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특강 서울권역 수도권역 21~38 강원권역 39~48 충청권역 49~62 전라권역 63~76 경상권역 77~94 제주권역 역사(01~21)서울.indd 1 3~20 95~104 13. 6. 13. 오후 2:49
역사01~04K3.indd 3 13. 6. 12. 오후 12:02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01. 조선의 건국과 통치 체제의 정비 종묘의 정치적 의미와 중요성을 안다. 조선 시대에 유교적 통치 이념이 어떻 게 구현되었는지 이해한다. I 위치 및 문의처 I 서울시 종로구 종로 157, 02)765-0195 I 홈페이지 I http://jm.cha.go.kr I 관람 안내 I _ 일반 관람: 문화재 해설사와 동행, 매시 20분 출발(17시만 정각 출발), 학생 단체 관람 시간 별도 운영(사전 예약 필수), 외국어 안 내 실시 _ 자유 관람: 매주 토요일, 09:00~18:00(2~5월, 9~10월) 09:00~18:30(6~8월), 09:00~17:30(11~1월) _ 매주 화요일 휴관 I 체험 코스 I 영녕전 악공청 정전 악공청 남문 서문 칠사당 창경궁 연결문 영녕전 공신당 외대문(정문) 정전 망묘루 향대청 수복방 재궁(어숙실) 하마비 전사청 동문 공민왕 신당 제정 초록색으로 표시된 부 분은 반드시 들려보 아야 할 곳을 선정한 것임. 종묘 정전의 기둥과 처마 영녕전 영녕전에는 주로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하거나 재위 기간이 짧 았던 왕들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그러나 반정으로 폐위되었던 연 산군과 광해군의 신주는 정전은 물론 영녕전에도 없다. 정전 종묘의 정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목조 건물로 단청 등을 사용하여 화려하게 장식을 하지는 않았지만, 단순한 구조를 토대로 최고의 격식과 검소함을 갖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서울 광화문 서쪽의 사직동에는 종묘와 함께 조선 왕조와 나라 그 자체를 의미한 사직단이 있다. 사직단은 나라의 발전과 백성들의 편안한 삶 및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땅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곳으로, 한자로 풀이하면 사( 社 )는 땅의 신, 직( 稷 )은 곡식의 신, 단( 壇 )은 제사를 올리는 제단을 말한다. 정기적으로 봄, 가을, 겨울에 제사를 지냈다. 사직단은 임진왜란 때 화재로 없어졌던 것을 숙종 46년(1720)에 다시 세웠는데, 지금은 입구에 세워진 문과 제단만이 남아있다. 무제-1 1 13. 6. 12. 오후 12:11 사진 붙이는 곳 역사01~04K3.indd 7 13. 6. 12. 오후 12:14 허준박물관, 겸재기념관 서대문 독립공원, 독립문, 연세 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국립현충원, 사육신묘 한강절두산성지 강서구 구로구 양천구 마포구 영등포구 금천구 사직단, 경복궁, 북촌 한옥 마을, 청계천, 운현궁, 흥인지문 은평구 서대문구 동작구 관악구 낙성대 종로구 용산구 중구 강북구 성북구 서초구 도봉구 동대문구 성동구 강남구 노원구 중랑구 광진구 송파구 덕수궁, 정동, 근대 문화 중심지 역, 남산 성곽 강동구 선릉, 봉은사 국립중앙박물관, 전쟁기념관 암사동 선사유적지 역사01~04K3.indd 20 13. 6. 12. 오후 12:55 이 책의 구성과 활용법 서울권역 체험할 지역을 권역별로 나누고, 해당 지역의 대표적인 체험 장소를 선정하 였습니다. 종묘 4 서대문형무소역사관 8 풍납 토성과 몽촌 토성 12 아차산 고구려유적 16 여기도 찾아가요! 20 종묘 I 관련 교과서 단원 I 종묘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나라에서 가장 큰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조선이 통치 이념으로 표방한 유교 사상에 입각하여 설립되었다. 종묘는 뛰 I 활동 목표 I 어난 건축미와 동아시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창성을 가져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종묘 제례는 제례악과 함께 2001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출발하기 전에 알아 두기! 조선 왕조 제례 문화의 꽃, 종묘 종묘는 1394년 12월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할 때 지어지기 시작하여, 다음해 9 월에 1차로 완공되었다. 그 뒤로 1546년(명종 1)까지 계속 증축하였으며, 1592년 (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중건되었다. 종묘의 정전에는 19칸의 태실에 19위의 왕과 30위의 왕후의 신주가 모셔져 있 다. 조선 초기에는 5대조까지 제를 지내는 5묘제를 따르다가 중기 이후부터는 치 적이 많은 왕은 5대가 지나도 정전에 그대로 모셨고, 그 외의 신주는 일정한 기간 이 지나면 영녕전으로 옮겼는데, 이를 조천( 遷 )이라 한다. 종묘의 정전은 옆으 로 길게 펼쳐진 1층짜리 건물로,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장소였던 탓에 장식없이 간결하게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겉으로 보면 20개의 기둥과 19칸의 문으로 이 루어져 있는데, 한번에 지은 것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 늘려지었기 때문에 기 둥의 모양이 모두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정전의 내부는 직접 볼 수 없게 되어있으 나, 향대청의 제2 전시관에 태실 1관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곳이 있어서 정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왕자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 는 의미를 담고 있는 영녕전에는 정 전에서 조천된 15위의 왕과 17위의 왕후 및 의민황태자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태 조 이성계의 고조부에서 부모(목조, 익조, 탁조, 환조)까지의 신주는 4칸의 중앙 태실에 모셔져 있고, 동서로 각 6칸씩의 태실이 더 마련되어 있다. 이 밖에도 종묘에는 종묘 제례에 사용할 음식을 만들던 전사청, 왕과 세자가 제 례를 준비했던 재궁(어숙실), 제례 의식에 사용하는 물품을 보관하고 제례에 참가 하는 사람들이 머물렀던 향대청 등의 건물이 있다. 또한 고려 제31대 왕인 공민왕 의 신당이 있는 점도 특징적이다. 체험할 장소에 대한 기본 정보가 수록되어 있습니 다. 또한 체험 활동을 기획할 때 체험 코스 및 관람 안내, 문의처와 홈페이지 등을 활용해 보세요. 1 하마비 2 외대문(정문) 3 망묘루 4 공민왕 신당 5 향대청 6 재궁 7 제정 8 전사청 9 공신당 10 정전 11 칠사당 12 영녕전 13 영녕전 악공청 14 정전 악공청 I 사직단 I 종묘 20 년 월 일 이름 학년 반 번 1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종묘 정전에는 19위의 왕과 30위의 왕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정전에서 조천된 15위의 왕과 17위의 왕 후 및 의민황태자의 신주는 영녕전에 안치되어 있다. 하지만 조선의 왕 가운데 폐위되었던 와/과 만은 종묘 그 어디에도 신주가 모셔져 있지 않다. ⑴ 빈칸에 들어갈 왕을 모두 써 보자. ⑵ 밑줄 친 부분과 같은 일이 있었던 까닭을 조선의 통치 이념과 관련지어 서술해 보자. 2 다음은 종묘에 있는 어느 인물의 사당이다. 이곳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쓰고, 이 사당이 종묘에 있는 까닭을 추론 해서 써 보자. 보고 듣고 읽기만 하고 끝낸다면 그 내용을 쉽게 잊어버리겠죠? 체험 장소와 관련된 흥미로운 과제를 수록하여 체험 활동을 더욱 알차게 마 무리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과제의 정답은 지학사 홈페이지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3 종묘 정전을 받치고 있는 월대와 앞마당에 깔린 돌은 상당히 거칠고 평평하지 않다. 사진을 직접 찍어 붙여 보고 왜 이러한 돌을 사용하였을지 설명해 보자. 7 여기도 찾아가요! 종로구 해당 권역 곳곳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역사 유적을 세부 지역별로 표시해 두 었습니다. 권역별로 수학 여행을 기획할 때 활용해 보세요. 서대문구 중구 마포구 용산구 강서구 강동구 동작구 관악구 강남구 2
서울권역 종묘 4 서대문형무소역사관 8 풍납 토성과 몽촌 토성 12 아차산 고구려유적 16 여기도 찾아가요! 20
종묘 종묘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나라에서 가장 큰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조선이 통치 이념으로 표방한 유교 사상에 입각하여 설립되었다. 종묘는 뛰 어난 건축미와 동아시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창성을 가져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종묘 제례는 제례악과 함께 2001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I 관련 교과서 단원 I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01. 조선의 건국과 통치 체제의 정비 I 활동 목표 I 종묘의 정치적 의미와 중요성을 안다. 조선 시대에 유교적 통치 이념이 어떻 게 구현되었는지 이해한다. 출발하기 전에 알아 두기! I 위치 및 문의처 I 서울시 종로구 종로 157, 02) 765-0195 I 홈페이지 I http://jm.cha.go.kr I 관람 안내 I _ 일반 관람: 문화재 해설사와 동행, 매시 20분 출발(17시만 정각 출발), 학생 단체 관람 시간 별도 운영(사전 예약 필수), 외국어 안 내 실시 _ 자유 관람: 매주 토요일, 09:00~18:00(2~5월, 9~10월) 09:00~18:30(6~8월), 09:00~17:30(11~1월) _ 매주 화요일 휴관 I 체험 코스 I 창경궁 연결문 영녕전 악공청 정전 악공청 서문 칠사당 영녕전 공신당 정전 전사청 수복방 동문 제정 1 하마비 2 외대문(정문) 3 망묘루 4 공민왕 신당 5 향대청 6 재궁 7 제정 남문 향대청 재궁(어숙실) 공민왕 신당 8 전사청 9 공신당 10 정전 11 칠사당 12 영녕전 외대문(정문) 망묘루 하마비 13 영녕전 악공청 14 정전 악공청 4
조선 왕조 제례 문화의 꽃, 종묘 종묘는 1394년 12월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할 때 지어지기 시작하여, 다음해 9 월에 1차로 완공되었다. 그 뒤로 1546년(명종 1)까지 계속 증축하였으며, 1592년 (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중건되었다. 종묘의 정전에는 19칸의 태실에 19위의 왕과 30위의 왕후의 신주가 모셔져 있 다. 조선 초기에는 5대조까지 제를 지내는 5묘제를 따르다가 중기 이후부터는 치 적이 많은 왕은 5대가 지나도 정전에 그대로 모셨고, 그 외의 신주는 일정한 기간 이 지나면 영녕전으로 옮겼는데, 이를 조천( 遷 )이라 한다. 종묘의 정전은 옆으 로 길게 펼쳐진 1층짜리 건물로,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장소였던 탓에 장식없이 간결하게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겉으로 보면 20개의 기둥과 19칸의 문으로 이 루어져 있는데, 한번에 지은 것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 늘려지었기 때문에 기 둥의 모양이 모두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정전의 내부는 직접 볼 수 없게 되어있으 나, 향대청의 제2 전시관에 태실 1관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곳이 있어서 정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왕가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 는 의미를 담고 있는 영녕전에는 정 전에서 조천된 15위의 왕과 17위의 왕후 및 의민황태자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태 조 이성계의 고조부에서 부모(목조, 익조, 탁조, 환조)까지의 신주는 4칸의 중앙 태실에 모셔져 있고, 동서로 각 6칸씩의 태실이 더 마련되어 있다. 이 밖에도 종묘에는 종묘 제례에 사용할 음식을 만들던 전사청, 왕과 세자가 제 례를 준비했던 재궁(어숙실), 제례 의식에 사용하는 물품을 보관하고 제례에 참가 하는 사람들이 머물렀던 향대청 등의 건물이 있다. 또한 고려 제31대 왕인 공민왕 의 신당이 있는 점도 특징적이다. 종묘 정전의 기둥과 처마 영녕전 영녕전에는 주로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하거나 재위 기간이 짧 았던 왕들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그러나 반정으로 폐위되었던 연 산군과 광해군의 신주는 정전은 물론 영녕전에도 없다. 정전 종묘의 정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목조 건물로 단청 등을 사용하여 화려하게 장식을 하지는 않았지만, 단순한 구조를 토대로 최고의 격식과 검소함을 갖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I 사직단 I 서울 광화문 서쪽의 사직동에는 종묘와 함께 조선 왕조와 나라 그 자체를 의미한 사직단이 있다. 사직단은 나라의 발전과 백성들의 편안한 삶 및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땅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곳으로, 한자로 풀이하면 사( 社 )는 땅의 신, 직( 稷 )은 곡식의 신, 단( 壇 )은 제사를 올리는 제단을 말한다. 정기적으로 봄, 가을, 겨울에 제사를 지냈다. 사직단은 임진왜란 때 화재로 없어졌던 것을 숙종 46년(1720)에 다시 세웠는데, 지금은 입구에 세워진 문과 제단만이 남아있다. 5
예를 갖추어 제사를 받들라, 종묘 제례 종묘에서 역대 왕조의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를 종묘 제례라 하는데, 조선 왕조의 제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것이어서 종묘대제 라고도 한다. 조선 시대에는 정기적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 섣달(12월)에 제사를 올렸고, 이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종묘에서 제례 의식이 거행된다. 이처럼 오래된 왕실 제례 의식은 동아시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문화이다. 종묘 제례에는 모든 행사의 순서에 맞게 노래와 악기 연주, 춤이 동반되었다. 이때 연주되는 음악과 춤을 종묘 제례악이라고 하는 데, 이는 종묘 제례에 걸맞게 장엄한 분위기를 띠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2001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종묘 제례 및 종묘 제례악 역사의 창 한양 곳곳에 깃든 유교 정신 조선은 건국 초부터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으며, 이에 도읍인 한양을 조성할 때 곳곳에 유교와 관련된 장치를 마련하였다. 우선 주례고공기 의 좌묘우사(左廟右社), 전조후시(前朝後市)의 원칙에 따라 한양의 공간을 구성하였다. 경복궁 동쪽에 종 묘를 세우고 서쪽에는 사직을 배치하였다. 경복궁 전면에는 육조를 두었고, 그 후면에는 시전을 마련하였다. 또한 신분에 따라 거주하는 지역을 구분하여 상하 구분, 명분론 등을 강조하였다. 한편 한양으로 통하는 4대문에는 인의예지신 (仁義禮智信) 의 유교적 가르침을 담아 이름을 붙 였다.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智 대신 같은 뜻의 靖을 씀), 보신각 등이 예이다. 이처럼 조선은 유교적 통치 이념에 따라 중앙 정치 제도 와 지방 행정 조직은 물론, 생활 곳곳에 유교의 가르침을 뿌리내리고자 노력하였다. 한양의 구조 6 역사(01~21)서울.indd 6 13. 6. 13. 오후 2:49
종묘 학년 반 번 이름 20 년 월 일 1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종묘 정전에는 19위의 왕과 30위의 왕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정전에서 조천된 15위의 왕과 17위의 왕 후 및 의민황태자의 신주는 영녕전에 안치되어 있다. 하지만 조선의 왕 가운데 폐위되었던 와/과 만은 종묘 그 어디에도 신주가 모셔져 있지 않다. ⑴ 빈칸에 들어갈 왕을 모두 써 보자. ⑵ 밑줄 친 부분과 같은 일이 있었던 까닭을 조선의 통치 이념과 관련지어 서술해 보자. 2 다음은 종묘에 있는 어느 인물의 사당이다. 이곳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쓰고, 이 사당이 종묘에 있는 까닭을 추론 해서 써 보자. 3 종묘 정전을 받치고 있는 월대와 앞마당에 깔린 돌은 상당히 거칠고 평평하지 않다. 사진을 직접 찍어 붙여 보고 왜 이러한 돌을 사용하였을지 설명해 보자. 사진 붙이는 곳 7
서대문형무소역사관 1908년 10월 21일 일제가 경성 감옥 이라는 이름으로 설립한 서대문형무소는 1945년 해방까지 한국의 국권을 되찾기 위해 싸운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고, 해 방 이후에도 서울 구치소로 이용되면서 민주화 운동 관련 인사들이 수감되는 등 한 국 근 현대사의 굴곡을 안고 있는 상징적인 장소이다. 1987년 서울 구치소가 경기 도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이곳은 199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관하여 자주 독 립 정신과 자유 평화 수호 정신을 기리는 교육의 현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I 관련 교과서 단원 I Ⅴ. 일제의 강점과 민족 운동의 전개 02. 일제의 식민 통치와 경제 수탈 I 활동 목표 I 서대문형무소의 장소적 의미와 중요성 을 이해한다. 애국지사들이 당한 고통과 독립운동을 이해한다. 출발하기 전에 알아 두기! I 위치 및 문의처 I 서울시 서대문구 통일로 251 서대문형무소역사관, 02) 360-8590~1 I 홈페이지 I _ 서대문구도시관리공단 서대문형무소역사관 홈페이지: www.sscmc.or.kr/culture2 _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블로그: http://blog.naver.com/sdmprison I 특이사항 I _ 홈페이지 내 각종 학습자료(현장학습보고서, 교사용 수업자료, 동영상 사진 자료 등) 제공 _ 단체관람의 경우 홈페이지 및 전화를 통한 예약접수 필요 _ 30인 이하의 경우 도슨트(해설사) 안내 서비스 운영(예약제) _ 근대문화유산 탐방, 근현대사 탐구교실 등 다양한 문화행사 운영 I 체험 코스 I 공작사 한센병사 시구문 사형장 순국선열 추모비 10옥사 11옥사 9옥사 12옥사 중앙사 보안과 청사 유관순 지하감옥 담장과 망루 1 담장과 망루 2 보안과 청사(전시관) 3 중앙사 4 12옥사 5 공작사 6 한센병사 7 순국선열추모비 8 사형장 9 시구문 10 유관순 지하감옥 8
순국선열이 잠든 곳, 서대문형무소 1908년 10월, 조선을 식민지로 합병하려던 일제 통감부는 동양 최대, 최신 규모 를 자랑하며 경성 감옥을 세웠다. 장차 일제에 항거하는 이들이 크게 늘어날 것을 예상하고 5백 명 수용 규모의 대형 감 옥을 세운 것이다. 이곳은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독립운동가 대부분이 거쳐 간 곳으로, 그들의 애국 혼이 배어 있는 민족 수난의 현장 이다. 1930년대 서대문형무소 전경 64세의 나이에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남대문역(서울역 전신)에서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1920)를 비롯해, 구한말 의병장 허위(1907), 3 1 운동에서 활약했던 유관순(1920),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노동국 총판 김동삼(1937) 등이 이곳에서 순국하였다. 김동 삼이 옥사했을 때는 일제의 보복이 두려워 시신을 수습하는 자가 나서지 않자 한용운이 내 평생 김선생님의 시신만이라도 뫼실 수 있다면 큰 영광 이라며 나서서 수습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는 서울 형무소(1945), 서울 교도소(1961), 서울 구치소(1967) 등으로 불 리며 민주화 운동을 벌이던 이들이 이곳에 수감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남아 있던 15개 동의 옥사( 獄 舍 ) 중 역사성과 가치를 고려하여 제9, 10, 11, 12, 13옥사와 옥사 전체를 감시하고 통제 했던 건물인 중앙사, 나환자를 격리 수용한 한센병사가 보존되어 있으며, 옥사 3개동(제10, 11, 12옥사)과 사형장은 사적(제324호)으 로 지정되었다. 이 외에도 일제 강점기 당시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공작사와 취사장이 있다. 공 작사는 형무소 내에서 수감자들이 노역하였던 공장 건물로 일제가 수감자들의 노 동력을 착취하여 각종 물품과 군수용품을 생산하는 모습을 담은 기록 영상이 상영 중이다. 또한 일제가 독립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을 투옥하기 위해 1916년 신축하였 다가 1934년에 매립한 지하감옥인 여사옥도 복원되어 있다. 그밖에 2개의 망루(원 래 6개)와 287m의 담장(총 1,161m)이 형무소의 상징으로 일부 남아 있다. 서대문형무소 내 옥사의 모습 유관순굴 이라고도 불리는 지하감옥 여옥사 지하에 설치된 독방으로, 비중있는 여성 애국지사들을 수용하여 가혹하게 신문하고 고문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유관순 열사가 순국하신 곳으로 유관순굴 이라고도 한다. 서대문형무소의 망루와 담장 망루는 재소자들의 탈옥을 막고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망루의 8면에는 감시 창이 설치되어있다. 정문의 망루는 1923년에 설치한 것이다. 9
애국지사의 혼이 서린 그곳, 잘 자라지 않는 미루나무 항일 애국지사와 해방 후 민주인사들의 형이 집행된 사형장의 둘레에는 높이 5m의 붉은 돌담이 쌓여 있다. 내부에는 개폐식 마루 판 위에 사형수가 앉는 의자가 있고 굵은 동아줄이 내려져 있다. 입구 쪽에 사형 집행 때 배석자들이 앉았던 긴 의자가 보존되어 있다. 사형장 바로 옆에는 사형을 집행한 시신을 형무소 밖 공동묘지까지 몰래 버리기 위해 만들어진 비밀 통로인 시구문이 있다. 시구 문은 일제가 그들의 만행을 감추기 위해 폐쇄했던 것을 서대문 독립 공원을 조성할 때 복원한 것이다. 또한 사형장 입구에 있는 미루나무는 형장으로 들어가는 사형수들이 붙들고 통곡했다고 하여 통곡의 미루나무 라 불렸으며, 사형 장 안에 있는 미루나무는 사형수들의 한이 서려 잘 자라지 않는다는 일화가 있다. 사형장 1923년에 일제가 지은 목조 건물로 전국에서 잡혀온 애국지사들이 사형당하였다. 시구문 일제가 폐쇄했던 것을 1992년에 약 40m 길이로 발굴하여 복원하였다. 역사의 창 곳곳에 세워진 형무소 일제는 서대문 형무소(경성 감옥)를 시작으로 전국 각 지역에 형무소를 설치 일제강점기(1930년대) 전국 형무소 설치 현황 하였다. 1908년에 전국 8개 지역에 감옥을 만들었고 그 아래에 분감(分監)까지 형무소 두어 1930년대까지 전국에 형무소 14개, 형무지소 11개, 소년 형무소 3개 등 28 청진 형무지소 소년형무소 개가 설치되었다. 조선 총독부가 밝힌 통계에 따르면, 전국 형무소에 갇힌 사람이 1913년에 361 신의주 함흥 만여 명이던 것이 1930년에는 609만여 명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당시 한국 인 원산 진남포 평양 구가 1,878만 명 정도임을 감안했을 때 3명에 1명꼴로 감옥살이를 한 셈이다. 서흥 금산포 해주 개성 인천 황해 동해 춘천 목포 독도 청주 공주 군산 울릉도 서대문 경성 이 밖에 일제는 러 일 전쟁에서 승리한 뒤 중국 뤼순 형무소를 확장하여 사용 하였는데,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과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신 채호가 이곳에 수감되어 옥사하였다. 안동 대전 김천 대구 전주 마산 광주 부산 진주 소록도 남해 이어도 0 100km 10 역사(01~21)서울.indd 10 13. 6. 13. 오후 2:49
서대문형무소역사관 학년 반 번 이름 20 년 월 일 1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쯤, (가) 의사의 손을 떠난 폭탄 한 발이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에 도착한 신임 총독 (나) 이/가 오른 쌍두마차 앞에서 굉음을 내며 터졌다. 마중 나온 일제 요인들로 북적대던 남대문역 귀빈실 주변은 한순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표적 서대문형무소 수형( 受 刑 ) 카드에 담긴 사진 이었던 총독은 목숨을 건졌지만 37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이 사건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⑴ (가), (나)에 들어갈 인물의 이름을 써 보자. ⑵ (나) 총독이 새로 조선에 부임해 온 까닭을 국내 민족 운동과 관련지어 서술해 보자. 2 다음은 일제가 애국지사에게 사용했던 도구들이다. 각 도구의 명칭과 이것을 사용한 목적을 설명해 보자. 명칭: 목적: 명칭: 목적: 명칭: 목적: 3 개방된 옥사에 앉아 있는 자신의 사진을 찍어 붙여 보고, 전시관 지하(고문 장면)와 2층(옥중 생활실)을 돌아본 후 애국지사에게 편지를 써 보자. 사진 붙이는 곳 11
풍납 토성과 몽촌 토성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고구려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온조가 나라를 세우고 처음 도읍지로 정한 곳이 하남위례성이다. 하남위례성의 위치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풍납 토성과 몽촌 토성 주변 지역으로 추정된다. 이 중에서 풍납 토성은 1925년 일제강점기 대홍수로 인해 세상에 알려진 이후 1997년 발굴을 통해 왕궁일 가능성이 한층 더 높아졌다. 또한 사적 제297호인 몽촌 토성은 백제 한성 시대의 중요한 성곽 중 하나로 밝혀졌다. 두 유적 모두 이 시기에 고대 국가 백제가 탄생하였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근거이다. I 관련 교과서 단원 I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03. 삼국 및 가야의 성립과 발전 I 활동 목표 I 백제 한성 시대의 모습을 파악한다. 유물과 유적의 발굴과 보존의 어려움을 안다. 출발하기 전에 알아 두기! I 위치 I _ 풍납 토성: 서울시 송파구 풍납동 72-1(지하철 5 8호선 천호역 10번 출구, 8호선 강동구청역 4번 출구) _ 몽촌 토성: 서울시 송파구 오륜동 88-3(지하철 8호선 몽촌토성역 1번 출구, 5호선 올림픽공원역 3번 출구) I 관련 전시관 I _ 한성백제박물관: http://baekjemuseum.seoul.go.kr/, 02) 2152-5800 _ 몽촌역사관: http://baekjemuseum.seoul.go.kr/dreamvillage, 02) 424-5138 I 특이사항 I _ 학교 및 가족 단위의 다양한 답사프로그램 및 다양한 교육행사 운영 _ 근대문화유산 탐방, 근현대사 탐구교실 등 다양한 문화행사 운영 I 체험 코스 I 풍납 토성 몽촌역사관 목책 곰말다리 해자 1 한성백제박물관 2 해자(몽촌 토성) 3 곰말다리(몽촌 토성) 4 목책 5 몽촌역사관 한성백제박물관 6 풍납 토성 12
백제 한성 도성의 흔적, 풍납 토성 우리나라 토성 중 가장 큰 규모인 풍납 토성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가 휩쓸고 간 뒤 갖가지 유물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청동솥, 금귀걸이, 유 리구슬, 4등분한 원형무늬가 있는 수막새 기와 등 한결같이 화려하고 비중이 큰 유 물들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몇몇 유물과 성의 흔적 외에 별다른 것이 발견되지 않았고 백제의 방어용 성이라는 당시 학자의 주장이 널리 퍼졌다. 이로 인해 왕성일 가능성은 배제된 채로 주변은 보존되지 못하고 방치되었다. 그러다 1997년 이 지역에 아파트를 짓기 시작하면서 풍납 토성이 다시금 주목받 았다. 그동안 발굴되지 않았던 백제 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지하 4m 깊은 곳에 묻혀 있다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때 수많은 양의 기와, 큰 건물을 지을 때 사용 하던 주춧돌과 건물터, 고급 전돌, 그리고 궁궐이나 관청에서 사용하던 다량의 유물 풍납 토성에서 발굴된 대부(大夫)명 직구단경호 토기 중앙 상단에 대부(大夫) 라는 글자가 보인다. 이 발견되었는데, 경주에 견줄 만큼 다량의 유물이 쏟아졌다는 사실은 그만큼 인구가 밀집한 대도시였음을 의미한다. 또한 출토 유 물 중 고위 관직명에 해당하는 대부(大夫) 라는 글자를 새긴 토기 조각도 고위층이 머문 지역임을 짐작케 한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 정법에 의한 검사에서도 기원전 2세기에서 서기 200년경에 풍납 토성의 축조가 마무리되었다는 결과가 나왔는데, 이 또한 온조왕이 도읍인 하남위례성을 세운 시기와 비슷하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풍납 토성이 하남위례성일 가능성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설령 이곳이 도읍은 아니라 하더라도 백제가 최소한 2세기경까지 대규모의 성을 세울 국력을 지닌 나라였다는 사실만큼은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는 유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중요한 의미를 지닌 풍납 토성은 최악의 발굴이라는 오명도 안고 있다. 1999년 9월 한신대 박물관이 주민들의 연립 주택 건립을 위한 구제발굴로 조사를 했는데, 도중에 시공사의 부도, 발굴 기한과 주민 보상을 둘러싼 건축 조합과의 갈등으로 2000 년 5월에 아파트 신축 중단을 우려한 재건축 조합 주민들이 중장비를 동원해 유적 일부를 갈아엎어 심각하게 훼손하였다. 결국 조사 를 중단하고 다시 흙을 덮게 되었는데, 이 사건은 풍납 토성의 보존이 쉽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풍납 토성(서울 송파) 풍납 토성은 서울시 송파구 풍납동에 있는 초기 백제의 토성으로, 평지에 흙으로 쌓은 고대의 성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성벽의 둘레는 3.5km, 너비는 43m, 높이는 11m로 추정되는데, 현재의 아파트 단지를 둘러싸고 남아있는 성곽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13 역사(01~21)서울.indd 13 13. 6. 13. 오후 2:49
올림픽 공원, 그 안에 1600년 전 백제인이 만든 몽촌 토성이 있다 지금은 올림픽공원으로 조성되어 시민의 휴식 공간이 되어 있는 몽촌 토성은 백제가 한강 지역에 나라를 세우고 발전한 시기에 축조된 성곽으 로, 야산의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진흙을 단단히 쌓아올려 만들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름모 모양이며, 성벽의 길이는 2,285m, 내부 면 적은 216,000m 2 이다. 동북쪽 바깥의 작은 능선에는 둘레 약 270m의 외 성을 따로 쌓았고, 낮은 성벽 주위에는 나무 울타리인 목책을 만들고, 성 밖에는 물길인 해자를 만들어 적의 침입에 대비하기도 했다. 몽촌 토성의 주변 지역을 살펴보면 멀리 서쪽으로 한강이 흐르고 있 고, 북동쪽으로는 한강의 지류인 성내천이 흘러 자연적인 방어선을 이루 고 있다. 북쪽으로는 풍납 토성 유적지가 있고, 남쪽으로는 백제 시대 고 분군인 방이동 석촌동 고분군이 있어 이 일대가 백제 시대의 큰 도시였 음을 알려 준다. 몽촌 토성 안에서는 각종 토기 기와류와 철제 무기류, 뼈로 만든 갑옷, 중국에서 만든 동전무늬도기 및 청자 조각 등이 출토되었는 데, 대부분 4~5세기에 백제 사람들이 즐겨 쓰던 물건들이다. 몽촌 토성(서울 송파) 남한산성에서 뻗어 내린 구릉지의 지형을 이용하여 외성과 내성의 이중구조로 축조하였다. 역사의 창 백제의 성곽 제작 기법 풍납 토성과 몽촌 토성은 흙을 쌓아 만든 토성이다. 흙으로 쌓아 약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먼저 나무 기둥 을 세우고 나무판을 사방에 두른 뒤 차곡차곡 흙을 쌓 아 올리고 절굿공 등으로 꾹꾹 눌러 다지는 과정을 여 러 번 반복하여 흙을 마치 시루떡처럼 다져쌓는 판축 공법( 版 築 工 法 ), 잔 나뭇가지와 잎사귀 등을 깔고 흙을 쌓는 부엽공법( 敷 葉 工 法 ) 을 사용하여 상당히 단단하게 축조되었다. 이는 고대 일본에서 성벽 및 제방을 쌓을 때 많이 사용한 방법인데, 풍납 토성 성벽 발굴 조사를 통해 그 기술적 원류가 시기적으로 앞서는 풍납 토성에 있음이 밝혀지면서 큰 관심을 받기도 하였다. 판축 기법으로 지은 백제의 성곽(한성백제박물관) 한성백제박물관 로비에 풍납 토성 성벽의 단면이 전시되어 있다. 방어 장치 몽촌 토성 내의 목책 나라마다 성 안에는 많은 사람과 건물이 있어 이를 지키는 방법을 여 러 가지로 고안하였다. 몽촌 토성의 구조를 살펴보면 우선 성으로 들어 가기 전에 물이 가득 찬 연못을 볼 수 있다. 이를 해자 라고 하는데 적 들이 쳐들어 올 때 물길을 이용해 방어하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목책 도 설치하였는데, 이는 사람 키를 넘는 나무 울타리로서 2차 방어선 역 할을 하였다. 14
풍납 토성과 몽촌 토성 학년 반 번 이름 20 년 월 일 1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풍납 토성 발굴시 성벽 중 일부가 남아 있는 동쪽 성벽 두 군데를 10m 간격으로 잘랐다. 성벽을 잘라보니 맨 아래쪽 폭이 무려 40m, 높이만 9~15m 안팍의 사다리꼴 단면을 띠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자른 성벽 단면은 단순히 흙만 쏟아 부은 게 아니라 아래층에는 두꺼운 진흙층을 깐 다음 10cm 정도 간격으로 흙을 다져 한쪽한 쪽 쌓아올렸음이 확인되었다. 성벽 전체 길이가 3,470m 정도였다. 계산에 의하면 이 정도의 성벽을 쌓으려면 8톤 트럭 20만대 분량, 즉 150만 톤 이상의 흙이 필요하다고 한다. ⑴ 풍납 토성을 조성할 때 사용한 기법의 명칭을 써 보자. ⑵ 풍납 토성의 규모를 동원 인력 및 권력의 크기와 관련지어 서술해 보자. 2 다음은 풍납 토성에서 발견된 유물과 그에 대한 설명이다. 이를 바탕으로 풍납 토성이 왕성일 가능성을 정리해 보자. 말머리 뼈 9개 고대 사회에 말은 굉장히 값비싸고 귀한 동물이었다. 이곳은 당시 가뭄이 들었을 때 왕이 하늘에 기우제와 같은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추정된다. 백제 초기의 기와 기와는 당시 아무나 사용할 수 없었고, 신분이 높은 자들에게만 허용되었다. 대부( 大 夫 ) 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 당시 사회에서 대부 는 높은 관직의 이름이었다. 3 몽촌 토성에서 한강의 지류인 몽촌호나 성내천을 바라본 사진을 직접 찍어 붙여 보자. 그리고 이들 하천이 몽촌 토성에서 담당하는 기능상의 명칭과 역할이 무엇인지 설명해 보자. 사진 붙이는 곳 15
아차산 고구려유적 아차산은 해발 285m의 낮은 산이지만 남쪽으로는 한강 남쪽의 모든 지역을 한눈 에 볼 수 있고, 북쪽으로는 멀리 의정부까지 볼 수 있다. 삼국 시대에는 고구려, 백 제, 신라가 군사적 요충지인 아차산을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였는데, 그에 따라 이 곳에는 군사 시설과 생활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아차산성이다. 백제 의 옛 도읍지에 있는 아차산성은 누가 쌓았는지에 대해 아직 논란이 있는데, 1989년 아차산성 부근에서 고구려의 군사 시설인 보루가 발견되면서 아차산이 고구려 유적 지로 주목받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고구려의 온달과 평강의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I 관련 교과서 단원 I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03. 삼국 및 가야의 성립과 발전 I 활동 목표 I 아차산 지역의 고구려 유적과 유물을 통해 고구려인의 생활상을 이해한다. 고구려 유적이 남한 지역에서 발견되 는 이유를 파악한다. 출발하기 전에 알아 두기! I 위치 I _ 아차산 생태공원: 서울시 광진구 광장동 370번지 일대 _ 아차산성: 서울시 광진구 광장동 산16-46, 구의동 산1-2 I 문의처 I 02) 450-1655(아차산 관리사무소), 02) 450-7593(광진구청 문화체육과(문화재)) I 홈페이지 I http://www.gwangjin.go.kr/achasan(아차산 생태공원) I 특이사항 I _ 구리시에 소재한 고구려대장간마을(http://www.goguryeotown.co.kr) 이 가까이에 있으므로 이곳의 아차산 고구려 유적 전시관 관람 및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이용한 연계 답사 가능 _ 근대문화유산 탐방, 근현대사 탐구교실 등 다양한 문화행사 운영 I 체험 코스 I 아차산 제4 보루 아차산 제3 보루 아차산 제2 보루 아차산 제1 보루 아차산성 1 아차산 생태공원 2 아차산성 한강 3 아차산 제1 보루 4 아차산 제2 보루 아차산 생태공원 5 아차산 제3 보루 6 아차산 제4 보루 16
아차산에는 고구려가 세운 '보루'가 있다 백제와 고구려 그리고 신라 사이에는 한강을 두고 수많은 전쟁이 벌어졌다. 금강산에서 시작된 고구려 보루군 분포도 북한강과 강원도 태백 금대봉에서 시작한 남한강이 흘러 양평을 거쳐 서울을 지나 황해로 빠져 나 망우산보루 가는 한강은 당시 도로가 거의 없던 고대 사회에서 중요한 교통로 구실을 하였다. 삼국사기 에 중랑구 백제 책계왕이 축성하고 광개토 대왕이 빼앗았다는 기록을 보면, 백제가 한강 지역을 맨 먼저 차 용마산보루 지하고 한강의 북쪽에 아차산성을 건설하여 고구려를 방어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이곳은 한강 건너에 있는 풍납 토성, 몽촌 토성과 함께 백제의 도성을 지키는 매우 중요한 히려 백제를 위협하는 성이 되었다. 고구려가 이곳에서 한강 건너의 풍납 토성과 몽촌 토성을 한 눈에 내려다보면서 백제를 견제했기 때문이다. 아차산성 건물터에서는 토기, 기와 등 여러 유물이 나왔다. 특히 기와조각 가운데 북(北) 한 (漢) 산(山) 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것들이 있어 이를 신라의 북한산성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그런 데 고구려의 유물은 산성에서 아직 한 점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고구려가 이곳에 상주하지 않 고 백제를 감시할 때에만 잠깐씩 사용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아차산에 남은 고구려의 흔적은 보루 를 통해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장수왕은 한성을 장악한 후 백제의 개로왕을 전사시켰다. 이후 아차산은 고구려의 남쪽 국경이 되었고, 고구려는 국경을 지키 기 위해 아차산에 보루를 세워 군인들이 머물게 하였다. 보루 는 적을 막거나 적의 움직임을 살피 시루봉보루 ⑤ ③ ④ ② ① 군사 요충지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백제에게서 한강 유역을 빼앗고 아차산성을 차지한 뒤에는 오 ③ ① ⑦ ⑥ ② 홍련봉보루 ② ① 구리시 ④ ③ 아차산보루 ② ⑤ ① 한강 아차산성 광진구 천호대교 구의동보루 자양동보루 잠실대교 올림픽대교 송파구 풍납 토성 몽촌 토성 고구려 보루 분포도 한강을 사이에 두고 백제의 풍납 토성, 몽촌 토성과 마주하고 있다. 기 위해 주로 산꼭대기에 만들어진 요새인데, 일반인이 거주하였던 산성과는 달리 교통로를 확보 하기 위해 주변 전망과 감시를 주로 하는 곳이었으며, 여러 개가 조를 이루었다. 산성보다 작은 진지인 보루에는 크기에 따라 적게는 10명에서 많게는 100명 정도 되는 군인들이 머물렀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아차산에 보루를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차산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해발 285m의 낮은 산이지만 꼭대기에 올라서면 한강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산세와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아차산에 산재한 약 20 여개의 보루들은 각각의 위치에 따른 저마다의 기능이 있는데, 가장 북쪽의 수락산 보루에서는 남쪽의 아차산 일대가 잘 보이고, 임 진강 유역으로부터 양주 분지, 중랑천, 한강 유역에 이르는 교통로를 감사하기 적당하였다. 망우산 보루에서는 북쪽 의정부에 이르 는 길목까지를 잘 볼 수 있고, 용마산 보루들은 중랑천 일대의 방어, 아차산 줄기의 보루들은 왕숙천변의 방어에 유리하다. 또한 지 금은 사라졌지만 한강변의 낮은 구릉에 있던 구의동 보루와 자양동 보루는 아차산 일대와 한강변 평지 조망에 유리하였다. 아차산의 보루를 보면 각 보루 사이의 거리가 가까운 것을 알 수 있다. 대략 400~500m 간격으로 늘어서 있다. 보루를 이렇게 세 운 것은 한 보루가 공격당했을 때 다른 보루에서 적을 쉽게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보루는 처음에는 고구려의 전진 기지로, 뒤 에는 신라와 백제의 공격을 막는 방어 시설로 사용 되었다. 아차산성 성벽 아차산성은 높이 200m의 산꼭대기에서 시작하여 동남으로 한강을 향하여 완만하게 경사진 산중턱 이상의 부분을 둘러서 주위가 약 1km가 넘는 성벽 을 구축하였다. 성벽의 구조는 삭토법에 의해서 형태를 구축한 후 그 윗면 을 따라 낮을 석벽을 구축했던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는 돌이 무너져 돌과 흙을 섞어서 쌓은 외형을 이후고 있다. 성벽의 높이는 평균 10m 정도이다. 17 역사(01~21)서울.indd 17 13. 6. 13. 오후 2:49
아차산의 보루에는 고구려의 발자취가 있다 보루는 국경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로 군인들이 생활한 장소이다. 아차산 일원에는 약 500m 간격으로 보루가 15군데 있었는데, 전 체로는 약 1,500명 정도의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당시의 생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흔적이 남아 있다. 먼저 군인들이 머물렀던 막사에는 온돌이 있었다. 온돌은 난방과 조리를 위해 필수적인데, 아차산 제4 보루에서는 12개의 온돌이 발견되었다. 또 바닥과 벽에 진흙을 발라 물이 새지 않도록 처리한 저수 시설이 두 개 발견되었다. 병사들이 사용했던 화살과 칼, 도 끼 등의 무기뿐만 아니라 철제 무기나 공구를 수리하기 위한 대장간 시설도 있었다. 아차산에서 국경을 지키던 군인들이 먹던 쌀, 콩, 조, 보리 등의 흔적도 확인할 수 있으며, 디딜방아, 절구와 함께 저장 도구인 토 기도 발견되었다. 또한 출토 유물 중에는 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고 띠고리가 달려 있는 커다란 시루(음식물을 쪄서 익히는 도구)도 있 었다. 이를 통해 당시 고구려 사람들은 주식인 조, 보리, 밀 등의 낟알이 단단하여 가루를 내 쪄서 먹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차산 제4 보루 발굴 전경(좌)과 복원된 모습(우) 아차산 제4 보루는 서울시 광진구와 경기도 구리시의 경계에 자리잡고 있으며, 1997년 서울대학교 조사단이 발굴하였다. 역사의 창 아차산성과 온달 장군 한강 북쪽에 있는 아차산에 가면 평강 공주와 온달 장군의 동 상을 볼 수 있다. 고구려 장군이었던 온달은 신라에게 빼앗긴 한 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였으나, 신라군에게 패하고 아단성( 阿 旦 城 )에서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아단 성 이 바로 아차산성( 阿 且 山 城 )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하지만 단양에도 온달산성이 있는데, 이 온달산성이 바로 온달 장군이 전사한 장소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참고로 아차산성의 삼국 시대 때 이름은 아단성이다. 아 는 한 강의 옛 이름인 아리수에서 딴 것이며, 단 은 골짜기라는 뜻이다. 이 아단성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휘( 諱 )를 단( 旦 ) 으로 온달과 평강(아차산 생태공원) 고치면서 왕의 이름과 같다고 하여 차( 且 ) 로 바뀌어 불리기 시작 하였다. 또한 아차산에는 온달과 평강에 관한 전설이 담긴 바위가 있다. 대성암 아래쪽에 있는 온달 장군의 주먹바위와 평강 공주의 통곡바위가 그것이다. 18
아차산 고구려유적 학년 반 번 이름 20 년 월 일 1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아차산 제4 보루 (가) 을/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벽화(각저총) 두 여인이 앉아 있는 곳이 (가) (이)다. ⑴ (가)에 들어갈 용어를 써 보자. ⑵ (가)의 존재를 통해 알 수 있는 생활상을 서술해 보자. 2 고구려의 아차산 보루에서 나온 다음 유물과 그에 대한 설명을 옳은 것끼리 서로 연결해 보자. 집수정: 물을 가두어 두었던 시설 이다. 시루: 음식물을 담아서 찔 수 있 게 만든 도구이다. 방아확: 방앗공이로 찧을 수 있 게 우묵하게 판 돌이다. 3 아차산 고구려유적을 답사하면서 직접 사진을 찍어 붙여 보고, 해당 장소의 특징을 설명해 보자. 사진 붙이는 곳 19
여기도 찾아가요! 서대문구 서대문 독립공원, 독립문, 연세 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종로구 사직단, 경복궁, 북촌 한옥 마을, 청계천, 운현궁, 흥인지문 중구 덕수궁, 정동, 근대 문화 중심지 역, 남산 성곽 마포구 한강절두산성지 은평구 강북구 도봉구 노원구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전쟁기념관 강서구 양천구 마포구 영등포구 서대문구 성북구 중랑구 종로구 동대문구 중구 성동구 용산구 광진구 강동구 강서구 허준박물관, 겸재기념관 구로구 금천구 동작구 관악구 서초구 강남구 송파구 강동구 암사동 선사유적지 동작구 국립현충원, 사육신묘 관악구 낙성대 강남구 선릉, 봉은사 20
수도권역 연천 전곡리 유적 22 수원 화성 26 강화 광성보 및 군사 시설 30 실학박물관과 다산유적지 34 여기도 찾아가요! 38
연천 전곡리 유적 연천 전곡리 유적은 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밝혀 줄 귀중한 자료로서 한국과 동아시아 지역의 구석기 문화 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세계적 인 구석기 유적이다. 경기도는 사적 268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전곡리 선사 유적의 영구적인 보존과 적극적인 활용을 위하여 전곡선사박물관의 건립을 추진하여 2011년 4월 개관하였다. I 관련 교과서 단원 I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01. 선사 시대의 문화 I 활동 목표 I 연천 전곡리 유적의 의미를 파악한다. 전곡리 유적에서의 체험활동을 통해 선 사 시대인의 생활을 이해한다. 출발하기 전에 알아 두기! I 위치 I _ 연천 전곡리 유적: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양연로 1510(전곡리 515번지) _ 전곡선사박물관: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평화로 433번길 2(전곡리 176-1번지) I 문의처 I 031) 832-2570(종합안내소), 031) 839-2206(토층전시관), 031) 830-5600(전곡선사박물관) I 홈페이지 I http://www.goosukgi.org(연천 전곡리 유적), http://www.jgpm.or.kr(전곡선사박물관) I 특이사항 I _ 연천 전곡리 유적: 선사체험마을 운영(홈페이지 사전 예약), 토층전시관 운영, 매년 구석기 축제 개최 _ 전곡선사박물관: 유아단체 학교단체 어린이 가족 청소년 성인별로 다양한 교육프로그램 운영, 각종 체험장 설치, 학습자료 제 공(홈페이지 참고) I 체험 코스 I 토층 전시관 선사체험 마을 야외체험 1 매표소 전곡선사박물관 2 토층전시관 3 선사체험마을 관광안내소 실내전시 종합안내소 전곡선사박물관 견학 22
연천 전곡리 유적, 세계 구석기 지도를 바꾸다 전기 구석기인들이 한반도 전곡리에서 살았다는 놀라운 증거는 우연한 기회에 발견되었다. 당시 미 공군 하사관으로 우리나라에 와 동두천 미군 2사단 헬리콥터장에서 근무하던 보웬(Greg Bowen)은 미국 인디애나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하다 주한 미군에 지원 입대한 사람이었다. 그는 1978년 1월 20일 한탄강 유원지를 거닐다 주먹도끼 한 점을 발견하고는 순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 어 주변을 살펴 주먹도끼 2점, 가로날도끼 2점, 긁개 1점을 추가로 발견하였다. 그는 이를 토대로 세계적인 구석기 권위자 프랑수아 보르드 교수(프랑스 보르도 대학)에게 보고서를 보내 검증받았고, 교수의 추천으로 서울대학교에 의뢰한 결과 1979년 3월부터 전곡 리 유적이 대대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하였다. 이 발굴 과정에서 나온 다량의 석기, 박편, 망치돌 등은 모두 전기 구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도구인 아슐리안형 석기에 해당하였다. 이러한 성과에 자극받은 한국 고고학계의 각 연구소, 박물관 등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최근 2009년까지 총 17차례에 걸쳐 조사 작업 이 진행되었다. 이는 구석기 유적 발굴로는 해방 이후 가장 큰 조사 작업이었고, 우리나라 구석기 문화를 파악할 수 있는 6천여 점의 유물을 발견하는 성과를 올렸다. 뿐만 아니라 발굴된 대량의 유물들은 유럽이나 아프리카 등 아슐리안 계통의 석기와 비슷한 구석기 유물이어서 이전까지 대세를 이루던 동북아시아에는 유럽이나 아프리카 지역에서 발견된 전형적인 주먹도끼는 없다. 는 모비우스의 학설을 뒤집는 결정적인 계 기가 되었다. 1981년 10월 전곡리 구석기 유물은 멕시코에서 열린 국제 선사 원사 고고학회에서 공식으로 인정을 받게되어 외국의 고고학 교과서에 올랐으며, 동북아 구석기 문화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구석기 유적지가 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언제부터 구석기인들이 터를 잡고 살았을까?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종합해 볼 때 적어도 30만 년 전부터 전곡 리를 중심으로 한 추가령 지구대에 구석기인들이 모여 살기 시작 한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한탄강 유역에서는 실제 많은 수의 구 석기 유적이 발견되어 이 곳 일대가 구석기인들이 모여 살았던 곳임을 알려 주고 있다. 전곡리에서 출토된 뗀석기 경기도 연천 전곡리 유적의 전경 전곡리 유적은 전곡 시가지 남쪽, 한탄강이 감싸고 도는 현무암 대지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현무암 위에 형성 된 퇴적층의 상부 점토층이 구석기 문화층으로, 여기에서 석기가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연천 전곡리 유적 발굴 현장 23 역사(22~39)수도.indd 23 13. 6. 13. 오후 2:50
전곡선사박물관, 그곳에 가면 선사 시대를 직접 만날 수 있다 2011년 경기도는 이 유적지에 전곡선사박물관을 세웠다. 박물관에는 전곡리에서 출토된 주먹도끼 외에 프랑스의 화석 인류 복원 전문가인 엘리자베스 데이네스가 복원한 세계의 대표적 화석 인류들이 다양한 동물 박제들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1층에는 상설 전시실과 함께 고고학 체험실이 있는데, 상설 전시실은 최초의 인류로부터 현생 인류의 출현까지의 진화 과정을 보 여 주며, 그 속에서 전곡리 유적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고고학 체험실에는 선사 시대의 사람과 동물, 기술 등을 직접 체험하고 확인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어 흥미롭다. 직접 돌을 부딪혀 석기를 만들어보고, 손가락에 물감을 묻혀 동굴 벽 면에 그림을 그리는 등 구석기인들의 생활과 예술에 대해 체험할 수 있다. 또한 이 체험실에는 1991년 알프스의 눈덮인 산에서 옷과 장비를 모두 갖춘 채 사망한 모습으로 발견된 구석기인 외찌 미라의 모형도 전시되어 있어서, 이를 매개로 기원전 3000년경에 살던 선사 시대인의 신발, 청동도끼, 주머니칼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전곡선사박물관 고고학체험실 내부 토층전시관의 전곡리 유적 표층전시관 내부 역사의 창 아슐리안형 주먹도끼 주먹도끼는 돌을 깨고 양면으로 떼어내어 날 카로운 날이 서게 한 석기의 일종이다. 주먹도끼 라는 이름은 그 모양이 지금 우리가 나무를 쪼개 는 데 쓰는 쇠도끼와 비슷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하지만 주먹도끼는 나무 다듬는 용도 외에 짐승 의 가죽을 벗겨 내고, 고기를 발라내고, 뼈를 부 수는 등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다. 당시 사람들에 게는 소중한 만능 도구였다. 이 주먹도끼를 일컬 어 세계 구석기 연구자들은 아슐리안형 주먹도 주먹도끼 사용 모습 생따슐 지방에서 발굴된 주먹도끼 끼라고 부른다. 아슐리안은 프랑스의 생따슐(St. Acheul) 지방에서 전기 구석기에 해당하는 다량의 주먹도끼가 출토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는 타원형 또는 삼각형 모양으로 양쪽 면을 모두 고르게 손질 가공하여 석기의 옆면이 마치 두 손바닥 을 모은 모습을 한 것이 특징이다. 초기에는 거칠게 가공되었지만 점차로 정형화된 형태를 지니게 되었다. 전곡리에서 발견된 주먹도끼 중에는 초기 아슐리안형이 많이 나타나며 전면을 가공한 타원형과 뾰족한 첨두형도 함께 발견된다. 24
연천 전곡리 유적 학년 반 번 이름 20 년 월 일 1 다음 글을 읽고 전곡리 유적이 갖는 의미를 서술해 보자. 1978년 전곡리에서 주먹도끼 가 처음 발견되기 전까지 모비우 스(H. Mobius)를 비롯한 서양의 학자들은 인도의 동쪽, 즉 동아 동해 시아에는 양면을 가공하여 잘 만 인도양 태평양 든 아슐리안형 주먹도끼가 없다 고 주장하였다. 이 석기 문화권 개 문화권 0 2000 2 다음은 전곡선사박물관에 모형으로 전시된 외찌 에 관한 내용이다. 외찌의 가상 하루 일과를 작성해 보자. 1991년 알프스에서 발견된 외찌 는 피부, 머리카락, 눈, 조직, 내장기관, 심지어 창자 속의 내용물까지 모두 남아 있었다. 기원전 3000년경에 살았던 키 160cm, 몸무게 약 50kg 정도의 46세 가량의 남자로 밝혀졌다. 외찌는 고산 지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따뜻한 가죽옷을 입었으며, 외찌의 신발은 정성들여 만든 것으로 먼 거리를 걸을 때 이상적이었고, 땅바닥에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 외찌는 주머니칼, 구리도끼, 불피우는 데 필 요한 장비 등을 가지고 있었다. - 전곡선사박물관 도록 3 전곡리 선사 유적의 야외 체험장이나 선사 박물관의 고고학체험실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의 사진을 직접 찍어 붙 여 보고, 어떤 장면인지 설명해 보자. 사진 붙이는 곳 25
수원 화성( 水 原 華 城 ) 조선 시대에는 왕과 왕비의 무덤인 능 과 세자와 세자빈의 무덤인 원 이 조성되면 주변 10리 안에는 백성이 살 수 없어 강제로 이사를 해야 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 세자를 위해 수원으로 무덤을 옮기려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해 야 할 사람들을 위해 백성들을 팔달산 동쪽으로 이사하게 하고 이사 비용과 집값까 지 보상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새 도시를 만들고 그 둘레에 성을 쌓았는데 그것이 바로 수원 화성 이다. 유네스코는 1997년 이를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하였다. I 관련 교과서 단원 I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04. 조선 후기 정치와 제도의 변화 I 활동 목표 I 수원 화성이 조성된 계기를 파악한다. 수원 화성의 특징과 의미를 이해한다. 출발하기 전에 알아 두기! I 위치 I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190 I 문의처 I _ 031) 290-3600(수원문화재단), 031) 228-2765(팔달문 매표소), 031) 251-4513(장안문 매표소), 기타 연락처는 홈페이지 참고 I 홈페이지 I http://www.swcf.or.kr(수원문화재단) I 특이사항 I _ 수원화성, 화성행궁, 수원박물관, 수원화성박물관 4종 통합 매표시 할인 _ 개인(4인 이상) 및 단체(20인 이상) 대상으로 문화관광해설 프로그램 운영(예약제) I 체험 코스 I 장안문 서북공심돈 화서문 화홍문 방화수류정 각건대 (동북포루) 동장대(연무대) 동북공심돈 1 팔달문 2 서장대 3 화서문 서장대 화성행궁 치성 창룡문 4 장안문 5 방화수류정 6 동장대(연무대) 7 동북공심돈 서남각루 팔달문 봉돈 8 창룡문 9 봉돈 동남각루 26
수원 화성, 정조의 이상을 구현한 신도시 정조는 왕이 된 지 13년 만인 1789년, 제대로 관리되고 있지 않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양주 배봉산 아래에 서 당시 조선 최고의 명당이었던 수원부 화산( 花 山 )으로 옮겼다. 아버지 무덤인 현륭원( 顯 隆 園 : 고종 때 융릉으로 격상되기 이전의 이름)이 완성되자 정조는 해마다 묘소에 참배를 하기 위해 수원을 찾았다. 1793년 정조는 무덤을 옮긴 지 5년 만에 수원에 새 성 을 쌓고 새 도시 화성( 華 城 : 花 山 의 花 와 같은 글자 華 를 따옴) 을 만든다고 발표하였다. 세자가 15세 되는 1804 사도세자와 비의 무덤인 융릉 년에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준 후 아버지 무덤을 모신 수 장조(사도세자)와 헌경왕후(혜경궁 홍씨)가 함께 모셔진 합장릉이다. 원에 내려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살아갈 생각이었 다. 이러한 의도로 정조는 화성을 서울에 버금가는 커다란 도시로 만들고자 하였다. 18세기의 조선에서는 상업이 활기를 띠면서 서 울과 지방의 유통이 활발하였는데, 서울에서 남쪽으로 가는 큰길에 화성을 조성하면 하삼도와 통하는 교통의 중심지이자 경제 도시 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1794년에 공사가 시작된 화성은 1796년에 완성되었다. 둘레가 5,520m인 성을 쌓는 데는 1만 1,800여 명의 일꾼이 동원되었고, 사 용된 돌덩어리는 18만 7천여 개, 벽돌은 69만 5천여 장, 기와 53만여 장 등이었다. 화성은 성벽에 방어 시설을 가득 설치하여 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었다. 또한 성 안에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넓은 시가지와 왕이 나라 일을 볼 수 있는 행궁을 만들었다. 화성의 축성이 이전의 도시 건설과 다른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계획도시답게 체계적으로 도시를 정비한 점이다. 우선 성 안을 관 통하는 물길을 정비하여 이전에 비가 오면 자주 범람하는 문제를 해결하였다. 또한 도시의 연결을 위해 성 한복판에 새로 동서와 남 북을 관통하는 네거리 교차로를 만들었다. 그리고 농업 기반을 튼튼히 하여 화성을 자립적인 경제 도시로 만들기 위해 저수지를 여럿 조성하였는데, 만석거( 萬 石 渠 ), 만년제( 滿 年 堤 ), 축만제( 祝 萬 堤, 지금의 서호) 등이 그것이다. 이전과 달랐던 점은 정조는 공사 과정에서 일할 사람들을 모아 일한 만큼의 임금을 지급한 것이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강제로 일을 시킨 예전에 비해 새롭게 나타난 제도상의 변화였다. 여기에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꾼들이 질병에 걸리면 치료를 해주 었고, 치료를 받는 동안 일을 하지 못하더라도 매일 쌀과 돈을 주었다. 화홍문과 수원천 화홍문은 일명 북수문이라고 하는데, 각종 전란에 대비하여 여러 가지 방어 시설을 갖추는 동시에 시내를 관통하는 광교천이 범람하지 않도록 물길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였다. 27
화성의 모양과 재료, 이전의 성과 다르다 수원 화성은 주산인 팔달산을 뒤에 두고 그 아 래에 관청을 배치하였다. 그런데 관청은 다른 지 역과 달리 남향이 아니라 동향이며, 간선도로는 자연히 남북 방향으로 놓이게 되었다. 이는 지형 조건보다 서울에서 이어진 간선도로의 방향을 더 중요시한 까닭이다. 이 때문에 화성의 정문도 남 문인 팔달문이 아니라 북문인 장안문이다. 서울 에서 출발해서 올 때 가장 먼저 성안으로 들어오 는 문이 북문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대부분의 성인 석성(돌로 지 은 성)의 단점을 보완하여 수원 화성은 돌과 벽돌 을 함께 사용해서 성벽을 쌓았다. 석성은 튼튼하 고 방어 기능이 뛰어난 반면 돌을 다듬는 데 시간 이 많이 걸리고, 또 대포의 공격으로 밑돌이 빠지면 성벽이 쉽게 무너지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벽돌을 섞어서 성을 쌓으면 공사 기간을 단축시키고 성벽의 붕괴도 막을 수 있었다. 장안문 수원 화성의 북문으로, 하나의 홍예문 위에 2층의 누각을 올리고 바깥쪽에 둥근 옹성을 갖추었다. 누각은 다 포식으로 화려하게 공포를 짜고 우진각의 기와지붕을 덮는 등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서울 남대문과 비슷한 외관을 갖추었는데, 남대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방어시설을 갖춘 점이 특징이다. 역사의 창 화성의 모든 것을 담은 화성성역의궤 화성성역의궤 장안문 설계도 거중기 정조는 화성을 쌓는 모든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해서 보고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하루하루 일한 사람의 숫자, 벽돌의 숫자까지 모든 것을 꼼꼼하게 기록해서 정조에게 보고하였고, 화성이 완성된 후 그 기록을 묶어서 책으로 만든 것이 바로 화 성성역의궤( 華 城 城 役 儀 軌 ) 이다. 이 책에는 화성을 만들기 위한 계획 단계에서부터 성이 완성될 때까지 왕의 명령과 관청 간에 오갔던 문서, 사용 도구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글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은 그림을 그려서 이해를 돕기도 했다. 공사비에 대한 대목에서는 각 공역에 들어간 경비를 산출하였고, 인건비(일당)와 공사에 참여한 일수 등도 상세하게 기록해서 석공 아무개가 어느 고장의 출신이며, 어느 현장에서 며칠 동안 일했으며 얼마의 돈을 품값을 받았는지 알 수 있게 했다. 이 책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한국 전쟁을 겪 으면서 많은 부분이 파손된 수원 화성을 다시 원래대로 복원할 수 있었고, 이에 따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다. 28
수원 화성 학년 반 번 이름 20 년 월 일 1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수원 화성의 성문들 앞에는 반달 모양으로 쌓은 자그마한 성벽이 있 다. 이를 (가) (이)라고 하는데, 이는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모습 과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 (가) 은/는 적으로부터 성문을 보호 하는 역할 뿐 아니라 성문 앞까지 진입한 적군을 사방에서 포위하여 팔달문 공격할 수 있는 군사 시설의 역할도 하였다. ⑴ (가)에 들어갈 용어를 써 보자. ⑵ (가)의 기능과 효과를 서술해 보자. 2 수원 화성의 성벽에서 확인할 수 있는 다음 구조물의 기능을 각각 정리해 보자. 공사실명판 봉돈 서북공심돈 3 자신이 인상 깊게 바라본 건물이나 기구의 사진을 직접 찍어 붙여 보고, 그것의 명칭과 역할이 무엇인지 설명해 보자. 명칭: 목적: 사진 붙이는 곳 29
강화 광성보 및 군사 시설 광성보는 강화 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로,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 하기 위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흙과 돌을 섞어 쌓은 축성이다. 조선 광해군 때 다시 보충하여 효종 9년(1658)에 광성보를 설치하였으며, 숙종(1679) 때 완전한 석성으로 만들었다. 광성보에는 정문인 안해루가 있고,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어재순 장 군의 쌍충비각, 신미순국 무명용사비, 신미순의총이 있다. 돈대로는 광성돈 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가 있으며 오두돈대와 화도돈대는 파손되어 현재 복원중에 있다. I 관련 교과서 단원 I Ⅰ. 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 01. 서양 열강의 침략과 흥선 대원군의 정책 I 활동 목표 I 보와 돈대의 기능과 구조를 이해한다. 유물과 유적의 발굴과 보존의 어려움을 안다. 출발하기 전에 알아 두기! I 위치 I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번지(해안동로 466번길27) I 문의처 I 032) 930-3114(강화군청), 032) 930-7070~1(광성보 매표소), 032) 934-7887(강화역사박물관) I 홈페이지 I http://museum.ganghwa.go.kr (강화역사박물관), http://tour.ganghwa.incheon.kr (강화군 문화관광) I 특이사항 I _ 강화 고인돌공원 내에 있는 강화역사박물관을 사전답사한 후 광성보를 현지답사하는 형태로 답사코스 구성 가능: 강화역사박물 관 1층 상설전시실에 관련 전시가 진행 중이며, 로비에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 가 전시되어 있음. _ 강화군 문화관광 홈페이지에서 문화관광해설사 신청 가능 _ 강화도는 선사 시대부터 근 현대까지 우리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섬으로, 전 시대에 걸친 여러 테마를 주제로 한 답사 가능 I 체험 코스 I 용두돈대 무명용사비 쌍충비각 광성돈대 안해루 신미순의총 손돌목돈대 1 안해루 2 광성돈대 3 무명용사비 4 쌍충비각 5 신미순의총 6 손돌목돈대 7 용두돈대 30
강화도, 국방을 지키는 요충지! 그안에 광성보가 있다 강화도의 유적지 대부 분은 적을 막고 나라를 지 키는 장소였다. 강화도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섬 이기에 외세가 서울로 침 략해 들어올 때 가장 먼저 통과하는 요충지였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왜란과 호란을 겪고 나 서는 진( 鎭 ) 보( 堡 ) 돈( 墩 ) 을 설치하여 전란을 대비 하였다. 여기에서 진과 보 는 군사상 중요한 지역, 주로 해안 변방에 설치하 여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 던 군사 지역을 말하는 것 광성보의 정문인 안해루 으로, 포대가 소속되어 있었다. 진은 오늘날로 치면 대대병력이 주둔하던 곳이고, 보에는 이보다 규모가 작은 중대병력이 머물렀다. 돈은 돈대( 墩 臺 )라고도 하며 여기에는 평지보다 높게 설치한 하나의 초소가 있었다. 강화도를 군사적 방어 기지로 삼기 시작한 때는 효종 대이다. 이후 숙종 대에 와서 국방에 만전을 기하였는데, 이 시기 월곶진, 재 물진, 덕진진, 인화보, 철곶보 등과 진 보에 소속되는 돈대와 포대 등을 설치하였다. 이들 국방 기지들은 근대 서양 제국의 침략을 받 아 그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광성보( 廣 城 堡 ) 역시 고려 때 외성을 보수하고 효종 7년(1656)에 설치한 방어 시설이며, 용두 오두 화도 광성 등의 소속 돈대는 숙 종 5년(1679)에 만들어졌다. 영조 21년(1745)에 성을 개축하면서 성문을 세우고 안해루( 按 海 樓 )라 불렀다. 이곳은 고종 8년(1871) 신미양요 때 미군 함대에 의해 초지진 덕진진에 이어 광성보마저 포위되면서 가장 격렬한 격전지가 되었다. 당시 미군은 9인치, 8인치 등 85문의 대포로 화력을 과시했으나 조선군은 이보다 성능이 떨어진 구식 대포(홍이포)와 소포로 대응하 였다. 어재연 장군은 전 수비군을 이끌고 싸우다 이마저도 포탄이 떨어지자 칼과 창으로, 마지막에 맨주먹으로 대항하여 싸웠으나 신무기로 무장한 저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어재연 장군과 그의 동생 어재순 그리고 휘하 200여 명의 군사는 4월 23일부터 다음날까 지 48시간의 사투를 벌인 끝에 모두 전사하였다. 미군은 이러한 조선군의 기세에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물러났다고 한다. 광성보 안에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 형제의 쌍충비가 비각과 함께 세워져 있는데, 이는 어씨 문중에서 순국의 뜻을 기 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그리고 그 곁에 신미양요 때 싸운 순국무명용사비가 서 있다. 또한 길 아래로 내려서면 7기의 분묘가 신미순 의총이라는 이름으로 나란히 누워 있다. 당시 어재연 장군 휘하의 군인 전사자들의 신원을 알 수 없어 여기 7기의 분묘에 합장하였다. 신미순의총 쌍충비각 31
광성보에 딸린 돈대, 그곳에서 격전 현장을 돌아보다 용두돈대 광성보에 딸린 광성돈대는 사적 제227호로, 마치 다리미 형상을 하고 있으며 내부에는 당시 사용했던 대포 3문이 복원되어 있다. 이 중에서 대포인 홍이포( 紅 夷 砲 )는 네덜란드에서 중국을 거쳐 들어온 것으로 당시 네덜란드를 홍이( 紅 夷 ) 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을 붙였다. 홍이 포는 포구에서 화약과 포알을 장전한 다음 포 뒤쪽 구멍에 점화하여 사 격하는 포구 장전식 화포로 사정거리는 700m이며 조선 영조 때부터 주 조하여 사용하였다. 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포알은 날아가지만 포알 자 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은 약한 편이다. 광성보의 안쪽으로 계속 걸어들어가다 보면 용두돈대를 만날 수 있 다. 성의 생김새가 마치 용의 머리와 같다 해서 붙은 이름으로, 좁은 강 화해협에 용머리처럼 쑥 내밀고 있는 암반을 이용하여 설치하였다. 물이 빠지고 나면 건너뛰어도 될 듯한 좁은 강폭이 절묘한 지형을 이루고 있 다. 반대편 쪽에 덕진진이 있어 적국 배가 이 지역을 지날 경우 양쪽에서 공격할 수 있다. 용두돈대와 이웃해 있는 손돌목돈대는 강화도의 다른 돈대들이 주로 사각 모양인 것과는 달리 둥그렇게 쌓았으며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해 강화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용두돈대와 손돌목돈대 사이의 수역을 뱃사공 손돌이 왕의 오해로 억울하게 죽은 곳이라 하여 손돌 목 이라고 하는데 그 이름을 땄다. 역사의 창 광성보 전투의 뒷이야기, 무명용사 그리고 수자기 미국 사학자 앨버트 카스텔의 논문에는 조선군은 용감했 다. 그들은 항복 같은 걸 아예 몰랐다. 무기를 잃은 자들은 돌 과 흙을 집어던졌다. 전세가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되자 살아남 은 조선군 1백여 명은 포대 언덕을 내려가 한강물에 투신자살 했고 일부는 자결했다. 조선군 사령관 어재연도 이때 목을 찔 러 자결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군사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항복을 거부한 무명용사들에게 고개를 숙이게 된다. 이 러한 용사들의 숭고함 때문일까 서울에 있는 미국인 학교에서 는 광성보에 수학여행을 오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다고 한 다. 찾아와서는 당시 전투에서 죽은 미국인에 대한 추념과 함 신미양요 당시의 수자기 께 무명용사비 앞에서 예를 표한다는 얘기가 이규태의 역사산책 이라는 책에 소개되어 있다. 신미양요에서 승리한 미군은 깃발 한가운데 장수를 뜻하는 수( 帥 ) 자가 적힌 기를 꺾고 성조기를 내걸었다. 수자기( 帥 字 旗 ) 는 총지휘관이 있는 본영에 꽂는 깃발인데, 광성보 전투에서 승리한 미군이 이 깃발을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그로부터 136년 만인 2007년 10월 장기대여(10년) 형식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2008년 4월 1일부터 5월 5일까지 수자기 136년 만의 귀환 이 라는 이름으로 특별전이 열리기도 했다. 수자기의 귀환으로 이제라도 무명용사들의 넋을 위로할 수 있게 되었다. 32
강화 광성보 및 군사 시설 학년 반 번 이름 20 년 월 일 1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현존하는 유일의 이 수자기는 강화도를 지키는 부대에 있던 것으로, 1871년(고종 8) (가) 당시 왕명으로 진무영 부지휘관인 중군( 中 軍 )에 임명된 (나) 장군이 광성보를 본진으로 하여 이 깃발을 걸고 싸웠다. 이 전투에서 미군의 근대적 인 군사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광성보가 함락되고 깃발도 빼앗겼지만, 350여 명의 조선군이 전사하는 치열하고 끈질긴 저항에 부딪친 미군은 퇴각하게 된다. 수자기 - 일보 2008. 3. 28. - ⑴ (가), (나)에 들어갈 용어를 써 보자. ⑵ 위의 수자기 가 갖는 의미를 당시 정세와 연관하여 서술해 보자. 2 다음 전시 유물과 그에 대한 설명을 보고 물음에 답하시오. 네덜란드에서 왔기 때문에 (가) (이)라는 이름이 붙은 대포( 大 砲 )이다. 구경100mm, 사정거리 700m에 달한다. 소포( 小 砲 )이며, 구경 84mm, 사정거리 300m로서 포알은 대포와 같으며, 대포와 달리 크기가 작아 조 준이 된다. 전시된 포 중 구경 26mm로 크기가 가장 작으며 이 름은 (나) (이)다. 포 1문에 다섯 개에서 아 홉 개의 자포를 결합하여 연속 사격할 수 있는 발달 된 화기이다. ⑴ 위의 포들이 야외 전시된 돈대의 이름을 쓰시오. ⑵ (가), (나)에 들어갈 말을 쓰시오. 3 자신이 인상 깊게 바라본 장면이나 유물 등의 사진을 직접 찍어 붙여 보고, 느낀 점을 적어 보자. 사진 붙이는 곳 33
실학박물관과 다산유적지 경기도가 효와 실학을 대표적인 정신문화로 육성하기 위해 2009년 10월에 개관 한 실학박물관은 조선 후기 개혁과 자아 탐구의 원동력이었던 실학에 관한 자료의 수집과 연구를 진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전시와 다양한 문화체험교육 등을 시행하고 있다. 박물관 내 상설전시실에서는 실학의 형성과 그 전개 과정, 실학자들의 천문과 지 리에 대한 연구 내용 등 실학 전반에 걸친 자료를 체계적으로 전시하고 있으며, 대표 적인 실학자와 그의 사상을 중심으로 한 특별전시가 해마다 두 차례 개최되고 있다. I 관련 교과서 단원 I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03. 삼국 및 가야의 성립과 발전 I 활동 목표 I 실학박물관의 전시 유물을 알아본다. 실학 발달의 배경이 된 서양의 과학 기술을 이해한다. 출발하기 전에 알아 두기! I 위치 및 문의처 I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 747번길16, 031) 579-6000~1 I 홈페이지 I http://www.nyj.go.kr/dasan/03_tra/01.jsp(다산유적지), http://www.silhakmuseum.or.kr(실학박물관) I 특이사항 I _ 다산유적지와 실학박물관이 공동으로 마재마을 답사길 체험사업 진행 중(홈페이지 참고) _ 다산유적지 및 실학박물관에서 다양한 각종 체험 및 교육활동 운영 중(홈페이지 참고) _ 1986년부터 현재까지 매년 가을 다산문화제 개최(http://www.nyjdasan.or.kr) I 체험 코스 I 사당(문도사) 정약용의 묘 여유당 다산기념관 다산문화관 거중기 다산 문화의 거리 혼천의 1 실학박물관 2층 상설전시실 2 실학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 실학박물관 3 다산문화관 4 다산기념관 5 정약용의 묘 6 여유당 7 다산 문화의 거리 34
실학박물관, 그곳에서 실학을 만나다 남양주에 위치한 실학박물관은 전시 유물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개별 유물과 그에 대한 설명 못지않게 실학박물관의 전시 전체를 개념화하 는 데 많은 신경을 썼다고 한다. 실학자들이 쓴 책과 수입품, 발명품으로 한정되어있는 유물을 단순하게 전시하는 것에만 그친다면 전체적으 로 지루한 구성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극복하 기 위해서였다. 실학박물관에는 3개의 상설전시관이 마련되 어 있다. 실학의 형성 을 주제로 한 제1 전시실 에는 실학 형성의 역사적 배경과 외래 문물의 유입과 관련된 주제별 내용이 전시되어 있고, 실학의 전개 를 주제로 한 제2 전시실은 국내에 서 실학이 발전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곳으로 경세치용파, 이용후생파, 실사구시파 등 실학의 학파별 전개에 대한 소개와 관련 유물이 전시되 어 있다. 마지막으로 천문과 지리 를 주제로 한 실학박물관 제1 전시실 제3 전시실에는 서양의 천문학과 지리학이 국 제1 전시실에는 서양 문물의 전래, 왜란과 호란으로 인한 국가 기능의 마비와 국토의 황폐화, 대동법 균역법 동전 유통 등 국가재건을 위한 각종 개혁 정책의 실시, 개혁에 따른 농업과 상업의 발달, 관련 개혁 방안의 제시 등 실학 내에 들어오면서 조선의 천문학과 지리학이 어 형성의 배경이 되는 내용이 전시되어 있다. 떻게 발전되었는가에 대한 내용이 천문 관측 기 기와 지도의 발달을 중심으로 전시되어 있다. 이 중 제2 전시실에는 실학의 학파별 전개와 관련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18세기 전반 이익( 李 瀷 ) 중심의 경세치용파는 정치 체 제 및 토지 제도 등의 개혁을, 18세기 후반 박지원 중심의 이용후생파는 상업의 진흥과 기술 개발을, 19세기 전반 김정희 위주의 실사 구시파는 형이상학을 배격하고 증거가 없으면 믿지 않는다.[ 無 徵 不 信 ] 는 실증적 학문방법론을 각각 추구하였다. 이러한 실학파들의 연구는 모두 우리나라에 관한 탐구를 지향하여 국학(조선학)으로 발전하였고, 19세기 개화 사상에도 영향을 주었다. 또한 1층 기획전시실에서는 1년에 두 차례 특별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그동안 다산과 가장본 여유당집 (2010), 연행, 세계로 향하는 길(2010), 이익, 성호사설 세상만물 새로보기(2011), 곤여만국전도, 세계와 우주를 그리다(2011), 다산, 한강가의 삶과 꿈 (2012), 순암 안정복, 우리 역사 이야기 동사강목(2012), 새로 여는 하늘 땅, 세계 - 성호 이익의 실학(2013) 등의 주제로 전 시가 열렸다. 이러한 특별 전시는 그 해와 관련된 실학자나 실학자의 대표 저서, 혹 은 실학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과학 기술 이나 세계 지도 등의 소재 중 한 가지를 집 중 조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실학박물관 제3 전시실 제3 전시실인 천문과 지리 는 서양의 천문학과 지리학이 국내 에 들어오면서 조선의 천문학과 지리학이 어떻게 발전되었는가 를 보여 주는 전시실이다. 이곳에서는 조선의 천문학을 소개함 과 동시에 한 중 일 삼국의 혼천의 지구의 등을 비교하여 삼국간 의 학문 교류 및 서로가 주고받은 영향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서양으로부터 전달된 세계지도와 지동설은 실학 전개의 기초가 되는 조선인의 자연관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구체적 으로 확인할 수 있다. 35
다산유적지, 정약용의 흔적을 찾아서 정약용은 경기도 양근, 현재 경기도 남양주에서 태어나 15세에 상경할 때까지 이곳에서 자랐다. 당시 양근 일대는 후일 실학자로 불리게 된 학자들이 새로운 학풍을 형성해 가던 곳으로, 정약용도 어린 시절부터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를 접하게 되었고, 일생에 걸 쳐 다양한 연구 및 저술 활동을 통해 18세기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실학박물관의 바로 옆에는 다산유적지가 자리하고 있는데, 다산 정약용의 묘, 그가 태어나고 세상을 떠난 여유당, 사당인 문도사, 그리고 다산의 대표적인 저서에 대한 소개 및 수원성 축조 과정에 쓰였던 거중기와 녹로 등이 전시된 다산기념관과 다산문화관 등이 있다. 특히 다산유적지 입구에는 그가 집필한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의 대표적인 구절이 동판에 새겨져 있다. 여유당 시대를 개혁하고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꿈을 담았던 정약용은 긴 유배 생활을 마친 후 태 어나고 자랐던 이곳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다 생을 마감하였다. 현재의 여유당은 1925년에 홍수로 떠내려간 것을 복원한 것이다. 목민심서 정약용이 전라남도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당시 저술한 책으로, 지방관의 사적을 가려 뽑아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를 다룬 책이다. 여유당전서 권 16~29에 수록되어있으며, 경 세유표 와 함께 조선 후기 연구 자료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역사의 창 시헌력 이 전한 새로운 자연관 시헌력 서양의 자연과학 지식이 전래되면서 조선의 천문학과 지리학은 크게 발전하 였고, 그 계기는 시간과 공간 등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에 대한 관념의 변 화였다. 종래에는 시간과 공간이 어떤 철학적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되었 으나, 이제는 이들이 단순한 자연현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천문학의 발달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1653년 시헌력( 時 憲 曆 )의 시행이었 다. 시헌력은 중국 왕조가 명에서 청으로 바뀌면서 1645년부터 채택된 역법으 로 서양의 수치와 계산 방법을 활용하였는데, 태양력의 영향을 받아 24절기를 확정한 태음태양력( 太 陰 太 陽 曆 )이었다. 조선은 이를 1644년 김육의 건의 이후 국내에 들여와 시행하였고, 이제 계절의 변화는 음양오행의 순환에 의한 것이 아니라 태양과 지구와의 각도에 의한 것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를 밝히기 위하여 지구설, 지동설 및 공전설 등이 탐구되기 시작하였다. 36
실학박물관과 다산유적지 학년 반 번 이름 20 년 월 일 1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중국에 서양의 세계지도가 본격적으로 전달되기 시작한 것은 1601년에 예수회 소속의 신부 마테오 리치 (Matteo Ricci)가 베이징에 정착하면서부터이다. 그는 1602년에 이지조와 협력하여 (가) 을/를 제작하 였다. 중국에서 제작된 세계지도의 조선으로의 도입은 매우 신속하여 1603년에 이광정에 의하여 바로 도입되 었다. 세계지도의 전래는 매우 충격적인 사실임에 틀림없었다. ⑴ (가)에 들어갈 세계지도의 명칭을 써 보자. ⑵ (가)의 전래가 갖는 의미를 서술해 보자. 2 다음 전시 유물과 그에 대한 설명을 보고 물음에 답하시오. (가) 은/는 용거론( 用 車 論 ) 을 통해 수레 를 이용하면 상품 유통이 활발해지고 물가가 고르게 되며, 시장이 전국으로 확대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⑴ (가) ~ (다)에 들어갈 말을 써 보자. 김성일이 1577년 명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가져왔 다. 16세기에 발달한 (나) 이다. 조선 시 대의 기록에는 안경을 애체( 靉 靆 ) 로 명명하고 있으 며, 지봉유설 과 성호사설 에 본격적으로 소개되 고 있다. 천문학 교수였던 송이영이 1669년 제작한 혼천 시계 (국보 제230호)의 (다) 부분만을 제작한 것이다. 여기에는 태양 운행과 달 운행을 표현했으 며, 지구의를 장착하여 지구와 태양과 달의 상대적 운동 메커니즘을 구현하였다. ⑵ (가) 인물이 수레의 이용을 강조한 이유를 산업의 효과 측면에서 써 보자. 3 자신이 인상 깊게 바라본 실학자나 유물 사진을 직접 찍어 붙여 보고, 느낀 점을 적어 보자. 사진 붙이는 곳 37
여기도 찾아가요! 파주시 임진각, 제3 땅굴, 도라전망대, 도 라산역, 임진각 평화누리, 오두산 통일전망대, 반구정, 용미리 마애 이불입상, 이이 유적지 연천군 1 21 무장공비 침투로, 전곡리 유적, 제1 땅굴, 신라 경순왕릉 고양시 서오릉, 서삼릉, 북한산성, 중남 미문화원박물관, 고려 공양왕릉 연천 남양주시 몽골문화촌, 남양주 역사 박물관, 다산유적지 동두천 포천 김포시 문수산성, 장릉, 덕포진 김포 파주 양주 의정부 고양 남양주 구리 부천 하남 광명 과천 시흥 안양 성남 광주 군포 의왕 가평 양평 양평군 용문사, 몽양 여운형 생가 기념관,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마을 수원 화성 오산 용인 이천 여주 화성시 융건릉, 용주사, 제암리 3 1 운동 순국기념관 용인시 한국민속촌, 와우정사, 경기도 박물관 평택 안성 안성시 3 1 운동기념관, 미리내성지, 안성맞춤박물관 여주군 영녕릉, 신륵사, 고달사지, 명성황후 생가 38
강원권역 임영관, 강릉 향교 및 단오제 40 속초시립박물관 44 여기도 찾아가요! 48
임영관, 강릉 향교 및 단오제 임영관은 강릉부의 객사(중앙의 관리들이 지방에 내려오면 머물던 곳) 건물로 지 금은 객사문(국보 제51호)만 남아있다. 객사문은 고려 시대 건축물 가운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몇 안되는 건물 가운데 하나이다. 향교는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각 지방에 설치된 국립 교육 기관으로, 성현에 대한 제사와 유학 교육을 담당하던 곳이다. 강릉단오제는 고대 부족 국가의 제천 의식과 농경의례에서 비롯된 유구한 역사의 향촌제로서, 전래의 모습을 그대로 전승하는 전통 민간 축제로 중요무형문화재 제 13호로 지정되어있다. 출발하기 전에 알아 두기! I 관련 교과서 단원 I Ⅲ. 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 02. 고려의 대외 관계와 문화 발달 04. 민족 문화의 발달과 사림의 성장 I 활동 목표 I 임영관의 건축 양식을 파악한다. 향교의 기본 구조를 파악하고 정치적 의미를 안다. 단오제의 의미를 이해한다. I 위치 및 문의처 I _ 임영관: 강원도 강릉시 임영로 131번길 6, 033) 640-5119 _ 강릉향교: 강원도 강릉시 교동 233, 033) 648-3667(오전에만 전화 가능) _ 강릉단오문화관: 강원도 강릉시 단오장길 1, 033) 660-3940~44 I 홈페이지 I _ 강릉단오문화관: http://www.danocenter.kr _ 강릉관광: https://tour.gangneung.go.kr _ 강릉단오제: http://www.danojefestival.or.kr I 특이사항 I _ 주변에 오죽헌, 강릉시립박물관, 선교장, 경포대, 신복사지, 굴산사지 등이 몰려있으므로 답사지를 추가하여 코스 구성 가능 I 체험 코스 I 선교장 경포대 오죽헌 강릉향교 임영관삼문, 임영관지 강릉단오문화관 1 강릉향교(명륜당 동재, 서재 동무, 굴산사지 승탑 굴산사지 당간지주 서무 대성전) 2 임영관삼문 3 강릉단오문화관 40
고려 공민왕이 머물렀던 강릉 임영관 조선 시대 영조 때 지어진 임영지 에 보면 임영관은 고려 태조 19년인 936년 에 지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1366년에 공민왕이 낙산사에 불공을 드리러 왔다가 폭우로 인해 이곳에서 10일간 머물며 임영관 이란 현판을 썼다고 전해진 다. 규모는 전대청 9칸, 중대청 12칸, 동대청 13칸, 낭청방 6칸, 서헌 6칸, 월랑 31칸, 삼문 6칸이었다고 전해지고, 조선 시대에도 계속 객사로 사용되었다. 하지 만 1927년 일제가 임영관삼문과 칠사당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을 모두 철거해 버 임영관 현판 가로 3m, 세로 1.2m 크기의 임영관 현판은 현재 문루에 걸려있는 것 렸다. 이에 강릉시는 지난 2000년부터 복원 사업을 추진해 2006년엔 임영관 내 으로, 공민왕이 직접 쓴 것으로 전해진다. 객사의 정청인 전대청, 중대청, 동대청, 서헌 등을 복원하고, 2007년부터 2012년까지 아문, 동헌, 별당, 의운루 등을 복원하였다. 국보 제 51호로 지정된 강릉 임영관삼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비교적 작은 크기를 갖고 있으며, 조금 높게 두어 정면에 돌계 단을 만들었다. 또한 앞과 뒤의 기둥은 중간이 아래 위보다 긁은 배흘림 기둥으로 만들고 중간의 기둥은 네모나게 만든 후 문을 만들 어 달았는데, 현존하는 목조 건축 중 기둥의 배흘림이 가장 크고 심한 편에 속한다. 또한 기둥 위에만 공포가 위치한 주심포 양식으 로 겉으로는 소박하고 단정하게 보이지만, 그 세부는 정교하고 세련되어 고려 시대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안동 봉정사극락전, 영주 부석사무량수전, 예산 수덕사대웅전 등과 함께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이지만, 사찰 건축물이 아닌 건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임영관삼문 원래 명칭은 강릉객사물 이었으나, 2010년 4월에 임영관삼문 으로 개칭되었다. 임영관삼문 측면 측면에서 보면 약간 솟음을 하고 있는 단층 맞배지붕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나라에서 세운 지방교육기관, 강릉향교 강릉시 교동에 있는 강릉향교는 고려 충선왕 5년인 1313년에 강원도의 안무사였던 김승민이 선현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 의 교화를 위해 설립한 향교이다. 1411년(태종 11) 불타서 사라지자 1413년에 이맹상이라는 인물이 강릉 지역의 뜻 있는 인물 68인과 함께 힘을 모아 다시 세웠다. 이후 여러 번의 수리를 거쳤으나 다행 히 6 25 전쟁에도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아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동재, 서재, 서 무, 내신문, 교직사, 기타 부속건물 등이 있으며, 경내에 명륜중 고 등학교가 있다. 보통 향교 건물은 크게 선현에 제사지내는 배향 공간과 가르치는 교육 공간으로 나누어지며, 두 공간 사이는 담을 쌓아 구분하는 것 이 일반적이다. 강릉향교의 경우에는 비교적 경사가 심한 땅에 두 강릉향교 전경 41
개의 단을 조성하여 아랫단에는 교육 공간, 윗단에는 배향 공간을 두었다. 배향 공간에는 공자의 사당인 대성전( 大 成 展 )을 중심으로 그 앞 좌우에 동무( 東 廡 )와 서무( 西 廡 )가 있고 이를 연결하는 회랑이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등 네 명 의 성인( 四 聖 ), 공자의 수제자 열 명( 十 哲 ), 송나라 6현( 宋 朝 六 賢 )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동무와 서무에는 공자의 문하 72 현( 孔 門 七 十 二 賢 ), 한 당 송 원나라의 22현( 漢 唐 宋 元 二 十 二 賢 ), 우리나라의 18현 ( 東 國 十 八 賢 )을 모신다. 교육 공간으로는 명륜당( 明 倫 堂 )과 동재( 東 齋 ), 서재( 西 齋 )가 있는데, 2층 누대 ( 樓 臺 ) 형식의 장방형 건물인 명륜당은 스승과 학생이 모여서 교육을 한 공간이며, 동재와 서재는 학생들의 기숙사로서 명륜당을 중심으로 동서 양쪽에 대칭으로 배 치되어 있다. 교직사 천운지 동 동재 대성전 전 명 당 일각문 서 서재 재 제기고 강릉향교 대성전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는 건물로, 현재 보물 제214호로 지정되어 있다. 강릉향교 배치도 역사의 창 강릉 지역의 특성을 잘 간직하고 있는 단오제 강릉 지역은 해안이 가까워 농토가 좁아 농사를 겸하는 어촌이 많았다. 또한 강릉 서쪽에 자리잡은 대관령은 높이 800m에 달하 는 험준한 길이었기 때문에 옛날 이 고개를 넘는다는 것은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른 지방의 보편적인 단오제는 농사에서 씨 뿌리 기를 끝낸 후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천 의식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강릉단오제는 강릉에서 태어나 국사 까지 된 신라의 실존인물인 범일 국사, 정씨 여인과 신라의 김유신 장군을 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이들은 모두 죽은 다음 신처 럼 숭상되었는데 범일 국사는 대관령국사서낭신, 정씨 여인은 대 강릉단오제 중 관노가면극 관령국사여서낭신, 김유신 장군은 대관령 산신으로 강릉 지방 사람들을 보호하는 신으로 여겨진다. 강릉 사람들은 단오제를 전후한 행사를 통해 높고 험한 산을 오르고 내릴 때 안전하기를, 농사가 풍년이 들기를, 고기잡이가 잘 이루어지기를, 마을이 평안하기를 기원하며 함께 제사를 지내고 먹고 즐겼다. 강릉 단오제는 지금까지 전해지는 여러 지역 의 단오제 중에서 옛 모습이 그대로 이어져 오는 다양하고 커다란 행사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67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13 호로 지정되었고, 2005년에는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었다. 지금은 외국인도 찾아와 즐기는 큰 축제 가 되었다. 42
20 년 월 일 임영관, 강릉향교 및 단오제 학년 반 번 이름 1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향교는 배향 공간과 교육 공간으로 나뉘는데, 배향 공간의 대표적인 건물로는 공자를 비롯한 네 명의 성 인을 모시는 (가) 이/가 있으며, 교육 공간의 대표적인 건물로는 인간 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의 (나) 이/가 있다. ⑴ (가), (나)에 들어갈 건물의 명칭을 써 보자. ⑵ 위 내용을 읽고 향교를 세운 이유를 조선의 통치 이념과 관련지어 서술해 보자. 2 임영관삼문 기둥 양식의 명칭을 써 보고 동일한 양식으로 이루어진 다른 건축물도 알아 보자. 양식의 명칭 : 동일한 양식의 다른 건축물 : 3 강릉향교를 출입하는 외삼문과 내삼문의 사진을 직접 찍어 붙여 보고, 문이 세 개인 이유를 써 보자. 사진 붙이는 곳 43
속초시립박물관 발해는 698년에 고구려 장군 출신 대조영이 고구려인들과 말갈인들을 이끌고 만주 지린 성의 동모산 근처에 도읍을 정하고 세운 나라로, 중국으로부터 해동 성국 이라고 불릴 정도로 크게 발전하였다. 속초 발해역사관은 우리나라에서 유 일하게 발해의 역사에 대한 전시를 하는 곳으로, 속초시립박물관의 부속 시설이 다. 지상 1층 지하 1층으로 이루어진 역사관에는 발해의 역사와 발해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보여 주는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I 관련 교과서 단원 I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 04. 통일 신라와 발해의 발전 I 활동 목표 I 발해의 역사를 발해 유물을 통해 파악한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근거를 말할 수 있다. 출발하기 전에 알아 두기! I 위치 I 강원도 속초시 신흥2길 16(노학동 736-1) I 문의처 I _ 속초시립박물관: 033) 639-2977, 033) 639-2972~5(관리팀), 033) 639-2976~8(학예팀) I 홈페이지 I https://sokchomuse.go.kr I 특이사항 I _ 속초시립박물관 내의 부속 시설로 속초실향민문화촌, 속초발해역사관이 있음. _ 각종 교육행사 및 문화행사 진행 중(홈페이지 확인) I 체험 코스 I 실향민문화촌 발해역사관 박물관 입구 1 실향민문화촌 2 박물관 3 발해역사관 44
속초의 역사와 문화를 확인하자 2005년 11월에 개관한 속초시립박물관은 속초의 역사와 문 화를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는 박물관이다. 2개의 전시공간을 갖춘 박물관은 제1 전시실에 속초의 대표적인 청동기 시대 주 거 유적지인 조양동 선사 유적지를 비롯한 속초 지역의 민속 문화를 미니어처로 꾸며놓았으며, 제2 전시실에는 해양 문화 에 대한 민속자료가 전시되어있다. 이를 통해 속초 지방을 중 심으로 한 관동 이북 지방의 역사 자료와 생활 모습을 유물을 통해 편리하게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속초시립박물관이 주된 테마로 삼고 있는 것이 바로 실 향민의 삶이다. 속초는 6 25 전쟁으로 아픔이 많은 지역인데, 광복 이후 남북이 각각 미국과 소련의 통치로 인해 갈라지면서 북한의 영토로 편입되기도 하고, 38선이 생기며 다시 남한으 실향민문화촌 이북5도 가옥 및 6 25 전쟁 당시 월남한 피난민 가옥을 재현해 놓았다. 로 편입되기도 한 애환의 도시이다. 특히 1 4 후퇴 때 국군을 따라 피난 온 함경도 출신의 나이든 사람들이 청초호 끝에 모여 살면서 아바이마을이 형성되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바다를 터전 으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며 살았던 실향민의 애환이 서린 마을의 모습을 실향민문화촌에서 재현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개 성집, 평양집, 평안도집, 함경도집 등 이북5도 가옥 및 피난민 가옥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북식 전통가옥은 박물관 테장 이후 숙박 장소로 개방되므로 특별한 체험도 가능하다. 발해, 동모산 기슭에서 건국하다 7세기 말 당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자, 고구려 장군 출신 대조영이 고구려인과 말갈인들을 이끌고 지린 성의 동모산 근처에 도읍 을 정하고 698년에 발해를 세웠다. 이어 즉위한 무왕은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 지역의 여러 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였는데, 이 시기 발해는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기도 하였으며, 돌궐 일본 등과 연결하면서 당과 신라를 견제하였다. 이어 즉 위한 문왕은 무왕 때와는 달리 친선 관계를 맺고 당의 문물을 받 아들였으며, 상설 교통로를 개설하여 신라와도 교류하였다. 한편 발해는 인안, 대흥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중국과의 대 등한 지위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발해는 선왕 시기에 전성기를 맞아 서쪽으로는 요동 지방, 남 부여부 쪽으로는 대동강 이북과 함경도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중국으로 철리부 발해 상경 용천부 동모산 부 정리부 부터 바다 동쪽에 있는 발전한 나라 라는 뜻의 해동성국 이라고 동경 용원부 장령부 중경 현덕부 불릴 정도로 크게 발전하였다. 발해의 건국으로 고구려의 멸망 백 산 이후 잃게 된 만주 지역을 다시 우리 역사의 무대로 할 수 있게 되 었다. 또한 발해왕이 일본에 써 보낸 국서에 고구려의 옛 땅을 다 요동성 서경 록부 남경 남해부 동해 시 차지하고, 부여의 풍속을 가졌다. 라고 써 보낸 것을 통해 발해 해 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알 수 있다. 발해 지역에서 출토되는 기 발해의 5경 와, 불상, 온돌 장치, 무덤 등을 통해서도 발해의 문화가 고구려 의 문화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 강 화 강 발해의 영역 발해는 지속적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여 나갔고, 9세기 초 선왕 대 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하지만 9세기 말에 이르러 지배층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국력이 점차 약해지다가, 결국 거란족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926). 45
발해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 발해역사관 속초시립박물관에는 발해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발해역사관도 별 도의 건물에 마련되어있다. 발해역사관의 1층 전시실은 발해의 역사와 문 화를 주제로 하고 있는데, 전시실 중심에는 발해의 도읍지였던 상경성 모형 이 있고, 발해의 기와류와 불상, 토기 등도 볼 수 있다. 한편 드라마 대조영 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진이 전시되어 있으며, 드라 마에 등장하는 발해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소개도 이루어져 있다. 영상실에 서는 드라마 대조영의 주요장면을 상영하고 있다. 발해 체험실에서는 발해 의 여러 가지 옷을 입어 볼 수 있으며, 다양한 무늬의 발해 기와 문양을 직 접 도장으로 찍어 볼 수 있다. 발해역사관의 외부 지하 1층 전시실에는 실제 정효 공주 무덤 안의 모습을 그대로 재 용머리 건물 기단에 끼워 넣어 장식 현해 놓고 있다. 무덤 안 벽화에는 여러 인물이 그려져 있는데, 옷차 하였던 것으로, 벽면에 튼튼 림과 그들이 들고 있는 악기 등을 자세히 볼 수 있어 발해 사람들의 하게 끼워질 수 있도록 뒷부 분을 쐐기 모양으로 길게 깎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발해 유적의 집터와 그 주변에서는 발해 사 아내고 고정하기 위한 홈을 람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릇들이 발견되었는데, 그 종류 팠다. 상경성을 비롯한 발해 의 도성에서 몇 개가 출토되 는 쇠솥, 쇠칼, 놋숟가락, 보시기, 단지, 접시, 시루, 독 등 다양하게 었지만 형태와 조각 기법은 거의 같다. 나타나 있다. 또한 전시된 유물을 통해 발해의 복식 문화가 고구려 복식 문화와 발해 건국 이전부터 발해 영역의 토착 세력이었던 말갈의 복식 문화, 당 문화의 유입에 의한 새로운 요소들이 복합적으 로 반영되어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역사의 창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였는가? 중국학계는 건국자인 대조영뿐 아니라 발해의 주민이 말갈인이라 주장한다. 신 당서 에서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 粟 末 靺 鞨 )이라 한 기록을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이 다. 또한 발해의 주민 구성을 보더라도 말갈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말갈인이 발해의 건국에 참여하였고 그 주민에 포함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말갈인은 어디까지나 피지배층이었고 나라를 세우고 국정을 운영하는 지배층은 고 구려 유민이었다. 구당서 에는 발해말갈 대조영은 고려별종( 高 麗 別 種 ) 이라 하여 분명히 고구려계임을 밝히고 있어, 고구려 유민이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발해인은 누구였는가 라는 문제는 발해인이 자신의 종족 계통을 어떻게 생각하 고 있는지를 보면 분명해진다.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자신들이 고구려의 옛 터를 회복하고 부여( 夫 餘 )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하였고, 고려국왕( 高 麗 國 王 ) 혹은 천손( 天 孫 ) 이라 하여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보여 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발해인 스스로가 자신들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여겼음을 알려 주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고구려 양식을 계승한 발해 석등 46
20 년 월 일 속초 시립박물관 학년 반 번 이름 1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중국: 발해는 말갈인의 나라였으므로 중국 고대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이다. 한국: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 세운 나라로 고구려를 계승한 독립국이다. ⑴ 중국과 한국의 주장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 보자. ⑵ 밑줄 친 부분의 의미를 우리 민족의 역사와 관련지어 서술해 보자. 2 다음은 발해 역사관 안에 있는 정효 공주의 묘 복원 모습이다. 이를 바탕으로 정효 공주의 묘가 어느 나라의 양식 을 계승하고 있으며 그 근거는 무엇인지 서술해 보자. 3 다음 고구려 기와와 비슷한 발해 기와의 사진을 직접 찍어 붙여 보고, 어느 부분이 유사한지 설명해 보자. 사진 붙이는 곳 47
여기도 찾아가요! 철원군 제2 땅굴, 월정역, 철의삼각전망 대, 백마고지위령비, 노동당사 양구군 양구 백자박물관, 제4 땅굴, 피의능선 전투전적비, 양구통일관, 전쟁기념관, 선사박물관 고성군 화진포의성, 통일전망대, 이승만 대통령 화진포기념관, 6 25전쟁 체험전시관, DMZ박물관, 이기붕 별장 고성 철원 화천 양구 인제 속초 양양군 낙산사, 진전사, 동해신묘, 오산리 선사유적박물관 양양 춘천 횡성 홍천 평창 강릉 강릉시 오죽헌, 경포대, 선교장, 굴산사 지, 6 25남침전적비, 안보체험등 산로 원주시 흥법사지3층석탑 삼층석탑 원주 정선 동해 삼척 평창군 영월 태백 상원사, 월정사, 이승복기 념관, 이효석문학관 영월군 장릉, 청령포, 요선정, 김삿갓문학 관, 조선민화박물관, 정조대왕태 실비 태백시 삼척시 이사부사자공원, 죽서루 석탄박물관, 태백산 천제 48
충청권역 괴산 송시열 유적 50 해미읍성 54 논산 관촉사 58 여기도 찾아가요! 62
괴산 송시열 유적 송시열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이자 문신으로 주자학의 대가로 추앙받아 많은 인 재를 양성하였다. 괴산 송시열 유적은 그와 관련된 곳으로, 화양 서원과 만동묘 터 가 남아 있다. 화양 서원은 우암 송시열이 잠시 머물렀던 장소에 세워진 서원으로 조선 시대 학 자들이 많이 모였던 장소이다. 만동묘의 자리는 중국 명나라 황제인 신종과 의종 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던 곳이다. 만동묘 주변에는 송시열과 관련된 암서재, 하 마비, 읍궁암, 송시열 무덤 및 신도비 등이 있으며, 암서재 근처의 암벽에는 충효절 의 비례부동 이라는 글을 새긴 곳이 많이 남아있다. I 관련 교과서 단원 I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01. 조선의 건국과 통치 체제의 정비 I 활동 목표 I 종묘의 정치적 의미와 중요성을 안다. 조선 시대에 유교적 통치 이념이 어떻 게 구현되었는지 이해한다. 출발하기 전에 알아 두기! I 위치 I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길 188 외 I 문의처 I 043) 830-3432(괴산군청 문화관광과 문화예술) I 홈페이지 I http://www.goesan.go.kr/content/main-tour.php(괴산군 문화관광) I 지정 현황 I 사적 제417호(1999년 12월 9일 지정) I 체험 코스 I 암서재 만동묘 성공문 외삼문 사당 승삼문 증반청 비각 존사청 풍천제 1 풍천제 2 존사청 3 외삼문 4 비각 5 성공문 6 만동묘 7 증반청 8 승삼문 9 사당 10 암서재 50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등장하는 송시열 우암( 尤 庵 ) 송시열( 宋 時 烈, 1607~1689)은 조선 후기 정치계와 사상계를 호령했던 인물이다. 조광조와 더불어 조선을 유교의 나라로 만든 장본인이었던 그는 우리나라 학자 중 자( 子 ) 자가 붙은 유일한 인물로 역사상 가장 방대한 문집인 일명 송자대전( 宋 子 大 全 ) 을 남겼다. 송시열은 보수적인 서인, 특히 노론의 입장을 대변하여 청나라에게 망한 명나라를 계승하고 병자호란으로 우리나라에게 씻을 수 없는 굴욕을 주었던 청에게 복수하는 것이 국가 정책의 기조 가 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안정된 국제 질서를 무력으로 파괴한 청나라에게 굴복할 수 없다는 국민 정서에 기초한 북벌론과, 명나라가 멸망한 상황에서 중화 문화를 계승 발전시킬 나라는 이 제 조선뿐이라는 자의식에 기초한 존주론이 구체적인 방법이었다. 존주론은 국민단합과 조선 문 화 수호의 논리로 전개되고 마침내 조선중화주의로 발전하였다. 그것은 성리학에 입각한 유교적 명분론의 표현임과 동시에 양란 이후 조선을 다시 세우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국가 기강의 확립과 송시열 민생의 안정을 위한 강력한 통치 이념의 필요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조선을 다시 세우는 방향 송시열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개개인 및 시 에 있어서 그는 봉건 국가의 틀을 유지 강화하는 가운데 그 운영을 개선하여 양란 이후의 사회적 대마다 다르지만, 그가 조선 사회에 끼친 영 향력이 컸다는 사실만은 이의가 없을 것이다. 모순에 대처해나가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 에 그 이름이 3천 번 이나 등장하며, 사약을 받고 죽었음에도 불구 그러나 이런 송시열의 생각은 정치적으로는 서인 노론 중심, 사상적으로는 성리학 유일주의에 하고 유교의 대가들만이 오른다는 문묘에 배 빠져 그를 권력투쟁의 중심에 서게끔 하였다. 첫 번째의 예송 논쟁에서 그가 주장한 기년설(만 1 향되었으며, 전국 23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이 영정은 1683년에 송시열 자신이 자신 스 년)이 관철되면서 남인을 제거하여 서인의 지도자로서 자리를 굳혔으나, 두 번째 예송 논쟁에서 스로를 경계하는 사자성어를 써 넣은 것인데, 이후 정조가 즉위 후 친히 이 영정에다가 어 그가 주장한 대공설(9개월)이 남인에 밀려 채택되지 못하면서 지방으로 유배되었다. 6년 뒤 1680 제시를 남겼다. 중앙 상단의 글이 정조의 친 년에 남인이 실각하자 다시 벼슬에 오르기도 했으나 그 무렵 제자였던 윤증과의 감정 대립이 악 필 어필이다. 화되어, 서인이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과 송시열을 수장으로 한 노론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의 화양동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는데, 1689년에 숙의 장씨가 아들(훗날의 경종)을 낳자 원자의 호칭 을 부여하는 문제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재집권하였다. 이때 송시열은 왕세자 책봉이 시기상조라며 반대하다가 제주도로 유배되 었고, 숙종이 내린 사약을 마시고 생애를 마감하였다. 이때 자손에게 남긴 친필유서가 아직도 전해지고 있다. 송시열의 유언으로 만동묘를 세우다 화양동 계곡은 원래 청주군 청천면 지역으로 황양목이 많아 황 양동 이라 불리었다. 그러다 효종 때 이르러 우암 송시열이 이곳 으로 내려와 살면서 화양동 으로 고쳐 불렀다. 송시열이 이곳에 은거해 들어와 산세를 살펴보니, 계곡을 따라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아홉 구비 풍광에 매우 감탄하여 이곳을 중 국 무이구곡의 이름을 따 화양구곡이라 불렀다고 한다. 벼슬에서 물러난 송시열은 곧바로 이 화양동에 들어앉아 암서재를 지어 글 을 읽으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송시열은 사약을 받으면서 제자들 에게 화양동에 만동묘를 세우도록 하였는데, 만동묘는 이 유언에 따라 권상하 등이 신종(만력제, 왜란 때 조선을 도움)과 의종(숭정 제, 명 마지막 황제)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1703년(숙종 29) 읍궁 암 남쪽에 북향하여 지은 것이다. 만동묘 숙종 20년(1694)에 경술환국으로 노론이 다시 실권을 쥐면서 송시열은 복권되었다. 이때부터 전국 각지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많이 세워졌고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서원이 화양 서원이다. 건설 당시부터 소론의 반대로 서원 건립이 중단될 뻔하였고, 사액( 賜 額 ) 51
을 받을 때에도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그 때마다 노론측의 강경한 요 구와 왕의 특별 배려로 서원의 유지가 허용되었다. 영조 때 노론의 일당전제가 이루어지자 노론의 본거지였던 화양 서원은 그 위세가 날로 더하였으며, 이후 여기서 발행하는 화양묵패( 華 陽 墨 牌 ) 는 관령 을 능가할 정도였다고 한다. 대부분의 집이나 사찰 사당 서당이 햇볕을 받는 동향이나 남향 또는 동남향으로 짓는데 비해 화양 서원과 만동묘 사당을 굳이 북향 하여 지은 것은 중화 문화를 숭상하는 성리학적 가치에 충실하고자 함이었다. 조선 후기에 화양 서원과 만동묘는 노론의 상징이 되었고, 이후 노론 주도의 정치를 타파하고자 했던 흥선 대원군이 서원 철폐 과정에서 만동묘와 화양 서원을 철거해 버렸다. 화양 서원 만동묘 터 주변에는 송시열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화양구곡의 암서재와 하마비, 효종의 제삿날 송시열이 엎으려 통곡하였다고 전 해지는 읍궁암, 묘소 및 만동묘정비, 화양 서원 묘정비 등이 남아있다. 또한 암서재 근처 암벽에는 충효절의( 忠 孝 節 義 ), 비례부동( 非 禮 不 動 ) 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암벽이 있다. 암서재 글자가 새겨진 암벽 역사의 창 송시열에 대한 평가 송시열은 양극단의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송시열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청에 굴복한 조선이 패배 의식에 젖어 있는 상황을 극복하고자 의식개혁의 일환으로 북벌론을 주창한 점을 높이 평가한다. 체념적 순응의 삶에 기울어져 있을 때 마땅히 지향하고 추구할 가치의 향방을 제시하고 추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또한 송시열이 정치 경제적 개혁으로 대동법, 향촌안 정책, 노비종모법 등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는 점도 긍정적 평가의 근거로 든다. 또한 그의 영향력이 이후 200년간 지속되었 다는 사실은 백성이 국가의 근본 라는 유학 정신에 기반한 그의 개혁성이 폭넓은 지지를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을 위시한 비판론자들은 송시열이 이미 조선에서 그 기능을 다한 주자학을 정치에 어긋나게 적용해 조선 사회의 비극을 잉태했으며, 이는 시대착오적인 소중화 사상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당시 시대의 변화 속에서 그가 중요시 여긴 것은 사대부라는 계급의 이익이었고, 서인 노론이라는 당의 이익이었다. 이를 위 해 농민과 여성들은 억압받아야 했고, 심지어 송시열은 본관이 다르더라도 동성( 同 姓 ) 간에는 결혼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결국 그의 당인 노론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정권을 잡았으나 이는 백성들의 나라가 아니라 그들의 나라에 불과했다고 주장한다. 52
괴산 송시열 유적 학년 반 번 이름 20 년 월 일 1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원자정호 문제로 숙종에게 사사받은 송시열은 그의 제자 권상하 등에게 신종(만력제, 왜란 때 도움)과 의종 (숭정제, 명 마지막 황제)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을/를 세우라고 유언을 남겼다. ⑴ 빈칸에 들어갈 건물의 명칭을 써보자. ⑵ 송시열이 밑줄 친 부분과 같은 일을 지시한 이유를 서술해 보자. 2 다음은 성공문에 이르는 길이다. 계단 사이가 여느 계단보다 좁은 이유를 서술해 보자. 3 화양동이 위치한 화양구곡에는 비례부동 이라는 글자가 많이 새겨져 있다. 글자의 사진을 직접 찍어 붙여 보고, 비례부동 의 의미를 서술해 보자. 사진 붙이는 곳 53
해미읍성 읍성은 지방 주요 지역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 행정을 담당하던 성이다. 읍성 안에는 관아와 객사, 관원과 백성들의 집, 시장과 여인 숙 등이 있었다. 충청남도 서산의 해미읍성은 남아 있는 읍성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현재 사적 제116호 지정되어 있다. 또한 흥선 대원군 때에는 천주교인을 박해한 현장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크게 의미가 있다. I 관련 교과서 단원 I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01. 조선의 건국과 통치 체제의 정비 I 활동 목표 I 읍성의 기본적인 구조를 파악한다. 해미읍성의 특징을 파악하고 역사적 의미를 이해한다. 출발하기 전에 알아 두기! I 위치 및 문의처 I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16, 041) 660-2540 I 홈페이지 I _ 해미읍성역사체험축제: http://www.haemifest.com _ 서산 문화관광: http://www.seosantour.net I 특이사항 I _ 사전 신청을 통한 문화해설사 안내 가능 _ 승마체험장, 국궁체험장, 씨름장, 전통찻집, 난전 복식 연체험, 윷놀이, 굴렁쇠, 제기차기, 투호 등의 체험 가능 _ 정기적으로 전통문화공연 시행 I 체험 코스 I 지성루 자연 생태 공원 동헌 객사 청허정 1 진남문(남문) 옥사 2 진남문 주위 성벽 3 옥사 4 동헌 5 객사 잠양루 6 청허정 7 잠양루 진남문 8 자연생태공원 9 지성루 54
조선 역사의 산 증인, 해미읍성 고려 말엽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왜구가 국정의 혼란을 틈타 서해안 지방에 침입, 지역 백성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혀 왔다. 이에 대처하는 차원에서 1417년(태종 17)부터 1421년(세종 3) 사이에 당시 덕산에 있던 충청 병마절도사영( 兵 馬 節 度 使 營 )을 이곳에 옮기면서 성 이 필요하게 되자 성종 원년에 이 성을 만들기 시작하였고, 성종 22년 에 성벽이 모두 완성되었다. 해미읍성( 海 美 邑 城 )은 평시에는 행정적인 기능을 하고 비상시에는 군사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군사 중심지였다. 1652년(효종 3)에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 가기 전까지 230여 년 간 종이품( 從 二 品 )의 병마절도사가 주둔하는 충청도 군사 최고 사령부 해미읍성 전경 의 병마절도사영이었으며 호서 지방 역사의 중심 무대로서 인근의 12 성 둘레에 탱자나무 울타리를 둘렀다고 하여 탱자나무 울타리를 둘렀다고 하여 개 읍성을 관할하였다. 이 병마절도사영에는 1578년(선조 11)에 충무공 탱자나무 성 이라고도 하였으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다. 이순신 장군이 젊은 시절 10개월간 훈련원 봉사( 訓 練 院 奉 事 )로 근무한 적이 있고, 숙종 때에는 온양에 있던 충청도 좌영을 이곳으로 옮겼으며, 다산 정약용이 열흘에 걸쳐 유배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조선 중기까지 1500여명의 병사들이 군사훈련을 받던 훈련장으로 서 역할도 하다가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설된 후에는 해미현의 관아가 이 성으로 옮겨 왔다. 그 후 1914년까지 문무를 겸한 겸영 장(조선 후기 각 도의 진영장 중에서 지방 수령이 겸직한 관직)이 배치되는 호서좌영( 湖 西 左 營 )으로서 내포 지방의 군사권을 행사했 으나 일제 강점기에 군현제가 폐지되고 해미현이 서산군에 통합되면서 해미읍성의 역할은 사실상 끝나고 말았다.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해미읍성 해미읍성에서 조선 시대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은 성곽과 진남문( 鎭 南 門 )이고, 그 밖의 건물들은 옛터를 발굴하여 복 원한 것이다. 읍성의 성곽은 평지에 쌓았는데 북동쪽은 나지막한 야산에 의지하여 쌓았으므로 문을 내지 않고 동문, 서문, 남문만 만 들었다. 간단히 다듬은 산돌로 쌓았는데, 아래는 큰 돌로 쌓기 시작하여 위로 올라갈수록 차츰 작은 돌로 쌓았으며, 진남문 부근의 성곽이 옛 모습을 가장 잘 지니고 있다. 진남문( 鎭 南 門 )은 남쪽을 지키는 문이라는 뜻으로 해미읍성의 정문이기도 하다. 문루의 대석 에 황명 홍치 4년 신해에 만들었다( 皇 命 弘 治 四 年 辛 亥 造 ). 는 아홉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홍치는 명나라 효종 때 사용한 연호로, 홍 치 4년은 우리나라 성종 22년(1491)에 해당한다. 진남문 해미읍성의 남문이자 정문으로, 성문은 화강석으로 만든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고, 문 위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단층 문루가 있다. 55
치성 해미읍성에는 남문 옆으로 치성( 雉 城 )이 두 군 데 있으며, 치성 위에는 포루가 설치되어 있다. 치성은 성벽 가까이 달라붙은 적을 공격하기 위 해 타원형의 성벽보다 바깥쪽으로 내어 쌓은 시 설이다. 치성 위에 포루를 설치하여 멀리 관측하 기도 했으며, 성벽에 달라붙은 적을 옆이나 뒤에 서 공격하기도 했다.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읍성으로는 가장 잘 형태가 남아있는 것으로, 불과 몇십 년 전만해도 이 성 안에 행정 관청과 학교를 비롯한 민가 160여채가 남아있었으나, 읍성의 대표적인 표본으로 삼기 위해 사적으로 지정하면서 성안 의 민가와 학교 등을 철거하고 성벽을 보수하는 등 연차적으로 전체적인 보수 작업을 시행하였다. 그 결과 1974년에 동문과 서문이 복원되었고, 1981년에 성내 일부를 발굴한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 客 舍 )가, 아문 서쪽에서 옛 아문지가 확인되었고, 관아를 둘러쌌던 돌담의 자취도 발견되었다. 역사의 창 천주교 순교 성지 조선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천주교 신도를 심 하게 탄압하였다. 특히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 트가 덕산 소재 남연군( 南 延 君 )묘를 파헤치려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에 이 지역 천주교 신도들이 많 이 연루되었기 때문에 더욱 탄압하게 되었다. 이 때 해미읍성 관할 군현 외의 주변 천주교 신도들 도 거의 해미읍성으로 끌려와 처형되었다. 수천명 의 순교자 중 해미읍성에서 독자적으로 처형할 경 우 문제가 됨직한 70여 명만 홍성 및 공주 등 상급 고을로 이송하기 위한 기록이 남아 있을 뿐 일반 신자들은 심리나 기록 절차 없이 처형되었다. 해 미읍성 서쪽의 생매장 순교지에서는 순교 시 예수 마리아를 부르는 기도 소리가 진동하였고 이에 유 래되어 여숫골이라고 불린다. 호야나무 읍성 안에는 600년 정도로 추정되는 호야나무가 남아 있다. 1866년 병인사옥 때 천주교 신도들이 이 나무에 머리채를 묶여 매달려 고문과 회유를 당하다가 처형당했는데, 지금도 그때 사용된 철사가 박혔던 흔적이 남아 있다. 김대건 신부도 이곳에서 순교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나무에서 많은 천주교도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교수목( 絞 首 木 )이라 부르는데 지금은 보호수 로 지정되어 있다. 1886년 조선이 프랑스와 조약을 맺은 후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어 더 이상의 비극은 없어졌지만 그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다. 56
해미읍성 학년 반 번 이름 20 년 월 일 1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읍성의 중심에는 지방 관아의 정무가 행해지던 (가) 와/과 사신이나 출장 관원들이 머물던 숙소인 (나) (가) 이/가 있었다. 에서는 지방의 일반 행정 업무와 재판이 모두 행해졌으며, 동쪽에 있는 행정청이라는 의미로 그 렇게 불리었다. (나) 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 殿 牌 )를 두고 수령을 비롯한 관원들이 초하루와 보름 에 대궐을 바라보며 절하였다. ⑴ (가)와 (나)에 들어갈 관청을 써 보자. ⑵ 밑줄 친 부분을 참고하여 읍성의 중요한 기능을 설명해 보자. 2 진남문 아래 성돌에는 공주, 청주 등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와 같이 글씨를 새긴 이유를 설명해 보자. 3 해미읍성은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받은 곳으로 유명하다. 해미읍성 안에서 천주교 박해와 관련있 는 장소 세 곳의 사진을 직접 찍어 붙여 보자. 사진 붙이는 곳 사진 붙이는 곳 사진 붙이는 곳 57
논산 관촉사 관촉사는 968년(광종 19)에 왕명을 받은 혜명대사가 조성하기 시작하여 37년만 인 1006년(목종 9)에 완성한 사찰이다. 옛날 중국의 지안이라는 명승이 이 절에 세 워진 석조미륵보살입상을 보고 미간의 옥호에서 발생한 빛이 마치 촛불을 보는 것같이 미륵이 빛난다 하면서 예배하였는데, 이런 연유로 관촉사라는 이름이 붙 여졌다고 전해진다. 경내에는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을 비롯하여 석등 (보물 제232호), 사리탑, 연화배례석(충남유형문화재 제53호) 등이 있다. I 관련 교과서 단원 I Ⅰ. 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 02. 고려의 대외 관계와 문화 발달 I 활동 목표 I 관촉사 창건의 정치적 의미를 파악한다. 고려 불상의 특징을 이해한다. 출발하기 전에 알아 두기! I 위치 I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로 1번길 25 (관촉동) I 문의처 I 041) 736-5700~2 I 홈페이지 I http://tour.nonsan.go.k(논산시 문화관광) I 체험 코스 I 삼성각 석조미륵보살입상 명부전 배례석/삼층석탑 미륵전 석등 시주비/사적비 해우소 대웅전 요사 공양간 누각 종무소 종루 천왕문 정자 일주문 1 일주문 2 천왕문 3 종루 4 누각 5 대웅전 6 명부전 7 미륵전 8 삼층석탑 9 석등 10 석조미륵 보살입상 11 삼성각 58
논산에 관촉사를 세우다 관촉사는 968년(광종 19)에 왕명을 받은 혜명대사가 조성하기 시작하여 37년만인 1006년(목종 9)에 완성한 사찰이다. 전해지는 이 야기에 따르면 산에서 고사리를 캐던 여인이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곳으로 가보니 아이는 없고 큰 바위에서 아이우는 소리가 들 렸고, 나라에서는 그곳을 신성하다고 여겨 절을 짓게 하였다고 한다. 옛날 중국의 명승이 이곳에 들러 이 절에 세워진 석조미륵보살 입상을 보고, 미간의 옥호에서 발생하는 빛이 마치 촛불을 보는 것 같이 미륵이 빛난다. 라고 하였다고 전하는데, 여기에서 관촉사 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관촉사가 입지해 있는 논산 지역은 예로부터 중요한 곳이었다. 논산 지역은 전라도에서 북상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지역이어 서 백제의 중요 행정구역인 동방성이 이곳에 위치하였고, 백제의 명운을 건 전투인 황산벌 전투도 이곳에서 일어났다. 또한 후백제 군은 황산벌에서 전열을 재정비하여 고려군과 맞서기도 하였다. 이러한 중요성으로 인해 고려 태조는 후백제를 평정하고 나서 이곳 에 개태사를 창건하였다. 개태사는 후에 있을지도 모르는 후백제 지역에서의 반란을 막기 위해서 지리적인 요충지인 논산 지역에 창 건되었던 것이다. 또한 논산 지역은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운 곳이었다. 이 지역은 황산벌이라고 불리고 대규모의 군대가 주둔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평야 지대였다. 역사적, 지리적, 경제적인 요지이기에 광종의 명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 바로 관촉사인 것이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보물 제218호로 지정되어 있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당시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유행하였던 지방화 된 불상 양식을 대 표한다. 높이 18.2m, 귀의 길이 1.8m, 눈과 눈 사이가 1.8m, 보관의 높이가 2.43m에 이르는 이 거대한 불상은 전해지는 많은 이야 기와 함께 은진미륵 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데 전체적인 형태는 조화롭지 못한 몸의 비율, 못생긴 얼굴, 거대한 몸통 관촉사 전경 59
등 고려 시대 불상에서 흔히 표현되는 괴체화 ( 塊 體 化 )된 모습이다. 특히 두 손이 몸에 비해 크게 표현되어 있는데, 두 손을 가슴높이까지 들어 오른손은 위로 올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 고 금속으로 댄 연꽃가지를 잡고 있고, 왼손은 약간 아래로 내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어 아미타불의 중품중생인( 中 品 中 生 印 )을 나타내 는 것으로 보인다. 대좌는 따로 만들지 않고 자연석을 가져다가 그대로 사용하고 있고, 불 상 몸통의 뒷면은 정으로 가공한 흔적이 그대 관촉사 석등 로 남아있어 암면의 조각과 차이가 있다. 이 불상은 백호( 白 毫 )를 수리할 때 나온 묵기( 默 記 )에 968년에 조성되었다는 기 록이 있어, 그 즈음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는 고려 광종 때인데, 이 불 상을 조성한 광종은 각처의 호족 세력을 연합하여 연계를 맺어 세운 고려의 정권 에 법제를 정비하고 국가 체제를 마련하여 왕권 강화를 확립한 왕이었다. 그는 백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고려 시대 최대의 석불 입상으로서 은진미륵 이라고 불리지만, 남 제 및 후백제의 유민으로서의 의식이 가시지 않은 이 지역 사람들에게 고려의 강 아있는 기록이나 불상의 인상( 印 相 )으로 보면 관음보살이 분명하 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7호)과 개태사지 석불입상 력한 왕권을 과시할 상징을 필요로 하였고, 왕권의 화신으로서 그처럼 거대하고 (보물 제219호) 등과 같이 고려 초기 충청도 지방에서 유행하였던 강력한 힘을 소유한 듯이 보이는 상징물로 이 불상을 조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 불상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은진미륵은 바로 앞에 있는 미륵전에서도 볼 수 있는데, 관촉사의 미륵전에는 따로 불상을 모시지 않은 대신에 창을 내어 석조 미 륵보살입상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보물 제232호 관촉사 석등은 석조미륵보살입상 앞 쪽에 놓여있는 고려 시대의 석등이다. 높이 5.45m에 이르는 이 석등은 하대석, 간주석, 상대석의 3단으로 이루어진 받침돌 위에 2층으로 된 사각의 화사석을 놓고 다시 그 위로 지붕돌과 보주를 얹은 형태이다. 아 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 새겨진 굵직한 연꽃무늬가 두터운 편이고, 기단석의 한 변이 2m 정도로 남한에서는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국보 제12호) 다음으로 거대한 규모의 석등으로 꼽힌다. 이 석등은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석조미륵보살입상과 함께 광종 19년인 968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어, 조성 연대를 알 수 있는 고려의 석등 중 대표작이다. 역사의 창 신라와는 다른 고려의 불상 고려 불상의 가장 큰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형태의 다양화 와 크기의 대형화 라고 할 수 있다. 고려 시대에 접어들면서 불교문화는 지방의 유력자인 호족들의 후원을 얻어 신라의 서울이던 경주를 벗어 나 고려 전역으로 확대되게 된다. 불상을 사주하고 발원한 계층의 폭 이 넓어지면서 불상의 형태는 토착적인 특성을 지닌 좀 더 사람을 닮 은 친근한 모습으로 조성되기에 이른다. 또한 고려 불상의 크기가 거 대화되게 된 것은 나라가 바뀌면서 지방의 호족들이 할거하던 혼란한 시대상을 반영한 것으로 불상의 조성을 후원하던 세력들의 힘을 과시 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이외에도 고려의 불상은 신라의 불상에 비 해 세련미나 신비감이 떨어지는데 이는 9산선문의 등장과 함께 통일 파주 용미리 불상 석불 입상 신라 말기부터 전파되기 시작한 선종의 영향으로 조형물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며,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이루어진 불사라는 점과 불상의 크기가 거대화된 것도 조형미를 치밀하게 계산하지 못했던 이유가 될 것이다. 60
논산 관촉사 학년 반 번 이름 20 년 월 일 1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가) 지역은 백제의 중요한 거점이자 후백제와의 마지막 전투가 있었던 중요한 요충지였다. 또한 경 작지가 많고 논의 비율이 다른 곳보다 높아,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곳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광종은 (가) 지역에 관촉사를 창건하였다. ⑴ (가)에 들어갈 지역을 써 보자. ⑵ 밑줄 친 부분을 왕권 강화와 연관지어 서술해 보자. 2 다음은 관촉사 5층 석탑 앞에 있는 돌이다. 이 돌의 명칭을 쓰고, 이 돌의 용도를 추론하여 써 보자. 3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쓰고 있는 관의 사진을 직접 찍어 붙여 보고, 관을 쓰고 있는 이유를 조사해 보자. 사진 붙이는 곳 61
여기도 찾아가요! 당진시, 예산군 솔뫼성지, 수덕사, 남연군묘, 임존성, 추사 고택, 한국고건축 박물관, 충의사 충주시 미륵리사지, 중원고구려 비, 탄금대, 선사유적박물 관, 고구려전시관, 충렬사 제천시 청풍문화재단지, 의림지, 박달재 서산시, 홍성군 해미읍성, 가야산, 간월도, 김 좌진 생가지, 한용운 생가지 천안시, 아산시 독립기념관, 유관순열사 유적지, 현충사, 외암민속 마을, 맹사성 고택 단양군 도담삼봉, 단양신라 적성비, 적성, 온달 산성 충주 제천 태안 서산 당진 홍성 예산 청양 아산 천안 연기 공주 계룡 진천 청주 청원 음성 증평 보은 괴산 단양 괴산군 송시열 유적, 충민사, 홍범식 고택 공주시, 연기군 무령왕릉, 공산성, 갑사, 동학사, 마곡사, 국립공주 박물관, 운주산성 보령 서천 부여 논산 화성 금산 옥천 영동 청주시, 청원군 상당산성, 청주 고인쇄박물 관, 청남대 보령시, 청양군, 서천군 성주사지, 칠갑산, 이상재선 생생가 영동군 영동난계박물관 보은군 법주사, 순조대왕태실 부여군 부소산, 정림사지, 백제왕릉 원, 궁남지, 국립부여박물관, 무량사 논산시 관촉사, 계백장군묘소, 쌍계사, 개태사 62
전라권역 군산 근대 문화 유적 64 정읍 동학 농민 운동 유적 68 화순 고인돌 유적과 운주사 72 여기도 찾아가요! 76
군산 근대 문화 유적 군산은 근대 문화 도시로,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부산, 원산, 인천, 목포, 진 남포, 마산에 이어 1899년 5월 1일에 개항된 항구 도시다. 다른 개항 항구와는 달 리 오직 쌀 수출을 근간으로 하는 일본 상공인들의 경제적 중심지로, 호남, 충청 의 쌀은 일본으로 강제 수출되는 등 일본의 쌀 부족을 보충했던 역사적 아픔이 군 산에 서려 있다. 이런 군산의 모습을 군산 근대 문화 역사의 거리와 군산근대역사 박물관에서 잘 보여 주고 있다. I 관련 교과서 단원 I Ⅵ.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민족 운동의 전개 02. 1910~1920년대 일제의 식민지 지 배 정책 I 활동 목표 I 일제 강점기 군산의 역할을 파악한다. 군산을 통해 일제 강점기의 시대 상황을 이해한다. 출발하기 전에 알아 두기! I 위치 및 홈페이지 I _ 동국사: 전북 군산시 금광동 135-1번지, http://www.dongguksa.or.kr _ 신흥동 일본식 가옥: 전북 군산시 신흥동 58-2 _ 구 조선은행: 전북 군산시 해망로 214 _ 구 일본 제18 은행: 전북 군산시 해망로 230 _ 구 군산세관: 전북 군산시 해망로 244-7 _ 내항 부잔교: 전북 군산시 장미동 _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전라북도 군산시 해망로 240, http://museum.gunsan.go.kr I 문의처 I 063) 288-0105(전북 문화관광도우미), 063) 450-6110(군산시 관광진흥과), 063) 443-8283(군산근대역사박물관) I 체험 코스 I 구 군산세관 군산 내항 해망굴 신흥 교회 구 일본 제18 은행 군산근대역사 박물관 내항 사거리 구 조선은행 내항 부잔교 신흥동 일본식 가옥 동국사 1 동국사 2 신흥동 일본식 가옥 3 구 군산세관 4 구 일본 제18 은행 5 군산근대역사박물관 6 구 조선 은행 7 내항 부잔교 64
군산, 일본의 수탈 기지로 선택되다 군산은 군산 마포 성진 각국 조계 장정 에 따라 1899년 5월 1일에 개항되었다. 이는 부산, 원산, 인천, 목포, 진남 포에 이어 전국 6번째였다. 조약 체결 직후 일제에 의해 군 산항 건설이 시작되었는데, 군산이 금강의 수로와 접해 있 긴 하지만 항구 도시로서 적합한 지역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여 오히려 큰 결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군산은 배후지로는 호남 평야를, 교통망으로는 금 강 수운이라는 최고의 자연적 요소들을 갖추고 있었으며, 서해와 접하였기 때문에 일본으로 물자를 수탈하기에 용이 1900년대 초기 군산항의 모습 한 지역이었다. 또한 군산은 현재 충남 논산에 있는 강경과 금강 수운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당시 강경은 평양 대구와 함께 조선 3 대 시장으로 전북 상권의 중심지였다. 군산에 남아 있는 일제의 흔적들 군산은 1900년대 초부터 1945년까지 일제 강점기의 역사가 매우 많이 남아 있는 지역이다. 특히 군산시 장미동, 월명동, 신흥동 등 군산 내항 일대를 돌아보면 일제 시대 군산항의 모습을 가깝게 느낄 수 있다. 동국사는 일본인 승려 우치다에 의해 1913년에 지어진 사찰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일본식 사찰이다. 건물 외벽에는 현대 식 창문인 미서기창이 달려 있고, 우리나라의 처마와는 달리 아무런 장식이 없는 처마가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일본 에도 시대 건축 양식을 보여 주는 이 건물은 원래 일본식 기와가 지붕에 올려져 있었고, 절 내부 바닥에도 모두 다다미가 깔려 있었다. 현재에 는 대웅전, 요사채, 종각 등이 자리하고 있는데 1913년 창건 당시에는 금강사 라는 이름이었으나 광복 이후 동국사로 사찰 이름이 바 뀌어 오늘에 이르렀다. 구 일본 제18 은행 군산 지점은 1907년에 건립된 군산 지역 최초의 은행 건물이다. 18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일제 강점기 총독부가 전국에서 18번째로 허가해 준 은행이라는 뜻이다. 이 은행에서 일본인들은 저이자로 대출받아 조선인에게 토지를 담보로 고리대금업 을 하였는데, 돈을 갚지 못한 조선 농민들은 결국 농토를 갈취당하였다. 동국사 구 일본 제18 은행 군산 지점 65
구 군산세관 구 조선은행 구 군산세관은 독일인이 설계한 유럽 양식 건축물로 서양 고전주 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현관 좌우에 방들이 연결되 어 있고, 오른쪽 복도 중간에 중앙홀로 출입하는 문이 있다. 창과 문 위쪽에 아치 형태의 장식이 있는데,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이러한 양 식의 건축물로는 현재 서울역사와 한국은행 본관이 있다. 구 군산세 관 본관 건물은 1990년대까지 실제 세관 건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보존이 가장 잘 되어있고, 근대 초기의 건축상과 세관의 발달상을 살 펴볼 수 있는 자료이기 때문에 건축사적으로도 의미가 깊다.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1923년 축조된 건물로 당시 군산에 있는 건물 중 최대 규모였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군산을 배경으로 한 채만식의 탁류 에도 등장하는 등 군산의 근대사를 보여 주는 상징적 인 건물이다. 조선은행은 1909년 대한제국의 국책은행으로 설립된 한국은행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1910년 조선과 일본 간 합병 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 총독부에 의해 조선은행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일본의 식민 지배를 위한 대표적인 금융 시설로 자리잡았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은 이러한 옛 군산의 모습과 전국 최대 근대 문화 자원을 전시한 곳이다. 특히 3층 근대생활관은 일제의 강압적 통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치열한 삶을 살았던 군산사람들의 모습 을 재현한 공간으로, 도시의 역사, 수탈의 현장, 서민들의 삶, 저항과 삶, 근대건축물, 탁본체험 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연출 공간에는 1930년대 군산의 모습을 재현하여 관람객의 이해를 돕고 있다. 역사의 창 군산이 낳은 작가, 채만식과 고은 군산은 당대 최고 문학인이었던 채만식의 고장이다. 채만식의 탁류 는 군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일제 강점기 군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채만식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기자로 일하면서 느끼게 된 역사와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자신의 문학 작품 에 그대로 표현한 특징을 가진 작가이다. 대표적인 작품이 1934년 발표한 단편 레디메이드 인생 으로, 이 작품은 지식인 실직자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는 대표작 중 하나이다. 냉소적 풍자 문학의 작품을 시도한 그는 1936년부터는 기자직을 버리고 본격 적인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고, 이후 대표작인 중편 태평천하 (1938)와 탁류 (1938)를 발표하면서 일제 강점기 모습을 잘 담아 채만식 문학관 냈다. 이러한 채만식을 기념하는 채만식 기념관이 현재 군산에 세워져 있다. 군산을 대표하는 또 다른 작가 고은은 자신의 역작이라 할 수 있는 만인보 를 2010년 4월에 30권을 마지막으로 완결판을 냈다. 승려였던 시기에 그의 시들은 허무의 정서, 생에 대한 절망, 죽음에 대한 심미적인 탐닉이 주를 이루지만, 문의 마을에 가서 를 낸 1974년부터 시대 상황에 대한 비판과 현실에 대한 투쟁의지를 담은 시들이 많이 발표되었다. 특히 만인보에는 그가 직접 경험한 일제 강점기 말기와,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 살았던 일반 대중들의 삶을 잘 표현되어 있다. 또한 그의 고향인 군산 의 모습도 시 속에 자주 등장한다. 66
20 년 월 일 군산 근대 문화 유적 학년 반 번 이름 1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군산은 일제 강점기 때 전북 지역의 식민지 수탈 기지로서 기능한 곳이다. 일제가 군산을 식민지 수탈 기지로 선정한 이유는 군산이 배후지로 (가) 을/를, 교통망으로는 (나) 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⑴ (가), (나)에 들어갈 말을 써 보자. ⑵ 밑줄 친 부분을 일제 강점기의 정책과 연관지어 구체적으로 서술해 보자. 2 다음은 군산 근대 문화 역사 거리에서 볼 수 있는 부두의 모습이다. 이곳의 명칭을 쓰고, 이 부두의 기능을 설명해 보자. 3 군산 근대 문화 역사 거리에서 일제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의 사진을 직접 찍어 붙여 보고, 이에 대해 설명해 보자. 사진 붙이는 곳 67
정읍 동학 농민 운동 유적 행정구역상 고부에 속했던 정읍은 일제 시대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을 거치면서 동학 농민 운동의 중심지로 고부권역의 일부인 태인, 정읍 등이 정읍으로 통합되었다. 정읍은 동학 농민 운동의 최고 지도자인 전봉준 김개남의 주 활동 무 대였으며, 손화중 최경선 등의 출생지이자 그들이 동학의 인맥을 맺어 나갔던 곳이다. 고부 봉기와 황토현 전투가 이곳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고부관아터, 고부 봉기의 농민군 집결 장소인 말목장터, 탐학의 상징물 인 만석보, 전봉준 고택 등 1차 봉기와 관련된 유적지가 많다. I 관련 교과서 단원 I Ⅳ. 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 03. 동학 농민 운동과 갑오개혁 I 활동 목표 I 고부 지역에서 농민 봉기가 시작된 배경을 이해한다. 동학 농민 운동 1차 봉기의 전개 과정을 파악한다. 출발하기 전에 알아 두기! I 위치 I _ 고부관아 터: 전북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현 고부초등학교 _ 동학혁명모의탑: 전북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내 _ 전봉준장군 고택: 전북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458-1 _ 만석보 유지비: 전북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17-1 _ 말목장터: 전북 정읍시 이평면 두지리 191-2 _ 황토현 전적지: 전북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산3번지 _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전북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산8번지 I 문의처 I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16, 041) 660-2540 I 홈페이지 I _ 정읍시 문화관광: http://culture.jeongeup.go.kr _ 동학농민혁명기념관: http://www.donghak.go.kr I 체험 코스 I 부안군 전봉준 장군 고택 만석보유지비 황토현 전적지 말목장터 정읍시 고부관아터 동학농민혁명기념관 동학혁명모의탑 1 만석보 유지비 2 전봉준 장군 고택 3 말목장터 고창군 담양군 순창군 4 황토현전적지 5 고부관아터(고부 초등학교) 장성군 6 동학혁명모의탑,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 7 동학농민혁명기념관 68
동학 농민 운동, 고부로부터 시작되다 오늘날 고부는 정읍시에 속한 군이지만 1894년 당시에는 정읍보다 더 세력이 컸던 곳으로, 인근 지역 쌀의 집산지이 자 상업의 중심지로 넓은 평야와 28개의 주변 촌락을 거느 린 가장 번성한 마을이었다. 이에 지방 관리들의 학정과 탐학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중앙 관리들은 뒷돈과 권세를 이용하여 서로 고부에 부임하 려고 애를 썼다. 1892년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온갖 가렴주구를 일삼았는데, 부잣집에는 공연히 시비를 걸어 부 모에게 불효하고 동기 간에 화목하지 못하다는 죄를 들어 재산을 빼앗고, 태인 현감을 지낸 아버지 조규순의 영세불 망비(永世不忘碑)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1천 냥을 갈취하기 만석보유지비 도 하였다. 이 비는 현재 피향정이라는 정자에 있다. 특히 조병갑의 학정 가운데 으뜸은 만석보를 세워 물세를 거둔 것이다. 원래 이곳 배들평[梨坪] 농민은 정읍천 아래에 민보(民洑) 를 세워 물을 댔는데, 이 보는 가뭄이 들어도 풍년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하여 예동보(광산보, 만석보라고도 함) 라고 하였다. 그러 나 조병갑은 정읍천과 태인천이 만나는 지점에 새로 보를 쌓았는데, 새로 쌓은 만석보는 너무 높아서 홍수가 들면 오히려 냇물이 넘 쳐 상류의 논이 피해를 입었다. 또한 조병갑은 이 보를 쌓기 위해 농민을 부역으로 동원하고 공사의 말구목으로 쓴다며 주인의 승낙 도 없이 큰 나무를 임의로 베어냈다. 여기에 보를 쌓은 첫해에는 세금을 걷지 않겠다던 약속을 어기고 좋은 논에는 두 말, 나쁜 논에 는 한 말을 물세 명목으로 강제로 걷어 약 700여 석을 쌓아 놓기도 하였다. 그 무렵 삼남 지방에 가뭄이 계속되어 세금을 감해 달라 고 관아로 간 농민들이 매만 맞고 나오는 일이 빈번해지자 전봉준 등 20여 명은 1893년 11월 당시 송두호의 집에 모여 조병갑의 학정 에 대한 대책을 모의하며 사발통문을 작성하였다. 이러한 때에 11월 말 익산 군수로 발령을 받은 조병갑은 뒷돈을 써 1894년 1월 다 시 고부 군수로 부임하였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전봉준 등은 미리 연락을 해 1월 10일 밤 배들평(이평)의 말목장터에 모여 다음날 새벽 고부 관아(현 고부 초등학교)를 점령하고 만석보를 부수었다. 이렇게 해서 고부 봉기가 시작되었다. 말의 목부분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말목 장터는 부안, 태인, 정읍으로 향하는 길이 만나는 삼거리에 위치한 장터로 만석보에서 3km, 고부 관아로부터 8km의 거리에 있었기 에 장날을 이용하여 농민들이 서로 연락을 주고받기 좋은 장소였다. 이 장터에는 수령이 약 180년 정도 된 감나무가 있었는데, 전봉준 장군은 이 감나무 아래에서 말목장터에 모인 농민들에게 조병 갑의 탐학과 농민 수탈 실정을 알렸다. 연설이 끝나고 전봉준이 감나무에 잠시 기대어 앉았는데, 감나무 가지가 그를 보호하려는 듯 가지를 아래로 내렸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에 이곳 주민들은 지금도 이 감나무의 감은 따지 않는다고 한다. 지방기념물 제 110호로 지정된 이 나무는 2003년 태풍 매미 때 나 무 밑동이 부러져 지금은 황토현 동학혁명기념관 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현재 새로운 감나무가 한 그루 심어져 명맥을 잇고 있다. 만석보 만석보유지비 광산보(옛보) 만석보 조감도 69 역사(64~77)전라.indd 69 13. 6. 13. 오후 2:54
황토현 전투, 동학 농민군이 관군에 맞서 최초로 승리를 거두다 황토현은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농민군이 관군을 맞아 처음으로 승리를 거둔 장소로 사적 제295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부 봉기에 놀란 정부는 조병갑을 파면하고 용안 현감이던 박원명을 고부 군 수로 내려 보냈다. 2월 말 부임한 신임 군수로부터 잘못된 부분을 고치겠다는 다짐을 들은 농민들은 농번기가 가까워오자 스스로 해 산하였다. 하지만 사건의 뒷처리를 위해 안핵사로 파견된 이용태 가 난민을 토벌한다는 이유로 살생과 방화, 약탈을 일삼자 전봉준 동학농민혁명기념관 동학 농민 운동 110주년을 맞아 2004년 5월에 개관하였다. 은 손화중, 김개남 등과 손잡고 3월 20일 무장에서 창의문을 선포 하고 다시 고부를 점령하였다. 이후 주변 고을을 차지해 갈 무렵 4 월 초 전라 감영군과 보부상패로 이루어진 연합군이 농민군을 추 격해왔다. 농민군은 이들을 황토현으로 유인하여 4월 6일 밤부터 7일 새벽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황토현 전적지는 동학 농민 운동이 동학란 등의 이름으로 폄하 되던 1950년대까지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다가, 1960년대부터 동 학 농민 운동이 반봉건 반외세의 민족 운동이었다는 역사적인 의 의가 재평가되면서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에 1963년 황토현에 동학농민혁명기념탑을 세우기 위한 동학혁명기념탑 건 립추진위원회 가 구성되었고, 그해 10월에 최초의 동학농민혁명기 념탑이 세워졌다. 이후 주위에 산재해 있는 동학 농민 운동 관련 동학농민혁명기념탑 유적에 대한 관심이 일반 국민과 학계 사이에서 높아져, 1973년에 동학 농민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최초의 탑으로 1963년에 건립되었다. 는 만석보가 있던 자리에 만석보유지비가 건립되었고, 1981년에는 전봉준의 생가가 보수되었다. 또한 1983년에는 황토현 전적지 내에 기념관이 건립되었고, 1986년에는 전봉준의 동상이 만들어졌으 며, 그 해 12월에 기념관을 개관하면서 황토현 전적지 정화 사업이 마무리되었다. 2004년에는 황토현 전적지 길 맞은편에 동학농민 혁명기념관이 세워져, 동학 농민 운동과 관련된 다양한 유물과 자료를 일반인에게 전시하고 있다. 역사의 창 동학 농민 운동을 기념하는 탑, 그 의미는? 내장저수지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 갑오농민혁명 100주년 기념 탑 이라는 이름의 탑이 서 있다. 동학 농민 운동의 100주년을 기념 하기 위해 세웠다. 화강암, 대리석, 오석( 烏 石 ) 등으로 만든 탑으 로, 주탑( 主 塔 )과 부탑( 副 塔 )으로 되어 있다. 주탑의 높이는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난 1894년을 기리기 위하여 1,894m로 하였다. 4각뿔 모양은 동학 농민 운동의 이상을 상징하고 있고, 민족 봉 기의 투철한 정신을 담아 흰 대리석을 사용하였다. 상부의 3단 금 태는 1월 고부, 3월 백산, 9월 삼례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를 형상 화하였다. 갑오농민혁명 100주년 기념탑 부탑은 직경이 85cm이고, 높이가 1,100cm인 원기둥 네 개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사 농 공 상의 4민( 四 民 ), 즉 온 백성의 평등 수평 사회를 상징하고 있다. 작가는 정읍 출신으로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바 있는 전수천이며, 준공식은 1997년 5월 11일에 가졌다. 70
20 년 월 일 정읍 동학 농민 운동 유적 학년 반 번 이름 1 빈칸에 들어갈 단어를 써 보자. 1894년 농민전쟁 역사에서 그렇게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하고 쓰러 져 간 농민군의 영혼과 넋을 위로하고 추모하려고 정읍 동학농민혁 명계승사업회가 주축이 되어 1994년 9월에 을/를 세웠 다. 사발통문이 발견된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대뫼 녹두회 관 앞에 있다. 사발통문 모양의 둘레석 안에 5m크기의 주탑과 이를 둘러싼 1~2m크기의 보조탑 32개가 있다. 보조탑은 각각 무명농민군을 상징하는 얼굴과 무기로 사용되었던 농기구 등을 새겨놓았다. 이 탑은 관 주도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시민단체와 뜻 있는 지역 주민들의 성금을 모 아 세워졌다. - 뉴스, 2006. 09. 05. 2 황토현 전적지에 있는 다음 전시물과 그에 대한 설명을 보고 물음에 답해 보자. 동학농민혁명기념탑(부분) 기념탑은 1963년에 세워졌는데, 여기에 새긴 글 자 제폭구민, 보국안민 중 보 자가 輔 가 아닌 (가) 자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 ⑴ (가) ~ (다)에 들어갈 말을 써 보자. (나) 의 영정(황토현 전적 기념관 내의 제민당) 얼굴은 서울로 압송될 당시 사진에서 따오고, 외모 는 정자관에 가죽신을 신은 도학자의 모습으로 그 려져 있다. 전봉준 동상 후면의 부조 일부(황토현 전적지) 당시 (다) 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관군 과 싸우러가는 치열한 모습이라기보다는 소풍가는 듯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아쉬움이 남는다. ⑵ 전시물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말해 보자. 3 전북 정읍의 동학 농민 운동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인상 깊게 본 유물 전시물이나 유적 사진을 직접 찍어 붙여 보 고, 느낀 점을 적어 보자. 사진 붙이는 곳 71
화순 고인돌 유적과 운주사 전남 화순군에 가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화순 고인돌 유적을 만 날 수 있다. 국가 사적 제410호로도 지정되어 있는 이 유적은 전남 화순 군에 있는 효산리와 대신리를 잇는 보검재의 양쪽 계곡 일대에 분포해 있 는데, 이곳의 고인돌은 주로 바둑판식 고인돌의 형태를 띠고 있다. 또한 전남 화순군에는 운주사가 있다. 황석영의 장길산 에 등장하기도 하는 운주사는 화순군 서남쪽의 천태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운주사의 창건 및 천불천탑의 건립은 신라 하대 도선 국사에 의해 이루졌다고 전해 진다. I 관련 교과서 단원 I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01. 선사 시대의 문화 Ⅱ. 고려 귀족 사회의 형성과 변천 04. 고려의 사상과 종교 I 활동 목표 I 세계문화유산인 화순의 고인돌 유적이 갖는 의미 를 파악한다. 운주사에 반영된 풍수지리설의 내용을 이해한다. 출발하기 전에 알아 두기! I 위치 I _ 화순 고인돌 유적: 전남 화순군 춘양면 대신리 일대/ 도곡면 효산리 일대 _ 운주사: 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20 I 홈페이지 및 문의처 I _ 남도여행길잡이: http://www.namdokorea.com _ 화순군 문화관광: http://www.hwasun.go.kr/2011/tour/culture/01/, 061) 379-3514 _ 화순고인돌 체험학습관: http://www.dolmen.or.kr _ 고인돌사랑회의 고인돌유적: http://www.dolmens.or.kr _ 운주사: http://www.unjusa.org, 061) 374-0548 I 특이사항 I _ 남도여행길잡이 홈페이지에서 관광지동영상, 테마코스 음성안내, 파노라마 사진, 설화 애니메이션, 관광가이드북, 로드뷰 등의 다양한 자료 제공 _ 화순군청 홈페이지에서 주요 탐방지를 경유하는 순환관광프로그램 운영(061) 379-3501~5) I 체험 코스 I 광주광역시 고인돌 유적 1 효산리: 괴바위, 관청바위, 달바위 2 대신리: 핑매바위, 감태바위, 대신리 발굴지 나주시 도곡면 화순군 운주사 춘양면 운주사 고인돌 유적 보성군 1 운주사9층석탑 2 칠성바위 3 와불 4 원형다층석탑 5 마애여래좌상 72
화순에 가면 세계문화유산인 고인돌 유적을 만날 수 있다 화순군의 고인돌은 1995년 능주목 학술조사 과정에서 발견되어 1998년에 사적 제410호로 지정되었다. 2000년 에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고창 강화의 고인돌 유적과 함 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화순군에는 1,600여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데, 남부의 영산강 상류 유역(지석강과 화순천)에 약 40%, 동 부의 섬진강 유역(동복천)에 약 30%가 분포되어 있다. 영 산강과 섬진강 상류의 평야 지대를 중심으로 고인돌을 만 든 사회가 형성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이 가운데 남부의 영산강과 연결된 지석강 쪽에는 사람들이 직접 탐방할 수 있도록 세계문화유산인 고인돌 유적을 정비하여 화순 고 인돌 공원 을 조성하였다. 이 공원은 전남 화순군 도곡면 화순 고인돌 유적 원경 효산리와 춘양면 대신리를 잇는 보검재의 양쪽 계곡 일대에 있다. 탐방로로는 효산리를 출발해 대신리로 넘어갈 수도 있고, 반대로 대신리에서 효산리로 넘어가면서 고인돌을 살필 수도 있다. 이 공원에는 100톤이 넘는 커다란 고인돌이 많고, 280여 톤으로 추정되 는 핑매바위 고인돌도 있다. 특히 춘양면 대신리 발굴지에서는 민무늬토기 조각, 붉은간토기 조각, 갈판과 갈돌, 반달 돌칼 등의 생 활상을 알 수 있는 유물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다수의 고인돌에 더해 선사 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유물까지 나오면 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다.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와 춘양면 대신리에 다수의 고인돌이 조성된 이유는 무엇 일까? 바로 이 지역의 암석에 그 해답이 있다. 이 지역에 흔한 암석은 응회암이다. 응회암은 용암이 녹아서 액체 상태로 있는 마그마가 지표로 나와 굳으면서 형성되 었다. 이 암석에 있는 절리( 節 理 )는 채석을 쉽게 하며 자연 상태에서는 홈 사이로 물이 들어가 풍화, 침식 작용을 빨리 진행시킨다. 화순의 고인돌을 구성하고 있는 석재는 주로 응회암이며 절리가 많이 나 있다. 이러한 암석의 특징으로 고인돌이 다수 조성될 수 있었다. 이곳 화순 고인돌 공원의 탐방로 중 특히 대신리 구간에서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핑매바위 외에도 감태바위 고인돌군처럼 땅 위로 무덤방이 드러나 있는 형태의 고 감태바위 고인돌(대신리) 인돌부터 받침돌이 없는 개석식 고인돌, 미완성의 고인돌 등 여러 형태가 모여 있는 곳도 있다. 주변의 채석장에는 덮개돌을 떼어 내 려다 만 흔적과 떼어 내려고 판 홈이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하고, 규모가 큰 여러 개의 덮개돌을 모아놓기도 하였다. I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 유적 I 고인돌은 선사 시대에 만들어진 돌무덤으로 영어로는 dolmen이라고 한다. 주로 동북아시아 지역에 밀집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전 국적으로 약 30,000여 기에 가까운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특히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은 밀집분 포도나 형식의 다양성으로 인해 고인돌의 형성 및 발전 과정의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고창 고인돌 유적 전라북도 고창군 죽림리와 도산리 일대에 걸쳐 동서로 약 1,765m 범위에 약 447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고인돌 군집 지역으로, 10톤 미만에서 300톤에 이르는 다양한 크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화순 고인돌 유적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와 춘양면 일대의 계곡을 따라 약 10km에 걸쳐 600여 기의 고인돌이 모여있다. 또한 고인돌의 축조 과정을 알 수 있는 채석장이 발견되어 당시 석재를 다루던 기술과 운반방법, 축조 방식 등을 연구할 수 있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강화 고인돌 유적 인천광역시 강화군 부근리, 삼거리, 오상리 등의 지역에 약 160여 기의 고인돌이 퍼져 있는데, 해발 100m~200m 위치까지 고인돌이 분포하 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특히 강화 부근리에 있는 탁자식 고인돌은 길이 약 6.4m, 높이 약 2.5m로 우리나라 최대의 크기이다. 73
운주사, 민중의 모습을 보다 운주사는 원래 울타리도 문도 따로 없이 천불산 다탑봉 아래 남북으로 뻗은 완만한 골 짜기 안에 탑과 돌부처만이 즐비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복원하여 일주문, 사천왕 상, 대웅전, 지장전 등을 갖추었다. 흔히 천불천탑 의 절이라 불리는 운주사의 창건은 신라 하대 도선 국사에 의해 이루어 졌다고 전해진다. 도선 국사가 풍수지리설을 바탕으로 배 모양으로 되어 있는 이곳의 지 형을 따라 배의 돛대와 사공을 상징하는 천불과 천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 한 내용을 전하는 자료인 도선국사실록 은 구한말에 쓰여진 것으로 신뢰하긴 어렵다. 다 만 중종 25년(1530)에 쓰여진 신증동국여지승람 능성현조에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으 며 절의 좌우 산마루에 석불과 석탑이 각각 1,000개 있다. 라는 기록이 있고, 인조 10년 (1632)에 발간된 능주읍지 의 내용 중 천불산 좌우 협곡에 석불과 석탑이 천 개씩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때까지는 천불과 천 탑이 실존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1940년대까지만해도 석불 213기와 석 운주사 석불 원형다층석탑(보물 제798호) 탑 30기가 운주사 내에 있었다고 전해지나, 현재에는 석탑 17기와 석불 80여 기 만 경내에 남아있어 그간 관리와 보호가 많이 소홀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9 층석탑, 석조불감, 원형다층석탑, 와불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받고 있으며, 운주사 자체는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조성 시기는 고려 중기인 12세기 정도로 추정되며 오랜 기간을 두고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조성 과정에서 절 중간부에 자리한 와불 처럼 도선 국사가 새 세상을 만들고자 하루 사이에 천불과 천탑을 만들려다 동이 터 세우지 못했다는 설화를 만들어내기도 하 였다. 여기에 착안하여 황석영은 장길산 에서 문학적 상상력을 더해 길산이 노비들과 새 세상을 꿈꾸는 이야기로 만들기도 하였다. 역사의 창 핑매바위에 얽힌 마고할미 이야기 화순 고인돌 유적 중 대신리에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거대한 핑매바위 고인돌이 있다. 핑매바위는 무게가 200톤이 훨씬 넘 는 거대한 크기를 자랑한다. 핑매 에서 핑 은 팽개치다, 매 는 마고 라는 뜻으로 여기에는 마고할미 전설이 어우러져 있다. 핑매바위 고인돌은 덮개돌 아랫부분을 일부러 둥그스름하게 다듬은 다음 그 아래에 고임돌을 둘러 일정한 공간을 만들어 두었다. 핑매바위 뒤로 보이는 바위의 결은 수평으로 나 있는 것에 비해 핑매바위의 결은 비스듬한데 이는 다른 장소에서 옮 겨온 흔적임을 알 수 있다. 마고할미 이야기는 우리나라에 전하는 창세 신화이다. 마고 핑매바위 는 지구의 어머니를 뜻한다. 세상이 처음 시작될 때, 해와 달은 하늘 위에 숨어 있고 별은 제멋대로 돌아다녀 낮과 밤도 구분 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엄청난 거인인 마고할미가 자고 일어나 두 팔을 펴고 기지개를 켜자 하늘이 우지직 금이 갔다. 그 틈으 로 해와 달이 얼굴을 내밀었다. 빛을 보게 된 사람들은 매우 기뻐하였다. 라는 내용이다. 이러한 마고할미가 운주사에 천불천탑을 쌓기 위해 치마에 돌을 넣어 가다가 닭이 울자 버린 바위라고 하며, 윗 부분의 구멍 은 마고할미가 오줌을 누어서 만들어졌다고도 한다. 74
화순 고인돌 유적과 운주사 학년 반 번 이름 20 년 월 일 1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운주사에서 흔히 (이)라 불리는 석불 2개는 실제로는 미처 일으켜 세우지 못한 부처들이다. 손의 모양으로 보아 각각 비로자나불좌 상과 석가여래불입상이다. 이들이 일어나는 날 세상이 바뀐다는 설화가 후대에 생겨나기도 했는데, 애초의 의도대로 이 거대한 불상들을 세웠더 라면 단연 운주사의 중심 부처가 되었을 것이다. 2 (가) ~ (다)를 보고 물음에 답해 보자. (가) (나) (다) 덮개돌 덮개돌 덮개돌 돌무지 무덤방 굄돌 굄돌 뚜껑돌 무덤방 돌무지 무덤방 덮개돌 밑에 받침돌과 막음돌을 두어 무덤방을 만 들었다. 따라서 무덤방이 지상에 있다. 또한 받침돌 (굄돌)로는 넓고 큰 판돌을 사용한다. 무덤방은 지하에 있으며 무덤방 위를 뚜껑돌로 덮었 다. 덮개돌은 그 위에 올렸다. 덮개돌 밑에 받침돌(굄 돌)로 여러 개의 기둥 둥근 모양의 돌을 사용한다. 무덤방이 지하에 있으며 받침돌과 뚜껑돌 없이 덮 개돌을 사용하여 직접 덮었다. ⑴ (가) ~ (다)에 해당하는 고인돌 형태의 명칭을 써 보자. ⑵ 위 자료를 바탕으로 고인돌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를 서술해 보자. 3 화순 고인돌 유적과 운주사를 돌아보면서 인상 깊게 본 유물이나 유적 사진을 직접 찍어 붙여 보고, 느낀 점을 적 어 보자. 사진 붙이는 곳 75
여기도 찾아가요! 김제시 금산사, 벽골제, 아리랑문학관 부안군 내소사, 개암사, 백산성, 반계 선생유적지 고창군 고창읍성, 고인돌유적지 영광군 백제불교 최초도래지, 불 갑사, 기독교인 순교지 신안 진도 목포 영광 무안 함평 고창 해남 영암 부안 나주 군산 장성 강진 광주 김제 정읍 장흥 담양 익산 화순 전주 순창 보성 완주 임실 곡성 익산시 미륵사지 고흥 순천 진안 남원 구례 장수 광양 여수 전주시 한옥마을, 전동성당, 전주읍 성, 전주향교, 견훤왕궁터 무주 남원시 광한루원, 만복지사, 국립민속 국악원, 오리정, 황산대첩비지, 실상사 구례군 화엄사, 노고단 광주광역시 국립 5 18 민주묘지, 광주 향교, 구 전남도청, 5 18 기념공원 완도 해남군 고산 윤선도 유적지, 대 흥사, 미황사 강진군 고려청자도요지, 무위사, 백련 사, 강진 정약용 유적 여수시 진남관, 충민사 76
경상권역 영주 소수 서원 78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천전리 각석 82 김해 가야 유적지 86 독도 90 여기도 찾아가요! 94
영주 소수 서원 사적 제55호인 소수 서원( 紹 修 書 院 )은 1543년(중종 38) 풍기 군수 주세붕이 건립 한 서원으로, 사당에는 안향을 배향하였다. 1550년(명종 5)에 백운동 소수 서원 이 라 명명되며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임과 동시에 최초로 사액을 받은 서원이 되었다. 서원은 선현에 대한 제사(제향)와 성리학에 대한 연구(강학)를 겸하는 기관으로, 소수 서원에는 제향 공간으로 문성공묘가 있고, 강학 공간으로 명륜당, 직방재와 일 신재, 학구재, 지락재 등이 있다. I 관련 교과서 단원 I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02. 성리학적 유교 사회의 성장 I 활동 목표 I 서원의 등장 배경과 기능을 알아본다. 소수 서원이 가진 의미를 파악한다. 출발하기 전에 알아 두기! I 위치 I 경북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740 (내죽리 152-8) I 문의처 I 054) 639-6259(관광안내실) I 홈페이지 I _ 영주시청 문화관광: http://tour.yeongju.go.kr _ 소수 서원 시립박물관: http://www.seonbichon.or.kr _ 선비촌: http://www.sunbichon.net I 특이사항 I _ 소수 서원, 소수박물관, 선비촌이 모두 인근에 위치하고 있어 하나의 답사코스로 구성 가능 - 홈페이지를 통해 각종 교육 및 체험 활동 신청 가능 I 체험 코스 I 사당(문성공묘) 장서각 전사청 영정각 명륜당(강당) 경렴정 지락재 학구재 1 경렴정 2 제향 공간: 사당(문 직방재, 일신재 성공묘) 3 강학 공간: 명륜당 (강당) 직방재와 일신재 영정각 78
사림의 지방 근거지에 서원을 세우다 서원은 조선 시대 사림의 사상적 본거지이자 지방의 활동 기반으로 성리학 연구[강학( 講 學 )]와 선현에 대한 제사[제향 ( 祭 享 )]의 두 기능을 담당하였다. 서원은 강학과 제향의 기능을 한 점에서는 관학( 官 學 )과 차이가 없었지만 제향의 대상이 공자와 그의 제자가 아닌 우리나라 선현이라는 점, 중앙 정부가 아닌 사림이 설립 주 체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중앙의 4부 학당 성균관, 지 방의 향교 등 관학을 중심으로 한 조선 초기의 교육 제도 는 중기를 지나면서 세조 때 집현전 폐지, 연산군 때 성균관 의 황폐화 등으로 국가 지원이 줄어들면서 점차 교육 기능 을 잃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방의 사림들이 개인적으로 서재( 書 齋 ), 정사( 精 舍 ) 등의 사학( 私 學 )을 세워 학문을 보급 소수 서원 전경 소수 서원은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살아남은 47개소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였으며, 또 교육과 제사를 겸한 서원을 설립하였다. 선조 때에 이르러서는 사림 세력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서원이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서원은 백운동 서원으로부터 비롯되었다. 1541년(중종 36)에 풍기 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은 이듬해 평소에 흠모하 던 회헌( 晦 軒 ) 안향( 安 珦 )의 연고지에 안향의 사당(문성공 소수 서원의 현판 묘)을 세웠다. 이후 사당 앞에 향교 건물을 옮겨 재실(명륜 명종이 직접 써서 하사한 것이다. 당)을 마련하여 선비들의 배움터를 만들었다. 서원의 시설 을 갖추면서 주세붕은 안향의 영정을 서울의 종가집에서 옮 겨다 봉안하였으며 1543년(중종 38) 중국에서 주자가 세운 백록동 서원을 본떠 백운동 서원 이라 하였다. 그 후 퇴계 이황이 풍기 군수로 부임하면서 1550년(명종 5)에 왕에게 진언을 올려 紹 修 書 院 (소수 서원) 이라는 명종 친필의 현판 과 함께 4서5경, 성리대전 등의 서적과 노비를 하사받았다. 소수 란 말은 이미 무너진 교학( 敎 學 )을 다시 이어 닦게 하 라는 의미이다. 소수 서원은 사당에서 출발하여 교육 기관이 된 만큼 그 배치가 엄격한 규칙에 의하기보다는 자연발생적으로 이루 어졌다. 서원의 배치는 앞쪽에 강당, 뒤쪽에 사당이 위치하 경자바위 는 전학후묘( 前 學 後 廟 )의 방식이 일반적인데, 소수 서원은 강학 장소인 명륜당을 중심으로 직방재, 학구재, 지락재 등이 자유롭게 자 연 경관에 맞게 어우러져 있다. 또한 전각을 세우는 데에 어떤 중심축을 따로 설정하지 않았다. 소수 서원 입구에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고, 그 지점에서부터 지면이 한 단 높아져있어서 여기서부터가 서원의 경내임을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입구 오른쪽에는 경렴정( 景 濂 亭 )이라는 정자가 이곳을 흐르는 계곡인 죽계를 끼고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원생 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곳이다. 또한 경렴정의 맞은 편에 있는 바위에는 성리학에서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수양론의 핵심 인 경( 敬 ) 이라는 글자가 붉게 새겨져 있는데 이는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창건하고 쓴 것이다. 또한 그 위에는 퇴계 이황이 풍기군 수로 있을 때 새긴 백운동( 白 雲 洞 ) 이라는 흰 글자가 남겨져 있다. 이황은 또한 이 바위 옆에 취한대라는 정자를 만들어 풍류를 즐겼 다고 전해진다. 서원의 안쪽에는 안향의 사당인 문성공묘, 강당인 명륜당, 교수의 숙소인 일신재와 직방재, 유생들이 공부하며 기거한 학구재와 지락재를 비롯하여, 책을 보관하던 장서각, 제수를 차리던 전사청 등이 남아있다. 79
소수 서원에서 얀향의 흔적을 찾다 안향( 安 珦, 1243~1306)은 송나라의 주자를 추모하여 주자의 호인 회암( 晦 菴 )을 모방하여 호를 회 헌( 晦 軒 )이라 지을 만큼 주자학에 심취하였다. 그는 고려의 왕과 원나라 공주이기도 한 왕비를 호위하 여 따르는 직책을 맡아 원으로 가게 되었고, 1290년(충렬왕 16)에 원에서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접하였다. 거기에서 우연히 주자가 쓴 주자전서 를 읽고 매료되어 이를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초상을 그려 귀국하였는데, 이로써 국내에 성리학이 전래되었다. 안향이 죽은 뒤, 1318년에 충숙 왕은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궁 중의 원나라 화공에게 명하여 그의 영정을 그리게 하였다. 현재 영정 회헌영정 각에 모신 안향의 영정은 그 그림 회헌 안향을 그린 영정이다. 원본은 을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 소수박물관 수장고에 있고, 영정각에 있는 그림은 복사본이다. 으로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 다. 사후에 그려진 영정이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에 따 라 그린 것으로 영정에서 그의 품성이 엿보인다. 온화하면서도 결 단력이 있어 보이는 매우 단단한 인상이다. 아울러 두건을 쓰고 영정각 서원 내 영정을 모시기 위한 건물이다.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보물 제485호), 주세붕 영정 붉은 겉옷을 입은 모습에서는 당시 학자의 풍모도 느껴진다. (보물 제717호) 등도 있다. 안향을 모신 사당인 문성공묘에는 안축(1287~1348)과 그의 아 우인 안보(1302~1357)가 1544년(중종 39)에, 그리고 주세붕이 1633년(인조 11)에 추가로 배향되었다. 안축은 안향의 삼종손(칠촌조 카의 아들)으로 그가 지은 경기체가인 관동별곡 과 죽계별곡 은 국문학사상 귀중한 사료이다. 역사의 창 서원 입구에 당간지주가 있는 까닭은? 소수 서원의 입구에 들어서기 전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당간지주 이다. 이는 절 입구에 깃 발을 세우기 위해 만든 버팀 기둥으로 불교와 관련 있다. 성리학의 공간인 서원 입구에 당간 지주가 서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소수 서원 자리에는 본래 숙수사( 宿 水 寺 )라는 통일 신라 시대의 절이 있었다. 이 숙수사의 법통이 언제 끊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안향이 숙수사에서 공부하여 18세에 과거에 급제하 였고, 그의 아들과 손자도 이곳에서 수학하였다고 전해진다. 절의 흔적은 이 당간지주나 소 수 서원 사료전시관 마당에 모아놓은 석등 석탑으로 확인할 수 있다. 1953년에는 소수 서원 의 뒷쪽으로 소수중학교 운동장을 마련하다 손바닥만한 금동불 수십 구가 발견되기도 했다. 조선의 통치 원리가 유교로 바뀌면서 세력을 잃은 불교문화는 그런 식으로 땅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불교의 흔적인 숙수사지 당간지주는 높이 3.65m로 두 지주가 곧게 뻗어 있으며 바깥면 중 앙에 세로로 띠선을 새겼다. 만들어진 형식으로 보아 통일 신라 시대의 유물로 짐작되며 보 물 제59호로 지정되어 있다. 숙수사지 당간지주 80
영주 소수 서원 학년 반 번 이름 20 년 월 일 1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소수 서원을 들어서면 먼저 강당인 (가) 와/과 마주하게 된다. 이 건물은 넓은 마루를 중심으로 온돌방이 달려 있는데, (나) (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어 소수 서원의 원래 이름을 확 인할 수 있다. 이 강당은 동향을 하고 있으며, 규모가 정면 4칸, 측 면 3칸인 팔작기와집이다. 강당 안의 대청 북쪽면에는 명종의 친 필인 (다) (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어 이 서원의 중심 건물임을 말해 준다. ⑴ (가) ~ (다)에 들어갈 알맞은 말을 써 보자. ⑵ (가) 건물의 기능을 써 보자. 2 다음의 건물과 설명을 보고 물음에 답해 보자. (가) (나) 안향을 모신 사묘( 祠 廟 )로 출발했음을 알 수 있는 사당 공간이다. 이 서원 안에 서 유일하게 단청을 칠했다. 이 사당에는 안향과 함께 안보, 안축, 주세붕을 함 께 모셔 배향하고 있다. 선비들이 기거한 동재와 서재이다. 현판은 둘 있지만 집은 한 채로 이어져 있 다. 명륜당 바로 뒤에 있으며 동향인 명륜당과 달리 남향을 하고 있다. ⑴ (가), (나) 건물의 명칭을 써 보자. ⑵ (가) 건물을 통해 알 수 있는 서원의 기능을 서술해 보자. 3 영주의 소수 서원을 돌아보면서 인상 깊게 본 유물이나 건물 사진을 직접 찍어 붙여 보고, 느낀 점을 적어 보자. 사진 붙이는 곳 81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천전리 각석 1970년 12월 24일 울산 지역 불교 유적 조사를 실시하고 있던 동 국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은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진 반고 사지( 盤 皐 寺 址 )를 찾기 위해 반구대 마을을 방문하였다. 이때 마을주 민 최경환씨의 안내로 천전리 각석을 발견하여 국내 최초로 암각화 가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이듬해 1971년 12월 25일 문명대 교수 등이 천전리 각석을 방문하였다가 마을주민의 도움으로 사연댐 상류 지역의 바위면을 조사하다가 대곡리의 반구대 암각화를 발견하 게 되었다. 이후 전국에 걸쳐 암각화가 발견되었으며 현재 약 20여 곳의 유적이 확인되고 있다. I 관련 교과서 단원 I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01. 선사 시대의 문화 I 활동 목표 I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의 의미를 파 악한다. 현재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가 안고 있는 과제를 이해한다. 출발하기 전에 알아 두기! I 위치 I _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반구대안길 285 _ 울산암각화박물관: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반구대안길 254 _ 울주 천전리 각석: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산210번지 _ 울산대곡박물관: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서하천전로 257 I 홈페이지 및 문의처 I _ 울주문화관광: http://tour.ulju.ulsan.kr, 052) 229-7644 _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http://www.ulju.ulsan.kr/bangudae _ 울산암각화박물관: http://bangudae.ulsan.go.kr, 052) 229-6678 _ 울산대곡박물관: http://dgmuseum.ulsan.go.kr, 052) 229-6638~9 I 특이사항 I 울산대곡박물관 홈페이지를 통해 다양한 교육 및 체험활동 신청 가능 I 체험 코스 I 천전리 울산대곡박물관 대곡리 울주군 울주 천전리 각석 1 울산대곡박물관 울산암각화 박물관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2 울주 천전리 각석 3 울산암각화박물관 4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82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에는 세계 유일의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우리나라 선사 시대의 바위그림은 지금으로부터 약 3천년 이전의 그림이다. 이러한 바위그림은 현재 전 국적으로 10여 점 정도 발견되었는데 울주 대곡리 반 구대 암각화가 가장 유명하다.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 기 시대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반구대 암각 화는 국보 제285호로,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다. 태화강의 지류인 대곡천의 건너 각단에 위치하고 있는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에서 그림이 집중적 으로 새겨진 주요 암면의 크기는 너비 약 10m, 높이 약 3m이며, 좌우에서도 10여개의 암면에서 형상들이 발견되고 있다. 그림 위에 다시 새기는 경우도 있고, 대곡천에 자리잡은 반구대 암각화 오랜 세월동안 비바람에 마모되어 내용을 알기 어려운 부분도 많 이 있다. 또한 바위 자체가 북향이고, 그림이 가장 많이 새겨진 중심 바위면 윗부분도 약간 돌출되어 있어서 한낮에도 선명하게 그림을 보기 어렵다. 약 300여 점에 달하는 갖가지 형상들은 크 게 바다 동물과 육지 동물, 도구와 사람 등으로 나눌 수 있으며, 특히 동물 그림은 생태적 특징이 매우 상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주로 왼편에 새겨진 바다 동물로는 고래, 거북, 물개, 물새가 확 인되며, 주로 오른편에 새겨진 육지 동물로는 사슴, 멧돼지, 호랑 이, 여우, 늑대, 족제비 등이 있다. 최근까지 선사 시대 고래가 새겨진 유적으로 스칸디나비아 반 국립고궁박물관 기획전시회에 전시된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탁본 도의 청동기 시대 바위그림 유적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가 국제학계에 소개되면서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이 바위그림에는 배와 작살, 부구, 그물을 이용하여 고래를 사냥하는 사실적인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 는 당시 울주만 주변에 고래 사냥이 매우 활발했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고래잡이 장면은 세계에서 유일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에 문화재청은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일대를 대곡천 암각화군 으로 묶어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 중이며, 이러한 의미를 담아 2013년 4월에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기획 전시회를 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바위그림은 여러 난관에 직면하고 있다. 1965년 사연댐이 만들어지면서 수몰되었고, 1971년 발견되어 학계에 보고된 울 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매년 길게는 8개월 가량 물속에 잠겼다가 노출되기를 반복하고 있다. 1996년 국보로 지정된 이후에도 유 적을 둘러싼 이와 같은 환경 조건이 변하지 않고 있어 보존 대책이 필요한데, 보존 방법을 두고서도 지난 10여 년간 문화재청과 울산 광역시가 공방을 거듭하고 있다. 세계적인 문화재에 대한 현명한 결정이 필요한 때이다. I 울주 반구대 암각화 보존 대책 관련 주요 일지 I 2003년: 서울대, 반구대 암각화 보존 대책 연구 용역 - 댐 수위 조절, 유로 변경, 차수벽 설치안 등 제시 2007~2009년: 관계기관 대책회의 및 공청회 개최 2008년 7월: 문화재위원회 검토 및 심의 2009년 7월: 국무총리실 조정회의, 사연댐 수문 설치 및 수위조절안 결정 2009년 10월: 세계문화유산 및 분과위원장단 현지조사 2010년 1월: 대곡천암각화군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 등재 -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천전리 각석 및 주변 경관 포함 2011년 9월: 울산시, 차수벽 설치 생태제방 설치 터널형 유로 변경안 제시 2011년 11월: 관련 학계 및 문화재 단체, 수위 조절 촉구 성명 발표 2013년 3월: 울산시, 용역 결과를 토대로 생태제방 설치안을 최적안으로 주장 / 문화재청, 보존 대책 마련을 위한 TF 구성 83
천전리 바위그림을 천전리 각석( 刻 石 ) 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1970년에 동국대학교박물관의 학술조사단이 울산에서 원효대사의 흔적을 찾다가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보다 먼저 발견한 것이 바로 울주 천전리 각석이다. 발견 이후 1971년에 두 차례에 걸쳐 정식으로 조사되었다. 울주 천전리 각석은 선사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추상적인 문양이 새겨진 상부 와, 신라 시대에 새겨진 선각화( 線 刻 畫 ) 및 명문이 있는 하부로 나눌 수 있다. 상부 의 문양은 주로 쪼는 방법으로 새겨졌으며, 하부의 문양은 긋는 방법으로 새겨졌는 데, 이는 두 부분의 제작 시대 및 제작 집단이 달랐음을 의미한다. 주로 청동기 시대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는 상부의 기하학 문양은 마름모꼴무 늬 굽은무늬 둥근무늬 십자무늬 삼각무늬 등이 주를 이루는데, 곡선이 직선보다 많고 상징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명확한 의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이러한 무늬는 본질적으로 신석기 시대 토기의 겉면에 새겨져 있는 기하학 문양과 연결되 어 있고, 이것이 청동기 시대에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즉, 이들 문양은 곡식이 나 음식물 등이 항상 풍요롭기를 바라는 청동기 시대인의 기원을 담았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특히 상부 왼편에는 사슴을 비롯한 각종 동물과 물고기, 새 등이 새겨져 있고, 극도로 단순화된 형태의 인물상도 나타나 있다. 하부에는 선각화와 명문이 뒤섞여 있는데, 신라 시대부터 통일 신라 시대에 이르 천전리 각석(상부) 천전리 각석(하부 명문 중 일부) 기까지의 오랜 시간에 걸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암면에 새겨진 을사( 乙 巳 )년은 신라 법흥왕 12년(525), 기미( 己 未 )년은 법 흥왕 26년(539)으로 추정된다. 선각화에는 말을 끌거나 타고 있는 인물상, 돛을 단 배, 말 등이 행렬을 이루고 있으며, 용 그림도 발 견된다. 명문은 확인된 것만 800자가 넘는데, 영랑( 永 郎 ) 금랑( 金 郎 ) 정광랑( 貞 光 郎 ) 등 신라 화랑의 명칭을 비롯해 관명 직명 인명 등이 여럿 새겨져 있어 신라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반면 천전리 각석에는 훼손을 가속화하는 점토광물 성분이 포함되어 있어 풍화의 속도가 빠르다. 2003년에 계명대 한국선사미술 연구소가 벌인 조사에서 30여 개의 낙서가 발견된 바 있으며, 2011년에도 수학여행을 다녀온 고등학생에 의한 낙서가 발견되어 경찰 이 수사에 나선 적도 있는데 낙서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작업으로 제거되었다. 역사의 창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안에 고래 사냥의 비밀이 있다! 지금은 과학 기술이 발달하여 아무리 큰 고래라도 쉽게 잡을 수 있다. 하지만 3천 년 전 사람들은 엄청나게 큰 고래를 무슨 수로 잡았을까? 고 래잡이 과정이 생생하게 묘사된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를 통해 궁 금증을 해결할 수 있다. 암각화의 왼쪽 상단을 보면 초승달 모양의 배와 배에 탄 사람을 볼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작살로 고래를 잡았는데, 암각화에는 작살에 찔린 고래의 모습도 있다. 또한 잡은 고래를 배에 연결해 끌고 가는 장면도 있다. 배와 고래 사이에 둥근 도넛 모양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고래잡이 에 쓰이는 부구 이다. 부구는 물개 가죽에 바람을 불어넣어 물에 뜨도록 만든 물건으로, 줄에 매달린 부구는 잡은 고래의 힘을 빼고 고래를 끌어 오는 데 사용되었다. 잡은 고래 끌고 가기 부구 사용 장면 작살맞은 고래 84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천전리 각석 학년 반 번 이름 20 년 월 일 1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태화강과 연결된 사연댐으로 인해 의 보존에 논란이 일고 있다. 문화재청은 바위그림이 물에 잠 기는 원인인 사연댐 수위를 낮추자는 쪽이고, 울산시는 대체 식수원 마련 없이 무턱대고 댐 수위를 조절할 수 없으니 바위그림 주변에 생태제방(일종의 방수벽)을 만들어 보호하자고 맞서고 있다. 이에 대해 정치권도 관심 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정치권 일부에서 제기된 임시제방 설치 안은 그 자체가 논란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으 로 전망된다. 그 명칭이 무엇이건 임시제방 또한 엄연히 제방인 만큼 반구대 암각화 주변 경관에 일대 훼손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국내는 물론이고 유네스코를 비롯한 외국의 문화재 행정 흐름은 문화재 그 자 체만이 아니라 주변 경관까지 함께 고려한 구역 중심 관리로 급속히 이동 중이다. -. 2013. 05. 02. ⑴ 빈칸에 들어갈 말을 써 보자. ⑵ 임시제방 설치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의 선정에 끼칠 영향을 서술해 보자. 2 다음 그림과 설명을 보고 물음에 답해 보자. (나) (다) (가) (나) : 사냥 주체 : 사냥 대상이 물에 가라앉지 않게 하 는 사냥 도구 (가) (다) : 사냥 대상 (바다 동물) (라) (라) 냥 도구 : 끝이 뾰족하며 물고기를 찔러 잡는 사 ⑴ (가) ~ (라)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써 보자. ⑵ 그림을 보고 당시의 사람이 되어 고래잡이에 나선 소감을 적은 일기를 작성해 보자. 3 울주의 암각화와 관련된 유적지를 방문한 사진을 직접 찍어 붙여 보고, 느낀 점을 적어 보자. 사진 붙이는 곳 85
김해 가야 유적지 낙동강 하류에 위치한 경남 김해는 가야의 초기 연맹인 금관가야가 있던 곳이다. 금관가야의 시작은 대략 3세기 중반으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는 김해 대성동 일대 에 대형 덧널무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때이다. 그리고 4세기 후반이 금관가야의 최 전성기였다. 금관가야의 범위는 정확히 어디까지인지 알아내기 힘들지만 김해 지역에서 발견 되는 토기의 출토 지역을 토대로 현재 부산과 창원, 그리고 낙동강 주변으로 예상하 고 있다. I 관련 교과서 단원 I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03. 삼국 및 가야의 성립과 발전 I 활동 목표 I 금관가야의 유물과 유적을 알아 본다. 대성동고분군을 통해 가야의 사회상을 이해한다. 김해에서 돌아볼 장소로는 가야의 시조에 해당하는 김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과 함께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구지봉 등이 있다. 출발하기 전에 알아 두기! I 위치 I _ 수로왕릉: 경남 김해시 서상동 312 / 수로왕비릉: 경남 김해시 구산동 120 _ 국립김해박물관: 경남 김해시 가야의길 190 _ 대성동고분군: 경남 김해시 대성동 434 _ 대성동고분박물관: 경남 김해시 가야의길 126 I 홈페이지 및 문의처 I _ 김해 문화관광: http://tour.gimhae.go.kr, 1577-9400 _ 국립김해박물관: http://gimhae.museum.go.kr, 055) 320-6800 _ 대성동고분박물관: http://ds.gimhae.go.kr, 055) 330-6881 I 특이사항 I 국립김해박물관과 대성동고분박물관에서 다양한 교육과 체험활동 제공(홈페이지 참고) I 체험 코스 I 구지봉 봉화마을 수로왕비릉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대성동 고분군) 수로왕릉 해 김해시청 김해시 반 천 1 국립김해박물관 2 구지봉 3 수로왕비릉 4 수로왕릉 5 대성동고분박물관(대성동고분군) 86
김해에서 금관가야를 만나다 삼국유사( 三 國 遺 事 ) 에 의하면 금관가야는 난생 설화를 가진 시조 수로왕( 首 露 王 )이 서기 42년에 세운 나라이다. 금관가야는 서기 300년 무렵 여러 가야 세력 가운데 해상 활동과 철을 바탕으로 대외 교역을 장악하여 전기 가야 연맹을 주도하였다. 신라와 영역 다 툼까지 벌이던 금관가야는 400년 무렵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내려온 고구려에게 패배한 이후 더 이상 가야의 중심 역할을 못하고 명 맥만 유지하다가 532년 구형왕이 신라에 투항함으로써 역사를 마감하였다. 이러한 역사를 가진 금관가야의 흔적은 김해시의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시조인 수로왕의 릉이 남아 있는데, 2,00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잘 유지 관리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수로왕은 당시 나이 158세까지 살다가 199년 세상을 떠났고, 나라 사람들에 의해 궁궐 동북쪽 평지에 왕릉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가야에서 끊이지 않았던 수로왕의 제사는, 가야가 신라에 흡수 된 이후 문무왕 시기에 이르러 재개되었는데, 이는 신라의 30대왕인 문무왕이 명을 내려 수로왕릉을 정비하고 제사를 지내게 했기 때문이다. 신라 문무왕이 이러한 명령을 내리게 된 데에는 자신의 외가가 가야의 왕족 출신이라는 점과 관련 있다. 이로써 수로왕릉 과 그 제사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수로왕릉은 봉분 이외에는 아무런 시설도 없는 원형 토분으로,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고려 문종대까지는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었으나, 조선 초기에는 많이 황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세 종실록 에 따르면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에 대해 무덤을 중심으로 사방 30보에 보호구역을 표시하기 위한 돌을 세우고, 세종 28년 (1446)에는 사방 100보에 표석을 세워 보호구역을 넓힌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무덤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선조 13년 (1580) 수로왕의 후손인 허수가 수로왕비릉과 더불어 크게 정비작업을 마친 후이고, 1647년(인조 25)에는 왕명에 의하여 허적( 許 積 ) 이 묘비문을 지어 비를 세웠으며, 1865년(고종 2)에는 숭선전을 중수하였다. 지금도 그 후손들은 매년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 두 차례 제사를 크게 지내고 있다. 다음으로 가야의 유물과 생활상을 체계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국립김해박 물관을 방문하면 된다. 1층 전시실은 부산 경남 지역의 선사 시대 유물, 가야의 성 장 기반이 된 변한의 유물과 가야의 발전에 대해 전시하고 있다. 2층 전시실은 가 야인의 생활과 대외 교류 등에 관해 전시하고 있다. 특히 전시물 가운데에는 가야의 특징을 보여 주는 다양한 형태의 토기가 많다. 금관가야는 3세기가 지나면서 1000도 이상의 고온에서 토기를 구워 표면에 막이 형성된 도질토기 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도질토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신라의 굽다리접시 가야의 굽다리접시 오름식 가마 가 필요한데, 이 가마는 산등성이의 경사를 따라 비스듬히 쌓은 가마 장식 구멍의 배치에서 두 나라 간에 차이가 있다. 로 가야인들이 한반도에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가야인의 토기 제작 기술 은 신라와 일본에도 영향을 끼쳤다. 수로왕릉 지봉유설 의 기록에 따른다면 능의 구조는 큰 돌방무덤(석실묘)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기록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에 의해 능이 도굴을 당한 것으로 되어있다. 87
금관가야 지배층의 무덤, 대성동 고분군 대성동 고분군은 김해건설공업고등학교와 김해공설운동장 사이의 동서 로 뻗은 구릉 지대에 있는 가야의 무덤으로, 초기 가야의 중심지였던 금관 가야의 지배층 무덤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은 길이 약 300m, 높이 20m정 도의 구릉 지대로, 경사가 완만해 무덤이 있기에 매우 적합하였다. 대성동 고분군은 1990년~1992년에 모두 3차례에 걸쳐 경상대학교박물 관에 의해 진행된 발굴조사 결과 2세기경부터 6세기경까지 장기간에 걸쳐 대성동 1호분을 재현한 모습(대성동고분박물관 실내전시관) 무덤 지역으로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중 거대한 무덤은 지배집단의 순장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무덤 자리로 추정되며 좋은 구릉의 정상부에 아래에서 위로 열을 지어 조성되었는데, 고인돌을 비롯하여 널무덤, 덧널무덤, 굴식돌 방무덤 등 여러 형식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또한 보다 신분이 낮은 계급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작은 무덤은 구릉의 사면에 무질서하게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 조성되어 있는 무덤의 크기와 유물을 통해 다음과 같이 금관가야에 관한 여러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첫째 영남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3세기말부터 순장 습속이 있었다. 보통 한 무덤에 순장된 사람 의 수는 3명 정도이지만 1호분과 8호분처럼 5명 이상이 묻히기도 하였다. 둘째, 제사 또는 장례를 치를 때 그릇이나 공구, 무기 등을 깨뜨리거나 구부려서 무덤의 봉분 에 묻는 유물 파손 습속이 있었다. 이를 훼기습속( 毁 棄 習 俗 ) 이라 한다. 셋째, 철 제품을 만들기 위해 사용되는 중간 단계의 제품인 덩이쇠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이 를 바탕으로 낙랑과 왜와 교섭하였음을 알 수 있다. 넷째. 대성동 고분군에서 발견된 청동솥과 같은 북방계 유물이나 중국제 거울 등은 당시 가야 가 한군현과 활발하게 교류하였음을 보여 준다. 또한 청동으로 만든 파형동기(바람개비 모양의 방패 꾸미개)는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것으로 가야와 왜와의 교류 관계를 입증하는 유물이다. 대성동 덧널무덤(경남 김해) 유물이 파손되어 함께 있는 모습이다. 파형동기는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대성동 고분군에서만 출토되었다. 역사의 창 가야 사람들이 자신을 부른 이름은? 가야 사람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불렀는지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가야 라는 말은 1500~2000년 전의 우리말을 한자로 옮 겨 적은 것으로, 역사책마다, 비석에 새긴 글마다 글자가 다 각각이다. 보통 가야( 加 耶, 伽 耶, 伽 倻 )라 적기도 하고, 가라( 加 羅, 伽 羅, 呵 囉, 柯 羅 ), 가락( 駕 洛, 伽 洛 ), 구야( 狗 邪, 拘 邪 ) 등 여러 방식 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심지어 같은 책 안에서 서로 다른 한자를 쓰기도 했다. 고려 시대에 들어서는 伽 耶 (가야) 라고 적었는데, 그것은 불교에서 인도에 있는 불교 성지인 부다가야(Budda Gaya)를 불타 가야( 佛 陀 伽 耶 )로 적고, 그 북쪽에 있는 도시인 가야(Gaya)를 가야성( 伽 耶 城 ) 으로 표기한 것과 관련 있다는 시각도 있다. 불교 가 성행하던 고려 시대에 일부 승려들이 역사를 기록하면서, 가야를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름으로 생각해 일부러 그렇 게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불교를 억압한 조선에 들어와서는 불교식 어감을 피하기 위해 글자를 伽 倻 로 고쳐 썼다. 고려사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그리고 한치윤의 해동역사 등에는 대개 가야( 伽 倻 ) 라고 썼다. 이렇게 한 나라 이름을 두고 여 러 글자로 쓰게 된 이유는 가야 사람 자신들이 직접 쓴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88
김해 가야 유적지 학년 반 번 이름 20 년 월 일 1 (가), (나)에 들어갈 나이를 써 보자. 수로왕은 158세, 왕비인 허왕후는 157세까지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이렇게 오래 살았을까. 문헌 을 통해 학자들이 연구한 바로는 가야인들의 나이를 계산하는 방법은 지금과 달라서 봄에 농사짓기 전 제사 를 지내면서 나이를 한 살 먹고, 가을에 추수가 끝나면 또 한 살을 먹었다고 한다. 이렇게 계산하면 수로왕은 (가), 허왕후는 약 (나) 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2 다음의 전시 유물과 설명을 보고 물음에 답해 보자. (가) (나) (다) 소나 코뿔소 등의 짐승의 뿔을 잘라 술이나 음료를 마시던 습관에서 유래되었다. 처음에는 실제의 뿔 을 사용했지만, 상아나 금속, 옥, 토기 등으로 만들 어서 사용하게 되었다. 북방 초원 지대에서 사용된 금속제 그릇으로 스키 타이계 유목민 문화에 기원이 있다. 한반도 지역에 서는 낙랑 지역과 김해 지역에서만 발견되고 있다. 청동으로 바람개비 모양을 만들어 방패의 앞부분 에 붙였다. 일본에서는 이런 모양을 청동으로 만들 어 4세기 말까지 사용하였는데, 일본과의 교류 흔 적을 보여 준다. ⑴ (가)~(다) 유물의 명칭을 써 보자. ⑵ (가)~(다)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는 금관가야의 모습을 대외적 측면에서 서술해 보자. 3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을 돌아보면서 인상 깊게 본 유물이나 유적 사진을 직접 찍어 붙여 보고, 자신 의 느낀 점을 적어 보자. 사진 붙이는 곳 89
독도 우리나라 가장 동쪽 끝에 위치한 독도는, 동도와 서도 및 여러 바위섬으로 이 루어져 있다. 독도는 일본의 오키 섬보다 울릉도와 훨씬 가까운데, 17세기에 일 본이 우리나라와 울릉도 및 독도의 영유권을 두고 다툴 때 각 나라로부터의 거리 를 조사한 결과 두 섬에 대한 우리나라의 영유권을 인정한 바 있다. 독도는 국제법상 섬 이므로 12해리 영해와 200해리의 배타적 경제 수역(EEZ)을 I 관련 교과서 단원 I Ⅳ. 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 07. 독도와 간도 I 활동 목표 I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설명한다. 독도가 지닌 가치를 이해한다. 가질 수 있다. 이에 일본에서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한국과 주장이 대립하여 현재 독도의 영해는 중간 수역에서 제외되어 있다. 출발하기 전에 알아 두기! I 위치 I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1~96번지 I 문의처 I 054) 790-6641 (독도관리사무소), 054) 790-6454 (독도 관광안내) I 홈페이지 I _ 외교부 독도: http://dokdo.mofa.go.kr _ 해양수산부 국립해양조사원 우리땅 독도: http://dokdo.nori.go.kr _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 독도 지리넷: http://dokdo.ngii.go.kr _ 경북지방경찰청 독도경비대: http://dokdo.gbpolice.go.kr _ 경상북도 사이버독도: http://www.dokdo.go.kr _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연구소: http://www.dokdohistory.com _ 울릉군 독도관리사무소: http://www.ulleung.go.kr _ 울릉군 독도박물관: http://www.dokdomuseum.go.kr I 유의사항 I _ 일반관람객의 경우 기상 여건 및 형편에 따라 입도가 어려울 수 있음. _ 독도 관람 구역은 동도 부두으로 제한되어 있음. I 체험 코스 I 동해 서도 독도리 독도영토 표석 동도 주민숙소, 선착장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선착장 독도등대, 경찰초소 해상일주관광 1 독도 선착장(동도) 2 동도(독도 등대, 독도 경비대, 독도 게양대) 3 서도(주민 숙소) 90
독도는 울릉도에서 보인다 독도는 한반도의 부속 도서로서 우리나라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다. 독도는 동도와 서도 및 89개의 바위섬(부속 도서)으로 이루 어져 있으며, 울릉도로부터는 87.4km 떨어져 있는 데 비해 일본 오키 섬으로부터는 157.5km 떨어져 있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 울릉도에서는 맑은 날 육안으로 독도가 보이지만, 일본 오키 섬 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울릉군 석포와 도동의 독도 전망대 등 여 러 곳에서 맑은 날이면 독도가 관측된다.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 인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였기에 울릉도 주 민들은 예로부터 독도를 오가면서 어로 활동을 하였고, 이는 독 도가 울릉도 주민의 생활 권역에 포함되어 있었음을 의미하기 때 문이다. 17세기에 조선과 일본이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인 일이 있었다. 당시 일본은 두 섬과 두 나라 사이의 거리 를 조사하여 독도와 울릉도의 거리는 약 200리, 독도와 일본 오키 섬의 거리는 약 400리라는 사실을 알고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한 사실이 있다. 또한 조선 후기 숙종 때 일본에 피랍된 안용복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주장하자 2년이 넘는 조사와 논쟁 끝에 일본 에도 막부는 1696년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임을 인정하고 일본 어민들에게 죽도( 竹 島, 울릉도) 도해( 渡 海 )금지령 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후 조선은 3년에 한 번씩 울릉도와 주변 섬에 수토관(외관) 을 파견하였는데, 이는 1699년에 시작되어 1894년까지 계속되었다. 1882년 울릉도 개척령 이후 울릉도 개척민이 점차 늘어나고 울릉도에 들어오 는 일본인도 늘어나자 이들을 관리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에 대한 제국 은 1900년 칙령 제41호를 통해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울도 군수가 관할하는 지역으로 울릉도와 함께 독도(당시 용어는 석도 )를 명시하였고, 이 내용을 관보에 실어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근대법적으로 분명히 하였다. 또한 일제가 러 일 전쟁 중 독도가 주인 없는 땅이라고 억지를 부려 이를 빼앗았 을 때에도 울도 군수(심흥택)와 춘천 군수(이명래) 등이 중앙 정부에 이를 알려 대 한 제국에서는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주장임을 명시하기도 하였다. 이후 독도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대한민국에 반환되었으며 1946년 연합국 최고 사령부 각서(SCAPIN)에 따라 일본의 관할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1952년 1월 대통 령 이승만은 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에 관한 선언(일명 평화선) 을 선포하여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대내외적으로 분명히 하였다. 독도의 지리적 위치 동 해 관보에 게재된 일명 평화선 (1952년) SCAPIN 677의 부속 지도에 나타난 독도(TAKE) 1946년 연합국 최고사령관은 이 각서를 통해 연합국은 일본 정부에 일본 국외의 모든 지역, 즉 패전 직전까지 지배하 고 있던 식민지나 점령지에 대한 정치 행정상의 권력 행사를 정지하도록 명령하였다. 특히 이 각서의 3항에서는 일본의 영토를 홋카이도, 혼슈, 규슈 및 시코쿠와 북위 30도 이상의 류큐 제도와 쓰시마를 포함한 약 1,000개의 인접하는 여러 소도로 구성된다. 라고 정의하였고, 여기서 인접하는 여러 소도 에 포함되지 않는 지역으로 울릉도, 독도, 제주도 가 명 기되었다. 91
독도의 무한 가치, 그리고 수호를 위한 노력 현재 독도는 영해 확보에 있어 중요한 기준이 된다. 독도는 국 제법상 섬 이어서 12해리의 영해와 200해리의 배타적 경제 수역 (EEZ)을 가질 수 있다. 1996년 한국과 일본이 각각 200해리의 EEZ를 선포한 결과 양국의 EEZ에 중첩 해역이 발생하였는데, 경 계에 대한 양국의 주장이 대립하여 1998년 우선 어업에 관한 사항 만을 규율하는 신한일 어업 협정 이 체결되었다. 이 어업 협정은 경계 획정에 이견이 있는 지역에 잠정적으로 중간 수역 을 두었 는데, 독도의 영해는 중간 수역에 포함되지 않는다. 한국 정부는 신한일 어업 협정을 통해 1996년 한 일 양국이 EEZ를 선포한 결 과 발생한 중간 수역에 대해 이는 EEZ 경계 획장 이전 단계의 잠 정적인 조치임을 분명히 하였다. 신한일 어업 협정의 결과 한국은 상당 면적의 EEZ를 한국 관할하에 두게 되었다. 독도는 이러한 바다 영토를 확보하는 데에 기여할 뿐만이 아니 라 수려한 자연 경관, 가스 하이드레이트와 해양 심층수 등의 해 저 자원 등을 갖게 되어 그 가치는 이를 말할 수 없이 크다. 특히 독도는 동해의 방위 거점이며 한 러 일의 지정학적 관계에서 한반도의 영해와 영공의 외연 을 넓히는 군사적인 가치 외에도 울릉도의 수산 업 관광업과 연계된 경제적인 가치 또한 높다. 여 기에 해양 기후 예보, 지구 환경 연구 등 해양 과 학 기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에도 손색이 없다. 현재 독도에는 1996년 6월 창설된 경북지방경 찰청 울릉경비대 산하 독도경비대가 상주하고 있 으며, 독도 근해에는 해양경찰의 경비함정이 상시 배치되어 우리나라의 해양주권과 바다의 안전을 지키고 있다. 중국 독도 주변의 매장 자원 0 200 신한일 어업 협정 수역도(1998) 동 해 시 황해 동해 대한 국 남해 대한 해협 일본 해양 수 천 가스 하이 이 역사의 창 일본은 옛날부터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의 공식 문서에도 1905년 일본이 독도를 불법으로 편입하기 전까 지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일 본 외무성 관리가 조선의 사정을 조사한 후 제출한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 朝 鮮 國 交 際 始 末 內 探 書 ) (1870)에서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가 조선의 부속이 된 경위 라는 보고서를 작성하여 독도가 한국 땅임을 스스로 인정하였다. 일본 해군성이 1876년 발행한 조선동해안도( 朝 鮮 東 海 岸 圖 ) 와 같은 관찬( 官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 撰 ) 지도에도 독도를 한국의 영토에 포함시키고 있다. 또한 1877년 일본 최고행 정기관인 태정관은 17세기말 에도 막부가 내린 울릉도 도해 금지 조치를 토대로 품의한 취지의 竹 島 (울릉도) 외 一 島 (독 도)의 건에 대해 일본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고 일본 내무성에 지시함으로써 독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님을 공식적 으로 인정하였다. 92
독도 20 년 월 일 학년 반 번 이름 1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2005년부터 일본은 일본 고유의 영토인 북방 영토 및 다케시마의 영토 문제가 여전히 미해결인 채로 존재 하고 있다. 라고 하여 한국 및 러시아와도 마찰을 빚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일본은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 소에 회부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이 아무리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주장해도 우리나라의 독도 영유권은 확고하다. 우리나라가 일본 측의 주장에 과민하게 반응하거나 감정적으로 대응할 경우 오히려 독도를 분쟁 지역화하여 일본 측에 유리한 상황 으로 이끌어 가려는 일본의 술수에 말려들 우려가 있다. ⑴ 일본이 밑줄 친 내용을 주장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써 보자. ⑵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한 우리의 대응 방안을 서술해 보자. 2 (가), (나)를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가) 제2조 군청 위치는 (나) 칙령의 석도( 石 島 ) 는 우리말 태하동으로 정하고 로 풀어 쓰면 돌섬 이다. 돌 을 구역은 울릉전도, 죽 도(울릉도 가까이 있 는 큰섬), 석도(독도) 를 관할할 것 울릉도에선 독 이라 발음해서 독섬 으로도 불렸다. 이를 한자 로 다시 적는 과정에서 독 자가 독( 獨 )이 되어 독도( 獨 島 ) 가 되 대한 제국 칙령 제41호(1900. 10. 25) 었다. ⑴ (가)에서 대한 제국의 독도 관할이 갖는 의미를 써 보자. ⑵ (나)의 칙령에 등장하는 석도 가 왜 독도 인지 생각해 보자. 3 독도를 방문한 사진을 직접 찍어 붙여 보고, 느낀 점을 적어 보자. 사진 붙이는 곳 93
여기도 찾아가요! 문경시 문경새재, 고모산성, 석탄박물관 영주시, 봉화군, 안동시 부석사, 계서당, 도산서원, 하회마 을, 봉정사, 병산서원, 하회세계탈 박물관 김천시, 칠곡군 직지사, 칠곡 왜관철교, 구 왜관터널, 왜관지구 전적기념관 대구광역시 구 조선식산은행, 삼성상 회옛터, 계산성당, 이상화 고택, 서상돈 고택, 관덕 정, 약령시, 국채보상운동 기념공원, 대구읍성 함양 하동 거창 산청 사천 김천 상주 진주 합천 문경 성주 고령 의령 고창 구미 함안 예천 칠곡 창녕 영주 대구 창원 의성 고창 안동 청도 경산 밀양 김해 봉화 영천 양산 부산 청송 영양 울진 포항 경주 울산 영덕 울릉도 독도 영덕군, 울진군 목은이색기념관, 신돌석장군 유적지, 봉평신라비 경주시 불국사, 석굴암, 안압지, 첨성 대, 포석정, 남산역사유적지구, 계림, 대릉원, 황룡사지, 분황사 모전석탑 청도군, 밀양시 새마을발상지기념관, 운문사, 표충사, 사명대사 유적지 남해 진주시, 하동군, 남해군 진주성, 진주향교, 쌍계사, 최참판댁, 백련리도요지, 지리산역사관, 청학 동, 남해충렬사, 이충무공전몰유허, 서포김만중선생유허, 보리암 통영 거제 고성군, 통영시, 거제시 고성탈박물관, 충렬사, 제승당, 최영장군 사당,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 옥포 대첩기념공원 부산광역시 범어사, 국립해양박물관, 동아대학교박물관, 조선통신사역사관, 백산기념관, 40계단기념 관, 부산민주항쟁기념관, 부산박물관 94
제주권역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 96 제주 4 3 평화공원 100 여기도 찾아가요! 104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은 고려 시대에 김통정 장군이 이끈 삼별초가 여 몽 연 합군에 맞서 최후의 일전을 벌이던 곳인 항파두리성에 기념비를 세우고 돌로 쌓은 내성과 흙으로 만든 외성을 복원해 놓은 곳이다. 항파두리성 안에는 전시관이 있어 삼별초의 역사와 당시 생활상을 볼 수 있다. 1997년에 사적 제 396호로 지정되었다. I 관련 교과서 단원 I Ⅱ. 고려 귀족 사회의 형성과 변천 02. 고려 후기의 대외 관계 I 활동 목표 I 대몽 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파악한다. 출발하기 전에 알아 두기! I 위치 및 문의처 I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상귀리 1012, 064) 728-8677 I 홈페이지 I _ 제주특별자치도 관광정보: http://cyber.jeju.go.kr I 지정현황 I _ 국가지정 사적지 제396호(1997년 4월 18일) I 체험 코스 I 구시물 옹성물 장수물 순의비 전시관 순의문 1 순의문 2 순의비 3 전시관 4 토성 토성 5 장수물 6 옹성물 살맞은 돌 7 구시물 8 살맞은 돌 96
제주도로 내려온 삼별초 중국의 송나라를 무너뜨린 몽골은 13세기 무렵 고려를 세 차례나 침입하였다. 이에 고 100 km 0 려는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가며 몽골군에게 40여 년을 맞서 싸웠지만, 결국 몽골과 강화 강화 동해 개경 지 않고 대항했던 군사 조직이 바로 고려의 무인 최우가 만든 삼별초 였다. 좌별초, 우별 울릉도 남경(서울) 를 맺으며 항복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몽골의 간섭을 받게 되었는데 끝까지 몽골을 인정하 독도 황해 초, 신의군으로 구성된 삼별초는 원래 전투와 경찰 등 공적 임무를 맡았을 뿐만 아니라 국 가의 재정에 의해 양성되고 국고에서 지출되는 녹봉을 받았다는 점에서 국가의 공적인 군 전주 대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최씨 정권의 사병적인 성격도 강했기 때문에 무신 나주 정권기에는 정변이 발생할 때마다 그들의 중요한 무력 기반이 되었다. 삼별초는 고려가 몽골에게 항복하고 수도를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옮기려 하자 끝까지 반대하며 강화도에 남아 몽골과 싸웠다. 하지만 고려와 몽골군의 연합 공격으로 인하여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진도로, 또 진도에서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길 수밖에 없었고, 결국 제주도에서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장흥 합포 동경(경주) 김주(김해) 동래 거제도 진도 배중손 (1270~1271) 이어도 탐라 (제주) 남해도 남해 김통정 (1271~1273) 삼별초의 근거지 이동방향 삼별초의 진출방향 삼별초의 이동 경로 항파두리성과 항몽유적지 삼별초는 지금의 애월읍 고성리에 외성과 내성을 쌓고 궁궐, 관아 및 기타 방어 시설을 갖추었는데, 이곳이 삼별초 제주 항몽의 근 거지인 항파두리성이다. 항파두리의 뜻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는데 항파두리성은 항파두리라는 지명 때문에 항파두리성이 라고 부른다는 의견과 항 은 항아리, 바두리 는 둥근 테라고 하여 항파두리성 을 항아리의 테두리처럼 둥그런 성 이라는 뜻으로 해석 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항 을 당시 진압군 장수였던 홍다구의 홍 으로, 바두 를 장군 영웅 장수를 뜻하는 몽골 어 바투 에서 나온 말로 해석하여 홍다구 장군이 진압한 성 이라는 해석도 있다. 항파두리성(외성) 순의문 항파두리성은 삼면이 하천으로 둘러싸여 있고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천혜의 요새이다. 진도에서 뼈저린 패배를 경험한 삼 별초는 이를 교훈 삼아 제주도 도착 후 서둘러 방어 시설을 쌓는데 주력하여, 우선 본거지를 중심으로 내 외성을 쌓았다고 한다. 내 성(현재 항몽순의비 자리)은 둘레 70m의 장방형 석성으로, 성안에는 대궐을 비롯하여 관아 병사 군기고 훈련장 등을 만들었고, 우 물과 저수지도 마련하였다. 외성은 언덕과 시내를 따라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해서 쌓은 타원형 토성으로, 그 주위가 15리(약 6km) 에 이르렀으며 성안의 면적도 60만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외성 가운데 약 920m가 복원되어 있다. 97 역사(96~104)제주.indd 97 13. 6. 13. 오후 2:55
항파두리성 내성 안에는 1977년에 세워진 항몽순의비와 전시관, 그리고 순의문 앞 팽나무 아래에 성문의 문짝 받침으로 사용되었으리라 추정되는 돌쩌귀들이 모여 있다. 또한 전시관에는 강화와 진도를 거쳐 제주에 입성하 기까지의 삼별초 활약상과 생활상, 항파두리성 축성을 그린 여러 점의 기념 화와, 1271년부터 1273년까지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 항파두리 성 일대에서 발굴된 기와 돌쩌귀 자기 파편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항파두리성 내외에는 여러 군데의 물 유적도 존재한다. 장수물은 김 통정 장군이 몸을 날렸다가 떨어진 지점에 발자국처럼 파여 샘이 솟는다고 전해지는 약수이고, 구시물은 성 밖 서민 및 병사들의 음료수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물이며, 옹성물은 삼별초가 항파두리에 있을 때 김통정 장군을 비 롯한 귀족계급들이 음료수로 사용했던 샘물로 전해진다. 문헌에 항파두 고 성 안에는 솟아나는 샘물이 있는데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아니한다. 라는 내용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샘물은 옹성물 과 구시물 로 현재에도 활기하게 솟아나고 있다. 돌쩌귀 삼별초군이 항파두리 내성의 문을 쇠로 만들어 달면서 이용했던 밑틀로 추 정되는 사대성문의 주춧돌로, 모두 현무암을 이용해 거칠게 다듬질이 되어 있다. 원래는 항파두리성 내외에 산재해 있었던 것을 이곳에 모아놓았다. 장수물 구시물 옹성물 역사의 창 삼별초 대몽 항쟁의 의미 삼별초의 항쟁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다르게 내려져 왔다. 이것이 처음 부각된 것은 1930년대의 일이었다. 당시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현실에서 삼별초의 대외 항쟁은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 주기 위해 널리 알려질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5 16 군사 정변 이후 군사 정권은 결핍된 정통성을 만회할 목적으로 민족 주체성 확립이라는 구호를 내걸었고, 그러한 환경 속에서 삼별초의 대 몽항쟁이 다시 한 번 주목받게 되었다. 더욱이 여기에는 고려의 무인 정권 을 민족적이고 진취적인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군사 정권의 상징을 조작하 려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었다. 항몽순의비 그러나 외세와 싸웠다는 것만으로 민족적 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무인 정권에 기생하며 각종 특혜를 받고 백성들의 항쟁을 억압하는 역할을 했던 군사 조직이 무인 정권 붕괴 이후 갑자기 민족적 인 군대로 탈바꿈할 수 있는 것인가? 여기서 우 리는 최씨 정권의 항전론이 국가 안보를 위한 것이었는가 아니면 정권 유지를 위한 것이었나를 구분해야 하는 것처럼, 삼별초 의 항쟁 역시 항쟁의 목적과 동기를 가지고 엄정하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98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 학년 반 번 이름 20 년 월 일 1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13세기 몽골이 고려를 침입하자 고려는 조정을 강화도로 옮기고, 40년 동안 몽골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고 려가 몽골과 강화를 맺어 몽골의 간섭을 받게되자 고려군이었던 삼별초는 고려 조정이 개경으로 돌아가는 것 을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삼별초는 (가) 에서 (나) 을/를 거쳐 (다) 에 이르러 고려와 몽골 연합군에 저항하였다. ⑴ (가), (나), (다)에 들어갈 말을 써 보자. ⑵ 밑줄 친 부분의 이유를 서술해 보자. 2 항파두리성에 남아있는 다음 유적의 명칭을 적어 보고, 명칭의 유래를 조사해 보자. 3 항파두리성 이외에 삼별초의 대몽 항쟁과 관련된 곳의 사진을 직접 찍어 붙여 보고. 그곳에 대해 설명해 보자. 사진 붙이는 곳 99
제주 4 3 평화공원 1948년 5월,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앞두고 제주도에서는 단독 정부 수립 반 대와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사태가 격화되자 정부는 병력을 투 입하여 대대적인 진압 작전을 펼쳤고, 그 과정에서 제주 주민의 일부가 큰 피해를 입었다. 정부는 2000년 제주 4 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 법을 제정하였으며,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 이 이루어졌음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하였다. I 관련 교과서 단원 I Ⅷ. 냉전 체제와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03. 대한민국과 북한 정부의 수립 I 활동 목표 I 4 3 사건의 배경과 과정을 파악한다. 4 3 사건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이해한다. 출발하기 전에 알아 두기! I 위치 및 문의처 I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명림로 340(봉개동), 064) 710-8461 I 홈페이지 I _ 제주 4 3 평화공원: http://jeju43.jeju.go.kr _ 제주 4 3 평화재단: http://www.jeju43peace.or.kr _ 제주 4 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http://www.jeju43.go.kr _ 제주 4 3 연구소: http://www.jeju43.org I 특이사항 I _ 제주 4 3 평화공원 홈페이지에서 사이버참배 가능 _ 제주 4 3 평화재단 주최로 4 3 사건 추가진상 조사사업, 4 3 사건 희생자 추모사업, 유족복지사업, 4 3 사건 문화학술사업, 국 내외평화교류 및 교육사업, 4 3유족진료비 지원사업 등 진행 중 I 체험 코스 I 위령재단 행방불명인표석 추념광장 조형물(귀천) 위령탑 지역별 추념광장 1 조형물(비설) 2 지역별 추념광장 각명비 조형물(비설) 3 행방불명인표석 4 추념광장 5 위령재단 6 조형물(귀천) 제주 4 3 평화기념관 7 위령탑 8 각명비 9 시간의 길 10 제주 4 3 평화기념관 100
현대사의 비극, 제주 4 3 사건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하였다. 남로당 제주 도당이 이끈 350명의 무장대는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 서 북청년단 같은 극우단체들의 폭력 반대, 미군 철수 등을 요구하 였다. 이에 미군정은 군대와 경찰을 동원한 토벌대를 편성하여 진압에 나섰다. 이후 1948년 11월 17일 대통령의 권한으로 국가 비상사태 때 대통령의 권한으로 군대를 동원해 치안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계엄령이 제주도에 선포되었다. 이 계엄령에 의 거하여 해안선에서 5km 바깥에 있는 중산간 마을에 대한 토벌 대의 무차별 방화와 재판절차도 거치지 않은 집단 학살이 전개 제주 4 3 사건 당시 피난을 떠나고 있는 주민들 되었다. 토벌대는 중산간에 사는 모든 주민들이 유격대에게 물자와 안식처를 제공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민간인들을 폭도로 취급하며 학살하였다. 1949년 5월에 토벌 작전이 끝났지만 그 사이 3만 여 명에 가까운 주민들이 희생당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 다. 정부는 2000년 제주 4 3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였으며,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대 표하여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 이 이뤄졌음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였다. 제주 4 3 평화기념관 제주시 봉개동에 위치한 제주 4 3 평화공원은 4 3 사건 발발 이후 50여 년간 해원되지 못한 희생자의 넋을 위령하고 4 3 사건의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겨 희생자의 명예회복 및 평화와 인권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조성되었다. 공원 내의 시설로는 희생자들의 신상 이 기록되어 있는 각명비, 참배공간인 위령제단, 각종 조형물, 추념광장, 행방불명인표석 등이 있고, 특히 역사적 아픔을 기억하고 평화와 인권의 소중한 가치를 되새겨볼 수 있는 장소로 제주 4 3 평화기념관이 세워져있다. 6개의 전시관과 특별전시관 다랑쉬굴로 구성된 제주 4 3 평화기념관은 4 3 사건에 대한 배경과 진행, 여러 자료를 전시하고 있 다. 1관 역사의 동굴 은 과거로의 시간 이동을 의미하는데, 30m 길이의 긴 동굴은 현시점에서 4 3 사건이 일어났던 과거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상황을 연출하며, 4 3 사건 당시의 피난처를 의미한다. 글이 새겨지지 않은 4 3 사건의 백비는 그 동안 봉기, 사태, 항쟁, 사건 등으로 불리어진 4 3 사건의 미완성된 역사를 의미한다. 2관 흔들리는 섬 은 제주 4 3 사건의 전사( 前 史 ) 부분으로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자치, 미군정의 실시와 뒤이은 3 1 발포 사건 등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제주 4 3 사건의 시작이 된 1947년 3 1 발포 사건과 총파업, 그리고 검거 선풍과 고문 치사 사건 등의 긴박한 상 4 3 평화공원 위령제단 4 3 백비 101
황이 잘 연출되어 있다. 3관 바람타는 섬 에서는 제주도 민중의 저항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특 히 남한 단독 선거를 반대하며 입산하는 제주도 주민들의 모습을 회화 와 아트워크로 표현하고 있다. 이곳에는 특별 코너로서 역사 속의 민중 의 저항을 다루는 코너가 마련되어 있어서, 제주 저항의 전통과 세계의 민중 보기가 연출되어 있다. 4관 불타는 섬 은 토벌대의 강경 진압으로 인해 죽음의 섬으로 바뀌 어 가고 있는 제주도의 모습을 전시하고 있다. 당시 제주 곳곳에서 죽음 의 여러 유형들이 23개의 조소 작품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북촌리의 비 다랑쉬굴 극을 중심으로 여러 학생에 대한 증언도 들을 수 있다. 제주 4 3 사건의 와중에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서 피난 생활을 하다가 군 경합동 토벌대에 의해 몰살당하였다. 다랑쉬 마을은 4 3 사건 이후 사라졌고, 44년이 지 5관 흐르는 섬 은 끝나지 않는 4 3 사건의 후유증과 진실을 찾기 위 난 1992년에 다랑쉬굴에서 그 당시 희생된 성인남자 7명, 부녀자 3명, 어린이 1명 한 모습을 전시하고 있다. 4 19 혁명 직후 전개된 진상규명 운동과 좌 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절,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흐름속에서 일어난 지속적인 진상규명 운동과 그 결과 제정된 4 3 사건 특별법 및 대통령의 사과 등의 역 사적 상황 등이 정리되어 있다. 6관 새로운 시작 은 에필로그 공간으로 제주도 마을의 중심역할을 하는 팽나무를 통하여 4 3 사건의 아픈 기억을 치유하고, 희생 자의 넋을 위로하는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특히 특별전시관 다랑쉬굴은 1992년 발견된 다랑쉬굴의 모습을 재현하여 당시의 긴박했던 피난생활과 학살 등의 상황을 연출한 4 3 사건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과거의 아픈 역사를 체험하게 한다. 역사의 창 4 3 사건 이후의 제주도 4 3 사건 이후 제주도민들은 이승만 정권이 덧씌운 빨갱이 섬 이라는 날조된 딱지와의 싸움을 전개해야 했다. 한국전쟁이 일어 나자 예비검속 이라는 이름으로 입산자 가족과 보도연맹에 들어 간 마을 주민들이 집단 학살되었다. 또한 제주도 출신 청년들이 해병대에 무더기로 자원입대해 귀신 잡는 해병 이라는 별명을 낳 게 만들었는데 이는 빨갱이 섬, 잠재적인 좌익분자들의 소굴 이 라는 바깥의 인상을 어떤 방법으로든 허물고 당당한 대한민국 국 민이 되고 싶었던 제주 사람들의 생존 의지 때문이었다. 제주 4 3 사건 피해자 가족과 시민단체에서 줄곧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을 5 16 군사 정권에 의해 파괴된 백조일손지묘 묘비의 파편 요구하였으나 역대 정부는 이를 무시하였고, 오히려 금기시하였다. 4 19 혁명 후에 정권이 바뀌자, 살아남은 후손들이 백조일 손지묘( 百 祖 一 孫 之 墓 )를 마을마다 세웠다. 이는 여러 할아버지의 한 자손이 묻힌 무덤 이라는 뜻으로, 어느 것이 자기 조상의 무덤인지 모르므로, 후손들은 마땅히 이 모두를 자기 조상의 묘처럼 받들라 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나 5 16 군사 정변 이후 군사정부는 백조일손지묘 를 없애고 비석을 파괴해 버리고 공동묘역 해체명령을 내려 역사를 은폐하였다. 이러한 은폐에 맞서 작가 현기영은 4 3 사건을 조명한 소설 순이 삼촌 을 출판하였는데 책은 금서가 되고 작가 현기영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 문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후 2000년 김대중 정부가 제주 4 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을 공포할 때까지 4 3 사건 희생자 유족들은 진상규명은 커녕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감시와 추궁을 당해야 했다. 102
제주 4 3 평화공원 학년 반 번 이름 20 년 월 일 1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 4월 3일 1948년 사건 발생 후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가) 평화공원에서 열린 (가) 희생자 위령제 에 참석해 불행한 역사 속에서 무고하게 희생당한 넋들을 애도하고 위로했다. 오랜 세월 말로 다 할 수 없는 억울함을 가슴에 감추고 고통을 견디어 오신 유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국가권력이 불법하게 행사됐던 잘못에 대해서 제주도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라고 말했다. ⑴ (가)에 들어갈 말을 적어 보자. ⑵ 밑줄 친 부분에 해당하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서술해 보자. 2 제주 4 3 평화공원에 전시된 다음 조형물의 명칭을 쓰고 그 의미를 생각해 보자. 3 제주 4 3 평화공원 이외에 제주 4 3 사건과 관련된 곳의 사진을 직접 찍어 붙여보고, 어떤 곳인지 설명해 보자. 사진 붙이는 곳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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