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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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희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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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3 여름/통권 제8호 동 국 여 지 승 람 에 변 산( 邊 山 ) 을 영 주 산( 瀛 洲 山 ) 이 라 고 기 록 하 고 있 다. 또 능 가 산( 楞 伽 山 ) 이 라 는 문 헌 기 록 도 보 이 는 데 이 는 불 교 의 영 향 인 것 으 로 여 겨 진 다. 그 런 가 하 면 변 산 을 봉 래 산( 蓬 萊 山 ) 이 라 고 도 한 다. 변 산 을 대 표 하 는 계 곡 이 름 도 봉 래 계 곡 이 다. 변 산 은 크 고 작 은 산 봉 우 리 가 장 광 팔 십 리 에 걸 쳐 있 고 골 골 마 다 는 깊 고 숲 은 우 거 져 고 려 시 대 이 래 나 라 의 재 목 창( 材 木 倉 ) 이 었 다. 삼 면 은 바 다 로 둘 러 싸 여 있 고 한 면 은 너 른 들 로 이 어 진 다. 그 런 변 산 안 에 는 다 른 세 상 이 있 었 다. 수 많 은 수 도 자 들 은 하 늘 에 기 대 어 절 을 짓 고 도 를 구 했 으 며 도 적 들 은 큰 세 를 이 루 고 왕 권 의 정 당 성 에 의 문 을 제 기 하 며 이 상 국 가 건 설 을 꿈 꾸 었 다. 그 런 가 하 면 산 중 에 터 잡 은 민 초 들 은 숱 한 전 화 속 에 서 도 꿋 꿋 하 게 삶 터 를 지 켜 왔 다.( 본 문 중 에 서),,,,
2 삼변( 三 邊 ) 예로부터 변산에는 유명한 것 세 가지가 있다. 변재( 邊 材 ), 변청( 邊 淸 ), 변란( 邊 蘭 )이 바로 그것으로 이를 삼변( 三 邊 )이라고 한 다. 변재( 邊 材 )는 변산의 소나무를 이르는 것으로 고려 조선시대에 변산은 나라의 재목창이었다. 궁재( 宮 材 )나 선재( 船 材 )로 쓰기 위해 나라에서는 변산의 소나무( 邊 材 )를 특별히 관리했다. 고려시대에는 정치가이자 대문호인 이규보 같은 이가 변산의 벌목책임자로 부임해 와 재목을 관리했고, 조선왕조실록에도 변산 소나무 관리에 관한 기록들이 보인다. 변청( 邊 淸 )은 변산 곳 곳의 바위벼랑 벌집에서 따는 꿀을 이르는 것으로 질이 좋기로 유명하여 왕실에도 진상되었다고 한다. 변란( 邊 蘭 )은 변산에 지 천으로 자생하는 난( 蘭 ), 즉 보춘화( 報 春 花 )를 이르는 말이다. 보춘화는 이름그대로 변산바람꽃, 복수초 등과 함께 일찌감치 꽃 을 피워 봄을 알린다. 그래서 춘란( 春 蘭 )이라고도 부른다. 보춘화(Cymbidium geoeringii (Rchb.f.) Rchb.f)는 난초과의 상록 여 러해살이풀로 우리나라의 따뜻한 남쪽 지방, 그것도 주로 전남 북의 바다와 가까운 곳의 소나무와 참나무가 섞여있는 숲의 볕 이 잘 들고, 비교적 건조한 땅에서 잘 자란다. 꽃은 3-4월에 피며, 꽃대 하나에 꽃을 한 개 피는 일경( 莖 )일화( 花 )이다. 꽃의 지 름 2~3cm 정도로 연한 황록색을 띠며, 잎술 꽃잎에 연한 홍자색의 반점이 있다. 열매는 길이 5cm 정도로 곧추서며 밑에 5~6cm인 대가 있다. 열매 안에는 먼지처럼 작은 씨앗이 가득 들어 있다. 자태 빼어나고, 향기 그윽한 난을 선인들은 사군자 중 의 하나로 꼽고 애지중지 했다. 그런데 난이 이처럼 귀하고, 관상가치가 높다보니 남획으로 황폐화가 심하다. 환경부에서는 한 때 보춘화를 법정보호종으로 지정해 보호했으나, 보호종이 너무 많아 그 수를 줄이는 과정에서 제외시켰다. 부안이야기 편집부 보춘화
3 2013 여름/통권 제8호 004 칼럼 격포에 작고 아름다운 박물관을... 김현채 어수대에 오른 酒 仙 변산면 마포 사는 조찬준은 별명도 참 많다. 도 사 주선 상투쟁이 수염쟁이 등등. 나는 조찬준 을 앞에 성을 달아서 보통 '조도사 라고 부르다가 술판에서는 주선 이라고 격을 달리해 부른다. 동 오술이 됐건, 날밤을 새우는 술판이건 간에 꺼떡 없다. 권하는 술잔을 거절하는 법도 없다. 도사 도 그렇다. 모항 사는 시쟁이 박형진이가 들 려준 이야기다. 한번은 그 패들이 변산을 올랐다. 내려오는 길에, 뚱그적 뚱그적 산을 오르는 아줌씨 부대와 만났는데, 그 아줌씨들..., 상투에 수염에..., 거기다 지팡이까지 든 조찬준을 보고 누구냐고 묻 기에 쩌그 몬댕이 넘어 가면 굴실이 하나 있는데, 거기서 10년 동안 도 닦고 지금 막 하산하는 길이 고만요... 하고 둘러대니까, 영락없이 믿으며 혀까 지 차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뒤 따 라 오면서 주고받는 이야기를 빤히 다 듣고도 조 찬준은 짐짓 연기력을 발휘하여 더 도사인 척 하 더란다. 이 친구가 무슨 맘을 먹었던지 수염 기르고 상투 튼지는 어언 20여 성상에 접어든다. 그의 어머니 는 그놈의 배기싫은(그의 어머니의 표현) 수염 어 떻게라도 잘라보려고 그가 곤하게 낮잠 잘 때 몇 번 가위질을 시도했다가 실패했다고 한다. 상투쟁이에 걸맞게 이 친구 복장 또한 매우 특이 하다. 여름엔 밀짚모자에 고무신, 겨울엔 어려서 털모자에 할머니들이 신는 가에 털 달린 털신이다. 이런 차림으로 논두렁, 밭두렁, 고샅 가릴 것 없이 휘적휘적 휘젓고 다닌다. 인사동, 광화문, 사돈네 잔치...? 말할 것 없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만나 자고 해도 내 확신컨대 그의 차림에는 변함이 없 을 것이다. 이처럼 그에게는 격식이 없다. 완전한 자연주의 자다. 외모뿐이 아니라 내면세계도 완전한 자연인 이다. 그런 그는 변산 유기농의 산역사이기도 하 다. 논농사, 밭농사도 비료, 농약 뿌리지 않고 잡초 씨 반, 낱알 반 거둔다. 그의 밥상을 보면 알 수 있 다. 밥은 온통 까맣다. 콩, 보리, 현미, 수수 등 최 소한 대여섯 가지 곡식이 섞여 있다. 거기에 된장, 고추장, 젓국에 집 사방에 나는 푸성귀 한 줌 뜯어 다 올린 소박하기 그지없는 밥상이다. 정이나 단백 질원이 당길 땐, 물 때 봐 감시로 삽이나 호맹이 챙 겨들고 에헴 헛기침 내지르며 하섬 앞 갯벌로 갯 것하러 나선다. 몇 해 전 비 많이 온 다음 날 조도사와 어수대에 오른 적이 있다. 쏟아지는 폭포 아래 도사라... 흔 한 그림이 아니기에 한 방 눌러 두었다. 변산에 비가 많이 온다기에 어수대가 생각났고, 어수대를 생각하다보니 조도사 생각이 났다. 그나 저나 본인 허락도 없이 이런 글, 사진 올렸다가 나 중에 지천을 얼마나 들을지 모르겠다. 이 글은 부안21( 옮겨왔습니 다.(글쓴이 : 허철희 2001년 6월 22일) [기획특집] 내변산속으로 1-변산의 옛 절들 하늘에 기대어 절을 짓고... 허철희 [기획특집] 내변산속으로 2-내변산의 땅이름 내변산의 땅이름을 찾아서... 소민석 [기획특집] 내변산속으로 3-변산도적 이야기 변산 노비도적 정팔룡 이야기 허정균 054 몽유부안도 1 위도( 蝟 島 ), 사랑하는 나의 작은 새 신병준 061 몽유부안도 2 꿈과 희망이 담긴 부안의 옛이야기 [1] 서해숙 이슈와 현장 1 맛난 복지 씨앗이 자라는 작은 이야기 이춘섭 이슈와 현장 2 운호 마을에서 울리는 즐거운 합창소리 서정용 발굴! 이 기록 1943년 봄, 서외리 마루모야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정재철 088 부안실록 1 부안은 나라의 재목창( 材 木 倉 ) 박노석 094 부안실록 2 우리에게 익숙한 부안의 행정구역은 언제 정해졌을까? 최범호 104 부안단신 펴낸날 고문 김석성, 김형주 펴낸이 신영근 펴낸곳 부안역사문화연구소/부안군 부안읍 석정로 226 수협2층 연합치과 내/전화 : (063) 기획 편집 김병남, 김중기, 정재철 사진 허철희 디자인 문현정 출판 도서출판 밝 (02) 인쇄 은성프린터 (02) * 본지의 글과 사진의 무단 전재 배포를 금합니다.
4 저는 격포에서 태어났습니다. 격포의 바람을 맞고 바다 내음을 맡으며 살았습니다. 이곳에서 결혼했고 지금도 자녀를 키우며 살고 있습니다. 항구가 아침을 깨우면 태어난 곳은 격상 마을인데 관아거리라고도 하고 진터라고도 합니다. 조선시대 격포진이 있었던 곳이 라는데 이곳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지요. 1920년대는 간이학교가 세워지기도 했답니다. 항구가 아침을 깨우면 격포 사람들은 바빠집니다. 음식점을 하는 사람, 고기 파는 사람..., 고기 잡으러 나가는 사람들도 이른 하루를 준비합니다. 낮에도 분주한데, 섬을 오가는 사람들이 격포항에서 여객선 을 타고 출입을 하니 하루 종일 사람으로 붐빕니다. 바쁜 일 중의 하나는 손님을 맞는 것인데요, 고향 을 떠난 이웃들의 방문입니다. 격포에 작고 아름다운 박물관을... 김현채/채석강수산물 대표 이들은 옛집도 뛰놀던 갯벌도 없어졌으니 가까운 이웃이라도 만나보고 싶어 합니다. 이때는 하루 일정을 접거나 미룰 수밖 에 없습니다. 이것 역시 격포가 관광지가 되면서 겪게 된 통과 의례 같은 것입니다. 저는 큰집 형을 따라 안양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것 외에는 격포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서 새마을금고에 근무했습니 다. 이곳에서 근무하다 보니 농사짓는 농부들은 뜸한데 어판장에서 일하는 어부들이 새마을금고에 저 축하러 오곤 했습니다. 새마을금고를 그만 두고 동네 사람들과 동업을 시작했습니다. 차 한 대 준비해 서 고기를 받아서 서울 노량진수산시장까지 팔러 다녔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만한 물량을 근처에서 쉽 게 소화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1983년도에 마을이장을 맡았습니다. 서로 이장을 맡지 않으려 했지요. 좋은 일을 한다 해도 마을사람 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어렵기 때문입니다. 마을이장을 하면서 보니 동네 분들의 생활이 말이 아니었습 니다. 주민들의 소득사업으로 30명 정도로 단을 만들어 모내기도 하고 벼베기도 같이 했습니다. 고지 004 부안이야기 2013년/여름/통권 제8호
5 로 빚진 어려운 사람들이 많아서 도움을 주려고 정부양곡을 끌어들이고 품앗 이를 해서 갚게 만들었습니다. 지역에 희망을 심고 싶었으니까요. 항구에서 관광지로 1960~70년대는 고기잡이를 한다 해도 별 수확이 없었습니다. 어업기술은 전통적인 통발을 이용하니 한계가 있었고 어선도 바람이 일면 바다에 나가기가 어려울 정도의 소형이었습니다. 고기가 잡힌다 해도 밥반찬을 한다거나 말려서 쪄먹는 정도였지 판로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80년대가 되면서는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큰 배가 들어오고 고기잡이 기술도 많이 나아졌습니다. 이곳에서 잡 힌 생선들이 격포를 찾는 관광객에게 팔리니 격포사람들의 생활은 조금씩 나아졌습니다. 그렇다고 정 부에서 큰 도움을 준 것은 아닙니다. 아시겠지만 부안에는 농촌지도소는 있어도 어업지도소는 없으니 까요. 관은 고기잡이를 돕는다거나 어촌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보다는 통제와 감시 기능의 지도가 많았습니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관광 붐이 일어나자 격포에 사람들이 넘쳐났습니다. 덩달아 땅값이 뛰었으나 이 미 격포의 많은 땅들은 외부사람들에게 넘어간 뒤였습니다. 이들은 개발정보를 어떻게 알았는지 격포 땅들을 싼값으로 많이 사들였지요. 핵폐기장과 격포 사람들 이제 격포가 조금 나아지는구나 싶었는데, 2003년 핵폐기장 유치라는 광풍이 부안을 휩쓸었습니다. 당시 군수가 핵폐기장을 위도에 유치하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습니다. 바닷가 사람들은 분노했습니다. 이제 조금 살만하니 핵폐기장이라니, 3월에 작업복 차림으로 부안에 나갔더니 핵폐기장 유치 반대를 위한 위원 격포항 격포해수욕장 격포어판장 격포항 칼럼/격포에 작고 아름다운 박물관을
6 격포시가지 격포당산제 격포관아 격포리봉수대 회가 꾸려지고 있었습니다. 격포에서도 여러 단체들이 여기에 참여했습니다. 저는 당시 지역발전위원회 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100여명으로 격포대책위원회가 꾸려져 위원장이 되고 김성균은 사무국장으로 함께 일했습니다. 격포주민들은 힘든 일상을 마치면 밤마다 부안으로 나갔습니다. 꾸준히 촛불집회에 참여하고 주민소환운동, 주민투표를 통해 핵폐기장 유치를 무산시켰습니다. 지금까지 부안에는 농민회 정도가 자신 들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그러나 핵폐기장 문제가 불거지면서 바닷가 사람들이 일치단결하여 목소리를 내 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바닷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함께 행동한 것은 흔치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도 외부에서 오는 사람 중에는 핵폐기장을 유치해서 지역개발을 했어야 한다고 꾸짖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처음에는 격론도 벌였지만 요즘은 그저 듣기만 합니다. 사안에 대한 관점은 다를 수 있 고 여간해서는 이런 생각을 바꾸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한편 생각해보면 경주가 핵폐기장을 받아들였 는데, 얼마나 어려우면 고도( 古 都 ) 경주가 그렇겠냐는 생각과 당장은 시설투자가 되니 훈짐이 나겠지 만,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앞으로의 생활은 어떻게 될 것인지 지켜봐야 할 일입니다. 감성을 키우는 항구로 격포는 개발이라는 이름에 그저 묵묵부답입니다. 그동안 개발에서 소외된 탓이기도 하고 정부에서 돈 을 들여 개발한다는데, 다른 주장을 펴기도 어렵습니다. 부안에서 상록해수욕장까지 4차선이 달립니 다. 이러다 보니 격포를 찾는 사람들도 새로 만들어진 큰 도로를 달리다보면 격포를 지나치곤 합니다. 이 자그마한 변산을 4차선으로 다 만든다 해도 관광객이 더 오리라고 예상하기는 어렵습니다. 단순히 찻길을 넓힌다고 사람들의 선호도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정치인들은 섬을 보면 다리를 놓겠다고 하고, 갯벌을 보면 땅으로 만들겠다고 합니다. 핵폐기장 문제 가 불거졌을 때 격포에서 위도까지 다리를 놓겠다는 황당한 말까지 지어냈습니다. 지금도 모항과 고창 006 부안이야기 2013년/여름/통권 제8호
7 을 연결하는 부창대교를 놓아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새로 생길 다리가 지역사회에 미칠 장단점 에 대해서는 세심한 관심이 없고 투자했으니 좋아지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만 충만합니다. 사람들은 격포에 한번쯤은 와보고 싶어 하는데 지속적으로 찾게 하려면 단순히 해산물을 파는 것만으로는 안 되 고 볼거리와 감성을 키워야 할 것입니다. 격포 일대 해안은 지질 교과서 와도 같은 곳입니다. 지각 변동으로 형성된 높은 해식애 및 해식동굴, 파식대, 습곡, 단층, 절리 등이 넘쳐납니다. 격포에 지질학 박물관을 만들면 어떨까요. 아이들 손을 잡 고 격포를 찾은 가족들에게는 또 다른 학습의 장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 조상들이 쓰던 어구들도 모아놓고 빛바랜 사진들도 전시할 수 있는 해양문화관도 좋고요. 일 하는 박물관이면 어떨까요. 격포에서 오래된 이발관, 음식점, 여관 등등이 옛 얘기를 간직하고 이것을 손님들에게 친절하게 풀어놓을 수 있다면 아름다운 추억으로, 감성으로 다가오지 않을까요. 이 땅이 후손에게 아름다운 땅으로 기억되기를 원합니다. 누구라도 격포를 부르면, 가슴이 먹먹해지 는 그런 설렘의 항구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채석강 해식동굴 칼럼/격포에 작고 아름다운 박물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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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동국여지승람 에 변산( 邊 山 )을 영주산( 瀛 洲 山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능가산( 楞 伽 山 )이라는 문헌 기록도 보 이는데 이는 불교의 영향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가 하면 변산을 봉래산( 蓬 萊 山 )이라고도 한다. 변산을 대표하 는 계곡 이름도 봉래계곡이다. 변산은 크고 작은 산봉우리가 장광 8십리에 걸쳐 있고, 골골마다는 깊고, 숲은 우 거져 고려시대 이래 나라의 재목창( 材 木 倉 )이었다. 3면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1면은 너른 들로 이어진다. 그런 변산 안에는 다른 세상이 있었다. 수많은 수도자들은 하늘에 기대어 절을 짓고 도를 구했으며, 도적들은 큰 세를 이루고 왕권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이상국가 건설을 꿈꾸었다. 그런가 하면 산중에 터 잡은 민초들 은 숱한 전화 속에서도 꿋꿋하게 삶터를 지켜왔다. [기획특집] 내변산 속으로 ➊ 하늘에 기대어 절을 짓고...-허철희 [기획특집] 내변산 속으로 ➋ 내변산의 땅이름을 찾아서-소민석 [기획특집] 내변산 속으로 ➌ 변산 노비도적 정팔룡 이야기-허정균 변산 최고봉인 의상봉에서 본 변산군봉
10 기획특집 ➊ 변산의 옛 절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예전에 변산에는 팔만구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과장이 심하지만 그만큼 변산에는 많은 절이 있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내변산 청 림과 유정재 너머 사창 부근에는 중들을 상대로 하는 중장( 僧 市 )이 섰을 정 도였다고 한다. 문헌에도 변산의 많은 절들과 고승대덕들의 기록이 보이며, 또 이들을 찾아 당대에 유명했던 시인묵객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절들 중에 내소사, 실상사, 청림사, 선계사는 변산 사대사 ( 四 大 寺 )로 손꼽혔으나 지금은 내소사만 남아 있다. 의상봉에 있었던 부사 의방장( 不 思 議 房 丈 )은 진표율사( 眞 表 律 師 )가 망신참법( 亡 身 讖 法 )으로 득도 한 암자로 고려의 대문장가인 이규보의 남행월일기( 南 行 越 日 記 ), 삼국유 사( 三 國 遺 事 ) 에 기록이 보이고, 김시습의 시도 전한다. 영산사( 靈 山 寺 )는 변산에 있었던 절임은 확실하나 변산의 어디에 있었는지, 또 언제 폐사되었 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진표율사가 부사의방장에서 지상보살로부터 계를 받았으나 그의 뜻은 미륵보살( 慈 氏 )에 있었으므로 영산사로 옮기어 수도하였는데, 이때 미륵보살로부터 <점찰경( 占 察 經 )> 2권과 증과( 證 果 )의 간자( 簡 子 ) 189개를 받은 뒤 이 땅에 미륵신앙을 전파한 것으로 삼국유사 에는 전한다. 영산사는 이처럼 한국 미륵신앙의 발상지로 서 한국 불교사에 크게 주목되고 있는 변산의 또 하나의 불교성지이다. 이규보는 원효대사의 수도처인 원효방에도 올라 남행월일기 에 기록을 남겼는데, 원효를 모시는 사포( 蛇 包 )가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젖과 같은 단 물로 늘 차를 다려 원효 에게 드렸다고 한다. 이를 통해 그 시대에 이미 변산에는 차( 茶 )문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백제의 차문화를 근 거하는 자료가 될 수도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신문왕 11년(691년)에 부설거사( 浮 雪 居 士 )가 창건하였다는 월명암은 불교에서 가장 이상적인 곳으로 여기는 산상무쟁처( 山 上 無 諍 處 )의 한곳으로 대둔산의 태고사( 太 古 寺 ), 백암산의 운문암 ( 雲 門 庵 )과 함께 호남의 3대 영지( 靈 地 )로 손꼽힌다. 월명암에 전하는 승전설화( 僧 傳 說 話 )에 의하면, 이곳 월명암에서 4 성( 四 聖 ), 8현( 八 賢 ), 12법사( 十 二 法 師 )가 난다고 했는데, 4성( 四 聖 )은 부설, 묘화, 등운, 월명 등 부설거사의 일가족 4권 속으로 이미 나타났고, 8현( 八 賢 ) 중 성암( 誠 菴 ), 행암( 行 菴 ), 학명( 鶴 鳴 )스님의 3현( 三 賢 )이 났다고 한다. 전설대로라면 앞으로 5현( 五 賢 )과 12법사( 十 二 法 師 )가 더 날 것이므로 기대가 된다. 하늘에 기대어 절을 짓고... 허철희/부안21 부안생태문화활력소 대표 010 부안이야기 2013년/여름/통권 제8호
11 청림사 동종이 내소사로 간 까닭은... 靑 林 寺 ( 新 ) 내소사 경내 보종각( 寶 鐘 閣 )에 걸려 있는 내소사고려동종( 高 麗 銅 鐘 )은 구경( 口 徑 ) 668mm, 높이( 全 高 ) 1053mm로 조 각이나 장식, 형태의 아름다움이 고려 후기의 전형적인 특색을 구비하고 있는 범종( 梵 鐘 )이다. 범종을 매달기 위한 목적으로 종 위쪽에 만들어 놓은 장치를 종뉴( 鐘 紐 )라고 하는데, 대부분이 용의 형상을 취하고 있 어 용뉴( 龍 紐 )라고도 한다. 내소사고려동종의 용뉴는 신라시대의 용뉴보다 외형이 섬세하면서 복잡하고 신라시대의 용두 ( 龍 頭 )는 대체적으로 앞쪽으로 하향( 下 向 )하였으나 내소사고려동종은 전방을 향하고 있다. 이 용은 직경 25mm의 여의주 2개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입에 물고 있고 하나는 왼쪽 발로 받들고 있다. 소리의 울림을 돕는 음통( 音 筒 )은 신라시대부터 내려온 우리나라 동 종의 독특한 구조이다. 내소사고려 동종의 음통에는 정상부에는 6개의 연주( 聯 珠 )로 장식하여 그 특이함을 더하였으며, 75mm의 간격을 두고 3단으로 윤상( 輪 狀 )의 절부( 節 部 )를 장식하였고 그 사이에는 꽃무늬를 배치하였다. 용의 꼬리부는 대상( 帶 狀 )으로 되어있고 음통 양측면에는 염익( 焰 翼 )이 뻗쳐있다. 상대( 上 帶 )와 하대( 下 帶 )는 동일 하게 모란당초문( 牧 丹 唐 草 紋 )을 화 려하게 양각하여 장식하였으며, 상 대 위의 입상대( 立 狀 帶 )는 여의두 문( 如 意 頭 紋 )과 비슷한 입상화문 ( 立 狀 花 紋 )이 양주( 陽 鑄 )되어 있다. 유곽대( 乳 郭 帶 )는 그 폭이 27mm 로 균등하며 우리나라 범종에서 흔 히 볼 수 있는 연주대( 聯 珠 帶 )가 외 내소사고려동종(보물 제277호) [기획특집]내변산 속으로1-하늘에 기대어 절을 짓고
12 측 주변에만 있고, 내측 주변은 2중소선( 二 重 素 線 )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내부에 연화당초문( 蓮 花 唐 草 紋 )이 배치되어 있 다. 유곽 안에는 높이 30mm의 9개의 돌출된 유두( 乳 頭 )가 있고, 각 유좌( 乳 座 )는 높이 약 1.5mm로 9개의 연엽( 蓮 葉 )으로 구성되었고 연봉오리로 된 융기유두는 4~5개의 연엽으로 3 3의 배치로 총 9개의 유두로 구성되어 있으며, 용뉴를 기 준으로 좌측 유두 1개가 파손되었다. 당좌( 撞 座 )는 전후좌우 4개소에 배체되어 있고 주변직경 136mm의 연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당좌와 유곽 사이의 각 상부에는 천개( 天 蓋 )를 갖추고 있는 운상( 雲 狀 )의 만개연화좌( 滿 開 蓮 華 坐 )에 삼존상( 三 尊 像 )이 양주( 陽 鑄 )되어 있는데, 본존( 本 尊 )은 관음보살좌상( 觀 音 菩 薩 坐 像 )으로 화관( 花 冠 )은 신라 고려시대 관음보살상에서 같 은 유형을 발견할 수 있다. 협시( 脇 侍 )는 연화대에 서 있는 상( 像 )으로서 본존 중심 오른편은 합장 예경하는 상이고, 왼편 은 보살을 향하여 공양 예경하는 상이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형식이며 삼존은 모두 원형두광( 圓 形 頭 光 )을 나 타내고 있다. 각 삼존의 정상에는 폭 90mm, 높이 70mm의 바람에 나부끼는 천개( 天 蓋 )가 각각 배치되어 정밀하고 치밀 하면서도 장엄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당좌와 당좌 사이의 종면에는 다음과 같은 종명( 鐘 銘 )과 종기( 鐘 記 )가 새겨져 있다. 1 靑 林 寺 銘 扶 寧 邊 山 中 有 靑 林 三 韓 前 寺 革 古 鼎 今 堂 宇 宏 麗 禪 侶 盍 簪 命 白 公 等 鑄 發 鯨 音 停 離 輪 苦 警 悟 昏 沉 凡 有 耳 子 開 覺 本 心 壬 午 六 月 日 社 主 禪 師 湛 黙 誌 2 凡 有 耳 者 開 覺 本 心 貞 祐 十 年 六 月 日 社 主 禪 師 湛 黙 記 3 貞 祐 壬 午 六 月 初 七 日 邊 山 靑 林 寺 金 鐘 鑄 成 入 重 七 百 斤 棟 梁 道 人 虛 白 道 人 宗 之 匠 韓 仲 叙 4 隱 士 金 性 圭 乙 酉 5 余 乙 酉 九 月 七 日 卜 居 靑 林 翌 年 九 月 七 日 鑿 此 金 鐘 移 懸 于 來 蘇 寺 銘 曰 性 保 金 剛 體 法 轉 輪 聞 聲 悟 心 花 開 實 新 崇 禎 紀 元 後 四 癸 丑 九 月 二 十 七 日 隱 士 金 性 圭 記 而 施 焉 持 殿 完 岩 正 于 내소사고려동종 종면( 鐘 面 )에 새겨진 명문( 銘 文 ) 012 부안이야기 2013년/여름/통권 제8호
13 위의 명문에 의하면 본래 고려 고종 9년(1222) 6월에 장인 한중서( 匠 人 韓 仲 叙 )가 주조하여 당시 부령(부안의 옛 지명) 에 있는 청림사의 종으로 달았던 것으로 주지인 담묵선사( 湛 黙 禪 師 )가 주성( 鑄 成 )한 후 종체( 鐘 體 )에 1, 3 과 같은 글 을 새겼다. 그 후 절이 소실폐사( 燒 失 廢 寺 )되어 종의 소재처를 알 수 없었는데, 청림에 복거( 卜 居 )하던 은사( 隱 士 ) 김성규( 金 性 圭 ) 가 조선 철종 4년(1853)에 폐사 후 오랫동안 매몰되었던 종을 발굴하여 내소사로 이현( 移 懸 )하고 4 ~ 5 를 새겼음을 확 인할 수 있다. 2 는 1 의 글처럼 글이 깊지 않고 조잡한 것으로 보아 후대에 누군가가 앞의 명문을 모방하여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무신기병의 근거지 청림사 청림사 동종이 내소사로 옮겨진 데에는 유명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청림사( 靑 林 寺 )는 상서면 청림리 청림 마을에 있 었던 절로 내소사( 來 蘇 寺 ), 실상사( 實 相 寺 ), 선계사( 仙 溪 寺 )와 함께 변산의 4대사( 四 大 寺 )로 손꼽힐 정도로 큰 가람이었 다. 지금은 그 자리에 마을(청림마을)이 들어서 있는데 마을 뒤편 대밭 가의 남쪽 석축 일부와 동쪽 석축 일부가 양호하 게 남아 있다. 청림사 터에는 지금도 상당수의 기와조각들이 흩어져 있는데 그중에는 靑 林 寺 란 銘 文 이 있는 것도 습득되었다고 하 며, 습득된 기와조각들의 상당수가 불에 탄 흔적이 있다고 한다. 이로 볼 때 청림사는 무신란( 戊 申 亂, 일명 이인좌의 난 ) 때 부안지역 무신기병( 戊 申 起 兵 )들의 근거지였다는 문헌기록으로 보아 이때 관군의 공격을 받아 불타버린 것으로 추정 된다. 무신란은 1728년( 英 祖. 4) 무신년( 戊 申 年 ) 3월에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소론과 남인들이 새로 등극한 영조( 英 祖 )의 적통성을 문제 삼아 무력으로 정권을 타도하려 했던 역모사건으로 이인좌( 李 麟 佐 )가 주동이 되었기 때문에 이인좌의 난 이라고도 한다. 부안지역에서는 고응량( 高 應 良 )과 정팔룡( 鄭 八 龍 ), 김수채( 金 守 彩 ) 김수형( 金 守 亨 ) 형제 등이 이에 적극 동조했는데, 특히 무신기병의 가장 중심세력이었던 부안 변산부 노비도적( 奴 婢 盜 賊 )인 정팔룡은 부안의 청림사( 靑 林 寺 ) 에 근거지를 두고 삼남지역의 청림병( 靑 林 兵 )을 지휘했다고 한다.<영조무신역옥추안> 청림사가 폐사된 후 그 터에는 마을이 들어섰는데, 집을 지으려고 땅을 파니 땅속에서 큰 종이 나왔다고 한다. 이에 대 해 청림의 고로( 古 老 )들은 절이 불에 타자 누군가가 동종을 우물에 넣고 메워버렸는데, 나중에 발견된 것이라고 한다. 동 종을 파낸 자리가 바로 박적시암 으로 1970년대까지 마을사람들이 다 이 물을 길어다 먹었다고 한다. 어쨌든 이 종이 바로 보물 제277호 내소사고려동종이다. 이때가 철종 4년(1853년), 그런데 종을 땅속에서 캐어 아무리 쳐봐도 도무지 소리가 나지 않는 벙어리 종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이 궁리 끝에 종을 치면서 변산 안의 모든 절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보기로 했다고 한다. 개암동의 개암사! 중계의 실상사! 변산의 모든 절 이름을 다 부르며 쳐보아도 소리가 나지 않더니 [기획특집]내변산 속으로1-하늘에 기대어 절을 짓고
14 돌개( 石 浦 )의 내소사! 하고 부르면서 종을 치니까 비로소 우웅... 하고 맑고도 우렁찬 종소리가 변산 안에 가득히 퍼지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종을 내소사로 옮겼다는 설화가 전해오 고 있다.<참고문헌/ 내소사지 -능가산 내소사 발행/1990년 전라북도 발행, 전설지 > 개암사로 간 청림리석불좌상 靑 林 寺 ( 古 ) 변산의 청림에는 두 청림사가 있었다. 그래서 편의상 (신)청림사와 (고)청림사로 구분해 부르는데, (신)청림사는 변산 4 대사찰 중의 하나로 청림마을에 있었던 절이다. 내소사고려동종(보물 제277호)은 이곳 신청림사터에서 출토되었다. 서운 암에 있었던 절을 (고)청림사라고 부르며,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23호로 지정되어 개암사 지장전에 모셔져 있는 청림리 석불좌상이 이곳 (고)청림사터에 있었던 석불이다. (고)청림사는 서운암에서 가마소 가는 계곡을 따라 1.2km쯤 올라가면 계곡 오른쪽에 있었던 절이다. 약 1,500평에 달하는 절터로서 석불좌상 은 북향하여 안주봉 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불상의 주위에 집 약적으로 와편( 瓦 片 ) 이 산재해 있는 것과 이곳이 다른 지역보 다 약간 높은 단을 이루는 것으로 보아 불당을 세워 불상을 모셨던 것으로 추정 된다. 절터에서 출토 되는 와편은 주로 조 가마소 가는 길, 안주봉(학봉) 남쪽에 있었던 청림리석불좌상(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23호). 부안댐 담수로 1997년 개암사 지장전으로 옮겨졌다. 선후기의 와편으로 014 부안이야기 2013년/여름/통권 제8호
15 명문( 銘 文 )이 있는 암막새편과 숫막새편들인 점으로 미루어 이 절이 조선 후기까지 있었으나 그 이후에 폐사된 것으로 추 정된다. 아니면 그 터에 절을 다시 지었을 수도 있다. 석불좌상 옆에는 석탑의 옥개석재( 屋 蓋 石 材 ) 1개가 놓여 있었는데 한 변의 길이가 42cm로 아주 소형이며 3단의 옥개 받침이 각출되었다. 작은 석탑의 최상층 옥개석재로 추정되나 풍화로 인해 많은 손상을 입고 있다. 주변에는 담장의 흔적 들이 약간씩 남아 있으며 초석이나 그 밖의 건축재 등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건물의 규모나 배치관계는 정확히 알 수 없고, 3동 정도의 건물을 갖춘 절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청림리석불좌상은 부안댐이 완성될 무렵인 1997년 개암사 지장전으로 옮겨졌다. 팔각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한 이 불상 은 머리에 두건을 쓴 지장보살상이다. 불상의 천의( 天 衣 )는 통견( 通 肩 )으로서 가슴아래에 복대를 두르고 있고, 머리 전체 를 두른 두건은 어깨와 등의 일부에까지 덮여있으며 다른 장식은 없다. 둥글고 원만한 얼굴에 눈과 입 등의 표현은 단정한 모습을 보이며, 코와 목은 시멘트로 보수하였다. 두 손은 서로 맞대 고 겹쳐놓은 선정인( 禪 定 印 )을 취하고 있는데 손 안에 보주( 寶 珠 )가 놓여있다. 번잡하지 않은 옷주름 표현 등은 전체적으 로 단정하고 정적인 느낌이 들게 한다. 좌대는 지대석, 중대석, 상대석으로 나뉘어져 있고, 할석재( 割 石 材 )로 된 지대석 위에 폭66cm, 높이18cm 하대석의 복 련좌( 覆 蓮 座 )를 올려놓고, 상부에 원형 중대석을 각( 刻 )하였다. 중대석은 직경 약 37cm, 높이 약 24.5cm의 소형이다. 조각 양식과 대좌의 형식 및 연화문 표현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참고문헌/ 사찰지 1990 년 전라북도 발행> 천층산 위에 그윽히 천년사가 서 있어 千 層 庵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이매창은 가녀린 여성의 몸으로 변산의 높은 곳에 있는 절에 올라 시 한 수씩을 남겼다. 변산 제 2봉인 쌍선봉 산상에 있는 월명암, 어수대 위에 있었던 왕재 석재사, 또 천층 산 위 바위가 갈라지고 돌이 포개져서 나 무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밖에 없는 곳의 절벽에 붙어 있었던 천층암을 오른 것이 그것이다. 아래는 그녀가 천층암에 올 라 지은 시이다. 登 千 層 庵 千 層 隱 佇 千 年 寺 瑞 氣 祥 雲 石 逕 生 淸 磬 響 沉 星 明 白 천층암에 올라서 천층 산 위에 그윽이 천년사가 서 있어 상서로운 구름 속으로 돌길이 났어라 맑은 풍경소리 스러지는 속에 별빛 달빛만 밝은데 [기획특집]내변산 속으로1-하늘에 기대어 절을 짓고
16 萬 山 楓 葉 鬧 秋 聲 - 허경진 역 - 산이란 산마다 단풍이 들어 가을소리가 가득해라 그런데 천층암이 변산 어디에 있었던 암자인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동국여지지( 東 國 輿 地 誌 ) 부안현( 扶 安 縣 ) 조 에 천층암에 대한 기록이 보일 뿐이다. 그러나 그 당시와 지금의 지명이 달라 그 정확한 위치를 가늠하기에 어려움이 있 다. 아래는 동국여지지 천층암에 관한 기록이다. 청림사( 淸 臨 寺 )는 변산 청연동( 靑 淵 洞 )에 있다. 절 뒤 산 위에 또 청연굴( 淸 淵 窟 ), 천층암( 千 層 庵 )이 있는데, 암자는 절 벽에 붙어 있다. 바위가 갈라지고 돌이 포개져서 나무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밖에 없는데, 그 위와 아래가 헤아릴 수 없 이 깊은 산골짜기이다. 또 본래의 청림사가 있는데, 옛날에 큰 절이었으나 지금은 없어져서 그 터만 남아 있다. 청림사를 소개한 대목으로 변산 청연동에 청림사가 있고, 천층암은 이곳 청림사 뒤 산 위 바위가 갈라지고 돌이 포개 져서 나무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밖에 없는 곳의 절벽에 붙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매창의 싯귀처럼 천층 산 위에 있는 절과 맞아 떨어진다. 참고로 동국여지지 는 반계 유형원(광해군14, 1622~현종 14, 1673)이 펴낸 것으로 추정되는 전국 지리지로 내용을 보 면 현종(1660~1674) 때까지의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 이매창이 만력 계유(1573)에 나서 경술(1610)에 죽었으니 동국여지 지 가 만들어진 시기라면 천층암은 아직 존재했을 것이기에 그곳에 오르고, 또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청연동 ( 靑 淵 洞 )은 또 어디 인가? 청연동을 찾 으면 청림사와 천층 암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동국여지 지 에 청연동의 기 록도 보인다. 안주봉(학봉), 천층암은 안주봉 또는 안주봉에서 북으로 이어지는 산 능선 어디쯤의 절벽 위에 있었던 암자로 추정된다. 청 연 동 은 변 산 가운데에 있다. 뾰족 뾰족한 산봉우리들 이 떼 지어 둘러싸고 시내와 폭포가 못을 016 부안이야기 2013년/여름/통권 제8호
17 이루었는데, 그 깊이를 알 수 없으며, 돌 위에 넘쳐흘러 자리를 깐 것처럼 평평하다. 세상에 전하기를 용이 못 가운데 숨 어 있다하며, 가물면 여기서 기우제를 지낸다. 그 상류에 또 화룡연( 火 龍 淵 )이 있고, 그 북쪽 1리쯤에 큰 바위가 있는데, 깎아 선 것이 천 길이나 되어 기어오를 수 없으므로 이름을 학암 鶴 岩 이라 했는데, 옛적에는 학의 둥우리가 그 위에 있었 다고 한다. 이쯤 되면 청연동의 위치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뾰족뾰족한 산봉우리들이 떼 지어 둘러싸고 시내와 폭포가 못을 이루었는데, 그 깊이를 알 수 없으며, 돌 위에 넘쳐흘 러 자리를 깐 것처럼 평평하다. 그 상류에 또 화룡연이 있다. 는 대목은 가마소계곡에 가 보았다면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상류에 있다는 화룡연은 와룡소로 여겨진다. 뾰족뾰족한 산봉우리들이 둘러싸인 계곡 가의 청림사( 淸 臨 寺 )는 (고) 청림사터이거나 그 주변으로 여겨지며, 절 뒤에는 깎아 선 것이 천 길이나 되어 기어오를 수 없으므로 이름을 학암 鶴 岩 이라 부른다는 곳은 학봉( 鶴 峯, 안주봉)으로 여겨진다. 동국여지지보다 50여년 빠른 시기의 기록인 심광세( 沈 光 世 )의 유변산록( 遊 邊 山 錄 (1607년 5월)에도 가마소계곡에 대 한 기록이 보이는데 동국여지지의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 어수대( 御 水 臺 )에서 십여 리를 가서 청계사( 淸 溪 寺 )에 이르렀다. 절 왼쪽에는 학봉( 鶴 峯 )이 있는데 깎아서 세운 듯한 것이 만 길이나 되고, 푸른 학 한 쌍이 내려앉은 둥지가 있다, 절 뒤에는 청연암( 淸 淵 菴 )이 있다. 절 앞으로 시내가 흐르 고 그 상류에 청연( 淸 淵 )이라는 못이 있는데, 못은 맑고 깊으며, 길이와 넓이가 수십 보는 될 만하며, 사방에는 큰 바위들 이 에워싸고 있고, 물은 옥 같은 소리를 내며 흘러나와 그 바위 위로 평평하게 펼쳐져 발을 씻고 또 양치도 할만 했다. 억 지로 십 리쯤 가서야 비로소 화룡연( 火 龍 淵 )에 도달할 수 있었다.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늘 향불을 피우고 제물을 바치면 서 비가 오기를 기도하는데, 신령이 응답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화룡연을 보고 나서 뒤에 다시 왔던 길을 따라서 청림동 ( 淸 臨 洞 ) 입구를 나와 십여 리를 걸어서야 비로소 실상사( 實 相 寺 )에 이르렀다. 이 기록에서 청연은 가마소, 화룡연은 와룡소, 학봉은 병봉(안주봉)으로 추정되며, 서운마을 기도원을 지나 대나무 숲 이 있는 곳, 즉 학암(안주봉으로 추정됨)을 왼쪽에 두고 청계사( 淸 溪 寺 )가 있었다면, 청연암( 淸 淵 菴 )은 대밭 뒤 어디쯤에 서 찾아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천층암은 안주봉, 또는 안주봉에서 북으로 이어진 산 능선 어디쯤의 절벽 위에 있었던 암자로 추정된다. 그러 고 보니 안주봉에서 북으로 이어진 봉우리를 변산반도국립공원의 지도에는 천총봉(266.4m) 이라 표기하고 있고, 현지의 주민들은 청춘봉 이라 부르고 있는데 혹 천층봉이 천총봉, 청춘봉으로 음이 변한 게 아닐까? 추정해 본다. [기획특집]내변산 속으로1-하늘에 기대어 절을 짓고
18 어수대에 올라 王 在 庵 釋 在 庵 登 御 水 臺 王 在 千 年 寺 空 餘 御 水 臺 往 事 憑 誰 問 臨 風 喚 鶴 來 - 허경진 역 - 어수대에 올라 천년왕업의 옛터엔 겨우 어수대만 남았어라 지나간 옛일이야 누구에게 물으리오 바람맞으며 서서 학만 불러보네 이매창의 시이다. 어수대는 섶못에서 내변산길로 접어들어 우슬재를 넘자마자 오른쪽으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기암괴 석의 절벽을 말한다. 장마철에는 이 기암괴석의 절벽이 온통 폭포로 변하여 장관을 이루는데, 자욱하게 피어오른 물안개 사이로 쏟아지는 기다란 물줄기는 마치 하늘에서 쏟아지는 듯, 그 시작점을 헤아리기 어렵다. 어수대에 오르려면, 우슬재 아래에서 오른쪽으로 남선동길로 오르는 길이 지름길이다. 이곳에서 어수대까지는 30분 정 도, 폭포에서 왼쪽으로 나 있는 등산로를 따라 10여분 더 오르면 왕등암( 王 登 岩 ) 정상에 이른다. 정상에서 길은 두 갈래 로 갈라지는데 왼쪽 길은 쇠뿔바위( 牛 角 峰 )를 지나 의상봉 정상에 이르는 길이 고, 오른쪽 계곡으로 내려가면 영천샘에 이른다. 영천샘 부근 에는 영천사( 靈 泉 寺 )가 있었다고 전 한다. 영천사터 주변 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몇 가구가 누에 도 치고, 담배농사도 지으며 살았다고 한 어수대 다. 그러나 김신조사 018 부안이야기 2013년/여름/통권 제8호
19 건 이후 정부의 오지 독가촌 이주정책에 따라 이곳 주민들 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다. 왕재( 王 在 ) 석재암( 釋 在 庵 )도 이곳 이디쯤에 있었던 절 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곳의 땅이름들이 예사롭지가 않다. 어수대( 御 水 臺 ), 왕재암( 王 在 庵 ) 등 왕과 관계되는 땅이름 들이다. 동국여지지( 東 國 與 地 誌 ) 에 어수대( 御 水 臺 ), 왕 재암, 석재암( 釋 在 庵 )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왕재암( 王 在 庵 ), 석재암( 釋 在 庵 ) 둘 다 변산 옥순봉( 玉 芛 峰 ) 동쪽에 있다. 4면 석벽이 가 파르고 높은데, 그 위는 후미지고 평평하여, 완연히 천성( 天 成, 하늘이 이룩한 일)으로, 암자가 그 안에 있으며, 두 절이 서로 잇닿아 있다. 그 동남쪽에 어수대( 御 水 臺 )가 있고, 서남쪽에 왕등암이 있는데, 모두 낭떠러지가 천 길이어서 사람이 기어오를 수 없다. 절에 기( 記 )가 있는데 암자는 정심두타( 正 心 頭 陀 )가 창건하였다. 신라왕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이곳에 이르러 즐기며 돌아가기를 잊었다. 이에 왕재, 석재, 어수의 이름이 있게 되었다. 낭떠러지 돌계단이 가깝게는 구름 걸린 산에 에워싸이고 멀리는 돌웅덩이에 둘러싸여 9층의 날리는 폭포가 만 길이나 되니 실로 지장( 地 藏 )의 별세계요, 하늘이 열린 듯한 뛰어난 경치로 복정( 福 庭, 복을 누릴만한 땅)이 된다. 고 하였다. 영천샘, 샘가에는 목 잘린 불상이 서 있었다. 영천샘 부근에는 영천사( 靈 泉 寺 )가 있었 다고 전하며, 왕재( 王 在 ) 석재암( 釋 在 庵 )도 이곳 어디쯤에 있었던 절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신라의 어느 왕이 변방의 험준한 산을 올랐다는 것일까? 그 어떤 고문헌에도 이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 데, 다만 1895년(고종 32)에 간행된 호남읍지( 湖 南 邑 誌 ) 3권에 어수대는 변산 가운데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 경 순왕이 왔던 곳이라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고 하였으나 고증할 길은 없다. 양진암을 떠나면서 학명선사에게 養 眞 庵 양진암( 養 眞 庵 )은 월명암의 부속 암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내소사지( 來 蘇 寺 誌 ) 는 월명암 아래에 있었으며 근세 학 명선사 이후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진묵, 학명, 만허 스님 등이 주석했으며, 만해 한용운은 양진암을 찾아 학명선사에 게 바치는 시 한 수를 남겼다. 그 후 만해의 권유를 받은 선사는 월명암에서 내려와 내장사로 향하였다고 한다. 고 기록 하고 있다. [기획특집]내변산 속으로1-하늘에 기대어 절을 짓고
20 養 眞 庵 臨 發 贈 鶴 鳴 禪 伯 양진암을 떠나면서 학명선사에게 世 外 天 堂 少 人 間 地 獄 多 佇 立 竿 頭 勢 不 進 一 步 可 臨 事 多 恨 劇 逢 人 足 別 離 世 道 固 如 此 男 兒 任 所 之 - 한용운 - 이 세상 밖에 천당은 없고 인간에게는 지옥이 많다 장대 끝에 우두커니 섰을 뿐 어찌 한 걸음 더 내딛지 않는가 일에 다다르면 고생이 많고 사람을 만나면 이별이 있다 원래 세상 이치 이러하니 남아라면 얽매임 없이 멋대로 살리 학명선사와 만해 한용운 위의 시는 만해( 萬 海 ) 한용운( 韓 龍 雲, 1879~1944)이 1923년 양진암( 養 眞 庵 )에서 그해 봄을 보내고 양진암을 떠나면서 학명선사( 鶴 鳴 禪 師, 1867~1929)에게 바친 시로, 이제 그만 세상에 나와 중생을 제도해달라는 간곡한 청이 담겨 있다. 만 해로부터 이러한 청을 받은 학명선사는 주장자( 拄 杖 子 )를 짚고 선원 뜨락에 서서 이틀밤낮을 지새우며 고민했다고 한다. 마침내 학명선사는 오랜 수행을 멈추고 하산하였다. 그는 퇴락한 정읍 내장사의 중창불사를 일으키는 한편, 승려들이 신도들의 시주로 먹고, 자며 편하게 수행하는 것을 경계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참선을 해야 한다는 선농일치( 禪 農 一 致 ) 를 주창하며 선불교를 새롭게 하는 일에 나섰다. 학명은 스스로 호미를 들고 모범을 보이며 내장선원의 규칙으로 반농반 선( 半 農 半 禪 ), 자선자수( 自 禪 自 修, 아침에는 경전을 읽고,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좌선을 함으로써, 스스로 참선하고 수행정진 한다), 자력자식( 自 力 自 食, 스스로의 힘으로 먹을 것을 마련한다.)을 내걸었다. 이외에도 그는 인근의 어린 학동 들을 모아 천수경 과 발원문 을 가르쳐 교화에 힘썼다. 그렇다면, 학명선사는 누구인가? 월명암을 창건한 부설거사가 예언하기를 월명암에서 4성8현( 四 聖 八 賢 )이 난다고 하 였는데, 4성은 부설, 묘화, 등운, 월명 등 부설거사의 일가족 4권속으로 이미 나타났고, 8현 중 성암( 誠 菴 ), 행암( 行 菴 ), 학 명( 鶴 鳴 ) 스님의 3현이 나셨고, 앞으로 5현과 12법사가 날 것이라고 한다. 학명의 속성은 백( 白 )씨이며, 전남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에서 태어났다. 스무 살 되던 해에 갑자기 부모가 세상을 떠나 자 문득 인간의 삶의 덧없음을 깨닫고 명산대찰을 찾아 나그네 길에 오른다. 그런 그의 발길은 순창 구암사( 龜 岩 寺 )에 닿 았고, 당대의 고승 설두( 雪 竇 )화상의 지도 아래 불도를 닦기 시작한다. 이후 불갑사( 佛 岬 寺 )의 금화( 錦 華 )선사를 스승으로 수계하여 출가한다. 4년 뒤인 1890년에는 자신의 출가 동기를 부여 했던 구암사 강원을 찾아 내전을 공부하고 구족계를 받았다. 이로부터 10년 동안 지리산 벽송사, 조계산의 선암사, 송광 사 등지를 두루 찾아다니며 천하의 선지식을 참방하여 법을 구하고 삼학( 三 學 )에 두루 통달하였다. 1900년, 학명은 은사인 금화선사에 의해 건당( 建 幢 )하고 법통을 이어 받으니 바로 백파선사의 7대 법손이 되고, 설두선 020 부안이야기 2013년/여름/통권 제8호
21 사의 증손이 되었고, 이후 중국 땅의 넓은 천지를 돌며 고승들 을 참방하고, 선화를 나누었으며, 이듬해 에는 일본으로 건너 가 당대 최고의 선지 식들과 교류하였다. 43세 때인 1909년 일본에서 돌아온 그 는 1912~1916년 경 내소사 주지를 맡았 으며, 1919년경부터 월명암에 주석하며 월명암에서 본 변산의 아침, 양진암이 월명암 부근에 있었다고 하니 양진암에서 본 변산의 아침풍경도 저랬을 것이다. 만허( 滿 虛 ) 등과 함께 폐허로 방치되었던 월명암을 중흥했다. 1919년 3월에는 훗날 원불교를 창교한 소태산 박중빈이 월 명암을 찾아와 10여일을 머물며 학명선사의 설법에 깊이 감복하여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그 후 소태산은 월명암 아래 실상사 옆에 두어 칸 초막(봉래정사)을 짓고, 그곳에서 원불교를 창교했다. 만해 한용운과의 조우도 학명이 월명암에 머물 때 이루어진 것이다. 그 무렵이라면 만해 한용운과 대비되는 육당 최남 선도 변산을 순례하고 1926년 발행한 심춘순례에 변산의 4대사 를 남겼다. 육당의 변산 방문 시기를 1925년으로 보기 때 문에 한용운이 변산을 다녀간 2년 후의 일이며, 기미년 3월 1일 몇 해 뒤의 일이다. 한용운과 최남선 만해와 육당은 대문필가이지만 독립운동 노선은 판이하게 달랐다. 육당이 훼절하여 친일 앞잡이 노릇을 했지만 만해는 꼿꼿하게 지조를 지키며 맨 앞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끝내 조국 독립을 못 본 채 운명했다. 두 사람의 변산 방문 목적도 달랐다. 한 사람은 유람 목적이었지만, 한 사람은 일본에게 국권을 강점당한 암울한 시기에 중생 제도를 고민하며 변산으 로 옮긴 구국의 발길이었다. 세간에 회자되었던 만해와 육당에 관한 일화가 있다. 1919년 2월 상순 경 최린은 최남선, 현상윤 등과 독립운동 계획을 협의하였다. 이때 선언문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육당이 말하기를, 나는 한 생애를 통하여 학자의 생활로써 관철하려고 이 미 결심을 한 바 있으므로 독립운동의 표면에는 나서고 싶지 않으나, 독립 선언문만은 내가 지어보고자 하는데 그 작성 책임은 형(최린을 지칭)이 져야 한다. 고 하면서 최린의 의사를 물었다고 한다. <한국사상 제4집 172~173면> 이 말을 들은 만해는 독 립운동에 책임질 수 없다는 최남선에게 선언문을 작성케 함은 불가하니 내가 짓겠다. 고 주장했다. [기획특집]내변산 속으로1-하늘에 기대어 절을 짓고
22 만해-육당에 대한 일화는 또 있다. 만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립선언문은 결국 최남선에 의해 지어졌다. 그런데 독 립선언문까지 작성한 최남선이 갑자기 자신의 책들을 일본에 바치는 등 친일파로 변하자 이를 용서할 수 없었던 한용운 은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최남선의 장례식을 치렀다고 한다. 만해의 대쪽 같이 강직한 지조의 일면을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 그가 우연한 장소에서 최남선과 마주쳤다. 최남선이 한용운 선생 아니십니까? 저, 최남선입 니다. 하며 인사를 건네 오자 심기가 뒤틀린 한용운은 최남선? 내가 아는 최남선은 벌써 죽었는데... 하며 최남선을 면 전에서 무시해버렸다는 것이다. 신석정, 한용운은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 부안이 낳은 대시인 신석정은 한용운을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꼽고, 또 그를 존경했다. 1930년 신석 정은 청운의 뜻을 품고 상경해 중앙불교전문강원의 문을 두드렸다. 그 무렵 신석정은 박용철, 정지용, 영랑, 편석촌, 이순 석, 조종형, 춘원 등 많은 문인들과 만났는데, 중앙불교종무원 불교사로 만해 한용운을 찾아가 조우한 것도 그 무렵의 일 이다. 신석정은 만해를 거만 무쌍하면서도 다정한 만해스님은 아주 붙일 맛이 두터웠다 고 소감을 밝힌 적이 있다. 아래 에 신석정의 난초잎에 어둠이 내리면 (지식산업사 간)에서 시인으로서의 만해 편의 일부를 발췌해 올린다. 지금 나는 간디의 모습과 가장 흡사하고 공통성을 일찍이 발견했던 가장 불행하고도 가장 위대한 한 사람의 시인을 여 러분의 기억에 되살려 보려고 한다. 그만치 그 시인은 가장 불행했던 시기에 태어났고, 또 그 시대를 살아왔고, 그 시대에서 떠났지만, 가장 위대한 일을 우 리 민속사와 더불어 우리 정신사에 눈부시게 남겼던 것이다. 항상 우리 마음속에 불사조처럼 영원히 도사리고 앉아 있는, 그리고 영원히 앉아 있을 이 위대한 시인은 다른 사람 아 닌 바로 만해 한용운 그분이다. 한 생명이 그 모습을 나타내고 이윽고는 죽어갈 때 사람들은 변전과 무상을, 혹은 시간과 영원을 말하지만, 한용운은 어둠속에 나타나 그 어둠 속에서 이글이글 횃불처럼 타다가 끝내 어둠 속에서 숨을 거두었기 에, 그 광망은 우리들의 마음에서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그 찬연한 빛을 거두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떠난 지 4반세 기가 넘었는데도 우리에게 남긴 빛이 찬연한 것같이 그의 가치는 통상적인 데서가 아니라, 시대가 변이하는 중에서도 그 가치의 불변성은 영원히 지속할 것이요, 더욱 더 그 위대성은 시공( 時 空 )을 초월해서 증가될 것이다. 구름 밖에 홀립하고 있는 거악 巨 嶽 은 아무리 우리와 거리를 멀리하고 있으되 우리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고 더욱 그 윤 곽이 뚜렷이 군소봉( 群 小 峰 ) 위에 군림하고 있는 모습과 다름이 없듯이, 지금도 우리 머리 위에 뚜렷이 그 모습을 나타내 고 있는 것이 바로 시인 한용운의 위대성인 것이다.<중략>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찌니의 님은 이탤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 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 022 부안이야기 2013년/여름/통권 제8호
23 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이것은 너무나 유명한 님의 침묵 의 서문의 전문이다. 저자 만해는 이 서문을 제( 題 )하되 <군말>이라 겸허하였으나, 군 말이 아니라 꼭 해야 할 말, 아니해서는 안 될 말인 것이다. 200자도 못되는 짧은 글인데, 이토록 거창한 의미를 함축성 있게 압축시킨 것을 생각하면 다만 눈이 휘둘릴 정도다. 두 말할 것 없이 중생은 석가의 님이요, 또한 만해의 님일 것이 며, 마찌니(Mazzini Giuseppe)의 님이 이탤리라면, 만해의 님은 조선일 것이다. 해 저문 벌판이란 이미 태양을 상실한 암 담한 조국이요, 길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란 바로 나라를 잃어버리고 헤매야 하는 이 나라의 겨레였던 것이다. 민족운동의 대열의 앞장에서 일제에 항쟁한 만해는 시인이기 전에 저 간디가 그렇듯이 이 나라의 메시아였던 것이 분 명하다. 그러므로 만해문학의 저변에는 불교 철학의 신념과 민족적 긍지로써 기초공사를 굳건히 하고, 그 위에 건립된 것 이 그의 작품 세계인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피라미드의 저변이 공고하지 않았던들 기원 전(BC30~29)에 세운 그 삼각탑이 오늘에 이르도록 이 지구상에서 있을 리 만무하다. 그와 마찬가지로 일생을 일제에 항쟁하고, 끝내 일제시에 마 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만해의 무장된 지조의 삼각탑은 그 어느 한 모서리도 금이 간 적이 없다.<하략> 실상사와 봉래구곡 작전 實 相 寺 실상사( 實 相 寺 )는 신라 689년(신문왕 9년) 초의선사( 草 衣 禪 師 )가 창건하였고, 조선 제4대 세종 임금의 형인 효령대군 의 원당이 되어 궁재로 중수하고, 또 숙종 때 영허선사( 映 虛 禪 師 )가 중수하였다. 대웅전, 나한전, 요사, 산신각 등이 있었 다고 하며, 대웅전 안에는 고려 초기 작품인 불상과 고사경( 古 寫 經 ), 고인경( 古 印 經 ), 화엄경소( 華 儼 經 疎 ) 등의 경판과 효 령대군의 원문 등 중요 문화재들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근래에는 원불교 창교자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실상사 옆 실상초당에서 원불교 교법을 마련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육이오 때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년 실상사터와 그 주변 16,725m2가 전라북도 기념물(제 77호)로 지정되었다. 육당 최남선은 1925년 3월 하순부터 50여 일에 걸쳐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그 주변의 내장산, 금산사, 변산 등지의 남 한 각지를 여행하고, 1926년에 기행문 심춘순례(백운사 간)를 출간했는데, 아래는 내소사, 직소폭포를 지나 실상사를 둘 러본 후 남긴 글이다. 곧 실상사( 實 相 寺 )가 되니 영락( 零 落 )한지 오래여서 사대사( 四 大 寺 )의 수일( 隨 一 )이던 풍모( 風 貌 )는 겨우 그 대적광 전( 大 寂 光 殿 )의 상설( 像 設 )에 남아 있음을 볼 뿐이다. 퍽 크게 만든 관음상인데 잘룩한 허릿매와 널따란 옷자락과 너그럽 고도 아우러진 상모( 相 貌 )가 고려라도 초기의 것임이 의심 없으며 사전( 寺 傳 )에는 서역으로부터 돌배를 타고 원암( 元 암) [기획특집]내변산 속으로1-하늘에 기대어 절을 짓고
24 불타기 전의 실상사(사진출처/고 채규병 전 부안문화원사무국장) 의 앞개에 내착( 來 着 )한 것인데 처음 수상한 배가 들어오 매 거인( 居 人 )이 다 투어 붙잡으려 하나 속인에게는 물라나 더니 혜구두타( 惠 丘 頭 陀 )가 나가매 절 로 달려들어 비로소 그 위에 앉으신 이 관음상을 모셔 내리 고 인하여 그 곳을 석포( 石 浦 )라고 일 컫게 되었다 한다. 수십 년 전 까지도 당우( 堂 宇 )가 여러 채 더 있고 불상도 오랜 것이 많았는데, 집은 다 뜯고 부처는 많이 파소( 破 燒 )하여 이렇게 조잔( 凋 殘 ) 하여졌다 한다. 그 중에도 한 불상은 보화( 寶 貨 )가 많이 들었다 하여 일찍 도적의 훼파( 毁 破 )를 당한 일이 있었다. 아무 다 른 것이 없으므로 적인( 賊 人 )은 실망하고 돌아갔으나 그 복장( 腹 藏 )에서 효령대군( 孝 寧 大 君 )의 원문( 願 文 )과 한 가지 고 사경( 古 寫 經 ) 및 고인경( 古 印 經 ), 부지기백권( 不 知 幾 百 卷 )이 나왔는데 더러는 도난을 당하고 아직 그 대부( 大 部 )를 고장 여( 高 丈 餘 )되는 한 쌍 팅( 㯑 )에 석 줄씩 잔뜩 이장( 裏 藏 )하여 있다. 대개는 해인본( 海 印 本 )의 제종경론( 諸 種 經 論 )이요 그 밖에도 고려판화엄경소( 高 麗 板 華 嚴 經 疎 ) 같은 희서( 稀 書 )도 몇 가지 끼었다. 이 밖에는 법화경판목( 法 華 經 板 木 ) 이 불탁( 佛 桌 ) 일우( 一 隅 )에 퇴적( 堆 積 )하였을 뿐이요, 다른 아무 상설( 像 設 )이 없음은 미상불 소조( 蕭 條 )한 생각이 있다... 그동안 6 25 전란 중에 소실되었다 는 막연한 문헌기록만 접해 왔는데, 6 25 당시 변산 빨치산이었던 고 김영권 선 생으로부터 1999년 실상사가 불탄 내력을 들을 수 있었다. 51년 여름, 빨치산 토벌대들은 사자동 실상사에 진을 치고 변산 빨치산 토벌에 나섰다고 한다. 그 당시 변산 빨치산은 병력도 많지 않고, 화력도 형편없었다고 하며, 여지저기 흩어져 있는 변산 빨치산을 통틀어 총은 15정 정도가 고작이었다 고 한다. 그러나 빨치산들은 오랫동안 산 생활을 해 그곳 지형을 잘 아는데다. 높은 곳에서 아래의 적진을 훤히 내려다보 며 싸우기 때문에 토벌대들은 빨치산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토벌대들은 어찌 해보지도 못하고 퇴각했는데, 후미 가 막 빠져나갈 무렵 실상사에 불길이 솟았다고 한다. 이때의 작전명은 봉래구곡작전 이었다고 한다.<참고문헌/ 사찰지 1990년 전라북도 발행> 024 부안이야기 2013년/여름/통권 제8호
25 부안명주 변산팔선주( 邊 山 八 仙 酒 ) 변산팔선주는 예부터 부안 지방의 전통 민속주로 변산에 자생하는 4근(오갈피, 마가목, 음정목(말오줌때), 개오동), 4본(창 출, 위령선, 쇠무릎, 석창포) 등 8가지 약재로 빚는 술이다. 맛이 부드러우면서도 향이 좋을 뿐 아니라, 약효 면에서 뛰어나 기력이 떨어지거나 잔병치레를 할 때 공복에 마시면 효험이 있다고 한다. 이렇게 약효가 뛰어나다보니 술보다는 약용으로 더 많이 애음해 온 귀한 술로 6 25 때 몰매를 맞고 골병 든 사람들이 이 술을 장기적으로 마시고 회복했다는 이야기는 변 산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다. 지금은 몇몇 민가에 이 술의 전통 비법이 전해 내려 올 뿐 거의 그 맥이 끊겼는데 상서면 청림 리 노적마을 장성수씨가 전통 방법 그대로 팔선주의 맥을 잇고 있어 다행한 일이다. 부안이야기 편집부 개오동 마가목 말오줌때(음정목) 오갈피 삽주(창출) 석창포 쇠무릎(우슬) 큰꽃으아리(위령선)
26 기획특집 ➋ 내변산의 땅이름 1988년 도립공원에서 국립공원으로 승격한 변산반도국립공원은 그동안 부안의 중심에 있어 왔고, 부안의 역사와 같이 해왔다. 그러나 공원관리에 있어 생물자원에만 치중하고 역사문화자원에 대해서는 소홀했다는 점을 부 인할 수는 없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2008년부터 역사문화자원 관리에 힘쓰기 시작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공원을 찾는 탐방객에게 제공하고자 노 력하고 있다. 그러한 노력 중의 하나가 2012년에 시작된 U-Park Storytelling 구축사업 이다. 산업사회가 진행되면서 농촌마을의 쇠락이 가속화되 고 마을의 정서가 담긴 향토문화와 역사가 급속히 사라져가는 이때, 마을 역사를 기록하고 DB화하는 작업이다. 그 작업의 시작이 내변산 마을들과 관련된 역사와 땅이름, 구전설화 등을 찾는 것이었다. 이러한 작은 노력이 공원일대 마을은 물론 부안군 모든 마을의 풀뿌리 역사 찾기 운동으로 전개 되길 바라며, 또한 변산반도국립공원의 역사자료 뿐만 아니라 부안군 전체의 소중한 자료로 활용되기를 기대한다. 내변산의 땅이름을 찾아서... 소민석/변산반도국립공원 사자동( 獅 子 洞 ) 변산면 중계리 사자동 마을이 정확히 언제부터 형성이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지금의 마을은 1970년대에 이루어졌 다고 한다. 1968년 김신조 사건과, 같은 해 10월 말경 울진 삼척간첩침투사건이 있었는데, 그 사건 이후 정부차원에서 독가촌을 안전지대로 이주시키기 시작하여, 이곳은 1972년에 동암골, 내인동 골짜기, 실상사 앞 등에 살던 사람들을 방2 칸에 부엌 1개를 두 가옥으로 붙여 이주시켜 지금의 형태를 이루었다고 한다. 사자동은 크게 원사자동, 원광선원 쪽의 말마동, 실상사, 내변산분소가 있는 칠부덕으로 나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변산에는 24혈의 명당이 있는데 그중 사자동 마을의 뒷산이 사자앙천혈( 獅 子 仰 天 穴 )이어서 마을 이름이 사자동이 되었으며, 이 사자앙천혈에 옛날 원씨( 元 氏 )가 묘를 써서 마을 뒷산 능선을 원천등 이라 불리고 있다고 한다. 026 부안이야기 2013년/여름/통권 제8호
27 사자동의 땅이름 사자동 : 중계교는 숫사자의 목이고 사자동은 암사자 배에 해당되며 배속에 새끼가 있어 사자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고 전해진다.(최효진) 말마동 : 사자동 안쪽에 천왕봉이 있고, 왕이 여기 있으니 신하도 있고..., 그래서 이곳에는 말을 매놓았다고 해서 말마동 이라 한다는 이야기(최효진)와 원정승이 말을 매놓은 곳이라 하여 말마동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이금호) 칠부덕( 七 富 德 ) : 내변산분소 앞 계곡에 일곱 개의 큰 바위가 떠있고, 이 동네에 일곱 가구가 형성이 되었을 때 부자가 된 다는 전설이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일곱 가구가 제대로 형성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 한 집이 들어오면 다른 한 집이 나 가고 해서 전설처럼 쉽게 일곱 가구가 형성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강성칠, 이금호) 조탑( 造 塔 ) : 천왕봉 바로 옆 봉우리로 6 25전쟁 전까지만 해도 가뭄이 들면 돌로 탑을 쌓은 다음 불을 지피고 무지제를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탑이 다 없어졌다고 한다.(이금호) 조탑은 장수, 남원, 곡성 등지의 산간지역 마을 입구 좌우에 조성한 돌탑으로, 주변의 돌들을 이용해 원형으로 쌓고, 맨 위에 윗돌이나 남근석을 올려놓은 형태 다. 조탑은 마을 신앙의 대상물로 다른 지역의 당산제와 비슷하게 해마다 탑제를 지낸다. 지역에 따라 누석단( 累 石 壇 )이라고도 한다. [기획특집]내변산 속으로2-내변산의 땅이름을 찾아서
28 원천등 : 옛날에 원정승이 있었는데 이곳에 묘를 써서 원천등이라고 하며, 그 묘자리에 보물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고 해 서 도굴꾼들이 오면 꼭! 그곳에서 보물을 찾았다는 이야기(최효진)와, 지금의 원천등 자리에 원정승이 살고 묘도 썼다 고 하는데 그 부근에 가서 땅을 파면 기와장 등이 나오고 도굴꾼들이 보물을 찾는다고 묘라는 묘를 모두 창으로 찔러 사자머리 있는 곳(중계교 가기 직전의 바위가 있는 봉우리)에서 동이(양동이) 하나를 찾았다고 한다.(이금호) 금강소( 金 剛 沼 ) : 봉래곡을 경유한 푸른 물이 산 그림자를 머금고서 적당히 괴여 소( 沼 )를 이룬다. 이곳이 봉래 제6곡 금 강소이다. 내변산의 한복판 사자동 입구에 있는 직경 6m 가량의 깊은 소 로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연못 속에서 찬란한 금 빛이 난다고 하여 금광소( 金 光 沼 )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금강소 옆에는 사자앙천혈( 獅 子 仰 天 穴 )이라는 명당이 있어 누구 나 탐을 내었는데, 옛날에 원( 元 )씨 성을 가진 이가 이 명당에 자기 선조 의 묘를 써서 대대로 흥성하여 정승과 판서가 났다고 한다. 원씨네는 그 묘에 금으로 만든 큰 비석을 세우고 위세를 떨치며 실상사와 그 부근 주 민들에게 작폐가 심하였다. 그러나 주민들은 어찌하는 도리가 없었는데 한번은 실상사의 한 중이 금비석을 밤에 몰래 뽑아서 등에 업고 오다 원 씨네들한테 들키고 말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중은 엉겁결에 옆에 있는 연못에 던지고 도망쳐버렸다는 것이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 일인들이 이 소문을 듣고 발동기로 온종일 물을 품는데, 갑자기 검은 구름이 일면서 사자동/실상사터 주변 뇌성벽력과 함께 큰 비가 내려 금비석을 찾는데 실패했다고 한다.<참고문헌 : 전설지 -전라북도> 사성폭포 : 사자동 사람들은 3폭포라고 하고, 불가에서는 사성폭포( 四 聖 瀑 布 )라고 하는데, 이는 부설, 묘화, 등운, 월명 일가족이 이곳 폭포 위 월명 암에서 수도하였다하여 이름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남여치 : 옛날 권문귀족들이 월명암을 승경할 때 남여( 藍 輿 )를 타고 가다가 이 고개에서 쉬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완용 부자는 채석강 구경을 마치면 남여를 타고 월명암에 올랐다고 하는데, 월명암 오르는 산 길이 가파르고 험하여 매고 가는 교군들과 유흥기구를 짊어진 짐꾼들의 고통이 심하여 몇 차례씩 쉬어가야 했다고 한다. 올라가는 산등에 으레 남여가 쉬어가는 곳이 있어 밖남여뜽 과 안남여뜽 이라는 이름까지 생 겨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남여 : 위를 덮지 않은 의자와 비슷한 작은 승교(가마)로 산길이나 좁은 길을 다닐 때 사용하던 가마. 직소폭포 : 1932년에 간행된 부안군지에 의하면 부안군내에는 상소산, 계 화도, 웅연(곰소), 직소폭포 네 곳에 기우단이 있었다고 한다. 옛 지도의 칠부덕 원천등 금강소 028 부안이야기 2013년/여름/통권 제8호
29 직소폭포 자리에 용추라고만 표기되어 있다. 전설에 의하면 변산에는 두 마리 용이 살고 있는데 한 마리는 직소폭포에, 또 한 마리는 와룡소에 살고 있다 하여 용추( 龍 湫 ), 또는 실상 용추라고 부른다고 한다. 봉래구곡( 蓬 萊 九 曲 ) : 동국여지승람 에 변산( 邊 山 )을 영주산 ( 瀛 洲 山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능가산( 楞 伽 山 )이라는 문 헌 기록도 보인다. 그런가 하면 봉래산( 蓬 萊 山 )이라고도 하여 고창의 방장산( 方 丈 山 ), 고부의 두승산( 斗 升 山 )과 함께 호남 의 삼신산( 三 神 山 )으로 꼽았다. 변산을 대표하는 계곡 이름도 봉래계곡으로 신선대 신선샘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망포대, 분초대에서 발원한 물줄기와 산곡의 분지마을 대소( 大 蕭 )에 서 만나 직소폭포 등의 빼어난 경관을 연출하며 굽이굽이 흘 러 서해로 빠진다. 이 계곡의 빼어난 곡( 曲 ) 아홉을 봉래구곡 ( 蓬 萊 九 曲 ) 이라고 한다. 1곡 대소( 大 沼 ), 2곡 직소폭포( 直 沼 暴 布 ), 3곡 분옥담( 墳 玉 潭 ), 4곡 선녀탕( 仙 女 湯 ), 5곡 봉래곡 ( 蓬 萊 曲 ), 6곡 금강소( 金 剛 沼 ), 7곡 영지( 影 池 ), 8곡 백천( 百 川 ), 9곡 암지( 暗 池 )이다. 지금은 5곡 봉래곡을 봉래구곡이라 봉래구곡의 석각 부르는데 이는 봉래곡의 석각( 蓬 萊 九 曲 )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으로 여겨진다. 봉래구곡 석각의 주인공 : 김석곤( 金 晳 坤, 년)으로 그의 자는 천안( 薦 按 )이고, 호는 동초( 東 樵 ) 또는 눌어( 訥 語 )이다. 전라북도 태인( 泰 仁 )에서 태어났다. 그는 명산대천을 두루 유람하며 바위에 글씨 새기기를 즐겨 변산의 봉래 구곡 외에도 정읍 내장산에는 내장풍악( 內 臟 楓 嶽 ), 두승산에는 수두목승( 水 斗 木 升 ), 칠보산에는 도불원인( 道 不 遠 人 ), 모악산에는 무량굴( 無 量 窟 ) 이라 새겼다. 낙조대 : 육당 최남선은 심춘순례 에서 조선의 빼어난 풍광 10경 중 하나로 이곳 낙조대를 꼽으며, 낙산의 일출과 월명 의 낙조는 반도 동서안에 있어 일대 절경으로 치는 것이요, 이른바 변산팔경 중에서도 가장 기장한 줄로 칭허되는 것 이니 공기의 관계로 변화가 무궁하여 만일 그 만판 조화 부리는 날을 만나기만 하면 인간의 구경으로는 다시없는 미묘 웅대를 맛보는 것이라 한다. 고 하였다. 쌍선봉(법왕봉, 法 王 峰 ) : 등대가 없던 시절 등대로 삼았다고 한다. 변산을 수호하는 산신의 서의처( 棲 依 處 )인 신도의 봉 우리로 보았다. 그러므로 낙조대를 변산의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본 것이다. 1939년의 큰 가뭄 때 이곳에 서 기우제를 지냈음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더우기 낙조대 아래는 서해의 칠산바다이고, 서해용왕에 게 비를 빌기에 매우 합당한 제단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의 낙조대는 원래는 변산의 수호신인 산신을 제사 했던 제단인 것이 분명하다.(김형주의 부안이야기 2편 215 참조) [기획특집]내변산 속으로2-내변산의 땅이름을 찾아서
30 동암( 動 巖 )골 : 봉래계곡의 왼쪽(서쪽) 능선에 동석(흔들바위)이 있어서 붙어진 이름인 것으로 추정된다. 동암골의 경우 6 25 때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2011년 6월 25일 부안 실상사(주지 한우스님)는 한국전쟁 당시 내변산 봉 래구곡에서 전개된 빨치산 토벌작전으로 숨져간 희생자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위령법회를 지냈다. 이무기(이미기)둥벙: 금강소와 백천 사이에 큰 바위 밑으로 상당히 깊은 소가 있는데, 이곳에 이무기가 살고 있다고 해서 이무기둥벙이라고 한다고 한다. 세봉 : 사자동 마을에서는 가인봉 또는 금선대라고 하는데, 1660년대 문헌에는 가련봉( 可 憐 峰 )이라고 하였다(이름으로 추정하면, 가는 봉우리를 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인장바위 : 예전에는 장암( 將 岩 )바위라고 했으며, 인장바위 앞에 천왕봉이 있으므로 인장바위( 印 章 岩 )를 왕의 옥새로 본 다고 한다. 1890년대 문헌엔 장군암( 將 軍 岩 )이라 하였다. 즉 천왕을 지키는 장군으로 여겨 그런 이름이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중바위 : 변산반도국립공원 내변산분소 진입로를 따라 들어가다 보면 학술림 앞에서 10시 방향에 있다. 여러 명의 중이 장삼을 입고 걸어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청춘봉 : 청춘봉은 서운마을 (고)청림사터 쪽에 천층암( 千 層 庵 )이 있었는데 이를 근거로 추정하면 천층봉이 청춘봉으로 불리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원불교제법성지 : 원불교 창교자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원불교 교법을 마 련한 곳. 대종사는 1919년 변산에 들어와 실상사 옆에 실상초당을 마련하 고, 주변의 만허, 학명스님과 교류하며 수양했다. 이듬해 4월 대종사는 일 원상을 중심으로 신앙과 수행으로 나눠 제시하고 있는 원불교 기본교리 를 발표했다. 원불교에서는 변산성지에서 교법이 마련됐다 해서 이곳을 제법( 製 法 )성지라고 부른다. 월명암 : 변산 제2봉인 쌍선봉( 雙 仙 峰 498m) 아래 산상( 山 上 )에 자리한 월 명암은 신라 신문왕 11년(691년)에 부설거사( 浮 雪 居 士 )가 창건하였다. 불 교에서 가장 이상적인 곳으로 여기는 산상무쟁처( 山 上 無 諍 處 )의 한곳으 로 대둔산의 태고사( 太 古 寺 ), 백암산의 운문암( 雲 門 庵 )과 함께 호남의 3 대 영지( 靈 地 )로 손꼽힌다. 월명암 사성전 : 월명암 뒤에 사성전이 있는데 부설거사와 묘화부인, 아들 등운, 딸 월명, 일가족 네 분을 모신 전각이다. 부설거사의 예언이라 하여 전해오는 말로는 이곳 월명암에서 사성팔현( 四 聖 八 賢 )이 나온다는데, 사 성은 부설거사의 일가족 4권속이 이미 나타났고, 팔현 중 성암, 행암, 학 명스님의 삼현이 나왔다고 한다. 실상사 : 내소사( 來 蘇 寺 ), 선계사( 仙 溪 寺 ), 청림사( 靑 林 寺 )와 더불어 변산 4 인장바위 천왕봉 원불교제법성지 030 부안이야기 2013년/여름/통권 제8호
31 대 사찰 중의 하나였던 실상사( 實 相 寺 )는 신라 689년(신문왕 9년) 초의 선사( 草 衣 禪 師 )가 창건하였고, 조선 제4대 세종 임금의 형인 효령대군의 원당이 되어 궁재로 중수하였다. 대웅전, 나한전, 요사, 산신각 등이 있었 다고 하며, 대웅전 안에는 고려초기 작품인 불상과 고사경, 고인경, 화엄 경소( 華 儼 經 疎 ) 등의 경판과 효령대군의 원문과 월인천강지곡 등 국보급 문화재들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6 25 때 불타 없어지고 지 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1986년 9월 9일 실상사터와 그 주변 16,725m2가 전라북도 기념물(제 77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된성재 : 중계터널( ~ )이 생기기 전에는 중계터널 능선 을 된성재(힘들다)라고 하여 그곳을 넘어 다락골(중계교 하단 계곡)을 지 나 남여치를 넘어 변산으로 가면 빨리 가도 2시간30분이 걸렸다고 한다. 중계재 : 지금은 부안댐이 생기면서 사라진 중계마을로 넘어 가는 고개로 이곳을 통해서는 마상치, 다락골, 석문동, 묵정, 해창으로 나갔다고 하며, 부안을 갈 때는 서운, 노적, 청림, 우슬재를 넘어 다녔다고 한다. 직소보 : 1991년 부안군에서 비상시 생활용수 확보를 위해 건설하였으나, 1996년 하류지역에 부안댐 건설로 기능을 상실하였다. 그 밖의 땅이름 : 창굴( 窓 窟 ), 시리봉(신우봉, 장군봉), 천왕봉(선인봉), 상사바 위, 매골, 어름골, 내인동( 內 咽 洞 ), 동석(흔들바위), 중계교( ~ ), 불당( 佛 堂 )재, 노적봉, 주랄등(앞에 노적봉이 있음으로 쥐와 연관된 지명으 로 추정됨), 회양골, 사지목(중계리 남쪽 사지목 고개밑의 마을), 도고룡(사 자머리 부분, 원천등에서 중계교쪽에 있다.) 된성재(지금은 중계터널이 나 있다.) 노적봉 상사바위 청림( 靑 林 ) 도고룡/사자머리 부분 상서면 청림리 청림마을은 옛날에는 맑을청( 淸 )자를 썼다고 한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푸를청( 靑 )자를 쓰 고 있다고 하는데, 푸를청이 청림마을에 있어 더 어울린다고 한다. 소( 牛 角 峰, 쇠뿔바위)가 있으니 푸른 풀밭이 있어야 한 다는 것이다. 또한, 청림마을은 새가 수풀로 날아든다는 비조투림( 飛 鳥 投 林 )형국의 명당터로 청림사 창건과 관련된 설화 가 전한다. 그래서 청림사 골짜기를 따라가면 조령으로 넘어가는 새재가 있으며, 이 마을을 비롯한 주변 산세는 커다란 소 한 마리의 형상이라고 한다. [기획특집]내변산 속으로2-내변산의 땅이름을 찾아서
32 청림의 땅이름 쇠뿔바위 : 소의 두 개의 뾰족한 뿔과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우각봉( 牛 角 峰 )이라고도 한다. 쥐꼬리날등 : 쥐꼬리날등을 중심으로 서취골과 동취골로 나뉘며, 지금은 숲이 우거져 잘 안보이나 앞쪽에 바위가 하나 있 는데 그 바위를 쥐바위라고 한다. 서취골( 鼠 就 汨 ) : 서취골이라는 이름은 어미쥐가 새끼쥐를 데리고 섬(소여물통)에서 나와 앞 노적마을의 노적봉을 향하 여 가는 명당이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바사리둑 : 소의 코뚜레와 연결된 밧줄을 말하며, 바를 세리다하여 바사리 둑이라 한다고 한다. 말뚝봉 : 소를 매어놓은 곳으로 백련리 뒷산으로 우뚝 솟은 봉우리가 있는 데 이를 말뚝봉이라고 한다. 구시골 : 소의 밥그릇에 해당하는 구시골은 지금도 많은 물이 고여 있고 마 르지 않는 물줄기라고 한다. 우슬재 : 우슬은 소의 무릎을 말하는데, 일제강점기에 이 우슬재를 끊으려 고 하여 마을사람들이 말렸는데도 끊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곳에서 피가 흘렀고 그로 인해 일본이 패망하여 돌아갔다고 한다. 그만큼 무서운 혈자 리로 그 후로 길을 내면서도 마을사람들의 반대로 우슬재를 많이 파지 못 청림마을 항공사진 하고 지금의 우슬재가 만들어졌다고 한다.(유영석) 우명철 : 쇠로 만든 소의 방울로 장터골 부근에 우명철골이 있다. 우투장골 : 소싸움장인데, 실재 소싸움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청림마을 앞쪽 쇠뿔바위 에 깊은 골짜기를 말하며, 그 골짜기 안쪽이 넓다고 한다.(유영석) 지장봉 : 의상대 중간쯤에 불사의방장이 있는데 그 방장에서 진표율사가 공 부하는 것을 지장보살이 지켜봤다고 한다.(유영석) 벼락골 : 지금은 숲이 우거져 보이지 않으나 쇠뿔바위 아래 강천등 쪽에 바 위가 있는데 벼락 맞은 것처럼 줄이 가 있어 높은 곳은 사람이 서 있을 수도 있다고 한다. 서낭당 : 돌멩이를 주워 던져 소망을 기원했던 곳. 강천등 : 진주강씨들이 묘를 쓴 자리로 그 앞에 강씨들 재실인 시남재( 始 南 齋 )가 있다. 재실은 정면 6칸 측면4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인 목조건물로, 재실의 중앙에 시남재( 始 南 齋 )라 쓴 재액이 있고, 솟을대문의 중앙에 봉 래동천( 蓬 萊 洞 天 ) 이라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시남재는 이곳 상서면 청림 쥐바위 지장봉 032 부안이야기 2013년/여름/통권 제8호
33 에 낙향하여 중시조를 이룬 사헌부지평( 司 憲 府 持 平 ) 강원로( 姜 元 老 )를 제향하기 위해 건립한 제각이다. 청림사( 靑 林 寺 ) : 고려 때 한 스님이 이곳을 지나는데, 큰 새가 하늘을 날다 가 숲 속으로 갑자기 떨어지기에 그곳에 가 보았더니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고 한다. 스님이 한참을 바라보니 새가 웅장한 절로 보였다는 것이 다. 스님은 예삿일이 아니라 생각하고, 그곳에 절을 세우고 동종( 銅 鍾 )도 만들어 절 이름을 청림사라 하였다고 한다. 이인좌의 난, 즉 무신란이 있 었던 1728년 이전까지는 청림사가 있었음은 확실하다. 이때 변산 노비도 적 정팔룡이 이끄는 무신기별들이 이곳 청림사에 주둔하였는데 이 부대 를 청림병이라 하고 정팔룡을 청룡장군이라 하였다는 <영조무신역옥추 안>의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사건으로 역도의 소굴이 소탕되면서 청림사는 훼철된 것으로 보인다. 내소사고려동종 : 내소사고려동종(보물 제277호)에는 종명( 鐘 銘 )과 종기( 鐘 청림사터 박적시암 記 )가 새겨져 있는데, 본래 고려 고종 9년(1222)에 주조하여 당시 부령(부안의 옛 지명)에 있는 청림사의 종으로 달았던 것으로, 그 후 절이 소실폐사( 燒 失 廢 寺 )되어 종의 소재처를 알 수 없었는데, 철종 4년(1853)에 발굴하여 내소사로 이현 [기획특집]내변산 속으로2-내변산의 땅이름을 찾아서
34 ( 移 懸 )하였다고 쓰여 있다. 박적시암(바가지샘) : 고려동종을 파낸 자리는 샘터가 되었다고 한다. 샘의 이름은 바가지로 떠서 먹는다고 하여 붙은 이 름이며, 이 샘의 물은 바위에서 나온다하며 끊기는 일이 없다고 한다. 예전에는 동네 사람들이 다 먹었기 때문에 동우 를 갖고 순번대로 물을 길어 먹었으며, 잠을 안자고 순번을 기다렸다고 한다. 박적시암 위에 넓은 바위가 있는데 그곳 에서 옛날 옛적에 호랑이를 잡았다고 한다. 지금은 그곳에 부안 김씨 비석이 들어서 있다. 그 밖의 땅이름 : 탑거리, 부도거리, 먹방골(먹뱀골) 노적( 露 積 ) 청림리 노적마을은 내변산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산골마을로 예전에는 노적매라고 불렀다. 노적마을의 노적은 나락 (벼)을 산봉우리처럼 높이 쌓아 올린 노적가리 모양의 봉우리가 마을 앞에 있어 이름지어졌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 년 전 조선 정조 때 파평윤씨가 처음에 마을 터 를 잡았다고 하나 그 후손은 없고 비슷한 연대에 장흥고씨와 밀양박씨가 들 어와 마을을 형성하여 살았다고 전한다. 마을 왼쪽에는 거석천, 오른쪽에는 청림천이 노적마을 앞으로 흘러 소 ( 沼 )를 이룬다. 두 냇물이 모이므로 그 소를 양수합이라고도 하고 정통이라 고도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말바위 아래 그 소를 양마입구( 廐 養 馬 入 ) 말 밥통으로 비유해 왔다고 마을 어르신들은 전하나, 풍수지리상의 양마입 구( 良 馬 入 廐 ) 즉 말이 들어오는 형국을 말하는 것 같다. 그 소 아래 판마실 ( 板 馬 室 :마구간)이라는 곳도 있다. 노적마을은 청림리 가운데 위치하고 있어 청림 물이 노적 앞 냇가로 모 이는데 물이 좋으므로 어느 집 어디를 가든지 물이 나오며 집집마다 우물 이 있는 것이 노적마을의 특징이기도 하다. 처음 집을 지을 때 마을 터에서 나무를 베어 집을 지었다는 두 집터가 남아 있으며 장흥고씨와 밀양박씨의 9대 종가가 살고 있다. 옛부터 1노적, 2옹정이라 할 정도로 양반이 많이 살았던 전형적인 양반마 을이었다고 한다. 이곳에 고씨, 이씨, 박씨 등 3성이 살았는데, 3성 모두 진 사벼슬을 지냈다고 하며, 조선시대 때 문과 및 소과 등 합격자가 11명에 이 르렀다. 진사벼슬은 3성이 돌아가며 고루 하였다고 하는데, 그중에서도 특 히 밀양박씨가 많은 하인들을 두고 떵떵거리며 사는 권세가였다고 한다. 노적마을 고양이바위 노적봉 석굴(1972) 034 부안이야기 2013년/여름/통권 제8호
35 조선시대 때 장흥고씨 집안에서 교리(문과) 1장, 무과 1장, 의관 1장, 도사 1장, 진사 4장, 밀양박씨 집안에서 진사 2장, 전주이씨 집안에서 진사 1장 등 한 마을에서 부안에서는 제일 많은 벼슬을 한 양반촌으로 부안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 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서울소식을 제일 먼저 듣는 마을이었다고 한다. 오늘날 아쉬움이 남는 것은 조선시대의 1노적이라는 명성답게 1집에 문간채, 행랑채, 사랑채, 안채, 별당, 사당이 잘 지어진 한옥이 여러 집이 있었는데, 6 25 때 우익촌이라고 해서 빨치산이 불을 질러 이 가옥들이 1주일 동안이나 탔다고 한다. 당시 에는 나무대문을 달았는데 문 여닫는 소리가 10리까지 들렸다고 하는 이야기만 들어보아도 당시의 가옥구조를 짐작케 한다 후 9 28 수복 때까지 3개월 동안 공산치하일 때, 내변산은 인민군의 패잔병과 빨치산이 산속으로 몰려와 이곳 주민들은 3년이라는 긴 세월을 피난살이와 굶주림으로 고생을 했으며, 빨치산이 불을 질러 노적마을 50여 세대를 비롯 내변산 4백여 가구가 1주일 동안 타버렸다고 한다. 1954년 봄 복구되어 쑥대밭이 된 논과 밭을 일구느라 많은 고생을 했 으며, 폐허되고 황무지가 된 땅을 개간하여 지금은 35여 세대들이 서로 화합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산골마을이다. [기획특집]내변산 속으로2-내변산의 땅이름을 찾아서
36 노적마을의 땅이름 고양이바위 : 전설에 의하면 청림마을의 쥐꼬리날등을 중심으로 쥐바위, 서 취골, 동취골이 있는데, 쥐가 노적가리의 나락을 먹으려고 하는 것을 노 적에 있는 고양이바위가 지켜주어 내변산 내에서는 노적마을이 경제가 가장 튼튼하다는 설을 주민 모두가 믿고 있다. 노적봉 석굴 : 노적봉 상봉에 석굴이 있는데 노적가리에서 1가마를 도둑맞 아 구멍이 나 있다 한다. 석굴에는 동자부처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빌곤했는데 일제 때 분실되고 5평 크기의 석굴에는 고요만이 남아있다. 판마실( 板 馬 室 :마구간) : 여덟 신선이 말을 타고 마실 나와 팔선주를 마셨 던 곳이라고 전한다. 삼예봉 : 예관이 세 명이 있어서 삼예봉이라 한다고 하며, 이 봉에서 기우제 를 지냈다고 한다. 기우제는 거석, 노적, 청림마을이 모여서 정상에서 지 냈으며, 노적마을의 유화어르신 아버님께서 제장을 맡아 하였다고 한다. 코끼리바위 매바위 효죽( 孝 竹 )거리 : 과거에 급제하면 으레 나무로 용을 만들고 푸른색을 칠하여 높은 대나무 끝에 매달아 놓고 영광을 표시 하고 축하를 하였는데 이를 효죽이라고 한다. 노적마을에서는 조선시대 때 많은 과거급제자가 배출되었는데, 합격을 기원하는 뜻으로 마을 앞 한가운데 효죽을 세웠던 그 길거리를 효죽거리라고 한다. 팔선주( 八 仙 酒 ) : 신선이 마시는 술로,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신선대가 있는데, 그곳에서 신선들이 백금과 황금으로 된 바둑알로 금바둑을 두다가, 여덟 신선이 말을 타고 팔마실에 내려와 팔선주를 마시고 돌아갔다는 얘기가 전해오고 있 다. 팔선주는 예부터 변산에서 조상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전통 민속주로 변산에 자생하는 4근(마가목, 말오줌대, 개오 동, 오가피), 4본(석창포, 위령선, 삽주, 쇠무릎) 등 여덟 가지 약재로 빚은 술이다. 맛이 부드러우면서도 향이 좋을 뿐 아니라 신경계통의 질환 예방과 건강증진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술보다는 약용으로 더 많이 애음하여 온 귀한 술이다. 그 밖의 땅이름 : 꾀꼬리봉, 매바위, 삼예봉, 양마입구, 코끼리바위, 농바위 거석( 擧 石 ) 청림리 거석마을은 선인봉을 등지고, 산삼밭의 전설이 얽힌 덕성봉을 앞으로 두고, 남으로는 옥녀봉을, 동으로는 개암 사가 위치하고, 서북간으로는 노적마을이 인접해 있다. 이 마을은 약 250여 년 전 조선 영조 때 전주이씨, 순천박씨, 영광김씨, 밀양박씨 등 4성씨가 유입하여 1960년대까지 약 036 부안이야기 2013년/여름/통권 제8호
37 40여 세대가 살았으나 지금은 20여 세대만이 살고 있으며, 거석리와 여장 사라는 전설이 얽힌 이 마을의 원래 이름은 들독거리라 불렀다고 한다. 옛날에 가마소의 깊은 골짜기에서 기골이 장대하게 생긴 여자아이가 태어 났는데, 이 여자아이가 자라 힘이 장사였으며 어느 날 가마소 골짜기의 큰 바윗돌을 치마에 담아가지고 이 거석리까지 쉬지않고 오더니 내려놓고 어디 론가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그 후 이곳 마을청년들이 이 바위를 들어보려 고 하였으나 아무도 들지 못하고 겨우 움직였을 뿐이었다고 한다. 그로부 터 이 마을 이름을 들독거리라 부르게 되었는데 한자로 표기해 거석리( 擧 石 里 )라 했다고 한다. 예전에 이 마을은 학지골(합지골), 명당골까지 한 동네였으나 한국전쟁 이후, 빨치산들을 염려한 정부에서 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주민들을 다른 곳 으로 전가시켜 한때 수 십호이던 것이 현재는 20여 호 남아 있으며 대부분 이 노년층이다. 지형적으로 산골짜기를 따라 깊숙이 형성된 거석마을의 석간생수는 물 맛이 좋기로 정평이 나있다. 덕성봉(옥녀봉)에서 본 거석마을 상여봉(삼예봉) 거석마을의 땅이름 옥녀봉 : 풍수지리설로 옥녀봉 줄기에 옥녀직금이라는 혈명이 있어 그 혈 에 연계되는 명물이 있으니 바드재, 아이를 업고 있는 할미바위, 치마바 위, 비녀바위, 30m나 우뚝 솟아있는 고등바위, 요강모양의 요강바위가 있다. 할미바우 : 할머니가 애기를 업고 있는 모양의 바위가 있다. 그리고 애기바 위 위에는 마치 머리처럼 보이는 모양의 돌이 얹어져 있었는데, 타지에서 이 산에 나무하러 온 짓궂은 나무꾼들이 합심하여 이 애기바우의 머릿돌 을 산 아래쪽으로 굴려버렸다고 한다. 그러면 이 동네에 화가 미친다하여 마을사람들(남자들만)이 좋은 날을 택일하여 애기바우의 머릿돌을 제자 리에 되돌려 놓곤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숲이 우거져 볼 수 없다. 치마바위(치매바우) : 옥녀가 베를 짜던 바위라고 한다. 치마를 펼쳐 놓은 듯 넓고 평편하여 이름 한 것 같다. 상여봉 : 마치 장례를 치를 때 쓰는 상여의 모양처럼 생겼다고 해서 상여봉 바드재 고등바위 뒤에서 책바위 작은통바지 [기획특집]내변산 속으로2-내변산의 땅이름을 찾아서
38 이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인근마을 노적과 청림에서는 삼예봉이라고 부르고 있다. 옛날에는 가뭄이 심할 때, 마을 남자들이 모두 이 봉우리에 올라가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는데 그 규모가 실로 엄청났다고 한다. 기우제에 특별한 제물 이나 제수는 마련하지 않고 오로지 이 상여봉의 9부 능선쯤 꼭대기에 일부러 불을 놓아 모두 활활 태우면 그날 밤에 반 드시 비가 내렸다고 한다. 바디재(잠치) : 지도에는 바드재로, 이 마을 사람들은 바디재로 부른다. 변산의 24혈 중 옥녀직금(옥녀가 베를 짜는 형국) 이라는 혈이 있어 옥녀봉이라 부르는데 그 봉 능선에 있다. 바위 이름들을 연상시켜 보면, 바디는 베틀의 구조에서 보 듯이 베를 짤 때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038 부안이야기 2013년/여름/통권 제8호
39 학재 : 비학승천( 飛 鶴 昇 天 )의 혈명이 있어 학재라 부른다고 한다. 망월대 : 마을 뒷산(선인봉, 선비봉) 정상에는 망월대가 있어 정월대보름이면 망월하기에 좋은 곳이라 한다. 오참의골 : 오참판이 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골짜기에는 참판들이 밟고 다니는 의산암이 있다고 한다. 책바위 : 선인독서( 仙 人 讀 書 )의 혈명이 있어 책바위가 있다. 덕성봉 : 산삼밭의 전설이 얽힌 봉우리이다. 청림, 노적, 거석마을 사람들은 지금의 각종 지도에 표기된 옥녀봉이 덕성봉 이라 불러 지도 제작 시 오류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마암 : 양마입구( 良 馬 入 廐 )의 혈명이 있어 마암이 있고 그 밑으로 말의 밥그릇인 작은통바지와 큰통바지로 불리는 골짜 기가 있다. 그 밖의 땅이름 : 고등( 高 燈 )바위, 비녀바우(노적에서는 고등바위를 비녀바위라 함), 선바위, 우산바우, 범바우, 명당리, 방아재 유동( 油 洞 ) 청림리 유동마을은 지금으로부터 약 400여 년 전 조선 선조 때 김씨라는 분이 위선사업( 爲 先 事 業 )을 목적으로 팔도명 당 중의 하나인 석재와우 명당을 찾아 현재의 남선동 자리 소코바위 밑에 터를 잡고 거주하기 시작하여 오늘의 유동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 마을은 창수동, 남선동, 남수동, 유동(지름골), 장낙골(장날골)이라는 각각의 이름을 가진 마을이 있 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이 마을들을 통합해 유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유동마을의 땅이름 창수동( 昌 水 洞 ) : 창수( 蒼 水 )라는 마을의 유래는 푸른 물이 골짜기로 흐르고 흘러 끝없이 마르지 않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앞산 어름박골짜기에 창수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터에서 발굴된 기왓장에 창수사( 昌 水 寺 )라는 문자가 적혀 있어 창수동( 昌 水 洞 )이라 했다고 한다. 남선동( 南 仙 洞 ) : 남선동은 마을 남쪽으로 선인무신( 仙 人 舞 神 )의 혈명이 있어 남선동이라 했다고 한다. 마을 뒤편에 옥녀봉 이 있고 선장암이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조선조 초 불교탄압 정책에 못 이겨 헐렸다고 한다. 지금도 옛 선장암 절터에 남 아 있는 석축은 인력으로는 도저히 어찌 할 수 없는 큰 바위라고 한다. 수십 년 전 이씨가 이 절터에 가옥을 짓고 선장암 의 맥을 이어오다가 수년 전 정부의 무허가 사찰 정리 때 헐렸다고 한다. 유동( 油 洞 ) : 풍수지리적으로 옥녀직금 형국의 유동은 멀지 않은 곳에 옥녀봉 이 있고, 옥녀가 밤에 베를 짜게 되면 반 드시 불을 환하게 밝혀 줄 등(기름)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옛날에는 이 마을 앞 골짜기 이름을 지름골, 진골 이라고 부 르다가 오늘날에 이르러 유동( 油 洞 )이라 부른다고 한다. 또 다른 설은 풍수지리에서 옥등개벽( 玉 燈 開 闢 ) 이라는 혈( 穴 ) 자리가 있는 곳으로 불을 밝혀준다 하여 유동이라 하였으며, 옛날에는 검은 물이 많이 나온다하여 석유가 나올 것이 [기획특집]내변산 속으로2-내변산의 땅이름을 찾아서
40 라는 이야기 때문에 여기저기 땅을 파내는 이도 많았다고 한다. 남수동( 南 水 洞 ) : 40여 년 전에는 10여 호가 살았다고 한다. 이곳 뒷산 절터 에 고려자기가 묻혀 있다는 소문이 있어 주민 2~3명이 땅을 파다 청색 비석을 캤는데 그 비석에는 유동 전체의 지명, 동명, 혈명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으며 내변산 안 마을들이 빠짐없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울금바위 : 울금바위는 변산을 상징하는 지형으로 남쪽 아래 개암동에는 개 암사가 있고, 북쪽 아래에는 유동마을이 있다. 울금바위로부터 창수동 북 바위의 상봉에 성을 쌓았는데 지금은 거의 붕괴되어 돌만이 빈 성터에 남 아 일명 성재 라고도 부르고 있다. 가늠제 : 옛날에 너무 오랜 가뭄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자 마을사람들이 우 슬재 옆 골짜기로 실처럼 가늘게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가는골(간골)에 저수지를 만들려고 하자 창수골 사람들이 창수골 물줄기가 더 세다며 창 수골 골짜기에 저수지를 만들기를 원하여 창수골에 댐을 쌓고 저수지를 만들어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고 하며, 현재의 가늠제는 창수제가 잘못 기록된 것이라 한다. 선장골 : 선장골에는 신선들이 내려와 장기와 바둑을 두던 곳이라 하며, 선 장암 절터에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바위로 정교하게 다듬은 석축 이 남아 있다고 한다. 장낙골(장터골) : 내변산 지역에는 옛날부터 크고 작은 절들이 많고 스님들 또한 많았으므로 자연스레 각 절들의 중간쯤에 위치한 이곳에 장이 서게 되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장낙골이라 부르기도 하고 장태골이 라 부르기도 한다. 부채바위 : 장낙골 앞쪽으로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부채모양을 하고 있어 이름 하였으며, 이 바위 뒤쪽에 대여섯 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동굴이 있어 한국전쟁 이후 북으로 올라가지 못한 잔여 빨치산들이 숨어살기도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장낙골 앞산 부채바위 및 동굴에는 빨치산이 구들 을 놓고 살았던 돌이 남아 있어 반공교육의 산 장소이기도 하다. 현감이후만식혜민불망비 : 장날골 앞의 옛날 길옆에 보존된 석비가 있는데 조선시대 부령현감의 혜민불망비이다. 옛날 이 지역에 큰 한해(가뭄)가 들었을 때 쌀 1가마씩을 주민에게 나누어 주어 연명케 했다는 부령현감 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로 중앙에는 현감이후만식혜민불망비( 縣 어수대에서 본 유동마을 창수사 기와 어수대 되창바위 040 부안이야기 2013년/여름/통권 제8호
41 監 李 候 萬 植 惠 民 不 忘 碑 )라 적혀 있고 양쪽에는 청림리, 서운암, 거석리, 노적리, 조령리, 남수동, 남선동, 유동리, 창수동 갑신오월(1884년으로 추 정)이라 적혀 있다. 놋점골 : 놋그릇을 구워낸 곳. 어수대( 御 水 臺 ) : 어수대는 지형적으로 유동마을 동서남북의 가운데에 위 치하고 있다. 어수대를 중심으로 사방의 동네 이름이 모두 물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수대는 왕과 관련있는 땅이름으로 여러 설이 있으 나 동국여지지( 東 國 與 地 誌 ) 의 신라왕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이곳에 이 르러 즐기며 돌아가기를 잊었다. 이에 왕재, 석재, 어수의 이름이 있게 되 었다. 는 어수대( 御 水 臺 ), 왕재암( 王 在 庵 ), 석재암( 釋 在 庵 )에 관한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또, 895년(고종 32)에 간행된 호남읍지( 湖 南 邑 誌 ) 3권에 어수대는 변산 가운데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 敬 順 王 이 왔던 곳이라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는 기록이 보인다. 성인봉 : 어수대 뒤의 성인봉( 聖 仁 峰 )은 변산에서 제일 높고 성스러운 산 가마바위 부령현감공적비 신이 사는 곳 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석재와우혈( 石 峙 臥 牛 穴 )이라는 혈자리가 있는데 그곳 에 묘를 쓰면 7명의 왕비가 나올 정도로 좋은 명당이라고 전한다. 되창바위 : 되창바위는 어수대 폭포 절벽 80m, 위에서 20m 지점에 위치한 바위이며 동굴이다. 옛날 집에는 출입방문이 있고 그 옆에 정사각형의 자그만 문이 있는데 이 문을 되창문(지금은 들창문)이라고 한다. 바로 이 동굴입구가 되창문 처럼 생겼다하여 되창바위라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되창바위는 그 절벽높이만도 무려 100m 이상 되는 층암절벽에 만 들어진 동굴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도하였다고 전한다. 이 동굴에 오르기 위해서는 사다리로도 갈 수 없고 밧줄 을 타고도 갈 수 없는 아주 험한 곳이라 하니 사명대사와 서선대사의 도가 얼마나 높았는가를 짐작할 수 있으며, TV 전설의 고향 에도 소개된 적이 있는 유명한 바위라고 한다. 가마바위 : 어수대 폭포 밑에 약 400년 된 팽나무는 이 마을의 당산목이며 이 팽나무 옆에는 가마모양의 가마바위가 있 다. 이 당산목과 가마바위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으니 내용인즉,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인들이 이 나무 에 공들이면 아들을 낳는다고 해서 여인들이 하루 이틀 걸이로 앞을 다투어 공을 들이러 왔다고 한다. 이 신령스런 가 마바위의 밑으로는 어수대의 폭포수가 흐르고 있어 더욱 신비감을 더한다고 한다. 왕재암, 석재암 : 동국여지지( 東 國 與 地 誌 ) 의 기록에 의하면 둘 다 변산 옥순봉( 玉 笋 峰, 지금의 비룡상천봉) 동쪽에 있 었다. 왕등암, 영천수, 되창바위가 있는 그 골짜기를 검무정골이라 한다. 영천사( 靈 泉 寺 ) : 어수대 뒤의 성인봉( 聖 仁 峰 )은 성스러운 산신이 사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이곳의 석재와우혈 ( 穴 ) 자리에 묘를 쓰면 7명의 왕비가 나올 정도로 좋은 명당이라는데, 영천사의 댓돌자리가 바로 그 혈자리라고 한다. 옛날에 영천사의 불목하니가 큰스님들이 명당자리 이야기를 하는 것을 엿듣고 스님들이 절을 비운 사이 자기 부모의 [기획특집]내변산 속으로2-내변산의 땅이름을 찾아서
42 유골을 댓돌아래에 묻고 절에 불 지르고 중국으로 도망쳤는데 명당의 효험이 있었는지 훗날 중국의 왕이 되었다는 믿 거나말거나 할 말이 전한다. 지금은 깨진 기왓장들이 널브러져 있어 옛 절터임을 말해주고 있으며, 아직도 영천(영천 샘)에서는 깨끗하고도 차가운 물이 흘러나오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목 없는 미륵석불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선장암 : 선장골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절터에는 커다란 바위 석축이 있다고 한다. 그 밖의 땅이름 : 진골 서운암( 棲 雲 岩 ) 청림리 서운마을은 약 600년 전 조선 태종 때 이씨, 정씨, 김씨가 취락을 형성하였으며, 마을 주변에는 내변산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가마소, 와룡소, 마당바위가 있고, 장군봉, 시루봉, 청춘봉(천총봉, 천층봉), 옥녀봉 그리고 마을 앞산에는 학바위, 마을 뒷산에는 구렁이바위가 자리 잡고 있는데, 지금은 부안댐 건설로 사라지고 이름만 남아 있다. 학바위(안주봉)와 구렁이바위 : 구름 뒤에서 학이 놀고 있어야 마을이 풍성해지고 인재가 난다고 하는데 현재는 구렁이 바위가 독을 품고 있어서 학이 날지 못하고 있으나 곧 숲이 우거져 산을 뒤덮게 되면 학이 모여들어 마을이 풍성해지 고 인재가 나게 된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옛 선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내려오고 있다. 042 부안이야기 2013년/여름/통권 제8호
43 와룡소 : 전설에 의하면 변산에는 두 마리 용이 살고 있는데, 한 마리는 직 소폭포(실상용추)에 살고, 또 한 마리는 와룡소에 사는데 옛날 서해의 용 이 가마소 계류를 타고 와룡소에 와서 아직 승천을 못하고 때만 기다리 고 있다고 한다. 섭실(섶실) : 섭실과 호랑이에 대한 전설이 내려오는 곳으로 그 정확한 위 치는 알 수 없다. 전설에는 서운마을과 불당골 사이에 있다 하고, 김형주 의 부안이야기 에는 수랑나들이골에 있는 큰바위가 섶실바위라고 한다. 가마소 : 용각봉과 남옥녀봉에서 발원하여 서운암에 이르는 약 9km에 이르는 계곡이 가마소계곡이다. 넓은 반석 위를 흐르는 계류가 여기저기 소를 이루 고 울창한 숲과 어우러져 비경을 연출하는데 그중에서도 가마소가 으뜸으로 가마솥처럼 소가 깊어 붙여진 이름이다. 가마소 위에 와룡소가 있다. 은적절터 : 시리봉 골짜기 부분. 수락노들(수랑나들이골) : 세봉쪽 골짜기. 그 밖의 땅이름 : 마당바위, 코끼리바위, 광대바위, 병봉(안주봉), 시루봉, 불 당골, 쪼갠바위(형제바위), 회양골, 청춘봉, 옥녀봉, 미륵봉, 문다랭이, 학 봉, 청림동, 청연동 (고)청림사지 : 청림리석불좌상이 나왔던 곳이다. 청림리석불좌상 : 이 마을에 (고)청림사가 있었는데, 그 절터만 남아 있고, 절터에 있던 돌부처는 600여 년간 온갖 풍파를 겪으면서 옛터를 지키며 남아 있다가 부안댐이 생기면서 개암사에 옮겨져 새로운 600년의 세월 을 맞이할 것이다. 그 밖의 땅이름 : 청연암, 천층암, 청계사 학바위 가마소 와룡소 조사작업이 진행중인 중계, 새재, 신적, 석문동, 마상치, 군막동 마을 일대의 자료는 다음 기회에 게재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참고문헌 국립공원관리공단, 2009, 국립공원 역사문화자원 자료집, 국립공원관리공단 국립공원연구원, 2009, 변산반도국 립공원 자연자원조사, 국립공원관리공단 원광대학교 박물관(부안군), 2004, 부안군문화유적분포지도, 부안군청 부 안군애향운동본부, 2003, 부안군 변산반도 부안군, 2004, 부안군문화유산 자료집, 부안군청 부안군, 1982, 변산의 얼 전라북도, 1990, 전설지, 전라북도 김형주, 2003, 김형주의 부안이야기 1권, 2권 부안문화원, 2006, 부안문화 제11호, 부안문화원 부안문화원, 유종남, , 부안군 변산반도 관광길잡이, 부안문화원 부안문화원, , 부 안의 문화유산/부안의 비지정문화재 총람, 부안문화원 부안문화원, , 부안땅이름, 부안문화원 소승규 심 광세 김서경(허경진옮김), 2007, 遊 蓬 萊 山 日 記 [부안변산기행문집], 부안문화원 부안군, 1991, 부안향리지, 부안군 참고사이트 부안문화원( 부안군청( 부안21( 문화재 청 홈페이지( 문화유산정보 전라북도 문화관광정보( 무형문화유산온 라인지식사전( 한국고전종합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청림사지에 있던 석불좌상(1996년3월) 불당골에서 본 미륵봉 [기획특집]내변산 속으로2-내변산의 땅이름을 찾아서
44 기획특집 조선 후기에 접어들어 붕당정치의 폐단은 극에 달했으며 정권장악과 유지 를 위해 피나는 살륙이 사대부들 간에 자행되었다. 이에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졌고 어지러운 세상을 바꾸어보자는 밑으로부터의 변혁운동이 꿈 틀거렸다. 영조4년(1728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은 이러한 당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대부들간의 권력투쟁에서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하고자 거병했던 이인좌의 난에서 이들이 준비했던 군사력의 주력부대는 변산의 노비도적 정팔룡이 이끄는 청림병이였다. 이인좌의 난과 변산 노비도적 정 팔룡에 대해 알아본다. ➌ 변산도적 이야기 변산 노비도적 정팔룡 이야기 허정균/뉴스서천 편집장 사림파의 등장과 붕당정치 고려말에 권문세족이라 불리는 지배층의 부패는 극에 달했다.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실패하였다. 이때 나타난 세력이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흥사대부였다. 이들은 사회개혁을 주장했으나 방법론에 있어서 둘로 갈라졌다. 강경파와 온건개혁 파로 나뉜 것이다. 강경파인 정도전, 하륜, 권근, 조준 등은 새로 등장한 무장인 이성계를 내세웠다. 이방원은 반대파를 간단히 제거하여 버렸다. '동방 이학( 理 學 )의 조( 祖 )'라는 정몽주를 타살한 것이다. 이들은 마침내 이색, 길재 등 온건파를 누르고 역성혁명 을 성공시켰다. 권력을 잡은 신흥사대부들은 정변이 일어날 때마다 수많은 공신( 功 臣 ) 을 양산해내며 부와 권력을 독차지했다. 이들이 훈구파이다. 한번 공신에 책봉되면 공신전과 노비가 지급되며 자자손손 대대로 부귀영화를 이어갔다. 또한 과거에 떨어 져도 벼슬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를 조상의 음덕으로 관리에 서용된다 하여 음서( 陰 敍 ) 라고 한다. 이러다 보니 이들 훈 구파는 점점 부패해지고 한정된 벼슬자리를 두고 이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극렬해졌다. 044 부안이야기 2013년/여름/통권 제8호
45 한편 중소지주층으로 지방에 거점을 둔 온건개혁파들은 향촌에 머물며 후학양성에 전념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사 림파이다. 이들이 관직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성종 때에 와서의 일이다. 성종은 깨끗한 사림파로 하여금 훈구파를 견제하 도록 한 것이다. 이후 훈구파와 사림파 간에, 때로는 훈구파간에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이 있었다. 연산군, 중종, 인종, 명종 치세에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 4대사화가 있었다. 그러나 선조 때에 와서는 사림파가 확실하게 권력을 잡게 되었다. 분화를 거듭하는 사대부들 80년대 군부독재 타도를 외칠 때 동교동계와 상도동계가 하나였듯이 훈구파와 권력투쟁을 벌일 때 사림파는 하나였 다. 그러나 권력을 잡게 되자 사림파는 분열되었다. 선조 7년(1574년) 이조정랑 자리를 두고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며 붕 당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사림이 분당되기 전에 이를 예언한 인물이 있었다. 동서로 분당되기 4년 전인 1571년 영의정이 었던 이준경은 사망하기 직전 임금에게 유차를 올려 이렇게 직언했다. 지금의 벼슬아치들이 이런저런 명목으로 붕당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는 대단히 큰 문제로 나중에 반드시 나라의 고치 기 어려운 환란이 될 것입니다. 선조 17년(1584년) 동 서인 융합에 힘쓰던 율곡 이이가 사망하고 선조 23년 세자 책봉문제로 서인이 실각하자 정권을 잡은 동인은 정철의 치죄문제를 두고 온건파인 남인과 강경파인 북인으로 분열되었다.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을 겪고 나서도 조선의 사대부들은 치열한 정쟁을 벌였다. 개혁군주였던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많 은 의병장들을 배출한 북인을 중용했다. 조선은 왕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사대부들은 왕도 사대부의 일원으로 보았으며 사대부들간의 권력 다툼에 왕이 깊이 개입되어 있었다. 권력을 잡는 길은 왕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이것이 여의치 않으면 왕을 강 제 퇴위시키고 자신들의 왕을 내세웠다. 북인들이 정권을 잡자 서인은 남인과 손을 잡고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을 퇴출 시켰다. 1623년에 일어난 인조반정 이 바로 그것이다. 명나라와 청나라와의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치던 광해군이 물러나자 조선의 외교정책은 명나라와의 의리를 우선하 고 청나라는 오랑캐 라고 배척하면서 병자호란을 자초했다. 인조와 효종 때에는 서인들의 세상이었다. 그러나 효종이 죽자 그때까지 살아있던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3 년 동안 입어야 하느냐 아니면 1년 동안 입어야 하느냐를 놓고 논쟁이 일어났다. 이를 예송논쟁이라 하는데 3년복을 주 장하는 남인당과 1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서인당이 서로 맞서 치열한 권력다툼으로 발전했다. 2차 예송에서 승리한 남인들은 서인들의 처벌문제를 놓고 강경파인 청남과 온건파인 탁남으로 분열됐으며 다시 서인 이 집권하자 서인은 남인들을 대하는 견해가 갈려 소론과 노론으로 분열됐다. 소론의 영수 윤증(1629~1714)은 서인이면 서도 서인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남인과 공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기획특집]내변산 속으로3-변산 노비도적 정팔룡 이야기 045
46 소론이 만든 임금 경종 남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으로 갈려 환국과 재환국의 격변이 일던 숙종의 47년 치세가 마감되고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 이 즉위하자 소론과 노론은 장희빈 문제로 부딪쳤다. 소론이 지지하고 보호했던 세자가 왕이 되었으니 왕의 생모인 장희 빈을 신원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집권당은 아직 노론이었다. 노론은 경종의 이복동생인 연잉군(후일 영조)을 왕세제( 王 世 弟 ) 로 책봉하는 일을 관철시켰다. 왕위를 이을 왕세자를 책봉하는 일은 왕실 안정에 필수적인 일이었다. 임금의 동생이 후사가 되는 왕세제는 비상시국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실질적으로 정권을 잡은 후 형인 정종을 허 수아비 왕으로 내세우고 자신은 왕세제로 있다가 즉위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노론은 이처럼 무리한 수를 써서라도 자 신들의 정치적 생존을 도모했다. 자신들이 내세운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시키는 데 성공한 노론은 경종이 병약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대리청정을 주장 했다. 이에 경종은 주요관직에서 노론을 퇴출시키고 소론을 대거 등용했다. 정권을 잡은 소론은 노론에 대한 보복을 단행했다. 노론 4대신인 김창집( 金 昌 集 ) 이이명( 李 頤 命 ) 이건명( 李 健 命 ) 조태채( 趙 泰 采 ) 등이 유배됐고, 세제책봉 과정과 대리청정 과정에 관여한 노론 50여명이 사형, 유배, 삭탈관직 등의 처벌 을 받았다. 이를 신축옥사라 부른다. 1722년의 일이었다. 실권을 장악한 소론은 기세를 모아 노론척결에 나섰다. 영수 김일경( 金 一 鏡 ) 등이 목호룡( 睦 虎 龍 ) 등을 시켜 노론이 삼 수역( 三 守 逆 : 경종을 시해하기 위한 3가지 방법, 첫째 자객을 왕궁에 들여보내 왕을 시해하는 방법, 둘째 음식에 독약을 타서 왕을 죽이는 방법, 셋째 왕의 전교를 받아 경종을 폐출시키는 방법)까지 꾸며 경종을 시해하려 했다고 고변하였다. 이 고변은 크나큰 파장을 일으켰다. 대간들은 모두 4대신의 극형을 주장했다. 경종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사헌부 지평 박 필몽은, 오늘밤을 지새는 한이 있더라도 4대신의 정형을 윤허하지 않으시면 물러나지 않겠사옵니다. 라고 간쟁했다. 결국 이미 유배를 떠난 노론 4대신을 비롯한 60여 명이 처형됐고 노론 170여 명은 유배 또는 문초를 받 았다. 이를 임인옥사라 부른다. 경종 독살설과 이인좌의 거병 조선의 20대 왕 경종은 재위 4년 2개월 만에 사망했다(1724년). 서른여섯의 한창 나이였다. 그는 줄곧 병약했음이 확인 되고 있고 사실상 후사를 낳을 수 없었다. 선의왕후 어씨가 종친의 자제를 왕자로 삼으려 했던 데에서도 이는 확인되고 있다. 노론을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한 소론에게 경종의 죽음은 청천벽력이었다. 경종독살설은 이같은 배경에서 나왔다. 영조 즉위 초는 소론과 노론이 정권을 나누어 가졌지만 결국 신축년과 임인년의 사화에 대한 책임을 물어 소론 이조판 046 부안이야기 2013년/여름/통권 제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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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 객사(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8호) 객사는 영조 35년(1759년)에 지어진 조선 후기의 관청 건물입니다. 원래는 가운데의 정당을 중심으로 왼쪽에 동대청, 오른쪽에 서대청, 앞쪽에 중문과 외문 그리고 옆쪽에 무랑 등으로 이 루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정당과 동대청만이 남아있습니다. 정당에서는 전하 만만세 라고 새 긴 궐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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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02 8 9 32 33 1 10 11 34 35 가족 구조의 변화 가족은 가족 구성원의 원만한 생활과 사회의 유지 발전을 위해 다양한 기능 사회화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의 행동 가구 가족 규모의 축소와 가족 세대 구성의 단순화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 1인 또는 1인 이상의 사람이 모여 주거 및 생계를 같이 하는 사람의 집단 타나는 가족 구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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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hcc.or.kr news@hcc.or.kr Hallelujah News PHOTO NEWS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제437호 2007년 10월 7일 (주일) 화요청년찬양부흥회 날짜: 10월 16일, 11월 6일, 11월 20일 12월 4일, 12월 18일 (매달 1 3주 화요일) 장소: 할렐루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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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1 융합 과학 2011년도 1학기 중간고사 대비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1 빅뱅 우주론에서 수소와 헬륨 의 형성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4 서술형 다음 그림은 수소와 헬륨의 동위 원 소의 을 모형으로 나타낸 것이. 우주에서 생성된 수소와 헬륨 의 질량비 는 약 3:1 이. (+)전하를 띠는 양성자와 전기적 중성인 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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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희망캠페인 쪽방의 겨울은 유난히 빨리 찾아옵니다. 하늘 높은지 모르고 오르는 기름 값은 먼 나라 이야기 마냥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내 몸 하 나 간신히 누일 전기장판만으로 냉기 가득한 방에서 겨울을 보내야 합니다. 한 달에 열흘정도 겨우 나가는 일용직도 겨울이 되면 일거리가 없어, 한 달 방값을 마련하 기 어렵고, 일을 나가지 못하면 밖으로 쫓겨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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