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Ⅳ부 역사의 가치를 되살려 문화의 시대를 열다 - 국립문화재연구소 로서의 위상 (1995년 2003년) 제1장 새로운 국립 기관의 위상, 문화재 연구의 제3장 우리 문화재 지키고 살리기 새로운 과제 - 국립문화재연구소로 명칭 변경 - 조사기록 및 국제교류 1. 국립문화재연구소로서의 새로운 각오 1. 무형문화재 기록과 영구보존 2. 금석문 자료의 효율적인 서비스 자료 제공 - 기록영화 및 도서 제작 3. 자랑스러운 세계유산,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 2. 무형문화재 아카이브 구축 4. 유적 발굴의 수준에서 역사 연구의 차원으로 3. 우리 문화재 지키고 알리기 5. 연구 자료 를 역사 자원 으로 남기기 위하여 제2장 과거의 생활, 오늘의 문화로, 내일의 자산으로 - 북한 및 해외문화재 조사, 국제교류 제4장 21세기 문화의 시대, 문화재의 가치를 높이다 - 유적 유물 연구와 무형문화재 보존 1. 유적 발굴 지역의 확대 및 조사 방향의 다각화 1. 미술공예 및 고건축 조사 연구 2. 연구 조사, 기록으로 빛을 더하다 3. 문화재, 문화재연구소에서 첨단과학을 만나다
제 1 장 새로운국립기관의위상, 문화재연구의새로운과제 - 국립문화재연구소로명칭변경 1. 국립문화재연구소로서의새로운각오 1995년 11 월 22일, 문화재청은유형문화재과를유형문화재 1 2과로분리개편하고, 재산관리과를폐지했다. 이와함께중요한조직개편중의하나는문화재연구소를국립문화재연구소로명칭변경한것이다. 이로써문화재연구소는국립문화재연구소로서, 국가문화재조사발굴및보존이라는고유의기능에더욱충실하게되었다. 기구도 (1995 년 11 월 23 일 ) 서 무 과 문화재기획관 유형문화재 1 과 유형문화재 2 과 국장 무형문화재과 기념물과 궁원관리과 문화재보수과 궁중유물전시관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서 무 과 경복궁사무소 유적조사연구실 창덕궁사무소 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공예연구실 창경궁사무소 예능민속연구실 종묘사무소 보존과학연구실 지구관리사무소 (12) 지방연구소 (3) 출 장 소 (3) 2. 금석문자료의효율적인서비스자료제공금석문조사와종합영상 DB 구축 금석문이란말그대로청동과같은금속성재료에기록한금문 ( 文 ) 과, 비석처럼석재 ( 石材 ) 에기록한석문 ( 石文 ) 을합하여일컫는말이다. 좀더구체적으로는, 금문은금속제의용기 악기 무기 화폐 인장 ( 印章 ) 경감( 鏡鑑 ) 조상( 造像 ) 범종( 梵鐘 ) 도량형등에주출 ( 鑄出 ) 되었거나새겨진문자이며, 석문은석제의비 ( 碑 ) 묘지( 墓誌 ) 조상등에새겨진문자이다. 금석문을연구하는학문을금석학이라하는데, 중국에서는금석이외에갑골 ( 甲骨 ), 간독 ( 簡牘 : 木簡 竹簡 ), 봉니 ( 封泥 ), 토기 ( 土器 ), 와전 ( 瓦塼 : 기와 벽돌 ) 등에있는문자도그범위에포함시킨다. 금문은중국의옛동기 ( 銅器 ) 에서볼수있는명문이주요한부분을차지하는반면, 서양에서는그리스의비문 ( 碑文 ) 과묘지명 ( 墓誌銘 ) 이유명하다. 그러나동양에서도석고 ( 石鼓 ) 나진 ( 秦 ) 나라각석 ( 刻石 ) 을비롯하여역대의비문, 묘지명, 조상비 ( 造像碑 ) 등에걸친중국의석문이중요하다. 대체로금석문은그출처나전해내려오는사정이분명한것일수록가치가크다. 또정확한문헌이적은고대사의해명에기여하며, 때로는문헌상의잘못을바로잡아주기도한다. 금석문조사는 1998년부터전국에소재한국가지정금석비문을중심으로일제조사를실시하여, 보존관리를위한자료확보및학술연구자료를제공할수있도록실시하였다. 먼저관계전문가의자문을구하여개별금석비문의상태를점검하고기록보존의우선순위를결정하도록하였다. 그리고국가지정금석비문 70건과, 지방지정및비지정도포함하여기록보존을위한탁본을연차적으로실시하며, 보존적측면에서는실태조사를통하여우선순위를정한후실리콘복제를통한모형을제작하도록하였다. 또한미술사적으로중요한금석비문에대하여는실측을하고, 조사자료를필름첩으로기록, 보존하도록하였다. 1999년도부터본조사에착수하여경기도안성칠장사혜소국사비등 11 건을완료하였다. 2002년도부터는 2007년까지 5개년계획으로전국에산재한국보, 보물, 신도비등을포함한금석문을모아선사시대부터조선시대까지종합적으로웹상에구축하여서비스를제공하는금석문종합영상 DB구축사업을실시하였다. 금석문의탁본, 실물등의이미지와판독과번역의텍스트를수집하여기록을보존하는것을일차적인목적으로하였다. 나아가 2004년도 5월부터는웹서비스를실시하여전문연구가들에게는원문자료의활용을가능케하고, 일반인들에게는선조들의기록문화에대한이해를증진하는데기여하고자하였다. 현재 한국금석문종합영상시스템 (http://gsm.nrich.go.kr) 을통해웹서비스를제공하고있다. 122 123
고대 ~ 조선시대금석문 8,000여건의텍스트 ( 원문및해석, 역주, 개관, 참고문헌목록등 ) 와이미지 ( 탁본 실물 ) 자료는영상 DB로구축완료하였으며, 특히탁본이미지에서원문을보다쉽게판독할수있도록첨단기술인 Zoom VR 기법 ( 고해상도확대기능 ) 과통합뷰어등을개발하여연구자에게는새로운연구과제를, 일반인에게는다양한정보를제공하는등금석문에흥미롭게접근할수있도록하고있다. 특히 2007년도에는한국역사정보시스템및한국고전번역원등과연계하여관련참고자료는정확한비문 ( 碑文 ) 번역을제공함으로써한국학관련사이트로서의면목을갖추었다. 향후지속적인관리 운영을통해한국금석문자료의효율적인서비스자료를제공할계획이다. 금석문종합영상 DB구축사업통계자료순차 1 2 3 4 5 6 계 연도별 2002년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시대별 총괄 고대 ~ 조선 Ⅰ 조선Ⅱ 고려통일신라 1392~1720년 1721~1910년 고대 ~ 조선 원문입력 8,011건 - - - - - 8,011건 종 - 718종 711종 800종 703종 300종 3,232종텍스트판독문 - 1,271건 1,187건 800건 703건 300종 4,826건구축해석문 - 644건 709건 800건 703건 300종 3,156건 DB 구축 웹진 ( 금석문과역사, 금석문이해하기 ) - 25종 10종 10종 - 22종 67종 실물 - 106종 90종 347종 434종 254종 1,231종이미지탁본 - 69종 200종 394종 1,828종 300종 2,791종구축소계 - 175종 295종 741종 2,262종 554정 4,022종 DB구축, DB구축, 시스템개발및시스템 DB구축, DB구축, DB구축, 시스템시스템보완웹서비스개발웹서비스웹서비스웹서비스추가개발웹서비스 장비구입 - DB 서버검색엔진, - 웹서버및SW 디스크어래이 - 부도및탑비조사전국곳곳에흩어져있는부도 ( 浮屠 ) 및탑비 ( 塔碑 ) 중국가지정문화재를중심으로정밀실측을실시하고구조기법및양식적인특징을조사 연구하여학술자료및문화재보수 복원시고증자료로활용할목적으로추진한사업이다. 이에전국주요사찰과유적지에남아있는석조미술문화재중국가지정석등을중심으로 1986~2001년까지 74건을조사 완료하여 2권의보고서를발간하였다. 부도및탑비에대한조사는 2003년도에석조미술문화재 10개년조사계획을수립하여정밀실측및디지털사진기록, 3D 스캔등을실시한것이며, 2007년까지대안사적인선사조륜청정탑 ( 보물제273호 ) 등 8기를포함해서총 30 기의부도와탑비를정밀실측한후관련기초학술자료를확보하였다. 부도및탑비정밀실측조사목록금석문종합영상시스템홈페이지화면연번문화재명조사연도시대소재지지정번호 1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 2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비 3 보리사대경대사탑비 2002년 4 흥법사진공대사탑 5 흥법사진공대사탑비 6 월광사월랑선사탑비 7 쌍봉사철감선사탑 2003년 8 쌍봉사철감선사탑비 9 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 10 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 11 실상사부도 2004년 12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 13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비 14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 2005년 17 보림사서부도 18 연곡사동부도 19 연곡사북부도 20 연곡사서부도 2006년 21 연곡사현각선사탑비 22 연곡사동부도비 23 대안사적인선사조륜청정탑 24 대안사광자대사탑 25 대안사광자대사탑비 2007년 28 선암사동부도 29 월남사지진각국사비 30 유마사해련부도총계 30건 15 26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선암사대각암부도 16 27 보림사동부도선암사북부도 고려고려 강원도원주국립중앙박물관 보물제198호보물제78 호보물제361 호 고려 국립중앙박물관보물제365호강원도원주보물제463호 고려통일신라통일신라 국립중앙박물관전남화순전북남원 보물제360호국보제57 호보물제360호보물제33호보물제34호보물제36호보물제38호보물제39호 보물제157 호 884년보물제158호전남장흥보물제155호고려초보물제156 호 통일신라 국보제53호 고려조선 전남구례전남곡성 국보제54호보물제152호보불제153호보물제154호보물제273 호보물제274호보물제275 호 고려 보물제1117호전남순천보물제1184호 보물제1185호 전남강진전남화순 보물제313호보물제1116호 124 125
사리장엄조사사리장엄이란부처나승려의사리를담는용구와이를탑속에봉안하는사리장치를통틀어일컫는용어이다. 미술문화재연구실에서는석탑해체보수시긴급히수습된사리장엄일괄유물에대하여보존처리후과학적분석및미술사, 건축사, 사리신앙등의종합적인조사연구를실시하였다. 1998년에는경주나원리오층석탑 ( 국보제39호 ), 2000년에는경주감은사지동삼층석탑 ( 국보제112호 ) 의사리장엄일괄유물에대한종합연구를수록한보고서를발간하였다. 나원리오층석탑에서는 1996년해체보수과정중에금동사리함이발견되었고, 사리 ( 舍利 ) 외에소불상 ( 小佛像 ), 소형의금동탑 목제탑, 다라니경 ( 多羅尼經 ) 등이다양하게확인되었다. 감은사지동삼층석탑의사리장엄구는 1996년에진행된석탑의해체복원공사중에발견되었는데, 탑내 외의사리함, 사리병, 사리등이발견되었다. 보고서에서는각종유물에장식된문양과기법등을분석하고, 동 ( 同 ) 시대에제작된사리함과의비교를통해서사리함제작의신앙적배경등에대하여고찰하였다. 또한일차적인유물의분석에그치지않고복원을위한복원도를제작하였으며, 보존처리결과와과학적분석에대한내용도함께수록하였다. 3. 자랑스러운세계유산,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조선왕릉은조선왕조의 500여년장구한역사와문화를종합적으로담고있는조선유교문화의정수이다. 조선왕릉은자랑스러운우리나라의문화유산이며, 세계가감탄하고인정한세계의유산이다. 이에문화재연구소는조선왕릉에대한체계적이고종합적인연구의필요성을앞서인식하고, 1996년부터 10개년조사계획하에 42기의조선시대왕릉을대상으로종합학술조사를진행해오고있다. 조선왕릉에대한기초자료를확보하기위해서 3D실측을활용한정밀실측작업과신도비탁본, 디지털사진기록화등의조사를진행하고있다. 기록보존자료의확보외에도왕릉봉분의병풍석, 난간석을비롯하여문 무인석등석물의미술사적인조사와능역의공간과입지조건을고려한건축물의배치및양식적특징등건축적인부분에대한조사, 산릉제례를통한조선왕실의상장의례와산릉도감의궤등도조사하여분야별종합적인조사를진행하고있다. 이러한노력의결실로 2007년에는 역사의숲조선왕릉 을국문과영문으로발행하여일반인들에게조선왕릉을새롭게인식하는계기를마련하였으며, 2009년 조선왕릉종합학술보고서 (1) 를발간하였다. 또학술심포지엄을개최하여조선왕릉분야별연구의새로 나원리금동불처리후 금동사리함보존처리완료후 역사의숲조선왕릉과종합학술조사보고서 운방향성을제시하였다.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의연구성과들은기록보존자료로구축되고있으며, 학술자료및문화재정책 홍보자료로제공 활용되고있다. 4. 유적발굴의수준에서역사연구의차원으로백제사비시대의연못지 - 부여궁남지 부여궁남지는 삼국사기 ( 三國史記 ) 에그조성내용이기록되어있는백제사비시대의연못지이다. 명확한증거는없으나정비 복원된지역이입지등에서기록상의위치에부합되며, 주변에존재하는화지산의별궁지 ( 別宮址 ) 및군수리사지 ( 寺址 ) 와관련하여학계의주목을받아왔다. 이후유적의중요성이인정되어 1964년국가로부터사적제135호로지정되었다. 궁남지주변에대해서는 1990년부터충청남도주관으로호안일부구역을조사한바있는데, 1차조사에서는궁남지서편과군수리사지사이에서백제시대에조성된연못서쪽호안의일부가확인되었고, 부여박물관이주관한 1991~1993년의 2 3차조사에서는호안가운데북동쪽과남동쪽일부및수전지의일부를확인하였다. 하지만이러한부분적인조사로는궁남지유적의전체적인성격파악과이해에한계가있었고, 정부에서는백제고도 ( 古都 ) 문화권유적정비사업의하나로궁남지의전체적인규모를파악한뒤원래의모습으로복원하여야한다는각계의의견에따라주변지역에대한부지매입과함께연차적으로정밀발굴조사를실시하기로하였다. 이에따라부여연구소에서발굴조사단을구성하여 1995년부터연못지내부바닥 9,000여평에대한트랜치조사를실시하게되었고, 발굴조사결과확인되는유적및유물등을통해자료를수집함으로써향후유적정비의기초자료로삼고관련분야의학술연구자료로활용하고자하였다. 1995년연못내부바닥조사에서는남북방향의도랑 [ 水路 ] 4개소와동서방향 1개소가조사되었고, 포룡정의남동편에서는말목과통나무등으로구축된시설물이확인되었는데, 이는저수조기능을하였던것으로추정되었다. 이구조물내부에서는짚신과함께사람의발자국흔적이확인되었고바깥의동서측에서는직교방향으로수로가나있었다. 그리고서편도랑에서는상당량의말뼈와말머리뼈, 치아등이집중적으로출토되었고부근에서는완형의목간 ( 木簡 ) 이나와대단히중요한자료로평가되었다. 1997년연못외곽서북편을대상으로탐색을실시하여동서방향으로난수로시설이확인되었다. 수로는폭 180cm, 깊이 70cm 정도이며, 안쪽에폭 140cm, 깊이 40cm 정도의또다른시설을갖춘이중형식인데, 거의동시기에만들어진것으로추정되었다. 목조수로 126 127
는서쪽편에편중되어단단한점질토층에홈을마련하여구축하였으며, 약 20cm 정도확인되었다. 수로남쪽의 2.5~2.7m 지점에서는대형목재가출토되었고이부근에서백제시대기와와토기편들이집중적으로수습되어인공적인건조물이있었을것으로추정되었으나유구는확인되지않았다. 목간은연두색의진흙층에서다른백제시대유물들과함께출토되었다. 길이 35cm, 너비 4.5cm, 두께 1cm로재질은소나무로판단되며, 칼같은것으로잘다듬어말끔하게끝처리하였다. 그리고매달아놓을수있도록상단에서 4.4~4.9cm되는지점에지름 0.5cm의구멍을뚫었으며, 전 후면에는 38자정도의묵서 ( 墨書 ) 가기록되어있다. 한국직물사규명유물의다량출토 - 부여능산리백제고분능산리백제고분군은왕릉고분군이있는곳으로부터논산쪽으로약 1.6km 되는지점에위치하고있다. 1994년 12 월부여군이이곳을공설운동장부지로선정하고공사차량진입을위한도로개설및터닦기작업을하는과정에서부여연구소와백제고분지표조사단에의해고분의존재가알려지게되었다. 이에즉시공사를중단시키고노출된유구에대해서는조속한조사와함께주변지역에대한지표조사를실시해야한다고부여군에건의하였다. 부여군은유적의중요성을감안하여 12월 30 일관계당국에긴급발굴을요청하는한편, 이지역일대에대한지표조사와병행하여긴급발굴조사를부여연구소에의뢰하였고, 공설운동장부지에대한작업의진행여부는발굴결과에대한학계전문가의의견에따라결정하기로하였다. 따라서조사단구성과함께우선주변지역에대한지표조사를실시하여 10여기이상의백제고분과조선시대회곽묘를확인하였고, 차량진입로를중심으로노출된고분에대해서발굴조사가이루어졌다. 조사결과백제계양식을갖춘좋은유적으로주변에상당수의고분이밀집되어있을것이라는가능성과함께고분부재용석재 토기편 자기편등을채집하였다. 부여군에서는공설운동장건설이군의숙원사업인관계로일정지역에대한심층조사를실시한후공사의진행여부를결정하자는의견을제시하였고, 고분의성격과유존상황을좀더정확히파악함으로써향후보존대책을종합적으로검토할수있다는판단에따라 1차조사지역주변에대한 2차발굴조사를실시하게되었다. 조사결과 48기의백제고분이추가로확인되어이곳이다양한구조를지닌백제고분의밀집지역이며출토된유물들은관련학문분야에중요한새로운자료를추가하는계기가되었다. 이곳에서얻어진주요한조사성과의하나는백제시대직물의확인이었다. 출토된직물은명주 견직물 합사비단등의평직물과비단이다. 특히사 ( 紗 ) 는관식에돌아가면서부착되어있는것이부분적으로남아있어문헌상의두사 ( 頭紗 ), 모자사 ( 帽子紗 ) 를관식과 함께확인할수있었고, 라 ( 羅 ) 는 4익경의문라 ( 文羅 ) 로관과함께출토되어문헌으로만나타나던나관 ( 羅冠 ) 의실상이확인되었다. 출토된평직물과라는작은단편이기는하나백제지역에서처음출토된것으로, 백제의직물제작기술을단편적으로나마이해할수있어한국직물사를규명할수있는아주중요한유품이다. 지역적역할의문제제기와해결의실마리제공 - 나주복암리 3호분나주복암리 3호분에대한조사는 1995년나주시에서고분군에대한정비및복원을추진하는과정에서먼저전남대학교박물관에서정비복원을위한기초자료획득을위한시굴조사를실시하게되었다. 그결과 1호분은원형분구로서판석조석실이확인되었고, 2 호분은사다리꼴의이형분구로확인되었다. 그런데 3호분을조사하는과정에서예상치못했던대형의완전한석실분이확인되고한분구내에석실과옹관등이공존하는새로운형태의고분으로확인되어문화재관리국에사전조사를의뢰하게되었다. 3호분에대한조사는우선 1996년 7~8월에국립문화재연구소 전남대학교박물관합동으로분구남사면중앙에위치한석실 (96석실) 을대상으로이루어졌다. 조사결과영산강유역의토착묘제인대형옹관이매납된석실분수용기의석실임이확인되고, 금동신발등이출토되어중요성이부각되었으며, 이를계기로전면적인조사가필요하게되었다. 이후 1996년 11 월부터 1998년 9월에이르기까지 3단계에걸쳐전면조사를실시하여석실및옹관등 7가지묘제의총 41 기의매장시설을확인하였다. 이러한다장 복합묘로서의중요성이외에도금동신발, 은제관식, 환두대도등중요유물이출토되어 3호분의성격뿐만아니라백제와일본과의관계규명에도중요한자료를제공하게되었다. 그리고매장시설조사이외에도분구및주구에대한전면적인조사를통해선행옹관묘군을재조정하여현재의방대형분구를완성하게된사실도알게되었다. 이러한중요성에따라 1998년 2월에도지방기념물제136호에서국가사적제404호로재지정되었다. 여기서출토된각종유물들은백제에의한정치적인통합이이루어졌음이분명하나문화적으로는여전히토착적요소가강하게유지되었음을보여주고있다. 실체를둘러싼끊임없는평가와논쟁의현장 - 풍납토성 1997년 1월부터서울시송파구에위치한풍납토성 ( 사적제 11호 ) 내부아파트재건축부지 2개소에대한긴급발굴조사를실시하여초기백제주거지 17기등다수의유구와유물을확인하였다. 풍납토성은그존재가알려진초기백제시대유적으로는거의유일하게그대로남아있는귀중한문화유적으로서, 이발굴조사가실시되기이전부터학계와고고 128 129
학계등으로부터그실체를둘러싼논쟁과평가가있어왔던곳이기도하다. 발굴조사는재개발사업시행자에따라 1차로풍납동 231-3 외 39 필지 3,300여평과 2차로풍납동 246-3외 124필지 4,300여평에대해별도로실시하였다. 1차조사는현장에서아파트기초를다지기위한터파기공사중백제토기가다량출토되었다는외부제보에의하여 1997년 1월 16 일급작스럽게수습조사에착수, 9월 5일조사를종료하였다. 2차조사는그사이풍납토성내부, 즉풍납동전지역에대한사전조사의무화조항이마련되고서울대등인근대학교와국립문화재연구소가주축이된풍납지구긴급발굴조사단이구성되면서사전조사를실시하게되었다. 따라서 10월 13 일부터공사구간전체에대한시굴조사를실시하여유구가확인된 900여평에대한정밀발굴조사를실시, 11월 30 일조사를마무리하였다. 1차조사지역은풍납토성의동벽중앙부, 성벽중심부에서 50m 거리이내에위치하였다. 이곳의조사는제보가있었던터파기구간을중심으로하여외곽으로확장해가며실시하였다. 터파기구간은현지표에서 4m 이상굴착이이루어져있어이미유구면이상당 풍납토성동성벽발굴조사 부분훼손된상태였는데, 토층조사결과지표아래 2.5m 정도부터백제시대유물포함층이시작되었고, 군데군데목탄과소토가혼합된유구의흔적이관찰되었다. 조사결과여기서는백제시대주거지 9기, 토기가마 1기, 저장용또는폐기용수혈 39기, 3중의환호유구등이확인되었다. 2차조사지역은 1차조사지역의바로남쪽으로골목하나를사이에두고위치해있다. 조사는기존건축물의철거후정지작업이완료된상태에서전지역에걸쳐폭 2~4m의시굴트렌치를넣어유구의유무를확인하는작업부터실시하였다. 그결과앞서의 1차조사지역과달리서쪽과남쪽구간에서는지표면부터단순모래층만이계속되는것과, 가끔씩교란된건축폐기물이깊게파묻혀있는것을볼수있었다. 다만북동쪽으로 1차조사지역과가장가깝게연결되는곳에서만유물포함층이확인되어정밀조사를실시하였다. 그러나그나마도상층부가상당히교란되고유구가중복되어원상을제대로유지하고있는유구는별로없었다. 조사결과는 1차조사에서확인된것과거의같은형태와규모를가진백제시대주거지 8기, 북쪽으로계속연결되는 3중환호, 기타수혈유구등이확인되었다. 여타의주거지들과출토유물도역시 1차조사지역과거의같은양상을띠고있어이일대가당시의주거밀집지역이었음을추정하게해준다. 다양한가야문화비교연구자료확보 - 고성내산리고분군 풍납토성신문기사 (1999 년 12 월 8 일조선일보 ) 경남고성지역에위치했던소가야의실체규명을위한연구및유적복원자료를확보하기위하여 1997~1999년고성내산리고분군 ( 사적제 120호 ) 에대한연차학술발굴조사계획을수립하여 3차에걸쳐조사를실시하였다. 이고분군은 1963년 1월 21 일사적제 120호로지정되었음에도불구하고, 이에대한자료가전무한상태였다. 따라서이고분군에대한 1차년도학술조사에서는차후발굴조사의기초자료로삼고자지형측량및유적현 130 131
황조사를위주로하였으며, 일부지역에대한탐색및수습조사를실시하였다. 제2차년도와제3차년도에는대형봉토분인제8호분과제34호분을각각발굴조사, 많은양의유물들을수습하여고성지역, 즉소가야문화권에대한보다깊은문화상을파악할수있게되었다. 제1차년도에는이일대의고분군을분포도로작성한결과, 축척 1:600 분포도상에동서 600m, 남북 240m의범위 ( 약 4만 3,000평 ) 에서 60여기의봉토분을확인할수있었는데, 직경 15~20m의대형분이 22기, 10~15m의중형분과 10m이하의소형분이 39기가산재하였다. 제2차년도에는고분군중사적지정구역내제8호분에대한조사를실시하였고, 유구가지상에축조되어있는세장방형수혈식석곽임을확인하였다. 주곽을중심으로 2기의옹관과 6기의석곽묘가배치된다곽식유구로서, 이지역의특색있는매장습속을확인하였다. 출토유물로는영락부유대장경호와유공호 ( 有孔壺 ) 등을비롯하여 190여점의유물을수습하였는데, 소가야의멸망시기와주변국과의교류관계를반영하는 6세기중엽경의것으로추정된다. 제3차년도에는고분군중사적지정외구역에분포하는제34호분에대한조사를실시하였는데, 봉분의규모는직경약 16m, 최대높이약 4m 에달한다. 조사결과주곽인횡혈식석실을비롯하여북편으로 5기의수혈식석곽이배치된다곽식유구였다. 주곽의현실은후벽부와연도가있는전벽부의도굴과좌측벽의붕괴로인하여그원형을파악하기어려웠으나바닥은정연히남아있었다. 현실의길이는 520cm, 너비는 240cm이며, 연도가전벽중앙에설치된양수식으로, 석실의형태는종장방제형평천정고분이다. 출토유물로는고사리무늬가동체에붙어있는토기대부호, 나팔상으로벌어진원통형기대, 철제연결고리가달린등자등 160여점이며, 조성시기는 6세기전반경으로추정된다. 고성내산리고분군은한봉토내에다수의유구가축조되어있는다곽식 ( 多槨式 ) 유구이며, 신라와백제등주변국과의교류를반영하는유물이출토되고있어소가야멸망시기에조성된고분군으로추정된다. 수많은봉토분이조성되어있는소가야의대형고분군을통해소가야의특징적인유물과특이한봉토축조방법등을확인함으로써다양한가야문화를비교연구할수있는자료를확보한점이성과로여겨진다. 고성내산리고분군 8 호분 고성내산리고분군출토유물 ( 구슬 ) 활성화를위해서는건설을추진해야한다는경주시와시민관련단체등의첨예한대립이계속되었다. 발굴은시굴조사결과를토대로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동국대경주캠퍼스박물관, 한국문화재보호단이지역을분담하여 1996년 11 월부터조사를추진, 총 60 여기에이르는많은수의토기가마와 20여기의숯가마, 그리고 2기의기와가마가조사되었고, 이들가마와관련된공방터와채토장, 생활주거지그리고고분이복합적으로확인되었다. 확인된여러종류의가마는우리나라발굴역사상최대규모의유적으로, 특히 5~7세기대의토기가마는축조방법상시기별로약간씩의차이점을나타내고있으며, 불량토기를버린폐기장이두텁게형성되어있어신라토기의편년과생산방식에관한획기적인자료를제공할수있을것이다. 숯가마또한아직까지한국고고학상미개척분야로남아있었던숯의생산과공급체계를규명할수있는좋은자료를획득하였다고할것이다. 손곡동, 물천리가마전경 신라시대의대규모생산유적 - 경주경마장부지 ( 손곡동 ) 유적이유적은경주시손곡동 천북면물천리에남아있는신라시대의대규모생산유적이다. 이곳은일찍부터신라 통일신라시대가마가집단으로남아있는것으로확인된지역이었고, 1994년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지표조사와 1995년시굴조사에서도여러종류의가마와고분이집단으로남아있음이확인되었다. 이에따라경주경마장건설의타당성여부를놓고건설을반대하는관련학계, 대통령공약사업의이행이라는측면, 지역경제의 국내최고규모의출토품과이형토기연구의귀중한자료 - 경주월산리삼국시대고분군 조사된삼국시대고분은석곽묘, 제사유구, 횡혈식석실묘, 옹관묘, 토광묘등이며, 조선시대민묘도조사되었다. 확인된유구는석곽묘 130여기, 옹관묘 5기, 토광묘 1기, 제사유구, 횡혈식석식묘 10여기등이다. 석곽묘는장축이산의등고선과평행한동서향이며, 20~30cm의산돌과냇돌을이용 132 133
데가장많은양이수혈식석곽묘에서는처음출토되었다. 또제사유구에서수습된등잔형토기의경우대각이 2단이고등잔갯수가 6개인토기로전체높이가 25.3cm, 등잔구경 8.5~9.8cm인대형토기이다. 이는부산복천동제53호에출토사례가있으나크기나등잔숫자에서이출토품이국내최고규모로서, 이형토기연구에귀중한자료가되었다. 옹관고분의축조특징을살피는귀중한자료 - 나주신촌리 9 호분 월산리단야구 경주월산리삼국시대고분군 해 4~7단정도쌓고그위에 5~6매의개석을올린구조와, 판석으로네벽을만든석관형석곽묘로나누어진다. 바닥은냇돌이나깬돌을이용하여시상 [ 屍床, 시신을놓는곳 ] 을만들었으며, 이외에관대시설을한유구가확인되는등다양하다. 석곽크기는길이가 170~340cm, 폭 30~80cm가많고높이는 60cm 내외가대부분이다. 출토유물은석곽의한쪽면에치우치거나양쪽면에나누어서매장했는데, 유물은토기류 철기류 장신구류가주를이룬다. 유물부장상태로시신의머리쪽에는소형토기, 발쪽에는비교적큰토기를매장하였다. 이에비해철기류는부장상태가일정치않으며, 마구류와무구류의출토량이적어서특이하다. 장신구류로는청색유리구슬과금동제세환이식이있다. 출토유물가운데특기할것은 18호묘에서철제망치와집게등단야구 [ 鍛冶具, 대장간공구 ] 가일괄수습된점이다. 횡혈식석식묘는대부분크게훼손되어벽석상부와개석이없고아랫단 1~4단만남은것이많다. 크기는길이 180~245cm, 폭 120~230cm이고, 복도의위치에따라좌 우편수식 중앙연도식으로구분하는데, 여기서는모든형식이혼재하였다. 시상도다양한형식을보이고있다. 이때삼국시대집단묘역이곳곳에서확인되었으나이처럼묘역이중복되지않고계획있게묘를만든곳은그리흔하지않았다. 이로보아집단묘연구에좋은자료가될것이다. 출토유물중단야구는철제망치 집게 철착 모루 숫돌이세트를이루나, 지금까지는대게망치와집게정도가함께출토될뿐일괄로출토되는경우가극히드물었다. 그런데이 18 호묘에서망치 3점, 집게 2점, 기타단야구와관련된철물등국내외단야구자료가운 신촌리 9호분은 1917~1918년조사에의해분구정상에서옹관 11기와금동관, 금동신발, 환두대도등이출토되어영산강유역의대표적인고분으로주목받고있으나보고서가발간되지않아자세한내용은알수없었으며, 현재까지정비되지않은상태로남아있었다. 신촌리 9호분에대한연대및성격에대해서는 4세기후반 ~6세기초반까지편년이정립되지않은상태이며, 영산강유역의독특한옹관고분으로서토착지배집단의무덤임이확실시되나백제 왜와의관계속에서어떤정치체제를유지하였는지에대해서는아직의견이분분한상태이다. 이고분은정비부문을위한학술조사의일환으로 1999년국립문화재연구소에의해발굴조사되었다. 분구는방대형으로분구기저부의주구안선으로볼때성토분구자체의밑변은 30.5m 27.5m의방형이고, 높이는원통형토기가상부가노출되도록배치하였다. 분정서북모서리원래의위치에서원통형토기가발견된점으로보아높이도거의원상태를유지한것으로보여 50cm 정도만깎인것으로추정된다. 신촌리 9호분에서출토된원통형토기는영산강유역대형분에서확인된최고의예이며또한당시까지순수한옹관고분에서출토된최초의예이다. 이점은원통형토기의발생및이후영산강유역에석실이도입되면서본격적으로나타나는원통형토기변화의기준이된다. 원통형토기는일본고분시대의원통하니와와유사한것으로, 장제적인측면에서관련이있어한 일간고대사연구의중요한단서가된다. 그러나호형원통형토기가일본에극히적은점이나제작기법, 정면수법등이독자적이며, 일본하니와가인물 기재등다양한구성을보이는것에비해단순한기종구성을보이는점, 기형이기대위에그릇이올려져있는모습으로일본원통하니와보다는실물을사실적으로의기화한모습등정보교류에의한문화요소의상호적교류및영향에서도강한독자성을살필수있다. 또한도립기법은일본에서도국지적으로나타나는현상이어서편년상의문제가해결되어야하겠지만, 제작방법의역수출등도추정할수있는자료이다. 또영산강유역곳곳에서원통형토기가출토되었으나분구중에열을지어확인된것은처음이며, 이토기의부장위치및기능해석에대한단서를제공하는것으로판단된다. 그리고당시까지최고의예인신촌 9호분출토원통형토기는기대에그릇을올려놓은 134 135
사실적의기이지만시간이지남에따라장고분등석실과공반된토기는형태가추상화되고있어형식적으로도가장이른것으로판단된다. 이러한시기적인차이외에도각지역고분의토기형태가다양한점은동일한모티브를수용하면서도독자적으로발전시킨배경, 즉영산강유역각지역집단의독자성을설명하는데귀중한자료가될것이다. 주구는분구의고대화, 채토처로서의기능적인성격이가장중요하였던것으로추정된다. 대형옹관고분에서분구와함께조사된주구의예로는처음있는것으로, 주구의기능및성격에대한논의과정에서중요한자료가될것이다. 옹관의상하중층매납과함께원통형토기의배치상태를확인한결과분구는한번이상수직확장된것을알수있어이지역옹관고분의축조특징을살피는데귀중한자료로평가된다. 고대불교문화사연구및유적보존정비의기본자료제공 - 창원봉림사지 제3차년도조사에서밝힌연못지의현황은동 남 북 3면은주변논으로인하여제법둑이높게남아 ( 약1.5m) 있으나서쪽의둑은자연지형탓인지약간의둑흔적만넓게남아있다. 연못지의규모는동서약 13m, 남북약 20m 정도의길이로약간의타원형을보이고있으며, 중앙부에는조산 ( 造山 ) 으로보이는높이약 1m, 직경약 8m의작은섬이있다. 석축기법등으로보아유구는조선시대의것으로추정되는데, 발굴조사결과조산의직경은동서 6.2m, 남북 7.8m의규모로토축하였으며, 연못호안석축은동서 14m, 남북 20.5m의규모로방형이다. 건물지는연못의호안석과인접하여노출되었는데, 초석으로보이는자연형태의큰돌이두세곳남아있으나교란이심하다. 제4차년도조사는사역의남쪽지역에대해실시하였으나, 배수로, 중복사용된건물지의형태를확인하였다. 출토유물은 봉림 ( 鳳林 ) 이새겨진청동젓가락 1점과 병인년봉림사조와 ( 丙寅年鳳林寺瓦造 ) 명 ( 銘 ) 의명문와를비롯하여다수의유물이수습되었다. 창원봉림사지에대한조사결과는나말 ( 末 ) 여초 ( 初 ) 의구산선문 ( 九山禪門 ) 중하나였던봉림사의실체확인과산지가람의일정한배치형태를확인한점을들수있다. 통일신라시대불교문화의번창을확인할수있는구산선문 ( 九山禪門 ) 중의제8 선문이었던창원봉림사지에대한연차학술발굴조사계획 (1995~1998, 4개년 ) 을수립 추진하여봉림사지의가람배치및규모와성격을밝히고, 고대불교문화사연구및유적보존정비의기본자료를관계기관에제공하기위해 1995년조사를하게되었다. 창원봉림사지 ( 경상남도기념물제127호 ) 는통일신라시대구산선문중하나인봉림사 ( 鳳林寺 ) 로서, 진경심희 ( 眞鏡審希 : 854~923) 대사가 894년경에창건하였다. 문화재로는진경대사보월능공탑 ( 眞鏡大師寶月 空塔, 보물제362호 ) 과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 ( 眞鏡大師寶月 空塔碑, 보물제363호 ) 가현재경복궁에있고, 봉림사지 3층석탑 ( 경남유형문화재제26호 ) 은창원시상북초등학교교정에이건되어있다. 제1차년도조사는사역의동쪽지역에대해이루어졌는데초석과적심석들이있는건물지와배수로, 약 4m 4m의탑구를가진탑지의흔적이확인되었다. 건물지조사에서금동불상 ( 높이 5.6m), 청동불상 ( 높이 9.2m) 및암막새, 수막새, 명문기와 ( 丙寅年鳳林寺瓦造, 鳳林寺月, 鳳林山普齊寺 ), 무문전등 160점의유물이수습되었다. 제2차년도조사는사역의북동모서리지역에대해이루어졌는데, 수년전까지논으로경작된지역이나거의대밭으로변해있다. 주좌가새겨진초석과기단석등으로보이는대형돌들이논둑에약간있을뿐건물지의흔적은전혀관찰되지않았다. 조사과정에서건물지및배수로등이확인되었다. 남쪽건물지는남향건물로 4번사용되었음을확인하였는데, 모두정면 3칸측면 1칸으로그규모는 1,000 330cm~1,180 450cm 등다양하다. 배수로는남쪽건물지를감싸고있고건물지의후면과동편에설치되어있으며, 길이가 1,840cm, 너비가 50~60cm, 최대깊이 125cm에달한다. 출토유물은 봉림사월 ( 鳳林寺月 ) 병인년 ( 丙寅年 ) 등명문와및토기매병 찻잔 암 수막새편등 60 여점이다. 창원봉림사지출토, 귀목문내림새 창원봉림사지출토, 연화문막새 통일신라시대부터조선시대까지기와제작방법에대한변화양상확인 - 경주천룡사지 사적제311호인경주남산일원내내남면용장리에위치하고있는경주천룡사지는남산내수많은사찰터중그명칭과지역이명확히고증된사찰터이다. 1990년당시폐탑 ( 廢塔 ) 으로남아있던탑을복원하여보물제1188호로지정하였으며, 이조사는천룡사측의요청으로정확한가람의구조와복원의기초자료수집을위하여금당지및탑지주변에대한발굴조사를실시하게되었다. 발굴조사지역은행정구역상경주시내남면용장리 875-2, 881번지일대약 500여평이며, 조사기간은 1996년 12 월 9일부터 1997년 2월 6일까지실시하였다. 천룡사에대한기록은 삼국유사 에서이미등장하며, 조선후기까지여러사료에서확인되어법통이끊이지않고유지되었음을알수있다. 조사대상지역은전체사역의일부에지나지않지만, 고려시대이후금당이 3차에걸쳐중수되었음을확인하는성과를거둘수있었다. 고려시대이후금당은후대에이를수록탑과의거리가좁아지면서중수된특징을가지며, 다른부속건물역시오랜기간동안수차에걸쳐개축되었음을알수있었다. 그러나조사대상지역내에서천룡사의초창기, 즉 삼국유사 에서언급한 7세기경의가람배치는확인할수없었는데, 그것은당시의사역이현재의탑주변에한정된것이아니라훨씬넓은범위에걸쳐조성되었기때문인것으로생각된다. 출토된유물로는통일신라시대금동불상을비롯하여조선시대명문내림새가다량출토되어중수혹은번와등이 15세기이후약 5번에걸쳐실시되었음을알수있었다. 특히 136 137
었다. 도로유구는신라왕경의도로로서, 남북도로 ( 너비 12m) 와동서도로 ( 너비 4m) 가만나는교차지점이노출되었다. 약 3차에걸쳐개축되었는데, 하부에는직경 10cm 내외의큰자갈을, 상부에는잔자갈을깔아매우잘다진상태였다. 동서도로남쪽에접해서는석축배수로를설치하였고, 남편지역에서는초석적심석군이다량밀집되어있어오랜기간동안여러차례건물이개축되었음을알수있었다. 이와같이도로유구가확인됨에따라신라도성 ( 都城 ) 이도로로구획되었음을증명하고당시에축조된도로의너비도다양했음을확인할수있었다. 또조선시대옥 ( 獄 ) 과수혈유구등은조선시대읍성의내부구조를파악할수있는중요한자료이다. 한편발굴조사지역의서남편에서확인된조선시대옥 ( 獄 ) 은조선정조 22 년 (1798) 이후에제작된것으로추정되는 < 경주읍내전도 ( 慶州邑內全圖 )> 에양무당 ( 養武堂 ), 진고당 ( 鎭鼓堂 ) 등과함께표현되어있었다. 옥의입구에는관원의공무소와같은건물과, 원형담장내부에는동서로 2동의건물이배치되고있었다. 하지만조사결과타원형의담장내부에서는옥사건물 2동외에북쪽에 1동의건물이더배치된총 3동의건물지가확인되었다. 옥의규모는담장을포함, 동서폭약 40m, 남북폭 35m에이르며, 내부에는수용시설로 경남남산천룡사지삼층석탑 기와 ( 내림새 막새 ) 를중심으로세부적인형식변화를고찰하여통일신라시대부터조선시대까지제작방법에대한변화양상을확인하는성과를얻을수있었다. 조선시대읍성내부구조파악의중요한자료 - 경주서부동유적 경주시가지중심지역에위치하는경주서부동유적은문화중 고등학교가교사 ( 校舍 ) 의노후화로인해경주시외곽지역으로이전후아파트신축추진에따라국립문화재연구소가사전발굴조사를실시하였다. 이곳은일부가사적제96호로지정되어있는경주읍성내서북쪽의한부분으로, 행정구역상경상북도경주시서부동 19번지이다. 발굴조사기간은 1997년 7월 7일부터 11월 30 일까지약 5개월에걸쳐진행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부터조선시대에이르기까지다양한유구가확인되었다. 조사된유적의면적은약 2,400여평으로통일신라시대건물지 담장 우물 도로 배수로, 조선시대옥사 ( 獄舍 ) 터 건물지 분청사기등이다량출토하는수혈유구등중요한유구가다수노출되었다. 표토바로아래인상부에서는주로조선시대유적이, 하부에서는통일신라시대유적이남아있었으며, 부분적으로는건물지가상당수중복축조되어있 서부동옥지 경주읍내전도 138 139
보이는대형건물지 2동과 2 1칸규모의감시초소형태의소형건물지가, 출입구인남쪽외부에서도건물지가확인되고있다. 옥사로사용된건물의하부기초는통일신라시대초석과장대석등상당량의석재를사용, 일반건물과는다른기단과줄적심구조로축조하고, 2.9m 폭의담장외부에폭이 3.8~4.7m, 깊이 80cm의수구 ( 水溝 ) 시설이있는것으로보아수감자 ( 收監者 ) 의도주를방지하기위해매우견고하게축조하였음을알수있다. 이와같이담장내 2동의건물이축조된것은이미세종때에수용자를위하여남녀의옥사를구분하고, 여름과겨울에는수용자의건강을위하여통풍과난방이되는건물에수용하도록했다는기사와부합되고있다. 특히수용자를위하여안옥도 ( 獄圖 ) 를만들어반포하여옥의구조를합리적으로짓도록하였음이정조와고종때편찬된추관지 ( 秋官志 ) 와육전조례 ( 典條例 ) 등에전해지고있다. 이는당시국왕과관리들은애민사상 ( 愛民思想 ) 의이념하에, 구금된수용자의처우에대한세심한관심을기울려왔음을보여주는것이라할수있다. 그리고옥북편으로 < 경주읍내전도 ( 慶州邑內全圖 )> 에별다른건물이표시되지않고수혈유구가약 50 여개소확인되었다. 이내부에서는분청사기와토기가일괄로출토되는것으로보아 15~16세기당시의주거공간주변의폐기장일가능성이있으며, 옥이설치되면서주변에는민가가들어서지않고옥이폐쇄된이후학교설립전까지소시장으로활성화되었다고한다. 따라서도심지임에도불구하고유적의보존상태가양호하였으며, 이렇게수혈유구에서일괄로출토된토기및자기는조선시대유물연구에중요한자료를제공하리라판단된다. 신라왕경복원의중요한단서제공 - 경주인왕동 556번지유적경주인왕동에위치하고있는이유적은선덕여자상업고등학교부지내로교실을증축하고자매장문화재부존유무확인을위한사전발굴조사를실시하였다. 이곳주변일대는사적보존지구로지정되어있으며, 남쪽으로월성 ( 이격거리 600m) 및안압지 ( 이격거리 370m), 북쪽으로전랑지유적 ( 이격거리 600m) 에둘러싸인신라왕궁의중심지역에해당되는곳으로추정되어왔던곳이다. 발굴조사는 1998년 3월 18 일부터 5월 13일까지실시하였으며, 조사된면적은 100여평에이른다. 발굴조사대상지역이상당히협소함에도불구, 신라왕경의 1구획 (1 坊 ) 의제반요소인담장석열, 도로시설, 출입시설, 다수의건물지및명문와편이출토되었다. 남북담장석열과동서담장석열은 형으로교차되며그북쪽과서쪽으로동서 ( 폭약 8m 까지확인 ) 및남북도로 ( 폭 10.2m) 가확인되고, 담장석열내부에는대형의건물지유구를비롯한초석적심석군이상당수중복되어있었다. 남북담장석열의경우 5~6단까지남아있는것은신라왕경유적발굴조사상최초의예로서, 담장축조수법을파악할수있는중요한자료이며, 남 쪽으로는출입시설과연결되고있었다. 이유적은신라왕경도시구조의단면을파악할수있는, 제반필수요소를종합하여갖춘유적이다. 또일반가옥이아닌대형건물 ( 주칸거리 : 5.5 3.5m) 과 의봉사년개토 ( 儀鳳四年皆土 : 679년 ) 명문와편이출토됨에따라건물지들의상호연관성연구및신라왕경복원에중요한단서를제공하였다. 따라서발굴조사완료후원상으로복토하고유적을보존토록조치하였다. 일제에의한태실이봉 ( 移封 ) 의근본의도규명자료- 서삼릉태비석군경기도고양시산 38 번지 ( 서삼릉경내 ) 에위치한태비석군에는조선시대에즉위한왕의태실 22 기와왕자 대군 왕녀등총 54 기가동서로구획을나누어봉안되어있으며, 이들외곽에는시멘트블록담장에철제문이달려있다. 이태실들은원래전국각지의명산에봉안되어있었던것인데, 일제강점기인 1929년경에이곳으로이봉되었음이표석이면의기록으로확인되었다. 이태비석군을조사하게된동기는그둘레에일자형 ( 日字形 ) 의블록담장을돌리고일본식철제출입문이되어있는것을헐어야된다는지역주민들의제의를문화재관리국이받아들여이주변을정리하게된것이었다. 이때문화재위원회의제3분과제2차회의에의거, 태실의실체를파악하고규명하기위하여 1996년 3월 11 일부터 3월 17일까지경종 헌종 인성대군의태실 3기에대한시굴 ( 표본 ) 조사를실시하였다. 시굴조사결과를가지고같은해 3월 13 일에현장설명회를개최한결과태비석군전체를정식으로발굴조사하여태지석및태항아리의매장형식등다각적인자료를수집, 연구할필요성이제기되었다. 이로써조선시대의태실봉안의식을밝히고일제에의해조선왕족의태실을집중이봉한근본의도등을역사적으로규명하는자료로활용함은물론, 수습된태항아리와지석을분류, 정리하여조선시대도자사및편년연구의자료를획득해야할필요성이있다는결정에따라정식발굴조사로전환하게되었다. 이에 1996년 3월 19 일부터 4월 10일까지수습발굴조사를실시하게되었다. 태비석의하부구조는원형으로땅을판후원형의시멘트조흄관을세워묻고, 내부바닥에는자갈을깐후정사각형의얇은시멘트판을중앙부에놓았다. 이위에태항아리를놓고태항아리전면에기대어태지석을세웠는데, 조사당시에는대부분넘어져눕혀진채출토되었다. 태지석은주인공의신분과출생및태를묻은시기가음각으로기록되어있으며, 태항아리는대부분조선시대백자항아리로써내 외항아리가한쌍으로봉인되어있으나이중에는흑갈색토기를봉안하거나내호또는외호만수습되는경우도있다. 원형을유지하고있는태항아리속에는동전한닢이들어있으며, 외호의구연부는밀납으로밀봉하고뚜 140 141
껑을덮은다음비단으로싸고끈으로묶은것으로확인되었다. 모든항아리는사이호 ( 四耳壺 ) 이며뚜껑역시 4개의귀가달려있는데, 이봉할당시에새로싼태항아리에는붉은칠을한끈으로몸통과이들귀를서로엮은형태가선명히남아있다. 일부태지석에는태실을이봉한연대가추가로기재되어있어 1929년에일괄로현재의위치에이봉한사실을간접확인할수있는근거가되기도하였다. 울산병영성북문지 ( 蔚山兵營城北門址 ) 유적발굴조사 (1999) 울산병영성은울산광역시중구동동 서동 남외동일대에자리잡고있으며, 1987년에사적제320호로지정되었다. 병영성이라는명칭은조선시대이곳에경상좌도병마절도사영 ( 慶尙左道兵馬節度使營 ) 이설치된뒤생긴명칭이다. 병영성의내부면적은 5만 6,371m2에달하며, 발굴조사는울산시에서진행하고있는병영성정비사업의일환으로이루어졌다. 조사결과체성 ( 體城 ) 의대부분이훼손되어외벽의기단부 ( 基壇部 ) 면석 ( 面石 ) 만일부남아있는상태였고, 북문지 ( 北門址 ) 는이미도로개설로훼손된상태였다. 그러나문지를감싸던옹성 ( 甕城 ) 의벽체일부가남아있었다. 이밖에북문지의동쪽단애면 ( 斷崖面 ) 에서해자 ( 垓子 ) 로추정되는석열 ( 石 ) 일부가확인되기도하였다. 산청단속사지 ( 山淸斷俗寺址 ) 유적발굴조사 (1999) 단속사지는경남산청군단성면운리에소재하는통일신라시대의사찰터이다. 현재사역 ( 寺域 ) 으로추정되는주변은민가 ( 民家 ) 가자리하고있으며, 보물제72호와제73호로지정된동 서삼층석탑이남아있다. 단속사는통일신라경덕왕대의이순 ( 純 ) 이창건하고신충 ( 信忠 ) 이중창한것으로알려져왔으나, 현존하는삼층석탑은 9세기전기 ( 前期 ) 에조성된것으로추정되고있다. 이곳은통일신라중대 ( 中代 ) 이후중앙에서배제된왕권의지지세력들이활동하던곳으로보이며, 신행 ( 神行 ) 이이곳에주석하면서북선종 ( 北禪宗 ) 을전법 ( 傳法 ) 한곳으로도추정된다. 따라서이시기에삼층석탑의건립이이루어지고, 사찰로서의지위와규모를갖추게된것으로추정된다. 그리고조선시대까지대찰 ( 大刹 ) 로서의법등 ( 法燈 ) 을유지하였으나, 중기이후유생들의공부장소로변모하는등사찰로서의역할을제대로이행하지못하면서폐사 ( 廢寺 ) 된것으로보인다. 단속사지에대한발굴조사결과건물지 2동과백자, 청자, 기와, 소불상편 ( 小佛像片 ) 등의유물이수습되었다. 산청지곡사지 ( 山淸智谷寺址 ) 유적발굴조사 (2002) 창원상남선사유적 ( 昌原上南先史遺蹟 ) 유적발굴조사 (1999) 상남선사유적은경남창원시토월동 959번지일대에위치하고있으며, 창원시의도심지역재개발사업계획의일환으로사전에매장문화재의분포상황을파악하기위해 1999 년도에 2차에걸친발굴조사를실시하였다. 조사결과청동기시대의제사유구 ( 祭祀遺構 ) 와환호 ( 環濠 ) 로추정되는 2중의구상유구 ( 溝狀遺構 ) 가확인되었다. 이로써인근에위치한상남지석묘및환호유구와함께토월천 ( 吐月川 ) 주변의청동기시대사람들의생활상을보여주는대표적인유적으로서알려지게되었다. 출토유물은발형 ( 鉢形 ) 과호형 ( 壺形 ) 의무문토기 ( 無文土器 ) 편이대다수를차지하는데, 함께수습된석기로는반월형석도 ( 半月形石刀 ), 마제석촉 ( 磨製石鏃 ), 석부 ( 石斧 ) 등이있다. 유적의형성시기는기원전 5세기경으로추정된다. 산청지곡사 ( 山淸智谷寺 ) 는고려전기에선종 ( 禪宗 ) 의 5대산문 ( 山門 ) 의하나였으며, 진관 ( 眞觀, 912~964) 과혜월 ( 慧月, 10~11세기 ) 등의고승이주석 ( 駐錫 ) 하면서여러차례중흥을이루며 19세기경까지법등 ( 法燈 ) 을유지했던유서깊은사찰가운데하나이다. 1530년 ( 中宗 25년 ) 에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 新增東國輿地勝覽 ) 의기록에서확인되고있는지곡사지 ( 경상남도기념물제225호 ) 는산청군의대행사업으로 2000년에시굴조사가이루어졌다. 이과정에서잘짜여진축대위에 3칸 3칸규모로축조된금당지와여러차례중첩된최소 5동이상의부속건물지가노출되었다. 이외에도귀두 ( 頭 ) 가잘려나간고려시대전기의귀부 ( 趺 ) 2기, 세진교비 ( 洗塵橋碑 ), 부도 ( 浮堵 ), 배례석 ( 拜禮石 ), 우물및수조 ( 水槽 ), 탑재 ( 塔材 ) 등의석조물이다수확인되었으며, 또한금당지에서는불상대좌 ( 佛像臺座 ) 와소조불상편 ( 塑造佛像片 ) 이노출되었다. 출토유물로는지곡사의실체를확인케하는 지곡사 ( 智谷寺 ) 명 ( 銘 ) 막새와통일신라시대기와편을비롯한고려, 조선시대의와전류 ( 瓦塼類 ) 및자기류 ( 磁器類 ) 가상당량출토되었다. 이러한유물의출토양상과가람배치등으로미루어보아신라응진 ( 應眞 ) 에의해 국태사 ( 國泰寺 ) 로창건되었다는기록은신빙성이적으나, 늦어도통일신라시대부터지곡사가존재하여조선후기까지개보수를거치며존속되었음을알수있다. 142 143
익산미륵사지서탑주변발굴조사 (2000) 부여화지산 (2000) 미륵사지는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1996년 12 월발굴조사를마치고유물인수인계후철수를하였다. 미륵사지철수전에서탑에대한부분적인발굴조사를통하여주변에건물지가없다는것을확인한바있으나, 그후정비하는과정에서탑주위에복토 ( 覆土 ) 를하였고, 서탑과그주변에대한세부적인정밀조사를하였을경우유구및유물들이나올가능성이잠재하고있었다. 미륵사지서탑에대한해체복원작업의일환으로서탑에대한세부정밀조사에필요한가설덧집 ( 높이 30m) 을서탑위에씌우게된다. 그에대한빔설치를위해서는사전에탑주변에대한조사가필요하여발굴조사를착수하게되었다. 화지산은부여부소산에서남쪽으로약 2km떨어진곳에위치한해발 48m의야트막한작은산으로서편에는궁남지가인접하고있으며, 궁남지에서서쪽으로약 150m 떨어져백제시대의군수리사지가일직선상으로나란히위치하고있다. 화지산의서편기슭은사비시대의이궁지 ( 宮址 ) 가있었던곳으로전해오고있으며, 특히이부근의밭가운데에는대리석을 8각으로짜올린어정 ( 御井 ) 이라불리는유구가지금도현존해있다. 삼국사기 의문헌기록에의하면망해루 ( 望海樓 ) 또한궁남지와관련하여화지산에존재했었을가능성이높기때문에화지산일대는예전부터왕궁과관련된유적이존재할가능성이항상대두되어왔다. 이발굴조사는부여군이화지산일대에도시자연공원조성계획의일환으로백제오천결사대충혼탑을화지산의 5부능선에건립하고국제조각공원을남서편전면에조성하기위한유구의확인조사를의뢰하여이루어졌다. 5. 연구자료 를 역사자원 으로남기기위하여 우리의문화유산더욱적극적으로알리기 - 문화유적총람및 CD-ROM 제작 익산미륵사지석탑해체전전경 문화재관리국에서는 1970년도부터전국에산재하고있는문화유적을일제조사하여 1차적으로 문화유적총람 ( 전4권 ) 을 1977년에발간하여학술자료및유적정비및보존의기초자료로활용해왔다. 하지만총람에수록되지않은새로운유적의발견과대규모국토개발의본격화에따라수록된유적의현상확인및미수록된새유적의발견을위해지속적인지표조사가필요하게되었다. 이에따라 1978년부터백제문화권 중원문화권 가야문화권등문화권별로나누어지표조사를실시, 2000년이전까지총 1만 3,000여건의유적을확인, 수록하였다. 이러한조사를바탕으로 1995년도부터전국에있는문화유적에대한전산화작업을계획, 추진하였다. 기존에발간된전국문화유적총람및지표조사자료를총망라한 전국문화유적총람 을전자도서 (CD-ROM) 로발간하여국토개발등으로인한문화유산의훼손방지및보존 관리 연구의기초자료및일반국민의교육자료등으로활용하고, 동시에뛰어난우리문화유산을국민에게널리알리는계기를마련하였다. 1995년도부터 1997년도까지모두 3집의 CD-ROM을제작완료했는데, 1집은서울, 5대광역시, 경기도, 제주도의문화유적 5,189건의해설내용과중요유적사진 1,571매, 분 144 145
포도 120매를수록하였다. 제2집은충청북도, 충청남도 ( 상 ), 전라북도, 전라남도 ( 하 ) 4개도의문화유적 1만 2,053건의해설내용과중요유적사진 3,750매, 분포도 667매가수록되어있다. 제3 집에는강원도, 경상남북도 3개도의문화유적 1만 3,502건의해설내용과중요유적사진 5,659매와분포도 603매가수록되어있다. 국토개발과문화재보존사이의균형을위하여 - 문화유적분포지도발간문화유적분포지도의발간은전국각지에산재해있는문화유적의분포상황을지도로제작, 국토개발사업으로인한유적의훼손및소멸을사전에방지하여국토개발과문화재보존사이의균형을도모하고, 유적보존정비및학술연구기본자료로활용하기위한것이다. 조사대상지역의선정은고도 ( 古都 ) 중심지역과, 현재개발이촉진되고있어문화유산의파괴가우려되는지역을우선으로하였으며, 지도수록대상은동산 ( 動産 ) 및무형문화재를제외한지정 비지정문화재및지표 발굴조사를통해확인된유적들이포함되었다. 확인된문화유적은유적명칭, 문화재지정여부, 유적위치및범위를 1:5,000 지형도에표시하고, 이를 50% 축소한뒤유적현황에대한간단한설명과유적사진을첨부하였다. 이어지역별 종류별통계를작성, 문화유적분포지도로작성하여관련국토개발, 국토이용사업계획수립, 부처간협의의기초자료로제공하는것은물론, 종합적인문화재연구 보존 정비자료로활용할수있게정보화되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및지방연구소에서는전라남도순천시, 충청남도천안시, 경상북도울진군, 충청남도서천군, 경상남도함안군을대상으로문화유적분포지도제작을추진하여지표조사결과를바탕으로 1998년에 문화유적분포지도-전남순천시 와 문화유적분포지도-충남천안시 를발간하였다. 순천시편에는 178매의지도에총 580건의문화유적이표시되었고, 그외에 212건의유적이부록으로수록되었다. 천안시편에는 137매의지도에 210건의유적이지도상에표시되었고 56건이부록으로수록되었다. 지역에대한유적유무확인을위해긴급지표조사를실시하였다. 1990년부터 1990년대말까지총 23 건의조사를실시하였다. 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는부여지방을중심으로한백제고분지표조사를연차적으로실시하여이에대한조사보고서를발간하고, 문화재보존관리의기본자료로활용하고자매년조사를실시하였다. 1992년도에는부여읍일대에대한고분지표조사를실시하여백제석실분과옹관묘등의고분군을확인하였다. 1993년도에는보령군일대도서지역의패총을중심으로한지표조사를실시하였으며, 1994년도에는부여군석성면과초촌면일대에대한백제고분지표조사를실시하였다. 1997년도에는 1994년도에조사한내용에대해미진한조사내용을보완하여정밀지표조사를실시하였으며, 1998년도에는부여군임천면과외산면을중심으로하여조사를실시하였다. 1997년에는함안군의도시계획등산업화로인해많은가야유적이멸실의위기에처해있어창원문화재연구소에서는이들지역내의모든문화유적을지도 (1:5,000 축척지형도 ) 에표기하기위하여지표조사를실시한결과 221개소의유적을확인하였다. 서부경남에산재하고있는불교유적을답사하여가야지역내에서의불교세력전파경로및수용 성장하는배경을파악하고, 이지역내의불교문화연구의기초자료로활용하고자지리산자락의불교유적인산청단속사지 3층석탑등 13 건의실측조사를실시하였다. 가야문화권유적정밀학술조사는 1984년김해시를시작으로 1991년까지 29개시 군에대한제1단계조사를완료하여총 515건의유적을확인한바있다. 제2단계사업은제1 단계조사자료를토대로보다심도있는가야의실체규명에필요한연구자료수집을위하 문화재의현상변경의사전방지 - 문화유적지표조사 경주문화재연구소는경주를포함한대구 경북관내에산재되어있는문화유적의정확한실태파악과급속한도시화 산업화과정에서훼손및인멸될우려가있는문화재의현상변경을미연에방지하고자정밀지표조사실시후전국문화유적분포지도와지표조사보고서를매년제작하였다. 연차지표조사는매년경상북도관내의 1개군을선정, 정밀계획하에실시하였으며, 사회간접자본확충등으로인하여토지의현상변경이발생하는 가야철기문화고분군신문기사 146 147
여가야권역별유적정밀조사를연차적으로실시하였다. 가야사 ( 伽倻史 ) 재구성을위한기본자료로활용하고자 1992~1999년까지조사기관을설정하고금관 소 아라 대가야권에대한조사를실시하였다. 1995년에는아라가야권을대상으로창원대학교박물관에서조사하여덕대리지석묘등 143건의유적을확인하였다. 1996년대가야권의거창지역을중심으로선사유적 32개소, 고대유적 45개소, 성곽유적 18개소, 불교유적 20개소등 115개의유적을확인하여가야사재구성을위한기본자료를확보하였다. 지의종류와방법을선정하였다. 그리고석탑의균열부위와꺽쇠를제거한부분에대한접착, 처리전상태기록, 처리전사진촬영, 해체부재에대한정밀실측을완료하였으며, 1999년에는기단부부터본석탑과가장유사한신석으로정밀복원과보존처리, 불상조각부분에대한정밀실측을실시하였다. 문화재원형보존을위하여 - 적극적인보존처리 경천사십층석탑훼손세부 문화재모형제작은원형의문화재를보호하기위한차원에서실시되고있는데, 일반적으로복원되거나복제된문화재모형은박물관이나전시관에서원형대신대체전시물로활용하였다. 문화재모형은유물의현상태를보여주는기록물이란점에서도원형의유물보존처리와함께중요한자료로이용되고있다. 따라서보존과학연구실에서는이러한문화재를합성수지등으로모형제작하여유물의영구보존과이동전시등학술및교육적자료로서활용하였다. 보존과학연구실에서는 1996년 문화재의과학적분석 10개년계획 을수립하고, 1997년부터 2006년까지 10년간중요문화재에대한재질분석을실시하였으며, 이를통해우리문화재가지닌고유의재료적특성과제작기법, 원료의산지등을폭넓고체계적으로규명하고자하였다. 이사업은유물을재질별로분류하여 1~3차년도는청동유물, 4~6차년도는도기및자기류, 7~8차년도는유리제품, 9~10차년도는유물의연대측정등총 1,000 여점에대한과학적분석을실시하였다. 1차년도인 1997년에는 15개국공립및대학박물관에소장되어있는중요문화재인총통과불상 153점의성분분석, 금속조직관찰, 납동위체원소분석을실시하였다. 2차년도인 1998년에는범종과무구류등 118점의유물을대상으로성분분석, 금속조직관찰, 미소경도측정을실시하여중요문화재의성분함량, 재질특성, 제작기법, 원료산지등에관한체계적인자료를입력하고이를데이터베이스화하여문화재의근원을판정할수있는근거를마련하였다. 한편고려말 (1384년) 경기도개풍군에세워졌던경천사십층석탑은 1905년경일본으로반출된바있다. 그후일제말기에손상되고훼손된상태로반환되었던것을경복궁회랑에보관하였다가 1960년시멘트로보충하여경복궁에복원하였다. 그러나산성비등외부환경에의한풍화로접착면등이심하게손상되어국립문화재연구소보존과학연구실주관으로 1995년 6월해체하여보존처리를실시하였다. 경천사십층석탑의보존처리를위해 1995년석탑과유사한암석을이용하여시험편 (400개) 를제작한후내후성시험등각종실험을실시하였으며, 보존처리에사용될합성수 경천사십층석탑, 국립박물관이관후 경천사십층석탑레이저세정 새보금자리로찾아가는경천사십층석탑 (2005 년 5 월 30 일동아일보 ) 148 149
제 2 장과거의생활, 오늘의문화로, 내일의자산으로 - 유적연구와무형문화재보존 제 2 장 과거의생활, 오늘의문화로, 내일의자산으로 - 유적 유물연구와무형문화재보존 1. 미술공예및고건축조사연구 미술공예조사연구의심화 1998년도경주나원리오층석탑보수공사시발견된사리장엄구일괄유물에대한보존처리후, 각분야별로조사연구를하였다. 즉, 이들개개유물을정밀실측, 사진촬영후미술사측면, 신앙적측면, 보존과학적인측면등을종합한학술서인 경주나원리오층석탑사리장엄 을간행하였다. 전국에산재된석조문화재중조각사연구에중요한위치를차지하고있는석등 ( 石燈 ) 을대상으로조각의기법, 각시대별양식등을비교분석하여석등의양식계보를밝히고학술기초자료를제공하고자 1992년부터연차조사를실시하였다. 조사대상은국가지정문화재로지정된석등을중심으로하되, 간주석의변화에따른전형양식과이형양식으로나누어먼저전형양식석등에대한조사를실시하였다. 또전국에소재한금석비문가운데중요도가높은국가지정금석비문을중심으로금석비문자료를일제조사하여, 보존관리를위한자료확보및학술연구자료를제공할수있도록 1998년도부터사업을시작하였다. 먼저이사업의올바른조사방향설정을위해관계전문가의자문을구한결과, 우선국가지정금석비문에대한일제실태조사를실시하여개별금석비문의상태를점검하고기록보존의우선순위를결정하도록하였다. 그리고국가지정금석비문 70건과, 지방지정, 비지정도포함하여기록보존을위한탁본을연차적으로실시하며, 보존적측면에서는실태조사를통하여우선순위를정한후실리콘복제를통한모형을제작하도록하였다. 또한미술사적으로중요한금석비문에대해서는실측을하도록하였으며, 이러한금석비문조사자료를필름첩으로기록 보존하도록하였다. 금석문자료에대한체계적조사와함께부도및탑비조사또한 2003년도부터 석조문화재 10개년조사계획 에따라정밀실측, 디지털사진기록, 3D 스캔등보다발전된기술을도입한조사가실시되었다. 이때국가지정문화재를중심으로총 30 기의부도를조사하여향후조사보고서발간에대비하였다. 한편경주남산은사지 불상 석탑 석등 석조물등신라불교유적이밀집된지역 일뿐만아니라선사유적지, 사적지, 왕릉, 민속신앙, 성곽, 천연기념물등의많은유적과유물이모여있는역사적인지역이다. 경주남산에관해서는 1940년에조선총독부에서발간된보고서인 경주남산의불적 ( 慶州南山の佛蹟 ) 이후여러저서와논문을통해새로운자료가발표되기도하였으나, 광복이후의발견자료에대해서는종합적인보고서가발간되지않아남산불교유적의보존과정비에필요한전반적인자료의정리가요구되었다. 이에따라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1972년이후남산의불교유적에대해연차적으로학술조사를실시해왔으며, 그결과 1992년 경주남산의불교유적-탑및탑재조사보고서 를발간하였으며, 1997년과 1998년에각각 경주남산의불교유적 Ⅱ Ⅲ집인동 서남산의사지 ( 寺址 ) 조사보고서가간행되었다. 보다과학적인고건축조사와보존 1989년도까지는사찰건축을중심으로조사를진행하여 58건의단위건물을조사하였다. 1990년부터는목조건축물조사중장기계획에의해그대상을서원과향교등유교건축으로변경하고, 조사범위도단위건물에서문화재지정구역전체로확장하여 1995년까지무성서원등서원건축물 7건을조사하였다. 1996년부터는향교건축물조사에착수하여 1998년까지서울 경기지역및충청북도지역의향교 44건에대한조사를완료하였다. 조사내용및조사방법은우선현지조사에앞서문헌과인문환경조사를실시한다. 현지조사에서는전체배치도와각건물을실측하여평면 입면 단면등의기본도를작성하고, 각건물의건축형식과건조기법등을조사하였다. 이외에도중수기와비문등의중요한명문이나공포등건축부재는탁본하고, 전경과각건물의세부사진을촬영하였다. 150 151
제 3 장우리문화재지키고살리기 - 조사기록및국제교류 제 3 장 완료했다. 내용은보유자 ( 보유단체 ) 가지닌기 예능의실연전과정을중심으로역사적인배경과전승양상등이다. 결과물은촬영원본, 기록본, 클린본, 연주본, 보급본이있다. 촬영원본은영구적인보존관리를위해국가기록원에이관하였다. 기록본은보유자의전수교육용등으로사용하고있으며, 클린본은기록본과동일한내용의자료로음악과내레이션등이포함되지않은것인데활용을목적으로별도제작되었다. 연주본은음악종목의경우에보유자의실연과정만별도로제작하여관련전공분야연구자등이활용할수있다. 보급본은 DVD로제작한것인데, 국공립도서관, 관련기관및단체등이널리이용할수있도록했다. 우리문화재지키고살리기 - 조사기록및국제교류 1. 무형문화재기록과영구보존 - 기록영화및도서제작 중요무형문화재기지시줄다리기기록화 (2006 년 ) 보고서나논문의한계를넘어상세하고개설적인내용 - 기록도서발간 기록도서에는종목별역사적배경, 제작 ( 실연 ) 도구나재료, 보유자의전승현황등을충실하게수록하고있다. 이는지정당시의보고서나관련논문들이간결한내용을담고있는것에반해그보다더상세하고개설적인내용을담은것이다. 아울러다큐멘터리분야의사진작가가보유자의기 예능실연현장에서촬영한 80 150컷이상의사진자료를선별하여수록하였다. 기록도서에는기록영상제작과정에서발생할수도있는기술적인실현의한계와예술적인표현의한계를극복하고자풍부한관련자료를바탕으로제작했다. 이로써기록영상과상호보완적인역할을할수있도록했다. 1995년부터 2009년까지중요무형문화재 125종목중에서 117종목에대한도서를발간했다. 최근에는독자들의문화에대한관심이증대되고, 그중에서도중요무형문화재에관한관심이고조되는상황이기때문에서점에서쉽게구입해서볼수있도록위탁도서로출판하고있다. 세계화속의민족정체성확인 - 기록영상제작 무형문화재는오랜역사를통해우리민족의삶과결부되어갖은애환과흥망성쇠를거듭하면서다듬어져온민족문화의정수이다. 우리나라의전통문화는일제강점기에훼손된것이미처복원되기도전에산업화와도시화로인해급격하게변화되어소멸의위기에놓여있었다. 세월이지남에따라기 예능보유자들이지닌기 예능을기록으로남겨놓지않으면영원히소멸할수밖에없는형편이었다. 이런작업들은어떤정책사업보다긴급성이요구되는사업임에도불구하고그동안소홀히하였던것이현실이다. 이에국가에서는우리문화의근간을형성하고있는전통문화의기 예능을지닌사람들을선별하여중요무형문화재보유자로인정하여관리했다. 사실상초기의보유자들에관한기록은거의이루어지지않았거나기록을했다고하더라도남아있는자료가거의없는관계로관련자료를찾아보기가쉽지않았다. 기록영상은보유자들이지닌기 예능을기록하고차세대전승교육자료및전통문화콘텐츠를구축하기위하여기 예능과정전체를기록한다큐멘터리영상이다. 이같은작업을통해서기록된결과물은전통무형문화유산의영구적인보존관리만이아니라 2차, 3차의가공을거쳐지속적으로활용하고있다. 먼저기록영상의결과물은거의모두보존관리하고있으며, 중요무형문화재의전승 전수교육자료로사용하고있다. 문화상품개발, 국민의전통문화에대한의식함양등을위한기본자료로활용할수있게되었다. 이자료는유네스코인류무형문화유산의등재신청서작성을위한기초자료로사용하고있다. 뿐만아니라유네스코인류무형문화유산대표목록에등재된종목을중심으로한국어및영어, 불어로번역된 30분길이의동영상으로제작해서내 외국인에게전통문화를소개하는자료로활용하고있다. 1995년부터 2009년까지중요무형문화재 125종목중에서 117종목에대한기록을 중요무형문화재고성오광대기록화 (1969 년 ) 중요무형문화재기록영상및기록도서 (2006 년 ) 중요무형문화재갓일기록화 (1986 년 ) 중요무형문화재서도소리기록화 (2009 년 ) 기록화관련기사 (1976 년 9 월 17 일경향신문 ) 152 153
제 3 장우리문화재지키고살리기 - 조사기록및국제교류 중요무형문화재기록화현황 연도 대 상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제와장평택농악, 전통장, 매듭장, 태평무강릉농악, 소반장, 경주교동법주, 배첩장, 승무, 살풀이춤, 서울새남굿윤도장, 남해안별신굿, 안동차전놀이, 황해도평산소놀음굿, 석전대제, 경기도도당굿, 예천통명농요, 옥장한장군놀이, 강릉단오제, 임실필봉농악, 사기장, 자수장, 각자장, 대목장, 완초장양주별산대놀이, 남사당놀이, 고성오광대, 이리농악, 동래야류, 처용무, 줄타기, 탕건장, 목조각장, 화각장갓일, 통영오광대, 북청사자놀음, 봉산탈춤, 수영야류, 단청장, 망건장, 양주소놀이굿, 진도씻김굿, 금속활자장은산별신제, 진주삼천포농악, 진주검무, 강령탈춤, 조선왕조궁중음식, 궁시장, 유기장, 동해안별신굿, 서해안배연신굿및대동굿, 명주짜기, 바디장, 염색장영산쇠머리대기, 소목장, 나주샛골나이, 은율탈춤, 고성농요, 발탈, 영산재, 한산모시짜기, 채상장, 가산오광대강강술래, 승전무, 밀양백중놀이, 진도다시래기, 문배주, 조각장, 장도장, 주철장, 남도들노래, 염장영산줄다리기, 광주칠석고싸움놀이, 악기장, 백동연죽장, 칠장, 하회별신굿탈놀이, 송파산대놀이, 나전장좌수영어방놀이, 학연화대합설무사직대제, 피리정악및대취타, 화혜장, 한지장, 구례향제줄풍류, 이리향제줄풍류, 기시지줄다리기위도띠뱃놀이, 제주칠머리당영등굿, 택견, 누비장, 낙죽장, 대금산조, 대금정악종묘제례, 종묘제례악, 가사, 경기민요, 선소리산타령, 두석장, 입사장서도소리, 가곡, 면천두견주, 침선장, 석장, 금박장 로써전통음악자료의기록및보존목적에충실하고, 관련연구자의학술연구자료로활용할수있도록했다. 1997년부터 < 이충선기악곡집 > 을시작으로해서 10년간매년정악, 민속악, 종교악중 1~3개분야의음반을출반했다. 이를정악, 민속악, 종교악의분야별로살펴보면, 정악은 < 봉해룡단소독주 > 를비롯해 11종 33 장, 민속악은 < 이충선기악곡집 > 을비롯해 28종 67 장, 종교악은 < 경기무악 > 을비롯해 4종 27장이있다. 마지막으로 2008년 < 제주도무가 > 까지 총 43종 127장 의음반을출반하고, 희귀전통음악출반 연구에관한 1차사업을종료하였다. 출반된음원자료는관련연구자나국악애호가들이쉽게활용할수있도록국립문화재연구소홈페이지 (http://www.nrich.go.kr) 에서 mp3파일로제공하고있다. 그간제작한희귀국악음반의자료목록은다음과같다. 2. 무형문화재아카이브구축 회귀국악음반관련기사 (1977 년 1 월 19 일경향신문 ) 희귀국악음반제작 1960~1980년대의명인들을현장조사및자료수집을통해서녹음자료 175종목 (1,040롤) 을확보하고있다. 이자료는우리전통음악에관한관심이비교적적을때, 현장에서살아숨쉬는자료를있는그대로기록하였고, 이제는현장에서찾아보기어려운자료라는점에서그가치를인정받고있다. 또한국악계에도알려지지않은자료및중요무형문화재보유자들에관한육성자료등이포함되어있어서관련국악연구자들도탐을내는귀중한자료이다. 이를효과적으로보존 관리하고, 폭넓게활용하기위한목적으로 1995년도부터디지털전환작업을실시했다. 그중에서국악관련학계에잘알려지지않았으며, 특별히희귀하다고판단되는음원자료를대상으로잡음을제거하는등음질보정작업을거쳤다. 이 회귀국악음반발간자료 154 155
제 3 장우리문화재지키고살리기 - 조사기록및국제교류 희귀국악음반제작목록 연도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소계 - 봉해룡단소독주 (2장 ) - 임석윤거문고독주 (5장 ) - 김성진대금정악 (3장 ) - 내포향제줄풍류 (1장 ) - 장사훈거문고독주 (2장 ) - 홍원기가야금독주 (5장 ) - 김태섭피리와생황 (3장 ) - 장인식거문고독주 (4장 ) - 김천흥해금독주 (4장 ) 정악민속악종교악비고 - 채정희가곡과가사 (3장 ) - 시창및송서 (1장) 11 종 33 장 - 이충선기악곡집 (3 장 ) - 황해도민요 (3 장 ) - 김봉업줄소리 (1 장 ) - 양소운배뱅이굿 (1장 ) - 송복산태평소독주 (1장 ) - 판소리고법 (7장 ) - 심상건가야금산조 (2장 ) - 강백천류대금산조 (1장 ) - 은산별신제 (1장 ) - 호남좌도농악 (2장 ) - 산조 (1장 ) - 해금시나위와산조 (1장 ) - 경기시나위와남도시나위 (1장 ) - 서도소리 (3장 ) - 강원도민요 (1장 ) - 강령탈춤 (2장 ) - 봉산탈춤 (2장 ) - 양주별산대놀이 (2장 ) - 은율탈춤 (2장 ) - 꼭두각시놀음 (1장 ) - 북청사자놀음 (1장 ) - 동래야류 (2장 ) - 수영야류 (1장 ) - 고성오광대 (1장 ) - 통영오광대 (2장 ) - 경상도민요 (8장 ) - 전라도민요 (7장 ) - 제주도민요 (7장 ) 28 종 67 장 - 경기무악 (4 장 ) - 양주소놀이굿 (5장 ) - 영남범패 (5장 ) - 제주무가 (13 장 ) 4종 27장 1 종 3 장 3 종 10 장 3 종 5 장 6 종 16 장 4 종 17 장 5 종 8 장 9 종 15 장 6 종 8 장 1종 8장 2종 12장 2종 12장 1종 13장 43종 127장 아카이브자료 중요무형문화재다국어영상물 (2009 년 ) 이두현기증자료 - 봉산탈춤조사모습 (1977 년 ) 아카이브관리급격한도시화나산업화를겪으면서우리문화전승주체의사망등으로민속문화가사라지고있는상황에서기초자료를수집함으로써소멸위기에놓인전통문화를보존하고자했다. 이에따라현지조사과정에서생산되는자료및수집자료등을보관하기위해서 1985년부터아카이브실을설치하고, 자료를각매체별, 년도별, 목적별등으로분류하여수집 보존 관리했다. 여기에는 1975년이후수집된각종시청각자료가정리되어있는데, 사진, 오디오, 영상자료중심이다. 초기의사진자료는주로인화사진, 필름, 슬라이드인데, 2004년부터 JPG, TIFF 등의형태로디지털사진자료로변환해서관리하고있다. 오디오자료는릴테이프, 카세트테이프, LP 등으로기록 보존되었으나, 최근에디지털자료로변환하여관리하고있다. 영상자료는릴테이프, 베타캠등으로기록 보존되었으나최근에는 CD, DVD 등의디지털형식으로변환하여관리 활용하고있다. 이렇게관리되고있는영상자료는보존관리에만그치지않고전통문화의보급과홍보를위해서도활용하고있다. 2007년에는공영방송인아리랑 TV와협약을체결하여전통문화의해외홍보를목적으로전세계 188개국에중요무형문화재 26종목을방영한바있다. 또한최근무형문화재에대한국민적인관심이급증함에따라 2008년에는공공성이확보된방송 3사 ( 한국정책방송, 예당아트 TV, 아르떼 TV) 에방송하도록협약을맺은바있다. 뿐만아니라전통문화의보급및해외문화행사의홍보자료로활용하기위해 2009년기제작된음악분야인 < 종묘제례악, 가사, 이리향제줄풍류, 경기민요, 대금산조 > 5종목을대상으로외국어판 ( 영어, 불어의나레이션및자막 ) 을제작한바있다. 구축자료의보존과관리 활용이지속적으로추진됨에따라우리실아카이브실이민속문화연구의자료센터로서그기능을수행하게되었다. 기증자료의관리우리문화전승자의사망등으로민속문화가점차사라지고있는급박한상황에서기초자료를수집함으로써차후전통문화를보존하고자하였다. 이를위해기초자료조사이외에원로민속학자및관련연구자들이그간수집한자료에관하여기증을받아기초연구자료를확보하는노력을기울이고있다. 전제주대박물관학예연구사고광민의소장자료와서울대명예교수이두현의소장녹음자료, 사진자료, 도서등을기증받아디지털로변환하여무형유산콘텐츠자료로확보했다. 2006년부터는기구축한콘텐츠자료를활용하여보고서및사진집등을발간하여보급하고있으며, 향후에도계속할예정이다. 기증자료는원로연구자들이구축한민속자 156 157
제 3 장우리문화재지키고살리기 - 조사기록및국제교류 료를통해서과거부터현재까지민속문화의변화추이를살펴볼수있는좋은계기가되고있다. 3. 우리문화재지키고알리기 - 북한및해외문화재조사, 국제교류 북한문화재조사와체계적정리 기증자료목록연도기증자료목록 2006 한국연극이면사, 제주도추는굿 2009 이두현기증사진집 1( 제의 ), 이두현기증사진집 2( 무속 1), 이두현기증사진집 3( 무속 2) 북한현지방문 오랜분단의현실에서장차있을통일에대비하여남북한문화의동질성을회복하고전통문화사 ( 傳統文化史 ) 를온건하게정립하고자 1984년부터북한의문화유산에대한자료를국내외관련기관이나학자를통해간접적으로수집하기시작하였다. 그후관계분야전문가로구성된북한문화재연구위원회를구성하여보다효율적이고전문적인자문과연구조사를실시하였다. 1997년도부터는북한의중요문화재를각분야별로도면 도판과함께해설한 북한문화재해설집 시리즈를발간하였으며, 그결과물로 1997년에 북한문화재해설집 Ⅰ집 ( 석조물편 ) 과 1998년 북한문화재해설집 Ⅱ집 ( 사찰건축편 ) 이발간되었다. 이러한해설집이외에도북한문화재관련최신자료의수집과정리를위해노력을기울였다. 2000년대에들어오면서국제정세의변화와남북한관계가개선되어상호교류의폭이넓어지는등우호적인분위기가조성되었다. 이러한흐름에편성하여국민의북한문화재에대한다양한요구수용에부응하고급격하게변화하는문화재환경의수요에대응하고자보다적극적이고계획적인자료확보및그에따른활용방안을강구하기에이르렀다. 2000 년대부터국내민간단체나북한방문언론인등을통해북한문화재관련자료를확보하기에이르렀다. 특히북한의문화재지정및관리체계를파악하기위한노력과더불어북한의지정문화재자료확보에노력을기울였다. 또한북한의조선미술박물관소장, 평양중앙역사박물관소장문화재사진을확보하기에이르러북한문화재전모를파악하고자하였다. 2004년 8월부터인터넷자료관 북한문화재자료관 을개관, 운영하기시작했다. 고구려궁성을찾아서 등관련콘텐츠 4종을개발 구축하고, 북한의주요유적및유물 4,000여종을 DB 로구축하여국민에게서비스하고있다. 2006년도에는 북한의지정문화재 ( 국보유적편 ), 2007년도에는 북한문화재관계문헌휘보증보판 과조선미술박물관소장회화등필름자료 650점을확보하고, 관련전문가의검토를거쳐 사진으로보는북한회화 ( 조선미술박물관편 ) 을발간하였다. 한 일문화재보존환경공동연구 이두현기증자료 - 장승제 ( 경기도광주엄미리 /1976 년 11 월 ) 산성비, 산성안개, 대기오염등과같은환경문제는인간은물론문화재손상에도상당한영향을미치고있다. 이에국립문화재연구소는세계문화유산보존에심각한영향을미치는환경오염의위기적상황을감안하여 1995년부터한 일간 문화재에있어환경오염 158 159
제 3 장우리문화재지키고살리기 - 조사기록및국제교류 의영향과수복기술개발연구 에대한공동연구방안을수립하고일본동경국립문화재연구소와교류협약체결및상호간의지속적인교류를진행하고있다. 1차협약체결 (1995~2000년 ) 에따른공동연구에서는환경오염평가용옥외폭로대설치, 기상관측, 환경오염물질분석등을통해환경오염이문화재재질에미치는영향및환경오염에손상된문화재수복재료및방법에대한연구를수행하였다. 2차협약체결 (2000~2005년) 기간에는중원미륵리사지를중심으로야외석조문화재의손상원인및손상에영향을미치는보존환경조사를실시하였다. 또한레이저크리닝을이용한오염물질제거방안에대한연구를수행하였다. 3차협약체결 (2005~2011) 에따른공동연구에서는서산및태안마애삼존불상과같은야외석조문화재의보존에있어보호각의실효성제고를위한환경조사를실시하는등보존환경개선을위한기초연구를수행하고있으며장기보존을위한보존처리재료및방법에대한현장적용실험연구등을실시하고있다. 또한 3차에걸친협약체결에따른공동연구수행뿐만아니라양국간공동연구자가상호방문하여공동연구에대한협의, 문화재보존과학분야에대한기술교류를매년 2회이상꾸준히진행하고있다. 2002년부터는공동연구대상문화재에대한연구결과및양국의중요연구사례발표등공동연구성과에대한연구발표회를연 1회한국과일본에서교대로개최하고있다. 문화재연구국제학술대회 검토하는계기를가졌다. 이로써동아시아철기문화의위치를짚어보고앞으로의연구방향을제시하는기회가되었다. 1997년에는문화유산의해를맞이하여 문화유산의해조직위원회 와공동으로매장문화재발굴제도개선방안수립을목적으로하는학술대회를 6월 10일부터이틀간세종문화회관대회의장에서개최하였다. 매장문화재발굴반세기-회고와전망 이라는주제로개최된이학술대회는 1946년경주호우총발굴을효시로광복이후우리학자들의손에의해발굴된 1,500여개소의유적발굴에대한정리 회고의시간을갖고, 현행발굴제도의제반현황과관련된주제를 11개로세분하여문제점을지적, 토론함으로써개선방향과대책을수립하였다. 이학술대회는전국의원로 중진급은물론, 소장고고학자들과발굴현장실무자및각급박물관의책임연구원, 그리고중앙 지방자치단체의매장문화재관계공무원들을망라한 25명의발표와약정토론및종합토론을실시하였다. 일반관람객을포함한 700명이상이참석함으로써역대매장문화재발굴과관련한국내학술대회중규모와내용면에서최대의학술토론장으로기록되었다. 1998년학술대회는 1996년 동아시아의철기문화-도입기의제양상 에이어 동아시아의철기문화-주거및고분을통해본정치 사회상 이라는주제로국립민속박물관대강당에서열렸다. 이대회에서는동아시아지역에있어서철기문화와관련된고고학연구자료와의견에관한폭넓은교류가이루어져이분야의연구를더욱향상시키는계기가되었다. 특히 한반도철기시대에대한개념화시도 는우리나라에서는처음으로시도되었던개념화작업으로서, 향후활발한연구가이루어질수있는계기를마련하였다. 1995년 10 월 22일부터 10월 25 일까지열린국제학술대회제4회대회는 동아시아의청동기문화 를주제로하고묘제와주거를부제로개최되었다. 국립민속박물관대강당에서개최된제4회대회에서는청동기시대사회상과성격을파악하려는시도가돋보였는데, 특히후기지석묘사회의성격을출토유물과함께검토하여, 지석묘는부족장의무덤이아니라전사자들의기념물로서영조되었다는새로운학설이제안되었으며, 청동기시대의경제생활, 특히농업 수렵 어업에대한종합적인분석이이루어졌다. 또중부지방의중도유적을중심으로하여서로상이한성격의유적인묘제와주거를동시에비교 고찰함으로써당시의사회상을살펴보는시도도이루어지는등, 청동기시대의사회상을파악하려는다양한연구가시도되었다. 아울러한국청동기시대입지환경과지역적통합을고찰하여 5가지유형의유적성립환경을고찰한연구, 시베리아의기원전 4000년말엽에서기원전 8세기에이르는청동기및초기철기시대의매장양식을잘보여주는최근 50여기의무덤발굴결과에대한소개는한국청동기문화연구에큰도움을주었다. 1996년에는 아시아의철기문화-도입기와제양상 이라는주제로 10월 23 일부터 10 월 26 일까지개최하였다. 이대회에는중국 일본 러시아와국내에서철기문화를전공하는고고학자들이최근까지의연구성과를발표하였고, 토론을통해서로의견해를교환및 콕샤로프카 -1 평지성쪽구들건물지굴뚝부분 중국고조선계비파형동검 160 161
제 3 장우리문화재지키고살리기 - 조사기록및국제교류 문화재연구국제교류및해외유적조사 1990년대후반에들어서면서우리나라의역사와밀접한관련이있는중국 일본 러시아와국제적인인적교류와협력을추진하였다. 문화재관계자의자질향상과새로운정보의수집및교류증진을통해우리문화유산의보존과학술연구발전에기여하고자문화재관계전문가를파견, 초청하였다. 일본과는매년 2~3명씩 10 일정도상호인력을파견해오다가 1995년부터는국립문화재연구소와나라국립문화재연구소및후쿠오카현교육위원회사이에협의한문화재연구자상호교류원칙에따라각 1명씩약 3주간의일정으로교류를실시하였다. 러시아와도 1992년 7월러시아과학원시베리아분소와협의한상호교환프로젝트에관해협의하고 1995년국제교류협력사업의일환으로적극적인교류를실시하였다. 또중국과는 1999년 7 월중국사회과학원고고연구소와문화재연구교류협의서를체결하여교류의길을놓았다. 해외유적조사는중국동북 3성및연해주일대에소재하는우리역사관련문화유산의현황및실태를조사하여향후보호 관리및학술연구의기초자료를확보하고자한것이다. 이조사사업은중국소재고구려 발해관련문화유적에대한현황조사로서, 우선기본현황을파악하여향후보존정비에필요한자료를확보하는데그목적이있었다. 이조사사업은 1994년부터 2000년까지 1차 7개년계획으로국립문화재연구소유적조사연구실이실시하였으며, 첫해사업인 1994년도조사는 10월 19 일부터 11월 11 일까지중국길림성과요녕성을대상으로실시하였다. 그결과길림성집안시소재장군총등 26 개소, 길림성길림시소재용담산성 1개소, 요녕성환인현소재오녀산성등 9개소등총 34 개소의고구려유적을현지조사하여기본적인보존실태및관리현황을파악하였다. 제2차년도인 1995년조사는 11월 24 일부터 12월 24 일까지요녕성및산동성소재유적을대상으로실시하였는데, 이조사사업의기본목적인고구려 발해관련유적조사를실시하지못하였다. 이른바 조선일보사건 이후중국당국이한국인개인또는단체들이동북 3성지역을답사할경우감시를강화하고, 특히길림성지역에대한고구려 발해관련유적조사를하기위해서는반드시국가문물국의허가를받도록하였기때문이다. 따라서중국당국이민감하게여기는고구려 발해유적은추후중국측입장이완화되거나바뀌면계속하기로하고, 중국문화전반에대한이해와관계당국과긴밀한관계를맺는차원에서중국의주요문화유적을대상으로현황조사를실시하였다. 조사결과구석기유적 1건, 신석기유적 4건, 청동기유적 3건, 릉 묘유적 10건, 고건축 ( 建築 ) 유적 8건, 성 ( 城 ) 유적 3건, 불교유적 7건등총36개소유적을현지조사하여유적의기본적보존실태와관리현황을파악하였다. 조사된유적중통일신라시대해상왕국을꿈꾸었던장보고와관련된적산법화원유적과신라말선문구산 ( 禪門九山 ) 의하나인성주산문의개조 ( 開祖 ) 무염스님과관련있는것으로추정되는무염사 ( 无染寺 ) 터는우리역사와관련된유적이어서특별히현황에대한상세한조사를실시하였다. 특히적산법화원은 중국과의문화재조사연구협력강화 실측조사를실시하여배치도를작성하였다. 또한한 러공동발굴조사는러시아극동지역소재한민족관련유적에대한발굴조사를러시아과학원시베리아지부고고학민족학연구소와공동으로실시하고있다. 지금까지아무르강하류수추섬유적 (2000~2002년 ), 연해주불로치까유적 (2003~2005년) 을발굴조사한바있으며, 2007년도에는아무르주트로이츠코예유적을발굴조사하여말갈발해고분 18 기를비롯하여신석기시대소형수혈 1기를조사하였다. 이러한발굴결과는말갈발해영역및문화변천을규명하는데중요한자료가되었다. 더불어러시아과학원극동지부역사학고고학민속학연구소와공동으로실시중인한 러공동연해주고고유적학술조사는러시아연해주에분포하는한반도관련유적에대한공식적인분포현황조사이다. 2007년에는연해주남부지역과중 러국경지대를중심으로조사를실시하여바라바시발해마을유적등을새롭게발견하고, 스타로레첸스코예발해평지성등 80 개유적에대한분포현황조사를완료하였다. 또한동해안에위치한소콜로프카고분군에서는초기철기시대제사유구를발굴조사하여한반도와연해주의문화적상관관계를밝힐수있는중요한고고자료를확보하였다. 본조사는옥저 발해등연해주소재한반도관련유적을체계적으로파악하고, 나아가올바른역사정립을위한자료로활용하는데그목적이있다. 162 163
제 4 장 21 세기문화의시대, 문화재의가치를높이다 제 4 장 21 세기문화의시대, 문화재의가치를높이다 1. 유적발굴지역의확대및조사방향의다각화 서해 5 도신석기시대유적최초발굴조사 - 중부서해도서지역학술발굴조사 백령도 연평도지역은위치상황해도와인접하고있어북한소재신석기유적과의관계확인및당시어로 해상활동을파악해볼수있는중요한곳으로인식되어발굴의필요성이꾸준히제기되어왔다. 하지만 2000년대이전까지대부분지표조사에머물러정확한유적성격을파악하는데어려움이있었다. 이과정에서 2001년국립문화재연구소의 군사보호구역내문화유적지표조사 내용을 1982년서울대학교가실시한 백령 연평도의즐문토기유적 과비교해본결과, 1982년당시 16 개소에이르던패총이 2001년에는 9개소만남아있음을확인하게되었고, 그나마남아있는패총도인위적 자연적요인으로결실이진행되고있음을확인하게되었다. 이에따라이들패총이더이상훼손 멸실되기전에유적보존대책을수립하고, 보다정확한유적성격을파악하기위해연평도에남아있는패총중훼손 멸실의가능성이높은유적을대상으로발굴조사계획을수립하게되었다. 그일환으로 2000~2001년에는 소연평도패총, 2002년에는 대연평도모이도패총, 그리고 2003년에는 대연평도까치산패총Ⅰ 을발굴하게되었다. 소연평도패총은분리된 2개의패각층을확인하였고, 층위는크게 7개층으로서패각층을포함한 2개층은신석기시대유물을포함하고있다. 패각층은부식토바로아래에형성되어있으며, 패각층형성이전의구릉에는신석기인들의생활면으로추정되는암갈색점질토층과암황색사질토층이퇴적되어있고, 이두개의층은순패층형성과거의시간차없이퇴적된것으로생각된다. 출토유물은심발형토기, 호형토기, 완으로서대부분이심발형토기가차지하며, 상층으로갈수록점차호형토기가증가한다. 문양은횡주어골문, 단사선문, 사선대문, 종주어골문, 격자문, 능문, 방점문등으로상층으로갈수록다양화되고, 무문화되는양상이나타난다. 특히제2패총에서는제1패총과는달리새로운기종과문양이출현하고있어제1패총 서해 5 도지역패총 보다장기간사용되었을가능성이있으며, 또한제1패총은출토된토기의양에비해패각층의두께가제2패총보다더두꺼워두패총의사용용도가달랐을가능성도배제할수없다. 이가운데중서내륙지역및남해안지역과관련된토기가출토되고있어, 양지역간의문화적상관관계를밝힐수있는중요한자료로평가되며, 학계의주목을불러일으켰다. 아울러다른중부서해안지역패총유적에비해 300여점에달하는많은그물추와생선뼈가출토되었다. 저장용기로추정되는구경 35cm가넘는대형토기가확인되어다른패총과는성격이다른점이확인됨으로써신석기시대생계경제연구에중요한자료로평가되고있다. 한편유적의패각층내에서수습한패각을이용하여방사성탄소연대측정을실시한결과제1 패총은 B.C.2860~B.C.2280, 제2패총은 B.C.2860~B.C.2400의절대연대가산출되어신석기시대중기말에서후기초에해당하는연대를보인다. 대연평도모이도패총은직경 15m 내외의크기로패각층의두께는최대 6m에이르는규모로서, 신석기시대주거지 2기, 야외노지 8기가확인되었다. 주거지는이미퇴적된패각을파낸다음가장자리에벽석을돌리고내부에돌돌림노지를정연하게만든구조적특징을보이며, 단면층위는패각의순차적인퇴적상태를나타내고있다. 유물은중부서해안에서확인되는침선문계즐문토기가다수를차지하며, 황해도지역과관련된압날계능문, 파상문토기가 3점출토되었으며, 조사된중부서해안지역의패총유적과는다르게석기의출토양이많은점은조사유적의성격이다른패총과는차별적인것으로판단되어주목된다. 아울러패총내에서출토예가많지않은석촉이출토되었고, 한개체분의사슴뿔이출토된것으로보아신석기인들이어로에만전념한것이아니라수렵도함께병행했음을알수있다. 164 165
제 4 장 21 세기문화의시대, 문화재의가치를높이다 대연평도까치산패총Ⅰ은약 50여평을발굴조사한결과크게 4개의유물포함층이퇴적되어있음을확인하였고, 주거지 1기, 야외노지 5기가발견되었다. 토층은구릉상부에서흘러내리면서형성된갈색마사점토층이조사지역전면에걸쳐확인되고있으며, 이층을경계로층위간의퇴적순서를구분할수있고, 이에따라즐문토기의편년을세분화할수있는중요한자료를얻을수있었다. 출토된유물은중부서해지역의신석기유적과는많은차이를보이는데, 주로중부서해지역은침선계횡주어골문이대다수를차지하는데비해이곳에서는압날계단사선문과능문, 파상문이주류를이루고있다는점에서커다란차이가있다. 이점은이곳이인접한황해도지역과더욱밀접한관계가있었던것으로, 북한에서출토된즐문토기의문양상과상호비교할수있는좋은자료로평가된다. 또한이와함께구분계토기및종주어골문의존재, 태토에활석과석면이혼입된토기의존재등을고려할때, 이유적이중부서해지역에서확인된신석기시대유적들보다상대적으로가장이른것으로판단된다. 특히패각내부에서노지와함께다량의동물뼈 조류뼈등이일괄출토되어당시생계양식이어로활동뿐만아니라수렵활동도왕성하게이루어졌음을확인되어신석기시대문화상을연구하는데중요한자료가될것으로생각된다. 이발굴조사에서밝혀진많은양의유물은그동안발굴조사자료의빈곤으로어려움을겪고있는중부서해지역신석기시대의고고학적연구에있어토기문화의변천상과신석기인의생계유형복원을위한중요한자료를제공할것으로보인다. 층을 3~5cm 두께로깐위에 30 120cm 크기의장대석을놓았다. 장대석위에는하단의장대석과같은장대석을모로쌓아뒷물림을하였다. 금천교남단의하부구조는, 회색뻘흙층위에마사토를 30~40cm 정도깔아지정을한뒤, 지정 ( 地定 ) 말뚝을박아, 그윗면에잡석을 2~3단놓아기초를마련하였다. 지정말뚝의범위는남북 20m, 동서 9.2m의범위로, 홍예내부 8m 범위와홍예남단외부의 12m 에걸친구역이다. 현존하는금천교의남북폭은 12.5m, 동서길이는 12.9m이다. 출토유물은 15~16세기의청자및백자편다량과 19세기의백자편, 일제시기의자기편, 禁 명문와편 ( 銘文瓦片 ) 1점등다량의와편이출토되었다. 이와관련하여 2001년 11 월 5 일현장에서개최한자문위원회의결과, 금천교가이설된것에는참석위원들의대부분이의견일치를보였으나, 이설시기와원래위치등의확인을위한추가정밀조사의필요성이제기되었다. 조선고적도보에실린동궐도 창덕궁금천교주변발굴조사, 15~16 세기의청자및백자편다량출토 금천교는태종때 (1411) 에건립된것으로, 궁궐내에세워진가장오래된석교 ( 石橋 ) 로전해지고있다. 현존하고있는금천교는진선문에서약간북으로비스듬하게위치하고있다. 그러나 조선고적도보 ( 朝鮮古蹟圖譜 ) 에실려있는사진과동궐도를비롯한각종문헌자료등에의하면, 진선문과직교하고있는것과현재와같이비스듬하게놓인두종류자료가있어, 오래전부터일제시대에이설되었다는설이제기되어왔었다. 2001년도부터금천교주변의어구에대한정비복원공사를실시하는과정에서, 금천교남편에서장대석렬과지정말뚝등이노출되어, 금천교의원래위치가현존위치의남편에위치해있었을가능성이제기되었다. 이에금천교의이설여부와, 이설되었을경우원래위치에대한정확한조사의필요성이제기되어, 종래의설에대한확인및복원정비에필요한기초자료를수집하고자 2001년 9월 20 일부터발굴조사를실시하였다. 발굴조사결과, 금천교홍 ( 虹 ) 내부에는배수를위한암거 ( 暗渠 ) 시설이확인되었는데, 암거의길이는 10m, 폭은 2.4m, 배수구의폭은 45cm였다. 홍예의지대석은마사토 ( 磨砂土 ) 지정 ( 地定 ) 위에 20~40cm 크기의잡석을깐후, 잘게깬돌과모래를혼입한몰타르 고려왕릉 ( 석릉 ) 출토, 비색청자 고려왕릉 ( 석릉 ) 출토, 비색청자 동쪽홍예내부암거시설노출상태 남한최초고려왕릉발굴조사출토비색청자공개국립문화재연구소는강화도고려왕릉인석릉의발굴조사출토유물을 2002년 1월 22일공개하였다. 석릉은인천광역시강화군양도면길정리소재고려제21대희종 (1181~1237, 재위기간 1204~1211) 의능으로, 사적제369호로지정 관리되고있다. 발굴조사는 2001년 9월 26 일부터 12월 24 일까지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실시하였다. 이발굴조사로출토된유물중기형이복원되는것은청자잔탁 3점을포함하여 20점이며, 이외에도많은양의청자편과철제 목제유물이출토되었다. 또한유물은봉분주변조사에서보다석실내부조사에서많은양이확인되었으며, 봉분주변에서출토된유물의경우도많은양의유물이도굴갱근처에서수습되었다. 166 167
제 4 장 21 세기문화의시대, 문화재의가치를높이다 석실내부는조사당시이미도굴된상태였는데, 석실의바닥아래에이르기까지철저히도굴이이루어져석실내부시설이어떤형태를갖추고있었는지확인하기힘들정도였다. 또한바닥시설로사용된것으로추정되는할석, 관주변을채워넣은것으로추정되는할석, 그리고석실내부로쓸려들어온흙등이도굴로인해서완전히뒤섞인채로석실의동벽과북벽에붙어높이약 1m 정도로쌓여있었다. 석실내부에서출토된유물의대부분은이교란층내에서확인되었다. 출토된유물은청자가가장많은양을차지하고있다. 청자잔탁 3점을비롯하여많은양의청자 ( 편 ) 가수습되었다. 기종은완 대접 접시가많은편이며, 그외에잔과잔탁, 매병 ( 梅甁 ), 호 ( 壺 ), 뚜껑 ( 蓋 ) 등의종류가출토되었다. 이중잔탁 1점과일부편을제외하고는대부분석실내부에서출토된유물이다. 석릉에서출토된청자 ( 편 ) 들은전성기비색청자의전통에상감및퇴화등의다양한기법이시도되기시작한 12세기말엽에서 13세기전기에이르는청자의특징을잘보여주고있다. 또한이를통해서석릉이축조된것으로알려진 13세기전기에출토된청자의문양과시문기법, 태토및유약, 기형등이시기적으로일치하는것을확인할수있다. 따라서이발굴조사로능의축조연대를비정할수있는학술적인자료를획득하였으며, 발굴조사된석릉이사료상의석릉과일치할가능성이매우높다는적극적인근거를확보하는성과를거두었다. 개성고려궁성유적남북공동발굴조사남북공동발굴조사는 2007년부터북측의문화보존관리국및조선중앙역사박물관과함께개성고려궁성 ( 宮城 ) 유적에대하여실시중이다. 남과북은 2007년 5월에서 11월사이 120일에걸쳐궁성유적의중심인회경전 ( 會慶殿 ) 영역의서편구역 30,000m2에대한시굴조사및일부구간에대한발굴조사를실시하였다. 조사결과입지와성격에따라각기중심축을달리하여조성된다수의건물지가드러나회경전서편구역의건물배치양상을확인할수있었으며지금까지확인되지않았던 亞 자형건물지의구조상특징을확인할수있었다. 그리고조사구역의서북편에위치한정면 5칸측면 3칸인 17 호건물지는 고려사 에기록된태조 ( 太祖 ) 와역대왕들의진영 ( 眞影 ) 이봉안된경령전 ( 景靈殿 ) 으로추정된다. 조사에서출토된가장특징적인유물은길이가 65cm에달하는용도를알수없는원통형청자로서지금까지알려진바없는매우특징적인유물이다. 그리고암 수기와의등문양에인장이찍힌약 100여점에달하는인장와 ( 印章瓦 ) 가출토되어고려시대기와연구에새로운자료를제공하고있다. 이후로진행될연차적인발굴조사를통하여고려궁성및고려시대도성제연구의새로운방향을제시할다양한자료를확보할수있을것으로기대한다. 고고학사전 2. 연구조사, 기록으로빛을더하다 10 년동안의노력으로고고학의지평을넓히다 - 국내최초의한국고고학사전발간 2002년 1월, 문화재연구소 1992년부터 10년간의노력이담긴 한국고고학사전 을국내최초로발간하였다. 한국고고학사전 은광복이후꾸준히성장해온한국고고학계의연구성과를총집대성하고, 우리문화재에대한일반인들의이해의폭을넓힐수있도록노력하였다. 지난 1992년부터한국상고사학회와함께 2년간의용어선정작업, 7년간의수정 보완작업을마무리하고, 2001년에는연구소에서원고교정및도면 도판등의편집, 관계전문가들의분야별감수를받아발간을완료하였다. 한국고고학사전 에는한국고고학을이해하는데필수적이면서도가장기본적인용어에대한정의와함께그간우리나라에서발굴조사된중요유적들에대한개괄적인설명이수록되어있으며, 또한한국고고학과직접적으로연관되는일본 중국 러시아는물론세계각지의중요고고학이론및관련유적들도함께소개하였다. 또고고학일반과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고구려및발해시대, 백제시대, 신라시대등총 8개분야 1,669 항목에대한설명과용어의기본적인개념을이해하는데필수적인도면과도판을충실히수록하였다. 아울러개념설명, 최신고고학이론과방법론소개, 국내외중요유적의발굴성과정리등의원고집필에전문고고학자를주축으로한 40 여명의분야별전문가들이참여하였으며, 최종적으로 11명의원로고고학자들로부터분야별감수과정을거쳤다. 상하 2권 1질로도면 도판 856매를비롯, 총 1,345쪽에이르는방대한분량으로서, 모든항목은한글과원어를병기함은물론한글발음과한자 원어발음을별도로색인화하여쉽게찾아볼수있도록하였다. 아울러독립된항목외에도필요하다고판단되는용어는색인에추가하여총 2,677개용어에대한관련내용을참고할수있도록하였다. 한편각항목마다설명문말미에기초적인보고서부터최신의논문까지참고문헌을게재하여보다상세한정보를제공하고자노력하였다. 한국고고학사전 은국공립도서관및공공도서관, 대학도서관, 박물관, 고고학관련연구기관등에배포되어활용되었으며, 국립문화재연구소홈페이지 (www.nrich.go.kr) 에전문을수록하여누구든지자유롭게검색, 활용할수있게함은물론, 이미발간된 전국문화유적발굴조사연표 와링크하여관련정보를상세히제공하였다. 168 169
제 4 장 21 세기문화의시대, 문화재의가치를높이다 3. 문화재, 문화재연구소에서첨단과학을만나다 통일신라금속공예기술의정수 - 감은사지동삼층석탑내발견금동사리장엄구보존처리 2001년감은사지동삼층석탑금동사리장엄구의보존처리를완료하였다. 이사리장엄구는 1996년 4월감은사지동삼층석탑 ( 국보제112호 ) 해체보수과정에서발견되었다. 발견당시심하게파손되어있어현장에서우레탄폼으로수습한후보존과학연구실로이송하였다. 사리장엄구는외함과내부의사리기로구분되어있는데내부에안치되는전각형사리기는전체높이 13.4cm로대좌위에탑신을안치하고가운데에사리병을놓았다. 사리기에는승상, 사자, 용, 사천왕등의장식과함께맨위에는천개장식을두어불상, 비천상, 연화문, 당초문등을투조하였다. 천개에는영락을늘어뜨려화려함과정교함의극치를보여준다. 특히이사리장엄구에서는길이 0.5~0.7cm의금제풍탁이유물수습과정에서발견되었는데, 0.3cm의금판을맡아몸체를만들고그안에금사로고리를만들어혀를달아움직일수있게하였다. 사리장엄구보존처리에는 4년여의기간이소요되었다. 우레탄폼으로수습한유물을일일이해체하여파편들을수습하고흙과부식물등의이물질제거, 탈염처리, 강화처리, 접합복원등의순으로보존처리를진행하였다. 유물의제작기술을알기위한분석조사도병행하였는데제작에사용된금의순도가매우높고도금단면도매우치밀하여고도의기술로제작된것을알수있었다. 누금기법, 땜기술적용등현재의기술로는재현하기어려운수준높은기술을보여주었다. 이사리장엄구는 2002년 12 월보물제1359호로지정되었다. 고려말금속공예연구에중요한자료 - 선암사금동팔각원당형사리탑보존처리 2003년 4월에는보물제955호선암사금동팔각원당형사리탑의보존처리를완료하였다. 금동팔각원당형사리탑은전남순천시승주읍에소재하는선암사삼층석탑 ( 보물제 395호 ) 동탑을 1986년 8월해체수리하면서발견되었고, 1988년보물로지정되었다. 선암사소장유물인금동팔각원당형사리탑은유물표면의부식물로인해세부문양이잘나타나지않고또한부식의진행이관찰됨에따라문화재위원회심의를거쳐 2001년 11 월부터 2003년 3월에걸쳐보존처리를실시하게되었다. 보존처리내용은사리탑표면의부식물과이물질을에틸알코올과소도구로제거하고, 벤조트리아졸 (Benzotriazole) 용액으로부식을억제시켰으며, 마지막으로합성수지인파라로이드 NAD-10(Paraloid NAD-10) 으로재질을강화시켰다. 또한유물의합금성분을확인하기위해비파괴분석조사를실시한결과구리와금 은 수은이검출됨으로서수은아말감법에의해금도금된것으로판명되었다. 금동팔각원당형사리탑은전체높이 6.0cm, 연화좌높이 2.7cm, 지붕높이 1.8cm이다. 지붕과몸체는붙어있으나연화좌는분리되며연화좌위에팔각원통형의수정제사리기가꽂히도록되어있다. 연화좌는 3겹의연꽃으로이루어졌고몸체표면에는화문 ( 花紋 ) 이장식되어있다. 이사리탑의보존처리결과유물의부식억제와함께외부부식물의제거로섬세한세부형태를알수있게되었고, 성분분석에의해도금방법을밝힌것이라할수있다. 이사리탑의제작시기는 14세기경으로추정되고있으며, 고려말금속공예연구에중요한자료가되고있다. 무한한정보가담긴유전자분석을통한고고유물의재발견 - 아산명암리유적출토인골 DNA 분석 감은사지금동사리함보존처리 2003년 6월 5일에는충남아산시탕정면명암리유적출토인골에대한 DNA 분석결과를발표하였다. 지난 2000~2001년충남대학교박물관에의해발굴된이유적의제9지역에서신석기 ~ 조선시대에이르는유물 주거지 건물지등이확인되었다. 또한고려후기 ~ 조선초기에조성된토광묘 49기가발굴되어많은인골이출토되었다. 최근고 DNA 분석은 DNA고고학 으로불릴정도로고고과학분야의새로운연구방법으로각광받고있는데형질인류학과고고학등기존의형태분석과달리분자유전학적연구방법을통해성별, 혈연관계, 매장양식등많은고고학적정보를객관적이고도과학적으로밝혀주고있다. 우리나라에서는지난 1999년국립문화재연구소에의해나주복암리 3호옹관인골에대한 DNA 분석이국내처음으로실시되었으며, 약 1,500년전매장된옹 170 171
제 4 장 21 세기문화의시대, 문화재의가치를높이다 관인골 2구의성별및모계혈연관계를과학적으로밝혀냄으로써당시매장관습에대한새로운연구방향을제시한바있다. 이분석은아산명암리토광묘에서출토된 21구의인골및치아를대상으로세포핵및미토콘드리아 DNA 분석을실시하였다. 세포핵 DNA 분석결과 3구의인골이친족관계임을밝혔으며미토콘드리아 DNA 분석을통하여 2구의인골은모계 ( 母系 ) 혈연관계가성립됨을확인할수있었다. 고고학발굴을통해출토되는고인골, 동물뼈, 식물유체등고대유기물 ( 有機物 ) 에남아있는 DNA에는무한한정보가담겨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과거에서현재에이르는한민족의유전정보를축적 자료화하기위하여한반도출토고인골에대한 DNA 분석을꾸준히수행하고있다. DNA 분석기술의향상을도모하고계속적인연구를통해고대한민족의유전학적기원과이동경로, 농경문화의성격과현대한국인과의유연 ( 緣 ) 관계를밝혀나가는노력을계속하고있다. 도 토기산지에관한자연과학적정보분석연구 문화재보존용방충방균제 ( 보존, BOZONE) 개발우리선조들은생물피해로부터문화재의손상을방지하기위해천연식물들을이용해왔다. 특히책을보호하기위해서석창포, 천궁, 운향, 연초, 쑥, 장뇌등을이용하였고황련, 상치, 촉산등의염색을통해서의류의충해를방지해왔다. 또한복장유물에첨가된식물체, 오향 ( 청목향, 정향, 곽향, 침향, 유향 ), 오곡 ( 보리, 기장, 벼, 녹두, 삼씨 ), 오약 ( 인삼, 감초, 계심, 아리, 부자 ) 등은생물학적피해로부터불상내부의복장유물을보존하는데기여하였을것으로생각된다. 이러한점에착안해문화재보존용방충방균제개발을위한연구에착수하였으며전통약재및향신료들중에서방충방균에탁월한향 ( 香 ) 성분을추출하였다. 이렇게추출된향성분은 ( 주 ) 한켐과의공동연구를통해문화재보존용약품 Bozone 으로상용제품화하였으며 2004년문화재보존용방충방균제로특허등록 ( 제0421538호 ) 되었다. 방충방균제 Bozone 의제품화는그동안보존관리가어려웠던섬유류나목재류, 고문서, 서화류등을보관하는수장고나서고, 전시실내에간단히설치함으로써문화재를충균해로부터안전하고손쉽게보존할수있다는장점이있다. 또한인체및환경오염의우려가없는것으로확인되어문화재보존을위해다양한분야에서활용되고있다. 한반도이남출토고대도 토기의산지및이동경로를확인할수있는자연과학적정보를체계적으로확보하기위하여 2000년부터 2002년까지 3년동안전국요지 ( 窯址 ) 30 곳에서채취한도 토기시료 700여점을중심으로중성자방사화분석 ( 中性子放射化分析 ) 을통한산지추정연구를실시하였다. 조사대상은경남 5곳 ( 토기 5), 경북 5곳 ( 토기 4, 자기 1), 전남 8곳 ( 토기 4, 자기 4), 전북 3곳 ( 토기 1, 자기 2), 강원 6곳 ( 토기 1, 자기 5), 충청남북 3곳 ( 토기 3) 등전국적인지역분포를고려하였다. 도 토기유물의소성온도, 제작기술및사용원료를규명하는분석방법은일반적으로유도결합플라즈마발광분석, X선회절분석, 편광현미경분석, 시차열중량분석등다양한과학적재질분석이동시에적용된다. 특히이연구에활용된중성자방사화분석은시료에방사능을조사 ( 照査 ) 한후방출되는핵종을측정하여시료중에함유된특정원소를정성 정량하는분석기술로서, 도 토기제작에사용된태토 ( 胎土 ) 의희토류 ( 希土類 ) 미량( 微量 ) 원소에관한지질학적정보를확보하고, 통계학적으로상호연관성및산지별분류가가능하도록했다. 그결과경남의 5곳은 4개집단 ( 정확도 95%), 경북의 5곳은 3개집단 ( 정확도 97.2%), 전남의 8곳은 5개집단 ( 정확도 88.5%), 전북의 3곳은 3개집단 ( 정확도 97.1%), 강원의 6곳은 5개집단 ( 정확도 92.6%), 충청남북의 3곳은 3개집단 ( 정확도 95.8%) 으로분류되는것을알수있었다. 아산명암리유적인골 DNA 분석장면 172 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