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절열녀 ( 烈女 ) 장씨 ( 張氏 ) 적 ( 籍 ) 은울진 ( 蔚珍 ) 이며장전 ( 張悛 ) 의딸로첨정 ( 僉正 ) 주호 ( 朱?) 의처다. 그는조선임진왜란때에부부가같이고산성읍성을지키다가부군이먼저왜적에게전사를당하고적이영인 ( 令人 ) 의젖을만지니양젖을손수칼로짤라땅에던지고꾸지람이끝나지도않아죽으니왜적이경탄하여그징상 ( 徵狀 ) 을기 ( 記 ) 하여여러죽음과구별하여표시를하고가니때는 1593년 8월이었다. 조정 ( 朝廷 ) 에서이를듣고증영인 ( 贈令人 ) 의벼슬을내리고정려 ( 旌閭 ) 를명 ( 命 ) 하였다. 후에석농 ( 石農 ) 오진영 ( 吳震永 ) 이열여기 ( 烈女記 ) 를지었다. ( 정여각 : 죽변면화성리매니 ) 서씨 ( 徐氏 ) 적 ( 籍 ) 은달성 ( 達成 ) 이며서덕태 ( 徐德泰 ) 의딸로장진혁 ( 張振赫 ) 의처다. 남편이 5년간병석에누워있을때에오목주화사판을얻어술에담가서계속복용토록하여병이나았다. 또남편이뇌종병이들어사경에이르자자기를대신할것을밤낮으로하늘에빌었다. 이에감응 ( 感應 ) 하여종기가완치되었고수명을연장하였다한다. 1643년 ( 인조 21년 ) 에조정에서정여 ( 旌閭 ) 를명 ( 命 ) 하였다. ( 정려각 : 북면부구리 ) 박씨 ( 朴氏 ) 적 ( 籍 ) 은영해 ( 寧海 ) 며박상하 ( 朴尙夏 ) 의딸로창녕 ( 昌寧 ) 조명룡 ( 曺命龍 ) 의처다. 남편이전염병으로죽어가므로손가락을두번이나끊어그피를남편의입에넣어다시살아나게하였다. 조정에서그의행적을알고 1749년 ( 영조 25년 ) 에표창하고정여 ( 旌閭 ) 를명하였다. ( 정여각 : 온정면덕인리 ) 남씨 ( 南氏 ) 적 ( 籍 ) 은영양인 ( 英陽人 ) 으로유학 ( 幼學 ) 안성문 ( 安聖文 ) 의처다. 그의남편이돌아가심에시체를안고 7일동안음식을하나도먹지않고죽으니조선순조 ( 純祖 ) 때에정려 ( 旌閭 ) 를명 ( 命 ) 하였다. ( 정려각 : 기성면정명리 ) 홍씨 ( 洪氏 ) 적 ( 籍 ) 은남양 ( 南陽 ) 으로홍응섭 ( 洪應燮 ) 의딸이며선비인안동 ( 安東 ) 김원진 ( 金源鎭 ) 의처다. 시부모를극진히섬겨왔으며남편이병이들어위독함에이것을자신이대신할것을하늘에빌었으며자기의손가락을끊어그피를입에넣어병이낳았다. 그러나남편이또다시병이들어결국사망하니같이죽기를각오하다가시부모를위하여죽지못하고종신하였다. 1904년 ( 광무 8년 ) 에조정에서정려 ( 旌閭 ) 를명 ( 命 ) 하고달성 ( 達成 ) 서신보 ( 徐臣輔 ) 가기 ( 記 ) 를지었다. ( 정려각 : 기성면삼산리 ) 적 ( 籍 ) 은담양 ( 潭陽 ) 으로전재남 ( 田在南 ) 의딸이며신안 ( 新安 ) 주진구 ( 朱鎭九 ) 의처다. 어릴적부터어버이를정성으로공경하였고시가에가서는며느리의도 ( 道 ) 를중히여겨그의남편을공손히섬겼다. 그러나남편이병이들어위독했으므로극력구호하였으나결국돌아가심에애통해하며초상예를다치루고음식을전폐하였다. 그리고밤새벽으로남편의묘소에가서곡 ( 哭 ) 을하였으며그의시어머니가음식을강력히권하였으나입에넣는시늉을하다가삼키지않고토하여버렸다. 이로인하여 17일만에죽기를맹세하고따라죽으니
사림 ( 士林 ) 에서그열 ( 烈 ) 됨을가상히여겨 1931년 10월에여각 ( 閭閣 ) 을세웠다. ( 여각 : 원남면금매리 ) 귀옥 ( 貴玉 ) 노덕신 ( 盧德信 ) 의처로조정에서열녀 ( 烈女 ) 의행적을듣고정려 ( 旌閭 ) 를명 ( 命 ) 하여고을북쪽에여각 ( 閭閣 ) 이있었으나지금은없어졌다. 우씨 ( 禹氏 ) 적 ( 籍 ) 은단양인 ( 丹陽人 ) 이며황월찬 ( 黃月贊 ) 의처다. 일찍이남편상 ( 喪 ) 을당하여스스로죽고자하였으나남의만류로이루지못하다가목욕재계후스스로죽으니조정에서그사실을듣고정려 ( 旌閭 ) 를명 ( 命 ) 하였으나지금은없어졌다. ( 정려연도와정려위치미상 ) 차씨 ( 車氏 ) 효자남태석 ( 南泰錫 ) 의처다. 남편이돌아가심에초상 ( 初喪 ) 부터담제 (? 祭 ) 까지지성으로예를치루고스스로죽으니조정에서그사실을듣고정려 ( 旌閭 ) 를명 ( 命 ) 하였으나지금은없어졌다. 적 ( 籍 ) 은김녕 ( 金寧 ) 이며김진원 ( 金震元 ) 의딸로장희덕 ( 張希德 ) 의처다. 남편병이위독하여지성으로탕약을썼으나보람도없이돌아가심에 3년동안하루같이슬퍼하니사림 ( 士林 ) 이포장 ( 褒狀 ) 하고상부에서상 ( 賞 ) 을주었다. 권씨 ( 權氏 ) 적 ( 籍 ) 은안동 ( 安東 ) 이며권언향 ( 權彦鄕 ) 의딸로장호선 ( 張好善 ) 의처다. 시부모에게극진히효도하고남편이돌아간후에삼베옷을입고나무숟가락으로음식을먹으며춘하추동복 ( 服 ) 을만들어묘옆에서태웠다. 3년후에는추울때나더울때에도삭망 ( 초하루보름 ) 에는묘에가서곡 ( 哭 ) 을하였고늙어서는나물과과실을먹지않고병중에도약을먹지않으면서 나는가벼운여자인데어찌건실로살아가리요 하며일생을마치었다 적 ( 籍 ) 은삼척 ( 三陟 ) 이며김흥시 ( 金興時 ) 의딸로장효권 ( 張孝權 ) 의처다. 일찍이과부가되어스스로일생을마치고자하였으나이루지못하고 시어머니가나를믿고있으니하루라도섬기지않으리요 하고삭망에남편묘에가서땅을뚫고엎드려곡 ( 哭 ) 하니사람들은그곳을열부굴 ( 烈婦堀 ) 이라하고그집을열부가 ( 烈婦家 ) 라하였다. 군수가그집에들려표창장을전하고상을주니고부 ( 姑婦 ) 가함께받지않고 죄가많아죽어도죄가남는데어찌포장을받으리요 하고재삼사양하니군수가문으로나가며탄식하여말하되 한집에정열 ( 貞烈 ) 이모였다. 하고효성문 ( 孝成文 ) 을지으니세상사람들은삼세열부 ( 三世烈婦 ) 라하였다. 남씨 ( 南氏 ) 적 ( 籍 ) 은영양 ( 英陽 ) 남순화 ( 南舜和 ) 의딸로파평 ( 坡平 ) 윤황 ( 尹晃 ) 의처다. 남편은문장이뛰어났으나일찍돌아가시니선비들이모여장사를치루었고남씨가스스로죽기로하였으나시모가계시므로죽지못하다가후에시어머니가별세하였다. 그후생가 ( 남편의생가 ) 시부모도돌아감에슬퍼하다가몸이쇠약하여 1년후에돌아가니무릇 16년소식 ( 素食 ) 하고목욕도하지않고머리도빗지않고하늘의해도보지않았으며가까운친정에도가지않았다이에주위사람들이감탄하였다.
윤씨 ( 尹氏 ) 적 ( 籍 ) 은파평 ( 坡平 ) 윤행윤 ( 尹行倫 ) 의딸이며신안 ( 新安 ) 주국조 ( 朱國朝 ) 의처다. 출가하여 5년만에남편이병을얻어약을썼으나백약이무효였다. 윤씨는자기의손가락을끊어그피를주혈 ( 注血 ) 하였으나구하지못하고돌아감에스스로죽기로하였으나죽지못하고어린아이가성장함을기다리며그시부모를뒤로하더니갑작스럽게아이마저죽자윤씨가항상천연스럽게지내더니어느날이부자리를펴고누워서가래를뱉으니그것이모두피였으며결국몸이쇠약하여죽으니향리사람들이애석하게여겼다. 임씨 ( 林氏 ) 적 ( 籍 ) 은평택 ( 平澤 ) 이며임지환 ( 林之煥 ) 의딸로영양 ( 英陽 ) 남혁성 ( 南赫晟 ) 의처다. 나이 19 세에출가하니그남편이오래묵은병을앓고있었는데병세가날로심하여지므로좋은약을다쓰고목욕재계하여하늘에빌면서자기몸을대신할것을원하였으며원하는음식을공양하였으나 1년을넘기지못하고상 ( 喪 ) 을당함에같이죽기를원하였으나후계가없었으므로조카를후를이을아들 ( 양자 ) 로정하고평생얼굴에화장도하지않고친가에도가지않았다한다. 그리고항상칼과노끈을몸에지니고다니면서자결할것을맹세하였고모든규범이남과달라문호가크게번창하니수양 ( 首陽 ) 오진태 ( 吳震泰 ) 가현원전 ( 賢援傳 ) 을지었다. 최씨 ( 崔氏 ) 적 ( 籍 ) 은경주 ( 慶州 ) 며남평 ( 南平 ) 문규헌 ( 文奎憲 ) 의처다. 집이가난하였는데그남편이소 ( 牛 ) 병에약으로쓰려고이웃집호박 1개를따왔더니그집주인이도적으로모함하여관 ( 官 ) 에서옥에가두어버렸다. 그때에집안에는팔순 ( 八荀 ) 노모가있었고최씨또한임신한지아홉달이었다. 시노모가상기하여사경 ( 死境 ) 에이르자최씨가간곡히위로하는말이 하느님이살피시어무고한사람을어찌죽이리요 하고마음을권하며안심시켜놓고곧이웃집에가서목을매어죽으니그남편이옥에서풀려나왔다. 그러나최씨는아홉달임부로배속에있는자식을불쌍히여기지않고시어머니의스스로의죽음을다투어죽으니효가아니고서야어찌가능하겠으며그남편이먼저죽는것을두려워하니이어찌열 ( 烈 ) 이아니겠는가? 관 ( 官 ) 에서말하기를남편 ( 文氏 ) 의삶은그삶이슬프고최씨의죽은은그죽음이영화롭다하였다. 즉시모를위함이효 ( 孝 ) 요그남편을위한죽음은열 ( 烈 ) 이라하였다. 이씨 ( 李氏 ) 적 ( 籍 ) 은평창 ( 平昌 ) 이며해주 ( 海州 ) 오출섭 ( 吳出燮 ) 의처다. 초례 ( 初禮 ) 를치루고 3일째되던날에남편이죽음에이씨가남편의시구를따라가니시어머니가식사를하지않고울고있어있는눈물을머금고시어머니에게음식을권하며안정시켜놓고자기는유화한빛을보이며속으로는같이죽는다는뜻을품어이불을쓰고음식을끊고죽었다. 안장할때에시체가들어있는널 ( 柩 ) 이움직여둘러서서보는사람이탄식하였다한다. 적 ( 籍 ) 은담양 ( 潭陽 ) 이며울진 ( 蔚珍 ) 임학희 ( 林學熙 ) 의처다. 그남편이옥 ( 獄 ) 에들어가있을때에아침저녁으로밥을얻어연명케하다가어느날까마귀가옥을향하여울기에전씨가옥에가서문을두드리고들어가보니그남편이목을매어죽기에이르렀다. 전씨는즉시입으로노끈을끊고이빨로손가락을물어뜯어그피를남편의입에넣어다시살아나게하였다. 그후에도이와같이구한바있으며또한꿈에붉은치마를입은부인이이르기를
내마땅히길을가르키노니네곧관가에가서호소하라 하거늘전씨가관가에가서간곡히호소하여남편을출옥케하였다. 또한남편이술에취하여강가초막 ( 草幕 ) 에서졸고있을때에근처의들에서불이일어나옷깃에불이닿을무렵전씨가가서구출하였다한다. 황씨 ( 黃氏 ) 적 ( 籍 ) 은평해 ( 平海 ) 며황치운 ( 黃致運 ) 의딸로경주 ( 慶州 ) 최태희 ( 崔泰熙 ) 의처다. 시부모를섬기기에정성을다하였고시집온다음해에남편의병이위독하였으므로항상맑은물을길어다가하느님께빌면서자기를대신할것을청하고정성을다하여구호하였으나병이낳지않고돌아가니애통함이지극하였다. 그러나시부모의위로로 10여년을검소한옷을입고지내다가조선고종 ( 戊子 ) 10월어느날밤추위가극심하여음식을전폐한지수일만에죽기를맹세하고하는말이남편과같이따라죽지못하고수치스럽게삶이한이라하고스스로죽어깨끗이의 ( 義 ) 를좇았다한다. 안씨 ( 安氏 ) 적 ( 籍 ) 은순흥 ( 順興 ) 으로안고의 ( 安高義 ) 의딸이며담양 ( 潭陽 ) 전병호 ( 田炳昊 ) 의처다. 남편병에항상목욕재계하고하느님께빌었으나구하지못하고상 ( 喪 ) 을당함에남편을따라죽지못하고장사를치루고예를한다음 1개월후에남자아기를낳아대를이어놓고순절 ( 殉節 ) 한열여 ( 烈女 ) 이다. 곽씨 ( 郭氏 ) 사직 ( 司直 ) 정이 ( 鄭?) 의처로출가하여남편을잃고젊어서부터홀로생활하였는데어물과육고기를먹지않았고때때로좋은음식물이생기면반드시저장하였다가제사때에쓰기를 80여세까지시종여사 ( 始終如斯 ) 하니관가에서가상히여겨삼베와식량을보내주었다. 이씨 ( 李氏 ) 명사 ( 名士 ) 손현량 ( 孫賢亮 ) 의처로출가하여남편섬기기를극진히하다가남편이돌아가심에몸가짐을더욱단정히하며의복을검소하게입고이웃집에도출입하지않았다한다. 관가에서이를알고삼베와양식을하사하였다. 황씨 ( 黃氏 ) 달효인 ( 達孝人 ) 장용단 ( 張龍端 ) 의처로남편이죽으니시체를안고통곡하며 4일동안음식을하나도먹지않다가죽으니이사실을관가에서알고상을주고표창하였다. 이씨 ( 李氏 ) 선비백중형 ( 白重亨 ) 의처로 21세때에남편이사망한후시부모섬기기를한결같이하였고남편의유언을생각하며통곡하던밤에뒷뜰에이름모를짐승이와서그와함께슬피울었다한다. 또한그는항상묘앞에가서나무를붙들고통곡하였는데그나무가말라죽었다한다. 이에유림에서그의행장을관가에올렸으나표창은받지못하였다. 선비권문발 ( 權文發 ) 의처로남편이병이들자단 ( 壇 ) 을모아하늘에기도하였고남편이돌아감에손가락을끊어주혈 ( 注血 ) 하여 3일간수명을연장하였다. 이에향교에서그를표창하였다. 적 ( 籍 ) 은담양 ( 潭陽 ) 이며효자전병겸 ( 田炳謙 ) 의딸로신안 ( 新安 ) 주형중 ( 朱衡中 ) 의처다. 그는어릴때부터아버님의가르침을받아매사에지각이있고, 성품이곧으며지조가있었
다. 출가하여서는시부모에게효도하고남편을잘받드니이웃과마을에서부덕 ( 婦德 ) 이있다는칭송이자자하였다. 경인 ( 庚寅 ) 년남북상쟁때에남편이출타하여돌아오지않아그화가시부 ( 媤父 ) 에게돌아감에전씨 ( 田氏 ) 는그화를자신의몸으로막아죽으니시부공경을다함이라하여국중선비가지은글과시가있고, 경제 ( 絅齊 ) 정연국 ( 鄭然國 ) 이말하기를 남편의목숨은하늘에빌고도적에게항거한맑은몸이니열 ( 烈 ) 이요, 시부 ( 媤父 ) 공경을다하여몸을바쳐죽으니효 ( 孝 ) 다 하였다. 주씨부인유인효열록 ( 儒人孝烈錄 ) 이있고중국의고정자양주씨 ( 考亭紫陽朱氏 ) 종보효열록에도등재되었다. 또한 1995년 7월 31일에성균관장으로부터표창장을추서받았으며중국주자학회장양청 ( 楊靑 ) 이정덕비명 ( 旌德碑銘 ) 을찬하였다. 적 ( 籍 ) 은담양 ( 潭陽 ) 이며서면왕피리전상구 ( 田箱邱 ) 의딸이다. 시조부와시부모에게효성이지극하였으며, 모두가세상을떠난후에는매일세번눈바람을가리지않고성묘하여청소를하니마을사람들이후손의모범이된다하여칭찬이자자하였다. 적 ( 籍 ) 은삼척 ( 三陟 ) 이며남혁지 ( 南赫智 ) 의처다. 14세에결혼하고 16세때에세배차친가에갔다가갑자기남편이사망했다는부음 ( 訃音 ) 을듣고달려가보았으나구하지못하고사망하였다. 후에친가에서개가의설 ( 說 ) 이있자친가와의왕래를끊고흰옷을입었으며임종유언에따라남편의죽음에관 ( 棺 ) 을쓰지않았으니내가죽어도관을쓰지못하도록하였다. 그리고포상도받았다한다. 최씨 ( 崔氏 ) 적 ( 籍 ) 은월성 ( 月城 ) 이며김인권 ( 金寅權 ) 의처다. 남편이병으로사경에이르자자기손가락을끊어그피를입에넣어소생하게하였다. 이에향리사람들이모두열녀라하였고관에서상을주고포상하였다. 남씨 ( 南氏 ) 적 ( 籍 ) 은영양 ( 英陽 ) 이며남재학 ( 南載鶴 ) 의딸로신안 ( 新安 ) 주병즙 ( 朱秉楫 ) 의처다. 19세에출가하여 25세때에그의남편이고혈압으로반신불수가되었다. 극히궁한가정에서 1남 1 녀의가족을돌보며남편의병에대한약을구하며 5년간간호하다가결국남편이사망하여열부의도 ( 道 ) 를다함에향리에서칭송이있었고 1939년 3월에울진군수의표창장과부상을받았다. 울진장씨 ( 蔚珍張氏 ) 장기한 ( 張基漢 ) 의딸로 1917년정명 ( 正明 ) 에서출생하여나이 18세에전의이씨 ( 全義李氏 ) 이종호 ( 李鍾虎 ) 의처 ( 妻 ) 가되어부군 ( 夫君 ) 이중병을얻어 5년간병간호에정성을다했으나, 효험이없어별세하니 3일만에남편을따르니, 1941년 ( 辛巳 ) 그때나이 24세였다. 이사실은보고듣는이로하여금 정절 ( 貞節 ) 이라고칭하였다. 장범곡 ( 張凡谷 ) 장병주 ( 張秉柱 ) 의맏딸로죽변면화성리범상골 ( 凡祥谷 ) 에서 1886년 8월 5일출생하니천성이온화 ( 溫和 ) 하며강직하였다. 18살에곽종목 ( 郭鍾穆 ) 처로출가하여가난한살림에도길쌈을하며가사를돌보고시부모를극진히봉양하다가 1910년경술늑약 ( 庚戌勒約 ) 으로나라잃은남편이조국광복을위한독립운동으로서간도유하현구산자 ( 溝山子 ) 로이주하자
남편을따라갔으나, 남편이 31세에일병과싸워전사하였다. 부인은남편의유골을고향땅에안장하기위하여삼천리험한길을반은걷고반은차편으로고생끝에고향에당도하여선영묘밑에안장하고 3년예 ( 禮 ) 를다하였다. 1960년 3월 1일울진교육감으로부터부도정절 ( 婦道貞節 ) 의공으로열부상 ( 烈婦賞 ) 을받고문교부장관표창장을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