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대회진행순서 시간 진행내용 14:00~14:05 (5 ) 14:05~14:10 (5 ) 14:10~14:35 (25 ) 14:35~15:00 (25 ) 15:00~15:25 (25 ) 개회사 축사 주제발표 1 김포의지명유래 김병욱 ( 인천대학교국어국문학과명예교수 ) 주제발표 2 원삼국 ~ 백제초기한강하류지역집단의성격 김길식 ( 용인대학교문화재학과교수 ) 주제발표 3 김포의강해 ( 江海 ) 도시적성격과역사속의해양활동 윤명철 ( 동국대학교사학과교수 ) 종합토론 15:25~15:55 (30 ) 좌장 : 이하준 ( 김포문화원원장 ) 토론 1 : 이범직 ( 건국대학교사학과명예교수 ) 토론 2 : 김무중 ( 재단법인중원문화재연구원원장 ) 토론 3 : 이재석 ( 인천대학교정치외교학과교수 ) 15:55~16:00 (5 ) 폐회사
목차 주제발표 1 : 김포의지명유래 3 김병욱 ( 인천대학교국어국문학과명예교수 ) [ 토론 ] 이범직 ( 건국대학교사학과명예교수 ) 17 주제발표 2 : 원삼국 ~ 백제초기한강하류지역집단의성격 21 김길식 ( 용인대학교문화재학과교수 ) [ 토론 ] 김무중 ( 재단법인중원문화재연구원원장 ) 49 주제발표 3 : 김포의강해 ( 江海 ) 도시적성격과역사속의해양활동 53 윤명철 ( 동국대학교사학과교수 ) [ 토론 ] 이재석 ( 인천대학교정치외교학과교수 ) 77
주제발표 1 金浦의地名由來 - 삼국시대 ~ 통일신라시대지명변천관련 김병욱 ( 인천대학교국어국문학과명예교수 ) 1. 서론 文化는조상들이역사적으로축적해온유형 무형의遺産의총체로현재에도, 또 미래에도連綿히창조, 계승될것이다. 유형 문화유산으로는각종의생활관련유 물들과문자로기록된문헌자료들이포함되며, 무형유산은神話, 傳說, 民譚등의 說話文學과여러장르의傳承형태의예술행위등이있다. 이러한유 무형의문화 유산들은그유산이최초로만들어지거나성립된시대를산조상들의생각, 곧우 주관, 가치관등당대철학의산물이된다. 그리하여단군조선은 弘益人間, 신라는 世俗五戒, 고려는 佛敎, 조선은 性理學 을기반으로문화가창조되었고, 그로말 미암아수많은물질, 정신적유산을남겼다. 인간이출생하면이름을지어부르는것이자연스런인간생활의시작인것처럼 인간이일정지역에터를잡고살게되면, 당연히자신들이살고있는땅의자연 또는인공물에자랑과正體性을담아作地名하여사용함으로써구성원들은矜持와 一體感을공유하게된다. 그러한지명은후손들에게遺傳되면서여러가지사정으 로變改되더라도原義를살려개명했다면그것은고유문화의寶庫이고, 정체성의 根源이된다. 1) 우리고대지명은원래고유어로작명되었을것이나, 고유문자가없던시대에는 원시적문자체계의창안, 또는수입한문자로기록됨으로써생명을갖게되었을것 이지만, 언어체계가다른문자로기록할때對應關係의어려움이허다했을것이다. 다른한편으로언어는변천하는속성을갖고있기때문에고대에문자로정착되었 1) 고유어숫자가현대에는 하나, 둘, 셋... 열 이지만고대지명자료에는 推良火一云三良火 三國史記 1-7, 五谷郡一云于次呑忽 三國史記 4-4, 七重城一云難隱別 三國史記 4-3, 十谷縣本高句麗德屯忽 三國史記 4-4 에서 三 ~ 密, 五 ~ 于次, 七 ~ 難隱, 十 德 의예숫자를볼수있고, 三 과 七 은고대일본어와도대응된다. - 3 -
다하더러도그들글자의音 訓의體系를알기어려운한편, 원래의지명에담겨있는有緣性을무시하고개명된지명들은이해에난관이따른다. 이러한이유로 訓民正音 반포이전에간행된 三國史記, 三國遺事, 高麗史 나吏讀, 鄕札로기록된각종자료, 地理志등에기록된지명들은표기체계, 당대의音韻體系, 고대한국한자음 [ 東音 ] 과그運用에관한정보가부족하여정확한解讀이어려운경우가많다. 2) 삼국통일이후 757년 ( 景德王 16) 통일한신라의疆域안의행정구역을 9 州, 5 小京, 121 郡, 290 縣으로編制할때원래고구려영토였던김포지역의고유지명을 黔浦 > 金浦 로改名하였다. 그이후왕조가바뀌고, 관할구역의변경이빈번했고邑格의昇降이있었으나, 경덕왕때새로얻은빛나는이름 金浦 는변치않고 1200년이상늠름한氣像을이어왔다. 이와같은談論에따라본고는 黔浦 > 金浦 개명의穿鑿을통하여각지명의국어사적의미, 선조들의가치관, 곧당대의철학을탐색하는것을목적으로한다. 다만, 현재의김포시의판도안에있던삼국시대와그이후여러 縣 에대한考究는후일로미룬다. 1.1 지명연구사 지명의연구는문헌연구와조사연구의두가지방법이주류를이루어왔다. 본고는주로문헌연구의방법으로접근하면서몇몇조사연구결과를참고할것이다. 강병륜 (1998:219~276) 에따르면, 우리나라지명의현대적방법의문헌연구는 19 세기말日人白鳥庫吉 (1896) 에의해시작되었고, 그이후前間恭作 (1925) 등 10여명의日人연구자의뒤를이어최남선 (1928), 신채호 (1929), 정인보 (1947) 등으로이어왔고, 양주동 (1942), 김형규 (1949) 에이르러는고가요주석, 곧고대국어해독방법을문헌지명연구에援用하는본격적연구가시작되었다. 그때로부터 1950년대까지는문헌연구 12편, 조사연구 2편으로초창기 50여년은미미한실적을보이다가, 1960년대에이르러유창균의 4편논문을필두로문헌, 조사연구합하여 33편의논문이발표되었으며, 1970년대 96편, 1980년대 140편, 1990년대에는전반기에만 96편의논문이발표될정도로활발한연구가진행되어왔다. 문헌연구는주로국어사적관점에서고대국어의보고인 三國史記, 三國遺事 등의지명어를통해일부나마고대국어를재구하고그변천과정을추적하여국어사 2) 牛渚書院 의 牛渚 는원래 세갈래물가 란뜻으로造語된지명이다. 검단대곡천과마전천이대곡동, 불로동사이쇠저산남동편, 감정동북편들에서합류하기때문에 세갈래물길 ( 가 ) 이되므로붙인이름이다. 세 [ 三 ]> 쇠 [ 牛 ] 로음운변화한 牛 와, 물가渚 를합성해 牛渚 가된것이다. 三角山, 곧 세귀산 의 세 를 쇠 [ 牛 ] 로인식하고 귀 ( 봉우리 ) 를동물의 귀 [ 耳 ] 로바꾸어 삼각산아래마을 을 牛耳洞 으로부르게된것과유사한변화다. 지명의變改에전혀방향감각이없는사례가허다하다. - 4 -
기술에一助하려는목적에서이루어졌다. 지명의조사연구는 1970년대이후대학의국문학과에서지명연구로석 박사를취득하기위한자료수집의방편으로, 다른한편으로는전국의시 군 구에서내고장가꾸기, 곧지역정체성탐색의일환으로지명자료집의발간을위하여대거실시하여 2000년대초까지그수가 250여편에달했다. 3) 김포의지명에대한기술은옛官撰志들인 三國史記 지리지, 高麗史 지리지, 世宗實錄 지리지, 1478년 ( 성종18) 의 東國輿地勝覽, 1530년 ( 중종25) 의 新增東國輿地勝覽, 1760년 ( 영조36) 輿地圖書, 1789년 ( 정조13) 戶口總數, 1842년 ( 헌종 8) 의 金浦郡邑誌, 1864년 ( 고종원 ) 1871년 ( 고종8) 의 金浦郡邑誌, 1899년 ( 광무3) 의 金浦邑誌 등의建置沿革條에지명 黔浦 > 金浦 의유래를간략히기술했고, 私撰誌로김정호의 大東地志 도대단한조사작업으로그업적이靑史에빛나고있다. 일제강점기에당시조선전체의마을이름까지망라한越知唯七의 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名稱一覽 은 1917년에간행된바, 1914년일제가조선의행정구역개편을위한예비작업이었고, 비슷한시기에조선전체의소지명까지를망라한조선총독부발행의 朝鮮地誌資料 가있다. 광복이후 1977년에는새로운체제의 金浦郡誌 가발간된바, 49쪽에郡名의시대적변천과정을표로제시하였고, 1993년의 金浦郡誌 에는漢字 黔浦 를逐字해석한정도의기술이있다. 필자는 1995년당시김포군의의뢰로군내의전체마을을답사해조사한결과를 지명유래집 (558쪽) 이란명칭으로집필하면서 黔浦 > 金浦 등옛군 현의명칭과그변천과정을국어사적관점으로접근하여기술한바있다. 2011년간행된 金浦市史 역사편에는 黔浦 > 金浦 등의역사적변천과정을표로제시하였을뿐지명에관한심도있는논의는없다. 3) 지명연구가활발해짐에따라 1980 년 < 한국지명학회 > 가창립되고학회지 地名學 창간호가발간되기시작해 26 집까지이어오고있다. - 5 -
2. 黔浦 > 金浦 의논의를위한이론적근거검토 訓民正音 창제이전에는고유어라하더라도한자이외의표기수단이없었다. 따라서 黔浦, 金浦 가고유어의한자차용표기이므로이들의국어사적의미를考究하기위하여고대국어시대의借字표기방법, 고대한국한자음의再構, 작지명의생성기반과有緣性, 유사한지명과의비교연구등의이론적기반이선행되어야한다. 2.1 고대한자음의차용과재구문제 우리고대국가에한자가수입되어常用化하기시작한시기를대략기원전 2c로추정하고있다. 그러나漢語를표기하기위한한자를언어구조가다르고음운체계가판이한우리말을한자로對應표기하기에는큰고초가있었을것이기에문자생활은자연히한문문장구조를익혀한문식의표현을하는편이손쉬웠을것이다. 그리하여삼국시대이른시기부터우리말표기를위하여口訣, 吏讀, 鄕札등의借字표기체계를창안하여고유어표기의수단으로삼아왔다. 三國史記, 三國遺事 의國名, 人名, 地名등은고유어를音借, 訓借의방법으로표기한것이다. 日人小倉進平 (1929) 이처음解讀한향가는극히적은예외는있지만가사의實辭는훈독, 虛辭인어미, 조사는음독하도록창안된향찰표기방법으로기록된것이다. 그러므로중국인들은이러한표기체계를알수없으므로한자를알기는하지만해독할수없는한편, 萬葉集 4) 이라이름한 11c까지창작된고대倭國의가사집의가사와불경등의角筆釋讀字는우리의차자표기체계를수입한日人들과우리나라학자들과만해독을공유할수있다. 이러한차자표기의방법의접근을위해 三國史記 지리지의일부지명의분석을시도한다. 1 耽津縣本百濟冬音縣 (3-10) 강진 의백제지명 冬音 이 耽津 을거쳐개명된것으로 冬音 은한자 冬 에서종성ㆁ (ŋ) 을버리고 音 의 ㅁ (m) 을종성으로표기한고대국어표기법이다. 이것은 * 둠을표기한것이다. 또한 冬音 이 耽 에대응하는바, 耽 의음은 탐, 담 이므로 冬音 의독음과유사하다. 그리하여이어형을재구하면 * 둠, 곧, 4) 萬葉集 에는 4,516 수의가사가실려있는바, 향찰, 吏讀의讀法이아니면日人들도해독못하는歌辭가다수라고한다. 결국박사왕인의한자전수와신라의 三代目 등을통해고대三國式의표기체계와문자를갖게되었을것이다. 일본문자 가나 가최종적으로확정된시기가 19c 말이라하므로이런견해가객관적일수있다.( 김공칠 : 日本의萬葉集古史記解讀의硏究 2004) - 6 -
*tvmv (v 는미확정모음의뜻 ) 5) 의형태가된다. 2 鐵圓一云毛乙冬非 (4-4) 鐵原 의옛지명 毛乙冬非 에서 毛乙 은 鐵 의대응표기인바, 한자 毛 의훈이 털 이며, 乙 은 ㄹ 받침표기 6) 를강조하기위하여중복표기한것이며, 이지명소는 털 > 철 의음운변화를겪었다. 결국 毛乙 은두글자를 털 ~ 철 로훈음독할수있다. 圓 과대응하는 冬非 도글자그대로를음독하면 동비 지만이경우에도 冬 에서종성ㆁ (ŋ) 을버리고 非 의 ㅂ [p] 을종성으로붙여쓰라는표기방법으로중세국어 (11c~16c) 시기에 圓 의고유어가 두렫 ~ 두렵 이었던것이참고가된다. 따라서 冬非 는 圓 에대응하므로 둥글- 의뜻이어야한다. 철원은태고적화산폭발로넓은분화구가평야가되고, 그일대가산으로둘러싸인 큰분지 이기때문에붙인지명임을이해할수있다. 3 漢拏在州南一曰頭無岳又云圓山 ( 世宗實錄 지리지濟州牧 ) 4 陶盆亦可 ( 딜둠기 됴 니라 )( 新傳煮硝方 ( 숙종 4 년간행 ) 3은 한라산 을설명한구절로한라산, 곧음차한 頭無 가훈차 圓 에대응하므로 頭無 = 圓 의관계가성립하고뜻이같아야한다. 앞의 12의경우와같은방법으로 頭無 는 * 둠 의異形態인 * 두무 이며, 뜻은 圓 이된다. 4는焰硝굽는방법을설명한대목의일부이다. 딜둠기 는 둥그런뚝배기 이다. 이항에서는 * 둠 이란어형을추출할수있고, 그형태가 둥글다 는뜻으로이해할수있다. 위에서 三國史記 지리지의 * 둠 ~* 둡 ( 둠 ), 한라산의 * 두무 ~ 圓, 질뚝배기 에서 * 둠 은모두하나의意味場에속하는地名素인것을확인할수있고모두 * 둠 계이며, *tvbv 의형태로재구할수있다. 그러면, 이러한지명소가고대국어에만사용되고, 死語가된것이아니라역사속에서나현대의지명에살아있어야地名學이존립할수있는근거가된다. 5 도마메 ( 대곶면상마리 ), 두밀 ( 인천서구검단대곡동 ) 대곶면의 陶馬메 는마을전설에 陶장군이말을타고가다이마을에서죽어도 마메 라고했다고전해온다. 검단의 두밀 은옛금석문에 杜谷 이라새겼는바, 이 5) 별표 * 은고유문자가없던시기의어형을再構할때사용하는기호. 6) 삼국시대한자로표기할수없는경우, 고유어받침표기글자로 ㄴ ( 隱 ), ㄹ ( 乙 ), ㅁ ( 音 ), ㅂ ( 邑 ), ㅅ ( 叱 ), ㅈ ( 次 ) 등으로借字표기. ( 舌內入聲 t>l(r) 의東音변천, 忽 [χuət>hol], 伐 [biɒt>bəl] ) - 7 -
마을은산으로둘러싸이고동쪽만터져있어이런지명을붙인것이다. 두마을모두 둠 계의지명이다. 역사적으로고려의유신 72현이 杜門洞 에서세상을등지고살았다는野史와 두메산골, 도마뱀 ( 산뱀 ) 등이모두같은意味場에속하는 둠 이거나그異形態들이다.(cf. 일본어 ; 玉 - tama ) 둠 계의지명소는 도무, 두무, 두문, 두미, 두밀, 땜, 때미, 뜸, 테미 등다양한變異形으로分化되었고, 일상어 담, 더미, 두멍, 둥벙 등과변형된 둔 ( 대둔산 ), 두류산 ( 지리산 ), 두룸산 [ 鶴山 ] 등이있다. 그러나, 위와같은借字표기의해독이어려울수밖에없는이유는한자가수입되어고대국어에同化되기시작한이후, 고대의중국한자음과도다른방향으로변천을해왔고, 또언어체계가달라對應표기가쉽지않았기때문이다. 우선, 漢字는音節文字이므로글자를쪼개 語頭子音, 母音, 語末子音 으로나눌수없다. 다행히중국은이러한불편을인식하고, 불교가수입된唐나라시기부터 Sankrit어로된불경을한자로표기하여염불을외우기위하여고안한聲韻學을발전시켜왔다. 그리하여모든漢字를 聲母 + 韻尾 로분석하는反切表記를고안하였다. 예를들면, 한자는 東 -- 德紅切 의반절식발음기호를 東 은 德 의聲母 ( 初聲子音 ) 인 t 를, 紅 에서는 韻尾 ( 母音과終聲 ) 인 uŋ 을잘라붙여 tuŋ 으로읽을수있게고안한것이다. 어쩌면, 고대국어표기에서한자를잘라내받침표기로사용하도록고안한것도반절을차용한듯하지만알수있는방도는없다. 여하튼, 고대국어문헌들의표기에발음기호가없으므로현재로서는중국어聲韻學者 Karlgren의 漢字古音辭典 (1966), 董同龢의 漢語音韻學 (1981) 등에의지해그런대로고대국어해독의지평을넓혀갈수있는것도다행이다. 三國史記 지리지등고대국어표기자료들을해독할때, 중세국어나현대국어의觀點을버려야하는또다른난제가있다. 우선고대국어의자음체계에 有氣音, 硬音 이없거나극히제한적으로사용되었다. 예를들면현대어 도라지 를江都피난시절강화 刊經都監 이간행한 鄕藥救急方 (1236) 에는 道羅次 로표기되어있지만, 현대어 도라지 는終聲이 ㅊ 이아닌 ㅈ 이기때문에 次 는유기음표기 ㅊ 이아닌 ㅈ 표기였다. 또한 13c 이전에는 ㅎ 은매우제한적이었고, k>χ>h 의변천과정을거쳐 / ㅎ / 이음소로정착한것이다. 현대국어와상이한이런상황은고대국어해독에서항상겪는어려움이다.( 成吉思汗, 四汗國 ~ 三韓, 居西干, 麻立干 - 角干 ; 九干 ) 硬音의경우, 訓民正音 시대에도경음을가진고유어는많지않았다. 예컨대현대어의 곳불, 갈치 등은이들단어에화석으로남아있는 고 는 코, 갈 은 칼 의고어의화석형이다. 더구나 16세기한자 氏 가 시 > 씨 로경음화된이래, 현대의東音에서경음으로정착한한자는 喫, 雙, 氏 세글자뿐이었다. - 8 -
앞의 * 둠 을재구할때, *tvbv 로語末母音 v 를표기한것은고대국어도일본말처럼음절말자음을外破로발음했을가능성을열어둔것이다. 용비어천가 7:23 에여진어 紉出闊矢 를 닌 시 로細註하여고대국어의발음의片鱗을보여주고있다. 訓民正音 終聲解에 八終聲可足用也 란규정에의해세종대에와서야종성이內破音으로발음이정착되었고, 그후로점차현대국어의 7종성 ㄱ, ㄴ, ㄷ, ㄹ, ㅁ, ㅂ, ㆁ 으로이행하였다.( ㅅ >e) 따라서, 15c 이전어느시기까지는어말의모든자음은외파로발음했던것을알수있으므로고대국어해독에참고해야한다.( 뒤의 고마 : 熊津 龍歌 3-16 참고 ) 2.2 信仰과지명 어느종족, 민족이나시대적, 지역적으로특수한종교체계를갖고있는바, 이를原始宗敎, 民俗信仰 (folk religion) 이라부른다. 그것은종족, 민족에따라天地創造神話, 建國神話, 또는일정공간을성역화하고, 그들신화의등장인물이나話素들에神格을부여하고絶對者, 超越者, 神聖物로表象하고신앙의대상으로섬겨왔다. 金浦市史 (52~6) 에따르면, 장기동, 신곡리유적에서기원전 5만년으로추정되는지층에서구석기시대유물들이발굴되었고, 가현리泥炭層에서는 4000±25B.P 시기의炭化米가발견되어 (p28) 김포판도에조상들이정착해농경해온역사가유구한것을알수있다. 神話가없는민족은꿈과미래가없는민족이다. 우리선조들은 三國史記, 三國遺事, 이규보의 < 東明王編 >, 이승휴의 帝王韻紀 등에고대국가들의시조, 특정인물들이건국, 탄생등에얽힌神異한기사들을남겨그것들이자랑스런인문학문화유산이되고있다. 고대인들에게원시신앙을정신적지주의기능을했던이유는인간으로서는不可抗力으로직면하는자연으로부터의恐怖感, 畏敬心, 崇高함등을堪耐할수없으므로숭배대상을表象하고그것을神格化하여섬겨왔고, 그때시행되는祭禮나儀式節次를주관할祭祀長을추대하여치루는일종의歲時風俗속에는先人들의世界觀, 宇宙觀이반영되어있을것이다.( 한상복외 : 273) 이렇게신을畏敬하는話素들을담고있는신화, 설화문학은고대인의集團無意識의표출로그의식절차중에서등장인물들은이야기꾼 (storyteller) 이되고, 歌舞音曲은原始綜合藝術로인류예술발생의始原이되었다. ( 이강숙 1989) 三國志 마한편에 國有別邑名之蘇塗立大木縣鈴鼓事鬼神 이란기사가있다. 蘇塗는죄인의도피처가되는 別邑 과降神에필요한大木, 방울, 북등, 神聖한요소들이하나의象徵이되어부족이나국가의정신세계를結集시키는원동력이되 - 9 -
었다. 하성면시암2리 鈴村 은전래적으로 방울터 로불러왔다. 이마을동북편祖江연안에 8기의지석묘가있는것으로미루어예전 소도 가있었던것으로추정된다. 地名由來集 (p490) 전국적으로 소도 계지명이분포되어있는바, 소도동, 솟대배기, 짐대배기등과그변이형들이모두옛 소도 의후신들이다. 그밖에마을마다당이있어선인들이神을의지하고살아온선인들의가치관을알수있다. 2.2.1 三國遺事 소재의신화검토 一然은 三國遺事 를편찬하면서 紀異 에叙하기를怪力亂神 7) 한내용을서술한 다고전제하고, 三國史記 에없는신화, 전설수편을수록하였다. 그첫번째 고 조선 편은대략다음과같다.... 乃王而千載有檀君王儉立都阿斯達開國呼朝鮮.. 古記云昔有桓因庶子桓雄數意天下貪求人世父知子意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乃授天符印三個遣往理之雄率徒三千降於太白山頂神壇樹下謂之神市是謂桓雄天王也將風伯雨師雲師以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時有一雄一虎同穴而居常祈于神雄願化爲人時神遣靈艾一炷蒜二十枚曰爾輩食之不見日光百日便得人形熊虎得而食之忌三七日熊得女身... 神壇樹下呪願有孕雄乃假化而婚之孕生子號曰檀君王儉... 後還隱於阿斯達山神壽一千九百八歲... 위에장문으로인용한 檀君神話 에서 桓雄 은國家大業의철학인 弘益人間 의國是를달성하기에필요한자연, 인문의모든조건을거느려生子 檀君 에게제공하여개국하게함으로써자연과相生할수있도록王道를열어준다. 桓因 桓雄 은 天降神 이지만지상의 熊 은 totemism의대상물로畏敬스런존재였다. 熊 은 食艾蒜 하고 不見日光百日忌三七日 의通過儀禮를거친다음得女身하여 地母神 으로재탄생하였다. 여기서우리는 熊 의한자古音에주목한다. 1 熊 *[ɣįung] (karlgren,204) 熊 은현대국어형태가 곰 이지만 龍飛御天歌 3:16에는 熊津 을 고마 로細註하였다. Ramstedt(1949) 에의하면, 알타이어들에서 곰 은터키어 Gam, 일본어 Kami 등이어서우리말과유사한형태를보이고있다. 8) 이들을기반으로地母 7) 怪力亂神은怪異, 勇力과悖亂鬼神에관한일의뜻. - 10 -
神 熊 은 * 곰, *kvmv 으로재구할수있다. 天神과地母神의결합으로탄생한 檀君 도당연히 神人 이다. 이疆域의王이라면 檀君王 으로족함에도 王儉 이라하여 儉 의지위를추가한것이다. 2 儉 *[giἄm] (karlgren,307) 위의漢字古音에서알수있는것처럼 * 검 도 *kvmv 의再構形이되므로 王 + 儉 으로두가지직위를가졌던바, 고대국가에서統治者의기능과祭祀長을겸했던神格을가진 神君 이었기때문으로추정된다. 9) 三國史記 신라본기에신라 2대왕을 南解次次雄惑云慈忠... 方言謂巫也 라고한것도왕의神君기능을말한것이다 ( 三國史記 신라본기1-3) 이상의 熊 과 儉 은모두신의뜻이며, 神 을의미하는고대어형은 * 곰 ~ 검, *kvmv 으로재구한다. < 檀君神話 > 를근거로神의뜻을가진어휘형태를 * 곰 ~ 검, *kvmv 으로재구한이상이것과音, 訓이같거나유사한어휘들도神의의미라는것이입증되어야한다. 풍수와관련된고대민속신앙에四神이있거니와, 北玄武 가그중하나다. 江西大廟 四神圖중 玄武 는거북과뱀이엉겨겨루는형상을하고있다. 거북이邪惡한뱀을물리치는象徵일것이므로 거북 은辟邪進慶하는神으로추앙받았던것으로추정된다. 최남선편 三國遺事 (108) 권2의 < 駕洛國記 > 를발췌인용한다.... 禊浴之日所居北龜旨有殊常聲氣呼喚衆庶二三百人集會於此有如人音隱其形而發其音曰吾所在爲何對云龜旨也又曰皇天所以命我者御是處惟新家邦爲君后爲玆故降矣你等須掘峯頂撮土歌之云龜何龜何首其現也若不現也燔炸而喫也... 金盒子開而視之六黃金卵六圓如日者... 이기사의개략은九干등이임금을맞이하기위하여부른노래인 < 龜旨歌 > 로이노래를불러하늘이내린알 6개가金首露王등 6 伽耶의왕이된誕降모티브의建國神話이다. < 龜旨歌 > 로通稱되는이가사의첫구절 龜何龜何 의 龜 를박지홍 (1957) 에서는향찰표기의 에대응하는것으로보았다. 四神圖의거북이 玄武 이며, 北方을수호하는神이었다. 玄 의訓이 검- 이므로九干등이神山 龜旨峯 에서 皇天 의명으로神君을맞이하는 迎神君歌 를부를때의 龜何龜何 로降神, 迎神을기원하 8) 몽골의일본침략을두번이나좌절시킨태풍을倭人들이 神風 -Kamikaze 라명명. 9) 양주동 (1965:422), 이병도 (1976:30), 유동식 (1978:33) 에서는 웅, 검 을 으로재구하였으나, 고대국어시기의모음체계에 ㆍ 의존재에대한부정적견해가있다. 김동소 (1998:64), 이기문 (2009:86) - 11 -
는노래이므로 * 검이여검이여 로해독하는것은온당하다고본다. 결론적으로 * 검- 의訓을가진四神圖의 玄武 는 거북신 으로象徵되고, 玄 도 * 검, *kvmv 형태로재구된다. 10) 이하에서는역사상 * 감, * 검, * 곰 의再構形이사용된예를고찰한다, 3 서르고마 야 ( 釋譜詳節 6:12 4 고마경 ( 敬 ), 고마건 ( 虔 )( 類合 하1:3) 5 님에게가는길은가져다가나에게주셔요검이여 ( 卍海, 님의침묵, 잠없는꿈 ) 6 무속의 조왕대감 터주대감, 대감놀이등 위의 3~6에서 고마, 검, 감 모두神을존경, 신을부르는구절중에 *kvmv 형태를사용한것으로이들이고대로부터현대에이르기까지그의미와용법이連綿히이어지고있는것이다. 11) 이제까지논의한예들이외에도 검- 의訓을가진 烏 는고구려고분에서 < 三足烏 > 가신비한새로묘를지키는神으로형상화되었고, 三國遺事 권2의 바위타고동해건너일본에가神으로추앙받는 延烏郞, 細烏女 의 烏 도모두훈차로 神 의意味場에속하는어휘들이다. 그리하여 * 검, *kvmv 계의地名素는다양한異形態를보이는바, 역사적으로작지명에사용해온音借字로 甘, 監, 甘巖, 巨物, 儉, 黔, 金, 今, 錦, 金馬 등과, 訓借한 熊 君, 黑, 釜, 孔, 柿, 烏, 玄 등이사용되어왔고, 三國史記 소재고대국명, 왕명, 또는州, 郡, 縣의명칭에다수기술되어있다. ( 尼師今, 金首露王, 金海, 金城, 甘文小國 등 ) 10) 일본한자에서도 龜 를 [kame] 로훈독하여참고가된다 11) 60+ 歲에서나쓰는인사 고마우셔라 라는표현은 神의가호로당신이복을받으니나도기쁘다 정도로이해된다. - 12 -
3. 三國史記 지리지의 黔浦 > 金浦 黔浦, 金浦 라는지명이문헌에최초로등장한것은 三國史記 지리지이며, 신라 가삼국을통일한이후 757 년 ( 경덕왕 16) 통일한신라의疆域안의행정구역을 9 州, 5 小京, 121 郡, 290 縣을편제할때이며, 다음 1 의기사를남긴것이전부이다. 1 金浦縣本高句麗黔浦縣景德王改名今因之 (2-5) 이짧은기사이외에당시 縣 의사정을알수있는어떤端緖도없다. 이제우 리는여기서지명이면서행정구역의명칭인 黔浦 金浦 의정체를추적함에 黔 金 글자자체의 音, 訓 을토대로두어측면으로考究할것이다. 12) 2 黔 金 의음과훈 ㄱ. 黔 *[giἄm](karlgren134), 黑 也, 귀신이름금 ( 明文漢韓大辭典 2150) ㄴ. 金 *[kiəm]( ), 금속의총칭, 신이름금 ( 1736) ㄱ. 의訓은 黑, 곧 검 - 의뜻이다. 옛김포판도안에특별히토양이검어서그 특징을고을의지명으로할만한곳은없는듯하다. 두번째 訓 은 귀신이름금 이 다. 다음으로재구된고대한자음은 *[giἄm] 으로앞의항에서검토한 *kvmv 으로 規式化할수있다. 이상을종합하면, 訓은 신 이며, 音은 *[giἄm], 곧 *kvmv 형태이다. ㄴ. 의訓은금속을총칭하는 쇠 로계승되어왔으며, 신이름금, 姓 으로쓸때 는 김 이된다. 音은여전히 *[kiəm] 곧, *kvmv 형태로재구할수있어앞의 ㄱ. 항과同軌이다. 지금까지검토한 黔 金 은이땅의판도안에 검은토양 이나 금속류 를 긍지로내세울만한특정한면이없으면서도이글자를채택한이유는 神 과관련 되는남다른역사가있었을것으로추정해볼수있다. 그러면, 고대에이지역을 神聖한땅 이라명명할조건을찾아야할것이다. 13) 12) 浦 는바닷가, 내륙강가지명에일반적을사용되어온常用의後部地名素이므로논외로한다. 13) 黔浦 이외에 三國史記 지리지 2-1 에 黔 字계지명은거의유일한예로보이는 穀壤縣本高句麗仍伐奴縣景德王改名今黔州 중 黔州 인바, 그이유를찾기어렵다. 黑壤郡本高句麗今勿奴郡景德王改名今鎭州 --- 이있는바, 鎭州 > 鎭川 으로변천해왔다. 鎭川에는 葛月里堡壘, 萬弩山城, 胎靈山城, 文案山城 등의옛堡壘와山城 ( 진천군 jincheon.go.kr) 이있기때문에 鎭 을지명으로썼고, 前代에 * 검 字계지명을사용한듯하다. 현대의지명에 검 의이형을사용한지명은수를헤아리기어렵다. - 13 -
ㄷ. 선사시대유물, 유적 : 김포군시절김포에소속되었던검단지역의원당, 불로지역의선사시대유적에서유구 30여곳과무문토기, 석촉, 석도등많은유물이발굴되었다.( 인천 서구사 2014:231~246) 김포장기동, 신곡리에서는 3만년전부터선조들이살아온유적을발굴하여주거지, 묘등에서구석기, 신석기시대의유물을대량발굴하였다고보고되었다.( 김포시사 2011:58~63) 또한黔丹대곡동 ( 황곡마을 ) 일대에는덮개돌의장축이 4m 이상인지석묘 3기를비롯한군집을이루고있는 99기의지석묘가보고되었다.( 인하대박물관대곡동지서묘지표조사, 인천 서구사 2014:243~246) 김포지역의지석묘는운양리 10여기가마을곳곳에산재해있는바, 그마을의전래이름은 감바위, 감암 이다. ( 김포군지 1993:1303) 참조. 필자는한강신도시조성이전장기동 ( 고창 ) 구석말서편산기슭에서수로공사로이미파괴되어나뒹구는지석묘의개석 2개를발견한바있다. ( 걸포리 1기, 두밀 2기 ) 이상논의한바와같이삼국시대의지명인 黔浦, 金浦 의글자는바뀌었지만, 개정전후지명모두지형적특징, 금속의産地란의미는稀薄하고, 神 의뜻인 * 검 ( *kvmv ) 과물가마을, 고을에사용해온地名素인 개 [ 浦 ] 를합성한 * 검 ( *kvmv ) + 개 [ 浦 ] 로변함없는구조의자랑스러운지명이다. 이지명과선사시대의유물, 유적등을통하여아울러볼때, 우리선조들이일찍부터많은수의先住民이상당한勢力集團을형성하고, 비옥한평야에서농경하고, 자연과친화하며살면서풍작을기원하고, 고을의안녕을하늘에빌기위하여統治者이면서祭祀長인神君을모셔긍지를갖고풍요롭게살아왔을것으로추정되는바, 이것이지명 黔浦, 金浦 에내포된철학이며정체성이라할수있다. 일찍이馬韓 54국의위치批正의논의가활발했던바, 速盧 와옛 首爾忽 이유사한音이라는이유가논거중에하나인것을보면, 객관적자료의논증을통해서얻은결론은아닌듯하여조심스럽지만, 이병도 (1959) 와천관우모두 速盧不斯國 을김포일대로추정한선학들의견해도 神君의고을임 을합리화하는논거에크게참고가될수있다. - 14 -
4. 마무리 지명은문화의총체적산물이라는전제를 결론에도달하였다. 담론으로출발하여대략다음과같은 1. 고대의지명을해독하기위하여고대한자음, 차자표기의방법의이해가선결문제이다. 2. 고대지명은표기된한자의逐字的해석으로선인들의작지명의철학에근접하기 어렵다. 3. 선조들생의최대관심사는신과친화였고, 작지명에신, 자연에대한외경제일의 제재였다. 4. 단군신화의熊과儉은神의뜻이며, 어형은 * 검, *kvmv 으로규식화하며, 이어휘는현대어에도살아사용되고있다. 또한구지가의거북도四神중玄武이며, 훈차하여 * 검 계의의미가되므로단군신화와같이 *kvmv 의재구형으로규식화할수있다. 5. 黔浦 金浦 는 黔, 金 이音借로神을표기한것이며선사시대의유물, 유적 으로미루어볼때神君의고을로해석할수있다. 경덕왕때의개명은글자는 바뀌었지만의미가달라지지않았다. - 15 -
참고논저 삼국사기 지리지, 아세아문화사영인본. 고려사 지리지, 아세아문화사영인본. 신증동국여지승람, 아세아문화사영인본. 세종실록 지리지, 아세아문화사영인본. 인천광역시 (1998), 인천의지명유래 김포시 (1993), 지명유래집 김포시 (2001), 김포시사 인천시서구 (2014), 서구사 김성원외 (1987), 명문한한대사전, 명문당. 유창돈 (1979), 이조어사전, 삼성인쇄. 김영진 (2008), 일본어한자일기사전, 성인당. 한국지명학회, 지명학, 1,3,10,14. 강신항 (1974), 조선관역어연구, 광문사. 권상로 (1961), 한국지명연혁고, 동국문화사. 도수희 (2004), 한국의지명, 아카넷. 김공칠 (2004), 만엽집고사기해독연구, 한국문화사. 김광억외 (1985), 문화인류학개론, 서울대. 김동소 (1998), 한국어변천사, 형설출판사. 이기문 (2009), 국어사개설, 태학사. 이강숙 (1989), 종족음악과문화, 민음사. 이병선 (1997), 한국고대국명지명연구, 아세아문화사. 최남희 (2005), 고구려어연구, 박이정. 동동화,(1981), 漢語音韻學, 범학. karlgren.b91975), 한자고음사전, 아세아문화사. - 16 -
토론문 1 金浦의地名由來 - 삼국시대 ~ 통일신라시대지명변천관련 이범직 ( 건국대학교사학과명예교수 ) 오늘우리는김포라는지명에대한자랑스러운의미개진에깊은이해의자리가되겠다. 지명을포함해서이름이갖는철학적가치는역사적으로부여되고있음이다각적으로논의되고있었다. 중국의고대철학에서보면공자는정명론에서이름을바르게하는것으로시작하는것이정치의기본이라는것을천명하였다. 이름이갖는명분을유지하는것이문화질서를달성한다고한것이다. 지명의경우역사와문화를함유하는개념이다. 김포는우리역사에서가장위대한긍지를구현한지명이다. 이를김교수는난해하면서도무개있는학문적논리로서증명하셨다. 나는여기에사족으로김포지명의의미를보태고자한다. 일찍이공자가君君臣臣父父子子임금은임금답고신하는신하다우며아버지는아버지답고자식은자식다워야한다. 라는말씀은正名 ( 명칭을바로잡는다.) 주의철학개념에서비롯한것이나이로부터유추한다면이름은역사성과문화적의미를함축한다고하겠다. 즉고대사회질서에서중요한질서의명분을정명론으로설파한대목이다. 지명또한역사문화성을반영한다고하겠다. 현대사속 6.25 전쟁의상처를지명에반영된사례를보기로하겠다. D.M.Z부근양구에가면을지전망대에서남쪽으로이름하여펀치보올 (punch bowl) 이라는분지형의지명이있다. 지형과 6.25 전쟁의상처를대변하는지명을이곳을찾는관광객들에게소개한다. 을지전망대에서내려다보이는이곳분지형을당시외국전쟁종군기자들이명명했기에지금펀치볼-서양에서파티에사용하는접시-이라고한다. - 17 -
우리나라지명이역사문화의개념이함축되었음을김교수도밝히고있다. 지명연구가대학의국문과에서상당한성과있음은언어체계와문자체계의차이를, 우리의역사와중국한자사이에서의간극을우리역사속에등장하는향찰이두표기로부터한자를원용함에서한문문장구조에이르는언어학의연구성과를인용하고있는것이다. 삼국사기를비롯한삼국유사는한자로우리역사를기술하고그속에서우리고유의언어흔적을표기하고있었다. 훈민정음이창제된이후에도인명이나지명표기에한글과한문표기가병용되는사례가언어연구에문헌자료가이용되고있었기에국어학자들의노력이지명연구에집중되는것이라하겠다. 토착민과토착문화기남기고있는地名을대상으로하여국어학자들은언어연구를심화발전시키고있는것이다. 국어사적연구를가능하게한것은훈민정음창제이후에도이전시기에서와다름 없이김포지명의표기가한자로쓰임에국어사연구를가능하게한것이다. 김포라는지명이삼국사기지리지, 고려사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1478), 신증동국여지승람 (1530), 여지도서 (1760), 호구총서 (1789), 김포군읍지 (1842, 1864, 1871, 1899), 김정호의대동지지에서김포라는지명은한자표기로되어한글자료표기와대조가가능하여국어사발달과정을추적연구가가능하게되는것에서국어학자들연구대상이되고있었다. 국어사연구에서쓰인방법은借字즉한자글자를빌어와우리언어를표기하는것이다. 지명을만듬에도이러한방법이었다는것이다. 삼국사기지리지삼국유사의國名人名地名등에한자를원용함에때로는音을빌리고訓 -뜻-을빌리는방법이었다는것이다. 발표자김교수는이러한연구결과를인용하고있는것이다. 한자를차용하는방법에음훈을빌어왔다는것과口訣吏讀鄕札등의표기체제를창안하여借字하기도하였다. 借字의표기방법은예외적사례가많아쉽게이해하는것이어렵다. 일본인학자小倉進平 (1929) 의향가연구와양주동박사의연구로향찰의실체가소명되고있으나우리역사를배경으로하고만들어진이름名을표기한한자의원음과글자의뜻의원용을바로이해하는것은쉬운일이아니었다. - 18 -
김교수가인용한사례 5 번 도마메 ( 대곶면상마리 ), 두밀 ( 인천서구검단대곡동 ) 예에서인용한발음의기초하는차음의원칙을이해하는것의어려움을간직하고 두번째로유의해야하는것으로는信仰문화가地名에영향을배려해야한다는것이다. 김포의고고학적발굴과설화전래되어온지명과연계가설은경청할대목이다. 하성면시암2리鈴村은전래적으로방울터로불러왔다. 와부근지석묘가있다는것과소도로추정하는연구작업은지명유래를설명하는매우합리적으로이해되는것이다. 우리역사서삼국유사에는신화단군신화가있다. 단군신화가운데곰으로표기되 는것은검으로보아이를神의의미를가진다고하고이어김교수는 검으로보이는地名素는다양한이형으로보이고는있지만音借字로甘, 監, 甘巖, 巨物, 儉, 黔, 今, 金, 錦, 金馬, 등과훈을빌어쓴글자로는熊, 君, 黑, 釜, 孔, 柿, 烏, 玄, 등이사용되었다고하였다. 삼국사기에는고대국명왕명또는주, 군, 현의명칭에기술되었음을말하고있다.( 金首露王, 金海, 金城, 甘文小國 ) 三國史記地理志의표기黔浦에서金浦로변화를 신라가삼국을통일한후서기 757 년 ( 경덕왕 16) 때기록이 金浦縣本高句麗黔浦縣景德王改名今因之.( 삼국사기권 35 잡지제 4. 지리 2) 김포현은본래고구려검포현이다. 경덕왕이개명하였는대지금그대로인용한다. 삼국사기편찬시기에신라의기록을존중한다는것이다. 김교수는黔검이나金김의한자음은우리전통문화에서모두神을상징하는것으로지명과연계됨을강조한다. 토양의검다라는경우또는금속과연루되는쇠의뜻과는거리가있다고하면서고대부터이지역을신성한땅이라는역사와문화를함유한것으로이해하는것이합당함을피력하고있는것이다. 金자의訓에서神의의미를인용하여지명을만든역사성을계승보존하고있음을 선사시대의유물유적과한강하류비옥한퇴적평야가선주민들의정치력흔적이 - 19 -
神君의고을이라는것이라고하였다. 黔浦검포金浦김포는黔, 金이한자의음을빌어지명을만든것이나역사문화적으로는우리의神을지칭하는검김을표기하기위한음차의표기로논증하고있는것이다. 김포는신라경덕왕이래로개명한김포나이전의검포모두글자의의미는같다는주장이었다. - 20 -
주제발표 2 원삼국 ~ 백제초기한강하류지역집단의성격 - 김포 인천지역을중심으로 김길식 ( 용인대학교문화재학과교수 ) Ⅰ. 머리말 인천과김포지역은한반도중서부의끝단, 서해연안에면한지역으로한반도중부지역역사의근간을이룬한강의관문이자출구로서역사적으로어느지역보다도중요한지역이다 ( 권오영 2009b). 특히한강하구에위치하면서김포시와인천서구검단동일대를아우르는김포반도는문수산 가현산 장릉산등소기복을이루는구릉성지형이약간있을뿐, 준평원화된지역으로서한강에의해퇴적된충적토가쌓여중부지역최대의평야지대를이루고있다. 김포의남동쪽에접해있는인천지역은북서-남동방향으로계양산-철마산-만월산으로이어지는지맥의서쪽에형성된야트막한해안평지와동쪽에형성되어있는잔구성평지, 그리고인천의중심부에서월미도-응봉-도화산을잇는지맥과남쪽의청량산-문학산에이르는동서방향지맥의북쪽과남쪽에형성된잔구성평지등여러곳에비교적저평한평지를이루고있다. 이산계는경기도의가장북쪽에있는대둔산, 천마산등 500m 이상의높은산맥에서시작하여김포반도의문수산, 강화도의마니산, 그리고계양산을지나철마산, 만월산에이르기까지해안선과평행하는구릉성평지해안을이루고있다. 특히김포반도와인천서해연안은 1970년대이후간석지나갯골과연결되는하구에방조제를쌓아만든간척지가넓게형성되어있으나원래는해안선이복잡하고많은항 포구가형성되어서해연안을항해하는선박의관문또는해상물류교통에최적의지형조건을갖추고있었다. 또북부의검단에서남쪽의인천가좌동에걸쳐서는넓고완만한해안을이루고있어염전에도적합한조건을갖추고있다. 이처럼인천과김포는한강본류와지맥에의해형성된나지막한구릉성평지지형과서해연안의넓은해안지역이지형적으로서로연결되고, 묘제나주거, 출토유물등고고학적문화양상도같게나타나므 - 21 -
로두지역을통합하여검토하는것이당시의역사 문화상에올바로접근하는방법일것이다. 이와같이한강하류역은김포반도의넓은충적평야지대와넓고완만한해안지역을배경으로일찍부터중부지역최대의농업생산력과소금생산력을가진지역이될수있었다. 이와더불어대하천인한강을끼고서해연안에발달한항 포구는서해바다와내륙으로드나드는수운과물류의관문으로서한강유역고대정치집단들에게어느지역보다도중요시되었던지역이라고할수있다. 이러한천혜의환경조건을배경으로하여고대에도유력한정치집단들이존재했을것으로추측되었다. 이를증명하듯이최근김포 인천지역의금속한개발에수반하여진행된대 소규모의발굴조사에의해고대김포 인천지역의역사 문화상이차츰드러나고있어현시점에서정리할필요성이제기된다. 따라서본고에서는한강하류역의김포 인천지역을중심으로존속했던고대정치집단중원삼국시대 ( 마한 ) 지역집단의존재형태와성격을파악하고, 그후백제가진출하여지배하는과정에대하여묘제, 그리고출토유물중, 특히철제무기의검토를통하여접근해보고자한다. - 22 -
Ⅱ. 인천 김포지역유적군과지역집단의존재형태 1. 원삼국시대이전의유적 인천 김포지역에원삼국 ( 마한 )~ 백제지역집단의존재를파악하기위해서는먼저이전시기의유적과어떠한관련성을보이는가를검토함으로써어떤배경에서이지역정치세력이형성되어갔는지알수있을것이다. 인천 김포지역에서도최근에다수의초기철기시대무덤들이조사되어이지역에마한이전에지역집단이존속하고있었음을알수있다. 검암동의계양산가지능선에서조사된 1기, 경서동구릉에서조사된 1기등기존에알려진자료에더하여최근검단신도시 Ⅲ지점과 Ⅴ지점에서 3기의무덤이추가로조사되었다. 대부분능선의정선부나상단부에조성되었으며평면형태는모두말각장방형이며등고선과직교하거나나란하게축조되었다. 규모는길이 2~2.5m 정도이고너비는 0.5~0.8m 정도이다. 그중경서동의것과검단 Ⅲ지점의 1기 Ⅴ지점의것등 3기는목관과묘광사이에할석을채워넣은적석목관묘이며, 검암동과검단 Ⅲ지점의 1기등 2기는점토를충전한토광목관이다. 내부의장구는남아있지않으나통나무목관또는상자형목관일것으로추정된다. 유물은세형동검, 흑도장경호, 원형점토대토기, 삼각형점토대토기, 무문토기 ( 호 ), 주조철부등이묘광과목관사이에부장되었다. 특히검암동과운양동유적에서는세형동검과삼각형점토대토기가공반되어이지역이문화적공백없이재지세력에의해원삼국시대묘제를수용하고있음을알수있다. 무덤이외에, 생활유적으로주거지, 수혈유구, 구등이다수확인되었다. 다수의무덤이조사된검암 Ⅲ지점과 Ⅴ지점에서조사된 2기의주거지는평면타원형과장방형이며길이 3.9~4.0m 규모이다. 내부에는타원형의무시설식노지, 수혈, 주혈등이확인되는등초기철기시대의보편적인주거구조이다. 주거지내부에서는삼각구연점토대토기편과무문토기편, 방추차형토제품, 석부등이출토되었다. 주거지인근에서함께조사된구 1기와수혈 3기에서도두형토기편, 무문토기편이출토되는등앞서무덤과같은시기에조성된생활유적이있었음을알수있다. 묘제와세형동검, 주조철부, 점토대토기, 흑도장경호등의유물조합관계로보아후기고조선 ( 위만조선 ) 단계의고조선유이민집단과의관련성이상정된다. 따라서인천 김포일대에는이지역에초기철기시대에이미재지세력에융합된지역집단이존속하였으며, 원삼국시대로접어들면서이지역집단들이새로운묘제를받아들여보다큰세력집단으로성장해갔다고할수있겠다. - 23 -
2. 원삼국 ~ 한성백제의유적군과지역집단의존재형태 지금까지한강하류역에서는인천불로동유적, 동양동유적, 중산동유적, 운북동유적, 운서동유적, 연희동유적, 검암동유적, 가정동유적, 김포운양동유적, 양곡동유적, 학운리유적, 등 2세기중후반 ~5세기초에이르는대 소규모의분묘군과분구묘, 목관묘, 목곽묘등다양한묘제가각지에서나타나고있는점으로보아대규모분묘군을중심으로하여취락과생산유적등이조합되어대규모거점유적군이장기간에걸쳐형성되었던것으로추정된다. 이거점유적군을중심으로여러세력들이존속하고있었던것으로추정된다. 사진 1 한강하류역초기철기시대 ~ 백제초기출토유적 인천지역의경우, 강화도대룡리유적을중심으로한주변의북부도서유적군, 운남동유적을중심으로시도패총 여차리유적등이군을이루는남부도서유적군, 문학산성을중심으로구월동유적, 문학동유적 선학동유적 도림동유적 남촌동유적등이군을이루는문학산성유적군, 계양산성을중심으로남쪽의장금도패총 연희동유적이군을이루는연희동유적군, 계양산성북쪽의원당동유적 불로동유적등이군을이루는불로동유적군, 계양산성남동쪽교통로상의평지에있는동양동유적군등여러단위의유적군이확인되는것으로보아이들유적군을중심으로크고작은세력들이존속하고있었던것으로추정된다. - 24 -
지도 1 한강하류역원삼국 ~ 백제초기유적군 (1. 김포양곡 2. 김포구래동 3. 김포양촌 4. 김포운양동 5. 인천동양동 6. 인천연희동 7. 인천중산동 8. 인천운서동 9. 인천구월동 10. 화성요리 11. 강화여차리 12. 시도패총 13. 인천운남동 14. 양곡동 15. 인천원당동 16. 인천불로동 17. 장금도패총 18. 동양동 19. 인천문학동, 20. 인천도림동, 21. 인천남촌동, 22. 인천선학동 23. 김포검암동 24. 계양산성 25. 문학산성 26. 시흥은계, 매화지구 ) 강화도를중심으로한북부도서유적군의대룡리유적에서는수혈유구 15기와경질무문토기, 타날문토기등원삼국 ~ 백제초기의유구 유물들이확인되어이곳에물류집산기능을하는취락이있었음을알수있다. 해안의항 포구에면해있는것으로보아해안을낀물류운송기능한해안취락으로추정된다. 영종도를중심으로한남부도서유적군인시도패총과여차리유적에서는다량의원삼국시대타날문토기가출토되어일정규모의취락이형성되어있었을것으로추정된다. 영종도의중산동유적에서도방형주거지 1기가조사되고, 주거지내부에서심발형토기, 단경호, 대옹, 시루, 자배기, 쇠스랑, 철겸, 철부등한성백제1기의이른토기와철기가출토된것으로보아주변에백제취락이있었던것으로추정된다. 운남동유적은 A B지구의 6개소에걸쳐원삼국후기 한성백제1기의대단위패총이형성되었으며, 주거지 6기, 수혈유구 31기, 고상창고군으로추정되는수많은주혈등이넓은범위에걸쳐분포하고있어대규모생산 저장기능을한취락으로파악된다. 취락내에서다량의재와함께수금을끓이는제염유구도확인되어소금 - 25 -
생산과저장기능을한취락으로파악된다 ( 박순발 2009). 주거지와저장혈, 패총을비롯한유적전면에걸쳐경질무문토기, 타날문토기, 심발형토기, 대옹, 시루, 뚜껑, 원반형토제품, 제의토기등다량의생활 의례용토기가출토되어소금생산취락으로매우중요시되었음을알수있다. 출토유물중제의용관련유물이많은것으로보아소금생산과관련된제의가빈번하게행해진것으로추정된다. 문학산성일대는미추홀의본거지로비정되고있는데, 신라석축산성으로알려진문학산성내에서도타날문토기등백제토기가여러곳에서확인되는것으로보아신라석축산성축성이전의백제토성이있었을가능성이높다. 문학산성주변의구월동, 문학동, 선학동, 도림동, 남촌동일대에도광범위하게원삼국 ~ 백제타날문토기편들이확인되는것으로보아문학산성을거점으로하여주변에대단위유적군이형성되었음을알수있다. 특히문학산성남쪽의저평한구릉에형성된구월동유적에서는대규모청동기시대취락과함께 4주식방형주거지 10기, 저장수혈 21기, 목관또는목곽묘 17기등의취락 분묘유적이함께조사되었다. 17기의분묘는분구묘와목관묘등이혼재하는데, 분구묘가대부분이다. 주거지와저장수혈, 분묘에서는심발형토기, 타날문단경호, 경질무문시루, 회색연질단경호, 타날문단경호, 완, 견부문양대직구호, 무관 편관환두대도, 철제괭이, 철부, 철도자, 철겸, 재갈편 (?) 등 3세기후반 ~ 한성2기의이른시기유물들이다량출토되었다. 따라서문학산성유적군은평지의구월동유적을중심으로대규모취락, 분묘군이조성되어전체유적군을형성한것으로파악된다. 계양산성서쪽해안을배경으로형성된연희동유적군의장금도패총은남북 35m, 동서7m의대규모패총으로, 두터운패각과함께경질무문토기편, 타날문토기편등원삼국후기 ~ 백제초기의토기편들이다량출토되어동시기인연희동분묘군과밀접한관련을지닌취락이있었음을알수있다. 연희동유적은원삼국후기 ~ 백제한성기의주거지 8기, 분구묘 58기, 목관묘 2기, 옹관묘 4기등주거 취락이함께확인된대규모유적으로해안가의저평한지대에대단위취락과분묘군이형성되어있었음을알수있다. 많은주혈군들이주거지주변에서확인되는것으로보아운남동유적과같이서해연안에대규모소금생산취락이형성되었을가능성도있다. 분묘군은취락상부경사면또는평지에광범위하게조성되었는데, 상부가삭평되어일부만잔존하는것이대부분인것으로보아훨씬대규모의분묘군이조성되었던것으로추정된다. 주거지와무덤내부에서는수정구슬, 경질무문심발형토기, 경질무문토기외반구연옹, 장란형토기, 타날문단경호, 양이부호, 이중구연토기, ( 거치문장식 ) 연질뚜껑, 자배기, 시루, 방추차, 철도자, 세장방형단조철부, 덩이쇠, 무경삼각형철촉, 삼각추형철 - 26 -
촉, 연미형철모, 편관환두대도등 3세기중후반 ~ 백제한성1기의장신구, 토기류, 철기류가다량출토되었다. 계양산성북쪽, 한강과의사이에형성된저평지대에입지한불로동유적군중불로동유적은해발 20~30m의잔구성구릉의대지에토기생산가마로추정되는소성유구 1기와저장수혈 11기가조사되어이곳에도토기생산시설과저장시설을포함한일정규모의취락이형성되어있었을것으로추정된다. 특히토기소성유구의바닥에대옹편이다량깔려있는것으로보아주로대옹을소성한것으로파악된다. 따라서주변에서조사된 11기의저장수혈과함께이취락이토기생산과농산물저장기능을겸비한중요취락임을알수있다. 그인근에있는원당동유적에서도원삼국 ~ 백제토기편이광범위하게산포하는것으로보아같은유적군에또다른취락이있었던것으로추정된다. 계양산성동쪽의한강지류인굴포천주변의충적대지에형성된동양동유적은아직주변에서다른유적이확인되지않고있으나지형조건으로보아동양동유적을중심으로하여일정단위의유적군이형성되었을가능성이높다. 청동기시대주거지와함께분구묘 1기와목관묘 4기가조사되었다. 분구묘의분구는 형이며매장시설은삭평되어잔존하지않는다. 주구안에서는적갈색연질발과소량의연질토기편이출토되었다. 목관묘는장축방향이등고선과직교하는 3호묘이외의 3기는모두등고선과나란하다. 무덤내부에서는타날문단경호, 회색연질단경호, 철도자, 불명철기등 3세기 ~4세기전반의유물들이출토되었다. 이상검토한바와같이인천지역에는크게 6개의원삼국 ~ 백제한성기의유적군이확인되며각유적군은지형에따라서도어느정도구분되고있으며, 일정한간격을유지하며분포하고있다. 앞으로의조사진전에따라서다소유동적일수있겠지만, 각유적군에크고작은세력들이점거하고있었다고해도크게틀리지는않을것이다. 김포지역의경우, 인천서구와의경계에취락 주거 분묘군이넓은범위로군을이루는검암동유적군, 그남쪽의한강변에군을이루는운양동유적군, 운양동유적이있는한강본류에서 10km 서측구릉에조성된양촌 양곡 구래동유적군등이현재까지확인되는유적군이다. 그외양촌유적군남쪽 8km 떨어진학운리분묘군도지형조건으로보아인근의양촌유적군과운양동유적군과별도의유적군으로분리될가능성이있지만분구묘 1기와모관묘 5기만단독으로조사되어더이상추적은불가능하다. 김포반도에위치하는검암동유적군은최근에행정구역상으로인천시에편입된지역이지만, 과거에는김포의중심지역이었다. 따라서여기서는검암동유적군을김포 - 27 -
지역에포함시켜검토하고자한다. 두유적군모두인천지역유적군에비해광범위하고대규모유적군으로서규모와출토유물등으로보아인천 김포일대에서가장큰중심유적군으로파악된다. 따라서이들유적군에한강하류역의김포 인천일대에서가장유력한세력이점거하고있었다고할수있겠다. 사진 2 김포운양동유적 지도 2 김포운양동유적운양동유적군은운양동유적을중심으로그하부의구릉기슭에서확인된주거지 들이포함된다. 주거지는방형 장방형주거지로서분묘군출토유물과같은시기 의유물들이출토되어분묘군과같은시기의취락이주변에취락이형성되어있었 음을알수있다. 운양동분묘군은한강강안의해발 73m 의모담산정상부릉선평 탄부에조성된대규모분묘군이다. 총 39 기의분묘중 32 기가 형주구를두른분 구묘이고나머지 3 기는단순목관묘이다. 무덤내에서금제이식, 수정, 다량의유리 옥등의장신구와철장검, 환두대도, 철모, 철촉, 철부, 철겸, U 자형구등많은철기 류와타날문단경호, 회색연질호, 양이부호, 대옹등의토기류가출토되었다. 출토유 물로보아 2 세기중후반 ~4 세기전반에걸쳐조성된것으로추정된다. 특히금제이 식과철장검, 회백색옹, 수정, 흑옥등장신구류와토기, 무기류에부여 고구려, 낙랑또는대방군지역에서유래하는외래계유물이많은점이주목된다. - 28 -
사진 3 김포양촌유적양촌유적군의대표인양촌유적은한강본류에서 10km 떨어진해발 20~30m 의 낮은구릉에조성되었다. 3 개의지점에서원삼국 ~ 백제초기의분묘 39 기가조사되었 는데, 32 기는분구묘, 나머지 7 기는단순목관묘로서분구묘가월등히많다. 무덤내 부에서는환두대도, 철모, 철촉등의무기류와심발형토기, 원저단경호등의토기류 와유리구슬다수가출토되었다. 양촌분묘군에서도백색옹과금박유리구슬등외래 계유물이출토되고, 분구묘중에합장묘도있는점이주목된다. 사진 4 김포양곡유적 - 29 -
양촌유적과동일한구릉으로이어지는양곡유적은김포반도중심부의낮은구릉사면말단부에조성되었다. 분구묘 8기, 목관묘 1기등의분묘군과함께능선하부의평지에서같은시기의유물이출토되는주거지, 수혈, 구상유구도조사되어저지대에취락이형성되어있었음을알수있다. 무덤안에서는환두대도, 철모, 단경호, 대옹등의철제무기와토기류가출토되었으며, 1지구 3호묘에서는외래계의이조선주조철부가출토되기도하였다. 출토유물로보아원삼국후기 ~4세기전반에걸쳐조성된것으로추정된다. 사진 5 김포구래동유적양촌 양곡분묘군과인접한곳에위치하는구래동유적에서는분구묘 2 기가조사 되었는데, 주구내부에서대옹편이출토되어양촌 양곡분묘군과같은시기에조성 되었음을알수있다. 이와같이같은릉선에서로연접되어있는이세분묘군은 같은집단에의해조성된대단위분묘군일가능성이높다. 검단신도시개발지역에넓게분포하는검암동유적군은주거지, 토기가마, 저장수 혈, 구상유구, 분묘등이넓은범위에걸쳐산재하는형태로조사되어취락의존재 여부를파악하기어렵지만주거지, 저장시설, 토기생산시설이갖추어져있는것으로 보아이곳에대단위의취락이형성되었을것으로추정된다. 주거지는 Ⅳ 지점과 Ⅰ 지점에서각각 1 기씩조사되었는데, 평면장방형또는타원형이며, 장축과나란하게 4 개또는 3 개의주혈이설치된구조이다. 2 기모두내부에서타날문토기편이출토 되어한성백제의수혈주거지로파악된다. 원삼국 ~ 한성백제의수혈유구는대부분 1~4 기씩소수로확인되지만, 중부 23 지점에서는 10 기가군을이루고있어이곳에 - 30 -
취락과관련된저장창고군이조성되었음을알수있다. 저장수혈은해발 30~41m의사면에군을이루고있는데, 기본적으로평면원형, 단면플라스크형으로이시기의전형적인저장혈형태이다. 규모는바닥지름 1.67~4.6m, 깊이는최대 3.4m로깊은것도있다. 저장수혈안에서는원저단경호편, 고배편, 삼족기편, 소호편, 병구연부편, 심발형토기편등주로한성Ⅱ기의이른시기유물들이출토되어검암동유적군이원삼국후기부터한성2기의이른시기까지장기간점유되고있었음을알수있다. 그외대동조사구역에서 90여기가한곳에밀집된소형수혈유구는저장수혈이아니라주거지의주혈또는고상창고군의주혈로파악된다. 주혈군이입지하는곳이저지대이고, 원삼국 ~ 백제토기가다량포함된유기물퇴적층언저리에입지하고있는것으로보아고상창고군의주혈일가능성이높다. 유물은회백색연질토기, 뚜껑, 흑색마연토기, 파수, 시루, 대호, 타날문호등원삼국후기 ~ 한성백제 1기의토기류가다량출토되었다. 취락내의생산시설인토기가마는대동Ⅰ-6지점에만 1기가조사되었다. 평면장타원형의등요로서요전부, 아궁이, 연소실, 소성실로이루어져있으며, 잔존길이 7.6m, 너비 1.8m 정도이다. 소성실과연소실바닥면에남아있는타날문토기편으로보아원삼국후기에조성된것으로추정된다. 분묘는분구묘, 목곽묘, 목관묘, 석곽묘등이각조사단의조사구역별로집중또는산발적으로분포하고있는데, 원래는몇개단위로분묘군을이루고있었을것이다. 분구묘는중앙 9기 ( 한성 1기 ), 충청 8기 ( 원삼국후기 ), 대동 11기 ( 원삼국후기 ~5세기초 ) 등총 27기가확인되었다. 대개구릉의정상부나능선의평탄면, 사면부에입지하고기본적으로 형주구와매장주체부로구성되었다. 매장시설이확인된것은충청 7기와중앙 4기, 대동 3기정도이고나머지는삭평되어주구만확인되었다. 매장시설인토광은 1분구내에 1기인것이대부분이지만, 중앙사지구 8호묘는 3기, 1호묘는 7기까지확인되는등 1 분구다장묘도다수확인되었다. 토광안에는대개목관이안치되거나목곽 ( 충청4-4 지역 2호묘와 4호묘 ) 이설치되었지만, 운양동등다른분묘군에비해목관 목곽묘와함께분구묘의매장시설에도목곽이많은점이특징이다. 매장시설은등고선과나란하거나직교하는것모두분구의중앙에위치하지만, 7기의매장시설이확인된중앙사지구 1호묘의경우 5기는주구로구획된분구내에, 2기는서편주구내에배치되어있어다장묘의순차적인매장프로세스를파악할수있다. 매장주체부의장축방향은주구와중첩된 1-7호묘만등고선과나란히배치되었으며, 1-1~6호묘는등고선과직교되도록배치되었다. 매장주체부의규모는길이 2.2~3.3m 가량이지만충청 4-4지역 2호는묘광의길이가 4.09m에이른다. 유물은단경호, 직구호, 완등의한성백제토기가출토되고, 철기류는환두도자, 철겸, 철부, 철도자가출토되 - 31 -
었다. 주구의평면형태는기본적으로방형이나장방형으로파악되지만대부분잔존상태가불량하여일부만남은것이많다. 주구의규모는길이 15m 이하인것이대부분이지만, 최대 30m( 대동Ⅰ-7지점 B구역 2호묘 ) 23.86m( 충청4-4지역 2호묘 ) 에이르는초대형인것도있다. 특히대동Ⅰ-7지점 B구역 2호묘의주구는 1.5m 이상으로깊으며, 주구내부를장타원형단위로구획굴착한형태이다. 매장주체부는길이 5.25m 규모이며, 내부에서는대형의천하석제관옥 10여점, 타날문토기, 철장검, 철모, 철촉등이출토되었다. 목곽내에서출토된철검은양단부가반전된청동제검격이부착된대형의철장검으로묘광의규모와대형의천하석제관옥, 다수의철모, 철촉등과함께검암동분묘군에서위상이가장높은무덤으로파악된다. 또 A구역제1호분구묘의목곽내부한쪽장벽에는길이 2.2m 정도의철병철창과대형철장검, 환두도, 철촉등무기류를서로엇갈리게포개어나란히부장하였는데, 이러와꼭같은형태의철창과철장검을같은방법으로부장한예가최근충남연기의행정중심복합도시 5생활권부지내유적에서도확인되어두지역간에밀접한관련이있음을보여주고있다. 분구묘외에도목곽묘를비롯하여목관묘와석곽묘도소수조사되었다. 목곽묘는 11기가조사되었는데, 모두대동조사지역에서확인되었다. Ⅲ-3지점에서 6기 (A구역 3기, B구역 3기 ),Ⅰ-7지점에서 5기 (A구역 3기, B구역 2기 ) 가조사되었다. Ⅲ-3 지점 B구역중앙부와동편사면부에각각 3기씩군을이루고있으나, 나머지는분산되어있다. 장축방향은등고선방향과평행하며, 묘광과목곽사이에는사질점토를채워충전하였다. 묘광의규모는길이 2~3m, 너비 0.75~1.85m 정도이다. 유물은 Ⅲ-3지점 B구역 1 3호묘와같이출토되지않는것도있지만, 주로단경호, 호, 옹등의토기류와철촉, 철검, 철부, 철모, 철도자등의철기류, 방추차등이출토되었다. 목관묘는호남Ⅱ-6지점에서확인되었는데, 2기가등고선과나란하게조성되었다. 규모는길이 298cm 306cm이며, 1호묘에서철장검, 철촉, 철모등이출토되었다. 그외석곽묘도중앙바지구에서 1기가조사되었는데, 백제의석곽묘로파악되고있다. 백제석곽묘가확실하다면인천 김포지역에서처음으로알려진유일한석곽묘이다. 이상에서검토한바와같이한강과서해안을낀김포지역에형성되어있는유적군을근거로김포지역에는 3~4개의지역집단이존속하고있었다고할수있겠다. 이와같이한강하류역의원삼국 ~ 한성백제의분구묘와단순목관 목곽묘권은크게한강을낀강안권역과서해연안을낀해안권역으로나뉜다. 강안권역은한강이북의망월산과이남의봉제산-춘덕산-소래산-만월산-원적산-천마산-계양산-가현산을경계로하여그서쪽에인천동양동유적군, 김포운양동 양곡리유적군 검암 - 32 -
동유적군이분포하고있다. 이지역권은대규모분구묘가확인된김포운양동 양곡리유적군과검암동유적군이중심지로파악된다. 이권역은묘제및매장시설의수에따라하류역은 1분구단장묘가대부분이었으나검암동유적군에서는새로 1분구다장묘가확인됨으로써백제중앙인중류역묘제의영향을받고있음을알수있다. 즉검암동유적의경우한강중류역의백제중앙고분군에서나타나는 1분구다장묘로서분구선행형묘제이고, 분구내의묘광에목관을안치한점, 원저단경호등한성백제토기도출토되는점등, 백제중앙묘제의영향을받았음을알수있다. 따라서이시기에중류역과하류역은서로유기적인관계를형성하고있었던것으로파악된다. 한편해안권역에는한강이남의소래산-망월산-천마산-계양산-가현산지맥의서남쪽에위치하는인천연희동 중산동 운서동유적, 김포학운리유적등이포함된다. 이중중심지는무관환두대도와수정옥이출토된 2세기후반의인천운서동유적에서 3세기전반이후인천연희동유적으로유적군의중심지가이동한것으로판단된다. 이상에서검토한바와같이인천 김포지역에는 10여개의지역집단이할거하고있었으며, 정치적 문화적유대관계에따라 2~3개의지역집단이연합하여마한소국의일원이되었을것으로추찰된다. - 33 -
Ⅲ. 철제무기의대량유입배경과지역집단의성격 앞에서인천 김포지역에는 10여개의유적군을바탕으로 10여개의소단위지역집단이있었으며, 지정학적 문화적유대관계에따라인접한 2~3개의소단위정치체가연합된형태의 3~4개의대단위정치체들이존재했던것으로파악하였다. 그러나이들각지역집단은물론, 인천 김포지역간에도묘제나출토유물상으로구분이되지않는공통적인문화양상을보이고있다. 한강하류전역에 2세기중후반 ~5세기초에이르기까지분구묘가중심을이루면서목관묘와목곽묘도축조되고, 출토유물또한같은변화양상을보인다. 특히이지역의특징인철제무기의대량부장현상이운동 양촌 검암동유적군에특히집중되지만, 한강하류전역에서나타난다. 도표 1 철제무기의 3 단계변화과정 이지역철제무기의변화과정역시전역에서 3단계의변화과정이간취된다. 그리고철제무기의계통도북방의부여 고구려, 북한강유역, 경기남부, 충청내륙지역등마한제지역과영남의진변한계등다양한계통으로구성되어있다. 철제농공구에까지확대하면서해안지역과호남지역계통의철기까지확인된다. 따라서여기서는한강하류역집단이철제무기를다원적으로공급받게된배경을각단계별철제무기의변화과정과접맥시켜검토해봄으로써한강하류역집단의성격과무기집중의배경을알아보고자한다. - 34 -
철제무기의변화와대량집중현상을검토하기에앞서이지역에서의철제무기생산여부를검토할필요가있다. 지금까지한강하류역에서제철유적과철제무기의생산흔적은취락과분묘유적을통틀어확인되지않는다. 철제무기생산유적이확인되지않는것은이지역에서철제무기제작이이루어지지않았을개연성을말해준다. 그럼에도불구하고마한권역의다른지역에는철제무기가빈약한것과는달리, 고유묘제인분구묘를중심으로철제무기가대량으로출토된다. 이러한정황은이지역에서대량으로출토되는철제무기들이외부로부터유입되었을개연성을말해준다. 실제철촉 철장검 환두대도 철모형식이진변한지역이나충청내륙 경기지역의철제무기형식과같다는점에서외부로부터유입되었을개연성을높여준다. 이지역에서출토되는토기나장신구는모두가서북한지역의낙랑 대방군계통인데비하여유독철제무기와농공구는한강이남의여러지역으로부터단원적으로유입된양상으로나타난다. 따라서한강하류역지역집단이주변의여러지역과다원적으로교류했음을알수있다. 그러나외래계유물중장신구나화폐, 생활용토기등이단발적으로유입된것과전쟁무기이자금수품인철제무기가삼한의여러지역으로부터대량으로, 지속적으로유입된것은그배경이전혀다른것으로보아야한다. 전자를정치 경제적교류의산물로볼수있다면 ( 김무중 2006 2012, 김기옥 2016), 후자는단순한교류의결과가아니라정치 경제적으로한강하류역정치체에대한대대적지원또는원조에의한것이라할수있다 ( 김길식 2013). 그렇다면이러한철제무기들이유독이지역에만근 원거리로부터다원적이면서도대량으로유입되어집중되게된배경과, 이를활용하고소비한한강하류지역집단의실체와성격이궁금해진다. 외래계철제무기들이대량으로집중되는김포운양동 양촌리 양곡리 검암동유적과인천운서동유적등은약간의시기차는있지만대체로 2세기중후반 ~3세기중후반을중심으로조성된대규모분묘군이다. 또이들분묘군의중심묘제는이지역의독자적묘제인분구묘이며, 분묘군간에무기부장량의경중과무기구성에약간씩의차이는있지만모두외래계의철제무기들이대량으로집중되는공통적인특징이나타난다. 이러한현상은곧김포 인천지역을중심으로한한강하류역일대가크게보아동질적인정치 문화집단을이루고있었음을나타낸다. 그렇다면이들유적들이집중되는 2세기중후반 ~3세기중후반경까지이지역에존속하였던정치집단은누구일까? 결론부터말하면신분고국일가능성이높다. 신분고국의위치에대해서는그간에많은논란이있었으나문헌사학계에서는대개한강하류역의인천 강화일대로비정하는것이대세이며 ( 이병도 1976, 천관우 1979, 문안식 1995), 고고학계에서는종전에는중도문화유형의분포권역에속하는 - 35 -
임진강유역일대와 ( 윤선태 2001, 권오영 2009 2015) 인천 강화지역 ( 박순발, 2013) 등크게 2가지견해로수렴되고있다. 철제무기의출토양상과변화과정으로보면후자의개연성이높다. 왜냐하면한강이나임진강유역의다른제지역과는달리유독이지역에서만다원적인철제무기들이대량으로집중되고, 주변의제정치집단들과근 원거리교류 교역을할수있는지정학적이점을가지고있는곳이기때문이다. 이러한요건을두루갖춘한강과서해연안을동시에끼고있는한강하류역의김포 인천지역이가장유력한지역이다. 또한강유역에서이러한철제무기들을근 원거리에서대량으로, 집중적으로공급받을수있었던위치에있었던집단은마한 54국중에서도가장큰세력을형성하고있었던정치집단으로추찰되기때문이다. 한강유역에서큰세력을형성한소국은백제국과신분고국이부각되지만 ( 권오영 2009), 그중백제국은한강중류의서울송파일대를중심으로하여백제국가로성장 발전해갔던세력이므로 ( 권오영 2016), 한강하류역의유력세력은자연히신분고국으로특정된다. 그렇다면한강유역중에서도한강하류역에근 원거리에서유입된철제무기들이대량으로집중되게된배경이궁금하다. 이문제는이지역이신분고국으로특정되는이상, 필시신분고국의역사적향방과직접적으로연동될것이다. 문헌에전하는바와같이기리영전투는 234년신분고국의선제공격으로대방군과벌였던대규모전쟁으로 ( 윤선태 2001) 전삼한사회에동요를일으킬정도로삼한사회에직 간접적으로많은영향을미쳤던전쟁이다 ( 윤용구 1999). 그기리영전투의직접수행당사자가신분고국이었다 ( 이정빈 2016). 인천운서동유적출토철기를통해서알수있는바와같이한강하류역에서도기원전 1세기부터서북한지역에서내려와정착한낙랑계주민들에의해선진철기제작기술을바탕으로하여철기생산이이루어졌을가능성은있다 ( 김무중 2013). 그렇지만운서동유적의경우도한강유역의다른철기생산유적과마찬가지로철제무기의생산흔적은확인되지않고, 철제농공구를비롯한생활용품만생산했던흔적만일부나타난다 ( 김무중 2013). 그이후한강하류역에서는철기생산유적은확인되지않으며, 운양동이나운서동 Ⅰ유적 2지점분구묘를비롯한이른시기의철제농공구와무경역자형철촉, 무경릉형철촉이이보다이른시기인북한강유역의가평대성리, 춘천중도동유적에서출토되는것과것아북한강유역의중도유형문화권역의유력집단으로부터공급받았던것으로보인다. 따라서한강하류역에서는철제무기에관한한, 자체적으로제작하여충당했다기보다는대부분외부에서유입된것으로보아도좋을것이다. 이지역에서기원전 1세기단계부터선진의철기제작기술을가진주민또는철기자체가유입되어농공구를비롯한생활용철기들이제작되기시작했음에도불구하 - 36 -
고 ( 김무중 2012) 그이후에는자체적인철기생산흔적이보이지않는이유를알수없지만, 철제농공구등의생활용철기의생산유적과실물자료는있으되, 일부형식의철촉이외의철제무기가거의확인되지않는것은한강하류역을포함한한강유역전역에철제무기생산과소유를제한하는무언가의힘이작용하고있었던결과로해석된다 ( 이남규 2005). 한강유역전역에서철제무기와그생산유적이부재하는상황에서한강하류역에만돌연히원삼국후기부터외래의철제무기가대량으로집중되는현상이나타나는것이다. 전술한바와같이이지역에 2세기중후반경부터영남의진변한지역을중심으로, 주변의여러지역으로부터철제무기들이유입되지만, 근 원거리의여러지역으로부터이전시기의철촉 철모이외에환두대도 소도 다양한형식의철모등이대량으로, 집중적으로유입되는시기는 3세기전 중엽이다. 이시기는기리영전투가벌어졌던시기와바로일치한다. 물론이러한철제무기가근 원거리에서다원적으로유입되어집중되는배경이비단기리영전투하나때문만이아닐것임은말할필요도없겠으나, 기리영전투가미친파장으로보아 ( 이정빈 2016) 이와같은대규모전쟁이근 원거리의다원적인무기공급과집중화의중요한배경이되었음은분명해보인다. 그런데한강하류역에서대량으로출토되는철제무기들이이른시기에북한강유역에서유입된철촉일부를제외하고는대부분이전기간동안가장먼거리인진변한계통의철제무기라는점이주목된다 ( 김새봄 2014). 물론한강하류역이외의마한권역의여러지역에서도한강하류역만큼은아니지만, 진변한계철제무기들이많이출토되고있다는사실이다 ( 이용범 2015). 시기차와출토량의경중은있겠지만, 금강이북의마한권역에서도보편적으로출토되는추세에있다. 그러나같은마한권역이라하더라도한강이북지역과금강이남의서남해안지역에서는진변한계철제무기가거의출토되지않는다. 진변한계철제무기의이러한분포양상은진변한계철제무기가분포하는지역과그렇지않은지역의사회분위기가달랐음을말해준다. 진변한계철제무기의북한계가한강하류역이고, 한강유역의다른지역에는철제무기가부재하는데비해, 이지역에만남쪽원거리에있는진변한계철제무기가대량으로집중하는현상은한강하류역의유력집단이그북쪽에있던모종의정치집단과군사적인대치상태또는전쟁분위기에있었음을말해주며, 그들이곧전쟁수행주체였음을말해준다. 반면에금강하류역의서남해안지역에서는철정과단야구, 철기생산유적등이다수확인되고 ( 김권일 2012, 최영민 2016), 영남지역과는다른특징을보이는철제무기들이나타나고있어철제무기를포함한철기들은이지역자체에서제작하여 - 37 -
수급한것으로생각된다. 또철촉 철모 철검 환두대도 소도등의기본적인무기체계는갖추어졌다하더라도금강이북지역에비해서는비중이낮을뿐만아니라농공구보다도출토량이적다. 따라서이지역은철및철제무기생산이활발하였던진변한지역으로부터그다지철제무기를수입할필요성이없었던사회분위기였다고할수있겠다. 반면에금강이북의경우경기남부, 충청내륙, 서해안지역을중심으로원삼국후기 ~4세기전반에해당하는많은유적에서진변한계철제무기들이다량출토되고있어같은계통의철제무기가대량유입된한강하류역과의관계가주목된다. 금강이북지역중에서도천안청당동 아산용두리 밖지므레 오산궐동 평택마두리유적등한강하류역에가까운지역일수록진변한계철제무기의출토량과유적이증가하는현상이간취된다. 반면에금강유역과그에가까운지역에서는진변한계철제무기가출토되기는하지만그출토빈도가낮고유적수도적다. 이와더불어이지역에서는철제무기를비롯한철기제작소재인철정이다수출토되고, 원삼국시대후기의철기생산유적도다수확인되어철제무기와농공구를자체제작하면서도, 일부는일찍부터철제무기의생산이활발하였던진변한지역에서도수입하여활용하였던것으로이해된다. 따라서마한권역은 1진변한지역철제무기를중심으로외부의여러지역으로부터전적으로수입하여확보한지역, 2자체생산무기와진변한지역무기가함께수급된지역, 3외래무기는거의없고대부분자체생산에의존한지역등크게 3지역으로나누어짐을알수있다. 그중 2의경우는그경중과철기생산관련유적및유물의존부에따라서다시두지역으로나누어진다 ( 김길식 2013). 앞서논의한바와같이 3세기전 중엽에들어서한강하류역에, 같은마한권역인경기남부, 충청내륙, 서해안지역으로부터철제무기뿐만아니라재지농공구류와함께진변한계의철제무기류도간접적으로유입되었다는것은이들지역의유력세력들이한강하류지역집단과밀접한관계망을형성하고, 진변한지역의철제무기들을직 간접적으로공급해주는중계자역할을했음을말해준다. 따라서한강하류역의진변한계철제무기들은진변한지역과직접적인교류 교섭에의해확보된것이외에, 이들지역의유력한중계자들에의해간접적으로공급받은것들도높은비중을차지하였다고할수있겠다. 특히그중에서도충청내륙과경기남부지역에서도진변한계통의철제무기들이다량출토되는것으로보아 ( 김길식 2016) 이지역세력의역할이컸다고할수있겠다. 그러므로한강하류역에서출토되는진변한계철제무기들을진변한지역과의직접적이고단선적인교류 교섭에의해서만유입되었다고보아서는안될것이다. - 38 -
이러한의미에서천안 아산지역에존속하였던것으로비정되는목지국의역할이주목된다. 목지국은마한 54국의맹주격으로진변한지역에까지세력을떨쳤다고할정도로당시마한사회뿐만아니라진변한사회에까지그영향력이막대하였다. 이와함께 변진의풍부한철을한에서가져가고, 변진의병장기가마한의그것과같았다 는동이전기록등의역사적정황은마한의철제무기와진변한의철제무기사이에밀접한상관관계가있었음을알려준다. 이러한역사적정황을한강하류역과경기남부 충청내륙 서해안지역에서출토되는진변한계철제무기의출토맥락과접목시켜보면목지국세력이구심체가되어한강하류역의유력세력, 즉신분고국에게마한재지의무기와함께진변한지역철제무기도간접적으로공급했던것으로귀결된다. 그렇다면이들제지역의유력집단들이대거가세하여한강하류역의신분고국에게대량의철제무기들을, 특히 3세기전 중엽에집중적으로공급하게된이유가궁금하다. 우선이들제집단자신들의필요때문이었겠지만, 앞서논의한바와같이일부지역을제외한삼한사회전역에이시기에들어서철제무기가다양화되고수량이폭증하는것과도무관하지않을것이다. 이시기에삼한사회전역에이러한현상이나타나는것은삼한사회대부분이전쟁의위기감에휩싸여있었던사정을반영하는것이아닌가한다. 거기에는기리영전투와같은전삼한사회를동요시킨대규모전쟁이배경으로작용하고있었던것으로추찰된다. 기리영전투의주체는한강하류역의신분고국이었지만, 그남쪽에있던제집단들에게도엄청난파장으로다가왔을것이다. 따라서신분고국과인접해있으면서나름대로마한사회에서일정정도기득권을누리고있던목지국을비롯한제지역의유력집단들은그후방에서철제무기의보급을비롯한군사적인지원을적극적으로할수밖에없었을것이다. 최전선의신분고국으로하여금전쟁을효과적으로수행할수있도록지원해줌으로써자신들의생존과기득권을유지하고자했을것이다. 거기에다무기공급의반대급부로써창출되는경제적인이득도챙길수있었을것이다. 특히마한의맹주였던목지국은종전의기득권을지속적으로유지하는것이당면과제였을것이다. 이러한배경에서한강하류역에경기남부, 충청내륙, 서해안지역에서재지의무기를포함한진변한계철제무기들을직 간접적으로적극공급해주었던것이아닌가한다. 영남의진변한역시상대적으로멀리떨어져있기는하지만, 그전쟁의여파와마한목지국등의압력에의해철제무기를적극공급해주지않을수없었을것이다. 무기생산과공급의직접적인당사자였던진변한역시그반대급부로창출되는경제적이익도얻을수있었던것도그배경으로작용하였을것이다. - 39 -
Ⅳ. 백제의진출과묘제 출토유물의변화 앞서검토한인천 김포지역원삼국 ~ 한성백제분묘의묘제를정리하면초기철기시대토광목관묘계통을잇는단순목관묘와목곽묘, 그리고매장주체부주변에 형의주구를두른분구묘가주묘제였음을알수있다. 단순목관묘나목곽묘에비해분구묘의비중이월등히높고, 단순목관묘 목곽묘는마한 백제의전지역에서보편적으로확인되는기층묘제라는점에서분구묘가이지역의특징적인묘제였다고할수있다. 그중분구묘는주구를굴착하거나주변에서반입한흙을일정높이로쌓은다음, 성토층을장방형으로파내어매장시설을만들고그안에목관이나목곽을안치한형태의분구선행형묘제로서주로한강하류역의강안과해안의저구릉정상부에조성된다. 분묘군내에서무덤간의중복은거의확인되지않고, 일정한간격을유지하며배치되어전체분묘군의묘역을계획적으로조성하였음을알수있다. 한강과충적평야를낀강안지역에서는김포운양동 양촌 검단유적과같은대규모분묘군이분포하는반면, 해안지역의경우인천운서동 중산동유적과같이 5기이하의소규모로조성된점이특징이다. 이는이시기에한강하류역의김포일대강안을따라넓게형성된농경지를배경으로대규모정치집단이존재했음을시사한다. 특히이지역에서는다른지역에비해무기가월등히많이출토되어타지역출토무기류와의비교를통해이묘제의출현시기와분묘군의조성시기를어느정도파악할수있다. 그중가장이른것은김포운양동 1-11지점 12호분구묘와양곡리 2-1지점 H구역 2호분구묘, 2-3지점나구역 2호분구묘로파악된다. 운양동 12호묘에서출토된 U자형구는인부와이부의경계각이없어지고 ( 박경신 2011), 양곡리의두무덤에서출토된철겸은직인과곡인이모두포함되어있는등 2세기중후반 3세기전엽으로편년된다 ( 김도헌 2012). 김포양곡리 운양동 인천운서동유적에서출토된환두대도역시 2세기중후반 3세기전반에걸쳐나타나는환두대도의특징을가지고있다 ( 이보람 2009, 김승옥 2011). 청동제심부철장검, 유관직기형철모, 무관연미형철모, 삼각만입철촉, 궐수문철기, 이단관식직기형철모, 관부돌출직기형철모등의무기류도청주, 울산, 포항, 김해등지의원삼국시대후기분묘에부장된것들과같은특징을지니고있어이시기로속함을알수있다 ( 이용범 2015). 따라서한강하류역에분구묘가등장하는것은 2세기중후반부터라고할수있다. 그다음 3세기중엽 ~4세기에이르면한강하류역의분구묘는이전시기와비교했을때해안지역을중심으로확인되며, 그위치도점차남하하여인천연희동유적, - 40 -
김포학운리유적등지에분포한다. 그렇다고하여운양동분묘군, 양촌분묘군등기존의강안지역에조성된분묘군이단절되는것은아니다. 이분묘군들도 2세기중후반이후조성되어 3세기에최성기를이루지만, 3세기후반 ~4세기전반까지계속해서분묘가조영된다. 이러한현상은이시기에백제의진출과함께기존의강안유역에대한지배력을계속유지해가는가운데새로해안지역에대한지배와통제력을강화해나가기시작했음을의미한다. 즉 3세기후반 ~4세기전반, 백제의진출과함께원삼국단계까지수운교통과물류의중심기능을담당했던강안지역의통제를더욱강화하되, 서해연안의항 포구를이용한해상교통과물류운송에대한통제도강화한결과, 분묘군의분포변화가나타나게된것으로이해된다. 한편이시기의분묘군중인천연희동유적과검암동유적을제외하면 10기이상의대규모분묘군은확인되지않으며, 그입지도해안의평탄지또는얕은구릉의사면에조성된다. 검암동유적의경우 27기의분구묘가확인되었으나여러조사지역에 10기미만으로분산분포하고있어대규모분묘군이라고는할수없다. 인천연희동유적에서출토된환두대도와 3세기후반 4세기전반으로편년되는용인상갈동유적, 군포부곡동유적, 안성도기동유적등에서출토된환두대도와의비교를통해 ( 성정용 2000, 이보람 2009) 3세기후반 ~4세기전반을중심으로조성된분묘군으로파악된다. 이러한현상은이시기에들어서대규모분묘군조성이이루어지지못했음을시사한다. 이는 3세기후반또는 4세기전반에백제가이지역으로진출함에따라지역정치체의기반이해체되는것과연동되는것으로이해된다. 즉원삼국단계까지지역수장층을중심으로강한유대관계를가진지역단위정치체를유지하고있었으나백제의진출과함께기존의지역집단의유대관계가와해되어백제국가의지방지배체제로전환된결과로풀이된다. 3세기후반 ~4세기에전반백제가한강하류역에진출하면서백제토기도보편적으로출토된다. 그러나백제중앙양식토기도있지만, 중앙양식토기의영향을받아이지역에서제작된재지계토기가대부분이다. 이와함께지방지배형태를보여주는확실한백제성곽이보이지않는것도이러한토기의출토양상과맥을같이한다고할수있다. 계양산성, 문학산성등에서백제토기편이출토되어신라가축성한석축성곽이전에백제한성기산성 ( 토성?) 이축성되어있었을가능성을배제할수없으나, 현재까지나타나는양상으로는이지역에백제성곽이축성되었다고는할수있다. 이러한고고학적현상은백제가이지역으로진출하기는했지만, 그지배방식이거점적간접지배방식이아니었음을의미한다. 따라서 4세기전반까지이지역에대한백제의지배형태는느슨한직접지배형태였다고할수있다. 그후 4세기후반에서 5세기초가되면이지역에확실한중앙양식토기가대거나 - 41 -
타나고묘제또한중앙과관련되는묘제도나타난다. 즉가락동 석촌동고분군에서확인되는 ( 즙석 ) 분구묘와같은다장분구묘가나타난다. 김포검암지구마전동사구역에서조사된 2기의다장분구묘가그것이다. 그이전에김포운양동유적에서도다장의한유형이라고할수있는합장분구묘가조사된바있어이지역장제에이미다장관념이있었음을알수있다. 그런데이시기에나타나는합장묘는운양동유적등한강하류역분묘군에서출토되는금제이식, ( 청동검격부 ) 철장검등북방의부여계유물과함께 ( 김기옥 2012) 부여의보편적인묘제라는점에서 ( 차윤환 2011) 부여계묘제가부여관련유물과함께유입된것으로파악된다. 따라서이지역에 3세기단계부터합장묘를비롯한다장관념이있었다고할수있다. 그런데상기의마전동다장분구묘는매장방법이나출토유물에서그계통과유입배경이운양동합장분구묘와는달라보인다. 마전동 8호묘는 1분구에 3기, 1호묘는 1분구에 7기의매장시설이있는다장분구묘이다. 토광안에는대개목관이안치되었다. 1호묘의경우 5기의매장시설은주구로구획된분구내에, 2기는서편주구내에배치되어있다. 매장주체부의장축방향은주구와중첩된 1-7호묘만등고선과나란히배치되었으며, 1-1~6호묘는등고선과직교되도록배치되었다. 그런데 1-7호묘출토토기가다른매장시설에서출토된토기보다도빠른점이주목된다. 여기서출토된타날문단경호, 연질완이대체로 3세기후반 ~4세기전반으로편년된다 ( 土田純子 2014). 반면에다른 6기의매장시설에서출토된토기는 4세기전반 ~5세기초에이르는여러시기의토기들이포함되어있는것으로보아순차적으로추가매장이이루어진것으로보인다. 따라서이다장분구묘도첫출발은이지역에서보편적으로나타나는 1분구단독장에서출발하여누세대에걸친가족묘로조성되었을가능성이높다. 3기의매장시설이 1분구내에나란히축조된 8호묘역시처음에는 1분구단독장에서순차적으로추가매장이이루어졌을것이다. 향후각매장시설의구조와출토유물과의면밀한비교검토가필요하다. 이와같은다장분구묘는백제중앙지배집단의고분군인서울가락동 석촌동고분군에서도조사된바있어두지역이밀접한관계에있었음을알수있다. 석촌동 3호분동쪽고분군과가락동 2호분등이다장분구묘이다. 석촌동3호분동쪽고분군에서확인된다장묘는즙석분구묘이다. 그중 1기는 1분구에토광목관묘, 토광옹관묘, 토광적석묘, 석곽옹관묘등 10기의매장시설이순차적으로매장된다장분구묘이며, 다른 1기역시 1분구에 5기의토광목관묘가순차적으로매장된즙석분구묘이다. 가락동2호분역시 4기의토광목관묘, 토광옹관묘가순차적으로매장된즙석분구묘이다. 서울지역다장분구묘의매장원리는기본적으로한강하류역에서나타나는성토분구묘와같으나분구축조마지막단계에할석또는천석을즙석한점이차이이다. 즙석을제외하면김포마전동다장분구묘와같은구조와매장원리이다. 분구의외형역시가락동 2호다장분구묘에서확인된 - 42 -
바와같이방대형으로한강하류역의그것과같다. 또석촌동 3호분동쪽 B지역대형토광내다장목관묘와같은형태의다장목관묘가길림성유수로하심중층유적 통화만발발자유적과요녕성윤가촌상층유적등에서확인되고있다 ( 차윤환 2011, 이종수 2017). 특히압록강중 상류역에위치하는통화만발발자유적은이른시기의고구려유적으로이유적에서확인된대형토광내다장목관묘는한강중류역의것보다규모가더크지만형태와구조는같으며, 매장시설의배치형태역시유사하다. 따라서각락동 석촌동고분군의다장분구묘와내형토광내다장묘는부여-고구려계묘제로서백제지배집단의남하에수반되어백제중앙으로유입된묘제라고할수있겠다. 한강하류역에서나타나는다장분구묘는백제중앙의다장분구묘와같은구조이고 3세기후반 5세기초의백제중앙양식토기를동반하는것으로보아백제중앙으로부터파급된묘제임을알수있다. 따라서한강하류역에서나타나는다장분구묘는백제의한강하류역진출과그이후의지방지배과정을반영하는중요한자료임에틀림없다. 그런데한강하류역에서는백제가지방지배를강화하는과정에서각거점지역으로확산되는횡혈식석실분과금동관, 이식, 금동식리, 중국청자등과같은위세품들은전혀출토되지않는다. 이러한현상은한강하류역이그이전에백제의직접지배권에들어갔기때문일것이다 ( 土田純子 2015). 즉한강하류역은늦어도 4세기전반경에는백제의직접지배체제에들어와굳이중앙지배층의묘제인횡혈식석실분의보급이나위세품사여를통한거점적간접지배를할필요성이없었다고 ( 이한상 2009) 할수있겠다. - 43 -
Ⅴ. 맺음말 한강하류역의김포 인천지역은김포반도의넓은충적평야와넓고완만한해안지역을배경으로중부지역최대의농업생산력과소금생산력을가진지역인데다내륙으로통하는대하천인한강본류와서해연안에발달한항 포구를끼고있어수운과물류의관문으로서고대정치집단들에게어느지역보다도중요시되었던지역이었다. 이러한천혜의환경조건을배경으로형성된유적군의존재형태에따라서원삼국시대 ~ 백제초기에인천 김포지역에는 10여개의소단위지역집단이존속하고있었으며, 이들은지정학적 문화적유대관계에따라인접한 2~3개의지역집단이연합되어 3~4개의대단위지역집단이존속하였던것으로파악되었다. 그중하나가한강남안의김포검암동 운양동 양촌유적군을중심으로존속했던것으로추정되는신분고국일가능성이타진되었다. 원삼국후기 ~ 백제초기한강하류역의묘제는분구묘 목관묘 목관묘등이혼재하지만, 분구묘의비중이월등히높아중심묘제는분구묘로파악되었다. 다만다른지역에비해목관묘와목곽묘의비중이상대적으로높은점이지역적특징이라고할수있다. 그러나 2세기후반 ~3세기의이른시기의목관 목곽묘는분구묘와같이등고선에평행한형태지만, 3세기후반 ~4세기전반이후에는등고선에직교하는형태의비중이높아지는것으로보아등고선에직교하는목관묘 목곽묘로이행하는것으로파악되었다. 재지의전통묘제인분구묘가지속되는가운데, 재지묘제에서지향하는매장주체부의장축방향과정반대인등고선직교장축방향의목관 목곽묘로변화하는것은이묘제에재지토기와함께백제토기또는그영향은받은토기의비중이높게나타나는현상과함께백제의진출에따른묘제변화로추정된다. 이와함께이시기에 3기 7기의매장시설이하나의분구내에순차적으로매장된다장분구묘도나타나는데, 이묘제는백제중앙인서울가락동 석촌동고분군에서도다수조사된바있고, 각매장시설안에서는 3세기후반 ~5세기초의재지토기와백제토기가출토되고있어백제중앙묘제가유입된것으로파악되었다. 이는 3세기후반이후의백제토기또는그영향을받은토기가점차증가하는현상과더불어이때부터이지역에백제의진출이이루어졌으며, 백제중앙과의관계가형성된것으로이해되었다. 그러나묘제와유물에나타나는백제적요소는확연하지않고, 그이후에도백제중앙양식토기는나타나지만, 거점적지방지배의상징물이라할수있는백제성곽과횡혈식석실분, 금동관, 이식, 금동신발등위세품들이확인되지않는것으로보아 3세기후반이래백제의진출과함께이루어진직접지배가일관되게작동한것으로이해되었다. - 44 -
한편김포운양동 양촌 인천검암동분묘군을중심으로한강하류역에서집중출토되는철제무기는여러지역에서다원적으로유입된것으로나타났다. 먼저 2세기중후반경한강하류역에철제무기가처음으로나타나는데, 이때부터북방의부여 고구려계통, 영남지역의진변한계통, 북한강유역의중도문화유형계통의철제무기가유입되기시작하였다. 그중 ( 검격부착 ) 철장검은그특징으로보아운양동분구묘에서함께출토된금제이식과함께부여 고구려계철장검으로파악되었다. 이는백제지배세력중비류집단의한강하류역 ( 미추홀 ) 입성과관련될가능성이높다. 그런데이시기에는부여 고구려계철장검에비해다른지역에서유입된철제무기는적어부여 고구려계지배집단이한강하류역에정착하여철기생산이활발하게이루어지고있었던북한강유역과진변한지역으로부터철제무기를확보하기시작한것으로추찰되었다. 그후 3세기전 중엽에이르면북한강유역과진변한지역이외에도, 경기남부, 충청내륙, 서해안지역등여러지역으로부터철제무기가대량유입된다. 특히진변한계철제무기가집중유입된다. 한강유역의다른지역에는철제무기가거의나타나지않는데비해, 유독한강하류역에만대량의철제무기가다원적으로집중유입된것은대규모전쟁수행에수반된것으로파악되었다. 그대규모전쟁은당시신분고국과대방군사이에벌어졌던기리영전투였으며, 전쟁의직접수행주체는신분고국이었다. 한강하류역에서출토되는철제무기가한강이남의여러지역으로부터다원적으로유입된것들이고, 기리영전투가벌어진곳과의지리적인위치, 한강하류역의지정학적위치등을종합해볼때, 한강하류역지역집단은신분고국일가능성이타진되었다. 진변한과마한의여러세력들이전쟁수행당사자인한강하류역의신분고국에게적극적으로철제무기를공급해준것은대규모전쟁으로부터스스로를방호함과동시에기득권의유지및전쟁의반대급부인경제적이득을얻기위함이었다. 특히마한의맹주국인천안 아산지역의목지국세력이무기공급의구심체역할을한것으로파악되었다. 그것은신분고국에게전쟁수행에필요한철제무기를적극지원해줌으로써그때까지누려왔던맹주국으로서의기득권을유지하기위함이었다. 그후 3세기후반 ~4세기경에도철제무기가소량유입되기는하였지만, 이전시기에비해무기가현격히감소하는등안정된사회분위기에접어든것으로이해되었다. 이시기이후에는무기가거의출토되지않고, 한성백제양식의토기들이함께나타나고있어, 이시기이후부터백제의직접적인영향력이미치고있었던것으로파악되었다. 이러한현상은묘제와다른출토유물의변화과정과도궤를같이하는것으로, 백제의본격적인지방지배가실현되어철제무기의소유와분묘부장을통제한결과나타나는현상으로이해되었다. - 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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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2 원삼국 ~ 백제초기한강하류지역집단의성격 - 김포 인천지역을중심으로 김무중 ( 중원문화재연구원원장 ) 발표자가머리말에정리한것처럼바다와내륙을연결하는최적의지형적조건을갖추고있어선사시대는물론고대에는중요한물류거점지역으로서매우중요시되었던지역이다. 현재는간척사업과대규모개발사업으로과거와는비교할수없을정도로지형변화가극심하다. 따라서 2000년대이후개발사업에수반한구제발굴조사의성과를통해고대의환경을유추할수밖에없다. 토론자는 2년전부터충청도지역에서활동하고있지만, 그전에는경기도지역이주된관심지역이었다. 주로김포 인천지역의원삼국 ~ 백제시대의묘제와철기를집중적으로연구하고있는발표자와함께공부하였으나, 오늘발표를통해새롭게조사 연구된자료와함께그간의연구성과를잘정리하여준덕분에많은공부가되었다. 이에대하여몇가지질문하면서토론자의소임을맡고자한다. 발표자는김포 인천지역에서조사된결과를정리하여 10여개의지역집단을상정하면서정치적 문화적유대관계에따라 2~3개의지역집단으로연합한마한소국의일원이었을가능성을염두에두고있다. 이와관련하여각유적군마다원삼국 ~ 백제시대까지연속되거나, 시간적으로공백, 또는단기간폐절등부침이달랐을것으로추정된다. 무덤이나취락혹은출토유물등유적군만으로과연지역집단을상정가능한지궁금하다. 이후 2~3개의마한소국을비정할때구체적으로어느지역을상정하고있는지궁금하다. 더불어원삼국이전과이후의사이에는기원전후부터기원후 2세기전반까지공백임을알수있다. 이러한현상을어떻게이해해야하는지의견을듣고자한다. 발표자는김포 인천지역의원삼국시대철제무기의변화를 3 단계의과정으로거 쳤음을지적하고있다. 1 단계 (2 세기중후반경 )~2 단계 (3 세기전 중엽 ) 의철제무기의 계통을북방의부여 고구려, 북한강유역, 경기남부, 충청내륙지역등마한제지 - 49 -
역과영남의진변한계등다양한계통으로구성되어있고, 철제농공구까지포함하면서해안지역과호남지역계통의철기까지확인된다고지적하고있다. 토론자도대체적으로공감하는바이나, 철제농공구와무경역자형철촉, 무경릉형철촉이북한강유역의중도문화권의유력집단에서공급받았다는지적은선뜻동의하기어렵다. 지면관계상상세한설명은생략하나비록철기생산유구 ( 단야공방, 대장간 ) 이확인되지않았지만편평한철편만가지고도간단하게제작이가능한유물이기때문이다. 더불어무기의종류와계통을보면 1단계와 2단계가크게변별되지않는데이에대한의견을부탁드린다. 또한이지역의철모, 장검등철제무기의대량유입배경을마한의맹주였던목지국이기득권을지속적으로유지하기위하여한강하류역, 경기남부, 충청내륙, 서해안지역에서재지의무기를포함한진변한계철제무기들을직 간접적으로공급해준것으로추정하고있다. 그러나진 변한지역의철모와유사한점은제외하고청동제검격 ( 손잡이윗부분 ) 이있는장검의경우는영남지역에서는보이지않는점과북방계장검이충청도청주정중리에서출토된바있어다르게해석하는것이좋지않을까한다. 또한발표자가언급하였듯이현재까지자료를토대로김포 인천지역의철기류는다양한계통의것들이혼재되어있다. 이러한양상을정치적인관점뿐만아니라경제적, 지리적인점등다양하게재검토할필요가있다고본다. 발표자가분류한 10여개의유적군에대한조사는최근에이루어진곳도있어차후정식보고서를기다려야하겠으나, 원삼국시대의묘제는지역성이뚜렷한ㅁ자형분구묘가주체로서군집을이루고있고, 백제시대에는목관묘와석곽묘가차츰확인되고있는점이주목된다. 이러한묘제변화는발표자가지적하였듯이이지역이백제의영향혹은지배권에편입되어가는문화상이라고설명할수있을것이다. 그런데백제중앙지역에서보이는횡혈식석실분이아직확인되지않고있다. 당시최상위계층의무덤인횡혈식석실분의부장유물에대한비교검토를통하여직접지배지역인지, 간접지배지역인지분명해질것으로생각된다. 혹시토론자가과문한탓인지모르나이에대한자료가있으면소개해주길바란다. 아울러백제시대의목관묘와석곽묘의분포양상에대하여보충설명을부탁드린다. 오늘발표내용중핵심적인점은축적된고고학자료의검토를통하여 2세기중후반경이지역은백제의지배세력중비류집단의한강하류역입성과관련된미추홀이었고, 10여개의유적군으로대응하는지역집단 ( 소국 ) 이 2~3개씩연합하여 3~4 개의대단위집단 ( 국 ) 으로존속하였다는주장이다. 그중한강남안의김포검암동 운양동 양촌유적군을중심으로신분고국일가능성이타진하고있다. 향후보다세 - 50 -
밀한검토를통하여발표자의주장이설득력을가지기를기대한다. 마지막으로발표자는이지역의발굴조사자문위원회의단골위원으로참여하고있다. 토론자역시수차례한강신도시개발지역을비롯하여김포일원의유적조사에자문이나견학을온적이있다. 그때마다김포시청의문화재담당자가자문위원회나현장설명회에참가한것을거의볼수없었다. 일반적으로대규모택지개발이나공공사업은국영기업체가시행하고있어, 중요한유적이발견되면현지보존을하는예도있지만자문위원회등에서지역주민을위한전시관혹은박물관설립을요청하는사례가많다. 인근의인천검단선사박물관이그러한사례이다. 오늘발표한내용을보더라도영세한문헌사료만으로이끌어내기어려운중요한가설들이제출되고있다. 이러한문화내용을지역주민이공유할수있는공간이절대적으로필요할시점에이르렀다. 여전히그러한기회가김포시에도있으며, 이를위하여김포시의적극적인인식전환이필요하다는점을강조하고자한다. - 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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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발표 3 김포의강해 ( 江海 ) 도시적성격과역사속의해양활동 윤명철 ( 동국대학교사학과교수, 유라시아실크로드연구소장 ) 1 머리말 김포 ( 金浦 ) 는한반도의중심이여, 황해에서가장중요한몇개만가운데하나인경기만의핵심공간이다. 따라서황해와연관된모든항로가경유하거나입항출항하는항구공간이었다. 또한한반도의중부전체를유기적으로연결시키는한강의종착공간이면서서해와만나는교류의공간이다. 또한역사이래로수도역할을많이담당한서울지역및개성의주변부에위치한위성도시의위치에있었다. 따라서김포는통념과달리지리정치적, 지리경제적, 지리문화적으로전략적인가치가높은공간이며, 이러한지정학적, 지경학적, 지문화적위상을활용하여역사이래로발전을이룩하였다. 大東地志 에 本百濟黔浦新羅景德王十六年改金浦爲長堤郡領縣 라는기록이있다. 그러나 三國史記 에따르면金浦는본래고구려의黔浦縣이었다. 경덕왕때金浦로개명하였다. 그아래에는領縣이넷있는데, 戌城縣은고구려의首尒忽縣, 김포현은고구려의黔浦縣, 童城縣은고구려의童子忽 ( 㠉山縣 ), 分津縣은고구려의平唯押縣이다. 이들 4현은지금각각수안, 김포, 통진이다. 陽川은조선시대에는김포에속해있었으나삼국시대, 특히고구려가지배할때는栗木郡의영현이었다. 14) 결국은백제시대부터검포로불리워졌음을알수있다. 백제와고구려에서부른黔浦라는명칭은음인검과연관이깊다. 은 < ㅣㅁ 검 곰 금 > 등으로互轉되는 神 의古語이다. 15) 김포는결과적으로신령스러운포구즉국가항구라는의미가있다. 백제의 2번째수도인웅진또한곰나루, 즉神津인것과동일한의미이다. 중국의주서와북사에는 固麻城 으로기록되어있다. - 53 -
즉김포 ( 金浦 ) 라는지명은원래는 黔浦 에서나온것으로언어학적으로신령스러운포구, 즉국가항구라는의미이다. 일종의서울지역의외항역할을담당하였다. 김포가현재당면한문제들을해결하고, 미래를지향하면서역할을규명하고자한다면김포가가진정체성의위상과역사적활동등을근거로다양한관점에서할필요가있다. 그가운데하나가강해도시로서의김포의성격을인식하고, 활동을규명하는일이다. 16) - 54 -
2 김포반도의자연환경분석 김포시의범위는어떻게설정해야할까?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이렇게기술되어있다. 즉동쪽으로양천현경계까지 22리이고, 남쪽으로富平府경계까지 10리이며, 서쪽으로바다까지 26리이고, 북쪽으로通津縣경계까지 17리인데, 서울과의거리는 63리이다. 이지역이원래의김포인데, 현재는서울의일부로편입되고, 검단은인천광역시로편입되었다. 김포는아래지도에서보이는것처럼반도이다. 북쪽은한강하구로서건너편의현재황해남도와강화도와의사이에는강화수로 ( 鹽河, 急水門 ) 가있고, 서해쪽으로는경기만과마주한즉삼면이강과바다로둘러싸인반도이다. 특히가현산이서쪽으로바라보고있는만은인천의제물포와강화의草芝쪽이만나는, 즉김포반도, 강화도, 영종도가만나서이루는전형적인 沿岸三角海域 이다. 강화에서인천으로가는뱃길은바로이내륙수로를이용해야한다. 또김포로해서한강수로를이용하거나육로를이용하는경우에도이만을이용하지않으면안된다. 또한과거에는가현산아래의금곡동근처까지물이들어왔었음으로직접바다와연결되었다. 지도 1 경기해역전도 그러므로김포의성격을, 특히정치경제적인측면에서이해하고자할때는첫째, - 55 -
한강과의연관성이핵심이다. 17) 역사에서강이가진의미는매우크다. 강은내륙 깊숙하게있는넓은부분과규모가크고작은線 ( 支川 ) 들을매개로사방으로연결된 굵은동맥같은선이다. 첫째는交通網 18) 의역할이다. 강은산평야와더불어육지 를구성하면서유기적인상호보완관계를이루고있다. 강은길고깊숙하게뻗은선 (line) 을이용하여육지의안쪽과해양을직접연결한다. 예를들면경기만의북쪽인 海州灣의내륙지역과남쪽인南陽灣의내륙지역을이어주며한강하계망을통해서 간접적으로이어진다. 또한해주만과한강중류지역을연결시켜준다. 일종의連水陸 路시스템으로서동해와서해, 남해와서해도연결이가능해진다. 강은농경과상 업, 어업, 수렵채취가발달한경제공간이었다. 농경지는강주변이나하류에집중분 포하고있고, 특히水田농업인경우에강의존재는절대적이다. 강은상업활동과직 결되어있다. 물자가이동하는물류의매개체는강이고, 수단은배이다. 이러한수 로교통망은곧물류망의기능을했으므로, 강주변에는항구와시장창고그리고 촌락과도시들이형성되었다. 따라서항해업과조선업에종사하는집단들도있었다. 한편큰강들은어업이발달하는최적의장소였다. 강에서서식하는물고기도있 었지만많은강들은하구에서내륙깊숙한지역까지조수의영향을받아서하구에 는바다를오고가는생선들도서식하였고, 각종어패류등이풍부했다. 경기해역어 종에관한최초의본격적인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 및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 도서 등을통하여잘살펴볼수있다. 근현대에이르기까지가장많이잡혔던어 종은조기 갈치 청어 민어 홍어 숭어 뱅어 낙지 굴 해삼 홍합 새우 게 가사리 미역등이 었다. 19) 뿐만아니라강주변에는식생대가다양하게발전하여임산물을비롯하여 각종식료품들이많이생산됐다. 때문에큰강의하구를장악하면그와연결되어있 는해상권을장악하는데유리함은물론이지만역으로그주변, 즉부채살처럼활짝 펼쳐진다양한河溪網과소위 內陸水路 를통해서전체에대한영향력을행사할 수있다. 그래서큰강의하구에는정치세력들이형성되었다. 한반도의서쪽은지형이낮기때문에강들이서해안으로흘러들어가는河系網을 구성하고있다. 평양을중심으로淸川江이있고, 특히남쪽으로는禮成江 臨津江 漢 江이河系網을구성하면서서해중부로흘러들어가경기만을구성한다. 한반도에서 대표적인강인한강은길이가 514km 이고, 유역면적이압록강다음으로넓다. 남한 강과북한강이양수리에서합쳐진후에북서방향으로틀어도중에王宿川 漢川 炭 川 良才川 安養川 昌陵川등의지류와합류한다. 20) 고양시일원과파주교하면의일 - 56 -
부를지나면북에서는曲陵川과만나고, 남에서는고촌등에서내려오는물길들을만나내려가다가파주를지나온임진강과교하에서합류한다. 다시내려가다가하성면의작은천들과건너편지역의작은천들이합쳐서내려가다가다시강화도북부에서개성지역을지나온예성강과만나최종적으로황해로들어간다. 한강유역은평야가발달하였는데, 가장큰규모는김포평야로서현재의김포시의일부이며고양시등이있는지역도역시평야가발달하였다. 두번째이점은바다와의관련성이다. 한강이끝나는지점은경기만의중심부를이루고있다. 京畿灣 21) 은한반도중부에서가장큰만이다. 이러한만이가진이점은다양하지만우선대외항로를개설하고사용하는데유리하다. 경기만에는대외항로의기점이고출발점이며동시에경유지로서자격을갖춘곳이여러군데있었다. 첫번째는인천만지역이다. 인천해역은조수간만의차가매우심한곳으로서해안선의굴곡이매우심한리아스식해안이다. 두번째는강화도와김포반도등주변지역이다. 강화도는한강과예성강이바다와만나는거대한경기만의한가운데를막고있다. 그러면서경기도의서쪽지역과개성남쪽의풍덕과옹진, 해주등황해도의남부해안일대가마주치는북부경기만의입구를꽉채우고있다. 세번째는남양만일대이다. 남양반도는해양교통을고려할때경기만의남쪽에위치한가장중요하고넓은지역가운데하나이다. 내부에몇개의작은만과串들을포함하고있으며, 북쪽으로는안산만, 남쪽으로는평택만이있다. 이러한상황에서경기만및한강하류의포구는전략적으로나전술적으로, 또경제적으로국가정책과관련하여매우의미가있었다. 결국은한강및서울지역은경기만을매개로넓은의미의서울영역권을설정할수있다. 뿐만아니라각각다른지역해안및강줄기와유기적인통일체형성할수있고, 나아가전국을 1개의선으로잇는수륙, 해륙교통의요지로서물류망의핵심이될수있다. 특히서울과김포는이른바河港도시와海港도시의상호보완관계를지녔다. 때문에한강은역사에서다양한이름으로불리어졌다. 삼국사기, 백제조에는 北史 를인용하여한강을설명하고있다. 온조조에는 漢水 로, 개로왕조에는왕이 " 郁里河 ' 에서큰돌을캐다가 -" 라고하였고, 광개토태왕릉비병신년조항에는 " - 渡阿利水 - " 라는표현이있다. 이어 世宗實錄地理志 에는 ' 한강도 ' 東國輿地勝覽 에는 ' 한강 ' 이라고기록하였다. - 57 -
지도 2 대동여지도 경기만(김정호, 1861년경, 서울 대학교 규장각 소장) 지도 3 경기만(대동여지도) 지도 4 경기도 해좌승람 지도 5 조선후기지방지도 <경기도편> 서울대학교 규장각 편, 1997-58 -
3 김포의강해 ( 江海 ) 도시적인성격의검토 필자는역사공간을 1 차적으로영토나영역, 정치장소로서성격을살펴본다음에 총체적인연결망, 즉네트워크의개념으로접근한다. 역사공간을 터와다핵 (field & multi core) 이론 으로이해하고있다. 터 이론의성격과시스템은동아시아전체, 우리역사의터, 그리고도시에도동일하게적용할수있다. 동아시아의이러한지리적이고문화적인특성을설명할목적으로동아시아의내부 터 이면서동방문명의中核으로서 東亞地中海 (EastAsian mediterranean-sea) 란 모델을설정하고학문적으로제시하였다. 이모델속에서몇몇국가들은대륙과해 양을유기적으로연결한 터 속에서생성하고발전한海陸國家임을주장해왔다. 22) 그리고도시또는성들도수도및국토와有機的體制를가져야하며, 자연환경, 역사적인계승성, 국제관계를고려할때필연적으로그국가들의수도는보다구체 적인정책의하나로서海陸都市의성격을가졌을가능성을여러예를들어서언급 하였다. 23) 동아지중해에서생성된도시들은자연환경의특성으로인하여일부의예외는있 지만, 대체로강하구, 바다와연관된지역에생성된항구도시들이다. 24) 내륙항구 ( 河 港 ) 도시, 江海도시, 海港도시 들이다. 25) 항구도시가되려면일반적인도시의조건외에도구체적으로몇가지조건을더 갖추어야한다. 첫째, 설치된위치등자연환경이다. 항구도시의위치는내륙의육 지나내륙의강가나호수가아닌육지와강, 육지와해양이직접만나는해안가浦 口, 바다와江河口가만나는나루나포구에서형성된도시다. 둘째는交通網 26) 이발달해야한다. 이러한접점지역은지형상으로內陸水路와육 로가연결된후에해로와통합되는곳이다. 東亞地中海처럼해륙적인환경속에서, 또한국가가해양을중요시하는정책을취할경우에는港口를거점으로面, 線과 點을이용하여대부분의지역과이어지는대내항로및대외항로를사용해야한다. 陸路交通도중요하지만內陸水路交通, 그리고해양교통에도적합해야한다. 항구와 - 59 -
가깝고물류의거점이고, 교통의結節點이어야한다. 고대에한국지역과중국간에사용되었던항로는대체로 3개로구분하고있다. 27) 그러데경기만은일본열도의큐슈북부해안을출항하여한반도서남해안을경유하여압록강하구와요동반도를통과한후산동까지環狀形으로이어지는남북연근해항로의중간기점이다. 동시에한반도와산동반도를잇는동서횡단항로와마주친다. 이러한모든길이상호교차하면서반드시거쳐야할곳이바로경기만이다. 이른바해양교통의결절점이다. 그러므로한강하류를장악하면경기만을장악하고, 경기만을장악하게되면하계망전체를장악할수있다. 김포는이른바水陸교통과海陸교통이교차되면서상호호환성을지닌중계지역이다. 셋째, 양질의항구와부두시설이구비되어야한다. 특히대외항로가발달하는데에는외항뿐만아니라양질의內港이필수적이다. 항구도시인김포에는, 특히한강과서해와만나는중요한지점에는크고작은나루즉소규모항구들이발달했을것이다. 28) 현재로서는조선시대를통해서추정할수밖에없다. 조선시대에나루터의의미로는흔히渡와津이쓰였다. 29) 서울의광나루송파마포노량진염창공암김포의감암포마근포조강나루, 일산의이산포등이있었다. 지도 6 東輿圖 제 16 층일부 ( 金正浩, 1860 년경, 서울대학교규장각소장 ) - 60 -
또하나주목할만한포구는누산리에있는개진포이다. 대곶면에서발원하여북쪽으로흘러서통진면가현리를거쳐양촌면통진리를지나누산리누촌에서한강으로들어간다. 예전에는이근처에수참 ( 水站 ) 이있었다.. 그림 1 수참 ( 물역 ) 이있었던지명 ( 누산리근처 ) 걸포 ( 傑浦 ) 나진 ( 羅津 ) 은김포시걸포동에있다. 즉한강에서검단으로가는길목에있는나루터이다. 건너편현재일산 고양지역으로가는포구였다. 1999년국립문화재연구소가지표조사를하여개석식고인돌을발견하였다. 30) 강안에는홍도평이있었다. - 61 -
김포시의 검암나루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따르면 甘岩津은 북쪽 8리에 있으 며, 바로 고양 任意津의 小路이다. 라고 하였다.31) 김포와 고양의 양 지역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근래에 이르기까지도 현재 고양 일산지역 사람들이 인천을 가고자 할 경우에는 이산포를 떠나서 검암나루에 닿은 다음에 검단을 거쳐 갔다고 한다. 현재 이산포나 검암나루는 나루의 기능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군초소가 있다. 바로 곁으로 일산대교가 놓여졌다. 지도 7 김포지역과 홍도평(1898년 측도, 1911년 제작) 31) 신증동국여지승람 권9, 김포현 津渡. 대동지지 에도 - 62 - : 감암나루 北八里卽高陽任意津小路 라고 되어 있다.
그림 4 봉성천과한강이만나는전류리. 그림 5 봉성포를거쳐한강으로들어가다. 봉성포에는봉성산성이있다. 김포지역에서가장대표적인항구는월곳면보구곶리에있었던강령포 ( 康寧浦 ) 이다. 북쪽으로개풍군과마주하고있다. 500세대가넘는주민들이있었으며각종상가와술집등이즐비하였고마포로가는배들이이곳에정박하였다. 연평도에서잡은조기와각종어물, 소금을싣고마포항으로가는중간기점이었다. 현재는돈대와군초소가있고, 민간인들은출입이통제되어있다. 1999년국립문화재연구소에의해실시된지표조사과정중에확인된유적으로석핵과박편석기등총 6점의구석기시대유물들이수습되었다. 32) 32) 군사보호구역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서 경기도편, pp344~346-63 -
지도 8 청구도에나타난동성산주변지역 조강포 ( 祖江浦, 조강나루 ) 는하성면조강리에있었다. 건너편인황해도연백군의하조강리와상조강리로이어지는중요한나루였다. 조선시대에는조강진이있었고, 대동여지도 나 東輿圖 를보면이곳으로흘러나오는물길은개성근처에서시작하고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통진현진도조에는 조강진은통진현북쪽 10리에있으며, 개성으로통한다 고되어있다. 고려의왕건은祖江渡에서전선을수리하고, 남쪽으로진도를공격하였다. 조선시대에는임진강을통해내려오는물산물, 강화에서올라오고서울에서내려오는물산물들이모여드는집하장소이기도하다. 그리고서해에서생산된수산물을임진강하구의양쪽지역으로공급하는중계지역할을하기도했다. 祖江院이라는관영의숙박소까지있어서한강을따라오르내리는배들이쉬는곳이었다. 지도 9 한강과임진강이만나는삼각수역 (1898 년측도, 1911 년제작한지도 ) - 64 -
현재는조강 1리, 2리모두민통선안에있다. 특히나루터였던곳은민간인의출입이통제되고있다. 하성면마조리의麻近浦가있다. 건너편은현재황해남도이면서임진강하구인오두산성과마주한蟹岩津과이어졌을것이다. 과거에는개풍군임한면정곶리로넘어가는나루가있었다. 그밖에도하성면시암리에있었던漢江浦, 양촌면양곡리의良陵浦가있었고, 강화도와마주보고갑곶진, 대곶면대명리의대명나루 ( 대명포 ) 등이있었다. 넷째, 해양진출과해양방어체제의유효한거점이어야한다. 수군을양성하고, 적절하게이용할수있고, 조선소를비롯하여수군함대기지등을설치하는장소가필요했다. 또한적의상륙을저지할수있는방어공간이항구주변은물론이고, 주변지역에도있어야한다. 필요시에는내륙의산악으로연결되는도피로도마련되어야한다. 그러므로방어적인측면에서강변방어체제 33) 와해양방어체제 34) 및육상방어체제들은유기적인시스템을구축해야한다. - 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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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반도에는한강변, 염하주변, 그리고서해와연변한지역에다수의크고작은방어체제가있었다. 童城산성은김포시하성면양택리와원산리의경계에있는臺山 ( 해발 132m) 의동남쪽지봉인동성산의정상부 (113m) 를감싼석축산성이다. 대동지지 에는 通津本百濟平淮押 ( 一云別史波衣 ) 라고하는데, 이통진의동쪽 20리에있는고읍인동성은본래백제의童子忽또는仇斯波衣幢山이라불리우다가, 신라경덕왕 16년 12월童城으로고쳐長堤郡의令縣으로삼았다. 현재석탄리오정동의야산과마조리의야산등은한강변에바짝붙어있다. 마조리에는 마근포 라는특별한의미를지닌지명등도남아있다. 하성군봉성리와전류동에있는봉성산성은한강수로를방어하는데에매우중요한역할을하였다. 良陵浦城은경기도김포시양곡의평야한가운데있는장성형태의토성이다. 대동지지 통진현조에는 물이수안고현에서흘러나와북동으로흘러서한강으로들어가는곳에있던양릉포에옛성이있다 고하였다. 양릉포를통과한물은봉성산옆을지나한강으로흘러들어간다. 北城산성은현재김포시내바로뒷산인북성산또는장릉산 성산이라고불리우는곳에있다. 輿地圖書 김포읍지편에 북성산 이라고나와있다. 그외에도김포반도에는크고작은방어체제가구축되어있다. 다섯째, 선박건조및수리에용이해야한다. 고대에항구를선정하는중요한조건가운데하나는선박을건조하는데에필요한나무를조달하는능력이다. 조선에필요한나무를구하는일은전근대사회의해양국가들에게는가장중대하고지난한과제이었다. 김포는지금의서울인밤섬에서서해에서사용하는선박들을건조하였다고한다. 그렇다면고려전기의전례로보아김포지역에서도선박의건조가이루어졌을것은분명하다. 그외도구와무기들을제작하는데필요한제철업등이발달해야하며, 어업환경도좋아야한다. 35) 이러한조건들을갖춘항구도시는육지와해양이직접만나는곳에형성된, 面을매개로접촉하는나루나포구에서형성된도시이다. - 67 -
4 김포반도를중심으로한역사속의해양활동 한강유역과김포반도는앞에서언급한지리지형적인조건으로인하여정치세력 들이일찍부터태동하였고, 강력하게발전하였다. 양평가평등에서구석기유적이 미사동, 암사동, 풍납동에서신석기유적지가발견된것으로보아한강변에는이미 선사시대부터인간이집단적으로거주하고있었음을알수있다. 또가장오래된 벼농사유적이김포고양일산등한강변에서발견되었다. 고인돌들도한강변에, 특 히걸포동에서는몇기의고인돌들이있고, 36) 그외에도고인돌군이여러곳에있 다. 이것은김포가고조선문명권의한부분으로편입되기시작했음을의미한다. 김포는삼국시대되면서중요한전략적인지역으로부상하였다. 우리역사상초기 의소국들은농경과어로의실질적인이익을얻어야하고, 주변의소국이나외국과 교섭을위해서, 또경제상의이익은외래문물의수입및수출에크게의존했으므로 필연적으로항구를갖춘해안가가까히있어야했다. 더구나해양을통해서들어온 移住民집단으로구성된경우가많으므로 1 차적으로해안가에위치해있었다. 그러 므로해양문화가발달했고, 교역을통해서성장한해항도시국가의성격을가지고 있었다. 三韓 78 개국의상당수는江河口, 만내부, 해안가까이에위치해있다. 나 루, 포구등에서정치적으로성장하고무역을통해서번창한 도시국가 (polis) 의성 격을가진일종의 나루국가 였다. 37) 백제가건국하고, 수도가항구도시인漢城으로정해지면서그위상이높아졌을것 이다. 전기의수도였을풍납토성은일종의하항도시였다. 비류는현재인천의문학 산성인미추홀에도읍을정하였는데, 이는물론해항도시였을것이다. 이후에백제 는초기부터한강을통해서서해로진출하였다. 고이왕은 236 년에강화도인서해대 도에직접가서사냥을하기도하였다. 중국지역과외교교섭을하고, 교역을하기위 하여한강하구와경기만을본격적으로장악하였다. 백제는한강유역을중심으로약 500 여년동안발전을하였다. 따라서해양진출 의전초기지, 항로의출발점으로김포를국가정책에서중요한위치로격상시켰을 것이다. 경기만과한강하구인김포반도는점차韓中交通의요지로활발하게사용되 면서국가간의질서와힘이충돌하는현장이었다. 특히이갈등은고구려와백제 의대결로시작되었고, 다시백제와신라, 또고구려와신라의대결로변화되었다. 이지역을차지하기위하여각나라들은존속기간내내생존을걸고치열한공방전 을벌였다. 각나라들은상륙작전등해양을통한침투를시도하고, 해안선근처에 - 68 -
서적극적인공방전을펼쳤다. 백제는중국지역과외교교섭을하고, 교역을하기위하여한강하구와경기만을본격적으로장악하였다. 고구려는 4세기말에이르러경제적인토대를마련하고, 정치적인통일을실천하고, 대외교섭의주도권을확보하고자경기만을장악하였다. 특히廣開土太王이관미성을공격하여점령했을때이지역은주요한전장이었을것이다. 그후대왕 6년인丙申年에감행된수군작전에서김포는당연히공격범주에들어갔을것이다. 대동강하구이북에서발진하여長山串이있는반도끝을돌아온선단은白翎島 ( 고구려의鵠島 ) 등바다의섬들을차례차례점령하고, 이어 1로로추정하고있는한강수로를직공하는부대는주력군으로서강화도를상륙한다음에통과하여김포반도의북동쪽, 즉한강수로변으로진입하였을것이다. 반면에다른한부대는직접김포반도로상륙하였을것이다. 이때점령당한성으로비문에나타난沸城은통진으로추정된다. 守安山城, 歌絃山城등은서쪽해안으로상륙하는고구려군을방어하였고, 동성산성등은한강수로를직공하여올라오는수군을방어하였을것이다. 그후에 553년에는신라가경기도지역을차지하면서김포또한신라가차지하면서국가발전은물론통일에서일정한역할을담당하였을것이다. 38) 이러한김포반도를둘러싼국가간의갈등은지명에서도나타나고있다. 대동지지 에 本百濟黔浦新羅景德王十六年改金浦爲長堤郡領縣 라는기록이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에따르면金浦는본래고구려의黔浦縣이었다. 경덕왕때金浦로개명하였다. 그아래에는領縣이넷있는데, 戌城縣은고구려의首尒忽縣, 김포현은고구려의黔浦縣, 童城縣은고구려의童子忽 ( 㠉山縣 ), 分津縣은고구려의平唯押縣이다. 이들 4현은지금각각수안, 김포, 통진이다. 陽川은조선시대에는김포에속해있었으나삼국시대, 특히고구려가지배할때는栗木郡의영현이었다. 39) 결국은백제시대부터검포로불리워졌음을알수있다. 백제와고구려에서부른黔浦라는명칭은음인검과연관이깊다. 은 < ㅣㅁ 검 곰 금 > 등으로互轉되는 神 의古語이다. 40) 은알타이어계통에서는神, 君, 人의뜻을가지고있는말로서우리말 과일치하고특히동북시베리아에서는무당의명칭을 kam, gam 등으로부르고있으며아이누어로 kamui는神, 熊을가리키며터키, 몽고, 신라는 kam, 일본은 kami로서神을나타낸다. 41) 결과적으로신령스러운포구즉국가항구라는의미가있다. 백제의 2번째수도인웅진이곰나루, 즉神津인것과동일한의미이다. - 69 -
그림 8 396 년광개토태왕의수군작전로 고려에이르면경기만은개경인수도권의일부로서비교적정치군사적으로는안정을회복하였으며, 외교물류에이용되는해로교통망의거점지역이었다. 건국자인왕건은전형적인한강하구와경기만의해양세력이다. 왕건집안은조부인작제건시대에이미항구도시인開州 ( 개성 ) 을비롯하여貞州 ( 풍덕 ), 鹽州 ( 연안 ), 白州 ( 배천 ) 4개주와江華, 喬桐, 河陰 ( 강화북부 ) 등 3개현인현재황해도남부와경기도서부, 강화도가만나고, 황해와한강하류와예성강이합쳐지는이소지중해같은곳에서성장한해상토호이다. 파주의임진강하구세력이그에게복속하였고, 결국은孔巖 ( 현재강서구가양동방화동일대 ) 黔浦 ( 김포시, 검단면일대 ) 등의한강세력들은고려로편입되었다. 수도인개경의바로앞은일종의내해 (INLAND-SEA) 로서한강하류와바다가만나는소지중해같은지역이다. 고려는이해역을장악하므로써한강예성강황강등의하계망을이용해서한성, 김포, 파주, 고양, 부천, 황해도의연백군일대와개경지역까지들어갈수있다. 이른바수도권의물류체계를장악할수있었다. 또한대외무역의발착항구로삼아강남의송나라서역 ( 아라비아 ) 일본유구국 ( 오끼나와 ) 등과교섭하면서세계로열린나라가되었다. 수도인개성은다양한인종과물건들이모 - 70 -
여드는동아지중해의유명한국제도시이었다. 개경에는사신과상인들이머무는객관들이오빈관, 영은관, 영선관등 10여개나있었는데, 이들은이곳에머물면서무역을하였다. 반대로고려인들도중국으로부지런히건너갔다. 중국남방의여러도시에는고려인들이진출하여살고있었다. 그개경의위성도시이면서외항과가까운곳이김포였다. 지도 11 고려시대의국제항로도 한편남경인서울지역과연결되면서일부는조운로사용되었다. 조운은조세로징수한미곡 포백등을해상운송하는물류망이다. 고려는成宗 11년 (992) 경에확립되었는데, 남방연해안과한강수로변에 12조창을두고서국가의세곡을예성강입구의京倉으로운송하였다. 무신란이후국내정세의혼란와서해안에서왜구의등장으로조운은계속되지못했다. 조선이건국하면서수도가한양으로천도하고한강은경제적인측면에서도매우중요하였다. 서해안과한강하류를통하여호남 호서지방과황해도 평안도지방의물자가한양으로운송되고, 한강의상류인남한강 북한강을통하여충청북도와강원도의물화가한양으로운송되었다. 한강조운로는 260리에이르는뱃길이었다. 42) 17 세기에들어서대동법이실시되면서조운량이증가하자심지어는경강사선까지도크게이용되었다. 이조운망에서가장중요하고, 실질적인종착점역할을한곳이용강리였다. - 7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