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정판 ] 5 18 혁명 펴낸일 2015년 3월 30일지은이 김진경해설 정호기펴낸이 박상증펴낸곳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주소 ( ) 서울시종로구율곡로 6 트윈트리빌딩 A동 6~7층전화 (02) 팩스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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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사건 공소사실의 요지 이 사건 공소사실의 요지는 피고인 함선주, 김 영은는 삼성에스디아이(SDI)주식회사(이하 삼성SDI'라고 함)의 협력업체인 영 회사 소속 근로자였고, 피고인 강용환는 또 다른 협력업체인 명운전자 주식회사 소 였다. 삼성SDI는 세계 디스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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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국어생활제 14 권제 4 호 (2004 년겨울 )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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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문답2

[ 별지제3 호서식] ( 앞쪽) 2016년제2 차 ( 정기ㆍ임시) 노사협의회회의록 회의일시 ( 월) 10:00 ~ 11:30 회의장소본관 11층제2회의실 안건 1 임금피크대상자의명예퇴직허용및정년잔여기간산정기준변경 ㅇ임금피크제대상자근로조건악화및건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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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고서의 목적과 개요 (1) 연구 목적 1) 남광호(2004), 대통령의 사면권에 관한연구, 성균관대 법학과 박사논문, p.1 2) 경제개혁연대 보도자료, 경제개혁연대, 사면심사위원회 위원 명단 정보공개청구 -2-

1. 상고이유 제1점에 대하여 구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법률 제9444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이하 구 도시정비법 이라 한다) 제4조 제1항, 제3항은 시 도지사 또는 대도시의 시장이 정비구 역을 지정하거나 대통령령이 정하는 경미한 사항을 제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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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영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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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December 소비자의날안전점검의날 (273 차 ) 무역의날 대설 ( 大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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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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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정판 ] 5 18 혁명 펴낸일 2015년 3월 30일지은이 김진경해설 정호기펴낸이 박상증펴낸곳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주소 (110-150) 서울시종로구율곡로 6 트윈트리빌딩 A동 6~7층전화 (02)3709-7500 팩스 (02)3709-7520 www.kdemo.or.kr 제작 유통 오름 (www.oruem.co.kr) 사진자료제공 ( 재 )5 18기념재단 이전자책은대한민국저작권법의보호를받는저작물입니다. 출판권자로부터서면에의한허락없이이책의일부나전체를어떠한형태로도가공할수없습니다. 본전자책은콘텐츠생산자인해당출판사가 2 차저작권을소유하고편집방침과검수를통해최상의품질로제작하여한국출판 콘텐츠 (www.e-kpc.co.kr) 가공급하는양질의전자책입니다.( 본컨텐츠는문화체육관광부와한국출판회의의 KoPub 서체를 사용하고있습니다.)

개정판을내면서 우리청소년들에게한국민주화운동의역사를바로알리기위해쓰고찍어나누어왔던 역 사다시읽기 를군데군데깁고새로운내용을추가하여다시내게되었습니다. 1. 청소년들이보다쉽게이해할수있도록관련사진과설명글을추가하고편집을컬러로바꾸었습니다. 2. 본문의내용을더깊이있게이해할수있도록주요개념과사건, 인물을새롭게써서보태고상자글로처리하여본문의이해도를높였습니다. 3. 내용의흐름을살리면서도소주제별로읽힐수있도록소제목을새로달았습니다. 4. 기존판형 ( 신국판 148 225mm) 을좀더넓고시원한판형 (172 218mm) 으로바꾸어보다편하게읽을수있게했습니다. 5. 과거의기억이현재와맞닿도록관련현장에조성된기념물형상을해당지면에수록했습니다. 개정판은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오랜기간축적한다양한자료들이활용되었고, 정호기? 이종률? 양금식등이참여했습니다. 아무쪼록이개정판이널리읽혀서청소년들이우리나라의 역사에자긍심을갖는데기여할수있기를희망합니다. 2015.3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발간사 역사는과거를빌미로현재와미래의변화를가로막고시간을거꾸로돌려놓는퇴행의발목잡기가아닙니다. 역사는단순히옛날이야기만도아닙니다. 역사는바로오늘현재우리앞에놓여있는과제가무엇이며나아갈방향은어디인지를가늠하는생생한현실인식입니다. 오늘의삶과사회를직시하고내일의변화와대안을찾기위한항해의나침반이자지도입니다. 역사는기억을뛰어넘는성찰이며, 지난날을오늘의눈으로다시보는동시에오늘을재인식하는진리탐구의망원경입니다. 일제시대에우리민족의과제가일본제국주의의식민지지배로부터독립을쟁취하는것이었다면, 해방후우리사회의과제는민주주의의확립과민족통일이었습니다. 그리고이과제는여전히오늘의과제이기도합니다. 우리들이민주화운동역사를지금이곳에불러들이는이유는이같은과정이우리모두의숙제를풀어나가는데반드시필요한일이기때문입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이 역사다시읽기 기획을통해우리사회를짊어지고나갈푸릇푸릇한젊은이들이우리의현실을있는그대로재인식하고새로운미래를열기위한주춧돌을놓는데나름의도움을주고자합니다.

1 사람은무엇으로사나 솔아, 흔히어른들은자기가겪은역사적사건에대해서너희들이당연히잘알아야하고, 그뜻을무조건깊이새겨야하는것처럼이야기하곤한다. 그래서때로는마음으로잘납득이되지않는데도너희들은기념행사장에동원되어서있기도했을게다. 잘될지는모르겠지만나는정말그런식으로이야기하고싶지가않구나. 그런식으로이야기할거라면아예이야기를하지않는게좋겠다는생각까지한다. 내가그렇게까지생각하는이유중의하나는우리도너희들과같은경험을많이가지고있기때문이다. 우리가고등학교 1학년때였으니까 1968년이었다. 어느날학생회를맡은선배들이운동장으로모이라고해서나갔더니 4 19혁명기념식을하더구나. 연단에올라오는사람마다 4 19가마치어제일어난일처럼이야기하는데우리에게는 3 1운동이나좀과장하자면조선조말기의갑신정변만큼이나까마득하게먼사건이어서전혀실감이나지않았다. 그러니장황하게이야기하는 4 19의의미가가슴에와닿을수없었지. *4 19혁명이승만정부와자유당은 1960년 3월 15일의선거운동과정에서국민의낮은지지를인지하고, 다양한부정적인수단과방법을계획했다. 자유당은 1959년 11월경부터내무부장관의기획과지원을받으면서치밀하게선거를준비했다. 이들은선거막바지에이르러서는이승만과이기붕을대적할야당후보가없음을알았지만, 영구집권의기반을구축하고자갖가지부정선거를자행했다. 그리하여 2월 28일대구에서, 3월 8일대전에서고등학생의저항을불러일으켰다. 3월 15일선거당일에는전국의여러지역들에서부정선거규탄과선거무효등을주장하는시위가발생했는데, 특히마산에서격렬했다. 경찰은시위를진압하면서발포하여많은사상자가발생했다. 이는보다악화된상황을만들었고, 전국으로확산시키는요인으로작용했다. 이승만정부와자유당은학생과시민의진정어린목소리는귓등으로흘리고, 공산당의배후조종과선전 등과같이근거가없는담화를발표하여항거를잠재우려했다. 4월 18일고려대학교학생들이도심시위를벌이자, 자유당은폭력배를동원해짓밟았다. 이사건은서울지역대학생들의도심시위를자극했고, 중 고등학생을비롯해시민이대거동참하게했다. 경찰은국회의사당일대를점거한시위대가경무대로향하자또다시발포했다. 이런양상은지방도시들에서도유사하게나타났고, 많은사상자가발생했다. 미국은상황이악화되자 4월 19일이승만을압박했고, 4월 21일과 23일에걸쳐정부와자유당은유화책을발표했다. 4월 25일서울지역대학교수들의시위는오랫동안진행된일련의과정에종지부를찍게하는계기가되었다. 다음날이승만의대통령직사임과더불어자유당정권은해체되었다. 하지만 4 19혁명의의의를계승할새로운정치 사회체제가형성되기까지는많은시간이필요했고, 그사이에 5 16군사정변이발생했다.

불과 8년전의 4 19가그렇게느껴졌는데 20여년전의 5 18민중항쟁이너희들에게어떻게느껴질지는물을필요도없지. 그까마득하게느껴지는시간적거리감을넘어 5 18이너희들의지금삶에무엇일수있는가를가슴에와닿게이야기할수없다면장황한이야기들이무슨소용이있겠니. 솔아, 요즈음은 TV에서종종모모한정치인이나유명인사들이 5 18묘역에참배하는모습을비춰주곤한다. 그런장면이나오면나는가끔 TV를꺼버리곤한다. 묘하게모독당하는듯한느낌이들기때문이지. 적어도그시대를살았던많은사람들에게 5 18은역사적사건이전에자기삶에대한근본적물음이었고, 자기의전존재를뒤흔드는지진같은것이었다. 그러니정치적계산이깔린형식적말과행사를보며모독당하는기분이드는것도무리는아니다. 아마도 5 18의이와같은느낌에딱들어맞는시가한용운의 님의침묵 이아닐까싶다. 날카로운첫키스의추억은나의운명의지침을돌려놓고뒷걸음쳐서사라졌습니다. 그렇다. 5 18은역사적사건이전에한사람한사람에게던져진삶에대한질문이었고그사람의존재를뒤흔들어운명의지침을바꾸어놓은날카로운첫키스의추억같은것이었다. 그러니, 그삶에던져진물음이어떤것인지그물음이한사람한사람의존재를어떻게흔들고간건지를너희들의가슴에닿게이야기할수없다면장황한사건의나열이무슨소용이있겠니. 솔아, 이제너도본격적으로대학입시에시달릴학년이되었겠구나. 아침부터밤늦게까지보충, 자율학습, 학원에시달리겠지. 우리가중 고등학교를다닐때로부터 30여년이흘렀는데하나도변함없이획일적인입시경쟁에시달려야하는현실이참으로안타깝기만할뿐이다. 이제까마득한옛날얘기다만고등학교다닐적에밤늦게돌아오면서스스로에게이런질문을한적이있었다. 사람의삶중에무엇을이루기위한수단으로희생되어도좋은몇년이란게도대체있을수있는것인가? 획일적인대학입시를위해죽어지내야만하는몇년은도대체무엇이란말인가? 어쩌면일상의삶속에서늘다가오는이러한질문속에거창하게이야기되곤하는인간의본질이니민주니역사니하는것들이무엇인가하는답이들어있는지도모르겠다.

1980 년 5 월 16 일전남도청앞의횃불대행진 군사독재로얼룩진 19 년간의암흑을민주주의의횃불로밝히겠다는의지가담긴평화적인시위였다. 어떤철학자는자신의죽음을자각하는존재라는점이동물과구분되는사람의본질이라고했다. 꽤그럴듯한말이지. 사람은자신의죽음을자각하기때문에, 다시말해서자기의삶이일회적이고유한하다는것을알기때문에자신의삶을귀중한것으로인식하고충만하게채워가려한다. 그리고상상을통해다른사람도자기와같다는걸인식함으로써다른사람의삶을존중하게된다. 솔아, 사람의사람다움이란과연무엇일까? 그것은자신의죽음을자각함으로써자신의삶의귀중함을깨닫고자기의지대로자기삶을충만하게채워가려는데있지않을까. 그것은자기삶을그것자체가목적인것으로인식하고자기삶이무엇을위한수단으로전락하는것을허용하지않으려는데있지않을까. 민주화란과연무엇일까? 인간을수단시하는사고나관행, 제도를혁파하여인간을목적자체로서존중하는사회를만들어나가는것이아닐까. 역사란무엇일까? 인간을수단시하는족쇄들을하나씩해체하면서인간을목적으로서존중하는사회를향해걸어가는우리들의궤적이아닐까. 솔아, 우리는지금도여전히이런저런모독감에시달리며살고있다. 내가한인간으로서목적자체로존중되는것이아니라하나의수단으로취급되고있다는느낌을많이받는다. 이것은우리사회에서인간의본질이아직충분히실현되고있지못하다는것이고, 민주화가아직충분히성숙하지못했다는것을뜻하고, 5 18이라는거대한사건을포함하는우리의역사적궤적이아직끝나지않았다는것을의미하는것이다. 솔아, 나는결코너에게까마득하게지나간사건이나그시시콜콜한사건의전개과정을전달하고자하는것이아니다. 나는그것이우리의삶에던진질문에대해서, 지금우리의삶에대해서이야기하고싶은것이다. 그렇기때문에이이야기는일방적인것이아니라너와나의대화이다. 우리들의대화를통해사람이어떻게사람으로설수있는것인지, 사람은무엇으로사는것인지답을구해보고싶은것이다. 나는어떤거창한철학이든, 어떤거창한역사적사건이

든결국엔이질문과답으로귀착될수밖에없다고생각한다.

2 1980 년서울의봄, 그날카로운첫키스의추억 솔아, 혹시전태일에대한이야기를들어보았는지모르겠다. 전태일은초등학교도제대로 못나온청계천피복공장의노동자였다. 1970년대초전태일은피복공장이늘어서있는청계천의길거리에서근로기준법을준수하라고외치며온몸에불을질러분신자살하였다. 이작은불꽃은 1970년대한국사회를밝히는등불이되었다. 전태일은왜근로기준법을준수하라는당연한주장을분신자살이라는극단적인방법을통해서이야기할수밖에없었을까? 1961년 5 16군사쿠데타로집권한박정희정권은경제발전을지상목표로노동자와농민을철저히희생시키는정책을펼쳤다. 농산물가격을값싸게묶어놓았기때문에빚더미에올라앉은농민들은고향을등지고도시로도시로향할수밖에없었다. 그들은도시로와서노동자가되었는데하루 12시간, 14시간노동에입에풀칠하기도어려운임금을받았고인간으로서의존엄은생각할수도없는기계취급을당하였다. * 근로기준법근로기준법은근로조건의최저기준을정하여노동관계일반에적용하는노동보호법이다. 1953년 5월 10일법률제286호로공포되었던근로기준법은 1953년 1월 27일제정된노동조합법, 1월 30일제정된노동쟁의법과더불어노동관련 3대법률로분류된다. 한국전쟁이진행중임에도불구하고, 이러한법률들을제정해야했을정도로노동자의처우와삶은열악한상태였으며, 제도적장치가미비했다. 근로기준법이제정되었으나, 현실에서는노동자를통제하는데활용되거나유명무실했다. 전태일이 1970년 11월 13일분신으로항거하며 근로기준법을지켜라 라고외친것은이와같이열악한노동환경과노동자의삶그리고거짓을일삼는노동관계기관의행위를세상에호소하기위함이었다. *5 16군사쿠데타(5 16 군사정변 ) 4 19혁명의여파가계속되던 1960년 5월 16일새벽박정희소장을중심으로한 3,600여명의군인들이서울을무력으로장악했다. 군사정변의주축은박정희, 그와개인적친분이있던장성들, 박정희가경비사관학교중대장시절생도였던육군사관학교제5기생, 그리고육군사관학교제8기생이었다. 군사정변으로윤보선대통령은연금상태에놓였고, 장면총리는피신했다. 이들은의장에장도영, 부의장에박정희를선임한 군사혁명위원회 를설치하여 3권을장악하고, 전국에비상계엄령을선포했다. 그리고 반공, 미국과의유대, 민정이양 등을담은 6개항의 혁명공약 을발표했으며, 포고제1호 ( 집회금지, 보도관제 ), 제2호 ( 금융동결, 물가동결 ), 제3호 ( 공항 항만봉쇄 ), 제4호 ( 장면정권인수, 각급의회해산, 정치활동금지 ) 를발표했다.

반군은사건이발생한지 24시간이경과했음에도불구하고군부전반의지지를획득하지못했다. 그린미미국대사와매그루더유엔군사령관은합헌정부 ( 장면내각 ) 를지지한다고공동성명을발표했다. 하지만 5월 18일육군사관학교생도들이군사정변을지지하는시가행진을벌이고, 군부전반에서지지를표명하는등분위기가전환되면서미국도불개입으로입장을선회했다. 장면총리는 5월 18일중앙청에나타나국무회의를개최하고내각총사퇴성명을발표했다. 군부는국정을비롯해정치 사회 언론 학원등전반에걸쳐통제를강화했다. 특히 5월 27일까지보도사전검열제실시, 남북교류운동을추진하던세력을포함하여 3,000여명의이른바혁신계와야당인사구속은중요한사건이었다. 5월 19일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 로확대 개편되었고, 지령제92호를내려 민족일보 를폐간했다. 이어서 5월 22일정당 사회단체와노동조합해산을포고했으며, 5월 23일에는언론정화를포고하여정기간행물 1,200여종을폐간하는등언론을장악했다. 학원분야에서는 6월 1일문교부가학원정화 5개준수사항을발표했는데, 대학생교복착용과중고생삭발령등을포함했다. 법률로보면, 6월 6일에국가재건최고회의가입법 사법 행정 3권을장악한다는내용의 국가재건비상조치법 을공포한것과 7월 4일 반공법 을공포한것이대표적인사례이다. * 혁명공약 1. 반공을국시 ( 國是 ) 의제일의로삼고지금까지형식적이고구호에만그친반공태세를재정비강화한다. 2. 유엔헌장을준수하고국제협약을충실히이행할것이며미국을위시한자유우방과의유대를더욱공고히한다. 3. 이나라사회의모든부패와구악을일소하고퇴폐한국민도의와민족정기를다시바로잡기위하여청신한기풍을진작한다. 4. 절망과기아선상에서허덕이는민생고를시급히해결하고국가자주경제재건에총력을경주한다. 5. 민족의숙원인국토통일을위하여공산주의와대결할수있는실력배양에전력을집중한다. 6. ( 군인 ) 이상과같은우리의과업이성취되면참신하고도양심적인정치인들에게언제든지정권을이양하고우리들본연의업무에복귀할준비를갖춘다.( 민간 ) 이와같은우리의과업을조속히성취하고새로운민주공화국의굳건한토대를이룩하기위하여우리는몸과마음을바쳐최선의노력을경주한다. 박정희군사독재체제란이렇게국민의대다수를기계와같은도구로삼아소수기업가와관료들만배불리는체제였다. 그리고이같은체제에대한불만은아무리억눌러도투표를통해서든, 지식인의입을통해서든, 집단적운동을통해서든터져나오기마련이었다. 박정희정권은이를막기위해헌법에보장되어있는국민의참정권, 표현과집회결사의자유, 신체의자유, 노동기본권등국민의기본적권리들을원천적으로봉쇄하였다. 이렇듯유명정치인과지식인의입에까지재갈이물려지고모두가침묵하는상황에서한어린노동자가자기주장을사회적으로표현할수있는길이란있을수가없었다. 우리도한인간이고국민이다, 기계의부품처럼도구취급을받으며살수만은없다, 우리도한인간으로서자기삶을자기의지대로충만하게살권리가있다, 그최소한의권리를보장하라. 이인간다운삶에대한주장을사회적으로펼칠수있는유일한방법은역설이외에는없었다. 자기가가득채우고싶어하는삶과생명을불살라버림으로써인간적삶과생명의존엄을주장할수밖에없었던것이다.

전태일오직한가닥타는가슴속목마름의기억이네이름을남몰래쓴다 민주주의여만세! 전태일의분신이있은이후로도박정희정권의독재는나날이강화되어갔다. 국민의정치적참여와의사표현을원천적으로봉쇄하는유신헌법, 긴급조치등이그것이었다. 대학구내에는학생숫자와맞먹을정도의사복형사와전투경찰이상주하였고, 대여섯명이모여점심을먹으려고해도집회시위법위반이라고으름장을놓으며흩어놓는웃지못할풍경이벌어지는지경에이르렀다. 그러나사람으로서자기삶을자기의지대로충만하게하고자하는욕구는어떤억압으로도누를수있는것이아니다. 그욕구는때로전태일의불꽃처럼표면으로솟아오르기도하면서사람들의가슴에서가슴으로요원의불길처럼번져가고있었다. * 유신헌법 1972년 10월 17일박정희대통령은긴급국무회의를소집하고, 전국에비상계엄령을선포했으며, 4개비상조치를포함한 10 17 대통령특별선언 을육성으로방송했다. 특별선언의내용은 1 국회해산, 정당과정치활동중지, 현행헌법의일부조항의효력을일부정지, 2 일부효력이정지된헌법조항의기능을비상국무회의가수행, 비상국무회의의기능은현행헌법의국무회의가수행, 3 비상국무회의는 10월 27일까지조국의평화통일을지향하는헌법개정안을공고하며이날로부터 1개월이내에국민투표를붙여확정, 4 헌법개정안이확정되면개정헌법절차에따라늦어도 1972년말이전에헌법질서를정상화한다는것이었다. 정부는유신의당위성을설명하는지도계몽반을편성하여캠페인등을벌이면서헌법개정에열을올렸고, 11월 21일실시된국민투표에서 91.9% 투표율에 91.5% 찬성률이라는놀라운결과를얻었다. 유신헌법에따라 12월 15일 2,359명의대의원이선출되어 통일주체국민회의 가구성되었다. 이기구는 12월 23일대의원투표를통해박정희를대통령으로선출했고, 12월 27일제8대취임식이열렸다. 유신헌법은대통령에게모든권력을집중시켰고, 영구집권이가능하도록했다. 박정희는 한국적민주주의의토착화 라는명분을내걸고 10월유신을단행했지만, 이는자유민주주의기본원칙들을부정하고민주주의를역행시킨것으로평가된다.

* 긴급조치 1972년 12월유신체제가출범한뒤약반년동안은정국이안정된것처럼보였다. 유신체제에반대하는집회와시위가발생하지않았던것이다. 침묵의정세는 1973년 8월김대중납치사건이공론화되면서반전되기시작했다. 학생들은 9월부터반유신시위에들어갔다. 신민당은반유신세력들을규합하여개헌청원 1백만인서명운동을벌였다. 12월 19일박대통령은서명중지담화를발표하여이를규제하려했지만, 오히려개헌운동은전국으로확산되었다. 박대통령은유신헌법제53조에근거하여 1974년 1월 8일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와제2호를선포하여개헌운동을탄압하면서긴급조치시대를개막했다. 그리고 4월 3일에는제4호를선포하여이른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과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 사건을조작하여단죄했다. 다음해 4월 7일에는긴급조치제7호를선포하여고려대학생집회와시위를진압했다. 긴급조치의절정은그해 5월 13일선포되어박정희정권이몰락할때까지맹위를떨쳤던제9호였다. 이는정부에대한비판과항거를일절금지시켰다. 세간의유행어였던 전국민의죄수화 는제9호위반자가급증한것에대한풍자였다. 그리하여사회적으로반공안보분위기가고조되었으나, 학생시위와지식인 종교인 정치인 문인등의반유신운동은계속되었다. * 대통령긴급조치제9호전문 1 다음각호의행위를금한다. 가. 유언비어를날조, 유포하거나사실을왜곡하여전파하는행위나. 집회, 시위또는신문, 방송, 통신등공중전파수단이나문서, 도서, 음반등표현물에의하여대한민국을부정, 반대, 왜곡또는비방하거나그개정또는폐지를주장, 청원, 선동또는선전하는행위다. 학교당국의지도, 감독하에행하는수업, 연구또는학교장의사전허가를받았거나기타의례적비정치적활동을제외한학생의집회, 시위또는정치관여행위라. 이조치를공연히비방하는행위 2 제1에위반한내용을방송, 보도기타의방법으로공연히전파하거나, 그내용의표현물을제작, 배포, 판매, 소지또는전시하는행위를금한다. 3 재산을도피시킬목적으로대한민국또는대한민국국민의재산을국외에이동하거나국내에반입될재산을국외에은닉또는처분하는행위를금한다. 4 관계서류의허위기재기타부정한방법으로해외이주의허가를받거나국외에도피하는행위를금한다. 5 주무부장관은이조치위반자, 범행당시의그소속학교, 단체나사업체또는대표자나장에대하여다음각호의명령이나조치를할수있다. 가. 대표자나장에대한, 소속임직원, 교직원또는학생의해임이나제적의명령나. 대표자나장, 소속임직원, 교직원이나학생의해임또는제적의조치다. 방송, 보도, 제작, 판매또는배포의금지조치라. 휴업 휴교 정간 폐간 해산또는폐쇄의조치마. 승인 등록 인가 허가또는면허취소조치 6 국회의원이국회에서직무상행한발언은이조치에저촉되더라도처벌하지아니한다. 다만그발언을방송 보도 기타의방법으로공연히전파한자는그러지아니한다. 7 이조치또는이에의한주무부장관의조치에위반한자는 1년이상의유기징역에처한다. 이경우에는 10년이하의자격정지를병과한다. 미수에그치거나예비또는음모한자도또한같다. 8 이조치또는이에의한주무부장관의조치에위반한자는법관의영장없이체포 구금 압수또는수색할수있다. 9 이조치시행후,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제2조뇌물죄의가중처벌의죄를범한공무원이나정부관리기업체의간부직원또는동법제5조국고손실의죄를범한회계관계직원등에대하여는동법각조에정한형에, 수뢰액또는국고손실액의 10배에해당하는벌금을병과한다. 10 이조치위반의죄는일반법원에서심판한다. 11 이조치의시행을위하여필요한사항은주무부장관이정한다. 12 국방부장관은서울특별시장 부산시장또는도지사로부터치안질서유지를위한병력출동의요청을받은때에는이에응하여지원

할수있다. 13 이조치에의한주무부장관의명령이나조치는사법적심사의대상이되지아니한다. 14 이조치는 1975 년 5 월 13 일부터시행한다. 내머리는너를잊은지오래내발길도너를잊은지너무도오래오직한가닥타는가슴속목마름의기억이네이름을남몰래쓴다타는목마름으로타는목마름으로민주주의여만세! 살아오는저푸르른자유의추억되살아나는끌려가던벗들의피묻은얼굴떨리는손떨리는가슴치떨리는노여움이네이름을남몰래쓴다타는목마름으로타는목마름으로민주주의여만세! * 김지하 타는목마름으로 유인물로몰래몰래전해지는위와같은시들을골방에숨어읽으며사람들은그것이던지는인간다운삶이란무엇인가하는물음에전율하곤했다. 그리고가슴에서가슴으로번져가던이불길은 1979년 10월부산과마산에서시민항쟁으로활활타올랐다. 김영삼의국회제명으로촉발된부마민주항쟁은시민들의절대적지지속에유신독재퇴진과민주화요구로발전해가고있었다. 이에놀란박정희정권은계엄령에이어위수령을내렸고, 공수 2개여단과정규군 250여명을동원하고장갑차를투입하여진압하였다. 부마민중항쟁은그렇게진압되었지만박정희정권은그로인해심각한타격을입었다. 미국과도미묘한갈등관계에놓이게되었고집권층내부에갈등과분열이생기게된것이다. * 부마민주항쟁부마는부산시와얼마전에창원시로통합한마산시를줄인말이다. 이지역들의학생과시민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대규모반독재민주항쟁을전개했다. 부마민주항쟁은사건이전개된지역에따라구분되는데, 부산시에서는 10월 16일부산대학교학생들을중심으로항쟁이촉발되었다. 이들은경찰의제지를뚫고부산시청앞과광복동 남포동일대로진출했고, 동아대학교학생들이합류하면서도심전역으로시위가확대되었다. 시위대는 유신철폐, 독재타도 등의구호를외쳤고, 시민들은적극적으로지원하거나

시위에동참했다. 10월 17일부산대학교가긴급휴교에들어갔지만, 전날과비슷한양상의시위가전개되었다. 10월 18일 0시를기해부산일원에계엄령이선포되었고, 공수부대 2개여단이투입되었다. 그러자항쟁이마산시로확산되어경남대학교학생들을중심으로격렬한도심시위가벌어졌다. 이곳에도시위진압을위해경찰은물론군대까지동원되었고, 19일에는경남대학교에무기한휴교령이내려졌다. 그렇지만도시하층민을비롯해시민들이합세하여시위는계속되었다. 당국은 10월 20일 0시를기해마산시과창원시일원에위수령을발동했다. 4일간의항쟁으로부산에서는 1,058명이, 마산에서는 505명이연행되어검찰과군법회의에서즉결심판과유죄판결을받았다. 부마민주항쟁의배경에는심각한불경기와이들지역출신정치인김영삼에대한탄압이자리하고있었다. 부마민주항쟁은유신체제가종말을고하게되었던중요한요인으로작용했다. *(10월 15일부산대학교에배포된 ) 민주선언문 ( 일부 ) 우리는학원내의일체의외부세력을배격한다. 비민주적학칙의민주적학칙으로의개정과학원 언론의자율화와학생회의민주화와집회의자유를요구하며어용교수학자를반대하며학원당국의민주행정방향으로서의성의있는노력을요망한다. 우리는언론 인권 자유의유보나제약에반대한다. 우리는경제적민족주의를당위적인목표로한경제개발계획의자립경제에대한무방향역방향성을고발한다. 우리는총체적인책임과결과로서현독재집권층은유신헌법을철폐하고물러날것을요구한다. 학우들이여! 효원학우들이여! 민족의앞날과사회정의에대한우리들의되풀이된청원과요구는되풀이된억압으로. 얼굴을가렸던책을치우고틀어막혔던입과귀를열자. 형제의피를요구하는자유와민주의깃발을우리가잡고반민주의무리, 자유의착취무리, 불의의무리들을향해외치며나아가자! 10시도서관앞 * 위수령위수령은 1950년 3월 27일대통령령제296호로제정되었다. 제정목적은 육군군대가영구히일지구에주둔하여당해지구의경비, 육군의질서및군기의감시와육군에속하는건축물기타시설의보호에임 하는것이었다. 이법령은 1970년 4월 20일대통령령제 4949호로전부개정되었으나, 제정목적은그대로였다. 위수령은재해나비상사태시치안유지를위해병력출동, 병기사용, 국민의신체구속도가능하도록규정한다. 하지만박정희정부가위수령을주로발동했던목적은반정부시위를진압하기위해서였다. 이를테면 한일협정비준안 국회통과에반대하는학생시위가거세게일어났던 1965년 8월 26일서울시일원에위수령이발동되었다. 1971년 10월 15일대학가에서반정부시위가격화되자, 서울특별시일원에학원질서확립을위한특별명령으로위수령을발동하여 1,889명연행, 74개동아리해산, 13개미등록간행물폐간, 7 개대학학생회기능이정지되었다. 또한정부는 1979년부마민주항쟁이발발하자 10월 18일 0시를기해부산일원에계엄령을선포하고, 공수부대를투입해시위를진압했다. 하지만반정부시위가부산에서마산으로확산되고, 수출자유지역노동자와학생이가담할조짐을보이자, 10월 20일 0시를기하여마산과창원일원에위수령을발동했다. *1979년 10월 20일마산지역작전사령관조옥식소장이발표한담화문친애하는마산시민여러분! 마산시일원의일부학생과불순분자들의난동과소요로우리군은마산시의안녕과질서를유지하고시민의재산과생명을보호하기위하여마산시일원에위수령발동을하였습니다. 시민여러분께서는필요없이시위군중에휩쓸려구경함으로써주동자체포나질서확립에지장을초래케하고데모군중으로오인되어체포되는피해를당하지않도록주의하여주시기바랍니다. 우리군은데모대주위의모든군중을시위군중으로판단하고전원연행하겠습니다. 시민여러분께서는특히통행금지시간을엄수해주시기바라며마산시의질서가하루속히회복되고시민의안전한생활이유지될수있을때까지적극협조해주시기바랍니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의한안가회식자리에서총성이울렸다. 당시의중앙정보부장인김재규가쏜권총에박정희가살해당한것이다. 박정희의죽음으로유신독재정권은갑자기붕괴되었다. 유신독재의붕괴와함께사람들의가슴속에억눌려있던인간다운삶에대한요구, 민주화에대한요구가눈부시게분출되어나오기시작했다. 이른바 서울의봄 이찾아온것이다. 솔아, 그것은말그대로눈부신것이었다. 그리고그분출은정치적차원의것만이아니라우리의일상적삶곳곳에서솟아오르는것이었다. 공장에서, 회사에서, 학교에서사람들은눈부시게변화하고있었다. 자신의삶을자기의지대로충만하게채우고자하는의지는스스로를아름답게하고다른사람에대한신뢰와존중을통해모두를아름답게변화시키고있었다. 솔아, 박정희독재정권은무려 18년동안이나지속되었다. 그러니우리또래아래의젊은이들은자각할수있는능력이생긴이래독재정권아래서왜소화되고왜곡된사람들의모습만보아온셈이었다. 자기의인간적본질을실현하려는의지로가득차있는사람들의모습을보는건태어나서처음이었다. 정말사람이아름답게보였고진심으로사람에대한믿음을가질수있었지. 그리고이러한믿음을바탕으로민주화되고정의가실현되는사회에대한꿈을가질수있었다. * 김재규김재규는 1926년 3월 6일경상북도구미 ( 당시선산군 ) 에서태어났다. 경북사범학교를수료하고김천중학교교사로있다가박정희와같이육군사관학교제2기로입교했다. 1956년에장군으로진급했으며, 5 16군사정변직후에는반혁명세력으로간주되어일시감금되었으나, 박정희의호의로석방되었다. 그는 1973년중장으로예편하기까지육군방첩부대장을비롯해요직을맡았다. 전역후에는유신정우회소속으로제9대국회의원이되었고, 1976년 12월중앙정보부장에임명될때까지중앙정보부차장과건설부장관을겸직했다. 김재규는대통령경호실장차지철과갈등이심했고, 1979년에빈번하게분출되는저항들을보면서유신체제의현실을체감했다. 그해 10월 26일서울시궁정동소재중앙정보부안전가옥의술자리에서김재규는박정희와차지철을살해했다. 그는상황을유리하게조성하고자했으나, 10월 27일새벽보안사령부에의해체포되었다. 계엄고등군법회의는 1980년 1월 28일내란목적살인및내란미수를적용해사형을선고했고, 5월 24일형을집행했다. * 박정희박정희는 1917년경상북도선산군구미면에서태어났다. 대구사범학교를졸업한박정희는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3년동안교사로근무하다 1940년만주군관학교에입학했다. 그는 1942년만주군관학교를수석졸업하고일본육군사관학교에편입했다. 이곳에서우수한성적으로졸업한박정희는만주에주둔하던관동군소위로임관했다가중위로해방을맞았다. 1946년 9월조선경비사관학교제2기생으로입학했던박정희는그해에대위로임관했다. 그런데 1948년 여수 순천10.19사건 이발발하면서생사의위기에직면한다. 이사건으로대대적인군부숙청이단행되었는데, 박정희가남로당과관련된혐의로구속되었던것이다. 이와관련하여 1949년 2월박정희는사형선고를받았으나, 백선엽등의구명활동덕분에감형 석방되었다. 그리고얼마후육군본부정보문관이되었다가한국전쟁발발직후인 7월에육군정보국전투정보과장으로현역에복귀했다. 이후박정희는 1955년제5

사단장, 1957년제7사단장에부임했고, 1960년 4 19혁명시기에는부산군수기지사령관, 9월에는육군본부작전참모부장을지냈다. 그리고 1961년 5 16군사정변시에는제2군부사령관이었다. 박정희등군사정변세력은군사혁명위원회를국가재건최고회의로재편하고권력을장악했다. 군부는민정이양과민정불참등의약속을이행하지않았다. 그리고박정희는 1963년 10월부터 1979년 10월 26일사망할때까지정적제거, 헌법개정, 각종통제법률의발동과제도의집행그리고기구를활용해대통령직을유지했다. 대통령박정희에대한평가는전반적으로상반된양상을보이는데, 민주주의와인권등의측면에서는부정적이다. *12 12쿠데타 1979년 12월 12일전두환계엄사령관을수장으로군부내사모임인 하나회 가중심이되어내란을일으켰다. 당시정승화계엄사령관겸육군참모총장은박정희정부시대에군의요직을독차지했던하나회를견제하기위해 12월 13일개각과함께전두환을동해안경비사령관으로발령을내려했다. 신군부는 11월중순부터정승화에관한문제를모의하고있었는데, 자신들을견제및좌천하려한다는정보를입수하고반란을강행했다. 10 26사건 에관한수사결과를발표하면서정승화는이사건과합동수사본부장전두환은무관하다고밝혔다. 하지만 12 12군사반란을정당화할명분으로 정승화계엄사령관이대통령시해사건현장부근에있으면서도적절한조치를취하지않아내란을묵시적으로공모했으며, 김재규로부터불법자금을제공받았다 고번복했다. 12 12군사반란은평시작전통제권행사와관련한한 미합의를위반한것이었다. 또한신군부는임의로군인들을무장시켜상관을체포하는하극상을벌였으며, 이과정에서발생한무력충돌로 3명의사망자를비롯해많은사람들이부상을당했다. 반란가담자들은승진인사와군요직에배치되었고, 반란을거부했거나맞섰던사람들은숙청당했다. 신군부는여론악화를차단하기위해군사반란의정당성을담은홍보책자를배포 교육했다. 그리고시민여론을긍정적으로조성하기위해다양한사후수습을했다. 하지만김영삼정부에서 12 12군사반란은 하극상에의한쿠데타적사건 으로규정되었고, 대법원은반란죄를적용하여유죄판결을내렸다. 그러나이러한우리들의꿈위에빠르게그림자가드리워지고있었다. 전두환, 노태우로대표되는신군부는 1979년 12월 12일쿠데타를통해당시계엄사령관정승화를제거하고실권을장악하였다. 박정희정권의충복으로성장한신군부가공백기를틈타권력의중심을빠르게장악해가고있었던것이다. 이러한신군부의움직임에제동을걸기위한민주화세력의움직임도활발했다. 김대중, 김영삼등의정치인들은군부세력에발목이잡힌정부주도의개헌반대와구속자석방, 공민권정지자의즉시회복, 계엄령해제등을합의하여발표했다. 대학가역시신군부의음모와계략에결코눈을감고있지않았다. 대학의교정마다라일락꽃향기가피어오르는 1980년 5월 1일, 서울대생 1만 3천여명이민주화대총회를열고신군부세력이주도하는비상계엄의즉각해제등을외치며교문앞에서기동경찰과충돌한것을필두로연일시위가확대되고있었다. * 전두환전두환은 1931년 1월 18일경상남도합천군에서태어났다. 대구공업고등학교와육군사관학교 ( 제11기 ) 를졸업하고, 1955년소위로임관했다. 그는군부내사조직이었던 하나회 를결성하여실질적으로주도했다. 전두환은 5 16군사정변이일어나자육군사관학교생도들로하여금지지행진을벌이게했다. 이것이인연이되어최고회의의장실민원비서관에발탁되었고, 박정희정부에서중앙정보

부와육군본부그리고청와대등의요직을두루거쳤다. 전두환국군보안사령관은박정희대통령시해사건에관한수사를총괄지휘했으며, 12 12군사반란을통해정부의실권을장악하게되었다. 신군부는 1980년 5월 18일계엄령을전국에확대하고, 5 18민중항쟁을무력으로진압하는등국민들의오랜민주화의열망을좌절시켰다. 이후전두환은승승장구하여중앙정보부부장서리를거쳐국가보위입법회의상임위원장을지냈고, 육군대장으로예편한후제11~12 대대통령이되었다. 민주정의당을창당하여초대총재를지낸전두환은육군사관학교동기이자하나회를함께이끌었던노태우가차기대통령에선출될수있도록지원하여후일을도모했다. 하지만전두환 노태우등신군부는시민의항쟁으로사법적처벌을피할수없었다. * 노태우노태우는 1932년 12월 4일대구시에서태어났다. 경북고등학교와육군사관학교 ( 제11기 ) 를졸업하고, 1955년에소위로임관했다. 그는전두환과함께군부내사조직이었던 하나회 를결성 운영했다. 방첩부대와수도사단그리고공수부대등을거친노태우는 1978년에는대통령경호실에서근무했다. 1979년박정희대통령이사망할때, 노태우는제9사단장이었으나, 12 12군사반란의주체로참여하여수도경비사령관으로부임했다. 노태우는신군부의핵심으로 5 18민중항쟁을유혈진압했던가해자이기도했다. 1981년육군대장으로예편한노태우는정무제2장관, 체육부장관, 내무부장관,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등행정부와체육계를두루거쳤다. 1985년에정치계로활동영역을전환하여민주정의당대표위원, 제12대국회의원, 민주정의당총재등을거쳐제13대대통령으로선출되었다. 대통령재임기 3당합당으로창당되었던민주자유당총재를지냈으며, 1991년 남북관계기본합의서 를채택했다. 하지만대통령에서퇴임한후에는시민의항쟁으로전두환등과더불어사법적처벌을받았다. * 김대중후광 ( 後光 ) 김대중은 1924년 1월 6일전라남도신안군하의면후광리에서출생했다. 목포제일공립보통학교와목포상업학교를졸업하고, 1944년전남기선주식회사에서근무하다가해방을맞았다. 김대중은근무하던회사의관리위원장이되었고, 1950년에는 목포일보 를경영하기시작했으며, 1951년 3월에목포상선주식회사 ( 흥국해운 ) 사장이되었다. 1961년 5월강원도인제에서제5대민의원에당선된김대중은정치계에첫발을딛었으나, 5 16군사정변으로등원이무산되었다. 김대중은 1963년민주당대변인이되었고, 제6~8대까지지역구목포와전국구에서국회의원을역임했다. 김대중은 1970년 9월신민당대통령후보로선출되어경선을치렀는데, 박정희와 95만표차이였다. 김대중은신병치료차간도쿄에서유신반대성명을발표하는등의활동을하다가 1973년 8월 8일중앙정보부에의해국내로압송되었다. 1976년 3월 민주구국선언 을발표하여수감되었던김대중은 1978년 12월형집행정지로가석방되어가택연금되었고, 1980년 2월에사면 복권되었다. 5월 16일김대중과김영삼은비상계엄해제와모든정치범석방과복권등을주장했다. 신군부는 5월 17일에김대중을연행했으며, 9월 17일내란음모사건으로사형을선고했다. 1982년 12월미국으로망명했던김대중은 1985년 2월전두환정권의반대와주위의우려에도귀국하여가택연금되었지만, 3월 18 일김영삼과함께민주화추진협의회공동의장이되었다. 1987년 5월 1일김대중과김영삼등은통일민주당을창당했다. 김대중은 7월 9일사면 복권되자제13대대통령선거에출마했으나낙선했다. 1988년 4월제13대국회의원선거에서전국구의원으로, 1990년 7월평화민주당총재, 1991년 4월신민주연합당총재로, 1992년 2월제14대국회의원선거에서전국구의원으로선출되었다. 제14대대통령선거에서낙선하고정계를은퇴했던김대중은 1993년 7월영국에서귀국하여정계에복귀, 새정치국민회의총재가되었다. 그는 1997년 12월제15대대통령에당선되었고, 2002년 2월 4일퇴임했다. 김대중정부는외환위기극복에전념했으며, 2000 년 6월 15일평양에서남북정상회담을열고 6 15남북공동선언을발표했다. 2000년 1월새천년민주당총재로선출되었고, 12월 10 일노벨평화상을수상했다. 한편김대중일행은 2003년 10월 23일서울고등법원에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에대한재심을청구하여다음해 1월 29일무죄를선고받았다. 김대중은 2009년 8월 18일사망했으며, 서울국립현충원에안장되었다. * 김영삼 거산 ( 巨山 ) 김영삼은 1927 년 12 월 20 일경상남도거제시장목면대계마을에서출생했다. 장목소학교, 통영중학교와경남중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951 년서울대학교를졸업했다. 1951 년 1 월장택상국회부의장비서관으로정계에입문하여 1954 년 5 월 25 세의나이

에제3대국회의원으로당선되었다. 그는그해 11월자유당을탈당하고민주당창당에참여했다. 그는 1963년군정연장반대시위로서대문형무소에수감되는등박정희정권에서야당으로많은고초를겪었고, 민주화운동에도참여하면서중진정치인으로성장했다. 1980년 5월신군부에의해가택연금되었던김영삼은 1983년 5월 18일민주화를요구하며 23일간의단식투쟁을벌였으며, 1984년에는 민주화추진협의회 를발족했다. 1985년 2 12총선에서신한민주당에서대거국회의원에당선하는데기여했고, 1986년 2월에는 대통령직선제개헌 1천만서명운동 을전개했다. 1987년 5월통일민주당을창당하고, 6월민주항쟁에도적극참여했다. 그는그해말대통령선거에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90년 1월민주 민정 공화당의합당을통해 1992년 5월에민주자유당대통령후보가되었고, 12월 28일제14대대통령에선출되었다. 김영삼은민주자유당총재와신한국당총재를역임했다. 김영삼정부는전직대통령과재벌총수들에대한사법처리등부정부패척결을단행했으며, 깨끗한정치를구현하기위해민주주의공고화를위한조치들을실행했다. 그리고권위주의청산과 윗물맑기 개혁, 금융실명제, 하나회해체와군개혁, 역사바로세우기, 외교의지평확대등도실행에옮겼다. 하지만정권말기에경제위기국면이초래되었고, 남북관계개선등에서는답보를면치못했다. 1980 년 5 월 15 일의서울역시위 1979 년 10 월 26 일박정희의죽음으로유신독재의붕괴와함께 서울의봄 이찾아왔다. 15일오후, 서울역엔새로운군부독재의등장을막기위해 20만명가량의대학생과시민들이운집하였다. 운집한군중이남대문을경계로전투경찰과대치하는동안각대학학생회에는서울의효창운동장과잠실운동장에군인들을실은트럭과장갑차가집결한다는제보가잇따라들어왔다. 임시연단에오른학생대표들은 군인들이탱크를몰고오면달아나지도말고싸우지도말고간악한유신잔당과신군부에게총부리를돌리도록호소하자 며서울역사수를외친다. 그러나결국서울지역총학생회장단은 심야에군과충돌하는것은피해야한다 며해산하는이른바 서울역회군 을발표했다. * 신군부신군부는박정희시대의군부와구분하여 12 12군사반란에참여하고 5 18민중항쟁을진압하여권력을장악했던장성들과영관급군인들을일컫는다. 이들은한국전쟁시기였던 1952년 1월육군사관학교에입교하여 1955년소위로임관했던육군사관학교제11기가중심이되었고, 이하기수들까지가입시켰다. 신군부는 1958년에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최성택등 5명이 오성회 ( 五星會 ) 를결성한것이시초였다. 전두환등은육군사관학교학생들을움직여 5 16군사정변지지시위를벌였고, 이를계기로박정희의지원을받아요직을장악했다. 이들은 1960년대초에선배들을후견인으로끌어들이고, 후배들을가입시켜 하나회 로개칭했다. 하나회는지연, 학연, 혈연등을중시했고, 우리 의식이매우강했다.

하나회는군내부의큰영향력을행사하는사조직으로성장했다. 하나회가세상에알려지게된계기는 1973년 4월하순에발생한이른바 윤필용사건 이었다. 그러나하나회의주류는거의충격을받지않은채존속했으며, 주요보직에배치되었다. 박정희대통령유고시보안사령관직을역임하고있던전두환과하나회는두번의군사정변을주도했다. 전두환이대통령에취임한이후, 하나회구성원들은군내요직을차지했으며, 전역후장관과국회의원등을지냈다. 1993년 2월문민정부를표방하며출범한김영삼정부는군부를통제할필요성을절감하여군정종식을선언했다. 이를위해군부내의가장큰세력으로갈등의주요축이었고, 12 12군사반란과 5 18민중항쟁에밀접히관련되었던하나회를대상으로숙군작업을벌였다. 장기적으로보면, 1997년전두환 노태우등에대한사법적처벌도이의연장선상이라고볼수있다. * 계엄령계엄령은 계엄법 에의거하여선포되며, 비상계엄과경비계엄으로구성된다. 계엄령은전시, 사변또는이에준하는비상사태로인해행정및사법기능의수행이현저히곤란한경우와일반행정기관만으로치안을확보할수없는경우에대통령과같은국가원수또는행정부수반이입법부의동의를구해군대를동원해서치안및사법권을유지하는조치이다. 계엄령이선포되면, 계엄사령부가행정사무와사법사무를관장하는권한을갖는다. 계엄령은반정부세력을탄압하거나, 권력을장악하거나유지하기위한정치적수단으로빈번하게이용되었다. 계엄령은 1948년 여수 순천 10.19사건 이발발한직후였던 10월 25일에처음으로선포되었다. 하지만계엄법이법률제69호로제정된날이 1949년 11월 24일이어서첫계엄령선포의적법성여부를두고논란이있다. 마지막으로계엄령이선포된것은부마민주항쟁이전개되고있던 1979년 10월 18일이었다. 계엄령은 10 26사건이발생하자제주도지역을제외한전국일원에선포되고, 1980 년 5월 17일자정을시점으로전국으로확대되었다. 신군부는대도시들에군대를투입했는데, 특별히서울 광주 대전에는공수부대를, 부산 대구에는해병부대를배치했다. 광주에투입된공수부대는제7공수여단본부대, 제33대대, 제35대대였다. 계엄령은 1981년 1월 24일에해제되었다. * 포고문 1호 79년 10월 18일 0시를기하여아래사항을포고한다. 1 일체의집회 시위 기타단체활동을금한다. 단관혼상제와의례적인비정치적행사인경우는예외로한다. 2 일체의언론 출판 보도 방송은사전검열을받아야한다. 3 각대학은당분간휴교조치한다. 4 유언비어날조, 유포와국론분열언동을엄금한다. 5 정당이유없는직장이탈이나태업행위는엄금한다. 6 야간통행금지는 22시로부터익일새벽 4시까지로한다. 7 이포고를위반한자는영장없이체포구금압수수색한다. 8 시민의정상적인경제활동과일상생업의자유및출입국, 국내여행등활동의자유는이를최대한보장한다. 부산지구계엄사령관육군중장박찬긍 그리고 5월 18일 0시를기해신군부는계엄령을제주도를포함한전국으로확대한다고발표했다. 동시에정치인과지식인들을예비검속이란이름으로잡아들이기시작했다. 박정희유신독재의몰락이온전히민중의힘에의해이루어진것이아니었던만큼전두환신군부의정치적야심을막기에는민주세력의힘에한계가있었던것이다. 눈부시게찾아왔던서울의봄이날카로운첫키스의추억처럼운명의지침을돌려놓고멀어져가고있었다.

* 예비검속일반적으로예비검속은사법기관이조사수행에방해가된다고판단하여법원의통제를받지않고혐의자를사전에검거 구금하는행위를가리킨다. 예비검속을당한대부분의사람들은심각한고초를겪었고, 죽임을당한경우도흔했다. 한국현대사에서예비검속은한국전쟁직후, 5 16군사정변직후, 그리고 1980년 5월 17일자정계엄령확대선포직전등수차례에걸쳐이루어졌다. 1980년 5월의상황을예로살펴보면, 김대중은내란음모혐의로체포되었고, 김종필은권력형부정축재자로연행되었으며, 김영삼은가택연금되었다. 계엄사령부는전국에서총 2,699명을예비검속하여 2,295명은훈방, 404명은공소제기를했다. 광주지역에서는 505보안대가예비검속을담당했다. 505보안부대는 22대의차량과 86명의인원을투입하여 17일밤 11시부터학생회간부와재야인사등시위주동예비검속대상자로선별한 22명가운데정동년등 12명을연행했다.

3 1980 년대를밝힌역설의등불, 5 18 민중항쟁 국민들이기울어져가는서울의봄을안타까워하고있는동안신군부는그날카로운첫키스의추억자체를말살하고자하는음모를착착진행시키고있었다. 전두환이이끄는신군부는엄혹한박정희유신독재아래서도가슴에서가슴으로번져갔던, 그리하여 1980년봄찬란하게개화하기시작했던인간다운삶에대한열망, 민주화에대한열망을쉽게잠재우기어렵다는것을잘알고있었으리라. 그래서국민을지킬의무를갖는군대를살인도구로해서국민의생명을말살하는무모한계획을세웠는지도모르겠다. 그것은국민을한낱도구로생각하는박정희군부독재의논리가극단화되어나타난것이었다. 1980년 5월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박준병등으로대표되는신군부는수많은국민들의생명을빼앗음으로써정권유지의기반을마련하였다. 그음모의칼끝은바로광주를향하고있었다. 솔아, 그칼끝은물리적으로광주를향하고있었지만광주만을향한게아니었다. 그칼끝은온국민의가슴을향하고있었다. 온국민의가슴에서날카로운첫키스의추억을, 인간다운삶에대한열망을, 민주화에대한희망을도려내기위해온국민의가슴을찌르는칼날이었다. 광주의비극이담긴채전세계로알려진영정을든아이의사진 광주 전남지역시민들은인간으로서의존엄을지키기위해죽음을무릅쓰는역설을선택하였다.

솔아, 선량한군인들이국민을향한신군부의살인도구로돌변한기가막힌상황에서국민들이선택할수있는길은무엇이겠니? 굴종하여인간으로서의존엄을포기하거나인간으로서의존엄을지키기위해죽음을각오하는길이외에는없었다. 광주시민들은인간으로서의존엄을지키기위해죽음을무릅쓰는역설을선택하였다. 충만한삶을위하여삶을버리는전태일의역설이광주에서다시시작된것이다. 하지만전태일의불꽃은외로웠지만광주의불꽃은화엄의꽃밭과도같았다. 그만큼민주화에대한열망이국민들의가슴에서가슴으로면면히이어지며자라난것이다. 그래서한시인이노래한대로광주는우리나라의십자가였다. 아아, 우리들의도시우리들의노래와꿈과사랑이때로는파도처럼밀리고때로는무덤을뒤집어쓸지언정아아, 광주여! 광주여! 이나라의십자가를짊어지고무등산을넘어골고다언덕을넘어가는아아, 온몸에상처뿐인죽음뿐인하느님의아들이여! 김준태 아아광주여! 우리나라의십자가여! 솔아, 이제이대화엄의꽃밭이펼쳐지기까지의과정을잠시 짚어보아야겠다. 1. 이얼마나계획적인밤 12 시였던가 _5 월 15 일 ~17 일, 5 18 민중항쟁의발단 솔아, 젊은이들의피는뜨겁고순수하다. 그래서늘소수의이익을위하여인간을도구화하고억압하는불의가깊어지면젊은이들이가장먼저앞장서일어나곤했다. 구한말의의병운동에앞장서싸웠던사람들이너와같은 13세에서 18세사이의젊은이들이었고, 3 1운동, 광주학생의거도그러했다. 그리고 4 19혁명은중고등학생들이그주역이었지. 1980년 5월에전개되었던민주화운동역시마찬가지였다.

5월 13일학내에서시위를벌이던서울의대학생들이가두로진출하자그뜨거운민주화의물결은서울만이아니라전국적으로번져가기시작했다. 광주에서는 5월 14일전남대, 조선대학생들이처음으로경찰의봉쇄를뚫고교문을나섰다. 가두로진출한 1만여학생들은도청앞분수대에집결하여민주화성회를개최했는데시민들수천명이주위에모여들어박수를보내곤했다. 5월 15일에도전남대, 조선대, 광주교대학생들은 14일에이어교문을나와가두로진출하였다. 의외로경찰의저지는없었다. 경찰들은오히려질서를지켜달라고부탁까지했다. 최루탄한발터지지않은평화로운시위가계속되었다. 그러나이평화는폭풍전의불길한고요와도같은것이었다. 그순간시위진압군인들의배치와특수진압훈련이시작되고있었고, 검거해야할민주인사명단이이미다만들어진뒤였다. * 노동3권노동3권은노동자의사회경제적지위향상을위해법률이정한기본권으로,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을가리킨다. 단결권은노동조건개선을위해사용자와협상할수있는노동자단체를조직할수있는권리를의미한다. 일반적으로노동조합결성, 자유로운가입 탈퇴에관한내용을담고있는데, 사용자가이를침해하면부당노동행위가된다. 단체교섭권은노동자단체가노동조건개선을위해사용자와교섭할수있는권리를의미한다. 단체행동권은노동자가노동조건개선을위해사용자에대한압력수단으로행동하는쟁의권을보장한다는것이다. 단단체행동권은행사요건에서제약을받으며, 사용자는직장을폐쇄할수있는대응수단이인정된다. 이렇게준비되고있는피비린내나는탄압을알리없는 1만 6천여명의학생들은전날처럼도청앞분수대에모여 비상계엄해제하라!, 노동3권보장하라! 등의구호를외치며시국성토대회를가졌다. 집회가끝나고학생들은학교로돌아갔다. 펼쳐든대형태극기뒤에는 50여명의교수들이따랐고그뒤를학생들이열을지어행진했다. 교수들의시위참여는 1960년 4 19혁명이후처음이었다. 솔아, 우리들이대학을다니던 1970년대는학교에나가는날이반정도밖에안되었다. 시위의확산을막기위해툭하면휴교령이내려졌기때문이지. 전남대총학생회간부들도이점을걱정하고있었다. 그래서휴교령이내려졌을때의행동지침을마련하여학생들에게널리알리고있었지. 휴교령이불시에내려지더라도다음날오전 10시에전남대교문앞에집결한다. 학교앞에집결하는게불가능하면 12시에도청앞분수대에집결하여가두투쟁을전개한다. 이날도시위대는흩어지면서다시한번이방침을확인하고, 상황변화가없으면다음날도

청앞분수대광장에모여민주화성회를개최하기로결의하였다. 솔아, 5월 16일부터서울을비롯한전국의대학은일단시위를중단하고정국을지켜보기로하였다. 시위의확대가신군부의무력탄압을가져올까우려해서였고이미그런조짐이서서히나타나고있었다. 전남의학생운동지도부는이와달리박정희군사쿠데타가일어난날이기도한 5월 16일횃불시위를벌이기로결정하였다. 전남대, 조선대, 광주교육대, 조선대공전등 9개대학생 3만여명은오후 3시부터도청앞분수대광장에모여시국성토대회를벌였다. 그리고저녁 8시부터 2개조로나누어횃불시위에들어갔다. 1980년서울의봄을마지막으로밝히는수많은횃불이 계엄철폐 의구호와함께광주시내를수놓았다. 박관현열사혁명정신계승비박관현은 들불야학 강학으로활동했으며, 1980년전남대학교총학생회장에선출되었다. 그는 5월 14~16일전남대학교와광주도심에서전개된집회와시위를이끌었다. 수배자가된박관현은 2년여를도피하다가주변인의밀고로검거되었다. 광주교도소에수감된그는 50여일동안단식투쟁을벌이다병보석으로석방되었다. 그는전남대학교병원에서치료를받다가 1982년 10월 12일사망했다. 법과대학학생회는 1989년 5월 6일박관현의죽음을추모하며전남대학교교정에계승비를건립했다. 시위를마친학생들은토요일, 일요일인 17일, 18일은다른지역대학과보조를맞춰쉬면서사태를관망하고 19일부터다시시국성토대회를벌이기로하고흩어졌다. 휴교령이내리면전남대교문앞 10시집결이라는지침을다시한번확인했음은물론이다. 그날밤철야농성을하던학생들은 17일에여러가지불길한조짐들을관찰했다. 대사관이나영사관에서무슨연락이라도받았는지전남대에서강의를하던외국인들이출근을하지않고있었고, 오후 9시경에는학교주변과야산을정찰하는군인들몇분대가목격되었다. 5월 17일정부측에서는학생시위와김대중씨등재야정치운동의소용돌이를해소하기위하여오는 20일 104회임시국회를소집하기로했다고발표하였다. 임시국회에서 계엄령해제, 정치일정단축, 국회개헌특위가마련한개헌안접수 등시국문제를폭넓게다룬다는것이었다.

민주화운동지도부들은상황이잘풀려가리라는낙관적인판단을하고있었던모양이다. 특히학생운동지도부가더욱그러해서 55개대학생대표 95명이 16일오후 5시 30분부터이화여대에모여제1회전국대학총학생회장단회의를열어 17일까지마라톤회의를하고있는중이었다. 하지만정부의그러한발표는속임수에불과했다. 그순간공수부대병력을실은군용차량들이호남고속도로를질주하는모습이여러사람들에의해목격되었고, 17일오후, 광주상무대전투교육사령부에는공수부대 1천여명이작전개시준비를마치고위에서명령이내려오기만을기다리고있었다. 17일오후전남대총학생회실의전화벨이요란하게울렸다. 전화기를들자한여학생의다급한목소리가흘러나왔다. 서울의각대학학생회장단들이모두계엄당국에연행되어갔다는것이었다. 전남대회장단은일단무등산장으로피신했다가저녁 9시쯤상황점검을위해시내의대지호텔로옮겼다. 여러군데전화를걸어보았지만연락이되지않았다. 학생회장단은각자흩어져피신하며사태를지켜보자고결정하였다. 한시간뒤경찰이대지호텔을급습하였으나이미학생들은피신한뒤였다. 밤 11시, 거의같은시각에경찰과군보안대요원들이군홧발로안방에뛰어들어민주화운동에주도적역할을했던청년들과재야인사들을체포해가고있었다. 간신히체포를피한사람들은광주밖으로피신하거나지하로숨어들었다. 이세종추모비 1980년 5월 17일자정을기해계엄령이전국으로확대되면서주요대학들에계엄군이진입했다. 전북대학교에진입한계엄군은학내를수색했고, 이세종은이들을피해도망쳤다. 계엄군은이세종의사인을학생회관에서추락사한것이라고했으나, 당시부검을했던의사는 1989년에이세종의시신곳곳에피멍이있었다고증언했다. 그의동료들은 1985년 5월 18일전북대학교교정에추모비를세웠으나, 당국의탄압으로 7월에고향으로이전해야했다. 추모비는 1989년에원래의자리로돌아왔다. 솔아, 17 일밤 11 시 40 분늦은시간이라텔레비전을켜놓은채졸고있던사람들은갑자기 시끄러워진텔레비전을놀란눈으로지켜보았다. 1979 년 10 월 27 일 4 시부터제주도를제외한

전지역에내려져있던비상계엄을 1980년 5월 17일 24시를기해제주도를포함한전국으로확대한다는정부의발표와함께이희성계엄사령관을비롯한고위장성들의살기등등한모습이화면을가득채우고있었다. 국민들은그러한계엄확대조치로무엇이달라지는건지알수는없었지만어쨌든전두환신군부가전권을장악해가고있고, 찬란했던 80년서울의봄이군홧발에짓밟혀숨이끊어져가고있음을분명히느끼고있었다. 계엄사령부는 5월 18일 0시를기해김대중을비롯한재야정치인과민주인사들, 그리고사전에작성된명단을가지고민주화운동에앞장섰던학생운동지도부, 노조지도부, 종교계지도부들을순식간에잡아들이고있었다. 5월 18일 1시 40분경제7공수여단 33대대가전남대와광주교대에진주했다. 그들은전남대도서관과총학생회실등에서철야농성을벌이고있던학생들을급습, 진압봉과군홧발로무자비한구타를가한후에 69명을체포해갔다. 조선대교정에도 7공수제35대대가투입되어학생 43명을체포해갔다. 이렇게계획적인음모의칼날은한시인의다음과같은시구절처럼밤을도와광주깊숙이들어오고있었다. 암호명 화려한휴가 특전사제 7 공수군인들이전쟁터도아닌광주를총칼로강타해들어가면서붙인작전명령은 충정훈련, 암호명은 화려한휴가 였다. 오월어느날이었다 1980년오월어느날이었다광주 1980년오월어느날이었다밤 12시나는보았다경찰이전투경찰로교체되는것을 밤 12 시나는보았다 전투경찰이군인으로교체되는것을

밤 12시나는보았다미국민간인들이도시를빠져나가는것을밤 12시나는보았다도시로들어오는모든차량들이차단되는것을 * 김남주 학살1 중에서 제 7 공수여단군인들이광주에투입되면서붙여진작전명령은 충정훈련, 암호명은 화려한 휴가 였다. 전쟁터도아닌광주를총칼로강타해들어가면서붙인암호가 화려한휴가 였다는 것은누가들어도어처구니없는상징이었다. * 충정훈련 / 화려한휴가육군본부는 1980년 2월 18일충정부대와주요후방부대에 2월중에충정훈련을조기실시하라는특별지시를하달했다. 충정훈련은군대를동원하여집회와시위를공세적으로진압하는제반훈련을일컫는다. 충정훈련은특수한임무를수행하는군부대를중심으로충정훈련이실시되는것이일반적이지만, 이시기에는수도방위사령부예하사단과수도권사단들에서도충정훈련이실시되었다. 공수부대등은일반훈련을중단하고, 길이 70cm의진압봉을제작하여충정훈련에열심이었다. 노태우수도경비사령관은 3월 6일특전사령관, 4개공수여단, 3개사단의부대장과작전참모, 수도기계화사단장, 치안본부장, 시경국장등을소집했다. 2박 3일동안열린회의는수도권소요사태대비태세를점검하기위한자리였다. 이들은학생운동주도세력을 맹목적저항세력 으로규정하고, 사회로부터격리해야하며, 강경한응징조치를취해야한다는데의견을모았다. 4월 12일이후에는충정훈련을위한차량배치를비롯해항공기와다양한진압도구들이지원, 보급되었고, 5월 6일부터 9일까지 소요진압준비태세 점검이이루어졌다. 경찰과달리공수부대가 5 18민중항쟁의시위대를잔인하게진압했던배경에는이와같이오랜기간의준비와훈련이이루어졌기때문이었다. 한편 화려한휴가 는광주지역일원에서전개된충정훈련의별명으로알려졌으나, 군의공식문서에서는확인되지않는다. 2. 항쟁의불씨 _5 월 18 일, 5 18 민중항쟁첫날 18일새벽어스름, 주요관공서와거리마다경찰, 전투경찰, 군인, 공수부대원들이지키고서있었다. 일터로가기위해일찍집을나선시민들은어깨를움츠린채고개를숙이고그곁을지나갔다. 출근시간이되면서거리에붐비기시작한사람들역시암담한표정이었다. 9시경이되자하나둘모여상황이어떻게돌아가는지이야기를나누는시민들이경찰과사소한언쟁을벌이기도했지만저항이조직될가능성은없었다. 대중을조직하고지도할만한민주화운동지도부는이미검거되거나피신하여남아있지않았다. 같은시각전남대정문앞에는학생들이삼삼오오모여들고있었다. 평상시처럼도서관을찾기위해, 혹은 휴교령이내려지면오전 10시에학교정문앞에집결하자 는총학생회측의

지침을좇아기대를갖고모여든학생들이었다. 5 18민중항쟁사적 1 광주광역시는 1999년 5 18민중항쟁과관련된주요장소 25개소에대한사적지보존사업을시행했고, 현재에는 27개장소로늘어났다. 전남대학교정문앞은 5 18민중항쟁이시작된뜻깊은곳이어서 사적 1 로명명되었고, 가장큰표지석이설치되었다. 표지석에는 5월 18일오전의상황과계엄군이전남대학교에진주하여무엇을했는지기록되어있다. 교문에는공수부대원 7~8명이완전무장을한채버티고서서학교출입이금지되었으니돌아가라고명령했다. 학생들은주위를배회하며돌아갈기미를보이지않았다. 모여든학생들은 100명을넘어서고있었고여기저기불만의목소리가터져나오기시작했다. 학생들이점점불어나자공수부대중대장이메가폰을들고교문앞다리까지나와귀가를종용했다. 하지만그럴수록학생들의불만은커져서자연스럽게다리부근에모여앉아농성을하기에이르렀다. 학생들은 200~300명으로불어났고 계엄해제, 전두환물러가라, 계엄군물러가라, 휴교령철회하라 는구호가튀어나왔다. 공수부대책임자가앞으로나와즉시해산하지않으면무력으로해산시키겠다고협박하자학생들은오히려더크게노래를불렀다. 그때갑자기 돌격앞으로! 명령과함께공수부대원 7~8명이학생들사이로뛰어들어진압봉으로머리를내려치기시작했다. 몇명의학생이피를쏟으며실신하자공수부대원들은학교안으로질질끌고갔다. 광주교대와조선대앞에서도비슷한상황이벌어지고있었다. 그것은통상적인시위진압이아니었다. 공수부대원들의진압봉은길이가 70cm가량이었고, 박달나무로제작된것이었다. 그들의얼굴엔살기가어려있었다. 학생들은골목으로흩어져돌을던지며대항했지만폭동진압훈련과게릴라특수훈련을받은공수부대원을당해낼수는없었다. 진압봉에맞아피투성이가된채학생들은질질끌려갔다. 시내로나갑시다광주역앞으로모입시다 대열을지휘하던학생이외쳤다. 그자리에서싸우면피해만늘어나리라판단하고시민들에게이러한상황을알리자는것이었다.

학생들 3~4백명은광주역에서대오를정비한다음도청앞을목표로하여버스공용터미널을거쳐, 금남로 3가가톨릭센터앞까지진출하여연좌농성을시작했다. 11시쯤 5백여명이던대열은금방 7백여명으로불어났다. 비상계엄해제하라!, 김대중씨석방하라!, 휴교령철회하라!, 전두환물러가라!, 계엄군물러가라! 등의구호가튀어나왔다. 농성이시작되고십여분뒤, 대기하고있던전투경찰들이학생들을포물선형태로포위하며진압에나섰다. 숨을쉴수없을정도로최루탄이터졌고경찰은흩어져달아나는학생들을진압봉으로마구구타하며잡아들였다. 16일횃불시위때의경찰들모습과는전혀딴판이었다. 피를흘리며경찰에끌려가는학생들을보며시민들은그잔인함에항의하기도하며치를떨었다. 학생들은흩어져산발적인시위를벌이며사람들을모으기로했으나헬리콥터가따라다니며집요하게경찰들을동원, 시위를막았다. 계림극장앞에서시위를벌이던학생들도경찰에쫓겨다흩어졌는데그중 20여명의학생들은흩어지지않고인근탁구장에들어가이후대책을논의하였다. 이들은끝까지싸울것을다짐하고오후 3시충장로에있는학생회관앞에모이도록다른학생들에게알리기로한후점심을먹으러흩어졌다. 숫자는적었지만이들이전남대교문앞시위에이어민중항쟁의기폭제를만들어낸다. 진압봉으로머리를내려치는공수부대원 돌격앞으로! 명령과함께공수부대원들이학생들사이로뛰어들어진압봉으로머리를내려치기시작했다. 공수부대원의만행 진압봉에맞아피투성이가된채학생들은질질끌려갔다.

오후 1시쯤수창국민학교에몰려든 20여대의군용트럭이군인들을쏟아냈다. 전원공수부대원들이었다. 모두방석철망을단철모를쓰고, 총은등에비스듬하게메고, 한손에는대검을다른한손에는살상용진압봉을들고있었다. 그곳에서그들은한두시간동안작전명령을받고새로조를편성한후오후 2시부터시외버스터미널을중심으로시내곳곳에투입되어진압을시작했다. 학생들은오후 2시쯤시내중심가로모여들기시작했다. 한일은행앞에방어선을친전투경찰과투석전을벌이던학생들은공용버스터미널쪽으로밀리며흩어졌다모이기를반복하고있었다. 이때오후 3시쯤공수특전단이투입되었다. 공수부대원들은서너명이 1개조가되어학생처럼보이는청년들은무조건쫓아가진압봉으로머리를강타하고가슴과배에발길질을했다. 만약에조금이라도반항기를보이면가차없이대검으로배를찔렀다. 팔을뒤로하여묶인청년들이트럭위로던져지면차위에있던무전병이다시한번사정없이구타하였다. 공수부대원들의만행은비단학생청년시위대들만을향한것이아니었다. 광주일고부근에서는공수대원들이길가던여성의머리채를붙잡고블라우스를낚아채자옷이찢어지면서맨살이드러났다. 그리곤시민들이보는앞에서차마입에담지못할욕설을하며피투성이로쓰러질때까지주먹과발로구타했다. 터미널의한골목끝에서는도망치다붙잡힌학생이무릎을꿇고살려달라고빌고있었다. 대문에나와지켜보던할아버지가너무애처로워몸으로가리며봐달라고사정했다. 공수부대원은 비켜이새끼! 하면서할아버지를진압봉으로내리쳤다. 피를뿜으며쓰러지는할아버지를본학생이돌을집어들고달려들었으나역시진압봉에맞아피투성이가된채끌려가고말았다. 한편오후 2시, 학생회관앞에모이기로했던학생들은그곳을경찰이장악하고있어서충장로파출소앞과태평극장사이에모여들었다. 오후 3시쯤 1,000여명으로불어난학생들은산발적인투석전을벌이다가허술한경계망을뚫고조용히학생회관앞으로급습해들어갔다. 방심하고있던 20~30명의경찰은도망치고가스차가연기를뿜으며타올랐다. 2,000여명으로불어난시위대는구시청을통해도청앞으로진출하려다가전투경찰에막혀광주공원후문으로물러났다. 시위대는대열을정비한뒤도교육위원회앞으로해서동명동쪽으로진출하였다. 동명동파출소와지산동파출소가시위대에의해파괴되었다. 시위대는산수동오거리를향해가던중담양에서올라오던경찰지원병력 45명을포로로잡기도했다. 부상경찰 3명은택시에태워보내고 42명은연행된학우들과인질교환을하기위해남겼다. 시위대가동명동입구인청산학원앞에이르렀을때군용트럭몇대가공수부대원을가득싣고시위대앞을가로질러지나갔다. 시위대사이에긴장이감돌았다. 붙잡은경찰

들을돌려보내자는의견이나와결국아무조건없이풀어주었다. 4시 40분경, 포로경찰들이풀려나기를기다렸다는듯포위하고있던공수대원들이시위학생들의전면으로치고들어왔다. 공수부대원들은시위학생을잡으면진압봉으로머리를때려쓰러뜨리고는서너명이달려들어군홧발로온몸을짓밟고얼굴을위로향하게한다음군홧발과진압봉으로피투성이를만들어놓았다. 죽었는지살았는지축늘어진청년들이군용트럭위로던져올려지고있었다. 공수부대가휘젓고간거리에는군데군데흥건히고인핏물위로을씨년스런침묵만이감돌았다. 동명동입구에서만도최소한 40여명의젊은이들이살상되었다. 공수부대원들이사라진뒤어느할아버지는 저럴수가있단말이냐. 일제때무서운순사도많이보고, 6 25때공산당도겪었지만저렇게잔인하게사람을죽이는놈들은처음본다. 학생들이무슨죄가있길래저러는가. 죄가있다고해도저럴수는없다. 저놈들은국군이아니라사람의탈을쓴악귀들이야 하면서통곡을했다. 어느중년남자는 월남전에서베트콩을죽여봤지만, 저렇게까지잔인하지는않았다. 저런식으로죽일바엔차라리총으로쏴죽이지. 저놈들을죽여야해 하며울부짖었다. 오후 7시쯤계림동광주고등학교부근에서청년들과학생수백명이또다시공수부대와충돌했다. 그러나이때쯤부터는청년과학생들도자신을방어할무기로각목, 쇠파이프, 식칼등을지니고있었다. 공수부대와부딪친시위대는기왕에죽을바엔싸우다죽겠다는각오여서좀처럼물러서지않았다. 도로는금방흥건하게핏물로젖었고, 치열한공방전끝에공수부대가밀리기시작하여산수동방면으로도망치기시작했다. 시위대가추격하자증강된공수부대가반격을가해왔다. 열세에빠진시위대는주변주택가로몸을숨겼다. 공수부대는주위를포위하고산수동풍향동일대를이잡듯이뒤져학생처럼보이는젊은이는무조건끌고갔다. 전남북계엄분소에서는광주지역에계엄공고제4호를발표, 통금시간이밤 9시로앞당겨진다고발표하고빨리귀가할것을종용했다. 젊은이들의연행은밤새계속되고있었다. 시내주택가곳곳에서비명소리와욕지거리가끊이지않았고, 그와함께공수부대의만행을알리는숨죽인분노의소리들이전화선을타고퍼져나갔다. 3. 살아남기위해싸워야한다 _5 월 19 일, 항쟁 2 일째 1980 년 5 월 19 일아침. 시민들은전날눈으로직접목격했거나전해들은소식으로치를떨

며분노를삭이지못한표정들이었다. 공수부대의진압방식이단순폭력을넘어살인행위였다는것은일반시민들뿐만아니라육군제31보병사단 ( 광주소재향토사단 ) 지휘관들과지역기관장, 경찰관들의공통된인식이었다. 시민들은서로소식을주고받다가그냥이럴게아니라어떻게돌아가는지살펴보자고중심가인금남로로몰려들기시작했다. 오전 10시가되자금남로에빽빽이모여든군중이 3, 4천명을넘었다. 그들은딱히시위를한다기보다피해자로서의동질감을가지고탄압자인군경의저지선을묵묵히노려보고있었다. 이가운데학생들은별로없었다. 소상인들, 가게종업원들, 주변주민들, 부녀자들이대부분이었다. 군중숫자가수천명으로불어나자군과경찰은확성기와군헬기를동원해해산을종용했다. 군중은헬기를향해주먹다짐을해대며해산할기미를보이지않았다. 10시 40분부터경찰은최루탄을쏘며군중을해산시키려하였고, 시민들은투석으로대항하기시작했다. 시위대가운데섞여있던학생청년들은인근공사장에서각목, 철근, 파이프를가져다무장하였고화염병을던지기도하였다. 11시 10분경, 군용트럭 30여대에나누어탄공수부대가도청앞과광남로 4거리에진출하여시위군중을포위공격하기시작했다. 공수부대원들은진압봉과총개머리판, 대검으로때리고휘두르고찌르면서시위대가운데로파고들었다. 그들의얼룩무늬군복마저벌겋게피로물들고있었다. 시민들은무수한희생자들을길바닥위에놓아둔채주택가나다방, 사무실, 상점등지로뿔뿔이피신하였다. 하지만공수부대원의살육은끝나는법이없었다. 그들은아무집이나문을박차고들어가젊은사람이면남녀를불문하고진압봉으로난타한다음길바닥으로질질끌고나왔다. 시위에가담하지않았는데왜그러냐고항의하면그즉시허벅지나옆구리에대검을찔러넣었다. 붙잡힌시위대들은많은사람들이보는앞에서벌거벗겨지고양손을뒤로묶였다. 그리고화염병조각과돌조각이널려있는길바닥위로배로만기는올챙이포복을해야만했다. 공수부대원들은여성들에게도갖가지폭행과잔혹행위를가했고, 심지어옷을벗겨놓고기합을주기도했다. 수창초등학교앞에서는시위군중속에서잡힌청년을발가벗겨전봇대에거꾸로매달아놓고는시민들이보는앞에서공수대원여럿이진압봉으로난타했다. 청년은처음엔비명을지르다가얼굴이피투성이가된채축늘어졌다. 여기저기에서부상자가속출하자택시기사들은부상자들을실어날랐다. 하지만이모습이공수부대원의눈에띄면끝장이었다. 공수부대원은부상자만이아니라운전수까지끌어내려진압봉으로난타하여피범벅을만들었다. 공수부대의살육진압은그야말로광기어린것이었다. 그들은부상당한시민들을실어나르는경찰에게까지진압봉을휘둘러댔다.

점심때쯤살육의광풍이휩쓸고간시내는텅빈채깊은정적이깔려있었다. 시위군중은궤멸되어버리고저항의싹은꺾여버린것만같았다. 하지만솔아, 공수부대의잔인무도한살육을목격한시민들의가슴에선뜨거운무언가가꿈틀거리며깨어나고있었다. 그것은생명과인간의존엄에대한자각이었다. 그리고그것을지켜내기위해저가슴깊은곳에서눈을뜨고있는생명에의근원적의지였다. 시위의양상은 19일오후부터뚜렷이달라지고있었다. 우선시위의주도세력이학생에서일반시민으로완전히바뀌어가고있었다. 또한학생시위를훨씬뛰어넘는치열성을보였고, 방어적인양상에서공세적양상으로바뀌었다. 금남로가톨릭센터앞 (5 월 19 일 ) 오후 1시반경살육진압을벌이던공수부대는점심식사를위해잠시조선대로이동하였다. 금남로에는공수부대의경비병력과경찰병력만이남아있었다. 시민들이슬금슬금모여들어어느새오전보다더많은숫자로불어났다. 오전에는볼수없었던 40대이상의중년층과부녀자들도많이참여하고있었다. 시위대는돌과화염병을던지며금남로를지키고있는경찰들을밀어붙였다. 공방전이계속되면서가스가자욱해지고해산을종용하는방송소리가요란하게울렸다. 이제시민들의분노의대상은공수부대만이아니었다. 자신들은피를흘리며죽어가고있는데한마디보도도하지않으면서쇼프로그램을내보내는방송또한증오의표적이었다. 일군의시민들은 기독교방송 이들어있는가톨릭센터차고에서취재차량 2대를끌어다불을붙인다음시동을걸어군경저지선을향해밀어붙였다. 불붙은차가바리케이드에부딪치며폭발하여군중들의환호성과함께화염이솟아올랐다. 오후 2시가조금넘어가톨릭센터옥상에공수부대병력이남아있다는소식이전해졌다. 시민들은가톨릭센터측에이들을넘겨줄것을강력하게요청했지만거절당했다. 격분한시민들이셔터를뜯고옥상으로올라가 2명의군인을붙잡았다. 공수부대원으로부터빼앗은총을흔들자시민들은환호성을질렀다.

그러나승리의환호성도잠시 11공수대원들이장갑차를앞세우고군중속으로돌진해왔다. 뒤쳐져빠져나가지못한시민들은무차별구타를당했다. 가톨릭센터안에서미처빠져나가지못한시민들이들이닥친공수부대원들에의해무수히구타와폭행을당했다. 오후 2시 50분경부터 11공수여단 3개대대와 7공수여단 2개대대가금남로를중심으로시내에투입되어마치전쟁에서적을대하듯진압작전을벌였다. 시민들은밀려나긴했지만결코진압되지는않았다. 산발적인시위가이어지며항쟁은점점확대되어갔다. 그리고이제시민들도당하지만은않았다. 고등학생대자보 타오르는눈빛의젊은고교생들이여! 조국의민주화는앉아서되는것이아닙니다. 금남로 3가지하상가의공사장으로피했던시민들은공사현장인부들에게각목을얻어대항하며광주공원방면으로물러나고있었다. 공수부대원들은끝까지추격하며심지어는사태를보러나온주부들까지무차별구타하였다. 이를보고있던노인들이만류하자공수부대원들은노인들의머리를진압봉으로내리쳤다. 노인들은머리에서피를뿜으며쓰러졌다. 이모습을본시위대들이어디서그런힘이솟았는지일시에돌아서 좋다, 다죽여라! 라고외치며정면으로공수부대원들에게달려들었다. 상대적으로숫자가적은공수부대원들은겁을먹고도망치기시작했다. 이중한명이무리에서떨어져광주천을따라양림교쪽으로도망쳤는데시민들은끝까지쫓아갔다. 공수부대원은양림교를지나고다급해지자광주천으로뛰어내렸다. 시민들이던진돌중하나가공수부대원의뒤통수를정통으로맞췄고그는앞으로푹고꾸라졌다. 이를목격한광주적십자병원의료진들은격분한시민들의분노를만류하고부상당한공수부대원을치료한후돌려보냈다. 이러한일이곳곳에서벌어지자공수부대원들은소수인원으로는감히진압에나설수없게되었다.

오후 3시 27분, 장동문화방송국앞에는 3천여명의시민들이결집하였다. 그들은광주상황은단 1초도내보내지않으면서아무일없다는듯쇼프로그램만방영하는방송에격분하고있었다. MBC 취재차량한대가불태워지고 MBC 사장이직영하는전자제품점문화상사가불길에휩싸였다. 오후 4시 40분경대인동공용터미널앞에서는가장치열한전투가벌어지고있었다. 천여명의시위대가가드레일과공중전화박스로바리케이드를쌓고 50미터앞까지다가온공수부대에투석으로맞서고있었다. 계엄군의뒤쪽에서대기하고있던장갑차가갑자기튀어나와바리케이드를부수고시위군중을양쪽으로갈라놓았다. 하지만시민들은다시모여들었고수천명으로숫자가불어나치열한공방전을벌였다. 그때갑자기금남로쪽의광남로를따라서공수부대원을가득태운군용트럭 10여대가나타나시위대의후면을강타하기시작했다. 그들은시위대가흩어지지않자갑자기방독면을쓰면서최루탄을수없이쏘아댔다. 시위대는골목으로, 옥상으로, 공용터미널지하로흩어져피했다. 이중공용터미널지하도로피신했던시민들은아무도보지않는어두컴컴한곳에서대검에난자당해죽어갔다. 여기서죽은사람들의사망원인은거의다자상이었고칼에찔린상처가두세군데가넘었다. 또한로터리부근전투에서피투성이가된부상자를병원으로이송하던택시를공수부대원이세우자운전수는 당신이보다시피다죽어가는사람인데병원으로운반해야하지않겠느냐 고하소연했다. 공수부대원은다짜고짜차창을깨고운전수를끌어낸다음마구구타했다. 운전기사에대한난타사건은여러곳에서발생했고, 몇명의운전기사가죽었다는풍문이떠돌았다. 20일차량시위는이러한상황이크게작용했다. 오후 5시 10분경광주고등학교앞도로에서시위대와공수부대사이에충돌이발생했다. 장갑차한대가일대를누비고다니며위력시위를벌였는데시위군중들은광주고와계림파출소사이의중앙로에서기다리다가차량앞부분에달린감시경에일제히돌을던져깨뜨렸다. 감시경은눈역할을하는것이기때문에장갑차는움직일수없었다. 시민들은짚단에불을붙여출입구인뚜껑위에올려놓았다. 잠시후공수부대장교가뚜껑을열고 M16을무차별로난사하기시작했다. 이사격으로조선대학교부속고등학교 3학년이던김영찬군이세군데총상을입었다. 이외에도우발적이지만계엄군이 19일에도총기를발사했음이여러증언에서확인되고있다. 오후 7시경부터어두워지는거리의핏자국위에비가내리기시작했다. 시민들은밤 10시경까지산발적시위를벌이다집으로돌아갔다. 하지만그들의가슴에선추적추적내리는비가기름이라도되는듯항쟁의불길이더욱거세게지펴지고있었다.

4. 저들을몰아내지않으면우리가죽는다 _5 월 20 일, 항쟁 3 일째 추적추적내리던비는 20일오전 9시쯤그쳤다. 비가그치면서오전 10시무렵대인동시장주변에는 1,000여명의시민들이모여들어전날의잔혹한살육광경을이야기하며울분을토했다. 고등학생부터가정주부, 50대노년층까지합세한군중은이날새벽 6시에발견된김안부 (36세, 광주시월산 2동 132-22) 씨의시신에대해이야기하고있었다. 그의시신은전남주조장앞길에서발견되었는데, 검안서에는머리에타박상을당해사망한것으로기록되어있다. 그냥진압하기위해살해한모습이아니었던것이다. 또발가벗겨진채두손이트럭뒤에묶인채질질끌려다니다숨을거둔한대학생에대해서도이야기가되었다. 대인시장상인들은저들을몰아내지않으면우리가다죽을판인데그냥있을수없다며가게문을닫고시위에나섰다. 그들은광주고교방면을돌아시민관사거리로나아갔다. 시위대는금남로로나가기전에탱크를앞세운채길을봉쇄하고있는공수부대에막혀흩어졌다. 하지만이런식으로사방에서모여드는사람들이금남로주위에사람의바다를만들어가고있었다. 오후 3시금남로의시위군중은수만명으로불어났다. 유치원꼬마손을잡고나온할머니부터술집여종업원, 점원, 학생, 회사원, 가정주부, 인근음식점의종업원등등모든계층의전시민이쏟아져나온것이다. 경찰이쏜최루탄이터지기시작했다. 시민들은잠시물러났다몰려들기를반복했다. 저마다들고나온각목이나쇠파이프등으로는어쩔수없는터라시민들은금남로와중앙로의교차로부근에서연좌농성을시작했다. 차라리우리모두를다죽여라! 누군가외치며준비해온태극기를펼쳐흔들었다. 금남로의차량시위 (5 월 20 일 ) 시위군중이수만명으로불어났고수많은차량이헤드라이트를켜고일제히경적을울리면서나타났다. 시위의파고는점점거세져도청앞광장으로통하는여섯갈래의길을따라시민들의대열

이몰려들고있었다. 시위대는맨앞줄에드럼통이나대형화분을앞세우고공수부대를향하여한걸음씩밀어나갔다. 시위대와계엄군은치열한접전과소강상태를반복하고있었다. 오후 5시 50분, 충장로입구쪽의시위군중 5,000여명은스크럼을짜고도청을향하여육탄돌격을감행했다. 계엄군과충돌한후물러나온시위대는 살인마전두환은물러가라, 군은 38선으로복귀하라 는구호를외치며연좌농성을벌였다. 싸움은갈수록치열해지고시민들의피해는늘었지만군경이철통같이지키고있는도청은접근하기가어려웠다. 7시경갑자기유동쪽으로부터수많은차량이헤드라이트를켜고일제히경적을울리면서나타났다. 맨앞에는짐을가득실은대한통운소속 12톤대형트럭과고속버스, 시외버스 11대가섰고, 영업용택시 200여대가뒤를이었다. 트럭위엔 20여명의청년이태극기를흔들었고, 저마다각목과태극기를든청년과아가씨들이타고있었다. 차량의행렬은거대한파도로밀려와시위군중을해일로일으켜세우고있었다. 민중항쟁의양적 질적비약이이루어지는결정적순간이었다. 이에앞서오후 2시좀넘어서광주역부근에는 10대가량의택시가모여들어있었다. 손님을태워준게무슨죄냐, 우리를이렇게진압봉과대검으로죽여대면우리도영업을집어치우고싸울수밖에없다 며울분을털어놓는동안택시는 20여대로불어났다. 택시기사들은조직적대응을위해광주시내택시들을모두무등경기장으로모으기로결의하고흩어졌다. 오후 6시경무등경기장앞에는 200여대의택시가모여들었다. 그들은이제까지자행된공수부대의잔학상과택시기사들의피해를알리고성토한후 군저지선돌파에앞장서자 고뜻을모았다. 완강한군경저지선앞에서어찌할바를모르고있던시위군중들은그들이도착하자환호성을지르며감격의눈물을흘렸다. 시위군중은쇠파이프, 각목, 화염병, 곡괭이, 식칼, 낫등을들고차를따라군경저지선을향해돌격해들어갔다. 갑자기돌변한상황에놀란군경은엄청난양의최루탄과가스를쏘아댔다. 차창을깨고떨어진가스탄에질식한운전수들은군경저지선에서 20미터도못되는곳에차를멈췄다. 공수부대원들이운전수들을끌어내진압봉과구둣발로짓이기기시작했다. 밤이되도록차량을앞세운시위대의공세는도청을둘러싸고계속되고있었다. 그사이에운수노동자들이봉기했다는소식을접한시민들이계속모여들어금남로일대의군중은 20만명선을넘어섰다.

불에탄 MBC 건물 밤 9시경부터 12시경까지는공수부대원과시민들이광주시청을두고공방전을벌였다. 광주시청이공수부대가진압을위한대기장소로활용하고있었기때문이다. 시의외곽은군경의손이미치지못한지오래였고, 이제도청과광주역을제외한전지역이시위대에의해장악되었다. MBC와 KBS가시위대에의해점거되었고학동, 산수동, 계림동, 양동등대부분의파출소가이날밤방화되거나파괴되었다. 밤 10시경 MBC가불타오르기시작했다. 광주의소식은한마디도전하지않으면서삐끔삐끔말도안되는계엄군측의발표만흘리는방송에대한시민들의분노가드디어폭발한것이었다. 광주역과도청을중심으로벌어진심야의공방전은더욱치열해지고있었다. 광주역은고속도로가막힐가능성이큰상태에서계엄군의증원과보급을위한유일한통로였다. 그만큼삼엄하게지킬수밖에없어서광주역에서뻗어나가는다섯갈래도로에는겹겹이바리케이드가쳐져있었다. 밤 10시 30분한청년이인근주유소에서드럼통 2개에기름을가득채운다음불을붙이고광주역을향해차를몰았다. 청년은계엄군전방 20여미터에서밖으로뛰어내렸다. 차는바리케이드를부수고돌진하여역앞분수대를들이받았다. 휘발유드럼통이폭발하며하늘높이화염을뿜어올렸다. 시청에서광주역으로이어지는도로쪽에서도이와같은차량돌격이여러차례감행되었다. 수많은차량이분수대주위에서폭발하거나불에타고있었다. 더이상버티기어려운지경에이른계엄군들은 M16을난사하기시작했다. 돌을던지던시민들이여기저기서총탄에맞아쓰러졌다. 새벽 2시경버스한대를선두로전춘심 (32세, 여, 일명전옥주 ) 이가두방송을하는가운데 2,000명가량의시위대가광주역으로합세해왔다. 일부시민들은시외곽지역을차량으로누비고다니며시민들을광주역으로집결시켰다. 공수부대의무차별사격에도불구하고시위대의필사적인공격이계속되었다. 드디어새벽 4시경계엄군은광주역으로부터물러났다. 시민들은태극기를휘두르며시체를넘어광주역사로진격해들어갔다. 이겼다! 우리가공수부대를물리쳤다!

감격의함성이광주역을뒤흔들었다. 한편도청앞에서도총격이시작되어수많은시민들이쓰러져가고있었다. 자정을넘기며시위대는사방에서계엄군을포위하고일각일각조여들어가고있었다. 총성이몇방울리자일순시위대는물을끼얹은듯조용해졌다. 위협사격의기관총예광탄이줄을그으며밤하늘로날아가고있었다. 시위대열의앞에선사람들은죽음이눈앞에와있음을직감했다. 하지만아무도피하려하지않았다. 이윽고 M16의자동사격이시작되었다. 콩볶는듯한소리가울려퍼지며앞장섰던청년들이두손에돌을든채픽픽쓰러져갔다. 다시한번연발사격소리가들렸다. 일순시간이멎는것처럼거리는얼어붙었다. 시위군중들은본능적으로상체를굽힌채흩어져빌딩모퉁이에몸을숨겼다. 길위에는시체들이즐비했고아직죽지않은부상자들의신음과고함소리가들렸다. 저놈들이총을쏘았어! 우리도총이있어야해, 총이! 시민들은눈물을삼키며부르짖었다. 새벽 1시, 도저히그대로집으로돌아갈수없었던시민들은광주세무서로몰려갔다. 세금은다같이잘살자고내는거지, 미국놈들무기사다가제국민죽이라고내는게아니다! 군중들은외치며정문을박차고들어가기물을부수고불을질렀다. 이어서노동청도불타올랐다. 한시인은선량한군대가국민을향한살인도구로돌변한위와같은상황을다음과같이노래하였다. 오월어느날이었다 1980 년어느날이었다 광주 1980 년오월어느날이었다 밤 12시나는보았다총건으로무장한일단의군인들을밤 12시나는보았다야만족의침략과도같은일단의군인들을밤 12시나는보았다야만족의약탈과도같은일군의군인들을밤 12시나는보았다악마의화신과도같은일단의군인들을

아얼마나무서운밤 12 시였던가 아얼마나노골적인밤 12 시였던가. 김남주 학살 1 중에서 새벽부터광주에서외부로통하는모든시외전화는완전히끊겨있었고, 열차와고속버스도시내에진입이금지되어광산군송정리에서승객을내려놓았다. 20일오후에열린국무회의에서는최초의소요사태에책임을지고전국무위원이일괄사표를제출했다. 그러나아직도광주지역의심각한상황에대해선단한마디도공식적인보도가없었다. 5. 왜우리는총을들수밖에없었는가 _5 월 21 일, 항쟁 4 일째 아침이밝자마자시민들은수레에시신 2구를태극기로덮어싣고금남로를향해행진했다. 지난새벽광주역전투에서죽은시민이었다. 계엄군들이죽은시신들을트럭에던져싣다가다급한나머지빠뜨린게분명했다. 지금까지저놈들은우리형제들의시신을빼앗아가고, 단한사람의시민도죽지않았다고보도했습니다. 자, 똑똑히보십시오. 우리의친구우리의형제는이렇게죽어있습니다. 오전 9시금남로로몰려든시위군중은십여만명을넘고있었다. 모두들지난밤계엄군의연발사격을떠올리며무장의필요성을절실히느끼고있었다. 아시아자동차공장에가서차를몰고나옵시다. 우리도무장이필요합니다. 무장을하려면우선차량을확보해야합니다. 한시민이외치자 20~30명의청년들이모여들었다. 아시아자동차공장에는대형 소형버스, 장갑차를비롯한군용트럭완제품이 360대나있었지만운전을할줄아는사람이적어버스 7대만몰고나왔다. 아직도공장에차량이많이있다는소식을듣고많은시민들이버스를타고몰려가차량을몰고나왔다. 이때몰고나온차량은 APC 장갑차 3대, 군용트럭 33대, 민간트럭 20대, 대형버스 22대등모두 80여대였다. 그리고이후 360대모두를징발해사용하였다. 중고등학생과젊은이들은몽둥이로차체를두드리고구호를외치며시외곽에서시민들을모아실어날랐다. 계엄해제하라, 김대중석방하라, 노동3권보장하라, 찢어죽이자전두환 등의구호가외쳐졌는데그때는민주화운동을해온사람들로문화선전대가구성되어차량

과시내곳곳에구호가적힌선전문구를붙이고있었다. 금남로에는동별로나온수백명의가정주부들이김밥등을함지에담아펼쳐놓고시위대에게나누어주고있었다. 긴박한전투현장에서아름다운식사공동체가이루어지고있었다. 오전 9시 50분, 금남로의시위군중들은도청을중심으로계엄군과대치한가운데김범태 (27세, 조선대법대 1년 ), 전춘심등세사람을대표로뽑아협상을시도하였다. 시민들의요구를도지사에게전달토록한것이다. 1. 유혈사태에대한당국의공개사과 2. 연행시민, 학생들의전원석방과입원중인부상자의소재, 생사를파악하게해줄것 3. 계엄군은 21일정오까지광주시일원에서완전철수할것 4. 전남북계엄분소장과시민대표들의협상을주선할것 5. 이런문제들에대해도지사가직접시민들앞에나와서설명할것 이때도청을중심으로한여러갈래도로에는남녀노소구분없이 30만가까운시위군중이운집해있었다. 시민들은도지사가나오기를기다리며애국가를부르고구호를외쳤다. 구용상광주시장이나섰지만시민들의야유를받고물러났다. 10시 50분경, 장형태도지사는경찰헬기를타고금남로상공을돌면서 공수부대를철수시킬테니광주시민들은질서를지켜달라 고하며시민들을무마하려했다. 시민들은도지사가자기들앞에나타나지않은데대해화를내긴했지만공수부대를철수시키겠다는말에큰기대를걸고 12시를기다렸다. 12시가되어도공수부대가철수할기미를보이지않자시민들은힘으로그들을몰아내리라마음먹었다. 공수부대병력은장갑차를앞세운채 20열횡대로저지선을구축하고있었다. 광장분수대주변에서는헬기가자주이착륙하며도청의중요서류들을실어나르고있었다. 시민들이시위대중간에있던차량을앞으로빼자긴장감이감돌았다. 그때갑자기시위대가모는장갑차한대가앞으로나오면서공수부대의저지선을향해돌진했다. 오후 1시조금못된시각이었다.

헬기로도청의중요서류를실어나르는모습 공수부대의저지선이순식간에무너지면서공수부대원들이도청을향해도망치기시작했다. 공수부대원들은부대구분도없이뒤섞였고, 공수부대의장갑차가급히후진을하다가권용운일병을치어사망케하고다른한명에겐중상을입혔다. 저지선이붕괴되자시위대의트럭과버스들이장갑차의뒤를따라도청앞분수대를돌아나오기도하고도청을향해진격하기도했다. 12시 58분광성여객버스가접근했을때분수대근처의일부병력이사격을가했다. 운전사는즉사하고버스는수협전라남도지부건물에처박혔다. 그리고 1시정각느닷없이애국가가방송되면서일제사격이시작되었다. 공수부대원들은엎드려쏴자세로집단발포를했다. 사격은메가폰으로사격중지명령이내려질때까지 10분간계속되었다. 금남로에는시신들이나동그라져있었고부상자들의신음과외침소리로지옥과도같았다. 용감한시민들이부상자들을구하기위해거리로뛰어나왔지만그들도저격수의총탄에쓰러져버렸다. 시민들은도저히믿을수없는사태에넋을잃었고, 공포감과분노로치를떨었다. 1시 30분경, 한대의장갑차가텅빈금남로를도청을향해질주했다. 상의를벗고머리에흰띠를두른청년하나가그위에서태극기를흔들며절규하고있었다. 광주민중항쟁민주애국학생임균수추모비원광대학교학생임균수는 1980년 5월 21일전남도청앞에서계엄군이쏜총탄에맞아사망했다. 그의동료들은 1981년그의넋을기려한의관 ( 구 ) 앞에태산목을심었으나, 다음날철거되었다. 한의대동기들은 1985년부터추모비건립모금을시작하여 1987년 임균수광장및추모비건립추진위원회 를출범시켰고, 그해 9월사회과학대앞에추모비를건립했다. 광주만세! 그러나그것도잠시뿐. 저격수의총탄에청년의고개가꺾어지고장갑차는화순방면도로를 향해사라졌다. 이어서금남로한국은행광주지점앞에 5~6 명의청년들이태극기를들고나타

났다. 전두환물러가라!, 김대중을석방하라!, 비상계엄해제하라!, 공수부대물러가라! 그들역시저격수의총탄에쓰러지자다른청년들이그들을골목으로끌어내고피묻은태극기를집어들고구호를외쳤다. 2시 55분경부터는도청별관옥상과수협전남지부옥상, 도심빌딩위에수명의저격병들이등장했다. 저격병들은지나가는행인은물론주변건물의창으로내다보는사람들에게도총격을가했다. 21일오후 1시부터 10여분사이에공수부대의집단발포로전남도청앞과금남로현장에서사망한사람은 54명, 부상자가 5백여명에이른것으로추정되고있다. 이외에도시내도처에서자행된공수부대의과잉진압행위와총격으로숨진사람들이많았다. 전남대앞에서도시위대와계엄군사이의공방전이벌어지고있었는데오후 2시경 3공수여단병력들이시위대를향해일제사격을퍼부었다. 이때전남대학교근처신안동에살고있었던최미애씨는영어교사인남편을집앞에서기다리고있었다. 그녀는세살배기아이의어머니로임신 8개월째를맞이한무거운몸이었다. 그녀는공수부대가쏜 M16 총알에머리를맞아즉사했다. 같은집에살다가참변을목격한친정어머니의말에따르면당시임신 8개월째이던딸의뱃속에서는아기가 천장만장뛰는게보였다 고말했다. 집단발포에쓰러진부상자 딸의시신은연탄리어카에실려변두리공터에가매장되었다가항쟁이끝난후시검을거쳐망월동 5 18묘지에묻혔다. 장의차도구할수없었고시외곽은공수부대가눈에불을켜고지키고있었기때문에그렇게한동안변두리공터로옮겨져가매장으로묻혀있었던것이다. 광주시내모든병원은총상부상자들로초만원을이루었다. 전남대병원, 기독교병원, 적십자병원, 각종외과 내과병원, 심지어는산부인과병원에까지총상사망자와부상자들로넘쳐났다. 아비규환의와중에서총상환자들을살린것은고급약품이나최신기술이아니었다. 한사람이라도더살려내기위해전력을다한의사와간호사들, 병원으로달려와자신들의단한방울의피라도보태겠다며거리에까지길게줄을선헌혈행렬이었다. 한시인은국군이국민에대한살육자로돌변한이때의상황을암담한밤 12시로다음과같

이노래하였다. 오월어느날이었다 1980 년오월어느날이었다 광주 1980 년오월어느날이었다 밤 12시도시는벌집처럼쑤셔놓은붉은심장이었다밤 12시거리는용암처럼흐르는피의강이었다밤 12시바람은살해된처녀의피묻은머리카락을날리고밤 12시밤은총알처럼튀어나온아이의눈동자를파먹고밤 12시학살자들은끊임없이어디론가시체의산을옮기고있었다 이얼마나끔찍한밤 12 시였던가 이얼마나조직적인학살의밤 12 시였던가. 김남주 학살 1 중에서 팔십년오월의꽃박금희순의비 5 18민중항쟁으로인해많은사람들이죽거나부상을당해헌혈운동이벌어졌다. 전남여자상업고등학교 3학년학생박금희는 1980년 5월 21일광주기독병원에서헌혈을마치고귀가하다가계엄군의총탄에맞아사망했다. 전남여상동문회는박금희의넋을위로하기위해 1991 년 5월 23일학교본관앞에순의비를건립했다.

5 18 민중항쟁사적 : 화순역광장 전라남도는 1998 년 5 18 민중항쟁과관련된주요장소 80 개소를선정하여사적지보존사업을시행했다. 화순역광장은군민들이 5 18 민중 항쟁에참여할것을결의했던곳이다. 이를기념하여안내판과표지석이설치되었다. 한편도청앞집단발포직후광주시민들은자신들의공동체를지키고더이상의희생을막기위해무장할필요성을절감했다. 차량에탑승한청년들은무기를구하기위해곧장광주시외로빠져나가기시작했다. 2시 30분경, 시위대는광주로차출되어비어있는나주경찰서삼포지서, 금성파출소무기고를부수고 M1 소총과실탄을접수했다. 화순에서도화순탄광무기고를접수, 광산노동자들의도움으로 TNT와소총등을손에넣었다. 이무기로무장한시위대들은한무리는광주시내로, 다른한무리는나주, 목포, 함평, 무안, 해남, 강진등지로진출하여궐기를호소했다. 각지에서무기를실은차량들이오후 3시를전후해서광주에들어와지원동, 산수동, 백운동로터리등외곽지역에서시민들에게무기를나누어주었다. 중학생부터장년층까지수백명이공수부대를몰아내기위해총을들었다. 이무장시위대를광주시민들은시민군이라불렀다. 시민군이최초로중심가에나타난것은오후 3시 15분경이었다. 이들은충장로광주우체국으로부터도청방향으로진격하였다. 2,000명정도의시위대가그뒤를따르고있었다. 시민군대오가나타나자시민들은환호성을지르며맞이했다. 솔아, 현대식 M16과는상대가안되는, 제2차세계대전이나 6 25전쟁에서사용되었던 M1, 칼빈이었지만그것은단순한총이아니었다. 그것은광주시민들의꺾일수없는기개이자자존심이었다. 오후 3시 30분무렵부터시민군과공수부대사이에총격전이벌어졌다. 광주외곽으로부터계속무기가반입되어시민군의숫자는계속늘어났다. 시민군은도청을포위하고금남로, 노동청, 광주천변도로, 충장로, 전남대의과대학방면에서공격을가했다. 오후 4시 15분경, 전남대의과대학 12층옥상에시민군이 LMG 2정을도청방향으로설치하여위협을가하였다. 그러나시민군은 LMG를발사하지는않았다. 12층높이로부터 300미터밖에떨어져있지않은 4층높이의도청을향해사격을가하면공수부대원들에게많은사상자가날수도있었다.

21일오후 4시광주의공수부대에주둔지로철수하라는명령이하달되었다. 이에따라도청의 11공수여단 APC 장갑차가케리바 50을난사하며도로를왕복해퇴로를확보했다. 그리고 4시 30분 11여단 3개대대와 7여단 35대대병력이도로양편에 M16을난사하며장갑차를따라빠져나가기시작해 5시 50분경조선대에집결하였다. 그리고조선대에남아있던병력들과함께도로를따라, 그리고조선대뒷산을넘어화순군에인접한주남마을일대로철수했다. 이철수과정의무차별사격으로또무고한시민들이많이살상되었다. 무장한시민들은결의는높았지만아직조직적전투를벌일능력은없었다. 그리고총기가중학생부터장년까지무차별적으로나뉘어져사고가날위험도컸다. 도청앞전투에서한예비군장교가일어나공수부대를물리치려면조직적으로싸워야한다는것을힘주어말했다. 시민들은이주장을받아들여오후 4시경총기와차량을가지고광주공원으로몰려들었다. 미성년자나총을다룰줄모르는사람들이내놓은무기를 10대후반에서 20대사이의청년들이받아전투조직을편성하였다. 예비역장교들이나사병출신들이총을안전하게다루는법을가르쳤다. 명실상부한시민군이편성된것이다. 김동수열사추모비 조선대학교전자공학과학생김동수는 5 18 민중항쟁의마지막항전이벌어졌던 5 월 27 일새벽전남도청에서사망했다. 지광김동수열사 기념사업회 는그의죽음을되새기기위해 1992 년 6 월 7 일조선대학교서석홀앞광장에추모비를건립했다. 이들은총소리가멈춘것을깨닫고어스름이깔리는저녁무렵금남로양편을따라도청으로다가갔다. 8시경선봉대가총을몇방쏘며도청안으로뛰어들었다. 도청은텅비어있었다. 드디어시민군이공수부대를광주에서완전히몰아내고승리를쟁취한것이었다. 물론공수부대의퇴각조치는신군부의작전에따른것이었다. 그것은일반국민들에게광주상황을왜곡전파하여광주를고립시킨다음군대의힘을일거에집중시켜광주민중항쟁을분쇄한다는것이었다. 하지만신군부의의도가어떠했든광주시민들에게그것은피로쟁취한승리임에틀림없었다.

6. 해방광주, 자긍심의시민자치공동체 _5 월 22 일 ~26 일, 해방광주 솔아, 사람에게자기를긍정하는마음은가장중요한근거이자힘이다. 그렇기때문에전태일은기계처럼사는자기부정을거부하고목숨을던지면서까지한사람으로서자기를긍정하려하였다. 이자기를긍정하는마음은한사람에게서멈추지않는다. 전태일이피웠던자기긍정의불꽃은수많은사람들의마음에자기삶에대한본질적물음으로번져면면히이어졌다. 1980년 5월의광주시민들역시마찬가지였다. 목숨에대한위협을무릅쓰고한인간으로서의존엄을지켜냈다는자긍심은서로의가슴에반향을일으키면서무한한신뢰에바탕한아름다운공동체를만들어냈다. 그리고전두환신군부의칼날이광주만이아닌온국민의가슴에꽂힌것이듯그자기긍정의힘또한광주시민만의것이아니라온국민의것이었다. 광주는시민들의거대한공동체로거듭나고있었다. 5월 22일아침일찍부터시민들은금남로로모여들었다. 시민들은폐허가되다시피한거리를자발적으로정리하기시작했다. 말라붙은핏자국을물로씻어내고, 불탄차와바리케이드로썼던전화박스, 대형화분들을치웠다. 거리는제법산뜻한모습을되찾고있었다. 하지만정말중요한것은계엄군의봉쇄작전을어떻게극복하느냐하는것이었다. 광주는외부와통하는통신과교통이완전히두절된상태였다. 광주시민들은이러한어려움에현명하게대처했다. 우선매점매석을방지하여시내에있는생활필수품을최대한활용하였다. 쌀집에서는한번에두되이상의쌀을팔지않았고, 담배가게주인은한사람에게한갑씩만팔았다. 모든가게가마찬가지였다. 또주부들은동별로김밥을만들어시민군들에게제공했고가게들에서도빵, 우유, 드링크제등을아낌없이무상으로내놓았다. 지금까지자랑스럽게이야기되는사랑과상부상조의민중공동체를통해악조건을극복해나가고있었다. 이과정에서시민군과학생들의역할이컸다. 그들은치안유지를위해파괴행위를금지시키고, 주요시설과인사들에게경비를붙였다. 그리고시민들의교통편의를제공하기위해차량들에번호를붙여지역별로배치하였다.

시민군에게식사를제공하기위해 투사회보 광주시민의민주화투쟁 드디어전국적으로확산되다!! 수습대책위원회 21일까지의민중항쟁은계획되지않은자기방어적투쟁으로서명확한한계를가지고있었다. 하지만광주시민들은지도부가없는상태에서도흘린피와땀을바탕으로나름대로의길을찾아나가고있었다. 1970년대말광주시광천동성당을중심으로 들불야학 이운영되었다. 들불야학에참여했던강학과학생 7명은 5 18민중항쟁을전후하여유명을달리했다. 들불열사기념사업회는이들의생전활동을기억하고널리알리기위해 2002년 5월 19일 5 18자유공원입구에기념조형물을건립했다. 시민들은무엇보다도진실을간절히원하고있었다. 공수부대가철수한후정부는언론을통해대대적인왜곡선전을하고있었다. TV에서는연일돌과화염병을던지는시위대와그에맞아다리를절며걷는공수부대원따위의화면만을내보내고있었다. 신문은연일광주시민을폭도로, 항쟁을폭동으로, 간첩과불순분자에의한책동으로몰아붙였다. 광주시민들은얼마

나많은사람들이죽고다쳤는지알고싶었고자신들의절박한상황을밖에알리기를원했다. 이러한시민들의요구에응답한것이바로 투사회보 였다. 윤상원을중심으로한광천동들 불야학팀은 22 일 투사회보 제 2 호를발간배포하고있었다. 들불열사기념조형물 * 윤상원윤상원은 1950년 8월 19일전라남도광산군임곡면신룡리에서출생했다. 본명은윤개원이다. 살레지오고등학교와전남대학교정치외교학과를졸업했다. 그는주택은행에입사했지만, 노동운동을위해사직하고 1978년 10월경광천공단에취업했다. 이곳에서박기순의권유로 들불야학 강학으로활동했다. 그리고 1980년 4월 전국민주노동자연맹 결성집회에서광주 전남을대표하는중앙위원으로선임되었다. 1980년 5월 14~16일광주시도심에서전개된민주화를촉구하는시위에참가했던윤상원은 5 18민중항쟁이본격화되자점차항쟁의중심이되어갔다. 그리하여 5월 25일이루어진민주시민투쟁위원회결성에큰영향을미쳤고대변인이되었으며, 26일도청홍보실에서개최된내외신기자회견을주도했다. 5월 27일새벽, 그는시민군에게 우리가저들의총탄에죽는다고할지라도그것이우리가영원히사는길입니다 라고마지막연설을하고, 끝까지계엄군에맞서다사망했다. 1982년에윤상원과들불야학강학으로활동하다가사망한박기순의영혼결혼식이열렸다. 1980~1990 년대민주화운동과정에서애창되었던 님을위한행진곡 은바로이영혼결혼식에서불리었던추모곡이다. 또한시민군들은 21일도청에진입한후상황실을설치하고계엄군이버리고간무전기로군의상황을파악했다. 그리고 22일아침신원이확인된사망자명단을옥외방송으로알려주었다. 시민들은오후가되어도돌아가지않고모여들어자발적인시민궐기대회를열었다. 가정주부, 상인, 농민, 종교인, 학생들이연단에뛰어올라울분을토하고자기나름대로투쟁방향에대한의견을피력했다. 진실이담긴외침들이모두의가슴을뜨겁게달구었지만그요구를수렴해투쟁을조직하고발전시켜나갈지도부는형성되고있지못했다. 이러한지도력의공백을틈타만들어진것이 5 18수습대책위원회 였다. 22일오전도청에출근한정시채부지사는지역유지들을모아회의를거듭한끝에수습대책위원회를만들어계엄당국과협상을시도하기로하였다. 지역유지만으로시민들의호응을받기어렵다고생각한정시채부지사는광주지역재야인사들에게참여를요청했다. 남동성당조비오신부, 홍남순변

호사, 송기숙, 명노근전남대교수등이오전 11 시경도청으로나가수습위에참여했다. *5 18수습대책위원회 5 18민중항쟁이본격적으로전개되었던기간은약 10일동안이었다. 계엄군이전남도청에서철수한다음날인 5월 22일, 전라남도부지사는상황을수습하고대책을강구하기위해친여 재야인사들을소집하여 5 18수습대책위원회 를결성했다. 그런데이들은평상시입장에서 5 18민중항쟁을바라보고있었던만큼, 사건을파악하는관점이크게차이가있었고, 수습대책에서도상당한이견을보였다. 수습대책위원회는부지사가모임을소집했던특성상계엄당국의요구를수용하는방향으로대안을마련하려했으나, 재야인사들의강력한주장이반영되어합의안이도출되었다. 그러나계엄당국은수습대책위원회의안을사실상수용하지않았고, 시민의지지를받지도못했다. 이에따라수습대책위원회는구성원과명칭등을변경하여 시민 학생수습대책위원회 가되었다. 수습위의토론과정에서의견이둘로갈렸다. 정부지사와지역유지들은총기반납이최우선과제라고했고, 재야인사들은계엄당국의사과가선행되어야무기가회수될수있다고주장했다. 결국다음과같은 7개요구조건에합의하고정시채부지사와이종기변호사, 장휴동태평극장사장등이전남북계엄분소로가서오후 1시반경김기석부사령관과협상을벌였다. 1. 사태수습전에군을투입하지말라. 2. 연행자를전원석방하라. 3. 군의과잉진압을인정하라. 4. 사후보복금지. 5. 책임면제. 6. 사망자에대한보상. 7. 이상의요구가관철되면무장을해제하겠다. 오후 5시경협상대표로갔던수습대책위원들이돌아와 10만시민앞에차례로올라와협상결과를보고하였다. 유혈을방지하고질서를유지하자 는수습위제안에시민들은열렬한박수를보냈다. 또수습위원들은계엄분소장이개인적으로는과잉진압을인정했다고보고했다. 하지만 무기를회수, 반납하고치안을계엄사에맡겨야한다 는장휴동씨의보고에대해서는분노에찬야유가터져나왔다. 시민들은 굴욕적인협상에반대한다!, 계엄을해제하라!, 전두환을처단하라! 등의구호를외쳐댔다. 수습위원들은시민들의야유와반대에부딪치자연단을내려와도망치듯이피해버렸다. 그러자김창길 (23세, 전남대농경과 3년 ) 등학생들이 이번사태는대학생이책임을져야할사건이기때문에우리가사태수습을책임져야한다 고나섰다. 송기숙, 명노근교수는이학생들을모아전남대, 조선대, 전문대생각 5명씩 15인으로학생수습위원회를만들게했다.

5 18기념공원광주시쌍촌동소재상무대는 5 18민중항쟁의진압을주관했던전투교육사령부가주둔했던곳이다. 5 18민중항쟁이후상무대에대한부정적이미지가고착되고, 도시발전을저해한다는비판이쇄도함에따라 1994년전라남도장성군으로이전했다. 2001년 4월상무대가이전한터의일부인 204,985m2 에 5 18기념공원이조성되었다. 주요시설은 5 18현황조각및추모승화공간, 5 18기념문화관, 오월루, 대동광장, 민주학생기념탑등이다. 시민수습대책위원회는주로계엄사와의협상을맡게되었고학생수습대책위원회는직접적인대민업무를맡는것으로자연스럽게역할분담이되었다. 위원장김창길, 부위원장김종배 (27, 조선대 3년 ) 를중심으로한학생수습위원회는총무에정해민 (23, 전남대경제과 4년 ), 대변인에양원식 ( 조선대 ), 허규정 ( 조선대 ) 등을임명하고총기회수반, 차량통제반, 수리보수반, 질서회복반, 의료반등의부서를두었다. 신군부의광주고립화작전과미국, 그리고시외곽에서의민간인학살 광주의항쟁은 21 일부터목포, 함평, 무안으로, 나주, 영산포, 영암, 강진, 해남, 화순으로확 산되기시작했다. 전라남도전역으로의시위확산은신군부에게커다란부담이되었다. 광주의 차량시위대는인근의경찰서무기고를점령하여다량의총기와실탄을확보했을뿐만아니라 반실업상태의농촌청년들을광주로실어날라시민군의전투력을강화하고있었기때문이다. 신군부는공수부대를광주시내에서철수시키고다른작전을구상할수밖에없었다. 신군부는우선 21 일밤부터 3 개공수여단과 20 사단, 전교사병력으로광주로통하는모든 교통망을봉쇄했다. 이것은항쟁이타지역으로확산되는것을막아광주를고립시키는일종의 군사적공격이었다. 그리고무력소탕작전의준비작업이기도했다.

광주외곽으로통하는도로는모두봉쇄되었다. 신군부는군사공격과함께정치적, 이데올로기적공격도본격화했다. 꼭두각시인언론매체를활용하여민중항쟁을 고정간첩과깡패, 불순분자, 김대중잔당들이조직적이고계획적으로지역감정을자극하는유언비어를유포, 선량한시민들을선동해서일으킨폭력난동 으로매도하였다. 무력진압의명분을마련하려는의도였다. 그리고아울러광주시민내부를분열시키기위한공작과심리전을집요하게펼치고있었다. 미국은이러한신군부의광주고립화작전과진압작전을지원하고있었다. *5 18에서미국의역할 12 12군사반란은군대의이동을수반하는것이었다. 따라서한미연합사령부과미국대사관은이에관한상황을파악하고있었다. 미국은사건발발초기에는 쿠데타 로명명했으나, 며칠뒤에는신군부와충돌을피하기위해고전적인의미의쿠데타가아니라고하면서이중적태도를취했다. 1980년 5월전개된 민주화의봄 국면에서도군부는시위에대처한다는명목으로군대를이동했다. 한국과미국의군사작전통제권협정에따라일체의과정은미군에통보되었고, 미국의승인이필요했다. 5월 17일신군부의대규모군대투입계획에관한미국의입장은 헌법개정과민의에의한민간정부선출을위한노력이즉시재개되어야한다 는것이었다. 미국은사실상군사반란을받아들이고있었던것이다. 미국은 1989년 6월 19일 1980년 5월광주에서일어난사건에대한미국정부의성명서 를발표했다. 미국은성명서에서첫째, 사태의심각성을알지못했고, 이를인지한뒤에는당사자들에게자제를촉구하고대화로해결하라고요구했다. 둘째, 제20사단의재투입통보를마지못해받아들였으나, 이사단은한미연합사의작전통제권에서해제되어있던상태였다. 셋째, 북한으로하여금한국정세를오판하지않도록경고했고, 예방조치로미공군및해군부대를파견했다고밝혔다. 하지만 5 18민중항쟁당시시민들은미국이신군부를제압하기위해일련의조치를취했으며, 항공모함코럴시호를한국해역에진입시켜신군부를진압하려한다고오판했다. 미국이신군부를방조또는지원하는입장에서일련의조치를취했다는것을시민들이알게되면서미국에대한인식에변화가생기기시작했다. 5월 22일미국방성대변인토머스로스는 존위컴주한유엔군및한미연합사령관은그의작전지휘권아래있는일부한국군을군중진압에사용할수있게해달라는한국정부의요청을받고이에동의하였다 고밝혔다. 3개공수여단의학살을묵인한데이어 20사단의광주무력진압투입을허용한것이다. 그뿐만아니라미국은 5월 23일 12시부로 33사단 1개대대병력에대한작전통제권을 소요사태확대에대비, 광주지역질서유지를위해 이양해달라는

신군부의요청을즉시받아들였다. 또한미국은신군부의정치적, 이데올로기적광주고립화를지원하였다. 미국행정부는남침의징후가전혀없음에도불구하고 5 18민중항쟁이더격화될경우남침을야기할수도있다는경고를계속했다. 그리고실제로조기경보기와항공모함을급파함으로써일반국민이 5 18민중항쟁을불안하게생각하도록분위기를조성하였다. 그럼으로써광주를정치적으로고립시키고무력진압을정당화하는데크게기여한것이다. 신군부의군사적광주외곽봉쇄가일종의군사적공격이었음을, 그봉쇄선에서일어난수많은민간인학살이웅변해주고있다. 몇가지예만들어보기로하자. 광주교도소는광주 ~ 담양간국도와순천행고속도로사이에위치해있다. 담양은광주경제권에속하는지역이어서광주에직장이있는사람이나광주에물건을사고파는사람들이통과하지않으면안되는곳이었다. 3공수여단은 21일오후 7시경부터이도로를봉쇄하고차량과행인에게무차별로총격을퍼부었다. 22일오전김성수씨부부는 5살짜리딸아이를안고귀가하는중이었다. 김씨는트럭으로채소를실어다광주에서파는일로생계를꾸리고있었는데, 이날일을마치고진도의집으로돌아가는길이었다. 제발통과시켜달라고애원하다가안된다고해서할수없이차를돌려광주로돌아가려고하는데갑자기뒤에서총을난사했다. 이때문에다섯살짜리딸아이가총을맞아하반신이마비되었고아내는총상후유증으로세상을떠났다. 1989년 2월 22일, 광주특위제28차청문회에서김성수의증언 광주교도소앞에서이렇게사망, 부상당한사람은공식확인된사례만사망이 10명이고부상이 12명이다. 광주 ~ 화순간도로의길목에위치한주남마을 5월 23일오후 2시경, 길가숲에서잠복중이던공수부대원들이지나가던버스를무차별집중사격을가해이차량을벌집으로만들어버렸다. 그결과버스안에타고있던승객 18명중 15명이현장에서즉사하고살아난나머지 3명이생포되었는데그들은여고생 1명과남자 2명이었다. 1980년 5월 21일저녁계엄군은전남도청에서철수하여광주시외곽으로이동했다. 5월 23 일지원 2동주남마을인근에매복한계엄군이전라남도화순으로향하던소형버스를공격했다. 1989년 1월 5일주남마을인근계곡에서암매장된시신 2구가발견되었는데, 채수길과양민석으로밝혀졌다. 마을사람들로구성된 주남마을5 18위령비건립추진위원회 는 2010년 5 월 4일이들을추모하며위령비를건립했다.

군인들은이들을데리고산으로올라가다가장교의명령에따라남자 2명을사살해버렸다. 버스승객들은모두현장에서암매장되었다가항쟁이끝난보름후에야발견되었다. 그들의시체는서너발의총탄을맞았던것으로보였다. 이끔찍한학살은유일한생존자였던당시 17세의여고 1년생이었던홍금숙씨등을통해서밝혀졌다. 위령비 당시고등학교 1학년학생이었다. 오빠를찾으러시내에나왔다가집으로돌아가는차를얻어탔다. 중간에계엄군이차를세우라고했다. 그러나운전사가차를세우면죽을것같아차를세우지않고달렸다. 그러자계엄군이총격을가해타이어가터지면서차가섰다. 차내에서사람들이응사를했다. 그러나이내버스에는산속으로부터집중사격이가해져응사를멈추고손을흔들고, 손수건을흔들며쏘지말라고애원했지만사격은계속되었다. 사격이멈추고계엄군이다가와발로툭툭차며시체를헤아렸다. 이때나는아파서소리를질러계엄군이죽지않은것을알았고, 그외남자 2명이부상을당한채함께산길로끌려갔다. 계엄군이시체를셀때 15명이죽었다고했다. 경운기를타고끌려가면서왜이런식으로이렇게같은동족끼리꼭이래야되냐고군인아저씨에게물었다. 그러니까군인한명이대검을딱들이대고너도유방하나잘리고싶냐고위협을하였다. 산길로끌려올라가니좀높은사람이뭐하러데려왔느냐며사살하라고그랬다. 그래서남자두명은살려달라고애원을하는데도군인들이다시오던길로끌고내려갔다. 그리고나만그곳에서헬기로후송되었다. 그때남자부상자한명은상처가심하지않았다. 이두사람은후에사살당했다고들었다. 당시군인한명이오전에도 11명이탄버스 1대가그앞에못미쳐서총격을받고모두사망했다고말해주면서죽고싶지않으면말을잘들으라며보호를해주었다. 1989년 1월 27일, 광주특위제26차청문회에서홍금숙의증언 24일엔광주외곽지대에서계엄군들끼리오인전투가있었다. 광주 ~ 나주간국도길목인송암동은 20사단병력이봉쇄작전을펼치고있던지역이었다. 주남마을뒷산에주둔하고있던공수부대 7, 11여단병력은오전 9시경 20사단보병에게임무를넘겨주고송정리비행장으로떠났다. 7공수여단 2개대대는헬기로떠나고 11여단은 APC 장갑차를앞세우고 54대의트럭

에분승하여광주 ~ 목포간도로의샛길을따라이동하였다. 11여단병력은좌우측민가를향해무차별사격을가하며전진하여원제저수지와효덕초등학교운동장에서놀던박광범, 전재수군이목숨을잃었다. 그런데효천역전방 500미터지점야산우측에서매복하고있던전교사보병학교교도대병력이 11여단을시민군으로오인하여 90밀리무반동총으로선두 APC와 4대의차량을폭파시키고크레모아, 수류탄을포함한일제사격을퍼부었다. 11여단병력이즉각반격에나서 30분넘게격전이벌어졌다. 이교전으로공수부대원 9명이사망하고 38명이크게다쳤다. 5 18민중항쟁탑 광주대학5 18광주민중항쟁탑건립추진위원회 가 1990년 5월 18일에건립한기념물이다. 항쟁탑은탑과 3인군상조형물로구성되어있으며, 후면에는 광주민중항쟁의혈사 가기록되어있다. 민간에서건립한 5 18민중항쟁관련시설가운데규모가가장크다. 주변에 1988년 5월에건립한 5 18영령비 가있다. 이오인전투직후 11공수여단대원들은인근마을을화풀이대상으로삼았다. 부근의동물농장에들어가집중사격, 칠면조 250마리를떼죽음시켰다. 소와나머지가축들은물론이고이총격으로마을주민 8명이숨지고 7명이부상을입었다. 항쟁기간중있었던계엄군들의학살만행을하나하나말한다면끝이없을것이다. 시민 학생수습대책위원회의한계와제 1 회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 5 월 23 일오전 10 시경, 시내의각방면에서시민들은도청앞으로모여들었다. 벌써군중의 숫자는 5 만명을넘어서고있었다. 도청주변의담벽에는선전팀이그려놓은각종플래카드가 울긋불긋붙어있었다. 민주시민만세, 살인마전두환찢어죽여라, 노동 3 권보장하라, 비 상계엄해제하라 등의현수막들이군중의함성처럼펄럭이고있었다.

남도예술회관벽면과인근담벽에는사망자명단과함께병원에서죽어가고있는부상자들의참혹한흑백사진이덕지덕지붙어있었다. 도청앞광장맞은편상무관에는많은시체가질서정연하게무명천에덮여진열되어있었다. 시민들은줄을이어엄숙하게분향을하고눈물을흘렸다. 도청에서는아침부터각가정에돌아오지않은행방불명자명단을접수하여여러병원환자및사망자명단과대조하는작업을하고있었다. 가족의생사에잠을설친사람들이끝없는줄을이루었다. 도청앞시민궐기대회 (5 월 23 일 ) 한편학생수습위원회는밤새워장례, 무기회수등의여러문제를논의하고있었다. 지역유지중심인시민수습위원회는밤새계엄군이기습공격해오지않을까하는불안감에집에돌아갔다가이튿날아침에나오는형편이었다. 학생수습위내부는무기반납문제에서의견이갈리고있었다. 김창길위원장외몇몇은더이상피를흘리지않기위해무조건무기부터반납해야한다고주장했다. 그러나부위원장김종배, 허규정등은시민들이납득할수있는최소한의요구조건이관철된상태에서반납해야한다고맞섰다. 수습위가내부갈등을일으키고있는오전동안 1,000여정의총기가회수되고있었다. 23일오전시민 학생수습대책위원회는기존위원 5명이사퇴한가운데시민수습위원 10명, 조선대생 10명, 전남대생 10명도합 30명으로개편하고위원장에는윤공희대주교를추대하였다. 시민수습위원으로는조비오신부, 신승균목사, 박영봉목사, 박윤봉적십자사전남지사장, 독립투사최한영옹, 이종기변호사, 장휴동태평극장사장, 교사신영순씨등이위촉되었다. 오후 1시, 회수된총기중 200정을가지고장휴동과김창길이계엄사에반납한뒤에연행자 34명의신병을인도해오자무조건무기반납을주장하는측과조건부무기반납을주장하는측의갈등이표면화되기시작했다. 수습위의전반적인분위기는무조건무기반납쪽으로기울고있었고, 사회인사들쪽에서는그밖에는다른대안이없음을명확히했다.

5 18 민중항쟁알림탑 광주시광산동소재옛전남도청과그일대는 5 18 민중항쟁의중요배경이되었고, 사실상항쟁이마무리되었던장소이다. 허경만외 44 명 은 1997 년 5 월 16 일당시전남도청과 5 18 민주광장경계부에알림탑을세웠다. 이탑은인물조형물과불꽃모양등으로구성되었다. 그러나앞에서살펴본신군부의군사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광주고립작전에비추어볼때계엄사의연행자일부석방은광주시민내부를분열시키기위한심리적교란작전이라할수있다. 이러한교란작전은이후여러가지방식으로집요하게이루어졌다. 전남사회운동협의회가엮고황석영이기록한 죽음을넘어시대의어둠을넘어 ( 풀빛, 1985) 에나타난대표적사례만짚어보자. 23일밤에는학생수습위원장김창길이화순탄광에근무하는화약전문가라는자를도청에데리고들어와지하실에보관중인다이너마이트의뇌관을전부제거시켰다. 그자는계엄군의공작첩자였다. 25일아침 8시장계범 (21세, 황금동부근술집경영 ) 이란사람이도청농림국장실로쓰러지듯들어오며 독침을맞았다! 라고소리쳤다. 시민군중한명이살펴보려하자장계범은 너는필요없어! 정형에게부탁하네 라며옆에서있던정한규 (23세, 운전사 ) 를지목했다. 정한규는독을빨아내는시늉을하고장계범을전남대병원으로후송했다. 그러자간첩이침투했다고소란을일으키며더이상불안해못있겠다고상당수가빠져나갔는데대부분계엄군측의정보요원으로의심되는자들이었다. 학생수습위부위원장인김종배가재조사를지시해전남대병원에갔을때는장계범은도망간상태였다. 미처피하지못한정한규를잡아다조사했는데그는 23일오후부터도청안에서어떤여자를만나그여자를통해계속바깥과연락하고있었고, 시민군의무전기로도청내상황을계엄군에게보고해온첩자임이밝혀졌다. 5 18민중항쟁이전부터민주화운동에앞장서온윤상원, 김종태등몇몇젊은이들은수습위의위와같은한계를보면서 22일에열렸던궐기대회를좀더목적의식적으로조직하여시민들의의지로무조건적인무기반납을막아야한다고뜻을모았다.

오전 11시 30분, 청년들은서둘러궐기대회를주도하기시작했다. 각계각층의사람들이연단에올라와끝까지싸워자신들이쟁취한민주해방을수호해야한다고주장했다. 궐기대회를마친선전조와청년들은자체평가회를가지고시민들의반응은좋았으나좀더체계적이고조직적으로준비되어야한다고뜻을모았다. 그리고현재의수습대책위원회로는이상황을헤쳐나가기어렵고강력한지도부의결성이필요하다는데뜻을모았다. 그러나수습대책위원회는이러한시민들의투쟁의지에반하여계속무기를회수하고있었다. 23일회수된총기는 2,500정으로시민군이가지고있는 5,400여정의 50% 에가까웠다. 그리고앞에서살펴보았듯이김창길을따라들어온계엄군첩자에의해도청안 TNT의뇌관이이날밤모두제거되었다. 항쟁지도부의형성 24일부터는지금까지의승리와해방에대한흥분상태가걷히고시민들의투쟁열기가식어가고있었다. 오후 3시에열린궐기대회는 5만여명으로규모도줄어들었고열기도낮았다. 이 2차궐기대회에서윤상원등의청년학생들은수습위의타협적자세를강하게비난하고, 수습위가시민들을자극한다는이유로궐기대회를반대한다고폭로했다. 분수대아래모인시민들은박수갈채로지지를표시하였다. 또수습위의방해를눈치채고자신들이직접전기기술자를찾아다가앰프를설치했다. 궐기대회가끝나자윤상원, 김영철, 정상용, 이양현등청년학생들은다시 YWCA에모여다음사항을결의하였다. 1. 재야민주인사들을연락하여항쟁에적극적으로참여시킨다. 2. 시민들을최대한동원하여궐기대회를적극추진한다. 그리고여기에필요한방송시설을확보하고유인물, 리본, 플래카드를제작한다. 3. 도청내수습대책위원회의투항주의적노선에개입하여투쟁노선으로바꿔나간다. 이를위해서도청내의일부투쟁지도부와합세하여병력을차츰교체시킨다. 이결정에따라윤상원, 정상용, 김영철, 정해직등은이날밤무기회수문제를논의하고있 는학생수습위회의에참여하여그투항주의적노선을비판했으나학생수습위의태도를바꿀 수없었다.

학생수습대책위원회의완장 5월 24일저녁부터시외곽의민간인학살소식이알려지기시작하자수습위는다시한번중대한위기에부딪쳤다. 항쟁의추이를지켜보고있던시민들이계엄군의만행에분개하면서수습위에대한노골적인불만을터뜨리기시작했다. 특히기층민중이주를이루는무장시민군은무기회수에강력히반발했다. 30여명의완전무장을한무등갱생원애들이있었다. 이들에게무장해제를시키려했으나완강히거절했다. 그래서야, 제발너희들때문에광주온시민이폭도라는누명을쓰게됐으니까너희들만무장해제를해준다면문제는끝나겠다고간곡히부탁하니까그중에젊은애하나가여보시오당신만애국자요? 우리도애국한번합시다하였다. 그순간그말이굉장히쇼킹하게받아들여졌다. 너희들배운놈들만애국자냐, 우리같이무식하고배우지못한놈들도애국할수있다, 애국할란다, 그러한뜻으로조크랄까비아냥거림으로받아들여졌다. 1989년 2월 23일, 제29차광주청문회윤영규의증언 이러한사태에직면하자 YWCA에모였던청년들은 7시 30분경다시모여투항주의적지도부를갈아치우기로결정하고, 홍보및선전박효선, 김태종, 기획및문안작성윤상원, 김영철, 이양현, 윤기현, 재야민주인사연락정상용, 정해직등으로역할분담을하였다. 이들은본격적준비에들어갔다. 윤상원은 24일밤김종배를만나 YWCA에조직된대학생들을도청에들여보내기존경비병력과교체시키자는의견을전했다. 25일오전 10시 YWCA에서이들청년학생과광주지역재야민주인사들이모임을가졌다. 여기참석한재야인사는홍남순변호사, 이성학제헌의원, 송기숙 명노근전남대교수, 조아라 YWCA 회장, 이애신 YWCA 총무, 윤영규 ( 장로 ), 박석무 ( 교사 ), 윤광장 ( 교사 ) 등이었다. 윤상원, 정상용등은이들에게새로운도청수습위에참여해청년들을지원하고궐기대회에서성명서를발표해달라고요청했다. 재야인사들은궐기대회참여요청은수락하지않았지만도청수습위참여는수락하였다. YWCA에모인대학생병력은김종배, 허규정, 박남선등개편된학생수습위간부들과협조하여기존의도청경비병력을대체하기시작했다. 이런가운데오후 3시부터제3차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가열렸다. 이대회에서는 국민에게드리는글, 전국종교인에게드리는글, 전국민주학생에게드리는글 등의성명서가낭독되었고시민들의피해상황보고가있었다.

오후 7시경새로운항쟁지도부를구성하기로한청년학생들은 30여명의무장대학생들을데리고도청으로들어갔다. 이들은학생수습위김종배, 허규정등과회의를열어새집행부를구성, 결사항전의각오로투쟁을전개키로뜻을모았다. 오후 9시경, 학생수습대책위원장김창길이위원장직을사임하고오후 10시에는마침내새로운항쟁지도부가결성되었다. 그구성은다음과같다. 위원장 : 김종배 (25세, 조선대무역과 3년 ) 내무담당부위원장 : 허규정 (26세, 조선대 2년 ) 외무담당부위원장 : 정상용 (30세, 전남대법대졸, 보성기업영업부장 ) 대변인 : 윤상원 (29세, 전남대정외과졸, 신협직원, 들불야학강학 ) 상황실장 : 박남선 (26세, 골재차량운전사 ) 기획실장 : 김영철 (32세, YWCA 신협이사, 광천동빈민운동 ) 홍보부장 : 박효선 (27세, 들불야학강학, 문학운동가 ) 민원실장 : 정해직 (29세, 교사, 흥사단아카데미회장역임 ) 조사부장 : 김준봉 (21세, 고려시멘트직원, 시민군 ) 보급부장 : 구성주 (25세, 건재사근무 ) 새로운항쟁지도부는기존의수습위와는달리항쟁의자연발생적이고도방어적인성격을뛰 어넘어항쟁이지닌민주혁명적성격을강화발전시키려고했다. 그러나남은시간이너무짧 았다. 신군부의진압작전이불과하루앞으로다가오고있었던것이다. 7. 최후의불꽃그리고새로운시작 _5 월 26~27 일, 결사항전 5월 26일새벽 5시 30분, 마침내탱크를앞세운 20사단병력이각방면에서광주시내를향해진군해왔다. 이것은심리적공포감을주기위한교란작전이자시민군의전투의지를시험해보는전초전이었다. 도청에는비상이걸렸다. 수습위참여재야인사 17명은철야회의를하고있다가이소식을들었다. 김성용신부가대책을내놓았다. 우리어른들이방패가됩시다. 지금상태로는전차앞에나서도죽고여기있어도죽습니다. 그러니모두나갑시다. 그가다음과같은네가지요구및결의사항을제안하자모든수습위원들이한결같이찬성했다.

1. 앞으로 1시간이내에군은본래의위치로철퇴하라. 2. 그렇지않으면전시민의무장화를호소하고 3. 우리는게릴라전으로싸울것이다. 4. 최후의순간이오면 TNT를폭발시켜전원이자폭합시다. 죽음을각오한 17명의재야수습위원들이금남로에일렬횡대로섰다. 그들은금남로-수창국민학교-광주대교-양동-서부경찰서앞돌고개-농촌진흥원앞까지 4km를천천히걸었다. 수많은시민들이역시죽음을각오하고그뒤를따랐다. 마침내 죽음의행진 을끝낸재야수습대책위원들은김기석전교사부사령관의제의를받아들여재야수습대책위원과학생 11명으로대표를정해상무대로들여보냈다. 오전 10시부터오후 2시 30분까지협상을위한지루한회의가진행되었다. 하지만이협상을위한회의자체가기만에불과했다. 바로그시간공수부대특공조는비행장에서진압작전예행연습을하고있었다. 물론협상은애초부터이루어질수없는것이었다. 26일은두차례의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가열렸다. 오전 10시경, 계엄군이진입했다는가두방송을듣고도청앞으로모여든시민들은협상결과에기대를걸지않고제4차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를열어계엄군을맹렬하게규탄하였다. 예비군의총궐기를호소하는주장이큰호응을받기도했다. 제5차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는오후 3시부터열렸다. 협상을벌이던재야수습위원들은 이미모든협상은끝났다. 오늘밤계엄군이공격해올것같다 는전갈을보내왔다. 항쟁지도부는이사실을시민들에게알릴것인지말것인지고심했다. 항쟁지도부는궐기대회가끝날무렵오늘밤계엄군이공격해올것같다고발표했다. 일순분위기가싸늘해지면서광장에는비장한침묵이감돌았다. 궐기대회가끝났는데도시민들은자리를뜨려하지않았다. 날이어두워지기시작했다. 어느여학생이광장의모퉁이에서청아한목소리로 우리의소원은통일 을부르기시작했다. 노래는군중사이로퍼져나갔다. 시민들은누가선두를섰는지모르게시가행진을시작했다. 같은시간, 도청안에서는몇사람을제외한대부분의일반수습위원들이청년학생들에게같이살아남아야하지않겠냐고무기를버리고투항할것을종용했다. 누군가가고개를쳐들고말했다. 물론우리는패배할것입니다. 죽을지도모릅니다. 그러나그냥이대로아무저항없이계엄군을맞아들이기에는지난며칠동안의항쟁이너무도장렬했습니다. 누군가가여기에남아도청을사수하다죽어야합니다.

5월 27일새벽 3시 30분부터도청을중심으로한외곽에서산발적인총격전이있었다. 그리고새벽 4시쯤, 도청앞은탱크를앞세운계엄군에의해완전히포위되어있었고금남로를중심으로시가전이벌어지고있었다. 계엄군의장갑차에설치된서치라이트가도청건물전면을비추며 폭도들에게경고한다. 너희들은현재완전히포위되었다. 무기를버리고항복하라! 고마이크로항복을권유했다. 도청창가에붙어있었던시민군들이서치라이트를향해총탄을날렸다. 순간공수부대의일제사격이개시되었다. 고막을찢는폭발음을내며수류탄이터지고기관총이불을내뿜었다. 하늘에서는엄청난화력을적재한무장헬기가공수부대의작전에동원되고있었다. 도청배후에서수비하던시민군들이다시도청앞으로이동했다. 이날새벽까지도청을사수하던시민군은 250여명으로추산되었다. 공수부대는도청뒷담을넘어시민군사이로섞여들어오면서기관총을난사했다. * 계엄군의진압작전 (5 27) 계엄군은 5월 25일부터전남도청진압작전에들어갔다. 이날계엄사령관은 5월 27일자정을기해 상무충정작전 을실시한다는지침을전투교육사령부에하달했다. 5월 26일오전전투교육사령관은진압에동원될부대장을집결시켜작전지침을구체적으로전달했다. 이에따라 5월 27일자정을넘어서면서계엄군은진압을위한행동을개시했다. 광주도심으로진입한계엄군은월산동, 계림초등학교앞등의시민군저항선을통과하여광주공원, 전일빌딩, YMCA, 전남도청등을거의동시에점령했다. 수백명의시민군이군사훈련을잘받은 8,000여명의대규모병력을막아낸다는것은가능하지않은일이었다. 시민군은이러한실상을잘파악하고있었으나, 죽음을마다하지않고민주주의와시민공동체를마지막까지지켜내려고했다. 전투가가장치열하게이루어졌던곳은전남도청이었다. 시민군이무력화된시점은새벽 5시 10분경이었다. 이과정에서많은사람들이사망하거나부상을당했다. 계엄군은생존자들을상무대영창등으로연행했다. 이곳에서연행자들은극단적인처우를받았고, 군사재판을받았다. * 계엄군의 작전일지 와 작전보고서 에수록된진압작전경과 01:00 특공부대행동개시 02:00 20사단행동개시 03:00 작전개시 04:00 31사단행동개시 04:55 최고고전 ( 도청, 공원 ) 05:06 광주공원점령 05:10 광주전지역장악 06:25 특공대부대철수완료 도청민원실 2 층에몰린윤상원등항쟁지도부는건물난간에바짝붙어방아쇠를당겼다. 여기저기에서시민군들이푹푹쓰러지고시민 학생투쟁위원위의대변인이었던윤상원도계엄 군에맞서다가목숨을잃었다.

YMCA 구호선동자 라는죄명으로잡혀가고있는청년 공수부대는투항한시민군 8명이도청앞뜰로걸어나오자가차없이사살했다. 공수부대는분류기준에따라나머지생존자들등에다매직으로 극렬, 실탄10발, 권총소지 등을휘갈겨썼다. M16 소총과헬기등최신형무기를휴대한공수부대에게시민군들의저항은돌을던지며싸우는것이나다름없었다. YWCA 건물에는 11공수 61대대 4개중대가투입돼시민군 2명을사살하고 29명을생포했다. 또한 11공수는도청앞전일빌딩과관광호텔을점령하고 7공수는광주공원을점령했다. 전남도청과 YWCA 등지에서붙잡힌시민군들은두손이뒤로묶인채군용트럭에실려상무대영창이나기타군대영창으로끌려갔다. 그렇게하여도청함락작전은 1시간 30분만에종료되었다. 광주최후의날인 5월 27일새벽, 전남도청작전에투입된병력은 3, 7, 11공수등 3개여단과특공부대병력 376명, 공격부대인보병 2개사단병력 5,036명, 봉쇄부대병력 769명등총 6,172명이었다. 외곽전투에참여한병력까지합한다면무려 2만여명이었다. 도청함락작전직후도청앞에서사상자를점검하고있는계엄군 이날아침 7시까지광주상공을가득메우며가로질러비행하던헬기숫자는셀수없을정도였으며, 제트폭격기도굉음을내며초계비행을했다. 도청옥상에걸린대형스피커에서는군가인 승리의찬가 가울려퍼졌다. 공수부대병사들은대오를갖추어힘차게군가를부르고있었다. 누가누구에게승리했단말인가? 한시인의표현대로무등산은차마볼수없어제옷자락으로얼굴을가려버렸다.

민족민주열사묘역 ( 구 5 18묘지 ) 5 18민중항쟁이후유족들이인수하지못한희생자유해는광주시립공원묘지 3묘원에일괄안장되었다. 이곳은 5월운동과정에서성지가되었고, 민주화운동과정에서희생된사람들이안장되면서성소의상징성이극대화되었다. 국립5 18민주묘지가조성되어 5 18민중항쟁관련자들의유해가이장하면서 구 5 18묘지 혹은 망월묘지 로불리다가 민족민주열사묘역 으로재명명되었다. 이곳에는 40여명의민주화운동관련자들이묻혀있다. 오월어느날이었다 1980년오월어느날이었다광주 1980년오월어느날이었다밤 12시하늘은핏빛의붉은천이었다밤 12시거리는한집건너울지않는집이없었다밤 12시무등산은그옷자락을말아올려얼굴을가려버렸고밤 12시영산강은그호흡을멈추고숨을거둬버렸다 아, 게르니카의학살도이렇게는처참하지않았으리 아, 악마의음모도이렇게는치밀하지못했으리. 김남주 학살 1 중에서 5 18 자유공원

계엄군은 5 18민중항쟁에서연행한사람들을주로상무대내영창에감금했다. 시민들은수용능력을몇배초과한영창에수용되어구타와고문을받는등큰고초를겪었다. 계엄당국은군사법정을신축하여수용자들에대한군사재판을열었다. 상무대가이전하는과정에서군사법정과영창건물이제대로관리되지못해원형은해체되고말았다. 그래서이를복원하여 1999년 4월에 33,058m2 규모의 5 18자유공원을개관했다. 주요시설은 5 18자유관, 법정, 영창등이다. 그동안정부가인정 집계발표 (2001.12.18) 한 5 18민중항쟁당시사망자수는민간인 168 명, 군인 23명, 경찰 4명등총 195명이었다. 총상및칼로자상, 구타, 고문등으로신체적피해를입은부상자는모두 4,782명이다. 그리고 5 18민중항쟁희생자제6차보상신고때까지신청한행방불명자 ( 행불자 ) 수는 406명이었으나정부가인정한희생자는겨우 81명뿐이었다. 아직발견되지않고확인이안된행불자, 지금도구천에서떠돌고있는암매장된사람들, 비밀화장터에서소각된것으로추정된사람들까지포함한다면 5 18민중항쟁운동의희생자는더많을것으로생각된다.

4 우리의자기긍정을 가로막는것은무엇인가? 솔아, 광주를향한전두환신군부의칼날이광주만을향한것이아니듯이죽음을무릅쓰고 인간으로서의존엄을지켜냈다는 5 18민중항쟁의자긍심역시광주만의것이아니라온국민의것이다. 또한 5 18민중항쟁이오늘날의모습으로자리잡기까지의과정도광주만의것이아니라온국민의것이었음은물론이다. 우리는 5 18민중항쟁의과정에서참많은것을배웠다. 그배움은우리의자기긍정을가로막는것이무엇인가에대한거였지. 우리는많은피를대가로해서민주주의가단순히어떤정치제도를선택하느냐의문제에그치지않는다는것을깨달았다. 민주주의는인간을도구화하는것을거부하고인간을목적자체로존중하는자기긍정의정신이며실천이라는걸말이다. 이러한깨달음을통해우리는민주주의의풍부한모습을발견하게되었다. 무엇보다도우선우리는많이배우고잘난사람이인간을목적자체로존중하는자기긍정의정신과실천에서뛰어나리라는생각이편견에불과하다는것을깨달았다. 못배우고못난이취급을당하는사람들이오히려인간을목적자체로존중하는자기긍정에대한염원이뜨겁고그실천에서투철할수있다는걸말이다. 5 18민중항쟁과정에서이름없이스러져간사람들은전태일이그랬듯이온몸으로우리들에게그걸가르쳐주었다.

관을잡고오열하는유족 5 18 민중항쟁과정에서희생된시민들 김의기열사추모비서강대학교무역학과학생김의기는 1980년 5월 30일 5 18민중항쟁의진실을시민들에게알리기위해 동포에게드리는글 을남기고서울시종로 5가소재기독교회관 6층에서투신했다. 그가참여한동아리학생들은 1984년 11월서강대학교로욜라도서관인근에 의기비석 을세웠으나, 경찰에의해철거되었다. 1988년에학생들이다시현재의비석을건립했고, 이후에여러시설들이추가로들어섰다. 그리고우리는남북의분단이우리에게끊임없이자기부정을강요하고있다는것을깨달았다. 그자기부정의극단적모습이국민의군대가국민을살상하는 1980년 5월광주 전남의상황이라는것을말이다. 그렇기때문에민주주의의완성은분단을극복하고통일로나가는문제와떨어질수없다는걸배웠다. 세번째로우리는외세에대한종속적관계가자기부정으로귀결될수있다는걸깨달았다. 5 18민중항쟁의과정에서미국이우리의진정한민주화와자기긍정을바라는건아니라는점이명확해졌다. 오히려분단체제의유지를뒷받침함으로써우리의진정한민주주의와자기긍정에장애가될수도있다는걸말이다. 위와같은깨달음은박정희군부독재보다훨씬극심했던전두환독재정권의탄압을뚫고민주화운동이줄기차게성장하는밑거름이되었다. 1980년대민주화운동은이전의민주화운동에비해훨씬폭이넓어지고깊어졌다. 오늘날엔상식이된노동운동, 농민운동등의성장과통일운동의성장, 외세에대한종속에서벗어나대등한관계로나가고자하는민족자주화에대한지향은 1970년대까지는상상하기어려운것이었다. *6월민주항쟁 1987년 1월 14일서울특별시남영동치안본부대공분실로연행되었던서울대학교박종철학생이경찰의고문치사로사망한사건이발생했다. 당국이이일을조직적으로은폐했다는진상이폭로되면서전두환정부를향한시민사회의분노가커졌다. 여기에전두환대통령의 4 13호헌선언 은여론을한결악화시켰고, 6월 9일연세대학교이한열학생이경찰이쏜최루탄에맞아혼수상태가되면서돌이킬수없는정국이조성되었다. 일반적으로 6월민주항쟁은 6월 10일부터 6 29선언이발표되기까지 20일동안전국에서전개되었던민주화운동을가리킨다. 6월민

주항쟁은사건이전개되는국면에따라 3단계로구분된다. 제1단계는 6 10대회부터 6월 18일 최루탄추방결의대회 이전까지이다. 여당인민주정의당은야당과시민사회의적극적인항거를도외시하고진압하면서노태우의대통령후보지명과호헌을강행했다. 제2단계는 6월 18일부터 6월 25일까지로 호헌철폐, 군부독재타도, 최루탄추방 등을외치는대규모대중집회와시위가전국에서전개되었다. 당국은시민항거를극단적인방식으로진압하여엄청난피해가발생했다. 시간이흐르면서시민항거는자생적으로전개되는양상을띠었다. 미국은상황이긴박해지자공개적으로개입했다. 6월 24일전두환 김영삼회담이이루어졌으나, 호헌철회만확인되었을뿐, 선택적국민투표와직선제개헌은수용되지않았다. 제3단계는 6월 26일국민평화대행진에서 6 29선언까지의기간이다. 전두환정권은호헌철회와개헌논의재개라는부분적인양보안을제시했으나, 국민운동본부와민주당은이를받아들이지않았다. 집회와시위는공권력으로해산 진압할수있는임계점을넘어섰고, 이른바 넥타이부대 라고명명되는중산층과사무직시민들도합류하여절정을이루었다. 결국전두환정권은노태우로하여금 6 29선언을발표하게했고, 직선제개헌이약속되었다. * 노무현노무현은 1946년 9월 1일경상남도김해시진영에서태어났다. 부산상업고등학교를졸업했으며, 1975년제17회사법고등고시에합격하여 1977년판사가되었다. 이듬해변호사가된그는 1980년대초부터인권변호사로활동했고, 6월민주항쟁등민주화운동에참여했다. 노무현은 1988년통일민주당공천으로국회의원으로선출되어정치에입문했다. 그는제5공화국비리를조사했던 5공비리특별위원회 위원으로청문회에서명성을얻었다. 1990년 3당합당에반대하고, 작은 민주당창당에참여했다. 그리고야당통합으로탄생한통합민주당의대변인이되었다. 노무현은 1992년국회의원총선거와 1995년부산시장선거에서낙선했다. 1998년서울종로구에서보궐선거로국회의원에당선되었다. 2000년선거에서는지역감정극복을표방하며부산에서출마했지만낙선했다. 이러한시련들이그에게긍정적으로작용하여 2000년해양수산부장관을지냈고, 2002년제16대대통령에당선되었다. 대통령재임시기에는탈권위주의, 참여, 자율, 분권을주장했고, 국가균형발전을강조했다. 2007년에는북한을방문하여제2차남북정상회담을열고 10 4선언 을발표했다. 2008년 2월퇴임후고향에서친환경생태농촌만들기운동을전개하다가 2009년 5월재임기의여러문제들로인해검찰의조사를받은뒤자결했다. 진정한민주화와자기긍정에대한이러한국민의성숙된역량은 1987년 6월항쟁으로분출하였고, 이후군부독재를끝내고김영삼문민정부, 김대중국민의정부, 노무현참여정부에이르는민주화의진전을가져왔다. 그리고남북간화해와협력의정신을명문화한 6 15공동선언에서김대중정부의햇볕정책으로이어지는통일운동의진전을가져왔다. 그리고 5 18민주화운동에관한특별법 (5 18특별법) 을제정하여 5 18민중항쟁에대한명예회복도이루어졌다. 이러한민주화의과정에서우리는광주 5 18의가해자인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박준병등의신군부세력을국회청문회에불러내고, 법정에세워그죄를물을수있었다. 1997년 4월 17일대법원은전두환 ( 보안사령관 제11 12대대통령 ) 노태우 (9사단장 제13대대통령 ) 를비롯하여 12 12쿠데타와 5 18대학살에적극가담한정호용 ( 특전사령관 ) 장세동 (30 경비단장 ) 박준병 (20사단장) 등 16명을반란및내란죄등을적용, 법정에세웠다. *6 15 남북공동선언 남한과북한은한반도의긴장완화와통일문제를협의하기위해꾸준하게접촉했으며, 수차례합의문을발표했다. 그가운데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가장크게영향을주었던것은 2000 년 6 월 15 일평양에서발표되었던 6 15 남북공동선언 이라고할수있다. 이선언은

두국가최고책임자들이정상회담을갖고, 5개기본조항에합의를바탕으로이루어진첫사례였다. 여기에는통일의주체, 통일추진의기본방안, 이산가족 친척의교환방문과비전향장기수문제의인도적해결, 경제협력과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등제반분야의협력과교류활성화, 위의합의사항을조속히실천에옮기기위한당국사이의대화개최등이포함되었다. 김대중대통령은이정상회담과햇볕정책을통해한반도평화를증진시킨것이성과로인정되어 2000년노벨평화상을수여받았다. 하지만노무현정부시기에남북정상회담개최를위해북한에대가성송금했다는것이정치 사회적논쟁으로부각되었고, 2003년에 대북송금특검법 제정과수사로이어지면서의미가반감되었다. 한편 2007년 10월평양에서개최된제2차남북정상회담은 8개항의 남북관계발전과평화번영을위한선언 을발표했다. 그러나이선언은 2008년이명박정부이후에는실효성을상실했다. *6 15남북공동선언문조국의평화적통일을염원하는온겨레의숭고한뜻에따라대한민국김대중대통령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김정일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평양에서역사적인상봉을하였으며정상회담을가졌다. 남북정상들은분단역사상처음으로열린이번상봉과회담이서로이해를증진시키고남북관계를발전시키며평화통일을실현하는데중대한의의를가진다고평가하고다음과같이선언한다. 1. 남과북은나라의통일문제를그주인인우리민족끼리서로힘을합쳐자주적으로해결해나가기로하였다. 2. 남과북은나라의통일을위한남측의연합제안과북측의낮은단계의연방제안이서로공통성이있다고인정하고앞으로이방향에서통일을지향시켜나가기로하였다. 3. 남과북은올해 8 15에즈음하여흩어진가족, 친척방문단을교환하며비전향장기수문제를해결하는등인도적문제를조속히풀어나가기로하였다. 4. 남과북은경제협력을통하여민족경제를균형적으로발전시키고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등제반분야의협력과교류를활성화하여서로의신뢰를다져나가기로하였다. 5. 남과북은이상과같은합의사항을조속히실천에옮기기위하여빠른시일안에당국사이의대화를개최하기로하였다. 김대중대통령은김정일국방위원장이서울을방문하도록정중히초청하였으며김정일국방위원장은앞으로적절한시기에서울을방문하기로하였다. 2000년 6월 15일 대한민국대통령 김대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김정일 5 18 특별법이제정되어전두환, 노태우등학살책임자들이역사의심판을받았다. 피고전두환은반란및내란수괴로내란목적살인및상관살해미수등으로 1 심에서사형, 2

심에서무기징역을받았다. 피고노태우는반란및내란중요임무종사와상관살해미수등으 로 1 심에서징역 22 년 6 월, 2 심에서징역 17 년을받았다. * 광주청문회 1980년 5월 27일새벽, 전남도청의시민군이진압되면서 5 18민중항쟁은막을내렸다. 하지만이것은 5월운동 이라는새로운 5 18 민중항쟁의서막이열리는것을의미했다. 5 18민중항쟁은 1980~1990 년대민주화운동의역사적자산으로활용되면서 6월민주항쟁을이끌어냈고, 1988년 4월치러진국회의원총선거결과로여소야대국면이형성되면서 광주청문회 가열리게되었다. 광주청문회는 5 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 이하광주특위 ) 가주도했다. 광주특위는 7월 8일첫회의를열고조사에들어갔으며, 이를바탕으로 11월 18일부터청문회를개최했다. 여야는특위의명칭, 증인선정그리고조사와청문회일정등을두고날카롭게대립했다. 청문회는텔레비전과라디오방송을통해전국에생중계되었다. 청문회에대한국민의관심은매우뜨거웠다. 피해자들은광주청문회에서자신이경험했던처절한상황들과전해들었던비극을증언했다. 반면다수의가해자들은본질을흐리거나, 망각으로회피하거나, 시민들에게책임을전가하거나, 위증과변명으로일관하면서상황을모면하는데급급했다. 시민들은 5 18 민중항쟁의진상을밝히기위해서는최고책임자들에대한청문회가필요하다고주장했다. 그렇지만현실정치의상황은녹녹하지않아서광주청문회는 1989년 1월말현장검증을마지막으로소강상태에들어갔다. 1월 24일야3당총재들이회담을갖고광주특위활동의마무리와 5공화국핵심인사들에대한사법적처벌등에대해합의했다. 그러나여권내갈등과야당내태도변화로 2월 24일광주청문회는중단되고말았다. 광주청문회는갈등을거듭하다가 1989년 12월 31일국회에서전두환의변명과같은발언으로마감되었다. *5 18가해자사법처벌 1987년말부터 5 18민중항쟁가해자들에대한처벌요구가중요한정치 사회적의제로부상했다. 이요구는광주청문회과정은물론, 전두환 이순자부부가백담사로간뒤에도그치지않았다. 한편에서는사법부에고소 고발운동이전개되었다. 첫사례는 1988년 10월 18일 5 18광주민중항쟁동지회 가전두환 노태우등 9명을 내란및내란목적살인죄 등으로광주지방검찰청에고소한것이었는데, 검찰의수사의지는미약했다. 이러한흐름은김영삼정부가들어서면서반전되었다. 1993년 7월 19일에 12 12군사반란당시육군참모총장겸계엄사령관이었던정승화등이 군사반란 등을이유로전두환등가담자 38명을서울지방검찰청에고소한것이다. 이에대한수사가진행될때, 정동년등 5 18민중항쟁피해자 320명이전두환등관련자 35명을 내란및내란목적살인혐의 로서울지방검찰청에고소했다. 이후에도유사한고소 고발이이어졌다. 검찰은이러한고소 고발들을종합하여 1995년 7월 18일 성공한내란은처벌할수없다 는논리로 공소권없음 을발표했다. 그러자수그러들었던 5 18민중항쟁가해자처벌운동이다시타올랐다. 정치권에서는야당이가해자들의처벌을목적으로하는 특별법안 을국회에제출하면서뜨거운정치적사안이되었다. 이를묵과할수없었던김영삼대통령은 11월 24일기존입장을번복했고, 12월 19 일 5 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 이제정되었다. 1996년 2월 28일에특별수사본부는전두환 노태우등 16명을 군사반란및내란피의자 로구속기소하여재판에회부했다. 재판장은피의자들을비호하려는다양한조직적 비조직적행동들이난무했다. 재판과정은또다른의미의 5월투쟁 과같았다. 1심공판총 28 회, 항소심공판총 13회를개최하고나서 1997년 4월 17일대법원은피의자들에게사형에서 3년의징역형을선고했다. 전직대통령이 반란및내란 등을이유로사법부의단죄를받은것은세계적으로도매우이례적이었다. *12 12군사반란관련자와 5 18민중항쟁가해자에대한사법부의판결전두환무기징역, 노태우징역 17년, 황영시징역 8년, 허화평징역 8년, 이학봉징역 8년, 정호용징역 7년, 이희성징역 7년, 주영복징역 7년, 허삼수징역 7년, 최세창징역 6년, 차규헌징역 5년, 장세동징역 3년 6월, 신윤희징역 3년 6월, 박종규징역 3년 6월, 박준병무죄

정호용등 14명의피고는역시내란죄등이적용되어 1심에서 4~10년, 2심에서 3~7년의징역형을선고받았다. 대법원은이들피고들을판결하면서 우리나라는제헌헌법의제정을통하여국민주권주의, 자유민주주의, 국민의기본권보장, 법치주의등을국가의근본이념및기본원리로하는헌법질서를수립한이래, 여러차례에걸친헌법개정이있었으나, 지금까지한결같이헌법질서를그대로유지하여오고있으므로, 헌법에정한민주적절차에의하지아니하고폭력에의하여헌법기관의권능행사를불가능하게하거나정권을장악하는행위는어떠한경우에도용인될수없는것 이라고명백히선언을했다. * 헌법에보장된국민의기본권 1945년 7월 17일대한민국헌법이제정된이래총 9회의개정이이루어졌다. 헌법을개정하는이유는공백이나불완전함을메우는경우, 중요한새로운사회적변화에대처하기위한경우, 질서정연하고집약적으로헌법을구성하기위한경우등인데, 한국에서는헌법개정절차가비정상적인상태에서이루어진경우가많았다. 그래서집권세력이권력유지를위해또는일방적인통치와지배를위한제도적장치를마련하기위해헌법을개정하곤했다. 헌법에서기본권은 기본적인권 을의미하며, 자연권 혹은 실정권 으로해석되고있다. 일반적으로기본권은평등권, 자유권, 참정권, 청구권, 사회권등에관한조항들을포함한다. 국민의기본권이헌법개정에서가장크게후퇴했던것은박정희정부시대에단행된제7차개정, 이른바 유신헌법 이었다. 유신헌법은구속적부심제도를폐지하고, 언론 출판 집회 결사에대한허가제 검열제금지규정을삭제했으며, 대통령이긴급조치를발동하여군법회의재판을받도록규정했다. 이와대비적으로의무교육확대와같은전시효과적인기본권확대규정도포함되었으나, 실효성이낮았다. 솔아, 흔히민주주의는피를먹고자란다고들말한다. 그렇다. 어쩌면너희들이당연하게여기는많은것들은선배들이흘린피의대가라고도할수있다. 솔아, 두여중생이미군장갑차에치여숨진것에항의하는촛불시위만해도그렇다. 1990년대초까지만해도그런일은피흘림과투옥을각오하지않고는감행하기어려운것이었다. 북한을적으로보지않고동포로인식하는너희들생각의변화또한그렇다. 1990년대초까지만해도그러한생각을표명하는것은투옥을각오해야만하는일이었다. 인터넷에서대통령을마음내키는대로비판하고풍자할수있는너희들의정치적자유또한마찬가지이다. 하지만솔아, 나는이미이룬것에대해더이상구구하게이야기하고싶지않다. 그러기에는우리의진정한자기긍정을위해아직해결되지않은것들이너무도많고, 너희들의앞에새롭게해결해야할문제로나타나는것들도너무도많다. 나는너희들이자기삶을긍정하기위해앞으로풀어나가야할것들이무엇인가에대해더많이이야기하고싶다. 그러는것이우리에게큰자기긍정을심어준 5 18민중항쟁의정신에도더잘맞는것일게다.

5 자라나는세대의 자기긍정을위하여 솔아, 30 년이상의세월이지났는데도너는우리때와별로다르지않은입시교육의중압 속에서생활하고있다. 이것하나만보아도우리의자기긍정이이제시작에불과하다는것을잘알수있다. 많은피를흘렸음에도불구하고우리는너희들에게할말이없는건지도모르겠다. 우리가온길보다는너희들이갈길이더멀고험난해보이니말이다. 앞에서나는 1980년 5 18민중항쟁은광주 전남만의것이아니라온국민의것이라고누누이이야기했다. 이것은어쩌면조금은반사적인강조인지도모르겠다. 전두환, 노태우군부독재정권은집요하게지역감정을활용하여 5 18민중항쟁을광주 전남지역폭도들의난동으로몰아가려했었다. 그리고민주세력내부에서도지역기반에따른분열을넘어서지못했기때문에지역감정은충분히극복되지못했다. 구 5 18 묘지를답사하고있는청소년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주최제 1 회청소년민주주의역사캠프, 2003 년 ) 1980 년 5 18 민중항쟁은광주 전남만의것이아니라온국민의것이었다.

5 18 광주민중항쟁기념비 중앙대학교에재학하던전남지역출신학생들이성금을모아 1988 년 5 월 18 일건립했다. 중앙대학교서울캠퍼스중앙도서관옆잔디밭에 위치해있다. 5 18 광주영령추모비 한국외국어대학교용인캠퍼스총학생회가 1988 년 5 월에 5 18 민중항쟁희생자들의넋을추모하고당시의의미를되새기기위해학생회관 앞에이추모비를건립했다. 추모비후면에는김준태시인의작품 아아광주여, 우리나라의십자가여 가새겨져있다. 솔아, 5 18민중항쟁에담겨있는자기긍정의정신은지역감정과같은왜소화와분열을넘어설것을요구하고있다. 이것은너희들과우리가함께풀어나가야할숙제로목전에놓여있고, 지금함께풀어나가고있는과정에있는것일게다. 솔아, 이제우리가대화를시작했던처음으로돌아가보자. 너희들의삶에가닿지도않는데어떤역사적경험을받아들이라고강요하고싶지는않다고이글의서두에서나는말했었다. 물론이말이역사적경험들을경시해도좋다는뜻이아님은너도잘알것이다. 우리가지나간역사에관심을갖는것은단순한호사취미때문이아니다. 지금우리가부딪친어떤문제들을해결하는데필요해서역사에관심을갖는것이다. 그렇기때문에역사는시간이흘러도변하지않는사실의더미가아니다. 똑같은역사적사건도어떤문제의식을가지고접근하느냐에따라달라지고, 각세대가부딪치는현실문제의차이에따라다르게보인다. 우리세대와너희들세대가갖는문제의식이다르다면우리세대가보는 5 18민중항쟁과너희들세대가보는 5 18민중항쟁이그만큼다를것이다. 솔아, 내가

강조하고싶은것은너희들은너희들세대나름대로의역사를바라보는눈이필요하다는것이었다. 내가강조하고싶은것은역사를바라보는눈을갖기위해서는자신의삶을바라보는진정성과자기삶에서문제를포착해내는치열한자각이필요하다는것이었다. 솔아, 너희들은우리가역사에서구해왔던것보다훨씬많은것들을역사로부터구해와야할것이다. 너희들이살세계는우리가살았던세계보다훨씬넓고그만큼부딪쳐오는문제들이많을것이기때문이다. 중국과러시아대륙이우리의생활속으로들어오는이른바동북아시대로일컬어지는격변이시작되고있고그것이앞으로너희들의삶이될것이다. 이러한격변속에서부딪쳐오는문제들을해결해나가기위해서너희들은가깝게는일제전후만주연해주에서우리민족이겪었던수난의역사에서새로운자기긍정의힘을가져와야할지도모른다. 또한멀리로는상고사까지를돌아보아야할지도모르지. 솔아, 그렇기때문에나는너희에게역사를보는눈을강조하고, 그러한눈을형성하기위한삶의진정성과치열성을강조한것이다. 모쪼록이대화가너에게넓게열려진세계를향해새로운자기긍정을마련해가는데도움이되었기를바란다. 새벽출정 (5 18기념탑) 서울대학교총학생회가 1989년 5월 24일대동제에서 5 18민중항쟁의정신을기리기위해만들었다. 2007년학생회관을개조하면서건물뒤편으로이전한뒤복원하지않자논란이되었다. 2010년 5 18기념탑복원추진위원회 가복원활동을전개하여학생회관앞휴식공간으로재이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