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평식(조선전기 염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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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前期 鹽의 生産과 交易 - 77 - 차원의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榷鹽을 포기함으로써 염 생산이 국가재정에서 차 지하는 비중이 비록 감소하였다 하더라도 염 생산자들이 부담하는 鹽稅는 국가에서 放棄 할 수 없는 주요한 稅源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염의 생산과 그 교역이 민의 생계 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연관하여 염정의 정비는 新生國家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이기 도 하였다. 이를 위해 조선 정부는 전조의 각염제 하에서 염 생산자들을 鹽戶로 차정하여 그들의 全生産額에 해당하는 貢鹽을 수납하던 鹽政體系를 원용하고 있었다. 즉 국가 차원 에서 각 연해주군에 鹽場을 설치하고 여기에 기왕의 염호들을 身役의 하나로 定役시킴으 로써 염의 안정적인 생산과 貢鹽의 확보를 기도하였던 것이다. 이른바 貢鹽干28) 公干29) 또는 式干30)이 바로 그들로, 국가는 이들을 따로 鹽籍에 편성하여 관리하였다.31) 身良役賤 계층으로서 貢鹽干은 그들의 生業과 身役이 일치하는 염 생산자였다.32) 그들 은 각자 自備한 物力을 바탕으로 鹽盆을 설치하고 일정한 지역의 해변에 대한 占有를 인 정받아 염 생산에 종사하고 있었으나, 그들의 이러한 생업은 국가에 의해 定役戶 곧 貢鹽 干으로 차정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었고 그만큼 국가의 강력한 통제 관리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형편이었다. 이들 소유의 염분이 公鹽盆 또는 貢鹽盆33)으로 지칭됨도 이런 사 정에서였다. 국가는 이들 官設 鹽場에서 이루어지는 염간의 염 생산 과정에 대한 관리와 그들로부터 貢鹽을 수취하는 업무를 담임시키기 위해 鹽場官을 두고 있었다.34) 물론 전술한 바와 같이 국초에도 이미 私鹽은 이른바 私干35)에 의해 생산 유통되고 있었 다.36) 이들은 국가의 역체계와 관계없이 스스로 물력을 투자한 염분에서 염을 생산하여 판매하면서 납세하던 존재였다. 곧 여타의 신역을 지닌 채 염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었다.37) 이에 비해, 公干 곧 貢鹽干은 국가에 의해 역체계의 일환으로 편성되어 국가에서 설정한 특정 염장에서 貢鹽을 生産 納貢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염장은 바로 이들을 차역시키기 위 해 국가에서 설정한 특정한 해변의 염 생산지였다. 또한 이들의 염 생산은 염장관을 통한 28) 太宗實錄 卷28, 太宗 14年 9月 戊寅(2冊, p.35). 29) 世宗實錄地理志 全羅道, 沃溝縣, 扶安縣, 興德縣, 順天都護府, 高興縣條. 30) 世宗實錄 卷109, 世宗 27年 8月 戊辰(4冊, p.635). 31) 世宗實錄 卷109, 世宗 27年 8月 戊辰(4冊, pp.635 636), 鹽干 名在干籍 不得回避 又 無他生理., 司宰監專掌其事 考其鹽干之籍 不使有隱漏閑役者. 32) 劉承源, 朝鮮初期의 鹽干. 33) 慶尙道地理志 소재 각 군현의 鹽盆 기사. 34) 鹽場官은 榷鹽制下 고려에서 염의 收稅 및 販賣를 담당할 목적으로 설치된 職制였다(姜順吉, 權寧國씨의 앞의 論文). 조선에서도 그 직제가 그대로 설치되었음은 태조의 즉위교서에 이미 염장관이 나타남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註 14와 같음). 35) 世宗實錄 卷109, 世宗 27年 8月 戊辰(4冊, p.635). 36) 私干의 존재와 鹽稅 부담에 대해서는 劉承源, 朝鮮初期의 鹽干, pp.48 50 참조. 이들이 생산 한 염의 교역과 그 확대 문제에 대해서는 本稿 Ⅴ장 私鹽의 生産과 交易擴大 에서 詳述. 37) 度支志 外篇 卷8, 版籍司 財用部, 漁鹽 事實, 式干 無他役而世傳其業 私干 有他役而兼爲資生.

- 78 - 國史館論叢 第76輯 국가의 엄격한 통제 관리 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정도전이 말한 置鹽場而官爲煮鹽 의 의미는 이상에서 서술한 공염간의 염 생산 조건을 전제로 하는 언급이었다. 따라서 결 코 前朝에서와 같이 국가에서 염의 생산과 판매를 전담 관리하는 상황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이라 하겠다. 太宗 14년(1414) 戶曹判書 朴信의 課鹽法에 대한 다음 啓文은 그러한 국초 염정 운영 의 사정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今國家沿海州郡 置貢鹽干 又收私鹽稅 其數不爲不多.38) 사염세를 부담하는 私干 외에 국가는 연해주군에 貢鹽干을 두었고, 이들이 생업이자 신역으로서 염을 생산 납공하는 곳이 바로 鹽場이었던 것이다.39) 이 시기 염간이 身良役 賤 계층의 하나로서 賤役人으로 인식되던 것40)도 바로 이처럼 국가의 엄격한 생산강제 아래에서 염간의 염 생산이 이루어지던 사정에서 연유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상 황을 바탕으로 공염간의 염 생산에 대한 국가의 강력한 統制 介在 행위가 官爲煮鹽 의 형 태로 관념될 수 있었던 것이다.41) 태조의 즉위교서에서 언급된 各道燔煮之鹽 42) 역시 이 런 관념 속에서, 국가가 염간을 동원하여 생산한 염이 아니라 염간으로부터 수취한 貢 稅鹽을 의미하는 표현이었다. 결국 국초 조선 정부의 鹽法改革의 기본 방향은 고려의 각염제를 폐지하는 데 있었다. 이제 定役戶인 貢鹽干은 신역의 일환으로 貢鹽을, 私干은 私鹽稅를 부담하면 되었다.43) 그들이 물력을 투자하여 설치한 鹽盆에 대한 소유권은 공 사간 모두에게 인정되었고, 염 생산 지역인 해변에 대한 점유 또한 인정되었다. 그들이 생산한 염 역시 貢 稅鹽을 제외 하면 자유로운 판매가 보장되었다.44) 정도전의 표현대로 蓋與民同其利 非禁而榷之 45)하 38) 太宗實錄 卷28, 太宗 14年 9月 戊寅(2冊, p.35). 39) 국초의 鹽場에 대한 이러한 관념은 이후, 염업의 발전과 함께 염 생산자의 鹽盆所有, 鹽生産 海邊(鹽田)에 대한 占有의 권리가 확대되면서 염 생산 시설 일반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전화한 다. 예컨대 仁祖 3년(1625)의 다음 기록은 그렇게 전화한 염장의 개념을 의미한다고 생각된 다. 仁祖實錄 卷10, 仁祖 3年 10月 壬寅(34冊, p.45), 今者 魚箭鹽場 各有主者. 40) 定宗實錄 卷1, 定宗 元年 2月 庚寅(1冊, p.144), 騎船格軍 非鹽干賤者. 41) 국초 鹽干의 염 생산에 대한 이러한 관념은 태종 11년(1411) 11월 사간원의 상소문에서도 확인된다. 太宗實錄 卷22, 太宗 11年 11月 辛巳(1冊, p.611), 鹽又切於民用 不可一日無也 國家設鹽場官 使燔之易民布貨 民甚便之. 42) 註 14)와 같음. 43) 貢鹽干의 貢鹽은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세종대 연간 20여 석에서 성종 대에 이르면 8석으로 인하 조정된다. 이에 비해 私干의 稅鹽은 동 시기에 모두 4석으로 변동 이 없다(劉承源, 朝鮮初期의 鹽干 ). 44) 世宗實錄 卷109, 世宗 27年 8月 戊辰(4冊, p.635), 一歲所貢 式干則十石 私干則四石 其餘 則任其所用 持價來買者 東西沓至 故雖不事農業 衣食自足.

朝鮮前期 鹽의 生産과 交易 - 79 - 는 제도였고, 염정에 있어 일대 개혁이었다. 조선 정부의 염정에 대한 이러한 개혁조처는 비단 염 생산자들의 생산조건 만을 향상시키려는 소극적인 목적에서 취해진 것은 아니었 다. 고려말 염세로 價布를 납입하고서도 염을 제때에 지급받지 못하는 사람이 열에 여덟 아홉에 이르던 사정과,46) 이로 인해 권세가들이 장악하여 생산한 私鹽이 高價로 私販되 던 현실47)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염정개혁이 가져 오는 일반 민인의 생활향상 효과는 적지 않은 것이었다. 토지 조세제도로서의 科田法의 제정 실시에서 의도하였던 新王朝 開創의 名分이 鹽政 분야에서도 각염제의 폐지로 실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각염의 폐지와 함께 국초에 단행된 鹽法改革의 또다른 중요한 내용은 염 생산자, 곧 염간 이외 권세가 등의 鹽盆私置를 금지하는 데 있었다. 물론 고려 역시 개인에 의한 鹽盆私置를 엄격하게 금지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염전매를 관철시키기 위해 私鹽의 유통을 막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48) 그러나 각염제의 문란과 동시에 麗末에 이르러 權豪에 의한 염분 奪占 私置는 다시 횡행하였고, 이는 사염의 유통 확대로 이어 지고 있었다.49) 이렇게 권호에 의해 장악 유통되는 私鹽이 국가의 官鹽에 못지 않게 高 價이고 이로 인해 민의 고충이 컸음은 물론이었다. 국초 조선 정부는 이러한 사염의 폐단을 근원에서 방지하기 위해 염간이 아닌 權勢家 個人의 鹽盆私置와 奪占을 금지하였다. 이 역시 山場水梁 一國人民所共利者 50)라는 山林 川澤에 대한 與民共之 의 이념에 근거하여 취해지는 조처였다. 때문에 이를 專擅하여 榷 利하는 자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조사 처벌하고, 권세가의 위세에 눌려 이를 보고하지 않 는 수령 또한 治罪하고 있었다.51) 염분의 私置와 私占을 금하는 이러한 원칙은 국초에는 대체로 준수되었던 것으로 보인 다. 예컨대 태조 7년(1398)에 迎日監務 盧植과 鹽場官 趙以道는 염분을 사치하였다가 중 앙에서 경차관이 파견되자 이를 毁盆한 혐의로 憲司에 의해 탄핵되었다.52) 지방관이고 염 생산과 수세를 담임하는 염장관인 이들이 처벌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개인이 염분을 사치 운영하는 행위가 법으로 금지되었고 적발시에 처벌됨이 常例였던 사실은 분명하다. 45) 註 13)과 같음. 46) 高麗史 卷79, 志33, 食貨2, 鹽法, 忠肅王 5年 5月(中冊, p.741), 今鹽場官 先徵價布 鹽 不及民者 十常八九. 47) 註 6)과 같음. 48) 高麗史 卷79, 志33, 食貨2, 鹽法, 忠宣王 元年 2月(中冊, p.471), 私置鹽盆及私相貿易者 嚴行治罪. 49) 姜順吉, 權寧國씨의 앞의 論文. 50) 註 11)과 같음. 51) 위와 같음. 52) 太祖實錄 卷13, 太祖 7年 3月 丙子(1冊, p.119), 憲司劾 迎日監務盧植 鹽場官趙以道 以道植私置鹽盆 聞敬差官至 毁盆 請收職牒 處之外方 命 杖以道植流于外.

- 80 - 國史館論叢 第76輯 그러나 염분의 설치와 경영이 가져다 줄 경제적 이익은 권세가의 鹽分私置 금지라는 국초 이래 원칙의 遵行을 어렵게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睿宗 元年(1469)의 다음 자료가 주목된다. 傳旨戶曹曰 江陵府蒜山堤堰 給上元寺 且免雜役及鹽盆稅.53) 호조에 내린 국왕의 傳旨 가운데에 上元寺의 염분세를 면제하라는 지시가 포함되어 있 다. 상원사 소유의 私鹽盆이 존재하고 이에 대한 課稅가 이루어지던 사정에서 국왕의 特 旨로 그 염분세가 면제되고 있는 것이다. 상원사의 사염분은 물론 상원사가 物力을 투자 하여 만든 염분으로 그 所有權이 同寺에 있는 염분이겠다. 이 염분의 염 생산이 상원사의 승려에 의해 이루어졌는지 아니면 鹽戶에게 代價를 징수하면서 貸與하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위 내용으로 보아 당시 상원사가 상당한 숫자의 염분을 소유하고 있음은 분명 하다 하겠다. 한편 이러한 鹽盆 私有의 추세는 이후 더욱 확대되었던 듯하다. 同 時期 말 엽인 成宗 23년(1492)에는 洛山寺 소유의 私鹽盆이 많다는 사실이 구체적으로 지적되고 있기 때문이다.54) 이상 鹽盆私置와 所有의 사례는 모두 동해안에 소재한 寺刹과 관련된 내용이지만, 그 러한 추세는 당대의 권세가나 양반 사대부, 토호 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55) 또 이들은 私置한 염분을 노비 등을 동원하여 自營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겠지만, 대개는 염 생산자들에게 대여하고 그 대가를 수취하는 형식으로 경영하였으리라 짐작된다. 그렇 다면 염간 이외 권세가나 개인의 염분 사치와 사점을 금하던 국초 정부의 방침은 15세기 전반을 거치면서 무너지고, 개인의 鹽分私有를 인정한 바탕에서 그에 대한 염분세가 부과 되고 있었던 셈이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의 기본 법전인 經國大典 에 실려 있는 鹽盆과 鹽稅에 대한 규정 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諸道魚箭鹽盆 分等成籍 藏於本曹本道本邑 漏籍者 杖八十 其利沒官 私占魚箭者同 魚箭分給 貧民 三年而遞.56) 염분은 어전과 더불어 分等成籍의 형태로 국가에 의해 파악되고 있었고, 漏籍者는 처 53) 睿宗實錄 卷3, 睿宗 元年 2月 己亥(8冊, p.329). 54) 成宗實錄 卷261, 成宗 23年 正月 戊子(12冊, p.134), 侍講官姜謙曰 洛山寺 私鹽盆 亦多. 55) 권세가나 양반 사대부의 鹽盆所有는 燕山君 12년(1506)에 昇平府夫人의 염분을 몰수하여 張 淑容에게 지급한 사실에서 그 實例가 확인된다( 燕山君日記 卷63, 燕山君 12年 8月 癸丑, 14冊, p.63). 56) 經國大典 戶典, 魚鹽.

朝鮮前期 鹽의 生産과 交易 - 81 - 벌되었다. 그런데 어전의 사점에 대한 처벌 규정이 明示되어 있음에 비해 염분의 사치 사점에 대한 규정이 빠져 있는 점이 흥미롭다. 국초 이래 산장 어량 염분 등 山林川澤 이 與民共之 의 이념 하에 개인에 의한 사점이 금지되면서 동일한 차원에서 취급되어 왔 음을 고려하면, 經國大典 의 위 내용은 염분에 대한 국가 정책이 변화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57) 요컨대 15세기 전반을 거치면서 염 생산자인 貢鹽干이나 私干 외에 權勢家나 寺刹 등 이 物力을 투자하여 私置한 鹽盆이 증가하면서 이를 금지하던 국초의 정책은 무너지고 있었다. 나아가 그러한 鹽盆私置의 증대라는 사정을 반영하여 그들의 鹽分所有를 인정하 고서 이에 대해 收稅하는 방향으로 국가의 鹽業政策이 바뀌었고, 經國大典 의 위 규정은 이런 사정에서 나온 변화였다. 이러한 염업정책의 변화는 당대 인구의 증가에 따라 염 소 비량이 급증하던 현실에서 염 생산의 증대, 그 중 특히 私鹽의 생산과 교역이 확대되던 사정을 배경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58) 각염제 폐지라는 국초의 원칙을 유지하면서도 鹽 業發展에 따라 진행되는 지배층의 염업에 대한 投資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조선전기의 鹽 政이 변화하고 있었던 셈이다. Ⅲ. 官鹽의 確保와 運用 조선전기 榷鹽制의 폐지와 私鹽의 허용에도 불구하고 염의 생산과 교역에 대한 국가의 관심은 지대하였고, 그에 따라 염의 생산 유통에 대한 국가의 干與 정도 역시 매우 높았 다. 각염의 포기에 따라 염의 생산이나 그 유통과정을 국가가 일원적으로 專擔할 방도는 없었지만, 조선 정부는 가능한 한 그 과정을 국가의 관리와 통제 하에 두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이를 통한 국가재정의 보충이라는 측면 외에도, 고려말 榷鹽의 강행과 권세가의 私鹽盛行이 가져왔던 사회적 폐단 곧 민의 현실적인 고충을 해결하는 차원에서도 그 필 요성이 절실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염은 민의 食生活에 없어서는 안될 必須食品으로 그 중요성이 主食인 穀物에 버금가는 식품이었다.59) 전매제가 폐지된 현실에서 조선 정부의 염 생산과 교역에 대한 간여, 이를 통한 국가 재정의 보충, 민생의 향상 노력은 이제 鹽稅의 징수와 그 관리정책을 통해서 기도되었다. 57) 山林에 대한 私占禁止는 經國大典 刑典, 禁制條에, 私占柴草場者 並杖八十 라 하였다. 58) 이 시기 私鹽의 생산과 교역 확대에 대해서는 本稿 Ⅴ장에서 詳述. 59) 太宗實錄 卷22, 太宗 11年 11月 辛巳(1冊, p.611), 鹽又切於民用 不可一日無也. 太宗實錄 卷28, 太宗 14年 9月 戊寅(2冊, p.35), 鹽 乃民之所資以生者 其重 次於五穀.

- 82 - 國史館論叢 第76輯 정부가 장악할 수 있는 염을 이용하여 민과의 교역을 통해 상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 이었다. 이른바 官鹽 또는 公鹽의 확보와 유통문제였고,60) 이는 바로 利權在上 의 이념 에 바탕하여 추진되는 정책이었다.61) 조선전기에 국가가 장악하는 염에는 우선 鹽干의 貢鹽이 있었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국가는 전국의 연해에 鹽場을 두고 여기에 貢鹽干들을 신역으로 차역시켰다. 물론 염 생산에 필요한 일체의 所要物品, 예컨대 鹽盆 鹽幕 柴木 등은 염간의 自備였고 따라서 그 시설물은 염간의 所有였다. 염장은 이들 염분이 소재하는 共有의 해변에 설정되었고,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염 생산과 貢鹽 징수를 위해 鹽場官을 설치하였다.62) 이들 공염간의 염 생산은 그것이 신역의 일환이고 국가의 강력한 生産强制 하에 이루 어졌기 때문에 官爲煮鹽 한다고 인식될 정도였다.63) 그런 만큼 그들의 貢鹽額數 또한 적 지 않은 분량이었다. 세종 원년(1419) 황해도 염간은 1년에 每戶當 24石을,64) 강원도 염 간은 同 9년(1427) 이전까지 1名當 20石을 부담하고 있었다.65) 당시 강원도 감사는 민 간의 弊瘼을 보고하면서 염간의 처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道內嶺東各官貢鹽 鹽干每一名 歲收二十石 此輩煮鹽代耕 以資其生 近因沿邊禁松令嚴 柴于 遠地 以致牛馬倒損 每年稅鹽 未充其額 人甚病之 請減半 每年一名 毋過十石 以便民生 上 命 鹽稅減半.66) 煮鹽으로써 農耕을 대신하는 이들은 특히 禁松令으로 인해 柴木 조달에 큰 어려움을 겪는 실정이었고,67) 이러한 사정이 참작되어 이들의 공염은 연 10석으로 인하 조정되었다. 60) 이 시기 公鹽의 개념에 대해서는 이미 劉承源씨가 朝鮮初期의 鹽干, p.47, 註 71)에서 정 리한 바 있다. 여기에서 씨는 公鹽을 王土思想 하의 公田과 비교하여, 전국의 모든 鹽盆, 국 가가 定役戶를 동원하는 염분(貢鹽盆), 국가 직속의 염분(官盆)과 그 염분 소유에 따른 염의 생산 유통행위 일체를 포함하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필자는 씨의 개념 규정에 기본적으로 동 의하나, 생산 시설로서 鹽盆과 상품으로서 鹽을 포함하는 개념으로서의 공염 규정에는 의문이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공염을 私的 所有와 流通의 영역에 있는 私鹽과 대비시켜 국가에서 장악하여 유통시키는 염으로 그 의미를 국한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당시 자료에서는 이러한 의미의 염에 대해 官鹽, 公鹽 또는 國鹽 등 다양한 표현을 쓰고 있다. 61) 拙稿, 朝鮮前期의 商業과 商業政策 (延世大 博士學位論文, 1997)의 Ⅱ장 2절 2항 利權在 上 論과 政府의 交易把握. 62) 국초에 설치된 鹽場官 職制는 이후 세종 18년(1436)에 혁파되고 그 임무는 해당 지역 수령 이 兼掌하게 된다. 世宗實錄 卷75, 世宗 18年 10月 癸亥(4冊, p.33), 罷諸道鹽場官 令其 官守令兼掌. 63) 本稿 Ⅱ장 國初의 鹽法改革과 鹽政의 推移 참조. 64) 世宗實錄 卷5, 世宗 元年 10月 乙未(2冊, p.342). 65) 世宗實錄 卷36, 世宗 9年 4月 壬午(3冊, p.69). 66) 위와 같음. 67) 鹽田의 有無에 관계없이 煮鹽方式으로 염을 생산하던 당시에 있어, 염 생산의 가장 큰 어려

朝鮮前期 鹽의 生産과 交易 - 83 貢鹽干 곧 式干의 공염은 세종 27년(1445)에도 10석으로 확인된다.68) 이후 이들 식간의 공염은 성종 16년(1485) 이전 어느 땐가 다시 연간 8석으로 인하되었고,69) 이 액수가 조선전기 내내 공염으로 부과된 것으로 보인다.70) 이 시기 국가에서 差役한 공염간의 전체 숫자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그 貢鹽總額을 추정할 수는 없지만 전국적으로 상당한 액수였을 것임은 짐작된다. 예컨대 世宗實錄地理 志 에 의하면 全羅道에 염분이 소재한 郡縣은 14개 지방이었고, 그 중 公 私干의 수를 파악하고 있는 9개 군현의 염간의 수는 724명, 그들이 납부한 공 세염은 총 6,892석이 었다.71) 물론 이 官鹽 總額은 공염간의 공염 외에도 私干의 私鹽稅가 포함된 수치이다. 그러나 이를 감안하더라도 선초 국가에서 공염을 통해 확보하는 관염은 적지 않은 액수 였다. 고려 忠宣王 元年(1309) 2월에 각염제를 시행하면서 국가가 파악한 전국의 鹽盆은 616坐, 鹽戶는 892戶에 諸道의 鹽價布는 4萬匹, 이를 당시 估價에 의해 산정하면 鹽으로 8萬石이었다.72) 그 중 전라도에 소재한 염분은 126좌에 염호가 220호였다. 世宗實錄地理志 가 편찬된 端宗 2년(1454)과 고려 충선왕 원년(1309) 사이에 보이는 이러한 통계치, 곧 鹽盆數73)와 鹽干數의 차이는 고려시기 국가의 관리에서 빠져 있던 多 數 私鹽盆의 존재나 또는 兩時期 사이의 염 생산의 발전에 따른 결과로 해석된다.74) 여 하튼 각염제 하에서 고려 정부가 장악했던 염의 총액이 8만여석이었음에 비해, 각염이 폐지된 상태에서 전라도 한 지방, 그것도 염생산 14개 郡縣 중 9개 군현에서 국가가 貢 움은 柴木 조달에 있었다. 煮鹽式 製鹽法에서 燃料 문제에 대해서는 金昊鍾, 朝鮮後期 製鹽 에 있어서 燃料問題 ( 大丘史學 26, 1984) 참조. 또 이 시기 製鹽方法에 대해서는 高承濟, 朴容淑, 申芝鉉씨의 앞의 論文 참조. 68) 註 44)와 같음. 69) 成宗實錄 卷183, 成宗 16年 9月 甲子(11冊, p.53), 式干 納稅鹽八石 私干 四石. 70) 磻溪 柳馨遠에 의하면 17세기 후반 전라도 扶安 茂長의 염세는 盆當 8석이었고( 磻溪隨錄 卷1, 田制 上, 肅宗 22년, 1696) 충청도 泰安 瑞山의 염세 역시 분당 8석이었다( 度支志 外篇 卷8, 版籍司 財用部, 漁鹽 事實). 71) 이 중 靈光郡에는 鹽干이 1,129명, 貢鹽이 1,290석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여타 군현의 경우와 이 시기 貢 稅鹽의 액수를 고려하면 염간의 수 1,129명은 129명의 誤記인 듯하다. 본문의 염간수는 이 校正한 수치에 의거한 것이다. 72) 高麗史 卷79, 志33, 食貨2, 鹽法, 忠宣王 元年 2月(中冊, p.741). 이때에 파악된 전국의 鹽盆 鹽戶數를 各道別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楊廣道 慶尙道 全羅道 平壤道 江陵道 西海道 計 鹽 盆 126 174 126 98 43 49 616 鹽 戶 231 195 220 122 75 49 892 73) 世宗實錄地理志 전라도조에 염분이 파악된 군현은 靈光郡과 茂長縣 뿐이다. 그러나 이 두 군현 소재 염분만으로도 그 수가 143좌여서, 충선왕 원년의 전라도 전체 염분수 126좌를 초 과하고 있다. 74) 權寧國, 14세기 榷鹽制의 成立과 運用, p.22.

- 84 - 國史館論叢 第76輯 稅鹽으로 거두었던 관염의 총액은 7,000여 석에 이르렀다. 특히 世宗實錄地理志 의 공염액이 애초 20여 석 이상이었던 공염이 10석으로 인하된 이후의 통계임을 고려하면, 이 이전까지 국가에서 공염을 통해 장악할 수 있었던 관염의 양은 그보다 훨씬 많은 액 수였다고 추정된다. 한편 조선전기 국가가 官鹽으로 확보하던 두번째 형태의 염은 私干들이 납부하던 私鹽 稅였다. 국초 鹽法改革의 일환으로 사염이 허용된 후, 제염업에 종사하던 사염인, 사간들 은 鹽稅를 납입하고 있었다. 이들 사간은 여타의 신역을 가진 채 염업에 종사하던 자들이 었으므로,75) 그들의 세염은 공염간의 공염에 비해 그 액수가 적었다. 이들 사간의 세염 액은 세종 27년(1445)과 성종 16년(1485)의 자료에 모두 4석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 아,76) 국초 이래 연 4석이었던 듯하다. 당시 사간들의 私鹽盆이 전체 염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그들의 稅鹽總額 등에 대 해서는 자료의 미비로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세종 6년(1424)에 간행된 慶尙道地理 志 소재의 염분 기사를 통해 15세기 초반 사염분이 차지했던 비중의 대략은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때 조사된 경상도 소재의 염분 1,302좌 중 사염분은 총 336좌로 전체 염분의 25.8%에 해당하였다. 나머지의 대다수는 貢鹽盆이었고, 이 외 약간의 軍須 鹽盆이 있었다.77) 세종초 1개도의 조사라는 점과 사염분의 漏落 가능성이 매우 클 것 임을 유념하면 이를 전국적인 수치로 연역할 수는 없겠지만, 국초 사염분이 전체 염분 에서 점하고 있던 비중의 대략은 추정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후 사염의 생산과 교역이 확대되는 데 따라 그 비중이 올라갔을 가능성 또한 충분히 상정할 수 있겠다.78) 나아 가 태종 14년(1414)에 벌써 私鹽稅 其數不爲不多 하였던 사정을 고려하면,79) 이러한 사염분의 확대 추세와 함께 전체 관염에서 사염세가 차지하는 비중 역시 증대하여 갔을 것이다. 국가가 장악하는 관염의 세번째 형태는 船軍(水軍)이 생산하는 염이었다.80) 애초 赴防 75) 註 37)과 같음. 76) 註 44), 69)와 같음. 77) 劉承源, 朝鮮初期의 鹽干, pp.42 43. 貢鹽盆 私鹽盆 軍須鹽盆 計 坐 數 906 336 60 1,302 百分率(%) 69.6 25.8 4.6 100 78) 15세기 전반을 경과하면서 진행되는 私鹽의 확대 경향에 대해서는 이하 本稿 Ⅴ장 私鹽의 生産과 交易擴大 에서 詳述. 79) 註 38)과 같음. 80) 선초 水軍煮鹽의 형태와 그 추이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 참조. 李載龒, 朝鮮前期의 水軍 ( 韓國史硏究 5, 1970). 劉承源, 朝鮮初期의 鹽干, pp.49 52.

朝鮮前期 鹽의 生産과 交易 - 85 - 中인 수군의 糧餉에 충당할 목적으로 시작된 水軍煮鹽은 이후 제도로서 置廢를 거듭하 다 결국은 水軍 固有의 役의 하나로 續六典 에 규정된다.81) 貿穀을 통한 軍糧補充이 그 목적이었다. 그런데 이후 세종대를 거치면서 수군 자염은 補軍糧의 목적과 아울러 救荒을 위한 燔鹽이 강조되었고,82) 그 내용이 經國大典 戶典 備荒條에 규정되기에 이 르렀다.83) 水軍煮鹽은 그 자체가 수군 역의 일환으로 강제되는 것이기에 鹽釜를 스스로 제조하는 등 수군에 있어 큰 苦役이었다.84) 세조 2년(1456)에는 충청 전라 경상도 도관찰사가 이들 수군의 屯田耕作, 煮鹽 동원으로 인해 防禦에 지장이 있다고 보고할 정도였다.85) 더욱이 당시 수군의 자염역은 수군 1인당 매월 鹽 2石을 수납하는 형태로 발전하고 있었 다.86) 이른바 수군의 月課鹽 이었다.87) 공염간의 공염 수납과 형태상 동일한 방식이었 고, 그 양 또한 적지 않은 액수였다. 성종 5년(1474)에는 수군이 土木之役과 煮鹽役으로 인해 날로 流亡四散 한다는 지경이었다.88) 그러나 국가의 입장에서 수군을 이용한 煮鹽은 손쉬운 官鹽確保의 방안이었다. 조선 국가는 이미 선초에 煮鹽水軍을 따로 배정하였고,89) 그 이후 지방에 따라 그 정원을 증 액시키기까지 하였다.90) 16세기 초반 중종 5년(1510)에 이르러 그 폐단이 지적되면 서 각포의 煮鹽軍을 勿定하자는 건의가 제기되기도 하였지만,91) 그 후에도 사정은 여전 81) 世宗實錄 卷86, 世宗 21年 7月 丙寅(4冊, p.227), 續典云 各浦船軍 當無事時 燔鹽營田海 産採取等事 隨宜擧行 若國家無事 則軍糧補乏 實爲急務 不可廢也. 82) 世宗實錄 卷74, 世宗 18年 7月 己亥(4冊, p.21) 및 卷117, 世宗 29年 9月 壬子(5冊, p.38). 成宗實錄 卷20, 成宗 3年 7月 甲子(8冊, p.676) 및 卷180, 成宗 16年 6月 壬辰(11冊, p.26). 83) 經國大典 戶典, 備荒, 諸鎭 令當番水軍 煮鹽採海菜 具數報觀察使 觀察使 每節季啓聞. 84) 文宗實錄 卷4, 文宗 卽位年 10月 庚辰(6冊, p.299). 成宗實錄 卷76, 成宗 8年 2月 乙未(9冊, p.423) 및 卷106, 成宗 10年 7月 丙寅(10冊, p.33). 85) 世祖實錄 卷4, 世祖 2年 7月 壬午(7冊, p.143). 86) 世宗實錄 卷43, 世宗 11年 正月 己未(3冊, p.161). 世祖實錄 卷5, 世祖 2年 11月 壬午(7冊, p.157). 成宗實錄 卷232, 成宗 20年 9月 丙子(11冊, pp.518 519). 87) 大典續錄 戶典, 支供. 成宗實錄 卷48, 成宗 5年 10月 辛丑(9冊, p.157). 88) 成宗實錄 卷44, 成宗 5年 閏6月 丁酉(9冊, p.118). 89) 世宗實錄 卷43, 世宗 11年 正月 己未(3冊, p.161), 刑曹啓 乃而浦千戶曺顔仲 濫增法外鹽 軍九人 每月收鹽人二石. 각포의 水軍 지휘관들이 私利를 위해 鹽軍을 增額한 사례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수군 중 일부 를 煮鹽役에 차역시켜 鹽軍 으로 삼는 제도는 이미 세종 11년(1429) 이전에 시행된 듯하다. 90) 成宗實錄 卷180, 成宗 16年 6月 壬辰(11冊, p.26), 京畿視察使魚世謙 來啓救荒節目 其 三曰 救荒鹽醬爲最 煮鹽水軍 只四十八名而已 甚不足 請依辛丑年例 准給百名 傳曰 依所啓. 91) 中宗實錄 卷12, 中宗 5年 10月 壬子(14冊, p.473), 司勇金世瑚上疏凡十八條 其一 請勿 定各浦煮鹽軍.

- 86 - 國史館論叢 第76輯 하였다.92) 아울러 당시 수군의 代立이 일반화하는 추세 속에서,93) 煮鹽分(月課鹽)을 穀 布로 貿納시키는 방안이 시행되기도 하였지만 이 또한 族徵 隣徵으로 연결되어 폐단이 적지 않았다.94) 이후 月課鹽 중 2分을 本色으로 나머지 8分을 貿穀하여 所居의 官에 납 부하게 조처하였지만, 이 역시 海邊과 山郡의 鹽價 차이로 인해 산군에 거주하는 수군에 게는 2배의 부담이 되고 있었다.95) 해변의 염가는 鹽 1斗에 租 1斗였지만, 鹽貴穀賤 한 山郡에서는 염 1두가 조 2두의 가격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문제는 중종 12년(1517)에 들어 해변과 산군을 물론하고 수군의 납부액 산정기준을 염 1斗當 조 1斗로 규정하여 恒 式을 삼음으로써 해결되었지만,96) 이로써 水軍의 煮鹽役은 또 하나의 租稅가 되고 말았 다. 이른바 鹽租 는 바로 이를 지칭함이었다.97) 국가가 장악하는 官鹽에는 또한 官이 직접 物力을 투자하여 설치한 官盆에서 생산하는 염이 있었다. 이 시기 지방의 各官은 救荒鹽의 확보나 貿穀을 통한 賑恤을 위해 자염이 가능한 지역에 직접 염분을 설치하여 염을 생산하기도 하였다.98) 특히 국가적인 차원에 서 전국 沿海에 官盆을 설치하고 여기에서 생산한 염을 이용하여 義倉이나 軍資 등의 국 가재정을 보충하려는 정책적인 시도가 세종대에 논의되고, 同 27년(1445)에 일시 시행된 바 있다.99) 이른바 義鹽法 이 그것으로, 연해의 군현에 官盆을 설치하고 그 生産鹽을 무 곡해서 義倉에 돌리자는 방안이었다. 시험 초기의 상당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의염 법은 시행 이듬해인 세종 28년(1446) 5월에 중단되고 만다. 애초의 의도와 달리 義鹽敬 差官들이 私鹽盆을 탈취하고 이를 榷鹽制의 부활로 여긴 사염간들이 염 생산을 포기한 92) 中宗實錄 卷31, 中宗 12年 12月 庚戌(15冊, p.365). 中宗實錄 卷48, 中宗 18年 6月 乙丑(16冊, pp.239 240). 93) 李載龒, 朝鮮前期의 水軍. 94) 中宗實錄 卷31, 中宗 12年 12月 庚戌(15冊, p.365), 諫院啓曰 沿海各官各浦煮鹽軍 貿納 穀布 積年未納者 分徵隣族 民多逃散. 95) 中宗實錄 卷31, 中宗 12年 12月 己未(15冊, p.370), 憲府啓曰 各浦水軍救荒鹽 鎭將不徵 本色 濫徵布物 戶曹爲公事 十分爲率 二分以本色納各浦 八分以貿穀納諸所居官 海邊各官則鹽賤 穀貴 故鹽一斗直租一斗 山郡則鹽貴穀賤 故鹽一斗直租二斗 然則日課一日一斗 一朔幾至二石 山 郡則直租四石 水軍至爲怨苦. 96) 中宗實錄 卷31, 中宗 12年 12月 辛酉(15冊, p.370), 戶曹啓曰 鹽租事 前年慶尙道觀察使 孫仲暾啓本 以爲年歲凶荒 請限明年九月 勿論山郡 皆令鹽一斗租一斗相准納官云 該曹據啓本施行 而今者 臺諫所啓至當 不必限今年九月而已 永爲恒式可也 傳曰可. 97) 위와 같음. 各司受敎 戶曹受敎, 丁巳(宣祖 10, 1577) 5月 15日 戶曹啓目. 98) 世宗實錄 卷74, 世宗 18年 7月 己亥(4冊, p.21). 99) 세종대의 鹽法論議에 대해서는 이미 다음 논문에서 자세히 검토된 바 있으므로, 그 자세한 始末에 대해서는 이를 참조. 劉承源, 朝鮮初期의 鹽干, pp.37 42. 金勳埴, 朝鮮初期 義倉制度硏究 (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3) pp.139 148.

朝鮮前期 鹽의 生産과 交易 - 87 - 데 따른 市中 鹽價의 상승 때문이었다.100) 세종대 義鹽法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도 조선 정부는 지방 各官 차원에서 관분을 설치하여 자염하는 방안을 장려하고 있었다. 鹽利가 利權在上 차원에서 결코 放棄할 수 없는 財源이었기 때문이다. 世祖 11년(1465)의 다음 자료를 보자. 戶曹啓 經國大典 凡諸鎭諸浦 可捕魚處結箭 有柴薪處置鹽盆 其魚鹽之數 移文本曹 第其多少 以行賞罰.101) 捕魚處와 柴木의 조달이 가능한 지역에 魚箭과 官盆을 설치하여 그 소득의 다소에 따 라 수령에 상벌을 내리는 규정이 세조대에 편찬된 經國大典 에 실려 있었던 것이다.102) 당시 定平府使와 瓮津縣令은 이러한 官盆煮鹽을 통해 각기 稻稷 700석과 816석을 마련 하여 補軍資 함으로써 施賞받고 있다.103) 세조 11년(1465) 경상도에 令을 내려 강원도의 구황에 필요한 鐵盆 100部를 鑄作輸送 토록 하였던 것도, 바로 강원도의 官盆煮鹽을 위 한 조처였다.104) 이렇게 주조된 철분 100부는 이후 강원도에서 염호에게 분급되었고, 이 들 염호로부터 每月 鹽 1斛 씩을 수납한 강원도는 그 염을 빈민에게 나누어주거나 換穀 하여 備荒用으로 사용하였다.105) 한편 沿海面을 갖지 못한 內陸 郡縣에서는 인근 沿海 군현의 일부를 割屬시켜 염분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세종 15년(1433)에 咸吉道 吉州 鏡城 兩邑의 魚鹽所出之地를 寧北 鎭에 推移 割屬한 바 있으며,106) 세조 12년(1466)에도 평안도 順安縣人이 인근 永柔縣의 寧遠 柔遠 通解 延德 등 4읍을 魚鹽利 확보를 목적으로 本縣에 할속시켜 줄 것을 요 청하자 그 중 延德을 순안현에 이속시킨 바 있다.107) 여기에는 물론 私鹽盆도 설치되었 겠지만, 이를 정부 차원에서 割屬시킨 사정을 고려하면 官盆 또한 설치되어 所屬縣에 관 염을 공급하였을 것이다. 成宗 5년(1474)에도 永安道 利城縣에 수십년 전에 설치된 甲山 府의 염분이 있었음이 확인된다.108) 私鹽 생산이 원활하지 못한 북부지방의 변방 郡縣에서는 官盆에 鹽戶 외에도 軍士들을 100) 위와 같음. 101) 世祖實錄 卷35, 世祖 11年 3月 庚申(7冊, p.676). 102) 성종 16년(1485)에 편찬된 經國大典 에는 이 내용이 빠져 있다. 지방에서 이 조처가 제대 로 遵行되지 않음으로 해서 삭제된 듯하다. 103) 註 101)과 같음. 104) 世祖實錄 卷37, 世祖 11年 12月 乙酉(7冊, p.715). 105) 世祖實錄 卷41, 世祖 13年 2月 癸丑(8冊, p.61). 106) 世宗實錄 卷62, 世宗 15年 12月 辛酉(3冊, p.531). 107) 世祖實錄 卷38, 世祖 12年 正月 乙巳(8冊, p.1). 108) 成宗實錄 卷40, 成宗 5年 3月 丙戌(9冊, p.93).

- 88 - 國史館論叢 第76輯 동원하여 煮鹽함이 일반이었다. 水軍을 동원하여 자염하는 방식과 동일한 원리 형태였 다. 때문에 이들 軍戶의 煮鹽役에는 水軍煮鹽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소정의 納付額이 설정되었고, 燕山君 9년(1503)에는 그로 인한 폐단이 문제되고 있다.109) 督徵에 따른 군 호의 逃散 문제였고, 사정은 이후 宣祖代에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110) 결국 이상에서 살펴 본 官鹽의 유형 중에서 水軍이나 軍士를 차역하여 煮鹽하는 염분 이나 官에서 物力을 투자한 염분은 그 所有權이 해당 官에 있는 형태였다. 이른바 諸道 官鹽盆 이었고,111) 여기에서 생산되는 염은 貿穀布 를 통해 군자나 진휼, 또는 여타의 용 도로 이용되었다. 예컨대 慶尙道地理志 에 보이는 경상도 소재 총 60坐의 軍須鹽盆 은 그 설치 목적이 軍須의 조달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며, 염 생산을 水軍이 담당하 였으므로 소속 浦의 이름을 明記하였던 것이다. 이에 비해 貢鹽干과 私鹽干의 염분은 각 기 염 생산자들이 물력을 自備하여 설치한 것으로 당연히 그 소유권이 그들에게 있는 私 鹽盆이었다. 염 생산을 身役으로 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그들의 부담을 貢鹽 이나 稅鹽 으 로 분류하고 또 그 세액에 차이가 있기는 하였지만, 鹽盆 所有를 전제로 한 收稅라는 점 에서는 공통이었다. 공염간의 공염 을 염세 로도 지칭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112) 이처럼 貢鹽을 포함한 鹽稅나 또는 官盆煮鹽을 통해 확보된 염, 곧 官鹽은 다양한 所 用處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전기 정부는 이들 관염을 크게 보아 중앙에서 직접 수세하여 國用에 충당하는 부분과, 해당 소속 군현에서 확보하여 다양한 용도에 이바지시키는 형 태로 나누어 運用함으로써 중앙과 지방의 재정을 보충하였다. 經國大典 에는 염분에 대 한 分等成籍 규정을 명시한 후에 그 鹽稅의 運用에 대해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설정하고 있다. 鹽盆遙隔諸邑 置鹽倉 輸稅鹽換穀布 補軍資 京畿忠淸黃海道稅鹽 則司宰監上納外 分輸軍資 監及鹽倉 諸道救荒鹽 除救荒所需外 並貿穀 每年貿穀補軍資之數 觀察使 具錄啓聞.113) 염분이 멀리 떨어져 있는 諸邑에 鹽倉을 두고 稅鹽을 실어 와 穀布로 바꿔 軍資에 보충시키는 규정이다. 그런데 당시 염창은 비단 內陸 郡縣에만 설치된 것이 아니었다. 염창의 설치가 고려 이래의 제도를 이어 받은 것인 만큼114) 沿海의 군현에 우선 설치되 109) 燕山君日記 卷48, 燕山君 9年 2月 庚戌(13冊, p.543), 刑曹正郞朴永文曰 五鎭鹽盆 以軍 戶循環煮取 定數輸納 每有不充其數 守令嚴加督徵 因此牛馬盡斃 家産蕩然 逃散者相繼不已. 110) 宣祖實錄 卷2, 宣祖 元年 6月 壬午(21冊, p.195). 111) 世宗實錄 卷105, 世宗 26年 7月 辛酉(4冊, p.569). 112) 世宗實錄 卷36, 世宗 9年 4月 壬午(3冊, p.69). 113) 經國大典 戶典, 魚鹽. 114) 姜順吉, 權寧國씨의 앞의 論文.

朝鮮前期 鹽의 生産과 交易 - 89 - 었고,115) 經國大典 의 위 규정은 고려와 달리 내륙 군현에도 염창을 설치하였음을 보 여 주는 내용이다.116) 그런데 經國大典 염세 규정에서 파악할 수 있는 또 다른 중요한 염세운용의 원칙은 京畿 忠淸 黃海道의 세염 만을 現物의 형태로 중앙 정부에서 수세 이용한다는 점이다. 당시 전국 소재의 염분을 모두 국가가 把握하여 成籍하고는 있었지만, 그 중 호조에서 현 물 형태로 稅鹽을 직접 수납하는 지역은 도성에서 근거리에 있는 경기 충청 황해 3道 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당시 이들 3도의 現物 稅鹽은 우선 司宰監에 상납되어 왕실의 所 用을 비롯한 國用에 충당되었고, 나머지가 도성의 軍資監과 현지 3도 군현의 염창에 나 누어 수송되었다. 이에 비해 이들 3도의 稅鹽 중 현지의 염창에 留置되는 세염을 비롯하여 여타 지방의 세염은 중앙에 그대로 상납되지 않았다. 위 經國大典 의 규정대로 현지에서 換穀布 되어 軍資를 비롯한 國用에 보충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염세 운용의 방침은 세종 원년(1419) 大司憲 申商의 鹽干 貢鹽에 대한 다음 啓文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慶尙全羅兩道及忠淸道下面諸處所煮鹽 本不爲國用 而於所在 換布貨輸於濟用監 但以京畿黃 海道及忠淸道上面所煮鹽爲國用.117)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 上面 鹽干의 所煮鹽, 곧 貢鹽이 현물의 형태로 국용에 사용되는 데 비해, 나머지 지방의 공염은 현지에서 貿布하여 그 布貨를 濟用監으로 수송하도록 되 어 있었다.118) 당대 기록에 나타나는 鹽稅布,119) 鹽稅之布,120) 鹽布 121)는 바로 이와 같이 私鹽盆에서 거둔 세염을 지방 각관이 貿布하여 중앙의 제용감이나 여타 그 수세를 分屬받은 官署에 상납하는 稅布였다. 世宗實錄地理志 全羅道 羅州牧條에 의하면, 나주의 115) 이 시기 연해 군현의 鹽倉은 世宗實錄地理志 慶尙道, 全羅道條에서 총 12개의 所在가 확인 된다. 조사된 염창 12개가 모두 연해에 설치된 것을 보면, 鹽場官의 임무와 결부하여 대부분 의 염창이 연해에 소재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116) 內陸郡縣의 鹽倉은 세조 11년(1465)에 경기도 長湍과 積城에 소재한 염창이 확인된다( 世祖 實錄 卷35, 世祖 11年 2月 乙酉 ; 7冊, p.672). 117) 世宗實錄 卷5, 世宗 元年 8月 甲戌(2冊, p.329). 118) 실제 이 3도 이외 지방의 稅鹽이 貿布되어 제용감에 수송되었음은 세종 8년(1426) 4월 咸吉 道 鹽稅의 상납 사례에서 확인된다( 世宗實錄 卷32, 世宗 8年 4月 辛卯 ; 3冊, p.24). 119) 中宗實錄 卷25, 中宗 11年 7月 甲午(15冊, p.198) 卷65, 中宗 24年 4月 辛巳 壬午(17 冊, p.111) 中宗實錄 卷82, 中宗 31年 10月 癸未(17冊, p.683). 明宗實錄 卷7, 明宗 3年 正月 壬午(19冊, p.556). 宣祖實錄 卷7, 宣祖 6年 4月 丙子(21冊, p.262). 120) 中宗實錄 卷95, 中宗 36年 6月 丁巳(18冊, p.470). 121) 中宗實錄 卷59, 中宗 22年 7月 癸未(16冊, p.583).

- 90 - 國史館論叢 第76輯 貢鹽 2,590석은 羅州牧使의 관장 하에 면포로 바꾸어 국용에 보태게 규정되어 있고, 성종 23년(1492)에 간행된 大典續錄 戶典 收稅條에는 나주 외에도 靈光의 세염을 모두 貿布 하여 校書館에 납입시켜 印書의 비용에 충당하도록 조처하고 있다. 호조에서 파악 수세하던 사염분의 鹽稅나 鹽稅布는 그것이 국가재정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위와 같은 용도 외에도 필요에 따라 各驛의 供饋之需,122) 回換 納穀 官封에 대 한 代價,123) 私船賃運價,124) 또는 官貿穀 官貿銀의 支拂手段125) 등으로도 이용되었다. 당시 鹽稅 收稅上의 폐단이 논란되었음에도 불구하고,126) 鹽稅收取의 實質을 기하자는 논의가 제기되고 이를 위해 敬差官의 파견을 검토 시행하였던 것127) 역시, 사염분의 염 세를 국가재정의 일환으로 파악 운용하던 사정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이처럼 전국의 해안에 소재하던 염분 중에서 그 所有權이 생산자 개인에게 있던 私鹽 盆, 즉 공염간과 사염간의 염분은 호조가 파악하여 그 염세를 지역에 따라 現物이나 또는 穀布와 교환하여 중앙재정에 충당하거나 또는 군자로 이용하였다. 이른바 戶曹案付 의 鹽 盆이고 鹽稅였다.128) 그런데 해당 지방의 官에서 物力을 투자하여 설치한 염분, 즉 官盆 에서 생산한 관염은 이런 사염분의 세염과는 그 처리 방식을 달리하였던 듯하다. 우선 수 군이 생산한 관염은 애초 수군의 糧餉에 충당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지만, 세종대를 거치 면서 救荒으로서의 용도가 더욱 강조되었고, 經國大典 에 이르러서는 아예 水軍煮鹽이 備荒條에 규정되었다.129) 물론 이후에도 水軍煮鹽 官鹽은 여전히 救荒과 함께 軍資를 보 충하는 데에도 충당하고 있다.130) 당시 관찰사는 이들 水軍煮鹽 官鹽의 이용 결과를 매 節季마다 중앙에 보고하게끔 되어 있었다.131) 요컨대 수군이 자염하는 官鹽盆을 국가가 122) 世祖實錄 卷30, 世祖 9年 正月 戊午(7冊, p.564). 成宗實錄 卷261, 成宗 23年 正月 己卯(12冊, p.131). 123) 世宗實錄 卷73, 世宗 18年 閏6月 癸未(4冊, p.9). 中宗實錄 卷65, 中宗 24年 4月 辛巳, 壬午(17冊, p.111) 및 卷73, 中宗 28年 正月 辛亥 (17冊, p.388). 124) 中宗實錄 卷59, 中宗 22年 7月 癸未(16冊, p.583). 125) 中宗實錄 卷13, 中宗 6年 4月 甲辰(14冊, p.510) 및 卷95, 中宗 36年 6月 丁巳(18冊, p.470). 126) 明宗實錄 卷23, 明宗 12年 10月 庚子(20冊, p.446). 127) 世祖實錄 卷22, 世祖 6年 閏11月 辛亥(7冊, p.435). 成宗實錄 卷184, 成宗 16年 10月 甲辰(11冊, p.66). 中宗實錄 卷7, 中宗 4年 2月 甲戌(14冊, p.311). 冲齋集 卷4, 日記, 己巳年(中宗4, 1509) 2月( 韓國文集叢刊 19冊, p.390). 128) 世祖實錄 卷46, 世祖 14年 6月 丙午(8冊, p.194). 129) 註 81), 82), 83) 참조. 130) 成宗實錄 卷105, 成宗 10年 6月 癸巳(10冊, p.24) 卷286, 成宗 25年 正月 癸巳(12冊, p.459) 卷290, 成宗 25年 5月 癸卯(12冊, p.533). 131) 註 83)과 같음.

朝鮮前期 鹽의 生産과 交易 - 91 - 파악은 하고 있었지만, 여기에서 생산한 官鹽은 현물의 형태이든 아니면 貿易한 穀布이든 지 中央에 납부하지 않은 채 현지에서 救荒鹽이나 軍資에 보충하였던 것이다. 한편 여러 목적으로 沿海 各官에서 설치한 官盆의 所煮鹽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와 관 련해서는 16세기 후반 紹修書院의 有司를 대신해서 朴承任이 호조에 올렸던 上書 내용이 참고가 된다. 당시 賜額書院이었던 慶尙道 豊基 소재 소수서원에는 전임 관찰사 安玹이 이속시킨 인근 熊川의 魚基 3所와, 그가 監營의 官布를 내어 寧海 盈德 등에 설치한 官 鹽盆 3坐가 분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후임 감사들이 그 수납에 신경을 쓰지 않아 제때에 어물과 염이 공급되지 않자, 소수서원측은 그 배경 설명과 함께 다음과 같은 조처를 호조 에 건의하였다. 彼魚也鹽也 顧其檢督 秖係於監司 籍記不管於該曹 故當輸之官 無所畏憚 而使朝廷曠代之盛 學 遽至於此 私憂過計 竊以爲上項魚基鹽盆 並與其輸稅之額 錄在地官考績之案 歲察其輸否 登 之解由 檢以殿最 一依常供之例.132) 영해 영덕 소재 관분의 收稅에 대한 文籍이 호조에 있지 않고 그 관리 감독이 監司에 위임되어 있는 데 따른 문제이므로, 이들 관분을 다른 사염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地官 (戶曹)의 案에 올려 解由時에 확인함으로써 그 收稅에 實을 기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요구 였다. 당시 지방 각관에서 설치한 관분은 사염분과 달리 호조의 收稅案에 오르지 않은 채, 지방에서 독자로 관리 감독하면서 여기에서 얻은 관염을 구황염이나 혹은 여타의 지 방경비에 보충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조선전기 국가에서 官鹽으로 확보하는 염은, 염분의 소유권 귀속에 따라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뉘어 각기 중앙과 지방재정에 충당되고 있었다. 우선 戶曹의 稅案에 올 라 있는 사염분의 공 세염은 現物 또는 지방에서 貿布된 형태로 중앙에 상납되어 中央 財政에 귀속되거나 또는 貿穀을 통해 현지의 軍資에 보충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지방관 에서 설치한 관염분은 관찰사를 경유해 중앙의 감독을 받기는 하였지만, 여기에서 생산된 관염 자체는 地方財政으로 충당되어 救荒鹽이나 여타의 용도로 이용되고, 또는 水軍煮鹽 分을 중심으로 현지 軍資에 보충되었던 것이다. 염분의 所有 收稅處의 系統이 달랐고, 따라서 여기에서 확보되는 관염 또한 그 처분과 이용 방식이 달랐던 셈이다. 세조 14년 (1468) 6월에 八道觀察使에게 내린 지시는 이러한 官鹽運用의 원칙을 잘 보여주고 있다. 諭八道觀察使曰 於沿海州縣 戶曹案付外 守令私收魚鹽之稅者 具錄以聞.133) 132) 嘯皐文集 卷1, 書, 代紹修書院有司上戶曹書( 韓國文集叢刊, 36冊, p.291). 133) 世祖實錄 卷46, 世祖 14年 6月 丙午(8冊, p.194).

- 92 - 國史館論叢 第76輯 사염분에서 守令이 戶曹 案付의 鹽稅 외에 추가로 魚鹽之稅를 私收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이다. 중앙의 收稅資源인 鹽干을 보호하는 조처로서 수령의 지방재정 확보 노력으로 인해 중앙재정이 타격받지 않도록 하는 차원에서 취해졌던 것이다. 물론 관염의 귀속에 대한 이런 원칙은 경우에 따라 변동 조정되기도 하였다. 예컨대 해당 지역의 흉년으로 인해 중앙에 상납하는 鹽이나 鹽稅布를 留置시켜 救荒資源으로 이 용하는 사례가 여기에 해당한다.134) 그러나 이런 조처에도 불구하고 사염분의 稅鹽과 관 염분의 所煮鹽을 분리하여 운용하는 官鹽運用의 방침은 이후에도 여전히 원칙으로서 준 수되었다. 세조 11년(1456) 경기도 관찰사가 長湍과 積城의 鹽倉鹽 각 100석을 和賣가 이루어지지 않는 사정을 이유로 제읍의 救荒鹽으로 돌릴 것을 건의한 데 대해, 호조는 이 들 鹽이 이미 已輸於倉 錄會計 된 것임을 상기시키면서 民과의 화매를 통해 輕貨는 濟用 監으로 米穀은 소재읍의 군자에 보충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아울러 부족한 구황염은 본도 의 諸浦鹽, 곧 水軍 所煮鹽으로 충당하도록 하였다.135) 사염분으로부터 수세한 염창의 稅鹽과 水軍所煮鹽이 系統이 다르고, 또 그 運用處가 다른 사정에서 나오는 조처였다. Ⅳ. 官鹽의 流通方式과 抑賣 염분의 소속 여부에 따른 官鹽 歸屬處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현물로 국용에 충당하는 鹽과 각 지방의 救荒鹽을 제외하면, 조선전기 국가에서 장악하는 관염은 貿穀布 의 형태 로 民과의 교역을 통해 중앙과 지방재정에 충당되었다. 官鹽이자 한편 商品으로서 유통되 는 염이었다. 이 시기 都城에서 유통되는 관염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경기 충청 황해도의 사 염분에서 수세하여 도성에 現物 형태로 輸納하는 稅鹽 중에서 司宰監에 공급되는 國用分 을 제외한 鹽이었다.136) 도성내 官鹽 流通政策의 沿革에 대해서는 세종 28년(1446) 領議 政 黃喜가 그 始末을 언급한 바 있어 참고된다.137) 그에 따르면 애초 조선 정부는 이들 134) 世宗實錄 卷74, 世宗 18年 8月 甲戌(4冊, p.26), 江原道監司啓曰 今當年歉 飢民救荒 不 可不慮 乞以國庫鹽八百石 換穀賑濟 從之. 世祖實錄 卷8, 世祖 3年 7月 辛卯(7冊, p.213), 傳旨戶曹曰 下三道貢鹽勿貿布 以備明年救荒. 135) 世祖實錄 卷35, 世祖 11年 2月 乙酉(7冊, p.672). 136) 註 113)과 같음. 137) 世宗實錄 卷111, 世宗 28年 2月 丙午(4冊, p.654), 前朝設義鹽倉 置權務判官 屬於版圖 每春秋 先自鰥寡孤獨 納麤布一匹受鹽二十斗 謂之頒鹽 本朝因而行之 逮罷 義鹽倉移屬司宰監 自 一品至權務平民鰥寡孤獨 或納布或納楮貨銅錢之受鹽十五斗 後只給鰥寡孤獨 不給各品 後變而屬於 軍鹽監 納米一斗受鹽五斗 此義鹽沿革之本末 而義鹽之遺意則尙存.

朝鮮前期 鹽의 生産과 交易 - 93 - 관염을 고려의 頒鹽 制에 의거, 義鹽倉의 주관 하에 鰥寡孤獨으로 하여금 매 春秋에 麤布 1필을 납부하게 하고 鹽 20斗씩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유통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이후 義鹽倉이 혁파되고 그 업무가 司宰監으로 이속되면서 1品의 관리에서부터 平民 鰥寡孤 獨에 이르기까지 도성민들에게 布 楮貨 銅錢 등을 받고 鹽 15斗씩을 지급하였다가, 후 에 다시 환과고독에게만 지급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세종 26년(1444) 2 월에 이르러서는 도성내의 관염 유통을 軍資監에 전담시키고, 그 易價米로 별도의 義倉을 설치하여 還上 賑濟에 충당하게 하였다.138) 당시 도성에서 정부가 유통시키던 官鹽을 義鹽 이라 부른 것은 관염을 市價에 의하지 않고 窮民 구제를 목적으로 헐값에 판매하기 때문이었다. 黃喜에 의하면 도성의 義鹽價는 국초에 麤布 1匹當 鹽 20斗였다가 이후 15두로 인상되었고, 군자감이 의염 업무를 맡은 세종 26년(1444)에는 米 1斗當 鹽 5斗로 和賣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종 28년(1446) 2월에 이르러 호조와 의정부의 건의에 따라 鹽戶의 艱苦燔煮 에 비해 그 가격이 지나치게 헐하 다는 이유로 미 1두당 염 3두로 인상하였다. 당시 도성 市中의 鹽價는 미 1두에 염 2두 였다. 領相 黃喜는 이 결정을 두고 義鹽變爲利鹽 이라 하여 和賣價 인상에 반대하였다.139) 황희의 반대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후 도성내에서 유통되는 관염, 즉 의염의 和賣價는 市價보다 1두 많은 미 1두당 염 3두로 인상된 듯하다. 이와 같이 도 성에서 유통되는 官鹽은 義鹽으로서 優價和賣 의 방침에 따라 환과고독을 비롯한 도성민의 食鹽으로 공급함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도성내 의염 유통의 현실은 이런 원칙과는 달리 전개됨이 일반이었다. 그 헐한 가격 때문에 누구나 이를 다투어 구입하려 하였으나 담당 관리들의 농간으로 和賣時 염 지급이 며칠씩 지연되기 일쑤였고, 심지어는 10여 일 이상 왕복한 후에도 구입을 못하는 경우마저 있었다.140) 우선 공급 대상이 아닌 時散各品의 관인들이 이를 先買하는 현상도 도성민의 의염 구입을 어렵게 하였다.141) 세종 27년 (1445) 集賢殿 直提學 李季甸은 당시 논의되던 義鹽法을 반대하는 논거의 하나로 이를 들고 있다. 도성의 의염이 비록 市價에 비해 1 2分 정도 싼 것은 사실이나, 이러한 폐 단을 고려하면 市廛에 가서 즉시 구입하는 편이 더 낫다는 견해였다.142) 義鹽으로서 도 138) 군자감이 도성내 관염 유통의 업무를 담임하는 사정은 세종 26년(1444) 2월의 다음 기록에서 확인된다. 世宗實錄 卷103, 世宗 26年 2月 甲辰(4冊, p.544), 戶曹啓 請自今義鹽 令軍資 監收管 優價易米 別立義倉 乃於鰥寡孤獨貧乏之人 隨歲豊歉 或給還上 或給賑濟 以施實惠 從之. 註 137)의 軍鹽監은 곧 官鹽 판매 업무를 전제로 붙여진 軍資監의 異稱일 것이다. 139) 世宗實錄 卷111, 世宗 28年 2月 丙午(4冊, p.654). 140) 世宗實錄 卷109, 世宗 27年 8月 戊辰(4冊, p.635). 141) 世宗實錄 卷103, 世宗 26年 2月 甲辰(4冊, p.544), 戶曹啓 義鹽之設 專爲鰥寡孤獨之人 近來先賣於時散各品 惠不及窮民 有違立法之意. 142) 註 140)과 같음.

- 94 - 國史館論叢 第76輯 성의 官鹽流通이 갖던 名과 實의 차이였다. 다음은 地方에서 이루어지던 官鹽의 유통 사정을 살펴 보자. 국초 정부는 지방민으로 하여금 米布의 精粗 多寡에 관계없이 時價에 의거하여 직접 관염을 구입하게 하였 다.143) 한편 태종 9년(1409) 이후 교환 수단을 米 만으로 한정하였다가 폐단이 일자, 同 11년(1411) 11월에 다시 米 布 楮貨 등으로 교역할 수 있게 조처하였다.144) 이러한 규정은 후에 稅鹽換穀布 라는 내용으로 經國大典 에 수록되었다. 그런데 조선전기 지방민의 鹽 購入 사정은 지역에 따라 그 형편이 매우 상이하였다. 염 생산 지역인 沿海의 경우 민이 직접 鹽倉이나 鹽戶 또는 鹽 商人들에게서 구입할 수 있었지만, 연해로부터 멀리 떨어진 內陸郡縣의 경우에는 民生에 절실한 식품인 염을 구입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시기 鹽 需給에 큰 곤란을 겪고 있던 대표적인 지역은 兩界地方의 邊方 郡縣, 태백산맥으로 東海와의 교통이 어려웠던 嶺西地方과 忠淸道 내륙 지방, 그리고 嶺南 內陸의 군현들이었다. 때문에 救荒에 대처하고 民生을 안정시키는 차 원에서 이들 지역에 대한 官鹽 공급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수시로 논의되었다. 양계지방, 그 중 특히 邊方에 소재한 군현민들은 食鹽問題로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함 경도의 경우 食鹽이 最貴하여 海水를 직접 마시거나 海菜를 태워 먹는다 는 지경이었다.145) 내륙에 소재한 지방의 사정은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성종 2년(1471) 이래 5鎭의 군현에 구황을 위한 官鹽盆을 설치하여 煮鹽하였던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146) 평안도의 변 방에 소재한 군현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江界를 비롯한 鴨綠江邊 諸邑의 민들은 식염 구입을 위해 農牛 戰馬에 米布를 싣고 연해의 鹽産地를 왕래하다가 牛馬의 태반이 疲斃 한다는 형편이었다.147) 따라서 당시 정부는 식염 공급이 원활하지 못한 변방의 군현민들 에게 鹽價를 本邑에 납입케 하여 軍資에 보충하고, 대신 연해의 관염을 수송하여 분급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었다. 세조 10년(1464)에는 安州 등 연해에서 생산한 관염을 晴川江을 이용하여 東路로는 寧邊의 水上과, 西路로는 雲山의 靑山山城에 설치한 鹽倉에 수송하여, 각각 江界 渭原 理山과 昌城 璧潼 朔州의 郡縣民에게 공급하는 방안이 채택되었다.148) 또 평안도 연해의 관염을 義州에 모아 압록강을 이용하여 공급하는 방안도 모색되었다.149) 변방의 軍資와 食鹽問題를 동시에 해결하려는 목적에서 추진하는 관염 공급정책이었다. 143) 註 13)과 같음. 144) 太宗實錄 卷22, 太宗 11年 11月 辛巳(1冊, p.611). 145) 中宗實錄 卷18, 中宗 8年 8月 癸卯(14冊, p.670). 146) 成宗實錄 卷57, 成宗 6年 7月 辛酉(9冊, p.242). 147) 世祖實錄 卷2, 世祖 元年 11月 辛巳(7冊, p.95). 148) 世祖實錄 卷34, 世祖 10年 8月 壬午(7冊, p.643). 149) 世祖實錄 卷26, 世祖 7年 11月 癸亥(7冊, p.499).

朝鮮前期 鹽의 生産과 交易 - 95 - 연해로부터 멀리 떨어진 영서지방과 충청도 내륙지방 역시 관염 공급의 필요성이 절실 하였다. 정부는 이들 지역에 서해에서 생산한 관염을 漢江을 이용하여 공급하거나, 영동 지방의 관염을 공급하였다. 세조 8년(1462)에는 경기도 會計鹽 800석을 站船으로 영서지 방에 轉輸하고, 강원도 회계염 200석을 麟蹄 楊口 洪川 春川 原州 旌善 등지로 수 송하였다.150) 또 同 11년(1465)에는 경기 貢鹽 중 군자감에 수납된 관염을 回去하는 漕 轉船을 이용해 원주의 興原倉과 충주의 慶原倉에 수송하여 이들 지역에서 미포와 교환하 게 하였다.151) 경상도의 내륙 군현에 대한 관염 공급은 洛東江을 이용하여 이루어졌다. 이미 태종대 에 그 사례가 보이는 낙동강을 이용한 관염 공급152)은 이후 더욱 활성화한 듯하다. 성종 16년(1485)에는 경상도 관염을 善山 尙州 등지에서 轉賣할 경우 그 가격이 倍簁에 이른 다고 언급되고 있다.153) 특히 경상도 지방에서는 이미 세종대에 本錢鹽을 조성하여 낙동 강 江岸에 분포한 各官에서 和賣한 사례가 보이고 있다.154) 조선후기에 일반화한 本錢鹽 은, 지방의 營門이나 軍門에서 군량과 지방재정 확보를 목적으로 미리 염호에게 穀物이나 錢을 지급한 후 나중에 생산한 염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일종의 先買制였다.155) 관염 외 에도 이러한 본전염을 조성하여 되팖으로써도 지방재정을 辦出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이 지방에서 和賣되는 官鹽 역시 義鹽 이라 부르는 데서 알 수 있듯 이,156) 優價和賣 가 그 원칙이었다.157) 그러나 지방 각관에서 이루어지던 관염의 유통과 정에서 이 원칙이 준수되기는 힘들었다. 관염의 화매가 국용과 더불어 군자나 지방재정의 보충에 그 목적이 있었던 만큼, 지방 군현을 비롯한 和賣主體가 이를 손쉬운 財政辦出 방 도로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세종대 義鹽法 논의에서 그 반대자들이 내세운 가장 중요한 논거의 하나가 바로 官의 화매시에 나타나는 抑賣, 給價遲延, 抑配 등의 폐단이었고,158) 이러한 우려는 곧 현실로 150) 世祖實錄 卷27, 世祖 8年 2月 乙未(7冊, p.523). 151) 世祖實錄 卷35, 世祖 11年 4月 丁丑(7冊, p.680). 152) 太宗實錄 卷14, 太宗 7年 7月 戊寅(1冊, p.407). 153) 成宗實錄 卷184, 成宗 16年 10月 乙酉(11冊, p.60). 154) 世宗實錄 卷109, 世宗 27年 8月 戊辰(4冊, p.635), 慶尙道本錢鹽 船輸洛東江 分布各官和賣. 155) 英祖 12년(1736) 황해도 本錢鹽 조성의 한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黃海道長連縣龍洞宮 折受所在鹽盆及漁箭與犯標境界開錄成冊 ( 內需司庄土文積 (奎19307) 14冊), 自監營管餉庫 每年 給本錢 貿鹽收捧. 156) 太宗實錄 卷28, 太宗 14年 9月 戊寅(2冊, p.35). 157) 世宗實錄 卷88, 世宗 22年 3月 乙丑(4冊, p.277) 및 卷105, 世宗 26年 7月 辛酉(4冊, p.569). 成宗實錄 卷10, 成宗 2年 4月 丁卯(8冊, p.567). 158) 世宗實錄 卷109, 世宗 27年 7月 乙未(4冊, p.629) 世宗 27年 8月 戊辰(4冊, pp.634 636) 世宗 27年 9月 乙亥(4冊, p.637).

- 96 - 國史館論叢 第76輯 나타났다. 즉 同 28년(1446) 의염법 폐지의 배경이 되었던 民間 鹽價 상승의 원인의 하 나가 바로 관염 억매를 위한 民間 私賣의 금지에 있었던 것이다.159) 고려말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되었던 榷鹽의 폐단이 의염법의 실시와 함께 재발한 것이었다. 국초 이래 관염 和賣에서 으레 나타났던 이러한 抑賣 문제160)는 의염법의 혁파 이후에 도 마찬가지였다. 세조 2년(1456) 국왕은 8도 관찰사에게 曉民諭書 를 내리면서, 反同 이라는 명칭으로 이루어지던 수령의 魚鹽抑賣 행위를 금지시키고 있다.161) 그럼에도 불 구하고 同 11년(1465) 경기도 長湍과 積城 염창의 관염이 사가는 사람이 없어 日就消融 한 것도 그 和賣價가 높았기 때문이며,162) 관염이 高價로 인해 팔리지 않고 久積消融 한 사정은 성종대에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163) 결국 이렇게 정상적으로 화매되지 못한 관 염은 민에 대한 抑賣로 이어지게 마련이었다. 당시 경상도에서 운영하고 있던 本錢鹽 역 시 전형적인 억매였다.164) 성종 25년(1494) 국왕은 이러한 관염 화매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換穀時에 減 1斗할 것을 命하고, 또 당시 許琮은 和賣價를 定價하지 말고 時價에 聯動시킬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165) 그러나 官鹽和賣時의 抑賣 폐단이 이로써 시정될 수는 없었다. 특히 관염은 그 공급이 민간의 鹽 필요 시기인 春 3 4월, 秋 7 8월을 맞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民이 더욱 買入 에 不肯하였고, 이는 다시 官의 抑賣로 이어지고 있었다.166) 조선전기 정부가 주관하는 穀物流通에서 나타나는 抑賣의 경향167)과 함께, 국가가 주도하는 상품의 유통과정에서 관철되던 封建的 特性이 官鹽의 流通過程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정부가 利權在上 의 이념에 입각하여 官鹽流通을 중앙과 지방재정을 보충하기 위한 방도의 하나 로 운용하던 사정에서 당연히 뒤따르는 현상이었다. Ⅴ. 私鹽의 生産과 交易擴大 官鹽이 염간의 貢 稅鹽과 官鹽盆에서 생산한 염으로서 국가의 재정운영과 관련하여 159) 世宗實錄 卷111, 世宗 28年 2月 辛酉(4冊, p.656). 160) 太宗實錄 卷5, 太宗 3年 6月 壬申(1冊, p.269). 161) 世祖實錄 卷5, 世祖 2年 11月 己丑(7冊, p.158). 162) 世祖實錄 卷35, 世祖 11年 2月 乙酉(7冊, p.672). 163) 成宗實錄 卷10, 成宗 2年 4月 丁卯(8冊, p.567). 164) 世宗實錄 卷109, 世宗 27年 8月 戊辰(4冊, p.635). 165) 成宗實錄 卷286, 成宗 25年 正月 癸巳(12冊, p.459). 166) 燕山君日記 卷27, 燕山君 3年 9月 丙寅(13冊, p.282). 167) 拙稿, 朝鮮前期의 穀物交易과 參與層 ( 韓國史硏究 85, 1994).

朝鮮前期 鹽의 生産과 交易 - 97 - 유통되는 형태였다면, 私鹽은 이를 제외한 私的 所有와 流通의 영역에 속해 있는 염이었 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貢鹽을 제외한 貢鹽干의 생산 염과 私鹽干이 생산한 염 중에서 稅 鹽을 제외한 모든 염이 여기에 해당하였다. 조선 건국과 함께 고려 이래의 榷鹽制를 폐지 하였기 때문에 이들 사염의 생산과 그 사적인 교역은 법과 제도상 용인되었고, 이런 기반 에서 사염의 생산과 교역은 관염의 그것과 대비를 이루면서 꾸준히 증대하여 갔다. 이 시기 私鹽業의 발전은 염이 갖는 絶對 必要性에 바탕하고 있었다. 염은 切於民用 不可一日無 168)하여 民生日用 莫急於鹽 169)하다는 食品이었고, 따라서 其重 次於五 穀 170)하였다. 염에 대한 需要는 凶年일 경우 더욱 절실하였다. 饑饉에 빠져 草食으로 延 命하더라도 반드시 鹽醬을 섞어 먹어야 浮腫에 이르지 않기 때문이었다.171) 장마 끝인 7 8월과 더불어 보릿고개 시기인 春 3 4월에 민의 염 수요가 집중되었던 것172)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정부가 榷鹽을 표방하여 사염의 생산과 유통을 제도로써 금지하던 高麗朝 에도 국법을 어긴 사염이 특히 권세가를 중심으로 만연하였던 것도 바로 염이 갖는 이상 과 같은 民生에 있어 불가결함 때문이었다. 각염의 폐지와 함께 조선 정부는 國用鹽의 안정적인 공급을 위해 전조 이래 국가가 파 악하여 오던 염 생산자를 貢鹽干으로 차역시켜, 그들의 身役과 生業을 일치시킴으로써 貢 鹽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시에 사염이 허용되었던 탓에 이제 전국의 연해에는 기 왕에 염업에 종사해 오던 공염간 외에도 사염인들이 煮鹽을 위한 염분을 설치하여 갔다. 煮鹽方式의 차이에도 불구하고,173) 우리나라 全海岸에서 염 생산이 가능하던 사정174) 때 문에 수많은 私鹽人, 곧 私鹽干들이 염 생산에 종사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염은 그 絶對 必要性으로 인해 대단한 商品性을 갖는 物品이었다. 세종 원년(1419) 황해도 감사가 염간의 1년 貢鹽額 24석이 과다함을 언급하자, 당시 官人들은 어염 의 이익이 無窮하기 때문에 비록 20여 석을 거두어도 重斂이 아니라는 지적하고 있다.175) 168) 太宗實錄 卷22, 太宗 11年 11月 辛巳(1冊, p.611). 169) 世宗實錄 卷88, 世宗 22年 正月 丁巳(4冊, p.262). 170) 太宗實錄 卷28, 太宗 14年 9月 戊寅(2冊, p.35). 171) 世宗實錄 卷17, 世宗 4年 8月 己酉(2冊, p.493), 饑饉人民 雖草食 必待鹽醬以食 不至浮腫. 172) 燕山君日記 卷27, 燕山君 3年 9月 丙寅(13冊, p.282). 173) 조선전기 煮鹽方式은 크게 보아 鐵盆을 이용하는 海水直煮式과 주로 土盆을 이용하는 (無堤) 鹽田式으로 구분된다(高承濟, 朴容淑, 申芝鉉씨의 앞의 논문). 前者는 주로 東海岸에서, 그리 고 後者는 西 南海岸에서 이용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그 生産性은 토분을 이용하는 염전식이 월등하였다. 世宗實錄 卷117, 世宗 29年 9月 壬子(5冊, p.38), 用釜鐵而煎 經日夜而出素 者 東海之鹽也 塗泥爲釜 或一日而再成鹹者 西南之鹽也 西南勞役稍歇 功倍於東海矣. 174) 世宗實錄 卷109, 世宗 27年 8月 戊辰(4冊, p.634), 我國 三面濱海 且地勢 東西狹南北長 魚鹽所出之地 甚廣. 世宗實錄 卷117, 世宗 29年 9月 壬子(5冊, p.38), 我東方 三面濱海 皆爲煮鹽之地. 175) 世宗實錄 卷5, 世宗 元年 10月 乙未(2冊, p.342), 魚鹽之利 其出無窮 雖收二十餘石 未爲重斂.

- 98 - 國史館論叢 第76輯 실제 일반 민의 食鹽에 대한 요구는 沿海와 山郡을 막론하고 절실한 데가 있었다. 예컨대, 近海居民 尙艱於食鹽 況遠居之民乎 民之望鹽 甚於飢渴 一聞鹽船 至於近境 則爭持米布 奔 走求買 如恐不及176) 하는 형편이었다. 민의 염에 대한 渴望이 飢渴보다 심하다는 정도였다. 선초 공염간의 貢 鹽 過多가 문제되어 그 액수가 20여 석에서 8석으로 인하되었음에도 불구하고,177) 당시 관인들이 鹽業을 일러 功省而利多 하고 더욱이 薄稅之外 無他賦役 한 생업이라 인식하였 던 것178)도 이 때문이다. 선초 염과 그 생산을 둘러싼 이런 사정을 바탕으로, 염간들은 그들이 생산한 염의 일 부를 공염이나 세염으로 납부하고 나머지를 사염으로 처분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해 갔다. 式干則十石 私干則四石 其餘則任其所用 持價來買者 東西沓至 故雖不事農業 衣食自足.179) 염을 구입하려는 자가 東西에서 沓至하였기 때문에 농사를 짓지 않고 염 생산을 專業 으로 하고서도 衣食이 自足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전기 염간의 염 생산은 家族 단위의 노동력에 기반한 小規模 生産이 대부분이었다 고 생각된다. 이러한 사정은 고려에서도 마찬가지였다.180) 이 시기의 鹽生産 規模를 추 정하는 데에는 세종 19년(1437) 6월의 다음 자료가 참고가 될 수 있겠다. 戶曹啓 來七月望前 分遣敬差官于八道 審定鹽場魚梁 鹽場則每一盆一番 定鹽漢五名 分二番 役使.181) 호조는 義鹽法의 실시를 강력히 주장하면서 각관에 설치할 官盆의 노동력 동원 방식을 위와 같이 건의하였다. 즉, 鹽場의 염분 하나에 鹽漢 5명씩을 差定하는 방안이 었다. 이 때 호조를 중심으로 추진한 官鹽盆 設置案이 당시 일반 염분의 염 생산 사정 을 전제로 마련되었을 것임을 고려하면, 5인 정도를 염분 하나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176) 世宗實錄 卷77, 世宗 19年 5月 庚寅(4冊, p.70). 177) 本稿 Ⅲ장 官鹽의 確保와 運用 참조. 178) 世宗實錄 卷77, 世宗 19年 5月 庚寅(4冊, p.70). 179) 世宗實錄 卷109, 世宗 27年 8月 戊辰(4冊, p.635). 180) 姜順吉, 權寧國씨의 앞의 論文. 181) 世宗實錄 卷77, 世宗 19年 6月 壬午(4冊, pp.83 84).

朝鮮前期 鹽의 生産과 交易 - 99 - 노동력 숫자로 추정할 수 있겠다. 요컨대 5인 정도로 구성된 1戶의 家族이 하나의 鹽盆 에서 생업으로서 염을 생산하는 형태가 이 시기 鹽業生産의 일반 유형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기 염업의 생산규모를 가족단위의 소규모 생산으로 추정하는 데에는 당시 公鹽干 의 貢鹽 收貢 단위 역시 참고가 될 수 있겠다. 선초 공염간의 염공은 그 收貢 단위가 戶 나 名으로 각기 달리 나타나고 있다.182) 이들이 身役으로 편성되어 있기 때문에 등장하 는 파악 단위로, 당대 염 생산이 가족 노동력을 이용한 소규모 형태였음을 가정하면 신역 단위로서 戶나 名(丁)은 동일한 의미로 생각되는 것이다. 곧 염분 하나를 설치하고 여기 에서 가족 노동력에 기초하여 염을 생산하는 鹽干이 1戶 또는 1名(丁)으로 파악되는 셈이 다. 鹽貢 計丁而收之 는 이런 원칙에서 나온 표현이다.183) 한편 선초 私鹽干의 염 생산 역시 공염간과 마찬가지로 가족 노동력에 기초한 형태가 대부분이었다고 생각된다. 世宗實錄地理志 全羅道條에는 私干을 公干과 동일하게 名을 단위로 파악하고, 여기에 근거하여 해당 군현의 貢 稅鹽 總額을 산정하고 있다.184) 또 세종 27년(1445) 集賢殿 直提學 李季甸은 염간의 염 생산 사정을 두고 다음과 같이 표현 하고 있다. 鹽干 獨辦燔鹽之事 故獨專其利.185) 염간은 鹽盆의 조성으로부터 柴木의 조달에 이르기까지 全過程을 獨辦, 곧 가족 노동 력에 기초하여 독자로 수행, 자염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당시 정부가 山林川澤 與民 共之 의 이념에 따라 염 생산자 이외 지배층의 염분 私置와 奪占을 금지하였음을 고려하 면,186) 공간 사간의 가족 노동력에 기초한 소규모 염 생산 형태는 이 시기 조선 정부가 추진하던 鹽政의 기본 방향과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염간이 생산한 私鹽은 전국에서 官鹽과 더불어 유통되었다. 우선 도성에는 국초 이래 市廛의 一員으로 鹽廛이 설치 운영되었다. 당시 성내에는 內鹽廛이 있었고,187) 또 성 밖 龍山에는 龍山鹽廛이 소재하여 여기에 소속된 鹽商들이 坐市行賣 하면서 그 판매에 종사하였다.188) 특히 城內 만이 아니라 城外에 별도의 염전이 설립되어 운영된 사실이 182) 註 64), 65)와 같음. 183) 世宗實錄 卷5, 世宗 元年 8月 甲戌(2冊, p.329). 184) 世宗實錄地理志 全羅道, 沃溝縣 扶安縣 興德縣 順天都護府 高興縣條. 185) 世宗實錄 卷109, 世宗 27年 8月 戊辰(4冊, p.635). 186) 本稿 Ⅱ장 國初의 鹽法改革과 鹽政의 推移. 187) 承政院日記 634冊, 英祖 3年 3月 11日(34冊, p.583). 188) 市弊, 龍山鹽廛( 韓國商業史資料叢書 2冊, p.593).

- 100 - 國史館論叢 第76輯 주목된다.189) 同 時期에 성내의 上 下米廛 외에도 昭義門 밖에 門外米廛이 별도로 설 립되어 있던 사정을 고려하면,190) 이러한 米 鹽廛의 분화 양상은 米 鹽이 城底民을 포함한 都城民의 생계에 절대적인 필수품이었던 데서 연유한 것으로 생각된다. 성내의 내염전이 原型의 시전이었다면 용산의 염전은 도성과 그 주변의 인구증가와 더불어 신설 된 것이었겠다. 때문에 龍山鹽廛人들은 內鹽廛의 商圈이 아닌 성 밖 店鋪에서 坐市하면 서 한편으로 성내외에서 鹽 行商에도 종사하였던 것이다. 규모 역시 내염전보다 소규모 였을 것이다. 당시 이들 도성 염전의 염 판매는 민간의 사적인 유통영역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優價 로 공급되던 관염보다는 高價인 市價를 유지하였던 듯하다. 그러나 그런 만큼 官의 介在와 그에 따른 抑賣의 소지가 없이 時價에 의한 교역이 가능하기도 하였다. 세종 27 년(1445) 이계전이 도성 내에서 義鹽의 형태로 유통되던 군자감 관염이 갖는 억매적 성 격을, 시전내 염전의 卽時市價交易 의 형태와 비교하면서 폐단으로 지적하였던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191) 지방에서 이루어지던 私鹽의 유통은 沿海와 山郡에 따라 그 내용을 달리 하였다. 우선 沿海의 경우 鹽商人들의 활동 여지는 그만큼 좁을 수밖에 없었다. 소비자인 民이 직접 염을 연해의 생산자로부터 구입하는 것이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持價來買者 東西沓至 하였던 것이다.192) 반면 해안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內陸郡縣의 경우 食鹽의 확보는 매우 절실하 면서도 곤란한 문제였다. 이 시기 관염 유통정책이 兩界 내륙의 邊方 군현이나 嶺西 忠 淸道 지방의 내륙군현, 그리고 嶺南의 내륙지방을 중심으로 국가 차원에서 시행되었던 것 도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193) 물론 이들 내륙소재 郡縣民들 역시 數百里의 險路를 넘어 徒步 또는 牛馬를 이용하여 직접 식염을 구입하기도 하였다.194) 그러나 그 어려움을 고려할 때 이들 지방의 식염은 관염이나 혹은 鹽商이 공급하는 사염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9) 이상 조선전기 鹽廛에 대한 기록은 모두 18세기의 자료이고, 또 각기 시전의 自己主張이기 때문에 그 신빙성에 의문이 없지 않다. 그러나 국초 이래 必需品을 중심으로 다수의 시전이 설립되었고, 이들이 국가에 대한 市役을 부담하고 있던 사실을 고려하면 이러한 鹽廛의 설립 과 운영은 충분히 수긍된다 하겠다. 조선전기 시전의 성립과 발전에 대해서는 다음 논고 참조. 拙稿, 朝鮮初期 市廛의 成立과 禁亂 問題 ( 韓國史硏究 93, 1996) 및 朝鮮前期 市廛의 發 展과 市役 增大 ( 歷史敎育 60, 1996). 190) 拙稿, 朝鮮初期 市廛의 成立과 禁亂 問題, p.69, <표 2> 후기 기록에서 확인되는 조선전기 의 市廛. 191) 註 142)와 같음. 192) 註 179)와 같음. 193) 本稿 Ⅳ장 官鹽의 流通方式과 抑賣 참조. 194) 世祖實錄 卷2, 世祖 元年 11月 辛巳(7冊, p.95) 卷26, 世祖 7年 11月 癸亥(7冊, p.499) 卷34, 世祖 10年 8月 壬午(7冊, p.643).

朝鮮前期 鹽의 生産과 交易 - 101 - 결국 식염이 희귀한 지방의 염 공급은 주로 鹽商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염상은 그 去來規模나 活動地域에 따라 각기 陸商과 船商의 형태로 활동하였다. 전자가 小規模 近距 離 行商이었다면, 후자는 보다 大規模 遠距離 行商이었다.195) 염 상인들은 주로 연해의 염간들로부터 염을 구입하여 이를 牛馬나 船舶을 이용하여 鹽價가 高價인 지역에서 되팔 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和賣되는 官鹽을 買集하기도 하였다. 이미 태종 14년(1414)에 그 폐단이 지적된 바 있는 이들의 관염 매집 행위는,196) 이후 세종 22년(1440)에도 여전 하여 議政府 左參贊 河演이 그 폐단을 다시 언급하고 있다. 慶尙道左右道 鹽倉買布之鹽 其價大輕 故非七豪奸吏 不得交易 因無國家利民之本意.197) 優價로 放賣되는 경상도 관염을 七豪奸吏들이 아니면 교역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이 들 土豪나 奸吏들은 이렇게 매집한 관염을 民間交易機構를 이용하여 고가로 판매함으로 써 큰 이득을 챙길 수 있었을 것이다. 매집한 관염의 판매는 물론 노비 등 그들의 家人이 담당하였겠지만, 이는 곧 지방 권세가들이 권력을 이용하여 관염을 先占하고 이를 사염으 로 교역시키는 鹽商 활동에 참여하는 모습이었다. 선초 鹽商에는 도보나 우마를 이용한 小規模 陸商이 다수였을 것으로 생각되나,198) 이 외에도 배를 이용하여 지역간의 대규모 교역에 종사하는 鹽 船商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세종 12년(1430)에는 鹽 船商 활동을 하다 풍랑으로 인해 중국에 표류한 白龍 등 17명이 송환된 적이 있으며,199) 이러한 염 선상의 보다 구체적인 활동 모습은 同 19년(1437)의 다음 기록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全羅道監司啓 通津縣船軍宋勿金 以販鹽 率商船三艘 泊于海島 夜遇倭船相戰 勿金投石夾擊 斬賊三級 賊船覆沒 餘賊皆死.200) 195) 拙稿, 朝鮮前期의 商業과 商業政策 (延世大 博士學位論文, 1997)의 Ⅳ장 2절 行商의 成長 과 地方商業. 196) 太宗實錄 卷28, 太宗 14年 9月 戊寅(2冊, p.35). 197) 世宗實錄 卷88, 世宗 22年 3月 乙丑(4冊, p.277). 198) 조선초기 자료에서 근거리 교역을 수행하는 鹽商의 존재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魚鹽 利를 좇아 海邊이나 海島에 散居 入居했던 私鹽干들은( 世宗實錄 卷39, 世宗 10年 正月 丁 亥 ; 3冊, p.106 卷87, 世宗 21年 11月 丙寅 ; 4冊, p.254 및 世祖實錄 卷3, 世祖 2年 2 月 辛丑 ; 7冊, p.113) 그들이 생산한 염을 來貿者에게 판매하는 한편으로, 직접 往來興販 하 기도 하였다( 世祖實錄 卷25, 世祖 7年 8月 癸酉 ; 7冊, p.478). 鹽商으로서 食鹽이 귀한 지 방의 閭里에서 벌이는 陸商活動이다. 場市가 출현한 이후 이들의 활동은 장시를 기반으로 더 욱 확대되었을 것이다. 壬亂時에 馬를 이용하여 장시에서 販鹽하던 상인이 바로 이러한 유형 이었다( 尾錄 第三, 甲午 6月 初4日. 國史編纂委員會刊, 下冊, p.326). 199) 世宗實錄 卷49, 世宗 12年 7月 乙卯(3冊, p.246). 200) 世宗實錄 卷78, 世宗 19年 7月 甲午(4冊, p.87).

- 102 - 國史館論叢 第76輯 전라도 감사의 보고에 의하면, 왜적과 相戰하여 戰果를 올린 商船 3척을 이끈 船軍 宋 勿金은 경기도 通津縣 소속으로 販鹽次 전라도의 海島에 와 있던 인물이었다. 경기도 소 속의 商船들이 鹽 購買를 위해 전라도 해안에 갔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들은 평소 염 생 산량이 많아 鹽價가 싼 전라도 일대에서 식염을 구매하여, 염가가 높은 京江 일대에서 판 매하던 염 선상이었다고 추측된다. 그들이 遠距離 航海를 감수하고 전라도 해안에까지 운 항한 사실로 보아, 이 시기에 이루어지던 隔地間 交易으로서 전형적인 船商活動의 한 모 습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조금 후대의 사실이기는 하지만 通津 인근 황해도 延安의 魚鹽 이 京江에서 유통되고 있던 사정201)을 고려하면, 宋勿金이 3척이나 되는 상선을 이끌고 전라도 일대에서 貿販한 대량의 鹽 역시 다수의 염 소비자가 거주하는 京江 일대에서의 판매를 목적으로 하였다고 추정된다. 地域間의 鹽 價格差를 이용한 선상들의 활동이었고, 이러한 상행위는 海路를 통해 都城과 연결되는 西海를 중심으로 당시 일반적으로 이루어 졌다고 생각된다. 이처럼 염상들에 의해 전개되던 私鹽의 流通은 官鹽과 함께 선초에 이미 전국 차원에 서 食鹽의 안정적인 供給을 낳고 있었다. 세종 27년(1445) 李季甸은 義鹽法을 위한 국가 의 官鹽盆 增設案에 극력 반대하면서 그 근거의 하나로 당시의 鹽 需給狀況을 두고, 至於窮村僻巷 雖未周足 亦未聞不得食鹽之人202) 이라 표현하고 있다. 비록 窮村僻巷일지라도 두루 足한 것은 아니지만 식염을 구입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는 지적이다. 이어 이계전은 곧바로 官盆의 增設이 관염의 過多生産으 로 이어지고 결국은 수령이 이를 戶口의 多少에 따라 分給하는 형식으로 抑配 抑賣함으 로써 민의 고통이 뒤따를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203) 선초의 食鹽 需給事情은 이미 국 가가 더 이상 介在하지 않아도 민이 이를 충분히 구입할 수 있을 만큼, 관염과 사염을 통 해 안정적으로 運用되고 있었던 것이다. 선초 食鹽 需給에서 사염의 생산과 그 유통이 차지하는 비중은 관염의 그것보다 높았 다고 생각된다. 세종 6년(1424) 경상도의 경우 사염분이 차지하는 비중이 25.8%로 공염 분의 그것보다 낮게 나타나지만,204) 사염분의 누락 가능성과 염분의 生産性, 공염분에서 생산된 염 중에서 公干이 사염으로 처분하는 분량 등을 고려하면 실제 유통에 있어 사염 의 비중은 관염의 그것보다 높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三面의 沿海 각 지역에서 염 생산 201) 成宗實錄 卷101, 成宗 10年 2月 甲寅(9冊, p.696) 및 成宗實錄 卷201, 成宗 18年 3月 丁巳(11冊, p.197). 202) 世宗實錄 卷109, 世宗 27年 8月 戊辰(4冊, p.634). 203) 위와 같음. 204) 註 77)과 같음.

朝鮮前期 鹽의 生産과 交易 - 103 - 이 가능하여 사염 생산이 이루어지던 사정205) 외에도, 국왕의 의지에 의거하여 세종대에 추진하였던 義鹽法의 失敗經緯에서 그러한 내역을 잘 짐작해 볼 수 있다. 애초 세종 19 년(1437)에 의염법 推進主體들이 이를 榷鹽論, 곧 사염의 생산과 유통을 금지하는 방향에 서 추진하였을 때,206) 세종은 이를 두고 禁私鹽而官專其利 乃近於理財 非美事207) 이라 하여 반대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無搉鹽理財之譏 하는 방안을 모색하도록 지시하였 다.208) 또 同 26년(1444) 首陽大君은 의염법의 시행과정에서 官鹽盆이 아닌 (私)鹽盆의 탈취가 불가함을 강조하였다.209) 물론 이러한 사염에 대한 국가의 허용 방침은 의염법 실시를 與民爭利 정책으로 여기는 臺諫을 중심으로 하는 官人들의 반대 때문이었다.210) 그러나 한편으로 그 배경에는 이미 국가가 금지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하여 民의 食鹽供 給을 담당하고 있던 私鹽業의 발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요컨대 당대 食鹽의 生産과 需給 에서 私鹽은 이미 국가가 부정할 수 없을 정도의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榷鹽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세종 27년(1445) 의염법은 官盆增設을 통해 義倉穀을 마련한다는 목적에서 추진되었다.211) 그러자 애초에 예상되었던 사염 생산의 萎縮이 곧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의염법이 榷鹽하는 방안이 아니라 단지 宜鹽空地에 官盆을 증설하는 형태였음에도 불구하고,212) 사염분의 탈취 현상이 벌어졌고 심지어는 私鹽의 거래마저도 금지하는 사태213)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사염인들은 자신들이 각염제 하에서 과중한 부담을 져야 하는 鹽戶로 차정될까 우려하여 不肯煮賣 하였고, 이로 인해 鹽價가 폭등하는 사태가 빚어졌다.214) 실제 의염법 실시 이전에 米 1斗當 3 6斗 하던 시중의 鹽價는, 그 실시 후에 3배 이상 폭등하여 미 1두에 겨우 염 1 2두를 교환 205) 註 174)와 같음. 206) 世宗實錄 卷77, 世宗 19年 4月 己卯(4冊, p.69), 官爲煮鹽 則須禁私鹽 庶可以廣布官鹽於 民 而公家所收多矣 搉鹽之法 古之好高論者 必先焉 然不爲公鹽則已 如煮公鹽 則當禁私鹽. 207) 위와 같음. 208) 위와 같음. 209) 世宗實錄 卷105, 世宗 26年 7月 辛酉(4冊, p.569). 210) 世宗實錄 卷109, 世宗 27年 8月 戊辰(4冊, pp.634 636) 및 世宗 27年 9月 乙亥(4冊, p.637). 211) 세종대 義鹽法의 實施經緯에 대해서는 註 99)에서 언급한 劉承源, 金勳埴씨의 論文 참조. 212) 世宗實錄 卷111, 世宗 28年 2月 辛丑(4冊, p.653) 卷112, 世宗 28年 4月 丙寅(4冊, p.667). 213) 世宗實錄 卷111, 世宗 28年 2月 辛酉(4冊, p.656). 214) 世宗實錄 卷112, 世宗 28年 4月 丁卯(4冊, p.667), 司諫院右司諫卞孝敬等上疏曰 義鹽之 法 雖是爲民 然亦新法 人皆厭之 且私鹽之人 恐將付籍 不肯煮賣 因此鹽價陡峻 民悉病焉.

- 104 - 國史館論叢 第76輯 할 수 있을 정도로 상승하였다.215) 의염법의 실시에 따른 사염 생산의 縮小, 교역의 萎 縮이 가져 온 결과였다. 이로써 의염법은 그 시행 초기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시행 1년만 에 혁파되고 말았다. 당시 집현전 직제학 이계전은 이러한 의염법 폐지를 生民之病을 제 거한 쾌거로 評하고 있다.216) 의염법 혁파 이후, 私鹽 生産이 復舊되고 그 流通이 再開 됨으로써 市中의 鹽價가 안정된 상황을 두고 이르는 표현이겠다. 조선초기 私鹽 생산과 그 유통이 전체 鹽 需給에서 차지하던 비중은, 당시 官鹽이 일 반적으로 抑賣의 형태로 유통되던 현실217)에서 이후 더욱 확대되고 있었다. 특히 15 16세기에 걸쳐 人口의 급격한 增加가 이루어지면서 사염의 생산과 그 교역은 더욱 확대 되었다. 조선전기 人口問題에 관한 기왕의 연구에 따르면, 국초 약 450여 만의 인구는 16세기 말에 이르면 대략 960여 만에 이르러 거의 2배 이상의 증가를 보였다.218) 이러 한 인구증가는 여러 부분에서 심대한 經濟的 變動을 야기하였을 것이고, 그 영향은 염의 생산과 교역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食鹽 消費量의 절대 증가와 그에 따른 염 생 산 교역의 확대 현상이었다. 鹽이 여타의 食品과 달리 代替物이 있을 수 없고, 또 生命 의 보존에 必需品이었음을 고려하면 이 시기에 나타난 2배 이상의 인구증가는 곧바로 그 만큼의 식염 소비량의 증대로 이어지게 마련이었다. 인구증가에 따른 食鹽 소비량의 증대는 염의 商品性을 더욱 높임으로써 염 생산의 증 대로 이어졌다. 성종 20년(1489) 경상도 관찰사 金礪石은 당시 密陽의 守山堤 國屯田 경 작에 동원하던 水軍을 煮鹽으로 돌리면, 그 生産鹽의 貿穀을 통해 屯田의 1년 소출보다 더 많은 官穀을 확보할 수 있다고 건의하고 있다.219) 水軍煮鹽의 收益性이 屯田耕作보다 215) 世宗實錄 卷112, 世宗 28年 5月 庚午(4冊, p.669). 216) 世宗實錄 卷112, 世宗 28年 6月 甲寅(4冊, p.680). 217) 本稿 Ⅳ장 官鹽의 流通方式과 抑賣. 218) 조선전기 人口增加에 대한 기왕의 諸見解는 다음 표와 같다. 본문의 數値는 이들 각각의 견 해가 지니는 人口推計上의 오류를 감안하여, 이 시기 인구의 증가분을 그 中間値로 暫定하여 본 것이다. (단위 만) 연 도 (A) (B) (C) 1400 449 573 1426 383 636 1519 410 721 1,047 1590 958 1,404 1690 695 1,603 (A) 金載珍, 韓國의 戶口와 經濟發展 (博英社, 1967). (B) 韓永愚, 朝鮮初期 戶口總數에 대하여 ( 인구와 생활환경, 서울대학교 인구 및 발전문제 연구소, 1977). (C) 權泰煥 愼鏞廈, 朝鮮王朝時代 人口推定에 關한 一試論 ( 東亞文化 14, 1977). 219) 成宗實錄 卷232, 成宗 20年 9月 丙子(11冊, pp.518 519).

朝鮮前期 鹽의 生産과 交易 - 105 우월하기 때문이었다. 중종 5년(1510) 황해도 관찰사 南袞이 前年의 還上 逋欠穀을 煮鹽 貿穀을 통해 보충하려 하였던 것도,220) 바로 식염 소비량의 증대에 따라 鹽業의 수익성 이 더욱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사례의 하나였다. 이러한 염업의 수익성 증대는 私鹽業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私鹽에 대한 국가의 허용 방침 속에서 국초 이래 발전하고 있던 鹽干의 염 생산은, 인구증가에 따른 鹽 需要의 增 大에 맟춰 16세기에 들어 더욱 확대되고 있었다. 명종 22년(1567)에는 충청도 南陽에 거주하는 李文 등 60여 명의 鹽干이 煮鹽用 薪을 채취하기 위해 4척의 배에 분승하여 海島에 갔다가 唐倭未辨之賊에 劫奪당한 사실이 보고되고 있다.221) 60여 명에 달하는 염간들이 煮鹽用 燃料 조달을 위해 4척이나 되는 선박을 동원하여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사정을 통해, 충청도 남양을 중심으로 하는 당대 사염업의 발전 사정을 추정해 볼 수 있겠다. 한편 선조 18년(1585) 충청도에 파견된 御史 姜紳이 올린 馳啓는 그러한 사염업의 발 전 사정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에 의하면 당대 國用船材의 産處는 海西의 長 淵, 湖西의 安眠, 湖南의 邊山 등의 지역이었고, 이들 지역에서 기왕에 이루어지던 權勢 家(沈通源 尹元衡 李樑 등)들의 材木 斬伐 행위는 近年의 禁法에 의해 거의 사라진 상태 였다. 國用船材의 확보를 위한 禁松政策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전혀 다른 측면에서 다시 제기되고 있었다. 즉 염간의 煮鹽을 위한 松木 斫伐 사태였다. 安眠串居民 以鹽爲業者 窟穴其中 晝夜斫伐 以煮其鹽 夫船材之養 非至於百歲 則不能成材 而今以么麽小民 斫取之濫 有甚於舊日權勢之家.222) 安眠串에 거주하는 염간들의 자염을 위한 松木 斫伐이 지난날 권세가들이 이 지역을 私占하던 때보다 더욱 심한 형편이라는 지적이다. 때문에 그는 안면곶의 鹽盆을 금단하고 해당 관리로 하여금 이후 규찰시키자고 건의하고 있다.223) 충청도 안면곶은 이미 세조 3 년(1457)에도 鹽夫들의 작벌로 인한 松木殆盡 사태가 문제되어, 居民을 刷出하고 인근 泰安 瑞山 등의 地方官과 處置使에게 그 禁伐을 지시한 바 있는 지역이었다.224) 안면곶 과 인근 태안 서산 등지가 염의 主要 産地인 탓에 제기되는 문제였고, 16세기에 들어 220) 中宗實錄 卷10, 中宗 5年 2月 丁酉(14冊, p.411). 冲齋集 卷5, 日記, 庚午(中宗 5) 2月( 韓國文集叢刊 19冊, p.417). 221) 明宗實錄 卷34, 明宗 22年 3月 甲戌(21冊, p.147). 德溪集 卷4, 啓, 請命備邊司措置備禦啓( 韓國文集叢刊 38冊, p.126). 222) 宣祖實錄 卷19, 宣祖 18年 4月 庚午(21冊, p.419). 223) 위와 같음. 224) 世祖實錄 卷6, 世祖 3年 正月 辛巳(7冊, p.171).

- 106 - 國史館論叢 第76輯 염업의 발전에 따라 그 정도가 더욱 심화하였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선조 18년(1585) 당시 御史 姜紳은 충청도의 安眠 만을 예로 들어 船材 보호를 위한 斫伐 禁止를 주청하고 있지만, 그가 船材培養處로 언급한 다른 지역 역시 당대 염의 主要 産地였다. 그렇다면 황해도의 長淵이나 전라도의 邊山 일대에서도 자염을 위한 염간들의 松木 斫伐 행위는 동일한 차원에서 문제되었음에 틀림없다. 요컨대 당시 정부의 國用木材 확보를 위한 禁松政策이 염간의 柴木 확보 노력과 마찰을 빚는 모습이었고,225) 이러한 사태는 바로 15 16세기에 전개되던 염 소비량 증대에 따른 사염 생산의 확대 추세를 잘 보여주는 내용이라 하겠다. 이처럼 인구증가와 염 소비량 급증에 따른 鹽業의 수익성 증대를 기반으로 사염업이 발전하게 되면서, 국초에 정부가 與民共之 의 원칙 하에서 표방했던 염간 이외 권세가 양반 사대부 등의 鹽盆私置 禁止 방침 역시 무너져 갔다. 本稿 Ⅱ장에서 살펴 본 바와 같 이 寺刹이나 권세가들이 설치한 이들 소유의 염분이 증가하여 갔고, 마침내 정부는 이러 한 현실을 수용하여 이들의 염분 소유를 인정하는 대신 收稅하는 방향으로 鹽政을 수정 하였던 것이다.226) 經國大典 에 山林川澤으로서 柴場이나 魚箭의 私占禁止를 明示하고 있음에 비해, 鹽盆에 대한 사점 금지를 규정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러한 염정의 변화를 法 規定으로 반영한 때문이었다.227) 양반 사대부나 권세가들의 염분 소유가 허용된 이후, 이들은 전국 각지에 物力을 동원 하여 鹽盆을 설치하거나 여러 방법으로 기왕의 염분을 私占함으로써 염 생산에 따른 이 익을 획득하여 갔을 것이다. 연산군 12년(1506)에 국왕이 몰수한 昇平府夫人의 염분을 張淑容에게 지급하였던 것228)도, 이 소유 염분에서 거두는 이익이 적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16세기 후반에 이르면 鹽盆所有라는 방법 말고도, 권세가들이 염업으로부터 이 익을 거두는 또 다른 형태가 출현하고 있었다. 鹽盆이 소재한 연해의 鹽田面을 私占하는 방법이었다. 선조 22년(1590)에 평안도 監司 尹斗壽가 올린 다음 書狀은 바로 이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平安監司尹斗壽書狀 天福稱名人 托稱王子君奴子 冒呈戶曹 咸從縣民等煮鹽蒙利之地 盡爲折 受 使居民失立業 其案還收 咸從顯令金光玉 矇然折給 罷黜事.229) 225) 조선전기 국가의 禁松政策에 대해서는 김선경, 朝鮮前期의 山林制度, pp.95 101 참조. 226) 本稿 Ⅱ장 國初의 鹽法改革과 鹽政의 推移 참조. 227) 위와 같음. 228) 燕山君日記 卷63, 燕山君 12年 8月 癸丑(14冊, p.63), 傳曰 昇平府夫人魚箭鹽盆 並給張 淑容. 229) 宣祖實錄 卷23, 宣祖 22年 正月 甲戌(21冊, p.456).

朝鮮前期 鹽의 生産과 交易 - 107 - 天福이라는 인물이 王子君의 奴子를 칭탁하여 호조로부터 평안도 咸從縣民들의 煮鹽蒙 利之地, 곧 염분이 소재한 鹽田面을 折受받음으로써 발생한 문제였다. 이로 인해 함종현 의 염간들이 실업하는 사태가 빚어지자, 평안감사가 그 立案의 還收와 이를 절급한 현령 의 罷黜을 건의하였던 것이다. 당시 염분이 설치되는 沿海의 土地, 다시 말해 鹽田面은 山林川澤 의 일환으로서 개인의 獨占이나 所有를 불허하여 民에게 開放되어 있는 곳이었다.230) 그런데 15세기 후반 이후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권세가는, 三南에 이어 平安道에 이르기까지 연해의 海 澤地를 立案이나 賜牌의 형식으로 折受받아 개간함으로써 소유권을 인정받고 있었 다.231) 정부의 開墾 장려 정책과 권세가의 所有土地 확대 노력이 결합됨으로써 나타나 는 현상이었다. 선조 22년(1590) 평안감사 윤두수의 보고는, 왕실을 비롯한 권세가의 折受 행위가 海 澤地 折受를 名目으로 염분이 설치된 연해의 鹽田面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애초 이들 염전면은 염분을 소유하고 자염하는 鹽戶가 이용하는 共有地였다. 염분이 毁撤 되지 않는 이상, 염호의 지속적인 占有가 보장되는 공유지인 것이다. 그런데 이제 권세가 들이 無主의 海澤地임을 근거로 절수를 통해 이를 獨占하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권 세가들이 절수지에 소재한 염분의 염호로부터 일정한 이용의 대가를 징수하였음은 물론 이겠고, 함종현 염호의 실업은 그 부담의 과중함 때문일 것이다. 天福의 함종현 鹽田面 折受 문제는 그가 王子君의 奴子를 칭탁하였기 때문에 감사가 문제삼은 사건이었다. 따라서 그렇지 않은 왕실과 권세가들의 절수는 일반으로 이루어지 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232) 당시 魚箭 柴場에서 전개되던 이들의 절수 경향과 동일 한 모습이었다.233) 鹽田에 대한 권세가의 私占과 徵收行爲는 물론 不法이었지만, 그 추 세는 壬亂 이후에도 여전하였다.234) 염업의 수익성이 증대되면서 권세가들이 그들 소유 230) 남원우, 16世紀 山林川澤 의 折受에 대한 硏究, p.6. 231) 李景植, 16世紀 地主層의 動向 ( 歷史敎育 19, 1976). 李泰鎭, 16세기 沿海地域의 堰田 개발 戚臣政治의 經濟的 背景 一端 ( 金哲埈博士華甲紀念 史學論叢, 1983 ; 韓國社會史硏究, 지식산업사, 1986에 收錄). 232) 鶴峯集 卷3, 箚, 請停築城仍陳時弊箚( 韓國文集叢刊 48冊, p.78), 江海魚鹽之地 悉稱立案. 233) 16세기 들어 盛行하는 권세가들의 魚箭 柴場 折受 경향에 대해서는 남원우, 16世紀 山林 川澤 의 折受에 대한 硏究, pp.16 37 참조. 234) 壬亂 이후 정부는 왕실재정의 곤궁을 이유로 여러 宮房에 鹽盆에 대한 收稅權을 折受의 형태 로 分給하게 된다. 그리고 이 와중에서 왕실과 권세가들이 염분이 소재한 鹽田面을 海澤地로 서 절수받아 그로부터 收稅하는 경향 또한 더욱 확대된다. 이른바 基主 로서의 권리가 그것이 었다. 조선후기 鹽盆私占 문제는 위 兩者가 복합된 형태였다. 그 중 基主 로서의 권리는 續 大典 에 이르러 부정되고, 수세권 절수 역시 均役法 실시를 통해 해결된다. 이상 조선후기 鹽 盆私占과 鹽稅運用에 대해서는 兪泌朝, 17 18세기 전반 鹽業 발전과 鹽盆私占 ( 韓國史論 36, 서울大, 1996) 참조.

- 108 - 國史館論叢 第76輯 의 염분을 늘려가는 한편으로, 권력에 기반하여 기왕의 염호의 염분을 사점함으로써 경제 적 이득을 취하는 또 다른 방도인 셈이었다. 이상과 같은 염업의 수익성 증대와 사염의 생산 확대는 곧바로 그 交易의 擴大로 연결 되었다. 특히 16세기에 들어 지역간의 가격차를 이용하여 대규모의 염 교역을 수행하는 鹽 船商의 활동이 자료에 빈번하게 나타난다. 중종 33년(1538)에는 官人으로서 鹽船을 운영하였던 李沆의 행위가 史臣의 褒貶으로 기록되어 있고,235) 同 39년(1544)에는 충청도 韓山의 염간 安孫 등 8인이 販鹽次 배를 이용하여 황해도로 가다 荒唐船에 劫掠당하기도 하였다.236) 또 선조 11년(1578)에는 販鹽을 위해 황해도 康翎으로 향하던 開城 西江 居 住 金夢 등의 배가 풍랑을 만나 遼東地方으로 표류하였다가 송환되었으며,237) 同 36년 (1603)에는 평안도 咸從縣 출신 奴 貴鶴 李莫松 등의 鹽船이 三和縣 海上에서 水賊에게 약탈당한 기록이 보인다.238) 모두 지역간의 鹽 價格差를 이용하여 謀利하는 船商活動이 었고, 특히 충청도 한산의 염간들은 그들이 생산한 염을 직접 선박을 이용하여 황해도에 서 販鹽하고 있었다. 생산 염을 상인에게 賣渡하는 것 보다, 직접 염 소비자들에게 판매 하는 船商活動의 이익이 크기 때문에 그들 자신이 선박을 마련하여 船商으로 나섰던 것 이다. 배를 이용하여 鹽 需要時機인 7월에 맞춰 그들의 商活動이 이루어지는 사정으로 보아, 그들의 鹽 生産規模 또한 선초와 달리 小規模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염 생산이 증대되고 그 교역이 확대되면서 염상들은 주로 지역간의 가격차를 이용하 여 상활동을 벌였지만, 獨占行爲를 통해 인위적인 鹽價 上昇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예컨 대 중종 12년(1517) 경상도 내륙지방은 凶年에 덧붙인 魚鹽 가격의 상승으로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洛東江을 통한 선박의 출입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태가 빚어진 까 닭은 낙동강 下流之人이 염 판매의 이익을 독점하고자,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염 선상 활동이 不利하다는 訛言으로 胥動한 때문이었다.239) 낙동강 하류에 근거하여 활동하는 鹽商들이 獨占을 통한 가격 상승을 도모하여 여타 선상들의 낙동강을 통한 내륙진출을 방해한 결과였다.240) 235) 中宗實錄 卷87, 中宗 33年 3月 丙戌(18冊, p.173). 236) 中宗實錄 卷104, 中宗 39年 7月 壬寅(19冊, p.110). 237) 宣祖實錄 卷11, 宣祖 11年 正月 丁巳(21冊, p.349). 238) 宣祖實錄 卷163, 宣祖 36年 6月 丁未(24冊, p.496). 239) 中宗實錄 卷27, 中宗 12年 2月 丁未(15冊, p.257). 240) 新增東國輿地勝覽 에는 金海의 都要渚 民을 두고 농업에 종사하지 않고도 商販上游諸郡 以 爲財産 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32, 金海, 山川條). 본문에서 언급한 洛 東江 下流之人은 바로 이 도요저 민들과 같이 낙동강을 근거로 魚鹽 등 海産物을 경상도 내륙 지방에 공급하던 상인들이라 추측된다. 김해의 도요저 거주민이 원래 200여 호였다가, 新增 東國輿地勝覽 이 편찬되는 中宗代에 400여 호로 증가되고 있는 사정 또한, 이러한 낙동강을 근거로 한 船商活動의 발전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된다.

朝鮮前期 鹽의 生産과 交易 - 109 - 이 시기 鹽商들의 선상활동은 위 낙동강 염상의 예에서 보듯이 주로 沿海에서 江을 통해 내륙으로 진출하여 販鹽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尾錄 의 著者 吳希文은 壬亂 중 충청도 林川에 寓居하면서, 錦江을 거슬러 올라 와 인근 咸悅의 熊浦에 정박해 있는 濟州船商으로부터 미역 등 해산물을 구입하고 있다.241) 鹽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특히 해로 수로를 이용하는 염상의 보다 구체적인 활동사정은 임란 중 糧餉 확보 방안 의 일환으로 煮鹽貿穀을 건의한 柳成龍의 上啓를 참고할 수 있겠다. 그는 연해의 염호들 을 동원하여 생산한 官鹽의 판매경로를 모색하면서 바다와 연결된 내륙 수로의 이용을 건의하였다. 즉 錦江을 통한 충청도 내륙 일대, 漢江 龍津을 통한 영동 충청 경기도 내륙지방, 臨津江 碧瀾渡를 통한 경기 황해 강원도 내륙지방, 그리고 大同江 晴川江 鴨綠江을 통한 양계 내륙지방에서의 官鹽 판매를 건의하고 있다.242) 물론 이는 官鹽 의 판매경로로서 모색된 방안이었지만, 이것이 또한 바로 당시 私鹽의 販賣와 유통경로 일 것으로 추측되는 것이다. 해로와 내륙수로를 연결하며 전개하던 鹽 船商들의 일반적 인 상활동을 토대로 이와 같은 방안이 구상된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15 16세기에 걸쳐 나타난 人口의 지속적이고도 급격한 증가는 食鹽의 소비량 증대로 이어졌고, 이는 다시 염업 그 중 특히 私鹽의 生産과 交易 이 확대되는 결과로 연결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염의 교역 확대는 同 時期의 穀物 流通에서 나타나는 동일한 사정과 아울러,243) 국내의 商品流通이 한층 더 발전하는 모 습을 보여주는 사례의 하나였다. 따라서 조선전기 도성상업의 발전, 장시의 성립과 그 확산 등으로 대표되는 상업발전의 諸樣相도 바로 이러한 商品의 流通擴大에 근거하여 나 타나는 변화이고 발전이라 하겠다. Ⅵ. 結 語 국초 조선 정부가 세운 鹽政의 기본 방향은 麗末 이래 산적해 온 榷鹽制의 폐단을 제 거하여 民生을 안정시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국가가 염의 생산과 교 역을 장악하여 그 이익을 국가재정에 보충하던 榷鹽制가 혁파되고, 私鹽의 생산과 교역이 민간에게 허용되었다. 山林川澤 與民共之 의 이념에 근거한 조처였다. 아울러 여말 權勢 家가 불법으로 염분을 私置하거나 奪占함으로써 야기되었던 민폐를 해결하기 위해 염간 이외 권세가나 양반 사대부 등의 염분 소유를 원칙으로 금지하였다. 241) 尾錄 第四, 丙申 3月 29日, 5月 16日(國史編纂委員會刊, 下冊, p.26, 41). 242) 西厓集 卷7, 啓辭, 請措置糧餉啓( 韓國文集叢刊 52冊, pp.153 155). 243) 拙稿, 朝鮮前期의 穀物交易과 參與層.

- 110 - 國史館論叢 第76輯 국가는 國用鹽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하여 前朝 이래 염 생산에 종사해 오던 鹽戶를 貢 鹽干으로 차정하여 연해에 설정한 鹽場에 소속시켰다. 鹽場官의 관리 하에 있던 貢鹽干 곧 公干은 身役과 生業이 일치하는 존재로, 그들이 부담하는 貢鹽이 國用鹽의 근간이 되 었다. 이제 定役戶인 貢鹽干은 신역으로서 貢鹽을, 私鹽干은 私鹽稅만 부담하면 그만이었다. 그들이 物力을 투자하여 설치한 염분에 대한 소유권은 공 사간 모두에게 인정되었고, 생산한 염 역시 貢 稅鹽을 제외하고는 자유로운 판매가 보장되었다. 국초 鹽法改革의 이러한 방향은 염업 발전에 따라 이후 寺刹이나 兩班士大夫, 土豪 등의 私置鹽盆이 증가하면서 수정되었 다. 각염제 폐지라는 원칙은 고수되었지만 지배층의 鹽分所有를 현실로 인정하고 이들로 부터 收稅하는 방향으로 鹽政이 조정되었고, 이 내용이 經國大典 에 수록되었던 것이다. 각염제의 폐지에도 불구하고 조선전기 염의 생산과 교역에 대한 국가의 관심은 지대하 였고, 그에 대한 干與 정도 역시 높았다. 이를 통해 국가의 재정을 보충한다는 목적 외에 도 그것이 민생에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利權在上 의 관점에서였다. 국가는 염 생 산과 교역에 대한 간여를 官鹽의 확보와 그 운용을 통해 기도하였다. 이 시기 국가가 장 악하는 관염에는 우선 공염간이 납부하는 貢鹽과 사염간의 稅鹽이 있었다. 공염간의 공염 은 선초 每戶當 年 20餘 石 이상이었다가 성종 무렵 8석으로 인하 조정되었으며, 사간의 세염은 4석으로 변동이 없었다. 鹽稅 또는 貢鹽으로 通稱되었던 공 사간의 세염은 그 전체 총액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世宗實錄地理志 에 의하면 전라도의 염 생산 14개 군 현 중 9개 군현의 稅鹽總額 만도 7,000여 석에 이르고 있어 적지 않은 분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국가가 확보하는 세번째 형태의 관염은 水軍(船軍)이 煮鹽하는 염이었다. 애초 赴防 중인 수군의 糧餉에 충당할 목적으로 수군 노동력을 동원하여 설치한 官盆에서 생 산하던 水軍煮鹽은, 이후 그 주된 용도가 救荒鹽으로 바뀌고 지역에 따라서는 水軍月課鹽의 형태로 변화하였다. 공염간의 貢鹽 수납과 동일한 형태였고, 그 부담 역시 적지 않았다. 관염에는 地方官이 직접 설치한 官盆에서 생산하는 염도 포함되었다. 세종대 국가적인 차 원에서 義倉穀 마련을 위해 전국의 해안에 官盆을 설치하여 운영한 義鹽法 은 그 대표적 인 실례였다. 義鹽法이 민간 사염분의 탈취와 이를 각염제의 부활로 여긴 私干들의 염업 포기에 따른 市中 鹽價의 상승으로 인해 시행 이듬해인 세종 28년(1446)에 중단되었음에 도 불구하고, 이후에도 지방 各官에서는 여전히 진휼, 군자 또는 특정 목적의 관염분을 설치하고 있었다. 관염은 염분의 所有關係, 歸屬의 系統에 따라 그 所用處를 달리하였다. 국가는 公 私 鹽干의 貢 稅鹽 중 도성과 가까운 경기 충청 황해도의 것만을 현물로 司宰監에 수납 시켜 왕실의 수요를 비롯한 國用鹽에 충당하고, 3도의 나머지 세염은 도성의 軍資監이나 현지의 鹽倉에 분속시켰다. 한편 이들 3도를 제외한 여타 諸道의 공 사염간의 세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