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편 문화 예술 제장 언 론. 신문 ) 중앙 일간신문 언론은 신문이나 잡지,방송을 통하여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보도나 의견 및 비판을 신속하게 전달하는 것으로써 우리나라는 한성순보 漢城旬報) 로부터 시작되었다.한성순 보는 임오군란 후 년 월 일 일본에 수신사로 갔던 개화당 김옥균,박영효,서광범, 김만식 등이 만든 것으로 비록 관보 官報) 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였지만 한국 최초의 신문이었고,이를 기로 후일 민간신문이 속출하게 되어 시사논설로써 대중 몽에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년에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창설함과 동시에 그 해 월 일에 독립 신물을 창간 발행하였다.제호로부터 기사 전부에 이르기까지 순 한글판 및 영문판으로 하여 발간하였다.이를 기로 많은 민간신문이 출현하게 되었다. 년 월 일 조선 일보가, 월 일에 동아일보가 창간되어 민족의 대변지로서의 역할을 시작하였다. 보령시에 신문이 보급되고 신문 지국이 설치되기는 년 조선일보 지국과 동아일보 지국이 처음이었으나 오늘날의 지국과 같은 활동은 없었고 오히려 잦은 정간과 교통의 불편으로 본사에서 직접 구독자의 신청을 받아 우송하는 경우가 많았다.일제 말기에는 지국에서 우송하는 방법을 택하여 신문이 발간된 지 ~일이 지난 후에야 받아보는 불편도 뒤따랐다. 해방 전까지 보령지역에 배달된 신문으로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비롯하여 일본어판인 경성일보 조선총독부 기관지),한글판인 매일신문 그리고 조선상공업신문, 대전에서 발행하는 중선일보 中鮮日報)등이 있었다. 년대 대천지역의 신문구독 상황은 동아일보 - 부,조선일보 - 부,매일신문 -부 정도였다고 한다.당시의 인구는 보령지역의 각 면이 비슷하였고,웅천과 청라면의 인구가 대천면보다 많았으므로 타 지역에서도 비슷하거나 좀 적게 구독했을
언론 것으로 추측된다. 년 해방 이후 신문에 대한 인식이 크게 높아져 중앙 또는 지방에서 발간되는 신문의 지국 설치도 일제 시대보다 훨씬 활발하였으나 당시 발간되는 신문의 수명이 짧은 경우가 많아 지국들이 희생을 치르는 등 폐해도 적지 않았다. 동란이 지나고 사회가 안정을 되찾기 시작하자 사회 각 분야별로 전문화가 이루어 지면서 각 신문사에서도 지방 보급망을 확장하기 시작하였다.보령지방에도 안정된 신문지국이 설치되기 시작하였다.한편 당시만 해도 지방에는 별도의 취재기자가 없었 으므로 지국장들이 기사 취재까지 맡았으며 어떤 면에서는 신문보급보다도 오히려 기사 취재에 더 열을 올렸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지국장들의 활동이 대단하였고 이를 빙자한 사이비 기자의 출현 등 사회적인 물의가 빚어지기도 하였다. 당시 보령군에서도 문화공보실을 두고 정부 시책의 홍보와 함께 언론기관과의 협조를 취하게 하였다. 년에는 각 신문사에서 처음으로 지방취재기자 제도를 두어 신문에 지방판을 만 들고 그 기사를 전담 취재케 하여 신문보급 업무와 기사취재 업무가 지방에서도 구분 되었다. 그러나 지방 주재기자 제도의 초창기에는 홍성에 기자가 주재하면서 홍성,예산, 서산,보령,청양,서천 등 충남의 서부지역을 취재토록 하다가 차츰 각 군에 기자를 주재시키게 되었다.그리고 사회가 발달하고 신문구독율이 높아져 신문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극대화되면서 많은 신문사들이 흥망을 속하는 가운데 취재와 보도에 열띤 각축을 벌이면서 지역 민주주의 발전과 사회정의 실현에 큰 몫을 담당하여 왔다. 년 이후 제 공화국의 출범은 우리 언론 발달에 일대 제약을 가하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언론기관의 난립으로 인한 피해를 막는다는 구실 하에 많은 언론기관들을 통폐합,중앙 단위에 몇 개 신문 그리고 각 지방 단위에 개씩의 신문사만을 운영토록 하여 자유경쟁 체제하의 언론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수난을 겪었다. 그러나 년 제 공화국의 출범으로 인하여 사회 각 분야의 민주화가 추진되면서 언론분야에도 민주화의 욕구가 한꺼번에 분출되어 그동안 중단되었던 신문의 재창간을 비롯한 수많은 신문들이 쏟아져 나와 신문의 홍수를 이루게 되었다. 년대 보령지역에 지사를 설치한 신문사는 대전일보,중도일보,대전매일을 비롯하여 충청일보,충남일보 등 개 지방 신문사를 위시하여 조선일보,동아일보,서울신문,한국일보, 중앙일보,경향신문,국민일보,세일보 등 개 중앙 신문사의 지국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밖에도 내외경제신문,제일경제신문,한국경제신문,매일경제신문,서울경제신문,한레 신문,스포츠서울,일간스포츠,스포츠조선 등 많은 일간신문을 비롯하여 여러 주간신문이
제편 문화 예술 보급되었다. 년 현재 보령지방에는 대부분의 중앙 일간신문이 들어와 있는데 대부 분 지국만 설치되어 있고,상주 기자는 두지 않고 있다.현재 상주 기자를 두고 있는 중앙지는 전국매일 이건영) 과 신아일보 박상진) 이다. 년의 신문 구독현황 년 월 일 현재,보령군 통연보) 대 천 주 포 오 천 천 북 청 소 청 라 남 포 웅 천 주 산 미 산, 조선 동아 경향 한국 서울 대한 각 기타 ) 지방 일간신문 년 월항쟁 이후 언론자유가 크게 신장되면서 이후 이른바 도 道)사 社) 정책이 폐기돼 지방 일간신문의 복간과 창간이 이뤄진 데 이어 년에는 정기간행물의 등록등에관한법률 이 신문등의자유와기능보장에관한법률 로 개정되면서 신문사 설립시 시설기준 윤전기) 이 대폭 완화되면서 지역 일간신문의 창간이 붐을 이루게 된다. 년 현재 보령지역에서 취재활동과 함께 보급되고 있는 지방 일간신문은 여 개로 대부분 대전 충남,충북을 취재권역으로 하고 있고,보령지역에도 주재기자를 두고 있다. 각 신문사의 현황과 상주 취재기자 현황은 다음과 같다. ) 각 신문 현황 ① 충남 지역 신문의 태동 충남에서는 년 월 일 일본인 가와지마 川島) 가 발행하던 중선일보 中鮮日報) 가 간행되었다.이 신문은 민간지라는 탈을 쓰고,관보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년 해방이 되기까지 일본인이 말하는 소위 대동아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온갖 만행과 악필을 총동원하다가 패망과 더불어 사라지고 말았다.년 월 일 광복과 함께
언론 중선일보의 간부급으로 있던 곽철수 郭喆洙)등이 일제하에 숨겨두었던 한글 활자를 가져다 동방신문 東邦新聞) 을 발행하였다.이 신문은 년 동란 때 사옥이 폭격으로 소실되어 폐간되고, 년 월 일 권서정 權瑞鼎) 에 의하여 대전시 선화동에서 호서 신문 주간) 이 발행되었으나 이것 역시 동란으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뿐만 아니라 년에 대전시 정동에 자리잡았던 충청매일신문도 동방신문과 함께 유일한 지방지로서 보급 확장에 힘썼으나 사세확장도 보지 못한 채, 동란으로 소실되어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다. ② 대전일보 동란으로 한때 중단되었던 충남의 언론은 수복 후 전시속보 戰時速報) 로 비라형의 신문을 발행했는데 후일의 대전일보이다.그후 발전을 거듭하다가 년 월 일부터 신문사를 도 사로 정비하려는 정부의 방침에 의하여 당시 쌍벽을 이루던 중도일보와 통합이 되고 제호를 충남일보로 바꾸었다. 년 월 일을 기하여 다시 대전일보로 환원하였다. 년 월 일 현재 호를 면으로 발행하였다.보령지역에는 보령지사 를 두고 있다. 대전일보 연혁.. 전시속보판 발간.. 공보부 정식등록 타블로이드 면 발행.. 주식회사 대전일보사 출범.. 중도일보 매수통합.. 제호 한글 대전일보로 변경,가로쓰기 전지면 확대.. 제호 한문 대전일보로 환원.. 대전 서구 갈마동 -신사옥 이전.. 충남취재본부 확대개편 천안,아산 지사 통합) ③ 중도일보 중도일보는 대전일보와 함께 창간되었는데 년 사장에 이웅렬,부사장에 송영헌, 편집국장에 추식 등이 취임했다.당초에는 중도매일로 발간하다가 중도일보로 바꾸어 여러 차례 시설의 증설과 기구를 확대하여 지방신문으로서 면모를 갖추어 발행되어 오다가 정부의 방침에 의하여 년 월 일을 기해 대전일보와 통합하여 충남일보로
제편 문화 예술 바뀌게 되었다. 그후 공화국에 이르러 언론의 자유가 확대되자 속간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년 월 일 현재, 호를 발행하였으며 면),보령지방에는 보령지사 를 두고 있다. 중도일보 연혁.. 중도일보 제호 공보부 등록 제 호).. 중도일보 창간호 발간.. 공화국 유신체제하의 ' 道社' 제도에 의행 강제 폐간.. ~.단절기간.. 년의 단절을 딛고 속간호 사령 제 호)발행.. 중도일보 제호 재발행 발행 편집 인쇄 김원식 사장).. 신사옥 이전 대전시 중구 오류동 -지하 층,지상 층) ④ 충청투데이 년 월 일 대전시 가장동에서 대전매일신문 창간호를 발간하였다. 년 월 일 충청투데이 로 법인을 전환하고, 년 월 일부터 신문 제호를 충청투데이 로 변경하고,충북지역까지 취재망을 확대하였다. 년도에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우선지원 대상 일간지로 선정되었다. 년 월 일 호를 면으로 발행하였다.보령시에는 충남 서부본부 당진)산하에 보령지사를 두고 있다. ⑤ 중앙매일 대전광역시 중구 대흥동에 본사가 있고,충청권 대전,충남,충북) 을 취재 권역으로 하는 신문이다. 년에 창간되어 년 월 일 현재 호가 발행되었다.보령지 역에는 보령지사 가 설치되어 있다. ⑥ 충청신문 대전,충남,충북을 취재권역으로 하는 신문이다.대전시 서구 용문동에 본사가 있고, 보령지역에는 보령본부 가 있다. 년 월 일 현재 호를 면으로 발행하였다. ⑦ 충청일보 충북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에 본사를 두고 충청권 충북,충남,대전) 을 취재 권역으로 하는 신문이다. 년 월 일 국민일보로 출발,두 번의 제호 변경으로 충청일보가
언론 되었다.년 월 일 현재, 호를 면으로 발행하였다. 보령지역에는 보령지사 를 두었다. ⑧ 충남일보 대전광역시 중구 오류동에 본사를 두고 충청권 대전,충남,충북) 을 취재 권역으로 하는 신문이다. 년 월 일 현재, 호를 면으로 발행하였다. 보령에는 보령지사 를 두었다. ⑨ 충청매일 충북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에 본사를 두고 충청권 충북,충남,대전) 을 취재 권역으로 하는 신문이다. 년 월 일 창간하여 년 월 일 현재, 호 면을 발행 하였다. ⑩ 대전투데이 대전광역시 서구 괴정동에 본사를 두고 충청권 대전,충남,충북) 을 취재 권역으로 하는 신문이다. 년에 창간되어 년 월 일 현재 호를 면으로 발행하였다. ⑪ 충청타임즈 년 월 일 창간된 충청권 대전,충남,충북) 을 취재 권역으로 하는 신문이다. 처음에는 새충청신문 으로 발행하다가 년 충청타임즈 로 제호를 바꾸었다. 년 월 일 호를 면으로 발행하였다.
제편 문화 예술 )보령시 주재 언론인, 지국 현황 지방일간지..현재) 언론사 대전일보 충청투데이 충청신문 충남일보 대전투데이 성명 최의성 김성윤 손유덕 장영선 오종진 직위 차장 국장 부장 차장 기자 언론사 중도일보 중앙매일 충청일보 충청매일 성명 오광연 황규출 김병철 권혁창 직위 차장 부장 기자 기자 지국장 신숙인 한상진 이재구 김재범 최영삼 최병기 이찬구 송정순 비고 신문사 지국 현황 신문사명 조선일보 경향신문 국민일보 매일경제 한국경제 동아일보 서울신문 한국일보 중앙일보 지국장 최상민 김민환 강상근 김상옥 최상현 비고 신문사명 한겨레신문 대전일보 중도일보 전국매일 충청신문 충남일보 신아일보 충청매일 본부장 본부장 ) 지역 주간신문 년대 말 시군 단위의 지방신문이 발간되는 붐이 일어나 보령지방에도 여러 주간 신문이 발간되고 경영이 어려워 폐간되기도 하였다. 년대 말에 창간된 보령지방의 신문은 대보신문,대천신문,한내신보,보령신문 )등이다.
언론 대천과 보령의 첫 글자를 따서 이름을 정한 대보신문은 발행인이 황영주로 년 월 일 창간되었고,매주 - 부까지 발행하여 보령뿐만 아니라 출향인사들에게까지 배포하였다.뒤에 이름을 보령신문으로 고쳐 년쯤)년 초까지 발간되었으나 경영난으로 휴간 중에 있다.대보신문과 보령신문의 역대 사장은 오찬규,임홍빈,이익호, 황의식이었다.다른 신문은 경영난으로 모두 폐간하였다. 년 월 현재 보령지역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은 보령시민신문,주간보령,시사 보령이다. 보령시민신문은 년 창간하여 주간으로 매주 면을 발행한다. 년 월 일 현재 호를 발행하였다.역대 발행인은 송두석,류근평,김종진 현) 이다. 주간보령은 년에 창간하여 주간으로 매주 면을 발행한다.년 월 일 현재 호를 발행하였다.발행인은 강철호이다. 시사보령은 년 월 창간하여 주간으로 매주 면을 발행한다.발행인은 김광태이다. ) 인터넷 신문 세기에 접어들면서 I T기술의 발달과 함께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인터넷 신문이 창간 되는 등 언론환경이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언론 관법령의 개정으로 언론사 설립의 제한이 대폭 완화되었고,I T산업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신문 방송 등 매체간의 경가 허물어졌으며,언론사에 의해 독점돼 온 여론형성 기능도 인터넷의 발전과 함께 인 미디어시대 가 도래하는 등 가히 혁명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언론사에 의해 일방적으로 제공되던 보도나 정보가 언론 소비자들의 관점 에서 평가되는 이른바 쌍방향 체제 를 형성하게 되었다.이에따라 지역 언론사들은 자체
제편 문화 예술 인터넷 홈페이지를 구축함으로써 언론 소비자의 다양한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가 하면 I T 기술의 발달과 함께 실시간 보도나 동영상 서비스까지 제공 하는 단까지 이르렀다. 년 현재 보령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터넷 매체는 디트뉴스,충남영상뉴스, I N-ne ws등 개이며,주간신문에서 운영하는 BBC인터넷방송과 시사보령도 인터넷판을 운영 중이다.이들 인터넷 매체는 보령지역의 소식을 거의 실시간으로 전달하는 장점과 함께 보도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댓글을 운영하면서 점차 영향력을 확대해 가고 있다.특히,동영상 서비스를 통해 기존 활자매체와의 차별화도 시도하고 있으나,장비나 기술인력 등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해 활성화되지는 않고 있다. 디트뉴스 발행인 김중규) 는 년 월 사) 대전언론문화연구원에서 창간한 인터넷 신문으로 대전 충남권을 중심으로 지역정가 소식을 비롯해 행정 사회 문화 스포츠 언론 동향 등을 주로 다루고 있다.보령지역에는 년부터 정해준 이상우 기자 등이 주재하고 있다. 충남영상뉴스 발행인 김봉덕) 는 인터넷 기반의 영상뉴스라는 뉴미디어를 표방하면서 년 월 창간했다.충남영상뉴스는 홍성에 본사를 두고 있고,내포지역을 중심으로 정치 행정 사회 교육 등 지역소식을 전달하고 있다.보령지역에는 김봉덕 김윤경 기자 등이 주재하고 있다. I N-ne ws 발행인 양회대) 는 장애인들을 위한 각종 정보와 지역소식을 전달하고 있으 며, 년 월 창간했다.I N-ne ws 는 동영상을 기반으로 뉴스를 제공하고 있으며,보령 지역뿐 아니라 서울 인천 등 다른 지역과 해외소식까지 영역을 확대해 가고 있다.보령 지역에는 이태영 기자가 주재하고 있다. 이밖에도,주간신문에서 운영하고 있는 BBC인터넷방송 년 월,발행인 강철호) 과 시사보령 년 월,발행인 김광태) 도 인터넷 신문을 운영하고 있다.
언론. 방송 ) 방송의 발전 우리나라에서 방송이 시작된 것은 년 월 일이었다.이른바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이 호출부호 J ODK,출력 의 소규모 방송시설을 갖추고 전파를 발사한 데서 비롯되었다. 개국 당시의 방송은 우리말과 일본어를 혼용하였으며 프로그램은 일본어 뉴스와 일용 품의 시세,일기예보 등 극히 단조로운 공지방송에다가 음악 정도였다. 이후 해방 당년까지 약 년 간에 걸쳐서 지방방송국을 설치함으로써 방송망 획을 완성하였다.그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모든 방송을 전쟁목적 수행에 동원하 였고,해방과 함께 식민지 방송은 막을 내렸다.이로써 자주독립과 민주주의의 새 시대를 맞아 참된 우리 방송은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미 군정청에 의해서 운영되던 우리 방송은 정부수립과 함께 방송 국영화에 따라 공보처 산하에 들어가면서 이때부터 중앙방송국을 포함한 전국 개 국영방송망의 체를 갖추게 되었다.한편 한국 방송의 부호가 HL 로 배정되고 년 월 일을 기하여 호출부호를 정식으로 방송하기 시작하였다. 사변은 한국방송의 기틀을 무너뜨려 부산과 대구를 제외한 개국의 시설이 파괴되고 소실되었으나 수복후 복구되고 년 우리나라 최초의 민영방송인 기독교방송이 탄생 하였다.이는 민간상업 방송의 가능성을 보여준 점에서 우리 방송사의 전환점을 이루었다. 은 우리 방송을 약진의 단로 끌어올린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민간 상업방송이 본격화된 것도 이 시기이며 년 KBS-TV 개국을 비롯하여 년에는 최초의 민영 TV인 동양TV 가 서울과 부산에서 동시 개국하였고, 년에는 MBC-TV가 등장 하는 등 TV방송이 본궤도에 오른 것도 이 시기이다. 중파방송과 단파방송 뿐 아니라 FM방송이 출현한 것도 이때이며,방송법이 제정 공포된 것도 년의 일이다.방송 기술면에서도 인공위성 I NTELSAT의 중를 성공 시켰고 금산 위성통신지구국의 개통은 우리나라 전파통신사상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또한 년대 초부터 칼라 TV시대가 열렸다. 충청남도에는 지방방송국으로 KBS대전방송국과 MBC대전방송국,TJ B가 있다.KBS 대전방송국은 년 월 대전시 목동에 방송국을 세우고 년 월 일 주파수 KHZ,출력 W로 일제전쟁방송을 해왔다.해방 후, 년에 출력이 W로 증강 되었으며, 년 공보처 대전방송국으로 정식 발족하면서 호출부호도 HLKI 로 정하여 졌다. 년 월 일부터. 사변으로 임시 중앙방송국의 역할도 하였으나 공산군의 침입으로 다시 기 일체를 철수시켰다.
제편 문화 예술 년 월 일 공보부 대전방송국으로 개칭되고,이듬해 월 현재의 대흥동으로 이전하여 목동 시설은 완전한 송신소로 독립하게 되었다. 년 지방 TV중소 설치 획에 따라 식장산 TV중소가 개소되어 CH,출력 로 이 고장에서 처음으로 TV 전파를 발사하게 되었다. 년 월 일 문화공보부 대전방송국으로 명칭을 바꾸고 라디오 중소는 년 월 일 홍성중소가 출력,주파수 KHZ로 개소되고, 년 월 일에는 부여중소가 주파수 KHZ,출력 로 첫 전파를 발사하였다. 년 월 일 한국방송공사 대전방송국으로 발족하였다. 대전문화방송국은 한국문화방송의 직할국으로 년 월 일 호출부호 HLCQ,주파수 중파 KHZ,출력 로 라디오 정규방송을 시작하였다.충남에서는 유일한 민간상업방송 으로 발족한 대전문화방송은 KBS와 함께 관민이 공존하는 새로운 충남방송사의 첫 장을 열어 놓았다 하겠으며,도민의 비상한 관심 속에서 충남북 일원을 가청지역으로 특히 지역 경제발전에 획기적인 활력소를 불어넣었다.개국 당시에는 전방송시간의 %에 불과한 로컬프로만을 운영하였으나 년 월 일 KBS와의 혼신을 방지하기 위하여 주파수를 에서 KHZ로 변경하였으며,아울러 방송시간도 하루 시간으로 연장하였다. 년 월 일 TV무선국 허가신청으로 시작된 대전 텔레비젼 방송 주식회사는 년 월 일 호출부호 HLAZ,CH,영상출력 W로 TV개국식을 거행하고 첫 전파를 발사하였다. 년 월 일에는 MBC대전국 라디오) 를 인수하여 대전문화방송 주식회사로 통합 발족하였다.우리 지역의 방송관련 시설로는 년 주산면 금암리에 설치된 무인 TV 방송중탑과 옥마산의 방송통신중시설 등이 있다. 옥마산의 방송통신중시설 KT대전네트워크서비스센터) 은 년에 공군에서 군용 시설로 건설하였던 것을 한국통신공사에서 인수하여 국가 무선망으로 사용하고 있다. 섬지역의 전화 등 모든 전화 중,TV 중 등을 하고 있다. 년 KBS,, TV의 중를 시작하였고,이어 민영TV도 중하였다.이 시설로 인하여 보령지역에서도 TV를 선명하게 시청할 수 있게 되었다.옥마산 시설이 있기 전,보령 남부지역의 TV수신은 전주방송국의 모악산 중시설에 의존하였다. ) 방송 수신장치라디오, TV)의 보급 과정 ) 라디오, TV 보급 방송국이 설치되고,질좋은 방송을 송출하여도 수신 시설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방송을 송출한 것은 년이라고 하나,보령지방에서 수신할 수는
언론 없었을 것으로 본다.보령지방에서 전파가 수신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수신 장치인 라디오가 없었기 때문이다. 보령지방의 라디오 숫자에 관한 최초의 통는 년도 통이다.당시 보령시, 가구 중, 가구가 라디오를 가지고 있어 보급률이. %에 불과하였다. 일제시대 말기나 해방 당시에는 % 미만의 가정이 라디오를 가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 해방 당시에 마을 당 가구 정도 라디오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년대 이후 라디오 보급은 급증하여 년대 중반에는 거의 모든 가구에 라디오가 보급되었다. 보령지방의 TV방송의 시작은 년부터이다.당시 보령시 지역은 난시청지역이라 개인적으로는 TV전파를 수신할 수가 없었다. 대천문화사에서 년 년간의 노력 끝에 봉황산에서 수신점을 찾아 유선중하여 용궁다방 에 처음으로 TV가 설치되었다.그러 다가 년경부터 서울 KBS의 CH와 광주 KBS의 CH가 혼선되어 무선안테나 방식 으로 중하였는데 전파감시국에서 불법적인 무선전파 발사를 중단하라고 하여 년에 사업을 중단하였다. 년 월부터 봉황산 너머의 차폐된 곳에서 다시 수신점을 찾아 중하였다. 오늘날에는 옥마산의 방송중시설 때문에 유선이 없어도 잘 나오지만,그래도 화면이 선명하지 않고 여러 채널을 선호하여 유선망을 설치하여 TV를 시청하는 가정이 많다. 라디오 TV 현황 구분,,,,,,,,,, 라디오,,,,,,,,,, 보령군 통연보, ) TV 총가구수,,,,,,,,,,,,,,, 년 읍면별 TV 보유현황 보급률 %).......... 보령군 통연보) 대천 주포 오천 천북 청소 청라 남포 웅천 주산 미산
제편 문화 예술 ) 년대의 유선방송사업 년대 이전에는 한 마을에 라디오를 보유한 가구가 한두 집뿐이어서 주민들이 최신 정보를 얻을 수 없었고,유행가나 연속극 등을 들을 수도 없었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 하고,정부 입장에서는 국민들에게 정부 방송인 KBS를 듣게 하기 위하여. 이후 정부에서 스피커를 설치하여 주거나,정부의 권장에 의해 사설업자가 각 지방에서 유선 방송을 실시하였다. 유선방송은 업자가 앰프를 설치하여 서울 KBS 라디오를 받아 각 가정에 보내고,각 가정에서는 인치 마그네틱 스피커를 설치하고 청취하는 것이었다.각 가정에서는 방송의 선택권이 없고 업자가 송출하는 KBS방송만 들어야 했다. 당시의 선로는 군에서 사용하다가 폐기되어 불하한 전화선을 이용하고 일부는 일반 철선을 이용하였다.전주는 전화선 전주,한전 전주,살아있는 나무 등을 이용하였고 부득이한 경우 나무로 전주를 세우기도 하였다. 스피커 청취료는 처음 시설을 할 때 옥내 설치비 약간을 부담하고 월 원씩 부담 하였다. 현금으로 내지 못하는 농촌의 경우는 가을에 벼 말,여름에 보리 말을 부담하였다. 유선방송은. 이후 년쯤 시작하여 년에는 각 읍면에 걸쳐 업체, 가구에서 청취하다가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보급과 함께 감소하여 년쯤 없어졌다. 대천지방에는 년 월 일 박민환 朴民煥) 이 대천문화사 출력 W) 로 허가를 얻어 사업을 시작하였고 년 임창재 任昌宰) 가 인수하여 사업을 속하였다. 대천문화사에서 나간 유선방송망은 아래와 같다. ① 신대리-관창리 ② 주교리-은포리 ③ 구시-궁촌-내항리 ④ 명천 흥덕굴) ⑤ 죽정리-화산리 ⑥ 동대리-명천리 남곡동과 요암 신흑동은 대천에서 원거리여서 기술적으로 스피커를 설치하지 못하였다. 대천문화사는 년에 스피커 사업을 폐업하고 TV중업으로 전업하게 되었다. 유선방송 현황 구분 업체수 공설 사설 보령군 통연보),,,, 스피커 시설 공설 사설,,,,
언론 - - -,,,,,,, -,,, -,,,,,,, - 읍면별 스피커 현황 구분 대 천 주 포 오 천 천 북 청 소 청 라 남 포 웅 천 주 산 미 산 업체수 공설 사설 ),,,, 스피카 설치수 공설 사설,,,, )현재의 유선방송사업 년대 KBS라디오 방송을 스피커로 내보내던 유선방송이 년대에 소멸되었고, 년대에 TV를 중하는 유선방송이 생겨나게 되었다.라디오와 달리 TV는 가시청 지역이 좁아 중시설이 없는 보령지방에서 시청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집집마다 높은 안테나를 세우고도 KBS만 간신히 볼 수 있었다.그래서 TV 수신시설을 하고,유선으로 중하는 유선방송업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유선방송에 가입하면 여러 채널을 선명한 화면으로 볼 수 있어 대부분이 유선방송에 가입하게 되었다. 보령지역에서는 년 현재 대천,웅천,성주,청라,신흑동 등지에서 유선방송 영업을 하고 있다. 한편 년에는 공주에 본사를 둔 주) 한국케이블 TV 충청방송이 들어와 영업을 시작하여 천북면과 오천면을 제외한 보령시 전역에서, 여 가입자를 대상으로 영업을 하고 있다. 전파는 공주에서 수신하여 보령까지 케이블로 연결하여 각 가정에 공급하고 있다.보령에는 서부센터를 두고 운영하는데 보령,부여,서천 지역을 관리하며 직원은 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