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야 - 고령 1. 대가야역사관 2. 왕릉전시관 3. 지산동고분군 4. 우륵박물관 - 1 -
대가야역사관 1. 선사시대의유물인암각화 [ 해설 ] 지금부터대가야의역사와문화를만나보실텐데요. 먼저바위에그린그림을뜻하는암각화에대해알아보겠습니다. 문자가없었던시대에, 사람들은어떤방식으로자신의생각을표현했을까요? 바위에그림을그리는것도한방법이었던것같습니다. 1971 년한주민이양전리마을에서이암각화를발견했는데요. [ 주민 ] 처음이그림을봤을때누가긁어서낙서를해놓은줄알았어요. 그런데자세히보니까왠지의미심장한암호같기도하더라고요. 박사님, 여기에있는이동그라미는뭘표현한건가요? [ 역사학자 ] 네, 그원은태양을상징한것이에요. [ 주민 ] 그럼, 이쪽에있는이사각형의그림은요? [ 역사학자 ] 이것에대해서는몇가지설이있는데요. 사각형주변에뻗어있는선들때문에, 울타리에둘러싸인마을을그린것이라보기도해요. [ 주민 ] 제가보기에는소를닮은것같기도한데요. [ 역사학자 ] 네, 농경사회에서는소를신성한동물로여겼기때문에소의얼굴을그린것으로보기도한답니다. 또, 칼집에칼을넣은모양을그린것으로보기도하는데요. 이는남녀의사랑을상징하는것이라고해석할수있지요. 당시의사람들은풍요와생산을기원하면서그림을그렸던거같아요. [ 주민 ] 참, 이암각화가있는양전리마을을예전에는 알터 라고불렀다고들었는데요. - 2 -
[ 역사학자 ] 알은생명의탄생을의미하는것이니까, 알터 라는옛마을이름도생산과관련되어있다고볼수있겠네요. [ 해설 ] 이암각화는청동기시대후기에그려진것으로보이는데요. 그러니까이곳고령지역에선사시대부터사람들이살았고, 그들나름의문화를형성하고있었던것이죠. 아이들이그린것처럼단순한점 선 면으로, 수천년전에살았던사람들의생각을더듬어볼수있다는것이흥미롭지않나요? 우리가쓰는문자보다는추상적이지만풍요로운삶을바라는마음은별반다르지않았을거예요. 선사시대의고령을살펴봤으니, 이제삼한시대로넘어가볼까요? - 3 -
대가야역사관 2. 삼한시대의고령은어떤나라였나 [ 해설 ] 암각화를통해보셨듯이, 이곳고령은청동기시대부터농경문화를꽃피웠던곳입니다. 그렇다면고령에는언제부터나라가세워졌을까요? 전시물들이이를설명해주고있는데요. 한나라가세워질수있는땅이라면천혜의자연조건을갖추고있었겠지요? 고령은가야산과그줄기로둘러싸인분지예요. 이가야산에서영양분이풍부한물줄기가흘러들었기때문에아주비옥한농경지를만들수있었지요. 이를바탕으로삼한시대에이르러국가를형성할수있었습니다. 여기서잠시역사학자의설명을들어보시죠. [ 역사학자인터뷰 ] 삼한시대는마한, 진한, 변한으로불리는문화권이한반도남부에형성되어있었던시대를말합니다. 이중에서변한이고령지역과관련되어있죠. 변한안의작은나라들중에서 반파국 이라는나라가바로이고령에서세워졌습니다. 3 세기후반에쓰인 < 삼국지 > 에서이나라의이름이이미나오고있는걸로봐서, 늦어도 3 세기전반에 반파국 이있었다는걸알수있지요. [ 해설 ] 하지만이반파국은크게발전하지는못했어요. 내륙에위치하고있었기때문에선진문물의도입이다소늦었던거죠. 가야시대후기에이르러, 고령은서서히가야연맹의중심지역으로떠오르게되지요. 이때부터대가야라는나라이름이사용되기시작한것으로보입니다. 다음은대가야의건국에담긴이야기를알아볼까요? - 4 -
대가야역사관 3. 대가야의건국이야기 [ 해설 ] 가야의건국신화라고하면흔히금관가야의김수로왕신화를먼저떠올리시는분들이많지요. 하지만고령지역에는또하나의가야건국신화가전해져오는데요. 조선초기의지리책인 < 동국여지승람 > 에그내용이간략하게소개되어있어요. [< 동국여지승람 > 의저자 ] 가야산신정견모주 ( 正見母主 ) 가천신이비가지 ( 夷毗訶 之 ) 에게감응되어대가야왕뇌질주일 ( 惱窒朱日 ) 과금관국왕뇌질청예 ( 惱窒靑裔 ) 두사람을낳았다. [ 해설 ] 이름이다소어렵죠? 그내용을자세히살펴보면, 가야의산신이자여신인 정견모주 가대가야와금관가야의왕을낳았다는이야기예요. 우선여신이이야기의중심이라는점이흥미롭지요. 아시다시피, 고조선의단군, 고구려의주몽, 신라의박혁거세등대부분남성이건국신화의주인공이었죠. 이와는달리대가야의건국신화에는여신숭배전통이강하게담겨져있다고볼수있어요. 또하나생각해볼것은여신이대가야와금관가야의왕을모두낳았다는것인데요. 하지만우리가알고있는김수로왕신화에서는하늘에서내려온여섯알중에하나에서태어난이가김수로왕이고, 나머지중하나가대가야를세웠다고하지요. 신화에서도두나라사이의묘한긴장과경쟁관계가느껴지지않나요? 금관가야는전기가야연맹의중심국이었으니, 금관가야사람들은자신들의시조가대가야까지세웠다는신화를믿었겠지요. 그리고후기가야에와서는대가야가그중심이되었으니, 대가야사람들은자신들의시조가금관가야를함께건국했다는신화를강조하게된것으로보인답니다. 이어서대가야의사회와문화를잘보여주는무덤을한번살펴볼까요? - 5 -
대가야역사관 4. 고분에드러난대가야의위상 무덤은삶과죽음의흔적이묻어있는곳이라할수있어요. 고대의무덤은이에그치지않고한나라의문화와풍습을보여주는증거가되기도하는데요. 박물관위쪽에위치한대가야의무덤들또한당시대가야의모습을엿볼수있는소중한유적이에요. 고분군을둘러보기전에무덤이만들어지던시기의대가야가어떤위상을지니고있었는지살펴보는것도도움이되겠죠? 서기 400 년에고구려광개토대왕이가야를침략했는데요. 고령지역의반파국은내륙이라는지역조건때문에전쟁의피해를입지않고온전할수있었어요. 이후, 반파국은주변의여러소국들을흡수하면서대가야로거듭났지요. 이시기에막강해진대가야의정치권력을잘보여주는것이바로고분이에요. 왕릉급의무덤에서발견된많은양의토기와철기들은당시대가야의기술력뿐만아니라, 왕권이강화된국가로서의면모를엿보게해준답니다. 대가야는이후중국과직접외교관계를맺고, 국제교역망을넓혀갔지요. 그리고고구려의신라원정을막기위해, 군사를파병할정도로나라의힘을자랑하게됩니다. 이시기의대가야를단적으로보여주는유물이있는데요. 바로 대왕 이라는글자가새겨진목항아리예요. 왕중의왕 임을선언한셈이니, 당시대가야의강력해진힘을짐작해볼수있겠지요? - 6 -
대가야역사관 5. 철의나라, 대가야 [ 해설 ] 이번에는대가야의철기에대해서알아보겠습니다. 고대에는철자원과철기를생산할수있는기술이한나라의국력을알수있는기준이되었어요. 철제농기구를이용하여농업을더욱발전시킬수있었고, 철제무기를통해군사력도강화할수있었기때문이에요. 대가야는당시에철산지였던합천야로지역을손에넣어풍부한철자원을얻을수있었어요. 철의나라로불린대가야의모습은 < 삼국지 > 에도기록되어있는데, 그내용을한번들어보시죠. [< 삼국지 > 의저자 ] 변진의나라에서는철이생산되는데, 이웃나라에서모두와 서사간다. 시장에서의매매는철로이루어져서, 마치중국에서돈을쓰는것과 같았다. [ 해설 ] 화폐용도로철을쓸정도였다니, 그생산량이엄청났던거같죠? 박물관에는철을만들던모습을모형으로제작해놓은전시물이있어요. 진흙으로만든용광로에철광석과숯을넣고불을지핀후, 풀무질로바람을불어넣어서용광로의온도가 1,000 도이상유지되면철광석이녹아쇳물이고이게됩니다. 12 시간을풀무질을해야철이만들어졌다고하니, 아주고된노동이었겠죠? 이러한과정을통해농기구와무기, 그리고갑옷을만들면서꽃피운대가야의철기문화는, 한반도각지와일본열도에까지널리전파되었죠. 이를통해대가야는국제적으로더욱성장할수있었답니다. 대가야의철기를살펴봤으니, 토기는또어떠했는지알아볼까요? - 7 -
대가야역사관 6. 독특한형식미를지닌대가야의토기 대가야의토기를살펴보도록하겠습니다. 점토를반죽하여구운토기는고대인들의생활에서가장필요한도구였어요. 그래서당시에도생산량이많았고, 또오래보존될수있어발굴과정에서가장많이출토되는유물이죠. 혹시박물관에들어서기전에, 마당에세워져있던커다란토기모형을보셨나요? 그것이바로대표적인대가야토기로알려져있는그릇받침이에요. 이는전시물을통해서도확인할수있는데요. 대가야토기는흔히신라토기와많이비교가된답니다. 형태가비슷하면서도미세한차이를보이는데요. 먼저바리모양의그릇받침을살펴보세요. 대가야의것은다리부분이부드러운곡선인데반해, 신라의것은사다리꼴의직선을이루죠. 대가야의그릇받침위에놓여있는긴목항아리가보이시죠? 받침과항아리가잘어울리는데요. 둘은하나의세트로사용되었죠. 항아리에는단추모양의뚜껑이달려있는것이특징이에요. 이에반해서신라의긴목항아리는뚜껑이없고, 항아리에다리가붙어있어서단독으로사용되었답니다. 대가야의그릇받침은바리모양말고도원통모양의것이또있는데요. 몸통부분에삼각형이나사각형의구멍을촘촘히뚫어놓은것이특징이에요. 무엇보다뱀모양의장식띠를세로로붙여서아주화려하고신비스러운느낌을주지요. 그래서인지대가야토기의상징으로여겨지기도하는데요. 제사나큰의례가있을때사용된것으로보입니다. 이같은고령의토기는대가야가성장하면서여러지역으로퍼져나가는데요. 합천을넘어서, 남원과순천에서까지발견될정도예요. 그래서토기는대가야가얼마나뻗어나갔는지를보여주는중요한유물인것이죠. 자, 이제맞은편에전시되어있는, 그유명한대가야의금동관을확인하러가볼까요? 7-8 -
대가야역사관 7. 대가야위상의상징인금관 금관... 그어감만으로도눈부신빛과화려함을자아내죠? 우리나라에서는신라의금관이유명하지만, 대가야의금관이출토된사실에대해서는모르시는분들이많으실텐데요. 대가야지역에서는금관외에도여러개의금동관이출토되었어요. 먼저지산동 32 호고분에서출토된금동관을살펴볼까요? 관대에큰판을세운형식입니다. 판의좌우에는양파모양의가지장식이뻗어나와있고요. 판의제일꼭대기는큰꽃봉오리모양으로만들어졌어요. 이금동관은대가야박물관이자랑하는유물이랍니다. 그옆에전시되어있는작은금동관은 30 호고분에서출토된것인데요. 무덤에서는어린아이의두개골이함께발견되었어요. 사회적지위가높은아이가이금동관을썼던것으로보입니다. 대가야가막성장하던무렵에이같은금동관이만들어졌는데요. 대국으로서의힘을자랑하던 6 세기에이르러서는금관을만들어쓰게됩니다. 바로이곳고령에서그금관이출토되었죠. 전시된금관은삼성리움미술관에소장되어있는금관을정교하게복제한것이에요. 관대에풀잎모양의장식네개를금실로고정해놓아그섬세함이돋보이지요. 일제강점기에일본의사업가인오쿠라다케노스케가이것과비슷한금관을자신의나라로가져갔고, 현재동경박물관에소장되어있다고합니다. 다음은대가야의화려했던장신구들에대해알아볼까요? - 9 -
대가야역사관 8. 대가야의귀걸이 고대인들이썼던장신구를보면, 그들이결코현대인에뒤지지않는감각과기술을지니고있었다는것에놀라게되지요. 대가야의장신구도예사롭지않은양식을보여주는데요. 귀걸이가대표적이죠. 귀걸이는귀에닿는부분과중간장식, 그리고가장아래부분의장식으로나누어살펴볼수있는데요. 대가야의귀걸이는귀에닿는부분이가는고리모양이지요. 그에반해서신라의것은아주두툼한고리모양인것이특징이에요. 대가야의귀걸이모양을전체적으로살펴보죠. 가는고리에공모양의중간장식이붙어있고, 그아래사슬연결고리를이어서잎사귀나원뿔모양같은장식을매달아놓았어요. 확대경으로자세히살펴볼수있도록전시되어있는귀걸이는지산동의 45 호고분에서발견된것인데요. 가장아래의원뿔모양에아주섬세한장식이가미되어있어그아름다움을더하지요. 이후에이같은장식은점점더화려해진답니다. 다른무덤에서는무덤의주인외에, 순장되어있는사람도금제귀걸이를하고있는것이발견되었는데요. 당시에금귀걸이가유행하고있었다는것을보여주죠. 아름답게보이려는본능, 그리고사회적인지위를더확실하게보여주려는욕망은예나지금이나다르지않았던것같네요. 자, 그럼이번에는철의나라로불린대가야의무기와갑옷은어떠했는지알아보기로해요. - 10 -
대가야역사관 9. 철의나라, 대가야의무기와갑옷 강국으로성장하기위해세력을뻗어나가던대가야는철제무기를비롯한갑옷과투구를대량으로생산했는데요. 전시되어있는투구부터살펴볼까요? 투구는일정한크기의쇳조각수십개를꿰어만들었어요. 그정교함이정말대단하지요? 갑옷의형태를보면, 넓은철판을이어붙인판갑옷인데요. 가야철제갑옷의상징적인이미지로떠올릴만큼유명합니다. 탄탄한어깨선과부드러운허리선이인상적이죠? 이러한갑옷은 5 세기이후에물고기비늘모양의쇳조각을이어붙인미늘갑옷으로변하게되는데요. 전투의양상이기마전으로바뀌었기때문이에요. 이전에보병들은주로판갑옷을입었지만, 말을타고싸움을하는병사들은훨씬더자유롭게움직이기에용이한미늘갑옷을입게되었죠. 갑옷과더불어무기도함께변하는데요. 화살촉을보면, 촉뒷부분을점점더길게만들어서공격력을강화시키게되죠. 이러한무기들을사용하여전쟁에서이기고돌아오면, 지휘를한수장은더큰권력을갖게되겠죠? 그리고다음전쟁을위해서전문적인전사집단을꾸리기도하는데요. 이같은상황에서무기는공격수단인동시에권위와위엄을보여주는도구가되지요. 왕이나귀족의것으로보이는대가야의무덤에서는화려한칼들이발견되기도하는데요. 손잡이에금이나은으로용과봉황, 거북의등같은장식을화려하게새겨넣은것이죠. 대가야의성장과함께변화된무기와갑옷은, 곧왕과최고위층의힘의상징이기도했던겁니다. 당시기마병들은말을잘부리기위해어떤도구들을이용했을까요? 이어서마구를살펴보기로해요. - 11 -
대가야역사관 10. 실용적인대가야의말갖춤 고대사회에서말은매우유용한운송수단이었어요. 특히전쟁에서말의역할은더욱중요해졌죠. 그래서말과관련된장비들이많이생산되었고발전하게됐던거예요. 말을잘타고, 잘부리기위해서는재갈과안장, 발걸이같은장비들이필요했지요. 지산동 44 호, 45 호고분에서출토된유물중에는금동으로제작된말장식도있어요. 잘꾸민말의띠를화려하게내려뜨리거나, 말의머리에투구를씌우기도했지요. 중앙통로에전시되어있는기마무사상을보시면, 말을어떤식으로장식했는지보다쉽게확인할수있답니다. 대가야는신라나백제의영향을받으면서그들만의말장식을하게되었는데요. 가야연맹지역에서는지산동고분군등대가야의중심부에서만화려한말장식이출토되는것으로보아, 마구가널리퍼져나가지않은것으로보입니다. 즉, 대가야의왕이나일부지배층만이특별하게말을장식한것이죠. 이마구를통해서도당시대가야가가야연맹의중심국가로우뚝서게되었음을확인할수있답니다. - 12 -
대가야역사관 11. 대가야인들의의식주 [ 해설 ] 낙동강으로이어지는하천들이있어비옥한땅을일구고살수있었던대가야의사람들... 그들의생활상은어떠했을까요? < 삼국지 > 위서한전에따르면대가야에는삼베옷감이유명하다고기록되어있습니다. 대가야가속한변한의이름을따서 변한포 라고널리알려져있을정도였다는데요. 그렇다면당시사람들은그베로흰옷을짜입었던걸까요? 이와관련해서고분에서는어떤유물이발견되었는지, 한번들어보시죠. [ 역사학자인터뷰 ] 실을만드는도구인가락바퀴가여러개출토되었는데요. 이 건베틀을이용해서옷감을만들었다는증거예요. 또갑옷이나금동관등의유물 표면에, 가죽이나비단같은직물이엉겨붙어있는것도확인되었죠. [ 해설 ] 물론비단으로옷을지어입은사람들은지배층이었겠죠? 박물관출구오른편에대가야인의의상이전시되어있으니, 나가시는길에한번확인해보세요. 고분에서는의복말고도, 대가야인들의식생활을엿볼수있는흔적도발견되었어요. 그중에는생선뼈도많이있었는데요. 무덤에서그물추가발견된것을보면, 하천에서그물로고기를잡아올렸으리라추측해볼수있겠죠. 박물관야외에는대가야인들이살았던집을재현해서전시해놓고있는데요. 땅을파서지은움집이지요. 여기서는난방방식을좀눈여겨볼필요가있어요. 그이유를들어보시죠. [ 역사학자인터뷰 ] " 대가야사람들은화덕에서피운연기의열로구들을데워서 난방을했는데요. 이것이더발전하면우리가알고있는온돌이되겠죠? 난방 시설의전통을이곳에서도확인할수있는겁니다. [ 해설 ] 박물관관람후에야외의움집전시관에서난방시설을한번확인해보세 요. - 13 -
대가야역사관 12. 고아리고분과벽화속연화문 무덤의천장과벽면에벽화를그린예로는고구려의고분벽화가널리알려져있죠. 대가야의고분에서도벽화가발견되었는데요. 벽화를관찰하기전에먼저고아리고분의특징을알아볼필요가있어요. 고아리고분은돌로무덤방을만든뒤그것을통로로연결한굴식돌방무덤이에요. 벽화는시신이있는방과, 통로에서발견되었어요. 많이훼손되어형체를알수없는그림도있지만, 연꽃모양의무늬는뚜렷하게남아있어요. 이는백제무령왕릉의베개와은잔에서발견된연화문과동일한양식이에요. 터널식인무덤의형식도무령왕릉과같지요. 따라서고아리고분은백제고분의영향을받아서만들어진것이라고볼수있어요. 그리고벽화에그려진연꽃은불교를연상시키지요? 대가야는이미불교를접하고있었는데요. 불교에서는윤회를믿기때문에육체를위해서무덤을크게세우는풍습은멀리했겠지요. 아마도이때부터대가야의무덤은다소간소해지고, 대신에벽화를그리는등의새로운전통이생겨났을것으로보인답니다. 이어서축소모형철기를만나보실텐데요. 왜철기를작은축소모형으로제작한것인지알아보도록해요. - 14 -
대가야역사관 13. 독특한유물, 축소모형철기 이박물관에는다른곳에서잘볼수없는독특한유물이전시되어있는데요. 지금보고계신축소모형철기가바로그것이에요. 실생활에서쓰던철제도구를작은크기로제작해놓은것이죠. 이것은대가야의고분에서발견된것인데요. 그렇다면왜축소해서만든철기구들을무덤에넣은것일까요? 전시되어있는철기들은주로도끼나낫을비롯한농기구예요. 우리에게는생소한 살포와따비 라는농기구도있는데요. 네모난몸통을지니고있는살포는논에물꼬를트거나막을때사용한기구이고요. 그옆에있는마름모꼴의따비는땅을일구는데사용한것이에요. 유물을자세히한번들여다보세요. 자루를끼웠던흔적이희미하게남아있는것을확인할수있는데요. 나무손잡이는썩어없어지고철기구만남은것이죠. 살포와따비는당시에대표적인농기구였어요. 하지만무덤의주인이실제로사용했던것들을그대로넣기에는너무컸겠죠? 그래서똑같은모양으로크기만축소해서부장품으로넣은거죠. 옛날사람들은무덤을죽은사람이사는집이라고생각했어요. 그래서죽은자가생존에썼던물건들을무덤에함께넣는장례풍습이크게유행했던거랍니다. 지금까지대가야의유물들을살펴보았는데요. 그럼이많은유산을남긴대가야는언제멸망했을까요? - 15 -
대가야역사관 14. 대가야의멸망 [ 해설 ] 대가야는백제와신라와의관계속에서성장했고, 또사라져갔다고볼수있어요. 6 세기초, 백제의무령왕은가야연맹에속해있던호남동부지역을침략하여손에넣게되죠. 그후한반도남쪽의중심은백제가됩니다. 대가야는해결책을강구해야만했어요. 그방안이바로신라와의혼인동맹이었는데요. 대가야의이뇌왕은신라의왕녀와결혼을하게됩니다. 신라에서는왕녀를보낼때백여명의시종들을함께보냈는데요. 신라는이들을대가야뿐만아니라, 가야연맹의여러소국에도보내어살게했어요. 그런데이것이문제가되었죠. 왜냐하면신라의시종들은가야에서도신라의옷을입고있었기때문이에요. 이에소국들중한나라의왕이크게분노하여시종들을신라로내쫓고맙니다. 시종들이돌아오자, 신라의왕도가만히있지않았습니다. [ 신라의왕 ] 어허. 이런변고가있나. 그렇다면신라의왕녀도당장돌려보내주 시오! [ 해설 ] 이소식을들은대가야의이뇌왕또한물러설수없었습니다. [ 이뇌왕 ] 부부의연을맺었는데어찌그리쉽게헤어질수있단말인가? 또한 어찌어미로써자식을버리고갈수있단말이오! [ 해설 ] 이리하여대가야와신라는돌이킬수없는관계가되고맙니다. 가야연맹을분열시키려는신라의계략에말려든것이죠. 그후신라의공격으로가야소국들이멸망했고, 대가야는손을쓰지못했어요. 기회를노리고있던백제와신라는경쟁을하듯가야의소국들을손에넣지요. 위기에몰린대가야는두나라사이에서살아남기위해노력하지만, 결국 562 년신라군에의해멸망하게됩니다. - 16 -
대가야역사관 15. 멸망의아픔속마지막태자와고령 [ 해설 ] 대가야의멸망, 그아픔을가장깊이느낀사람은아무래도대가야의마지막왕자였던월광태자였겠지요. 대가야가마지막으로백제를도와신라를침략했을때, 그리고패배했을때, 월광은매우곤란했을겁니다. 어머니가신라의왕녀였기때문에그의몸에는신라의피도함께흐르고있었으니까요. 대가야와신라모두에게서환영받지못했을것같은월광태자. 그런데한가지이상한점이있어요. < 삼국사기 > 에는대가야의마지막왕이 도설지왕 이라고기록되어있는데요. 신라진흥왕이자신의영토를돌아다니면서남긴여러비문에도 도설지 라는이름의신하가등장하지요. 이기록속의도설지와대가야의월광태자는동일인물이었을까요? 이에대한설명을들어보시죠. [ 역사학자인터뷰 ] 전쟁직후에월광태자가신라로망명했을수도있어요. 그렇다면그태자가대가야의마지막왕이라기보다는, 신라가대가야를멸망시킨후에민심을무마하기위해서, 지역의통치권을줘서월광태자가도설지왕이된것이라고볼수있을겁니다. [ 해설 ] 어찌됐든, 이제 왕 이라는명칭은무색하게되었죠. 신라는도설지왕이된월광태자를철저하게통제했을것으로보여요. 그래서인지월광태자는출가를해서불가에귀의를했다고도전해집니다. 망국의한은왕자에게뿐만아니라, 고령에도남게되는데요. 대가야를점령한신라는지역을축소시켜 ' 대가야군 ' 으로이름을고쳤습니다. 고려와조선시대의고령대가야이후의고령에대해서는불교와관련한유산을주목해볼필요가있는데요. 전시관안에는반룡사의다층석탑이전시되어있습니다. 반룡사는고령에서가장유명한절이에요. 원나라군사들이일본을토벌하기위해서잠시이곳에머물렀을때, 원나라황제가사찰에피해가가지않도록주의하라는글을붙인곳으로유명하답니다. 하지만석탑은각층의몸체가모두없어지고, 지붕돌만포개어놓은상태로발견되어서다층석탑이라고만부르지요. 그리고고령은아니지만합천에있는해인사를살펴볼필요가있는데요. 대가야지역에서는가장유명한절이에요. 해인사는신라애장왕이창건했는데요. 해인사에도역시대가야의흔적이남아있답니다. 절안에 국사단 이라는이름의사당이있는데요. 과거에는 정견천왕사 로불렸죠. 혹시대가야건국신화에서핵심이되었던여신인 정견모주 를기억하시나요? 바로이신을모신사당이에요. 즉, 해인사는정견모주의사당위에지어진사찰로볼수있지요. 고려시대에고령이불교의중심지였다면, 조선시대에는유학의거점이 - 17 -
되는데요. 사림의원조라고할수있는김종직선생등을배출하기도했답니다. 자, 그럼마지막으로토기발굴지를통해대가야의범위를알아보도록하겠습니 다. 박물관출구에전시되어있는지도앞으로이동하겠습니다. - 18 -
대가야역사관 16. 토기의분포로본대가야범위 삼국중심의역사속에묻혀있었던가야. 그중에서도특히베일에싸여있던대가야의면모를지금까지살펴보셨는데요. 대가야는어느지역까지그영향력을미치고있었던걸까요? 박물관출구로나와서오른쪽에걸려있는지도를통해알수가있습니다. 5 세기중엽을전후해서, 대가야는가야의중심에섰고또대가야만의토기양식을완성했죠. 그후대가야가영향력을행사하던곳에널리토기를전해주었는데요. 따라서여러지역에서출토된대가야식토기를토대로, 나라의범위를살펴볼수있답니다. 경남지역과전북지역의고분군에서대가야의토기가아주많이발견되었는데요. 특히합천과함양, 그리고남원에서발견된유물들은아주고령양식일색이었답니다. 당시이지역이완전히대가야에속한영토였다고볼수있죠. 대가야의전성기였던 5 세기후반, 강과해안을경계로그범위는더확장되는데요. 동쪽으로는낙동강을경계로신라와국경을형성했고, 서쪽으로는전라남북도를동서로가로지르는호남정맥을두고백제와국경을형성했지요. 생각했던것보다대가야의범위가무척넓지않나요? 가야연맹의중심이었던대가야의숨결은흙으로빚은토기를통해이처럼널리퍼져나갔습니다. 지금까지역사속에숨겨져있던대가야의화려한영광을둘러보셨습니다. 박물관옆으로는왕릉전시관과지산동고분군이있어서, 대가야의생생한역사적현장을보실수있으니, 꼭들려보시기바랍니다. (5 세기후반대가야범위 ) - 19 -
왕릉전시관 1. 44 호고분을그대로재현한전시관 지금부터둘러보실왕릉전시관은, 전시관위쪽산에있는지산동고분군에서 44 호고분의내부를재현해놓은곳이에요. 전시관은마치고분속으로직접들어온듯한생생한느낌을전해주는데요. 지름이 27 미터, 높이가 6 미터에달하는 44 호고분의내부를실물크기대로제작해놓아, 대가야시대의거대한무덤안을고스란히느껴볼수있는곳이랍니다. 고대국가는나라마다무덤을만드는방식이다른데요, 이곳에서는대가야만의독특한무덤양식을직접볼수있답니다. 이무덤은발굴당시에이미도굴된상태이긴했지만, 그래도남아있던많은유물들이출토돼함께전시되고있습니다. 이를통해대가야의문화와생활상도엿볼수있죠. 전시관을둘러보시기전에이무덤의특이한구조에대해서먼저설명을드리겠습니다. 보통한개의무덤에는한명의시신만묻는것이일반적이지요? 그런데 44 호고분에는봉분속에무덤들이무려 35 개나있었고, 그안에서 22 구의유골이발견됐어요. 이처럼많은이들을함께묻은이유는무엇일까요? 이는고대의장례풍습중하나인순장을했기때문입니다. 44 호고분은우리나라에서최초로순장이확인된무덤이어서놀라움을더해주는데요. 순장의풍습에대해서는, 이후자세히알아보도록하고요. 그럼이제대가야의무덤속으로함께들어가볼까요? - 20 -
왕릉전시관 2. 관람데크 1- 고분의전체적인구조 전시관 안으로 들어오셨나요? 무덤의 규모가 정말 대단하지요? 왼쪽 방향으로 이동하며, 설치돼 있는 3 개의 관람데크에올라, 무덤내부를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겠는데요. 우선첫번째데크위에서무덤 내부를 보시겠습니다. 각각의 무덤은 직사각형으로 땅을 판 뒤, 그안의사방을돌로쌓아 만들었기때문에석곽이라고하는데요. 넓은무덤내부의중앙에있는가장큰 석곽을 한번찾아보세요. 저곳이 바로 이 무덤의 주인이 묻힌 곳이라 하여, 주석곽이라부르지요. 주석곽의아래와옆에 무덤의주인을 위한 부장품들을 묻어놓은 2 개의부석곽이배치되어있답니다. 이주석곽과부석곽을중심으로 32 개나 되는 석곽들이 부채살 모양으로 자리하고 있는데요. 순장의 풍습을 보여주는 순장곽이지요. 순장이란 죽은 사람을 뒤따라서 살아 있는 사람이 스스로목숨을끊거나, 혹은강제로죽여서함께매장하는장례풍습을말합니다. 이고분의순장곽중 18 곳에서 22 구의유골이발견되었는데요. 성인남녀가 함께 묻히기도 했고, 아버지와 딸로 보이는 성인 남자와 여자아이가 함께 묻히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순장풍습이 언제부터 있었던 걸까요? 그리고 이 고분에 순장된 이들은 누구일까요? 두 번째 관람데크로 이동하신후, 그이야기를들려드릴게요. - 21 -
왕릉전시관 3. 관람데크 2- 순장의풍습, 그리고 44 호고분의사람들 두번째관람데크에서는많은순장곽들을볼수있습니다. 그렇다면이순장곽에묻힌이들은누구였을까요? 그들중에는주인을모신시녀였을것으로보이는 20 대초반의여성도있고, 큰칼과화살을지니고있어서주인을호위하던무사로보이는남자도있지요. 또다른순장곽에서는금제귀걸이가발견되기도했는데요. 이를통해꼭낮은신분의사람만이순장된것은아니었음을알수있답니다. 그럼이들은어떻게무덤속으로들어가게된것일까요? 일부유골에서칼에찔리거나, 둔기로맞은듯한치명적인상처의흔적이발견되었는데요. 이것으로보아자의에의해서라기보다는강제로죽임을당한후에순장된것으로여겨집니다. 왜이같은장례풍습이생겨난걸까요? 고대인들은사람이죽어도혼은사라지지않는다고믿었기때문에, 사후세계에서도살아생전과똑같이살게해주어야한다고생각했죠. 그래서무덤의주인을모시던사람들을함께묻었던것이에요. 이렇게순장이가능한나라는계급이분명히나누어진사회였어요. 왕이나높은계급의무덤주인이자신의권력을과시하기위해순장을했던것으로볼수있어요. 이대가야무덤의순장도같은경우이죠. 하지만인권에대한의식이높아지면서, 순장의풍습은사라지게되지요. 대신에흙으로사람이나동물모양을빚어무덤에넣기도했는데요. 경주의무덤에서발견된신라의흙으로만든인형인토용이그예랍니다. - 22 -
왕릉전시관 4. 관람데크 3- 주석곽과부석곽 주석곽을가장가깝게볼수있는세번째관람데크입니다. 석곽안을한번살펴보세요. 중앙에는이무덤의주인이누워있는데요. 이렇게화려한무덤을만들고, 또많은사람들을순장할수있는권력자라면아마도대가야의왕이었겠지요. 무덤의주인위아래로남성이한명씩묻혀있는것을볼수있는데요. 그들은왕을호위했던무사나가까이에서모셨던신하였을거예요. 특히위쪽에묻힌남성은옆으로비스듬히누워있는데요. 그이유는무엇일까요? 왕의머리에발이닿는것은아무래도보기가안좋았겠죠? 그래서시신을비스듬히눕혀묻었을것으로보입니다. 안타깝게도이주석곽의부장품은대부분도굴되었지만, 각종무기류와마구류, 토기류등이남아있었답니다. 특히쇠못과꺽쇠들이발견되었는데요. 이는나무관에무덤의주인을넣어묻은뒤세월이흘러나무관은썩어없어지고, 관을이은못과꺽쇠들만남아있어서예요. 주석곽오른편에는부석곽이배치되어있는데요. 무덤주인이사후세계에서쓸물품들을보관하는창고같은곳이죠. 여기에서는인골조각도발견되었는데요. 아마도물품을관리하는창고지기였을것으로보입니다. 고대인들은사람이죽어도그영혼은사라지지않는다고믿었습니다. 따라서대가야의사람들은죽은왕이생전과똑같이살아갈수있도록무덤을만들었지요. 그래야대가야가오래도록번영하는데, 무덤속의왕이힘을보태줄것이라고믿었던것아닐까요? - 23 -
왕릉전시관 5. 출토된유물로보는대가야의위상 출토된유물을보시기전에전시관통로에재현된주석곽의모습을먼저살펴보도록하겠습니다. 관람데크에서내려다본석곽의구조를이곳에서확인해볼수있는데요. 먼저벽면을돌로잘맞추어쌓아올리고, 그돌사이사이에는고운점토를채워서다졌어요. 석곽안에서위를한번올려다보세요. 뚜껑돌이보이시죠? 관을넣은다음여러장의큰돌을잇대어덮고, 그틈은작은돌로막은후에진흙을발라완전히막은것이지요. 석곽의모형을통과하면, 고분에서발견된유물들이전시되어있는데요. 그중에서특히야광조개로만든국자를눈여겨볼필요가있답니다. 찾으셨나요? 이유물은주석곽에서발견된것인데요. 다른유물과마찬가지로크게훼손되어있습니다. 하지만남아있는형태를참고해실제야광조개를가지고재현해놓았습니다. 큰야광조개껍질을둥글게오려서국자를만든것인데요. 울퉁불퉁한조개표면을연마한가공기술을엿볼수있습니다. 44 호고분에서나온여러유물들중특히이야광조개국자가주목을받는이유는무엇일까요? 야광조개는일본의오키나와열도에서서식하는조개랍니다. 따라서이유물은일본과의교류를보여주는결정적인증거죠. 대가야가낙동강을따라남해안의항로를통해서, 이웃나라와활발한교류를했던사실을다시한번확인할수있지요. 이무덤이정말대가야왕의것이라면유물중에왕관이있었을텐데요. 아쉽게도발굴조사당시에는발견되지않았습니다. 그런데서울의삼성리움미술관에소장되어있는국보 138 호금관이, 고령에서발견된것이라고전해지고있어요. 혹시그금관이이 44 호분에서출토된것이아닐까추측하고있답니다. 전시관을돌아보시면서대가야의장례풍습과당시의생활상을엿볼수있으셨나요? 이왕릉이실제로위치한지산동고분군에는산등성이를따라많은무덤들이이어지는데요. 꼭한번둘러보시기바랍니다. - 24 -
지산동고분군 1. 지산동고분군의전체규모 왕릉전시관옆에서시작되는오르막길, 이초입에서산책로가시작됩니다. 산책로를따라조금더가다보면두갈래길이나오는데요, 그중오른쪽길로가면대가야의무덤들을만날수있답니다. 이고분군은대가야 520 년의역사가무덤을통해드러나는곳이라할수있어요. 대가야는자신들의찬란한역사를문헌으로기록해놓지않았기때문에우리고대사에서오랫동안조명되지못했죠. 이곳에있는무덤들은우리가잃어버린고대의왕국대가야를알고느끼게해주는중요한유산이라고할수있답니다. 여기에서는쉽게상상하기힘드시겠지만능선을따라약 700 기에이르는무덤들이이어지는데요. 신라사람들이평지에주로고분을만든것과달리, 대가야사람들은산아래쪽에서부터위쪽으로올라가면서무덤을만들어갔어요. 특히북쪽으로가면왕릉급의대형무덤들이늘어서있어놀라움을자아내는데요. 더높은곳에더큰무덤을만들고싶은지배층의열망이반영된것이아닐까싶어요. 천오백년이넘도록주산의능선에고요히잠들어있던무덤들. 그중에 20 여기가일제강점기에발굴되었죠. 그리고지금까지총 10 기의무덤이발굴되었답니다. 고분군의규모에비해현재까지발굴된무덤이많지는않지만앞으로계속발굴이이루어질것이라고해요. 자, 이제수많은무덤의부드러운곡선이이어지는능선으로향해볼까요? - 25 -
지산동고분군 2. 지배층의무덤인 32~35 호고분 [ 해설 ] 능선의중턱즈음언덕이형성된곳에 5 개의큰무덤이있습니다. 찾으셨나요? 이중 32 호에서 35 호까지의 4 기의무덤은 2~3 미터간격을두고모여있어서흥미롭지요. 4 개의무덤중에서 35 호무덤은지산동고분군의중대형무덤중에서가장먼저만들어진것으로확인되었습니다. 이무덤에서대가야지배층의무덤이시작되었다고볼수있지요. 이무덤들중에서특히흥미를끄는것은 32 호와 33 호무덤인데요. 그이유가무엇인지, 문화해설사분의소개를한번들어보시죠. [ 문화해설사인터뷰 ] 대가야박물관에전시되어있는금동관이이 32 호고분에서출토되었어요. 그래서이무덤의주인은왕이거나, 매우높은신분의사람일거라고보고있지요. 그런데그옆에있는 33 호고분을발굴했더니, 여성과관련된유물들만잔뜩나왔어요. 아마도 32 호에묻혀있던남자의아내가묻힌것이아닐까추측하고있습니다. 이두무덤을멀리서보면꼭엄마의젖가슴처럼포근하게보이는것이인상적이지요. [ 해설 ] 또 34 호와 35 호고분의관계도흥미로운데요. 두무덤사이에연결된석곽에서부부의자식으로보이는다섯살가량의남자아이유골이발견되었지요. 그아이곁에는높은신분을상징하는부장품들이함께놓여있었는데요. 아이의무덤에도화려한부장품을같이묻은것을보면, 당시사회가상당히발전된계급사회였다는점을알수있습니다. 자, 산책로를따라좀더올라가볼까요? 다음에만나볼고분은 44 호와 45 호랍니다. - 26 -
지산동고분군 3. 왕릉급무덤인 44,45 호 [ 해설 ] 37 호무덤을지나면왼쪽에있는큰무덤이 44 호고분입니다. 이무덤은 5 세기말에만들어졌는데요. 비슷한시기에만들어진다른가야지역의왕릉급무덤과비교해보면, 규모나형식면에서월등한차이를보인답니다. 이무덤에대한설명을들어보도록하겠습니다. [ 문화해설사인터뷰 ] 이무덤은폭이 27 미터정도되는아주큰무덤인데요. 여기서순장풍습이발견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순장에관한기록만있었지실제로발견된적은없었거든요. 그래서이무덤을발굴했을때모두들깜짝놀란거지요. 40 여명의순장자가있었으니까요. 바로이무덤을재현해놓은곳이왕릉전시관입니다. [ 해설 ] 무덤속에서발견된많은순장자와부장품으로봐서, 대가야왕의위상을확인할수있는무덤으로여겨지지요. 그런데이무덤이만들어지기전, 대가야의정치상황을살펴보면흥미로운점이발견되는데요. 대가야의하지왕이중국에사신을보내어보국장군복국왕이라는관직을받아서, 대가야라는나라가서서히두각을나타낸것이지요. 그래서 44 호분이혹시하지왕의무덤이아닐까추측하기도한답니다. 다음으로 45 호고분을만나볼까요? 바로위를보면경사가급해지기시작하는지점이나오는데요. 그앞에 45 호고분이있답니다. 44 호분보다크기는작지만주석곽과부석곽주변으로 11 개의순장곽이배치되어있어서, 비슷한형식의무덤이라고볼수있어요. 이곳에서도 11 명이상의순장자가있었던것으로확인되었답니다. 무덤의겉모습만볼수있어서아쉽겠지만, 왕릉전시관을떠올려보면내부가상상되기도하지요? 무덤안의석곽을덮은돌의무게가 1 톤이상이었다니무덤을만드는데엄청난인원과시간이동원되었을겁니다. 그래서두무덤을통해서대가야의지배자들이어느정도의힘을지녔는지엿볼수있는것이지요. 이제조금더올라가서정상부근처에다다르면초대형고분 5 개를볼수있습니다. 천천히발걸음을떼어볼까요? - 27 -
지산동고분군 4. 금림왕릉으로불리는 47 호고분 [ 해설 ] 정상부가까이에는 5 개의초대형고분이늘어서있습니다. 이중에서가장큰것이왼쪽에있는 47 호고분이에요. 이른바금림왕릉으로불리고있지요. 이무덤은일제강점기에처음발굴되었는데요. 그조사과정에대한설명을한번들어보시죠. [ 문화해설사인터뷰 ] 팻말에는 5 호분이라고적혀있는데요. 고분의관리를위해임의로번호를매긴거지요. 그런데이고분의이름에있는금림왕이실제로대가야왕의이름이었는지는알수없어요. 다만조선시대때부터금림왕릉으로알려져있었어요. 그리고금장으로용무늬를새긴고리자루칼이나무기류가출토되어서무덤의주인이왕이라고볼수있는것이죠. [ 해설 ] 이금림왕릉은 6 세기전반에만들어진것으로보이는데요. 흔히 3~6 세기중반까지의시기를삼국시대라부르지요. 당시에가야가한반도에독립적으로세워져있었지만, 작은나라들의연맹체였다고보기때문인데요. 보고계신이무덤과같은초대형왕릉을만들수있는정도라면, 가야연맹후기의대가야는왕권이강력한중앙집권체제를갖추고있었다고볼수있지않을까요? 그래서어떤학자는이시기를삼국이아닌, 사국시대로보아야한다고주장하기도합니다. 잃어버린왕국으로우리에게남아있었던대가야를재조명해야한다는것이죠. 자, 이제고령시내가한눈에내려다보이는정상부에서보실까요? - 28 -
지산동고분군 5. 정상부 - 대가야의발전을가능케한고령 정상부에서는고령읍내가한눈에들어옵니다. 또겹겹이둘러쳐진산세가펼쳐지죠. 산정상부가까이에왕릉급의무덤이늘어서있는것도이러한지형과관련이있는듯한데요. 이곳에누운왕은사후에도도읍지를굽어볼수있다고생각하지않았을까요? 여기에서는왕릉의주인들이살았던대가야의왕궁터를내려다볼수있는데요. 11 시방향으로내려다보이는향교주변이바로그곳입니다. 향교옆에있는고령초등학교의운동장에서는왕궁터에서왕에게길어올린우물인어정이위치했습니다. 이왕궁터와관련해서살펴볼곳이왼편의산능선에있는주산성인데요. 대가야는신라의공격을방어하기위해서많은산성을쌓았습니다. 주산성외에도여러산에서약 20 여개의산성이발견되었지요. 대가야의왕과지배층들은평상시에는왕궁에머물렀다가, 전쟁과같은유사시에는주산성으로피해서수비태세를갖추었을것으로보입니다. 가야산의산줄기로둘러싸인이지산동일대는적을쉽게감시하고방어할수있는천혜의지리적요건을지니고있지요. 이처럼대가야의중심지역이었던고령을감싸고있는이주산에대가야의무덤들이자리하고있어서, 자연속에서역사를만날수있다는점이바로지산동고분군의매력이아닐까싶네요. 내려가시기전에지나온고분들을한번내려다보세요. 봉분의부드러운곡선들을다시한번느껴볼수있답니다. - 29 -
우륵박물관 1. 대가야의악성, 우륵을기리는박물관 우륵박물관입구에도착하셨나요? 박물관이세워진이곳은실제로우륵이제자들과함께가야금을연주하던곳으로전해지고있는데요. 가야금소리가정, 정, 정, 이렇게울려퍼졌다고해서이일대를 정정골 이라고부르게됐다고합니다. 성인에이를정도로뛰어난음악가를 악성 이라고부르는데요. 고구려의왕산악, 조선의박연과더불어대가야의우륵을우리나라의 3 대악성으로꼽고있답니다. 박물관정면왼쪽에 우륵상 이서있는데요. 여기서박물관의지붕을바라보면, 가야금을본따서지은것임을확인할수있습니다. 지붕을통해가야금의형태를보면윗면은둥글고아랫면은평평한대요, 이는둥근하늘과평평한땅을상징하죠. 또 12 개의가야금줄은일년의열두달을표현한것이에요. 대가야사람들이사람들의생각을가야금의모양에담은것이라할수있습니다. 가야금에대해서는박물관에서더자세히살펴보기로해요. 박물관으로들어서기전에뒤로돌아마을과산을한번둘러보세요. 열한시방향으로멀리산위에세워진탑이하나보일텐데요. 이게바로 우륵기념탑 이에요. 우륵의업적을기리기위해서가야금모양의탑을세운것이죠. 걸어서 15 분정도걸리니, 박물관을둘러보신후에가보시는것도좋을듯합니다. 이제박물관으로들어가서가야금과우륵선생의이야기를우륵박물관해설사의목소리로들어보실까요? - 30 -
우륵박물관 2. 가야금이전의고대현악기 [ 해설 ] 6 세기대가야의가실왕시대에만들어진가야금. 가야금이전에도우리민족은여러종류의악기를만들고연주했던것으로전해지는데요. 특히중국악기와음악의영향을많이받았다고해요. 이같은사실은고대악기들을소개하고있는전시물들을통해보다자세히알수가있습니다. 먼저역사서에나와있는고대현악기의기록을살펴볼필요가있는데요. < 삼국지 > 의위서한전편에는가야로발전하기이전시대인변한의풍습에관한기록이있습니다. 그내용을잠시들어보실까요? [< 삼국지 > 의저자 ] 변한의사람들은노래하고춤추며술마시기를좋아한다. 슬 과비슷한악기가있는데, 퉁겨서소리를낸다. 또연주곡도있다. [ 해설 ] 여기서말하는 슬 은중국의현악기인데요, 가야지역에는그이전부터이와비슷한악기가있었다는사실을알수가있습니다. 게다가그들만의연주음악이있었다고하니, 가야지역의음악전통이꽤깊다는것을확인할수가있지요. 우리나라의고대현악기는여러지역에서악기의일부분만발견돼그실체를정확히알수는없습니다. 하지만악기를연주하는모습들이표현돼있는삼국의유물들을통해서당시쓰였던악기들을짐작해볼수있답니다. 고구려의고분벽화, 백제의금동대향로가그대표적인예죠. 가야와신라에서도흙으로만든인물상인토우에악기를연주하는모습이남아있는데요. 몸체를짧은방향으로세우고줄부분을바깥으로가도록해서연주하고있는모습을전시물을통해확인해보십시오. 결론적으로가야금은우리민족이예로부터지녀왔던문화적, 음악적유산을토대로가야의정신을담아만들어진것이라할수있어요. 우리의전통악기에대해알아보았으니, 이제그럼우륵선생을만나러가볼까요? - 31 -
우륵박물관 3. 신라에전해진우륵의음악, 전통이되다 [ 해설 ] 우륵과가야금을설명하고있는전시물들이보이실텐데요. 그오른편에는 < 삼국사기 > 악지 가놓여있습니다. 당시대가야의정치적인상황을토대로우륵과가야금에대해자세히서술하고있답니다. 대가야의가실왕이중국의악기를보고만든가야금. 그리고우륵이지은가야금연주곡 12 곡. 당시신라의왕이었던진흥왕은우륵의진가를알아보고신라에정착하여살도록권유했습니다. [ 진흥왕 ] 허허허, 먼길을오시느라고생이많으셨소. [ 우륵 ] 폐하께서이렇게환대를해주시니, 성은이망극하옵니다. [ 진흥왕 ] 부디우리신라의악사들도가야금을연주할수있도록가르침을주기바라오. [ 우륵 ] 네, 분부대로그리하겠사옵니다. [ 해설 ] 우륵은신라의악사들에게가야금연주를가르쳤고, 마침내신라의악사들이진흥왕앞에서연주를하자, 왕은크게기뻐했지요. [ 진흥왕 ] 하하하, 과연듣던대로가야금연주는심금을울리는구려. 수고하시었소. [ 우륵 ] 성은이망극하옵니다. [ 해설 ] 이후, 진흥왕은우륵의음악을나라를대표하는음악인대악으로까지삼았습니다. 우륵은신라의악사들에게가야금연주와더불어노래와춤까지가르쳤고, 그래서합주와공연이가능하도록만들기도했습니다이후우륵이타던가야금은중국에까지알려졌고, 일본의전통악기와음악에도큰영향을주었죠. 안타깝게도가야와신라에서연주되던가야금의실물은전해지지않지만, 일본왕실의창고에신라에선전래된가야금 3 점이남아전해지고있답니다. 자, 그럼자리를옮겨우륵이지은 12 곡이지닌의미를알아보도록할까요? - 32 -
우륵박물관 4. 가야의통합을위한우륵 12 곡 < 삼국사기 > 악지를펼쳐놓은전시장옆으로우륵 12 곡의의미에관한전시물이놓여있습니다. 그렇다면우륵은왜열두개의곡을지은것일까요? 대가야의가실왕은가야지역의여러나라가각기다른방언을지니고있어서, 12 개의지역에해당하는곡을짓게했어요. 그래서각각의곡은특정지명과연관되어있지요. 첫번째곡명인 하가라도 는대가야가가야연맹의중심국이된후, 남가라 로불리던김해가락국을뜻하는것이고, 이에반해두번째곡 상가라도 는이곳고령의대가야를뜻하죠. 이렇듯 12 곡으로표현된가야지역을보면당시대가야의영역을알수있는데요. 고령을중심으로하는대가야권과섬진강쪽의남원, 임실, 그리고남해안지역의여수순천등이대가야의세력권안에있었던것을알수있어요. 이는 5 세기말, 대가야가전성기를맞았을때의영역과대체로일치한답니다. 특히전라도지역으로그영역이확장됐다는것에주목할필요가있는데요. 나라의땅이넓어졌다해도, 초기에는결속력이약하기마련이지요. 바로이때문에 12 곡이만들어진거랍니다. 즉, 대가야권의단결을도모하면서왕의위상을확고히다지고자했던것입니다. 하지만우륵이 12 곡을만든시기가정확하게알려져있지는않아요. 510 년대대가야가전성기였을때우륵이 12 곡을만들었지만, 나라가어려워지자신라로망명했다는설이있고요. 516 년백제의공세로대가야가수세에몰린상황에서, 나라의결속을다지기위해만든것으로보기도한답니다. 이렇듯우륵이라는인물과그가만든음악은대가야의흥망성쇠를모두담고있어서, 대가야의역사를말할때빼놓을수없는부분이지요. - 33 -
우륵박물관 5. 연주법이다양한가야금, 그리고새로운탄생 이곳에전시된다양한가야금들을둘러보시며가야금의연주방법과변천사에대해알아보도록하겠습니다. 가야금은종류도여러가지고, 연주하는방법도다양했습니다. 흔히퉁기는부분을무릎위에두고, 다른한쪽은땅에비스듬히놓고연주하는방식을떠올리실텐데요. 하지만신라토우를통해확인하셨듯이, 수직에가깝게악기를세워연주하는방식도있었습니다. 일본왕실의창고에남아전해지는 3 대의신라가야금에서는끈이달려있거나, 끈을매었던흔적이발견됐는데요. 악기를몸에걸고일어나서연주를했던거지요. 아마도가야금이단독으로연주되었다기보다, 춤과노래혹은다른악기들과합주되었기때문에, 연주방식도다양했었던것으로보여집니다. 또한시대의흐름에따라가야금도변형되어갔을건데. 특히 19 세기후반에들면, 합주형식에서각각의악기가강조되는독주형태인 산조 가생겨나게됩니다. 가야금산조가생겨난이후, 다른악기들의산조도연주되었답니다. 산조가야금을한번살펴보세요. 이전의것보다폭이좁고길이가짧은모습이눈에띄지요? 빠른음악을연주하기에적합하고, 들고다니기에도간편해진겁니다. 이때문에산조가야금은우리전통음악의흐름에있어혁명적인변화로평가받고있습니다. 전시관앞에놓인버튼을눌러서각기다른현악기의소리를직접들어보세요. 산조가야금연주에서왼손으로줄을짚고흔들어서다양한장식음을내는기법을 농현 이라고하는데요. 음의높낮이나떨림의정도를달리하여소리에멋을입힘으로써연주자는자신의개성을드러내지요. 박물관을다둘러보셨는데요. 애초에가야금은, 기존악기의음율이지닌한계를극복하기위해서탄생된악기였습니다. 따라서이후로도계속될가야금의변화는바로가야금자체가지닌정신이라고도볼수있습니다. 정, 정, 정, 하고오래전이곳에울려퍼졌던우륵의가야금소리는, 앞으로도시대의흐름에맞게변화를거치며우리의마음을풍요롭게해줄겁니다. ( 가야금의변화 ) - 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