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시관에선 음식물 반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2. 전시물은 손으로 만지면 안됩니다. 3. 사진 촬영은 어디서나 가능합니다. 추억을 남기세요~^^ 4. UN한국전쟁관 안쪽과 참전기념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다소 어두우니 어린이를 동반한 분들은 안전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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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소고내지(09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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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충칭시개황및역사 1 Ⅱ. 충칭시경제및무역현황 3 Ⅲ. 현지출장참고자료 5 ( 항공편, 생활정보, 관광명소, 충칭진출한국기업 ) Ⅳ. 비즈니스시유의사항 14 Ⅴ. 유용한중국어표현 17 Ⅵ. 충칭무역관주소및연락처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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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PM GUIDE BOOK No. 2015-1 온라인 가이드북 유엔평화기념관 가이드북으로 보다 알찬 감상과 체험이 되길 바랍니다

1. 전시관에선 음식물 반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2. 전시물은 손으로 만지면 안됩니다. 3. 사진 촬영은 어디서나 가능합니다. 추억을 남기세요~^^ 4. UN한국전쟁관 안쪽과 참전기념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다소 어두우니 어린이를 동반한 분들은 안전을 부탁드립니다. 5. 어른들의 사소한 행동이 아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칩니다. 다른 관람객을 배려하고 질서를 지켜주세요~! 그럼 지금부터 UN한국전쟁관으로 함께 떠나요~! 1

1 관람 동선과 중요 위치 2

2 관람 내용과 활용 TIP UN한국전쟁관은 6 25전쟁의 참상과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까지의 긴박감을 주요 유물과 자료, 영상 등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관람 위치 관람 내용 활용 TIP 6 25전쟁의 배경과 발발 1. 6 25 전쟁의 배경과 과정 1) 대한민국 해방과 정부 수립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이 항복 하면서 1945년 8월 15일 한국은 광복을 맞이했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한국에 남아 있던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키고 38선을 경계로 북한은 소련이, 남한은 미국이 분할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유엔은 유엔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와 정부수립 후 미 소 양군 철수를 결의했지만 제1, 2차 미 소공동위원회의 결렬로 남한은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통해 제헌의회가 구성되고 7월 20일 선거로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을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면서 제2차 세계대전을 벌인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미국 등 연합군에 의해 항복을 합니다. 이에 우리나라는 35년이라는 긴 세월 일본의 강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점령하고 있던 소련은 유엔 임시한국위원단 입북을 거절하였고 김일성을 중심으로 최고인민회의 선거를 실시하여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을 수립했습니다. 해방의 감격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풀려나와 만세를 외치는 애국 지사들과 이를 환영하는 시민들의 모습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 자료출처: 해방의 감격, 점령의 비극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2012. 4. 9., 휴머니스트) MEMO 3

관람 위치 관람 내용 활용 TIP 6 25전쟁의 배경과 발발 2) 북한의 남침 준비 1949년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에 무력통일안 을 제기했고 소련과 중국은 시기 상조라고 판단했으나 소련의 핵실험 성공과 중국이 중화인민공화국 을 선포하면서 북 중 소의 연대가 더욱 결속되었습니다. 1950년 4월 김일성은 남침 동의를 얻어내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한반도를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겠다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이에 스탈린은 남침을 허락하였고 중국 역시 동의하게 되면서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기습적으로 남침을 강행했습니다. 2. 6.25전쟁의 발발 1) 갑작스러운 남침: 6 25전쟁의 시작(1950년 6월 25일) 웅진반도에서 시작된 전쟁은 곧 38선 전역에서 일어났습니다. 북한은 중국에 있는 조선족 군인들까지 합쳐 그 숫자는 20만 여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당시 국군은 23일 비상경계령이 해제 됨과 동시에 주말을 맞아 병력 1/3 이상이 외출을 한 상태였고 이러한 북한의 남침에 대비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피난을 떠난 이승만 대통령이나 국군의 책임자들은 전쟁이 금방 끝날 것이라며 큰 소리를 쳤기 때문에 많은 국민들은 피난을 가지 못한 상황이었 습니다. 스탈린은 남침 동의 뿐 아니라 무기와 군수물자까지 지원 했습니다. 2) 북한군 서울 점령(1950년 6월 28일) 북한은 소련에서 지원받은 최신 무기인 YAK전투기와 전차 등으로 밀고 내려왔고 남침 시작과 동시에 북한군들은 파죽지세로 남한을 격파하여 전쟁이 일어난지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습니다. 6.25 피난민/대동강철교 파괴된 대동강철교를 타고 남하하는 북한 주민들 사진출처: 동아일보사 자료출처: 한국전쟁 [ 韓 國 戰 爭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MEMO 4

관람 위치 관람 내용 활용 TIP UN과 대한민국 그 인연의 시작 1. UN의 결의안 통과 이러한 기습적인 북한의 남침에 대해 국제사회는 중대한 도발로 규정하고, 유엔은 대한민국에 대한 지원을 신속히 결정했습니다. 유엔은 1950년 6월 26일 북한에게 38선 이북으로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대한민국에 대한 지원을 결의하고 6월 27일 북한에 대한 군사적 제재를 결정했습니다. Q 이 사진을 찾아 보세요? 2. UN군 결성 미국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재소집하여 북한의 불법 전쟁 행위를 중지토록 결의하고 유엔군을 창설했습니다. 이에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해 공군을 한국에 지원할 것을 명령하였고 7월 7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한반도의 유엔 군사활동을 위하여 미국에 최고 지위권을 위임하기로 결의하여 맥아더가 총사령관이 됩니다. UN기를 받는 맥아더 장군 관람 위치 관람 내용 활용 TIP UN과 대한민국 그 인연의 시작 3. 계속되는 후퇴 속에 북한국의 대전 함락 1950년 7월 1일 일본에서 공수된 미군 제24단의 스미스 부대는 7월 5일 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남하하던 북한군과 첫 전투를 벌였습니다. 스미스 부대는 첫 전투에서 540명의 부대원 중 181명의 전사자와 행방불명자가 발생했고 후퇴를 합니다. 미군 지상군 투입에도 전세는 불리하기만 했고 죽미령, 천안, 금강 방어선에서 계속 북한군에 밀려 후퇴를 했습니다. 대전에서 북한군과 또 한번 격렬한 전투를 치렀지만 1950년 7월 20일 대전마저 북한에게 내주었습니다. MEMO 5

죽미령 전투를 알아볼까요? 죽미령전투는 승패에 관계없이 유엔군의 참전을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고 이후 전쟁은 자유 수호를 위한 유엔의 전쟁이 되었습니다. 미군의 초기 개입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반격을 시도하는 시간을 벌 수 있게 된 의미 있는 전투이기도 합니다. 1950년 7월 5일 스미스 대대장(중령) 등 미군병사 540명은 오전 8시 16분부터 6시간 15분 동안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181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습니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전사한 전우의 시신 위에 돌무덤을 만들고 후퇴하면서 다시 돌아온다는 약속을 했고, 결국 약속대로 돌아와 죽미령 고개에 540개의 돌을 모아 죽은 전우들을 기리는 작은 탑을 세웠습니다. 자료출처: 서민택(오산시 복지교육국장), 우리오산e야기, 2014. 12. 18. 미군이 세운 추모비 전쟁이 끝나고 29년이 지난 1982년, 경기도와 오산시는 이 전투를 기념해 미군 초전비 건너편에 'UN군 초전비'를 세웠고, 초전비는 이제 주한미군은 물론 미국 인들이 대한민국을 방문하면 헌화 분향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경기도와 오산시가 세운 초전기념비 미군 장병들의 넋을 기리고자 오산시는 죽미령전투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비문 자유수호를 위해 UN은 일어나다. 혈전 6시간 15분 한 품은 고혼 이곳에 잠드니 혈맹의 우리 어찌 잊으리! 2013년 4월 개관한 유엔군초전기념관 MEMO 6

관람 위치 관람 내용 활용 TIP 낙동강 방어전선 1. 1950년 7월 25일 최후의 보류, 낙동강 방어전선 북한에게 호남지방도 함락되어 밀려나게 된 전세는 한반도의 끝에 위치한 부산 근교의 낙동강 전선에서 최후의 사투를 벌이게 되었습니다. 낙동강 전선은 남해안의 마산에서 남지 왜관 낙정리로 이어 지는 남북 160km와 낙정리에서 동해안의 영덕으로 이어지는 동서 80km를 말합니다. 낙동강 방어전선이 만들어진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본격적으로 연합전선을 구축했습니다. 1950년 8월 초 에서 9월 중순까지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고 결사적인 공방전은 계속되었습니다. 한편 부산은 군사 정치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임시수도가 되었습니다. 미 제8군 사령관은 낙동강을 따라서 방어선을 설정하고 미군은 최대 격전을 벌이게 되면서 한때 일본으로 철수 계획을 세울 만큼 전세가 급박했지만 차츰 상황은 호전되고 있었습니다. 이로써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겠다던 김일성의 야욕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1950년 부산항 디오라마와 투명 브릿지 지금 보시는 디오라마와 모 형은 대한민국의 관문 역할을 한 부산항 제1, 2, 3부두를 재현한 것으로 당시 유엔군과 각종 지원 물자들이 입항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파병된 유엔군과 전쟁 지원을 위한 수많은 병참 물자가 대부분 부산을 통해 들어왔습 니다. 특히 제1, 2부두에서는 유엔군 하선과 각종 무기 및 기계 장비 등이 하역되었으며, 제3 부두에서는 원조 구호물자들이 하역되었습니다. 1950년 7월에서 9월 사이의 부산항 모습을 모형으로 재현 낙동강 방어전선과 워커 장군 해리스 윌턴 워커 Harris Walton Walker 1889. 12. 3.~ 1950. 12. 23.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 극동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워커 중장에게 미 제8군 제24사단을 한국으로 이동시키라 라는 명령을 하달(1950년 6월 30일)하였고 워커 중장은 7월 13일 한반도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는 중장계급을 달고 죽을 각오로 전선을 지휘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말 중에는 Stand or Die!(지키느냐, 아니면 죽느냐!), "I will stay here to protect Korea until my death"(내가 죽 더라도 한국을 끝까지 지키겠다.)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워커 장군의 동상 제막식이 2010년 6월 23일 서울 용산 미 제8군 사령부에서 거행 됐습니다. Q 워커 장군은 전시관 어디에 있을까요? 7

관람 위치 관람 내용 활용 TIP 인천상륙 작전 인천상륙작전으로 유엔의 대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한 달여 만에 낙동강 방어전선까지 밀리게 되자 유엔군은 맥아더 장군의 지휘로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실행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부대인 미 제10군단 사령관에는 맥아더 장군의 참 모장인 알몬드소장이 임명되었고 상륙작전을 앞두고 유엔군이 먼저 서해안 요충지에 포격을 실시하여 해상을 봉쇄했습니다. 23일이라는 짧은 준비 기간이었지만 월미도를 시작으로 인천 서북부 해안 및 남부 해안을 확보한 후 인천 일대를 수복했습니다. 한편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조수간만의 차가 세계에서 가장 큰 인천이 적절치 않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은 인천의 약점을 극복하고 거꾸로 역습에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관철시켰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은 1950년 9월 15일 UN군이 맥아더의 지휘 아래 인천에 상륙하여 6ᆞ25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군사작전을 말합니다. 크로마이트 작전 키오스크 인천상륙작전 D-day준비와 과정을 보실 수 있습니다. 더글러스 맥아더 Douglas MacArthur 1880. 1. 26. ~ 1964. 4. 5. 인천상륙작전과 맥아더 장군 태평양 전쟁 시 미군 최고 사령관이었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 일어나자 진주만을 기습한 일본을 공격하여 1945년 8월 일 본을 항복시키고 일본 점령군 최고사령관이 됩니다. 한국전쟁에서 유엔군 최고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였으며 중국과의 전면전을 두고 트루먼 대통령과 갈등으로 해임되면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 민국 건국 행사인 정부 수립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대한 민국을 처음 방문한 연합군 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과 이승만 전 대통령이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는 모습입니다. 자료출처: 뉴시스 2014. 8. 18. 사진출처: 월드피스자유연합 MEMO 8

관람 위치 관람 내용 활용 TIP 서울 탈환과 북진 작전 1. 서울 탈환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미 제10군단은 1950년 9월 18일부터 서울 진격작전을 개시했습니다. 국군과 미군 병력이 서울 시내로 진입했을 당시 이를 막아선 북한군 병력은 2개 사단 총 2만 여명 이었습니다. 9월 25일부터 서울 중심부에서는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고, 국군과 미군은 9월 26일 시가지 절반 이상을 장악한 후 9월 27일 아침 6시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합니다. 2. 북진 작전 1950년 9월 29일 맥아더 장군은 북진계획을 세운 후 이를 본국에 제출하여 승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0월 2일 북진작전 작전명령 제2호 를 전군에 전달했습니다. 10월 7일 유엔도 통일된 민주정부를 수립한다는 취지로 북진을 결의했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38선 돌파 후 순식간에 북부지역을 점령했습니다. 10월 10일 국군 제1군단이 원산을 점령했고 10월 19일에는 국군 제1 사단이 평양에 입성했습니다. 10월 30일 평양시청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 입성 환영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서울 탈환에 이은 평양 입성으로 통일에 대한 기대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승기를 잡은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0월 26일 압록강변의 초산 및 11월 21일에는 혜산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압록강과 두만강에 다다른 국군과 유엔군은 머지않아 전쟁이 끝날 것으로 전망하며 통일을 눈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관람 위치 관람 내용 활용 TIP 새로운 적, 그리고 후퇴 1. 중국군의 개입 이곳에서는 6 25전쟁에 중국의 개입으로 중국군의 인해전술 상황과 극한 추위에서 유엔군이 겪었던 절망적인 순간들을 볼 수 있습니다. 1950년 10월 15일 열린 웨이크회담에서는 중국군 투입 가능성이 장진호 전투 (1950. 11. 27.~12. 11.) 희박하다고 전망하였고 11월 23일 추수감사절까지 전쟁을 끝내 북한의 영하 30도로 내려간 겠다는 각오로 총공세를 펼쳤습니다. 그러나 전쟁 초기부터 참전에 매서운 겨울 추위와 중국의 대비하고 있던 중국은 인민지원군(人民志願軍) 을 조직하고 인해전술은 유엔군에겐 가장 항미원조(沆美援朝) 라는 명분을 내걸고 30만 여명 이상의 힘든 전투였습니다. 6천 여 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장진호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습니다. 중국은 1950년 10월 25일 1차 공세 에서 중국군의 포위망을 뚫어 때 평양 이북을 공격했으며, 11월 25일 2차 공세 때는 흥남 전멸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북의 함경도 지역으로 전선을 확장하여 12월 31일 3차 공세에 흥남으로 모인 유엔군과 국군은 서는 대규모 남하작전으로 서울을 점령했습니다. 인해전술과 전쟁 안전하게 철수하기 위해 흥남 주위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경험으로 무장한 중국군의 전력을 유엔군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흥남부두를 통해 무사히 탈출 고전할 수밖에 없었고 전황은 다시 급변하였습니다. 하게 됩니다. 9

관람 위치 관람 내용 활용 TIP 새로운 적, 그리고 후퇴 2. 흥남철수작전과 후퇴들 이런 상황으로 유엔군과 국군은 철수작전을 계획할 수밖에 없었고, 사람들은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다시 피난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전쟁터의 현실은 비참했지만 인간애를 확인할 수 있는 기적도 일어났습니다. 흥남철수작전 때 부두로 몰려든 피난민은 10만 여 명에 달했으며 급박한 상황 속에서 병력 철수작전을 펼쳤던 미군과 국군은 이들 대부분을 구해냈습니다. 중국의 총공세로 1951년 1월 4일 서울은 다시 점령 당하게 됩니다. 크리스마스의 기적, 흥남철수작전 메러디스 빅토리호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는 흥남 철수 작전 기념비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단일 선박으로 가장 큰 규모의 구조 작전을 수행한 배로 기네스북에도 올랐습니다. 이 배의 정원은 60여 명이었고, 이미 선원 47명이 타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화물칸에 태운다 해도 2천 명 이상의 승선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처참한 광경을 목격한 레너드 라루 선장은 피난민의 승선을 허락했습니다. 1만 4천 여명의 피난민과 17명의 국군 헌병이 승선했는데 새 생명이 5명이나 태어나는 기적도 생겼습니다. 흥남에서 마지막 배가 철수한 것은 12월 24일이며 흥남철수 작전을 완료하면서 미군은 흥남부두를 폭파시켰고 싣지 못한 군장비 역시 함께 폭파되었습니다. 러셀 로이드 블레이즈델 Russell Lloyd Blaisdell 1910~2007 자료출처: http://blog.naver.com/ktx111/220229147872 유모차 공수 작전 러셀 블레이즈델 대령 6 25전쟁 1,069명의 아이들을 피난시킨 미군 중령(그 당시 계급), 그는 1950년 9월, 매일 아침마다 서울 시내를 돌며 전쟁 고아들을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1950년 12월 중국군을 피해 유엔군은 후퇴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1,069명이라는 아이를 돌보고 있던 중령은 이 아이들을 두고 떠날 수 없었습니다. 수송 기는 확보했지만 아이들을 김포공항까지 이동시킬 트럭은 1대 뿐이었습니다. 그때 해병대 트럭을 발견하고 중령의 명령으로 아이들을 이동시킬 수 있었고 12월 20일 제주도에 도착합니다. 명령 불복종으로 미군의 검찰 조사를 받던 그는 누군가는 해야 러셀 블레이즈델 군목을 할 일이었습니다 라고 답합니다. 2001년 그는 다시 한국을 찾아 기리는 동상 제막식이 2009년 자신이 돌봤던 고아들을 만났습니다. 2007년 97세로 별세하였고 12월 17일 광주 양림동 광주 남구 충현원에 그의 동상이 있습니다. 충현원에서 열렸습니다. MEMO 10

관람 위치 관람 내용 활용 TIP 철의 삼각지 철의 삼각지는 철원 김화 평강을 정점으로 하는 삼각지대를 말합니다. 이곳은 한반도의 허리에 해당하는 곳으로 서울과 원산을 이어주며 중부지역에서 동해안 북부로 넘어가는 교통의 중심지로 중부전선의 심장부였습니다. 이곳을 확보하지 못하면 중부전선을 장악하기 어렵고 비옥한 곡창지대여서 보급과 식량 조달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는 전쟁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계속되 었습니다. 백마고지전투전적비 에 적힌 대로 포탄 가루와 주검이 쌓여서 무릎 높이까지 채울 만큼 치열했습니다. 해발 395 미터인 이 산봉우리는 열흘 동안 주인이 스물네 차례나 바뀌면서 1만 4000여명에 가까운 군인이 죽거나 다쳤고, 쏟아진 포탄만 해도 30만 발이 넘었다고합니다. 자료출처: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8 강원도, 2012 관람 위치 관람 내용 활용 TIP 고지전 유엔 주재 소련대사 말리크가 유엔 연설을 통해 1951년 6월 23 일 휴전을 제의했습니다. 종전을 원하던 중국과 북한은 정전 지지 의사를 표명하였고, 미국도 긍정적인 입장을 밝혔기 때문에 1951년 7월 개성에서 정전협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정전 협상이 체결될 때까지 38선 부근에서는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 하기 위한 치열한 접전이 계속되었습니다. 상대방 능선과 고지를 쟁탈하기 위한 백병전이 벌어지는 속에서 끝없는 희생이 이어졌 습니다. Q 지게를 찾아볼까요? 지게는 어떤 용도로 쓰였을 까요? 관람 위치 관람 내용 활용 TIP 정전협정(1953. 7. 27.)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협정 이 체결되었 습니다. 이로써 3년 1개월 동안 이어졌던 전쟁은 중단되었지만 이는 전쟁을 일시적으로 멈춘다는 의미이지 완전한 전쟁의 종결은 아닙니다. 2층 관람뷰 360 벽면으로 보이는 영상 감상 MEMO 11

피난민들의 생활 이 사진들은 알바니아 태생으로 제1,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한국전쟁을 취재한 미국의 저명한 사진가 디미트리 보리아(1902~1990)가 주일 미극동사령부 사진반에서 일할 때 한반도 각지를 돌며 촬영한 것입니다. Q 이 사진들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 드나요?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이 모습이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 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삶이었습니다. 나무뿌리라도 먹어야 산다. 잡초보 다 모질 게 살아남아야 했다. 아이를 업은 소녀의 손에 쥐어진 나무뿌리 는 이 가족의 한 끼 식사일까, 아니 찬 이슬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면 헛간이라도 좋았다. 행색은 초라해도 카메라를 강하게 의식하는 이 초롱 초롱한 눈매의 자매들은 지금쯤 어 피난을 가는 일가족의 전형적인 모습. 지게에 가재도구를 싣고 수백리 길 을 걸어서 피난을 떠나야 했다. 면 땔감일까? 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유틀란디아호 실제 모습과 비교해 보세요! 유틀란디아호의 모습 기념관내 유틀란디아호 모형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