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년이베리아반도및모로코여행기 (2 편 : 스페인안달루시아지방 -1 편 ) 12월 28일 ( 수 ), 셋째날지브롤터해협을건너스페인안달루시아로!!! ( 타라파 론다 - 미하스 ) 오늘은북아프리카를출발해지브롤터해협을건너스페인과포르투갈이자리잡고있는유럽의이베리아반도로가는내게있어역사적인날이다. 또한이슬람세력이이베리아반도 ( 스페인 ) 에서마지막까지꽃피웠다는안달루시아지방을내눈으로직접느껴보는날이기도하다. 오전 5시기상하여 6시에아침식사를한후, 7시에호텔을출발하였다. 약 15분후항구에도착하여 8시배를타려고하였으나, 풍랑으로배가출항할지모른다고하며기다리라고하였다. 기다리는동안항구주변을살펴보니, 이곳이 700년간스페인정복을위한이슬람세력의출발지였으며, 항해시대에지중해와대서양을연결하는통로로서아프리카대륙에대한유럽각국의교두보역할을하였던곳이라그런지옛성곽이남아있었으나, 현재모습은전체적으로아름다운해변도시라는인상이들었다. 7시 30분쯤예정대로출항한다고하여수속을밟기시작하였다. 이른아침이고관광비성수기때라서그런지페리를타려는손님이별로없어빠르게출국수속을할수있었다. 그런데관광객인우리일행은별문제없이출국심사를통과하는데반해, 모로코인들에대해서는엄격히심사가이루어지고있어, 역시밀입국과같은문제가존재한다는것을느낄수있었다. 8시에고속페리에승선하였다. 우리가탄배는 HSC Algeciras Jet 호로우리나라고속페리와달리선실이라운지식으로안락하고, 인간중심적이라는느낌이들며, 손님보다는배와같은자본재를자본주의의극을추구하는콩나물시루같이보고, 요금도비싸게받는우리나라시스템에대한인식이바뀌었으면하는생각이들었다. 드디어, 오전 8시 40분경배가출항하였다. 이제모로코는안녕이고, 학수고대하던스페인으로들어간다는생각에마음이다소들뜨기까지하면서, 스페인에대해여행전에수집하였던자료를꺼내다시한번살펴보았다.
[ 스페인일반 ] 스페인의정식국명은 < 스페인왕국 >(Kingdom of Spain) 으로, 스페인어식표기는에스파냐왕국 (Reino de España) 이다. 수도는 < 마드리드 (Madrid)> 이고, 2011년기준으로약 650만명이거주한다. 스페인의전체면적은 50만 5370km2로한반도의약 2.3배 ( 남한의 5배 ) 이며, 인구는약 4,700만명이다. 스페인사람들은유럽의 3대민족인게르만족, 슬라브족, 라틴족가운데서라틴족의후예들로, 라틴족은스페인을비롯하여포르투갈, 이탈리아, 프랑스, 루마니아에살고있다. 스페인어는카스티야 (Castilla) 지방어가표준어이고, 기타카탈루냐 (Cataluña) 어, 바스크 (Basque) 어, 갈리시아 (Galicia) 어가해당지역에서공용어로사용되고있다. 종교는형식적으로국민의 94% 이상이로마가톨릭신자라고한다. 스페인의국가형태는입헌군주국이며, 현재국왕은펠리페 6세 (Felipe VI) 이다. 정부형태는내각책임제이고, 의회는양원제이며, 임기는모두 4년이다. 외교기조는유럽연합 (EU) 과북대서양조약기구 (NATO) 의회원국을포함하여, 모든국가와선린우호관계를추구하는데있다. 스페인의국경일은 10월 12일로, 이것은 1492년 10월 12일크리스토퍼콜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 가아메리카대륙을발견한날을기념한것이다. 2011년국제통화기금 (IMF) 과스페인통계청이발표한스페인의경제지표를살펴보면국내총생산 (GDP) 은 1조 4935억달러 ( 세계 12위 ) 이고 1인당국내총생산은 3만 2360달러이다. 교역규모는 8728억달러로수출액은 4321억달러, 수입액은 4407억달러이다. 관광수입은 706억달러이고관광객수는한해에대략 5700만명이며, 실업률은 22.9% 이다. 2012년도스페인의산업구조를살펴보면, 서비스업은 69%, 제조업 17%, 건설업 11.4%, 농수산업 2.6% 등의비율을보이고있다. 스페인의화폐단위는유로 (Euro) 이다. 또한스페인의의무교육기간은 10 년 (6~16세) 이다. [ 스페인지리 ] 스페인의영토는이베리아 (Iberia) 반도의 85% 를차지하는본토와지중해의발레아스
(Baleares) 제도, 아프리카북서쪽의카나리아 (Canarias) 제도및북아프리카의세우타 (Ceuta, 면적 19km2, 인구약 6만 7000명 ), 멜리야 (Melilla, 면적 12km2, 인구약 6만 3000명 ) 로구성되며 50개주및특별주 ( 세우타, 멜리야 ) 로구분된다. 스페인은전국토의 1/3 정도가산지이며, 평균고도는해발 600m 이상으로유럽에서스위스다음으로고지형이다. 북부에는피레네산맥이, 대서양연안에는칸타브리아 (Cantábria) 산맥이, 남부에는시에라모레나 (Morena) 산맥, 시에라네바다 (Nevada) 산맥이있으며중앙에는해발고도 500~1,000m, 면적 21만km2의메세타 (Meseta) 고원이자리하고있다. 피레네산맥과칸타브리아산맥을중심으로한북부지방은가장유럽적인지방으로리아스식해안을가진서해안의갈리시아지방, 광물자원이풍부한칸타브리아지방, 빌바오 (Bilbao) 의철광석등으로유명한바스크 (Basque) 지방, 그리고피레네산지로구분된다. 중앙고원지대는초원지대로신구카스티야지방으로나뉘며, 레온 (Leon) 지방과함께스페인문화의발상지로서목축이성행한다. 지중해연안에는발렌시아 (Valencia), 카탈루냐, 무르시아 (Murcia) 등여러지방이있으며, 이들지방에는농업및경공업등이발달해있다. 남부의과달키비르 (Guadalquivir) 강유역의안달루시아 (Andalucía) 지방은비옥하여포도, 오렌지, 올리브재배가성행하며, 과거에이슬람세력이미쳤던곳으로아랍색채가농후하다. [ 스페인기후 ] 스페인의기온과강우량은지역에따라상이한데, 북쪽의해안지방은연중서늘한기후 ( 연평균기온 13.9 ) 이고, 중앙고원지대는계절별기온의차이가뚜렷하다. 마드리드 (Madrid) 의경우평균기온은겨울 5.9, 여름 30 정도이다. 지중해와접해있는남부및동부의여름철은때때로 40 를넘기도하지만대체로온화한편이다. [ 스페인역사 ] BC 2만 5천년 ~1만 5천년사이에알타미라 (Altamira) 동굴벽화가발견되었지만, 이베리아반도내에서생존한것으로확인된최초의종족은바스크 (Basque) 족이다. BC 8세기 ~7세기에는페니키아인, 그리스인이스페인의지중해연안지역에식민지를건설하였고, BC 7세기에는유럽중부의켈트 (Celta) 족일부가피레네산맥을넘어이베리아반도에정착했다. 스페인역사의주인공은이들켈트족과북아프리카로부터건너와켈트족보다먼저스페인에정착한이베로 (Ibero) 족이나, 기원전 6세기경북아프리카의카르타고인들이침입하여, BC 3세기에이르러카르타고가이베리아반도의대부분을정복하였다. 그러나 3차례에걸친포에니전쟁 (Punic Wars) 이 BC 264년 ~ BC 146년사이에일어났으며, 결국로마는카르타고를격파하고지중해를제패하였다. 따라서 BC 2세기무렵부터 AD 5세기초까지스페인지역은로마의지배하에서라틴어를사용하고가톨릭을수용하는등완전히라틴화되었으며, 또한당시이베리아반도에는여러도시들이건설되어메리다, 세고비야, 코르도바, 타라고나, 사라고
사등에는그자취가남아있다. 또한네로 (Nero) 황제의스승이었던세네카 (Seneca), 테오도시스 (Teodosis), 트라자노 (Trajano), 아드리아노 (Adriano), 맥시모 (Maximo) 등 5명의로마황제가스페인지역출신이다. 그러나 600년에걸친로마제국의번영도쇠퇴기에접어들며, 5세기에는게르만족의대이동으로게르만족의일파인반달족 (Vandalos) 과서고트족 (Visigodos) 이이베리아반도로이동하여정복왕국을건설하였다. 특히서고트족은 579년왕국의수도를톨레도로옮겼으나, 그후끊이지않는내분으로정치적기반이약해졌다. 결국 711년북아프리카의이슬람교도 ( 무어 [Moor] 족이라불림 ) 들이이런내분을틈타침입해왔고, 716년경까지반도의 2/3를차지하면서이베리아반도가이슬람화되었고, 다른민족과종교임에도불구하고이후약 700년간무슬림의지배는이베리아반도에확실히뿌리를내렸다. 특히 756년시리아에서들어온후기옴미아드왕조가부흥하면서수도로삼은코르도바도영화를누리게되었으며, 지금도남아있는코르도바의메스키타 ( 모스크 ) 는이슬람문화의결정체라고할수있다. 이처럼이슬람시대에스페인은문화, 경제, 산업적으로크게발전하였으며, 중동에서들여온관개기술로안달루시아는비옥한곡창지대로변모하였다. 일예로이때들여온쌀이나아랍의조리방법이 < 파에야 > 를탄생시켰다고한다. 이베리아반도의대부분이이슬람세력의지배아래에서번영을누렸으나, 북부의아스투리아스왕국을중심으로국토회복운동인레콘키스타 (La Reconquista) 가시작되었는데, 722년코바동가전투에서승리하여이슬람에의한반도의완전점령에서벗어난가톨릭세력들은점차레온, 카스티야, 아라곤왕국을탄생시키며레콘키스타를수행해나갔고이슬람왕국을압박하였다. 이후 1031년후기옴미아드왕조가분열, 해체되자남은이슬람계의소왕국들은안달루시아지방으로밀려나게되었다. 1212년라스나바스데톨로사 (Las Navas de Tolosa) 승리이후가톨릭세력이이슬람세력을연파하였으며, 13세기중엽에와서는스페인남부의그라나다 (Granada) 를제외한전지역의국토를회복하였다. 마침내 1492년스페인에서는 700 년에걸친레콘키스타가결실을보게되는데, 카스티야 (Castilla) 의이사벨 (Isabel) 여왕과아라곤 (Aragon) 의페르난도 (Fernando) 왕의연합군은 1492년 1월 2일그라나다를탈환하고영토회복을완수하였다. 스페인의이사벨여왕은그라나다탈환직후, 야전진영에서숙제로남겨두었던크리스토퍼콜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 의항해계획지원계약서에서명하였으며, 콜럼버스는이사벨여왕의후원하에아메리카대륙을발견하였다. 이후, 1494년스페인과포르투갈은세계를양분하는토르데시아스 (Tordesillas) 조약을맺었다. 1498년포르투갈인바스코다가마 (Vasco da Gama) 는인도항로를발견했고, 1512년에는오늘날과같은스페인의영토가형성되었다. 1516년페르난도와이사벨의외손자인카를로스데보르본 (Carlos de Borbon) 이카를로스 1세 (CarlosⅠ) 로즉위하여스페인통일왕국최초의왕이되었으며, 같은해프란시스코피사로 (Francisco Pizarro) 가남미의잉카를정복하였다. 또한 1519년 ~1522년포르투갈인페르디난드마젤란 (Ferdinand Magellan) 이스페인왕의후원아래세계일주항해에성공하였다. 를로스 1세는 1519년신성로마제국황제로선출되어스페인영토와합스부르크왕가의영지를합병하여남아메리카에서서유럽까지 태양이지지않는대제국 을이끌며유럽최강의위치를확고히하였다. 그리고 1556년펠리페 2세 (FelipeⅡ) 가즉위하면서, 귀족과대주교세력들을피해 1561년에수도를마드리드 (Madrid) 로천도하였고, 또한 1571년레판토 (Lepanto) 해전에서오스만터키를격파하고지중해를제패하였으며, 1580년에포르투갈을병합하였다. 그러나 1588년스페인이자랑하던펠리페 2세의무적함대가영국에패배한뒤, 17세기에이르러스페인은 30년전쟁 (1618년 ~1648년 ), 왕위계승전쟁 (1701년 ~1714년 ) 등에서계속패퇴함으로써많은식민지를잃고본토인지브롤터까지영국에빼앗기는등영국과프랑스에세
계의주도권을내주게되었다. 한편, 1605년미구엘데세르반테스 (Miguel de Cervantes) 가 < 돈키호테 (Don Quixote)> 를발표하였으며, 1668년스페인은리스본조약 (Treaty of Lisbon) 을맺어포르투갈의독립을인정하였다. 1746년아라곤 (Aragon) 출신의궁정화가프란시스코고야 (Francisco Goya) 가사라고사 (Zaragoza) 에서태어났다. 1808년 ~1814년나폴레옹이스페인을지배하였으며, 나폴레옹의형이스페인왕으로즉위하였다. 그리고 19세기초반에는라틴아메리카에있던스페인의식민지대부분이독립하였다. 1873년 ~1874년스페인제1공화국이탄생하였으며, 1852년에는세계적인건축가안토니가우디 (Antoni Gaudi) 가, 1881년에는세계적인화가파블로피카소 (Pablo Picasso) 가각각태어났다. 1898년스페인은미국 스페인전쟁에서의패배로쿠바, 필리핀및푸에르토리코를미국에할양하였다. 1902년스페인의마지막왕알폰소 13세 (Alfonso XIII) 가즉위하면서스페인은정치적으로불안한시기를맞이하였다. 경제적으로는세계제 1차대전에참전하지않고중립을지켜일시적으로호황을보였으나, 세계공황의격랑에떠밀려종말을맞이하게되어, 정치, 경제, 사회모든분야에서긴장감이일시에고조되었다. 1936년총선에서좌파인인민전선이정권을잡자우파에의한쿠테타가발생하여이른바 스페인내란 이발발하게되었다. 독일과이탈리아가지원하는프란시스코프랑코 (Francisco Franco) 장군의우파가소련이지원하는좌파를격파함으로써 1939년 4월에내전은종결되었다. 그와중인 1937년 4월독일공군은프랑코측을지원하기위해스페인북부의공화파도시게르니카 (Guernica) 를맹폭하였는데, 당시의참상은파블로피카소의그림 게르니카 에잘표현되어있다. 내전을마친상태이기도하였지만프랑코정권의스페인은제 2차세계대전에도중립을지켜국제사회에서오랫동안고립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스페인은경제전반에걸쳐눈부신발전을이룩하였고이를스페인의기적, 즉 < 밀라그로에스파뇰 (milagro español)> 이라고부른다. 1975년프랑코총통이사망하자, 망명하였던구왕족후안카를로스 (Juan Carlos) 1세가스페인국왕으로즉위하여, 1976년의신헌법제정, 1977년의총선을거쳐스페인은민주주의체재에돌입하게되면서다른나라와의관계도개선되었다. 1992년에는올림픽을개최하고, 2002년에는유럽공동통화인유로화를도입하는등명실공히유럽과국제사회의일원으로서새로운발걸음을내딛고있다. 내가탄고속페리는항구를떠나바다로나오더니지브롤터 ( 자발타리크, ' 타리크의바위 ' 이라는뜻 ) 해협을건너기위해모로코해안을끼고동북쪽으로항해하기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염려하였던것과는달리풍랑도거세지않았다. 배선창으로나가지중해와대서양을연결하고, 아랍계이슬람교도들이유럽대륙을침공 (?) 하기위해건넜던말로만듣던지브롤터해협을내가직접건너고있구나하는것을실감하면서감회가남달랐다. 참고로서양역사에중심을둔자료에서스페인을침략한 < 무어인 > 이라는단어를사용하는데, 무어인은아랍인, 스페인인, 베르베르인의혼혈인 스페인계이슬람교도 를의미하며, 이를확대해석하여이슬람교도 ( 무슬림 ) 전체를가리키기도한다. 그리고아랍인무슬림은 680년에북부아프리카의모리타니와를정복하였는데, 이모리타니와에서무어 (moor, 스페인어로모로 (moro)) 인이라는말이나왔다고하며, 모리타니와라는말은라틴어의마우리 (Mauri) 에서유래했는데, 처음에는로마인들이오늘날의알제리서부지역과모로코북동부지역으로이루어진로마의속주모리타니와주민들을일컫는용어였다고한다.
배선창에서지브롤터를건너면서, 곧도착할스페인의타리파를시작으로, 앞으로 3일간예로부터고대로마인, 이어서게르만계서고트족, 나아가 711년무어인이침입 (?) 하여정주함으로써, 다양한역사와문화가혼재하여가장스페인다움을잘느낄수있다고알려진안달루시아지방을둘러보는것으로, 스페인여행의핵심이될것이라는생각에다소마음이설레기까지하였다. 또한가톨릭계입장에서는 1300년전타리크에의해시작된무어인의스페인침략을시작으로, 800년에걸친 스페인가톨릭교도들이이베리아반도를지배하고있던무어인들을축출하는운동또는전쟁 의의미로사용된 국토회복운동 인 < 레콘키스타 >(Reconquista) 로서, 반대로무어인의입장에서는 800년동안지배하던스페인에서축출당하는아픔 (?) 을겪었던이지방을제 3자의입장에서내눈으로직접확인해보고싶다는생각도들었다. 배창문을통해대서양에생긴무지개도감상하며있는데, 배가해협한가운데로들어가자갑자기거친풍랑이몰아치면서배가심하게요동치기시작하더니, 배안에서구토하는사람들이속출하기시작하였다. 어릴적바닷가부근에서살아뱃멀미를모르던나자신도다소겁이들정도로파도가거세었으며, 이런상황은 9시 40분경배가스페인아니유럽최남단땅끝마을에해당하는 < 타리파 (Tarifa)> 항구에도착할때까지계속되었다. 아마지브롤터해협은평생잊을수없는지명으로내기억에남아있을것같다. 참고로지브롤터해협을왕복하는고속페리는대부분탕헤르와영국령지브롤터를품고있는 < 알헤시라스 >(Algeciras) 를오고가나, 우리일행이탄배는이베리아반도의최남단인타리파와탕헤르를왕복하는노선이었다.
드디어스페인땅에들어왔다는것을실감하며, 타리파항구에서입국수속을하려고줄을섰는데, 내앞쪽의모로코인입국수속이너무나지체되어일행중앞에서있던내가결국은가장늦게수속을마치게되었다. 말은거의알아듣지못하였지만모로코인수속할경우에는소지품은물론이고소지한돈및서류등모든것을너무나도꼼꼼하게조사하는것을보고역시밀입국자및불법이민자문제와함께마약밀수입이양국간에큰문제로남아있다는것을다시한번실감하면서, 한편으로는모로코인을멸시하는것같은출입국직원의태도에화도났다. 세관건물밖으로나오자, 바로눈앞에 10세기경에건설하였다는구스만성 (Castillo de Guzmán) 과중세시대의시벽등많은문화유산이곳곳에남아있는것이눈에띄었다. 조그만마을임에도불구하고해변유명한휴양지답게많은요트가계류장에정박해있는것도눈에띄었다. 참고로, 타리파는스페인카디스주남부해안에위치하며, 주도카디스에서남동쪽으로 101km 떨어져있는스페인최남단에있는인구가약만 8 천명인작고아담한항구도시로, 지 브롤터해협을사이에두고아프리카모로코와마주보고있다. 유명한해변휴양지코스타데
라루스 (Costa de la Luz) 의시작점이되는도시로서쪽부터각각대서양, 지브롤터해협, 알보란해 (El Mar de Alborán) 에접하고있는데, 긴해안선을따라해수욕과일광욕을즐기기에최적의장소로알려진아름다운해변이계속이어져관광 휴양도시로각광받으며, 특히 1년중절반은항상따뜻한햇볕을즐길수있어일조량부족에시달리는북유럽사람들이많이찾는다고한다. 도시의기원은정확히밝혀지지않았으나, 고대로마시대에이지역에 훌리아트란스둑타 (Julia Transducta) 라는큰도시가존재했는데당시의유적이아직도남아있다. 그러나내게는이곳이약 800년동안스페인을지배한아랍계이슬람교도들인무어인이 711년에가장먼저정복한후스페인최초의무어인거주지를세웠으며, 스페인에서완전히물러날때도최후까지저항하였던도시라고하는데관심이갔다. 짐을끌고앞으로의스페인여행을함께할버스로가니, 놀랍게도초대형버스로좌석사 이간격도넓었다. 21 명이일행인우리에게한사람이좌석을두자리씩사용할수있어여행 하기에는최고의버스이기때문에, 이것이이번스페인여행의청신호라는생각이들었다. 인솔자를포함해일행중뱃멀미를한사람이많아잠시휴식을취하는동안, 주변을살펴
보니지정학적거리와는관계없이역시나라가바뀌니통행인들의대부분이백인으로, 조금 전바다건너탕헤르와는정반대였다. 이러한상황은일견다소의아스럽게느껴지면서도이 지역의역사적인배경을생각해보면한편으로는당연 (?) 하다는생각까지들었다. 오전 10시반경버스에올라첫번째목적지인 < 론다 > 로향하면서본격적인안달루시아지방의스페인관광을시작하였다. 버스가스페인땅인데도불구하고주택형태면으로아직모로코분위기가많이나는작고아담한해안도시인타리파를출발하자마자곧가파른산언덕위로올라가더니능선을따라난도로를달렸다. 간혹보이는지중해바다와해안가로발달한덤불이무성한척박한구릉지산인시에라네바다산맥이절경을이루고있었으며, 산꼭대기에는단지형태의풍력발전시설이있었다. 곧버스는산맥을내려가는것같더니아프리카를오가는페리가정박하고, 스페인남단에위치한인구 10만이넘는알헤시라스 (Algeciras) 도시를통과하면서, 저멀리바위산인영국령 < 지브롤터 > 가보였다. 이윽고버스는지중해에면한지역으로수려한해안선뿐아니라겨울에도온난한기후덕분에유수의휴양지가많다는코스타델솔 (Costa del Sol, 태양의해안 ) 로나
있는고속도로를달려갔다. 간혹나타나는지중해에면한휴양지도시들의풍광이무척매혹 적으로느껴지며, 태양의해안이라는말이실감났다.
우리가탄버스는유명한휴양지인에스테포나 (Estepona) 와마르베야 (Marbella) 도시중간쯤 에서고속도로에서벗어나, 이번에는시에라네바다산맥을넘는험한산길도로 (A397) 를오르 기시작하였다. 강릉쪽에서올라가는굽이굽이대관령고갯길과같은험한산길을버스가올라갈때, 다소 무서운느낌도들었으나, 눈아래로펼쳐지는코스타델솔 ( 태양의해안 ) 지방의멋진풍광은 너무나도환상적이며또한매혹적이었다.
버스가정상부근의산맥을넘을때에는산성의운모편암과편마암이혼재되어하얀빛깔이 나는돌산봉우리가눈앞에나타났는데신성한느낌마저들면서, 왜이산맥이스페인어로 눈덮인산맥 이라는의미인 < 시에라네바다 > 산맥이라고불리는지이해가되었다. 산맥을넘자눈아래로남진의 < 임과함께 > 라는노래가사가떠오를정도로경치가좋은분지 형태의초원구릉지가나타나고, 멀리언덕위에하얀빛깔의도시가보였다.
타리프를떠난지약 2 시간지나드디어스페인안달루시아자치지역남부말라가주에속 하며, 깊은협곡을사이에둔절벽위에세워진도시 < 론다 (Ronda)> 에도착하였다. 버스터미널이있는가르시아레돈도광장에서내려약간비탈길을내려가며도시를살펴보니,
인구 3만 6천명의작은도시론다의신시가지에는상점과레스토랑이즐비하였는데, 깔끔하고깨끗한도시라는인상이들었으며, 전체적으로벽색깔이흰색으로이곳을 < 카사데블랑카 >(Casa de Blanca, 하얀집의마을 ) 라고하는것이이해가되었다. < 소코르 > 광장에서점심식사를한후, 본격적인론다관광에들어갔다. 먼저간곳은알라메다델타호공원에있는투우장인 < 플라사데토로스 >(Plaza de Toros) 였다. 론다의산악지형높은곳에위치하고있는론다의투우장은규모는작지만스페인에서 가장오래되고또가장아름다운투우장으로손꼽히는곳이라고한다. 이투우장은오늘날우리가알고있는투우라는경기가처음시작된곳으로, 1754년에서 1784년까지호세마르틴데알데우엘라가바로크양식으로건설하였으며최초의 < 코리다 >, 즉투우경기는 1785년에열렸다고한다. 또한이곳은근대투우의발상지로도, 로메로일가를비롯한많은유명한투우사들을배출한것으로유명하다고한다. 이투우장에는 5천명이상의관객이입장할수있으며지금도때때로투우경기를개최하곤한다는데, 거대한돔에 136 개의석주가배열되어있어역사를느끼게하였다.
또한투우장지하에있는투우박물관에는투우사가입었던의상이나사진, 포스터등이 전시되어있었다.
특히내게인상적이었던것은무수히많이전시된검과창으로, 귀족이나기사들이투우사역할을맡아말에탄채로수소와싸움을벌였던 18세기이전의원래투우인기마투우에서사용된것들이라고한다. 참고로인간과황소를겨루게한다는구경거리는 6세기에기원한것으로추측되며, 이러한경기가몇세기에걸쳐발달하여투우라는이름의격식을갖춘의식이되었다고한다. 특히론다투우장은오직투우만을위해지어진최초의건물중하나로, 론다의토레로 (torero), 즉투우사들은투우장이그러했듯이투우라는스포츠가발전해오는데중요한역할을했다는데, 처음에는로마의원형극장이경기에알맞은장소로종종사용되었기때문에투우장은둥근형태를띠게되었다고한다. 18세기의투우사들중뛰어난이로는론다의로메로가문을들수있는데, 이들은 3대에걸쳐일류투우사들을배출해왔다. 이중에서도가장유명한페드로로메로마르티네스는투우사경력동안약 6천마리의황소를죽였으며매번털끝하나다치지않은채유유히경기장밖으로걸어나왔는데, 당시로는혁신적이었던마치발레와도같은그의투우스타일은여러세대에걸친투우사들에게영향을끼쳤다고한다. 그의할아버지인프란시스코는예전에는투우사들이한쪽팔에걸치곤했던 물레타 라는 붉은천을스틱에달아흔드는방식을도입하여 론다파 라는이름으로알려지게된투우 스타일에큰영향을주었던인물이라고한다.
다음으로간곳은론다최고의명소인 18 세기 (1793 년 ) 에만들어진 < 누에보다리 (Puenta Nuevo)> 였다.
과달레빈강이만든 < 타호 (Tajo)> 라불리는엄청난협곡절벽을가로질러신, 구시가지를연결하는이다리는, 다리앞에있는스페인광장에서보면그저짧고조그만다리로느껴지나, 헤밍웨이의산책로 (Paseo de E. Hemingway) 라고불리는누에보다리에서스페인국영호텔 < 파라도르 > 전망대까지이르는작은오솔길을걸으면서보면, 까마득한깊이의협곡밑바닥까지닿은웅대하고거대한다리는장관을이루며인간의위대함마저느끼게하면서경이롭다는표현이절로나왔다. 다리밑으로빠져들것만같은깊은계곡과계곡건너편에펼쳐진들판의풍경이어우러져너무나도아름답고환상적인풍광을자아내고있어, 이곳이수십년동안스페인의모든인공구조물가운데가장빈번하게사진촬영의대상이되었으며, 현재도전세계의사진작가들이선호하는장소라는것을실감할수있었다.
또한, 헤밍웨이가론다에서생활하는동안수없이오고간길이라고하는헤밍웨이산책로를걸으며, 그의대표소설 누구를위하여종을울리나, 무기여잘있거라 를론다에서집필했다고전해질만큼, 헤밍웨이가론다를예찬하였다는것에동감하면서, 이곳에서한동안살고싶다는생각이들었다. 참고로론다는스페인내전을다룬헤밍웨이의 누구를위하여종을울리나 에등장하는마을로, 영화에서도이누에보다리가나왔다. 그런데누에보다리쪽산책로입구에노벨상을받은일본인의이름이쓰여있는산책로안내판이있어다소의아했으나, 역시일본인다운발상이라는생각이들며씁쓸한기분이들었다. 잠시론다전망대에서눈앞에펼쳐진아름다운풍경을감상하다, 시간이다소남아누에보다리를다른각도에서느껴보기위해다시스페인광장으로돌아와누에보다리를건너구시가지로들어서, 오른쪽골목을따라조금가다보니주택가계곡쪽에작은공원이있고, 그곳에있는계단을통해아래로내려갔다. 내예상대로밑에서올려다보는누에보다리의위용은한마디로압권이라고할수있으며, 오래도록나의뇌리에서사라지지않을것이라는생각이들었다. 일행과만나버스터미널로돌아와서, 아쉬움을남기며론다를출발하여, 지중해휴양지말
라가인근에있는작은마을미하스로향하였다. 론다를출발한버스는시에라네바다산맥의넓고구릉지로만들어진계곡을따라만들어진도로 (A366) 을달려내려가는데주변이온통올리브농사를짓고있으며, 가끔씩나타나는마을은그림같이평화롭고아늑한느낌을주고있었다. 론다를떠난지약 1 시간반지나, 어둠이깔리려고하는시각에안달루시아자치지역에 속한일명 < 카사데블랑카 >, 즉, 백색의도시 또는 하얀마을 중에서도아름답기로유 명해흔히 안달루시아의에센스 라는애칭으로불리는 < 미하스 (Mijas)> 에도착하였다. 참고로, 미하스는말라가주남부해안에위치하며주도말라가에서남서쪽으로 31km 떨어져있으며, 평균고도는 428m로, 해안가에있는산중턱에위치하고있다. 말라가주에서 4번째로인구가많은주요도시로, 고대타르테소스 (Tartessos) 왕국의말기에해당하는기원전 6세기경에타르테소스인들이세운마을이그시초라고하며, 당시에는이마을을 < 타미사 (Tamisa)>
라고불렀다고한다. 역시미하스는안달루시아지방고유의정취를그대로간직한작고아름다운도시라는것을실제내눈으로확인할수있었는데, 특히흰색벽과갈색또는붉은색기와지붕이특징인안달루시아전통양식의주택이산기슭부터중턱까지빼곡하게들어찬모습이장관을이루고있었다. 특히산세바스티안 (San Sebastian) 거리주변은골목골목마다아름다운흰색벽이이어지며 예쁜가게들이늘어서있었는데마치그림엽서에서본듯한아름다운광경을보여주고있어
아저씨인나조차도절로환성이나올정도로, 안달루시아의에센스라는애칭이정말로어울린다는생각이들었다. 광장근처에는바위를뚫고지은특이한성당이있었는데, 내부에이마을의수호성녀라는긴머리의여성상이모셔져있었다. 또한이곳전망대에서아름다운마을모습과함께눈아래로펼쳐진아름답고푸른지중해를볼수있는데, 해질녘어스름한분위기속에서의풍광은너무나도환상적이었다. 미하스관광을마치고, 근처에있는코스타델솔 ( 태양의해안 ) 최대의휴양지로알려진 < 토레몰리노스 >(Torremolinos) 의해안가산미겔 (San Miguel) 에위치한고급스런호텔 (Las Palmeras) 에도착하여, 뷔페식으로저녁식사를한후, 호텔주변을산책하였다. 길건너각양각색의요트가모여있는요트계류장과함께, 해안도로변에는멋진레스토랑, 기념품점및고급옷가게등이즐비하여, 역시세계적인휴양지답다는인상이들었다. 해변에서커피를마시며파도소리를듣다가호텔로돌아와스페인에서의첫째날을행복하게마감하였다. 12월 29일 ( 목 ), 넷째날안달루시아의고향을가다!!!! ( 말라가 코르도바 - 그라나다 ) 오늘은안달루시아의고향이라고할수있는코르도바를비롯하여, 피카소가태어났다는말라가및알함브라궁전으로유명한그라나다를여행한다는들뜬마음과함께잠에서깨어떠날채비를한후, 호텔바깥으로나가해변가를잠시산책하다상쾌한기분으로돌아왔다.
뷔페식으로아침식사를한후, 오전 9시에스페인의휴양도시말라가로이동하였다. 토레몰리노스에서말라가까지는약반시간소요되었는데, 바닷가에펼쳐진아름다운휴양지마을들을보면서이지역을왜 태양의해안 이라고부르는지를다시한번실감할수있었다. 9 시반경코스타델솔의관문인 < 말라가 (Malaga)> 에도착하였다. 말라가는항구도시이며지중해에속한말라가만에위치하고있는데, 페니키아 그리스이래의오랜도시로, 당시의성채는로마의수복과이슬람의지배를거쳐아직도남아있는데, 이성채와성벽으로연락되어있는히브랄파로는 14세기에건설된방어목적의성에해당하며, 전망이아름답다고한다. 이슬람의지배는 1487 년그라나다왕국으로부터가톨릭세력이탈환함으로써끝났으며, 그후 스페인의 가톨릭의두왕 ( 카스티야의이사벨과아라곤의페르난도 2 세 ) 의영지가되었다 고한다. 또한말라가는잘알려진피카소가태어나서열살까지살았던어릴적고향이기도
하다. 우리는피카소의생가가있는메르세드광장근처에서내려, 말라가관광을시작하였다. 현지주민들이이도시를 파누엘로 ( 손수건이라는뜻이며좁은곳을비유 ) 라고부르듯이말라가시내는아담할정도로작고골목들은전체적으로좁았다. 그러나피카소가태어난도시라그런지여기저기피카소관련현수막, 안내판과함께골목골목마다도피카소풍의조각상작품들이세워져있었다. 말라가시내골목을누비며간곳은말라가의중심인 < 라리오스 (Larios)> 거리로명동거리보다도마음에드는한마디로고품격의평온한거리라는인상이들었다. 즉대리석을깔아놓은아름다운거리에장미꽃이장식된가로등과고풍스런건물에즐비한대형매장과레스토랑및파란하늘까지도이곳이관광에특화된도시임을대변하고있었다. 특히이거리를지나다니는현지인들의옷차림패션은부러울정도로세련되고품위가있었다. 거리를산책하다주
변에있는대성당 ( 카데드랄 ) 을보러갔다. 르네상스양식을기조로한건물로 16세기초반부터건축되기시작하였으나, 1782년자금부족으로인해한쪽의탑을남긴채공사가중단되었기때문에, 라만키타 (La Manquita : 외팔이여인이라는의미 ) 라는애칭으로불리는계기가되었다고하는데, 성당형태로는다른지역의것과비교해특징이별로없다는느낌이었다. 다시 16세기에지어진부에나비스타궁전을개조하여만들었다는 < 피카소미술관 > 을외부에서만보고, 메르세드광장으로다시돌아와, 일행중일부가 1881년피카소가태어나 1세반까지살았다는생가를개조하여만든광장에연한 < 피카소생가 > 를관광하는동안나는광장한구석에있는피카소동상과함께사진을찍은후, 말라가광장카페에앉아커피를마시며잠시휴식을취하였다. 노천카페에서평일오전중인데도많은현지인들이모여앉아즐겁게환담을나누고있는
여유로운모습이다소부럽기까지하였다. 버스도탈겸해서우리일행은다시거리를걸어서이슬람교지배자의성채로 11세기에건설되었다는 산에있는등대 라는뜻을가진 < 히브랄파로 > 성을방어하기위한알카사바성채및성채입구바로옆에있는로마시대의원형극장터를보러갔다. 알카사바의담 ( 성곽 ) 에해당하는유적이로마원형극장유적뒤의얕은산정에병풍처럼서있는것이인상적이었다. 또한지금도지하에서는계속로마시대의유적들을발굴중이라는극장터옆에는단층형태의작고아담한현대식극장이있어, 좋은대조를만들어주고있었다. 이와함께극장터앞에는아코디언을연주하는악사와그림을그리기위해나온유치원원아들이있었는데, 인형같은서양아이중에까만눈의여아가눈에띄었다. 중국인여아로반가운마음과함께문득아까광장부근에서본이동네에있는중국집아저씨의딸이아닐까 (?) 하는생각이들었다. 오전 11시경말라가관광을마치고, 버스에올라기원전로마식민지시절부터안달루시아지방의중심지이며, 이슬람과가톨릭이뒤섞인건축물 < 메스키타 >( 코르도바대성당 ) 로유명한 < 코르도바 > 로향하였다. 말리가를떠난버스가시에라네바다산맥을넘자마자, 낮은구릉지푸른평원이끝없이나타나기시작하였으며, 평원에는올리브와밀농사가주를이루고있었다. 하지만이곳에는 5월경에꽃을피우는해바라기농사도많다고하는데, 한겨울이라눈에띄지않았다. 말라가에서북쪽으로나있는고속도로 (A-45) 로약 2시간걸리는코르도바까지가는동안차창밖으로펼쳐진풍경을감상하며코르도바의역사에대해잠시조사한것을살펴보았다. < 코르도바 (Cordoba)> 는과달키비르 (Guadalquivir) 강중류, 안달루시아지방의중앙에위치하며, 8세기에세워진이슬람교대사원 ( 메스키타 ) 이상징하는바와같이중세에는이슬람의지배를받았기때문에오늘날에도이슬람문화색채가많이남아있다고한다. 코르도바의지리적특징은두가지로정의되는데, 광물자원이있는북쪽의 < 시에라모레나 >(Sierra Morena) 산맥과이산맥을에워싸고흐르는 < 과달키비르 > 강이있다는것이다. 따라서이곳은 교역과방어 라는이유로자연스럽게인간이정착하게된지역으로이곳을중심으로남쪽의시에라네바다산맥사이를차지하는안달루시아저지는개발의역사가오래되었다.
이지역의초기역사는잘알려져있지않지만, 융성했던카르타고의거주지역이었다가도시의전략적 상업적중요성을알아차린로마인이기원전 206년에이곳을점령하고이스파니아 (Hispania, 로마인들이사용했던이베리아반도의옛이름 ) 속주, 즉바에티카 (Baetica, 고대로마가이베리아반도에설치한 3개자치주가운데하나 ) 로삼으면서, 이도시는미려한공공건물과개인가옥이경관을형성하고, 독특한요새로둘러싸여있었다. 이곳출신의유명인으로는 2명의세네카 (Seneca) 와시인루칸 (Lucan) 이있다. 그러다 6세기에들어이방인의침략이시작되면서이베리아반도의로마사회는흔들렸고, 결국코르도바는서고트족에게함락되면서, 이시기에많은것이파괴되었지만, 서고트족의지배아래에서도도시의정체성을보존할수있었다고한다. 그러나서기 711 년에코르도바는과달레테 (Guadalete) 전투에서대승을거둔타리크 (Tarik) 가이끄는이슬람세력들에게처음으로점령당한도시가운데하나가되었다. 이와더
불어아브드알라흐만 1세 (Abd-al-Rahman I) 가다마스쿠스의칼리프지위에서쫓겨나스페인으로도망와서, 이슬람세계의최고신분인모하메드의후예라는점을이용, 756년에칼리프대신에 < 에미르 > 라고부르는새로운독립이슬람국가인후기옴미아드왕조를건립하고수도를코르도바로정하면서, 이도시의역사에서가장화려한시기를위한토대가만들어졌는데, 이나라의국호가바로 [ 알안달루스 ] 였다. 참고로이베리아반도를침공한무슬림들은그들의정복지였던반도남부지역을 알안달루스 라고불렀는데, 이명칭은 반달족이건너온곳 이라는뜻의 < 반달루스 (vandalus)> 에서유래된것으로여기서 알 (al) 은아랍어관사이다. 알라흐만 1세는 786년에로마의야누스사원이있던자리에다마스쿠스의모스크보다더빛나는거대한모스크 ( 메스키타 ) 를세우려했으며, 이작업은 2세기에걸쳐계속되었다. 또한코르도바는예술과지식의탁월한우월성을지니고다른종교에대해관대하게용인해주면서유럽에서가장문명화되고번영한거대도시로발전하였다. 그위용을보자면, 929년아브드알라흐만 3세시대에코르도바는인구는 50만명을넘고, 중동의다마스쿠스와바그다드에필적하는 300채이상의모스크와수많은궁전, 그리고공공건물에둘러싸여있었던것으로전해졌다. 그러나시간이지나면서안달루스에는불안한조짐이나타나기시작하였는데, 왕은어리고나약했으며, 또한북쪽으로부터는국토회복운동이라는레콘키스타를기치로내건가톨릭세력이남하하면서이슬람세력들을위협하기시작했다. 이때어린왕을대신해재상의자리에올라권력을휘두른사람이바로알만수르 (' 승리자 ' 라는의미, 재임 977~1002) 였는데, 그는가톨릭세력들에대한불안감을떨칠수없어바르셀로나, 코임브라, 레온을침공했으며, 997년에는예루살렘, 로마와나란히이베리아반도북부에있는가톨릭의성지인 <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Santiago de Compostela) 까지공격하였다. 그는예수의열두제자가운데하나인산티아고의무덤은존중했지만성당의문짝들과교회당의종들을전리품으로코르도바로가져갔는데, 이는커다란충격과함께북부가톨릭세력들을공포에떨게만들었지만, 다른한편으로는가톨릭세력의단합을촉구하는계기가되었다. 결국 1002년알만수르가레온, 나바라, 카스티야의가톨릭왕국들에게패배하면서사망하자, 코르도바에서는무능한왕과분열된귀족들의내분이격화되었고, 코르도바의마지막왕인힉셈
3 세가 1031 년에사망함으로써왕국에서동요와반란이일어나한동안진정되었던종족간분쟁 이되살아났다. 그결과메스키타만을번영했던시절의상징물로남기고한군주가통치하는에미레왕조는 사라지고, 왕조가통치하던안달루스 ( 안달루시아지방 ) 는주요도시로분할되어각도시마다 군주들이난립하는군웅할거시대인타이파 ( 소왕국 ) 왕국의시대로넘어갔다. 그후, 아노라비드 (Ahnoravid) 가권력을계승하고, 그결과 12세기코르도바에아우오아드 (Ahuohad) 왕조가들어서면서다시안달루스의수도로삼아이전의영광을대부분복구하였으나, 1236년에카스티야의왕인페르난도 3세가코르도바를점령함으로써도시는다시가톨릭세계로발을들여놓았고, 모스크는대성당으로바뀌었으며, 빈번한무어인의공격위협을막아
내는국경도시라는역할에걸맞게알카사르와칼라오라탑사이에새로운방어구조물이높이쌓아졌다. 따라서모스크-대성당주변에밀집한역사적중심지는특징적인좁고구불구불한거리와함께중세도시의구조를상당부분잘보존하고있다고한다. 그러나이베리아반도전역에걸친가톨릭지배로스페인이재건되면서코르도바는그정치적 지성적중요성이많이떨어져현재는인구약 30만명의조용한도시로변해졌지만, 시에라모레나산맥의구리및납광산이부근에있고, 무슬림이전한관개 농경기술에힘입어농산물집산지를유지하고있었기에아직도상업적으로중요한역할을유지하고있다고한다. 오후 1시경에 < 코르도바 > 에도착하였다. 버스에서내린곳은코르도바역사지구부근을지나는길중앙에공원이있는대로변으로, 코르도바의첫인상은조용한우리나라지방도시와같으며, 도로주변에꽃과야자수가많다는느낌으로친숙한느낌마저들었다. 금강산도식후경이라고우리는대로변에있는중국집으로가서점심식사를한후, 걸어서코르도바역사지구관광을시작하였다. 공원은물론이고, 거리곳곳에예쁜꽃이나화분으로도시를밝게만들고있는것이눈에띄었다. 갑자기스페인현지가이드가따라걷고있는우리일행앞에서코르도바의친한현지여성을만났는지양쪽뺨을맞대면서가볍게쪽소리를내는스페인특유의인사인 도스베소스 (dos besos) 를하여색다른광경에순간적으로놀랐는데알고보니이곳로컬가이드로두사람은이미구면인듯하였다. 코르도바에서먼저간곳은유대인마을과꽃의골목이었다. 성곽의알모도바르 (Almodóvar) 문을통해들어가자원래의모습을가장잘보존하고있다는유대인구역이나왔다. 성곽을끼고서말그대로사람한명이지나갈만한좁은골목이미로처럼얽혀있는것이색다른느낌을주었으며, 특히그곳에 1492년유대인추방이후가톨릭교인이사용한벽한면이정교한석고조각으로되어있는작은 < 시너고그 >(Synagoga, 유대인회당 ) 가있어, 나를놀라게하였다. 참고로스페인에는이러한시너고그가 3개 ( 톨레도 2개, 코르도바 1개 ) 존재한다고한다. 또한유대인거리곳곳에예쁜꽃이나화분으로집안을정성스럽게조경을한각양각색의파티오 (patio, 건물과건물사이의안뜰 ) 가눈에띄었는데, 아늑하고포근한기분마저들정도로보는사람의마음도편안해졌다. 여행가이드에코르도바가파티오로유명하다고
쓰여있던것이떠오르며, 잠시들어가차라도한잔마시며감상하고싶지만매정한가이드는 계속길을재촉하였다. 유대인거리남쪽좁은길로들어간곳에양쪽흰벽에예쁜화분들이가득걸려있는일명 꽃의골목 이라는앙증맞고아름다운골목길이있었다. 소문대로사진이기가막히게나오는것은인정이되는데, 골목길이가 20m도되지않는너무나짧은골목이라놀랐다. 꽃의골목을빠져나오자마자스페인어로모스크 ( 이슬람사원 ) 를뜻하는이슬람교와가톨릭이혼재하는대건축물인 < 메스키타 >(Mezquita) 가눈앞에나타났다. 담장문안으로들어가자 < 오렌지의안뜰 > 이나왔다. 이메스키타는 785 년아브드알라흐만 1
세에의해서고트왕국의교회가있던자리에건립되었고, 그후 848년, 961년, 987년의 3차례확장공사를거쳐 2만 5천여명의신자를한꺼번에수용할수있는규모로완성하였다고하는데, 당시무슬림들이기도를올리기전에이오렌지의안뜰에있던연못에서몸을정갈히하였다고한다. 그런데현재그연못은국토회복운동이후에모스크를교회로개조할때없어지고우물만이남아그때의모습을짐작하게하고있어, 한마디로세월의무상함을느끼게한다. 또한특이하게도메스키타의상징인미나레트 ( 종탑 ) 도아랫부분은이슬람의미나레이고, 그윗부분에가톨릭의종탑을올린복합적인형상으로, 이사원의복잡하고험난한 (?) 역사를실감나게해주고있었다. 우리는국토회복운동이후에모스크를교회로개조할때유일하게부수지않고남겨두었다는 < 종려의문 > 을통해서모스크내부로들어갔다. 사원의규모는남북 180m, 동서 130m 로거대 하였는데, 내부는생각하였던것보다는단순하였다. 다만, 메스키타내부에는스페인을거쳐
간지중해의모든문명 그리스, 카르타고, 로마, 비잔틴 의양식들이모두표현된줄무늬석영, 벽옥, 대리석, 화강암등으로만들어진 80여개나되는둥근석조기둥 ( 원래는 1200여개라고함 ) 이아치를이루며서있어미궁속을연상하게하였다. 특히메스키타에서가장오래된부분인입구부분에있는중량을분산시키고, 천장을더욱높이기위해만든 2층아치의적백문양은언뜻보면채색한것처럼보이지만, 백색돌과적색벽돌을교대로짜맞추어만든것이며, 천장의정교한모자이크는비잔틴제국에서가져왔다고한다. 가장안쪽에는미흐라브 ( 메카의방향을나타내는제단 ) 가있었는데, 정면과측면, 천장에이르기까지정밀하게조각된장식들이한마디로놀라움을자아내게하였다. 그런데미흐라브의위치가좀특이하게도건물벽면중앙에있지않았는데, 알고보니사원확장에따른충분한부지를확보하지못하였기때문에원래메카방향으로있는미흐라브를향해좌우대칭이어야할모스크의균형이무너져있다고한다. 한편생뚱맞게도건물중앙부분에는성직자들이당시의왕카를로스 5 세를설득하여 16 세기 에지은카데드랄 ( 대성당 ) 이있었는데, 그자체만으로는웅장하고아름다웠다. 하지만완공 후에이것을본왕이 당신들은어디에도없는것을부수고, 어디에나있는것을지었다고
고한탄하였다고전해지듯, 문외한인내가봐도사원전체분위기와는전혀맞지않았다. 그러나이슬람문화와가톨릭문화의양식이한공간에혼재되어 ( 동거하고 ) 있다는점에서이사원은 어디에도없는건축물 이되었다는생각이들면서, 한편으로는이스탄불의소피아성당이갑자기떠오르며종교적으로이슬람교가가톨릭보다문화적인면에서더포용력이있었다는것을느끼게만들어주었다. 메스키타관광을마치고나온후, 자유시간이주어져메스키타담장을끼고, 남쪽으로걷다보니과달키비르강과함께, 로마다리 (Puente Romano) 가나타났다. 이다리는과달키비르강에가로질러놓인폭 3.7m의다리로, 로마의아우구스트황제시대에지어진다리로로마시대의귀중한유적가운데하나라고한다. 그러나전쟁때마다파괴와복구가반복되었으며, 현재의다리는이슬람교도가정비한다리에레콘키스타후에복원작업을한것이라고한다.
로마다리를건너가자이슬람시대에다릿목을지키는요새로지어졌다는칼라오라탑 (Torre de la Calahorra) 이나타났고, 약간높은언덕에서잠시쉬면서한눈에보이는과달키비르강건너편에시원스럽게펼쳐진코르도바역사지구 ( 구시가지 ) 를편한마음으로감상하였다. 또한말없이흐르고있는과달키비르강을보면서이강은약 700년간이슬람세력과가톨릭세력의전쟁역사를알고있으며, 특히 1212년여기로부터동쪽에있는도시 Linares 부근의 < 라스나바스데톨로사 > 전투에서카스티야왕국을주축으로한아라곤, 나바라의가톨릭연합군이이슬람세력을격퇴시키며역사를바꾼전투를포함해두세력간의전쟁에서이강의역할이막중하였을것이라는생각이문득들었다. 그런데건너편강기슭에그옛날아마강으로부터물을끌어올리는데사용되었을대형물 레방아가눈에띄었는데, 사람은가고없어도자연과유물은그대로 라는생각이들면서
물레방아가그옛날의영화로부터벗어난코르도바를목가적인분위기마저느낄수있게만들어주고있었다. 오후 3시반경코르도바를떠나 < 알람브라궁전 > 으로유명하며, 화려한이슬람문화와가톨릭문화가신비하게뒤섞였다는그라나다로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