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3 미주리 대학교 언론대학원 명예교수 장원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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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opy Right c 2015 by Won Ho Chang: whchang.tistory.com and changw@missouri.edu ISBN-13: ISBN-10:

4 목차 1 서양 문명의 요람 그리스 5 2 터키 공화국과 오토만 제국 15 3 정렬과 삼바의 고장 남미 28 4 경이의 파나마 운하 41 5 앙코르 톰과 캄보디아 59 6 하롱베이와 베트남 70 7 동 유럽 배낭여행 80 8 가족 모임의 아카풀코 96 9 알로하 정신이 숨쉬는 하와이 남 태평양 절경의 타히티 금혼식 축하 알라스카 아름다운 카나다의 동북 쪽 웅장하고 신비스런 미국의 서부 겨울의 킹스캐년과 세코이야 죽음의 계곡과 단풍 환락의 라스베이거스 자랑스런 나의 조국 소나기 마을과 제주도 연변과 백두산 (1986) 평양의 봄 (1995) 은퇴인의 낙원 라구나 우즈 빌리지 296 4

5 여행 이야기3를 쓰면서 년 오레곤 대학교에서 20 세기 문학 과목을 공부할 때, 노벨 문학상을 탄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의 책을 열심히 읽었다. 스타인벡이 여행하며, 신문기사 처럼 쓴 책을 읽으면서, 나도 언젠가는 여러 지방을 여행하며, 보고 들은 이야기를 엮어 보겠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은퇴를 하고서야 실천에 옮기며 쓴 리포트가 이 책이다. 은퇴인으로, 여행과 여행 이야기 쓰는 것을 나의 천직으로 알고 있다. 여행은 은퇴인에게 활력소를 넣어준다. 그러나 여행에서 우리가 자연의 경이를 보았다는 사실만으로는 효과가 적다. 자연을 보고서 그 경험을 우리 삶과 연결하려고 노력하는 데서 여행의 보람을 찾아야 한다. 자연 속에서 한 사람의 존재가 무엇인가를 보는 것은 우리를 항상 겸손의 경지로 몰고 가기도 한다. 여행을 하면서 배우는 것은 겸손한 마음과 세상만사를 즐겁게 보려는 노력이다. 나의 삶을 허무하고, 후회스럽고, 그리고 고통 스럽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나이가 들면서 찾아오는 지혜와 너그럽고 부드러운 마음의 안정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여행 이야기 는 즐겁게 살려고 노력하는 은퇴인의 보고서이며, 가능하면 계속하여 여행 이야기 4, 5... 를 춮판하려고 한다 년 월 靑 岩 張 元 鎬 5

6 1. 서양문명의 요람 그리스 올림픽 성화 이야기 올림픽 성화 앞에서 2012 년 5 월, 우리 빌리지 열두 가정은 서양 문명의 요람인 그리스와 오토만 왕국의 터키를 여행하기로 결정하고 한인 여행사에 자세한 사항을 문의하였다. 한인들, 특히 기독교인들이 선호하는 이 지역 여행은 두 가지 프로그램이 있는데, 하나는 크루즈 유람선을 타고 해변을 따라 여행하는 방법이 있고, 다른 하나는 내륙 지역, 특히 터키의 카포도키아와 파무칼레 온천 지역을 버스와 터키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돌아보는 방법이 있다. 우리는 두 번째 방법으로 여행하기로 결정하고 현지 안내인과 같이 다니는 버스 편을 택하기로 하였다. 우리 일행이 로스앤젤레스 비행장을 떠나 오랜 비행 끝에 암스테르담에 도착, 작은 비행기로 다시 갈아타고, 그리스 수도 아테네에 도착한 날은 5 월 16 일이었다. 아테네 비행장에서 만난 현지 6

7 안내인은 아들이 미국 대학에 다닌다는 한국 여성이었다. 이곳으로 유학 와서 결혼하고 사는 안내인은 올림픽의 본 고장이며 서양 민주주의와 철학의 발상지인 그리스에 온 것을 크게 환영한다고 우리 에게 말했다. 또한, 안내인은 마침 내일 올림픽 성화가 이곳에서 2012 년 올림픽 개최지인 영국으로 출발하는 날이어서 우리 일행이 그 출발 연습 장면을 볼 수 있다고 안내했다. 4 년에 한 번 있는 세계적 이벤트를 우연히 보게 되는 행운을 우리가 갖게 된 것이다. 태극기가 휘날리는 아데네 올림픽 스타디움 비행장에서 바로 아테네 시내의 올림픽 광장으로 간 우리 일행은 군복 차림의 행사요원들이 성화 환송 행사의 예행 연습을 하는 과정을 지켜 보았다. 참으로 귀한 장면이었다. 우리는 올림픽 광장의 국기 게양대에 휘날리는 올림픽 개최국 국기들 중에서 1988 년 서울 올림픽을 개최한 우리나라 태극기를 발견하고 모두 엄숙하고 자랑스럽게 경의를 표하였다. 7

8 올림픽이 처음 생길 때의 목적은 스포츠 경쟁을 통하여 세계 평화, 상호 이해, 그리고 화합을 증진하는 고상한 정신으로 시작되었으나, 오늘날의 올림픽은 지나치게 상업화되었고, 국가 간의 시기와 경쟁 으로 본래의 올림픽 정신이 사라지고 있다는 안내인의 설명을 들으며, 우리는 근처의 의사당과 지하철역 내부를 돌아보았다. 지하철역에는 지하철 건설 당시 발견된 오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마주칠 수 있는 그리스 문명의 귀한 역사에 대하여 경건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민주주의의 발상지 파르테논 앞에 선 은퇴인들 나는 그리스 역사서를 여러 번 읽었고, 2500 년 전 그리스에서 시작된 그리스인들의 지혜와 철학이 인류 발전에 기여한 바를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을 오늘 아침 일찍 보면서, 나는 그리스를 오래 지배했던 로마의 역사를 생각했다. 로마의 호전적인 장군과 군주가 틈만 있으면 그리스를 포함한 약소 민족을 s침략하고 노예의 피와 땀으로 약탈한 땅에 거대한 궁전과 성곽을 8

9 지어서 방탕하게 생활했다. 그런 로마인들의 후예들인 이태리가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생각하니, 역사의 깊은 아이러니를 안 느낄 수 없다. 파르테논은 기원전 508 년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뛰어난 자취를 아직도 간직하고 그 자리에 서 있다 년대 중반,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나는 기초 과목인 정치학 개론 시간에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강의를 아주 감명 깊게 들은 적이 있었다. 이제 내가 바로 그 직접 민주주의의 발상지에 서 있으니, 반세기가 지난 나의 대학 캠퍼스 추억이 너무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파르테논은 본래 그리스의 처녀신인 아테네 여신을 위하여 기원전 447 년에 짓기 시작하여 15 년 후인 432 년에 완성되었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그리스 예술의 극치와 도리스 식 최상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파르테논 앞에서 그리스의 다른 신전처럼 파르테논은 아테네 황실의 금고로 사용 되었으며, 5 세기에는 성모 마리아를 위한 기독교 교회로 사용되었다 년, 오토만 터키 정복기에는 회교도 사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9

10 그 후 화약고로 쓰일 때, 베니스 인들의 공격으로 화약이 폭발하면서 신전의 일부가 파괴되기도 했지만, 파르테논 신전은 아직도 그 웅대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아고라와 아크로폴리스 사이에 위치한 아레오파고스는 왕정 시대의 그리스가 대법원으로 사용한 건물이며, 기원 전 624 년에 대법원에서 중추원으로 재판권이 넘어가면서 범죄를 심판하는 중추원 건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중추원은 직접 민주주의가 시작된 기원전 487 년 부터 없어졌다고 한다. 소크라테스(Socrates)와 서양 철학 서양 철학의 기원은 기원 전 6 세기경이라고 한다. 소크라테스 이전에도 그리스 주변의 식민지에서 온 철학자들이 있었다고 하나, 그 기록은 별로 없다. 서양 철학의 시조는 소크라테스이고, 이 위대한 철학자는 그 이전 학자들이 주장한 생각과 의견에 대한 가정을 부정 하면서 그의 철학을 가르쳤다.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후에 플라톤에 의하여 집대성되었다. 우리 일행은 소크라테스가 갇혀 있다가 독약을 받아 마시고 기원전 399 년에 죽었다는 전설의 감옥 앞으로 갔다. 유명한 소크라테스 재판은 당시 배심원 형식으로 진행 되었다고 하는데, 소크라테스의 죄는 두 가지였다고 한다. 그 첫째는 기괴한 철학적 질문을 던져 젊은 이들을 부패시켰고, 둘째는 당시의 그리스 신을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너무 앞서 가는 사람을 미워하기는 마찬가지인 듯했다 메테오라 금욕고행 수도원 (Meteora s Ascetic Life) 메테오라 수도원은 그리스에서 제일 큰 그리스 정교 사원이며, 아토스 산에서는 두 번째로 큰 수도원이다. 이 수도원은 6 개의 작은 수도원 10

11 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름다운 Thessaly 평원을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동시에 피오이오스 강과 핀두스 산맥을 옆에 둔 높은 돌 산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메테오라 수도원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인 커럼바카도 상당히 먼 거리에 떨어져 있어서 이 수도원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힘든 자연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9 세기경에 금욕 고행 수행자들이 와서 정착한 뒤에야 비로소 이 메테오라 수도원이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고 한다 수행자들은 600m 높은 산 위의 바위틈에 살았는데, 절벽 같은 바위 사이를 올라가기가 아주 힘들어서, 사람들이 수행자들이 있는 곳까지 찾아오기란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수행자들은 각자 홀로 생활하고 일요일에만 바위 아래에 세워진 교회에서 같이 모여 예배를 보았다고 한다.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수도원이 처음 세워진 것은 9 세기 초로 알려져 있으며, 그 후 13 세기에 크게 번성했다고 한다. 그 후 정치적 혼란을 피하여 수도원은 더 높은 바위 위로 옮겨 지어졌고, 사람들이 사다리로만 올라 올 수 있는 입구가 단 한 군데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사다리를 수도원에서 끌어 올리면 입구가 차단 되었으며, 지금도 그 입구의 일부가 보존되어 있었다. 14 세기 말엽부터 오랫동안 북부 그리스를 다스리던 비잔틴 왕국이 데살리 평원을 탐내는 오토만 터키 왕국의 침공을 받자, 들어오기 어렵게 만든 메테오라 수도원으로 많은 그리스인들이 몰려와서 20 개 이상의 수도원이 번성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 중 6 개의 수도원이 보존되어 있어서 그리스의 중요 관광 지가 되고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바위 위에 살던 아다나시우스 수도사는 독수리의 도움으로 바위 속 수도원까지 올라갔다고도 한다. 지금 남아 있는 6 개 수도원 중에 네 곳에만 몇 명의 수도사와 관리인이 살면서 관광객을 안내하고 있었다. 넓고 넓은 데살리 평원과 그 안의 메테오라 수도원을 구경하려면 버스 관광만이 가능하고 크루즈로는 관광이 불가능하다고 안내인이 설명 했다. 안내인은 그밖에도 옛날 금욕고행 수도원의 많은 비화를 들려주 었다. 옛날 법에는 수도원에 여자들이 들어 갈 수 없도록 규제 11

12 되었는데, 이것이 근래에 바뀌어서, 요새는 여자들도 이곳 관광지의 관리원과 안내인이 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메테오라 수도원 입구 성 바울과 고린도 신약 성경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초기 선교 활동과 오늘날 기독교의 많은 계시를 간직한 곳이 고린도다. 거의 모두가 기독교 신자인 우리 일행은 경건한 마음으로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찾았다. 그러나 이 기독교의 성지가 지진으로 파괴되어 간 곳이 없었고, 대신 우리는 1885 년에 새로 건설된 신 고린도 시를 보아야만 해서 아쉬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고린도 운하는 당시에 농산물 운송 수단으로 쓰였다고 하나, 이제는 관광용으로만 남아 있었다. 새로 건설된 고린도 항구는 농산물 교역 항구인데, 다른 해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층 건물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곳에는 아직 개발의 물결이 미치지 못한 듯했다. 12

13 사도 바울은 예수님보다 다섯 살 아래이며 초기 기독교 선교에 가장 큰 역사를 기록했다. 사도 바울은 본래 예루살렘에서 법과 배 만드는 교육을 받았다. 그의 초기 배 만드는 경력은 선교 자금을 조성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교회 조직, 운영 관리 경험이 있어서 각종 종교적 기록을 몇 번이고 검토, 수정하는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기원후 49 년에서 50 년경에 사도 바울은 빌립보 시를 시라, 티모데우스와 누가를 대동하여 방문하고 이곳에서 전도했다고 한다. 당시 이곳에는 유태인 인구가 적었으나, 사도 바울은 강가에서 많은 유태인 여인들을 만났고, 그 중 리디아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리디아는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을 자기 집으로 초청하였고, 사도 바울은 이 지역 선교 기간 중에 리디아의 집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리디아 교회를 방문했으며, 그 전에 이 빌립보 시에 세워 진 당시 제일 큰 교회와 그 주변 도시 유적을 찾아보았다. 사도행전에 사도 바울의 역사가 잘 기록되어 있지만, 이 교회의 규모와 그 주변이 마치 큰 도시와 같은 유적을 보면서, 2000 년도 넘는 그 시절에 이런 거대한 교회와 도시가 어떻게 건설되었는지, 그 크기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였다. 신약 성경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정신을 넘어서, 우리는 이번 여행을 통해서 이런 종교 도시를 건설할 수 있었던 성인의 능력을 다시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리디야 교회는 기독교인들은 꼭 보아야 할 유적이었다. 사도 바울이 큰 교회와 도시를 세우는 커다란 성사를 이룩한 뒤에는 리디아의 헌신이 있었다. 바울은 리디아의 집에 머물렀으며, 그 리디아의 집이 또 하나의 성지로 지정되어 있었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곳을 방문하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는데, 마침 그곳 관리인이 우리 안내인과 친분이 두터워서 관람 시간이 넘은 늦은 13

14 시간임에도 우리 일행을 기다려주었다. 그 관리인은 우리가 도착하자 밝은 웃음과 함께 이곳 전통 커피를 대접해 주었다. 근처에 위치한 리디아 세례 성전은 큰 교회 건물과 세례를 주기 위한 센터 건물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도 바울을 도와서 이곳 기독교 초창기에 위대한 헌신의 역사를 남긴 리디아는 후에 성인이 되었다. 성 리디아의 역사를 보존하기 위하여 후세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새로 지었는데, 그 교회 역시 지중해를 돌아보는 관광 코스의 요지가 되었다. 이곳을 귀하게 돌보고 있는 이곳 터키 관리인은 자기 할아버지가 한국전 참전 용사였다며 마치 친형제를 만난 듯이 우리를 극진히 대접해 주었다. 네오포리스 항구 비가 내리는 저녁 늦게 리디아 교회를 떠나서, 우리 일행은 그리스 마지막 날 밤을 묵을 호텔로 들어갔다. 이 호텔은 사도 바울이 배를 타고 드나들었던 빌립보의 항구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빌립보 항구는 전에는 카바라라고 불렸고 요새는 네오폴리스 항구라고 불리고 있었다. 호텔 창문으로 바다에 정박한 크루즈 배와 아름다운 항구 전경이 보였지만, 우리는 비가 내려서 밖에 나가 보지 14

15 못하고 그리스의 마지막 밤을 호텔 안에서 조용히 보냈다. 나는 비 내리는 네오폴리스 항구가 바라보이는 호텔 방에서 그 동안 그리스 여행에서 보고 느낀 상념들을 정리했다. 이번 그리스 여행은 서양 철학과 문명의 요람인 그리스가 우리에게 미친 영향을 다시 조명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였다. 나는 서양 종교인 기독교와, 건전한 정신과 신체의 균형을 찾는 동양 문화의 가치를 비교하면서, 그 장단점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15

16 2. 터키 공화국과 오토만 제국 그리스는 서양이고, 터키는 동양이다. 하지만, 그리스에서 터키 국경으로 넘어가도, 우리는 아직도 서양 땅에 있다. 터키 땅의 일부가 유럽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터키에 들어서자, 터키 버스와 관광 안내원이 한국인 보조원을 대동하고 우리를 반겨주었다. 터키에서는 일반적인 관광 안내원 보조는 한국인이 할 수 있지만, 관광지 안내원 자체는 외국인이 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다. 우리를 맞은 한국인 보조원은 미술 역사를 전공하고 이 지역 미술 공부를 하러 왔다가 그냥 터키에 정착한 사람이었다. 그의 본업은 미술품 교역이고, 틈틈이 관광 보조원 일을 하고 있었다. 우리의 터키 관광 일정은 6 일간으로 트로이, 에베소, 파묵칼레, 카파도키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을 둘러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관광 안내원은 짧은 기간에 돌아볼 여행 지역이 방대하고 볼 것이 너무 많아서 매일 아침 6 시부터 강행군한다고 겁을 주었다. 16

17 오토만 제국, 터키의 역사 서쪽 보스포러스 해협의 오르타코이 회교 신전 우리가 터키 땅에 들어서자마자, 그리스의 민주 문명의 분위기가 무서운 오토만 제국 문명의 분위기로 바뀌는 듯했다. 오토만 제국은 1299 년부터 1923 년까지 624 년 간 터키와 지중해 일대, 그리고 멀리 동유럽까지 지배한 대제국이었으며, 로마제국과 몽고제국처럼, 세계 역사상 방대하고 오래 지속된 제국 중 하나다. 오토만 제국과 비슷한 시기에 건재했던 조선 왕조( )는 518 년 동안 한반도에만 갇혀 있었으며, 일본과 중국, 기타 오랑캐 나라들로부터 700 여 회의 침략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런데 오토만 제국은 그 반대로 700 여 회 주변 나라들을 공격하고 공포를 조성했다니 조선 왕조와는 극단적으로 대조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다. 주변 민족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오토만 제국도 19 세기 후반에 와서 전 세계적으로 두루 퍼진 민족자결주의의 물결에 밀려 영토가 점차 줄어들었다. 결국 20 세기 초반에 오토만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뒷문으로 도망친 것을 끝으로, 오토만 제국은 막을 내렸다. 오토만 제국이 붕괴되자, 그 지배 아래 놓였던 여러 민족들이 독립했다. 20 세기 후반에는 그 여러 민족 간의 분쟁이 벌어지기 17

18 시작했고, 지금도 분쟁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 중 가장 참혹했던 분쟁의 역사는 유고슬라비아의 분열,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 그리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숙명적 대결이 있다. 이들 지역 모두가 오토만 제국 치하에 있었던 국가들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어떻게 보면, 오토만 제국의 몰락은 로마 제국의 패망과 그 원인이 유사하다. 오토만 제국 안에 있는 여러 민족 간의 갈등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오토만은 이를 해결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전 세계적으로 번져오던 인권주의, 문화주의, 의회주의로 인해 오토만 제국 내 민족 간의 갈등과 분열은 끝없이 전개됐다. 오토만 문화는 동서양 생활 방식이 합쳐져서 조성된 복합 문화였다. 오토만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은 로마 제국과 비잔틴 제국의 중심지로서 아주 특이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터키 초기 공화국은 오토만 제국의 이슬람 종교와 국가의 통치권을 분리시키면서, 박물관, 오페라 하우스, 극장 등 건축 문화 시설에 많은 투자를 했다. 터키는 역사적 가치와 문화를 지키면서 새로운 서방국가로 발전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터키의 단일 정당 정치제도는 1945 년에 끝나고, 그 후 다수당 의회 주의가 계속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1960 년, 1971 년, 1980 년, 그리고 1997 년에 각각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는 혼란을 겪었다. 그러나 1980 년부터 시작된 자유시장 경제제도는 오늘날의 경제 발전과 정치적 안정을 가져오는 데 기여했다고 한다. 카나카레 해변의 그림 같은 호텔 우리 일행은 버스에 몸을 싣고 에게 해를 버스까지 싣고 가는 배로 건너서 동양의 제일 서쪽 도시인 카나카레에 도착하였다. 이 지역은 18

19 아직 도로 정비가 되지 않아서, 우리는 덜커덩거리는 길을 달려 트로이 성이 있는 해변 근처 호숫가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호텔로 일정보다 좀 일찍 들어갔다. 너무도 아름다운 호반의 방갈로 식 호텔이 좋아서, 그리고 그 호텔 옆에 트로이 성이 있어서, 우리 중에는 언젠가 이곳에 다시 와서 한 1 주일 정도 쉬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 나오기도 했다. 트로이(Troy) 트로이는 터키의 아나토리아 지역 북서부의 도시이며, 호메로스의 두 개 시 중 하나인 일리아드에 나오는 트로이 전쟁 으로 유명한 곳이다. 트로이는 그 후 로마 시대에는 일리움이라고 불렸는데, 일리움은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에 생겼다가 콘스탄티노플 시기에 번창했으며, 비잔틴 왕국 시절에 망했다. 트로이 목마 역사가 3000 년이 넘는 이 도시는 트로이의 목마 로 유명한 곳이며, 19

20 트로이 전쟁은 스파르타의 왕 메네라우스의 부인 헬레네를 되찾는 전쟁이다. 그리고 오디세이는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리스 영웅들이 전쟁 후 고국으로 돌아오는 여행 중 겪은 모험담을 기록한 것이다. 나는 트로이 전쟁, 또는 트로이 목마를 그린 영화를 여러 번 보았다 년 전에 있었다는 이 전쟁이 서사시 오디세이에 나오는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알고 있었는데, 1822 년 스코틀랜드 기자 찰스 맥클라렌(Charles Maclaren)이 이 지역을 세상에 알리면서, 사람들은 실제로 트로이라는 도시가 있었고, 따라서 트로이 전쟁도 전설이 아니라 사실이었다고 알게 되었다. 이제는 고고학자들의 발굴로 옛날에 번성했던 트로이 도시의 면모가 유적으로 되살아났다. 우리는 트로이 전쟁 당시의 성곽과 주변 주택가, 그리고 당시의 극장 자취를 볼 수 있었고, 관광객의 사진 배경으로 새로 만들어진 트로이 목마도 구경할 수 있었다 년 전에 있었다는 트로이를 통해 서양 문명의 자취를 느끼면서, 우리는 에베소를 향해 버스를 타고 달렸다. 에베소(Ephesus) 에베소는 처음에는 그리스의 도시였고, 그 후에는 로마의 번성한 도시였으며, 이제는 터키의 서쪽 주요 도시로 자리 잡고 있다. 에베소는 기원 전부터 이미 인구가 25 만 명이었다고 한다. 요한 계시록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되어 요한 복음을 에베소에서 집필하였고, 예수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를 모시다가 이곳에서 임종하였고, 그 시기에 성모 마리아도 돌아 가셨다고 한다. 에베소는 널리 알려진 기독교 성지이며, 지중해에 위치한 쿠사다시 항구가 바로 옆에 있는 관광 명소이기도 하다. 에베소는 성모 마리아께서 돌아 가신 곳이고, 사도 요한의 묘가 있는 곳이기도 하여, 기도교인, 특히 천주교인들의 성지로서 많은 신자 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우리가 에베소의 한인 식당에 점심 식사를 하러 들어갔을 때, 서울에서 온 한국 관광객 일행을 만났다. 그들은 한참 학기 중인 5 월인데 초등학교 학생들을 데리고 그곳까지 20

21 왔다. 아마도, 그들은 학교 공부보다 성지 순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새르서스 도서관의 유적 우리는 안내인이 보여주는 에베소의 옛 도시 자리로 갔다. 이곳은 지중해 동쪽 지역 중에서 로마 유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으로, 아직도 발굴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데, 현재는 전체 대상 지역의 15% 정도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4 세기경의 이 도시가 얼마나 큰 도시였는지는 몇 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외극장 터를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직도 그 거대한 위상을 자랑하는 셀수스(Celsus) 도서관 자리에 우뚝 서있는 돌기둥은 터키의 20 리라짜리 지폐 뒷면에 새겨져 있다. 이 도서관은 서기 125 년에 이곳 로마 집정관이었던 줄리우스 셀수스가 자기 개인 재산으로 짓기 시작하여 그의 사후에 아들이 완성하였다고 한다. 셀수스 자신은 도서관 완공 후에 그 밑에 묻혔다고 한다. 이 도서관은 아침에 뜨는 햇살이 열람실을 환히 비추도록 설계되었는데, 건축물의 규모가 너무나 웅장했다. 이어서, 우리는 바리우스 목욕탕과 스코라스티카 목욕탕의 옛 21

22 모습을 보았다. 바리우스는 일반인용이라서 평범하였으나, 스코라스티카는 귀족용 목욕탕인 듯 로마의 목욕탕처럼 냉탕, 온탕, 열탕, 스팀탕 등 네 개의 탕이 있었고, 내부가 모두 자연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목욕탕에는 탈의실, 운동실, 그리고 도서관까지 갖추고 있어서 수많은 이용객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24,000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야외극장 성 요한의 묘 사도 요한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사망한 지 3 년 후인 서기 42 년에 성모 마리아와 함께 에베소로 와서 기독교 선교를 하다가 사망했다. 또한 사도 바울도 서기 52 년에 이곳에 와서 3 년을 같이 사도 요한과 지냈다. 우리 일행은 사도 요한 묘 앞에 가서 기도와 묵념을 하고 다시 에베소에 건설된 엄청난 기독교 도시를 구경하였다. 이 사도 요한의 묘는 로마의 저스티니안 황제가 나무 지붕을 한 낡은 교회를 헐고 서기 4 세기경에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22

23 우리는 에베소의 옛 도시를 몇 시간이나 구경하다가 저녁 때가 되어서 우리의 숙소인 쿠사다시(Kusadasi) 항구에 있는 호텔로 갔다. 쿠사다시 항구는 지금부터 3000 년 전부터 번성했고, 기독교인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에베소 성역을 찾을 때 입구 역할을 하고 있는 아름다운 지중해 항구였다. 성 요한의 묘지 파무칼레(Pamukkale)와 히에라폴리스(Hierapolis) 파무칼레는 목화성( 木 花 城 )이라는 뜻이다. 이 지역 산은 온통 석회로 하얗게 덮여 있는 자연 온천이며, 멀리서 보면 하얀 목화가 성을 이룬 것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스, 로마, 비잔틴의 휴양 도시인 히에라폴리스는 온천 물이 흐르는 산 위에 건설되었는데, 이 도시 성곽은 길이 약 2.5km, 폭이 600m, 그리고 높이 15m이다. 주로 귀족들의 휴양 도시인 이곳에는 원형극장, 목욕탕 등이 있었다고 하며, 히에라폴리스의 엄청난 23

24 공사에 수 만 명의 노예가 동원되어 혹사당했다고 한다. 석회로 덮여 있는 자연 온천 파무칼레의 노천 온천에서는 사람들이 수 천 년 전부터 노천에서 목욕했다고 한다. 우리 일행 중에도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노천 온천 물에 들어간 사람이 있었지만, 우리는 이 산 밑에 새로 지은 호텔 수영장이 노천 온천 물을 끌어온 것이라고 하여 호텔 수영장에서 옛날 로마 귀족처럼 온천욕을 즐겼다. 왕과 귀족들의 휴양 도시로서 파무칼레와 히에라폴리스의 엄청난 규모에 우리 일행은 놀라움을 넘어서 할 말을 잃었다. 참으로 대단한 역사적 유물이었다. 카파도키아(Cappadocia) 카파도키아는 터키의 아나토리아 지역 가운데 있다. 카파도키아는 지도에 나오는 도시명이 아니고, 매우 광할한 터키의 남동부 일대를 말하는데, 카파도키아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신이 만든 예술의 경지라고 극찬할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수백만 년전 활화산이었던 예르지예스산(3917m)에서 용암이 분출 24

25 되면서 이곳의 지형이 형성 되었고, 오랜 세월 동안 풍화, 침식 작용을 일으켜 응회암지대로 바뀌게 되었다.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이러한 바위를 깎고 동굴을 만들어 주거공간을 마련하여 생활하였다. 땅 밑으로 한참 내려가야 만날 수 있는 지하 도시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종교박해를 피하려고 숨어 살던 시설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종교인뿐만 아니라 죄를 지은 범죄자들도 이 지하 도시에 숨어들었고, 그러면 로마 군인들이 그들을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지하 도시는 일종의 지하 동굴이지만, 공기 유통을 위한 시설도 있고, 로마 군인이 들어오면 차단하는 시설도 있었다. 그러나 지하 도시의 가장 어려운 문제는 화장실을 어디에 만들고 그 배설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지하 시설을 돌아보면서 세상에 이런 곳도 있었나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카파도키아의 돌의 도시 25

26 이스탄불 (Istanbul) 터키에서 제일 큰 도시, 이스탄불은 동양과 서양을 가르는 보스포로스 해협을 중앙에 두고 양쪽으로 나뉘어 있다. 그래서 이스탄불은 이 세상에서 한 도시가 동서양을 같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도시이기도 하다. 이 도시는 오랜 역사를 통해서 로마, 비잔틴, 라틴, 그리고 오토만 제국의 수도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923 년에 터키에 공화국이 건설되면서, 터키는 이스탄불에서 앙카라로 수도를 옮겼다. 동쪽 보스포로스 해협의 Blue Mosque 콘스탄티노플로 불리던 이 도시는 제 4 차 십자군 원정 시 약탈당한 후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 후 라틴 제국이 들어서면서, 이 지역 종교가 그리스 정교 비잔틴으로부터 카톨릭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라틴도 오래가지 못하고 비잔틴 제국으로 1261 년에 다시 바뀌자, 이 도시의 인구가 9 세기에 50 만에서 당시 4 만 명 정도로 줄었다고 한다. 비잔틴의 마호메드 2 세가 1266 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이스탄불로 도시 이름을 바꾸면서 이 도시를 세계적 종합 도시로 만들었다고 26

27 한다. 그는 과거의 기독교 주민을 추방하고 다른 지역으로부터 회교도, 유태인, 그리고 기독교인들을 이스탄불로 이주시켜서 후에 오토만 제국이 종합 수도가 되는 기틀을 만들었다고 한다. 동서양을 연결하는 보스포로스 해협을 다니는 페리 보트는 1851 년부터 운항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는 여행사가 마련한 보트를 타고 이 해협을 돌아보며 이 도시의 중요한 역사적 건물을 두루 구경하였다. 참으로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다음 우리는 소피아(Sophia) 사원을 방문했다. 이 사원은 본래 그리스 정교 사원이었는데, 오토만 시절에는 회교 사원이 되었다가 이제는 박물관이 되었다. 소피아란 라틴어로 지혜를 뜻하는데, 성 소피아 사원은 큰 돔을 가진 비잔틴식 건축물의 대표적 유산으로서 잘 보존되고 있다. 톱카피(Topkapi) 궁전 소피아 사원 톱카피 궁전은 오토만 제국 황궁으로 400 년 동안 사용된 곳이다. 이 궁전은 황족들의 숙소와 이들의 연예, 체육 등 각종 행사를 하던 27

28 장소였다. 이제는 이 궁전이 국가가 관리하는 박물관이 되었으며, 회교도의 유물과 오토만 시절에 점령지에서 가져 온 많은 보화가 이곳에 보관되어 있는데, 그 가치가 가히 천문학적이라고 한다. 이 거대한 궁전은 네 개의 큰 건축물과 작은 부속 건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때는 4,000 명이 이 안에서 살았다고 한다. 가이드 설명에 의하면, 이 궁궐은 공화국 설립 이후 박물관으로 쓰고 있는데, 이곳에 진열된 보화를 다 보려면 며칠이 걸린다고 한다. 우리는 대충 이들을 보고, 서둘러서 세상에서 제일 오래되고 큰 이스탄불 재래 시장으로 향했다. 이 Grnad Bazaar 시장에는 마치 서울의 남대문 시장처럼 꼬불꼬불한 64 개의 골목에 3,600 개의 상점이 몰려 있다고 한다. 그래서 가이드는 우리들에게 길을 잃으면 찾아 나오기 힘드니 일행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세계에서 제일 오래 되었다는 재래시장 28

29 3. 정열과 삼바의 고장 남미 칠레 산티아고까지 16 일 동안 크루즈 배를 타고 태평양 연안으로 중남미를 돌아본다는 신나는 여행 계획이 2011 년 1 월 16 일로 잡혔다. 우연한 기회에 로얄 캐리비안 회사 소속 Mariner of the Seas 가 16 일 항해에 699 달러라는 인터넷 광고를 보고, 우리 동네에 사는 9 개 가족이 재빠르게 이를 예약했다. 보통 크루즈 여행은 하루에 100 달러 정도로 계산하면 얼추 적당한 가격으로 치는데, 이번 크루즈 여행 경비는 16 일에 699 달러니 터무니없이 싼 것이었다. 예약한 뒤 발견된 사실이지만, 이 초대형 호화선은 캘리포니아에서 지중해 연안으로 회사의 주무대를 갑자기 옮기는 과정에서 이번 여행 상품을 만든 것인데, 사전 예약자이 모자라 급히 손님을 찾으려고 덤핑 가격으로 내놓은 기회를 우리가 잡은 것이다. 우리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크루즈 전문가들이어서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우리는 산 패드로 여객선 터미널에 가서 승선 수속을 하면서 이 배의 자료를 보고 놀랐다. 이 호화선은 13 만 8,000 톤의 크기에, 3,200 명의 승객과 1,500 명의 승무원이 일한다. 배 한 가운데에 인조 하늘이 보이는 쇼핑몰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3,000 명이 넘는 손님은 보이지 않았고, 수속하는 데도 임시 29

30 직원들이 하는지 무척 지루했다. 미국의 서비스 산업 종업원의 교육 정도는 원래 좋지 않다. 우리는 이들이 일하는 과정을 지켜 보면서 미국의 비능률적인 현실을 통감하였다. 승선하고 보니, 손님이 적어서인지 종업원 수도 적은 듯했다. 내가 즐겨 사용하는 도서관은 하루에 2 시간만 열렸고, 그 많은 상점도 정오가 되어야 열렸으며, 심지어 카지노도 오전 10 시가 되어야 시작됐다. 제한된 서비스지만, 작은 타운 같은 호화선에서 손님이 붐비지 않으니, 우리는 오히려 편하기만 했다. 특히 항상 비어 있는 듯한 사우나 시설은 제법 쌀쌀한 1 월 날씨에 쾌적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선장 초청 만찬을 마치고 크루즈에서는 선장이 초청하는 만찬에는 모두 정장을 입는다. 이 만찬에서 바다가재 요리가 포함돼서 메뉴 중에서 가장 맛있고 비싼 요리를 우리가 몇 번이고 대접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손님 수가 적은 덕이었을 것이다. 30

31 첫 나흘 동안의 항해 중, 우리는 멕시코의 Cabo San Lucas 와 Vallarta 항구에 들렸다. 이 항구는 몇 번이나 가 본 적이 있는 곳이다. 나는 아예 배에 남아서 텅 빈 듯한 수영장 근처의 비치 의자에 누어서 흘러가는 구름을 보면서 밀린 글을 쓰고 있으려니, 이런 천당이 또 어디에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코스타리카와 적도제 우리는 코스타리카의 Puntarenas 항에 들러서 겨울철 휴양지로 널리 알려진 리조트 시설을 돌아보았다. 오래 전 이곳은 싸게 여행할 수 있고 자연 그대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곳이었는데, 이제는 값도 제법 비쌌고 또 손님들도 붐비는 곳이 되어 있었다. 넵튠 왕과 적도 제 크루즈 배는 푼타레나스를 저녁 7 시에 떠나서 다음날 새벽 4 시에 적도를 통과했다. 크루즈 배에서는 적도제(적도 통과 제사)가 있으니 함께 참여하라고 몇 번이나 방송을 되풀이했다. 나도 배를 많이 탄 편이지만 적도를 건너는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 일행 중에는 오랜 31

32 선장 생활을 하면서 적도를 건너 본 적이 있는 분이 있어서, 여러 가지 적도제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이 호화선은 선장과 모든 고위 간부들이 출연해서 바다의 신인 넵튠(Neptune) 왕에게 적도를 무사히 넘어서 안전한 항해를 기원 하는 제사를 올렸다. 제사의 시작은 이상한 옷차림의 넵튠 왕이 거창 하게 입장하는 것이었다. 이 가상의 왕이 자리에 앉으니, 고위 간부들 하나하나가 왕 앞에 나와서 절을 하고 안전한 항해를 기원했다. 왕은 그 대가로 간부 중 제일 먼저 참모장에게 양동이에 든 키위 같은 과일주스를 머리에 붓는 희생을 요구했다. 왕의 요구대로 참모장이 나와 무릎 꿇으면, 제사를 올리는 제주가 주스 한 통을 머리에 부었다. 희생자도 놀라지만 보는 많은 승객들은 이 희한한 장면을 사진으로 찍으면서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YMCA 노래를 부른 선장과 희생자들 32

33 두 번째 희생자는 여자 간부 중 제일 높은 서비스 장이었다. 마지막으로는 선장까지 나와서 희생을 당했다. 선장이 당하는 희생은 선장의 부인이 나와서 남편을 혼내주는 것이었다. 이런 모든 제사가 끝나자, 주스를 덮어 쓴 희생자들이 옷을 입은 채 수영장으로 들어가 YMCA 노래를 부르면, 보는 모든 사람들까지 함께 목청 높이 노래를 한바탕 따라 불렀다. 적도제는 재미있고 우스운 행사였다. 우리 일행 중에 한국 배를 타고 적도제를 지낸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그는 한국배들은 적도제 때 작은 돼지를 삶아서 올려놓고, 술과 많은 음식을 차려놓으며, 선장 이하 간부들이 차례로 절을 하며 제사를 지낸다고 설명했다. 한국식 적도제는 미국식과 매우 대조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왕의 도시 페루의 리마 리마 해변 공원 33

34 페루의 수도 리마 여정은 카야오(Callao) 항구에 아침 7 시에 내려서 하루 종일 리마 근방을 구경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리마는 스페인 항해자들이 처음 발견했고 1553 년에는 왕의 도시로 명명되면서 이 주변 지역이 교역 중심 도시로 번창했다고 한다. 리마가 번창했던 이유 중 하나는 이곳이 신성계곡(Sacred Valley) 으로 가는 길목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일행을 태운 관광 버스는 정부청사와 대통령 사무실이 있는 시장 플라자와 오래된 샌프란시스코 사원을 경유했다. 나는 놀랍게도 1551 년에 세워 졌다는 산 마루코스 대학교를 관심 있게 둘러보았다. 이렇게 오래 전에 세워진 대학이 미국 고등교육 학계에 전혀 알려진 바도 없었고, 더구나 이 대학 출신으로 이름 있는 학자가 있다는 사실도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어쩌면 그 이유가 이 지역민들을 식민지 사람으로만 다스렸던 식민지 정책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페루는 일찍이 1821 년에 독립했지만 계속된 정치 혼란과 국가 재정 파탄으로 아직도 고난을 겪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전국민의 36%나 되나, 3,000 만 명의 국민은 여러 인종의 복합체로서, 그 중에는 얼마 전 대통령에서 쫓겨 난 일본계 후지모리 대통령도 있었다. 칠레 (Chile) 칠레는 널비가 180km에 길이가 4,300km나 되는 기다란 나라다. 동쪽으로는 남미의 록키 산맥인 안데스 산맥이 있고, 서쪽으로는 태평양을 가지고 있는 특이한 지형의 국가다. 기다란 나라의 행정을 위하여 행정구역이 남북으로 갈라져 있으며, 비옥한 남쪽에 비하여 북쪽은 대부분 사막이다. 우리 일행은 칠레에 도착하기 전에 칠레 역사에 관한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본래 칠레는 마푸체(Mapuche) 원주민이 살던 곳이었다. 16 세기 초에 스페인이 점령하기 전에는 잉카왕국의 자체 문화와 종교를 가졌던 곳이었다. 원주민들은 대포와 총을 가진 스페인 해군에 활로 저항했으나 견디지 못하고 식민지가 된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수백 년 동안 스페인 식민지로서 착취당하면서, 이 원주민들은 이제 전체 인구의 5%밖에 지나지 않지만, 그들의 전통과 34

35 역사를 보존하려는 노력이 대단하다고 하다. 칠레는 1818 년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여 비교적 안정된 국가를 유지하다가, 피노체라는 군인 독재자가 1973 년부터 1990 년까지 18 년간 독재정치를 하는 바람에 국가가 여러 모로 병이 들어 고생한 과거가 있다. 현재 칠레는 경제적으로는 남미에서는 잘 사는 편이다. 북쪽 사막에 있는 구리가 세계 매장량의 3 분의 1 이며, 남쪽의 비옥한 땅과 쾌적한 날씨를 가지고 있어서 포도주 생산량이 세계 8 위를 차지할 정도로 비교적 저렴한 포도주를 전 세계에 수출하고 있다. 한국이 칠레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후 값싸고 질 좋은 칠레 와인이 한국에 수출되는 바람에 한국의 삼겹살 식당에서도 소주대신 칠레 와인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들었다. 그대신 칠레에는 한국 자동차가 판을 치고 있어서 한국 자동차 판매 상들이 내건 커다란 한국차 광고가 칠레 어디를 가나 우리를 즐겁게 맞아 주었다. 칠레에 들어서서 우리는 북쪽의 아름다운 항구 아리카(Arica)에서 하루를 보냈다. 이 아름다운 항구는 북쪽 아타카마 사막에 붙어 있고, 이 사막은 1 년 강우량이 1cm도 안 되는 아주 건조한 곳이었다. 아리카 시내관광을 배에서 신청할 수 있는데, 경비는 1 인당 79 달러 정도였다. 그러나 항구에서 내려서 택시나 밴(소형버스)을 대절하면, 시내관광 비용도 반 이상 줄일 수 있고, 또 우리가 원하는 대로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범죄가 심한 곳에서는 비싸도 배에서 안내하는 대로 하는 것이 상식이었지만, 아리카는 비교적 안전한 항구로 이제까지 아무런 사고가 없었다고 하여, 우리 일행 18 명은 자체로 차를 렌트할 생각으로 우선 선착장을 나왔다. 선착장 제한구역을 나오자, 택시들이 줄줄이 서서 관광객들에게 터무니 없이 비싼 요금을 부르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택시를 여러 대 구하기보다는 시내로 들어 가서 큰 밴을 빌리기로 하고 시내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갔다. 마침 시내버스가 아침 시간에 손님이 하나도 없이 빈 차로 오자, 우리 18 명이 모두 올라탔다. 운전기사 빅터 휴고(Victor Hugo)는 35

36 영어를 전혀 못했지만, 우리 일행 중에 스페인어를 좀 하는 분이 있어서 운전기사에게 엉뚱한 제안을 했다. 우리가 버스에 손님도 별로 없으니 우리를 태우고 시내관광을 하는 것이 어떠냐고 하자, 관심을 보인 버스 기사가 버스 회사로 가서 배차 주임에게 상의하는 듯했다. 버스 회사 측은 4 시간 동안 시내관광하는 데 150 달러를 받겠다고 우리에게 흥정해 왔다. 우리는 1 인당 7 달러 50 센트씩 걷어서 기사 팁으로 30 달러까지 얹어서 주니, 배에서 제시한 시내관광 비용 1 인당 79 달러에 비해 10 분의 1 도 들지 않게 됐다. 아리카 선착장 주변 세상에 칠레에서 시내버스를 대절하여 시내관광했다는 이 전무 후무한 이야기는 칠레 사람들도 믿기 힘든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사실이 됐다. 빅터는 이 지역에서 태어난 토박이라 이 지역을 잘 알고 있었으며, 우리가 배에서 얻은 자료를 보여주자, 그보다 더 잘 설명해주겠다고 했다. 그는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면서도 우리를 너무 즐겁게 해주는, 아주 재주 있는 기사였다. 36

37 우리가 시내관광 중 처음 찾은 곳은 시내에서 좀 떨어진, 아자파 (Azapa) 의 산 미구엘 박물관이었다. 그 부근에는 얼마 전부터 분출 하기 시작해서 연기를 내뿜고 있는 화산이 있어서, 우리는 그 화산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었다. 1 년에 비가 겨우 몇 방울밖에 내리지 않는 이 지역에 이런 도시가 있다는 사실이 믿기 힘든 일이었다. 아주 유쾌한 친구인 버스기사 휴고와 함께 사실 이 항구는 이 지역에서 많이 나는 구리와 광물을 수송하는 곳으로 발전했다. 주민들은 주로 광산업에 종사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지역은 지하수가 풍부하여 근래에는 올리브를 수출하는 농업도 발전되고 있다고 한다. 이 지역에는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건축된 산 마루코스 성당이 있는데, 19 세기에 재건됐다고 하며, 고딕 건축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었다. 성당 안에는 예수의 모형 시신이 보관돼 있었다. 바다를 내려다보는 도시 앞 산 위에는 남미에서 제일 큰 예수 동상이 서 있었다. 이곳은 많은 관광객으로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산에서 내려오자, 마침 이곳에서는 고전 음악과 춤의 축제가 열리고 있어서, 37

38 우리는 이 지역 토산품 시장과 이곳에서 열리고 있는 축제를 함께 구경할 수 있었다. 아리카를 떠나자, 옆으로 보이는 북부 칠레는 모두 바위 절벽뿐, 비가 오지 않아 식물들이 자라기 힘든 지역이었다. 우리는 다시 배로 돌아와 며칠을 더 항해해서 우리의 마지막 항구 기착지인 발파라이소(Valparaíso)에 도착하게 되고, 거기서 우리는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를 관광하게 돼 있었다. 그러나 이 배는 거기서 마젤란 해협을 돌아서 브라질로 계속 항해한다고 하며, 우리를 제외한 일부 승객들은 브라질까지 간다고 했다. 남미에서 제일 크다는 예수 동상 발파라이소(Valparaiso)항구 발파라이소 항은 파나마 운하가 개통된 1904 년 전까지는 남태평양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항구였다. 태평양에서 대서양을 가기 위한 배들이 마젤란 해협을 지나기 전에 발파라이소 38

39 항을 거쳐서 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선원들 간에는 이 항구가 작은 샌프란시스코 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파나마 운하 개통 후 이 항구에는 그전처럼 배들이 많이 들어오지 않았지만, 아름다운 항구로 재개발돼 있었다. 우리 일행은 13 일간의 항해를 마치고 독일제 버스를 타고 이 유서 깊은 항구를 돌아본 뒤, 산티아고로 가서 한국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였다. 발파라이소 항은 아름다운 해변을 가지고 있어서 수도인 산티아고 부자들의 휴양지 역할을 하는 고급 해변 빌라들이 들어서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 이곳은 다른 해변 도시에서 흔히 보이는 고층 아파트가 없어, 도시가 더욱 아름다웠다. 이곳은 19 세기 건축물과 시설들을 잘 보존하고 있어서, 우리는 몇 시간 동안 시내구경을 즐겁게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산티아고로 가는 도중에 베라몬테(Veramonte) 포도주 회사를 방문했다. 이 회사는 두 개의 산 사이 계곡에 위치하여 비교적 서늘한 기후를 유지할 수 있어서 샤도네 백포도주 생산에 적합한 입지를 지니고 있었다. 이곳은 북 캘리포니아 지역 나파 계곡과 아주 비슷했다. 이곳은 프랑스 보르도와 같은 포도를 재배 하며, 칠레 상표 프리무스 포도주를 만드는 곳이라고 한다. 이 포도주 회사는 회사 구경하는데 8 달러, 와인 한 잔에 4 달러를 달라고 해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 우리가 이 동네 어느 식당에 가서도 이 회사 포도주 한 잔에 3 달러 이상을 준 적이 없었는데, 공장에서 1 달러를 더 받았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관광객을 공장으로 불러들여 자기 브랜드를 홍보하기보다는 돈 먼저 챙기 겠다는 뱃심을 가진 듯했다.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 (Santiago) 우리는 하루 종일 산티아고 시내관광을 했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라몬데 궁이었다. 마침 우리가 정부청사로 둘러싸인 플라자를 구경할 때, 대통령이 출근하면서 정문 입구에서 기다리는 군중과 악수를 하며 인사하는 순간을 우리 일행도 함께 볼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은 칠레 현직 대통령과 같이 기념촬영을 하는 39

40 기회를 가졌다. 이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쉽게 상상 할 수 없는 짜릿한 경험이었다. 18 년 동안 피노체트 군사독재에 시달린 시민들과 자유로이 만나서 인사를 나누는 칠레 대통령은 너무나 멋있게 보였다. 산티아고는 개들의 낙원이었다. 대통령 사무실 앞을 비롯하여 어느 곳에도 많은 개들이 더운 열대 기후에 지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개들은 사람들을 따라다니거나 귀찮게 하지도 않았으며, 배가 고프지 않은 듯 먹을 것을 찾지도 않았다. 마치 관광객이 법석거리는 플라자와 정부청사가 자기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출근하는 칠레 현직 대통령과 기념 사진 산티아고 시내 구경 중에 인상 깊은 곳은 채소와 생선을 파는 중앙시장이었다. 시장은 많은 상인과 손님들로 시끄러웠다. 우리는 시장 안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산티아고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산타 루치아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그곳은 샌프란시스코나 홍콩에서 볼 수 있는 시내 공원이어서 우리는 운동 삼아 걸어서 다녀왔다. 산티아고는 도시 뒤로 안데스 산맥이 배경으로 서 있고 수 많은 수목 속에 자리잡은 아주 아름다운 도시였다. 40

41 산티아고에서 둘째 날, 우리는 3,000m 높이의 안데스 산맥에 자리 잡은 뽀르티요(Portillo) 스키 리조트를 구경했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세 시간이나 버스로 올라가 도착한 스키장은 여름이어서 손님이 없었지만, 우리는 주변의 아름다운 정경과 그 높은 곳에 있는 전설적인 잉카호수를 돌아보았다. 잉카 왕국의 마지막 공주가 잉카가 스페인에 패망하자 이 호수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전설을 들으며, 우리는 칠레의 전통 샌드위치 메뉴로 점심을 호숫가에서 먹고 다시 시내로 내려왔다. 비극의 전설 잉카 호수 칠레는 남미에서 제일 부자 나라지만, 호텔을 나오면, 영어 하는 사람을 보기 힘들었다. 큰 체인 상점에서도 영어는 통하지 않았다. 칠레가 강대국으로 발전하려면 제일 먼저 할 일은 국민의 국제화인 듯했다. 이제 세계 어느 나라나 무역이 중요한 국가 수입이 됐으며, 관광 산업도 중요해졌으니, 관광객을 유치하려면 외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할 듯했다. 41

42 4. 경이의 파나마 운하 또 크루즈 여행인가? 라고 가까운 친구의 놀란 듯한 힐책을 듣고, 나는 그저 4 월은 원래 우리 부부가 여행하는 달이라 가려는 것이네 라고 간단히 넘기려 했다. 하지만 이 친구는 자네는 중성 지방 수치를 낮추고 몸무게를 줄이는 다이어트 프로그램에 성공 했다고 하면서, 크루스를 가면, 그 좋고 많은 음식의 유혹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번 크루즈 여행을 다녀오면 몸무게가 다시 많이 늘겠구먼! 이라고 바로 응답했다. 그렇지 않네. 채소, 과일, 생선 요리는 많이 먹을 것이고, 어느 크루즈도 소고기 요리는 별로 좋지 않아 소고기는 입에도 안 댈 테니, 잘 먹으면서도 몸무게는 안 늘리고 오겠네 라고 내가 응수했지만, 이 친구는 못 믿겠다며 머리를 저었다. 파나마운하의 첫 관문을 열면서 그러나 얼마 후, 그 친구에게 여행하면서 사진도 찍고 여행기를 쓴다는 것이 나의 은퇴 생활에 절대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나는 세계적 명승지를 찾아 다니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한다고 설명 해주었다. 사실 나는 은퇴 전에 출판사를 차려서 이런 생활을 즐기려고까지 생각해 보았다. 나는 여행을 통해서 대자연 속의 내 42

43 존재가 얼마나 미미하고 순간적인가를 느끼면서, 수천만 년을 말없이 지켜온 자연에서 나의 나머지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이번 크루즈 여행지로 정한 파나마 운하는 사실 오래 전부터 여행 지로 눈독을 들이던 곳이다. 특히 4 월에 이곳을 간다는 것은 시인 박목월의 사월의 노래 를 생각나게 한다. 나는 이 노래를 젊은 시절에 즐겨 불렀다. 지금도 혼자서 마음속으로 즐겨 부르는 이 노랫말처럼, 4 월은 낭만적인 여행 경험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사월의 노래는 나의 역마살 신세처럼 계속되는 여행 속에서 목련 꽃이 활짝 피어 있는 어느 이름 없는 항구 에 머무는 여행자의 마음을 느끼게 한다. 비록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은 아니지만 오래된 책을 읽으면서 빛나는 꿈의 계절과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 4 월에 장장 14 일간을 물위에 떠 있는 호텔에서 보낸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마음이 설랬다. 이번 여행 계획은 지난 해 연말연시 파티에 모인 여덟 가족이 추진 하기로 이미 결정했으며, 내가 그 준비를 맡았다. 그러나 모두가 합의할 만큼 좋은 여행 프로그램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여행사 주선으로, 우리는 플로리다의 포트 라더데일(Ft. Lauderdale) 항구 까지 비행기로 가서, 그곳에서 떠나는 코랄 프린세스(Coral Princess) 크루즈를 4 월 6 일에 타고 떠나, 로스앤젤레스에 4 월 20 일에 도착하는 여행 프로그램 예약을 1 월 초에 마칠 수 있었다. 여행 시기보다 여러 달 일찍 예약했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저렴 하고도 유리한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1 인당 크루즈 비용은 999 달러, 비행기 요금은 211 달러였다. 여기에 여덟 가족이 함께 간다고 2 주간 저녁 만찬에 필요한 774 달러 상당의 포도주를 보너스로 받았다. 예약 후 3 개월을 기다리다 4 월 5 일 밤 비행기로 출발할 시점이 되자, 노년의 여덟 가족 부부는 마치 소풍 가는 초등학생처럼 마음이 들떴다. 제트 블루(JET BLUE)라는 이름 없는 비행기를 처음 타 보았으나, 우리는 우려와는 달리 아주 편한 서비스를 받으며 즐겁게 5 시간을 날아서 4 월 6 일 새벽 6 시에 크루즈 항구가 있는 포트 라더데일 비행장에 도착하였다. 43

44 미국의 베니스, 포트 라더데일(FT. LAUDERDALE) 미국의 베니스라고 불리는 이곳에 비행기로 도착하면, 승선 때까지 남는 시간 동안, 원래 우리는 시내 유람선을 타고 이 도시 명소를 돌아볼 계획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밤 비행에 지쳐서 시내 관광을 생략하고 비행장에서 아침 식사를 든 후 곧바로 승선장으로 갔다. 호화 유람선, 코랄 프린세스 본래 이 항구는 마이애미에서 40km 정도 북쪽에 떨어져 있었으며, 마이애미가 비싸고 붐비는 대도시가 된 후에 개발된 신흥도시로 인구는 180 만 정도였다. 이 도시는 시내 곳곳에 운하가 관통하여 자동차 대신 배를 타고 시내 관광을 즐길 수 있는 화려한 수상 도시로 유명하다. 도시에는 수백 개의 음식점과 술집이 있어서, 이곳은 북쪽의 추운 지방 사람들이 즐겨 찾는 휴양도시로도 유명 했다. 우리는 선착장에 너무 일찍 도착한 탓에 몇 시간을 기다리다 11 시경에 승선할 수 있었다. 크루즈에 승선하면, 우선 밤낮 없이 열려 있는 뷔페 식 호라이즌 카페(Horizon Cafe)로 가서 맛있는 점심을 먹는 것이 제일 기다려지는 일이었다. 44

45 이 유람선은 파나마 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규격으로 제작된 9 만 톤 급으로 다른 큰 유람선의 반 정도 크기였다. 그러나 승객 2,000 명에 종업원 900 명을 수용하고 있으며, 갖출 것은 다 갖추었기 때문에, 조금도 불편한 요소는 발견되지 않았다. Fort Lauderdale 항구 이 호화 유람선이 자랑하는 것은 14 층 리도 데크(Lido Deck)에 수영장과 비치 의자에 누어서 영화를 볼 수 있는 야외극장인데, 이는 유람선 중에서 제일 큰 스크린과 6 만 2,000 와트짜리 거창한 스피커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이 유람선에는 조깅과 걷기 운동을 할 수 있는 트랙이 배 위에 있는 여타 유람선과는 달리 선내 7 층에 설치되어 있어서 운동하는 승객들이 거센 바람과 따가운 햇볕을 면할 수 있었다. 승선 후, 우리는 항해 중 13 번 차려지는 만찬 식당에 가서 화려한 음식과 식당 종업원들을 처음 만났는데, 뜻밖에 이태리 출신 선장이 우리 테이블을 찾아주어 이태리 마피아 이야기로 우리를 한참 웃겼다. 저녁은 매일 정식으로 차려지며, 이번 항해 중에 세 번의 저녁 정식에 승객들은 턱시도 정장을 입고 입장해야 했다. 정장을 입고 입장하는 저녁 식사 때, 승객들은 영정 사진이라고 해서 각자의 개인 사진, 가족 사진, 그리고 일행 전체의 스튜디오 사진을 찍게 마련인데, 그 사진 값이 무척 비쌌다. 크루즈의 저녁 만찬에는 비싼 와인을 마시는 것이 상례다. 우리는 45

46 18 명이나 되어 사전에 패키지로 36 병을 주문하였는데, 시장에서 10 달러짜리가 이곳에서는 25 달러 정도에 제공되었다. 우리 일행은 다른 크루즈 때보다 저렴하고 좋은 와인을 마시게 되었다고 모두 좋아했다. 아침과 점심 식사도 매일 정식으로 대접 받을 수 있었으나, 각자 한 두 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호라이즌 카페에서 다양한 채소와 과일을 즐겼다. 시원한 맥주는 7 달러, 그리고 칵테일 한 잔은 10 달러 정도로 비싼 편이라, 우리는 배 안에서 술을 마시기보다는 배가 관광지에 설 때마다 관광하고 배로 돌아오는 길에 그 지역의 좋은 술을 물병에 담아가지고 와서 배 안에서 술을 즐기기도 했다. 파티 차림의 여자분들 유람선을 타면, 최근에 개봉한 영화를 매일 보여주고, 틈틈이 춤과 노래와 만담으로 엮어지는 쇼와 빙고, 그리고 스포츠 댄스 교습이 있는데, 오히려 손님들이 이런 다양한 프로그램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첫날 영화는 Premium Rush"라는 액션 스릴러로 컬럼비아 영화사가 작년에 개봉한 영화라고 하는데, 처음 들어보는 46

47 영화였다. 그러나 뉴욕 번화가에서 자전거 택배원이 지닌 봉투를 악당들이 탈취하려는 모험을 그려 제법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영화 였다. 유람선은 승선일 오후 4 시에 출발하여 하룻밤과 또 이틀을 약 18 노트 정도의 속도로 달려서 승선 제 4 일 아침에 첫 항구인 아루바에 도착했고, 승객들에게 한나절 관광 시간을 준 다음, 저녁에 다시 다음 항구인 카르타헤나(Cartagena)까지 밤새도록 달렸다. 신혼여행 가는 아루바(ARUBA) 항구 항해 두 번째 만찬은 정장 만찬이었으며, 우리 일행 중 몇 분이 턱시도를 가지고 왔서 차려 입었고, 여자 분들도 파티 드레스를 차려 입었다. 만찬 후에는 여러 가지 쇼와 댄스파티가 있었지만, 나는 큰 스크린으로 보여주는 Anna Karenina 영화를 보았다. 이 영화는 톨스토이의 작품으로 완전한 소설 이라는 평을 듣는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화한 것이었다. 나는 이 소설을 여러 번 읽어서 영화 닥터 지바고 를 보고 가졌던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바람이 세게 부는 배 위 야외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았으나, 나의 기대에 못 미쳤다. 이것은 2012 년 개봉된 영국 영화로서 영국 배우 키이라 나이틀리(Keira Knightley)가 주연 안나 역으로 열연했지만, 별로 큰 흥행을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잘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었다. 장장 14 일간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향하는 유람선의 첫 기항지인 아루바는 미국 동부에서는 신혼 여행지로 많이 알려진 곳으로 네덜란드 부속국이다. 이곳은 아름다운 열대 항구이지만, 그 규모가 작고 별로 찾아 볼 관광 명소는 없었다. 이 나라의 수도인 오랑예스타트(Oranjestad)에는 배를 타고 호텔 안으로 들어 갈 수 있는 르네상스 호텔이 대표적인 명소였다. 이곳 상인들이 보석을 사라고 매 달렸지만, 우리는 이 도시를 한 바퀴 돌아보고는 바로 배로 돌아왔다. 일찍이 1449 년에 유럽 개척자가 이 섬을 발견했으며, 금이 많다고 해서 스페인이 이 섬을 식민지로 오랫동안 지배하다가 1933 년에 독립됐다. 그 후 세계 2 차 대전 당시 미국 병참기지로 사용되는 47

48 과정에서, 1940 년부터 1942 년까지는 영국 보호령, 그리고 1942 년부터 1945 년까지는 미국 보호령이었다가, 현재는 네덜란드의 보호령으로 되어 있었다. Oanjestad 항구 입장 기념 무더운 열대 기후를 이기며 시내관광을 마치고 유람선으로 돌아오니, 야외극장에서 Mamma Mia"를 상영하였다. 나는 비치 의자에 누어서 아루바 산 럼주로 만든 마가리따 라는 술을 마시면서 6 만 2,000 와트짜리 스피커로 뮤지컬 영화를 보고 있으니 꿈만 같았다. 메릴 스트립(Meryl Streep)이 주연하는 이 영화는 연극으로 라스베이거스 만달레이 극장에서 10 년 이상 공연되었을 때 내가 본 적이 있는데, 역시 영화보다는 연극이 좋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름다운 항구. 카르타헤나(CARTAGENA) 카르타헤나는 캐리비언 해협 중요한 지점에 자리 잡은, 컬럼비아의 해양 도시이며 세계 3 대 미항 중 하나로 꼽히는 아름다운 관광 명소로 알려진 곳이다. 48

49 2012 년 여름 이곳에서 세계정상회담이 열렸고, 미국 오바마 대통령을 수행한 경호원들이 이 항구의 미녀들과 스캔들을 벌인 것이 밝혀져서 구설수에 오른 바로 그곳이었다. 나는 1973 년 미주리 대학교 조교수 시절 국제 커뮤니케이션 회의 때 이곳을 다녀오면서 언젠가는 다시 꼭 와 보겠다는 결심을 한 적이 있었다. 그 꿈이 40 년 만에 이루어지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해변에 들어 선 고층건물의 카르타헤나 40 년 전 그때, 어느 부호의 초청으로 우리는 개인 소유 로사리오 (Rosario) 섬에 가서 랑고스티노라는 새우와 바다가재의 합성 생선을 숯불에 구어 먹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서, 나는 그 요리를 찾으려고 노력했으나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 없어 헛되이 배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러나 정말 놀란 것은 아름다운 옛 고적을 많이 보존하고 있는 이 도시가 고층 건물로 꽉 차 있다는 것이었다. 이 항구의 중심가는 과거에는 옛 성곽으로 둘러 싸여 있었는데, 이제 해변에는 모두 30 층 정도의 고층 아파트 건물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이 도시의 최고 명소는 포트 산 필립(Fort San Felipe) 군사 시설이다. 수십 년을 걸려서 6 만 4,000 명의 아프리카 노예들이 만들었다는 이 보루는 아직도 그 위세가 대단했다. 이 보루는 1741 년 영국의 남미 침략을 막았다는 돈 블라스 데 레조(Don Blas de Lezo) 장군과 얽힌 전설적인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년 스페인 왕 필립은 영국의 두 해군 장성이 다음 해에 카르타헤나를 침공하려고 계획 중이라는 간첩의 첩보를 받고 레조 중장을 이곳으로 보내서 대비하라고 했다. 스페인 레조 장군의 49

50 카르타헤나 군사력은 노예를 포함하여 6,000 명에 불과했으나, 영국군은 3 만의 대군과 185 척의 군함, 그리고 2,000 문의 대포를 보유하고 있어, 레조 장군 측은 도저히 영국의 상대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산 필립 요새 입구 스페인 왕이 총독으로 파견한 레조 장군은 이곳에 오기 전 이미 영국과 오랜 싸움을 하면서 막대한 부상을 입은 역전의 장수였다. 그는 지브랄탈 전투에서 대포에 맞아 왼쪽 다리를 잃었으며, 1707 년 영국군과의 투우론 전투에서는 오른쪽 눈을 잃었고, 1717 바르셀로나 전투에서는 바른쪽 팔을 잃어서, 한 다리, 한 눈, 그리고 한 팔을 영국군에게 잃은 장수였다. 예상한대로 1741 년 4 월에 영국군의 총 공격이 시작되자, 스페인 군은 전투마다 패하여 마지막 보루인 이곳 산 필립까지 밀려왔다. 그러나 레조 장군의 마지막 카드인 산 필립 보루에서 날리는 화력을 견디지 못한 영국군은 마침내 철군하고 말았다. 1 만 8,000 명의 사상자와 50 척의 군함이 파괴된 채, 전쟁은 영국의 대 참패로 50

51 끝났고, 다시는 영국이 이곳을 넘보지 못하게 되었다. 영국 국왕 조지 2 세는 남미 침공의 희망을 버리고, 이 패전을 아무도 말하지 못하도록 함구령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이 전쟁이 남미를 영어가 아닌 스페인어가 지배하는 땅으로 남게 된 한 편의 역사적 전기였던 것이다. 이 성곽을 보고 나서, 우리는 17 세기 초에 진행되었다는 무시무시한 종교재판소 구역으로 갔다. 이곳의 어둠침침한 구석에 차려진 고문 장치는 지금까지 내가 그 어떤 유적에서도 보지 못한 가장 잔인스런 기구였다. 그 장치는 식민 정치가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었다. 안내인 설명에 따르면, 이곳에 잡혀 온 죄인들 중에 무죄로 풀려 나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고 하니, 소름이 끼쳤다. 웅대한 파나마 운하 미국 토목공학회가 세계 7 개 불가사의한 경이의 공사 중 하나로 1994 년에 선정할 만큼 파나마 운하는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한 대공사였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오래 전부터 이곳을 와 보고 싶었다. 태평양과 대서양의 수면은 차이가 없다. 그런데 이 두 대양 사이의 두개의 호수 가 있고, 이 두 호수를 통과 하려면 약 25 미터 호수 수면 높이 차이를 극복해야된다. 세계에서 제일 큰 인조 호수 가툰 호수(Gatun Lake)를 만들고, 대서양에서 이 호수까지 배를 끌어 올리는 거대한 개폐 장치 (Locks)를 세개를 만들고 다시 태평양 쪽으로 내려가는 세개의 개폐 장치들을 거치면서 10 만 톤 배를 파나마 운하로 끌어 올리고 내리는 작업은 경이스러웠다. 이런 과정 때문에, 배가 불과 80km 정도의 파나마 운하 거리를 지나는데 10 시간이나 걸리고, 운하에는 9,500 명의 종업원이 일한다고 하며, 지나는 수수료도 엄청나게 비싸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는 배들이 파나마 운하를 이용하지 않으면, 거의 1 만km 거리에 20 일간 항해를 더 해야 한다니, 그들은 비용이 비싸도 이 운하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51

52 1 년에 약 1 만 4,000 척의 배를 옮긴다는 이 운하는 수요가 급증 하여 규모를 두 배로 확장하는 대공사가 현재 진행 중이었다. 이 공사는 최초 개통 100 주년이 되는 내년에 완공된다고 한다. 우리는 새로 넓혀진 운하가 개통되기 전에 최초의 원형 파나마 운하를 봤다는 역사적인 의미를 간직하게 되었다. 대서양 입구에서 본 파나마 운하 가난한 파나마는 이 운하를 넘겨받고 경제적 이윤을 얻을 새로운 희망에 부풀어 있다고 현지 안내원이 자랑스럽게 설명해주었다. 파나마 정부는 국민투표를 거쳐서 2007 년에 현재의 두 배가 되는 2 차선 개폐공사를 시작했고, 내년에 완공한다. 인권주의에 충실했던 지미 카터 대통령이 집권 당시에 이 운하를 파나마 국민에게 넘겨주는 조약을 체결했다고 하니, 미국인들은 카터 대통령을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카르타헤나를 떠난 우리의 크루즈 코랄 프린세스는 아침 7 시경 해가 밝자 유람선이 이 운하를 건너가는 동작 하나 하나를 승객들이 볼 수 있도록 항해를 진행했다. 우리는 10 시간을 거치는 파나마 운하 항해를 통하여 물을 올리고, 배가 건너고, 다시 물을 빼는 작업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인조 호수로는 제일 크다는 가툰 호수 주변의 52

53 평화스러운 자연 환경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옛날 파나마 시, 푸에르토 아마돌(Puerto Amador) 그 다음 유람선의 여정은 이번 항해의 세 번째 기항지인 파나마의 푸에르토 아마돌 항구에 오후 늦게 정박하고 다음날 하루를 이 지역 관광으로 즐길 수 있도록 짜 있었다. 유람선은 아마돌 선착 장으로 들어가지 않고 멀찌 감치 바다 한 가운데에 정박한 뒤 자체 구조선으로 선착장까지 승객을 실어 날랐다. 이곳에는 두 가지 관광 상품이 있었는데, 첫째는 파나마 운하를 돌아 볼 수 있도록 1855 년 양 대륙을 연결한 기차를 타고 거대한 호수와 운하를 돌아보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버스를 타고 옛날의 파나마 시를 보는 시내 관광이었는데, 우리 일행은 반반으로 나뉘어 관광을 나갔다. 나는 파나마 시내 관광 쪽에 합류했다. 라 비에호(La Viejo)는 15 세기경 구 파나마 시로 크게 번성했던 도시였는데, 안내원 설명으로는 1671 년 영국의 헨리 몰간이라는 해적에 의하여 대파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당시의 건축물과 53

54 유적들이 뚜렷이 남아 있었으며, 특히 성당은 그 규모로 보아 옛날의 번성을 짐작케 했다. 우리는 파나마가 자랑하는 박물관으로 가서 1500 년대 이곳의 문화 유적을 보았는데, 역시 식민지로 박탈당한 파나마의 당시 문화 유산은 초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비슷한 시기의 중국이나 조선 시대 유적이 이보다는 훨씬 훌륭하다는 것을 모르는 안내원에게 우리는 파나마 유적이 대단하다고 칭찬해 주었다. 파나마 운하의 엄청난 공사는 1881 년에 시작되었다. 공사 개시 33 년 만인 1914 년에 완성된 이 운하는 몇 단계의 곡절을 거쳤다. 처음에는 컬럼비아가 공사를 시작했고, 프랑스가 이어받아 많은 투자를 했으나 끝을 맺지 못하자, 결국 당시 신흥 자본국인 미국이 넘겨받아 최종 완성했다고 한다. 미국은 완공 후 84 년을 운영해서 투자액의 몇 배를 회수한 뒤 1999 년 말에 파나마 정부로 운하를 넘겨주었다. 고층 건물이 들어서는 구 파나마 시 더욱 놀란 것은 이 아름다운 해변도시에 점점 고층 아파트 건물이 들어서고 또 지금도 공사 중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고층 건물 근처 에는 재개발에 밀려나가게 된 초라한 주거 시설이 아직도 많이 보였는데, 큰 자본이 들어와 개발에 쫓겨나는 주민들이 너무도 54

55 평화롭게 보이는 것이 안타까웠다. 나는 서울의 중요 지역 재개발과정을 몇 번 본 적이 있으며, 경찰도 겁을 내는 주민들의 무서운 투쟁 장면을 너무도 뚜렷이 떠올렸다. 그러나 수백 년을 식민지로 견딘 이들이 별다른 반격 없이 법을 따라가고 있는 이유는 수백 년 동안의 식민 지배 과정에서 몸에 밴 수동적 민족성의 유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팠다. 새로 번창하는 이 아름다운 해변 도시를 보면서 또 하나 내가 놀란 것은 도시계획 없이 도시가 개발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옛날의 좁고 굽혀진 도로가 그대로 조금 넓혀 쓰이고 있으니, 자동차가 사람보다 많은 듯한 이 도시의 교통질서가 엉망이었다. 그런데도 한국산 현대 기아 차가 제법 많이 보여서, 시내에서 선착장까지 빤히 보이는 가까운 거리를 가는데 교통 정체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렸어도 전혀 불만이 없었다. 30 대 초반의 아리따운 현지 안내인은 파나마의 애국적 홍보원처럼, 자기 나라의 자랑과 희망의 앞날을 몇 번이고 강조하였다. 그녀는 2014 년은 대통령 선거가 이뤄지고 파나마 운하가 새롭게 확장, 개통되는 해이니 다시 오라고 우리를 초청했지만, 내 생애에 이 나라를 다시 보기는 힘들 것만 같았다. 그러나 새로 희망에 찬 그들의 앞날에 축복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자연을 사랑하는 푼타레나스(Puntarenas) 푼타레나스 항구는 수년 전 칠레 산티아고를 가는 남미 크루즈 때 들른 적이 있는, 코스타리카의 명성 높은 항구이다. 유람선은 여기서 12 시간 이상 정박하며 승객들을 위해 세 개의 관광 코스를 준비했다. 그중 하나는 우리가 지난 번 가본 높은 산 위에 있는 그레시아 (Grecia) 도시와 그 근처 커피 농장을 돌아보는 코스, 악어들의 낙원인 강가와 그 주변 리조트 시설을 구경하는 코스, 그리고 이 나라 수도인 산호세와 그 주변을 보는 코스였다. 우리가 택한 것은 잘 보호되어 있는 열대림과 그 밑에 흐르는 악어 사파리를 9 시간 동안 돌아보는 것이었는데, 비용이 좀 많은 1 인당 210 달러였다. 55

56 이 아름다운 열대 항구도시도 큰 자본이 들어와서 고층 주택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도시가 뉴욕의 맨하튼이나 서울 여의도와 같이 콘크리트 범벅으로 자연이 파손된 도시가 아니기를 희망하면서 관광에 나섰다. 우리가 옛날 도로로 한 시간 이상 간 곳은 리오 그란데 탈콜레스(Rio Grande Tarcoles)였다. 나는 전에 이 지역만 돌아보고 간 적이 있었는데, 이곳은 보트를 타고 열대 지역 강변을 2 시간 이상 돌아볼 수 있는 곳이었다. 우리는 정글 악어 사파리 라는 곳에서 조그만 관광 보트를 타고 58 종류의 새들과 악어(Crocodile)들이 평화스럽게 살고 있는 강을 따라 관광하는 경험을 가질 수 있었다. 악어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안내원이 설명했다. 안내원은 이곳에 있는 크로코다일은 알리게이터 (Alligator)와 카이만 (Caiman)과는 전혀 다른 종류이며, 머리 부분이 좀더 날카롭고 뾰족한 것이 특징이고, 성격이 공격적이기 때문에 가까이 가면 안 된다고 우리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이들은 마치 낮잠을 자는 듯 별로 움직이지 않았으며 자주 보는 침략자 인간들을 못 본 척하는 듯했다. 인적이 드문 자연 그대로의 강 코스타리카의 상징이기도 한 막카우(Macaw) 새는 나타났다가 56

57 사진을 찢으려면 사라지곤 하기를 여러 번했다. 이 새는 사람들의 출현을 관계치 않았으며, 머리와 다리가 까만 황새가 많이 보였다. 그 밖에도 안내원은 많은 종류의 새들을 일일이 찾아서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리들을 감탄하게 한 것은 밀림 속을 거쳐서 바다로 나가는 강 풍경이었다. 이 밀림 속의 강은 주거 지역이나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고, 또 진입로가 까다롭게 만들어져 있어, 아무나 들어 가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이 강에는 물고기가 많을 듯한데, 낚시꾼이 보이지도 않았고, 사람이 다녀간 흔적이 없었다. 밀림 속의 강을 본 우리 일행 모두가 좋은 구경을 했다고 안내원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더니, 안내원은 정말 볼 곳은 지금부터라고 말했다. 그가 안내해준 곳은 레인 포리스트(Rain Forest)라는 열대림이었다. 우리는 열대림을 향해 두 시간 정도 산으로 올라간 뒤, 곤돌라로 45 분 정도 산 위로 더 올라갔는데, 곤롤라는 밀림을 훼손하지 못 하도록 우리를 내려 주지 않은 채 다시 그냥 내려왔다. 사람이 들어간 흔적이 없는 이 열대림 속에는 몇 천만 년 묵은 나무, 풀, 그리고 이끼가 가득했다. 열대림으로 올라가는 곤돌라 57

58 곤돌라가 산 아래에 도착하자 우리는 그곳에서 이 나라 특산 점심 식사를 대접받았는데, 처음 보는 과일과 채소를 이 지역 특산품인 임페리얼(Imperial) 맥주와 곁들여 먹으니 꿈만 같았다. 이어서, 안내원은 이 단지에 설치된 수목원으로 우리를 안내했는데, 우리는 이 지역에서만 자생하는 나무, 풀, 그리고 과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무엇보다 우리 일행이 관심 있게 본 것은 수목원 구석구석에 세워진 유리 상자 속에 전시된 뱀이었다. 물리면 즉사한다는 작고 독한 독사 종류와 하얀 백사 종류의 뱀들이 보였다. 일행 중 한 분이 한국의 어느 운동선수가 수만 달러를 주고 자기의 암을 치료하겠다고 백사를 구입해서 먹었지만 끝내 목숨을 잃었다며 백사는 한국에서 매우 비싸고 귀하다는 얘기를 하자, 안내원은 이곳에는 백사가 매우 흔하다고 대답했다. 이 나라 상점들은 비교적 영어가 잘 통했고 관광객 돈을 쓰도록 친절하게 손님을 대접했다. 직전 여정에서 파나마 시 어느 슈퍼에 들렀다가 시원한 맥주가 1 달러 정도여서 내가 줄을 서서 기다렸더니, 종업원이 외화로 지불하려면 운전면허증을 보여 줘야 하고 증명 서류에 서명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 등의 짜증스런 경험을 했는데, 코스카리카 상점들은 전혀 달랐다. 여행은 바로 공부다 푼타레나스 항구를 떠나 4 박을 하고 5 일째 되는 아침에 우리는 로스앤젤레스 항구인 산 페드로에 도착했다. 코스타리카를 떠나 4 박 5 일의 긴 항해는 우리에게 일상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주었다. 유람선은 여행 중에 손님이 지루하지 않도록 많은 연예 공연, 교육적인 강의, 춤과 노래를 함께 즐기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했으며, 특히 식당에서는 잊지 못할 메뉴로 승객들에게 서양 요리의 정상을 체험하게 하였다. 코랄 프린세스 호는 유람 기간 동안 교육 프로그램을 맡은 두 명의 강사가 있었다. 빌 킨(Bill Keene)은 주로 중남미 역사와 우리가 58

59 기항하는 지역의 특수성 강의를 맡았으며, 그의 파나마의 꿈과 악몽 (Dreams and Nightmares of Panama) 시리즈 강의는 승객들에게 이 지역 역사 속의 고통을 다시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 파나마는 15 세기부터 연달아 유럽 왕국의 해군들에 의해 점령 당하여 식민지화되고 300 년 동안 자원을 강탈당했다. 19 세기 말부터는 해군이 아닌 서구의 자본주의가 파나마를 침공하였다. 처음에는 프랑스 자본이 파나마 운하 공사를 시작하면서 침투했고, 그 공사에 실패하자, 그 다음 1881 년에는 미국 자본이 들어와 파나마 운하 공사를 재개했다. 미국의 자본은 1914 년에 파나마 운하 공사를 완료하여 84 년간 남의 나라에서 운하 장사를 했다. 킨에 따르면, 미국은 운하 장사로 본전의 몇 배나 더 찾아먹고도 파나마 국민에게 파나마 운하를 돌려주지 않다가, 인도주의적인 카터 대통령의 결단에 의해 겨우 1999 년 말에 파나마 운하를 파나마 국민들에게 돌려주었다고 한다. 그의 설명은 식민주의, 그리고 자본주의가 그 동안 중남미 사람들을 불쌍하게 많이 괴롭혔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었다. 강의가 끝나고, 나는 아이오와에서 왔다는 어느 철학 교수와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유럽 백인들이 중남미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나는 이런 점에서 그 친구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 그는 카톨릭 교회가 이 지역에 종교를 전파한 것도 이 지역을 식민지로 지배하려는 야욕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 정도에서 그와의 대화를 끝내고 자리를 떴다. 사람들이 여행을 통해서 자연의 경이를 보았다는 사실만을 느낀다면 여행의 가치가 적은 것이다. 여행의 경험을 이리저리 우리 삶에 연결하려는 노력에서 나는 여행의 보람을 찾는다. 물론 자연 속에서 한 사람의 존재가 무엇인가를 다시 보는 것은 나를 항상 겸손의 경지로 몰고 간다. 우리는 내년에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제정 러시아 유적지 세인트인 피터스버그 주변을 돌아보는 것을 차기 여행 계획으로 정하고 2 주간 여행을 마쳤다. 59

60 5. 앙코르 톰 과 캄보디아 캄보디아의 심볼인 앙코르 와트 사원 캄보디아와 베트남을 미국에서 직접 가기는 너무나 멀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비교적 가까운 여행이어서 고향에 갈 때마다 생각만 하다가 2013 년 서울 여행 중에 10 월 15 일부터 20 일까지 캄보디아와 베[트남 여행 예약을 미국에서 마치고 그 수속을 끝냈다. 3 년 만에 고향을 가면서도 13 시간 비행기 타는 일이 무척 힘들었고, 고향에는 옛날처럼 꼭 만나야 하는 친구들이 많지 않다. 한 달간의 모국여행 기간 중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캄보디아와 베트남에 가보자는 우리 빌리지 네 가족의 제안을 쉽게 받아 드린 것도, 이제는 서울에 오래 머물고 싶지가 않기 때문이었다. 5 박 6 일 관광 코스는 서울에서 호치민 시로 먼저 가서 캄보디아의 시엠립 공항으로 가고, 캄보디아에서는 앙코르 탐 주변의 앙코르 와트와 왓트마이 사원의 유적과 톤레삽 호수를 보고 베트남으로 가서 하롱베이와 하노이를 보고 서울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60

61 서울에서 열흘을 보낸 다음, 10 월 15 일에 우리 일행은 인천공항에서 여행사 직원을 만나 캄보디아 입국서류와 여행 안내서를 받았다. 인천에서 4 시간 비행하여, 호치민 시, 옛날 사이공에 도착하였다. 공항에서 캄보디아 시엠립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며, 공항 주변을 보았다. 많은 미국의 젊은이들이 이 공항에서 시체로 실려 가던 옛날 월남전 뉴스를 회상해 보며, 아무리 보아도 그 참혹했던 옛날의 흔적은 없었다. 시엠립 공항 호치민 시에서 시엠립 공항까지는 45 분정도 비행을 하고 비행기에서 트랩을 내리자 구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이곳에 험한 우기를 지나서 온다고 계획 했지만 비는 아직도 내리고 있고, 지난주에는 엄청난 홍수가 있었다고 한다. 시엠립 국제공항은 한국의 어느 지방 공항보다 작아서, 마치 캄보디아 불교 사원에 온 듯 했다. 3 달러를 별도로 내고 우리 일행은 세관 입국 절차를 면제 받았다. 공항에서 바로 준비된 경복궁 한국식당으로 가서 돼지 갈비 전골과 잘 준비된 한국음식을 즐겼다. 주인이 한국인이며 종업원이 손님들 숫자보다 많은 듯 했다. 하루의 임금이 2 달러 월급이 50 달러 정도라고 하니 이들의 경제 수준을 바로 알만하다. 캄보디아에서 첫날은 오전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오후부터는 맑다고 하는데, 가랑비를 맞는 것이 쨍쨍한 햇볕에 99 퍼센트 습도보다 견디기 쉽다고 생각했다. 계획대로 첫 번째 방문 한 곳은 앙코르 톰이었다. 남문과 남쪽 크레앙, 바푸욘, 코끼리 테라스, 레퍼왕 테라스를 돌아보았다. 앙코르 톰은 12 세기에 자야바르만 7 세가 어머니를 위하여 만든 거대한 도시 61

62 속에 세계 7 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인 사원을 건설 한 것이다. 앙코르 톰은 9 km²면적의 거대한 도시로서, 자야바르만과 그 후대의 왕에 의해 건설된 여러 유적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앙코르 톰의 중심에는 자야바르만의 상이 있는 바이욘 사원이 있고, 그 위쪽으로 빅토리 광장 주변으로 주요 유적이 자리 잡고 있다. 주위의 유적과 함께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앙코르는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로 도시라는 의미이다. 또한 톰은 크메르어로 크다는 뜻이다. 앙코르 톰은 주변 3km의 수로와 라테 라이트로 만들어진 8m 높이의 성벽에 둘러 쌓여있다. 외부에는 남대문, 북대문, 서대문, 사자의 문 그리고 승리의 문 다섯 개의 문으로 연결되어 있다. 각 성문은 탑이 되고 있고, 동서남북 사방에는 관세음 보살이 조각되어 있다. 또 문으로부터 수로를 연결하는 다리의 난간 에는 나가의 상이 조각되어 있고, 이 나가를 당기는 아수라와 기타 신상들이 조각되어 있다. 앙코르 톰 관광 카트 62

63 앙코르 왓트는 앙코르 톰 남쪽에 위치한 사원으로, 12 세기 초에 수르야바르만 2 세에 의해 옛 크멜제국의 도성으로서 창건되었다. 앙코르에서 가장 잘 보존되어 있으며, 축조된 이래 모든 종교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맡은 사원이다. 처음에는 힌두교 사원으로 나중에는 불교 사원으로도 쓰인 것이다. 앙코르 와트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종교 건축물로서, 옛 크메르 제국의 수준 높은 건축기술이 가장 잘 표현된 유적이다. 또한 캄보디아의 상징처럼 되면서 국기에도 그려져 있다. 이것이 관광객들이 캄보디아에 오는 목적이기도 하다. 사원의 정문이 서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해가 지는 서쪽에 사후 세계가 있다는 힌두교 교리에 의한 것으로 왕의 사후세계를 위한 사원임을 짐작 하게 한다. 길이 3.6km의 직사각형 해자에 둘러싸여 있는 이 사원의 구조는 크메르 사원 건축 양식에 따라 축조되었다. 우리는 하나여행사가 마련한 12 인승 전기 카트로 앙코르 톰 여러 지역을 다녔다.. 대형 버스는 들어가지 못하는 곳도 걷지 않고 이 카트로 다닐 수 있는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코끼리 사원이라고도 불리는 놈박행 사원은 일본 등 여러 나라의 문화 보존 단체의 후원으로 복구공사를 하고 있다. 54 사원으로 이루어진 이 지역의 대부분이 이제 모두 살아지고 있었는데 우리가 올라간 사원은 그 규모가 대단히 크고, 특히 옛날 힌두교의 많은 신들의 조각을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힌두교에는 많은 신이 있는데 비하여 같은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신이 하나도 없다. 아무나 수도를 잘 하면 신 즉 부처가 된다고 한다. 이곳 불교인들은 신은 오직 하나라고 하는 것이 기독교가 이 지역에서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라고 한다. 캄보디아는 1863 년부터 1953 년까지 불란서의 보호령으로서 91 년을 지냈지만 불란서 문화에 동화 되지 않은 국가이다. 바로 옆에 있는 베트남은 불란서 말을 쓰고, 불란서계통의 천주교가 제법 전파 되었지만, 캄보디아에는 아직도 96%가 불교를 믿고, 불란서 말을 하는 국민을 보기 힘들다. 불란서에서 1953 년에 독립하여 헌정 왕국으로 출발하였으나 민주 63

64 주의의 기본 전통이 없는 나라로서 관료의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국민들이 20 세기의 경제개발 또는 생활의 근대화를 모르고 지내다가, 크메르 루지(Khmer Rouge: 빨간 크메르)의 난동으로 1975 년부터 1979 년까지 5 년 동안 대학살의 잔인한 고역을 치르기까지 한 불쌍한 나라이다. 바로 옆 나라인 베트남은 막강한 미군까지 몰아내고 캄보디아 공산 당을 도우려 1979 년부터 1991 년까지 캄보디아를 침공하였다. 이 전쟁은 1991 년 파리 조약으로 캄보디아는 유엔 감시 하에서 1993 년도 새로운 헌법과 대통령을 뽑았다. 새 정부가 선지 4 년도 안된 1997 년에 훈센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하고, 대통령이 되어 25 년 이상 혼자서 독재정권을 유지하는 나라이다. 21 세기의 경쟁목표로, 새로운 기술의 개발과 무역전쟁으로 잘 사는 나라를 만들려고 온 국민이 설치는 대한민국을 보다가 빨간 장삼을 걸치고 시간만 있으면 목탁을 들고 염불을 하는 캄보디아의 젊은 중들을 보면서, 누가 더 행복한가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국의 생산업 회사들이 베트남에는 공장을 세워도 캄보디아에는 공장을 세우지 않는다. 일 할 젊은이들이 염불만 하기 때문이라고만 생각 했으나 이곳에서 알아 본 것은 사정이 다르다 년에서 1979 년까지, 3 년 7 개월간 무식하고 잔인한 폴 포트는 자기 민족의 1/3 에 해당하는 200 만 명을 학살 했다. 캄보디아의 교육을 받은 지성인이나 종교인들을 몰살 시켰으니, 캄보디아를 바보의 나라로 만들었고, 지금의 군인출신 훈센 역시, 자기 정권 유지에만 관심이 있지, 국가발전을 별로 생각하지 못한다고 안내원이 설명한다. 캄보디아는 이런 이유로 돈 버는 일에 능숙하지 못하다. 우선 캄보디아에 서울에서 가는 직행 비행기가 없다. 이곳 경제지표가 세계 220 여 개 나라 중에 189 라고 하며, 한 달 월급이 50 달러 정도, 북한보다 조금 나은 정도이다. 인도차이나 반도 문명의 중심지가 이렇게 뒤 떨어진 이야기는 들을 수 록 눈물이 날 지경이다. 놀랍게도 12 세기에 이룩한 앙코르 지역의 관광 수입이 이 나라 재정의 반이 넘는다고 하니 정말 이곳을 찾아보기를 잘 했다고 느꼈다. 시엠렙 지역 앙코르를 찾는 관광객의 90 퍼센트는 한국인 관광객인 64

65 듯하다. 이 도시에 한글 간판이 수없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한국인의 경제 활동이 활발하다고 안내인이 설명한다. 사실 우리가 들린 점심 시간에는 고베 철판구이, 그리고 저녁에는 민속 쇼를 보면서 먹는 뷔페 모두 한국인이 경영하고 캄보디아인 종업원들의 한국어 솜씨가 대단하다. 왓트마이 사원 전경 시엠립에는 캄보디아의 전통적인 재래시장에 들렸다. 주로 과일 종류를 팔고 있는데, 이 지역 생산품보다는 태국과 베트남에서 수입 하여 팔기 때문에 값이 비교적 비싼 편이다. 아직도 길에는 자전거가 대부분인데, 다음단계는 베트남처럼 모토 사이클이 되고 그 다음은 한국이나 중국처럼 자동차가 길에 찬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저녁시간까지는 좀 여유가 있어서 본래는 내일 가기로 된 왓트마이 사원을 들렸다. 작은 킬링필드 라 부르는 왓트마이 사원에는 크메르 루즈군에 희생된 참혹한 백골 탑이 있다. 사원 한 쪽에 있는 백골 탑은 유리 벽 안에 백골이 가득 들어 있는 탑이다. 특히 지식인들과 승려를 많이 죽였다고 65

66 한다. 지금 캄보디아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빨리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경제적 발전 아이디어를 내 놓을 지식인들과 승려들이 모두 처형되고 없기 때문이다. 폴 포트에 살해된 승려의 백골 탑 폴 포트(Pol Porth)는 농가에서 태어났고, 2 년 동안 승려생활을 한 적도 있다. 프놈펜의 기술학교에서 1 년 동안 목수 일을 배웠고, 1940 년대에 호치민 휘하에서 반( 反 )프랑스 저항운동에 가담했으며, 1946 년부터는 캄보디아 공산당원이 되었다 년 8 월 무선전자 공학을 배우기 위해 파리로 유학 간 폴 포트 는 공부는 하지 않고 혁명 활동에 가담했다 년 1 월 프놈펜으로 돌아 와 사립학교 교사로 생활을 하였으나,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게 되자 프놈펜을 떠났다. 베트남 전쟁에서 패전한 미군이 떠나고 미국의 지원을 받던 크메르 공화국의 론놀 이 해외로 망명한 사이, 프놈펜에 크메르 루즈가 입성하여 폴 포트가 정권을 잡자 론놀 정권의 부패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국민들은 대 환영하였다. 66

67 그러나 폴 포트는 국명을 민주 캄푸차 로 개칭하고 새로운 '농민 천국'을 구현한다며 도시인들을 농촌으로 강제이주 시키고, 화폐와 사유재산과 종교를 폐지했다. 크메르 루즈 정권은 1979 년 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캄보디아 공산동맹군에 의해 전복되었고, 폴 포트는 1998 년 4 월 15 일 캄보디아와 타이의 접경지대에서 살해 되었다. 사람의 죽음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도움으로 불교는 전생과 후생을 연결하는 윤회사상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살생을 철저히 금한다고 한다. 옆에 있는 개미의 전생이 바로 본인의 돌아가신 선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생에서 수도하고 선행을 하면 후생에 지금보다 더 좋은 삶을 갖기 위하여 금욕과 수행을 한다고 한다. 여행 중에 만난 젊은 수도사에게 왜 중이 되었느냐고 여행 안내원의 통역으로 물었더니, 나를 한참 처다 보고 나서, 자기는 극락세계에 가려고 하며, 후생에 더 좋은 생애를 얻기 위한다고 거침없이 대답한다. 저녁에는 캄보디아의 민속센터에 가서 민속춤인 압사라 공연을 보았다. 이 공연은 한국의 전통적인 고전 무용극이나 일본의 가부끼 처럼 캄보디아인이 자랑 하고 싶고, 또 자부심을 키워주는 훌륭한 공연이었다. 공연을 보면서 저녁 식사를 하도록 된 관람석에는 백명인 넘는 한국인 여행객이 있었는데 공연이 진행 하는 도중에 소란스럽게 잡담을 하거나 공연장을 나가는 문화인답지 않은 모습이 보기 흉 하였다. 안내인의 설명에 의하면, 3 막으로 된 이 연극을 끝까지 보는 한국인 관광객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이었다. 다음날은 톤레삽 호수를 구경했다. 시엠립 시내에서 차로 40 분을 가면, 톤레삽 호수가 있다. 거기에는 2,500 km2, 우기에는 4 배 이상 불어나 12,000 km2, 캄보디아 전국토의 15%를 차지하는, 캄보디아 지도에서 호수만 덩그러니 보일 만큼 넓고 호수에 수평선이 이어질 정도로 크고 넓은 호수이다. 티베트에서 발원하여 7 개국(중국, 미얀마,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을 관통하여 남지나해로 흘러가는 메콩 강물이 유입되어 형성된 호수이다. 지도상에서 보면 메콩 강은 프놈펜 동쪽을 지나간다. 그런 메콩 강이 프놈펜과 한참 떨어진 시엠립까지 거대한 호수를 형성하는 것은 연례적인 범람의 결과이다. 건기(10 월~3 월)에 메콩 강 원류는 프놈펜 주변을 흘러 베트남을 지나 67

68 델타(삼각주지역)를 이루다 남지나해로 빠져들어 가지만, 우기 (4 월에서 9 월)에는 상류에서부터 노도처럼 밀려오는 강물이 미쳐 남지나해로 빠져나가지 못한 채 델타 지역으로 되돌아와 지대가 낮은 이쪽으로 물길이 역류하여 거대한 호수를 형성한다. 우리가 도착한 10 월 17 일은 물이 많이 차 있는 호수였다. 톤레삽 호수 톤레삽은 옛날에는 좋았다고 하나 이제는 캄보디아의 가난하고 더러운 치부를 구경하는 듯하다. 우선 천여 명의 수상가옥 거주인 들과 관광객을 위한 장사꾼들이 있지만, 흙탕물을 음료수와 취사용으로 쓴다고 하며, 하수 시설이 없으니 냄새 나는 자연 화장실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배를 타고 떠나자 적고 빠른 배로 쫓아와서 우리 배에 승선하여 캔 음료수를 파는 아이들이 있고 또 아주 어린 아이를 옷도 입히지 않고 보여주며 구걸하는 거지 배가 몇 개나 따라 붙어 다닌다. 이 아이들은 뱀을 목 걸고 있어서 흉측하고 불상한 이들의 삶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시 범람이 끝나면서 물길도 빠져나가고 뜨거운 햇빛에 68

69 고갈되면 팔딱팔딱 뛰는 물고기 떼들이 그대로 드러날 정도로 호수 면이 줄어드는 연례행사를 반복한다. 큰 호수와 그 호수 위에 배(수상가옥)를 띄워놓고 살아가는 수상 족들의 생활을 볼 수 있으며, 바다만큼 넓은 호수 톤레삽이 있기에 고대 크메르 왕국이 부강을 누리지 않았을까 한다. 인도차이나 반도를 적셔주는 어머니 강 메콩이 범람하면 톤레삽에 비옥한 옥토를 머금은 물이 흘러 들고 건기가 되면서 물길이 프놈펜 쪽으로 다시 빠지면서 자연스레 곡식을 심기만 하면 되는 비옥한 누적토가 남는다. 물이 차면 어획을 하고 물이 빠지면 농사를 지어, 인간이 살아가는 데 최적의 조건을 제공하는 톤레삽은 이 지역 자연인들에게 행복한 보금 자리로서 손색이 없는 호수였다고 한다. 수상가옥 캄보디아의 치안은 어떻게 하는지 이 거대한 호수에는 경찰을 볼 수 없고, 관광객이 몰려와서 먹고 사는 이들의 무질서한 현상은 다시는 가지 못할 더럽고 위험한 호수였다. 차라리, 앙코르 지역에서 옛날의 호화로웠던 사원을 좀 더 여유 있게 보는 것이 더 좋을듯하다. 69

70 톤레삽 호수를 뒤에 두고 우리를 안내한 곳은 캄보디아의 유명한 토산물인 뽕나무에서 자란 상항버섯을 파는 곳에 갔다. 버섯이 나무같이 단단하고 방석만큼 큰데, 캄보디아 북쪽 밀림에서 가져 온다고 한다. 암을 예방하고 만병통치약처럼 설명하는데 값이 엄청나게 비싸다. 1Kg에 5 백 달러를 달라고 하니 우리 일행 중에는 아무도 사지 않았고, 그 옆에 있는 선물센터에 들려 나도 이곳 토산물 몇 개를 선물로 주려고 샀다. 캄보디아 여행에서 우리에게 좋은 역사 공부의 기회를 주었다. 12 세기부터 19 세기 초에 불란서에 의하여 망하기까지 캄보디아 왕국의 화려했던 뚜렷한 역사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경제적으로는 아주 어려운 사항에서 행복하게 사는 캄보디아 인 참 모습을 보았다. 이웃의 해변 국인 베트남이 수 없이 침공을 하여, 모든 왕궁은 주변에 호수를 파서 방어 했으며, 지금도 베트남인을 싫어한다. 그러나 베트남은 일본처럼 서양문물을 일자기 받아들여 경제적으로 약 네 배 정도 앞 서 있으며, 현재의 훈센 정권은 베트남과 친한 정책을 펴고 있다고 한다. 마치 한반도와 일본의 역사를 보는듯하다. 인도차이나 실크 문명의 발상지며, 실크로드가 시작된 캄보디아가 베트남에 침공 당했다는 것이 한 반도를 일본이 7 백여 차래나 침공 한 것과 많이 비슷하다. 또 하나의 사실은 정치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듯하다 년대의 한국은 캄보디아와 별다른 것이 없었다. 두 나라의 발전은 이제 비교하기가 힘들 정도로 달라졌다. 한국의 경제 지표만도 60 배정도 차이가 난다. 어쩌면 캄보디아의 훈센이 걸림돌인지도 모른다. 70

71 6. 하롱베이와 베트남 캄보디아의 시엠립에서 북쪽으로 두 시간 정도 비행하여 하노이에 도착했다. 하노이 비행장 규모는 사이공보다 작지만, 베트남전쟁에 승리한 수도의 위엄이 보인다. 공항 직원들은 공산주의 관료 그대로, 친절하지 않다. 아직도 공산주의 이념 아래서 자라온 이들에게 서비스나 능률은 이들이 미워하는 자본주의의 개념인가? 하노이 주재 하나투어 직원의 안내로 다시 버스로 3 시간 반을 달려 하롱베이에 도착했다. 꿈의 호텔이라는 Dream Hotel 에 투숙했을 때는 자정이 지났고, 우리 일행 모두가 녹초가 되어버린 강행군이었다. 베트남 관광은 동양 3 대 절경의 하나인 하롱베이 를 보고 하노이로 와서, 시내 관광을 마치고 밤늦게 베트남을 떠나 다음날 아침 인천에 도착하는 것이다. 하롱베이의 섬들 용( 龍 )이 내려와서 외적의 침략을 막았다는 하롱베이 해변은 세계 7 대 경이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3 천 개의 섬과 바위 속에 만들어진 커다란 도시 같은 동굴이 명물이다. 베트남을 갔다면 이 절경을 꼭 봐야 할 71

72 관광 명소이다. 석회암의 구릉 대지가 오랜 세월에 걸쳐 바닷물이나 비바람에 침식 되어 생긴 3,000 여 개나 되는 섬과 기암이 에메랄드그린의 바다 위로 솟아 있다. 날카롭게 깎아지른 바위, 절벽을 이루고 있는 작은 섬들, 환상적인 동굴이 있는 섬들이 기후나 태양 빛의 변화에 따라 그 모습과 빛깔을 미묘하게 바꾸는 광경 등이 절경을 이룬다. 티 탑 앞에 선 우리 여행 구릅 긴 세월에 걸쳐 자연이 조각해 낸 기묘한 이 조각의 세계에는 부인, 물개, 사람머리, 엄지손가락 등 이름이 붙어있는 만도 1,000 여 개나 된다. 대부분의 섬들은 사는 사람도 찾는 사람도 거의 없는 무인도 이지만, 많은 종류의 포유동물과 파충류, 조류가 서식하고 다양한 식물상이 존재한다. 주로 바문 섬과 캣바 섬에서 열대림이 발견되며, 바다에는 1,000 종 이상의 어류가 있다.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섬들에는 종유동(석회암동굴)이 있는 곳이 많다. 수억 년의 세월에 걸쳐 석회를 머금은 물은 천정으로부터 종유석을 흘려 내려 보내고 바닥에서는 석순을 쌓아 올렸다. 몇 개의 섬에서는 4500 년 전의 잘 다듬어진 돌도끼가 발견됐다. 이것은 베트남 본토 에서는 발견된 적이 없는 돌 도끼였으며, 혼가이 섬에서는 호아빈 72

73 문화로 알려진 1 만 년 전 인류의 유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하롱베이는 영화 인도차이나 와 굿모닝 베트남 텔레비전에 등장 하면서 우리에게 친숙하다 년에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 자연유산에 그 이름을 올린 뒤에는 세계적인 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 세계적인 자연 유산지역의 가장 큰 매력은 언제 들러도 절경을 만끽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맑은 날에는 투명한 바다가 에메랄드 빛으로 빛나고 저 멀리 있는 섬의 모습까지 볼 수 있어 거대한 수석전시장을 방불케 한다고 하나, 우리가 방문 했을 때는 날씨가 흐리고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짙은 안개 사이로 비치는 섬들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수묵화 속 배경처럼 신비로운 분위기를 보여 주었다. 큰 도시 같은 석회암 동굴 여행사는 이 아름다운 절경을 세 시간 동안 배를 타고 보여준다. 수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은 글로서 표현하기가 힘들며, 유네스코가 지정한 동굴에 들어 갔을 때는 정말 자연의 신기한 위력에 압도 되었다. 마치 산 속에 도시가 있는 듯 넓고 아름답게 뾰족한 바위와 사람이 만들 수 없는 천정을 조명으로 비쳐진 아름다운 세계였다. 베트남 공항 면세점에서 산 검은 죠니 워커 스카치를 아세아에서 뛰어난 절경을 돌아보는 유람선에서 다금바리 회와 함께 즐긴다는 것은 감동스런 경험이었다. 73

74 텔레비전이 생긴 이후, 참혹한 전쟁의 생생한 보도와 많은 미군 회생자의 시체를 미국 시청자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에게 매일 보여 준 것이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이기지 못하고 철수하는 커다란 이유 중에 하나라고 언론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한국전쟁 때만 해도 텔레 비전이나 다른 매체가 국방성에 의하여 보도 통제 된 사항이었고, 2 차 대전 때는 텔레비전이 없었다. 베트남의 관광 사업은 캄보디아보다 한참 잘 되고 있고, 우선 공공 위생에 현저한 개선의지를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이 지역 섬 들을 돌아 보는 적은 유람선은 깨끗했다. 우리는 배에 있는 식당에서 준비한 다금바리 회와 러시아 산 게로 점심을 먹었다. 캄보디아의 어느 식당보다 훌륭했다. 그리고 배에는 가라오케 장치도 있어서 함께 온 여행객들이 자기 소개를 했다. 맥나마라 당시 국방장관이나 웨스트 모얼랜드 등 미군 장성들이 베트남 전쟁 텔레비전 보도를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막강한 미국언론을 잡을 수는 없었다. 당시 나는 언론학 학생으로서, 언론 편에 섰고, 학교 세미나에서는 미국의 무모한 전쟁이라고 철수를 주장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베트남 전쟁이 치열하기 전에 미국으로 와서, 미국에서 베트남 반전 데모, 특히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를 보면서 세상이 많이 바뀌고 있다고 실감한 기억이 있다. 반전 데모와 함께, 새로 등장한 히피족의 아노말리 문화현상을 남의 일처럼 보았다. 그러나 나의 동료 중에 직업군인으로 커리어를 택한 여럿이 이 참혹한 전쟁에 참여 하고 있다는 사실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당시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베트남 전쟁에 파했였다. 대한민국의 파병은 미국의 요청이 있기 전인 1961 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 케네디 대통령에게 먼저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케네디의 정책은 베트남 전쟁에 미군을 직접 투입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박정희의 제안을 거절했다. 케네디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존슨은 1964 년 대한민국에게 의료 부대의 지원을 요청했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130 명 규모의 이동 외과 병원과 10 명으로 편성된 태권도 교관단 등 140 명을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그 후 통킹만 사건 이후 미국은 대한민국에 후방 지원부대의 74

75 파병을 요청하였고, 대한민국은 제 6 사단사령부에서 한국군사원조단 본부인 비들기 부대를 창설하고 1965 년 3 월 10 일 파병하였다. 비둘기 부대는 3 월 16 일 사이공에 도착하였고, 사이공 동북쪽 22km에 있는 지안 에 주둔하여 건설 지원임무를 수행하였다 년 미국은 베트남 주둔 미군의 사상자가 속출하자 곤경에 빠져 있었다 년 3 월 11 일 김현철 주미대사는 조지 볼 미 국무부 차관과의 면담을 통해 "한국 정부는 베트남에서 추가적인 병력을 기꺼이 파견하겠다."고 말했으며, 이동원 외무부 장관은 브라운 주한미국 대사와 협상을 했다. 한국 정부는 6 월 14 일 남베트남 정부로부터 전투병력 정식 파병 요청서를 접수했다. 8 월에 국회 의결을 얻고, 청룡 부대가 1965 년 10 월 9 일에 깜란에 상륙하였고, 9 월 20 일부터 한국군 사령부가 사이공에서 업무를 시작하였다. 대한민국의 베트남 파병 병력의 누계는 32 만 명에 달했다. 베트남파병 병사의 의무 기간은 1 년이었고, 파병이 최고조에 달했던 1968 년 당시의 베트남에 주둔한 한국군의 수는 5 만여 명이었다. 미군이 철수하면서 대한민국 역시 철군하였다.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한국 군의 전사자는 약 5 천여 명이었고 1 만 1 천 명이 부상했다. 미국은 한국군 병사에게 2 억 3 천 6 백만 달러를 지불했다. 대한민국은 파병의 댓가로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고 분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대한민국의 GNP 는 파병을 전후로 하여 5 배가량 성장하였다 한편, 현재의 월남은 엄청난 피를 흘린 비참한 역사이지만, 사회주의 기반의 북부 월맹의 정치구조로 남북을 통일하고, 공산 사회주의지만 중국처럼 개방정책으로 그들의 숙원인 경제개발에 정력을 다하고 있다 년 여름 적국이었던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을 국빈으로 대접하고 경제협력을 논의 한 것은 베트남의 대단한 변화이다. 베트남 통일의 수장인 호치민은 심장마비로 그의 승리의 종말을 보지 못하고 일찌기 서거 했지만, 다른 공산주의의 예를 보면 반세기 이상 집권하는 카스트로나 3 대를 물려받는 김일성에 비하여 지혜로운 나라인지도 모른다. 베트남은 중국이나 한국을 모델로 경제 개발의 속도기 빠른 편이다. 옆의 나라 캄보디아와는 아주 대조적이라고 할 수 75

76 있다. 하노이는 북부 베트남의 홍강 삼각주에 위치하고 있으며, 강 안의 땅 이라는 의미로, 이 지역에는 홍강과 그 지류들이 흐르고 있다. 이 외에도 여덟 개의 강들이 하노이를 흐른다. 하노이는 베트남의 신성한 땅이다. 기원전 3 세기, 안 즈엉 브엉 왕이 다스리던 어우락국 시절에 동 아인 지역에 속해있던 꼬 로아 지역이 수도가 되었다. 그 후, 북부 베트남의 지배 시기에는 하노이가 저항 운동의 주요 근거지가 되었다. 유람선 위의 네 가족 여행 팀 홍강 삼각주의 중앙이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하노이의 인구는 서서히 증가하여 대표적인 거주지역이 되었고, 북부베트남 지배 시에는 핵심 도시가 되었다. 하노이는 전쟁의 피해와 자연재해를 겪어온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도 구 시가지나 600 년이 넘은 사원 등 많은 고대의 76

77 건축물들을 오늘날까지 잘 보존해오고 있다. 일 주사 나 문묘, 하노이 성채, 하노이 오페라 하우스, 호치민 묘소 등이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하노이의 중심에 있는 호안끼엠 호수는 매력적이면서도 시민들의 휴식공간이다. 전설에 따르면, 리 로이(Ly Loi)는 이 호수에서 거북이가 전해 준 용왕의 보검으로 중국 명나라를 물리치고 리왕조를 건국하고 시조인 리 타이 또(Ly Thai To)가 되었다. 황제가 된 리 타이또가 이 호수에서 뱃놀이를 하던 중 거대한 거북이가 나타나 용왕의 보검을 돌려 달라고 하면서 리타이또의 보검을 입에 물고 호수 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그 후 이 호수는 칼을 되돌려 주었다고 해서 還 劍 湖 (호안끼엠호수)라 불리게 되었다. 대형 식당 야외에 차려진 쇼 무대 호안끼엠 호수는 하노이의 중심에 위치하면서 하노이 사람들의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운 호수다. 하노이의 에메랄드라고 불리며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소재가 되기도 한다. 호수 중앙에는 작은 섬에는 탑이 하나 있다. 거북 탑 (Thap Rua)이라 불리는데 리로이의 전설을 상징하는 거북을 떠올리는 하노이의 정신적인 상징이다. 하노이 시내구경을 위하여 사람이 자전거 페달로 움직이는 인력거를 타고 시내 중심가인 증권 거래소등을 돌아보았다. 우리가 1940 년대에 본 인력거는 자전거를 앞에 달고 움직이는 것과는 달리, 앞에는 한 사람의 손님을 태우고 뒤에서 페달을 밟는다. 사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77

78 무공해 관광은, 많은 자동차와 벌떼처럼 많은 오토바이에서 나오는 매연으로. 우리는 수술하는 의사들이 사용하는 마스크를 쓰고 구경 하여야 했다. 불란서 총독부가 쓰던 베트남의 주석 집무실 하노이는 베트남, 캄보디아, 그리고 라오스 등을 약탈한 불란서 점령군의 본부로서 불란서의 91 년 동안의 영향이 뚜렷하게 보인다. 카토릭 성당을 크게 건설 않고도, 베트남 인들을 카토릭 인으로 만들었고, 지금도 베트남 인들은 불란서 말을 잘 한다고 들었다. 불란서 총독부로 쓰던 건물을 그대로 보존하여 쓰고 있으나, 박물관에 전시 할 만한 것들은 모두 루브르 박물관으로 갔다고 안내인이 설명한다. 근래에 세계 방방 곳곳에서 약탈한 불란서가 러시아에게 자기 것들을 돌려 달라고 했다고, 세상에 이런 일도 있느냐고 우리에게 반문한다. 하노이 시내에는 대우 호텔이 있고 70 층 건물에 30 층 아파트가 벌서 많이 들어섰다. 여러 군데에 건설하는 현장이 보인다.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일당 독재이지만, 경제적으로는 사유재산을 1986 년부터 78

79 인정하여, 중국처럼 부자가 많고, 베트남의 경제 지표는 캄보디아의 4 배 정도이다. 대략 노동자의 한 달 월급이 200 달러 정도라고 한다. 시내구경을 하면서 하노이 대학을 열심히 보면서, 경제적으로는 공산주의를 한참 벗어났지만, 교육적으로는 아직도, 모두가 안 배우고 못산다 는 지난 세기의 유산이 아직도 남아 있는 곳이기도 다. 호치민을 모신 건물 하노이 구경의 초점은 역시 호치민 유적지 ( 胡 志 明 主 席 古 宮 ) 이다. 이 곳은 불란서 총독부가 있던 곳으로 1954 년 불란서에서 독립하고 총독부 건물을 호치민이 그의 통치 본부로 사용하다가, 1969 년 호치민 서거 후에 그의 시체를 보존하기 위한 거대한 건물을 새로 짓고, 이곳을 보여주고 있으나, 우리는 여는 시간 후에 도착하여 밖에서만 봤다. 나는 김일성 시체를 본 적이 있어 별로 관심이 없었다. 79

80 결혼도 안하고, 검소하고 청렴한 정치인의 표본이 된 호치민은 1954 년부터 1958 년까지, 불란서 총독부의 전기공이 사용했던 집을 썼다. 간단한 침대와 책상과 의자 하나만이 있던 그대로를 전시하고 있다. 그 흔한 불란세제 소파 하나도 없다. 그의 방에는 그가 신봉한 맑스와 레닌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호치민 집무실 뒤에는 아름다운 호수와 망고 나무와 자몽이 달려있는 나무들이 있으나 우리가 방문 했을 때는 이 호수를 보수하기 위하여 물을 따 빼고 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옆에 붙어 있는 기둥이 하나인 불상을 모셔 놓은 절이 있다. 안내인 말로는 이곳에 와서 봉공을 드리면 자손을 얻을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아침 일곱 시 반에 하롱베이를 떠나서 오후 한나절 동안 하노이를 돌아 본 우리는 지칠 대로 지쳤다. 지친 여행객에게 하노이의 명물인 푸짐한 굴, 회, 스시 등의 해산물과 새우, 사시모, 삼겹살 등을 숯불에 구워주는 스카이 식당으로 갔다. 이 식당은 야외에 스테이지를 차려놓고 베트남의 전통춤을 현대화한 쇼를 보여주었다. 80

81 7. 동유럽 배낭여행 고희를 맞아 동유럽 배낭여행을 계획한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였다. 나는 A History of the Hapsburg Empire (Robert Kann), 와 Twilight of the Hapsburg (Alan Palmer)를 읽고 중세기 특히 르네상스 이후의 동유럽에 꼭 가보고 싶은 생각이 커졌다. 마침 독일 동남쪽 레겐스부르크에는 교환교수로 가 있는 막내아들 유진 내외가 있으니, 나는 그곳을 베이스캠프로 정하고, 2006 년 5 월 16 일부터 30 일까지 2 주 동안 동유럽의 몇 개 나라를 돌아보는 계획을 세웠다. 여행 코스는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체코의 프라하, 독일의 뉘른베르크와 뮌헨 지역이었다. 유서 깊은 도시 레겐스부르크 (Regensburg) 석교와 탑을 가진 레겐스부르크 81

82 레겐스부르크는 독일 동남부에 자리 잡은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도시다. 신성로마제국 당시에 교황이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고, 많은 주교들이 상주하는 곳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주교를 뜻하는 비숍에 맥주의 호프를 합쳐 비숍 호프(Bishophof) 라는 맥주 브랜드가 이곳에서 탄생했다. 석탑 두 개가 우뚝 솟은 탑을 갖은 성당 옆에 비숍호프 맥주를 파는 곳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성당은 2 차 대전 때 폭격을 피하여 천 년이 지나도 그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이 성당이 유명해진 것은 전 교황 베네딕트 16 세가 바로 이 지역에서 성장했으며, 주교로서 이 성당을 맡은 적도 있었고, 또한 교황 취임 후 2005 년 9 월에는 이곳을 방문했기 때문이었다. 교황과 여러 인연이 있는 이 성당은 전 세계의 많은 천주교인들로 붐볐다. 성당에서 바로 건너 보이는 도나우 강 위에는 지은 지 1000 년이 넘어서 독일에서 제일 오래 된 석교가 있었다. 석교 가장 높은 중간 지점에는 성당을 바라보는 작은 동상이 있었다. 이 동상은 망원경 으로 성당의 탑 건축 상황을 감시했던 사람을 기념하여 세워 졌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석교를 만드는 책임자와 석탑을 만드는 책임자가 서로 누가 먼저 완성하는가를 놓고 내기를 해서 두 사람은 밤낮 없이 공사를 독려했다고 한다. 그런데 석교 공정이 늦어지자, 석교 책임 자가 이 경쟁에서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기도 중에 하늘에서 사자가 내려와서 석교를 먼저 만들게 해 주겠으니 그 대가로 석교 책임자의 아들 세 명을 하늘에 바치라고 했다고 한다. 이를 석교 책임자가 수락했고, 약속에 따라서 석교가 완성되면 아들 세 명이 제일 먼저 석교를 건너가야했고, 그러면 그들은 그대로 하늘나라로 직행하게 돼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석교가 완성되자, 주교 세 명이 억지로 먼저 석교를 건넜고, 그들이 하늘나라로 직행하면서 석교 책임자 아들 세 명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중세기 건축 양식과 모습을 제일 많이 지키고 있는 이 도시는 이 전설을 통하여 당시 종교의 횡포와 부패가 얼마나 무서웠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르네상스 시절에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부르 82

83 짖은 지역인 아이스레벤 (Eisleben)이 이곳에 멀지 않은 곳에 자리 하고 있다. 석교 위에서 내려다 보면, 여의도 같은 적은 섬이 하나 보였다. 그곳에는 석교와 성당을 바라 보면서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직 초여름인데 바람이 쌀쌀했다. 무더운 여름에 강가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이곳에서 바비큐를 즐긴다면 얼마나 멋있을까를 잠시 생각해 보았다. 중세기 건축의 레겐스부르크 시내 유서 깊은 레겐스부르크에는 유명한 턴스와 택시스 (Thurns and Taxis) 왕자들의 성이 있다. 이곳은 합스부르크 왕조 중 하나인 맥시밀리언 왕가의 거점으로 많은 전설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이제는 거대한 성을 유지하기가 힘들어 1 인당 15 달러의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이 성은 수백 년이 된 가구와 시설들을 보존하고 있으며, 집안 귀족들의 묘소로 지은 지하 시설은 아직도 후손들이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83

84 오스트리아의 비엔나(Vienna) 레겐스부르크에서 아침 9 시 15 분에 출발하는 비엔나 행 열차는 6 시간 반을 달려서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역에 도착했다. 달리는 기차 창 밖으로 펼쳐지는 유럽 농촌은 한국에서 흔히 보이는 개발의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 보기 흉한 콘크리트 고층 건물도 없었고, 산이고 들이고 막 파헤친 도로망도 없었으며, 옛날 집들이 원형 그대로 유지돼 있어서 정말 농촌 같은 친근감이 물씬 났다. 오스트리아의 작은 도시를 지나가도 새 건물은 보기 드물었고, 많은 농가나 건물에 에어컨 실외기 같은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여기도 여름이면 더울 텐데, 지구를 뜨겁게 달구는 에어콘이란 흉물을 안 쓰는 이들의 지혜가 대견 스러웠다. 우리는 비엔나의 호텔을 인터넷에서 예약했는데, 하루에 99 유로로 4 성급 호텔이라고 하나 시설 수준은 미국이나 한국의 호텔과는 비교할 수 없이 떨어졌다. 아나나스 호텔은 성 문안 근처의 필그림매스(Pilgrimasse) 전철역 옆에 있어 한 정거장만 가면 바로 도심지가 펼쳐지기 때문에 관광객으로 붐볐다. 사실 비엔나는 꼭 10 년 전 우리의 회갑 기념으로 아이들이 돈을 모아 기념으로 보내준 서유럽 여행을 할 때 들린 곳이었다. 당시에 본 합스부르크 궁전과 스테파노 성전이 눈에 떠오르는데, 10 년 후에 다시 들리니 모든 게 변함이 없어 감개가 무량했다. 도시 안에는 서울의 명동 거리처럼 상가가 즐비했지만, 넓은 거리 가운데에는 식당들이 자리 잡고 있어서 그곳에서 한가히 맥주를 마시는 관광객들은 너무도 화려하게 보였다. 거리에는 오페라나 콘서트를 홍보하는 중세기 복장의 홍보맨도 있었고, 카메라를 들고 중세기 건물과 거리를 찍는 아마추어 사진작가들도 많이 보였다. 중세에는 먼 훗날 자동차의 등장을 예상하지 못하여 차가 다닐 거리나 특히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을 생각하지 못했다. 당시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으니 5 층 이상을 지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지금도 그 고도제한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니, 84

85 이들의 전통을 지키는 자세와 지혜에 찬사를 보내고 싶었다. 비엔나뿐만이 아니라 독일과 동유럽 어디를 가도 리모델링하는 건물들이 많이 있었지만, 옛날 중세의 모습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유럽인들의 의지가 보였다. 중세 건물의 가장 웅장한 건물이 비엔나의 성 스테파노 성당이다. 성당을 보면서, 나는 그 옛날에 어떻게 이런 웅장한 성당을 지었을까 하는 경외심과 함께 종교의 힘이 무서웠던 시절을 다시 생각했다. 합스부르크 궁전 중세에는 성직자들의 권세도 막강했지만, 중세 왕가들의 힘과 호화 로운 모습도 대단했다. 그 중 합스부르크 왕조의 역사를 상징 하는 궁전이 바로 비엔나에서 그 옛날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성당에서 걸어서 10 분이면 이 엄청난 왕가의 궁전에 들어서게 된다. 지난 번에는 자동차로 여행 중이어서 우리 일행은 마차를 타고 궁전 근처를 돌아보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이번에 나는 제일 먼저 말이 끄는 마차를 탔다. 우리 일행 네 명이 타고 한 시간 반 정도 궁전 85

86 일대와 그 부근에 있는 비엔나 대학과 그 주변을 다니며 설명을 듣는 비용이 100 달러 정도였는데,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300 년을 지배한 합스부르크 왕조의 말년을 지켰던 프란시스 조셉 황제와 그의 부인 시시 와의 전설은 당시 대중 매체가 없었으니 구두로만 전해지면서 만인이 동경하는 한 편의 멜로 드라마가 됐다. 시시가 15 세 되던 해 조셉 황제는 시시의 언니와 선을 보러 갔는데, 동생을 본 순간 생각이 바뀌어 3 년 후에 동생인 시시와 결혼했다. 뛰어난 미모와 승마의 재질을 타고난 시시는 황후가 된 후에 말을 타고 시민들에게 그 모습을 자주 나타냈는데, 국민들은 그녀의 인자한 마음씨에 탄복하여 그녀를 존경해 마지 않았다고 한다. 옛날 화려했던 전설을 들으며 궁전 밖 길가 나무 밑에 있는 카페에 앉아서 700 년 전통을 자랑하는 황실 맥주를 마시니 꿈만 같았다. 합스부르크 궁전 마차 다음날 우리는 지하철을 이용해 왕들의 여름 별장인 쇼엔부룬 궁전과 벨베데어 궁전을 찾았다. 벨베데어 궁전 박물관에는 86

87 르네상스 이후에 에로틱하게 제작된 모자이크 그림 키스 가 아주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Budapest) 부다페스트 행 기차의 2 등실은 6 명이 탈 수 있는 박스형이고 박스 밖으로는 통로가 있었다. 1 등실은 4 명이 타게 돼 있었고, 3 등실은 정해진 좌석이 없었다. 우리는 2 등실을 탔다. 현지에서 기차표를 사니 상당히 비싼 편이었다. 2 등칸에 우리 일행 4 명을 포함해 모두 6 명이 앉았는데, 아늑하긴 했지만 에어컨이 나오지 않아 창문을 열고 가야했다. 그러나 창 밖에서 불어 오는 바람은 청량해서 맞을 만했다. 기차가 오스트리아를 벗어나서 헝가리로 들어서자, 가난한 헝가리의 생활상이 확실히 표나게 보였다. 부서진 창문을 제대로 수리하지 못한 채 집들이 방치돼 있었고, 길가에는 잡초가 무성했으며, 지나다니는 자동차도 별로 없었다. 이런 모습은 평양에서 본 거리와 너무 비슷하여 헝가리도 공산 치하가 이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한탄이 절로 나왔다. 비엔나에서 부다페스트로 가는 기차는 국경을 지날 때마다 여권을 검사했다. 부다페스트 역은 철도역 자체가 관광 명소였다. 우리는 역 근처 바로스 라는 관광호텔을 예약했는데, 마침 호텔이 공사 중이어서 방 세 개 중에 하나는 그 호텔에서 제일 비싼 스위트 룸에 묵게 됐다. 그 방은 침대가 넷이나 됐고 유럽에서 보기 드문 자쿠지 욕실(기포가 발생하는 욕실)을 갖춘 큰 방이었다. 호텔의 위치는 기차역 바로 앞이어서 교통이 번잡했지만 도시를 잘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마침 우리가 도착한 날이 토요일이어서 상가는 모두 문을 닫았고 음식점도 연 곳이 드물었다. 겨우 호텔에서 추천하는 식당에 가서 헝가리 전통 음식 굴라시와 닭고기 요리로 저녁식사를 했으나, 맛은 별로였다. 다음날 일요일 아침 7 시에 호텔에서 주는 아침을 들고, 우리는 부다페스트 거리를 돌아 보았다. 시내 중앙역 광장만 여행객들로 87

88 붐볐고, 지하통로에는 노숙자들이 잠을 자고 있었다. 광장에는 기타를 치며 한국어로 찬송가를 부르는 한국인 전도사(?) 남편과 전자 오르간을 치는 그의 부인이 행인들에게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장면을 보고 우리 일행은 깜짝 놀랐다. 요즘 한국 기독교 전도사들은 전 세계 어디든 안 가는 곳이 없다고 하는 말이 실감났다. 다뉴브 강에서 본 부다페스트 우리는 아침 10 시부터 2 시간짜리 시내 관광 프로그램을 사서, 버스 2 층 뚜껑이 없는 곳에 자리를 잡고 시내를 구경했다. 운전기사의 설명을 들으며 우리는 다뉴브 강가의 성당과 국회의사당을 자세히 보았다. 시내는 5 층 고도 제한 때문에 낮은 건물들만 있었지만, 시내를 벗어나자 고층 아파트 건물들이 보였다. 투어의 하이라이트는 서울의 남산처럼 시내 한 복판에 우뚝 솟은 제일 높은 곳에 군용 포대가 있는 성곽을 보는 것이었다. 성곽에는 길거리 상인들로 시끄러웠지만, 부다페스트 시내를 한 눈에 다 내려다 볼 수 있어서 좋은 전망을 감상할 수 있었다. 이곳에는 공산 치하 때 세워진 스탈린, 레닌 동상이 있었는데, 자유화의 물결에 밀려 모두 철거됐다고 한다. 88

89 우리는 시내투어를 마치고 의사당 뒤편에 있는 제일 멋진 상가로 갔다. 이곳에는 물건 사는 사람보다 관광객이 더 많았다. 우리는 맥도날드를 발견하고 들어가 화장실을 쓰려고 하니 영수증을 보여 달라고 했다. 고약한 인심이었다. 그곳은 커피 맛도 이상했고 값도 많이 비쌌다. 저녁에 우리는 다뉴브 강을 배로 한 바퀴 도는 유람선을 탔다. 저녁과 칵테일이 포함된 두 시간의 뱃놀이는 석양에 비치는 의사당과 그 건너편 성곽을 그림처럼 멋지게 감상하는 경험을 우리 에게 선사했다. 수천 년을 말없이 조용히 흐르는 푸른 도나우 강은 사랑과 미움과 처절한 전쟁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체코의 프라하(Prague) 다음날 아침, 우리는 체코의 프라하로 가는 기차를 탔다. 다행이 여행 시즌이 아니어서 기차는 붐비지 않았다. 우리가 탄 기차는 6 인석이었는데, 우리 일행 4 명만의 차지가 되었다. 우리는 마음 놓고 떠들며 헝가리와 체코의 농촌을 마음껏 즐겼다. 기차의 식당 칸에서 기름에 튀긴 닭요리를 먹었는데, 값만 비싸고 맥주 맛도 그저 그랬다. 여행 전, 나는 프라하의 지도를 보고 연구 한다고 했는데, 역시 처음 가는 곳이어서 지리를 알기 어려웠다. 프라하의 서부역에서 시내 중심가로 가는 지하철을 탔으면 간단한 것을 택시를 탄 것이 잘못이었다. 우리를 태운 택시기사는 영어가 서툰데다 프라하의 중심가를 전혀 모르는 초보자였던 모양이다. 그 택시는 시내를 한참 돌아다니다가 엉뚱한 곳에 우리를 내려 주었다. 다리만 건너면 우리가 예약한 호텔이라고 기사가 말했지만, 우리는 한참을 더 헤매어야만 했다. 예약한 Koecku(닭) 호텔은 같은 건물 안에 인형극장을 갖고 있는 제법 이름 있는 호텔이었다. 이 호텔은 1 층 고급 레스토랑에서 아침을 제공하고 하루 숙박에 99 달러였다. 89

90 프라하를 건설한 찰스 황제의 이름을 따서 찰스 스트리트로 불리는 이 지역에는유명한 찰스 다리가 있고 그 옆에 호텔이 있었다. 이 호텔에서 100m쯤 가면 프라하의 최고 명물인 천체 시계탑과 광장이 있다. 천체 시계는 해와 달의 위치를 보여주며 현재 시간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 시계는 매 시간마다 예수의 12 제자가 시계 위로 나타났다가 들어가고 마지막으로 시계 위에 있는 박스에서 닭이 나와 소리를 내며 시간을 알려주었다. 이 시간을 알려주는 모습을 보려고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어 시계탑 앞은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이 시계탑 주변 멋진 야외 카페에 앉아서 한 잔에 10 달러나 하는 맥주를 마셨다. 프라하의 둘째 날, 우리는 아침 식사를 7 시에 마치고 찰스 교를 건너며 주변을 구경했다. 그리고 10 시부터는 시티투어를 시작했다. 우리는 프라하의 성곽 주변을 자세히 보고난 후 걸어서 호텔로 왔다. 프라하 시 전경 프라하의 성당과 박물관보다는 중세 문화를 이해하는 데는 합스 부르크 왕조의 궁궐과 성곽을 보는 것이 더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 왕조는 1526 년에 시작 되었지만, 이들의 전성기인 18 세기 중반, 90

91 로레인의 프란시스와 마리아 테레사가 집권한 시절( )에 합스부르크 왕궁을 증축했다. 이 성 안에는 12 세기에 축조된 성당이 있는데, 그 형태가 잘 보존돼 있었다. 마리아 테레사가 이 성당을 중심으로 왕궁을 18 세기에 건설했는데 바로크식과 고딕 양식이 잘 조화된 모양을 지니고 있었다. 왕궁 안 모든 건물의 복도가 서로 통하게 돼 있으며, 황제가 성당에 갈 때는 그의 전용통로가 있어서 이를 이용했다고 한다. 이 성곽 안에도 제법 맛있는 식당이 있었는데, 여기서의 점심은 기억에 남을 만큼 맛있고 멋진 것이었다. 지금 이 성은 체코 대통령의 관저로 쓰이기 때문에 영국 왕성의 수문장처럼 대통령 경호실 벙정들이 한 시간 동안 인형처럼 꼼짝도 안하고 서 있었다. 이들을 보기 위해 관광객이 몰렸다. 수위 병정 들은 매 시간마다 교대하는데, 교대 예식이 제법 볼만했다. 이 성곽에서는 프라하의 명물 찰스 교가 보였다. 성곽에서 가파른 언덕을 내려가려면 바로크식 정원을 거쳐야 한다. 수 백 년의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옛날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정원과 건물들이 길가를 지키고 있었고, 특히 좁은 도로들은 작은 돌로 촘촘히 포장된 옛날의 형태를 그래도 유지하고 있었다. 성곽을 내려오면서 우리는 또 찰스 교를 걸었다. 이제는 차가 다니지 못하게 해 놓은 다리 위에는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들과 간단한 선물이나 그림을 파는 상인들이 관광객들을 호객하고 있었다. 프라하는 찰스 대제의 위대한 공적으로 가득차 있는 듯했다. 프라하의 마지막 밤은 어쩐지 아쉬움이 많았다. 언제 이 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앞서니 더욱 그러했다. 인형극장들이 여러 군데 있었으나, 예약을 못해서 갈 수 없었다. 우리는 그 대신 다시 찰스 광장 시계탑 앞 카페에서 비싸지만 역사가 담긴 맥주와 피자를 먹으며 그 동안 돌아다닌 프라하의 기억을 정리하였다. 다음날 아침 8 시에 호텔을 나선 우리는 짐도 있고 지하철역까지 걷기에는 너무 멀어서 택시를 불렀다. 독일 레겐스부르크로 가는 기차는 중앙 기차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타게 돼 있으나, 91

92 이곳 택시기사도 일방통행 도로망을 잘 모르는지 길을 헤맸다. 그러니 프라하는 여행객이 자가운전하기에는 엄두를 낼 수 없는 곳이었다. 체코의 돈은 독일에서 쓰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일행은 체코 돈을 모두 이곳에서 써 버리고 기차를 탔다. 다시 6 시간의 기차 여행이 시작됐다. 불과 며칠 안 되는 여행기간이었지만 우리는 상당히 지쳐 있었다. 아들 유진이는 레겐스부르크 역 바로 옆 강가의 소시지 식당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비숍호프 맥주와 이곳 특산물인 레겐스부르크 소시지를 먹으며 이 소시지가 가지고 있는 오랜 역사를 유진이가 설명해 주었다. 독일의 뉘른베르크(Nuremberg) 뉘른 베르크 성 우리는 레겐스부르크에서 기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뉘른베르크로 갔다. 이곳은 독일 나치의 중요한 본부가 있었고 전후 재판이 열리던 92

93 곳으로 전쟁 중에는 연합군의 집중 폭격으로 95%가 파괴된 도시였다. 당시 소련군이 진주하여 무참히 짓밟은 곳이기도 했다. 이곳은 중세풍의 건물도 있었지만, 도로가 넓은 등 유럽에서 보기 드물게 잘 계획된 도시이기도 했다. 뉘른베르크는 신성로마제국 당시에는 어느 군주에도 속하지 않은 자유도시로서 교역이 성행했고 상인들에 의해 일찍이 개발된 도시였다. 이곳 독일 남부는 동구라파 여러 제후들과의 교역 장소 였다고 한다. 천년이 넘는 성곽이 제일 높은 산 위에 자리 잡고 있어 관광명소가 되었으며, 성 아래로는 도나우 강 상류가 흐르는 아름다운 언덕에 거대한 네 개의 성당이 있었다. St. Elizabeth, St. Martha, St. Clara, Lorenz Kirch 등 4 개의 성당 주변에는 많은 식당과 상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침 우리가 방문한 시점이 성령강림절 연휴여서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고, St. Clara 성당 옆에는 맥주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성당을 구경하러 내부로 들어가니 마침 내일 열리는 콘서트 예행 연습이 한창이었다. 웅장하게 새로 지은 성당 안에서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과 관현악이 연주되었고 거기에 맞춰 수십 명의 성가대원들이 베토벤의 D Minor 메시아를 부르고 있었다. 우리는 넋을 잃고 메시아가 다 끝날 때까지 듣고 있었다. 이번 여행 중에 우리는 많은 성당을 보았지만 이렇게 훌륭한 성당 콘서트를 현장에서 우연히 감상하게 됐다. 나는 여행이 끝난 지금도 그 성당에서의 합창 메아리가 울려퍼지는 듯하여 베토벤의 메시아 CD를 사가지고 와서 틈날 때마다 듣고 있다. 성령강림 주일은 연휴로서 월요일도 휴일이다. 미국의 노동절처럼, 독일은 이번의 연휴를 시작으로 여름철 휴가가 시작된다. 우리는 에어컨이 잘 나오지 않는 기차에서 더워서 혼이 났기 때문에 반바지에 가벼운 차림으로 투어에 나섰다가 추워서 고생했다. 그날은 가랑비가 내리면서 온도가 급격하게 내려가 털 외투에 오리털 파카를 입고 나온 사람들도 보일 정도로 추운 날씨였다 년 올림픽 도시 뮤닠(Munich) 우리는 10 시 반에 시티투어에 나섰다. 이곳에서 우리는 올림픽 93

94 경기가 열리던 1972 년에 팔레스타인 독립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이스라엘 선수 18 명을 기관총으로 무참하게 사살한 사건이 벌어졌던 올림픽 공원과 경기장 주변, 그리고 BMW 본사와 성당 등을 돌아 봤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바바리안 왕가의 님펜부르크 성을 보는 것이었다. 님펜부르크 성 이 성은 사냥터까지 그 안에 있는 광대한 정원을 갖고 있었다. 이 성은 프랜시스 조셉 황제의 외가이기도 하며, 그가 부인 시시 를 처음 만난 곳이기도 했다. 황제가 건물 뒤편 정원의 사냥터에서 15 세의 소녀 시시의 말 타는 솜씨에 놀라 사랑에 빠지게 되어 그녀 어머니의 끈질긴 반대를 물리치고 결혼을 성취한 전설의 장소이기도 했다. 투어버스는 우리에게 이 성에서 30 분 이상 자유 시간을 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날씨가 추워서 정원이나 사냥터를 멀리 벗어나지 못했다. 투어를 마치고 시내 몇 군데 성당을 더 돌아본 우리는 유명하다는 식당을 찾아서 점심을 했다. 500 년 전통을 자랑하는 이 식당에서 우리는 전설적인 맥주를 마시고 두 곳의 성당을 더 돌아 보았다. 2 차 대전 때 폭격에 부서진 성당을 옛날처럼 다시 복구했다는데, 94

95 유리창문만은 과거 모습대로 재현해 내지 못했다고 한다. 이 도시 관광 명소는 HB 브랜드의 호프브로이하우스 맥주집이다. 1,000 명 이상이 한꺼번에 생맥주를 마실 수 있는 이곳에는 4 인조 브라스 밴드가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니, 그 밴드가 즉시 아리랑을 연주해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 이 맥주집은 맥주 한 컵에 약 10 달러나 받았으며, 맥주 안주 프렛젤 하나에 5 달러나 받는 비싼 곳이기도 했다. 님펜부르크 공원 이곳에는 2 차 대전 당시 유태인 수용소가 있었으며, 전쟁 후에는 나치 전범을 수용한 형무소가 있었는데, 우리 투어에는 이들 전쟁 유적들이 포함되지 않았다. 독일은 자신들의 치부를 굳이 관광객 들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투어 내내 비가 솔솔 내렸고, 온도는 급격히 내려갔다. 우리는 추위를 뒤로 하고 예약된 4 시반 기차로 다시 레겐스부르크로 돌아왔다. 오랫동안 고대했던 동유럽 여행을 마치고, 우리는 뉴욕을 거쳐 캘리포니아 존 웨인 공항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은 많이 배우고 많이 생각하게 된 값진 여행이었다. 무엇보다도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을 95

96 보았다는 기쁨이 컸다. 집에 돌아와서 다시 책을 펴며, 나는 중세 유럽의 문화를 공부했다. 여행은 사람과 문화와 역사를 배우고 인생을 반추하는 학습의 장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앞으로도 더 많은 곳을 보고, 듣고, 배우는 여행길이 있다면, 나는 기꺼이 여행에 나설 것이다. 96

97 8. 가족 모임의 아카풀코 Norwegian Star 배 앞에선 일행 대구가 고향인 처가 형제는 4남 3녀로 7 남매이며, 모두 건강하다. 74세의 큰 처형은 사범학교를 나와 선생을 오래하고 은퇴했다. 그 집안에서 제주도 성산포에 일출봉 호텔을 경영하고 있고, 아들이 교장인 경남 창원의 어느 고등학교도 운영하고 있다. 70세의 둘째가 바로 내 아내로 남편인 내가 미국으로 유학 갔을 때 같이 와서 40년을 미국 교수 부인으로 살고 있으며, 셋째는 캐나다에서 사업하는 부군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 와서 40년을 토론토에 살면서 남동생 두 명도 캐나다로 이주시켜 같은 도시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다. 대구에 남아서 연세대 법대를 졸업한 후 은행에 다니다 은퇴한 처남과 막내는 큰 공장을 사업체로 경영하며 재미를 보고 있다. 97

98 일곱 사람이 같이 모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고, 처가 형제들은 중간 누나인 집사람과 내가 사는 로스앤젤레스에 모여 멕시코의 아카풀코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7박 8일의 크루즈 여행을 가기로 했다. 사업하는 막내가 재정적으로 후원해서 7남매가 Norwegian Star 크루즈를 타고 여행을 떠났다. 2006년11월 22일이었다. 7 남매의 항해 중 기념사진 11월 23일은 마침 추수감사절이어서 휴가를 얻은 우리는 9만 톤급 바다 위의 호텔인 거대한 크루즈에 투숙했다. 이 호텔은 2,500명의 손님과 1,500명의 종업원으로 꽉 차 있었다. 배는 거의 3일 동안 쉬지 않고 아카풀코를 향해 내려갔다. 크루즈 배에는 통상 24시간 문을 여는 식당이 있다. 저녁에는 정장을 하고 테이블에 앉아서 비싼 와인을 마시며 맛난 정찬을 즐길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배는 손님들의 복장에 대해 별로 까다롭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배 꼭대기 층에는 수영장이 있었고, 훌륭한 사우나 시설이 있어서 매일 아침마다 사우나에 들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카지노는 물론이고, 극장과 라이브 음악으로 춤을 추는 홀이 여러 군데 있었다. 98

99 형제 중 김 회장 일행은 배 꼭대기에 있는 앞이 훤히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담배를 피우며, 지나간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출발 다음 날은 추수감사절이어서 우리는 칠면조 디너를 정장을 하고 즐겼으며, 다음날은 선장의 초청 디너에 참석해서 바다가재 요리를 대접받았다. 4일째 되는 날 11시에 드디어 배가 아카풀코에 정박했다. 아카풀코는 배에서 보면 지구상에 이 이상 아름다운 항구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한 쪽으로 산을 뒤에 두고, 다른 한 쪽으로 프라야(Playa) 반도를 끼고 있는 아카풀코 비치는 아름답기 한이 없었다. 이곳을 처음 찾아온 방문객은 417년의 중국인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다시 5세기부터 중국인들이 안에서만 싸우지 않고 서방 정복을 시작했다면 아메리카 대륙이 온통 동양문화권이 될 수도 있었을 테니 아쉽기도 했다. 1,700년대에 이곳을 점령한 스페인 왕조는 갖은 약탈을 다 하다가 멕시코 독립전쟁에서 패해 쫓겨 나갔다. 그러나 아카풀코가 휴양지로 각광을 받은 것은 1960년경 세계 부자들이 휴식처로 찾아오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이 아름다운 항구 휴양지에는 멕시코 정치 혼란의 여파로 아직도 1960년대의 낡은 건물과 잡초가 해변에 널려 있었다. 1960년대의 서울을 연상케 하는 이 도시는 정치 지도자들의 역할이 한 나라의 생존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느끼게 했다. 배에서 시내 관광을 신청하려면 60달러 정도를 내야 했다. 김 회장 일행은 이곳을 여러 번 다녀 온 누나들의 안내로 배 밖으로 나가 택시를 잡아 타고 시내를 관광했다. 택시값도 배가 주선하는 관광 요금의 3분의 1인 1인당 20 달러로 쌌고 우리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어서 무척 편했다고 한다. 아카풀코는 구 시가지 근처에 상가가 많았다. 이곳에서 제일 자랑하는 관광 명소는 130m 절벽 위에서 바다로 뛰어 내리는 다이빙을 구경하는 것이며, 언제나 이곳은 사람들로 붐볐다. 그러나 절벽 다이빙은 별로 신기한 것이 없어서, 일행은 다시 차를 몰고 플라맹고(Flamingo) 호텔로 갔다. 옛날 미국 영화배우들이 묵었다는 이 호텔도 이제는 지저분하기만 하다고 대구에서 온 막내가 한마디했다. 99

100 돈 많은 부자가 아들의 요절을 슬퍼하여 만든 산꼭대기의 묘지 겸 천주교 사원은 이 나라 빈부의 차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었다. 우리는 다시 상가로 내려가 돌아다녔지만 살 만한 게 없었다. 전에는 은으로 만든 장식품이 인기였는데, 이제는 조잡하게만 보였다. 멕시코 카우보이 밀짚모자 하나에 15달러를 달라는 것을 깎아서 5달러 주고 샀다. 이 시장에 비하면, 서울의 남대문 시장은 백화점 격이었다. 본래 아카풀코 시내 관광 계획은 4시간이었는데, 우리는 두 시간 조금 지나서 다시 배로 왔다. 35도 이상의 따가운 햇살도 견디기 힘들었고, 욕심나는 음식점도 하나도 보이지 않는 이 아카풀코는 관광지로서는 수준 이하였기 때문이었다. 아카풀코의 자연환경은 천하의 절경이므로 제대로 개발한다면 세계 어느 곳보다도 훌륭한 관광지로 만들 수 있다며, 김 회장은 은퇴만 안 했으면 서울의 투자자들을 모아다가 한 판 해 볼 만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아무 땅에다 콘크리트 건물을 지어놓고 엄청난 값을 받는 서울의 아파트 투기에 비하면, 이 곳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블루오션이라고 김회장이 역설했다. 이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아카풀코를 아쉬운 마음으로 뒤에 두고 거창한 5 성급 크루즈 호텔은 다음 기항지인 지하타네호 이스타파 항으로 밤새 달렸다. 다음날 아침, 크루즈는 구름 한 점 안 보이는 깨끗한 하늘 아래 아름다운 지하타네호 이스타파 항구에 닻을 내렸다. 이 지하타네호는 본래 작은 어촌이었다. 이 어촌을 끼고 이스타파 관광지를 조성한 것은 불과 수년 전의 일이라고 한다. 이스타파 휴양지는 아카풀코의 더러운 모습과는 달리 옛것을 싹 버리고 사람이 만든 신도시 휴양지였다. 이곳은 관광을 위해 의도적으로 조성됐기 때문에 멕시코인은 거주할 수 없으며, 그들은 다른 지역에 살면서 이 신도시로 출퇴근 하도록 규제하고 있다고 한다. 이 항구는 지금은 다 쫓겨 나간 어부들의 고장으로 어촌이었으며, 돌로 된 산이 널려 있어서, 수영할 만한 곳이 없었다. 대신, 이곳은 고급 요트나 보트를 타고 물속의 고기들과 함께 노는 스쿠버 100

101 다이빙으로는 적격인 듯했다. 이곳에는 근처에 새로 만든 좋은 호텔과 골프장이 많았다. 이곳은 추운 캐나다에 사는 처가 형제들이 겨울에 비행기를 타고 골프 치러 몇 년 전에 다녀 간 곳이어서, 아름다운 시가지를 간단히 둘러 보고 우리는 배로 다시 왔다. 다음 기항지는 바얄타(Vallarta). 이 항구는 자연적으로 훌륭한 항만 시설을 갖추고 있지만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1963년 존 휴스턴이 테네시 윌리암스의 작품 Night of the Iguana"를 영화화할 때 이곳에서 촬영한 것을 계기로 이곳이 갑자기 유명해졌다. 이 영화는 리차드 버튼과 에리자베스 테일러 주연으로 두 연인의 열렬하고 강렬한 사랑을 그린 이야기여서, 그런 경험을 해 보겠노라고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 왔다고 한다. 이곳은 제법 잘 건설된 신도시지만 아직도 당나귀 수레가 돌아 다니는 옛날의 멕시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여기에는 골프장도 제법 많아서, 골프 관광 패키지로 오는 한국인들이 있다고 한다. 멕시코 골프장은 몇 년 전만해도 싼 맛에 인기가 있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미국보다 비쌌다. 경치 좋은 항구 한 가운데에는 1970년대에 짓다가 중단된 4층 구조물이 녹이 까맣게 쓸어서 흉하게 서 있었다. 이 도시에는 멕시코가 잘 나가던 70년대에 이런 건물들이 수도 없이 건축되다가, 다시 경기가 쇠퇴하면서 끝을 못보고 중단된 건물들이 여럿 있었다. 특히 골프장 주변에는 콘도로 건축되다가 중단된 채 처리가 안된 건물들이 많았다. 이들은 이 나라의 경제 형편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당선이 확정됐는데도 공산당 후보가 자신이 대통령이라며 데모를 하고 있으니, 지금 멕시코는 대통령이 두 명이나 되는 나라다. 멕시코는 나라꼴을 알만한 곳이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기항지는 Cabo San Lucas 로서 멕시코 본토 서해안 쪽으로 800km 이상의 복도(Corridor 라고도 불린다)처럼 깔려있는 반도 최남단의 아름다운 항구다. 1973년에 고속도로가 완성되기 전까지 이 항구는 아름다운 줄은 알지만 갈 수가 없는 곳이었다. 그때는 빙 크로스비나 존 웨인 같은 유명 연예인들이 자가용 비행기로 와서 낚시를 즐기던 곳이라고 한다. 101

102 미국에서부터 자동차, 특히 RV(한국에서는 캠핑카로 불림)로 낚시를 즐기려는 관광객이 이 항구로 몰려 들기 시작하자, 1970년에는 인구가 1,500명 정도였지만 이제는 인구가 6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항구에는 고급 낚시용 배들이 많이 보였다. 우리 일행은 2시간 반 동안 스노클을 하면서 물고기와 함께 노는 것으로 만족했다. 아름다운 Cabo San Lucas 해변 이곳에도 새로 건설한 콘도가 많았다. 멕시코 사람들이 관광객 들에게 다가와 콘도에 투자하라고 설득했지만, 멕시코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시내 상가들은 1970년대 서울의 모습과 흡사했으며, 티셔츠나 맥고모자를 사라고 쫓아다니는 영세 상인들은 한없이 불쌍하게 보였다. 102

103 7박 8일의 크루즈 여행은 서로 바쁘게 사느라고 함께 모이기 힘든 처가 7남매가 하루 세끼를 같이 먹고, 함께 관광지를 같이 다녀보고, 그리고 조용히 서로의 세상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너무도 귀하고 즐거운 여행이었으며, 조금도 지루한 줄을 몰랐던 여행이었다. 처갓집 형제들과 서로 덕담을 나무면서 내가 옛날에 들은 카네기 이야기를 했다. 어느 카네기의 강연장에서 한 여인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욕과 저주를 퍼부었다고 한다. 그런데 카네기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 화를 내기보다는 그저 조용히 미소만 짓고 있었다고 한다. 카네기에게 사람들이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험한 말을 듣고도 참을 수가 있나요? 카네기는 크게 웃으며 대답하기를 그 여자가 내 아내가 아닌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를 생각하니 나도 몰래 미소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에 그 여인이 내 아내였다면 저는 온전하게 세상을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사람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민망한 분들이 제법 많다. 경우 없고, 예의 없고, 안하무인이고, 배려심도 없고, 자기 밖에 모르는 분들을 대하게 될 때면 그 사람이 내 아내가 아니고, 내 가족이 아니고, 내 가까운 사람이 아닌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고 했다. 이번 여행의 좌상인 큰언니는 여기에다 감사하는 마음을 덧붙였다. 우리가 감사할 수만 있으면 세상은 당장에라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행복을 추구하며 살지만 흔히 내가 행복해진 이후에 내 마음 속에 감사한 마음이 생겨난다고 한다. 그런데 큰 언니의 생각은 본인이 먼저 범사에 감사할 수 있어야 그에 대한 보상으로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어떤 어려운 일을 겪더라도 내 마음 안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절대로 좌절하거나 불행해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차를 몰고 가다가 접촉사고가 났다 하더라도 그 사고만을 생각하면 기분 나쁜 일이 되겠지만, 그 사고에도 불구하고 103

104 서로의 몸이 다치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감사할 수 있는 것도 우리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그 사고로 인해 몸이 조금 다쳤다고 할지라도 그것만 생각하면 불행한 일이 되겠지만, 자동차 사고에도 불구하고 중상을 입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그것에도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우리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인생이 불행하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내가 불행한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이 나를 불행하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마음 하나 고쳐먹으면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우리네 세상이다. 로스앤젤레스 항에 도착하여 간단한 세관검사를 마친 우리 일행은 우리가 사는 라구나 비치로 가는 차 안에서 가슴에 사무치게 그리운 돌아가신 부모님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겼다. 이제는 돌아 가신지 오래 된 부모님이 생각난다고 큰 처형이 말을 시작하니 모두들 갑자기 숙연해졌다. 부모님께서 살아 계실 때에는 잘 모실 형편들이 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좀 더 잘 모셨어야 했다는 아쉬운 생각에 자식들은 한없이 죄스런 마음뿐이었다. 그리고 모든 형제들은 언제 손자들을 데리고 다시 한번 여행을 가야겠다고 서로 말했다. 돌아가신 나의 할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내가 너희들을 이렇게 잘 챙겨도, 손자가 할아버지 생각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내가 죽으면, 너희 들은 잘 울지도 않을 것이다. 실제로 할아버지 돌아 가셨을 때 정말 우리는 슬피 울지 못한 일이 생각난다고 서로 웃으며 실토했다. 지금 아이들은 과거 우리와는 더욱 다르다. 저희들 생활이 바쁘니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우리 세대보다 못하다. 자식 사랑은 내려가는 것이지 올라 오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우리 모두들 배가 정박해서 항구 시내로 나갈 때마다 손주들 선물을 한 보따리씩 샀다. 큰 처형은 이렇게 선물을 사는 것은 아이들이 우리를 좀 더 생각해달라는 마음 아니겠냐고 말했다. 104

105 9. 알로하 정신이 숨쉬는 하와이 하와이는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 듯 느껴지지만 아주 먼 곳이다. 우리와 별로 잘 어울리는 곳도 아니다. 우리와 하와이 원주민은 별다른 인연이나 닮은 데가 없다. 그러나 하와이는 매력이 넘치는 곳처럼 나에게 다가왔다. 그곳엔 알로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이기 때문일까? 나는 하와이를 몇 번 다녀온 적은 있어도 하와이 역사와 원주민들이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가슴 깊이 느껴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하와이를 제대로 보고 알로하 정신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나는 2010년 하와이 크루즈 여행을 계획했다. 나는 하와이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이곳의 역사를 익히기 위해 두 권의 책을 사서 읽었다. 그것은 하와이 왕국의 마지막 여왕 Lydia 105

106 Liliuokalani 가 쓴 Hawaii s Story 와 Helena G. Allen 이 쓴 Betrayals of Liliuokalani 이다. 알로하 정신의 복장 나는 제일 먼저 책 속에서 알로하 정신이 무엇인지를 찾았다. 알로하는 원주민들의 말로 안녕 이라는 인사 말이다. Hello, Goodbye, Love 의 뜻도 포함 되어있다. 안녕 이란 알로하의 뜻 속에는 그들 특유의 관용 정신과 서로 인정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우리가 하와이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하와이 원주민들이 목에 106

107 화환을 걸고 허리를 흔들며 훌라 춤을 추는 것도 알로하 정신이 깃든 하와이의 상징이라고 말 할 수 있다. Holly Andersen 이 쓴 Paradise of Hawaii 에서 앤더슨은 알로하의 정신을 겸손과 조화, 은총을 주신 신의 숨결 이라고 간결 하게 표현했다. 하와이 원주민이 말하는 알로하 정신은 우리 한인들에게도 공감이 가는 삶의 철학이다. 개개인의 특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정신, 그리고 선조가 후손들을 보살핀다고 믿는 조상 숭배 사상이기도 한 것이다. 하와이 섬은 태평양의 하와이 제도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는 폴리네시아 민족들이 태평양 섬에서 들어와 다스린 왕국이었다. 미 본토에서 3,700km 떨어져 있는 해외 주이며, 미국 영토 중에 가장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섬이다. 하와이는 20세기 초 우리 민족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하와이는 우리 민족의 최초 이민 정착지로, 우리 선조 이민들의 사탕수수 밭 애환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하와이는 1778년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에 의해 발견된 섬이다. 하와이 제도는 19개의 섬으로 구성돼 있고, 암초 형태의 섬까지 합치면 모두 137개의 섬으로 되어 있다. 큰 섬은 8개이며, 2개의 섬은 관광객들에게는 개방되지 않는 섬이다. 미개방 섬 중 니이하우 섬은 원주민이 아니면 들어 갈 수 없는 섬이고, 카호올라웨 섬은 무인도다. 그래서 우리는 하와이 4개 섬을 하루씩 돌아보는 크루즈를 예약했다. 하와이까지 항해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긴 했지만, 크루즈 안에서 좋은 음식과 즐거운 프로그램이 제공되었으므로 큰 불편은 없었다. 하와이 마지막 왕은 여왕으로 리디아 였다. 그녀는 1891년 왕위를 계승하여 하와이 왕국을 유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서구의 영향권이 점점 커지는 와중에, 하와이 경제를 장악한 미국 식민지 개척자들이 하와이를 결국 미국에 귀속시키고 말았다. 1893년 미 군함 보스턴 107

108 호와 미 해병대가 하와이에 들어와 민주주의를 미끼로 술책을 펴 미국에 귀속시키는 작업을 한 지 5년만인 1898년 하와이는 미국 보호령이 됐고, 결국 1957년 8월 21일 미국의 50번째 주로 편입되었다. 리디아는 왕좌의 자리에서 쫓겨났고 1917년 비참한 생을 마감했다. 리디아 여왕은 1838년생으로 기독교 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서양문명을 알게 됐다. 리디아의 일생일대의 실수는 무역상 아들 John Owen Domini 라는 영국인과 결혼한 것이었다. 시어머니가 끝까지 반대한 결혼을 감행한 리디아 여왕은 결혼 후 20여 년을 불행하게 살았다고 한다. 당시 저택 Washington Place 에는 마지막 여왕 리디아가 살았던 삶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하와이에서 역사적으로 제일 오래된 섬은 카우아이 섬이다. 약 1500년 전 폴리네시아 인들이 큰 섬 으로 알려진 히로 섬에 이주 하면서 그들의 언어를 가지고 왔다. 그들은 하와이 원주민들과 싸우면서 하와이 왕국을 세워 평화롭게 지냈지만 유럽 탐험가들이 몰려와 분쟁을 일으켰고, 결국 왕국은 종말을 맞게 됐다. 지금 폴리네시아 인들은 하와이 전체 인구의 9 %에 불과하다. 현재는 한국, 일본, 중국, 필리핀 등의 아시아 인들이 하와이 전체 인구의 50%를 점유하고 있다고 한다. 큰 섬 히로(Hilo) 쿠르즈가 미국 산 페드로 항을 떠난 지 닷새째 되는 새벽에 우리는 히로, 또는 큰 섬 이라고 불리는 항구에 정박했다. 이 섬은 제일 크기도 하지만 하와이 왕국의 역대 왕들이 태어나고 살았던 곳으로 유명하다. 하와이 왕국의 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곳은 하와이 전통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아직도 원주민들이 페레(Pele)라는 여신을 모시고 있었다. 동쪽 항구는 정부 청사와 각종 산업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우리는 1916년 연방 공원으로 지정된, 방대한 키라우이야 (Kilauea) 화산 공원을 구경했다. 불꽃의 108

109 여신 페레는 이 키라우이야 산 속에서 산다고 이 곳 주민들은 믿고 있었다. 페레 신은 혹독한 언니 신을 피해서 다른 섬에서 이곳으로 도망 왔다고 하는데, 남편을 찾아 이곳에 왔으나 결국 남편을 찾지 못해서 페레는 아직도 이곳에 혼자 살고 있다고 한다. 우리들은 1983년에 화산이 크게 폭발한 근처까지 가서 폭포와 자연 경관을 즐겼다. 다행이 히로 섬에는 한국 식당이 있어서 우리는 미국을 떠난 지 오랜만에 된장찌개와 김치를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정원 같은 카우아이 (Kauai) 저녁 때, 다시 배가 움직여 두 번째 섬 카우아이에 도착했다. 배는 한 나절 이 섬에서 머물며 지내게 돼 있었다. 카우아이 섬은 정원 같은 섬이다. 그림 같은 해변 모래 사장과 아름다운 골프장이 많아 관광객들이 골프 투어를 위해 즐겨 찾는 곳이었다. 나는 오래 전인 1996년 가까운 친구의 환갑 잔치가 카우아이 섬 남단에 위치한 하네리아의 리조트 호텔에서 열려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닷새를 머물며 골프를 즐겼는데 17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카우아이의 독특한 음식점들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이 섬 중앙에는 와이아래아래 (Waialeale) 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이 산은 아주 오래 전에 폭발한 화산으로 산 주변에는 폭포가 산재되어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었다. 며칠을 돌아봐도 질리지 않는 곳이었다. 카우아이 섬 서남 쪽으로 30km 떨어진 곳에는 니이하우 (Niihau) 섬이 있었다. 이 섬은 100% 원주민이 아니면 들어 갈 수 없는 신비스러운 섬이었다. 원주민들은 섬에서 생산되는 진주와 조개로 장식품을 만들어 호놀룰루 등 다른 섬으로 나와 이 장식품을 팔면서 살고 있었다. 109

110 주 도시, 호놀룰루 (Honolulu) 크루즈가 세 번째로 들린 곳은 하와이 주 청사가 있는 호놀룰루였다. 인구가 40만여 명으로 하와이에서 제일 큰 도시다. 이곳은 미국 영토가 처음으로 외세의 침략을 받은 곳이기도 한데, 바로 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1년 9월 7 일 일본군이 미국에 선제 공격을 가한 진주만이 있는 곳이다. 지금도 그 때의 끔직한 역사를 잘 보존해놓은 Arizona Memorial and Punchbowl Creater 이 있어, 그 때의 사건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모두 전에 진주만을 구경한 경험이 있었지만 또 다시 그 주변을 돌아보았다. 나는 매년 9월 7일이면 도라 도라 도라 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이는 진주만 폭격에 얽힌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을 담은 감동적인 영화였다. 지금도 일본군 수장 야마모도로 출연한 미푸네의 얼굴이 환하게 떠 올랐다. 와이키키 해변 백사장은 호놀룰루의 명물이다. 그런데 정작 와이키키 해변을 거닐다 보니 실망이 앞섰다. 작은 바닷가에 모래도 110

111 드문드문 아주 적게 깔려있었고 너무나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우리가 드넓은 Laguna Beach 의 백사장과 아름다운 풍경을 늘 접하고 살고 있기에, 우리에게 와이키키가 초라하고 볼품 없어 보였으리라. 우리는 하와이의 마지막 여왕 리디아의 옛 왕궁 앞에 서서 당시의 찬란했던 그 때와 지금을 비교하며 상념에 잡겼다. 인류의 역사가 이렇게 잔인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에게 역사는 신처럼 소중한 것이다. 하와이 마지막 여왕 리디아가 쫓겨난 자리에, 왕실의 가구며 역사의 흔적을 파괴한 미국인들이 당시의 유물들을 모아 다시 진열해 놓았다. 무지한 인간들이 역사의 순수한 혼을 모두 사라지게 하고 있는 듯했다. 호놀룰루에 올 때마다 나는 스노클을 쓰고 가두어 놓은 예쁜 물고기와 함께 노는 프로그램을 감동스럽게 즐겼다. 우리 일행 중 처음 온 사람들은 스노클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아주 좋았다는 말을 연발했다. 호놀룰루의 밤 야경을 뒤로 하고,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마지막 섬 마우이로 떠났다. 자연의 신비를 간직한 마우이 (Maui) 섬 마우이 섬은 높고 깊은 왕의 계곡 이 있는 곳이다. 이 계곡은 너무 깊어 햇빛을 직접 받지 못한다. 산 속 깊이 들어 갔다 못 나오는 경우가 많다는 경고문이 계곡 입구에 서 있었다. 우리 일행이 도착하자마자 간 곳은 마우이의 열대농원이었다. 이 농원은 섬의 자랑거리인 관광 요충지였다. 그곳에는 넓은 농장을 돌아보는 열차가 있었다. 이곳에서는 열대 작물인 파파야, 망고, 마카데미야, 아보카도, 커피 등을 생산하고 있었다. 나는 특산품인 커피와 마카데미아를 기념으로 샀다. 열대 농원을 돌아본 뒤 우리는 바로 할레아카라(Haleakala) 국립 공원으로 갔다. 자연과 등산을 즐기는 여행자들이 이 국립공원으로 몰려든다고 한다. 한 여행자는 일주일 휴가를 이 산에서만 머문 적이 111

112 있었다는데, 다양한 자연의 신비를 가득 간직하고 있어 일주일 머물어도 지루함이 없는 산이라고 극찬했다. 이 산 위에서 해변을 내려다 보면, 화산 용암이 변해서 된 까만 모래와 바위가 해변에 잔뜩 깔려있어서 사람들은 마치 화성에 와있다는 착각이 들 수도 있었다. 카파루아 골프장 이 화산은 폭발한 지 2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용암이 덮인 지역이 검게 남아 있었다. 산의 높이는 3,000m 가 넘어 우리 나라 백두산 보다 높았다. 이 섬의 해변가는 과거에 고래잡이의 중심지로 번창했던 곳이었다.어부들이 즐겨 찾던 술집과 식당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이곳은 현재 국립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었다. 그래서 고층 건물은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 하고 있었고 새로운 개발은 금지되어 있었다. 나는 이렇게 원형이 보존되고 있는 상태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마우이에는 한국의 SBS 가 매년 1월 주최하는 미국 PGA 골프 토너먼트가 열리는 카파루아 (Kapalua) 골프장이 있다. 이번 여행 112

113 중에 골프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지만, 우리는 코스라도 한 번 보고 싶은 마음에 이곳을 들러 보았다. 이 골프장은 2003년 메르세데스 벤츠 쳄피언십에서 최경주 선수가 우승한 명문 골프장이기도 하다. 7,411야드의 파 73짜리 코스는 우리가 TV 중계에서 보는 것보다 더 길고 어려운 코스로 보였다. 남태평양의 푸른 바다를 보면서 뜨거운 햇빛이 있더라도 시원한 바다 바람을 받으며 골프를 칠 수 있는 이 골프장에 언젠가 다시 한번 와서 플레이해 보리라 다짐하면서 이곳을 떠났다. 마지막 항구 엔시나다 (Ensenada) 나흘간의 크루즈 여정은 멕시코의 엔시나다 항구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엔시나다는 멕시코의 바하 캘리포니아 반도 위 제일 큰 도시다. 이곳은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 가까운 샌디아고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곳이어서 자동차로도 오가는 도시다. 이 도시는 좋은 골프장도 많고 특히 참치 낚시로 유명하다. 이곳은 멕시코 포도주의 90%를 생산하며 멕시코의 명주 티킬라도 만든다. 마침 우리가 도착한 날이 프랑스의 전통적 봄 축제인 마디 그라스 (Mardi Gras) 행사 날이어서 시내를 온통 막아놓고 퍼레이드가 113

114 한창이었다. 일전에 뉴 올리언스에서 본 축제처럼 이 축제에서도 젊은이들이 멋지게 장식한 차 위에서 라틴 음악에 맞춰 흥겹게 춤추고 있었다. 우리는 축제 모습을 한참 동안 보고 즐겼다. 일행 중 여자들이 근처 폭포를 보러 간 사이, 남자들은 오랜만에 한가로이 길가 음식점에 앉았다. 우리는 해방된 기분으로 멕시코의 코로나 맥주와 전통 음식을 먹었다. 보름 동안의 유람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이번도 재미있고 보람된 여행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114

115 10. 남태평양 절경의 타히티 작년 10 월에 예약한 남태평양 여행을 5 개월 후인 2015 년 2 월 5 일 출발했다 년에 개봉한 남태평양 영화를 회상하며, 당시 무척 예쁘다고 기억되는 간호장교 미치 게이너의 사랑과 낭만을 회상 하면서, 우리 빌리지 여행객들이 이 지역을 가 보자는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나왔지만, 여행비용이 너무 비싸고 어려워서 힘들게 준비된 여행이다. 설날 파티와 골프 행사를 제쳐놓고 떠나는 것이 아쉬웠지만, 겨울 기후의 남 가주 지역에서 한 여름 지역으로 간다고 생각하며 즐겁게 밤 11 시 비행기를 탔다. Air Tahiti Nui 비행기는 불란서국적 애어버스 기종으로 비교적 편한 8 시간 비행으로 타이티의 수도 파피티에 새벽 5 시 반에 도착하였다. 타히티를 찾아 온 말론 브란도, 리즈 테일러, 더스틴 호프만 등 115

116 할리우드 스타들을 비롯해 빌 게이츠 등 세계 유명인사들이 타히티의 아름다움에 반해 무인도를 사들이거나 멋진 휴가를 보냈다는 곳에 도착했다. 마피아 두목으로 분장하여 명성을 날린 말론 브란도는 이곳에 여행 와서 원주민과 결혼까지 했던 곳이라고 한다. 타히티와 주변 섬의 정식 명칭은 프랑스 령 폴리네시아이나, 일반적으로 타히티라고 한다. 타히티는 북부 마퀘사스 제도 가운데 소시에테 제도, 쯔아모쯔 제도 남부 오스트랄 제도와 동남부의 간비에 제도의 5 개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 각 제도는 화산, 폭포가 흐르는 미개의 숲, 청록색의 아름다운 산호초와 모래 비치 등,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지고 다양한 매력을 뽐내고 있다. 무인도 북한의 평양 비행장처럼 적은 비행장에서 입국수속을 마치고 바로 선착장으로 갔다. "Ia Ora na! (안녕하세요)," "Maeva! (어서 오세요)", 폴리네시아 주민은 이 처럼 대표적인 두 가지 타히티 말로 여행자를 따뜻하게 맞아 준다. 타히티의 여행객에 대한 환대는 그 관대함과 따뜻함으로 유명하고 이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느낄 수 있다. 기타와 우쿨렐레 연주와 노래로 마중하며, 타히티의 대표적인 꽃으로 만든 화관을 선물하기도 한다. 새벽에 선착장에 도착하니 다행히 짐을 첵크인 할 수 있어서 선착장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되는 파피티의 상가 중심으로 나갔다. 116

117 일직 연 식당 패티오에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몇 시간을 보냈다. 이곳 주민들은 세상에 알려진 대로 친절하고 정다운 사람들 같았다. 바로 옆에 있는 이 도시의 자랑거리인 노트르담 성당과 생선을 진열한 중아시장을 돌아보고 11 시에 승선을 했다. 파피티는 다섯 개 섬을 돌아보고 와서 이틀간을 더 보내게 된다. 유람선Ocean Princess 는 내가 타본 중에 제일 작은 3 만 톤급이며, 종업원 375 명에 손님 660 만 태우는 1999 년에 만든 바다 위의 호텔이다. 잔잔한 남태평양의 산호가 들어찬 섬 사이를 유람하기에 아주 편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크루스 일정은 타히티의 수도 파피티를 출발 첫 기항지는 우와이네이고, 다시 랑기오라를 거쳐 라이아테아, 그리고 보라 보라에서 하루를 쉬고 모오레아섬을 마지막으로 정박 하였다가, 가까운 수도로 다시 돌아오는 크루스 코스이다. 이 지역 내 118 개의 섬 중에 여섯 군데를 들리지만, 잠은 프린세스 배에서 자고 낮에는 이 지역 섬들을 체험하는 일정이다. 117

118 태평양의 남쪽에 자리를 잡고 있는 타히티 섬과 주변 섬은 지구상에 있는 가장 큰 제도이다. 면적으로 따지면 유럽 전역에 맞먹는 해역에 펼쳐져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비행기로 8 시간을 가는 거리이며, 유럽이나 동북 아세아에서도 그 정도 멀리 떨어져서, 관광지로는 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큰 매력이다. 사람들의 손으로 만든 고층 건물이나 다른 개발의 흔적이 드물다. 건물의 높이는 야자수 보다 높게 질 수 없다고 한다. 자연이 그대로 아름답게 보존 되어 있으며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안 문명의 자취를 체험 할 수 있는 멀면서도 아름다운 지역이다. 이번 여행의 특징은 첫날 하로 밤을 항해를 하지 않고 파피티에서 지낸다는 것이다. 열흘간의 여행 수속을 모두 마치고 다시 한 번 파피티 구경을 나가기는 힘들었고, 또 적은 섬 도시근처에는 별로 볼 것도 없어서 조용히 떠 있는 호텔에서 보내고 첫 만찬인 6 시에 지정된 테이블에 앉았다. 크루스 여행 중에 제일 좋은 것은 매일 저녁 고급 만찬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젊은 여행객들은 118

119 이런 기회에 파피티의 밤의 향응 을 위하여 나간 듯 예정된 테이블이 많이 비어 있는 듯했다. 호화선에서 첫날 밤을 지내고 아침 일직이 일어나 배 위에 있는 트랙을 돌았다. 배가 적다보니 트랙이 100 미터 정도 되는듯 한번 도는데 약 160 보 되는 트랙을 열 번이상 돌고 푸짐한 아침식사를 마쳤다. 어제 돌아 본 파피티 시내관광중 몇 군데를 다시가서 사진을 찍었다. 예정대로 저녁 5 시 파피티를 떠나서 다음날 아침 8 시에 우아이네 섬 근처에 배를 정박하고 구조용 보트를 타고 선착장에 내렸다. 우아이네 (Huahine) 우아이네 섬 입구 아름다운 폴리네시안 정취가 가장 뛰어난 곳이 우아이네 섬이다. 큰 섬 작은 섬 두개를 다리로 연결하여 자연 그대로 보존된 이 섬에는 안쪽으로는 열대 정글이 있고 흰 모래사장과 크리스털처럼 맑게 보이는 라군으로 엮어진 우아이네는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신혼 여행지로 알려져 있다. 119

120 두 섬 사이의 적은 섬에 있는 Maroe 밖에 정박하고 부두 시설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선착장에서 크루스 회사가 $99 를 받고 돌아 보는 투어버스에 탔다. 처음 들린 곳은 바닐라를 재배하는 곳이었고, 다음으로 이곳의 하이라이트인 폴리네시안 원주민의 신전 마레 (Marae) 역사를 돌아 볼 수 있는 지역으로 갔다. 옛날의 신전은 다 없어지고 그 자취만이 남은 곳에서 우리는 기념 촬영을 하고 그 옆에 있는 이곳 추장의 집 Fare Potee를 돌아보았다. 본래의 400 년 된 Fare Potee는 태풍으로 다 쓸려 나간 것을 1998 년에 다시 지어서 이제는 그 내부에 이곳 원주민의 자취를 보존하는 박물관처럼 차려놓고 관광객을 불러 드린다. 마레아 신전이 있었던 유적 길가에서 볼 수 있는 이곳 원주민이 물고기를 유인하던 돌로 만든 시설을 보고, 또 새까만 진주를 양식하는 어장에 들려보았다. 다시 큰 섬에서 나오는 지점 Faie의 적은 개울에서 푸른 눈의 장어를 보았다. 이 장어는 이곳 원주민의 전설이 실려 있다. 폴리네시안 전설에 의하면, 첫 장어(Eel)는 산을 넘어 와서 이곳 처녀와 결혼하였고, 이곳 원주민은 이들의 후손이라고 한다. 한국 역사 전설에서 백두산의 곰과 호랑이 이야기처럼 남태평양 원주민들의 장어 전설은 우리에게는 잘 이해가 안 되지만 이곳 120

121 원주민들은 이 장어들을 먹지도 않고 잘 모신다. 타히티에는 나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폴리네시아 인 외에 유럽인, 19 세기에 이민 온 중국 이주민들이 살고 있으며, 다민족이 공생하고 있다. 다양한 민족이 섞여 섬 본연의 정체성과 현대의 폴리네시안 문화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박물관이 된 Fare Potee 청록색 산호 호수(lagoon), 하얗게 빛나는 모래 해변이 끝없이 펼쳐지는 섬. 깜빡 속아 넘어갈 것만 같은 환상적인 세계가 펼쳐지는 타히티는 연인과의 낭만적 인 여행지로 가장 이상적인 곳이어서 신혼 여행지로 최상이다. 이 곳에는 결혼신고를 하고 사는 주민이 20 % 정도뿐이 안되는 곳이고 남녀교제가 상당히 개방되어서, 외국인들이 이곳에서 결혼식 올리는 것을 금지하다가, 2009 년부터 외국인도 이곳에서 혼인이 가능해 져졌다. 서울이나 미국에서 비싼 결혼비용을 쓰는 것보다 이곳으로 와서 결혼식을 올리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한다. 스노클을 하면서. 돌고래는 물론 세계 최대의 쥐가오리, 바다거북, 바라쿠다 등 놀랍게 거대한 물고기도 볼 수 있었다. 다이버들에게 절대적인 인기를 자랑하는 스타적인 존재는 물지 않는 착한 121

122 상어와의 만남, 섬의 모든 곳에서 체험해 볼 수 있다. 최고의 다이빙을 즐길 수 있는 쯔아모쯔 제도, 특히 우리가 다음으로 가는 랑기로아 섬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다이빙의 메카이다. 다음 정착지는 랑기오라 섬은 이번 여행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으로 36 시간을 가야하니 배에서 하로 낮과 두 밤을 보낸다. 유람선을 돌아가며 가는 곳 역사 강의를 하는 강사는 Pearson이다. 그가 말해주는 원주민의 종교요 사회 질서를 정해준 Marae 역사가 감명 깊었다. 피어선의 강의에 의하면, 무수한 별처럼 흩어진 타히티와 섬의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경제, 정치, 대도시의 번잡함에서 벗어난 거리라고 한다. 보호된 자연 환경과 폴리네시아 전통, 다양한 풍경, 레스토랑과 호텔 서비스. 이러한 좋은 조건을 갖춘 관광지를 잘 왔다고 환영한다. 랑기오라 섬 입구 랑기로아 랑기로아는 산호 암초와 수많은 적은 산호 섬, 그리고 이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MOTU 라고 하는 식물이 서식하는 산호 암초 등으로 둥글게 만들어진 커다란 바닷가의 호수 (Atoll)로서 세상에 제일 122

123 크다는 곳이다. 산호섬에서 포도주가 나온다고 하면 믿지 못하지만 이곳에는 포도 재배가 가능하고 포도주를 만든다. 물론 값은 비싸다고 한다. 포도나무는 염분이 있는 바다 물로 자라지만 사람 살기는 힘든 곳이다. 물을 멀리 떨어진 섬에서 가져오거나 아니면 빗물을 받아서 쓰는 곳으로 인구가 700 명 정도라고 한다. 이곳 주민들은 관광객을 위한 보트 택시서비스에 종사한다고 한다. 이곳의 산업으로는 포도주 생산 과 여러 가지 자연 칼라를 자랑하는 진주를 양식하는 양식장이 30 곳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고기잡이 특히 새우를 많이 잡아서 타 지역으로 파는 것이 큰 산업이다. 해변을 돌면서 색갈이 찬란한 열대어를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바닷고기를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랑기로아에는 신혼여행으로 최상이라는 Kia Ora 수상 호텔이 있다. 일박에 약 $1,000 정도라고 하며 그 근처에는 파라다이스라고 자랑하는 값이 저렴한 숙박 시설도 있다. 문제는 이곳을 오려면 상당히 멀고 어렵고 비싼 여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며 신혼여행 일주일 패키지로 약 $34,000 라고 한다. 산호 섬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호수 123

124 라이아티아 라이아티아 섬은 이 제도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며 고대 폴리네시아 문명의 중심지이고 또 종교의식의 행사를 했던 성지로 알려져 있다 년도 발굴로 Opoa에 있는 Marae Taputapuatea 에서 사람을 제물로 바친 수천 개의 유골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이곳 전설에 의하면 Oro라고 하는 전쟁과 출산의 신이 이섬의 북쪽 Tameani 산 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곳의 원주민은 문명의 새로운 기구를 모르고 살다가 관광객들이 몰려와서 그들의 전통이나 생활방식의 혼란을 가져 오는듯하다. 상당히 원시적인 주거환경에 애어컨디션이 없어도 더우면 언제나 바다에 들어가고, 배가 고프면 흔한 과일이 즐비하여 그들의 전통적인 방법으로 잘 살았는데, 고급 자동차가 들어오고 서양의 문물과 돈 이 이들을 혼란 시키는듯하다. 원주민들의 어린 아이들로 된 전통적인 춤 공연을 보면서, 박수 124

125 갈채를 보냈지만, 어쩌면 우리가 잔인스럽게 이들의 생활을 침범 하는듯하다. 총기와 거창한 복장을 한 경찰도 필요 없고 심지어 결혼 신고조차 필요 없던 이들에게 경쟁과 투쟁의 새로운 질서를 우리가 강요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라이아티아 섬의 입구 자연이 그대로 보존된 라이아티아 섬은 문명으로부터 침범이 늦었다. 이곳에서 뺏어 갈 자원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돈이 되는 흑진주도 자연 생이 아니고 1960 년대에 일본사람들이 개발한 양식 법을 이용한다. 값이 나가지만 생산수단이 오래 걸리고 별로 상업적인 대량생산 방법이 없다. 관광산업을 개발하기도 개발된 도시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아톨(Atoll)이라는 아름다운 산호로 둘러 싸인 섬과 한 발자국도 들어 갈수 없는 원시림이 가득한 높은 산과 땅에 떨어져 굴러다니는 열대 과일을 즐기며 잘 살던 이들이 관광객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하고 혼자 깊은 생각에 잠기며 3 시간 반 동안의 섬 일대를 돌아보았다. 125

126 Ocean Princess유람선은 우투로아(Uturoa) 항구에 정박하였다. 인구가 12,000 정도로 타이티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며, 이 섬은 랑기로아와는 달리, 농사를 짔고 가축을 길을 수 있는 비옥한 땅이라고 한다. 보라보라 보라보라 섬은 라이아티아 섬에서 멀리 보이는 지점에 있으며, 아침 해가 뜬 후에 출항하여 아침 열 시경에 섬 선착장 앞에 정박하였다. 태평양의 진주라는 별칭으로도 불리고, 영화 허리케인을 촬영했던 곳으로 널리 알려져서 큰 기대를 가지고 왔었는데 오자마자 장대같은 비가 내렸다. 이날이 금요일이고 13 일이라고 안내인이 웃으며 반겨준 인사였다. 보라보라 섬의 주택들 우리가 예약한 이 섬을 돌아보는 프로그램은 8 시 반 부터였는데 한 시간을 지체하다가 비가 오는데도 계획의 변함없이 섬을 한 바퀴 126

127 도는 22 마일 해변도로를 돌았다. 바다 전체가 수백만 년 동안 만들어진 산호로 이루어져 바다 빛깔이 시시각각 변하는 이 섬은 너무나 맑고 깨끗한 자연으로 인해 하늘빛이 그대로 바다에 투영되어 석양은 노랑과 주황, 붉음이 교차하는 황홀한 노을을 만들어내는 마법 같은 곳이라고 투어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으나 비가 내리는 바다는 별다른 감명을 주지 못했다. 섬을 돌면서 Bloody Mary Restaurant에 들려서 이곳을 다녀간 유명인사들의 이름을 보고 그 유명하다는 칵테일 한 잔을 마시지 못했다. 별로 볼 것도 없는 식당에 관광객만 가득 차있고, 셔츠와 모자 등을 사는 사람들의 줄만 길었다. 원주민 소년들의 춤 Tupuna 산을 가운데 두고 두세 채의 집들로 이루어진 작은 마을과 리조트호텔들이 해변을 따라 줄지어 있는 코스를 돌면서 이곳 주민들의 생활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이제까지 본 타이티의 다른 127

128 섬들과는 뚜렷하게 자연스럽지도 못하고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면서 서양문물에 젖어있는 모습이다. 어쩌면 세계 2 차 대전 때 미군이 비행장을 만들고 태평양 전쟁 보급요새를 만든 것이 이곳 주민들의 문화를 바꾸어 놓은듯하다. 이 섬에는 집집마다 폐차 되었거나 폐차 직전의 자동차가 있으며, 구석구석에 쓰레기가 쌓여 있다. 마론 브란도가 살았다는 수상 콘도를 보면서 이곳에서 돈만 있으면 아무 생각 없이 태양 아래 뒹굴며 살갗을 태우거나 방갈로 한쪽에서 책을 읽으며 지구상에서 가장 멋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되었다. 여행 안내인의 설명에 의하면 수상 방갈로는 이곳에서 처음 짖기 시작 했으며, 지금도 좋은 호텔이나 콘도는 수상 방갈로식으로 되어있다. 냉방 시설과 호화로운 가구로 갖추어졌다고 하며 하루에 약 $1,000 정도라고 한다. 말론 브란도가 살았다는 콘도 128

129 첫날 프린세스에서 주선한 보라보라 섬 일주관광은 크게 실망 적이었다. $99 식이나 받으면서 트럭으로 만든 간이 버스를 타고 볼 것 없는 상점이나 식당에 들려서 지루하게 마쳤는데, 다음날 부두에서 개인 여행사에서는 $30 를 달라고 한다. 다음날은 천만 다행으로 세 명의 가족이 운영하는 보트여행 안내인을 만나서 이 섬 주변을 보트로 네 시간동안 구경 할 수 있었다. 40 년 경험을 갖은 60 세 선장은 섬 앞 바다의 물고기, 특히 핑크색의 석자정도 되는 큰 상어와 쥐가오리들이 친구처럼 쫓아다니는 지점에 배를 세우고 스노클을 쓰고 함께 놀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 꿈만 같았다. 또 다른 지점에 가니 바다가 짙은 하늘색이고 그 안에 온갖 열대어가 우리가 주는 빵을 먹으려 몰려오는 장관을 바다 물속에서 체험 할 수 있었다. 손에 잡힐 듯 몰려오는 총천연색의 열대어와 같이 놀면서, 세상에 이런 신기한 일도 있다고 감탄하였다. 상어와 쥐가오리와 함께 힐톤 호텔과 보라보라 호텔의 수상 방갈로를 가까이 접근하여 보면서 천 달러가 넘는 호텔이 여름에는 예약이 힘들고 근래에는 중국관광객이 많이 몰려온다고 한다. 배에 돌아오니 프린세스에서 주선한 스노클 팩케이지 보다 두 배 이상을 체험하고 값도 반 정도였다는 것을 알았다. 129

130 보라보라 섬에서 바렌타인 날을 맞는 2 월 14 일을 보내고 축제 저녁만찬을 갖았다. 모두 정장을 하고 바다가재 요리로 훌륭한 만찬을 대접받고, 연인의 날 바렌타인 날을 보냈다. 전설에 의하면, St. Valentine 은 3 세기의 전설적인 인물로서 당시 로마의 크라디우스 2 세의 금지명령에도 불구하고 젊은 군인들의 결혼을 주례하는 것을 계속하다가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2 월 14 일에 처형되는 날까지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from your Valentine"이라고 서명한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제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을 표하는 날로 되었고 초콜릿을 선사하는 풍습이 있다. 모오레아 (Moorea) 파인애플 농장으로 덮인 울창한 산비탈과 수정 같은 라군, 현무암 바닥을 뚫고 솟아 오른 화산 봉우리, 쿡만과 오푸노후만의 잔잔한 바다에 투영된 모오레아 섬의 아름다움은 글로서 표현 할 재주가 없다. 길가에서 과일을 파는 소녀들 이번 여행의 마지막 날 우리 일행은 Ocean Princess에서 알선하는 투어 패키지를 택하지 않고 나가서 개인 자영업자 투어를 저렴한 $60 을 주고 아침 아홉시 반부터 오후 3 시까지 아주 보람찬 투어를 해주었다. 20 인승 400 마력 고속정으로 모오레아 섬 주변을 보고 중간지점에서 스노클도 하고 점심에는 공원 같은 무인도 섬에서 나무불을 피워놓고 그들이 기르는 토종닭 바비큐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상상도 못 할 만큼 좋았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맥주는 하이네껜 맥주와 비슷한 맛을 가졌는데 모닥불에 구운 닭고기와 130

131 너무 잘 어울렸다. 이 섬은 쿡만과 오푸노후만이 내륙 깊숙한 곳까지 파고 들어가 마치 날개를 펼친 박쥐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데, 해안을 따라 약 60 km 길이 일주도로가 놓여 있다. 섬에는 수백만 년 전 화산 활동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고갱은 그의 저서 노아노아 에 고성 같은 섬이라고 표현해 놓았다. 또한 제임스 미체너 원작 로건 감독이 영화화한 남태평양을 통해 신비한 섬인 발리 하이로 그려졌던 섬이다. 자매 섬이란 애칭으로 불리는 모오레아섬의 주민들은 모두 타고난 예술가들이다. 모오레아섬에는 화가나 도예가 등 많은 예술가가 생활하고 있으며 어린아이들도 타히티 전통무용을 추며 우쿨렐레를 연주한다. 모오레아 섬에서 마지막 풀코스 만찬을 갖는 시간에 여행을 마치며 은퇴요건을 토론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역시 건강이다 년에 라구나 우즈 빌리지 조사결과를 은퇴 없는 은퇴(장원호: PageOne출판, 2008:ISBN ) 책에 발표한바 있지만 건강이 은퇴인 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우리 모두가 동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남녀 간에 이견이 있다. 남자들에게는 배우자이고 여자들에게는 돈이라고 한다. 70 이 넘은 남자들은 부인을 국보급 존재로 잘 모셔야 한다고 하는 반면, 여자들은 늙은 남편을 하로 세끼 찾아 먹는 삼식 이라고 구박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남자에게도 돈이 중요하다. 돈이 있으면 각자 취미생활을 찾아보고 또 세상에 못 가본 곳에 여행이라도 같이 할 수 있지만, 경제적 여유가 없는 남녀 은퇴인 에게는 짜증만 나는 생활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취미생활이고 다섯 번째는 가까운 친구들 이렇게 네 가지 은퇴인의 요건이 은퇴인들이 바라는 것이라고, 이번 여행을 같이 하게 된 우리 빌리지 일곱 가정 14 명이 동의하면서, 이런 이유로 라구나 우드로 이사 왔다고 했다. 131

132 은퇴인에게 건강이 있으면, 골프가 절대 요건이라고 한 분이 강조한다. 골프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좋은 운동도 되고 취미가 비슷한 친구들의 모임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처럼 공동목욕탕은 없어도, 골프를 마치고 클럽하우스에서 오징어튀김에 맥주 한잔은 정말로 귀한 행사이기도 하다. 모오레아 섬에서는 밤 8 시에 파피티 종착부두로 떠났다. 가까운 거리여서 우리는 호화선에서 마지막 밤은 파피티에 보냈다. 고갱 기념관 파피티에서 보고 싶은 첫째는 고갱 기념관이다. 소박한 원시생활에 매료되어 타히티로 이주해 온 후기 인상파의 거장 폴 고갱을 만나고 싶다면 이 곳을 찾으면 된다고 알고 왔다. 그러나 기념관 정문은 굳게 잠겨있고, 기념관 앞들에서는 이곳 주민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진품은 없지만 복제품과 그의 생애를 소개한 패널이 전시되어 있고, 또 마키저스제도의 히바오아 섬에서 최후까지 사용했던 아틀리에를 132

133 재현해 놓고 있다고 안내원이 설명하면서 언제 다시 열는지는 모른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깝고 아쉬운 일이다. 문이 닫힌 고갱 기념관 서구적인 전통을 외면한 채 문명 이전의 인간 근원으로 돌아가 진실한 표현에 도달하고자 했던 후기 인상주의 화가 고갱. 그의 광기어린 삶과 원색의 강렬한 색채로 타히티의 순수한 몸짓을 화폭에 옮겨 담은 그림은 현대 화가들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는 신화로 남아 있다. 타히티를 관광하며 그가 남긴 예술적 체취를 따라가 보는 것도 오랫동안 추억으로 남을 문화체험이었다. 프랑스의 오랜 지배 탓에 시설 등은 서구화되었지만 천혜의 자연과 타히티 주민들의 순수함은 고갱이 백 년 전에 화폭에 옮겼던 그대로이다. 어떤 위치에서든 건물로 인해 경관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타히티 전역에서는 높은 건물을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노력들이 타히티를 세계적인 관광지로 명성을 유지하게 하는 요소들이다. 133

134 11. 금혼 축하 알라스카 누가 세월을 유수 같다고 했던가? 우리는 2012 년 5 월 6 일에 결혼 50 주년인 금혼을 자축했다. 큰 아이 혜경이가 두 남동생 가족을 밴쿠버로 불러 식구가 한 자리에 모였다. 내 아이들은 자녀들이 학교를 안 가는 방학인 8 월 12 일에 떠나는 알라스카 크루즈 여행을 5 월에 미리 예약해뒀다. 아이들 세부부와 4 명의 손자, 그리고 1 명의 손녀를 더하면 11 명, 그리고 우리 부부까지 합치면 모두 13 명에 이르는 대형 단체였다. 우리는 Celebrity 크루즈를 예약했으나, 제일 큰 손자 벤이 대학 입학 예비고사가 겹쳐서 빠지는 바람에 최종 여행인원은 12 명이 되어, 1 주일간을 가족이 같이 보내게 되었다. 갑판 위에 모인 가족 큰 아들은 서울에서 외국 기업 사업담당 국제 변호사로 일하고 있어 가족과 함께 서울에 살고 있다. 둘째 아들 내외는 보스톤과 그 134

135 근교에서 부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우리는 캘리포니아 남단에 살고 있으니, 13 명 모두가 함께 모인다는 것은 군사 이동 작전만큼 어려웠다. 특히 이제 세 살 된 손자 도빈이와 손녀 하은이는 비행기와 배 멀미를 하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여행 내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캐나다 벤쿠버 혜경이 집에서 13 명이 법석을 떨다가 배에 올라 각 가족 방을 정하고 난 뒤 식당에 모이니, 딴 세상에 온 듯 모두가 자유를 느꼈고, 즐거운 1 주일이 이렇게 시작됐다. 도빈이와 하은이의 재롱은 너무 귀여워서, 우리는 서로 먼저 안으려고 경쟁했고, 사춘기 고등학생 에릭은 벌써 친구들을 사귀어 저녁 식사 시간 이외는 만나기도 힘들었다. 크루즈 유람선은 밴쿠버의 유람선 선착장을 서서히 떠나 사자다리 (Lion Gate) 밑을 거쳐 서쪽 밴쿠버로 나갔다. 아름다운 도시 밴쿠버가 오후의 따가운 햇볕을 받아 더욱 빛났다. 우리 모두는 이 크고 예쁜 밴쿠버에서 시청 도시 기획관으로 일을 시작하게 된 혜경이를 다시 축하해 주었다. 크루즈에서는 저녁 식사 때마다 손님들이 정해진 테이블에 앉으면, 정해진 웨이터와 조수가 격식을 차려 식사를 대령했다. 우리는 고급 포도주를 비싸게 사서 마셨고, 식사 후 디저트를 들면서는 온갖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첫날 저녁 식사 때, 15 세 에릭이 나에게 나의 고등학교 시절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한참 망설이다가, 나는 정치인으로 크게 성공하여 세계 평화에 기여하고, 조국의 번영에 기여하고 싶어서, 대학 전공으로 정치학을 택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에 유학 와서 언론학으로 전공을 바꿔서 박사 학위를 받아 교수가 되었고, 그래서 내 직업은 언론학 교수였으며, 큰 학자는 못 되었어도, 자랑스런 교육자였다고 대답 했다. 에릭은 다시 내게 물었다. 젊었을 때 가장 어려웠던 일이 무엇이었느냐고. 나는 서슴지 않고, 29 세 때 자녀가 둘이나 되는 가장으로서 미국 유학을 온 것이며, 어려운 미국 학사, 석사, 그리고 박사 학위를 6 년 만에 마친 난관을 최선을 다해 극복한 것이라고 135

136 이야기 하니, 에릭은 쉽게 수긍이 안 되는 듯한 표정을 보였다. 이 항해는 배가 태평양으로 많이 나가지 않고 북미 대륙을 오른쪽에 끼고 북쪽으로 올라가는 코스였다. 해변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항로를 약 20 노트 정도로 서서히 움직이는 호화 유람선은 바다가 잔잔해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태평양 바다 위에 떠서 움직이는 이 호화 호텔은 울창한 산림으로 꽉 찬 캐나다의 태평양 쪽 절경을 보여 주며 고급 요리와 즐거운 연예 프로그램을 제공해서 우리들을 즐겁게 했다. 매일 정식코스로 잘 차려진 저녁 식사를 할 때마다, 나는 알라스카에 관하여 그 동안 조사 연구한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 주었다. 이 거대하고 전략적인 알라스카를 1867 년 3 월 30 일에 미국이 러시아로부터 720 만 달러, 한화로 약 75 억을 주고 샀다는 역사적인 사실에 아이들은 정말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1 에이커(약 1,300 평)를 2 센트에 샀다는 것인데, 요즘 돈 가치로 당시 금액은 약 1 억 2,000 만 달러 정도라고 하며, 이 금액으로는 보잉 747 여객기 1 대도 못 산다고 한다. 더구나, 2 차대전이 끝나고 소련과 미국이 냉전 체제를 오래 유지했고, 지금도 러시아나 중국과 맞서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알라스카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전략적으로 그 가치는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다. 알라스카는 미국이 사들인 이후 여러 번의 행정 절차를 거쳐서 1912 년에 자치령이 되었고 1959 년에 미 연방의 한 주가 되었다. 21 세기에 와서는 이곳에서 엄청난 양의 원유가 나와 알라스카 주민은 세금도 내지 않으며, 매년 보상금을 받는다. 갑자기 알라스카는 부자 주가 된 것이다. 밴쿠버를 떠난 지 사흘 째 되던 날 오후 3 시에 크루즈는 만년설과 빙하의 계곡인 Icy Strait Point 에 다달아 밤 10 시까지 그 주변을 아주 천천히 항해했다. 다음 날 아침에는 배가 이번 크루즈 여행의 최대 명소인 허바드(hubbard) 빙하 바로 앞까지 가서 장장 4 시간 동안을 그 주변에서 서서히 돌면서 여러 방향에서 빙하의 장관을 보여 주었다. 136

137 허바드 빙하 허바드 빙하는 동쪽 미국령 알라스카와 캐나다령의 일부로 조성돼 있다. 이 빙하는 2002 년에 길버트 포인트(Gilbert Point)까지 떠내려와서 거의 호수를 하나 만들 뻔하였다. 이 허바드 빙하의 길이는 약 120km나 되고, 빙하 안에는 높이 3,500m의 월시 산(Mt. Walsh)이 있고, 거기서부터 약 8km를 물이 흘러 바다에 닿는다고 한다. 허바드 빙하는 지난 100 년간 바다 쪽으로 이동하고 있는데, 지구 온난화로 그 속도가 좀 빨라지고 있다고 걱정하는 학자들이 많다고 한다 년에 이 빙하는 러셀포드 계곡을 막아서 러셀 호수를 만들었다가 3 개월 후에 다시 부서져 바다로 나갔는데, 당시 빙하가 만들었다가 사라진 폭포가 나이아가라 폭포의 35 배 정도였다고 하니, 자연의 무서운 힘에 놀라울 뿐이다. 빙하가 바다까지 흘러내려와 깨지는데는 400 년이 걸린다고 하니, 바다에 떠 있는 얼음 덩어리는 최소한 400 년 전에 생성된 것들이고, 그 중에는 크기가 10 층짜리 건물만한 것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큰 얼음 덩어리는 대부분이 물 속에 잠겨 있고 작은 윗부분만 보이기 때문에, 우리가 타고 있는 유람선은 아주 조심스럽게 얼음 덩어리 사이를 움직인다고 선장이 알려주었다. 허바드 빙하를 뒤로 두고 남쪽으로 내려오는 항로에도 많은 얼음 덩어리들이 떠 있었다. 밤새도록 항해한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알라스카의 수도 주노 항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는 알라스카의 137

138 38 개 빙하 중 하나인 멘덴헐 (Mendenhall) 빙하가 있었고, 우리는 바로 그 앞까지 가서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멘덴헐 빙하는 약 5000 평방 마일의 크기에 얼음, 바위, 그리고 만년설이 덮인 장엄한 빙하다. 이 빙하 바로 앞에는 빙하가 중력에 의하여 조금씩 흘러내려와서 녹은 멘덴헐 호수가 있으며, 흘러내린 어름 덩어리는 최소 200 년이 된 것들이라고 한다. 이 지역은 미국 연방정부가 관리하는 국립공원지역으로 개발돼 관광객을 부르고 있었다. 주노 항은 넓은 면적을 갖은 섬 도시로서 알라스카 본토 육지에서 자동차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비행기나 배를 타야만 갈 수 있다. 주노에는 개인이 개발한 수목원이 있는데, 입장료를 내고 들어 가면, 이 지역의 특이한 꽃과 나무를 볼 수 있다. 이번 크루즈의 마지막 항구는 켓치칸 (Ketchikan) 이었다. 이 항구는 알라스카 남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광산과 어업으로 크게 개발되어 제법 큰 비행장도 있고 여기에는 여러 항공사가 서비스하는 도시라고 한다. 항구 켓치칸에는 알라스카로 오는 모든 크루즈 배가 정박한다. 하루에 크루즈 배 5 척이 정박하는데, 1 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항구로 들어와 북적거리고, 시내의 상점들도 관광객들로 제법 재미를 본다. 우리는 연어포 (Salmon Jerky)가 맛있어 보여 샀는데, 값은 결코 우리 지역보다 싸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일행 중 한 팀은 시내 구경을 하러 나갔고, 나와 큰 아들 철준이, 그리고 사위 데이비드 세 명은 예약해놓은 연어와 광어 낚시 배를 탔다. 낚시 배는 네 시간 동안 켓치칸 근처의 좋은 낚시터로 우리를 안내해 주었는데, 우리는 광어를 잡지 못했으나 1~3kg 정도 크기의 연어는 여러 마리 잡았다. 약속된 낚싯배 임대 시간인 네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유람선으로 돌아 갈 준비를 하던 중, 철준이가 10kg에 가까운 왕 연어 (King Salmon)를 낚았다. 그 거대한 연어를 끌어 올리는데 10 분 이상 걸렸고, 30 년 낚시 관광업을 했다는 선장이 도와주어 겨우 끌어 138

139 올릴 수 있었다. 철준이는 대단히 흥분했으며, 옆에서 보던 데이비드와 나도 놀랐다. 선장은 큰 연어를 잡을 수 있다고 선전하며 손님들을 유혹하여 배에 태우고 바다로 나오지만, 실제로 이런 큰 연어를 잡기는 아주 드문 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연어를 배로 가지고 갈 수는 없었고, 선장은 연어를 포장해서 우리 집으로 부쳐줄 수 있다고 했지만, 비용이 만만찮아서, 우리는 그 연어를 선장에게 선물하고 말았다. 철준이가 잡은 왕 연어 켓치칸을 떠나, 밴쿠바로 오는 항해 중에 우리 가족은 모두들 지난 날의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아이들이 어렸을때 우리 부부는 언쟁이 자잤는데, 막내가 웃으며 우리 부부가 50 년을 같이 살아 온 비결이 무어냐고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서슴치 않고 나이가 들면서 다툴 일이 생기면 나는 무조건 내가 잘 못 했다고 이야기한 것이 바로 비결 이라고 답했더니, 아이들은 모두들 믿지 못하겠다고 했다. 139

140 그러나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이제는 나의 생활 태도는 분명히 내가 항상 지자는 것이다. 아예 집안 청소와 설거지는 내 담당이 됐다. 아직 요리는 내 담당이 아닌데, 아내가 주방에서 요리할 때 너무 많은 도구와 그릇을 사용한다고 나는 항상 불평한다. 이 사실은 우리 동네 지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일이다. 밴쿠버에 도착한 뒤, 우리는 이번 여행을 계획하고 모든 예약과 준비를 한 혜경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톡톡히 했다. 우리 부부는 이번 여행 비용을 아이들이 모두 부담해 주어 더욱 고마웠다. 아름다운 밴쿠버 시 혜경이는 이번 여행 중에 시청 도시 기획관으로서 수습 기간 6 개월을 마치고 정규직으로 승격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받았고, 우리는 또 한 번 축하 파티를 열었다. 우리가 가지고 간 조니워커 블루와 철준이가 비행기에서 산 고급 양주로 우리 가족은 축하 건배를 높이 들었다. 나는 이제 은퇴인으로서 내가 할 일은 정치, 사업, 교육이 아니라 가족과 친지를 아끼고 챙기며, 또 나의 건강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라고 아이들에게 설명하면서, 이번 여행은 아이들이 우리 부부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라고 거듭 감사해 마지않았다. 140

141 12. 아름다운 캐나다의 동북 쪽 은퇴를 하고 보니, 매일 아침 일어나면 매일 노는 날이라는 것이 아직도 새로웠다. 언제나 휴가를 갈 수 있지만, 은퇴하고 캘리 포니아로 이사와서 처음 맞는 이번 2004 년 여름에는 토론토로 바캉스를 가서 캐나다 동북부, 특히 퀘벡 시와 몬트리올을 두루 돌아봤다. 이번 여행은 손태염 장로 내외와 토론토 동서 내외, 그리고 우리 부부, 이렇게 세 가족이 작년 엘로우스톤 여행처럼 함께 다녀 보자고 오래 전에 세운 계획이었다 년 8 월 16 일: 우리가 사는 지역의 오렌지 카운티 비행장에서 뉴욕 주 버펄로까지 가는 비행기 요금은 편도에 99 달러였다. 도중에 라스베이거스에서 비행기를 갈아타야 했지만, 요즘 이만한 거리에 직행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낡은 737 보잉 비행기였지만, 값이 싼 이유는 Southwest Airline의 특수한 경영 전략 때문이기도 했다. 조종사를 제외하고는 모든 종업원이 캐주얼 차림이었고, 기내 승무원들도 반바지 바람이었다. 우리가 탄 비행기의 비행 시간은 6 시간 정도였는데, 오후 2 시에 출발해서 중간에 라스베이거스를 경유해서 가는 이 여행은 지루했지만 견딜 만했다. 더구나 내가 사는 LA 지역과 버팔로는 3 시간의 시차가 있어서, 우리가 버팔로에 도착한 것은 새벽 1 시 반이었다. 그 시각에 공항 까지 자동차로 우리를 데리러 온 처제와 동서에게 대단히 미안 했지만, 여기서 다시 토론토까지 비행기로 가려면 무려 500 달러 이상을 내야 했으니,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버팔로에서 토론토까지 거의 3 시간을 차로 달려 도착하니, 새벽 4 시가 넘었지만, 오는 도중 우리는 밀린 이야기로 지루한 줄 몰랐다. 18 일: 손태염 장로 내외가 뉴저지에서 자동차로 토론토에 도착했다. 손 장로 내외와 다시 여섯이 모이니, 우리들의 밀린 이야기가 끝이 없는 듯했다. 마침 이상 기온으로 아침 저녁에는 쌀쌀한 편이어서, 여름인데도 마치 가을을 맞은 듯했다. 두 분은 이미 칠순이 지났고, 나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우리 생애도 가을을 맞은 듯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어느 덧 우리의 봄과 여름도 가고, 이렇게 가을과 겨울을 생각하게 됐으니, 오랜 세월이 어느새 이렇게 빨리 가 141

142 버렸을까? 이제 남은 우리의 생애는 어떻게 보내야 할까? 상념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이런 19 일: 캐나다의 첫 수도는 나이아가라 폭포 옆에 있는 온타리오 호수 근처의 Niagara On the Lake" 이였다. 이 도시는 1812 년 미국과 캐나다의 전쟁에서 불타 버리고 다시 건설됐는데, 19 세기 건축 양식으로 잘 보존되어 캐나다 국립 역사 기념지로 지정되어 있다. 매년 8 월 하순에는 이곳에서 축제가 열리는데, 마침 이곳에 온 김에 우리도 축제 현장에 들려서 옛날을 회상하며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미국과 속된 전쟁에 지친 캐나다는 미국이 가까운 이 수도를 버리고 내륙 지역인 지금의 오타와로 수도를 옮겼다고 한다. 나이아가라 폭포 공원에서 김밥 피크닉 토론토 근처의 명물은 역시 나이아가라 폭포다. 나는 나이애가라 폭포를 여러 번 와 봤지만 계절마다 달라 보이는 이 자연의 위대한 작품은 갈 때마다 감명을 준다. 손 장로 부부는 처음 나이애가라 폭포에 왔다고 했다. 우리는 이 엄청난 자연의 위력 앞에서 사람들은 142

143 겸손함을 배워야 한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에 기꺼이 손 장로 부부와 같이 폭포 관광에 따라 나섰다. 나이애가라 폭포로 들어 가는 입구에는 미국으로 넘어 가는 다리가 있고 그 근처에 공원이 있다. 우리 일행은 그곳으로 들어가서 미리 준비해 온 김밥과 함께 피크닉을 벌였다. 음식도 맛 있고, 정담도 좋고, 그야말로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이곳의 또 하나의 명물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생산되는 아이스 와인이다. 아이스 와인은 포도를 가을에 수확하지 않고 두었다가 겨울철에 포도가 얼어버린 것으로 만든다고 한다. 아이스 와인은 일반 포도주보다 값이 비싸고, 얼어 있는 것은 한 병에 수 백 달러 짜리도 있었다. 나도 몇 번 마셔 보았으나, 대개는 그 맛이 좀 단 편이어서 여성들이 좋아한다고 한다. 나이아가라 폭포 나이아가라 폭포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 웅장한 자연의 위력을 직접 체험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1953 년에 만들어진 마릴린 몬로 주연의 영화 한 편 때문에 더욱 나이아가라를 잊지 143

144 못한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이 영화 나이아가라 를 봤는데, 마릴린 몬로의 섹시한 모습보다는 이 거대한 폭포가 더 감동적 이어서, 영화를 본 당시에 나는 죽기 전에 이 폭포를 꼭 한 번 보겠다고 굳게 다짐한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그 후에 정말 나는 이곳을 여러 번 찾아왔고 올 때마다 고등학교 시절의 결심을 떠올리며 감회가 깊었다. 영화 나이아가라 는 1950 년대를 그린 꿈같은 작품이었다. 한국전쟁 말기에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 미국의 사회상을 그리 썩 잘 묘사하지는 못했어도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나이아가라 폭포의 위대한 모습과 마릴린 몬로의 섹시한 몸만 기억할 뿐 그 영화 스토리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아무튼 영화 나이아가라 때문에 나이아가라 폭포는 유명해졌다. 알공킨으로 가는 길가의 공원에서 점심 20 일: 금요일 아침에 피크닉 준비를 하고, 우리는 이곳에서 두 시간 이상 북쪽으로 올라가 알공킨 공원을 찾았다. 그날은 단풍 시즌과는 한 달 정도 이른 시기였지만, 이 공원은 원래 호수와 단풍이 유명했다. 이 자연 공원에서는 아직도 여름 놀이인 카누와 카약을 144

145 즐기는 젊은이들과 아이들이 많았다. 우리는 방대한 공원의 호수 가에 자리를 잡고 숯불을 피워서 재워온 갈비와 양념으로 무친 낙지를 구워 먹었다. 그 맛과 정취는 우리 기억에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21 일: 우리는 토론토에서 마지막 코스로 시내 한 복판에 자리 잡은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센트럴 아일랜드로 갔다. 이곳은 여의도만한 크기의 섬으로 섬 자체가 온통 공원이며, 색이 고운 꽃으로 장식되어 있고, 어린이 놀이터, 그리고 수영할 수 있는 비치가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적어 텅텅 비어 있는 공원 여러 곳을 우리는 트레일러 차를 타고 안내원의 해설을 들으면서 둘러보았다. 관광 후 우리는 공원 벤치에 앉아서 맥주와 피자로 점심을 하고, 주변을 산책한 다음, 저녁때 섬을 나왔다. 저녁 식사를 위해 우리는 차이나 타운의 중국집으로 갔다. 이 중국집은 광고가 요란했는데 과연 광고대로 바닷가재를 중국된장을 넣고 볶은 요리가 일품이었다. 한 접시에 두 마리를 요리한 것을 먹는 데 27 달러 정도였는데, 우리는 이 요리 두 접시를 시키고 다른 몇 가지 요리를 추가로 주문해서 포식하고 집으로 돌아 왔다. 토론토는 외국인들이 비자 없이 여행이 가능하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 한인이 약 10 만 명 정도 산다고 한다. 중국인은 오래 전부터 이곳에 정착하여 현재 인구가 50 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중국인이 운영하는 중국집은 세계 어느 곳을 가도 장사가 잘 되는데 유독 한국에서는 대부분 쫓겨났다고 한국에서 중국집을 하다 미국 이나 캐나다로 온 중국인들은 대개 이런 푸념을 한국인들에게 늘어 놓게 마련이다. 22 일: 오늘은 주일이다. 우리 일행 모두는 한인 천주교에 미사를 보러 간다고 나섰다. 미사 후에는 한인들의 천주교인 모임인 밀알회가 주최하는 피크닉이 있는데, 나도 여기에 초청되어 일행과 함께 천주교회로 갔다. 밀알회에는 지인인 이형 내외가 회원이고, 이 모임의 다른 회원들과 우리 부부가 몇 년 전 푸엘토리코, 바하마를 비롯한 서인도 제도 6 개국을 순방한 크루즈에 동행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전혀 낯선 모임이 아니었다. 더구나 천주교 신도 회장에다 이 모임을 이끌고 가는 한 회장이 학교 145

146 후배여서 밀알회 회원들은 모두 만나면 반가운 형제 같은 사이이기도 했다. 우리는 회원 백 형이 준비해온 갈비와 꽁치를 공원에서 숯불을 피워놓고 구어 먹으니, 이처럼 언제나 즐겁고 낭만적인 자리는 없는 듯했다 년에 이곳에 와서 천주교회를 세우고 은퇴한 전설적인 고종욱 신부가 마침 이 피크닉에 참석해서, 나는 말로만 듣던 그분을 처음 만나게 되어 더욱 반가웠다 년생인 고 신부가 건강이 나빠서 휠체어를 타고 온 것을 보니 마음이 무거웠으나, 우리는 고 신부와 함께 기도하고 일행보다 먼저 집으로 돌아 왔다. 이 피크닉은 저녁 식사와 저녁 후 술 한 잔 모임까지 계획돼 있었으나, 우리는 내일 아침 2 박 3 일의 동북부 투어가 예약돼 있어 일찍 집에 돌아 와야 했다. 22 일: 로열 투어 회사는 처형의 큰 아들이 하는 회사다. 그 조카는 우리 여섯 명을 위하여 대형버스 앞자리를 잡아 주었다. 우리는 대형 버스 두 대가 가는 100 명 투어 그룹의 일부였다. 모두 한국인들 이었는데, 대부분이 서울에서 왔거나 캐나다로 연수온 젊은이들이고, 미국이나 캐나다에 사는 교포는 우리들뿐인 듯했다. 우리 부부는 이 패키지가 가는 몬트리올, 퀘벡시, 오타와, 그리고 1000 섬 지역을 오래 전에 가 본 적은 있으나 제대로 자세히 돌아보지는 못했다. 특히 이곳이 초행인 손 장로 내외와 함께 하는 여행이어서 기꺼이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첫날 우리 일행은 몬트리올 시로 갔는데, 4 시간 이상이 소요돼서 여행사가 제공하는 김밥 도시락을 휴게소에 들려 커피와 함께 맛있게 먹었다. 일행은 첫 관광지인 노트르담 성당에 도착했다. 노트르담 성당은 세계 여러 곳에 있지만 파리에 있는 것과 이곳 몬트리올에 있는 것이 제일 크고 유명하다고 한다. 나는 전에 몇 번 이 성당에 들렸으나 당시는 내부 수리 중이어서 자세히 보지 못했다. 이번에는 수리를 깨끗이 마치고 단장한 이 대성당을 볼 수 있었는데, 대신 약간의 입장료를 내야 들어 갈 수 있었다. 웅장한 성당의 유리창은 이곳 역사를 설명하는 내용으로 장식돼 있었고, 많은 성인 조각들은 그 정교함과 우아함에 관광객의 기를 눌러 버렸다. 이 성당의 파이프 오르간으로 1 년에 두 번씩 콘서트가 열린다는데, 그 명성은 널리 146

147 알려진 사실이다. 성당을 뒤로 하고 몇 부락 동쪽으로 가면 작크 카티에 광장이 있다. 그 주변에는 음식점이 늘어서 있고, 길 가운데는 초상화 그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 일행은 어느 식당에 들러 생맥주를 한 잔 마시고 성 요셉 성전으로 옮겼다. 프랑스 수도사 안드리우가 이곳에서 많은 병자를 고쳐 줬다는 이 기적의 성당은 우선 그 웅장한 크기와 넓은 면적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성 요셉 성전 성전에 들어서니, 현 교황이 성인으로 봉안한 안드리우 수도사의 시신을 모신 석관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 석관을 만지며 기도할 수 있었고, 성인의 심장은 따로 전시돼 있기도 했다. 성당 입구에는 수 백 수 천 개의 목발이 걸려있는데, 이는 목발에 의지하여 성당에 들어온 신도들이 병이 완치되어 걸어 나가면서 버린 것들이라고 한다. 이 거대한 성전을 신도들의 모금으로 50 년에 걸려 지었다고 한다. 제 23 일: 호텔에서 뷔페식으로 아침을 하고 우리는 바로 퀘벡시로 147

148 갔다. 가는 도중 몽모렌시 폭포에 들렀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고 온 후에 보는 이 조그마한 폭포에는 그 밑으로 세인트로렌스 강이 내려다 보였으며, 새로 개축된 다리 위를 건너서 폭포를 한 바퀴 돌아오는데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 관광객들은 운동 삼아 한 바퀴 돌아곤 했다. 프랑스인들이 제일 오래 점령했던 이 도시는 영국과의 전쟁, 그리고 미국과의 전쟁으로 지난 200 년 동안 파란 많은 역사를 간진한 도시다. 퀘백시는 세인트 로렌스 강을 끼고 펼쳐져 있으며 캐나다에서 제일 오래되고 아름다운 도시다. 나는 몇 년 전 이곳의 라발 대학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하러 온 적이 있어서 거리가 그리 낯설지 않았다. 우리는 한 이태리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바로 위쪽 동네로 가서 샤토 프랑티낙 호텔을 중심으로 펼쳐진 화가의 거리, 그리고 또 하나의 노틀담 성당을 돌아보았다. 그곳에서는 세인트 로렌스 강이 내려다보였고, 뒤에는 고색창연한 샤토 프랑티낙 호텔 광장이 있었다. 여기서는 몇 그룹의 연예인, 또는 음악가들이 돌아가며 공연 하고 관중들이 주는 돈을 받았다. 우리는 고색창연한 호텔 이층 라운지에 가서 세인트 로렌스강을 내려다보며 프랑스 와인 한 잔을 들고 오랫동안 마시다가 계단으로 한참 내려가서 아랫동네로 갔다. 강변에 세워진 이 마을 한 가운데는 로얄 광장이 있고, 루이 14 세 흉상이 서있었다. 프랑스 역사에서 지나치게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을 지었고 온갖 호화를 누려서 좋지 않은 평판을 가지고 있는 루이 14 세의 흉상이 아직도 건재하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서울에서는 제 1 공화국의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나 다른 대통령의 동상을 헐어 내리고 지나간 역사를 마음대로 파헤치는 가슴 아픈 사태가 일어나고 있다고 들었다. 역사는 시간이 가면 자연스레 진실이 밝혀지고 바로 잡히는 것인데, 현재의 정치인들이 역사를 따지는 것은 매우 무모하고 가슴 아픈 일이다. 이 동네에는 강을 따라 유럽에서 건너 온 선원과 여행객이 오랜 여행 뒤의 객고를 풀었다는 환락가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이제는 이곳이 148

149 모두 상가로 변했지만 옛날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했다. 마치 미국 루이지아나 주의 뉴올리언스의 프렌치 쿼터가 연상되었다. 이 환락가에서 취한 사람이 윗동네로 올라갔던 가파른 계단이 아직도 있었는데, 올라가다가 목이 부러진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 계단은 목 부러지는 층계 라고 불리고 있었다. 24 일: 아침 열 시에 시작하는 의장대 사열을 보기 위하여 우리는 캐나다 연방 정부 광장으로 달렸다. 많은 관광객으로 둘러 싸여서 진행되는 사열은 의장대 장병들이 기계처럼 움직이는 장관이었다. 오타와에는 초현대식 박물관이 있다. 이층에는 책에서만 본 귀한 15 세기 작품들이 수없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한 방에는 이 미술관에서 제일 값이 나간다는 피카소의 작품이 몇 개 걸려 있었고, 또 다른 방에는 헨리 무어의 조각품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래층에는 이곳 원주민의 작품과 유물들이 잘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는 다시 몬트리올로 갔다 년 올림픽 스타디움을 보고 다시 한국식당인 서락정에서 저녁을 먹었다. 내일은 여행의 마지막 날로 1000 섬 관광을 하게 돼 있었다. 올림픽 스타디움에는 마침 야구경기가 진행 중이어서 들어가지는 못했다. 캐나다는 이 웅장한 올림픽 시설물을 짓고 올림픽 이후에 큰 손해를 봤다고 한다. 그 빚을 갚는 데만 20 년 이상이 결렸다고 하는 이 경기장을 올림픽을 개최할 나라마다 올림픽 실패의 교훈을 얻기 위해 방문한다고 한다, 올림픽은 지금도 열리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지만, 나는 즐겨 보지 않는다. 국가 간의 화해와 친목을 증진하기 위하여 생긴 경기가 올림픽인데, 요즘은 지나친 경쟁으로 인해 마치 국가 간에 전쟁이라도 하는 듯하여 나는 올림픽 경기가 보기 싫어졌다. 그리고 지나친 상업성 때문에 똑바로 보기 민망한 연예 프로 같은 경기도 생겼고, 심판들의 주관으로 오판이 이어져서 이전투구하는 경기들이 많아져서, 올림픽 전체가 다시 정비됐으면 좋겠다. 2 주 동안 쓸 때 없는 낭비와 싸움의 잔치가 돼버린 올림픽은 이제는 진정한 스포츠가 아닌 듯하다. 이번 투어의 마지막 순서는 1000 섬(Thousand Islands)이 있는 세인트 로렌스 강으로 가서 주변의 절경을 한 시간 동안 배를 타고 149

150 돌아보는 것이었다. 정확히 몇 개의 섬이 있는지는 조사한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이 섬은 1000 개가 넘으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볼트 캐슬(Boldt Castle)에 대한 로맨틱하고 전설적인 이야기를 마음 깊이 생각하게 된다. 전설의 주인공 조지 볼트는 1860 년경에 제정 프러시아에서 캐나다로 이민을 와서 어려운 독학으로 학업을 마치고 뉴욕 어느 고속도로 근처의 호텔에서 근무하게 됐다. 갑자기 천둥번개와 폭우로 운전이 어려워지자, 이 호텔은 손님들이 몰려와 방이 다 차게 되었다. 그런데 노신사 내외가 이 호텔 문을 두드렸다. 빈방이 없었으나 착하고 순발력이 뛰어 난 조지 볼트는 방은 다 나갔으나, 제가 쓰는 방을 치워 드리겠으니 기다리십시오 하고 자기 방을 그 노 부부에게 드렸다. 비를 피하고 하루 밤을 지낸 이 노인 부부는 너무도 고마워 큰돈으로 조지 볼트에게 사례를 하려 했으나 그가 받지 않았다. 이 노인이 바로 뉴욕의 Waldorf-Astoria 호텔 주인이었다. 이 인연으로 조지 볼트는 월돌프 아스토리아로 자리를 옮겨 이 호텔과 필라델피아의 Bellevue-Stratford 호텔을 경영하며 호텔 왕이 되었다. 착한 마음과 뛰어난 순발력, 그리고 호텔 경영 기술력으로 조지볼트는 미국 호텔 역사상 가장 뛰어난 경영인이 되었다. 후에 그는 Louise라는 여인과 결혼했고, 이 두 사람의 사랑은 많은 젊은이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루이스는 병약하여 이 곳 1000 섬에 요양하는 것이 좋겠다고 희망하자, 조지 볼트는 사랑하는 아내를 위하여 지금의 볼트 캐슬을 지었다. 그것이 1904 년의 일이었다. 요양하는 아내를 위하여 특별히 조지 볼트가 보낸 주방장이 개발한 음식이 Thousand Islands 샐러드 드레싱 이다. 병약한 루이스가 끝내 오래 살지 못하고 죽자, 조지 볼트는 완성되지도 못한 성의 건축을 중지시키고 다시는 이곳을 방문하지 않았다고 한다. 방이 120 개나 되고 맨 위층에는 실내 수영장과 대리석 벽에 엘리베이터로 사방이 연결되어 있는 이 성은 그 후 1977 년까지 버려진 상태였다. 이곳 천 섬 교각 기구에서 1977 년에 인수하여 150

151 보수한 후 관광 명소로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볼트 캐슬에 와서 그들의 전설적인 사랑을 흠모하고 있다. 우리는 미국 쪽에 있는 이 섬에 내리지는 못하고 캐나다 배를 타고 주변을 한 바퀴 돌면서 낭만적인 이들의 사랑을 되새겨 보았다. 30 일: 우리는 아무런 골프 준비 없이 이곳 퀘백에 왔지만 골프를 한 번 안치고 갈 수는 없었다. Granite Ridge Club에 마침 예약할 수 있어서, 지인인 황 형 내외, 홍 형 내외와 함께 우리는 두 팀으로 나눠 한 홀에 2 달러짜리 스킨 게임을 했다. 원래는 게임비를 모아 점심을 먹자는 의도였으나, 나중에 모자라는 식사비를 황 형이 부담하여 고마웠다. 이 클럽은 한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곳으로 주중 멤버십이 1,500 달러 정도 한다. 예약한 골프 코스는 토론토에서는 서쪽으로 한 30 분 차로 가면 나오는 밀톤이라는 동네에 있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골프를 마치고 근처에 있는 맨다린이라는 중국 식당으로 갔다. 이곳은 한 10 달러 정도면 다양한 중국 요리를 마음 것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우리 일행은 몇 년 전 멕시코의 이스타파라는 곳과 캔쿤으로 골프 여행을 함께 간 적이 있어서 잘 아는 사이였지만 이렇게 모처럼 만나게 되니 이야기가 끝이 없었다. 그러나 내일 새벽에 내가 퀘백을 떠나야 해서 아쉬움을 남기며 헤어져야 했다. 31 일: 우리 부부는 새벽 3 시에 버팔로 비행장으로 출발하였다. 조카 세실리아가 차를 몰고 달리니 두 시간도 안 결려서 비행장에 도착했다. 아침 6 시 40 분 비행기 시간보다는 무려 두 시간이나 남았다. 우리는 간단히 아침을 하고 이곳을 떠나 볼티모어까지 한 시간 비행, 또 한 시간 기다려 다른 비행기로 갈아타고 애리조나의 페닉스에 들렸다가, 오렌지카운티 비행장에 도착하니 낮 12 시 30 분이었다. 무려 6 시간을 비행기로 여행한 셈이니, 서울에서 미국오는 시간만큼 걸렸다. 싼 비행기를 탔으니 오래 걸린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아무튼 우리 부부가 안전하게 집에 도착하니 마치 제 고향에 온 듯 마음이 푸근했다. 지인 조 박사 사모님이 비행장에 와서 우리를 태워주고, 또 그 집에 가서 점심까지 잘 얻어먹고 우리 집으로 돌아 와 짐을 풀며, 이번 여행을 마감했다. 151

152 13. 웅장하고 신비스런 미국의 서부 나는 평생 해보고 싶었던 여행을 위하여 2003 년 여름에 밴을 샀다. 인터넷으로 몇 달을 찾아보고, 일본회사 혼다가 만드는 2003 년도 형 오디세이라는 배기량 3 천 5 백, 7 인승을 구입한 것이다. 중간 의자는 떼어 낼 수도 있고 뒷줄 의자는 속으로 감춰지기도 하여 여행에 적절했다. 구입가는 3 만 달러. 미국에 40 여 년을 살면서도 교수로서 바쁜 생황을 하다 보니 이름 있는 관광지를 별로 가보지 못하였다. 출장은 많이 다녀도 호텔과 비행장을 보았을 뿐이다. 밴을 사자말자, 제일 가 보고 싶은 곳으로 산 바위에 미국 대통령 네 사람을 조각한 러시모아와 옐로우스톤 공원 그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브라이스 캐넌으로 돌아오는 여행을, 2003 년 8 월에 떠났다. 마침 시카고에 있는 손태염 장로 내외와 토론토의 이상수씨 내외가 함께 가기로 했다. 우리는 시카고로 모여서 구체적인 계획이나 예약이 없이 서부 행을 감행했다. 다행이 손형 내외가 오래 전에 가 본적이 있어서, 몇 개의 지도만을 가지고 떠나는 여행이었다. 부인네들은 김치, 반찬, 라면, 그리고 밥통까지 챙겨서 여행 중에 식사는 사먹지 않아도 될 만큼 준비를 했다. 그 점이 나는 좀 불만이었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시카고를 벗어나 Interstate 90 를 타고 북서부를 향해 출발했다 년 8 월 27 일 아침 9 시가 넘었을 때였다. 시카고 북부 외곽을 빠지자 곧 위스컨신 주로 들어섰다. I-90 은 위스컨신 대학이 있는 매디슨을 옆으로 끼고 4 시간쯤 갔을 때, 미네소타 주부터 내려오는 미시시피 강이 길가에 크게 보이는 라 크로스 (La Crosse)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이 휴게소는 강가의 정경이 너무 곱고 점심 먹기 좋도록 콘크리트 의자와 식탁이 여러 개 준비 되어 있었다. 아침에 떠날 때 만들어 온 김밥을 마치 국민학교 시절 소풍 간 기분으로 맛있게 먹었다. 처음부터 운전은 남자 세 명이 하기로 계획했지만, 끝도 없이 달리는 차 속에서 세 명의 여자는 무슨 이야기인지는 몰라도 끝이 없었다. 152

153 점심을 먹고 두 시간씩의 운전 임무를 두 차례 마치고 보니 농사 짓는 넓은 농토를 지닌 위스컨신 주를 지나 사우스 다코타 주로 들어섰다. 아직 해가 중턱을 좀 지난 6 시경에 우리는 마음에 드는 모텔을 잡기로 하고 미첼이라는 적은 도시의 베스트 웨스턴 모텔에 들어갔다. 지금은 성수기가 아니기 때문에 예약도 없이 떠나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하여튼 미국을 자동차로 여행 할 때는 항상 해가 있을 때 모텔로 들어가는 것이 여러 가지로 좋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모텔도 여러 가지 체인이 있지만 베스트 웨스턴 체인이 비교적 무난하다. 건물이 오래 된 것은 냄새도 나고 싸지만 겉으로 보아서 번듯하면 하루 저녁 지내기는 무난하다. 대략 방 하나에 달러 정도, 10% 정도 세금을 추가로 내야 한다. 우리는 방 세 개를 10% 디스카운트를 받고 들어갔다. 어느 모텔이나 AAA 나 AARP (은퇴자 협회: 50 세부터 회원이 될 수 있다) 중 하나는 회원대우를 하니 여행 때는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일찍 방을 잡고 가지고 온 밥솥에 밥을 만들고 온갖 반찬에 세 가지 김치까지 차려 놓고 만찬을 했다. 이형이 어느 틈에 나가서 1.75 리터짜리 (우리는 손잡이 병이라 부른다) 스카치와 맥주를 한 상자 가져와서 즐거운 여행의 첫 날밤을 늦게 까지 떠들었다. 이런 종류의 모텔들은 아침을 제공 한다. 부인네들은 내일 점심에 먹을 밥을 지어놓고 잤다. 모두들 환갑이 지난 노인들이고 보니 아침은 일찍이 일어나서 모텔에서 주는 아침 식사를 간단히 했다. 컨티넨탈 브랙퍼스트라고 불리는 아침식사다. 커피, 밀크에 토스트나 빵과 사과 오렌지, 요구르트, 몇 가지 시리얼 등으로서 간단한 아침식사로 좋았다. 물론 약간 고급 모텔에서는 여기에 오무레트를 만들어 주거나, 계란을 주문에 맞추어 요리 해주기도 한다. 간단한 식사와 커피 잔을 들고 둘째 날 드라이브를 시작했다. 오늘은 운전 할 시간이 좀 적다. Mount Rushmore를 보기 위하여 그 근처인 래피드 시티 근처까지만 가는 것이다. 사우스 다코타 주부터는 흔한 옥수수 농장도 보기 힘든 사막을 달려야 한다. 시간도 중서부보다는 153

154 한 시간 늦고 인터스테이트 90 번 도로는 몇 십 키로를 가도 굽은 길이 없이 똑바르고 교통량도 적어진다. 고속도로 속도 제한도 여기서부터 시속 75 마일이지만 80 마일 이하로 가는 차를 보기 힘든 길이다. 여기에 여름이면 열리는 모터사이클 집회가 있는지 몇 십대씩 떼를 지어 지나 간다. 미국이 자랑하는 할리 데이비슨 들이 대부분, 한 대에 2 만 달러가 넘어서 웬만한 자동차 값이다. 나도 미국 오기 전에는 모터사이클을 좋아했다. 이들을 보니 나이가 원망스러울 뿐이다. La Crosse 휴게소에서 점심을 마치고 점심때가 되어 아름도 모르는 작은 휴게소를 찾아서 어느 구석을 자리를 잡았다. 이제 제법 맛이 들어 냄새가 대단한 부추김치와 무청 김치는 먹을 만하다. 점심도 먹고 커피도 타서 마시며 아직도 여름같이 따가운 햇살을 즐기며 좋은 휴식을 취했다. 다시 오늘에 목표인 러시모아 공원 근처인 라피드 시티에 있는 모텔이 또 일찍이 들어가서 저녁을 푸짐하게 만들어 먹고 남자들은 스카치를 몇 잔씩 돌렸다. 셋째 날은 아침 차를 몰아서 그렇게 보고 싶어도 오지 못 했던 Mount Rushmore에 올라갔다. Mount Rushmore National Memorial 은 1925 년에 제정된 미국의 4 대 대통령의 얼굴을 154

155 바위에 조각한 미국이 자랑하는 관광지이다. 네 명의 대통령은; 초대인 워싱턴, 불란서 영이었던 미국의 중간 부분을 불과 몇 천만 달러에 사들인 제퍼슨, 노예해방을 이룩한 링컨, 그리고 미국의 경제 대 공항을 극복한 테드 루스벨트 대통령이다. 이 거대한 아이디어를 착수한 사람은 굳존 볼그럼 (Gutzon Borglum). 착수한 1924 년부터 완성까지는 장장 17 년이 걸린 거대한 자연의 광경이 눈앞에 펼 처 질 때 우리는 입을 딱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일을 시작한 장본인은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실제로 많은 일을 한 사람은 그의 아들 링컨 (Lincoln Borglum)이었다. 링컨은 1986 년 초까지 살면서 이 작품을 돌보았다고 한다. 우선 이 거대한 조각품은 그 규모가 엄청나게 크다. 전체가 186 피트 x 160 피트이고 워싱턴의 얼굴만도 20 여 미터에 코가 7 미터나 된다고 하니 그 큰 규모를 상상 할만하다. 바로 앞에까지는 가지 못 해도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이 거대한 조각품은 다시 이와 비교 할 만 한 예를 찾기 어렵다. Rushmore 공원 앞에서 두 번째로 생각나게 하는 것은, 요즈음 같으면 자연을 훼손한다고 155

156 말썽이 날만 한데 별로 그런 토론의 여지가 없었다. 사막의 연속 같은 버려진 땅 중에서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 까만 언덕 (Black Hills)이라는 외진 곳이고,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당시에는 길도 없어서 걷기나 말을 타고 야만 갈 수 있던 아주 벽지의 산이다. 높이가 5725 피트이니 한라산 정도 높이인 1900 미터 가량 되지만 이 조각품이 없었다면 지금도 버려진 산이었을 것이다. 네 명의 대통령 밑에서 156

157 마지막으로는 당시나 지금이나 누구의 얼굴을 선택하느냐에 별다른 반론이 없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남쪽에서는 남북전쟁에 진 것을 애통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이 전쟁을 한 링컨이나 다른 대통령을 모함 할 수 있는 여지가 없지도 않다. 이런 시비를 하지 않는 원숙한 미국 사회에 비하여, 초대 대통령으로서 존경 받아야 할 이승만 박사의 동상을 부수는 우리의 형편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위대한 작품을 민간단체에서 시작하여 연방정부가 맡아서 완성했다. 엄청난 비용 때문이다. 미국 민주주의 수호의 지도자상을 자랑스럽게 만들어 놓고, 미국국민뿐 아니라 전 세계의 많은 사람 들이 이곳을 찾아와서 감탄하도록 하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 거대한 작품을 공원 관리인들이 맡아 관리하고 있다. 입장료도 받지 않고 많은 관광객의 편의를 돌보는 이곳의 공원 관리인들도 한 결 같이 친절하여 미국을 자랑스럽게 만드는 좋은 예를 보는듯하여 아주 감명 깊은 일이었다. 러시모아는 웅대한 장관을 볼 수 있지만 오래 머물 곳은 아니었다. 근처에 등산로가 뚫려 있어서 캠핑을 하면서 등산을 할 수 있으나 우리는 갈 길도 멀고 또 등산을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어서 두 시간 정도 머물며 잘 정리된 박물관을 돌아보고 다시 차를 몰았다. 다음 목표는 옐로우스톤이다.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 고속도로를 제치고 남쪽으로 16 번 지방도로를 타고 Wind Cave National Park 근처의 온천지인 Hot Spring 이라는 동네를 찾아 갔다. 이 지역은 이 곳 원주민이었던 인디언들이 만병을 치료하는 신비의 물이 나오는 곳으로 일찍부터 알려진 곳이지만, 백인들이 인디언을 몰아내고 군인들의 휴양소로 사용하던 곳이라고 한다. 유황냄새도 진하지 않지만 물도 뜨겁지 않아서 이제는 옛날의 휴양서 자리에 대형 수영장을 만들어 놓고 관광객이나 근처의 주민들의 놀이터로 이용하고 있다. 수영장 근처에는 가족탕이나 마사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소도 있지만 우리는 수영장을 들어 가 보기로 하고 우선 어제 저녁에 준비한 오늘의 점심을 먹기 위한 장소를 찾았다. 인구가 1,000 명도 안 되는 동네이지만 시청건물 앞으로 적은 시냇물이 흐르고 다리를 157

158 건너면 시내 한 복판에 훌륭한 공원이 있었다. 아직 날씨가 뜨거워 공원을 이용하는 사람은 우리들뿐, 우리는 마음 놓고 부추김치 등 반찬을 차려놓고 푸짐한 점심을 먹었다. 커피도 한 잔 마신 뒤 오다가 보아둔 실내 수영장을 갔다. 입장료도 4 달러를 받는 이 수영장은 온천수 속에서 여러 가지 물놀이를 할 수 있는 시설이다. 햇빛을 즐기려면 밖에도 작은 수영장이 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물이 흐르는 굴속으로 미끄러지며 내려오는 놀이는 아이들과 함께 우리도 즐겁게 참여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온천에 관심이 많아서 다시 16 번 도로로 서쪽으로 한 시간 정도 가니 이제는 섭씨 130 도의 끓는 물이 나오는 Thermopolis 라는 동네를 찾았다. 이곳은 일본의 벳부나 뉴질랜드의 로투라처럼 온 동네가 온천수로 부글부글 끓고 있고 유황 냄새가 지독한 동네이다. 이곳 시청에서 운영하는 온천시설을 찾아가니 여기도 실내와 옥외의 시설을 해놓고 물이 너무 뜨거워 시켜서 관리를 하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온천장이 무료입장이라는 것이다. 시설도 좋고 탈의장 옷장을 빌려주면서 공짜라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이 뜨거워 건강에 해로우니 20 분만 하고 바로 나오라는 주의만을 단단히 주었다. 우리는 20 분을 조금 지나고 나와서 정말로 고맙다는 이사를 하고 다시 이제는 우리의 가장 큰 목표지인 옐로우스톤을 향했다. 이 온천 도시에서 16 번 도로 2 시간쯤 가면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의 동쪽 입구로 연결된다. 이 공원은 다섯 개의 입구가 있는데 동 입구는 근처의 산불진화 작업 때문에 아침 7-9 시 그리고 저녁 7-9 시 두 시간씩만 문을 연다고 한다. 여기서 다른 입구로 가기도 힘들고 하여 우리는 동쪽 입구에서 제일 가까운 곳의 커터지 형 방을 구했다. 방은 셋이지만 두 개는 혼자뿐이 못 자고 큰방은 제번 크고 커다란 침대가 둘이나 있어서 코를 심하게 곤다는 이형과 내가 독방을 쓰고 다른 분들은 큰방을 쓰기로 했다. 7 시에 맞추어 공원에 입장을 하려니 미리부터 와서 기다리는 차들이 백 여 대나 앞에 있었다. 순서가 되어 공원관리인 (Park Ranger라고 한다)에게 입장권을 사려하니 62 세가 넘는 시민은 국립공원 패스를 158

159 10 달러에 사면 한 해 동안 미국 내 어느 공원에도 갈 수 있고 우리가 타고 가는 밴 속의 다른 다섯 명도 모두 무료였다. 하기야 한국에서는 65 세가 넘으면 지하철도 무료이고 국립공원이나 박물관도 무료인 것에 비하면 별 것이 아니나 함께 타고 가는 사람들까지 무료여서 반가웠다. 동쪽 입구를 지나니 곳곳에 아직도 산불 연기가 나고 있어서 낮에 진화 작업하는 분들이 이제 철수 하는 광경을 볼 수가 있었다. 공원에는 들어갔지만 9 시까지 나와야 하는 우리는 별로 구경도 못하고 나왔다. 내일 하루 종일 이곳을 돌아보자는 계획이어서 세계에서 몇 군데 안 되는 신비스러운 산속에서 잠을 청했다. 그러나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소방원에게 들은 이곳 산불 이야기가 떠올라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 소방원은 멀리 미시간 주에서 자원으로 와서 오늘도 낮에는 진화 작업을 했다고 한다. 나는 우선 1988 년에 이 공원을 반 이상이나 태워 버린 큰 불이 나서 이 공원이 다 타 버린 줄 알았다고 하니 이 소방원은 크게 웃으며 이 공원의 산불은 항상 조금씩 있으며 주원인은 번개라고 하며 어쩌면 산불이 이 공원에 새로운 나무와 풀을 가지고 오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이 모두가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데 인간들만이 왜 서로 싸우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공원을 하루나 이틀에 보겠다는 것은 커다란 착각이다. 우선 이 지역이 남북으로 320 킬로이고 동서로 230 킬로이고 보면 한반도의 대부분에서 경남 전남 지역을 제외한 방대한 지역을 그렇게 쉽게 돌아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마치 미국인들이 한국에 가서 한국을 하루 이틀에 다 보겠다는 것과도 비교가 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곳은 관광명소가 아닌 자연 체험장 같아서 우리는 하루에 돌아보고 다음으로 옮기기로 정했다.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은 우선 약 30 분마다 하늘로 온천수가 솟아 오르는 Old Faithful Geyser를 대표로 거대한 온천지다. 그리고 대부분의 공원이 2 천 3 백 m 이상의 고윈지 이면서도 큰 것은 마치 바다 같고 그리고 많은 호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이곳은 자연에서 마음 놓고 즐기는 동물들의 낙원이기도 하다. 159

160 우리가 제일 먼저 찾아 간 곳은 하늘로 물을 뿜는 진경을 보여주는 Old Faithful 지역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맞추어 기다리자 하늘로 물을 뽑는 장관을 보면서 사진 찍는 사람 그리고 박수 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기서 얼마 가지 많아 나팔꽃처럼 보이는 온천은 화씨로 340 도나 되는데 주의하지 않은 사람이 빠져서 죽은 사례가 있다고 엄중한 경고를 하고 있다. 그래도 이 유황 냄새가 큰 뜨거운 물이 관절염에 좋다고 하여 손과 발을 담그고 또 용기에 물을 떠가는 사람들도 있다. Old Faithful 에서 솟아오르는 물줄기를 보면서 이 공원의 주된 길은 8 자형으로 되어 있어서 중간 교차로는 몇 번이고 지나게 된다. 많은 호수에는 낚시도 한다지만 우리는 낚시 준비가 없고 이곳의 그랜드 캐년이라는 폭포를 찾아가는 길에서 차를 세워 놓고 보는 곰, 늑대, 그리고 지나가는 차를 막아 놓고 움직이지 않는 버펄로 등이 이곳을 찾아온 손님들에게서 큰 대우를 받고 있다는 기분이다. 길을 막아선 버펄로를 크락숀 소리를 내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그저 기다리고만 있는 정경은 좀 심하다고 했다. 이 공원은 며칠이고 160

161 이곳에 머물면서 낚시와, 등산 등 할 일들이 많지만 우리는 다음 기회에 하기로 다음 목표인 유타 주의 사해처럼 소금 호수의 도시 솔트레이크시를 향하여 이제는 남쪽으로 달렸다. 가는 도중 그랜드 텐톤 국립공원 (Grand Tenton National Park)도 있지만 다음으로 미루고 그 근처인 Idaho Falls 시 근처에서 제법 깨끗한 Little Tree Inn 에 들어갔다. 다른 모텔에 비하여 방 하나에 20 달러 정도 비싸지만 방도 크고 방마다 큰 침대 두 개씩이나 있어서 방 두 개라도 넉넉한 편이었다. 아침 식사에 26 가지가 나온다고 자랑하기에 아침 그리고 내일 점심도 준비 안 하고 편안히 하루 저녁을 쉬었다. 다음 날은 일요일이고 일요일 맞추어 유타의 몰몬교 본 사당을 찾아가는 것이 목표여서 아침 느지막하게 출발하여 솔트레이크시에 도착 한 것은 11 시경이었다. 아무것도 살아가기 힘든 사막에다 몰몬교 교도들이 이룩한 기적의 도시는 너무도 깨끗하다. 먼지 하나 담배꽁초 하나 찾아 볼 수 없고 도시의 건물들도 높지도 않지만 단정하게 정리 되어 있어서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내외는 1976 년도에 이곳을 다녀갔지만 다시 유타 주의 주 정부 청사를 돌아보고 우리는 몰몬교의 본 사당 근처에 차를 세우고 본당으로 들어갔다. 예배를 보는 둥근 사당에는 세계에서 제일 크고 좋다는 파이프 오르간이 보인다. 우리는 하지 말라는 사진을 하나 찍었다. 예배 시간까지는 한 시간 정도 기다려야 이 웅장한 오르간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본당 구내에는 몰몬 교도들의 유니폼 같은 횐 셔츠에 검은 바지나 스커트 (그 길이가 보통보다는 길다)를 입은 선교 원들이 달라붙어서 안내를 하면서 선교를 하기 때문에 한 군대 기다리기는 어렵다. 76 년도에 이곳을 방문 하였을 때 우리는 순진하게 우리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방명록에 서명한 적이 있었다. 그 후 우리는 몰몬교 선교 원들의 끈질긴 방문을 받았으며 마침 아이들이 어렸을 때인데 영화와 게임 등을 가지고 와서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그래서 이번 에는 그들의 선교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단호한 태도를 보였으나 161

162 친절하게 안내하고 자기들의 역사를 잘 설명 해주어 감명이 깊었다. 전에는 본적이 없던 인포메이션 센터는 박물관과 선교관을 겸하고 있어서 그 안에서만 돌아보아도 이들의 어려웠던 초기와 기적 같이 이루어 놓은 그들의 역사를 보면서 사람의 힘은 역시 크다는 큰 감명을 받았다. 서울에서 아주대학교 신입생 입학식에 특강을 해 달라는 부탁으로 신입생과 학부형이 수천 명 모인 자리에서 윌리엄 스티븐슨 박사의 지론을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사람의 능력은 큰데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능력을 10%도 쓰지 못하고 생을 보낸다는 얘기다. 그 후 학부형 몇 분이 감명 깊게 들었다는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몰몬교의 역사를 보고 있으면 그 예를 또 하나 볼 수 있다고 느꼈다. 몰몬교를 다 보고서 우리는 이곳의 명물인 소금의 호수를 구경하러 갔다. 호수 가에는 아랍의 성전 같은 거물이 있어서 들어가 보니 아랍인들이 집을 잘 지어 놓고는 버리고 가버려서 저녁에는 이 곳 주민들이 모여서 춤도 추고 노는 장소로 쓰고 있다. 화장실까지 닫아 놓고 있어서 그곳에 들어온 사람들은 밖에서 본 건물과는 전혀 다른 인상을 갖고 갔다. 몰몬 교도들은 커피도 안 마시는 금욕 자들이니 장사가 안 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우리는 그 건물 내에서 점심이라도 할 생각이었는데 실망하고 그곳을 나와서 결국은 처음 외식한 것이 반은 서브 샌드위치고 반은 맥도날드 햄버거와 샐러드였으니 이번 여행 중 처음 외식인데 실망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점심도 시원치 못 하였지만 우리는 브라이스 캐넌의 해지는 경관을 놓지 지 않기 위하여 6 시간 정도를 빨리 몰았다. 모든 고속도로가 속도제한이 75 마일 이지만 우리는 평균 85 마일은 달린듯하다. 브라이스 캐넌에 도착 했을 때는 여름날이기는 하지만 해가 아직도 한참이나 남아있었다. 역시 브라이스 캐넌에서는 맨 밑에 있는 해지는 포인트가 제일 좋지만 그 곳을 먼저 보고 나니 다른 곳의 경관도 뛰어 난데 별로 보이지가 않았다. 그 중에는 폭포와 빨갛고 노란 수 만개의 봉우리 162

163 등이 펼쳐 있어서 장관이었다. 이 곳에서 북쪽으로 약 두 시간 올라 가면 인터 스테이트 70 번 도로를 만나며 그 근처에는 작은 타운들이 있어서 밤늦게까지 운전하여 리치필드라는 동내의 모텔을 잡았다. 이제는 조금만 가면 콜로라도의 로키 산맥을 넘게 되고 콜로라도 주의 수도인 덴버를 가기 전에 Glenwood Springs를 들리는 것이 목표였다. 늦게 모텔에 들어가자 우리는 몹시 지친 상태에서 아침에는 좀 늦게 떠나기로 하고 푹 쉬었다. 브라이스 캐넌을 뒤에 두고 콜로라도의 로키 산맥 정상은 높이가 4 천m가 넘지만 서쪽에서 오르는 데는 비교적 원만하고 우리는 좌우로 펼쳐지는 자연환경에 도취되어 모두들 조용하였다. 특히 길 오른쪽으로 흐르는 콜로라도 강에는 래프트를 타는 활기찬 젊은이들도 보이고 물에 깊숙이 들어 가서 송어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였다. 강가에 잘 차려 놓은 휴게소를 보고 우리는 좀 이르지만 점심을 먹으며 이 물이 흐르고 흘러서 캘리포니아주의 남쪽인 로스앤젤레스까지 흘러가고 그들의 식수가 되어 우리가 그곳에 살면서 이 물을 마시고 살았다고 생각하니 더욱 고마운 생각이 든다. 163

164 경치를 즐기며 가다 보니 우리가 목표로 하는 그렌우드 온천지가 나타났다. 우리는 수년 전 아스펜의 스노우매쓰로 스키를 타러 간 적이 있는데 이 그렌우드에서 애스펜으로 가는 길이 있다. 그렌우드는 온천으로 큰 관광시설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제는 그 시설도 좋아 졌지만 값도 비싸다. 이곳 온천은 온천수로 수영장을 만들어 놓고 맨 위에 있는 수영장은 아주 뜨겁고 밑으로 내려올수록 온도가 내려가는 형태이다. 수영장 근처에 비치파라솔과 테이블을 차려 놓아서 가족들이 수영복을 입고 피크닉을 하기 좋은 시설이다. 그런데 일인당 입장료가 자그마치 13 달러여서 어느 고장에서는 무료이고 한 4 달러 정도를 몇 년 전에 냈었는데 많이 비싸기도 하다. 여름 날씨가 좋아서 차를 세우기조차 힘 들 정도로 만원이어서 우리는 구경만 하고 그 유명하다는 그렌우드 온천을 뒤로 두고 떠났다. 여기서부터는 콜로라도의 이름 있는 스키장 동네가 계속하여 나타난다. 그 중에는 베일이라는 동네는 존슨이 대통령 후보로서 스키장에서 넘어지는 사진이 미디어에 나가서 그 선거에 많은 표를 잃은 동네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덴버를 들려서 그곳 시내 구경을 하고 76 번 도로로 바꾸어서 캔자스 주를 거치지 않고 네브래스카 주를 횡단하기로 했다. 아직 해가 많이 남았지만 우리는 Fort Morgan 이라는 동네에 들어가서 또 하루 저녁을 보냈다. 내일은 좀 길은 멀지만 네브래스카를 건너서 아이오와 주의 한 가운데 있는 아이오와 시를 방문하기로 했다. 네브래스카 주를 횡단 하는데 약 600 Km이니 고속도로 양편에는 옥수수 밭 뿐인이다. 아이오와 시에 도착 했을 때는 저녁 7 시가 되었다. 아이오와 시는 내가 박사학위를 위하여 1970 년부터 1972 년까지 2 년을 살았고 또 내 지도로 석사학위를 한 이 목사가 큰 교회를 짓고 목회를 잘 하고 있는 곳이어서 우리는 옛날 살던 곳이라 언제나 들리고 싶었고 또 이곳 구경을 내가 안내하기로 계획이 되었던 것이다. 아이오와 시는 대학으로 꽉 차 있고 모텔이나 쇼핑센터는 모두 그 옆에 붙어 있는 코라빌이라는 적은 외곽도시가 있다. 우리도 코라빌에 있는 내가 늘 찾아가는 모텔에 방을 얻었다. 사실 우리는 164

165 아이오와 대학을 다닐 때도 학교 아파트가 이곳에 있었고 이곳에는 핑크바인이라는 골프장이 두 개나 있었는데 북쪽 것만 남겨두고 남쪽 9 홀 코스는 다른 운동장으로 만들었는데 우리가 들어 간 모텔은 바로 이 남 핑크바인 길 건너편에 있다. 짐을 풀고 이곳에 내가 아는 한국식당으로 가는 것이 예정이었는데 모텔 옆에 붙어 있는 중국식당에서 뷔페를 한다고 크게 보여서 중국식당으로 갔다. 벌써 화요일 저녁이고 보니 식당은 한산한데 알라스카 개발이 있고 음식도 다양하여 오랜만에 모두들 포식을 하고 모텔로 돌아왔다. 아이오와 시는 나에게는 여러 가지로 뜻 깊은 도시이며 이곳에서 보낸 2 년은 나의 생의 방향을 잡아준 곳이기도 하다. 언론학 박사를 할 수 있었던 이곳의 어려운 공부는 나를 교수로 만들었고 또 미국에 정착하는 기회를 만들어 준 곳이기도 하다. 서울에 두고 왔던 혜경이와 철준이가 이름표를 달고 찾아 온 곳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생각이 엇갈려서 나는 혼자 조용히 차를 몰고 이 주변을 밤늦게 돌아보면서 옛날 일들을 회상 해 보기도 했다. 우리 모텔 주변에는 70 년도 경에는 인터스테이트 70 번 도로로 여행하는 트럭 운전사들이 쉬고 가는 주막 동네이기도 했다. 그 당시에도 더그아우트 (Dugout)라는 술집은 여자들이 거의 나체로 춤을 추는 곳이 있기도 했으나 이제는 거대한 쇼핑 몰 동네가 되고 말았다. 예정 한대로 아침은 모텔에서 먹고 아이오와 대학 구내를 돌아 보기로 하였다. 이종구 목사에게 연락하면 오늘 떠나기가 어려워 져서 이번에는 그냥 지나가려고 하다가 학교 가는 길에서 핸드폰 으로 전화를 하였다. 꼭 만나고 싶다고 하여 우리는 학교를 돌아보고 유니온으로 왔으며 이 목사가 부리나케 찾아 왔다. 한동안 지난 이야기를 하고 또 김정탁 교수 부인과도 전화 통화를 한 뒤, 우리는 겨우 아이오와 시를 떠났다. 이제는 시카고까지는 4 시간 거리다. 느긋한 마음으로 아이오와 주 출신으로 대통령이 된 후버대통령 기념관을 찾았다. 아이오와 시에서 30 분 정도 동쪽에 있는 West Branch 라는 동네에 165

166 있다. 미국 31 대 대통령이고 후버 댐을 건설한 허버트 후버는 1874 년 이 동네에서 태어나 스탠포드 대학에서 광산 엔지지니어링을 공부한 정치가다. 생일은 나와 같이 8 월 10 일 생이다 년부터 1933 년까지 대통령을 지내고 재선운동을 하였으나 당시 닥친 경제공황을 견디지 못하고 테드 루스벨트에게 패배한 신사 정치가다. 그 후도 미국을 위하여 많은 공적을 남기고 90 세의 장수를 한 사람의 온갖 기록과 유품이 장 정리되어 전시된 이 기념관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켜보았다. 이곳에서 한 시간 정도 동쪽으로 가면 일리노이 주 경계가 되는 곳에 미시시피 강이 흐른다. 이 강가로 네 개의 도시가 붙어 있다. 그 경관이 또 화려하여 우리는 한동안을 강가 휴게소에 차를 세워 놓고 바라보았다. 일리노이 주로 들어서면서부터 계속 적은 동내를 지나서 시카고 외곽지로 들어서니 마침 러시아워가 되어 차가 많이 밀린다. 아직 저녁시간도 이르고 하여 이태리 피사의 사탑을 모방하여 세워놓은 YMCA 건물근처를 돌아서 시카고에서 제일 알려진 우래옥 을 찾은 것은 아직 저녁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이 우래옥은 서울이나 뉴욕보다도 시설도 화려하고 음식도 정결하여 우리는 몇 번이나 와 본 곳이지만 다시 한 번 우리는 좋은 식사를 하고 손형네 집이 있는 버논 힐이라는 시카고 외곽 도시로 나갔다. 오랜만에 가까운 세 가족이 즐거운 여행을 마치고 우리는 서로 즐거웠던 기억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지난 여행을 이야기 하는 것도 즐거웠다. 여기서 일단 우리는 이번 여행의 순서를 마치고, 이형은 토론토로, 우리는 미주리로 다음날 아침 각각 출발 하였다. 물론 곧 다음 여행을 하기로 약속 한 것은 말 할 것도 없다. 166

167 14. 겨울의 킹스캐년 과 세코이야 2005년은 나의 손위의 동서인 대구의 성도경 교장 내외의 금혼식 기념의 해이다. 이제는 은퇴를 한지가 오래되고 둘째 아들이 이미 교장이 되었지만 우리는 교장 선생이라고 부른다. 부부가 50년을 같이 산다는 것은 미국인들에게는 아주 드문 일이다. 몇 년 전 동료교수였던 태프트 영감 금혼식에는 지방 신문이 우편 카드만한 사진과 함께 큰 기사로 만들었다. 그러나 함께 오래 살기는 여전히 힘들지만, 사람의 수명이 길어지면서 한국이나 미국에도 금혼식 행사를 많이 볼 수 있다. 킹스 캐년 결혼기념일은 11월 16일. 대구에서 크게 행사를 하겠다는 아들 덕기와 딸 은미 가족의 제안을 뿌리치고 미국의 좋은 산천이나 돌아보겠다는 계획은 오래 전에 서 있었고, 이 기회에 토론토의 처제 내외가 합류하도록 계획이 서 있었다. 167

168 성 교장은 은퇴 후에는 좋아하던 골프도 제쳐 놓고 명산을 두루 찾아 다니며 자연의 위대함을 체험하고 있다. 미국 서부 지방의 거대한 명승지를 찾아 다니는 것은 좋은 기회이고, 더구나 세 동서 내외가 함께 여행한다는 것은 여행 자체가 즐거운 계획이었다. 지난해 엘로우스톤과 브라이스 캐년의 신비롭도록 웅장한 자연을 보면서 6척도 안 되는 사람들이 하는 일들을 다시 돌아보게 되며 인생이 100년을 산다 해도 자연의 오래된 풍경을 보면 아주 적은 순간이라는 것을 깊이 느끼게 한다. 비행기 예약 때문에 마침 손자들이 떠나는 날 도착하니 번거롭기는 하지만 혜경이네 식구들을 모두 만나서 점심을 같이 한다는 즐거움도 있었다. 잠깐 만나고 헤어져야 하지만 오랜만에 이루어진 어려운 모임이다. 장남이어서 손 위의 형이나 누이가 없는 나에게는 큰 형 그리고 누님 같은 분이다. 지금까지 어렵지만 보람 있게 살아오는데 언제나 도움을 청 할 수 있는 두 분이 미국의 자연을 보러 온다고 연락이 왔을 때, 아무런 걱정 없이 오시라고 하였지만 막상 여행 계획을 세우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더구나 11월 1일에는 영수 처남이 대구에서 온다고 하니 더욱 복잡해졌다. 비좁은 우리 집에 다섯 명의 손님을 모신다는 것도 어렵지만 이번이 미국여행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몇 번이고 말하는 이분들에게 감명 깊은 여행을 마련하고자 온갖 노력을 다 하였다. 11월 달은 이미 겨울인데 너무 무리한 자동차 여행은 피하면서도 미국의 자연의 웅장함을 보기에는 최소한도 네 군데를 잡았다. 우선 집을 떠나 첫 번째의 목표는 King's Canyon 이었다. 거기에서 다시 Yosemite 공원을 보고, 다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로 유타 주 Bryce Canyon 을 보고, 15번 도로로 라스베이거스에 들려 며칠을 묵고 캘리포니아로 돌아온다는 계획으로 8박 9일 정도의 일정을 잡은 것이다. 168

169 이 계획의 문제는 기후 조건이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서 어려움의 한도가 정해지지만 갑자기 눈이라도 만나면 꼼짝 못하고 갇혀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아무에게 말하지 않았다. 평소 인터넷을 많이 이용하지만, 1999년에 생긴 라구나 우즈 시가 입력이 되어 있지 않았고, 킹스 캐년의 입구 도시가 잘 나타나지 않지만, 별로 큰 준비 없이 길을 떠났다. 이 지역은 국립공원 Sequoia 지역 으로서 미국에서 제일 큰 장군 나무가 둘이나 있는 곳이다. 미국 역사상 이름 있는 셔만 장군과 그랜트 장군의 이름을 가진 웅장한 두 그루의 나무와 이 나무 주변의 많은 거목들을 찾아 그 웅장함에 탄복을 하였다. 그랜트 장군목에 갔을 때는 우리가 양 손을 벌려 서로 잡고 재어 보니 약 30명 정도는 있어야 될 듯하였다. 웅장한 세코이야 산맥에서 3형제부부 키는 셔만장군목이 크지만 하늘을 찌를듯 높은 이 나무가 몇 년이나 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이곳을 관리하는 직원이 오늘 저녁에는 산 위에는 눈이 오고 밑에는 비가 온다고 말 해주어 그곳을 조급히 내려갔다. 비가 내리는 가파른 산길을 두 시간 정도 내려오니, 밤이 169

170 한참 어두웠다. Fresno 시에 도착하여 모텔을 잡고 가지고 온 밥솥으로 밥을 짓고 반찬을 차려 놓고 여행 첫날을 산 밑에서 보냈다. 둘째 날 아침에 일어나니 어제 밤의 비가 세상을 깨끗이 쓸어 간 듯 청명한 날씨이다. 어제 밤에 급히 내려오느라고 보지 못한 Kings Canyon 을 다시 보러 가자는 것이다. 다시 2천5백 m 가 되는 정상에 올라서 캐넌 길로 들어 선 것이다. 기암절벽을 타고 한 시간 이상 계곡까지 내려갔다. 주변의 경치가 신비로운데 단풍이 아직도 물감을 뿌려 놓은 듯 아름답다. 이 계곡은 나무 보다는 동네만한 바위로 둘러싸인 계곡으로 흐르는 물이 얼음처럼 차고 깨끗하다. 여름에 왔다면 며칠 캠프를 하면서 이 위대한 자연 속에 안겨서 지내고 싶은 곳이다. 언제 다시 한 번 오자고 약속을 했다. 이 캐넌은 계곡 밑에까지만 길이 있어서, 다시 정상으로 올라가서 아침에 올라왔던 길로 내려와서 이곳에서 별로 멀지 않은 Sierra 지역으로 옮겼다. 41번 도로로 올라가는 길은 고원지대로서 해발 2000 미터 이상을 달려서 오후 4시경에 Oakhurst 라는 동네에 들려 전에도 이용한 적이 있는 모텔에 자리를 잡았다. 아직 해가 지기에는 시간이 있지만 요세미티 공원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 가야하고, 감기에 고생하는 일행도 있어서 일찍이 쉬기로 했다. 11월 5일 아침 8시경, 호텔에서 주는 간단한 아침을 먹고 다시 산길을 달렸다. 41번 도로로 올라가는 길이 험하지만 절경이다. 120번 도로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오는 길은 계곡을 많이 이용하기 때문에 주변의 경치가 별로이다. 120번 길로 작년 2월 아주대 학보사 기자들과 함께 다녀 온 길이어서 이 길로 요세미티를 벗어나려는 것이 우리의 계획이다. 중심부에서 120번을 타고 동쪽으로 나가는 길은 눈에 덮여서 10월부터 폐쇄되어 있다. 이 길이 열렸으면, 395번 도로로 나가서 타호 호수를 가기가 쉽지만 지금은 상상도 못한다. 금강산이 아름답지만 산세가 높지 않고 그 규모가 작다. 41번 도로로 들어가는 길 주변의 경치가 대단하다. 이제는 이 엄청난 절경에 170

171 취하여 감탄사를 찾기도 힘들게 되었다. 요세미티 빌리지에 도착 했을 때는 아직도 아침 시간, 의외로 관광객이 별로 없었다. 겨울의 이곳 경치는 대단하지만 기후 조건 때문에 계획을 세우기가 힘들다. 더구나 아이들이 학교에 나가고, 휴가철이 아니니, 은퇴한 노인들이 오는데, 우리처럼 용감한 관광객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빌리지 주변이 아름답고 여름에도 선선한 이 지역이 여름철에는 호텔이나 캠핑 시설을 몇 달 전에 예약해야 되는 곳이다. 셔만 장군 나무의 크기를 재어 보며 갈 길이 먼 우리는 폭포 밑에 가서 사진을 찍고 조금 걸어서 돌아보고 다시 120번 도로를 따라서 서쪽으로 나가기 시작 했다. 120번에서 49번 도로로 바꾸어 올라가는 길은 산 골 길에다가 많은 적은 동네를 꼬불꼬불 돌아간다. Sonora Village 에서 49번 길을 찾는 것은 힘들다. 우리는 49번 도로를 찾지 못하고 108번 도로로 유명한 소노라 패스의 어려운 길로 한참을 갔다. 가다보니 이 길은 10월초에 이미 닫혀 있어서 다시 49번 도로를 찾아 타호 호수까지 가는 길은 하늘 위를 차로 몰고 가는 듯 무서울 정도이다. 171

172 49번에서 50번 도로로 갈아타면서 길은 좋아지지만 해발 2000 미터 이상의 고산을 몇 시간이나 달린다. 샌프란시스코의 많은 인구를 목표로 세워진 타호 호수의 리조트와 카지노는 겨울에도 오기 편하도록 만들었다. 해가 있을 때 도착하려는 목표는 소노라 패쓰에서 헤맨 두 시간 때문에 호수 서편 입구에 도착 했을 때는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이 타호 호수는 우리 내외에게는 많은 추억과 낭만이 얽혀 있는 곳이다. 1967년 여름방학 동안에 오레곤 대학의 친구들과 함께 학비를 벌고 아내의 미국 비행기 값을 벌기 위하여 석 달을 고생 하였고, 또 일이 끝날 무렵 아내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고, 내가 비행장에 나가서 이 호수가로 왔다. 이 호수는 백두산 천지처럼 화산으로 이루어진 곳으로, 그 크기가 바다처럼 보이는 곳이다. 호수를 길게 남북으로 나누어서, 반쪽은 캘리포니아주가 서쪽으로 차지하고, 동쪽으로는 네바다 주가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서쪽에는 카지노가 없고, 주로 상가와 호텔이 있고 네바다 주 쪽에만 카지노가 있다. 특히 카지노와 상가는 South Shore 에 있고 북쪽에는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인크라인 빌리지 옆으로 두 서너 개의 카지노가 있다. 그중에 하나가 CalNeva 라는 카지노로서 프랑크 시나트라가 소유했었으며, 60년대에는 크게 성황을 이루던 곳이다. 이 카지노의 반은 캘리포니아주에 있어서, 호텔이 있고 네바다 주 쪽에 카지노가 있다. 우선 남쪽에서 제일 큰 카지노인 Harrah 옆에 있는 모텔에 자리를 잡고 그 근처를 둘러 보았다. 마침 지금이 이곳의 스키 시즌이어서 사람들이 붐비고 값도 만만치 않았다. 다음날 아침 일찍이 우리 내외의 추억의 명소인 칼네바 카지노를 도착 하였을 때에 너무도 놀랐다. 카지노는 열었으나 손님이 적어서 축소 해 놓았고 연수를 위한 손님을 주로 받는듯하다. 내가 일 하던 쇼를 하는 바는 아이들의 전자 게임장이 되었고, 큰 극장은 줄여서 회의장으로 만들었는데 그 회의장은 아직도 프랑크 시나트라 극장 이라고 간판이 있다. 172

173 참으로 세상이 빨리 변하고 사업도 오르고 내리는 곡절이 있기 마련인가보다. 60년대에 하라하 카지노가 서민들을 위한 것이라면 칼네바는 고급 카지노로서 마피아 두목들이 드나들면서 주목을 받은 곳이라고 들었다. 세상이 무상 하다는 착잡한 마음으로 호수를 내려오는 길은 네바다 주의 수도가 있는 칼슨 시티로 가는 큰 길을 택하였다. 거리는 얼마 안 되어도 1000 미터 이상 내려오는 길이고, 도시를 들어가기 전에 395 하이웨이를 따라서 브리지포트까지 내려가고, 거기서 다시 네바다 주 서편에 있는 Hawthorne 시로 가는 것이다. 호손을 지나면 별로 깨끗한 모텔을 찾기 어려울듯하여 El Capitan 이라는 호텔/카지노에 들어갔다. 넓은 사막 한 가운데에 천명도 안 되는 도시이지만 이곳이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주변의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다. 옛날에는 금을 캐러 오는 사람들로 붐비던 곳이라고 한다. 또 근처에는 공군 폭격 훈련장과 탄약고가 있어서 군인들과 그 가족들의 수도 많은 듯하였다. 이 적은 도시에도 중국 식당이 둘이나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타일랜드에서 온 중국인으로서 타이식의 중국요리를 맵게 잘 먹었다. 카지노는 오래된 기계에다, 별로 신통치 못하다고 모두 방으로 돌아와서 스케듈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이 곳에서 알아 본 바에 따르면, 유타 주의 브라이스 캐년이 눈 때문에 닫혔다는 것이다. 하기야 작년 8월말에도 그 곳에는 눈과 얼음이 있었으니 수긍이 가는 일이다. 하루를 꼬박 가는 거리에다 만약 눈이라도 만나면 아주 어려울 것을 생각하고 브라이스 캐년을 다음 기회로 남겨 놓고 라스베이거스로 직접 내일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본래 하루나 이틀을 있기로 한 곳을 3박 4일로 하자고 했다. 특히 처남이 쇼핑 할 것도 많다고 하니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호손에서 라스베이거스까지는 310 마일이고 95번 도로로 새로 만든 이 길은 재향군인의 도로라고 명명했으며, 사막 한 가운데를 자로 곧게 금을 그어놓고 만든 길이다. 비록 2차선 하이웨이지만 속도 제한도 70마일이고 몇 시간을 똑 바른 길로 달리는 길에 내가 80 마일을 놓고 달려도 모두들 우리를 추월하며 달린다. 173

174 호손에서 라스베이거스까지 가는 길에는 적은 두개의 도시뿐이어서 간단히 주유를 하고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로 점심을 하면서 달리다 보니 라스베이거스에 도착 한 때는 2시경이었다. 호텔을 여러 군데 알아 보았으나 Orleans 호텔이 특별대우로서 49 달러로 해 준다 하여 체크인 하였다. 미국에서 네바다 주만이 유일하게 도박장을 만들어 놓고 재미를 보던 시대는 지났다. 유람선이나 강 위에 떠 있는 배 위에서는 도박을 허가하는 오래된 법을 이용하여 강가에나 바닷가에 유람선 같이 집을 짓고 도박 장을 만들기 시작 한 것이 10 여 년 이제는 도박장이 없는 주가 별로 없다. 특히 치외 법권을 주장하는 원주민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그들의 격리된 지역에다 도박장을 세워 놓은 곳이 많기 때문에 도박을 하기 위하여 네바다를 찾을 필요는 없다. 사실, 나는 도박을 안 하기로 작정한지 오래 되었다. 은퇴 인으로서 도박으로 돈을 따려는 욕심을 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고, 이제는 스릴이나 모험이 즐겁지 않은지가 오래 되었기 때문이다. 슬롯머신에 가끔 돈을 넣어 보지만 옛날에 즐기던 부랙잭 카드를 만지지 않는다.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하여 놀라는 것은 이곳이 은퇴인 들을 위한 소위 실버타운으로 번창한다는 것이다. 사막 위에 집을 엄청나게 많이 지어놓고, 비교적 저렴하며 세금이 싸고 기후가 건조한 사막 기후여서 견디기 좋다는 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좋은 호텔 시설을 이용하여 컨벤션이나 각종 회의를 유치하고 이제는 도박보다는 각종 엔터테인먼트의 메카로 바뀌고 있다. 유명한 쑈나, 콘서트, 코미디언, 그리고 영화관이 이제는 카지노 안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카지노 안의 해산물 뷔페는 싸고 좋다. 갑자기 이 근처에 골프장이 수 십 개 생기고 사막 땅에다 그림같이 만들어 놓은 골프장은 일 년 내 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지만 네바다 주의 적은 동네에는 아직도 공창이 있다는 사실이 있다. 이번 11월 선거에서 어느 동네의 공창폐지 법안을 선거에 붙였으나 부결되었다고 신문에 적은 기사로 나와 있다. 그리고 세금이 없거나 174

175 싼 것을 이용하여 많은 상가들이 들어서 있고 특히 새로 유행하는 아울렛 상가에는 고급 옷이나 귀중품을 비교적 싸게 살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번 기회에 제주도에서 일출봉 호텔을 하고 있으니 세계적인 호텔을 두루 돌아본다는 것도 일정에 하나였다. 특히 파리호텔이나 베네시안 호텔의 엄청난 시설과 하늘을 덮고 있는 인조 천장이나 에펠탑, 그리고 실내에 판도라를 띠워 놓은 카날은 몇 번을 보아도 인상적이다. Bellagio 의 분수 시설은 밤에 조명을 하고 엄청난 음악을 틀어 놓고 펼치는 장관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빡빡한 3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10 일 날 다시 라구나 우드로 돌아왔다. 7박 8일의 여정이었다. 175

176 15. 죽음의 계곡과 화려핚 단풍 사막에도 볼만한 단풍이 있을까? 이곳 라구나 우즈 빌리지 주민들이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으로 가을 단풍 구경을 간다고 할 때,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단풍으로 유명한 곳이라면, 여러 번 가 본 설악산, 오스트리아의 알프스, 캐나다의 알공킨 공원, 그리고 노랗고 빨간 단풍으로 덮인 예일 대학의 골프장 등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매년 늦은 가을, 이곳 주민들이 단풍 구경을 간다는 곳이 바로 우리 마을 주변 사막에 있다고 한다. 망설이는 나를 위해 식물학을 전공한 은퇴 교수 친구가 사막에서도 아주 아름다운 단풍을 볼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이 교수 설명에 따르면, 사막에서 자라는 낙엽성 잎은 늦은 가을에 아주 빨갛고 노란색으로 몇 주간 변한다는 것이다. 이들 사막에서 서식하는 나뭇잎은 본래 여름에는 chlorophyll이라는 염색체가 세포 속에 들어 있어서 초록색을 띄는데, 일조 시간이 줄고 기온이 떨어지면 수분을 섭취하는 잎의 연결 줄기를 닫으면서 특별한 콜크 세포라는 것을 176

177 형성한다고 한다. 이 콜크 세포가 두터워 지면서, 나뭇잎의 수분과 광물질 채취가 줄어들어 그 색깔이 예쁘게 변한다고 한다. 전문가의 설명을 듣고, 나는 주저 없이 2 박 3 일 단풍관광 그룹에 참여했다. 럭키관광 회사는 젊은 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관광 회사이다. 우리는 라구나 우드 빌리지 3 번 출입구에서 10 월의 마지막 주에 50 명이 타는 관광버스를 타고 여행을 떠났다. 버스가 출발하자 관광 안내원이 우리 일정을 자세히 설명해 주면서, 우리가 볼 것은 단풍나무가 아니고, 사막에서도 잘 자라는 포플러 계통의 미루나무라고 알려주었다. 이 미루나무는 여름에 목화처럼 생긴 솜털을 날리고 있어서 일명 cottonwood라고도 한다. 우리가 가는 곳은 사막 중에도 몇 개의 아름다운 호수를 가진 지역으로 이들 호숫가에 이 나무가 많이 들어서 있다고 한다. 미루나무는 강변이나 호숫가에서 자라서 수분 섭취가 용이하여 빨리 자라지만, 나무의 질은 별로 좋지 않아서, 과거에는 수송용 박스 재료로 널리 쓰이다가, 요즘엔 플라스틱이 나오면서 사용이 줄었다고 한다. 나는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기 직전인 1960 년 말에 당시 농림부 공무원으로 채용되었는데, 군사 쿠데타로 집권에 성공한 박정희 장군의 이태리 포플러 나무를 전국에 재배하라 는 지시가 떨어져 이 나무를 전국에 공급하는 일을 한 적이 있다 년대 초 미루나무는 한국에서 성냥 개피나 음식점용 나무젓가락으로 많이 사용되기도 했다. 일본인 집단 수용소 만자나 (Manzanar) 약 5 시간 정도 395 번 도로를 타고 달리니, 우리는 첫 관광지인 만자나 일본인 수용소 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2 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계 미국인 12 만 명을 10 개의 캠프로 나눠 수용했던 곳중에 하나라고 한다. 만자나는 스페인어로 사과 과수원을 말한다고 한다. 이곳은 수용소가 생기기 오래 전에는 미국 인디언들이 과수원으로 177

178 사용했으며, 로키 산맥 동쪽에 있는 이곳 사막 지대로 콜로라도 강의 물줄기가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1929 년 로스앤젤레스 시가 커지면서, 이쪽으로 내려오는 물줄기를 식수원으로 사용하기 위해 빼돌려, 이 지역은 본래의 사막만 남아 버려진 땅이 되었고, 그곳에 수용소가 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황무지 사막으로 버려진 이 땅에 일본계 시민을 강제로 수용하게 된 것은 일본군의 진주만 폭격으로 미국인의 분노가 하늘 높이 솟을 때, 일본계 시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도 있었고, 또 다른 정보에 따르면, 일본계 미국 시민들이 간첩활동을 한다고 하여 실시된 비인도적 정책이었다고 한다. 세계 제 2 차 세계대전이 1945 년에 끝나면서, 이 수용소는 문을 닫았다. 모든 건축물들은 옮겨졌지만, 입구의 초소, 수용소에서 사망한 사람들이 묻혀 있는 묘지와 위령탑, 그리고 수용소 당시 고등학교 강당은 그냥 남겨 두어, 그 옛 모습을 지니고 있다. 이곳의 강당은 해외 전쟁 참전용사회의 모임 장소로 1951 년까지 쓰이다가, 지금은 이곳 지역 도로공사 창고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내부는 보지 못하고 멀리서 사진만 찍었다. 수용소 생활을 한 여러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이 지역을 보존하자는 운동을 펼치게 178

179 되었고, 그래서 현재는 연방 정부가 이 유적지를 관리하게 되었다. 주로 일본계 후세들이 이곳에서 생활한 부모와 조부모들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려고 찾아오고 있으며, 관광객을 위한 안내소와 보존관리 사무소 시설이 자리 잡고 있다. 안내소에서는 레이건 대통령이 1942 년 일본계 미국인을 강제 수용한 것은 잘못되었다고 선언하고 수용소 생존자들에게 2 만 달러씩을 보상했다는 내용의 해설 방송을 들려주었다. 참으로 미국인다운 역사 기록에 대한 태도이다. 같은 전쟁에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못된 역사를 저지른 과거를 갖고 있는 일본의 현재 지도자들이 이곳에서 미국의 태도를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묘지와 위령탑을 방문하려는 일행 몇이 있었는데, 우리 안내양이 2 차 대전 당시 일본인의 만행을 역설하면서 굳이 갈 필요가 있느냐고 간곡히 말려서, 우리 일행은 사진도 찍지 않고 수용소를 나왔다. 사실 나는 어린 시절에 일본군이 얼마나 무리한 전쟁을 하였는가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으며 초등학교 2 학년 때 일본의 패망을 보았다. 일본의 문제는 일본이 지은 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극우파 정치 세력이 너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한국에서는 극좌파 세력이 아직도 설치고 있다는 아이러니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만자나 수용소를 나왔다. 죄인들이 숨었던 죄인 호수 (Convict Lake) 다시 한 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들른 곳은 깊은 산골짜기에 숨어 있는 아름다운 호수였다. 살인죄를 저지르고 감옥에서 탈출한 죄인이 숨어서 살았다고 하여 죄인의호수 라고 명명되었다지만, 그 이름이 호수의 아름다운 경치를 너무 더럽히는듯하다. 이 호수는 약 2,300 m 고산지대에 있다. 호수 위 모리슨 산정의 눈이 호숫물에 비춰 보이고, 호숫가는 포플러 나무의 노란 단풍으로 병풍을 두른 듯 아름다웠다. 안내원의 긴 설명에 따르면, 남북전쟁이 끝나고, 패잔병 남부 군인들이 먹고 살기 위해 서부의 금을 찾으러 이 지역으로 몰려 왔으나, 금은 쏟아져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온갖 범죄가 난무하던 1871 년 179

180 9 월, 네바다 주의 수도인 칼슨 시에서 수 명의 죄수가 도망쳐 이 산속에 숨었다고 한다. 탈옥수들을 잡으러 보안관이 이끄는 민병대가 이 호수 근처에서 죄인들을 잡았으나, 민병대원인 로버트 모리손이 접전 과정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그 뒤, 호수 뒷산은 모리손 산으로, 호수는 죄인의 호수로 명명하게 됐다고 안내인이 마치 서부활극의 줄거리처럼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토파즈 호수 (Topaz Lake) 수정호수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농업용 저장호수이다. 캘리포니아 주와 네바다 주의 경계를 만드는 이 호수는 네바다 주에서 두 번째로 큰 리노 에서 120 키로 정도 남쪽에 있으며 본래 적은 호수를 1922 년에 크게 만들어 이 근처 농공업용으로 이용한다고 한다. 식수용이 아니기 때문에 수영, 보트, 낚시 등 여러 레저용도로 쓰인다. 이 호수 가에는 카지노와 호텔이 들어서 있고 우리 일행도 이 카지노 호텔에서 여행 2 박을 했다. 395 번 도로 가에 위치한 이 리조트는 큰 도시에서 거리가 멀어서, 노름꾼 보다는 야외운동을 즐기는 낚시꾼, 보트와 스키를 즐기는 스포츠맨들이 오기 때문에 카지노 사업은 잘 안 된다고 한 종업원이 설명 해둔다. 어느 카지노와 마찬가지로, 이곳에는 제법 좋은 식당이 있으나 이미 근처 산에 눈이 내리는 10 월 하순, 그 좋은 경치를 보러 호수 가에 까지 내려가기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여행 첫날밤을 수정호수 가에서 지내고 아침 일직 일어나니, 본래 여행 계획이었던 캘리포니아의 알프스라고 하는 Alphine County 로 가서 매년 세계 사진작가들이 현지 촬영대회가 열리는 경치를 보고, 이름 있는 Glover 온천을 즐기는 계획이 밤새 내린 눈 때문에 바뀌었다. Monitor Pass 로 알려진 로키 산맥을 산 골짜기를 타고 나가는 이 계곡은 우리가 몇 년 전에도 킹스 캐년을 보고 네바다로 넘으려다 실패 한 곳이다. 10 월이 되면 눈이 많이 와서 닫아버리는 예가 많다고 한다. 예비 된 대로 우리는 이곳에서 약 400 키로 북쪽으로 올라가는 Tahoe 호수로 간다고 한다. 나는 내가 1968 년도 여름방학에 아르바이트를 한 180

181 CalNeva 카지노가 있는 곳이어서 오히려 반가웠다. 우리의 목적지인 타호 호수 를 거의 다 와서 Gardnerville 이라는 395 번 도로변 도시의 중국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제법 번창하는 이 중국음식점에 45 명 우리 일행이 도착하니 붐볐지만 제법 좋은 중국식 음식을 즐겼다. 여행을 하다 보면, 미국의 아무리 작은 도시에도 예의 없이 중국식당이 있으며, 중국인들이 식당 업으로 세계에 뻗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었다. 노름장 호수가의 공원 테일러 크리크(Taylor Creek) 3000 미터가 넘는 고산 지대에 화산 때문에 형성된 바다같이 큰 타호 호숫가에는 테일러 크리크라는 리조트가 있다. 이 리조트는 바로 아래에 리노 시가 있고, 자동차로 4 시간 정도 달리면 샌프란시스코가 있어서, 카지노 리조트로는 좋은 조건을 가지고 50 년대에 크게 건설되었다. 테일러 크리크는 지금도 미국 서부 명문 관광지로 여러 개의 카지노가 자리 잡고 있다. 테일러 크리크 근처의 인스부르그에는 언젠가 동계올림픽이 개최될 만큼 훌륭한 스키장이 있으며, 호숫가 주변에는 가장 더운 8 월 여름에도 하얀 눈을 볼 수 있어 또 하나의 지상 낙원으로 불리기도 한다. 타호 호수는 45 년 전 미국 생활 초창기에 나의 많은 추억이 살아 있는 곳이어서,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내 마음이 설렌다. 나는 1967 년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3 개월간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그 고생 덕분에 한 해 학비도 벌었으며, 대구에서 떨어져 생활하던 아내를 미국으로 불러들여 이 아름다운 호숫가에서 제 2 의 신혼생활을 했다. 지나고 보니 이곳이 모두 아름답게 보이지만, 이곳에서 3 개월간 두 개의 직업으로 밤인지 낮인지 구별도 못하고 일할 때, 나는 세상에 이렇게 어려운 일도 있는가를 몇 번이고 생각했다. 당시 내가 가졌던 첫 번째 직업은 저녁 8 시부터 새벽 4 시까지 카지노 바에서 바 보이 라는 이름의 직업으로 바텐더 조수를 하는 일이었다. 두 번째 직업은 아침 7 시부터 오후 3 시까지 작은 모텔의 침대 시트와 수건 등 세탁물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두 직업 사이 순간순간 새우잠을 181

182 자면서 석 달을 어떻게 일했는지 지금도 이해가 잘 안 간다. 이곳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온 여러 명의 한국 유학생들이 방 두 개짜리 아파트를 빌려서 같이 살았지만, 나는 침대에서 잔 기억이 없다. 내가 소파에서 단잠을 자고 있을 때, 일하러 가라고 친구가 깨우면, 벼락을 맞은 듯 벌떡 일어나 고양이 세수를 하고 뛰어 나가던 시절이 그 때였다. 한번은 지금은 고인이 된 민한기 형이 당시에 나를 깨웠을 때, 벌떡 일어난 나는 양말 한 짝은 신고 또 한 짝은 손에 들고서, 내 양말 한 짝이 어디 갔느냐고 민 형에게 물으니, 그가 너 정신 잃는 것 아니냐 고 하면서 둘이 부둥켜안고 운 적도 있었다. 그러나 석 달을 밤낮 없이 일한 결과, 나는 한 해 학비에 해당하는 3,000 달러를 벌었다. 지금 같으면 2 만 달러 가치가 넘을 듯싶다. 이렇게 어렵게 번 돈으로 한 해 학교를 다녀야 했고, 한국에서 아내까지 데려 왔으니, 나는 카지노에서 일하면서도 노름을 해 볼 수가 없었다. 지금도 카지노에 가면 나는 노름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182

183 모노 호수(Mono Lake) 모노 호수는 76 만 년 전에는 깊은 바다였다. 이 지역은 육지로 떠오르면서 바닷물이 빠져 나가지 못하고 보존되어 짠 소금물로 채워진 호수가 되었다. 유타 주에 가면 솔트 레이크 시티(Salt Lake City)처럼 이런 호수가 말라서 소금 땅이 된 곳이 많지만, 이곳은 주변에서 흘러 들어오는 빗물로 인해 소금기가 약해진 호수가 되었다. 모노 호수는 350 년 전에는 화산도 폭발한 적이 있다. 이 호수에는 소금물 새우가 많아서, 철새들이 즐겨 찾았다고 한다. 그림 같은 석회화암 앞에서 그러나 1941 년 로스앤젤레스 시청이 이곳으로 오는 물길을 자기 도시 식수로 빼돌리기 시작하면서 빗물이 들어오지 않은 이 모노 호수는 다시 소금 염도가 배로 늘었고 수위도 점점 낮아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갑자기 물을 뺏어 간 인간들 때문에 모노 호수는 사람들이 만든 기형적인 화학물질 보관소로 변했고, 새우가 없어지면서 철새들도 이곳을 찾지 않게 되었으니, 모노 호수는 인간이 자연에 대해 또 하나의 모독적인 죄를 저지른 곳이라고 이곳 안내원이 설명했다. 183

184 모노 호수가 화학물질 저장소가 되면서, 근처의 공기조차 사람에게 해로울 정도로 나빠졌다. 그후, 새로 생긴 깨끗한 공기 법 이 발효되자, 1978 년 이 근처 주민 David Gaine이 중심이 되어 모노 호수 보호위원회를 조직했고, 이 위원회에 동조하는 각계각층의 회원이 2 만 명이나 되었으며, 이들이 힘을 모아 모노 호수 보호 운동을 펼쳤다. 석회화암 투파는 비극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 위원회는 그동안 모노 호수 보호를 위한 법적인 투쟁에서 많은 공적을 올렸지만, 아직도 원상회복의 길은 멀다고 한다. 석회 화암 (Tufa) 모노호수를 장식한 신비한 암석을 석회화암 투파라고 한다. 그런데 이 특수한 석회암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알고 나니, 여간 흥미로운 게 아니었다. 이 호수 지하에서 나오는 물은 대개 칼슘이 많다. 이 칼슘이 탄산염과 184

185 혼합되면 화학작용을 일으켜, 칼슘탄산석이 형성되는데, 이를 석회화암이라고 한다. 칼슘탄산석은 지하수가 나오는 곳에서 계속 쌓여 수백 년을 지나면서 투파 탑을 만든다고 한다. 수면 아래에서 투파는 10m 이상 커지며, 사람은 볼 수 없지만, 모노 호수 수면 아래에는 수많은 투파 탑이 있게 된다. 그런데 1941 년 인간이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갑자기 호숫물을 빼앗고 보니, 이 아름다운 투파가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사람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라고 안내인이 설명한다. 이렇게 투파가 보이게 된 이유는 비극적이지만, 이 호수를 찾는 관광객에게 투파는 신비한 구경거리가 되었다. 쥰 호수(June Lake) 단풍을 걸치고 잔잔한 쥰 호수 쥰 호수는 모노 호수에서 390 번 지방도로 건너편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 준 호수는 2,330m의 아주 높은 산 위에 두 개의 커다란 호수로 구성되어 있다. 지질학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 두 개의 호수는 아주 오래 전 빙하가 내려오다가 바위에 부딪혀 말굽처럼 휘어지면서 U자형 루프 모양을 형성하고 있다. 185

186 이 호수는 고산지대에 있어 물이 차다. 그러나 주변이 사막 기후이기 때문에 백두산 천지에 없는 송어가 여기서 자란다고 한다. 송어를 잡겠다는 낚시꾼들이 이 호수를 발견하고 모여들어, 새로운 동네가 형성되었다. 지금은 상점들도 들어서서 제법 큰 동네가 되었으나, 여름에는 아주 붐비고 겨울에는 한산한 계절 동네라고 한다. 본래 송어는 자연 번식이 잘 안되어, 다른 곳에서 인공 부화시켜 호수에 옮겨야 한다. 요즘 주정부의 예산 사정이 안 좋아 이 호수로 송어를 옮겨오지 못한 탓에 이 호수에는 송어가 많지 않다고 한다. 대신 오래된 송어가 많아서 잡기는 아주 어려운 반면에, 한 번 잡았다 하면 아주 큰 송어가 잡혀서 낚시꾼들이 많이 모인다고 한다. 절경의 낚시터 쥰 호수 2 박 3 일 동안, 나는 상상도 못한 자연의 형성과 변화 과정을 배웠고, 특히 로스앤젤레스 시가 성장하면서 이 지역 자연을 비극적으로 훼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186

187 이번 우리 일행은 관광을 마련해준 사람들에게 감사해하며 여름에도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라고 부탁하였다. 우리는 여름이 되면 락 크릭(Rock Creek)이라는 큰 산 밑으로 송어 낚시를 가곤 했는데, 이제는 동네 낚시꾼들을 모아서 이곳 쥰 호수로 낚시 장소를 바꾸어 보자고 제의했다. 자연산 송어는 잘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산 송어는 일반 식료품점에서 파는 양식 송어와는 맛이 전적으로 다르다. 나는 아직도 송어 낚시 초년생이지만, 이제부터는 동네 고수들과 같이 송어 낚시를 즐겨 보려고 한다. 동네로 돌아와서, 이곳 낚시 전문가인 지인에게 이 호수 이야기를 했다. 그는 이곳을 이미 여러 번 다녀왔으며, 햇볕이 뜨거운 여름에 준 호수에서 캠핑을 하면 또 다른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을 갖는다고 말했다. 여름이 되면, 나는 로키 산맥 서쪽 세코이야 산이 있는 비사리아 (Visalia)에 가서 좋은 음식점도 들르고, 킹스 캐년으로 가서 온천과 캠핑도 하고, 거대한 산맥 동쪽으로 이동하여, 이름은 죽음의 계곡 이지만 자연이 살아있는 이 지역을 다시 방문하려고 한다. 187

188 16. 환락의 라스베이거스 인천에서 라스베이거스 직행이 일주일에 세 번이다. 서울에서 가까운 친구가 대한항공 비행기로 죄와 환락 의 도시로 알려진 라스 베이거스(여기서는 흔히 베이거스라고 한다)의 컨벤션에 가니 좀 만나자고 전화를 하면서 747 대형 비행기가 한 주에 1,000 명 이상 실어 나른다고 해서 깜작 놀랐다.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뉴욕 뉴욕 카지노 이 친구 말에 따르면, 인천이 동북아의 비행 허브가 되면서, 동남아 특히 중국인들이 많이 이용하며, 중국인들의 카지노 선호는 대단하여 이들이 대한항공 영업을 도와 준다고 한다. 그는 이어서 처음 가는 베이거스에서 1 주일 동안 무엇을 해야 되느냐고 물어서, 그 동안 많이 가본 이 도박장 이야기를 여기에 적어본다. 사실 나는 노름은 절대로 안 한다. 우리 집이 있는 남 캘리포니아에서 베이거스까지는 대략 서울에서 부산 거리로, 자동차로 속도 120 킬로로 달리면 네 시간 정도 걸리는 곳에 있다.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의 다른 지역 그리고 세계 어디서나 베이거스에 오는 친척 188

189 친구들은 나에게 안내를 하라고 해서 여러 번 가 본 곳이다. 룩소 (Luxor) 카지노 입구 베이거스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미국이 경제 공황으로 어렵게 헤매던 1931 년에 네바다 주가 노름장을 할 수 있는 법이 통과되었으나 실제로 건설되기는 1940 년대에 세계 2 차 대전에 사용 할 원자폭탄 제조를 위한 맨하탄 프로젝트가 시작되어 과학자와 종업원들이 네바다로 온 다음에 발전되었다. 지금은 위험하다고 근처에도 안 가는 원자탄 실험을 보러 온 구경꾼들이 많아서 베이거스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이 구경꾼들은 벤자민 시에겔이나 메이어 란스키 같은 마피아 두목들이 베이거스 발전을 위하여 주동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대전 후 1970 년 초 오일 쇼크까지 겹치면서 미국 자본주의의 전성기로서 베이거스는 수많은 기업들의 년차 컨벤션을 독점하여 미국인의 제일 좋은 놀이터로서 번창 했었다. 그러나 1973 년부터 시작된 미국 경제가 어려워지자, 각 주 정부들은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189

190 위하여, 노름장 허가를 주기 시작 하면서 베이거스는 카지노 보다는 고급 유흥 도시로 변하기 시작했다. 베이거스에 가면 다음 다섯 가지는 꼭 챙겨 봐야 한다. 특히 마지막 번인 윈 (Wynn) 카지노를 보고 또 이 카지노에서 운영하는 그린 피 500 달러짜리 골프를 칠 수 있으면 아주 좋고, 못 치더라도 코스는 한번 구경 해 볼만하다. 1. 벨라지오 붂수 호수 베이거스에서 제일 볼만한 것은 역시 벨라지오 카지노 앞뜰의 분수 호수이다. 오후 3 시부터 저녁 8 시까지는 매 30 분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자정까지는 매 15 분마다 약 만평 (8.5 Acres)의 호수에서 프랑크 시나트라와 지인 캘리의 노래에 맞추어 1,214 개의 분수가 150 미터 높이까지 품어 올리는 분수는 정말 장관이다. 이 분수호수의 사진을 찍기 위하여 몇 날 몇 시간을 보내며 수 백 장의 사진을 찍었다. 아래 사진은 2014 년 4 월 20 일 오후 6 시 반에 잡은 것이다. 벨라지오 옆에 후라밍고 길 건너편에 있는 시저스 팔레스 어우거스터스 호텔 39 층에서 내려 보며 잡은 것이다. 벨라지오 붂수 광경 190

191 이 거대한 분수 건너 편에 보이는 파리 카지노 앞에 있는 에펠 탑괴 그 옆에는 헐리우드 프라넷 카지노가 라스베이거스 스트맆이라고 불리는 새로 건설 된 라스 베이거스의 중심이다. 베이거스가 노름을 독점하던 시절은 벌서 지나가고, 이제는 노름에서, 각종 컨벤션을 유치하고, 좋은 음식과 첨단 연예 프로그램으로 방향을 바꿨다. 노름이 위주였던 70 년대에는 베이거스에 오면, 음식과 연예가 저렴했다. 이제는 그 질도 높아졌지만 값도 많이 비싸다. 2. 태양의 서커스 베이거스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태양의 서커스 (Cirque du Soleil) 이다. 입장료가 140 에서 250 달러나 되는 이 서커스는 들판에 포장을 쳐놓고, 코끼리와 말을 타고 그네 위에서 곡예를 하는 종래의 서커스를 실내로 가지고 와서, 적은 호수와 폭죽등의 엄청난 세트에서 춤과 음악에 맞추어 각종 곡예를 사람들이 하는 종합 드라마이다. 지난 십 년이상 계속되는 이 서커스 중에, 벨라지오에서 하는 O 쇼가 제일 좋고, MGM 카지노에서 주관하는 KA 쇼가 아주 좋다. 그런데 근래에 보물섬 카지노에서 하는 신비 (Mystère) 쇼를 보고 크게 감탄하였다. 이 쇼에서 보여주는 연예인이면서 체조선수인 출연자의 상상을 초월하는 퍼포먼스는 감동적이었다. 태양의 서커스 장면 191

192 3. 미라지 화산 폭발 해가 지면 화산이 폭발하는 미라지 카지노의 인조 화산은 몇 번을 보아도 신기하다. 미라지 카지노는 3,044 개의 방을 가지고 있는 최고급 호텔 카지노이며, 역사상 6 억 3 천만 달러의 건설비를 들인 거대한 시설물의 하나로 이 인조 화산을 만들어 베이거스에 오는 사람마다 가슴을 서늘하게 해 준다. 음악이 나오고 불꽃이 솟아올라 올 때는 신기하게도 뜨거운 열기도 나와서 겨울에는 가까이 가서 보고 싶다. 4. 만다래이 베이의 상어 수족관 수족관 속의 상어 베이거스의 새로운 카지노 거리를 스트립이라고 한다. 그 길의 서쪽에 있는 만다래이 베이 카지노는 수십 년 동안 Mamma Mia 를 연출하다가 몇 년 전 다른 곳으로 갔다. 이 카지노는 멀지않은 근처에 골프장을 가지고 있어서, 나의 중학교 10 년 선배이신 정 교수와 그의 사위인 이장한 종근당 회장과 얼마 전에 환상적인 골프를 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카지노 지하에 있는 상어 어족관이 있는 줄도 모르고 192

193 있다가, 친척 아이들이 가자고 하여 이 수족관을 보았다. 수족관 잠깐 구경하는데 18 달러나 받아서 새삼 베이거스가 비싼 도시라는 것을 느꼈다. 수족관 터널로 들어서자 한 쪽은 지하이고, 또 다른 쪽은 하늘이 보이는 기다란 터널은 아주 큰 거북이, 악어 그리고 많은 상어가 크고 길다란 방처럼 된 수족관에서 수많은 관광객을 모르는 척 평화스럽게 살고 있다. 5. 스티브 윈과 베이거스 재건 베이거스에서 최상급 카지노는 Wynn 과 Encore 이며 이 두 개의 카지노를 개발 소유하고 있는 스티브 윈의 이야기는 바로 베이거스를 새로운 환락의 도시로 재건한 역사이다. 베이거스 윈 카지노는 2005 년에 문을 열었고 엥코어 카지노는 2008 에 열고, 중국의 마카오까지 가서 윈 마카오를 2010 년에 열면서, 카지노의 왕이 된 스티브 윈의 면목을 보여 주었다. 스티브 윈은 1942 년생으로 메릴랜드 주에서 태어나 부친이 경영하던 빙고 게임 회사를 유산으로 받은 것이 그가 카지노 산업을 출발한 계기가 되었다. 물려받을 때는 빚 투성이 회사를 살려가면서 베이거스의 Frontier Hotel and Casino에 투자 하면서 1967 년도에 그 당시 부인 에레인과 베가스로 왔다. 처음 4 년간 년까지는 와인과 리커 수입상을 경영하면서, 그 이익으로 당시 하워드 휴 가 소유했던 시저스 파래스 와 골든 너갵 카지노 인수에 참여 하면서, 뉴욕 밑에 있는 아트란틱 골든 너갵을 소유 하게 되었다. 그저 노름장이었던 것을 카지노 리조트 호텔로 재개발하여 엄청난 이익으로 팔고, 베이거스에서 미라지 카지노를 인수, 지금의 거대한 형태로 개발 한 것이다. 미라지는 총 120 억 달러로 개발 하면서, 베이거스에 100 억 달러(11 조 원 상당)급 건물들이 들어 서기 시작하여, 현재의 라스베이거스 스트립을 서서히 이룩한 것이다. 미라지가 스티브 윈이 직접 설계와 공사에 참여하고, 이 공사에 필요한 약 6 억 3 천만 달러의 자금은 마이클 밀리칸이 발행한 정크 펀드를 이용 했다는 기적적인 성공이었다. 193

194 1991 년에 미라지를 성공리에 완성 한 것이 스티브 윈의 계속된 카지노 사업 인수와 발전의 역사이다. 2 년 후인 1993 년에 4 억 8 천만 달러 비용으로 Treasure Island 카지노를 열었고 이때에 처음으로 베이거스에서 태양의 서커스를 보여 주기 시작 했었다. 윈 호텔 카지노 1998 년에는 160 억 달러 벨라지오를 개장 했는데, 당시 이 카지노 호텔은 세계어는 곳에서도 비교 할 만한 카지노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년도에는 그의 첫 작품인 미라지를 MGM 에 6 억 6 천만 달러에 팔면서 스티브 윈은 억만장자가 되었다. 이제는 눈이 잘 안 보이나 새 젊은 부인과 그 여생을 베이거스와 마카오를 드나들면서 산다고 한다. 스티브 윈 이야기를 읽으면서, 세상에 이런 수도 있구나 하고 감탄했다. 윈 카지노 호텔은 방이 400 달러정도 하지만, 이 비싼 호텔에 있는 아침 뷔페는 베이거스에서 최상이다. 의외로 값도 저렴하여 나는 베이거스에 가면 윈에 있는 T. I.식당에 가서 아침을 먹는다. T. I. 는 처음에는 Treasure Island 식당이었는데, 이름을 그 약자로 바꾸어 보물섬 카지노에 있는 식당이 아니라는 뜻으로 위상을 높였다고 한다. 지상의 최고급 호텔카지노의 아침 식사 값이 $19.99 이라니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내가 안내하는 친구들은 이 식당을 잊기 힘들 194

195 것이다. 특히 베이거스 윈을 열면서 전에 데저트 카지노가 운영하던 골프장을 새로 환상적인 코스로 만들어 처음부터 500 달러 그린피를 받는 최상의 골프장으로 만들었다. 윈 카지노 호텔에서 창문 밖으로 보이는 이 골프장은 마치 환상의 영화를 보는 기분이다. 6. 테코파 소금 온천 윈 골프장 캘리포니아서 라스베이거스로 가는 도중 북미대륙의 로키 산맥을 지나서 남북으로 연결하는 오래된 395 하이웨이 옆에 위치한 테코파 온천은 한국인들만이 즐겨 찾는 시설이 초라한 소금 온천이 있다. 온천이라고 하면, 지하에서 솟아오르는 뜨거운 물이 각종 광물질 특히 유황이 섞어 올라와서 우리 몸에 좋다고 한다. 그런데 아주 옛날에 바다가 내려앉은 Death Valley 국립공원 남단에 위치한 테코파 온천은 광물질은 별로 없고 염분이 많은 소금온천이라고 하여 아주 오래전부터 잘 알려진 명소이다. 195

196 이곳 지역 주민이 관리하며, 입장료를 톡톡히 받는 시설이며, 바닷물 같은 이 온천수는 위장에도 좋다고 하여 물통에 담아서 가지고 간다. 우리 이웃에 사는 친구내외는 그들의 캠핑용 RV로 이곳에 와서 한 달씩 묵으며, 주변을 돌아보며 매일 이 온천을 즐긴다고 한다. 우리는 이 온천으로부터 죽음의 계곡 국립공원까지는 몇 시간 올라 가야하고, 또 겨울철에는 춥고 삭막하여 온천욕을 마치고, 바로 라스베이거스로 차를 몰았다. 한 시간 정도 차를 몰고 베이커에 도착하면 이제는 남북으로 새로 만든 15 번 고속도로를 만나고 한 시간 정도 더 가면 네바다 주로 들어서는 것이다. 세계의 3 대 온천으로는 일본의 벳푸, 뉴질랜드의 로토루아 온천 그리고 독일의 바덴바덴 온천이라고 안내인이 설명한다. 나는 벳푸와 로토루아에 다녀 온 기억이 생생하다. 벳푸는 오이따 골프리조트에 갈 때마다 가까운 거리여서 다녀왔다. 36 여개의 특별 탕을 만들어 놓고, 반으로 나누어서, 남성 탕과 여성 탕을 바꾸어 주니 이틀을 묵으면 전체를 다 볼 수 있도록 된 스기노이에 가 있다. 한 번은 버스로 아소 산을 넘어서 후쿠오카까지 관광 여행을 하면서, 연기가 나는 화산 밑에까지 갔고, 일본의 지방 촌락을 거치면서 일본의 지난날을 상상해 보았다. 196

197 이 지역은 해변에 있으며, 식당 이름이 노 도라쿠 사시미 라고 하는데 그 뜻은 트럭으로 실고 온 생선이 아니고 직접 잡은 생선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본래 일본에서는 활어 회를 먹지 않았는데 한국인들이 많이 오면서 한국인을 겨냥 한듯하다. 오이타에서 골프를 치고 벳푸에서 온천욕을 하고 노 도라꾸 사시미 식당에서 일본 전통 정종과 신선한 생선회를 즐긴다는 것은 꿈만 같은 현실이다. 7. Red Rock Canyon National Conservation Area 라스베이거스 지역의 특징은 허허벌판의 사막이 아니고, 주변에 상당히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 속에 초호화판 고층 카지노 건물로 꽉 차 있다는 사실이다. 그 중에 동남쪽으로 후버댐땜 가는 길가에 Potosi 산과 Spring 산 서쪽 사이에 붉은 바위 계곡이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다. 이 계곡은 라스베이거스에서 약 25 키로 떨어져 있으며, 자동차로 197

198 30 분 이내에 갈 수 있다. 철분이 섞인 모래바위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빨갛게 변한 바위로 장식 된 계곡을 포함한 방대한 산악지역 보존을 위하여 연방정부가 공원으로 만든 지 10 여년뿐이 안 된 명소이다. 평풍처럼 펼쳐져 있는 계곡은 구경보다는 며칠이고 할 수 있는 등산로가 있으며, 자전거도 빌려 준다. 자전거로 돌아보는 젊은이들이 많다. 우리는 차를 세워놓고 구경하는 것도 크게 보람이 있었다. 겨울에 동면을 안 하는 방울뱀이 많으니 조심하라고 여러 군데 표식을 해 놓았지만, 뱀은 못 보았고, 다른 사막에 사는 동물과 식물이 잘 보존 된 아름다운 계곡이다. 계곡을 내려오면 바로 서부활극의 명물인 Red Rock 카지노와 식당이 있다. 아직 제대로 준비가 안 되어 촌스러운 멋이 있기도 하다. 8. 후버 댐 콜로라도 강줄기를 막아서 만든 후버 땜은 네바다 주와 애리조나 주 경계에 있다. 미국의 경제공황으로 어렵던 1920 년대 후반에 계획하여 1931 년부터 5 년간 공사로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작품이며 수 천 명의 노동자가 어렵게 공사를 하면서 백 명 이상의 사고 사망자를 낸 어려운 공사였다고 한다. 사막 지역에 필요한 농업용 그리고 주거용 물과 수력 발전시설을 하기에 훌륭한 여건을 갖춘 이 땜은 1900 년도부터 검토하였으나 어려운 공사와 막대한 비용 때문에 엄두도 못낸 사업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시작한 테네시 벨리 프로젝트와 함께 공사를 시작하고 성공리에 만든 이 땜은 미국의 서부 발전에 절대적인 기여를 하고 있고, 이제는 매년 백만 명 이상이 찾아오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테러리스트에 의하여 파괴되자, 연방정부가 가장 위험한 목표로 후버댐을 생각하고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후버 댐 위로 가는 93 번 도로를 차단하였다. 우회도로가 어려워지자 새로운 다리를 500 미터 거리에 강으로부터 300 미터 높이의 새로운 도로를 5 년에 걸쳐 공사를 하고 2010 년 10 월 19 일에 완성하여 이제는 후버 댐을 500 미터 밖에서만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198

199 새로 만든 다리는 Mike O'Callaghan-Pat Tillman Bridge 라고 하며 관광객을 위하여 차를 세워놓고 다리 위를 걸어서 건너 가 볼 수 있는 시설이 있지만 매운탕 식당이나 술집은 없어서 아쉬웠다. 이 유명한 다리를 걸어가면서 멀리 후버 댐을 보는 것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Mike O'Callaghan-Pat Tillman Bridge 199

200 17. 자랑스러운 나의 조국 서울은 조선 왕조가 수도로 정한 이래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심장이다. 21 세기의 아름다운 관광도시의 하나로서 전 세계 관광 객이 몰려드는 도시이다. 근래에 새로 복원한 경복궁, 그리고 한강의 기적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서울 도심에서 서해로 연결되는 강과 다리, 지하철, 우뚝 높이 솟은 거대한 빌딩 숲은 세계 어는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도시이다 전쟁으로 다 부서진 서울이 이렇게 건설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다. 나도 1966 년에 미국에 유학생으로 간 이래, 서울에 올 때마다 엄청나게 달라지는 서울과 대한민국의 발전을 보면서 자랑스럽고 고마웠다. 참으로 우리 민족은 우수하고 능력이 뛰어나다. 근대에 불행했던 일본의 36 년간 강점과 6.25 전쟁이 가져온 폐허에서 이렇게 기적적인 재건에 재건을 거치면서 세계 역사에 어느 곳에서도 보기 어려운 아름다운 나라를 건설 한 것이다. 서울에 도착하면, 우선 놀라는 것은 이런 풍경뿐만 아니라, 디지털 기술의 첨단을 경험하고 놀라 버린다. 다른 어느 도시에서 보지 못한 디지털 멀티미디어 방송 (DMB)이 되며, 인터넷 연결은 한국인 생활 어느 곳에서나 빠르게 활용되고 있다. 핸드폰을 지하철이나 터낼 속에서도 사용 할 수 있는 도시는 서울을 제외하고 아직 보지 못했다. 서울에 가는 또 하나의 이유는 건강 종합검진을 받는 것이다. 특히 내시경이나 대장검사를 미국에서 한번 하려면 그 수속이 복잡하여 수개월이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든다. 서울에 가면 일 주일 이내에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마치고 나면 검사결과를 즉시 사진과 함께 준다. 근래에는 외국에 사는 동포를 위하여, 건강진단을 한국의 명승지에서 지역관광과 함께 묶어서 한다고 한다. 출입국 관리사무소나 자동차 운전 면허증 사무소에 가면, 디지털 정보처리 방법이 우수하고, 또 일하는 직원들의 민첩하고 영리한 처리는 다른 나라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다. 호적등본을 본적지에 200

201 가지 않고 어느 동 사무소에서나 교부 받을 수 있고, 자동차면허증은 한 시간도 안 걸려서 손에 쥐고 나오면서 크게 감탄한 적이 있다. 얼마 전 내가 사는 캘리포니아에서 자동차 면허증을 갱신하려고 줄을 서고 몇 시간씩 기다리고, 면허증은 한 달 후에 우편으로 간다고 하는 경험을 하고 한국의 뛰어난 행정력을 좀 배우라고 외치고 싶었다. 이런 민첩한 행정력이 한국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다고 확신한다. 한국이 이렇게 크게 발전하게 된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는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몇 번이나 말 한 것처럼 교육의 힘이다. 한국인의 교육에 대한 집념은 엄청나고, 좋은 대학을 보내기 위하여, 한국의 아이들은 초등학교부터 준비를 한다고 한다. 대학 진학 율도 높고, 이 젊은이들의 디지털 기술이나 첨단 학문에 도전하는 교육은 경쟁력이 높은 한국사회에서 견디는 기본이다. 德 邱 온천 이번 서울 여행일정 중에는 둘째 그리고 셋째 동생 내외가 준비한 울진군 북면에 있는 덕구 온천의 관광호텔에서 2 박 3 일 여행을 하는 것이 있다. 우리는 이미 대구에 와 있어서 대구에서 울진으로 포항을 거쳐서 280Km를 운전하고 동생들은 서울에서 내려와 호텔에서 2 시경에 만나자는 약속이었다. 대덕 맨션에서 동 대구를 나가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다가 나오는 20 번 도로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보기 드문 신공법의 고속 도로였다. 산이 막히면 굴을 뚫고, 농토나 적은 마을을 지날 때는 육교다리를 놓아서 거의 직선에 수평을 이룬 이 고속도로는 한국의 뛰어난 도로건설 기술로 개발한 훌륭한 고속도로이다. 포항에서 울진 가는 동해 해변 7 번 도로 역시 훌륭하다. 울진은 나에게는 낯선 곳이 아니다 년 장면 정권시절 국토개발요원으로 선발되어, 울진군 책임자로 2 개월간 나가 있으면서 울진군의 모든 면들을 돌아보았고 지금 크게 개발된 온 정면의 백암 온천을 몇 번이나 갔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내가 머물던 울진여관 주변과 시내 가운데를 갈라서 내려가는 울진 천과 다리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시내에서 다리를 건너가기 201

202 전에 보성양복점이 있었고 그 분들의 정겨운 대우를 받은 기억이 새롭다. 다리를 건너 주변을 살펴보아도 그 옛날의 자취나 사람들을 찾을 수 없으니 이래서 인생이 무상하다고 하는가 보다. 덕구 온천 호텔 우리 세 가족은 거의 같은 시간에 호텔에 도착하여 체크인 하고 바로 죽변 항의 해물시장으로 갔다. 영덕 대게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곳에서는 울진 대게라고 하는 게와 우럭 같은 좋은 생선회를 먹게 된다는 커다란 기대감을 가지고 온 것이다. 그러나 세찬 바람과 비가 내려서 어선들이 모두 정박하고 있는 상항이어서 게 한 상자와 3 Kg짜리 문어를 스팀으로 쪄서 호텔로 가지고 왔다. 둘째 동생이 준비한 묵은 김치와 싱싱한 채소, 그리고 소주를 깊은 산 속 호텔 베란다에서 마신다는 것은 꿈같은 정경이다. 옛날 어린 시절의 기억이나 주변 사람들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둘째 날 새벽에 이곳 호텔 지하에 있는 온천탕을 찾았다. 깨끗하고 시설이 잘 되어 고급스러워 보였다, 이곳 물은 한국에서 유일하게 지하에서 올라오는 자연수 그대로 쓴다고 적혀있다. 유황이나 독한 냄새가 전혀 없는 맑은 물에 몸에 좋은 광물질이 많이 들어 있다고 하는 온천탕에 몸을 당구고 한 동안을 보냈다. 계획된 피크닉과 등산 코스로 온천 근처에 있는 응봉산과 그 산 중턱에 있는 불영사를 찾아 나섰다. 신라 진덕왕 5 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이 절은 사찰 서쪽 산 위에 부처를 202

203 닮은 부처 바위가 연못에 비추어 불영사라고 전해 온다. 지금도 그 연못은 잘 가꾸어져 있었다. 그러나 절 건물들은 모두 새로 지은 듯 번듯 번듯하고 그 중에 제일 큰 건물인 대웅전에는 누구의 명복을 비는 절차가 진행 하는 듯하다. 이제는 동안거가 끝났을 것이라 생각 했으나, 문을 굳게 닫혀 있고 외부인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절에 오면 참선을 하리라 생각 했었다. 명승 6 호로 불리는 불영사 계곡은 가벼운 등산 코스였다. 계곡을 두루 돌아보고 내려오면서 물가에 평평한 바위를 찾아 피크닉 자리를 잡고 준비해온 삼겹살과 반찬으로 푸짐한 점심을 먹었다. 바람이 거세게 부는 산길을 내려와 어제 갔던 죽변 항을 다시 찾아갔다. 이날은 마침 수산시장에는 자연산 우럭과 홍삼이 있어서 푸짐하게 사가지고 호텔로 왔다. 우럭 회도 알려진 대로 훌륭하지만, 홍삼 역시 좋았다. 본래 홍삼은 날로 먹기는 너무 딱딱하고 질겼다. 제주도에서 배운 대로 펄펄 끓는 물에 잠 간 삶아서 먹으니 천하 일미이다. 다시 옛날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다가 밤늦게 잠자리로 갔다. 셋째 날 아침 6 시 반에 호텔에서 안내하는 등산 프로그램에 참가 하였다. 응봉산 위로 약 4Km 정도 올라가는 곳에 덕구 온천의 수원지 원탕이 있는 곳까지 다녀오는 코스였다. 약 2 시간 반 정도 걸리는 등산은 우리에게는 좀 힘들었지만, 조그만 온천수가 뿜어 올리는 분천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대구앞산의 등산로 나에게 대구에서 제일 좋아하는 곳은 대구 앞산의 등산로이다. 밤 늦게 까지도 수풀과 나무가 우거진 등산로는 하로 종일 걸을 수도 있지만, 나는 대구에 갈 때마다 매일 아침 두 시간 정도 걷고, 산 밑에 내려와 콩나물 국밥이나, 대구의 명물인 따로국밥을 먹는다. 지방자치제도가 이제 자리를 잡히면서, 시민 건강과 복지에 과감히 투자한 좋은 본보기가 바로 대구앞산 등산로이다. 이 등산로는 맨발로 걸어보라고 모래로 덮은 길이 따로 있으며, 중간에 배드민턴 과 기계체조를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203

204 대구 앞산의 등산로 또 하나 볼만한 곳은 대구의 쓰레기 매립장 위에 만든 식물원이다. 대구에 지하철을 건설하면서, 나온 홁으로 식물원을 만들고 보기 어려운 수목과 꽃으로 장식한 공원은 너무도 멋이 있다. 냄새나고 더럽던 매립장이 아름다운 공원이 된 것이다. 서울 외곽 난지도 매립장이 월드 컵 축구장, 골프장 그리고 커다란 공원이 된 것과 비슷하다. 부산 여행 울진 여행을 마치고 돌아 온 다음날 나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은 나에게는 서울과는 달리 정이 넘치는 항구도시이다. 부산에는 경성대학교에 우병동과 정태철 교수, 부산대학교의 박재진 교수 등, 나의 수제자들이 있다 년에는 경성대 대학원장 정태철 교수가 주선하여 특강을 헀다. 언론사 출신으로 나와 친 형제 같은 이우봉과 차용범은 언론계를 떠나서 부산발전을 위하여 크게 기여하는 기수들이다. 이우봉은 부산 204

205 해운대 안에 거대한 명품도시를 건설하는 센텀시티 사장으로 건설을 완수하고, 지금은 북항대교를 건설하는 회사의 감사로 일 하고 있다. 부산언론의 중추역할을 하던 차용범 박사는, 부산광역시 미디어 센터장으로 대학 강의는 틈 있을 때만 하고, 부산 시의 매체홍보 부문을 책임지고 있다가 부산시 전시 컨벤션 센터(BEXCO)의 상임감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 밖에, 많은 학자들이 내가 현직에 있을 때 미주리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연수했다. 동명대의 장미옥 교수, 동의대의 강준규 교수, 동서대학교의 이완수 교수, 부산 MBC의 김용성 국장은 부산 가면 꼭 만난다. 부산의 새로운 상징은 개통 10 년이 넘는 광안대교다. '다이아몬드 브리지'라는 애칭만큼 아름다운 대교는 국내 최초 설계수명 100 년, 진도 9 의 강진을 견딜 수 있는 '파격'을 도입, 국내 다리의 풍속 내진 기준 교과서로 불린다. 광안대교는 무엇보다 부산의 풍경을 바꿔놓으면서 부산의 랜드 마크로 당당히 자리매김했다. 단순한 다리 개념을 넘어 부산의 상징이며, 풍경이요, 축제의 중심이다. 대규모 고급 아파트단지의 205

206 배치도를 새로 짜고, 조망권 프리미엄을 불러온 광안대교는 항만 물류의 대동맥이자 동서교통난 완화의 핵심 축이 되었다. 부산에는 항구도시로서 부산식 회집 이 좋다. 해운대 달맞이 언덕의 거북선 횟집이나 광안대교 근처의 부산횟집은 나의 꿈에도 보이는 곳이다. 나는 화식집의 사시미보다는 부산식 횟집이 좋다. 사시미는 보기만 좋고 값만 비싸지만, 부산식 회는 실속이 있고 특히 부산 된장과 같이 먹는 것은 천하일미다. 삼성그룹에서 소유 관리하는 베네스트 동래 골프장은 한국에서 전통 있는 골프장으로, 겨울에도 칠 수 있는 아름다운 명문위상을 자랑하는 클럽이다. 그리고 부산 광역시가 2002 아시안 게임을 위해 건설한 기장의 아시아드 CC는 거리가 길고 어려워서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이우봉, 차용범, 김용성과 내기 골프를 치면 내가 즐겁게 깨진다. 삶의 의미를 찾는 가족 모임 (2013) 우리 가족 모임 2013 년 10 월, 3 년 만에 다시 찾아가는 조국에서 삶의 초점인 가족과 친구를 찾아 보는 즐겁고도 중요한 여행이었다. 206

207 처음으로 우리 가족이 모두 참가하는 모임을 나는 원하였다. 넷째인 원식이, 일곱 번째인 원철이 그리고 막내 영자가 주선하여 2013 년 10 월 9 일에 강원도 깊은 산골 문막에 있는 참나무 골 (Oak Valley Golf and Resorts) 에 우리가족 40 여명이 모였다. 한국전쟁 말기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깊은 산 골자기에 54 홀의 골프장과 스키장을 만들어 놓았으며, 서양식의 콘도 시설은 마치 알프스 산속에 있는 스위스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는 황홀한 리조트였다. 참나무를 많이 심어 10 월 초 이제 단풍이 들기 시작하니 온 계곡이 더욱 아름다웠다.도착하자마자 콘도에 입주하여 가지고 온 온갖 맛있는 반찬과 소주로 밤늦게까지 그동안 듣지 못한 온갖 이야기가 끝이 없었다. 우리 팔남매는 모두 살아 있는데, 둘째 철호 어머니가 저 세상에 가신지는 벌써 10 년이 넘는다. 철호는 딸 셋에 아들 하나 그리고 하연이는 아들만 둘을 두고 있으니 우리 형제 중에 손 자녀가 제일 많아서 손 자녀 재미있게 보아주기가 바쁠 터인데 너무 일직 가신 것을 모두 아쉬워했고, 또 여섯째 인순이 남편 윤홍식이 아직 젊은 나이에 갑자기 승천하니 형제들의 놀라움은 풀리지가 않는다. 다음날 아침 일지기 일어나서 모두 근처 산으로 등산을 하고 점심에는 미리 예약 해놓은 약밥을 넣고 옹기를 굽는 가마 속에서 구운 오리 고기 집에서 언제 다시 갖기 힘든 어려움을 알면서 송별 207

208 파티를 하였다.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연설하는 순서에 좌장인 나는 이제 80 세가 가까우니 진짜 인생의 뜻이 무언가를 이야기 해달라는 젊은이들의 요청으로 몇 마디 하였다. 참나무 골의 콘도 시설 나의 이야기는 젊은 수도승 효민 스님이 메일로 돌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최근 뉴욕에서 관람한 뮤지컬 피핀 (Pippin) 은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난 피핀은 삶에서 위대하고 특별한 무언가를 성취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전쟁에 나가 전쟁 영웅이 되기도 하고, 가난하고 굶주린 자들을 위해 혁명을 일으켜 왕위에 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종국에는 이 모든 것이 다 허망하다는 것을 느끼고, 자신이 진정 원했던 것은 항상 곁을 지켜주었던 여자 친구와 함께 소소한 시간을 보내는 것임을 깨닫는다. 오랫동안 애타게 찾아 헤매던 것이 막상 찾고 보니 다름 아닌 항상 자기 옆에 존재했던 것이었다. 사실 구도자들이 추구하는 깨달음도 피핀의 깨달음과 다르지 않다. 처음엔 깨달음이 뭔가 특별한 경험이나 대단한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라고 착각하지만, 수행을 하면 할수록 평상심이 곧 도( 道 )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깨달음은 뭔가 없었던 것을 새로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항상 가지고 있는 본성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그래서 깨닫는 순간, 많은 성인들은 눈앞에 항상 두고도 못 봤다니 208

209 하며 껄껄 웃는다.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이란 현재 삶과는 다른 뭔가 새롭고 특별한 것을 성취하는 것으로 여기는 수가 많다. 그래서 지금이 늘 불만족스럽고, 더 좋은 것, 더 새로운 것, 더 나아 보이는 것을 찾고 싶어서 마음이 바쁘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여행을 해보면 알겠지만 정말로 소중한 것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인동 장씨 태사공파 34 대 8 남매 젊은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덕담이지만, 나는 이제 내가 사는 남은 인생에 초점을 잡았다고 가족들에 말하면서 좀 늦기는 했지만 가족과 친구를 챙기는 것이 나의 남은 생애의 목표라는 것을 가족들에게 분명히 설명하였다. 단풍이 화려한 설악산 한국의 알프스라고 하는 설악산에 단풍이 들기 시작하자 갑자기 우리도 가보고 싶다고 하니 철준이는 회사 일에 바빠서 가기 어려우나 철준이 차로 아침 일찍이 설악산 여행을 다미가 만들었다. 209

210 1987 년 풀브라이트 교수로 고려대학교에 왔을 때 차로 설악산을 가면서 고속도로가 아닌 지방도로로 가고 오는 길 로 차를 몰기가 어려웠던 생생한 기억을 갖고 있다. 이번에는 서울시를 떠나자 새로 개설한 고속도로가 너무도 인상적이고 예상보다 한참 적은 2 시간 조금 지나서 설악산 입구에 도착하였다. 마침 주중이어서 많이 붐비지 않았다. 전에는 산과 산 사이를 타고 돌아가던 지방도로가 산에는 터널을 파고, 계곡에는 다리로 연결한 고속도로는 다른 나라 어느 곳에서도 보지 못한 훌륭한 고속도로 공법이라고 한다. 오랫동안 기억한 설악산은 생각보다 그 규모가 작았으나 아름다운 산에 마침 단풍이 들기 시작하니 참으로 좋은 구경을 한다고 손녀 하은인와 손자 윤석이와 함께 감탄하였다. 산으로 올라가기 전에 통일을 염원하는 커다란 부처상과 그 부처상 210

211 밑에는 지하 시설로 마치 지하의 절과 같은 시설이 인상적이었다. 산에는 멀리 올라가지 않았으나 설악산 케이블 차를 타고 산위에 올라가서 주변을 돌아보면서, 설악산은 아주 아름다운 산이라고 다시 감탄하였다. 설악산 여행을 당일치기로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하다가 하은이와 윤석이를 데리고 즐거운 관광을 마친 우리는 서래마을 집 근처 이태리 음식점에서 멋있는 저녁식사를 하고 돌아왔다. 이런 귀한 여행을 마련한 큰 며느리 다미에게 고맙다고 몇 번이나 치사를 했다.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갈 때는 항상 KTX 고속열차를 탔었는데, 고속버스가 새로 개통한 중앙고속도로를 달려 나의 고향근처 충주와 수안보를 지나 문경 새재(조령)를 넘는다고 하여 고속버스를 타고 갔다. 경남 관광 고등학교 대구에 도착하여 마침 창원에 국화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으니, 처형의 큰 아들 덕기가 교장으로 있는 창원관광고등학교를 보러 갔다. 처조카 덕기는 미주리 대학교에서 저널리즘 석사를 마치고, 당시 석사장교를 마치고 다시 미주리로 와서 교육행정학 박사를 마쳤다. 자기 아버지가 이사장으로 있는 이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시작하여 이제는 교장이다. 학교 시설과 교육과정이 특별히 잘 되어서 정부 추천으로 다른 사립 211

212 고등학교에서 견학을 오고 또 텔레비전으로 많이 소개 이 학교를 보고 싶었다. 또 이 지역 창원이 대구에서 마산으로 가는 고속도로가 있어서 두 시간도 안 걸렸다. 그 곳에 도착하여 알게 되었지만 창원과 마산이 바로 옆에 있다는 것도 나는 모르고 갔다. 창원에는 경상남도 도청이 있어서 새로 지은 캘리포니아 주청사보다 한참 거창한 도청 주변을 돌아보았다. 너무나도 넓고 큰 정부 청사는 지방자치를 시작한 후 부터 보는 신기한 현상이다. 이렇게 좋은 청사를 버리고 마산으로 옮기자는 운동이 한참이라고 하니 오래된 것을 좋아하기보다는 새로운 것을 찾는 우리 민족의 습성도 다시 생각 해 볼만하다. 호텔경영 코스로 유명하며, 졸업생 취직이 거의 보장 된 이 학교의 시설은 마치 관광호텔처럼 인조대리석 바닥에 나무로 벽이 잘 이루어진 시설이었다. 아주 훌륭한 시설에 좋은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창원 시와 경남도에서 엄청난 많은 보조를 받았다고 한다. 덕기 부모와 함께 학교를 돌아보고, 복어를 구어 먹는 창원의 특미 식당에서 귀한 점심을 먹고 창원 국화 행사를 돌아보았다. 지방자치를 시작하여 아직도 개선 할 점이 많지만, 지역사회가 자체로 아주 훌륭한 잔치와, 이 잔치에서 재미 보는 지역상인들의 얼굴에는 만족스런 얼굴들이 눈에 보인다. 여흥을 주선하며 지역 토산물이나 음식으로 며칠을 보아도 되겠지만 우리는 마산을 거쳐서 다시 대구로 올라왔다. 해스리 나인 브릿지 골프코스 여러 나라의 좋은 코스에서 내가 골프를 쳤지만, 100 대 안에 들어간 곳은 제주 나인 브릿지 뿐이다. 그런데 제주의 나인 브릿지 보다 더 훌륭한 코스를 서울 근처에 개장하고 코스 이름을 해스리 나인 부릿지라고 했다 년 10 월 서울 여행 중에, 해스리 나인 브릿지에서 라운딩을 갖었다. 이 클럽에는 120 명의 멤버만을 유지하며, 멤버만이 함께 칠 게스트를 초청 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종근당 이장한 회장이 멤버로서 두 팀을 예약했다. 이 회장은 못 나오고, 부인의 주재로 212

213 나의 중학교 10 년 선배이신 정병희 교수님을 모시고, 내 막내 동생 부부와 양휘부씨 부인이 함께 라운딩을 가졌다. 해스리 나인 브릿지 코스 입구 우선 골프장에 들어가는 클럽하우스 건물이 세계에서 최상 목표로 지었다고 한다. 건물 디자인이 너무 웅대하고 정묘하였다. 라커룸과 목욕탕 시설은 어느 호텔 사우나보다 예쁘게 만들어 저 있었다. 나인 브릿지라고 다리가 9 개 있는데, 다리마다 특별 조각을 한 듯하며, 골프장 페어웨이는 다른 코스의 그린에 쓰는 잔디로 깔아 놓아서 아이언으로 칠 때마다 잔디를 훼손하여 치기가 겁 날 정도였다. 골프를 마치고 클럽하우스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면서 준비된 포도주를 반주로 마셨다. 한국에서 인기 있는 포도주는 캘리포니아 와인으로 Kendall Jackson이라고 한다. 몇 년 전 부산에서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가 참석한 APAC 회의에서 이 포도주가 나왔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한국에서 많이 수입하여 이 브랜드 값이 많이 올랐다고 한다. 그런데 그 값이 미국 값의 열 배 정도 받는 것을 보고 놀랐다. 213

214 18. 소나기 마을과 제주도 황순원 소나기 마을 오래 전에 읽은 Barbara Bradford의 파리에서 3 주간 에 감명 받아서 이번 한국여행은 꼭 3 주간을 머무는 일정을 잡았다. 직장을 옮기는 큰 아들가족과 함께 제주도 여행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그러나 제주도는 10 월 일로 예약되어 있어서 서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셋째 동생 원식이 내외가 서울 근교에 여러 곳을 구경 시켜 주겠다고 214

215 하였는데 우리는 서울의 물줄기인 양평군 양수리 근처에 있는 순수문학의 대가 황순원의 소나기 마을을 선택하였다. 어렴풋이 기억하는 소나기는 내가 70 년 전의 소나기와 비슷한 기억을 되 살려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다. 황순원 기념관 소나기 이야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 시골마을의 초등학생 석이는 요양하러 내려온 윤초시의 증손녀 연이를 개울가에서 만난다. 연이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 기쁘지만 쑥스러운 마음에 무뚝뚝하게 외면하곤 한다. 그러나 며칠 째 학교를 나오지 않던 연이가 학교에 오자 석이는 용기를 내 말을 걸고 함께 놀러간다. 단풍놀이를 하던 둘은 돌아오는 길에 소나기를 만나고 오두막에서 모닥불을 피우며 소나기가 그치기를 기다린다. 비를 많이 맞아 앓고 났던 연이는 개울가에서 석이를 만나 읍내로 이사 간다고 말한다. 215

216 그날 밤 석이는 덕쇠 영감의 호두를 따 개울가에서 연이를 기다리지만 연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잠결에 아버지에게서 연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석이는 숨죽여 흐느껴 운다. 소나기 애니메이션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 는 현재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으며, 소년의 순수한 사랑을 부각시킨 내용의 뮤지컬로도 제작되기도 하였다. 초등학교 2 학년 중반에 해방을 맞은 1945 년에 나에게 있었던 일이다. 해방 전에는 초등학교도 선발하여 입학을 시켰는데, 해방이 되자마자, 어린이들을 모두 입학시켰다. 우리 반에는 갑자기 2-3 년이나 많은 형과 같은 소년 소녀가 들어오고 반 편성도 갑자기 남녀 공학이 된 것이다. 여학생들과 한 교실에서 공부 하는 것이 처음에는 무척 어색 하였지만, 교실을 반반으로 나누어 남자 쪽과 여자 쪽을 구분하던 216

217 시절이었다. 우리 반에 부모들이 친구인 남씨 댁의 큰 딸과 나는 한두 번 가족과 함께 만난 적이 있었다. 교외로 소풍을 가는 날 남 양이 내 책상에 사과와 삶은 달걀을 몰래 넣는 것을 본 나이 많은 학생이 크게 소문을 내어 우리 둘을 난처하게 하였다. 매일 아침 등교하면 누군가가 흑판에 소녀소년을 그려놓고 우리 둘의 이름을 올렸다. 다음해에 반이 바뀌기까지 우리 둘은 서로 눈도 못 마주치게 피해 다니는 형편이었다. 아니 그 후에 그 소녀를 다시 만나보지 못하고 나는 청주로 유학을 떠나서 지금까지 소식을 모르고 산다. 이 귀하고 아름다운 기억은 황순원의 소나기 속의 석이와 연이의 이야기처럼 아름답고 애처로운 나의 이야기로 남아있다. 소설 소나기 의 배경을 재현한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마을 은 양평군 서종면 수능리에 소나기마을의 배경 무대와 지상 3 층 규모의 황순원 문학관을 조성했다. 217

218 황순원문학관에는 황순원 선생의 유품과 작품을 전시하는 3 개 전시실이, 소나기광장에는 노즐을 통해 인공적으로 소나기를 만드는 시설이 있다. 또, 징검다리, 섶다리 개울, 수숫단 오솔길 등 소설 소나기 의 배경을 재현한 체험 장이 있다. 황순원의 다른 소설을 주제로 한 목넘이 고개(목넘이 마을의 개), 학의 숲(학), 해와 달의 숲(일월), 별빛 마당(별)을 만들었고, 소나기광장과 사랑의 무대 등 부대시설도 설치했다. 황순원은 1915 년 3 월 26 일 평안남도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3.1 운동 때 평양 숭덕학교 교사로 재직 중에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평양 시내에 배포한 일로 옥살이를 했다 년 만 6 세 때 가족 전체가 평양으로 이사하고, 만 8 세 때 숭덕소학교에 입학한다. 유복한 환경에서 예체능 교육까지 따로 받으며 자라났다 년에는 정주에 있는 오산중학교에 입학한다. 그곳에서 교장 출신인 남강 이승훈을 만나게 된다 년부터 동요와 시를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광복 이후 황순원은 218

219 평양으로 돌아가지만 북한이 공산화되면서 지주 계급으로 몰리자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이듬해 월남했다. 월남 후 서울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재직한 황순원은 지속적으로 단편소설을 발표했고, 1953 년에는 장편 작가로서 그를 인정받게 한 장편 소설 카인의 후예 를 발표한다 년에는 경희대학교 국문과 조교수로 전임하여 생활이 안정되면서 김광섭, 주요섭, 조병화 등 동료 문인들과 함께 더 많은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는 1985 년 발표한 산문집 말과 삶과 자유 를 발표할 때까지 왕성한 창작열을 불태우며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2000 년 타계할 때까지 소설은 더 이상 쓰지 않았으나 간간이 시작품을 발표하며 말년을 보냈다. 아들 황동규는 시인이자 영문학자로 활동하고 있다. 소나기 마을을 나와서 시내의 식당가에 들려 옛날 보리밥 점심을 들었다. 아주 좋은 점심식사였다. 보리밥은 봄철 춘궁기에 가난한 사람들의 메뉴였는데, 이제는 건강 식품으로 흰 쌀밥보다 귀하고 219

220 좋은 밥이라고 한다. 보리밥에는 부자들이 먹지 않던 이름없는 채소로서 갓, 씀바귀, 열무, 상추, 치나물을 넣고, 고추장을 넣어서 비비는 것이 옛날 식이다. 좀 맛을 내려고 참기름을 한 숫가락 넣으면 천하 일미이다. 노인들에게 무서운 과 체중, 당뇨와 고혈압을 주리려면 탄수화물이 많은 쌀 밥보다는 보리밥이 월등히 좋다는 설명은 이제 수도없이 읽고 들었다. 푸짐한 점심을 들고, 소나기 마을에서 멀지 않은 양수리(두물머리 나루터)로 가서 강변에 만들어 놓은 옛날의 모습과 식물원을 보았다. 지방자치를 시작한지 10 년이 넘으면서, 좋고 나쁜 여러 가지 사항이 벌어지고 있지만, 가는 곳마다 옛날 모습을 복원하여 관광지로 개발하고 많은 사람들이 분비는 것은 참으로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하면서, 천만이 넘는 서울의 풍부한 물줄기를 부럽게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사는 캘리포니아는 물이 모자라 야단인데, 서울에서는 물 걱정은 없다. 단지 상수 수원지인 양수리가 관광지가 되면서 물을 보호하는 시설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좀더 조심 했으면 좋겠다고 혼자 걱정을 해보았다. 220

221 양수리 근처를 돌아보고 서울로 돌아 오면서, 서울 근처에는 찾아 보고 싶은 곳이 너무 많은데, 서울 갈때마다 친구 후배 특히 제자들에게 전화를 하고 식사를 했던 지난날들을 원망스럽게 반성 하면서, 앞으로는 서울가는 것도 알리지 않기로 했다. 서울에 돌아 와서 혼자 처음으로 광화문과 경복궁을 찾아 몇 시간을 보냈다. 경복궁을 돌아보다가 경회루에 와서는 화려한 정경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왕의 침실영역 서쪽에 위치한 연못 안에 조성된 누각으로 외국사신의 접대나 임금과 신하 사이에 벌어지는 연회장소로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경복궁 창건 당시는 작은 누각이었던 것을 태종이 크게 연못을 파고 지금과 같은 규모로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의 경회루는 고종 4 년(1867)에 중건된 것이다. 다시 지어진 경복궁의 많은 건물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회루는 중건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여 왔다. 연못 주변에는 담장이 둘러싸여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동 서 남 북의 담장이 철거되었으며, 2004~2005 년에 각각 북쪽과 동쪽 담장이 복원되었다. 경회루로 가는 3 개의 돌다리에는 벽사의 의미를 가진 동물상이 새겨진 엄지기둥을 놓았다. 경복궁을 돌아보면서, 우리 선조는 훌륭헀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면서, 나이가 들면서, 세상보는 눈이 트인다고 혼자 웃었다. 221

222 경복궁을 나와서 광화문 주변을 돌아 보았다. 광화문 앞에는 세종대왕을 기념하는 공원과 대왕 동상이 우뚝 서있다. 서울의 중심에 있는 이 공원은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있는 링컨 광장처럼 크지는 못하지만, 잘 짜인 고상한 정원이다. 세종대왕의 여러 가지 뛰어난 업적 중에 그가 시켜 만든 한글이 있다. 언어학자들 간에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편리한 문자라고 한다. 특히 지금의 디지털 기술에 적용하기에 가장 뛰어난 발명이라고 한다. 이 세종대왕 기념 공원 지하에는 대왕의 역사와 업적을 차려놓은 박물관이 있으며, 500 년 전 역사를 다시 공부 할 수 있다. 관광객 사진 찰영을 위하여 차려놓은 왕좌에 앉아서 세종대왕의 업적을 살펴보았다. 훌륭한 문자를 발명 한 것뿐 만 아니라, 과학적인 기초를 연구 시켰고, 왕의 제일 큰 목표가 국민을 잘 살고 편하게 해 주어야 한다는 정치 지도자의 지침을 마련한 위대한 대왕이었다. 역대 여러 대통령을 지낸 분들이 임기만 끝나면, 자신들의 사리사욕에서 벗어나지 못한 근래의 한국 실상을 생각하면서 세종대와의 업적을 다시 칭송하고 싶다. 세종대왕 기념관에서의 필자 222

223 서울에서 일정을 대략 마추고 대구로 내려갔다. 금년이 결혼 60 주년이라고 11 월 16 일에 집안들이 모여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기회에 성도경 선생님 자서전 死 에서 生 으로 를 만들면서 지난날의 어려웠고 힘들었던 이야기와 사진을 편집하고 있었으며 그래도 틈을 내어 전라북도 무주군 구천동 등산로를 안내 해 주셨다. 무주 구천동: 대구에서 무주까지는 갈 생각도 못하던 일이 경상도 와 전라도를 뚤어놓은 전두환 대통령의 88 고속도로로 두 시간이면 갈 수 있다는 것이 새삼 고마워진다. 지리산 골자기에 한국전쟁 말기에 빨치산 토벌작전에서 악명 높았던 경남 거창 인터체인지에서 고속도로를 나와 시골 길로 얼마 안가니 바라 무주 구천동이 된다. 10 월 하순이니 화려한 단풍이 좀 지났으나, 아직도 화사한 자연의 풍경을 보면서 네 시간정도 등산을 즐긴다는 것은 아주 고마운 223

224 일이었다. 특히 전에 보지 못한 비포장 산속을 걸으면서, 자연의 신비함을 감탄하며 걸었다. 제주도 기행 한국여행 일정 마지막으로 제주도를 3 박 4 일로 철준이가 준비한대로 갔다. 제주도에는 우리도 여러 번 가 본 곳이지만, 구체적은 내용은 알려주지 많으면서 이번 여행은 아주 특별하다고 철준이와 다미가 말 한적이 있어 우리의 기대가 큰 여행이었다. 10 월 26 일 일요일에 제주행 비행기를 타면서, 놀란 사실은 이제 대한항공과 아시아나 이외에 여러 개의 저렴한 비행기회사가 한국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 일행 7 명은 Eastar Airline 비행기를 탔는데, 오래된 보잉 737 비행기였지만 값은 싸다고 한다. 제주 비행장에 내리자 예약된 밴을 빌려서 제주에서 3 박 4 일을 보내는 224

225 것이다. 비행장에서 숙소로 가는 도중에 덤장이라는 식당에 들려 점심을 들었다. 만 오천 원짜리 전복 뚝배기를 시켰는데 맛있는 적은 전복이 여러 마리 들어있고 조개와 새우등 해물이 조화된 맛있는 점심이었다. 우리가 예약한 Lotte Resort Art Villas 는 초호화 시설로서 우리가 머무는 C형 한 채 를 빌리는데 하루에 3 백이십만 원이라고 하니 그 호화로운 시설과 주변을 상상 할만하다. 방이 4 개나 되고 주방 시설이 되어 있고 그 가구는 신라호텔보다 좋다고 한다. 롯데 호텔이 직접 운영하는 빌라 호텔은 Sky Hill 골프장 옆에 있으며 중문단지에 가장 호화로운 시설이라고 힌다. 10 월 하순은 이 지역의 비수기로서 손님이 별로 없는 편이고, 상당한 디스카운트를 받았다고만 다미가 설명 해준다. 사실 5 십만 원하는 호텔 방 4 개에다 주방 시설까지 있으니 부자들의 노름터라고만 할 수도 없었다. 225

226 시설이 너무 좋아서 다른 곳 갈 생각이 나지 않지만, 석양이 깃들면서, 아이들이 졸라서 낮에 본 카트 트랙 운전 장에 갔다. 그리고 식료품도 살 겸 서귀포 신라호텔로 가서 호텔 뒤쪽의 해변을 걸으면서 잘 가꾸어 놓은 공원 시설을 돌아보았다. 사려니 숲: 둘째 날은 늦은 아침을 하고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신의 땅, 사려니 숲을 가서 오랜만에 산속 길을 걸었다. 사려니 숲길은 제주시 봉개동 절물오름 남쪽 비자림로에서 물찻오름을 지나 서귀포시 남원읍 사려니 오름까지 이어지는 약 15km의 숲길을 말한다. 완만하고 평탄한 지형의 숲길에서는 물찾오름, 붉은오름, 사려니오름 외에도 자갈 대신 화산석이 가득한 천미천 계곡, 서중천 계곡들도 만날 수 있다. 전형적인 온대산지인 사려니 숲길에는 자연림인 졸참나무, 서어나무가 우점하고 산딸나무, 때죽나무, 단풍나무 등이 자생하고 있다. 산림녹화사업의 일환으로 삼나무, 편백나무 등도 식재돼 있다. 시인 도종환은 <사려니 숲길>이란 제목의 시에서 신역으로 226

227 뻗어있는 사려니 숲길 같은 이라는 표현을 썼다. 제주도 말로 사려니, 살안이의 살 은 신성한 곳을 뜻한다고 한다. 사려니 숲길을 신역( 神 域 )으로 표현한 도종환 시인의 시구와 멋지게 어울리는 것 같다. 다양한 나무들의 모습에 푹 빠져 걷는 둥 마는 둥 하다 보면 숲길을 가로지르는 새왓내 라는 물길을 지난다. 한라산 정상부 동쪽 사면에서 발원해 중산간 마을에 식수를 대고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경계 삼아 휘돌아 흐르다 제주도 표선 바닷가로 흘러가는 제주도에서 가장 긴 천미천의 지류다. 자갈대신 화산석 가득한 냇가도 이채롭고 삼삼오오 모여 뾰족한 부리로 냇물을 마시는 까마귀들도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년대 제주도가 벌겋게 헐벗었을 때 제주도민들이 일본에서 빠르게 자라는 삼나무를 들여와 바로 이곳 일대에 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사려니길 입구 주변의 삼나무들은 수령이 80 년쯤으로 유난히 굵다. 이곳에서 키운 묘목들이 제주도 곳곳으로 퍼져나가 현재처럼 한라산과 중산간, 오름의 주인이 되었다고 안내소 직원은 전했다. 산굼부리는제주시 조천읍 교래리에 있는 분화구 모습의 오름으로, 제주도 유일의 폭렬공 측화산(오름)이다. 무르익은 늦은 가을 제주도의 햇볕은 따갑고 들녘은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특히 아주 잘 익은 오렌지가 주렁주렁 달린 밭은 그 경치를 표현 할 말이 없도록 풍요하다. 은퇴 인으로서 나와 자연 경치의 연관은 무엇일가? 제주의 오름이 그 답을 준다고 믿는다. 오름은 화산의 분출활동으로 만들어진 화산체라고 한다. 분출물의 성질과 지역의 토양이나 환경에 따라 식는 속도에 따라 다양한 오름이 만들어진 것이다. 제주의 정상인 한라산의 백록담도 보았고, 일출봉은 여러 번 가 본적이 있다. 제주에는 수 백 개의 오름이 있다고 하며, 이번 기회에는 전에 가보지 못한 오름 몇 군데를 가보기로 하고 첫 번째로 찾은 곳이 바로 산굼부리이다. 227

228 주위의 평지보다 5 30m 더 높은 것에 불과한 산굼부리 분화구는 전혀 높은 화산체를 가지지 않는 화산의 화구임이 특징이다. 이렇게 분화구의 높이가 낮고 지름과 깊이가 백록담보다도 더 큰데 물은 고여 있지 않다. 이는 산굼부리의 형성과정을 알게 해준다. 보통 분화구라면 산 정상을 연상하게된다. 제주도의 다른 기생 화산들도 비록 크지는 않지만 모두가 조그마한 산들이다. 그러나 억새꽃 휘날리는 광활한 야산초지에 거대한 분화구가 있다. 산굼 부리분화구. 제주도 내에서 유일한 폭렬공기생화산(밑에서 폭발하여 폭발물이 쌓이지 않고 다 분출되어 뻥 뚤린 분화구)으로 봉우리가 거의 발달되어 있지 않다. 깊이가 100 여 미터, 면적이 9 만 7 천 평으로 한라산 백록담 보다 조금 더 크고 깊다. 이곳에는 420 종의 식물이 자생하고 있는데 분화구의 일조량이 달라서 북쪽에는 붉가시나무, 후박나무 등의 난대성 수목과 겨울딸기가 자라며, 남쪽에는 서나무, 단풍나무, 산딸기나무 등의 대표적인 온대성 수목들이 자라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 263 호로 지정 되었다. 산굼부리는 용암을 거의 분출하지 않고 폭발에 의하여 구멍만 228

229 깊숙이 팼으며, 폭발로 인한 물질은 사방으로 던져지고 소량만 주위에 쌓였다. 또한, 화구에 내린 빗물은 화구벽의 현무암 자갈층을 통하여 바다로 흘러나간다. 이런 화구를 마르(Maar)라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산굼부리가 유일하며 세계적 으로는 일본과 독일에 몇 개 알려져 있다. 산굼부리는 평지에 있는 분화구로서 산이 구멍난 부리 라는 말 뜻대로 특이한 형태일 뿐만 아니라, 분화구 안에는 원시상태의 식물군락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어 관광과 학술적으로 그 가치가 높아 1976 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제주 돌 문화공원 10 월 7 일(화)부터 11 월 30 일(일)까지 제주돌문화공원 오백장군 갤러리에서 공존과 변이-이명애 展 을 열고 있었다. 이번 기획전은 반적으로 화가들이 사용하는 정형화된 사각의 캔버스에서 벗어나 229

230 자유로운 형태의 쉐이프드 캔버스(shaped canvas) 기법을 활용한 작품 50 여 점을 전시하였다. 이명애 작가는 한국과 독일을 오가며 활동을 진행하고 있으며, 작품 활동 뿐만 아니라 큐레이터로서도 역량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20 여 년 동안이나, 객관과 주관, 대립과 수용 이라는 주제를 일관되게 펼쳐온 이명애의 작품 세계는 공존 과 변이 를 통해 기하학적 조직에서 느껴지는 싸늘함을 없애고 인간적인 체온과 낭만, 조화로움을 추구하고 있다. 제주돌문화공원 이순배 소장은 이명애 작가는 천연재료들을 활용하여 자연의 색채를 통해 인위적인 느낌을 배제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진행해 왔기 때문에 오백장군갤러리의 천혜의 자연환경과 잘 어울릴 것 같다 고 말했다. 섭지코지는 항상 관광객들로 붐비는 곳이다. '섭지'는 '좁은 땅', '코지'는 '곶(바다로 돌출된 지형)'의 제주 말이다. 성산 일출봉을 230

231 바라볼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제주도가 이 땅을 팔아버려서 '풍경의 사유화', '경치의 사유화'가 되어 버렸다. 이후 관광객들은 사유지를 피해 빙 돌아가서 붉은 오름에서 성산 일출봉을 볼 수 있다 년 TV 드라마 '올인'의 촬영지로 유명해졌다. 여주인공인 송혜교가 생활했던 수녀원 세트장과 드라마 기념관인 올인 하우스 등이 있었지만, 2014 년 이들을 없애고, 과자 마을이란 컨셉트를 입힌 '달콤한 하우스'로 개조했다. 그 외에 영화 단적 비연수, 이재수의 난 등을 섭지코지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쇠소깍 제주도 서귀포시 하효동에 있는 쇠소깍은 원래는 소가 누워있는 형태라 하여 쇠둔이라는 지명이었는데, 효돈천을 흐르는 담수와 해수가 만나 깊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어 쇠소깍 이라고 붙여졌다. 쇠는 소, 소는 웅덩이, 깍은 끝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쇠소는 용암이 흘러내리면서 굳어져 형성된 계곡 같은 골짜기로 이름 만큼이나 재미나고 독특한 지형을 만들고 있다. 쇠소깍은 서귀포 231

232 칠십 리에 숨은 비경 중 하나로 깊은 수심과 용암으로 이루어진 기암괴석과 소나무 숲이 조화를 이루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한다. 또 이곳의 명물인 테우라고 하는 작고 평평한 땟목이 있는데, 줄을 잡아당겨 맑고 투명한 물 위를 유유히 가르며 갖가지 재미있는 모양의 바위 등 쇠소깍의 구석구석까지 감상할 수 있는 이색적인 자랑거리다. 쇠소깍이 위치한 하효동은 한라산 남쪽 앞자락에 자리 잡고 있어 감귤의 주산지로 유명하여 마을 곳곳에 향긋한 감귤 냄새가 일품이다. 주변에는 주상절리대와 중문해수욕장, 천제연 폭포 등 유명한 관광지가 많아 함께 둘러보기에 좋다. 저지오름: 처음 우리나라의 소중한 보물섬 제주를 찾는 사람들은 탄성이 절로 나오는 아름다운 바닷가에 반한다. 그러다가 몇 번 더 제주 섬을 찾게 되면서 상상도 하지 못했던 아름다움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건 바로 '오름'이다. 부드러운 오름의 능선과 그 오름에서 굽어보는 제주의 또 다른 풍광은 제주에서 만나는 아름다움의 정점이지 않을까 싶다. 한라산이 거느리고 있는 360 여 개의 크고 작은 오름들은 저마다의 독특한 풍광과 느낌을 선사한다. 은빛 억새들이 바람을 타고 춤을 추는 오름, 소와 말이 노니는 이국적인 정취의 오름, 굼부리(분화구)에 연못이 있는 오름 등 다양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한 섬이 갖는 기생화산(오름)의 수로는 세계에서 으뜸이라고 하니 그럴 만도 하겠다. 만만한 동네 뒷산같은 능선에 올라가 봐야 별 거 있겠냐고 여기기 쉽지만 올라가 보면 밑에서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덕분에 매년 제주 여행을 가도 지겹기는커녕 늘 새로운 마음으로 떠날 수 있다. 아름답고 개성 있는 오름들 가운데 드물게도 울창한 숲을 가진 오름이 있다.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에 있는 '저지오름'이 그 주인공. 오름을 굳이 구분하자면 억새오름, 민둥오름, 숲오름으로 나뉜다는데 저지오름은 대표적인 숲오름이다 년 산림청이 주관하는 '제 8 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해 232

233 어떤 오름일까 궁금했었다. 이 오름은 저지리의 수호신처럼 마을 한복판에 둥그렇게 서서 주변을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다. 이 오름을 중심으로 5 개(중동, 남동, 성전동, 명의동, 수동)의 작은 마을이 모여 있다. 제주 서쪽의 중산간에 터를 잡은 저지리는 옛 생활모습을 간직한 마을이다. 집들마다 어깨 높이의 새까만 돌담들이 이어져 있고 돌담 너머 마당엔 때깔 고운 감귤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다. 그 위로 병풍마냥 둘러쳐진 저지오름을 보고 있자니, 마을과 오름이 잘 어우러진다. 저지리 마을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연합이 올해의 아름다운 마을로 뽑았다고 한다. 여기에 저지오름도 한몫했을 듯싶다. 협재해수욕장은 제주시 서쪽 32km 거리의 한림공원에 인접해 있다. 조개껍질가루가 많이 섞인 백사장과 앞 바다에 떠 있는 비양도, 코발트 빛깔의 아름다운 바다와 울창한 소나무숲이 한데 어우러진 233

234 풍광이 매우 아름답다. 백사장의 길이 약 200m, 폭은 60m, 평균수심 1.2m, 경사도 3~8 도로서 수심이 얕고 경사가 완만하여 가족 단위의 해수욕장으로 적합하다. 또한 각종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으며 소나무 숲에서는 야영도 가능하다. 이 해수욕장의 남서쪽 해안은 금릉해수욕장과 이어져 있는데, 주민들은 두 해변을 합쳐 협재해수욕장이라고도 부른다. 해수욕장 내에는 탈의실, 샤워실, 휴게소, 식수대, 화장실 등 각종 편의시설이 있어 이용하기에도 편리하다. 또 해수욕장 주변에는 짙은 송림이 있어 야영과 산림욕을 즐길 수 있고, 전복과 소라가 많이 잡히기 때문에 싱싱한 해산물을 마음껏 맛볼 수 있다. 멀지 않은 곳에는 한림공원과 협재굴, 명월대, 황룡사, 영각사 등이 있어 해수욕과 함께 주변을 둘러볼 수 있으며 특히 해수욕장 정면에 보이는 비양도의 모습은 맑고 깨끗한 해수와 어울려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하며 이곳에서 바라보는 낙조 또한 아름답다. 초원승마는 일반적인 트랙 코스가 아닌 우보악 오름과 서귀포 해안절경을 볼수 있는 차별화된 초원코스이다. 날씨가 좋은 날!!저 234

235 멀리 마라도를 바라보고 롯데스카이골프장 36 보며 자연과 함께 돌아보는 아주 좋은 승마 코스였다. 홀을 내려다 승마를 마치고 바로 킹스톤 호텔로 갔다. 롯데 호텔에서 길 건너편에 5 성의 호화 호텔 킹스톤이 있다. 호텔 꼭대기에 이름도 아룸다운 하늘 오름 식당이 있다. 저녁 정식이 백 달러 정도이며, 고급 포도주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나 값이 너무 비싸다. 철준이 친구가 제주도에 중국재벌이 시작한 거대한 호텔과 카지노 사업회사에서 변호사로 일하며, 함께 저녁식사를 헸다. 오설록: 마지막 날 비행장 가는길에 오설록 차 문화 기념관을들렸다. 오설록은 제주도 서광다원 입구에 세워졌으며 동서양,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룬 문화공간이자 자연친화적인 휴식공간이며 녹차와 한국 전통 차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학습공간이다. 오'설록(o'sulloc)은 origin of sulloc, only sulloc, of sulloc cha 의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설록차의 기원이자 뿌리가 되는 제주도에서 설록차의 모든 것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임을 의미한다. oh! sulloc 이라는 감탄의 의미를 경쾌하게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235

236 다시 서울로 와서 내일 캘리포니아로 돌아 갈 준비를 하면서, 이번 서울 여행은 우리 생애에 아주 갑진 여행이라고 철준이와 다미 그리고 윤석과 하은이게 고맙다고 했다. 236

237 19. 연변과 백두 산 (1986) 북경, 상해, 심양을 거쳐 연길까지 가는 여정에서 심양-연길은 기차를 이용했다. 상해에서 요녕성 수도 심양까지 오는 동안 중국민항 (CAAC) 국내선 항공편이 3 차례나 연발, 취소, 연발 끝에 이틀을 허송한 터라 기차여행에 대한 두려움이 없지 않았다. 심양의 우원빈관 (호텔) 방에서 새벽 4 시에 잠이 깨 부랴부랴 떠날 준비를 하고 기차역으로 가니 아침 7 시 밖에 되지 않았고 기차는 9 시 5 분에 떠났다.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연길까지는 1 천 2 백 킬로미터의 장거리 여행이다. 기차에 오르니 3 호실 12 번 좌석으로 자리가 배정됐다. 내 좌석은 중국 기차에서 가장 고급인 외빈용 연석 침대칸이었다. 중국에는 경석, 연석, 경침대칸, 연침대칸 등 4 가지가 있다. 경자가 붙은 것은 딱딱한 나무로 만든 의자나 침대로 된 것이고 연자가 붙은 것은 쿠션이 있는 것이다. 중국 열차는 1 량의 외빈용 특급 칸을 달고 다니는데 이 차량은 237

238 8 개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한 방에 4 명이 쓰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외빈용 정원은 모두 32 명으로 가끔 군 장성이 떼로 몰려 여행하거나 일본인 관광객이 몰려들면 웬만한 사람은 자리구경도 못한다. 지정 침대칸을 찾아가니 3 명의 고급 중국장성들이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4 명이 앉을 수 있는 침대칸에 이미 3 명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나도 빈자리에 앉았다. 영어로 말을 건네 보니 묵묵부답이다. 영어를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기차 탑승 전에 역에서 본 군 장성들이라는 사람들이 틀림없었다. 이들은 중국제 승용차인 홍기라는 커다란 차에 호위병을 대동하고 나타나 고급장교 대기실에서 기차를 기다리던 사람들이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열차가 출발하자 승무원이 나를 찾아와 7 호실 27 번으로 옮기라고 했다. 옮긴 자리도 침대칸으로 거기에는 2 명의 무순대의대 교수들이 앉아 있었다. 60 대의 이 대학교수들과 자리를 같이한 것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차창 밖은 광활한 평원에 갓 심은 벼가 이제 뿌리를 박고 짙은 푸른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나치는 인가는 초가집이 많았으나 역시 기와집도 많이 보였다. 탄광지대로 유명한 무순에서부터는 집들이 석탄가루 때문인 듯 시커멓게 보였으며 높은 굴뚝과 소련식 건물이 군데군데 보였다. 도시를 벗어나니 비포장도로에서 트럭이 뽀얀 먼지를 날리며 달리고 있었다. 길림성 쪽으로 갈수록 뒤늦게 모내기를 하는 모습이 눈에 많이 띄었다. 인구가 많은 나라여서 인지 아니면 기계영농이 아직 발달되지 않아서인지 논밭에 경운기 등 기계는 보이지 않고 농부들만이 일을 하고 있었다. 송화강을 끼고 달린지 얼마 되지 않아 승무원이 와서 점심식사로 무엇을 들겠느냐고 묻는 것 같았으나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 수 없어서 그대로 자리를 지켰다. 한참 있다 다시 그 승무원이 와서 식당 칸으로 나를 안내했다. 이 식당에는 이미 다른 승객들이 식사를 끝냈기 때문에 나는 열차 승무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됐다. 식사가 끝날 무렵 곁에 앉아 있던 승무원 한 사람이 식사를 더하겠느냐 며 한국말로 물어왔다. 238

239 상해를 떠난 이후 한국동포를 만나지 못했고 영어도 통하지 않아 애를 먹고 있던 나는 놀랍고 반가울 뿐이었다. 이 사람은 기차를 타는 전담 경찰로 자신을 승경 ( 乘 警 ) 이라고 소개했다. 갑자기 긴장이 들어서인지 식당 칸을 둘러보니 조선민족자치주 인민 정부렬차 라고 한자와 한글로 쓴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열차 승무원은 내가 불편해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일부러 한국계 승경과 식사시간을 맞춰 나를 안내한 것이었다. 식당칸 다른 식탁을 둘러보니 중국인 승무원들이 고추와 오이를 고추장에 그대로 찍어 먹고 있었다. 신기해서 물어보니 길림성에 한국인동포가 많이 살아서 이들 중국인들도 한국식 식사에 익숙하다는 대답이었다. 반가운 김에 맥주나 한잔하자고 주문했더니 맥주는 없고 산포도로 담근 술이 있다고 가져왔다. 소다수와 샴페인을 칵테일 한 것 같은 맛이었다. 물론 얼음에 채우지 않은 미지근한 술이었다. 식사가 끝나 그 한국인 승경을 내 자리로 불러 같이 얘기를 나누었다. 그에게 연변대학의 박문일교장 (총장) 에게 내가 간다는 연락을 부탁했다. 그 승경은 나더러 왜 평양은 가보지 않느냐고 묻기도 하고 이것저것 얘기를 나누다가 내가 가지고 간 한국 월간 여성잡지를 보여주었더니 몹시 놀라는 표정이었다. 광고 등에 나온 여성들의 화려한 의상과 또 많이 벗은 모습에 놀라면서 깊은 관심을 나타내기도 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니 그 승경 덕분인지 얼음에 차게 식힌 포도주를 제공해 오랜만에 시원한 맛을 즐길 수 있었다. 연길까지는 모두 17 시간이 걸린다고 하며 도착은 새벽 1 시 경이 된다고 했다. 길림성까지는 디젤차가 끌더니 여기서부터 연길까지는 증기차로 바뀌었다. 석탄가루도 싫고 차창 밖은 어두워져 문을 닫아걸고 잠을 자기로 했다. 새벽 1 시 15 분 눈을 뜨니 연길이다. 바깥은 가느다란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개찰구를 지나니까 연변대학 외사부의 이종림씨가 나를 맞았다. 연변대학이 외국인을 위해 만들어 놓은 숙소인 빈관으로 가는 길에 어둠 속인데도 수많은 한글 간판이 눈에 띄었다. 커다란 여자 얼굴 밑에 파마 라고 쓴 미장원 간판이나 자전거 수리점 그리고 간이술집, 음식점들의 간판이 오히려 이색적으로 내 239

240 눈을 스쳐갔다. 연길에는 한국 동포가 10 만 명이 넘어 인구 18 만 가운데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중국본토 전역에 180 만 명의 한국인이 대부분 동북 3 주, 즉 흑룡강성 (40 만명), 길림성 (80 만명), 요녕성 (30 만명) 에 몰려 살고 있다고 했다. 또 내몽고에도 10 만 명이 살고 있다고 했다. 연변대학교 정판룡 부총장 연길 도착 첫날 오전에 먼저 연변대학을 방문했다. 연길 도착 순간부터 나를 안내한 이종림씨를 따라 대학본부에 들어서니 박문일 교장(총장)은 여행 중이고 정교룡 부교장 (부총장) 이 나를 맞았다. 문학전공인 정부교장은 54 세 정도의 단단해 보이는 인상에 양복 넥타이 차림의 신사였다. 그는 소련에서 공부를 하고 러시아 문인 고리키전을 쓴 학자로 지난해에는 미국 하와이에도 다녀왔다고 자기를 소개했다. 지금까지 남조선인 (한국인) 을 많이 만나봐서인지 한국사정도 비교적 잘 알고 있었다 년 전라남도 담양에서 부친을 따라 연길로 옮겨왔으며 현재는 중국인 부인과 살고 있었다. 그는 남북한에 대한 그의 소견을 묻는 240

241 나의 질문에 북한의 1 인 숭배주의도 싫어하고 한국의 지나치게 서구화된 문명도 좋아하지 않는다 며 자신은 독립된 의견을 가진 국수주의자 라고 말했다. 정부교장은 대화를 진행해 갈수록 호탕한 사람이라는 인상이었다. 그는 또 남북한을 통틀어 조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성계가 중국에 국호를 지어달라고 요청해서 얻어간 것으로 중국에선 어쩔 수 없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사람들이 남북한을 특히 조선 이라고 부르는 것은 북한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한국 멸시와 한국 측의 대 중국 사대주의에서 나온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또 조선은 북경 동북부의 두 강인 조수와 선수 에서 따온 것으로 북경 동부지방 국가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조선이란 다분히 중국식 사고방식에서 나온 나라 이름인 것이다. 연변대학은 연변자치주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시설이 좋다는 대학으로 교수진 77%가 한국동포라는 설명이었다. 연변인구 190 만 가운데 한국계 80 만 명이면 42%, 연길시의 경우 60%라 치더라도 교수진의 한국인 비율은 굉장히 높은 셈이다 년에 설립된 이 대학은 교수, 부교수 47 명, 강사 166 명, 조교 등 71 명, 행정직 191 명에 4 년제 본과학생 1,700 명, 대학원생 170 명, 그리고 이 대학에서 실시하고 있는 통신강좌 수강생이 4,500 명이나 되는 작지 않은 규모였다. 이 대학은 간단히 줄여 부를 때 한국의 연세대처럼 연대라고 불러 처음엔 알아듣는데 조금 혼란이 오기도 했다. 이 대학에는 현재 정치학부, 어문학부, 역사학부, 외국어학부, 수학학부, 물리학부, 화학학부, 체육학부 등 8 개 학부에 2-3 년제 연구생부 (대학원) 9 개와 44 개의 강좌가 있다고 한다. 또 공동체육, 교육심리학, 지리, 시청교육, 마르크스 레닌주의 등 5 개의 직속 수업연구실과 조선역사 및 어문, 조선문제, 화학 및 화학공업 등 3 개의 연구소와 이론물리, 유기화학, 일본문제, 漢 語 등 4 개의 연구실이 있었다. 연변대학을 둘러보면서 가장 관심이 있었던 것은 역시 조선문제 연구소, 조선문학 및 어문연구소와 도서관이었다. 특히 서일권 조선문학부장 (학과장) 과 이상순 조선문제연구소장 이 두분과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이들은 연변대 조선 (한국) 관계 연구의 중심 241

242 인물들로 평양에 교환교수로 다녀온 적이 있는 인물들이다. 이 두 교수는 연구자료 부족을 여러 번 안타까워했다. 북한에 가서 연구 및 자료를 구하려고 해도 북한사회는 정치문제와 사상문제가 주종을 이루고 어문학 부문 연구는 생각보다 저조하며 실제 연구가 있어도 발표할 전문지가 많지 않아 연구업적을 서로 나누어 가지기가 매우 어려운 실정이라고 전했다. 서교수 등은 심지어 차라리 한글 등 어학부문이나 문학부문은 북한에 가서 배워오기보다 오히려 북한 측에서 연변에 와서 배워 가야 할 정도 라고 말했다. 그들은 또 한국에서 많은 종류의 서적이 발간되고 있는 줄 아는데 어떻게 이들 자료를 구할 수 가 없느냐고 간곡히 부탁하기도 했다. 서교수는 특히 한국에서 발간된 서적 발행 리스트를 갖고 있는 것을 보여주며 이런 책을 꼭 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조선어문학부 건물은 일본의 연변 관동군사령부가 차지하고 있던 것으로 이를 개조해서 쓰고 있다고 들었다. 도서관은 40 여만 권의 장서가 개가식 및 서고식으로 되어 있으며 독서용 책상은 비닐 덮개로 씌워놓아 한국의 어느 음식점 테이블과 같은 모습을 보여 인상적이었다. 이 도서관의 도서를 둘러보다 깜짝 놀랐다. 4 천여 권의 한국 발행서적이 보관되어 있는 것이었다. 연변 등 중국에서 발간된 여느 책보다도 지질이나 장정이 상대적으로 뛰어나 금방 눈에 띄었다. 이들 책은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이 기증한 것이라는 도장이 일일이 매 권마다 찍혀있었다. 특히 조선문학부에서 아끼는 책은 김회장이 보낸 이조실록 전집 이었다. 이 실록을 얼마나 아끼는지 해당학과의 학생들에게도 접근이 심하게 통제될 정도로 모셔지고 있었다. 이와 비교해서 북한에서 발간된 전문서적은 눈에 잘 띄지 않았고 실제로 얼마 되지 않는다는 설명이었다. 도서관 측에서도 한국 으로부터의 도서기증을 상당히 바라는 눈치였다. 연변대학 도서관의 도서구입비로는 한국 책 몇 백 권이면 1 년 치 예산을 다 써야 되기 때문에 독자적 구입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얘기였다. 이유는 한국서적의 가격이 중국화폐로 환산하면 엄청나게 비싸기 242

243 때문이다. 서울에서 1 권에 5 천원-1 만 원짜리 전문서적이면 중국 특히 연변에서는 17.7 원에서 25.5 원으로 10 권이면 교수 봉급 한 달 치가 넘는 액수가 된다. 이들 교수들과 식사를 같이하면서 서울에서는 살아서 입을 쩍쩍 벌리는 광어회 한 접시에 3 만원이 든다고 말하니까 중국 돈으로 1 백 원이라고 환산하더니 믿어지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그만큼 한국과 중국의 화폐가치와 물가의 차이가 실감나는 얘기였다. 서교수 등은 또 자료부족 외에 조선문학부가 최근엔 약화되고 있다고 걱정했다. 많은 한국계 학생들이 연변에 머물지 않고 북경 등 중앙으로 진출해 공부하고 싶을 뿐 아니라 조선 문학보다 다른 실질적 학과를 희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선문학부에 학생은 80 여명이 되지만 학생의 질은 날로 조금씩 떨어지고 있다는 걱정도 했다. 그러나 중국에는 요즘 향학열이 대단해 대학입시가 커다란 사회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들이 일본의 동경대 입시지옥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한국의 입시지옥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고 나도 구태여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연변에는 중국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학제가 유치원, 소학교, 중학교, 고등중학교 (고등학교), 고등학교 (대학 및 전문학교) 가 있다. 유치원 및 소학교의 수는 1,300 여개, 중학교 및 고등중학교 241 개, 고등학교는 연변대학을 비롯하여 연변의학원, 연변농학원, 연변사범전문학원 등 4 개가 있다. 연변대학은 이 대학들중 종합 대학으로 이곳 고등교육의 중심이 되고 있다. 이번 연변대학 방문에서 나는 새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조선문제연구소의 허영구교수가 자신이 공동집필한 동북항일 투쟁사 3 권을 나에게 기증했다. 이 책에는 많은 한국인과 중국인 열사들이 등장하고 있으나 정작 북한이 항일운동의 영웅으로 신격화한 김일성의 이름은 한군데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연변대학을 방문한 소감은 어서 빨리 한국의 대학과 연변대학이 자매결연 맺거나 이것이 어려우면 비공식적인 자료 교환의 문호가 열렸으면 하는 것이었다. 한반도의 분단 상황이 다시금 안타까운 하루였다. 243

244 연변일보의 주필 오태호씨는 외신의 경우 아직도 관영인 신화사 통신의 기사를 전재하게 돼 있다고 설명하고 연변일보나 청년 생활이나 다른 모든 연변의 언론매체들이 평양에 특파원을 상주 시키지 않고 있어 북한 기사는 더욱 접근이 어렵다고 말했다. 신화사는 북경정부의 관점에서 기사를 송고하기 때문에 연변의 한국 동포가 관심을 가질 만한 기사는 거의 보내지 않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서울 올림픽 관계 기사나 지난번 오스트리아 빈에서 탈출했던 신상옥, 최은희씨 부부의 기사가 연변일보 등에 그런 대로 자세히 보도된 것은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이곳 언론의 태도에 흥미가 있어 이를 분석하기 위해 오주필에게 지난 6 개월간의 연변일보를 몽땅 한 부씩 부탁했다. 그는 다음날 쾌히 이 신문 뭉치를 나에게 전해 주었다. 연변일보는 하루 4 페이지 발간 1 면은 정치, 2.3 면은 문화, 4 면은 사회면으로 순 한글 순 한문 2 가지가 각각 따로 발행되고 있다. 6 월 9 일의 연길 도착 첫날 저녁 숙소에서 TV 뉴스를 시청했다. 첫째 내 귀를 의심스럽게 한 것은 아나운서의 발음이 북한식이 244

245 아니고 서울에서 듣던 KBS나 MBC의 아나운서 발음과 똑같은 것이었다. 연변 TV의 한 편집자로부터 한국 KBS방송에서 가끔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또는 흉내 내는 방송이 있는 것이 이상 하더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 그제야 이해가 가는 것이었다. 연길에서 며칠 머문 뒤 연변일보를 방문하고 간부진들과 신문사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1 층짜리 오래된 자그마한 연변일보 건물 내부는 좁고 어두웠으나 부근에 새 건물을 지어 곧 이사 간다는 설명이었다. 연변대학의 최상철 교수는 연길에 한글 신문이 4 개, 한글 잡지가 34 개 있다고 말했다. 만주지역 한글 신문은 연길신문 외에 요녕신문 (심양발행), 흑룡강성신문 (하얼삔발행)이 있고, 중국 전역에 배포되는 조선소년신문 도 있다. 잡지는 청년생활 외에 아리랑, 시냇물, 소년과학, 연변청년, 연변위생, 새마을 등 많은 전문잡지가 있다는 최교수의 설명이다. 라디오 방송인 연변방송국(1956 년)도 한국어로 방송을 하고 있으며 8 개의 무선 중계방송소와 112 개의 유선방송중계소를 통해 자치 구내 곳곳에 소식을 전달하고 있다 년에 세워진 연변TV방송국은 10 개의 중계소를 통해 매일 하오 6 시부터 밤 10 시까지 4 시간씩 방송을 내보내고 있으나 중요한 스포츠 경기가 있는 날이거나 일요일 아침에 특별 프로 그램을 방영하고 있다고 한다. 연변대학을 방문했을 때 정부교장이 이곳 학생들을 위해 보고회, 강연을 해달라고 부탁해 쾌히 응했다. 내가 미국언론에 대해 설명한 이 강연에는 60 여명의 학생들이 참석했다. 나의 강연이 끝나고 질문을 받겠다고 했으나 처음에는 아무도 질문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옆에 동행한 최교수 등이 학생들이 장교수에게 질문하면 결례가 될 걸로 걱정하고 있는 모양이라고 설명했다. 최교수는 이곳 학생들의 교수에 대한 존경심은 겨의 맹목적이라 할 만큼 순종적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거듭 질문을 하라고 권하자 한 학생씩 서서 질문하는 것이 아니고 쪽지에 질문을 메모해 차례로 내밀었다. 미국 언론에 대한 관심들이 높아 강연은 무려 3 시간 동안 계속됐다. 245

246 그러나 한 학생의 질문에 대해서는 선뜻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왜 KBS 대북 방송은 터무니없는 내용을 보도하느냐 는 내용의 질문이었다. 즉, 중국에서 최근에 누구누구가 누구를 총으로 쏘아 죽였다는 보도는 엉터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학생은 한국의 신문방송이 외국의 갖가지 통신, 잡지와의 접근이 아주 쉽고, 문제의 그 기사는 북경에서 흘러나온 소식을 외신이 보도하고 이를 KBS가 다시 이용해 보도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관영 신화사 통신의 기사만을 실어야 하는 연변 언론의 실상이 잘 반영된 질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연변에서 얼굴에 허옇게 분을 바른 여자는 어김없이 모두 한국 여성이다. 결혼식장에 직접 가보진 못했으나 연길의 한 결혼식 장면을 찍은 사진에는 한국이 1950 년대나 60 년대에 성행했던 꼬마 어린이 2 명의 들러리가 꼭 등장한다. 무슨 행사가 있든지 해서 한국여성들이 거리를 나올 떄 보면 모두가 한복차림이다. 그런데 이 한복의 디자인은 근래 서울에서 볼 수 있던 현대감각이 가미된 발전적(혹은 개조된) 모양이 아니라 60 년대 한국식의 한복이다. 치마길이가 무릎 부근을 맴도는 것도 내가 서울에서 학교 다니던 시절 보던 것이다. 물론 언어도 북한식 표현이 많지만 요즘 한국에서 들을 수 있는 새로운 단어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이 같은 연변 한국동포들의 문화는 1960 년대에서 그냥 정지된 것인가 아니면 우리 고유의 것이 그대로 보존된 것인가. 대답은 연변의 한국사회를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각각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얼굴에 분을 바른 한국여성, 중국 여행 중 북경, 상해, 심양을 여러 날 돌아보았지만 중국여성들이 얼굴에 분바른 채 거리에 나온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한국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이나 욕구는 중국사회에서도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 것인가 보다. 입고 나온 한복도 연분홍, 연녹색 등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날린다 는 우리 옛 가요에 등장하는 전통적 색깔이 대부분이다. 연변시에는 많은 미장원이 있다. 간판에 뚜렷이 파마 라고 한글 간판을 붙인 미장원이 곳곳에 있다. 그러나 연길에서 만난 여성들의 헤어스타일은 단발 형이거나 긴 머리여서 서울 사람들이 보면 단연코 구식이다. 헤어스타일에 대한 이곳 여성들의 관심은 246

247 연길에서 발간되는 월간잡지의 한 기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연변에 며칠 있는 동안 느낀 것은 이곳의 우리 민족들은 중국문화와 문명에 대해 상당히 배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동포들이 우리 고유의 문화를 고집하다보니까 오히려 이곳 중국인 들이 한국문화를 좇아오는 곳도 있다. 심양에서 연길로 오던 기차 안에서 중국인들이 고추장에 풋고추를 찍어 먹는 것을 본 것이나 이곳 중국인들 중에 한국말을 제법 유창하게 하는 사람도 많은 것이 하나의 예가 되겠다. 나는 연변으로 가면서 한국민족이 중국사회에서 어떻게 동화해 가고 있을까 하는 관점에서 가능한 한 자세히 관찰해 볼 생각이었다. 문화동화작용이란 말은 본래의 고유문화를 가지고 있는 한 민족이 이질문화를 가지고 있는 민족과 접촉을 가질 때 그 본래의 문화가 어떻게 바뀌는가를 연구하는 개념이다. 연변은 중국정부의 소수 민족 문화정책에 따라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만들어 고유문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혜택을 받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국민학교에서부터 대학까지 한글로 강의하는 학교도 있고 모든 간판도 한글을 머리에 쓰고 한자는 옆에 곁들여 쓰는 형식이며 한자도 중국인처럼 읽지 않고 우리 식으로 읽고 있다. 연변의 한국동포들은 대부분이 2 세 또는 3 세들이다. 극소수의 노인들을 제외하고는 한국과 지속적인 연관이 없다. 한국과의 관계는 6.25 당시 이들 연변 동포들이 중공군에 편입돼 전쟁에 참가하여 한국군과 전투를 함으로써 분단국의 동족상전의 경험을 똑같이 겪었다 전쟁 시 연변에서 참가한 사람들 가운데 희생자가 7 천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한국인들이 가끔 연변을 방문할 때 일단은 친절한 척하지만 마음속에는 아직도 원한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고 있는 듯했다. 실제 연변대학의 모 교수는 같은 술자리에서 문득 이들 희생자 얘기를 꺼내려다 주춤하고는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었다. 어떤 면에서 연변의 한국동포들은 북한과의 관계가 더욱 단절된 것으로 보였다. 이것은 이곳 언론이나 일반 한국동포들의 말이나 또 그들의 생활방식이 북한과 동떨어지고 있음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 이후 북한은 대중국 국경선 경내를 강화, 한국동포들의 북한 247

248 방문을 상당히 엄중하게 통제하고 있다. 또한 중국이 최근 개방 정책을 취하면서 중국으로부터 자유주의 물결이 북한으로 유입 될까봐 출입국 통제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이 같은 출입통제에는 문화적, 정신적 오염 외에도 북한보다 더 잘 개발된 라디오, 시계, 선풍기 등 생활용품이 중국에서 북한으로 일종의 밀수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 설명도 있다. 그러나 연변의 한국동포가 북한에 공식적인 목적으로 건너갈 때 들고가는 라디오는 도착하자마자 북한방송만 들을 수 있도록 다이얼을 고정 시켜 버린다는 것이 이곳 동포들의 얘기다. 이 같은 정치적, 지리적 이유로 해서 연변의 우리 동포는 사실상 한반도 남북한 공히 문화적 접촉의 단절상태를 겪고 있다. 또 연변의 동포들은 근본적으로 어떤 외부세계와의 접촉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우리문화는 그런 대로 보존되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나의 관점에서 볼 때 연변의 한국 전통문화는 외부세계와의 단절로 인해 60 년대까지의 고유문화를 잘 보존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 된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 속에서 그 환경 속의 문화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일견 정지된 상태의 전통문화는 주변상황 및 조건으로 어차피 변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내가 연변에서 느낀 변화라고 한다면 음식이 아닌가 싶다. 이곳 음식들은 서울의 기준으로 볼 때 한국적이 아닌 것이 너무나 많다. 시원한 개성의 보쌈김치나 함경도의 감주(식혜), 평안도 순대와 빈대떡, 젓갈 맛이 감치는 남도지방의 김치 깍두기를 전혀 만날 수가 없었다. 김치 생각이 간절해서 한번 특별히 부탁을 했더니 가져온 것이 오이를 잘게 썬 것을 고추가루와 간장으로 버무린 것이었다. 순대도 속에 찹쌀만 가득 넣은 느끼한 것이었다. 연변에서 겪었던 큰 고생 중에 하나는 분명 김치에 대한 향수였다. 연변의 젊은 한국 동포들이 북경 등 중앙 진출 욕구가 높아지고 언어도 조금씩은 달라지고 있다. 나를 만난 동포들이 조심은 하지만 무의식중에 중국말을 그대로 쓰는 수도 있다. 연변대학교수들도 샹반 ( 上 班.출근), 샤반 ( 下 班.퇴근)이라고 무심코 말하고는 스스로 248

249 껄껄 웃기도 했다. 조용필, 김연자의 가요나 원미경의 표지 모델 사용은 연변동포들의 한국과의 간접적 접촉을 의미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곳 한국인들은 아직도 한국에 대한 정보 불충분으로 북한식 선전을 그대로 믿고 있는 경우가 많다. 연길시에서의 일이다. 한 동포가 나에게 질문했다. 한강다리 밑에는 아직도 거지가 우글 거린다면서요? 내가 절대 그렇지 않다고 설명해도 막무가내다. 한국의 발전상은 이곳 잡지에서도 가끔 언급되고 있지만 보통 사람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의 폭은 아주 좁다. 다행히 서울을 다녀간 연변의 한국동포들이 한국의 실상을 보고들은 대로 얘기하면 그때서야 조금씩 납득하는 눈치다. 단절이거나 폐쇄이거나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연변은 한국의 전통문화가 상당히 그대로 보존되고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분단의 비극은 연변에서도 여러 번 실감했다.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한반도의 전쟁과 분단이 남긴 가장 큰 비극은 불신 이라고 하던가. 북경, 상해, 심양을 거쳐 중국여행을 계속한지 17 일째인 1986 년 6 월 11 일 하오, 연변대학이 마련한 강연회를 마치고 저녁식사를 위해 이 대학 교수들과 함께 요정 `삼꽃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거리로 나서는데 난데없이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가 귓전을 때린다. 별로 붐비지 않는 도시에 한국 대중가요가 가두 스피커 로부터 거리를 꽉 채우다시피 크게 울려 퍼지는 곳,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함경북도가 지척에 있는 중국 연변 조선족 자치주 수도 연길시에서 있었던 일이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는 단순한 서울과 만주의 지리적 거리감을 상실케 하는 하나의 조그만 충격이었다. 이 같은 충격은 삼꽃집을 들어서면서도 계속됐다. 거리이름 표지도 없는 도심의 대로에서 꺾어져 포장 안 된 좁은 골목길을 한참 들어가 자리잡은 삼꽃집은 문을 열고 들어서면 3 평짜리 온돌방 겨우 2 개가 전부인 요정이다. 알코올 도수 50 도의 랑 이라는 상표의 배갈과 맥주가 나오는 이 집의 안주는 또 개고기다. 소 내장, 불고기 등 순 한국식 요리와 249

250 함께 개고기 단지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점잖게 나와 조용필의 노래 못지않은 충격이었다. 연변대학교 교수들과 삼꽃집 파티 파티가 계속되는 동안 한국적인 것은 또 계속됐다. 함께 간 연변대학 조선어 문학부 최상철 교수 등 동행 6 명은 이곳 한국 동포들이 흰술 이라고 부르는 배갈로 거나해지자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 귀에 익은 선구자를 비롯해서 찔레꽃, 고향의 봄, 아리랑, 양산도, 도라지 타령 등이 메들리로 이어졌다. 나중에는 카세트 테이프에서 흘러나온 옛 노래가 더욱 흥을 돋우기 시작했다. 흥이 돋자 끝내는 3 평밖에 안 되는 좁은 방에서 일행 7 명이 모두 일어서서 노래에 맞추어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휴일 날 서울 교외에 나가면 어김없이 볼 수 있는 한국인의 춤, 누가 이곳을 중국이라 하겠는가. 이곳으로 오기 전 북경과 상해에서 만났던 중국 언론인들과 교수들은 내가 연길로 간다하자 아 술 많이 마시고 노래 많이 부르고 춤도 많이 추시오 라며 부러워했다. 중국인들은 연변을 술과 노래와 춤과 축구의 고장이라 이라고 부른다. 한국인들이 자고로 가무에 능하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지만 이곳에서는 250

251 술과 축구가 또한 대중의 친근한 문화 요소들이다. 연변에서 생산되는 술의 절반 이상을 연길시의 한국인들이 소비한다는 이곳의 술 소비량 통계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술이 있으니 흥겨운 노래와 춤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선 지 이곳 연길의 한국인들은 한국의 대중가요와 아주 친숙해져 있다. 지리적으로 정치적으로 아주 가까운 북한에도 노래와 춤이 있겠지만 북한의 가무란 김일성을 찬양하고 군대식 노래와 춤으로 일관되어 술이 즐거운 연길의 동포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겠다. 그래서 이곳 동포들이 즐겨듣는 것은 북한 상공과 두만강을 넘어 들려오는 한국의 대중가요다. 동포들은 KBS의 음악프로를 최근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카세트테이프로 녹음해 이를 수없이 반복해서 듣는다. 연길시에서 만난 동포들 가운데 조용필은 물론 김연자의 노래테이프를 갖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한국 대중가요를 즐겨 들으면서도 조가 누구고 김이 누구고 하는 가수의 이름에는 별 관심들이 없다. 그러나 술을 마시고 흥겨울 때는 흥겨운 노래가 제격인 때문이리라. 따라서 연변의 조선가무단이 미국순회여행을 하면서 갈채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 연길에서는 TV에 방영되는 연속극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알아볼 기회는 없었다. 그러나 북경에 잠시 체류하는 동안 일본 TV 연속극 오싱 에 대한 인기는 거의 폭발적이었다. 중국에서는 아신이라는 이름으로 방영되는 이 TV연속극은 방영할 때마다 북경 시내의 전 수도 계기가 올 스톱된다고 할 정도이다. 중국의 대중문화는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이 병존하고있다. 최근에는 중국 대중가수의 카세트가 엄청난 매상을 올리고 있지만 대체로 구성이나 연기와 제작이 단순해 커다란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에 오싱의 세련되고 사랑의 갈등이 곁들인 휴먼스토리가 아기자기하게 펼쳐지자 지금까지 잊어버렸던 인간본성의 욕구가 이들 새 대중문화에 그대로 몰입한 탓이 아닌가 싶다. 이 같은 오싱의 열풍은 연변이라 해서 별 다를 것이 없으리라 짐작된다. 251

252 그러나 오싱의 이야기나 조용필, 김연자의 노래 등 이것 모두가 중국 그리고 연변에서 어느덧 대중문화의 큰 몫을 차지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고 한다. 연변의 경우 지난 83 년 8 월 중국의 실권자 등소평이 연길을 다녀간 후 본격적으로 개방의 시대를 맞았다는 설명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심스런 태도였던 동포들이 드러내놓고 한국 대중가요를 따라 부르고 음식점이나 술집에서 공개적으로 카세트, 라디오의 음악을 크게 틀 수 있었던 것이 연변의 오늘이다. 삼꽃집에서의 흥겨운 파티는 밤늦게 끝났다. 삼꽃집 아주머니로 통하는 이 요정의 주인여자는 50 대로 함경도에서 건너왔다고 했다. 통제경제 속의 중국에 요정이 웬 말이냐고 의심이 날지 모르나 이 집은 분명 요정이다. 삼꽃집 아주머니는 이 술집을 개인이 독자적으로 경영하는 자본주의식 주인이다. 다른 음식점이나 호텔 식당이 시청직원인 공무원들이 운영하고 수익도 모두 국가 또는 시 소유가 되는 것과는 달리 삼꽃집 아주머니는 술값, 밥값을 모두 자신이 차지한다.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같이 갔던 최교수가 파티비용으로 100 유엔 ( 元 한국 돈으로 3 만 3 천원) 이 들었다고 말했다. 물론 최교수의 개인돈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최교수의 한달 봉급이 100 유엔 정도에 불과하니까 우리가 먹고 마신 돈은 무려 그의 한 달 치 봉급의 전부가 날아간 것이 된다. 연변의 소비문화는 그래서 만만치가 않아 보였다. 이 같은 요정은 또 어떤 면에서 연변의 또 다른 대중문화의 한 요소가 되고 있을지 모른다. 즉 자본주의식 소비문화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연변에서 이미 자본주의 문화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겠다. 이는 물론 등소평 집권 이후 나타나기 시작한 중국의 개방물결의 큰 흐름 중의 하나일 것이다.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부자가 있을 수 있다. 연변 한국동포의 서민생활을 알아보기 위해 연길 시내 시장을 둘러보고 느낀 것이다. 연길에 도착했던 것은 지난 6 월 10 일 새벽 1 시 5 분경. 숙소에서 눈을 좀 붙이고 오전에는 연변대학 등을 둘러 본 뒤 하오에는 시장구경을 나섰다. 수많은 사람들과 자전거가 길을 메운 시장거리는 1960 년대 서울 남대문시장처럼 왁자지껄하고 북적 거렸다. 500 m 정도 길이의 이 시장은 양쪽으로 2 층 건물에 채소등 252

253 농산물을 파는 노점상이 즐비했다. 어림짐작에 노점을 포함한 가게가 1 천개는 되어 보였다. 시장건물의 1 층은 주로 식료품점으로 생선과 돼지고기 등 각종 어육과 채소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특히 이색적인 것은 개고기를 다른 돼지고기나 쇠고기처럼 똑같은 식용고기로 취급하여 가게에서 구할 수 있다고 했다. 나를 안내한 연변대 외사부의 이종림씨는 연길에는 개고기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개를 전문으로 사육하는 곳도 많다고 했다. 세계에서 진짜 황구탕은 이곳 연변뿐일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이씨가 소속된 외사부란 외사판공부의 줄임 말로 연변대는 물론 중국 내 거의 모든 기관에 설치된 부서로 우리나라로 따지면 공보부, 섭외부 등의 성격을 띤 것이다. 시장 2 층은 주로 공산품으로 갖가지 기성복과 양복지, 비단 등이 있었으며 특히 나일론 계통의 옷감이 대종을 이루었다. 우리가 색동이라고 부르는 것을 색단이라는 이름으로 옷감을 팔고 있어 다시 동포의 짙은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이 시장의 점포들 가운데 절반은 한국동포의 소유다. 그리고 삼꽃집 아주머니처럼 이 점포에서 생기는 수익도 주인의 소유다. 여기서 점포의 소유와 수익의 소유는 공산국가 중국에서 어느새 자본주의 개념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임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정도야 미미하겠지만 자본주의 개념이 있으면 부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한 노점상 아주머니와 얘기를 나누었다. 이 채소는 어디에서 사온 것입니까? 딥 (집)에서 공닥 (공작=일) 해 수확한 것이디요. 평안도 사투리 억양이 강한 주인아주머니는 자가생산한 물건이라고 말했다. 하루에 얼마나 파십니까? 달 (잘) 팔면 원은 되디요. 하루에 20 원 (6 천원)을 파는 것으로 치더라도 한 달이면 6 백원 (18 만원) 의 순수입이 이 아주머니의 수익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253

254 서방 자본주의 국가처럼 도매상에서 산 물건을 다른 소비자에게 팔아 차익을 남기는 장사가 아니라, 이 같은 상거래는 상당히 원시적이고 직접적인 것이다. 그러나 한 달에 6 백 원이면 중국에서는 큰돈이다. 연변대학 정. 부교수 한 달 월급으로 180 원 (5 만 4 천원)이 최고라면 이 채소가게 아주머니는 대학교수보다 3 배 이상의 소득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나의 자본주의식 계산방법에 따르면 연길 시장의 모든 가게주인들은 조만간 갑부가 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중국 전국은 물론이지만 이곳 연길의 동포사회에서 저축에 대한 강한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더욱 나의 계산을 뒷받침해 준다 하겠다. 이처럼 개인소득이 가능한 것은 중국이 등소평 집권 이래 실시하고 있는 실용주의 노선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전에는 농산물이든 공산물이든 생산된 것은 모두 국가에 납입하고 식품을 배급받는 형식이었지만 요즘은 농산물의 경우 소출의 일정량을 정부에 갖다 바치면 나머지는 얼마든지 개인이 쓰거나 시장에 들고 나가서 팔아 현금을 마련할 수 있다. 물론 자영농산물이 일 년 내내 시장에 나가 팔 수 있을 만큼 개인 농업이 그 규모나 양에서 크지 못하기 때문에 현금을 쥘 수 있는 액수는 별로 대단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 가게주인들은 이미 부자라고 이곳 한국 동포들은 말하고 있다. 연길에서 머무는 동안 최상철교수의 저녁 초대를 받아 그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소학교 (국민학교) 교사인 부인이 그날은 하루 결근을 하고 종일 음식을 준비해 연변대 한국인 교수들과 함께 나를 초대한 것이다. 대학당국에서 준 최교수의 집은 단층짜리로 허술 하게 보였다. 중국 내 다른 곳도 비슷하겠지만 연길에서도 도심의 5 층짜리 큰 건물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주택이 6.25 이후 한국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판잣집 같은 인상을 주었다. 물론 동네 거리는 비만 오면 질척거리는 비포장이다. 최교수의 집은 3 평짜리 방 2 개가 있는 전체 크기 10 평 정도의 작은 집이었다. 변소는 집안에 없고 바깥의 공동변소를 이용해야 했다. 최교수 집의 특징은 집안을 들어서면 미닫이문이 있고 문을 열자 마자 신발을 벗는 조그만 공간이 부엌과 연결돼 있다. 신발을 벗고 254

255 비닐장판이 깔린 온돌방에 올라서면 부엌과 부엌 찬장과 신발 벗는 곳과 그리고 부뚜막에 걸어 논 무쇠 솥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세 공간이 벽이나 다른 칸막이가 없이 모두 한 공간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집에서는 방에 오른다는 말은 성립이 돼도 방에 들어선다는 말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 방 한 구석에는 5 자 크기의 옷장이 하나 놓여 있다. 나무로 짠 이 가구는 앞면이 인두로 지진 그림인 낙인화가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최교수의 살림살이가 다른 서민들보다 낫다는 증거인 선풍기가 하나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선풍기 1 대 값이 250 원 (7 만 5 천원) 인데 웬만한 서민의 한 달 수입이 100 원이라면 선풍기 1 대 값이 두 달 반 동안 먹지 않고, 입지 않고, 쓰지 않아야 될 만큼 엄청나게 고가인 셈이다. 자전거는 너무 흔해서 인지 1 대에 150 원 (4 만 5 천원) 으로 비교적 싼 편이지만 그래도 한 달 봉급을 넘거나 비슷한 값이다. 중국에서 TV의 경우, 흑백 1 대는 600 원 (18 만원), 칼라의 경우는 5 천원 (60 만원) 이다. 따라서 서민이 TV를 갖는다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고 그래서 TV를 가지면 갑부소리를 듣는다. 연변에서는 이제 라디오는 보편화가 됐다. 그러나 TV문화가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해서 이곳 사람들은 이 문명의 이기를 구하는 것이 최상의 목표가 될 정도다. 연길을 비롯하여 중국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이나 일반 공무원이거나 저축을 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일반적인 것은 이같은 TV, 선풍기 등을 구하는 것이 주 이유가 되는지는 모른다. 이처럼 저축의 목표가 어디에 있든 이같은 경제활동은 사실상 연변 등 중국에서 돈의 쓰임새의 폭이 넓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돈의 용도가 넓어지고, 돈이 더욱 필요해지는 중국사회, 그래서 연길 시의 시장바닥이 남대문시장처럼 흥청거리는 것인가라고 생각했다. 이 자유시장을 거닐며 구경하는 동안 일반 점포나 노점상들이 스피커가 붙은 마이크를 들고 손님을 호객하는 모습이 계속 눈에 띄었다. 손님을 끌어야 한다는 것은 물건을 빨리 팔아야겠다는 이유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많이 팔아야 하고 그래서 돈을 많이 벌고 저축을 해서 고급 전자제품을 사야겠다는 의지가 담긴 상행위이다. 이 같은 자본주의식 경제개념은 어느새 얼마나 많은 상품을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가 하는 생산경쟁에 까지 돌입했다는 255

256 것이다. 3 년 전까지의 집단농장 경영시보다 최근 농산물 생산량이 3 배가 늘었다는 이곳 사람들의 말이다. 그 동안 농업기술이 특별히 발전한 것도 아니라는데 중국 연길의 경제무대의 신기한 점이 숨어 있다. 자본주의식 경제개념이 중국경제에 커다란 동기부여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게 눈에 보였다. 백두산 드디어 백두산으로 가는 날이다. 6 월 12 일 상오 8 시 연변대학의 이종림이 약혼녀와 함께 내가 묵고 있는 숙소로 동행차 찾아왔다. 밖에는 백두산을 가기 위해 특별 전세를 낸 일제 도요다 크루저 7 인승 사막 산악용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 차는 운전사와 함께 3 일 예정으로 6 백 원(18 만원)을 지불하고 대절한 것이다. 대학교수 한 달 월급이 129 원이니까 약 1 년치에 해당하는 거금을 투자한 여행이다. 한민족 정신의 고향이요 전설의 원천이요 역사의 출발지인 백두산을 가는데 그 정도 금액이 대수냐. 숙소 밖에서 만난 운전사는 30 대 중반에 훤칠한 키가 시원해 보이는 넥타이에 정장을 한 신사였다. 이름은 한수명. 중국 길림성 연길시 연변 주빈관 기차대 소속이라고 자신을 밝혔다. 한씨의 아버지는 256

257 연변대학 운전사였으며 아버지가 사망하자 가업(?)을 이었다고 했다. 중국에서는 운전사가 굉장히 존경받는 직업처럼 보였다. 운전사와 대학 총장 (교장) 이 함께 식사를 하거나 회식을 하는 등 아무런 차등이 없는 것은 이곳에 자동차가 많지 않으니 기술자로 우대받기 때문이다. 한씨가 몰고 온 차는 북한 청진에서 인수한 수입품으로 몇 달 전 인수 시 1 만 달러(3 만 5 천원) 기타 합하여 모두 4 만 달러 (14 만원)나 들었다고 자랑했다. 1 만원이면 중국 일반노동자 20 년 치의 봉급에 맞먹는다. 엄청나게 고가품이자 귀중품이다. 연변에서 백두산까지는 3 백여 킬로미터. 고속도로라면 3 시간 남짓한 거리이지만 이곳 도로사정이 좋지 않아 모두 7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한씨는 말도 시원시원하게 잘하고 백두산에 대해 아는 것도 많았다. 그는 1 년에 절반은 장백산 (백두산의 중국식 이름) 에 산다고 말했다. 백두산까지 가는 도중 한씨는 줄곧 테이프를 자동차 카세트에 넣어 음악을 들려주었다. 모두가 한국의 대중가요다. 조용필, 김연자 등 한국의 가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이 내가 알고 있는 한국 가수 이름보다 많았다. 연길을 떠나 산악지대로 들어서자마자 산중턱까지 밭농사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곳 농부들은 대부분 문화혁명 기간 중 산동성 등지에서 이주해온 중국인들이라 했다. 연변에서는 한국인들이 수전 (논) 의 전문가로 불린다고 했다. 중국인들은 논농사가 힘들어 짓던 농사도 버리고 밭농사로 바꿀 정도라고 했다. 백두산에서 머지않은 송강을 지나서는 중국인들이 버리고 떠난 논이 폐허로 남은 곳이 눈에 많이 띄었다. 산악지대의 중국인 토담집은 풀로 지붕을 하고 창문도 제대로 만들어 달지 않은 모습이었으며 이곳 중국인 농부들도 경간을 입고 있으나 세탁을 제대로 하지 않아 때가 심하게 묻어 있었고 냄새도 상당했다. 경간이란 중국 사람들이 입는 일상복으로 일할 때나 행사에 나갈 때 항상 입는 것으로 이 경간에는 중산복과 모택동복 2 가지가 있다. 운전사 한씨가 이곳 중국 사람들은 먹을 것만 있으면 다른 데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고로 만주인하면 서두르지 않고 성격이 잘지 않은 느긋한 사람이라는 것이 다른 중국인과 257

258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이 같은 그들의 성격은 산골 벽촌이라서 더욱 두드러진 것인지 모르겠다. 백두산 입구에서 입산등록을 마쳤다. 내가 등록하기 바로 전에 오스트리아에서 온 학생 한 사람이 등록을 마쳤다. 백두산은 1983 년 8 월 등소평이 다녀간 이후 중국 언론에서 크게 보도하기 시작해 최근 관광객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지난 해 관광객 수는 약 14 만 명, 이 가운데 외국인이 1 천 7 백 명이었다는 설명이다. 백두산 입구를 지나 원시림을 한참 달려서 이곳 관광호텔에 도착했다. 하오 3 시. 아직도 날이 저물려면 한참이나 남았다. 호텔을 위시한 백두산 일대는 유엔에서도 지정한 자연보호구역으로 삼림이 울창했다. 호텔주변에는 이곳 말로 장백산 두견이라 부르는 소가죽 꽃이 점차 시들어가고 있었고 그 대신 고산종 진달래가 피어나고 있었다. 높은 산악지대라선지 연길이 6 월 중순의 무더운 날씨였던 것과 달리 이곳 기후는 아직도 이른 봄철이었다. 오른쪽으로 폭포가 있고 왼쪽으로는 화산 석으로 된 가파른 산에 엇물려 있는 이 호텔은 북경의 당간부들이 많이 찾아들기 시작해 지난 83 년 신축한 것이라 했다. 하루 숙박비는 90 원에 식사비는 15 원을 받았다. 6 월 12 일이면 아직 이른 철이어서 그런지 이 호텔의 종업원 10 여명이 우리 일행을 아주 반갑게 맞았다. 이들과 운전사 한씨는 아주 가까운 사이로 보였다. 호텔 저녁식사에는 송이버섯, 더덕잎, 고사리, 고비 등 귀한 음식이 나왔고 산 밑에서 가져온 수박도 나왔다. 이 호텔의 목욕물은 백두산 온천지 ( 池 ) 에서 파이프로 끌어온 것으로 물도 맑으며 냄새도 전혀 없고 촉감도 매끄러워 목욕하기에 아주 그만이었다. 이 온천물은 호텔의 겨울 난방용으로 쓰인다고 했다. 저녁식사 후 운전사 한씨와 호텔 방에서 여러 가지 잡담을 나누는데 전기 불이 나가 버렸다. 이곳 전기는 디젤발전기로 발전해서 공급하는 것인데 밤 10 시가 되면 전기공급을 중단한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촛불을 켜놓고 얘기를 계속했다. 다음날인 13 일 금요일, 상오 8 시에 백두산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258

259 길가에는 악화두견, 들죽이 낮게 깔려 있었다. 장백산두견, 악화두견이라 불리는 소가죽 꽃과 진달래꽃 같은 작은 꽃이 매달린 들죽은 잎과 줄기가 5cm 정도밖에 되지 않으나 뿌리는 15cm 나 땅속에 뻗어있어 이 식물 위에 드러누우면 부드러운 카펫 위에나 누운 것처럼 푹신한 감을 준다. 백두산은 해발 500-1,200m 까지는 침엽수가 울창한 반면 1,500m 이상부터는 나무가 없고 이들 들죽들이 넓게 서식하고 있었다. 정상을 향해 오르는 자동차 길은 가파르고 자갈이 많아 연길에서 타고간 랜드크루저가 아니면 올라가기가 무척 힘들 것으로 보였다. 길은 지난겨울의 눈이 채 녹지 않거나 녹은 부분은 흙이 쓸려나가 움푹움푹 패어져 있었다. 정상 못 미쳐서 중국이 세운 기상관측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까지가 자동차가 갈 수 있는 막다른 길이다. 이 기상관측소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여름 한철은 가끔 집에 들러 가족을 만날 수 있으나 겨울철 5 개월은 완전히 이 산정에서 갇혀 살 수 밖에 없다 했다. 기상관측소 근무자들이 널어놓은 빨래가 곳곳에 보였다. 이 영산에 빨래라니 조금 섭섭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최종목표인 정상을 걸어 오르기 시작했다. 기상관측소에서 나오는 오토바이 소리 같은 디젤발전기 돌아가는 소리를 뒤로하며 발길을 재촉하니 저기 정상이 보인다. 곧 천지도 보일 것이다. 이미 내 귀에는 단군신화의 설화가 들리기 시작한다. 한없이 짙푸른 하늘이 백두산 정상 너머로 나를 손짓해 부르고 있다. 아! 천지! 259

260 나는 이 천지를 위해 지금까지 이 감탄사를 아껴왔다. 2,744m 의 백두산 16 연봉 중 한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얼음이 얹힌 푸른 물의 고요한 천지는 4 천년 한민족 탄생설화를 유구한 역사와 함께 한 아름 품고 있었다. 백두산 최고봉인 백두봉이 천지를 가로질러 북한 땅 저쪽 끝에 우뚝 서있다. 지척에 두고도 가보지 못하는 저 우리나라 땅, 우리의 산, 감개가 비탄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남북 4.8km, 동서 3.3km, 분수령 둘레 18.1km, 호수기슭 둘레 13km, 평균 수심 204m, 최고수심 373m, 총 저수량 20 억 m, 이것은 천지를 설명하는 수치다. 중국에서는 장군 봉이라 부르는 백두봉을 마주하고 천지 물은 오른쪽으로 천지폭포를 힘차게 타고 내린 뒤 송화강의 상류인 이도백하로 흐른다. 왼쪽으로는 땅 밑 40km를 흘러내렸다가 하내보 부근에서 다시 지상으로 나와 두만강이 된다. 건너편으로 해서 내려가는 물은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의 원류가 된다. 영산 백두는 중국에서 옛날에는 불함이라고 불렸고 다시 개만대산, 도태산, 태백산, 요즘에는 장백산으로 이름이 굳어졌고, 만주어로는 궈리민산옌아린 이라 불린다. 궈리민 은 길다는 뜻이고 산옌 은 희다, 아린 은 산을 뜻해 이는 장백산을 뜻한다. 함께 천지를 내려다 260

261 보는 동행 자동차 운전사 한수명씨가 많은 해외 한국인들이 이곳을 찾았다고 전한다. 그는 나와 같은 한국 사람들이 천지를 처음 바라다보며 보인 감동에 찬 반응을 이렇게 전했다. 한국에서 전직 차관을 지낸 한 사람은 천지를 내려다보며 넙적 절을 세 번하고 할아버지 라고 절규했으며 캐나다에서 온 한 목사는 땅에 입을 맞추며 일어서지를 못했다 한다. 중국실권자 등소평도 천지를 보지 못하면 한이 될 것이라 말했다고 그는 전했다. 날씨가 다행히 좋았다. 저 멀리 아래 산기슭에 구름바다가 감돌며 백두 16 연봉을 감싸듯 떠받들고 있고 하늘 아래 첫 땅 백두봉은 천병만마를 호령하듯 수천만 한민족을 다독이듯 위로 솟고 아래로 푸근히 앉아 있다. 이 감동스런 자리에서 저 건너 한 중 국경선이 보이며 다시 나를 슬프게 한다. 국경선은 4m 폭으로 나무를 베어내 표시하고 있었다. 백두산은 현재 휴화산이나 2 백 년 전과 4 백 년 전 폭발한 적이 있어 이 주기대로라면 조만간 다시 폭발할 가능성이 있다 한다. 백두산이 전에 폭발할 때 중국 쪽으로 용암이 많이 흘러 중국 쪽에는 화산석이 많이 덮여 있으나 한국 쪽은 흙이 많아 식물이 더 많이 자라고 있다 했다. 백두산 등정은 지금이 최적기라고 한다. 앞으로 5 주만 지나면 갖가지 꽃이 다 지고 여름 기후로 들어서며 하루에도 10 여 차례 날씨가 뒤바뀌고 소나기가 쏟아지며 바람도 거세게 일어 등반하기가 무척 어렵다고 한씨는 열심히 설명했다. 그러나 8 월 무렵 백두산 일대가 단풍이 들면 또다시 절경이라는 설명이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천지로부터 돌리며 올라올 때와는 다른 길로 하산을 시작했다. 얼마 내려가지 않아서 바람구멍 이라고 부르는 곳에 닿았다. 이곳을 지나는 바람이 크게 갈리진 바위틈을 무서운 속도로 지나치기 때문에 바람이 새나오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듯했다. 바람구멍은 또 천지폭포를 멀리 내려다보기 아주 좋은 장소이기도 했다. 높은 산을 양쪽으로 화산석이 검게 대자연을 이룩한 등성을 따라 흐르던 천지 물이 천지에서 1.25km 떨어진 곳에서 절벽을 만나 높이 68m의 대폭포를 이루었다. 천지폭포다. 하늘에서 은하수가 기울어져 내린 것 같다 는 이 천지폭포를 중국 사람들은 261

262 장백폭포라고 부른다. 다시 걸음을 재촉해 주먹만 한 돌이 바람에 날린다는 바람구멍에서 나는 돌 을 구경하지 못한 채 호텔로 향했다. 호텔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시 천지폭포를 가까이서 보기 위해 올라갔다. 천지폭포 주변은 아직도 눈과 얼음이 녹지 않아 아주 가까운 접근은 어려웠다. 간혹 녹아내린 눈덩이와 함께 집채만큼씩이나 큰 바위가 가파른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져 간담이 서늘했다. 폭포에서 다시 5 백m 쯤 아래로 내려가니 온천지대가 있었다. 사방 1 천 m의 이 온천지대는 산화철로 인해 온통 바위가 검붉게 물들여져 있었고 수증기가 백두산 신령의 입김인 향 하얗게 오르고 있었다. 이 온천은 이도백하로 흐르는 송화강의 또 다른 상류다. 이 온천의 물은 최고 섭씨 82 도나 되는 뜨거운 것으로 해발 2 천 5 백 m 가 넘는 것에서 자연의 신비는 범인을 경건하게 만든다. 이 온천물이 호텔의 목욕물이 되고 또 난방용 물이 된다 했다. 다시 호텔에 돌아가 좀더 아래로 내려가니 관광코스에서 빠뜨릴 수 없는 소천지가 있었다. 직경 50m 정도의 이 호수는 전설에 따르면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하기 때문에 보통사람이 들어가서는 안 되는 곳으로 알고 있다고 한씨가 말했다. 한씨는 이 소천지에 아무나 들어가면 물속에서 용이 나타나 발을 끌어당긴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전설이야 어찌됐든 소천지의 잡초하나 없는 맑은 물은 정녕 선녀가 내려와 시원스레 목욕할 만큼 푸르고 아름다웠다. 저녁에 호텔에서 식사를 하며 김치를 부탁했다. 나온 김치라는 것이 소금에 절인 배추였다. 입안에 넣어 씹는 순간 뭐라 말할 수 없는 괴상한 냄새가 입안을 진동시켰다. 질겁할 정도로 격한 냄새였다. 이유를 물어보니 이곳에서 나는 냄새나는 풀 향초를 고추 가루 대신 넣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곳의 별미인지 어쩐지는 모르나 다시는 김치 달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14 일 아침 일찍 일어나 백두산의 온천물로 다시 목욕을 하고 연길로 가는 길에 올랐다. 도중에 백하라는 마을에 유명한 미인송이 있다하여 보고 가기로 했다. 백하 기차역 앞에 늘어선 20 여 그루의 미인 송은 사람 피부색으로 쭉 뻗은 줄기 위로 가지가 조각품처럼 기묘하게 엉클어져 신기한 모습이었다. 이곳 백두산에서 흔하지 않다는 미인송이건만 한 그루는 이미 말라죽어서 관리가 허술해 262

263 보여 안타까웠다. 이틀 전 지나온 송강과 안도를 거쳐 심양을 통과중 도로공사로 길이 막혔다. 30 분이나 지체한 때문에 천지에서 닦은 마음이 답답해지고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먼지와 자갈에 차가 흔들리고 숨이 막혀 순간 뒤를 돌아보자 백여리 떨어진 먼 곳에서 백두산 연봉이 잘 가라고 손짓하는 듯했다. 나는 어느새 속세로 돌아온 것이다. 자신이 속세인 임을 다시 자각케 해준 아! 천지여! 백두산에서 돌아와 연길에 도착하니 하오 3 시, 도착 즉시 외사부의 입경관리부에 가 용정 및 도문 방문 출입증을 교부 받았다. 외사부에서 출입증 교부 시까지 약 30 분을 기다렸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김일성 배지를 단 사람들이 여러 명 들어와 나를 흘끔흘끔 곁눈질해 보고 있었다. 괜스레 불안해지는 기분이었다. 6 월 15 일 일요일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의 서감권부장과 이 문학부 소속 신문학교수인 최상철씨가 나와 나의 용정, 도문여행에 동행했다. 연변과 북한의 국경도시 도문을 가는 길은 먼저 용정을 거쳐 개산둔을 지나야 한다. 연길에서 용정까지는 20 여 km. 가는 길에 노래 선구자에 나오는 해란강을 만났다. 선구자들은 연길을 거쳐 이 해란강을 끼고 말달리며 용정으로 갔을까. 그 선구자들은 아마 이 해란강 어디쯤에서 말을 쉬게 하고 강물에 발을 담그고 조국의 앞날을 생각하며 멀리 남쪽 하늘을 쳐다보았을까. 옛날에는 이 강이 수량이 많고 그냥 떠서 마실 수 있을 만큼 깨끗했으리라. 그러나 지금 차창 밖으로 바라보는 해란강은 무릎깊이의 얕은 물에 허연 거품이 섬뜩할 정도로 오염돼 있었다. 이 해란강은 용정을 거쳐 국경도시 도문에서 두만강과 만난다. 용정가는 길은 좌우에 사과배 (사과나무에 배를 접붙여 맺은 과일) 과수원이 줄지어 있었다. 해란강 위에 세워진 자그마한 다리를 거쳐 용정으로 들어갔다. 먼저 옛날에 용이 승천했다는 우물인 용정을 찾아갔으나 우물은 메워지고 버드나무만 서 있었다.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들이 이 우물을 메우고 비석도 어딘가에 내버리고 나무를 그 위에 심어놓았다 한다. 용정에는 2 차대전 무렵 일본인이 영사관으로 쓰던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건물에서 수없이 많은 항일투사들이 고문을 당하고 목숨을 잃었다 한다. 263

264 용정에는 대성, 동흥 등 유명한 학교들이 있었다. 이들 학교 출신들 가운데 한국의 정치무대에서 크게 자리를 차지했던 정객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 학교는 현재 모두 이름을 바꾸어 버려 찾아볼 수 없으나 옛 동창생들은 지금도 모인다고 했다. 용정은 19 세기 중반 이미 한국동포들이 이주해 살기 시작한 곳으로 당시 우리 선조들은 이곳을 용드레촌 으로 불렀다 한다 년 인구 5 백여 명이던 곳이 현재 6 만이 넘고 이중 65%가 한국 동포라고 한다. 용정이 유명한 이유는 우리 선조들의 항일 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3.1 운동을 이어받아 1923 년 3 월 13 일 벌인 용정 시위와 1930 년의 5.1, 5.30 궐기는 일본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민족투쟁이었다. 이 같은 역사적 배경이 노래 선구자의 탄생을 가능케 했던 것으로 보인다. 용정에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국수집이 있다고 했으나 아직 점심시간으로는 너무 일러 섭섭하지만 그대로 지나쳤다. 항일투쟁열사들이 이 집의 국수를 들며 국가를 걱정했던 마음을 읽고 싶었는데 유감이었다. 용정을 떠나 개산둔으로 갔다. 개산둔은 두만강변의 국경도시로 이곳에는 도문과 함께 북한으로 넘어가는 다리 6 개 가운데 하나가 놓여있다. 이곳에서 처음 만나는 두만강 7 백리. 해란강이 오염됐다 했지만 개산둔에서 본 두만강은 더 오염된 것 같았다. 강폭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별로 넓지 않았다. 한국 5 대강 중의 하나라고 배운 두만강이 뛰어서 건너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아 보여 옛 고려, 조선 시절 여진, 거란의 무리가 왜 그리 자주 함경도를 침범, 약탈을 했던가가 이해되는 듯했다. 이 강이 얼어붙으면 물론 걸어서도 넘어갈 수 있는 곳이 만주요 함경도 땅이 아닌가. 개산둔에는 중국 최대의 제지공장이 있다고 했다. 북경의 인민일보 신문용지도 공급한다는 제지공장은 두만강 오염의 최대 원흉이기도 했다. 개산둔에서 연변 제 2 의 도시 도문까지는 50 여 km. 오른쪽으로 두만강을 끼고 멀리 북한 땅을 보면서 가는 국경여행이었다. 멀리 건너다보이는 북한 쪽에는 계속해서 산 위에 커다란 글씨로 표어 같은 것들을 만들어 놓은 것이 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264

265 만세 같은 글들이 쓰인 산 아래에는 강변을 따라 철도도 보였고 그런 대로 산뜻하게 꾸며놓은 집들도 보였다. 그러나 기이할 정도로 인적이 없었다. 도문 도착 후 제일 먼저 가본 곳은 북한의 남양과 도문을 잇는 국경다리 도문교였다. 석조와 시멘트로 된 이 다리 양쪽 끝에는 칼을 꽂은 총을 멘 국경 경비대가 지키고 있었다.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려다가 찍지 말라고 몇 번이나 경비대의 경고를 받았다. 그래서 가까이서 얼른 몇 장의 사진을 촬영하고 다리에서 멀리 떨어져 건너다보이는 남양 사진도 몇 장 재빨리 찍었다. 남양은 별로 크지 않지만 그런 대로 깨끗하게 단장된 도시였고,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한국의 휴전선에서 북한 측 마을을 보면 사람이 살지 않는 전시용 도시가 있듯, 남양도 그와 같은 도시가 아닌가 싶다. 점심 무렵이 되니 도문교 옆에 30 대와 대의 관광객 한 무리가 나타났다. 이들은 모두 한복을 입은 우리 동포들로 북과 장고를 갖고 왔었다. 다리 부근에서 식사를 하면서 술도 한잔 거나해지자 연길에서 여러 번 봐온 예의 가무가 시작됐다. 265

266 노인층들은 북과 장고에 맞추어 노래와 춤을 즐겼고, 30 대 등 젊은 층은 카세트 녹음기를 틀어 커다란 소리로 음악을 즐겼다. 곡명은 잘 알 수 없으나 이미자의 노래 같았다. 이들 우리 동포들이 도문교에 나타나 술을 마시고 장고와 북으로 춤을 추는 것은 좀 이상했다. 국경경비대의 삼엄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흥겨운 놀이를 즐기는 우리 동포들. 강 건너 조국 땅에 대한 염원을 담은 것인가 아니면 남양의 동포들에게 같이 어울려 춤을 추자는 초청장을 보내는 것인가. 동행한 운전사 한씨와 최 서교수 등은 이 같은 가무를 북한 측에선 정신적 오염 이라고 간주하고 남양 주민들을 딴 데로 소개시킨 것 같다고 전했다. 북쪽 중국에서 정신적 오염 이 건너갈까 봐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가끔 이 다리를 건너가는 연변의 한국 사람들은 선물로 라디오, 시계, 자전거 등 공업제품을 갖고 가면 북한에서 5-10 배의 높은 값을 받을 수 있고, 북한에서 돌아올 때 명태, 오징어 등 해산물을 갖고 오면 연변에서 또 높은 값을 받을 수 있어 잘만하면 배의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장사가 된다는 것이다. 도문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50 여 년 전만 해도 1 백여 가구가 인구의 전부였으나 이젠 10 만 인구의 대도시로 성장했다 한다. 국경도시답게 각종 국경통과 여행자들의 출입국을 통제하는 관청이 설치되어 있으며 특히 식당이 많은 것이 이곳의 특징이라고 했다. 점심으로 한 음식점을 찾아가 평양냉면을 주문했다. 바깥에다 커다란 스피커를 설치해 놓고 돌아와요 부산항에 가 귀청이 터져나갈 정도의 큰 소리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견디지 못해 소리를 줄여 달라고 부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도문기차역을 구경했다. 일본인들이 만주침략 교두보로 삼은 도문에 이 역사 ( 驛 舍 ) 를 지으면서 해양국으로서 일본의 이미지를 크게 강조하기 위해 기선의 모양을 본떠지었다고 한다. 배처럼 옆으로 길게 지은 건물 중앙부에 기선의 굴뚝같은 높은 굴뚝을 세워놓아 멀리서 보면 영락없는 커다란 배의 모습이다. 도문주민들은 이 역사를 보며 일본의 침략야욕을 기억하고 역사의 악순환을 거듭하지 않도록 재다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266

267 20. 평양의 봄 (1995 년) 북한의 정치지도자들은 이번 평양축전의 목표를 자주, 친선, 평화라는 세 가지 슬로건으로 내걸고 북한 출신 재일교포 프로레슬러였던 역도산의 제자인 안토니오 이노끼를 공동주최 위원장으로 위촉하여 대회를 준비하였다. 이와 같은 대행사를 주최한 이들은 북한의 발전상황을 대외에 선전하려는 것이었으나 일주일을 이곳에서 보내고 난 후의 나의 느낌은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비판적인 것 이었다. 김일성이라는 우상 밑에서 노동자, 농민은 하나같이 열심히 일했는데도 그들의 생활은 넉넉지 못한 것 같았다. 이제까지 소문난 것처럼 끼니를 거르거나 굶주리는 사람은 없어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즐기는 일반생활환경은 내가 처음 중국에 갔었던 1984 년과 별로 다른 것이 없었다. 그들의 생활환경은 상당히 낙후되어 있었고 북한 어느 곳을 가도 김일성을 칭송하는 그림과 탑만이 보일 뿐이고 정작 생산 공장을 볼 수 없었다. 천리마운동의 본부인 강서 제강, 제철, 유리공장에는 연기가 나오지 않았고 그곳과 연결된 송전 267

268 고압선을 볼 수가 없었으며, 원료와 생산품을 실어 나르는 차량도 거의 없었고 그곳에서 생산되는 새로운 트랙터를 본적도 없다. 남포항이나 원산항에도 선박이나 컨테이너를 볼 수 없었다. 공업부분 뿐만 아니라 농업부분도 낙후되어 있어서 오이나 토마토는 작고 맛이 없었으며 평양 주변 채소밭에 있어야할 비닐하우스도 없었다. 외국관광객에게 내놓고 파는 물건들은 대개 그림이나 수놓은 것과 같은 간단한 수공예제품 뿐이었고 개성에 갔을 때 고가품이라고 파는 물건도 개성인삼과 각종 술 종류뿐이었다. 우리일행이 일주일을 머물렀던 30 층짜리 서산 호텔은 1970 년대 중국처럼 비능률적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그 시설도 겉으로 보면 30 층의 그럴듯한 건물 이었지만 속은 전혀 꾸며지지 않았다. 우리는 29 층에 머물렀었는데 목욕물이 잘나오지도 않고 잘 내려가지도 않았다. 또 엘리베이터가 4 개 있었는데 두개는 일본의 히타치 제품이었고 두개는 평양 제품 이었는데 평양제 품은 수동으로만 작동되고 또 4 개의 엘리베이터가 동시에 작동이 안 되어서 한번 내려갔다 오려면 30 분씩 걸렸다. 호텔음식도 우리에게는 최상의 음식을 만들어주는 것 같았는데 맛이 별로 없었으며 특히 대형냉장고가 없기 때문에 맥주는 항상 미지근한 상태로 마셔야 했다. 또한 이 고급호텔에 전화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수건을 갖다 달라고 전하기 위해 1 층까지 30 분을 갔다 와야 했다. 물론 시내전화나 국제전화를 방에서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고, 한 예로 국제전화를 시도했다가 상대와 통화도 못하고 45 달러를 내야했던 로스앤젤레스의 유 목사는 불평을 많이 했다. 재일 교포들이 드나들면서 가르쳐 놓은 것이 관리들의 부패 행위이었다. 안내원들에게 무엇을 부탁하면 그 대가에 따라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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