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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천 울산 현대 노동자 87년 7, 8월 대투쟁의 현장을 찾아서 남목 삼거리에 도착했을 때 아직 겨울의 찬기가 가시지 않은 쌀쌀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희미한 오후의 햇살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남목은 남쪽의 말목장이란 뜻이다. 예전에 이곳에 말목장이 있었는데 그것은 중심과 변두리를 가르는 상징적인 고개였다. 1987년 7, 8월 현대 노동 자들 수만 명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함께 이 남목 고개를 넘었다. 이 고 개를 넘어 시내로 향하면 자신들의 여러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 라 믿으면서. 일요일 오후여서인지 현대중공업은 조용했다. 평일에는 2만 5천 여 명이나 되는 노동자들이 조선, 해양, 프랜트, 엔진기계, 전기 전자 시 스템, 건설장비로 나뉘어 일을 하고 있다. 남목 고개를 넘으면 현대 자 동차가 나온다. 그곳에서도 3만여 명의 노동자가 일을 하고 있다. 남목의 상점들은 대부분 문이 닫혀 있었다. 겨우 찾아들어간 조그만 식당에서 1987년 그 당시 투쟁에 참여했던 몇 명의 노동자들을 만났다. 울산 현대 노동자 87년 7, 8월 대투쟁의 현장을 찾아서 307 307 9:47:12 AM
20. 20 40..,?...... 가슴설레이는첫파업.. 1987 7 28 11.... 7 5.... 7 21. 11 308 그날그들은그곳에서
. 11. 1 7..... 630 7~8....,. 29., 25%.... 8 6.. 울산현대노동자 87 년 7, 8 월대투쟁의현장을찾아서 309
......... 4. 8 7.. 8 14. 99%.. 8 월 17 일총파업 - 남목삼거리 8 8 3 50. 11, 14, 17 3 17 12. 14 2. 6.. 310 그날그들은그곳에서
8 17 8 30....... 10,...,... 11 4 역사적인 1987 년노동자대투쟁. 자신이일하는 도구와장비를끌고나와시위에참여하는 적극적인행동을보이기시작했다. 현대중공업운동장에모여민주노조결성, 인금인상등을요구하는근로자들 _ 경향신문사 1987.09.03) 울산현대노동자 87 년 7, 8 월대투쟁의현장을찾아서 311
선 도로가 현대노동자들의 물결로 꽉 찼다. 전경들과 노동자들이 뒤얽 혀 있었고 노동자들이 많아 전경들을 포위한 형태가 되었다. 그 사람들 도 당황하여 안기부장이 협상을 제의해 왔다. 당신들을 믿고 갈테니까 시내까지는 나가지 마라 그 당시 노조협의회 의장이었던 권용목도 남 목까지만 가기로 합의를 했다. 전경들이 버스에 나눠 타고 물러가자 사 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내가 늘 현장에서 머리 검사나 당하고 뭐 그냥 용접쟁이로 알았다가 아, 뭔가 정부 관료가 오고 우리가 움직이니까 뉴스에도 나오고, 카메라 기자들 이 그렇게 많이 온 것은 처음 봤어요. 야, 이거 우리가 힘이 있는 사람들이 구나, 우리가 이거를 알았죠. 김형균 씨는 그 당시의 느낌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같은 시간에 현대자동차 노동자 8천여 명도 장대비에도 불구하고 어 용노조 물러가라 며 사내 행진을 하고 있었 다. 모든 공장의 조업 이 중단되고 임시총회 를 개최했다. 노동자 들이 이미 누군가 노 조 결성하기를 기다린 것처럼 순식간에 대거 참여해서 많이 놀랐 다. 며 현대자동차 전 도란아파트라고 불린 이 곳은 현대노동자들의 사택이 있던 곳이다. 312 노조위원장 이상범 씨 가 말했다. 그날 그들은 그곳에서 312 9:47:19 AM
8월 18일 파업 이틀째 - 공설운동장 중공업, 정공, 중전기, 엔진 등 현대 노동자들이 전날보다 더 많은 2 만 4천여 명이 모였다. 모이자마자 즉각적인 가두시위를 시작했다. 정 주영 회장 족벌체제 화형식을 하고 11시 40분쯤 시내로 나가기 위해 남 목으로 갔다. 전날처럼 전경과 대치를 했다. 우리는 시내로 나가야 한 다. 공설운동장까지만 길을 비켜달라 권용목 씨가 도경국장에게 요구 했다. 그는 위에서 막으라고 지시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해결 할 수 없다면서 어딘가로 전화를 하면서 10분만 기다려 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날은 숨이 막힐 듯이 더운 날이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뜨거운 햇빛에 그대로 서 있었다. 빨리 결정해 달라는 요구에 그는 야, 이 사람아, 내가 어떻게 결정하나 청와대가 결정하지 그러면서 또 5분만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 전경들이 가로 막으면 그 저지선을 뚫고 가고, 더 물러나서 또 막으 울산 현대 노동자 87년 7, 8월 대투쟁의 현장을 찾아서 313 313 9:47:20 AM
면 또 뚫고 가면서 16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드디어 울산공설 운동장에 도착했다. 정말 신나는 투쟁이었다. 그 시각이 오후 4시 25분 이었다. 시위대는 6만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공설운동장에는 노동자 들과 시민들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노동자들의 열기를 받으며 급박하 게 울산시장, 경찰서장, 안기부장, 노동부 차관과 노조협의회 대표들이 만나 협상을 했다. 즉각 민주노조인정, 임금인상 등에 합의했다. 그런 데 노동부 차관이 공설운동장에 모인 노동자들에게 대표로 합의안을 발표하는데 무지 떨면서도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려 해서 노동자들에게 야유를 받기도 했다. 그 이후 회사 측과 정부는 민주노조 인정, 9월 1일까지 임금인상 확 정 이 아니라 민주노조를 인정하도록 협력, 협조, 협의한다고 하는 애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하는 울산 현대노동자들의 모습 314 그날 그들은 그곳에서 314 9:47:21 AM
매모호한 말로 노동자들을 속였 다. 9월 2일, 노조협의회가 임금 인상안도 25%에서 17%로 양보했 는데 회사 측은 협상은커녕 협상 시기를 계속 늦췄다. 화가 난 2만 여 명의 노동자들이 오후 1시 오 토바이 천여 대와 샌딩머신을 앞 세우고 8천여 명의 공권력을 돌 파하여 시청으로 향하였다. 회사 와는 아무런 해결이 보이지 않으 니 권력의 핵심부에 가면 뭔가 해 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 졌던 것이다. 5시에 시청에 도착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독서모임이 이루어졌던 양정교회 한 노동자들은 7, 8시쯤에 다시 공설운동장으로 돌아왔다. 밤을 새기 위해서였다. 지도부가 가고 없는 상황에서 시청 유리창이 부숴지고 차량을 방화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경찰도 있었고 전경도 많았는데 아무도 용의자를 연행하지 않았다. 같은 날 저녁 현대중공업에서도 20여 명이 몰려와서 사무실 유리창 을 부수고 기기를 부수는 사건이 일어났다. 노조간부들이 그 중 3명을 잡아서 물어 보니 모두 조합원들이 아니어서 경찰에 넘겼다. 나중에 한 사람만 남고 다 풀려났다. 차량이 방화되는 사건은 곧바로 언론에 대서특필되었고 이를 빌미로 9월 4일 새벽5시 현대중공업에 공권력이 투입되었다. 대의원과 노조간부 등 89명이 연행되었고 연행된 집행부 전원이 구속되었다. 연행을 피했던 김형권 총무부장이 엔진노조의 지 원을 받으러 갔다가 경비대가 들이닥쳐 납치하는 과정에서 이를 막던 이상남 씨가 차량바퀴로 들어가 중상을 입고 612일간의 긴 투병 끝에 울산 현대 노동자 87년 7, 8월 대투쟁의 현장을 찾아서 315 315 9:47:24 AM
숨지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회사는 무기한 휴업조치를 내렸다. 일주 일 후 회사는 노조해산 명령서를 울산시에 제출한다. 집행부가 다 잡혀 간 상황에서 회사는 노사화합잔치를 열어 고기를 구워 먹이며 노동자 들을 회유했다. 참 겨우 이 정도 가지고 무너진다는 게 이해가 안 되고. 야, 이거 이것이 끝인가, 이런 생각이 들었고 이해가 안 되었어요. 김형균 씨는 싸움이 너무 어이없이 끝난 상황이 그 당시에는 잘 이해 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후 수습대책위가 꾸려지고 임금협상과 지도 부 석방을 남긴 채 그해 여름 긴 투쟁은 끝이 났다. 그후 비록 승리하지 못하고 참 슬프게 끝난 싸움이긴 했지만 울산 현대 노동자들에게는 많은 것을 남겼다. 그냥 좋았다. 목 아프게 고함을 질러도 찡그리는 사람이 없었다. 어깨 를 걸며 걸어가는 생면부지의 노동자들이 십수 년 몸 부대끼며 함께 산 가 족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주는 대로, 시키는 대로 하는 무지렁뱅이 근로자 가 아니라 새로 태어난 노동자였다. 정병모 씨는 인터넷에 올린 글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런 체험은 노동자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그후 128일 투쟁과 골리앗 투쟁에서도 커다란 힘으로 작용한다. 현대노동자들의 투쟁은 316 그날 그들은 그곳에서 316 9:47:27 AM
부산의 효성중공업으로, 창원의 대우중공업으로, 광주의 아세아자동차 로, 인천 대우자동차 등, 전국으로 노동자들의 투쟁을 확산시켰다. 그 리고 택시, 사무, 전문직, 병원 등 다양한 업종의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울산 현대 노동자 87년 7, 8월 대투쟁의 현장을 찾아서 317 317 9:47:27 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