惠岡 崔漢綺의 科學思想 權 五 榮* Ⅰ. 머리말 Ⅱ. 宇宙觀 Ⅲ. 自然科學思想 1. 科學一般論 2. 地理學思想 3. 天文學思想 4. 醫學思想 5. 西歐科學技術受容 Ⅳ. 맺 음 말 Ⅰ. 머 리 말 르네상스 이후 서구에서는 새로운 근대과학이 형성 발전하여 나갔다. 주지하는 바 와 같이 이러한 서구학문은 조선후기 이래 19세기 전반기까지는 중국을 거쳐 조선에 수용 되었다. 그리하여 중국을 통하여 수용된 서구과학은 李瀷 洪大容 朴趾源 丁若鏞 등 일련의 실학자들에게 일정한 영향을 끼쳤고, 특히 19세기 중엽에 활동한 崔漢綺 (1803 1877)의 諸思想形成에는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서학의 여러 학 문 중에서도 가장 깊은 영향을 끼친 것은 바로 자연과학부문이었다. 이에 본고에서는 최한기의 자연과학사상에 대하여 여러 분야로 나누어 검토하고자 한다. 흔히 우리는 최한기를 氣學者나 氣哲學者로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여기에 서는 그의 기학이 서구의 자연과학과 밀접히 관련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의 氣論 과 자연과학의 관계를 구명하고자 한다. 그런데 최한기는 이미 宋 明代의 心學(陽明 學)과 性理學도 자신의 기학의 誠實을 이끌어내는데 기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것 으로 볼 때 최한기의 기학은 동양의 성리학을 비롯하여 서구의 제반 학문과 깊은 관 련성이 있으나 여기에서는 자연과학사상을 위주로 검토하겠다. 최한기의 서구과학수용에 대한 연구는 朴星來에 의하여 그 단서가 열렸고1) 그 뒤 許南進이 최한기의 과학사상의 철학적 기초를 탐구하여 그를 東道西器論者로 규정한 바 있다.2) 본고에서는 이러한 기존의 연구에 힘입어 보다 실증적으로 최한기의 宇宙 * 韓國情神文化硏究員 編修員. 1) 朴星來, 韓國近世의 西歐科學受容 ( 東方學志 20, 1978).
- 194 國史館論叢 第63輯 觀과 자연과학사상을 탐구하겠다. 우선 최한기의 과학사상을 살펴보기 전에 코페르니 쿠스의 태양중심설에 입각한 우주관을 그가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를 地球圖說 을 새로 발굴하여 실증적으로 제시하겠다. 그리하여 기학의 발단을 서양의 근대과학의 발달에서 파악해 볼 수 있고, 아울러 그에 이르러 실학자들의 우주관이 비로소 근대 우주관으로 전환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氣說의 일부인 大氣 說은 바로 서양천문학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 형성된 것이요, 우주관도 서구의 천체역 학의 지식을 통하여 새로운 근대우주관으로 변모되어 갔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기학에 영향을 준 제학문을 살피기로 한다. 그런데 과연 최한기의 사상의 어느 부문이 서양과 중국과학지식의 영향을 전적으로 받았으며, 반면에 독창적인 부 분은 어떤 점인가 하는 것을 밝힐 필요가 있다. 여기서 그의 사상을 올바르게 파악하 기 위하여는 중국에 전래된 17세기 이래의 서양의 사상과 과학기술 등에 대한 서적 및 그가 講讀한 중국의 제서적에 대한 정확한 비교 검토 위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 이다. 특히 氣를 보고 기를 증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 말로 그의 기학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를 보고 기를 증험하는 서학은 바 로 회르비스트의 靈臺儀象志 와 알폰세 바그노니의 空際格致 에 수록된 내용에 서 취한 것이었다. 최한기가 기학과 관련하여 제시한 학문은 크게 地理學 天文學 醫學 器用學 등이다. 먼저 그의 사상형성에 깊은 영향을 준 것은 바로 지리상의 발견에 따른 지구에 대한 해명이었다. 지리상의 발견으로 지원설과 자전설이 입증된 것이야말로 조선후기 지식 인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다. 최한기는 포르투갈인 카노의 지구일주를 天地의 開 闢 이라고 극언하였다. 따라서 최한기가 지구에 관한 학문을 통하여 그의 기학을 형성 하였음을 실증적으로 논구하고자 한다. 이것은 그가 기학의 入門에 해당하는 학문으 로 지리학 또는 지구과학을 제시한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그의 기 학에 方向을 제시한 학문은 천문학이다. 여기에서는 뉴턴의 만유인력법칙의 수용과정 을 살펴본 뒤 그가 自得한 氣輪 說을 검토하겠다. 그는 천문학에 대한 깊은 연구를 통하여 千古의 疑惑 이 풀렸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최한기의 동서양의 의학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겠다. 그는 인간의 知覺運 動이 뇌와 마음 중 어느 곳에서 주관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깊이 고민하고 우리나라에 서는 처음으로 히포크라테스의 腦가 知覺을 주관한다는 설을 수용하였음을 검토하겠 다. 마지막으로 최한기가 기학의 경험에 해당하는 학문으로 제시한 것은 기용학으로 토목공학이라든가 농공학 등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가 제시한 농업기술이라든가 일용 기계 등의 과학기술에 관한 올바른 파악은 서양의 과학기술에 관한 漢譯書들과 이와 2) 許南進, 惠岡 科學思想의 哲學的 基礎 ( 科學과 哲學 2, 1991).
- 195 관련한 중국의 제서적, 그리고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저술에 대한 정확한 탐구 위에서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과학사상의 연원을 구명하는 과정의 하나로 그가 남긴 과학기술관계의 몇몇 서적과 참고한 한역서학서와 실학자들의 서적을 통하여 농업기 술문제와 일용기계를 중심으로 그 원류를 밝혀 보고자 한다. Ⅱ. 宇宙觀 조선후기 서양역법의 도입으로 조선학계에서는 전통적인 동양의 우주관에서 벗어 나서 양우주관에 대한 수용이 나타나게 되었다. 최한기도 중국을 통하여 새로운 서양 과학의 내용을 담은 신서적을 수용함으로써 우주관과 자연과학에 관한 신지식을 갖게 되었다.3) 그런데 최한기의 우주관에 대한 연구는 처음 朴星來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박성래는 최한기의 우주관이 1836년과 1857년 사이에 크게 바뀐다고 지적하였다. 즉 1836년에는 지구중심자전설에서 1857년에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받아들여 자전과 공전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성과는 조선시대 우리나라에도 최초로 지 구공전설을 이해한 인물이 있었다는 실증적인 증거를 제시한 것이었다. 그런데 박성 래는 地球典要 에 그려진 4개의 우주모델을 소개하고, 제4도를 보면 經星天을 그 려 넣고 있어서 최한기가 유한한 폐쇄된 우주를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고 하여 洪大容 이 이미 무한우주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에 비하여 최한기의 우주관은 그다지 발전을 보이지 못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고 평하였다.4) 그러나 최한기가 무한우주론을 펴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서구 천문학에 의거하여 제시된 천체 구조를 이해하여 소개하 고 있다는 점에서는 홍대용 등 그 전시기의 실학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 씬 진보적인 견해를 제시하였던 것이다. 최한기는 上古 中古 近古를 거쳐 우주에 대한 이해의 발전과정을 정확히 알고 있었 다. 上古에는 지구가 정지하여 있는 것으로 여겨 曆을 만들어 형세가 장차 渾天이 일 일 일주를 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런데 中古에는 地轉으로서 역을 만들었는데 형 세가 장차 經星天으로써 움직이지 않는다고 여겼다. 近古에는 지구가 黃道를 따르는 3) 19세기 중엽 최한기는 주로 중국에서 들어온 歷象考成 이나 歷象考成後篇 을 통하여 우주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다. 그의 편저 儀象理數 는 바로 역상고성후편 을 발췌 하여 엮는 책으로 儀象理數 는 본래 상하 두 책이었으나 현재 상책은 전하지 않는다. 이 상책에는 平弧, 三角相求의 비례와 타원각도, 면적의 分數가 자세하게 편집되어 있었다( 星 氣運化 凡例 참조). 한편 하책에는 歷象考成後篇 의 내용이 선별 편집되어 있다. 4) 朴星來, 韓國近世의 西歐科學受容 ( 東方學志 20, 1978). 그런데 地球典要 에 수록된 네 가지 우주모델을 제시하면서 티코 브라헤와 머르센의 우주모델을 동일한 모양으로 그려 놓았는데, 티고 브라헤의 우주모델은 月 日 水 金 火 木 土星 위에 均輪이 표시되어 있으나, 머르센의 우주모델은 地 月에만 均輪이 표시된 차이가 있다.
- 196 國史館論叢 第63輯 것으로 계산을 하였으니, 형세가 장차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 위치하게 되었다고 하였 다.5) 여기에서 우리는 태양중심설을 그가 정확히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천체의 범위는 일정하게 배포되어 있지만, 사람의 견해의 究明이 각 각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최한기는 우주구조에 대한 명확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한 부분이 없지 않다. 우주에 가득차 운화하여 만물을 생성하는 기가 순환하여 쉬지 않아 원근과 상하가 서로 끌어 당겨 照應하여 지구 달 태양 별의 몸체가 등근 물건이 항상 氣運의 가운데 있으니 어찌 항상 정지하여 움직이지 않겠는가. 여러 천체가 회전함에 기가 따라서 움직이는가. 여러 천체와 氣化가 각각 運轉하는 性을 가지고 있는가 라고 의문을 제기 하면서, 비록 분별해서 지적할 수는 없으나 옛날부터 지금까지 무궁한 運化에 物이 피할 수 없으니 사람들도 異說이 없다는 것이다.6) 우주 안에 가득차서 활동운화하는 것은 기인데, 비록 지구 달 태양 별이 운동하는 궤도가 있으나, 원근과 대소의 타원의 모양이 있고 때로는 확대 축소의 나누어짐이 있으니, 이것을 사실대로 도형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천문학자들이 겹겹이 싸인 圈을 그려 제시하지만 그것은 다만 대략의 짐작에 불과한 것이요, 따라서 活動 運化와 寒熱乾濕의 기의 性과 情을 표현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7) 그러면서도 그는 天은 기의 大體이고, 기는 천의 충만한 形質로 보았으며 지구 달 태양 별을 天氣가 응 결한 물건으로 보고, 천체의 구조는 겹겹이 싸여 있고 층층이 운동하여 버티고 있는 형세와 활동의 틀이라 생각하였다.8) 이러한 견해는 뒤에서 서술하겠지만 바로 氣輪說 의 연원으로 해석 된다. 최한기는 1836년 우주에 나열되어 있는 經星과 衛星이 사연이 없이 나열되어 있다 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궤도를 따라 주행하는 것이 不得不 그러한 바, 즉 모든 천체가 각각 주장하는 德性 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9) 이 덕성 은 바로 후일 뉴턴 (Issac Newton, 1642 1727)의 인력설에 의하여 천체의 운동을 설명하는 것을 받아들 일 여지가 있는 근원으로 이해된다. 즉 최한기가 1867년 星氣運化 에서 비로소 뉴 턴의 인력법칙에 의거하여 천체상호간의 운동을 설명하기까지에는 不得不 그러한 勢 로 천체의 상호 간의 운동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10) 5) 氣學 권1, 上古以地靜造歷 勢將以渾天一日一周 中古以地靜論歷 勢將以經星天爲不動 近 古以地循黃道立算 勢將以太陽居宇宙之中. 6) 氣學 권1, 充塞六合 運化陶鑄之氣 循環不息 遠近上下 牽掣照應 地月日星 體圓之物 常在 雖氣運之中 豈有常靜不動 諸曜轉而氣隨之運歟 氣運化而諸曜隨轉歟 諸曜與氣化 各具運轉之性 歟 未可分別指的 自古及今 無窮運化 物不能逃焉 人亦未有異說. 7) 運化測驗 권1, 氣不可圖. 8) 氣學 권1, 天者 氣之大體 氣者 天之充滿形質 地月日星 乃天氣凝結之物 而旣分形質 則各有其氣 地氣月氣日氣星氣 大小輕重 隨大氣之積厚 從遲速而載運 高低生焉 冷熱燥濕 各放 氣而交射 大氣受而和瀜 造化生焉 重重裹包 層層輪轉 撑柱之勢 活動之氣 統爲天體. 9) 神氣通 권1, 體通, 地體及諸曜; 推測錄 권6, 推物測事, 萬物資育.
- 197 한편 1850년대 최한기는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1473 1543)의 태양중심설을 지 지하고 있지만 태양과 토성 목성 화성 지구 달 금성 수성이 부단히 운행하는 것을 부 득불 그러한 勢 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뉴턴의 만유인력법칙에 의거하여 천체의 운 행을 설명하고 있지 않다. 다만 어떤 법칙이 존재할 것이라는 추측으로 시종 일관하 고 있다. 그런데 1860년대에 들어와 최한기의 우주관에 깊은 영향을 끼친 서양천문학 서는 영국의 허설(Frederick William Herschel)이 쓴 談天 이었다. 최한기는 이 책 을 토대로 星氣運化 를 저술하여 천체에 대한인식을 피력하고 있다.11) 한편 최한기는 1836년 무렵 경성 위성 태양 달 지구의 상호관계에 대하여 세 가지 를 가정을 하고 있다. 첫째, 경성이 범위의 진열이 되고, 위성이 태양 달 지구를 도와 응하는 구조, 둘째, 지구 달 태양이 위성을 도와 응하는 구조에 다시 위성이 경성을 도와 응하는 구조가 되어 위치를 바꾸어 가며 聯絡하여 그 體를 이루는 구조, 셋째 연계되거나 조응하는 바가 없으면서 ー氣의 속에 포함되어 각각 맡은 바가 따로 있으 면서 일체를 이루는 구조를 생각하였다. 이러한 세 가지의 견해를 나타내면서 이 사 실들은 제쳐두고 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요, 또 그 대강을 확정하여 말할 수도 없 다고 하였다.12) 이와 같이 1836년 당시 그의 우주관은 매우 신중하나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다만 여러 천체 중 낮은 것은 운동이 빠르고 높은 것은 운동이 느리다 는 것으로 천체의 거리를 생각하고, 地動說을 믿고 있는 정도였다.13) 서양의 우주모델 중 티코 브라헤(Tycho Brahe)의 학설을 처음으로 중국에 소개한 책은 로오(Giacomo Rho ; 羅雅谷)의 五緯歷指 로서 崇禎曆書 에 수록되어 있 다.14) 바로 新法算書 ( 숭정역서 를 뒤에 改題)의 오위역지 에 프톨레마이오 10) 地球典要 권1, 潮汐 論氣化. 11) 최한기가 星氣運化 를 저술하기 위하여 참고한 談天 18권은 1858년에 간행된 책이었 다. 그러나 필자는 그 책을 구해볼 수 없어 부득이 1874년에 간행된 책(성균관대학교 도서 관 소장)으로 비교검토하였다. 그 결과 1858년본과 1874년본은 권수에 차이가 없고 1858년 이후 천체에 대한 관측치만 수정되어 수록되고 있는 것 같으므로, 星氣運化 와의 대조에 별다른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星氣運化 권1, 地氣數는 談天 권1의 論地와 권2의 命名의 일부를 전재하고 있고, 성기운화 권2의 天氣數는 담천 권5의 天圖를, 성기운화 권3의 日氣數는 담 천 권6의 日躔을, 성기운화 권4의 月氣數는 담천 권7의 月離를, 성기운화 권 5의 諸行星氣數는 담천 권9의 諸行星을, 성기운화 권6의 諸月氣數는 담천 권10 의 諸月을, 성기운화 권7의 慧星氣數는 담천 권11의 慧星을, 성기운화 권8(恒 星氣數-목차누락)은 담천 권15,16의 恒星과 恒星新理를, 성기운화 권9의 星林氣數 는 담천 권17의 星林을, 성기운화 권10의 氣輪攝動은 담천 권12의 攝動을, 성기운화 권11의 楕圓諸根變은 담천 권13의 楕圓諸根之變을, 성기운화 권12의 經緯差度는 담천 권14의 逐時經緯差度差의 일부를 전재하고 있다. 12) 神氣通 권1, 體通, 地體及諸曜. 13) 위의 책 권1, 體通, 地體及諸曜 및 推測錄 권2, 推氣測理, 地球右旋. 이 부분은 코페르니 쿠스가 태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行星일수록 천천히 움직인다고 주장한 사실을 받아들인 것 같다. 14) 姜在彥, 조선의 西學史 (民音社, 1990) p. 42.
- 198 國史館論叢 第63輯 스(Ptolemaeous Claudius)와 티코 브라헤의 우주모델이 수록됨으로15) 중국에서는 티 코 브라해의 우주모델이 이해되었다. 한편 이 신법산서 에는 프톨레마이오스 티코 브라헤 코페르니쿠스의 저술의 내용이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는데,16)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모델이 수록되지 않고 프톨레마이오스와 티코 브라헤의 우주모델이 소개되고, 특 히 티코 브라헤의 우주모델이 新圖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 이유는 로마교황청이 코페 르니쿠스의 天球의 同轉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를 금 서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은 로마교황 청이 금지하고 있던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 가 1757년 금서목록에 서 해제되고 난 뒤 프랑스의 야소회 선교사 브노아(Michel Benoit; 蔣友仁)17)에 의하 여 처음으로 중국에 소개되었던 것이다. 즉 중국에서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이 어느 정 도 뚜렷이 발표된 것은 1767년에 간행한 地球圖說 이 처음이었던 것이다.18) 따라 서 최한기가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받아들인 것도 바로 이 지구도설 에 의거하였 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지구도설 에는 지구 전체의 운동 변화하는 모습이 대략 밝혀져 있다고 하였는데,19) 이 지구도설 은 바로 브노아의 저술로 최한기의 우주 에 대한 이 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지구도설 의 七曜表序의 우주모델을 그대로 지구전요 에 편집하여 소개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지전설의 설명 도 아울러 전재하고 있기 때문이다.20) 여기에서는 최한기의 지구와 천체에 대한 이해를 지구전요 의 분석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근래 지구가 점점 밝혀지고 역법에 또한 연혁이 있어 천지로부터 보면 運行氣數 가 고금이 다름이 없고 사람의 見聞 이 점점 實測 을 다하여 앞사람이 깨닫지 못한 바를 깨닫고 앞사람 이 증험하지 못한 바를 증험하였으니, 중요한 열쇠는 오로지 지구에 있으니 지구와 더불어 서로 견주어서 상호 推明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구의 자전 공전을 인식하고자 하면 반드시 諸曜의 진퇴와 지속, 고저와 원근을 증험하여 밝혀야 한다.21) 15) 新法算書 권36, 五緯歷指 권1, p. 634( 文淵閣四庫全書 天文算法類). 16) 위의 책 권98, 歷法西傳 1 14면( 文淵閣四庫全書 天文算法類). 17) 브노아에 대해서는 疇人傳 西洋 4, 蔣友仁 참조. 이 주인전 에는 중국과 서양의 역대 과학자들의 傳記가 수록되어 있는데, 저서명과 論說이 상세하게 다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 주인전 6책은 당시 조선에서는 유일하게 南秉喆(哲)이 소장하고 있었다( 五洲衍文長箋 散考 권42, 西洋通中國辨證說附西舶通我東及疇人傅). 18) 李龍範, 法住寺所藏의 新法天文圖說에 대하여 下( 歷史學報 32, 1966) 및 姜在彥, 조선의 西學史 p. 148 참조. 19) 地球典要 凡例 4면. 20) 현재 국내에는 브노아의 지구도설 의 소장이 확인되지 않아 부득이 대만 중앙연구원 소 장의 지구도설 을 복사하여 지구전요 와 비교검토를 하였다. 한편 阮元 撰, 疇人 傳 에도 프랑스인 브노아의 地球圖說 의 내용을 일부 轉載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疇人傳 권46, 西洋 4, 附蔣友仁, pp. 601 610 참조).
- 199 - 이러한 인식에서 그는 중국이나 조선의 고래의 천문학 지식을 수용하여 지구와 七 政을 해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서양의 여러 학설을 지구도설 에서 인용하여 지구전요 에 소개하였다. 그리하여 최한기는 첫째로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관을 인용 소개하고 지구전 요 의 말미에 지구도설 의 제16도를 수록하였다. 둘째로 그는 티코 브라헤의 우 주관을 인용 소개하고 지구도설 의 제17도를 수록하였다. 셋째로 머르센 (Mersenne)의 우주관을인용 소개하고 지구도설 의 제18도를 수록하였다. 넷째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의 우주관을 인용 소개하고 지구도설 의 제5도를 수록 하였다. 최한기는 이러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의 우주관을 인용하면서 바로 이어서 서술하고 있는 코페르니쿠스의 우주관의 전승관계는 전재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西士들이 정밀하게 천문을 구하는 자는 모두 코페르니쿠스가 논한 바 序次로써 諸曜의 운동을 추산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그가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받아들여 조선에 소개하고 있는 것이요, 나아가 그는 서양의 학자 들 뿐만 아니라 중국인 중에도 천문을 정밀하게 구하는 자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 심설을 따르고 있다고 하였다.22) 여기에서 지구도설 과 지구전요 의 地球圖 및 天文圖의 관계를 비교하면 다 음의 표와 같다. 한편 최한기는 諸曜徑各不同 에서 태양 수성 금성 지구 달 화성 목성 토성의 지 름이 같지 않음을 比例表로 소개하고 있다. 또한 4계절이 지구의 운동으로 말미암아 생기며, 태양과 5星의 구체적인 모습과 운동에 대하여 圖와 說로 편집하여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천체에 대한 모든 이해는 바로 브노아의 지구도설 의 내용을 그대로 편집하여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최한기의 과학사상이 결코 낮게 평가 될 수는 없다. 우선 당시는 서구학문의 東漸 속에서 그 수용이 급하였기 때문에 그는 그 역할을 충분히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구학문에 대한 정확한 이해 위에서 자 신의 기학을 제창하였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최한기는 南北極恒星圖의 대략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그는 태양과 달 토성 목성 화성 금성 수성에 대하여 언급 하였다. 즉 태양면의 黑影, 달의 표면, 토성의 본체와 土星環 및 토성주위를 도는 5개 의 위성의 운행을 소개하였다. 또한 목성의 면과 4개의 위성의 운행 등을 설명하고 21) 地球典要 권1, 七曜次序, 挽近地球漸明 歷法亦有沿革 自天地觀之 運行氣數 古今無異 人 之見聞 漸致實測 覺前人之所未覺 驗前人之所未驗 大端關鍵專在地球 地球之可與比擬 互相推 明者七曜也 欲認地球之動靜及自轉輪轉 須驗諸曜之進退遲速 高低遠近而明之. 22) 地球圖說 원문에는 今西士精求天文者 로 표현되어 있으나 최한기는 凡中西精求天文者 로 고쳐 쓰고 있다( 地球圖說 9면 ; 地球典要 권1, 七曜次序, 13면 참조),
- 200 國史館論叢 第63輯 있다. 물론 이는 大千里鏡으로 관측한 결과임을 부연하고 있다. 특히 남북극항성은 그 동안 대기에 가려져 천체를 고찰할 수 없었는데 비로소 항성도로 그려내었음을 소개 하고 있다.23) 이러한 항성도에 대한 이해는 그가 태양계 뿐만 아니라 항성계까지도 깊은 관심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표></표> 地球圖說 (21도) 坤輿全圖 1 坤輿全圖 2 太陽併游曜諸圖 제1도 제2도 제3도 제4도 제5도 제6도 제7도 제8도 제9도 제10도 제11도 제12도 제13도 제14도 제15도 제16도 제17도 제18도 地球典要 內容 제19도 제21도 제20도 제4도 제17도 제18도 交食 交食(月食圖) 交食(日食圖) 제1도 제2도 제3도 제10도 제11도 제12도 제16도 五星 五星 太陽 太陽 五星 五星 Ⅲ. 自然科學思想 23) 推測錄 권6, 推物測事, 星名災祥之非. 備考 코페르니쿠스 우주관 프톨레마이오스우주관 티코 브라헤우주관 머르센우주관
- 201-1. 科學一般論 최한기는 자연과학에 대한 이해를 서양선교사의 서적을 통하여 이해하였다. 여기서 는 주로 運化測驗 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운화측험 은 그 골격이 알폰세 바그노니(Alponse Vagnoni ; 高一志)의 空際格致 에 연원을 두고 있다.24) 최한기는 운화측험 의 54항목 중에서 공제격치 의 총 62항목 중 26항목을 그대 로 인용하고 있다. 그 인용부분은 流星 隕星을 비롯하여 地震 地內火에 이르기까지 주 로 자연현상에 대한 것을 전재하고 있다. 여기서 두 책을 비교해 보면 그 체재에서 매우 유사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그 내용에 있어 큰 차이점은 공제격치 는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을 언급하면서 원소(行)의 의미를 주로 언급한 반면, 운화측험 은 氣와 氣의 속성인 運化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이 점은 바로 그가 서양의 자연현상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전적으로 수용하면서도 4원소설 자체는 비판 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즉 4원소설이 동양의 五行說의 뒤에 나와 기를 밝힌 공은 있으나 一氣運化에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최한기는 서양의 4원소설이 太陽火際로써 최대의 廣輪으로 삼고 그 다음은 氣輪으 로 설정하고, 또 그 다음은 水 土가 지구를 이루어 限界를 나누어 이것을 4원소의 純 이라 하고, 熱은 火에 속하고 濕은 水에 속하고 乾은 土에 속하고 冷은 氣에 속하여, 서로 화하게 되면 4원소의 雜이라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억지로 분배한 것일 뿐이 라고 하여 기의 三域說을 부정하였다.25) 최한기는 이러한 4원소설에 대신하여 그 대안으로 ー氣論을 제창하였다. 그에 의하 면 氣의 物됨은 우주 안에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여 물에 붙으면 物氣가 되고, 水에 붙으면 水氣가 되며, 土에 붙으면 土氣가 되고, 火에 있으면 火氣가 되며, 物에 붙지 않으면 그것이 곧 運化氣인데, 어찌 기로서 수 토 화에 限界를 나누겠느냐고 반 문한다. 그리하여 그 근본을 말하면 氣이고 分殊를 말하면 萬有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중국의 오행설의 害는 지금까지 고치기 어려운 병이나 서양의 4원소설도 비록 氣의 發端은 말하였으나, 오히려 미진한 바가 있다고 하였다. 이에 그는 地體의 자전 과 氣의 全德을 터득하기 위하여는 기를 三域으로 나누어 파악한 서양과는 달리, 氣 의 性으로 活(생명성) 動(운동성) 運(순환성) 化(변화성)를 제창하고 기 의 情으로 寒 (cold) 熱(hot) 乾(dry) 濕(wet)을 제시하여 그 나름의 ー氣論을 형성하여 자연과학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시도하였던 것이다.26) 24) 空際格致 는 이미 安鼎福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최한기 이전에도 읽혀졌을 가능 성이 있다. 25) 運化測驗 권2, 五行四行. 26) 위와 같음.
- 202 國史館論叢 第63輯 한편 최한기는 운화측험 에서도 冷熱器, 燥濕器, 玉衡車, 火輪機를 그의 기학에 근거하여 설명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기계들은 靈臺儀象志 泰西水法 해국 도지 에서 인용한 것으로서 그의 과학지식은 결국 중국에 들어온 서양선교사들의 지 식이나 중국의 과학기술서적을 통하여 형성되었다.27) 예컨대 최한기가 바닷물의 짠맛 을 제거하여 淡水로 변화시키는 문제에 대하여 바로 공제격치 의 내용을 그대로 이해하고 있으며,28) 이러한 지식은 1871년 辛未洋擾 때 실제적으로 敵情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29) 그렇다면 운화측험 에서 서양의 기에 대한 인식이 최한기에게 어떻게 변형되어 받아들여지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먼저 그는 空際 개념을 上際 로 바꾸어 쓰고30) 간 접적으로 積氣 로 표현하거나31) 심지어 性情 이라는 표현도 氣味 로 바꾸기도 하였 다.32) 이와 같이 그는 공제격치 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의 독자적 인 기의 인식으로 선회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공제격치 의 모든 자연현상에 대한 설명을 운화의 범위에 넣어 설명하고 있다. 그의 자연과학에 대한 이해는 공제격 치 의 내용을 적극 수용하면서 4원소설의 氣 水 土 火 중에서 기에 대한 이해를 확 대 해석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최한기의 자연과학일반에 대한 이해는 기에 대한 일관된 인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즉 기는 활동운화의 성과 한열건습의 정으로써 오르고 내리는 것을 풀무질 하여 만물을 생성하니 天氣의 한열건습은 비록 그 자세한 내용은 터득하지 못하겠으 나, 태양의 熱이 비쳐 불이 일어나고, 달의 濕으로 인하여 水氣를 움직이니 차고 더운 기의 정에 의하여 모든 것이 생성되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33) 따라서 그의 자연과학 에 대한인식은 기를 떼놓고 설명될 수 없으며, 모든 자연현상이 기의 성정인 활동운 화와 한열건습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명백히 서양의 과학기술부문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의 원리의 부분도 수용한 것으로서, 그에 이르러 비로소 서학의 전반적인 수용과 이해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최한기의 자연과학일반에 대한 이해는 기존의 어느 실학자보다 광범위 27) 위의 책 권1, 用器驗試. 28) 위의 책 권2, 水之臭味 및 空際格致 下, 江河 34면 참조. 29) 明南樓全集 1, 惠岡崔公傳 참조. 30) 運化測驗 권2, 雲窟. 최한기가 空際를 上際 로 고쳐 쓴 곳은 運化測驗 에 모두 7곳에 散見된다. 그는 天地의 사이에는 空際가 없고 氣와 水 二物이 운동하여 사이가 없다고 하였다 ( 推測錄 권2, 推氣測理, 氣水無間 참조). 이 밖에도 空際格致 의 空洞과 空窟을 曠窟로 바꾸어 표현하기도 하였다( 空際格致 권下, 地震 38면 및 運化測驗 권2, 地震 참조). 31) 運化測驗 권2, 虹霓. 32) 空際格致 권下, 溫泉, 諸泉性情 有甚奇者 各方不一 有舊泉渴 新泉生者 有晨溫午寒 日旰熱夜半沸者 는 運化測驗 권2, 水之臭味에 宇內各方 諸泉氣味不一 有晨溫午寒 日旰熱夜半沸者 로 표현되어 있다. 33) 運化測驗 권1, 氣之性情.
- 203 하였다. 그가 格致의 학문이라고 부르는 것은 과학의 범위에 넣어 파악해야 할 것이 며, 그 대표적인 학문은 바로 天文學 算學 輿地學 醫學을 들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이 러한 과학발달이 어떤 일개인의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우주의 총명한 지식인들의 공동의 노력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임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즉 과학자들 이 즐겨하는 것은 바로 氣化의 究明이니 만사 만물이 모두 기화를 따라 그 맥락을 얻 고 가리워 있던 그동안의 防碍를 제거하고 밝게 드러난 충만한 형질을 계발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지금에 이르러 物理의 증험이 자못 많고 虛를 제거하고 實에 나아 가 미래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하였다.34) 그가 말하는 물리는 하늘이 외부대상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에 부여한 이치로 오늘날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물리와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가 物性에 대하여 자주 언급하고 있고, 항상 인식주체 인 神氣와 외부대상세계의 사물과의 관계에서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한 것으로 보아, 邵雍의 象數學에서 말하는 물리에서 근대 물리학으로 발전해가는 중간지점에 위치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과학기계 일반에 대한 최한기의 견해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우리는 17세 기 중엽에 이르러 大氣의 움직임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토리첼리(Torricelli), 파스칼 (Pascal), 폰 게릭케(von Guericke), 보일(Boyle) 등에 의하여 비로소 이루어졌다는 사 실을 잘 알고 있다. 특히 근대자연과학의 특징은 실험과 수학의 결합이라 할 수 있는 데, 이들은 실험을 통하여 대기를 측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구체적으로 기를 측정 한 과학실험기계를 최한기가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 겠다. 우선 冷熱器(일명 寒暑表) 즉 온도계에 대하여 최한기의 이해를 검토하기로 한다. 냉열기는 17세기 회르비스트(Ferdinandus Verbiest ; 南懷仁)의 靈臺儀象志 에서 그가 수용 이해한 것으로35) 1836년 조선에 소개하였다. 이 냉열기는 유리로써 球를 만들고 구 밑에 대롱이 있으며 박잎의 줄기모양을 하고 있고 갈고리처럼 굽어져 있으 니 이름은 左管과 右管이라 한다. 대롱입구에 물을 조금 넣어 대롱의 굽은 곳을 막아 둔다. 만일 날씨가 더우면 구 속의 기도 열이 나서 확산하여 반드시 왼쪽 관의 물을 몰아서 오른쪽 관의 수면이 지평보다 몇푼 올라갈 것이다. 반면 바깥의 기가 서늘하 면 구 속의 기가 수축하여 왼쪽 관의 물이 그 빈 곳을 따라 채워져 부득불 위로 올라 가게 되고 오른쪽 관의 물은 지평으로 물러나게 될 것이다. 그는 이같이 물이 오르고 내리는 分數를 통하여 바깥 기의 냉과 열을 시험할 수 있다고 하면서 1860년 運化 測驗 에서도 냉열기에 의한 실험을 통하여 기의 冷은 수축하고 熱은 흩어짐을 시험 할 수 있다고 하였다.36) 그런데 그는 냉열기는 사람의 몸이 날씨가 추우면 피부가 오 34) 明南樓隨錄 32면. 35) 古今圖書集成 4, 曆法典 제92권, 靈臺儀象志 4, 驗氣說 ; 靈臺儀象志 5, 108圖 참조. 36) 推測錄 권2, 推氣測理, 氣水升降 및 같은 책 권6, 推物測事, 身爲器本, 夫冷熱器者 以琉
- 204 國史館論叢 第63輯 싹하고 텁텁하면 가슴에 열이 나는 것에서 취한 것이라 인식하였다.37) 그는 1857년 氣學 에서도 이러한 견해를 그대로 제시하고 있다. 즉 身氣의 熱이 外氣의 熱보다 지나치면 身熱을 느끼게 되고 신기의 열이 외기의 열에 미치지 못하면 外熱을 느낀 다. 그 寒도 마찬가지인데, 안팎의 한열이 알맞으면 그 한열을 느끼지 못한다. 신체의 주위는 바깥의 열을 빌려서 따뜻하게 하고, 신체의 더위는 바깥의 추위를 빌려서 서 늘하게 되니, 이것은 모두 자기가 느끼는 바요 다른 사람이 느끼는 바는 아니라고 하 였다.38) 그는 냉열기를 통하여 기의 정으로 설명하고 있는 냉열 건습 중 냉열을 기구 의 실험을 통하여 알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던 것이다. 이것은 조선의 학자로는 처음 으로 17세기 서구에서 이루어진 대기에 대한 측정을 이해한 것으로 해석된다. 최한기가 냉열기와 더불어 제시하는 또 하나의 과학실험기계는 燥濕器 즉 습도계 璃造球 球下有管 如匏葉莖而屈曲如鉤 名爲左管右管 安於架上 灌水于管口小許 以塞管之屈處 若天氣熱 則球內之氣 亦熱而舒放 勢必驅逼左管之水而右管之水頭 上於地平幾分 若外氣冷 則 球內氣 收斂而左管之水 隨實其虛 不得不强之上升而右管之水頭 亦退至地平 以其水上下之分數 驗外氣之冷熱也. 運化測驗 권1, 用器驗試 및 古今圖書集成 4, 曆法典 제92권, 靈臺儀象志 4, 驗氣說, 用琉璃器如甲乙丙丁 置木板架如(一百九圓) 上球甲與下管乙丙丁相通 大小長短有一定之則 木 架隨管長短分三層 以象天地間元氣之三域 下管之小半 以地水平爲準 其上大半兩邊 各分十度 其所畵之度分 俱不均分 必須與天氣寒熱加減之勢相應 故其度分 離地平線上下遠近若干 則其大 小應加減亦若干 假如冬月在本球內之天氣加厚 而其從前所占八寸之地 自收斂而歸於二寸之地 若五日內 如皆八分之冷 則球內之氣 第一日加厚一寸 第二日不及寸 第三日不過五分 第四五日 加至三分而不動矣 若六日內八分之冷氣 與此相同 而其加厚之寸分 毎日不動 蓋冷熱之驗 有所 必然者 故候氣之具 自與之相應 而冷熱之度 大小不平分相對之至於用之法頗多 總歸於一 卽所 謂辨冷熱之分是也 冷熱者 天地萬變之所起 造化之功所由成也 今姑擧其用之有四以驗之 一測天 氣 一測地氣 一測人物氣 一測月星等之氣 先以測天氣言之 天之氣晝夜無間而無不變易 在卯酉 子午時 其氣之升降不同 器內之水亦應之 如卯時太陽上地平 天氣加熱而升 午時氣更熱而更升 (氣升降之理有本論) 在乙庚管之水亦然 酉時太陽下地平而天氣降 子時更降 在管之水 隨之而歸 於地平 如明日較今日 天氣熱冷若干 而在管之水 因而升降亦若干 蓋晝夜如此 而周年毎節氣日 亦如此 是以冬氣與春氣 又春氣與夏秋等氣 彼此相比 因管之水升降度分若干 可以推其冷熱若干 又今年之節氣 於次年之節氣 彼此相比亦然 欲辨東西南北等風之氣何如 則以此管對之 風熱則水 必升 風冷則水必降 捷於影響 臺不爽焉. 이러한 최한기의 온도계에 대한 설명과 영대의상 지 의 내용으로 보아 최한기는 17세기 갈릴레이와 그 제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알콜온도 계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수은온도계는 1720년 독일 물리학자 파렌하이트 (Fahrenheit, Gabriel Daniel, 1686 1736)에 의하여 처음 만들어졌는데 최한기가 수은 대신 물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수은온도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한편 프라이어의 氣學須知 에 파렌하이트의 寒暑表(수은온도계)의 설명과 그림이 있는데 이는 19세기에 나온 책에 비로소 수은온도계가 설명되고 있는 것을 말해준다. 37) 推測錄 권6, 推物測事, 身爲器本. 38) 氣學 권1, 至於身氣之熱 過於外氣之熱 則覺身熱 身氣之熱 不及外氣之熱 則覺外熱 其寒 亦然 內外之寒熱均適 不覺其寒熱 身之熱 借外熱而溫之 身之熱 借外寒而淸之 是皆自己之所 覺 非他人之所覺. 이러한 최한기의 견해 역시 靈臺儀象志 4, 驗氣說의 如有外熱攻伐吾身 而身內之本熱 與之相等 則觸司必不知覺也 惟外來之熱 有過不及於吾身之熱 而人之觸司 方能辨其熱之强弱 也 에서 수용한 것이다.
- 205 이다. 그는 이 기구에 대한 도설을 영대의상지 로부터 수용하였다.39) 먼저 鹿肋繩 을 十字架에 달고 下板에 十字標를 그린 뒤 板의 十字와 木의 十字를 서로 대조하여 차이가 없게 한다. 만약 濕氣가 노에 젖으면 木의 南北劃이 판의 남북획보다 조금 왼 쪽으로 이동하고, 만약 燥氣가 노보다 마르고 까끌까끌하면 목의 남북획이 판의 남북 획보다 조금 오른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燥濕이 많으냐 적으냐의 分數를 이를 통하여 시험할 수 있으니, 사람이 거주하는 집도 습도계를 가지고 시험하여 조습의 치우침을 피한다고 설명하였다.40) 이와 같이 최한기는 냉열기 조습기를 기를 실험하는 매우 중요한 기구로 인식하여 거듭 강조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는 曆數學(천문학 지구과학) 物類學(博物學) 器用學 (科學一般)의 세 가지를 겸비해야 기를 인식하고 시험하고 기를 가지고 변통할 수 있 다고 하였는데,41) 바로 이 냉열기와 조습기가 氣에 대한 실험 을 대표한다고 생각하 였다. 그가 이러한 기계를 통하여 기의 정인 냉 열 건 습을 과학적 실증적으로 제시한 것은 한국사상사에 있어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제 더 이상 기는 형이상학적인 그 무엇이 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玉衡車에 대한 최한기의 견해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옥형차는 태서 수법 에서 그 도설을 인용하고 있다. 氣 水가 서로 접하여 끊어지지 않으니 털끝 만 큼의 간격이나 틈이 없다. 기가 올라가면 물이 이어서 올라가고 물이 내려가면 기가 따라서 내려간다고 하면서 옥형차를 만드는 법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1丈의 나무통 으로써 밑판에 밸브(valve, 舌)를 설치하여 신통하게 開閉에 응하게 한다. 그리고 피 스톤(piston, 砧)과 피스톤 杆(piston rod, 桿)을 사용하여 위로부터 억누르는데, 안에 39) 古今圖書集成 4, 暦法典 제92권, 靈臺儀象志 4, 測氣燥濕之分 ; 靈臺儀象志 5, 109圖 참 조. 조습기의 그림은 영대의상지 뿐 아니라 프라이어의 氣學須知 에도 그 도설이 실 려 있다. 40) 運化測驗 권1, 用器驗試, 燥濕器(圖說見靈坮儀象志) 以鹿肋繩懸十字木 下板畵十字標 使板 十字木十字 相照無差 若濕氣漬潤於繩 則木之南北畵 差左於板之南北畵 若燥氣乾澁於繩 則木之 南北畵 差右於板之南北畵 燥濕之多寡分數 可驗於此 人之所居房舍 將此試驗 以避燥濕之偏. 古今圖書集成 4, 曆法典 제92권, 靈臺儀象志 4, 測氣燥濕之分, 夫燥氣之性於凡物之所入 卽收斂而固結之 濕氣之性反是 欲察天氣燥濕之變 而萬物中惟鳥獸之筋皮 顯而易見 故借其筋弦 以爲測器(見一百九圖) 法曰用新造鹿筋弦 長約二尺厚一分 以相稱之斤兩墜之 以通氣之明 架空 中橫收之上截 架內緊夾之下截 以長表穿之 表之下安地平盤 令表中心 卽筋弦垂線 正對地平中 心本表 以龍魚之形爲飾驗法 曰天氣燥則龍表左轉 氣濕則龍表右轉 氣之燥濕加減若干 則表左右 轉亦加減若干 其加減之度數 則於地平盤上之左右邊 明畵之而其器備矣 其地平盤上面界 分左右 各畵十度 而闊狹不等 爲燥濕之數 左爲燥氣之界 右爲濕氣之界 其度各有闊狹者 蓋天氣收斂其 筋弦 有鬆緊之分 故氣度有大小以應之 譬如人用緊紉一物 初用八分之力 其物可旋繞一周 再用 八分之力 物繞不及一周 復再用八分之力 而物繞則僅半周矣 其用力同而旋繞不同 夫天氣加減燥 濕之氣 收斂筋弦之理 亦有然者 凡欲分別東西南北各房之風氣 或上下左右各房屋之氣 燥濕 何 如 以此器驗之 無不可也. 41) 氣學 권1, 非器械 無以着手乎此氣 非歷數 無以分開于此氣 歷數器械 互相發明 庶可以認 氣 亦可以驗氣 歷數學 物類學 器用學 三者兼備 乃認氣而驗之試之 又將氣而變之通之.
- 206 國史館論叢 第63輯 있는 氣를 몰아 억눌러서 밑판의 밸브가 닫히게 된다. 위로부터 피스톤을 들면 안에 있는 기가 빨아 올라가 밑판의 밸브가 열리게 된다. 井水가 따라 들서가 재차 피스톤 을 누르면 통안의 기수가 모두 밑의 밸브를 눌러 문득 닫혀 外水가 들어가지 않고 內 水가 새지 않게 된다. 또 피스톤과 피스톤 간을 들면 통내의 기수가 문득 빨아올라가 밑의 밸브가 열리고 外水가 다시 들어간다. 이같이 여러차례 풀무질하여 물이 점점 많아지고 氣가 차서 채워지게 되어 피스톤 곁에 밸브를 두어 氣를 받아들여 솟아 오 르면 필경 물이 피스톤 위로 올라가 흘러 나오니, 여기에서 氣 水가 서로 이어서 昇 降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만약 물을 병에 붓고 기가 나가면 물이 들어가지 않는다. 물 이 가득찬 독에 병을 거꾸로 하면 병 속의 기가 물의 가리는 바 되어 나오지 못하니, 비록 오랜 시간이 지나더라도 물이 병 속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42) 사실 이러한 옥형차의 원리는 최한기가 이미 1834년에 농업용수의 공급을 위하여 陸海法 에서 처음으로 제기하여 도설을 상세하게 소개하였다.43) 그뒤 1836년 그는 氣는 水와 서로 접하여 털끝 만큼의 빈 틈도 없으며, 기를 빨아올리면 물이 이어서 올라간다는 옥형차와 恒升車의 원리를 소개하였다.44) 그의 이러한 견해는 1830년대에 펌프(pump)와 揚水機의 원리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최한기는 氣에는 稀稠 疎密 厚薄 輕重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하 였다. 그가 70寸 용량의 풀무로써 1촌 용량의 毬에 기를 불어넣으면 그 기가 견고하 게 쌓여 억누르기 어려우니 稠密하고 厚重함을 증명할 수 있는데 氣砲의 원리가 이것 이라 하였다. 그런가 하면 1촌 구에 쌓인 기로써 70촌의 용기에 넣으면 그 기가 稀疎 하고 薄輕한다는 것이다.45) 또한 그는 氣의 質은 氣를 가지고 축소할 수 있지만 그 중에 스스로 축소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고 보았다. 7척 길이의 풀무를 사용하여 驅 築을 하면 鑰(吸氣器)이 5척여에 들어가면 內氣가 점점 堅實하게 되어 힘을 다하여 약을 築한다. 만약 吐하고 撑하면 약에 기가 들어가기 어렵게 되어 6척 9촌에 이르러 다시 더 들일 수 없으니 남은 바 1촌의 기는 그 견고하기가 金剛石보다 못하지 않다. 비록 重力으로써 약을 눌러 차라리 鐵堅의 鞴(排氣管)를 파탄하여 낼지언정 비를 완 전히 하여 다시 털끝 만큼도 더하여 압축할 수 없으며, 이것이 곧 70촌의 管과 비에 42) 運化測驗 권1, 用器驗試. 43) 陸海法 권下, 玉衡車 玉衡說. 44) 推測錄 권1, 推氣測理, 氣水升降. 45) 위의 책 권2, 推氣測理, 氣水升降, 且氣有稀稠也 疎密也 厚薄也 輕重也 如欲驗視 試以容七 十寸之鞴籥 驅氣納于容一寸之毬 其氣築堅難抑 稠密厚重矣 急放之 有甚於火藥之焚起 氣砲之 築毬是也 又以一寸毬之築氣 還納于七寸之器 其氣稀疎薄輕也. 古今圖書集成 4, 曆法典 제92권, 靈臺儀象志 4, 測氣燥濕之分, 夫氣之有厚薄也 疎密也 輕重也 加減而遞相爲焉 何以明其然邪 今以氣自然所在之地 爲七十分之一分而設言之 假如有 氣於此 其自然所在之地 止能盈寸 若用法以强之 則此一寸之氣 能放而盈七十寸之地 又有氣於 此 其自然所在之地 則盈七十寸 若用法以强之 而卽揫斂於一寸之地 此諸氣厚薄輕重之力與諸 測法也 其强之法與器詳見水法之本論.
- 207 69촌까지 기를 압축하는 定率이라고 하였다. 그는 1寸氣의 맹렬한 築力은 氣銃의 銅 瓶의 築氣에 견줄 수 있는데, 이로 인하여 築氣의 定限이 있음을 밝힐 수 있다고 하 였다.46) 여기에서 우리는 최한기가 氣에는 輕重이 있다고 파악한 사실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대기의 무게 측정은 17세기 토리첼리를 비롯한 과학자에 의하 여 비로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토리첼리는 한쪽 끝이 막힌 긴 유리관에 수은을 채 우고 끝이 열린 다른 쪽을 수은이 담긴 그릇에 세워서 기압계를 만들었다. 이 시험을 통하여 유리관의 길이에 관계없이 수은주가 일정한 위치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으며, 수은이 차지 않은 관의 나머지 부분은 眞空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 뒤 를 이어 파스칼은 대기가 희박한 산위에서 이러한 실험을 하여 기압에 의하여 수은주 가 다소 감소함을 확인하였다. 그는 물리학 방면에서 流體壓은 모든 방향으로 균등하 게 작용한다는 법칙을 발견하였다. 이 법칙은 비록 공기의 무게는 아래로 향하고 있 지만 그 압력은 모든 방향에 가해진다는 것이다. 최한기가 기압에 관하여 정확한 이 해를 하지는 못하였지만, 기에는 輕重과 稀疎 稠密 厚薄이 있다고 파악한 것은 서구자 연과학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분명 그를 종래 기철학자와 구분해 주는 하나 의 요소이다. 최한기의 기에 대한인식은 토리첼리가 처음 만든 氣壓計(陰晴儀)를 설명하고 있는 데서도 살필 수 있다. 음청의는 날씨의 흐림, 비, 맑음을 시험하는 儀器로 냉열기와 마찬가지로 유리로 球를 만들어서 물을 조금 넣어 1촌 두께가 되게 한 뒤 입을 굳게 막아 기를 새지 않게 하면 청명한 날에는 그 속이 투명하여 막힘이 없고, 구름이 끼 고 흐린날에 날씨가 무더워지면 의기 속에 담겨 있는 물이 안개같은 기로 변하여 의 기 속에 맺혀지게 된다. 또 비가 갤 때 의기 안의 안개같은 기가 움츠리고 내려와 개 이게 되는데, 밖에서 관찰하면 유리창에 물을 뿌린 모습이 있으니 처음 의기를 만든 자가 기를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47) 여기에서 그가 처음 실험기구를 만 든 자를 기를 보았다 고 한 사실은 종래 성리학에서 기를 논의만 한 사실과는 판연히 다른 것이다. 이는 바로 최한기의 과학지식이 서양선교사의 과학지식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 으며, 더 나아가 단순히 서양의 과학기술을 수용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기술의 이면 에 숨은 원리를 수용하려는 적극적인 사고로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실험기계 에 의한 시험을 통한 결과야말로 그의 과학과 기학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고는 당시의 主氣論者들이 관념적으로 기에 대하여 인식한 사실과는 현격한 차가 있는 것이다. 최한기는 이러한 기에 대한 실험을 나름대로 거듭 제시하였다. 첫째, 바리때를 동이 물속에 엎으면 물이 바리때 속에는 들어가지 않는데 그 이유는 바리때 속에 기가 차 46) 運化測驗 권1, 用器驗試. 47) 推測錄 권2, 推氣測理, 陰晴儀.
- 208 國史館論叢 第63輯 있기 때문이다. 둘째, 방의 동쪽과 서쪽에 창이 있는 경우 동쪽 창문을 갑자기 닫으면 서쪽 창문이 열리는 것은 기가 방속에 가득차서 서로 부딪치기 때문이다. 셋째, 70寸 의 풀무에 69촌의 기를 압축할 수 있지만 1촌의 견고함은 억지로 압축할 수 없는데, 이는 氣의 形質이 있기 때문이다. 넷째, 옥형차는 기가 빨아들여 물이 따라 올라가는 것이니 이것은 기가 물을 끌어들이는 증거이다. 다섯째, 氣砲에서 견고하게 응축하여 탄환을 발사하는 것은 기가 힘을 발사하는 증거이다. 여섯째, 冷熱器 속의 기가 추위 와 더위에 따라 오르내리는 것은 기가 움츠리고 내치는 증거이다.48) 이 밖에도 불을 끄는 水銃의 원리에서도 기의 움직임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49) 그런데 18세기에 가장 중요한 기계의 발명은 蒸氣機關이었다. 이것은 물론 17세기 에 이루어진 氣體에 관한 지식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최초의 증기기관은 간단한 장 치인 보일러로부터 나오는 수증기가 氣筒으로 들어가서 기통 안에 있는 피스톤을 밀 어올리게 되어 있었다. 수증기가 증발되고 찬물의 분출이 기통에 부어지면 그 속에 있던 수증기는 물로 응결되고 따라서 피스톤은 내려오게 된다. 이러한 형태는 그뒤 와트(James Watt)에 의하여 개량되었다. 최한기는 증기기관의 일종인 火輪機에 대하여 해국도지 에서 인용하여 이해하 였다. 솥에 끓는 濕 熱氣가 부딪치면서 발작하여 상하 양쪽의 管에 들어가니 관이 갈 라진 곳에 上下喉를 나누어 각각 밸브를 설치하고 곁에 하나의 둥근 구리로 만든 筩 을 둔다. 통의 중심부에는 하나의 피스톤 로드(piston rod)와 피스톤을 드리우고 上管 의 開口로 하여금 피스톤의 위를 굽어 들어가게 하고 下管의 開口로 하여금 피스톤의 아래에 굽어 들어가게 한다. 濕熱의 氣가 끓게 되어 管으로부터 上管의 밸브가 열린 곳으로 들어가면 下管의 밸브는 닫히게 된다. 熱氣가 피스톤 위에 차서 피스톤을 몰 아 내려가면 피스톤 아래의 氣가 下管에 몰아 나가 아래의 밸브가 열리면 윗부분의 밸브는 닫히게 된다. 그리고 熱氣가 下管으로부터 피스톤 아래에 충만하여 피스톤을 미루어 올라가 이같이 작동하면 통의 중심의 피스톤이 한번은 올라가고 한번은 내려 가 계속하여 운동을 하면 피스톤 로드의 끝이 管 밖으로 벗어나 올라갔다가 내려가고 내려갔다가 올라간다. 피스톤 로드의 끝에는 굽은 프랭크(枵)를 설치하고 크랭크 끝에 둥근 구멍을 하여 활처럼 굽은 크랭크축(輪軸)에 꿰면 크랭크축이 한번은 올라갔다가 한번은 내려가서 끊임없이 輪轉하게 된다. 이것은 곧 濕氣와 熱氣에 의하여 기계를 설비하여 작동하는 것으로 사람의 技巧에서 나온 것이다.50) 이러한 화륜기는 바로 베 를 짜는 기계를 말하며 그가 실용적인 기계로 높이 평가하면서 서양으로부터 수용하 기를 적극 주장하였던 것이다. 한편 최한기는 1860년에 서구열강의 東漸을 간파하고 화륜선과 같은 무기를 소개 48) 人政 권10, 敎人, 氣之形質. 49) 推測錄 권2, 推氣測理, 氣水升降. 50) 運化測驗 권1, 用器驗試.
- 209 하였다. 1866년 제너럴셔먼호사건으로 화륜선의 화력이 현실로 나타나게 되자 그 뒤 그는 1871년 辛未洋擾 때는 직접 江華鎭撫使 鄭岐源의 자문에 응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부국강병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에 서구열강의 동양진출의 수단인 화륜선에 대 한 깊은 이해는 하루빨리 조선도 이러한 기계를 연구 개발하여 부국강병을 달성해야 된다는 일념에서 나온 것이다. 그의 뒤를 이어 박규수 김윤식 등이 이 화륜선에 관심 을 가지는 등51) 개화사상가라면 으레 이러한 기계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최한기는 자석과 철, 琥珀과 芥는 서로 접하면 끌어당기는 기가 그 가운데 있어 和 應하는 氣가 連脈되어 있으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남녀는 서로 즐기는 氣가 있어 자식을 낳아 기르고 天地에는 交感하는 氣가 있어 만물을 생성한다는 것이다. 모든 만물에 이르러 그 類를 따라 서로 즐기고 서로 和한 기가 있지 않음이 없고, 또 서로 꺼리고 서로 미워하는 기가 있다는 것이다.52) 이러한 그의 견해는 길버트(William Gilbert, 1540 1603)의 磁石현상에 대한 설명과 電氣에 대한 연구를 방불하게 한다. 즉 길버트는 琥珀이나 그 밖의 다른 물질인 유리 나무진 금강석 봉랍 등은 마른 헝겊 으로 문지르면 코르크(cork)나 종이조각 같은 것을 끌어들이는 힘을 가지게 되는데, 이 흡인력을 전기라고 부르기 시작한 인물이다. 최한기가 호박과 지푸라기 사이에 끌 어당기는 기가 있다고 인식한 것은 전기가 있다는 설과 동일한 것이다. 그리고 길버 트는 공중에 매달린 자석이 항상 남북을 가리키며 정지하는 까닭은 지구 자체가 지리 학적인 兩極을 磁力의 중심으로 가진 거대한 자석의 작용을 하는 데 기인한 것이라 하였는데, 최한기도 이러한 생각을 이미 1836년에 제시 하고 있다.53) 최한기는 태양 달의 氣가 地氣가 싸고 있는 속에 들어오게 되면 대부분 지기의 섞 인 바가 되어 지기의 性情을 이루게 된다고 하였다. 모든 물건은 반드시 지구에 돌아 와 붙는데 이는 輕重浮沈의 性情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혹 지구의 열기의 衝發 하는 바 되면 가볍고 무거운 물건이 모두 지구를 떠나서 올라가다가 그 힘이 다하면 도로 땅에 붙는다. 그 가운데 무거운 것은 오르는 것이 더디고 가벼운 것은 오르는 51) 박규수의 화륜선에 대한 관심은 1866년 제너럴셔먼호사건 때 그가 화륜선의 부속품을 일일 이 수합하여 조정에 보고한 것에서 살필 수 있다. 김윤식의 화륜선에 대한 이해 또한 1866 년 海國圖志 를 통하여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52) 運化測驗 권1, 氣之形. 53) 推測錄 권6, 推物測事, 推物性測大地, 物性之所以然 頗難形言 只可從其須用 推測經驗而 已 吸鐵石發動之氣 歸靜之所 可見地球兩極自靜 東西常動 凡微小之物 體靜而爲氣轉移者 必向南北而常靜 如燒紅之鐵 以銅絲懸之空中 旣復原冷 則兩端自轉而向南北兩極 再如舊墻內 生鐵鏽之礴 等照前法 懸之空中亦然 且如井底尺木 初雖横斜 久久自轉向南北 是皆頑動之物 其所運向遲鈍 至於吸鐵石與鐵針 自有感應之活動 吸染之傳氣 及其交切 石性吸鐵而動 鐵性應 鐵而動 因成搖動捷疾之物 指東西則常動未定 指南北則稍止不動 以其有稟受之本性而然也 凡 物方向 必以地球之方向爲準 而地球上應日月之輪轉 下有潮汐之移動 東西常動 南北常靜 諸物 之能自轉移者 隨其利鈍遲速 畢竟歸定于南北 猶草木之脈絡 皆自達其氣而上生焉 皆物之體 莫 不有其本性 則未有不順本性之行 以全乎其爲本體者也 至於南北方向之比兩極 少有偏東西之差 者 自有隨地之不同受氣之各異也.
- 210 國史館論叢 第63輯 것이 빠르며, 내려오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그 까닭은 밖에 싸고 있는 기의 성 정이 조금 차이가 있어 안에 있는 기가 和應하는 빨아당김을 두루 막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이것은 氣의 力에 多少와 緩急의 나누어짐이 있음에 말미암는다는 것이 다.54) 이와 같이 그는 지구의 引力과 物性에 대하여 어렴풋이나마 논하였다. 만유인력 설에 대한 이해의 흔적은 1860년의 운화측험 에서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 만 이러한 사유의 발전과정을 거쳐 1867년 비로소 만유인력 법칙을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밖에도 그는 望遠鏡 顯微鏡55) 時計56) 氣砲 氣碗 地氣 (養氣 淡氣 炭氣 輕氣 電氣) 水節風鎗 磺强 硝强 등을 기와 관련하여 설명하였다.57)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하여 최한기가 각종 실험기구를 통하여 종래 조선사상계의 일반적인 理氣論으로서의 氣에 대한 이해를 타파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는 냉열기 조습기 옥형차 비약 기총 화륜기 등에서 氣의 形質 을 명 쾌하게 볼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기가 흩어지고 모이는 妙함과 運化의 功이 스스로 털끝 만큼의 無形의 氣가 없으며, 또 수많은 갈래의 交接의 변화가 일어난다 고 하였다. 한편 최한기는 과학자의 역할에 대하여 매우 높은 평가를 하였다. 이미 阮元이 東 西의 과학자의 略歷을 집성하여 疇人傳 을 펴낸 바 있지만, 그도 이 疇人 즉 과학 자가 후세에 실질적인 혜택을 주었다고 하였다. 그는 과학자들의 발명에 의하여 火輪 에 땔나무나 숯을 쓰지 않고 氣를 이용하여 火力을 얻으니, 후인들이 실제적인 혜택 을 입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과학자들은 일상에 필요한 기계에 옛날에 있지 않았던 새로운 제품을 창출하여 백성의 이용후생으로 삼고 氣의 쓰임을 曲盡히 하니 어찌 후 생의 다행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58) 이러한 그의 과학자에 대한 애정은 이제 세계 는 바야흐로 과학의 시대가 도래하였다는 진보적 견해에 입각한 것이었다. 요컨대 최한기는 자연과학일반론에 대한 이해에 있어 바로 17세기 중엽부터 토리 첼리를 비롯한 서구과학자들이 밝힌 氣體의 부피 압력 온도 사이의 관계 등을 나름대 로 수용하여 설명하였다. 이것은 그의 주장하는 기학의 내용이 종래 성리학자들이 언 급한 기에 대한 내용과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地理學思想 54) 運化測驗 권1, 氣之性情. 55) 최한기는 현미경으로 관찰한 精子의 모습을 생생하게 언급하기도 한다. 56) 17세기에 鄭斗源이 自鳴鐘을 가져온 이래 18,9세기에 활동한 沈象奎(1766 1838)는 호화저택 에 서양의 자명종을 비치하고 식사시간과 산보를 정확하게 규칙적으로 하였다고 한다( 智 水拈筆 권8, 西洋鳴鐘). 최한기가 시계를 소유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자주 시계를 비유로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시계의 원리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57) 이러한 것들에 대한 설명은 身機踐驗 에 자세히 제시되어 있다. 58) 明南樓隨錄 20면.
- 211 - (1) 地球論 최한기는 지구가 球形이요, 자전과 공전을 한다는 사실에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地球論이야말로 천지의 正體를 밝히고 千古의 암흑을 밝혔다고 하였 다.59) 따라서 이 한마디의 言表에 그의 세계관이 집약되어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구에 대한 그의 견해야 말로 그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최한기는 지구를 형질로 보고 지구상에는 水가 6/10이요 土가 4/10라고 하였다. 그 리고 地體는 生物로서 스스로 冷 熱 乾 濕의 性情을 갖추고 있으며, 태양의 열기가 水 에 들어가 地氣의 冷 濕을 招攝하고 土에 들어가 지기의 乾 熱을 빨아들인다는 것이 다. 명목이 비록 한 열 건 습 네가지이지만 그 실제는 水土의 濕 熱일 뿐이라는 것이 다. 熱이 조금 減하면 乾이요 濕이 조금 감하면 冷인데 이것이 곧 수토의 형질이 發 한 바의 氣로 地面의 人과 物을 化育시켜 각자 냉 열 건 습의 기를 갖추어 그 형질에 따라 또 각기 차이가 생긴다는 것이다.60) 이러한 그의 地體에 대한인식은 기존 학자 들과의 견해차이는 물론 地轉說에 근거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氣를 한 열 건 습 으로 파악한데 있다. 최한기는 지구가 천명된 이후로 測驗할 수 있는 氣數가 점차 계발되어 自轉으로써 낮과 밤이 생기고 公轉으로써 사계절이 생기며 熱氣가 올라가 구름과 비가 되고 大氣 (蒙氣)가 쌓여 해와 달을 접하여 만사와 만물이 이루어진다고 하였다.61) 이러한 견해 는 무엇보다도 지구에 대한 과학적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그의 기학의 발단은 이 지구의 자전 공전설에 연원하는 것이다. 나아가 구름과 비의 생성이유, 만사 만물 의 생성이 대기와 태양과 달의 조화로운 현상에 의하여 이루어짐을 천명하였다. 최한기는 氣學이 점점 통창함이 球體 運動 生氣에 말미암는다고 하였다. 地體의 한 열 건 습의 生氣와 지구 밖에 존재하는 運化하는 氣가 일체 和應하여 밀고 끌어당기 는 형세가 不得不 그러함이 있어 스스로 그치지 않는데서 地氣의 運轉을 믿을 수 있 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체의 地圓에서 그 形質을 증험할 수 있는 뒤에 萬事의 운동 변화가 모두 실제의 증거가 있게 되니 고금의 여러 설을 거의 취사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체의 기를 見得하지 못하면 무엇으로써 地轉을 논하겠으며, 지체 의 球를 증험함이 없으면 무엇으로써 지체의 道를 논하겠는가라고 하였다.62) 그는 지 체가 스스로 한 열 건 습의 기가 발하여 지구 밖에 순환하는 태양과 달의 照應하는 기와 서로 교감하고 서로 화합하여 活 動 運 化의 덕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 59) 推測錄 권2, 推氣測理, 地球右旋. 60) 運化測驗 권1, 形質氣運化氣. 61) 위의 책, 序. 62) 運化測驗 권1, 地氣之運.
- 212 國史館論叢 第63輯 체의 기가 스스로 運轉하는 힘을 갖추어 여러 천체의 운동에 응하니 이것은 곧 지구 달 태양 별이 氣에 의뢰하여 質을 이루고 기에 의거하여 활동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주안의 만물에 대해서는 일찍이 기를 버리면 그 生成을 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63) 이처럼 그는 지원, 운화기, 한 열 건 습의 생기에 의하여 기학이 점점 드러 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우주안의 만물을 모두 기에 의하여 설명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지체는 上古에는 그 드러남을 터득하지 못하였고 中古에는 地轉의 사실을 증험하지 못하였고, 다만 여러가지 의혹과 무한한 부연설명이 치료하기 어려 운 병이었으나 인간이 지구를 일주함에 이르러 비로소 지체가 圓임을 증험하게 되었 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앞사람이 밝히지 못한 것을 밝혔을 뿐만 아니라 뒷 사람의 통 달을 열어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천체를 測驗함에 이르러 하나도 運轉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비로소 지체의 運轉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최한기는 적도와 지구의 남북극을 중심으로 지구를 이해한다. 그는 赤道 南北帶는 內地로서 태양이 바로 발사하는 열을 받아 地의 濕 熱이 서로 화하여 발산하기 쉽다 는 것이다. 그리고 南北極 지역은 태양이 지평의 상하에 轉繞하여 비껴 비치는 열이 매우 미미하여 추운데, 이곳은 지구의 濕 熱이 엉켜서 발산하기 어렵다. 또한 북극의 남쪽지역과 적도의 북쪽지역, 그리고 남극의 북쪽지역과 적도의 남쪽 지역은 그 度의 多少에 따라 태양의 비침이 같지 않으며, 따라서 晝夜의 장단과 寒暑의 지속에 다름 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지구의 습 열의 발함이 차등이 있으니 이것은 地氣의 발함이 태양의 招攝에 말미암아 차이가 있음을 시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64) 만약 地球運化에 터득함이 있다면 남북극 아래는 반년이 낮이 되고 반년은 밤이 되며, 적도의 아래에 는 1년 내에 봄과 가을이 각각 두번이고 겨울과 여름도 두번 생긴다는 것이다.65) 이와 같이 최한기의 氣學은 地球說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바로 지구가 정 지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지구가 운동한다는 인식으로의 전환은 우주의 모든 삼라만상 이 운동 변화한다는 생각을 낳게 하였다. 따라서 그의 氣의 運化論도 지구의 자전 공 전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었다면 제시될 수 없었다. 2) 地圓說과 地轉說에 대한 理解 14세기부터 서유럽에서는 르네상스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시기에 이탈리아의 토스 카넬리(Toscanelli)는 지구 구형설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지구 구형설은 17세기 이후 地球圖가 중국과 조선에 전해짐으로써 지식인들 사이에 수용이 되었다. 한편 중국에 지구의 자전 공전설을 처음 소개한 책자는 바로 브노아66)의 地球圖說 67)이었다. 63) 위와 같음. 64) 위의 책 권1, 氣之濕熱. 65) 推測錄 권2,推氣測理, 晝夜冬夏生於太陽 및 氣學 권1, 若有得於地球運化 則南北極 下半年爲晝 半年爲夜 赤道下一年內春秋各二 冬夏亦再. 66) 1755년 1765년간에 중국에 들어와 增補坤輿全圖 와 新製渾天儀를 진헌하고 奉旨로 坤 輿全圖說 을 번역하였으며, 內閣學士兼禮部侍郎 何國宗, 右春坊兼翰林院檢討 錢大昕이 자
- 213 최한기도 이 책을 통하여 지구의 자전 공전설을 받아들이고 나아가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의 우주관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이 지구도설 은 최한기의 사상의 전환 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인들은 19세기 서양과학의 우수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우수성은 옛날 중국 의 지식이 서양으로 전해져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예컨대 堯曆이 서양에 전 해져 西曆이 되었다고 주장하였고 지원설도 그러한 것 중의 하나에 속하였다. 19세기 淸의 대학자인 阮元은 지구도설 서문에서 그러한 사실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서양인이 천지의 理를 말한 것이 가장 정밀하나 그 사실은 夏 殷 周 이후 古法에 옛날 있 었던 바가 아닌 것이 없다. 뒷날의 학자가 그 새로운 것을 좋아하여 宗으로 삼고 그 기이함 을 의심하여 물리치니 모두 그르다. 하늘이 둥글고 땅이 둥글다고 말하는 것은 大戴記 의 曾子 天員篇에 밝게 드러나 있다.68) 이와 같이 완원은 서양의 지원설을 중국 고대에 이미 있었던 것으로 해석하여 견 강부회하여 설명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이러한 天圓地圓說은 과학적 근거가 뒷받침되 지 못하고 추상적인 주장에 지나지 않아 中華中心의 사고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동양에서는 오랜 기간 동안 天圓地方說이 천과 지의 德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形體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해되어 왔다. 이에 반하여 최한기는 서양의 지원설과 지구자전설 지구공전설이 추호의 의심이 없 는 확실한 과학적 결론에서 얻어진 결과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지구도설 의 학설 을 전적으로 수용하였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 지구밖을 싸고 있는 氣는 回轉하는 형 세에 따라 輪廓을 이루어 안에 있는 기를 단속하고, 지구에서 떠난 사물이 마침내는 돌아와서 붙게 되는 기의 性情에 착안한다. 다시 말해 그는 지구가 球인 이유가 지구 를 싸고 있는 기가 회전하여 윤곽을 이루어 안의 기를 단속하기 때문에 지구가 둥글 다는 것이요, 또 사물이 모두 기속에 통섭되어 결국은 지구에 부착되는데 여기에서 지구의 성정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69) 이러한 그의 생각은 회전하는 것은 몸체가 모 세하게 潤色을 하였다( 疇人傳 권 46 참조). 67) 이 地球圖說 에 대한 중국인의 인식은 다음과 같다. 즉 브노아의 地球圖說 을 번역하 면서 외국의 풍토를 언급하였는데, 혹 의거할 수 없으나 그 천지 七政恒星의 行度를 말함에 이르러서는 모두 古法을 거슬러 올라가 익힌 것이니, 과학자가 四夷에 흩어져 있다고 생각 하였다. 한편 少詹事 錢大昕이 책을 번역한 原書에는 說이 있고 圖는 없었는데, 이에 첨사 의 고제자 李銳에게 부탁하여 圖를 그리고 說을 만들어 보충하였다( 地球圖說 序 참조). 한편 四部總錄天文編 제2책에 의하면 蔣友仁傳, 何國宗 錢大昕 奉勅 潤色의 文選樓叢書 本 地球圖說 1권이 소개되고 있는데 補注에 叢書集成本附阮元補圖라 한 것으로 보아 나중에 완원이 몇몇 天文圖를 더 보충하였던 것 같다. 68) 地球圖說 序, 西洋人 言天地之理最精 其實莫非三代以來古法所舊有 後之學者 喜其新而 宗之 疑其奇而關之 皆非也 言天員地員者 顯著於大戴記 曾子天員篇. 69) 運化測驗 권1, 氣之性淸.
- 214 國史館論叢 第63輯 두 둥글게 생겼으며 引力의 법칙을 氣의 性情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한편 대기권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자연현상에 대해서 최한기가 어떻게 설명하 고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는 비 이슬 서리 눈 바람 구름 노을 안개 등에 대하 여 다각도로 검토하였다. 사람이 지면에서 習染한 바의 것은 지구의 蒸鬱氣요 보고 듣는 바도 증울기이다. 증울기가 강한 힘에 의하여 올리는 바가 되어 위에 있는 기가 솟아 들어갔다가 힘이 다하여 다시 내려오면 비 이슬 서리 눈이 되고, 혹 흩어지면 바 람 구름 노을 안개가 된다는 것이다.70) 이처럼 그는 대기권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하 고 있다. 이러한 기상현상은 바로 지체의 주위에서 오르고 내리면서 서로 和하는 기 가 스스로 정해진 바의 界限이 있는데 불과하니, 이것이 지구 곁을 싸고 있는 氣라고 이르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지구 곁의 대기(蒙氣)에 의하여 이와 같은 자연현상이 일 어난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그는 지구 달 태양 별은 모두 氣化 중의 생물이니 각각 몸체 곁의 기가 두루 싸서 그 運化의 힘을 행하니 지구로부터의 거리가 멀어 그 자세 함을 알 수 없다고 하였다.71) 최한기에 있어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지리상의 발견으로 인하여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 실제로 증명된 일이었다. 즉 그는 서양의 선박이 서로 통하고 있는 당시의 현 실을 지리상의 발견에서 얻은 결과로 명백히 이해하였다. 그는 흙과 돌의 큰 덩어리 가 地가 되며 地體는 둥근데 달보다는 크고 태양보다 작다고 이해한다.72) 그는 지체 가 원형이라는 것에 대하여 몇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첫째, 달이 지구의 그림 자에 가려 月蝕이 생기는데 그림자는 형체에 따라 생기는 것이니, 형체가 모난 것은 그림자가 모나며, 형체가 둥근 것은 그림자도 둥글다는 것이다. 따라서 월식에 가려진 지구의 그림자를 보아 항상 둥글다면 그것으로써 지체가 둥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남북극을 볼 때 북으로 향하여 갈수록 북극이 더욱 높고, 남으로 향하여 점점 멀어질수록 남극이 지상에 나온 것이 북극과 다름이 없으니, 이를 통하여 지체가 남 북의 둥근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의 차이를 보아 東西 의 차가 난다면, 또한 지체가 동서의 둥근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73) 그런데 이러한 지원설은 이미 李瀷을 비롯하여 그뒤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이해하 고 있으나, 조선의 지식인이 華夷觀을 극복해 나가는 데 거쳐야 할 하나의 관문이었 다. 아울러 세계정세를 이해해 나가는 데 거쳐야 할 하나의 중요한 과정이기도 하였 다. 최한기는 지구도 우주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라고 언급한다. 즉 지구가 우 70) 위의 책 권1, 氣之層包. 71) 위와 같음. 72) 推測錄 권2, 推氣測理, 地體蒙氣. 73) 위와 같음.
- 215 주에 속해 있는 것이 곧 여러 별들과 대등한 반열이며, 하늘에 소속 간섭하는 것이 무슨 역할과 임무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구가 반드시 여러 별들에 의존하고, 여러 별들 도 지구에 의지하여 스스로 빠뜨릴 수 없는 것이니, 하늘에 가득찬 여러 별들이 어찌 다만 지구를 위하여 나열되어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74) 이는 지구가 우주의 일부라 는 사실에 의거한 견해였다. 최한기는 지구의 운행에 대해서도 깊이인식하고 있었는데, 地轉의 몇가지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潮水와 汐水가 항상 지구를 끼고 왼쪽에서 끌고 오른쪽에서 밀 어 달과 相應하여 달이 높은 곳에 이르면 조수가 줄어들고 달이 낮은 곳에 있으면 석 수가 넘치게 된다. 둘째, 여러 천체 중에 낮은 것은 운행이 빠르고 높은 것은 천천히 운행한다. 셋째, 船舶의 風帆이 서쪽을 향하면 항해가 쉽고, 동쪽을 향하면 어려운 것 이니 이것으로 지체가 圓球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뿐만 아니라 지구가 운행하는 것이 더욱 밝혀졌다고 하였다.75) 이와 같이 지구원형설과 지구운행설은 최한기에게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로 받아 들여졌고, 이러한 이해 위에서 세계의 모든 政敎와 禮俗 風物을 이해수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지구의 運化를 철저히 밝혀 백성과 세상에 그 사실을 이해하게 하는 것이 최초의 啓蒙에 해당한다고 말하고 있다.76) 최한기는 예로부터 지구를 논한 책이 대부분 각국의 疆域 風土 物產 人民 政俗 沿 革 따위를 설명하고 있는데, 지구의 全體 運化는 오직 지구도설 에 대략 밝혀져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77) 그는 지원설에 관해서도 地球圖가 처음 중국에 들어왔을 때 모두 의심하였는데, 차차 믿게 되어 바꿀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그 런데도 오히려 曆算 등 여러 설에 구애되어 지구가 운행한다는 이치는 확실하게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78) 그는 지구가 오른쪽으로 운행한다는 사실을 거론하고 이러한 지 구론이야말로 천지의 正體를 밝히고 천고토록 캄캄하던 밤을 밝힌 것으로 曆家에서 비록 천체가 왼쪽으로 운행한다고 하였으나, 다만 계산의 간편을 위한 것이니 학자는 반드시 지구가 오른쪽으로 돈다는 사실을 알아야 연속하여 순환 운행하는 이치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79) 최한기는 지구의 원형과 운행에 대한 사실은 지구에 밝은 자가 알 수 있는 것이며, 지구가 밝혀지기 이전에는 비록 이러한 말을 하더라도 사람들이 믿지 않았다는 것이 74) 神氣通 권1, 體通, 地體及諸曜. 75) 위와 같음. 76) 地球典要 序,1 2면. 77) 위의 책, 凡例 4면. 78) 推測錄 권2, 推氣測理, 地球右旋, 自是圖之入中國 始疑而次信之 漸知其爲不易之論 然猶 拘於歷算諸說而未釋然于地運之理也. 79) 위와 같음. 至哉 地球之論 明天地之正體 晳千古之長夜 歷家雖謂天體左旋 特爲入算之簡便 學 者須知地球右旋 乃見斡運之連綴. 이러한 설 역시 코페르니쿠스의 견해를 받아들인 것이다.
- 216 國史館論叢 第63輯 다. 즉 지구의 해명은 수백년을 거쳐 점차 드러난 것으로 사람이 이것을 믿게 된 것 도 경험을 거듭 쌓아 바야흐로 의심이 풀린 것으로 설명하였다.80) 최한기의 지체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고 그에 따른 각국의 風俗에 대한 이해를 살 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 천하만국이 언어가 전달되고 서적이 두루 통하여 지구 전체가 모두 드러나고 大氣가 크게 나타나 우주안의 格致의 神氣를 唱導하여 천고의 의심스럽던 것이 이로부터 밝혀진 것 이 많고 정돈된 것이 적지 않다. 추위와 더위의 내왕과 밤과 낮의 長短이 지구로 말미암아 지역에 따라 다르고 바람 구름 우레 비 이슬 서리 눈이 地氣의 증발로 말미암아 엉겨서 이 루어진 것이다 物產의 성쇠와 美惡은 土性의 차이에 말미암고 人事의 服食과 動用은 풍 속이 같지 않은 데서 말미암는다. 무릇 사람이 한 고을과 한 나라의 습속에 얽매이게 되면 이웃나라와 먼 지방의 일에 대하여 논할 수 없고, 또 혹 천하만국의 형상에 집착한다면 地氣 造化의 자취에 통할 수 없다.81) 최한기는 지구의 運化는 여러 천체가 서로 응함으로써 이루어지고 인생의 도리는 지구의 운화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으로 인식하여 우주의 천체와 지구, 인간의 三者관 계를 유기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人道의 經常을 분명히 말하고 政敎의 실행이 전제되어야 지구상의 인생도리를 인식할 수 있다고 하였다.82) 즉 남북의 風氣와 土宜, 物產, 民俗 등이 지구에 관계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일체의 大氣化도 또한 지구의 남 북의 海陸에 같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은 地體에서 말미암은 것이고, 대기에 원래 다른 운화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하였다.83) 최한기는 명나라 이후 바야흐로 지체가 球라는 사실을 알고, 曆法이 점점 실측에 가까워졌고 밤낮의 장단과 추위와 더위의 진퇴, 潮汐의 증감과 風土의 異同, 그리고 만국의 역대의 치란과 각국의 성쇠가 지구전요 에 실려 있는데, 이를 연구하고 터 득하면 天地의 방향과 氣化의 운행에 발명한 바가 많을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84) 그의 지구전요 에 대한 이러한 스스로의 말은 이 책에 편집된 내용에 대하여 깊은 연구를 통하여 天地의 方向과 氣化의 運行을 터득하기를 바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한기는 地體氣의 活動을 見得함에 이른 뒤에 地運의 까닭이 더욱 밝혀졌다고 하 80) 人政 권11, 敎人, 氣化不同. 81) 神氣通 권1, 體通, 地體及諸曜, 到今天下萬國 言語傳達 書籍周通 球體畢露 蒙氣大現 唱 導宇內格致之神氣 千古疑晦 從此就質頗多 歸整不鮮 進退之寒暑 長短之晝夜 由於體球而隨處 不同 風雲雷霆雨露霜雪 由於地氣蒸發盤結而成也 物產之盛衰美惡 由於土宜有異 人事之服 食動用 由於風俗不同 夫人拘束於一鄕ー國之習俗 則不可與論於鄰國遠邦之事 又或泥着於天下 萬國之形狀 則不可得通於地氣造化之跡. 82) 地球典要 序, 3면. 83) 人政 권11, 敎人, 氣化不同. 84) 위의 책 권8, 敎人, 地體.
- 217 였다. 모든 사물 곁의 氣의 운동에서 그 몸체가 이미 움직이는 것을 알고, 곁의 기가 움직이지 않는데서 그 몸체가 움직이지 않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구 곁 의 기가 항상 운행하여 고요하지 않는 것을 보면 地轉의 理는 이 運化氣 에 인하여 橫說堅說의 설을 拂拭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85) 그는 活 動 運 化의 形質은 寒 熱 乾 濕의 상하좌우가 있어 바꾸어가며 돌고 밀고 발하여 주야로 항상 운전하여 문득 氣輪 의 바람이 생긴다는 것이다. 만약 활 동 운 화의 熱氣에 나아가 질문하지 않으면 무엇 으로써 지체의 운행을 見得하겠는가라고 하면서, 火輪의 火가 꺼진다면 열기가 끊어 져 輪이 구르지 않을 것이요, 태양이 발사하는 열기가 일어나지 않으면 여러 천체들 의 운행이 모두 度를 잃을 것이라 하였다.86) 그는 대개 地體가 熱을 발산하여 태양이 발사하는 熱과 응하여 半은 항상 비쳐 活動의 勢가 있고, 반은 항상 비치지 않아서 運化의 조짐이 있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달 곁의 氣의 輪轉이 지구 곁의 기의 윤 전과 서로 연계하여 왼쪽에서 끌고 오른쪽에서 미는 勢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였 다.87) 3) 地理上의 發見에 대한 見解 지구의 해명과 더불어 지리상의 발견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실제로 증명한 일 이었다. 최한기는 지리상의 발견으로 이루어진 세계일주에 대하여 명확한 인식을 하 고 세계의 위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地體는 둥근데 싸고 있는 대기(蒙氣)가 햇빛을 받아 구슬처럼 빛나기 때문에 地球라고 부 른 다. 萬曆(1573 1620) 연간에 서양인이 처음으로 地球圖을 바쳤으니 대개 지면을 5대주로 나누었다. 중국 大界는 아시아(남으로 필리핀[呂宋], 수마트라[亞齊], 자바[噶喇巴]에 이르고, 북으로는 新增, 白臘, 북극해[氷海]에 이르고 동으로는 일본열도에 이르고 서로는 볼가강[大 乃河?], 黑海, 西紅海,인도양[小西洋]에 이르는 지역)이다. 大西洋은 곧 유럽(남으로는 地中海 에 이르고, 북으로는 바렌츠해[白海]에 이르고, 동으로는 黑海에 이르고, 서로는 대서양 바다 의 각 섬에 이르는 지역이다), 西南洋은 곧 아프리카(利未亞)(남으로는 그레이트 카루[大浪 山?]에 이르고, 북으로는 지중해에 이르고, 동으로는 서홍해, 스코트라섬 [聖老楞佐島?]에 이 르고 서로는 카보 베르드[聖多默島?]에 이르는 지역이다), 外大西洋은 곧 아메리카(亞墨利加) 이다. 지형이 길고 허리가 가늘기 때문에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 두 洲로 나누는데, 대륙이 바다를 같이 하니 본래는 하나의 圓球이다(正德 1506 1521 이전에 포르투갈인 카노[嘉 奴]가 비로소 지구를 돌아서 돌아왔는데 지구가 밝혀진 것이 이로부터 시작된 뒤 100 여 년 만에 지구도가 중국에 들어왔다).88) 85) 運化測驗 권1, 用器驗試. 86) 위와 같음. 87) 위와 같음. 88) 推測錄 권2, 推氣測理, 地球右旋, 地體圓而所包蒙氣 受日光而生耀如珠 故謂之地球 萬曆 時西人始進地球圖 蓋以地面 分爲五大洲 曰華夏大界 卽亞細亞(南至 呂宋 亞齊 噶喇巴 北至 新增白臘氷海 東至日本島 西至大乃河 黑海 西紅海 小西洋) 曰大西洋 卽歐羅巴(南至地中海
- 218 - 國史館論叢 第63輯 이와 같이 지구의 일주와 더불어 최한기는 해양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피력하고 있다. 이러한 이해는 우선 지구도의 영향으로 세계에 대한 인식의 확대를 가져 왔다. 대개 천지가 처음 열린 이후로人物이 대륙에 번성하여 퍼지게 되었지만 수만리 해양은 문 득 버려진 곳이 되어 버렸다. 明代 이후로 서양 선박이 대륙에 두루 다녀 (正德 이전에 포르 투갈 사람 중에 카노라고 이름하는 자가 왕에게 청하여 5隻의 배를 타고 출발하여 東行하여 빙 돌아 西에 이르렀다가 지구를 돌고 돌아왔다. 그가 돌아온 날에 국왕이 은으로 작은 지구 를 만들어 주고 위에 글자를 새겨 이르기를 처음 지구를 한바퀴 주행한 자는 카노구려! 라고 하였다. 지금은 바닷길을 더욱 익히고 서양 선박이 동으로부터 서로 가고, 혹은 서를 경유하 여 동으로 돌아오니, 지구를 둘러 돌아오는데 8,9개월의 기간이 걸리는데 불과하다. 곧 全地 를 주행할 수 있는 것이 모두 前人이 開創한 공이다.89)) 연해의 여러 곳에 도시와 부두를 설 치하고 건장한 용사들을 모아 鎭守하게 하고 商에 兵을 붙여 천하에 방어하기 어렵게 되었 으니. 이에인간세상의 생활살이가 一變에 이르러 物產이 만국에서로 통하고, 여러 종교가 천 하에 서로 섞이게 되었으며, 陸市가 변하여 海市가 되고 陸戰이 변하여 水戰이 되었다. 변화 에 대처하는 방법은 진실로 마땅히 그 변화를 가지고 그 변화를 막아야 할 것이고, 변화하지 않는 것을 가지고 그 변화를 막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90) 이러한 최한기의 해외지식, 특히 지구의 일주에 대한인식은 물론 당시 중국을 통하 여 받아들여졌다. 특히 카노에 대한 이해는 미국인 브리지먼(Elijah C. Bridgman)의 北至白海 東至黑海 西至大西洋海各島) 曰西南洋 卽利未亞(南至大浪山 北至地中海 東至西紅 海聖老楞佐島 西至聖多默島) 曰外大西洋 卽亞墨利加 地形長而腰纖 故分爲南亞墨北亞墨二洲 大地同海 本一圓球(正德以前 葡萄牙人嘉奴 始圜地而返 則地球之明 自此始而后百餘年 圖入 中國). 89) 인용문 중 카노에 대한 부분은 바로 海國圖志 의 美理哥國志의 내용을 그대로 전재한 것 이다. 그런데 이 부분이 1836년에 최한기가 저술한 推測錄 에 기록되어 있으나, 아마 合省國志 가 나온 1838년 이후 그가 추가한 것으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이 부분의 기술 이 합성국지 의 본 기사와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에, 그가 합성국지 를 직접 보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해국도지 의 인용부분을 재인용한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海國圖志 권59, 外大西洋, 全洲總說 p. 882 참조). 그러나 1836년에 쓴 神氣通 등에 카노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이미 카노의 활동에 대하여 알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카노에 대하여 언급한 곳은 그의 저서의 여러 곳에 散見된다. 위의 인용문은 地球典 要 권1의 海陸分界에도 그대로 인용되어 있으며, 人政 권10, 敎人, 歷代漸次修明에서 도 카노의 명칭이 보인다. 90) 推測錄 권6, 推物測事, 海舶周通, "蓋自開荒以來 人物蕃延於大陸而數萬里海洋 便爲空棄之 所 自明代以後 洋舶周行大地 (正德以前有葡萄牙人 名嘉奴者 稟請發船五隻 東行旋繞至西 圜 地而返 返之日 王賜以銀鑄小地球 上刻字云 始圜地而旋者 其嘉奴乎 今則海道益習 洋船自東 往西或由西返東 圜地而返 計不過八九月之間 卽可周行全地 皆前人開創之功也) 沿海諸處 羅 列市埠收聚健勇 設置鎭守 寓兵於商而爲天下之難禦 於是人世營濟 至於ー變 物產交通於萬國 諸敎混殽于天下 陸市變爲海市 陸戰變爲水戰 處變之道 固宜將其變 以禦其變 不宜以不變者 禦其變.
- 219 合省國志 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러한 사실은 싱가포르의 堅夏書院에서 간행된 미국인에 의하여 이루어진 세계지식이 중국을 통하여 조선에 전 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이 지구를 일주하였다는 사실이 최한기에게는 天地의 開闢 으로 인식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천하의 周通이 이루어지 게 되어 商船이 두루 다니고, 사신이 서로 전하여 진기한 물산과 편리한 기계가 원근 에 전파되었다고 이해하고 있다.91) 그런데 특히 주목해야 할 사실은 그가 개화사상을 확고하게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급변하는 상황에는 변화의 논리로 대처해 나가야 하며 변하지 않는 수구의 논리로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할 수 없다 는 인식을 하였던 것이다. 즉 전자는 개화사상의 견해요 후자는 위정척사사상의 논리 이니 그는 명백히 개화사상의 논리로 국제정세에 대처할 것을 역설하였다. 사실 포르투갈에서는 15세기 전반기에 이미 왕자 엔리케의 지휘하에 인도로 가는 새로운 항로의 탐색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뒤 1488년 바르톨로뮤 디아스 (Bartholomeu Dias)는 아프리카 남단에 도달하여 희망봉이라 이름지었으며, 1498년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9 1524)는 희망봉을 돌아 인도 서해안에 도달하 여 마침내 인도로 가는 신항로가 발견되었다. 그런데 최한기가 자주 말하는 嘉奴 는 바로 1519년 에스파냐를 출발하여 세계일주항해를 하여 1522년 에스파냐로 귀환한 카 노를 가리킨다.92) 한편 최한기는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 1506)가 지구 구형설을 믿 고 1492년 8월 초에 에스파냐의 후원을 얻어 3척의 배로 대서양을 횡단하였다는 사실 을 알고 있었다.93) 또한 1519년 포르투갈의 마젤란(Ferdinand Magellan, 1480? 1521) 이 에스파냐 왕의 명령으로 세계일주항해에 나서 필리핀에 도착하였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94) 이와 같이 그는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초에 이루어진 지리상의 발견에 대 하여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이를 天地의 開闢 으로 이해하여 매우 충격적인 사건으 로 받아들이고 있다. 최한기는 지리상의 발견으로 서양제국이 동점하는 사실을 瀛環志略 과 海國 圖志 를 통하여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고, 이를 조선에 소개하였다. 특히 그는 포르 투갈의 동점에 대하여 영환지략 의 내용을 그의 지구전요 에 전재 소개하였다. 즉 포르투갈의 국왕이 巨艦을 보내어 南行하여 아프리카의 서쪽을 거쳐 동쪽으로 돌 91) 神氣通 권1, 體通, 天下敎法就天人而質正. 92) 카노(Juan Sebastian del Cano,? 1526)는 본래 1519년 8월 마젤란이 승무원 265명 과 5척 의 배로 세계일주항해를 할 때 그 부하로 참여하였다. 그런데 마젤란이 1521년 필리핀에서 土人에게 살해되자 대신 카노가 지휘하여 항해를 계속하여 1522년 9월 에스파냐로 귀환하 였는데, 생존자는 카노 이하 18명에 불과하였다고 한다(洪始煥 編著, 地圖의 歴史 現代 科學新書 74, 1976, pp. 104 106 참조). 93) 地球典要 권9, 亞墨利加, 沿革. 94) 위의 책 권7, 西班牙國, 沿革.
- 220 國史館論叢 第63輯 아 五印度의 서쪽에 이르러 다시 돌아 동쪽으로 향하여 말라카(Malacca)에 이르고, 또 수마트라 자바의 해협으로부터 동남양의 여러 섬나라를 지나 이르는 곳에 부두를 설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소개하였다. 또한 포르투갈인은 마카오(澳門)에 이르러 땅을 조차하여 부두를 설치하였으며, 이 지역이 유럽제국이 廣東으로 통하는 시초가 되었 다고 알리고 있다. 그 뒤를 이어 에스파냐와 네덜란드가 동쪽으로 왔으며, 그뒤 프랑 스 영국이 포르투갈이 세운 인도양과 동남양의 부두를 침탈하였다는 사실도 알리고 있다.95) 이러한 西勢의 東漸에 대한 이해는 徐繼畬의 영환지략 의 내용을 그대로 이해한 것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현실에서는 매우 신속히 세계의 무역활 동로와 장차 도래할 서양열강의 진출과 팽창을 이해한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지구에 대한 해명과 지리상의 발견은 최한기의 氣學의 형성에도 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파악된다. 즉 그는 活動運化의 氣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에서 처음 보 았고, 다음으로 지구가 자전과 공전한다는 사실에서 밝혀졌으며, 마지막으로 대기(淸 蒙)에서 다 드러나게 되었다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처음 지구를 일주한 역량을 궁구해 보면 보고 들은 바가 없이 항해한 것은 아니며, 반드시 東西海國의 원근을 내 왕하면서 얻은 견문에 의거하여 별들의 半周 全周의 標度를 測驗하고 완전히 지체는 둥글다는 것을 터득하여 항상 서쪽을 향하여 동쪽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보아 마침내 사해를 거쳐 일주를 하였으니,96) 이것이 곧人事의 가장 큰 변화라고 말하였다. 또한 사람이 지구를 주행함으로써 지체가 돌고 있으며, 風氣가 동서에 고르게 배포되어 있 고 兩極에 폐색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으며, 오는 데 3개월 가는 데 5개월이 걸린다는 俗謠와 동쪽으로 갈때는 쉽고 서쪽으로 갈 때는 거스른다는 설이 活動運化 가 드러난 것이 아닌 것이 없다고 설명하였다.97) 이와 같이 최한기는 地圓 地轉 大氣(淸蒙)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그의 기학을 정 립시켜 나가고 있다고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그는 지구를 일주 하였다는 사실에 가장 큰 충격을 받았고, 그로 인하여 活動運化의 기가 밝혀지고 있 다고 이해하였다. 이렇게 볼 때 그의 기에 대한 인식은 조선 성리학의 理氣論의 氣와 관련되기보다는 지리상의 발견으로 인하여 더욱 밝혀진 대기에 대한 이해 위에서 이 루어진 것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다. 그리하여 그는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 바로 氣學 의 入門이라고 주장하였다.98) 이처럼 그의 기학의 형성 배경에는 지구에 대한 해명이 95) 위의 책 권8, 葡萄牙國, 商; 瀛環志路 권7, 葡萄牙國, pp. 562 563 참조. 96) 이러한 최한기의 견해는 콜럼버스가, 이탈리아의 토스카넬리가 14세기에 주장한 지구구형설 에 따라 대서양을 서쪽으로 항해하여도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항해를 하여 서인도제도에 도착한 것에 견주어 이해해 볼 수 있다. 97) 氣學 권2, 桅舶之利 周行地球 乃人氣之運化 古無而今有也 活動運化之氣 人始見於地 圓 次明於地轉 畢露於淸蒙 究其始煥地之力量 非無所見聞而直駛桅舶也 必因東西海國 遠 近來往之見聞 測驗星辰半周全周之標度 胸中完得地體之團圓 眼前常見西向而東還 竟致身歷四 海 躬環一周 是卽人事之最大運化也 且以人之周行 可驗地體旋轉 而風氣均布於東西 閉塞于兩 極 來三去五之謠 東西順逆之說 無非活動運化之著現.
- 221 -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최한기의 자연과학사상도 분명 지구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즉 운화기의 해명은 지구로부터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는 近古 이래 氣說이 점점 밝혀져 제반 기계의 시험이 모두 갖추어져 조물주의 神 功이 이에 있으니, 조금 知覺이 있는 자는 보고 알기가 어렵지 않다는 확신을 가졌 다.99) 특히 그는 당시 중국을 통하여 들어오는 西法 중에서 曆算과 氣說을 취하되 기 독교의 怪誕한 이야기나 禍福說을 제거하기를 주장하였다.100) 여기서 우리는 그가 서 법 중에서 기설 을 취하기를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로 그의 기학이 바로 서법에서 나 온 것임을 알 수 있고, 이것은 바로 서양의 역상, 산수(기예), 지구와 지리상의 발견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그가 서양으로부터 배우고자 하였던 것이다. 물론 최한기도 사해를 항해하는 서양선박이 해안가에서 백성을 해치는 일을 일으 켜 화포를 때때로 발사하고 있으며, 우매한 백성에게 敎術을 전하고자 하고 있음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交通初에 흔히 있는 일로 오래지 않아 사라질 것 으로 전망하고 있다.101) 그는 오히려 海禁에 얽매여 세계의 지식인을 맞아들여 감화 를 받지 못하고, 망원경이나 火輪 등의 기계에 대하여 전해 들은 바를 직접 확인을 통하여 자신의 의심을 해소하지 못함을 못내 아쉬워하고 있다.102) 요컨대 최한기의 지구에 대한 인식과 지리상의 발견에 대한 이해는 지구상의 모든 政敎 習俗을 이해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 명백하다. 아울러 그가 주창한 기학 도 지구가 해명된 15세기 말부터 점차 기가 해명되어 가고 있는 시기에 일어난 새로 운 학문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3. 天文學思想 최한기의 기학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학문은 지리학과 더불어 천문학 이었다. 그는 천문에 대해서는 옛날에 밝히지 못한 것을 밝혔는데, 오히려 미진한 부 분이 있으나 후대의 증험에 따라서 점점 밝혀진 것이 두세 가지가 아니라고 하였 다.103) 따라서 그가 천문학에 대하여 어떠한 견해를 가졌는가에 대한 파악은 그의 자 연과학사상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요, 기학의 해명을 위해서도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우선 역법에 대한 견해를 살피고 이어 천체에 대한 인식과 만유 98) 위의 책 권2, 地球之兩轉 爲氣學之入門. 99) 人政 권8, 敎人, 諸敎. 100) 神氣通 권1, 體通, 天下敎法就天人而質正, 西法中取曆算氣說 去怪誕禍福. 101) 明南樓隨錄 5면. 102) 위의 책, 50면. 103) 運化測驗 권1, 用器驗試.
- 222 國史館論叢 第63輯 인력설의 수용형태를 살펴보고 그 자신이 제창한 기륜설에 대하여 검토하겠다. 19세기에 이르면 역법에 대한 이해에 있어 중국학계에서는 서양역법의 정교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중국의 고래의 역법이 서양에 전해졌다가 다시 중국으로 수용하 는 것으로 이해하는 학자들이 많았다. 조선후기에 이규경도 이러한 중국학자의 학설 에 동조하였다.104) 그리하여 조선정부도 서양 역법의 정확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으 며, 실학자들도 서양역법의 수용에는 적극적이었다. 천문학의 발달은 역법과 밀접한 영향을 가지고 있었는데, 최한기는 크게 地靜曆法과 地運暦法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우선 전자는 태양이 黃道를 도는 것으로 계산하여 1년에 1주한다는 것이요, 후 자는 태양이 하늘의 중심에 있고 지구가 황도를 도는 것으로써 계산하여 1년에 일주 하나 아직 質定하지 못하는 大端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역법에 대한 견해에서 보면 태양중심설을 아직 완전히 믿고 있지는 않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지구의 自 轉은 대부분 역법이 증험할 수 있고 밝힐 수 있으며, 남북극이 지구의 兩端에서 스스 로 생김을 밝힐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水와 土로 이루어진 地體가 구형인 緣由와 상하 거꾸로 매어달린 의혹을 명백하게 증험할 수 있으니, 진실로 地體에서 그 活動 의 氣를 보고人身에서 그 運化의 氣를 증험하면 천만가지 일정하지 않은 움직임에 이 르러서도 비록 미진한 단서가 있더라도 그 사실은 멀지 않다고 하였다.105) 최한기는 태양 달 별이 氣에 의거하여 운행하는데 원래 상하가 각 궤도를 따라 뜨 지도 않고 가라앉지도 않으니, 이것은 곧 層包의 기가 輕重과 淸獨이 있어 태양 달 별 의 體와 각기 그 마땅함에 적절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月天의 기는 月體를 싣고 움직 하며, 日天의 기는 日體를 싣고 움직이며 火 木 土 經星天의 기는 화 목 토 경성의 체 를 싣고 움직이니, 배가 바다에 운행하고 사람이 육지에 다니는 것과 같이, 그 경중과 청탁의 氣數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106) 최한기는 여러 천체 중에 지구가 1일 일주하므로 가장 빠르게 운행한다고 하였다. 지구에서 하늘을 바라보면 비록 천체가 1일 일주하는 것 같으나, 그 사실은 恒星天의 움직임이 70년에 1 가 어긋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항성천도 움직인다고 파악하 였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107) 사실 항성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이미 이규경도 西 曆을 통하여 이해하여 소개하고 있었다.108) 104) 五洲衍文長業散考 권42, 西洋通中國辨證說 附西舶通我東及疇人傳. 105) 運化測驗 권1, 氣之活動. 106) 運化測驗 권1, 氣之層包. 107) 종래 연구자들은 최한기가 經星天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이해였다고 보았는데, 이는 그의 天體觀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의 사고 속에는 움직이지 않는 존재란 추호도 없는 것으 로 이러한 배경 속에서 氣의 運化論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108) 이규경은 新曆을 소개하면서, 平運한 것으로써 宗動天이라 하여 ー氣가 渾轉하여 光象이 없 다고 하였다. 恒星과 태양 달, 五緯가 그 가운데서 운행하는데, 태양은 하루에 1 를 행하고 달은 13 남짓을 움직이고, 金星과 水星은 태양을 따라 또한 하루 1 를 행하고, 火星은 2일 에 1 를 행하고, 木星은 12일에 1 를 행하고, 土星은 28일에 1 를 행하며, 항성은 67년 남짓
- 223 최한기는 하늘에 가득찬 恒星은 각기 氣輪을 갖추고 있으며, 우주에 나열되어 그 역할에 이바지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여러 行星이 軌道가 있어 순환의 지속은 攝動 氣力의 다소에 달려 있는데, 섭동 기력이 많은 것은 빠르게 운행하고 적은 것은 더디게 운행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서로 迭蕩하여 거의 털끝 만큼의 공간이나 틈이 존재하지 않으며, 바람 비 추위 더위 구름 안개 우레가 왕래하며 계속하여 일어나 지구 의 蒸熱氣와 더불어 서로 밀고 서로 당긴다고 이해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최한기가 분명히 萬有引力의 작용을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太陽熱의 勢力의 섭동이 크 고, 반사하여 비치는 빛은 여러 갈래이다. 기를 증험함에 보고 터득이 있는 자는 다소 의 事務가 반드시 기를 따라서 條理를 연구하고, 기에 인연하여 계급을 밟게 되나 기 를 알지 못하는 자는 매번 기의 활동을 보고 여러 갈래의 의혹이 이르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109) 최한기는 천하의 사물이 일각도 고요히 정지해 있는 것이 없으니 항성이 歲差運動 을 하고, 토성은 28년에 일주운동을 하고, 목성은 12년에 일주운동을 하고, 화성은 3 년에 일주운동을 하고, 금성 수성은 1년에 태양을 일주하는 운동을 하며, 달은 한달에 지구를 일주하는 운동을 한다. 태양 및 지구는 자전운동을 하니 태양은 25일에 한번 자전하고, 지구는 하루에 한번 자전을 하는데, 태양이 1년에 黃道를 일주하는 것은 전 해 내려온 역법에 의한 것인 반면, 지구가 1년에 황도를 일주하는 것은 근세에 밝혀 진 것이라고 하였다.110) 이러한 인식에서 그는 토성 목성 화성 달 등 천체의 일주는 각기 거리가 멀면 느리고 가까우면 빠른 구분이 있다고 이해하였다.111) 이러한 천체 의 운동을 그는 충만한 大氣가 活動運化하여 잠시의 머무름도 없는 것에서 찾고 있 다. 그리고 최한기는 천체의 일주운동과 더불어 여러 천체의 반지름도 언급하고 있는 데, 실제로 반지름 비례의 수를 표로 그려 소개하고 있다.112) 지구의 지름은 2만 8650 里이며, 달은 지구보다 2/3가 적고, 태양은 지구의 100배가 되며, 토성과 목성은 각각 지구의 10배, 화성은 지구의 1/5, 수성은 지구의 1/3, 금성은 지구와 같으며, 경성의 경우 큰 것은 태양과 같고 매우 미미한 것도 지구의 수배에 이른다는 것이다.113) 그 에 1 를 행한다. 항성의 운행이 가장 더디기 때문에 사람이 깨닫지 못하고 움직이지 않는다 고 여겼다. 오직 항성이 67년 남짓에 1 를 움직이기 때문에 日躔의 恒星者도 67년 남짓에 1 를 행한다. 지금 歲差를 法하여 恒星行度를 삼으니 이치는 다르나 법은 같다( 五洲衍文 長箋散考 권46, 日躔因歲差歲差改恒星行辨證說). 109) 明南樓隨錄 42면. 110) 氣學 권1, 靜觀天下事物 無一刻之靜定 經星有歲差之運 土星有二十八年一周之運 木星 有十二年一周之運 火星有三年一周之運 金星水星有一年一周於太陽之運 太陰有一月周於地球 之運 太陽及地球有自轉之運 太陽二十五日ー自轉 地球一日ー自轉 太陽之一年一周黃道 流傳 之曆法 地球之一年一周黃道 近世之所發. 111) 運化測驗 권1, 氣之活動. 112) 地球典要 권1의 諸曜徑各不同 에 日 水 金 地 月 火 木 土의 比例表를 제시하고 있다.
- 224 國史館論叢 第63輯 러나 그는 이러한 천문학의 관측기록을 정확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네 가지 사실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첫째, 대기권 안에서 바라보는 태양 달 별빛의 그림자는 희미 하여 정하기 어렵다. 둘째, 천체가 운동하는 궤도는 타원이기 때문에 비록 평균 지름 을 취한다 하나 어찌 넘치거나 모자라는 수가 없겠는가. 셋째, 작은 관측기계와 미세 한 점과 획으로 우주의 光影을 비추니 엄청난 오차가 없겠는가. 넷째, 지구의 자전과 공전으로 보면 모든 천체의 반경은 마땅히 증감이 있을 것이다.114) 이와 같이 최한기는 티코 브라헤의 대기설과 케플러의 타원궤도설, 그리고 관측기 계와 천문학의 발달에서 이루어진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그 당시의 천문관측기록은 아 직 정확한 단계에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천문학의 발달로 새로운 발 견이 계속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고정된 관측기록을 당시로서는 확정하여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그가 서구의 실험과학의 결과로 밝혀진 이러 한 사실에 대하여 모두 精實이 없고 證險이 없다고 비판한 것은 그의 자연과학지식에 대한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최한기는 1858년까지 이룩된 서양 천문학의 지식을 담고 있는 허셜(Frederik William Herschel 侯失勒, 1738 1822)의 The Outlines of Astronomy 談天 의 내용을 성기운화 에 인용하여 소개하면서 가끔 자신의 기학의 입장에서 기의 활동 운화로 모든 천체에는 氣輪이 형성되어 상호관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氣輪說을 덧붙이 고 있다. 여기서 한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은 그가 서구의 서적을 전재하면서도 확고 하게 견지하는 태도는 우주안에는 털끝 만큼의 기가 존재하지 않는 空間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그는 서구학자들의 한역 서학서에서 空際 나 天空 등 의 표현을 모두 天際 上際 積氣 등으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115) 즉 최 한기의 학문, 즉 기학에는 空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의 우주관도 空이 없는 기로 충만된 우주에 대한 견해인 것이다. 그런데 그가 담천 을 통하여 받아들이고 있는 지식은 뉴턴의 만유인력설을 응 용하여 설명하고 있는 天體力學이다. 비록 그가 담천 의 내용을 전적으로 인용하 고 있다 할지라도 조선에 천체역학시대의 우주관을 비롯하여 水星 金星 地球 火星 木 星 등 태양계를 비롯하여 은하계에 관한 지식을 도입하여 소개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 할 만한 사실이다. 113) 運化測驗 권1, 地濟自轉 31면. 이 역시 브노아의 地球圃說 을 통하여 받아들인 것이 다( 疇人傳 권46, 西洋 4, 附 蔣友仁 참조). 114) 運化測驗 권1, 氣之數. 115) 최한기는 談天 의 내용 중에 빈번히 나오는 天空, 空際라는 표현도 그가 空際格致 의 내용을 運化測驗 에 수록하면서 空際格致 에 空際라고 쓴 용어를 모두 上際 혹은 積 氣로 바꾸어 쓴 것과 마찬가지로, 上際 天際 天球 따위로 고쳐 星氣運化 에 수록하고 있 다. 아울러 談天 에 쓰인 理字는 의도적으로 생략하거나 神氣 등으로 쓰는데, 이는 그가 철저히 氣에 입각하여 우주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 225 그러면 최한기가 담천 의 천체에 대한 이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제창한 기륜 설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사실 이 기륜설은 이미 1857년에 나타나고 있다. 즉 그는 潮 汐현상을 지구와 달의 기륜에 의하여 설명하였다. 지구가 운행하면 곁의 기도 돌아서 기륜이 형성되고, 달이 운행하여 달을 중심으로 기륜이 형성되는데, 기륜이 서로 접촉 하여 조석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지구와 달의 기륜이 상호관계를 미루어 七曜 의 기륜에 미쳐 칠요가 연계하여 일체를 이룬다는 것을 궁구할 수 있는데 스스로 부 득불 그러한 勢 가 있다는 것이 1857년 당시의 그의 견해였다.116) 그뒤 그는 1860년에 서양의 4원소설을 비판하면서 氣域을 기륜으로 언급하고 있다.117) 이러한 그의 1850 년대말의 인식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지구와 달의 관계를 기륜으로 설명하고, 나아 가 칠요의 운행까지도 부득불 그러한 세 가 있을 것이라고만 하였다. 그러나 1867년에 이르면 허셜의 담천 을 통하여 뉴턴의 만유인력설을 받아들여 천체의 상호관계를 설명하였다. 그러면 담천 의 만유인력에 대한 설명과 최한기의 담천 의 내용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의 차이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허설은 담천 에서 만유인력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앞사람은 다만 當然한 것은 알았으나 그 까닭은 알지 못하였다. 뒷사람은 攝力으로써 해명 하여 처음에는 섭력과 합하지 않은 것 같으나, 자세히 고찰하면 또한 섭력에 근본함을 알 수 있어 섭력의 이치는 더욱 확고하여 바꿀 수 없다.118) 물론 위에서 말한 攝力(attraction)은 바로 뉴턴의 만유인력을 가리킨다. 최한기는 담천 을 통하여 만유인력의 법칙을 이해하고 있는데, 그는 위의 담천 의 인용 부분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만유인력과 기륜의 상호관계에서 설명하고 있다. 앞사람은 다만 攝力이 있어 해명하는 것을 알았으나 諸星의 氣輪이 活動運化의 큰 범위가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기륜으로써 섭력을 밝히면 섭력이 전체의 섭력이 되고, 섭력으로 써 기륜을 미루어 보면 기륜이 계산을 위한 기륜이 된다. 天歷(曆)의 活法을 궁구하는 자는 기륜을 쫓아 학문에 들어가고 人歷의 死法을 구하는 자는 섭력을 따라 공을 쓴다.119) 이와 같이 최한기는 뉴턴의 만유인력의 역학시대가 지나고 기륜에 의하여 천체를 해명하는 시대를 구상하고 있다. 뉴턴의 인력에 의한 모든 물체의 운동을 명백히 이 116) 地球典要 권1, 潮汐 및 권13의 제22도 참조. 117) 運化測驗 권2, 五行四行. 118) 談天 권14, 逐時經緯度差 1면. 119) 星氣運化 권12, 經緯度差, 前人但知有攝力 遞解遞明 不知有諸星氣輪 爲活動運化之範圍 以氣輪明攝力 則攝力爲全體之攝力 以攝力推氣輪 則氣輪爲立算之氣輪 究天歷之活法者 從氣 輪而入學 究人歷之死法者 循攝力而用功.
- 226 國史館論叢 第63輯 해하면서도 기륜설을 거듭 부연설명하고 있는 것은 모든 천체에는 기륜이 있고, 이 기륜 사이에는 만유인력이 작용하고 있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이었다. 최한기의 기륜설은 물론 담천 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그가 담천 의 論地 의 蒙氣差 부분을 전재하면서 기의 輪層을 설명하고 있는데, 기 륜의 시작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기륜설도 분명 서양천 문학의 소산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그는 지구 밖의 기륜과 각 기륜의 섭동 (perturbation)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보통 사람은 다만 蒙氣가 지구를 싸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몽기가 활동하여 지구를 돈다 는 것은 알기 어렵고, 비록 몽기가 활동하여 지구를 돈다는 것은 알지만, 그 바깥쪽에 또한 濁한 기가 싸고 있다는 것을 알기 어렵다. 또 그 바깥쪽에 淸한 기가 널리 싸고 있다는 것을 알기 어렵고, 또 그 바깥쪽에 지극히 淸한 기가 멀리 두르고 있어 地氣輪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기 어렵다. 地氣輪의 반지름은 지구반지름의 천백배나 되며, 가까이는 月氣輪과 攝動 을 하고, 멀리는 日氣輪과 섭동한다.120) 이것은 최한기가 허셜의 담천 의 몽기차를 전재하면서 자신의 기륜설을 전개하 고 있는 내용이다. 즉 地球 蒙氣 濁氣 淸氣 極淸氣로 지구의 외부를 설명하고 있 는데, 여기서 대기권은 몽기까지이며, 그가 말하는 기륜은 몽기 극청기 사이로 이해 된다. 한편 그는 담천 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氣가 輪廓을 싸고 중심(腹)에 원심력 이 있으며, 두 끝에는 圓錐運動의 극이 있으니 지구가 그와 같을 뿐만 아니라 태양 달 및 모든 행성이 원심력과 원추운동이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비록 기륜을 명백히 말하지는 않았으나 곧 衆星氣輪을 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후학이 바야흐로 充滿한 神氣와 그 신기의 活動運化가 털끝 만큼의 틈도 없고 한 곳 도 관련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121) 그러면서도 최한기는 홉슨(Hobson, 1816 1873)의 博物新編 과 허설의 담천 이 지구의 자전 공전을 설명하고 있지만, 이러한 서적의 결함은 充滿한 神氣와 活動 運化의 本末을 탐구하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그 결함을 바로 기륜설을 제창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하였다.122) 그는 지구 곁에는 기륜이 여러 층으로 싸여 있고, 어느 지점에 이르면 여러 별들이 기륜과 접하여 流體로 틀을 이루어 運化가 행해진다고 파악하였 다.123) 즉 地氣輪과 諸星의 기륜이 유기적인 상호관계에 의하여 이루어져 있다고 파 120) 위의 책 권1, 地氣數, 凡人但知蒙氣之包地 難知蒙氣活動而遶地 縱知蒙氣之活動遶地 難知其 外 次濁之氣蒙包 又難其外 次淸之氣廣包 又其外極淸之氣遠圍 而成地氣輪 而地氣輪半徑 爲 地半徑之千百倍 近與月氣輪攝動 遠與日氣輪攝動 및 談天 권1, 論地 5면 참조. 121) 위의 책, 序, p. 83(이하 이 책의 페이지는 李佑成 編, 明南樓全集 3에 수록된 성기운 화 부분의 페이지를 가리킨다). 122) 위의 책, 凡例 p. 85. 123) 위의 책, 凡例 p. 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