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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34호 <별쇄본> ISSN 충청감사와 갑오년의 충청도 상황 신 영 우 동학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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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충청감사와 갑오년의 충청도 상황 신영우* 국문초록 이 논문은 충청감사의 시각에서 갑오년을 파악하려는 목적으로 작성한 글 이다. 지금까지 군현이나 권역 단위의 사례연구는 나왔으나 도( 道 ) 단위로 살 펴본 적은 없지만 충청도는 동학농민군의 세력 규모와 봉기 상황을 볼 때 이 러한 연구가 요구되는 곳이다. 충청도는 정부가 양호초토사와 양호도순무사와 같이 진압군 최고지휘관의 직함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동학농민군의 1차와 2차 봉기에서 중심 무대로 파 악한 곳이다. 그 이유는 동학교단의 대도소가 충청도 보은에 설치되어 있었 고, 동시에 동학농민군의 중심세력이 충처도에 위치해서 큰 영향을 미치고 있 었기 때문이었다. 충청감사의 시각에서 보면 당시 일정하게 이해하게 된다. 충청감사는 경 내 각 군현의 관아에서 올리는 보고를 받고 관내의 사태를 상세하게 파악하였 다. 그리고 관속들을 지휘해서 효유, 진압, 선무, 안무, 기찰 등을 수행하거나 각 군현 관아에 명을 내렸다. 초토사나 순무영 선봉진, 그리고 소모사, 소모 관, 별군관, 토포사과 일본군 후비보병제19대대도 감사와 협력해서 진압작전 * 충북대 충청감사와 갑오년의 충청도 상황 189

4 을 수행해야 했다. 1894년에 충청감사의 임무를 수행한 인물은 조병호(1847~1910) 이헌영 (1837~1908) 박제순(1858~1916)이었다. 이들 3명은 개인 이력을 보면 상당한 역 량을 갖고 있는 고위관리들이었다. 집안 배경이나 학식 그리고 관료로서의 경력은 화려하다고 평할 수 있다. 하지만 문관으로서 병란을 맞아 군사지휘 나 봉기세력의 진압에는 성과를 낼 수는 없었다. 감사로서 재임하는 시기에 각 군현의 관치질서 붕괴를 막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감영이나 병영 그리 고 수영이 보유했던 무력이 동학농민군을 제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충청도 내포 일대는 청일전쟁의 해전과 육전이 시작한 곳이었다. 관내에서 일어났지만 충청감사가 신식군대의 여단급 전투를 간여할 수 없었다. 동학농 민군의 재봉기도 감사가 통제할 수 없었다. 오히려 전라도의 남접농민군과 영동과 옥천에서 온 북접농민군의 공주성 점거를 막기 위해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야 했다. 충청도에서 1894년에 벌어진 전투는 매우 치열하고 격렬하였지만 그 실상 이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다. 2차에 걸친 청주성전투를 비롯해 주요 전투만 들어도 다음과 같이 14회나 된다. 괴산전투, 안보전투, 문의전투, 증약전투, 승전곡전투, 홍주성전투, 세성산전투, 해미성전투, 우금치전투, 논산전투, 연 산전투, 용산전투, 북실전투, 되자니전투. 이두황의 장위영 병대가 공격한 세 성산전투와 해미성전투를 제외하면 모두 일본군과 싸운 전투였다. 승리한 전 투로 평가할 수 있는 것도 괴산전투, 안보전투, 승전곡전투 3차례였다. 충청감사는 이러한 갑오년 상황 속에서도 교체가 이루어졌다. 조병호는 경 상감사로 전임되었고, 이헌영은 신병으로 인해 짧은 기간만 재임하고 교체되 었다. 박제순은 2차봉기를 맞아 충청감영을 지키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충청도의 동학농민군 주력은 일본군에게 제압당하고 그 기세가 수그러들 190 동학학보 제34호

5 게 된다. 그리고 민보군과 각 군현의 관아가 평정에 나선 후 해산하였다. 충청 감사 박제순은 충청도에 밀려온 거대한 변란을 수습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였 다. 3인의 감사 중 유일하게 군공이 인정되었다. 주제어: 충청감사, 조병호, 이헌영, 박제순, 청일전쟁, 동학농민군 논문투고일: 2월 28일 심사일: 3월 3일 게재확정일: 3월 10일 1. 머리말 조선왕조에서 병사와 수사, 그리고 54개 군현의 지방관을 감독하는 충청 감사의 지위는 관찰사( 觀 察 使 ) 또는 도백( 道 伯 )과 방백( 方 伯 )이란 말에서 잘 드 러난다. 국가를 운영하는 주요 축 중 하나인 지방통치 기구에서 중앙정부와 목민관의 중앙에 위치하여 왕조를 보위하고 백성 통치를 책임진 최고의 관 직이 감사이다. 1 재직임기가 360일로 규정된 8도의 감사들은 국왕의 신임을 받는 고위 관료 중에서 선임되었다. 충청도를 비롯하여 인구와 물산이 집중 된 경상도와 전라도의 감사는 주요 경관직과 외관직을 역임해서 역량이 검 1 임선빈, 충청감사의 재임실태와 업적 충청감영 공주개영 400주년기념 학술심포지움 요약집 (충청남도 공주시, 공주), 2002; 임선빈, 충청도관찰사 기초연구 (충남발전연구원, 대전); 임선빈, 2003 충청도관찰사와 공주감영 충청도관찰사전 (공주시 충남발전연구원), 2002; 김양수 김양식, 조선후기 忠 淸 監 司 와 淸 州 守 令 의 출신성분과 재임실태 한국사연구 125, 2004; 이상식, 여지도서 를 통해 본 지방행정 체계의 구성 및 운영원리 - 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사학보 25호, 2006; 여상진, 18세기 충청감사의 감영처 및 도내 읍치시설 이용 - 交 龜, 巡 歷 및 行 禮 를 中 心 으로 - 한국산학기술학회논문지 9(1), 충청감사와 갑오년의 충청도 상황 191

6 증된 인사가 발탁되었다. 1894년 삼남의 감사는 스스로 처리하기가 불가능한 커다란 사건에 직면 하였다. 동학농민군이 여러 군현에서 대규모로 봉기한 것이었다. 전라도에 서 시작한 이 사건은 충청도와 경상도로 퍼져나가 한해 내내 확대되었다. 동학농민군이 대규모로 봉기한 군현에서는 관아의 기능은 무너졌고, 감영 에서도 질서 유지가 불가능하였다. 충청감사는 각 군현에서 감영에 올린 보고를 통해 도내에서 벌어지는 사 태를 파악하고 있었지만 정부에서도 감당하지 못하는 문제를 감사가 해결 할 수는 없었다. 1차봉기에는 회덕에서 활동하는 동학농민군을 무력으로 해산시킬 수 없었고, 여름 동안에는 집강소를 설치했던 군현도 지켜보아야 했다. 더구나 충청도에서 벌어진 청일 간의 전쟁은 감사도 간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동학농민군의 2차봉기에는 오히려 감영이 점거될 직전까지 이 르러서 전전긍긍해야 했다. 이 논문은 삼남의 감사들이 보는 시각에서 갑오년의 상황을 조감해보려 는 목적으로 작성하는 첫 번째 글이다. 지금까지 군현이나 권역 단위의 사 례연구는 나왔으나 도( 道 ) 단위로 1894년의 상황을 살펴본 연구는 없었다. 충청도는 동학농민군의 세력 규모와 봉기 상황을 볼 때 도 단위에서 검토 하는 연구가 요구되는 지역이다. 정부는 동학농민군의 두 차례 봉기에서 충 청도를 중심 무대로 파악하였다. 1차봉기에서 경군 지휘관으로 파견된 홍 계훈의 직함은 양호초토사였다. 양호는 충청도와 전라도를 가리키는 것이 었다. 2차봉기의 진압 책임을 맡은 신정희도 양호도순무사에 임명되었다. 전국의 관군을 통제하는 최고 군사지휘관의 위치였지만 양호를 명시한 직 함으로 지휘하였다. 정부가 충청도를 전라도와 함께 중심지역으로 파악한 이유는 명확하다. 192 동학학보 제34호

7 첫째 동학 교주 최시형과 대접주들이 보은 일대에 모여서 동학조직을 이끌 었던 사실이다. 둘째 충청도의 동학교단이 집결시킨 북접농민군이 전국의 봉기상황에 크게 영향을 미치던 것이다. 충청감사는 경내 각 군현의 관아에 서 올리는 보고를 통해 충청도의 사정을 일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1894년에 충청감사의 임무를 수행한 인물은 조병호( 趙 秉 鎬, 1847~1910), 이 헌영( 李 金 憲 永, 1837~1908), 박제순( 朴 齊 純, 1858~1916)이었다. 조병호는 4월 25 일(양력 5월 29일)까지 재임하고, 다음 감사 이헌영은 뒤늦은 6월 20일(양력 7월 22일) 부임해서 8월 25일(양력 9월 24일)까지 재임한다. 2차봉기와 우금치전쟁 에 감사로 직면했던 박제순은 1895년 5월까지 자리를 지켰다. 먼저 이들 충청감사 3명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본 뒤 각각 재임 시기의 충청도 상황을 알아보려고 한다. 주로 동학도들의 집단활동을 제어하고, 동 학농민군의 봉기에 대처하는 동시에 진압에 노력했던 충청감사의 역할에 관해 사실을 소개하는 형태로 정리하려고 한다 년에 재임한 충청감사 조병호 이헌영 박제순 1894년 봄 동학농민군이 1차봉기를 수습해야 했던 충청감사는 조병호였 다. 그의 본관은 임천으로 충청도 목천 세성면 용산 출신이다. 조병호는 당 시 막강한 집안 배경을 갖고 있었다. 참의 벼슬을 지낸 아버지 조기진( 趙 基 晋, 1814~1886)이 차남인 경호( 慶 鎬, 1839~1914)를 흥선대원군의 장녀와 혼인시 켜서 왕실과 사돈이 된 것이었다. 그는 대원군의 사위이면서 고종의 매부로 서 형조판서와 예조판서, 그리고 한성판윤과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했다. 2 2 趙 慶 鎬 撰, 趙 秉 鎬 書, 趙 基 晉 墓 誌, 국립중앙도서관 한 古 朝 충청감사와 갑오년의 충청도 상황 193

8 조기진의 삼남인 조병호는 경상감사와 공조 이조 예조 형조의 판서, 그리고 한성판윤을 역임한 홍우길( 洪 祐 吉 )의 딸과 혼인한다. 홍우길의 손자 가 순국열사인 홍범식이고 증손자가 소설가 홍명희이다. 국왕의 매부를 형 으로 둔 조병호는 벼슬길에서 거칠 것이 없었다. 문과 급제한 후 홍문관 관 원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22세 때 서장관으로 청국을 다녀온다. 그가 소장관 료로서 역임했던 관직은 홍문관과 승정원 그리고 성균관의 요직으로서 출 세가 기약되는 자리였다. 조병호는 1881년에 30대 초반으로 관세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1882년 임오군란 당시에는 영접관으로 청국군의 서울 진주를 주선하였다. 1883년에는 안동부사로 나가는데 이때 안핵사로 동래 와 성주에서 일어난 민란을 수습하였다. 1884년에는 도성 방위에 중요한 강 화유수에 임명되어 다음해 예조판서로 발탁될 때까지 강화영( 江 華 營, 沁 營 )을 책임지기도 했다. 내무협판으로 3년 여 동안 긴요한 국정을 다루던 조병호가 충청감사로 부임한 것은 46세 때인 1893년 3월(양력 4월) 3 이다. 4 당시 충청도에는 커다란 사건이 연이어 몰아쳤다. 하나는 보은 장내리에 동학도 수만 명이 집결해서 벌인 시위였다. 고종은 조병호가 신임 인사를 하기 전날에 시원임대신과 만 나는 자리에서 전라도와 충청도에 깃발을 세우고 서로 호응 하는 동학도들 을 우려하면서 어사를 보내 해산을 종용하는 한편 군사를 동원하는 양면책 을 확정하였다. 5 조병호가 충청감사에 부임한 후 장내리집회는 이 방식으로 3 이 논문의 본문 날짜는 번거롭지만 음력과 양력을 같이 쓰려고 한다. 약 한 달 정도의 차이가 나는 날짜를 음력만 쓰면 계절변화를 잘 파악할 수 없게 된다. 각주의 날짜는 음력을 그대로 두었다. 4 일성록 1893년 3월 26일자. 辭 陛 하는 날이 26일이었다. 5 이미 이때부터 유사시 군량으로 사용할 곡식 비축에 만전을 기하도록 경기와 전라 그리고 194 동학학보 제34호

9 해산시킬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더욱 심각했던 문제로 심한 가뭄이었다. 1893년 흉작은 심각 해서 충청도 55개 군현 중 절반 이상인 29개 군현에서 재해 피해를 입었다. 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재해지를 조사해서 세금을 감면하거나 면제해주는 것이었다 년에는 가뭄이 더 심각해서 저수지가 마르고 곡식 파종을 못하는 사태가 이어졌다. 조병호는 1894년 4월 25일(양력 5월 29일)에 충청감사에서 경상감사로 자리 를 바꾸게 된다. 이 시기는 충청도가 동학 조직의 활동으로 여러 지역에서 소용돌이 상태로 빠져들던 때였다. 회덕에 이어 진잠 공주 청산 일대의 동 학도들이 더욱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조병호는 충청병영의 병대를 회덕 과 진잠 일대로 파견해서 순회하도록 하였다. 그러한 사정은 새로 부임한 경상도에서도 동일하였다. 각 군현에서 동학 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서 관아가 통제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전임 경상감 사 이용직은 탐학해서 그가 부임한지 1년도 안되어 온 도내가 다 탕진되었 다. 7 고 할 정도로 백성을 괴롭혔다. 동학농민군이 봉기 원인을 논하며 지방 관의 자질이 거론되면서 정부가 감사들을 선임하는데도 신중해졌다. 후임 충청감사는 종친부 지종정경( 知 宗 正 卿 )인 이헌영이 임명되었다 대에 경기도와 경상도의 암행어사 9 로 여러 군현에서 폐단을 척결한 경력이 충청감사에게 지침을 전하게 했다. 6 일성록 1893년 3월 25일자. 가을에 파악된 작황은 서산 등 13개 군현은 尤 甚 이었고, 공주 등 16개 군현은 之 次 였으며, 청주 등 26개 군현은 稍 實 이었다. 7 매천야록 제1권 하, 1. 이용직과 민형식 등의 음사, 탐학과 이응서의 선정. 8 위자료, 1894년 4월 25일자. 以 趙 秉 鎬 爲 慶 尙 監 司 李 永 爲 忠 淸 監 司 敎 曰 慶 尙 監 司 有 闕 之 代 忠 淸 監 司 趙 秉 鎬 除 授 忠 淸 監 司 之 代 知 宗 正 卿 李 永 除 授 使 之 不 日 辭 朝 9 畿 繡 集 略 嶠 繡 集 略 충청감사와 갑오년의 충청도 상황 195

10 있는 그는 감사로서 적임자였다. 하지만 병으로 인해 바로 임지로 떠나지 못하였다. 4월 25일 전임 조병호 감사가 떠난 후 6월 14일에 사폐를 하고 6 월 20일 비로소 감영에 도착하여 선화당에 들어갔다. 충청감영은 무려 2달 가까이 공관 상태로 있었다. 이헌영은 전주이씨로서 34세가 되는 늦은 나이인 1870년에 들어와 종친 과에 응시하여 환로로 들어선다. 그리고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승정원 등 능력을 인정받은 젊은 관리들이 거쳐 가는 주요 관직을 역임한다. 이헌영의 이력에서 몇 가지 덧보이는 관직이 있다. 첫째는 1878년과 1882년에 경기 도와 영남 우도 암행어사가 된 일이다. 지방관으로서는 부안현감과 정주목 사를 역임한 그가 암행어사로 순회했던 임무는 도 단위로 각 군현의 실태를 파악하는 기회가 되었다. 10 둘째는 암행어사에 임명되는 형태로 조사시찰단의 일원이 되어서 1881 년에 일본을 다녀온 일이다. 그 다음에는 외국과 교섭하는 임무를 맡게 되 었는데 통리기무아문 부경리사, 부산항 감리, 의주 부윤, 주차일본동경상판 사의, 영흥부사 등으로 일본과 청국관리를 상대하였다. 셋째는 3차례에 걸쳐 감사를 맡았는데 경상감사 2회와 충청감사 1회를 역임하였다. 경상감사는 1891년에 부임하였고, 경상도가 남북으로 분도된 뒤인 1902년에 다시 경상북도 관찰사가 되었다. 충청감사는 1894년에 임명 되어 격변기를 충청도에서 지냈다. 넷째는 외관으로 나갔을 때 일지 형태로 모든 업무를 기록한 일이다. 11 공 10 김현영, 이헌영의 嶠 繡 集 略 을 통해 본 암행어사의 실상과 경상도 지방관 영남학 16, 이 기록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료총서 53에 수록되었다. 敬 窩 集 略 상; 瀛 館 集 略 ( 全 ) 扶 風 集 略 (춘 하 추 동) 畿 繡 集 略 (천 지 인) 新 安 集 略 (천 지 인) 日 槎 集 略 (천 지 인) 수록). 敬 窩 集 略 중; 嶠 繡 集 略 (춘 하 추 동) 釜 署 集 略 (상 하) 龍 灣 集 略 (상 하) 永 府 集 略 ( 全 ) 196 동학학보 제34호

11 문서를 전재한 이 기록들은 당시의 실상을 파악하는 기본 자료가 된다. 충 청감사 재임시의 기록이 바로 금번집략 이다. 짧은 기간이지만 재임시기 의 사정을 파악할 수 있도록 비교적 충실한 내용을 기록했다. 갑오년의 세 번째 감사인 박제순은 젊은 나이인 36세에 부임한다. 경기도 용인 출신으로 김윤식( 金 允 植, 1835~1922)과 남정철( 南 廷 哲, 1840~1916) 등 기호 지방의 고위 관료들을 길러낸 유신환( 兪 莘 煥 )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그의 아버지도 유신환에게 배웠기 때문에 부자가 동문이 되었고, 이 학맥에 속한 관료들이 박제순의 출세에 큰 힘이 되어주었다. 박제순은 1883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요직을 밟아왔다. 통리교섭통상사 무아문 주사 겸 기연해방군 사마( 畿 沿 海 防 軍 司 馬 )로 지내던 그는 남정철이 1884년에 천진주차독리통상사무( 天 津 駐 箚 督 理 通 商 事 務 )로 갈 때 종사관으로 동행해서 견문을 넓혔다. 다음해 돌아와 홍문관 부교리와 사헌부 장령으로 있다가 다시 천진으로 부임해서 1886년에 28세 나이로 정3품이 되어 천진 주재독리통상사무를 맡았다. 1887년에는 귀국하여 이조참의와 호조참의, 1888년에는 인천부사 겸 감 리통상사무에 임명된다. 1890년에는 종2품 내무협판에 오른 후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태리 프랑스 5개국 전권대신에 임명되었다. 1891년에는 한성부 좌윤, 호조참판 그리고 이어 예조참판과 이조참판을 역임했다. 그리고 1893년 여주목사를 지낸 후 1894년 4월에 장흥부사가 되었는데 불과 3개월만인 6월에 전라감사로 발탁되었지만 부임하지 못한다. 동학농 민군과 긴밀히 협조하고 있던 김학진이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전라감 영을 떠나지 않았고, 정부가 전라도의 여러 현안 때문에 김학진을 재임시킨 嶠 藩 集 略 (1 2). 敬 窩 集 略 하; 嶠 藩 集 略 (3 4 5) 錦 藩 集 略 ( 全 ) 再 嶠 集 略 (천 지 인). 충청감사와 갑오년의 충청도 상황 197

12 때문이었다. 12 장흥을 떠난 후 인수인계를 받지 못했던 박제순은 전임감사 이헌영이 신 병으로 이임을 원해서 빈자리가 나오자 바로 충청감사에 제수되었다. 박제 순이 부임한 이후 충청도는 더욱 격동하였다. 최시형의 기포령에 따라 동학 조직이 경내 전역에서 봉기했던 것이다. 3. 동학농민군의 1차봉기와 충청감사 조병호 정부는 1894년 3월 25일(양력 4월 30일) 삼남의 도신( 道 臣 )들에게 엄격한 지 시를 내렸다.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봉기한 동학도들의 집단행동을 엄격히 금지하고 그 두목을 잡아 효수( 梟 首 )하라는 것이다. 13 이때 동학도들은 협잡 배로 표현되었고 교화를 받지 못한 무리로 간주되었다. 전국으로 퍼져나갈 대변란의 조짐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지시였다. 전라도 고부민의 항쟁에서 촉발된 갑오년의 사태는 충청도 접계지역인 금산에서 처음 격화되었다. 14 백성들이 폐단을 바로잡는다고 걸핏하면 무 리를 모아 소란을 일으킨다면서 삼남의 도신( 道 臣 )들에게 백성들을 효유하 고 동학 괴수는 잡아다가 효수( 梟 首 )하라고 명하였다. 금산 사태도 원인을 규명해서 해결책을 강구하는 것이 아니라 동학도에만 책임을 돌리는 조치 12 고종실록 1894년 7월 18일자.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전라감사 김학진이 중앙으로 옮긴 날이 며칠 남지 않아 곧 인수인계하려 합니다. 이 감사는 소란이 일어났을 때에 부임하여 정성을 다하여 무마하여 백성을 감화시킨 결과 그가 조정으로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서는 모두 유임시켜 주기를 원한다고 하니 그의 성심과 실적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전직에 임명하여 성과를 거두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3 고종실록 1894년 3월 25일자. 14 고종실록 1894년 3월 23일자. 198 동학학보 제34호

13 를 취하였다. 이런 지침은 봉기한 동학농민군에게 엄중한 책임을 묻는 삼남 감사들의 기본방침이 되었다. 정부는 장위영 영관 홍계훈을 양호초토사( 兩 湖 招 討 使 )에 임명하고 경군을 이끌고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으로 직행하도록 했다. 홍계훈이 이끈 경군은 인천에서 청의 북양함대 소속 군함인 평원호( 平 遠 號 )와 조선 기선 창룡호, 한 양호를 타고 군산까지 온 후 육로로 전주로 향했다. 15 충청도의 동학농민군 진압도 홍계훈에게 책임이 맡겨졌다. 홍계훈은 전라도로 직행하면서 충청 도 여러 군현에 직접 군사 문제를 지시하고 있다. 충청감사 조병호도 관치 질서를 유지하는 동시에 초토사와 협력해야 했다. 이 시기에 동학대도소와 교주 최시형이 보은 일대에 있었던 것은 감영에 서도 잘 알고 있었다. 대도소는 1893년 봄에 동학도 수만 명이 집결해서 시 위했던 보은 장내리에 위치했고, 최시형은 청산에 거주하였다. 보은과 청산 일대는 동학도들의 세력이 강대해서 관헌들이 활동하기 어려웠다. 충청감 영도 이들 동학 거점을 제압할 수 없었다. 동학 교단과 최시형은 전라도에서 시작한 1차봉기를 지지하지 않았다. 4 월 초 충청도에서 호응한 지역은 회덕뿐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충청감영 을 통해 정부에 즉각 알려졌다. 16 지금 회덕의 보고를 받아보니, 동도 몇 천 명이 어젯밤에 관정( 官 庭 )을 점 거하고 군기를 빼앗아갔습니다 라고 하니, 그 형편을 더욱 헤아리기가 어렵 습니다. 또한 영교( 營 校 )의 회답을 보니, 저들이 공주 사오( 沙 塢 ) 감송( 甘 松 ) 15 양호초토등록 4월 6일자. 16 동비토록 1894년 4월 9일자. 충청감사와 갑오년의 충청도 상황 199

14 파군( 破 軍 ) 상하리( 上 下 里 ) 회덕 선창( 先 蒼 ) 등지에 모였다가 진잠으로 향 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충청감사 조병호는 회덕의 사태와 함께 보은 일대에 있는 동학도들의 동 정을 초토사에게 전하였다. 초토사의 다음과 같은 전문을 통해 그런 사실을 알 수 있다. 충청감영에서 언문으로 전보하기를, 최한( 崔 漢, 최시형)의 통문은 만 가지 로 통탄할 일입니다. 저들이 회덕( 懷 德 )의 백사장에 있다고 하여 병영에서 회 덕으로 포군( 砲 軍 )을 동원하여 보냈으나, 그 수가 150명에 불과하니 고민스럽 습니다. 청산( 靑 山 )의 일은 포교( 捕 校 )를 보내 정탐하게 하였는데, 아직 보고가 없습니다. 17 당시 긴급한 연락은 새로 설치한 전신을 통해 오고갔다. 이 전보문을 보 면 회덕의 냇가 백사장에 동학도들이 집결했다고 한다. 이들은 4월 8일(양력 5월 12일) 회덕 관아에 들어와서 무기를 빼앗아 갔던 사람들이었다. 충청병 영은 포군 150명을 보냈으나 상대는 수천 명 이었다. 청산에는 포교를 보냈 으나 동학도들이 보호하던 최시형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충청감사 조병호는 양호초토사 홍계훈에게 장위영 병정 몇 백 명을 감영 으로 보내달라고 요청 18 하였다. 홍계훈은 전라도 사정이 시급했기 때문에 이를 들어줄 수 없었다. 다만 충청병영에 회덕 일대의 수색을 지시할 뿐이 17 양호전기 1894년 4월 8일자. 18 위 자료, 4월 9일자. 200 동학학보 제34호

15 었다. 그리고 병영과 수영과 각 군현에 지시하여 경군 파견 사실을 알리고 동학도들의 귀화를 촉구하는 게시문을 마을과 거리마다 붙이도록 하였다. 충청도에서도 사태는 악화되었다. 우선 전라도 소식이 사람들을 동요시 켰다. 고부 항쟁과 지도자 전봉준 이야기와 황토현에서 벌어진 전투 결과가 전해졌다. 19 홍계훈이 거느린 장위영 병대가 전라도에 간 사실도 들려왔고, 전주성까지 점령 위기라는 말까지 속속 전해졌다. 전운사 조필영이 군량 조 달을 하면서 주민들에게 부담시켜 불만을 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20 다음은 도내에서 동학에 입도하는 사람들이 대거 늘어난 것이다. 그때까 지 은밀히 활동하던 접주들이 드러나서 포교를 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입도 해왔다. 보은 일대는 동학 세상처럼 되었고, 다른 군현도 장내리 집회의 귀 환자들을 탄압할 수 없었다. 1894년에는 동학에 입도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 었다. 시문기 등에는 감영이 있는 공주에도 동학이 전파되던 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때 본주 경내에 동학이 접( 接 )을 수십 여 곳에 설치하여 대접( 大 接 )은 천 여 명이고 소접( 小 接 ) 역시 3, 4백여 명 이하로 내려가지 않았다. 그 두령을 접 주라고 칭하였다 남유수록 1894년 4월 9일자. 20 위 자료, 1894년 4월 11일자. 轉 運 使 가 군사들을 먹이려고 각 읍에 닭과 계란을 요구하였고, 관속들로 하여금 각 마을에서 거두도록 하였다. 날아가는 닭을 잡고 놓여있는 계란을 거두기를 매우 서두르니 백성들이 더욱 실망하였다. 21 시문기. 충청도 유생 李 丹 石 이 기록한 이 자료는 1894년 정월 고부의 농민항쟁을 전하고 월별로 나누어 전개상황을 소개하고 있다. 금산 공주 이인 등지에서 동학 접주들이 富 民 에게 재산을 탈취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충청감사와 갑오년의 충청도 상황 201

16 호서( 湖 西 )의 경우 최명기( 崔 明 基 ) 강채서( 姜 采 西 ) 박화춘( 朴 和 春 )이 유성 ( 儒 城 )에서 일어나 남의 무덤을 파고 남의 재화를 빼앗았다. 임기준( 任 基 準 )은 궁원에서 일어났다. 22 공주의 대접주급으로 주목할 인물이 임기준( 任 基 準 )이었다. 하지만 이때 는 지목되지 않고 있었다. 충청감사 조병호는 공주 감영의 바로 인근까지 동학도들이 집결해서 활동하는 사실을 정부에 보고하면서 초멸하겠다고 말했으나 실제로 그럴 힘이 없었다. 일본 정보원들이 그 사실을 탐지하고 있다. 23 지금 들은 바로는 공주와 진잠 주민들은 두 읍의 경계인 성전평( 星 田 坪 )에 모여 있고 동학도들은 공주와 회덕의 경계인 사오( 沙 塢 )에 주둔하고 있는데 성전평과의 거리는 20리입니다. 그러므로 교졸( 校 卒 )을 보내어 효유하는 한 편, 비장( 裨 將 )과 영교( 營 校 ) 및 포군을 동학도들이 있는 곳으로 보내어 초멸토 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부보상들에게도 사람을 보내도록 재촉했지만 경내에 는 불과 100여 명만 있으니 걱정스럽습니다. 공주의 사오지방에 비장과 영속 및 보부상들을 보냈다는 것은 이미 전보 로 아뢰었습니다만, 회덕의 보고를 연이어 받아 보니 동학도 수천 명이 각기 총과 창을 들고 동현( 同 縣 )의 문지리( 文 旨 里 ) 24 에 주둔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곳 22 약사, 1894년 세평. 23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권, 一. 全 羅 民 擾 報 告 宮 闕 內 騷 擾 의 件 一 (7) 東 學 黨 에 관해 5월 13일 접수한 各 報 告. 24 문지리는 현재의 한국과학기술원 자리이다. 新 舊 對 照 朝 鮮 全 道 府 郡 面 里 洞 名 稱 一 覽 에 의하면 202 동학학보 제34호

17 은 사오와의 거리가 20리에 불과하므로 어제 보낸 비장에게 영을 내려 모두 초멸토록 하였습니다. 공주에 성( 城 )이 있는데, 즉 진잠 공주 회덕 세 군데 는 요해처가 될 수 있는 곳입니다. 감영의 관속은 역부족이었고 충청병영의 남영병이 치안 유지를 맡아야 했지만 동원 가능한 병력은 적었다. 하지만 남영병은 홍계훈이 병사로 재임 할 때 신식무기인 스나이더총으로 무장시켜서 위력이 있었다. 조병호는 4월 25일(양력 5월 29일) 경상감사로 전임하도록 명을 받았다. 그 때까지 충청도는 회덕의 동학농민군이 활동을 격화시키지 않으면서 커다 란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새 임지로 순조롭게 부임할 수 있었다. 4. 충청감사 이헌영과 청일전쟁 충청도의 동학농민군 1) 충청도에서 벌어진 청일전쟁 후임 감사 이헌영은 선임된 후에도 신병 때문에 공주로 바로 오지 못하였 다. 의정부의 독촉을 받은 뒤인 6월 10일(양력 7월 12일)이 되어서야 국왕에게 하직인사를 하게 되었다. 25 그때 고종은 세 가지 현안을 강조하였다. 하나는 호서가 경기를 방어하는 삼남의 요충지이니 관찰사의 책무를 다해 동학도 들을 선무해서 귀화시키라는 것이었다. 다음은 청국군에 대한 대응문제였다. 청국군은 고종이 요청해서 파병된 병사들이었다. 아산 등 여러 곳에 진을 쳐서, 이 더위를 만나 몸을 상한 사 회덕현 구즉면 문지리는 1910년 대전군 구즉면에 속하게 되었고 일부가 원촌리로 들어갔다. 25 금번집략 日 錄, 1894년 6월 10일. 충청감사와 갑오년의 충청도 상황 203

18 람과 말들이 많다. 면서 잘 응대하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는 호서지역 토호들의 횡포를 응징하고, 또 무명잡세를 혁파 하라고 강조하였다. 고종은 충청도 토호들의 횡포가 심한 것을 일찍부터 지 적하고 있었다. 1894년 격동의 해에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였다. 무명잡세 는 지방관만 걷어 들였던 것은 아니었다. 안으로는 각 궁( 宮 )과 군영 그리고 아문( 衙 門 )과 밖으로는 감영과 병영 그리고 읍진( 邑 鎭 )까지 새로운 잡세를 징 수했는데 이는 다음 감사가 와서 혁파하게 된다. 26 이헌영이 공주감영에 도착한 날은 6월 20일(양력 7월 22일)이었다. 직무를 시작할 때부터 놀라운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모두 감사로서 감당할만한 사건들이 아니었다. 첫째, 일본군 혼성제9여단이 6월 21일(양력 7월 23일) 새벽에 경복궁을 기습 점령해서 국왕 고종이 인질이 된 것이다. 둘째, 경군 각 병영이 일본군의 기 습을 받고 무장해제가 되었다. 셋째, 대원군이 다시 섭정으로 국정을 간여 하고, 일본공사가 위안스카이( 袁 世 凱 )를 대신해서 내정 간섭을 하기 시작했 다. 넷째, 그때까지 실세였던 민영준 등 척족들이 밀려나고 개화파 관료가 실권을 차지했다. 다섯째, 6월 23일(양력 7월 25일)에는 아산만의 풍도 근해에 서 청일 간 해전이 벌어졌다. 여섯째, 6월 27일(양력 7월 29일) 새벽 성환에서 청국군과 일본군 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일곱째, 충청도 내포의 여러 군현 이 청일전쟁의 와중으로 시련을 겪었다. 아산 서산 해미 홍주 덕산 예산은 패산한 청국군과 추격하는 일본군이 약탈 파괴 방화 위협 등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26 충청도 관찰사가 올린 장계 1894년 10월 26일. 충청감사 박제순의 이 장계를 보면 고종은 의정부에 내린 지시를 통해 무명잡세의 근절을 거듭 강조하고 있고, 충청도 26개 군현에서 10년 동안 신설된 각종 잡세를 혁파했던 사실이 확인된다. 204 동학학보 제34호

19 이와 같은 사건은 서울과 충청도 두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청국과 일본의 전쟁은 충청감사 이헌영이 관할하는 경내에서 벌어졌다. 두 전투의 상황을 보면 선전포고 없이 일본군이 기습해서 시작한 전투였다. 청국군은 해군이나 육군이나 사전에 탐지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기습을 당해서 무 너졌다. 27 일본군의 도발은 계획에 따른 작전이었다. 이미 5월 2일(양력 6월 5일) 전쟁 지휘부인 대본영을 설치해서 전시상태를 조성하고, 제5사단 예하의 2개연 대가 중심인 증강된 혼성제9여단을 조선에 파병해서 서울로 들어간 다음 장기주둔의 핑계로 조선정부에 내정개혁을 강요하는 등 위협을 가하다가 6 월 21일(7월 23일) 경복궁을 점령하였다. 이렇게 험악한 상황을 만들어놓고 일본 해군 함정이 청국의 북양함대를 기습한 것이다. 풍도전투를 감행한 일본 함정은 제1유격대 소속 순양함 요시노( 吉 野 ), 아 키츠시마( 秋 津 洲 ), 나니와( 浪 速 )함이었다. 북양함대 소속 치유엔( 濟 遠 ), 광이 ( 廣 乙 )함은 조선에 파병하는 청국군을 호위하고 돌아가기 위해 아산만에 머 물다가 기습을 받았다. 인근에 있던 청국 포함 카오장( 操 江 )호와 영국 상선 코싱( 高 陞 )호도 포격을 받아 카오장호는 태안 해변에서 나포되었고, 청국군 1,100명이 탄 코싱호는 나니와함의 포격으로 침몰해서 탑승자 대부분이 수 장되었다. 28 청일전쟁 발발 과정은 다음과 같다. 27 청일전쟁에 관한 내용은 신영우 내포일대 갑오년 상황과 동학농민군의 봉기 동학학보 제29호 참고. 28 선전포고 없이 수송선을 침몰시켜 대규모 피해가 일어난 고승호사건으로 영국에서 반일감정이 비등해졌다. 나니와함의 함장은 러일전쟁 때 일본 해군 연합함대를 지휘하게 되는 도고 헤이하치로( 東 郷 平 八 郎 ) 대좌였다. 충청감사와 갑오년의 충청도 상황 205

20 5월 5일(양력 6월 8일) - 청국군 아산만 백석포 상륙 5월 9일(양력 6월 12일) - 일본군 혼성제9여단 서울 진입 6월 21일(양력 7월 23일) - 일본군 경복궁 기습 점령 6월 25일(양력 7월 25일) - 청일군 풍도전투 6월 27일(양력 7월 29일) - 청일군 성환전투 이 일지를 보면 청국군 선발대가 머물던 기간은 52일이었다. 조선정부는 경군이 보유한 군마를 청국군에게 제공하도록 하였고, 인근 군현들은 수천 명에 달하는 청국군에게 적지 않은 군량과 말먹이를 공급해야 했다. 결국 충청감사가 각종 물자를 청국군에게 제공하는 임무를 감독하지 않을 수 없 었다. 충청감사 이헌영은 태안부사의 보고를 받고 풍도전투의 발발 사실을 알 게 되었다. 태안부사는 광이함( 廣 乙 艦 ) 승조원 136명이 태안 관아에 들어왔 는데 일본 군함 3척이 공격해서 침몰했다고 보고해왔다. 태안 관아는 이들 중 부상자 6명은 서산으로 보냈고 나머지 130명은 아산에 있던 청국 진영으 로 보냈다고 했다. 29 이러한 전쟁 발발을 감사도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나 성환전투는 지역민과 관아에 직접 피해를 주었기 때문에 대책 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투 상황은 이중하의 장계를 보고 알게 되었 다. 30 6월 27일 새벽부터 성환에 머물고 있는 섭사성의 진영은 일본군과 접전하 29 금번집략, 별계, 1894년 6월 25일. 30 위 자료, 별계, 1894년 6월 28일. 206 동학학보 제34호

21 여 서로 많은 자들이 죽고 다쳤습니다. 마침내 중과부적으로 사시( 巳 時, 오전 9~11시) 무렵에 통령 섭사성의 군대들이 천안으로 물러갔고, 이어서 제독 섭 지초도 일시에 떠나 공주를 향하여 물러났습니다. 신( 臣 ) 또한 진의 뒤쪽에서 따라갔습니다. 6월 27일 출발하여 해시( 亥 時, 오후 9~11시) 무렵에 공주에 도착 하여 대진은 잠시 주둔하였고, 통령 섭사성과 통령 강자강은 부병들을 거느 리고 공주 광정현( 廣 亭 峴 )을 지켰습니다. 서산 해미 홍주 덕산 예산 등의 읍은 태안에서 온 중국 병사와 성환에서 싸움에 져서 흩어진 병사들이 흘러 들어와서 의지할 곳이 없어 마을을 수색 하고 약탈하여, 백성들이 모두 놀라서 흩어졌습니다. 섭지초는 군사와 함께 공주감영까지 들어왔으나 섭사성과 강자강은 부 하들과 함께 광정현에 머물렀다. 광정현은 지금 정안면 광정리이다. 청국군 은 소규모로 분산해서 사방으로 흩어진 후 재집결하였다. 31 후퇴하는 동안 에 마을을 찾아가 약탈하거나 음식물을 구하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청국군보다 더 심했던 것이 추격하던 일본군이었다. 아산현감 정 인진이 감사에게 올린 보고가 그런 사실을 잘 전해주고 있다. 32 지난 6월 27일 오시 무렵에 몇 천명인지 알 수 없는 일본군들이 각각 총과 칼을 가지고 마대( 馬 隊 )와 함께 혹은 성환으로 가는 길을 따라가고 혹은 백석 포에서부터 출발하여, 일시에 갑자기 빠르게 진격하기도 하고, 혹은 객사에 주둔하거나, 혹은 사면으로 산판에 주둔하면서 사직을 불태웠습니다. 이어서 31 위 자료, 별계, 1894년 7월 3일. 32 위 자료. 이하 주요 내용은 금번집략 기사 참고. 충청감사와 갑오년의 충청도 상황 207

22 인가와 각각의 관청건물 등에 들어가 남아 있는 돈과 곡식 및 여러 물건들을 모두 빼앗아 갔으며, 각 항목에 대한 장부들도 모두 불에 타고 찢겨 졌습니 다. 도로의 민가와 의복, 그릇, 여러 가지 물건들이 부서지고 찢겨졌고, 뒤져 서 가져간 것이 그 수를 알 수 없으며, 위협하고 능멸한 것은 이루 말할 수 없 을 정도입니다. 일본군은 아산에서 청국 병사들이 남기고 간 탄환과 기계를 관문( 官 門 )의 안팎에서 꺼내어 태웠 고, 백석포에 쌓아둔 곡식을 윤선( 輪 船 )에 싣고 갔다고 했다. 이 곡식은 아산에서 거둔 세곡으로 청국군에게 군량으로 제공한 것인 데 모두 일본군이 탈취해간 것이었다. 충청감사 이헌영이 일본군이 경내 군 현에서 저지른 피해에 대해 항의할 통로가 없었다. 다만 일본군이 입힌 피 해를 조사해서 정부에 보고할 뿐이었다. 청국군 제독 섭지초는 공주에 들어온 다음날 병사를 이끌고 연기와 청주 방면으로 떠났다. 출발하기 전에 감영을 방문하고 충청감사 이헌영에게 사 례하는 뜻을 표했다. 영접관 이중하는 병 치료 때문에 동행하지 않았다. 이 헌영은 공주판관 신욱( 申 㮋 )에게 안내해서 가도록 했다. 청국군은 6월 28일 연기에 도착해서 머물러서 하룻밤을 보냈고, 다음날 청주에 도착한 후 다시 청안으로 떠났다. 그런 행군 일정은 지방관들이 속속 감사에게 보고해왔고, 감사는 다시 정부에 장계로 그 사실을 급히 알렸다. 청국군은 충주를 거쳐 북상하였다. 청국군은 전투에 패배하여 사기가 떨 어진 위에 군기도 무너진 상태였다. 청주와 충주를 지나면서 인가에 들어가 서 소와 닭은 물론 쌀과 옷감을 탈취하면서 주민들에게 보여준 행태는 실망 208 동학학보 제34호

23 스러운 것이었다. 33 충주에 사는 백성들이 하룻밤 사이에 모두 흩어져 제각기 살 길을 도모하 니, 충주목사가 마침 쌀과 장( 醬 )을 준비하여 청군을 기다렸다. 청군은 왜군이 충주의 가까운 곳에 있다는 말을 듣고 가던 길을 바꾸어 신당의 저자로 들어 갔는데, 그 수효가 무릇 6000여 명이었다. 군병들이 민가로 흩어져 들어가 소나 닭을 탈취한 자도 있고 또 한 말의 쌀과 한 자의 베 및 심지어 호박과 마 늘과 고추까지 모두 탕진하여 남은 것이 없었으니, 거주민들이 크게 실망하 였다. 일본군은 청국군을 추격하지 않았다. 한 여름의 찌는 듯한 더위 속에 서 울에서 충청도 성환까지 행군해오고 전투를 벌이면서 지쳐있었다. 군수물 자의 운반을 위해 강제로 불려온 조선 인부의 많은 수가 중간에 도망간 까 닭에 곤란도 겪었다. 34 그래서 노획물을 가지고 서울로 돌아갔다. 충청감사 이헌영이 고종에게 지시받은 청국군을 대한 응접 임무는 풍도 전투와 성환전투에서 패배당한 청국군을 평양으로 호송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2) 일본군 제5사단의 충청도 행군 청국군이 충청도에서 떠나가자 일본군 대부대가 충청도를 거쳐 북상한 다는 보고가 잇달아 들어왔다. 연풍현감과 충주목사가 긴급히 알려온 것이 33 이면재, 갑오일기 갑오년 7월 34 長 岡 外 史, 新 日 本 の 鹿 島 立, 小 林 川 流 堂, 1920 충청감사와 갑오년의 충청도 상황 209

24 었다. 35 황해의 제해권을 갖지 못한 일본군은 청국군과의 결전을 준비하기 위해 먼저 육로를 확보하였다. 경복궁을 점령한 후 강제로 조일동맹을 맺고 협 조를 강요했다. 그리고 부산과 서울을 잇는 요지에 군용전신소와 병참부를 시급히 설치하고 경비병을 배치하였다. 히로시마의 대본영과 일본군 참모 본부는 군용전신을 통해 용산의 일본군 주둔지와 남산의 일본공사관을 연 결시켜서 내정간섭을 자행하고 군사작전을 원격 조종하였다. 그리고 이 통 로를 이용해서 히로시마에 있던 제5사단 잔여 주력부대를 북상시키려고 했 다. 부산으로 건너온 이 부대가 충청도를 거쳐서 가려고 들이닥친 것이다. 충청감사는 일본군을 상대로 경내를 방어할만한 군사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청국군은 평양에 대규모 병력 을 증파해서 주둔하였고, 공주에서 올라간 청국군 부대도 합세하였다. 일본 군은 평양 공격에 대비해서 대규모의 군수물자를 운반하고 올라갔다. 충청도에는 설치한 군용전신소와 병참부는 연풍 안보와 충주 가흥에 위 치하였다. 이 노선으로 7월 하순과 8월 초에 연이어 많고 적은 일본군 부대 가 지나갔다. 7월 18일(양력 8월 18일)에는 일본군 제5사단장 노즈 미치츠라 ( 野 津 道 貫 ) 중장 36 이 많은 군수물자를 가지고 안보에 도착하였다. 그 사실은 연풍현감 한진태의 보고로 충청감사 이헌영에게 전해졌다. 문경의 향리가 전달한 내용에 의하면 노즈 중장 일행은 짐꾼을 355명이 35 금번집략, 별계, 1894년 7월 25일, 7월 30일, 8월 3일. 36 노즈 미치츠라( 野 津 道 貫, 1841~1908)는 가고시마의 高 麗 町 출신의 사쓰마번 사무라이로서 메이지정부의 고신페이( 御 親 兵 )에 들어가 육군 상층부에 속하게 된다. 1884년 육군경 오야마 이와오( 大 山 巌 )의 유럽 출장을 수행해서 근대육군의 견문을 얻은 다음에 1885년부터 히로시마 진대의 사령관, 히로시마 주둔 육군 제5사단장을 맡는다. 이 사단이 1894년 조선 침략의 동원부대로 파병되면서 노즈 중장이 안보와 가흥을 지나가게 되었다. 210 동학학보 제34호

25 나 요구하면서 새벽 일찍 색리가 인솔해서 기다려 달라고 하였다. 그것이 동래부터 올라오면서 연로의 각 읍을 통과하는 관례라고 하였다. 이런 규모 로 북상하는 일본군이 많아지자 조령에서 충주에 이르는 도로 인근의 주민 들은 놀라서 산속으로 피난하여 마을이 빌 정도였다. 충주목사 민영기는 7월 18일(양력 8월 18일) 일본육군 2등군리 하마나카 칸 유( 濱 名 寬 祐 ) 37 가 장위영 초관 1원( 員 ), 좌우포청의 포교 각 1명과 함께 부산항 에서부터 올라온 10,000여 명의 대군을 영접하기 위하여 충주에 와서 머물 렀으며, 7월 19일과 20일에 일본병 200명 내지 300명이 부대를 이루어 영남 에서 육지로 속속 올라와 대략 1,100여 명이 되는데, 혹 곧바로 지나가고 혹 은 유숙하기도 하면서 모두 경성으로 향하였습니다. 고 감사에게 보고하였 다. 노즈 중장 일행이 지나간 뒤에도 일본군이 매일 끊이지 않고 30~40명 또 는 40~50명 서울로 올라가고 있다는 보고가 잇달았다. 7월 24일(양력 8월 24 일)에는 일본군 1,000명과 기마 70여필, 다음날에도 일본군 1,000명과 기마 100여 필이 지나갔다는 충주목사의 보고가 올라왔다. 남한강 하담나루에는 군량과 병기를 쌓아두고 있다고 하였다. 충청감사 이헌영은 이 같은 사실을 장계를 통해 정부에 보고만 할 뿐이었다. 해당 지방관에게도 빠르게 보고할 것만 강조할 뿐이었다. 그러나 세세한 보고는 들어오지 않았다. 노즈 중장은 가흥에서 배를 타고 남한강을 내려가 하루만에 송파에 도달 하였다. 많은 장비와 인원을 쉽게 이동시키는 방법으로서 수로는 매우 편리 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이 배편으로 서울로 향했다는 보고를 충주목사가 하 37 하마나카 칸유( 濱 名 寬 祐, 1864~1938)는 시즈오카 출신으로 육군경리학교를 나와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참가한 경리장교로서 제5사단 軍 吏, 12사단 主 計 監, 육군 主 計 監. 關 東 都 督 府 의 병참 경리부장이 된다. 그는 중국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만주사를 연구하여 契 丹 古 傳 를 저술한다. 충청감사와 갑오년의 충청도 상황 211

26 지 않았다. 그 배가 화륜선( 火 輪 船 )인지 조사조차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안보와 가흥의 일본군 군용전신소가 갖는 중요성도 연풍현감과 충주목 사는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충청감사 이헌영도 한 차례만 장 계에서 군용전신소의 상황을 보고했을 뿐이었다. 연품현감이 전선을 가설 한 후에 안보동( 安 保 洞 )에 분국을 설치하였는데, 거의 수백 명이 여전히 머물 고 있다고 한 것처럼 주둔병만 관심을 가졌다. 38 충주 가흥에 위치한 역참도 일본군이 점거하여 군용시설인 전신소와 병 참부로 사용하였다. 가흥역은 남한강 수로를 이용해서 서울로 세곡을 운송 하기 위한 가흥창과 함께 있었는데 일본군은 이런 역과 창의 시설들을 점거 해서 사용하였다. 39 연풍 안보와 충주 가흥의 군용전신소와 병참부는 설치하기 전에 전혀 충 청감사와 사전협의가 없었다. 이헌영이 감사로 부임한 이후 작성한 일지의 어디에도 관련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부산에서 시작한 이 통신망과 병참 망은 밀양 대구 다부역 해평 낙동 태봉 문경으로 연결해서 충청도 로 들어왔고, 서울 방면으로는 이천 곤지암 도연을 통해 송파로 이어졌 다. 40 3) 유생들의 반일 의병 추진과 금지 일본군이 서울 장안을 장악하고 경복궁을 점령한 사실은 국가에 최악의 38 안보는 현재의 수안보 북쪽 고개를 넘어가면 나오는 대안보를 말하는데 여기에 있던 역참을 일본군이 점거하고 있었다. 39 8년 후인 1902년에 작성한 충주군양안 은 21칸 커다란 초가집을 군용전신소로 쓰고 있었다. 신영우, 대한제국기 충북 충주의 주거사정 역사실학 42집, 2010 참고. 40 명치 27년 6월 陣 中 日 誌, 병참총감부 212 동학학보 제34호

27 위기가 닥친 것이었다. 이 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충청도의 양반 유생들이 대책을 강구하였다. 먼저 활동에 나선 지역은 공주와 홍산 그리고 은진이었 다. 이들 지역의 유생들은 유회소( 儒 會 所 )에서 의병 조직을 심각하게 논의하 였다. 41 국왕까지 위태롭게 된 사태를 극복하기 위한 의병 논의였기 때문에 유생 들은 충청감사도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창의 준비를 알렸다. 명분은 국 왕에 대한 충성과 외적이 경복궁을 침범한 분함이라고 밝혔다. 이때 충청도에는 선무사 정경원( 鄭 敬 源 )이 동학농민군 효유와 관치질서 유지를 목적으로 순회하는 중이었다. 고위관직인 이조참판을 역임하고 왕 명을 받아 활동하던 선무사 정경원은 창의 소식을 듣자 즉각 유생들에게 의 병을 조직하지 말라고 말렸다. 충청감사 이헌영도 선무사의 조치에 동조해 서 유회소에 유시를 보내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유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솔하게 거사한다면, 오히려 임금의 급한 사정을 해결하지도 못하고, 마 침내는 국가의 해가 될 것이 명확하다. 지금의 시기와 기미를 시험 삼아 본다 면, 과연 어떻다고 말하겠는가? 진실로 군사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면, 적 에 대한 분노와 증오에 대하여 어찌 많은 선비들이 뛰쳐나오기를 기다리고 있겠는가? 조정에서는 반드시 소모( 召 募 )하게 될 것이니, 시기와 기미로 볼 때 실로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 비유컨대 만일 호랑이가 집에 들어왔을 때, 집 밖에 있는 사람들은 어려움을 구하는 것에 급급하여 무기를 들고 둘러싸서 41 이 절은 신영우, 내포 일대의 갑오년 상황과 동학농민군의 봉기 동학학보 29, 2013의 관련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함. 충청감사와 갑오년의 충청도 상황 213

28 그것을 잡으려 한다면, 호랑이는 나올 수 없어서 포효하면서 집안에서 마음 대로 하게 될 것이니, 어찌 근심이 없게 된다고 하겠는가? 42 지금 경복궁을 점거한 일본군에게 국왕이 붙잡혀 있으니 섣불리 창의를 거사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집안에 들어온 호랑이를 자극시키는 것처럼 국왕이 일본군에게 해를 입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진전되는 상황을 보면서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자고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적절한 말이 아니 었다. 이미 정권은 일본공사가 지시하는 대로 따르는 개화파가 장악하고 있 었다. 국왕이나 대신들은 위협을 무릅쓰고 의병을 일으켜서 일본군을 축출 하자는 창의를 이끌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일본공사의 요청대로 어떤 일이든 청일전쟁에 협력해주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다시 부여의 유생 천기일( 千 基 一 )도 의병 봉기를 시도하였지만 충청감사 이헌영은 같은 논리로 창의를 금지시켰다. 부여 유생들은 훈신( 勳 臣 )들이 구름같이 모였다 고 했으나 이헌영은 그것을 경솔한 거사라고 하였다. 오 히려 임금의 급한 사정을 해결하지도 못하고, 마침내는 국가의 해가 될 것 이 명확하다. 이번 달의 시기와 기미를 시험 삼아 보건대, 종사가 그대로 보 존되어 있고, 임금에게도 탈이 없으니, 창의 모병하여서 장차 무엇을 하려 고 하는가? 생각건대 없는 것에서 문제를 일으켜서 소란의 단서를 야기하 여, 위로는 국가에 근심을 끼치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화를 일으킬까 두 렵다. 진실로 군대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고, 적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있다 면, 반드시 조정에서 소모하게 될 것 이라며 제어한 것이다 금번집략, 별감, 공주홍산은진유회소. 이 자료에는 날짜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선무사 정경원의 임명 시기와 자료 수록 순서 등 전후 사실을 보면 양력 7월 23일 이후에서 8월 초까지로 보인다. 43 위 자료, 별감, 유시 부여유생천기일 214 동학학보 제34호

29 똑같은 사례가 은진유회소에도 전달되었다. 충청감사는 왕명을 받고 온 선무사의 유시를 보지 못했느냐 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묘와 사직이 이미 안정되었다. 임금께도 탈이 없다. 창의 모병하여 장 차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생각건대 없는 것에서 문제를 일으켜서 소란의 단 서를 야기하여, 위로는 임금께 근심을 끼치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화를 일 으킬까 두렵다. 44 충청감사 이헌영과 창의를 시도한 유생들의 시국관 차이는 명백하였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거했지만 국왕의 신변에는 탈이 없다는 것이었다. 오 히려 창의 모병을 하면 문제를 일으켜서 국왕과 백성들에게 화를 일으킬 것 이라고 하였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거하고 국왕이 인질이 된 사태와 청일 양군의 군대가 조선에서 벌인 전쟁까지 지켜보았으면서 선무사나 충청감 사는 종묘와 사직이 안정 된 상태라고 설득하고 있었다. 결국 양반 유생들 의 창의 시도는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4) 충청도의 동학도들과 충청감사 이헌영 이헌영은 8월 25일(양력 9월 24일) 관인을 후임감사에게 전해주고 감영을 떠나 서울로 올라갔다. 그때까지 약 2달 동안 충청도 전역은 무장봉기를 준 비하던 동학농민군 때문에 각 군현의 관아가 압도당하고 있었다. 국가의 위기에 즉각 대응한 세력은 동학농민군이었다. 보은 청산 옥천 영 동 일대에는 동학도들이 몰려들었다. 1893년 봄 이래 동학도들의 활동을 전 44 위 자료, 별감, 유시 은진유회소 충청감사와 갑오년의 충청도 상황 215

30 혀 제어되지 않았다. 서남부 전라도와 접경한 군현에서는 도계를 넘나들던 동학농민군이 관아까지 들어와 무기와 군량 등을 요구하는 일이 벌어졌다. 청일 간의 전투를 직접 목격한 내포 일대는 동학농민군이 활동하기 시작했 다. 충청감영이 있는 공주도 동학도들이 집단행동을 하면서 공주 부내까지 들어오는 것도 막지 못하고 있었다. 충청감사에게 경복궁 침범 직후 보고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천 : 6월 29일(양력 7월 31일) 전라도에서 동학도들이 도계를 넘어왔다. 전 라도 성당에서 온 동학도들이 관아까지 난입해서 물품을 요구하고 마을에 들 어가서 사사로이 총과 마필을 가져갔다. 또 빈민을 구호한다고 말하면서 조 ( 租 ) 271석 10두, 쌀 15석, 소 1마리, 돈 150량 을 빼앗아갔다. 연산 : 7월 6일(양력 8월 6일)에 동학배 20여 명이 각각 총과 창을 지니고 쏘 면서 돌입하여 총 4자루, 돈 30냥, 백성의 말 3필을 빼앗아갔으며, 초 7일 미 시 무렵에 100여 명이 또 갑자기 들이닥쳐 돈 100냥을 토색해 갔고, 초8일에 는 10여 명이 총을 쏘면서 들어와서 읍의 말 1필을 빼앗아 가서 읍과 마을에 서 폐단을 저지르고 민정을 시끄럽게 하였다. 정산 : 과거의 원한 때문에 양반이 맞아 죽는 사건이 벌어졌다. 관현면 신 대리에 사는 진사 조창하( 趙 昶 夏 )가 17년 전에 돈을 빌려가서 갚지 않았다며 동학도들이 집단 폭행을 했다. 동학도들은 그 돈을 받아내서 무장을 하는 비 용으로 사용하려고 했다. 보은 : 7월 2일(양력 8월 2일)에 동학도들이 군수 정인량에게 창의두령이 되 어달라고 요구하였으나 경사( 京 司 )가 위급한 날에 창의하겠다는 이야기는 괴 이하다고 할 수 없겠지만, 지금 서울의 소식이 어떠한지 모르는데 망녕된 생 각을 하면 안 된다고 했다. 216 동학학보 제34호

31 서천 : 7월 9일(양력 8월 9일) 부안의 동학도들 57명이 마필과 무기가 부족하 다면서 이방과 수성포수에게 강요하여 화승총과 화약 등을 빼앗아갔다. 서천포 청양 이인에서도 동학도들의 동정이 범상하지 않았다. 7월에 들어오면 홍주와 같은 대읍도 동학도들의 세력은 관아가 감당하지 못할 만 큼 커졌다. 홍주 목사 이승우의 막객( 幕 客 )인 홍건은 구체적인 상황을 다음 과 같이 전하고 있다. 45 초 7일(양력 8월 7일). 내가 빈 관아에 있었는데, 밤에 어떤 소리를 들었다. 시끄러운 것이 파리( 巴 俚 )같기도 하고 무당이 외우는 것 같았다. 시장 거리에 서부터 성 밖의 교외까지 가득하여 소리가 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밤새 끊이 지 않아 괴이하여 시동에게 물어보았더니, 시동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바로 동학이 주문을 외는 소리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밤마다 점점 더해져 서 이교와 노령( 奴 令 ) 같은 것들도 감염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동학도들이 모여서 밤마다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마치 가곡을 부르거나 무당이 무가를 부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홍주목 관아의 향리나 포교, 그 리고 관노까지 동학에 감염되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외촌은 동학세상으로 변한 모습이 명확하였다. 무기와 군량을 구하는 활동만 아니라 그 과정에 과거의 원한을 보복하는 행위까지 나오고 있었다. 외촌( 外 村 )에서 전해온 것을 들어보니, 난도( 亂 徒 )가 사방에서 일어나 무리 45 홍양기사 1894년 7월 7일, 7월 9일. 충청감사와 갑오년의 충청도 상황 217

32 를 불러 모아 패악을 자행하였는데, 남의 재물을 약탈하고 남의 말과 가축을 빼앗았으며, 남의 무덤을 파헤치는 것을 감히 금하지 못하였고, 돈을 빌려준 자는 감히 돈을 돌려받지 못하였으며, 사소한 원한에도 반드시 보복을 당하 였다. 초 9일. 우연히 동쪽 문루에 올랐다가 마침 패류( 悖 類 )가 시가를 제멋 대로 다니며 공사 간의 말과 노새를 빼앗는 것을 보았는데 마치 사람이 없는 것과 같았다. 그것을 보는 자들은 피하고 감히 어느 누구도 어찌할 수가 없었 다. 9월에 들어와서 동학도들의 활동이 더 활발해졌다. 8월 1일(양력 8월 31일) 1만여 명이 공주 정안면 궁원에 모여서 창의를 했다고 감영에 알렸으며, 다 음날에는 깃발을 잡거나 창과 칼을 지니고 본부 안으로 들어와 길에 가득 찼다. 46 감영조차 부내에 들어온 동학도들을 제어할 수 없었다. 정부에서는 충청도 선무사로 학무협판 정경원( 鄭 敬 源 )을 파견하여 동학도 들을 해산시키려고 하였다. 정경원은 군국기무처의 회의원으로 갑오개혁 의 주요 법안을 만들던 인물이었다. 이때 거론된 가장 위태로운 동학도들은 이인에 집결한 세력이었다. 충청감사 이헌영은 양호초토사 파견 때와 마찬가지로 선무사 정경원과 함께 경내의 동학도들을 해산시키려고 하였다. 이인의 동학취회소에는 거 듭 방문을 게시하여 선무사와 함께 효유하여 여러 차례 말한 바 가 있다 면서 만약 해산하지 않고 소요를 일으키면 그 두령을 잡아서 중벌을 내릴 것 47 이라고 하였다. 46 금번집략 1895년 8월 5일. 47 위 자료, 별감, 이인취회소의 방문. 218 동학학보 제34호

33 선무사 정경원은 여러 군현에서 동학도들을 만나 사정을 들었다. 홍주에 서 내포 일대의 접주들을 불러 접견한 이후 비로소 주요 지도자들을 파악하 게 되었다. 48 그것은 중요한 정보가 되었다. 충청감사 이헌영이 영동에 보낸 공문은 새로운 사실을 보여준다. 충청도 에서도 전라도와 같이 집강을 정해서 개혁을 추진하도록 한 사례가 나오는 것이다. 49 전라도에서 전라감사 김학진이 집강을 통해 적폐를 개혁하라고 했던 것과 다름없다. 무리를 모아서 소요를 일으킨 일은 집강( 執 綱 )을 차정하여 금하도록 하였 다. 지금 영동에서 보낸 보고를 보니, 1,000여 명의 도당들이 인가에 갑자기 들어가서, 사람을 때리고 재산을 부수고, 돈과 재물을 빼앗으며 모이고 흩어 지는 것이 일정치 않다고 하였다. 진실로 너희들이 염두에 두어 금지하였으 면, 어찌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영동 집강 손인택 등에게 보낸 별감( 別 甘 )이다. 여기서 감사가 집강을 정 해서 활동하는 것을 인정한 사례가 나온다. 이 자료만으로는 구체적인 내용 을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하지 않으나 영동 관아가 동학농민군을 통제할 수 없게 되자 충청감사 이헌영도 전라도와 마찬가지로 집강소의 폐정개혁 을 용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8월 2일(양력 9월 1일) 동학도 수천 명 이 공주성에 들어왔다가 다음날 나갔 48 홍양기사 갑오 8월 6일. 홍주의 金 永 弼 丁 大 哲 李 漢 奎 鄭 元 甲, 덕산의 李 春 實, 예산의 朴 德 七 朴 道 一, 대흥의 兪 致 敎, 보령의 李 源 百, 남포의 秋 鏞 成, 정산의 金 基 昌, 면천의 李 昌 求 등이었다. 49 금번집략, 별감, 영동의 집강 손인택 등에게 내림. 충청감사와 갑오년의 충청도 상황 219

34 다. 이 사실을 장계로 정부에 보고를 하였다. 8월 19일 동학도 수천 명 이 금 강 근처에 모여서 공주감영에 들어오려고 했다. 이때는 바로 23일(양력 9월 22일)까지 해산도 하지 않고 시위를 하였다. 50 8월 19일(양력 9월 18일) 동학배 수천 명이 금강 근처에 모여 장차 감영으로 들어가려 한다고 하므로, 감영과 공주목에서 이끌고 있는 군졸과 영( 營 ) 아 래 사는 각 동민들을 불러 모아 여러 곳으로 보내 밤새 막아서 지키도록 하였 다. 이러 집단행동은 충청감사 이헌영을 반일 무장 봉기에 동참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헌영은 여기에 동조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군졸은 물론 동민까지 동원해서 공주성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이헌영은 이미 신병으로 인해 감사 직무를 수행하기 어렵다고 교체를 요구한 상태였다. 4. 충청감사 박제순과 공주 우금치전투 1) 충청도의 동학농민군과 진압군 파견 박제순은 동학농민군의 재봉기 직전인 8월 25일(양력 9월 24일) 공주목 동 헌에서 감사의 인부( 印 符 )를 받았다. 51 이때 충청도 전역은 동학 조직에 가세 하는 농민들이 늘어나고 집단행동이 많아지면서 소란해져갔다. 9월에 들어 와 남접농민군의 재봉기와 동학교주 최시형의 기포령으로 충청도 전역이 50 위 자료, 일록, 1894년 8월 19일 ~ 23일. 51 위 자료, 일록, 1894년 8월 25일. 공주목 동헌에서 관인과 인부( 印 符 )를 주고받은 이후 출발하였다. 220 동학학보 제34호

35 격동하였다. 9월 하순에는 양호도순무영에서 경군 병대를 선발해서 파견하였다. 의정 부에서는 경군이 내려갈 경기감사와 충청감사에게 공곡( 公 穀 )과 공전( 公 錢 ) 을 경군에게 제공하라는 영을 내렸다. 52 이런 지시는 경군이 이동할 때마다 연이어 내려왔다. 53 충청도의 여러 군현에서 동학농민군이 관아의 무기가 탈취되었다는 보 고가 들어왔다. 본격적으로 관아를 들이쳐서 무기고에 보관된 화승총과 칼 등 각종 무기를 탈취해갔다. 감사로서 관아 점거는 용납 불가였다. 충청감 사 박제순은 관아를 지키지 못한 지방관을 그때마다 엄중히 관직을 삭탈하 고 엄벌을 내리도록 했으나 무기를 빼앗긴 군현이 갈수록 늘어나자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다. 10월 초까지 무기를 빼앗긴 곳은 상당산성을 비롯해서 제천 단양 청안 영동 천안 회인 진천 목천 직산 서천 등 10개 군현이었다. 54 재봉기한 전라도의 남접농민군은 삼례에 집결한 이후 공주성을 목표로 북상을 시도하였다. 최시형의 기포령에 따라 북접농민군도 충청도 전역에 서 일시에 봉기하였다. 전라감사 박제순은 경내 안정과 공주성 방어라는 두 가지 화급한 문제에 대처해야 했다. 그러나 공주성이 위협을 받게 되자 신임감사 박제순에게는 이제 공주성 방어가 가장 시급한 현안이 되었다. 남접농민군은 각지에 통문을 보내 일대 봉기를 촉구하며 공주성 점령을 공언하였다. 노성현감 김정규가 보고를 통 해 그 사태를 알게 된 박제순은 호남 비적( 匪 賊 )의 경보( 警 報 )가 이르렀다.( 湖 52 갑오군정실기 10월 1일. 關 경기감사 충청감사 53 위 자료, 10월 7일. 54 위 자료. 충청감사와 갑오년의 충청도 상황 221

36 南 匪 徒 警 報 至 矣 ) 55 고 정부에 급보를 올렸다. 대규모 세력이 공주성을 위협하 면 자체 무력으로는 방어가 불가능하였다. 정부에서도 동학농민군의 재봉기에 대처하였다. 첫 번째는 각도 감사와 수령, 병사와 수사, 그리고 군현의 지방관들이 직접 토벌 대책을 세우라는 것이었다. 56 각읍( 各 邑 )과 각진( 各 鎭 )에 각별히 신칙하여 엄하게 단속하고 군 사를 모아 방비 하도록 한 것은 경군이 무력했던 이 시기의 유일한 대응 방 법이었다. 둘째는 지금까지 주요 지방관에게 군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군국기 무처의 건의 57 에 따라 충청도의 홍주가 전라도의 나주 순창, 경상도의 안 의 예천과 함께 군권 부여 대상지로 선정되었다. 이어 전국 주요 군현에 소모사와 조방장 등을 임명하는데 충청도에서는 진잠현감도 소모사에 임 명되었다. 58 9월 22일에는 호위부장 신정희를 양호도순무사에 임명해서 전국의 관군을 지휘하는 최고 지휘부인 양호도수무영을 설치하도록 하였 다. 59 다음으로는 일본군을 진압에 참여시키는 방법이었다. 관군의 힘만으로 는 전국 차원에서 일어난 병난을 진압할 수 없었다. 청국군을 차병해서 진 압시키려고 했던 것처럼 일본군도 이용하려고 했다. 일본군의 시각에서 보 면 동학농민군의 진압은 절실한 당면과제였다. 당장 청국과 전쟁을 하는데 후방으로 보았던 조선 내부에서 동학농민군이 방해를 하였다. 오히려 일본 55 고종실록, 1894년 9월 18일. 56 위 자료. 57 위 자료, 1894년 9월 19일. 58 일성록, 1894년 9월 29일. 59 위 자료, 1894년 9월 22일. 222 동학학보 제34호

37 군 참모본부와 일본공사관에서 일본군의 개입은 요구하는 바였다. 후방 병 참망과 군용전신망을 위협하는 세력인 동시에 가장 큰 반일세력을 제거하 는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는 일본군이 조선정부에 강요해서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한 파병 을 요청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진압부대로 온 후비보병제19대대의 지휘관 인 미나미 고시로( 南 小 四 郞 ) 소좌에게 경군 파견부대의 지휘를 넘기도록 하 였다. 후비보병제19대대는 경군 파견군을 지휘하며, 3개중대를 각각 동로 중로 서로로 나누어 충청도를 향해서 내려왔다. 동로군은 충주로 직행하였 고, 중로군은 청주로 갔고, 서로군은 공주로 직행했다. 이때 충청도에서 동학농민군이 집결해서 활약했던 주요 지역은 7개의 권 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보은 청산 영동 일대 3 목천 천안 5 공주 부근 2 충주 연풍 괴산 단양 4 내포 일대 6 청주 문의 회덕 일대 1은 동학 대도소가 위치하면서 기포령에 따라 각지에서 봉기한 북접농 민군이 집결해서 주둔했던 지역이었다. 그 세력은 매우 커서 충청병영의 정 예병력도 보은 일대로 들어가지 못하였다. 2는 충주 황산 일대에 경기도 와 강원도 그리고 충청도 북부의 북접농민군이 집결했던 지역으로서 보은 으로 행군하는 도중에 괴산에서 막는 일본군 파견대를 물리친 곳이기도 했 다. 또 안보의 일본군병참부를 화공으로 불태워서 군용전신선이 단절되기 도 하였다. 3은 경군과 일본군이 통과했던 길목에 위치했지만 서울에 가장 가깝게 충청감사와 갑오년의 충청도 상황 223

38 거점을 만든 곳인데 세성산 근거지에는 대규모 동학농민군이 활용할 수 있 는 군량과 무기를 모아놓고 있었다. 4는 홍주를 비롯해서 서산 태안 예산 해미 덕산 당진 등 동학농민군의 세력이 호대했던 곳이다. 내포 일대의 동 학농민군은 공주 북쪽에서 공주성을 협공할 수 있는 위협적인 세력이었다. 5는 공주 감영의 북부인 정안과 남부인 이인 등지를 거점으로 여러 차례 동학도들이 집결해서 감영으로 들어오는 등 활발히 활동했던 지역이었다. 6은 1차봉기에 나섰던 지역으로서 강력한 동학조직을 기반으로 무장활동 이 적극적인 곳이었다. 청주성 공격 이후 진압군 파견에 대비해서 문의 일 대에 집결해 있었다. 충청감사 박제순은 각 권역에서 전개되는 사태에 관해 해당 지방관들의 보고를 받고 있었지만 관찰사로서 적절한 대책을 세울 방도가 없었다. 10월 하순과 11월에 접어들어서는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60 경군과 일본군 이 들어간 지역은 동학농민군이 흩어져서 관치질서가 회복되기도 했지만 여러 군현의 관아가 여전히 마비된 상태였다. 가장 먼저 집결지의 동학농민군이 진압된 지역이 청주 일대였다. 동학 교 주 최시형의 기포령 직후 수천 북접농민군이 9월 24일(양력 10월 22일) 청주성 을 공격했지만 병사 허장회( 許 長 會 )가 나서서 완강히 반격해서 실패로 돌아 갔다. 충청병영이 있는 청주성은 섣불리 점거를 시도할 수 있는 곳이 아니 었다. 그럼에도 공격을 시도한 것은 오래 전부터 무장봉기를 준비해서 승리 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청주성에서 밀려난 동학농민군은 무심천 건너편에서 대치하며 재공격을 노렸다. 그러자 충청병사와 청주목사는 충청감영과 서울로 급보를 보내서 60 일성록, 1894년 9월 28일. 충청병영의 병정들이 가진 무기는 신식 스나이더소총이었다. 224 동학학보 제34호

39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충청감사 박제순은 그 사실을 정부에 알려서 구원병 을 급파하도록 하였다. 경리청과 장위영 병대와 함께 교도중대를 이끈 일본 군 중로군이 청주로 직행하였다. 그 사이에 갑오년 전시기에 걸쳐 보아도 관군으로서는 가장 충격적인 사 건이 벌어졌다. 충청병사 이장회( 李 長 會 )는 남영병 100명을 감영에 보내서 감사 박제순의 지휘를 받도록 했다. 이 병력 중 80명이 10월 3일(양력 10월 31 일) 대전평( 大 田 坪 )의 동학농민군 집결지에서 포위되어 73명이 피살된 것이 다. 61 이 사건은 경군이나 충청병영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후 동학농민군을 더욱 혹독하게 진압하는 요인이 되었다. 10월 7일(11월 4일)에는 면천의 동학농민군 지도자 이창구( 李 昌 九 )가 이끄 는 세력이 보령의 충청수영을 수륙 양면으로 진입해서 무기와 화약을 탈취 해 간 사건이 벌어졌다. 수영을 방어하지 못한 수사 이봉구( 李 鳳 九 )와 수교 ( 首 校 ) 등은 구타와 난자를 당해 큰 부상을 입었다. 탈취해간 무기는 홍주 광 천에 보관해 두었는데 다음날 홍주목사 이승우가 보낸 민보군 300여명이 탐지하여 회수해왔다. 62 청주성에 몰려온 경군은 보은의 동학 근거지를 기습하기로 결정하고 장 위영과 경리청, 그리고 충청병영 병대가 함께 내려갔다. 보은 일대의 북접 농민군이 이미 논산으로 간 것을 알게 되자 영관 이두황이 지휘한 장위영 병대만 장내리로 직행하여 10월 14일(양력 11월 11일) 불태워버렸다. 목천과 천안 일대의 북접농민군도 장위영 병대가 기습해서 궤멸하였다. 보은 장내리를 불태우고 공주로 향하던 장위영 병대는 충청병사 이장회의 61 갑오군정실기 10월 10일, 忠 淸 兵 使 李 長 會 爲 謄 報 事. 모충사실기 62 위 자료, 10월 17일, 忠 淸 監 司 朴 齊 純 爲 謄 報 事. 충청감사와 갑오년의 충청도 상황 225

40 지시를 받고 목천 세성산으로 직행하였다. 군수물자를 쌓아둔 세성산 거점 은 10월 21일(양력 11월 18일) 장위영 병대의 기습을 받아 와해되었다. 미나미 소좌가 지휘하는 일본군 중로군은 문의 일대에 집결한 북접농민 군과 전투를 벌였다. 10월 26일(양력 11월 22일)에는 문의에서, 29일(11월 25일) 에는 증약에서 조우하였다. 일본군과 접전한 북접농민군은 일방적으로 큰 피해를 입고 무너졌다. 무기의 열세가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일본군 중로군은 지대를 보은 등지에 파견하면서 옥천을 거쳐 금산쪽으 로 행군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경군과 일본군은 이르는 지역마다 동학농민 군을 제압해갔다. 진압군의 핵심은 일본군이었다. 중대 병력에 불과했지만 수천의 동학농민군은 이를 감당하지 못했다. 청주 문의 일대와 보은 옥천 등지의 북접농민군은 커다란 피해를 입고 종전의 막강했던 위상을 잃게 되 었다. 우금치전투 이전에 충청도의 주요 북접농민군 근거지는 이처럼 하나 하나 제압되어 갔다. 일본군 중로군이 청주에서 옥천까지 행군하고 체류하면서 또 전투를 벌 였던 일정은 다음과 같다. 일본군 중로군의 행군 일정과 전투 10월 24일(양력 11월 21일) - 청주 25일(양력 11월 22일) - 청주(체류) 26일(양력 11월 23일) - 문의(전투) 29일(양력 11월 26일) - 용포 11월 1일(양력 11월 27일) - 문의 6일(양력 12월 2일) - 옥천(체류) 7일(양력 12월 3일) - 옥천 (지대) 사라리 (지대) 사라리 (지대) 보은 (지대) 증약(전투) (지대) 회덕 (지대) 청산 (지대) 용산 226 동학학보 제34호

41 이때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각 군현의 보고가 제때에 올라오지 않았다. 여 러 군현에서 관아가 점거되어 무기와 세곡을 빼앗기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 관들은 전전긍긍하였다. 10월 중순에 이미 15개 군현 이상에서 관아가 점거 되었다. 그 과정에 읍내와 관아를 둘러싼 동학농민군의 위협이 계속되어 지 방관들이 감사에게 보고하고 지침을 받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보고도 즉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충청도의 사태를 정부에 알리는 충청감사의 장계 를 보면 그런 상황이 드러난다. 다음 11월 16일(양력 12월 12일) 보낸 장계는 10월 하순(양력 11월 중순)에 벌 어졌던 사건을 전하는 내용이었다. 63 군사활동 등 사태진전은 빠르게 진행 되고 있는데 보고는 무려 보름이나 늦어지고 있었다. 각 읍의 보고를 받아보니, 일본군 20명과 병정10명이 10월 22일에 천안에 서 목천에 이르러 일본군 4명은 덕평으로 방향을 바꿔갔고, 나머지 일본군은 병정과 함께 진천으로 갔다고 하며, 일본군 77명과 교도소 병사 156명이 10 월 25일에 보은에 왔다가 다음날 26일에 회인으로 떠났으나 같은 군에 사는 안무현( 安 武 賢 )이 동도로서 병정에게 잡혀 그날 총살되었다고 합니다. 일본군 80명이 10월 26일에 천안에서 성환에 이르러 무사히 경내를 지났다고 하고, 경군이 일본군 200명과 함께 10월 28일에 문의에서 회덕에 도착하여 그 다음 날 29일에 출발하였다고 하며, 10월 26일에 일본군 300여명과 교도병 500여 명 및 충청병영 병사 100여 명이 청주에서 문의에 이르러 동도 7명을 잡아와 서 처형하였고, 그날 일본군 100여명과 경군 100여명이 회인에서 문의현에 왔으며, 28일에는 일본군 수백명이 부강에서 문의현에 왔고, 29일에 회인 63 충청도관찰사가 올린 장계 1894년 11월 16일. 충청감사와 갑오년의 충청도 상황 227

42 연기 청주 등지로 떠났으나 11월 2일에 경군 일본군 병영의 군사가 문의 현에 돌아왔습니다. 오히려 가장 중요한 문제가 충청감영에 다가오고 있었다. 감영이 위치한 공주성을 방어하는 것이 감사의 최대 현안이 되었던 것이다. 2) 공주 우금치 전투와 충청감사 박제순의 독전 충청감사 박제순은 10월 16일(양력 11월 13일) 양호창의군영수( 兩 湖 倡 義 軍 領 袖 ) 이름으로 전봉준이 보낸 통문을 받았다. 64 일본 오랑캐가 임금을 핍박하 고 백성에게 소동을 일으켰으니 죽음으로써 의( 義 )를 함께 하자는 것이었 다. 이는 최후통첩이었다. 그때 공주성에 와있던 스즈키 아키라( 鈴 木 彰 ) 소 위는 이를 개전서( 開 戰 書 ) 라고 표현하였다. 65 논산에는 수많은 동학농민군 이 집결해서 즉시라도 북상할 기세였다. 박제순은 이때 절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영병 73명도 피살되어 공주성 방어병력도 줄어들었다. 남은 병사만으로 공주성을 방어하는 것은 불가능 했다. 이런 사태는 문신인 박제순이 감당할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방어력을 갖추려고 노력하 였다 全 琫 準 上 書 65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 五. 東 學 黨 에 關 한 件 附 巡 査 派 遣 의 件 二 (5) 恩 津 礪 山 等 地 東 徒 의 公 州 攻 取 豫 定 開 戰 書 送 付. 여기 공주 남쪽에 있는 은진 여산 등의 동학도가 요사이 전라도의 동학도와 합세하여 공주를 함락 점거하려고 開 戰 書 를 이곳 감사에게 보내왔습니다. 게다가 전부터 얼마간 잠잠해졌던 부근의 동학도도 이들과 한 패거리가 되어 사태가 매우 불온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소관은 공주를 버리고 갈 수가 없습니다. 괴산 보은의 정찰은 충주에 머물러 있는 飯 森 소좌님께 의뢰해 두었으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66 신영우, 북접농민군의 공주 우금치 연산 언평 태인전투 한국사연구 154 참고. 228 동학학보 제34호

43 첫째, 다른 임무를 받고 공주 감영에 온 스즈키 소위가 이끄는 일본군 병 력을 체류시키면서 방어군을 지휘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스즈키 소위가 공 주성을 떠나려고 하자 외부대신 김윤식을 통해 이노우에 공사에게 떠나지 못하게 해달라고 긴급 요청하기도 했다. 둘째, 순무영 선봉 이규태에게 시 급히 공주에 와달라고 긴급 요청하였다. 경리청 병대와 충청병영의 남영병, 그리고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의 서로군에게도 공주성 직행을 요청하 였다. 셋째, 청주성에서 보은으로 행군하여 장내리를 불태운 이두황이 이끈 장위영 병대도 공주성으로 급히 오도록 하였다. 넷째, 정부에 병법에 능한 관원과 군대를 보내 주기를 청하는 상소 67 를 올려서 정부 차원에서 공주성 구원에 집중하도록 요청하였다. 충청감사 박제순은 장위영 병대가 충청병사 이장회의 전령을 받고 목천 세성산으로 간 것을 알고 격분했다. 충청병사가 감사의 명을 받들지 않고 자의적으로 처리한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즉각 충청병사 파출을 요청하는 장계 68 를 올렸다. 하지만 정부에서는 한창 전투 중에 장수를 바꿀 수 없다고 해서 그대로 두었다. 69 공주가 위급한 상황이 되자 통위영과 경리청 병대는 공주로 향했다. 미나 미 대대장이 지휘하는 일본군 중로군과 교도중대는 문의전투와 증약전투 를 벌이는 와중이었기 때문에 공주로 가지 못했다. 67 승정원일기 1894년 10월 20일. 68 고종실록 1894년 10월 23일. 충청 감사 박제순이, 병사 李 長 會 는 딴 논의를 주장하여 군사 행동을 지연시키니 우선 파출하고 그 죄상을 유사( 攸 司 )에서 품처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라고 아뢰었다. 69 위 자료, 1894년 10월 24일. 충청병사 이장회가 도신의 장계로 인하여 청파( 請 罷 )되었습니다. 도신이 논한 것이 비록 군사 규율에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군사 행동을 지체시킨 것은 혹시 형편을 따르느라 그랬을 수도 있으니, 이 때문에 싸움 중에 장수를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특별히 용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충청감사와 갑오년의 충청도 상황 229

44 스즈키 소위의 소대는 외부대신 김윤식의 요청에 따라 이노우에 가오루 공사도 공주성에서 수비와 교련을 돕도록 하였으나 명령이 늦게 전달되어 용산으로 돌아갔다. 70 박제순은 공주 방어에 일본군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 각하였다. 충청감사 박제순이 영의정 김홍집과 일본군 요청에 대해 주고받은 편지 내용을 보면 당시 사정을 알 수 있다. 71 일본군을 많이 파견해줄 것을 여러 번 요청했으나, 일본공사는 여전히 신 중하여 많이 파견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일본과 청국간의 전쟁이 지금 한창 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본군이 이미 봉황성( 鳳 皇 城 )을 점거하였고, 해군도 여순( 旅 順 )의 입구를 빼앗아서 승리는 머지않아 기약할 수 있습니다. 각국의 병함( 兵 艦 )이 모두 위해( 威 海 )에 모여 이 전쟁이 결정된 뒤에 바로 모두 일어나 서 화약( 和 約 )을 권유할 것입니다. 이 화약이 이루어져서 육군 10만명이 개선 하는 날에 기세가 미치면 비도( 匪 徒 )도 두려워서 흩어질 것입니다. 감사가 보낸 화급한 요청에 따라 구원병이 속속 공주성으로 모여 들었다. 10월 19일(양력 11월 16일) 가장 먼저 서산군수 성하영과 안성군수 홍운섭과 경리청 참영관 구상조가 거느린 경리청 병대가 공주에 도착해서 72 충청감사 박제순의 군령에 따라 효포의 4군데에 나누어 배치되었다. 70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 五. 東 學 黨 에 關 한 件 附 巡 査 派 遣 의 件 二 (12) 鈴 木 少 尉 隊 의 公 州 駐 在 와 全 州 方 面 에의 軍 隊 派 遣 問 題 1) 鈴 木 部 隊 公 州 駐 留 差 跌 에 대한 解 明. 스즈키 소위는 용산에 주둔한 후비보병 제6연대 제2대대 소속으로 대대장 이이모리 모리마사( 飯 森 則 正 ) 소좌의 지휘를 받았다. 71 금영내찰, 도원( 道 園 ). 72 순무선봉진등록 1894년 10월 20일, 10월 23일. 230 동학학보 제34호

45 이때 동학농민군의 동정은 자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호남적 전봉준이 4만명을 이끌고 경천을 겁략( 劫 掠 )하고 공주로 향하려고 하며 옥천포의 동 도 수만명은 대교에 둔취해서 전봉준과 회합하려고 한다. 는 것이었다 월 23일 안성군수 홍운섭은 효포를 지키고 있다가 강을 건너서 대교의 북접 농민군을 기습 공격하여 물리쳤다. 공주공방전의 첫 전투였다. 그렇지만 충 청감사 박제순은 사전보고 없이 강을 건넌 것에 불만을 가졌다. 10월 24일(양력 11월 21일)에는 모리오 마사이치( 森 尾 雅 一 ) 대위가 이끄는 후 비보병 제19대대 서로군이 공주성에 들어왔다. 이들은 도착 즉시 공주 남부 의 고지에 올라서 방어진을 치고 대비하였다. 이때부터 공주성 방어의 실제 지휘는 일본군 모리오 대위가 맡았다. 서로군과 그 지대가 행군한 일정과 중로군과 경군이 충청도 일대에서 전투를 벌인 상황은 다음과 같다. 일본군 서로군의 행군 일정과 전투 10월 22일(양력 11월 19일) - 천안 (지대) 예산 23일(양력 11월 20일) - (이인전투) 24일(양력 11월 21일) - 공주 입성(이인전투) 25일(양력 11월 22일) - 공주(효포전투) 28일(양력 11월 25일) - 공주 11월 1일(양력 11월 27일) - 공주 8일(양력 12월 4일) - 공주(우금치전투) 9일(양력 12월 5일) - 공주(우금치전투) (지대) 덕산(승전곡전투) (지대) 홍주 (지대) 홍주(홍주성전투) (지대) 홍주 (지대) 홍주 (지대) 대흥 14일(양력 12월 10일) - (연산전투, 중로군) 73 갑오군정실기 先 鋒 爲 牒 報 事 1894년 11월 2일. 충청감사와 갑오년의 충청도 상황 231

46 15일(양력 12월 11일) - 논산(전투) 17일(양력 12월 13일) - 공주 (지대) 파군리 (지대) 연산 공주공방전은 경군이 이인전투, 효포전투, 우금치전투 모두 3회의 전투 로 구분 기록하였다. 74 이 3회의 전투는 갑오년 전 기간에 걸쳐 볼 때 동학농 민군의 패배를 결정한 전투였다. 동학농민군과 일본군 경군은 훈련의 수 준과 무기의 강약에서 서로 비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결과는 받아들 일 수밖에 없지만 최대 규모로 집결시킨 남북접농민군이 결전을 치러서 승 패가 결정이 난 것이었다. 공주공방전은 단 한 차례의 전투가 아니었다. 이인전투와 효포전투와 우 금치전투를 포함해야 한다. 대교전투를 포함하면 실제로 4회의 전투를 벌 였다. 가장 큰 전투가 우금치전투였다. 또 공주공방전은 그 전투 전후에 벌 어졌던 청주성전투, 문의전투, 증약전투, 승전곡전투, 홍주성전투, 세성산 전투, 해미성전투, 연산전투, 논산전투를 함께 평가해야 한다. 이러한 일련 의 전투 결과 동학농민군은 패배하였다. 75 이 같은 중요한 전투는 모두 충청도에서 벌어졌다. 모두 충청감사 박제순 이 재임하던 시기에 일어난 전투였다. 그렇지만 박제순이 전투결과에 일정 한 영향을 미쳤던 것은 공주공방전뿐이었다. 우금치전투 이후 경내 지방관들의 보고가 감영에 속속 도달하였다. 충청 감사 박제순은 경내 각 군현의 사태와 군무에 관한 내용을 정리해서 양호도 74 公 山 剿 匪 記 는 利 仁 之 役, 孝 浦 之 戰, 牛 金 峙 之 師 으로 기록했다. 75 어느 전투에서도 동학농민군의 피해는 매우 많았다. 승리한 전투로 보는 승전곡전투와 괴산전투는 소규모 일본군을 물러서게 한 정도였다. 안보전투는 일본군 군용전신소와 병참부를 불태워 단시간 동안 통신망과 병참망을 두절시킨 성과가 있었다. 232 동학학보 제34호

47 순무영과 의정부에 보고할 수 있게 되었다. 충청도에서 경기도를 거쳐 서울 로 가는 역참이 기능하지 못하던 것도 일정한 수의 고군을 두어 해결하도록 조처하였다. 전란을 겪는 동안에 확보해서 사용한 공곡( 公 穀 )과 공전( 公 錢 )의 군량과 군비 전용을 확인하여 회계를 정비하거나 태안과 서산 등지에서 피 해를 입은 관리들에 대한 대책, 그리고 관아의 역할을 평소와 같이 회복시 키는 일 등도 해나갔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급하게 처리했던 것은 여러 군현에서 활약하던 동학 농민군 지도자를 붙잡아서 처벌하는 일이었다. 각 관아의 기능이 회복되자 향리들이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근거지를 추적해서 체포해왔다. 민보군도 조직되어 향리들과 함께 활동하였다. 충청감사 박제순의 장계도 그러한 내 용이 주요 주제였다. 5. 맺는 말 앞장에서 살펴본 1894년의 충청도 상황과 충청감사의 대응을 간략히 정 리한다. 충청도 보은과 청산은 동학대도소가 설치되고 교주 최시형이 거처하던 곳으로서 1893년 봄 이래 전국의 많은 동학도들이 찾아오던 동학교단의 본 거지였다. 1894년 봄에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자 정부는 회덕만 봉기에 참여 했던 충청도도 전라도와 아울러서 평정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장위영 영관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학교단이 남 접농민군의 봉기에 호응을 하지 않고 충청도에서 더 이상 봉기한 군현이 나 오지 않자 초토사의 진압작전은 충청도까지 미치지 않았다. 1893년 3월에 부임하여 감사로 재임하고 있던 조병호는 회덕 관아를 침 충청감사와 갑오년의 충청도 상황 233

48 범한 동학농민군을 제압하기 위해 집결지인 문지리 일대의 냇가에 포군을 보냈으나 150명으로 수천 명 을 당해낼 수 없었다. 청산으로 간 포교는 최 시형에게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조병호는 초토사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전라도로 직행한 경군은 충청도로 병정을 보낼 여력이 없었다. 당시 상황이 그러했다. 전라도에서 동학농민군이 황토현전투와 장성전투에서 승리하고 전주성 을 함락했다는 소식이 충청도지역을 격동시켰다. 동학에는 입도자가 갑자 기 늘어나고 접 조직이 팽창하였다. 충청감사 조병호는 공주를 비롯해서 동 학도들이 공공연히 활동해도 제어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지만 감영의 일상 업무가 흔들릴만한 큰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4월 25일(양력 5월 29 일) 조병호는 순조롭게 경상감사로 전임할 수 있었다. 두 번째 감사로 선임된 인물은 이헌영이었다. 신임감사는 즉시 임지로 오 지 않아서 6월 20일(양력 7월 22일)까지 무려 54일 간 공관( 空 官 ) 상태였다. 이 기간 동안 충청도와 경상도 지역도 새 바람이 돌기 시작하여 점점 전라도와 같이 변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헌영이 부임한 직후부터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져서 충청도 전역이 격동하였다. 그것은 6월 21일(양력 7월 23일) 새벽에 발생한 일본군 혼성제9여단의 경복궁 침범과 6월 27일(양력 7월 29일) 새벽부 터 벌어진 청일 군의 성환전투였다. 충청감사 이헌영은 충청도 땅에서 벌어진 청일 간의 전쟁에 직면했으면 서도 감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당연히 병영과 수영의 군대로 백성 들의 안전 지키는 조치를 취해야 했으나 대응할 무력이 없는 감사는 관아와 마을이 침범 받는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고종이 청국군을 적절히 응접하 라고 한 당부는 패전 후 황급히 북상하는 길을 공주판관을 통해 안내하고, 연로 각 군현에 편의를 제공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끝났다. 234 동학학보 제34호

49 황해 제해권을 갖지 못한 일본군은 부산과 서울을 잇는 행군로에 군용전 신망과 병참망을 구축하고, 대규모 군대를 북상시켰다. 충청도에는 연풍의 안보와 충주의 가흥에 일본군 기지가 설치되었다. 연풍과 충주 지방관은 일 본군의 왕래 사실을 감사에게 보고해왔다. 충청도의 유생들은 국왕을 인질로 잡고 국정에 간섭하는 일본군을 축출 하기 위해 의병 조직을 준비하고 감사도 참여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이헌영 의 정국인식은 같지 않았다. 아직 국왕의 신변은 이상이 없고 정부도 기능 하고 있는데 의병을 일으키면 국왕이 해를 입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 서 적극 금지해서 충청도 유생들의 의병은 일어나지 않았다. 1894년의 반일 무력항쟁은 동학 조직에서 시작했다. 일본군의 경복궁 침 범 직후 동학 조직은 무장을 강화하고 사람들을 끌어들여서 세력을 키웠다. 공주 인근의 활동은 두드러졌다. 이헌영이 영동에서 소요의 원인을 제거하는 책임을 스스로 선정한 집강 에게 맡긴 것은 전라도와 같이 집강이 폐정을 개혁하도록 한 사례가 된다. 감사 재임시 이헌영이 중시한 것은 관치질서 유지였지만 8월 19일(양력 9월 18일)부터 동학도 수천 명 이 금강가에 집결한 다음 감영으로 들어오려고 했 다. 모든 관속과 동민까지 동원해서 이를 5일 간 막았던 것이 이헌영이 감사 로서의 수행했던 마지막 직무였다. 세 번째 선임된 감사는 박제순이었다. 전전임 조병호는 갑오년 때의 나이 가 만 47세였다. 전임 이헌영은 만 57세에 충청감사로 부임해서 여러 난제 를 조정해나갔다. 세 번째 감사인 박제순은 전임 감사보다 21세나 적은 만 36세에 직무를 시작하였다. 격동기의 도백으로서는 경륜이 더 필요한 나이 였다. 전봉준의 봉기령과 동학 교단의 기포령 이후 충청도 전역이 격동을 했다. 충청감사와 갑오년의 충청도 상황 235

50 충청도 여러 군현에서 읍내가 점거되고 관아의 무기와 세곡이 탈취되었다. 10월 초(11월 초)까지 상당산성과 제천 단양 청안 영동 천안 회인 진천 목천 직산 서천 등 10개 군현에서 무기를 빼앗겼다. 충청병영이 있는 청주성도 공격을 받았고, 무심천을 경계로 여러 날을 대치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양호도순무영은 통위영 장위영 경리청 교도중대 강화영 병대를 파 견하였고, 선봉장 이규태가 지휘하도록 했다. 일본군도 후비보병 제19대대 를 증파해서 동로군 중로군 서로군으로 나누어 남하시켰는데 미나미 고 시로 대대장이 경군 지휘권까지 장악하였다. 진압군은 충청도로 직행했고, 충청감사는 이에 협조해야 했다. 충청도의 동학농민군이 활동한 주요 권역은 1 보은 청산 영동 일대 2 충주 연풍 괴산 단양 3 목천 천안 4 내포 일대 5 공주 부근 6 청주 문의 회덕 일대였다. 이들 지역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 주력은 보은으로 집결해 서 통령 손병희의 지휘 아래 우금치전투에 참여하였다. 잔여세력은 그 지역 에 머물면서 진압군에 맞서 싸웠다. 주요 지역의 동학농민군은 속속 일본군과 경군의 공격을 받아 패산하였 다. 충주와 단양 일대의 동학농민군은 병참부의 일본군과 서울에서 추가 파 견한 후비보병 제6대대 6중대 병력이 제압하였다. 공주공방전 이전에 일본 군 중로군과 서로군, 그리고 장위영이 참여한 주요 전투는 세성산전투(양력 11월 18일), 문의전투(양력 11월 23일), 승전곡전투(양력 11월 21일), 홍주성전투(양 력 11월 25일), 증약전투(양력 11월 26일), 해미성전투(양력 12월 3일)였다. 전봉준이 양호창의군영수( 兩 湖 倡 義 軍 領 袖 ) 이름으로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보낸 통문은 오히려 공주성의 방어병력을 불러 모으는 역할을 하였다. 충청 감사 박제순의 긴급 요청에 따라 공주성에는 통위영과 경리청 병대, 그리고 일본군 서로군이 속속 들어와서 이인과 효포, 그리고 우금치에 방어망을 치 236 동학학보 제34호

51 게 되었다. 남북접농민군은 논산에서 합류한 다음 이인전투(양력 11월 20일), 효포전투 (양력 11월 22일), 우금치전투(양력 12월 4일~5일)를 벌였지만 패퇴하였다. 공주 에서 물러난 남북접농민군은 일본군 중로군을 만나 연산전투(양력 12월 10일) 를 벌였고, 또 추격해온 서로군과 논산전투(양력 12월 11일)를 벌였지만 모두 패배한 후에 전라도로 후퇴하였다. 전봉준과 합류하지 않은 김개남이 이끈 남접농민군은 청주전투(양력 12월 9일)에서 패배하고 후퇴하였다. 동학농민 군의 공격으로 일본군이 퇴각하거나 큰 피해를 입은 전투는 안보전투(양력 10월 25일), 괴산전투(양력 11월 3일), 승전곡전투(양력 11월 21일)뿐이었다. 남접농민군의 재봉기와 북접농민군의 기포 이후 중요한 전투가 벌어진 곳은 충청도였다. 그렇지만 충청감사 박제순이 영향을 미쳤던 전투는 공주 공방전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주요 전투는 경군 병영의 영관들과 일본군 장 교들이 지휘하였다. 박제순은 공주공방전과 을미년 정월까지 계속된 진압 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갑오군공록 에 기재되었다 甲 午 軍 功 錄 忠 淸 監 司 朴 齊 純 從 二 品 五 朔 危 機 盡 心 禦 寇 충청감사와 갑오년의 충청도 상황 237

52 참고문헌 日 省 錄 高 宗 實 錄 承 政 院 日 記 錦 藩 集 略 甲 午 日 記 梅 泉 野 錄 洪 陽 紀 事 兩 湖 剿 討 謄 錄 巡 撫 先 鋒 陣 謄 錄 甲 午 軍 政 實 記 東 匪 討 錄 兩 湖 電 記 錦 營 來 札 公 山 剿 匪 記 南 遊 隨 錄 時 聞 記 略 史, 甲 午 軍 功 錄 駐 韓 日 本 公 使 館 記 錄 新 舊 對 照 朝 鮮 全 道 府 郡 面 里 洞 名 稱 一 覽 趙 慶 鎬 撰, 趙 秉 鎬 書, 趙 基 晉 墓 誌 明 治 27 年 6 月 陣 中 日 誌, 兵 站 摠 監 部 長 岡 外 史, 新 日 本 の 鹿 島 立, 小 林 川 流 堂, 1920 임선빈, 충청도관찰사와 공주감영 충청도관찰사전 (공주시 충남발전연구원), 이상식, 여지도서 를 통해 본 지방행정 체계의 구성 및 운영원리 - 충청도 지역 을 중심으로- 한국사학보 25호, 김현영, 이헌영의 嶠 繡 集 略 을 통해 본 암행어사의 실상과 경상도 지방관 영남학 16, 신영우, 대한제국기 충북 충주의 주거사정 역사실학 42집, 신영우, 북접농민군의 충주 황산 집결과 괴산전투 한국근현대사연구 55, 신영우, 북접농민군의 공주 우금치 연산 원평 태인전투 한국사연구 154, 신영우, 내포일대 갑오년 상황과 동학농민군의 봉기 동학학보 제29호, 동학학보 제34호

53 Abstract The Governor of Chungcheong and the Critical Situation in 1894 Young-ou Shin This article is from the perspectives of the governor of Chungcheong to review the society of the province of Chungcheongdo. Until now, there was not seen that looked back as the high-ranking official compared to several casestudies which was seen by low-ranking executives. Chungcheongdo is the place where needs to study as the scale of the province because of the scale of the Donghak peasant army. The government saw Chungcheongdo as the center of the Donghak peasant army. The reason was that the Daedoso of Donghak was placed at Boeun, Chungcheongdo so that they gathered on a large scale. As the perspective of the superintendent of Chungcheong, we could understand the circumstance of In 1894, there was three, Cho Byeongho( 趙 秉 鎬, 1847~1910) Lee Heonyoung( 李 金 憲 永, 1837~1908) Park Jaesoon( 朴 齊 純, 1858~1916), all of them had brilliant career with good family, educational background. Even though the West cost of Chungcheongdo was the war zone of the Sino- Japanese war, the superintendent of Chungcheong could not interrupt. Instead of the restricttion the Donghak peasant army by government, the official had faced to defense its office. The battles of 1984 at Chucheongdo were known for intensity, but the as-built analysis was not released. The change of the Governor of Chungcheong was done during the battle. The main battle filed was about 12 areas. Twelve times was against to Japanese. Park Jaesoon was the only Governor of Chungcheong who had the merit of 충청감사와 갑오년의 충청도 상황 239

54 military service among them. Key-words: the governor of Chungcheong, Cho Byeongho, Lee Heonyoung, Park Jaesoon, the Sino-Japanese war, the Donghak peasant army 240 동학학보 제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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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FACBCBCC0C7BBE7C7D02831302031203139292E687770> 延 世 醫 史 學 제12권 제2호: 29-40, 2009년 12월 Yonsei J Med Hist 12(2): 29-40, 2009 특집논문 3 한국사회의 낙태에 대한 인식변화 이 현 숙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1. 들어가며 1998년 내가 나이 마흔에 예기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되었을 때,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들 너무나도 쉽게 나에게 임신중절을 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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