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실군 국가, 도지정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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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이야기part2

현장에서 만난 문화재 이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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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3 회서울특별시과학전람회 예선대회작품설명서 본선대회작품설명서 쓰나미의피해를최소화시키는건물과 건물배치에대한탐구 출품번호 S-504 출품분야학생부출품부문지구과학 학교명학년 ( 직위 ) 성명

(연합뉴스) 마이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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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개념정립 _ 행렬의참, 거짓 수학전문가 NAMU 선생 1. 행렬의참, 거짓개념정리 1. 교환법칙과관련한내용, 는항상성립하지만 는항상성립하지는않는다. < 참인명제 > (1),, (2) ( ) 인경우에는 가성립한다.,,, (3) 다음과같은관계식을만족하는두행렬 A,B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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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7 ( ). (1) 1),. ( 湖西 ),. 19,., , (2).,,,,.,,., ),.. 1) 조광, 초기천주교의충청도선교와그사회문화적특성, 2014, p.11~30. 프란치스코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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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도경상북도지방공무원제 1 회공개경쟁임용시험 - 필기시험합격자및면접시험시행계획공고 ( ) 필기시험합격자 : 491 명 ( 명단붙임 ) 2 필기시험합격자등록및유의사항. : ( ) ~ 7. 6( ) 3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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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2014 년국내총 R&D 투자는 63 조 7,341 억원, 전년대비 7.48% 증가 - GDP 대비 4.29% 세계최고수준 연구개발투자강국입증 - (, ) ( ) 16. OECD (Frascati Manual) 48,381 (,, ),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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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임실군에소재하고있는국가지정문화재와전라북도지정문화재소개

목차 1 임실군국가지정문화재목록 5 2 등록문화재 188호오수망루 6 3 중요무형문화재 11-마호임실필봉농악 7 4 천연기념물 388호관촌면산개나리군락 9 5 천연기념물 387호관촌면의가침박달나무군락 14 6 보물제267호임실용암리석등 19 7 임실군도지정문화재목록 22 8 지방기념물 100호성미산성 [ 城嵋山城 ] 24 9 지방기념물 91호이석용생가 [ 李錫庸生家 ] 26 10 전북민속자료제31호사곡리남근석 [ 沙谷里男根石 ] 28 11 전북민속자료제12호이웅재고가 [ 李雄宰古家 ] 31 12 전북민속자료제1호의견비 [ 義犬碑 ] 33 13 전북문화재자료제167호오괴정 ( 五槐亭 ) 36 14 전북문화재자료제137호양요정 [ 兩樂亭 ] 38 15 전북문화재자료제130호광제정 [ 光霽亭 ] 40 16 전북문화재자료제124호상이암부도 [ 上耳庵浮屠 ] 42 17 전북문화재자료제118호노동환가옥 44 18 전북문화재자료제26호임실향교대성전 47 19 전북문화재자료제25호죽림암 [ 竹林庵 ] 50 20 전북문화재자료제24호해월암 [ 海月庵 ] 52 21 전북문화재자료제22호신안서원 [ 新安書院 ] 54 22 전북문화재자료제21호주암서원 [ 舟巖書院 ] 56 23 전북문화재자료제20호영천서원 [ 寧川書院 ] 59 24 지방유형문화재 198호관곡서원소장전적및고문서 ( 館谷書院所藏典籍및古文書 ) 61 25 지방유형문화재 160호삼계강사계안 [ 三溪講舍契案 ] 63

26 지방유형문화재 151호수운정 [ 睡雲亭 ] 66 27 지방유형문화재 150호상이암부도 [ 上耳庵浮屠 ] 68 28 지방유형문화재 145호임실이도리미륵불상 [ 任實二道里彌勒佛像 ] 70 29 지방유형문화재 144호김복규, 김기종효자정려비및정판 72 30 지방유형문화재 135호운서정 75 31 지방유형문화재 112호신흥사대웅전 [ 新興寺大雄殿 ] 77 32 지방유형문화재 106호만취정 79 33 지방유형문화재제87호학정리석불 81 34 지방유형문화재 86호오수리석불 84 35 지방유형문화재 82호임실용암리사지석조비로자나불상 87

임실군국가지정문화재목록 2013.06.18 21:02 임실군국가지정문화재목록 지정문화재현황지정별문화재소재지 총 32 개소 국가지정 임실용암리석등 보물267호 신평면용암리 188-1 소계 4개소 임실관촌면의가침박달나무군락 천연기념물 387호 관촌면덕천리산37 임실관촌면의산개나리군락 천연기념물 388호 관촌면덕천리산36 임실필봉농악 중요무형문화재 11-마호 강진면필봉리 88-25 임실오수망루등록문화재 188 호오수면오수리 348-6 임실군국가지정문화재목록 5

등록문화재 188 호오수망루 2013.06.18 21:01 ㆍ문화재명 : 임실오수망루ㆍ지정별 : 등록문화재제188호ㆍ지정일자 : 2005. 06. 18 ㆍ소재지 : 임실군오수면오수리 348-6 ㆍ규모 : 건축면적 2.0m2, 높이 12 하부직경 2.4m 높이 12m의임실오수망루는 1940년경세워져주변지역의산불감시및비상상황고지, 야간통행금지를알리는수단등으로사용되었으며도심지역에위치하여이지역의랜드마크적인역할을담당하고있다. 축조방식에있어서원형으로된망루위에육각형의망대를두면서생기게되는 6모의구조적인처리가간결하면서인상적으로지역사적, 건축사적가치가크다. 등록문화재 188 호오수망루 6

중요무형문화재 11- 마호임실필봉농악 2013.06.18 21:00 전라북도임실군강진면 ( 江津面 ) 필봉리에서보존해온농악. 종류농악지정번호국가지정무형문화재제 11-마호지정연도 1988년 8월 1일기능보유자박형래 ( 朴炯來 ) 강진면필봉 ( 筆鋒 ) 마을은 40여가구가모여사는아담한마을로서호남농악좌도 ( 左道 ) 굿 7채가락을 90여년전부터꾸준히대를이어보존하고있다. 이마을에는 들당산굿 을비롯, 날당산굿, 당산제굿, 장원리굿, 이사굿, 매굿 등이전승되고있다. 농악의정신이협동과협화 ( 協和 : 싸잽이 ) 그리고형태의근간이되는 7채가락의보존과토착화에따른전승에그의의가크다고하겠다. 판굿 은음력정월에마을의가가호호를돌아다니며집안의무사태평을축원해주는 뜰볼비굿 을마친후에하루날을잡아온동네사람들이모여흥겹게노는굿으로, 마을에서가장마당이넓은집을골라판을만들고밤이새도록풍물을잡으며논다. 이 판굿 에는 길굿 외에 13종의굿놀이가있다. 첫째, 외마치 7채가락은호남좌도굿의특징이며 7채가락이란악장을의미하는것으로타음 ( 打音 ) 의기본이되는것이다. 둘째, 쌍방울진굿은덕석모리나오방진굿이라고도하나이마을에서는쌍방울진이라고하여두번진풀이를한다. 셋째, 반풍류굿은느린 중요무형문화재 11- 마호임실필봉농악 7

풍류를빨리친다. 넷째, 호호굿은가락에맞추어구령을외치면서단결을나타낸다. 다섯째, 영산굿은좌도가락중에서가장흥겨운가락으로판굿의절정을이룬다. 이영산굿에는 가진영산, 다드래기영산, 군영놀이영산, 제농기영산, 미치기영산 등이있다. --------------------------------------------------------------------------------- 1988년 8월 1일국가지정무형문화재제 11-마호로지정되었다. 호남좌도농악을대표하는판굿이다. 곡성 ( 谷城 ) 농악, 남원금지 ( 南原金池 ) 농악과함께남원상쇠전판이 ( 田板伊 ) 계보에들어간다. 1920년경상쇠박학삼을초빙하면서예부터내려오던당산굿, 마당밟이등의단순한농악이높은수준의농악으로발전했다. 농악대는큰기, 영기, 나팔, 대포수, 창부, 조리중, 양반, 각시, 무동, 농구 ( 상쇠의제자 ), 화동, 꽹과리, 징, 장구, 북등 40여명으로구성된다. 현재전승하고있는농악의종류는섣달그믐날치는매굿, 정초에치는마당밟이, 정월초아흐렛날치는당산굿을비롯하여대보름 날행해지던노디고사굿, 찰밥걷기농악, 대보름뒤마을기금을마련하기위해딴마을에서치는걸궁굿 ( 걸립굿 ), 두레굿등이있다. 또한정초에집집을돌면서뜰볼비굿을하고나서날을잡아넓은마당에서밤을지새며벌이는판굿이유명하다. 판굿은임실필봉농악중에서도가장예술성이뛰어난것으로꼽히는데채굿, 호허굿, 풍류굿, 삼방진, 머지기, 가진영산, 노래굿, 춤 굿, 수박치기, 등지기, 군영놀이, 도둑잽이, 탈머리의순서로진행된다. 판굿의가락은오채질굿, 참굿, 호허굿가락등특이한혼합박자와 3 분박느린 4 박자로질굿, 느린풍류, 벙어리삼채가락등이있고, 3 분박보통빠른 3 박자로갠지갱, 차진호허굿, 가진영산, 느린삼채가락등이있다. 3 분박빠른 4 박자로일채, 이채, 사채, 육채, 칠채, 두마치, 된삼채, 다드래기영산가락등이있고, 2 분박빠른 4 박자로휘모리, 짝드름가락등이있다. 필봉농악의특징은농악수들모두가상모를쓰지않고쇠잡이만쓰며나머지는고깔을쓴다는점과판굿속에수박치기가있다는 점, 군영놀이 도둑잽이 탈머리의진행방식이특이하다는점등이다. 또영산가락이가진영산, 재능기영산, 군영놀이영산, 다드래기 영산, 머지기영산으로세밀하게나누어져있는점도다른지역의농악과구별되는점이다. 필봉농악대는징과북의수가적고꽹과리, 장고에치중하며잡색 ( 雜色 ) 이많이편성되어있다. 또농악을통해이웃간의소중함을 배우며개개인의기교보다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요하게본다. 중요무형문화재 11- 마호임실필봉농악 8

천연기념물 388 호관촌면산개나리군락 2013.06.18 20:59 ㆍ문화재명 : 임실관촌면의산개나리군락ㆍ지정별 : 천연기념물 388호ㆍ지정일자 : 1997. 12. 30 ㆍ소재지 : 임실군관촌면덕천리산 36 임실관촌면의산개나리는갈잎넓은잎나무로물푸레나무과에속하며주로북한산, 관악산, 수원화산을비롯한중부지방에서만발견되던것으로이곳남쪽에서발견된것은매우드문일이다. 따라서이를산개나리분포의남한계선을정하는기준으로삼아도될것이다. 또한좁은면적에 230여그루가모여사는것도드문일다. 이산개나리주위에는졸참나무, 느티나무, 조록싸리, 붉나무, 국수나무, 장구밤나무, 더위지기, 칡, 찔레꽃, 물참대, 명석딸기, 쥐똥나무, 까마귀베개등이함께자라고있다. 우리나라산개나리의자생남한계선으로서학술적가치와종보존으로서가지는가치가매우크다고보아천연기념물로지정하였다. ----------------------------------------------------------------------- 산개나리는키가작고줄기가분명하지않다. 높이는 1 2m 정도이고, 어린가지는자주빛이며털이없고 2년쯤자라면회갈색을띤다. 잎은 2 6cm로넓고큰데, 앞면은녹색으로털이없으나, 뒷면은연한녹색으로잔털이있다. 꽃은연한황색으로 3 4월에잎보다먼저핀다. 천연기념물 388 호관촌면산개나리군락 9

임실관촌면산개나리군락에는약 230 그루가있다. 산개나리는북한산, 관악산및수원화산에서주로자랐는데, 현재는찾아보기 어려울정도로극소수만남아있다. 임실관촌지역이남부에속하는지역임에도불구하고우리나라중북부지방에분포하는산개나리 가자생하고있는것은이곳의기후가중부지방과비슷하기때문으로보인다. 임실관촌면의산개나리군락은우리나라에서산개나리가자랄수있는남쪽한계선으로학술적가치가높으며, 멸종위기에있는산개나리를보호하기위해천연기념물로지정하여보호하고있다. 산개나리는물푸레나무과의낙엽활엽관목으로높이가 1~2m에달하고, 어린가지는자주빛이돌며털이없고 2년된가지는회갈색이다. 잎은대생하고난형, 장난형또는피침형으로끝이예두또는점첨두이며, 기부는넓은예저또는원저이고, 가장자리에잔톱니가있다. 잎길이는 2~6cm로앞면이녹색이며털이없고뒷면은연한녹색으로맥위에잔털이있다. 엽병은길이 2~10mm로잔털이있다. 꽃은 3~4월에잎보다먼저피고연한황색이며액생으로엽액에 1개씩달린다. 꽃받침통은길이 2mm로녹색이며열편은길이 2mm정도이다. 꽃잎은길이 13~15mm이고열편은선상의긴타원형으로길이 9~11mm이며너비 3~4mm이다. 암술은수술보다길다. 과실은삭과이고편평한난형이며끝이극히뾰족하고 9~10월에익는다. 산개나리군락크기는길이 20m, 폭 20m이고산개나리개체수는약 230여주이다. 식생분포를보면전북임실군관촌에서자생하고있는산개나리군락지는아교목, 관목, 초본층으로이루어진 3층식생양상을보이고있으며, 사면중부에주로군락을형성하고있다. 사면상부는바위절벽 ( 높이 2m) 으로서물푸레나무, 상수리나무등의아교목들이소수자라고있으며, 사면하부는찔레꽃과칡이강하게우점하고있다. 식생의양상은관목으로서산개나리가밀집된상태로자라고있으며, 상층부는상수리나무가다른수종에비해다소우점도가높고, 물푸레나무, 느티나무, 팽나무등이자라고있으며, 관목층은산개나리에의하여매우강하게우점되어있으며구성종으로는느티나무, 졸참나무, 장구밥나무, 조록싸리, 떡갈나무, 쥐똥나무, 국수나무, 붉나무등이비교적출현빈도가높으며 ( 폐쇄된상태로써특히산개나리가밀집되어있는곳은그러하다 ) 초본층은그늘사초, 큰기름새, 산거울, 맑은대쑥, 으아리등이다른종에비하여출현빈도가높았다. 산개나리군락지의층상구조는상층부와아교목층의수간부에는상당히열려져있는상태이나, 관목층은산개나리가강하게우점하고있어매우폐쇄적인양상을나타내고있으며, 특히산개나리가분포하는곳은초목들의침입이거의일어나지않고있다. 수고는아교목층이 2.5~3m, 관목층이 1~1.5m 정도이며, 군락내식생은전반적으로심한교란으로인하여식생의발달이불안정하며천이의진행정도가초본류에서관목림으로진행된것으로볼수있으며아교목층의상수리나무, 느티나무, 물푸레나무는부분적으로다른수종에비해우점도가높았다. 산개나리군락주변의남쪽에밭과과수원등농경지가펼쳐져있으며좌 우측으로는띠모양으로관목림을형성하고있다. 사면하부에는칡, 찔레꽃, 으름, 계요등, 으아리등이자생하는것으로보아이는교란의정도가매우심한것으로판단되며, 특정수종의군락형성에심한영향을미칠것으로보인다. 이러한상황으로볼때산개나리군락에대한특별한보호대책의강구가필요하다. 즉, 사면하부는교란으로인한만경식물에의한식생형이더욱강하게형성될것으로보이며, 사면중 상부는천이의진행에따라졸참나무, 상수리나무, 느티나무등의수종들에의한아교목층의발달이예상되며이로인한수관층의폐쇄가일어나관목층의우점종인산개나리군락의발달에영향이우려된다. 천연기념물 388 호관촌면산개나리군락 10

천연기념물 388호관촌면산개나리군락 11

천연기념물 388호관촌면산개나리군락 12

천연기념물 388호관촌면산개나리군락 13

천연기념물 387 호관촌면의가침박달나무군락 2013.06.18 20:57 ㆍ문화재명 : 임실관촌면의가침박달나무군락ㆍ지정별 : 천연기념물 387호ㆍ지정일자 : 1997. 12. 30 ㆍ소재지 : 임실군관촌면덕천리산37 임실관촌면의가침박달나무는장미과에속하는넓은잎나무로서, 우리나라에서는 1914년에처음관찰된 1종 1변종이자라는드문수종이다. 이곳군락은교목층이졸참나물를우점종으로하여상수리나무, 개어서나무등이함께자라고, 가장자리에아까시나무, 은수원사시가자라고있다. 키작은나무는국수나무, 물푸레나무, 쥐똥나무와청머래덩쿨, 청가시덩쿨, 칡등이함께자란다, 풀종은그늘사초, 맑은대쑥, 구름조개풀, 산거울, 개맥문동, 대사초, 양지꽃, 둥글레, 솔새, 개솔새, 그령, 억새등이자란다. 이가운데자라는가침박달나무는키가 2~3m 정도이고숲가장자리를따라자란다. 이가침박달나무는다른종들이주로중부이북지방에자라고있는데비해이곳에자생하여식물분포의남한계선이되기때문에식물분포지리학상귀중한자료를제공해학술적가치를지닌다. 또한그규모가매우크기때문에자체로보존가치가높다고하겠다. --------------------------------------------------------------------------- 가침박달나무는산기슭및산골짜기에서자라는나무로서, 가지는적갈색으로털이없으며꽃은 4 5월에핀다. 가침박달 의 가 천연기념물 387 호관촌면의가침박달나무군락 14

침 은실로감아꿰맨다는 감치다 에서유래한것으로보이며실제로가침박달나무의열매를보면씨방이여러칸으로나뉘어 있고각칸은실이나끈으로꿰맨것처럼되어있다. 또한 박달 은나무의질이단단한박달나무에서비롯된것으로보인다. 임실관촌면가침박달나무군락은직선거리 500m 내에약 280 그루, 3 km내에다시 300 그루정도의무리를이루고있어그규모가매 우크다. 나무의높이는대부분 2 3m 정도이며, 숲가장자리를따라자라고있다. 가침박달나무는한국에서 1 종 1 변이종이자라고있다. 주로중부이북에분포하고있다고알려져있으며, 남부지방인임실군관촌은 가침박달나무분포의남쪽한계선으로서식물분포지리학상귀중한자료가되고있다. 임실관촌면의가침박달나무군락은남부지방에자라고있는매우보기드문대규모군락지로서식물분포학상가치가높아천연기념물로지정 보호하고있다. 가침박달나무의속명인 Exochorda는희랍어 exo( 바깥 ) 와 chordie( 끈 ) 의합성어로, 꽃태자리곁에실이박혀있다는의미를나타내고있다. 그러므로 가침박달 의 ' 가침 ' 은가장자리를마주대고실로감아꿰맨다는 ' 감치다 ' 에서유래한것으로보이며, 실제로가침박달의열매를보면씨방이여러칸으로나뉘어있고, 각칸은실이나끈으로꿰맨것처럼되어있다. 또한 ' 박달 ' 은나무의질이단단하여빨래방망이나다듬이방망이로쓰이는 ' 박달나무 ' 에서유래한것으로보인다. 중국, 만주, 한국에서만자라고있는가침박달나무는중국과만주에서는 4종, 한국에서는 1종 1변이종이자라고있는데우리나라의경우 1914년에최초로관찰되었다. 가침박달나무는낙엽활엽관목으로산기슭및산골짜기에서자라고, 높이는 1 5m로작은가지는적갈색이며털이없고백색피목이드물게산재한다. 잎은호생으로타원형또는도란상타원형이다. 잎길이는 5 9cm로어린잎에는뒷면에짧은털이성기게있다가점차없어진다. 앞면은녹색, 뒷면은흰색을띤회백색이며, 엽병의길이는 1 2cm이다. 꽃은양성으로 4 5월에피고, 총상화서로서새가지에 3 6개씩달리며꽃지름이 4cm이다. 꽃잎은 5개로백색이며도란형이고끝이오목하다. 꽃받침은 5개로난형인데꽃이핀뒤떨어진다. 수술은 25개이고암술대는 5개인데꽃이진뒤떨어진다. 과실은삭과로서 9월에성숙하며앞뒤면에서 5갈래로터져갈라진쪽에 1 2개의종자가들어있으며편평하고날개가있다. 천연기념물 387 호관촌면의가침박달나무군락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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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제 267 호임실용암리석등 2013.06.18 20:56 종목 : 보물제 267 호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석등 보물제 267 호임실용암리석등 19

수량 : 1기지정일 : 1963.01.21 소재지 : 전북임실군신평면용암리 189 시대 : 통일신라소유자 : 국유관리자 : 임실군우리나라의석등으로는가장큰것의하나이며, 아깝게도상륜부 ( 相輪部 ) 가없어졌다. 8각의지대석위에놓인하대는 2매석으로되었으며 8각하대의각측면에는가늘고길쭉한안상 ( 眼象 ) 을새기고상하에는굽을둘렀다. 이위에올려진연화대석위에는연화문이새겨져있으며 8판씩조각하였는데그끝에는큼직한귀꽃을달아장식하였다. 간주석은원주형으로중앙에는북모양으로배가부른양각대가있고상, 하단의주위에는복엽 8 판의양, 복면을대칭이되도록조각하 였다. 상대석에는낮고높은 2 단의원형괴임이조출 ( 彫出 ) 되고측면에는단엽 8 판의암연이새겨져있다. 화사석 ( 火舍石 ) 은 8 면에모두 장방형의화창을내었다. 옥개석은하면에 3 단의낮은괴임츨각출하였고추녀의낙수흠도각이낮다. 전각끝에는삼선형의큼직한귀꽃을세워놓았고웅장하면서도경쾌한모습을모이고있다. 낙수면의각합각은뚜렷하며상부에 복연을놓아상륜부를받도록하였다. 옥개석정상에는현제 8 각의노반과암화석만이남아있으나원래는보개 ( 寶蓋 ) 와보주 ( 寶珠 ) 등여러가지상륜부재가있었을것이다. 이석등은조각된문양이섬세하고다양하며전체적으로조화를이루고있다. 석등이있는중기사는건립연대가확실치는않지만, 신라중엽에창건되었다하며번성했을당시에는수도승이천여명을헤아렸다고전한다. 중기사본당앞 50여m 전방에세워진석등의규모로미루어이곳에거대한절이있었음이분명하다, 중기사가폐허로변한시기는확실하지않으나일설에의하면임진왜란때모두소실되었다고한다. 그러나주지승이전하는바에따르면연대는확실치않지만절앞에흐른는섬진강이엄청난홍수로범람하는바람에사찰은물론승려모두가홍수에휩쓸린후폐허로변했다고한다. 현존하는중기사는 1924년에당시주지박봉주씨가중건하여오늘에이르고있다. 본당은정면4칸, 측면2칸의함석지붕으로이루어져요사 ( 療舍 ) 를겸하고있다. 본당우측동현으로정면 2칸, 측면칸도역시함석지붕으로이루어져산신각 ( 山神閣 ) 이세워져있다. 법당의내부에는좌불이안치되어있는데석불의몸체에흰페인트칠을해예술적인가치를크게훼손시켰다. 중기사에보존된문화재로서잘알려진것은연화좌대이다. 이좌대는 1924년중기사를재건할당시현중기사의서쪽 50m 지점에위치한광명제에서출토되었다하며지방유형문화재제 82호로지정되어있다. 제작연대는혹실하지않으나문양등의규모로보아통일신라시대의유물로추정된다. 중기사법당의앞뜰에는중기사주위에널려져있던옥개석 3 장과탑신, 노반을모아편리한상태로쌓아놓은탑이있다. 이들옥개석 과옥석받침등은대단히정교하게다듬어진모습을보여주고있다. 전하는바에의하면바로이곳에 13 층탑이있었다고하나확실 한것은발굴을통해묻혀있는기단부를조사해야알수있을것이다. 1992년실시된용암사지 1차발굴을통해이미지정된문화재석등이나연화좌대이외에귀면암, 암악새등 185점의유물이발굴되었다. ---------------------------------------------------------------------------- 우리나라에서손꼽힐정도로큰석등으로, 가운데받침돌을제외한각부분모두신라시대석등의기본형태인 8각을이루고있다. 보물제 267 호임실용암리석등 20

석등은불을밝혀두는화사석 ( 火舍石 ) 을중심으로아래에는 3단의받침을두고위로는지붕돌을올리고있다. 아래받침돌에는옆면에안상 ( 眼象 ) 을새기고, 윗면에는커다란꽃장식을두었으며그위에는구름을조각하였다. 가운데기둥은장고모양이며, 연꽃을새긴마디가있다. 윗받침돌에도연꽃이새겨져있으며그위에불을밝히는화사석 ( 火舍石 ) 은각면마다창을내었다. 지붕돌의경사는급한편이며, 여덟곳의귀퉁이마다큼직한꽃장식이달려있다. 꼭대기에는머리장식으로노반 ( 露盤 : 머리장식받침 ) 과복발 ( 覆鉢 : 엎어놓은그릇모양의장식 ) 이놓여있다. 이석등은통일신라시대에만들어진것으로여겨지며, 여덟곳의면에모두창을낸예를실상사석등 ( 보물제35호 ) 이나개선사지석등 ( 보물제111호 ) 에서도볼수있어호남지방석등의특색을보여주고있다. 보물제 267 호임실용암리석등 21

임실군도지정문화재목록 2013.06.18 10:02 임실군도지정문화재목록 지 정 문화재현황지정별문화재소재지 소계 12개소 임실용암리사지석조비로자나불상 지방유형문화재 82호 신평면용암리 76-1 오수리석불 지방유형문화재 86호 오수면오수리 312-1 학정리석불 지방유형문화재 87호 삼계면학정리 285 만취정 지방유형문화재 106호 삼계면산수리 109 신흥사대웅전 지방유형문화재 112호 관촌면상월리 360 운서정 지방유형문화재 135호 관촌면덕천리산 52 김복규, 김기종효자정려비및정판 지방유형문화재 144호 임실읍정월리 561 임실이도리미륵불상 지방유형문화재 145호 임실읍이도리 210-4 상이암부도 지방유형문화재 150호 성수면성수리산 85 수운정 지방유형문화재 151호 신덕면금정리 251-1 삼계강사계안 지방유형문화재 160호 오수면둔덕리 584 관곡서원소장전적및고문서 지방유형문화재 198호 지사면관기리 208 소계 11개소 도 지 정 영천서원 문화재자료 20호 지사면영천리 58 주암서원 문화재자료 21호 지사면방계리 713-1 신안서원 문화재자료 22호 임실읍신안리 447 해월암 문화재자료 24호 오수면대명리 725 죽림암문화재자료 25 호임실읍성가리 525 임실향교대성전문화재자료 26 호임실읍이도리 812 노동환가옥문화재자료 118 호삼계면후천리 465 임실군도지정문화재목록 22

상이암부도 문화재자료 124호 성수면성수리산1-1 광제정 문화재자료 130호 삼계면세심리 252-1 양요정 문화재자료 137호 운암면입석리 490-3 오괴정 문화재자료 167호 삼계면삼은리 309 소계 3개소 의견비 지방민속자료 1호 오수면오수리 332 이웅재고가 지방민속자료 12호 오수면둔덕리 543-1 사곡리남근석 지방민속자료 31호 덕치면사곡리 1019 소계 2 개소 이석용생가 지방기념물 91호 성수면삼봉리 676 임실성미산성 지방기념물 100호 관촌면덕천리산15 임실군도지정문화재목록 23

지방기념물 100 호성미산성 [ 城嵋山城 ] 2013.06.18 10:02 전라북도임실군관촌면덕촌리에있는산성 ( 山城 ). 지정번호 전북기념물제100호 지정연도 1999년 4월 23일 소재지 전북임실군관촌면덕촌리산15 시대 삼국시대 크기 둘레약 518m 분류 성지 ( 성곽 ) ㆍ연혁 임실성미산성은신라와백제가대립하고있던 6~7세기에걸쳐소백산맥을국경으로하는주저항선과진안. 임실. 남원을잇는후의전라좌도연변을따라제2의방어선성격을띠고있으며, 백제본기무왕 605년 2월에각산성을축성하였다고하며, 신라본기에는태종무열왕 661년에두량이성과정읍태인에서백제군에패한후 2000여급을배었다는기록이있음. 성미산 (430m) 의정상을안고남쪽사면 ( 斜面 ) 을축성한좁은정삼각형으로둘레가 517.5m 나된다. 이처럼성미산성을중심으로대리산성 ( 신령면대리 ), 방현리산성 ( 관촌면방현리 ) 이좁은지역에집중되어있는것은달리유래가없는것으로고대사연구에중요한현장인것이다. 임실성미산성안에서는승석문토기편등이출토되었으며, 우물터도발견되었다. ---------------------------------------------------------------------------- 1999년 4월 23일전라북도기념물제100호로지정되었다. 조기홍외 3명이소유 관리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에무왕 ( 武王 ) 지방기념물 100 호성미산성 [ 城嵋山城 ] 24

6 년 (605) 2 월에축성하였다고기록되어있다. 성미산 (430m) 을중심으로좁은정삼각형형태로축성하였으며, 둘레는약 518m 이다. 신라와백제가첨예하게대립하던 6~7 세기에소백산맥을경계로하는주저항선에대해진안 임실 남원을잇는제 2 방어선성격을 가진다. 신라본기 에는이곳에서태종무열왕 ( 太宗武烈王 ) 8 년 (661) 두량이성과정읍태인에서백제군 2,000 명의목을베었다고기 록되어있다. 또한성미산성주위에는대리산성 ( 신령면대리 ), 방현리산성 ( 관촌면방현리 ) 이집중되어있는것으로보아이곳이 6~7세기에걸쳐신라와백제의격전지임을알수있고, 고대사연구에중요한장소이다. 우물터가발견되었으며, 토기파편들도출토되었다. -------------------------------------------------------------------------- 임실성미산성은 1965년에전영래박사에의해조사되었다. 사선대로뻗어내린높이 433m 의 [ 배뫼산 ] 이니배뫼는 [ 뿔뫼 ] 곧角山인셈이다.( 성미란성이있는산을말한다고본다. 나주자미산성 (= 성산산성 ) 과정읍시옹동면산성산성이다같은이름이다 ) 성미산정박이에서면한세모꼴의산성이완연히남아있다. 각산성에관해서는삼국사기백제본기에 " 무왕 6년 3월에각산성을쌓았는데, 8월에는신라가동쪽변방에침입하였다 " 는대목이있다. 이산성은백제시대의갈령도인고부- 태인- 임실- 진안- 장수-거창- 고령을잇는선상에위치한다. 이는현소백산맥 (?) 육십령고개를넘는횡단코스이다. 동국여지승람정읍. 산천조에의하면노령산맥을 [ 葦嶺 ] 이라고도적고혹은 [ 蘆嶺 ] 으로도적는다했는데모두 [ 갈. 재 ] 의새김글자를빌린것이다. 이에반하여 [ 葛嶺 ] 의갈은소리글자를적은것이다. 태인천을넘어온신라군은이갈재의등줄기를넘어섬진강상류인오원천곧운암천을따라진안방면으로물러가다가각산전투를만났다. 이때백제의군사 2천이희생되었다. 이곧은지금의임실군관촌면오원천양켠기슭에뿔처럼솟아있는요새지의성터인것이다. 지방기념물 100 호성미산성 [ 城嵋山城 ] 25

지방기념물 91 호이석용생가 [ 李錫庸生家 ] 2013.06.18 10:01 전라북도임실군성수면 ( 聖壽面 ) 삼봉리 ( 三峰里 ) 에있는고가. 지정번호 전북기념물제91호 지정연도 1997년 7월 18일 소장 이명근 소재지 전북임실군성수면삼봉리 676 시대 조선시대 크기 정면 3칸, 측면 1칸 면적 512m2 분류 생가 ( 지 ) ㆍ연혁 이석용생가는 19 세기후반에지어진것으로추정되고있으며이석용이고종 15 년 (1878) 에이가옥에서태어나 1903 년까지이곳에서 거주하다가임실군성수면태평리로이전하여생활하였다고한다. 이석용은 1907 년 9 월 12 일에진안의마이산에서호남의병장의동맹단을결성하고의병장으로추대되어항일운동을하다가일본경찰 지방기념물 91 호이석용생가 [ 李錫庸生家 ] 26

에의해체포되어 36세의나이로 1914년 4월 4일대구형무소에서처형되었다. ------------------------------------------------------------------------- 1997년 7월 18일전라북도기념물제91호로지정되었다. 한말독립운동을하던의병장이석용 ( 李錫庸 ) 이태어나면서부터성수면태평리로이전하기전인 1903년경까지거주하던곳으로, 1870년에지어진것으로추정된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초가로, 자연석으로된주춧돌위에기둥을세웠다. 1칸규모의방 2개에오른쪽끝에부엌이딸려있는구조이다. 삼봉리마을안쪽에자리잡고있는이집은현재비어있으며, 관리가제대로이루어지지않아부재가썩고건물한쪽이무너져있다. 이석용은 1907년 9월 12일진안의마이산에서호남의병장동맹단을결성하여항일운동에힘쓰다가일본경찰에체포되어 1914년 4월 4일 37세의나이로대구형무소에서처형되었다. 이명근이소유및관리하고있다. -------------------------------------------------------------------------- 일제시대독립운동가이며의병장이었던이석용선생의생가이다. 이석용은고종 15 년 (1878) 이집에서태어나 1903 년까지살았던것으로알려져있다. 이후에는임실군성수면태평리로옮겨의병활 동을하였다고한다. 1870년대에지은것으로추정하는데규모는앞면 3칸 옆면 2칸이다. 자연석주춧돌위에둥근기둥을세웠으며마루는건축당시에는없던것을후대에덧대어설치한것으로보인다. 마을안쪽에자리잡은이석용생가는현재사람이거주하고있지않아방치된상태이다. 관리가되지않다보니부재가썩어건물의한쪽이무너져붕괴의위험이있다. 정면 3 칸 측면 2 칸의방 3 개에부엌이딸린개량형일식기와의우진각지붕의살림집이다. 자연석주초에원형기둥을사용하였으며, 마루는건축당시에는없거나토마루이었던것이후에덧대어설치된것으로보인다. 1870 년에지어진것으로추정되는이석용생가는구한말에독립을위하여목숨을바쳐항일투쟁을했던이석용의병장이 1878 년 11 월 29 일에출생하여 1903 년경까지본가에서거주하다이후임실군성수면태평리로이전하여생활하였다고한다. 지방기념물 91 호이석용생가 [ 李錫庸生家 ] 27

전북민속자료제 31 호사곡리남근석 [ 沙谷里男根石 ] 2013.06.18 10:00 전북민속자료제 31 호사곡리남근석 [ 沙谷里男根石 ] 28

전라북도임실군덕치면사곡리에있는남근석 ( 男根石 ). 지정번호 전북민속자료제31호 지정연도 1998년 1월 9일 소장 자경마을 소재지 전북임실군덕치면사곡리 크기 높이약 2m, 둘레약 1.1m 분류 신앙자료 ㆍ연혁 남근석의건립연대는정확히알수없으나크기는높이 200cm 둘레 113cm 원추사각형석조물이다. 마을에전해오는구전에의하면옛날마을에돌림병이심하고민심이흉융해지자마을어른들이마을의형상이여자의음경을닮았기때문이라고생각하여마을입구에남근석을세워지세의기운을누르고자하였다고한다. ------------------------------------------------------------------------------- 1998년 1월 9일전라북도민속자료제31호로지정되었다. 건립연대는정확히알수없으며, 높이약 2m, 둘레약 1.1m의원추사각형석조물이다. 밭둑길위에세워져있으며, 사각형형태의남근석윗부분을두툼하게턱모양으로쪼아귀두 ( 龜頭 ) 를장식하였다. 마을의구전에따르면마을에돌림병이심하고인심이흉흉해지자이는마을형상이여자의음경을닮았기때문이므로마을입구에남근석을세워지세의기운을누르고자하였다고한다. 원래남근은옛날부터무속과민간신앙의대상이되어풍요와생식을상징하였다. 나무나돌로남근모양을조각하거나남근과비슷하게생긴돌이나나무를신앙의대상으로여겨생식과풍요를기원하며제의 ( 祭儀 ) 를올렸다. ---------------------------------------------------------------------------- 전북민속자료제 31 호사곡리남근석 [ 沙谷里男根石 ] 29

자경마을앞도로변에서있는남근석이다. 남근석은남성성기모양을한자연암석이나인위적으로조각한것으로, 민족고유신앙인성기숭배사상에서다산 ( 多産 ) 과풍년을기원하고질병이나악으로부터보호해준다는의미를지니고있다. 높이 200cm, 둘레 113cm의원추형사각꼴으로, 이곳의민심이흉흉하고돌림병이심하여그원인을알아보니, 마을의형상이여성의성기모양을하고있는탓이라하여땅의기운을누르고자아남근석을세웠다는얘기가전한다. 정확한건립연대는알수가없고, 현재의남근석은경지정리를하다부러진것을다시붙여놓은것이다. 경지정리하다포크레인으로부러뜨려, 마을주민들이진정에의해다시붙여세워두었으며도로포장으로위치도변경되었다. 화강암석조물로높이 200 cm, 둘레 113 cm의원추형사각꼴이며이상윤 ( 李相允 ) (72 세, 남, 사곡리 774 번지 ) 에의하면이남근석과관련 된당제 ( 堂祭 ) 는처음부터없었다한다. 설치연도는미상이며구전 ( 口傳 ) 에의하면옛날에마을에돌림병이심하고민심이흉흉하자, 마을어른들이마을형상으로인한것이 라하여, 즉여자의음경을닮은마을형상때문이라하여, 마을입구에남근석을세워지세의기운을누르고자하였다한다. 전북민속자료제 31 호사곡리남근석 [ 沙谷里男根石 ] 30

전북민속자료제 12 호이웅재고가 [ 李雄宰古家 ] 2013.06.18 09:59 전라북도임실군오수면둔덕리에있는옛가옥. 지정번호 전북민속자료제12호 지정연도 1977년 12월 31일 소재지 전북임실군오수면둔덕리 456-1 시대 조선시대 크기 안채정면 5칸측면 1칸, 사랑채정면 3칸측면 1칸, 대문채 5칸 면적 대지 44 41.2m 분류 가옥 ㆍ연혁 이집은현소유자의 16대선조이며, 마을의향조이기도한춘성전 (1490년생) 이지은것이라고전하나건물자체는여러번의중수를거쳐오늘에이른것이다. 대지는거의장방형 (44 41.2cm) 을이루고있으며, 북에서남으로비탈져있어서군데군데에축대를동남향으로앉았다. 안채는정면 5칸측면 1칸으로동서양측에날기를달아ㄷ자형을이루고있다. 이집에서는큰방의동측에머리방대신도장을설치하고도 전북민속자료제 12 호이웅재고가 [ 李雄宰古家 ] 31

장남측에마루를두고이어서머리방을두었다. 서측날개에도색방을따로두고있어서상부는공루이고하부는아궁이를둔공간을배치하였다. 큰방서측에는찬방을두어부엌과연결되도록하였다. 안채전면에는ㄷ자형의안행랑채가날개를벌려안채를감싸고있다. 이는방아실, 안변소, 안광, 책방등으로구성되었다. 안행랑채동측에일자형으로선사랑채의지붕은맛배지붕이며처마는홑처마이다. 각각 2칸씩의방과마루로구성되어있다. 사랑채는정면 5칸측면 1칸의규모이며상량문에의하면 1864년에세워졌다. 출입문은중앙부한곳에만두고좌우에는채광을위한창을달았을뿐이다. 대문채는 5칸규모이며중앙부에소슬대문을두었다. 여기에는 有明朝孝子贈通政大夫吏曹參議李文胄之閭 라고쓰여진정문현판이걸려있다. 이현판은 1870년에내려진것으로문간채도이무렵에중수된것으로보인다. 대문의한쪽남측에는바깥변소가별도로세워졌으며전면우측에는하마석이있다. ----------------------------------------------------------------------------- 1977년 12월 31일전라북도민속자료제12호로지정되었다. 현소유자이웅재의 16대선조이자마을의향조인춘성정이지었고, 여러번중수하였다. 대지는 44 41.2m 로거의직사각형을이루고있으며, 북에서남으로비탈져있어서군데군데축대를쌓고건물을세웠다. 주건물은 남동향으로앉았다. 안채는정면 5 칸, 측면 1 칸으로, 동서양측에날개를달아ㄷ자형을이루고있다. 큰방의동쪽에머릿방대신도장을설치하고, 도장남쪽에마루를두고이어서머릿방을두었다. 서쪽날개에도샛방을따로두고이 어서상부는공루이고, 하부에는아궁이를둔공간을배치하였다. 큰방서쪽에는찬방을두어부엌과연결되도록하였다. 안채전면에는안행랑채가날개를벌려안채를감싸고있으며, 방아실, 안변소, 안광, 책방등으로구성되었다. 안행랑채동쪽에일자 형으로선사랑채의지붕은맞배지붕이며, 처마는홑처마이다. 각각 2 칸씩의방과마루로구성되었다. 사랑채는정면 3 칸, 측면 1 칸이며상량문에따르면 1864 년 ( 고종원년 ) 에건립되었다. 출입문은중앙부한곳에만두고좌우에는채광 을위한창을달았을뿐이다. 대문채는 5 칸규모이며, 중앙부에솟을대문을두었다. 대문채에는 유명조선효자증통정대부사조참의이부위지려 ( 有明朝鮮孝子贈通政大夫史曹參議李父胃之閭 ) 라고적힌정문현판이걸려 있다. 이현판은 1870 년 ( 고종 7) 에내려진것으로서문간채도이무렵에중수된것으로보인다. 대문의한쪽남쪽에는바깥변소가 별도로세워졌으며, 전면좌우측에는하마석이있다. 전북민속자료제 12 호이웅재고가 [ 李雄宰古家 ] 32

전북민속자료제 1 호의견비 [ 義犬碑 ] 2013.06.18 09:59 전라북도임실군오수면 ( 獒樹面 ) 오수리 ( 獒樹里 ) 에세워진의견비. 지정번호 전북민속자료제1호 지정연도 1972년 12월 2일 소재지 전북임실군오수면오수리 322 시대 고려시대 분류 민속자료 ㆍ연혁 오수의지명이전해주듯이곳은충심있는개의이야기로유명하고이이야기는교과서에수록될정도이다. 본래오수의견비이야기는구전으로내려와심병국씨가유래를찾았다. 언론인백남혁씨가고려악부의견문곡과보한비의의견비에서나타난이야기가바로오수와밀접한관계를갖고있음으로알아내고가람이병기박사로부터고증을받음으로써이마을이 보은 ( 報恩 ) 의개 마을이었음이밝혀졌다. 지금도오수리시장내원동산공원에는의견비가서있어주인을위해죽어간개의충절을위로하고있다. 지금부터 1천년전고려시대거령현, 오늘날의지사면영천리에김개인 ( 金蓋仁 ) 이라는사람이살고있었다. 그는개한마리를기르고있었는데 전북민속자료제 1 호의견비 [ 義犬碑 ] 33

개를몹시사랑하였으며어디를다닐때면항상데리고다녔다. 먹을때도같이먹고그림자처럼함께다니면서생활하였고그개역시그를충성으로따랐다. 그러던어느해이른봄그는개를데리고장이선오수로놀러나갔다. 그런데그는너무나술을좋아하여친구들과한잔두잔기울이다가그만날이저물어버렸다. 그는몹시취한채집으로가다가몸을가누지못하여그만잔디밭에쓰러져깊은잠에빠지고말았다. 개는주인이잠에서깨어나기만기다리며쪼그리고않아주위를살피면서지키고있었다. 때마침부근에서들불이일어나부근에번지고있었다. 개는주인을입으로물고밀면서깨우려고온갖지혜를다짜냈다. 그러나술에골아떨어진주인은주위의불길도아랑곳없이깨어날줄모르고있었다. 뜨거운불길이점점주인의옆에까지번져오자개는불을끌수없음을깨닫고가까운냇물로쏜살같이달려가온몸에물을흠뻑묻혀와잔디를적시기시작했다. 수십수백번을이렇게왔다갔다하여잔디는물에젖고싸늘함을느낀주인은잠에서깨어날수있었다. 그러나힘이쑥빠진개는주인의옆에서쓰러져죽고말았다. 주위를둘러본후사건의전말을알게된김개인은, 몸을바쳐자기를구해준개를부여안고크게원통해하였다. 주인은개를장사지낸뒤이곳을잊지않기위해개의무덤앞에평소자기가지니고다니던지팡이를꽂아두고그자리를떠났다. 얼마후지팡이에싹이돋기시작하더니하늘을찌를듯한느티나무가됐고그때부터그나무를오수라하였고그것이이고장이름으로정착되었다. 그개의충성심을길이기리기위해건립했던의견비는문자마저마멸돼버려 1955년에다시세웠고이뜻을전국에알리기위해면의명칭도둔남면에서오수면으로 1992년 8월 10일바뀌게되었다. 1994년 4월 3일춘향도로국도변에김개인과의견상을건립하였다. ------------------------------------------------------------------------------ 1972년 12월 2일전라북도민속자료제1호로지정되었다. 오수리마을에세워진개무덤과비석이다. 오수리의구전설 ( 義狗傳說 ) 은전국적으로유명하며여러문헌에실려있는데, 고려시대최자 ( 崔滋 ) 가지은 보한집( 補閑集 ) 에다음과같이기록되어있다. 1 천년전김개인 ( 金蓋仁 ) 이란사람이장에서친구와술을마시고몹시취하여집에돌아가던중잔디밭에누워잠이들었다. 이때 인근에서불이나김개인에게불길이번지자개는냇가에가서몸을적시어주인주위의풀에물기를배게하여근방의불길은잡았 으나개는지쳐쓰러져죽고말았다. 김개인이깨어나이사실을알고노래를지어슬픔을달래고무덤을만들어장사지낸뒤이곳을잊지않기위하여무덤앞에지팡이 를꽂아두었다. 얼마후지팡이에싹이돋기시작하여하늘을찌를듯한큰느티나무가되었다. 그때부터이나무를오수라고했으 며, 마을이름도오수라고부르게되었다한다. 후에동네사람들이주인을살린개의충성심을후세에기리기위해의견비를세웠으나오랜세월의풍파로글씨가마멸되어알아볼수없게되었다. 지금의의견비는 1955년 4월 8일에세운것으로비각을세우고주위를단장하여원동산공원을만들고일주문까지세웠다. ------------------------------------------------------------------------------ 오수시장옆의원동산공원에있는의견비 ( 義犬碑 ) 와동상으로, 주인을구하고목숨을바친개의충성과의리를기리고있다. 오수 ( 獒樹 ) 라는지방이름은 은혜갚은개 라는뜻으로, 이곳전설과관련이있다. 옛날통일신라시대때지사면영천리에김개인이라는사람이살고있었다. 그는개를매우사랑하여어딜가든지데리고다녔다. 어느날그는술에취해집에가는도중그만길에서잠이들었다. 얼마후그곳에산불이나서그불길이주인근처까지오게되자급해진개가주인을깨우려했지만일어나지않았다. 개는할수없이냇가에들어가온몸에물을묻혀주인이자는주변을적시기시작했다. 이런일을수백번반복하여겨우불길은잡았으나지친개는그만쓰러져죽고말았다. 나중에잠에서깨어난주인은모든상황을짐작하고개의충성심에감탄하여무덤을만들어묻어주고자신의지팡이를꽂아두었다. 전북민속자료제 1 호의견비 [ 義犬碑 ] 34

그것이나무로살아나자라나이나무를 오수 라이름붙이고, 마을이름도오수라불렀다. 후에동네사람들이개의충성을대대 로알리기위해의견비를세웠다고하나전하지않고, 현재의것은 1955 년에다시세운것이다. 믿음과의리가사라져가는오늘날에 깊은감동을주는귀중한민속자료이다. 전북민속자료제 1 호의견비 [ 義犬碑 ] 35

전북문화재자료제 167 호오괴정 ( 五槐亭 ) 2013.06.18 09:58 전라북도임실군삼계면삼은리 ( 三隱里 ) 에있는조선시대의정자. 지정번호 전북문화재자료제167호 지정연도 2000년 11월 17일 소장 해주오씨판사공파돈암공종중 소재지 전북임실군삼계면삼은리산49 시대 조선시대 크기 정면 3칸, 측면 2칸 분류 누 ( 정 ), ㆍ연혁 임실군삼계면삼은리산 49 번지에소재한오괴정 해주오씨판사공파돈암동 ( 휘양손 ) 종중소유 이전라북도지정문화재자료제 167 호로 지정되었음 - 오괴정은뢰계리 ( 磊溪里 ) 에세거 ( 世居 ) 한해주오씨입향조 ( 入鄕祖 ) 인돈암 ( 遯庵 ) 오양손 ( 吳梁孫 ) 이지은정자 ( 亭子 ) 이다. 그는한훤당 ( 寒喧堂 ) 김굉필 ( 金宏弼 1454-1504) 의문인으로벼슬은참봉이었다. 1519년 ( 중종14년 ) 에을묘사화가일어나서정암 ( 靜庵 ) 趙光祖등많은어진선비가화를입은것을보고그는처음에는수원으로돈적 ( 遯跡 ) 하였다가다시 1521년 ( 중종16년 ) 에남원말천방 ( 川坊 ) 전북문화재자료제 167 호오괴정 ( 五槐亭 ) 36

목기촌으로터를잡아옮겼왔다. 그가이마을에들어와서은거하면서정자를짓고그옆에다섯그루의괴목 ( 槐木 ) 을심어정호 ( 亭號 ) 를오괴라이름하였다. 이것은옛날중국의왕진 ( 王晉 ) 이세그루의괴목을심은고사를본딴것이다. 그후로이정자는그의후손이나이웃의사림들이모여향음례 ( 鄕飮禮 ) 를행하기로하였고또는강 ( 講 ) 을설 ( 設 ) 하여글을읽고詩를짓기도한장소로쓰여오다가화재로소각되었다. 그러다가후손들이다시중건을하고그중건기 ( 重建記 ) 를동강 ( 東江 ) 김녕한 ( 金漢 ) 에게 1922년에받아서이정자에걸었다. - 건립연대 : 1545 년, 중건 1922 년 - 구조 : 팔작지붕, 겹처마 - 규모 : 정면 3칸, 측면 2칸 ---------------------------------------------------------------------------- 2000년 11월 17일전라북도문화재자료제167호로지정되었다. 뇌계리 ( 磊溪里 ) 의해주오씨입향조 ( 入鄕祖 ) 인돈암 ( 遯庵 ) 오양손 ( 吳梁孫 ) 이 1545년 ( 인종 1) 에지은정자이다. 높은언덕에자리하고커다란느티나무와참나무숲에둘러싸여주변경관이수려하다. 정자는잘다듬은화강암주춧돌위에짧은누하주 ( 樓下柱 ) 를받치고두리기둥을세워지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기와로된겹처마팔작지붕건물이며, 가운데에방을두고사방에퇴를두른전형적인호남지방의정자이다. 방에는사방에들어열개문을달아필요할때주변의경관을감상할수있게하였고마루주위에는사방으로계자각난간을둘렀다. 참봉오양손은한훤당 ( 寒喧堂 ) 김굉필 ( 金宏弼 ) 의문인이다. 1519년 ( 중종 14) 을묘사화때수원으로피신하였다가 1521년 ( 중종 16) 에남원말천방목기촌으로옮겨숨어살던중이정자를지었는데 ' 오괴 ' 라는이름은정자옆에심은다섯그루의괴목 ( 槐木 : 회화나무 ) 에서비롯되었다한다. 그후오양손의후손과이웃사림들의향음례 ( 鄕飮禮 ) 나강의장, 혹은글을읽고시를짓는장소로쓰여오다가불에탄것을 1922년에후손들이중건하였다. 동강 ( 東江 ) 김영한의중건기 ( 重建記 ) 가전한다. 전북문화재자료제 167 호오괴정 ( 五槐亭 ) 37

전북문화재자료제 137 호양요정 [ 兩樂亭 ] 2013.06.18 08:22 전라북도임실군운암면입석리에있는조선시대의정자. 지정번호 전북문화재자료제137호 지정연도 1997년 7월 18일 소장 최종춘 소재지 전북임실군운암면입석리 490-3 시대 조선시대 분류 누 ( 정 ), 각 ㆍ연혁 양요정은조선조 25년 (1592) 충현공양요당최응숙이임진왜란으로인해이곳으로낙향하여건립한것으로자신의호를따서양요정이라하였다한다. 양요라는뜻은 " 인자요수의인요산 " 에서나온말로어진사람은물을좋아하고의로운사람은산을좋아한다는의미이다. 강물이산을둘러흐르며앞면에는폭포를이루고있고주위산수의정자가하나가되어뛰어난풍치를이루고있어많은풍류객들이찾아와시문을새긴편액 14개가있다. 원래는현위치에서동쪽으로약간떨어진산아래강변에있었으나 1965년섬진강댐이축조됨에따라후손들에의해이곳으로옮겨졌다. ------------------------------------------------------------------------------- 1997년 7월 18일전라북도문화재자료제137호로지정되었다. 1592년 ( 선조 25) 임진왜란이일어났을때난을피해낙향한충현공양요 전북문화재자료제 137 호양요정 [ 兩樂亭 ] 38

당최응숙이세운누각으로, 자신의호를따서이름을지었다. 양요는 " 어진사람은물을좋아하고의로운사람은산을좋아한다 ( 仁者樂水義人樂山 )" 는말의요 ( 樂 ) 2 자를가리키는것이다. 정자앞으로강물이산을둘러흐르며앞쪽에서는폭포를이루고있어주위의풍치가뛰어나다. 많은풍류객들이찾아와시문을새긴편액 14개가남아있다. 원래의위치는지금보다동쪽으로약간떨어진산아래강변이었으나 1965년섬진강댐을건설할때수몰되자후손들이현재의위치로옮겼다. 전북문화재자료제 137 호양요정 [ 兩樂亭 ] 39

전북문화재자료제 130 호광제정 [ 光霽亭 ] 2013.06.18 08:20 전라북도임실군삼계면세심리에있는조선시대누 ( 정 ) 각. 지정번호 전북문화재자료제130호 지정연도 1990년 6월 30일 소장 남원양씨한림공파종중 소재지 전북임실군삼계면세심리 252-1 시대 조선시대 크기 1동 분류 누 ( 정 ) 각 전북문화재자료제 130 호광제정 [ 光霽亭 ] 40

ㆍ연혁 약 200년전에매당양돈 ( 楊敦 ) 선생이지었다. 선생은생원. 진사를지내다가연산군무오사화를피해아산방 ( 현제. 봉현리 ) 에서은거하였는데문장과덕행이뛰어났다. 선생은남효온 ( 호. 秋江 ) 공의천거로조정에서불렀으나이를마다하고이곳에서여생을보냈다. 선생이별세하자양민들이추모하여아계사 ( 阿溪祠 ) 를짓고매년봄. 가을에제사를지내고있다. ---------------------------------------------------------------------------- 1990년 6월 30일전라북도문화재자료제130호로지정되었다. 조선시대학자양돈 ( 楊墩 ) 이건립하였다. 본래삼계면후천리광제마을에있다가 1872년 ( 고종 9) 현재의위치로옮겼다. 김인후 ( 金麟厚 ) 의글과기정진 ( 奇正鎭 ) 의 광제정중건기( 光霽亭重建記 ) 등이보관되어있다. 3단계단식축대위에건축되었고한가운데온돌방이있는것이특징이다. 양돈의호는매당 ( 梅堂 ) 또는광제정 ( 光霽亭 ) 이다. 1461년 ( 세조 7) 출생으로 1498년 ( 성종 9) 사마시 ( 司馬試 ) 에합격, 생원 진사를지내다가연산군때무오사화가일어나자현재의봉현리인아산방 ( 阿山坊 ) 에은거하다 1512년 ( 중종 7) 70세로사망하였다. 향민들이그를추모하여아계사 ( 阿溪詞 ) 를짓고매년봄 가을에제사를지낸다. ------------------------------------------------------------------------------ 광제정은언제지었는지정확한기록이없으나, 광제정양돈 (1461 1512) 의호로미루어그가생존시에지은것으로추정한다. 양돈은성종 9년 (1498) 사마시에합격하였으나무오사화로봉현리에낙향하였다. 그의문장과덕행은뛰어나당시모범이되었고, 남효온의추천으로조정에서벼슬을내렸으나이를거부하고조용히세상을살았다. 원래정자는삼계면후천리광제마을에있었으나, 고종 9년 (1872) 에지금있는자리로옮겨지었다. 광제정은앞면 3칸 옆면 2칸규모이며, 정자한가운데에온돌방이하나있는점이특징이다. 계단식축대위에정자가있으며, 한가운데에계단식통로가있다. 정자안쪽에는 매당 ( 梅堂 ) 이라는현판이걸려있으며, 하서김인후의글과기정진의 광제정중건기 ( 光霽亭重建記 ) 등이걸려있다. 광제정은후손들이관리해오고있으며, 선생의별세후주민들이아계사 ( 阿溪詞 ) 를짓고해마다봄 가을로제사를지내고있다. 전북문화재자료제 130 호광제정 [ 光霽亭 ] 41

전북문화재자료제 124 호상이암부도 [ 上耳庵浮屠 ] 2013.06.18 08:19 전라북도임실군성수면성수리에있는부도 ( 浮屠 ). 지정번호 전북문화재자료제124호 지정연도 1986년 9월 8일 소장 상이암 소재지 전북임실군성수면성수리산1-1 크기 높이혜월당부도 194cm, 두곡당부도 125cm 분류 부도 ㆍ연혁 상이암은신라헌강왕원년 (875) 에가야선사가창건하였다고한다. 그후조선태조3년 (1394) 각여선사가증수하였으나 1894년동학혁명때병화를입었다가다시 1909년김대원선사가재건하였다. 이상이암에있는해월당부도와두곡당부도는화강암으로만들어졌는데해월당부도는항아리모양의몸체위에 8각형의옥개석을올리고그위에보주를갖춘 194cm 정도의높이이다. 두곡당부도는석종형부도로 8각의하대석위에교복형으로된탑신을세우고그위에보주를얹은높이 125cm의부도이다. 전북문화재자료제 124 호상이암부도 [ 上耳庵浮屠 ] 42

---------------------------------------------------------------------------------- 1986 년 9 월 8 일전라북도문화재자료제 124 호로지정되었다. 상이암뒷편에 2 기 ( 基 ) 가있다. 부도 2 기에는각각 慧月堂, 杜谷堂 이라고음각되어있으며, 높이는 194 cm와 125 cm이다. 혜월당과두곡당은모두상이암에서배출된고승이다. 기단부는평평한부정형의자연석을사용하고, 그위에탑신부를올리고, 다시그위에네귀가반전된, 팔작지붕형태의옥개석 ( 屋蓋石 ) 을올려놓았다. 옥개석위상륜부 ( 相輪部 ) 에는 2개의보륜 ( 寶輪 ) 과보주 ( 寶珠 ) 가있으며, 부도의크기에비해큰느낌을준다. 탑신부의위와아래에는당초문 ( 唐草文 ) 이새겨져있다. 중대석은조각이없는원통형이며, 하대석은 1변이 50cm의사각형이다. 상대석에는앙련 ( 仰蓮 : 꽃부리가위로향한연꽃 ) 의연화무늬가양각되어있다. 상이암은 875년 ( 신라헌강왕 1) 도선국사 ( 道詵國師 :827~898) 가창건하였으며, 1394년 ( 조선태조 3) 각여 ( 覺如 ) 가중수하였다. 동학농민운동당시소실된것을 1909년 ( 순종 3) 10월대원 ( 大圓 ) 이재건하였으며, 6 25 전쟁때소실되었다. 현재의건물은 1958년에재건한것이다. -------------------------------------------------------------------------- 부도는승려의무덤을상징하여그유골이나사리를모셔두는곳이다. 상이암의뒷마당에자리하고있는이 2기의부도는각각 해월당, 두곡당 이라는호를가진두승려의사리를모시고있다. 해월당부도는하나의돌로이루어진 3단의받침위로, 항아리모양을한탑신 ( 塔身 ) 의몸돌을두고, 지붕돌을얹었다. 받침돌에는세련되지못한연꽃무늬가있고, 지붕돌은여덟귀퉁이가위로살짝들려있다. 꼭대기에는밑부분이깨진꽃봉오리모양의돌이놓여머리장식을하고있다. 두곡당부도는 8각의받침돌위로종모양의탑신을올리고, 꽃봉오리모양의머리장식을얹은구조로, 탑신에는위아래에넝쿨무늬를두어장식하였다. 두부도를세운시기는밝혀지지않고있다. 상이암은신라헌강왕원년 (875년) 에가야선사가창건하였는데, 그후조선태조 3년 (1394년) 에각여선사 ( 覺如禪師 ) 가크게중수하였고, 고종 31년 (1894년) 동학혁명때병화입은것을순종 3년 (1909년) 10월에김대원선사 ( 金大圓禪師 ) 가재건하였으며, 6.25동란으로소실되었던것을그후재건시킴으로써지금에이르고있다. 상이암부도는성수산 ( 聖壽山 ) 골짜기의상이암경내후원에 2 기가위치하고있는데, 윗면이평평한부정형의자연석을지대석으로하 고, 그위에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을 1 매로석재로서조각하여올려놓았다. 하대석은각면 0.5m 의사각형의형태를하고있고, 중 대석은아무런조각이없는원통형이며, 상대석은세련되지못한앙련 ( 仰蓮 ) 의연화문 ( 蓮花紋 ) 을조각하였다. 탑신석은고복형으로서상단부와하단부에각각횡선대 ( 橫線帶 ) 를두르고있으며, 횡선대로구획된상부와하부에는당초문 ( 唐草紋 ) 을조각하였다. 옥개석은팔작지붕의형태를하고있으며, 옥개석의네귀는반전되어있다. 상륜부는부도의크기에비해서고준한느낌이들며, 그위에는하부가결손된보주 ( 寶珠 ) 가놓여있다. 전북문화재자료제 124 호상이암부도 [ 上耳庵浮屠 ] 43

전북문화재자료제 118 호노동환가옥 2013.06.18 08:18 전라북도임실군삼계면후천리에있는고가 지정번호 전북문화재자료제118호 지정연도 1986년 9월 8일 소장 노동환 소재지 전북임실군삼계면후천리 465 시대 1650년 면적 안채 20.64평, 사랑채 14.29평 분류 고가 ㆍ연혁 마을이형성될당시진 ( 陳 ) 씨들이현건물뒤대나무밭에이건물을지어 6 7대를이어오다가양 ( 梁 ) 씨들이 3 4대를살았다한다. 건물주 ( 노동환 ) 의 8대조오류처사공이건물을구입신축하여현재에이르렀다. 건물의터가제비알을품은형태이고집을바라보고있는원산 ( 강정등 ) 이사두혈이라하여이집을넘어다보기때문에거부나인재가나오지않는다하여사두를눌러꼼짝못하게하기위하여산머리에강정이란정각을지었다한다. 전북문화재자료제 118 호노동환가옥 44

1650년에건축된것으로보이며안채, 행랑채, 문간채로구성되어있다. 안채는정면 4칸, 측면 2칸팔작지붕으로 20.64평이다. 서쪽으로부터앞쪽에부엌이있고뒤쪽으로방이둘있다. 안방다음으로대청마루, 그다음건넌방이있고뒷쪽으로도장이있다. 주초는 4각형자연석을썼으며기둥은방주로굵기가 25 25cm 이다. 댓돌은자연석으로 3개가있다. 행랑채는외양간, 헛간, 변소등으로구성되어있어옛용도를정확히알수없다. 원래는초가집이었으나기와로바뀌었다. 사랑채는정면 3칸, 측면 2칸인팔작지붕으로건평 14.29평의ㅗ자형건물이다. 사랑채와문간채가붙어있는형식으로대문좌우에문간방이있었으나현재는없다. 문간방아래쪽으로청지기방이있고그옆으로사랑방이있다. -------------------------------------------------------------------------------- 1986년 9월 8일전라북도문화재자료제118호로지정되었다. 노동환이관리하고있다. 현재노동환이살고있는옛날가옥으로안채 사랑채 문간채로구성되었다. 마을이형성될당시진 ( 陳 ) 씨들이지금의건물뒤대나무밭에이건물을지어 6~7대를이어오다가양 ( 梁 ) 씨들이 3~4대를살았다한다. 건물주의 8대조노엽 ( 盧燁 : 오류처사공 ) 이건물을구입 신축하여현재에이르렀다. 전설에의하면건물의터가제비알을품은형상이고, 집을바라보고있는원산 ( 강정등 ) 이사두혈 ( 巳頭穴 ) 이라이집을넘어다본다고한다. 때문에거부나인재가나오지않는다하여사두를눌러꼼짝못하게하고자산머리에강정이란정각을지었다한다. 상량문에 " 숭정기원후경인삼월초육일인시견주경인삼월십육일유시상량 ( 崇禎紀元後庚寅三月初六日寅時堅柱庚寅三月十六日酉時上樑 " 이라하여효종원년 (1650) 에건립된것으로추정된다. 안채는정면 4칸, 측면 2칸의팔작지붕으로 20.64평이다. 서쪽으로부터앞쪽에부엌이있고, 뒤쪽으로방이둘있다. 안방다음으로대청마루, 건넌방이있고, 뒤쪽으로도장이있다. 주초 ( 柱礎 ) 는 4각형자연석을썼으며기둥은네모기둥으로굵기가 25 25cm 이다. 댓돌은자연석으로 3개가있다. 도장은각종물건을보관하는곳이다. 선반이하나메어져있고, 바닥은마루로되어있으며, 동쪽으로창문이나있다. 통풍을용이하게하기위해마루를설치한것같다. 건넌방의정면에부엌이있고, 부엌문이달려있던흔적이있다. 다락은안방으로부터부엌쪽으로하나가있다. 처마는홑처마이고, 용마루에는귀면 ( 鬼面 ) 망새가있다. 문간채는현재외양간 헛간 변소등으로구성되어있어옛용도를정확히알수없다. 원래는초가집이었으나기와로바꾸었다. 사랑채는정면 3칸, 측면 2칸인팔작지붕으로, 건평 14.29평의凹자형건물이다. 사랑채와문간채가붙어있는형식으로대문좌우에문간방이있었으나, 북쪽의방은현재는없다. 문간방아래쪽으로청지기방이있고, 그옆으로사랑방이있다. 사랑에는정양사 ( 靜養舍 ) 라는현판이붙어있다. 본래대지가경사진관계로사랑의마루가상당히높아서훨씬시원해보인다. -------------------------------------------------------------------------------- 집주인의 8대조노엽이효종 1년 (1650) 경지어지금에이르고있는집으로안채와사랑채, 행랑채로구성되어있다. 안채는앞면 4 칸 옆면 2 칸규모로지붕은옆면에서볼때여덟팔 ( 八 ) 자모양을한팔작지붕이다. 서쪽으로부터앞쪽에부엌이있고 뒤쪽으로방이둘있다. 다음으로안방과대청이있고건넌방뒤쪽에도장이있다. 도장은각종물품을보관하는곳으로통풍을용이 하게하기위해마루를설치했다. 행랑채는원래모습을정확히알수없으나지금은외양간과헛간따위로쓰이고있는데초가를기와로바꾼것이다. 사랑채는앞면 3 칸 옆면 2 칸규모에지붕은팔작지붕으로문간채가함게붙어있다. 대문좌우에문간방이있었으나지금은하나만 남아있으며사랑에는 정양사 라는현판이붙어있다. 대지가경사진탓에사랑마루가높아서시원한분위기를만든다. 전설에따르면건물의터와집을바라보고있는산이서로맞지않아부자나인재가나오지않는다고하여산머리에강정이란정자 전북문화재자료제 118 호노동환가옥 45

를세웠다고한다. 전북문화재자료제 118 호노동환가옥 46

전북문화재자료제 26 호임실향교대성전 2013.06.18 08:17 전라북도임실군임실읍이도리에있는임실향교의대성전. 지정번호 전북문화재자료제26호 지정연도 1984년 4월 1일 소재지 전북임실군임실읍이도리 812 시대 조선시대 크기 대성전정면 3칸측면 4칸, 명륜당정면 4칸측면 3칸, 서재정면 4칸측면 2칸, 동재정면 5칸 분류 향교 전북문화재자료제 26 호임실향교대성전 47

ㆍ연혁 임실읍의중앙을가로지르는임실 순창국도로부터서쪽으로약 300m가량떨어진향교부락에위치하고있다. 이곳은용요산의동남쪽기슭인봉황대와 3.1동산사이에위치한지역이다. 이향교의창건연대와창건당시의위치는알수가없으나현위치에이건된것은태종 13년 (1413) 이라고한다. 이후의연혁도고찰할만한문헌적자료가없으며확인할수있는것은주로조선말고종이후의것뿐이다. 철종 5년 (1854) 에김성근현감에의하여대성전이크게중수되고고종 15년 (1878) 에다시교궁이수리되고고종 20년 (1883) 한기석현감에의해서서재가크게수리되었고고종 22년 (1885) 에다시동재가중수되었다. 향교에보관되어있는중수기에의하면이후임실향교는고종 31년 (1894), 광무 11년 (1887), 1916년, 1919년, 1928년, 1935년, 1941년등수차에걸쳐다시중수되었다. 근래에이르러서 1988년대성전을보수하고, 명륜당마루공사, 번와등을실시하였고, 1986년서재와명륜당을보수하였다. 현재향교에는맨뒤로부터정면 3칸 (11.20m), 측면 4칸 (7.2m) 의맛배지부의대성전 (24.5평) 과정면 3탄 (6.70m), 측면 1칸 (2.40m) 의고루집형식의내삼문 (4.,9평) 이있고, 그앞에정면 3칸 (11.40m), 측면 3칸 (5.90m) 이맛배지붕형식의명륜당 (20.4평) 이있다. 명륜당을사이에두고그앞으로정면 4칸 (10.0m), 측면 1칸 (6.20m) 과맞배지붕형식의동재 (10.8평), 정면 5칸 (14.8m), 측면 2칸 (6.0m) 의맞배지붕의서재 (25.4평) 가마주보고배치되어있으며, 이앞에정면 3칸 (6.2m), 측면 1칸 (2.60m) 의맛배지붕의형식인외삼문 (4.9평) 이있다. 그리고명륜당과좌측의협문을사이에두고정면 4칸 (11.6m), 측면 2칸 (6,0m) 의우진각형식의한옥인관리인집 (24평) 이있다. 한편외삼문밖에는근래에만든홍살문이세워져있다. 그왼편에는문묘중수사적비, 임실향교주수사적비, 임실향교모성계사적비등 3기의비석이세워져있다. 대성전으로올라가는등재와명륜당의사이에는둘레 4m, 수고25m, 수령 700년의은행나무두그루가있다. 이은행나무는 1982년 9월 20일도나무로지정되어보호되고있다. --------------------------------------------------------------------------------- 향교는공자와여러성현께제사를지내고지방민의교육과교화를위해나라에서세운교육기관이다. 임실향교의원래자리는알수없으나, 조선태종 13년 (1413) 지금있는자리에옮겨지은후여러차례수리하였다. 현재남아있는건물로는대성전을비롯하여명륜당과동재 서재가있으며, 출입구로내삼문 외삼문 홍살문등이있다. 대성전은공자를비롯한여러성현의위패를모시고제사를지내는곳이다. 앞면 3칸 옆면 4칸의규모이며, 지붕은옆면에서볼때사람인 ( 人 ) 자모양인맞배지붕이다. 조선시대에는나라에서토지와노비 책등을지원받아학생을가르쳤으나, 지금은교육기능은없어지고제사기능만남아있다. ------------------------------------------------------------------------------- 임실향교는조선태종 13년 (1413년) 에현재의위치에옮겨지어졌다고기록되었으나, 원래의위치는알수없다. 건물은대성전을비롯하여명륜단 ( 明倫堂 ), 동재 ( 東齋 ), 서재 ( 西齋 ) 가있으며, 대성전과명륜당사이에는내삼문이, 입구쪽에는외삼문이있고, 외삼문전면에는홍살문이세워져있다. 전에는이외에헌관방 ( 獻官房 ), 제기고, 주고, 행랑등이있었다고하나, 현재는철거되었다. 매년춘추로석전제를지내고이와는별도로매월삭월과망일마다분향례 ( 焚香禮 ) 를지내고있다. 대성전은정면 3칸, 측면 4칸의맞배지붕이며, 처마는겹처마이다. 좌우양합각에는방풍판을달았다. 건물은낮은석축의기단위에세워졌으며, 기둥은두리기둥을사용하였다. 전면중앙에는상부는띄살문, 하부는판문형식으로된분합문을달았으며, 좌우양측에도같은형식의외여닫이를달았다. 내부의가구형식은대들보위에짧은동자기둥을세우고, 이에다시중보를얹어서사다리꼴의대공을받치고있다. 명륜당을비롯한동재, 서재등의건물도맞배지붕이며, 처마는겹처마이다. 명륜당은정면 4칸, 측면 3칸의규모이다. 서재는정면 4칸, 측면 2칸, 퇴집으로방 3칸, 대청한칸을배치하였으며, 동재는정면 5칸건물로방3칸, 대청 2칸의전면에퇴를놓았다. 전북문화재자료제 26 호임실향교대성전 48

------------------------------------------------------------------------------- 1984년 4월 1일전라북도문화재자료제26호로지정되었다. 창건연대와당시의위치는알수없으나, 현위치에이건된것은 1413년 ( 태종 13) 이다. 임실과순창간의국도로부터서쪽으로약 300m 떨어진향교부락에있다. 이곳은용요산의남동쪽기슭인봉황대와 3 1 동산사이에위치한지역이다. 매년춘추로석전을지내고, 이와는별도로매월삭월과망일마다분향례 ( 焚香禮 ) 를지내고있다. 임실향교는 1854 년 ( 철종 5) 대성전이크게중수되고, 1878 년 ( 고종 15) 교궁이수리되는등수차에걸쳐중수되었다. 근래에 1986 년서 재와명륜당을, 1988 년대성전과명륜당의마루와기와를보수하였다. 대성전은정면 3 칸, 측면 4 칸의맞배지붕이며처마는겹처마이다. 좌우양합각에는방풍판을달았다. 건물은낮은석축의기단위에 세워졌으며, 기둥은두리기둥을사용하였다. 전면중앙의상부는띄살문, 하부는판문형식으로된분합문을달았으며, 좌우양측에도 같은형식의외여닫이를달았다. 대성전의가구 ( 架構 ) 는대들보위에짧은동자기둥을세우고, 이에다시중보를얹어서사다리꼴의대공을받치고있다. 이외명륜당을비롯한동재 서재등의건물도맞배지붕이며, 처마는겹처마이다. 명륜당은정면 4칸, 측면 3칸의규모이다. 서재는정면 4칸, 측면 2칸, 툇집으로방 3칸, 대청한칸을배치하였으며동재는정면 5칸건물로방 3칸, 대청 2칸의전면에퇴를놓았다. 외삼문밖의홍살문은근래에지었는데, 왼편에는문묘중수사적비 임실향교중수사적비 임실향교모성계사적비등 3기의비석이세워져있다. 대성전으로올라가는동재와명륜당사이에는둘레 4m, 높이 25m, 수령 700년의은행나무두그루가있다. 이은행나무는 1982년 9월 20일문화재로지정되어보호되고있다. 전북문화재자료제 26 호임실향교대성전 49

전북문화재자료제 25 호죽림암 [ 竹林庵 ] 2013.06.18 08:12 전라북도임실군임실읍성가리에있는사찰. 지정번호 전북문화재자료제25호 지정연도 1984년 4월 1일 소재지 전북임실군임실읍성가리 525 시대 조선시대 크기 본전정면 5칸측면 2칸, 미륵당 산신각 칠성각정면 1칸측면 1칸 분류 사찰건축 ㆍ연혁 임실읍의안산이라고할수있는용요산의중턱에있는사찰로구임실경찰서에서부터서쪽으로약 1.5km 정도떨어져있다. 9세기말경신라의진감선사가암자를짓고수도하였던곳이라고전하는데창건연대는정확히알수없다. 다만죽림암의법당의연력기에의하면조선연산군 18년 (1584) 에태고진우국사의 4세손인벽필지암대선사가초건하였고현종 5 년 (1664) 진묵일옥대선사가중창하였고그이후수차의중수를거쳐오늘에이르고있다. 본래법당본전 5칸과칠성각산신각등이있었으나, 임진왜란때불타규모가줄었고, 6.25 동란때다시불타버렸다. 현존하는법당, 칠성각, 산신각등은 1981년중수된것이다. 법당본전은정면 5칸 (5.80M), 측면 2칸 (2.30m) 8각지붕의건물이고, 미륵당 (2.20 1.90) 산신각 (1.75 1.85), 칠성각 (3.10 2.46) 은각 전북문화재자료제 25 호죽림암 [ 竹林庵 ] 50

각정면 1칸, 측면 1칸의맛배지붕건물이다. 정면 2칸측면 1칸의 6평규모의목조슬레이트구조의헛간이있다. 암자의바로앞에는오래된느티나무 3그루가서있는데큰것은두레가 6.5m, 높이가약 25m정도로이절의역사를짐작케한다. 교파는조계종이다. ------------------------------------------------------------------------------- 1984년 4월 1일전라북도문화재자료제25호로지정되었다. 성가리용모산밑에있으며, 9세기말경신라진감국사 ( 眞鑑國師 ) 가신흥사 ( 新興寺 ) 를건립후초가삼간의규모로창건하였다. 신흥사가수행을위한도장으로만들어졌다면죽림암은수행과포교의목적을지닌곳이었다. 죽림암의법당연력기에따르면 1504년 ( 연산군 10) 고려시대승려인보우국사 ( 普愚國師 ) 의 4세손지엄 ( 智嚴 ) 이중창하였으나, 임진왜란때소실되었다. 1664년 ( 현종 5년 ) 일옥이, 그후덕진이전라남도의어느민가를해체하여복원한것이현재의죽림암이다. 본래법당본전 5칸과칠성각 산신각이있었으나임진왜란때불타규모가줄었고, 6 25 전쟁때다시불타버렸다. 지금의법당 칠성각 산신각등은 1981년중수된것이다. 법당본전은정면 5칸, 측면 2칸이고, 미륵당 산신각 칠성각은각각정면 1칸, 측면 1칸의맞배지붕이다. 정면 2칸, 측면 1칸의 6평규모의목조슬레이트구조의헛간이있다. 암자바로앞에는오래된느티나무 3그루가서있는데큰것은둘레 6.5m, 높이약 25m 정도로이절의역사를짐작케한다. 절주위에는왕대가있었는데, 이때문에죽림암이라불렀다한다. 한승려가칡덩굴을없애려고불을놓았다가왕대도모두사라졌다한다. 전북문화재자료제 25 호죽림암 [ 竹林庵 ] 51

전북문화재자료제 24 호해월암 [ 海月庵 ] 2013.06.18 08:11 전북문화재자료제 24 호해월암 [ 海月庵 ] 52

전라북도임실군오수면대명리에있는고려말에창건된사찰 지정번호 전북문화재자료제24호 지정연도 1984년 4월 1일 소장 해월암 소재지 전북임실군오수면대명리 715 시대 고려시대 분류 사찰건축 ㆍ연혁 고려말 1352경오수면에해경대사와월산대사가창건하였다하여두사람의이름을따서해월암이라이름하였다. 본전은ㄱ자형의팔각우진각건물이고산신각은정면측면각각 1칸의맛배지붕의건물이다. 1556년 ( 명종 11년 )7월 20일남원부사가중건했고 1747년 ( 영조 23년 ) 5월 15 일에는거사양정봉이중수하고다시 1858년 ( 철종 9년 ) 과 1915년에중수오늘에이르고있다. 나무가우거져신포정과잇고있어이른봄의상춘객과여름의피서인파가몰려든다. --------------------------------------------------------------------------------- 1984년 4월 1일전라북도문화재자료제24호로지정되었다. 고려말인 1352년 ( 공민왕 1) 경해경대사 ( 海鏡大師 ) 와월산대사 ( 月山大師 ) 에의해창건되었다. 해월암 ( 海月庵 ) 은두사람의이름첫자를따서지은것으로, 본전 ( 本殿 ) 은ㄱ자형팔작, 우진각지붕집이고, 산신각 ( 山神閣 ) 은정면과측면이각각 1칸인맞배지붕건물이다. 1556년 ( 명종 11) 7월 20일남원부사에의하여중건되었고, 1747년 ( 영조 23) 5월 15일에는거사 ( 居士 ) 양정봉 ( 梁正峰 ) 이중수하였다. 그후 1858년 ( 철종 9) 과 1915년등수차례중수가이루어졌다. 전북문화재자료제 24 호해월암 [ 海月庵 ] 53

전북문화재자료제 22 호신안서원 [ 新安書院 ] 2013.06.18 08:09 전라북도임실군임실읍신안리에있는조선시대의서원 지정번호 전북문화재자료제22호 지정연도 1984년 4월 1일 소장 한도수 소재지 전북임실군임실읍신안리 447 시대 조선시대 분류 서원 ㆍ연혁 신안서원은원래임실읍낙촌리에위치하였다가후에금동으로옮겨현재에이르고있다. 선조21년 (1588) 한호겸선생의문하생들이스승의덕을흠모하여사당을건립하고신안서원이라이름하였다. 정유재란 (1597) 때에소실되었으며오랫동안유지만남아있다가, 현종 10년 (1669) 에재건되었다. 처음에는문간공이서선생과신제한호겸선생만을봉안하였으나, 정조 12년 (1788) 에사림들의결의에따라둔학송경원. 만회당한필성. 홍운정한명우. 거묵당송시태를추배하고, 다시정문공김수근. 무명제강백진을추배하여모두 8현을배양하였다. 전북문화재자료제 22 호신안서원 [ 新安書院 ] 54

순조 (1819) 때도내유림의공의에따라주부자회암선생의영정을봉안키로하니이는순창군무이서원의예에따른것으로, 주희선생의영정은이해 9월에함평자양서원에서복사해왔다. 그후신안서원도고종 5년에훼손되었으며현존하는서원시설은 1958년 10월에준공하였다. ----------------------------------------------------------------------------- 1984년 4월 1일전라북도문화재자료제22호로지정되었다. 1588 년 ( 선조 21) 한호겸 ( 韓好謙 ) 의덕행을기리기위하여문인들이창건하였다. 임진왜란때소실되고오랫동안유지만남아있다 가 1669 년 ( 현종 10) 에중건하였으나, 1868 년 ( 고종 5) 흥선대원군의서원철폐령에의해철폐되었다. 1936 년에단을설치하였으며, 광복후 1958 년 10 월에중건하여오늘에이른다. 처음에는이서와한호겸만을봉안하였으나, 1788( 정조 12) 에사림들의결의에따라송경원 ( 宋慶元 ) 한필성 ( 韓必聖 ) 한명유 ( 韓鳴愈 ) 송시태 ( 宋時態 ) 를추가하고, 다시김수 ( 金洙 ) 강백진 ( 康伯珍 ) 을추가, 모두 8 현을배향하였다. 1819 년에는도내유림의 공의에따라회암선생의영정을봉안키로했는데이는순창군무이서원의예에따른것이다. 이해 9 월에는함평의자양서원 ( 紫陽書院 ) 에있던주자 ( 朱子 : 朱熹 ) 의영정을이곳으로옮겨와주벽 ( 主壁 ) 으로봉안하고 신안 이 라는사액 ( 賜額 ) 을받아서원으로승격되었으며선현배향, 지방교육의일익을담당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사당과정면 4칸, 2칸의강당은모두팔작지붕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동재 ( 東齋 ) 는맞배지붕으로된한옥으로, 원래임실읍낙촌리에있다가금동으로옮겨현재에이른다. -------------------------------------------------------------------------------- 주희와신재한호겸의위패를모신서원이다. 한호겸은성리학자로서항상주희의영정을모셔왔는데, 그가죽은뒤조선선조 21년 (1588) 에제자들이그의덕행을추모하기위해신안사라는사당을짓고주희와그의위패를함께모셨다. 그뒤정유재란으로불탄것을현종 10년 (1669) 에다시세웠고, 순조 19년 (1819) 에는나라의지원을받는사액서원이되어이름도신안서원로바뀌었다. 고종 5년 (1868) 에흥선대원군의서원철폐령으로철폐되었다가 1958년에다시세워오늘에이르고있다. 서원안에있는건물로는사당, 강당, 동재, 신문, 고사, 창고, 대문등이있다. 사당은앞면 3칸 옆면 2칸규모이며, 지붕은옆면에서볼때여덟팔 ( 八 ) 자모양인팔작지붕이다. 강당은앞면 4칸 옆면 2칸규모로지붕은팔작지붕으로꾸몄다. 학생들의기숙사인동재의규모는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지붕은옆면에서볼때사람인 ( 人 ) 자모양인맞배지붕으로되어있다. 현재이곳에는주희를중심으로이서 송경원 한호겸 한필성 강백진 한명유 송시열 김수근등을모시고해마다봄 가을에제사를지내고있다. 전북문화재자료제 22 호신안서원 [ 新安書院 ] 55

전북문화재자료제 21 호주암서원 [ 舟巖書院 ] 2013.06.18 08:09 전북문화재자료제 21 호주암서원 [ 舟巖書院 ] 56

전라북도임실군지사면방계리에있는조선시대서원. 지정번호전북문화재자료제21호지정연도 1984년 4월 1일소재지전북임실군지사면방계리 713-1 시대조선시대크기사당정면 3칸측면 2칸, 강당정면 4칸측면 3칸분류서원주암서원은인조 8년 (1630년) 에창건되었으며, 광무원년 (1897년) 에철폐되었다. 그후융희원년 (1907년) 에중건하고, 연촌공최덕지 ( 煙村崔德之 ), 암계공최연손 ( 岩溪崔連孫 ), 율계공장급 ( 栗溪張及 ), 사촌공장경세 ( 沙村張經世 ) 등을배향하였다. 제사지내는장소인사당은앞면 3칸 옆면 2칸규모로, 지붕은옆면에서볼때여덟팔 ( 八 ) 자모양인팔작지붕이다. 공부하는강당역시팔작지붕으로앞면 4칸 옆면 3칸규모의건물이다. 이서원에서는해마다음력 3월에제사를지내고있다. 연촌공최덕지는전주최씨문성공계중랑장공파연촌공파의파조로휘는덕지 ( 德之 ) 이고자는우수 ( 迂 ) 또는가구 ( 可久 ) 이며호는연촌 ( 烟村 ) 또는존양당 ( 存養堂 ) 이고시호는문숙 ( 文肅 ) 이다. 연촌공은 1384년에 4세월당공최담의넷째아들로태어났다. 1405년에문과에급제하여옥당대각을거쳐서여러지방의지방관을지냈다. 특히경상도청도군수로계실때지방백성들이무거운세금에허덕이는현실을정밀하게분석하여세금을덜어주어야한다는내용을주제로하여올리신상소문 " 논공담험변부소 " 는그의미와철학이깊어후세의학자나관리들에게커다란귀감이되었다. 전북문화재자료제 21 호주암서원 [ 舟巖書院 ] 57

남원부사를마지막으로벼슬을버리고전라도영암영보촌으로내려가서재를지어이름을존양루 ( 存養樓 ) 라부르고호를 " 연촌 " 에 서 " 존양당 " 으로바꾸었으며책과글을벗삼아학문연구와후진양성에전념하였다. 암계공최연손은전주최씨문성공계중랑장공파, 연촌공파 7세선무랑공의둘째아들로휘는연손 ( 連孫 ) 이고자는자윤 ( 子胤 ) 호는암계 ( 巖溪 ) 이다. 암계공의태어나고돌아가신기록을포함하여대부분의기록이둘째아들감찰공최엄조 ( 崔淹祖 ) 가경남함양에서살큰불 ( 火災 ) 로모두불타없어지고말았으나 1450년에서 1460년경에태어나신것으로짐작된다. 1480년 2월 24일생원시를장원으로이어서같은해에진사시도합격했으며 1489년에문과에급제했다. 1492년예문관봉교, 1493년사간원정언, 이조좌랑, 1507년봉상시정, 1509년사제감정, 1527년 2월 3일에는통훈대부홍문관교리형조참의를지냈다. 1537년 5월 12일에는통정대부승정원도승지, 가선대부이조참판, 등을그리고전라도균전어사, 함양군수, 강릉부사, 평양서윤등많은관직을거쳤다. 전북문화재자료제 21 호주암서원 [ 舟巖書院 ] 58

전북문화재자료제 20 호영천서원 [ 寧川書院 ] 2013.06.18 08:08 전라북도임실군지사면영천리에있는조선시대의서원. 지정번호전북문화재자료제20호지정연도 1984년 4월 1일소장안재연소재지전북임실군지사면영천리 203 시대조선시대분류서원 1619년 ( 광해군 11년 ) 에창건되고 1686년 ( 숙종 12년 ) 임금이친필로현판을하사해사액서원 ( 賜額書院 ) 으로승격된서원중최고의서원이다. 당시남원부 48방중의지사방이었으나 1914년행정구역개편으로임실군으로편입되었다. 이서원은 48방내의 30여서원중에서유일한사액서원이었으므로권위가높아우수한학자들이멀리서까지몰려왔다고한다. 그러다가다른일반서원과같이 1868년 ( 고종 5년 ) 에헐었다가해방후후손들이재건한것이다. 헐기전의건물로는사우 3칸, 신문 1 칸, 동서협문각 1칸, 전사고 1칸등이있었으나현재는정면 3칸, 측면 2칸의사우와정면 3칸, 측면 2칸의강당및 3문이남아있을뿐이다. 이서원은중종때기묘사화에희생된사제당안처순을주벽으로하여정환, 유헌, 정황, 활계이대빙선생이배향되어있다. 우의지붕은맛배지붕이며처마는겹처마이다. 기둥은두리기둥을사용하였으며중앙에는상부가교착형식으로사분합문을달았는데좌우측에는같은형식의두짝열개의복합문이있다. 공포는기둥위에만배치되었으며공포와공포사이에는화반한개씩을놓았 전북문화재자료제 20 호영천서원 [ 寧川書院 ] 59

다. 강당의지붕은맛배지붕이며처마는홑처마이고기둥은두리기둥을사용하였다. --------------------------------------------------------------------------------- 1984 년 4 월 1 일전라북도문화재자료제 20 호로지정되었다. 1619 년 ( 광해군 11) 에지방유림의공의로기묘사화 ( 己卯士禍 ) 때희생된 4 인의학문과덕행을추모하기위하여창건되었다. 1686 년 ( 숙 종 12) 에임금이친필로 영천 ( 寧川 ) 이라는현판을하사해사액서원 ( 賜額書院 ) 으로승격되어선현배향및지방교육의일익을담당 하여왔다. 당시남원부 48 방중의지사방이었으나 1914 년행정구역개편으로임실군으로편입되었다. 이서원은 48 방내의 30 여서원중에서유일한사액서원으로권위가높아우수한학자들이멀리에서몰려왔다고한다. 1868 년 ( 고종 5) 흥선대원군의서원철폐때훼철되었으며, 현재의건물은광복후에후손들이복원한것이다. 서원안에는안처순 ( 安處順 ) 을주벽으로하여정환 ( 丁煥 ), 정황, 이대유등이배향되어있다. 훼철되기전에는사우 ( 祠宇 ) 3칸, 신문 1칸, 동서협문각 1칸, 전사고 1칸등이있었으나현재는사우와강당및 3문만이남아있다. 4인의위패가봉안되어있는사우는맞배지붕에겹처마건물이다. 기둥은두리기둥을사용하였으며, 중앙에는상부가교창 ( 交窓 ) 형식으로된사분합문을달았는데, 좌우측에는같은형식의 2짝 10개의분합문이있다. 공포는기둥위에만배치되었으며, 공포와공포사이에는화반 1개씩을놓았다. 원내각종행사와유림의회합, 학문강론장소로사용되는강당은맞배지붕, 홑처마이고, 기둥은두리기둥을사용하였다. 가구 ( 架構 ) 형식은대들보위에짧은동자기둥을놓고, 종보를올린다음종마루를받치는사다리꼴의대공을얹었다. 매년 2 월과 8 월중정 ( 中丁 ) 에향사를지낸다. 전북문화재자료제 20 호영천서원 [ 寧川書院 ] 60

지방유형문화재 198 호관곡서원소장전적및고문서 ( 館谷書院所藏典籍및古文書 ) 2013.06.18 08:05 종목 : 시도유형문화재제198호 ( 전북 ) 분류 : 기록유산 / 전적류 / 전적류 / 전적류수량 : 12권 10매지정일 : 2003.05.16 소재지 : 전북임실군지사면관기리 208 시대 : 조선시대소유자 : 관곡서원관리자 : 관곡서원연락처 : 전라북도임실군문화관광과 063-640-2542 서원관계서적이나문서들이희귀한편인데관곡서원에관계되는일괄문서를두루구비하고있어매우귀중한자료라고판단되며, 保奴案, 保直案은院奴와서원의직숙을담당하던院直을재정적으로돕기위해배정된保인保奴, 保直의명단으로 19세기에서원에도保가배정되었음을알려준다. 古文書중에는 1) 서원接人의잡역을금해줄것을진정하여수령으로부터승인받는과정을알수있게하는것 2) 서원儒案에평민 이入錄되고있으며유생의확보가재정적의미를가진다는것을알려주는것 3) 서원유생을수령이着定하고그差帖도수령이발 지방유형문화재 198 호관곡서원소장전적및고문서 ( 館谷書院所藏典籍및古文書 ) 61

행한다는것을알려주는것이있어 18-19 세기사회를이해하는데에좋은자료이다. -------------------------------------------------------------------------- 임실군지사면관기리에위치한관곡서원에소장되어있는일괄문서들이다. 서원관계서적이나문서들이희귀한편인데관곡서원에관계되는일괄문서를두루구비하고있어매우귀중한자료로평가된다. 또한보노안 ( 保奴案 ), 보직안 ( 保直案 ) 은원노 ( 院奴 ) 와서원의직숙을담당하던원직 ( 院直 ) 을재정적으로돕기위해배정된보 ( 保 ) 인 보노 ( 保奴 ), 보직 ( 保直 ) 의명단으로서 19 세기에서원에도보 (( 保 ) 가배정되었음을알려준다. 고문서중에는서원접인 ( 接人 ) 의잡역을금해줄것을진정하여수령으로부터승인받는과정을알수있게하는것, 서원유안 ( 儒案 ) 에평민이입록 ( 入錄 ) 되고있으며유생의확보가재정적의미를가진다는것을알려주는것, 서원유생을수령이차정 ( 差定 ) 하고그 차첩 ( 差帖 ) 도수령이발행한다는것을알려주는것이있어 18 19 세기사회를이해하는데에좋은자료이다. 지방유형문화재 198 호관곡서원소장전적및고문서 ( 館谷書院所藏典籍및古文書 ) 62

지방유형문화재 160 호삼계강사계안 [ 三溪講舍契案 ] 2013.06.18 08:04 삼계강사에관한고문서. 지정번호전북유형문화재제160호지정연도 1998년 1월 9일소장전북대학교박물관소재지전북임실군오수면둔덕리 584 시대조선시대분류고문서삼계강사 ( 三溪講舍 ) 는효령대군의증손인춘성정 ( 春城正 ) 이담손을중심으로조선광해군10년 (1618) 에강사를창립하여 7개부락 7개성씨 ( 이. 김. 한. 최. 하. 장. 양씨 ) 등에의해인근학도들을교육하는서재로운영되었다. 삼계강사에보관되어있는 135개서책과 95장의고문서는조선시대향촌사회의모습과함께혼례. 상례. 관례들을알수있는귀중한자료이다. ------------------------------------------------------------------------------- 1998년 1월 9일전라북도유형문화재제160호로지정되었다. 계안은전북대학교박물관에소장되어있고, 삼계강사는전라북도임실군오수면 ( 獒樹面 ) 둔덕리에있으며, 효령대군 ( 孝寧大君 :1399~1486) 의증손춘성정 ( 春城正 ) 이담손등이 1618년 ( 광해군 10) 에창립하였다. 창립목적은마을주민들이상부상조하기위해만든일종의자치모임이다. 구체적인활동은주민들의교화와교육이었으며, 운영은 7 개부락 7 개성씨 ( 이, 김, 최, 하, 장, 양, 한 ) 등이맡았다. 지금도임실군 오수면둔덕리에서는삼계강사에서 5 년마다 1 차례씩계모임을갖는데, 주민들은이를강사계라한다. 이계는오늘날의일반적인친 목계또는동갑계와같은계가아니라오랜전통과역사가있으며, 조선시대에는이러한강사계와같은모임을동계 ( 洞契 ) 라하였다. 지방유형문화재 160 호삼계강사계안 [ 三溪講舍契案 ] 63

동계는정부로부터징수된세금과울력을징수하고애경사 ( 哀慶事 ) 가일어났을때이를해결하였다. 오수면둔덕리에서는이에그치 지않고삼계강사를통해마을의모든일을자치적으로해결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삼계강사에모여민족자강과독립의식을고취시 켰으며, 강사 ( 講舍 ) 의재산일부를헌납하여오수초등학교가건립되는데밑거름이되었다. 총 135 책 92 장으로, 동계 127 책, 교계 ( 轎契 ) 6 책, 서당계 1 책, 기타 1 책, 고문서 92 장으로구성되었다. 오수면둔덕리의생활사또는 향토사연구에매우귀중한자료이며, 나아가서조선시대향촌사회와혼례 상례 관례 ( 冠禮 ) 등을알수있는매우귀중한자료로 평가된다. 지방유형문화재 160 호삼계강사계안 [ 三溪講舍契案 ] 64

지방유형문화재 151 호수운정 [ 睡雲亭 ] 2013.06.12 20:31 전라북도임실군신덕면금정리에있는조선시대의누각. 지정번호전북유형문화재제 151 호 지정연도 1995 년 6 월 20 일 지방유형문화재 151 호수운정 [ 睡雲亭 ] 65

소장경주김씨계림공파종중소재지전북임실군신덕면금정리 251-1 시대조선시대분류누 ( 정 ) 각수운정은조선철종 13년 (1362) 에이마을에살던경주김씨 15대손수운김낙현이산수와더불어이풍류를즐기기위해시냇가양지바른곳에건립하였다. 이곳에서지나가는나그네들에의해이곳의수려한자연을찬미한글귀를담은현판들이걸려있다. 6.25때에마을이모두소실되었으나수운정만은소실되지않고보호되어현재에이르고있다. ---------------------------------------------------------------------------------- 1995년 6월 20일전라북도유형문화재제151호로지정되었다. 신덕면금정리마을안에있는정자로서, 1862년 ( 철종 13) 4월 2일에지은것이다. 조선시대때경주김씨 9대손김재오 ( 金載五 ) 라는사람이삼계면 ( 三溪面 ) 석문동에서이곳에와정착하여살았는데, 가세가날로번창하였다. 그의 15대손인수운 ( 睡雲 ) 김낙현 ( 金樂顯 ) 이성운 ( 星運 ) 성홍 ( 星弘 ) 성철 ( 星徹 ) 등아들셋을두어행복한가정을꾸려가던중성운 성홍두아들이죽자상심한낙현은산수를벗삼으며소요하고자시냇가양지바른곳에터를닦아서정자를지었다. 이정자가곧수운정으로서, 이후나그네등이이곳에서풍류를즐기고수려한자연을벗삼았다. 나그네들이쓴것으로, 이곳의수려 한자연을찬미한글귀를담은현판들이걸려있다. 6 25 전쟁으로마을이모두소실되었으나수운정은잘보호되어현재에이르며, 지금은금정리주민의대화장소로이용되고있다. 지방유형문화재 151 호수운정 [ 睡雲亭 ] 66

지방유형문화재 150 호상이암부도 [ 上耳庵浮屠 ] 2013.06.12 20:30 전라북도임실군성수면성수리에있는부도 ( 浮屠 ). 지정번호전북문화재자료제124호지정연도 1986년 9월 8일소장상이암소재지전북임실군성수면성수리산1-1 크기높이혜월당부도 194cm, 두곡당부도 125cm분류부도상이암은통일신라헌강왕원년 (875) 에도선국사가창건하여도선암이라하였다. 일설에의하면조선태조이성계가이곳에와서치성을드리니후에왕이될것이라는소리가들렸다고하여상이암으로개명 ( 改名 ) 한것으로전하며, 태조3년 (1394) 에각여대사가증수하였으나그후 1958년에중건하였다. 상이암에안치된 3개의부도중 2기는 1986년에이미문화재자료 124호로지정된바있다. 현부도는화강석의지대석위에옥신, 옥개석위에노반, 노발, 보개등이얹혀져있어형식과구조, 조각등의수법이매우뛰어나다. --------------------------------------------------------------------------- 지방유형문화재 150 호상이암부도 [ 上耳庵浮屠 ] 67

1986 년 9 월 8 일전라북도문화재자료제 124 호로지정되었다. 상이암뒷편에 2 기 ( 基 ) 가있다. 부도 2 기에는각각 慧月堂, 杜谷堂 이라고음각되어있으며, 높이는 194 cm와 125 cm이다. 혜월당과두곡당은모두상이암에서배출된고승이다. 기단부는평평한부정형의자연석을사용하고, 그위에탑신부를올리고, 다시그위에네귀가반전된, 팔작지붕형태의옥개석 ( 屋蓋石 ) 을올려놓았다. 옥개석위상륜부 ( 相輪部 ) 에는 2개의보륜 ( 寶輪 ) 과보주 ( 寶珠 ) 가있으며, 부도의크기에비해큰느낌을준다. 탑신부의위와아래에는당초문 ( 唐草文 ) 이새겨져있다. 중대석은조각이없는원통형이며, 하대석은 1변이 50cm의사각형이다. 상대석에는앙련 ( 仰蓮 : 꽃부리가위로향한연꽃 ) 의연화무늬가양각되어있다. 상이암은 875 년 ( 신라헌강왕 1) 도선국사 ( 道詵國師 :827~898) 가창건하였으며, 1394 년 ( 조선태조 3) 각여 ( 覺如 ) 가중수하였다. 동학농민 운동당시소실된것을 1909 년 ( 순종 3) 10 월대원 ( 大圓 ) 이재건하였으며, 6 25 전쟁때소실되었다. 현재의건물은 1958 년에재건한 것이다. 지방유형문화재 150 호상이암부도 [ 上耳庵浮屠 ] 68

지방유형문화재 145 호임실이도리미륵불상 [ 任實二道里彌勒佛像 ] 2013.06.12 20:29 전라북도임실군임실읍이도리에있는운수사의석불. 지정번호 전북유형문화재제145호 지정연도 1993년 8월 31일 소재지 전북임실군임실읍이도리 210-2 크기 높이 2.54m, 어깨너비 81cm 지방유형문화재 145 호임실이도리미륵불상 [ 任實二道里彌勒佛像 ] 69

분류석불임실읍이도리미륵불상은높이 2.54m. 어깨폭 81cm로수정마을운수사 ( 雲水寺 ) 에남아있다. 운수사는창건연대와설립경위는전해지지않고있으나백제시대의유물로추정되고있다. 이석불은풍수지리설에의하여산세의액막이를위해세운절에남아있는것으로지금은숲과합도는없어지고이석불만남아있을뿐이다. 상은은비교적잘표현되어있으나, 목이하는조각이희미하니불신은흰색으로칠해져있고머리와눈썹, 그리고수염은검은색, 입술은붉은칠을하고있어토속적인색채가강하다. 백제시대의유물이라고전하나그조각연대는분명치않다. 이지역은성수면고덕산산세가험하여화재가자주일어나기때문에이재난을막기위하여고덕산이보이지않도록나무를심어수정 ( 樹亭 ) 이라는마을이름이생겼다고한다. 이곳에절이생기게된것은한도승이이곳을지나가다가워낙숲이좋고뒷산외혈맥과앞의냇물이흐르는중간에마을이위치한것을보고이곳에절을지어인간의도를깨우치려하였다는데에서유래한다고한다. --------------------------------------------------------------------------------- 1993년 8월 31일전라북도유형문화재제145호로지정되었다. 높이 2.54m, 어깨너비 81cm로수정마을운수사 ( 雲水寺 ) 에남아있다. 운수사의창건연대와설립경위는전해지지않고있다. 단지풍수지리설에의하여산세의액막이를위해세운것으로주위에숲이울창하였으나, 지금은석불만남아있다. 목이하는조각이희미하며, 불신은흰색으로칠해져있다. 머리와눈썹, 그리고수염은검은색이며, 입술은붉은칠을하고있어 토속적인색채가강하다. 백제시대의유물이라고전하나조각연대는분명치않다. 이지역은성수면고덕산 ( 高德山 ) 의산세가험하여화재가자주일어났다. 재난을막기위하여고덕산이보이지않도록나무를심어 서수정 ( 樹亭 ) 이라는마을이름이생겼다고한다. 당시한도승이이곳을지났는데, 마을이뒷산의혈맥과앞의냇물이흐르는중간 에위치한것을보게되었다. 이때이곳에절을지어인간의도를깨우치려하였다는데서유래를찾아볼수있다. 지방유형문화재 145 호임실이도리미륵불상 [ 任實二道里彌勒佛像 ] 70

지방유형문화재 144 호김복규, 김기종효자정려비및정판 2013.06.12 20:28 지방유형문화재 144 호김복규, 김기종효자정려비및정판 71

전라북도임실군임실읍정월리에있는조선시대비석. 지정번호 전북유형문화재제144호 지정연도 1993년 8월 31일 소장 김해김씨호은공파종중 소재지 전북임실군임실읍정월리 561 시대 조선시대 분류 석비 김복규 김기종효자정려비및정판 [ 金福奎金箕鍾孝子旌閭碑 旌板 ] ㆍ연혁 임실읍정월리당목마을에위치한효자비각으로김복규부자의효심을기리기위해철종 6년나라의명으로건립하였으며효행기록은다음과같다. 김복규는효성이지극하여 16세에부모상을당하여묘지를정하지못한채밤낮으로슬픔을이기지못하던중천신의현몽으로신약을얻어다려드리니다시깨어나천수를누리게하였다. 이같은행장을찬양하여나라에서증공조참판동지의금부사의벼슬을제수했다. 김기종은부친의효심을이어받아효성이지극하였고부모상에는 3년간을묘소에초막을짓고그애통하는호곡이마치호랑이울음처럼산야를메아리쳐그효심을기리기위하여마을이름까지호동으로바뀌어부르게되었다고한다. -------------------------------------------------------------------------- 1993년 8월 31일전라북도유형문화재제144호로지정되었다. 김복규 ( 金福奎 ) 김기종 ( 金箕鍾 ) 부자의효행을기리기위하여 1885 년 ( 철종 6) 나라의명에따라건립한비석으로, 당목마을효충서원에서원사적비와함께있다. 지방유형문화재 144 호김복규, 김기종효자정려비및정판 72

전하는바에따르면, 김복규가 16 세때부친상을당하였으나묘를정하지못하여슬픔에빠져있던중꿈에천신 ( 天神 ) 이나타나 이르는대로약을구해다려드리자부친이다시살아나천수를누리니, 나라에서그의효행을찬양하여증공조참판동지의금부 사의벼슬을제수하였다. 그의아들김기종또한효성이지극하여부친상을당하자 3년동안초막을짓고묘소를지켰는데, 그의울음소리가마치호랑이울음소리같아마을이름을호동 ( 虎洞 ) 으로바꾸어불렀다한다. 각각의비석에는김정희 ( 金正喜 ) 의글씨로 조선효자증참판김공복규정려비 ( 朝鮮孝子贈參判金公福奎旌閭碑 ) 와 조선효자증교관김공기종정려비 ( 朝鮮孝子贈敎官金公箕鍾旌閭碑 ) 라고새겨져있다. -------------------------------------------------------------------------- 김복규, 김기종부자정려문은삼천동상거마부락에위치하였으나현재는임실군임실읍정월리에옮겨져있다. 이정려문은이들부자의양대에걸친효심을기리기위해 1855년 ( 철종 6년 ) 에세운것이다. 김복규는효심이지극하여 16세때부친상을당하자장지를정하지못한채슬픔에잠겨있던중도사의현몽으로장지를정했다. 특히그는아버지가병으로운명직전에있었으나역시도사의현몽에따라약처방을알아천수를누리게하였다. 나라에서는김복규의지극한효심을알고공조참판동지의금부사의벼슬을제수하였다. 비석의유래이에김복규의아들김기종도부친의효심을이어받아부모에대한효성이지극하였고부모상을당하자 3년간시묘살이를하며애통해했는데마치그울음소리가호랑이의울음소리처럼산야에메아리쳐마을사람들이그의효성을기리기위해마을이름까지호동 ( 虎洞 ) 으로바꾸어불렀다한다. 나라에서는이조참판서유훈으로하여금비를세우도록하고추사김정희가글씨를써오늘에내려오고있다. 추사김정희가쓴정려기에는 증참판김복규의정려기라. 김복규는효자이다. 순조계미 ( 순조 23 년, 1823 년 ) 에정려를세웠는데 그송 ( 頌 - 칭송하는글 ) 에말하기를고목나무버섯의뿌리요단샘의근원이라효자에는효자정문을세워그효행을대대로빛나 게하리. 완당김정희서 라새겨져있다. 손자영곤의비문에는 아버님이남기신말씀에따라완옹 ( 김정희 ) 에게비명을부탁하였다. 완옹의글은매우간결하고엄숙하였다. 편액에는 양세정효각( 兩世旌孝閣 ) 이라쓰고또 효덕연경당( 孝德衍慶堂 ) 또는 육행당( 六行堂 ) 이라적었다. 2대에걸친효자각 이요, 효행의덕으로경사스러움이넘친다, 여섯가지덕행 이다하는이뜻만으로도더이상누누한여러말을할필요를느끼지않아삼가그대략을쓰는데그친다 하고날짜와비를세운이, 글지은이, 글쓴이, 글새긴이의이름을적었다. 이비석은정려를내린지 33년만인 1855년 ( 철종6년 ) 에세운것이다. 김기종에대한비석은다음과같다. 효자인증동몽교관김공기종의정려기라. 김기종은복규의아들이다. 대대로효행이뛰어나그아버님의정려를내린후 29년만인금상 ( 철종 ) 2년 (1851) 에 동몽교관 의증직을받았고 2년후에는다시정려를내렸다. 그송에는 아름답게일어나는효자여, 정성스런어짐이여, 흠없는공양이여, 물가의난초와같도다. 아! 초목도감동하여꽃을맺지아니하고사나운독수리도엎드려날아오네. 이효성은만세에멸치않을것이니후에사람들에게전하리라 하고 완당김정희서 라고되어있다. 지방유형문화재 144 호김복규, 김기종효자정려비및정판 73

지방유형문화재 135 호운서정 2013.06.12 20:27 지방유형문화재 135 호운서정 74

전라북도임실군관촌면 ( 館村面 ) 덕천리 ( 德川里 ) 에있는김승희 ( 金昇熙 ) 가세운누각. 지정번호 전북유형문화재제135호 지정연도 1990년 6월 30일 소재지 전북임실군관촌면덕천리산 52 시대 일제강점기 크기 1동 분류 누각 ㆍ연혁 관촌면오원천변의사선대위에있는운서정은울창한수목들에둘러싸여운치를더하고있다. 운서정은당대의부호인승지김양근의아들승희공이부친의유덕을추모하기위하여 1928년당시쌀 3백석을들여 6년간에걸쳐지은곳이다. 정각과동, 서재그리고가정문으로이루어진운서정은이지방에서는보기드물게거대한목재와석축등을사용한건축양식이다. 건립후일제하에경향의우국지사들이모여망국의한을달래던곳으로도유명한운서정은오늘날에는관광지사선대의빼놓을수없는명소이다. -------------------------------------------------------------------------- 1990년 6월 30일전라북도유형문화재제135호로지정되었다. 섬진강상류인오원천 ( 烏院川 ) 변에있는사선대 ( 四仙臺 ) 위에세운누각으로지금은김재두가소유 관리하고있다. 당대의갑부인승지김양근 ( 金瀁根 ) 의아들인김승희가아버지의유덕을추모하기위해 1928년쌀 3백석을들여 6년간에걸쳐세웠다고전해진다. 정각과동재 서재 가정문으로이루어졌으며거대한목재와석재등으로건조된지방에서는보기드문조선시대의전통적인건 축양식을따르고있다. 일제강점기때전국각지의우국지사들이모여망국의한을달래고나라의앞날을걱정했던곳으로도유 명하다. 지방유형문화재 135 호운서정 75

지방유형문화재 112 호신흥사대웅전 [ 新興寺大雄殿 ] 2013.06.11 10:20 전라북도임실군관촌면상월리에있는삼국시대의건축물. 지정번호 전북유형문화재제112호 지정연도 1985년 8월 16일 소장 신흥사 소재지 전북임실군관촌면상월리 360 시대 백제시대 분류 사찰건축 ㆍ연혁 신흥사는상월리사자산남쪽기슭에있는절로백제성왕 7년 (529) 에건축되었으며그후여러차례중건했지만대웅전등주요건물은창건당시백제때의건축양식을그대로가지고있어매우소중한가치가있다. 또한창건당시대웅전, 나한전, 산신각정문, 요사가김제의금산사에못지않았다고한다. 대웅전의기단은자연석이며초석도역시자연석주초이다. 기둥은배흘림이뚜렷하고특히우주는다른기둥에비해매우강하다. 전체적으로보아기둥의높이가평면규모에낮음으로해서지붕이상대적으로크게보인다. 정면의문은어칸이 4분합의빗살문이며협칸은각각 3분합의빗살문으로되어있다. 처마는겹처마다둘렀으며그아래공포는다포식으로내외 2출목이며어칸에는공간포가 2개, 협칸에는 1개씩있고저공의끝은앙 지방유형문화재 112 호신흥사대웅전 [ 新興寺大雄殿 ] 76

설로조각적수법은그리화려하지못하다. 그러나이러한단점을단청으로보완하여단순하게보이지는않는다. 창방머리는보아지형식의곡선, 장식을했고, 단청역시초화문으로하였다. 전체적으로보아측면의폭의넓은편이며그중어칸이특히넓어내진의공간이깊음을알수있다. 또, 측면풍판의마무리가부드러운곡선으로되어있는점이나측변의너새도정면과같이새들로단정히정리한것으로보아측면에많은관심을기울인듯하다. ------------------------------------------------------------------------------- 1985년 8월 16일전라북도유형문화재제112호로지정되었다. 신흥사는사자산남쪽기슭에있는절로 529 년 ( 백제성왕 7) 에창건되었으며, 그후여러차례중건했지만대웅전등주요건물은창건 당시백제때의건축양식을그대로지니고있다. 석가여래본존불상을모신대웅전은다포집으로정면 3 칸, 측면 2 칸의맞배지붕이다. 기단은자연석기단이며초석도역시자연석덤 벙주초이다. 배흘림기둥에특히우주는다른기둥에비해매우강하다. 전체적으로평면규모에비해기둥의높이가낮아지붕이상 대적으로크게보인다. 정면의문은어칸이 4 분합빗살문이며, 협칸은각각 3 분합빗살문이다. 처마는겹처마로, 그아래공포는다포식으로내외 2 출목이 며, 어칸에는공간포가 2 개, 협칸에는 1 개씩있고제공의끝은앙설로서조각수법은그리화려하지않으나이러한단점을단청으로 보완하였다. 창방머리는보아지형식의곡선장식을하였고, 단청역시초화문으로하였다. 전체적으로보아측면의폭은넓은편이며, 그중어칸이특히넓어내진의공간이깊음을알수있다. 또, 측면풍판의마무리가부 드러운곡선으로되어있고너새도정면과같이새들로단정히정리한것으로보아측면에많은관심을기울인듯하다. 지방유형문화재 112 호신흥사대웅전 [ 新興寺大雄殿 ] 77

지방유형문화재 106 호만취정 2013.06.11 10:19 전라북도임실군삼계면산수리에있는조선시대의정자 지정번호 전북유형문화재제106호 지정연도 1983년 8월 24일 소재지 전북임실군삼계면산수리 234 시대 조선시대 분류 누정 ㆍ연혁 만취정은김위 ( 金偉,1532 1595) 가조선선조5년 (1572) 에세운건물로순조14년 (1814) 에고친것이다. 김위는지방관으로재직할때마다선정 ( 善政 ) 을베푼사람으로유명하며, 경상도합천등지에그의업적을기리는선정비 ( 善政碑 ) 가남아있다. 만취란겨울에도변하지않는초목 ( 草木 ) 의푸른빛이라는뜻으로김위의인품을상징하는듯하다. 만취라는정자의이름은선조 13년 (1580) 에우리나라를찾은명나라사람서계신 ( 徐繼申 ) 이지어주었고, 글씨는선조의친필이라는얘기가전한다. 정철 ( 鄭澈 ), 기대승 ( 奇大升 ), 임제 ( 林悌 ) 등대학자들과김위가술잔을기울이며주고받던시가담긴상호헌시판 ( 相互 지방유형문화재 106 호만취정 78

獻詩板 ) 이정자내에걸려있다 ---------------------------------------------------------------------------- 1983년 8월 24일전라북도유형문화재제106호로지정되었다. 1572년 ( 선조 5) 에김위가후진을양성하기위해학당으로사용하려고지었다. 창건이후여러차례중수되었는데, 1834년 ( 헌종즉위 ) 에마지막으로중수되었다. 김위는조선개국공신인예림군김균의 7대손으로, 1532년 ( 중종 27) 에태어났다. 1558년 ( 명종 13) 문과에등급하였고, 예조정랑에오른뒤 1562년합천군수등아홉고을의부사를지내면서선정을베풀었다. 팔도암행어사시절에는잘못된일을많이바로잡기도하여선정비가남아있다. 시문에도능하였고이이와교분이두터웠다. 1595년 ( 선조 28) 에죽은뒤조정에서업적을기리어승정원도승지에추서하였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익공계겹처마이며, 팔작지붕건물이다. 가운데 2칸에방을두고앞뒤와오른쪽 3면에마루를가설하였다. 정자안에는이이, 기대승등의시판이소장되어있다. 지방유형문화재 106 호만취정 79

지방유형문화재제 87 호학정리석불 2013.06.11 10:16 지방유형문화재제 87 호학정리석불 80

고려시대에조각된것으로추정되는돌부처. 지정번호 전북유형문화재제87호 지정연도 1979년 12월 27일 소장 사유 지방유형문화재제 87 호학정리석불 81

소재지 전북임실군삼계면학정리 285 시대 고려시대 크기 ( 지상부분 ) 높이 155cm, 너비 85cm 분류 석불 ㆍ연혁 고려시대에제작된것으로보이는이불상은, 받침대등하반신이아직땅에묻혀있지만, 상체의모습만으로도상당한규모임을짐작할수있다. 큼직한얼굴과볼아래까지내려온커다란귀는풍만하지만, 가는눈과작은입은다소무거운느낌을준다. 머리는 6ㆍ25때떨어진것을다시붙인것이다. 어느날풀을먹다가달아난소를발견하고화가난농부가소에게돌을던졌으나, 잘못하여석불의코를맞혀석불의코귀퉁이가떨어져나갔다고한다. 농부는그날부터병을앓다가죽었는데, 주민들은농부의죽음을석불이내린벌이라생각하고, 석불을두려워하게되었다는애기가전한다. ------------------------------------------------------------------------------ 1979년 12월 27일전라북도유형문화재제87호로지정되었다. 전라북도임실군삼계면학정리석문동 ( 石文洞 ) 의밭가운데에있는돌부처인데, 하반신은땅속에묻혀있고상반신만지상에드러나있다. 땅위에있는부분의크기는높이 155cm, 너비 85cm이다. 머리에는큼직한육발 ( 肉髮 ) 이있다. 두귀는도톰한양볼아래까지쳐져있고턱은두텁게생겼다. 가느다란두눈은양쪽끝이약간치켜올라갔으며, 입은작은편이나미소를띠었다. 왼손은배중앙을가로질러오른손관절부분에서희미해졌다. 전체적으로둔중하고풍만한생김새를보이고있는데, 이런특징은굵은목, 팽팽한상반신에도나타나있다. 팽만한체구이지만세련미보다는둔중한느낌을표현하고있어서시대적인특징을보여준다. 법의 ( 法衣 ) 는두어깨를덮고내려가슴부분에서완만한 U자형을이루는통견의 ( 通肩衣 ) 이고, 의습 ( 衣褶 ) 은선이희미하여형식화된듯하다. 현재가슴아랫부분이땅속에묻혀있어수인 ( 手印 ) 의형식, 대좌 ( 臺座 ) 의형태를확인할수없다. 그러나드러나있는부분만으 로추측하여볼때, 왼손에연호 ( 燕壺 ) 와같은어떤물건을들고있는듯한모습을하고있어약사여래 ( 藥師如來 ) 로추정된다. 지방유형문화재제 87 호학정리석불 82

지방유형문화재 86 호오수리석불 2013.06.11 10:15 지방유형문화재 86 호오수리석불 83

전라북도임실군오수면 ( 獒樹面 ) 오수리 ( 獒樹里 ) 에있는조선시대의석불. 지방유형문화재 86 호오수리석불 84

지정번호전북유형문화재제86호지정연도 1979년 12월 27일소재지전북임실군오수면오수리 550 시대조선시대크기높이 350cm분류석불오수면관월부락뒤에는약삼백년전부터석불이우뚝서마을의수호신처럼이마을을굽어보고우뚝서있다. 한아낙네가어느날뒤쪽산을바라보니큰집채만한바위덩어리가걸어내려오는것을보고깜짝놀라저것좀보라고큰소리를치니이아낙네가외치는소리를들은바위가그만그자리에우뚝멈추어서버렸다는것이다. 마을사람들은이바위가석불인것을알고난후부터는서로불공을드리고관리에정성을쏟아오고있는데석불이마을뒤산쪽에안좌하지않고마을앞까지나와안좌 ( 정좌 ) 했더라면이마을이더욱융성하고자손이오래도록부귀영화를누렸을것이라전한다. 그후 1백년이나눈, 비, 바람을맞고외로이서있는석불을이마을최경태씨가움막같은집을만들어주었으며다시약 80년전진안마이산에거주하는고이갑용처사가꿈에이석불이나타나 내가옷을벗고있으니집을지어달라 는부탁을하므로다시개축하여현재에이르고있다. -------------------------------------------------------------------------------- 1979년 12월 27일전라북도유형문화재제86호로지정되었다. 하나의암석으로된석불로아랫부분이땅속에묻혀있어지대석이나단없이맨땅위에서있다. 조성연대나내력에관한기록은없으나, 옛날한아낙네가마을뒤쪽산에서큰집채만한바위덩어리가걸어내려오는것을보고 저것좀보라 고큰소리로외치니그소리를들은바위가그만그자리에우뚝멈추어서버렸다는것이다. 마을사람들은석불인것을알고정성껏불공을드렸는데석불이마을앞까지나와안좌했더라면마을이더욱융성하고자손이오래 도록부귀영화를누렸을것이라고한다. 높이는 350 cm로앞 뒤쪽에서보면완만한타원상의원추형이고옆쪽에서보면한쪽은완만한타원형이고, 다른한쪽은불상이조각 된면만약간볼록하게솟아있다. 앞면에조각된미륵석불은입상으로광배는두광 신광 화염문을조각하였다. 머리에는육계가있고, 얼굴모습은역삼각형이며, 눈은개안이고, 목에는삼도가있다. 양귀는길고, 코는이등변삼각형으로볼록하 고평평하다. 몸체는어깨에서아래로내려갈수록조금씩체감되는데, 어깨너비는 140 cm, 땅에접한부분의너비는 100 cm, 상의높이 는 240 cm이다. 법의는통견으로양쪽어깨에서아래로내려오다가가슴밑부분에서만난다. 그밑으로거의수평을이룬소매자락이있고, 그속에 두손을넣고있어외형상의손은표현되지않았다. 볼록하게표현된소매자락은법의와함께어울려밑으로내려져있다. 지방유형문화재 86 호오수리석불 85

지방유형문화재 82 호임실용암리사지석조비로자나불상 2013.06.11 10:14 ㆍ문화재명 : 임실용암리사지석조비로자나불상 ㆍ지정별 : 지방유형문화재 82 호 ㆍ지정일자 : 1977. 12. 31 지방유형문화재 82 호임실용암리사지석조비로자나불상 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