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소승소지 : 남구칠석동 560 보유기능 : 고제작 지소정소일 : 1970 년 7월 22 일 漆石洞 ( 옻돌마을) 에서해마다음력정월 10일경부터 2월초하루에걸쳐연희되오는놀이로써정월보름에 절정을이룬다. 고싸움의좥고좦라는말은좥옷고름좦, 좥고맺음좦, 좥고풀이좦들의예에서보듯이

Similar documents
¼øâÁö¿ª°úÇÐÀÚ¿ø

untitled

회원번호 대표자 공동자 KR000****1 권 * 영 KR000****1 박 * 순 KR000****1 박 * 애 이 * 홍 KR000****2 김 * 근 하 * 희 KR000****2 박 * 순 KR000****3 최 * 정 KR000****4 박 * 희 조 * 제

¹ßÇ¥¿äÁö

<B9AEC8ADC0E7C3A2766F6C2E31325FBDCCB1DB2E706466>

문화재이야기part2

현장에서 만난 문화재 이야기 2

~

01¸é¼öÁ¤

- 2 -

유적지1


(001~010)206교과-앞부속(수정)

³»Áö_10-6

1220½É¹Ì¾Èâ27È£º»¹®

<C1DF29BCF6C7D020315FB1B3BBE7BFEB20C1F6B5B5BCAD2E706466>

愿묒쭊援??섏젙諛깆꽌?댁?0907

5 291

4-Ç×°ø¿ìÁÖÀ̾߱â¨ç(30-39)

Çѹ̿ìÈ£-197È£

2 Journal of Disaster Prevention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

(연합뉴스) 마이더스

5권심층-양화1리-1~172

#7단원 1(252~269)교

<C1DF29B1E2BCFAA1A4B0A1C1A420A8E85FB1B3BBE7BFEB20C1F6B5B5BCAD2E706466>

할렐루야10월호.ps, page Normalize ( 할 437호 )

*부평구_길라잡이_내지칼라

hwp

조사보고서 완본(최종인쇄본).hwp

º´¹«Ã»Ã¥-»ç³ªÀÌ·Î



2저널(11월호).ok :36 PM 페이지25 DK 이 높을 뿐 아니라, 아이들이 학업을 포기하고 물을 구하러 가를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 본 사업은 한국남동발전 다닐 정도로 식수난이 심각한 만큼 이를 돕기 위해 나선 것 이 타당성 검토(Fea

제 53 회서울특별시과학전람회 예선대회작품설명서 본선대회작품설명서 쓰나미의피해를최소화시키는건물과 건물배치에대한탐구 출품번호 S-504 출품분야학생부출품부문지구과학 학교명학년 ( 직위 ) 성명

** ¿ùÈ£

<B3EDB9AEC0DBBCBAB9FD2E687770>

33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문 * 웅 입주자격소득초과 34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송 * 호 입주자격소득초과 35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나 * 하 입주자격소득초과 36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최 * 재 입주자격소득초

금강인쇄-내지-세대주의재고찰

2014 경영학회_브로셔 내지

연구노트


¹é¹üȸº¸ 24È£ Ãâ·Â

ÀÚ¿øºÀ»ç-2010°¡À»°Ü¿ï-3

감사인사

2020 나주도시기본계획 일부변경 보고서(2009).hwp

1960 년 년 3 월 31 일, 서울신문 조간 4 면,, 30

CR hwp

2014도서목록본문


È޴ϵåA4±â¼Û

레이아웃 1


2007중국답사기

10월추천dvd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60

나하나로 5호

지도학발달06-7/8/9장

경영학회 내지 최종

041~084 ¹®È�Çö»óÀбâ

untitled

내지-교회에관한교리


....pdf..

82-대한신경학0201

소식지수정본-1


T hwp

178È£pdf


<5BB0EDB3ADB5B55D B3E2B4EBBAF12DB0ED312D312DC1DFB0A32DC0B6C7D5B0FAC7D02D28312E BAF2B9F0B0FA20BFF8C0DAC0C720C7FCBCBA2D D3135B9AEC7D72E687770>

< E5FBBEABEF7C1DFBAD0B7F9BAB02C5FC1B6C1F7C7FCC5C25FB9D75FB5BFBAB05FBBE7BEF7C3BCBCF65FA1A4C1BEBBE7C0DABCF62E786C73>

77

( 단위 : 가수, %) 응답수,,-,,-,,-,,-,, 만원이상 무응답 평균 ( 만원 ) 자녀상태 < 유 자 녀 > 미 취 학 초 등 학 생 중 학 생 고 등 학 생 대 학 생 대 학 원 생 군 복 무 직 장 인 무 직 < 무 자 녀 >,,.,.,.,.,.,.,.,.

쌍백합23호3

#遺€?됱궗?뚮뱾168?

성인지통계

0000³»ÁöÀμâ

141018_m

1 [2]2018개방실험-학생2기[ 고2]-8월18일 ( 오전 )-MBL활용화학실험 수일고등학교 윤 상 2 [2]2018개방실험-학생2기[ 고2]-8월18일 ( 오전 )-MBL활용화학실험 구성고등학교 류 우 3 [2]2018개방실험-학생2기[

<B1DDC0B6B1E2B0FCB0FAC0CEC5CDB3DDB0B3C0CEC1A4BAB82E687770>

º»ÀÛ¾÷-1

단양군지

µ¿¼�Çѹ溴¿øb60Ü¿ïÈ£š

2015년9월도서관웹용

해피메이커 표지.indd

<34BFF9C8A320B4DCB8E9B0EDC7D8BBF32E706466>

1111

03-교통이야기

(012~031)223교과(교)2-1

±³À°È°µ¿Áö

1. 경영대학


~11

발간등록번호 제정 2010 년 6 월 개정 2012 년 9 월 국립환경과학원 National Institute of Environmental Research

춤추는시민을기록하다_최종본 웹용

2±Ç3Æí-1~4Àå_À°±³


한국사 문제1급

Transcription:

Ⅰ. 지정문화재 1. 광주서오층석탑 ( 光州西五層石塔 ) 지정번호 : 보물제109호 소유자 : 국유 소재지 규 재 시 : 남구구동 16-2 모 : 높이 7m 료 : 화강석 대 : 고려시대 지정일 : 1963 년 1월 21일 이탑이있는광주공원은원래성거산( 聖居山 ) 또는성구강( 聖龜崗 ) 이라불렸다. 산의모양이거북처럼 생겼으므로상서로운동물이광주를떠나지못하도록등에는성거사( 聖居寺 ) 를세우고, 목위치에는오 층석탑을세웠다고하는데지금의광주공원북서쪽에있는탑이다. 탑의상륜부는모두없어졌으나전체적인상태는매우양호한데, 통일신라시대의이중기단( 二重基壇 ) 양식에서고려시대의단층기단양식으로변화된모습을보여준다. 또지붕석의추녀와몸체석( 塔身石 ) 의 알맞은비례, 상층으로올라가면서줄어드는각층의비율이크지않아전체적으로높게보이면서도튼튼 한안정미와더불어수려함이넘치는고려시대탑으로서는뛰어난수작이다. 탑의특징은초층몸체석( 塔身石 ) 이 2단의別石을이룬것과 5 개의돌을맞추고있는점이다. 이런양 식은고려시대이전에는볼수없었던것으로고려시대때흔히나타나는이형( 異形 ) 탑의한양상이다. 또한지붕밑의층급은고려탑의定形인 4 단이며각귀모서리는위로반전의곡선을이루었다. 또한 1961 년에해체보수하였는데, 이때 2 층몸체석윗쪽에서금동전각형사리구( 金銅殿閣形舍利具 ) 가발견되 어현재국립광주박물관에보관되어있다. 탑의보존상태는기단부의앞쪽받침기둥이파손되었고기단갑석의앞쪽왼편모서리가떨어진채 있었다. 그리고초층지붕석앞면이조금파손되어있었으며삼층몸체석에금이가고층급받침이파손 되어복원때그절반을만들었다. 2. 고싸움놀이 지정번호 : 중요무형문화재제33호 기능보유자 :

전소승소지 : 남구칠석동 560 보유기능 : 고제작 지소정소일 : 1970 년 7월 22 일 漆石洞 ( 옻돌마을) 에서해마다음력정월 10일경부터 2월초하루에걸쳐연희되오는놀이로써정월보름에 절정을이룬다. 고싸움의좥고좦라는말은좥옷고름좦, 좥고맺음좦, 좥고풀이좦들의예에서보듯이노끈의 한가닥을길게늘여둥그런모양으로맺은것을지칭한것이다. 따라서고싸움이란놀이의이름은놀이기구인 좥고좦가서로맞붙어싸움을벌인다는데서연유된것으로생각된다. 좥고싸움좦의유래에관해서는전하는 기록이없고전국각지에서내려오는 俗說에의하면땅의거센기운을누르기위하여많은사람이동원되어땅 을밟는놀이를꾸민것으로생각된다. 특히羅州南平지방에서는 1950 년대까지도활발하게행하여졌으며또 長興, 康津, 靈巖 지방에서줄다리기의앞놀이로서고싸움이행해졌던것을볼때줄다리기놀이와연관된것 으로보기도한다. 줄다리기와좥고싸움좦은놀이의시기가같고, 上村인東部는남자를상징하고, 下村인西部 는여자를상징하며, 여자가이겨야풍년이든다는고풍적믿음이같다. 그러나고싸움은지휘자가좥고좦위에 서지휘하고세가지노래가불려지며 20 여일간격렬하게계속되는데비해, 줄다리기는불려지는노래도없고 3-4 일동안만하고끝나는것이다르다. 고싸움놀이의구성은上村인우대미와下村인아랫대미가너비 2m 이상의골목길을경계선으로나뉜다. 한편( 便 ) 의구성은줄을타고싸우는우두머리인좥줄패장좦, 고를메는 좥몰꾼좦, 고의몸과꼬리를잡는꼬리줄잡이이며, 들러리응원단으로농악대, 깃발잡이, 횃불잡이등이다. 승부는상대방의좥고좦를어떤방법으로든지땅에닿게함으로써결정이나는데이때농악과함께旗手 와횃불이동원되어온마을사람들이참여한다. 만약승부가나지않을때는좥고좦를풀어줄을만들어 2월 초하룻날줄다리기로최후의결판을내기도한다. 고싸움은한국의민속놀이가운데가장격렬하고남성적인 놀이로서일사불란한통제력과협동심을필요로하는놀이다. 좥줄패장좦의지휘에따라좌우이동, 전진후퇴 를거듭하는, 統合心과協同心을북돋는중요한기능을갖고있다. 이고싸움은 1945 년을전후하여거의자취 를감추었다가뜻있는사람들에의하여재현되어 1969년 10월大邱에서열린제10회전국민속예술경연회에 서대통령상을받음으로써세상에널리알려지게되었고이를계기로 88서울올림픽때시연함으로써대단한 갈채와격찬을받기도했다. 이놀이를전승해가기위하여현재칠석마을앞에건평 96.3 평의傳授會館을건 립하고그보존에힘쓰고있다.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제9호 소유자 : 광주향교 소재지 : 남구구동 22 광주향교 규 시 모 : 일곽( 一廓 ) 대 : 조선시대 지정일 : 1985 년 2월 25일 3. 광주향교 ( 光州鄕校 )

龜洞광주공원과社洞사이에있다. 건축물의初創時期는분명치않으나, 조선태조 1 년(1392 년) 에각 도의 按察使에게교학의쇄신을명한것을계기로대부분의향교가세워졌던사실로미루어이무렵에 세워졌을것으로추측된다. 향교의본위치는壯元峰아래에있었으나虎患이심하여城안으로옮겼다. 그러나저습한데다좁고퇴락하여 1488 년에현위치로다시옮겨지었다. 당시의향교移建史蹟은成宗때의文臣成俔이자세히써서남겼는데役事가시작되자서민들이자 신들의일처럼서둘러부역하여수개월만에일을마쳤다고전하며, 특히縣監權守平이많은私財를희 사하여향교의논밭을사고經書들을마련하자이에감격한監司李叔, 都事鄭鐸도비용을내놓았다고 한다. 이때완성된건물이현재에이르고있다. 건물현황 1 大成殿 : 正面 3 칸, 側面 3 칸, 맞배지붕이며, 前面 1 칸은退間으로개방했다. 다듬은돌로높 게쌓은축대위에다시기단을돌리고막돌로초석을놓았다. 拱包는柱心包系의 初翼工樣式이다. 2 明倫堂 : 正面 8 칸, 側面 2칸맛배지붕의단층강당으로맨右側正面 1 칸, 側面 2칸은온돌 방으로꾸미고나머지는넓은대청으로구성하였다. 3 4 5 東 西 : 東와西는각각正面 2 칸, 側面 1칸半의맞배지붕건물로前面半間을退間으로개 방했다. 東 西齋 : 東齋는正面 3 칸, 西齋는正面 4칸이고側面은모두 1칸半씩의맞배지붕건물이 다. 東 西齋모두前面半칸은툇마루이며그안에온돌방을꾸몄다. 內三門 : 正面 3 칸, 側面 1 칸인맞배지붕의平大門이다. 막돌초석위에圓柱를세운三樑架 의二翼工양식이다. 6 外三門 : 正面 3 칸, 側面 1 칸의平大門이며다듬은圓形초석위에圓柱를세웠다. 7 文會齋 : 正面 3 칸, 側面 3 칸의팔작집. 화강암바른층쌓기의기단위에다듬은원형초석 을놓고그위에圓柱를세운五樑架의二翼工양식이다. 처마는겹처마, 천장은宗 樑위로만우물천장을마련하고나머지는연등천장으로꾸몄다. 8 養士齋 : ㄱ字形으로된팔작집으로樣式은初翼工式이다. 光州鄕校의祭享日은春秋 2회이며음력 2월上丁日과 8 월上丁日에집전한다. 4. 지산재 ( 芝山齋 )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제10호 소유자 : 경주최씨문중 소재지 : 남구양과동 715-1

규모 : 正面四間, 側面一間, 八作지붕 시 지정일 대 : 조선후기 : 1979 년 8월 3일 신라말의대학자孤雲崔致遠선생을配享하고있는祠宇이다. 1737 년( 英祖 13 년) 에이곳에影堂을세 우고孤雲선생의영정을봉안하다가 1846 년( 憲宗 12 년) 芝山祠를건립하였다. 그러나 1886년大院君의 書院撤廢때毁撤되었다가 1922 년다시현祠宇를건립, 오늘에이르고있다. 이곳에는芝山齋 ( 講堂 ) 와內外三門, 影堂등이있는데文化財로指定된것은芝山齋 1 棟이다. 이건물 은正面 4 칸, 側面 1 칸, 八作지붕인데中央 3칸은마루바닥이고兩退間은방을놓아흡사일반민가와 같은인상을준다. 芝山齋의扁額은顧堂金奎泰의글씨이며, 1985 년건물좌편공지에새로遺墟碑를세웠다. 當初配享된인물은崔致遠선생을주벽으로한崔雲漢, 崔亨漢, 鄭吾道등 4 位였으나, 1922年復設하 면서孤雲先生만配享하였다. 崔致遠 (857 ~?) : 신라말의대학자이며號는孤雲, 謚號는文昌侯이고경주沙梁部사람이라전한 다. 12 세때唐에유학, 17 세때과거에급제하여宣州漂水縣尉, 承務郞侍御史內供奉을역임하였다. 黃巢의亂때격문을써서이름이높았으며 884 년(27 세) 에귀국하였다. 時務 10余條를써올려阿이되 었으나亂世가되자전국을돌며풍월을읊다가해인사에서여생을마쳤다한다. 저서에四六集 1권과 桂苑筆耕 20 권이있었다하나전하지않는다. 崔雲漢 (1444~1499 년) : 號는苽庵, 本貫은慶州, 生員永源의長男이다. 畢齋金宗直의門下에서 世祖때生六臣의한사람인秋江南孝溫과함께修學한후成均館生員에뽑혔다. 그러나벼슬할생각을 버리고고향인良苽洞에서부모를봉양하다가아버지가돌아가심에 3 년을侍墓하여孝子에천거되었다. 崔亨漢 (1446~1504 년) : 字는卓卿, 號는永思亭이며本貫은慶州, 生員永源의아들로 1480 년( 成 宗 11 년) 진사가되고 1483년式年文科에乙科로급제典校暑의正字가되었으나다음해에병으로사 임했다. 이어 1498년재등용되어獻納掌令 靈巖郡守등을역임하였으나 1504년甲子士禍가일어나자궁 궐앞에서待罪하다 9 일만에굶어죽었다. 金馹孫, 成俔등과交誼가두터웠다. 鄭吾道 (1641~1732 년) : 字는一貫, 號는藥圃이며贈左承旨碩賢의아들이다. 尤庵宋時烈門下에 서性理學을배웠으나 1689 년己巳換局으로宋時烈, 金壽恒등이流配되고成渾, 李珥등이出黜됨을보 고향리에돌아와洞을창설하고鄕約을제정하는등鄕里의文化發展에힘썼다. 1710년學行에천거되 어僉知中府事에올랐고 1727 년通政大夫折衝將軍을제수받았다. 5. 제봉문집목판 ( 霽峰文集木版 )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제20호 소유자 : 장흥고씨문중 소재지 : 남구원산동 775 포충사 수량 : 481매 재 료 : 나무 시대 : 1617 년( 조선광해군 9) 지정일 : 1992 년 3월 16일 霽峰文集木版은그의막내아들高用厚가광해 9 년(1617) 에남원부사로자원해가서그해에남원지 역의부호들로부터판각에필요한재원을기부받아모두 481 판을제작하였다. 재질은박달나무로양면 판각인데크기는 3종류로서가로세로의길이가각각 27 16 cm, 33 18.5 cm, 33 21.6 cm이며대부분詩 集이다. 시집외正氣錄과遊瑞石錄, 霽下彙錄, 霽峰年譜, 褒忠祠誌가있다. 이목판은訥齋, 思庵, 高峰 木版과함께 17세기개인문집목판으로서목판인쇄의기술사적연구자료와더불어매우중요한가치를 지니는문화재이다. 현재木版은포충사입구右側正氣館에보관되어있다. 판각의제목을간략하게적 으면다음과같다. 1) 霽峰文集과續集및遺集 이문집은제봉이전장으로떠날때다시돌아오지못하리라생각하고어린막내아들고용후에게자 신의 詩文集을잘간직해달라는말을하였다. 고용후는어지러운전란의피난길에서도이문집만은꼭 지니고다녔다가나라가평정된후남원부사로왔으므로부친의문집을간행하여세상에전하였다. 문집 은 1권 1책으로되어있으나곧속집이 1권 1책이요遺集이 1권 1 책이며, 본문집에는백사이항복과 西 坰柳根선생, 명나라禮部主客莊應會의서문이실려있다. 2) 瑞石錄 제봉의나이 42 세되던해( 선조 7 년. 1574) 4월 20 일광주목사葛川林薰의초청으로지금의무등산 인서석산에오른登山紀行文이다. 3) 正氣錄 임진란때에순절한충렬공제봉고경명과장남孝烈公峯從厚, 차남毅烈公鶴峯因厚三父子의 忠孝精神과節義精神, 그리고그사실을기록한것이다. 4) 霽下彙錄 제봉의 7 대손臨淵齋時民이제봉의년보를편찬하면서국사책과野史, 先賢文集을보고高氏一門에 관계되는여러사실과文籍을가려내어편집하고약간의序, 跋, 사액치제문, 사제문, 시장, 제문, 만사, 행장, 유사, 묘갈등을보태어成冊한것이다. 5) 霽峰年譜

이연보는제봉의 7 대손臨淵齋時民이편찬한것으로권두에世系錄이있고다음에一門三綱圖와三 叔姪擧義圖가있다. 이삼강도와거의도에의하면忠奴 2명을합쳐서高氏一門에 9명의순절자가있는 셈이며, 그후의거에참여한분이 3 명이나되었다. 연보는編年체로서제봉이태어난중종 28년부터임진년 7월 10일순절할때까지의편년기록과그 후에이어返葬기록, 不기록, 旌閭기록, 賜祭기록이있고효렬공, 의렬공의순절과딸인盧氏부인과질 녀安氏부인의순절기록이있고, 또포충사건사기록, 신도비, 제봉문집, 정기록, 서석록의편찬간행 기록과연보및제하휘록의편찬간행기록등 6) 褒忠祠誌 1963 년까지의일들이기록되어있다. 광주제봉산기슭에있는賜額祠堂으로제봉과그의두아들효렬공, 의렬공그리고月坡柳彭老와淸 溪安瑛을봉안한곳이다. 이포충사지는포충사가세워진경위와창건목적, 세운분들의이름이수록되 어있고그후포충사에관한모든문헌과운용사항이기록되어있으며, 역대院長과霽任들의명단, 부 속건물에관한記文, 上樑文, 奉安文이수록되어있다. 상하 2권 1 책으로하권말에附錄, 補遺가붙어 있고원본은 1959 년기해본으로漢籍沿活字本이다. 6. 포충사소장고경명문적 ( 褒忠祠所藏高敬命文籍 )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제21호 소유자 : 장흥고씨문중 소재지 : 남구원산동 775 포충사 수량 : 4종 9점 시대 : 조선시대 (1558~1688 년) 지정일 : 1994 년 7월 21일 褒忠祠에는霽峰高敬命과그의아들그리고포충사와관련된文籍 9 점이소장되어있다. 霽峰高敬命 (1533~1592 년) 은朝鮮宣祖때義兵將으로, 子는而順號는霽峰또는笞軒, 謚號는忠烈 公이다. 1558년문과에壯元하여成均館典籍으로관직에들어가 17 곳의내외직을두루거치고, 59세에 동래부사를사임하고고향에돌아와있을때바로이듬해壬辰倭亂이일어나의병을모집하여錦山에서 싸우다전사하였다. 文章과글씨가남달리뛰어났으며저서로는霽峰集이있다. 1601 년나라에서祠宇를세우고褒忠祠라賜額하고당시포충사와관련된祭位沓永納明文과守直奴 永納明文이내리니포충사관리에소중한자료이다. 또, 立案文書는忠孝之家에대한국가의禮遇가어 떠했는지알수있는자료이며, 敎旨역시그功績을認定追贈하는제도를알수있는것들이다. 제봉 의親筆遺墨은제봉선생의精神이스며있는귀중한자료인데文籍目錄은다음과같다.

文籍解題 1) 明文 제봉의 부인과 아들이 포충사의 관리를 위해 논 12斗落과 奴婢를 寄贈한 것은 나라에서 포 충사를 세우고 春秋로 祭亨을 올리도록 하며 賜額까지 내려주시니 子孫된자의 感謝한 마음으로 田畓과 奴婢를 永納한 내용으로 그 例가 드문 일이다. 2) 立案文 田畓, 奴婢의 賣買 때 官廳으로부터 인가받는 증명서이나 여기에는 매매인정서가 아니고 復戶立案文으로 國家가 戶에 부과하는 役負擔을 減免하거나 免除해 주던 제도로 行蹟이 뛰어난 忠臣, 孝 子, 烈女 등에 혜택을 주는 復戶로 5結을 復戶한 내용인데 全羅道觀察使가 確認한 立案文이다. 3) 敎旨 모두 4장으로 제봉의 것이 2매 그 아들의 것이 각 1매인데, 그 내용은 고경명이 嘉靖 37년 (1558)에 文科及第한 紅牌敎旨와 崇德 8년(1643)에 忠烈公 謚號를 내린 贈謚敎旨가 있고, 崇禎 2년 (1629)에 高因厚에게 議政府領議政을 贈職한 것과 高從厚에게 康熙 27년(1688)에 吏曹判書를 贈職한 敎旨들이다. 4) 遺墨 제봉의 手草檄文과 世篤忠貞의 揮毫가 전한다. 世篤忠貞은 年代를 알 수 없이 액자로 보존되 고 있으며 手草檄文은 後孫에 의해 作帖한 것인데 앞부분에 手草檄文이 있고 다음에 아들 高用厚의 親 筆(1630년)을 위시하여 申翊聖의 親筆(1641년)과 文谷 金壽恒의 親筆(1678년), 澹雲 曺命敎의 親筆 (1740년), 그리고 曺顯命의 親筆(1744년)등 6인의 筆蹟이 15장으로 作帖되어 있다. 이는 正氣錄을 만들 때 받은 序跋들이다. 7. 기대승 종가소장 문적 (奇大升 宗家所藏 文籍)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22호 소 유 자 : 기성근 소 재 지 : 남구 월산동 978-8 수 량 : 7종 18점 시 대 : 조선시대 (1559~1880년) 지 정 일 : 1994년 7월 21일 高峰 奇大升 宗孫家 所藏 古文書와 典籍은 高峰先生의 親筆書簡과 退溪先生의 친필서간이 같이 합쳐 진 往復書와 高峰家係의 分財記인 和會文記類등 7鍾 18點이 所藏되어 있다. 高峰 奇大升(1527~1572년)은 조선 선조 때의 性理學者로 1558년(명종13)에 문과에 급제, 承文院, 副 正字 벼슬을 시작으로 大司諫에 이르렀으나, 그만두고 귀향도중 병을 얻어 全北古阜에서 운명하였다. 고봉선생은 이퇴계와 四端七情을 論한 往復書簡을 8년간 계속하였을 뿐 아니라 이 과정에서 퇴계는

고봉의 이론을 자주 수용했다고 하며, 퇴계문하에 뛰어난 제자들이 많았으나 道學을 이을자는 오직 奇高 峰을 첫째로 꼽았다. 奇大升 宗孫家 所藏 文籍의 내용과 목록은 다음과 같다. 1) 分財記 3點 財産相續文書로 자녀들에게 재산을 상속해준 내용을 기록한 것. 帖裝으로 되었으며 和會文記 2점, 別 給文記 1점이다. 2) 典籍 3券으로 1572년(선조5)에 高峰이 筆寫한 좥陶山記좦와 陶山記에 대한 화운 18首와 함께 跋文(1570 년)을 지어 帖으로 된 高峰의 親筆遺墨이다. 3) 明文 田畓, 家屋, 奴婢등의 賣買文書로 모두 6件이다. 4) 試券 文武 雜科등 大 小諸科 의 試紙인데 모두 3점이다. 5) 上疏文 上言은 國王에게 올리는 文書로 上疏의 一種이나 樣式에 있어서 조금 차이가 있다. 이 上言은 司諫院 司諫인 奇彦觀이 75세의 나이로 관직 사양을 청하는 내용이다. 6) 戶口單子 戶口單子는 戶主가 각 戶口狀況을 作成하여 官廳에 提出하는 文書로 오늘날의 戶籍申告書이다. 記載되는 內容은 戶主의 이름, 나이, 본관, 호주와 처의 四祖(父祖 曾祖外祖 ), 소유한 노비다. 奇氏宗家의 호구단자 는 고봉선생의 4代孫인 震說의 것이다. 7) 關門 關門은 동등한 官府 相互間 또는 上部官廳에서 下部官廳에 발급하는 公文으로 奇氏宗家의 것은 忠勳 府에서 全羅道兵馬節道使에게 高峰의 墓所山直守護人에게 雜役을 免除하도록 하는 내용의 문서이다. 8. 오웬기념각 (OWEN 紀念閣)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26호 소 유 자 : 학교법인 광주기독병원교육재단 소 재 지 : 남구 양림동 67-1

시 대 : 1914년(추정) 지 정 일 : 1998년 5월 7일 오웬기념각은 배유지 목사와 함께 전남최초의 선교사로 광주에서 활동하다 순교한 오웬과 그의 할아 버지를 기념하기 위하여 지은 양옥 건물이다. 오웬은 생전에 할아버지의 기념각을 지을 계획이었으나 추 진하기 전에 순교하였다. 그가 죽은 뒤 미국의 친지들이 성금을 모아 보내와 그와 할아버지의 기념각을 지었다. 이 때문에 대리석 현판에는 IN MEMORY OF WILLAM L. AND CLEMENT C. OWEN. 吳基 冕及其祖聿廉之紀念閣 이라 쓰여 있다. 이 건물은 회색벽돌을 네델란드식으로 쌓아 벽을 만들고, 내부에 나무기둥을 세워 목제 지붕틀을 받쳤 다. 평면형태는 정방형이지만 내부구조가 모서리에 위치한 설교단을 중심으로 좌우가 대칭이고, 설교단 의 반대편은 2층으로 되어있다. 바닥은 설교단을 향하여 약간 경사져 있다. 건물이 예배나 집회의 장소 로 사용하기에 적합하도록 설계되어 교회로 사용된 적도 있으며 다양한 집회를 하였다. 특히 이곳은 개화기 광주 신문화의 발상지라고 할만큼 크고 작은 문화행사가 이곳에서 베풀어졌으며, 이 곳을 통하여 이 고장의 문화운동이 파급되어 갔다. 기독교와 관련된 모든 집회는 물론 강연회 음악회 영 화 연극 무용학교나 유치원의 학예회 졸업식 등을 이곳에서 함으로써 오웬기념각은 지역의 공회당 기능을 겸한 문화의 전당이라고 할 수 있었다. 9. 진다리붓 지정번호 : 무형문화재 제4호 보 유 자 : 안종선(1911년생) 전 승 지 : 남구 백운동 623-37 보유기능 : 붓제작 지 정 일 : 1985년 2월 25일 광주의 특산물 가운데 으뜸가는 것이 진다리붓이다. 진다리는 백운동의 옛 지명으로 진다리의 동쪽을 난지실이라고 불렀다. 진다리붓은 안씨의 조부가 이곳에 정착하여 붓을 만들면서부터 유명해졌다고 전해 진다. 현재의 기능보유자인 안종선은 원래 보성군 문덕면에서 살던 안재환의 손자인데 안재환은 어려서부터 붓을 잘 만들었으나 문중에서 공장(工匠)에 종사하는 것을 반대하여 말리므로 21세 때 만주로 떠나가서 붓 만들기를 계속하였다. 안재환의 아들 규상(圭相)도 父業을 이어받았으며, 1930년 무렵 안재환이 진다 리로 정착하자 붓 이름을 좥진다리 붓좦이라 하고 현재 4대 째 이곳에서 붓을 만들면서 진다리가 붓의 고장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안재환쭻규상쭻종선쭻명환 일가의 붓만들기 기술에 대한 의견을 보면 다음과 같다. 붓의 생명인 털은 첨(尖), 재(齋), 원(圓), 건(健)의 네가지 덕을 갖추어야 하는데, 이는 끝이 뾰족하고, 가지런해야 하며, 또한 털의 모듬은 원형을 이루고, 힘이 있어 한 획을 긋고 난 뒤에 붓털이 힘있게 다 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족제비 꼬리털인 황모(黃毛)와 청모(靑毛), 장모(獐毛)를 많 이 쓰는데, 안종선은 족제비 꼬리털과 양털을 주로 사용한다고 한다. 대(竹)는 시누대, 마디대, 오죽(烏竹)을 쓰며, 겨울에 대를 베어 황토흙과 쌀겨를 섞어 물을 탄 뒤 짚으 로 여러번 문질러 햇볕에 2~3개월 말려 한 토막씩 자른 다음 건조한 곳에 저장해 두고 쓴다. 진다리 붓이 이름나게 되자 진다리에서 붓 만드는 이가 늘어났으나 안종선을 능가하는 사람은 없다. 안종선은 전국관광민예품전에서 십여차례 수상하였다. 10. 남도판소리 동편제 지정번호 : 무형문화재 제9호 보 유 자 : 박화순(1930년생) 전 승 지 : 남구 월산동 1015-8 보유기능 : 수궁가 지 정 일 : 1993년 3월 20일 동편제(東便制)라는 말은 전라도 동북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창법으로 송흥록(宋興錄)을 시조로 하고 있다. 동편제를 전수한 박화순(朴花順)은 임방울(林芳蔚)의 바디를 충실히 전수한 직계 수제자로 천부적 인 방울목으로 임방울의 성량 창법을 지니고 있다. 또한 발림과 연기력이 풍부하여 판소리의 연희적 구 성 요소인 창자(唱者), 고수(鼓手), 청중(聽衆) 모두에게 공감과 감흥력을 주는 매력적인 창법을 지니고 있다. 그는 1930년 광산구 소촌동에서 출생하여 13세 때 광산군 극락면의 이명식 문하에서 소리와 장고춤 을 배움으로써 국악계에 입문하였다. 14세 때 이명식의 소개로 광주 남동의 권번(券番)에 들어가 박동실 (朴東實)에게 춘향가, 흥보가, 수궁가를 배웠으며, 17세 때부터는 임방울에게 수궁가, 적벽가, 춘향가 등 임방울 바디체를 배우면서 국극단에서 활동하였다. 이 때 목포 극장에서 춘향역을 끝내고 내려오자 임방 울이 화선(花仙)이라는 예명을 지어 주었다. 30세 때부터 박초월(朴初月), 박봉술(朴奉述), 공대일, 박동진(朴東鎭) 등에게서 수궁가, 춘향가, 흥보가 등의 판소리를 배웠으며, 50세 때 최난수의 권유로 임방울 판소리제를 본격 재수업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국악발전과 후진양성을 위하여 1991년부터 화선국악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1992년에는 수궁가 완창발표회를 가져 그의 예술세계를 확연히 보여 주었다. 그는 50여 년 동안 한 길만 걸어온 노력파로

발림과 연기력이 매우 풍부한 정통 국악인으로 판소리의 예술성을 잘 지키고 있다. 11. 포충사 (褒忠詞) 지정번호 : 기념물 제7호 소 유 자 : 장흥고씨 문중 소 재 지 : 남구 원산동 775 규 모 : 1동 시 대 : 1603년(조선 선조 36) 지 정 일 : 1974년 1월 22일 포충사는 임진왜란 당시 호남 지방에서 최초로 義兵 7천명을 모집하여 錦山 戰鬪에서 장렬히 순절한 高敬 命, 高從厚, 高因厚 三父子와 柳彭老, 安瑛 등 五位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賜額 祠堂으로 大院君의 書院撤廢 때에도 長成의 筆岩書院과 함께 훼철되지 않았던 전남지방 二大書院 중 하나이다. 壬亂이 끝나고 政局이 안정된 1601년 湖南 儒生들은 忠節人物을 모실 祠宇 건립을 청하고 光州 제봉산 아 래 사당을 건립했으며 이어 1603년에 朴之孝와 후손들이 賜額을 청하여 좥褒忠좦이란 額號를 받았다. 祠宇 內 主壁에 高敬命을 祭享하고 東配位에 高從厚柳彭老, 西配位에 高因厚安暎 을 配享했다. 配享 人物의 行跡은 다음과 같다. ① 高敬命(1533 1592) : 字는 而順, 號는 霽峰 또는 苔軒이며, 본관은 장흥으로 富提學 孟英의 아들이다. 1552년(明宗 7년)에 進士試, 1558년에 文科에 壯元하여 成均館典籍이 된 후로 戶曹佐郞, 世子侍講院司書, 司 諫院正言, 刑曹佐郞을 역임했다. 한 때 벼슬을 떠났다가 다시 靈巖郡守, 承文院判校, 東萊府使를 역임한 후 1591년 벼슬을 떠나 고향에 쉬던 중 임란을 만나 예순의 高齡을 무릅쓰고 義兵 7천여명을 모아 先祖의 行宮 이 있던 평안도로 달려갔으나, 가는 도중에 錦山에서 마주친 倭軍과 싸우다 戰死했다. 후에 議政府左贊成에 追 贈되었으며 諡號는 忠烈이다. 錦山星谷書院, 從容祠, 淳昌花山書院에도 配享되었다. 著書에 좥霽峰集좦, 좥遊瑞 石錄좦이 있다. ② 高從厚(1554 1593) : 字는 道仲, 號는 峰이고 高敬命의 長男으로 1570년(선조 3년) 進士가 되고, 1577년 別試文科에 內科로 급제 臨陂縣令, 知製敎를 역임했다. 壬亂 때 錦山戰鬪에 참가했으나 아버지와 아우를 잃은 뒤 다시 義兵을 일으켜 왜적에게 대항했으며, 1595 년 진주성이 위태롭게 되자, 金千鎰, 崔慶會들과 함께 진주성 지키기에 전력을 다하였으나 성은 함락되었고, 의분을 못이긴 고종후는 김천일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장렬한 최후를 하였다. 후에 吏曹判書에 追贈되었고 諡號는 孝烈이다. 褒忠詞와 晋州 장렬사에 祭享되었다. ③ 高因厚(1561 1592) : 字는 善健, 號는 鶴峰이며 高敬命의 둘째 아들이다. 1577년 進士가 되고 1589년 增廣內科에 兵科로 급제하고 成均館學諭를 지냈다. 임란 때 부형과 함께 금산 전투에서 순절했다. 후에 禮曹參議에 追贈되었고, 仁祖 때 領議政에 加贈되었으며, 諡號는 義列이다. 포충사와 錦山 從容祠에 配享

되었다. ④ 柳彭老(1554 1592) : 字는 君壽, 號는 月坡, 本貫은 文化이며 柳景顔의 아들이다. 1588년(宣祖21) 式年 文科에 乙科로 급제, 弘文正字, 成均館學諭를 지내다가 고향인 谷城 玉果에 내려와 있던 중 壬辰倭亂을 겪게 되었다.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梁大, 安瑛 등과 함께 義兵을 일으켜서 潭陽에서 高敬命軍과 합치고 從事官이 되었 다. 錦山 전투에서 전사했다. 후에 司諫에 추증되었다. 玉果의 詠歸書院, 錦山의 從容祠에도 祭享되었다. ⑤ 安瑛(? 1592) : 字는 元瑞, 本貫은 順興이며 校理 處順의 증손자이다.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서울에 있는 어머니를 모시러 상경하다가 高敬命의 義兵軍에 가담하여 여러 전투에서 전공을 세우고 錦山 전투에서 高敬命을 보좌하여 싸우다 전사했다. 후에 掌樂院僉正에 추증되었다. 남원의 忠 愍祠에도 祭享되어 있다. 한편 褒忠祠에는 忠奴 鳳伊貴仁之碑 가 옛 사우 入口 홍살문 옆의 자연석에 새겨져 있어 이채롭다. 이들은 高敬命의 家奴로서 義兵에 참가했는데, 錦山 전투에서 高敬命과 高因厚 부자가 전사하자 시신을 거두어 정성 껏 장사지냈고, 이듬해에 다시 從厚를 따라 晋州城 전투에 참가하여 倭賊과 싸우다가 순절한 충의의 인물들이 다. 이 밖에 高敬命장군의 유품인 親筆 馬上檄文, 木板(493枚)들이 보존되고 있고, 新祠宇 건립 때 正氣館에 마 련된 記錄畵 3점이 있는데 倡義擧兵圖 (吳承潤그림), 錦山救國血戰圖 (吳承雨그림), 救國出兵圖 (梁寅 鈺 그림)등이다. 12. 칠석동 은행나무 지정번호 : 기념물 제10호 소 유 자 : 광산구청 소 재 지 : 남구 칠석동 120 규 모 : 1그루 시 대 : 조선시대 중기 지 정 일 : 1979년 8월 3일 칠석동 옻돌마을 앞에 있는 당산나무로 높이는 약 26m가량이며, 지상 7m 내외에서 가지가 갈라지고 있다. 主幹의 둘레가 6.47m, 가지를 포함한 전체둘레는 13.3m이다. 수관(樹冠)의 너비는 동서 길이 30m, 남북 너비 26m이며, 수령은 약 800여년으로 추정된다. 현재 나무 주위에는 돌을 쌓아 이웃 논과 경계를 주고 있다. 은행나무는 우리 나라의 환경 풍토에서 가장 장수하는 나무로 알려져 있어 관리를 잘 하면 앞으로도 수백년은 계속 생존할 수 있다. 이 나무는 마을 사람들이 서낭나무로 존숭(尊崇)하여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 밤이면 당산제를 지내고

있는데, 제가 끝나면 16일부터는 상 하촌(上下村 )으로 나뉘어 고싸움 놀이가 시작된다. 이 때 고가 먼저 이 나무 둘레를 돌아야 한다. 고싸움 놀이는 중요무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어 전승 보존되고 있다. 이 마을은 全州李氏와 光山金氏의 동족 마을로 죽령산(竹領山) 아래의 평야지대에 터를 잡고 있는데, 풍수지리상 와우(臥牛)형국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소가 매우 사납기 때문에 고삐를 매어두기 위 하여 은행나무를 심었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조선 초의 문신 김문발(金文發 1359~1418)이 심었다고도 한다. 13. 고씨 삼강문 (高氏三綱門) 지정번호 : 기념물 제12호 소 유 자 : 장흥고씨 문중 소 재 지 : 남구 압촌동 산 14 규 모 : 일곽(一廊) 시 대 : 조선시대 지 정 일 : 1985년 2월 25일 고씨삼강문은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 전투에서 순국한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선생을 비롯한 그 일가의 충절 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1忠, 3孝, 2烈, 1節義로 7명이 표창되어 있다. 1충은 고경명, 3효는 그의 장남 종후(從厚), 차남 인후(因厚), 손자 부금(傅金)이며, 2열은 그의 딸 노상룡(盧尙龍)의 처와 질부인 거후(居厚)의 처 광산정씨(光山鄭氏)이고 1절은 그의 동생 경형(敬兄)이다. 이들은 1595년에 고경명과 경형, 종후, 인후가 정려되었으며, 1597년에는 노상룡의 처 고씨가 정려되었고, 1655년 부금이 정려되었으며, 1844년에 거후의 처 광산정씨가 포함되었다. 충렬공(忠烈公) 고경명(1533~1592년)은 압촌동에서 대사간(大司諫) 맹영(孟英)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호는 제봉(霽峰), 본관은 장흥(長興)이다. 명종 13년(155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 임명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591년 동래부사(東萊府使)를 끝으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선생은 이듬해 임진왜 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금산에서 왜병과 싸우다 차남 의열공(毅烈公) 인후와 함께 전사하였다. 효열 공(孝烈公) 종후는 1554년 태어났으며, 1577년 문과에 급제하여 임피현령(臨陂縣令)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와 함께 금산 전투에 참가하였으나 아버지와 동생을 잃었다. 이듬해 다시 의병을 일으켜 스스 로 復讐義兵將이라 부르고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 양산숙(梁山璹) 등과 함께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였 으나 성이 무너지자 이들 의병장들과 함께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 열녀는 그의 딸 영광 유생 노상룡의 처와 그의 질부인 고거후의 처 광산정씨로 이들은 정유재란 때 왜군에 게 붙잡히자 자결하여 절개를 지켰다. 그 외에 효자로 그의 손자인 선교랑(宣敎郞) 부금과 절의(節義)로 죽은 동생 경형 등 일가 7명이 모셔져 있다. 현존 건물은 1844년에 세운 것으로 사방에 홍살문을 설치하여 내부를 차단하고 앞뒤 2열로 정려현판(旌閭縣板)을 걸었다. 정면 4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지붕은 부연(附緣)이

없는 홑처마로 처리했다. 건물 밖에는 담장을 돌리고 외삼문(外三門)을 세웠으며 삼강문 옆에는 고씨 문중의 제각인 추원각(追遠閣)이 있다. 14. 우일선 선교사 사택 지정번호 : 기념물 제15호 소 유 자 : 재단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전남노회 유지재단 소 재 지 : 남구 양림동 226-25 수 량 : 1동 시 대 : 1920년대 지 정 일 : 1989년 3월 20일 양림산 기슭에 동향으로 세워진 2층의 회색 벽돌건물이다. 건물의 평면은 정사각형으로 1층은 거실, 가족실, 다용도실, 부엌, 욕실이 있고, 2층은 사생활 공간으로 침실을 두었다. 지하층은 창고와 보일러실 이 있다. 현관이 동향(東向)인 점은 한국의 전통적 방위관(方位觀)을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된다. 건물의 크기는 정면 10.6m, 측면 10.6m이다. 이 건물은 미국인 선교사 우일선(Wilson)에 의해 1920년대에 지어졌다고 전해올 뿐 정확한 건립 년대 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광주에 남아 있는 양식(洋式)주택으로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구조를 보면 벽은 두께 55mm의 회색 벽돌을 가지고 네델란드식으로 쌓았으며, 내부는 회반죽으로 마 감을 하고 고막이부분은 화강석을 쌓아 처리하였다. 개구부(開口部)는 모두 반원의 아치형으로 만들었고 창대부분은 벽돌 마구리 세워 쌓기를 하였다. 창문은 외부는 열개창, 내부는 오르내리창의 이중창(二重 窓)으로 구성하였다. 1층과 2층을 구별하기 위하여 벽돌로 돌림띠를 두어 외벽에 변화를 주었다. 정면 현관의 기둥은 2B 두께(40여 )로 쌓아가다가 2층 바닥부분에서 4켜 내쌓기로 주두를 만들어 단조로움 을 없앴다. 15. 양림동 호랑가시나무 지정번호 : 기념물 제17호 소 유 자 : 재단법인 미국남장로교 한국선교회 유지재단 소 재 지 : 남구 양림동 226-25 수 량 : 1그루

수 령 : 410년 시 대 : 조선시대 지 정 일 : 1989년 3월 20일 광주 사직공원이 있는 양림산 남쪽 기슭의 기독교 장로교 선교부 후원에 있다. 호랑가시나무는 전남 남해안과 제주 서해안에 주로 자생하고 있는 상록활엽소교목(常綠闊葉小喬木)이다. 변산반도(邊山半島)가 북쪽 한계선이며 중국에도 분포하나 특히 전남의 나무라고 할 수 있다. 잎은 두꺼운 가죽질이고 광택이 있으며 잎가에 가시 모양의 톱니 다섯개가 있다. 꽃은 여름철에 흰빛 으로 잎 겨드랑이에 모여서 피며, 가을에 핵과(核果)가 붉게 익는데, 겨울철에 눈 속에서도 붉은 빛을 띠 어 관상수로서 적격이다. 이 나무는 높이가 6m 정도이며 나무의 근원을 이루는 부분의 둘레가 1.15m로 이 수종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큰 나무이다. 수관(樹冠)의 너비는 남북 7m, 동서 5m이며, 가슴 높이에서 두갈래로 갈라져 있다. 나무의 아래부분은 도로가 옆에 있어 잘라진 곳이 많으나 윗부분은 공모양을 이루어 건강한 편이 다. 나무가 있는 이 곳은 1899년 미국 남장로교의 선교사 배유지(裵裕祉), 오원(吳元) 두사람이 목포에서 광주로 이주하여 전도를 시작하였던 본거지이다. 이들은 1907년에 수피아여학교와 숭일학교(崇一學校) 를 설립하였으며, 1911년에는 제중병원(濟衆病院:지금의 기독교병원)을 세워 선교 활동을 넓혀 갔다. 이 런 이유로 이 일대의 구릉지는 대부분 장로교의 소유지가 되었다. 따라서 이곳은 원래의 양림산 나무들 이 자라고 있는데, 이 나무도 원래 이 일대에서 야생으로 자란 것을 관상용으로 보호해 왔으며, 주변에 는 아직도 어린 나무들이 자생하고 있다. 16. 괘고정수 (掛鼓亭樹) 지정번호 : 기념물 제24호 소 유 자 : 광산이씨 종중 소 재 지 : 남구 원산동 579-1 규 모 : 1그루 시 대 : 조선시대 지 정 일 : 1998년 5월 7일 남구 원산동 만산마을 입구에 있는 왕버들로 높이가 약 15m 가량이며, 가슴높이의 직경은 약 1.7m 정도이다. 수관(樹冠)의 너비는 13m 내외로 수령은 약 600년 정도로 추정된다.

이 나무는 필문 이선제(畢門 李先齊 ; 1389 1454)가 심었으며 이 나무가 죽으면 가문도 쇄락해지리 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이후 이선재의 후손들은 과거에 등제하게 되면 이 나무에 북을 걸어놓고 축하 연을 열었기 때문에 괘고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1589년 이선재의 5대손 이발(李潑)이 기축옥 사(己丑獄事)로 일컬어지는 정여립모반사건(鄭汝立謀叛事件)에 연루되어 본인은 물론 가족들까지 죽임을 당하자 나무가 말라죽기 시작하였다. 그후 이발의 억울함은 밝혀지게 되었고, 죽은지 300여년이 흐른 뒤 에 다시 잎을 피워 살아났다는 전설이 있다. 선조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이 나무를 광산이씨문중에서 각 별한 관심을 가지고 관리하고 있다. 17. 이장우 가옥 (李章雨 家屋) 지정번호 : 민속자료 제1호 소 유 자 : 학교법인 해인학원 소 재 지 : 남구 양림동 128 수 량 : 1동 규 모 : 안채, 정면 6칸, ㄱ자형 팔작지붕 시 대 : 1899년 지 정 일 : 1989년 3월 20일 비낀 동서축으로 대문간, 곳간채, 행랑채, 사랑채, 안채로 배치된 상류양식의 기와집이다. 안채의 상량 문에 光武 三年乙亥二月十日乙丑時로 기록되어 있어 1899년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안채가 문화 재로 지정되었다. 축조 당시의 소유자는 정병호이며 1965년 이장우가 사들였다. 안채의 평면 형태는 ㄱ자형으로 되어 있어 정면은 6칸으로 좌우에 마루(退)가 있으며, 우측면은 4칸과 뒷마루, 좌측면은 1칸과 앞뒷마루가 있다. 구조는 왼쪽부터 1퇴(退)마루, 1칸 작은 방, 3칸 대청, 2칸 큰 방, 1칸 1퇴의 부엌, 그리고 ㄱ자로 꺽인 2칸의 작은 방으로 되어 있다. 안채의 면적은 36평 정도로 규 모가 크다. 가구(架構)는 2고주(高柱) 5량(樑)의 팔작(八作) 기와지붕이다. 세벌대의 다듬돌 기단 위에 원형 주초 석을 놓고 원형기둥과 사각기둥을 세웠다. 보아지(樑奉)와 우미량(牛尾樑) 퇴보에 도리를 결합하였다. 처 마는 겹처마 지붕이며, 합각(合閣)의 중앙부에는 채광창(採光窓)이 있다. 대청은 연등천정에 가로지른 대 들보 위에 마루보(宗樑) 없이 원형 판자공으로 종도리(宗道里)를 받치게 하였다. 온돌 방문은 2분합 겹문으로 안은 미닫이, 밖은 여닫이문을 설치하였으며, 대청의 문은 4분합 들어열 개문으로 되어 있다. 여닫이문을 고정시키기 위해 중방에 문잡이 거북장식물을 두었으며 들어열개문을 고정하기 위해서 참새 모양의 장식물을 장혀(長舌)에 두고 있다.

18. 최승효 가옥 (崔昇孝 家屋) 지정번호 : 민속자료 제2호 소 유 자 : 최승효 소 재 지 : 남구 양림동 166-19 수 량 : 1동 규 모 : 안채, 정면 8칸, 측면 4칸, 팔작지붕 시 대 : 1920년 지 정 일 : 1989년 3월 20일 양림산(楊林山) 동남쪽 끝부분에 있는 이 집은 원래 독립 운동가 최상현(崔相鉉)의 집이다. 800평의 부지 위에 동향으로 지었으며 정면 8칸, 측면 4칸의 매우 큰 규모의 전통가옥이다. 일자형 평면의 팔작(八作) 지붕이면서도 우측의 경사진 부지를 자연 그대로 이용하여 1퇴(退) 공간의 반지하층을 구성하여 율동감을 주었다. 좌측으로도 1퇴를 개방, 공간으로 주어 비대칭의 평면과 입면을 형성하여 단조롭지 않게 하였다. 서향인 뒤쪽은 너비 60cm의 마루를 두르고 미닫이 창문을 만들어 서쪽의 빛을 일단 차단시키고 있으 며, 미닫이 창문 때문에 방이 어두워지는 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벽면 윗부분에 띠판창을 두었다. 연등천 장인 대청을 제외하고는 다락을 두었는데, 이곳에 독립 운동가들을 피신시켰다고 한다. 다락 외부 벽에 는 완공을 두어 다락안의 채광을 돕고 있다. 기단은 우측의 반지하부분을 제외하고는 1m 정도 높인 뒤 2단 원형 주초석을 써서 모양을 살렸다. 작은 언덕과 암벽에서 흘러내리는 석간수(石澗水)를 끌어다가 지당(池塘)을 만들어 건물의 운치를 한결 돋보이게 하고 있다. 1920년대의 가옥으로 한말 전통가옥의 이행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건축사적 의의가 큰 집이다. 19. 필문이선제 부조묘 (蓽門李先齊 不祧廟) 지정번호 : 소유자: 소재지: 수 량: 규 모: 시 대: 지정일: 민속자료 제7호 광산이씨문중 남구 원산동 만산마을 535-1 1동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 조선시대 (1843년 중수) 1990년 11월 15일 이는 조선초의 문신인 필문 이선제(1389 1454년)의 신위(神位)를 모신 사당이다. 나라에 공훈을 세 운 것을 기리어 신주를 영원히 모시도록 하는 부조지전(不之典)으로 건립한 사당이 부조묘이다. 부조묘

는 포충사 뒷쪽 산기슭에 있으나 원래의 위치에서 50여m 왼쪽으로 옮겨온 것이다. 필문은 광주 대촌(大村) 출신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세자빈객(世子賓客),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등을 역임하였고, 문종(文宗)때는 정인지(鄭麟趾) 등과 高麗史 편찬에 참여 하였다.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에 돌아와서는 후진 양성은 물론 이 고장에 향약(鄕約)을 베풀어 미풍양속(美風良俗)을 이루는데 모 범이 되었다. 이곳 이외에도 강진의 수암서원 오현당(秀巖書院五賢堂)과 죽산사(竹山祠)에 배향되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앞마루를 둔 맞배집이다. 앞마루는 반폭칸으로 개방하였으며, 툇마루를 놓았다. 공포(包)는 쇠서 하나를 내어 가운데에 연꽃무늬를 둔 초익공(初翼工)으로 위부분에 용머리 장식 을 하였고 마루의 대들보 쪽에는 구름무늬로 처리하였다. 가구(架構)는 고주(高柱) 5량형(樑形)으로 되어 있으며, 도리(道理)는 장혀(長舌)를 받친 굴도리를 걸쳤다. 그리고 마루 기둥의 주심도리(柱心道理) 외기 둥 위는 납도리를 사용하였고, 주심도리 장혀와 창방 사이에는 소로(小累)를 둔 원반(圓盤)을 하나씩 놓 았다. 막돌초석 위에 정면만 민흘림 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사각기둥을 세웠다. 마루밑은 호박돌 위에 동바 리 기둥으로 처리하여 바람이 잘 통하도록 밑벽막이 없이 개방하였다. 문은 쌍여닫이 문으로 띠살문이 며, 겹처마이다. 고설삼문(高設三門)과 양측의 맞담 위에 기와를 얹어 담을 돌렸으며, 뒷쪽은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다. 부조묘의 뒷산 언덕에 필문의 묘(墓)와 묘비(墓碑)가 있으며, 이곳에서 500여m 떨어진 도로변에 그의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마을 앞에는 필문이 심은 괘고정(掛鼓亭)이라 불리는 수령(樹齡) 600여년의 노거 수(老巨樹)가 있어 유서 깊은 이곳의 유래를 상상하게 한다. 20. 고원희 가옥 (高元熙 家屋) 지정번호 : 소유자: 소재지: 수 량: 시 대: 지정일: 문화재자료 제8호 고원희 남구 압촌동 101-1 일원 1917년 1987년 6월 1일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 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옛 집터를 그 후손들이 여러차례 고쳐 지은 집이다. 현존 가옥은 1917년 소유자 고원희(高元熙)의 부 종석(琮錫)이 건축한 것으로 옛집은 무너져 없어졌다. 예전에는 더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대문과 사랑채, 안채, 곳간채, 사당, 등이 남아 있다. 대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와 곳간채가 나란히 있으며,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안채, 안채 오른쪽에 사당이 있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앞뒤로 마루가 있는 팔작지붕이다. 다듬돌 바른층 쌓기의 두벌대 기단 위에 덤벙주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우미량과 굴도리, 장혀를 보아지와 함께 결합하였

다. 평면은 좌로부터 1칸의 방 3개와 1칸의 대청을 1단 높혀 누(樓)마루로 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에 전후좌우에 마루가 있는 팔작지붕이다. 다듬돌 바른층 쌓기의 외벌대 기단 위에 덤벙주초석을 놓고 앞열은 원형, 그 외는 사각기둥을 세웠다. 원형기둥 위에는 우미량과 굴도리, 장혀 를 보아지와 함께 결합하였다. 내부가구(架構)는 고주(高柱) 위에 큰대들보를 걸치고 판대공을 놓았으며, 그 뒤에 종도리를 놓았다. 평면은 좌로부터 1칸반의 부엌과 겹집형태로된 방, 2칸의 대청, 1칸의 방으로 되어있 다. 창호는 전체가 양쪽으로 열어지는 2분합문이며, 방은 겹문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넉살창(窓)이 있다. 숭정기원후 오갑정사 윤이월초 구일(崇禎紀元後五甲丁巳閏二月初九日)이라는 상량문(上樑文)이 있어 1917년 에 건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당은 고경명장군과 그 아들 종후(從厚), 인후(因厚)형제의 부조묘(不廟)이다. 이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 칸으로 앞에만 마루가 있으며 맞배지붕이다. 외벌대의 낮은 기단 위에 덤벙주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 다. 기둥 위는 첨차형의 포(包)로 결합하였고, 초익공(初翼工) 위에는 용두(龍頭)를 빼내고 장혀와 굴도리를 얹었다. 내부가구는 큰대들보 위에 동자주를 얹고 종보를 걸친 뒤 그 위에 다시 판대공을 놓고 종도리를 얹 었다. 문은 양쪽으로 열리며 우물마루를 깔았다. 겹처마에 조잡한 모루 단청(丹靑)을 하고 있다. 건립시기는 안채보다 더 빠르다. 21. 양과동정 (良苽洞亭)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12호 소 유 자 : 양과동 마을 소 재 지 : 남구 양과동 166-1 규 모 : 정면 3칸, 측면 2칸, 맛배지붕 시 대 : 조선시대 지 정 일 : 1990년 11월 15일 이 정자는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마을 동산에 있으며, 다른 이름은 간원대(諫院臺) 또는 고경명 (高敬命)의 별서(別墅)라고도 한다. 간원대는 이곳 출신들이 간관(諫官)으로 많이 배출되어 여기에서 국 사를 의논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은 동약(洞約)과 향약(鄕約) 등의 시행처로도 사용 되었다. 삼한 또는 신라시대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하나 여러차례의 중수가 있었고, 뚜렷한 자료가 없어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다. 정자의 제액(題額)은 우암 송시열(尤庵宋時烈 1607 1689)이 쓴 것이다. 정자 내에는 동정입의서(洞亭立議序)와 중수기(重修記), 고경명의 제양과모정(題良苽茅亭), 박광옥(朴光 玉)의 차유곡모정운(次柳谷茅亭韻), 제간원대(題諫院臺), 향약 등과 관계된 현판이 걸려 있다. 관련된 문 서는 1648 1889년에 작성된 동계좌목(東契座目) 2권과 상소문 5매가 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바람 막는 판이 설치되어 있다. 기단은 바른층 막 돌쌓기를 하고 덤벙주초를 놓고서 원형기둥을 세웠다. 사방은 벽이 없이 개방된 공간이며 우물마루를 깔 았다. 천장은 연목(椽木)의 연골이 그대로 들어난 연등천장으로 하였으며, 홑처마이다. 또한 목재의 모양 이나 기둥 상부에 S 자형의 헛첨차만을 이룬 단순한 형태는 공포(包)완성 바로 직전의 형태로, 이 정자가 오래된 구조물임을 알 수 있다. 기와의 문양은 숫막새는 날개를 펴고 있는 백조 문양이며, 암막새는 거북선 모양이다. 22. 부용정 (芙蓉亭)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13호 소 유 자 : 광산김씨 문중 소 재 지 : 남구 칠석동 129 규 모 : 정면 3칸, 측면 3칸, 맛배지붕 시 대 : 조선시대 지 정 일 : 1990년 11월 15일 부용정은 고려말 조선초에 활동한 金文發(1359 1418년)이 지은 정자로 평야가 펼쳐져 있는 평지에 2단으로 대지를 고른 후 건립되었다. 정자의 이름은 蓮을 꽃 중의 君子라고 칭송하였던 北宋 주돈이(周 敦 )의 애련설(愛蓮說)에 담긴 뜻을 취하여 지었다. 김문발은 본관은 광산, 호가 부용으로 고려말 조선초에 왜적을 물리친 공이 매우 크며 전라감사(全羅 監司),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형조참판(刑曹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1418년(태종 18년) 낙향하여 여씨(呂氏)의 남전향약(藍田鄕約)과 주자(朱子)의 백록동규약(白鹿洞規約)을 모방하여 풍속 교화에 힘썼 는데, 이것이 광주 향약좌목(鄕約座目)의 유래가 되었다. 따라서 이 정자는 광주지역 향약의 시행 장소로 매우 유서가 깊은 곳이다. 또한 그는 이곳에서 이시원(李始元), 노자정(盧自亭)등과 학문을 논하고 시를 읊기도 하였다. 건물은 정 측면 다같이 3칸으로 기둥머리에 공포가 없는 민도리집이다. 우물마루를 깐 맞배지붕으로 민흘림기둥을 세웠으며 홑처마이다. 기단은 네모 막돌 바른층 쌓기를 하였으며, 좌우 가운데를 제외하고 는 자연석 덤벙주초를 놓았다. 사방은 벽이 없이 개방된 공간이며, 천장은 연등천장을 하였고 연골벽은 회반죽으로 마감하였다. 이곳에는 부용정 현판과 양응정(梁應鼎), 고경명(高敬命), 이안눌(李安訥), 박제형(朴濟珩) 등 후대 명유 (名儒)들의 누정제영(樓亭題詠)을 새긴 편액이 많이 걸려 있다. 정자 주변에는 칠석(漆石)마을 고싸움놀

이(중요무형문화재 제35호) 전수관과 부용이 심었다는 은행나무(기념물 제10호)가 있고, 부용정의 내력 이 쓰인 부용정석비(芙蓉亭石碑 1984년 건립)가 있다. 23. 임암동, 원산동 선사주거지 및 석곽묘 (林岩洞, 院山洞 先史住居址 및 石槨墓)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18호 소 유 자 : 김용안 외 10명 소 재 지 : 남구 임암동 산 64, 원산동 산 1 수 량 : 일원 시 대 : 선사시대, 삼국시대 지 정 일 : 1992년 10월 22일 이들 유적은 돌머리라 불리는 표고 20~30m의 낮은 구릉지대에 분포하고 있으며, 구릉정상부를 경계 로 마을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지역이다. 이 일대는 영산강 지류인 대촌천(大村川)의 상류에 해당하는 곳 으로 취락지 형성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1977년 전남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임암동 주거지(집자리)는 일부 유실되었으나, 원형에 가까운 타원형으로 지름 4.3m, 면적 14.86 이 다. 내부구조는 북벽 가까이에 감실(龕室)이 있으며, 중앙과 남북에 각 2개의 기둥이 있는데 남북 기둥 구멍은 대칭이다. 주거지 남쪽에는 33~80 너비의 입구가 있으며, 중앙에는 갈돌이 놓여있다. 중앙 기 둥 구멍과 북벽 사이에 타원형의 화덕자리(爐址)가 있는데, 이곳을 중심으로 무문토기가 집중 분포되어 있다. 출토유물은 기둥 구멍을 중심으로 서북쪽에 갈돌, 화덕, 대석(臺石) 등이 있어 중심부에 부엌이 있 었던 것 같고, 동남쪽에는 숫돌과 석재편 등이 있어 도구 제작처로 추정된다. 기둥 구멍으로 보아 원형 의 직립벽에 원추형 지붕을 씌운 형태로 생각된다. 원산동 주거지의 형태는 모가 죽은 장방형으로 동쪽부분이 산사태로 대부분 유실되어 남아 있는 크기 는 남북 1.9m, 동서 2.3m이다. 기둥 구멍은 벽을 따라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지붕의 형태는 우진각으 로 추정된다. 주거지 내부에는 유물이 없으며 주변에서 많은 석재편이 출토되었다. 석관묘는 원산동 주거지 부근에서 석실과 일부 천정석을 갖춘 채 확인되었다. 동서 장축의 무덤방(石 室)은 동서 길이 1.8m, 남북 너비 75~80, 깊이 70 로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형태이다. 무덤방의 동 벽은 1매의 길고 큰 돌로 축조하였고 남북벽은 깬돌을 쌓아 구성하였다. 무덤방 바닥은 자연암반을 깍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2~3매의 천정석을 덮었다. 유물은 철촉과 관못, 관장식이 있으며, 관못의 위치로 보아 나무관은 길이 150, 너비 70 로 추정된다. 무덤방 구조로 보아 삼국시대 수혈식(竪穴式)석실분 으로 보인다. 24. 양과동계 고문서 (良苽洞契 古文書)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19호 소 유 자 : 양과동계 소 재 지 : 남구 이장동 993-3 수 량 : 일괄 재 료 : 종이 시 대 : 1729~1908년 지 정 일 : 1992년 10월 22일 양과동계는 1451년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본받아 실시된 광주향약의 영향을 받아 홍치년간(弘治年間 1488~1505년)에 이루어진 동약이다. 특히 광주향약을 발의한 이선제(李先齊 1389~1454년)가 이 마을 출신이며, 초기의 좌목(座目)에 기축옥사(己丑獄死)에 연루되어 화를 당했던 이발(李潑 1544~1589년:이 선재의 5대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선제와 연관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동약이 중수된 것은 임진왜란 후인 1604년으로 중수에 관여한 유사경(柳思敬)은 동적입의서(洞籍立議 序)에서 홍치년간의 동약이 100여년간 잘 운영되다가 중간에 약간 해이해졌으며, 임진왜란을 지나면서 그 필요성이 커져 중수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중수 이후 기본적인 틀을 잃지 않고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1604년에 작성된 중수조목(重修條目)을 살펴보면,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을 원용하였기 때문에 다른 지역 동약들과 대개 비슷하며, 벌칙과 세부 시행규칙인 별규(別規)에서 개성을 살필 수 있 다. 양과동 동약은 모두 4권의 좌목이 있는데, 이것은 동계원의 명단을 기록한 것으로 중요한 마을사 자 료가 되고 있다. 이 좌목은 옛날 것을 일괄 정리하여 동계에 가입한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어 각 시기의 동계원 구성자료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초창기의 성씨 구성원이 현재와 매우 다름을 알 수 있 는데, 이것은 마을에 보관된 문과안(文科案)과 사마안(司馬案)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동계의 조목 중 이 의 실시를 30리로 한정한 내용이 있는데, 이는 동계의 범위를 한정한 것으로 여러 마을을 하나의 공동 체로 간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1786년 동각(洞閣)을 중수하면서 작성한 물자수합록(物資收合錄)에 서도 일부 확인되고 있다. 동답기(洞畓記)와 완의(完議)는 동약의 물적기반인 사회경제적 내용을 기록하 고 있는데, 동장(洞長)과 공사원(工事員), 유사(有司) 등의 동약 조직과 소속 전답을 적고 있다. 동약이 별도의 부세와 관련된 경제력까지 간여하고 있어 상부상조의 기능을 넘어 보다 큰 기능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 동향약(洞鄕約)과 양과정중수기, 경오인일운(庚午人日韻), 양과정현판시문, 수조안(收租案), 상 서문(上書文) 등이 있다.

Ⅱ. 문화유적 1. 진월동 원제마을 고인돌 (6기) 1) 위 치 : 남구 진월동 원제마을 2) 시 대 : 선사시대 3) 소 유 자 : 4) 관련문헌 : 무등산 1988. 광주직할시, 향토문화개발협의회. 효덕동에서 지원동간 세멘트포장도로를 따라 2 쯤가면 우측 저수지 주변 논 가운데 6기의 고인돌이 밀집해 있다. 이 가운데 1기는 나머지 5기와 북서로 30m 떨어져 있다. 여기에 있는 고인돌은 개석 상부 에는 고인돌 원석을 채석시 이용한 채흔이 비교적 선명하게 잔존해 있어 당시의 채석기술상의 문제점 을 해결할 수 있는 자료이다. 이들 채석의 특징은 자연석리현상의 이용과 금속을 이용한점 전문기술인의 존재 등을 알 수 있으며 청동기단계부터 이미 계층의 분화등 사회적으로 보다 복잡한 계층구성이 형성 되었음을 알수 있다. < 원제부락 고인돌 현황 > 상석크기( ) 번호 장축방향 길이 폭 두께 1 250 190 120 2 100 118 40 3 80 70 4 150 5 6 남북 개석형태 지석유무 비고 원형 무 채흔2 열 타원형 채흔5 개 40 부정형 150 50 원형 160 160 70 190 70 45 장타원형 2. 노대동 고인돌 (10기) 1) 위 치 : 남구 노대동 노대마을 2) 시 대 : 선사시대 3) 소 유 자 : 함안윤씨 문중 4) 관련문헌 : 무등산 1988. 광주직할시, 향토문화개발협의회 채흔4 개

구암마을에서 동쪽으로 400미터 거리에는 입석1기와 더불어 야산구릉지대에 1902년에 세워진 만오정 이 있고, 그 주변에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군집되어 있다. ①호는 만오정 건물 정면에 있고 측면에 모두 잇대어져 있다. 이 가운데 ⑧호는 개석의 형태가 사각형의 길다란 형태로서 개석이 가장 크고 ⑩호는 현 재 하부가 노출되어 있고 주변에서는 흑도편, 홍도편이 수습되었다. 특히 ⑦⑩호는 개석이 언덕받이에 위치해 있었으나 현재는 언덕에서 미끄러져 석실자체가 드러나 있는 상태이다. 전체적으로 노대부락에 있는 고인돌은 개석이 조잡스럽고 하부도 소략화 되어있는 것들이 많다. < 노대동 고인돌 분포현황 > 번호 상석크기( ) 길이 폭 두께 장축방향 개석형태 지석유무 비 고 주변토기편채집 1 250 130 70 북동 -남서 원형 무 2 190 140 100 남 -북 3 195 100 100 북동 -남서 장방형 4 170 100 60 남 북 유 5 210 130 70 무 6 180 126 60 장타원형 7 180 90 60 동 서 8 270 150 70 남 북 9 210 120 75 잡석 10 215 80 70 북동 -남서 유 3. 행암동 구암마을 고인돌군 (9기) 1) 위 치 : 남구 행암동 구암마을 2) 시 대 : 선사시대 3) 소 유 자 : 4) 관련문헌 : 무등산 1988. 광주직할시, 향토문화개발협의회 광주에서 남평간 도로를 따라 시내버스 15번 버스종점 함안윤씨 제각앞에 고인돌 9기가 남북2열로 분 포되어 있다. ①②호가 지면상 같은 수평면에 배치되어 있고 나머지는 구릉경사지에 배치되어 있다. ①호는 개석이 가장 두껍고 하부는 잡석을 채웠다. ②호는 석실차제는 지면보다 20-25 정도 높여 석 실자체가 외부에서 보이도록 되어 있다. ④⑤호는 개석이 지면과 맞닿아 하부를 알수 없고 ⑤호의 개석

상에는 40 길이로 채흔이 조식되어 있으며 ⑥호에는 保 字란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⑦⑧⑨호는 지 석대신 하부에 잡석으로 채워놓고 있으며 석질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화강암을 이용하여 축조 하였다. < 효덕동 고인돌 분포 현황 > 번호 상석크기( ) 장축방향 개석형태 지석유무 180 남서- 북동 장방형 2개 200 100 잡석대체 180 140 50 남북 무 4 340 220 75 장타원형 5 190 110 80 채흔 6 160 160 60 원형 ( 保) 자음각 7 240 230 90 3개 8 240 167 90 장타원형 무 9 370 150 100 하부잡석 길이 폭 두께 1 250 210 2 300 3 비 고 지석크기30 20 4. 송하동 입하마을 고인돌 (2기) 1) 위 치 : 서구 송하동 입하마을 2) 시 대 : 선사시대 3) 소 유 자 : 4) 관련문헌 : 신 송하동 입하마을 고인돌은 송암공단내의 30번 시내버스 종점에서 풍암동 운리마을로 넘어가는 고개길 도로 우측 구릉지대에 있다. 주변에는 10-15년생 소나무와 민묘가 있으며 민가도 몇 가구 있다. 이 고 인돌의 확인은 일제시대부터 확인되었으나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주변이 개발되어 소멸될 위기에 놓여 있다. ①호의 규모는 장축 170, 폭 70, 높이 60 의 장방형이며 석재는 화강암이다. 장축방향은 북서남동의 방향을 취하고 있으며 남동쪽 하부가 노출되어 있고 지석은 볼수 없는 개석식 고인돌이다. ②호는 ①호와 남북으로 210 거리에 있으며 장축 160, 폭 100, 높이 60 로서 개석이 완전지 면에 밀착되어 ①호보다 개석이 얇다. 주변에는 채석에 용이한 암반은 볼수 없고 압촌동의 고인돌과 유 사한 내륙지방에서 흔히 볼수 있는 고인돌이다. 이곳의 고인돌과 서창 풍암리의 고인돌군과 인접되어 이일대의. 선주취락집단의 존재를 알수 있는 중 요한 자료라 할수 있다.

5. 압촌동 압촌마을 고인돌(1) 1) 위 치 : 남구 압촌동 압촌마을 2) 시 대 : 선사시대 3) 소 유 자 : 장흥고씨문중 4) 관련문헌 : 신 압촌동 압촌마을 고인돌은 마을뒷편 장흥고씨문중산의 송학산 구릉 경사면 고위운묘 앞에 남북으로 1 열을 이루면서 18기가 군집되어 있으며 ①-⑧호와 ⑨-18호까지는 동북으로 약450여미터 간격을 이루면 서 분포한다. ①호 고인돌은 종래 하부가 땅에 묻혀 있었으나 근래에 주변을 파고 지석을 노출시킨 흔적 이 보이며 하부석실은 도굴되어 있다. 이 고인돌의 특징을 보면 개석의 배치방향은 북서-남동을 취하고 있으며 형태는 장타원형이다. 하부구조는 노출되어 주변에는 개석을 받친 지석이 9개로서 북서쪽에 3개 북동쪽에 3개 남쪽에 2개이 고 나머지 1개는 개석과 격리되어 있다. 대표적인 지석의 크기는 64 60 80, 140 50 40 이다. 석실자체의 특징은 도굴되어 가운데가 순수한 생토만 있을뿐 유구는 확인할 수 없을 만큼 도굴이 심 하며 대체적으로 크기는 410 150 로서 장법상 신전장의 형태였음을 알수 있다. 전체적인 크기는 길 이 680, 폭 390, 높이 120, 두께 100 이다. 6. 압촌동 압촌마을 고인돌(2) 1) 위 치 : 남구 압촌동 압촌마을 2) 시 대 : 선사시대 3) 소 유 자 : 장흥고씨문중 4) 관련문헌 : 전남고고학 지명표. 1974 이 고인돌은 ①호와 남쪽으로 40m 가량 떨어져 있으나 배치된 지형은 통일 등고선상에 있다. 15m 북 쪽위에는 장흥고씨 고휘경의 묘가 있다. 고인돌의 형태는 판상의 장방형이고 화강암제이다. 하부에는 3 개의 지석이 동시에 받쳐있고 최근에 도굴된 흔적이 보이며 잡석이 다수 깔려있다. 규모는 260 180 80 의 크기이다.

< 압촌동 압촌마을 고인돌 분포현상 > 번호 상석크기( ) 장축방향 개석형태 120 북서 -남동 장타원형 9개 180 80 " 장 방 형 3개 180 120 75 " 반 원 형 2개 4 300 170 130 동- 서 원 형 5 160 70 60 " 반 파 무 " 6 300 300 160 " 원 형 3 개하부 갑석 " 7 200 160 120 " 장방형 8 개석 파괴 9 150 100 60 남 -북 장타원형 무 10 150 100 30 " 부 정 형 " 지면밀착 11 240 180 120 " " " " 12 150 130 90 " 원 형 " " 13 140 110 70 " 반 파 " " 14 170 140 70 " 장방형 " " 15 190 120 80 " " 2 개 (서쪽) " 16 260 150 110 북동 -북서 장타원형 1 개 (북쪽) " 17 210 180 60 " 원 형 무 하부유구노출 18 180 130 120 " 장방형 " 길이 폭 두께 1 680 390 2 260 3 지석우무 하부갑석 비 고 64 60 80 140 50 40 석실노출 " 1 개 (북쪽) 마을북쪽고개 경질토기편스습 " 7. 칠석동 칠석마을 고인돌(9기) 1) 위 치 : 남구 칠석동 칠석마을 2) 시 대 : 선사시대 3) 소 유 자 : 문흥식(45) 4) 관련문헌 : 신 칠석동 칠석마을 고인돌은 모두 9기가 있다. 이. 가운데 6기는 이천서씨세장산 구릉지대에 있으며, 나 머지 3기는 문흥식(45)씨 집옆에 1기, 집뒷편 대나무숲에 2기 등 도합 9기가 있다. 전자의 6기는 30m

반경내에 남북 2열로 배치되어 있으며 대부분 뚜껑돌이 하부에 밀착된 소위 개석식 고인돌이다. 크기는 ①138 140 80, 장방형. ②200 100 140, ③120 11 35, 원형. ④190 140 80, 장방형. ⑤ 160 110 75, 장방형. ⑥190 160 75, 장방형이며 주변에는 대나무와 노송이 식목되어 있다. 문흥식씨 집안에 있는 고인돌 3기중 ①호는 장축이 남북방향으로서 하부는 지석이 있으나 후대에 넣 은듯하며 개석은 장타원형으로서 10톤이상의 무게로 추정된다. 크기는 남북장축 290, 동서 210, 높이 90, 두께 70 이다. ②호는 ①호와 북으로 17m 거리에 있으며 크기는 210 110 70, ③호는 127 110 80 이다. 한편 구소동 농막 부락 뒤편 삼거리에도 고인돌 1기가 있으며 크기는 동서장축 230, 남북 150, 두께 150 이며 장타원형으로 지석은 없다. 8. 석정동 원석정마을 고인돌 ( 5기 ) 1) 위 치 : 남구 석정동 원석정마을 2) 시 대 : 선사시대 3) 소 유 자 : 낙안오씨문중 4) 관련문헌 : 신 석정동 석정마을 고인돌은 석정마을 뒤편에 위치해 있으며 부락뒷편 구능지대에 해당된다. 현재 이곳 은 낙안오씨문중 밭과 언덕받이로서 5년전 이 마을앞에도 7기가 있었으나 경지정리로 개석만모아 현재 마을 앞에 쌓아놓았다. 고인돌의 전체적 배열형태는 북서-남동방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전남내륙에서 흔히 볼수 있는 무지 석식 고인돌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30m반경내에 있다. 한편 이 고인돌군 부근은 마을에서 청룡등이라하여 옛부터 말무덤이 있었으나 현재는 마멸되고 민묘 만 남아있다. 분포된 고인돌의 구체적 크기와 형태를 보면 다음과 같다. < 석정동 원석정 고인돌 분포 현상 >

상석크기( ) 장축방향 개석형태 개석유무 비 95 북서 -남동 원 형 사 방지석 유 파괴됨 110 95 타원형 하부지 석밀착 ②③ 호사이 에민 묘 140 110 85 부정형 4 150 120 65 타원형 5 210 110 90 장타원형 번호 길이 폭 1 140 130 2 160 3 두께 고 9. ① 호와 거리500 여 석정동 내동마을 고인돌 (2기) 1) 위 치 : 남구 석정동 내동마을 2) 시 대 : 선사시대 3) 소 유 자 : 김 관 4) 관련문헌 : 신 석정동 내동마을은 석정마을과 맞은편으로 바라다 보고 있으며 농경지를 사이에 두고 두마을은 구릉 지대에 위치해 있다. 내동 고인돌은 석정에서 내동과 정착촌으로 가는 도로변옆 대나무숲 옆에 위치해 있으며 민가와 이웃해 있기도 하다. 2기의 배치방향은 동서 1열로 배치되어 있으며 뚜껑돌의 장축방향은 2기 모두 남북장축을 이루고 있 다. 원석정부락 고인돌과는 0.5 쯤되며 일찍이 이 지역에 취락지가 형성되었음을 시사하는 좋은 자료라 하겠다. ①호의 크기는 남북장축 260, 동서단축 180, 높이 120 이며 장타원형으로서 지석은 보이지 않 는다. 하부는 고인돌이 가옥과 언덕사이에 위치하여 하부가 약간 헐려있다. ②호는 남북장축 190, 동서단축 150, 높이 110 크기의 타원형 개석이며 일부가 파괴되어 있다. 하부는 동쪽에 지석이 1개보이며 집안담장과 개석 남쪽이 맞물려 있다. 내동 고인돌의 개석은 석정보다 훨씬 두텁고 석재도 화강암제중에서도 석질이 다른 것들이다. 10. 석정동 정착촌 고인돌 1) 위 치 : 남구 석정동 정착촌 2) 시 대 : 선사시대 3) 소 유 자 : 광산김씨선산

4) 관련문헌 : 신 석정동 정착촌 고인돌은 송학산 남단의 구릉이 뻗어내린 지형으로서 대촌서창간 도로변 우측에 위치해 있다. 주변은 개답지와 광산김씨제각이 있으며 토질은 황갈색 토질로 원예작물에 적합하며 40년생 이상 의 송림이 우거져 있다. 고인돌은 남북1열로 길이 40m 정도의 반경내에 분포되어 있으며 전반적으로 개석이 두껍고 하부는 지하에 매몰된 것들로서 전남 내륙에서 보이는 전형적 개석식 형태를 하고 있다. 각 고인돌의 구체적 현 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정착촌 고인돌 분포 현상 > 상석크기( ) 번호 장축방향 개석형태 지석유무 80 동 -서 장방형 무 100 100 남 -북 장타원형 " 240 160 90 " " " 4 260 170 120 " " " 성혈2 개 5 100 50 20 " " " 파괴 150 140 50 " 삼각형 " 7 120 180 110 동 -서 장방형 " 8 150 120 90 " 장타원형 " 9 190 130 85 남북 " " 길이 폭 두께 1 100 140 2 150 3 6 비 고 남북1열배치 ①호와남북5 m 11. 도촌마을 입석(2기) 1) 위 치 : 남구 도천동 도천마을 2) 시 대 : 선사시대 3) 소 유 자 : 김재철 양동필 4) 관련문헌 : 신 도촌동 입석은 2기가 있으며 이 마을 김재철씨 논에 위치해 있다. 원래는 이 마을 앞 논에 있었으나

경지정리로 인해 현재처럼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세웠다. 입석의 분포현상을 보면 다음과 같다. 양동필씨 논에 있는 ①호는 높이 150 의 6단으로 된 화강석을 원형으로 쌓고 그 위에 입석을 세웠는 데 높이 110, 폭 50, 두께 39 로서 1976년 1월 25일에 단을 쌓고 다시 세웠다는 기록을 새겨 넣 었다. 김재철씨 논에 있는 ②호는 화강석을 8단으로 쌓고 그 위에 입석을 세웠으며 기단에 새끼줄을 감았다. 입석의 형상은 상협하관형이며 높이 110, 폭 76, 두께 30이다. 신앙은 정월대보름날 농악놀이와 짚신 밟기를 행하고 제를 지내며 동네의 무병장수와 풍요를 기원하 고 있다. 기단 상단에 새겨진 글을 보면 옛부터 전통으로 내려온 석비는 삼두창금기로 해석되어 1976. 1. 25 일 개축하였음 이란 글귀가 보이며 주변에서 백제시대로 보이는 경질의 토기편도 산견되고 있다. 12. 원산동 석관묘 1) 위 치 : 남구 원산동 원산마을 2) 시 대 : 삼국시대 3) 소 유 자 : 4) 관련문헌 : 광주 송암동 주거지, 충효동지석묘 전남대박물관. 1979. 원산동 석곽묘는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원산동 수혈주거지 근처에 고인돌이 있어 1979년 발굴한 결 과 그 개석하에서 동서장축의 석실을 가진 석관묘가 드러났다. 석실의 내부는 동서 1.8m 폭 80 상관 하래의 형태로서 길이는 70 정도이다. 석실의 동편은 폭 80, 높이 40 의 1매석으로 가로막고 북 남측벽은 길이 50, 폭 20 의 부정형 할석을 3단정도 쌓아 벽을 구성하였다. 발굴당시 석실내부에서 특별한 출토유물은 없었고 철촉과, 석실 주위를 돌아 가면서 철정만이 출토되 었으며 동쪽에 가까운 북쪽 벽에 관장식으로 생각되는 청동제 장신구가 2개 발견되었다. 석실에서는 후 대에 유입되어간 듯한 백제토기편이나 통일신라 후기의 인화문토기편이 수습되었다. 또한 석실내에서 발 견된 철정의 위치로 보아 목관의 길이는 폭 70, 길이 150 정도로서 피장자의 신장도 150 내외로 보이며 이와 유사한 형태는 백제고분형식에는 보이지 않고 가야지방에서 나타나는 연도없는 수혈식 석 실묘와 흡사하다고 보고하고 있다. 13. 이장동 와요지

1) 위 치 : 남구 이장동 227-1번지 2) 시 대 : 조선시대 3) 소 유 자 : 고재기 고영주 4) 관련문헌 : 신 와요지는 이장동 복수부락 마을회관 앞에 위치해 있으며, 이장동 227번지 고재기씨밭과 227-1의 고 영주씨밭에 해당된다. 이 지역은 원래 야산이었으나 근래 개간되어 밭으로 전용되었다. 그러나 고재기씨 밭에 해당되는 곳의 가마는 최근 겨울철 논에 황토흙을 채우기위해 이곳을 깎아버렸기 때문에 훼손되어 버렸고 현재 고영주씨밭에 해당되는 부분의 와요지가 대체로 잘 남아 있다. 와요지의 현상을 살펴 보면 방향은 북서-남동방향으로 총길이가 50여미터 정도이며 유존된 부분은 20여미터 정도이다. 경사도는 15-20 정도이며 자연구릉을 이용한 터널 형가마로 보인다. 가마의 폭은 100, 깊이 70, 벽두께 20 이며 훼손당시 숯덩이가 주로 출토되었다고하며 이가마에서 구워낸 기와 는 이장동 고가에 필요한 기와를 구웠음을 알수 있으며 1988년 오치동에서 발견된 와요지와 유사하다. 또한 이 부락뒷편 전나무밭에는 고인돌이 1기 있으며 남선연탄사장의 밭이다. 크기는 남북장축 180, 폭 140, 두께 90 의 장방형으로 되어 있다. 와요지가 있는 주변에서 백제토기편이 산견되기도 한다. 14. 원산동 와요지 1) 위 치 : 남구 원산동 원산마을 2) 시 대 : 조선후기 3) 소 유 자 : 이병석 4) 관련문헌 : 신 원산동 와요지 위치는 마을 뒤편 여재각 옆의 대나무숲 부근에 해당되며 주변에서는 유실수 재배와 함께 구릉지대의 경사지에 위치해 있다. 이 와요지는 10년전(89년 기준) 개간시 적은 구멍이 발견되었 으나 현재는 약 3.5m 정도가 유실되었다. 요지의 방향은 북서-동남향으로 터널형으로 되어 있으며 경사는 바닥(지면)에서 약 20 의 경사를 유 지하고 있다. 폭은 110, 높이 약 60, 표면두께 45, 불탄흙두께 14, 총길이 20m 정도이다. 불탄 흙의 토질은 석영과 고운모래가 섞여 마치 시멘트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형성되어 표토층과 외벽을 받 치고 있다. 요지의 형태는 지상식 터널형으로 정상부에는 굴뚝으로 보이는 움푹패인 곳이 엿보이며 내부

는 흙으로 덮여 있어 출토유물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이곳에서 2.3 떨어진 이장동에도 와요지가 지면에 노출되어 있으며 이곳일대의 고가에 필요한 기와를 충당하기 위한 요지로 추정된다 주변에는 토 기, 자기, 와편등이 다수 분포되어 있으며 황갈색 토질이 형성되어 있다. 1. 성거사지 오층석탑 1) 위 치 : 남구 구동 16-2번지 2) 시 대 : 고려초 3) 소 유 자 : 국유 4) 지 정 : 보물 109호 (1935. 5. 24) 5) 관련문헌 : 무등산 1988. 광주직할시, 향토문화개발협의회 이 석탑은 현재 광주공원내의 언덕 받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 약 8.5m의 화강암제 석탑으로 현재 보물 제10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은 성거사지로 전해 오고 있어 일명 성거사지 오층석탑이라 불리어 지고 있다. 이 석탑은 현재 기단부와 탑신부는 제대로 남아 있으나 상윤부는 결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기단부는 이중의 기단이 아닌 매우 높은 단층의 기단시설인데 넓게 구획된 지대석 위에 큼직한 이중의 받침이 있어 기단을 받치게 하였다. 기단면석의 탱주는 하나씩이며 갑석에는 부연이 있고 상면중앙에는 탑신을 받기 위하여 2단의 각형옥신괴임을 마련하였다. 초층옥신은 4매의 석재를 상, 하, 2단으로 결구 한 특이한 모습이며 매우 높다. 옥개석은 비교적 두텁고 처마가 넓은 편이며 층급받침의 수는 각층 4개 씩이며 낙수면의 전각은 직각에 가깝다. 상윤부는 결실되어 로반이외의 시설은 없다. 전체적으로 살펴보 면 기단의 형식이 전형양식에서 벗어나 있고 2층이상의 체감율이 적어 세장 고준화된 모습을 보아 조성 시기는 고려전기로 보인다. 1961년 헤체 복원시 2층옥신 상면에서 사리공이 발견되었고 그 안에서 동제 탑형사리구와 사경, 동경, 옥류 등이 수습되었다. 2. 옥천사 석등 1) 위 치 : 남구 진원돌 옥천사내 2) 시 대 : 한말 3) 소 유 자 : 옥천사 4) 관련문헌 : 新 옥천사석등은 대웅전경내에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평기와 8작지붕이며 창문은 정 자

창살로 되어 있고 출입문은 평기와 맞배지붕이다. 사찰입구에는 옥천사지장계공덕비 와 효녀정석남 실적비 가 있다. 석등을 보면 지대석은 6각이며 간주는 원주형으로 2매의 화강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사석은 없고 연화문비슷한 꽃잎무늬로 로반과 석등 중심부를 장식하고 있다. 크기는 높이 160 폭 45 이며 조선후기에서 한말의 시기에 해당되는 석등으로 보이며 전체적으로 치졸한 편이다. 1. 광주향교 대성전(大成殿) 1) 위 치 : 남구 구동 22번지 2) 시 대 : 1597 3) 소 유 자 : 광주향교 4)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9호, (1985. 2. 25) 5) 관련문헌 : 광주시사, 1985 광주향교는 현재 광주공원 옆에 위치해 있다. 원래는 태조7년 무인(1398)년에 무등산 장원봉 밑에 건 립하였으나 호환이 심하여 동문밖(현재동명동)으로 옮겨졌는데 여기서는 또 큰 수해를 입게되어 1488년 (성종9년)에 당시의 광주현감 권수평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건물은 소실되어 재 건하였는데 위패는 권일제가 호위하여 화를 면하게 되었으며 이후 직원1인 장의2인 색장1인의 교임을 두고 관리하다가 일제시에 직원1인 장의7인을 두었고, 8.15해방후 직원을 전교로 개칭하고 장의도 28인 으로 증원하였으며 유도회를 설치하고 유교발전과 윤강결식에 진력하고 있다. 현재의 건물구조는 정면 3간 측면 1간 단층의 한식기와로된 맛배지붕으로 되어있다. 기단은 화강석기 단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원형의 기둥을 세웠으며 기둥과 기둥사이에는 창방을 가구하고 주두위에는 익 공식의 포작을 보이고 있다. 창호는 2분합문으로 되어 있으며 처마는 겹처마이다. 내부는 연등천정이며 5량가이다. 2. 서강사(瑞岡祠)

1) 위 치 : 남구 방림동 82-1번지 2) 시 대 : 1574 3) 소 유 자 : 윤정복 4) 관련문헌 : 광주시사, (1985) 서강사는 방림동 현재 숭신공고 밑에 위치해 있으며 고려 태사공 윤신원(삼한공신)을 주벽으로 하고 개국백 문정공 윤관, 호조상서 문강공 윤언신, 남원백 벽송 윤위, 함안백 행촌 윤돈, 영평부원군 문현공 윤요 등 6위를 배향한다. 경내에는 강당인 경모제가 있으며 서강사묘정비가 세워져 있다. 건물은 3단의 화강석기단 위에 정평주초를 놓고 원주기둥을 세워 정면 3칸 측면 1칸의 골기와 8작지 붕으로 되어있다. 네귀에는 각3개씩 처마를 받치는 활주를 세웠으며 창방위의 주두에는 뺄목을 결구하고 평주와 평주사이에 1개의 변형소로를 끼워 장혀와 납도리를 가구하였다. 내부는 우물천정으로서 2고주 5량집이다. 창호는 좌우 편문으로되어 있고 중앙은 2분합겹문으로 교살창으로 장식하였다. 인방밑에는 머름을 두 고 상인방 위에도 머름을 설치하여 안상의 무늬를 넣었다. 처마는 평고대를 끼워 겹처마로 되어있고 2익 공식을 따르고 있다. 전면에는 단청이 비교적 잘되어 있고 대문은 평3문으로 되어 있으며 제일은 음력 3월 18일이다.. 3. 포충사(褒忠祠) 1) 위 치 : 남구 원산동 776 2) 시 대 : 1601 3) 소 유 자 : 광주직할시 4) 지정번호 : 기념물 7호, 1974. 5. 22 5) 관련문헌 : 광산군지, (1981) 포충사는 남구 원산동에 있는 사액사우로서 의병장 제봉 고경명을 주벽으로 임난때 같이 순절한 종후 차자 인후 부장 유팽노 안영 등을 배향하고 있다. 경내의 총면적은 1만오천평이며 1978년 정부의 성역 화 방침에 따라 오늘의 포충사 모습으로 탈바꿈 하였다. 정화사업시 구사당경내에 있던 충효당, 전사당, 고직사, 원직사등을 철거하고 구사당과 동서재를 보수 내외삼문을 개축하였다. 1979년 6월 조선중기 건 축양식에 따라 영당, 내삼문, 외삼문, 유물전시관, 관리사무소를 신축하였다. 영당은 31.8평 규모에 일출 목 이익공 겹처마에 정면 5칸 축면 2칸 단층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내삼문은 7.48평 규모로 굴도리 3량 초익공 홋처마이며, 유물전시관은 55.3평 규모에 외일출목 이익공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외삼문은

10.67평으로 굴도리 5량 초익공 홋처마 평삼문이며 34.1평 규모의 구사당은 조선중기 양식이다. 이곳에는 제봉의 친필로된 문집과 노비문서와 교지 등 서지학연구에 필요한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다. 4. 황산사(黃山祠) 1) 위 치 : 남구 원산동 만산마을 2) 시 대 : 1957 3) 소 유 자 : 장흥고씨문중 4) 관련문헌 : 광산군지, (1981) 황산사는 남구 원산동에 있으며 조선 중종때 절신 송설정 고중영, 청백리 고경조, 임난공신 고성후 삼 부자와 더불어 임난공신 청계 위덕의를 배향한 사우이다. 건물은 정면 3간 측면 1간의 골기와 맛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건립경위를 보면 1725(영조원년)에 유 림들이 고중영 고경조의 유풍을 추모하여 현재의 광주에 경열사를 창건하고 제사를 지내 왔는데 1868년 (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광복후 1957년 현소재지에 사우를 중건하여 황산사 라 칭했으며 1960년부터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고중영은 1540년(중종35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갔다가 모함으로 진도로 귀양갔으며 그아들 고경조는 155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61년 문과에 급제하여 경주목사에 이르렀다. 고성후는 경조의 자로서 1583년 전중어사를 지냈고 1592년 금마군수에 임명되어 권율의 휘하에서 진주싸움에 참 가 하였다. 이원 위덕의는 1573년 사마시에 합격 임진왜란시 주부를 제수하여 형조좌랑에 임명되었으며 진원현감을 거쳐 1613년(광해군 5년)에 타계 하였다. 5. 양파정(楊波亭) 1) 위 치 : 남구 사동 사직공원내 2) 시 대 : 1914년 3) 소 유 자 : 정씨문중 4) 관련문헌 : 호남문화연구 14집, (1985) 양파정은 광주광역시 사동 사직공원입구의 계단상의 높은 언덕위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 칸의 골기와 팔작지붕의 건물로 바닥은 인조대리석으로 단장되어 있다. 1914년 참봉 정낙교가 세웠으며

1932년 중건하였다. 운람 정풍현의 기 및 원운 30여개에 달하는 시문의 현판이 있다. 정낙교의 기에 의 하면 옛 석서정(石犀亭)의 유지가 이곳 이었음을 알려주는 귀중한 단서가 된다. 楊波亭記 余至愚極陋不足齒於人數而其志則不無放情事外優遊於林泉之想不幸早嬰風樹繼遭終鮮役役世物事不從心其亦戚 矣然而其志則未嘗一日不在山顚水涯亭樓榭之間草木之年遽爲五十有一則乃喟然歡曰如是乎因循不已則吾將老於世 故而止矣遂得古所謂石犀亭荒廢之地作亭於其上以爲遺落世事棲身終老之計自今以往可謂粗酬吾志矣蒔花種樹俯水 臨野日與朋舊飮酒哦詩自適其適追思往者滖泊於塵埃之中則寢驚夢愕未知此身如何過了此境界也凡爲子孫者追念吾 今日則吾將曰余有後也 甲寅四月下澣楊波散人 鄭洛敎 記 楊波亭記 楊波亭寢郞洛敎旣自記亭又要余書其事余曰楊波亭記六一公已作之矣主人曰今吾作此亭千載前六一公已作記云者 此何說也余曰有美堂記云山水登臨之美人物邑居之繁一寓目而盡得之今楊波亭爲然其非六一公己記之乎有美堂記把 作楊波亭記看可矣主人曰雖然請一言之余輾然而笑曰無己則之書作新年月如江子我之於嚴陵釣臺可乎盖始役於甲寅 三月斷手於五月或難之曰此不已太簡乎余又逈然而笑曰主人之雅致槪及於吾所作六偉之文亦何架疊爲此足爲楊波亭 記也 作亨之歲中夏下澣雲藍 鳳鉉 書 6. 화수정(花樹亭) 1) 위 치 : 남구 구동 광주공원내 2) 시 대 : 1957년 3) 소 유 자 : 전주최씨문중 4) 관련문헌 : 호남문화연구 14집, (1985) 화수정은 광주과역시 구동 광주공원내 서오층석탑의 동서쪽 개인 가옥내에 있다. 들창문을 사방으로 달아 보호하고 있으며 중앙은 대청 구조로 되어 있다. 전주최씨의 만육공 죽정공 월당공 삼파의 후손들 이 일가의 대동단결을 도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으로 1951년에 경암 최숙, 오은 최한홍, 정헌 최중권 등 3인이 주간되어 전남최씨대동화수회를 조직하고 이를 바탕으로 1957년에 이 화수정을 건립하고 또 여씨향약을 모범으로 하여 종법을 만들었다. 화수정은 정자가 일가의 종회소 역할을 하는 예라 할 수 있 다.

花樹亭序 籍全州崔氏晩六竹亭月塘三先生家於古於今文獻無徵而未能通譜則後之齋恨無等而無時可洩無事可寓也古之同族 今之道人古則子弟從父兄今則父兄從子弟者由不深知其本故也程子垂訓於萬世曰凡人家法須月爲一會以會族古人有 花樹韋家宗會法可取也每有族人遠來赤一爲之吉凶嫁娶之類更須相與爲體使骨肉之意常相通骨肉日疎者只爲不相見 情不相接爾自是以來三家痛於古今無徵而恨深於海洋耳一日羣季俊秀以呂氏洞約韋家宗法纂之敬之曰安如不有今而 專美於古也一呼百應如谷稟聲凡修稧八九年如一日而成矣檀紀四千二百九十二年己亥八月二十三日光州觀德亭買受 而扁全州崔氏大同花樹亭大抵失於終廢於久人之所同患也切願春上亭秋登亭者絶勿以於終失之於久廢之須以物心兩 面敬之於久厚之於終不其明乎其宜勉焉 壬寅皐夏 日 竹亭公 後孫 橚 7. 만오정(晩悟亭) 1) 위 치 : 남구 효덕동 노대 473번지 2) 시 대 : 1902년 3) 소 유 자 : 함안윤씨문중 4) 관련문헌 : 호남문화연구 14집, (1985) 만오정은 광주광역시 남구 노대부락 앞에 위치해 있으며, 1902년 윤하검의 아들 희진, 희성이 건립하 였다.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골기와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훼손이 극히 심하여 정의 사방을 버팀 목으로 받쳐 무너지는 것을 막고 있으나 보수가 시급하다. 가의(嘉義)의 품계를 받은 윤하검이 가정이 유족치 못하여 빈객이 찾아와도 접대할 곳이 없음을 노상스럽게 여김에 그의 자손들이 건립하였다. 晩悟亭實記 嗚呼此地有亭非自今日先人之有志己久矣先人少時食貧所居屋樣雖古之黔屢無以過之性安間澹첨泊喜與賓客遊而賓 客至迎接無地每以此恨之自中歲來一歲之資幸無朝夕之娛因起小舍於寢門之側而又甚湫隘不容旋馬前日之恨亦何以 洗之耶丙子夏起茅亭於屋後山跬步地間而亭在山腰眼界稍寬雖不見外山亦足以暢敍幽情也每署熱乘暇至亭下消遙納 半日凉一日不肖與一卯適趍侍在傍先人辟咡而詔之曰人生世問大事業則誠做不得以林泉一局遺之子孫我東先哲多有 行之者若曺能繼而葺之使此亭不朽於百世則我之晩年事業止此足矣若曺有能成吾志者否不肖俯而答退而與一卯謀曰 親命若是我輩豈敢一日忘哉鳴呼繼志述事人子之當職而書曰若考作室不肯堂矧肯搆由是言之則繼述之緊重孰有如堂 室者哉卽欲廣其舊制改其塗檐代以陶瓦而舊址傾急勢不可久遂綠崖攀壁十步九折透迤而下至小溪上得平岡一麓而移 建焉一年而告成是歲先人年己九十餘矣以壽累蒙恩秩陞嘉義階而氣雖衰耗精力不衰聞賓客至則輒肩與而出終宵唔語

娓娓盡歡而罷二歲三歲如一日以終餘年先人林泉之樂或可以少遂其願而不肖搆述之道亦庶幾粗效其力矣晩梧是先人 晩年自號而命之因名其亭 -歲丁未三月日不肖 喜鎭 謹識- 8. 행은정(杏隱亭) 1) 위 치 : 남구 효덕동 행암동 구암마을 2) 시 대 : 미상 3) 소 유 자 : 함안윤씨문중 4) 관련문헌 : 新 행은정은 남구 행암동 구암부락에 위치해 있으며, 건물은 6각형의 건물로서 골기와 우진각지붕을 갖춘 구조로 함안 윤희규의 휴양소였다. 현재 정자주변에는 철조망이 쳐저있어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으며 최근에 보수작업을 하였다. 처마 끝에는 양철지붕을 내달았고 주변에 시멘트 기둥 5개를 세워 화강기단 의 정평주초 위에 세웠다. 기둥을 중심으로 주변에 머름웃대와 머름지방을 결합 머름동자를 설치하였다. 정내에는 원운만 있을뿐 그외 기록은 찾을 수 없어 자세한 내력은 미상이다. 행은정의 원운(杏隱亭原韻) 光陰條忽屬殘年 유수처럼 빠른 세월 이 내 나이 늙어지니 白首經營結數椽 남은 만년 보내려고 두어서끌 얽었도다. 舊址猶存泉石下 천석하의 옛날 구지 그 흔적이 남아있고 山川改觀柴門前 시문전의 푸른 산천 옛 모습이 아니로다. 文杏風淸千古色 문행위의 바람속에 천고색을 느끼었고 龜岩星列一犂田 구암가의 별빛아래 묵은 밭을 갈았도다. 安貧樂業由來業 가난함을 편히 여겨 나의 본업 즐겨하니 勉爾兒孫銘佩傳 여러 아손 대를 이어 나의 뜻을 지켜가리. 행은(杏隱) 윤 희 규(尹喜奎) 9. 난계정(蘭溪亭) 1) 위 치 : 남구 주월동 월산마을

2) 시 대 : 1930년대 3) 소 유 자 : 광산김씨문중 4) 관련문헌 : 호남문화연구 14집, 1985 주월동 월산부락은 부락주변이 소구릉의 야산으로 둘러져 있으며 난계정은 광산김씨 가정집에 위치해 있다. 현재는 주공아파트가 건립되어 있다. 정자의 구조는 모정과 같으며 최근의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구내에는 중추원의관남계김공의상비와 소 암김공영철기적비가 서 있다. 비문에 의하면 난계는 김봉석의 호이며 그의 자는 성언, 광산김씨로 1872 년(임신)에 태어나 1933(계유)에 졸하였다. 벼슬은 중추원의관을 지냈으며 문숙공 김주정의 후예로 조는 월탄 김기환 부는 참봉을 지낸 재만이며 소암 김영철은 그의 이남이다. 정자에는 난계의 원운과 고광열 의 차제운 등 이수만 남아있다. 난계정의 원운(蘭溪亭原韻) 蘭是非蘭我是蘭 난초아닌 난초보다 참 난초를 즐겨하여 我培我植得生安 먼곳에서 옮겨다가 북돋아서 살렸도다. 折薪招會樵兒伴 초아(草芽) 들과 짝을 지어 산에 올라 나무하고 學稼奚嫌野老冠 야로(野老) 갓을 높이 쓰고 들에 나가 일했도다. 案上琴書親可悅 책상위에 쌓인 금서(琴書) 그지없이 즐거웁고 家中孝友子能歡 가정안의 깊은 효우(孝友) 한이없이 기쁘도다. 春宜吟咏秋宜詩 봄철에는 글을 읽고 가을철에 시읊으며 庭草不除物理看 푸른 정초(庭草) 바라보고 그의 생리(生理) 느꼈도다. 경진(庚辰)년 8월에 난계( 蘭溪) 김 태 석 (金泰錫) 삼가 원운을 따라 지움(謹次原韻) 溪畔亭成扁以蘭 시냇가에 정자 지어 난(蘭)으로서 이름하고 無時登眺一生安 때가 없이 등조(登眺) 하니 그의 일생 편했도다. 林深泉響鳴當枕 깊은 숲풀 샘물소리 베개가에 들려오고 野窄峰陰倒濕冠 좁은 들판 산그림자 갓머리에 가득하네. 開放兒童庭上戱 뛰어노는 어린 아들 뜰가에서 희롱하고 下迎賓客榻間歡 반간 손님 맞이하여 탑(榻)위에서 즐겼도다 不關塵世興亡事 티끌 세상 흥망사(興亡事)를 관심없이 져버리고 只把幽享仔細看 맑은 향기 즐기면서 자세하게 보았도다.

남강(南岡) 정 순 환(鄭淳煥) 10. 양과동정(良苽洞亭) 1) 위 치 : 광산구 양과동 만산마을 2) 시 대 : 삼한시대 - 1604(선조37년) 3) 소 유 자 : 마을공유 4) 관련문헌 : 호남문화연구 14집, (1985) 양과동정은 포충사로 들어가는 도로옆 높은 구능상에 위치해 있다. 구조는 정면 3간 측면 2간의 맛배 지붕 건물로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다. 정의 창립은 삼한대 또는 신라시대라고도 하며 수차의 중수를 거 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혹 양과동정은 간원대라고도 하며 제봉 고경명의 별서라고도 한다. 특히 이 양 과동정은 동적입의서, 향약등을 현갈하고 있는바 옛 부곡일대의 동약이 잘 지켜지지 않아 다시 성종때 동적을 만들었으나 세월이 흐를수록 준수가 안되어 새로이 1604년에 유사경이 동약을 제정했다는 기록 이 보인다. 향약은 동약보다 늦게 만들어져 고한원이 그 서문을 쓰고 있다. 정자가 이처럼 동약이나 향 약의 시행처로 작용한 것은 중요한 사례라 하겠으며 제액은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良苽洞亭立議序 鄕社修禊古也其樂不徒在於東阡北陌杖屨來往而巳其事不徒在於酒食遊戱相徵逐而己惟敦信義厚風俗其本也孟子 曰死徒無出鄕鄕田同井出入相友守望相助疾病相扶持則百姓親睦此鄕隣第一義也良苽古縣載於國乘不知何時降爲部 曲然其形勝之美俗尙之厚見稱於南藩久矣賢士大夫名公巨卿代不乏人往在弘治年間始成洞籍列書官位姓名共立契約 略放藍田呂氏之遺意吉凶慶弔之禮褒善懲惡之規靡所不備百有年來遵守不弛頃緣喪亂舊籍煨燼禮俗廢而不講少長雜 而無序有識之人思欲復古議以克合今年夏五月改書古今人名氏于冊類自高曾以下靡不載錄而條約此舊頗詳密焉嗚呼 鳥獸不可與同群生生之道捨吾人奚以哉詩曰維桑與梓必恭敬止孔子於鄕黨恂恂如也似不能言者釋之者曰謙卑遜順不 以賢智先人也鄕黨父兄宗族之所在故孔子居之其容貌辭氣如此宜萬世之所當師法者也世降而道衰矣鄕無遜悌之風里 有頑囂之俗父兄之所遊從視之如路人宗族之相鬪爭視之如胡越又烏知夫所謂桑梓之敬哉或有讀得數十卷書畜得數十 斛粟便自驕人甚至兩面二心嫉人之善幸人之禍者亦有之擧世波頹莫或正之幾何其不胥而爲夷也吾儕今日此擧將以法 聖人居鄕之道徵叔季燒薄之習重父母之邦敬祖先之居入相慈孝出相悌長謹身力行齊整風俗使智者擇居必歸吾仁里豈 不美哉若其區區於燕集遊躍之末而不務其本惟圖利於一己而不顧信義則豈不有愧於同約之意而後之人將歷指其名而 議之曰某也賢某也愚某也君子某也小人可不惧哉繕寫旣訖父老命余序之因識其顚末旣以自勉又以勉人用以爲後來之 規云 -萬曆甲辰年六月朔 洞人 儒城 柳思敬 謹書-

11.남덕정(覽德亭) 1) 위 치 : 광산구 석정동 120번지 2) 시 대 : 1864 3) 소 유 자 : 羅觀洙 4) 관련문헌 : 新 남덕정은 석정동 석정부락 뒷편에 있으며 최근 보수되어 주변에 철제 울타리를 둘러 보존되고 있다. 건물은 세멘트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원주의 기둥을 세워 정면3칸 측면 1칸반의 골기와 8작지붕으 로 되어있다. 중앙은 대청마루이고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하엿다. 전면은 고주위에 납도리를 지나가게 한 5량가이다. 내부의 처마는 선자서자래이며 전후좌우퇴집형태로서 회벽나감을 하였고 좌우측에는 간문을 설치하였다. 건물정면에는 정명의 현판 이외에는 별다른 문기는 없다. 남덕정은 조선말기의 향토인 덕암 나도규가 경국지사를 통탄하여 1864년경에 이곳에 정각을 건립하고 문하생에게 생리학과 도덕을 전수하여 많은 인사를 배출하였다. 광주읍지(1925년간)에 기록된 원운을 보면 다음과 같다. 覽德亭原韻(남덕정의 원운) 潭上飄然一小亭 연못위의 작은 정자 날을듯이 서 있는데 林端高出洗塵冥 수풀위에 높이 솟아 티끌없이 깨끗하네. 深園花樹山仍紫 깊은 동산 꽃 빛깔에 산 얼굴이 붉어지고 短崖篁梢水蘸靑 짧은 언덕 대 그늘에 물 모습이 푸렸도다. 隨鳳翶翔明德覽 나는 봉황(鳳凰) 뒤따라서 밝은 덕(德)을 살펴보고 觀魚活潑此心醒 노는 고기 구경하며 이 마음을 깨우쳤네. 輔仁賴有諸君子 여러 군자(君子) 도움으로 나의 인(仁)을 닦아가며 淸渭同流戒濁涇 맑은 위(渭)10)와 함께 탁한 경(涇)11)을 경계했네. 12. 관호정(觀湖亭) 1) 위 치 : 남구 화장동 농막마을

2) 시 대 : 1932 3) 소 유 자 : 김인규(70) 4) 관련문헌 : 호남문화사연구 14집. (1985) 관호정은 남구 화장동 농막부락 김인규씨집 뒷편 숲속에 있으며 김영현의 소건으로 계남정사라는 현판 도 가지고 있다. 건물은 화강석 막돌허튼층쌓기의 기단위에 정평주초를 놓고 원주의 기둥을 세웠으며 각 칸마다 신발돌을 배치하고 있다. 마루와 대청사이에는 머름을 배치하였고 평주 위에는 굴도리 고주 뒤에 는 납도리가 지나가고 있는 평5량가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골기와 8작지붕이며 정면에 들쇠가 달려 있고 중앙칸은 들어열개의 4분합문 좌우각1간은 2분합문으로 되어있다. 현판은 원운 차운 등 2개가 있으며, 원래는 정인보의 기 및 김승수 정순전 고강수 등의 시가 전한다고 하나 현재에는 볼수 없고 거의 파괴상태에 있으며 경내에는 계남김선생유허비가 있다. 觀湖亭原韻(관호정의 원운) 有亭高起壓江城 높이 솟은 이 정자가 긴 강성( 江城)을 짓누르니 百里明湖鏡裏晴 백리길의 맑은 호수 거울속에 개었도다. 雪虐園松猶翠色 흰눈 쌓인 동산위에 푸른 솔빛 울창하고 風來庭竹更奇聲 바람 이는 뜰 가운데 대 소리가 차갑도다. 鳶飛魚躍觀天理 날고 뛰는 연어(鳶魚) 속에 하늘 이치 들어나고 鷺宿鷗眠遠世情 자울으는 노구(鷺鷗)속에 세상 정이 멀어지네. 借問仙源何處是 볼 수 없는 선원(仙源)땅을 무엇하러 찾을손가 不如修養送平生 한가로운 수양(修養)으로 나의 평생 보내오리. 갑술(甲戌) 년 사월에 김정수(金鼎洙) 삼가 이 글을 씀. 謹次( 삼가 원운을 따라 지음) 醒欄霽戶壓塵城 높이 솟아 맑은 난간 속세(俗世) 진성( 塵城)8)짓누르니 愛物心天獨異晴 뛰어나는 애물심( 愛物心)이 청천(晴天)처럼 개었도다. 朝輝交錯風無怒 아침 빛이 교착(交錯) 하니 바람소리 고요하고 夜氣洗來月有聲 밤 기운이 깨끗하니 달빛 소리 들려온 듯. 隨柳自知前學事 버드나무 만지면서 옛날 학사(學事) 생각하고 指桃欲問舊仙情 복숭아꽃 가리키며 옛날 선정(仙情) 물었도다. 主人亦樂推能識 이 주인의 이런 낙(樂)을 내가 능히 헤아리니

故與魚鰕許爾生 어하(魚鰕) 등과 짝을 지어 그의 여생( 餘生) 즐겼도다. 하였다. 13. 불로당(不老堂 또는 舞鶴亭) 1) 위 치 : 남구 구소동 165 2) 시 대 : 미상 3) 소 유 자 : 최순기 4) 관련문헌 : 호남문화연구 14집, (1985) 불노당은 일명 무학정이라고도 하며 구소동 1구 마을앞 도로변 좌측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반의 평기와 8작지붕이다. 문은 2분합문으로서 현재 최순기씨의 살림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처마는 겹처마로 서 양철물받이 채양이 있고 기둥은 정평주초위에 사각기둥을 세워 도리를 올렸다. 이 불로당에서는 최창 규와 동료 8인이 동거하면서 유영강학의 목적으로 건립한 것이다. 不老堂記 夫士之有亭有堂古也自唐宋喜兩亭三槐堂而名於天下後世至我朝有風詠亭浩歌亭而著於湖南若非金漆溪柳雪江二 公之道義則可以巍然於極樂之土九江之浦哉今不老堂在光州治四十里西南間龜洞一隅茂林脩竹蔚然於其間不鄙不僻 巍然特立盖瑞石磅磚之氣迷迤屈曲局勢淸揚錦嶽月出西南護從黃龍砥江左右流注山水之助應可想矣崔斯文昌奎甫與 同志八人同居一里有志未就者切無二公之世豈敢以此名諸堂云乎惟吾濟箕裘爲業農桑是職使子孫肆業干此且年其六 十幾經百怯形容雖云憔悴心常希賢不失所守可謂身老而心不老者矣昌奎甫以同志之請要予請記予曰嚮使二亭非二公 之道義則安得以著名于後世乎有其道義則有其亭有其亭則有道義理之自然也子之堂出於同志誠仰慕事可成就且夫春 蘭秋菊之時詩兮酒兮相酬其中而覺旣往風塵之汚辱守末年不老之方語曰老益壯壯則非老吾子之謂也 丁巳三月 日 濟州 梁會純 識 14. 무송정(撫松亭)

1) 위 치 : 남구 칠석동 상칠석마을 2) 시 대 : 1900 3) 소 유 자 : 이천서씨문중 4) 관련문헌 : 新 무송정은 칠석동 상칠석부락 앞에 위치해 있으며 세멘트기단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원주기둥에 사방 1 칸반으로 된 골기와 8작지붕으로 되어있다. 평주위에는 굴도리 고주위에는 납도리를 올리고 있는 5량가 이다. 광주읍지 (1924년간)에 주의 서쪽 30리 칠석 죽령산하에 있다 라고 되어 있으며 참봉 서태 환이 건립하고 윤용구가 제액을 썼으며 김영한 송철헌 고광선 등의 기가 있다고 전하나 현재는 볼수 없 다. 撫松亭自敍 瑞石下竹嶺下里濱野曰漆石近古金柳洪三家甚烜爀爲玆鄕名村矣到今烏衣夕陽作一荒僻窮蔀而止惟吾徐氏自中葉 菟裘于玆土爲七世之久夙夜兢惕期仰其紹述先業世値蔑貞無可爲矣而反爲世棄君平者流顧念夙心己成陳跡雖然勁陰 殺節不能凋寒木之心則自顧萎弱猶有此歲寒之意撫松盤桓欲學陶靖節而未能故要以名吾亭云爾詩曰陶翁遺蹟起余淸 經始一亭今適成雪裏更看寒歲色風邊靜聽素琴聲偶參關柝非吾願永矢盤桓畢此生從古行藏難副實令人慚愧錫嘉名 主人 徐台煥 原韻 원운 陶翁遺蹟起余淸 도옹의 높은 유적 이 마음 맑게 하니 經始一亭今適成 한 정자 새로 지어 때마침 이뤘도다. 雪裏更看寒歲色 눈속의 푸른 세한 즐겁게 다시 보고 風邊靜聽素琴聲 바람의 맑은 금성 고요히 들었도다. 偶參關柝非吾願 관탁의 낮은 벼슬 나의 소원 아닌지라 永矢盤桓畢此生 이곳에 반환하며 이 평생 마치오리. 從古行藏難副實 예부터 행장간에 부실하기 어려우니 令人慚愧錫嘉名 분외의 이 이름이 그지 없이 부끄럽네 주인 서 태 환 15. 부용정(芙蓉亭)

1) 위 치 : 남구 칠석동 129번지 2) 시 대 : 1500 3) 소 유 자 : 광산김씨문중 4) 관련문헌 : 호남문화연구 14집, (1985) 芙蓉亭은 광산구 칠석동 하칠부락에 위치해 있다. 건립시기는 조선 세종대에 전라감사를 지냈던 김문 발의 별서로 1500년경에 세워졌으며 정면 3간 측변 3간의 맞배 지붕의 건물이다. 김문발은 은일로서 천 거되어 형조참판까지 이르렀으나 조년퇴휴하여 부용정을 짓고 이곳에서 람전향약과 백녹동규약 등을 시 행하여 풍속의 장려에 힘썼다. 광주지역의 향약은 이로부터 비롯 되었다 하는데 정자가 향약의 시행처로 기능한 사례로 중요한 의미 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芙蓉亭韻 (부용정의 운) 朝來雨意欲絲絲 아침에 실낱같은 가는 비 내리더니, 向挽靑光蕩綠池 저녁되니 맑은 빛이 푸른 못에 넘실거리네. 佳會豈非天所借 아름다운 모임 어찌 하늘이 준 기회가 아닐까. 使君行色自應遲 사군( 使君)의 행색 저절로 응당 더디리. 무진년 봄에 송천 양 응 정 謹次芙蓉亭韻 (삼가 부용정 운을 따라 지음) 官裡文書綴亂絲 관청의 쌓인 문서 실처럼 얽혔는데 行春又到習家池 관내를 행춘하다 습가지 들렸도다. 非關泥酒停騶御 도중에 술 마시러 주차함 아니오라 問柳尋花故作遲 꽃향기 즐기다가 이처럼 더뎠도다. 무진년 봄에 제봉 고 경 명 16. 필문이선제부조묘(華門李先齊不祧廟) 1) 위 치 : 남구 원산동 만산마을 2) 시 대 : 18C

3) 소 유 자 : 이승만 4) 관련문헌 : 신 필문이선제부조묘는 만산부락 뒷편에 위치해 있으며 주변에 500년이상된 왕버들 2그루에 대한 전설과 관련을 가지고 있다. 필문선생은 남구 대촌에서 정종1년(1399)에 출생, 세종때 급제하여 이조참판세자부 빈객을 지냈고 문종조에서 성삼문 박팽년 등 32인과 함께 고려사를 편찬하여 광국훈으로 경창군에 봉해 졌으며 성종때 이조판서 예문관대제학에 추증되었고, 수암서원 오현당 죽산사에 배향되었다. 건물은 화강석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그위에 원주기둥을 세웠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골기와 맛배지붕으로 되어있다. 주두에는 익공형태의 포작과 기둥과 기둥사이에 창방 소로 평방의 부재로 가구 하여 굴도리를 올렸으며 내부는 대들보 위에 판대공을 올리고 그 위에 도리를 지나가게 한 5량집이다. 창호는 각칸마다 2분합겹문을 내고 띠살창으로 되어 있으며 청판을 달았다. 처마는 평고대를 사이에 댄 겹처마이며 대문은 평삼문으로 되어 있으나 콘크리트로 되어있다. 위패에는 현선조고증예문관대제학행 이조판서세자좌빈객경창부원군필문선생부군신주, 후손 진국봉사 현선조비정부인보성선씨신주 후손 진국봉라 쓰여있다. 17. 남평문씨쌍효문(南平文氏雙孝門) 1) 위 치 : 남구 사동 124-2번지 2) 시 대 : 1866 3) 소 유 자 : 문재귀 4) 관련문헌 : 新 남평문씨쌍효문은 사동 여성회간 밑 도로변에 있다. 현재는 쌍효문만이 있고 내부는 좌측문을 개조하 여 관리자 문재귀씨가 거주하고 있으며 현판은 연탄불에 그을려 내부의 현판은 전혀 볼수가 없다. 내부 에는 정여기외에 12개의 현판이 걸려있으며 상양문에는 숭정기원후오병인이월십육일병오묘시입주십칠일 정미사시상양 이라 되어있고 정면에는 효자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문장갑지여, 효자증동몽 교관조봉대부문장섭지여 상기즉작이년을축명정월이년정묘개각 의 글이 보인다. 효자 문장갑(1798-1832)과 문장섭은 형제로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부친의 병환에 지성 으로 간호하기를 2년동안을 한결같이 하였다. 임종에 당하여서는 단지윤혈하는 등 정성을 다하였으나 상 을 당하여서는 예제대로 장사하였다. 향당의 효자로 칭하여 국가에서 명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 함풍이씨효열지여(咸豊李氏孝烈之閭)

1) 위 치 : 남구 사동 63-2 2) 시 대 : 1830 3) 소 유 자 : 정부호 4) 관련문헌 : 효열행열지 함풍이씨효열지여는 사동 광주공원옆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는 관리가 소홀하다. 건물은 정면, 측면 각 각 1간으로 골기와 8작지붕으로 되어있다. 주초는 덩벙주초위에 원주기둥을 세웠으나 주초석은 남쪽 1 개에 연화문이 조식되어 있고 북쪽 1개는 석탑의 옥개석을 엎어 놓았다. 연화문덤벙주초는 석등의 기단 석이 었을 것으로 보인다. 정여각내에는 효열이씨정여기와 제효열질부이씨정여병서의 제액이 걸려있다. 제효열질부이씨정여병서 嗚呼惟我孝烈姪婦李氏卽咸豊箕城君之浚參奉熙明七代孫幼學啓鐸之女學生鄭浩直之妻也盖其事親竭力爲夫立節 特夢棹稧之 命而孝烈之蹟己悉於名鄕諸公之贊跋不必架疊而昔我先考孝行於士林聯狀搢揷序跋積成卷軸屢登也報尙 未蒙襃揚之 典是乃子孫之抑爵者也今此孝烈安知非祖貽孫述漑根食實之理哉余於是尤有闕興感狀德之記在他人猶曰 難愼大況親子侄之門乎夭逝兩子頗有文識渠差生存錄其事序蹟而遭此不幸可不歎惜玆以老拙略記顚末絶以詩曰 維友 咸應自身修畵閣蘬然瑞石顯命盡三綱尙稟稟行兼四德儘悠悠漫籤汗簡私門寶爭咏上碑嚝世休永使吾家惟戀闕延분軒 流水亘千秋 庚寅冬 十月 日 四叔父 鄭旻瀅 識 19. 효자광주정공암지여(孝子光州鄭公痷之閭) 1) 위 치 : 남구 양림동 157-1번지 2) 시 대 : 1611 3) 소 유 자 : 광산정씨문중 4) 관련문헌 : 新 정암의 정려는 현재 양림동 6통 1반 157-1번지에 있으며 석조로된 정여이다. 정여각내에는 비와 함 께 경내에는 견석상이 1구가 있다. 비신에는 증가선대부사헌부대사헌겸홍문관제학예문관제학동지경연 춘추관의금부사오위도총관세자좌부빈객행통정대부승정원동부승지겸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지제교양촌정 선생여각비 라고 쓰여 있다. 이수는 종모양에 변형운문을 조식하고 있다. 효자 정암은 1558년(명종 무오)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동부승지를 지냈다. 모친 섬기기에 효성을

다하였고 병환에 밤에는 옷을 벗지 않고 모친을 돌보았으며 상을 당하여는 장례절차를 성대히 하였으나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니 그 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1611년 국가에서 정여를 명하 였다. 이후 정여각이 퇴락되어 1975년에 석조로 재건하였다. 20. 고씨삼강문(高氏三綱門) 1) 위 치 : 남구 압촌동 103-5번지 2) 시 대 : 조선시대(1595) 3) 소 유 자 : 高元熙( 장흥고씨문중) 4) 지정번호 : 지방기념물 12호 1985. 2. 25 5) 관련문헌 : 내고장전통가꾸기 광산군 1981. 장흥고씨 삼강문은 충렬공 고경명의 태생지인 압촌동 마을입구에 있다. 정석7간 측면 1간의 골기와 8 작지붕으로서 임진왜란 후 왜병이 철수한 선조28년(1595)에 고경명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선조가 명 하여 세운 정려(旌閭)이다. 기단은 막돌허튼층쌓기의 기단위에 정평주초를 놓고 원형의 기둥을 세웠으며 기둥위에는 창방을 가구하고 굴도리를 올렸으며 내부에는 대들보위에 사다리꼴 판대공을 올려 종도리를 가구한 5량집으로 되어 있다. 또한 여기에는 고경명을 비롯하여 그의 아들 준봉 고종후와 학봉 고인후 그리고 정유재란때 왜적과 대항하여 순절한 그의 딸인 열려 노상용(영광의 유생)의 처와 질부인 고거후의 처 광산정씨 이밖에 효자 로 선교랑 고부금(고경명의 손자)과 절의로 죽은 고경형 등 일가 의 7명의 충절을 기록한 현판이 걸려 있다. 21. 경모재(景慕齋) 1) 위 치 : 남구 방림동 82-1번지 2) 시 대 : 1983 3) 소 유 자 : 윤정복 4) 관련문헌 : 新 경모제는 서강사의 강당이며 건물 우측에는 서강사묘정비 좌측에는 서강사창건기실비가 있다. 건물은 화강석으로 石階를 1.8m 정도 기단을 조성한 후 콘크리트를 다져 그 위에 모기둥을 세워 정면 5칸, 측면 1칸의 일식기와를 올린 8작 지붕으로 되어있다. 내부는 중앙에 대청을 조성하고 좌우에는 온

돌방을 배치하였으며 분합문으로 마루와 온돌방을 구획하였다. 천장은 우물천정으로 되어있으며 사다리 꼴 판대공을 종보위에 올려 종도리를 지나가게한 5량집이다. 주두에는 장혀와 납도리만을 가구하였으나 전면 좌우 퇴칸에는 소로와 창방을 덧붙였다. 창호는 좌우 각각 1칸씩은 2분합겹문 중앙은 4분합문으로 되어있으며 띠살창이다. 온돌방 좌우에도 2 분합문으로 출입문을 두었다. 뒷편에는 대청에 2분합문을 2개 내고 온돌방 뒷편에는 봉창을 달았다. 전 면에는 풍우를 막기위에 최근 유리창을 내었으며 대문(필식문)은 소슬대문으로 홍살과 거북 귀문등을 목 각으로 장식하였다. 건립연대는 상양내용으로보아 단기4301(1986)년이다. 22. 영모재(永慕齋) 1) 위 치 : 남구 진월동 2) 시 대 : 1960 3) 소 유 자 : 하남정씨문중 4) 관련문헌 : 新 영모재는 진월동 수덕재 옆에 위치해 있으며 하남정씨재실이다. 재실입구 도로변에는 고려전중판시중천선 생정공신도비가 세워져 있고, 건물 뒷편에는 하남정씨선조묘가 있다. 건물의 형태를 보면 높이 1.4m 정도의 화강석기단을 쌓아 다듬주초를 놓고 원주의 기둥을 세워 정면 3칸, 측면 1칸의 일식기와 8작지붕으로 되어있다. 주두와 창방을 결구하고 소로없이 장혀 굴도리를 가구하였으나 내부는 대들보 위에 종보와 사다리꼴 판대공을 결구한 5량집으로 되어있다. 내부는 대청 1칸, 온돌방 1칸으 로 구성되어 있으나 온돌방은 전퇴칸을 살려 개조한후 살림집으로 이용되고 있다. 대청뒷편은 1개의 판문으 로 온돌방 측면은 협문과 함실을 내었다. 창호는 4분합문이며 청판이 부착된 띠살창이다. 마루는 귀틀마루로서 전면에만 있다. 대문(敦義門)은 평3문 이며 담장은 붉은 벽돌담장으로 철조망이 쳐져 있다. 처마는 홑처마로서 양철물받이를 달았다. 23. 수덕재(修德齋) 1) 위 치 : 남구 진월동 2) 시 대 : 1980년 3) 소 유 자 : 창영조씨문중 4) 관련문헌 : 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