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특강 서울권역 수도권역 21~38 강원권역 39~48 충청권역 49~62 전라권역 63~76 경상권역 77~94 제주권역 역사(01~21)서울.indd 1 3~20 95~104 13. 6. 13. 오후 2:49
역사01~04K3.indd 3 13. 6. 12. 오후 12:02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01. 조선의 건국과 통치 체제의 정비 종묘의 정치적 의미와 중요성을 안다. 조선 시대에 유교적 통치 이념이 어떻 게 구현되었는지 이해한다. I 위치 및 문의처 I 서울시 종로구 종로 157, 02)765-0195 I 홈페이지 I http://jm.cha.go.kr I 관람 안내 I _ 일반 관람: 문화재 해설사와 동행, 매시 20분 출발(17시만 정각 출발), 학생 단체 관람 시간 별도 운영(사전 예약 필수), 외국어 안 내 실시 _ 자유 관람: 매주 토요일, 09:00~18:00(2~5월, 9~10월) 09:00~18:30(6~8월), 09:00~17:30(11~1월) _ 매주 화요일 휴관 I 체험 코스 I 영녕전 악공청 정전 악공청 남문 서문 칠사당 창경궁 연결문 영녕전 공신당 외대문(정문) 정전 망묘루 향대청 수복방 재궁(어숙실) 하마비 전사청 동문 공민왕 신당 제정 초록색으로 표시된 부 분은 반드시 들려보 아야 할 곳을 선정한 것임. 종묘 정전의 기둥과 처마 영녕전 영녕전에는 주로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하거나 재위 기간이 짧 았던 왕들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그러나 반정으로 폐위되었던 연 산군과 광해군의 신주는 정전은 물론 영녕전에도 없다. 정전 종묘의 정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목조 건물로 단청 등을 사용하여 화려하게 장식을 하지는 않았지만, 단순한 구조를 토대로 최고의 격식과 검소함을 갖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서울 광화문 서쪽의 사직동에는 종묘와 함께 조선 왕조와 나라 그 자체를 의미한 사직단이 있다. 사직단은 나라의 발전과 백성들의 편안한 삶 및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땅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곳으로, 한자로 풀이하면 사( 社 )는 땅의 신, 직( 稷 )은 곡식의 신, 단( 壇 )은 제사를 올리는 제단을 말한다. 정기적으로 봄, 가을, 겨울에 제사를 지냈다. 사직단은 임진왜란 때 화재로 없어졌던 것을 숙종 46년(1720)에 다시 세웠는데, 지금은 입구에 세워진 문과 제단만이 남아있다. 무제-1 1 13. 6. 12. 오후 12:11 사진 붙이는 곳 역사01~04K3.indd 7 13. 6. 12. 오후 12:14 허준박물관, 겸재기념관 서대문 독립공원, 독립문, 연세 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국립현충원, 사육신묘 한강절두산성지 강서구 구로구 양천구 마포구 영등포구 금천구 사직단, 경복궁, 북촌 한옥 마을, 청계천, 운현궁, 흥인지문 은평구 서대문구 동작구 관악구 낙성대 종로구 용산구 중구 강북구 성북구 서초구 도봉구 동대문구 성동구 강남구 노원구 중랑구 광진구 송파구 덕수궁, 정동, 근대 문화 중심지 역, 남산 성곽 강동구 선릉, 봉은사 국립중앙박물관, 전쟁기념관 암사동 선사유적지 역사01~04K3.indd 20 13. 6. 12. 오후 12:55 이 책의 구성과 활용법 서울권역 체험할 지역을 권역별로 나누고, 해당 지역의 대표적인 체험 장소를 선정하 였습니다. 종묘 4 서대문형무소역사관 8 풍납 토성과 몽촌 토성 12 아차산 고구려유적 16 여기도 찾아가요! 20 종묘 I 관련 교과서 단원 I 종묘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나라에서 가장 큰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조선이 통치 이념으로 표방한 유교 사상에 입각하여 설립되었다. 종묘는 뛰 I 활동 목표 I 어난 건축미와 동아시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창성을 가져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종묘 제례는 제례악과 함께 2001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출발하기 전에 알아 두기! 조선 왕조 제례 문화의 꽃, 종묘 종묘는 1394년 12월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할 때 지어지기 시작하여, 다음해 9 월에 1차로 완공되었다. 그 뒤로 1546년(명종 1)까지 계속 증축하였으며, 1592년 (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중건되었다. 종묘의 정전에는 19칸의 태실에 19위의 왕과 30위의 왕후의 신주가 모셔져 있 다. 조선 초기에는 5대조까지 제를 지내는 5묘제를 따르다가 중기 이후부터는 치 적이 많은 왕은 5대가 지나도 정전에 그대로 모셨고, 그 외의 신주는 일정한 기간 이 지나면 영녕전으로 옮겼는데, 이를 조천( 遷 )이라 한다. 종묘의 정전은 옆으 로 길게 펼쳐진 1층짜리 건물로,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장소였던 탓에 장식없이 간결하게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겉으로 보면 20개의 기둥과 19칸의 문으로 이 루어져 있는데, 한번에 지은 것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 늘려지었기 때문에 기 둥의 모양이 모두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정전의 내부는 직접 볼 수 없게 되어있으 나, 향대청의 제2 전시관에 태실 1관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곳이 있어서 정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왕자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 는 의미를 담고 있는 영녕전에는 정 전에서 조천된 15위의 왕과 17위의 왕후 및 의민황태자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태 조 이성계의 고조부에서 부모(목조, 익조, 탁조, 환조)까지의 신주는 4칸의 중앙 태실에 모셔져 있고, 동서로 각 6칸씩의 태실이 더 마련되어 있다. 이 밖에도 종묘에는 종묘 제례에 사용할 음식을 만들던 전사청, 왕과 세자가 제 례를 준비했던 재궁(어숙실), 제례 의식에 사용하는 물품을 보관하고 제례에 참가 하는 사람들이 머물렀던 향대청 등의 건물이 있다. 또한 고려 제31대 왕인 공민왕 의 신당이 있는 점도 특징적이다. 체험할 장소에 대한 기본 정보가 수록되어 있습니 다. 또한 체험 활동을 기획할 때 체험 코스 및 관람 안내, 문의처와 홈페이지 등을 활용해 보세요. 1 하마비 2 외대문(정문) 3 망묘루 4 공민왕 신당 5 향대청 6 재궁 7 제정 8 전사청 9 공신당 10 정전 11 칠사당 12 영녕전 13 영녕전 악공청 14 정전 악공청 I 사직단 I 종묘 20 년 월 일 이름 학년 반 번 1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종묘 정전에는 19위의 왕과 30위의 왕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정전에서 조천된 15위의 왕과 17위의 왕 후 및 의민황태자의 신주는 영녕전에 안치되어 있다. 하지만 조선의 왕 가운데 폐위되었던 와/과 만은 종묘 그 어디에도 신주가 모셔져 있지 않다. ⑴ 빈칸에 들어갈 왕을 모두 써 보자. ⑵ 밑줄 친 부분과 같은 일이 있었던 까닭을 조선의 통치 이념과 관련지어 서술해 보자. 2 다음은 종묘에 있는 어느 인물의 사당이다. 이곳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쓰고, 이 사당이 종묘에 있는 까닭을 추론 해서 써 보자. 보고 듣고 읽기만 하고 끝낸다면 그 내용을 쉽게 잊어버리겠죠? 체험 장소와 관련된 흥미로운 과제를 수록하여 체험 활동을 더욱 알차게 마 무리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과제의 정답은 지학사 홈페이지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3 종묘 정전을 받치고 있는 월대와 앞마당에 깔린 돌은 상당히 거칠고 평평하지 않다. 사진을 직접 찍어 붙여 보고 왜 이러한 돌을 사용하였을지 설명해 보자. 7 여기도 찾아가요! 종로구 해당 권역 곳곳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역사 유적을 세부 지역별로 표시해 두 었습니다. 권역별로 수학 여행을 기획할 때 활용해 보세요. 서대문구 중구 마포구 용산구 강서구 강동구 동작구 관악구 강남구 2
서울권역 종묘 4 서대문형무소역사관 8 풍납 토성과 몽촌 토성 12 아차산 고구려유적 16 여기도 찾아가요! 20
종묘 종묘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나라에서 가장 큰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조선이 통치 이념으로 표방한 유교 사상에 입각하여 설립되었다. 종묘는 뛰 어난 건축미와 동아시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창성을 가져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종묘 제례는 제례악과 함께 2001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I 관련 교과서 단원 I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01. 조선의 건국과 통치 체제의 정비 I 활동 목표 I 종묘의 정치적 의미와 중요성을 안다. 조선 시대에 유교적 통치 이념이 어떻 게 구현되었는지 이해한다. 출발하기 전에 알아 두기! I 위치 및 문의처 I 서울시 종로구 종로 157, 02) 765-0195 I 홈페이지 I http://jm.cha.go.kr I 관람 안내 I _ 일반 관람: 문화재 해설사와 동행, 매시 20분 출발(17시만 정각 출발), 학생 단체 관람 시간 별도 운영(사전 예약 필수), 외국어 안 내 실시 _ 자유 관람: 매주 토요일, 09:00~18:00(2~5월, 9~10월) 09:00~18:30(6~8월), 09:00~17:30(11~1월) _ 매주 화요일 휴관 I 체험 코스 I 창경궁 연결문 영녕전 악공청 정전 악공청 서문 칠사당 영녕전 공신당 정전 전사청 수복방 동문 제정 1 하마비 2 외대문(정문) 3 망묘루 4 공민왕 신당 5 향대청 6 재궁 7 제정 남문 향대청 재궁(어숙실) 공민왕 신당 8 전사청 9 공신당 10 정전 11 칠사당 12 영녕전 외대문(정문) 망묘루 하마비 13 영녕전 악공청 14 정전 악공청 4
조선 왕조 제례 문화의 꽃, 종묘 종묘는 1394년 12월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할 때 지어지기 시작하여, 다음해 9 월에 1차로 완공되었다. 그 뒤로 1546년(명종 1)까지 계속 증축하였으며, 1592년 (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중건되었다. 종묘의 정전에는 19칸의 태실에 19위의 왕과 30위의 왕후의 신주가 모셔져 있 다. 조선 초기에는 5대조까지 제를 지내는 5묘제를 따르다가 중기 이후부터는 치 적이 많은 왕은 5대가 지나도 정전에 그대로 모셨고, 그 외의 신주는 일정한 기간 이 지나면 영녕전으로 옮겼는데, 이를 조천( 遷 )이라 한다. 종묘의 정전은 옆으 로 길게 펼쳐진 1층짜리 건물로,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장소였던 탓에 장식없이 간결하게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겉으로 보면 20개의 기둥과 19칸의 문으로 이 루어져 있는데, 한번에 지은 것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 늘려지었기 때문에 기 둥의 모양이 모두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정전의 내부는 직접 볼 수 없게 되어있으 나, 향대청의 제2 전시관에 태실 1관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곳이 있어서 정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왕가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 는 의미를 담고 있는 영녕전에는 정 전에서 조천된 15위의 왕과 17위의 왕후 및 의민황태자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태 조 이성계의 고조부에서 부모(목조, 익조, 탁조, 환조)까지의 신주는 4칸의 중앙 태실에 모셔져 있고, 동서로 각 6칸씩의 태실이 더 마련되어 있다. 이 밖에도 종묘에는 종묘 제례에 사용할 음식을 만들던 전사청, 왕과 세자가 제 례를 준비했던 재궁(어숙실), 제례 의식에 사용하는 물품을 보관하고 제례에 참가 하는 사람들이 머물렀던 향대청 등의 건물이 있다. 또한 고려 제31대 왕인 공민왕 의 신당이 있는 점도 특징적이다. 종묘 정전의 기둥과 처마 영녕전 영녕전에는 주로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하거나 재위 기간이 짧 았던 왕들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그러나 반정으로 폐위되었던 연 산군과 광해군의 신주는 정전은 물론 영녕전에도 없다. 정전 종묘의 정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목조 건물로 단청 등을 사용하여 화려하게 장식을 하지는 않았지만, 단순한 구조를 토대로 최고의 격식과 검소함을 갖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I 사직단 I 서울 광화문 서쪽의 사직동에는 종묘와 함께 조선 왕조와 나라 그 자체를 의미한 사직단이 있다. 사직단은 나라의 발전과 백성들의 편안한 삶 및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땅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곳으로, 한자로 풀이하면 사( 社 )는 땅의 신, 직( 稷 )은 곡식의 신, 단( 壇 )은 제사를 올리는 제단을 말한다. 정기적으로 봄, 가을, 겨울에 제사를 지냈다. 사직단은 임진왜란 때 화재로 없어졌던 것을 숙종 46년(1720)에 다시 세웠는데, 지금은 입구에 세워진 문과 제단만이 남아있다. 5
예를 갖추어 제사를 받들라, 종묘 제례 종묘에서 역대 왕조의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를 종묘 제례라 하는데, 조선 왕조의 제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것이어서 종묘대제 라고도 한다. 조선 시대에는 정기적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 섣달(12월)에 제사를 올렸고, 이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종묘에서 제례 의식이 거행된다. 이처럼 오래된 왕실 제례 의식은 동아시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문화이다. 종묘 제례에는 모든 행사의 순서에 맞게 노래와 악기 연주, 춤이 동반되었다. 이때 연주되는 음악과 춤을 종묘 제례악이라고 하는 데, 이는 종묘 제례에 걸맞게 장엄한 분위기를 띠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2001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종묘 제례 및 종묘 제례악 역사의 창 한양 곳곳에 깃든 유교 정신 조선은 건국 초부터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으며, 이에 도읍인 한양을 조성할 때 곳곳에 유교와 관련된 장치를 마련하였다. 우선 주례고공기 의 좌묘우사(左廟右社), 전조후시(前朝後市)의 원칙에 따라 한양의 공간을 구성하였다. 경복궁 동쪽에 종 묘를 세우고 서쪽에는 사직을 배치하였다. 경복궁 전면에는 육조를 두었고, 그 후면에는 시전을 마련하였다. 또한 신분에 따라 거주하는 지역을 구분하여 상하 구분, 명분론 등을 강조하였다. 한편 한양으로 통하는 4대문에는 인의예지신 (仁義禮智信) 의 유교적 가르침을 담아 이름을 붙 였다.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智 대신 같은 뜻의 靖을 씀), 보신각 등이 예이다. 이처럼 조선은 유교적 통치 이념에 따라 중앙 정치 제도 와 지방 행정 조직은 물론, 생활 곳곳에 유교의 가르침을 뿌리내리고자 노력하였다. 한양의 구조 6 역사(01~21)서울.indd 6 13. 6. 13. 오후 2:49
종묘 학년 반 번 이름 20 년 월 일 1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종묘 정전에는 19위의 왕과 30위의 왕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정전에서 조천된 15위의 왕과 17위의 왕 후 및 의민황태자의 신주는 영녕전에 안치되어 있다. 하지만 조선의 왕 가운데 폐위되었던 와/과 만은 종묘 그 어디에도 신주가 모셔져 있지 않다. ⑴ 빈칸에 들어갈 왕을 모두 써 보자. ⑵ 밑줄 친 부분과 같은 일이 있었던 까닭을 조선의 통치 이념과 관련지어 서술해 보자. 2 다음은 종묘에 있는 어느 인물의 사당이다. 이곳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쓰고, 이 사당이 종묘에 있는 까닭을 추론 해서 써 보자. 3 종묘 정전을 받치고 있는 월대와 앞마당에 깔린 돌은 상당히 거칠고 평평하지 않다. 사진을 직접 찍어 붙여 보고 왜 이러한 돌을 사용하였을지 설명해 보자. 사진 붙이는 곳 7
서대문형무소역사관 1908년 10월 21일 일제가 경성 감옥 이라는 이름으로 설립한 서대문형무소는 1945년 해방까지 한국의 국권을 되찾기 위해 싸운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고, 해 방 이후에도 서울 구치소로 이용되면서 민주화 운동 관련 인사들이 수감되는 등 한 국 근 현대사의 굴곡을 안고 있는 상징적인 장소이다. 1987년 서울 구치소가 경기 도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이곳은 199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관하여 자주 독 립 정신과 자유 평화 수호 정신을 기리는 교육의 현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I 관련 교과서 단원 I Ⅴ. 일제의 강점과 민족 운동의 전개 02. 일제의 식민 통치와 경제 수탈 I 활동 목표 I 서대문형무소의 장소적 의미와 중요성 을 이해한다. 애국지사들이 당한 고통과 독립운동을 이해한다. 출발하기 전에 알아 두기! I 위치 및 문의처 I 서울시 서대문구 통일로 251 서대문형무소역사관, 02) 360-8590~1 I 홈페이지 I _ 서대문구도시관리공단 서대문형무소역사관 홈페이지: www.sscmc.or.kr/culture2 _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블로그: http://blog.naver.com/sdmprison I 특이사항 I _ 홈페이지 내 각종 학습자료(현장학습보고서, 교사용 수업자료, 동영상 사진 자료 등) 제공 _ 단체관람의 경우 홈페이지 및 전화를 통한 예약접수 필요 _ 30인 이하의 경우 도슨트(해설사) 안내 서비스 운영(예약제) _ 근대문화유산 탐방, 근현대사 탐구교실 등 다양한 문화행사 운영 I 체험 코스 I 공작사 한센병사 시구문 사형장 순국선열 추모비 10옥사 11옥사 9옥사 12옥사 중앙사 보안과 청사 유관순 지하감옥 담장과 망루 1 담장과 망루 2 보안과 청사(전시관) 3 중앙사 4 12옥사 5 공작사 6 한센병사 7 순국선열추모비 8 사형장 9 시구문 10 유관순 지하감옥 8
순국선열이 잠든 곳, 서대문형무소 1908년 10월, 조선을 식민지로 합병하려던 일제 통감부는 동양 최대, 최신 규모 를 자랑하며 경성 감옥을 세웠다. 장차 일제에 항거하는 이들이 크게 늘어날 것을 예상하고 5백 명 수용 규모의 대형 감 옥을 세운 것이다. 이곳은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독립운동가 대부분이 거쳐 간 곳으로, 그들의 애국 혼이 배어 있는 민족 수난의 현장 이다. 1930년대 서대문형무소 전경 64세의 나이에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남대문역(서울역 전신)에서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1920)를 비롯해, 구한말 의병장 허위(1907), 3 1 운동에서 활약했던 유관순(1920),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노동국 총판 김동삼(1937) 등이 이곳에서 순국하였다. 김동 삼이 옥사했을 때는 일제의 보복이 두려워 시신을 수습하는 자가 나서지 않자 한용운이 내 평생 김선생님의 시신만이라도 뫼실 수 있다면 큰 영광 이라며 나서서 수습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는 서울 형무소(1945), 서울 교도소(1961), 서울 구치소(1967) 등으로 불 리며 민주화 운동을 벌이던 이들이 이곳에 수감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남아 있던 15개 동의 옥사( 獄 舍 ) 중 역사성과 가치를 고려하여 제9, 10, 11, 12, 13옥사와 옥사 전체를 감시하고 통제 했던 건물인 중앙사, 나환자를 격리 수용한 한센병사가 보존되어 있으며, 옥사 3개동(제10, 11, 12옥사)과 사형장은 사적(제324호)으 로 지정되었다. 이 외에도 일제 강점기 당시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공작사와 취사장이 있다. 공 작사는 형무소 내에서 수감자들이 노역하였던 공장 건물로 일제가 수감자들의 노 동력을 착취하여 각종 물품과 군수용품을 생산하는 모습을 담은 기록 영상이 상영 중이다. 또한 일제가 독립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을 투옥하기 위해 1916년 신축하였 다가 1934년에 매립한 지하감옥인 여사옥도 복원되어 있다. 그밖에 2개의 망루(원 래 6개)와 287m의 담장(총 1,161m)이 형무소의 상징으로 일부 남아 있다. 서대문형무소 내 옥사의 모습 유관순굴 이라고도 불리는 지하감옥 여옥사 지하에 설치된 독방으로, 비중있는 여성 애국지사들을 수용하여 가혹하게 신문하고 고문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유관순 열사가 순국하신 곳으로 유관순굴 이라고도 한다. 서대문형무소의 망루와 담장 망루는 재소자들의 탈옥을 막고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망루의 8면에는 감시 창이 설치되어있다. 정문의 망루는 1923년에 설치한 것이다. 9
애국지사의 혼이 서린 그곳, 잘 자라지 않는 미루나무 항일 애국지사와 해방 후 민주인사들의 형이 집행된 사형장의 둘레에는 높이 5m의 붉은 돌담이 쌓여 있다. 내부에는 개폐식 마루 판 위에 사형수가 앉는 의자가 있고 굵은 동아줄이 내려져 있다. 입구 쪽에 사형 집행 때 배석자들이 앉았던 긴 의자가 보존되어 있다. 사형장 바로 옆에는 사형을 집행한 시신을 형무소 밖 공동묘지까지 몰래 버리기 위해 만들어진 비밀 통로인 시구문이 있다. 시구 문은 일제가 그들의 만행을 감추기 위해 폐쇄했던 것을 서대문 독립 공원을 조성할 때 복원한 것이다. 또한 사형장 입구에 있는 미루나무는 형장으로 들어가는 사형수들이 붙들고 통곡했다고 하여 통곡의 미루나무 라 불렸으며, 사형 장 안에 있는 미루나무는 사형수들의 한이 서려 잘 자라지 않는다는 일화가 있다. 사형장 1923년에 일제가 지은 목조 건물로 전국에서 잡혀온 애국지사들이 사형당하였다. 시구문 일제가 폐쇄했던 것을 1992년에 약 40m 길이로 발굴하여 복원하였다. 역사의 창 곳곳에 세워진 형무소 일제는 서대문 형무소(경성 감옥)를 시작으로 전국 각 지역에 형무소를 설치 일제강점기(1930년대) 전국 형무소 설치 현황 하였다. 1908년에 전국 8개 지역에 감옥을 만들었고 그 아래에 분감(分監)까지 형무소 두어 1930년대까지 전국에 형무소 14개, 형무지소 11개, 소년 형무소 3개 등 28 청진 형무지소 소년형무소 개가 설치되었다. 조선 총독부가 밝힌 통계에 따르면, 전국 형무소에 갇힌 사람이 1913년에 361 신의주 함흥 만여 명이던 것이 1930년에는 609만여 명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당시 한국 인 원산 진남포 평양 구가 1,878만 명 정도임을 감안했을 때 3명에 1명꼴로 감옥살이를 한 셈이다. 서흥 금산포 해주 개성 인천 황해 동해 춘천 목포 독도 청주 공주 군산 울릉도 서대문 경성 이 밖에 일제는 러 일 전쟁에서 승리한 뒤 중국 뤼순 형무소를 확장하여 사용 하였는데,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과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신 채호가 이곳에 수감되어 옥사하였다. 안동 대전 김천 대구 전주 마산 광주 부산 진주 소록도 남해 이어도 0 100km 10 역사(01~21)서울.indd 10 13. 6. 13. 오후 2:49
서대문형무소역사관 학년 반 번 이름 20 년 월 일 1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쯤, (가) 의사의 손을 떠난 폭탄 한 발이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에 도착한 신임 총독 (나) 이/가 오른 쌍두마차 앞에서 굉음을 내며 터졌다. 마중 나온 일제 요인들로 북적대던 남대문역 귀빈실 주변은 한순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표적 서대문형무소 수형( 受 刑 ) 카드에 담긴 사진 이었던 총독은 목숨을 건졌지만 37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이 사건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⑴ (가), (나)에 들어갈 인물의 이름을 써 보자. ⑵ (나) 총독이 새로 조선에 부임해 온 까닭을 국내 민족 운동과 관련지어 서술해 보자. 2 다음은 일제가 애국지사에게 사용했던 도구들이다. 각 도구의 명칭과 이것을 사용한 목적을 설명해 보자. 명칭: 목적: 명칭: 목적: 명칭: 목적: 3 개방된 옥사에 앉아 있는 자신의 사진을 찍어 붙여 보고, 전시관 지하(고문 장면)와 2층(옥중 생활실)을 돌아본 후 애국지사에게 편지를 써 보자. 사진 붙이는 곳 11
풍납 토성과 몽촌 토성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고구려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온조가 나라를 세우고 처음 도읍지로 정한 곳이 하남위례성이다. 하남위례성의 위치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풍납 토성과 몽촌 토성 주변 지역으로 추정된다. 이 중에서 풍납 토성은 1925년 일제강점기 대홍수로 인해 세상에 알려진 이후 1997년 발굴을 통해 왕궁일 가능성이 한층 더 높아졌다. 또한 사적 제297호인 몽촌 토성은 백제 한성 시대의 중요한 성곽 중 하나로 밝혀졌다. 두 유적 모두 이 시기에 고대 국가 백제가 탄생하였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근거이다. I 관련 교과서 단원 I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03. 삼국 및 가야의 성립과 발전 I 활동 목표 I 백제 한성 시대의 모습을 파악한다. 유물과 유적의 발굴과 보존의 어려움을 안다. 출발하기 전에 알아 두기! I 위치 I _ 풍납 토성: 서울시 송파구 풍납동 72-1(지하철 5 8호선 천호역 10번 출구, 8호선 강동구청역 4번 출구) _ 몽촌 토성: 서울시 송파구 오륜동 88-3(지하철 8호선 몽촌토성역 1번 출구, 5호선 올림픽공원역 3번 출구) I 관련 전시관 I _ 한성백제박물관: http://baekjemuseum.seoul.go.kr/, 02) 2152-5800 _ 몽촌역사관: http://baekjemuseum.seoul.go.kr/dreamvillage, 02) 424-5138 I 특이사항 I _ 학교 및 가족 단위의 다양한 답사프로그램 및 다양한 교육행사 운영 _ 근대문화유산 탐방, 근현대사 탐구교실 등 다양한 문화행사 운영 I 체험 코스 I 풍납 토성 몽촌역사관 목책 곰말다리 해자 1 한성백제박물관 2 해자(몽촌 토성) 3 곰말다리(몽촌 토성) 4 목책 5 몽촌역사관 한성백제박물관 6 풍납 토성 12
백제 한성 도성의 흔적, 풍납 토성 우리나라 토성 중 가장 큰 규모인 풍납 토성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가 휩쓸고 간 뒤 갖가지 유물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청동솥, 금귀걸이, 유 리구슬, 4등분한 원형무늬가 있는 수막새 기와 등 한결같이 화려하고 비중이 큰 유 물들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몇몇 유물과 성의 흔적 외에 별다른 것이 발견되지 않았고 백제의 방어용 성이라는 당시 학자의 주장이 널리 퍼졌다. 이로 인해 왕성일 가능성은 배제된 채로 주변은 보존되지 못하고 방치되었다. 그러다 1997년 이 지역에 아파트를 짓기 시작하면서 풍납 토성이 다시금 주목받 았다. 그동안 발굴되지 않았던 백제 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지하 4m 깊은 곳에 묻혀 있다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때 수많은 양의 기와, 큰 건물을 지을 때 사용 하던 주춧돌과 건물터, 고급 전돌, 그리고 궁궐이나 관청에서 사용하던 다량의 유물 풍납 토성에서 발굴된 대부(大夫)명 직구단경호 토기 중앙 상단에 대부(大夫) 라는 글자가 보인다. 이 발견되었는데, 경주에 견줄 만큼 다량의 유물이 쏟아졌다는 사실은 그만큼 인구가 밀집한 대도시였음을 의미한다. 또한 출토 유 물 중 고위 관직명에 해당하는 대부(大夫) 라는 글자를 새긴 토기 조각도 고위층이 머문 지역임을 짐작케 한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 정법에 의한 검사에서도 기원전 2세기에서 서기 200년경에 풍납 토성의 축조가 마무리되었다는 결과가 나왔는데, 이 또한 온조왕이 도읍인 하남위례성을 세운 시기와 비슷하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풍납 토성이 하남위례성일 가능성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설령 이곳이 도읍은 아니라 하더라도 백제가 최소한 2세기경까지 대규모의 성을 세울 국력을 지닌 나라였다는 사실만큼은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는 유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중요한 의미를 지닌 풍납 토성은 최악의 발굴이라는 오명도 안고 있다. 1999년 9월 한신대 박물관이 주민들의 연립 주택 건립을 위한 구제발굴로 조사를 했는데, 도중에 시공사의 부도, 발굴 기한과 주민 보상을 둘러싼 건축 조합과의 갈등으로 2000 년 5월에 아파트 신축 중단을 우려한 재건축 조합 주민들이 중장비를 동원해 유적 일부를 갈아엎어 심각하게 훼손하였다. 결국 조사 를 중단하고 다시 흙을 덮게 되었는데, 이 사건은 풍납 토성의 보존이 쉽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풍납 토성(서울 송파) 풍납 토성은 서울시 송파구 풍납동에 있는 초기 백제의 토성으로, 평지에 흙으로 쌓은 고대의 성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성벽의 둘레는 3.5km, 너비는 43m, 높이는 11m로 추정되는데, 현재의 아파트 단지를 둘러싸고 남아있는 성곽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13 역사(01~21)서울.indd 13 13. 6. 13. 오후 2:49
올림픽 공원, 그 안에 1600년 전 백제인이 만든 몽촌 토성이 있다 지금은 올림픽공원으로 조성되어 시민의 휴식 공간이 되어 있는 몽촌 토성은 백제가 한강 지역에 나라를 세우고 발전한 시기에 축조된 성곽으 로, 야산의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진흙을 단단히 쌓아올려 만들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름모 모양이며, 성벽의 길이는 2,285m, 내부 면 적은 216,000m 2 이다. 동북쪽 바깥의 작은 능선에는 둘레 약 270m의 외 성을 따로 쌓았고, 낮은 성벽 주위에는 나무 울타리인 목책을 만들고, 성 밖에는 물길인 해자를 만들어 적의 침입에 대비하기도 했다. 몽촌 토성의 주변 지역을 살펴보면 멀리 서쪽으로 한강이 흐르고 있 고, 북동쪽으로는 한강의 지류인 성내천이 흘러 자연적인 방어선을 이루 고 있다. 북쪽으로는 풍납 토성 유적지가 있고, 남쪽으로는 백제 시대 고 분군인 방이동 석촌동 고분군이 있어 이 일대가 백제 시대의 큰 도시였 음을 알려 준다. 몽촌 토성 안에서는 각종 토기 기와류와 철제 무기류, 뼈로 만든 갑옷, 중국에서 만든 동전무늬도기 및 청자 조각 등이 출토되었는 데, 대부분 4~5세기에 백제 사람들이 즐겨 쓰던 물건들이다. 몽촌 토성(서울 송파) 남한산성에서 뻗어 내린 구릉지의 지형을 이용하여 외성과 내성의 이중구조로 축조하였다. 역사의 창 백제의 성곽 제작 기법 풍납 토성과 몽촌 토성은 흙을 쌓아 만든 토성이다. 흙으로 쌓아 약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먼저 나무 기둥 을 세우고 나무판을 사방에 두른 뒤 차곡차곡 흙을 쌓 아 올리고 절굿공 등으로 꾹꾹 눌러 다지는 과정을 여 러 번 반복하여 흙을 마치 시루떡처럼 다져쌓는 판축 공법( 版 築 工 法 ), 잔 나뭇가지와 잎사귀 등을 깔고 흙을 쌓는 부엽공법( 敷 葉 工 法 ) 을 사용하여 상당히 단단하게 축조되었다. 이는 고대 일본에서 성벽 및 제방을 쌓을 때 많이 사용한 방법인데, 풍납 토성 성벽 발굴 조사를 통해 그 기술적 원류가 시기적으로 앞서는 풍납 토성에 있음이 밝혀지면서 큰 관심을 받기도 하였다. 판축 기법으로 지은 백제의 성곽(한성백제박물관) 한성백제박물관 로비에 풍납 토성 성벽의 단면이 전시되어 있다. 방어 장치 몽촌 토성 내의 목책 나라마다 성 안에는 많은 사람과 건물이 있어 이를 지키는 방법을 여 러 가지로 고안하였다. 몽촌 토성의 구조를 살펴보면 우선 성으로 들어 가기 전에 물이 가득 찬 연못을 볼 수 있다. 이를 해자 라고 하는데 적 들이 쳐들어 올 때 물길을 이용해 방어하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목책 도 설치하였는데, 이는 사람 키를 넘는 나무 울타리로서 2차 방어선 역 할을 하였다. 14
풍납 토성과 몽촌 토성 학년 반 번 이름 20 년 월 일 1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풍납 토성 발굴시 성벽 중 일부가 남아 있는 동쪽 성벽 두 군데를 10m 간격으로 잘랐다. 성벽을 잘라보니 맨 아래쪽 폭이 무려 40m, 높이만 9~15m 안팍의 사다리꼴 단면을 띠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자른 성벽 단면은 단순히 흙만 쏟아 부은 게 아니라 아래층에는 두꺼운 진흙층을 깐 다음 10cm 정도 간격으로 흙을 다져 한쪽한 쪽 쌓아올렸음이 확인되었다. 성벽 전체 길이가 3,470m 정도였다. 계산에 의하면 이 정도의 성벽을 쌓으려면 8톤 트럭 20만대 분량, 즉 150만 톤 이상의 흙이 필요하다고 한다. ⑴ 풍납 토성을 조성할 때 사용한 기법의 명칭을 써 보자. ⑵ 풍납 토성의 규모를 동원 인력 및 권력의 크기와 관련지어 서술해 보자. 2 다음은 풍납 토성에서 발견된 유물과 그에 대한 설명이다. 이를 바탕으로 풍납 토성이 왕성일 가능성을 정리해 보자. 말머리 뼈 9개 고대 사회에 말은 굉장히 값비싸고 귀한 동물이었다. 이곳은 당시 가뭄이 들었을 때 왕이 하늘에 기우제와 같은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추정된다. 백제 초기의 기와 기와는 당시 아무나 사용할 수 없었고, 신분이 높은 자들에게만 허용되었다. 대부( 大 夫 ) 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 당시 사회에서 대부 는 높은 관직의 이름이었다. 3 몽촌 토성에서 한강의 지류인 몽촌호나 성내천을 바라본 사진을 직접 찍어 붙여 보자. 그리고 이들 하천이 몽촌 토성에서 담당하는 기능상의 명칭과 역할이 무엇인지 설명해 보자. 사진 붙이는 곳 15
아차산 고구려유적 아차산은 해발 285m의 낮은 산이지만 남쪽으로는 한강 남쪽의 모든 지역을 한눈 에 볼 수 있고, 북쪽으로는 멀리 의정부까지 볼 수 있다. 삼국 시대에는 고구려, 백 제, 신라가 군사적 요충지인 아차산을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였는데, 그에 따라 이 곳에는 군사 시설과 생활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아차산성이다. 백제 의 옛 도읍지에 있는 아차산성은 누가 쌓았는지에 대해 아직 논란이 있는데, 1989년 아차산성 부근에서 고구려의 군사 시설인 보루가 발견되면서 아차산이 고구려 유적 지로 주목받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고구려의 온달과 평강의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I 관련 교과서 단원 I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03. 삼국 및 가야의 성립과 발전 I 활동 목표 I 아차산 지역의 고구려 유적과 유물을 통해 고구려인의 생활상을 이해한다. 고구려 유적이 남한 지역에서 발견되 는 이유를 파악한다. 출발하기 전에 알아 두기! I 위치 I _ 아차산 생태공원: 서울시 광진구 광장동 370번지 일대 _ 아차산성: 서울시 광진구 광장동 산16-46, 구의동 산1-2 I 문의처 I 02) 450-1655(아차산 관리사무소), 02) 450-7593(광진구청 문화체육과(문화재)) I 홈페이지 I http://www.gwangjin.go.kr/achasan(아차산 생태공원) I 특이사항 I _ 구리시에 소재한 고구려대장간마을(http://www.goguryeotown.co.kr) 이 가까이에 있으므로 이곳의 아차산 고구려 유적 전시관 관람 및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이용한 연계 답사 가능 _ 근대문화유산 탐방, 근현대사 탐구교실 등 다양한 문화행사 운영 I 체험 코스 I 아차산 제4 보루 아차산 제3 보루 아차산 제2 보루 아차산 제1 보루 아차산성 1 아차산 생태공원 2 아차산성 한강 3 아차산 제1 보루 4 아차산 제2 보루 아차산 생태공원 5 아차산 제3 보루 6 아차산 제4 보루 16
아차산에는 고구려가 세운 '보루'가 있다 백제와 고구려 그리고 신라 사이에는 한강을 두고 수많은 전쟁이 벌어졌다. 금강산에서 시작된 고구려 보루군 분포도 북한강과 강원도 태백 금대봉에서 시작한 남한강이 흘러 양평을 거쳐 서울을 지나 황해로 빠져 나 망우산보루 가는 한강은 당시 도로가 거의 없던 고대 사회에서 중요한 교통로 구실을 하였다. 삼국사기 에 중랑구 백제 책계왕이 축성하고 광개토 대왕이 빼앗았다는 기록을 보면, 백제가 한강 지역을 맨 먼저 차 용마산보루 지하고 한강의 북쪽에 아차산성을 건설하여 고구려를 방어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이곳은 한강 건너에 있는 풍납 토성, 몽촌 토성과 함께 백제의 도성을 지키는 매우 중요한 히려 백제를 위협하는 성이 되었다. 고구려가 이곳에서 한강 건너의 풍납 토성과 몽촌 토성을 한 눈에 내려다보면서 백제를 견제했기 때문이다. 아차산성 건물터에서는 토기, 기와 등 여러 유물이 나왔다. 특히 기와조각 가운데 북(北) 한 (漢) 산(山) 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것들이 있어 이를 신라의 북한산성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그런 데 고구려의 유물은 산성에서 아직 한 점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고구려가 이곳에 상주하지 않 고 백제를 감시할 때에만 잠깐씩 사용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아차산에 남은 고구려의 흔적은 보루 를 통해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장수왕은 한성을 장악한 후 백제의 개로왕을 전사시켰다. 이후 아차산은 고구려의 남쪽 국경이 되었고, 고구려는 국경을 지키 기 위해 아차산에 보루를 세워 군인들이 머물게 하였다. 보루 는 적을 막거나 적의 움직임을 살피 시루봉보루 ⑤ ③ ④ ② ① 군사 요충지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백제에게서 한강 유역을 빼앗고 아차산성을 차지한 뒤에는 오 ③ ① ⑦ ⑥ ② 홍련봉보루 ② ① 구리시 ④ ③ 아차산보루 ② ⑤ ① 한강 아차산성 광진구 천호대교 구의동보루 자양동보루 잠실대교 올림픽대교 송파구 풍납 토성 몽촌 토성 고구려 보루 분포도 한강을 사이에 두고 백제의 풍납 토성, 몽촌 토성과 마주하고 있다. 기 위해 주로 산꼭대기에 만들어진 요새인데, 일반인이 거주하였던 산성과는 달리 교통로를 확보 하기 위해 주변 전망과 감시를 주로 하는 곳이었으며, 여러 개가 조를 이루었다. 산성보다 작은 진지인 보루에는 크기에 따라 적게는 10명에서 많게는 100명 정도 되는 군인들이 머물렀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아차산에 보루를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차산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해발 285m의 낮은 산이지만 꼭대기에 올라서면 한강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산세와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아차산에 산재한 약 20 여개의 보루들은 각각의 위치에 따른 저마다의 기능이 있는데, 가장 북쪽의 수락산 보루에서는 남쪽의 아차산 일대가 잘 보이고, 임 진강 유역으로부터 양주 분지, 중랑천, 한강 유역에 이르는 교통로를 감사하기 적당하였다. 망우산 보루에서는 북쪽 의정부에 이르 는 길목까지를 잘 볼 수 있고, 용마산 보루들은 중랑천 일대의 방어, 아차산 줄기의 보루들은 왕숙천변의 방어에 유리하다. 또한 지 금은 사라졌지만 한강변의 낮은 구릉에 있던 구의동 보루와 자양동 보루는 아차산 일대와 한강변 평지 조망에 유리하였다. 아차산의 보루를 보면 각 보루 사이의 거리가 가까운 것을 알 수 있다. 대략 400~500m 간격으로 늘어서 있다. 보루를 이렇게 세 운 것은 한 보루가 공격당했을 때 다른 보루에서 적을 쉽게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보루는 처음에는 고구려의 전진 기지로, 뒤 에는 신라와 백제의 공격을 막는 방어 시설로 사용 되었다. 아차산성 성벽 아차산성은 높이 200m의 산꼭대기에서 시작하여 동남으로 한강을 향하여 완만하게 경사진 산중턱 이상의 부분을 둘러서 주위가 약 1km가 넘는 성벽 을 구축하였다. 성벽의 구조는 삭토법에 의해서 형태를 구축한 후 그 윗면 을 따라 낮을 석벽을 구축했던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는 돌이 무너져 돌과 흙을 섞어서 쌓은 외형을 이후고 있다. 성벽의 높이는 평균 10m 정도이다. 17 역사(01~21)서울.indd 17 13. 6. 13. 오후 2:49
아차산의 보루에는 고구려의 발자취가 있다 보루는 국경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로 군인들이 생활한 장소이다. 아차산 일원에는 약 500m 간격으로 보루가 15군데 있었는데, 전 체로는 약 1,500명 정도의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당시의 생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흔적이 남아 있다. 먼저 군인들이 머물렀던 막사에는 온돌이 있었다. 온돌은 난방과 조리를 위해 필수적인데, 아차산 제4 보루에서는 12개의 온돌이 발견되었다. 또 바닥과 벽에 진흙을 발라 물이 새지 않도록 처리한 저수 시설이 두 개 발견되었다. 병사들이 사용했던 화살과 칼, 도 끼 등의 무기뿐만 아니라 철제 무기나 공구를 수리하기 위한 대장간 시설도 있었다. 아차산에서 국경을 지키던 군인들이 먹던 쌀, 콩, 조, 보리 등의 흔적도 확인할 수 있으며, 디딜방아, 절구와 함께 저장 도구인 토 기도 발견되었다. 또한 출토 유물 중에는 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고 띠고리가 달려 있는 커다란 시루(음식물을 쪄서 익히는 도구)도 있 었다. 이를 통해 당시 고구려 사람들은 주식인 조, 보리, 밀 등의 낟알이 단단하여 가루를 내 쪄서 먹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차산 제4 보루 발굴 전경(좌)과 복원된 모습(우) 아차산 제4 보루는 서울시 광진구와 경기도 구리시의 경계에 자리잡고 있으며, 1997년 서울대학교 조사단이 발굴하였다. 역사의 창 아차산성과 온달 장군 한강 북쪽에 있는 아차산에 가면 평강 공주와 온달 장군의 동 상을 볼 수 있다. 고구려 장군이었던 온달은 신라에게 빼앗긴 한 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였으나, 신라군에게 패하고 아단성( 阿 旦 城 )에서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아단 성 이 바로 아차산성( 阿 且 山 城 )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하지만 단양에도 온달산성이 있는데, 이 온달산성이 바로 온달 장군이 전사한 장소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참고로 아차산성의 삼국 시대 때 이름은 아단성이다. 아 는 한 강의 옛 이름인 아리수에서 딴 것이며, 단 은 골짜기라는 뜻이다. 이 아단성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휘( 諱 )를 단( 旦 ) 으로 온달과 평강(아차산 생태공원) 고치면서 왕의 이름과 같다고 하여 차( 且 ) 로 바뀌어 불리기 시작 하였다. 또한 아차산에는 온달과 평강에 관한 전설이 담긴 바위가 있다. 대성암 아래쪽에 있는 온달 장군의 주먹바위와 평강 공주의 통곡바위가 그것이다. 18
아차산 고구려유적 학년 반 번 이름 20 년 월 일 1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아차산 제4 보루 (가) 을/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벽화(각저총) 두 여인이 앉아 있는 곳이 (가) (이)다. ⑴ (가)에 들어갈 용어를 써 보자. ⑵ (가)의 존재를 통해 알 수 있는 생활상을 서술해 보자. 2 고구려의 아차산 보루에서 나온 다음 유물과 그에 대한 설명을 옳은 것끼리 서로 연결해 보자. 집수정: 물을 가두어 두었던 시설 이다. 시루: 음식물을 담아서 찔 수 있 게 만든 도구이다. 방아확: 방앗공이로 찧을 수 있 게 우묵하게 판 돌이다. 3 아차산 고구려유적을 답사하면서 직접 사진을 찍어 붙여 보고, 해당 장소의 특징을 설명해 보자. 사진 붙이는 곳 19
여기도 찾아가요! 서대문구 서대문 독립공원, 독립문, 연세 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종로구 사직단, 경복궁, 북촌 한옥 마을, 청계천, 운현궁, 흥인지문 중구 덕수궁, 정동, 근대 문화 중심지 역, 남산 성곽 마포구 한강절두산성지 은평구 강북구 도봉구 노원구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전쟁기념관 강서구 양천구 마포구 영등포구 서대문구 성북구 중랑구 종로구 동대문구 중구 성동구 용산구 광진구 강동구 강서구 허준박물관, 겸재기념관 구로구 금천구 동작구 관악구 서초구 강남구 송파구 강동구 암사동 선사유적지 동작구 국립현충원, 사육신묘 관악구 낙성대 강남구 선릉, 봉은사 20
수도권역 연천 전곡리 유적 22 수원 화성 26 강화 광성보 및 군사 시설 30 실학박물관과 다산유적지 34 여기도 찾아가요! 38
연천 전곡리 유적 연천 전곡리 유적은 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밝혀 줄 귀중한 자료로서 한국과 동아시아 지역의 구석기 문화 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세계적 인 구석기 유적이다. 경기도는 사적 268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전곡리 선사 유적의 영구적인 보존과 적극적인 활용을 위하여 전곡선사박물관의 건립을 추진하여 2011년 4월 개관하였다. I 관련 교과서 단원 I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01. 선사 시대의 문화 I 활동 목표 I 연천 전곡리 유적의 의미를 파악한다. 전곡리 유적에서의 체험활동을 통해 선 사 시대인의 생활을 이해한다. 출발하기 전에 알아 두기! I 위치 I _ 연천 전곡리 유적: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양연로 1510(전곡리 515번지) _ 전곡선사박물관: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평화로 433번길 2(전곡리 176-1번지) I 문의처 I 031) 832-2570(종합안내소), 031) 839-2206(토층전시관), 031) 830-5600(전곡선사박물관) I 홈페이지 I http://www.goosukgi.org(연천 전곡리 유적), http://www.jgpm.or.kr(전곡선사박물관) I 특이사항 I _ 연천 전곡리 유적: 선사체험마을 운영(홈페이지 사전 예약), 토층전시관 운영, 매년 구석기 축제 개최 _ 전곡선사박물관: 유아단체 학교단체 어린이 가족 청소년 성인별로 다양한 교육프로그램 운영, 각종 체험장 설치, 학습자료 제 공(홈페이지 참고) I 체험 코스 I 토층 전시관 선사체험 마을 야외체험 1 매표소 전곡선사박물관 2 토층전시관 3 선사체험마을 관광안내소 실내전시 종합안내소 전곡선사박물관 견학 22
연천 전곡리 유적, 세계 구석기 지도를 바꾸다 전기 구석기인들이 한반도 전곡리에서 살았다는 놀라운 증거는 우연한 기회에 발견되었다. 당시 미 공군 하사관으로 우리나라에 와 동두천 미군 2사단 헬리콥터장에서 근무하던 보웬(Greg Bowen)은 미국 인디애나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하다 주한 미군에 지원 입대한 사람이었다. 그는 1978년 1월 20일 한탄강 유원지를 거닐다 주먹도끼 한 점을 발견하고는 순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 어 주변을 살펴 주먹도끼 2점, 가로날도끼 2점, 긁개 1점을 추가로 발견하였다. 그는 이를 토대로 세계적인 구석기 권위자 프랑수아 보르드 교수(프랑스 보르도 대학)에게 보고서를 보내 검증받았고, 교수의 추천으로 서울대학교에 의뢰한 결과 1979년 3월부터 전곡 리 유적이 대대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하였다. 이 발굴 과정에서 나온 다량의 석기, 박편, 망치돌 등은 모두 전기 구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도구인 아슐리안형 석기에 해당하였다. 이러한 성과에 자극받은 한국 고고학계의 각 연구소, 박물관 등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최근 2009년까지 총 17차례에 걸쳐 조사 작업 이 진행되었다. 이는 구석기 유적 발굴로는 해방 이후 가장 큰 조사 작업이었고, 우리나라 구석기 문화를 파악할 수 있는 6천여 점의 유물을 발견하는 성과를 올렸다. 뿐만 아니라 발굴된 대량의 유물들은 유럽이나 아프리카 등 아슐리안 계통의 석기와 비슷한 구석기 유물이어서 이전까지 대세를 이루던 동북아시아에는 유럽이나 아프리카 지역에서 발견된 전형적인 주먹도끼는 없다. 는 모비우스의 학설을 뒤집는 결정적인 계 기가 되었다. 1981년 10월 전곡리 구석기 유물은 멕시코에서 열린 국제 선사 원사 고고학회에서 공식으로 인정을 받게되어 외국의 고고학 교과서에 올랐으며, 동북아 구석기 문화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구석기 유적지가 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언제부터 구석기인들이 터를 잡고 살았을까?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종합해 볼 때 적어도 30만 년 전부터 전곡 리를 중심으로 한 추가령 지구대에 구석기인들이 모여 살기 시작 한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한탄강 유역에서는 실제 많은 수의 구 석기 유적이 발견되어 이 곳 일대가 구석기인들이 모여 살았던 곳임을 알려 주고 있다. 전곡리에서 출토된 뗀석기 경기도 연천 전곡리 유적의 전경 전곡리 유적은 전곡 시가지 남쪽, 한탄강이 감싸고 도는 현무암 대지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현무암 위에 형성 된 퇴적층의 상부 점토층이 구석기 문화층으로, 여기에서 석기가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연천 전곡리 유적 발굴 현장 23 역사(22~39)수도.indd 23 13. 6. 13. 오후 2:50
전곡선사박물관, 그곳에 가면 선사 시대를 직접 만날 수 있다 2011년 경기도는 이 유적지에 전곡선사박물관을 세웠다. 박물관에는 전곡리에서 출토된 주먹도끼 외에 프랑스의 화석 인류 복원 전문가인 엘리자베스 데이네스가 복원한 세계의 대표적 화석 인류들이 다양한 동물 박제들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1층에는 상설 전시실과 함께 고고학 체험실이 있는데, 상설 전시실은 최초의 인류로부터 현생 인류의 출현까지의 진화 과정을 보 여 주며, 그 속에서 전곡리 유적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고고학 체험실에는 선사 시대의 사람과 동물, 기술 등을 직접 체험하고 확인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어 흥미롭다. 직접 돌을 부딪혀 석기를 만들어보고, 손가락에 물감을 묻혀 동굴 벽 면에 그림을 그리는 등 구석기인들의 생활과 예술에 대해 체험할 수 있다. 또한 이 체험실에는 1991년 알프스의 눈덮인 산에서 옷과 장비를 모두 갖춘 채 사망한 모습으로 발견된 구석기인 외찌 미라의 모형도 전시되어 있어서, 이를 매개로 기원전 3000년경에 살던 선사 시대인의 신발, 청동도끼, 주머니칼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전곡선사박물관 고고학체험실 내부 토층전시관의 전곡리 유적 표층전시관 내부 역사의 창 아슐리안형 주먹도끼 주먹도끼는 돌을 깨고 양면으로 떼어내어 날 카로운 날이 서게 한 석기의 일종이다. 주먹도끼 라는 이름은 그 모양이 지금 우리가 나무를 쪼개 는 데 쓰는 쇠도끼와 비슷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하지만 주먹도끼는 나무 다듬는 용도 외에 짐승 의 가죽을 벗겨 내고, 고기를 발라내고, 뼈를 부 수는 등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다. 당시 사람들에 게는 소중한 만능 도구였다. 이 주먹도끼를 일컬 어 세계 구석기 연구자들은 아슐리안형 주먹도 주먹도끼 사용 모습 생따슐 지방에서 발굴된 주먹도끼 끼라고 부른다. 아슐리안은 프랑스의 생따슐(St. Acheul) 지방에서 전기 구석기에 해당하는 다량의 주먹도끼가 출토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는 타원형 또는 삼각형 모양으로 양쪽 면을 모두 고르게 손질 가공하여 석기의 옆면이 마치 두 손바닥 을 모은 모습을 한 것이 특징이다. 초기에는 거칠게 가공되었지만 점차로 정형화된 형태를 지니게 되었다. 전곡리에서 발견된 주먹도끼 중에는 초기 아슐리안형이 많이 나타나며 전면을 가공한 타원형과 뾰족한 첨두형도 함께 발견된다. 24
연천 전곡리 유적 학년 반 번 이름 20 년 월 일 1 다음 글을 읽고 전곡리 유적이 갖는 의미를 서술해 보자. 1978년 전곡리에서 주먹도끼 가 처음 발견되기 전까지 모비우 스(H. Mobius)를 비롯한 서양의 학자들은 인도의 동쪽, 즉 동아 동해 시아에는 양면을 가공하여 잘 만 인도양 태평양 든 아슐리안형 주먹도끼가 없다 고 주장하였다. 이 석기 문화권 개 문화권 0 2000 2 다음은 전곡선사박물관에 모형으로 전시된 외찌 에 관한 내용이다. 외찌의 가상 하루 일과를 작성해 보자. 1991년 알프스에서 발견된 외찌 는 피부, 머리카락, 눈, 조직, 내장기관, 심지어 창자 속의 내용물까지 모두 남아 있었다. 기원전 3000년경에 살았던 키 160cm, 몸무게 약 50kg 정도의 46세 가량의 남자로 밝혀졌다. 외찌는 고산 지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따뜻한 가죽옷을 입었으며, 외찌의 신발은 정성들여 만든 것으로 먼 거리를 걸을 때 이상적이었고, 땅바닥에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 외찌는 주머니칼, 구리도끼, 불피우는 데 필 요한 장비 등을 가지고 있었다. - 전곡선사박물관 도록 3 전곡리 선사 유적의 야외 체험장이나 선사 박물관의 고고학체험실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의 사진을 직접 찍어 붙 여 보고, 어떤 장면인지 설명해 보자. 사진 붙이는 곳 25
수원 화성( 水 原 華 城 ) 조선 시대에는 왕과 왕비의 무덤인 능 과 세자와 세자빈의 무덤인 원 이 조성되면 주변 10리 안에는 백성이 살 수 없어 강제로 이사를 해야 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 세자를 위해 수원으로 무덤을 옮기려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해 야 할 사람들을 위해 백성들을 팔달산 동쪽으로 이사하게 하고 이사 비용과 집값까 지 보상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새 도시를 만들고 그 둘레에 성을 쌓았는데 그것이 바로 수원 화성 이다. 유네스코는 1997년 이를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하였다. I 관련 교과서 단원 I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04. 조선 후기 정치와 제도의 변화 I 활동 목표 I 수원 화성이 조성된 계기를 파악한다. 수원 화성의 특징과 의미를 이해한다. 출발하기 전에 알아 두기! I 위치 I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190 I 문의처 I _ 031) 290-3600(수원문화재단), 031) 228-2765(팔달문 매표소), 031) 251-4513(장안문 매표소), 기타 연락처는 홈페이지 참고 I 홈페이지 I http://www.swcf.or.kr(수원문화재단) I 특이사항 I _ 수원화성, 화성행궁, 수원박물관, 수원화성박물관 4종 통합 매표시 할인 _ 개인(4인 이상) 및 단체(20인 이상) 대상으로 문화관광해설 프로그램 운영(예약제) I 체험 코스 I 장안문 서북공심돈 화서문 화홍문 방화수류정 각건대 (동북포루) 동장대(연무대) 동북공심돈 1 팔달문 2 서장대 3 화서문 서장대 화성행궁 치성 창룡문 4 장안문 5 방화수류정 6 동장대(연무대) 7 동북공심돈 서남각루 팔달문 봉돈 8 창룡문 9 봉돈 동남각루 26
수원 화성, 정조의 이상을 구현한 신도시 정조는 왕이 된 지 13년 만인 1789년, 제대로 관리되고 있지 않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양주 배봉산 아래에 서 당시 조선 최고의 명당이었던 수원부 화산( 花 山 )으로 옮겼다. 아버지 무덤인 현륭원( 顯 隆 園 : 고종 때 융릉으로 격상되기 이전의 이름)이 완성되자 정조는 해마다 묘소에 참배를 하기 위해 수원을 찾았다. 1793년 정조는 무덤을 옮긴 지 5년 만에 수원에 새 성 을 쌓고 새 도시 화성( 華 城 : 花 山 의 花 와 같은 글자 華 를 따옴) 을 만든다고 발표하였다. 세자가 15세 되는 1804 사도세자와 비의 무덤인 융릉 년에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준 후 아버지 무덤을 모신 수 장조(사도세자)와 헌경왕후(혜경궁 홍씨)가 함께 모셔진 합장릉이다. 원에 내려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살아갈 생각이었 다. 이러한 의도로 정조는 화성을 서울에 버금가는 커다란 도시로 만들고자 하였다. 18세기의 조선에서는 상업이 활기를 띠면서 서 울과 지방의 유통이 활발하였는데, 서울에서 남쪽으로 가는 큰길에 화성을 조성하면 하삼도와 통하는 교통의 중심지이자 경제 도시 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1794년에 공사가 시작된 화성은 1796년에 완성되었다. 둘레가 5,520m인 성을 쌓는 데는 1만 1,800여 명의 일꾼이 동원되었고, 사 용된 돌덩어리는 18만 7천여 개, 벽돌은 69만 5천여 장, 기와 53만여 장 등이었다. 화성은 성벽에 방어 시설을 가득 설치하여 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었다. 또한 성 안에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넓은 시가지와 왕이 나라 일을 볼 수 있는 행궁을 만들었다. 화성의 축성이 이전의 도시 건설과 다른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계획도시답게 체계적으로 도시를 정비한 점이다. 우선 성 안을 관 통하는 물길을 정비하여 이전에 비가 오면 자주 범람하는 문제를 해결하였다. 또한 도시의 연결을 위해 성 한복판에 새로 동서와 남 북을 관통하는 네거리 교차로를 만들었다. 그리고 농업 기반을 튼튼히 하여 화성을 자립적인 경제 도시로 만들기 위해 저수지를 여럿 조성하였는데, 만석거( 萬 石 渠 ), 만년제( 滿 年 堤 ), 축만제( 祝 萬 堤, 지금의 서호) 등이 그것이다. 이전과 달랐던 점은 정조는 공사 과정에서 일할 사람들을 모아 일한 만큼의 임금을 지급한 것이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강제로 일을 시킨 예전에 비해 새롭게 나타난 제도상의 변화였다. 여기에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꾼들이 질병에 걸리면 치료를 해주 었고, 치료를 받는 동안 일을 하지 못하더라도 매일 쌀과 돈을 주었다. 화홍문과 수원천 화홍문은 일명 북수문이라고 하는데, 각종 전란에 대비하여 여러 가지 방어 시설을 갖추는 동시에 시내를 관통하는 광교천이 범람하지 않도록 물길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였다. 27
화성의 모양과 재료, 이전의 성과 다르다 수원 화성은 주산인 팔달산을 뒤에 두고 그 아 래에 관청을 배치하였다. 그런데 관청은 다른 지 역과 달리 남향이 아니라 동향이며, 간선도로는 자연히 남북 방향으로 놓이게 되었다. 이는 지형 조건보다 서울에서 이어진 간선도로의 방향을 더 중요시한 까닭이다. 이 때문에 화성의 정문도 남 문인 팔달문이 아니라 북문인 장안문이다. 서울 에서 출발해서 올 때 가장 먼저 성안으로 들어오 는 문이 북문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대부분의 성인 석성(돌로 지 은 성)의 단점을 보완하여 수원 화성은 돌과 벽돌 을 함께 사용해서 성벽을 쌓았다. 석성은 튼튼하 고 방어 기능이 뛰어난 반면 돌을 다듬는 데 시간 이 많이 걸리고, 또 대포의 공격으로 밑돌이 빠지면 성벽이 쉽게 무너지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벽돌을 섞어서 성을 쌓으면 공사 기간을 단축시키고 성벽의 붕괴도 막을 수 있었다. 장안문 수원 화성의 북문으로, 하나의 홍예문 위에 2층의 누각을 올리고 바깥쪽에 둥근 옹성을 갖추었다. 누각은 다 포식으로 화려하게 공포를 짜고 우진각의 기와지붕을 덮는 등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서울 남대문과 비슷한 외관을 갖추었는데, 남대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방어시설을 갖춘 점이 특징이다. 역사의 창 화성의 모든 것을 담은 화성성역의궤 화성성역의궤 장안문 설계도 거중기 정조는 화성을 쌓는 모든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해서 보고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하루하루 일한 사람의 숫자, 벽돌의 숫자까지 모든 것을 꼼꼼하게 기록해서 정조에게 보고하였고, 화성이 완성된 후 그 기록을 묶어서 책으로 만든 것이 바로 화 성성역의궤( 華 城 城 役 儀 軌 ) 이다. 이 책에는 화성을 만들기 위한 계획 단계에서부터 성이 완성될 때까지 왕의 명령과 관청 간에 오갔던 문서, 사용 도구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글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은 그림을 그려서 이해를 돕기도 했다. 공사비에 대한 대목에서는 각 공역에 들어간 경비를 산출하였고, 인건비(일당)와 공사에 참여한 일수 등도 상세하게 기록해서 석공 아무개가 어느 고장의 출신이며, 어느 현장에서 며칠 동안 일했으며 얼마의 돈을 품값을 받았는지 알 수 있게 했다. 이 책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한국 전쟁을 겪 으면서 많은 부분이 파손된 수원 화성을 다시 원래대로 복원할 수 있었고, 이에 따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다. 28
수원 화성 학년 반 번 이름 20 년 월 일 1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수원 화성의 성문들 앞에는 반달 모양으로 쌓은 자그마한 성벽이 있 다. 이를 (가) (이)라고 하는데, 이는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모습 과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 (가) 은/는 적으로부터 성문을 보호 하는 역할 뿐 아니라 성문 앞까지 진입한 적군을 사방에서 포위하여 팔달문 공격할 수 있는 군사 시설의 역할도 하였다. ⑴ (가)에 들어갈 용어를 써 보자. ⑵ (가)의 기능과 효과를 서술해 보자. 2 수원 화성의 성벽에서 확인할 수 있는 다음 구조물의 기능을 각각 정리해 보자. 공사실명판 봉돈 서북공심돈 3 자신이 인상 깊게 바라본 건물이나 기구의 사진을 직접 찍어 붙여 보고, 그것의 명칭과 역할이 무엇인지 설명해 보자. 명칭: 목적: 사진 붙이는 곳 29
강화 광성보 및 군사 시설 광성보는 강화 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로,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 하기 위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흙과 돌을 섞어 쌓은 축성이다. 조선 광해군 때 다시 보충하여 효종 9년(1658)에 광성보를 설치하였으며, 숙종(1679) 때 완전한 석성으로 만들었다. 광성보에는 정문인 안해루가 있고,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어재순 장 군의 쌍충비각, 신미순국 무명용사비, 신미순의총이 있다. 돈대로는 광성돈 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가 있으며 오두돈대와 화도돈대는 파손되어 현재 복원중에 있다. I 관련 교과서 단원 I Ⅰ. 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 01. 서양 열강의 침략과 흥선 대원군의 정책 I 활동 목표 I 보와 돈대의 기능과 구조를 이해한다. 유물과 유적의 발굴과 보존의 어려움을 안다. 출발하기 전에 알아 두기! I 위치 I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번지(해안동로 466번길27) I 문의처 I 032) 930-3114(강화군청), 032) 930-7070~1(광성보 매표소), 032) 934-7887(강화역사박물관) I 홈페이지 I http://museum.ganghwa.go.kr (강화역사박물관), http://tour.ganghwa.incheon.kr (강화군 문화관광) I 특이사항 I _ 강화 고인돌공원 내에 있는 강화역사박물관을 사전답사한 후 광성보를 현지답사하는 형태로 답사코스 구성 가능: 강화역사박물 관 1층 상설전시실에 관련 전시가 진행 중이며, 로비에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 가 전시되어 있음. _ 강화군 문화관광 홈페이지에서 문화관광해설사 신청 가능 _ 강화도는 선사 시대부터 근 현대까지 우리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섬으로, 전 시대에 걸친 여러 테마를 주제로 한 답사 가능 I 체험 코스 I 용두돈대 무명용사비 쌍충비각 광성돈대 안해루 신미순의총 손돌목돈대 1 안해루 2 광성돈대 3 무명용사비 4 쌍충비각 5 신미순의총 6 손돌목돈대 7 용두돈대 30
강화도, 국방을 지키는 요충지! 그안에 광성보가 있다 강화도의 유적지 대부 분은 적을 막고 나라를 지 키는 장소였다. 강화도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섬 이기에 외세가 서울로 침 략해 들어올 때 가장 먼저 통과하는 요충지였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왜란과 호란을 겪고 나 서는 진( 鎭 ) 보( 堡 ) 돈( 墩 ) 을 설치하여 전란을 대비 하였다. 여기에서 진과 보 는 군사상 중요한 지역, 주로 해안 변방에 설치하 여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 던 군사 지역을 말하는 것 광성보의 정문인 안해루 으로, 포대가 소속되어 있었다. 진은 오늘날로 치면 대대병력이 주둔하던 곳이고, 보에는 이보다 규모가 작은 중대병력이 머물렀다. 돈은 돈대( 墩 臺 )라고도 하며 여기에는 평지보다 높게 설치한 하나의 초소가 있었다. 강화도를 군사적 방어 기지로 삼기 시작한 때는 효종 대이다. 이후 숙종 대에 와서 국방에 만전을 기하였는데, 이 시기 월곶진, 재 물진, 덕진진, 인화보, 철곶보 등과 진 보에 소속되는 돈대와 포대 등을 설치하였다. 이들 국방 기지들은 근대 서양 제국의 침략을 받 아 그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광성보( 廣 城 堡 ) 역시 고려 때 외성을 보수하고 효종 7년(1656)에 설치한 방어 시설이며, 용두 오두 화도 광성 등의 소속 돈대는 숙 종 5년(1679)에 만들어졌다. 영조 21년(1745)에 성을 개축하면서 성문을 세우고 안해루( 按 海 樓 )라 불렀다. 이곳은 고종 8년(1871) 신미양요 때 미군 함대에 의해 초지진 덕진진에 이어 광성보마저 포위되면서 가장 격렬한 격전지가 되었다. 당시 미군은 9인치, 8인치 등 85문의 대포로 화력을 과시했으나 조선군은 이보다 성능이 떨어진 구식 대포(홍이포)와 소포로 대응하 였다. 어재연 장군은 전 수비군을 이끌고 싸우다 이마저도 포탄이 떨어지자 칼과 창으로, 마지막에 맨주먹으로 대항하여 싸웠으나 신무기로 무장한 저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어재연 장군과 그의 동생 어재순 그리고 휘하 200여 명의 군사는 4월 23일부터 다음날까 지 48시간의 사투를 벌인 끝에 모두 전사하였다. 미군은 이러한 조선군의 기세에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물러났다고 한다. 광성보 안에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 형제의 쌍충비가 비각과 함께 세워져 있는데, 이는 어씨 문중에서 순국의 뜻을 기 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그리고 그 곁에 신미양요 때 싸운 순국무명용사비가 서 있다. 또한 길 아래로 내려서면 7기의 분묘가 신미순 의총이라는 이름으로 나란히 누워 있다. 당시 어재연 장군 휘하의 군인 전사자들의 신원을 알 수 없어 여기 7기의 분묘에 합장하였다. 신미순의총 쌍충비각 31
광성보에 딸린 돈대, 그곳에서 격전 현장을 돌아보다 용두돈대 광성보에 딸린 광성돈대는 사적 제227호로, 마치 다리미 형상을 하고 있으며 내부에는 당시 사용했던 대포 3문이 복원되어 있다. 이 중에서 대포인 홍이포( 紅 夷 砲 )는 네덜란드에서 중국을 거쳐 들어온 것으로 당시 네덜란드를 홍이( 紅 夷 ) 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을 붙였다. 홍이 포는 포구에서 화약과 포알을 장전한 다음 포 뒤쪽 구멍에 점화하여 사 격하는 포구 장전식 화포로 사정거리는 700m이며 조선 영조 때부터 주 조하여 사용하였다. 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포알은 날아가지만 포알 자 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은 약한 편이다. 광성보의 안쪽으로 계속 걸어들어가다 보면 용두돈대를 만날 수 있 다. 성의 생김새가 마치 용의 머리와 같다 해서 붙은 이름으로, 좁은 강 화해협에 용머리처럼 쑥 내밀고 있는 암반을 이용하여 설치하였다. 물이 빠지고 나면 건너뛰어도 될 듯한 좁은 강폭이 절묘한 지형을 이루고 있 다. 반대편 쪽에 덕진진이 있어 적국 배가 이 지역을 지날 경우 양쪽에서 공격할 수 있다. 용두돈대와 이웃해 있는 손돌목돈대는 강화도의 다른 돈대들이 주로 사각 모양인 것과는 달리 둥그렇게 쌓았으며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해 강화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용두돈대와 손돌목돈대 사이의 수역을 뱃사공 손돌이 왕의 오해로 억울하게 죽은 곳이라 하여 손돌 목 이라고 하는데 그 이름을 땄다. 역사의 창 광성보 전투의 뒷이야기, 무명용사 그리고 수자기 미국 사학자 앨버트 카스텔의 논문에는 조선군은 용감했 다. 그들은 항복 같은 걸 아예 몰랐다. 무기를 잃은 자들은 돌 과 흙을 집어던졌다. 전세가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되자 살아남 은 조선군 1백여 명은 포대 언덕을 내려가 한강물에 투신자살 했고 일부는 자결했다. 조선군 사령관 어재연도 이때 목을 찔 러 자결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군사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항복을 거부한 무명용사들에게 고개를 숙이게 된다. 이 러한 용사들의 숭고함 때문일까 서울에 있는 미국인 학교에서 는 광성보에 수학여행을 오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다고 한 다. 찾아와서는 당시 전투에서 죽은 미국인에 대한 추념과 함 신미양요 당시의 수자기 께 무명용사비 앞에서 예를 표한다는 얘기가 이규태의 역사산책 이라는 책에 소개되어 있다. 신미양요에서 승리한 미군은 깃발 한가운데 장수를 뜻하는 수( 帥 ) 자가 적힌 기를 꺾고 성조기를 내걸었다. 수자기( 帥 字 旗 ) 는 총지휘관이 있는 본영에 꽂는 깃발인데, 광성보 전투에서 승리한 미군이 이 깃발을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그로부터 136년 만인 2007년 10월 장기대여(10년) 형식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2008년 4월 1일부터 5월 5일까지 수자기 136년 만의 귀환 이 라는 이름으로 특별전이 열리기도 했다. 수자기의 귀환으로 이제라도 무명용사들의 넋을 위로할 수 있게 되었다. 32
강화 광성보 및 군사 시설 학년 반 번 이름 20 년 월 일 1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현존하는 유일의 이 수자기는 강화도를 지키는 부대에 있던 것으로, 1871년(고종 8) (가) 당시 왕명으로 진무영 부지휘관인 중군( 中 軍 )에 임명된 (나) 장군이 광성보를 본진으로 하여 이 깃발을 걸고 싸웠다. 이 전투에서 미군의 근대적 인 군사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광성보가 함락되고 깃발도 빼앗겼지만, 350여 명의 조선군이 전사하는 치열하고 끈질긴 저항에 부딪친 미군은 퇴각하게 된다. 수자기 - 일보 2008. 3. 28. - ⑴ (가), (나)에 들어갈 용어를 써 보자. ⑵ 위의 수자기 가 갖는 의미를 당시 정세와 연관하여 서술해 보자. 2 다음 전시 유물과 그에 대한 설명을 보고 물음에 답하시오. 네덜란드에서 왔기 때문에 (가) (이)라는 이름이 붙은 대포( 大 砲 )이다. 구경100mm, 사정거리 700m에 달한다. 소포( 小 砲 )이며, 구경 84mm, 사정거리 300m로서 포알은 대포와 같으며, 대포와 달리 크기가 작아 조 준이 된다. 전시된 포 중 구경 26mm로 크기가 가장 작으며 이 름은 (나) (이)다. 포 1문에 다섯 개에서 아 홉 개의 자포를 결합하여 연속 사격할 수 있는 발달 된 화기이다. ⑴ 위의 포들이 야외 전시된 돈대의 이름을 쓰시오. ⑵ (가), (나)에 들어갈 말을 쓰시오. 3 자신이 인상 깊게 바라본 장면이나 유물 등의 사진을 직접 찍어 붙여 보고, 느낀 점을 적어 보자. 사진 붙이는 곳 33
실학박물관과 다산유적지 경기도가 효와 실학을 대표적인 정신문화로 육성하기 위해 2009년 10월에 개관 한 실학박물관은 조선 후기 개혁과 자아 탐구의 원동력이었던 실학에 관한 자료의 수집과 연구를 진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전시와 다양한 문화체험교육 등을 시행하고 있다. 박물관 내 상설전시실에서는 실학의 형성과 그 전개 과정, 실학자들의 천문과 지 리에 대한 연구 내용 등 실학 전반에 걸친 자료를 체계적으로 전시하고 있으며, 대표 적인 실학자와 그의 사상을 중심으로 한 특별전시가 해마다 두 차례 개최되고 있다. I 관련 교과서 단원 I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03. 삼국 및 가야의 성립과 발전 I 활동 목표 I 실학박물관의 전시 유물을 알아본다. 실학 발달의 배경이 된 서양의 과학 기술을 이해한다. 출발하기 전에 알아 두기! I 위치 및 문의처 I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 747번길16, 031) 579-6000~1 I 홈페이지 I http://www.nyj.go.kr/dasan/03_tra/01.jsp(다산유적지), http://www.silhakmuseum.or.kr(실학박물관) I 특이사항 I _ 다산유적지와 실학박물관이 공동으로 마재마을 답사길 체험사업 진행 중(홈페이지 참고) _ 다산유적지 및 실학박물관에서 다양한 각종 체험 및 교육활동 운영 중(홈페이지 참고) _ 1986년부터 현재까지 매년 가을 다산문화제 개최(http://www.nyjdasan.or.kr) I 체험 코스 I 사당(문도사) 정약용의 묘 여유당 다산기념관 다산문화관 거중기 다산 문화의 거리 혼천의 1 실학박물관 2층 상설전시실 2 실학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 실학박물관 3 다산문화관 4 다산기념관 5 정약용의 묘 6 여유당 7 다산 문화의 거리 34
실학박물관, 그곳에서 실학을 만나다 남양주에 위치한 실학박물관은 전시 유물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개별 유물과 그에 대한 설명 못지않게 실학박물관의 전시 전체를 개념화하 는 데 많은 신경을 썼다고 한다. 실학자들이 쓴 책과 수입품, 발명품으로 한정되어있는 유물을 단순하게 전시하는 것에만 그친다면 전체적으 로 지루한 구성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극복하 기 위해서였다. 실학박물관에는 3개의 상설전시관이 마련되 어 있다. 실학의 형성 을 주제로 한 제1 전시실 에는 실학 형성의 역사적 배경과 외래 문물의 유입과 관련된 주제별 내용이 전시되어 있고, 실학의 전개 를 주제로 한 제2 전시실은 국내에 서 실학이 발전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곳으로 경세치용파, 이용후생파, 실사구시파 등 실학의 학파별 전개에 대한 소개와 관련 유물이 전시되 어 있다. 마지막으로 천문과 지리 를 주제로 한 실학박물관 제1 전시실 제3 전시실에는 서양의 천문학과 지리학이 국 제1 전시실에는 서양 문물의 전래, 왜란과 호란으로 인한 국가 기능의 마비와 국토의 황폐화, 대동법 균역법 동전 유통 등 국가재건을 위한 각종 개혁 정책의 실시, 개혁에 따른 농업과 상업의 발달, 관련 개혁 방안의 제시 등 실학 내에 들어오면서 조선의 천문학과 지리학이 어 형성의 배경이 되는 내용이 전시되어 있다. 떻게 발전되었는가에 대한 내용이 천문 관측 기 기와 지도의 발달을 중심으로 전시되어 있다. 이 중 제2 전시실에는 실학의 학파별 전개와 관련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18세기 전반 이익( 李 瀷 ) 중심의 경세치용파는 정치 체 제 및 토지 제도 등의 개혁을, 18세기 후반 박지원 중심의 이용후생파는 상업의 진흥과 기술 개발을, 19세기 전반 김정희 위주의 실사 구시파는 형이상학을 배격하고 증거가 없으면 믿지 않는다.[ 無 徵 不 信 ] 는 실증적 학문방법론을 각각 추구하였다. 이러한 실학파들의 연구는 모두 우리나라에 관한 탐구를 지향하여 국학(조선학)으로 발전하였고, 19세기 개화 사상에도 영향을 주었다. 또한 1층 기획전시실에서는 1년에 두 차례 특별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그동안 다산과 가장본 여유당집 (2010), 연행, 세계로 향하는 길(2010), 이익, 성호사설 세상만물 새로보기(2011), 곤여만국전도, 세계와 우주를 그리다(2011), 다산, 한강가의 삶과 꿈 (2012), 순암 안정복, 우리 역사 이야기 동사강목(2012), 새로 여는 하늘 땅, 세계 - 성호 이익의 실학(2013) 등의 주제로 전 시가 열렸다. 이러한 특별 전시는 그 해와 관련된 실학자나 실학자의 대표 저서, 혹 은 실학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과학 기술 이나 세계 지도 등의 소재 중 한 가지를 집 중 조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실학박물관 제3 전시실 제3 전시실인 천문과 지리 는 서양의 천문학과 지리학이 국내 에 들어오면서 조선의 천문학과 지리학이 어떻게 발전되었는가 를 보여 주는 전시실이다. 이곳에서는 조선의 천문학을 소개함 과 동시에 한 중 일 삼국의 혼천의 지구의 등을 비교하여 삼국간 의 학문 교류 및 서로가 주고받은 영향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서양으로부터 전달된 세계지도와 지동설은 실학 전개의 기초가 되는 조선인의 자연관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구체적 으로 확인할 수 있다. 35
다산유적지, 정약용의 흔적을 찾아서 정약용은 경기도 양근, 현재 경기도 남양주에서 태어나 15세에 상경할 때까지 이곳에서 자랐다. 당시 양근 일대는 후일 실학자로 불리게 된 학자들이 새로운 학풍을 형성해 가던 곳으로, 정약용도 어린 시절부터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를 접하게 되었고, 일생에 걸 쳐 다양한 연구 및 저술 활동을 통해 18세기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실학박물관의 바로 옆에는 다산유적지가 자리하고 있는데, 다산 정약용의 묘, 그가 태어나고 세상을 떠난 여유당, 사당인 문도사, 그리고 다산의 대표적인 저서에 대한 소개 및 수원성 축조 과정에 쓰였던 거중기와 녹로 등이 전시된 다산기념관과 다산문화관 등이 있다. 특히 다산유적지 입구에는 그가 집필한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의 대표적인 구절이 동판에 새겨져 있다. 여유당 시대를 개혁하고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꿈을 담았던 정약용은 긴 유배 생활을 마친 후 태 어나고 자랐던 이곳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다 생을 마감하였다. 현재의 여유당은 1925년에 홍수로 떠내려간 것을 복원한 것이다. 목민심서 정약용이 전라남도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당시 저술한 책으로, 지방관의 사적을 가려 뽑아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를 다룬 책이다. 여유당전서 권 16~29에 수록되어있으며, 경 세유표 와 함께 조선 후기 연구 자료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역사의 창 시헌력 이 전한 새로운 자연관 시헌력 서양의 자연과학 지식이 전래되면서 조선의 천문학과 지리학은 크게 발전하 였고, 그 계기는 시간과 공간 등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에 대한 관념의 변 화였다. 종래에는 시간과 공간이 어떤 철학적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되었 으나, 이제는 이들이 단순한 자연현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천문학의 발달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1653년 시헌력( 時 憲 曆 )의 시행이었 다. 시헌력은 중국 왕조가 명에서 청으로 바뀌면서 1645년부터 채택된 역법으 로 서양의 수치와 계산 방법을 활용하였는데, 태양력의 영향을 받아 24절기를 확정한 태음태양력( 太 陰 太 陽 曆 )이었다. 조선은 이를 1644년 김육의 건의 이후 국내에 들여와 시행하였고, 이제 계절의 변화는 음양오행의 순환에 의한 것이 아니라 태양과 지구와의 각도에 의한 것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를 밝히기 위하여 지구설, 지동설 및 공전설 등이 탐구되기 시작하였다. 36
실학박물관과 다산유적지 학년 반 번 이름 20 년 월 일 1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중국에 서양의 세계지도가 본격적으로 전달되기 시작한 것은 1601년에 예수회 소속의 신부 마테오 리치 (Matteo Ricci)가 베이징에 정착하면서부터이다. 그는 1602년에 이지조와 협력하여 (가) 을/를 제작하 였다. 중국에서 제작된 세계지도의 조선으로의 도입은 매우 신속하여 1603년에 이광정에 의하여 바로 도입되 었다. 세계지도의 전래는 매우 충격적인 사실임에 틀림없었다. ⑴ (가)에 들어갈 세계지도의 명칭을 써 보자. ⑵ (가)의 전래가 갖는 의미를 서술해 보자. 2 다음 전시 유물과 그에 대한 설명을 보고 물음에 답하시오. (가) 은/는 용거론( 用 車 論 ) 을 통해 수레 를 이용하면 상품 유통이 활발해지고 물가가 고르게 되며, 시장이 전국으로 확대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⑴ (가) ~ (다)에 들어갈 말을 써 보자. 김성일이 1577년 명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가져왔 다. 16세기에 발달한 (나) 이다. 조선 시 대의 기록에는 안경을 애체( 靉 靆 ) 로 명명하고 있으 며, 지봉유설 과 성호사설 에 본격적으로 소개되 고 있다. 천문학 교수였던 송이영이 1669년 제작한 혼천 시계 (국보 제230호)의 (다) 부분만을 제작한 것이다. 여기에는 태양 운행과 달 운행을 표현했으 며, 지구의를 장착하여 지구와 태양과 달의 상대적 운동 메커니즘을 구현하였다. ⑵ (가) 인물이 수레의 이용을 강조한 이유를 산업의 효과 측면에서 써 보자. 3 자신이 인상 깊게 바라본 실학자나 유물 사진을 직접 찍어 붙여 보고, 느낀 점을 적어 보자. 사진 붙이는 곳 37
여기도 찾아가요! 파주시 임진각, 제3 땅굴, 도라전망대, 도 라산역, 임진각 평화누리, 오두산 통일전망대, 반구정, 용미리 마애 이불입상, 이이 유적지 연천군 1 21 무장공비 침투로, 전곡리 유적, 제1 땅굴, 신라 경순왕릉 고양시 서오릉, 서삼릉, 북한산성, 중남 미문화원박물관, 고려 공양왕릉 연천 남양주시 몽골문화촌, 남양주 역사 박물관, 다산유적지 동두천 포천 김포시 문수산성, 장릉, 덕포진 김포 파주 양주 의정부 고양 남양주 구리 부천 하남 광명 과천 시흥 안양 성남 광주 군포 의왕 가평 양평 양평군 용문사, 몽양 여운형 생가 기념관,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마을 수원 화성 오산 용인 이천 여주 화성시 융건릉, 용주사, 제암리 3 1 운동 순국기념관 용인시 한국민속촌, 와우정사, 경기도 박물관 평택 안성 안성시 3 1 운동기념관, 미리내성지, 안성맞춤박물관 여주군 영녕릉, 신륵사, 고달사지, 명성황후 생가 38
강원권역 임영관, 강릉 향교 및 단오제 40 속초시립박물관 44 여기도 찾아가요! 48
임영관, 강릉 향교 및 단오제 임영관은 강릉부의 객사(중앙의 관리들이 지방에 내려오면 머물던 곳) 건물로 지 금은 객사문(국보 제51호)만 남아있다. 객사문은 고려 시대 건축물 가운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몇 안되는 건물 가운데 하나이다. 향교는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각 지방에 설치된 국립 교육 기관으로, 성현에 대한 제사와 유학 교육을 담당하던 곳이다. 강릉단오제는 고대 부족 국가의 제천 의식과 농경의례에서 비롯된 유구한 역사의 향촌제로서, 전래의 모습을 그대로 전승하는 전통 민간 축제로 중요무형문화재 제 13호로 지정되어있다. 출발하기 전에 알아 두기! I 관련 교과서 단원 I Ⅲ. 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 02. 고려의 대외 관계와 문화 발달 04. 민족 문화의 발달과 사림의 성장 I 활동 목표 I 임영관의 건축 양식을 파악한다. 향교의 기본 구조를 파악하고 정치적 의미를 안다. 단오제의 의미를 이해한다. I 위치 및 문의처 I _ 임영관: 강원도 강릉시 임영로 131번길 6, 033) 640-5119 _ 강릉향교: 강원도 강릉시 교동 233, 033) 648-3667(오전에만 전화 가능) _ 강릉단오문화관: 강원도 강릉시 단오장길 1, 033) 660-3940~44 I 홈페이지 I _ 강릉단오문화관: http://www.danocenter.kr _ 강릉관광: https://tour.gangneung.go.kr _ 강릉단오제: http://www.danojefestival.or.kr I 특이사항 I _ 주변에 오죽헌, 강릉시립박물관, 선교장, 경포대, 신복사지, 굴산사지 등이 몰려있으므로 답사지를 추가하여 코스 구성 가능 I 체험 코스 I 선교장 경포대 오죽헌 강릉향교 임영관삼문, 임영관지 강릉단오문화관 1 강릉향교(명륜당 동재, 서재 동무, 굴산사지 승탑 굴산사지 당간지주 서무 대성전) 2 임영관삼문 3 강릉단오문화관 40
고려 공민왕이 머물렀던 강릉 임영관 조선 시대 영조 때 지어진 임영지 에 보면 임영관은 고려 태조 19년인 936년 에 지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1366년에 공민왕이 낙산사에 불공을 드리러 왔다가 폭우로 인해 이곳에서 10일간 머물며 임영관 이란 현판을 썼다고 전해진 다. 규모는 전대청 9칸, 중대청 12칸, 동대청 13칸, 낭청방 6칸, 서헌 6칸, 월랑 31칸, 삼문 6칸이었다고 전해지고, 조선 시대에도 계속 객사로 사용되었다. 하지 만 1927년 일제가 임영관삼문과 칠사당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을 모두 철거해 버 임영관 현판 가로 3m, 세로 1.2m 크기의 임영관 현판은 현재 문루에 걸려있는 것 렸다. 이에 강릉시는 지난 2000년부터 복원 사업을 추진해 2006년엔 임영관 내 으로, 공민왕이 직접 쓴 것으로 전해진다. 객사의 정청인 전대청, 중대청, 동대청, 서헌 등을 복원하고, 2007년부터 2012년까지 아문, 동헌, 별당, 의운루 등을 복원하였다. 국보 제 51호로 지정된 강릉 임영관삼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비교적 작은 크기를 갖고 있으며, 조금 높게 두어 정면에 돌계 단을 만들었다. 또한 앞과 뒤의 기둥은 중간이 아래 위보다 긁은 배흘림 기둥으로 만들고 중간의 기둥은 네모나게 만든 후 문을 만들 어 달았는데, 현존하는 목조 건축 중 기둥의 배흘림이 가장 크고 심한 편에 속한다. 또한 기둥 위에만 공포가 위치한 주심포 양식으 로 겉으로는 소박하고 단정하게 보이지만, 그 세부는 정교하고 세련되어 고려 시대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안동 봉정사극락전, 영주 부석사무량수전, 예산 수덕사대웅전 등과 함께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이지만, 사찰 건축물이 아닌 건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임영관삼문 원래 명칭은 강릉객사물 이었으나, 2010년 4월에 임영관삼문 으로 개칭되었다. 임영관삼문 측면 측면에서 보면 약간 솟음을 하고 있는 단층 맞배지붕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나라에서 세운 지방교육기관, 강릉향교 강릉시 교동에 있는 강릉향교는 고려 충선왕 5년인 1313년에 강원도의 안무사였던 김승민이 선현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 의 교화를 위해 설립한 향교이다. 1411년(태종 11) 불타서 사라지자 1413년에 이맹상이라는 인물이 강릉 지역의 뜻 있는 인물 68인과 함께 힘을 모아 다시 세웠다. 이후 여러 번의 수리를 거쳤으나 다행 히 6 25 전쟁에도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아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동재, 서재, 서 무, 내신문, 교직사, 기타 부속건물 등이 있으며, 경내에 명륜중 고 등학교가 있다. 보통 향교 건물은 크게 선현에 제사지내는 배향 공간과 가르치는 교육 공간으로 나누어지며, 두 공간 사이는 담을 쌓아 구분하는 것 이 일반적이다. 강릉향교의 경우에는 비교적 경사가 심한 땅에 두 강릉향교 전경 41
개의 단을 조성하여 아랫단에는 교육 공간, 윗단에는 배향 공간을 두었다. 배향 공간에는 공자의 사당인 대성전( 大 成 展 )을 중심으로 그 앞 좌우에 동무( 東 廡 )와 서무( 西 廡 )가 있고 이를 연결하는 회랑이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등 네 명 의 성인( 四 聖 ), 공자의 수제자 열 명( 十 哲 ), 송나라 6현( 宋 朝 六 賢 )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동무와 서무에는 공자의 문하 72 현( 孔 門 七 十 二 賢 ), 한 당 송 원나라의 22현( 漢 唐 宋 元 二 十 二 賢 ), 우리나라의 18현 ( 東 國 十 八 賢 )을 모신다. 교육 공간으로는 명륜당( 明 倫 堂 )과 동재( 東 齋 ), 서재( 西 齋 )가 있는데, 2층 누대 ( 樓 臺 ) 형식의 장방형 건물인 명륜당은 스승과 학생이 모여서 교육을 한 공간이며, 동재와 서재는 학생들의 기숙사로서 명륜당을 중심으로 동서 양쪽에 대칭으로 배 치되어 있다. 교직사 천운지 동 동재 대성전 전 명 당 일각문 서 서재 재 제기고 강릉향교 대성전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는 건물로, 현재 보물 제214호로 지정되어 있다. 강릉향교 배치도 역사의 창 강릉 지역의 특성을 잘 간직하고 있는 단오제 강릉 지역은 해안이 가까워 농토가 좁아 농사를 겸하는 어촌이 많았다. 또한 강릉 서쪽에 자리잡은 대관령은 높이 800m에 달하 는 험준한 길이었기 때문에 옛날 이 고개를 넘는다는 것은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른 지방의 보편적인 단오제는 농사에서 씨 뿌리 기를 끝낸 후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천 의식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강릉단오제는 강릉에서 태어나 국사 까지 된 신라의 실존인물인 범일 국사, 정씨 여인과 신라의 김유신 장군을 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이들은 모두 죽은 다음 신처 럼 숭상되었는데 범일 국사는 대관령국사서낭신, 정씨 여인은 대 강릉단오제 중 관노가면극 관령국사여서낭신, 김유신 장군은 대관령 산신으로 강릉 지방 사람들을 보호하는 신으로 여겨진다. 강릉 사람들은 단오제를 전후한 행사를 통해 높고 험한 산을 오르고 내릴 때 안전하기를, 농사가 풍년이 들기를, 고기잡이가 잘 이루어지기를, 마을이 평안하기를 기원하며 함께 제사를 지내고 먹고 즐겼다. 강릉 단오제는 지금까지 전해지는 여러 지역 의 단오제 중에서 옛 모습이 그대로 이어져 오는 다양하고 커다란 행사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67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13 호로 지정되었고, 2005년에는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었다. 지금은 외국인도 찾아와 즐기는 큰 축제 가 되었다. 42
20 년 월 일 임영관, 강릉향교 및 단오제 학년 반 번 이름 1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향교는 배향 공간과 교육 공간으로 나뉘는데, 배향 공간의 대표적인 건물로는 공자를 비롯한 네 명의 성 인을 모시는 (가) 이/가 있으며, 교육 공간의 대표적인 건물로는 인간 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의 (나) 이/가 있다. ⑴ (가), (나)에 들어갈 건물의 명칭을 써 보자. ⑵ 위 내용을 읽고 향교를 세운 이유를 조선의 통치 이념과 관련지어 서술해 보자. 2 임영관삼문 기둥 양식의 명칭을 써 보고 동일한 양식으로 이루어진 다른 건축물도 알아 보자. 양식의 명칭 : 동일한 양식의 다른 건축물 : 3 강릉향교를 출입하는 외삼문과 내삼문의 사진을 직접 찍어 붙여 보고, 문이 세 개인 이유를 써 보자. 사진 붙이는 곳 43
속초시립박물관 발해는 698년에 고구려 장군 출신 대조영이 고구려인들과 말갈인들을 이끌고 만주 지린 성의 동모산 근처에 도읍을 정하고 세운 나라로, 중국으로부터 해동 성국 이라고 불릴 정도로 크게 발전하였다. 속초 발해역사관은 우리나라에서 유 일하게 발해의 역사에 대한 전시를 하는 곳으로, 속초시립박물관의 부속 시설이 다. 지상 1층 지하 1층으로 이루어진 역사관에는 발해의 역사와 발해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보여 주는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I 관련 교과서 단원 I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 04. 통일 신라와 발해의 발전 I 활동 목표 I 발해의 역사를 발해 유물을 통해 파악한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근거를 말할 수 있다. 출발하기 전에 알아 두기! I 위치 I 강원도 속초시 신흥2길 16(노학동 736-1) I 문의처 I _ 속초시립박물관: 033) 639-2977, 033) 639-2972~5(관리팀), 033) 639-2976~8(학예팀) I 홈페이지 I https://sokchomuse.go.kr I 특이사항 I _ 속초시립박물관 내의 부속 시설로 속초실향민문화촌, 속초발해역사관이 있음. _ 각종 교육행사 및 문화행사 진행 중(홈페이지 확인) I 체험 코스 I 실향민문화촌 발해역사관 박물관 입구 1 실향민문화촌 2 박물관 3 발해역사관 44
속초의 역사와 문화를 확인하자 2005년 11월에 개관한 속초시립박물관은 속초의 역사와 문 화를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는 박물관이다. 2개의 전시공간을 갖춘 박물관은 제1 전시실에 속초의 대표적인 청동기 시대 주 거 유적지인 조양동 선사 유적지를 비롯한 속초 지역의 민속 문화를 미니어처로 꾸며놓았으며, 제2 전시실에는 해양 문화 에 대한 민속자료가 전시되어있다. 이를 통해 속초 지방을 중 심으로 한 관동 이북 지방의 역사 자료와 생활 모습을 유물을 통해 편리하게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속초시립박물관이 주된 테마로 삼고 있는 것이 바로 실 향민의 삶이다. 속초는 6 25 전쟁으로 아픔이 많은 지역인데, 광복 이후 남북이 각각 미국과 소련의 통치로 인해 갈라지면서 북한의 영토로 편입되기도 하고, 38선이 생기며 다시 남한으 실향민문화촌 이북5도 가옥 및 6 25 전쟁 당시 월남한 피난민 가옥을 재현해 놓았다. 로 편입되기도 한 애환의 도시이다. 특히 1 4 후퇴 때 국군을 따라 피난 온 함경도 출신의 나이든 사람들이 청초호 끝에 모여 살면서 아바이마을이 형성되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바다를 터전 으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며 살았던 실향민의 애환이 서린 마을의 모습을 실향민문화촌에서 재현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개 성집, 평양집, 평안도집, 함경도집 등 이북5도 가옥 및 피난민 가옥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북식 전통가옥은 박물관 테장 이후 숙박 장소로 개방되므로 특별한 체험도 가능하다. 발해, 동모산 기슭에서 건국하다 7세기 말 당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자, 고구려 장군 출신 대조영이 고구려인과 말갈인들을 이끌고 지린 성의 동모산 근처에 도읍 을 정하고 698년에 발해를 세웠다. 이어 즉위한 무왕은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 지역의 여러 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였는데, 이 시기 발해는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기도 하였으며, 돌궐 일본 등과 연결하면서 당과 신라를 견제하였다. 이어 즉 위한 문왕은 무왕 때와는 달리 친선 관계를 맺고 당의 문물을 받 아들였으며, 상설 교통로를 개설하여 신라와도 교류하였다. 한편 발해는 인안, 대흥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중국과의 대 등한 지위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발해는 선왕 시기에 전성기를 맞아 서쪽으로는 요동 지방, 남 부여부 쪽으로는 대동강 이북과 함경도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중국으로 철리부 발해 상경 용천부 동모산 부 정리부 부터 바다 동쪽에 있는 발전한 나라 라는 뜻의 해동성국 이라고 동경 용원부 장령부 중경 현덕부 불릴 정도로 크게 발전하였다. 발해의 건국으로 고구려의 멸망 백 산 이후 잃게 된 만주 지역을 다시 우리 역사의 무대로 할 수 있게 되 었다. 또한 발해왕이 일본에 써 보낸 국서에 고구려의 옛 땅을 다 요동성 서경 록부 남경 남해부 동해 시 차지하고, 부여의 풍속을 가졌다. 라고 써 보낸 것을 통해 발해 해 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알 수 있다. 발해 지역에서 출토되는 기 발해의 5경 와, 불상, 온돌 장치, 무덤 등을 통해서도 발해의 문화가 고구려 의 문화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 강 화 강 발해의 영역 발해는 지속적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여 나갔고, 9세기 초 선왕 대 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하지만 9세기 말에 이르러 지배층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국력이 점차 약해지다가, 결국 거란족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926). 45
발해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 발해역사관 속초시립박물관에는 발해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발해역사관도 별 도의 건물에 마련되어있다. 발해역사관의 1층 전시실은 발해의 역사와 문 화를 주제로 하고 있는데, 전시실 중심에는 발해의 도읍지였던 상경성 모형 이 있고, 발해의 기와류와 불상, 토기 등도 볼 수 있다. 한편 드라마 대조영 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진이 전시되어 있으며, 드라 마에 등장하는 발해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소개도 이루어져 있다. 영상실에 서는 드라마 대조영의 주요장면을 상영하고 있다. 발해 체험실에서는 발해 의 여러 가지 옷을 입어 볼 수 있으며, 다양한 무늬의 발해 기와 문양을 직 접 도장으로 찍어 볼 수 있다. 발해역사관의 외부 지하 1층 전시실에는 실제 정효 공주 무덤 안의 모습을 그대로 재 용머리 건물 기단에 끼워 넣어 장식 현해 놓고 있다. 무덤 안 벽화에는 여러 인물이 그려져 있는데, 옷차 하였던 것으로, 벽면에 튼튼 림과 그들이 들고 있는 악기 등을 자세히 볼 수 있어 발해 사람들의 하게 끼워질 수 있도록 뒷부 분을 쐐기 모양으로 길게 깎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발해 유적의 집터와 그 주변에서는 발해 사 아내고 고정하기 위한 홈을 람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릇들이 발견되었는데, 그 종류 팠다. 상경성을 비롯한 발해 의 도성에서 몇 개가 출토되 는 쇠솥, 쇠칼, 놋숟가락, 보시기, 단지, 접시, 시루, 독 등 다양하게 었지만 형태와 조각 기법은 거의 같다. 나타나 있다. 또한 전시된 유물을 통해 발해의 복식 문화가 고구려 복식 문화와 발해 건국 이전부터 발해 영역의 토착 세력이었던 말갈의 복식 문화, 당 문화의 유입에 의한 새로운 요소들이 복합적으 로 반영되어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역사의 창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였는가? 중국학계는 건국자인 대조영뿐 아니라 발해의 주민이 말갈인이라 주장한다. 신 당서 에서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 粟 末 靺 鞨 )이라 한 기록을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이 다. 또한 발해의 주민 구성을 보더라도 말갈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말갈인이 발해의 건국에 참여하였고 그 주민에 포함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말갈인은 어디까지나 피지배층이었고 나라를 세우고 국정을 운영하는 지배층은 고 구려 유민이었다. 구당서 에는 발해말갈 대조영은 고려별종( 高 麗 別 種 ) 이라 하여 분명히 고구려계임을 밝히고 있어, 고구려 유민이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발해인은 누구였는가 라는 문제는 발해인이 자신의 종족 계통을 어떻게 생각하 고 있는지를 보면 분명해진다.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자신들이 고구려의 옛 터를 회복하고 부여( 夫 餘 )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하였고, 고려국왕( 高 麗 國 王 ) 혹은 천손( 天 孫 ) 이라 하여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보여 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발해인 스스로가 자신들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여겼음을 알려 주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고구려 양식을 계승한 발해 석등 46
20 년 월 일 속초 시립박물관 학년 반 번 이름 1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중국: 발해는 말갈인의 나라였으므로 중국 고대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이다. 한국: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 세운 나라로 고구려를 계승한 독립국이다. ⑴ 중국과 한국의 주장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 보자. ⑵ 밑줄 친 부분의 의미를 우리 민족의 역사와 관련지어 서술해 보자. 2 다음은 발해 역사관 안에 있는 정효 공주의 묘 복원 모습이다. 이를 바탕으로 정효 공주의 묘가 어느 나라의 양식 을 계승하고 있으며 그 근거는 무엇인지 서술해 보자. 3 다음 고구려 기와와 비슷한 발해 기와의 사진을 직접 찍어 붙여 보고, 어느 부분이 유사한지 설명해 보자. 사진 붙이는 곳 47
여기도 찾아가요! 철원군 제2 땅굴, 월정역, 철의삼각전망 대, 백마고지위령비, 노동당사 양구군 양구 백자박물관, 제4 땅굴, 피의능선 전투전적비, 양구통일관, 전쟁기념관, 선사박물관 고성군 화진포의성, 통일전망대, 이승만 대통령 화진포기념관, 6 25전쟁 체험전시관, DMZ박물관, 이기붕 별장 고성 철원 화천 양구 인제 속초 양양군 낙산사, 진전사, 동해신묘, 오산리 선사유적박물관 양양 춘천 횡성 홍천 평창 강릉 강릉시 오죽헌, 경포대, 선교장, 굴산사 지, 6 25남침전적비, 안보체험등 산로 원주시 흥법사지3층석탑 삼층석탑 원주 정선 동해 삼척 평창군 영월 태백 상원사, 월정사, 이승복기 념관, 이효석문학관 영월군 장릉, 청령포, 요선정, 김삿갓문학 관, 조선민화박물관, 정조대왕태 실비 태백시 삼척시 이사부사자공원, 죽서루 석탄박물관, 태백산 천제 48
충청권역 괴산 송시열 유적 50 해미읍성 54 논산 관촉사 58 여기도 찾아가요! 62
괴산 송시열 유적 송시열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이자 문신으로 주자학의 대가로 추앙받아 많은 인 재를 양성하였다. 괴산 송시열 유적은 그와 관련된 곳으로, 화양 서원과 만동묘 터 가 남아 있다. 화양 서원은 우암 송시열이 잠시 머물렀던 장소에 세워진 서원으로 조선 시대 학 자들이 많이 모였던 장소이다. 만동묘의 자리는 중국 명나라 황제인 신종과 의종 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던 곳이다. 만동묘 주변에는 송시열과 관련된 암서재, 하 마비, 읍궁암, 송시열 무덤 및 신도비 등이 있으며, 암서재 근처의 암벽에는 충효절 의 비례부동 이라는 글을 새긴 곳이 많이 남아있다. I 관련 교과서 단원 I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01. 조선의 건국과 통치 체제의 정비 I 활동 목표 I 종묘의 정치적 의미와 중요성을 안다. 조선 시대에 유교적 통치 이념이 어떻 게 구현되었는지 이해한다. 출발하기 전에 알아 두기! I 위치 I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길 188 외 I 문의처 I 043) 830-3432(괴산군청 문화관광과 문화예술) I 홈페이지 I http://www.goesan.go.kr/content/main-tour.php(괴산군 문화관광) I 지정 현황 I 사적 제417호(1999년 12월 9일 지정) I 체험 코스 I 암서재 만동묘 성공문 외삼문 사당 승삼문 증반청 비각 존사청 풍천제 1 풍천제 2 존사청 3 외삼문 4 비각 5 성공문 6 만동묘 7 증반청 8 승삼문 9 사당 10 암서재 50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등장하는 송시열 우암( 尤 庵 ) 송시열( 宋 時 烈, 1607~1689)은 조선 후기 정치계와 사상계를 호령했던 인물이다. 조광조와 더불어 조선을 유교의 나라로 만든 장본인이었던 그는 우리나라 학자 중 자( 子 ) 자가 붙은 유일한 인물로 역사상 가장 방대한 문집인 일명 송자대전( 宋 子 大 全 ) 을 남겼다. 송시열은 보수적인 서인, 특히 노론의 입장을 대변하여 청나라에게 망한 명나라를 계승하고 병자호란으로 우리나라에게 씻을 수 없는 굴욕을 주었던 청에게 복수하는 것이 국가 정책의 기조 가 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안정된 국제 질서를 무력으로 파괴한 청나라에게 굴복할 수 없다는 국민 정서에 기초한 북벌론과, 명나라가 멸망한 상황에서 중화 문화를 계승 발전시킬 나라는 이 제 조선뿐이라는 자의식에 기초한 존주론이 구체적인 방법이었다. 존주론은 국민단합과 조선 문 화 수호의 논리로 전개되고 마침내 조선중화주의로 발전하였다. 그것은 성리학에 입각한 유교적 명분론의 표현임과 동시에 양란 이후 조선을 다시 세우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국가 기강의 확립과 송시열 민생의 안정을 위한 강력한 통치 이념의 필요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조선을 다시 세우는 방향 송시열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개개인 및 시 에 있어서 그는 봉건 국가의 틀을 유지 강화하는 가운데 그 운영을 개선하여 양란 이후의 사회적 대마다 다르지만, 그가 조선 사회에 끼친 영 향력이 컸다는 사실만은 이의가 없을 것이다. 모순에 대처해나가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 에 그 이름이 3천 번 이나 등장하며, 사약을 받고 죽었음에도 불구 그러나 이런 송시열의 생각은 정치적으로는 서인 노론 중심, 사상적으로는 성리학 유일주의에 하고 유교의 대가들만이 오른다는 문묘에 배 빠져 그를 권력투쟁의 중심에 서게끔 하였다. 첫 번째의 예송 논쟁에서 그가 주장한 기년설(만 1 향되었으며, 전국 23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이 영정은 1683년에 송시열 자신이 자신 스 년)이 관철되면서 남인을 제거하여 서인의 지도자로서 자리를 굳혔으나, 두 번째 예송 논쟁에서 스로를 경계하는 사자성어를 써 넣은 것인데, 이후 정조가 즉위 후 친히 이 영정에다가 어 그가 주장한 대공설(9개월)이 남인에 밀려 채택되지 못하면서 지방으로 유배되었다. 6년 뒤 1680 제시를 남겼다. 중앙 상단의 글이 정조의 친 년에 남인이 실각하자 다시 벼슬에 오르기도 했으나 그 무렵 제자였던 윤증과의 감정 대립이 악 필 어필이다. 화되어, 서인이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과 송시열을 수장으로 한 노론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의 화양동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는데, 1689년에 숙의 장씨가 아들(훗날의 경종)을 낳자 원자의 호칭 을 부여하는 문제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재집권하였다. 이때 송시열은 왕세자 책봉이 시기상조라며 반대하다가 제주도로 유배되 었고, 숙종이 내린 사약을 마시고 생애를 마감하였다. 이때 자손에게 남긴 친필유서가 아직도 전해지고 있다. 송시열의 유언으로 만동묘를 세우다 화양동 계곡은 원래 청주군 청천면 지역으로 황양목이 많아 황 양동 이라 불리었다. 그러다 효종 때 이르러 우암 송시열이 이곳 으로 내려와 살면서 화양동 으로 고쳐 불렀다. 송시열이 이곳에 은거해 들어와 산세를 살펴보니, 계곡을 따라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아홉 구비 풍광에 매우 감탄하여 이곳을 중 국 무이구곡의 이름을 따 화양구곡이라 불렀다고 한다. 벼슬에서 물러난 송시열은 곧바로 이 화양동에 들어앉아 암서재를 지어 글 을 읽으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송시열은 사약을 받으면서 제자들 에게 화양동에 만동묘를 세우도록 하였는데, 만동묘는 이 유언에 따라 권상하 등이 신종(만력제, 왜란 때 조선을 도움)과 의종(숭정 제, 명 마지막 황제)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1703년(숙종 29) 읍궁 암 남쪽에 북향하여 지은 것이다. 만동묘 숙종 20년(1694)에 경술환국으로 노론이 다시 실권을 쥐면서 송시열은 복권되었다. 이때부터 전국 각지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많이 세워졌고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서원이 화양 서원이다. 건설 당시부터 소론의 반대로 서원 건립이 중단될 뻔하였고, 사액( 賜 額 ) 51
을 받을 때에도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그 때마다 노론측의 강경한 요 구와 왕의 특별 배려로 서원의 유지가 허용되었다. 영조 때 노론의 일당전제가 이루어지자 노론의 본거지였던 화양 서원은 그 위세가 날로 더하였으며, 이후 여기서 발행하는 화양묵패( 華 陽 墨 牌 ) 는 관령 을 능가할 정도였다고 한다. 대부분의 집이나 사찰 사당 서당이 햇볕을 받는 동향이나 남향 또는 동남향으로 짓는데 비해 화양 서원과 만동묘 사당을 굳이 북향 하여 지은 것은 중화 문화를 숭상하는 성리학적 가치에 충실하고자 함이었다. 조선 후기에 화양 서원과 만동묘는 노론의 상징이 되었고, 이후 노론 주도의 정치를 타파하고자 했던 흥선 대원군이 서원 철폐 과정에서 만동묘와 화양 서원을 철거해 버렸다. 화양 서원 만동묘 터 주변에는 송시열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화양구곡의 암서재와 하마비, 효종의 제삿날 송시열이 엎으려 통곡하였다고 전 해지는 읍궁암, 묘소 및 만동묘정비, 화양 서원 묘정비 등이 남아있다. 또한 암서재 근처 암벽에는 충효절의( 忠 孝 節 義 ), 비례부동( 非 禮 不 動 ) 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암벽이 있다. 암서재 글자가 새겨진 암벽 역사의 창 송시열에 대한 평가 송시열은 양극단의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송시열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청에 굴복한 조선이 패배 의식에 젖어 있는 상황을 극복하고자 의식개혁의 일환으로 북벌론을 주창한 점을 높이 평가한다. 체념적 순응의 삶에 기울어져 있을 때 마땅히 지향하고 추구할 가치의 향방을 제시하고 추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또한 송시열이 정치 경제적 개혁으로 대동법, 향촌안 정책, 노비종모법 등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는 점도 긍정적 평가의 근거로 든다. 또한 그의 영향력이 이후 200년간 지속되었 다는 사실은 백성이 국가의 근본 라는 유학 정신에 기반한 그의 개혁성이 폭넓은 지지를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을 위시한 비판론자들은 송시열이 이미 조선에서 그 기능을 다한 주자학을 정치에 어긋나게 적용해 조선 사회의 비극을 잉태했으며, 이는 시대착오적인 소중화 사상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당시 시대의 변화 속에서 그가 중요시 여긴 것은 사대부라는 계급의 이익이었고, 서인 노론이라는 당의 이익이었다. 이를 위 해 농민과 여성들은 억압받아야 했고, 심지어 송시열은 본관이 다르더라도 동성( 同 姓 ) 간에는 결혼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결국 그의 당인 노론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정권을 잡았으나 이는 백성들의 나라가 아니라 그들의 나라에 불과했다고 주장한다. 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