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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경계 부산경남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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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2016.3), 1~33 1) 임진왜란기대구수령의전쟁대응과 사족의전쟁체험 정해은 목차 국문초록 이논문은임진왜란기대구의수령과지역사족들이일본군침략에어떤방식으로대처해나갔는지를검토한글이다. 대구는 1592년 4월 21일에일본군이쳐들어온이후로 1593년 5월 15일퇴각할때까지일본군의후방보급로이자중간기지로활용되었다. 일본군이퇴각하자마자명군이팔거에 1년정도주둔하면서대구는경상도중심지로부각되었다. 따라서임진왜란기대구에대한이해는일본군과명군이오래주둔한지역이라는사실에서부터시작해야한다. 전쟁이발발하자마자대구부사는동화사로들어가관군을지휘하면서전쟁에대처했다. 대구부및인근지역의전황을상급자에게수시로보고하고, 주요지역에복병을설치해일본군에타격을입혔다. 또의병조직을지원하고 을경영해군량을확보했다. 정유재란때에는도원수권율과관찰사이용순이공산성을방어거점지로활용했으며, 사방에서오는군량들을공산성에비축했다가경주및울산으로이송했다. 사족들은 1592년 10월무렵적세가치성해지자다른지역으로피신했다가 1593년 5월에일본군이퇴각하자귀향하기시작했다. 사족들은농사에 * 한국학중앙연구원책임연구원 / 1for2@aks.ac.kr 임진왜란기대구수령의전쟁대응과사족의전쟁체험 1
집중하고인적네트워크를이용해생존해나갔다. 또명군주둔군영에물건을팔아서식량을해결한점도주목된다. 사족들은전쟁중에도제사나독서를포기하지않았다. 이것은사족들의변하지않은일상이면서도지키고자한가치와신념이었다. 주제어임진왜란, 대구, 수령, 사족, 관군, 의병, 경상좌도, 공산성, 윤현, 박의장 Ⅰ. 머리말 이글은 1592 년 4월임진왜란부터 1598 년 11월정유재란까지대구의전황을살펴보고, 수령과사족들이일본군의침략에어떤방식으로대처하고대응해나갔는지를검토한글이다. 현재임진왜란연구에서대구가차지하는비중은그다지높은편은아니다. 대구는인근의경주처럼수령과관군의활동이활발한편이아니었으며, 영천처럼이름높은의병장이출현한지역도아니었다. 이점은이지역에대한연구경향에서도잘드러난다. 지금까지임진왜란기대구에관한연구는월곡우배선을제외하고찾아보기힘들며, 몇몇단행본이나논문에서부분적으로언급했을뿐이다. 1) 최근에서야임진왜란기팔공산회맹과대구지역의의병활동을전체적으로조명한단행본과논문들이나와이지역에대한이해를높이고있다. 2) 임진왜란기대구부에일본군이처음쳐들어온때는 1592 년 4월 21일이었다. 이로부터 1년여가지난 1593 년 5월 15일에일본군이남쪽으로퇴각하면서주변지역으로피난을간사람들도되돌아오기시작하였다. 1) 최효식, 임란기경상좌도의의병항쟁 ( 국학자료원, 2004); 이수건, 월곡우배선의임진왜란의병활동 : 그의 을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 13(1992); 장동익, 월곡우배선의임진의병활동 역사교육논집 18(1993); 김형수, 17 세기초대구사림의형성과분화 - 의 를중심으로 역사교육논집 36(2006). 2) 구본욱, 대구유림의임진란의병활동 ( 삼일사, 2014); 구본욱, 대구유림의임진란창의와팔공산회맹 조선사연구 36(2006); 이욱, 임진왜란초기대구지역의의병활동 역사학연구 57(2015). 2 역사와경계 98(2016.3)
그럼에도대구는 1595 년까지사람의자취가끊기고농토가황폐하다는인상기가남아있으며, 해안현의경우 1597 년초까지도유사한감흥을써놓은기록이있어전쟁상흔이잘회복되지않은지역이었다. 임진왜란기대구지역을특징짓는요소는일본과명부대의주둔이라고판단한다. 대구는 1592 년 4월 21일에일본군이들어온후 1593 년 5 월 15일퇴각할때까지 1년여동안일본군이점령한곳이었다. 그리고일본군이퇴각하면서곧바로명군이주둔하였다. 명장수 이 1593 년 8월이후부터성주 에 1년여간주둔하면서대구는중앙조정에서명주둔지로인식되었다. 또 1596 년에대구달성에경상감영이설치되면서대구는임진왜란후반기경상좌도와우도를연결하는중요한공간으로부각되었다. 정유재란때에는대구공산산성이일본군을방어하기위한중요지역으로선정되었고, 명군의군량과마초를보관하는장소로이용되었다. 그러므로임진왜란전기간동안대구부의상황을파악하려면일본군과명군주둔을염두에두면서정유재란까지살필필요가있다. 이논문은이러한문제의식에서 1592 년 4월임진왜란부터 1598 년 11 월정유재란이끝날때까지대구의전황을검토하고그안에서수령과사족들이어떤상황에처해있었는지를살펴보았다. 사족의경우의병활동보다는피난과일상생활을더유의깊게살펴보았다. 전쟁기간사족의일상에대해주목하는이유는전쟁국면마다사족들이늘적극적인항전에나서지못했지만, 끊임없이전쟁을극복하고자한다양한시도나태도들을통해전쟁기간삶의전략을명료하게드러낼수있다고보았기때문이다. 이글에서전쟁기간사족의일상을알아보기위해중요하게이용한자료는대구사족 (1550 1615) 의 와 (1553 1594) 의 다. 3) 서사원의경우 1592 년 7월 6일에팔공산부인사에서 을조직할때에의병대장으로추대된인물로당 3) 낙재선생일기 의원본은계명대학교소장본, 번역본은 국역낙재선생일기 ( 박영호역, 대구 : 이회문화사, 2008) 을이용했다. 낙애선생일기 는동래정씨임하공문중소장본을이용하였다. 이일기자료들을소개, 제공해주신 교수에게감사드린다. 임진왜란기대구수령의전쟁대응과사족의전쟁체험 3
시의상황과체험을일기로자세히남겨두었다. 정광천은공산의진군의최초의병장으로추대된 의아들로서공산의진군에서하빈현남면의의병장으로활동하면서의병활동과피난생활을일기로써두었다. 논문의구성은먼저전쟁기간동안대구지역의전황을세밀히검토하였다. 다음으로전쟁발발직후부터명주둔이전까지대구부사의활동을추적하여임진왜란기수령의역할을재조명해보았다. 끝으로사족을중심으로전쟁으로위기를맞은일상이어떻게전개되었는지살펴보았다. 이글이임진왜란기대구지역의상황을파악하는데에조금이나마보탬이되기를기대해본다. Ⅱ. 임진왜란초기대구지역의전황 1592 년 4월 14일아침부산앞바다에상륙한일본군은세길로나누어북상하였다. 그가운데일본군최강의전력을갖춘고니시 [ ] 가이끄는제1군이부산포에상륙하여 4월 19일밀양을출발해서청도, 대구를거쳐 23일에인동성으로들어갔고 24일에낙동강을건너선산을거쳐상주를공격하였다. 4) 대구에일본군이들어온시점은 4월 21일이었다. 5) 대구사족으로의병을조직한 은어린하인의전갈로전쟁발발을알게되었다. 그는 4월 21일자일기에어린하인이 왜적이이미가까운곳까지들이닥쳤고, 은벌써사방문을열고도망가숨었고관아창고에는화염이하늘을찌릅니다. 고알려주어서서문밖으로달려가보니성에는한사람도남아있는사람이없었다고적었다. 6) 일본군은대구를남쪽으로부터침입해북쪽과서쪽을공략해나갔다. 4월 21일에일본군은대구남쪽지역인파잠 을거쳐들어왔다. 4월 4), の の 5( :, 1965), 116 117 쪽. 5),, 1592 년 4 월 21 일 ;, 1, 1592 년 4 월 21 일. 6) 서사원, 낙재선생일기 1592 년 4 월 21 일. 4 역사와경계 98(2016.3)
22일에수성현이불타고이어서읍내가불탔다. 4월 23일정오무렵에는북쪽을침입했는데, 팔거도덕봉고개로부터용진파계사로들어왔다. 4월 29일에는북쪽지역인검단리까지불탔다. 7) 5월 7일에는읍치의서쪽인하빈현에들어와약탈했고, 8) 5월 18일에도하빈현에서약탈을자행하는상황이었다. 9) 5월 25일에는다시북쪽내동까지접근하였다. 6월에도대구에는여전히일본군이있었다. 6월 22일경일본군은대구읍치의북쪽인해안현 까지침입했고, 8월 3일에도왜장 가이끄는일본군이해안현을침입하였다. 10) 7월초에는북쪽지역인부인동 동화리를거쳐지장동까지들어와지장사를분탕하였다. 하빈현의경우낙동강인근이어서성주를비롯한인근지역에서물길을따라배로도접근이가능하였다. 7월일본군은왜선으로낙동강을이용해하빈현을침략했다. 9월 16일새벽에도대구와성주에있던일본군이하빈현으로와서집결하였다. 11) 이러한사정을반영하듯, 선조에게올라온장계에는대구가일본군에게점령당했다는소식이이어졌다. 1592 년 6월에경상도관찰사겸도순찰사 는 좌도의동래 양산 밀양 청도 경산 대구 인동에서부터우도의성산 상주까지전체가이미적의소굴이되었습니다. 12) 고보고하였다. 1592 년 10월경상우도관찰사 도 경상도에서점거당한곳이좌도의경우부산 동래 경주 밀양 청도 대구 영산 창녕 현풍등열고을입니다. 13) 고보고하였다. 대구에들어온일본군의규모는정확하지않다. 다만, 1592 년 5월에일본군의선봉이서울을점령하자도요토미히데요시는각부대마다담당구역을정해서통치를명하였다. 이때대구는 이이끄는군사 8백명, 이이끄는군사 8백명등 1천 6백명이주둔했고, 7) 서사원, 낙재선생일기 1592 년 4 월 21 일, 22 일, 24 일, 26 일, 29 일. 8) 구본욱, 행정정여강의생애와임진란창의, 앞의책, 31 쪽. 9) 서사원, 낙재선생일기 1592 년 5 월 18 일. 10) 서사원, 낙재선생일기 1592 년 6 월 22 일, 8 월 3 일. 11) 이탁영, 정만록 곤, 장계.( 역주정만록, 305~306 쪽 );, 역주, 한일문화연구소, 180 쪽. 12) 선조실록 권 27, 선조 25 년 6 월 28 일 ( 병진 ). 13) 조경남, 난중잡록 1592 년 10 월 10 일. 임진왜란기대구수령의전쟁대응과사족의전쟁체험 5
8 9월에는 이이끄는군사 4천명이추가되었다. 14) 따라서 8 9월무렵대구에는 5천 6 천명정도가주둔해있었다고유추할수있다. 일본군이대구로대거몰린이유는 1592 년 7월이후곽재우 김면등의의병부대가현풍과창녕사이에서잇따라일본군을물리쳐낙동강중류이하의수로를차단하자, 어쩔수없이대구를경유하는육로를이용할수밖에없었기때문이다. 15) 일본군은주로대구향교에웅거하면서사방으로나가약탈을일삼았다. 16) 당시향교는동문밖 안에있었다. 그래서 여지도서 에는 옛향교터 로나온다. 일본군들은향교에다감옥을만들었고, 여염집에다대나무를쭉늘어세워울타리를만들어방어막도쳐놓았다. 17) 1593 년에도대구의상황은나아지지않았다. 1593 년 1월대구의북쪽팔공산에자리한동화사및인근암자나절들이일본군에의해불태워졌다. 1593 년 1월제2차평양성전투에서조 명연합군이승리하자일본군은강화협상을진행하면서남하했으며, 1593 년 4월중순에서울에서완전철수하였다. 이런상황에서 1593 년 1월하순에좌병사박진이군대를지휘해인동의일본군들을공격해포위하자살아남은잔당들이대구로쫓겨내려왔다. 18) 임진왜란초기에경상좌도에서군무를총괄한사람은영천출신의 으로 1592 년 4월 27일무렵에 로왔다. 19) 안집사김륵은선조에게 경상좌도의경우인동 대구 청도 밀양 기장 양산 동래 부산등지에여전히일본군들이웅거하면서물러날생각이없는상태 라고보고하였다. 20) 김륵이이문서를보고한시점은정확하지않으나 1593 년이었다. 1593 년 5월전라도좌수영에서돌아온선전관이춘영도인동 대구 밀양 14), の, 132 쪽. 15) 장동익, 월곡우배선의임진의병활동 역사교육논집 18(1993), 67 68 쪽. 16) 이탁영, 정만록 1592 년 7 월 15 일. 17) 서사원, 낙재선생일기 1592 년 6 월 9 일. 18), 1593 년 1 월 21 일 ( 병자 ). 19) 정해은, 임진왜란초기경상좌도안집사김륵의역할과활동 영남학 28 (2015), 365 쪽. 20), 권 5,,. 6 역사와경계 98(2016.3)
청도 동래 부산등지에적진이그대로있다고보고하였다. 21) 이후대구에주둔한일본군이철수하는시점은 1593 년 5월 15일경이었다. 명군이일본군을쫓아남하하자일본군이대구에서완전히철수한것이었다. 22) 경상도관찰사한효순은 도안에서대구 청도의적은 (5월) 15일에물러갔습니다. 23) 고보고하였다. 이후에도일본군은대구및인근지역에크고작은형태로출몰했고, 이에따라관군과의병활동도지속되었다. 이상의내용을정리해보면, 임진왜란기일본군은 1592 년 4월 21일에대구를쳐들어와서무려 13개월동안주둔해있었다. 일본군의규모는 8 9월에 5천 6 천명정도있었다고추정된다. 일본군은대구의남쪽지역을시작으로수성현과하빈현을침략했고 1593 년정월에팔공산동화사에불을질렀다. 그러다가 1593 년 5월 15일에남쪽으로퇴각하였다. 그리고뒤에서언급하겠지만일본군이퇴각하면서그자리에명군이주둔하였다. Ⅲ. 대구부사의전쟁대응 1. 임진왜란기대구부사의재임현황 조선시대에대구는 세종실록 지리지가편찬될당시경주부에속한 대구군이었다. 이때대구군은대구읍내를비롯해수성현 하빈현 해안현 자이소로이루어졌다. 그러다가 1466 년 ( 세조 1) 세조가대구에 을설 치하면서도호부로승격되었다. 이후 신증동국여지승람 (1530 년 ) 이편찬될무렵대구부는대구군일 때와구성이크게다르지않았다. 이외에하빈현 ( 서 ) 수성현 ( 남 ) 해 안현 ( 북 ) 자이소가속해있었다. 24) 그리고임진왜란직전까지대구부는이 21) 선조실록 권 38, 선조 26 년 5 월 22 일 ( 을해 ). 22) 선조실록 권 39, 선조 26 년 6 월 6 일 ( 기축 ). 23) 선조실록 권 39, 선조 26 년 6 월 15 일 ( 무술 ). 24)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26, 경상도대구도호부. 임진왜란기대구수령의전쟁대응과사족의전쟁체험 7
모습을유지했는데, 1592 년 7월 6일 < > 에서확인할수있다. 이기록에따르면, 1592 년 7월에대구부는 20개마을로구성되었다. 읍내의경우 6리 1촌이며, 세개현은면 8곳, 리 3곳, 촌 2곳으로총 13개마을이속해있었다. 25) 임진왜란기대구부사로재직한사람들에대해서는기록의미비로온전하지않다. 여러 대구읍지 에 이남아있지만, 공통적으로부임과이임날짜를기록한시점이 1607 년 ( 선조 40) 5월에부임한 부터다. 이이전의부사들은언제부임했는지기록이없다. 임진왜란발발당시대구부사로재직중이던윤현을기준으로여러자료들을종합해보면임진왜란기대구부사는대략 7 9명정도재직했다고추정된다. 26) 성명 재임기간 출신 근거 1590년에읍성축조 대구읍지 대구읍지 1593년 6월제수, 바로교체 대구읍지 / 대구읍지 1593년 11월경부임 ( 추정 ) 대구읍지 / 낙재일기 1594년후반 1596.6 대구읍지 1597.7.21 대구읍지 / 대구읍지 대구읍지 대구읍지들에따르면, 김여표이후로부사로부임한인물은김구정 배 응경등이다. 배응경은 선조실록 에따르면 1601 년 2 월에대구부사로 임명되었다. 27) 따라서김구정은 1601 년 1 월까지대구부사였으므로임 진왜란기는아니며, 이흥종과김여표는정유재란기에대구부사로재임 했을가능성이높다고판단하였다. 그러므로임진왜란기대부부사는김 여표까지포함하면 9 명이며, 이흥종 김여표를제외하면 7 8 명정도다. 25) 서사원, 낙재선생일기 권 2, < >. 26) 대구읍지는 대구읍지 김태규 박대현편역 ( 대구광역시, 1997) 을비롯해, 규장각소장본 3 종과 경상도읍지 2 종, 영남읍지 1 종을참조했다. 27) 선조실록 권 134, 선조 34 년 2 월 12 일 ( 신사 ). 8 역사와경계 98(2016.3)
임진왜란기대구부사는윤현과조호익을제외하고모두무신들이었다. 조호익의경우 1593 년 6월에대구부사에임명되었으나곧체직되었다. 도원수권율이즉시부임하지않았다고논박하는계를올렸기때문이다. 28) 그렇다면윤현을제외하고모두무신들이부임한셈이었다. 기왕의연구에따르면문 무출신수령을교차로파견된지역은군사적으로중시된연변지역에집중적으로분포되었다고한다. 29) 그런데대구는이경향과조금차이가난다. 임진왜란기에무신수령을집중적으로파견했다가, 전쟁이끝나고나서부터문신파견지역으로변해가는특성을보인다. 임진왜란기대구에무신수령을파견한것은대구가군사적으로중요지역으로부각되었음을말해준다. 현재임진왜란기대구부사가운데윤현을제외하고자료에서확인이가능한사람은이상과박홍장 (1558 1598) 정도다. 이상은서사원이 1593 년 12월 1일자일기에새로온성주이상을알현했다고하므로, 30) 1593 년 11월하순무렵에부임하지않았을까추정된다. 박홍장은임진왜란기경주부윤으로이름을떨친박의장의동생이다. 박홍장은 1580 년 ( 선조 13) 23세의나이로무과에급제해제주조방장및영암군수를거쳐 1594 년후반에대부부사로부임하였다. 대구부사시절인 1596 년 ( 선조 29) 8월에일본통신 에임명되어 과함께적국일본에다녀왔다. 박홍장에대해서는읍지마다 선정비가세워졌다. 고기록되어있다. 18세기말학자이긍익은 일본에사신으로가서적에게굽히지않았으므로나라의명령을욕되게하지않았다. 31) 고높게평가하였다. 2. 대구부사의전쟁대처 1592 년 4 월 14 일일본군이부산포를침략했다는첩보를받은경상감 28) 조호익, 부록권 1, 연보, < >. 29) 구완회, 조선후기의수령제운영과군현지배의성격 ( 경북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92), 25 29 쪽. 30) 서사원, 낙재선생일기 1593 년 12 월 1 일. 31), 4,,,. 임진왜란기대구수령의전쟁대응과사족의전쟁체험 9
사김수는 4월 15일에여러읍의수령들에게전령을보냈다. 그리고 16 일에도내모든군사의징발령을내려각지에서나누어주둔할것을명하였다. 임진왜란발발당시경상도의병영은울산 ( 좌병영 ) 과창원 ( 우병영 ) 이었다. 여기에속한 은경주 안동 대구 상주 진주 김해였다. 전쟁이발발하자상주진관에속한상주및함창수령은군사수천명을이끌고대구로향하였다. 이들은성주에도착해감사의지휘를받아대구밖에서군사를지원하기위해대구로진격한것이었다. 상주목사와함창군수가낙동강을건너칠곡석전에도착하고, 선봉대는대구금호에도착하였다. 32) 하지만결과는그다지좋지못하였다. 칠곡석전에도착한상주목사와함창군수는일본군으로보이는군사수십명이산뒤에서내려오자두려움에휩싸여전투도하지않고흩어져 4월 20일에상주로복귀하였다. 대구금호에이른선발대도도로에말을타거나걸어서대구를빠져나오는사람들로가득하자대구가이미함락되었다고판단해그대로도망쳤다. 나중에알고보니석전에서만난군졸들은피난민들과아군이었다. 33) 대구부에서는경상감사김수보다더일찍전쟁소식을접하였다. 4월 13일아침대구부사윤현이군사를모으라는명령을내렸다. 그리고이튿날부사윤현은좌병영으로가기위해군비를정비하고함창수령을지낸 를대구부의 으로삼았다. 그리고 4월 15일에 를이끌고좌병영으로향했다. 34) 4월 22일에좌병영울산이무너졌다. 이때 13개읍의군사들이다무너졌다고하는데, 35) 이 13읍에대구도포함되었다고판단된다. 23일에는우병영창원마저함락되었다. 대구부사가대구부로복귀한시점은정확하지않다. 4월 22일에좌병 32) 이호준, 임진왜란초기경상도지역전투와군사체제 군사 77(2010), 149 150 쪽. 33), ( 검간조정선생 ) 1592 년 4 월 20 일, 4 월 23 일. 34) 서사원, 낙재선생일기 1592 년 4 월 13 일 ~15 일. 는부대규모를뜻하는데, 현재로서는구체적인규모를알수없다. 35) 조경남, 난중잡록 1, 임진년, 1592 년 4 월 22 일. 10 역사와경계 98(2016.3)
영이함락되고 4 월 24 일에대구부사가팔공산동화사로들어갔다고하 므로 4 월 23 일이나 24 일에복귀했다고추정된다. 대구부소속아전들은 동화사의부속암자인염불암으로들어갔다. 36) 이때부터대구부의실질 적인지휘소는읍내에서 20km 떨어진동화사가되었고, 부사는이곳에 서군정과민정활동을전개했다. 대구부사의활동중눈에띄는것은동화사에주둔해있으면서치보 를늦추지않고좌도의전황과적정을알리는역할을수행한점이다. 경 상도감영의구실아치로서임진왜란기경상도관찰사의막하에서활동한 (1541 1610) 이작성한 정만록 에는임진왜란기장계가다수수 록되어있다. 이장계들을살펴보면전쟁초기관찰사김수나안집사김 륵이선조에게올린장계중경상좌도의전황은대구부사윤현이제공 하고있다. 앞서언급했듯이임진왜란초기에경상좌도에서군무를총괄한사람 은안집사김륵이었다. 김륵은안집사로왔으나곧바로저항태세를갖 출수없었다. 더구나 4 월 21 일이후로좌도와우도의소식이서로끊기 고, 김륵이 4 월 29 일, 5 월 4 일, 5 월 29 일에작성해올린보고서도길이 막혀조정에전달되지못했다. 37) 이처럼한동안경상좌도는군정이나 조차도국왕은물론상급자에게조차보고하지못한채고립상태였 다. 또김륵은 7 월중순무렵에도여전히우도의소식을들을수없다는 점과아직도밀양 양산 울산 동래 인동 기장 언양 현풍 비안 영산 창녕 등지의소식이정확하지않다고보고하였다. 38) 이런분위기에서대구부사윤현은보고들은소식들을치계하였다. 예컨대, 김수는 1592 년 7 월 15 일자보고서에서대구부사윤현의치보 를인용해경상좌도의여러고을및대구부의상황을보고하였다. 대구 부사윤현은 도의명령을받들어좌도의여러고을의전황과수령의 와왜적의거취, 농사형편, 버려진무기의수습, 군량창고의유무와 규모를듣고보는대로상고하여사잇길로급히보고하라는전령이옵기 에, 드디어보고들은것에따르면다른군읍은상세히알수없으 36) 서사원, 낙재선생일기 1592 년 4 월 24 일. 37) 김륵, 백암선생문집 권 5,, < >,. 38) 김륵, 백암선생문집 권 5,, ( 첫번째 ). 임진왜란기대구수령의전쟁대응과사족의전쟁체험 11
나 39) 하면서경상좌도의여러고을및대구부의상황을김수에게 보고한것이다. 윤현에대한훗날평가에도이런사실이기록되어있다. 윤현은임진란초기부터공산동화사에있으면서왜적을조치하여잡은공 이많았다. 경상좌도와우도가서로길이막혔을때순찰사김수가사람을 시켜샛길로가서좌도의일을물으면윤현이조목조목아뢰었다. 40) 다음으로대구부사윤현의활동으로위기록에보이는 왜적을조치 하여잡은 군사활동도빠트릴수없다. 부사윤현이동화사에주둔하 면서군사를모아관군을정비한시점은 1592 년 6 월 13 일이었다. 41) 부 사윤현은흩어지거나도망한군졸 2 천여명을모았다. 그리고일본군 과직접맞서싸우기보다는주요지역에복병을설치하는방식으로대항 하였다. 부사윤현은대구부를넘어인근지역과연합해관군을이끌고전투에 참여하기도했다. 1592 년 5 월이후로경상좌병사박진이군사활동을 전개하기시작하면서윤현도여기에합류한것이었다. 윤현은 6 월에경 상좌병사박진의명으로군사를이끌고경산으로갔다. 42) 이때박진은 불시에일본군의공격을받아고전을면치못했으나, 윤현과관군들은 일본군 17 명을활을쏘아죽이는전과를올리고무사히돌아왔다. 43) 8 월 2 일에도관군은경내에침범한일본군들을추격해강을건너지못 하게하였다. 44) 이처럼부사윤현이동화사를기점으로군사활동을전 개하자, 감사김수는하양등적침을받지않은팔공산인근고을의곡 식및각종물건들을동화사로옮겨지키게하였다. 45) 하지만 8 월에연합작전에참가했다가수많은사상자를내고말았다. 39) 이탁영, 정만록 곤, 장계.( 역주정만록, 305 쪽 ) 40), 역주 1593 년 3 월.( 서울 : 역락, 2010, 67 쪽 ) 41) 서사원, 낙재선생일기 1592 년 6 월 13 일. 42) 김진수, 임진왜란기박진의군사활동과평가 한국사학보 60(2015), 255 쪽. 43) 이탁영, 정만록 곤, 장계.( 역주정만록, 263 쪽 ); 서사원, 낙재선생일기 1592 년 6 월 19 일, 6 월 20 일. 44) 서사원, 낙재선생일기 1592 년 8 월 2 일. 45) 신흘, 역주난적휘찬 1593 년 3 월. 67 쪽. 12 역사와경계 98(2016.3)
당시좌병사박진을중심으로경주성을공격했으나박진이거느린군사 2 백명이전사했고, 윤현도적을추적하다도리어포위되어 7 백명이나 전사하였다. 46) 9 월에김성일이경상우도감사로다시발령을받아우도 로가기직전에동화사에서박진을만났는데, 이때부사윤현에게많은 군사를죽게한죄를물어곤장을치려다가그만두었다. 47) 다음으로, 대구부사의군사활동가운데주목할점이의병부대와밀 접하게연계를맺은사실이다. 대구에서본격적인창의는 1592 년 7 월 6 일팔공산부인사에서 를열고, 대구전역이참여하는 을조직 해 (1530 1593) 을의병대장으로추대한것이었다. 이후의병장 은정사철이병때문에사양하면서 7 월 18 일에서사원이새롭게대장이 되었다. 48) 여기서주목할점은대구향병의모집이나 및 이부사가주 둔한동화사에서이루어졌다는사실이다. 49) 1592 년 8 월이후로향병의 활동이본격화되면서향병의결진도동화사인근 에서이루어졌다. 이때마다부사윤현은군사가결진한곳으로와서살펴보았다. 50) 이런 사실들로미루어볼때에향병조직과운영에부사가관여했음을짐작할 수있다. 1593 년 1 월팔공산동화사가일본군에의해불태워지고, 인근의다른 암자들도불태워졌다. 부사윤현은인근 으로옮겨업무를보다가 맨몸으로빠져나왔다. 51) 이후윤현의군사활동은자세하지않다. 그러 다가 1593 년 5 월에명군이성주의속현인팔거에주둔하면서도원수권 율도하빈현에주둔했는데, 52) 이후대구부사들은하빈현을거점으로삼 46) 이탁영, 정만록 1592 년 8 월 25 일, 9 월 1 일 ;, 역주, 한일문화연구소, 177 쪽. 47) 이로, 역주용사일기, 177 쪽. 이내용은 과 에도실려있다. 48) 이욱, 임진왜란초기대구지역의의병활동 역사학연구 57(2015), 60 쪽. 49) 서사원, 낙재선생일기 1592 년 7 월 27 일, 7 월 30 일. 50) 서사원, 낙재선생일기 1592 년 8 월 6 일, 8 일, 9 일. 51), 1593 년 1 월 6 일, 9 일. 이후윤현은 1593 년 3 월에보령 로옮겨가기위해낙동강을건너다가인동에서왜적을만나, 부인과며느리 아들이강에투신해죽었다.( 신흘, 역주난적휘찬 1593 년 3 월 ) 임진왜란기대구수령의전쟁대응과사족의전쟁체험 13
아팔거를오가면서군정을수행하였다. 한편, 전쟁이중반으로접어들면서대구부사의활약으로주목할점이둔전의운영이다. 임진왜란당시대구부의네곳창고에는총 11만석의곡식이비축되어있었다. 그런데읍내본창은일본군이들이닥치자마자소실되었고, 해안 수성 하빈세창고의곡식도 4월말경에이미민들이가져가버렸다. 53) 이때문에대구는다른지역에서곡식을가져다가민을구휼하는형편이었다. 대구부에서민의안정과군량확보를위해 을의논한시점은 1593 년 12월이며, 1594 년초부터둔전을시행하였다. 경상감사가팔거에주둔한명군군영에있는민들을불러모아둔전을경작한결과곡식수만석을얻는성과를올렸다. 여기에는대구부사박홍장과군관전계신의역할이컸다. 54) 1595 년 ( 선조 28) 6월류성룡은둔전의성공에고무되어선조에게대구지역의재건을건의할정도였다. 대구는서울로가는직로이자한도의중앙에위치해있습니다. 또청도사이는땅이매우비옥합니다. 금년에농사를크게짓고흩어진유민을불러모으면 을이루어서후일을도모할수있습니다. 신임대구부사박홍장은박의장의아우로무사중에유명한사람입니다. 다른사무는시키지말고대구부를수리하고돌보는일에만마음을쓰게해야합니다. 그리고순찰사에게농우와곡식종자를특별히조치하여떨어지지않게하소서. 55) 이상으로대구부사의활동을살펴보았다. 전쟁이발발하자마자대구부사윤현은즉시군사를이끌고좌병영으로이동하였다. 좌병영에서퇴각한윤현은대구에일본군이침입하자동화사로들어가관군을지휘하면서전쟁에대처하였다. 관찰사김수나안집사김륵에게대구부및인 52) 선조실록 권 46, 선조 26 년 12 월 3 일 ( 임자 ). 53) 이탁영, 정만록, ( 역주정만록, 305 쪽 ); 서사원, 낙재선생일기 1592 년 4 월 28 일. 54) 이탁영, 정만록 1595 년정월 ; 신흘, 역주난적휘찬 1595 년정월. 55) 류성룡, 서애선생문집 권 8,, < >;, ( ) 1595 년 6 월. 14 역사와경계 98(2016.3)
근지역의전황을수시로보고하는한편, 주요지역에복병을설치해일본군에게타격을입혔다. 또사족들과함께의병을조직, 훈련하는일도지원했다고판단된다. 하지만대구부사의활약은 1593 년 1월동화사가일본군의공격을받은이후로는자세하지않다. 다만, 총병유정이팔거에주둔하면서대구부사들이인근하빈현에주둔하면서팔거군영을자주왕래하는모습을확인할수있을뿐이다. 이와함께 1594 년부사박홍장과군관전계신의주도로둔전을시행해큰성과를거두고, 이것이바탕이되어대구부의재건도진행되었다고할수있다. 부사박홍장의선정비도이둔전과관련이있어보인다. Ⅳ. 사족의피난생활과일상 1. 피난과귀향 대구부에전쟁이났다는소식은인근지역에비해하루더일찍전파되었다. 이미대구부사가 4월 13일에군사소집의명을내린상태였으므로민간에서도전쟁소식을일찍접한셈이었다. 대구부사가좌병영으로가면서임명한유진장박충후는읍성문을닫아민들의출입을통제하였다. 하지만 4월 21일에일본군이들이닥치자지역사족및민들은본격적으로피신하였다. 대구민들의주요피난처중한곳은팔공산이었다고판단된다. 일본군이한때파계사및지장사로들어왔으나, 대구부사가동화사에주둔했으므로민간인들도팔공산인근으로몰려들었다. 56) 팔공산은대구와청도가마주치는곳으로지형이험해일본군이제대로올라오지못하였다. 57) 그래서이곳은 1593 년 1월일본군이동화사를불태울때까지비교적안전한피신처였다. 공산성부근에도피난민들이초막을짓고피신 56) 이탁영, 정만록 1592 년 9 월 14 일. 57) 선조실록 권 44, 선조 26 년 11 월 7 일 ( 정사 ). 임진왜란기대구수령의전쟁대응과사족의전쟁체험 15
하였다. 58) 앞서소개한대구사족서사원은전쟁소식을듣고서바로피신하지 않았다. 서사원은 의중심인남산동에살고있었다. 서사원이노친을 다른곳에모신날은 4 월 19 일이었다. 그리고 4 월 23 일에서사원은노 친과가속및친구들과함께응봉으로피하였다. 응봉은해발 300m 의 봉우리로응해산인근에있다. 서사원은응봉에서멀리서나마일본군의 모습을실제로목격했다. 이후서사원은부인리를거쳐염불암에서한동 안가족들과지냈다. 서사원은통문과편지, 지인이나수령과의만남등을통해전황을파 악하였다. 서사원은수시로동화사로가서수령을만났으며, 7 월에향병 을조직하였다. 그러다가일본군이 9 월에원당과동촌까지침범하자아 버지의결정에따라삼가로옮기기로결심하였다. 서사원일행은 10 월 말화원읍심원사를거쳐해인사를지나 10 월 28 일삼가에도착하였다. 이처럼서사원은전쟁이발발하자대구의북쪽지역에있는산봉우리 나암자에서피신하면서적동향을살피고수령을만나다가, 10 월말에 야대구를벗어나다른지역으로피신하였다. 서사원과함께대구향병 의의병장으로추대된정사철의아들정광천도적세가강해지자아버지 를모시고고향하빈현을떠나고령으로피난길에나선때가 1592 년 10 월 15 일이었다. 59) 이로보아대구지역에서적세가치성해진것은 1592 년 10 월경으로추정된다. 서사원은피난처에서대구소식을끊임없이파악하였다. 1593 년 5 월 12 일에명군이함창 상주 선산에이르자일본군들이달아났다는소식을 듣는다. 5 월 15 일에는일본군이대구를나갔으며, 5 월 17 일에는명군이 대구를지나갔다는소식을들었다. 서사원은 5 월이후로대구의사정이 점차나아지는소식을접하자 1593 년 6 월 13 일에대구로돌아왔다. 그 리고부서쪽으로 30 리정도떨어진 에터를잡았다. 서사원이대구 로돌아오기전에정광천도 5 월 17 일이른아침에낙동강을건너고향 으로돌아왔다. 60) 이처럼대구지역의경우사방으로피난을간사람들 58) 서사원, 낙재선생일기 1592 년 6 월 14 일. 59) 정광천, 낙애선생일기 1592 년 10 월 15 일. 60) 정광천, 낙애선생일기 1593 년 5 월 15 일, 5 월 17 일. 16 역사와경계 98(2016.3)
이 1593 년 5월중순일본군이퇴각하면서되돌아오기시작한것이었다. 한편, 대구에서일본군이극성을부리면서일본군부역자문제도대두되었다. 1592 년 4월 24일에는벌써하인들이일본군복장을하고토적질을하려다가마을사람들에게죽임을당하는일이발생했다. 일본군은경상도의여러지역을점령하자마자점령정책의일환으로 활동을펼쳤다. 1592 년 4월 24일관찰사겸도순찰사김수는대구를거쳐인동 선산을함락시킨일본군의동정을정탐하기위해선산으로박진 배설등을파견했다. 길에서박진을만난민간인들은 를차고일본군이나눠준종이를갖고있었다. 그종이는 의명의로되었는데위쪽에 자를크게쓰고, 그아래에다잔글씨로 군현의백성들은속히옛집으로돌아가남자는모를심고보리를거두며, 여자는누에를치고실을뽑아각각자기집일에힘쓰라. 만약우리군사가법을범하면반드시처벌한다. 61) 고되어있었다. 현재확인할수없지만대구지역도이와유사한점령정책이시행되었다고보인다. 1592 년 6월중순 가일본군에게붙어서나쁜짓을자행한 등 50여인을참한일도점령정책이시행되었을개연성을보여준다. 62) 다만, 종전후임진왜란사적을정리한 (1550 1614) 이 상주 대구 영천등에서는왜적이둔을친지가꽤오래되었지만, 단한사람도왜적에붙어서앞잡이가된사람이있다는소식을듣지못했다. 63) 고기록하였다. 이기록을그대로수용하기어렵지만대구가다른지역에비해부역자가적었던듯하다. 앞서소개한대로일본군이들어온직후일본군복장을한사노들이죽임을당하고, 6월중순에도부역자들이죽임을당했듯이대구에서자체적으로이루어진정화노력이부역자를감소시킨요인이아니었을까판단된다. 64) 61) 조경남, 난중잡록 1, 임진년상, 1592 년. 62) 서사원, 낙재선생일기 1592 년 6 월 15 일. 63) 신흘, 역주난적휘찬 1592 년 6 월 15 일. 64) 1592 년 7 월 19 일에김성일은 및소모관 유사를정하고, 일본군에 임진왜란기대구수령의전쟁대응과사족의전쟁체험 17
2. 생계유지방식 임진왜란동안식량문제는사족을포함한일반민들의상황을검토할때에빠뜨리지말아야할중요한주제다. 전쟁중사족및일반민들이겪은참혹한식량난은여기서일일이소개하지않아도될만큼많은연구들을통하여밝혀졌다. 그러나반복하여 식량의극심한부족으로아사자가속출했다. 는사실만을강조하다보면사족및일반민들이수행한적극적인전쟁극복과생존노력에대한통찰을저해할수있다. 예컨대, 7년동안조선군의군량보급및명군에대한각종경제지원을설명하고종전후신속한복구의과정을이해하기위해서는전쟁기간동안사족및일반민들이집요하리만큼포기하지않던농사경영에대하여이야기할필요가있다. 대구의피해상황은 무너진성터와다쓰러져가는집터 65) 라는표현에서엿볼수있듯이일본군이 1년이상주둔하면서민간의고통은이루말할수없을정도였다. 1594 년비변사에서 경상도의여섯진관가운데동래 경주 대구 진주 상주의다섯고을은이미곡식이고갈되어백성이거의모두사망하였습니다. 66) 고보고할정도였다. 1595 년 2월함양사족정경운은 아침을먹은후길에올라대구ㆍ경산ㆍ하양경계를지나니, 사람의자취가끊어졌다. 밭과들이모두황폐하였고, 흰갈대와누런띠풀이끝없이펼쳐있었다. 마음을아프게하는참담한풍경이이와같은경우가있겠는가? 67) 하고한탄하고있어전쟁소강기간에도대구가제대로회복되지않은사정을보여준다. 정경운은 1597 년 1월에 대구를지나다가반야촌에서말에게여물을먹였다. 사람들이모여있는데, 1595 년에본것보다몇배나많다. 68) 고적었다. 대구는정유재란직전에서야회복되고있었다. 그러면서도정경 게 하는사람들을따로기록하게하였다.( 서사원, 낙재선생일기 1592 년 7 월 19 일 ) 65) 선조실록 권 41, 선조 26 년 8 월 17 일 ( 무술 ). 66) 선조실록 권 49, 선조 27 년 3 월 23 일 ( 신축 ). 67), 1595 년 2 월 10 일. 68) 정경운, 고대일록 1597 년 1 월 8 일. 18 역사와경계 98(2016.3)
운은 해안현은산과내가꾸불꾸불둘러있고토지가비옥한데옛날의 번화함은모두잿더미가되어깨어진주춧돌과허물어진담이태평시절 을떠올리게할뿐이었다. 69) 고적고있어지역마다회복의편차가있었 다고보인다. 그렇다면임진왜란기대구민들은어떤방식으로생계를유지했을까? 서사원과정광천을중심으로살펴보면사족의생계유지방식은크게네 가지였다. 농사경영, 지인들을방문하여식량을얻는방식, 고을수령에 게식량을요청하는방식, 친인척부근에거주하면서식량을조달하는 방식이었다. 이네가지방식은임진왜란기양반들에게서공통적으로나 타나는특징으로서, 농사경영을제외하면모두인적네트워크를활용한 방식이라할수있다. 이런측면에서사족이전쟁중식량을확보할수 있는방도는다른계층에비해훨씬유리했다고할수있다. 서사원이삼가에서대구로돌아오자마자힘쓴일은농사였다. 여기에 서일일이소개할수없을만큼서사원은매일농사경영에힘을쏟았 다. 하양의택기전을갈고, 콩을심고, 기장밭과메밀밭을갈고, 읍내사 이에있는밭에김을매고, 콩밭에김을맸다. 이뿐만이아니었다. 주변 밭에서도토리도주워모았다. 또식량난을해결하기위해하나하나열 거할수없을만큼수령이나순찰사등에게지속적으로요청해식량을 보조받았으며, 환자 [ ] 등을신청하였다. 그런데대구사족들이생계를해결하는방식가운데다른지역과달리 눈에띄는점이있다. 곧명군주둔군영을통해식량을해결한점이다. 부총명유정이이끄는명군의지휘부가설치된곳은팔거의가산산성이 었으며, 대구에는전투병력을배치하였다. 70) 명군은 1 년이상이곳에 주둔해있었다. 이때문에 1594 년 8 월유정이철수할때에조선조정에 서는그동안유정부대에서 노릇을하거나명병사와혼인한여성 들을명으로가지못하게금지하는것이큰일이었다. 비변사의건의로 남자는포수와살수에뽑아소속시키고, 여자는여러가지방법으로구 제해서온전하게살려주게하였다. 71) 69) 정경운, 고대일록 1597 년 1 월 14 일. 70) 김성우, 조선시대대구읍세의팽창과정 대구사학 75(2004), 84 쪽. 71) 선조실록 권 54, 선조 27 년 8 월 16 일 ( 신유 ). 임진왜란기대구수령의전쟁대응과사족의전쟁체험 19
실제로유정부대에서색출한조선인은남자만 560여명에달하였다. 이들은대부분굶주린실업자로서살아갈방도가없어명군부대에의탁한사람들이었다. 이들은유정이철수할때복장을바꾸어입고압록강을넘어가려하였다. 72) 이안에대구출신들이얼마나포함되었는지알수없으나유정부대가대구와팔거에있었으므로해당지역민들이상당수포함되었을가능성이높다. 더구나대구민들은명군군영의도움을곧잘받았다. 명군군영에물자가몰렸으므로자연스럽게이쪽으로사람들이몰렸다. 1593 년 12월비변사에서는 들리는내용에따르면대구의총병유정이주둔한곳에는멀고가까운지역의배고픈백성이떼지어모여들었고, 굶어죽은시체가들판에가득하여아무리구덩이를파고묻어도처리해낼수없다고합니다. 73) 고보고하였다. 또지역민들은명부대에물건을팔기도하였다. 명군들은본인에게배급된군량중일부를갖고본인들이필요한물품을조선인들과교역하였다. 이때문에여러고을에서명의진영을왕래하면서물건을저당하거나팔아서생계를유지했다. 그래서 의각고을사람들이팔거군영에나아가서팔기위해물품을머리에이거나등에짊어진자들이길에늘어섰다. 74) 고한다. 지역사족들도예외가아니었다. 서사원은피난을갔다가대구로돌아온후에 들의강압에못이겨말을팔고 과책갑을팔았다. 하지만이후로는자발적으로물건을갖다팔았다. 은술잔을팔고자했으나명군이은이아니라고우겨서그냥돌아온적도있었다. 1594 년 1 월에도아들의말과안자를팔아백미 18말을받아왔다. 75) 정광천도 1593 년 9월부내로가서명장수를만나소나말을팔려고했으나명장수들이병때문에누워있어만나지못하였다. 다시아들을명군진영에보냈으나허탕을치자결국주변지인이명군진영으로가서쌀과콩을구해돌아왔다. 11월에도사람을시켜소한마리를내주 72) 선조실록 권 56, 선조 27 년 10 월 8 일 ( 임자 ). 73) 선조실록 권 46, 선조 26 년 12 월 24 일 ( 계유 ). 74) 신흘, 역주 1594 년. 75) 서사원, 낙재선생일기 1593 년 7 월 7 일 20 역사와경계 98(2016.3)
어서명군진영에서쌀을사오게하였다. 11 월 24 일에도몇사람이말을 끌고팔거로갔는데아마도말을팔기위해간것으로보인다. 윤 11 월에 도아들이팔거진영에서쌀을사서돌아왔다. 76) 3. 명군주둔에따른피해 1592 년 ( 선조 25) 12월명제독이여송은약 4만 5천여명을이끌고조선으로들어왔다. 1593년 1월조선군과연합해평양성전투 (1593.1.6 1.9) 에서승리한이여송부대는그여세를몰아일본군을추격했으나벽제관전투 (1593.1.25 1.27) 에서패하였다. 이후송응창등명군지휘부가일본과강화협상을시작하면서일본군은 1593 년 4월중순이후서울에서철수해남하했고, 남하하는일본군을쫓아명군도남하하였다. 대구부에명군이처음들어온시기는 1593 년 5월 15일이었다. 일본군이퇴각하자그날명군의선봉대인부총병이여백이군사를거느리고들어온것이다. 77) 이어서유정도상주를거쳐대구로들어왔다. 본래대구에오유충이오기로했으나, 상주에주둔해있던유정이대구로오고, 오유충은신녕으로옮겼다. 78) 유정은 1593 년 4월말에단병무예에능한 군사를이끌고먼저압록강을건넌명군과합류하였다. 명군은일본과강화교섭이진행되면서 1593 년 8월부터단계적으로철수하여 1594 년 9월에조선출병 20개월만에군사 1만명만잔류시키고나머지병력을요동으로철군하였다. 이과정에서명조정의필요와조선의요청으로유정은 1594 년 7월명조정의명령으로귀국할때까지 1년 4개월여정도조선에머물렀다. 조선에서유정에대한평판은초창기에대단히좋았다. 예컨대 유정군대는물건을주어도사양하며, 물건을보아도빼앗지않고청렴하고근엄함이다른군대에뛰어나니모든사람이흠모한다. 79) 고할정도였 76) 정광천, 낙애선생일기 1593 년 9 월 3 일 6 일 7 일 8 일. 11 월 17 일 24 일, 윤 11 월 21 일. 77) 선조실록 권 39, 선조 26 년 6 월 6 일 ( 기축 ). 78) 신흘, 역주 1593 년 5 월 15 일. 79) 이탁영, 정만록 1593 년 5 월 17 일. 임진왜란기대구수령의전쟁대응과사족의전쟁체험 21
다. 1593 년 6월 역시서울에서참장 로부터유정이지금도착했는데, 그가자신의친족이자단병무예에능한남방군사로서조선에남게된다면이익이있을것이라는말을들었다. 80) 하지만 1593 년 6월말에조선군이진주성전투에서크게패한이후조정에서는유정에대한불만이커져갔다. 조정에서진주성전투이후유정에게적극도와줄것을요청했으나, 유정은자기뜻대로할수없다면서경략송응창과제독이여송의명령을기다려야한다고핑계되었다. 81) 유정은일본군의형세가급박해지자대구에서이동해고령을거쳐합천에주둔하였다. 하지만유정은여전히전투에적극나서지않으면서전투부재의책임을조선장수들에게돌렸다. 82) 그러면서영남이황폐하고멀다면서서울이나평양에주둔하기를희망하였다. 83) 1593 년 8월하순유정은대구로돌아왔다. 여기에는두가지배경이있었다고판단된다. 하나는경략송응창이진주성전투이후명군을두갈래로나누어한쪽은남원 진주사이에배치하여전라도를지키고, 다른한쪽은대구 선산사이에배치해경상도를지킬것을명했기때문이다. 84) 다른하나는진주성싸움이후에일본군이울산이나경주를침범할지도모른다는경보가나오자, 유성룡이유정에게경주가까운곳이나대구와청도경계에진주해적을막아줄것을끊임없이요청했기때문이다. 유정은유성룡의요청이있자군사 2 를출동시켜먼저대구로가서진을치게하였다. 85) 그리고본인도대구로왔다가 8월하순에대구에서성주팔거로진을옮겼다. 86) 이후유정은황제의명을받고철수할때까지팔거에주둔하였다. 80) 유성룡,, < >. 81) 선조실록 권 40, 선조 26 년 7 월 10 일 ( 임술 ). 82) 선조실록 권 41, 선조 26 년 8 월 13 일 ( 갑오 ). 83) 선조실록 권 41, 선조 28 년 8 월 17 일 ( 무술 ). 84) 선조실록 권 41, 선조 28 년 8 월 17 일 ( 무술 ). 85) 유성룡,, < >, < >, < >. 86) 조경남, 난중잡록 3, 계사년, 1593 년 8 월 22 일. 22 역사와경계 98(2016.3)
팔거에명군이주둔하면서대구부의민들은명군의양식이나말먹이를마련해야하는부담을졌다. 이뿐만이아니었다. 명군들이민가에수시로드나들면서민폐를끼쳤다. 마을사람들은농사도짓지못한채이들을위해밥을지어야했다. 명군들은말을비롯해각종물건들을빼앗고, 노비들을비롯해지역민을구타하였다. 마을의나무를베어갔으며, 쌀이나각종물건을들고와번번이술을요구하였다. 술이없으면화를내면서소란을부리기도하였다. 87) 이처럼명군의주둔은지역민들에게양면성이있었다. 이들을통해생계를유지하는가하면다른한편으론이들때문에큰피해와곤혹을치러야했다. 이것이 1594 년 7월에유정부대가철수할때까지지역민들이명군으로인해겪던상황이자어려움이었다. 4. 일상의영위 : 제사와독서 임진왜란기일상에서대구사족들이중요하게여긴사안은제사였다. 전쟁중사족들이제사를충실하게거행하는모습은오희문이나정경운사례에서도비슷하게나타난다. 1592 년 11월정광천은고령으로피난중이면서도고조부기제사에참석하기위해아버지정사철를모시고거창까지갔다온다. 88) 12월에는어머니제사를위해피난처에서대구하빈으로돌아와밥과국으로제사를지냈다. 1593 년정월일본군이동화사를불태우는시점에서정광천은새해를맞아차례를올리고아버지에게헌수을기원하는술잔을올리기까지한다. 정광천은 1593 년 3월에돌림병으로아버지정사철이사망하자주변의도움을받아소렴을치렀다. 그리고문상을받기시작하였다. 정광천은관을구하지못해성복하지못하다가간신히관을짜서대렴한후무등곡촌에임시산소자리를마련하였다. 이과정에서일꾼들에게줄양식이 87) 명군으로겪은피해상은 낙재선생일기 를참조해서술했으며특별히각주를달지않았다. 88) 정광천의제사와효행은 낙애선생일기 를참조해서술했으며, 앞서와마찬가지로특별히각주를달지않았다. 임진왜란기대구수령의전쟁대응과사족의전쟁체험 23
없어산역이중지되기도하였으나주변인의도움으로간신히산역을마쳤다. 산역을마친후묘소에서간단하게제를올리고, 이튿날일가식구들을데리고성묘하였다. 이후정관천은한동안여막에서지냈다. 아버지생신을맞이하자나물 과일 술등을간단하게갖추어전을올렸다. 이처럼정광천은피난중이면서도아버지상을당해주변의도움을받아임시로산소를조성하고여막에서지내면서아버지에대한효를보여주었다. 비록평소처럼하지못했지만기본의례들을빼뜨리지않으면서아침저녁으로상식을하며보름 까지하는모습을보여주었다. 이처럼 16세기말에제사로구현된효는이미사족들에게중요한실천이념으로유포되고생활화되어있었다. 이시기효의실천이란사족들에게중요한가치이자, 사족으로서의정체성과자긍심을지켜나가는중요한매개였다고생각한다. 그러므로정광천도전란중에아버지의상례를포기하지않은행적을보임으로써자기정체성을유지하려고했던것이다. 한편, 서사원이본인의정체성을지켜나가는방식도눈길을끈다. 서사원은일기에본인의자질구레한일상을많이기록한편이아니다. 농사나가족 제사, 향촌에서일어난공적인사건들을더많이남겨두었다. 그럼에도서사원이본인에대해지속적으로기록한주제가있었는데그것은다름아닌독서였다. 서사원은 1592 년 5월피신중에하인을시켜집에서서책 20여권을가져오게하였다. 하인으로부터집이모두타버리고대문만남아있다고전해들은서사원은참담한심경을이렇게적었다. 더욱참담한것은 1 천권의 를내가반평생동안널리구하여보배처럼간직한것인데하루아침에연못속에모두버려졌으니상심이어떠한가? 하면서안타까워하였다. 서사원이독서기록을본격화하는시점은 1593 년 8월이후삼가에서돌아와이천에자리를잡으면서부터다. 서사원은주로 를읽었으며 도좋아하였다. 1594 년 4월부터는틈틈이각종책들을읽거나외웠다. 명신언행록 근사록 화담집 ( 서경덕 ) 태극도설 24 역사와경계 98(2016.3)
소학 주역 등을읽었다. 무엇보다도서사원이즐겨읽은책들은 논어 대학 중용 이었다. 서사원은이책들을아침저녁으로반반씩나누어외우기도하였고몇차례씩반복하여읽었다. 1595 년에는 주역 을부지런히외우면서끝까지통독했고, 다시 주서 를읽다가 맹자 를보았다. 서사원의독서기록은임진왜란기피난일기에서좀처럼찾기어려운기록이다. 이부분은얼핏사소해보이지만자세히관찰해보면서사원이추구한삶의지향점을알려주는함축적인단서가녹아있다. 서사원은전쟁이소강기로접어들면서향촌에서생존과생계를위해고군분투하면서도독서를멈추지않았다. 독서는변하지않은일상이기도하거니와, 서사원이전쟁중에서도지키려고한가치이자신념이었다고여겨진다. Ⅴ. 정유재란과대구의상황 도요토미히데요시는정사황신, 부사박홍장이이끄는조선통신사가다녀간이듬해인 1597 년 1월부터주력부대를보내다시전쟁에돌입하였다. 가토오가이끄는제1군이 1597 년 1월 14일에부산다대포에상륙했으며, 이어고니시가이끄는제2군이웅천에상륙하였다. 7월 8일일본군은다시부산에상륙해전라도를수중에넣었으나, 1598 년 8월도요토미히데요시가죽고 11월노량해전에서이순신에게패배해본국으로퇴각하면서전쟁도막을내렸다. 이것이정유재란이다. 정유재란이발발하기전에통신사로간황신과대구부사박홍장은선조에게일본의재침가능성을비밀리에보고했고, 선조는이보고서를토대로명에일본군의재침가능성을알렸다. 89) 또선조는경기도체찰사이원익을부산으로파견해일본의재침에대비하게하였다. 이원익은황신과박홍장등이부산에당도하자이들을통해적침의경보가긴박하다는정황을파악하였다. 그래서각도에급히공문을보내증축 보수해둔 89) 선조실록 권 82, 선조 29 년 11 월 10 일 ( 임인 ). 임진왜란기대구수령의전쟁대응과사족의전쟁체험 25
산성을중심으로정해진기일안에들판을비우게하였다. 90) 여러장수들은군사를거느리고관내산성으로들어가고모든민들은각자저장한곡식을산성으로운반하여청야한후에성을지켜라. 오는 (1597 년 ) 1월 5일에종사관을파견해명령의실행여부를조사할때에명을어긴자는일체군율로다스릴것이다. 91) 이에따라경상도의관리와민들은창녕의화왕산성, 대구의공산산성, 하동의정개산성, 삼가의악견산성, 합천의이숭산성, 안음의황석산성등지에집결하여일본군의재침에대비하였다. 92) 임진왜란이발발한이후대구지역에서요해지로서주목받은곳은팔공산의공산산성이었다. 1593 년 11월비변사에서는팔공산이대구와청도가마주치는곳으로지형이험해 1592 년에도일본군이끝내올라가지못했다고평가하면서민력을덜기위해의승장홍정을시켜보수하자고건의하였다. 93) 하지만이때는물력의부족으로시행하지못하였다. 공산산성이다시주목받는해는 1596 년이었다. 1596 년관찰사이용순은체찰사이원익의제안으로대구 에경상도감영을열고석축을더쌓았다. 대구가감영자리로주목을받은이유는경상우도와좌도를연결하는중간지점인데다가, 경상도북부와남부를연결하는통로에위치했기때문이다. 대구가경상도감영으로서위상을갖자 1596 년 4월에도체찰사이원익의명령으로공산산성이보완, 수축되었다. 이무렵관찰사이용순에대하여 순찰사이용순이대구에있으면서늘공산을왕래하며중요한일들을지휘하므로, 이용순을가리켜대구의순찰사요, 공산의만호라하였다. 94) 는평이있을정도였다. 그런데공산산성이대구읍치로부터 20km 떨어진곳에위치하다보니요충지로서적합하지는않다는의견도제시되었다. 1596 년 11월권율은 90) 조경남, 난중잡록 3, 1596 년 11 월, 12. 91) 조경남, 난중잡록 3, 1596 년 11 월. 92) 서인한, 임진왜란사 ( 서울 :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7), 219 쪽. 93) 선조실록 권 44, 선조 26 년 11 월 7 일 ( 정사 ). 94) 신흘, 역주난적휘찬 1596 년. 26 역사와경계 98(2016.3)
산성과요해지의중요성을역설하면서공산산성은요충지는아니나이미쌓았으니인근민들의피난처로활용해야한다고주장하였다. 95) 1597 년 2월도체찰사이원익은권율과상의한끝에경주 부산 공산세곳에정예군사들을뽑아나누어지키게하자고건의하였다. 그러자비변사에서경주 부산 공산의세곳은적진과멀어서공격에유리하지못하다고판단하였다. 96) 유성룡도팔공산에산성이있지만 1592년처럼일본군이영천 신녕 의흥에서팔공산후면으로나온다면조령과죽령아래쪽은며칠이면함락될수있다고보았다. 그러므로일본군의북상을막기위해서는대구위쪽으로안동같은큰지역에방어시설을해야한다고주장했다. 97) 이러한논의에도불구하고대구공산산성은정유재란때두가지측면에서중시되었다. 하나는정유재란때에도원수권율및관찰사이용순등이주둔하면서방어거점지로활용되었다. 조선조정은일본의재침소식을접하자경상좌우도가합세해대처하게하였다. 우병사김응서등이군사를이끌고경주와울산에진주하였고, 권율은대구에서각도의군사 2만 3천명을모아적침로를방어하였다. 또권율의명으로남원부에보관한총통 1천자루를대구로이송하였다. 98) 다음으로대구는경상좌도와경상우도를연결하는중요한지점으로서, 정유재란당시사방에서오는곡식들이대구를거쳐경주및울산으로이송되었다. 1597 년조선조정에서는군량마련을위해경상도좌로에윤승훈, 중로에유영경, 우로에성영을파견하였다. 이들은해당지역에서곡식을거두어상주 대구 경주등지로옮겼다. 99) 1597 년 12월에대구로이송된군량이쌀과콩을합쳐 5천석이나되었다. 100) 대구로이송된군량은주로공산성에비축해두었다. 이런가운데대구민들은군 95) 선조실록 권 82, 선조 29 년 11 월 16 일무신. 96) 선조실록 권 89, 선조 30 년 6 월 10 일 ( 기사 ). 97) 류성룡, 진사록, < >. 98) 조경남, 난중잡록 3, 1597 년 2 월. 99) 류성룡, 진사록, < >. 100) 류성룡, 진사록, <, >. 임진왜란기대구수령의전쟁대응과사족의전쟁체험 27
량을경주까지수송하는데에동원되었다. 101) 공산과금오산성에는민력을소비한것이가장많았고이웃고을의기계와 군량을모두거두어성중에가득쌓아놓고수령을독려해늙고약한남녀 들을거느리고성을지키게하니원근지방의인심이떠들썩하였다. 102) 인근지역에서대구로군량을수송한사례는경상도풍산양반 (1555 1628) 의사례가있다. 이진은정유재란이발발하자 1597년 2월에여강서원에서향회를열어향병조직을결의하였다. 유사를선출해봉정사에서병기와군량들을거두고, 군량을모아대구로수송하였다. 그결과 1597 년 5월에각민호 8결당군량 1석씩을읍창에서받아서대구로수송하였다. 103) 6월과 7월에도대구공산성으로군량을운반했다. 정유재란당시일본군이공산성을침입한것은 1597 년 9월이었다. 당시관찰사이용순은의성향교의북산에서결진하면서침공에대비하였다. 하지만일본군이바로공산성을침략하는바람에그안에쌓아둔무기와수만석의곡식을빼앗겼다. 104) 이때문에공산성에곡식을비축한조치가비판받기도했으나, 공산성은정유재란때에대구지역의상황과역할을보여주는중요한공간이라할수있다. Ⅵ. 맺음말 이글은 1592 년 4월임진왜란부터 1598 년 11월정유재란까지대구의전황을검토하고, 수령과민이일본군의침략에어떤방식으로대처하고대응해나갔는지검토한글이다. 필자가임진왜란기대구의상황을검토하면서고심한문제는두가지 101) 류성룡, 진사록,. 102) 류성룡, 정유년 8 월. 103), 5 월 3 일, 9 일, 16 일. 6 월 29 일, 7 월 5 일. 일기가수록된 의원본은유교넷 (http://www.ugyo.net) 이용. 104) 이탁영, 정만록 1597 년 9 월 20 일. 28 역사와경계 98(2016.3)
였다. 임진왜란기대구에대한이해가임진왜란사연구에어떤기여를할수있는가, 전쟁을일상의관점에서바라보았을때에임진왜란에대한이해의폭을어떻게넓힐수있는가하는점이었다. 대구는 1592 년 4월 21일에일본군이침략한후 1593 년 5월 15일퇴각할때까지 1년여동안일본군이점령한곳이었다. 일본군은대구를후방보급로이자중간기착지로활용하면서인근지역을공격하였다. 그리고대구는일본군이퇴각하면서곧바로명군이주둔한지역이었다. 명총병유정이팔거에 1년정도주둔하면서대구는경상좌도와우도를연결하고, 경상도의북쪽과남쪽을이어주는중심지로부각되었다. 따라서임진왜란기대구에대한이해는일본군과명군이오랜기간주둔한곳이라는사실에서부터시작해야한다고본다. 이논고는이러한문제의식에서 선조실록 과각종일기자료를토대로임진왜란초기대구지역의상황을재구성하고, 수령및사족들의전쟁대처방식을검토하였다. 전쟁이발발하자마자부사윤현은군사를이끌고좌병영으로이동하였다. 좌병영에서퇴각한윤현은동화사로들어가관군을지휘하면서전쟁에대처하였다. 대구부및인근지역의전황을수시로보고하는한편주요지역에복병을설치해일본군에게타격을입혔다. 또사족들과함께의병을조직하는일도지원하였다. 이후대구부는 1596 년감영이되고정유재란때에공산성을중심으로내지와전장을연결하는허브역할을하였다. 도원수권율및관찰사이용순이주둔하면서방어거점지로활용되었으며, 경상도의남북을연결하는중요한지점으로서사방에서오는곡식들이대구를거쳐경주및울산으로이송되었다. 1597 년 9월에일본군침입으로공산성의군량과물자들이파괴되었지만, 지역의중요성이부각되어종전이후부터조선후기내내경상감영으로자리하게된다. 한편, 대구부의사족들은 1592 년 10월경적세가치성해지자대구를벗어나다른지역으로피신하였다. 그리고 1593 년 5월중순경일본군이퇴각하자다시귀향하기시작하였다. 사족들은농사에집중하고인적네트워크를이용해생존해나갔으며, 이런속에서도제사나독서등을통해사족으로서의정체성을유지하였다. 이것은사족들의변하지않은일상 임진왜란기대구수령의전쟁대응과사족의전쟁체험 29
이면서그들이전쟁중에서도지키려고한가치이자신념이었다고본다. 요컨대, 임진왜란기대구지역은내부적으로수령과관군의역할을다양한시선에서살펴볼수있는단서이자, 외부적으로일본군과명군의움직임을면밀히파악할수있는공간이라할수있다. 그리고이안에서사족과민들의생존방식은임진왜란기에펼쳐진일상을구체적으로접근하는데에중요한시사점을던져준다고생각한다. 30 역사와경계 98(20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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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105) The Wartime response of the Daegu suryeong during the Imjin-year war with the Japanese and the Sajok figures experience of the taste of war Chung, Hae-Eun Examined in this article is how the suryeong(, local magistrate) and Sajok figures of the Daegu area responded to the Japanese invasion in the 1590s. Daegu was first invaded in April 21st, 1592, and until they retreated on May 15th, 1593, the area was forced to serve as the Japanese troops homefront supply base and a middle stopover. As soon as the Japanese soldiers retreated, the Ming army entered the region and stayed at Palgeo for a year, and Daegu became the central strategic point of the Gyeongsang-do provincial area. Future studies of the Daegu area in the Imjin Wae ran period should keep in mind that the region was inhabited by both Japanese and Ming troop for a rather extended period of time. As soon as the war broke out, the Daegu suryeong established a basecamp in the Dong hwa-sa monastery, where he monitored battle situations and issued orders to Joseon troops. He reported the situation of the Daegu-bu area and that of the adjacent regions to his superiors on a regular basis, and deployed continuous ambushes to strike the Japanese troops. He also provided support for the Righteous militias, and ordered cultivation of garrison farms to secure necessary grains. When the war resumed after a brief respite of negotiation, and the so-called Jeong-yu Jae ran began, Supreme Commander(Do-Weonsu) Gweon Yul and Gwanchal-sa magistrate Yi Yong-sun decided to use the Gongsan-seong ( ) fortress as a critical defense post, which also served later as a * Senior Researcher,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 1for2@aks.ac.kr 32 역사와경계 98(2016.3)
relay post of grains, collected from other regions to be sent to Gyeongju and Ulsan areas. Fearing the imminent invasion of the Japanese troops, in October 1592 the Sajok figures left Daegu, sought refuge in other areas, and returned in May 1593, after the Japanese troops withdrew. They concentrated in agricultural production and relied upon human resources to survive. They also sold commodities to the Ming soldiers and bought food they needed. They did not give up their studies and maintained their custom of holding memorial services, even during wartime. That was what they were determined to uphold and preserve even in dire situations, their values, their conviction and their lifestyle. Key Words Imjin-year War with the Japanese( ), Daegu( ), suryeong(, local magistrate), Gyeongsang Jwa-do Province( ), officials forces( ), righteous militias 논문투고일 : 2015.12.5 논문심사일 : 2015.12.10 게재확정일 : 2015.12.26 임진왜란기대구수령의전쟁대응과사족의전쟁체험 33
98(2016.3), 35~74 106) 일제강점기부산부하수도건설사업의 진행과정과한계 (1929~1932)* 박민주 목차 국문초록 부산에서는 1929년부터 제1기부산하수도건설사업 ( 이하제1기사업 ) 이진행되었다. 제1기사업은 1927년부터논의가시작되었다. 그리하여부산부협의회에서 50만 5천원규모의 5개년공사를내용으로하여사업을진행하기로하였다. 이후 1929년에총공사비 26만원의 3개년사업으로최종결정되었다. 사업구역은대창정, 본정, 서정, 부평정, 서부평정, 좌등정, 영정이었다. 이들지역은일본인인구가많았던지역이었으며, 상업중심지였다. 사업내용이확정된이후, 1929년부터공사가시작되었다. 공사는본정, 서정, 부평정, 서부평정, 영정, 좌등정, 대창정순으로진행되었다. 제1기사업은 1932 년종료되었고, 소요된공사비는 25만 6500원이었다. 부산부는사업종료이후 * 이논문은본인의석사논문을수정 보완한것이다 ( 졸고를작성하는데도움을주신모든분들과게재에관하여심사해주신심사위원분들께감사의말씀을드립니다 ). ** 동아대학교사학과석사 / krzone001@naver.com 일제강점기부산부하수도건설사업의진행과정과한계 (1929~1932) 35
독자적인세출항목으로 하수비 ( ) 를편성하여하수도를체계적으로관리하기시작하였다. 한편, 제1기사업은이전의하수도공사와마찬가지로민족차별적인성격을띠어조선인거주지역을제외한채이루어졌다. 조선인들은부산에서일본인거주지외곽에주로거주하였다. 이들지역은낙후된지역이었으며, 도시기반시설건설에서도배제되었다. 이와같은민족차별적인시정 ( ) 에대한조선인들의불만표출의한사례가 1934년부산부회에서의조선인의원사퇴였다. 1934년부산부회에서조선인의원들은조선인지역의위생시설확충을요구하였다. 그러나이요구는부회내에서의정치적상황과맞물려이루어지지못했고, 의원들은사퇴하기에이르렀다. 조선인의원사퇴는이후부산부의설득에의해끝내철회되었지만, 부산의조선인들이도시기반시설정비를절실하게원했음을보여주는대표적인사례였다. 주제어부산부 ( ), 제 1 기부산하수도건설사업, 위생문제, 도시계획, 지 역정치, 공간정치 Ⅰ. 머리말 1876 년조일수호조규 ( ) 가체결된이후일본인들이개항장에이주하기시작했다. 이가운데부산은지리적으로일본과가까웠고, 15세기부터왜관이설치되었기때문에이주해온일본인들의수가다른도시들에비해많았다. 개항기부산은정주하게된일본인들에의한도시발전이진행되었다. 부산의일본인들은일본전관거류지 ( ) 를중심으로거주지역을확대해갔다. 부산은지형적특성상평지가부족했기때문에이들은매축공사등을진행하였고, 근대도시의기반시설들을함께정비하였다. 이것은일제강점기에진행되었던도시개발사업으로이어졌다. 이시기정비했던도시기반시설가운데상하수도시설은전염병예방과같은공중위생의향상을위해반드시필요한시설이었다. 특히하수도는 오수처리 를수행한다는점에서 깨끗한물의공급 을수행하는상수도에못지않은중요성을가지고있었다. 또한하수도는근대위생담 36 역사와경계 98(2016.3)
론이작용하는대표적인시설이라는점에서도근대도시이해에도움을얻을수있는시설이었다. 당시근대도시에영향을주었던공중위생개념은근대서구의개념으로일본을거쳐조선으로유입된것이었다. 서구에서는 19세기에들어서서병인 ( ) 으로써 세균 이발견되었고, 근대위생개념이확립되었다. 그이후우리의몸을좀더철저히관리해야한다는필요성이제기되기시작했다. 그러한필요성에따라서구의도시도새롭게구조화되었다. 1) 이러한구조화에서가장중요했던것이물이었다. 이와같은흐름속에서서구의상하수도가근대적으로정비되었으며, 일본에서도 19세기말부터정비되었다. 조선에서는개항이후대한제국에의해정비되기시작하였고, 조선에들어온일본인들에의해서도정비가이루어졌다. 2) 본글에서는개항기부터일제강점기재조일본인들에의해건설되었던조선의상하수도시설가운데서부산하수도시설을다루려한다. 그리하여이시기의하수도시설건설이앞에서언급한근대위생개념이조선의도시에서적용되었던하나의사례였다는것을밝히는것을목적으로한다. 이때도시계획실행의부분에서하수도건설을통해부산부와부산부협의회라는지방세력이영향력을미쳤는가를함께파악하려한다. 또한조선에서일본인들의주도에의해진행되어민족차별적성격을띤도시개발사례중의하나였음을논하려한다. 한국의하수도시설에관한연구는주로도시계획, 도시공학과같은분야에서이루어졌으며, 역사학의경우에는근현대도시사연구분야에서다루고있다. 재조일본인들에의한조선의하수도시설을다룬선행연구를살펴보면, 손정목이나김의환, 김용욱등에의해선구적인연구가이루어졌다. 3) 그이후부산거류민단에의한상수도시설공사연구 4) 나 1) 조르주비가렐로, 깨끗함과더러움 ( 서울 : 돌베게, 2007), 295 쪽. 2) 김정란, 근대해항도시부산에서의콜레라유행과그대응 일본인거류지운영과상수도설비과정을중심으로 해항도시문화교섭학 4(2011), 14 쪽. 3) 손정목, 한국개항기도시변화과정연구 ( 서울 : 일지사, 1982).; 손정목, 일제강점기도시계획연구 ( 서울 : 일지사, 1990).; 김의환, 부산근대도시형성사연구 ( 서울 : 연문출판사, 1973).;, 의 2(1963). 4) 김승, 한말부산거류일본인의상수도시설확장공사와그의미 한국민족문화 34(2009). 일제강점기부산부하수도건설사업의진행과정과한계 (1929~1932) 37
청계천정비를둘러싼경성부협의회에서의논의과정을다룬연구 5) 등에서하수도시설이언급되었다. 또한일제강점기서울에서의상하수도와우물과의관계를다룬연구, 6) 1885 년부터 1910 년까지한성부내일본인거류지에서의근대적위생사업에관한연구, 7) 일제강점기청진의도시개발을논한연구 8) 등에서도다루어졌다. 이들선행연구는일본인에의한하수도시설공사에대한이해를넓히는데도움을얻을수있다. 그러나독립적인연구의소재가아닌점으로인해구체적인내용을알기어렵다는한계가있다. 또한지역의하수도시설에대한연구가부족하다는한계점을들수있다. 그리하여본글에서는구체적으로일제강점기부산부에서진행되었던하수도건설사업에대해다루려한다. 9) 일제강점기부산부에서는조선총독부에의해총 2번의대규모하수도건설사업이진행되었다. 첫번째는 1929 년부터 3개년사업으로 1932 년까지진행되었으며, 두번째는 1936 년부터시작되어첫번째사업과마찬가지로 3개년사업으로진행되었다. 본글에서는첫번째사업을중심으로논지를전개하려한다. 첫번째사업은개항기를포함하여일제강점기를통틀어부산부에서대규모로진행되었던최초의하수도건설사업이라는점에서의의를갖고있다. 또한부산부의하수도시설이이사업이후부터독자적인예산이편성되어관리되기시작했다는점에서도중요한사업이다. 본글은먼저 1929년부터시작된부산하수도건설사업의배경에대해서서술한다. 이를위해선행연구들과조선총독부가발행한 부산도시계획서 ( ), 부산일보 ( ) 조선시보 ( ) 5) 염복규, 식민지시기도시문제를둘러싼갈등과 민족적대립의정치 : 경성부 ( 협의 ) 회의 청계천문제 논의를중심으로 역사와현실 88(2013). 6) 김백영, 일제하서울의도시위생문제와공간정치 상하수도와우물의관계를중심으로, 68(2009). 7) 이연경 김성우, 1885~1910 년한성부내일본인거류지의근대적위생사업의시행과도시변화 대한건축학회지 28(2012). 8) 송규진, 일제강점기 식민도시 청진발전의실상 사학연구 110(2013). 9) 본고에서의부산부행정범위는 1914 년부제 ( ) 실시이후에설치된부산부에소속된지역이다. 또한 1936 년동래군서면과사하면암남리가편입되기이전까지의부산부를의미한다. 38 역사와경계 98(2016.3)
동아일보 ( ) 조선일보 ( ) 와같은당시신문자료를이용한다. 그리하여부산의개항과일본인거주지확장, 일제강점기초조선에서의도시개발, 개항이후부터 1920 년대까지의부산하수도시설의건설등을다룬다. 다음으로 부산부협의회회의록 ( ), 부산부세입출결산 ( ), 부산도시계획서, 신문자료, 하수도사업관련조선총독부문서등을활용하여 1929~1932 년부산하수도건설사업의전반적인내용을서술하려한다. 이때의전반적인내용에는사업의결정과정과진행과정및결과, 사업의한계등을포함한다. Ⅱ. 개항이후 1920 년대까지의부산하수도건설 부산이 1876 년개항된이후일본정부는조선정부와조약을체결하고조선으로의이주를장려하였다. 그결과, 개항이후부산의일본인인구는폭발적으로증가하였다. 부산재조일본인들은개항이후부산항가까이에위치했던초량왜관을중심으로조성된일본전관거류지에거주했고, 이를토대로생활권을점차확장해갔다. 거류지에는용두산을중심으로일본영사관등정부기관이설립되었고, 용두산동쪽을중심으로거주지가형성되었다. 10) 부산은지형적인특성상산이많고, 넓은평지를갖고있지못하였기때문에일본인들이거류지에서자신들의영향력을넓히기에는한계가있었다. 이에일본인들은생활권확장을위해대규모공사를여러차례진행하였다. 그리하여북빈매축공사 ( ), 영선산착평공사 ( ), 부산진매축공사 ( ) 등이이루어졌다. 공사가진행되면서일본인들은부산북부지역과부산진방면으로영향력을확장하게되었다. 이시기부산에서는일본인들이거주하는지역의도시기반시설정비도함께이루어졌다. 앞서언급한공사의부속공사로써도로, 수도, 항 10) 아이사키코, 부산항일본인거류지의설치와형성 개항초기를중심으로 도시연구 : 역사 사회 문화 3(2010), 21 쪽. 일제강점기부산부하수도건설사업의진행과정과한계 (1929~1932) 39
만시설등에대한공사가진행되었다. 일본인들에의한부산의확장은 일본인인구의증가로이어졌다. 조선인들도부산확장을위해이루어진 공사로인해부산으로유입되었기때문에조선인인구도증가하였다. 11) 개항이후진행된일련의도시개발은부산을근대도시로변모시켰다. 부산의근대하수도시설도개항기부터정비되기시작했다. 이시기부 산일본인들은콜레라와같은전염병이발생하는것은조선인들이불결하 기때문이라고생각하였다. 12) 또한위생에대한인식이낮은조선인들이 일본인지역에출입하는것도하나의원인으로보았다. 13) 이때당시위 생은주로 전염병으로부터목숨을지켜준다 는뜻을지녔고, 단순한방역 을넘어서신체의건강을유지하기위한하위개념으로이해되었다. 14) 또한당시부산은인구와가옥이증가하고교통이빈번하여청소가잘 이루어지지않고, 전염병도증가하고있었다. 15) 일본인들은자신들의거 주지를위생적으로만들고전염병을예방하기위한하수도시설의필요 성을인식하고있었다. 이에이시기만들어진하수도는도로중간에설 치되어오수가빨리배출되도록하고, 덮개를한시설이었다. 16) 또한영 선산착평공사당시새로운시가지의배수를위하여양측은돌로만들 고, 뚜껑은철근콘크리트로만든암거 ( ) 공사가진행되었다. 굴착지 에는구거 ( ) 가구축되었고부산역주변의구거도정리 개선되었다. 17) 1891 년제정, 1902 년개정된 청결에관한취체규칙 ( ) 에서는하수류 ( ) 의건설과관리방법이규정되었다. 이밖에 1904 년 부산영사아리요시 [ ] 에의해거류지와주변지역을대상으로도로 정비및상하수도개량공사를위한 부산거류지도로및상하수도개량 11) 이시기부산의인구증가에관해서는홍순권, 일제시기부산지역일본인사회의인구와사회계층구조 역사와경계 51(2004) 을참조. 12) 전염병발생, 위생등과관련하여개항기부산전관거류지일본인들이조선인에대해어떠한인식을가졌는지에대해서는김정란, 근대해항도시부산에서의콜레라유행과그대응 일본인거류지운영과상수도설비과정을중심으로 해항도시문화교섭학 4(2011) 을참조. 13) 정영란, 부산시의분뇨처리 ( 부산 : 부산환경공단, 2013), 53 쪽. 14) 신동원, 호환마마천연두 ( 서울 : 돌베개, 2013), 123 쪽. 15) 정영란, 부산시의분뇨처리 ( 부산 : 부산환경공단, 2013), 53 쪽. 16) 정영란, 위의책, 53 쪽. 17) 김의환, 부산근대도시형성사연구 ( 서울 : 연문출판사, 1973), 72 73 쪽. 40 역사와경계 98(2016.3)
공비예산서 와 부산항일본거류지관내도 가외무성에제출되기도하였다. 18) 한일병합이후에도정비는계속되어 1910 년대중반에는초량바닷가쪽의하수개축공사가진행되었다. 19) 또한 1920 년대에진행된 시구개정 시기에도시행되었다. 이때부산도시계획을위한하수도설비현황조사가이루어지기도하였다. 20) 개항이후 1920 년대까지부산에서건설되었던하수도시설에관해서는다음의표와그림을통해참고할수있다. ( 단위 : m) 구역 간선 지선 길이 구조 비고 a지선약 18 개거제5간선 80 암거제1구제18간선 65 보수천 665 개거 164 제1간선 370 암거 시구개정당시시공 b지선 96 시구개정당시시공 제2간선 139 제3간선 349 일부시구개정당시시공 제2구 제4간선 139 제5간선 360 개거 제7간선 390 제8간선 680 제 9 간선 130 331 암거 a 지선 90 개거 시구개정당시시공 18) 김정란, 근대해항도시부산에서의콜레라유행과그대응 일본인거류지운영과상수도설비과정을중심으로 해항도시문화교섭학 4(2011), 20 쪽 19) 부산일보, 1915.7.10.(2), の 20) 조선시보, 1924.5.23.(2), の と の 일제강점기부산부하수도건설사업의진행과정과한계 (1929~1932) 41
제 10 간선 90 210 암거 b지선 90 개거 계 4,446 개거 2,577m 암거 1,869m * 출전 : 조선총독부내무국토목과, 부산도시계획서, 1930, 153~154 쪽. * 출전 : ( 좌상 ) 부산광역시립중앙도서관, 부산근대지도모음집 ( 부산 : 부산광역시립중앙도서관, 2012). 중 22. 부산부전도, 1934 의일부 ; ( 중간 ) 조선총독부내무국토목과, 부산도시계획서, 1930. 중 부산도시계획서하수도계통도 의일부 42 역사와경계 98(2016.3)
< 표 1> 과 < 그림 1> 은조선총독부가부산에진행했었던도시개발과향후의도시계획에대한내용을담아 1930 년에발행한 부산도시계획서 에수록된것이다. 21) < 표 1> 에서 부산도시계획서 가제작될당시까지부산에서건설된하수도시설을확인할수있다. 조선총독부에의한첫번째부산하수도사업이 1929 년부터시작되기때문에 1930 년에나온 부산도시계획서 에수록된 < 표 1> 의기설하수도는 1920 년대까지의하수도시설임을알수있다. < 표 1> 상의제1구는현재의부산서구지역이며제5간선은서구충무동, 제18간선은현부산도시철도자갈치역부근이다. 보수천 ( ) 은부산서구와중구를흐르는천으로현재의보수천과동일한하천이다. 다음으로제2구는현부산중구 동구지역이며제1간선은현중구대청동부근이다. 제1간선부터현동구좌천동부근까지제10간선이이어진다. 이때제1구에서제5간선과제18간선만이기설하수도시설로언급되는것은, 부산도시계획서 에서기존에건설된구역과향후건설할구역을모두포함하여구역을설정하였기때문으로생각된다. < 표 1> 과 < 그림 1> 에의하면당시일본인들이많이거주했던현재의충무동, 남포동, 동대신동, 초량동, 좌천동부근에하수도가건설되었음을알수있다. 이때, 일본전관거류지는한일병합이후에도일본인의중심거주지가되었으므로거류지가있었던현재초량동지역의하수도 (< 표 1> 상의제2구 ) 는개항기에건설되었을가능성이크다. 하지만이시기근대하수도시설은조선인들이많이거주하고있던지역에는건설되지않았기때문에민족차별적인성격을띠었다. 일본인지역에만하수도가건설되었던것은자신들의지역을위생적으로만들어외부에서유입될수있는비위생적인요소를사전에차단하고, 혹은유입이되더라도이를신속히배제하기위한의도로진행된것으로보인다. 21) < 그림 1> 의왼쪽위에수록한지도는부산광역시립중앙도서관이발행한 부산근대지도모음집 중에서 1934 년에발행된 부산부전도 를수록한것이다. < 그림 1> 중좌상의그림은 1920 년대까지의부산하수도건설이당시부산부에서어느지역에건설되었음을이해하기위한목적으로수록하였다. 좌상의그림에서노란색네모로표기한부분이 1 구에해당하는지역이며, 붉은색네모가 2 구에해당하는지역이다. 일제강점기부산부하수도건설사업의진행과정과한계 (1929~1932) 43
한편, 1920 년대까지하수도건설은이시기조선에서의도시개발열풍과도관련있었다. 재조일본인들은개항기부터자신들이살고있는지역의개발을원하였다. 이것은행정기관에대한청원, 상업회의소에서의활동등을통해꾸준히표출되었다. 이에조선총독부는 1910 년대초반부터각도시에시구개정을실시하여도시를개발하기시작하였다. 22) 이시기의시구개정은도시의도로 교량 하천을근대적으로정비함으로써구획별로건축물의근대화를달성한다는도시계획의초보적인개념으로진행하는사업을의미했다. 23) 그리하여경성, 부산, 평양, 진남포, 신의주의 5 개부 ( ) 와전주, 진해, 진주, 해주, 겸이포, 함흥의 6개면 ( ) 에 1930 년대초까지시구개정사업이진행되었다. 24) 또한조선총독부내무국은 1920 년대초반에일본의도시계획법에영향을받아도시계획령을제정해우선적으로경성, 부산, 대구, 평양에도시계획사업을진행하려하였다. 25) 그러나내무국의도시계획령은총독부내에서아직 시기상조 라는반응이나옴에따라조선시가지계획령이논의되기전까지논의가중지되었다. 26) 이러한일련의상황에는도시개발에대한재조일본인들의욕구도반영된것이었다. 부산에서진행되었던매축, 착평공사, 시구개정사업, 대부산건설계획 등도같은경우였다. 시구개정이진행되면서도시개발과정의하나로각도시에서근대하수도건설이함께이루어졌다. 당시조선총독부는 조선시가의하수설비는불안전하여오수가길가에버려지거나, 토지에스며들어지하수를오염시켜위생상위해를끼치고있다 면서하수도건설을추진하였다. 27) 그리하여경성, 대구, 평양, 진남포, 전주등에서시구개정과하수도건설이병행실시되었다. 또한대전, 이리, 군산, 광주, 원산, 선주등에서는하수도건설을주로하면서가로 ( ) 공사가부수적으로병행 22) 손정목, 일제강점기도시계획연구 ( 서울 : 일지사, 1990), 101 쪽. 23) 손정목, 위의책, 101 쪽. 24) 손정목, 위의책, 112 쪽. 25) 동아일보, 1922.12.23.(2),, ; 1925.1.28.(1),, 를 26) 염복규, 일제하경성도시계획의구상과시행 ( 서울 : 서울대학교, 2009), 96 쪽. 27) 조선총독부, 조선토목사업지 ( ), 1937, 810 쪽. 44 역사와경계 98(2016.3)
되었다. 28) 부산에서는 < 표 1> 에서도확인할수있듯이시구개정과병행하여하수도건설이진행되었다. 이처럼개항기부터 1920년대까지부산에서는근대하수도시설이꾸준히건설되었다. 그러나이시기건설은체계적으로진행된것은아니었다. 당시의이러한상황에관해서는위생을위하여계통적인조사를바탕으로하수도가건설되어야한다는의견이제기될정도였다. 29) 부산의위생문제도꾸준히언론을통하여보도되었다. 부산부의위생인부 ( ) 가부산공설시장에서나온오물통을보수천에서씻고있으며, 이것은전염병의원인이될것이라는보도가대표적이었다. 또한부산항의위생이형편없으며, 항구의오수가도로위로흘러내리고있다는등의문제제기도있었다. 30) 이것은이시기까지진행되었던하수도공사가일본인들이만족하는수준에까지이르지못했다는것을의미했다. 건설이체계적으로이루어지지도않았지만, 그나마건설되었던시설도비위생적인상황을개선해주지못했던것이다. 이밖에개항기부터만들어진시설은점차노후화됐기때문에개량이필요했다. 또한일본인인구역시꾸준히증가했기때문에새로운하수도시설의건설이요구되었다. Ⅲ. 사업의수립과시행 1. 사업계획의수립 부산의근대하수도건설은앞서언급하였듯이개항기부터 1920 년대 까지진행되었다. 그러나늘어난인구로인해발생하는많은오수를체 계적으로처리할수있는새로운시설의건설과기존시설의개량을필 요로하게되었다. 총독부는이를해결하기위해부산부하수도건설사 업을 1929 년부터 3 개년으로진행하기로하였다. 31) 제 1 기사업은 1920 28) 손정목, 일제강점기도시계획연구 ( 서울 : 일지사, 1990), 113 쪽. 29) 부산일보, 1925.6.10.(1), ( ) 30) 조선시보, 1923.1.21.(3), で を ふことを める ; 1923.1.21.(3), も も 일제강점기부산부하수도건설사업의진행과정과한계 (1929~1932) 45
년대중반이후다시진행된총독부의부산도시계획에포함되었던사업 중하나였다. 또한, 이사업은총독부의의중뿐아니라부산부에거주하 는일본인들의바람이반영되었던것이기도하였다. 제 1 기사업은사업 지역등을결정하는실무적인부분에서부산부와부산부협의회가관여하 였고, 이후총독부에의해서최종결정되었다. 구체적인공사역시부산 부에의해서시행되었다. 총독부는제 1 기사업에관한내용을 부산도시 계획서 에수록했다. 제 1 기사업은 1923 년사업의착수가결정되었다. 32) 이후 1927 년부터 구체적인논의가진행되었다. 그것은사업을실시할구역과사업에필요 한예산확보에대한것이었다. 1927 년 3 월 18 일부터진행된부산부협 의회에서제 1 기사업에관한논의가이루어졌다. 야마우치 [ ] 부 산부이사관 ( ) 은 하수도를완성하고도로포장공사를하는것이 좋다고생각 되며, 도로의개선을위해서는하수도의완성과함께진행 할필요가있다 는의견을피력하였다. 33) 같은회의에서요시오카시게 미 [ ] 의원은부산부하수도를완전하게해주었으면한다는발 언과함께 1927 년도예산에는어느정도의예산이계상 ( ) 되어있는 가 라는질문을하였다. 이에야마우치부이사관은 하수도문제는당면 한문제이기때문에제 1 계획에서는사업예산을 1 백만원으로잡고있으 며, 계획의실행을위해국고와지방비보조를신청할것 이라답하였다. 또한도로포장계획도하수도공사와동시에시행하려고한다는답도덧 붙였다. 34) 앞서언급하였던논의와제 1 기사업이전까지의상황을함께볼때, 31) 이때의하수도건설사업을당시발행되었던신문이나 부산부협의회회의록, 부산부세입출예산 등에서는별도의명명을하지않고 부산부하수개수공사 라는명칭을사용하였다. 그러나사업이종료된후에진행된다음사업에대해서는 제 2 기부산하수도공사 등과같이사업명 ( ) 에 제 2 기 를붙여사용하는것을확인할수있다. 이에본고에서는첫번째하수도건설사업을제 2 기하수도공사사업이전에진행되었던사업이라는의미에서 제 1 기사업 으로표기한다. 32) 조선시보, 1923.7.22.(2), で に を に ち の 33) 제 1 회부산부협의회제 1 차회의록, 1927. 34) 제 1 회부산부협의회제 2 차회의록, 1927. 46 역사와경계 98(2016.3)
부산부는하수도문제를급히처리해야할문제로생각하고있음을알수있다. 또한부산부협의회에서사업구역에대한논의가이루어진것을통해서볼때, 사업의기초계획이조선총독부라는중앙에서결정이되어하향전달된것이아님을확인할수있다. 이는당시도시개발사업에지방의의견이반영되었음을추측하게한다. 이와같은제1기사업과관련한내용은 1927 년 3월의논의에서최초로확인할수있다. 또한 1927 년 6월부터는언론매체에서도관련된내용을확인할수있다. 1927 년 3월협의회에서의논의이후같은해 6월 24일의협의회에서는도로및하수도개량공사의시행을위한국고및지방비보조신청에대한논의가이루어졌다. 이날야마우치부이사관은하수도의완성을위해서는앞서제시하였던예산 1백만원의 2배인 2백만원이필요할것이라예상하였다. 그러면서이를위해예산보조를신청하려하니협의회의승인을바란다는발언을하였다. 이과정에서협의회의원들은 제 1기이후에도계속해서사업이진행되기를바란다, 예산보조신청승인에대해회의소집이너무긴박하다, 35) 제1기사업의시행구역이인구밀도를기준으로정했다고하나공평한계획이라생각하지않는다 36) 는등의여러의견을내었다. 37) 1920 년대부협의회가부의자문기관성격으로이미결정된부의정책을형식적으로승인하는역할을맡고있었다고는하나, 의원들이하수도공사에높은관심을보이는것을확인할수있다. 이를통해부산부협의회의원들도부산부와마찬가지로하수도시설을중요하게인식하고있었음을알수있다. 또한이와같은인식들은부산부토목관료의인식속에서도확인할수있다. ( 중략 ) 우리의부산부가중요한번화가에대해서 12 간 ( ) 이상의간선도로가 없는것은정말로유감이나새삼스럽게확장도불가능하기때문에내년도 35) 이것은야마우치이사관이예산보조신청서를회의다음날인 6 월 25 일까지제출해야한다고했기때문에나온반응이었다. 36) 여기서공평한계획이라생각하지않는다는발언은사업구역을행정구역별로의발전상태나상황등을고려하지않은채, 단순히인구밀도만으로선정하였기에나온불만으로생각된다. 37) 부산일보, 1927.6.25.(2), と かる 일제강점기부산부하수도건설사업의진행과정과한계 (1929~1932) 47
예산으로하수도를근본적으로시설 ( ) 하는것과함께간선의모든도로를포장하는것을결정하여, 국고보조신청을하게되었 ( 다 ). 종래부산의전염병발생은다른조선내도시보다도많다. 보통티푸스와같은것은수도와하수 ( 도 ) 가완비된다면그발생이격감 ( ) 하므로부산도지금공사중인상수도와하수 ( 도 ) 의완비를통해도시의큰불명예가되는티푸스그외의전염병을박멸하고싶다. 도로포장은그하수계획이나지하매설물과밀접한관 ( 계 ) 가있으므로동시에시공하는계획인데, 오른쪽과같이간선도로가좁으므로포장에의해교통의소통을계획하는데필요 ( 라는면 ) 에서말해도, 시민의편익을위해서 ( 도 ) 꼭필요하다. ( 이하생략, 괄호는필자가넣은것임 ) 38) 인용문은부산부토목주임기사하야미류조 [ ] 가 1927 년에부산일보와한인터뷰의일부이다. 하야미는 부산은종래전염병환자가많은곳 이므로하수도가완비되면전염병환자의발생을막을수있다는논리로하수도시설의필요성을주장하고있다. 여기서하야미의직책인기사 ( ) 는 1920 년대조선전체에서 20~30 명뿐인엘리트기술관료였다. 하야미는토목주임기사였으므로부산부토목관료들을대표했다고봐도무방할것이다. 하야미의지위를놓고볼때부산부의토목관료들사이에서도하수도시설에대한필요성이제기되었음을추측할수있다. ( 단위 : 명 ) 콜레라 적리 장티푸스 발진티푸스 파라티푸스 계 1918 0 104 99 0 0 203 1919 177 183 95 9 0 464 1920 708 56 46 0 0 810 1921 0 52 188 0 0 240 1922 0 134 107 0 6 247 1923 0 81 116 0 7 204 1924 0 57 75 0 8 140 1925 0 179 129 0 15 323 1926 0 47 138 0 12 197 1927 0 97 141 0 13 252 38) 부산일보, 1927.6.22.(2), の は づ の から 48 역사와경계 98(2016.3)
두창 성홍열 디프테리아 유행성뇌척수막염 계 1918 2 4 39 0 45 1919 376 18 31 0 425 1920 28 12 9 0 49 1921 36 13 10 0 59 1922 378 14 18 0 410 1923 28 190 17 0 235 1924 3 374 19 1 397 1925 1 31 20 5 57 1926 4 29 19 4 66 1927 2 32 23 6 63 * 조선인, 일본인, 외국인을모두합한수임 * 출전 : 부산부내무계, 부산부위생시설개요 ( 부산 : 부산부, 1928), 12~14 쪽을정리 또한, 부산은전염병환자가많은곳이라는하야미의발언에관해서는부산부내무계가부산부의전반적인위생상황에대한내용을담은 부산부위생시설개요 ( ) 를참고할수있다. 부산부위생시설개요 에서는조선인환자수에대하여불명확한부분 39) 이있으나, 1918 년부터 1927 년까지당시에발생하였던콜레라, 적리 ( ) 등과같은전염병환자수현황을수록해놓았다. < 표 2> 를통해서부산에서매년마다전염병환자가늘지는않지만꾸준하게환자가발생하고있음을알수있다. 이를바탕으로생각할때, 부산의전염병에대해언급하고있는하야미의발언은신빙성이없는것은아니었다. 이밖에 부산부위 39) 조선인환자수에대한부분은편집상글에수록된표에서는확인할수없으나, 실제 부산부위생시설개요 를살펴보면조선인환자수가일본인수에비해적은것을확인할수있다. 예를들면 1927 년의적리환자수가일본인이 43 명, 조선인이 4 명, 외국인이 1 명인식이다. 1927 년부산의인구중조선인인구는일본인인구에비해약 1.7 배많았었기때문에단순하게인구수로만생각해도예와같은환자수가나올수없다. 이것은환자수를병원을찾았던환자에한정하여집계하였기때문일가능성이크다. 당시에는서양식병원에대한거부와유료진료등으로인해병원을찾는조선인들이많지않았기때문이다. 그리하여일본인환자수가조선인에비해더많은결과가도출된것이라할수있다. 당시조선인들의서양식병원에대한거부감에대해서는신동원, 호환마마천연두 ( 서울 : 돌베개, 2013) 을참조. 일제강점기부산부하수도건설사업의진행과정과한계 (1929~1932) 49
생시설개요 에서는전염병이다수발생하는원인을 음식을주의해서섭 취하지않은것 과 환자발견이늦어지는경향 으로분석하였다. 40) 이 때오염된음료수역시주의해야할음식의하나이므로, 이러한전염병의 원인에대한분석또한앞서언급한인식이형성되는것에영향을주었 을것이다. 이처럼부산부협의회와부산부관료들은부내의하수도정비에대해 관심을갖고그필요성을인지하고있었다. 그리하여 1927 년도로포장과 하수공사를 88 만원규모의 5 개년공사로제 1 기사업을진행하기로하 였다. 이때도로포장에는 37 만 5 천원, 하수도공사비로는 50 만 5 천원이 책정되었다. 재원은 29 만 3 천원의국고보조와 5 만원의지방비보조를 받으며, 나머지는부채 ( ) 로충당하는것이되었다. 부채는시구개정 비를사용하여 20 년동안상환하게하였다. 41) 1927 년에결정된예산을단순금액으로보면, 하수도공사비가협의회 에서제시되었던 2 백만원의반도되지않는금액이책정되었다. 그러나 도로포장으로책정된금액보다많은금액이책정되어하수도공사의중 요성과비중이높았음을알수있다. 이것은부산부의의견이반영된것 으로보인다. 하수도공사를우선시하였던야마우치부이사관의앞선 발언을통해서볼때, 부산부가하수도공사의비중을높게해야한다고 총독부에피력하였고총독부가이를받아들인결과인것이다. 1927 년에결정되었던제 1 기사업내용은 1928 년에보다구체화되었다. 기존에 88 만원규모로진행될예정이었던사업은 1928 년 5 월도로포장 공사비 35 만원과하수도개량공사비 65 만원을합쳐총 100 만원으로 변경되었다. 1928 년에결정된예산은 1927 년예산에비해서총예산은 늘었으나도로공사비가일부줄어들었고, 하수도공사비는증가하였다. 이를통해전년도인 1927 년과마찬가지로하수도공사의중요성과비중 이유지되고있음을알수있다. 또한이때의 100 만원중 60 만원은부 비 ( ) 로충당하고 32 만 5 천원은국고보조로충당하는것으로변경되 었다. 사업이실시될구역은대창정 ( ), 본정 ( ), 서정 ( ), 부평 40) 부산부내무계, 부산부위생시설개요, 부산부, 1928, 11 쪽. 41) 부산일보, 1927.6.26.(1), の の を の に ぐ 50 역사와경계 98(2016.3)
정 ( ), 보수정 ( ), 초량정 ( ), 곡정 ( ), 목도 ( ) 등이 었으며, 총길이는 1 만 99 미터로규모면에서도대규모공사였다. 42) ( 단위 : 원, m) 내역 명칭 금액 길이 함형 ( 函形 ) 암거 원형 ( 圓形 ) 암거 길이 폭 높이 길이 지름 대창정 40,000 1,029 170 1.5 1.2 859 0.5-1.2 본정 49,000 1,173 569 1.2-2.0 1.2-1.5 604 0.8-0.9 서정 35,000 606.45 62.15 1.8 1.5 544.3 0.8-1.3 부평정 82,000 1,140 455 1.5-2.0 1.5-2.0 785 0.9-1.3 서부평정 9,500 400 400 0.6-1.0 좌등정 3,000 180 180 0.7-1.0 영정 10,000 150 150 1.2-1.5 1.0 측구 10,500 2,100 사무비 21,000 합계 260,000 6,878.45 1,406.15 3,372.3 * 출전 : 조선총독부내무국토목과, 부산도시계획서, 1930, 151~153 쪽. 공사구역문제 현안개선방법대창정은중요한상업가이자, 평탄한대창정하수도를개량하기로함매립지로써오수의처리가불량함 * 제1지선 : 구 ( 舊 ) 매립신정 ( 埋立新町 ) 일대의배수를완전하게함 * 제2지선 : 용두산 ( 현부산용두산 ) 부터구매립신정, 대창정 1정목본정은부산시가지중가장번성방면에흘러내리는빗물을본정통본정한상업구역으로이구역의배수 ( 本町通 ) 으로모아암거에의해바가잘되도록할필요가있음다에방류하기로함 * 제3지선 : 장수통 ( 長手通 ) 의배수를꾀하는것으로써재래 (?) 암거를이용해그 ( 배수 ) 구조의일부를개조 보강하기로함 42) 부산일보, 1928.5.10.(3), の に へ 일제강점기부산부하수도건설사업의진행과정과한계 (1929~1932) 51
인구가조밀하여하수개수가필요서정및행정 ( 幸町 ) 의하수도를개서정함량하기로함대청정전차통 ( 電車通 ) 북측일대의언덕으로부터유출되는빗물의부평정하수제2지선을 일부가인가 ( 人家 ) 가조밀한보수등의여러피해를제거하고더욱더정 1정목및부평정 3정목에서범부평정복병산서쪽기슭부터유출되는빗람하고있음. 또한큰비가올때마물을제1지선에서모아간선암거다침수가옥이수십호를헤아려에의해바다에방류하기로함부평정의위생이대단히한심한상태임부산공설시장부근의오수배제가서부평정하수도를신설하기로함불량함대창정 1정목부근에서배수를필좌등정하수도를신설하기로함요로함본정 5정목복병산 ( 현부산복병산 ) 의고지대로부터흘러내리는빗물산진열소가로방향의재래하수영정물및오수가부산역전부근의저구를개수하여제2잔교기부 ( 基部 ) 지대에정체 잔류하는것을막을부근의바다에방류하기로함필요가있음 측구개수 간선하수 ( 도 ) 의개수에따라이것에접속하는측구의일부를개수하기로함 * 출전 : 부산부하수개수공사비충당기채의건 (1929) 부산부관계서류 ( 국가기록원소장, 관리번호 : CJA0002736), 483~485 쪽을재정리 * 괄호는필자가넣은것임 제시한자료중 < 표 3> 은 부산도시계획서 에수록된 부산하수개수 공사실시계획일람표 이다. < 표 4> 는 부산부관계서류 에수록된제 1 기사업의 공사구역및대요 ( ) 를바탕으로새롭게정리한표이다. 두자료를통하여구체적인공사구역과각구역에소요되는경비등을 확인할수있다. 먼저, 제 1 기사업에는최종사업지역으로현재의부산동구와중구일 대인대창정, 본정, 서정, 부평정, 서부평정 ( ), 좌등정 ( ), 영 정 ( ) 이선정되었다. 43) 여기서본정과영정은 < 표 1> 에서확인하였던 43) 좌등정의경우에는 1912 년부터 1931 년까지진행된바다매립공사이후동명을다시제정하는과정에서 1927 년지지정 ( ) 과함께대창정일정목 ( ) 으로통합되었다. 부산부관계서류 에서좌등정이그대로사 52 역사와경계 98(2016.3)
이미하수도공사가진행되었던구간이포함된지역이다. 나머지는 < 표 1> 에수록되지않은지역이다. 이때 < 표 1> 에는수록되지않았으나 < 표 4> 에서개수할것이결정된지역도존재했다. 이를통해제1기사업에서본정과서정, 영정, 대창정에서는기존하수도시설의개량과신설이함께진행됐으며, 이외의지역에서는하수도신설이이루어진것을알수있다. 소요경비의면에서보면, 제1기사업은처음계획된 5개년사업에서예산문제로인해 3개년사업으로최종결정되었다. 총공사비역시같은문제로 65만원에서 26만원이되었다. 44) 사업공사비는 9만원은국고보조, 3만원은지방비보조를받으며, 나머지 14만원은기채 ( ) 로하여충당하기로하였다. 기채의연이율은 6분 ( ) 8리 5모이내로하고, 1932 년에우선 5만원을갚기로하였다. 또한 1933 년부터 1952 년까지나누어보조금및일반세입으로상환하는것이되었다. 부산부는하수도공사이후에도로공사를한다는조건으로하수도공사의공사비보조를인정받아공사를진행하기로하였다. 제1기사업의시행년도별지출액과보조액에대해서는다음표를참고할만하다. ( 단위 : 원 ) 지출 재원 년도 사무비 공사비 계 국고지방비보조보조 기채 계 1929 7,000 80,000 87,000 10,000 10,000 67,000 87,000 1930 7,000 78,000 85,000 40,000 10,000 35,000 85,000 1931 7,000 81,000 88,000 40,000 10,000 38,000 88,000 계 21,000 239,000 260,000 90,000 30,000 140,000 260,000 * 출전 : 부산부하수개수공사비충당기채의건 (1929) 부산부관계서류 ( 국가기록원소장, 관리번호 : CJA0002736), 459 쪽. 용되고있는것은통합된대창정일정목에서과거좌등정이었던구간을사업지역으로선정하였기때문인것으로생각된다. 일제강점기부산의동명변화에관해서는이병운, 부산행정구역지명의변천사 한국민족문화 29 (2007).; 동아일보, 1927.7.15.(4), 에서, 을 으로 를참조. 44) 부산일보, 1929.3.9.(8), 々 ; 1929.8.9.(9), の の は り 일제강점기부산부하수도건설사업의진행과정과한계 (1929~1932) 53
( 단위 : 명 ) 정동별 일본인 조선인 외국인 합계 남부민정 127 2,439-2,566 녹정 740 349 6 1,095 초장정 1,599 4,237 4 5,840 토성정 1,749 461 5 2,215 곡정 247 4,305-4,552 부민정 781 624 1 1,406 중도정 546 1,528 1 2,075 대신정 2,061 10,912 6 12,979 보수정 3,787 2,189 13 5,989 부평정 5,588 526 17 6,131 대청정 1,890 197 5 2,098 복전정 221 3-224 서정 2,405 103 29 2,537 행정 1,167 98 3 1,268 남빈정 1,417 197 7 1,621 변천정 1,186 135 9 1,330 본정 1,868 628 17 2,513 대창정 2,217 727 15 2,959 영정 815 180 18 1,033 영주정 518 9,212 54 9,784 초량정 3,846 9,560 345 13,751 수정정 1,947 5,342 100 7,299 좌천정 519 4,506 25 5,050 범일정 939 6,159 17 7,109 영선정 4,336 9,315 16 13,667 청학동 53 926-979 동삼동 28 1,517-1,545 항만 39 1-40 합계 42,642 76,370 643 119,655 * 출전 : 장선화, 1920 30 년대부산의공업발전과도시구조의변화 ( 부산 : 동아대학교, 1998) 에서발췌해재정리함 다음으로선정된사업지역대해자세히알아보려한다. < 표 6> 은 1929 년부산의행정구역별인구수를정리한표이다. 제 1 기사업지역은 < 표 6> 45) < 표 5> 에서제 1 기사업구역을굵은글씨와 문자로표기하였다. 좌등정의경우에는대창정에포함되어있기때문에따로표기되어있지않다. 54 역사와경계 98(2016.3)
에서확인할수있듯 1929 년현재일본인인구가조선인인구보다작게는 3배, 많게는 20배이상이많은지역이었다. 당시부산에는대신정 ( ), 초량정, 영선정 ( ) 등총인구의약 10% 에해당하는 1만명이넘는인구가살고있는행정구역도존재했다. 도시전체의위생과전염병예방이라는측면에서본다면, 이들지역에대한하수도공사는필수적이었다. 그러나이들지역은모두제1기사업에서제외되었다. 이때이세지역은일본인인구에비해서조선인인구가많다는공통점을가지고있음을 < 표 6> 을통해서확인할수있다. 이를통해제1기사업은사업지역선정에 민족차별에따른 우선순위가적용되어, 일본인인구가많고일본인중심의행정구역이우선적으로선정되었던것으로이해할수있다. 또한사업지역의선정에는부산부협의회의원들의출신성분과도연관이있었다. 제1기사업지역은 1926 년 11월에당선된제3기협의회의원들에의해서결정되었다. 제3기협의회는총 30명의의원으로구성되었는데, 조선인의원은 3명이었고일본인의원은 27명이었다. 여기서조선인의원 3명은상업자본가 1명을포함하여모두자본가출신이었으며, 일본인의원중에서도상공업자들이많았다. 46) 상공업자를포괄하는자본가출신의원이많은제3기협의회에서결정된제1기사업지역에는상업과관련된지역이많이포함되었다. 한편, 일본인들은상업지와주거지를구분하지않았기때문에, 일본인회사가많았던당시상업관련지역은자연스레부산에서일본인인구가많은지역이기도했다. 이것이반영되어결정된제1기사업지역중에서상업중심지는대창정과본정, 서부평정이었다. 이들지역에는각각은행을포함한주요회사 ( 대창정, 본정 ) 과부산공설시장 ( 서부평정 ) 이자리잡고있었다. 사업이시작된 1929 년현재부산에는본점과지점을모두포함하여 175개의회사가있었다. 이가운데대창정과본정은각각 44개와 19개의회사가존재했을정도로상업이발달하였고회사가다른지역보다많았다. 또한부산의상업지역은 1920 년대초반까지는거류지가중심이었는데, 20년대 46) 이에관해서는홍순권, 근대도시와지방권력 ( 부산 : 선인, 2010), 354 356 쪽을참조. 일제강점기부산부하수도건설사업의진행과정과한계 (1929~1932) 55
후반으로가면서매립지쪽으로중심지가이동하였고상점가와야점 ( ) 도확장되었다. 47) 매립지쪽에서는특히대창정에회사가집중적으로분포하였다. 본정이부산에서가장번성하는상업구역이며, 대창정이중요한상업지역이라는 < 표 4> 의설명은이를잘나타낸다. 서부평정의부산공설시장은부평정시장 ( ) 을의미했다. 부평정시장은영정시장 ( ) 과함께 1915 년 9월 1일자로부영 ( ) 으로하여개시 ( ) 하였다. 여기서영정시장은성적이좋지않아 1916 년폐지되었고, 부평정시장은이후전국에서가장큰규모의공설소매시장으로성장하였다. 48) 부산부는 1914 년실시된시장규칙에따라자연발생적으로만들어져경영되었던사설시장을매수하거나대여하여부영시장을만들어갔다. 또한대여한사설시장을확장하여그것을인수하기도하였다. 1922 년이되면부평정시장은부산부의모든시설을인수하여진정한의미의부영시장이되었다. 부산부는 1920년대초부영시장을정비하면서시장주변을정리하였다. 이때 종래시장부근의도로는음식물, 야채, 해산물등의조선인행상인으로가득차통행의장애는물론비위생적으로아주무질서 하다는이유로위생적인부분에서도로, 하수도등이정비되었다. 부산공설시장의정비는 1920 년대후반까지이어져제1 기사업의사업구역에도선정되었다. 이를종합해보면제1기사업의사업지역은부산내지역별민족적인구구성과함께상업중심지와같이상업과관련된요소들이작용되어결정되었다. 또한부평정시장의경우처럼당시공중위생에대한관심도영향을주었다. 2. 사업시행과결과 제 1 기사업은 1929 년본정부터시작되었다. 본정은거류지의동쪽지 역으로재조일본인들이가장오랫동안거주했던곳이었다. 또한본정의 47) 전성현, 일제시기부산의중심상점가와도시문화 역사와경계 92(2014), 179 쪽. 48) 홍순권외, 일제강점하부산의지역개발과도시문화 ( 부산 : 선인, 2009), 91 쪽. 56 역사와경계 98(2016.3)
뒤를 이어 개수하기로 한 서정 역시 본정과 더불어 재조일본인 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이면서 핵심적인 지역이었다.49) <그림 2> 제1기 사업 실시 구역을 나타낸 지도 *출전 : 부산부 하수개수공사비 충당 기채의 건 (1929) 부산부관계서류 (국가기록원 소장, 관리번호 : CJA0002736), 253쪽. <그림 2>를 살펴보면, 구체적인 건설 구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 해, 하수도 시설이 일본인 시가지의 중심부에 건설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제1기 사업이 진행될 예정인 지역은 부산도시계획서 에 수록되어 있는 장래에 하수도 건설을 시행할 구역 중에서 제1구와 제2구에 소속 된 지역이기도 했다.50) 多年 懸案 釜山下水改良工事 愈本年度 三 年繼續事業 着手 先 本町通 開始 49) 부산일보, 1929.4.6.(3), の であった から ヶ で づ から 50) 부산도시계획서 의 하수도 부분에서는 기존에 부설되었던 하수도에 대한 내용과 더불어서 장래의 계획 이라는 이름으로 앞으로 진행하려 하는 하수 도 건설 계획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장래의 계획 에서는 부산을 총 5개 일제강점기 부산부 하수도 건설사업의 진행과정과 한계(1929~1932) 57
* 출전 : ( 좌 ) 조선시보, 1931.2.9.(3), 釜山の下水工事進む ( 우 ) 조선시 보, 1931.2.21.(3), 釜山本町下水改修工事進む 의구역으로구분하여공사를진행하려고하였다. 하수도건설을위해조선총독부가구분한부산의다섯구역구역명세부구역보수천을중심으로하는고원견산 ( 高遠見山현부산엄광산 ) 부터구봉산제1구 ( 龜蜂山현부산구봉산 ) 을거쳐서, 사병산 ( 四屛山현부산구덕산 ) 정상에이르는산봉우리서쪽및사병산부터부두로내려가는남쪽지대제2구사병산산봉우리동쪽으로하여고원견산정상부터시목골 ( 杮木谷 ) 을거쳐소서성지 ( 少西城址현부산자성대 ) 부근에이르는초량역부근일대제3구조선방직회사공장 ( 현부산자유시장 ) 북쪽의동천유역제4구우암리 ( 현부산남구우암동 ) 를중심으로조선방직회사공장동쪽일대제5구목도 ( 현부산영도 ) 일대 * 출전 : 조선총독부내무국토목과, 부산도시계획서, 1930, 153쪽. 이것을현재의지명으로바꾸어살펴보면, 제 1 구와제 2 구는각각현재의부산서구, 중구지역과동구지역이다. 다음으로제 3 구의경우조선방직주식회사는현재의부산동구범일동에자리잡고있었고, 동천은현재부산진구범천동에흐르는하천이었다. 그리하여제 3 구는범일동과범천동지역인것을알수있다. 제 4 구는당시의우암리는현재의부산남구우암동지역이고우암동은범일동지역의동쪽에있기때문에범일동과우암동사이의지역인것을확인할수있다. 마지막으로제 5 구는현재의부산영도구일대이다. 장래의계획은다섯구역으로나누어간선및주요지선의배치를하여하수도의근본계통을정하였고, 향후단면 ( ) 및지선측구의건설에있어서는상세한조사가필요하므로이들건설이이루어질때조사를하기로한다는말로마무리된다. 58 역사와경계 98(2016.3)
한편, < 그림 3> 은 조선시보 에실린제1기사업당시실제공사사진이다. 왼쪽사진은구체적인공사구역을밝히지않았으며, 오른쪽은본정에서진행된공사임을밝히고있다. 해당사진들은사진만실린상태이기때문에구체적인공사방법등은확인할수없다. 그러나상대적으로화질이높은오른쪽사진을보면하수도관을묻기위해땅을파놓은장소옆에관들이쌓여있는것을볼수있다. 또한파놓은땅에는관을묻을때사용했을것으로추측되는지지대가설치되어있음을알수있다. 이러한제1기사업이진행될당시하수도시설은 1902 년의 청결에관한취체규칙 에따라설치되고개수되었을것으로추측된다. 청결에관한취체규칙에의하면하수관 ( ) 은돌또는벽돌혹은 8분 ( ) 이상의후판 ( ), 혹은원형 반원형의도관 ( ) 을사용해야했다. 또한연결되는곳에서오수가스며나오지않게해야한다고규정하였다. 이때하수구바닥은통관이함몰되지않도록견고하게축조하며, 쓰레기유입을막는강철뚜껑을설치할것을주문하고있다. 하수는대하수구 ( ) 나바다에흐르게해야하며, 이것이불가능한장소에는하수류 ( ) 를만들어야했다. 하수류는하수관과같이돌이나벽돌, 후판으로오액 ( ) 이스며나오지않도록만들어야하는데, 큰독을써도상관없었다. 마지막으로하수류는우물등에서격리된곳에설치해야했다. 51) 제1기사업은대창정과부평정의하수도및본정측구에대한설계가일부변경되기도하였으나, 52) 정상적으로진행되어 1929 년에본정과서정의하수가개수되었다. 또한 1930 년에본정, 부평정, 서부평정, 영정, 좌등정하수및서정의측구가개수되었다. 1931 년에는대창정, 부평정하수및본정측구의개수및건설이진행되었다. 제1기사업에서소요된총공사비는 25만 6500 원이었다. 총독부는사업이종료된이후 조 51) 정영란, 부산시의분뇨처리 ( 부산 : 부산환경공단, 2013), 353 쪽. 52) 소화 6 년도부산하수개수공사실시설계일부변경의건 (1930) 부산하수국고보조공사시설실시설계준공인가서류 ( 국가기록원소장, 관리번호 : CJA0014751); 부산하수개수국고보조공사실시설계인가의건 (1930) 부산하수국고보조공사시설실시설계준공인가서류 ( 국가기록원소장, 관리번호 : CJA0014750). 일제강점기부산부하수도건설사업의진행과정과한계 (1929~1932) 59
사를하건데설계와같이준공된것으로인정 하였다. 한편, 부산부는사업비를정산하여남은 5058 원 94전중국고보조분에해당하는 2529 원 47전을국고에반납해야했다. 그러나총독부는 1931 년재정에서이미보조액중 3500 원을감액했기때문에부로의반납을명하였다. 53) 제1기사업이완료된이후부산부는독자적인세출항목을편성하여시설을관리하였다. 부산부는부예산의지출항목에 하수비 ( ) 예산을새롭게편성하여집행하였다. 이예산을통해하수도시설을보수하였고 [ ], 준설하였다 [ ]. 54) 이러한하수도시설관리를위한비용은임시부세출부분에서도편성되어지출되었다. 제1기사업이전의 부산부세입출예산 에서는 하수비 항목은존재하지않았으며, 이와관련한예산항목으로 구거비 ( ) 만이존재하였다. 하수도시설은 하수비 항목이편성되기전에는기존의 구거비 를통해서구거와함께정비되었다. 그러나 하수비 가편성되면서하수도시설이독자적으로관리되기시작하였다. 이를통해부산의근대하수도시설이제1기사업을기준으로하여체계적으로관리되기시작했다는것을알수있다. 또한이것은하수도시설의위상이이전에비해높아진것을뜻했다. 제1기사업의결산은다음표를참조할수있다. ( 단위 : 원 ) 1. 세입 과목관항 1929 1930 1931 1932 계 비고 보조금 20,000 50,000 26,500 20,000 116,500 국고보조금 10,000 40,000 16,500 20,000 86,500 지방비보조금 10,000 10,000 10,000 30,000 부채 67,000 35,000 38,000 140,000 합계 87,000 85,000 64,500 20,000 256,500 53) 부산하수개수국고보조공사준공인가의건 (1930) 부산하수국고보조공사시설실시설계준공인가서류 ( 국가기록원소장, 관리번호 : CJA0014753). 54) 소화 8 년도부산부세입출예산, 1934. 60 역사와경계 98(2016.3)
2. 지출 과목관항 1929 1930 1931 1932 계 비고 하수 개수공사비 87,000 85,000 64,500 30,000 256,500 공사비 80,000 78,000 59,413 18,873 236,286 * 사무비 7,000 7,000 5,087 1,127 20,214 ** 합계 87,000 85,000 64,500 30,000 256,500 * 공사비세부항목 ( 단위 : 원 ) 세부항목 세부비용 대창정하수개수비 52,565 본정하수개수비 35,643 서정하수개수비 33,201 부평정하수개수비 83,203 서부평정하수개수비 12,470 좌등정하수개수비 4,987 영정하수개수비 3,860 측구개수비 6,357 ** 사무비세부항목 ( 단위 : 원 ) 세부항목 세부비용 기수직 ( 技手 ) 지급액 8,112 ( 월액 104 2인 3년 3개월분 ) 공수직 ( 工手 ) 지급액 2,847 ( 월액 73 1인 3년 3개월분 ) 공부직 ( 工夫 ) 지급액 2,160.34 ( 월액 1.82 1인 3년 3개월분 ) 숙소비 1,014 위로금 1,343 여비 ( 旅費 ) 1,500 잡급 ( 雜給 ) 1,200 수용비 ( 需用費 ) 및기타 2,037 * 출전 : 소화 7 년도부산부세입출예산, 1931, 671~672 쪽. < 표 7> 은 소화 7 년도부산부세입출예산 에수록된것으로제 1 기사업 의예산결산을정리한표이다. 이을통해제 1 기사업을위한국고보조 일제강점기부산부하수도건설사업의진행과정과한계 (1929~1932) 61
비와 지방비 보조비, 부의 기채가 어떻게 집행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 다. 앞선 <표 5>와 <표 7>를 비교해보면 제1기 사업에서 사업비는 국고 보조금액이 줄어들기는 했으나 대체로 맞게 집행된 것을 알 수 있다. 세 부적인 공사비 부분을 살펴보면, 새로운 하수도 시설 공사가 이루어졌던 부평정에 가장 많은 예산이 투입되었다. 또한 상업 중심지였던 대창정, 본정, 서부평정과 함께 서정에 상대적으로 많은 예산이 사용되었다. 이밖 에 사무비 세부 항목에서는 사업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의 세부 직위 등도 파악할 수 있다. Ⅲ. 사업의 한계와 조선인 배제 제1기 사업이 진행되고 하수도 시설의 개선이 이루어졌지만, 한계도 존재했다. 그것의 하나는 공사로 인한 부민 피해였다. 본정에서는 공사가 착공 5개월이 되어도 끝이 나지 않아, 상인들이 피해를 입는 일이 발생 하였다. 이 피해로 인해 상인들 중에는 가게를 닫는 이도 있었으며, 심지 어는 야반도주를 하는 이도 나타났지만 부산부는 이를 외면하였다.55) 또 請負業者)들을 부산부 한 측구 건설 과정에서 공사를 담당하는 청부업자( 가 제대로 감독하지 못하여 계획과 다르게 공사가 진행되었다가, 이를 되돌려야 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56) 여기서 보다 중점적으로 다뤄져야 할 사업의 한계는 조선인 거주 지역 이 제외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제1기 사업이 1920년대까지 부산에서 이 루어졌던 하수도 시설 건설과 마찬가지로 민족 차별적인 성격의 사업이 었다는 또 다른 한계를 가졌음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사업이 진행될 당시 부산부 조선인들은 일본인 거주 지역의 외곽에 주 로 집중적으로 거주하였다.57) 조선인들이 거주하는 지역 중 대신정, 영 危い下水工事 土地の陥没で 珍工事 引こめた家を復出さねばならず 責任 者 誰 南富民町 초장정(草塲町), 곡정, 영주정(瀛州町), 초량정, 水晶町 佐川町), 범일정(凡一町), 청학동(靑鶴洞), 동삼동(東 55) 부산일보, 1930.7.6.(4), 56) 부산일보, 1930.10.3.(3), は れ 57) 대신정, 남부민정( ), 수정정( ), 좌천정( 62 역사와 경계 98(2016.3)
水晶町)의 경우는 산동네였다. 이들 산동네 지역의 주정, 초량정, 수정정( 가장 큰 문제는 부산에서도 낙후된 지역이라는 것이었다. 조선인 거주 지역의 낙후성은 다음의 기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중략) 부산역으로부터 본정 이남(以南)이나 이서(以西)로 도청 막마츰인 중도정 中島町)까지는 정목마다 구역정리와 모든 시설(施設)방법(方法)이 질로나 ( 양으로 보아서 조선에 제2도시지 라고 볼수도 잇스며 자랑도 할마치 되여 잇스나 중도정 이외 조선인이 석거사는 정목에는 아조 볼것이 업다. 그리고 그런 것은 차치하더라도 본정 이북( )으로 볼것 가트면 영정, 초량정, 수 以北 一方)편(便)으로 정정, 좌천정 내지 범일정까지 십리나 되는 장거리에 일방( 통하야 12간 도로만 굉장하고 일본 사람의 상점회사공장을 제하고는 보잘 것이 업스며 12간 도로 이서( )는 시가지라고 거론도 못할 궁촌( )이 以西 窮村 다. 더구나 본정에 접근되여 잇는 영주정대는 전부 조선사람만 몰녀들어 사 는데 호수가 일천오백여 호나 되는 그 영주정은 기구한 형태에 빠저잇다. (이하 생략)58) 인용한 기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부산의 조선인 지역은 낙후되 어 기사의 표현처럼 기구한 형태 에 빠져 있었다. 이는 이곳이 도시 기 반시설 정비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선인 지역 은 개항기를 비롯해 1920년대 부산 시구개정 시기에 진행되었던 도로 상수도 등과 같은 도시 기반시설 건설에서 배제된 지역이었다. 도시 기 반시설과의 배제는 위생 부분에서의 차별과 연결되었다. 이 시기에 만들 어진 시설들은 조선인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하는 근대적인 시 설일 뿐이었다.59) 위생 부분에 대한 차별은 조선인이 거주하는 방면의 위생적 행정을 보면 더욱 그 근처에 잇는 일본인 거주지와 대조하야 볼 때에는 실노 언어도단의 차별 60)이라고 표현될 정도로 심각하여 조선인 三洞) 등이다. 이들 지역은 오늘날 부산의 서구, 중구, 동구, 영도구 지역이 다. 58) 동아일보, 1927.2.5.(4), 差別甚한市區 59) 김경남, 한말 일제하 부산지역의 도시형성과 공업구조의 특성 지역과 역 사 5(1999), 246쪽. 60) 동아일보, 1926.8.8.(1), 와 夏期 衛生 일제강점기 부산부 하수도 건설사업의 진행과정과 한계(1929~1932) 63
들의 생존을 위협했다. 이러한 상황의 원인은 1920년대까지 늘어난 부산의 조선인들이 대신 정이나 영주정과 같은 조선인 거주 지역으로 몰렸기 때문이었다. 인구의 증가는 주택문제를 비롯한 많은 도시 문제를 낳는 원인으로 작용하였 다.61) 이처럼 조선인 지역은 어느 지역보다도 하수도와 같은 위생 시설 이 필요했던 지역이었기에, 꾸준히 건설을 요구하는 의견이 나왔을 것이 다. 그러나 정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장 큰 원인은 식민권력이 조선 인들의 바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에 있었다. 식민권력의 민족 차별 市政)은 조선인들을 외면하였고, 제1기 사업에서도 제외되었 적인 시정( 다. 일본인 거주 지역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빈민들이 많았던 이들 지역 의 조선인들은 이와 같은 처사에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불 만이 표출된 대표적인 사례가 부산부회에서의 조선인 의원에 의한 요구 였다. (중략) 빈민지대에 오물소제를 하지 아니하야 여름이 되면 전염병이 많이 발생 되어 히생자가 속출하니 일반부민의 생명을 보장한다는 부당국의 모든 설 비가 무용하게 되니 산간지대인 빈민이 집단되어 잇는 지대에 하수구를 개 선하고 오물을 소제함과 동시에 똥을 평등하게 소제하라고하야 장내가 긴 장되엇다. 부 당국에서는 부내의 오물의 소제는 7할 밖에 하지 못하고 3할 은 그대로 버려둔다고 하야 그것은 산상에 잇는 관게로 도로 기타 모든 조 건이 소제할 수 없게 되어잇어 그것을 소제하랴면 거액의 경비가 소요되니 지금 상태로는 할 수 없다는 애매한 답변을 하엿다. (이하 생략)62) 1934년 부산부회 조선인 전원사퇴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에서 위생 시설의 확충을 요구하는 조선인 의원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930 년대 부산부회에서는 1920년대에 비해 조선인 의원들이 수적으로 늘어 61) 양미숙, 1920 1930년대 부산부의 도시빈민층 실태와 그 문제 지역과 역 사 19(2006), 10~11쪽. 62) 동아일보, 1934.3.29.(3), 의 은 에, 에서 貧民地帶 施設等閑 府民衛生 重大問題 道路改修 汚物掃除等 要求 釜山 府會 大波瀾 64 역사와 경계 98(2016.3)
나 발언권이 강화되었다. 또한 다양한 계층의 지역 유지층이 부회에 진 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인 의원들은 누적된 민족적 모순에 대하 여 그 일부나마 해결하려는 의지를 나타내었다.63) 그리하여 1931년에 부산부회 의원이 된 조선인 9명은 당시 부산부회에서 구기성회파와 대립 하는 가운데 수적으로 열세였던 협화회파와 공조하여 조선인의 생활환경 개선에 관한 안건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64) 조선인 의원들은 1934년 부산부회에서 부산부의 조선인 산동네에 도 로를 개설해 줄 것, 쓰레기 처리 분뇨처리도 일본인 거주 지역과 같게 해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65) 이때 하수도 건설도 포함되었는데, 조 선인 의원 중 목순구는 다 같은 부산부민임에도 빈민지대에 사는 주민들 恩澤)을 입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은 부산부민으로서의 은택( 목순구는 위생 시설에 관해서도 빈민지대에서는 오물과 분뇨 소제를 하 고 있지 않아 여름이 되면 전염병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음을 지적하였 다.66) 그러면서 하수구를 개선하고 오물 분뇨 시설을 설치할 것을 요구 하였다. 이근용 역시 영주정 산동네 등의 세민부락에서 분뇨를 퍼가지 않아, 세민부락이 전염병의 발원지대가 되고 있어 위생 시설을 확충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부당국은 거액의 경비가 소요되므로 당장 해결할 수 없다는 애매한 답변을 내놓았다.67) 부산부회의 조선인 의원들은 부당국이 자신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모른 체하며 부회 예산을 일본인이 거주하는 다른 지역의 시설 투자에만 급급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자신들이 해마다 부민의 절대 다수인 조 선인 거주 지역에 매우 긴급한 위생, 도로, 상하수도 시설 등을 설치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 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68) 63) 64) 65) 66) 홍순권, 근대 도시와 지방권력 (부산: 선인, 2010), 419쪽. 홍순권, 위의 책, 423쪽. 손정목, 한국지방제도 자치사연구(상) (서울: 일지사, 1992), 295쪽. 김동명, 1934년 부산부회 조선인 의원 총사직사건 연구 한일관계사연구 48(2014), 360쪽. 67) 김동명, 위의 글, 360쪽. 68) 김동명, 위의 글, 367쪽.; 동아일보, 1934.3.31.(2), 의 로 숙년의 소망이던 조선인촌의 길 한 ( ) 易道路案否決 後顚末 釜山 多數議員 反對 簡 府會朝鮮人議員 總辭職 前 일제강점기 부산부 하수도 건설사업의 진행과정과 한계(1929~1932) 65
조선인 의원들의 문제 제기는 부당국의 거부로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 다. 여기에는 협화회파 일본인 의원들이 공조하기로 한 약속을 깨버린 영향도 있었다. 조선인 의원들은 협화회파에 대한 배신감과 함께 자신 들의 존재를 인정해주지 않으며 자신들의 희망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이유 를 들면서 의원직을 사퇴하기에 이르렀다.69) 조선인 의원들이 의원직을 사퇴하자, 당황한 부산부는 조선인 의원들 大島良士]는 조선인 의원들에게 자신은 공정의 관점을 갖고 예산을 편성해 완급(緩急)과 경 중(輕重)을 조사해 조선인의 복리시설 확충에 예산을 써왔음 을 주장하 을 설득하여 사퇴를 철시키려 하였다. 부윤 오시마[ 였다.70) 그러면서 물리적으로 예산안을 수정할 시간이 없으므로 양해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또한 앞으로는 부회의 의견을 존중하여 예산을 편 성하고 집행할 것임을 밝혔다.71) 이에 조선인 의원들은 사퇴를 철회하였 다. 그러자 조선인들은 조선인 의원들의 사퇴 철회에 부민대회를 개최하는 등으로 불만을 표출하였다. 부민대회의 조선인들은 10만 조선인 부민의 존재까지 무시한 부산부 당국의 태도에 부민들은 한층 의아를 가지고 사 직한 의원단이 끝까지 조선인의 이익을 주장하야 목적을 관찰하기를 촉 망한 것 이었음을 밝히면서, 조선인 의원들의 행동이 경거망동 하다고 평하였다.72) 조선인 의원 사퇴 철회 이후의 부민대회는 조선인들에게 도 시 기반시설의 정비가 절실한 문제였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였다. 一新) 을 해야 할 우선 그러나 식민권력에게 있어 조선인 지역은 일신( 순위가 낮은 지역일 뿐이었다. 그 결과, 부산부의 조선인들은 제2기 하수 도 건설 사업에서 일부 지역이 사업지역으로 선정되기까지 식민권력의 외면과 민족 차별 속에서 생활을 영위해야 했다. 釜山府會鮮人議員 突如全部辭表 提出 69) 부산일보, 1934.3.31.(1), を 70) 선인의원에 관한 건 (1934) 부산부관계서류 (국가기록원 소장, 관리번호 : CJA0003055). 71) 김동명, 1934년 부산부회 조선인 의원 총사직사건 연구 한일관계사연구 48(2014), 372쪽. 72) 동아일보, 1934.4.16.(3), 의 를, 그럴 것 을 처음엔 왜 햇든가고, 열고 釜山府議員辭表 無條件 撤回 反對 府民大會 妄動糾彈 66 역사와 경계 98(2016.3)
Ⅳ. 맺음말 개항이후부산으로들어온일본인들은일본전관거류지를중심으로자신들의생활권과영향력을넓혀갔다. 이과정에서북빈매축공사, 영선산착평공사, 부산진매축공사등이진행되었다. 이와함께재조일본인들이거주하는지역의도시기반시설정비도이루어졌다. 이러한일련의과정을거치면서부산의일본인인구는점차증가하였다. 또한개항기부산의개발은도시개발열풍에도영향을받으면서진행되었고그이후시구개정과 1920, 30년대의도시개발로이어졌다. 부산의근대하수도시설은개항기부터정비되었는데, 재조일본인들은위생적인거주환경을위해하수도가필요하다는것을인식하고있었다. 그리하여개항기일본인거주지에초창기근대하수도시설이건설되었고, 영선산착평공사시기에도암거와구거공사가진행되었다. 하수도의정비는병합이후에도계속되어제1기사업이시작되는 1929 년까지꾸준히정비되었다. 그러나당시의시설은체계적으로건설된것은아니었으며, 일본인거주지역에서만건설이이루어졌다. 또한일부시설의경우에는시간이흐르면서낡아졌다. 이에따라꾸준히기존하수도시설의개량과인구증가에따른새로운하수도시설의건설을요구하는주장이나오게되었다. 그리하여 1929 년부터 3개년사업으로제1기하수도건설사업이진행되었다. 여기에는부산부와부산부협의회도참여하여사업내용이결정되었다. 제1기사업은 1927년부터논의가시작되었고, 협의회에서는사업구역, 예산편성과관련된논의가진행되었다. 이후, 대창정, 본정, 서정, 부평정, 서부평정, 좌등정, 영정이제1기사업지역으로선정되었다. 이들지역은주로일본인거주지역이었고, 상업중심지도포함되었다. 제1기사업은예산문제로인해처음계획되었던 5개년사업에서 3개년사업으로변경되어진행하는것이최종결정되었다. 제1기사업이시작되자 1929 년에본정, 서정의하수가개수되었고 1930년에는본정, 부평정, 서부평정, 영정, 좌등정하수및서정의측구가개수되었다. 또한 1931 년에는대창정, 부평정하수및본정측구의 일제강점기부산부하수도건설사업의진행과정과한계 (1929~1932) 67
개수및건설이각각진행되면서종료되었다. 사업종료이후부산부는하수도시설을관리하기위한독자적인예산을편성하여관리하기시작하였다. 제1기사업에서는공사로인해부민피해가발생하는한계가드러나기도하였다. 그러나보다주목해야할한계는조선인거주지역이사업에서제외되었다는것이었다. 사업당시부산의조선인들은주로일본인지역의외곽에거주했는데, 이들지역은낙후된곳이었다. 그렇지만이들지역은식민권력의민족차별적인시정에의하여시구개정을비롯한도시정비에서제외되었다. 이는제1기사업에서도동일하게적용되었다. 이에조선인들은불만을가졌는데, 1934 년부산부회에서의조선인의원사퇴사건은조선인들의불만이표출되었던대표적인사례였다. 당시조선인의원들은조선인산동네에위생시설을일본인거주지역의수준으로해달라고요구하였다. 하지만이는실현되지못하였고, 부산의조선인들은식민권력의외면과민족차별속에서생활을영위해야했다. 부산의제1기사업은경성의하수도사업과비교할때시기적으로경성에비해서늦게시작되었다. 그러나경성은개거식을주종으로한혼합식으로공사가진행되었지만, 부산은암거식이주종을이루었다는점에서차이가있었다. 또한경성의하수도사업은최초계획이경성부협의회에서의반대로인해논의가중지되기도하였다. 부산은앞에서살펴보았듯경성과는다른모습을보였다. 이를통해부산제1기사업의특수성을확인할수있다. 그러나조선인배제라는면에서는부산은경성과같은양상을띠었다. 73) 본연구는일제강점기부산의하수도건설사업을다루었지만, 첫번째사업만을다루었다는한계를가지고있다. 또한사업의결정이이루어지는과정에서조선총독부와서울이라는중앙과부산부와부산부협의회 ( 또는부산부회 ) 라는지방과의정치적인관계에대해서도상세히다루지못하였다. 도시기반시설정비사업은중앙에서의결정에의해이루어지는것이대부분이다. 그러나이것은중앙과지방간의상호작용을통 73) 경성하수도사업에대해서는김백영, 지배와공간 ( 서울 : 문학과지성사, 2009) 를참조. 68 역사와경계 98(2016.3)
해서살펴보아야제대로분석할수있다고본다. 그리하여이러한것들을보완한향후연구가이루어져야할것이다. 한편, 제1기사업이중심시가지일부에서진행되었고, 부산에서고지대거주자가증가함에따라부산제2기하수도건설사업이시행되었다. 제 2기사업은고지대와그외의불량부분을개선하기위해서진행되었고, 궁민구제사업과연관되었다. 74) 제2기사업에서는대신정, 중도정, 초장정, 보수천호안 ( ), 보수정, 영주정, 초량천개수, 고관공원밑의하수, 부산천개수, 제1범일정, 제1영선정, 제8영선정, 제4영선정 75) 등현재부산의서구, 중구, 동구지역이사업실시구역으로선정되었다. 이계획에따르면조선인들이많이살고있던대신정, 초장정, 영주정, 제1 범일정이포함되었다. 일제강점기부산부에서의하수도사업전체상을그리기위해서제2기사업에대한사업지역결정, 실제시행내용등의후속연구도필요해보인다. 74) 소화 9 년부산부하수개수공사계획개요서 (1934) 시가도로및하수국고보조품신채택관계철 ( 각도 ) ( 국가기록원소장, 관리번호 : CJA0014681) 75) 부산부하수개수공사계획개요서 (1935) 시가도로및하수국고보조서류 ( 각도 ) ( 국가기록원소장, 관리번호 : CJA0014868). 일제강점기부산부하수도건설사업의진행과정과한계 (1929~1932) 69
참고문헌 신문 東亞日報 釜山日報 朝鮮時報 조선총독부 문서 부산부 하수개수공사비 충당 기채의 건 (1929) 부산부관계서류 (국가기록원 소장, 관리번호 : CJA0002736) 소화 6년도 부산 하수 개수공사 실시 설계 일부 변경의 건 (1930) 부산하수국고보 조공사시설실시설계준공인가서류 (국가기록원 소장, 관리번호 : CJA0014751) 부산 하수 개수 국고 보조 공사 실시 설계 인가의 건 (1930) 부산하수국고보조공 사시설실시설계준공인가서류 (국가기록원 소장, 관리번호 : CJA0014750) 부산 하수 개수 국고 보조 공사 준공 인가의 건 (1930) 부산하수국고보조공사 시설실시설계준공인가서류 (국가기록원 소장, 관리번호 : CJA0014753) 선인의원에 관한 건 (1934) 부산부관계서류 (국가기록원 소장, 관리번호 : CJA0003055) 소화9년 부산부 하수개수공사 계획 개요서 (1934) 시가 도로 및 하수 국고 보 조품 신채택 관계철(각 도) (국가기록원 소장, 관리번호 : CJA0014681) 부산부 하수개수공사 계획 개요서 (1935) 시가 도로 및 하수 국고 보조 서류 (각 도) (국가기록원 소장, 관리번호 : CJA0014868) 釜山府稅入出決算 회의록 제1회 부산부협의회 제1차 회의록, 1927. 조선총독부 및 관련기관 간행물 釜山府內務係, 釜山府衛生施設槪要, 釜山府, 1928. 朝鮮總督府 內務局 土木課, 釜山都市計劃書, 朝鮮總督府, 1930. 朝鮮總督府, 朝鮮土木事業誌, 朝鮮總督府, 1937. 70 역사와 경계 98(20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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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76) The Process and Limitations of the Busan-bu Sewer Construction Project(1929~1932) Park, Min-Ju In 1929, Busan initiated the First Phase Project for Busan Sewerage System Construction (hereafter referred to as the FPP). The FPP had been discussed at Busan-bu Council since 1927 and was planed to be proceeded with the cost of 505,000 won for five years. The final decision was made in 1929 by making the FPP as a 3-year-long project with the cost of 260,000 won. The project area included Daechangjeong, Bonjeong, Seojeong, Bupyeongjeong, Seobupyeongjeong, Jwadeungjeong, and Yeongjeong. These regions were commercial centers populated by many Japanese people. The FPP was initiated in 1929. The construction works were carried out with Bonjeong followed by Seojeong, Bupyeongjeong, Seobupyeongjeong, Yeongjeong, Jwadeungjeong, and Daechangjeong in order. The total cost of construction amounted to 256,500 won. As soon as the project was completed, Busan-bu began to manage the sewage system systematically by organizing independent expenditure items. Meanwhile, the FPP had an ethnic disclamatory character with exclusion of Koreans' residential areas from it, as in the cases of the earlier swage system construction projects. In 1934, a Korean representative of the Busan-bu council resigned, which was one of the cases where Koreans' grievances were expressed against the ethnic disclamatory administration at that time. In the same year, the Korean representatives at the Busan-bu council were demanding for an expansion of the sanitary facilities in Koreans' residential areas. However, this demand was dismissed, and the representative resigned from the council in protest. * Master, Dept. of History, Dong-A University / krzone001@naver.com 일제강점기부산부하수도건설사업의진행과정과한계 (1929~1932) 73
The representatives withdrew their resignations by persuasion from the Busan-bu authorities, but this case was a striking example demonstrating that the Koreans in Busan-bu at that time desperately wanted the maintenance of the urban infrastructure. Key Words Busan-bu, the First Phase Project for Busan Swage System Construction, Sanitary Issues, City Planning, Local Politics, Spatial Politics. 논문투고일 : 2016.3.7 논문심사일 : 2016.3.15 게재확정일 : 2016.3.20 74 역사와경계 98(2016.3)
역사와 경계 98(2016.3), 75~125쪽77) 中國의 郡望制度와 韓國의 本貫制度 비교* - 중국의 淸河崔氏와 한국의 南陽洪氏를 중심으로 安 光 鎬** 목차. 서론. 중국의 郡望制度. 한국의 本貫制度. 결론 Ⅰ Ⅱ Ⅲ Ⅳ 국문초록 唐나라 말기까지 존재하였다고 알려진 淸河崔氏의 역사 와 한국 사회에서 전통기 시대부터 현재까지 계속해서 이어져 오고 있는 南陽洪氏 의 역사를 통하여 중국의 郡望制度와 한국의 本貫制度를 비교해 보았다. 이 두 制 度는 그들이 역사상 존재하였던 시기는 서로 다르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성격은 참으로 유사하였다. 그리고 이 두 制度는 그들이 각기 기반을 두고 있는 사회에 출 본고에서는 중국 역사상 현한 이후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성격에 따라 각기 다른 방향으로 변하여 갔다. 주제어 郡望, 郡望制度, 淸河崔氏, 本貫, 本貫制度, 南陽洪氏. Ⅰ. 서론 本貫制度에 관심을 가진 연구자들은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郡 望制度에 일찍부터 주목하여 왔다. 그 이유는 한국 사회에서 氏族을 지 한국의 * 이 논문은 2014년도 국사편찬위원회의 연구지원비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 한국고전번역원 / lose-angle@hanmail.net 中國의 郡望制度와 韓國의 本貫制度 비교 75
光山金氏, 安東金氏, 潘南朴氏, 全州李氏, 그리고 南陽洪氏니 하는 명칭이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門閥士族 을 지칭하는 范陽盧氏, 滎陽鄭氏, 隴西李氏, 趙郡李氏, 그리고 淸河崔氏니 하는 명칭과 유사하게 보였기 때 문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는 光山金氏, 安東金氏, 潘南朴氏, 全州李 氏, 그리고 南陽洪氏니 하는 명칭에서 光山, 安東, 潘南, 全州, 南陽을 本 貫이라 부르고 있지만, 중국 역사에서는 范陽盧氏, 滎陽鄭氏, 隴西李氏, 趙郡李氏, 그리고 淸河崔氏니 하는 명칭에서 范陽, 滎陽, 隴西, 趙郡, 淸 河를 郡望이라 칭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현재 중국 사회에 살고 있는 중국인들과 姓氏에 관련된 칭하는 1)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우리는 참으로 재미있는 현상 하나를 발견하게 된 다. 그것은, 한국인들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거의 그 本貫을 가지고 있을 것이란 생각에 그에 관한 이야기를 선뜻 꺼내보지만, 실제로 중국인들은 本貫이라는 용어 를 그들이 그들의 本籍地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용어인 籍貫 으로 이해하 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 현대 중국인들과 함께 郡望에 관한 이야기 러하듯이, 현대 중국인들도 또한 모두 를 하다보면, 우리는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그 이유는 현대 郡望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으며 또 郡望의 의 미를 알고 있는 극소수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실제로 그들이 소속된 氏族 이 어떠한 郡望을 칭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대 중국인들이 郡望이라는 것을 낯설어 하는 이유는 그 郡望 이라는 것이 중국 사회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死文化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本貫에 관련된 오해는 현재 중국 사회에서 本貫이라는 용어가 의 미하는 바와 현재 한국 사회에서 本貫이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바가 서로 중국인들의 대다수는 다른 데서 비롯된 것이지만, 여하튼) 현재 중국 사회의 상황이 이러함에 도 불구하고 한국의 연구자들이 계속해서 중국의 郡望 漢字語 辭典 郡望制度에 대해서 관 漢字語 辭典 郡 漢字語 辭典 1) 본고에서는 이라는 용어를 현대 시기에 편찬된 들에서 정의 하고 있는 바와는 다른 의미로 이해하고 있음을 밝혀둔다. 현대 시기에 편찬 된 들에서는 이라는 용어를 일반적으로 한 단위 안의 이라는 뜻으로 정의하고 있지만, 본고에서는 들에서 정의하고 있는 바와 달리 의 로 이해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필자의 또 다 른 논문을 참고하길 바란다. 族 76 郡望 遠祖 本籍地 역사와 경계 98(2016.3) 望
심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그 郡望이라는 것이 한국 사회 氏族을 지칭할 때 나타나는 本貫과 너무나 유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의 本貫制度에 관련된 연구 성과를 검토해 보면, 한국의 本 貫制度를 중국 역사상 존재하는 郡望制度와 관련시켜 살펴보려는 연구가 나오는데, 그 중 대표적인 연구자가 宋俊浩와 李樹健이다. 宋俊浩은 한국 本貫制度의 성격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중국 郡望制度(-宋俊浩은 이를 두 고 中國의 本貫制 라 칭하였다)를 언급하며, 두 制度 모두 門閥崇尙의 社 會風潮로 인해 생겨난 역사적 산물이다 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李樹 健은 唐나라 시대에 존재하는 郡望이 고려 사회에 유입되어 고려 사회에 서 本貫制度가 형성되는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고 말하였다. 이상의 연구는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本貫이 중국 역사에 존재하는 郡 望과 유사한 면이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 다. 특히 宋俊浩는 한국의 本貫制度가 지니고 있는 성격을 규명하기 위하 여 중국의 郡望制度를 살펴보고 또 그렇게 얻어진 두 制度의 성격을 통하 에서 2) 2) 宋俊浩의 연구는 韓國의 氏族制에 있어서의 本貫 및 始祖의 問題 朝鮮社會 史硏究, 一潮閣, 1987.을, 李樹健의 연구는 한국의 성씨와 족보 83면, 서 울대학교출판부, 2006.을 살펴보길 바란다. 그리고 安光鎬, 전통기 韓 中 地 方志에 나오는 本貫 기록 비교-江西省 吉安府 吉安府志 와 全羅道 南原府 龍城續誌 를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 81집,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 원, 2013.; 安光鎬, 전통기 韓 中 姓氏制度를 바라보는 두 知識人의 시각-宋 나라 시대 鄭樵와 朝鮮 시대 柳馨遠을 중심으로- 사학연구 113호, 한국사 학회, 2014.; 권기석, 족보, 왜 사대부에게 꼭 필요했는가 38~46면, 한국학 중앙연구원출판부, 2015.도 참고하길 바란다. 또, 한국 에 관한 연구는 이미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중 대표적인 연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의 52,, 1981.과 의 과 의 관계 를 중심으로- 한국중세사연구 8, 한국중세사학회, 2000.;,,, 1981.;,,, 1984.;,,, 1987.; 이수건, 한국의 성씨와 족 보,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의 와 의 과 -,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의 과 에 대한 검토- 에서 언급된 중국 역사 관 련 내용을 중심으로- 전북사학 44호, 전북사학회, 2014.;, 의 과 에 대한 검토- 에서 언급된 관련 내용을 중심으로- 전북사학 45호, 전북사학회, 2014. 本貫制度 金壽泰 高麗 本貫制度 成立 震檀學報 震檀學會 高麗初期 本貫制度 本貫 姓 許興植 高麗社 會史硏究 亞細亞文化社 李樹健 韓國中世社會史硏究 一潮閣 宋俊浩 朝鮮社會史硏究 一潮閣 蔡雄錫 高麗時代 國家 地方社會 本貫制 施行 地方支配秩序 安光鎬 韓國 本貫制度 起源 土姓 分定 說 土姓 分定 說 安光鎬 韓國 本貫制度 起源 土姓 分定 說 土姓 分定 說 世 宗實錄地理志 中國의 郡望制度와 韓國의 本貫制度 비교 77
韓 中 兩國 사회가 가지고 있는 성격을 서로 비교하였다는 점 에서 우리 史學界의 커다란 업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주로 牧野 巽과 David G. Johnson의 연구 성과를 인용하여 중국의 郡望制度를 소 개하고 있을 뿐, 실제로 중국 역사에서 郡望이 어떻게 출현하였는지 그리 여 전통기 고 어떠한 형태로 변화하여 갔는지 하는 점은 밝히지 못하였다. 그리고 宋俊浩가 중국의 郡望制度에 관하여 언급한 이후, 한국 史學界에서는 아 직까지 중국의 郡望制度에 관해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한국 史學界에서 이루어진 이상의 연구 성과 이외에도, 중국 郡望制度에 관한 연구 성과는 많이 있다. 이 연구 성과들을 그 성격에 따라 나누어 보면 크게 네 분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 첫째는 郡 望 이라는 용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분석한 연구이고, 그 둘째는 魏晉 南北朝 시기에서 唐나라 시기까지 중국 사회의 지배계층으로 활동하였던 門閥士族 들 가운데 하나의 門閥士族 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연구이며, 그 셋째는 敦煌에서 발견된 역사 문헌 가운데 郡望에 관련된 기록을 분 석한 연구이고, 그 넷째는 隋나라와 唐나라에 관련된 역사를 서술하면서 郡望에 대한 내용을 단편적으로 언급한 연구이다. 3) 郡望 이라는 용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분석한 논문은 다음과 같다. 竹田 龍兒, 唐代士人の郡望について 史學 第24卷 第4號, 1951.; 越智重明, 魏 晉南朝の士大夫について 東洋史學 第2輯.; 失野主稅, 望の意義について 長崎大學敎育學部社會科學論叢 第21號, 長崎大學敎育學部 編, 1972.; 상동, 北朝における民望の意義について 長崎大學敎育學部社會科學論叢 第6號, 長崎大學敎育學部 編, 1956.(越智重明의 연구에 관해서는 失野主稅가 그의 논 문에서 언급한 내용을 참고하였음을 밝힌다.) 하나의 門閥士族을 중심으로 이 루어진 연구는 다음과 같다. 守屋美都雄, 六朝門閥の一硏究:太原王氏系譜考, 東洋大學學術叢書, 日本出版協同, 1951.; 毛漢光, 我國中古大士族之個案硏究 -瑯琊王氏 歷史語言硏究所集刊 第37本, 下冊, 臺北, 中央硏究院, 1967(中 華民國56年).(이 논문은 후에 中國中古社會史論 (365 404쪽, 上海書店出版 社, 2002.)에 재수록 되었다.); David G. Johnson, The Last Years of A 3) Great Clan:The Li Family of Chao Chün in Late T'ang and Early Sung, 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 vol.37,.1, 1977.; Patricia Buckley Ebrey, The Aristocratic Families of Early Imperial China; A Case Study of the Po-ling Ts'ui Family, Cambridge Univ. Press, 1978.;,,, 2004.;,,, 2006. 또, 를 분석한 연구로는 다음과 같다., の ( )- の を として- 42 3 夏炎 中古 世家大族淸河崔氏硏究 天津古籍出版社 王力平 中古杜氏家族的變 遷 商務印書館 敦煌文書 池田溫 唐代 郡望表 上 九 十世紀 敦煌寫本 中心 東洋學報 第 卷 78 역사와 경계 98(2016.3)
본고에서는 이상의 연구 성과 위에, 중국 역사상 唐나라 시기까지 존 淸河崔氏와 한국 사회에서 전통기 시기부터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南陽洪氏, 이 두 氏族의 역사를 우선적으로 살펴보고, 또 이를 통하여 중국의 郡望制度와 한국의 本貫制度를 비교해 보고자 한 다. 특히, 이 두 制度가 그들이 각기 기반을 두고 있는 사회의 어떠한 역 사적 배경 속에서 출현하였는지, 또 이 두 制度는 그들이 기반을 둔 사 재하였다고 알려진 회에 출현한 이후 각기 어떠한 형태로 변화하여 갔는지, 그리고 그러한 변화 과정 속에서 이 두 制度는 어떠한 유사점과 차이점을 가지게 되었 는지 하는 점을 비교해 보려 한다. Ⅱ. 중국의 郡望制度 門閥士族 이란 魏晉南北朝 시기부터 唐나라 시 중국 역사에서 말하는 기까지 중국 사회를 주도적으로 움직였던 계층을 일컫는다. 이 계층은 유 력한 몇몇 가문의 구성원들에 의해서 형성된 것으로, 그들은 주요 관직을 대대로 세습하며 국가의 정책 결정에 있어 그 결정권을 거의 전유하다시 피 하였다. 그리하여 때로는 서양 역사학자들의 눈에 고대 그리스 사회에 寡頭政治(Oligarchy) 와 유사하게 비춰지기도 하였다. 4) 존재하였던 號, 1959.와 唐代の郡望表(下)-九 十世紀の敦煌寫本を中心として- 東洋學 報 第42卷4號, 1960. 王仲犖, 新集天下姓望氏族譜 考釋 敦煌吐魯番文獻 硏究論集 第2輯, 北京大學出版社, 1983.; 唐耕耦, 敦煌四件唐寫本姓望氏族 譜殘卷硏究 敦煌吐魯番文獻硏究論集 第2輯, 北京大學出版社, 1983. 그리 고 隋唐 관련 역사서에서 단편적으로 언급된 연구는 다음과 같다. 岑仲勉, 隋唐史 上冊 121~126면, 中華書局, 1982.; 岑仲勉, 唐史餘瀋:外一種, 中 華書局, 2004.; 章群, 論唐開元前的政治集團 (中華叢書)唐代硏究論集, 臺 灣, 中國唐代學會, 1992. 4) 門閥士族이 주도한 중국 사회를 고대 그리스의 寡頭政治에 비유한 연구로는 David G. Johnson, The Medieval Chinese Oligarchy, Westview Press, 1977.이 있다. 현재 역사학계에서 이 을 지칭하는 용어는 학자마다 다양하다. 을 지칭하는 용어를 학자 별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Patricia Buckley Ebrey는 그의 저서에서 시기의 지배 계층을 (Aristocrats) 이라 부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시기에 이르러 閥士族 貴族 門閥士族 魏晉南北朝 魏晉南北朝 中國의 郡望制度와 韓國의 本貫制度 비교 門 79
이 門閥士族에 의해 지배된 사회에서는 그들이 속한 가문의 사회적 지 위에 따라 그들의 사회적 지위도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관직에 나아갈 때에도 그들이 속한 가문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그들이 나아갈 漢 貴族 社會 貴族 서는 그 이전 시기인 나라 시기에 비해 (Aristocracy) 의 성격이 더욱 강화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이 누구인지에 따라 그들의 사회적 신 분이 결정되고 또 동일한 을 소유한 사이에서만 이 이루어지는 현상이 더욱 강화된 점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Patricia Buckley Ebrey, Cambridge Illustrated History: China, 86면 91면.Cambridge Univ. Press, 1996.) 또, Charles O. Hucker는 나라 시대부터 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사회는 (Hereditary Great Families) 계층에 의해 지배되었 다고 보고, 나라 시대의 은 그 이전 시기인 나라 시대의 (Nobility 또는 Noblemen) 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4 5세기에 이르러서는 계층(Shih Class) 이 사회의 주요한 세력으로 등장 하게 되지만, 이 계층 은 에 의해 철저하게 통제를 받았다고 주장하였다.(Charles O. Hucker, China's Impeial Past, 176 180면, Stanford Univ. Press, 1975.) 는 그의 연구에서 한국의 계층을 시대의 지배 계층과 비교하여 그 성격이 유사하다고 언급하면서 시대의 지배 계층을 이라 부르고 있다.(그는 이러한 견 해를 그의 연구 곳곳에서 언급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로 490면,, 1987.을 참고.) 또,,, 과 같은 학자들 역시 시대의 지배 계층을 이라 칭하고 있다.( 과 이 각기 집필한, アジア ( 2 391a~392b면)와 (361b~362a면),, 1970. 그리고, の,, 1977.과, と,, 1976.도 참고. 의 저서는 2002년 임대희 등에 의해 번 역되었다.) 이에 비하여, 은 그의 저서에서 시기부터 시기의 지배 계층을 이라 부르고 있다.(, ( ) p561,,, 2008.(11 )) 또, 는 그의 저서에서 시기의 지배 계층을 이라 부르고 있으며, 역시 이라 칭하고 있다. (, 53~63면,, 2011.과, 85~86면,, 2011.) 또 는 그의 저서에서 그리고 이라 부르고 있다.(,,, 5 26 30~35면,, 1998.) 이외에도 이라 칭하는 학자도 있다. 아울러, 시기부터 시기까지 계층을 지칭하는 다양한 용어 와 그 의미에 관해서는 David G. Johnson, The Medieval Chinese Oligarchy, pp. 5~17, Westview Press, 1977.을 참고하길 바란다. 貴族 漢 世襲 貴族 士族 士族 門閥 祖上 漢 世襲 貴族 唐 婚姻 周 封建 世襲 貴族 宋俊浩 兩班 魏晉南北朝 魏晉南北朝 門閥貴族 朝鮮社會史硏究 一潮閣 宮崎市定 川勝義雄 谷川道雄 日 本 魏晉南北朝 貴族 宮崎 市定 川勝義雄 平凡社 編 歷史事典 九品官人法 條 第卷 貴族 條 平凡社 宮崎 市定 九品官人法 硏究 同朋舍 谷川道雄 中國中世社會 共同體 國書刊行會 宮崎市定 錢穆 魏晉南北朝 隋唐 士的新貴族 錢穆 國史大綱 下 北京 商務 印書館 次印刷本 唐長孺 魏晉南北朝 士族 馮爾康 士族 唐長孺 士族的形成和升降 魏晉南北朝史論拾遺 中華書局 馮爾康 南北朝的宗族結構與士族社會特質論綱 中國宗族制度與譜牒 編纂 天津古籍出版社 常建華 士族 門閥士族 常建華 宗族志 中華文化通志 制度文化 典 上海人民出版社 世家大族 魏晉南北朝 唐 士族 80 역사와 경계 98(2016.3)
婚姻을 하려 할 때에도 그들 가문과 동일한 지위에 있는 가문 안에서 婚姻의 대상자 수 있는 관직도 일정 범위 안으로 한정되었으며, 또 이들이 를 찾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門閥士族이 중국 사회에 출현하게 된 배경은 九品官人法 (또는 九品中正制 라고도 한다)이라는 관리 등용법이 중국 사회에 실시된 사실 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九品官人法이란 중국 三國 시대에 존재하였던 국가 가운데 하나인 魏나라 시기에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인재를 두루 등용하려는 목적으로 실시된 것으로, 이후 南北國 시 기 거쳐 隋나라 초기까지 실시되었다. 이 九品官人法에 따르면, 중앙 정부에서는 각 州郡 단위에 中正이라는 官을 설치하고 그 中正으로 하여금 해당 州郡 단위 내에 살고 있는 인재 들을 조사하여 그 인재들이 지니고 있는 才德에 따라 그들을 9品(-이를 鄕品이라고 한다)으로 나누어 중앙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럼 중앙 정부 에서는 각 지방에서 보고해 온 鄕品에 따라 관리를 등용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몇몇 가문을 중심으로 하여 鄕品이 고정되는 현상이 생 이런 겨났고, 이로 인해 몇몇 가문의 구성원들이 고위 관직을 독차지하고 또 그들 사이에서만 婚姻을 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중국 역사에서 말하는 門閥士族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생겨났다. 그리고 이 門閥士族들은 그들이 소속된 氏族을 밝히는데 있어 언제나 그들의 姓氏와 함께 특정 지역의 地名을 칭하였다. 이를 중국 역사상 5 姓7望 으로 불리는 유명한 氏族을 예로 하여 살펴보면, 그들의 姓氏와 함 께 博陵이라는 地名을 칭한 博陵崔氏, 淸河라는 地名을 칭한 淸河崔氏, 隴西라는 地名을 칭한 隴西李氏, 趙郡이라는 地名을 칭한 趙郡李氏, 范陽 이라는 地名을 칭한 范陽盧氏, 滎陽이라는 地名을 칭한 滎陽鄭氏, 그리고 太原이라는 地名을 칭한 太原王氏가 있었다. 그리고 후세 학자들은 이 門閥士族들이 그들의 姓氏와 함께 칭하였던 특정 지역의 地名을 郡望이 라 불렀다.5) 5) 門閥士族들이 그들의 姓氏와 함께 칭한 특정 지역의 地名을 郡望이라 부른 사례는 중국 역사 문헌에서 얼마든지 찾아진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를 소개 하면 王昶, 金石萃編 卷88 潘智昭墓誌銘 篇과 楊愼, 丹鉛總錄 卷10 人品 類 郡姓 篇이다. 王昶은 그의 저서에서 以郡望冠其姓 이라 말하였고, 楊愼은 中國의 郡望制度와 韓國의 本貫制度 비교 81
그리고 이 郡望은 지방 통치 단위로서의 郡 단위가 중국 역사상 존재 하였던 시기에 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를 좀 더 郡 단위가 각 지역에 설 치되고 난 뒤, 각 郡 단위 내에서는 그 郡을 대표하는 望族이 생겨났고 그 望族은 자신들의 本據地가 있는 郡 단위를 벗어나 다른 지역에 살게 되더라도 그들의 本據地가 있는 郡 단위의 地名을 계속해서 姓氏와 함께 칭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郡望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淸나라 시기의 학자인 方東樹(1772~1851)의 설명에서도 찾아진다. 方東樹는 그가 작성한 方氏 族譜의 序文에서 戰國 시기까지는 姓, 氏, 族 이 각기 별개의 의미로 사용되다가 漢나라 시기에 이르러 서는 姓, 氏, 族 이 모두 姓 으로 칭해졌다 는 顧炎武(1613~1682)의 말을 인용하고 난 뒤, 郡望이 생겨난 역사적 배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면, 지방 통치 단위로서의 설명하고 있다.6) 郡望은 漢나라 시기(-漢 高祖 시기:安註)에 각 지방의 豪族들을 關中 지역 으로 옮겨 살게 하여 關中 지역의 내실을 도모한데서 시작되었다. 關中 지 역으로 이주한 大姓들은 (그들의 姓氏와 함께) 자신들이 본래 살았던 지역 의 地名을 사용하여 (동일한 姓氏를 사용하는 또 다른 집단과) 스스로를 구 별하였다. 이는 그들이 某郡 출신의 著名한 氏族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과 같았다. 그 후 그들은 남북으로 흩어져 살고 또 그렇게 하기를 여러 세대 동안 하였어도, 그들이 를 칭할 때에는 언제나 이 관행에 따라 각기 부 르게 되었다.7) 姓氏 그의 저서에서 以姓配郡望 이라 표현하였다. 方東樹가 顧炎武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 부분은 아래와 같다. 顧氏亭林(-顧炎武를 말함.:安註)謂 古者 以祖之所自岀 謂之姓 姓本於五 帝 若嬀子姬姜之屬 春秋諸侯 於公子公孫卿大夫 有賜氏賜族 氏族本於春 秋 若以字以謚以官以邑以伯仲之屬 戰國猶稱氏族 漢人則通謂之姓 於是 姓氏族混而爲一.(方東樹, 考槃集文錄 卷11 族譜序 ) 아울러, 본고에서는 續修四庫全書編纂委員會 編, 續修四庫全書 1497冊, 上 海古籍出版社, 2002.에 수록되어 있는 考槃集文錄 을 이용하였음을 밝힌다. 7) 方東樹, 考槃集文錄 卷11 族譜序. 郡望之始 起於漢徙豪右實關中 大姓各繫其土 著以自别 若曰此某郡之著 族耳 其後歷代南北遷徙 一時著姓 亦各相沿此制 以爲稱. 6) 82 역사와 경계 98(2016.3)
郡望에 대한 方東樹의 설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 역사상 지방 통치 단위로서의 郡 단위가 秦나라 시기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秦나라가 戰國 시기를 통일하고 각 지방에 郡을 설치한 뒤, 각 郡 단위 안에는 그 郡을 대표하는 望族이 생겨났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望族 사이에서는 그들의 本據地가 있는 郡 우리가 단위를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점차 나타나기 시작하 方東樹는 각 郡 단위의 望族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 한 시점을 漢나라 高祖 시기로 보고 있다. 漢나라 高祖인 劉邦(B.C 256~B.C 195)은 B.C 202년에 皇帝로 등극 하면서 首都를 長安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長安 지역 이 匈奴族들이 머물고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기 때문에 匈奴族의 침입 에 대비하여 각 지방의 豪族들을 關中 지역으로 옮겨 살게 해야 한다는 劉敬의 건의를 받아들여, 각 지방의 豪族들을 關中 지역으로 옮겨 살게 였는데, 하는 이민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이민 정책으로 인해 10여만 豪族이 關中 지역으로 이주하였다고 역사 기록은 전하고 있다. 또 方東樹에 따르면, 이러한 漢 高祖의 이민 정책으로 인해 關中 지역 에는 각 지방 출신의 豪族들이 모여들게 되었는데, 이렇게 모여든 豪族 들은 그들의 姓氏와 함께 그들이 본래 거주하였던 郡 단위의 地名을 칭 함으로서, 동일한 姓氏를 사용하고 있는 또 다른 집단들과 자신들을 구 별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 각 지방 출신의 豪族들이 그들의 姓氏와 함께 칭하였던 郡 단위의 地名이 중국 역사상 존재하는 郡望의 기원이 되었다 고 方東樹는 믿고 있다. 여하튼, 方東樹는 중국 역사상 존재하는 郡望이 漢 高祖 시기에 실시 된 이민 정책으로 인해 출현하였다고 믿고 있는데, 이렇게 생겨난 郡望 명의 8) 8) 司馬遷, 史記 卷99 劉敬 列傳. 劉敬이 건의한 내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匈奴河南白羊樓煩王 去長安近者七百里 輕騎一日一夜 可以至秦中 秦中新 破 少民 地肥饒 可益實 夫諸侯初起時 非齊諸田 楚昭屈景莫能興 今陛下 雖都關中 實少人 北近胡寇 東有六國之族宗彊 一日有變 陛下亦未得高枕 而臥也 臣願陛下徙齊諸田 楚昭屈景 燕 趙 韓 魏後及豪傑名家 居關中 無事 可以備胡 諸侯有變 亦足率以東伐 此彊本弱末之術也.( 白羊 과 樓煩王 은 匈奴族이 있는 지역을, 秦中 은 關中 지역을, 齊諸田 은 齊나라의 여러 田氏를, 楚昭屈景 은 楚나라의 昭氏 屈氏 景氏를 말한다.) 中國의 郡望制度와 韓國의 本貫制度 비교 83
은 이후 중국 사회에 지속적으로 존재하였다. 漢 高祖 시기 이후에도 각 郡 단위의 望族들은 그들의 本據地가 있는 郡 단위를 벗어나 다른 지역 으로 이주하게 되면 자신들이 某郡 출신의 著名한 氏族 임을 밝히기 위 하여 으레 郡望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郡望은 이후 중국 사회에 서 자신이 소속된 氏族을 드러내야 할 때에는 자신의 姓氏와 함께 반드 시 밝혀야 하는 하나의 社會的 制度 로 발전하였고, 하나의 社會的 制 度 인 郡望制度는 魏晉南北朝 시기와 隋나라 시기를 거쳐 唐나라 말기까 지 지속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姓氏 관련 문헌들을 살펴보면, 많 은 문헌들이 이 郡望制度에 근거하여 氏族을 분류하고 있음을 알 수 있 다. 그리하여 그 문헌을 읽는 사람들은 동일한 郡望과 동일한 姓氏를 사 용하는 사람들을 동일한 氏族으로 간주하곤 한다. 하지만 동일한 郡望과 姓氏를 사용하는 氏族이라 하더라도, 그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수많은 支派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앞서 언급하였던 5姓7望, 그 5姓7望 가운데 하나인 淸河崔氏에서도 실제로, 중국 전통기 시기에 편찬된 찾아진다. 淸河崔氏는 漢나라 초기에 東萊侯에 봉해졌던 崔業이라는 인물을 始祖 로 하는 氏族이다. 이 淸河崔氏는 崔業이 淸河 東武城에 정착한 이후 중 국 사회에 지속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어, 東漢 시대에 이르러서는 山 東 지역을 대표하는 氏族으로 성장하였으며, 이후 三國 시기와 魏晉南北 朝 시기 그리고 隋唐 시기를 거치는 동안에도 수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중국 역사에서 대표적인 氏族이 되었다. 이 淸河崔氏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역사 문헌으로는 新 唐書 에 수록되어 있는 宰相世系表 가 있다. 이 宰相世系表 에는 唐나 라 시기에 宰相을 역임한 369명의 家系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12명이 淸河崔氏이다. 또, 이 宰相世系表 에는 淸河崔氏의 여러 支派 9) 新唐書 宰相世系表 에 수록되어 있는 宰相의 수에 대해서는 趙超, 新唐書 宰相世系表集校 1면, 中華書局, 1998.을 참고하였다. 그리고 宰相世系表 에 수록되어 있는 淸河崔氏 12명은 高宗 시기의 崔知溫, 則天武后 시기의 崔元 綜 崔詧 崔神基, 肅宗 시기의 崔圓, 憲宗 시기의 崔羣, 宣宗 시기의 崔愼由 崔 龜從 崔鄲, 昭宗 시기의 崔昭緯 崔胤, 그리고 黃巢 시기의 崔璆이다. 古今姓 9) 84 역사와 경계 98(2016.3)
支派와 派祖(-중국 역사 문헌에서는 이를 두고 始祖라 한다. 하지만 본고에서는 한국 氏族制度의 관행에 따라 派祖라 가 언급되어 있는데, 그 지칭하였다)를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표 1> 淸河崔氏의 支派와 派祖 支派 東祖崔氏 西祖崔氏 中祖崔氏 (中祖崔氏) 鄭州崔氏 (中祖崔氏) 許州鄢陵房 南祖崔氏 (南祖崔氏) 烏水房 派祖 崔雙 崔邯 崔寓 崔蔚 崔彧 崔濟 崔曠 支派 南祖崔氏 全節 ( ) 의 烏水房 南祖崔氏 別派 (南祖崔氏 別派) 淸河大房 (南祖崔氏 別派) 淸河小房 (南祖崔氏 別派) 淸河靑州房 藍田의 南祖崔氏 別派 派祖 崔靈茂 崔密 崔休 崔寅 崔輯 崔羣 淸河崔氏의 支派 중 中祖崔氏를 살펴보면, 中 祖崔氏는 後漢 시대에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 崔寓의 후손임을 알 수 있 다. 崔寓는 淸河崔氏의 始祖로 淸河 東武城에 처음으로 정착한 崔業의 8 대손이자, 崔業의 5대손으로 淸河 東武城 지역을 벗어나 歈縣(-오늘날 山東省 德州市 平原縣 일대)에 정착한 崔泰의 曾孫이다. 이 崔寓가 어떠 한 이유로 淸河崔氏들 사이에서 中祖(-역사서에서는 崔寓를 南祖라 칭하 기도 한다)라 불리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역사에서는 그를 淸河 崔氏의 中祖로 부르고 있으며, 이로 인해 그의 후손들은 中祖崔氏라 일 우선, <표 1>에 나오는 컬어졌다. 崔寓의 10대손인 崔蔚은 오늘날 河南省 滎陽市 일대인 滎 陽에 정착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崔蔚은 그의 從兄인 崔浩(?~450) 가 北魏 皇室의 역사를 잘못 기술하였다는 이유로 그 一族이 모두 처형 당하게 되자 이를 피하여 南朝로 도망하였다. 南朝로 도망한 그는 宋나 라에서 관직 생활을 하다가 延興(471~476) 연간에 다시 北魏로 돌아왔 다. 北魏로 돌아 온 그는 潁川郡守에 제수되었는데, 이러한 인연으로 인 하여 그의 후손들은 潁川 인근 지역인 滎陽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 그리고, 이 10) 氏書辯證 에는 崔昭緯를 제외한 11명의 家系가 실려 있다. 崔蔚에 관해서는 新唐書 宰相世系表 이외에도, 周書 卷36 崔彦穆 傳 10) 中國의 郡望制度와 韓國의 本貫制度 비교 85
하여 세상에서는 崔蔚의 후손들을 滎陽이 속해 있는 地名을 따라 鄭州 崔氏 라 부르게 되었다. 또, 이 崔蔚의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인 崔彧은 滎陽 지역을 벗어나 許 州 鄢陵(-오늘날 河南省 許昌市 鄢陵縣 일대)에 거주하였다. 그가 어떠한 이유로 鄢陵에 자리 잡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그가 鄢陵에 정 착한 이후 그의 후손들은 隋나라와 唐나라에서 계속해서 名望을 얻게 되 었고, 이로 인해 세상에서는 그들을 가리켜 許州 鄢陵房 이라 칭하게 되었다. 淸河崔氏의 支派 중 또 다른 支派 인 南祖崔氏는 崔濟의 후손임을 알 수 있다. 崔濟는 後漢 시기에 諫議大 夫를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淸河崔氏의 始祖인 崔業의 9대손 이자 歈縣에 처음으로 정착한 崔泰의 玄孫이다. 그리고 역사에서는 어떠 한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그를 南祖라 부르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그 의 후손들은 南祖崔氏 라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崔濟의 10대손인 崔曠은 오늘날 江蘇省 連云港市 일대인 齊郡 烏水에 정착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역사상 南燕 이라 불 리는 왕조를 수립하였던 慕容德(336~405)을 따라 남으로 내려오게 되었 고, 이로 인해 齊郡 烏水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가 烏水에 정착한 이후 그의 후손들은 烏水 지역을 중심으로 크게 번창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烏水房 이라 부르게 되었다.(-齊郡 烏水의 위치 그럼 다시 <표 1>로 돌아가 보면, 비정에 관해서는 아래의 주석 14번을 참고하길 바란다) 崔曠의 손자 가운데 한 사람인 崔靈茂는 齊郡 烏水 지역을 떠 나 오늘날 山東省 濟南市 동북부 일대인 全節에 정착하였다. 비록 그는 南朝인 宋나라에서 관직 생활을 하였지만, 그가 북으로 올라 가 全節에 정착한 이후 그의 후손들은 北魏, 北齊, 北周, 그리고 唐나라에서 많은 또, 이 관직자를 배출하여 중국 사회에서 유명한 가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南祖崔氏라 불리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崔濟의 후손이 아닌 崔蔚 崔彦穆의 列傳에서 崔蔚에 관하여 기술된 내 祖蔚 遭從兄司徒浩之難 南奔江左 仕宋爲給事黃門侍郎汝南義陽二郡守 延興初 復歸於魏 拜潁川郡守 因家焉 後終於郢州刺史. 을 참고하였다. 의 손자인 용은 아래와 같다. 86 역사와 경계 98(2016.3)
崔密을 派祖로 하는 사람들인데, 崔密은 淸河崔 氏의 始祖인 崔業의 8대손으로 전해지고 있다. 본고는 이들을 南祖崔氏 別派 라 부르려 한다. 여하튼 전하는 바에 의하면, 崔密은 崔覇와 崔琰 2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 아들인 崔琰의 8대손인 崔休와 崔寅 형제가 각기 淸河大房 과 淸河小房 의 派祖가 되었다. 또, 崔琰의 玄孫인 崔輯은 南朝로 내려가 宋나라에서 관직 생활을 하 다가 오늘날 江蘇省 揚州市 일대인 靑州에 정착하였다. 그가 靑州에 정 착한 이후 그의 후손들은 많은 관직자를 배출하는 등 중국 사회에서 名 望을 얻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들은 세상에 淸河靑州房 이라 알려졌다. 또 崔密의 큰 아들 崔覇의 5대손인 崔羣은 오늘날 陝西省 西安市 藍田縣 일대인 藍田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崔羣의 玄孫인 崔詧은 則天武后 시절 에 宰相을 역임하였는데, 역사서에서는 그를 藍田崔詧 이라 칭하기도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하였다.11) 中祖崔氏와 南祖崔氏 그리고 南祖崔氏 別派의 分派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淸河崔氏가 여러 개의 支派로 나누어져 있으며 그 支派들은 또다시 그 하위 단위의 支派들로 계속해서 분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다시 정리해 보면, 같은 淸河崔氏 안에서 中 祖崔氏와 南祖崔氏 그리고 南祖崔氏 別派가 나누어지고, 中祖崔氏 안에 서 鄭州崔氏가 생겨나며, 鄭州崔氏 안에서 許州 鄢陵房이 분화되어 나왔 다. 그리고 南祖崔氏 안에서 烏水房이 생겨나고, 烏水房 안에서 全節에 거주하는 淸河崔氏가 분화되어 나왔으며, 南祖崔氏 別派 안에서 淸河大 房, 淸河小房, 淸河靑州房 그리고 藍田에 거주하는 淸河崔氏가 생겨났다. 이러한 사실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면, 許州 鄢陵房은 鄭州崔氏 안에 존재하는 여러 支派들 가운데 하나이고, 鄭州崔氏는 中祖崔氏 안에 존재하는 여러 支派들 가운데 하나이며, 中祖崔氏는 淸河崔氏 안에 존재 하는 여러 支派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동일한 방식으로, 全節에 거주하는 淸河崔氏는 烏水房에 존재하는 여러 支派들 가운데 하나이고, 烏水房은 南祖崔氏 안에 존재하는 여러 支派들 이상에서 살펴 본 藍田崔 資治通鑑 卷203 唐紀19 則天順聖皇后上之上 에 詧 라는 기록은 11) 나온다. 中國의 郡望制度와 韓國의 本貫制度 비교 87
南祖崔氏는 淸河崔氏 안에 존재하는 여러 支派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淸河大房, 淸河小房, 淸河靑州房 그리 고 藍田에 거주하는 淸河崔氏 역시 南祖崔氏 別派에 존재하는 여러 支派 들 가운데 일부이며 南祖崔氏 別派 역시 淸河崔氏 안에 존재하는 여러 支派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가운데 하나이며,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다시 <표 1>로 돌아가, <표 1>에 支派들 즉 東祖崔氏와 西祖崔氏를 생각해 보면, 그 支派 들 또한 淸河崔氏 안에 존재하는 여러 支派 가운데 일부라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그 支派들 역시 그 내부에 수많은 하위 단위의 支派가 존재하 나오는 여타의 였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 어렵지 않게 생각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우 唐나라 시기 淸河崔氏 안에는 위 宰相世系表 에서 언급된 東祖崔 氏, 西祖崔氏, 中祖崔氏, 南祖崔氏 그리고 南祖崔氏 別派 이외에도 많은 支派가 있었으며 그리고 각 支派들 안에는 수많은 하위 단위의 支派가 리는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淸河崔氏의 支派들 가운데 극히 일부 支派의 家 系만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된 이유는 그들 家系에서 唐나라 시기에 宰 相을 역임한 인물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唐나라 시기 宰 相을 역임한 淸河崔氏 12명의 家系, 즉 鄭州崔氏의 崔元綜 家系, 許州 鄢陵房의 崔知溫 家系, 全節의 崔昭緯 家系와 崔愼由 崔胤 父子 家系, 南 祖崔氏 別派의 崔神基 家系, 淸河大房의 崔龜從 家系, 淸河小房의 崔羣 家系 崔鄲 家系 崔璆 家系, 淸河靑州房의 崔圓 家系, 그리고 藍田의 崔詧 家系를 중심으로 宰相世系表 의 편찬자가 淸河崔氏의 家系를 작성하였 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新唐書 의 宰相世系表 에 수록되어 있는 淸河崔氏의 家系를 이해하려 할 때에는, 唐나라 시기 淸河崔氏 안에는 무수한 支派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과 그 支派들 가운데 극히 일부만이 宰相世系表 에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여하튼, 唐나라 시기 淸河崔氏 안에는 무수한 支派가 존재하고 있었다 는 것인데, 사실 이러한 점은 중국 역사에서 氏族制度가 변화하며 발전 그리고 이처럼 무수한 하는 과정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 들일 수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주지하다시피, 중국 88 역사와 경계 98(2016.3) 上古 시기에 몇몇 엘
姓 리트 계층을 중심으로 서로를 구분하기 위하여 을 사용하기 시작하였 姓 고, 동일한 을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여러 支派가 생겨나게 氏 夏 商 周 시기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소속된 氏族을 밝히는데 있어 으레 姓 과 氏 를 함께 칭하게 되었다. 그 러나 동일한 氏 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도 여러 支派가 생겨나면서 姓 과 氏 를 구분하지 않고 姓 과 氏 를 모두 姓氏 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 고 동일한 姓氏 를 소유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또다시 여러 支派가 생겨 나면서 姓氏 앞에 郡望을 밝혀 서로를 구분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 이 지나면서 동일한 郡望과 동일한 姓氏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여러 支派가 생겨나게 되었고, 이러한 分派가 계속되면서 唐나라 시기에 이르러서는 한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논하는데 있어 어느 郡望을 사용 하고 있는냐 하는 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郡望을 사용하고 있는 누구의 後孫이냐 하는 점이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국의 氏族制度를 저 上古 시기부터 통찰하였던 宋나라 시 기의 鄭樵(1104~1162)는 중국의 氏族制度가 以親別疏 以小別大 以 異別同 以此別彼 하는 방식을 통하여 끊임없이 無非辨族 하는 형태로 변화하고 있다고 말하였고, 또 중국의 氏族制度와 한국의 氏族制度를 비 교한 조선 시기 李圭景(1788~?)은 (역사적으로 氏族制度가 발전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하나의 族 안에서 여러 개의 姓이 생겨나고, 하나의 姓 안에서 여러 개의 望이 생겨나며, 또다시 하나의 望에서 여러 개의 房이 생겨난다. 氏族制度의 발전 과정이 이와 같기 때문에 하나의 族 안에 姓 이 많아지게 되면 그 族의 의미는 약해지게 되고, 하나의 姓 안에 望이 많아지게 되면 그 姓의 의미 또한 약해지게 되며, 또 하나의 望 안에 房 이 많아지게 되면 그 望의 의미 역시 약해지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氏 族制度가 발전하는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必然之勢이기도 하다 라고 밝 되면서 가 등장하였다. 그리하여 12) 히고 있다.13) 12) 韓 中 兩國 氏族制度 宋俊浩 韓國 氏族 朝鮮社會史硏究 鎬 韓 中 姓氏制度 知識人 朝鮮 柳馨遠 排他性 一潮閣 宋 사회의 가 나 와 남 을 구분하는 을 기반으로 발전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아래의 연구를 참고하길 바란다., 의 112~113면,, 1987.;, 전통기 를 바라보는 두 의 시각- 나라 시대 와 시대 을 중심으로- 사학연구 113호, 한국사학회, 2014. 中國의 郡望制度와 韓國의 本貫制度 비교 安光 鄭樵 89
淸河崔氏의 分派 과정을 유심히 살펴본 독자 라면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淸河崔氏들은 그들이 속 한 支派에 따라 여러 지역으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고 또 그들 가운데에 는 그들이 이주한 지역에 世居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淸河 지역이 아닌 다른 지역에 살게 되더라도 淸河를 계속해서 郡望으로 칭하 였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新唐書 의 宰相世系表 에 기록 되어 있는 그들의 世居地와 해당 支派를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또, 앞서 필자가 설명한 <표 2> 淸河崔氏의 世居地名와 그 위치 비정14) 支派 鄭州崔氏 許州 鄢陵房 烏水房 全節의 烏水房 淸河靑州房 藍田의 南祖崔氏 別派 世居地 滎陽 鄢陵 齊郡 烏水 全節 靑州 藍田 오늘날 위치 비정 河南省 鄭州市 滎陽市 일대 河南省 許昌市 鄢陵縣 일대 江蘇省 連云港市 일대 山東省 濟南市 동북부 일대 江蘇省 揚州市 일대 陝西省 西安市 藍田縣 일대 鄭樵, 通志 卷25 氏族略 氏族序 篇. 李圭景, 五洲衍文長箋散稿 人事篇1 人事類2 氏姓 姓氏譜牒辨證說 篇. 自族(-姓 氏 族의 族이 아님:安註)別而爲姓 姓別而爲望 望別而爲房 故 姓多則訛其族 望多則訛其姓 房多則訛其望 此又必然之勢也. 아울러, 鄭樵의 견해에 관해서는 安光鎬, 전통기 韓 中 姓氏制度를 바라보 는 두 知識人의 시각-宋나라 시대 鄭樵와 朝鮮 시대 柳馨遠을 중심으로- 사학연구 113호, 한국사학회, 2014.를 참고하길 바란다. 14) 이 표에서 언급된 齊郡 烏水와 靑州는 東晉 시기 僑置된 地名이다. 주지하다 시피, 晉나라는 317년 남쪽 지방으로 遷都하여 이른바 東晉 이라는 왕조를 수립하였는데, 이 東晋 시기에는 晉나라가 본래 자리 잡고 있던 북방 지역의 地名을 남방 지역에 僑置하는 일이 많았다. 齊郡 烏水와 靑州도 이 시기 僑 置된 地名이다. 참고로, 齊郡 烏水라는 地名은 본래 오늘날 山東省 臨博市 일대를, 靑州라는 地名은 본래 오늘날 山東省 靑州市 일대를 지칭하였다. 이 에 관해서는 夏炎, 中古世家大族淸河崔氏硏究 62면과 71면, 天津古籍出版 社, 2004.를 참고하길 바란다. 그리고 全節은 南朝에 僑置된 地名이 아니라 오늘날 山東에 있는 본래의 地 名으로 파악하였다. 그 이유는 全節에 처음으로 거주한 崔靈茂의 후손들, 예 를 들면 아들인 崔稚寶, 손자인 崔逵, 그리고 曾孫인 崔德仁이 모두 北朝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崔靈茂 대에 다시 북으로 이주한 13) 것으로 보았다. 90 역사와 경계 98(2016.3)
淸河崔氏 가운데 처음으로 淸河 東武城을 떠나 다른 지역에 정착한 인물은 崔泰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崔泰는 始祖인 崔業의 5대손으로 歈縣에 정착하였는데, 이 崔泰의 10대손인 崔蔚이 滎 陽으로 이주하였고, 崔蔚의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인 崔彧이 滎陽에서 許 州 鄢陵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始祖 崔業의 14대손이자 南祖 崔濟의 10대손인 崔曠은 齊郡 烏水에 정착하였고, 崔曠의 아들인 崔靈茂는 烏水 에서 全節로 이주하였다. 또, 南祖崔氏 別派로 崔密의 5대손인 崔輯과 崔 羣은 각기 靑州와 藍田에 정착하였다. 주지하다시피, 淸河郡은 漢 高祖 4년인 B.C 203년에 역사상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그리고 이 당시 淸河郡은 오늘날 河北省 淸河, 棗强, 南宮 그리고 山東省 臨淸, 夏津, 武城, 高唐, 平原 일대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 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淸河郡은 지방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置廢를 거듭하고 또 지방 행정 단위로서의 위상도 일정하지 않았지만, 747년(至 德 2)에 지방 통치 단위로서의 淸河郡이 역사상 그 운명을 다할 때까지 는 오늘날 河北省 남부 일대와 山東省 북부 일대에 계속해서 위치해 있 전하는 바에 의하면, 15) 었다. 淸河崔氏의 世居地, 즉 滎陽, 鄢陵, 齊郡 烏 水, 全節, 靑州, 그리고 藍田은 역사상 淸河郡이 위치해 있던 지역과는 일치하지 않는 지역들이다. 특히, 全節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들은 淸河郡 하지만 <표 2>에 나오는 이 위치해 있던 지역에서 상당한 거리에 있는 지역들이다. 그럼에도 불 淸河崔氏들은 그들의 世居地가 위치해 있는 지역과 무관하게 淸 河를 계속해서 그들의 郡望으로 사용하였다. 실제로, 新唐書 의 宰相世系表 에는 총 596명의 淸河崔氏가 수록되 어 있는데, 이 596명 가운데 중국 역사상 25史 라 불리는 正史, 그 正史 중 唐나라 이전 시기에 편찬된 正史들에서 그 列傳이 확인되는 인물은 총 10명이다. 그리고 그 列傳들에서 그 列傳의 주인공을 본격적으로 구하고 16) 15) 16) 士爲樂 主編, 中國歷史地名大辭典 淸河郡 條,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5. 唐나라 이전에 편찬된 正史로는 史記, 漢書, 後漢書, 三國志, 晉書, 宋書, 南齊書, 梁書, 陳書, 魏書, 北齊書, 周書, 隋書, 南史, 北史 가 있다. 참고로, 舊唐書 는 5代 가운데 하나인 後晋 시기에, 新唐 書 는 宋나라 시기에 편찬되었다. 中國의 郡望制度와 韓國의 本貫制度 비교 91
人 淸河와 관련 있는 淸河東武城人, 淸河武城人, 그리고 淸河人 으로 소개하기에 앞서 밝히고 있는 이른바 을 살펴보면, 이 10명 모두 기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표 3> 正史 列傳에 나오는 淸河崔氏 正史名 姓名 人 支派 崔琰 淸河東武城人 南祖崔氏 三國志 崔林 淸河東武城人 中祖崔氏 別派 崔逞 淸河東武城人 南祖崔氏 別派 崔亮 淸河東武城人 淸河靑州房 魏書 崔休 淸河人 淸河大房 崔暹 淸河東武城人 鄭州崔氏 崔彧 淸河東武城人 許州郾陵房 北齊書 崔㥄 淸河東武城人 淸河大房 周書 崔彦穆 淸河東武城人 鄭州崔氏 隋書 崔儦 淸河武城人 淸河大房 비고 北史 에도 수록됨 北史 에도 수록됨 北史 에도 수록됨 北史 에도 수록됨 正史에 수록된 列傳에서 淸河崔氏의 인물을 소개하며 그 들의 世居地를 밝히는 대신에 그들의 郡望을 기록하는 이유는 唐나라 이 전 시기의 역사 기술 방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기도 하다. 唐나라 이전 시기에는 한 인물의 列傳이나 行狀을 작성하면서 人 을 기록할 때에는 그들의 郡望에 따라 人 을 기록하였다. 그리하여 <표 3>에 나오는 崔暹(?~559)의 경우, 그의 아버지인 崔蔚이 北朝로 올라와 滎陽 에 정착한 이후 그와 그의 후손들이 滎陽과 潁川 일대에 거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魏書 에 수록되어 있는 그의 列傳에서는 그를 本云淸河東武 城人也 世家于滎陽潁川之間 이라 소개하고 있다. 또, <표 3>에 나오는 10명 이외에도, 즉 新唐書 의 宰相世系表 에 수록되어 있는 596명 가운데 唐나라 이전 시기에 편찬된 正史에서 그 列傳이 확인되는 10명 이외에도, 그 正史의 列傳에서 宰相世系表 에 수 이처럼 중국 록되어 있는 인물들과 가족 관계가 확인되는 사람들은 총 6명인데, 그들 淸河東武城人 또는 淸河人 으로 소개되어 있다. 역시 17) 그 중 대표적 17) 崔劼 이외의 5명은 宰相世系表 에서 南祖崔氏로 분류되어 있는 崔悅의 손 92 역사와 경계 98(2016.3)
崔劼을 예로 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崔劼은 烏水房의 派祖인 崔曠의 曾孫으로, 그의 祖父는 崔靈延이고 아 버지는 崔光이다. 앞서 소개하였지만, 崔曠은 慕容德을 따라 남으로 내려 갔다가 齊郡 烏水에 정착하였다. 당시 齊郡 烏水는 南朝인 宋나라 시기 에 오늘날 江蘇省 連云港市 일대에 僑置되었던 冀州에 속한 지역이었 다.(-각주 14번도 참고할 것) 그리하여 北齊書 에 수록되어 있는 그의 列傳에서는 그가 본래 淸河人 이라고 소개하고, 曾祖인 崔曠이 남으로 내려가 靑州의 동쪽에 거하였는데, 이 때 南朝의 宋나라에서는 黃河 이 남 지역에 冀州를 僑置하고 그 아래에 郡縣을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崔 氏 일가는 東淸河郡 지역에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 郡縣이 개편되면 서 다시 南平原의 貝丘 지역에 거하게 되었다 라고 밝히고 있다. 여하튼 淸河崔氏는 그들의 世居地가 위치해 있던 지역과 무관하게 淸 河를 계속해서 郡望으로 칭하였는데, 사실 淸河崔氏에서 발견되는 이러 한 점은 비단 淸河崔氏 뿐만이 아니라 동시기 중국 사회에 존재하였던 여타의 氏族들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淸河崔氏를 비롯한 여타의 氏族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과 무관하게 특정 지역 을 계속해서 郡望으로 칭하였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러한 방식으로 자 신들이 소속된 氏族을 밝히는 것이 하나의 社會的 制度 로 당시 사회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이러한 社會的 制度 가 생겨나게 된 원 인을 社會史的 觀點에서 좀 더 해석해보자면, 앞서 方東樹가 그의 저서 에서 밝히고 있듯이 자신들이 某郡 출신의 著名한 氏族 이라는 사실이, 조금 바꾸어 말하면 자신들이 某郡에서 비롯된 著名한 氏族의 후예 라는 으로 18) 崔潛 崔宏 崔玄伯 형제 그리고 崔宏의 아들 崔浩, 宰相世 系表 南祖崔氏 別派 있는 崔諲의 손자인 崔祖思, 그리고 崔劼 崔光 崔宏은 北史 에, 崔玄伯과 崔浩는 魏書 에, 崔祖思 南齊書 南史 淸河東武城人 또는 淸河人 으로 기록되어 崔光 北史 淸河人 으로, 魏書 에 東淸河鄃人 으로 기 李百藥 北齊書 卷 列傳 崔劼 傳. 本淸河人 曾祖曠 南渡河 居靑州之東 時宋氏於河南立冀州 置郡縣 卽爲 東淸河郡人 南縣分易 更爲南平原貝丘人也.( 河南 은 黃河의 남쪽을 말 한다. 南縣 은 郡縣의 誤字로 보았다.) 자이자 의 아들인 에 로 분류되어 의 아버지인 이 그들이다. 는 와 에 있다. 그리고 은 에 록되어 있다. 18), 42 34 中國의 郡望制度와 韓國의 本貫制度 비교 93
사실이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표현하는데 있어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 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淸河崔氏를 비롯한 여타의 氏族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이러한 宋나라 이후 중국 사회에 생겨난 관행, 즉 자신이 살고 있는 지 역의 地名과 함께 姓氏를 칭하여 자신이 소속된 氏族을 밝히는 宋나라 이후의 새로운 관행과는 그 성격이 분명히 다른 것이다. 앞서 필자는 淸 河崔氏들이 여러 지역으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고 또 그들 가운데에는 그 들이 이주한 지역에 世居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하면서, 대표적으로 滎陽에 世居하는 淸河崔氏, 鄢陵에 世居하는 淸河崔氏, 齊郡 烏水에 世居 하는 淸河崔氏, 全節에 世居하는 淸河崔氏, 靑州에 世居하는 淸河崔氏, 그리고 藍田에 世居하는 淸河崔氏를 언급하였는데, 만일 이 淸河崔氏의 支派들이 宋나라 이후 중국 사회에도 계속해서 존재하였다고 한다면, 이 들은 淸河崔氏의 支派가 아닌 별도의 氏族으로, 다시 말해 滎陽崔氏니, 鄢陵崔氏니, 烏水崔氏니, 全節崔氏니, 靑州崔氏니, 藍田崔氏니 하는 별도 의 氏族으로 변하게 되었을 것이다. 현상은 19) 氏族制度 宋 常建華 常建華 邱漢生 李文 治 徐揚杰 王思治 王善軍 馮爾康 宋 宗族 宗族 身份性 身份 性 世家大族 宋 身份性 官僚 宗族 內藤湖南 谷川道雄 井上徹 宋 宗族 常建華 宋明以來宗族制形成理論辨析 宋以后宗族的形成及地域比較 人 民出版社 安徽史學 19) 중국 가 나라 시기 이후 그 성격이 크게 변화하였다는 견해에 대 해서는 가 그의 연구에서 잘 정리해 두었다. 는,,,,, 그리고 등 중국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소개하고, 그 연구 성과들이 나라 이전 시기에 존재하였던 과 또 그 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던 사회에서는 이 존재하였고, 또 그 을 바탕으로 생겨난 사회 계층인 들이 그 사회를 주도적으로 이 끌어 갔다. 하지만 나라 이후의 사회에서는 그 이 사라지게 되었 고, 비록 낮은 관직을 소유한 나 일반 민중이라 할지라도 그 사회적 지 위가 상승하여 을 가지게 되었다 라는 점을 공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고 말하였다. 또 그는,, 등 일본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하고 그들 역시 나라 시기 이후 생겨난 의 성격에 관해서는 중국 학자들과 유사한 시각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20~21면,, 2013.을 참고하길 바란다. 이 연구는 2007년 에 게재 되었으며, 이듬해 원정식이 번역하여 강원사학 제22 23합집에 수록되기도 하였다. 아울러, 이나 에 나오는 을 통하여 사회를 비교 한, 의 에 있어서의 및 의 75~82면,, 1987.과, 전통기 에 나오는 기록 비교 와 를 중 列傳 行狀 人 韓 中 兩國 宋俊浩 韓國 氏族制 本貫 始祖 問題 朝鮮社會史硏 究 一潮閣 安光鎬 韓 中 地方志 本 貫 江西省 吉安府 吉安府志 全羅道 南原府 龍城續誌 94 역사와 경계 98(2016.3)
Ⅲ. 한국의 本貫制度 郡 단위가 중국 역사상 출현한 이후 각 郡 단위에는 그 郡 단위를 대표하는 望族들이 생겨났고, 그 望 族들은 동일한 姓氏를 가진 또 다른 집단과 자신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本據地가 있는 郡 단위의 地名을 姓氏와 함께 칭하였는데, 이 것이 바로 郡望의 기원이 되었다고 말하였다. 또, 이처럼 자신이 속한 氏 族을 밝히는데 있어 姓氏와 함께 郡望을 칭하는 관행은 이후 중국 사회 에 하나의 社會的 制度 로 자리 잡게 되었고, 그 관행이 社會的 制度 로 자리 잡은 이후로는 그들이 郡望 지역이 아닌 다른 지역에 世居하게 되 더라도 그들은 그들이 속한 氏族을 밝히는데 있어 언제나 郡望을 칭하였 이상에서 필자는 지방 통치 단위로서의 다고 언급하였다. 本貫制度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제는 이에 관해서 살펴보 도록 하자. 일반적으로 전통기 시기 한국의 학자들은 한국의 本貫制度가 중국의 郡望制度와 유사하다고 생각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학자가 앞서 언급하였던 李圭景(1788~?)이다. 앞서 소개하기도 하였지만, 李圭景은 그의 저서 五洲衍文長箋散稿 에서 (역사적으로 氏族制度가 발전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하나의 族 안에서 여러 개의 姓이 생겨나고, 하나의 姓 안에서 여러 개의 望이 생겨나며, 또다시 하나의 望에서 여러 개의 房이 생겨난다. 氏族制度의 발전 과정이 이와 같기 때문에 하나의 族 안에 姓 이 많아지게 되면 그 族의 의미는 약해지게 되고, 하나의 姓 안에 望이 많아지게 되면 그 姓의 의미 또한 약해지게 되며, 또 하나의 望 안에 房 이 많아지게 되면 그 望의 의미 역시 약해지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氏 族制度가 발전하는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必然之勢이기도 하다 라고 하 였는데, 그는 이와 같이 말하고 나서 중국의 郡望을 한국의 本貫과 비교 그럼 한국의 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望이란 하나의 氏族을 지칭하는 명칭이다. 예를 들어, 중국 심으로-, 대동문화연구 81집,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3.도 참 고하길 바란다. 中國의 郡望制度와 韓國의 本貫制度 비교 95
李氏의 경우 隴西 지역을 望으로 삼는 이들이 있는데, 이 隴西 望 名稱이 된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이 望을 本이라 불렀다. 예를 들어, 李氏의 경우 全州 지역을 本으로 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 全州 가 바로 本의 名稱이 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本은 혹 貫이라고도 칭하는 데, 이 貫의 의미는 鄕貫을 의미한다. 이 本은 속칭 姓鄕이라고도 하고 또 籍이라고도 불린다. 에 존재하는 가 바로 의 20) 李圭景이 말하고 있는 望 과 本 이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본고에서 살펴보고 있는 郡望과 本貫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 唐나라 皇 室의 姓氏로 알려진 隴西李氏와 한국 조선 王室의 姓氏인 全州李氏를 예 로 하여 살펴보면, 隴西李氏의 隴西나 全州李氏의 全州는 모두 하나의 氏族임을 표현하기 위한 符號(-물론 李圭景은 이를 名 즉 名稱으로 칭 하였다)들인데, 중국에서는 이를 望 이라 부르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本 이라 부르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리고 현대에 이루어진 수도인 本貫에 관련된 연구 성과 가운데에는, 신라의 慶州에 살던 貴族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지방으로 내려가 그 지 역의 유력한 가문으로 성장하게 되고 그들이 고려의 건국과 동시에 고려 開城으로 모여들게 되면서 한국 사회에 本貫이 출현하게 되었 다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견해는 일찍이 宋俊浩에 의해 제기된 것으로, 그는 그가 한국 사회에서 氏族이 출현한 시기를 고려 건국 이전으로 보 의 수도인 는 이유를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新羅王京에 있었던 同族 집단, 예컨대 王室系인 朴氏나 金氏 또는 貴族姓으로 알려진 李, 崔, 孫, 鄭, 裵, 薛 등 諸 姓氏의 同族 집 단:安註) 중에서는 여러 가지 理由로 王京을 떠나 각 地方 예컨대, 密陽이 니 尙州니 또는 江陵이니 善山이니 하는 지역으로 내려가 그곳에 정착하고 그곳에서 世居하는 자들이 나타났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들 중에는 그 지방 의 有力家門으로 成長한 자들이 分明히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들에게는 그 地方名이 붙여진 호칭 즉, 密陽朴氏니 尙州朴氏니 또는 江陵 金氏니 善山金氏니 하는 호칭이 생겼을 것이다. 말하자면 종전에 다 같이 20) 李圭景, 五洲衍文長箋散稿 人事篇1 人事類2 氏姓 姓氏譜牒辨證說 篇. 望卽氏之名 如中原李姓望隴西 則隴西爲望名 我東以望爲本 如李姓本全 州 則全州爲本名 本或稱貫 卽鄕貫也 俗稱姓鄕 又曰籍. 저들 각 집단(- 즉 96 역사와 경계 98(2016.3)
王京人이었던 朴氏 또는 金氏들 사이에서 分籍의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21) 이어 그는 한국의 氏族史에 있어 고려 왕조의 출현은 중요한 전환점을 가져왔다고 하면서 그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慶州 起點 地方으로 향하여 進行되었던 主要氏族 移動 慶州 地方으로부터 新 王都 開城 을 향해서 모여드는 方向으로 전환하였다는 점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물론 開城을 향해서 진행된 새로운 方向의 그 移動은 어느 지방의 어느 氏 族에 있어서나 그 氏族 構成員 중의 극소수 인원이 新王朝의 統治機構에 참여할 기회를 얻어 올라가는 그러한 方式의 것이었지만 그 移動이 계기가 되어 이제는 각 地方의 여러 氏族, 특히 여러 望族들의 대표가 開京에 모여 들게 되었고 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기반을 다지고 그곳에서 世 居하게 되었다. 그러나 위의 移動에는 分籍이 수반되지 않았으며 이 점에 있어서도 高麗가 출현한 10世紀初는 韓國 氏族史에 있어서 큰 分岐點이 된 그때까지 를 으로 하여 그곳에서 각 들의 이 이제는 를 포함한 각 다고 생각한다.22) 慶州에 世居하던 貴族들 사이에는 朴氏니 金 氏니 하는 姓氏를 사용하는 집단이 있었는데 이들 사이에서 分封이나 여 그에 따르면, 신라 시기 타의 정치적인 이유로 지방으로 내려가 살게 되는 사람이 생겨났다. 그 리고 지방으로 내려간 慶州 출신의 貴族들 사이에는 그 지방의 유력한 가문으로 성장한 이들이 있었다. 그 결과 그들에게는 그들이 살고 있는 地名이 붙여진 호칭, 즉 密陽朴氏니 尙州朴氏니 또는 江陵金氏니 善山金氏니 하는 호칭이 생겨났다. 그리고 한국의 氏族史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두고 分籍 이라 부르고 있다고 그는 소개하고 있다. 또, 이러한 방식으로 생겨난 氏族들은 고려가 건국된 이후 다시 開城 지역의 宋俊浩, 韓國의 氏族制에 있어서의 本貫 및 始祖의 問題 朝鮮社會史硏究 101면, 一潮閣, 1987. 22) 宋俊浩, 韓國의 氏族制에 있어서의 本貫 및 始祖의 問題 朝鮮社會史硏究 107면, 一潮閣, 1987. 宋俊浩는 朝鮮社會史硏究 에서 이상의 내용은 1983년의 國際 세미나에서 말한 대목 이라고 밝히고 있다. 1983년의 國 際 세미나 는 1983년 9월 내장산에서 개최된 국제 세미나 A Conference 21) on Korean Society로 생각된다. 中國의 郡望制度와 韓國의 本貫制度 비교 97
王都로 모여들게 되었고 그들 사이에는 그곳에서 世居하 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하지만 開城에 정착한 氏族의 구성원들 사 이에서는 더 이상 分籍의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고려 왕 조가 출현한 10세기 초는 한국 氏族史에 있어서 큰 분기점이 된다고 그 이라는 새로운 는 말하고 있다. 이상에서 宋俊浩가 밝힌 本貫의 출현 배경과 앞서 方東樹가 말한 郡望 의 출현 배경을 비교해 보면, 우리는 이 두 사람의 견해에 하나의 유사 方東樹는 漢나라 초기 실시된 이민 정 책으로 인해 關中 지역으로 이주한 지방 출신의 豪族들 사이에서 郡望이 출현하였다고 이해하고 있으며 宋俊浩는 신라의 慶州에 살던 貴族들이 지방으로 내려가 유력한 가문으로 출현하게 됨과 동시에 本貫이 생겨났 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다고 본다는 점에서, 이 두 사람이 이해하고 있는 그 역사적 배경에는 차이가 있지만, 郡望과 本貫 모두 국가가 制定 分配한 것이 아니라 동일 姓氏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를 구분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 한 게 생겨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두 사람 모두 동일한 입장 을 취하고 있다.23) 여하튼, 통일 신라 시기 이후 고려 건국까지 일련의 역사적 과정을 거 本貫은, 중국의 郡望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의 社會的 制度 로 변하여 갔다. 필자가 하나의 社會的 制度 로 변 하여 갔다 라고 말하는 의미는 이전까지는 某 지역의 某氏 와 같이 사회 관습으로 칭해지던 호칭이 이제는 社會的으로 制度化 되었다는 뜻으로, 예를 들면 자신이 소속된 氏族을 밝힐 때에는 以本貫冠其姓 하는 방식으 로 그들의 姓氏와 함께 반드시 本貫을 칭하게 되고 또 戶籍과 같은 문서 에서 자신의 身上을 밝힐 때에도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과 함께 반드시 치면서 출현하기 시작한 한국의 史學界 本貫制度 土姓 制度 起源 土姓 分定 說 韓國 本貫制度 起源 土姓 分定 說 世宗實錄地理志 制定 分配 安光鎬 韓國 本貫 土姓 分定 說 安光鎬 土姓 分定 說 23) 현재 한국 에는 한국의 가 고려 초기 국가에서 하 였다고 하는 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필자는 이러한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에 관해서는, 의 과 에 대한 검토- 에서 언급된 중국 역사 관련 내용을 중심으로- 전북사학 44호, 전북사학회, 2014.;, 의 과 에 대한 검토- 에서 언 급된 관련 내용을 중심으로- 전북사학 45호, 전북사학 회, 2014.를 참고하길 바란다. 98 역사와 경계 98(2016.3)
本貫을 기록하게 되는 걸 가리킨다. 그리고 본고에서는 이 本貫制度의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보기 위하여 한국 사회에서 전통기 시기부터 현재까지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는 南陽 洪氏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南陽洪氏는 크게 唐洪系 와 土洪系 로 나누 어지는데, 唐洪系 는 唐나라에서 건너온 洪學士 (-이름을 天河 라고도 칭한다)의 후예로 알려진 洪殷悅을 始祖로 하는 이들이고 土洪系 는 고 려 高宗 때 金吾衛別將을 지낸 洪先幸을 始祖로 하는 사람들이다. 본고 에서는 이 두 개의 南陽洪氏 가운데 唐洪系 를 주로 살펴보고자 한다. 南陽洪氏 唐洪系 역시 중국의 淸河崔氏가 그러했듯이, 그 안에 수많 은 支派가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은 요 근래 간행된 그들의 族譜에서도 확인이 되는데, 그 族譜에 나오는 내용을 표로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支派 南陽君派 文正公派 判密直公派 判中樞公派 代言公派 <표 4> 南陽洪氏의 支派24) 支派 侍中公派 侍郞公派 尙書公派 繕工監令公派 益山君派 支派 唐城君派 經歷公派 司諫公派 中郞將公派 禮史公派 南陽洪氏 唐洪系 가운데에서도 南陽君派에 속한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최근에 간행한 한 族譜를 참고하여 작성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南陽洪氏 唐洪系 안에 존재하는 支派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南陽君派 族譜에서 언급된 支派들 이외에도 역사상 다른 支派들이 얼마 든지 있을 수 있다는 사실과, 또 그 族譜에서 언급된 支派라 하더라도 그 支派 안에는 수많은 하위 단위의 支派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 선적으로 전제해 두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이 南陽君派 族譜에서는 <표 4>는 24) 南陽洪氏南陽君派大宗中會 編, 南陽洪氏南陽君派世譜, 2004. 이 南陽洪氏南陽君派世譜 에는 <표 4>에 나와 있는 15개의 支派 이외에도 宰臣公派가 소개되어 있다. 하지만 宰臣公派는 南陽洪氏南陽君派世譜 가 편 찬되기 이전에 缶林洪氏로 分籍되었다. 中國의 郡望制度와 韓國의 本貫制度 비교 99
南陽君派에 속한 구성원을 38개의 支派(-이 南陽君派 族譜에서는 이를 두고 門中이라 칭하였다)로 다시 나누고 있다. 그리고 南陽君派는 南陽君 洪澍(?~1342)를 派祖로 하는 사람들이다. 洪澍는 南陽洪氏 唐洪系 의 始祖인 洪殷悅의 12대손으로, 고려 말기에 활동하였던 洪奎(?~1316)의 손자이자 洪戎(생몰년 미상)의 아들이다. 현 재 이 南陽君派는 오늘날 南陽洪氏 唐洪系 안에 존재하고 있는 여러 支 派들 가운데 가장 큰 支派로 알려져 있으며, 또 조선 시대 동안에도 唐洪 系 안에서 가장 많은 文科及第者와 官職者를 배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洪澍의 할아버지인 洪奎는 슬하에 1남 5녀를 두 었다. 그 중 아들은 앞서 언급한 洪戎으로 관직이 判三司事에 이르렀고, 셋째 딸은 忠宣王의 妃인 順和院妃(생몰년 미상)이며, 다섯째 딸은 忠肅 王의 妃인 明德太后(1298~1380)이다. 특히 明德太后는 그의 아들이 뒤 에 忠惠王과 恭愍王이 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또, 洪澍의 아들 가운데에 는 洪徵(?~1388)이 있었다. 洪徵은 고려말 權臣으로 알려진 廉悌臣 (1304~1382)의 사위이자 廉興邦(?~1388)의 妹弟이다. 그래서 그는 廉 興邦이 禑王과 李成桂 일당에 의해 제거될 때 廉興邦의 族黨이라는 이유 로 그의 세 아들 洪尙濱, 洪尙溥, 洪尙淵과 함께 처형되기도 하였다. 앞서 필자는 南陽洪氏 唐洪系 와 그 唐洪系 의 한 支派인 南陽君派 안에는 수많은 하위 단위의 支派가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였는데, 이 많 은 支派 가운데에서도 洪春卿(1497~1548)의 후손들이 가장 잘 된 것으 로 알려져 있다. 洪春卿은 앞선 언급한 바, 洪徵이 처형될 때 함께 처형 된 3명의 아들, 그 3명의 아들 가운데 둘째 아들인 洪尙溥의 5대손으로, 이 洪春卿의 후손들 구체적으로는 그의 세 아들 洪天民(1526~1574), 洪 逸民(1531~1586), 그리고 洪聖民(1536~1594)의 후손들이 역사적으로 가장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南陽洪氏의 구성원 가운 데 조선 시대 동안 文科에 급제한 인물이 모두 323명으로 알려져 있는 데, 그 중 100명의 인물(-洪天民의 후손이 23명, 洪逸民의 후손이 50명, 그리고 洪聖民의 후손이 27명이다)이 이 세 사람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통해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이 100명의 명단은 <부록 5> 南 25) 25) 위 100 文科及第者의 수에 관해서는 (Wagner-宋 文科프로젝트)文科譜 의 내 역사와 경계 98(2016.3)
陽洪氏 春卿 系 文科及第者 를 참고하길 바란다) 이 洪春卿의 후손들은 조선 시대 동안 주로 京畿道 積城縣 南面 湘水 里(-오늘날 京畿道 楊州市 南面 湘水里)와 京畿道 驪州牧 金沙面 梨浦里 (-오늘날 京畿道 驪州市 金沙面 梨浦里)에 世居하였는데, 洪春卿의 세 아 들 가운데에서도 큰 아들인 洪天民의 후손과 둘째 아들인 洪逸民의 후손 들은 湘水里에, 그리고 셋째 아들인 洪聖民의 후손들은 梨浦里에 世居하 였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의 학자인 成海應(1760~1839)은 그의 저서 硏經齋全書 에서 湖中(-京畿道와 忠淸道:安註) 지역에는 사대부들이 世 居하는 곳이 많다 라고 밝히고 그 사대부들의 世居地를 하나하나 소개하 면서 積城之湘水村(-그 가운데에서도 역말[驛村]:安註) 을 今爲洪氏所 居 라고, 그리고 (驪州의) 梨湖 (-梨湖는 梨浦의 별칭임)를 今爲洪氏 物 이라고 말하고 있다. 洪春卿의 후손들이 湘水里에 정착하게 된 경위는 洪春卿의 高祖인 洪 智(생몰년 미상)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洪智는 고려 말에 화를 당한 洪徵의 손자이자 洪尙溥의 아들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러한 사실은 洪聖民이 작성한 慕遠錄 에서도 확인된다. 洪聖民은 慕遠錄 에 서 洪智를 자신의 5대조라 밝히고, 5대조는 고려 조 壽延大君 王珪의 26) 사위로, 조선 왕조가 건국된 후로 아주 힘든 역경을 견뎌야 했다 그리고 5대조와 그 부인 王氏는 모두 積城 湘水驛 북쪽에 있는 松山 기슭에 묻 宋 文科 文科譜 宋萬午 成海應 硏經齋全書外集 卷 雜記類 名塢志 篇 成海應 名塢志 篇 序文 進則仕於朝 退則耕於野者 士之常分也 苟或狃於利而忘返 則有懷祿苟寵 之誚 安於固而不出 則有違親絶俗之譏 君子之仕與耕 要以蹈於義而中 於節爾 今之士多世室之裔也 義當與國家同休 豈能屛跡山林 鞱名江湖 以自絶於世也哉 然簪組軒冕 要非治生養性之資 苟欲養鷄牧豕 躬耕自 適 如徐孺子龎德公之倫者 亦不當遠離於京師 是故湖中多士大夫所居 故余記名塢特詳之 積城之湘水村 에 대해서는 在縣南二十七里 積城卽新羅七重城也 匏盧河 紺 岳山互相映帶 而淸秀之氣 蘊于湘水驛村 故多名墓佳基 而今爲洪氏所居 라, (驪州의)梨湖 에 대해서는 距州治二十里 長江自巽入艮 橫帶于前 東南之野 甚曠遠 村人專仰舟楫商販以代農 其贏優於耕作 始爲韓氏所有 今爲洪氏物 이 용을 참고하였다. (Wagner프로젝트) 를 필자가 이용할 수 있도록 제공해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26), 64. 은 의 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라 소개하고 있다. 中國의 郡望制度와 韓國의 本貫制度 비교 101
혀 있다 고 기록하고 있다. 또 그는 며, 5대조의 묘지는 본래 월경에 洪智와 王氏 부인의 墓表를 인용하 湘水가 아닌 다른 지역에 있었는데 1438년 9 湘水로 이장하여 왔다. 하지만 그 묘지가 본래 어느 곳에 있었는 지 또 어느 곳에서 현재 이곳으로 이장하여왔는지는 알지 못 하겠다 고 밝히고 있다.27) 南陽洪氏 집안에는 이 洪智의 묘지가 湘水로 오게 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그 전설에 따르면, 洪智는 고려 말에 할아버지와 아버지 또 현재 3형제가 모두 화를 당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고 또 조선 조에 들어 자 姻戚이라는 이유로 핍박을 당하게 되자 점차 세상 일을 멀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사후에 오늘날 東九陵 일대(-경기도 신조차도 고려 왕실의 구리시 인창동 일대)에 묻히게 되었는데 조선 왕실의 요구로 그곳을 떠 湘水로 오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 왕실에서는 그에 대한 답례로 湘水 일대를 그의 후손들에게 下賜하였다. 이후 洪智의 후손들이, 그 중에서도 洪智의 둘째 아들 洪敬孫과 洪敬 孫의 셋째 아들 洪閏德으로 이어지는 후손들이 湘水에서 살게 되었다.(洪 閏德은 洪春卿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리고 그 이후로는 洪 春卿, 그의 아들 洪天民과 洪聖民, 그리고 洪天民의 아들 洪瑞鳳 (1572~1645)이 3대에 걸쳐 이른바 賜暇湖堂 을 하게 되면서 세상에 3 代4湖堂 집 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또 그 이후로도 宣祖와 光海君 대에 文章으로 이름을 떨쳤던 洪命元(1573~1623)과 丙子胡亂 당시 강화도에 서 金尙容과 함께 殉節한 것으로 유명한 洪命亨(1581~1636) 형제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이 집안은 조선 시대 동안 세상이 알아주는 門閥 이 되었다. 그리하여 세상에서는 이들이 世居하는 곳의 地名을 따라 이 들을 湘水洪氏 라 칭하게 되었다. (-이 湘水洪氏는 京畿道 積城縣 南面 나 28) 洪聖民, 拙翁集 卷9 10, 慕遠錄 篇. 洪智의 묘지에 관련된 관련 내용을 소 개하면 아래와 같다. 祖考妣(-洪聖民의 5代祖考妣 즉 洪智와 開城王氏)之塋 同在積城湘水驛 北松山麓 其墓表曰 直長某 戊午(-1438년 즉 세종 20년)九月初九日移 葬 今未知移自何地 王氏 天順己卯(-1459년 즉 世祖 5년)九月二十七日 葬云. 28) 湘水 지역과 湘水洪氏는 조선 시대 동안 많은 이들에 의해 언급되었는데, 이 를 통해서도 조선 사회에서 그들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湘水 지역과 湘 27) 102 역사와 경계 98(2016.3)
湘水里에서도 역말[驛村]에 世居하였다) 그리고 이 湘水洪氏의 구성원 가운데 일부는 湘水를 떠나 驪州 梨浦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洪春卿의 셋째 아들 洪聖民의 후손들로, 그들이 언제 어떠한 경위로 梨浦로 이주하게 되었는지는 현재로서 정확히 알 수 없으 나, 아마도 그들은 洪聖民의 손자인 洪命耈(1596~1637)와 관련하여 梨 浦로 이주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洪命耈는 丙子胡亂 당시 淸나라 군대 에 맞서 싸우다 殉節한 인물로 유명한데, 그가 殉節한 이후 조선 왕실에 서는 그의 忠節을 기려 梨浦에 있는 沂川書院에 그를 배향하였다. 그리 고 그의 후손들은 梨浦 일대를 賜牌地로 下賜받았다고 한다. 이 梨浦에는 洪氏들이 거주하기 이전에 韓氏들이 살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앞서 언급한 成海應에 의해서도 확인이 되는데, 成海應은 그의 저서에서 큰 강이 남동쪽에서 흘러와 북동쪽으로 흘러가면서 마을 앞을 감싸고 있고, 마을의 남동쪽으로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마을 사람 들은 농사를 짓는 대신에 오로지 배를 이용한 상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그 상업에서 나오는 이윤이 농사를 짓는 것보다 더 크다. 이 마을은 본래 韓氏 소유였으나 지금은 洪氏가 차지하고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硏 經齋全書 의 내용을 인용한 주석 26번 참고) 成海應이 말하는 韓氏는 韓蘭을 始祖로 하는 淸州韓氏로, 睿宗과 成宗 대에 모두 功臣으로 책봉된 韓繼禧(1423~1482), 이 韓繼禧의 玄孫인 韓 亨吉(1582~1644)과 그 후손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이 梨浦 29) 水洪氏를 언급한 사람으로는, 앞서 언급한 成海應 이외에도, 兪拓基(1691 1767)을 들 수 있다. 兪拓基는 그의 자손들에게 遺言을 남기면서, 葬事를 지낼 때에는 헛되이 風水說을 따르지 말고 族山이나 族山에서 가까운 곳에 葬事를 지낼 것 을 당부하였다. 그러면서 廣州의 궁말[宮村]李氏 先山과 積 城의 湘水洪氏 先山을 본받을 것을 말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兪拓基, 知守 齋集 卷15 雜著 遺戒 篇을 참고하길 바란다. 29) 安鼎福, 順菴集 卷27 司憲府執義贈吏曹參議漫隱韓公行狀 篇. 壬戌 捨京第 卜居于原州梨湖 卽叅判公桑梓鄕也.( 漫隱 은 韓垽의 號를, 壬戌 은 1682년을, 原州梨湖 는 驪州 梨浦를, 叅判公 은 韓垽의 아버지 韓亨吉을 말한다.) 참고로, 韓亨吉의 8촌인 韓孝仲, 韓孝仲의 5대손인 韓命輿, 韓命輿의 손자 韓商新은 文科 及第 당시 그들이 驪州에 살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또, 洪命 耈의 아들인 洪重普, 이 洪重普의 딸 가운데 한 사람이 韓孝仲의 손자인 韓 中國의 郡望制度와 韓國의 本貫制度 비교 103
金安國(1478~1543)의 별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金安 國은 이곳에서 후학들과 함께 학문을 논하였고, 이로 인해 驪州 지역의 儒生들은 梨浦에 沂川書院을 지어 그의 學德을 추모하였다. 그리고 이 후 이 沂川書院에는 丙子胡亂 때 殉節한 洪命耈가 배향되기도 하였다. 梨浦에 정착한 洪氏들은 이후 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조선의 1급 門 閥 로 알려지게 되었고, 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梨浦洪氏 라 부르게 되었 다. 이 梨浦洪氏는 10대에 걸쳐 다섯 명의 宰相을 배출한 것으로 유명한 데, 洪聖民의 손자로 顯宗 대에 領議政을 지낸 洪命夏(1607~1667), 洪 聖民의 曾孫으로 顯宗 대에 右議政을 지낸 洪重普(1612~1671), 洪重普 의 손자로 英祖 대에 領議政을 지낸 洪致中(1667~1732), 洪致中의 7대 손으로 高宗 대에 領議政을 지낸 洪淳穆(1816~1884), 그리고 甲申政變 당시 右議政을 한 洪英植(1855~1884)이 바로 그들이다. 또 洪重普의 아 들인 洪得箕(1635~1673)은 孝宗의 딸이자 顯宗의 누이인 淑安公主를 아내로 맞이하기도 하였다. (-梨浦洪氏는 京畿道 驪州牧 金沙面 梨浦里 에는 30) 31) 에서도 뒷골에 세거하였다.) 南陽君 洪澍의 후손이라고 하더라도 즉 南陽郡派에 속하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湘水洪氏나 梨浦洪氏와 달리, 저 멀리 全羅道 任實 과 南原으로 내려가 살게 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洪澍의 曾孫이자 洪智의 아우인 洪陟(생몰년 미상)의 후손들이다. 洪陟의 아들인 洪演 그리고 같은 如愚와 혼인하였다. 金安國 30) 이 梨浦에 泛槎亭 이라는 별장을 지었다는 사실은 그의 문집인 慕齋 集 을 포함한 많은 역사 문헌에서 확인이 되는데, 그 중 대표적으로 申光漢 (1484~1555)이 지은 泛槎亭記 에 나오는 내용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或有問槎之說者曰 槎桴屬 乘之可以濟 昔漢有張騫者 嘗乘此以使西域 故 後世稱使者 遂爲之乘槎 今也有舊宰相金公安國罷官于朝 旣不得爲時所用 則作亭于梨湖之陰 命以泛槎 亦何取於此哉.(申光漢, 企齋文集 卷1 泛 槎亭記 ) 31) 梨浦 지역과 梨浦洪氏 역시, 湘水洪氏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조선 시대 동안 많은 사람들에 의해 언급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丁若鏞(1762~1836)이 다. 丁若鏞은 그의 아들들에게 故家世族 은 모두 名勝地를 점유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그 대표적인 집안으로 渼陰金氏, 궁말李氏, 金灘鄭氏와 함께 梨浦洪氏를 예로 들고 있는데, 이러한 기록에서도 梨浦洪氏가 조선 사회에서 차지하는 지위를 알 수 있다. 이에 관해서는 丁若鏞, 與猶堂全書 1集 卷 18 示二子家誡 篇을 참고하길 바란다. 104 역사와 경계 98(2016.3)
號 湖隱)은 端宗이 왕위에서 쫓겨나자 스스로 관직을 버리 고 京畿道 楊州 일대에 은거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 洪休(1426~1492) 는 막내 아들 洪孝宗(1468~1526)을 데리고 그의 妻家인 保安韓氏의 田 庄이 있는 오늘날 全羅北道 任實郡 靑雄面 가랏[柯田]으로 낙향하였다. 그 후 洪休의 손자인 洪碩舫(1508~1594)은 文科에 及第하여 原州牧使 를 역임하였고, 또 洪碩舫의 아들 洪鵬(1539~1597)은 學行이 뛰어나 任 實 鶴亭書院에 배향되기도 하였다. 또 洪休의 8대손인 洪濟明(1678~1753)은 任實 가랏을 떠나 오늘날 全羅北道 淳昌郡 赤城面 槐亭里(-南原府 東溪面 槐亭里)에 살게 되었다. 그가 槐亭에 살게 된 계기는 그의 外家인 廣州李氏가 槐亭에 살고 있었 기 때문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洪濟明이 槐亭에 들어가 살기 얼마 전 槐亭 일대에는 극심한 전염병이 돌았고 이로 인해 廣州李氏들은 槐亭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洪氏 一家가 槐亭에 들어가 살 (1403~1458, 게 되었다. 洪濟明의 外祖는 李必芳(1632~1687)인데, 이 李必芳은 世祖 대에 右 議政을 지낸 李仁孫(1395~1463)의 아들이자 李克墩(1453~1503)의 형 인 李克堪(1427~1465)의 6대손이다. 그리고 李必芳의 曾祖 李有慶 (1497~1558)은 宣祖 대에 領議政을 역임한 李浚慶(1499~1572)의 사촌 이다. 하지만 李有慶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李浚慶의 아들인 李德 悅(1534~1599)이 李有慶에게 養子로 들어가게 되었다. 앞서 필자는 槐 亭에 사는 廣州李氏들이 槐亭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다고 하였는 데, 그들이 이주해 간 곳 중에 하나가 오늘날 南原市 德果面 新陽里 사 립안[扉村]이다. 그리고 이 사립안에 사는 廣州李氏들은 조선 시대 동안 이 李浚慶을 顯祖로 내세우며 南原 지역에서 1급 兩班 으로 행세하였던 사람들이다. 廣州李氏들이 槐亭에 들어가게 된 계기는 南原楊氏와의 婚姻 관계 에 의해서였다. 李必芳의 아버지인 李士獻(1598~1665)는 南原楊氏 楊時 晉(1573~1615)의 사위가 되었는데, 이 楊時晉은 進士와 文科에 급제하 고 司憲府 持平과 司諫院 正言을 역임하는 등 장래가 총망 받는 사람이 다. 하지만 光海君 대에 綾昌君 逆謀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를 가던 중 또 中國의 郡望制度와 韓國의 本貫制度 비교 105
楊時晉의 집안은 고려 말 이래로 오늘날 全羅北道 淳昌郡 東溪面 龜尾里에 대대로 살아오고 있는 사람들로, 조선 시대 동안 京鄕 간 이른바 名門들과 婚姻이 많이 이루어진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楊 時晉, 그 아버지 楊士衡(1547~1599), 그 할아버지 楊洪(1508~1564), 그리고 그 曾祖 楊公俊(1484~1525)이 모두 文科에 급제하고, 또 楊時 晉, 楊時遇(1563~1638), 楊時鼎(1567~1633) 4촌 3명이 모두 文科에 사망하였다. 급제하면서 세상에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32) 京畿道 楊州에 살던 南陽洪氏가 全羅 道 任實 가랏으로 이주하고 또 가랏에 살던 南陽洪氏가 南原 槐亭으로 이야기가 다소 복잡해진 듯한데, 이주할 수 있었던 주요한 계기는 이들이 그 지역에 거주하는 유력한 가 婚姻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南陽洪氏들은 全 羅道에 내려 온 이후, 앞서 언급한 廣州李氏나 南原楊氏 이외에도 全羅 道 지역의 유력한 가문, 예를 들면 壬辰倭亂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高敬 命(1533~1592) 집안인 長興高氏, 壬辰倭亂과 丁酉再亂 때 全州城을 지 킨 李廷鸞(1529~1600) 집안인 全義李氏, 扶安 下西面 晴湖里에 世居하 며 4대가 내리 功臣에 책봉된 濟州高氏, 그리고 崔 盧 安 李 로 알려 진 南原 지역의 양반, 朔寧崔氏 豊川盧氏 順興安氏 全州李氏 등 全羅 道 지역의 유력한 가문들과 계속해서 婚姻을 맺게 된다. 그리고 任實 가랏에 살던 南陽洪氏 가운데에는 槐亭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이주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洪濟明의 叔父인 洪錫疇(1663~1725)의 후손들이었다. 그들은 지금은 저수지가 만들어져 수몰되어 버린 全羅北 道 任實郡 雲岩面 텃골[基洞]에 살았는데, 그들은 텃골에 정착한 이후 만석군 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富를 가지게 되었고 高敞의 蔚山金氏와 같은 全羅道 일대의 富豪들과 교류를 하였다. 그리하여 세상에서는 槐亭 에 사는 南陽洪氏를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地名에 따라 槐亭洪氏 라 부르듯이, 이들 또한 텃골洪氏 라 부르게 되었다. 南陽洪氏 唐洪系 는 唐나라에서 건너 온 洪學士 의 후예라고 생각하 문들과 며 살았던 사람들과 또 그렇게 믿으며 현재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가 32) 남원양씨의 역사에 관해서는 전경목 외, 육백년을 지켜온 한성받이 마을(한 국의 전통 마을 9, 전북 순창군 동계면 귀미리), 한국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 1997.을 참고하길 바란다. 106 역사와 경계 98(2016.3)
洪學士 는 唐나라에서 동쪽으로 건너 온 이후에 南陽이라는 곳에 정착하였는데, 이 南陽이라는 곳은 오늘날 京畿道 남서부 일대, 좀 더 구체적으로는 오늘날 京畿道 華城市 南陽邑 일대를 가리킨다. 물론 洪學士 가 南陽에 정착한 이후 南陽이라는 地名은 역사 속에서 置廢를 리킨다. 이 거듭하였고 또 지방 통치 단위로서의 위상도 일정하지 않았지만, 역사상 京畿道 남서부 일대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洪學士 가 南陽에 정착한 이후 그곳에서 생활하던 그의 후손들 가운 데에는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南陽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사람 들이 생겨났다. 南陽을 벗어나 다른 곳에 정착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고 려의 수도인 開城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크게 활약한 사람도 있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南陽洪氏 唐洪系 의 始祖로 알려진 洪殷悅이다. 그리고 洪殷悅의 후손들은 대대로 開城에 살게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언제나 오늘날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와서는 새로운 왕조의 탄생 과정 속에서 커다란 시 京畿道 積城縣 南面 湘水里 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湘水里에 살던 南陽洪氏 가운데 일부는 또 다시 湘水里를 떠나 京畿道 驪州牧 金沙面 梨浦里에 거주하게 되었다. 또 開城에 거주하던 洪殷悅의 후손 가운데에는 조선 왕조의 건국과 함 께 漢陽 인근으로 오게 된 사람들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사람 들 가운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漢陽 인근을 떠나 지방으로 내려가 살 게 되는 사람이 생겨났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端宗이 왕위에서 쫓겨나자 그 不義함을 보지 못하고 楊州로 은둔한 洪演과, 또 楊州에서 저 멀리 全羅道 任實 가랏으로 옮겨 간 洪休 父子이다. 그리고 가랏에 정착한 洪休의 후손 가운데에는 또다시 가랏을 떠나 다른 곳에 정착하는 이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앞서 살펴본 槐亭洪氏와 텃골洪氏가 그 대표 련을 겪게 되었고 그 자손들 가운데 일부가 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표 5> 南陽洪氏 南陽君派 世居地 世居地 오늘날 위치 비정 京畿道 積城縣 南面 湘水里 京畿道 楊州市 南面 湘水里 京畿道 驪州牧 金沙面 梨浦里 京畿道 驪州市 金沙面 梨浦里 全羅道 任實縣 玉田面 가랏[柯田] 全羅北道 任實郡 靑雄面 玉田里 가랏[柯田] 中國의 郡望制度와 韓國의 本貫制度 비교 107
全羅道 南原府 東溪面 槐亭里 全羅北道 淳昌郡 赤城面 槐亭里 全羅道 任實縣 下雲面 텃골[基洞] 全羅北道 任實郡 雲岩面 텃골[基洞] 洪學士 가 南陽에 정착한 이후 南陽에 거주하던 洪氏들 가운데 南陽 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언제부터 생겨나게 되 었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들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 지금으로부터 최소한 1천 년 전에는 이미 南陽을 떠나 다른 지역에 정착 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전 世居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은 南陽이 아닌 다른 지역에 世居地를 두고 생활을 하더라도 그들의 遠祖가 살았다고 전해지는 南陽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 다시 말 하면, 南陽을 떠나 開城, 湘水, 그리고 梨浦에서 1천 년 이상의 시간을 보냈다고 하더라도, 또 南陽을 떠나 開城, 楊州, 가랏, 槐亭, 그리고 텃골 국 각지에 흩어져 살게 되었고 그곳에서 에서 1천 년 이상의 세월을 보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들이 소속된 氏族을 밝히는 데 있어 그들의 姓氏와 함께 언제나 南陽을 칭하였다. 그리고 南陽洪氏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현상은 우리가 본고 에서 살펴보았던 淸河崔氏의 역사에서도 찾아진다. 이를 淸河崔氏의 역 사에 비추어 다시 한 번 더 정리해 보면, 漢나라 시기에 崔業이라는 인 물이 淸河 東武城에 정착한 후, 그의 후손들 가운데에는 淸河 東武城을 떠나 歈縣에, 歈縣을 떠나 滎陽에, 滎陽을 떠나 許州 鄢陵에 정착한 사람 들이 있었고, 또 歈縣을 떠나 齊郡 烏水에, 齊郡 烏水를 떠나 全節에 거 주하는 이들이 있었으며, 그리고 淸河를 떠나 靑州와 藍田에 각기 정착 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淸河崔氏가 중국 역사상 門閥士族(-또는 世家大族)으로 존재하는 순간까지 그들이 소속된 氏族을 밝히는 데 있어 淸河를 계속해서 칭하였다. 필자는 앞서 한국 사회에서 本貫이 출현하게 되는 역사적 배경을 이야 기하면서 종전에 다 같이 신라 王京에 살았던 朴氏니 金氏니 하는 사람 들 사이에서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地名에 따라 密陽朴氏니 尙州朴氏 니 또는 江陵金氏니 善山金氏니 하는 호칭이 생겨났고, 이를 한국의 氏 族史에서는 分籍 이라 부른다 는 宋俊浩의 말을 인용하였는데, 南陽洪氏 의 역사와 淸河崔氏의 역사에서 이러한 分籍의 현상을 찾아보면, 南陽洪 108 역사와 경계 98(2016.3)
氏의 경우, 지금으로부터 적어도 1천년 이전에 그들의 조상 가운데 南陽 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특히 開城으로 이주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洪氏라는 姓氏를 가진 또 다른 집단들과 자신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그들 의 姓氏와 함께 南陽을 칭하는 현상 즉 分籍의 현상이 나타났고, 이후 그들이 開城, 楊州, 湘水, 梨浦, 가랏, 槐亭, 그리고 텃골, 그 어디로 이주 하여 살아도 分籍의 현상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으며, 또 淸河崔氏의 경우, 漢나라 시기 그들의 조상 가운데 淸河를 떠나 다른 지역에 정착한 사람을 중심으로 崔氏라는 姓氏를 사용하는 또 다른 집단과 서로를 구분 하기 위하여 그들의 姓氏와 함께 淸河를 칭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그들 이 淸河가 아닌 그 어느 지역에 살아도 門閥士族으로서 그들의 氏族이 중국 사회에 존재하기까지 分籍의 현상은 더 이상 생겨나지 않았다. 이처럼 南陽洪氏와 淸河崔氏가 상당히 오랜 세월 동안 南陽과 淸河가 아닌 다른 지역에 흩어져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서 分籍의 현 상이 나타나지 않은 이유는 무엇보다도 某郡에서 비롯된 著名한 氏族의 후예 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 하나의 社會的 制度 로 그 당시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인데, 이 社會的 制度 가 바꾸어 말해 한국의 本貫制度와 중국의 郡望制度가 그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원인은 그 당시 사회에 門閥을 崇尙하는 社會 風潮가 크게 성 행하였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한국의 本貫制度 나 중국의 郡望制度 모두 門閥을 崇尙하는 社會 風潮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南陽洪氏의 역사와 淸河崔氏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공통 적인 모습은 宋나라 이후 중국 사회에 존재하였던 氏族(-일반적으로 中 國史學界에서는 이 시기의 氏族을 宗族이라 부른다)의 모습, 즉 그들의 遠祖가 살았던 지역의 地名이 아닌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地名과 함 33) 33) 宋俊浩 역시 한국의 本貫制度나 중국의 郡望制度 모두 門閥을 崇尙하는 社 會 風潮의 산물이다 는 점을 언급하였다. 그는 그의 저술 곳곳에서 이러한 점을 언급하였는데, 그 중 대표적인 부분을 제시해 보면, 宋俊浩, 韓國의 氏族制에 있어서의 本貫 및 始祖의 問題 朝鮮社會史硏究 82~90면 96~99면, 一潮閣, 1987.이다. 아울러, 宋俊浩는 중국 사회에서 郡望을 칭하는 社會的 制度를 中國의 本貫 制 또는 中國의 本貫制度 라 칭하였는데, 필자는 그와 달리 郡望制度 라 칭 하였다. 中國의 郡望制度와 韓國의 本貫制度 비교 109
姓氏를 칭하여 그들이 소속된 氏族을 밝히고 또 그렇게 칭해진 氏族 을 分籍(-물론 分籍이라는 용어는 한국의 氏族史에서 쓰이는 용어이다) 된 별개의 氏族으로 간주하는 모습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이를 좀 더 강조해서 말해 보자면, 南陽洪氏의 역사와 淸河崔氏의 역사에서 발견 되는 이상의 모습은 湘水洪氏, 梨浦洪氏, 槐亭洪氏, 그리고 텃골洪氏가 南陽洪氏의 支派가 아닌 南陽洪氏에서 分籍된 별개의 氏族으로 간주되었 을 宋나라 이후 중국 사회의 氏族의 모습과는 氏族의 존재 형태부터가 께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Ⅳ. 결론 淸河崔氏의 역사와 南陽洪氏의 역사를 통하여 중국의 郡望制度와 한국의 本貫制度가 역사상 존재하는 시기는 서로 다르지만 우리는 이상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성격은 참으로 비슷하다는 사실, 어찌 보면 그들을 지칭하는 용어는 서로 다를지 몰라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성격에 있어서 는 그들을 하나의 制度로 간주할 수 있을 정도로 참으로 유사하다는 사 실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는 동안 우리는, 또다시 또 다른 역사적 의문점 하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중국의 郡望制度가 중국 사회에 출현한 이후 唐나라 시기까지 존재하다가 사라 진데 비하여, 한국의 本貫制度는 한국 사회에 그것이 출현한 이후 지금 까지도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럼 어떠한 이유로 또는 어 떠한 역사적 요인으로 인하여 중국 사회에서는 약 1천 년 전에 이미 사 制度가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필자는 이러한 역사적 의문점에 대하여, 앞서 중국의 郡望이 출현하는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기 위하여 언급하였던 淸나라 시기의 학자 方東樹 라진 (1772~1851)의 견해를 다시 한 번 더 소개하면서 그에 대한 해답을 제 方東樹는 자기 집안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자신의 집 안을 魯谼方氏 라 칭하였다. 그가 자기 집안을 魯谼方氏 라 칭한 이유는 그의 조상 가운데 桐城(-오늘날 安徽省 安慶市에 속한 桐城市 일대)에 시해 보고자 한다. 110 역사와 경계 98(2016.3)
魯谼에 정착하였기 때문이다.(실제로 현재 중국 에는 桐城魯谼方氏族譜 가 남아 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집안이 桐城으 로 들어오게 된 과정을 이야기 하면서, 자기 집안은 본래 河南을 郡望으 로 하는 方氏였는데, 隋나라 시대에 歙令 을 역임한 인물이 있어 歙縣에 정착하게 되었고, 이 歙縣에 거주하는 方氏 가운데 일부가 徽州 婺源(徽州는 오늘날 安徽省 黃山市를 말하고, 婺源은 오늘날 江西省 上饒市에 속해 있다)으로 이주하였으며, 그 婺源에 살던 方氏 가운데 일부가 다시 桐城으로 이주해 왔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집안이 본래 河南을 郡望으로 하는 方氏였다는 사실 에 대하여, 지금은 애석하게도 隋唐 이전 시기에 작성된 역사 문헌 속 에서 우리 집안이 河南方氏라는 사실은 확인할 수 없다 라고 말하고, 우리 집안이 河南을 郡望으로 한다는 사실은 (이번에 族譜를 간행하면 처음으로 들어 온 사람이 34) 서는) 그대로 기록해 두도록 하되 (그 사실 여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 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 라고 결론짓고 있다. 또 그는 자신의 先祖 婺源에서 왔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우리 집안은 明나라 洪武 연간에 徽州의 婺源에서 桐城으로 이주해 왔다. 하지만 우리 집안 始遷祖의 선 대에 관련된 기록이 徽州에 살고 있는 方氏들의 族譜에서 확인되지 않는 다 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方東樹가 그의 선대에 관련하여 객 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桐城으로 이주해 온 始遷祖와 그 후대 에 관련된 것일 뿐, 그 始遷祖 윗대에 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었던 것이 가 35) 다. 그리고 方東樹는 오랜 譜學 활동을 통하여 자기 집안뿐만이 아니라 자 기가 보아온 많은 집안들 또한 자기 집안과 같이 그 선대에 관한 기록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중국 氏族 들 사이에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원인을 역사적으로 고찰하기 시 方東樹 考槃集 文錄 卷 族譜序 方東樹 考槃集文錄 卷 族譜序 篇 至今惜乎 吾不得隋唐以前之書而考之以訂其是非 河南之望 則姑存而勿論 可也 吾族自明初洪武間 由徽之婺源遷桐 而 其始遷之祖以上載於徽譜者 不可考 34) 본고의 결론 부분에서 언급되고 있는 의 견해는 그의 문집인 11에 수록되어 있는 의 내용을 바탕으로 필자가 재정리한 것임을 밝힌다. 35), 11. (중략) (중략). 中國의 郡望制度와 韓國의 本貫制度 비교 111
世變 과 書失 을 언급하게 되었다. 그가 말하는 世變 이란 중국 역사상 家系 記錄이 온전하게 전해지지 못할 정 작하였고, 그에 대한 해답으로 도로 사회적으로 커다란 변화가 있었던 시기를 의미한다. 그는 이러한 世變 을 크게 6개의 시기로 구분하고 있는데, 戰國 시대 말기부터 秦나 라가 중국을 통일한 시기가 그 첫 번째요, 漢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지 방의 豪族을 關中 지역으로 이주시킨 시기가 두 번째, 晉나라부터 南北 朝에 이르는 시기가 세 번째, 唐나라 건국 후 새로운 성격의 지배계층이 등장한 시기가 네 번째, 唐나라 말기부터 시작된 5代10國 시기가 다섯 번째, 그리고 南宋 이후 元나라에 이르는 시기가 여섯 번째이다. 또 그가 말하는 書失 이란 이상의 世變 을 거치는 동안 믿을 만한 家 系 記錄이 거의 사라지고 믿지 못할 家系 記錄이 많이 생겨난 것을 가리 킨다. 그에 따르면, 魏나라 시대에는 九品中正制 가 실시되면서 각 州郡 단위에서 家系 記錄을 직접 관리하였고, 그로 인해 이 시기에 작성된 家 系 記錄은 믿을 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魏나라 시대의 관행은 南 北朝 시기 南朝에 존재하였던 晉 宋 齊 粱 시기에도 이어졌다. 하지만 北朝에서는 代北人 들이 그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姓氏를 버리고 漢族이 소유한 姓氏를 취하기 시작하였고, 또 唐나라 시기에 와서도 賜姓 이니, 改姓 이니, 冒姓 이니 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姓氏가 계속해서 생겨나게 되면서, 그 이전부터 전해오던 家系 記錄에는 일대 혼란이 생기게 되었 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개인이 사사로이 작성한, 믿지 못할 家系 記錄이 많이 생겨났다고 方東樹는 말하고 있다. 여하튼, 方東樹는 이상에서 말한 世變 과 書失 로 인해 중국 氏族들은 그 선대를 알 수 없는 만큼 혼란을 겪게 되었고, 이로 인해 중국 사회에는 千年可徵之氏族 이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경우는 달랐다. 다시 말해, 한국 사회는 方東樹가 世變 과 書失 이 중국 사회에 비하여 그 정도가 약했다. 필 자가 그 정도가 약했다고 말하는 이유는, 예를 들면 郡望制度가 크게 성 행하였다고 말해지는 南北朝 시기, 이 南北朝 시기는 몇 십 년을 단위로 말하고 있는 기존의 왕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는 대혼란의 시대였고 그 혼란의 시대 동안 한 개인은 평생 동안 몇 개의 왕조를 섬겨야 하는 경 112 역사와 경계 98(2016.3)
淸河崔氏 崔逞이다. 崔逞은 평생 동 안 前燕, 前秦, 東晉, 翟魏, 後燕, 北魏 6개의 왕조를 섬겼다. 아무튼), 이 우도 많았는데(-그 대표적인 인물이 와 같은 대혼란의 시기가 한국의 역사 속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 고, 또 중국 사회의 경우, 唐나라 말기에 이르러서는 정치적인 면에 있어 서나,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나, 사회적인 면에 있어서나, 그리고 사상적 인 면에 있어서 그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변화가 일어났다고 알려져 있 는데, 전통기 한국 사회에서는 이에 비견할 만한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 기 때문이다. 전통기 한국 사회는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중국 사회에 비하여 그 사회를 비교적 안정적으로 지탱할 수 있었고, 한국의 氏族들 또한 중 氏族들에 비하여 그 家系를 비교적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이를 方東樹의 말과 연관시켜 이야기 해보자면, 조선 시대 동안 내놓으 라 하는 兩班 으로 행세하였던 가문 가운데에는 자기 집안이 밝히고 있 는 本貫이 불확실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나, 또는 자기 집안이 대대 로 살아오고 있는 지역 즉 世居地에 처음으로 정착한 入鄕祖의 선대를 국의 확인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선 시대 柳馨遠(1622~1673)은 우리 나라에서는 (옛날부터) 門閥을 중시하 였기 때문에 氏族들이 으레 자기들의 遠祖의 出身地를 밝혀 그것으로 本 貫을 삼았으며 그리하여 그 子孫들도 비록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그 렇게 하기를 數十 世代 그리고 數百 年 또는 數千 年이 흘렀어도) 그 本 貫을 바꾸지 않았다 고 말하고 있다. 요컨대, 중국의 郡望制度는 그것이 중국 사회에 출현한 이래 단기간 존재하다가 사라진, 다시 말해 門閥을 崇尙하는 風潮가 중국 사회에 성 행하던 짧은 시기 에 존재하다가 사라진 것이었지만, 한국의 本貫制度는 학자 36) 그것이 한국 사회에 출현한 이후 중국의 그것보다도 더 발전된 형태로 36) 柳馨遠의 견해는 그의 저서인 東國輿地志 凡例 篇에 수록되어 있다. 아울 러, 柳馨遠의 견해를 이용한 연구인 宋俊浩, 韓國의 氏族制에 있어서의 本 貫 및 始祖의 問題 朝鮮社會史硏究, 一潮閣, 1987.와 安光鎬, 전통기 韓 中 姓氏制度를 바라보는 두 知識人의 시각-宋나라 시대 鄭樵와 朝鮮 시 대 柳馨遠을 중심으로- 사학연구 113호, 한국사학회, 2014.도 참고하길 바란다. 中國의 郡望制度와 韓國의 本貫制度 비교 113
祖上代代로 전해오는 絶代 不變의 遺産인 양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는데, 그 성격이 참으로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 두 制度가 이처럼 서로 다른 방향으로 변해갔던 이유는 그 두 制度가 각기 기반을 변화하여, 마치 두고 있던 두 사회, 즉 전통기 중국 사회와 동시기 한국 사회가 각기 경 험한 역사적 상황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며 또 각기 다른 역사적 상황 속 에서 형성된 그들의 사회적 성격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114 역사와 경계 98(2016.3)
<부록 1> 元和姓纂 에 나오는 姓氏와 郡望37) 姓氏 郡望 姓氏 郡望 姓氏 郡望 姓氏 郡望 姓氏 郡望 彭城 劉 東陽 下邳 略陽 河東 沛國 相縣 長城 金城 廣平 邯鄲 孫 郭 河東 聞喜 華原 蕭縣 廣陵 扶風 洛陽 彭城 呂縣 汝南 平原 燉煌 潁川 長社縣 宏農 下邳 河間 蠡吾縣 東海 郯州 南陽 堵縣 河間 東海 中山 東陽 昌黎 棘成縣 中山 京兆 新安 東莞 姑幕 陳留 梁郡 河東 桑泉 趙 南陽 穰縣 高平 韓 河東 南陽 沮陽 新安 酒泉 長城 廣陵 陝郡 河北縣 徐 琅琊 京兆 劉 高平 陳 馮翊 廣平 陰城 廬江 汲郡 濮陽 東郡 東菀 姑幕 武當 河東 於潛 范陽 高唐 廣漢 射洪 長平 新豐 長樂 東平 臨淮 信都 瑕邱 宛句 廣陵 會稽 京兆 安定 洛陽 臨淮 趙郡 襄陽 新蔡 賈 河東 琅琊 廣宗 杜 中山 胡 弋陽 定城 廣平 東海 洛陽 濮陽 義陽 中州 樂陵 南郡 萬年 洹水 洛陽 河內 野王 38) 郡望制度 元和姓纂 宋 新唐書 唐 林寶 鄧名世 古今姓氏書辯證 宰相世系表 元和 姓纂 姓氏 姓氏 郡 望 郡望 姓氏 郡望 姓氏 四庫全書 臺灣商務印書館 編 文淵閣四庫全書 第 冊 元和姓纂 元和姓纂 永樂大典 唐韻 古今姓氏書辯證 姓氏書 四庫全書 元和姓纂 某郡諸氏 郡望 劉氏 郡望 諸郡劉氏 某處人 中山人 上邽人 洛陽人 宣州人 京兆人 宋州 虞地人 部州 沙 河人 陳留 封邱人 長安人 岐山人 潤州 上元人 東平人 范陽人 汴州人 元 和姓纂 劉氏 馮氏 徐氏 陳氏 樊氏 呂氏 趙氏 馬氏 段氏 郭氏 諸郡某氏 37) 중국 에 관한 연구에서는 주로 나라 시대 가 편찬하였다고 전해지는, 나라 시대 가 편찬한, 그리 고 에 수록되어 있는 를 이용하고 있다. 이 중 에는 총 1460종의 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387종의 에 이 기록되어 있다. 이 표는 이 기록되어 있는 387종의 가운데 이 8개 이상 기록되어 있는 14개 를 위주로 작성된 것이다. 참고로, 필자는 (, 890 ) 에 수록되어 있는 을 이용하였는데, 이 은 에 실려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과 과 같은 의 내용을 참고하여 편찬 당시에 재편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의 내용 가운데 이른바 로 분류된 들은 이 표 에 수록하지 않았다. 예로 들면 의 경우, 이 표에서 소개하고 있는 40 개의 이외에도 라 하여 역대 인물의 이른바 을 소개 하며,,,,,,,,,,,,, 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경우는 모두 이 표에 수록하지 않았다. 에는 이외에도,,,,,,,, 그리고 에 가 실려 있다. 中國의 郡望制度와 韓國의 本貫制度 비교 115
高密 河南 京兆 鄠縣 澓陽 竟陵 汝南 安城縣 陝郡 樂陵 陳郡 夏陽縣 范陽 沛國 安德 恒山 汝南 東萊 陳留 扶風 郿縣 河東 彭城 丹陽 潯陽 偃師 河南 袁 樂陵 東光縣 蘭陵 臨川 成都 潁川 京兆 杼秋 廬江 河東 上黨 華陰 宣城 太山 齊郡 長樂 信都 河東 陳留 淮南 醴泉 京兆 襄陽 武功 周 永安 河南 馮 河間 吳郡 濮陽 河間 文安縣 太原 陽曲 魏郡 錢塘 尉氏 臨汝 馮翊 新平 沛國 相縣 濟陰 華陰 京兆 高州 朱 永城 譙郡 京兆 武功 河東 汾陰 潁川 崗州 義陽 廬陵 淸河 華陰 太原 中都 丹陽 郭 中山 鼓城 南康 江陵 樂安 大康 譙郡 長安 館陶 東宛 孫 吳郡 富春 河南 東都 河南 曲沃 河南 昭州 河內 富陽 雕陰 趙 天水 西縣 武昌 淸河 元和姓纂 의 편찬자는 丹陽, 蘭陵, 杼秋, 宣城, 陳留 5개의 郡望에 대하여는 檢未獲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 陳留 이상의 郡望에 대해서는 已上劉氏 二十六郡 竝舊望 (-安註: 실제는 28개 郡임)이라는 내용을 小註로 밝히고 38) 있다. 116 역사와 경계 98(2016.3)
<부록 2> 淸河崔氏 分派圖 崔業 (5대손) (8대손) 泰 密 恪 景 覇 琰 殷 諒 欽 (증손)濟 (5대손)羣 雙 邯 寓 金 虎藩 固 (10대손)曠 (현손)詧 (증손)逞 (증조)輯 靈延 靈茂 (7대손)悅 (6대손)神基 諲 (11대손)圓 潛 湛 光 (7대손)翹 靈和 宏 玄伯 (손자)蔚 劼 陵 異 宗伯 浩 暹 幼 彧 (손자)昭緯 (손자)愼由 (증손)休 (증손)寅 胤 (현손)元綜 (5대손)知溫 (8대손)龜從(증손)大質 玄覽 玄弼 (6대손)羣(현손)陲 郾 鄲 璆 中國의 郡望制度와 韓國의 本貫制度 비교 117
<부록 3> 百氏通譜 에 나오는 姓氏와 本貫39) 姓氏 本貫 姓氏 本貫 姓氏 本貫 姓氏 本貫 姓氏 本貫 東萊 慶州 江陵 長興 金堤 溫陽 延安 金海 吳 和順 趙 咸安 慶州 德水 原州 杞溪 白川 草溪 全義 安山 淸州 淳昌 海州 韓山 金 善山 平山 南陽 河東 廣州 靈光 谷山 豊山 晉州 龍仁 海豊 漢陽 缶溪 光州 李 星州 水原 安邊 洪 洪州 奉化 驪州 彦陽 韓 唐津 懷仁 鄭 淸州 公州 海州 交河 開城 瑞山 富平 同福 保安 安山 慶州 遂安 寶城 新平 義州 羅州 靑海 羅州 扶安 昌原 廣州 水原 高敞 楊州 長水 盈德 淸州 吳 咸陽 豊壤 尙州 海南 安東 樂安 楊州 黃 懷德 長鬐 光州 軍威 趙 林川 紆州 奉化 金 慶州 荳原 漢陽 平海 延日 延安 迎日 平壤 黃州 李 全州 淸風 朗山 稷山 善山 氏族源流 趙從耘 編 諸姓譜 丁時述 篇 姓苑 叢錄 任慶昌 編 綜合譜 綜合譜 百氏通譜 具羲書 編 百氏通譜 姓氏 姓氏 本貫 姓氏 39) 전통기 한국 사회에서는 ( ), ( ), ( )과 같은 가 일찍부터 만들어졌다. 그 가운데 (, 추정)는 그 내용에 있어서나 분량에 있어서 최고의 역작으로 뽑힌다. 이 에는 총 51개 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51개 가운데 8개 이상의 이 기록된 를 정리한 것이 <부록 3> 이다. 118 역사와 경계 98(2016.3)
<부록 4> 南陽洪氏 分派圖 奎 戎 順和院妃 明德太后 澍 徵 尙濱 尙溥 尙淵 智 齡 陟 賀孫 敬孫 演 淀 潤溫 潤善 潤德 休 系貞 孝宗 春卿 碩舫 天民 逸民 聖民 鵬 瑞龍 瑞鳳 永弼 瑞翼 (현손)夏疇 (현손)錫疇 命元 命亨 命耈 命夏 濟明 重普 得箕 得禹 致中 (7대손)淳穆 英植 中國의 郡望制度와 韓國의 本貫制度 비교 119
<부록 5> 南陽洪氏 春卿 系 文科及第者40) 天民 系 文科及第者 1. 姓名 天民 瑞鳳 命一 處亮 好人 景顔 聖淵 樂淵 文科 明宗08(1553)別試 宣祖27(1594)別試 仁祖11(1633)增廣 仁祖15(1637)庭試 肅宗32(1706)庭試 英祖35(1759)式年 英祖51(1775)庭試 英祖44(1768)式年 逸民 系 文科及第者 姓名 學淵 相益 柱翼 秀晩 秉壽 晩燮 贊燮 翼燮 文科 純祖13(1813)增廣 英祖50(1774)庭試 正祖02(1778)庭試 正祖14(1790)增廣 憲宗13(1847)庭試 純祖03(1803)增廣 哲宗12(1861)庭試 純祖34(1834)式年 姓名 重燮 遠燮 萬燮 世燮 在瓚 在九 鍾運 文科 純祖27(1827)增廣 憲宗14(1848)增廣 高宗03(1866)別試 高宗18(1881)庭試 高宗08(1871)別試 高宗28(1891)增廣 高宗11(1874)增廣 姓名 啓遠 文海 述海 準海 儀泳 趾海 景海 纘海 宗海 相簡 相臣 相聖 遇燮 起燮 龜燮 冕燮 在鉉 文科 英祖45(1769)耆老 英祖51(1775)庭試 英祖35(1759)庭試 英祖27(1751)庭試 正祖07(1783)增廣 英祖28(1752)庭試 英祖27(1751)庭試 英祖42(1766)庭試 英祖30(1754)增廣 英祖42(1766)庭試2 英祖49(1773)庭試 英祖41(1765)謁聖 純祖01(1801)增廣 純祖02(1802)庭試3 純祖04(1804)式年 純祖03(1803)增廣 哲宗10(1859)增廣 姓名 在龍 在敏 在喆 在重 鍾奭 鍾大 軒鍾 原鐘 鍾榮 鍾燦 鍾永 鍾憲 鍾璨 淳馨 淳九 淳學 文科 憲宗01(1835)增廣 純祖01(1801)增廣 純祖26(1826)別試 憲宗03(1837)式年 哲宗02(1851)庭試 高宗02(1865)式年 哲宗11(1860)庭試 憲宗10(1844)增廣 高宗25(1888)別試 高宗19(1882)增廣 高宗12(1875)別試 高宗19(1882)增廣 高宗24(1887)庭試 高宗11(1874)增廣 高宗26(1889)謁聖 哲宗08(1857)庭試 2. 姓名 命元 命亨 處厚 處尹 處大 受河 受瀗 受漸 受疇 禹瑞 禹傳 禹寧 禹行 啓迪 啓裕 啓禧 啓謹 文科 宣祖30(1597)庭試 光海04(1612)式年 仁祖07(1629)庭試 仁祖17(1639)謁聖 仁祖17(1639)謁聖 顯宗05(1664)春塘 肅宗08(1682)增廣 肅宗10(1684)式年 肅宗08(1682)增廣 肅宗28(1702)謁聖 肅宗45(1719)別試 肅宗33(1707)別試 肅宗25(1699)增廣 肅宗34(1708)式年 英祖09(1733)式年 英祖13(1737)別試 英祖35(1759)式年 文科及第者 宋 文科 文科譜 文科譜 40) 위 의 수에 관해서는 (Wagner프로젝트) 의 내용 을 참고하였다. (Wagner프로젝트) 를 필자가 이용할 수 있 도록 제공해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아울러, 어려운 상황 속에서 도 Wagner프로젝트 를 계속해서 추진하고 계시는 선생님 께 이 자리를 빌어 존경을 뜻을 표한다. 宋萬午 宋 文科 120 역사와 경계 98(2016.3) 宋 文科 宋萬午
聖民 系 文科及第者 3. 姓名 聖民 瑞翼 命耉 命夏 重普 致中 益三 益聞 相纘 文科 明宗19(1564)式年 光海01(1609)增廣 光海11(1619)謁聖 仁祖22(1644)別試 仁祖23(1645)別試 肅宗32(1706)庭試 英祖16(1740)庭試 純祖13(1813)增廣 英祖47(1773)增廣 姓名 秉喆 在臣 勝圭 穉圭 永圭 正圭 鍾序 鍾遠 鍾英 文科 純祖01(1801)增廣 哲宗13(1862)庭試 純祖15(1815)庭試 純祖27(1827)增廣 純祖29(1829)庭試 哲宗07(1856)別試 哲宗01(1850)增廣 純祖31(1831)式年 憲宗09(1843)式年 姓名 鐘應 鍾雲 鐘學 淳肯 淳穆 淳大 萬植 英植 性友 文科 純祖28(1828)式年 憲宗11(1845)庭試 哲宗13(1862)庭試 高宗22(1885)增廣 憲宗10(1844)增廣 哲宗06(1855)庭試 高宗03(1866)庭試 高宗10(1873)式年 高宗29(1892)庭試 中國의 郡望制度와 韓國의 本貫制度 비교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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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41) A Study on the Historical Comparison Between the Chinese Choronym System and the Korean Choronym System - Centering on Qinghecuishi Lineage and Namyanghongssi Lineage An, Gwang-Ho* This paper is focused on the historical comparison between the Chinese choronym system (Junwangzhidu) and the Korean choronym system (Pon'gwanchedo), which respectively existed in Chinese history from ancient to T'ang times and in Korean history from the traditional period to modern times. Although the two systems existed in different time periods, there are many similarities between the two. And, the two systems have changed based on the characteristics of their own societies after they appeared in their society. Key Words Junwangzhidu, Qinghecuishi, Pon'gwanchedo, Namyanghongssi. 논문투고일 : 2016.3.2 논문심사일 : 2016.3.8 게재확정일 : 2016.3.18 * Institute for the Translation of Korean Classics / lose-angle@hanmail.net 中國의 郡望制度와 韓國의 本貫制度 비교 125
98(2016.3), 127~158 42) 식민지도시다롄과주민의생활공간 * 권경선 사카노유스케 목차 국문초록 본고는일본제국주의통치아래고도의식민지화가진행된 1930년대중반의다롄을중심으로, 도시주민의생활공간을민족과계층에따라유형화하고, 각유형별로생활에필수적인재화와서비스에대한접근성을분석함으로써식민지도시로서다롄의특징을도출하고자했다. 일본식민당국은다롄의도시공간을용도에맞추어구획, 활용함으로써도시기능을극대화하고, 민족분거에유의함으로써민족간마찰을방지하는동시에, 계층에따라주민의거주지를배치, 조정함으로써식민지경영의효율성을높이고사회질서를유지하고자했다. 이러한과정에서주민의민족별, 계층별구성에따라주거, 생업, 교육, 소비, 여가활동이이루어지는생활공간이구획되고, 각생활공간사이의불평등이발생했다. 다롄의중심업무지구, 산록부의고급주택지구, 교외의전원주택지구는, 주거환경이양호하고교통이편리할뿐만아니라자녀교육을위한시설이가까이에있으며소비및휴식여가시설이구비된양질의생활공간으로서, 다롄사회의상층을점하던일본인, 중국인, 구미각국출신자가거주했다. 일본인사회의중하층을점하고 * 이논문은 2008 년정부 ( 교육부 ) 의재원으로한국연구재단의지원을받아수행된연구임 (NRF-2008-361-B00001). ** 제 1 저자. 한국해양대학교국제해양문제연구소 HK 연구교수 / plumgirl@hanmail.net *** 공동저자. 나가사키대학다문화사회학부객원연구원 / francisco.ys@gmail.com 식민지도시다롄과주민의생활공간 127
있던 노동자계층의 다수는 일정 정도의 생활 조건이 구비된 공장사택구역이나 노 동자주택구역에 거주했으며, 중층 정도의 생활수준을 갖추고 있던 중국인들은 샤 오강쯔의 중국인구역에 집거했다. 한편 식민지 역학관계에서 가장 취약한 입장에 있었던 중국인 저소득노동자층과 빈민층은 도심 외곽의 빈민가 등 불평등이 가장 심화된 생활공간에 배치되었다. 이처럼 민족과 계층으로 구현되는 식민권력과의 관계에 따라 주민의 생활공간이 주어지고 생활 전반이 규정되는 것은 식민지도시 로서 다롄이 가지고 있던 특성이었다. 주제어 식민지도시, 다롄, 생활공간, 민족, 계층. Ⅰ. 들어가며 大連) 주민의 생활공간을 주민의 본고는 일본 제국주의 통치 하 다롄( 민족별, 계층별 구성을 중심으로 유형화하고, 주민 생활에 필수적인 재화 와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을 분석함으로써 도시공간에 나타난 식민지적 성격을 고찰하고자 한다. 다롄은 근대 제국주의의 침략과 함께 탄생한 신생도시였다. 다롄은 일 遼東半島) 할양을 저지한 러시아가 그 대가로 관동주(關 東州)를 조차하고, 뤼순(旅順)을 군사행정중심지, 다롄만(大連灣) 주변을 본의 랴오둥반도( 상업무역중심지로 건설하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러시아 통치시대 동안 기초적인 도시 형태를 갖춘 다롄은, 러일전쟁 후 40년 간 일본의 통치 하에 이른바 대륙정책의 기지로서 도시의 규모와 시설을 확충하며 식민 지도시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신생도시로서 규모를 갖춘 원주민사회의 부재는 제국주의 세력이 현지 세력과의 큰 마찰 없이 식민지도시를 건설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다. 다양한 계층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식민을 동반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특 징은 다롄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났고, 일본은 시기에 따라 많게는 도시 인구의 절반에서 적게는 4분의 1을 점하던 자국민의 이식을 통해 다롄의 식민지적 성격을 강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본인의 이식과 정착, 나아가 일본인사회의 구축과 안정의 물 128 역사와 경계 98(2016.3)
리적 기반이 된 것이 일본 식민당국의 주도 하에 구획, 배치된 도시 공 간이었다.1) 일본 식민당국은 도시공간을 용도에 따라 구획, 활용하여 식 민지도시의 기능을 극대화하는 한편, 일상생활에서 접촉면이 클 수밖에 없었던 중국인 주민과 일본인 주민의 거주지 및 생활 동선의 분화에 유 의함으로써 민족 간 마찰을 방지하는 동시에, 주민의 경제적 실력과 사 회적 실력이 반영된 계층을 고려하여 거주지를 배치, 조정함으로써 식민 지 경영의 효율성을 높이고 사회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 이러한 과정에 서 주민의 민족 구성과 계층 구성에 따라 주거, 생업, 교육, 소비, 여가 등의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생활공간이 구획되고, 각 생활공간 사이의 불평등이 발생했으며, 나아가 식민지도시 다롄의 성격으로 고착되었다. 본고에서 주목하는 근대 다롄에 대한 도시사적 연구는 건축학과 역사 학 분야에서 도시계획 및 건설 과정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상당 부분 축적되어 왔다. 건축학 분야에서는 주로 도시의 공간구획과 가로망, 건축 양식의 분석에 집중했고, 역사학에서는 주로 식민지 지배와 수탈을 목적 으로 한 식민자의 도시 설계와 건설 활동이 기형적인 도시공간을 창출했 음에 초점을 맞추어 제국주의의 식민통치를 비판해왔다.2) 제국주의 하 다롄의 도시 건설 과정을 주민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한 연구로는 미즈우 水內俊雄)와 고시자와 아키라(越澤明), 이상균의 연구를 들 수 치 도시오( 關東總督 關東廳 大連市制 1) 일본 관동주 조차지의 중앙정부는 그 통치 방식에 따라 관동총독부(. 1905~1906), 관동도독부(. 1906~1919), 관동청(. 1919~ 1934), 관동주청(. 산하. 1934~1945)으로 변경되었고, 다롄 지방정부에 해당하는 다롄시( )는 1915년 다롄시제( )의 실시와 함께 업무를 개시했다. 다롄 도시 건설의 이니셔티브는 관동주 중앙정부와 국 책회사였던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이하 만철)가 쥐고 있었 다. 도시계획은 관동주 중앙정부의 결정에 의거하여 집행했으나, 정부 출자 시설의 실질적 건설은 만철이 담당했고, 지방정부인 다롄시의 역할은 약소한 편이었다., の -1899~1945-37-5(1985), 443~444쪽. 2) 궈톄좡, 관제 저, 신태갑 역, 일본의 대련 식민통치 40년사 2권 (서울: 선인, 2012); 우영만 장익수 당건 구영민 이동배, 도시형성을 통해 본 연안도시의 근대화과정에 관한 연구-1898년~1945년 식민기를 중심으로 대한건축학회 학술발표논문집 20-1(2000); 정형아, 근대도시 건설과 국제 정치의 영향-중국 대련시를 중심으로- 중국근현대사연구 45(2010);, ( :, 2013). 府 關東都督府 關東州廳 關東局 大連市 南滿洲鐵道株式會社 水內俊雄 植民地都市大連 都市形成 年 人文地理 中國 大連市 蔣耀 輝 大連開埠建市 大連 大連出版社 식민지도시 다롄과 주민의 생활공간 129
있다. 이들의 연구는 일본 식민당국이 자국민의 정착과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민족 분화를 전제로 실시한 다롄의 도시계획과 건설 과정을 다루면 서, 그 가운데 발생한 중국인 주민의 강제 퇴거 또는 중국인 집거지에 대한 무계획적 조치 등 중국인에 대한 배제 및 차별을 규명하거나, 노동 력의 필요에 따라 중국인의 거주지를 재배치하는 양상을 고찰함으로써, 식민지도시 건설 과정 중에 나타난 중국인 주민에 대한 일본 식민당국의 차별과 모순적 태도를 지적하고 있다.3) 본고는 상술한 선행연구들을 참고하되, 당시의 통계 자료와 지도 자료 를 활용하여 민족과 계층에 따른 생활공간의 분포를 보다 명확하게 제시 하고, 기존 식민지 관련 연구에서 주로 개별 주제로 다루어져 왔던 주거, 생업, 교육, 소비, 휴식여가 등 생활의 기본 조건에 대한 충족 정도나 관 련 시설에 대한 접근성에 초점을 맞추어 각 생활공간 사이의 불평등을 고찰하고자 한다. 본고는 도시 내 민족과 계층에 따른 생활공간의 분화 양상을 뚜렷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1930년대 중반의 다롄에 주목하고자 한다. 1930년대 滿洲事變) 을 계기로 다롄의 배후지인 만주 전 중반은 이른바 만주사변( 역이 일본의 세력권으로 편입되면서 장기불황에 빠져있던 다롄의 경기가 平時) 회복되고 인구 유입이 급증한 시기로, 중일전쟁을 목전에 둔 평시( 중 식민지도시로서의 요소와 성격이 가장 축적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본론에서는 먼저 다롄 도심과 도심 외곽지구, 교외지구를 구역의 용도 와 주민의 민족별, 계층별 구성을 중심으로 분석하여 주민 생활공간의 유형을 도출한다. 이어서 생활의 주요 요소인 주거, 생업, 교육, 소비, 휴 식여가와 관련된 필수 재화 및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에 초점을 맞추어 각 생활공간 사이의 불평등을 도출함으로써, 주민 생활공간에 구현되었 던 다롄의 식민지적 성격을 고찰하도록 한다.4) 釜山 越澤明 植民地 水內俊雄 植民地都市大連 3) 이상균, 일제 식민지 해항도시의 근대적 재편생 연구 : 한국 부산( )과 중 국 대련( )의 비교연구 해항도시문화교섭학 9(2013);, の ( : アジア, 1978);, の -1899~1945-37-5(1985). 4) 본고에서 사용하는 용어에 대해 설명해두고자 한다. 먼저 각 민족을 가리키는 용어로, 한인( )은 조선인으로 표기하고, 한족( ) 만주족( ) 몽고족 ( ) 등 화인( ) 계열 민족에 대해서는 중국인이라 표기했다. 지명과 大連 滿洲 都市計劃 千葉 經濟硏究所 都市形成 年 人文地理 韓人 蒙古族 華人 130 역사와 경계 98(2016.3) 漢族 滿洲族
Ⅱ. 주민 생활공간의 분화와 유형 <그림 1> 1930년대 중반 다롄 도심과 그 주변 最新詳密 大連市全圖 附旅順戰蹟地圖 의 내용을 木崎純一 制作, 最新詳密 大連市全圖 附旅順戰蹟地圖 東京 伊林書店 주: 이 지도는 1938년의 바탕으로 필자가 제작한 것이다. ( :, 1938). 1935년 다롄의 총인구는 514,956명으로, 중국인(369,532명. 71.8%)이 가장 많았고, 일본인(141,485명. 27.5%)이 4분의 1 이상을 차지했으며, 그밖에 조선인(2,623명)과 구미 각국 출신자로 구성된 기타 외국인 (1,316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5) 지구별로는 다롄 경찰서 관내(이하 구 관련해서는 당시의 식민 맥락을 고려하여, 일본 통치시대 이전부터 존재했던 지명이나 중국인 집거지 내의 지명과 같이 명백한 중국식의 지명은 중국어 발음으로 표기하고, 일본 통치시대에 붙여진 일본식 지명은 일본어 발음으로 표기했다. 지명의 표기방식은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을 따랐다. 5) 통계수치는 당시 경찰관리파출소 의 호구조사부( ) 에 기재된 다롄 상주인구를 바탕으로 정리한 것으로, 여행객을 비롯한 일시 체류자, 군인과 수감자를 포함하지 않는다. 1935년 다롄의 기타 외국인 중에는 무국적의 구 러시아 출신자가 1,019명으로 가장 많은 가운데, 미국인 61명, 영국인 51명, 戶口調査簿 식민지도시 다롄과 주민의 생활공간 131
沙河口) 경찰서 관 다롄)의 인구가 전체의 약 51%를 차지했고, 샤허커우( 小崗子) 경찰서 관내가 약 19%를 차지하고 있었 내가 약 29%, 샤오강쯔( 다.6) 민족별 거주지 분포를 보면, 중국인은 구 다롄(47%), 샤허커우 (31%), 샤오강쯔(21%)의 순으로 거주했고, 일본인은 구 다롄(61%)에 과 반이 거주하는 가운데, 샤허커우(21%), 샤오강쯔(14%)의 순으로 거주했 다. 조선인 역시 구 다롄(57%)에 과반이 거주하고 샤오강쯔(23%)와 샤 허커우(20%) 순으로 거주했고, 기타 외국인은 구 다롄(76%)과 샤허커우 (22%)에 주로 거주했다. 市界) 이번 장에서는 1935년 무렵의 다롄을, 도시계획이 미치는 시계( 내에 있는 구 다롄 지구, 샤오강쯔 지구, 샤허커우 지구 및 교외지구와 시계 밖에 있는 도심 외곽지구의 다섯 개로 나누고, 각 지구들을 상업 공 업 주택 혼합 휴양 등의 구역 용도와 주민의 민족별 구성 및 계층별 구성 을 기준으로 분석함으로써 주민의 생활공간을 유형화하고자 한다. 1. 주민 구성과 구역 용도에 따른 도시공간의 분화 1) 구 다롄 지구 구 다롄은 러시아 통치시대에 건설된 도심지구로서, 일본 통치시대에도 행정기관과 만철, 각종 회사와 은행 등이 집중된 중심업무지구 및 일본 인주택지구의 기능을 했다. 구 다롄은 용도에 따라 북쪽부터 러시아마치 露西亞町)의 ( 大廣場) 만철구역, 러시아마치 이남에서 오히로바( 이북에 南山) 인근 주택구역 사이의 혼합 구역, 동쪽의 다롄항과 그 주변의 유방(油房)이 밀집된 공업구역, 그리고 걸친 상업구역, 오히로바 이남과 남산( 독일인 32명, 소비에트연방인 24명, 이란인 22명, 덴마크인 21명, 인도인 18 명, 그리스인 14명, 라트비아인 10명, 리투아니아인 10명, 유고슬라비아인 9 명, 폴란드인 8명 외에, 스위스인, 이탈리아인, 에스토니아인, 몽고인, 헝가리 인, 체코슬로바키아인이 있었다., ( :, 1936), 14~78쪽. 6) 그밖에 다롄항 수상( )경찰서 관내가 약 0.4%를 차지하고 있었다. 수상경 찰서의 관할구역은,,,,, 로 이 루어져 있었는데, 1935년 당시 수상경찰서 관내 인구는 대개가 중국인으로, 전체 인구 2,129명 중 2,030명이 에 거주하고 있었다. 關東局 132 關東局 昭和十年關東局第三十統計書 大連 水上 直轄區域 東埠頭 西埠頭 北大山通 海岸分室 西溜 東埠頭 역사와 경계 98(2016.3)
<그림 2> 1935년 다롄 시내 주민의 민족별 성별 거주분포 주: 원 그래프가 나타내는 인구의 크기가 민족에 따라 다름에 주의할 것. 출처:, 18~25쪽의 인구통계를 참고 하여 작성. 關東局編 昭和十年關東局第三十統計書 寺兒 남산 인근의 주택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다롄항 부근의 스얼거우( 溝) 구역도 시계 내에 포함되나 실질적으로 도시계획 밖에 있었으므로 도심 외곽에서 다루기로 한다.(<그림 1> 참고) 구 다롄의 민족별 거주 양상은 전반적으로 일본인의 비율이 약간 높은 경향을 보이는 가운데, 오히로바 주변의 상업구역과 그 이남의 혼합구역 混住) 경향이 강하고,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일 본인의 비율이 높았다. 단 남산 주택구역과 인근의 오우미초(近江町), 오 히로바 근처의 오쿠마치(奧町)와 같이 특정 민족의 거주비율이 상당히 을 중심으로 민족 간 혼주( 높은 구역도 있었다.(<그림 2> 참고) 大和町, 일본인 주민의 비율 신메이초(神明町, 88%), 가에데초(楓町, 일본인의 비율이 높은 구역은 야마토초( 播磨町, 94%), 하리마초( 90%), 81%)로 남산 주택구역 및 그 인근이었다. 남산 주택구역은 러시아 통치 시대의 저택구로, 다롄 시내와 다롄항을 관망할 수 있는 남산록에 고급 식민지도시 다롄과 주민의 생활공간 133
주택이 저밀도로 들어서있었다. 남산 주택구역과 오히로바 사이의 구역 에는 만철 사택을 비롯한 일본인 주택구역이 들어서 있었다. 逢坂町, 80%) 역시 일 남산 주택구역의 서남쪽에 위치했던 오사카마치( 본인의 비율이 높았다. 오사카마치는 다롄의 대표적인 유곽거리로, 일본 인 여성의 비율이 매우 높았으며, 조선인 여성(266명)도 상당수 집거하 고 있었다. 당시 다롄의 일본인 여성 유직자의 3할 이상, 조선인 여성 유 직자의 과반이 유흥 관련 업종에 종사하고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7) 오사 카마치에 거주하는 일본인 여성과 조선인 여성은 대개 유곽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오히로바 인근의 오쿠마치(중국인 주민의 비율 82%)와 남산 주 택구역 인근의 오우미초(81%)는 중국인의 비율이 매우 높은 구역이었다. 식민지도시의 상업중심지와 고급주택지 인근에 피식민자 의 비율이 높은 구역이 존재했던 것은 특수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오쿠마치는 구 다롄 상업구역 내의 중국인 상업가였다. 오쿠마치에는 일반 중국인노동자계층은 접근하기 어려운 고급소매상점과 대극장 잉샨 永善茶園)과 같은 문화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8) 차위안( 상업구역은 다롄에서 지가가 가장 높은 곳으로,9) 오쿠마치가 있던 오쿠마치를 비롯한 상 7) 1935년 당시 다롄 시내의 일본인 여성 유직자 10,851명(총 63,930명) 중 3,462명(약 32%)이, 즉 유흥 관련 업종에 종사하고 있었 고, 조선인 여성 유직자 430명(총 1,138명) 중 260명(약 60%), 중국인 여성 유직자 5,086명(총 62,185명) 중 561명(약 11%), 기타 외국인 여성 유직자 98명(총 549명) 중 21명(약 21%)이 동종업종에 종사하고 있었다. 구역별 인 구분포를 참고하면 일본인 및 조선인 여성 종사자는 대개 오사카마치 방면에, 중국인 여성 종사자는 대개 샤오강쯔 일대의 유곽거리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 으로 보인다., ( :, 1936), 19~24쪽. 8), に ける の ( :, 1928), 46~47쪽. 9) 1934년 8월 다롄 시계 내의 지가를 보면, 구 다롄 상업구역의 나니와초(. 가장 비싼 은 최고 800엔에서 최저 200엔. 가장 싼 은 150~100엔), 오야마도오리(. 300~150엔), 이세마치(. 300~150 엔), 이와기초(. 300~100엔), 오쿠마치(250~100엔), 야마가타도오리 (. 250~70엔), 시나노마치(. 200~100엔) 등은 샤오강쯔의 상업 중심인 다롱졔(. 300~30엔), 더성졔(. 300~30엔) 일대와 함께 지가가 가장 비싼 구역이었다.,. ( :, 1934), 55~59쪽. 旅宿飮食店浴湯業 大連市役所 大連市史 大連 大連市役所 南滿洲鐵道株式會社 大連 於 中國人勞動者 生活狀態 大連 南滿洲鐵道 株式會社 浪速 町 三町目 五丁目 大山通 伊勢町 磐城町 山縣通 信濃町 大龍街 得勝街 大連商工會議所 大連商工案內 昭和九年度版 大連 大連商工會議所 134 역사와 경계 98(2016.3)
업구역에 상점을 내고 거주하던 중국인들은 높은 지가와 임대료, 세금 등을 부담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실력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식민 당국과의 관계에서도 입지가 있는 사회적 실력자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남산 주택구역의 인근에 있던 오우미초의 중국인 비율이 높은 것은 중 人力車夫合宿所 )가 있었기 때문이다. 국인 인력거부합숙소( 10) 당시 인력 거는 다롄의 주요 교통수단 중 하나로, 인력거부합숙소는 인력거 수요지 와의 접근성을 고려하여 일본인 주택구역과 인접한 곳에 입지하되, 합숙 소라는 이름으로 외부와 노동자의 주거를 사실상 격리하는 형태로 민족 분거를 유지하고 있었다. 2) 샤오강쯔 지구 구 다롄 서쪽의 샤오강쯔 지구는 러시아 통치시대에 공원(지금의 勞動 公園)을 끼고 중국인구역으로 지정되었던 곳이다. 샤오강쯔 지구는 북쪽 에서부터 베이강쯔(北崗子)와 요업공장 제마공장 등이 들어선 공업구역, 시강졔(西崗街) 일대의 주택구역과 상공업구역이 섞인 혼합구역, 다롄운 동장 동쪽에서 후시미다이(伏見臺)에 이르는 주택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다롄의 대표적인 중국인 집거지였던 샤오강쯔 지구는 러시아 통치시대 에 구획되었으나 일본 통치시대에 들어와 중국인이 집거하면서 본격적으 로 성장했다. 시강졔는 중국인 주민이 9할 이상을 차지하는 구역으로 흔 히 이 일대를 샤오강쯔라 불렀는데, 도심 내의 다른 구역에 비해 인구밀 도가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남쪽 후시미다이 근처의 모미지가 紅葉街), 도키와마치(常盤町) 등의 고대(高臺) 구역은 일본인이 8할에 이( 조금 못 미치는 비율을 차지하며, 일본인 주택구역을 이루고 있었다. 샤오강쯔의 시강졔 일대와 후술할 도심 외곽 중국인 집거지의 형성 과 關東局施政三十年業績調査資 정에 대하여 관동국시정30년업적조사자료( 料) 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0) 다롄차부합숙소는 페스트의 만연을 계기로 1911년 4월에 설립되었다. 1928년 당시 합숙소는 부지평수 8,270여 평, 건물평수 2,600여 평에 102개 동의 건물 로 구성되었다. 수용인원은 가족동반 차부 186명, 단신 차부 1,424명에 차부 의 가족과 구내 음식점 및 매점의 점원 등을 합치면 2,000명 이상이 거주하고 있었다., ( :, 1928), 291~292쪽. 大連民政署 大連要覽 大連 大阪屋號書店 식민지도시 다롄과 주민의 생활공간 135
苦力. 중국인 육체노동자-인용자) 부락은 지금 현재 스 寺兒溝 香爐礁 蟠居 神明町 초(薩摩町), 남산록(南山麓), 다롄신사(大連神社), 이즈모신사(出雲神社) 부근 다롄 시내의 쿨리( 얼거우( ), 샹루쟈오( ) 등에 반거( )하여 다롄 시내의 큰 고 민거리이다. 메이지 40년(1907년-인용자) 무렵, 신메이초( ), 사츠마 에 갑자기 700~800호의 쿨리 가옥이 생겨나, 이를 퇴거시키는데 애를 먹 었다. 그러나 당시 다롄 중심지에 이렇게 뒤숭숭하고 비위생적인 쿨리 부락 을 둘 수는 없었기에, 경찰은 실력을 행사하여 이를 퇴거시키기로 결정하고 인부를 감독하여 쿨리 가옥을 제거, 철거하고 땅을 골랐다. 이에 쿨리 등의 일군은 지금의 전기유원( )과 샤오강쯔로 퇴거했다. 당시 샤오강쯔 電氣遊園 에는 10호 정도의 농가가 있었을 뿐이었다. 다른 무리는 샹루쟈오와 탄쟈 譚家屯 石道街 뤼쟈툰(呂家屯)으로도 옮겼다. 툰(. 다롄운동장 일대-인용자)으로 퇴거했다. 탄쟈툰으로 간 무리는 그 후 스다오졔( )와 샹루쟈오로 이전하거나 또는 송쟈툰( )이나 11) 宋家屯 이 기록에 따르면, 일본의 통치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롄의 중심지이자 상징적 장소라 할 수 있는 오히로바와 다롄신사 사이에 자연 발생적인 중국인노동자 취락이 들어섰고, 치안과 위생을 문제 삼은 식민 당국에 의해 강제 퇴거되었음을 알 수 있다.12) 퇴거에 부닥친 중국인노 동자들은 러시아 통치시대부터 중국인구역으로 계획된 샤오강쯔 지구나 샤허커우 지구에 인접한 샹루쟈오, 도심에서 상당 부분 떨어진 산간의 스다오졔로 이주하여 중국인 취락을 형성했다. 3) 샤허커우 지구 馬欄河) 샤오강쯔 서쪽의 샤허커우 지구는 북쪽의 공업구역에서 마란허( 白雲山)에 이르는 지구이다. 샤허커우 지구의 를 끼고 남쪽의 바이윈산( 북부는 만철공장 및 일본계 대공장들이 밀집한 공업구역과 공장에 근무 11) 關東局文書課, 關東局施政三十年業績調査資料 (大連: 關東局文書課, 1937), 636~637쪽. 12) 즉 당시 다롄의 도시건설은 제국주의 종주국인 일본의 이상과 이념에 따라 진행되어, 중국인의 거주환경의 향상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중국인을 이질적인 것 혹은 이상적인 도시건설에 적합하지 않은 배제 또는 격리의 대 상으로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の 59쪽. 越澤明 植民地滿洲 都市計劃 136 역사와 경계 98(2016.3)
하는 노동자의 사택구역, 그리고 샤오강쯔로 이어지는 혼합구역으로 이 루어졌고, 남부는 주로 주택구역으로 이루어졌다. 샤허커우 내에는 각 민족이 혼주하는 구역도 존재했으나, 민족분화가 沙河 口神社) 부근의 만철기계공장 사택구역(神社前, 89%)과 쇼토쿠공원(聖德 公園) 예정지 이남의 쇼토쿠가이(聖德街, 96%), 그 서쪽의 마가네초(眞金 町, 86%), 다롄운동장 인근의 시라기쿠초(白菊町) 등이었다. 쇼토쿠가이 확실한 구역이 많았다. 일본인의 비율이 높은 구역은 샤허커우신사( 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호황기에 일본인 토목업 종사자의 주택난을 해 결하기 위해 계획된 것이었고, 시라기쿠초는 중산층 이하의 일본인 주민 을 위한 시영주택 등이 입지했다. 그러나 구역 경영방침의 실패로 일본 인 공무 종사자와 자유업 종사자가 입주하는 주택구역이 되면서,13) 바이 윈산록 주변의 고대에도 사회 중상층의 주민이 다수 거주하는 일본인 주 택구역이 조성되었다. 한편 쇼토쿠공원 예정지 이북과 마란허 주변에는 중국인이 9할 이상을 차지하는 중국인 집거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샤오강쯔 중국인구역의 연 장으로 볼 수 있는 공원 예정지 이북 구역은 시강졔 일대와 함께 도심 내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구역의 하나였다. 만철공장 남쪽의 이즈미 泉町)와 마란허 이서의 다이노야마초(臺山町), 스소노마치(裾野町) 등 초( 은 시계 내에서 지가(이즈미초 10~5엔. 다이노야마초, 스소노마치 10엔) 가 가장 싼 구역 중의 하나였다. 당시 다롄은 시계의 동서쪽 변두리로 갈수록 지가가 낮아지고 중국인 주민의 비율이 높아지는 양상을 보였는 데,14) 시계 바깥의 도심 외곽지구에는 도심보다 인구밀도가 훨씬 높은 중국인 집거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4) 도심 외곽지구 다롄 시계 밖의 도심 외곽지구에는 중국인의 자연취락이 형성되어 있 었다. 다롄항 근처의 스얼거우 일대, 샤오강쯔와 샤허커우 이남 산간의 三春柳) 등은 각각의 거주 스다오졔, 샤허커우 이북의 샹루쟈오와 산춘류( 13) 14) 水內俊雄, 植民地都市大連の都市形成-1899~1945年- 449쪽. 大連商工會議所, 大連商工案內.昭和九年度版 55~60쪽. 식민지도시 다롄과 주민의 생활공간 137
인구가 1~2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취락으로서, 주민의 99% 가까이를 중국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다롄항 부근의 스얼거우 일대는 시계의 안팎이 맞물리는 구역으로, 다 롄항 하역노동자의 수용소와 마차부수용소 등 중국인노동자수용소가 입 지해 있었고, 곳곳에 중국인 주민이 거주하는 판자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통계에 따르면 1935년 스얼거우에는 2만 명, 서부 산간의 스다오졔에는 1만 명에 가까운 중국인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다롄에 막 도착한 山東省) 출신 노동자나 유민의 대다수가 이곳에 체류, 정착했다는 산둥성( 점에서 통계에 잡히지 않았던 유동인구가 더욱 많았을 것으로 여겨진 다.15) 스얼거우와 스다오졔는 다롄 경찰서 관내에 속하는 구역으로, 이 두 구역의 인구가 다롄 경찰서 관내 인구의 16%를 차지하고 있었다. 샤 허커우 북부의 샹루쟈오와 산춘류는 각각 2만 명과 1만 7천 명 이상의 중국인 주민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샤허커우 경찰서 관내 전체 인구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하는 수치였다. 상술한 구역들은 도시계획구역 밖에 위치하여 가로와 상하수도 설비 등 공공시설의 정비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도심보다 저렴한 생활비 용과 느슨한 행정규제로 인해 중국인 저소득노동자층이나 빈민층이 거주 하는 빈민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5) 교외지구 교외지구는 도심에서는 떨어져 있었으나 시계에 포함되었던 지구였다. 老虎灘)에 이르는 가도 연선에는 전원도시 개념의 주택구역이 들어섰고, 샤허커우 남서쪽에 위치한 호시가우라(星が浦)에는 구 다롄에서 라오후탄( 레저휴양지로서 만철이 운영하는 호시가우라유원지가 들어섰다. 初音町), 고나미초(小波町), 도 라오후탄 가도 연선에 들어선 하츠네초( 桃源臺), 분카다이(文化臺)는 1910년대 말 전후 호황기의 주택부 겐다이( 족난을 해결하기 위해 민간토지회사들이 교외주택구역을 계획하면서 만 들어진 것으로,16) 인구의 3분의 2 이상을 일본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구 15) 16) 138 南滿洲鐵道株式會社, 大連に於ける中國人勞動者の生活狀態 10~16쪽. 水內俊雄, 植民地都市大連の都市形成-1899~1945年- 448쪽. 역사와 경계 98(2016.3)
역 내에는 주택, 점포, 시장, 욕장, 소학교, 병원, 클럽, 전기 가스 수도시 설이 설치되었고, 시내와 이어지는 노면전철을 부설하고, 부근 해안의 경 승지를 유원지화하는 등 부대사업이 함께 진행되었다. 해수욕장, 골프장, 호텔, 임대 별장이 갖춰진 호시가우라유원지는 당 초 외국인유치책의 일환으로 설립된 것이었다. 그러나 다롄 주민의 이 용이 급증하면서, 만철은 주민을 대상으로 한 유원시설로 경영 방침을 전환한 후, 구역 내에 다양한 여가시설을 정비하고 노면전차를 연장했 다.17) 1935년 호시가우라 거주 인구를 보면, 전체 4,472명 중, 중국인 이 3,037명(68%), 일본인이 1,160명(26%), 기타 외국인이 272명(6%), 조선인이 3명으로 중국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일본인 및 기타 외국인 거주자 중에는 상류계층의 주민이 많았다. 2. 민족별 거주구역의 계층 분화 앞 절에서는 다롄의 도심 지구와 그 외곽 지구, 교외지구를 구역 용도 와 주민 구성을 통해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구역별로 주민의 민족별 구 성과 계층별 구성에서 일정한 경향이 나타남을 확인할 수 있었고, 더불 어 같은 민족 내에서도 계층에 따른 거주구역의 분화가 나타남을 엿볼 수 있었다. 이번 절에서는 앞선 분석을 바탕으로 동일 민족 내에서의 계 층 분화를 고찰하여, 주민의 생활공간을 구획하고 유형화하는 근거로 삼 고자 한다. 1) 일본인 거주구역의 계층 분화 식민자 로서 일본인의 거주구역은 기본적으로 시계 내의 도심과 교외 지구에 집중되어 있었으나, 계층에 따라 분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일본인 의 거주구역을 주민의 직업과 계층에 따라 분류하면, 크게 구 다롄의 상 업구역과 혼합구역을 포괄하는 중심업무지구, 남산록 후시미다이 바이윈 산록 등의 높은 지대에 자리한 고급주택지구, 샤허커우 일대의 노동자주 택지구, 교외의 전원주택지구로 나눌 수 있다. 17) 水內俊雄, 위의 논문, 448쪽. 식민지도시 다롄과 주민의 생활공간 139
구 다롄의 중심업무지구에는 러시아마치의 만철 사택이나 오히로바 인 근의 행정구역과 상업구역을 중심으로 행정기관이나 만철 및 유력 상사 의 직원, 상업종사자가 주로 거주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단 이곳에 거주 하는 일본인 주민 내에서도 경제적 실력 등에 따른 분화가 진행되었는 浪速町)와 데, 그 일례가 상업가 나니와초( 連鎖街)의 렌사가이( 분화였 다.(<그림 1> 참고) 오히로바 인근의 나니와초는 러시아 통치시대부터 시가 건설이 이루어졌던 구역으로, 일본 통치시대에 들어 다롄 최대의 상업가로 성장했다. 인구 증가와 산업 성장에 따라 다롄 경기가 활성화 되고,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호황기를 겪으며 나니와초의 지가와 임대료가 앙등하자,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게 된 일본인 상인들은 관동 주 행정당국과 만철의 지원을 받아 구 다롄 서쪽에 렌사가이를 건설했 다. 렌사가이는 우여곡절 끝에 1920년대 말 완공되었으나, 당시 다롄의 장기불황으로 인해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다가, 만주사변 이후 지역 경 기가 회복되면서 다롄의 새로운 번화가로 활기를 띠게 되었다.18) 렌사가 이의 건설은 당시 다롄 일본인사회 내의 계층 분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인 동시에, 일본 식민당국의 지원과 비호 아래 이루어진 일본인 상 공업자의 대표적인 식민지 경제활동 사례이기도 했다. 상업지구와 더불어 일본인 주민의 주택지구도 계층에 따라 분화되었 다. 1938년 무렵 다롄 일본인사회의 상층을 점하고 있던 사교클럽회원의 거주지는 남산록 일대과 후시미다이, 바이윈산록 등 산록부의 주택지구 와 호시가우라 및 라오후탄 연선에 집중되어 있었다.19) 즉 다롄 남쪽 산 록부의 고급주택지구와 교외의 전원주택지구 등 한적한 녹지로 둘러싸인 저밀도의 주택지구에는 상류계층의 일본인이 다수 거주했음을 알 수 있 다. 한편 만철기계공장과 일본계 대공장들이 들어서있던 샤허커우 일대 에는 만철 공장에 근무하는 노동자의 사택을 비롯하여 여타 일본인 공장 大連商工會議所編, 大連市に於ける営業分布に関する調査. 昭和十年七月調査 (大連: 大連商工會議所, 1936), 53~79쪽. 19) 당시 다롄의 주요 사교클럽으로는 다롄로터리클럽, 실업동지회(實業同志會), 화요회(火曜會), 이십오일회(二十五日會) 등이 있었고, 회원들은 대개 여러 개의 사교클럽에 중복으로 가입해 있었다. 大連商工會議所編, 大連商工案內. 昭和十三年版 (大連: 大連商工會議所, 1938), 173~180쪽; 水內俊雄, 植民 地都市大連の都市形成-1899~1945年- 448쪽. 18) 140 역사와 경계 98(2016.3)
노동자의 사택지구와 토목건축 등에 종사하는 일본인노동자의 주택지구 가 들어서 계층에 따른 거주지 분화를 보여주었다. 덧붙여 일본인 상류계층과 함께, 다수의 구미 각국 출신자가 구 다롄 山縣通. 남산 주택구역의 가에데초(303명), 상업구역의 야마가타도오리( 154명), 교외의 호시가우라(272명), 라오후탄(92명), 분카다이(78명) 등 에 거주하며 상공업, 교통업, 공무, 자유업 등에 종사하고 있었음에도 주 목해야 한다. 이러한 기타 외국인의 구성과 거주분포는, 다롄을 국제무역 도시로 선전하며 경제적 이익을 얻는 동시에, 자국을 제국주의 열강의 일원으로서 국제사회에 자리매김하고자 했던 일본의 의도 및 조치가 반 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단, 기타 외국인의 절대다수를 점하고 있었던 무국적의 구 러시아계 주민(기타 외국인 1,316명 중 1,019명)의 생활은, 그들과 일본 식민당국과의 관계, 또는 그들을 둘러싼 일본 식민당국과 소비에트연방과의 관계 등을 고려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중국인 거주구역의 계층 분화 한편 중국인의 생활공간은 도심은 물론 외곽으로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으며,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계층에 따른 분화 양상을 보였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중심업무지구의 오쿠마치와 주변 일대는 구 다롄 상업구 역의 높은 지가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있고, 식민 세력과의 관계에서도 입지가 있는 경제적 실력과 사회적 실력을 갖춘 중국인들의 생활공간이 었다. 상업 공업 주택구역의 기능이 혼합된 샤오강쯔는 일반적인 중국인 상공업자와 노동자계층이 거주하던 구역이었고, 도심 외곽의 스얼거우와 스다오졔, 샹루쟈오와 산춘류 등은 도심 거주가 어려운 중국인 빈민층이 집거하는 구역이었다. 그리고 앞서 서술한 인력거부나 마차부, 다롄항 하 역노동자 등은, 오우미초의 인력거부합숙소, 스얼거우의 하역노동자수용 소, 스얼거우와 바이윈산의 마차부수용소 등과 같이 도심 내, 혹은 도심 과 가까운 곳에 건설된 중국인노동자수용소에 거주했다.20) 聽戱 看戱 20) 거주구역 뿐만 아니라 중국인의 주요 여가활동의 하나인 연극(, ) 관람에서도 다롄 중국인사회 내의 계층분화를 엿볼 수 있다. 오쿠마치의 대 극장 잉샨차위안은 여타 중국인극장에 비해 좋은 시설을 갖추었으나 비교적 식민지도시 다롄과 주민의 생활공간 141
중국인사회 내 생활공간의 분화는 주민의 경제적 사회적 실력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인노동자의 관리를 둘러싼 일본 식민 세력의 조치와도 연관이 있었다. 당시 다롄의 산업은 배후지 만주 에서 大豆)나 지하자원을 다롄으로 운반하여 수출하는 교통운수 생산되는 대두( 업과 무역, 배후지에서 운반해온 원료를 수출용 혹은 내수용으로 가공하 油房業) 는 유방업( 21)과 窯業), 만철이나 여타 공업부문에 필요한 기 요업( 구기계를 제작하는 기계공업 등이 큰 축을 이루고 있었다. 중국인노동자 는 이들 주요산업분야는 물론, 도시 잡업 부문에 이르기까지 다롄 산업 전 분야에 대규모 노동력을 공급하고 있었다. 일본은 식민지 경영에 필수 불가결한 중국인노동자의 역량을 인식하여 노동 현장과 높은 접근성을 가 지면서도 민족 간 접촉을 최소화할 수 있는 생활공간을 구축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민족 분거 조치로서 중국인구역인 샤오강쯔가 건설되었고, 민족 분거와 함께 경제적 격차에 따라 생활비용이 싸고 식민당국의 행정 력이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도심 외곽에 빈민층의 자연취락이 형성되 었으며, 고도의 노무관리를 위한 중국인노동자수용소가 건설되었다. 중국인노동자수용소는 부두하역이나 유방, 인력거부, 마차부와 같이 대 규모 노동력이 투입되고 노동 현장과의 접근성을 고려해야하는 업종과 고가였으므로 일반 중국인 노동자는 이용하기가 어려웠다. 중국인구역 샤오 강쯔 극장의 관람료는 최저 20전( )으로 잉샨차위안에 비해 저렴하게 이용 할 수 있었으므로 일대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이 다수 이용했다. 한편 다롄항 근처의 스얼거우에는 보다 저렴한 극장(관람료 최저 10전)이 있어서 그 일 대에 거주하는 저소득노동자층이 주로 이용했다., に ける の 46~47쪽. 21) 근대 다롄 경제를 지탱하고 있던 주요산업의 하나로 만주 특산의 대두( )를 원료로 한 콩깻묵과 두유( )의 생산을 들 수 있다. 유방업( ) 은 콩깻묵과 두유의 제조분야를 가리키는 용어이고, 유방( )은 그 제조공 장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러시아 통치시대에도 다롄에는 중국인이 경영하는 유방이 존재했으나, 다롄의 유방업이 본격적으로 성장한 것은 일본 통치시 대부터였다. 오쿠라구미( )를 필두 주주로 하는 닛신유방( ), 미 쓰이 물산( )이 중일합변회사로서 설립한 산타이유방( ) 등 일본의 거대자본이 투하된 대형 유방과 함께 중국 자본으로 이루어진 다수 의 중소 유방이 다롄 유방업을 이끌고 있었다. 다롄의 유방은 원료의 운반 과 상품 수출에 용이한 다롄항 부근과, 중국인구역 샤오강쯔에 집중되어 있 었다., 398쪽. 錢 於 中國人勞動者 生活狀態 豆 豆油 三井物産 南滿洲鐵道株式會社 大連 大 油房業 油房 大倉組 關東局文書課 關東局施政三十年業績調査資料 142 역사와 경계 98(2016.3) 日清油房 三泰油房
업체에서 채용하는 방식이었다. 이것은 노동 현장과 가까운 일정 공간 안에 노동자와 그 가족이 최소 수준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폐쇄적 생 활공간을 구축함으로써 노동을 비롯한 생활전반을 통제하는 시스템이었 碧山莊) 다. 다롄의 대표적인 중국인노동자수용소였던 스얼거우의 벽산장( 福昌公司)가 중국인노동자 은, 다롄항 부두하역작업을 청부했던 복창공사( 를 일괄 수용, 관리함으로써 다롄 사회 전반의 위생과 치안을 안정시키 고 노동생산성을 제고한다는 목적 아래 건설한 것이었다.22) 벽산장과 마 찬가지로 인력거부합숙소, 마차부수용소 등도 중국인노동자와 그 가족의 생활 자체를 격리하여 관리함으로써 노동밀도와 노동생산력을 제고하고, 散在)를 막아 일본인과의 접촉과 갈등을 최소화하고자 그들의 도심 산재( 한 조치였다. 3. 주민 생활공간의 유형 각 도시공간을 용도별, 주민의 민족별 구성 및 계층별 구성으로 분석 한 이상의 결과를 바탕으로, 다롄의 주민 생활공간을 다음과 같이 유형 화할 수 있다. ① 러시아마치의 만철구역, 오히로바 인근의 상업구역과 그 이남의 혼 합구역, 동쪽의 부두 및 유방지대를 포함하는 구 다롄의 중심업무지구 22) 福昌華工株式會社, 碧山莊 (大連: 福昌華工株式會社, 1934), 1쪽. 다롄항 부 두하역노동자 및 벽산장과 관련해서는 적지 않은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謝 麗는 일본 통치시대 다롄항 부두노동자에 초점을 맞추어 다롄으로 이동한 산둥성 출신 이민의 이주 원인 및 이동 방식과 경로, 다롄에서의 생존 양상 을 분석했다. 謝麗, 大連의 하이난디우(海南丢) 에 관한 연구 : 부두노동자 를 중심으로(1905-1937) 동북아문화연구 39(2014). 柳澤遊는 20세기 전반 다롄항 하역노동자의 노무관리를 중일전쟁 이전, 중일전쟁시기, 아시아 태평양전쟁으로의 확전시기로 나누어 분석했다. 柳澤遊, 大連埠頭, 松村高 夫 江田憲治 解學詩, 滿鐵勞動史の硏究 (東京: 日本經濟評論社, 2002), 249 284쪽. 王洪恩과 曲傳林의 연구는 다롄항 하역노동자를 관리하던 복창화 공주식회사(福昌華工株式會社)를 중심으로 중국인노동자에 대한 일본 제국주 의의 압박과 착취의 측면을 고찰했다. 王洪恩 曲傳林, 日本帝國主義殖民統 治時期的大連福昌華工株式會社 遼寧師範大學學報(社會科學版) 1986年6期 (1986), 84~88쪽. 식민지도시 다롄과 주민의 생활공간 143
(CBD). 2 상류계층의주민이주로거주하던남산록 후시미다이 바이윈산록등남쪽산록부의고급주택지구. 3 서쪽샤허커우일대의만철공장등공업지구와그사택을비롯한일본인노동자주택지구. 4 구다롄에서라오후탄으로이어지는가도연선과호시가우라에분포한교외전원주택지구및휴양지구. 5 오쿠마치와그인근구역등, 구다롄중심업무지구내에분포하는중산층이상의중국인상업지구. 6 주택 상업 공업구역이혼합된샤오강쯔및서쪽으로이어진샤허커우일부의중국인거주지구. 7 도심내에위치한벽산장, 인력거부합숙소, 마차부수용소등의중국인노동자수용소. 8 스얼거우, 스다오졔, 샹루쟈오, 산류춘등도심외곽의중국인빈민가. 다음장에서는상술한생활공간의유형을바탕으로주민생활공간사이의불평등을고찰하도록한다. 144 역사와경계 98(2016.3)
Ⅲ. 주민 생활공간 사이의 불평등 이번 장에서는 생활공간의 유형별로 주민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본적 인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을 확인하고자 한다. 당시 주민의 생활 을 구성하고 있던 기본 요소, 즉 주거, 생업, 자녀교육, 소비, 휴식여가는 식민세력이 규정하거나 직접적 영향력을 쥐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본고 에서는 주거환경, 주거지와 생업 현장 사이의 접근성, 교육기관, 소비생 활을 위한 시장, 휴식여가시설로서 공원에 초점을 맞추어 각 생활공간 사이의 격차를 확인하고, 그 속에 구현되는 식민지도시로서의 특성을 고 찰한다. <그림 4> 다롄의 주요시설 주: 유방의 위치는 1921년의 기록을 바탕으로 표기한 것으로, 1930년대 중반 의 그것과 반드시 일치한다고는 할 수 없다. 출처: 표기 내용은 다음의 지도를 참고했다., ( :, 1921);,. 8 ( :, 1933);,. 南滿洲鐵道株式會社總務部調査課 大連市街圖 大連 南滿洲鐵道株式會社 南滿洲鐵道株式會社 大連市街圖 大連 昭和 年版 大連 南滿洲鐵道株式會社 木崎純 一 最新詳密大連市全圖 附旅順戰蹟地圖 식민지도시 다롄과 주민의 생활공간 145
1. 주거환경 생활의기반이되는주거환경은민족별, 계층별격차가가장뚜렷하게나타나는부분중하나였다. 구역용도가혼재하고도심외곽으로퍼져있었던중국인의생활공간에비해, 일본인의생활공간은도심의주택지구에집중되어있었다. 다롄인구의 4분의 1 가량을차지하던일본인이도시주택면적의 60% 를차지하고있던사실은도시공간에반영된식민성을여실히보여준다. 23) 일본인주택지구에는넓은주택면적을활용하여중국인거주지에비해저밀도의주택지가형성되어있었고, 도로와상하수도시설이완비되어주민생활에편의를제공했다. 남산주택구역이나샤허커우사택구역등일본인주택지구에설치된신사와절은, 일본인주민이종교활동은물론일본본토에서와같은의식과의례를행하고식민의식을고취하는장소로서, 식민지거주일본인의생활에심적 물적안정감을제공했다. 일본인생활공간의주거환경은중국인의그것과비교하여양호했으나, 계층에따라다른양상을보였다. 대표적인예로고급주택가인남산주택구역과노동자의사택및주택이밀집한샤허커우주택구역을비교할수있다. 남산주택구역은러시아통치시대부터도시기반시설이확충된곳으로, 다롄시내와바다를관망할수있는높은지대에저밀도의고급주택들이들어서우수한주거환경을조성하고있었다. 샤허커우의노동자주택구역은샤오강쯔나도심외곽의중국인집거지에비해충실한공공시설과서비스를제공했으나, 공장지대에둘러싸인격자형의가로위에주택들이단조롭게나열되어, 남산주택구역과같은넓고쾌적한주거환경과전망을누릴수없었다. 한편오쿠마치와인근구역을제외한대다수의중국인생활공간에는상하수도등이완비되지않은구역에많은인구가집거하고있었다. 대표적인중국인구역샤오강쯔는도심내에서도인구밀도와주택밀도가매우높은구역으로, 북쪽은철도선로와적탄장, 서쪽은공장지대로둘러 23) 궈톄좡, 관제지음, 신태갑옮김, 일본의다롄식민통치 40 년 2 권 270 272 쪽. 146 역사와경계 98(2016.3)
싸여 있었으며, 주민의 종교 활동이나 심리적 안정을 도울 잘 갖춰진 종 교시설이나 녹지공간이 부족했다. 도심 외곽의 스얼거우, 스다오졔, 샹루쟈오, 산춘류 등의 취락은, 주변 에 도살장과 쓰레기장, 분뇨처리장이 입지하고, 가로와 상하수도 등이 정 비되지 않은 곳에 1만~2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집거하고 있었다. 산둥 성 출신 저소득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주요 거주지였던 스얼거우에는, 정 비되지 않은 가로 위에 새롭게 유입된 노동자나 유민이 거주하는 협소하 半 고 열악한 판잣집과 함께 반( ) 정주 주민들의 가옥이 각각의 구역을 이루며 밀집해 있었고, 현지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허름한 음식점이나 소매상점, 노점이 곳곳에 펼쳐져 있었다. 이들 구역에는 상하수도가 정비 되지 않았으므로, 주민은 대개 물을 소매하거나 수질이 좋지 않은 우물 물을 이용하여 음료수로 충당했고,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도랑에 폐수와 오물을 함께 흘려보내는 등 열악한 위생 상태에 처해있었다.24) 중국인노동자를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중국인노동 자수용소는 다소 상이한 양상을 보였다. 복창공사의 기록에 따르면 1만 명 안팎의 하역노동자를 수용하고 있던 다롄항 벽산장은 수용소 안팎의 위생과 주거환경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수용소 구내에는 상하수도가 완 비되고 전등이 이용되었으며, 목욕탕과 병실은 물론 매점과 여가시설이 마련되어 노동자들은 노동을 제외한 모든 일상생활을 구내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고 한다.25) 기록대로라면 벽산장은 일견 주거환경이 잘 정비된 시설로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앞서 서술한 것처럼 일정 공간 안에 노 동자의 주거 소비 여가를 위한 최소한의 시설을 구비하고 노동자의 생활 공간과 외부를 격리시킴으로써, 대규모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면서 도 일본인과의 접촉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한 조치라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2. 주거지와 생업 현장 사이의 접근성 1935년 다롄 주민의 주요 종사업종은 운수업과 물품판매업을 비롯하 24) 25) 南滿洲鐵道株式會社, 大連に於ける中國人勞動者の生活狀態 10~16쪽. 福昌華工株式會社, 碧山莊. 식민지도시 다롄과 주민의 생활공간 147
旅宿飮食店浴場業 ), 제조업, 토목건축업 등의 상 여 여숙 음식점 욕장업( 공업에 집중되어 있었다.26) 다롄 주민의 생업 현장은 구 다롄과 샤오강 쯔 일대의 상업구역과 혼합구역, 다롄항 부두, 다롄항 부근의 유방지대와 샤오강쯔 및 샤허커우 일대의 공장구역 등 공업구역, 도시 내의 토목건 축 현장, 기타 잡업 현장 등 도심에 집중되어 있었다. 도심 거주자들의 생활공간은 대개 생업 현장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상업종사자들은 점포 내에 주거공간을 마련하여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 다. 만철이나 일본계 대공장들은 부근에 관리자나 노동자를 위한 사택이 나 숙사를 마련하여 거주지와 노동 현장의 접근성을 높였으며, 샤오강쯔 와 샤허커우 내 공장에 근무하는 중국인노동자들도 노동 현장과 가까운 주변에 거주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주거지와 생업 현장이 비교적 떨어져 있더라도 도심 거주자와 교외 거 주자들은 정비된 도로와 노면전차 및 버스(승합자동차) 등의 교통수단을 이용한 이동이 가능했다. 1935년 무렵 다롄 도심과 교외지구의 간선도로 와 지선도로는 대부분 완성되어 있었다. 단, 일본 식민당국이 주체가 되 어 정비한 구 다롄이나 샤허커우의 도로와는 달리, 샤오강쯔의 지선도로 는 대개 현지의 중국인 상공업자들이 자발적으로 건설하여 협소한 것이 많았다. 도로 정비와 더불어 주요 교통수단인 노면전차와 버스가 운행되 면서 생업 현장과 떨어진 곳에 거주하던 사람들도 접근성을 높일 수 있 었다. 다롄의 노면전차는 1909년 구 다롄 지구를 중심으로 운행을 시작 하여, 1910년에는 샤오강쯔와 샤허커우 등 서부 일대, 1911년에는 교외 의 호시가우라, 이후에는 라오후탄 방면까지 연장되며, 1920년대 말에는 이미 하루에 7만 명 가까이가 이용하는 다롄 주민의 발이 되었다.27) 그러나 도심 외곽의 빈민가는 도심에서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었을 뿐 만 아니라, 도로 설비가 불충분하고 대중교통수단이 부재했다. 따라서 주 26) 1935년 다롄 시내 주민(본업자 및 가족)의 직업구성을 보면, 1차 산업에 해 당하는 직종의 비율이 극히 낮은 가운데, 2차 산업이 4분의 1 가량을 차지 하고, 3차 산업부문이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상세 업종별로는 교통 운수업(약 18%)과 물품판매업(약 15%) 종사자의 비율이 매우 높은 가운데, 여숙 음식점 욕장업, 기계기구제조업, 토목건축업, 의류잡화제조업 등에 1만 명 이상이 종사하고 있었다., 19~24쪽. 27), 116~118쪽. 大連民政署 大連要覽 148 역사와 경계 98(2016.3) 大連市役所 大連市史
로 도심 외곽에 거주하면서 도심의 잡업노동에 종사하던 중국인 주민들 은 생업 현장으로의 이동이 도심이나 교외 거주자에 비해 쉽지 않았다. 설령 교통수단이 있다하더라도 중국인노동자들의 이용에는 경제적, 정책 적 제약이 따랐다. 1935년 다롄 시내의 주요교통으로는 노면전차 버스 錢 자동차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노면전차의 요금은 편도 일괄 5전(. 1 円 전은 0.01 )으로 가장 저렴했다.28) 당시 도심 외곽의 주민이 주로 종사 했던 잡업노동의 하루 임금은 0.5엔으로, 이들이 노면전차를 이용하려면 하루 임금의 10분의 1, 왕복 이용 시에는 5분의 1을 지출해야 했으므로, 사실상 이용이 불가능했다.29) 더불어 일본 식민당국은 중국인의 대중교 통 이용에도 관리를 가했다. 중국인의 보통노면전차 승차를 제한하고, 샤 허커우-샤오강쯔-스얼거우를 잇는 노동자의 이동노선에 붉은 색의 중국 인 전용전차를 운행함으로써,30) 중국인 주민과 일본인 주민의 접촉을 최 소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처럼 도심에 있으나 외부와 분리된 중국인노동자수용소의 운영, 중 국인노동자의 노면전차 승차 제한, 공공설비가 부재한 도심 외곽 중국인 빈민가의 존재는, 산업에 필수적인 중국인노동력을 최대한 활용하면서도 도심 내에서는 민족 분리를 관철하고, 도심 외곽 주민의 편의에 대해서 는 방관하는 일본 식민당국의 모순적 태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3. 교육시설 주민들에게 교육이란 자녀들이 다양한 지식과 기술을 익혀 보다 나은 미래를 마련할 수 있는 기반이었으나, 일본 식민당국에게는 주요한 식민 지 통치 수단 중의 하나였다. 식민당국은 일본인 교육과 중국인 교육을 28) 버스 요금은 시내의 경우 1구간 5전에서 구간이 늘어날수록 5전씩 올라갔 고, 교외선은 구간에 따라 달랐다. 1935년 다롄 시내 교통시설과 요금에 대 해서는,. ( :, 1936), 92~103쪽을 참고. 29) 1935년 다롄 중국인노동자의 하루 평균 임금은 1.24엔이었고, 일본인노동자 의 하루 평균 임금은 3.19엔이었다., 180쪽. 30), ( :, 2007), 200쪽. 議所 大連商工會議所編 大連商工案內 昭和十一年版 大連 大連商工會 關東局 昭和十年關東局第三十統計書 竹中憲一 大連歷史散步 東京 皓星社 식민지도시 다롄과 주민의 생활공간 149
구분하는 이원제 교육정책을 실시하여 중국인 교육 수준과 내용에 제약 을 가했고, 중국인의 자율적인 교육 활동을 제한했다.31) 1935년 일본 식민당국의 인가를 받은 일본인 교육시설로는, 초등교육 小學校) 17개, 중등교육시설 13개, 전문 특수교육시설 5개 시설인 소학교( 가 있었다.32) 일본인 교육시설은 구 다롄 각지와 후시미다이에서 바이윈 산록의 주택지구, 샤허커우의 사택구역, 라오후탄 연선의 전원주택구역 등 일본인 생활공간 곳곳에 설치되어, 일본인 자녀의 교육과 기술 습득 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반면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교육시설과 내용은 양적, 질적으로 제한되 關東州公學堂官 制) 를 공포하여 중국인 학생을 대상으로 한 일본어교육과 덕육(德育) 어 있었다. 일본 식민당국은 1907년 관동주공학당관제( 등 식민지교육을 실시하고, 그밖에 일상생활에 필요한 지식과 기능을 가 르치는 수준에서 교육서비스를 제한했다.33) 1935년 식민당국의 인가를 土 받은 중국인 교육시설로는 초등교육시설로서 구 다롄 지구의 토사초( 佐町) 공학당, 샤오강쯔 지구의 시강졔 공학당, 후시미다이 공학당, 샤허 커우 지구의 샤허커우 공학당, 아키즈키(秋月) 공학당, 이즈미초(泉町) 공 학당의 6개 공학당과 대동여자기예학교(大同女子技藝學校), 다롄청년회부 속소학교가 있었다.34) 중국인 교육시설은 일본인 거주구역 곳곳마다 들 어서 있던 다양한 수준의 교육시설과 비교하여 수적으로 적었을 뿐 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제한되어 있었다. 더욱이 그마저도 도심에 집중되어 있어서 도심 외곽에 거주하는 다수의 중국인 자녀들은 비교적 체계를 갖 춘 시설에서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되었다. 샤오강쯔 등 중국인 書房)도 있었으나, 제공하는 교육 수 집거지에는 중국인이 경영하는 서방( 준의 한계와 함께 식민당국의 규제로 인해 활동에 제약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다롄의 중국인 주민은 교육의 질적, 양적 제한으로 인 31) 궈톄좡, 관제 지음, 신태갑 옮김, 일본의 다롄 식민통치 40년 2권 279 297쪽. 32), 691~734쪽. 33) 궈톄좡, 관제 지음, 신태갑 옮김, 일본의 다롄 식민통치 40년 2권 279 297쪽. 34), 691 734쪽. 大連市役所 大連市史 大連市役所 大連市史 150 역사와 경계 98(2016.3)
해 교육 기회에서 차별을 받고 있었고, 정식 교육을 받는 경우에도 식민 적인 교육 과정과 내용을 이수할 수밖에 없었다. 4. 소비시설 주민 생활에 필요한 물자와 서비스의 소비 역시 생활공간에 따라 상이 한 양상을 보였다. 다롄 주민의 물자 구매(소매)는 나니와초나 렌사가이, 露天市場) 등 대형 상점가와 백화점, 공설시장, 주 샤오강쯔의 노천시장( 민 생활공간 곳곳에 자연적으로 생겨난 시장, 가판이나 행상 등 다양한 시설과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으나, 본고에서는 일본 식민당국이 설립한 공설소매시장을 중심으로 소비시설에 대한 접근성을 분석하고자 한다.35) 본고가 논하는 소비시설에 대한 접근성은 생활공간과 소비시설 간의 물 리적 접근성뿐만 아니라, 주민의 구매력으로 인한 소비시설의 이용 가능 여부, 소비시설의 설립 배치 운영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식민당국의 의 도와 조치를 포함한다. 일본 식민당국은 주민의 일용품 구매를 돕고 물가와 위생을 관리한다 薪炭) 어류 육류 채소 는 명목으로, 도심의 인구 집거지 곳곳에 미곡 신탄( 과일 식료잡화 등 일용품 전반을 취급하는 공설시장을 설립했다. 1936년 信濃町), 야마 무렵 다롄의 공설시장은, 구 다롄 상업구역의 시나노마치( 千代田町), 서부의 샤오강쯔, 샤허 커우, 쇼토쿠가이 남쪽의 우스이초(鶯町), 지도상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 으나 라오후탄 방면 전원주택구역의 세이메이다이(晴明臺) 등 일곱 개 가타도오리, 스얼거우 주변의 치요다초( 구역에 설립되어 있었다. 시나노마치 시장(1905년 8월 설립)과 야마가타도오리 시장(1914년 1 월 설립)은, 일본의 다롄 통치 초기에 설립된 공설시장으로, 노면전차가 통과하는 중심가의 입지조건과 규모 및 설비의 축적을 바탕으로 다롄의 양대 시장으로 성장했다. 다롄의 중앙시장격인 두 시장의 이용객은 구 다롄을 중심으로 한 도심 전역에 퍼져있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중심업 35) 다롄 공설시장과 관련된 내용은 했다. 大連市役所, 大連市史 638~639쪽을 참고 식민지도시 다롄과 주민의 생활공간 151
무지구로서주변환경과비싼지가및임대료등을고려하면, 소득수준이높지않은주민의이용은쉽지않았을것으로보인다. 중국인구역의샤오강쯔시장 (1909 년 2월설립 ) 역시비교적일찍부터설립된공설시장으로, 샤오강쯔일대에거주하는중국인주민이주고객이었다. 샤오강쯔시장의설립은주민의소매수요를충족시키고, 물가와위생을식민당국의관리하에두는것은물론, 다롄소비공간내민족분화의정도를제고하고유지하고자한조치라고할수있다. 중국인노동자계층과빈민층이집거하는스얼거우일대에설립된치요다시장 (1927 년 5월설립 ) 역시, 일대의중국인이용객을집중시켜관리를용이하게하고민족분화정도를높이려한것으로이해할수있다. 일본인의거주구역이서부와교외로확장되면서공설시장도곳곳에설립되었다. 샤허커우의니시시장 (. 1922 년 12월설립 ) 은샤허커우내일본인주민의집거에대응한조치로서, 인근의일본인주민대부분과일부중국인주민이이용했을것으로여겨진다. 쇼토쿠가이와바이윈산인근으로일본인주택구역이조성되면서 1936 년에는우스이초시장이설립되었다. 같은해교외전원주택구역에설립된세이메이다이시장은규모는크지않았으나, 중국인주민을대상으로한공설시장이두군데에지나지않았던것과비교하여, 식민당국이일본인주민의편의도모에많은주의를기울였음을알수있다. 5. 휴식여가시설 주거, 생업, 소비와함께심신의피로를회복하기위한휴식여가활동역시생활에필수불가결한요소이다. 본고에서는당시다롄의주요휴식여가시설이었던공원을중심으로각생활공간과휴식여가시설의접근성을살펴보고자한다. 공원은공공의휴식과오락, 보건을목적으로공공단체가마련한공공재이다. 다른각도에서보자면이는곧건설주체인공공단체의의도와계획에따라공원의배치와규모, 원내시설이결정되고, 그것을이용하는 공공 이선별된다는것을의미한다. 다롄에서는공원건설주체인일 152 역사와경계 98(2016.3)
본 식민당국(관동주청, 다롄시, 만철)의 의도와 계획에 따라, 공원에 대한 각 생활공간의 접근성에서 큰 차이가 발생했다. 다롄의 공원은 구 다롄 및 그 인근에 집중되어 있었다. 일본 식민당국 은 근대 공원이 구축된 문명도시 로서 다롄을 선전하고, 이곳에 거주하 던 사회 상층의 주민들에게 쾌적한 휴식여가공간을 제공하고자, 러시아 통치시대부터 계획, 건설되고 있던 공원을 계속해서 정비하거나, 새로운 공원을 건설했다. 구 다롄의 주요공원으로는 먼저 러시아 통치시대에 러시아인을 비롯한 中央公園. 유럽인구역과 중국인구역을 분리할 목적으로 건설된 쥬오공원( 지금의 勞動公園)을 들 수 있다. 일본 통치시대에 들어 구 다롄 남부와 후시미다이 부근에 고급주택지구가 들어서면서, 쥬오공원은 근린에 거주 하는 주민의 휴식처이자 여가활동장소가 되었다. 식민당국은 근린 주민 의 체육활동을 위해 원내에 야구장 궁장 마장 정구장을 구비했고, 구내에 들어선 고급음식점은 일본인 상류층의 사교활동장이 되었다. 구 다롄 북 부 러시아마치의 만철구역에는 정구장 대궁장 아동놀이기구를 갖춘 기타 北公園. 지금의 北海公園)이 정비되어 만철사원과 그 가족들에게 휴 식공간을 제공했다. 남산록의 야요이가이케공원(彌生が池公園. 지금의 大 連植物園), 남산 주택구역 인근의 가가미가이케공원(鏡が池公園. 지금의 兒童公園)은 당초 우수(雨水) 조정을 위한 목적으로 건설되었으나, 근린 공원( 의 주민을 위한 공원의 기능을 겸하게 되었다.36) 반면 샤허커우와 샤오강쯔, 도심 외곽에는 휴식여가시설을 갖춘 공원 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일본 식민당국은 샤허커우와 샤오강쯔에 거주하 는 주민을 위해 이른 시기부터 쇼토쿠공원(지금의 中山公園)을 계획하여 건설을 추진했으나, 중일전쟁 발발 후인 1938년 시점에도 완성되지 못하 고 예정지로 표기되어 있었다. 한편 공원 대신 도살장, 하수처리장, 쓰레 기장이 들어서있던 도심 외곽의 빈민가의 주민들은, 멀리 떨어진 도심의 공원 혹은 공원예정지에서 휴식과 여가활동을 즐길 여유조차 없는 경우 가 많았다. 36) 다롄 공원의 구성과 성격, 설립 주체와 설립 과정, 현황 등에 대해서는 리웨 이 미나미마코토, 다롄 도시공원의 탄생과 변천: 식민지 통치시대(1898 1945)를 중심으로 해항도시문화교섭학 12(2015), 49~81쪽을 참고. 식민지도시 다롄과 주민의 생활공간 153
중국인노동자수용소는 최소한의 시설을 갖추고 외부와 차단되는 생활 공간을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구내에 잘 갖춰진 공원이 없었을 뿐만 아 니라, 외부의 공원에 대한 접근성도 떨어졌다. 단 다롄항의 벽산장은 구 天德寺)와 토지묘(土地廟), 작업 중 사망한 일본인사원과 중 국인노동자를 기리기 위한 만령탑(萬靈塔), 연극 영화 축음기 연주를 위한 내에 천덕사( 극장을 만들어 노동자의 휴식과 여가활동, 종교 활동을 위한 공간을 구 축하고 있었다.37) 그러나 이러한 시설 역시 궁극적으로 노동자의 수용소 생활을 안정시키고, 제한된 공간 내에서 노동력의 재생산을 극대화시키 기 위한 노무관리방식의 일종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Ⅳ. 나오며 본고는 일본 제국주의 통치 하 다롄 주민의 생활공간을, 주민의 민족 별 계층별 구성과 분화를 고려하여 구획하고, 주거환경, 생업 현장과의 접근성, 자녀 교육시설, 소비시설, 휴식여가시설이라는 생활의 기본적인 조건을 중심으로 각 생활공간 사이의 불평등을 고찰했다. 다롄의 생활공간은 구 다롄의 중심업무지구, 산록의 고지대에 자리 잡 은 고급주택지구, 도심의 일본인노동자주택지구와 교외의 전원주택지구, 중국인구역으로서 상공업 용도와 주택 용도가 혼합된 샤오강쯔, 외부와 분리된 중국인노동자수용소, 도심 외곽의 저소득층 자연취락으로 나눌 수 있었다. 각 생활공간에서 접할 수 있는 생활 조건의 불평등은 크게 민족을 기 준으로 나누어지지만, 동일 민족 내에서도 계층에 따라 달라졌다. 사회 상층부를 점하고 있던 일본인과 소수의 중국인 및 구미 각국 출신자들 은, 주거환경이 양호하고 교통이 편리하며 교육시설에 대한 접근성이 좋 고 소비와 휴식여가시설이 구비되어 있는 중심업무지구나 산록부 또는 교외의 고급주택지구에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인노동자계층은 기본적인 공공시설과 생활 조건이 갖추어진 서부 공장지대 근처의 사택지구나 주 37) 154 福昌華工株式會社, 碧山莊 18~21쪽. 역사와 경계 98(2016.3)
택지구에다수가거주했으며, 중층정도의생활수준을갖추고있던중국인들은샤오강쯔의중국인구역에집거했다. 부두하역노동에종사하거나인력거부및마차부등도심의주요교통업에종사하던중국인노동자들은회사나식민당국의노무관리가용이한도심의노동자수용소에서생활했다. 한편민족과계층이교차하는식민지역학관계에서가장취약한입장에놓여있던중국인저소득노동자층과빈민층은도심외곽등생활조건이열악하고불평등이가장심화된생활공간에배치되었다. 이처럼민족과계층으로구현되는식민권력과의관계에따라주민의생활공간이주어지고생활조건전반이규정되는것은식민지도시로서다롄이가지고있던특성이었다. 끝으로본고의한계와앞으로의과제에대해밝히고자한다. 본고는식민지도시로서다롄의특징을보다용이하게드러내기위하여, 민족과계층에따른분화가확실히드러나는구역을중심으로생활공간을유형화했다. 따라서다롄곳곳에서흔히보이던민족혼주의양상에대해서는다루지못했다. 그러나다롄각민족사회의기저를이루던중하층주민의생활공간은대개이러한혼주구역을중심으로구축되었을가능성이높다. 식민지생활공간의실질을보다정확하게포착하기위하여, 혼주구역의주민구성및생활실태와, 혼주과정에서발생한마찰과불평등양상을고찰할필요가있을것이다. 또한본고에서는다롄의양대민족집단인중국인과일본인에초점을맞추면서, 소수민족집단인조선인과구러시아인, 구미각국출신자의생활공간에대한구체적인분석이생략되었다. 이른바제국주의 이등국민 으로서조선인생활의실제와, 무국적자로서일본식민당국및소비에트연방등과복잡한관계로얽혀있던구러시아인의생활상태, 정치경제적으로다롄의상층부를점하고있던구미각국출신자의생활공간에대한파악은, 일본제국주의와의관계를바탕으로주민의생활공간이복잡하게전개되던식민지도시다롄의특성을규명하기위해서반드시해결되어야할작업이다. 식민지도시다롄과주민의생활공간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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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38) A Study on Dalian, a Colonial City, and the Living Spaces of Its Residents Kwon, Kyung-Seon Sakano Yusuke This study set out to classify the living spaces of urban citizens according to the ethnic groups and social classes and analyze their access to the essential goods and service in life by the types in Dalian, which underwent advanced colonization under the Japanese imperial rule, in the middle 1930s, thus identifying its characteristics as a colonial city. The Japanese colonial authorities tried to maximize its urban functions by zoning and using its urban spaces according to the purpose, prevent clashes between different ethnic groups by separating their residential districts, and increase the efficiency of colonial management and keep the social order by arranging and adjusting the residential places of residents according to the social classes. In that process, the living spaces of residents were zoned for residence, occupation, education, consumption, and leisure activities according to the ethnic groups and social classes with inequality happening between the living spaces. The residents of Dalian had their living spaces given and their overall life defined according to their relations with the colonial power embodied according to the ethnic groups and social classes, which was one of Dalian's characteristics as a colonial city. Key Words Colonial City, Dalian, Living Spaces, Ethnic group, Social class 논문투고일 : 2016.3.4 논문심사일 : 2016.3.8 게재확정일 : 2016.3.18 * HK Research Professor, Institute of International Maritime Affairs, Korea Maritime and Ocean University / plumgirl@hanmail.net ** Guest Researcher, School of Global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 Nagasaki University / francisco.ys@gmail.com 158 역사와경계 98(2016.3)
역사와 경계 98(2016.3), 159~208쪽39) 해양을 통해 본 대만사 - 대만학계의 연구현황을 중심으로* 조 세 현** 목차. 들어가는 말. 해양사연구의 흥기와 臺灣島史 의 출현. 해양을 통해 본 대만사 1. 조기대만시기 2. 청조통치시기 3. 일본통치시기. 결론을 대신하여: 해양대만 을 둘러싼 논의 Ⅰ Ⅱ Ⅲ Ⅳ 국문초록 이 논문에서는 대만학계의 대만해양사 연구현황을 정리하면서 동시에 해양을 통 中央硏究院(Academia Sinica)의 中國海洋發展史 연구계획과 曹永和(Cao, Yonghe)의 臺灣島史 를 통해 해 어떻게 대만사를 볼 수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우선 대만해양사연구의 출발을 살펴볼 것이다. 본문에서는 早期대만시기, 청조통치시기, 일본통치시기 등 세 시대의 역사를 史前-1683)는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대만 식민통치 鄭氏왕조의 통치시기로 동아시아 해상무역이 활발했던 때이므로 해 다루었다. 첫째, 조기대만시기( 와 이를 이은 양사와 가장 관련이 깊다. 대만학계는 대체로 조기대만시기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통치를 경험하면서 사회구조가 단시간 내에 비약적인 혁신이 있었을 뿐만 아니 라, 유럽 아시아 여러 국가의 경쟁으로 말미암아 세계무역체계에서 불가결한 구 中華民國 臺灣獎助金 * 이 논문은 2015년 (외교부)의 재원으로 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 부경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학 사학과 교수 / shcho@pknu.ac.kr 해양을 통해 본 대만사 159
성원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둘째, 청조통치시기(1684-1894)는 海禁이 기본적인 국가정책이었으므로 해상무역보다는 대만 내 토지개발이 활발한 시기였다. 비록 청대 대만은 국제무역망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대만과 대륙의 범선무역이 증가하면서 양 지역 간의 분업관계가 나타났으며, 대만과 동남아무역 도 일정 정도 유지되었다. 특히 청말 대만이 개항(1865년)하면서 서양열강과 일 본의 진출이 활발해지자 다시 해양이 주목을 받았다. 셋째, 일본통치시기 (1895-1945)는 일본이 대만을 식민지배하면서 군사적 경제적 필요에 따라 자국 의 해양무역체제 안에 넣었는데, 이로 인해 대만인들은 해양국가의 식민지라는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일본통치시기는 식민지적 근대성(colonial modernity) 문제가 논의의 핵심인데, 청조통치시기와는 달리 해양관련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발전이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 논문의 마지막부분에서는 대만민주화이후 해양대만 을 둘러싼 다양한 논의 를 소개할 것이다. 여기선 실제로 해양사연구가 어떻게 대만사회에 자극을 주어 대만사를 독립영역으로 구축하는데 도움을 주었는지 살펴보았다. 주제어 대만학계, 연구현황, 해양사, 대만사 Ⅰ. 들어가는 말1) 대만학계의 대만사 연구는 20세기 후반 큰 변화를 경험하였다. 이에 대해 한 연구자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우선 정치적 환경이 대만사 연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국민당정권이 대만으로 건너온 후 장 기적인 계엄령 아래에서 대만사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1980년 大中國主義 중심의 역사관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으 나, 1980년대 이후 대만의 정치민주화와 本土化運動의 영향으로 대중국 주의사관이 도전을 받았고 臺灣主體意識을 강조하는 연구가 나날이 늘어 대 이전에는 났다. 이에 따라 1990년대부터는 대만 각지의 향토사나 지역사 연구가 中央硏究院 人 國立政治大學 臺灣史硏究所의 戴寶村교 國立臺灣大學 歷史系 周婉窈교수께 1) 이 글은 작성하는 과정에서 필자의 인터뷰에 흔쾌히 응해주신 의 교수와 수 및 필자의 방문학자 요청을 받아주신 감사의 뜻을 전한다. 文社會科學硏究中心 劉序楓 160 역사와 경계 98(2016.3)
漢人中心主義에서 多族群社會 관점으로 바뀌었다. 平埔族史, 族群關係史, 客家硏究 등이 나날이 증가하 강조되었다. 다음으로 대만사 연구는 점점 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끝으로 1970년대 말기부터 사회과학적 문제의식 이 대만사 연구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어 새로운 연구 분야를 제공하였 다. 특히 토지개척사, 족군사, 법제사 등이 그렇다.2) 이와 같은 대만사연 구의 흥기과정에서 주목받은 새로운 분야 가운데 해양사도 빼놓을 수 없 다.3) 해양사는 간단히 말하면 사람과 바다의 관계를 주축으로 삼는 역사인 데, 사람이 바다에 대해 이해하고 이용한 역사로 인문학적인 측면을 중 시하는 연구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해양사는 대륙형 문화모델의 연구 시각과 달리 바다와 밀접한 인류활동과 역사경험을 중시하여 세계사와 지역사 연구의 성격을 동시에 가진다. 특히 유럽의 해양사 연구는 초기 대항해시대의 제국주의적 색채가 강한 유럽확장사(European Expansion) 의 경향에서 근래에는 다원적인 해양사(Maritime History) 연구로 변화 하고 있다.4) 1980년 중엽 이래 대만사연구가 체계화되고 세밀화 되면서 연구 성과가 축적되자 대만학계는 세계학계의 영향을 받아 해양사라는 새로운 연구영역이 등장했는데, 해양사의 관점에서 대만사를 보면 대만 의 역사와 세계사의 흐름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5) 그런 데 대만해양사의 범주를 정의하는 문제는 생각보다 까다롭다. 대만은 섬 나라이므로 대만해양사란 분야 가운데 대만사 의 의미를 강조하면 그 범 주가 지나치게 방대해질 수 있으며, 거꾸로 해양사 의 특성을 강조하면 어디까지가 대만해양사인지 그 범주가 모호해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특 정국가와 지역을 가리키는 대만사는 국경과 영해를 넘나드는 해양사 고 유의 개방성과 충돌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단지 분명한 점은 대만 사연구의 폭발적 증가로 말미암아 대만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해양사 2) 林玉茹 李毓中 編著, 戰後臺灣的歷史學硏究(1945-2000) (第7冊 臺灣史)(國 家科學委員會, 2010年), 381 382쪽. 3) 필자도 10년 전쯤 대만 역사학계의 급격한 변화현상에 대해 쓴 글이 있다(조 세현, 대만에서의 역사 다시 쓰기, 북방사논총 (10)(2006년)). 4), (, 2000 ), 15 16쪽. 5),, (, 2005 ), 31 쪽. 戴寶村 近代臺灣海運發展 戎克船到長榮巨舶 玉山社 年 陳國棟 臺灣史與東亞海洋史 臺灣的山海經驗 遠流出版公社 年 해양을 통해 본 대만사 161
연구가 풍부해졌다는 사실이다. 이 글에서는 대만학계의 대만해양사 연구현황을 정리하면서 동시에 해 양을 통해 어떻게 대만사를 바라보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2장에서는 중 앙연구원의 中國海洋發展史 연구계획과 曹永和의 臺灣島史 를 통해 대만 해양사연구의 출발을 살펴볼 것이다. 조영화는 중앙연구원 해양사연구팀 뿐만 아니라 다른 연구소와 대만대학 등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의 대 만도사 개념은 대만 섬을 연구주체로 삼은 체계적이고 전 지구적인 대만 新史學의 성립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장 에서는 대만사 연구현황을 통해 早期대만시기, 청조통치시기, 일본통치시 사관으로 기 등 세 시대의 역사를 다루고자 한다. 대만학계에서 대만사의 시대구 분과 명칭문제는 여전히 논란이 많은 부분인데, 여기서는 대략 아래와 史前-1683)는 네덜란드 스페인의 대만 식 같이 나누었다. 조기대만시기( 민통치와 이를 이은 정씨왕조의 통치시기로 동아시아 해상무역이 활발했 던 때여서 해양사와 관련이 깊다. 청조통치시기(1684-1894)는 海禁政策 이 기본적인 국가정책이었으므로 해상무역보다는 대만 내 토지개발이 활 발한 시기였다. 토지개척을 둘러싼 원주민과 예해 이른바 漢人과의 모순과 갈등이 첨 原漢關係의 연구가 많다. 하지만 청말 대만이 개항(1865)하 면서 서양열강과 일본의 진출이 활발해지자 다시 해양이 주목을 받았다. 일본통치시기(1895-1945)는 식민지 근대화문제가 각종 논의의 핵심인 데, 그 가운데 해운과 항구를 비롯한 각종 해양관련 연구들도 적지 않다. 요즘 대만사연구의 흥기와 더불어 사료가 상대적으로 풍부한 일본통치시 기의 해양사연구가 한창이다. 결론을 대신해서 마지막 부분에서는 대만 민주화이후 해양대만 을 둘러싼 여러 논의를 소개할 것이다. 여기선 실 제로 해양사연구가 어떻게 대만사회에 자극을 주어 대만사를 독립영역으 로 구축하는데 도움을 주었는지 간단히 살펴보겠다. Ⅱ. 해양사연구의 흥기와 臺灣島史 의 출현 대만에서 해양사연구가 처음 체계적으로 시작한 때는 일본통치시기인 162 역사와 경계 98(2016.3)
臺北帝國大學 시절부터이다. 당시 대만은 일본제국주의의 남진정책의 중 심이었기에 1928년에 설립된 대북제국대학 文政學部의 사학과에서는 南 方史 혹은 東西交涉史라는 주제로 해양사 연구를 시작하였다. 일제가 역 사연구를 통해 남진정책의 역사적 근원을 찾으려는 과정에서 대북제국대 학과 일본의 해양사 연구전통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 것이다. 사학 과 내 동양사든 남양사든 국사(일본사)든 대부분의 일본인 교수들은 공 통적으로 해외교통사에 장점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학생들에게 교육하 였다.6) 패전 후 대만 내 일본인 역사학자들이 모국으로 돌아가자 대만 현지에서는 方毫 全漢昇 曹永和 등과 같은 젊은 학자들이 등장하였다. 하지만 전후 대만사회는 국민당정부 통치아래 오랜 계엄 상황 속에서 중 국지방사로서의 대만만이 존재했을 뿐, 대만사 자체에 대한 연구는 쉽지 않았다. 같은 맥락에서 남양사연구의 전통은 단절된 채 해양사 연구는 침잠해 있었다.7)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중앙연구원 소속 三民主義硏究所에서 1983년 부터 중국해양발전사 연구계획 을 준비하면서 대만 내 해양사연구의 서 막을 열었다. 1983년 6월 3일과 4일 이틀 간 연구소에서 열린 중국해양 발전사연토회를 통해 발표한 논문들을 모아 다음 해 첫 번째 논문집인 中國海洋發展史論文集 (제1집)을 출판하였다. 그 후 중국해양발전사 학 술회의가 대략 2년에 한번가량 열렸으며, 논문집 또한 이에 맞추어 중 국해양발전사논문집 시리즈로 꾸준히 발간하였다. 1984년부터 2008년 까지 모두 10집의 논문집이 나왔는데, 여기에는 133편의 학술논문과 2 편의 강연논문이 실렸다. 이 논문집에는 대만학계를 대표하는 해양사 전 문가들은 물론 해외학자들도 참여해 항운, 해외무역, 항구도시, 해난, 해 양문화교류, 이민, 화교사회 등 다양한 방면에 걸쳐 수준 높은 논문들을 실었다. 여기서 기억할 사실은 이 논문집의 제목이 중국해양발전사 라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국해양사연구의 맥락에서 그 일부로 대만해양 사를 다루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논문집을 처음 출판할 때 서문에서도 陳昀秀 整理, 傳統與發展: 日本近年的海洋史硏究槪況, 臺灣與海洋亞洲硏究 通迅 第3期(2009年12月). 7) 斯波義信 著 蔡家丘 譯, 海洋史的效用, 漢學硏究通迅 (總111期)(2009年8 月), 17쪽. 6) 해양을 통해 본 대만사 163
분명하게 나타난다. 서문에서 중화민국해양발전사의 연구는 해양이민과 해양발전과 관련해 지역 관점에서 보자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고 했다. 첫째는 해외발전기지인 연해지구, 둘째는 연해의 도서인 대만과 해남도를 포함 한 지구, 셋째는 본토가 아닌 해외지구이다. 이 세 지역 간에는 상호 밀 접한 관련을 가지므로 고루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8) 이에 따라 중국해양발전사 연구는 중국연해지역(연해지구와 연해대외관계), 대 륙연해도서(대만지구와 대만관계), 세계각지 華人이주방면(해외지구와 화 인사회) 등 세 분야를 연구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후 삼민주의연구소는 中山人文社會科學硏究所로 이름을 바꾸었고, 다시 2004년 중산인문사회 과학연구소는 다시 蔡元培人文社會科學硏究中心과 합병하여 현재의 人文 社會科學硏究中心을 만들었다. 이 연구중심은 7개의 專題中心과 5개의 硏究計劃을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海洋史硏究專題中心이 있었다. 이 연 구팀에는 현재 張彬村, 劉石吉, 朱德蘭(위원장), 湯熙勇, 劉序楓(비서) 등 이 전임원구원으로 있으며, 陳國棟(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과 林滿紅 (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 등이 초빙연구원으로 있다. 이들은 모두 대만 학계의 해양사연구를 대표하는 학자들이다. 여러 차례 명칭이 바뀌는 것 에서 암시하듯 20세기 말 대만사의 흥기로 말미암아 21세기로 넘어오면 서 중국해양발전사 연구는 점차 대만중심의 해양사연구로 흐름이 바뀌었 海洋史工作室 인터넷사이 다.9) 특히 해양사연구팀의 유서풍이 운영하는 트는 2006년 말에 만들어져 최근까지 대만 내 해양사 연구현황에 관한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10) 李亦園, 序言, 中國海洋發展史論文集編輯委員會主編, 中國海洋發展史論文集 (第1輯)(中央硏究院三民主義硏究所, 1983年12月). 9) 海洋史專題硏究中心에서 개최한 제10차 해양사국제학술연토회(2006년 8월)에 8) 서는 중국해양발전사를 중심주제로 삼아 열렸으며, 그 논문집도 여전히 중국 해양발전사논문집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국가와 지역을 넘는 새로운 주제로 돌파구를 마련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어 적 지 않은 변화를 암시하였다(, ( 10 )(, 2008 ), ). 이 때 중국 에 방점이 찍혀 있던 해양사 연구를 적어도 아시아 로 연구범위를 확대할 것으로 학자들이 공감한 것으로 보인다. 10) 해양사공작실(http://blog.sina.com.tw/maritime/)의 각종 정보들은 세세하게 湯熙勇主編 中國海洋發展史論文集 第 輯 中央 硏究院人文社會科學硏究中心 年 編者序 164 역사와 경계 98(2016.3)
1980년대 중반 중앙연구원 삼민주의연구소가 해양사연구의 출발을 알 렸다면, 이 작업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사람은 중앙연구원 원사인 曹永和 (1920-2014)였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대만학계 해양사연구의 상징적 인 인물인데, 중국해양사뿐만 아니라 대만해양사연구의 기초를 세운 학 자이다. 조영화는 별다른 학력 없이 젊은 시절부터 대만대학 도서관에 근무하면서 남는 시간에 독학한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일본학계의 영향으로 해상교류사와 대외관계사 분야를 연구했으며 나중에는 일본과 의 관계뿐만 아니라 네덜란드통치시기도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일본과 유럽에 건너가 얼마간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의 연구방향이 중국을 중심 으로 한 사유에서 대만을 중심으로 한 사유로 바뀌면서, 대만을 주체로 삼아 지리적 시각과 동아시아적 각도에서 연구를 진행하였다. 조영화는 대만대학 도서관에서 퇴직한 후 중앙연구원에서 중국해양발전사 연구계 획을 추진하면서 해양사와 대만사 연구에 집중하였다. 이 시기 대만대학 역사학과에도 겸임교수로 출강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해양사 과목을 개설하였다.11) 臺灣島史 라는 개념을 학계에 제안할 때, 대만사의 조영화는 1990년 해양성 특색을 강조하면서 대만은 일종의 해양문명을 대표한다고 주장했 다. 그가 대만도사를 통해, 장차 대만사는 세계사의 맥락 가운데 놓아 區域總體史로서의 臺灣新史學을 건립한다. 는 구상을 제기하였다. 대만도사라는 용어가 글로 등장한 것은 1990년이지만,12) 비록 그의 연구 속 에는 이 개념이 일찍부터 있었다. 이미 몇 해 전 대만 조기역사연구의 자료부족 문제를 지적하면서 대만사를 전체 중국해양발전사와 아시아해 양교통무역사, 더 나아가 세계사의 각도에서 접근하자는 제안을 한 바 있었다.13) 이런 발상이 구체화되어 대만도사 개념으로 나타난 것이다. 조영화는 프랑스 아날학파의 관점, 특히 페르낭 브로델(Fernad Braudel) 각주를 달지 않았으나 본 논문을 작성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 2010 ), 154 157쪽. 12), -, 15 (1990 6 ). 13),, 23 1 (1985 ). 11) 鍾淑敏 等 訪問 吳美慧 等 紀錄 曹永和院士訪問紀錄 中央硏究院臺灣史硏 究所 年 曹永和 臺灣史硏究的另一個途經 臺灣島史 槪念 臺灣史田野硏究通訊 第 期 年月 曹永和 臺灣早期歷史硏究的回顧與展望 思與言 卷 期 年 해양을 통해 본 대만사 165
이 필리페2세시대의 지중해와 지중해세계 에서 제기한 전체역사관과 해 양인식에 기초하여 자신의 역사관을 만들었는데, 시간을 기준으로 삼고 대만에서 생활한 인민을 주체로 삼아 대만의 역사를 바라보았다. 그의 해양문명론은 대만사회의 예민한 정치문제와 갈등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도 해양사와 다족군 사회의 특징을 결합해 연구하자는 것이었다.14) 그의 생각의 요점은 史前시대부터 서로 다른 종족 언어 문화의 人群이 대만 섬에서 활동했으며, 그들이 이곳에서 창조한 역사가 모두 대만사라 고 보았다. 따라서 대만사를 건립하려면 대만도사를 기본적인 공간단위 로 삼아 섬 안에 산 사람들을 연구의 주체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漢人을 중시하거나 대륙문화를 중시하는 관점을 가졌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中 國史觀을 받아들이면 대만은 중국의 도서에 속할 뿐이고, 臺獨史觀을 받 런데 과거 대만사 연구는 정치 분야에 편중되어 대체로 통치자나 아들여도 역시 한족의 관점일 뿐이어서 대만의 역사는 4백년을 넘지 못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만사는 절대로 4백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조영화의 대만도사의 관점에서는 토지와 도서와 해양에서 출발해 모든 생물족군과 이곳 토지가 상호작용한 것이 대만의 역사였다. 해양의 시각에서 보면, 대만의 지리적 위치가 동아시아와 군도의 중심점 에 위치하는데, 서쪽으로는 유라시아대륙, 동쪽으로는 광대한 태평양에 접하며, 계절풍에 따른 국제항로 상에 있어 사전시대부터 동아시아지역 족군 이동의 주요통로라고 하였다. 대만이 역사시대로 진입한 이래 해양 과 외부가 연결되었다. 16세기 유럽 해양열강의 지리상 대발견 이후 대 만은 세계적인 쟁탈전의 한 가운데 놓였으며, 이 때문에 도서의 주권은 주변 국가들에 의해 분할 혹은 통합되었다고 보았다. 장기적으로 보면 대만은 해양과 외부와 각종 관계를 맺었으며 세계조류와 국제정세의 영 향을 받았기에 이를 드러내는 것이 대만역사의 진면목이라는 것이다. 그 는 대만도사의 관념으로 학계에 만연한 한족중심주의와 국가주의를 벗어 나 인민과 지역을 중심으로 역사발전을 이해한다면 대만사의 진정한 모 습을 드러내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믿었다.15) 曹永和, 臺灣史硏究的另一途徑: 臺灣島史 槪念, 臺灣史田野硏究通迅 第 15期(1990年). 15) 曹永和는 한 논문에서 대만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대 14) 166 역사와 경계 98(2016.3)
조영화의 대만도사론은 전후 대만사연구의 새로운 출로를 보여주는 사 학이론으로 높이 평가받았다. 張隆志(중앙연구원 대만사연구소)는 대만사 연구가 중국지방사 로서의 대만사에서 점점 본토 로서의 대만사로 대체 하는 과정이라고 보면서, 조영화의 동아시아해양사와 지역사연구의 새로 운 시각은 토지와 인민의 현실에서 출발하여 도서역사와 본토사회의 발 전과정과 특수성격을 해명하는 것이라고 했다.16) 그리고 吳密察(성공대 以人範史 의 개념을 대신해 학 중문과)은 역사학자들이 오랫동안 사용한 以地範史 의 다른 방식을 개발했다고 보았 조영화는 대만도사관을 통해 다.17) 그 후 대만학계의 해양사연구는 중국해양사가 축소되고 대만해양 사가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사실 현재 대만해양사 연구자 가운데 적 지 않은 연구자들은 과거 중국해양사를 연구했던 사람들이다. 그의 학문적 업적을 높이 평가한 대만학계와 문화건설위원회는 중앙연 近代早期東亞海洋史及臺灣島史-慶祝曹 구원 인문사회과학연구중심에서 永和80大壽國際學術硏討會 (2000년 10월)를 열어 국내외 학자를 초빙하 여 동아시아해양사의 시각에서 대만 섬을 관찰하였다.18) 다시 10년 후 東亞海域與臺灣-慶祝曹永和院士九十壽誕國際學 에 대만대학 도서관에서 術硏討會 (2010년 10월)를 열어 동아시아해양사를 연구하는 국내외 학 자들이 성황을 이루며 그의 장수를 축하하였다.19) 조영화의 학술은 해외 만역사를 조망할 때, 단지 한족의 대만개발이나 혹은 대만 한인사회의 형성 과정 등 중국사의 범주에서만 바라볼 수는 없었다. 동아시아의 범주나 세계 사의 계기를 가지고 탐구할 경우, 국가단위의 국제정치질서를 관점으로 삼 을 필요가 없다. 특히 국제정치사회가 형성되기 이전이나 혹은 더 나아가 원시 무문자 시대이래의 동아시아 각 지역의 경우, 사람들 상호 간 교통과 왕래의 역사 추세 중에 만들어진 동아시아 교통권 교역권과 같은 각도로 연 구하면 오히려 대만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더욱 유리할 것이다. (, ( 41 1, 1991 3 ), ( ) (, 1996 ), 104쪽)라고 하였다.,, ( 16 4 )(, 2009 12 ), 161 184쪽.,, 100 (1991 ). 80 (, 2000년 10월 26일). 2009년 10월 중앙연구원 대만사연구소 주관으로 를 열어 대만도사와 17세기 해양사 연구 및 대만도사와 대만사관의 상호 曹永和 環 中國海域交流上的臺灣與日本 臺灣風物 卷 期 年 月 臺灣史論 文精選 上 玉山社 年 臺灣史硏究 第 卷 第 期 中央硏究院臺灣 16) 張隆志 當代臺灣史學史論綱 史硏究所 年 月 當代 第 期 年 17) 吳密察 臺灣史的成立及其課題 18) 近代早期東亞海洋史及臺灣島史 慶祝曹永和 大壽國際學術硏討會 中央硏究 院人文社會科學硏究中心 臺灣島史 小型學術座談會 19) 해양을 통해 본 대만사 167
에서도 높이 평가받아 네덜란드 일본 등지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2014년 9월 그가 9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각종 추모행사가 열렸는 曹永和紀念講座(2015년 11월 26일)를 개최하여 조영화와 해양아시아론 이라는 주제로 濱下武志 데, 최근에도 대만대학 역사학과에서는 제1차 교수의 특강을 열었다. 한편 조영화는 생전에 바쁜 사회활동으로 인해 학문연구에 집중하기 어렵게 되자 스스로 財團法人曹永和文敎基金會 (1999년 7월)를 설립했는데, 후세대 연구자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 해 만든 단체이다. 이 기금회는 주로 대만도사와 동아해양사 연구를 지 원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이 두 가지 주제는 그가 평생 연구에 주력한 臺灣史與海洋史 시리즈 가 출판되었다. 이 시리즈 가운데 해양사 관련 연구서로는 陳國棟의 臺 灣的山海經驗 과 東亞海域一千年 등과 같은 저서나 歐陽泰(Tonio Andrade)의 福爾摩沙如何變成臺灣府? 등과 같은 번역서가 고루 포 분야이기도 하다. 조영화문교기금회의 지원으로 20) 21) 함되었다. 조영화의 대만도사론은 본인이 재직한 중앙연구원의 해양사연구전제중 심(현재는 亞太區域研究專題中心 내 해양사연구 팀)은 물론 대만학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 소속 진국동의 대만적산해경험 은 저자가 20여 년 동안 쓴 대만역사에 관한 논문들을 모은 것으로 총론, 대만교 통, 淡水, 청대대만, 17세기 등으로 이루어졌다. 전체적으로 보면 조영화 가 받아들인 아날학파의 역사인식을 도서와 동아시아지역과 전지구화의 각도로 바꾸어 지역연구를 더욱 정밀하게 진행한 것으로 평가한다. 여기 서 특징적인 것은 섬 내 작은 지역사를 연구하고, 산 과 바다 로 연결시 켜 구성하며, 다시 도서 와 섬 밖 대 지역 을 연결시키려는 시도였다. 그는 대만도내 연구는 반드시 도외 지역해양사연구를 포함해야한다고 강 대화 라는 주제로 대만도사의 회고와 전망을 담은 모임을 가졌다., (, 2005 );, (, 2005 ). 21) (Tonio Andrade),? (, 2007 ). 이 책은 어떻게 대만이 중국이 되었나? 라는 원제처럼 가출 몰하고 스페인과 네덜란드 및 일본인이 활동하며 해상 정성공이 왕국을 건 설하던 대만이 어떻게 대청제국이 관할하는 일개 가 되었나를 추적한다. 20) 168 陳國棟 臺灣的山海經驗 遠流出版公社 年 陳國棟 東亞海域一千年 遠流出版公社 年 歐陽泰 著 鄭維中 譯 福爾摩沙如何變成臺灣府 遠流 年 海盜 府 역사와 경계 98(2016.3)
조했는데, 대만사 연구는 해양사의 지식과 개념을 연결시켜야만 내용이 더욱 풍부해지고 심도 있게 된다고 믿었다.22) 진국동의 다른 책 동아해 역일천년 의 주제는 경제와 무역을 중심으로 17-18세기 중국인의 해사 활동의 궤적을 찾는 것이다. 이 연구는 조영화의 대만도사와 동아해양사 개념에 호응해 시간과 공간의 범주를 확대한 것이다. 이 저작에 대해 중 국을 중심으로 한 해양사를 사유한 책이라는 평가가 있다. 저자는 중국 의 해양발전은 유럽에 비해 늦지 않으며, 비록 중국해양사를 연구하는데 유럽문헌은 장점이 많으나 중국 중심의 입장에서 다양한 중국 측 자료들 을 유럽문헌과 상호 비교해 연구하자는 주장을 편다. 진국동은 대만도사 와 동아해양사의 개념은 사실상 상호보완적인 관계이며, 대만도사의 건 립과 동아해양사는 세계해양사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인식했 다.23) 이 두 권의 저서는 모두 조영화의 지도와 협조를 받은 것으로 그 의 학은에 보답하는 성격을 띤 책들이다.24) 중앙연구원 대만사연구소에 재직하다 대만대학 역사학과로 옮긴 周婉 窈는 1997년에 출판한 臺灣歷史圖說 에서 대만을 주체로 삼는 대만역 사를 구상하였다. 대만사에 관한 대표적인 개설서로 알려진 이 책은 10 만부가 넘는 많은 판매부수를 자랑하며 국내에도 번역되었는데, 근래에 증보개정판까지 내었다. 대만역사도설 은 대만 역사상의 복잡한 族群 (Ethnicity)과 문화 및 언어를 함께 묶어서 서술하는 틀을 제시하였다. 저자는 대만도를 역사단위로 삼아 人群방면에서는 원주민을 서술기점으 로 삼아, 이후의 편장에도 여전히 그 관점을 견지하여 한인개발사관을 벗어나 대만사 서술의 새로운 국면을 열고자 한다. 25)고 기본적인 생각 陳能治, 從 臺灣島史 硏究到探索 臺灣特性 : 布勞岱 法蘭西特性 的啓發, 思與言 第51卷第3期(2013年9月), 162 163쪽. 23) 陳國棟, 臺灣史與東亞海洋史, 臺灣的山海經驗 (遠流出版公社, 2005年), 20 21쪽. 24) 陳國東은 해양문화연구를 7개의 범주로 나누었다. (1)魚場과 漁撈, (2)船舶 과 船運, (3)海上貿易과 移民, (4)海岸管理 海岸防禦와 海軍, (5)海盜와 밀 수, (6)海洋環境과 生態, (7)海洋人物과 藝術活動 등이다(陳國棟, 海洋文化 硏究的多元特色, 海洋文化學刊 第3期(2007年), 17쪽). 25) 周婉窈, 臺灣歷史圖說 (聯經, 2009年), 增訂本 自序. 이 책은 2003년에 국 내에서도 번역(주완요 지음, 손준식 신미정 옮김, 대만-아름다운 섬 슬픈 역사, 신구문화사, 2003)되었으며, 2007년에는 일본어판(平凡社)도 출판되 22) 해양을 통해 본 대만사 169
을 밝혔다. 대만사 개설서를 통해 지리로서 역사의 기초를 세워 계엄해 제 후의 민족정체성 혼란을 해결하길 기대한 것이다. 주완요는 대만 내 臺灣與海洋亞洲硏究通迅 을 처음으로 해양사란 이름을 달은 연구통신 2008년 9월부터 1년 주기로 몇 차례 발간하였다. 이 간행물은 국립 대 臺灣與海洋亞洲硏究領域發展計劃 팀에서 발행하며 주 만대학 역사학과의 완요가 주편을 맡고 있는데, 요즘은 인터넷사이트를 통해 운영하고 있 다.26) 이 연구통신의 발행과 인터넷사이트의 운영은 대만대학 역사과를 대만해양사연구의 중심 가운데 하나로 만들려는 목적이자, 본인이 이전 에 몸담았던 중앙연구원의 조영화가 건립한 학술전통을 계승하려는 의지 의 표현이다.27) 하지만 주완요는 전형적인 해양사연구자라기보다는 대만 사연구자라고 말할 수 있다. 최근 그녀는 본토관념을 강조해 대만도(대만 본도와 주변도서, 즉 大臺灣)의 산과 바다 및 평원 등 세 곳에서의 인군 활동을 주요 구성요소와 공간무대로 삼아 지나온 역사를 건축 융합하여 대만역사연구를 하겠다는 관점을 제시하였다.28) 정치대학 대만사연구소의 戴寶村은 본래 청대(근대 포함) 해항과 해운 사전문가로 해양사와 대만사에 관한 많은 저서가 있다. 그의 대표저서 臺灣的海洋歷史文化 가운데 하나인 29)에서는 해양의 관점에서 대만의 역사와 문화를 다루면서 전반적으로 대만과 해양의 밀접한 관계를 밝히 고 있다. 대보촌의 견해에 따르면, 오랫동안 이루어진 교육은 대만인의 美學 26) 27) 反 었다. 최근 개정판에서는 제10장 지식분자의 식민운동, 제11장 대만인의 세계가 추가되었고, 전후( )편이 4장 추가되어 대만현대사에 대한 내 용을 대폭 보강하였다. 연구통신에서는 이 연구계획의 명칭을 이라고 정했는데, 대만은 해석할 필요가 없고 이른바 Maritime Asia 란 역사발전과정 중에 해양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아시아대륙과 도서 (중국대륙연안, 일본, 유구 및 동남아 여러 국가 등)을 가리킨다. 라고 설명 한다(https://tmantu.wordpress.com). 2009년 12월 4-5일 간에 대만대학 역사과는 국제연토회 를 열었다. 당시 한국학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하세봉(한국해양대)교수의 이라는 주제보고가 있었다.,,, :,, (, 2011년 5월 28 일)., (, 2011 ). 戰後 臺灣與海洋亞洲研究領域發展計畫 海洋亞洲 臺灣與海洋亞洲 韓 國近年的海洋史硏究槪況 臺灣海洋文化的吸取 轉承與 28) 周婉窈 山 海 平原 臺灣島史的成立和展望 發展 國際硏討會 國立交通大學 人文與社會科學硏究中心 年 29) 戴寶村 臺灣的海洋歷史文化 玉山社 170 역사와 경계 98(2016.3)
마음속에 대륙국가 의 사유방식을 심었는데 지금도 쉽게 제거할 방법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대만은 본래 해양지리적 위치와 해양역사의 발전과 정에 맞추어 독자적인 해양사관을 건립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해양역사 연구를 추동하고 대만해양의 역사상을 중건하여 대륙국가 사유체계로 만 들어진 문화체계를 반성해야만, 비로소 사면이 바다로 둘러싼 현실로 돌 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대만독립론자이기도 한 그는 본인 역시 조영 화의 학술전통을 이어받은 사람의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대만이 해양문 화 발전을 통해 해양국가 건설로 나아가길 희망한다.30) 조영화는 대학 강단에서 강의한 시간이 매우 짧았기 때문에 위에서 언 급한 진국동, 주완요, 대보촌 등은 엄격한 의미에서 그의 직계 제자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이들 모두 조영화의 해양사연구의 영향을 받은 사 실은 분명하며, 다른 해양사연구자들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31) Ⅲ. 해양을 통해 본 대만사 1. 조기대만시기 대만은 사면이 바다이어서 본래 섬에는 사람이 없었고, 모두 외부로부 터 온 이주민들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해양이민의 나라이다. 원주민은 남 도어계로 유라시아대륙의 동남쪽에서 대략 6000년 전 바다를 건너 대만 에 건너온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남도어계민족은 연해와 연하지역에 30) 戴寶村은 해양사 연구방향을 13개의 주제로 나누었다. (1)해양생태와 과학, (2)해양생업의 개념, (3)국가해양정책, (4)해양무역, (5)해안항구발전, (6)해 선 선구의 건조와 발전, (7)항해기술의 발전, (8)해외이민의 현상, (9)해권과 해군, (10)해외불법세력, (11)해외국가의 이해와 왕래, (12)해양사상과 문화, (13)해외영지와 본도 이동의 관계 등이다(,, 36 (2004 ), 31 41쪽). 31) 등과 같은 전문학술지에서 해양사 특집을 마련한 것은 물론, 중 앙연구원과 몇 몇 대학(해양대학, 대만대학 등)에서는 청년과 중고등학교 교 사 등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해양사와 해양문화 관련 학습활동인 을 운영하였다. 史館館刊 復刊第 期 臺灣文獻 習營 年 戴寶村 臺灣海洋史的新課題 國 海洋史硏 해양을 통해 본 대만사 171
거주하면서 수력자원을 이용하여 생활했다. 초기에 산으로 이주한 일부 민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평원과 연해에 살았으며, 그들 중 일부는 지 금도 여전히 해양민족의 특색을 지니고 있다.32) 대만해역을 흐르는 해류 를 黑潮(Kuroshio)라고 부르는데, 필리핀 연해와 대만 동쪽 연안과 대륙 붕을 지나 북상하여 일본에 이른다. 이 해역은 풍부한 어장을 형성하여 오래전부터 漢人 어민들이 흑조를 따라 대만에 오곤 했다. 또한 대만은 지리적으로도 동남아와 동북아가 교차하는 지점이자 대륙연안과 연결되 는 지점에 있다.33) 송원대를 전후해서 해상항운과 무역을 매우 발달하여 서아시아 남아시 아 동남아시아의 상인들이 범선으로 중국무역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중 국을 왕래하던 범선은 주로 중국대륙 해안을 끼고 항행했기 때문에 극소 수만이 대만 섬과 접촉할 기회를 가졌을 뿐이다.34) 명대부터는 해금정책 을 실행하여 과거의 영화를 누리지 못했고, 오히려 琉球가 동북아 동남 아 중국동남연안 해상무역의 중심이 되어 작은 섬이지만 왕국을 이루어 번성했다. 이 시기 대만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국제무역에서 매 력적인 상품이 없었고, 동아시아 무역네트워크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 이다. 그런데 16세기 중엽이후 대만의 국제적 지위가 갑작스레 바뀌면서 早期대만시기(보통 대만역사의 출발을 알리는 네덜란드 스페인통 치시기와 鄭氏통치시기를 지칭함)가 시작되었다. 서유럽 해양제국들이 동 이른바 쪽으로 진출하면서 대만은 동아시아와 유럽 간 중요한 무역노선에 위치 하게 된 것이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식민지와 해 상무역의 이권을 놓고 다툴 무렵, 후발주자인 네덜란드는 정부의 전폭적 인 지원 아래 1602년 동인도회사를 만들고 해상무역의 독점권과 군대를 조직해 전쟁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동인도회사가 중국과 일본무역을 32) 조기대만시기 연구에서 고고학분야의 연구 성과는 대만을 중국 대륙문화의 일부로 볼 것이냐 아니면 동남아 해양문화의 일부로 볼 것이냐에 중요한 시 사점을 안겨준다. 예를 들어, 대만산 연옥의 동남아 분포를 어떻게 해석하느 냐의 문제 등이다. 이 글에서는 연구자의 준비부족으로 역사학분야로 글을 한정하였다. 33), (, 2011 ),. 34),, (, 1979 ), 26쪽. 戴寶村 臺灣的海洋歷史文化 玉山社 年 導言 曹永和 荷蘭與西班牙占據時期的臺灣 臺灣早期歷史硏究 聯經 172 역사와 경계 98(2016.3) 年
전개하는 과정에서 1624년 대만의 동남부 일부지역을 점령하였다. 이를 견제하기 위해 스페인은 1626년 대만의 동북부 일부지역을 점령해 식민 지를 만들었으나, 1642년 네덜란드의 공격에 패배하여 물러났다. 전후 네덜란드통치시기의 대만사 연구는 조영화에 의해 거의 혼자 이 臺灣早期歷史硏究 (1979년 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판)35)는 출 논문집으로 20여 년 동안 송대와 네덜란드 스페인통치시대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대만조기역사의 연구 성과를 모은 것이다. 이때까지 만 하더라도 조영화는 중화민족의 확장과 대만의 개발이라는 시각에서 대만사의 기본성격을 이해하였다. 황하에서 발원한 중화민족이 대만까지 明鄭時期以 활동영역을 넓힌 것으로 본 것이다. 하지만 논문집에 실린 前之臺灣 등에서는 민족주의적 틀을 벗어나 중국과 대만의 밀접한 관계 보다는 명대 해금과 지리상 대 발견으로 촉진된 국제환경을 강조하면서, 16세기 이래 한족 일본인 유럽인들이 동아시아 해역에서 경쟁하고 충돌 臺灣歷史硏究續集 (2000년 출판) 하는 모습을 서술하였다. 그 속편인 36) 環 은 그 후 20여 년간의 연구 성과를 모은 것이다. 이 논문집에 실린 中國海域交流史上的臺灣與日本 에서는 당시 해상세력의 각축을 설명하면 서 네덜란드의 합작대상은 관이든 해적이든 막론하고 처음에는 대만에 온 상선과의 교역이 목적이었으나, 일본의 쇄국과 鄭芝龍의 초무를 받으 면서 대만은 비로소 네덜란드가 아시아에 마련한 무역거점으로 변했다고 보았다. 해상교류를 중시하는 그의 해양사관은 경제사의 발전을 촉진시 켰다. 이 책에서는 대만도사의 관점이 뚜렷하여 대만도 인민을 주체로 하여 대만의 역사를 바라보았는데, 한인이 대만을 개발했다는 관점에서 벗어나 대만 원주민을 중시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본인 스스로 대만사회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연구시각과 방법이 크게 변화했 음을 밝히고 있다. 과거 대만학계는 이른바 정씨통치시기의 정씨집안과 관련한 편협한 주 제에 집착해 연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관행을 바꾸는데 일조한 조 包樂史, 영화는 1980년대에 이르러 네덜란드학자 블루스( J. Leonard 曹永和, 臺灣早期歷史硏究 (聯經, 1979年), 後記. 특히 논문집 가운데 첫 번째 논문인 中華民族的擴展與臺灣的開發 에서 그 관점이 뚜렷하다. 36) 曹永和, 臺灣歷史硏究續集 (聯經, 2000年), 後記. 35) 해양을 통해 본 대만사 173
Blusse)와 공동연구를 통해 네덜란드통치시기 대만사 연구를 활성화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블루스는 대다수 해양사연구자와 마찬가지로 브로델의 지중해연구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다. 그는 동아시아 해양사를 전공한 연 구자로 특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중국(대만)해양사에 관한 많은 저 서가 있으며, 그 가운데 여러 책들은 중국어로 번역되었다.37) 최근에는 看得見的城市 38)를 번역 출판하여 19세기 통상항구도시 출현이전에도 아시아의 바다에는 활발한 국제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설명했다. 이 책은 17-18세기 아시아의 세 항구도시 광주, 나가사키, 바타비아를 주목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가져온 유럽무역은 중국해의 개인무역과 함께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바다에서 번성했다는 사실을 묘사했다. 그는 상인, 해도, 밀수꾼 등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무역방식 이야말로 전 지구적인 정치와 산업혁명에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그 후 대만에서는 유학길에 올라 네덜란드어를 공부하여 직접 대만관 련 네덜란드 당안과 사료를 읽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林偉盛이다. 39) 그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대만관련 사료나 네덜란드통 荷蘭時期東印度公司在臺 金, 銀, 絲, 糖, 鹿皮 등과 같은 상품이 치시기 대만사를 정리하였다. 박사학위논문인 灣的貿易 (1622-1662) 40)에서는 대만 중국 일본 및 동남아 등지로 유통되는 상황을 정리하고 국제정세를 면밀히 분석하여 대만의 동아시아무역거점으로서의 위치를 재검토하였 다. 임위성은 대만이 중계기지로서의 무역체계가 비록 1635년에 이미 건 립되었으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시종일관 주도권을 쥐지 못했다고 보 荷使初訪中國記 硏究 (1989), 中荷交往史 (1989), 巴達維亞華人與中荷貿易 巴城公館檔案硏究 十八世紀巴達維亞唐人 社會 航向珠江 荷蘭人在華南(1600-2000) (2004), 苦澀的結合 十七世紀荷蘭東印度公司的一齣離婚戱劇 (2009) 등이 있다. 38) 包樂史(Leonard Blusse), 看得見的城市 (蔚藍文化, 2015年), 導讀(6 19쪽) 참고. 39) 네덜란드통치시기 대만사 연구현황에 대해서는 林偉盛, 二十年來荷據時期臺 灣史的硏究狀況, 中國現代史專題硏究報告 21集(國史館, 2000年); 林偉盛, 十年來荷據時期臺灣史硏究, 臺灣風物 60卷1期(2010年3月) 등을 참고할 수 있다. 40) 林偉盛, 荷蘭時期東印度公司在臺灣的貿易(1622-1662), 國立臺灣大學歷史 學硏究所博士論文(1998年). 37) 번역된 책만 열거하더라도 (1997), (2002), 174 역사와 경계 98(2016.3)
았다. 왜냐하면 상품의 생산지든 명조의 간섭이든 막론하고 모두 상인 겸 도적인 한인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고, 상품가격과 무역항선도 그들 이 장악했기 때문이다. 곧이어 정씨집단이 무력과 물자의 우세로 1640년 대부터 일본과 동남아시장을 다시 장악했다고 설명한다.41) 앞서 소개한 陳國棟의 臺灣的山海經驗 42)에서도 몇 편의 논문이 네 덜란드통치시기 중계무역과 산업발전에 대해 썼다. 그는 임위성의 연구 처럼 중계무역의 각 시기 발전에 주목하면서 그 시기를 1945년 이후까 지 연장하여 바라보았다. 하지만 임위성과 다른 점은 1640년 이후 대만 이 무역중계기지로서 우위를 가진 것은 정씨집단이 직접 中國絲를 일본 에 팔았기 때문이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여전히 베트남과 인도 동부 지역의 絲를 일본백은과 교환하며 활발한 상업 활동을 벌였다고 본 사실 이다. 뿐만 아니라 동인도회사는 시종 중국으로부터 자기 등을 수입해 다시 유럽이나 동남아시장에 팔았고, 그 대금을 받은 황금 등을 아시아 각지의 네덜란드상관으로 옮겼다고 주장했다.43) 翁佳音의 荷蘭時代: 臺灣史的連續性問 鄭維中의 荷蘭時代的臺灣社會-自然法的難題與文明化的歷程 임위성과 진국동의 연구 말고도 題 44)나 45) 등과 같은 네덜란드통치시기 대만학자의 시각을 반영하는 주요 저작들이 韓家寶, Pol Heyns)의 荷蘭時代臺灣的經 안드라데(歐陽泰, Tonio Andrade)의 나왔다. 뿐만 아니라, 헤인즈( 濟關係模式 福爾摩沙如何變成臺灣府? 등과 같은 외국학자의 시각을 반영하는 저작 (1624-1662) 46)이나 들도 나왔다. 이처럼 현재 네덜란드의 대만통치에 대한 연구는 적지 않 다. 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네덜란드의 통치지역은 서남평원에 제한되 41) 42) 43) 44) 45) 46) 林琮舜, 海洋史硏究之回顧, 臺灣與海洋亞州 (2015年3月17日)(https://tmantu. wordpress.com/). 이 글은 본래 대만학계의 연구현황과 역사교과서의 내용 을 비교분석한 석사논문의 일부를 발췌 정리한 글이다. 본고의 작성에 큰 도 움이 되었다., (, 2005 ).,, (2015 3 )., : (, 2008 )., (, 2004 ). (Pol Heyns), (1624-1662), (2001 ). 陳國棟 臺灣的山海經驗 遠流 年 林琮舜 海洋史硏究之回顧 臺灣與海洋亞州 年 月 翁佳音 荷蘭時代 臺灣史的連續性問題 稻鄕出版社 年 鄭維中 荷蘭時代的臺灣社會 自然法的難題與文明化的歷程 前衛 年 韓家寶 荷蘭時代臺灣的經濟關係模式 國立臺灣大 學歷史學硏究所碩士論文 年 해양을 통해 본 대만사 175
었고, 대만 섬 전체를 효율적으로 통치한 정권은 근대시기 일본이 등장 하기 전에는 없었다. 비록 통치기간은 네덜란드보다 짧았지만 북부대만 을 지배했던 스페인 점거시기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지 적이 있었다. 이에 따라 스페인통치시기에 대한 연구가 지역사 형태로 나타났다. 宗仁의 鷄籠山與淡水洋: 東亞海域與臺灣早期史硏究 陳 (1400-1700) 47)가 대표적이다. 그는 대만북부지역의 조기역사 발전과정을 1570), 航行指標(1400- 轉運貿易(1570-1625), 主權의 轉換(1626-1700) 등으로 나누어 변화과정을 탐색하였다. 연구서 제목에서 나오는 항구도시인 계롱(현재의 基隆)과 담수는 지리적 장점으로 인해 1570년대 명조가 해금을 이완했 을 때 일찍부터 허가한 해외무역항구로 門外要地 라고 불리며 海商이 몰 리는 번영을 이루었다. 그러나 생활물자를 주로 수입하던 계롱과 담수는 17세기에 이르러 남방의 大員(현재의 臺南 일부)과 경쟁이 되질 못하였 다. 게다가 아메리카 백은의 감산과 일본 쇄국의 충격으로 1635년 이후 중계기지로서의 기능은 점차 상실했으며 최종적으로 두 곳 모두 주변화 되었다고 설명했다. 이 연구는 조기해양사연구가 대만남부지역에 집중하 던 기존 연구에서 벗어난 것으로 동아시아해역사의 시각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스페인 유학출신인 方眞眞은 중국과 필리핀 간 무역연구로 알 려져 있는데, 스페인 자료를 활용해 대만과 필리핀 간 관계사에 주목한 明末淸初臺灣與馬尼拉的帆船貿易(1664-1648) 이란 저서가 있다. 역 시 스페인 유학출신인 李毓中이 쓴 동아시아 해양사 관련 여러 논문 중 48) 에는 대만을 주제로 한 글들이 적지 않다. 그리고 대만대학에서 강의하 鮑曉鷗, Jose E. Borao)가 쓴 西班牙人的臺灣體 는 스페인학자 보라오( 驗 (1626-1642) 49) 등도 출판되었다. 16세기 후반 한인이 대만으로 건너와 활동하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대 륙으로부터의 이주는 대만역사발전의 새로운 동력이 되었다. 해외로부터 유입된 세력이 대만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경우는 그 후에도 반복되었 陳宗仁, 鷄籠山與淡水洋: 東亞海域與臺灣早期史硏究(1400-1700) (聯經, 2005 年). 48) 方眞眞, 明末淸初臺灣與馬尼拉的帆船貿易(1664-1648) (稻鄕出版社, 2006年). 49) 鮑曉鷗(Jose E. Borao), 西班牙人的臺灣體驗(1626-1642) (南天, 2008年). 47) 176 역사와 경계 98(2016.3)
다.50) 네덜란드통치시기 대만의 어업발전은 기본적으로 閩南지역 출신의 한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시기 어업사에 관한 연구는 일찍이 일본 中村孝志의 荷領時代臺灣南部之鯔魚漁業 과 臺灣南部鯔漁業再 論 등이 있으며, 대만학자로는 曹永和의 明代臺灣漁業誌略 과 明代 臺灣漁業誌略補說 등이 있다. 조영화의 앞의 논문에서는 명대에 이미 대만지역에 閩南 어민들이 작업하는 어장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팽호 일 인 학자 51) 52) 대 해역에 제한되었으나 나중에는 대만의 서남해안으로 확대되었다고 보 았다. 뒤의 논문에서는 중촌효지의 연구 성과와 새로운 사료를 활용해 대만어업의 발전과정, 중국어민이 대만에 고기잡이하러 온 규모, 네덜란 드인의 중국인 포어세 과세 및 대만의 중요 어장 등을 기술하였다. 조영 화의 대만어업사 관련논문은 1950년대에 이루어진 대만사연구의 고전으 로 손꼽는다.53) 17세기로 넘어오면서 한인이 대규모로 대만으로 이주해 오게 된 배경 의 하나는 1600년을 전후해 대륙어민들이 대만 서남해안에 큰 어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매년 왕래하는 어민은 만여 명에 이 르렀는데, 이들 어부들은 봄에 대만으로 건너와서 농업도 겸하며 생활하 다가 가을에 수확이 끝나면 다시 대륙으로 돌아가는 계절성 이민이었 다.54) 1624년 네덜란드인들이 대남에 왔을 때나 1626년 스페인인들이 북대만에 왔을 때, 모두 소규모로 흩어진 한인촌락을 발견했는데 당시 50) 대륙학계의 시각에 따르면, 대만의 해양문화는 복건해양문화와 기원이 같으 며 해양문화의 이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대만과 복건지역의 해 양문화의 발전과정에는 각자의 특색이 있다. 복건해양문화의 발전은 전통적 으로 현지 지리환경에 의해 결정되었는데, 통치자의 정책 제한을 받아서 장 기간 험난한 발전과정을 거쳤다. 이와 달리 대만해양문화는 지역 해양 문화의 이식과 연장선아래서 이를 뛰어넘는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다(,,, (2012 3 ), 101쪽). 51),, 6 1 (1953 ). 52),, 7 4 (1954 ). 53), (1945-2000) ( 7 )(, 2010 ), 55쪽. 54), :, (, 2002 ), 247쪽. 閩南 閩南 陳思 從歷史角度比較閩臺海洋文化的發展 福建論壇 人文社會科學版 年 第期 曹永和 明代漁業誌略 臺灣銀行季刊 卷 號 年 曹永和 明代漁業誌略補說 臺灣銀行季刊 卷 號 年 林玉茹 李毓中 編著 戰後臺灣的歷史學硏究 第 冊 臺灣史 國 家科學委員會 年 林滿紅 黑潮文明經濟圈 的歷史與文化 臺日關係編 晩近史學與兩岸思維 麥田出版 年 해양을 통해 본 대만사 177
한인들은 원주민들과의 교역에도 종사하고 있었다. 한 연구자는 만약 중 국연해어업의 발전과 확장이 민남 어민을 대만남부해역에 고기잡이하도 록 만들어 대만의 발견 을 가져온 역사적 원인의 하나라면, 중국어업사 의 맥락에서 대만사를 심사숙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55) 한인은 1630년대에 대규모로 대만으로 건너오기 시작하여 1650년대 에는 대략 2만여 명의 한인이 거주하였다. 이들 한인이 대만에 온 또 다 른 배경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대만에서 토지를 개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인들은 대만원주민의 농업기술 수준이 너무 낮다고 보아 고급농업기술을 가진 한인들을 유입시켰다. 이 시기는 네덜란드인 들이 말하는 흑인들-동남아와 인도 등지의 사람들-도 함께 건너왔는데, 전성기 때는 모두 3만여 명에 다다랐다.56) 조기대만시기 일본인의 활동 에 주목한 연구도 있다. 易 57)에서는 林景淵의 濱田彌兵衛事件及十七世紀東亞海上貿 네덜란드인이 대만에 식민지를 건설할 때 발생한 일본인과 네덜란드인과의 충돌사건을 다루었다. 濱田彌兵衛事件은 네덜란드의 동 아시아무역과 일본의 해외팽창이 충돌한 사건으로 대만과 일본을 배경으 로 한 무역 분쟁이었다. 이를 통해 17세기 동아시아 해상무역의 단면을 읽을 수 있다. 周婉窈의 海洋與殖民地臺灣論集 58)은 해양편과 식민지편으로 나누어 진 논문집으로, 그 가운데 해양편에는 4편의 논문이 실려 있다. 이 논문 美麗島船難事件, 陳第 東番記 의 소 개와 분석, 명청문헌 가운데 臺灣非明版圖 의 예증 등을 다루고 있는데, 들은 명대인들의 대만인식, 1582년 이 시기 대만이 중국인가 아닌가를 다룬 논쟁적인 글이다. 그녀는 명조 陳第의 東番記 나 舟師客問 등의 문헌을 분석하여 당시 대만은 중국 陳國棟, 臺灣史與東亞海洋史, 臺灣的山海經驗 (遠流出版公社, 2005年), 24 쪽. 56) 鄭瑞明, 臺灣早期的海洋移民-以荷蘭時代爲中心, 邱文彥主編, 海洋與臺灣過去現在未來, 海洋文化與歷史 (胡世圖書, 2003年), 43 44쪽. 57) 林景淵, 濱田彌兵衛事件及十七世紀東亞海上貿易 (南天書局, 2011年). 55) 58) 해양대만(maritime Taiwan)과 식민지대만(colonial Taiwan)으로 나누어진 논문집이다. 해양사(4편)와 식민지사(6편) 등 연구논문 10편을 모으고, 부록 으로 두 편의 소논문을 덧붙여 12편의 논문을 편집한 책이다(, (, 2012 )). 與殖民地臺灣論集 聯經出版公司 178 역사와 경계 98(2016.3) 年 周婉窈 海洋
의 영토가 아니라고 논증하였다. 대만이 1684년 이전까지 중국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역사 사실이며, 수십 년간 유행한 정치주장 즉 대만은 예부터 중국의 신성한 나눌 수 없는 영토 라는 논리를 사료분석을 통해 대만은 명의 판도가 아니었다. 고 반박한다.59) 한편 이 시기와 관련하여 전문적인 학술서라기보다는 대중성을 갖춘 저 작들도 나왔다. 예를 들어, 관료출신인 湯錦台이 쓴 大航海時代的臺灣 60) 에서는 서태평양의 해권 쟁탈은 4백 년 전 대만주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면서, 17세기 대항해시대를 대만해역과 관련시켜 소개하였다. 포르투갈 과 스페인은 물론 네덜란드의 신흥 상업 자본은 인도네시아와 일본에 걸 쳐 상업왕국을 건설했고, 이전부터 활동하던 중국인 일본인들과 상호 영 향을 주고받으며 대만, 복건, 일본 큐슈를 중심으로 무역지대가 만들어진 사실을 강조하였다. 이런 사실은 대만사를 세계사의 시각에서 바라보도 록 한다는 것이다. 대만출신 재미학자인 東西洋的交接 61)에서는 蔡石山의 海洋臺灣: 歷史上與 역사적 시각에서 대만과 해양의 관계를 조망한 다. 여기서는 네덜란드통치시기에 제한하지 않고 외국모험가들이 대만에 온 이야기, 서로 다른 해양문화와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대만원주민에 게 준 비애, 중국식 범선무역, 강력한 네덜란드 연합동인도회사, 영국 아 편상인과 스코틀랜드 차상인, 예수회신부와 장로회선교사, 일본식민주의 자, 미국 관리들의 이야기 등을 고루 다룬다. 네덜란드 스페인인들이 대만을 동아시아 중계무역거점으로 만들었다 면, 鄭成功은 반청복명의 깃발아래 네덜란드인을 몰아내고 대만을 반청 의 근거지로 삼았다. 처음 정성공이 대만으로 왔을 때 원주민과 한인이 무조건 환영한 것은 아니며 적지 않은 저항도 있었다. 정성공 사후 이 대만 최초의 한인정권인 鄭經 東寧을 건국하였다. 그 후 해양입국의 정씨 59) 대만 팽호의 조기역사연구에서 출토유물이 많이 나왔는데 불구하고 문헌에 만 의존하는 학계의 태도를 지적하는 주장도 있다. 송원시기 도자기의 대량 출토는 이 시기 대만과 팽호 역사의 재구성 가능성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2008 10 ), 26 28쪽). 60) (, 2011 ). 61), : (, 2011 ). 陳 信雄 被疏忽的重點與立足點 鄭和下西洋硏究與臺彭硏究 中國海洋發展史 硏究的回顧與展望工作坊 年 月 湯錦台 大航海時代的臺灣 如果出版社 年 蔡石山 著 黃中憲 譯 海洋臺灣 歷史上與東西洋的交接 聯經出版公司 年 해양을 통해 본 대만사 179
왕조는 일본 나가사키와 대만 및 복건 광동 연해의 해상무역을 장악하여 명실상부한 동아시아와 남양의 해상무역왕국을 건립하였다. 바다를 매개 로 잠시나마 경제적 풍요를 이루었으나 청 제국 연해에 영향력을 미치고 무역이익을 보려는 시도가 오히려 망국을 초래하였다.62) 정씨왕조와 관 련해서는 전통적인 제국주의식민, 한인개척의 해석입장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특히 정성공을 민족영웅으로 묘사하며 찬양하는 글들도 적 지 않았다.63) 하지만 대만사와 해양사연구가 꾸준히 늘어나면서 정씨왕 조의 의의를 과장하기보다는 대만과 세계의 접촉을 강조하고 대만 섬 내 족군의 움직임을 주목하는 방향으로 연구가 선회하였다.64) 대만학계는 대체로 조기대만시기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통치를 경험하 면서 사회구조가 단시간 내에 비약적인 혁신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유 럽 아시아 여러 국가의 경쟁으로 말미암아 세계무역체계에서 불가결한 구성원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이렇듯 대만은 국제화된 해양 국가였음에 도 불구하고 1683년 정씨왕조의 몰락과 1684년 청조의 대만통치 이후 해금정책으로 말미암아 바다와 멀어졌다는 것이다. 2. 청조통치시기 청조는 遷界令, 海禁, 招撫 등을 비롯해 무력을 동원해 대만을 점령했 으며, 대만을 방어하기 위해 대만을 통치한다. 는 방침에 따라 대만을 다시는 외부인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통제정책을 실시하였다. 한인들이 대만으로 이주하는 것을 엄격히 제한하자 불법으로 건너가다 62) 薛化元 戴寶村 周美里, 臺灣, 不是中國的-臺灣國民的歷史 (群策會, 年), 54 59쪽. 2005 63) 대륙학계의 시각에 따르면, 17세기 20년대 초 네덜란드와 스페인 식민주의 자들이 차례로 대만에 들어오고, 17세기 초 동북지방의 만주족이 40년대 초 중원에 들어와 청군은 정성공이 장악한 복건과 네덜란드인이 점령한 대만과 대치하였다. 중국연구자는 정성공을 항청운동이 실패하자 새로운 항청기지 를 찾고자 대만으로 건너와서 네덜란드 식민주의자들을 내쫒고 대만을 수복 한 민족영웅이라고 본다(, (, 2001 ), 7쪽). 64),, (2015 3 ). 陳在正 臺灣海疆史硏究 廈門大學出版社 引言 林琮舜 海洋史硏究之回顧 臺灣與海洋亞州 年 月 180 역사와 경계 98(2016.3) 年
선박이 난파해 죽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게다가 남자들만 건너가다 보니 성비의 불균형이 심각해져 사회가 불안해졌다. 1717년 청조가 모든 남양무역을 금지시키자 대만의 해외무역은 단절되었다. 1727년 청조가 다시 남양무역을 개방했으나 대만을 대외무역항으로 지정하지는 않았다. 청의 통상항구로 하문과 광주가 정해지자 한 세기 가량 번영하던 대만의 해외무역은 침체에 빠졌으며, 중국 연해항구와의 교역정도로 규모가 축 소되었다. 청 제국의 육권통치사상은 해양지리적 특징을 가진 대만이 다 시 동아시아와 유럽의 주요 무역거점이 되는 것을 막았으며, 상인기질이 강한 복건상인조차도 보수적인 정치체계 속에서 자신들의 특색을 발휘하 지 못했다. 이 때문에 중상적인 해양성격은 점차 농업대만으로 바뀌어갔 다. 혹자는 대만이 중국에 가까웠기 때문에 중국인이 유일하게 해상으로 진출해 식민지를 만들고 판도 내에 넣은 것이지, 만약 대만이 중국과 거 리가 멀었다면 대만으로 이주한 한인들은 마치 동남아 화인거주지와 마 찬가지로 변했을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즉 서양제국주의 식민지가 되었 지 한인사회로 성장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65) 청조통치시기 대만 원주민과 한인과의 세력관계는 오랜 세월동안 끊임 없는 논쟁거리였다. 한인이주민이 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대만사회의 주 류집단이 되면서 원주민, 특히 귀화한 원주민인 熟蕃의 토지는 대량으로 한인의 손에 넘어갔다. 숙번지권의 상실과 변천과정은 1980년대 원주민 사가 흥기할 때부터 주목받은 문제였다. 초기에는 한인개발사의 각도에 서 원주민을 관찰하여 상대적으로 단순하게 그들이 토지를 잃어 가난에 처했다든지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 없어 한인의 문화와 제도를 받아들였 다는 정도였다. 1990년대에 들어와 원주민의 입장에서 한인이 경계를 넘 어 토지를 개간한 사실을 탐구한 연구들이 나타났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陳秋坤이 쓴 淸代臺灣土著地權-官僚 漢佃與岸裡社人的土地變遷(17001895) 이 있다. 그리고 21세기 들어와서도 柯志明이 쓴 番頭家 淸 代臺灣族群政治與熟番地權 이 나타났다. 이런 책들은 일반적인 착취나 66) 67) 65) 66) 湯錦台 大航海時代的臺灣 (如果出版社, 2011年) 중 中央硏究院院士 許倬 雲의 추천사. 陳秋坤, 淸代臺灣土著地權-官僚 漢佃與岸裡社人的土地變遷(1700-1895) (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 1997年). 해양을 통해 본 대만사 181
보호의 관점을 넘어서 정책의 이념 변천 및 성과 등을 전면적으로 검토 해 청대대만의 族群關係를 설명한 뛰어난 저작으로 평가받는다. 상대적 生藩과 그들의 영토는 청조의 통치를 받지 않았는데, 1874년 일본 이 대만원주민을 정벌한 牧丹社사건은 원주민 지권문제와도 관련되어 있 으로 었다.68) 원한관계는 경우에 따라서는 해양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 예를 들면, 戴寶村의 帝國的入侵 牧丹社事件 69)은 대만인을 주체로 삼아 국 가와 민족의 틀을 설명한 저작인데, 해양사관의 영향이 뚜렷하게 드러난 다. 1867년에 발생한 해난사건인 羅妹號(Rover)사건에서 미국과 대만원 주민 사이에 맺어진 맹약은 국제조약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역시 해난 사건에서 비롯된 목단사사건에서는 일본과 원주민 간에 전투가 발생하였 다. 이때 청조는 대만전도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면서도 政敎가 미치지 化外의 땅이 있음을 인정하였다. 일본과의 교섭과정에서 청조는 유 구의 종주권이 도전받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으며, 萬國公法에 대한 무지 않는 는 결국 일본의 대만침략 정당성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원주민이 깊이 관여된 목단사사건은 해양사 시야를 통해 대체로 관방의 입장이나 민족주의 해석에서 벗어나서 원주민의 대외접촉과 세계정세를 중심으로 한 연구관점으로 바꾸었다. 비록 청대 대만은 국제무역망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 라 대만과 대륙의 범선무역이 증가하면서 양 지역 간의 분업관계가 나타 났다. 그리고 대만과 동남아무역도 일정 정도 유지되었다. 앞서 소개한 臺灣歷史上的貿易與航運 바 있는 진국동의 대만적산해경험 에 실린 에서는 중국 70) 海盜가 해외로 나아간 거점, 중국연해어업의 발달이 대만근 해를 중국인의 어장으로 만든 사실, 대만에서 찾아낸 수출상품들, 대만이 새로운 국제항선의 중계지가 된 점 등을 통해 16세기 중엽 이후 대만의 柯志明, 番頭家 淸代臺灣族群政治與熟番地權 (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 2003 年). 68) 林琮舜, 臺灣史硏究在高中敎科書中的落實與落差, 國立臺灣大學歷史學系, 碩 士論文(2014年), 29 31쪽. 69) 戴寶村, 帝國的入侵 牧丹社事件 (自立晩報, 1993年). 70) 陳國棟, 臺灣歷史上的貿易與航運, 臺灣的山海經驗 (遠流出版公社, 2005年). 67) 182 역사와 경계 98(2016.3)
淸代中葉(約1780-1860)臺灣與大陸之間的帆 船貿易:以帆船爲中心的數量估計 에서는 청대중엽 대만과 대륙 간 범선 정세변화를 살폈다. 그리고 71) 무역의 흥쇠를 연구했는데, 청대 대만항운업의 대강을 살피기에 유용한 글이다. 嘉慶연간의 蔡牽을 주제로 한 단행본 개별논문이 적지 않다. 한 예로, 廖風德의 海盜 與海難: 淸代閩臺交通問題初探 에서는 해도와 해난에 관한 사건들이 閩臺 양 지역의 경제뿐만 아니라 대만이주에 심리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해양신앙의 보급을 가져왔다고 보았다. 일본학계 해양사연구자인 松浦章 도 東亞海域與臺灣的海盜 라는 단행본을 대만에서 번역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는 海商을 개괄적으로 다루면서, 주로 海盜라고 불리는 세력을 청대의 해도문제는 상당히 심각했는데, 연구72)말고도 73) 74) 해상에게 위협을 가하고 피해를 입히는 동시에 반체제 세력으로 묘사하 鄭成功, 蔡牽, 郭 였다. 특히 범선을 이용해 항운업을 하던 청대의 해도들( 婆帶, 張保子 등)은 물론이고 일본통치시기 대만해협의 해도들의 각종 면 모도 다루었다. 마치 네덜란드통치시기 해양사연구에서 블루스가 대만학 계와 폭넓은 교류를 가졌듯이, 청조(근대 포함)통치시기 해양사 연구에서 는 일본학자 松浦章이 유명하다. 청대 해난사에 대한 연구는 다른 시대에 비해 풍부한 편이다. 대표작 湯熙勇의 淸代臺灣外籍船難的處理方法及其影響 과 淸代臺灣 的外籍船難與救助 등이 있다. 여기서는 민간과 관방에서 선박조난 때 75) 으로는 76) 인식하는 차이, 습관과 법률의 충돌, 선박조난의 처리과정에서 나타나는 차이 등을 분석하였다.77) 그리고 劉序楓도 해난사에 관한 여러 편의 논 陳國棟, 淸代中葉(約1780-1860)臺灣與大陸之間的帆船貿易:以帆船爲中心的數 量估計, 臺灣的山海經驗 (遠流出版公社, 2005年). 72) 李若文, 海賊王蔡牽的世界 (鄕稻出版社, 2011年). 73) 廖風德, 海盜與海難: 淸代閩臺交通問題初探, 中國海洋發展史論文集 第3 輯(中央硏究院中山人文社會科學硏究所, 1988年3月), 263 280쪽. 74) 松浦章, 東亞海域與臺灣的海盜 (博揚文化, 2008年). 75) 湯熙勇, 淸代臺灣外籍船難的處理方法及其影響, 行政院國家科學委員會專題 硏究計劃成果報告 (中央硏究院中山人文社會科學硏究所, 1996年). 76) 湯熙勇, 淸代臺灣的外籍船難與救助, 中國海洋發展史論文集 第7輯(中央硏 究院人文社會科學硏究所, 1999年). 77) 林玉茹 李毓中 編著, 戰後臺灣的歷史學硏究(1945-2000) (第7冊 臺灣史)(國 71) 해양을 통해 본 대만사 183
淸末東亞變局與終日琉球關係 以漂流民的遣返問題 경우 고궁당안, 지방지, 비문, 해관보고, 中日韓琉 등지의 문을 썼다. 그 가운데 爲中心 78)의 문헌을 분석해 해난의 원인, 선박의 손실상황, 선박의 구조상황, 인원의 구조와 협력 등을 분석하였다. 청조가 유구 조선의 조난선박을 만났을 때, 전통적 책봉조공체제 아래서 주변국과 정기적으로 책봉과 조공의 예 를 갖추었듯이 이에 준한 방법으로 해난문제를 처리하여 종번의 지위를 유지했다고 설명한다. 한편 대만 중앙연구원 인문사회과학연구중심 해양 사연구팀의 유서풍과 탕희용는 일본 關西大學 문학부의 松浦章과 공동으 로 근대 중국해역 부근에서 발생한 해난자료를 정리하였다. 그 결과물로 淸代檔案中的海難史資料目錄 이 나왔는데, 이 자료집은 近代環中國 海的海難資料集成 이라는 장기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대만학계의 淸代海防(혹은 해군)史에 대한 연구는 1960년대에 주로 양 79) 무운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청말 대만의 광산 전선 철도 대외관계 등과 관련해 주목하였다. 1970년대에는 해방(해군)연구가 앞 시대를 이 어 대만통치정책, 臺灣建省, 조약개항, 역사인물 등과 관련해 이루어졌다. 1980년대에도 이런 흐름에는 큰 변화가 없었는데 주목할 만한 연구자로 는 許雪姬가 있다. 그녀는 淸代臺灣的綠兵 80)에서 청대 대만의 군사제 도에 주목하여 녹영의 설치, 총병관의 직권, 반병의 기능 등을 분석하였 다. 근래에 청대 대만해방사의 대표연구로는 防 81)을 許毓良이 쓴 淸代臺灣的海 들 수 있다. 그의 석사논문을 기초로 만들어진 이 책은 청조 동 남해방의 배경 아래 대만해방을 체계적으로 서술하면서 대만이 중국변경 淸代 으로서 지니는 특수성을 홀시하지 않았다. 그는 최근에 대륙에서 臺灣軍事與社會 82)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83) 청대 해군사 연구자인 家科學委員會, 2010年), 88쪽. 劉序楓, 淸末東亞變局與終日琉球關係 以漂流民的遣返問題爲中心, 第11回 琉中歷史關係國際學術會議論文集 (2008年). 79) 劉序楓 編, 淸代檔案中的海難史資料目錄 (中央硏究院亞太硏究專題中心, 2004 年12月). 80) 許雪姬, 淸代臺灣的綠兵, 中硏院近代史硏究所專刊(54)(1987年). 81) 許毓良, 淸代臺灣的海防 (社會科學文獻出版社, 2003年), 序一(許雪姬), 2쪽. 82) 許毓良, 淸代臺灣軍事與社會 (九州出版社, 2008年). 83) 1980년에 廈門大學에 대만연구소가 만들어진 이후 대륙학계에서도 대만해 78) 184 역사와 경계 98(2016.3)
李其林은 자신의 저서 淸代前期沿海的水師與戰船 84)에서 청대 수사와 전선에 대해 전면적인 분석을 하면서 대만수사에 대한 연구도 병행하였 다. 아편전쟁 이전 청대대만의 수사는 세 가지 방어선을 가지고 있었다 고 한다. 즉 전선으로 外洋에서 적을 제압하고, 포대로 연안에서 적을 공 격하고, 육상에서 수사와 육군이 적을 섬멸한다는 전략이었다. 이런 해방 정책은 康熙23년(1684년) 대만수사가 설치된 이후 거의 변화가 없었는 데, 서양열강의 침략이 이루어지면서 큰 변화가 나타났다. 왜냐하면 대만 의 해방설비는 주로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아편전쟁 시기에는 그런 전략이 소용없었기 때문이었다.85) 1860년 영프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한 후 맺은 천진조약의 영향으로 대만이 개항(1865)하면서 기존 무역관계에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대만의 樟腦 차 설탕 등이 주요 무역품이 되면서 수출량이 대폭 증가했 을 뿐만 아니라, 대만의 경제제도나 항운무역에도 큰 변화가 찾아왔다. 이런 상품들은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시장으로 삼았다. 이것은 19 세기의 제국주의가 대만을 다시 세계시장체제 내에 편입시킨 것이다.86) 臺灣通史 에도 묘사되었듯이 臺灣海國 의 모습을 통상을 시작한 이래 띠었는데, 지리적 이점을 살려 상업무역으로 동서문화 교류의 창구 역할 을 담당하였다. 대만에서 합법적으로 해외무역을 한 항구는 다섯 곳이었 安平(高雄을 포함)과 淡水(基隆을 포함)였는데, 이 두 항구는 외국선박에도 개방되었다. 그밖에 彰化일대의 鹿港과 海豐港, 宜蘭일대의 烏石港 등이 있었다. 이 세 항구는 단지 중국범선의 출입만 다. 그 가운데 두 곳은 을 허락하였다.87) 방사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양안 학계에서 다양한 주제로 해방연구가 이루어졌다(, (, 2003 ), 4 6쪽)., : (, 2014 ).,, 61 3 (2010 9 ), 100쪽.,,,, (, 2003 ), 8쪽.,,,, (, 2003 ), 25쪽. 許毓良 淸代臺灣的海防 社會科學文 獻出版社 年 年 84) 李其林 見風轉舵 淸代前期沿海的水師與戰船 五南出版 臺灣文獻 第 卷第 期 年 85) 李其林 鴉片戰爭前後臺灣水師布署之轉變 月 86) 吳密察 以臺灣史畵東亞地圖 邱文彥主編 海洋與臺灣 過去現在未來 海洋 文化與歷史 胡世圖書 年 87) 陳國東 臺灣歷史上的貿易與航運 邱文彥主編 海洋與臺灣 過去現在未來 航運貿易新趨勢 胡世圖書 年 해양을 통해 본 대만사 185
청대 대만과 대륙 간의 상업 활동이 빈번해지자 범선(Junk)항운이 융 성했으며 연해항구도시가 흥기하였다. 따라서 항구연구는 청대 대만해양 사 뿐만이 아니라 경제사 연구의 중요 주제이다. 이 시기 항구사와 관련 해서 林玉茹는 淸代臺灣港口的空間結構 88)에서 청대 대만항구를 체계 적으로 연구하였다. 그녀는 청대 대만항구의 발전을 관방이 주도한 정식 항구와 각 지역 시장권의 형성에 따라 대륙과 직접무역의 필요에서 만들 어진 작은 항구로 나누었다. 그리고 청대 대만의 각 시기의 항구를 몇 가지 종류의 항구시스템으로 나누어 청 초기부터 중기까지 대만항구의 상호관계와 전체발전을 기술하였다.89) 그리고 戴寶村의 淸季淡水開港之 硏究 에서는 담수의 개항 과정과 항구발전 및 수출입무역 등을 다루면서 대만의 대외관계와 서방문화의 전파 등을 소개하였다. 이 책은 그의 해 양사 연구의 출발점이 되었다. 청대 해운사연구도 없지 않은데, 근대시기(청대 후기)와 겹쳐있는 경우 近代臺灣海運發展 戎克船到長榮巨舶 가 운데 정크범선의 항운과 무역에 대한 연구 나, 임옥여의 淸代臺灣港口 的空間結構 가운데 항운을 언급한 부분 이 그렇다. 그 밖에도 張炳楠 洪美齡의 臺閩供輪米穀에 대한 연구, 陳國東의 청 의 綠港開港硏究, 가 많다. 예를 들어, 대보촌의 90) 91) 92) 93) 중엽 대만과 대륙 간 범선무역에 대한 연구94) 등이 있다. 개항한 1860 년대 중반부터 식민지가 되는 1890년대 중반까지 대만무역은 이미 일본 林玉茹 淸代臺灣港口的空間結構 知書房 年 88), (, 1995 ). 89) 한 중국연구자에 따르면, 대륙학계의 경우 대만이민사, 대만경제사, 양안관 계사 등의 연구는 상대적으로 풍부하지만 대만해항사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 으로 빈약하다고 한다. 이와 달리 대만학자들은 이 방면에 적지 않은 연구 성과를 낳았지만 그들의 연구는 대체로 청대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아 청대 이전 항구의 흥기와 발전에 대해서는 체계적인 연구가 부족하다고 본다(, ( ( ), 1999 ), 3쪽). 90), (, 2000 ), 16 17쪽. 91), (, 1996 12 ). 92),, 19 1 (1964 3 ). 93),,, (1978 6 ). 94), ( 1780-1860), 1 1 (1994 6 ), 55 96쪽. 呂 淑梅 陸島罔絡 臺灣海港的興起 江西高敎出版社 致讀者 年 戴寶村 近代臺灣海運發展 戎克船到長榮巨舶 玉山社 年 林玉茹 淸代臺灣港口的空間結構 知書房出版社 年 月 張炳楠 鹿港開港史 臺灣文獻 第 卷 期 年 月 洪美齡 淸代臺灣對福建供輪米穀關係之硏究 臺大歷史硏究所 碩士論文 年月 陳國東 淸代中葉 約 臺灣與大陸之間的帆船貿易 臺灣史硏究 第卷期 年月 186 역사와 경계 98(2016.3)
남양 중국대륙 말고도 홍콩이나 하문을 경유하여 전 세계로 파급되었다. 松浦章은 명청대 중국해양사에 대한 연구 말고도 대만해양사에 대한 여러 저술을 했는데, 해운사 분야만 하더라도 대만에서 淸代臺灣 海運發展史 와 日治時期臺灣海運發展史 란 책이 번역 출판되었다. 특 히 淸代臺灣海運發展史 는 작자가 1997년 이후 일본, 대륙, 대만의 학 일본학자 95) 술잡지에 실은 9편의 논문을 엮고 새로운 자료를 보완해 정리한 책으로, 청 말부터 일본통치시기까지 대만해협 양안 간 항운문제들, 청대 대만일본 간 항운문제들을 다루었는데, 주로 대만의 항운과 대외관계를 함께 묶어 분석하였다. 松浦章은 자신의 중국인 학생들과 함께 중국(대만)해양 사 관련 여러 권의 논문집을 지금도 출판하고 있다. 3. 일본통치시기 1895년 청조는 청일전쟁의 패배로 말미암아 일본과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 에 의거하여 대만과 팽호를 일본에게 할양하였다. 일본의 식민지배 정책은 본국의 군사적 경제적 필요에 따라 대만을 일본의 해양무역체제 안에 넣었는데, 이로 인해 대만인들은 해양국가의 식민지라는 새로운 체 험을 하게 되었다. 대만이 일본의 해양문화 범주에 포함되면서 일본정부 주도아래 대만 고유의 해양생태와 문화체계에 대한 조사연구가 이루어졌 다. 그 후 농업의 대만, 공업의 일본 이란 구도가 설계되어 산업분업화 가 이루어지면서 대만은 일본제국의 산업구조 속에 재편되었다. 이런 구 상은 1930년대에 새로운 제국정책으로 인해 재조정이 이루어졌다. 이 시 기 일본제국은 동남아지역으로의 진출을 위하여 대만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고자 대만을 남진정책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동남아지역을 제국의 범주 내에 넣기 위해서는 대만 산업을 육성할 필요를 느낀 것이다. 이에 일본은 대만의 중공업을 육성시키기 위해 일본의 자본과 대만의 노동력 및 풍부한 자원을 이용하였다. 이에 따라 1930년대 이후 대만의 신흥공 업도시들은 급속하게 발전하였다.96) 95) 96) 松浦章 著 卞鳳奎 譯, 淸代臺灣海運發展史 (博揚文化, 2002年). 吳密察, 以臺灣史畵東亞地圖, 邱文彥 主編, 海洋與臺灣-過去現在未來, 海 洋文化與歷史 (胡世圖書, 2003年), 9 10쪽. 해양을 통해 본 대만사 187
대만학계의 일본통치시기에 대한 연구는 1980년대 이전에는 권위주의 정치체제로 인해 거의 대부분 민족주의관점에 의거해 대만할양의 시말과 무장 항일운동에 주목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와 일본통치시기에 대한 정치적 금기가 해제되면서 대만사연구의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다. 널리 알려졌듯이, 대만학계는 한국과는 달리 이른바 식민지적 근대성(colonial modernity)에 대한 적극적인 평가가 시도되었다. 灣社會領導階層之硏究 97)에서는 吳文星의 日據時期臺 대만사회의 엘리트가 어떻게 근대화지 식을 학습했고 어떻게 대중에게 지식을 전파했는가를 분석하였다. 賢의 殖民地臺灣的近代學校 98)에서는 許佩 공립학교가 가지고 있는 식민성 은 단지 학과교육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규칙과 학예회, 운동회, 수 학여행 등 의례적 활동에도 있었으며, 국가적 상징을 통해 인민의 신체 와 사상을 조정했다고 보았다. 대만인의 초등교육 취학률의 상승이 곧 전쟁동원의 대폭 상승을 가져온 것도 식민지적 근대성의 예증이라고 보 았다. 王泰升의 臺灣日治時期的法律改革 99)에서는 법률제도의 연혁과 실제 운영과 식민지 구조 등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하여 일본이 어떻게 대만사회에 법에 의한 통치를 이루었나를 분석하였다. 일본통치시기에 대한 연구가 항일사관에서 벗어나 식민통치를 연구한 것은 불과 20여년 을 넘었을 뿐이다.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이루어진 연구에 대한 反思를 하면서 이 시기에 대한 편견을 수정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식민통 치를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식민성과 근대성의 중층구조를 신중하게 탐 색하고 있는데, 이 점은 해양사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일본이 대만을 점령한 후 청조통치시기와는 달리 해양관련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발전이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우선 해운분야를 살펴보면, 일본정부는 대만을 남진정책의 발판이자 화남진출의 거점으로 인식해 대만해운업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강력한 통제 정책으로 서양 상인의 해운업 진출을 막았으며 동시에 정부보조금으로 윤선공사가 日臺항선을 만들도록 고취하였다. 이에 대일항선, 대만연해항 선, 중국항선, 남양항선 등이 구축되었으며, 기본적으로 대만무역은 대륙 97) 98) 99) 188 吳文星, 日據時期臺灣社會領導階層的硏究 (正中, 1992年). 許佩賢, 殖民地臺灣的近代學校 (遠流, 2005年). 王泰升, 臺灣日治時期的法律改革 (聯經, 1999年). 역사와 경계 98(2016.3)
이 아닌 일본을 향하게 되었다. 일본이 대만을 식민통치한 50년간 해운 은 새로운 발전단계에 접어들었는데, 현대화된 증기윤선이 구식범선을 대체했고, 대만과 일본 간에 밀접하고 빈번한 해운왕래가 이루어졌으며, 점차 대만과 중국대륙 연해는 물론 동남아 항운무역도 상당히 발전하였 다. 대만총독부 교통국 등에서는 대만해운에 대한 풍부한 자료와 저서를 國史館에 소장되어 있던 일문고적인 臺灣海運史 는 대만총독부 교통국 부참사인 吉開右志 太가 쓴 책으로 본래 海務協會 회원을 대상으로 출판한 전문서적이었지 남겨 놓아 이 시대의 해운상황을 연구할 수 있다.100) 만, 후에 내용을 풍부하게 하고 자료를 상세히 하여 1942년에 일반대중 을 대상으로 출판하였다. 이 책은 일본통치시기 대만해운발전의 과정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국사관내 대만문헌관에서 근래에 중국어 로 번역 출판하였다.101) 1990년대부터 식민지시대 대만해운에 대한 논문이 많이 나왔는데, 예 劉素芬은 일본통치 초기 20년간의 대만해운정책과 무역을 분석 한 日治初期臺灣的海運政策與對外貿易 1895-1914 을 썼고, 蔡采秀 를 들어 102) 는 장기역사의 맥락에서 일본의 해상경략과 대만의 대외무역을 다루면서 日本的海上經略與臺灣的對外貿易 썼다. 해운사에 관한 대표저서로는 대보촌의 近代臺 灣海運發展 戎克船到長榮巨舶 을 뽑을 수 있다. 이 책은 청대시기의 일본 근대해상세력의 발전을 소개한 1874-1945 103)을 104) 대만항운업부터 개항이후의 항운업 성장과정을 다루면서 해양대만의 특 징을 분석하였다. 전통적인 범선하운이 근대적인 기선운수로 바뀌는 과 정과 짧은 기간 동안 대만의 해운이 급속하게 발전하는 상황을 탐구하였 다. 그의 책은 청대의 대만해운, 개항통상시대의 해운, 일본식민통치시대 戴寶村, 近代臺灣海運發展 戎克船到長榮巨舶 (玉山社, 2000年), 17쪽. 吉開右志太 著 黃得峰 譯, 臺灣海運史(1895-1937) (國史館臺灣文獻館, 2009 年), 序文 2쪽. 102) 劉素芬, 日治初期臺灣的海運政策與對外貿易 1895-1914, 中國海洋發展 史論文集 第7輯(中央硏究院中山人文社會科學硏究所, 1999年), 637 694 쪽. 103) 蔡采秀, 日本的海上經略與臺灣的對外貿易 1874-1945, 臺灣商業傳統論 文集 (中央硏究院臺灣史硏究所籌備處, 1999年), 205 212쪽. 104) 戴寶村, 近代臺灣海運發展 戎克船到長榮巨舶 (玉山社, 2000年). 100) 101) 해양을 통해 본 대만사 189
의 해운, 현대대만의 해운 등을 고루 다루고 있는데, 비교적 근대시기에 주목한 저서이다. 한편 松浦章의 日治時期臺灣海運發展史 105)는 제1부 에서 일본통치시기 대만과 중국대륙 간의 항운과 무역을 주로 다루었으 며, 제2부에서는 대만 기선의 정기항로가 개통되는 맹아시기를 주로 다 루었다. 대만항구사 분야 역시 대보촌의 연구를 주목할 만하다. 그의 박사논문 近代臺灣港口市鎭之發展 淸末至日據時期 106)에서는 인 대만항구시장 의 발전, 대만과 대륙 간의 범선무역, 특별수출입항의 설치와 구항구의 몰락 등을 다루었다. 일본이 대만을 식민지로 만든 후에는 대만과 중국 대륙 간의 교류를 통제하고 대만과 일본본토를 연결하는 정책을 폈기 때 문에 점차 중국을 외국으로 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중국과 무역하던 옛 항구들은 쇠락하고 일본으로 쌀과 설탕 등을 수출하기 위한 필요에서 1899년 基隆港 건설을 시작하였다. 그 후 1908년에는 高雄港 건설도 시 작되어 점차 다른 항구의 기능을 대체하면서 그 위상이 높아졌다.107) 얼 近代臺灣港口市鎭發展 이란 제목으로 출판 마 후 대보춘의 학위논문은 했는데, 그 연구공간을 크게 확대하였다. 그리고 일본통치시기 대만경제 사의 권위자로는 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에 있는 林滿紅을 들 수 있다. 그녀는 동아시아 해상무역 가운데 특히 대만의 대외무역의 전개에 관한 풍부한 저술을 남겼는데, 경제사논문들이지만 해양사연구와 깊은 관련을 가진다.108) 許雪姬는 日治時期臺 臺灣總督府公文類纂 등 이 시기 대만해도(해난)사에 대한 연구도 있다. 灣面臨的海盜問題 109)에서 臺灣日日新報 와 松浦章 著 卞鳳奎 譯, 日治時期臺灣海運發展史 (博揚文化, 2002年). 戴寶村, 近代臺灣港口市鎭之發展 淸末至日據時期, 臺灣師範大學歷史硏究 所, 博士論文(1988年). 107) 戴寶村, 近代臺灣港口市鎭之發展與變遷, 臺灣史論文精選(上) (玉山社, 1996 年), 437쪽. 108) 林灣紅, 茶 糖 樟腦業與臺灣之社會經濟變遷 1860-1895 (聯經出版 1997); 臺灣海峽兩岸經濟交流史 (日文版)(交流協會 1997); 晚近史學與兩岸思維 (麥田出版 2002 등 참고. 109) 許雪姬, 日治時期臺灣面臨的海盜問題, 臺灣文獻史料整理硏究學術硏討會 論文集 (臺灣省文獻會, 2000年), 27 82쪽. 105) 106) 190 역사와 경계 98(2016.3)
의 사료를 통해 청일 해도문제와 관련한 외교적 처리과정을 다루었다. 대 만과 중국연해 해도의 기원, 작업방식, 선박형태와 근거지는 물론 민간선 박의 자위방식, 청조의 대책, 총독부와 중국의 교섭 및 해도방어를 위한 조치 등을 고루 언급하였다. 이 글은 일본통치시기 해도연구의 시작을 알린 논문으로 그 후 해도에 관한 여러 논문들이 나오고 있다. 대보촌은 船難與求難: 日治初期臺灣海難史硏究(1895-1912) 110)에서 대만해협에 서 일어난 선박조난의 문제를 주제별로 분류하여 서술하였다. 해난문제 는 해도문제와 상호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1867 년에 일어난 미국상선 로버호사건이나 1874년에 일어난 목단사사건은 기본적으로 해난사고에서 비롯된 국제분쟁이었다. 이 논문은 일본통치시 기 해난사연구의 초기논문으로 해양사연구의 범주를 넓혔다. 일본통치시기 대만의 어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일본본토 가 어업자원에 의존하는 바가 컸기 때문으로 일찍부터 근대어업기술을 받아들여 육지자원에서 해양자원으로 눈을 돌렸기 때문이다. 식민정부는 대만에서 어업을 발전시키고자 적극적으로 수산조사와 수산실험을 실시 하여 어업기술을 개량하고 어업법규를 제정하였다. 대만어업사 연구는 청대에는 거의 없으나 식민지시기는 일본인에 의해 자료가 정리되었다. 吉越義秀의 臺灣水産史 111)나 內藤春吉과 許冀武 공저의 臺灣漁業史 112) 등이 그것이다. 전후에는 어업관료들에 의해 대만어업사가 정리되었다. 張寶樹가 쓴 中國漁業 과 中國漁業生 物資源之硏究 모두 李士豪와 屈若搴 공저인 中國漁業史 나 李士 豪의 中國海洋漁業現狀及其建設 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그리고 정부 내의 수산어업관련 誌書들이 나왔는데, 대부분 대만어업의 발전을 예를 들어, 어업행정을 담당했던 113)는 114) 戴寶村, 船難與求難: 日治初期臺灣海難史硏究(1895-1912), 臺灣文獻 第61卷第3期(2010年9月), 191 242쪽. 111) 吉越義秀, 臺灣水産史, 臺灣水産雜誌 293, 294(1939年). 112) 內藤春吉 許冀武, 臺灣漁業史 (臺北, 臺灣銀行經濟硏究室, 1957年). 113) 張寶樹, 中國漁業 (臺北, 中華文化出版事業委員會, 1954年); 張寶樹, 中國 漁業生物資源之硏究 (臺灣商務印書館, 1968年). 114) 李士豪 屈若搴, 中國漁業史 (上海, 商務印書館, 1937年); 李士豪, 中國海 洋漁業現狀及其建設 (上海, 商務印書館, 1936年). 이 책의 청말 어업에 관 한 내용은 沈同芳의 中國漁業歷史 (1905年)에 기초한 것이다. 110) 해양을 통해 본 대만사 191
소개하는 성격을 띠었다. 그 가운데 어업관료 출신인 胡興華이 쓴 拓漁 책115)은 대만어업사와 연관 臺灣, 話漁臺灣, 躍漁臺灣 등 세 권의 성을 가진다. 삼국시대의 어업발전부터 시작해 역사상 각 시기 대만어업 의 발전과 변화를 소개하며 당시 중대한 사건들이 어업에 미친 영향을 기술하였다. 저자는 대만어업사를 明淸, 荷鄭, 日治, 戰後 등 네 개의 시 기로 나누어 어업발전의 역사뿐만 아니라 각 어업의 형태, 어구, 어법의 종류와 차이도 상세히 설명하여 기술 관료의 특색이 드러내었다. 역사사 건에 대한 서술과 해석에는 다소 이념적인 편향이 나타나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관방문헌의 관점에 따라 일본통치시기의 어업부분은 가능한 축소하고 당시 수산업의 발전상황을 제한적으로 서술하였다.116) 이처럼 대만어업사는 誌書의 형태나 어업관리에 의해 정리되었다. 117) 기존 학자 들의 흥미는 어업보다는 주로 어민과 어촌의 풍모에 있었다. 예를 들어, 李明仁과 江志宏 공저인 東北角漁村聚落和生活 118) 등이 있다. 인류학 자나 지리학자 등에 의해서도 어민들의 일상생활과 어로활동을 연구한 책들이 나왔다. 林玉茹의 논문을 들 수 있 그녀는 과거 연구자들이 홀시했던 東臺灣 지역을 집중적으로 연 구하여 臺灣史與海洋史 시리즈의 한 권으로 殖民地的邊區: 東臺灣的政 治經濟發展 이란 책을 출판하였다. 책 제목에선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근래 어업과 수산업에 대한 대표연구로는 다.119) 120) 胡興華, 拓漁臺灣 (臺灣省漁業局, 1996年); 話漁臺灣 (行政院農業委員會 漁業署, 2000年); 躍漁臺灣 (行政院農業委員會漁業署, 2004年). 116) 胡興華의 拓漁臺灣 에서는 대만어업의 역사를 明 淸時期의 悲情漁業, 荷 鄭時期의 艱辛漁業, 日據時期의 殖民漁業, 광복 후의 本土漁業과 21세기의 永續漁業 등으로 나누어 저자의 개인적 취향을 드러내었다(祝平一, 碎鏡零 史 戰後台灣漁業史研究回顧, 新史學 12卷2期(2001年6月), 220쪽). 117) 祝平一, 碎鏡零史 戰後台灣漁業史研究回顧, 新史學 12卷2期(2001年6 月), 227쪽. 118) 李明仁 江志宏, 東北角漁村聚落和生活 (稻鄕出版社, 1995年). 119) 林玉茹, 戰時經濟體制下臺灣東部水産業的統制整合 東臺灣水産會社的成立, 臺灣史硏究 第6卷第1期(2000年9月), 59 92쪽; 林玉茹, 殖民與産業改 造 日治時期東臺灣的官營漁業移民, 臺灣史硏究 第7卷第2期(2000年12 月), 51 93쪽. 120) 林玉茹, 殖民地的邊區: 東臺灣的政治經濟發展 (遠流, 2007年). 115) 192 역사와 경계 98(2016.3)
본문에서는 수산회사와 어업이민 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日治時期臺灣水産業之硏究 121)라는 王俊昌의 박사논문도 나왔는데, 대만총독부의 출판물을 중심으로 대만수산업에 대해 전면적으로 분석하였다. 여기서 어업환경과 조기어업, 수산행정, 수산업발전과 그 관련효과, 수산운송판 매와 무역, 어민의 생계 등을 다루었다. 아마도 대만학계에서 처음으로 일본통치시기 수산업 상황을 종합적으로 접근한 글일 것이다. 그밖에도 謝佳珍의 대만수산협회 연구논문 122)이 있으며, 최근에는 전후의 수산정 책이나 어선조난 관련논문과 각 지역별 어항에 관한 글도 나왔다.123) 덧붙이자면, 제2차 세계대전 후 중화민국정부는 군사적으로 일본식민 지 지배아래에 있던 대만을 접수하였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국 민당은 대만으로 철수했으며, 대만해협을 사이에 둔 양안의 정치적 냉전 은 대만사회에 새로운 해금시대를 열었다. 일반인들에게 바다는 쉽게 접 근할 수 없는 금지구역이 되었다. 그러나 신흥공업국으로 발전하면서 산 업발전에 따른 수출입의 필요성은 대만의 해운체계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으며, 항만운수업은 장족의 발전이 있었다. 이와 관련해 洪紹洋 近代臺灣造船業的技術轉移與學習 대만조선업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臺灣造船公司에 대한 실증연구이다. 식민지시기 소형선박을 만 의 124)은 들던 회사에서 전후 선박수리부터 시작해 기술발전에 따라 대형선박을 건조하는 과정까지를 다루었다. 이 책의 특징이라면 전전 전후의 대만조 선업의 발전을 연속적으로 기술한데 있다. 특히 전후 초기 대만조선공사 王俊昌, 日治時期臺灣水産業之硏究, 中正大學歷史硏究所, 博士論文(2006 年). 122) 謝佳珍, 臺灣水産協會成立初探, 臺北文獻 第160期(2007年6月), 123 146쪽; 謝佳珍, 臺灣水産會初探 兼論其與臺灣水産協會的差異, 臺灣風 物 第57卷第4期(2007年12月), 145 177쪽. 123) 黃馨塋, 日治時期水産政策的推動: 水産博覽會對臺灣水産業的影響(1895-1910), 國立臺灣師範大學歷史學系, 碩士論文(2012年); 梁雅惠, 日本統治臺灣時期 漁船遭難之硏究, 國立中央大學歷史硏究所, 碩士論文(2013年1月) 등이 있 다. 한편 臺灣的漁港 은 대만어항의 개황과 역사발전부터 시작해 각 지역 별 어항을 나누어 역사와 현황을 살피는데, 대량의 사진과 그림을 넣어 대 만어항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黑潮海洋文教基金會著 臺灣的漁港 (遠 足文化, 2004年)). 124) 洪紹洋, 近代臺灣造船業的技術轉移與學習 (遠流出版, 2011年). 121) 해양을 통해 본 대만사 193
가 일본인 기술자들이 떠난 후 발생한 관리와 기술적 곤란을 어떻게 메 우고 극복하는가에 주목했다. 전후 대만의 항운업을 연구한 책도 나왔는 林志龍의 臺灣對外航運 1945-1953 에서는 역사학에서 별로 다 루지 않았던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대만 國際航運政策과 國家船隊經營問 題 등을 다루었다. 125) 데, Ⅳ. 결론을 대신하여: 해양대만 을 둘러싼 논의 서양학계의 해양사연구의 출발이 해양 이라는 지리적 시각으로 정치사 를 대체하려는 의도와는 달리, 본문에서 언급했듯이 대만해양사연구가 자의든 타의든 대만의 統獨問題와 관련해 정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 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실제로 조영화의 대만도사관은 대만중심주 의 역사관을 건립하는데 깊은 영향을 미쳤다. 대만도, 동아해양, 전 지구 적 시야의 해양사 연구 등의 표현은 대만중심주의를 확립하여 동아시아 사 맥락의 대만학 을 건립하려는 시도였다. 그리고 일반인들에겐 해양대 만, 해양문화, 해양국가 등의 용어로 전달되었다. 앞서 소개한 연구들처 杜政勝은 新史學과 同心圓 적 대만역사연구와 교학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여 去中國化를 추구하였다. 林滿紅은 양안 경제무역관계의 分과 合 에 주목해, 장기간에 걸쳐 정치 사건 의 영향을 받지 않는 양안 경제무 럼 역발전의 지속성을 연구하였다.126) 이런 대만학계의 다양한 연구들은 1980-90년대 대만독립의 정치 사회 문화적 분위기와 관련이 있으며, 직 간접적으로 대만중심주의의 논술을 구축하려는 의도를 가졌다.127) 125) 126) 林志龍, 臺灣對外航運 1945-1953 (稻鄕出版社, 2012年). 林滿紅은 河傷 과 같은 프로그램에서 나타나듯이 황하를 중심으로 하는 내륙문명은 중국을 해양문명으로 발전하기 어렵게 만들었다고 보았다. 하 지만 대만은 매우 다행스럽게도 해양문명에 속하지 내륙문명은 아니라고 한다. 게다가 대만은 중국 동남연해의 해양문명 뿐만 아니라 대만원주민을 계승해 동남아로부터 이입된 해양문명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 2002 ), 157 158쪽). 127), :, 51 3 (2013 9 ), 166쪽. 林滿紅 晩近 史學與兩岸思維 麥田出版 年 陳能治 從 臺灣島史 硏究到探索 臺灣特性 布勞岱 法蘭西特性 的啓發 思與言 第 卷第 期 年 月 194 역사와 경계 98(2016.3)
전후 국민당의 계엄정책이 대만인을 해양과 단절시켰다면, 1987년의 解嚴은 해양과의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대만사 회에서는 이른바 해양문화 담론이 출현하여 학계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분 야에 퍼져 신문 잡지 방송 등 대중매체에서 유행하였다. 등과 같은 정치가부터 許信良 呂秀蓮 余英時 등과 같은 저명학자에 이르기까지 책과 논 문을 써서 대만 해양문화의 역사와 전통을 선전하였다. 이런 전방위적인 해양문화 열기는 사회 각계의 해양문화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상당정도 관련분야의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런 열기 뒤에는 홀시할 수 없는 문제가 숨어있는데, 대만과 중국대륙 간의 문화적 관계를 끊으 려는 경향이 바로 그것이다. 해양문화가 대만과 중국대륙을 구분하는 기 준이 될 수 있느냐의 문제는 이미 오래 전에 제기되었다. 1977년 이 張俊宏 許信良의 風雨之聲 이란 책의 서문을 쓰면서 대만이 천년동안 건립 한 문화는 해양문화라며, 중국대륙의 굴기에 맞서 대만문화는 반드시 서 로 다른 특징을 가진 발전을 해야지 구중국의 노예로 굴종할 수는 없다 고 하였다.128) 대만 언론의 개방이 가속화되자 대만의 해양문화에 대한 논의가 증가 하였고, 정치문제와 연계되어 대만독립론자들은 이 관점을 고취시켰다. 대만민주화 운동과정에서 해양문화의 주장은 민주와 개혁의 또 다른 대 명사가 되자 일부 지식인들은 국민당 권위체제를 비판하는 무기로 이용 하였다. 대만독립론의 대부로 불리는 彭明敏이 1996년 총통선거에서 대 만인은 중국인과 전혀 다른 해양민족이라고 주장하면서 해양대만과 대륙 중국이 대립하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民進黨은 건당 이래 항상 대만의 해양문화를 강조했는데, 그 목적은 전통적인 대중국의 육지주의 의 속박 에서 벗어나 대만독립의 합리적인 논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특히 2000년 국민당에서 민진당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후 이런 관점은 정부의 지 呂秀蓮은 陳水扁총통의 재선운 동을 도우면서 臺灣大未來: 海洋立國世界島 라는 저서를 출판했는 원 아래 공개적으로 고취되었다. 2004년 129) 張俊宏, 始終沒有離開的朋友, 許信良, 風雨之聲 (序言), 文星書店有限公 司(1989年), 9쪽, 6쪽(陳思, 略論臺灣海洋文化的歷史與現實, 臺灣硏究集 刊 (2011年제5期), 11쪽 재인용). 129) 呂秀蓮, 臺灣大未來: 海洋立國世界島 (知本家文化事業有限公司, 2004年), 128) 해양을 통해 본 대만사 195
데, 여기서 대만은 전형적인 해양국가로 중국대륙의 주변도서에 속하지 않는다. 고 선언했다. 해양대만이야말로 대만인민의 희망이자 미래이므로 허구적인 대륙의식은 대만인민에게 공허와 결핍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만독립파가 해양문화를 제창하는 것은 중국을 버리려는 시도 의 하나라고 볼 여지가 있는데, 이에 반발하는 측에서는 그들이 중국에 대한 인연 을 방기하는 과정에서 일본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찬양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대만은 민진당이 집권한 2000년부터 정부 각 부분에서 해양정책이 태 海洋白皮書 를 공포해 해양은 대만생존의 명맥 동하였다. 우선 2001년 이라며 해양입국의 정책을 마련할 것을 천명했고, 2004년에 행정원은 確立海洋臺灣 의 시정을 제시하여 해양이야말로 대만미래의 영속적인 발 전의 주요방향이라고 선전했다. 여기에는 해양교육도 포함되어 있어 대 학이나 일반학교에서 해양교육이 강화되는 등 일부 변화가 나타났다.130) 海洋政策白皮書 를 공포하여 해양대만을 각종 정책의 기초 2006년에는 로 삼아 전면적인 해양발전을 도모하였다. 그 가운데 해양분야에 인문 적 요소를 넣어 해양문화를 교학하고 연구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 다. 해양국가란 어떤 국가이고, 대만은 어떻게 해양에 대처해야하며, 해 양정신과 문화를 어떻게 발전시키느냐는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한 사례로 臺灣硏究基金會는 高雄市에서 海洋與臺灣學術硏討會 (2002년 9 월 6-7일)를 열어 해양국가의 구상을 토론하였다.131) 이 회의는 해양을 중심의제로 진행한 초기의 대규모 국제학술회의였다.132) 이 기금회에서 陳思 略論臺灣海洋文化的歷史與現實 臺灣硏究集刊 年 期 羅綸新 等 建構具海洋特色之敎育硏究所課程與敎學 海洋文化學刊 創刊 號 年 月 邱文彥 主編 海洋與臺灣 過去現在未來 海洋文化與歷史 胡世圖書 年 編後語 高雄海洋宣言 4쪽, 67쪽(,, (2011 제5 ), 12쪽). 130),, (2005 12 ), 182쪽. 131),, (, 2003 ),, 207쪽. 132) 에서는, 대만의 사면은 바다에 둘러싸여 있으며 대대로 바 다에 의존하며 살아왔기에 해양은 포모사(Formosa) 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존발전의 동맥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대 만은 의 제도와 관념 때문에 해양의 존재와 중요성을 망각하여, 대만의 독특한 다원적 문화와 지리적 위치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해양을 파 괴하고 잘못 이용하는 현상이 만연하였다 대만의 미래를 위해서는 역사관 重陸輕海 196 역사와 경계 98(2016.3)
海洋與臺灣 시리즈 4권도 출판하였다. 133) 는 그 후 대만의 다른 주요 도시와 대학에서도 해양문화134)의 이름으로 해양사연구가 부분적으로 활성화되었다. 基隆에 위치한 國立臺灣海洋大 學 인문사회과학원에서는 海洋文化學刊 (2005년 12월) 창간호를 시작 으로 해양문화에 관한 전문잡지를 추구하였다. 잡지 내용은 해양문화 전 반에 관한 다양한 글들을 실어 상대적으로 해양사 논문비중은 높지 않다. 이 대학은 2007년 대만 내에서는 처음으로 해양문화연구소를 만들었고, 해양문화연구총서 와 같은 논문집 시리즈를 출판하였다.135) 비록 대만해 양대학은 해양기술 관리 해운 등이 장점인 학교이지만, 해양교육이나 해 海洋人文敎學與硏究通訊 을 발행한다. 高雄에 위치한 國立中山大學 인문사회과학연구중심에서는 劉石吉 王儀君 林慶 勳 주편으로 海洋文化論集 (제1집, 2010년 5월)을 출간한 이후 海洋, 양역사문화도 중시하여 136) 과 세계관과 해양관이 반드시 필요하며, 넓은 시야와 해양적 사유가 필요 하다 우리는 전국 국민에게 마땅히 다시 대만을 인식하고 해양을 인식하 기를 강렬히 요청한다. 정부는 우선적으로 중요한 해양자원을 보호하고 해 양관리체제를 정비하며 해양과학기술을 적극 발전시키고 해양산업발전을 지원하여 근본적인 를 새롭게 구축할 것을 주장한다 대만은 반드시 의 보수적 폐쇄적 사고에서 벗어나 해양을 향하여 이를 받아 들여 영원히 발전하는 로 나아가야 한다. (2002년 9월 6-7일 에 참가한 참가자들이 통과시킨 선언문의 일 부). 이 주편하여, (, 2003 );, (, 2003 );, (, 2003 );, (, 2003 ) 등 네 권의 논문집을 펴내었다. 해양발전사의 관점에서 해양문화를 보자면 (1)해양관, (2)연해지역 및 도서 의 사회경제와 문화발전, (3)항해활동, (4)해외개척, (5) 과, (6)외래문화의 이입부터 피식민통치 등의 문제들을 포함한다(,, (2005 ), 265 268쪽)., (, 2008 ), 2 3쪽. 해양대학의 해양사연구자인 는 일본연구자 의 제자이어서 공 동으로 등 다양한 학술출판활동을 펼치고 있 다. 人海新倫理 島國 海洋國家 高 雄市 海洋與臺灣學術硏討會 海洋與臺灣 過去現在未來 航運貿易新趨勢 胡世圖書 133) 邱文彥 年 海洋與臺灣 過去現在未來 海洋文化與歷史 胡世圖書 年 海洋與臺灣 過去現在未來 海洋産業發展 胡世圖書 年 海洋與臺 灣 過去現在未來 海洋永續經營 胡世圖書 年 134) 華僑 華人 華裔 李東華 從海 洋發展史的觀點看 海洋文化 的內涵 海洋文化學刊 創刊號 年 135) 黃麗生 編 東亞海域與文明交會 國立臺灣海洋大學海洋文化硏究所出版 年 序 卞鳳奎 松浦章 136) 關西大學東亞海域交流史硏究 해양을 통해 본 대만사 197
跨界與族裔 (제2집, 2010년 11월), 城市與海洋論集 (제3집, 2011년 10 월), 海洋歷史文化與邊界政治 (제4집, 2012년 8월) 등을 꾸준히 출판하 였다. 臺南에 위치한 國立成功大學 인문사회과학중심에서도 해양문화를 주제로 국적과 전공을 넘나드는 다양한 연구와 교류를 진행했으며, 해양 海港, 海難, 海盜: 海洋文化論集 (2012 문화학술연토회를 열고 논문집 년)137) 등을 펴내었다. 2000년 대만의 정권교체가 대만사연구의 열기를 고조시킨 것은 분명 하지만 그대로 해양사 연구 붐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대만사연구자의 광범위한 연구 성과 가운데 바다와 관련 있는 것들을 해양사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지는 다소 애매하다. 그런 글들을 쓴 대만사연구자 스스로 자신이 해양사를 연구한다고 생각하는지 여부도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해양사의 범주를 엄격하게 적용할 경우 대만학계의 해양사 연구 자는 별로 많지 않다. 수도인 대북에 주로 해양사연구자가 집중되어 있 으며, 기륭의 대만해양대학, 대남의 성공대학, 고웅의 중산대학 등 일부 지방대학에서 해양문화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지방대학 내 해 양사연구자는 불과 한두 명에 그쳐서 개별적인 연구수준에 머무른다. 2008년 다시 국민당이 집권한 다음에는 기존 민진당정권이 해양문화 平原文化 보다도 정신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수적인 島國文化 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에 직면하였다. 여기서 도국문화 낙후한 란 대륙문화에 비해 더욱 폐쇄적이고 고립적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내포 한다. 이에 다시 국민당정부 아래서 해양문화의 의미에 대해 새롭게 해 석하려는 시도가 있다. 예를 들어, 중국문화를 폐쇄적인 대륙문화로 보는 시각은 편협한 것이며, 중국고대사의 경우 해양적 성격과 대륙적 성격이 혼재되어 있는 역사라는 것이다. 따라서 대만의 해양문화도 중국해양문 화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아야 하며, 단지 특수한 지리적 위치로 말미암 아 대륙 연해지역에 비해 외래문화를 흡수할 기회가 많았다는 관점이 다.138) 이 점은 최근 대륙학계의 해석과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한다. 국 鄭永常 主編 海港 海難 海盜 海洋文化論集 里仁書局 年 137),.. : (, 2012 ). 138) 대만의 해양문화는 다원일체의 중국문화의 일부분이라는 중국 측 주장이 있다. 근래 들어 대륙학계는 역사적으로 중국대륙도 오랜 해양문화 전통이 있고 해양문화는 중국문화의 주요 구성부분이라며, 대만해양문화 역시 중 198 역사와 경계 98(2016.3)
민당이 재집권한 기간 동안 상대적으로 해양사무에 대한 관심이 약화되 었다는 지적이 없지 않으나 이미 대만사회에서 해양의 중요성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게다가 최근 2016년 1월의 총통선거의 결과 다 시 민진당의 蔡英文이 당선되고, 입법원의 과반수이상을 민진당이 장악 하면서 앞으로 새로운 해양문화론의 출현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일이 다. 민주화가 상당히 진행된 대만사회에서 정권 교체에 따라 중앙연구원과 같은 국가연구소나 대만대학과 같은 국립대학이 정치적 압력이나 재정적 불이익을 통해 학문통제를 받는 일은 별로 없다. 하지만 대만해양사의 특성상 대만사연구와 결부되어 전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것만은 아닐 것이다.139) 대만학계의 한 해양사연구자140)는 마치 브로델이 지리사적 지향으로 국가를 역사의 핵심에서 몰아냈듯이 해양사 연구와 현실정치와 의 거리를 두려는 모습이 뚜렷하지만, 다른 해양사연구자141)는 공개적으 국복건해양문화가 대만으로 연장된 결과이므로 양안문화는 불가분의 밀접 한 관계라고 한다. 이른바 대만문화가 해양문화라는 것이 중국대륙문화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논리는 학술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2011 제5 ), 15쪽). 139) 한 논문에 따르면, 근래 들어 대만의 역사교과서 가운데 해양사가 차지하 는 분량이 조금씩 줄어들었다고 한다. 네덜란드 스페인통치시기의 예를 들 면 교과과정에는 본래 세계체제와 민족교류의 해양사관념을 중시하여 반영 한다고 했으나 다수의 교과서에는 여전히 학계와 거리가 있는 보수적인 해 석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즉 와 같은 다양한 최근 연구 성과는 별로 반영하지 않고, 등 대만개척과 관련한 전설을 넣어 과 대만의 밀접한 관계만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17세기 동아시아정세의 변화가 대만에 미친 영향을 홀시한 것이라는 지적이다(,,, (2014 ), 27 28쪽). 140) 국립대만해양대학 해양문화연구소의 는 해양사연구가 대만을 중심 으로 하는데 제한되지 않고, 더욱이 단일국가를 주체로 삼아 고찰하는 연 구과정에 그쳐서는 안 되며, 마땅히 국제적 시야를 가져야만 비로소 더욱 넓은 연구영역과 성과를 이룰 수 있다. 고 생각한다(,, 189 (2014 9 ), 10쪽). 141) 예를 들어, 국립정치대학 대만사연구소의 은 역사교과서 편찬은 물 론 활발한 대외활동을 통해 대만독립론을 주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해양사 연구를 다른 해양학 분야와 폭넓게 결합하여 연구할 것을 제안한다. 예를 들어, 일제 강점기 비교적 풍부한 자료가 남아있는 수산업 분야의 해양사 略論臺灣海洋文化的歷史與現實 臺灣硏究集刊 年 期 陳思 轉口貿易 地權制度 顔思齊 鄭芝龍 漢人 林 琮舜 臺灣史硏究在高中敎科書中的落實與落差 國立臺灣大學歷史學系 碩 士論文 年 卞鳳奎 硏究的出版觀察報告 全國新書資迅月刊 第 期 戴寶村 卞鳳奎 東亞海域文化 年月 해양을 통해 본 대만사 199
로 대만독립론을 지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대만독립을 지지하는 이들 海權과 陸權이 오고가는 역사 였다면서 21세기 새로 운 해양의 시대에 대만은 海洋立國을 통해 海洋國家를 건립해야 한다. 은 대만의 역사는 고 주장한다.142) 이렇든 저렇든 해양사 연구는 대만역사학이 지향해야할 불가결한 연구 분야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필자가 만나본 대만학계의 한 해양사 연구자의 말에 따르면, 대만의 연구 환경은 인력이나 제도 면에서 일본학계와 큰 차이가 난다고 한다. 자신들의 해양사 연구는 대부분 개별적인 수준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일 본과 같이 학회나 연구회 등을 통해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게다 가 해양사연구가 주로 네덜란드통치시기에 편중되어 있으며, 일본통치시 기의 경우 대만사연구와 혼재되어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 해양사 연구 후속세대가 충분하지 않은 현실에 우려를 나타내었다.143)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대만학계는 자국사에 대해 일본 및 외국학계와의 교류가 빈번하 고 해외학계의 연구 성과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특징을 가 지고 있다. 비록 소수일지 몰라도 나름의 열정과 사명감을 가지고 수준 높은 해양사 관련 논문과 저서들을 발표하고 있다. 동아시아 해양사 연 구에 있어 한국학계의 연구자들은 이미 일본과 중국의 연구뿐만 아니라 대만학계의 성과도 반드시 참고해야할 시점에 와 있다.144) 연구 등이 그렇다. 142),, 미발표논문. 143) 일본학계의 경우 해양사연구자는 일본문부성 등의 지원으로 대형 프로젝트 를 진행하고 있는데 반해, 대만학계의 열악한 연구현실은 일본과 같은 해 양사관련 대형사료집(, 등)이 만들어 질 수 없는 상황을 지적한다(, :, 3 (2009 12 )). 144) 대만학계의 해양사 연구현황 목록은 의 에서 정 리한 을 참고할 수 있다. 하지만 대만사 관련 논저들이 너무 광범위하게 실려 있어 해양사 논저를 추려내기에 다소 번거롭다. 아 래 참고문헌 에서는 편의상 대만해양사 관련 단행본 연구서와 본문에 인 용된 연구논문 일부만을 소개하였다. 戴寶村 蔡昇璋 擺盪於海陸之間的臺灣歷史 日本海事史料叢書 大航海時代叢書 劉序楓 講演 陳昀秀 整理 傳統與發展 日本 近年的海洋史硏究槪況 臺灣與海洋亞洲硏究通迅 第 期 年 月 臺灣師範大學 臺灣史硏究所 海洋史參考書目 200 역사와 경계 98(20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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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145) The history of Taiwan from the maritime point of view - Focused on the status of research in the academic circle of Taiwan Cho, Se-Hyun This study intends to review the status of research on the maritime history of Taiwan by the academic circle of Taiwan, and to examine how we can look at the history of Taiwan from the maritime point of view. (1) The rise of maritime history and the emergence of the History of Taiwan island In this research, the beginning of research of Taiwan's maritime history will be examined through the research plan of Chinese Maritime History by Academia Sinica and the History of Taiwan island by Cao Yonghe. If Sunwenism Institute in Academia Sinica became the start of the study on maritime history in the mid 1980s, the person who actually led this study was a scholar Cao Yonghe from the institute. He was recognized as a symbolic figure for the study of maritime history in the Taiwanese academia, who laid a foundation not only for the Chinese maritime history, but the Taiwanese maritime history. The concept of the History of Taiwan island by Cao Yonghe is a well-arranged and global view of Taiwanese history, focused on the island of Taiwan as the research subject, which is known to have exercised great influence on the development of new historical studies. (2) The history of Taiwan seen from the maritime perspective With the status data of research on the Taiwanese history, this research divides the history of Taiwan into three major ages, early period of Taiwan, Qing Rule and Japanese Rule. It is still highly controversial in terms of the division of the history of Taiwan and the issue of naming * Dept. of History, Pukyung National University / shcho@pknu.ac.kr 206 역사와경계 98(2016.3)
the history within the academic circle of Taiwan. The sketchy division of the history in this research is as follow. Early Period of Taiwan (Prehistoric Taiwan 1683): The early period of Taiwan is most related with the maritime history, as it was the period of the colonial rules of the Netherlands and Spain followed by the ruling of the Zheng Dynasty, when the seaborne trade was vigorous in East Asia. The academic circle of Taiwan, on the whole, acknowledge that the colonial experience of Taiwan by the Netherlands and Spain in the early period of Taiwan made it possible to have a rapid innovation of its social structure within a short period of time, and also became one of the essential members in the global trade system as a result of competitiveness among European and Asian countries. Although being a maritime nation at a global level, Taiwan became grew apart from the ocean after the collapse of the Zheng Dynast and following the Ban of the Ocean policy by the rule of the Qing Dynasty. Qing Rule (1684-1894): During the ruling period of the Qing Dynasty, the ban of the ocean was the fundamental national policy in the country, and as a result, land development became more lively within the land of Taiwan than seaborne trade. As a result, conflicts and contradictions between Taiwanese aborigines and Han Chinese immigration were so severe, and there have been many studies done about resentment relationships between them. Although Taiwan remained out of the global trade network during the Qing rule, the number of vessel trades between Taiwan and the mainland increased over time, and the two regions naturally had a relationship of a division of labor. The trade between Taiwan and South East Asian countries also remained more or less constant. In particular, when Taiwan opened a port to foreign countries at the end of the Qing period in 1865, western powers and Japan actively pushed into the maritime trade, and the ocean came to the fore again. Japanese Rule (1895-1945):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Japan included Taiwan into its own maritime trade system as necessary for their military and economic needs. As a result, Taiwanese people had a new experience of being a colony of a maritime country. The main issue of the discussion for the period of the Japanese rule is colonial modernity. 해양을통해본대만사 207
Unlike the period of Qing rule, it is true that there was a significant development in the maritime field during this period. Along with the rise of the study on the history of Taiwan, active studies have been conducted on the maritime history of Taiwan regarding during the Japanese rule as there are relatively abundant historic resources available. The last part of this research will introduce different discussions surrounding maritime Taiwan after the democratization of Taiwan. Particular attention will be paid on how the studies of the maritime history actually stimulated the society of Taiwan and helped establish the history of Taiwan as an independent field. Key Words 海禁), maritime defence(海防), marine transport(海運), navy(海軍), naval warfare(海戰), territorial waters(領海), sea power(海權), fishery(漁業), island(島嶼), awareness of the ocean. Taiwan, East Asia, marine history, sea ban( 논문투고일 : 2016.1.5 208 역사와 경계 98(2016.3) 논문심사일 : 2016.1.15 게재확정일 : 2016.2.10
역사와 경계 98(2016.3), 209~247쪽146) 筑紫大宰 성립에 대하여 - 외교 교섭 및 불교 수용을 중심으로 朴 志 婀* 목차. 들어가며. 연구사와 문제제기. 축자대재 성립 경위와 배경. 축자대재의 전개와 백제 불교. 나오며 Ⅰ Ⅱ Ⅲ Ⅳ Ⅴ 국문초록 본고에서는 大宰府의 전신인 6~7세기의 축자대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 주요 요인을 탐구하고자 했다. 축자대재의 성립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관점이 있 었지만, 필자는 왜와 한반도의 외교교섭 특히 백제와의 교섭을 중시하였다. 종래 推古朝 對隋 외교에 비중을 두어 축자대재라는 관제가 성립되었다는 주장이 있었 지만, 실제로 수와의 교섭은 2차례였고, 한반도 제국, 특히 백제와는 빈번하게 교 섭하였다. 백제는 6세기를 통해서 군사적인 목적으로 빈번하게 왜와 교섭을 하였다. 한 반도의 긴장 고조로 말미암아 왜로부터 군사지원을 필요로 한 백제는 그 반대급 부로 유교경전과 불교 등 선진문물을 왜로 전수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고구려 와 신라도 왜와 다양하고 빈번한 외교 교섭을 가졌다. 한편 군사외교를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하여 전래한 불교를 왜가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된 것도 축자대재 성 립의 한 요인으로 지적해 보았다. 敏達朝에 宰 (미코토모치)라는 용어가 나타나며, 한반도와의 외교교섭에서 활 동하고 있었다. 宰 는 대왕의 命을 받든 자로서 한반도로 파견되는 사신을 칭했 * 부경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 ohhee4408@hanmail.net 筑紫大宰 성립에 대하여 209
筑紫의 大宰 (오호미코토모치)이다. 한반도에 파견되어 외교적 직 宰 전된 것이 筑紫大宰 일 것이다. 다. 축자대재란 무를 수행하였던 와 마찬가지로, 중앙에서 축자지역에 파견된 사신이 정비 발 주제어 大宰府, 筑紫大宰, 왜, 백제, 원흥사, 불교문화, 외교교섭 Ⅰ. 들어가며 율령 국가의 지방 관사 중 가장 광범위하고 多面的 기구였던 大宰府는 養老律令의 여러 규정을 통해서 官制의 개요나 관의 구성 직무, 국가 통 치의 機構的 위치 등 구체적인 운영실태가 대략은 밝혀졌다. 더욱이 계 속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고고학적 조사 성과에서 대재부의 규모 구조와 시대적 변천이 다양한 유적 유물 등으로 해명되고 있고 국내에서도 대재 부에 대한 연구는 진행되었다.1) 大宰府의 성립과정 또는 기원에 대한 문제에 부딪히면 논의가 다양해진다. 대재부의 성립과정 중에 필수 불가결한 것이 筑紫大宰에 대 그러나 한 규명이다. 그것은 관제로서의 축자대재가 언제 설치되고 어떻게 전개 되어 마침내 대재부로 繼受되었나 하는 것과 그 관제적 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에 대한 문제이다. 筑紫는 본래 筑紫君 일족의 세력 범위로 九州 북부 지역의 명칭이다. 이 지역은 한반도와 가장 근접하고 筑紫君이 대외교섭을 독자적으로 전 개하고 있었던 곳인 만큼 외교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하는 왜 왕권에 筑紫君 磐井을 제압한 왜 왕권이 북부 九州에 대한 그들의 지배를 구현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 筑 紫大宰와 筑紫總領이다. 7세기대의 대재와 총령의 관계는 일찍이 동일 있어서는 중요한 거점으로 인식되었다. 마침내 실체설이 주장되어 통설적 위치를 차지해 왔는데, 왜 하나의 실체에 다 1) 朴昔順, 日本古代國家の對 蕃 認識 日本歷史 637(東京:日本歷史學會, 2001) ; 同, 일본고대국가지방기구 大宰府의 외교기능에 대한 법제연구 (日本歷史 硏究 第19輯, 2002); 同, 고대일본의 구니(國)의 외교적 기능 (日本文化硏究 第11輯, 2004). 210 역사와 경계 98(2016.3)
른 두 개의 명칭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설득력 있는 해명은 없었다.2) 이 러한 점이 있음을 밝혀 두고, 축자대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 주요 요인을 밝히고자 한다. 축자대재의 성립 연구에서는 推古朝 對隋 외교에 비중을 두어 관제가 성립되었다는 주장을 비롯해 여러 관점이 있었다. 축자대재의 성격 연구 隋使가 내착함에 따라 외교적 기능이 추가 또는 새로운 기능이 부가되었다고 한다. 즉 축자대재의 일반적인 이해는 那津官家에 에서도 추고조에 근원을 두고 추고천황 16년(608) 무렵에 성립한 율령제 대재부의 전신 관사로서 서해도 제국을 관할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축자대재가 성립된 계기가 對隋 외교에 있었다는 관점보다는 한반도 삼국, 특히 백제와의 빈번한 외교교섭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日本書紀 에서 왜와 한반도 제국의 외교교섭 기사는 매우 많다. 특히 사료 상에 축자대재가 처음 나타날 때, 백제와 백제의 승려, 元興寺가 함 께 기록되어 있다. 백제는 왜로부터 군사지원을 받기 위해 불교 및 선진 문화를 전수하였다. 한반도의 긴장 고조로 말미암아 군사지원을 필요로 한 백제는 그 반대급부로서 선진문물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6세기 후반 대에는 한반도의 급변한 환경에 대응하고자 고구려도 왜와 적극적으로 외교교섭에 나서게 되며 교섭의 장이 넓어진다. 왜가 백제 고구려와 함께 활발한 외교교섭을 진행하게 되며 발생한 외교교섭의 빈도 또한, 왜의 사회 정치기구 정비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당시 6세기를 중심으로 고대 한반도와 왜의 외교 교섭 관계를 통해 축자대재의 형성과정의 한 측면을 검토해 보고자 한 日本書紀 推古 17년(609) 4월 庚子 條부터 율령제를 확립하는 大寶 元年(701) 이전이다. 근거로 삼을 사료 다. 축자대재의 사료 수록 범위는 가 한정되어 있다. 일본서기 의 사료를 바탕으로 하되 6, 7세기에 있어 서 한반도와 동아시아 국제정세와 연결해서 축자대재의 성립과정을 탐색 해 볼 것이다. 2) 高倉洋彰, 第3節 筑紫大宰, 第3編 大宰府の時代, 第1章 大宰府の成立前史 太宰府市史通史編 1 (太宰府市史編輯委員會, 2005). 筑紫大宰 성립에 대하여 211
Ⅱ. 연구사와 문제제기 那津官家 에 근원을 둔 것으로 대부분 이해를 하고 있다. 大和政權이 九州를 지배하는 과정을 보면 筑紫君 磐井의 亂이 평정된 이 후 磐井의 아들 筑紫君 葛子가 糟屋屯倉을 헌상하여(安閑 2년, 535) 筑 豊 肥 3국에 屯倉을 설치하게 되었다. 나진관가의 설치(宣化 元年, 536) 는 大和政權의 직접 지배가 九州에 시작된 것을 의미한다. 推古朝에 筑 紫大宰가 처음 출현하고 文武天皇 4년(700)에 보이는 筑紫總領을 거쳐 大寶律令制 하의 大宰府가 성립하여 제도적으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축 자대재는 宣化 元年 5월 辛丑朔條의 厚饗良客 이라는 文句에서 발단이 되어 최종적으로는 율령제 대재부 養老職員令69 大宰府條의 蕃客 歸化 饗讌으로 연결되는 기능을 가지게 된 것이다. 축자대재는 3) 그런데 나진관가 에 대한 기록은 이 조항뿐이어서 그 실체는 물론 시 설의 소재지에 대해서도 분명하지 않아 문제가 되어 왔다. 예를 들어 日本書紀 를 보면, 외국으로부터 사신이 渡倭했을 때 대부분의 기록이 단순히 축자에 도착했다는 정도의 의미에 지나지 않지만, 欽明 15년 (554) 백제 사신들이 渡倭하고 있을 무렵의 사신 방문에 대해서는 사료 에 명확하게 축자를 목적지로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4) 그러나 사료 상 倭 조정이 백제 사신들에게 어떠한 편의 시설을 제공하였고, 管理 運營을 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즉 백제 사신들이 渡倭해서 축자에 머물 에는 5) 렀던 기간 동안 그들에게 제공된 시설 및 그것들을 관리 운영한 실체가 무엇이었나 하는 것에 대한 의문이 있다.6) 日本書紀 宣化 元年條 夏五月辛丑朔, 詔曰, 遙設凶年, 厚饗良客 (중략) 修造 官家, 那津之口.(후략) 4) 日本書紀 欽明 15年 春正月 戊子朔甲午, 立皇子渟中倉太珠敷尊, 爲皇太子. 丙申, 百濟遣中部木刕施德文次 前部施德曰佐分屋等於筑紫, 諮內臣 佐伯連等曰, 德率次酒 杆率塞敦等, 以去年閏月四日到來云, 臣等, [臣等者謂內臣也.] 以來年 正月到. 5) 倉住靖彦, 筑紫大宰の出現 古代の大宰府 古代史硏究選書(吉川弘文館, 1985), 15쪽. 6) 波多野晥三, 大宰府淵源考 筑紫大宰の性格について 日本歷史 72(1954). 에서는 내신들이 나진관가에서 對韓 원조의 처리 에 임하고 있었다고 해석하 3) 212 역사와 경계 98(2016.3)
日本書紀 崇峻 5년(592) 11月 丁未條의 筑紫將軍所 라고 표기 한 부분을 축자지역의 병력을 통솔하는 관사로 볼 수 있다. 여기에 推 古 10년(602), 장군의 호칭이 일정하지 않은 사례가 있어, 축자대재라 또한 7) 8) 는 용어가 사료 상에 나타나기 이전의 축자대재 칭호 또는 관직명의 성 립에 대한 의문이 있다. 따라서 축자대재의 존재 여부에 대한 논란마저 있을 정도이며 그 후의 축자대재의 성격, 관제 성립에 대한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大宰府는 일본 고대의 매우 중요한 기구이므로 연구한 학자들도 매우 많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竹岡勝也, 그리고 鏡山猛 竹內理三 坂本太郞 井上光貞 藤井功 田村圓澄 倉住靖彦 井上辰雄 石松好雄 長洋 一 등과 우리나라의 朴昔順 이 있다. 축자대재 라는 명칭은 日本 書紀 推古 17년(609) 4월조에 보이고, 뒤이어 皇極 2년 4월 庚子 9) 10) 14) 11) 12) 13) 15) 16) 고 있다. 7) 5년, 8) 10년 4월 조에서는 인 의 후임 으로 가 장군 후보가 되었다. 당시 고유명사로서 이란 호칭이 성립되어 있었다고 하면, 이 으로 바뀌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 고 하는 견해가 있다., 21(1976). 9), の と 16 17 (1937)., の (, 1968) ;, ライブラリー(ニューサイエ ンス, 1979). 10), アジア との を える (, 1987) ;, と の 197(, 1987) ;, (, 1990) ;, の と (, 1987). 11), (, 1979) ;, の (, 1985) ;, の を える (, 1987). 12), の を える (, 1987). 13), の,( 1984) ;, と を す( 1985) ;, の と の シンポジウム(, 1988). 14), を える (, 1987). 15), 일본고대국가 지방기구 의 외교기능에 대한 법제연구 ( 19, 2002). 16) 17,, ( ) 日本書紀 崇峻 丁未 遣驛使於筑紫將軍所曰 日本書紀 推古 戊申朔 擊新羅將軍 來目皇子 當摩皇子 征新羅 將軍 擊 征 田村圓澄 大宰府前史小論 九州文化史硏究所紀要 鏡山猛 大宰府 遺蹟 條坊 史淵 第 輯 第 輯 同 大宰府都城 硏究 風間書房 同 大宰府跡 考古學 社 田村圓澄 東 世界 接點 筑紫 古代 考 大宰府 吉川弘文館 同 九州 日本社會 形成 吉川弘文館 同 大宰府 探究 吉川弘文館 同 日本古代 宗敎 思想 山喜房仏書林 倉住靖彦 大宰府 歷史新書 敎育社 同 古代 大宰府 古代史硏 究選書 吉川弘文館 同 大宰府 成立 古代 考 大宰府 吉川 弘文館 井上辰雄 天下 一都會 古代 考 大宰府 吉川弘文館 石松好雄 大宰府跡 日本 美術 至文堂 同 大宰府 多賀城 古 代日本 發掘 岩波書店 同 條坊制 問題 大宰府 新羅 百濟 文化 國際 討論 學生社 長洋一 大宰府成立前史 古代 考 大宰府 吉川弘文館 朴昔順 大宰府 日本 歷史硏究 第 輯 日本書紀 推古 年 夏四月 丁酉朔庚子 筑紫大宰奏上言 略 筑紫大宰 성립에 대하여 213
條 와 同年 6월 辛卯條에 보인다. 그리고 善隣國寶記 에 인용된 海 外國記 의 天智 3년 9월조에는 唐의 사절 來着에 맞추어 조정에서 파견 된 이들의 직책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天武 元年 6월 丙戌條부 터 持統 4년 10월 戊午條까지의 기사가 있어 사료 상에서 보면 7세기 17) 18) 19) 20) 초기부터 말기까지 존속한 것을 알 수 있다.21) 이와 같은 사료에 의거해서 대재부 성립기원 또는 성립과정에 대해 주 竹岡勝也 竹內理三은 축자대재가 성립된 기원을 宣化朝에 보이는 大伴磐 이후에 야마토 조정에서 파견된 자가 筑紫에서 계속 주재한 것으 로 보고 推古朝에 축자대재가 성립했다고 한다. 竹岡은 나진관가에서 행 목한 하는 직무의 하나가 외교였던 점을 중시하여 외교적인 기능에 축자대재 창설의 의의를 두고 있다.22) 竹內理三은 여러 사례를 들어 축자대재를 宣化 2년 大伴磐이 축자에 주재한 이후 조정에서 파견한 자가 정착하며 부르게 된 호칭 이라고 보았다. 즉 大伴磐이 수행한 역할에서 그 후에 이른바 重臣의 축자주재가 항상화된 것으로 추정하여 중신과 관련된 관 23) 직명이 축자대재의 창설배경이 된 것으로 이해한다.24) 竹內理三의 관점을 발전시켜 田村圓澄은 군사적 기능을 가진 那津官家 日本書紀 皇極 2年 4月 庚子條, 筑紫大宰, 馳驛奏曰, (略) 日本書紀 皇極 2年 6月 辛卯條, 筑紫大宰, 馳驛奏曰, (略) 日本書紀 天智 3年 9月 大山中津守連吉祥 大乙中伊岐史博德 日本書紀 天武 元年 6月 丙戌條, 筑紫大宰栗隈王 日本書紀 持統 4年 10月 戊午條, 遣使者, 詔筑紫大宰河內王等曰, (略) 竹岡勝也의 나진관가를 대재부의 기원으로 보는 것은 학설의 대립이 있다. 이것에 대한 연구로는 酒井芳司, 那津官家修造記事の再檢討 日本歷史 725(2008).이 있다. 대재부 성립에 관한 1970년대 전반까지의 연구사는 倉 住靖彦, 大宰府硏究の現狀と問題點についての序章 日本史硏究 153(1975). 에 정리되어 있다. 倉住靖彦, 筑紫大宰の出現, 20쪽. 酒井芳司, 倭王權の 九州支配と筑紫大宰の派遣 九州歷史資料館硏究論集 34(2009). 23) 竹內理三, 大宰府と大陸 古代のアジアと九州 (平凡社, 1973), 298쪽. 宣 化 2년 大伴磐을 駐在시킨 것, 백제 성왕 32년(554, 欽明 15년) 정월에 백 제의 사신이 축자에 도착해 內臣 佐伯連 등과 구원군 파견을 교섭한 것, 崇 峻 4년(591) 11월 紀男麻呂 외 대장군이 2만 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축자 에 滯在한 사례 등. 24) 日本書紀 宣化 2年 冬10月 壬辰朔, 天皇, (전략) 以助任那. 是時, 磐留筑 紫, 執其國政. 17) 18) 19) 20) 21) 22) 214 역사와 경계 98(2016.3)
推古 16년의 隋使 내착을 계기로 새롭게 외국사절 접대를 직무로 하 게 되어 축자대재는 那津 이라는 위치에 설정되게 되었다고 한다. 田村 圓澄의 큰 특징은 축자대재 성립의 직접적인 계기를 推古 16년 隋使 裴 世淸의 來倭에 주목하고 축자대재를 장관으로 하는 관사가 창설했다고 가 한 점이다.25) 이에 대해 倉住靖彦은 축자대재 성립의 직접적인 계기가 隋使의 來倭 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종래 나진관가에 부담시키고 있던 임무를 폐지 하고 새롭게 관사를 창설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동조하지 않는다. 또 한 倉住는 7세기 후반, 특히 天智 2년(663) 8월 백촌강 전투에서 패배 한 후 축자대재가 군사기능이 중요해진 점에 비중을 두어, 7세기 전반 前期 筑紫大宰(推古朝), 7세기 후반을 後期 筑紫大宰(天智朝 )로 나 長洋一 森公章 狩野久가 倉住와 田村의 입장을 계승하였 누고 있다. 을 26) 다.27) 北條秀樹는 전기 축자대재가 외국사절을 응접하는 기능을 부여받아 관 련사항을 중앙으로 보고하고 있기는 하지만, 九州 통괄과 군사적인 기능 에 대해서는 인정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또한 波多野晥三은 조정에 서 파견한 나진관가 의 수장인 征新羅將軍(推古 10년, 602)이 축자에 머물게 되면서부터 축자대재가 설치되었으나, 그 후 推古朝의 대외 군사 28) 정책이 후퇴함에 따라 축자대재의 기능이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29) 이와 같이 축자대재 창설에 대한 문제는 소재지, 성립경위, 성격 면에서 세부 田村圓澄, 大宰府前史小論 九州文化史硏究所紀要 21(1976), 40 46쪽. 同, 大宰府の創建, 123 124쪽. 26) 倉住靖彦, 筑紫大宰の出現, 16 25 26 28쪽. 축자대재는 백제 멸망 이후 외국 사절의 迎送 기능을 새롭게 하며 축자 방위의 주요거점으로서 군사적 역할을 강화했다고 한다. 27) 長洋一, 大宰府成立前史 古代を考える大宰府, 37 39쪽 ; 森公章, 大宰 府および到着地の外交機能 古代日本の對外認識と通交 (吉川弘文館, 1998), 330 332쪽. ; 狩野久, 筑紫大宰の成立 九州史學 140(2009), 44쪽. 또 한 森氏는 나진관가를 대재부의 연원으로 하는 것에는 의문을 보인다. 28) 北條秀樹, 大宰府成立前史小論 日本古代國家の地方支配 (吉川弘文館, 2000), 138 140쪽. 29) 波多野晥三, 大宰府淵源考 筑紫大宰の性格について 日本歷史 72(1954), 25) 41쪽. 筑紫大宰 성립에 대하여 215
적으로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데 대재부로의 흐름과 연결되기 때문 推古 17년(609) 4월 庚子條의 기사로 보는 견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 八木 充의 연구도 주목된다. 八木充은 隋書 倭國傳에 당시 축자에서의 영접이 難波에서 영접한 것 만큼 특필되어 있지 않고, 舒明 4년(632) 唐使 高表仁의 입경루트 상에 서도 축자가 기록에 보이지 않는 점 등을 들어 推古朝 외국사에 대한 접 응 儀禮와 축자대재의 성립은 동일한 기능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고 지 八木充의 설을 따르는 차세대 연구자들로서 龜井輝一郞 北條 적한다. 秀樹 田中正日子 中西正和 등이 있다. 이 중 龜井輝一郞은 축자대재를 7 세기 후반, 백제 구원전쟁과 관련한 朝倉宮에 付隨해 임시 軍政府로 설 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축자대재의 관제적 기원을 30) 치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전기 축자대재 관련 기사는 일본서기 의 윤색 酒寄雅志는 축자대재를 지방 지배기구, 특히 國司 제도와 의 관련만으로는 증명할 수 없고 律令制下의 대재부 기능 중 하나인 외 으로 본다.31) 교권을 유의해서 보아야하기 때문에 대재부의 성립을 7세기 중엽 이후의 외교관계에서부터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32) 1990년을 전후한 2세대 연구자들인 田中正日子 酒井芳司 狩野 33) 34) 八木充, 筑紫大宰とその官制 九州歷史資料館開館十周年記念 大宰府古文化 論叢上卷, 298 299 304 307 330 331쪽. 축자대재는 원래 백촌강 전투 의 한반도 중국을 둘러싼 동아시아의 국제 긴장에 대처하기 위한 군사적 관 사로서 기구화 되었을 것으로 이해한다. 同, 大宰府政廳跡發掘調査報告書大宰府成立論のまとめ- 九州歷史資料館 (2002), 425 426쪽. 31) 龜井輝一郞, 大宰府覺書-筑紫大宰の成立- 福岡敎育大學紀要 第53号, 第 2分冊 社會科編(2004), 60쪽. ; 中西正和, 筑紫大宰の成立にの關する一考察 古代史の硏究 9(1993), 4 7쪽. 中西正和도 推古朝의 축자대재 설치를 일본서기 편자의 윤색으로 보고 축자대재 성립시기를 국사통괄 관사로서 의 성격을 가지고 있던 때로 보아 推古朝의 축자대재를 대재부의 전신이 아 니라고 한다. 32) 酒寄雅志, 7 8世紀の大宰府-對外關係を中心として 國學院雜誌 80-11 (1979), 37쪽. 33) 田中正日子, 筑紫大宰とその支配(その1) ふるさとの自然と歷史 312(2008), 6 7쪽. ; 同, 同(その2) 同 322(2008), 6 8쪽. 34) 酒井芳司, 倭王權の九州支配と筑紫大宰の派遣 九州歷史資料館硏究論集 34 (2009), 49 52쪽 ; 同, 那津官家修造記事の再檢討 日本歷史 725(2008). 30) 216 역사와 경계 98(2016.3)
久 赤司善彦 은 井上辰雄의 주장에 찬동한다. 즉 왜 왕권이 筑紫 君磐井의 亂 이후 6 7세기까지의 九州 지배를 전개해 나가는 과정을 주 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板楠和子는 舍人部나 靫部 및 屯倉의 설치와 관 35) 36) 37) 련해서 축자대재를 연구하고 있다.38) 또한 대재부의 대외적 기능 부여는 단계적인 전개과정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연구도 있다.39) 이상과 같이 전 기 축자대재의 기능 또는 기원에 관한 재검토가 이루어지면서 그 존재 여부를 포함해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한 부분이 있다. 고대에 있어서 국가의 성장과 발전 그리고 존립을 위한 대외 정책으로 필수 불가결한 것이 외교였다.40) 한 국가의 외교정책은 그 국가가 처한 국제적 환경, 국내외적 조건, 계기 등에 의해 추진된다. 그래서 그와 연 동되어 동아시아의 거대 강국인 隋의 사절 영접을 계기로 축자대재가 성 립되었다는 주장도 나왔을 것이다. 따라서 외교의 형태도 정치 군사적인 목적에서뿐만 아니라 경제 문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고대국 가 형성기의 경제 문화적 외교에 있어서 정치성을 배제한 교류는 생각하 기 어렵고 양자는 서로 표리 관계에 있었다. 결국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 기 위해 경제 문화적 요소가 그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을 외교를 통 해서 알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왜와 백제 간의 빈번한 외교교섭은 고 대의 매우 중요한 면을 시사하고 있고, 축자대재가 성립된 사정을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狩野久, 筑紫大宰の成立, 55쪽. 赤司善彦, 筑紫の古代山城と大宰府の成立について-朝倉橘廣庭宮の記憶- 古代文化 61(2010), 85쪽. 37) 磐井을 토멸한 大伴氏系 部民들이 亂이 일어난 직 후, 북부 큐슈에 설치된 屯倉 가까이에 분포한 것을 보고 알 수 있다고 한다. 井上辰雄, 大和政權と 九州の大豪族-その統治政策を中心として- 九州歷史資料館開館十周年記念 大宰府古文化論叢上卷 (吉川弘文館, 1983), 123 127 131 132쪽. ; 同, 古代都市 大宰府の成立を考える シンポジウム, 九州歷史資料館((株)三光, 2008), 9쪽. 38) 板楠和子, 亂後の九州と大和政權 (小田富士雄編 古代を考える磐井の亂 吉 川弘文館, 1991), 220 229쪽. 39) 重松敏彦, 大宰府の成立過程 -その對外的機能の展開を中心として- 考古學, No 588(2009), 11 13쪽. 40) 延敏洙, 古代 韓日 外交史 -三國과 倭를 中心으로- 한국고대사연구 27 35) 36) (2002), 196쪽. 筑紫大宰 성립에 대하여 217
특히 한반도의 긴장 고조로 말미암아 군사지원을 필요로 한 백제가 왜로부터 군사지원을 받는 대가로 불교문화를 전래하는 등 빈번한 교섭 을 하고 있는 이 시기는 왜 왕권의 정치기구 형성과 관련하여 매우 유 의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또한 이러한 인적 물적 교섭 상황이 고대 정치 사에 있어서 특별히 사료에 기술되어 있는 것은 고대국가제도 정비와 관련해 보다 주목을 요한다.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에는 대중국 교섭을 적극적으로 시도하였다. 한반도의 서남해안에서 남경으로 이어지 는 항로를 이용하며 당시의 일본 열도와 남중국과도 교섭을 하게 된 다.41) 이러한 백제에게 왜국은 좀 더 적극적이고 우호적인 입장을 견지 해 왔다. 5~7세기의 왜는 고대 한반도로부터 매우 큰 영향을 받았고 더욱이 백 제와의 관계에서 발생한 빈번한 정치 군사, 경제 문화적인 양자 간의 외 교교섭이 축자대재 기구 형성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있다. 백제의 대왜 외교교섭 상에서의 외교 일선에 나선 주역들을 보면 대부분 왕족들 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다. 외교권은 군주권의 중요한 내용이 되기 때 大和 조정에서 축자대재를 파견할 때 왕족 출신을 임명하는 것과도 서로 맥이 통한다. 日本書紀 를 보면 백제의 위덕왕 문이다. 이것은 이후 42) 대에 고구려도 왜와 교섭하게 되며 한반도와 외교교섭의 폭이 넓어지며 교류의 빈도도 증가해 간다. 또한 사료 상에 처음으로 축자대재와 함께 元興寺가 등장했다. 이 부분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으로 백제인 백제승려 보이며, 축자대재 성립의 주요 요인은 한반도와의 관계 특히 백제와 관 련해서 풀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Ⅲ. 축자대재 성립 경위와 배경 日本書紀 推古 17년(609) 4월 庚子條의 축자대재가 처음 등장하는 41) 윤재운, 한국 고대무역사 연구 (경인문화사, 2006), 63쪽. 42) 축자대재 장관은 왕족이 임명되는 것이 인사원칙이었다. の, 1 の, 429 496 519쪽. 時代 第 章 大宰府 成立前史 218 역사와 경계 98(2016.3) 高倉洋彰, 大宰府
기사 내용을 보도록 하자. 日本書紀 推古 17년 4월, 庚子條 축자대재가 주상하여, 백제승려인 道欣과 惠彌를 우두머리로 한 10명과 (가) 70명의 속인들이 비후국의 위북나루에 도착하였습니다. 라고 주상하였다. 이때 난파길사 덕마려와 선사룡을 보내어 어찌하여 왔느냐? 라고 물었다. 吳國 그러자 백제왕의 명령으로 에 파견되었는데, 그 나라에 전란이 있어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다시금 본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던 중 홀연히 폭풍 을 만나 해중에서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聖帝의 변경 에 도착하게 되어 기쁩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筑紫大宰奏上言, ②百濟僧道欣 惠彌爲首, 一十人, 俗七十五人. ③泊于肥後 國韋北津. 是時④遣難波吉士德摩呂 船史龍以問之曰, 何來也. 對曰, 百濟王命 以遣於吳國. 其國有亂不得入. 更返於本鄕. 忽逢暴風, 漂蕩海中. 然有大宰, 而 ⑤泊于聖帝之邊境. ⑥以歡喜. ① 葦北津은 지금의 熊本縣 葦北지역이다. ➂은 和名抄 에서 肥後國 葦北郡 葦北鄕으로 나타난다. 현재 熊本縣 내에서 는 최남부에 해당하는 葦北郡에서 水俣市에 걸쳐서 八代海에 면한 지역 으로 추정된다. 이 ➂지역은 日本書紀 景行 18년에서도 보이는데, 景 行天皇의 巡狩傳承에서 發船한 곳이고 九州 서해안에 있어서 해상교통 의 요지였다. 또한 이곳은 왜가 金工品을 한반도 남부 세력으로부터 입수하던 과정(6세기 초기 무렵)에 若狹灣 연안, 有明海 연안과 같은 지 위의 사료 상에 보이는 ➂ 43) 역의 호족세력과 대가야가 직접 교섭을 하였던 곳이다.44)<그림 1 참 조> 日本書紀 景行 年 同 倭 壬辰朔 從葦北發船到火國 於是日沒也 43) 18 5월,.. 44) 이근우, 5세기의 일본열도 왜 5왕 문제와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2005), 209 211쪽. ;, 고대의 낙동강 하구와 왜 역사와 세계 41(효원사학 회, 2012), 8쪽. ; 박천수, 5세기 의 을 통해 본 와 왜 5왕 문제와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2005), 309쪽. ;, 새로쓰 는 한일교섭사, 142 145쪽. 日本列島 韓半島系 文物 同 筑紫大宰 성립에 대하여 加耶 219
<그림 1> 九州지도 상 天草諸島와 그 주변 ➀ 水俣市 ➁ 八代市 ➂ 八代海 ➃ 天草諸島(上,下島) ➄ 有名海 한반도의 백제인들은 4세기 후반 무렵부터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인 해45) 끊임없이 왜로 이주해 왔다.46) 이들 이주민 집단은 백제에서 와 筑紫, 그리고 내해인 瀨戶內海를 경유해 難波灣에 對馬 도착하기도 했 葦北津 來 다.47) 이처럼 일본열도를 빈번하게 왕래하였던 백제인에게 ➂ 迫은 단순히 해상 조난에 의한 우연한 결과로 보기 어렵다. 동중국해에 서 표류한 경우 이 지방에 표착하는 일이 있었다고는 하지만,48) <그림 1>의 지도상에서 확인해 보면 內海이다. 다시 말해 天草灘은 天草諸島라 는 크고 작은 여러 섬으로 둘러싸여 있는 내해로서, 표착하기란 결코 쉬 운 곳이 아니다.49) 三國史記 권25, 백제본기 아신왕 8년(399) 조에 秋八月 王欲侵高句麗 大 徵兵馬 民苦於役 多奔新羅 戶口衰滅 이라 한 기사 참조 46) 日本書紀 應神 7年 9月, 同 11年, 10月. : 梁起錫, 5세기 百濟와 倭의 관 45) 계 왜 5왕 문제와 한일관계 한일관계사연구론집 편찬위원회(경인문화사, 2005), 114쪽. 47), 5세기 의 성격 개관 왜 5왕 문제와 한일관계 한일관 계사연구론집 편찬위원회(경인문화사, 2005), 27쪽. 48), の (, 1971), 11 12쪽. 49) 는 의 남서부. 와 를 중심으로 120여개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은, 서쪽은 로 로 면하고, 북쪽은 盧重國 韓日關係史 石母田正 日本 古代國家 岩波書店 天草諸道 熊本縣 天草下島 上島 八代海 外海 天草灘 220 역사와 경계 98(2016.3) 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