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희룡 부경대학교 환경대기과학과 년 월 일 접수 년 월 일 승인 서 론 2004년에는 한반도에서 근대기상사업이 시작된 지 100주년이 된다는 시각이 있어 한국 기상학계와 과학 사 학계에서는 기상사업 발달의 역사를 돌아보는 계기 가 마련되었다. 이 시기에 한상복 (2003)은 한반도의 삼국시대부터 현대까지 기상사업발달의 역사에 관한 귀중한 자료들을 정리하였다. 그래서 강수량과 기온의 관측, 그리고 조직제도의 변화에 관한 자세한 연구가 진행된 바 있다. 특히 100년 전, 근대 기상학이 태동되 던 시기의 사료가 잘 정리되었다. 그러나 예보역량의 발달과정이나 일기도의 작성에 대하여 관심을 보인 연구는 아직 발견되지 않는다. 이 는 한상복 박사가 기상예보 경험이 없는 해양물리학자 란 점, 그리고 한상복 외에는 기상학사를 연구한 사람 이 별로 없기 때문에 생긴 한계점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 연구는 한상복의 관심이 미치지 못한, 최초에 발간 된 일기도에 관하여 관심을 갖는다. 기상청에서는 최초의 일기도라 하여 1905년 11월 2 일의 일기도 한 장을 기상청 내의 전시실에 게시하여 왔었다. 그런데 2004년 말경에 부산에 있는 국가기록 원 부산기록정보센터 (2004년 5월 전의 명칭은 정부기 록보존소 였음)에 11월 1일의 천기도 (, 당시는 일기도를 이렇게 불렀음)가 있음이 발견되었다. 일일 2장의 일기도와 1장의 기상표로 구성되어 있었다. 표 면에 유리테이프가 붙어 있는 등 많이 낡고 훼손되어, 이미 판독 불가능한 곳이 많았으며, 머지않아 모두 판 독 불가능하게 될 가능성이 상당히 크게 보였다. 그 때 문에 11월 2일자 일기도가 최초 일기도로 소개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본 소고는 계속 훼손되어가는 고 일기도들을 부분 적으로나마 복원하고 보존하여 가능한 한 장기적으로 보존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고자 한다. 기상청에서는 1990년대 초반에 이 일기도와 함께 다른 초기 일기도 들을 전부 마이크로필름으로 촬영하여 보관하여 왔으
한국에서 처음 작성된 일기도의 내용과 배경 나, 판독이 전혀 불가능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다. 그 래서 이 일기도들이 훼손되고 나면 조사할 수 있는 기 회도 사라져 버릴 상황이다. 종이로 된 일기도는 언젠 가는 훼손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케너를 이용 하여 정밀한 그림 파일로 만들었다. 한 장의 일기도를 여섯 등분하여 스캔한 다음 다시 합성하여 한 장으로 복원하였다. 11월 1일자 3장과 2일자 기상표 한 장을 합하여 4장을 이렇게 복원하였다. 그 외에도 처음 작성 된 시기를 전후한 일기도들을 20여장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하여 보관했다. 복원된 11월 1일의 일기도로 기상 청 전시실의 일기도를 교체하였다. 11월 2일자 일기도 가 최초인 것으로 오인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복원하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이 일기도들의 내용에 대하여 조사한 기록이 없었음을 발견하였다. 이에 본 소고는 이 일기도를 관찰한 내용을 서술하였다. 고 일 기도의 원본이 없이, 추측으로 연구해야 할지도 모를 후세의 연구자들을 위해서이다. 고 일기도에서는 일기 의 관측, 일기도의 기입 및 분석 방법에 있어서 현대의 그것과 차이가 나는 점이 적지 않게 발견되었다. 한글 이 한 글자도 포함되어 있지 않고, 한자와 일본어 그리 고 영어로 작성되어 있다. 덧붙여 본 소고는 당시 이 일기도가 만들어진 역사 적 배경을 조사하여 일기도가 만들어지고 예보기술이 발달한 과정을 밝히고자 한다. 이 일기도가 그려진 시 점, 일기도에 기입된 관측 지점의 목록에서 당시의 국 제정세 및 일기도의 작성목적 등을 명확하게 밝혀 두 고자 함이다. 중요한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이 일기도 가 한국에서 최초로 작성된 일기도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일기도 작성의 시작점은 바로 현대 적 기상예보의 시작점이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 기 때문에 이 문제도 취급하였다. 기상관측과 예보의 시작 일본의 일기도 작성과 부산 기상관측의 시작 일본에서는 1875년 6월 1일 동경 기상대가 설립되 면서 근대 기상의 관측이 시작된 것으로 간주 된다. 그 전에 외국인의 도움으로 기상 관측도 하고 일기도도 그렸지만 일본은 중요시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근대기 상 백주년이란 기념사업을 1975년에 시행하였다. 1884년 6월 1일부터 매일 천기예보 (지금의 일기예보) 를 시작하면서 폭풍경보와 천기예보에 사용하기 위해 부산의 관측자료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1884 년 6월 16일부터 일본중앙기상대 위탁사업으로 일본 전신국에서 부산의 기상관측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매일 1회 기상전보를 보내던 것이 1884년 12월 1일부 터는 매일 2회로 늘었고, 1885년 11월 1일부터는 매일 3회로 되었다. 따라서 한반도의 기상관측치가 (일본 의) 일기도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84년이다. 한상 복 (2003)은 1884년 7월부터 1885년 12월까지의 월평 균기온 자료는 Woeikof (1887)에서 찾고, 기타 자료도 일본 명치관보 903호, 904호, 1034호 등에서 찾았다. 그 후 일본은 1887년 1월에 동경기상대에서 일본중앙 기상대로 개칭하고 폭풍과 기상예보를 하기 시작했다. 러일전쟁과 아시아의 기상관측의 발달 1904년 대한 제국 영토에 일본의 임시기상관측소들 이 들어 서기 시작했는데 근본적 원인은 러일 전쟁이 었다. 2월 8일 일본은 선전포고도 없이 인천항과 여순 항에 정박한 러시아 군함을 기습하였다. 러시아 측은 선전포고도 없이 공격하였다고 비난하나, 일본 측에서 는 선전 포고가 러시아에 도착하는데 시간이 걸렸을 뿐, 합당한 선전포고를 발표하였다고 주장하는 러일전 쟁이다. 한국정부는 진작 러일 간의 급박한 사태를 감 안, 1904년 1월 23일 국외중립( ) 을 선언하 였으나, 일본은 이를 무시한 채 먼저 군대를 서울에 투 입하고, 곧 이어 2월 8, 9일에는 러시아 함정을 격파하 였다. 2월 23일에는 한국정부를 강압하여 공수동맹( )을 전제로 한 한일의정서 를 체결하였다. 일 본은 이 의정서에 따라 한국내의 광대한 토지를 군용 지로 점령하고 통신망을 접수하였으며, 경부, 경의선의 부설권, 연해의 어업권, 전국의 개간권까지 획득하였다. 이러한 와중인 1904년 3월 5일에는 일본정부칙령 제 60호로 일본중앙기상대 산하에 9개의 임시관측소 를 개설하기로 했고 (명치관보 제 6201호), 3월 7일에 제 1 임시관측소는 부산 서정삼정목 ( ) 31 번지에 있는 민가를 차입하여 관측소 사무를 개시하 고, 3월 8일에 임시관측과장에 와다유지 ( ) 가 임명되었다. 3월 25일에는 제 2 임시관측소가 목포 의 팔구포에 있는 옥도란 섬에서 사무를 개시했다 (일 본중앙기상대, 1936). 이들 관측소에서는 일본의 인력 과 기술에 의해서 기상관측을 하여 이들을 기상전보로 통보하였다. 울릉도와 제주도 그리고 백령도에서도 1904년 이후 일본해군의 망루에서 기상관측이 전쟁기
변희룡 간동안 이루어졌으며, 이들 중 일부는 전쟁 후에 당분 간 계속되기도 했다. 그 해 4월 하순, 한국에 상륙하여 북상한 일본 제 1 군은 5월 초 압록강 연안에서 러시아군과 충돌하여 격 파했고, 같은 달 요동반도 ( )에 상륙한 제 2 군은 남산 ( ), 대련 ( )을 점령하고 여순 ( )을 고립시켰다. 한국정부는 전쟁이 일본의 승세로 기울자 같은 해 5월 18일자로 러시아와 체결하였던 일 체의 조약 협정의 폐기를 선언하였다. 다시 6월에는 만주군 일본총사령부가 설치되었다. 8월 요양 ( ) 부근에서 러시아군과 일본군이 첫 번 째 대규모적인 접전을 벌여 일본이 승리하였다. 그리 고 일본은 8월 22일 외국인용빙협정 ( ) 을 한국과 체결, 한국의 외교권을 거의 박탈하는 고문 ( )정치 를 성립시켰다. 10월의 사하회전투 ( ), 1905년 1월의 흑구대전 ( ) 등의 전투에서도 일본군이 모두 승리하였다. 한편 여 순에 주둔한 러시아 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을 꾀하였으나, 8월 황해에서 일본 해군의 총공격을 받고 항구 안에 봉쇄당하였다가 1905년 1월에 패퇴하였다. 다시 유럽으로부터 지원군을 얻은 러시아군 32만 명과 일본군 25만 명은 3월에 봉천 (, 현 )에 서 격돌하였으나 역시 러시아군이 패퇴하였다. 러시아 는 육전에서의 패배를 만회하려고 발트함대를 회항시 켜 5월 27, 28일 대한해협에서 대 해전을 전개하였으 나 일본 연합함대에 격파되어 전멸하였다. 전승국이 된 일본은 1905년 7월과 8월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각 각 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확인받고 1905년 9월 5일 강화( )하였다. 이어 9월의 포츠머스조약에 따 라 러시아로부터 한국의 독점적 지배를 확인받았고, 한 일간의 을사조약으로 이어져 한국은 망국의 운명 을 맞게 되었다. 이 전쟁의 와중에 일기도가 그려지기 위한 관측소 의 증설은 속속 늘어났고 그 과정의 중심에는 거의 항 상 와다유지가 있었다. 그는 1904년 3월 8일에 동경에 있는 일본 중앙기상대에서 임시관측과장 겸임으로 발 령받아 대한제국에 산재한 임시관측소의 업무를 총괄 했다. 7월에는 제3임시관측소장을 겸하며, 전체 임시 관측소 업무를 총괄하였다. 1904년 7월 28에는 임시 관측소에 임시 관측기사를 둔다는 기사가 일본국 칙령 제 188호로 발표되었고, 이에 따라 8월 22일부로 중앙 기상대 임시관측기사로 발령되었다. 이는 1904년 8월 23일 발행된 명치관보 제 6345호에 나타난다. 1904년 7월 28일 임시관측소에 전임 기사 1인과 서 기 2인, 기수 43인으로 인원이 확대되면서, 9월 7일 제 6 임시관측소가 대련( )에서, 10월 1일에는 제 7 임시관측소가 영구에서 사무를 시작하여 만주지방으 로 관측업무가 확대되었다. 또 중국 중요도시에도 임 시관측원을 파견하여 기상관측을 하도록 했는데, 지부 ( )에서 9월 13일, 천진( )에서 9월 19일, 항주 ( )에서 10월 6일, 남경( )에서 10월 12일 관측 이 시작되었다. 해군에서 운영하는 울릉도 서북단의 송도서( )망루에서는 9월 2일부터 기상관측이 시작되었고, 9월 30일부터는 제주도 서안( )의 제도 ( )망루에서도 관측이 시작되었다. 이리하여 1904년 10월에 이르러서는 천기예보에 필요한 기상관 측소가 13개소로 늘어났다. 인천의 제 3 임시관측소 (소장 와다유지)에서는 각 임시관측소에서 3회 보내주는 관측치와, 각 파견소에 서 임시관측원이 2회 보내주는 관측치, 그리고 해군 감 시 망루에서 통보해오는 자료들을 매일 모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자료들을 30여개소의 일본중앙기상대 통보 자료와 함께 기입하여 천기도를 작성하고, 이를 바탕 으로 천기예보와 폭풍경보를 발표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자료들로 인해 인천의 제 3 임시관측소에서 천기도 를 그리고 천기예보를 시작한 시기가 1904년 10월부 터일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 그러나 1905년 이후에도 관측소의 증설은 계속되었다. 1905년 1월 1일 인천의 제 3 임시관측소는 응봉산 마루에 새로운 청사를 준공해서 임시관측소의 중심지 가 되었다. 1월 17일 중국의 한구( )에 임시관측원 이 파견되어 관측이 시작되었고, 1월 18일에는 사시 ( )에서도 관측이 시작되어 중국의 임시관측원 파 견지는 총 6곳으로 늘어났다. 5월 1일에는 만주 봉천 ( )에서 제 8 임시관측소가 사무를 시작했고, 5월 18일 성진( )에서 제 9 임시관측소가 문을 열었으 며, 7월 16일에 제 6 임시관측소 여순구 ( )출장 소가 사무를 시작했다. 1905년 7월에 이르러 임시관측 소는 총 9개소, 출장소 1개소, 임시관측원 파견지 6개 소로 늘어났다. 해군의 감시망루는 8월 16일 울릉도 북쪽에 송도북 ( )의 망루가 업무를 시작하면서 기상관측도 했다. 여기서 임시관측소의 업무개시일자 는 1936년 전전천대길 ( )이 정리한 조선 기상사업의 연혁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관측소의 공 식적 업무가 개시되기 전에 이미 관측치는 생산되고 있었다. 1904년 11월 1일에 작성된 기상표에 이미 중
한국에서 처음 작성된 일기도의 내용과 배경 국의 임시관측소들의 관측치가 기록되어 있다. 당시는 전쟁 전후라 필요하면 먼저 업무를 시작하고 뒤에 공 문을 발표하는 경향이 이 외에도 몇 번 더 발견된다. 대한제국의 기상업무 대한제국은 1907년 ( 11 ) 2월 1일 칙령 제 7 호로 농상공부소관 측후소관제를 반포하여 신식 기상 관측 사업을 위한 관제를 확립하였다. 측후소는 소장 1 인, 기사 2인, 기수 3인을 두도록 해서 총원 6명으로 구 성되었으며, 필요한 곳에 측후지소를 두도록 했다. 이 칙령은 의정부관보과 ( ) 발행의 관보 제 3683호 ( 11 2 7 )에 게재되어 있다. 1907년 1월 1일부터 평양측후소에서, 1월 7일부터는 대구측후소에서 기상관측을 시작하였다. 즉 관측을 시 작한 후에 칙령을 발표하였다. 1907년 2월 1일에는 인 천측후소 휘하의 경성측후지소로 신설되어, 동년 10월 1일부터 관측업무를 시작하였다. 이것이 한국정부에 서 세운 세 번째 측후소로 후에 서울 측후소가 되었다. 1907년 4월 1일에는 임시관측소가 없어지고, 인천에 통감부관측소 (소장 와다유지)가 생기며, 부산, 목포, 원 산, 용암포, 성진 등은 통감부관측소 산하의 지소로 조직 이 변하면서 이마저도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조선 시대에 서운관, 관상감으로 개명되어 내려온 대한제국 의 관상소 ( )는 1907년 12월 13일에 폐지되었다. 1908년 3월 31일에는 통감부관측소가 폐지되고 4 월 1일 농상공부관측소 (소장 와다유지)로 변하여 일 본인들이 모든 관측업무를 수행했다. 다시 1910년 10 월 1일부터 조선총독부관측소 (소장 와다유지)로 변했 다. 1911년 10월 1일 강릉측후소가 문을 열고, 1914년 5월 1일부터는 웅기와 중강진에서도 기상관측업무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1918년 5월 15일 전주와 초산에 측후소를 증설했다. 1923년 5월 1일부터는 제주측후 소가 문을 열었다. 즉, 대한제국에서 관측 업무를 시작 하였다는 기록은 있으나 예보나 일기도에 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관측시작 날짜에 관한 토의 부산의 기상관측의 시작일자 결정은 여러 가지 시 각이 얽혀 있다. 1) 일본에서 일기도를 작성하기 시작 한 1884년으로 보는 시각은 일본에서 매일 발행하던 일기도 내에 부산의 기상 관측치가 기입된 것을 중시 한 것이다. 2) 일본인에 의해 한국에 임시관측소라는 조직이 설립된 날짜로 보자는 시각은, 개인적인 관측 이 당시의 전후에 난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일본 에 의해 시작되긴 했지만 조직적 시작이므로 중시하자 는 생각이다. 3) 1884년 이전에 해관 ( )에서 행해 진 기상 관측을 중시하자는 시각은, 누가 시작했는지 는 차치하고 실제로 정기적으로 관측된 사실을 중시한 것이다. 4) 1907년에 대한제국의 조직에 의해 시작된 관측으로 보자는 시각은 국가조직을 중시한 생각이다. 이런 와중에서 조직 (일본인이라 하더라도)에 의한 기상관측을 중시하자는 여론이 당분간 지배적이어서 한국의 근대기상 100주년 기념은 2004년 3월 25일 거 행되었다. 그런데 이 날짜는 또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 다. 부산측후소 즉 제 1 임시관측소의 창립일자에 대하 여 1904년 3월 (농상공부 관측소, 1910), 혹은 3월 7일 (일본, 1910;, 1936), 3월 26일 (일본기상학회, 1975), 4월 4일 (조선총독부, 1904)로 기록되며 명치관보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관측 게시일 은 4월 9일 (중앙기상대, 1985, 1987; Mukasa, 1910) 혹은 4월 10일 (, 1910) 등으로 기록되 어 있다. 한편 팔구포 (간혹 목포라고 적힌 곳도 있다.) 의 임시관측소 설치일은 3월 25일이나, 관측 개시일은 1904년 3월 25일 (Mukasa, 1910; 일본 수로부, 1920), 4월 1일 (중앙기상대, 1985), 1906년 1월 1일 (중앙기 상대, 1987) 등으로 전해지고 있어 혼선이 있다. 간추려 보면, 부산에서의 제 1 임시관측소 사무는 1904년 3월 7일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첫째 근거로 3월 8일부터 와다유지가 제 1 임시관측소장 (부산)을 겸임했다는 사실이다. 1904 년 (명치 37년) 3월 9일 중앙기상대 기사 와다유지가 한국에 파견되었음을, 그해 3월 10일 발행된 명치관보 제 6204호의 서임급사령란에 어용유지한국피차유 ( ) 란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둘째 근거로 앞서 소개한 1904년 3월 5일 일본중앙 기상대에 9개 임시관측소를 개설하기로 한 일본정부 칙령 제 60호가 있는데 제 1 임시관측소부터 제 9 임 시관측소까지 번호별 순서는 부산 (1904년 3월 7일, Mukasa는 4월 9일), 목포 (1904년 3월 25일), 인천 (1904년 4월 10일), 용암포 (1904년 5월 1일), 원산 (1904년 4월 10일), 대련, 영구 ( ), 봉천, 성진 (1905년 5월 18일, Mukasa는 13일) 의 순서이다. 이는 1905년 11월 1일에 작성된 천기도에 첨부된 기상표에 적힌 임시관측소 번호의 순서이다. 대련과 영구 사이
변희룡 에 여순구 라는 지명이 하나 더 있는 것만 다르다. 따 라서 일본에 가장 가까우며 제 1 임시 관측소이고, 또 부산은 이미 1884년부터 관측을 해 오고 있었고 3월 7 일에 개소했다는 기록도 있으므로, 부산에서 가장 먼 저 개소했을 가능성은 높다. 한국시정연보 (, 1910)는 원산, 인천의 개소날짜와 같은 날짜로 오인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와 같은 논란 중에 일본중 앙기상대 (1975)는 한국에서의 최초의 관측날짜를 1904년 3월 25일인 것으로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한 국 기상청은 2004년에 근대 기상 백주년 기념사업을 벌였다. 관측자료의 관보게재 한국의 기상 관측치는 일본관보에 매일 3회 자료가 실려서 소개되었는데 1905년 3월 12일부터 부산, 목 포, 인천, 진남포, 원산, 용암포 등 6곳의 자료가 나타 나기 시작한다. 1908년 5월 15일부터는 진남포 대신 평양 자료가 나온다. 1941년 12월 7일 기상자료까지 발표되었고 (소화 16년 12월 10일 발행 일본관보 제 4478호), 그 이후에는 사라졌다. 대한제국에서는 융희 2년 (1908년) 1월 1일부터 오전 6시의 기압, 풍향 풍 속, 최고 기온, 최저 기온, 우량, 천기 등이 매일 관보에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초기의 측후소는 인천, 경성, 목 포, 부산, 대구, 평양, 용암포, 원산, 성진 등 9곳 이었다 (융희 2년 1월 6일 발행 관보 3963호). 1940년 7월 17 일 자료까지 관보에 발표되고 있는데, 오전 6시의 기 압, 풍향, 풍속, 기온, 천기, 강수량 등이 중강진, 신의 주, 인천, 경성, 전주, 목포, 원산, 강릉, 추풍령, 부산 등 지의 측후소에서 관측된 자료이다 (1940년 7월 20일 발행 관보 4049호). 관측소에서는 관측결과를 예보를 위한 천기도 작성에 우선적으로 사용하고, 그 다음 월 보와 연보 등으로 정리하였으며, 연구 자료로도 활용 하였다. 즉, 관보에 기상관측 자료가 게재되는 것과 일 기도가 작성되는 것은 전혀 별개의 사업이었다. 뒤에 첨부한 처음일기도는 위에 설명한 것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첫 일기도 첫 일기도의 발견 어떤 기록에는 한국에서는 1921년 8월 1일부터 천 기도를 일간 ( )으로 발행하고 1921년 9월 1일부 터 발매 ( )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발행기관은 조선 총독부관측소였다고 알려져 있다 (, 1936; 한상복, 2003). 그러나 실제로 천기도가 작성된 것은 1905년 11월 1일부터이거나 그 이전이다. 1905년 11 월 1일부터 매일 천기도 한장과 변화도 한장 그리고 기 상표 한 장씩이 지금까지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하 일기도의 모습을 상술한다. 첫 일기도와 변화도와 기상표 등압선과 등온선을 분석한 일기도의 천기도 상단 좌측에는 라 고 적혀 있다 (Fig. 1). 숫자 중,, 은 수기 ( )한 것이며,, 등등의 다른 글자들은 청색 으로 인쇄되어 있다. 기온 및 기압의 8시간 및 14시간 변화량을 기입하고 분석한 천기도에는 같은 위치에 같 은 방법으로 란 명칭이 붙어 있다 (Fig. 2). 그리고 관측치를 기입만 한 기상표에는 란 명칭이 우측 상단에 검은 색으로 세로로 적혀 있다. Fig. 3은 11월 1일의 기상표가 아니고 2일의 기 상표이다. 1일의 기상표가 훼손되어 중요 관측지점이 찢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이 일기도들은 훼손이 가속 되고 있어 후일에는 식별이 더욱 어려울 것이다. 후일 이 서류를 조사하는 연구자는 본 연구 중에 초기의 일 기도 및 변화도를 약 20여장의 사진으로 찍어 두었음 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확대 복원하여 인화한 사진 4 장은 기상청 기후과, 그리고 부산 지방 기상청에 각각 한질씩 제공하였는데 그 원본도 디지털 자료로 보관하 였다. 이하 명칭들은 천기도, 변화도, 기상표로 사용한 다. 제시되는 일기도와 기상표는 여러 장으로 정밀 스 캔하여 재합성한 것이다. 첫 일기도의 일련번호 천기도, 변화도, 그리고 기상표에 모두, 보관을 위해 찍은 것으로 보이는 일련번호의 도장이 우 중간 모서 리에 찍혀져 있는데, 명치 38년 (195년) 11월 1일의 천 기도가 14번, 변화도가 15번이다. 엉뚱하게도 16번은 두개가 보이는데 1909년 10월 31일의 천기도, 1905년 12월 30일 기상표이다. 17번은 없다. 이 사실은 먼저, 처음 천기도가 그려진 수 년 후에
한국에서 처음 작성된 일기도의 내용과 배경 년 월 일의 천기도
변희룡 년 월 일의 변화도
한국에서 처음 작성된 일기도의 내용과 배경 도장이 찍혀졌음을 의미한다. 아마도 10월 31일의 천 기도는 년도를 보지 않고 날짜만 봐서 11월 1일 보다 하루 앞선 것으로 생각하고 도장을 찍은 것으로 보인 다. 12월 30일의 기상표도 년과 일만 보고 월은 보지 않아서 한 실수로 보인다. 1905년 11월 1일의 기상표 는 18번이다. 이후부터는 19번은 11월 2일의 천기도, 20번은 2일의 변화도, 21번은 기상표로 일일 3장의 천 기도가 차례대로 이어져 간다. 그런데, 1905년 11월 1일이 14번이면 그 전에 몇 장 의 일기도가 더 있었다는 추측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실수로 14번부터 찍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 Fig. 3에서 보이듯이 도장을 한번 찍고 나서 지운 다음 다시 찍은 경우도 많다. 천기도와 변화도, 기상표의 하단중앙에는 다시 가 는 펜으로 수기한 아라비아 숫자가 있다. Fig. 1에는 복 사과정에서 일부러 지웠으나, 원본에는 분명하게 있 다. Fig. 2에는 미처 지우지 못하고 남겨둔 것이 분명하 게 보인다. 1905년 11월 1일의 천기도가 1번으로 수기 되어 있으므로, 최소한 이 수기를 하는 시기에는 1번부 터 13번까지의 일기도가 이미 없어졌다는 뜻이다. 이 수기를 한 것이 아마도 기상청에서 마이크로필름을 촬 영할 때가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이다. 14번부터 찍힌 도장이 기상청 작업의 소산일 수도 있을 것이다. 천기도의 내용 천기도는 일일 한 장인데 세 부분으로 나눠져 있다 (Fig. 1). 오전 6시, 오후 2시, 오후 10시 등 세 번의 관 측치가 한 장의 종이위에 기입되어 분석된 것이다. 오 전 6시 천기도를 가장 중시하여 이 천기도의 종이면적 이 전체의 삼분의 2를 차지한다. 이 천기도로 그날 예 보를 발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기도의 범위는 오 전 6시의 경우 중국의 서해안과 만주 그리고 대만과 일 본이 나타나는 지역 (119.9E, 31.7N, 145.0E, 31.5N, 117E, 46.2N,149.2E, 46.3N)이다. 천기도에는 기압, 기온, 풍향, 풍력 (풍속을 말하는 듯), 그리고 운량이 기입되어 있다. 관측소 위치를 뜻 하는 동그라미의 바로 오른쪽에 기압치가 60.5 (760.5 mmhg의 뜻)로 기록되어 있고, 바로 밑에 기온이 12.2 의 형태로 기입되어있다. 단 12.0 o C이면 12.0 이라 적 지 않고 12로만 적었고 12.2 o C이면 12.2라 적었다. 그 러나 이 위치는 풍향을 나타내는 막대를 피해서 아무 데나 기록한 경향이 있다. 운량의 기록은 1) 안이 꽉 찬 동그라미 (현대의 OVC인 듯, 이하 추정), 2) 동그라미 위에 다시 동그라미 (현대의 Broken 인 듯, 무풍을 나 타내는 것은 아니다. 무풍인 경우 풍향 풍속이 없다.), 3) 동그라미 안에 가로줄 하나 또는 세로줄 하나 (현대 의 Scattered, 가로 세로의 차이는 알 수 없음), 4) 안이 텅 빈 동그라미 (현대의 few 또는 clear을 의미) 등 네 종류로 구분된다. 바람은 풍향을 따라 풍향 막대를 관측소 동그라미 위에 그렸으며 그 막대 위에 깃털의 갯수로 풍속을 나 타내었다. 풍속을 나타내는 반 깃털도 사용되었는데 여러 날짜의 일기도를 함께 비교해 보니 반 깃털과 온 깃털의 구분이 명확하지가 않다. 풍속의 단위가 Knots 인지 m/s 인지 명확하지 않다. 당시는 Beaufort Scale 을 많이 사용하였었다. 기입된 천기도는 등압선 (흑색, 5 mmhg 간격, 760, 765 등으로 시도가 기입됨)과 등온선 (적색, 5도 간격, 시도는 0, 5, -5 등으로 기입)을 분석하였다. 등치선의 시도는 오른쪽 끝에만 적었으며, 가장자리에서의 선 처리는 아무렇게나 해서 지도 중간 부분에서 시작되기 도 했고, 지도 밖으로 선이 많이 나가기도 했다. 등치선 사이에 간혹 점선으로 중간선이 들어가기도 했다. 고 기압은 high라고 영어로 수기하고 곁에 중심 기압을 mmhg 단위로 적었다. Fig. 1의 우중간 혼슈우 위에 예가 있다. 저기압의 중심이 보이지 않으면 L 이라고 만 적었는데 Fig. 1의 좌상 귀에 예가 있다. 천기도에는 선박에서 관측한 자료도 기입되어 있다. 측후소가 있 었다는 기록을 찾기 어려운 울릉도의 자료도 기입되어 있다. 독도에도 바람관측치가 기록되어 있다. 11월 1 일 이후에는 독도의 기록이 있는 천기도는 찾기가 어 려웠다. 변화도의 내용 변화도도 일일 한 장인데 6부분으로 나눠져 있다 (Fig. 2). 오전 6시, 오후 2시, 그리고 오후10시에 대하 여 8시간의 기압 변화량을 기입 분석한 것이 윗부분에 외쪽부터 오른쪽으로 차례로 진열되어 있다. 같은 방 법으로 아랫부분에는 24시간의 기압 및 기온 변화량이 기입 및 분석되어 있다. 기압 변화량은 5 mmhg 간격, 기온변화량은 5 도 간격으로 그려져 있다. 오후 10시 의 자료는 일본지역은 기입 및 분석이 되어 있지 않고 한국과 만주지방만 기입되어 있다. 다른 날들도 다 그 러하다. 분석은 한 경우도 있고 안한 경우도 있다. 이는
변희룡 년 월 일의 기상표
한국에서 처음 작성된 일기도의 내용과 배경 이 변화도가 일본에서 그려진 것이 아니고 한국에서 그려진 것이란 사실을 증명한다. 당시의 통신 수단의 한계 때문에 통신이 어려웠거나 가능한 한 통신량을 줄이기 위해서 밤 10시의 자료는 중시하지 않은 것으 로 보인다. 기상표의 내용 기상표도 일일 한 장씩이다. 1905년 11월 1일의 기 상표에는 한반도 부분의 관측지점이 훼손되었고 우측 의 날짜 부분이 인쇄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Fig. 3은 11월 2일자 기상표이다. 당시 인쇄술의 부족으로 이것 도 날짜 부분 일부가 인쇄되지 않았다. 기상표 안에는 총 52 개의 관측소의 관측치를 기입하게 되어 있다. 관 측지점은 상위에 부산 ( ), 목포 ( ), 인천 ( ), 용암포 ( ), 원산 ( ), 대련 ( ), 여순 구 ( ), 영구 ( ), 봉천 ( ), 성진 ( ) 등의 순으로 10개의 한국과 만주지방이 있다. 임시관 측소가 개소된 순서를 중심으로 나열된 듯하고, 현대 에서 사용하는 방법인 고위도 서쪽부터 나열하는 방법 은 사용하지 않았다. 다섯줄을 비운 다음, 송도 ( ), 제도 ( ), 백도 ( ), 천진 ( ), 지부 ( ), 청도 ( ), 상해 ( ), 항주 ( ), 남경 ( ), 한구 ( ), 사시 ( ) 등 중국지역 11개가 기록되 어 있다. 다시 세 줄을 띄우고 항춘 ( ), 팽호도 ( ), 대북 ( ), 석원 ( ), 나패 ( ), 대도 ( ), 좌다갑 ( ), 궁기 ( ), 족납 ( + ), 조갑 ( ), 광도 ( ), 대판 ( ), 대뢰기 ( ), 장기 ( ), 엄원 ( ), 하관 ( ), 서향 ( ), 빈송 ( ), 동경 ( ), 포* ( + ), 전교 ( ), 개월 ( ), 소목 ( ), 추전 ( ), 석권 ( ), 청삼 ( ), 함관 ( ), 찰황 ( ), 종곡 ( ), 근실 ( ), 사나 ( ) 등 31 개의 관 측소가 나열되어 있다. 오후 2시와 오후 10시의 자료 는 각 관측소의 첫 글자만을 같은 줄에 한 번 더 표시하 였다. 기입된 관측요소는 기압, 기압의 8시간 변화량, 기 압의 24시간 변화량 (이상 모두 0.1 mmhg 단위), 풍향 (36 방향), 풍력 (풍속을 말하는 듯), 기온 (0.1 o C 단위), 기온의 24시간 변화량 (0.1 o C 단위), 우량(정수이며 단 위는 불명확), 운향 (정수, 0-7사이로 발견됨), 운속 (정 수, 0-7까지 발견됨), 운량 (정수, 0-9까지 발견됨), 운 형 (정수, 0-9까지 발견됨), 기사 (, 0, 1 등 정수가 발견됨), 최고와 최저기온 (오전 6시에만 0.1 o C 단위로 기록되어 있음)등이다. 각 기상요소는 오전 6시, 오후 2시, 오후 10시에 한 번씩 기록하였다. <천기개황>, <천기예보>, <폭풍경보> 등 세 란이 따로 있어 매일 기록하게 되어 있다. 예보를 했다는 증거이다. 기록은 모두 한자 및 일본어이다. 요약 및 토의 한국에서 처음으로 그려진 것으로 간주되는 일기도 의 내용과 배경을 살펴보았다. 일기도의 일상적 분석 과 예보는 1905년 11월 1일부터 일본인에 의해 시작되 었다고 알려진다. 현대의 분석과 다소 차이가 있으며 단위가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는 것이 적지 않다. 풍량 (풍속을 뜻함), 우량, 운향, 운속, 운량, 운형, 기사 란에 기입된 값의 단위나 의미는 밝히지 못하였다. 당시는 기상관측 뿐 아니라 일기도의 분석이나 예보가 노일 전쟁에서 폭풍경보를 생산하기 위해 일본이 시작한 것 이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기상경보나 폭풍경보가 전 쟁에서 사용된 여부에 관한 기록은 발견하지 못하였 다. 후일 누군가가 노일전쟁의 역사의 세목을 조사하 여 밝혀 주기를 바란다. 대한제국에서는 1907년부터 관측을 시작하였으나 일기도를 그렸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한편 발견된 일기도보다 3개월 쯤 더 이전에, 혹은 수일 전에 일기도가 그려졌을 가능성을 배재할 수 없 다. 와다유지가 조선에 부임한 후 바로 일기도를 그렸 다면 수개월 앞서서부터 일기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 리고 발견된 일기도에 일련번호가 도장으로 찍혀 있는 데 14번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봐서 그 앞의 1번부터 13번까지 일기도가 어딘가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 발 견된 일기도가 어디에서 작성된 것인지, 발견된 일기 도가 몇 년분이나 되는지 확인하지 못하였다. 2004년에 3월 25일에 한국에서 거행된 근대 기상 100주년 기념사업은 그 명분에 있어서 재고해야할 필 요가 있다. 기상관측을 처음 시작한 날도 아니고, 예보 를 시작한 날도 아니다. 일기도용 관측을 시작한 날도 아니고, 일기도를 그리기 시작한 날도 아니며, 한국인 에 의한 관측 시작이라는 의미도 없으며, 단지 일본 조 직에 의한 관측의 시작이라는 의의를 가질 뿐인데 그 나마도 이설이 많다.
변희룡 감 사 본 연구를 위해 여러 가지 제보를 주신 정창희 교수 님께 감사드립니다. 사료에 관하여 한수당 자연환경 연구소에서 국회 도서관에 기증한 연구기록을 많이 인 용하였음을 밝히며 한상복 박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참고문헌 농상공부관측소 제 권 발간 농상공부관측소 월 발간 일본기상학회 일본 과 일본중앙기상대 조선기상 년보의 부록 조선기상사 업의 연혁 간 의 의 조선총독부 관측소연보 중앙기상대 한국강수자료 제 권 중앙기상대 한국기온자료 제 권 한상복 한반도 기상학사 개설 대기 제 권 호 농상공부관측소 발간 제 권에 있음 기상학 잡지 월호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