나이더총으로 무장한 것에 비하여 이들은 신향 무라타( 村 田 )총을 지급받 았다. JACAR(アジア 歴 史 資 料 センター)Ref.C 明 治 27 年 自 9 月 24 日 至 11 月 1 日 臨 着 書 類 綴 庶 ( 防 衛 省 防 衛 研 究 所 ). 10, 23 臨 着 928 号 陸 軍 大 臣 西 郷 従 道 発 参 謀 総 長 熾 仁 親 王 宛 後 備 歩 兵 第 18 大 隊 携 帯 銃 交 換 の 義 に 協 議 の 趣 了 承 40 JACAR(アジア 歴 史 資 料 センター)Ref.C 明 治 27 年 自 9 月 30 日 至 11 月 13 日 臨 発 書 類 綴 庶 ( 防 衛 省 防 衛 研 究 所 ) 41 19대대 동로군과 18대대는 인천병참감에게 전투 결과를 보고했으나 그 내용이 주한일본공사관 기록 에 전재되지 않아 강원도 관련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42 동비토론 1894년 11월. 江 襄 原 橫 洪 五 邑 東 匪 接 主 車 箕 錫 96 동학학보 제37호

25 직을 봉기시켜 홍천에 집결시켰다. 관동소모관 정준시가 그 사태를 맹영재 에게 긴급히 알렸다. 10월 13일 홍천 서석리( 瑞 石 里 )의 동괴( 東 魁 ) 차기석이 갑자기 충주에서 와서 평민 7명을 죽이고 홍천 횡성 원주 등지를 침범 43 하 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차기석이 충주를 다녀왔다는 것은 청풍의 서창집결지나 충주 의 황산집결지에 갔다는 말이기도 했다. 9월 말 청풍 제천 단양 영춘 4군에 서 모인 서창집결지의 상황은 급박하였다. 9월 27일 안보를 공격해서 병참 부와 군용전신소를 불태웠으나 가흥병참부에서 급파된 일본군이 공격해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44 그런 사건을 보고 온 차기석의 동학농민군 지도 방향은 종래와 달라졌다. 무기와 군비를 모으기 위해 과감한 행동을 피하지 않았고, 동학농민군에게 적대한 민보군과 양반유생에 대한 공세도 적극적이 되었다. 45 9월 그믐쯤에 군사를 모아 난리를 일으켜서 창고를 불사르고 인민을 위 협하며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집을 태우고 사람을 죽였다. 또한 포목 해산물 가축 등 상인들을 회유하여 그 재물을 빼앗고 사람들을 죽여서 태워 버렸다. 산골짜기 길의 행상 중에 죽은 자가 수백 명이었으나 길이 끊겨서 영동에서는 전혀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43 갑오군정실기, 10월 21일. 44 신영우, 북접농민군의 황산 집결과 괴산전투 한국근현대사연구 55, 월 초에는 경기 도와 강원도에서 모인 황산집결지의 동학농민군이 보은으로 행군을 시작한 10월 3일 가흥병참부 에서 온 하라다 소위의 일본군과 괴산전투를 벌여서 물리쳤다. 그 과정에서 인명손실이 적지 않았 다. 45 임영토비소록 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군과 풍암리전투 97

26 강릉부사 이회원이 달라진 차기석을 기록한 것처럼 이 일대의 동학농민 군은 엄혹해졌다. 각 군현에서 민보군이 결성되면서 상황은 악화되었다. 민 보군 참여자를 잡으면 처형하였고, 보부상도 마찬가지였다. 보부상은 관아 와 민보군에게 협력하고 있었다. 46 내면 근처에 거주하는 윤태열( 尹 泰 烈 ) 정창해( 丁 昌 海 ) 조원중( 趙 元 中 ) 정운심 ( 鄭 雲 心 ) 등은 본래 무뢰배들인데, 교활하게 차적( 車 賊 )을 빙자하여 마을사람 들을 속이고 군사들을 모았으며 창고 옆에 목채를 세우고 강제로 각 마을에 명령을 내려, 호( 戶 )마다 속미( 粟 米 ) 6말, 미투리 한 켤레씩을 빠짐없이 거두 었다. 또한, 소를 빼앗아 날마다 여러 마리를 잡으니 고기와 포( 脯 )가 산과 숲 을 이룰 정도였다. 기꺼이 자신들을 따르지 않으려는 자가 조금이라도 있으 면 바로 죽였다. 이에 완악한 무리들이 모두 일어나 한 패가 되었다. 진부면 안영달( 安 永 達 ) 김성칠( 金 成 七 ) 등도 거기에 가담하였다. 김상연은 진부면 두일 촌( 斗 逸 村 )에 살았는데, 어느 날 밤에 잡혀가서 4부자( 父 子 )가 함께 구덩이 안 에서 죽었다. 지난날에 잠시 중군을 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행상과 부고( 負 賈 ), 보부상들이 모두 불 속의 귀신이 되었고, 요호와 양민이 솥 안의 물고기 로 절로 나뉘어졌다. 내면과 함께 평창의 봉평면은 동학농민군이 거점이 되었다. 그래서 두개 의 면 내면과 봉평면 은 100리가 되는 산골짜기인데 곧 양산박과 같은 소굴 이 되었다 47 는 표현까지 나왔다. 10월 13일 밤에는 동학농민군이 홍천 내촌 46 위 자료. 47 위 자료. 98 동학학보 제37호

27 면 물걸리에 있는 동창을 들이쳐서 세곡을 탈취하였는데 그 과정에 창고에 불이 나고 7명의 인명을 해치는 사건이 벌어졌다. 시임 홍천현감은 7월에 부임한 서학순( 徐 學 淳 )이었다. 48 그 사건을 보고 받 고 서학순이 시신을 검사하기 위해 향리와 더불어 현장으로 갔으나 수백 명 의 동학농민군이 무기를 들고 둘러싸서 접근조차 하지 못하였다. 49 읍내로 돌아온 현감은 관아가 점거되는 사태를 우려하였다. 그래서 중군 이진석( 李 震 錫 )에게 관포군을 지휘하고, 전감찰 이영엽( 李 永 燁 )을 민보군의 영 수로 삼아 읍내 민정 150여 명을 영솔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감영과 인근 군현에 공문을 보내서 구원을 호소하였다. 동학농민군은 강릉에서 밀려난 일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동창을 친 이후 강릉으로 갈 것이라고 하였다. 집결지인 동면 좌운리( 坐 雲 里 )에는 모 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홍천읍의 관포군은 약세이고 포교의 수도 적어서 만일 읍내로 들어온다면 막아낼 수가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차기석은 읍내로 들어가지 않고 서석면 풍암리로 가서 집결하였 다. 풍암리는 교통의 요지이면서 수천 동학농민군이 집결할 만한 곳이었다. 풍암리에서 서쪽으로 가면 읍내를 거쳐 춘천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북쪽으 로 가면 백암산과 소뿔산을 좌우로 돌아 인제로 갈 수 있고 남쪽으로 가면 횡성, 동쪽으로 대관령을 넘으면 강릉이 나온다. 풍암리에 있는 야산은 넓은 골짜기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주변에 마을도 적지 않아 분산해서 투숙하면 추운 밤을 넘기기도 쉬웠다. 또 대규모 취사 도구도 있었던 것 같다. 동학농민군은 풍암리집결지에서 여 48 승정원일기 1894년 7월 5일. 徐 學 淳 을 洪 川 縣 監 으로 삼았다. 49 동비토론 1894년 11월 1일. 순영에 첩보[ 甲 午 十 一 月 初 一 日 牒 巡 營 ] 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군과 풍암리전투 99

28 러 날을 움직이지 않았다. 13일에 물걸리 동창에서 왔다면 무려 10일 동안 한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동학농민군이 서석면 풍암리에 집결했다는 소식은 널리 전해졌다. 강원 감영은 인근에 있는 관군과 민보군을 홍천에 시급히 오도록 하였다. 가장 먼저 홍천을 관할하던 병영인 춘천 친군진어영의 병대가 출동하였다. 50 본영 병정 70명과 포군 30명을 군관 김동규( 金 東 圭 )와 초관 박진희( 朴 晋 熙 ) 가 영솔해서 달려가게 했습니다. 10월 18일 해시( 亥 時 )쯤 그 장관( 將 官 )의 보고 를 받아보니, 영병( 營 兵 )이 그 날 저물녘에 홍천에 도착했습니다. 저들이 항 거하여 서로 대적할 때에 3명을 쏘아 죽이고 18명을 사로잡았으나 저들은 수 가 많고 우리는 적으며 홍천현의 화약이 떨어졌다고 하기에 다시 포군 40명 과 화약 100근을 바로 발송했습니다. 140명의 진어영 병대는 읍내에 머물고 서석면에는 접근하지 않았다. 수 천 명 에 달하는 동학농민군에게 겁을 내고 있었다. 뒤이어 횡성현감 겸 토 포사 유동근( 柳 東 根 )도 관동소모관 정준시와 함께 원주와 횡성 포군을 인솔 해왔다. 51 횡성현감 유동근이 첩보합니다. 홍천 비도를 토벌하러 소모관과 함께 원 주 포군 28명 본현 포군 100명 창군( 鎗 軍 ) 50명을 인솔해서 10월 17일에 출발하여 본현 청일면 춘당리에 머물렀습니다. 춘당리는 홍천 서석과 경계 50 위 자료, 10월 22일. 51 위 자료, 10월 28일. 100 동학학보 제37호

29 를 접해 20리가 넘지 않는 곳입니다. 그들의 수가 많고 군기도 적지 않을 뿐 아니라, 저들은 많고 우리가 적어 가볍게 상대할 수 없어 합세해서 토벌하자 는 공문을 홍천과 지평에 보냈습니다. 횡성의 청일면 춘당리에서 먼드래재를 넘으면 하군두리를 지나서 서석면 풍암리로 바로 갈 수 있다. 대규모 동학농민군과 맞서려고 하지 않는 횡성 과 원주 포군 178명도 춘당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현지에서 장정 을 모집하는 방식으로 세력 확대를 꾀하였다. 그러자 오히려 동학농민군이 10월 20일 새벽 6시경에 춘당리로 기습해왔다 월 20일 묘시( 卯 時 )쯤 비도 500여 명이 갑자기 진중을 침범해서 소모관 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힘껏 토벌했습니다. 죽거나 다친 비도는 그 수를 셀 수 없었고, 사로잡은 자도 10여 명이 되었습니다. 어리석은 백성이 어쩔 수 없이 따른 것이었기에 목숨을 구제할 방도가 없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잘 타일러서 잘못을 고치고, 군오( 軍 伍 )에 배치하여 군대 기물을 지어 나르게 했습니다. 그중에 조희준( 趙 希 俊 )과 고진성( 高 辰 成 ) 등은 저들 중에 부두목으로 평소에 행패가 낱낱이 드러나서 바로 목을 베어 경계하였습니다. 형편에 따 라 바로 소굴을 기습할 계획입니다. 진두( 陣 頭 )에 소모하는 일은 아직 숫자가 정해지지 않았고, 이미 모집한 숫자는 지금 300여 명이 됩니다. 풍암리에 모인 동학농민군의 무장이나 전투력은 횡성의 민보군에 비해 떨어졌다. 횡성민보군을 선제 기습을 했으나 반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많이 52 위 자료, 10월 28일. 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군과 풍암리전투 101

30 입고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횡성 토포사와 소모관은 현지에서 300여 명이 나 장정을 동원해서 진압군의 수를 늘리고 있었다. 맹영재도 강원감영의 급보를 받았다. 양호도순무영에서도 맹영재에게 급 히 홍천으로 가도록 지시하였다. 동시에 각 군현에 전령을 보내서 맹영재가 이끄는 민보군에게 때를 놓치지 말고 접대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53 홍천에 온 맹영재는 풍암리로 가기 전 진압군 세력의 확대에 노력했다. 이미 지평민보군에는 양근과 여주의 민보군이 합류해 있었다. 홍천 읍내에 들어와 홍천에서 조직된 민보군도 합류시켰다. 서석면 풍암리로 가지 못하 고 기다리던 친군진어영 병정들도 가세하였다. 맹영재는 거침없이 풍암리로 진군하였다. 처음에 화촌면을 통해 접근해 서 동학농민군 일부가 장야촌에 진을 친 것을 알아냈다. 바로 장야촌으로 들어갔다. 첫 전투는 10월 21일 장야촌에서 벌어졌다. 다음날인 10월 22일 에는 풍암리전투가 벌어졌다. 이 두 전투는 지금까지 간략한 내용만 알려졌다. 승정원일기 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양호도순무영의 말로 아뢰기를, 방금 소모관인 지평현감 맹영재의 보고 를 보니, 지난 10월 21일 행군하여 홍천 장야촌에 이르러 비류 30여 명을 쏘 아 죽였고, 다음날 서석면으로 방향을 바꾸었는데 비도 수천여 명이 흰 깃발 을 세우고 진을 치고 모여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총을 쏘며 접전하였는데, 그로 인해 죽은 자들이 그 수를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생포한 놈들 53 위 자료, 10월 25일. 경기 호서 관동을 지나는 각 읍에 보내는 전령. 소모관 맹영재가 행군하 여 가는 곳에서 그 접대하는 일이 지체되어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이다. 102 동학학보 제37호

31 은 모두가 어리석어서 강제로 끌려 들어간 자들이기 때문에 자세히 사핵( 査 覈 )한 다음 일일이 타일러 보내고, 귀순하여 생업에 안착하도록 특별히 신칙 한 뒤에 즉시 환군( 還 軍 )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54 고종실록 55 과 갑오실기, 그리고 나암수록 에도 같은 내용이 전재되 었다. 이 기사의 원문이 되는 것은 바로 양호도순무영에서 국왕에게 올린 보고이다. 그것이 갑오군정실기 에 실려 있다. 56 이를 모두 인용한다. 제가 홍천에 달려간 연유는 전에 첩보하였습니다. 10월 21일 신시( 申 時, 오 후 3시 5시)쯤 홍천 화촌면( 化 村 面 ) 조개대( 鳥 介 垈 )로 들어가서 전진하는 적의 형세를 알아보려 했더니, 길이 끊겼기 때문에 창수( 鎗 手 ) 10명을 적들의 모양 으로 꾸며 고깔을 씌워 먼저 보냈습니다. 비류 4명을 사로잡아 처음으로 장 야촌( 長 野 村 )에 진을 친 것을 알았습니다. 즉시 행군하여 총을 쏘아 잡은 자가 20여 명입니다. 그 다음날 22일에 송치리( 松 峙 里 )로 들어갔더니, 고개가 높고 길이 험할 뿐 아니라 적들이 사방에서 불을 놓아 거리를 구분하기 어려워서 그대로 머물 렀습니다. 이날 밤에 때에 맞춰 비가 내려 그 불이 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22일에 서석면( 瑞 石 面 ) 어론리( 魚 論 里 )로 들어가는데, 100여 명의 적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10여 명을 쏘아 죽였습니다. 승세를 타서 풍암리 ( 豊 巖 里 )까지 추격했더니 그들은 흙으로 보루를 쌓아 백기를 꽂고 수천 명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바로 접전을 해서 한낮부터 저물 때까지 이어졌고, 54 승정원일기 1894년 11월 2일. 55 갑오군정실기, 11월 2일. 56 갑오군정실기, 11월 2일. 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군과 풍암리전투 103

32 포병( 砲 兵 )이 승세를 타니 적들이 점차 무너져서 그대로 흩어졌습니다. 도망 가는 적을 추격하여 총에 맞아 죽은 자를 셀 수가 없었습니다. 거괴( 巨 魁 ) 차기석( 車 箕 錫 )과 박종백( 朴 宗 伯 )은 그 이름을 들었으나 얼굴을 알 지 못하기 때문에 죽었는지 도망갔는지 정확히 알기가 어렵습니다. 사로잡 지 못해 법을 살펴 형률을 시행하지 못해 매우 한탄스럽습니다. 그대로 주둔 하여 도망간 나머지 적을 일일이 토벌하였습니다. 비도( 匪 徒 )가 저지른 흉악 한 일을 들어보니, 평민을 잡아다가 마음대로 죽이거나 해치고 묻어버린 자 가 많다고 하기에 현감이 직접 그들이 흙으로 만든 보루를 가서 상세히 살펴 보았습니다. 한 구덩이에 쌓인 시신이 8 9명이나 되었으나 죽은 자의 거주 지와 성명을 물어볼 사람이 없었습니다. 억울하게 죽은 평민이 매우 불쌍하 게도 원귀( 寃 鬼 )가 되어 글을 지어서 억울한 혼을 제사지냈습니다. 위협을 견디지 못해 들어간 자에게 모두 동일한 형률을 시행해야 하지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잡아다가 심문을 하고나서 배도표( 背 道 標 ) 57 를 만들어 각자 면( 面 )으로 돌려보내고, 한문과 한글로 전령을 보내 훈 계해서 각자 돌아가 생업을 편안히 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철군할 것입니다. 다. 여러 새로운 내용을 전해주는 이 기록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정리할 수 있 1 홍천의 동학농민군 주력은 풍암리 야산에 보루를 쌓고 진을 치고 있었 고, 화촌면 장야촌과 서석면 어론리에도 경계병이 배치되었다. 풍암리로 들 57 배도표( 背 道 標 )는 동학의 도를 저버렸다고 기재한 표이다. 104 동학학보 제37호

33 어오는 입구인 어론리에 100여 명이 있었다면 장야촌에도 그 이상이 배치되 었을 것이다. 또 횡성 민보군이 들어오는 입구인 청량리와 하군두리에도 경 계병을 배치했을 것이다. 2 민보군은, 군현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관군처럼 검은 두루마기를 입 거나 두건으로 머리를 싸서 흰옷을 입은 동학농민군과 구별을 하였다. 58 동 학농민군은 머리에 고깔로도 해석되는 지변( 紙 弁 )을 썼다. 그것은 고깔 모양 의 두건이 아닌가 한다. 지평민보군은 들키지 않으려고 똑같은 복장으로 접 근해서 파수를 보던 동학농민군을 붙잡아왔다. 그리고 이들에게 정보를 획 득했다. 3 동학농민군은 야간 기습을 막으려고 솔치재 여러 곳에 모닥불을 피웠 다. 홍천의 10월 하순은 춥기 때문에 보초라고 해도 모닥불이 없이 밤을 새 울 수 없었다. 4 풍암리 들판에 접한 작은 야산에 수천 명의 동학농민군이 방어를 위해 흙으로 보루를 쌓아 놓고 지키고 있었다. 이런 대비는 지평민보군에게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오히려 조밀하게 모여 있는 동학농민군은 표적이 되 었을 뿐이다. 5 관아에서 지원하는 민보군에 비해 무기가 열악했던 동학농민군은 고 지를 선점하고 위에서 내려다보며 응사를 하는 것이 주요 전투방식이었다. 풍암리 야산은 방어에 적합한 고지가 아니었고, 지평민보군과 같이 경험이 있는 공격군을 쉽게 막아낼 지형이 아니었다. 6 그런 조건 아래 많은 피해를 입으면서 한낮부터 저물 때까지 싸웠다는 58 갑오척사록, 7월. 집강과 도감은 모두 답호( 褡 護 )를 입고, 유사 집사 및 부병은 모두 흑삼( 黑 衫 )을 입고 머리를 싸매어서 흰옷과 구별한다. 경상도 예천의 민보군 약조 중 하나이다. 신영우, 1894년 영남 예천의 농민군과 보수집강소 동방학지 44, 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군과 풍암리전투 105

34 것은 풍암리의 동학농민군이 완강히 버틴 것을 전해준다. 화승총으로 무장 한 사람은 일부이고 주로 창수로 이루어진 동학농민군으로서는 분투한 것 이었다. 7 풍암리에서 희생된 동학농민군의 수는 매우 많았다. 얼마나 많았는지 부지기수( 不 知 其 數 )라고 표현하였다. 도망가는 사람들도 추격해서 대량 학살 이 벌어졌다. 8 동학농민군도 진압군에 있던 사람이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처형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평민을 학살해서 한 구덩이에 쌓인 시신이 8 9명 이라고 하였다. 맹영재는 이들이 억울한 귀신이 되었다고 생각하여 제문을 지어서 제사를 지냈다. 9 동학농민군 지도자인 대접주 차기석과 박종백의 생사여부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이들은 풍암리를 빠져나와 피신에 성공하였다. 10 붙잡힌 동학농민군이 너무 많기 때문에 다 처형하지 못하였다. 강제로 위협에 못 이겨서 합류한 사람은 동학을 배반했다는 배도표( 背 道 標 )를 만들 어 주고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동학농민군의 전투 방식은 어디서나 거의 일정하였다. 많은 수가 산과 같 은 고지대에 올라서 멀리서 다가오는 관군에게 수적 우위를 보여주고 아래 를 내려다보면서 총을 쏘는 것이었다. 관군의 경우 대개 적은 병력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산위에 모여 있으면 멀리서 몇 번 총을 쏘고 물러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우세한 신식무기로 무장하였거나 전투 경험이 많은 상대방에게는 쉽게 표적이 될 수가 있었다. 풍암리 진등에 모 여 있던 동학농민군은 가깝게 접근한 민보군을 막아낼 무기도 없었고, 전투 에 대비한 훈련도 부족하였다. 106 동학학보 제37호

35 맹영재는 서석면 풍암리에 있던 수천여 명 이 흰 깃발을 세우고 진을 형 성하여 모여 있었다고 보고하였다. 풍암리의 주변에서 방어진을 펼 수 있는 고지대는 마을 앞의 작은 야산밖에 없었다. 마을 뒷산은 가파른 경사면 때 문에 대규모의 인원이 집결해 있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결국 서석면 풍암리 의 전투는 동학농민군의 일방적인 패배로 끝이 났다. 풍암리의 동학농민군 진압은 표현하기 어려울만큼 잔혹했다. 이로 말미 암아 평화롭던 서석면 일대는 사람이 끊어졌다고 한다. 59 풍암리의 주민 가 운데 동학농민군으로 전투에 참여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같은 날 희생된 사람들이 나왔고, 이후 여러 집안에서 같은 날 제사를 지내는 비극적 인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횡성민보군은 전투가 모두 끝난 다음날인 10월 24일 새벽에 풍암리로 들 59 다음 증언은 희생자의 숫자 등에 과장이 있지만 당시의 상황을 전해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신 인간 1, 2호, 1926년. 동학군이 극성일 때는 소위 관군이란 자들이 감히 접전도 못하고 동학군 의 방귀 소리만 들어도 머리를 싸서 안고 쥐죽은 듯이 도망질을 하였지만, 동학군이 한, 일, 청 3 국병에게 패하여 각지로 흩어질 때에는 관군이 간 곳에는 풀도 한포기 남지 못할 만큼 전멸이 되 었다. 재산의 약탈은 물론이고 부녀의 강간도 함부로 하며 무고한 양민이라도 동학군이 있던 곳의 사람이면 이유를 불문하고 죽였다. 내가 어릴 때 실제로 듣고 본 것을 말하면, 강원도 홍천군 서석 면 풍암리에서 일어난 사실이 특히 참혹하였다. 그 때에 홍천군에는 동학의 대접주로 유명한 차 기석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인물이 비범하여 부하의 신도가 수만여 명이었는데, 갑오 당시 에 역시 강원도 일대를 중심으로 크게 활동하여 관군과 여러 번 싸워서 이기고, 횡포한 양반과 부 호 계급의 죄악을 응징하여 일시 일반 민중의 환영을 받아 그 세력이 매우 컸다. 그러나 삼남의 동 학군이 일, 청 양군에 패하매 관동의 동학군도 역시 고립된 상태에 빠졌다. 그 기회를 타서 맹영재 라는 유학자는 토벌군을 일으키고, 춘천의 관군은 포군 200명과 보졸 300명으로 동학군의 근거 지인 홍천군을 좌우로 협공하였다. 창으로 찌르고 칼로도 찌르고 총개머리로 때려서 눈 빠진 사 람, 창자 나온 사람, 다리 부러진 사람이 즐비하게 거꾸러지고 산과 들은 모두 피 바다가 되며 비 린 냄새가 코를 찔러서 아무리 포악한 관군이라도 눈물을 흘린 자가 많았다. 이러한 이야기는 지 금에 하여도 온몸에 소름이 끼쳐서 말을 잘 못하겠다. 어찌 하였든 그 때에 그곳에서 죽은 사람이 약 수천여 명이나 되는데 몇해 동안 송장 냄새 때문에 행인들이 잘 다니지 못하고 또 집을 잃은 개 떼들이 송장을 뜯어먹고는 아주 미쳐서 산과 들로 돌아다니며 소리를 지르고 야단을 쳐서 관청에 서 포수를 풀어서 개사냥을 다 하였다. 지금도 그 동네에는 동학군의 무덤이 70여 곳이나 있는데 모두가 산더미 같이 크고 그 한 무덤에는 대개가 삼사십 명씩 합장을 하였다. 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군과 풍암리전투 107

36 어왔다. 그리고 부상한 동학농민군이 도망하는 것을 잡아서 처형하는 등 26 일 아침까지 뒷정리를 하였고, 그런 내용을 양호도순무영에 보고하였다 월 24일 새벽녘에 소모관과 함께 창포군( 鎗 砲 軍 )을 인솔해서 바로 홍천 서석리 소굴로 갔더니, 기전소모관이 홍천 여주 양근 지평 춘천 등의 포군 1,000여 명을 데리고 와서 23일에 수백 명을 쏘아 죽이고 돌아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날이 저물어 묵고 25일에 소모관과 함께 그대로 머물렀습니다. 다친 비도 중에 그 마을에 사는 오복선( 吳 福 先 )이 도망가다가 잡혔습니다. 더 욱 교활하고 악독하기에 바로 진영 앞에서 목을 베어 경계하고, 마을사람을 불러 타일러 안정시키고 나서 26일 이른 아침에 떠나 바로 본현에 돌아왔습 니다. 횡성현감 유동근의 보고문에 맹영재가 홍천 여주 양근 지평 춘천 등의 포 군 1,000여 명을 데리고 왔다고 하였다. 당시 기록에 인원수를 과장해서 쓴 경우가 많지만, 이 수가 사실이라고 볼만한 근거는 있다. 지평민보군이 9월 24일 여주로 행군했을 때 의병포군 600명이 왔다고 여주목사가 보고하였 다. 이런 규모의 병력 운영에는 군수 지원이 필수였다. 그렇기 때문에 양호도 순무영에서 각 군현에 엄명을 내려서 맹영재의 민보군에게 군량과 말먹이 등의 제공을 강조하였고, 필요 경비는 공전을 쓰도록 하였으며, 화약 등도 관아에서 제공하게 한 것이다. 탁지부에서도 광목 10동이나 되는 많은 양을 겨울 군복용으로 제공하였다. 60 갑오군정실기 11월 9일. 108 동학학보 제37호

37 풍암리전투에서는 여기에 양근과 여주의 민보군이 합세하여 인원이 늘어 난 위에 춘천 친군진어영 본영 병정 70명과 포군 30명, 그리고 나중에 증원 된 40명이 합류하였다. 홍천에서 합세한 홍천민보군의 수가 기록에 나오지 않으나 만약 200명 이상이라면 충분히 1,000여 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친군진어영을 관할했던 춘천유수 임상준( 任 商 準 )은 지평민보군이 오기 전 에 이 병력이 화촌면과 영귀미면에 있다가 함께 풍암리전투로 갔다면서 풍 암리전투에 대한 개괄적인 내용을 보고하였다. 61 본영에 속한 홍천현 동도를 토벌하러 병정을 보낸 연유는 전에 신속하게 보고하였습니다. 10월 20일 해당 현감의 첩정에, 본영의 병정이 본현의 포군 과 길을 나눠 화촌면( 化 村 面 ) 영귀미( 詠 歸 美 ) 등지에 행군하여 동도가 모인 곳 에 포를 쏘아 9명을 죽였다 고 하였습니다. 본영의 병정이 지평의 포군 및 본현의 포수와 함께 화촌면에서 서석면에 와서 동도 소굴에 총을 쏘아 죽은 자가 수백여 명이 되었습니다. 괴수를 죽 이지 못해 후환을 낳은 것이 한탄스럽습니다. 서석면에서 밀려난 동학농민군은 봉평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10월 하순 이후에는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강원도 일대에서 진압에 나서게 되었고, 각 군현에서 민보군이 동학농민군을 추적하였다. 지평현감 맹영재는 지평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휘하 민보군이 세운 풍암 리전투의 군공을 인정해달라고 양호도순무영에 요청하였다. 양호도순무영 종사관 정인표가 의정부에 포상 여부를 건의하였는데 그 명단을 보면 지평 61 위 자료, 11월 3일. 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군과 풍암리전투 109

38 민보군의 구성에 대해 알 수 있다. 62 이번에 비류를 토벌할 때에 본현의 유학 최태헌( 崔 台 憲 ) 허경( 許 坰 ) 남정덕 ( 南 廷 德 ) 김노수( 金 魯 洙 ) 나정학( 羅 正 學 ) 이익수( 李 益 洙 ), 출신( 出 身 ) 양춘환( 梁 春 煥 ) 고치백( 高 致 伯 ) 서석화( 徐 石 化 ) 함승연( 咸 承 淵 ) 김백선( 金 伯 先 ), 여주 포군 박경호 ( 朴 敬 浩 ) 박춘일( 朴 春 日 ) 고덕원( 高 德 源 ) 등이 처음부터 끝까지 고생을 다해 장려 하기에 합당합니다. 지평의 유학 6명과 출신 6명, 그리고 여주 포군 3명이다. 이들은 중간 간 부로 보인다. 양근과 여주의 민보군도 함께 참여했지만 여주 포군만 명단에 포함되었다. 이중 민보군의 핵심인물이 김백선이었다. 63 맹영재는 이어서 다른 민보군 가담자에게도 포상해주도록 요청하였다. 나라에 일이 있을 때에 신하로서 충성을 바치고 힘을 다하는 것은 본분입 니다. 다만 보고할 것은 처음에 홍천의 팔봉( 八 峰 )과 이번 서석( 瑞 石 )에서의 싸 움에 함께 데려간 군졸과 유생 중에 현장에 있던 사람의 이름을 적어 보고합 니다. 62 위 자료. 63 大 韓 民 國 獨 立 有 功 者 功 勳 錄 第 1 卷 ( 國 家 報 勳 處, 1986 年, 517~521)에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 다. 김백선은 경기도 砥 平 (현재 楊 平 ) 출신이다. 원래 기개가 있고 용력이 비상하였으며, 학문은 없지만 대의를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앞장서는 인물이었다. 일찌기 '갑오동학운동'이 있을 때에는 지평 洪 川 등지에서 난군들의 약탈로 민간의 폐해가 매우 큰 것을 보고 앞장서서 감역 맹영재 와 함께 지방 포수를 모아 조직 훈련하고 난동군들을 쳐서 부근 일대를 편안하게 하였다. --- 맹영 재의 휘하에 砲 軍 4백 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김백선이 맹영재와 동학 혁명군을 토벌할 때에 양성시켜 지휘하던 김백선의 수하 병력이었다. 110 동학학보 제37호

39 지평민보군에는 경기도뿐 아니라 다른 도에서도 소문을 듣고 달려온 사 람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맹영재의 요청을 양호도순무영이 수용해서 김백 선을 비롯한 포군 주요 인물에게 절충장군의 체지를 주었다. 64 소모관 맹영재가 비도를 토벌할 때에 온 힘을 다한 의로운 군사인 포군 고치백( 高 致 伯 ) 서석화( 徐 石 化 ) 함승연( 咸 承 淵 ) 김백선( 金 伯 先 ) 박경호( 朴 敬 浩 ) 박 춘일( 朴 春 日 ) 고덕원( 高 德 源 ) 등에게 모두 절충장군( 折 衝 將 軍 )의 체지( 帖 紙 )를 준 다. 풍암리전투에서 흩어진 동학농민군을 홍천의 민보군이 추적하였다. 강릉 과 횡성의 민보군도 뒤를 쫓았다. 평창과 정선 등지에서는 일본군 후비보병 제18대대의 1개중대와 커다란 전투를 벌였으나 일방적으로 패배하였다. 패 산한 동학농민군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결국 깊은 산골지역을 찾아들 지 않을 수 없었다. 갑오년 겨울은 매우 추웠고 눈이 많이 내렸다. 한겨울에 도피할 길을 찾 지 못한 홍천의 동학농민군 지도자는 속속 체포되었다. 홍천민보군 종사관 허경( 許 坰 )의 군공을 보면 접주 30여 명을 붙잡아서 포살했다고 하였다. 차기석은 내면 원당에 들어가 있다가 추적군에게 탐지되었다. 강원도에 서도 가장 깊숙한 산악지대에 피신해 있었지만 그 정보를 들은 강릉소모영 이 추적군을 보냈다. 강릉과 양양 그리고 평창과 홍천 민보군이 일시에 기 습하였다 갑오군정실기 11월 8일. 65 임영토비소록 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군과 풍암리전투 111

40 11월 6일에 (평창) 봉평 대장 강위서 등이 군정을 이끌고 내면에 출병하여 1리( 里 ) 창고에서 묵었다. 차기석 정운심 등이 밤을 이용하여 진채를 공격하 니 강위서가 크게 패하여 돌아왔다 이에 소모사가 박동의를 소모영 종사 관으로 삼아 진부면의 군정을 인솔하여 강위서에게 가서 돕게 하였다. 또한 강위서를 종사관으로 올려 기한을 정하여 비도들을 섬멸하도록 하였다. 지난 날 양양부( 襄 陽 府 )에 관문을 보내어 병정을 모집하게 하였다. 양양부 의 사족 이석범( 李 錫 範 )은 --- 지난 10월 초에 마을사람들을 이끌고 경내에 숨 어있는 비도들을 토벌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소모사의 명령을 듣고 동생인 국범( 國 範 )과 동향의 사족 최주하( 崔 舟 河 ) 김준태( 金 儁 泰 ) 등과 함께 포병 100여 명을 인솔하여 왔다. 소모사가 크게 기뻐하고 바로 이석범을 종사관으로 임 명하여 내면에 파견하여 강위서 박동의 등과 함께 합세하여 비도들을 토벌 하게 하였다 강위서는 보래령( 甫 來 嶺 )을 넘어서 들어와 홍천 의병인 허경 ( 許 坰 )과 합세하여 자운포( 自 雲 包 )를 바로 공략하였다. 이석범은 박동의와 합 세하여 운두령( 雲 頭 嶺 )을 넘어 들어와 바로 청두리( 靑 頭 里 )로 진격하였고, 이국 범은 신배령( 新 排 嶺 )을 넘어 들어왔다. 김익제는 응봉령( 鷹 峰 嶺 )을 넘어서 들어 왔다. 사방의 길에서 협공하니 포 소리가 땅을 울렸고, 연기가 골짜기에 가 득하여 비도들이 놀라서 궤멸하였다 여러 군사가 약수포( 藥 水 包 )를 돌아 들어가서 차기석을 생포하였고, 김치실( 金 致 實 ) 등 3명을 포살하였다. 강릉부사 겸 소모사 이회원이 허경에게 보낸 전령에서 차기석을 체포한 사실이 확인된다. 66 강릉 소모영에 끌려간 차기석은 11월 22일에 처형되었 66 위 자료. 홍천 종사관 허경에게 보내는 전령[ 傳 令 洪 川 從 事 官 許 坰 ]. 지금 본 관아의 종사관 박동 의의 보고를 받아보니, 내면 비도의 괴수 차기석 등 3명을 사로잡았다 고 하는 소식을 듣고 매우 상쾌하였다. 이것은 본진( 本 陣 )이 합세하여 협공한 덕이 아닌 것이 없으니 매우 가상하다. 그 밖의 112 동학학보 제37호

41 다. 67 그 후 강원도의 동학농민군은 재기를 하지 못하였다. 맹영재와 함께 활동한 사람들의 명단은 갑오군공록 에서 삭제되었다. 그 이유를 전해주는 기록은 없으나 짐작할 만한 것은 있다. 우선 양호도순 무영이 11월 말 갑자기 해체되었다. 도순무사 신정희는 12월 23일 강화유수 가 되고, 경무사로 중군을 겸임했던 허진( 許 璡 )은 모든 직책을 떠났다가 다음 해 2월 남병사를 맡아 함흥으로 부임했다. 68 일본공사의 내정간섭과 압력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은 갑오군공록 이 일본공사의 국정 농단이 심했던 시기에 만들어져 을미사변 이후 의병 참여자들이 명단에서 제외된 것이다. 김백선은 민보군 동료들을 대부분 의병에 합류시켜서 모두 빠지게 되었다. 지평의 신재정과 이기원 2명과 양근의 서병승 유덕준 이덕래 3명만 기재되었다. 69 맹영재는 의병에 가세하지 않았지만 휘하의 민보군 대부분이 가담한 까닭에 그 자신 도 의심을 받았고, 등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갑오군정실기 10책에 실린 군공을 인정받은 사람도 맹영재가 보고한 사람은 양근 인사 서병승과 유덕준 단 2명뿐이다. 70 이것은 강릉부사 이회원 나머지 무리도 남김없이 섬멸하여 후환을 없애고 특별히 뒤를 밟아서 일일이 체포하여 없애버리 도록 하라. 1894년 11월 16일 67 임영토비소록 11월 22일에 내면의 군사가 돌아와서 차기석과 박학조를 면박( 面 縛 )하여 소모영 에 바쳤다. 소모사가 사대( 射 臺 ) 앞에 교장을 열어 두 사람의 목을 베었다. 68 일본공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일본군과 협력이 되지 않는 양호도순무영을 업무를 마치기 전에 폐지한 것이다. 신영우, 장신 신정희의 사환 이력과 활동 역사와 담론 57집. 69 갑오군공록. 지평출신 신재정( 申 在 政 ) 맹영재를 수행하며 많은 비류를 죽였다. 지평포군 이기 원( 李 基 元 ) 비도를 토벌하고 소탕하여 한 고을의 칭송을 받았다. 양근진사 서병승( 徐 丙 升 ) 의병을 통솔하고 거괴를 염탐하여 붙잡았다. 양근유학 유덕준( 兪 德 濬 ) 의병을 통솔하여 괴수를 붙잡고 그 무리들을 해산시켰다. 양근유학 이덕래( 李 德 來 ) 의병을 통솔하여 괴수를 붙잡고 그 무리들을 해산 시켰다. 70 갑오군정실기 10책. 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군과 풍암리전투 113

42 이 보고한 인물이 13명이나 오르고, 횡성의 소모관 정준시가 보고한 인물이 횡성지역 4명과 포군 135명, 평창지역 2명과 포군 50명이 등재된 것과 비교 된다. 71 맹영재는 지평군수를 맡은 이후 조정 지시에 순응하는 관리로서 지냈지 만 그와 같이 활약했던 포군 400명이 의병으로 맹렬히 활약하여 일본군을 놀라게 하였다 동학당정토인록 은 갑오군공록 의 초고처럼 보인다. 여기에 실린 지평의려는 전 출신 신재정( 申 在 政 ), 전 수문장 최인순( 崔 仁 淳 ) 6품, 종사랑 최태헌( 崔 台 憲 ) 동 이익수( 李 益 珠 ), 동 김노수( 金 魯 洙 ) 동 남정덕( 南 廷 德 ) 전 사과 심상희( 沈 相 喜 ) 진사 맹건호( 孟 建 鎬 ) 유학 맹중호( 孟 重 鎬 )이고, 양근 의려는 전 판관 김태영( 金 泰 潁 ) 5품 진사 서병승( 徐 丙 升 )이다. 72 주한일본공사관기록 9, 三. 機 密 本 省 往 來 一 ㆍ 二 > (13) 事 變 후의 情 況 續 報, 문서번호 機 密 第 18 號. 南 漢 山 城 은 廣 州 府 관할에 속하고 경성에서 겨우 50리 떨어진 예전 국왕 피난처로서 성벽 의 완전함이 거의 경성과 유사하여 북쪽의 北 漢 산성과 서로 對 峙 해서 가장 嶮 要 無 比 의 곳입니다. 그런데 처음 堤 川 에서 일어났던 賊 魁 孟 英 在 의 부하들이 점차 각처에 만연, 발호하는 기세였지만 끝내는 지난 달 26일 밤 갑자기 그 산성을 습격, 이를 탈환했는데 郡 守 朴 仁 이 이 난으로 죽었습 니다. 그리고 폭도의 수는 1,000명 정도이며, 그 중 소위 砲 軍 이라고 해서 총기를 가진 자가 400 여 명이 된다는 警 報 가 경성에 도달되자 정부는 크게 놀래어 같은 달 29일에 현재 경성에 남아있 던 친위대 3개 중대 중에서 1개 중대(이중 포병 50명)에 대포 2 門 을 따르게 해서 이들을 정토하러 가게 했습니다. 다음날 3월 1일 위 부대는 경성에서 30리 떨어진 松 坡 鎭 ( 漢 江 기슭에 있으며 우리 兵 站 支 部 가 있는 곳)에 舍 營 하고 다음날 2일부터 산성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관군은 나아가 南 門 산 밑 碑 堂 부근에 砲 列 을 배치하고 포격을 했는데 적은 빠른 기세로 산 밑으로 밀고 내려와 접 전해서 관군은 크게 무너져 대포를 버리고 퇴각하였습니다, 그리고 포 1 門 은 산계곡에 떨어져 파 괴되었지만 다른 포 1 門 은 끝내 적에게 빼앗겼습니다. 현재 관군 100명은 산성 남문과 송파 사이 에 있는 梅 着 里 ( 戶 數 20여 호)에 주둔하고, 100명은 東 門 으로 통하는 鳥 峴 街 道 를 끼고 적의 통로 를 끊어놓고 다시 더 원병을 보내줄 것을 줄곧 요구해 오므로 정부에서는 오늘 다시 친위대 1개 중대를 후원병으로 파견하였습니다. 또한 江 華 에 있는 구식병 200명을 경성으로 소집해서 만일 에 대비한 경비에 충당하기로 했습니다(현재 출정병은 7개 중대이며 경성에 남아 있는 것은 겨우 1개 중대에 불과함). 114 동학학보 제37호

43 5. 맺는 말 지금까지 설명한 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군과 풍암리전투를 요약하는 것 으로 맺는 말을 대신하려고 한다. 차기석은 1894년에 강릉 양양 원주 횡성 홍천 5개 읍의 접주로 불릴 만큼 위력을 가졌던 대접주였다. 백두대간 양쪽의 큰 산줄기와 긴 골짜기로 이루 어진 5개 군현은 강원도 중부 일대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1894년에 들어와 세력을 증대시켰지만 양반유생들이 보기에 현저하게 나쁜 행적 이 있는 동 학 지도자는 아니었다. 대접주 차기석이 동학 교단의 지침에 따라서 불법을 저지르거나 난폭한 활동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군의 경복궁 점거로 야기된 나라의 위기에 동학 조직이 적극 나서면서 차기석의 동학 조직도 무장봉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봉기 준비 는 입도 강요, 돈과 곡식 강제 헌납, 화승총과 창칼 등 무기 확보 등으로 이 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양반 향리와 부농 지주가 동학을 적대시하게 되었 다. 결국 외세의 침략에 직면해서 내부 갈등이 심각해진 상태에 이르게 되 었다. 홍천 서부의 동학도들은 팔봉과 필곡에 접을 설치하고 경기도 지평까지 가서 전곡 헌납과 입도를 강요하면서 지평의 양반유생들과 충돌하게 되었 다. 9월에 들어와 재봉기를 준비하는 시기에 대립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 지평의 전 감역 맹영재가 나서서 민보군을 결성하였다. 지평관아와 현감 의 지원 속에 사포군 300명을 모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김백선이란 유능한 인물이 들어와 결속을 다져 장예군대가 되었다. 맹영재는 관포군과 사포군 100여 명과 함께 홍천으로 가서 팔봉을 기습하고 고석주 등 동학지도자 3명 을 잡아서 현장에서 처형하였다. 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군과 풍암리전투 115

44 정부가 맹영재의 팔봉 기습사건을 보고 받은 시기는 양호도순무영을 설 치해서 동학농민군 진압 방안을 강구하던 9월 26일이었다. 양호도순무영은 맹영재를 기전소모관에 임명해서 민보군을 지휘하는 군권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전국 주요 지역에 소모사 소모관 조방장 별군관 등을 임명하여 민간 에서 스스로 민보군을 조직하도록 하였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유력한 방안으로 민보군 결성을 추진한 것은 지평의 사례가 모범이 되었기 때문이 었다. 동학 교주 최시형이 기포령을 내린 9월 18일 이후 경기도 일대의 동학 조 직이 활동을 격화시켜나갈 때 맹영재의 민보군은 여러 군현을 순회하면서 동학 조직을 견제하였다. 맹영재는 전격적으로 동학 근거지로 직행하여 동 학 지도자를 체포하였고, 또 이들을 즉각 처형하는 과감한 행동으로 동학도 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양호도순무영도 경기도와 충청도, 그리고 강 원도의 경계를 가리지 말고 활약하도록 명을 내렸고, 각 군현에 공문을 보내 서 관아에서 적극 지원하도록 조처하였다. 강원도의 동학농민군은 2대로 나누어 활동하였다. 1대는 충주 황산에 집 결한 후 보은으로 가서 합류한 다음 통령 손병희의 지휘 아래 논산으로 행 군하여 전봉준의 남접농민군과 연합해서 공주 우금치 공격에 참여하였다. 관동포를 중심으로 많은 강원도의 동학농민군이 1대에 속해 충청도와 전라 도까지 활동 영역을 넓혔다. 2대는 강원도에 남아서 연고지를 중심으로 집결해 있으면서 진압군과 맞 서서 싸웠다. 춘천의 친군진어영과 원주감영의 영군과 함께 강릉의 민보군, 홍천 횡성 양양 원주 등지의 민보군이 각지에서 동학농민군과 대치하였다. 홍천의 동학대접주 차기석은 10월에 들어와 예하 전 조직을 동원해서 봉 기에 들어갔다. 10월 13일 동창을 점거해서 군량을 확보하고, 수천 여 명이 116 동학학보 제37호

45 서석면 풍암리에 가서 집결하였다. 홍천현감은 놀라서 강원감영과 인근 군 현에 급보를 전하고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양호도순무영과 강원감영은 동원 가능한 진압군을 홍천에 파견하였다. 먼저 춘천유수가 친군진어영 병정 70명과 포군 30명, 추가로 병정 40명을 파견하였다. 다음에는 횡성민보군이 토포사 겸 횡성현감 유동근과 소모관 정준시의 지휘 아래 포군 100명과 창군 50명 그리고 원주 포군 28명, 모두 178명이 횡성으로 들어오는 입구인 청일면 춘당리에 가서 길을 막았다. 춘 당리에서 동원한 장정도 300여 명을 헤아렸다. 맹영재의 지평민보군은 홍천으로 들어가 친군진어영 병대를 합류시키고, 풍암리로 접근하였다. 10월 21일 화촌면 장야촌을 지키던 동학농민군 20여 명을 쏘아 쓰러뜨렸고, 다음 날에는 서석면 어론리를 방수하던 동학농민군 을 만나 10여 명을 쏘아 죽인 다음 승기를 타고 흙으로 보루를 쌓고 백기를 꽂고 수천 명이 진을 친 풍암리집결지를 공격하였다. 10월 22일 한낮부터 저물 때까지 이어진 전투는 진압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났다. 동학농민 군은 셀 수 없을 정도의 희생자를 남기고 패산하였다. 풍암리에서 도피한 사람들은 다른 지역의 동학농민군과 함께 일본군 후 비보병 제18대대가 들어온 정선과 평창전투에도 참여했으나 모두 패배하였 다. 이 두 전투에서 진압군의 주력은 일본군이었다. 그렇지만 풍암리전투는 일본군이 참여하지 않았다. 풍암리전투는 대규모 동학농민군이 지평민보군과 친군진어영 병사들에 게 공격을 당해서 패배한 전투였다. 풍암리에 집결했던 동학농민군의 수는 수천여 명 이라고 했다. 풍암리에서 머물렀던 기간은 적어도 10일 이상이었 다. 동창에서 가져온 세곡으로 식량은 공급이 가능했을 것이다. 풍암리집결지에서 동학농민군은 민보군 참여자나 관군에 협력했던 부보 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군과 풍암리전투 117

46 상, 그리고 일본 세력을 축출하려는 대의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징치하였 다. 그 결과 여러 사람이 희생되기도 하였다. 이들을 공격했던 진압군은 홍천 여주 양근 지평 춘천 등의 포군 1,000여 명 이라고 하였다. 지평민보군에는 양근과 여주민보군이 합류해 있었는데 기전소모관 맹영재는 의병포군( 義 兵 砲 軍 ) 600여 명을 이끌고 다녔다. 여기에 춘천 진어영과 홍천 민보군이 가세했던 총수가 1,000여 명이었다. 양호도순 무영이 각 군현 관아에서 말먹이를 충분히 준비해서 제공해주라고 내린 전 령을 보면 기마대를 운영하였거나, 군량과 화약을 싣고 다녔던 짐말도 많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풍암리전투는, 쌍방 참여자의 수를 보면, 수천 여 명 과 천여 명 이 싸운 대규모 전투였다. 갑오년에 강원도 지역에서 벌어진 최대의 전투라고 할 수 있다. 그 승패가 강원도 일대의 상황을 결정지었다. 풍암리전투 이후 강원 도의 동학농민군은 이전과 같은 기세를 보이지 못하였다. 풍암리의 동학농민군을 지휘한 대접주 차기석과 박종석은 정성과 평창전 투 이후 홍천민보군이 체포해서 처형하였다. 홍천민보군은 풍암리전투에 참여하였던 접주 30여 명을 뒤쫓아서 포살하였다. 죽산부사 겸 장위영 부영관 이두황이 목천의 세성산을 공격해서 점령한 날이 장야촌전투와 같은 10월 21일이었다. 풍암리전투와 세성산전투에서 진압군이 승리한 이후 서울 도성은 더 이상 동학농민군의 위협을 받지 않았 다. 동학농민군으로서는 서울로 올라가는 기회가 상실된 것을 의미했다. 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싸우지도 못하고 경기도와 강원도 의 민보군과 춘천의 친군진어영 병대에게 제압된 것은 비극이었다. 경복궁 을 점거해서 국왕을 인질로 잡은 일본 침략 세력을 앞에 두고 민족 내부에 서 서로 싸워 역량이 탕진된 것이기 때문이다. 118 동학학보 제37호

47 다음 해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지평민보군의 주력을 이루었던 사람들은 김백선을 중심으로 의병에 참여를 한다. 경복궁 침범과 국왕의 인질 사태에 맞서 무장봉기하여 국난을 극복하려고 분투했던 동학농민군이 사라지고 난 뒤에 일본군의 왕비 시해라는 변란에 직면하여 봉기한 을미의병의 대의는 반외세라는 점에서 동일한 것이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이 신분제로 대표되는 불평등한 사회제도와 부패하고 무능한 왕조정치에 저항한 세력이었다면 민보군은 불평등한 신분제를 유교 사상에 따라 영구불변의 진리로 보고 일본공사의 조종을 받고 내려오는 왕 명을 말 그대로 준수했던 세력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지평민보군의 전 투력을 대표하는 상민 출신 김백선이 을미의병에 참여했으나 양반 출신 의 병지도자에게 항명한 일 때문에 처형된 것은 갑오년에서 이어진 사회변화 와 시대과제를 둘러싼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군과 풍암리전투 119

48 참고문헌 天 道 敎 書 東 學 道 宗 繹 史 侍 天 敎 宗 繹 史 高 宗 實 錄 承 政 院 日 記 日 省 錄 燃 藜 室 記 述 甲 午 軍 政 實 記 聚 語 兩 湖 右 先 鋒 日 記 臨 瀛 討 匪 小 錄 東 匪 討 論 甲 午 斥 邪 錄 甲 午 軍 功 錄 東 學 黨 征 討 人 錄 駐 韓 日 本 公 使 館 記 錄 梧 下 記 聞 新 人 間 大 韓 民 國 獨 立 有 功 者 功 勳 錄 第 1 卷 ( 國 家 報 勳 處, 1986) JACAR(アジア 歴 史 資 料 センター)Ref.C 明 治 27 年 自 9 月 24 日 至 11 月 1 日 臨 着 書 類 綴 庶 ( 防 衛 省 防 衛 研 究 所 ). JACAR(アジア 歴 史 資 料 センター)Ref.C 明 治 27 年 自 9 月 30 日 至 11 月 1 3 日 臨 着 書 類 綴 庶 ( 防 衛 省 防 衛 研 究 所 ) 박준성, 1894년 강원도 농민군의 활동과 반농민군의 대응 동학농민혁명의 지역적 전개와 사회변동, 1995, 새길. 신영우, 1894년 영남 예천의 농민군과 보수집강소 동방학지 44, 신영우, 장신 신정희의 사환 이력과 활동 역사와 담론 57집, 신영우, 북접농민군의 황산 집결과 괴산전투 한국근현대사연구 55, 동학학보 제37호

49 Abstract Donghak Peasant Army in Hongcheon, Gangwon-do and the Battle of Pungam-ri Young-ou Shin Gangwon-do is the place where Donghak leader Choi Sihyung had made Donghak spread during sequestered period to avoid supression. In 1894, Donghak peasant army in Hongcheon, Gangwon-do prepare for uprising against the Japanese army by forcing riches in Gyeonggi-do to donate their wealth. The riches depence themselves by making Min-bo gun so that attack the Dong-hak peasant army in Hongcheon, Gangwon-do. They made sudden attack the Dong-hak peasant army and killed numerous ones. These stories was not known because of minimal recordings of Gojongsilrok( 高 宗 實 錄 ). The Gabogunjungsilgi( 甲 午 軍 政 實 記 ), however, has been used for studying recently shows more stories about the Donghak peasant army in Hongcheon, Gangwon-do. It is a new historical material of the Donghak peasant army. If the Donghak peasant army extended their power in Gyeonggi-do, Seoul might be threatened. The Dong-hak peasant army in Hong-chun, Gangwondo was dispersed by the Minbogun( 民 堡 軍 ) in Jipyeong, Gyenggi-do. Maeng Young-jae( 孟 英 在 ), the leader of the Minbogun in Jipyeong, Gyeonggi-do was became the magistrate of Jipyeong(Hyengam, 縣 監 ), Gyeonggi-do as a reward for the broken-up of the Donghak peasant army. He made arrested the several leaders of the Donghak peasant army in Gyeonggi-do and Chungcheong-do and stopped their spread. The battle between the Donghak peasant army in Pungam-ri of the 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군과 풍암리전투 121

50 Hongcheon, Gangwon-do and the Minbogun in Jipyeong, Gyeonggi-do provoked the weakness of the Joseon military power during the Joseons suffered form a foreign invasion. Keywords : Donghak Peasant Army, Minbogun( 民 堡 軍 ), Gangwondo Hongcheon, Gyeonggido Jipyeong, An armed uprising, New historical material, 122 동학학보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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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51 창화현이라고도 한다. 현종 9년(1018) 양주에 예속시 키고 후에 감무를 두었는데, 본조(조선) 태조 6년 (1397)에 양주에서 치소를 이곳 견주로 옮겼다가 뒤 에 지금의 치소로 옮겼다. 지금의 古 州 內 이다. 라고 하여 두 기사간에 다소의 차이점이 있 50 양주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6. 조선시대 태조 2년(1393) 조선이라는 새로운 국호가 정해 지고 신왕조의 기틀이 잡혀지자 국도의 천도가 제기 되었다. 천도론은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지덕이 쇠한 개경에 머무를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 제기되었지만, 실질적 으로는 고려의 전통적인 세력기반을 떠나서 조선왕조 의 새로운 정치기반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태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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