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긴 관련 공문서를 분리하고 각 공문서의 전달체계를 추적하였다. 둘째 장계에 담긴 여러 공문서의 전달속도와 처리시간을 수량화하여 중앙과 지 방, 도내 행정 층위 간 전달속도를 측량하였다. 셋째 장계의 내용에 따라 업무별 빈도수와 월별 분포도를 정리하였다. 사례에 한정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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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년 년 3 월 31 일, 서울신문 조간 4 면,,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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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영남지방 지방관의 행정소통 체계와 조정방식 李 仙 喜*34) Ⅰ. 머리말 Ⅳ. 행정층위 간 갈등과 조정방식 Ⅱ. 행정소통체계와 운영방식 Ⅴ. 맺음말 Ⅲ. 지방관의 업무와 연계 분야 국문초록 본 연구는 공문서를 분석하여 영남지방 지방관의 행정운영 실태를 고찰 한 것이다. 지방관의 행정운영 실태를 분석한 것은 지방관이라는 특정 집 단의 일상에 접근하기 위한 것이다. 개인의 일상이 아닌 지방관의 일상은 지방관으로서 처리해야 하는 반복적 행정업무를 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 이다. 지방관의 행정운영은 문서를 주된 방식으로 운영되었으므로 문서의 전 달과 처리 과정을 본고에서는 행정소통체계로 특화하여 주목하였다. 주된 분석 자료는 嶺營狀啓謄錄 으로 영남감사가 75년 6월부터 0개월간 작성한 장계를 정리한 것이다. 감사의 장계에는 京司에서 수령에게 내리 는 關文, 수령이 올린 牒呈, 면리임 등이 올린 文狀 등이 본래 문서 그대 로 인용되어 있다. 장계는 도내 행정 운영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분석 방식은 첫째 행정소통체계의 세분화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 장계에 *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 전자우편: ysh@aks.ac.kr 45

담긴 관련 공문서를 분리하고 각 공문서의 전달체계를 추적하였다. 둘째 장계에 담긴 여러 공문서의 전달속도와 처리시간을 수량화하여 중앙과 지 방, 도내 행정 층위 간 전달속도를 측량하였다. 셋째 장계의 내용에 따라 업무별 빈도수와 월별 분포도를 정리하였다. 사례에 한정되지만 지방관은 사법과 조세 분야에서 업무 집중도가 높았으며 지방관의 업무는 시기별 특화 업무와 정례 업무 등으로 나뉘었다. 넷째 중앙과 지방의 행정운영 연계도가 높은 업무에서 지방관이 어떻게 지방관의 입장과 의견을 중앙과 조정하였는지를 분석하였다. 업무의 조정을 위한 갈등과 협의 과정을 조 정 사례별로 분류하여 지방관의 연계 업무 실태에 접근하고자 하였다. 주제어 -------------------------------------------------------------------------------지방관, 관찰사, 수령, 장계(狀啓), 첩정(牒呈), 공문서(公文書), 행정운 영, 행정체계, 행정소통체계, 갈등, 조정 46

Ⅰ. 머리말 본 연구는 행정운영의 작용 실태를 추적하여 조선후기 영남지방 지방관 )의 실제 일상을 고찰하기 위한 것이다. 지방관의 일상이란 개인이 아닌 지방관으로서 관할 지역에서 행정운영과 고유권한을 행사하는 일상을 뜻 한다. 아울러 지방행정체계에서 조직 구성원으로서 횡적종적으로 그물망 처럼 구성된 층위간의 소통과 협력, 갈등과 조정 등의 이해관계가 지방관 의 일상에는 용해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축적된 지방사 연구를 통해 지방관의 법적 지위와 권한, 임용 실태 등이 정리될 수 있었다. 영남지방 지방관에 대한 연구 역시 여러 사 례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지방행정체계의 각 층위 집단 간 관계 나 계통운영의 실제에 대한 접근은 사례연구와 연구성과 축적이 요구된다 고 본다. ) 지방관은 觀察使, 都事, 判官, 守令, 訓導, 京畿 以外에 所在하는 모든 陵과 各 殿의 參奉, 敎授, 敎官, 節度使, 營將, 虞候, 察訪 등이 포함된다. 본고는 중앙 과 지방의 소통체계의 정점이었던 관찰사와 수령을 큰 축으로 하여 상하 관련 권력층위를 살피고자 하여 본고에서 지방관은 관찰사와 수령으로 한정하여 사 용하였다. ) 영남지방의 지역연구는 지방관, 향리, 감영, 사족층 등 다양한 계층에 대한 연 구성과로 지역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데 접근하고 있다. 자료의 현황과 활용방 안을 위한 연구성과도 지방관 연구를 활성화할 수 있을 것이다.(황위주, 경상 감영 관련 자료의 현황과 활용방안, 영남학 8,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005) 연구성과 중 영남지역 지방관을 직접 연구대상으로 삼은 연구성과를 간 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吳仁澤, 9세기 말엽 경상도 지역의 향촌사회 지 배조직과 수령권 -오횡묵의 총쇄록을 중심으로, 지역과 역사 제호, 부산 경남역사연구소, 996:高錫珪, 9세기 전반 鄕村社會勢力間 對立의 推移- 慶 尙道 英陽縣을 중심으로, 국사관논총 8, 국사편찬위원회, 989:張仁鎭, 朝 鮮後期 慶尙監司考, 도협월보 -,, 3, 한국도서관협회, 980:한기문. 조선전기 경상감사제도의 성립과 운용, 상주문화연구, 상주대 상주문화 연구소, 00:이수건, 慶尙道監營의 성립과 직제, 경상감영의 종합적 연구,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004:이수환, 경상감사의 직무와 권한, 경 상감영의 종합적 연구,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004:, 조선전기 慶尙監司와 都事의 巡歷과 통치기능 - 在嶺南日記 를 중심으로, 民族文化 論叢 第34輯,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006 47

조선후기 지방관의 행정운영은 관찰사의 유영체제가 정착되면서 공문서 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3) 중앙과 지방의 통치업무는 공문서를 통 해 보고, 연계, 하달, 조정되었다. 관찰사와 수령의 공문서 중 대부분을 차 지하는 장계와 첩정 등은 업무의 처리만이 아닌 이후 업무 처리나 책임에 대한 증빙 자료로서 중요하였다. 때문에 공문서 내용과 관련 있는 전 과 정의 관련문서 내용이 직접 인용되어 있어 자료적 성격이 강하였다. 특히 관찰사의 장계는 중앙과 지방을 잇는 일원적 통로였던 관찰사의 위치로 인해 중앙과 지방의 행정운영 전반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현 재까지 발굴된 관찰사의 장계는 영남경기전라황해 등 4도에 각 건, 충 청도가 건, 의주가 건 등 일뿐이다.4) 그러나 장계는 한 건의 장계라도 여러 읍 수령의 첩정을 여러 건 등재하고 있다는 점, 京司와 해당 읍 수 령의 관련 문서가 정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적은 수효에도 불구하고 지방 행정 운영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고 생각한다. 본고는 조재호5)가 작성한 嶺營狀啓謄錄 를 분석하되 도내 수령의 첩정 중 시기적 차이가 가장 근접한 商山錄 을 비교군으로 삼았다6). 3) 李仙喜, 8세기 수령과 관찰사의 행정마찰과 처리방식- 嘉林報草 를 중심으 로, 고문서연구 7집, 005. pp.96~0. 4) 譯註 嶺營狀啓謄錄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004), 按覈狀啓 (국립중 앙도서관 BA60-70), 湖西兵營狀啓謄錄 (奎5093-v.-3), 狀啓 (한 국정신문화연구원), 全羅兵營狀啓謄錄 (奎5096-v.-4), 黃海監營狀啓謄錄 (奎507-v.-), 義州府狀啓謄錄 (奎53-v.-6), 狀啓 (奎67), 忠淸道觀察使狀啓 (奎776, 奎7763), 京畿道兵馬節度使狀啓 (奎 7764) 5) 趙載浩(70~76)의 본관은 豊穰이다. 79년(영조 5) 式年試에서 進士 二 等으로 합격하였다. 홍산현감 재임 중이던 744년(영조 0) 春塘臺試 丙科 위로 합격(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한 후 승지로 특진된후 관력이 우 의정까지 이르렀다. 조재호는 영남감사에 75년(영조 7) 윤5월 0일에 임 명되었다. 75년(영조 8) 5월 6일 大司憲으로 교체될 때까지 약 년 간 영남감사를 지냈다.( 承政院日記 영조 7년 윤5월 0일, 영조 8년 5월 6 일) 6) 영남지방 소속읍에 대한 보첩류로는 商山錄 외에 義興縣公事, 疏本各報 牒抄, 各樣論報謄書, 公移占錄, 牒草, 赤羅政模, 山陰記事, 公文目 錄 ( 韓國地方史資料叢書 報牒篇, 여강출판사, 987) 등이 있다. 48

이를 통해 첫째, 장계에 담긴 관련 공문서의 전달체계를 추적하여 어느정 도 세분화된 계통체계가 운영되었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둘째, 업무의 분야별월별 집중도를 분석하여 지방관의 업무 연계 분야의 특징을 파악하 고자 한다. 셋째, 연계 업무 중 갈등이 생기는 업무의 경우 행정 층위별로 마찰을 해결하려는 조정방식을 사례별로 정리하여 지방관의 권한 정도와 조정 전략이 어떠했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이를 통해 지방관이 일상적으 로 반복해서 연계했던 계통과 업무 처리 및 조정 방식에 접근하고자 한다. 그러나 본 연구는 공문서의 흐름에 집중함으로써 지방관이 행정업무를 수 행하면서 관련되었던 지역 사회 여러 권력계층과의 관계망에 대한 접근에 까지는 이르지 못한 한계를 갖는다. Ⅱ. 행정소통체계와 운영방식 행정체계는 통치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국정운영의 기본틀이다. 그런데 공문서의 전달체계는 행정체계의 기본틀에 더해 세밀한 계통을 갖고 있었 다고 볼 수 있다. 조선후기에 중앙과 지방의 공문서 전달체계는 궁방과 외읍 간 문서 흐름에서 일단을 살필 수 있다. 외읍에 있는 궁방전을 궁방이 관리할 때 간편하고 직접적인 방식은 외 읍에 궁방 담당자가 직접 관문을 내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앙과 지방의 행정체계 기본 축인 왕-관찰사-수령의 집권적 체계에 대한 확고 한 인식은7) 궁방이 직접 외읍과 소통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관청에서 圖署는 공문서를 작성할 때 사용되었다. 그 러나 궁방의 圖署는 관문의 인신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궁방의 도서가 찍힌 牌子는 땔감이나 곡식을 재촉하거나 導掌과 마름을 임명하거나 파출 7) 世祖實錄 세조 0년 3월 0일 49

하는 등의 일에만 사용할 수 있었다. 직접 관문을 낼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었지만 궁방에서 외읍에 관문을 보내는 폐단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784년(정조 8)에 지평 李翼晉이 宮房圖署의 폐단을 啓陳하자, 비변사 에서 覆奏하여 節目을 만들어 금지시키기를 청하였다. 정조는 궁방에서 도서패자를 외읍에 내리는 것을 엄금하는 하교를 내렸는데 정조에 앞서 777년(영조 5)에 내린 영조의 수교를 다듬도록 하였다. 수교에 의해 궁 방은 허가된 외에 田土와 奴婢를 打量하거나 望定하는 것 및 漁稅를 침탈 하며 債錢을 징수하는 일이 엄금되었다. 궁방에서 필요할 경우 該曹를 경 유하도록 하였다. 해조를 경유하지 않고 서울과 지방에 도서패자를 내린 경우, 해당 궁방의 首任은 엄중하게 형신하여 定配하고 죄를 저지른 宮任 은 세 차례 형신하여 햇수를 기한하지 말고 먼 지역에다 정배토록 하였다. 숨기고 아뢰지 않은 道臣과 帥臣은 먼저 파면한 뒤에 잡아들이도록 하였 다. 수령은 徒 3년으로 정배시키고 5년을 기한하여 禁錮시키도록 규정하 였다. 京司의 당상관이나 낭청으로 즉시 적발하지 않은 죄는 감사와 수령 에게 적용한 형률을 준행하게 하여8) 법규로 정하였다.9) 법규대로라면 궁방이 외읍에 대해 업무가 있는 경우, 手本의 사유를 갖 추어 내수사에 보고해야 했다. 내수사가 육조 중 업무 관련 該曹에 전보 하면 각 도에 관문을 내어 관찰사에게 전달하였다. 관찰사는 해읍 수령에 게 관문을 내렸다. 관문 내용에 따라 백성들의 실정을 조사한 후 수령이 다시 관찰사에게 첩정을 올리면 관찰사가 다시 장계를 올려 품처토록 하 였다. 京司와 지방의 공문서 전달체계는 조재호의 장계에서도 확인된다. 성균관 대사성은 75년(영조 7) 8월 6일 비변사회의에서 성균관의 재 정 확충을 위해 밀양부 소속의 토지를 성균관으로 이속시켜 줄 것을 제안 하였다.0) 윤허를 거쳐 비변사는 관찰사에게 관문을 보냈고 관찰사를 거 쳐 밀양부사에게 내려졌다. 관문에 대해 밀양부사는 소속 토지의 이속을 위한 堤堰 축조가 어렵다는 첩정을 관찰사를 통해 비변사에 보고하였 8) 正祖實錄 정조 8년 3월 일. 9) 大典通編 刑典 雜令 0) 備邊司謄錄 영조 7년 8월 6일 50

다.) 반대로 지방에서 중앙으로 공문서를 전달할 때 관찰사의 장계에는 수령 외에 面里任 이나 烽軍의 보고 내용까지 직접 인용되어 전달되었다. 관찰 사는 지방 통치 자료로서 기이하거나 사망자가 급증한 경우 등을 왕에게 보고하였는데 해당 지역 면임의 보고가 필요했다. 면임이 文狀으로 실화 나 익사자를 보고하면 해당 수령이 관찰사에게 첩정을 올렸고 관찰사는 비슷한 지역을 묶어 장계를 작성하여 중앙에 올렸다. 조재호가 75년 8 월 6일에 작성한 장계에는 보고하는 읍 중 0읍이 면임이나 이임의 문장을 인용하였다). 그런데 喪事나 사망 등으로 인해 전달 운영에 결원이 생기는 경우 읍에 서는 삼공형이, 병영에서는 우후가 대신 관찰사에게 문서를 올렸다. 75 년 고성현령이 모친상을 당하자 삼공형이 문장을 올려 수령의 상사를 알 렸다. 관찰사는 상사로 인해 생긴 결원을 보충하기 위한 신임 수령 임명 을 중앙에 요청하였다.3) 또 동년 8월 우병영의 병사가 이질로 사망하자 우병영 우후 홍하상이 첩정을 올려 병사의 유고를 알리면서 監捧한 密符 를 군관에게 인계하여 바로 올려 보냈다. 관찰사는 첩정과 함께 전해진 밀부를 보관하고 중앙에 병사의 사망과 이후 처리 상황을 보고하였다.4) 그렇다면 중앙과 지방의 행정업무 처리를 위한 공문서의 전달 속도는 어느 정도였을까. 우선 중앙에서 영남지방에 부임하는 지방관이 서울을 출발하여 부임하는 시간을 통해 중앙과 지방의 이동 시간을 살펴보자. 조 재호는 75년 6월 일 서울을 출발하여 4일 만인 동월 5일에 영남 交龜亭에 도착하였다.5) 그러나 다른 수령의 경우 부임일이 조재호보다는 ) ) 3) 4)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월 7일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8월 6일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월 7일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8월 9일. 해당 장계는 등록으로 정리하는 과정 에서 작성일자에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병사가 죽은 일자가 8월 0 일인데 작성일자가 8월 9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사의 사망 시 우후가 병사를 대신하여 업무를 처리하고 관찰사에게 첩정을 올리는 내용은 유효하 다고 생각한다. 5) 譯註 嶺營日記 75년 6월 일, 6월 일. 5

빨랐던 것으로 보인다. 조재호가 嶺營에 부임한 다음 달인 7월 6일에 대 대적인 인사발령이 있었다.6) 조재호는 신임 수령 중 창원과 인동, 장기, 고성 수령 4명이 아직 부임하지 않았으므로 독촉하여 보내줄 것을 장계로 요청하였다.7) 이때 독촉하지 않은 예산, 금산, 예천, 사천, 기장, 비인 등 6명의 수령과 자여찰방은 늦어도 8월 8일 이전에 부임하였다고 볼 수 있 을 것이다. 부임한 것을 전제한다면 다른 수령이 부임하는데 걸린 시간은 일 미만이었다. 물론 인접지에 있으면서 숙배를 거치지 않고 직접 부임 하는 경우도 고려해야 하므로 나머지 6명 수령이 모두 서울에서 출발했다 고 보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숙배를 거치지 않고 바로 부임하는 경우 는 이에 대한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이에 대해 윤허받은 다른 기록은 보 이지 않는다. 서울에서 영남으로 부임하는데 걸린 시간을 일 이내로 보 는 것은 有旨나 敎旨가 전달되는 시간에서 설득력을 갖는다. 조재호는 영 남감사로 재임하는 0개월 동안 7건의 유지와 건의 교지를 받았다. 유지 가 발급되어 감사가 수급하기까지 소요시간은 4일과 5일이 각 건, 6일이 3건, 7일이 건 등으로 평균 5.7일로 약 6일이 걸렸다. 건 뿐인 교지는 7일 만에 도착하였고 도착소요시간이 4일로 가장 짧았던 건의 유지는 선전관이 직접 전달한 경우였다.8) 75년 7월 7일 진상품을 제때 갖추지 못한 것으로 조재호가 待罪를 청한 장계에 대해 勿待罪 하라는 유지가 8월 일에 내려졌다. 조재호는 8월 7일에 유지를 받고 8월 일에 수급을 확인하는 장계를 올렸다. 결 국 영영에서 올린 장계가 중앙에 전달되고 왕이 재결하는데 걸린 시간이 4일간이었다. 승지가 장계를 접수하고 왕에게 올리는 단계까지를 포함하 고 있으므로 영영에서 올린 장계가 중앙에 닿은 시간은 4일 미만임을 알 수 있다. 유지의 평균 전달 속도 6일을 관찰사의 장계 전달속도에 적용한 다면 관찰사의 장계가 왕의 재결을 받는데 걸린 처리 시간은 8일 미만이 었다고 볼 수 있다. 6) 承政院日記 영조 7년 월 일 7)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8월 9일. 8) 譯註 嶺營日記 75년 월 일 5

한편 관찰사와 수령의 도내 소통은 지리적 근접으로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기장현은 표류선을 감독하는 지역적 특화업무를 수행하는 곳이었 다. 기장현감은 75년 7월 7일 申時와 酉時, 8일 卯時 등에 남산봉군 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즉각 첩정을 작성하였다. 첩정을 받은 관찰사는 기 장현감의 3건의 첩정을 담아 7월 일에 장계를 작성하였다.9) 기장현감 이 올린 첩정이 도착한 날은 분명하지 않지만 7월 8일 작성된 기장현 첩정이 3일만에 장계로 작성되는 시간차는 살필 수 있다. 중앙과 지방의 공문서는 동등 이하에게는 關을 사용하고 동등 이상에게 는 牒呈을 사용하여0) 행정 층위별로 발급자의 직위와 수급자와의 관계 를 나타냈다. 京司가 관찰사에게 보낸 관문, 관찰사가 왕에게 올린 장계, 수령이 관찰사에게 올린 첩정, 면리임이 수령에 올린 문보, 봉군이 수령에 올린 보고 등이 그것이다. 관찰사는 장계에 卽到付安陰縣監沈錪牒呈 內 )라고 밝힌 후 관련 읍 수령의 첩정을 직접 인용하였다. 비변사의 관 문에서도 직접 인용을 찾을 수 있다. 조재호가 받은 비변사의 관문은 75년 9월 7일에 열린 비변사 회의 내용과 동일하다.) 해당 내용은 9월 0일자 비변사등록에 정리되어 있어 비교할 수 있다.3) 비변사등록 의 내용과 비변사에서 낸 관문의 내용이 합치하는 것은 행정운영과정의 세밀한 연계와 상호연접도를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4) 그런데 농형 보고처럼 여러 읍의 상황을 개괄해야 할 때는 첩정의 내용 9) 0) ) ) 3)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7월 일 經國大典 禮典 用文字式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7월 0일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0월 5일 備邊司謄錄 영조 7년 9월 0일. 이밖에도 장계에 인용된 비변사관문 내 용이 備邊司謄錄 과 일치하는 경우는 75년 월 7일에 작성된 장계에 서도 확인된다.(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월 7일) 4) 조선후기 등록의 기능확대에 대한 연구가 참고된다.(김혁, 朝鮮後期 中央官廳 記錄物에서 謄錄의 위상, 서지학보 6, 00) 53

을 장계에 일일이 직접 인용하지 않았다. 영남 소속 7개 읍을 대상으로 농형이나 지진, 전염병 등의 상황을 종합하여야 할 때는 첩정의 내용을 요약하여 장계를 작성하였다. 조재호는 6월에 부임한 이후 7월 4일 당해 의 농사상황을 정리하여 장계를 작성하였다. 이때 정리된 읍은 58개로 58 건의 첩정을 정리하여 종합하였다.5) 첩정의 요약은 내용에 해당하는 지 역을 열거하는 것이었는데 지역적 근접 상황까지 고려하지는 않았던 것으 로 보인다. 조재호는 75년 6월 일에 올린 농사상황에 이어 7월 7 일에도 농사상황을 보고하였다.6) 9개 읍에 대한 상황을 논밭 농사상황, 콩목화 등 작물상황에 따라 5항목으로 구분하였다. 첫째 의흥, 의성, 청 송, 경주, 안음, 거창 등의 상황, 둘째 상주, 대구, 현풍, 창녕, 김해, 창원 등의 상황, 셋째 고성, 거제, 남해, 웅천 등의 상황, 넷째 곤양, 기장 등의 상황, 다섯째 동래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의흥, 의성, 청송, 경주가 인접지 역이고, 안음과 거창이 인접한 지역으로 그 외 대구, 현풍, 창녕이 인접지 역으로 묶을 수 있지만 인접 지역끼리 재정리하지는 않았다. 농사상황은 인접 지역과 무관하게 각기 다른 상황일 수도 있기 때문에 지역적 인접성 을 고려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병충해는 인접 지역 간 피해상황 이 비슷할 가능성이 높았지만 권역에 대한 염두는 보이지 않는다. 75년 8월 일 올린 장계에 병충해 피해 고을 8곳을 정리하였다. 연이어 적 은 청도, 김해, 사천, 하동, 함창, 영산 등의 순서에서 청도와 영산은 경 계를 접하고 있는 인접읍이었지만 지역을 연계하지는 않았다.7) 다만 도 내 지역에 대한 권역별 인식은 고성, 거제, 남해, 웅천 등 4개 읍이 연해 지역으로 보고에서 단일 권역으로 처리되는 정도만 엿보일 뿐이다. 이외에 장계 작성에서 주목되는 것은 영남 소속 유배지에 보내진 죄인 의 도착 보고 장계이다. 유배지 죄인 도착을 알리는 장계는 다른 장계에 서 보이지 않는 一 로 구분하여 죄인의 성명과 도착일마다 구분하여 정리 되었다. 각 구분마다 작성일자가 적혀 있어서 각각 따로 작성된 장계로 5)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7월 4일 6)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7월 7일 7)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7월 7일 54

볼 수 있다. 그런데 앞 장계의 별첨문서가 별개의 장계로 구분되어 등록 된 경우가 두 차례 발견된다. 75년 월 3일자 장계는 75년과 75 년 두 해 동안 시행된 별무사 시험에 대한 내용이었다. 연이어 등록된 장 계는 월 7일로 일자가 적혀 있지만 월 3일자 장계에서 밝힌 별무사 시험 성적 우수자의 직급과 성적에 대한 별첨문서였다. 즉 월 7일로 일자가 잘못 적혔고 별첨문서를 개별 장계로 분류하는 착오가 있었다.8) 장계 등록에 착오가 있다는 점, 죄인 유배 도착 장계에만 一 로 항목을 나눈 점, 다른 장계에서는 一 과 같은 표시가 없다는 점 등에 근거할 때 죄인 유배 도착 사항은 한 건의 장계로 정리되었다고 추정된다. 한편 관찰사가 장계를 올리는 간격은 어떠했을까. 앞서 살핀 대로 서울 과 영남이 원거리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매 장계마다 한 건씩 올려 보 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우선 시급한 사안 외에는 여러 달의 내용을 한 건의 장계에 담아 보냈다. 조재호는 75년 8월 6일 3월부터 7월까지 익사 혹은 소사로 인한 사망자수를 일괄 정리하여 보고하였다. 사망 원인 과 사망자 성명, 사고 장소, 사망일 등이 정확히 기재된 5개월 분량의 내 용이 장계에 정리되었다.9) 조재호의 경우 관찰사가 장계를 올리는 시기 는 부정기적이었지만 같은 날 작성된 장계가 자주 발견된다. 장계 중 작 성일이 같은 장계는 작성일만 같을 뿐 내용이 상이한 별개의 독립된 장계 였다. 동일 장계 건수가 5건 이상인 경우는 8회로, 7월 0일 7건, 7월 7 일 6건, 8월 8일 7건, 9월 30일 6건, 0월 8일 5건, 월 9일 6건, 월 8일 8건, 월 일 8건 등이었다. 그런데 장계가 5건 이상 동일에 작성된 경우, 매달 0일 이후에 집중되 어 있는 것이 주목된다. 등록된 장계 중 6월, 월, 3월만 예외인데, 6월 은 부임한 달이고 3월은 9일 사직장계까지만 등록되어 있다. 한 달이 온 전하게 반영된 달 중 월만 0일 이후 동일일 작성 장계 수가 적었다. 8)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월 3일, 월 7일. 75년 월 9일의 두 건의 장계 역시 앞의 장계가 호조 연분사목에 대한 相考이고 뒤의 장계 는 연분등제에 따른 실총 내역과 호조에 올리는 별도의 장계가 합치되는 착 오가 있었다. 9)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8월 6일 55

월은 총 작성 장계가 4건으로 장계수 자체가 적었다. 조재호의 경우에 한해 볼 때 관찰사는 0일 이후 특히 8일부터 말일까지 해당월에 보고 할 내용을 정리하여 사안별로 동일에 장계를 작성하였다. 도내 수령이 관찰사에게 첩정을 올릴 때도 매 건마다 첩정을 따로 올리 지는 않고 비슷한 사안에 대한 여러 첩정을 한 번에 감영으로 보낸 것으 로 보인다. 기장현감은 표류선을 감시하고 표류선에 대한 처리를 담당하 고 있었다. 기장현감은 75년 9월 일 酉時에 남산봉군으로부터 표류 선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후 남산봉군은 유시로부터 술시, 해시, 자시 그리고 다음날 인시, 진시, 미시 등 매시 마다 변동 상황을 기장현감 에게 보고하였다. 각 보고 때마다 기장현감은 보고에 대한 명령내용과 이 유를 첩정에 담았다.30) 당시 사건 관련 첩정은 총 8건은 관찰사에게 一 時到付 되였음을 장계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로 미뤄 볼 때 기장 현감이 표류선에 대한 급한 업무를 먼저 봉군에게 명령하였지만 매시 상 황과 명령 사유를 자세히 적고 독립된 첩정으로 작성한 후 8건의 첩정을 일시에 관찰사에게 올린 것으로 보인다. Ⅲ. 지방관의 업무와 연계 분야 지방관은 행정, 사법, 군사, 치안, 경제, 교육 등 통치업무을 총괄하는 업무를 일상적으로 수행하였다. 관찰사의 장계에는 중앙과 지방의 관련 업무가 종합적으로 담겨 있어서 장계를 내용에 따라 세분하면 지방관이 주로 어떤 업무와 관련하여 공문서를 작성하였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조 재호가 작성한 장계를 업무내용에 따라 월별 분포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30)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9월 30일 56

<표> 嶺營狀啓謄錄 업무 내용별월별 수효 업무 내용 사법 군사 일반 외교 정보 사 살 군 왜 군 기 법 옥 사 관 역 이 연 월 6 7 8 9 0 7 5 년 7 4 4 3 3 7 7 전 염 병 농 수 조 진 관 인 포 규 향 유 기 형 세 운 상 이 사 폄 찰 교 지 타 곡 4 6 총합 34 3 8 5 3 4 5 5 6 3 3 년 총합 관리 북 7 5 인사 조세일반 5 0 분야별 36 8 39 5 총합(%) (7.) (5.8) (6) (9.3) (.3) 3 6 0 5 5 4 9 3 5 6 3 8 33 3 8 33 (.3) (6.0) (.5) (00) 조재호가 0개월간 작성한 장계는 33건이었다. 6월 5일 장계를 시작 으로 3월 9일 사직장계까지의 기간을 따지면 평균 이틀에 건 정도의 장계가 작성된 셈이다. 업무별 빈도수와 월별 분포도를 파악하기 위해 우 선 업무 내용은 세분하여 사법, 살옥 등 8개 업무로 나누었다. 세분한 업무는 다시 비슷한 성격끼리 묶어 분야별 집중도를 산출하였다. 이를 통 해 장계의 업무별 월별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월별 장계의 빈도수는 높은 순서로 보면, 월-7월-월-8월0월 -9월-6월3월-월 순이었다. 이 중 3월과 6월은 한 달이 온전하게 반영 된 것이 아니므로 제외하면 월 4건이 가장 낮은 횟수였다. 장계가 가장 57

많이 작성된 달인 월은 특히 北關移穀, 즉 함경도 구휼을 위해 영남에서 移穀하는 업무 관련 장계가 5건으로 다른 달에 북관이곡 관련 장계보다 월등하게 높았다. 월을 제외하고 대체로 5건 전후의 장계가 작성되었 다. 둘째 업무별 장계 빈도수를 보면 세분한 업무별 빈도순위와 분야별 묶 음 빈도순위에서 차이가 있다. 세분한 업무별로 보면 사법이 34건으로 가 장 높았다. 다음으로 높은 순서는 수세-군사-인사-북관조미-왜관유지 -농 형진상기이 -향교전염병조운 -살옥포폄 -기타 순이었다. 업무를 세분한 것 은 단일 업무 사례별로 보다 정밀하게 분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관 련 업무를 묶어 분류하면 조세일반 업무가 9. 3%로 가장 높은 비율이었 다. 다음으로 높은 것은 사법일반인데 36건으로 전체 장계 중 7.%를 차지하였다. 다음으로 높은 빈도수 분야는 군사외교 -인사관리-정보전달향교 관리-유지 순이었다. 유지에는 교지까지 포함한 수이다. 그 외 기타 로 분류한 건은 건은 순행일정보고이고, 건은 공신사망 보고였다. 결 국 세분한 업무로는 사법이, 업무별 묶음에서는 조세가 각각 가장 많이 장계가 작성되었다. 장계의 업무별 편중도는 상주목사가 작성한 첩정에서 도 유사한 집중도를 가졌었다. 商山錄 에 문서 07건 중 箋文 등의 글을 제외한 첩정은 84건이다. 이 중 작성일자가 확인되는 경우는 5건에 불과 하다. 일자별 집중도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내용별로 구분하면 사법이 43 건으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였다. 다음으로는 조세분야로 38건이 작성 되었다. 셋째 업무의 월별 집중도를 보면 시기별 편중에 따라 업무가 달랐다. 사법, 왜관, 인사 등은 월별로 고르게 분포하여 시기별 편차가 크지 않았 다. 인사는 수시로 발생하는 수령의 체직 혹은 파출에 대한 관리였으므로 시기적 특징을 갖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사법과 왜관은 정례 보고가 반복 적으로 발견된다. 사법에서는 수감자의 수감일과 형신 횟수에 대한 월별 보고가 있었다. 왜관은 왜관 관청 관리 상황과 왜인선의 출입수를 월별로 보고하였다. 반면 농형은 9월0월에, 수세는 9월월에, 전염병은 6월7 월월에, 진상은 7월0월월월에 각각 집중되었다. 전염병은 계절적 58

요인으로 인해 여름과 봄에 관련 장계가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농형 과 수세는 공통적으로 9월에 집중되어 있었다. <표>에서처럼 조재호의 사례에 한해 볼 때 지방관은 사법과 조세 관련 업무에서 장계 작성의 빈도수가 높았다. 사법과 조세 관련 장계의 내용을 업무별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법 관련 장계 내용은 정례 보고와 살옥안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정 례 보고는 매달 도내 수감자의 수감일자와 동추 및 형신 횟수를 정리한 것이었다. 조재호는 재임기간 0개월 중 7월, 9월, 0월, 월, 월에 보 고하여 5차례 정례 보고를 하였다. 7월 0일에는 六月朔, 9월 30일에는 八月朔, 0월 7일에는 九月朔, 월 8일에는 十二月朔, 월 일은 一月朔 을 보고하였다.3) 수감자에 대한 보고는 7월0월월분이 보고 되지 않았다. 작성일을 기준으로 해당 달로부터 작성일까지를 포괄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9월 30일 장계에 8월분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였다 고 하였으므로3) 9월 30일에 정리하면서 앞서 정리한 6월분 다음인 7월 과 8월 모두 포함하지 않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법에 정하기로는 매 0일 마다 죄인의 죄명과 처음 囚禁된 月 日, 拷訊과 決罪한 數를 각 官司에서 錄啓하여야 했지만 외방의 경우 월에 啓하도록 하였다.33) 결송에 대해서도 결송하는 월일을 매달 초에 경 외관은 형조에 이문하여야 했지만34) 외방의 경우 휼수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35) 월에 啓하도록 되어 있었던 셈이다. 고신과 형신의 횟수는 죄수에 대한 恤囚에서 백성을 안집하기 위해 파악되어야 할 중요 사안이 3)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7월 0일, 9월 30일, 0월 7일. 75년 월 8일, 월 일. 3)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9월 30일 33) 經國大典 刑典 恤囚 34) 續大典 刑典 決訟日限 35) 經國大典 刑典 恤囚 59

었다. 고신은 3일 이내에 두 번 시행할 수 없었고 고신한 지 0일 이내에 決罰하도록 하였다. 형신의 횟수는 하루에 회에 한하였다.36) 특히 형신 에 대한 제한은 영조 때 각별히 준칙하도록 하였다. 영조는 735년에 獄 이라는 것은 有罪한 者를 懲戒하는 것이지 본래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이 아니므로 中 外 官吏에게 하교하여 휼수를 명하였고 그대로 법에 규정되 었다.37) 조재호가 법에 정한 횟수보다 빈번하게 월별로 수감자와 수감일, 동추와 형신의 횟수를 보고한 것은 이와 같은 당시 상황을 미루어 볼 때 법률에 정한 것보다 월례 보고의 성격이 강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사법권은 관찰사나 수령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관찰사의 사법권에 비해 수령의 그것은 지위에 비해 낮았다고 본다. 관찰사는 流 이하를, 수령은 笞 이하를 직결할 수 있었고 수령은 圓杖을 사용할 수 없었다.38) 수령이 사건의 전말에 대한 첩정을 올리면 관찰사는 題辭를 통해 형신 횟수와 방 송 여부를 지시하였다. 살옥은 국가에서 정한 바대로 인접 읍의 수령과 동추하여 조사하였다.39) 그러나 살옥 외에도 여러 사건의 처결을 수령은 첩정을 통해 題辭를 받아 처리하였다. 동추관도 역시 관찰사에게 첩정을 올려 동추 진행을 보고하였다.40) 이처럼 사법 관련 업무는 대부분이 수령 에서 관찰사로, 관찰사에서 중앙으로 보고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사 법권에 대한 지방관의 제한된 권한이 해당 업무분야의 소통 흐름에 작용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조세 업무에서 수세대행과 운반을 담당하였던 지방관은 사법에 비 해 적극적으로 지방의 상황과 입장을 전달하였다. 조세관련 장계는 법에 서 규정한 지방관의 조세업무와 관련성이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월별 조 36) 37) 38) 39) 40) 續大典 刑典 推斷 續大典 刑典 恤囚 續大典 刑典 濫刑 經國大典 刑典 推斷 商山錄 에는 옥안 사건과 살옥안 4사건에 대해 총 35건의 첩정이 작성되 었다. 수령의 첩정에 대해 관찰사의 제사가 더해 동일 사건에 대해 여러 건 의 첩정이 작성정리되었다. 작성된 첩정은 옥안이 7건, 살옥안이 8건이 었다. 60

세 업무 규정과 실제 조재호의 장계 내용을 비교하여 보면 조세 관련 업 무가 높은 빈도수를 갖게 된 배경을 파악할 수 있다. 3월 중순은 작년도 분의 조세를 서울로 보내는 마지막 시한일이었는데 영남지방 조세의 운반 은 조운선과 세곡선을 통해 수운되었다. 조세의 완납시기는 조선전기는 월 일부터 익년 월 사이에 수세를 완료한다는 조항으로 출발일에 대 한 구체적인 한정이 크지 않았다.4) 그러나 續大典 부터 영남의 경우 3 월 5일 이전에 발선하여 5월 5일4) 내에 상납하는 조항이 마련되었다. 법전 내용의 변화는 정착 시기보다 앞서, 전례의 축적이 필요했던 만큼 조선후기의 내용으로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당해년의 수세안은 實總에 대한 災實의 차감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재실 에 대한 조사와 정리가 중요하였다. 아울러 수세의 기준인 연분등제의 작 성을 위해서도 필수적이었다. 재실에 대한 조사 과정은 아래로부터 단계 를 정리하면 권농관 수령 관찰사로 행해지도록 법으로 규정하였다. 권 농관은 8월 5일 이전까지 수령에게 해당 지역의 재실과 농사상황을 조 사하여 보고하여야 했다. 수령은 9월 5일까지 권농관의 조사내용을 다시 확인하여 왕에게 아뢸 수 있도록 해야 했다.43) 결국 9월 5일은 관찰사 가 왕에게 올리는 보고 기한인 것이다. 수령은 9월 5일보다 앞서서 관찰 사에게 해당 군현의 재실과 농사상황을 반영한 수세안을 작성하여 올려야 했다. 8월과 9월을 통해 정해진 수세안과 결총이 다음해 5월까지 납부해 야 하는 조세수를 결정하기 때문에 지방관에게는 중요한 시기였다. 災實 에 따라 결정되는 결총은 실총에서 제외되는 만큼 세액 조정에 중요한 단 계였다. 호조에서는 매년 연분절목을 작성하여 관찰사에게 관문을 내리면 관찰사가 다시 수령에게 내려 연분절목에 따라 연분등제를 작성하도록 하 였다. 상주목사는 연분절목에 따라 첩정을 작성하여 관찰사에게 상고하였 다.44) 실제로 조재호의 장계는 9월과 0월에 전체 업무 중 조세 관련 업 4) 經國大典 戶典 收稅 4) 영남의 수세 완료일은 5월 5일에서 후기로 갈수록 더욱 당겨진 5월 5일로 大典會通 에 법례화되었다.( 大典會通 戶典 收稅) 43) 經國大典 戶典 收稅 44) 商山錄 年分節目 6

무 특히 수세 관련 업무에 집중도가 높았다. 또한 조재호의 장계에서는 0월과 월에는 호조의 관문이 여러 차례 확인된다. 호조에서는 전년도 미납분에 대한 독촉을 관련 관청별로 다른 관문을 내려 보내 해당 수령을 독려하도록 하였다. 경사에서 전년도 미납분을 정리하는 것과 같이 수령 은 당해 연도 환상과 포흠에 대한 정리를 행하였다. 지방관은 한 해를 마 무리하는 歲前을 기한으로 영남 收租案을 마련하여 상송하였다. 기한이 지나면 논책되었으므로 기한을 엄수하여야 했다.45) 조재호 역시 월에 수세 관련 업무 장계가 총 장계 9건 중 6건으로 단일 업무로는 조세에 가장 높은 집중도를 보인 달이었다. Ⅳ. 행정층위 간 갈등과 조정방식 왕권의 입장에서 본다면 지방 통치와 백성의 위무는 국가 수세의 원활 한 수취와 수세원 확보로 단순화할 수 있다. 중앙의 수세 정책과 운영은 백성의 실상을 반영하여야 하지만 국가 통치운영을 위한 재원 마련이라는 점에서 반영되는 실제는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중앙의 정례화된 규모와 백성의 가변적인 매해의 상황은 결국 중앙과 지방의 갈등을 반복적으로 유발하였다. 조재호는 결총의 획정을 앞두고 올린 장계에서 백성을 위무하고 보호하 는 방도는 조세를 감하는 정책보다 급하지 않다고 적었다.46) 그러나 이와 같이 말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총이 더 많이 획정되어야 한다는 말 을 하기 위해서였다. 75년 호조에서 내린 연분 시행계획은 실총을 기사 년(749년) 실총 만 4000결에 준거하여 정해졌다. 해당 실총 중 경오 년(750)년 하천 침수 손실분인 000여결을 면제하고 결총이 4000여 결 45) 續大典 戶典 漕轉 46)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9월 6일 6

에 지나지 않다고 감사는 걱정하였다. 조재호는 3읍에 더해 0읍을 합쳐 총 4읍의 蟲災를 중앙에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영남지방의 실총은 팔도 에서 가장 많기 때문에 조세에 대한 관찰사의 책임 역시 가장 높았다고 하겠다. 호조에서 획정한 결총에 대해 결총 4000여 결 외에 한 6~7천결 정도를 더 획정하여 만결의 숫자에 준하기를 장계로 요청하였다.47) 조재 호는 9월 6일에 장계를 올린 후 중앙의 답신을 기다렸지만 0일이 지나 도록 어떠한 답신도 없었다. 조재호는 9월 9일에 다시 장계를 올려 회답 을 받지 못해 더욱 절실하게 되었다고 하여 답신이 없는 것에 대해 완곡 하게 불만을 나타내었다.48) 수세액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기본일정은 원칙적으로 8월에 호조에서 연 분절목을 내려 보낸 후 9월에 획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9월에 획정되는 재결수는 다음해 봄까지 계속해서 협상의 대상이 되었다. 신임관찰사가 부임하기에 앞서 왕에게 숙배하고 입시하였을 때 재결을 늘려주는 문제를 청하는 기사가 잦은 것에서도 재결수의 조정을 위한 노력의 일단이 보인 다.49) 그러나 국가 재정에서 재결의 증가는 수세액의 감소를 초래하므로 관찰사의 노력은 결실을 내기 어려웠다. 수세액 조정과 함께 지방관은 수 세물 代捧에서도 중앙과 조율이 필요했다. 목화가 생산되지 않는 읍에서 순목을 납입하기 보다는 토산물인 麻布로 대체하는 것이 백성에게나 지방 관에게 유리하였다. 그러나 재정 운영의 통일성과 타도와의 형평성으로 인해 대봉 역시 수세액 조정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다.50) 조세 관련 업무의 조정은 크게 보면 중앙과 지방관으로 대별되지만 이 해당사자 간의 충돌도 있었다. 도와 도 관찰사간에, 도내 관찰사와 수령 간에 입장차가 있었다. 진휼을 위해 비변사조로 영남에 소속된 射軍木의 함경도 이관이 9월 7일 비변사 회의에 참석한 함경감사 黃晸에 의해 제 안되었다. 황정은 9월 일 함경감사에 임명되기 직전 한성부 우윤을 지내 47) 48) 49) 50)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9월 6일 譯註 嶺營狀啓謄錄 74년 9월 9일 備邊司謄錄 영조 7년 월 일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9월 6일 63

고 있었기 때문에5) 당시 서울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재호는 함경감 사의 의견에 대해 다른 道의 일이라 다만 그 명색만 듣고 그 실상은 자세 히 알지 못하다고 평하였다. 사군목이 진휼에 도움이 될 만큼의 액수가 되지 못하는 내역도 일일이 열거하여 장계를 올려보냈다.5) 결국 함경도 로 사군목을 이관하려던 비변사의 계획은 무효화되었다. 도내 수세 업무에서 관찰사와 수령의 입장 차이는 특히 진상 상납에서 자주 드러났다. 조재호가 9월분 진상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해당 읍 수 령과 겪은 갈등은 관찰사나 수령 모두에게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창원부 사 조완은 75년 0월 5일 진상할 생청어가 날씨탓으로 잡을 수 없다 고 관찰사에게 알렸다. 관찰사는 더욱 독촉하여 기일에 맞추도록 신칙하 는 제송을 내렸다. 수령을 독촉하는 한편 실상 조사를 위해 진해현감을 차사원으로 정하였는데 차사원의 보고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관 찰사는 생청어를 갖추지 못한 사유와 함께 장계 말미에 待罪한다고 하였 다.53) 도내 진상을 맡았던 관찰사는 이유에 상관없이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기에 수령을 감독하고 독려해야 했다. 한편 세곡선은 운송 과정에서 난파되는 일이 잦았다. 난파사건은 책임 소재를 추적하는 것에 더해 조작을 통한 포탈 여부를 구분해야 했다. 지 난하고 복잡한 문제인 난파사건의 이해 당사자는 주로 해당 읍 수령과 감 관, 색리 등이었다. 조운선 난파사건 조사에는 년 전까지 소급되는 경우 도 있었다. 기사년조(749년) 세곡을 실은 배가 난파된 사건은 영산, 현 풍, 창녕 3읍이 관련되었는데 감관과 색리가 묵은 것을 바쳤다고 공초를 내어 수령들이 곤란하게 되었다. 영산 현감이 공초문서를 조사해 보니 당 시 담당 좌수 유학 이덕신의 공초에는 전부 새것으로 준비하였다고 되어 있었다. 현풍현감도 그간의 상황을 조사하여 열거한 후 배의 선원들이 묵 은 것을 바쳤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관찰사는 수 5) 承政院日記 영조 7년 8월 4일, 9월 일 5)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0월 5일 53)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0월 8일. 왕은 유지를 내려 진상품을 갖추지 못한 것에 대해 대죄하지 말 것을 명하였다.(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월 일) 64

령들이 올린 내용에 따라 장계를 올렸다.54) 관찰사의 권한 중 인사행정에 대한 것은 감찰이 주된 것이었다. 도내 수령이 부정한 행위를 하였을 경우 파출할 수 있었지만 인사관리 차원이 었고 신임 수령의 선발에는 영향력을 갖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 사권에 대한 갈등이 주목되는 이유는 관찰사가 도내 통치업무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인사 처리에 의견을 제출함으로써 인사권에 일정정도 관여하 려는 시도가 보이기 때문이다. 75년 8월 당시 대구판관은 宋淳明으로 748년 월 일에 임명된 후 75년까지 3년 간 재임 중이었다.55) 조재호는 송순명이 온갖 폐단을 제거하여 모두들 신뢰하고 편안해 한다고 평하였다.56) 예천군수 鄭志翼도 부임이래57) 한결같이 근면하고 일처리 솜씨가 뛰어나다고 평하였다. 그런데 75년 7월 6일 송순명과 정지익 이 체직되게 되자58) 이들의 잉임을 청하였다.59) 행정능력이 뛰어난 두 수령이 한 번에 체직될 경우 해당 읍의 관리가 어려울 것을 염려한 결과 였다. 그러나 조재호는 0월 3일 다시 장계를 보내60) 이조에서 이미 허 락하지 않았으니 서둘러 신임 수령을 부임토록 독촉할 것을 요청하였다. 조재호는 영해부사 柳綽6)이 75년 월 3일 길주목사에 임명된 것을 조보를 통해 알았다.6) 조재호는 송순명과 정지익과 같은 이유로 영해부 사의 잉임을 요청하는 장계를 월 일에 올렸지만 잉임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54) 55) 56) 57) 58) 59) 60) 6) 6)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7월 7일 承政院日記 영조 4년 월 일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8월 9일 承政院日記 영조 4년 6월 일 承政院日記 영조 7년 7월 6일. 정지익이 長城府使에, 송순명이 金山郡守 에 임명되었다.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8월 9일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0월 3일 유작이 영해부사에 임명된 것은 750년(영조 6) 8월 0일이었다. 길주목사 에 임명된 것은 75년(영조 8) 월 3일이었다.( 承政院日記 영조 6년 8월 0일, 영조 8년 월 3일)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월 일 65

수령 임명과 체직에 대해 장계를 올린 후 중앙의 입장이 바뀌지 않는 경우 조재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신임 수령의 빠른 부임 독촉이었다. 조재호는 구관의 잉임을 요청한 것은 그대로 유임시켜 편하게 잘 하려는 생각이었다거나 새로 파견될 사람이 감당할 만하다는 식의 말을 붙여 중 앙과의 갈등 수위를 낮추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63) 75년(영조 7) 함경도는 심한 흉황을 겪어서 동년 0월 望後 만 섬을 구획하여 보내라는 관문이 영남감영에 도착하였다. 조재호는 관문이 내려온 지 한 달이 되지 않아 곡물을 실어 보냈지만 운송 중 3척이 흥해 등의 바다에서 난파되었다. 척은 익사자 없이 곡물도 거의 건져냈지만 척은 격군 8명이 사망하고, 미수미가 84섬 6말이나 되었다. 조재호는 운 송할 배를 마련하기 위해 호남 배 30척을 구획할 것을 비변사에 보고하여 허락을 받았다.64) 하지만 전라감사는 비변사에 장계를 올려 호남의 배를 차출하는 것을 철회토록 하여 영남감사는 호남에서 배를 지원받지 못하게 됐음을 비변사 관문으로 알게 되었다. 0월 이후 계속해서 조재호를 시달 리게 했던 북관으로의 이곡은 뜻밖의 상황으로 조재호를 압박하였다. 조 재호는 함경도 이곡에 대해 왕에게 보고한 것이 8차례였고 비변사에 보고 한 것도 3차례나 되었다.65) 조재호의 보고는 왕에게 정확히 전달되지 않 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재호가 북관으로 이곡하는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 지 못하고 배를 여전히 출발시키지 못한 것을 이유로 조재호가 從重推考 를 받았기 때문이다.66) 더욱이 조재호는 업무를 독촉하는 유지를 받아야 63)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8월 9일, 0월 3일. 64)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월 9일 65) 북관이곡과 관련된 장계는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0월 5, 0월 8 일, 75년 월 8일, 월 8일, 월 0일, 월 월 8일, 월 9일(건), 3 월 일, 3월 8일 등이었다. 총 0건의 장계가 등록에는 정리되어 있다. 그 런데 조재호는 3월 9일 사직장계를 올리면서 총 차례의 보고를 하였다고 적었다. 66

했다.67) 조재호의 낙담은 컸고68) 결국 조재호는 3월 9일 사직장계를 올 렸다.69) 조재호는 관할 도가 아닌 함경도의 진휼을 위해 이곡해야 하는 업무를 0월 이전부터 준비하여 월까지 4개월 넘는 기간 동안 수고하며 중앙과 마찰을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재호는 마찰을 해결하기 위해 온건적인 태도를 취했다. 조재호는 본래 조정에서 추가 구획분은 남도와 북도의 배가 절반 씩 나누어 8500섬씩 운송하도록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영남에서 차출한 배에 만 040섬을 실어 보냈다. 이와 같은 상황을 장 계하면서 북관의 기근이 매우 심하고 임금님의 근심이 더욱 깊어서 신이 감히 나누어 운송하라는 조정의 영에 의탁할 수 없다고70) 하여 충정을 드러내 보였다. 조재호는 중앙과의 갈등에서 대치하기보다는 온건적 태도 를 취했다. 그러나 온건적 태도는 왕에 대한 태도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 다. 경사와의 갈등에서 지방관이 입장을 관철하거나 조정안을 마련하기 위한 방식은 조재호의 장계에 한해 보면 실상의 조사 보고, 전례나 법조 항의 근거 제시 등의 사례가 보인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증빙할 문서의 장기 보존과 전례의 확보, 실제 조사와 문서화, 그리고 관련 법조문 인용 등의 조정 방식을 살필 수 있다. 첫째 증빙 문서의 장기 보존은 세운곡의 조사에서처럼 년이 넘어서까 지 조사되었던 사례에서 필요성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전례를 相考하여 새롭게 시행하는 근거로 활용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조재호는 浦倉의 곡식을 저축하기 위한 방책으로 이전 감사 중 74년의 예를 전례로 제 시하였다. 9년 전 영남감사 김상성은 무명을 획급하여 호조에 납부하고 66) 備邊司謄錄 영조 8년 월 6일 67)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3월 일. 75년 3월 일 내려진 유지를 조 재호는 3월 9일 받았다. 68)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3월 일 69)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3월 9일. 장계등록은 사직장계를 끝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조재호의 사직장계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재호는 75년 5월 6일 大司憲에 임명될 때까지 영남감사에 재임하였다.( 承政院日記 영 조 8년 5월 6일) 70)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3월 8일 67

도내 寺奴婢들이 바칠 무명 중 호조에 납부할 것을 대신 돈으로 대납하도 록 요청하여 시행하였다. 무명을 백성들에게 빌려주고 가을에 곡식으로 받아서 생긴 이익은 포창의 곡식 비축에 충당한 것이었다. 조재호는 당해 년에도 전례대로 비축할 곡식을 마련할 것을 장계하였다.7) 둘째 실상의 조사와 보고를 통해 중앙의 지시가 수정되는 사례도 있었 다. 성균관 대사성의 요청으로 비변사에서 영남감사에게 관문이 전해졌는 데 밀양부 소속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밀양부 소속 남면에 소속지가 없는 기름진 토지가 있는데 이곳에 수로를 쌓아 물을 막은 후 성균관 소속지로 삼고자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당시 밀양부는 전염병이 심해서 공사 를 시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관찰사는 수로 쌓는 공사는 현재 불가능 하다는 밀양부사의 첩정을 담아 비변사에 상세하게 보고하였다. 성균관에 서도 별도로 郎廳을 밀양부에 파견하여 수로 공사에 필요한 목재를 마련 하고 工匠 및 역군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현지 상황을 살핀 낭청 은 공사가 본래 예정한 두 달보다 더 걸릴 상황임을 보고하였다. 이로써 밀양부 남면에서 수로 공사를 하려던 성균관의 시도는 시행되지 않게 되 었다.7) 셋째 법조항을 통해 중앙에 지방관의 입장을 설득할 근거로 활용한 사 례이다. 지방관이 경사와의 의견 조율을 위해 법전의 내용을 援用하는 내 용은 호조와 영남감사, 거제부사의 조정과정을 통해 살필 수 있다.73) 호 조는 관문을 내어 739년 이후 아직 거두지 못한 각종 곡물을 납부하라 고 하였다. 관찰사는 해당 고을에 기한을 정해 납부하라는 관문을 내려 보냈다. 해당 고을 중 하나인 거제부사 이경로가 첩정을 올렸다. 호조에서 미납되었다고 한 내용 중 두 가지 사항이 사실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하 나는 호조에서 내려 보낸 문서에는 거제부에 획급된 744년조의 稅太 중 에서 司僕寺에 분납하기로 했다가 미룬 船價太가 6섬 3말 되 8홉이라 는 것이었다. 그런데 거제부사가 문서를 상고해 보니 거제부의 갑자년 세 7)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0월 일 7)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월 7일 73)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9월 30일 68

태는 실제 상납할 것과 선가 잡비 등을 총합인 66섬 0말 3되 3홉을 호 위청에서 보낸 군관 金致綸에게 절차에 따라 보내어서 미납된 것이 전혀 없었다. 또 하나는 배가 난파되어 중앙까지 올라가지 못한 사고분에 대한 것이 었다. 746년 8월 일 남양 경내의 倉島 앞바다에서 배가 난파되어 사 공과 격군 3명이 익사하고 감관과 색리 및 격군 8명은 생존하였다. 하지 만 침몰한 곡물은 섬도 건지지 못하였다. 거제부사는 남양부와 여러 차 례 실상을 조사하여 조사내용을 경기 감영에 보고하였다. 경기 감영에서 는 이를 장달하였고 거제 소속 감관과 색리는 거제 관청으로 이송하였다. 사건 처리가 마무리되어 처리된 곡물에 대한 미납 처리는 부당하다고 거 제부사는 첩정을 올렸다. 거제부에는 5년전 남양부와 주고받은 文案이 모두 보관되어 있었다. 거 제부사는 보관된 문안을 근거로 이와같은 첩정을 올릴 수 있었다. 거제부 사는 법전의 내용을 근거로까지 제시하였다. 거제부사는 續典 에 大洋 에서 破船되어 乘船者가 溺死한 경우에는 이를 調査한 後 稅穀 追徵은 免 除한다. 74)이라고 수록되어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續典 은 續大典 을 지칭하는데 실제로도 현재 전해지는 續大典 호전 조전조에 이와 같은 조항이 그대로 전한다. 법전 내용을 수령 업무 수행에 직접 적용하고 있 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거제부사의 첩정에 근거하여 경상감사는 장계에 거듭 법전의 조항을 명시하였다. 더하여 事情이 믿어지지 않는 경우에는 乘者가 死亡한 後면 追徵은 免除한다. 는 속대전의 조항을 덧붙 여 당시 감관이 이미 죽었으므로 분담시켜 징수한다는 이 한 조항은 더욱 논할 수 없다고 적었다. 그런데 당시 난파된 배에 실린 세목 중에는 선혜 청, 진휼청, 금위영 등 세 아문에 상납할 세목이 있었다. 호조에서 보낸 관문에는 위 세 아문의 항목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관찰사는 호조에 낼 곡물 역시 징수 면제의 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하 지만 호조에서 잘못 기재한 것으로 거제부사가 주장한 항목은 첩정을 그 대로 인용만 했을 뿐 장계에서 주장하지는 않았다.75) 결국 조재호는 호조 74) 續大典 戶典 漕轉 69

와 업무를 조율할 때 법전에 명시되어 근거가 확실한 경우만을 문제삼았 다고 하겠다. Ⅴ. 맺음말 지금까지 지방관이 처리한 공문서의 흐름과 내용을 통해 조선후기 지방 의 소통체계와 업무 조정 과정을 살폈다. 이를 통해 얻은 몇 가지 결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관찰사의 유영체제가 확립된 조선후기 일 사례에 한 해 볼 때 관 찰사는 이틀에 한 건 정도의 장계를 작성하였다. 장계를 작성하기 위해서 는 영남 7개 읍의 상황이 반영되어야 했다. 농사 상황이나 전염병 등의 지방 실정을 알리는 경우 많게는 58개 읍까지 한 건의 자계에 정리하여 작성하였다. 지방관은 공문서를 작성할 때 해당 공문서를 작성하게 된 관 련 공문서의 내용을 시기순으로 나열하였다. 관련 공문서의 내용은 전체 를 직접 인용하는 방식이었다. 이를 통해 이후 업무 관련 책임이나 증빙 에 필요한 근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지방관은 관련 문서를 관청에 보관 하여 세곡선의 난파나 조세 미납에 대한 문제를 처리할 때 자료로 사용하 였다. 문서 보관은 영남감영의 경우 9년 전의 문서까지 고증할 수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 지방관의 장계나 첩정은 매 건마다 한 번씩 전달되기 보다는 한 번에 여러 건의 공문서가 상부로 전달되었다고 보여진다. 전달되는데 걸 리는 시간은 왕명이 영남감사에게 전달되는 시간의 경우 빠르게는 4일이 소요되었고 평균 6일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셋째 지방관은 중앙과의 업무연계 중 조세와 사법 관련 업무에서 밀접 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사법 관련 업무는 정례 보고와 살옥안에 대한 보 고 등이 대부분이었다. 지방관은 사법적 권한의 한계로 인해 중앙에 보고 75) 譯註 嶺營狀啓謄錄 75년 9월 30일 70

하는 업무를 수행하였다고 본다. 하지만 조세 관련 업무의 경우 백성의 실상과 당해년 농사 상황에 따른 조정이 불가피했다. 중앙은 일방적으로 조세를 과세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지방관은 중앙과의 수세액 조정을 위해 각 읍별 상황과 전년도 전례 등을 조사상고하여 지속적으로 중앙과 세액 조정을 시도하였다. 넷째 지방관은 중앙과의 업무 조정이 필요할 경우 관련 문서를 조사하 거나 현지 조사를 통해 지방관의 입장을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수세 등과 같이 갈등이 첨예한 문제에서는 전례나 법전의 내용을 근거로 삼아 조정 하고자 하였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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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dministrational Communication Systems and Compromising Mechanisms of Local Governors in the area of Yeongnam In late Choson Yi, Sun-hui This study analyzes official documents to show the reality of administrational jobs of a local governor in the area of Yeongnam (嶺南). That can lead us to approaching to the ordinary life of a specific group such as local governors. I presume that the ordinary life of a local governor, unlike laymen's ones, means repetitive administrational jobs that he should do. Administrational jobs of a local governor were mostly carried out through documentations. In this context, I especially focused on the administrational communication systems through deliveries and handling processes of documents. Main source of this writing comes from Yeong-Yeong-Jang-Gae-Deung-Nock(嶺營狀啓謄錄), written by a governor of Yeongnam, from Jun of 75 to March of 75. A Jang-Gae(狀啓) of a local governor contains not only administrational jobs of him but also the entire administration of his province. A Jang-Gae consists of original copies of followings : Kwan-Mun(關文) given to Su-Ryong(守令) from Kyung-Sa(監司), Cheop-Jung(牒呈) of Su-Ryong, Mun-Jang(文狀) of Meon-Lee-yim (面里任), and so on. The analyzing method I have chosen here was first to sort out the relevant official documents. Then I searched for the delivery 74

systems of respective documents to subdivide them to more specific categories. Secondly, I quantified the delivery durations and processing times of the documents so that I could measure the communication speed between the local government and the central and between high and low levels of adminstration within the province. Thirdly, according to the contents of a Jang-Gae, I analyzed the frequency of each jobs and made monthly distribution charts. Acknowledging not many examples included, I found that a local governor concentrated more on judicial and taxational jobs. The jobs of a local governor was divided into seasonal special ones and regular ones. Fourthly, I analyzed how the local governor compromised the disputes in the administrational relation between the local and the central with the central government. According to the compromising method, I sorted out the conflict and negotiation processes in order to approach the reality of the local governor's jobs. 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