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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진: 노래를 좋아하는 분들은 많지만, 콘서트까지 가시는 분들은 많이 없잖아요. 석진: 네. 그런데 외국인들은 나이 상관없이 모든 연령대가 다 같이 가서 막 열광하고... 석진: 지 드래곤 봤어?, 대성 봤어?, 승리 봤어? 막 이렇게 열광적으로 좋아하더라고요.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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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년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1

체험수기집을 펴내며 우리 모두는 압니다. 몸의 상처이든, 마음의 상처이든, 깊은 상처를 안고 있을수 록 이를 다른 사람에게 내보이는 일은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그 중 도박중독은 삶 독은 치유될 수 있습니다. 조금은 어렵고 긴 호흡이 필요하겠지만 변화된 삶속에 서 건강하게 회복되는 모습을 봅니다. 의 전반을 송두리째 흔들고 지나갔고, 또는 지금도 그 여파에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더 아플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체험 수기 부문에서는 그러 한 상처와 아픔을 온전하게 내보이고 용기 있게 참여하여 주셨습니다. 이번 수기집의 발간을 통하여 지금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이 희망을 가지고 새로운 삶과 회복의 과정에 동참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앞으로도 수기집을 비롯한 여러 기회를 통하여 고통 받고 있는 분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정책에 적극 반영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많은 분들의 한결같은 질문이 바로, 도박중독이 치유될까요? 입니다. 수기집 에도 담겨있듯이 도박중독의 깊고 어두운 터널 속에서 본인을 비롯하여 가족과 주 변 지인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게 됩니다. 손상된 신뢰와 믿음, 무너진 재 정상황, 피폐해진 가족생활 등등 그 고통을 이루 말할 수 없겠지요. 그 고통을 우 리는 나누고 싶습니다. 회복의 과정에 참여하시는 많은 분들이 증명하듯이 도박중 2 _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2012년 12월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 위원장 김 성이 3

심 사 평 올해 체험수기 부문에서는 양적으로 많은 분들이 참여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질 적으로도 훌륭한 작품을 볼 수 있었습니다. 상처와 후유증으로부터 치유되기 위하여 노력한 과정에 대해 진정성을 가지고 표 현하였습니다. 독자들 입장에서도 공감하실 수 있는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예전에는 도박중독으로 고통 받는 가족들, 특히 배우자들의 참여율이 높았었는 데, 올해는 부모님의 도박중독문제에서 힘겹게 삶을 지켜가고 싸워나가는 청소년 기 자녀들의 참여가 눈에 띄었습니다. 또한 가족들이 도박중독으로 인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모습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발견하였 습니다. 혹시 담겨있는 작품 속에서 내가 가진 상처가 발견된다면, 그 분들이 회복의 첫 걸음을 시작할 수 있도록 이 수기집에 힘과 용기 또한 담아봅니다. 마지막으로 용기를 내어 수기를 써 주신 많은 분들에게 지면을 빌어 감사의 말 씀을 전해드립니다. 공모전에 접수된 59편이나 되는 작품 중에서 순위를 매기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은 오랜 시간 심사숙고하여 10편의 작품을 선정 2012년 12월 하였습니다. 이 작품들은 도박중독으로 인한 상처를 입게 된 과정과 도박중독의 심사위원 일동 4 _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5

차 례 대상 너무 늦은 깨달음 8 최우수상 도박이라는 이름의 괴물 26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37 우수상 공짜는 없다 47 형부와 언니의 죽음 61 이번에 발간되는 체험수기집은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 중독예방치유센터와 강원랜드 KL중독관리센터가 공동으로 주최한 에서 2012년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수상한 작품들입니다. 장려상 무일푼 삶에서 풍요로운 삶으로 67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77 우리 곁으로 돌아온 엄마 92 빠져나올 수 없는 늪을 나오다 96 아버지 114 수상자들의 신변보호를 위하여 인적사항은 공개하지 않습니다. 6 _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7

2012년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_대상 너무 늦은 깨달음 듯한 두통에 방으로 들어와 이불을 펴고 누웠습니다. 여보, 왜 그러냐니까, 남편한테 못할 얘기가 뭐가 있어, 장모님한테 무슨 일 생 기신거야? 아니에요. 그런데 왜 이래, 당신답지 않게.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그래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7월, 온 가족이 모여앉아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 는데 시골에 혼자 계시는 어머니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어머니가 웬일이세요, 전화도 자주 안 하시는 분이. 저, 저, 그게 말이야.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어머니는 한동안 말씀을 못하시고 망설이기만 하고 계셨습 니다. 왜요?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너무 비싼 것만 아니면 제가 사드릴 테니까 뜸들이지 말고 얘기해보세요. 호호호. 저, 사실은 좀 전에 병원에서 전화가 왔는데 너희 아버지가. 저는 하마터면 전화기를 바닥에 떨어뜨릴 뻔 했습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웃으면서 전화를 받던 제가 차가운 얼굴로, 그것도 손까지 떨면서 딴사람처럼 바뀌자 남편은 서둘러 아이들을 방으로 들여보냈습니다. 여보, 장모님 전화 아니야? 갑자기 왜 그래. 남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소파에 앉혔습니다. 어머니, 저한테 아버지가 어디 있다고 그래요, 그런 이상한 얘기 하시려거든 전화 끊 어요. 그래 못 들은 걸로 해라, 어미가 괜한 전화를 해서 네 속을 상하게 했구나. 어머니는 서둘러 전화를 끊으셨습니다. 몇 년간 잊고 살았던 소름끼치는 아버지라는 단어가 저를 숨 막히게 했고 저는 터질 남편은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적잖게 놀랐는지 한참동안 저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물수건이라도 만들어 오겠다며 나갔습니다. 몇 년간 전 아버지라는 존재를 그저 죽었다고만 생각했고, 저와 제 주변에 나타나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좋았습니다. 그런 존재였는데 병원에서 왜 아버지에게 연락이 왔는지 수없이 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저를 괴롭혔습니다. 저는 흥분한 감정을 잠시 추스르고 어머니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전화를 끊으시면 어떡해요! 병원에서 왜 전화가 왔는데요? 응, 처음엔 가족이 없다고 했다는데 나중에 수술 끝나고 마취에서 깨어나면서 집에 전화를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더구나. 도대체 무슨 수술을 받았길래요? 모르겠다, 병원에 오면 말해준다는데 심각한 모양이야. 그럼 거기서 혼자 죽지, 뭣 하러 가족을 찾는데요! 무슨 염치로... 어미가 죄가 많아서 그렇지 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걱정하다가 너한테 전 화한 거란다. 어머니는 마치 당신이 죄인인양 몇 번이고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셨고, 저는 그런 어 머니 때문에 더 속이 상했습니다. 한 평생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 한번 받아본 적 없이 어찌 보면 바보처럼 일만하시다 가 늙어버리신 어머니셨으니까요. 8 _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9

내일 애들 아빠랑 아침 일찍 갈게요. 그래, 미안해서 어쩌느냐. 아무튼 조심해서 와라. 참 바보 같은 어머니십니다. 남들 같으면 꼴도 보기 싫다고, 아니면 그런 사람 모른다고 일언지하에 전화를 끊었 을 텐데 그래도 남편이라고, 자식들 아버지라고, 병원에서 온 전화를 끝까지 받으 셨던 모양입니다. 어머니와 통화를 끝내고 잠시 긴 한숨이 흘러나왔습니다. 예, 선생님. 너 혹시 집에 무슨 일 있니? 아니요, 아무 일도 없는데. 선생님은 저를 유심히 쳐다보시더니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말씀 드리어라. 무슨 말씀이요? 어, 행정실에서 연락이 왔는데 오늘 너희 아버지가 오셔서 네가 6년 동안 들었던 학 교적금을 해약해 가셨다는구나. 아버지. 아버지라는 존재가 나한테 어떤 존재였을까. 저는 바닷가가 보이는 작은 마을에서 2남3녀의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밭과 논이 꽤나 많이 있었 고, 동네에서도 몇 안 되는 작은 배도 한척 갖고 있었습니다. 그랬던 우리 집이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했던 건 아마도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무렵이 었던 걸로 기억이 됩니다. 소풍을 다녀오던 날 집안에는 눈물을 흘리고 애원을 하시던 어머니와 매몰차게 땅문 서를 가지고 집을 나가셨던 아버지의 그 차갑던 얼굴이 지금도 잊혀지질 않으니까요. 그 무렵부터 아버지는 한 달에 한두 번 집에 오셔서 어머니를 힘들게 했고, 어머니는 그때마다 친척집으로 이웃으로 돈을 빌리러 다니시느라 쩔쩔매셨습니다. 제 적금을요? 그래, 너도 모르고 있었구나.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꼭 말씀드리렴.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학교에서 한 달에 두 번씩 저금을 했던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보통은 그 돈으로 중학교에 들어갈 때 교복도 맞추고 입학금도 보태고 그런 시절이었 으니까요. 집에 오자마자 선생님에게 들었던 말씀을 어머니에게 해드렸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그냥 서럽게 울기만 하셨습니다. 어린 제 마음에도 어머니를 슬프게 하고 가족들을 가난하게 만든 아버지가 죽이고 싶 을 정도로 미웠으니까요. 모두가 즐거워야할 중학교 입학식 때 저는 교복을 장만하지 못해서 학교에 가지 못했 어요. 사복이라도 입고 가라는 어머니의 성화에 집을 나섰지만 하루 종일 바닷가에 앉아서 초등학교 6학년 때였어요. 점심시간에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데 멀리서 아버지가 보였습니다. 오랜만에 아버지를 본거였지만 전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외면했지요. 수업이 끝나고 책가방을 메려는데 선생님께서 저를 조용히 부르셨습니다. 은화야, 이리 좀 와보렴. 우리 집은 왜 이럴까? 그런 생각만 했던 것 같습니다. 학기가 시작되고 한참이 지나서야 친척들의 도움으로 교복을 마련할 수 있었고 그런 것 때문인지 전 더 말이 없고 소극적인 아이로 자랐지요. 제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우리는 이사를 해야 했습니다. 10 _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11

그나마 남아있던 집마저 아버지가 노름빚으로 넘기셔서 우리는 이모가 살고 있는 집 의 창고를 손봐서 그곳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엄마, 나 학교 그만두고 서울 가서 돈 벌게요. 너 미쳤니! 수업료는 어미가 어떡해서든 장만할 테니까 고등학교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마쳐야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머니는 당신처럼 고생하시는 게 다 못 배운 탓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찢어지게 가난 하고 힘든 상황에서도 저를 학교에 보내셨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3년 동안 수도 없이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지만 그런 어머니의 마 음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어요. 전 너무 속이 상해서 다시 기숙사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저기, 은화야, 애비다. 뒤에서 들리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마치 저승사자의 목소리처럼 저를 소름끼치게 만들 었어요.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오세요. 어떻게 알고 여길 찾아왔냐고요. 내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지만, 나 이제 노름 안한다. 노름을 하고 안하고 저는 관심 없으니까 다신 여기 찾아오지 마세요. 알았으니까 잠깐만 나하고 얘기 좀 하자. 그냥 못들은 체 기숙사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직장 동료들도 보이고 해서 어쩔 수없이 아버지와 밖으로 나왔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전 서울에 직장을 얻어서 고향을 떠났습니다. 궁상맞게 울고만 계시는 어머니의 눈물이 싫었고, 느닷없이 집으로 쳐들어와 돈을 마 련해 달라며 살림살이를 때려 부수는 악마 같은 아버지의 그늘이 싫었습니다. 과자를 만드는 제과업체에 취직한 저는 생산직에 근무하며 열심히 돈만 벌었습니다. 한 달에 수도 없이 야근을 해서 받은 월급으로 시골에서 공부하는 동생들 학비도 보 내주고 큰돈은 아니지만 적금도 들었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몸은 힘들었어도 마음은 참 편했던 것 같네요. 함께 근무하는 동료들이 저를 보고 짠순이라고 놀렸지만 전 그렇게 열심히 제 청춘을 일에 파묻혀 보냈습니다. 회사에 다닌 지 4년쯤 되던 어느 날 기숙사 방송에서 제 이름이 나오더군요. 생산2부 이은화씨! 가족 면회 있습니다. 어쩌다 한 번씩 시골에서 동생들이 면회를 왔기 때문에 전 즐거운 마음으로 기숙사 앞으로 뛰어나갔습니다. 그런데 동생들이 보이질 않았어요. 이상하다싶어 주위를 둘러보는데 잠시 후 정문 옆에서 아버지가 나타나셨습니다. 그래, 서울서 직장생활 하느라 힘들지?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으니까 찾아온 용건만 말씀하세요. 그게 전 돈 없으니까 돈 얘기는 아예 꺼내지도 마세요. 나 노름 완전히 끊었다. 그런데 예전에 노름할 때 빚진 게 좀 남아있는데 그놈들이 시골에 있는 네 동생들 학교까지 찾아갔다지 뭐냐. 뭐라고요? 아버지가 그러고도 사람이에요. 내가 너를 볼 면목이 없구나. 지금은 노름에서 완전히 손 뗐다. 애비가 무슨 일이든 해서 갚을 테니 돈 좀 빌려다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아버지가 저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돈을 빌려 달래요. 어쩌겠냐? 네 동생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시달림을 받으니 내가 꼭 일해서 금방 갚아 주마. 전 너무 어이가 없었습니다. 제가 보내준 학비로 구김 없이 열심히 공부하는 동생들이 보고 싶어도 차비가 아까워 서 자주 만나지 못했는데 그런 동생들이 아버지의 노름빚 때문에 시달림을 받아야 된다 12 _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13

고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더군요. 제발 우리 좀 그냥 내버려두세요. 왜 자꾸 나타나서 못살게 구시는 거예요. 그래 알았다, 이번 한번만 동생들 생각해서 애비 좀 살려다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테니 염려 말고, 내가 다시 노름을 하면 손가락을 잘라버리마. 그날 전 4년 동안 옷 한번 제대로 사 입어보지 못하고 부었던 적금을 해약해서 아버지 께 드렸습니다. 이걸로 꼭 빚 갚고 아이들한테 피해 주지마세요. 알았다니까, 고맙다. 아버지는 피같이 모아둔 제 적금을 들고는 뒤도 안돌아보고 사라지셨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눈물 섞인 말들이 모두가 거짓이었다는 걸 알게 된 데는 그리 많은 시 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시골에서 들려오는 소식에는 아버지가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는 딸한테 받은 돈으로 읍내에서 며칠 만에 노름으로 탕진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하니까요. 아버지를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지만 그 일로 인해 제 앞에는 절대 나타나지 못할 거 라는 생각을 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습니다. 제가 열심히 근무해서 시골에 있는 동생들이 걱정 없이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것만 으로 저는 즐거웠습니다. 입을까봐 매사에 조심해주는 모습이 눈에 보였습니다. 1년여의 열애 끝에 결혼을 약속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맛보는 행복에 꿈이 아니기 를 수없이 기도했던 기억이 납니다. 결혼을 한 달여 앞둔 어느 날이었어요. 은화야, 오늘 장인어른 만났었어. 뭐, 뭐라고요? 왜 한 번도 인사 안시켜준거야. 장인어른 참 좋으신 분 같던데. 상견례 때도 전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병원에 계신다며 아버지 얘기를 피했고 지금의 남편은 무슨 사연이 있겠거니 했는지 더 이상 아버지에 대해 묻지도 알려고 들지도 않았 었습니다. 그런 사람 앞에 아버지가 나타났다는 말에 전 숨이 막힐 듯 아무 말 할 수가 없었어요. 아버지가 뭐라고 하셨어요? 어,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고 그냥 자기한테 잘해주라고, 고생 많이 시킨 딸이라 고 마음 아파하시던데. 정말 다른 얘기는 없었죠? 없었다니까 그러네. 장인어른이랑 무슨 사연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가 보기엔 괜찮은 분이시던데 결혼식 때 오시라고 하면 안 될까? 싫어요, 아버지 얘기는 그만했으면 좋겠어요. 지금의 제 남편을 만난 건 스물다섯 살 되던 봄이었어요. 회사에 함께 근무하는 언니의 소개로 만난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저처럼 가난한 시골에서 자라지도 않았고, 화목하고 평범한 집안에서 자란 서울 남자 지만 무엇보다 저를 아껴주고 이해해 주는 착한 사람이었지요. 우린 늘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했고 회사 근처 포장마차에서 국수를 먹으며 행복해 했습니다. 어려운 형편을 이해해주었기에 항상 돈 안 드는 데이트를 선택했고 늘 제가 상처를 알았어, 그만 할게. 잊을만하면 어떻게 알고 제 주위를 맴도는 아버지 때문에 늘 마음이 불안하고 괴로웠 습니다. 수없이 노름을 끊었다던 아버지는 언제나 그대로였고, 어머니야 쉬쉬 하시지만 고향 에 갈 때마다 아버지가 매번 어머니를 힘들게 하고 그때마다 십 원짜리 한 잎까지 싹싹 뺏어서 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으니까요. 막냇동생이야 그때까지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피해가 없었지만 도회지 14 _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15

에 나가 직장에 다니던 동생들은 몇 번씩 아버지에게 월급을 통째로 빼앗길 때가 많았습 니다. 그렇게 아버지에게 돈을 주지 말라고 동생들에게 수없이 다짐을 받았지만 아버지는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동생들에게 돈을 타가곤 하셨으니까요. 아버지 한사람 때문에 가족이 자주 만날 수도, 마음 편히 돈을 모을 수도 없는 비참한 현실이 아버지를 더욱 밉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결혼을 앞둔 우리 앞에 나타났다는 생각을 하니 회사에서도 도무지 일 이 손에 잡히질 않더군요. 그렇게 지금의 남편과 성당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고 서울 변두리 산동네에서 신 혼을 시작했습니다. 제 생애 그토록 행복하고 꿈같던 시절은 아마 없었을 거예요. 늘 저를 믿고 아껴주는 남편과 함께 웃을 수 있어서 행복했고, 곧 첫아이를 임신하는 축복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술에 약간 취해서 퇴근을 했더군요. 웬일이에요, 술도 잘 안마시면서. 어, 오늘 장인어른이랑 한잔 했어. 기분이 좋아서 너무 많이 마셨나봐. 또 만났어요? 아이참, 사위가 장인어른 만나는 건 당연한 거잖아. 오늘 회사 앞으로 오셨더라 고. 당신 회사는 어떻게 알고 가셨대요? 결혼 전에 처음 뵀을 때 내가 명함을 드렸거든. 아버지가 무슨 부탁 같은 거 안 했어요? 부탁은 무슨, 그냥 기분 좋게 술만 마시고 온 거야. 임신을 한 상태에서 나쁜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고, 되도록 편한 마음을 갖고 싶었기 에 그렇게 아버지 얘기는 일단락 짓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은행에서 남편 앞으로 우편이 하나 날아왔더군요. 무얼까 하고 꺼내봤는데 전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남편 앞으로 대출이 두 번 돼있었는데 너무 큰 액수라 겁이 났습니다. 아니 나도 모르게 이렇게 큰돈을 왜 대출했을까? 우려했던 걱정은 무서운 현실이 되어 나를 슬프게 했습니다. 당신 이렇게 많은 돈을 왜 나 몰래 대출한 거예요? 음, 내가 꼭 쓸데가 있어서 솔직히 말해 봐요. 나도 다 짐작하는 게 있으니까 솔직하게 말해보라구요. 사실... 장인어른이 장사를 하시려는데 급하게 돈이 좀 모라란다고 해서 빌려드렸어.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선뜻 큰돈을 대출해서 아버지에게 드린 남편을 욕할 수도 없고, 그저 불행한 내 신세 를 한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솔직히 그때는 뱃속에 아기와 함께 세상을 등지고 싶다는 생각을 몇 번이고 한 적이 있었어요. 차라리 제가 없어져야 이런 불행이 끝이 난다는 그런 생각을 말입니다. 우린 아직 젊으니까 돈이야 열심히 다시 벌면 되잖아. 그러니까 화 풀어. 어떻게 나한테 상의 한마디 없이 그 많은 돈을 드려요? 장인어른이 당신한테는 꼭 비밀로 해달라고 몇 번을 부탁하셔서 어쩔 수 없었 어 살아가면서 참 열심히 누구한테 싫은 소리 한번 안 해보고 살았건만 늘 이렇게 저를 절망에 빠트리는 아버지가 숨이 막힐 정도로 싫었습니다. 이제 절대 아버지 만나지 마세요. 그래도 어떻게. 그게 아버지 살리는 거라고요. 아무도 아는 척 하지 않고, 아무도 십 원 한 잎 주지 않아야 그나마 나을 수 있는 병이라고요. 16 _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17

아, 알았어. 그렇게 할게. 결혼 전 제가 어머니께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 냉정하게 생각 좀 하세요. 아버지 저렇게 도박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시는 거 저건 분명히 심각한 병이라고요. 노름에 빠져서 저러긴 해도 앞으론 절대 노름 안한다고 그러니까 한번만 더 믿어 보자. 어머니가 매번 그러시니까 아버지 병을 못 고치는 거예요. 병이라고까지 얘기하면 어쩌냐, 남들 들을라. 이미 동네사람들은 모두 다 아버지가 노름에 미쳐 계신다는 걸 알고 손가락질 하고 있는 데도 어머니는 늘 아버지의 도박병을 숨기시려고만 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병은 이제 본인 의지만으로는 고칠 수 없는 심각한 병이라고요. 요 즘 도박중독을 치료해주는 기관도 있다고 하니까 제발 좀 가서 상담도 받아보고 하자 니까요. 네 아버지가 그런데 갈려고 하지도 않겠지만 나도 그렇게 까지는 하고 싶지 않구나. 저러다 좋아지겠지,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보자. 아버지의 도박중독에 대해 어머니는 늘 이런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시는 모양 이셨어요. 그로인해 우리 가족은 언제나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불안한 삶을 살수밖에 없었습 니다. 못했습니다. 마치 술이나 마약에 중독된 사람처럼 돈을 마련해 달라며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눈동 자로 어머니를 괴롭히기 시작했지요. 돈을 어디서 빌리겠냐며 눈물짓는 어머니를 짐승처럼 때리는걸 보고 저건 아버지 의 지로 고칠 수 없는 심각한 병이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어머니와 전 읍내로 아버지를 찾아 나선 적이 있었어요. 수소문 끝에 노름을 하는 곳을 찾았는데 방에 둘러앉아 노름을 하고 있던 아버지의 표정은 집에서 보던 표정하고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그렇게 행복한 표정을 평소엔 한 번도 본적이 없으니까요. 여보,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빨리 집에 가 봐요. 저놈에 여편네가 여기를 어디라고 찾아와! 알았으니까 당장 애 데리고 꺼져!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아버지는 그렇게 어머니와 저를 그곳에서 쫓아내셨고 3일장을 치르는 내내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남편이 아버지에게 대출받아서 준돈을 조금이라도 보태기위해 임신 중에 하루도 빠짐없이 집에서 부업을 했습니다. 여보, 뱃속에 아기 때문에 몸도 힘들 텐데 이제 부업은 그만하면 안 될까? 전 괜찮아요, 집에서 그냥 있으면 뭐해요. 이거하고 있으면 잡념도 없어지고 많지는 않지만 돈도 생기고 좋잖아요. 말은 그렇게 태연하게 했지만 아버지 때문에 남편이 힘들어할 생각에 한 푼이라도 벌 제가 아버지의 도박중독을 심각한 병이라고 느꼈던 건 고등학교1학년 때였습니다. 한 달에 한두 번 집에 들어오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날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꼼 꼼히 눈여겨봤으니까요. 아마도 아버지란 사람이 싫다 못해 불쌍하게까지 느껴져서 그랬나 봐요. 아버지는 마치 무엇에라도 쫓기는 사람처럼 몹시 불안해했고,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어서 아버지의 빚을 갚아주고 싶었습니다. 카세트테이프에 부품을 끼워 넣는 부업도 해보고, 또 어떨 땐 여행용 휴지를 케이스 에 담는 부업까지 아마 열 가지도 넘는 부업을 했던 생각이 납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을 힘들게 하고 끊임없이 괴롭히던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끊겼던 게 18 _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19

아마 5년 정도 된 걸로 기억합니다. 시골에 계시는 어머니에게 전화가 한번 왔었던 걸 빼고는 그 어느 가족에게도 연락이 없었으니까요. 아버지가 가족들을 힘들게 하지 않으니까 우리 형제들은 더할 나위 없이 즐겁고 행복 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작지만 저축도 할 수 있어서 좋았고, 불안에 떨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그렇게 남들처럼 웃으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가 느닷없이 어머니의 전화를 받으니까 도저히 어찌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 환자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잠시 서류를 뒤적이던 직원은 어디론가 전화를 했고 우리를 의사선생님이 있는 곳으 로 안내했습니다. 이 수길씨 가족 되시죠? 네. 다른 게 아니고 이 환자가 지난 3월에 공사장에서 추락사고를 당해서 저희 병원 중환 자실로 들어오셨는데요. 공사장이요? 예, 그때 뇌수술 받으시고 허리랑 다리 수술까지 받으셔서 지금은 거동을 아예 못하 여보, 도대체 장모님이 뭐라고 하시기에 당신이 그러는 거야? 저는 남편에게 어머니와의 통화내용을 말해주었습니다. 참, 어쩌다가 병원에 가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내일아침 일찍 시골에 내려가 봅시다. 미안해요, 여보. 남편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제 자신이 창피하고 한심하게 느껴지더군요. 부부사이에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당신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다음날 아침 일찍 고향에 가기위해 남편과 집을 나섰습니다. 남편은 내 눈치를 보느라 조용히 운전만 했고, 전 지나온 세월들이 너무 힘들고 가슴 아파서 자꾸만 눈물을 흘렸습니다. 여보, 그만 좀 울어요. 다 잘 될 거야. 우리가 무슨 걱정이 있어. 아이들 건강하게 잘 크겠다, 부부 금슬 좋겠다, 남편 직장생활 잘하겠다, 아! 그러면 된 거지. 안 그래! 남편의 따뜻한 말이 위로가 되어 간신히 힘을 내 고향에 도착했습니다. 어머니는 사위 얼굴 보시기가 창피하다며 몇 번이고 남편의 손을 잡고는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 하셨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전화가 왔다는 병원을 찾았을 땐 이미 늦은 오후가 되고 있었어요. 저기, 실례합니다. 어머니한테 여기서 전화가 왔었다는데. 시는 상황입니다. 대소변을 받아내는 상황이죠. 의사선생님은 그간의 일을 상세히 말씀해주셨습니다. 이젠 더 이상 손쓸 수도 없고, 수술받기엔 체력도 연로하셔서 마지막 수술을 해드린 건데 성과는 보이지가 않네요. 죄송합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건가요? 솔직히 이런 말씀 드리기 참 곤란하지만 지금 뇌수술 경과도 좋지를 않고, 말씀도 제 대로 못하시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장기 요양원으로 모실 건데 아마 길어야 1년 정도 보 고 있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수술비랑 병원비는 얼마나 된데요? 어머니는 그 상황에서도 돈 걱정을 하시고 계셨습니다. 어차피 산재 환자라 그런 건 걱정 안하셔도 되고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안남은 시간, 마음이라도 편안하게 해드렸으면 싶네요. 의사선생님의 말씀이 끝나자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언제고 사람 되서 나타날 줄 알았더니 죽을 때가 돼서야 나타나는구나. 이런 기구한 팔자가 어디 있누. 한참을 망설이다가 아버지가 누워계시는 병실을 찾았습니다. 20 _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21

병실에는 초라하게 늙어버린 깡마른 노인 한분이 누워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 보여 줄라고 찾았어요? 뭐 하러 우릴 찾아요? 그냥 조용히 죽으면 끝날걸! 뭐 할라고 찾냐구요. 어머니, 그만하세요. 옆에 다른 환자들도 있잖아요. 저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하도 시끄러웠는지 한참 만에 아버지가 눈을 뜨셨습니다. 저, 저. 의사선생님 말씀처럼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가르쳐 드릴게요. 옆에서 다른 환자를 돌보던 간호사가 옆으로 다가왔습니다. 제가 이 할아버지 여기 처음 오셨을 때부터 도와드려서 전 무슨 말씀하시려는지 대 충 알거든요. 예,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뭐라고요? 한참 아버지 옆에서 무언가 얘기를 듣던 간호사가 병실침대 옆에 있는 서랍에서 가방 을 하나 꺼냈습니다. 이걸 전해 드리래요. 이게 뭔데요? 할아버지가 가족들한테 드리려고 막노동일 하셔서 모으신 건데 얼마 되지 않아도 꼭 받으시래요. 이거 전해 드리려고 전화해달라고 하셨다는 거 같은데요. 간호사가 전해준 통장에는 220만7천원이 들어있었습니다. 누가 이런 돈 받으면 좋아할 줄 알았어요. 평생 사람구실 못하고 노름판만 돌아다니 더니 죽을 때까지 사람 속을 뒤집어 놓네. 이 늙은이가.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도무지 가슴만 막막했습니다. 아버지는 무언가 말씀을 하시려고 입을 계속 움직였지만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한마 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더군요. 다만 후회가 많으셨는지 소리 없는 눈물만 자꾸 흘리고 계셨습니다. 그토록 증오하고 미워했던 아버지였는데 이렇게 초라하고 힘없는 촛불처럼 앙상한 모습으로 누워계시니까 그저 불쌍하게만 느껴졌어요. 한참을 지켜보다가 남편과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을 나섰습니다. 아버지는 떠나가는 어머니와 저희 부부를 보시면서 통한의 눈물만 흘리시는 것 같았 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집으로 돌아가는데 한참 아무 말씀이 없으시던 어머니께서 옆에 있던 제 손을 꼭 잡으시더군요. 은화야, 어미가 백번 잘못했다. 무슨 말씀이에요, 어머니가 뭘 잘못해요? 오래전에 네가 어미한테 그렇게 아버지를 치료하자며 애원했을 때, 그때 어미가 어 떻게든 네 아버지 모시고 상담도 받고, 치료도 했으면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텐데. 다 지난일인데 지금 와서 후회한들 뭐하겠어요. 어머니는 고개를 떨구신 채 한숨만 자꾸 내쉬었습니다. 어미가 무식해서 그런 거야. 진즉이 네가 얘기했을 때 아버지 혼자선 고칠 수 없는 병이라 생각해고 치료를 받았더라면 이지경은 안 됐을 텐데, 어미가 무식해서 그런 거 야. 다 이 못난 에미 탓이다. 어찌 보면 죽음을 코앞에 두고 후회의 눈물을 흘리시는 아버지나 저러다 나아지겠지, 저러다 나아지겠지 하며 도박중독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셨던 어머니의 후회나 둘 다 너 무 늦은 깨달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좀 더 일찍 도박중독의 심각성을 깨닫고, 어떻게든 아버지를 치료받게 했다면 지금처 럼 통한의 눈물은 흘리지 않았어도 됐을 테니까 말이에요. 며칠 전 남편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22 _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23

여보, 원망스럽고 한없이 미운 아버지지만 이번 추석 때는 어머니 모시고 요양원에 한번 다녀와야겠어요. 잘 생각했어, 여보. 장인어른이 비록 도박에 빠져서 온 가족들을 힘들게 했지만 늦게 나마 후회하시고 그렇게 우시는 거 봤잖아. 그래요, 얼마 안남은 아버지 인생을 편안하게 보내 드려야겠어요. 그럽시다.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거실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가 제 옆 에 앉았습니다. 엄마. 왜, 엄마한테 무슨 할 말 있니? 엄마가 얘기 안 해주셔서 모를 것 같지만 저도 외할아버지에 대해 대충은 알고 있 어요. 실제로 겉으로 드러나질 않아서 그렀지, 우리 주위에는 저처럼 도박중독자를 가족으 로 두고 있는 가족들이 많을 거예요. 그런 가족들에게 꼭 이 말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도박중독은 절대로 본인의 의지로 나아질 수 있는 병이 아니란 걸 명심하셨으면 좋겠 어요. 병은 알려야 낫는다는 옛말이 있잖아요. 부끄럽다고나 창피해야할 일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상담하고 치료하면 충분히 나을 수 있다는 병이란 걸 깨달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저희 가족처럼 너무 늦게 깨달아서 많은 시간 온 가족들이 피폐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고통은 겪지 않으시길 말이에요. 알코올중독이나 마약중독처럼 도박중독 역시 하루라도 빨리 가족들이 함께 도와서 치 료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게 최선일거에요. 아니 네가 어떻게. 아빠한테 들었는데 이번 추석 때 외할아버지 요양원에 가신다면서요. 저도 같이 가 면 안 돼요? 거긴 가서 뭐하려고. 그래도 외할아버지잖아요. 같이 가도 되죠? 그래, 같이 가자. 돌이켜 보건데 아버지가 도박중독에 빠지지만 않았더라면, 아니 하루라도 빨리 도박 중독을 치료할 수 있었더라면 여느 집처럼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의 귀여움을 받으며 더 소중한 추억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너무 늦은 깨달음이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지금이라도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는 제 자신이 한없이 고맙게 느껴지는 하루입니다. 가족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곧 나아지겠지 라는 망상은 버리시고, 억지로라도 도박 중독을 치료하고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는 게 가장 바람직한 방법일겁니다. 이제 저희가족처럼 불행한 삶을 사는 가족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불혹의 나이에나마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어서 한결 마음이 가볍습니다. 가벼운 놀이와 도박중독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사회적인 시선도 하루빨리 자리 잡기를 바래봅니다. 24 _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25

2012년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_최우수상 도박이란 이름의 괴물 의 도박중독 때문이었다. 결혼하기 전, 총각시절부터 아빠가 도박에 빠져 지냈다는 사 실을 엄마는 전혀 알지 못한 채 결혼식을 올린 상태였다. 결혼을 한지 한 달 만에 아빠는 자신의 본성을 들어내고야 말았다. 집에 들어오지 않 는 것은 기본이었고 돈이 생기면 무조건 노름판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엄마 는 아빠를 찾아다니며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애를 썼지만, 아빠는 그런 엄마에게 설상가 상으로 폭력까지 휘둘렀다. 하지만 그래도 엄마는 아빠를 포기하지 않았다. 가정을 지키 [나는 도박이라는 말이 무섭다.] 나는 도박이라는 단어가 싫다. 아니, 솔직하게 이야기 하자면 그 단어가 자체가 무섭 다고 해야 더 알맞을 것이다. 내가 미래의 남편에게 바라는 점은 딱 한가지인데, 그것은 돈도 아니고 훤칠한 키도 아니며 능력도 아니고 외모도 아니다. 그런 요소들은 전혀 중 요하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나는 나의 미래의 남편이 이것 하나만은 지켜주는 사람이 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도박을 하지 않는 사람 이다. 가끔씩 친구들 끼리 만나 자신이 좋아하는 이상형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나는 도박을 하지 않는 사람 이 좋아! 라며 장난 식으로 얘기를 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의 사정을 잘 모르는 친구 들은 그게 뭐냐며 웃어넘기지만, 이것은 내가 지금까지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세운 가장 중요한 불문율이라 말할 수 있다. 내가 이토록 도박 이란 단어와 행위에 민감한 이유는 모두 아버지 때문이다. 엄마와 나. 우리 모녀는 아버지의 도박 때문에 평생을 고통 받으며 살아야 했는데, 도박이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한 가정을 무너트릴 수 있으며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트릴 수 있는 것 인지, 엄마와 나는 지난날의 체험을 통해 무서울 정도로 잘 알고 있다. 고 싶었던 엄마는 아빠를 이해하고자 노력했으며 아이가 생기면 달라질 것이라 믿고 힘 든 시간들을 참아냈다. 하지만 내가 태어났어도 집안 상황은 무엇 하나 좋아지질 않았다. 아빠는 여전히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고 집안일에 무관심했다. 가끔씩 집에 들어온 아빠는 손수 음식도 해주고 다정하게 나를 안아주기도 했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 다. 다정했던 아빠는 몇 분 만에 야수로 돌변해 집안을 두려움이란 글자로 물들게 했다. 엄마에게 돈을 달라고 윽박을 지르거나, 엄마가 돈을 주지 않으면 다른 남자가 생겼냐 는 등의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으며 엄마에게 폭력을 가했다. 하지만 그래도 엄마는 견 뎌냈다. 자식인 나를 위해 참고 견디며 아빠가 도박을 끊고 가정으로 돌아오기만을 바 랬다. 하지만 그런 엄마의 기대치를 짓밟아버린 아주 끔찍한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그날도 평소와 같이 도박을 하러 가려는 아빠를 엄마는 온 몸으로 막아서고 있었다. 가 려는 아빠와 말리던 엄마의 사이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갑자기 아빠가 이번 달 전화 비가 왜 이렇게 많이 나왔느냐며 생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그리곤 엄마가 무슨 말을 할 새도 없이 혹시 바람이 난거 아니냐며 엄마를 죽이겠다고 식칼을 뽑아 달려들었다. 칼을 들이대는 아빠의 행동에 혼비백산한 엄마는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며 집 밖으로 뛰쳐나 갔고, 그것을 본 이웃들이 아빠를 뜯어 말리고 엄마를 숨겨주어 무사히 사건이 일단락 될 [불행의 시작] 때는 바야흐로 88년도 6월, 우리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6월의 신부로 웨딩 마치를 올리게 되었다. 사랑받는 부인으로 그리고 아내로... 행복만 가득할 것 같던 엄 마의 결혼생활은 채 한 달이 되기도 전에 모두 산산이 부서지고야 말았다. 이유는 아빠 수 있었다. 어렸던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동네 아줌마 품에 안겨 하염없이 울기만 했었다. 그 당시 아빠의 칼부림 사건은 어렸던 나에게도 그리고 당사자인 엄마에게도 너 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엄마는 그 사건을 통해 더 이상 아빠에겐 어느 가능성도 없 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결국 내가 7살이 되던 해에 이혼을 결심하시게 되셨다. 26 _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27

[잠깐의 행복과 다시 찾아온 불행] 부모님이 이혼을 하신 뒤 친척집에 맡겨졌던 나는, 엄마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후 에야 서울로 와 엄마와 같이 살 수 있게 되었다. 엄마와 함께 살면서 아빠의 빈자리 같 은 것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나는 집에 아빠가 계시지 않아 더 행복했다. 일단 전보다 눈에 띄게 밝아진 엄마의 얼굴이 좋았고, 더 이상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때 리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그렇게 우리 모녀는 어두운 지난날을 잊고 새롭 게 살아갈 희망에 부풀어있었다. 하지만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던 불행이란 이름의 그림자는 소리 소문도 없이 어느새 엄마와 나의 옆에 다가와 서 있었다. 아빠는 엄마와 이혼을 하긴 했지만 자식인 나를 보겠다는 핑계로 종종 엄마를 찾아오 곤 했었다. 자신의 결혼생활을 상처로 얼룩지게 만든 아빠가 싫고 증오스러울 만도 하 련만 엄마는 집으로 찾아오는 아빠를 딱히 말리지 않았다. 아빠가 아무리 밉고 원망스 럽다 해도 그것은 자신의 마음일 뿐이지, 부모 자식 간의 연이란 엄마가 싫다고 해서 그 렇게 쉽게 두부 자르듯 쉽게 끊을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셨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엄마 는 전혀 모르고 계셨다. 아빠는 그러한 부모 자식의 연마저 끊어버릴 만큼, 무시무시한 도박이라는 이름의 괴물에게 잠식당해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학교가 끝난 뒤 집으로 가보니 집안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매일 아침 9시면 일을 가 시던 엄마가 그날따라 집에서 누워계셨기 때문이다. 어렸던 나는 엄마가 일을 가지 않고 집에 계신다는 사실이 그저 좋았다. 하지만 소리도 내지 못하고 뚝뚝- 눈물만 떨어트리 며 서럽게 울고 계신 엄마를 보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울고 있는 엄마의 머리맡에는 여러 장의 하얀 종이가 수두룩하게 놓여 있었다. 그것 은 모두 카드 고지서였다. 엄마는 쓴 적도 없는 어마어마한 양의 카드빚이 고스란히 엄 를 낭떠러지로 밀어 버린 뒤, 아빠는 그렇게 혼자 유유히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내가 성 인이 된 지금까지도 연락이 되질 않고 있다. [엄마의 상처 그리고 나의 상처] 순식간에 우리 집은 엄청난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치매에 걸리신 외할아버지, 큰 외삼 촌과 작은 외삼촌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 식구의 실질적인 가장역할을 하며 남들보다 배 로 열심히 사셨던 어머니는 그 사건 이후로 삶의 의욕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셨다. 아침 9시에 출근해 밤 11시가 넘어서 집으로 돌아오던 엄마였다. 매일을 서서 일해 퉁퉁 부운 다리를 해가지고도 차비가 아깝다며 걸어서 출퇴근을 하시던 엄마였다. 그렇게 쉼 없이 일 하시고도 주말에는 내 손을 붙잡고 근처 공원이라도 함께 가주시던 그런 다정한 엄마였다. 하지만 엄마가 그토록 열심히 살아도, 죽도록 노력해도 세상은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 듯 엄마에게 더 큰 시련만을 안겨줄 뿐이었으며 계속되는 불행의 굴레에 엄마는 지칠 대 로 지쳐버린 상태였다. 결국 엄마는 더 이상 버텨나갈 힘이 없으셨는지, 아빠의 카드빚 사건이 있고나서 며칠 후 스스로 손목을 그어 자살시도를 하셨다. 부엌 옆에 붙어있는 조그마한 쪽방에 죽은 듯 누워 계시는 엄마. 하얀 베개와 이불을 축축하게 적신 검붉은 피. 그리고 그 가운데 이질적으로 누워 있는 엄마. 그리고 그런 엄마의 옆에 놓여 있는 커다란 부엌칼. 엄마에게서 훅 끼쳐 나오는 피비린내까지, 너무 큰 충격을 받은 일이라 그런 것일까? 내 눈과 머리에 생생히 각인 되어있는 그날의 그 모습은,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마치 어제의 일인냥 또렷하게 떠올라 나를 괴롭게 한다. 다행히 빠른 신고와 대처로 엄마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나, 엄마의 손 목과 나의 가슴에는 평생을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상처가 남게 되었다. 마의 앞으로 나와 있었다. 알고 보니, 나를 핑계로 엄마를 찾아왔던 아빠가 엄마의 신 용카드를 몰래 훔쳐 달아나 그 카드로 도박을 했던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엄마는 아빠에게 애타게 전화를 해봤지만 아빠의 핸드폰은 이미 없는 번호가 되어 있었으며, 그 어디에서도 아빠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손쉽게 엄마와 나를 끝도 모 [쪽방 촌에서의 새로운 시작] 병원에서 퇴원을 하시긴 했지만, 그 이후로 엄마는 일을 나가시질 못했다. 연달아 터 진 큰 사건들에 의해 엄마는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 많이 쇠약해지신 상태였다. 그런 28 _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29

데 그 와중에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게 되었고, 외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뒤 엄마는 우리가 살던 집을 미련 없이 팔아버리셨다. 그리고 그 집을 판돈으로 아빠의 카드빚을 어느 정도 갚은 후, 엄마와 나는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쪽방 촌이란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차마 엄마에게 티는 낼 수 없었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쪽방 촌이란 곳에서 살게 된 나 는 막막함에 눈물이 흘렀다. 커다란 가옥에 4가구가 다닥다닥 붙어사는 형식의 집. 좁디 좁은 방 한 칸. 냉장고와 행거, 서랍장 등을 넣고 나니 꽉 차는 방. 엄마와 나 둘이 누우 면 발과 머리가 방 끝과 끝에 닿는 그런 방. 그리고 방 밖에 위치해 있는 하나뿐인 공용 화장실까지. 이사비용이 없어 직접 손수레로 끌어온 짐들을 풀던 날. 나는 엄마에게 들 키지 않기 위해 입을 틀어막고 대문 앞에도 조용히 눈물을 흘렸었다. 빚을 갚고 새로운 곳에서 다시 한 번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쪽방 촌으로 이사를 온 것 이었지만, 쪽방 촌에서의 하루하루는 힘겹기만 했다. 여름이면 4가구가 사용하는 화장 실에서 악취가 나 벌레가 들끓었고 팔뚝만한 쥐가 하수구를 통해 드나들었다. 게다가 겨울이면 밖에 있는 호스가 얼어 밥도 해먹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겨울만 되면 엄마와 나는 밖에서 밥을 사먹어야 했다. 하지만 그 비용도 부담스러워 우리 모녀는 즉석카레 와 즉석짜장을 몇 십 개씩 사와 한겨울 내내 먹곤 했었다.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는 방학 기간 내내 즉석카레만 먹어야 했던 적도 있었는데, 그때 너무 질린 탓인지 나는 지 금도 카레는 잘 먹지 않게 된다. 위생상 좋지 않은 시설과 부실한 식사까지,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엄마의 몸 은 점점 이상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엄마는 기력 없이 매일을 방에 누워 계셨고 밥 한 숟갈도, 심지어 물 한모금도 잘 삼키시질 못했으며 이상할 정도로 점점 말라가고 있 었다. 그런 엄마를 모시고 간 보건소에서 우리 모녀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들어야 만 했다. 잘 먹지 못하고 면역력이 약해져 폐결핵과 대장결핵이 동시에 왔다는 말이었 다. 엄마의 병명을 듣는 그 순간 하늘이 노래지고 땅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 다. 엄마는 내 인생의 전부였고 내가 유일하게 의지하고 살아가는 하나뿐인 존재였다. 그런 엄마가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뭔가에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리고 그와 동시에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엄마를 낫게 해드리려면 내가 강 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엄마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 었다. 이 쪽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리고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공부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 나 는 주변 친구들이 독하다고 욕을 할 정도로 이를 악물고 공부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시험기간에는 잠도 자지 않았고, 4시간씩 수면을 취했으며 자지 않기 위해 한 겨울에도 얼음물에 발을 담구고 입에 얼음을 문 채 공부를 했었다. 나는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그리고 더 좋은 집에서 엄마를 호강시켜드리고 싶어서 악착같이 공부에만 매달렸었다. [다시 찾아온 행복 그리고 기적] 다행히도 그런 나의 노력은 좋은 결과가 되어 나와 엄마의 눈앞에 나타나 주었다. 중 학생 때만 해도 하위권을 맴돌던 성적이 고등학교에 가서는 전교 1-3등 안에 드는 상위 권으로 변하게 되었다. 하지만 변한 것은 나의 성적뿐만이 아니었다. 제자리에 서서 포 기하지 않고,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려 노력하자 우리 모녀에게는 소위 말하는 기적 이 라는 것이 찾아와주었다. 우선 동사무소에서 저소득층자녀로 선정이 되어 어느 정도의 지원금을 받게 되었으며 학비 또한 지원받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방학 때면 식당에서 무료로 밥을 주시거 나 무료과외를 해주시겠다는 분들도 계셨으며 다달이 후원금을 보내주시는 분도 생기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막막하고 캄캄한 터널 속 같았던 세상살이가 많은 분들의 도움과 후원으로 차츰 차츰 밝은 빛을 띠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기적은 바로 엄 마가 조금씩 병을 이겨내기 시작하셨다는 점이었다. 조금씩 좋아지는 집안 상황에 엄마 도 다시 기운을 내시기 시작했으며, 식사도 하시고 동네 산책을 해도 될 만큼 건강이 많 이 회복되시게 되었다. 30 _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31

TV나 책에서만 보던 기적 이라는 것이 진짜로 찾아온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기적이 내가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찾아온 것이라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굳이 공부가 아 니었더라도 내가 열심히 살고자 노력만 했다면, 다른 부분에서 그러한 노력들을 보상받 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어렸고 학생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그 노력 의 대상을 공부로 삼은 것뿐이었다. 아무튼, 그때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노력을 하면 불 행의 늪에서도 행복으로 가는 길을 찾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가슴으로 깨닫게 되었다. 지금 나는 내가 원하던 대학교에서 4년 동안 장학금을 받으며 장학생으로 학교를 다 니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쪽방이 아닌 국가에서 운영하고 있는 임대주택에서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데, 이 집으로 이사를 온 뒤부터 엄마는 부쩍 더 밝아지셨으며 건강해지 셨다. 화장실도 집안에 있고 부엌도 있으며 365일 온수가 나와 따뜻한 물로 씻고 밥을 해먹을 수가 있다. 거실에 앉아 엄마와 함께 누워 TV를 보노라면 괜스레 웃음이 새어 나온다. 이러한 것들은 다른 사람들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상일지도 모르지만, 우리 모 녀에게는 너무나도 커다란 행복으로 다가온다. 물론 엄마의 건강이 완벽하게 회복된 것은 아니다. 한번 잃어버린 건강은 그렇게 쉽 게 돌아오지는 않는 법이라, 엄마는 몇 년째 신경정신과를 다니며 신경안정제를 드시고 있다. 옛날의 괴로운 기억들이 아직도 엄마의 머릿속에 남아 엄마를 힘들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시던 예전에 비해 지금은 매우 좋아지신 상 태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아마 시간이 좀 더 흐른다면, 엄마의 힘든 기억들도 조금은 흐려지게 되지 않을까? 얼른 엄마의 힘든 기억들이 무뎌져, 엄마가 신경안정제를 드시 지 않고도 편히 주무실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래본다. 물이 뭉개고 짓밟은 것은 단순히 돈과 그에 따른 가난이 아니었다. 그 괴물은 엄마의 결 혼생활을 깨트리고 우리의 가정을 부쉈으며 엄마의 인생을 뒤흔든 뒤, 나의 행복한 유 년 시절과 학생시절의 추억을 앗아가 버렸다. 도박이란 괴물이 무너트리고 간 것은 그 렇게나 많았고 그렇게나 컸다. 몇 번씩이나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힘들고 어려웠 었지만, 그때마다 나에게 큰 위로가 되어주던 시 한편을 소개하고 싶다.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 정 현종- 나는 가끔 후회 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 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도박이란 이름의 괴물이 무너트린 것을 되찾아 오기까지] 정말이지, 도박이란 이름의 괴물이 무너트린 것을 다시 되찾아 오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물론 아직도 모든 것을 다 되찾아 온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우리 모녀 는 도박이란 괴물에 의해 너무 오랜 세월을 힘들어하고 아파해야만했다. 도박이라는 괴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32 _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33

이는 정현종 시인의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이라는 시의 전문이다. 이 시는 힘 들고 어려웠던 시기에 나를 지탱해주던 시였다. 매순간 찾아오는 절망의 앞에서 모든 것을 다 포기하려고 하다가도 나는 이 시를 읽으며 참아냈다. 모든 순간이 다 꽃봉오리 라고, 내 노력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라고 믿으며. 그 언젠가는 나의 꽃도 활짝- 세상 어느 누구의 것보다도 더 예쁘게 필 것이라 생각하며 그렇게 견뎌왔다. 이 시는 힘들었 던 그 시절 나에게 많은 위로와 힘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정말로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 자 기적이 찾아왔고 아름다운 꽃봉오리가 피게 되었다. 하지만 그 꽃봉오리가 피기까지, 그리고 우리 모녀가 도박이라는 괴물에게서 잃어버 린 것들을 되찾아 오기까지의 여정은 너무나 험난하기만 했다. 꼬박 22년이 걸려서야 나와 엄마는 도박이라고 하는 그 괴물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솔직히 나는 이 글을 쓰는 내내 너무나도 괴로웠다. 우리 모녀가 가장 힘들고 아파해야했던 그 시기를 다시 생각해내 글로 쓴다는 행위 자체가 힘겨웠다. 하지만 반대로, 그랬기 때문에 나는 더더욱 이 글을 써야한다고 마음먹었다. 날이 갈수록 도박의 방법은 다양해지고 있으며, 만연하는 자본주의와 한탕주의로 인해 사람들은 예전보다 더 손쉽게 도박의 유혹에 빠져들게 되었다. 순간적인 충동에 못 이겨, 혹은 쉬운 방법으로 빨리 돈을 벌고 싶어서 등등 그 이유도 매우 다채로워지고 있다. 예전에 TV에서 카지노 에 대해 취재를 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내가 본 화면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봐온 카지노의 모습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었다. 화려하거나 멋진 옷차림의 사람들은 생각보다 별로 없었고 오히려 씻지도 못한 채 허름한 옷을 걸친 사람들이 카지노 문 앞에 줄을 지어 서있었다. 그들은 카지노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돈을 구걸하거나 자신이 타고 온 자가용 등을 담보로 돈 을 빌리기도 했다.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은 카지노에서 가진 돈을 모두 잃고 빈털터리가 된 사람들이었다. 도박 때문에 자신이 만들어 놓았던 삶의 기반을 전부 잃게 된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 도 다시 도박판에 뛰어들려하고 있었다. 빠른 시간 내에 자신이 잃은 만큼 돈을 벌기 위 해서는 도박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도박은 더 큰 도박과 빚 을 부를 뿐. 결국 그 취재가 끝나가는 동안 그 도박의 미수에서 벗어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가로 유명한 파스칼은 도박을 즐기는 인간은 불확실한 것을 얻기 위해 확실한 것을 걸고 내기한다. 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는데 나는 이 명언을 듣 고 우리 아빠가 생각이 났었다. 나의 아빠는 불확실한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 던 것 중에 가장 확실한 것인 가정을 버린 사람이었다. 나는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모든 분 들이, 불확실한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확실한 것 모두를 내던져버리는 그런 바보 같은 행동은 하지 않으시길 바란다. 하지만 분명 위의 다큐멘터리 속사람들처럼 이 미 모든 것을 잃으신 분이나 혹은 잃기 직전까지 가신 분들이 계실 거라 생각된다. 내가 괴롭고 힘들지만 이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것은 바로 그러한 분들 때문이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우리 아빠처럼 도박중독에 빠진 분들이 이 글을 읽고 조금이라도 도박중독에 벗어나시길, 그리고 도박이란 괴물로 인해 나와 엄마 같은 피해 자가 다시 생기지 않길 바라며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도박으로 인해 깨어져 흩어지게 되었지만, 이 글을 읽으시는 다른 분들은 순간적인 유혹 때문에 자신의 곁에 있는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으시길 바란다. [이 글을 마치며..] 내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단 한 가지 단언하는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모든 순간 은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수 있는 꽃봉오리이지만 도박만은 그런 꽃봉오리가 아니다. 라는 것이다. 도박은 내가 열심히 한다고 해서 나의 노력의 여부에 따라 꽃을 피워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도박의 꽃봉오리는 겉보기엔 크고 화려해 사람들을 홀리지만, 결코 꽃잎을 피워주거나 열매를 맺는 일이 없는 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피지 않을 모 조 꽃을 피우기 위해 애를 쓰기 보다는 내 주변에 있는 소중한 친구나 가족들을 생각하 며 혹은 아름다운 꽃으로 활짝 피어날 수 있는 내 자신을 생각하며, 도박으로 인해 힘든 34 _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35

시간을 보내시는 분들이 한시라도 빨리 도박중독에서 멀어지시기를 바란다. 조금 오래 걸리긴 했지만 엄마와 내가 불행의 늪에서 나와 행복의 길을 찾아냈던 것처럼, 다른 분 들도 행복의 길을 찾아내시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2012년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_최우수상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이겨내세요. 힘내세요. 당신을 응원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나에게 붙어 다니는 별명이 하나 있다. - 도박중독자의 딸. 언제나 수식어처럼 따라다니는 어른들이 붙여주신 그 별명은 아버지가 나에게 유일하 게 주신 선물이었다. 밤새도록 화투장을 문지르는 손가락의 지문은 사라진지 오래였고, 퀭하게 들어간 두 눈은 오로지 그것만을 뚫었다는 증거였다. 학교에 갈 때쯤 얼굴 반을 가리는 까칠한 수염을 앞세워 들어오는 아버지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은 것이 어쩌면 나 의 반항이었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에게 이제 지쳤는지 쳐다보지도 않으시 고 먹다 남은 밥을 아버지에게 내 놓으신다. 그래도 남편이라고 자식들의 아버지라고 찬밥이라도 건네는 어머니는 사춘기 시절 수학 공식만큼이나 이해할 수 없는 여자였다.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아버지는 위로 누나만 넷이라 부모님의 사랑을 가득 받고 자랐다고 한다. 장남이라고 맛있는 것 좋은 것만 먹이며 키운 아버지가 공고를 졸업하 고 일을 다니며 배운 것은 도박이었다. 특별한 기술 자격증이 없었던 아버지는 공사판 을 다니며 일용직을 하셨고, 그 곳에서 형님이라고 부르며 따르는 다른 이들에게 세상 의 죄악 중에 하나인 도박에 손을 대기 시작하셨다. 아버지의 부모님에게 몇 번이나 끌 려왔지만, 그 때마다 아버지는 늑대 인간의 울음소리보다 더 애절하게 외쳤다고 한다. 그 놈을 만지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어머니, 아버지 호강시켜 드릴게요. 그래서 선택한 아버지의 호강은 할아버지를 농약으로 60년의 짧은 인생을 6분 만에 떠나보내는 일이었고, 할머니께서 힘들게 일구어 놓으신 논과 밭을 고스란히 도박판에 36 _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37

헌금하는 것이었다. 20대를 그렇게 보내시던 아버지께서 공장에서 일을 하던 어머니와 맞선을 보게 되면서 도박과 멀어지는 듯도 하였다. 못생긴 얼굴에 바짝 마른 몸매가 할 머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도박에서 멀어지는 것 같아 언제나 고마워하는 며느리였다. 나를 비롯해 세 명의 자식을 낳으며 외삼촌의 도움으로 조그만 회사의 관 리직으로 들어갔을 때만 해도 할머니를 비롯해 어머니는 아버지가 도박에서 완전히 벗 어난 줄로만 알았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한 가지는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새벽에 들려왔던 그 소리 는 아직도 한 번씩 나를 달콤한 잠에서 지옥으로 떨어지게 한다. 전세계약서 어디 있어? 여보, 제발. 그것만큼은 안 돼요. 이번만 잘 넘기면 내가 주인집 눈치 안 보며 살게 해 줄게. 반쯤 떠진 두 눈에 비춰진 아버지의 흐릿한 뒷모습은 옷장 속의 옷들을 헤집고 있었다. 옆에서 말리는 어머니와 땅 속의 감자를 캐 듯 계속만 휘젓는 아버지의 손들. 그리고 드 디어 아버지의 손에 전세 계약서가 들려지는 순간, 어머니는 필사적으로 달려들었지만 솥뚜껑 같은 아버지의 손이 어머니의 얼굴을 덮치며 흐릿한 영상은 끝이 나고 말았다. 우리들이 깰 깨봐 엎드려 소리죽여 우는 어머니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두 눈에 시냇 물 길을 만들었다. 고개를 돌려 동생들을 보니 다행히 눈물의 짜디짠 시냇물이 아닌 달 콤한 호숫가를 헤엄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아버지의 도박은 어머니의 끈질긴 노력과 고군분투하는 삶에서 꺼졌다 다시 켜졌다,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과도 같았다. 할머니의 치매가 3년을 기점으로 종지부를 찍던 날, 아버지는 울면서 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지켰다. 할머니께서 다시는 못 오실 그 곳으로 떠나시던 날, 아버지는 화투장에 우리 가족의 모든 것을 걸고 계셨다. 그래서일까? 영정사진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이 다른 때와는 달라 보였다. 입관을 마치고 나오는 아버지는 결국 울다 지쳐 쓰려 지셨다. 어머니에게 불효만 저 지른 못난 아들의 마지막 발악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아버지를 더 가식적으로 보이 게 하였다. 할머니의 장례를 마치고 아버지는 다시금 도박이 없는 우리들 곁에 머물러 계시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여전히 식당일을 다니셨고, 아버지는 가끔씩 일거리를 찾아 며칠 씩 공사장에서 보내기도 하셨다. 너무나도 평온하고 평범한 가정의 울타리 속, 이 현실이 영원히 지속되기만을 기도하 고 또 기도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학교 선생님의 추천으로 은행에 취직하게 되었다. 그 때만 해 도 은행에 다니면 대기업 못지않은 월급과 대우가 있었기에 우리 집에서는 명문대 합격 보다 더 기쁨의 잔치가 벌어졌다. 아버지도 나의 손을 잡으시며 아비가 못 나서 큰 딸 대학도 못 보내주고, 미안하다. 눈물을 훔치시는 아버지에게 공부는 제가 하고 싶을 때 다시 하면 돼요. 저 지금은 열심히 일해서 돈 많이 벌고 싶 어요. 그래서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우리 두 동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딸, 그리고 언니 가 될 거에요. 아버지의 도박 이야기를 꺼내려다가 말았다. 이제 다시는 도박에 손대지 않는다고 약 속하자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것 같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냥 아버지를 믿기로 하였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버지의 손에 지문이 다시 그려질 때 쯤, 나는 결혼 날짜를 잡았다. 은행에서 같이 근무하던 남자와 연예를 시작하고 우리는 곧 이어 결혼준비를 서두르 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뱃속에 작은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었기에. 아직은 아버지의 도박 빚이 남아있었기에 내가 부어놓은 적금을 해약해서 결혼식을 준비하기로 하였다. 결혼을 한 달 앞두고, 적금을 해약해서 어머니에게 결혼준비를 부탁하는 날 밤, 아버 38 _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39

지가 사라지셨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랍을 열어보니, 나의 몇 년 세월이 고스란히 묻 어있던 돈이 없어졌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꺼져있다는 안내만 들려올 뿐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믿었는데, 그래도 나의 아버지라고 생각하 며 당신이 저지른 과거의 잘못을 모두 덮어버리러 했는데, 순간 어쩔 수 없는 짐승만도 못한 도박중독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친구들에게 연락을 취해 아버지의 행방을 알아내었다. 강원도였다. 아버지는 강원도 정선에 있는 카지노에 갔다고 했다. 딸의 결혼식에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는 자신의 처지가 한스러워 많이 속상해 하셨 다고 한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카지노에서 하룻밤사이에 원금의 열 배 이상을 땄다는 이야기를 들으셨다는 것이다. 내가 사람한테 속아 도박으로 돈을 다 날렸지만, 기계는 나를 못 속이지. 이번에 잘 해서 우리 큰 딸 시집갈 때 아버지로 제대로 챙겨주고 싶어. 소주잔에 털어 넣던 아버지의 푸념을 아버지 친구 분의 입을 통해 들었다. 아비 된 자 로 당연한 생각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결국 아버지는 과거의 허물을 여전히 지닌 채 우리를 속이며 사셨던 것이다. 나는 이제 완전히 아버지라는 이름에 붉은 줄을 그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아닌 한 명 의 구제불능 도박중독자라는 이름으로 아버지라는 이름 위에 덮어 씌웠다. 아버지가 믿 고 있는 카지노의 기계도 사람의 수작인 것을 어리석은 그는 왜 모르고 있는 것일까? 중 독자의 뇌는 우리가 절대로 범접할 수 없는 그리고 상상할 수 없는 장치가 설치되어 있 음이 분명했다. 일주일 만에 아버지를 만났다. 우리는 아버지를 카지노가 아닌 근처 허름한 여인숙에 서 볼 수 있었다. 3일 만에 그 많던 돈을 다 잃고 차비도 없이 먹을 것도 없이 그렇게 방 에서만 보내었다고 한다. 여인숙 주인의 전화가 없었다면, 우리는 아버지를 이 세상 아 닌 다른 세상에서 만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기약도 없는 만남을 겨우 피한 어머니는 게 슴츠레 눈을 뜬 아버지를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사람도 아니야. 그냥 확 죽어버리지 왜 살아 있어? 어머니의 발악은 살을 도려내는 것보다 더 아프게 나에게 다가왔다. 그래도 30년 가 까이 믿고 의지해 온 남편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발악이라는 것을 나는 서울에 와서야 알았다. 이혼을 했다. 어느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결혼을 앞 둔 딸아이 앞에서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는 어머니를 누구도 욕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대로 그렇게 어머니의 뜻을 받아들어 주었다. 그나마 남아있는 집을 처분했다. 이혼 선물로 어머니는 아버지의 빚 을 마지막으로 다 청산해주며 제발 사람으로 살아 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으셨다. 동생들은 원룸을 얻어 어머니와 함께 살았고, 나는 결혼식도 없이 뱃속 아기의 아빠 와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그 날처럼 훌쩍 사라져 버린 아버지를 누구도 찾지 않았다. 다 만 어디선가 살아있을 거라는, 죽었으면 연락이 오겠지 라는 남보다 더 못한 사이가 되 어 흐르는 시간에 모든 것을 맡겨 버렸다. 아기의 돌잔치 날, 아버지를 다시 보게 되었다. 일찍 부모님을 여윈 남편이 나 몰래 한 달간 수소문해서 겨우 찾았다고 한다. 당신 쓸데없는 짓 한 거야. 나에게 아버지는 없어. 너에게 아버지는 없어도 우리 찬호에게 할아버지는 있어. 남편의 단호한 한 마디에 나는 어떠한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남편에게도 가슴 아픈 상 처가 있다는 것을 찬호 돌잔치 전 날, 아버지를 만나기 하루 전 날 알 수 있었다. 나처럼 남편도 도박중독자라는 사람의 그늘 밑에서 자랐다고 한다. 옷가지 몇 개만 남겨놓고 모든 것을 도박판에 바친 남편의 아버지는 자살이라는 치사한 방법으로 세상 을 떠나버렸고, 그 충격으로 어머니 또한 일 년을 못 채우고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 일을 중학생의 힘으로 견뎌내었다는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슬픈 영화를 보는 것처럼 눈 물이 났다. 고모 집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살았다는 남편의 이야기에 드디어 진심어린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나의 시아버지가 될 줄 모르는 그 또한 도박중독자였다는 말에 나는 그의 자살을 어쩌면 환영했는지도 모른다. 40 _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41

도박 중독은 죽어서도 저승 가서도 끊을 수 없다고 믿고 있었기에, 이미 지쳐버린 내 육체가 나의 감정을 더 메말라 버리게 부채질 했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픈 상처 앞에서도 의무적인 눈물만 흘렸으니. 아버지의 일 년 만의 등장으로 찬호의 돌잔치는 엉망이 되었고, 돌잔치보다 더 엉망 이 된 것은 나의 삶이었다. 이미 남남인 어머니 대신 아직은 부녀의 연결 고리를 끊지 못했다는 이유로 남편은 아버지를 우리 집으로 모셨다.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일 년 사 이에 십 년의 나이를 드신 아버지는 자신의 육체가 아닌 검은 그림자부터 우리 집에 들 어 놓는 듯하였다. 우리 아버지처럼 그냥 그렇게 떠나보낼 수는 없어. 남편은 두 번 아버지를 잃고 싶지 않다는 의지를 보이며 아버지에게 친아들 보다 더 한 관심을 보였다. 이미 모든 것을 잃은 그였기에, 아버지는 순한 양이 되어 남편을 목 동처럼 따랐다. 하지만 나의 눈에는 양의 털을 쓴 늑대로만 보였기에 집에 천 원짜리 하 나 남겨놓지 않고 은행에 넣어 놓았다. 혹시나 지갑이 아버지 그림자 안에 들어가 있다 면 나는 얼른 그것을 다른 곳에 숨겨 놓기도 하였다. 아버지, 우리 오늘 저녁부터 운동 나가요. 밖에 날씨도 선선한 것이 운동하기 딱 좋 아요. 바쁜 은행 업무에도 남편은 피곤한 기색 없이 아버지와 매일 운동을 나갔다. 운동 덕 분인지 아니면 남편의 관심 때문인지 아버지는 잃어버린 십 년을 다시 찾는 듯하였다. 찬호도 할아비, 할아비. 하며 잘 쫓아 다녔다. 가끔 남편이 주는 담배 값으로 찬호의 과자를 사 주시는 아버지 를 보며 마음이 누그러들기도 했지만, 이미 주홍 글씨처럼 가슴에 찍혀 버린 아버지의 못난 과오는 나를 쉽게 흔들지는 못했다. 아버지의 육십 한 번째 생신인 환갑이 다가왔다. 남편이 동그랗게 쳐 놓은 달력의 숫 자가 자꾸만 내 눈에 걸리었다. 남편은 3일 간의 휴가를 내었고, 11인승 승합차를 빌렸 다. 나에게 어떠한 상의도 없이 결정한 남편의 선물은 아버지를 모시고 가족여행을 가 는 것이었다. 물론 어머니와 두 동생도 함께였다. 남편을 제외한 모두들 서먹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승합차에 몸을 실을 수밖에 없었다. 낯선 곳에 납치라도 당하는 것처럼 그 누구도 남편의 운전대가 향하는 곳을 몰랐다. 다만 한 번씩 보이는 이정표로 우리가 가는 곳이 강원도라는 것만 알았다. 남편이 정해 놓은 리조트로 올라가는 길에 나는 더 분명한 이정표를 보았다. 우측으 로 몇 미터만 가면 강원 랜드가 있다는 것을. 아버지는 창가에 그려지는 풍경을 보며 이미 아셨을 것이다.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 이, 그리고 우리 가족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리고 아버지의 30년 사랑마저 앗아가 버린 그 곳으로 차가 향하고 있다는 것을. 저녁을 일찍 먹고 남편이 우리 가족을 데리고 간 곳은 내가 그렇게도 치를 떨었던 카 지노였다. 막내 동생에게 찬호를 맡길 때부터 혹시나 하는 마음은 들었지만, 그래도 설 마 했다. 오천 원 입장권을 구입하는 남편에게 나는 미쳤다. 라는 말 뿐, 어떠한 반응도 보일 수 없었다. 남편을 제외한 모두들 그랬을 것이다. 아버지마저도. 어머님, 아버님. 여기는 도박장이 아니라 생활의 피로를 풀어주는 게임장이예요. 간 간히 일확천금을 노리는 못난 눈들이 있지만, 우리는 오늘 여기에 놀러 온 거예요. 일확 천금이 아니라 행복의 일확천금을 위하여. 남편의 황당한 이야기에 모두들 어안이 벙벙해 지면서, 남편이 나누어 주는 오만 원 씩을 받으며 카지노에 들어갔다. 영화에서만 보던 거대한 화면이 나의 두 눈을 어지럽게 하였다. 남편은 그런 나의 모 습에 관심도 없다는 듯이 아버지를 모시고 대형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우리 세 모 녀는 한 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아버지가 언니 결혼식을 위해 한 밑천 건져보려고 했던 곳이 어떤 곳인지 우리도 한 번 즐겨 보자고. 42 _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43

동생의 냉소적인 말투에 섞인 호기심 덕분에 우리는 한 발짝 그 곳으로 들어갈 수 있 었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화면의 그림들, 그리고 정장차림의 딜러들 앞에 주눅이 들기 도 했지만, 이내 우리는 게임 속으로 빠져들었다. 가장 단순한 카지노의 룰렛 게임을 하면서 우리도 모르게 한숨과 환호성을 지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게임을 즐겼다. 처음에는 겁이 나서 천 원 이상의 배팅을 걸지 않 았지만, 칩이 쌓일수록 배팅의 금액은 나도 모르게 늘어났다. 남편이 손에 쥐어 준 오만 원은 두 시간이라는 아쉬움과 교환 되었다. 동생과 어머니는 남은 칩을 현금으로 바꾸 며 연신 싱긋벙긋 이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빠지는 거구나. 나도 모르게 자꾸만 욕심이 생기네. 어머니의 한 마디에 우리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쓱해 하는 아버지를 다시 쳐다 보게 되었다. 의지보다 한 순간 욕심이 두 눈을 가리면 누구든지 아버지와 같은 과오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내 몸으로 직접 느끼니 아버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 다. 그런 뜻에서 남편이 우리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재밌죠? 하지만 이건 재미로 끝이 나야해요. 눈싸움을 할 때 이기기 위해 눈덩이 속 에 돌멩이를 넣어 버리면 그건 놀이가 아니라 진짜로 싸움이 되듯이, 게임도 그 자체가 아닌 거기에 욕심을 심어 넣게 되면 그건 도박이 되고 마는 거예요. 돌멩이에 맞아 다쳐 버리면 그건 더 이상 놀이가 아닌 거죠. 남편의 말이 맞았다. 욕심 주머니를 차고 살아가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쉽게 빠질 수 있는 도박의 늪에서 우리는 아무도 아버지의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 그냥 주변에 서서 손가락질 하며 외면했을 뿐. 남편의 말에 아버지는 눈물을 흘렸고, 그렇게 깊어가는 가을 밤. 우리 가족 모두는 화 려하게 빛나는 그 곳에서 서로 손을 잡고 이제껏 잊고 있었던 가족의 눈물을 흘릴 수 있 었다. 조금이나마 풀린 어색함이 남은 여행기간 동안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해 주었다. 할 머니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마냥 신이 나서 까르르 웃는 찬호를 보며, 서서히 지워지고 있는 가슴 속 주홍 글씨를 느낄 수 있었다. 남편에게 고마웠다.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그냥 던져버리고 만 것을 남편은 기를 쓰고 잡으려 했던 것이다. 예전과 달라진 모습은 없었지만, 분명히 우리들 삶에 변화의 물결은 잔잔하게 일고 있었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파김치와 간장게장을 들고 오시는 어머니를 쑥스럽게 맞 이하는 아버지를 보며 우리는 몇 년 만에 맛있는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수기를 쓰면서 처음에는 얼마나 망설였는지 모릅니다. 뱃속에서 새롭게 꿈틀거리는 찬호의 동생을 생각해서라도 기억하기 싫은 일들을 나의 두 손으로 그려낸다는 것이 악 몽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망설임을 뒤로 하고 수기를 쓰는 이유는 지금도 도박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서입니다. 저는 남편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외면은 최선이 아니라 최악이라는 것을. 늪에 빠지면 혼자서는 절대로 올라올 수 없습니다. 살고 싶어 발버둥을 칠수록 더욱 더 빠져드는 곳이 늪입니다. 그렇게 허우적거리며 살고 싶다고 아우성치는 가족을 우리 는 외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손만 뻗어주면 되는데, 서로 힘을 합쳐 건져내어 주면 되 는데 우리는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겨우 늪에서 나온 아버지를 다시 빠지지 않도록 잘 보살펴 주고 닦아 주어야겠 습니다. 도박의 늪이 다시 아버지를 유혹하지 않도록 우리 가족들은 울타리를 쳐서 아 버지를 지켜낼 것입니다. 며칠 전 남편의 생일 날, 아버지는 선물로 남편의 넥타이와 함께 편지를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편지를 읽으며 남편의 품에 안기어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이제껏 아버지 를 미워하고 증오했던 모든 것들을 씻어내듯이 그렇게 울었습니다. 남편에게 준 아버지 의 편지 소개를 마지막으로 수기를 마칠까 합니다. 44 _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45

사랑하는 나의 아들. 자네에게 함부로 아들이라고 칭해서 미안하네. 하지만 그렇게 부르고 싶은 못난 아비를 용서해다오. 나는 자네를 통해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만 같아 요즘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내 가 배운 것이 없어서 아는 것도 없지만, 그건 알아. 자네가 나에게 금도끼 은도끼가 아닌 볼품없는 쇠도끼에 행복을 심어주었다는 것을. 그래 자네는 나에게 도끼를 찾아 준 산신령과도 같아. 자네가 나를 찾아 와 준 날, 소주 한 잔을 건네며 아버지 한 잔 하시죠. 라며 건배를 했을 때, 자네를 놓치면 내 인생도 끝이겠구나 싶었어.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자네를 따라갔는지도 모르지. 그래, 나는 살고 싶었어. 죽지 못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살고 싶었어. 너무 못난 육십년의 인생을 엎어버리고 새로 시작하고 싶었던 게지.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살고 싶었던 거야. 정말로 고마워.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정말로 고마워. 2012년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_우수상 공짜는 없다 뼛속까지 뜨거웠던 무더위가 한풀 꺾이고 어느새 선선한 바람이 아침저녁으로 불어 온다. 소란스럽던 장마도 지나고 추석이 곧 멀지 않았던 몇 해 전 이맘때쯤 그 사람은 영원 히 내 곁에서 멀어졌다. 어린 시절 내가 아홉 살, 내 동생이 다섯 살 되었을 무렵 내 인생에서 엄마라는 단어 는 사라졌다. 새벽마다 시장으로 일을 다녔던 엄마는 시장에서 만난 어떤 놈과 사랑에 빠졌고 그렇 게 그 엄마라는 사람은 우리 아빠가 아닌 내가 아닌 내 동생이 아닌 사랑이라는 이름의 그 남자를 선택했다. 그날도 여전히 일을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 아홉 살이나 되었어도 가끔 새벽에 세계지도를 그리는 날 깨워서 화장실로 데려가 소변을 누이고 잠투정하며 연신 엄마 품을 비비고 들어가려는 날 어렵게 떼어내 자리에 눕히고는 엄마 일 다녀올 게.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볼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회사도 가지 않은 채 눈 부릅뜨고 엄마를 찾아다니는 아빠는 무서웠고 슬펐으며 당연 히 엄마를 찾아서 울고불고 해도 모자랄 나이의 다섯 살 동생 역시도 어떠한 무거운 분 위기를 감지했던 것인지 아니면 앞으로 엄마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예 감했던 것인지 단, 한 번도 엄마를 찾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동생은 아홉 살 나이의 내 가 보기에도 기가 막히도록 안쓰러웠다. 46 _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47

늘 사랑이 고팠고 마음이 고팠고 따뜻함이 고팠고 관심이 고팠다. 배가 고픈 건 수돗물 한 그릇 쭉 들이키면 아주 잠깐 몇 초라도 허기짐을 달랠 수 있 었지만, 사랑이 고프고 마음이 고픈 건 어찌 달랠 방도가 없었다. 제일 좋아했던 동네시장 모퉁이에 있던 뉴욕제과점의 빵을 배부르게 먹어도 졸업식, 입학식이 아니면 먹기 힘들었던 자장면을 곱빼기로 먹어도 이상하게 허기가 졌다. 그때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정도 머리가 굵어지고 난 뒤 저절로 알게 되 었다. 달그락달그락 거리며 식사 준비를 하는 엄마의 뒷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배부른 행복 이었다는 사실을. 항상 원리원칙을 고수하는 우리 아빠. 정확히 정리정돈 되어야 했던 책꽂이, 책상서랍, 옷장, 주방의 그릇들. 가벼운 먼지조차도 허용되지 않았던 집안 구석구석. 너무 답답하고 꽉 막힌 생활 속에서 누군가가 늘 내 목을 죄어오는 듯한 갑갑함, 고등 학교에 진학하면서 그 답답함과 갑갑함은 더욱 배가 되어 날 괴롭혔다. 탈출구가 필요 했다. 매일 머릿속으로 상상의 날개를 펼쳤다. 내 머릿속 상상의 세상 안에서는 난 외톨이가 아니었다. 친구 같은 아빠가 있고 너무나 가족에게 헌신적인 엄마가 있고 투정 많고 눈물 많고 애교 많은 제 나이를 찾은 동생이 있었다. 그렇게 내가 꿈꾸던 가족을 매일매일 난 만들어냈고 이에 질세라 친구도 매일매일 만 늘 양 갈래로 곱게 땋거나 혹은 올림머리로 예쁘게 관리하던 긴 머리카락을 옆집 중 학생 오빠 머리와 똑같은, 멋이라고는 아예 찾아볼 수 없는 짧은 커트로 잘라버렸다. 엄마가 사라지고 난 뒤 관리하기 어려워진 긴 머리를 보다 못한 아빠가 나와 내 동생 을 미용실로 데리고 가서 '무조건 짧게, 관리가 필요 없도록 짧게 잘라주세요.' 라고 말 한 뒤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일어난 일이였다. 그 뒤에 학교 등교 준비시간이 훨씬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만큼 내 별명은 더 늘어나 게 되었다. 어쩌면 초등학교 시절 엄마 없는 아이는 제일 약자일지도 모른다. 특히 엄마 없는 티 가 확연히 드러나는 아이라면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 내가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철저히 조용한 아이가 되는 것이었다. 그 누구도 내가 이 자리에 있었는지, 혹은 내 이름조차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조용하 고 또 조용한 공기 같고 바람 같은 아이가 되는 것. 쉽지 않았지만 어렵지도 않았다. 하지만 조용하게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 되어갈수록 가슴 속 나의 외 로움은 더욱 더 커져가고 있었다. 들어냈다. 그 안에는 난 행복했지만, 그 행복한 상상이 멈추는 순간 내 허기짐은 더욱더 깊어져 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열여덟 생일 날 아빠의 선물로 컴퓨터가 생겼다. 전에 쓰던 낡은 고물 컴퓨터로는 타자연습이 고작이었지만 새로운 컴퓨터는 달랐다. 그때 당시 pc통신이 보급되면서 컴퓨터가 가진 매력은 무궁무진했다. 학교를 마치고 돌 아오면 숨도 쉬지 않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새로운 나를 만들어냈다. 컴퓨터 안에서 만큼은 현실에서의 나와는 달리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독서를 좋아하는 조용하고 또 조용해서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이 없고 늘 혼자인 열 여덟 살 여고생이 아닌 임기응변에 능하고 열띤 논쟁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당당하고 자신감에 차있는 친구들 사이에 늘 주인공인 그런 열여덟 살의 내가 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접속만 하면 수 없이 날아오는 쪽지들, 나와의 대화를 기다리는 또래 친구들, 그 안에 서는 난 외톨이가 아니었다. 그 안에서 만큼은 난 꽤 괜찮은 열여덟 살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세상과의 접속은 얼마가지 못했다. 48 _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49

아빠의 동공이 커질 만큼 놀라운 전화 요금 폭탄을 맞고 나서 다시 현실로 복귀할 수 밖에 없었으니까 말이다. 무언가 항상 애정에 목말라 있던 내가 얼굴도 목소리도 모르는 낯선 타인들이 주는 관심에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그 위로가 감사했다. 놀림 받기 싫어서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 되자고 결심을 했을지 몰라도 내안의 깊은 내면 어딘가에는 분명 늘 그들 속에서 하나가 되고 싶었던 바람을 컴퓨터 안에서 보상받 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릴 때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며 어머니를 버리고 떠나버린 아버지, 일곱 살 이후로 그 사람은 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해서 자식이 생긴다면 자신의 아버지와는 다른 정말 좋은 아빠가 되고 싶다던 사람이었다. 자신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한 어머니와 누나를 끔찍하게 생각하던 사람, 그 모습이 참 예뻤고 안쓰러웠고 듬직했다. 나와 비슷한 아픔을 가졌지만 나와는 다르게 친구들의 중심에서 당당하고 자신감 있 던 나와 반대되는 그 사람의 성격이 나는 자랑스러웠고, 그런 그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난이 심하다고 공공연히 매스컴에서 떠들던 시기에 난 운 좋게 도 첫 직장에 입사를 하게 되었고 입사 후 회사 업무에 적응하느라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바빴던 그 시기에 한 남자를 알게 되었다. 입사동기였고 동글동글한 성격에 서글서글한 눈웃음이 참 맑았던 남자였다. 그 역시 도 회사 업무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미간 한번을 찌푸리는 모습 을 보인 적이 없는 그 남자, 상사들의 짓궂은 농담에도 유연하게 잘 대처하며 오히려 분 위기를 주도하는 그 남자에게 나는 자꾸만 시선이 갔다. 그리고 첫 회식 날, '지영씨(가명)는 성격이 참 조용하신 것 같아요.' 하며 조심스레 말 을 걸어오는 그 남자의 대화를 시작으로 소주를 한잔 두잔 나누게 되는 기회가 생겼고 술을 마셔서 그런지 아니면 평소에 내 시선을 끌었던 그 남자라서 그랬는지 몰라도 평소 의 나와는 달리 꽤 많은 대화가 오고갔고 그 회식자리를 계기로 우리는 가까워졌고 사람 을 대하는 일이 쉽지 않았던 나와는 달리 유달리 사교성이 뛰어나고 적극적인 그 사람 성격 탓에 얼마 뒤 우리는 공식적인 사내커플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이제 내 인생에서 외로움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겁도록 외로웠던 내 삶에 내 기도를 우연히 듣게 되 신 하늘의 그 누군가가 선물을 보내신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 사람은 나와 참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과거를 돌아보면 참 닮은 부분이 많은 사람 이었다. 록 나에게 하늘이 되었고 우주가 되었다. 늘 나와 함께 해주는 사람, 내가 흘리는 눈물이 가장 가슴 아프다던 사람, 작고 조용 한 내 목소리가 세상에서 제일 듣기 좋다던 사람, 소심한 내 성격이 여성스러워 좋다던 사람, 사귀는 내내 큰 목소리 한번 낸 적 없었던 사람, 너무 따뜻해서 그 사람 옆에 있게 된 후로는 나의 계절에 겨울은 없었다. 단, 한 번도 내가 외롭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 게 만들었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게 예쁘게 사랑을 키우고 2주년이 되었을 때, 그 사람에게 청혼을 받았고 1년 뒤 에 우리는 결혼을 하기로 약속을 했다. '아기는 둘만 낳았으면 좋겠어. 내가 입고 싶은 웨딩드레스는 이런 스타일이야. 신혼여행은 어디로 갔으면 좋겠어.' 매일 매일 우리의 결혼식과 미래의 결혼생활에 대해여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대화를 나눴지만 우리는 그 대화가 질리지도 지겹지도 지루하지도 않았다. 그 시간조차도 나에게는 과분하다는 생 각이 들만큼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 사람이 아무 말도 없이 결근을 하는 일이 생겼다. 그 전날 에도 별다른 말이 없었던 상황이었고 평소에 몸이 아파도 회사를 결근하거나 지각조차 도 하지 않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고가 생겼거나 아니면 큰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계속 연락을 취해 봤지만 핸드폰도 꺼져있고 연락이 되질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점심도 거른 채 회사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던 그 사람의 오피스텔로 달려가 50 _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51

보았지만 그 곳에도 그 사람은 없었다. 하루 종일 불안하고 걱정스런 마음으로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퇴근을 해서 새벽까지도 그 사람에게서 연락은 없었다. 뜬 눈으로 밤을 보내고 그 다음 날 아침 그 사람이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휑한 눈빛, 그 사람 역시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모습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다그치듯 물어보는 내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며 미안해, 많이 걱정했지? 하며 집안에 일 이 생겨서 어머니께 좀 다녀왔다며 연락을 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고 연락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는 그 사람의 눈을 보면서 뭔가 의심스러운 부분도 있었지만 정말로 피곤해 보 이는 행색과 별다른 일 없이 무사히 돌아왔으면 됐다는 안도감으로 다시는 연락 안 되는 일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그 사람을 꼭 안아주고는 그 날일은 더 이상 물어보지 않고 함께 출근을 했다. 하지만 그건 곧 시작일 뿐이었다. 그 날 일을 시점으로 그 사람은 갑자기 하루는 아프 다며 회사를 결근하고 또 어느 날은 집에 사정이 생겼다며 결근을 하는 둥 입사한 뒤 근 태에 있어서는 근무평가가 가장 뛰어났던 그 사람의 회사 생활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있 었다. 아프다며 결근을 한 그 날, 점심시간에 그 사람 집으로 찾아가보면 집은 텅텅 비어있 었고 웬만한 일이 아닌 이상 2년 동안 주말에도 꼭 함께 했던 주말의 시간들을 나 혼자 서만 보내는 날도 잦아지고 있었다. 불안한 낮과 초조한 밤의 시간들이 점점 길어져 가고 그 사람에게 집요하게 물어봐도 미안하다는 말 외에는 별다른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시간이 계속 되어 갈 쯤 그 사람이 강원도에서 친한 형님과 장사를 하게 되었다며 그래서 그 동안 장사 준비를 하느라 회사 에 결근을 했던 거라며 뜬금없는 그의 고해성사에 그의 말을 믿어야 할지 아니면 의심을 해야 할지 그것도 아니면 설득을 해야 할지 나 역시도 결정을 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틈을 타 그 사람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1년 뒤에 결혼하자고 약속했던 사람이 나와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뜬금없는 통보만으 로 결정한 일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화도 나고 서운했지만, 평소 성실한 사람이었고 2년 을 만나 오면서 날 실망하게 한 적이 없었던 사람이었기에 그를 믿고 지지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사직서를 내고 살던 오피스텔도 정리한 뒤 강원도로 올라가고 일주일가량 지났을 때 ' 좋은 가게 자리를 봤는데 돈이 조금 부족하네. 형님도 인테리어랑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자금이 부족한가 봐, 진짜 미안한데 지영아(가명) 천만 원만 빌려줄 수 있어? 한 달 후에 형님이 자금 좀 풀린다고 하니까 한 달 후에 꼭 갚아줄게.' 하며 어렵게 물어왔다. 큰돈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결혼자금으로 모아둔 돈이 있었던 터라 망설임 없이 그에게 빌려주었다. 연신 고맙다, 고마워, 너밖에 없다, 하는 그의 목소리가 조금 부자연스럽다 고 느꼈던 것은 우연이었을까? 가게 준비하느라 바쁜 그의 상황 탓에 강원도에 올라간 뒤로는 한 번도 보지 못해서 그 사람이 그립고 보고 싶은 맘에 더불어 준비하고 있는 가게도 궁금해서 '이번 주말에 강원도 갈까?' 라는 말만 꺼내기만 하면 갑자기 말을 돌리며 바쁜데 네가 오면 방해된 다. 혹은 여기와도 너랑 있어 줄 시간이 없다. 혹은 예전에는 언성을 높이거나 화를 낸 적이 없었던 온순했던 그 사람이 버럭 화를 내며 사람 힘든데 멀리서 응원을 해주면 안 되느냐며, 자기를 못 믿는 거냐고 소리를 지르는 통에 더는 보고 싶다는 말도 한번 가서 자기 일하는 모습 보면 안 되겠느냐는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날이 길어질수록 나는 점점 지쳐가고 2년간의 그 시간들이 혹시나 내가 또 만들어 낸 상상의 시간들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회사에 출근하고 퇴근하면 곧장 집으로 와서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를 시 작해서 전화를 끊기 전까지 내내 바쁘다는 말만 녹음기처럼 되풀이하는 그 사람과 5분 가량의 짧은 통화를 마치고 샤워를 하고 책을 잠깐 보다가 잠이 드는 일상만 한동안 계 속 반복하고 있었다. 그 날도 평소의 일상처럼 출근을 해서 일을 하고 있을 때 예전에 그 사람과 제일 친하 52 _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53

게 지냈던 직장 동료가 점심 먹고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하고 물어왔다. 점심을 먹고 급하게 1층 로비에 있는 휴게실에서 만난 직장동료는 나보다 먼저 도착 해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직장동료가 어렵게 입을 뗀 이야기는 '지영씨(가명) 아직 동훈(가명)이랑 사귀는 거 맞아요?'였다. 내가 그렇다고 아직 만나고 있는 것 맞다. 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직장동료가 하 는 말은 동훈(가명)이가 회사를 퇴사하기 전에 천만 원만 빌려달라고 하더라, 그렇게 큰 돈은 없다고 이야기 했더니 그러면 오백 만원이라도 빌려달라고 퇴사해서 퇴직금 받으 면 바로 갚겠다고 하더니 그 뒤로는 연락이 전혀 되질 않는다. 혹시나 지영씨(가명)가 동훈이(가명)와 연락이 된다면 연락을 부탁드린다. 하는 내용이었다. 퇴근을 해서 떨리는 마음으로 그에게 전화를 했더니 역시나 전화를 받자마자 '나중에 내가 다시 전화할게, 지금 많이 바빠.'였다. 그 사람 대답을 무시하고 '혹시, 상민(가명)씨한테 돈 빌린 적 있어.' 라고 묻자 아무런 대답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린다. 다시 전화를 걸어 봤지만 계속 꺼져 있는 전화. 숨 막힐 듯 답답한 시간만 계속 흘러 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래서는 안 되겠다. 무조건 그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라는 결심을 세우고 있을 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그 사람의 누나였다. 그리고 그 사람의 누나가 꺼낸 이야기는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충격적인 이야기 였다. '지영씨(가명) 전화번호를 어렵게 알아냈다. 혹시 동훈이(가명)와 연락이 되느냐. 몇 개월 전에 동훈이(가명)가 아는 형이랑 동업한다고 삼천만 원이 필요하다고 하더라. 그 래서 집에서 어렵게 마련해줬다. 근데 그 뒤에 알고 보니까 퇴직금 받으면 준다고 이야 기를 하고 다니면서 고모네랑 이모네 그리고 사촌들이랑 학교 다닐 때 선배 후배들한테 까지 돈을 몇 십 만 원에서 천만 원 단위까지 돈을 빌리고 다녔더라. 얼마 전에는 카드 회사와 은행에서까지 찾아왔다. 대출 받은 돈만 오천만 원이 넘더라. 그래서 이래저래 알아봤더니 강원도 카지노에서 도박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 근처에서 며칠을 기다리 다가 동훈이(가명)를 잡아서 집으로 데리고 왔는데 며칠 전에 잠깐 집을 비웠을 때 우리 아들(동훈 조카) 저금통을 들고 집을 나갔다. 그래서 혹시 지영씨(가명)하고는 연락 될 까 해서 연락을 했다.'라는 것이었다. 그 사람 누나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어지러움과 울렁거림으로 내가 지금 듣고 있는 내용의 사람이 정말로 지난 몇 년간 내가 만나고 사랑했던 그 사람이 맞는 걸까? 하는 생각에 머리가 돌처럼 굳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지금은 저 역시도 연락이 안 되고 있으니 연락이 오면 잘 설득해보겠다. 너무 걱정하 지 마시라고 혹시나 집으로 먼저 연락이 온다면 저한테도 꼭 연락을 부탁하겠다고 말씀 드리고 전화를 끊고 말할 수 없는 배신감과 당혹감에 물 한 모금 삼킬 수 없는 날들만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열흘쯤 흐른 뒤 그 사람의 누나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고 지금 동훈(가명)이와 함께 있으니 이쪽으로 올 수 있으면 와달라는 내용이었다. 당장 운전을 해서 강원도로 올라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만난 그 사람은 예전에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푸석한 머리카락, 지쳐 보이는 푹 꺼진 눈동자, 늘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던 턱밑의 수 염들은 얼마동안이나 면도를 하지 않았는지 덥수룩하게 자라나 있었고, 웃음기 없는 얼 굴과 날 똑바로 보지 못하는 자신감 없는 태도, 무언가가 불안한 듯 흔들리는 눈동자와 잠시도 쉬지 않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그의 모습,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그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건 눈물을 흘리는 것밖에 없었다. 3억이 넘는 그의 많은 빚, 변해버린 그 사람, 내 첫사랑이 나에게 남긴 배신의 상처들 은 그 자리에서 몇 배로 불어나서 날 괴롭히고만 있었다. 아는 형을 따라서 우연히 따라왔다가 돈을 잃고 나니까 본전을 찾고 싶다는 생각에 계속 매달리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는 그 사람은 후회하고 있었다. 54 _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55

내가 혹시나 떠나버릴까 봐 그 자리에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테니 떠나지 말아 달라고 매달리는 그 사람을 보면서 난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있 을 때 그 사람의 누나가 내 손을 잡고 울며 '우리 동훈이(가명) 빚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테니까 지영씨(가명)가 한 번만 더 기회를 줘서 저 자식 사람 좀 만들어 달라'며 부탁들 해왔다. 과거에 엄마가 떠나면서 버려진 사람의 아픔을 어느 정도 이해를 했기 때문일까. 아 니면 그 와중에도 그 사람을 너무 많이 사랑했기 때문일까. 나는 다시 한 번 그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 사람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취직 하게 되었고 어머니가 그의 누나 집으로 들어가 면서 어머니 집을 정리하고 집을 정리한 비용으로 그의 빚을 갚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 가 결혼하게 된 후에는 어머니를 우리가 모시는 걸로 합의를 봤고 모든 것은 다시 원점 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 사람이 새로 입사한 직장에서 첫 월급을 받은 다음 날에 양가 상견례를 마쳤고 3개 월 뒤에 결혼하기로 결혼식장까지 예약을 끝냈다. 과거 일은 모두 묻어두고 우리는 아직 젊으니까 앞으로 더 노력하며 예쁘게 살자, 예 쁘게 살자, 예쁘게 살자...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인생이 동화라면 공주님과 왕자님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하고 행복한 마침표로 끝 날 수 있었겠지만, 동화가 아닌 우리의 삶은 죽음이 아닌 이상 마침표가 없었다. 결혼식이 한 달 앞으로 남았을 때 내가 쓰고 있던 카드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이 나 몰래 내 카드로 현금서비스와 카드론을 받았고 그 빚만 무려 2천만 원에 가까웠다. 설마, 설마 아닐 거야. 정말 그 사람을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얼마 못 가 깨 져버리고 말았다. 어머니 보험을 해지한 돈과 그의 누나 이름으로 되어있던 누나네 아파트까지 팔아서 사라진 것이었다. 결혼식을 한 달 앞두고 사라진 예비신랑 때문에 우리 집에서도 난리가 났고 어제만 해도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나의 미래는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지옥의 시 간으로 바뀌어 버렸다. 우리 집에서는 결혼을 반대하며 청첩장을 보냈던 친척들에게 나 의 파혼소식을 알리는 전화를 돌렸고 나는 그 사람을 찾아서 강원도에 있는 카지노로 찾 아가 몇 날 며칠을 그 주위의 전당포부터 식당들까지 찾아다니며 기다려도 보았고 그의 누나와 함께 서울로 인천으로 혹시나 누가 비슷한 사람만 보았다는 소식만 들어도 찾아 다녔지만 야속하게도 그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만약 예정대로 진행되었다면 우리가 예쁜 신혼부부가 되었을 결혼식 당일 날 이 되었고 나는 나 혼자 누우면 적당한 사이즈의 작은 내방 침대에서 몇 달간 모아뒀던 수면제를 먹고 영원한 잠을 청했다. 영원히 자고 싶었던 나는 아쉽게도 마흔세 시간 뒤에 깨어났고 엄마가 사라졌을 때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내 동생은 날 붙잡고 오열을 토해냈고 무섭고 슬픈 눈빛으 로 엄마를 원망하는 눈빛으로만 가득했던 아빠는 그저 슬픔만 가득 담긴 눈빛으로 목 놓 아 울음을 터트리셨다. 퇴원 하고 나는 일상으로 돌아가려 부단히 노력했다. 내 슬픔만으로 가족을 더 슬프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 사람과의 추억이 너무나 가득한 회사에는 사직서를 제출했고 동생과 함께 여행을 다녀왔다. 그렇게 또 몇 개월의 시간이 흐르고 조금씩 안정을 찾고 있을 때 그 사람의 누나에게 서 여러 통의 전화가 걸려왔지만 받지 않았다. 또다시 흔들리고 싶지 않았고 얽혀서 더는 아프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여전한 걱정스러운 마음에 통화 버튼을 눌리고 말았 고 울고 있는 그 사람의 누나와 통화를 하게 되었다. 지영씨(가명) 동훈이(가명)가 오늘 발인이야. 제일 먼저 알리고 싶었는데 전화가 연결 56 _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57

이 안 되서 우리끼리 그냥 했어. 눈물이 나지도 않았다. 울기에는 이건 그냥 악몽이었다. 내가 이제 막 다시 걸음마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그 사람은 날 또 주저앉게 만들어 버 렸다. 나쁜 사람, 모진 사람! 동생과 함께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바로 올라갔다. 이렇게 초라한 장례식이 있을 수 있을까. 그렇게 사람 좋아서 주위에 많았던 선배들 도 후배들도 친구들도 찾아볼 수가 없는 그 사람의 마지막 가는 길. 누나의 아파트를 팔아서 다시 도박에 손을 댔다고 한다. 하지만 일확천금을 기대했던 그 사람은 마지막 백 원 한 푼까지 전부 잃어버렸고 더 는 돈을 빌릴 곳도 돌아갈 곳도 없어진 그는 노숙 생활로 떠돌다 자신이 팔아버린 누나 의 아파트 15층에서 질긴 인생의 끈을 마감했다고 한다. 가여운 사람, 바보 같은 사람, 어리석은 사람. 많이 울었다. 그 사람이 가는 길이 서럽지 않도록. 울고 또 울고 또 울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여버렸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사람 덕에 2년의 세월은 너무나 행 복했으므로 그것만으로 내 눈물을 받을 자격이 그 사람은 있었다. 다시는 그곳에서는 그런 실수는 하지 않길 기도했다. 생각하고 적은 월급이라도 알뜰살뜰 저축해서 적금 만기를 채우는 날 사랑하는 가족과 맛있는 외식을 하는 소박한 행복이 인생의 가장 큰 무기이고 생각하는 남자가 있다. 애 정표현은 서투르고 무뚝뚝하지만 내가 새벽에 아프다고 전화하면 24시간 영업하는 약 국부터 달려가서 '아프지 마라.' 라는 사랑을 한 마디를 약과 함께 툭 던져주는 산 같은 남자가 있다. 가끔 첫사랑과 너무 다른 지금 내 사람을 보면 하늘에서 그 사람이 나에게 정말 미안 해서 보내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곧잘 하게 만드는 사람. 몇 년이 흐른 지금에서야 나는 겨우 안정되었고 과거를 떠올려도 눈물 흘리지 않을만 한 여유도 생겼다. 도박이라는 단어를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많은 연관 검색어가 뜬다. 그중에 제일 대표적인 연관 검색어는 도박중독이다. 죽어야 끝난다는 도박중독. 손가락이 잘리면 발가락으로 손이 잘리면 입으로 팔로 발 로 한다는 무서운 도박! 나 혼자만 망가진다면 상관없겠지만, 도박을 시작하는 순간 본인뿐만 아니라 사랑하 는 당신의 가족, 당신의 연인까지 파국을 맞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시작부터 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소란스럽던 장마가 끝나고 추석이 곧 멀지 않은 이맘때 그 사람은 떠나갔다. 평소에는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기억은 깊은 물속에 잠겨서 잘 떠오르지 않다가 그 사 람이 떠나간 이 맘 때가 되면 깊은 물속에 잠겨있던 그 사람이 기억이 조금씩 내 수면으 로 떠오른다. 나의 가장 따뜻하면서 따가웠던 첫. 사. 랑. 그 사람은 오락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게임이 중독이라는 무서운 결과가 초래될 수 있을 거라 예상은 했었을까? 중독은 너무 무섭다. 뭐든 과한 것은 부족한 것만 못하다. 우리 엄마와 그 사람의 아빠 두 사람이 가족도 버릴 만큼 본인들에게는 숭고했던 사 랑중독, 과연 지금까지도 그 두 사람은 사랑중독에 빠져있을까? 아니 그 두 사람은 분명 후회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중독이 끝나는 순간 또 다른 중독을 찾아서 움직였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 지금 내 옆에는 일확천금은 소용없다고 외치며 로또복권조차도 사치라고 그리고 그 사람을 가족의 곁에서 또 내 곁에서 앗아가 버린 도박중독. 58 _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59

게임이, 오락이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 게임과 오락이 단순 재미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도구 정도로만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괜찮겠지만 그 게임과 오락을 통해 일확천금을 꿈꾼다거나 혹은 일 상생활에 피해가 갈 정도로 빠지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멈춰야 한다. 세상에 행복 2012년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_우수상 형부와 언니의 죽음 한 공짜는 없다. 그 공짜의 뒷면엔 분명 대가가 찾아올 것이다. 우리 엄마라는 사람은 사랑이라는 일확천금을 꿈꾼 대신에 가족을 잃는 대가를 치렀 고 그 사람은 일확천금을 꿈꿨지만, 결국엔 모든 것을 잃고 초라한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르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만약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떠한 중독이든 빠져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혼자서 이 겨낼 자신이 없다면 병원의 치료 혹은 가족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이겨낼 수 있기를 바 래본다. 나는 오락실도 싫다. 지나가다 뿅뿅 게임하는 소리만 들어도 온 몸에 두드러기가 돋 는다. 화투는 더 싫고 카드는 더더욱 싫다. 그건 나 역시 오락을 오락으로서만 끝낼 자제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커피 한 잔을 타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나는 능숙하게 본체의 전원을 누르고 모니터 를 켠다. 윈도우가 열리고 바탕화면에는 푸른 초원이 펼쳐진다. 이윽고 초원에는 한 마 리의 나비 같은, 한 송이 꽃 같은, 저마다 컬러풀하게 알록달록한 아이콘들이 하나 둘 제자리 하며 내려앉는다. 이제 나는 그 누구의 방해도, 간섭도, 그렇다고 잔소리도 없는 나만의 여행을 자유롭 게 떠나는 것이다. 한 번의 클릭으로 저 먼 지구 반대편을 삽시간에 왕복하고, 두 번의 클릭으로 누군가가 올려놓은 글을 읽고, 누군가가 찍어 놓은 사진을 본다. 그러다 문득, 화분에 얹어 두었던 돌멩이를 집어 들고 본체와 모니터를 사정없이 때 려 부셔버리던 몇 년 전 그때의 일이 또다시 진드기처럼 스멀스멀 머릿속으로 기어 올라 와 나는 전원을 강제로 종료해 버렸다. 그럼에도 명백하게 끝낼 것을 다시 한 번 확고하 게 묻는 듯이 모니터 화면에는 -지금 끝내기- 네모 박스가 영정처럼 무섭게 뜨고 나는 서둘러 지금 끝내기를 눌렀다. 이 일을 대체 어떻게 하면 좋아. 너무 무서워서 혼자 견딜 수가 없다. 좀 올라와 주면 안 되겠니? 일 년 동안 연락이 두절되었던 청주에 사는 언니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무슨 일이야? 그 동안 왜 연락이 안 되었던 거야? 얼마나 걱정하고 찾았는데. 언니는 전화상으로 길게 말 못할 상황이라며 한 시라도 빨리 올라와 줄 것만을 간곡 히 부탁했다. 언니는 쉴 새 없이 울고 있었다. 60 _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61

전화를 끊자마자 이곳 부산에서 세 시간을 달려 곧장 청주로 올라갔다. 내게 전화를 할 때부터 커피숍 구석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언니의 모습은 그야말 로 처참했다. 얼굴에는 성한 곳 없이 온통 멍투성이였고, 옷은 마구 찢어져 있었으며 신 발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그리고 나이 마흔도 넘은 언니는 겨우 40킬로그램도 안 될 만큼 병든 나뭇가지처럼 야위어 있었다. 커피숍의 주인인지 종업원인지는 내가 도착을 하자 어떻게 저 여자를 처리해야 할지 난감했다는 표정을 역력하게 띄우며 보호자의 등 장에 비로소 안도를 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엉망이 되어버린 언니를 앞에 두고 나는 할 말을 잠시 잃어 쳐다보기만 했다. 언니는 그저 서럽게 울 뿐이었다. 정신 차리고 이제 어떻게 된 건지 자초지종을 설명 해 보란 내 말에 몇 번의 긴 한숨을 눈물에 섞어 뿌리고는 어렵게 말을 시작했다. -벌써 몇 년 전부터 네 형부는 일도 안 나가고 매일같이 집안에서 꼼짝 안하고 컴퓨 터 게임만 했다. 식당에서 하루 종일 뼈가 부서지도록 설거지를 해대며 그래도 아들 하 나 번듯하게 키워내고 싶어서 내가 아무리 고생하며 일을 해도 네 형부는 컴퓨터에만 미 쳐있었지. 처음에는 그냥 저러다 말겠지 싶었어. 하지만 날이 갈수록 점점 더해지기만 하더라. 잠도 안자고, 밥도 안 먹고, 오로지 컴퓨터 게임에만. 결국에는 게임을 하여 잃은 돈을 내게 내놓으라고 하더라. 컴퓨터로 게임을 했는데 무슨 돈이냐며 물었으나, 실제 도박판과 마찬가지의 내가 알지 못하는 일이 엄청나게 벌어지고 있는 거였어. 이제 제발 그만 하라고 한 마디만 하면 주먹이 날라 오고 나를 밟아댔다. 그리고 구정물에 손 담그며 애면글면 눈물겹게 벌어 감춰둔 돈까지 다 뒤져다가 탕진 했지. 하물며 애 책 사줄 돈이며 반찬거리 살 몇 푼의 돈까지 모두 빼앗아 가버렸다. 식 당일 마치고 단칸방 집으로 가면 네 형부는 그렇게 게임만 해 댔고, 네 조카와 나는 그 옆에서 숨죽이며 덜덜덜 떨어야만 했지. 그런 시간이 한 달, 두 달, 석 달. 네 형부는 집 밖으로 단 한 번도 나가질 않았어.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자랐어도, 수염 은 목울대까지 늘어졌어도 말이다. 집 안에 햇볕 들어오는 것이 싫다면서 전깃불도 켜 지 못하게 하였고, 네 조카가 공부한다며 컴퓨터를 쓸려고 해도 절대 양보해 주지 않았 다. 그러다 어젯밤에 이럴 바에는, 이렇게 살 바에는 다 같이 죽는 게 낫다며 내가 정신 잃은 사람처럼 바락바락 대 들었더니, 부엌칼을 들고 와서는 네 조카와 나를 찌를 듯 위 협하며 죽여 버릴 거라며 폭행을 휘둘렀다. 나는 그렇다 치고 자식새끼 그 칼에 찔려 죽 을 거 같아서 그 길로 둘이서 뛰쳐나왔다. 네 조카 책가방만 챙겨들고는 아무것도 못 챙 겨서 나왔는데 갈 곳이 있어야지. 우선은 찜질방으로 가서 자고 애는 학교 보내고 네게 전화한 거야. 언니로서 차마 이런 꼴을 보여 주기 싫어서 망설이고 망설였는데. 정 말 아무데도 전화 할 곳이 없더구나. 어쩌다 이렇게 되었구나. 언니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부처님 반 토막같이 착하기만 한 우리 언니에게 이런 일이 생겼단 말인가. 법 없이도 살 거 같던, 순하디 순하기만 했던 형부가 어찌 그렇게 되었단 말인가.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것이었다. 다시 언니와 조카를 형부 곁으로 돌려보낸다는 건 생지옥으로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었다. 나는 일단 몇 시간 동물 안 원숭이 꼴이 되어 있던 언니를 데리고 커피숍을 빠져 나와 무작정 방을 얻으러 다녔다. 언니에게 물어 언니와 형부가 살던 곳과 반대되는 곳으로 갔는데 마침 다행히도 방 두 칸짜리 사글셋방이 있었다. 주변 환경이며 주거 환경 등은 따져 볼 여유가 없었기에 방을 보자마자 내 통장에 들어있던 돈을 털어 집주인과 계약을 했다. 그리고는 근처 마트로 가서 우선 당장 쓸 싸구려 생필품을 샀다. 그러고 나서 감자탕 집에 들어가 앉았지만 언니는 밥 한 숟가락도 삼키질 못했고, 술 도 제대로 못 마시는 언니에게 나는 소주 몇 잔을 따라 주었다. 언니야, 괜찮다. 이제 새롭게 시작하면 된다. 형부와는 당장 이혼할 마음먹어라. 아이 는 언니 혼자서 오히려 잘 키울 거니까. 우선은 언니 건강이 먼저니까 일단 당분간은 식 당일도 하지 마. 그 동안은 내가 어떻게 해 볼 게. 그리고 다 잊어. 알았지? 소주 몇 잔에 벌써 취기가 잔뜩 오른 언니는 벌게진 뺨 위로 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잠시 언니를 달랜 뒤 언니는 먼저 집으로 가 있으라며 바래다 준 후, 조카가 62 _ 도박중독예방 현상공모전 체험수기집 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