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루디’ 과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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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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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금강인쇄-내지-세대주의재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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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게임 (Pitch Till Everyone Leaves the Ground) 영화 퍼펙트게임 은 야구를 소제로 국내에서 제작되었다. 1980년대 중반 한국의 프로야구팀 의 라이벌 관계인 롯데와 해태 소속의 투수인 최동원과 선동열, 이 두 선수간의 숙명의 맞 대결 경기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묘사한 작품입니다. 영화 감상 후 다음 사항에 답하시기 바랍니다. 1.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에 대한 소감. 퍼펙트 게임 을 보기 전에 과연 이 영화가 재밌을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던 것 같다. 최동원 선수와 선동열 선수의 이름은 익히 들어는 봤지만 저 두 선수의 활약한 모습은 사실 상 내 눈으로 볼 수가 없었기에 왠지 공감가지 않는 지루한 옛날이야기를 담은 영화 일 것 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이처럼 아쉽고 심장이 두근두근 됐던 영화는 없었던 것 같다. 또한 최동원 선수와 선동열 선수를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며 그들이 활약상을 글 과 동영상을 통해 보며 왜 사람들이 아직까지 저 두 선수들의 이름을 잊지 않고 사는지 이 해 할 수 있었고 2011년에 53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최동원 선수에게 늦게나마 조의를 표 할 수 있었다. 영화의 주인공인 최동원 선수와 선동열 선수를 통해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최 동원 선수의 성실함과 끈기, 그리고 자신의 위치에서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나로서는 꼭 닮고 싶은 부분이다. 어깨가 상하고 부서질 것 같아도 뒤에서 자신의 등을 보고 있는 동료 들과 관객들을 위해 아픔을 참고 끝까지 투구를 하며 투혼을 펼친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 면 나도 결혼을 하고 자식과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야 하는 날이 올 것이다. 나도 이런 최동 원 선수의 모습을 본 받아 내일에 항상 최선을 다하고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며 항상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내 주위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지켜야 겠다. 영화에 박만수라는 허구인물이 등장한다. 이 선수는 해태 타이거 팀의 후보 선수이다. 항상 주전 선수들의 그늘 아래 빛을 보지 못한다. 후보 선수인 그는 낮은 임금으로 긴 세월을 버 티며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도 사랑하는 부인과 아들에게 인정을 못 받으며 살아간다. 하지 만 그는 정상적인 훈련이 끝난 후에도 혼자 남아 열심히 연습을 한다. 그리고 결국 세기의 대결인 최동원 선수와 선동열 선수의 3차전 경기에서 동점 홈런을 쏘아 올리며 자신의 어 둡고 외로웠던 무명시절을 날려 버릴 수 있었다. 사실 요즘 취업 준비를 하면서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내 자신에게 실망도 하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하지만 이 허구인물인 박만수 선수를 통해 내가 어리석은 생각을 했다고 느꼈다. 당장 좋은 결과가 있지 않더라도 그것에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내 자신을 고쳐나가며 다음에 있을 기회를 위 해 매사에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다짐 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보면서 스포츠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정말 엄청난 것 같았다. 스포츠 때문에 생판 모르는 사람과 웃고 울며 싸울 수도 있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희망과 비 전을 주고, 국민이 하나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관중, 팬, 그리고 국민들을 위해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사는 운동선수들이 너무나 고맙고 자랑스럽다. 2. 다음 사항에 답하시오 1) 본 영화에서 최동원 선수와 선동열 선수간의 라이벌 대결은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 최동원 선수와 선동열 선수는 서로가 가장 아끼는 선후배 관계이자 숙명의 대결을 펼쳐 야만 하는 라이벌 관계이다. 최동원 선수는 부산에서 태어나 경남고등학교를 나와 연세 대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 팀인 롯데에 입단한다. 반면 선동열 선수는 광주에서 태어나 광주제일고등학교를 나와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 팀인 해태에 입단한다. 서울 태 생인 내가 저 둘의 이력을 대강 들어도 살얼음판을 걷는 듯 왠지 모를 긴장감이 맴돈다. 어쩌면 저 둘이 살아온 지역과 소속이란 배경이 기자들과 사람들에게 좋은 떡밥, 반찬거 리가 돼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정작 자신들은 안중에도 없는 라이벌 관계가 이러한 주변 인들을 통해 앙숙관계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이러한 라이벌 관계는 저 둘의 사이를 갈라놓을 뿐 아니라 영남과 호남이란 지역을 더욱 대립되게 하는데 일조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영남과 호남이란 지역과 해태 타이거즈와 롯데 자이언츠란 팀 을 화합할 수 있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된다. 2) 최동원 선수와 선동열 선수 각자의 성격은 야구를 통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영화를 보면서 최동원 선수와 선동열 선수 각자의 성격도 자라온 환경 만큼이나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최동원 선수는 운동선수로써의 자기관리가 너무나 완벽하고 철저하다. 항 상 노력하고 상대 선수를 분석하며, 경기 하나하나에 일구일생, 일구일사 라는 정신으로 공을 던지기에 그가 한국 최고의 투수로 기억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나 완벽을 추구하는 그의 성격은 가끔 팀 동료들과의 마찰을 빚기도 한다. 반면, 선동열 선수는 노력보다는 타고난 재능이 부각된다. 영화에서 선동열 선수의 모습은 최동원 선수에 비해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으로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아간다. 동 료선수들과 어울리며 술 한 잔하며 말이다. 하지만 그의 삶이 최동원 선수의 삶과 비교 당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에게 게으른 선수로 비춰진다. 이런 식의 비교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항상 낙천적일 것 같던 선동열 선수도 최동원 선수와의 라이벌 의식이 점점 심화되고 자신의 우상이었던 최동원이란 산을 넘기 위해 죽기 살기로 연습에 매진한다. 3) 최동원 선수와 그의 동료 김용철 선수와의 갈등과 화해는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 최동원 선수와 그의 동료 김용철 선수는 어렸을 때부터 같이 야구를 해온 친구이다. 당 연히 돈독한 사이일거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둘이 눈만 마주쳤다 하면 싸우기 일쑤였다. 어렸을 때부터 자기 관리가 워낙 투철하고 끊임없는 노력과 재능으로 만인의 스타가 되

어 버린 최동원 선수는 김용철 선수가 봤을 때 부러움에 대상이자 많은 열등감을 느꼈을 것이다. 김용철 선수가 자신이 아무리 홈런을 쳐도 정작 신문 1면을 장식하는 것은 최동 원 선수라는 대사가 기억이 남는다. 이렇다 보니 김용철 선수에게 최동원 선수의 말 한 마디 한마디가 자신을 무시하고 잘난척하는 어조로 들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고등학교 야구 감독님이 세상을 떠난 후 최동원 선수가 김용철 선수에게 다가가 자신이 현재 처한 상황과 평소에 술 한자 같이 못 한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말을 건넨 다. 그 후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해태 타이거즈와 3차전 경기에서 최동원 선수는 15회 를 마운드에 오르며 자신을 불태운다. 이 과정에서 어깨통증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본 김용철 선수는 자신과 팀 동료들에게 최동원 선수를 위해서라도 이기자며 팀을 하나 로 만든다. 이 경기를 통해 최동원 선수와 김용철 선수는 무언의 화해를 통해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앙숙관계를 탈피할 수 있었다. 4) 영화속에서 최동원 선수와 고등학교 야구 감독과의 관계는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가? 영화속에서 최동원 선수와 고등하교 야구 감독님과의 관계는 단지 선수와 감독, 학생과 선생을 넘어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관계였다. 야구를 할 때만큼은 그 누구보다 무섭게 최동원 선수를 훈련시킨 것 같다. 그가 한국에서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감독님이 있어서가 아닐까란 생각을 한다. 항상 일구일생 일구일사를 강조하신 감독님이 있기에 당시에 최동원 선수가 마운드에서 뿐만 아니라 경기장 밖에서도 성실한 모습으로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최동원 선수의 어깨가 심하게 악화되고 계속 재활치료를 받는 모습을 본 감독님은 자신이 너무나 그를 혹독하게 훈련시켰기 때문이라 생각하며 미안해했다. 같은 병원을 다니고 있음에도 최동원 선수가 자신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모 습을 보면 경기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까봐 비밀로 한다. 이 모습을 보며 가슴이 찡했던 것 같다. 5) 스포츠 기자들의 직업인으로서의 애환은 무엇인가? 스포츠 기자들의 애환은 독자들에게 항상 새로운 가십거리, 정보를 타사의 기자들 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해야 된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좀 더 자극적인 것 을 원한다. 이렇다 보니 기자들은 매일 어떤 기사거리를 가져다 줘야 할지 고민일 것이 다. 영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기자들은 선수들과의 단독 인터뷰와 특종을 사수하기 위해 몰래 담을 넘고 잠깐의 취재를 위해 많은 시간을 기다린다. 또한 집요하게 선수들에게 접근하고 그들이 자극 받을 만한 말들을 막 던지기도 한다. 선동열 선수와 최동원 선수 의 세기의 대결이 성사된 것은 아마도 기자들의 저 극성맞음 일지도 모르겠다. 6) 프로야구와 정치 및 권력과의 관계는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 영화에서 한 정치인은 선동열 선수와 최동원 선수의 대결을 정치에 이용한다. 이 두 선 수들이 각 지역에 파급적인 효과를 미친다는 것을 노린 것이다. 그들의 대결을 통해 영 남과 호남지방의 지역감정을 극대화 시켜 표를 나누려는 목적이다. 하지만 고맙게도 이 들의 악한 욕심이 오히려 두 지역을 화합하게 만들었다.

7) 두 선수에게 있어서 3차전 경기의 무승부의 의미는 무엇인가? 두 선수에게 있어 3차전 경기는 정말 중요했을 것이다. 만약 선동열 선수가 이 경기를 이기게 되면 자신의 우상인 최동원 선수와의 비교를 통해 받아왔던 수많은 비난을 끝을 내고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투수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최동원 선수가 이 경기 에서 승리한다면 선배로써 항상 자신의 자리를 위협한다는 기자들과 사람들에게 말이 아 닌 실력으로 증명 할 수 있는 기회이다. 영화로만 봐도 저 둘의 시합은 정말 치열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경기를 직접 볼 수 없었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부모님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경기가 끝나기 전까지도 그 들을 서로 이기려고 악을 쓰며 마운드 에 올라 공을 던졌다. 하지만 마침내 15회가 끝이 나고 결국 무승부로 경기가 막을 내렸 다. 경기가 끝나고 두 선수는 마주보며 씩 웃는 모습이 참 많은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 다.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는 두 선수들이 당시 어떤 기분과 마음이었을지 너무나 궁금하 다. 손에 살점이 다 떨어져 나가고 어깨를 들어올릴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끝까 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기에 누가 이기고 지는 것은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던 것 같다. 이 경기는 두 선수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넘어 팀과 지역 간에 감정을 누그러트 리고 화합의 장이 이루어진 것에 대해 정말로 중요했던 것 같다. 이 경기를 통해 스포츠 가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정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8) 영화속에서 관중 및 팬들의 응원문화는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 영화속에서 관중 및 팬들의 응원문화 수준은 지금과 비교해 보았을 때 상당히 낮은 것 같다.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거나 팀이 지기라도 하면 관중들은 경기 도중에 선수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것은 당연하고 쓰레기와 오물 등을 경기장에 던지는 등 무정 부상태로 변해 버린다. 해태와 롯데는 지역감정의 골이 깊기 때문에 다른 팀과의 경기에 비해 관중들은 더욱 민감해 지는 것 같다. 경기가 끝나고도 상대 팀의 관중들과 싸움이 일어나거나 선수들을 폭행하려 하고 선수들이 탑승한 버스를 부수려고 한다. 이러한 팬 심은 정말 좋아 보이기는 하나 제 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았을 때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 다. 그래도 만약 타임머신이 있다며 저때의 저 곳에서 꼭 한번 응원해보고 싶다. 9) 당신에게 있어서 영화속의 두 주인공 최동원 과 선동열 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는가? 영화로나마 최동원 선수와 선동열 선수의 대결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 영광이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어마어마한 대결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선동열 선수의 현역시절에 대 한 기억 조금은 있다. 하지만 최동원 선수는 얘기로만 들어봤지 이렇게 엄청난 선수인지 영화를 통해서나마 느낄 수 있었다. 최동원 선수는 내게 노력으로 꿈을 이룬 사람으로 다가왔다. 물로 한국 최고의 투수가 되려면 그만큼의 재능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영화를 통해 비춰진 최동원 선수는 재능보다는 노력과 성실함으로 최고의 위치에 자리할 수 있던 것 같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실제 최동원 선수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인 터넷으로 그를 찾아봤다. 인터넷으로 그의 사진이 나왔을 때 어렸을 때 TV로 자주 본 사 람인 것이다. 그냥 해설위원이나 방송인인줄 알았는데 한 시대의 야구계를 주름잡던 사

람이었다니 신기했다. 너무나 안타까웠던 것은 이른 나이에 더 많은 후배들을 보지 못하 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반면, 지금도 감독으로 활동하며 나에게 꾀 친숙한 선동열 선수 는 영화의 단면만 봤을 때 노력보다는 타고난 덩치와 재능으로 성공한 것 같다. 물론 영 화의 초반에는 능글맞고 뺀질대 보였지만 마운드 위에서만은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는 악바리 근성을 보인다. 이런 모습은 저 둘이 최고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 같다. 10) 본 영화의 명대사 및 명장면들은 무엇이며, 이들이 본인한테 전달해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영화 초반에 최동원 선수의 손가락 살점이 심하게 갈라지면서 선동열 선수에게 강력 접 착제로 그 살을 붙이게 한다. 이미 너무나 많은 경기를 소화했기에 몸이 만신창이임에도 불구하고 감독에 부름에 흔쾌히 마운드로 올라가 한국이 이기게 된다. 한 가지 아이러니 했던 것이 나중에 선동열 선수와 최동원 선수 3차전 경기에서 선동열 선수의 손가락의 살점도 갈라지며 감독님이 강력 접착제로 선동열 선수의 손가락을 붙여준다. 최고가 되 기란 정말 쉽지 않은 것 같다. 최동원 선수가 고등학교 시절 때 야구 감독님과 연습이 끝난 후 같이 라면을 먹는 장면 이 있다. 거기서 감동님은 최동원 선수를 돌로 빚대어 말하면서 끝 없는 연습과 노력으 로 반짝반짝한 보석이 되라고 한다. 어깨가 빠지는 한이 있어도 마운드에 선 최동원 선 수의 뒷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죽을 힘을 다해 던져야 한다고 말하며 일 구일생, 일구일사 를 강조한다. 이 장면을 통해 내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과연 나는 어떤 일에 대해 죽을힘을 다해 노력한 적이 있을까? 어려움이 닥쳐오면 너무나 쉽게 포 기하는 내 모습에 저 두 선수들과 너무나 비교가 되었다. 나도 나만의 보석을 빛나게 하 기 위해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 것이다. 최동원 선수의 위엄을 느낄 수 있었던 장면과 대사는 선동열 선수와 최동원 선수의 대결 을 앞두고 한 여기자가 최동원 선수에게 한물 갔다고 하던데...라며 최동원 선수를 자극 한다. 이때 최동원 선수는 그 여기자에게 나는 동열이가 나오건 누가 나오건 죽도록 던 집니다. 내가 한물 갔건 두물 갔건 끝까지 던집니다. 나한테는 그게 야구입니다. 내가 지 든지 이기든지 내 게임은 내가 나갑니다. 내가 끝을 봅니다. 누가 뭐라해도 최동원이 게 임은 최동원이 나간다고 라고 언성을 높여 말한다. 이 모습을 보고 온몸에 소름이 돋고 눈물이 핑 돌았다. 그의 어깨는 이미 너무나 상해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저란 말을 한다는 것에 가슴이 찡했던 것 같다. 영화를 보면서 눈여겨 볼 수 있었던 것은 최동원 선수와 선동열 선수 같은 스타란 그림 자에 가려진 박만수 선수의 삶이다. 누군지 궁금해서 검색을 해봤다. 하지만 그의 존재는 실존 인물이 아니었다. 아마 감독은 이 인물을 통해 모든 운동선수들이 선동열 선수나 최동원 선수처럼 화려하지 않다는 것을 관객에게 표현하려 했던 것 같다. 주전 선수가 되지 못해 배고픔에 허덕이고 가족이 등을 지는 등 운동세계의 잔혹함을 그려낸다. 이 박만수라는 선수를 통해 현재를 충실히 살고 미래를 위해 꾸준히 준비한다면 어느 순간 내게 다가온 기회에 당황하지 않고 꽉 잡을 수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마지막 3차전 경기가 결국 무승부로 끝났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 하늘이 도운 것인 지도 모르겠다. 관객입장에서 운동 경기가 비긴다는 것만큼 시시한 일은 없을 것이다. 하 지만 이 시합만큼은 비기기를 간절히 바란 적은 없던 것 같다. 경기가 끝나고 선동열

선수와 최동원 선수가 다시 예전처럼 돈독한 사이로 돌아가는 것 같아 너무 기분이 좋았 다. 또한 스포츠가 한 사람, 국민,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3. '한국의 프로야구'에 관한 자료 검색 - 참고문헌 명기할 것. 역사 1901년 YMCA 개척 간사로 한국에 파송된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는 1903년 황성기독 교청년회(YMCA)를 설립했고 1905년에는 청년회 회원들에게 서양식 공놀이인 야구를 가르 치기 시작했다. 대한체육사에 기록되어 있는 한국 야구의 효시다. 한국에 야구가 보급된 것 은 1905년 이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1873년에 야구를 도입한 일본이 조선 침략을 본격화하 며 전국에 일본인 야구팀을 만들어 즐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 디까지나 일본인의 야구일 뿐 한국 야구는 아니다. 그래서 한국 야구의 도입을 1905년으로 보는 것이다. 우리나라 야구 역사의 시작 일제 강점기 한국 야구의 수준은 어느 정도였을까. 전반적인 수준은 일본에 뒤졌지만 주력 선수의 능력은 일본 야구 선수에 뒤지지 않았다. 이것은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한 이들만 봐 도 알 수 있다. 일본 최초의 직업야구팀으로 세미 프로 격인 지바우라협회가 창단한 것은 1920년이다. 지바우라협회는 1924년 2월 다카라즈카로 옮겼고 1925년 2차 대륙 원정 때는 손효준, 백효득, 김정식, 정인규, 한기준, 함용화 등이 주전 선수로 활약했다. 또한 1924년 메이저리그 올스타와 경기를 펼친 대일본동경구락부에는 이영민이 참가했다. 1938년 10월 에는 박현명이 오사카 타이거스(현 한신)와 계약을 맺으며 최초의 한국인 프로야구 선수가 됐다. 이후 일본 프로야구 최초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이팔룡과 유완식, 김영조, 이규백 등 이 프로 유니폼을 입었다. 한국에 야구가 도입된 지 100년이 훌쩍 지났다. 1920년 에 열린 전조선야구대회가 전국체육대회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한국 스포츠에서 차지하는 야구의 위상을 쉽게 알 수 있다. 광복 후 수많은 야구인의 노력으로 한국 야 구는 발전을 거듭해 미국, 일본과 세계 정상을 다투게 됐다. 이 글에서는 한국 야구의 발자취를 살펴보려고 한 다. 무엇하나 소중하지 않은 역사가 없지만 아마추어 야 구와 세계대회 등에서 이정표가 될 몇몇을 추렸다.

질레트에서 일본 진출까지 1905년 -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가 YMCA 회원인 현동순, 허성, 김연호 등으로 팀을 만들어 서 야구를 하기 시작한 것이 한국 야구의 효시다. 이것이 덕어학교, 영어학교 등 외국어학교 로 번져 나가며 이 땅에 야구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1906년 3월 15일에는 훈련원에서 최초의 야구 경기가 벌어졌다. 덕어학교가 YMCA에 3점 차 승리를 거뒀다. 1946년 -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기쁨을 맞이한 야구인들은 이듬해 3월 18일 조선야구협 회를 결성하며 야구 재건에 나섰다. 5월 17일부터 19일까지 서울운동장에서는 광복 후 첫 야구대회인 4도시대항 야구대회가 열렸다. 9월 11일부터 18일까지 서울운동장에서 전국 24개교가 참가한 전국중등학교야구선수권대회 (청룡기)가 개최됐다. 이 대회는 한국전쟁으로 6, 7회(1951, 1952년)가 중단되었지만 지금까 지 이어오고 있다. 부산상업(현 개성고)이 처음으로 청룡기를 품에 안았고 에이스 김상대는 대전공업과 치른 2회전에서 대회 최초이자 이 대회의 유일한 홈런을 기록했다. 또한 광주서 중(현 광주일고) 김성중은 인천상업을 맞아 볼넷 4개, 몸맞은공 1개만을 내주며 광복 후 첫 노히트노런의 대기록을 세웠다. 1947년 - 8월 21일부터 26일까지 서울운동장에서 예선을 거친 8개교가 참가한 가운데 전 국지구대표 중등야구쟁패전(황금사자기)이 열렸다. 동아일보가 주최한 이 대회 첫 패권은 경 기중학(현 경기고)을 9-3으로 꺾은 경남중학(현 경남고)이 차지했다. 1954년 - 5월 17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한국, 일본, 대만, 필리핀이 회원국으로 참가한 아시 아 야구연맹이 결성됐다. 아시아야구연맹은 아시아 지역에 야구 기술을 보급하기 위해 12월 18일부터 23일까지 마닐라에서 제1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광복 후 첫 국제대회에 나선 한국은 일본과 필리핀에 잇달아 졌지만 대만을 4-2로 꺾고 3위에 올랐 다. 1956년 - 한국일보와 대한야구협회가 공동으로 재일동포학생야구단 모국방문경기대회를 개 최했다. 이 대회는 1968년 제11회 대회까지 이어졌으며 1972년부터는 한국일보가 주최한 봉황기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에 참가하는 것으로 계속됐다. 그러나 1997년을 끝으로 출전 경비 등의 문제로 재일동포학생야구단의 모국 방문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 대회를 통 해 재일동포 2, 3세들이 조국을 이해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계기가 됐다. 1957년 - 동산고가 동향의 라이벌 인천고를 3-1로 꺾고 유일하게 청룡기대회 3연속 우승을 달성했다. 3연속 우승의 중심에는 괴물 투수 신인식이 있었다. 1학년이던 1955년 제10회 결 승에서 대회 3연속 우승을 노리던 인천고를 맞아 연장 12회까지 1실점으로 완투하는 괴력 을 발휘했다. 2학년이던 제11회 대회에서는 한술 더 떴다. 중앙고와 벌인 결승전에서 1회 초 유격수 실책으로 1번 타자를 출루시킨 것을 제외하고 단 한 명의 타자도 누상에 내보내 지 않았다. 11탈삼진을 곁들이며 결승전 사상 최초의 노히트노런을 달성한 것이다. 1992년 청룡기대회 결승에서 공주고 노장진이 선린상고(현 선린인터넷고)를 상대로 두 번째 결승전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다. 1958년 - 한국 야구 불후의 명선수이며 광복 후에는 야구 행정에 힘쓴 고 이영민을 기념하 는 이영민 타격상이 제정됐다. 고교 선수 가운데 우수한 타격 성적을 거둔 이를 선정해 이 상을 준다. 제1회 수상자로는 경남고 3루수 김동주가 선정됐으며 백인천(1959년), 이광환 (1965년), 정현발(1971년), 김일권(1973년), 이만수(1976년), 김건우(1980년), 강혁(1991년), 김 현수(2005년) 등 한국 야구를 빛낸 수많은 스타가 이 상을 받았다. 경남고 신민기는 1997년 과 1998년 최초이자 유일하게 2년 연속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1962년 - 1월 농협의 백인천이 일본 프로야구 도에이와 계약하며 대타자 장훈과 한솥밥을 먹게 됐다. 광복 후 첫 프로야구 선수가 된 백인천은 1975년 수위타자에 오르는 등 타율 2 할7푼8리, 209홈런, 212도루, 776타점 등의 통산 성적을 남겼다. 국내 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에는 MBC 청룡 감독 겸 선수로 활약하며 2010년 현재 유일한 시즌 4할 타율(.412) 을 기록했다. 1990년에는 감독으로 LG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1963년 - 9월 21일부터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이 마 침내 일본에 처음으로 승리를 거두며 첫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25일 1차 리그에서 재일동 포 신용균의 호투와 포수 서정리의 공수에 걸친 활약으로 일본을 5-2로 꺾었다. 대회 우승 이 걸린 29일 2차 리그 일본 전에서도 신용균의 쾌투와 김응룡의 2점 홈런에 힘입어 3-0으 로 완승했다. 신용균 KIA 3군 코치는 1차 리그 때는 커브와 싱커를 주로 던졌다. 2차 리그 에서는 빠른 공을 중심으로 던지며 싱커를 섞은 게 주효했다. 일본 타자들이 조급하게 덤벼 완봉승을 거둘 수 있었다 고 회고했다. 1966년 - 6월 중앙고의 강속구 투수인 이원국이 도쿄 오리온즈에 입단해 백인천에 이어 일 본 프로야구에 진출한 제2호 선수가 됐다. 하지만 외국인 선수 제한 등으로 백인천과 달리 1군 무대에서 활약하지는 못했다. 이후 야구 연수를 간 미국에 정착한 그는 마이너리그와 독립리그를 거쳐 1972년부터 멕시칸리그에서 통산 149승(한국야구사에는 150승)을 거두는 등 미국 프로야구와 멕시칸리그에 진출한 최초의 한국인 선수가 됐다. 한국야구, 세계 정상을 향해 비상하다 1975년 - 8월 14일부터 31일까지 캐나다에서 열린 제2회 대륙간컵쟁탈 세계야구대회에 출 전하며 처음으로 세계무대의 문을 두드렸다. 콜롬비아, 이탈리아, 니카라과에 승리했지만 캐 나다, 푸에르토리코, 일본, 미국에 져 3승 4패로 A조 3위에 머물며 예선 탈락했다. 1976년 - 12월 콜롬비아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참가했지만 5승 5패로 공동 5위에 머물렀다. 그러나 9일 일본과 경기에서는 6-4로 승리하며 국외에서 열린 대회에서 처음으로 일본을 꺾었다. 김호중에 이어 구원 등판해 빼어난 투구 내용을 보인 유남호 KBO 운영위원 은 나는 그저 멍했는데 당시 김계현 대표팀 감독님이 자신이 대표팀 감독을 하면서 일본 을 한번 시원하게 이겨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그것을 오늘 풀었다 면서 내 손을 잡고 눈물 을 흘리셨다 고 회고했다.

1977년 - 마침내 한국 야구가 세계 정상에 우뚝 섰다. 11월 11일부터 26일까지 니카라과에 서 열린 슈퍼월드컵대회에서 미국과 일본 등을 꺾고 우승의 기쁨을 만끽했다. 앞선 2번의 경기에서 미국에 연패했던 한국은 우승 결정전에서 김봉연의 홈런과 이해창의 결승타 등에 김시진-최동원-유남호가 이어 던지며 5대4로 승리했다. 1980년 - 1월 28일 연세대 박철순이 메이저리그 밀워키 브루어스와 계약금 1만 달러에 입 단 계약을 맺었다. 1981년까지 마이너리그에서 활약한 그는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OB(현 두산)에 입단해 22연승을 포함해 24승을 올리며 팀을 원년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후 연이은 부상에도 오뚝이처럼 재기하며 1996년까지 통산 76승을 기록했다. 1981년 - 7월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열린 제1회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김건우, 조계현, 이효봉, 김동기, 강기웅, 조양근 등 고교 선수에 나이 제한(18세 이하)에 걸 리지 않은 선동열(당시 고려대)과 구천서(당시 상업은행)가 포함된 청소년대표팀은 3전 2승 제로 열린 미국과 결승전에서 3-1, 3-2로 연승하며 정상에 올랐다. 1982년 - 쳤습니다. 좌측. 홈런이냐! 홈런이냐! 홈런입니다. 홈런. 홈런. 홈런. 스리런 홈런. 김용 MBC 아나운서의 터질 듯한 목소리와 함께 잠실구장은 흥분의 도가니가 됐다. 9월 서 울에서 열린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일본 전에서 2-2 동점을 깨는 한대화의 3점 홈런 이 나온 것이다. 프로야구가 출범하며 우수 선수들이 이탈해 전력 열세가 예상됐지만 선동 열, 임호균 등의 마운드와 탄탄한 수비력을 바탕으로 한 지키는 야구가 빛을 발하며 우승 목표를 달성했다. 솔직히 0-2로 뒤지던 7회까지는 이기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 사건 등으 로 시끄러울 때였다. 압박감이 아주 컸다. 지면 운동장에 앉아서 (관중이)던지는 소주병에 맞아 죽자고 (선수들에게) 말했을 정도였다. 패전의 뒷감당을 어떻게 하겠나! 머리로는 어렵 다는 생각이 들어도 마음으로는 어떻게든 이기려고 했고, 그게 하늘에 닿은 모양이다. 어우 홍 당시 감독의 설명이다. 1994년 - 1월 12일 한양대 박찬호가 계약금 120만 달러에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와 입단 계약을 체결했다. 메이저리그에 신인드래프트가 도입된 이래 17번째로 메이저리그에 직행했 지만 17일 만인 4월 21일 경험 부족 등으로 마이너리그로 내려갔다. 1995년 9월 메이저리 그에 복귀해 지난해까지 동양인 최다인 통산 124승을 기록했다. 박찬호 이후 많은 선수가 메이저리그의 문을 두드렸지만 봉중근, 서재응, 김병현, 최희섭, 조진호, 류제국, 추신수에 한 일 프로야구를 거친 구대성과 이상훈 등만이 메이저리그 무대에 섰다. 1998년 - 박찬호, 서재응, 임창용, 김동주, 이병규, 박재홍 등 국내외 프로야구 스타와 김병 현, 홍성흔, 신명철, 강혁 등 아마추어 선수들로 꾸린 대표팀이 방콕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우 승을 차지했다. 대회 첫 우승이었다. 사회인 야구 중심으로 선수를 선발한 일본과 결승전에 서는 장단 14안타에 박찬호의 호투를 앞세워 13-1 7회 콜드게임승을 거두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999년 - 1월 대한야구협회는 아마추어 야구 최고 지도자에게 주는 김일배 지도자상을 제 정했다. 한국야구사에서 명장으로 이름 높은 김일배는 1947년 조선운수 감독을 시작으로 육 군, 경동고, 연세대, 교통부, 해운공사, 제일은행, 장충고 등에서 수많은 우승을 일구어 내며 한국 야구를 빛낸 스타들을 길러 냈다. 야구인의 업적을 기념해 제정된 국내 야구상은 이영 민 타격상과 김일배 지도자상 뿐이다. 2000년 - 프로 선수에게 문호를 개방한 9월 시드니 올림픽에서 한국은 경희대 정대현을 제 외한 전원을 프로야구 선수로 대표팀을 구성했다. 예선에서 호주, 쿠바, 미국에 패하며 4승 3패로 일본과 공동 3위로 준결승에 진출했다. 미국과 치른 준결승전에서 더그 민케이비치에 게 끝내기 홈런을 맞아 2-3으로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일본과 벌인 3위 결정전에서 8회 말 이승엽의 2타점 2루타 등으로 3-1로 이겨 동메달을 획득했다. 2007년 - 12월 18일 한국 야구의 성지인 동대문야구장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동대문야 구장은 1925년 개장했으며 1966년 9월 국내 최초로 조명탑이 설치됐다. 1982년 출범한 프 로야구 개막전도 함께하는 등 동대문야구장은 한국 야구 역사 그 자체였다. 첫 홈런은 1928 년 6월 8일 이영민이 기록했다. 2008년 - 한국은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대회 우승 이후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지역 예선 탈락에 이어 2006년 도하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대만과 일본에 져 동메달에 머무는 수모를 겪었다. 명예 회복에 나선 한국은 대표팀 전원을 프로 선수로 구성해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 했다. 김경문 감독의 용병술이 적중하며 한국은 9전 전승을 기록하며 아시아 나라로는 처음 으로 야구 종목의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전승 우승은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와 1996년 애틀랜타 대회의 쿠바에 이어 3번째로 올림픽에 프로 선수가 참가한 후로는 처음이 다. 야구인 최동원 한국 프로야구는 1982년 출범한 이래 수많은 스타를 배출했다. 그 중 최고의 선수가 누구인 지 쉽게 말할 수 없지만 최동원(51)의 이름을 빼 놓고 한국 프로야구를 말할 수는 없다. 이 제는 그를 알지 못하는 세대들이 자라나고 있지만 한국에는 '야구=최동원'이었던 시절이 아 직도 선명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최동원의 인생은 그의 선수 시절만큼 굴곡이 많았다. 최동 원의 선수 시절이 그의 전매 특허인 불 같은 강속구 같았다면 지금 그의 인생은 그를 대표 하는 또 다른 구종인 커브의 곡선을 닮은 듯하다. 강렬한 투혼의 추억 한국 시리즈 7전 가운데 혼자 4승을 따내다 이번에 선정한 한국 스포츠 사를 빛낸 50인 중 한국 프로야구에서 활약했던 이는 단 3명이 다. 이승엽, 선동열, 최동원. 그렇다면 최동원은 어떤 선수였을까? 그는 1983년 프로에 데뷔 한 뒤 8시즌 동안 통산 103승 74패 26세이브를 기록한 투수다. 통산 방어율 2.46과 1,019개 의 탈삼진을 기록했다. 그러나 그는 통산기록 부문에서 10위권 안에 드는 것이 거의 없는

투수이기도 하다. 그의 이름에 늘 같이 따라다니는 선동열의 통산 146승 132세이브 통산 방어율 1.20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최동원을 잊지 못하는 것일까? 그 건 1984년, 짧았지만 너무나 강렬해서 도저히 지워낼 수 없는 한국시리즈에 대한 짙은 향수 때문일 것이다. 야구 팬들은 롯데가 우승했던 그때의 일을 가을의 기적 이라 부른다. 최동원 은 7전4선승제의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따내며 약체 롯데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1984 년 한국시리즈보다 더 극적인 승부는 아마도 한국 프로야구에서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17이닝 연속 노히트 노런 기록, 그러나 병역이 발목 잡은 메이저 진출 아마추어 야구 시절부터 최동원의 활약상은 눈부셨다. 경남고등학교 2학년 때 전국우수고교 초청대회에서 당시 고교 최강인 경북고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이 경기를 계기 로 최동원 이란 이름이 야구판에 널리 알려졌다. 최동원은 다음 경기인 선린상고전에서도 8 회까지 노히트 노런 투구를 이어가 17이닝 연속 노히트 노런 기록을 세웠다. 그 뒤에도 각 종 기록을 쏟아 내며 고교 최고 투수로 이름을 날렸고 팬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그를 모델로 그린 만화가 발매될 정도였다. 해외 진출의 기회도 여러 차례 있었다. 첫 번째 기회 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인 1977년에 찾아왔다. 일본 프로야구 롯데 오리온즈(현 지바 롯데 마린스)의 가네다 마사이치 감독이 최동원을 양자로 들이는 조건으로 입단을 추진했지만 여 러 가지 이유로 결렬됐다. 최동원은 아무리 큰물에서 야구를 하고 싶다고 해도 당시 정서 로 볼 때 일본인의 양자로 들어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할아버지를 비롯해 주변 어 르신들이 많이 반대하셨다 며 그 시절을 떠올렸다. 아쉬움으로 따진다면 1981년 메이저리그 구단과 성사 직전까지 갔던 두 번째 기회가 더 클 것이다. 최동원은 1981년 캐나다에서 열린 대륙간컵 대회에서 캐나다를 상대로 8회까지 퍼펙트 게임을 기록하는 등 호투를 펼치며 대회 최우수선수로 뽑혔다. 최동원의 투구 내용 을 높게 평가한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입단 제의가 이어졌고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연봉 61 만 달러에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최동원의 해외 진출 꿈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병역 문 제 때문이었다. 당시 공군에서 뛰던 축구 스타 차범근은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했지만 복 무 기간이 6개월 남았다는 이유로 귀국해 복무 기한을 채운 뒤 재진출하는 일도 있었다. 그 만큼 해외 진출이 어려웠던 때다. 최동원은 해외 진출을 성사시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찾 아봤지만 결국 포기해야 했다. 최동원은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시 기였다. 이듬해 프로야구가 출범해 해외 진출의 꿈을 잊고 열심히 던지며 행복할 수 있었 다 고 말했다. "최강팀이 맞상대로 나와도 승패는 아무도 모르는 일" 1982년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했다. 그러나 최동원은 서울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대표로 뽑혀 프로 진출이 1년 유보됐다. 1년 뒤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고 프로야구에 데뷔했다. 아 마추어 야구 최고 스타 최동원은 데뷔 첫해 9승16패를 기록하며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팀 전력이 좋지 못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프로 1년 만에 타자들의 기량이 발전한 점도 최동원 이 10승대 투수가 되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해 최동원은 208⅔이닝을 던지며 2.89의 방어율

을 기록했다. 최동원은 데뷔 2년째인 1984년 선발과 중간을 오가며 27승13패 방어율 2.40 의 좋은 성적을 올렸고 롯데를 한국시리즈로 이끌었다.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은 삼성 라이온 즈는 전기리그 우승을 차지한 당시 최강 전력의 팀이었다. 삼성 김영덕 감독은 시리즈를 앞 두고 롯데 에이스 최동원이 정규 시즌에서 우리와 붙어 재미를 보지 못했다 며 자신감을 보이자 롯데 강병철 감독은 1, 3, 5, 7차전에 최동원을 투입해 4승3패로 이기겠다 고 응수 했다. 최동원은 강병철 감독에게 1, 3, 5, 7차전 등판, 이거 너무 무리 아닙니꺼? 하고 말 씀 드렸다. 강 감독은 미안한 표정과 함께 동원아, 우야노 여기까지 왔는데 라고 답했고 최 동원은 알았심더. 한번 해보입시더 라며 결의를 다졌다. 최동원은 당시 삼성은 10번 싸우 면 1번 정도 이길 수 있는 강한 상대였다. 그러나 승패는 경기가 끝나기 전에는 모르는 일 이기 때문에 열심히 던지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고 당시를 회상했다. 마침내 시리즈가 시작됐고 최동원은 1차전과 3차전에서 각각 9이닝 7안타 완봉승(롯데 4-0 삼성), 9이닝 6안타 2실점으로 완투승(롯데 3-2 삼성)을 기록했다. 5차전에서는 8이닝 6안타 2실점으로 호투했지만 롯데가 2-3으로 졌다. 최동원은 이 경기에서도 완투했다. 강감독은 6 차전 5회에 최동원을 구원 투수로 기용해 6-1로 승리하며 시리즈를 최종전으로 끌고 갔다. 7차전을 앞두고 롯데 선수들이 더그아웃에 모였다. 최동원은 객관적으로 열세였던 전력에 서 3승3패로 맞선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니 7차전을 보너스 경기라고 생각하고 마음 편하 게 뛰자고 서로를 격려했다 고 기억했다. 마운드에 오른 최동원도 가벼운 마음으로 공을 뿌 렸다. 경기 초반 4점을 내줬지만 마음은 편안했다. 8회초 롯데 공격에서 유두열이 6차전까 지의 부진(17타수 1안타)을 말끔히 씻어 내는 3점포를 쏘아 올렸고 경기는 6-4로 뒤집혔다. 8회말과 9회말만 막으면 된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부담감이 밀려왔다. 앞선 점수를 어떻 게 지켜낼 지 스스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교체는 생각하지 않았다. 에이스인 자신이 막지 않으면 안 됐기 때문이다. 이기든 지든 자신이 마무리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9회말 2사후 최동원의 몸쪽 높은 공에 삼성 장태수의 배트가 돌았다. 주심은 판정을 하지 않았고 최동원은 곧바로 1루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배트가 돌았다는 1루심의 제스처에 최동원은 펄쩍 뛰어오르며 포수 한문연과 포옹했다. 최동원은 그때 감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내 선수 생활 가운데 최고의 순간이었다 고 말했다. 한국시리즈에서만 40이닝을 던지며 4승을 올린 최동원은 타격 3관왕을 차지한 삼성 이만수를 제치고 정규 시즌 최우수선수로 뽑히며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어려운 선수들 돕자는 선수협 추진 후부터, 그늘이 찾아오다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뒤에도 최동원은 쾌속 질주했다. 1987년까지 해마다 10승 이상 을 기록했고 200이닝 이상을 던졌다. 1988년 최동원은 선수협의회를 결성하고자 했다. 해태 타이거즈의 투수 김대현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고 선수 복지 문제의 심각 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최동원은 같이 운동을 하던 선수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도울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연습생 선수들의 최저 생계비나 선수들의 경조사비, 연금 같은 최소한 의 복지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선수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고 말했다. 명예욕에 따른 움직임이라는 일부의 편견도 있었다. 그러나 최동원은 나는 1억 원의 연봉을 받는 선수였 다. 그 돈이면 당시 강남에 아파트를 마련할 수 있었다. 내 욕심을 위해서라면 선수협을 결

성할 필요가 없었다. 어려운 동료들을 돕고 싶었을 뿐 이라고 강조했다. 구단들의 강한 반발 에 밀려 선수협 결성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해 11월 최동원은 삼성 투수 김시진과 맞트레이 드됐다. 롯데가 아닌 다른 팀의 유니폼을 입는 것은 최동원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트레이드 사실보다 최동원을 힘들게 한 것은 구단이 자신의 의도를 본의와 다르 게 받아들였다는 점이었다. 구단에 대한 섭섭한 마음과 함께 선수 생활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최동원은 1990년 시즌까지 삼성에서 뛰었고 1991년 시즌이 시작하기 전 마운드 를 떠났다. 가족들과 의논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32살이었다. 아마 추어 야구 시절부터 혹사 당한 게 조기 은퇴로 이어진 것이 아니냐는 견해도 있었다. 최동 원은 아마추어 시절이나 프로에서 무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시대에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름 세 글자에 부끄럽지 않게 맡은 바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고 말했다. 은퇴한 뒤 최동원은 야구인으로 살고 싶었다. 지도자가 되고 싶었지만 그를 받아 주는 구단 은 없었다. 팬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어 텔레비전의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했지만 사람들은 그의 뜻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야구 선수가 왜 오락 프로그램에 나오느냐 는 식 으로 바라봤다. 자신의 의도가 다르게 전해진 것을 안 최동원은 1999년부터 방송 출연을 접 고 다시 야구 판으로의 복귀를 노렸다. 그러다 2001년 한화 이글스 투수 코치로 지도자 생 활을 시작하게 됐다. 선수들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고 코치 직에서 물러난 뒤 2005년 다시 한화에서 코치를 맡았다. 2007년에는 한화 2군 감독을 맡아 2년 동안 유망주 들을 가르쳤다. 2008시즌을 마치고 한화에서 물러난 최동원은 올 시즌부터 한국야구위원회 (KBO) 경기감독위원으로 야구장을 찾게 됐다. 의족 차고 다니시던 아버지, "네가 운동하고 싶다면 마음껏 해보거라 최동원의 야구 인생은 승부사 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다. 최동원은 어떤 경기에서든 이를 악물고 던졌고 팬들은 그의 역투에 환호했다. 혼신의 힘을 실어 공을 던질 때마다 최동원은 아버지를 가슴에 담았다. 최동원은 아버지께서는 6.25 전쟁으로 한쪽 다리를 잃으신 뒤 의 족을 차고 다니셨다. 당신께서는 축구선수가 되고 싶어 하셨지만 할아버지의 반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나에게는 네가 운동을 하고 싶다면 시켜주겠다 며 아낌없이 지원해 주셨 다 고 부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드러냈다. 최동원은 불편한 몸으로 아들 뒷바라지를 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야구 외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안테나를 별도로 설치해 일본 고교 야구와 프로야구 중계를 볼 수 있게 해 주신 것도 아버지였고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함께 캐치볼을 했던 것도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였지만 최동원이 프로에 입단하는 과정이나 연 봉 협상 과정에서 구단과 갈등을 빚을 때면 일부 언론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의 문제에 지나 치게 간여한다며 최 씨를 비난했다. 최동원은 일부 언론에 대한 섭섭한 마음을 드러냈다. 최동원은 내가 해명을 하려고 해도 선수 한 명의 목소리는 구단에 비해 너무 작았다 고 말했다. 아버지는 주위의 이야기에 흔 들리지 마라 며 아들에게 힘을 실어 주곤 했다. 최동원은 아버지에게서 즐겁게 열심히 사는 것이 건강하게 사는 것 이라는 가르침도 받았다. 최윤식 씨는 2003년 세상을 떠났고 최동원 은 아버지의 명예가 회복되기를 바라고 있다.

최동원은 가슴 속에 뜨거운 열망을 품고 있다.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은 삶을 위해 노 력하고 있다. 최동원은 지도자로 좋은 후배들을 길러 내고 선수 시절과 마찬가지로 내 이 름 세 글자를 널리 알릴 수 있으면 좋겠다. 나이에 관계없이 더 큰일을 하고 부족한 면을 채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고 밝혔다. 마운드의 승부사 최동원은 인생이라는 마운드에서 여전 히 공을 던지고 있다. 야구인 선동열 외아들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2남2녀의 막내였다. 다섯 살 위의 형이 젊은 나이에 백혈병 으로 세상을 떠났기에 그 때부터 외아들이 된 것이다. 그 형은 동생에게 야구라는 선물을 안겨줬다. 그 선물은 그에게 평생을 야구계에 몸을 담도록 한 출발점이었다. 그리고 한국 야 구사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커다란 획을 긋게 된다. 세상을 떠난 형에게서 배운 야구라는 선물, 한국 최고의 투수로 만들다 채소농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선동열이 야구를 접하게 된 것은 형 선형주의 영향이 컸다. 형이 초등학교 때부터 야구선수(포수)였기에 어려서부터 동네어귀에서 형을 향해 공을 던질 수 있었다. 그때 형은 동생의 공을 받으며 한국 최고의 투수가 탄생할 것을 짐작이나 했을 까? 하지만, 동생에게 귀중한 선물을 선사한 형은 고2 때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소년 선동 열의 초등학교 6학년 때 일이다. 졸지에 외아들이 되자, 집에선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야구 만 하는 게 미덥지 않았다. 정말 엄청난 반대가 있었어요. 야구해서 먹고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어려웠으니까. 그런데 나로선, 야구를 도저히 그만 둘 수가 없었어요. 결국 야구와 공부, 둘 다 포기할 수 없어 가정교사를 두게 됐죠. 광주 송정동초등학교를 나와 무등중학교에 들어가서였다. 수업은 오전만 했고, 오후엔 야구 훈련을 했다. 오후 수업을 따라잡기 위해 훈련이 끝나면 저녁마다 책상에 앉아 가정교사로 부터 별도의 수업을 받았다. 그럴 때마다 배움보다 졸음이 더 많이 밀려왔다. 결국 공부를 포기해야 했다. 3년 전, 그러니까 2006년 작고하신 아버지가 당시 엄청난 꾸지람 뒤에 아들 의 야구를 허락하면서 한 말이 있다. 이왕 시작했으니, 국내에서 최고가 될 생각으로 해라. 그렇지 않으면 아예 시작하지 말라 는 당부였다. 아버지는 어떻게 커갈지 모를 아들의 야구 미래를 위해 아낌없이 애정을 쏟았다. 광주 송정리 집 뒤뜰에 티배팅 시설과 공을 던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줬고, 밤에도 운동을 할 수 있도록 야간 라이트 시설까지 했다. 튼튼한 몸을 만들기 위해 어려서부터 보약도 많이 지어 먹였다. 당시 운동을 해서는, 잘 해야 대학 가고 실업팀이나 들어가는 정도였는데, 그래도 부모님이 뒷바라지를 열심히 해줬기에 선수 로서 잘 커나갈 수 있었습니다. 강속구 위력에 포수의 뼈가 부러지기도 대학 때 구속 150km 훌쩍 넘어 야구 말고는 사실 제대로 해 본 운동은 거의 없었다. 다만, 공을 던지는 쪽엔 남다른 소질이 있었다. 연습 파트너인 포수가 그의 공을 받다가 그만 공을 잘못 받는 바람에 몸에 맞아 뼈 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한 적이 있었다.

중학교 시절 체격이 1m68cm, 62kg 정도였는데, 공 빠르기가 시속 130km 중반 대까지 나 올 정도였다. 어려서부터 공은 빨랐다 고 했는데, 광주일고 3년 때 키가 1m82cm에 비해 체중은 67kg 밖에 나가지 않을 만큼 가냘픈 체격인데도 구속이 148km까지 나왔다. 고려대 에 입학해 숙소 생활을 하면서 먹는 것이 좋아지고 체중이 75kg까지 불자, 구속은 150km를 넘어섰다. 구속으로만 보면, 대학 때가 투수 3관왕을 했던 프로 때보다 더 좋아 시속 155~156km대를 유지했다. 강속구가 한창 위력을 보이던 고교 3년, 1980년 전국 4개 대회에서 2차례 우승을 이끌며 평균자책 1.27을 기록했다. 노히트노런도 이때 처음 기록했다. 봉황대기 첫날 경기고와 대결 에서 매회 삼진과 선발타자 전원삼진 등 15개 탈삼진을 기록했다. 하지만 광주일고는 중앙 고에 져 우승을 하진 못했다. 당시 연간 4개였던 고교 대회의 총 관중이 103만 명이었으니 고교야구의 열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몸 쪽으로 던지면 직접 공 주워와" 포수 심재원 덕에 정교한 투구 완성 고려대에 입학하던 1981년은 처음 태극마크를 달던 해였다. 평소 3명의 야구 우상이 있었는 데 최동원, 김시진, 임호균이었다. 대표팀에서 함께 훈련할 때 불펜 연습투구를 보면서 그의 마음 속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빠르기와 제구력이 적절히 조화된 투구 모습에 푹 빠지고 만 것이다. 나도 저렇게 해봐야지 하는 강한 충동이 생겼고, 그게 더 야구를 열심히 하게 된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고백했다. (임)호균이 형의 경우엔, 얼마나 제구력이 좋은지 홈플레이트에 야구공을 한 개 올려놓고, 3개를 던지면 1개는 반드시 그 공을 맞출 만큼 정 교했었어요. 지금도 포수가 원하는 공 10개 중 7개만 던져도 최고의 투수로 평가를 받는데, 임호균은 당시 컨트롤의 마술사로 불릴 만큼 제구력은 가장 뛰어났다고 회고했다. 대표팀 훈련에서 우상들이 강한 동기부여를 했다면, 그것을 구체적인 실력으로 다듬어가도 록 해준 것은 대표팀의 포수였던 심재원이었다. 당시 선동열은 공은 빨랐지만 제구력이 좋 지 못했다. 10개 중 포수가 원하는 공을 3~4개 정도밖에 던지질 못했다. 포수 심재원은 바 깥쪽으로 제구 되면 스트라이크로 잡아주고, 몸 쪽이면 아예 잡아주지 않고 직접 공을 주워 오도록 했다. 머리를 한 대씩 맞는 것은 당연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투수 선 동열은 정교한 선수로 성장해갈 수 있었다. 선동열 감독은 잘 하는 선수와 보통 선수의 차 이는 정말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한데도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로 나타난다 며 결국 잘 하는 선수는 자기 플레이에 대해 강한 자신감을 갖는 것인데, 이것을 얻기까지 얼마나 스스 로 노력해 터득하느냐의 문제 라고 했다. 1981년은 대학 입학과 대표팀 합류 외에 첫 국제 대회 출전이라는 점에서 선동열에겐 잊을 수 없는 해였다. 미국 오하이오주 뉴워크에서 열 린 제1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김건우와 함께 마운드를 책임지며 창설대회 우승 을 거머쥐었다. 그는 교민이 3명 밖에 살지 않았고, 그 중 의사가 사는 교민 집에서 특별히 지낼 수 있었는데, 한국음식에다 너무 잘 대접을 받아 외국 호텔에서 고생하던 다른 선수들 에게 미안할 정도였다 고 했다. 1982년 일본과의 세계야구선수권 결승전, 기적 같은 대역전 드라마의 MVP

이듬해인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은 투수 선동열 뿐 아니라 김재박 한대화 등 숱한 스타들을 배출하며 한국 야구를 세계만방에 과시한 대회였다. 최강 쿠바가 불참하면서 개최국으로서 우승이 목표였지만, 중하위권으로 분류된 이탈리아와 첫 경기에서 1-2로 역전패해 출발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엔 선동열 투수가 있었다. 미국과의 2차전 에 선발로 나와 15개의 삼진을 뽑아내며 5피안타 1실점으로 호투해 2-1 승리를 이끌었다. 자유중국전에서도 8삼진 무실점으로 6-0 완봉승으로 역투했다. 이제 남은 것은 일본과 결승 전. 난적 미국과 자유중국 승리의 선봉이었던 선동열이 다시 선발로 나섰다. 선동열이 2회 2실점한 뒤 일본 스즈키에 타선이 1안타로 고전하면서 7회까지 뒤졌지만 8회 기적 같은 드 라마가 연출됐다. 김재박의 개구리 점프 스퀴즈번트와 한대화의 역전 결승 3점포로 5-2, 역 전극이 펼쳐졌다. 선 감독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이가 제일 어렸어요. 임호균 최동원 김시진 3명의 선 배가 있었는데도, 어우홍 감독이 전날 나보고 던지라고 했죠. 너무 긴장돼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어요. 잠실야구장 개장 뒤 첫 국제대회였고, 3만 명 이상이 가득 찬 구장에 서 보긴 그때가 처음이었으니까요. 마운드에 섰을 때 다리가 후들거렸고, 포수 사인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죠. 2회 2실점 뒤 점수를 주지 않아 반드시 따라가리라 생각했었고, 역전 뒤 9회 마지 막 공을 던질 땐 다리가 하늘에 붕 떠있는 기분이었어요.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죠. 대회 최 우수선수를 발표하는데, 주최 쪽이 나를 처음 불렀다가, 다시 한대화를 불렀고, 다시 또 정 정해서 나를 불러 결국 MVP가 됐어요. 지금도 한대화 (삼성)수석코치에게 미안할 따름이 죠. 그런데 인연이 묘한 것이, 이후 해태시절에서도 내가 던질 때마다 결승타와 홈런, 타점 이 가장 많았던 게 한 코치에요. 그래서 지금도 삼성에서 한솥밥을 계속 먹게 된 것 같아 요. 1938년 대회 창설 뒤 44년 만에 아시아에선 한국이 처음 우승을 하는 감격적인 장면에 서 막내 선동열이 MVP가 되면서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선동열 입단 파동'겪은 후 완봉승 8번, 완투 19번, 평균자책 '꿈의 0점대'기록 이미 대학무대에서 국제적인 선수로 능력을 인정받자, 그의 시선은 해외를 바라보고 있었다. 82년 세계선수권 우승으로 병역문제도 해결된 터였다. 하지만, 해외로 가려는 그를 도와주 는 사람은 없었고, 모두 그를 어떻게 하면 붙잡아 팀 전력으로 활용할 것인가가 야구계의 뜨거운 화두였다. 이게 결국 1985년 선동열 파동으로 알려진 입단 사건의 발단이 됐다. 대 한야구협회와 한국야구위원회가 펴낸 <한국야구사>는 이 문제를 선동열의 양다리 작전 으 로 표현하고 있다. 선 감독의 얘기다. 82년 세계선수권 우승 뒤 군 문제가 해결돼 해외로 가려고 했지만, 학교 등의 반대에 부닥쳐 무산됐어요. 결국 졸업 뒤 실업에 가면 5년 종사 뒤 해외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한국화장품에 입단해 시범경기까지 뛰었어요. 당시 한국 화장품 회장이 대한야구협회의 임광재 회장이었던 점도 작용했죠. 하지만, 해태 팬들의 성화 가 심해져 집에서 해태 입단을 독촉하게 됐어요. 결국 한국화장품을 포기하고, 해태로 들어 가게 됐어요. 이 일로 전반기를 뛸 수 없는 징계를 받게 됐죠. 프로야구의 출범으로 인기와 재정에서 타격을 본 대한야구협회가 아마등록선수가 프로선수 에 등록할 수 없다고 무효소송을 제기하면서 비롯된 사건이었다. 결국 전반기를 근신한

1985년 후반기 대구 삼성과 개막전(7월2일)에 프로 데뷔전을 치르게 된 선동열은 1976년부 터 요미우리에서 4년 연속 두 자리 승수를 기록했던 거물 김일융(일본이름 니우라 히사오) 과 맞대결해 7회까지 무실점으로 버티다 8회 집중 5피안타로 0-5로 져 패전투수가 됐다. 선 감독은 당시 졌던 게 오히려 약이 됐어요. 결과적으로 신인 선수가 7회까지는 잘 던지긴 했는데, 역시 프로의 벽이 높다는 것을 실감했어요 라고 말한다. 그 해 4패를 당한 선동열은 3경기 만에 세이브를 따내는 등 구원승으로만 7승에 8세이브, 평균자책 1.70의 신인성적을 냈다. 하지만 그의 진가가 드러나는 데 오랜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다음 시즌인 1986년 8 차례 완봉승과 19번의 완투경기를 포함해 개인 역대최다인 24승(구원 7승) 6패 6세이브에 평균자책은 꿈의 0점대 인 0.99를 기록했다. 결국 프로 입문 2년 만에 투수 3관왕(다승 평균 자책 승률)에 오르며 시즌 최우수선수가 됐다. 1988년부터 3년 연속 투수 3관왕을 차지했으 며, 해태의 한국시리즈 4연패의 주역이 되었다. 그는 1995년 해태에서 국내 무대를 은퇴할 때까지 11시즌 동안 0점대 평균자책을 5번이나 이뤄냈고, 통산 평균자책을 1.20으로 마무리 했다. 선 감독은 80년대 중반부터는 힘으로 승부했고, 마무리로 돌아선 93년 전후로 해서 는 기교로 던졌다 며 마운드에서만큼은 내가 최고라는 생각으로 정면 승부를 했고, 역시 자 신감을 갖고 던졌을 때 늘 결과가 좋았다 고 했다. 일본 진출 첫해의 실패를 딛고 최단기간 20세이브 기록, 주니치 우승의 주역이 되다 국내에서 탄탄대로를 걸었던 그에게 시련과 고난의 시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국내 무대 에선 오른쪽 어깨 부상으로 92년 8개월을 재활로 쉰 적이 있지만,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 았다. 그토록 바라던 일본 진출 첫해였던 1996년이었다. 한국 프로선수로는 처음 일본에 진 출했기에 마음이 앞섰는지 밸런스가 무너지면서 자기 볼을 던지지 못하게 됐고, 자신감마저 떨어진 것이었다. 자고 나면 국내로 돌아가야겠다, 1년 내내 시합에서 던지지 않았으면 좋 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38경기에서 5승1패3세이브에 평균자책은 역대 가장 높은 5.50이 나 됐다. 몸무게가 13kg이 빠지고, 원형탈모까지 나타날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했다. 왜 야구 를 하게 됐는지에 대한 처음이자 마지막 회의가 들었던 때이기도 했다. 결국 아내 김현미씨 와 짐을 싸 돌아가자고 했지만, 다음날 아침 이건 아니구나 라는 생각에 다시 훈련장을 찾 았다. 그는 1년 실패 뒤에도 2년 계약이 성사돼 마음을 가까스로 추스렸다 며 내 인생에서 그렇게 많은 훈련을 한 적은 없었다 고도 했다. 그리곤 최단기간 20세이브를 기록했던 1997 년은 1승1패38세이브에 평균자책 1.28로 부활했다. 1999년 주니치의 리그 우승 마지막 투수 로까지 활약했던 그는 체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구단의 계약연장을 거부했다. 4년간 한 번도 진 적이 없던 요미우리와 한신이 당시 입단 제의를 해왔지만, 이 역시 거부하자, 주니치가 선동열을 명예선수로까지 대우하게 됐다. 아마추어에서 국내프로로, 그리고 해외진출로 모두 성공한 그는 2005년 프로 초보 감독으로 는 역대 처음 정규리그와 한국시리즈를 모두 우승하는 등 한국시리즈 2연패를 달성함으로 써 지도자로서도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감독의 길이 쉽지만은 않은 듯하다. 그는 역시 선수가 최고다. 감독은 야수 투수 1군 2군 재활군에 코치까지 두루 종합적으로 신경 을 써야 한다 며 그러나, 야구가 나에게 준 것이 너무 많기에 이런 것들을 선수나 후배들에 게 베풀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고 했다.

모든 것을 거의 성취한 듯 보이는 그의 야구인생에 남은 바람은 또 있을까? 직구 하나만 제대로 컨트롤되면 10승은 가능하고, 거기에 변화구 하나만 얹으면 플러스 5승은 가능해요. 내가 선수로, 지도자로 배운 경험과 노하우 그리고 지도자로서 더 배워야 할 것들이 많기에 어느 자리에서든 힘이 닿을 때까지 야구를 위해 몸을 바치고 싶습니다. <참고문헌> 한국 야구의 역사 <네이버 http://naver.com> 불꽃 같았던 마운드의 승부사 야구인 최동원 <네이버캐스트 http://navercast.naver.com> 그라운드의 풍운아 스포츠인 선동열 <네이버캐스트 http://navercas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