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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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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전체 :7 PM 페이지14 NO.3 Acrobat PDFWriter 제 40회 발명의날 기념식 격려사 존경하는 발명인 여러분! 연구개발의 효율성을 높이고 중복투자도 방지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국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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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이야기part2

현장에서 만난 문화재 이야기 2


Tran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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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I^ts:려는 풀결저텀 김양식 (사안, 韓 印 문화연구원장) 그대는 고운 물결처럼 효르고 그대는시쩌렴 날고 짚분흥 깃털씌 셔쩌럼 낳고 71쁨도장치.:I. 7 I뿜싹 고운 01소도 잠시 오, 우리 삶외 고뇌와 슬픔 그 눈울 흩뿌리려 흐느끼는까 마다 따디 Jl.1 훌려 뛰여용 바탈길 그갚고도험참외깊셔! 웃으며흘러던눈물자움

만족무용 채 2호 <> 권두셔 / 김양식 <>권두언 민족문화의거수로서 / 최재승...... 8 민족무용 발간의 와미와 지향점 / 이 민홍... 10 제2호 발간에 부침 / 펀집자 '"............... 13 <> 춤에셰이 법률가약 예술문화 / 김성수......... 15 벼울춤과 바울의 노래 / 검 g씩...... 18 내가 우용을 사랑하는 이유 / 홍준철...... 23 힐본 최초의 가극단 다카라즈카{ 寶 據 ) / 신계창...... 28 <>푼화재 탐방 인간문화재와의 대담 - 감천흥편 / 허영일...... 35 <>석학과의 딴남 동셔양의 민족춤을 찾아서 / 허영일...... 47 백딱속의 춤, 춤속의 맥락 / 검채현... "....... 65 써상을 돌아보는 예술교육 / 주성혜...... 73 <> 연구논푼 열본 천황가의 한국신 제사와 춤 / 홍윤기...... 81 고려조 문물과 악무의 탐색 / 이면홍 '_4._.... 92 셔대별로 보는 한국의 검무 / 박은영......... 119

만족무용 저ß2호 <> 특별가고 노(B~) 교갱( 狂 言 )의 형( 型 )J 과 학습법 / 야마모토 토지로... 137 기모노(훌 物 )의 역사와 사회적 변화 / 오쿠타 나오유키...... 144 <> 향장무 탐구 항장무와의 만남 / 허영일... 149 뭘 才 項 莊 舞 의 연희전숭과 극연출 방식 / 성무경... 154 울 才 項 莊 舞 와 연원 및 전숭 / 김운정... 193 항장무 項 莊 舞 )를 연출하며 / 박상현... 2;2() <> 찌외 한국인의 면족무용 러시아 고려인들의 민족예술단 / 김발러 리아... ~... ".. 223 중앙아시아 고려언의 고려극장 / 이애리아... 226 연해주의 한민족 / 이팡규... 앓4 <> 공연라뷰 한일 고전 예능제 '2f.X12 / 박은혜...... 241 모쓰지 엔넨( 毛 越 좋 延 年 )의 춤 / 김효진...... 246 <> 무용답사 중국 운남성 소수민족무용 / 최미연, 전은혀 1, 김주연.... 251 <>자료도용 본 연구소 설립 취지와 연혁 / 편집실... "... 271

The Ethnic Dance The 2nd Edition <>Ope피ng Poetry / Kim Yang- shik <> Preface As an Ensign of the Ethnic Culture / 다loi Jae-seung...... 8 The Meaning and Objective for Issuing r.암le 많mic DanceJ / Lee Min-hong...... ~... "...... 10 Issuing the Seoond 많ition / 까1e Editor..., 13 <> Dance Essays Lawyers and Art Culture / f이m Sung-su...... 샌 τbe 않n않 and Song of Pa버 / Kim Yang- shik...... 18 The Reasons for my 1ρIve for Art I Hong Jun-chel... z3 암le first 야~ra Troupe in Japan, Takarazuka I Shin Kyl앙에ang...... 28 <> Interview with the C띠h표al Assets An Interview with a Human Cultural Asset, 1잉m Chun-hueng I Huα.l r Yo αu뻐.jng힌-키네il.... 35 <> Encoun따단19 the (늄'eat Scholars To Find the Ethnic Dan않s of East and West I Hur Young-il... 47 The Interconnected 없nce & the Interconnections of Dance / 얘m Chae-hyeon...... "...... 65 Art 많ucation that Gives Global Insights I J. Sung ly e... 73 <> The Study Thesis A Sacrifici려 Rite of the Koll얹n God and the 않nce by the Ja뼈nese In뼈괴 al Far띠ly I Hong Yun-덩 ee...... 81 Understanding the Culture and Music of the Korγo Dynasty I Lee Min long......... 4...... 92 Studying Kori없n Sword Dance by 미많 / Park Eun-young... 119

The Ethnic Dance The2nd Edition <> Special Colunm The Forrns and 1얹ming ways of No and Kyogeng / Yarnarl1:)to-Tojiro... 137 The Histαγ and Social Changes of Kirnono / Okuta-Naoyuki... 144 <> Stud찌ng the 없ng Jang 않nce Fin빼Jg l꿇ng Jang 않nce / Hur 'oung-i1 맘le...... 1쟁 Transmission and pr1αlucing of 없ng Jang Dance / Sung Mu냐1- - - - -. 암le or핑ma없nd Traditioαon 0:혀 If 1뼈꿇뼈n뿔g J.뼈 an핑g 않nce / K에 애im Eun-jung 193 R떠ucing the 많ng J;없Jg 없nce / Park Sang-hyun... a <> The Ethnic Dance of Over똥as Koreans The Ethnic Art Trou~ of the Koryo Peaple in Russia / Kim Balleria...... 223 The Koryo Theatre of the :Middle East Korγo Peaple / Lee Aeria.... ~... "....226 The f옮n Race in the Marit:irre Provinces / Lee Kwar핑--gue... 잃4 <> Perlorrnance Review The Korea - Japan Traditional Art Festival 2fJJ2 / Park Eun ìye......... 241 암le Dance of Motsuji Ennen / 씨m Hyo-jin... 246 <> Dance Exploration 암le 않nce of 1\1파lOrity Races in Yunnan china / Ch대 Mi-yeon, Chun Eun-hye, Kim J γun... 251 <> Secondary Help The Objective of Founding the Institute and Brief I- 五 story / Edit 때 Departrnent... 271

8 L련두언 I 민족 문확의 끼수가 되 '1훌훌 최재승 i 국회의원 셔l 계민족무용연구소의 민족 무용 제 2집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 드 컵다다. 21세기는 지삭과 정보 창의력이 중심어 되는 문화의 시대업니다. 문 화는 이제 개인의 삶의 질을 높일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국가 경쟁 력울 좌우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결국 문화의 시대, 21세기 는 먼족문화를 보편적언 세계문화로 숭화셔 키고 인류 문화 발전에 끊임없는 자양분융 제공하는 국가가 진정한 문 화강국이자 국제사회의 려더가 될 것입니다. 먼족( 民 族 )은 우리 삶과 문화의 원천을 담고 있는 모태이며 무용은 인 간의 가장 기본적안 신체 동작에서 벼롯된 근원적인 예술입니다 따라서 무용은 잔실한 인간 감정파 의사 표현의 수단으로 인류와 셰계 각 민족 들의 내면을 대변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민족과 국가간의 공존과 소통이 더욱 더 절실한 시기애 무용 을 통해 각 만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탐구승}는 세계먼족무용연구소와 민족무용 의 존재가 더욱 각별한 이유가 바로 여가에 있다고 생각합 니다.

9 한마다로 민족 무용 온 우려의 문화 예술 발전에 새로운 동력임은 물 론, 평화로운 지구촌 건설을 위한 소중한 계기가 될 것임에 틀렴이 없습 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씀 드련 바와 같이, 무용은 우리 자신과 상대방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객관적인 거울이며 국경과 인종 등 어떤 장벽 을 념어서도 소통할 수 있는 보편적인 예술이거 때문입니다. 결국 세계 각 민족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또한 이를 학문적 성과로 축 적하는 작업이야말로 평화의 시대, 분화의 시대를 여는 가장 거본적인 이론적 실천적 작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처럼 의며 있는 활통을 실천하고 있는 민족무용 의 발자취는 관 계자 여러분의 노력과 열정에 힘입어 다양하고 참신한 접근으로 이미 창간호부터 주위의 비상한 관심과 주목을 받은 바 었습니다 아번에 출간되는 제2집 역사 이러한 기대를 져버리지 않으리라 확신 하면서 아무쪼록 민족 무용 이 우리 시대의 문화를 주도하고 안류 문화 발전에 기여하는 자양분이 되겨를 기대해 봅니다.

10 민족무용~CD 발Zt워 와 DI확 "1훨탬덤 01 민 홍 성균관대 어문학부 교수 i 중국은 역대로 통푼정책( 同 文 政 策 )을 써서 소위 주변의 제후국을 통 솔했다. 동문정책은 문화제국주의의 근간으로서, 수천 년간 제국주의적 정책을 설시하는떼 금과옥조가 되었고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이는 중국뿐 딴 아나라 세계 도처에 제국주의를 지향하는 국가둘 전부가 이 테두리 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고려 인종 원 1건 끄23년 송나라 서긍 徐 鏡 )야 사 산으로 와서 견문한 벼를, 이듬해 1124 1 녕 고려도경 이라고 명명한 일종 의 정보문서를 완성하여 휘종( 徵 宗 )에게 바쳤다. 이 책에 동문([ 司 文 )장이 있는데 네 개의 항목으로 짜여져 있다. 기년( 紀 年 )을 명시한 정삭( 正 湖 ) 과, 이머l 올로기어} 해당하는 유학(f 需 學 )과, 천하 만백성을 화합하제 하는 악률( 樂 律 )과, 생활 일용품의 유통칠서를 확립하는 도량권형( 度 量 權 衝 )이 그것이다. 서긍여 제시한 바 개의 항목을 현대적으로 부열하면, 정삭 은 우리가 쓰고 있는 기년( 紀 年 )얀 서가( 西 紀 )에 준하고, 유학 은 자본주의 사회주 의 민주주의 등 통치아념에 해당되고, 악률 은 지금 각계각층에서 향유 하여 즐기는 노래약 춤이고, 도량권형 은 오늘날 불류의 기본이 되는 미 터볍이 여가얘l 해당된다. 문화제국주약플 실천하는데 있어서 위의 너l 종 중 어느 것이 중요하자 않을까 마는 필자가 특히 관심을 갖는 것은

11 악률 이고 악률에 포괄되는 무용 부분여다. 대악( 大 樂 )은 천지와 더불어 조화를 이루고, 오성( 五 聲 )은 오행( 五 行 )에 근원했고, 활음( 八 音 )온 팔풍 ( 八 風 )에서 생겨나서, 청탁고하( 淸 獨 高 下 )가 각각 있지만, 이는 얼기( 一 氣 )에서 나왔는바 이를 사람이 보고들을 경우 자선또 모르제 수무족도 ( 手 舞 足 짧)하게 된다. 무용은 다름 아닌 수무족도 이다. 그러므로 무용은 악률의 결론이요 총화일 수도 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은 진부한 것이긴 하나, 이 말 만 큼 정곡을 찌흔 격언이 없다: 21세기는 모두들 푼화 예술의 셔대라고 한 다. 예술의 다양한 분야 중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변함없는 사랑을 받아 온 것이 무용이다. 이같은 현상은 미래에 더욱 증폭될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무용은 악( 樂 )의 결론언 수무쪽도이기 때문이고, 다시 그 원초 언 대악( 大 樂 )의 출발접으로 되돌아가는 촉매언 까닭야다. 무용의 본래 목적은 오산( 觸 神 )이다. 신을 즐겁게 하는 제의( 察 廢 ) 파 정에서, 이에 참여한 사람들도 즐거워하는 것을 본 무자( 舞 者 )7}, 유계 (뼈 界 )로 향한 몸짓을 잠깐 멈추고 명계( 明 界 )의 관중을 의식종}는 춤사 위를 취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오언( 媒 人 )의 모티브가 형성된 것이다. 그 러나 시대가 흘려갈수록 유계를 향한 수무족도는 화석으로 남게되고, 명 계를 의식한 갖가지 새롭고 흥미 있는 수무족도가 계발되어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데 무자의 의지가 집중되었다. 이같은 추세로 인해 사 중의 무용온 흥미위주의 오인무( 媒 人 舞 )가 볍람하여 그 정도를 넘고 있 는 터에ff'민족무용 이 창간되어 전아{ 典 雅 )한 고무( 古 舞 )를 바탕으로 하 고, 여기에 수반하여 발랄한 선무( 新 舞 )까지 포용코자 한 편집의도는 평 가할 만하다. 민족무용 에서 판심야 가는 부분은 민족 이라는 용어이다ff'민족무 용 에서의 면족 은 우려 면족반을 의마하는 것야 아니고 전세계의 민족 모두를 지칭했다. 그러나 전세책의 민족을 말하더라도 어뎌까자나 우리 면족 을 출발점으로 하면서도 결국 우려민족 으로 회귀한 점이 잔보성을 획득하게 되어 독자들의 공감을 얻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문화를 벼롯한 각 분야와 학채 풍토는 남의 것을 통하여 우리 것을 평가하는

12 경향이 강했다. 유명한 우리의 음악가와 무용가를 말할 때, 대중들의 호 응을 얻기 위해 서양와 저명한 악무예인 樂 舞 藝 人 )을 거명하면서 논의하 는 것이 상례언데, 예를 들면 한국의 셰역스피어이다"라는 식으로 딸해 왔다는 접어다. 이에 벼해 민족무용 온 창간호에서 지적한 것처렵, 서 서l통점을 지양( 止 揚 )하고 지금부터는 동세서점( 東 勢 西 漸 )의 입장은 취해 야 마땅하며, 그러기 위해서 우랴의 무용계부터 이를 실천하자는 야심만 만한 의도에서 편집 발간 된 것으로 해석된다. 무용은 무용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약나라, 문화의 일부로 여해되고 연구되어야 한다는 시각은 참신하다. 각급 학문와 분야가 담장을 높여 쌓아 유아독존으로 존채하는 것여 훌륭하다는 인식을 우리는 대체로 가 져왔다. 문화 예술 전란의 야같은 유아적 인식과 개인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민족무용도 유아론적( 唯 我 論 的 ) 태도룰 극복하고 셰계 모든 민족와 무용과 나란혀 놓고 연구할 때, 우려 민족무용의 진변목이 냐타난다. 현재까지 전승펀 우리의 민족무용은 순수한 우리의 것이 대부분이지 만, 일부는 동북아시아와 서남아시아와 공유한 것도 었다. 우리의 무용 이 아서아와 각급 민족의 무용을 수용했거나 또는 전승하고 았다는 것 은 자랑이지 불명예가 아니다. 동아시아의 다양한 무용을 수용하여 우리 의 면족무용으로 승화시킨 선대 악무예인들의 지혜는 길야 예찬확어야 한다. 이같은 지혜를 이어받i아 민족무용을 계송 발전시키고자 노력하는 오늘날 악무예인의 노력 역시 청송되어야 할 것이다.

13 저12Y 발만억 l 부질 펀접자 민족무용 연구지가 2002년 12월 제2호 발간으로 세계민족무용연구 소(W표)1)의 일년활동계획을 모두 마무리하는 마지막 작업으로 완수되 었습니다. 본 연구소의 일년 성과가 집약 정라되어 먼족무용 어l 담기게 되어 더욱 보람이 있고 연구소의 활동에 적극 협조하고 참여하신 많은 학자 예술가를의 공로 또한 그대로 보존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에스닉 (ethnic) 하다. 그리고 모든 춤은 에스닉하다 라고 하신 조안 킬려노호모쿠박사의 말씀은 시간을 초월하는 민족무용의 특 성을 잘 표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민족무용은 옛것을 지칭하거나 국한된 지역의 정체성을 의미하지 않 습니다. 민족무용은 과거를 향유하여 현채에 숨쉬며 미래에 대한 바션올 모색해 가는 역동적인 춤이며 먼 조상으로부터 새로운 세대로 이어지는 춤이거에 지금도 지구의 곳곳애는 민족무용이 각각의 자긍심을 가지고 재현 생성되고 있습니다. 만족무용올 셰상에 알려고 보존하기 위하여 창간호에 이어 제2호를 발간하면서 그 내용을 더욱 풍성하제 하였습디다. 춤을 바라보는 문화인들의 따뜻한 글을 모아 소개하며 00평생 오로지

14 궁중악무룹 연희 보존해오신 중요문형문화채 가능 보유자이신 감천흥( 金 千 興 )선생님파 본 연구소 소장 허영일 교수님의 대담 내용을 수록하였습 니다. 또한 수많은 유적 답사와 연구를 통해 일본문화사의 새로운 사실들을 여러 권의 책으로 펴내산 홍융거박사님의 귀중한 글을 가고 받을 수 있 어서 기뽑니다. 창간호에 이어 궁중정재 項 莊 舞 에 대한 더욱 심도 있 는 연구를 해주산 성무경, 김은정 두분 교수남파 SIDance에 참여하여 항장무 연춤을 맡으신 박상현 교수님께서는 항장무 탐구의 기반을 두탑 게 하셨습니다 재외한국인의 먼족무용 발자취의 첫 번째로 현지의 예술단창으로 활 동중이신 김발러l t:i아씨의 글을 통해 러사아 고려인들의 만족우용 현장 올 소개함과 함께 세계적인 석학과의 심포져움 참판71 와 좌담의 내용을 담아 민족무용에 대한 다른 관점을 조명하였습니다. 본 연구소의 공연기획이었던 한일고전예능제 2(x)2와 세계무형문화재 초청 사리즈였던 모쏘지 엔넨의 춤 공연 리뷰는 다시 보는 공연의 현장 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고 중국 운남성 소수민족무용을 찾아간 무용답 사지록문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야론과 학생들의 현장감 었는 로 소채함으로써 민족푸용 은 더욱 연구하는 책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감하 말할수있습니다. 표Ãl글자 舞 자를 내어주신 원로서예가 정주상션생님과 권두사와 권두언으로 축하를 해주산 김양식, 최재송, 이만홍선생님들의 민족무 용 사랑에 보답하거 위해서 저의 W표)1의 모돈 연구원들은 참되게 노 력하겠습니다. 집필애 공헌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나다.

법률가와 예술문화 15 훌훌많렐11 법률7t와 예술문화 김성수 i 아태합동법률 변호사 l 육법전서와 법률서적에 둘러싸인 서가 속애 톨스토이 의 안나차헤 리나의 소설은 그 향기를 드높인다는 친척의 조언이 귀에 울랴면서 법 률가로서의 생활에 젖은 사람의 예술문화생활이 쉽지 않다는 것올 최근 에 더욱 실감하고 았다. 법률가뿐만 아냐고 다른 전문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은 세계화, 국제화, 경쟁력강화를 위한 전문화 풍의 슬로건에 빠져 서질상 하루 48시간도 모자랄 정도로 생활하지 아니하면 낙오되눈 변화 많은 디자털 사회에 우리가 살고 었기 때문일 것이다. 전문성을 발휘하 여 인류문화를 발전시키는 사명은 또한 중요하지만 이 지구상에 한번밖 에 주어지지 않은 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전문 분야만 초점을 맞추고, 안 간생활의 맥을 잇고 인간사회의 흐룹을 찾아주는 예술문화생활을 도와 시한다는 것은 부끄럽기도 하고 연쟁을 반만 사는 생활이 되져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하게 환다. 이와 같은 우려속에서 본얀이 일하는 사무소에 서 예술문화의 공간을 갖기 위하여 두달에 한번씩 영화, 연극, 오페라등 을 감상하기 위한 시간을 갖기도 해보지만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21세가인 현 사회는 정보, 통신, 교통의 발달로 인하여 지구 어느 국 가의 조그마한 사건도 즉각 지구 반대편으로 알려지고, 12-13세기에한

16 민족무용 - 홉 에셰어 3년씩 걸려서 아동하였던 실크로드의 동쪽과 서쪽이 비챙기 시간으로 불과 10서간 내에 여동어 가능한 사회가 다가왔으므로 지구는 분명 시 갚과 공갇이 훨씬 인간생활에 효율성올 높여는 쪽으로 발잔해온 것은 분명하다. 결국, 한 인간야 간 연생을 생활하면서 시간과 공간이 훨씬 절약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것아 21세기플 살아가는 우랴의 삶인 것야 다. 이와 같은 과학문명의 발달로 얀한 부정적인 요소? 즉 삶의 터전인 생활공간의 환경파피, 환경호르몬으로 인한 인간칸강의 파괴등의 요소가 명백하 나타나지만, 그 반면 시간파 공간을 효율적으로 쏠 수 있는 긍정 적인 요소가 역시 나타나고 있으므로 이 부분에 관한 우리들의 특별한 관심, 즉 과학문명으로 늘어난 사간과 공간을 어떤 측면에서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저l 쩨 71 와 이에 대한 해답야 필요하다고 본 다. 본인은 야와 같은 문제 제가에 명백한 대답은 안간의 예술문화생활 환경이 개선되고, 따라서 이에 대한 절약된 시간과 공간을 좀 려 폭넓온 예술문화생활에 할애할 수 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야다. 2002년 금년에 우리 한국에서 성공적으로 치러낸 월드컵대회 그리고 아시안게임등은 우려의 생활올 훨씬 밝고 윤택하게 이끌어 갔었고, 어 배정에는 위에 얘기한 과학문명 발달로 인한 시간과 공간의 효율성으로 인하여 스포츠 및 스포츠 문화생활을 우리 모두가 향유할 수 았었거 때 문얘 이와 같은 삶의 질을 높아는 체험을 할 수 었었던 것으로 생각된 다. 스포츠와 더불어 우리 주변에 많은 예술문화적 활동공간과 활동무대 가 전재되어 있다. 모두가 자기가 성취하고자 하는 분야, 자기가 즐겨하 는 분얘 자거가 삶의 가치로서 인식하고자 승}는 분야를 선택하여 그 부 분에 관한 예술문화적 효율성을 높이는 생활을 영워하려고 하는 자세와 샤각여 필요한 때라고 생각된다. 최근얘 몇 차례 가면서 본 예술의 전당 와 각 분야별 표로그램과 활동은 괄목할 한하다고 생각된다. 특히, 우려 예술문화적 유산을 탐구하면서 국제적인 사각으로 }를 벼교 발전사켜 나가는 활동은 그 의미하눈 바가 컸으며, 특히 한일문화교류 정책의 일 환으로 실시된 일본의 전롱무용의 소개논 우-펴틀에거} 시사승}는 바가 컸 다고 생각된다.

법률가와 예술문화 17 법률가의 시각에서 보면 2차대전을 기점으로 지구상에 동양적인 법체 계는 전부 사라져 버리고, 오직 그리스 로pb 시대를 근원으로 하는 서양법체계 및 서양법문화가 우리 생활에 젖어와서 동양의 법문화는 존 채하지 아니하였던 것처럼 느껴지게 변화되어 온 것야 현재의 상황이라 고 보여지는데, 이와 같은 서양편중의 법문화에 젖은 법률가들의 시각애 서는 우려의 예술문화 동양의 예술문화 그리고 아시아의 예술문화에 대 한 향수와 느낌은 아주 깊을 수밖에 없다. 국악, 한국무용, 한국서예 등 우려의 예술문화적 원류를 보다 깊이 느꺼고 음미하기 위해서는 바교적 검토1 비교적 시각을 가져야할 것으로 생각되고 이를 확해서는 비교할 수 있는 많은 예술문화적 교류 또는 예술문화교류마당의 기화를 갖도록 우려 스스로가 노력해야 할 것으로 생각펀다. 물론 이와 같은 큰 작업은 한국의 국악계, 무용계의 전문가적 노력이 필수이지만 이틀을 지원하고 격력하는 주변의 노력이 없이는 그 성취가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법률가와 예술문화계의 연결이 쉽지는 않겠지만 이를 위한 법률가측의 노력과 예술문화계측의 관심이 양분야를 연결해 주는 다려가 형성될 것 으로 기대되는 것이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수 없다고 옛 철인이 얘기한 것처럼 인간은 법만으로 살수 없고, 볍과 예술문화가 어울려잔 사화애서 소위 인간의 삶의 질이 향상되고 발전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01 와 같은 느낌에서 강남에 소재한 예술의 전당은 역시 강냥에 위처한 대 법원 등의 법조단지와 잘 어울리는 위치 선정이 되었다고 믿고 싶다. 법 률가의 생활중에포 예술문화생활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그러나 예술문화 생활 속으로 뜰어갈 수 없는 한계를 느끼면서 화이부동( 和 而 不 同 )의 뜻 을음미해 본다.

18 민족무용 - 춤 에세이 바윷춤과바울의 노래 김 양식 i 한인문화연구원 원장, 본 연구소 고문위원 i 오놓날 Ba띠 Song의 시적 표현과 비유는 E빙갈 문학에 수많이 취급되 고 있다. 또한 그 선율과 리듬의 패턴은 전 인도적으로 사랑받고 있는 Tagore Song(타고르의 작사작곡)에 크께 영향율 미쳤다. 그들은 주로 삶을 노래한다. 영혼이 깃들은 푸념들은 노래악 본질이다. 이 충만된 그들의 노래에 귀 거울이고 있음은 마치 한 마리의 새가 귀 기윷여 뜯고 있읍과 다룹아 없다. 그들의 사랑 속에서 성장하는 것은 자 기 자신의 사랑 속에서 성장함과 같다. 그것은 맑고 깨끗하고 조용한 수 면이기 때문아다. 그틀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생생함여며 순간적여다. 그들 가까이에서는 부정야 긍정으로 변한다, 그것온 사랑 때문이다. 그들의 자비는 우려틀이 우려 스스로를 올바르게 보고 있는가를 가르쳐 준다. 반일 우리에게 볼 수 있고 판딴할 수 있는 능력이 었다면 말이다. 그렇다. 사람에게 있어 자거 자신을 초월해 있는 것을 보가란 어렵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인간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를 받가는 어렵 다. 그렇다 하더라도 의식을 갖고 내 집에 불밝혀고저 하는 소망을 갖기 휘하여 우펴는 그틀의 춤파 노래에 가까야 다가가는 것이다 또한 우려 그플의 노래의 행간 마다에서 산선하게 이는- 미풍과 그 향가에 이 젖어옴을 느낀다. 바울은 뱅갈지방올 중섬 하여 17세기경부터 차츰 형태릎 갖추며

바울춤과 바올의 노래 19 발전해온 하나의 자생적 토속 종교집단이다. 특악한 것은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 어떤 종교에도 속하지 않는 톡립된 토속신앙의 집단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울의 삶과 문화는 다분히 집서적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 주완 특정은 대책로 다음과 같다. 1. 일체의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다. 따라서 불상이나 사원 같은 것은 없다. 2. 문서화 되어진 경문류는 알체 없으며 모든 것은 구전으로 전승된다. 3.1빼산앙에 입문한 자는 얼체의 사회생활에서 떠나 자기 마음속에 있는 산과 하나거 되도록 포든 생활을 바친다. 따라서 카스트(계급) 을 인정치 않는다. 4. 살아가기 위하여서는 걸식하는 것딴이 허락된다. 5 신과의 합일을 위하여, 또한 그 기쁨의 표현으로서 노래와 춤을 춘 다. 이와 같이 종교로서의 염원을 노래와 춤으로 공양하는 것이 Ba띠 Song언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춤과 노래에 사용되는 악기란 너무나도 단순하다. 얘 끄따라 라고 하는 악기는 대부분 자신들의 수제물로서 단 한 줄의 현악 기아다. 거기에 도호르, 따브라, 받수리 풍의 민속악기로 반주하는 것 이 보통여다. 허나 혼자서 악기(애끄따라, 도호르)를 연주하고 소리하고 춤추는 것 도자주목격된다. Ba퍼의 우리는 갈모퉁이 마을 또는 나무숲속 어디에서든 다만 끊임 없어 노래하고 춤춘다. 그들은 최하총 카스트 사람들로부터도 기쁜 마음 으로 보시를 받는다. 엄연히 존재하는 연도의 신분제도 때문에 사회 저 변에서 선음하는 사람들은 &띠의 모습에서 커다란 와안을 받는다. Ba띠 외 무랴가 노래하고 춤추는 주위에는 많은 사랑뜰이 모여들어 각각 다 른 느낌과 생각으로 바라보며 춤과 노래가 끝냐면 각기 한줌의 식량이 나 음식풍틀을 건네준다. 여와 같이 Ba띠은 최하층 사람들에게 사량을

20 민족무용 - 춤 에서}이 받고 살아가며 그들의 노래인 Ba띠 Song과 춤인 Baul 않nce는 차츰 아 사이에도 조급씩 퍼져가고 있다. Baul Song은 이제 뱅갈의 중요한 민속음악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그려나 인도목립 이전까지딴 해도 이 노래는 최하층 사람들만 불렀었 다. 현재는 뱅갈의 여러 계층 사람들로부터도 사랑을 받고 었다. 그것은 인도의 사성 타고르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타고르는 그의 생 존시 여틀을 몹사 아꼈고 그틀과 더불어 노래와 춤을 자주 즐겼다. 따 라서 빵갈의 지식계급에도 Baul 애호가들아 나타났으며, 인도 독립 후 의 민족주의 부흥과 그 축을 하나로 할만큼 모든 계층에 Ba띠 Song이 확산되었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고 다만 자기 자선에제 속할 뿐이다. 그 들은 자유로운 땅에 살며 조국도 없다. 어떠한 종교도 없으며 어떠한 경 전도 없다. 그들의 이같은 반역은 선사들의 그것보다도 더욱 깊어진다. 그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여 없다. 바울이란 언제나 길거랴에 있는 사 랑들어다- 집도 절도 없다. 신( 神 )만이 그들의 거처어며, 하늘 전체가 그 들의 거처여다. 거기앤 다딴 보잘 것 없는 한 줄uH거의 손수 만든 얘n 따라와 작은 북인 제혜르... 그것만이 그들이 소유한 모든 것이다. 한손으로는 애끄따라를 키고 또 한손으로는 겨드랑이에 깐 아주 작은 북, 제때르를 두드린다. 그려고 춤추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종교의 포든 것이라 하겠다. 춤은 그들와 종교야며 노래 부름은 그들의 기도어다. 노래의 울결을 타고 춤의 물결을 타고 그들은 안간내변을 향하여 간다. 노래 부르며 그 들은 혈벗은 채 앞으로 나간다. 그들에게는 설교가 필요치 않다. 설( 說 ) 하고저 하는 것은 모두가 그들의 시( 詩 }이다. 그들이 부르는 것은 그툴의 가슴이 노래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시( 詩 ) 는 그림자처렁 그들을 따르고 았다. 그려가에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것 이다 그들이 그러한 서( 詩 )를 만들고 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틀 의 시(픔)룰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정열이며 삶 그 자체이r::t. 그들의 춤은 거의가 야상할 뿐이다. 그들은 결코 춤을 배운 일이 없다.

바올춤과 바울의 노래 21 그틀은 춤의 예술성에 대하여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들은 다만 려듬에 맞추어 자유롭게 율동한다. 마치 바람처럼 그들은 울고 싶올 때 운다. 그들이 길가에 머울고 서서 아무련 이유도 없는데 윷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만일 누가 왜 울고 있느냐?JJ 고 묻는다면 그틀은 다음파 같이 답할 것이다Ii아무런 이유는 없다. 다만 그렇게 느꼈기 때문일 뿐이다. 울고 싶어 울었을 뿐이다.JJ 라고. 다만 웃고 싶어서 웃고, 다만 노래하고 싶어 노래하고 라고는 하지 만 그 깊은 느낌은 쉽제 집작할 수 없을 것어다. 그들에게는 어떠한 의식이나 체면 같온 것은 없다. 의식 같은 것은 전 적으로 반대다. 어떠한 경전도 없으며 의식적인 종교도 은 일야다. 없다는 것은 좋 바울은 어떠한 순간에도 죽음이 줍비되아 있다. 왜냐하면 그틀은 한 순간도 낭비하지 않았다. 그들은 산다는 것을 가능한 한 깊이 살았다. 그들에재는 어떠한 불만도 없으며 삶에 대하여 어떤 한( 恨 )같은 것은 없 다. 어떠한 소유라는 것이 없다. 그러기에 죽음이 찾아들어도 그들은 죽음마저도 살아갈 용의가 있다. 그들은 죽음을 포옹하며 죽읍에 대하여 주인도 된다. 즉 우리가 정당하 게 열심히 또 충실하게 살았다면 우리는 평화와 행복에 충만한 채 죽읍 을 준비할 수 었다. 바울은 춤추며 죽고 노래하며 죽는다. 바울온 애끄 따라와 제떼르를 켜며 죽는다. 그들은 어떻게 살며 어떻게 죽는가를 잘 알고있다. 그들의 탐구의 모든 것은 다만 나 라는 본질적 안칸을 발견하는 것이다Ii나는 누구얀가?JJ 야말로 그들의 본질적 탐구언 것이다. 여기 그들의 흔이 담긴 노래가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하늘의 거용이> 하늘의 거울이 내 영혼을 비치고 있네/오요 바울의 걸이여/오오 바 울, 나의 가숨이여/하늘의 거울야 내 영혼을 비치고 있네/오오, 나의

22 민족무용 춤 애세여 감각 잃은 가슴아여/너는 인간악 땅을 가는 일에 실패했네/딴일 가 는 일에 실패처 않았다뺨그것은 황금의 수확을 가져다주었을 것/생 명과 마음과 두 눈이 동의할 때표적은 너l 벌거숭이 눈으로 너는 형태 없는 자를 보네 손이 닿는 곳에 었느냐/ 인디언 댄서

내가 무용을 사향}는 이유 23 내가 무용윷 사랑훨}는 이유 홍준철! 효택여 술종합학교 발전기급 사무국장 합창단 <음악이 있는 마을> 지휘자 무용과 거리가 멀게 살았다. 음악을 전공하고 합창을 했지만 안접예술 안 무용과는 거려가 멀었다. 또한 무용은 특별난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 는 생각을 언제나 했다. 솟 다리 솟 활에다가 머리의 무게가 영청 나가 는 나로서는 도사 무용은 보통명사가 되질 못했다. 그러나 인생이 만들 어 내는 운명은 무용과 펠 수 없는 사야로 만들어 놓고야 말았으나 한 국예술종합학교 발전기금 재단사무국이 서초동 교사로 옮기면서 무용원 이 위치한 2층에 자리 잡기 시작하변서였다 사람은 환경에 민갑한 영향을 받는다는 다윗의 진화론은 맞다. 매일 보는 것이 무용수요 인끈 무용원 교수남틀을 한 분씩 알게되면서 공연 이 있을 때면 눈 도장이라도 찍어야 하는 상황이 생기고 산학협동이나 학교 일을 같이 하거나 하다못해 마실을 가는 일이 자주 있게 되면서 무용에 대한 이해는 늘어만 갔다. 또한 무용과학실에서 퇴근 후에 살을 좀 빼볼 요량으로 시작하게된 헬스 때에논 늦게 까져 남아 연습에 몰두 하는 학생들을 볼 수 았었으며 그들이 만들어 내는 안무를 아무도 없는 곳에서 따라하면서 비록 자세는 전혀 나오지 않지만 활을 뻗고 다려를 올려면서 무용수들와 마음을 야해해보려고 노력했다 더더욱 세계민족무

24 먼족무용 - 충 어l 셰이 용연구소가 설립되고 행정지원을 맡게 확면서 이제는 무용온 매우 가까 운 일상의 숨과 같이 되어 버렸다. 무용을 알면 알수록 내가 하고 있는 음악애도 크고 작은 영향을 주었 다. 음악의 표현온 그 음악에 따라 춤을 춘다고 생각해보딴 훨씬 더 깊 은 심도를 갖게 되는가 하면 3박자 계열의 춤곡은 춤을 추변서 노래를 하면 해석에 완벽을 기할 수 았논 장점이 있었다. 결국 인간의 갑정 표 현을 몸요로 하는 메카니즘을 갖은 무용이나 융으로 하는 음악과 원천 적 뿌려는 같은 예술약고 또한 무용에 음악이 필수로 작용하는 것인 만 큼 음악과 무용은 불가분의 관계를 성립하고 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옛 성인들이 말한 가무( 歌 舞 )라는 단어도 피부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 다. 야러한 무용에 대한 장족의 발전은 민족무용을 접할 가회를 가짐으로 서 더더욱 확장되었다. 일본의 <노>, 인도의 <쿠티야탐>, 펼라핀의 <먼 속무용>, 일본악 <분락구>의 공연의 설무자가 되면서 우선 무식을 씻으 려는 노력으로 공부하고 원갚 공연, 본 공연을 판람함으로서 어려웠지만 아해하려 애도 썼다. 민족무용을 접한 것은 현대옆으로서는 호기심만으후는 접하기 야려운 점이 있다. 특별히 일본 전통무용에서 더욱 그랬는데 느린 며학의 정수 안 일본 전통무용은 나를 비우지 않으면 그 느림이 내 것아 되지 않았 다. 처음에는 너무 답답해서 면족무용은 재미없는 것으로 치부하기도 했 는데 남들은 무형문화제라고 소중히 여기는 것을 냐는 별 것 아니라고 느낀 것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해서 몇 분의 조언을 얻은 결과 나의 시 간에 대한 감각어 지나치게 빠르다는 것을 알았다. 밥도 빨리 먹고 빨리 걷고 뭐든지 빨려 빨리 하는 그래서 가속도가 붙어버련 나의 감성과 몇 백년 전의 일본문화의 감성아 소통할 리가 없었펀 것이다. 그래서 천천 히 천천히... 느려게 느리게를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념들을 쩔쳐 버리고 민족무용의, 그들의 마학에 나를 맡기려고 노력하 나 한결 환해졌고 이해하는 단초를 얻을 수 있었음은 큰 소득이었다. 더 구나 일본 요코하마에서 었온 한열고전예능제의 참석은 일본과 한국문

내가 무용올 사랑하는 이유 25 화를 비교해 볼 수 있는 훌륭한 정헝이었다. 30분전부터 극장 건물 밖에서 줄을 셔고 기다라는 일본 판객들의 모 습, 여유롭게 공연을 기다리고 공연을 감상하려는 조용한 태도, 정시에 시작해도 늦는 관객은 서너 명에 불과한 수준 높읍.3시간 넘는 공연을 흐트려짐 없이 관람하거나 휴식 때의 행홍틀. 어쩌나 우리와는 다르던지 일본 판객플의 모습이 본인억 의지로 움직 언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늦으면 안돼 J, [돈은 내 야해], [조용히], [재미없어도 끝까지]가 이미 입력 되어있는 상태처럼 보 이기까지 한 것이다. 이날 공연된 내용이 일본의 경우 <노오>, <나기나타야시마 >두 프로 그램으로만 진행되었는데 단조롭고 단순반복으로 움직임도 매우 느련 반면 한국 무용은 <산조춤>, <선비춤>, <살풀야> 등 다섯 프로그램으 로 유연하고 션을 중시하며 갇간이 즉흥적인 면도 있는 자유함이 돋보 였다. 일본처럼 안정되다 못해 노화하는 사회가 보야는 푼화에 대한 관 심과 몸에 밴 질서의식이 만들어 내는 세분화되고 조금은 경직된 무용~... 아직도 불안의 요소를 내재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무질서, 문화의 소외, 성급함이 만들어 내는 유연과 즉흥적인 자유함의 무용어 양국의 비교를 분명하게 해준 점이었다. 언도무용인 <쿠티야탐>때에도 배운 것이 많다'.8가지와 얼굴 표정을 표현하는 방식을 원삶을 통해서 강의를 했는데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연극의 원형이라는 점에서 소중하기도 했지만 매우 정교하고 감정 몰업 을 하는 데에도 탁월한 기량을 보였다. 그중 가장 마음을 사로잡은 표정 은 슬픔과 사랑이었는떼 솔픔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같이 울도톡 만드는 힘이 있을 정도로 강렬했다. 또한 몰입과정도 길었고 몰입 후에 무표정 으로 돌아오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슬픔이라는 감정야 그러한가? 라 는 생각을 해보았다. 사랑을 표현하는 얼굴은 말할 수 없는 환회와 자돼 그리고 화망을 나타내는 아름다운 얼꿀이었다. 인간이 표현 할 수 있는 최고의 얼굴표현을 그때 보았다 또한 손의 언어 (hasta mudra 손, 상장) 는 처밀한 상징성파 주술적 동 71 룹 결정하는 선차적인 요소로서 신들의

26 민족무용 - 춤 에셰이 원초적인 행동자체로 여기눈가 하면 제관들이 선을 가리는 산성한 언어 로 고안된 것에 태한 매력은 남달랐다. 손올 이용하여 합창지휘흘 하는 나로샤는 몇 가지를 응용해보게 만들었고 생각올 하게 하였다. 하지딴 공연단올 대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안도 무용수들은 고가를 먹고 안 먹눈냐에 따라서 몹의 풍채가 달랴진다. 고기를 먹는 쪽운 좀 쉬웠지만 안 먹는 쪽은 데운 우유에 설탕을 타서 먹논 것을 즐겨했는데 고기를 피하려고 바싼 돈주고 한국 궁중음식을 줘도 입애도 안 댄다. 꼭 반찬 투정하는 어린애들 같았다. 그러나 야 비쩍 마륜 사람들이 북을 쳐 대는 모습을 보변 어디에서 힘야 나올까 할 정도로 가히 폭발적이다. 명 상을 통해 기를 모으고 공연 때눈 선들린 사람들처럼 길고 긴, 대사도 알 수 없는 공연을 했다. 보통 밤새고 산전에서 공연을 했다 하니 완형 을 보았다면 나는 가절했을 것이다. 필리판 무용은 내게는 남다르지는 않았다. 여미 오랜 필리핀 경험으로 그네들의 정서를 잘 알고 았었으며 춤도 때우 서구화되어 원시미와 많1l11C으로서의 멋을 잃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용탄의 군기(?) 는 대단했다. 무대에서의 동션을 연습하는 과정은 전투와 다룹없는 반복 을 거듭했으며 따지막 날 둬풀이 삼아 음식을 대접하띤서 옆구리 찔러 맥주라도 마셔볼 요량으로 맥주를 권했지반 누구도 신청하지 않았고 단 장인 오부산 선생님은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 저렇게 치열해야 세계를 누벼며 공연을 가질 수 았다는 생각융 했다. 2(x)3년부터논 중국 무용을 연구하기로 사업계획을 잡고 있다. 즉 한자 문화권인 한국, 일본, 중국을 잇는 민족무용올 연구하고 야후 인도 무용 을 거쳐 태국 등지의 동남아시아의 민족무용들을 일괄함으로서 아세아 영역의 민족무용을 아우르는 최고의 연구소로 발돋움하려는 노력이 그 것이다. 이렇게 세계 만족무용연구소는 폭넓은 활동과 더불어 연구논문들이 야 어졌다. 즉 꽁연과 야론을 철저하게 겸비한 것이다. 행정으로 참여하는 문외한의 나도 배워 가는 판에 학생틀은 정말 최고의 환경을 제공받게 됨은 자명한 일이었다. 사업과 교류 그려고 교육과 연계된 연구소의 프

내가 무용을 사랑하는 이유 27 로젝트는 국내적으로 보면 사회에 지구촌 곳곳의 무형 문화재들을 보고 즐길 수 있는 밭이 되는가 하변 세계적으로 보면 문화의 중심지가 서울 로 자리이동을 하고 우리의 문화가 세계를 향하여 퍼져나가는 그야말로 우리가 꿈꾸는 문화 한국의 한 축을 볼 수 있는 귀한 일이다. 나는 개안 적으로 이 일은 더 없이 소중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다. 아무도 할 수 없었던 이 일은 선각자의 입장에서 많은 사람이 주축이 되어 일한 결과이긴 하지딴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이끌어온 허영일 소 장념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분의 굳은 심지로, 그분이 보는 희망 으로 여기까지 왔으며 또 제획된 길을 갈 것이다. 나는 이제 무용에 판한 무식함을 좀 덜었다 공연윷 보는 눈도 업-그레 이드 된 것도 사실이다:g:: 언접예술을 통해서 나의 분야를 살찌우는 소 득도 있었다. 배우는 즐거움파 일하는 줍거움여 함께 한다는 것은 그래 서 축복인가보다

28 민족무용 - 춤 에서}이 알본 최초의 7t극단 다카라즈카( 寶 撥 ) 꿈을파는바즈나스 신계창 싸겨 l 먼족무용연구소 연구원 l 일본에서 뮤지컬은 현대판 가부키( 歌 舞 俊 )로도 불린다. 가극( 歌 處 의 형식이나 화려한 무대 등이 가부커와 다를 바 없논 친근감을 주기 때문 야다. 푸대의 규모나 출연 배우의 숫자에 있어서는 뮤지컬의 본고장얀 영국과 미국에서도 부려워 할 정도로 초호화 대형공연이다 그 중에서도 단연 일본 뮤지컬의 최고( 最 高 )라 할 수 있으며 셰계에서도 그 예를 찾 기 힘툰 여성배우만으로 아루어진 가극단 다카라즈카( 寶 據 )를 지난 9월 26일 무용원 이론파 세미나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 서1마나와 강사는 1004년 다카라즈카 가극단에 입단하여 <베르사이유의 장며> 초대 앙드 레 역,<바람파 함께 사라지다>의 애슐리 역 등 굵직한 남성 역할을 맡 았던 타지마 루미( 但 馬 久 美 씨였다. 타지마씨는 특히 춤의 재능을 높이 평가 받아 한때 다카라즈카 극단의 제일 가는 무용수로 안기를 한 몸에 받았던 스타 배우였다. 다7}라즈카( 寶 據 )란 일본 효고현( 兵 庫 縣 )의 한 소도시의 지명인 동시 에 올해로서 8s년의 역사를 맞이한 일본 특유의 레뷰 (revue)를 전문오로 하는 가극단의 이륨이다. 1914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다커라즈카 가극 단의 역사는, 오λ}카의 우메다와 다카라즈7}를 엿는 철도를 완성한 철도

일본 최초의 가극단 다카라즈카( 寶 據 ) : 꿈을 파는 비즈니스 29 회사 한큐전철이 작은 온천 마을 다카라즈카에 관광잭을 끌어들이기 위 한 하나의 관광상품으로서 개발하면서 시작되었다. 온천과 먹거리, 소녀 가극단에 의한 례뷰 꽁연을 철도로 연결한 상업화된 문화관광상품이었 다. 그러나 88년이 지난 져금 다카라즈카는 일본의 남녀노소 모두가 좋 아하는 일본을 대표하는 뮤지컬로 자리잡았으며 다카라즈카 공연을 보 려면 3개월 전에는 예약올 해야 할 정도로 그 인기가 태단하다.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창사자는 한큐전철(~& 急 電 鐵 )의 창립자이거도 한 고바야시 이치조( 小 林 -긍, 1873-1957) 이다. 기업가이자 문화언으로 일본 정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닿당했던 그는 다카라즈카의 모든 재정적 후 원을 뒷받침했다. 정부의 지원을 전혀 받지 않는 다카라즈카는 현재도 한큐 그룹에서 제작, 운영, 지원 모든 분야의 책암을 맡고 있다. 수많온 일본 여성들에게 동경의 대상인 다카라즈카의 가장 큰 특정은 모든 l:iß 우가 남자인 가부카( 歌 舞 俊 )와 정반대로 (우려 나라의 여성국극처럼) 여 자배우만으로 여뤄진 가극단으로, 단원 충원이냐 그 운용방식야 매우 특 이하다. 여배우가 남자역까지 소화해야 하는 다카라즈카는 부자연스럽고 더려 는 퇴행척인 느낌마저 든다 하여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관 객틀은 이련 색다른 분위기를 즐낀다. 1974년 초연한 <베르사이유의 장 미>가 거둔 공전절후의 인기가 좋은 예이다. 가쓸고 긴 다리의 얼굴 예 쁜 납자 를 표현하는 데는 원작인 만화 이외에는 다카라즈카 여배우 01 상이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다카라즈카논 극 자체가 남자역을 중 심으로 이루어지며 각 조를 이끄는 톱스타나 조장들도 남자역 배우가 맡게 된다. 이런 남자역을 전문으로 맡논 배우를 男 짧 오토코야쿠)라고 부르는 반면 여자역을 전문으로 하는 배우는 娘 投 무스메야쿠)로 부르는 데, 여 여자역의 배우플은 남자역을 빛나게 해주는 조역( 助 짧) 에 불 과하다. 누가 남자역을 맡고 누가 여자역을 맡을지는 다카라즈카악 쩨우 로서 정삭으로 업탄하기 전 미 정해지게 된다. 예비학교인 다카라즈카 음악학교 사절에 이 역할을 선택하는 기준은 재인의 희망에 따르는 것을 기본척으로 하고는 있지만 대체로 선장과 체격에 의해 암묵적으로 정해

30 민족무용 춤 에셰이 진다. 다카라즈카는 쿠마 라고 부르는 5개의 조( 組 =troup) 로 이루어 져 었다. 이 다섯 조들은 æ년의 간 역사 속에서 다카라즈카의 얀가와 더불어 극단의 ït!.표가 커져면서 분리, 창설된 것으로 각각 花 組 (꽃), 組 (딸), 雪 組 (눈), 星 組 (별), 庫 組 (하늘)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작 조에는 남자역과 여자역 각 한 명씩 총 10명의 톱스타가 있다. 다카라즈카에서 는 엄격한 선후배 관계를 전통으로 하고 있지딴 톱스타와 경우는 그 서 열제에서 예외가 된다. 극의 주연은 언책나 톱스타가 맡게 되며 심지어 각본도 톱스타를 중심으로 쓰여지거나 각색된다. 즘 톱스타들어 다카라 즈카의 중섬인 것이다. 각 조의 최^d-급생은 조장( 組 長 ) 이라고 불랴며 그 조의 일을 맡아 관장한다 그 다음 기수와 배우가 부조장어다. 다카라즈카는 지수와 연 차에 따른 철저한 연공서열의 세계로서 극단 소속의 음악학교에 업학한 연도에 따르는 구조이다. 재미있제도 이 서열은 나이와는 전혀 상관없다. 톱스타나 톱의 계열에 들어간 배우의 경우는 약간 예외이지만, 그 외의 단원들은 선후배 서여를 엄격하게 지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다카라즈카 와 배우관리는 입단 7년까져는 전속으로 월급을 주며, 8년째부터는 기여 도나 스타성에 따라 극단과 단원이 개별적으로 계약하는 형식을 갖는다. 현재 ffi-73명인 조( 組 ) 는 공연와 지본 단위이자 서로 다른 작품을 다룬 우대에 올려는 내부 경쟁의 단위여다. 단원은 생도( 生 徒 ) 라고 부르며 입단 년 차에 따라 f 연구과 년생 야라고 불련다. 일정한 가량 에 이른 학생은 조에서 나와 전과 專 科 ) 에 소속된 채 각 조의 공연 을 특별출연 형태로 도외준다. 다카라즈카와 단원이 되려면 우선 2년 과정의 다카랴즈카 음악학교애 들어가야 한다. 다카라즈카 읍악학교는 매년 않명 정도의 입학생딴 받아 들이는데, 2년의 채학기간 동안 노래와 연가, 발러l와 재즈, 고전 무용, 다 양한 악기 연주 등 여러 장르의 과정을 모두 수료한 후 생도는 첫무대 에 서게 된다. 음악학교에 웅서할 수 있는 나이는 보통 15-18세로, 여} 月 과와 본과로 나누어지는 2년간의 양성가간윤 거쳐띤 17세 -20세 즈음

일본 최초의 가극단 다카라즈카( 寶 據 ) : 꿈을 파는 버즈니스 31 첫무대에 서게 되는 셈이다. 이후 성숙한 다카라즈카 배우로서 성장하기 까지는 10년 정도의 기간이 걸린다. 따라서 푸대에 서는 여배우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안 서른 살 정도가 되어서야 톱스타의 반열어l 들 수 있 다고 할 수 있다", 1919년 다카라즈카 음악학교가 설립된 후 지금까지 약 3천 5백 명악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다카라즈카 가극단은 배우들 뿐만 아니라 무대를 구성하는 크고 작은 무대장치, 조명, 음향, 의상, 가발. 신발, 섬지어 아주 작은 소품에 이르기 까지 공연에 필요한 모둔 것을 자체 내에서 해결하고 있다. 다카라즈카 무대의 가장 큰 특징은 무대 중앙에 설치되어 있는 26개의 거대한 대계 단인데, 무거운 의상을 걸친 배우들은 이 계단을 밑을 보지 않고 사션을 정변으로 향한 책 걸어 내려오}야 한다. 이것온 때우 어려운 동작으로 수 많은 연습을 통한 숙딸을 펼요로 한다. 오케스트라 박스에서는 35명의 오케스트라 단원이 음악을 연주하며, 오케스트라 박스와 객석 사이애는 간 통로 형태를 하고 있는 은교( 銀 橋 ) 라고 하는 에이프런 스테이지 (apron stage)가 았다 단원으로서의 다카라즈카 배우들은 가극단에 소속되어 있는 이상 독 선을 고수해야 한다. 그 이유는 관객들에게 이상적인 꿈과 낭만을 전탈 해 주는 것을 최대의 무기로 삼고 있는 다카라즈카에 있어 배우가 결혼 윷 할 경우 꿈과 낭만이라는 주제가 무대에 효파적으로 표출되기 힘을 며 그만큼 판객들의 감동도 화석된다고 여겨자기 때문이다. 젊은 여성들 의 에너지나 갑동의 근원이 되는 파워가 결혼 이후에는 표현되기 힘들 다고 생각하여 결혼을 금지시키고 또한 결혼을 하게 되면 배우 본인들 뿐만 아니라 판객들이 기대하는 이상적인 꿈과 낭만에 대한 상상력도 그만큼 떨어질 것으로 보는 것이다, 다카라즈카의 주요 모토는 아름답게, 맑게, 정직하게 이다. 그래서인 지 현실에셔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완벽한 로맨스 를 가극의 주 요 테마로 삼으며 여성관객들의 판타지를 자극한다. 다카라즈카에는 열 광하는 소녀 팬들이 특히 많은데, 이것은 다카라즈카가 현실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상작인 남성상을 그리고 있으며 또한 현실세계에서는

32 민족무용 - 춤 에세이 존째하지 않는 완벽한 로맨스 판타지를 무대에 올림으토써 공연을 보는 많은 소녀 팬들의 상상력을 자국 그런 판타지에 때료되게 하기 때문이 다. 이런 지속적얀 인기를 끝어온 다카라즈차와 혐은 무엇일까? 우선 앓 년이라는 긴 전통올 들 수 있다. 100년에 가까운 역사 속애서 다카라즈 카는 그들만와 역사와 전통을 만들고 튼튼한 조직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래서 일본 국내에서 뿐 아니라 해외 공연을 통해서 일본을 알려고 문 화교류를 하는 떼도 큰 공헌올 하였다. 해외 공연 때 일본적 테마의 작 품을 반므시 포함시키는 것도 바로 이 어유 때문이다. 또 다른 다카라즈카의 힘은 대중성이라 하겠다. 우리 나라 여성국극야 한국전통의 국악만을 기본으로 하는 반면 다카라즈카는 테마 뿐아니라 형삭이l 있어서도 탱고, 탬 댄스 등 서양의 다양한 장르를 집약시켜 대중 적으로 그랴고 일본적으로 풀어낸다. 모든 무대예술이 다 그렇겠지만 다 카라즈카얘 있어서 관객은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카라즈카 팬들이 다카라즈카틀 만들고 있다고 해도 과언아 아닐 것아다'. 1 總 년 다카라즈 카의 사상 첫 북경공연에 수많온 일본의 팬들이 북경까지 응원을 간 것 에서도 좋은 예를 찾올 수 있다. 이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른 판객의 다 양한 요구를 다차라즈카가 정확하게 반영하여 대중을 사로잡기 때문이 다. 다카라즈카의 힘온, 대중성 거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다카라즈카를 여끄는 주요 원칙은 다카라즈카 극단의 근 본적인 야녕아 자립적 여성 을 만드는 데 았다는 것이다. 단지 예놓 무대만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어 아니라 이상적인 무대인물을 만들어가 는, 진정한 무대인으로서의 한 여성을 만들어가는 것야 근본적언 목표라 는 점이다. 따라서 다카라즈카는 공동생활 단체생활의 경험을 대단하 중요시하며 기숙사 챙활을 통한 일종의 여성공동체를 지향한다. 단체생 활을 통해 무대 속의 일치감과 일체갑을 표현하는 것이다, 지금은 서대 의 호롬야 많이 바뀌었고 그런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긴 하지만 다카라 즈카는 그것이 지향하는 여성훈련의 이념을 꾸준허 지켜나가려 한다. 강연을 하는 타지따 쿠미 씨는 %패의 냐이가 믿기지 않는, 여자로서

일본 최초의 가극단 다카라즈카( 寶 據 ) : 꿈을 파는 바즈니스 33 는 제법 륜 키의 균형 잡힌 여성이었다. 목소리에서 묻어 나오는 그 호 소력과 행동 속에 배어았는 당당함과 절제력은 2시간아라는 짧지 않은 강연시간 내내 청중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다카라즈카에서 훈련 받은 그녀의 얼생은 다카라즈카 푸대가 아닌 인생이라는 우대에서도 그 빛을 발하고 있었다. 1없4년부터 2001년까지 8년간 일본국회의 참의원으로 활 약한 타지마 쿠미씨는 <예술문화진흥기본법>을 국회에 제출하는 등 특 히 예술진흥과 여성인권문제에 있어서 활발한 정치활풍을 펼쳤다. 그녀 의 답자 같은 제스처가 다소 신기하기도 했지만 일생을 뮤지컬에 몸담 고 현재 사회 속에서 당당한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그녀만의 인생철학이 인상에 남는다

34 민족무용 - 춤 에세이 훈앵전 공연, 일본 요코하마 노악당에서 김천홍 선생님과 핑 Àl 노악도to!l서

인간문화재를 찾아서 - 김천홍 편 35 톨홉셜뤘?혈훌를 안간문화재를 찾아서 - 김천흥 펀 대담자 - 허영앨 l 효택 셔 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i 섬소감천홍선생님 소개 심소( 心 짧) 김천홍( 金 千 興 ) 선생남은 1!:XJ.)년 3월 30일(음 2월 9일) 남 대문에서부터 남산을 향해 이어져 있는 성맡마을 아묵골에서 당시 목수 를 하시던 부친 김재희(본관 경주)와 모천 정성녀(본판 초계)의 5형채 (만용, 천용, 천홍, 교욱, 응천)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우리 국민의 주권 과 권한이 하나씩 얄본인에게 예속되는 벼운이 샤작되어 많은 한국인이 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국가와 만족을 자가 자산의 엽산영딸을 위 하여 매국노 행위를 자처하는 때에 남달리 국가판이 강하고 의를 위해 굽혈 줍 모르는 곱고 강한 부천의 성품과 지혜롭고 자상하선 모친의 가 정교육 속에서 선생님께서는 산과 들포 나가 들나물을 캐 71 도 하고 뒷 산에 올라자 낙엽파 솔잎을 긁어 모으거도 하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어 수선한 서국 속에서도 연극이나 산파극아니 하여 대중 예술 활동이 싹 트며 가설극장이 세워져 활발한 공연 활동이 사작되어 야런 풍경을 자 주 목격하면서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선생님와 예술 언생와 밑거름이 되었다. 선생님께서는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 ( 李 王 職 옮 樂 部 員 養 成 所 ) 제 271 생으로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무악( 舞 樂 )의 예술인생의 길로 들

36 민족무용 - 문화재탐방 어섰다. 어왕직 아악부. 그것은 어찌 보면 우리 무용 음악사애 었어 참으로 아 련 상처이다. 당당한 겨레음악이었던 것이 일제에 의해 한낱 식먼지 왕 7t의 음악으로 격하되었던 시대와 아픈 편린이므로. 김천홍 선생님은 바 로 그 어왕직 아악부의 아악생으로서 예술인생을 연 사람이었다. 풍부한 감수성을 가지고 세상을 향한 호거심으로 한껏 열린 조가바 같았턴 시 절. 그는 아악생 로 선발되어 기울어 가는 나라의 정재와 음악을 익혔 다. 당시의 아악부는 황가의 저l 례나 의식이 많이 축소되었던 때인 딴큼, 단지 명목상의 기구토 바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감천홍 선생님은 그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아악의 품격과 원형을 고스란히 전한다는 자부성올 앓져 않았던 스승들을 또렷야 기억하고 있다. 우려 선생님툴, 비록 가녀린 끈이건 했지만, 궁중음악과 정재의 맥 을 잇는다는 도도함을 가지고 계셨어요 그핵서 우리들에게 정말 혹독하 게 공부를 사키셨지요. 종묘제례악어며 문묘제례악, 여면락 모두를 와는 것은 물폰, 악거도 다 익혀도록 했어요 번저 육보 구음효로 전수하셨 는폐, 우려는 눈에 보악는 악보보다는 그 가략에 스민 숨결부터 느꼈 ;<1 요... 풍덩 당 뜰, 슬기퉁 싸랭" 선생님은 어느새 여만락( 與 民 樂 )을 구음으후 부르고 있다. 소려에 스 민 보드라운 입체감이 손으로 만져칠 것만 같다. 읍악에 있어 그 읍악의 숨은 혼을 찾기란 얼따나 어렵고 얼마나 긴 언내심을 요구하는 것일까? 김천홍 선생님은 환음한음 정성을 다해서 가락얘 호흡윷 불어넣고서야 어련 제자들에게 숨대며 활을 줘거l 했던 선생님을 떠올려본다. 구한말 장악원( 掌 樂 院 )얘 속해 있었한 김영제, 함화진, 이수경... 그들야 김천홍 선생님께 그 따뜻한 구음가락을 전해 주었던 조선시대의 마지막 아악사 들이었다. 심소( 心 짧), 고아한 여I술세계와 더불어 사람 사는 고운 정을 가득안고 있는 선생님와 아호만큼 담담하고 올곧게 표현하는 말야 없을 듯하다. 선생님은 우려 음악과 춤을 사무치도록 사랑하며 음악을 하는 후배들과 평생올 살아온 국악원이 바로 선생닙의 따뜻한 집파 같다.

인간문화재를 찾아서 - 김천홍 편 37 션생념과확 대담 (Q & A) 궁중무용 수엽과 궁중청채의 전승 Q: 선생님께서는 궁중음악과 무용을 언제부터 시작하셨고, 또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는지요? A: 내가 음악과 춤을 시작하게 된 것은 1922년 1 14살 적어l 이왕직 아악 부에 들어갔을 때부터예요 한일합방 후 원래 궁중읍악과 궁중무용 을 맡았던 장악원이 이왕직 아악부로 바쩌면서 1 1918년 제 1기에 이 어 l앉쪼년 제 271 아악쟁을 뽑게 되었던 거지요 곧고 강한 성품애 국가관이 투철하셨던 부친과 친교가 있으시며, 아악부 아악수장직을 지대시던 고익삼( 高 益 三 )씨의 소개로 업소하게 되었어요. 당사 아악 부엑서는 학생들에게 15원씩의 장학금도 줬는데, 그거l 쌀 한 가마에 7원 밍전 할 때니까 가계에도 꽤 도움이 되는 거였지요 게다가 공 부도 계속할 수 있으면서 학용품 일체까지 자급 받았으나 나로서는 원하던 것을 한꺼번에 얻은 셉이었습니다. 그때에 아악부 장소가 어 다냐 하면, 지금의 쩨푼안교회(원각사터, 1fm년 초 우라나라에서 지은 최초의 서구식 극장) 뒤편 어디쯤에 았던 봉상소( 奉 않IT) 라는 건물야었어요. 봉상소는 왕가에서 일이 있을 때 잔치상올 차랴는 곳 이었는데, 전선인 장악원이 없어진 후 아악부가 그 봉상소 건물의 부속으로 들어가재 된 것아었지요 우리는 5년 내내 그 곳에서 소, 돼자를 잡는 것, 술 담그는 것 등을 보면서 공부를 했어요 Q: 장악원이 일제약 탄압으로 건물을 빼앗겨면서 봉상소와 같아 제사 읍석을 공급하는 속에 끼여 들어간 것야었군요 그 봉상소 건물마 저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악부에 계사는 동안 주로 어떤 결 배우셨는지요? A: 물론 읍악(아악)이 주 과목이었고 한문, 일어, 습자, 역사 둥 소위 선학문을 부수로 배웠습니다. 문묘약이며 종묘악, 안 배운 것이 없 었아요 춤을 배운 것은 1앓년 가을이었지요. 나를 포함해 1-2기

38 면족무용 - 문화채탐방 생 중 성발된 11 명이 밤에 따로 춤을 배우게 된 것이지요 낮에는 정규 공부를 해야 하니까. 그때는 선생님께서 너화들은 춤을 배 워야 한다" 그러나까 그냥 예" 하고 배울 수밖에 없었어요 요 즘 같이 왜 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없었지요 겨울얘서 이듬해 봄까지 가언전목단어며, 무고, 포구락, 장생보연지무 등 7-8가지 정도를 1:IR 웠어요. Q: 처융으로 춤올 공연하게 된 것은 언제인지요? A: 1잃3년, 순종 황제 오순(많세) 탄신 축하연에서예요 그때는 아악부 의 무동만 춤을 출 수 있었지 일반 사람들이 춤을 추는 경우는 없 었어요. 었다 하더라도 특수한 여자들만 추었지요 아무튼 우리는 큰 기대에 부풀어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궁중의 나인들이 지어준 옷올 입고 난생 처음 화장도 했지요 드디어 1앓년 3월 25일(음력 2월 8열로 기억됨), 창덕궁 안 안정전에서 우려눈 공연을 하게 되었 어요. 그련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손님이란 사람들이 죄다 국척 ( 國 魔 )야나 일본고관, 작위(짧 位 들이었더군요 Q: 나라를 잃은 상황이였으니까요. 그런떼, 선생님. 1910년을 기점으로 우리 궁중정재는 어떻게 된 걸까요? 단절되었던 서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A: 내가 1!*B년 생이니까, 1910년 이전의 상황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진찬의궈Il( 進 購 驚 軟 )J 니 전연의궤( 進 홈 慶 戰 니 이련 기록을 보 면 lw1, 1앓년까져는 잔치가 있었으며, 누가 나왔고, 어떤 춤을 추 었는지에 대한 얘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이후는 알 수가 없어요. 모르긴 몰라도 나라가 소란한데 잔치하고 술 마사고 춤출 수 있었 겠어요? 아마 1910년 이후, 궁 안에셔 다시 춤을 춘 것은 1앓3년 그 때가 최초가 아난가 싶어요 Q: 그때 어떤 선생님께셔 선생님을 지도하셨나요? A: 야수경씨, 함화전씨, 김영제씨 등이 있어요. 그런데 김창하의 증손인 김영저}씨도 정조 때부터 대대로 야어온 악사집안의 샤람야었고, 함 화찬씨도 영 정조 때부터 악사의 집안이였 죠 대가 들어갔을 당시만

언간문화재를 찾아서 - 김천흥 펀 39 해도 새로 들어온 몇몇을 제외하딴, 아악부 직원들은 거의 모두가 대물림을 하고 있었어요 백정, 무당뿐만 아니라 아악부의 아악생도 대대였던 거져요 Q: 김창하는 정조 때 전악( 典 樂 )으로서 춘앵전을 안우했던 분이지요. 그랴면 우리 나라에서도 가무( 歌 舞 ) 같은 것어 대대로 이어졌다는 얘거인가요? A: 그래요 함화진의 백부 함재운이 헌종조 악사 함제홍의 아들로서, 순종 제2대 국악사장이 된 것이 그 예라 할 수 있겠지요. Q: 그렴, 무용도 대대로 전해졌다고 보십니까? A: 글째, 아까 여야가한대로 무용은 장악원을 중심으로 지역적으로 다 있었던 거예요 진주겸무에 관한 얘기를 좀 할거I 요. 1952년 늦가을, 경남 진주에서 독립겨념으로 제 3회 채천 예술제를 개최했야요 우 리 일행은 말로만 듣던 저 유명한 촉석루와 남강의 의암을 볼 기대 로 가득 차 있었지요 하지만 촉석루는 6.25 동란으로 모두 소실 되고 빈터에 주춧돌만 이리저려 핑굴고 있었어요 허탈한 마음을 달래며 유유히 흐르는 남강을 보니, 왜장을 껴안은 채 물에 뛰어든 논개( 論 介 )의 장한 얼이 비쳐는 듯 하더군요 아무튼 산책을 마치고, 유숙지로 돌아오니, 주최측에서 예술제에 참가하는 무용단들의 반 주를 부탁하더군요. 그련더} 바로 그들 중, 진주 겸무가 냐}게 매우 특별한 감흥을 주는 것이었어요 여태껏 보아온 겸무와 많은 차이 점이 있었지요. 서울에서 추는 검무에는 염불가략, 한삼을 끼고 하는 가락이 없어요. 바로 타령장단으로 넘어가요 1930년대의 기억어I서도 마찬가지예요. 언제 없어졌는지는 모표져만 아런 것이 없었어요 그래서 신웠을 알 아본 즉, 그들운 광복 전까지 여지 女 妹 ) 생활을 하던 이들로, 어련 시절부터 검무를 배워서 오랫동안 추어 온 사람뜰이었어요 진주 겁 무는 논개 사당에서 I년에 한 번썩 지내는 제사 때 추어진 것으로 기녀들 사아에서 전해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진주 지방에서는 예부 터 겸무가 유명했고, 71 냐들은 어느 춤보다 겸무를 소중히 여기며

40 만족무용 문화재탐방 춤을 학습할 때 우선으로 배워왔다고 합니다. 예술제에서는 마침 조선 말 고종 때 진연에 선발되어 궁 얀에서 춤 을 추었다는 최완자라는 노기( 老 妹 )가 그의 채자들과 활겸무를 추었 어요 생존해 있는 그녀로부터 그 옛날 장악원애 대한 얘거를 들을 수 있었는데 그로 안해, 고종 때까지 궁중에샤 추어지던 겸무가 어 떤 계통으로 해서 전주 지방에서 전해 내려왔는지 확얀할 수 있었 지요. 생각해 보세요. 검우는 논개가 죽기 이전에도 있었기 때문에, 가생인 논개가 추었던 거예요 그 검무룰 추던 여기 女 鼓 )들 중 일 부가 장악원에 발탁되면서 기녀 노릇을 했으냐, 검무가 궁중에 전책 졌겠지요 그련데 그들의 신분은 백정야나 무당처럼, 대대로 세습되 었거 때문에 딸옳 낳으면 또 여령이 되었져요 그틀이 나중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도, 궁중에서 배운 것을 토대로 똑같이 거생을 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변천은 안 되냐까. 그런데 지역은 지역대로 또 행사가 았으니까, 자연 궁중무가 지역에 전달되고, 또 지역의 것이 올라가고... 사전이나 펼름 같은 증거가 없을 뿐야지, 궁중무는 아 마 전국적으로 전해졌을 거예요 어쨌든 최완자 여사의 얘거를 토대 로 한 내 주장애 의해, 진주 겸무는 1없7년 중요 무형분화재 제 12호 로 져정확었어요 최 여사가 문화채 지정 발표 직전에 별세한 것은 실로 애석한 일여 아닐 수 없었져요 아무튼 개천 예술제 같은 기회 나따 없었더라면 진주 겁무의 보존과 전승이 오늘의 위치에 있을 수없겠져요 1ffi2년 가을에 대구에 피난 가 았던 국립극장의 서향석 극장장으로 부터 개판기냄공연 요청여 왔어요. 그곳에서 박리홍이단 노안과 그 의 제자 권명화 양을 만났는데. 무척 인상적여었지요 박 노인은 1958년 제 l 회 면속 경연태회에서 대통령상을 획득하였는텍. 그는 이 때 대중 앞에 최초로 얀동하회가면무( 安 東 河 回 假 園 舞 ) 를 선보였 어요. 윤석운이 이 춤 발굴에 관계했던 이것은 야 안동하회가면 무 를 재현해 서울파 지방에서 공연하며 일반에게 널리 알려는 계 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1~년대 중반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문제

인간문화재를 찾아서 - 김천홍 편 41 가 논의되었을 때, 싼동하회가면무 는 기능 보유자인 박 노인이 이마 고인이 되었다논 이유로 대상에서 제외되고 말았습니다. 다행 히 주민들의 계속적인 보존 노력애 힘입어 1900년 중요무형문화재 채69호로 지정되는 결실을 맺게 되었지요 Q: 그런데 장악원애서는 여령들도 춤을 추었지만, 아까 말했듯 청선비 와 의술녀도 춤을 추었잖아요? 그렇다면 그들이 겸직을 했다는 말 아 되나요? A: 그렇죠 지금 같으면 정해잔 기구에서 해당 인력을 딱딱 관리하겠지 만, 당시에는 예술얘 관한 한 장악원에서 판장한 것이 확실하지만 다흔 것은 알 수 없어요 상여니, 약방이나 하는 것이 장악원에 속 한 것야었는지, 그냥 궁 안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춤도 꽤웠는지는 알수없는것이죠 Q: 그럼 선생님, 그것이 여태 밝혀지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A: 안 밝혀지고 있어요 장악원 기구 구성편이나 다른 문서에 나와 었 어야 하는데, 그게 나와 있지 않단 말이예요 그련폐 상방기생이녀 약방기생은 홀가(~릎뎌 구제의 의식에서 와식의 순서률 적은 글)에 나와 있으니 알 수 있었지요 나로서도 분명히 얘기할 수는 없지앉 여령이나 안동의 누구, 전주의 누구냐 하는 그 야룹들이 분명 있기 는 있었거든요 Q: 딴약 홀기에 반복해서 이틈이 나와 있다변 그 사람은? A: 반복되어 았다딴, 분명 그 사람이 그 당시에 무용을 했던 것이겠죠 홍기라는 것은 나중에 책으로 묶가도 했지만 원래는 그 자체가 하 나 하나찍 떨어져 있턴 거예요 그햄그때 의식이 있을 때마다 기록 을 한 것이니까. 거기에 나와 있으면 분명 존재했던 것야 틀림없지. 대 생각에는 홀거와 진연의궤.JJ, Ir전찬의궈11..0 를 대조해 봐야 할 것 같아요. 큰 과제이자요 Q: 그건 남아 있는 사랑들의 연구과제가 되겠군요 선생님께서는 처음 춤올 추게 되면서 어떤 훈련부터 시작하셨나요? 아악부에 틀야오시 71 이전까지 무용을 하지 않으셨잖아요?

42 민족무용 - 문화재탐방 A: 도드리 장단에 맞춰 발 떼는 것부터 시작했어요 교실에서 책상 옆 에 발을 놓고, 구부리고 펴고 하면서 발딛음을 배웠지요 또 몹가짐 새, 팔들고 내라는 것 등, 가본동작과 보법( 步 法 )을 배웠어요. 족도 ( 足 道 )에 대해서도 배웠는떼 당사 우랴 선생님께서 무릎 구부려고 펴고 하는 것이 족도라 하서더군요 그런데 홀가애는 그냥 결어가는 것이 족도라고 나와 있어요 그때는 그결 알지 못했으냐 의문을 갖 지도 못했지만, 아무튼 우려눈 그렇게 1:l>>웠지요 한국무용의 전망 Q: 선생남께서는 앞으로의 21세기 한국무용계에 어떠한 전망을 가지고 계시나요? A: 우선 대학교도 많고 무용과포 많으니 새로운 무용을 창조해야 되겠 죠 하지만 새로운 무용을 창조하면서도 바탕파 정신을 잊어서는 안 될 겁니다. 가령 발레 형식의 줌야나 현대무용의 창조도 최선을 다 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예숲로 승화시키면 좋은 거라 생각이 돼 요. 하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발전을 하면 되는 것어고, 동시에 우랴 의 춤도 다른 여러 춤들과 어윷려 발표될 수 있는 것이라야 합나다. 가령 현대무용을 워주로 한 창작작품 속에 현대무용이 나온다든지 한국적얀 뭐가 나온다면 더 나을 것 아니겠어요? 한국무용어l 펼요 하다면 현대무용의 것이튼 발혜의 것아든 넣어야 할 것은 넣으란 말이죠 가령 봉산탈춤, 양주탈춤, 그려고 경상도 덧배기춤 등은 다 른 데는 없는 춤이예요 외국사람들어 우리나라 사람의 무용을 볼 때, 저펙들이 다 아는 발례나 현대무용을 보고 싶겠어요? 우리의 것 이 들어가면, 한층 새로워진다는 딸이저요. Q: 그런떼, 선생님. 대부분의 사람들01 의문시하는 것인데요 그것여 현 대무용인지, 한국무용인지 그 구분이 애매할 때가 있다는 거예요 저희 학생틀도 질문을 하곤 하는데 저도 그 대답을 못할 때가 많아 요. 지금 한국무용에서는 창작활동이 왕성히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 나까? 저는 학생뜰에게 현돼무용과 한국무용은 기본 트레이닝 방법

인간문화재를 찾아서 } 김천홍 편 43 에 있어 차이가 난다고 얘기합니다. 훈련 방법이 흘리니깐 창작방법 의 틀도 툴리다는 것이지요 한국 현대무용에서는 한국적인 정서와 전통적인 춤사위룰 어떻게 접목시키느냐, 즉 그 창작형식야 판건이 라 생각하는데요 이에 대해 선생님의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A: 요즘의 우리 무용은 복잡다난한 발례나 현대무용에만 빠져 있어서, 뭔가 우리나라의 것에서 취할 수 있는 것들이 었을 텐데ξ 전혀 고려를 해보지 않는 것 같아요 다른 것은 몰라도 테크닉 변에서 만이라도 우리가 한국무용에 대해 뭘 얼마나 연구했는지에 대해 반 성해 보아야 할 것 같아요 양주변 양주, 봉산이면 봉산, 경상도 덧 배가면 덧배기 등 우리가 토속적인 것에 대해 얼마나 아느냐 이거 지요 결국 우리 전통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해야 하지, 그냥 한 가지 기볍딴을 형식적으로 차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거지요 Q: 제 생각에는 생활적인 측변도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요즘 같어 전 통적인 생활풍습을 다 잃어버리고 살면서 어떻게 그것이 우려 정서 에 나타나길 기대하겠어요 A: 그렇죠 정신이라든지, 그 맛이라든지, 정취가 있어야 하지요. 맹목 적으로 한쪽만 공부해서는 안 되지요 정서란 여러 방면과 통해 있 는것아냐까요. Q: 그러고 보면 우리가 그 동안 너무 한국무용계라든개 초창기의 발레 등애 관한 계보를 소홀히 했던 것 같아요 그런 것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의무가 아닌가 하고 생각해요 A: 나 역시 연구소를 왔다갔다하면서 바쁘게 지냈지만, 제대로 정말 침 착하게 무용계를 돌아보지는 못했어요. 누구나 겉으로 나타나는 것 에만 급급혜 그저 발표만 했지, 워 하나라도 다부지재 일궈낸 사람 아 없는 거혜요 그래도 그 당사를 회상해 보면 김윤학씨라고 1942 년 일본에서 지바 며아로에게 현대무용을, 한국오로 건너오}서는 조 택원에게 한국무용을 사사받아 참으호 공연을 활발하게 하던 그가 먼저 떠오릅니다. 약마도 그는 1945년에 시공간 에서 제 1 회 김융학 발표회 룰 했었을 거예요.<오생불심>, <석불>, <송우>,

44 민족무용 - 문화재탐방 <추월강상> 등 비교적 불교적 색책 7t 곁은 작품들을 공연했었는데, 당시에 무용발표회틀 가장 많이 한 무용가로 손꼽히는 존재였어요 그가 그렇게 활동하면서 김미영, 신옥자, 정춘.;;;:}, 조흥동, 김명훈, 한 유성, 한상옥 풍 많은 제자를 길러냈었죠 그 중에서도 검며영은 그 의 어린 딸이였는데 인물도 반듯하고 채주가 뛰어나 제2의 최송 회 라고 소개될 정도였어요. 그녀는 지금 캐나다에서 김미영 한 국무용 연구소 를 운영하고 있고, 또 국제 민속페스티벌에도 초청 받아 공연하는 등 계속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Q : 19)8년에 전국 만속경연대회가 생겼었잖아요 그 뒤에 선생님께서도 관계흘 하선 것으로 아는데... A: 심사위원을 하기도 했었지요 그나마 그런 젓이 있어서 오늘날 강릉 탈춤야나, 봉산탈춤, 북청사자놀음 동을 찾은 것이고 져역적으로 촬 통도 훨쳐지고 그런 것이지요 아마 l없y년대인가부터, 한국가면연 구회의 임석채씨와 여두현씨 등이 해마다 강습회를 하고 탈을 만들 고 했자요 북청사자놀음도 그때 처음 탈을 만들었을 접나다. 그렇 자 않았으면 없어졌을 자도 몰라요 특히 석하 양재연 선생님에 의 해 면속놀야가 시작되면사 해마다 얼마나 새로운 것들이 쏟아져 나 오픈자, 참 가막힐 일이었지요 그 중에는 문화재로 지정여 판 것도 있어요 지금도 구석구석에서 새로운 것이 나오고 그래요. Q: 무형 문화재가 생긴 뒤로는 무용예술가들에게도 일종의 계급이 생 긴 것 같아요 최고의 지위니까요. 하지만 바로 그런 점에서 좋은 무형 문화채를 발굴해낸다는 면 뒤에 자리잡은 병폐도 심각한 것 같아요 최고의 자리에 오르거 전까지 그것을 야수하는 과정이 무 명시절이 되잖아요 선생님의 경우 언제까지가 무명시절이셨는지 요? A: 언채까자라고 딱 부러져채 그런 것을 정해본 적 없어요 어쨌든 나 는 아악부에 들어가서 아악부에 종사하고 평생 무용만 했다고 생각 해요 예술하는 사람은 고생문야 훤한 것 같아요. 배워야 하고 가르 쳐야 하고 창조해야 하니까요 다른 예술도 물론 그렇지만, 음악이

인간문화재를 찾아서 - 김 천홍 면 45 나 무용은 더욱더 새로운 것이 나와야 하지요 춤추고 웃고 화장하 고, 잘 입고 하니깐 얼핏 호화롭게 보이지만 본인은 엄청 괴로운 거 예요. 새로운 것을 만들지 않으면 죽은 예술이 되버리니까요 그래 서 나는 언쩨나 한계를 두지 않아요 죽을 때까지 고생하는 것이 예술가지요 지금도 나는 할 일은 해야한다고 생각하고, 또 해보려 고도 생각해요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면 할 수 없지만, 마지막 순간 까지..... Q: 6-7년 전쯤이던자 책자들과 함께 한 어느 작은 무대에서 봄날 꾀 꼬리 같이 노란 앵삼을 입고 <춘앵전>을 추던 선생님을, 참으로 감 명 깊계 보았던 기억이 았습니다. A:<춘앵전>은 내가 좋아하는 춤이예요 우아하고 기품었고. 그 춤을 출 때는 예쁘게 보이려는 게 아나라 정성들여 마음을 다해 높온 님 (임금)에계 바치듯이 추는 거지. 화전태라는 말은 <춘앵전>에 보일 듯 말듯하게 상굿 미소를 띠는 동작인데, 그건 얼굴이 웃는 게 아 니라 정성되고 가지런히 가다듬은 마음이 웃는 거예요 Q: 마음이 웃는 경지란 어떤 것일까요? 음악과 춤이 강약과 농담을 어 우러 조화흘 이루고 나서 마음자리에 생긴 여백야 있어야 <춘앵전 >의 미무가 배어 나온다고 할 수 있을지. 그런 변에서 본다면 선생 님은 정재나 만속무를 막론하고 지나친 표면적인 색채미를 파시하 고 간간히 헤폰 화류태마저 벼치는 설악은 요즘 젊은이 들의 춤 태가 여간 못마땅하실 것 곁아요 A: 춤꾼이 관객에게 아름답게 보이려고 하는 노력은 헛된 져예요. 관객 이 아름답다고 느끼눈 순간은 춤과 음악의 어울립, 그러니깐 얼마나 서로를 깊게 이해하고 있고 그것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가에 따르는 거나까. 난 요즘 살풀이춤을 보면서 참 많이 안타까워 요 사나위 반주 따로 춤사위 따로... 서로 자기 목소려만 높이는 거예요 살풀이춤에서도 무명같은 정갈함이 사라졌어요 음악은 춤 애 감겨야 하고 춤은 읍악에 스며야 하는더1.... 정말 눈에 잘 보이 주: 저우 워돼 갱이지 싼주;;::. ;;션이지요

46 민족무용 - 분화재탐랑 선생님의 회고 되돌아보면 내가 철없던 어린 서절 궁중악과 궁중무를 공부하체 된 것어 발딴이 되어 여 분야에서 00여 년 동얀 살아왔다. 그러나 나눈 무 학( 無 學 )한떼다 타고난 채질도 없으며 더욱이 영만하고 출중한 두뇌로 태어나지 못해 연수로딴 00성상을 봉담아 왔자 실은 이 부분에 뚜렷하 게 해놓은 일이란 없다. 그래서 냐는 항상 너무 무재( 無 才 )함을 한탄하 고 후회하며 안타까운 심정으로 지대왔다. 그러면서도 나는 무악( 舞 樂 ) 의 분야를 떠나지 않고 천직으로 알고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묵묵 혀 계속해 왔다. 그려고 원체 대 자신이 재주와 자절이 없어 푸능한 것 을 잘 알기 때문에 그 긴간 세월에 종사해 오면서 제법 한 자리를 넘져 다보지도 못했고 또 물욕에 탐심해 날뛰거나 명예와 직위에 연연하며 방황하지도 못해보고 욕심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지금까지 걸어온 것이 다~ffi여 년 동안에 살림집과 우용연구소 이사를 밍여 회나 다녔으니 m 평생에 나딴륨 이사를 많이 다년 사람은 없을 것여 아닌가 생각하며 한 편으로는 만일 아런 사람에게도 시상을 하는 제도가 었다면 내가 따논 당상요로 수상할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 보며 속담에 오르지 못 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고, 우물을 파려거튼 한 우물을 파라고 한 것과 같아 E잉여 년 똥안에 내 생애가 순탄차만은 않았으며 곡절과 사고가 없 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냐는 이것을 인내하고 극복하며 용하게 살아왔다. 그렇지 때문애 현재 중요 무형 문화재 기능 보유자로 자정되었으며 또 다f한면국 예술원 회원으로 추천되어 평생 여}우를 받게 되었으며 93세의 늙은 몸이 국립국악원에 재직해 국록( 國 錄 )을 받으며 평안하고 안정된 생활올 누려고 있다. 이렇듯 세 가지와 국은( 國 恩 )을 엽으며 남은 여생 을 즐겁게 보내게 된 것윤 오직 하나님이 주신 은총여랴 생각하고 깊이 감사 드리며 아직 못 다한 일을 계속하려고 마음 깊이 다집하고 있다.

좌담 - 동서 양의 민족춤을 찾아서 47 률끓꿇폐폐함뀔톨 좌담 - 동서양의 만촉춤을 찾아서 -그전통성과참조성- 조안 케알려이노호모쿠(J댔1n W. Ke해 i뼈뼈뼈ru Ol드리앤 캐뚫러(뼈끼enne 없P때er 춤인류학채 등문영( 都 文 英 북경대 무용할과.ïi!.쉬 민속무용학재 사 회 : 허영일(효댁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세계민족무용연구소 소장) 톰 엮 : 황선자(연변대 전임 강사, 서 계민족무용연구소 연구원) 박혜연(효맥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이론과 전문새 때 곳 : 2x)2년 10월 5일 오전 세계민족무용연구실

48 민족무용 - 석학파의 딴남 두 여류 석학야 연구실을 방문한 때는 가을이 다채로운 색깔로 시작 하는 10월 초여서 연구설 창문 밖으로 하늘은 그 푸프름어 짙었고 나무 는 일년 중 가장 화려한 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세계적인 민족무용학자언 조안 킬랴노호모쿠(J뼈m w. 선생님과 아드리앤 캐플러(Adri없ne 1없Wl않) KJ얹1inohormku) 선생념, 그리고 북경 무용 대학 중국고전 무용학부 교수이신 동문명( 都 文 英 )선생님 세 분을 모사고 따뜻한 녹차와 붉은 홍사감을 맛보면셔 나눈 대화는 가을처럼 풍요롭고 향기로웠다. 따지 오핸 지인( 知 人 )을 만난 것처럼 친숙한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올 가을은 더욱 성숙하게 무르익어 가는 것을 마음으로 느끼 면서 다양한 나라의 문화예술 현상과 무용예술에 대한 거사적이고 포괄 적인 견해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축복 받은 시간이었다. 평생 춤을 사랑 하고 연구해온 세분 선생님의 연륜은 에스닉(없hnid 그 자체야기에 구 부러진 등과 주릅진 모습에서도 황혼이 주는 이름다움과 함께 고개 숙 여지는 존경심을 갖게 하였다. 춤을 향하는 시션이 얀류학이라는 커다란 카테고리에서 출발하여 다 른 수많은 문화의 핵 쪽으로 향하는래 있어서 각자가 찬행하는 방볍온 다르지딴 결국은 춤을 향하여 가는 같은 연구자로서의 학문적 접근으로 는 아작 많은 연구와 발굴이 필요한 우리의 민족무용학의 발전에 혐을 설어주었다고 본다.<민족학>아란 <민족>에 역점울 두느냐, 아니면 < 문화>에 역점을 두느냐에 따라 인류학, 고고학, 민속학, 종교략 예술학, 무용학, 음악학들이 여러 다른 학문 분야와 멀접한 관계를 갖게 된다. 마찬가지로 만족무용학>역서 이러한 다양한 분야의 학문적 시각에서 연구되어야 할 것어다. 많은 다른 만족들의 춤을 바교 연구함으로써 각 민족의 정책성을 찾 아볼 수 았으며 푼화 발달 과정이나 사회구조의 특성까지도 춤을 통해 서 알수가 있다. 킬랴노호모쿠 선생님의 <호펴족파 폴리네시안의 춤의 비교> 또는 < 훌라와 호피춤의 버교연구>등은 만족 무용의 비교 연구로서 큰 비중을 차져하고 있으며 또 선생님은 <현대무용과 만속무용>에 대한 비교연구

좌담 - 동서 양의 민족춤을 찾아서 49 와 <미국 흑인 의식춤과 아사아 춤 그려고 한국춤 연구> 등의 논문 등 을 통해서 동서양, 현대, 고대 등의 역사적, 롱λl 적 방법으로 춤을 연구 해 왔다. 그랴고 지금은 CCDR(Cross Cultura1 D않lce Resources) 의 연 구소장을 하시면서 춤이 왜 먼족 공통의 언어인지 또 왜 춤이 소모되어 서는 안되는지에 대해 연구하는 것을 폭표로 활동하시고 있다- 포든 사람은 에스닉하다. 그랴고 모든 춤은 에스닉하다 라는 선생님 의 말씀은 얼마나 멋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인간과 춤에 대한 훌륭한 묘 사인가! 선생님은 너무나도 여성스럽고 열정에 찬 파란 눈융 반짝이시며 말씀하시고 한국 녹차를 좋아하시고 한국음식을 맛있게 드셨다. 아드라앤 캐플러 선생님온 춤인류학자로서 스며소니언 박물관의 0:,없nic Etlmology 관장으로 계시면서 통가와 하와아 먼속춤, 타이티 외 다양한 민족춤을 연구송}셨다. 미국 7개 대학에서 강의를 하셨으며 수많 은 춤 관련 논문을 발표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학문적 세계를 구축하셨 다. 비원을 관람하시고 나서 한국의 정적인 아름다움에 때우 감동윷 받 으셨으며 특히 한국사람들의 핸드폰 문화에 대해서는 놀라움을 표현하 였는데 비평적 견해이셨고 한국 음식을 극찬하셨다. 등문영 선생님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훤 아론과에 3개월간 초빙교 수로 오셔서 학생들에게 중국소수민족 무용학을 강의하고 계시면서 이 두분 석학들과 함께 자리를 같이 하셔서 중국의 민간 무용에 대해서 말 씀을 나누어 주셨으며 조안과 아드리앤 선생념과 함께 4일간의 일정에 동참해 주셨다. 등선생남은 특히 중국의 고전 무용연구자로서 이 분야에 연구 업적융 쌓고 계서며 연륜만큼이나 많은 학자적 발자취를 갖고 계신다. 중국에 있는 9천 6백만평아라는 넓은 져역의 민족들야 생존 번성하는 과정에서 창조 발전 된 무용형식인 중국민간 무용에 대한 선생님의 말 씀에 조안과 아드려앤 선생님은 깊은 관섭을 가지고 경청하시고 질문하 셨다. 등선생님은 열성 있게 답하시고 부족한 부분을 수 차례 의자애서 일어나 춤을 추어 보이기도 하셨다. 창밖으로 가을의 과일이 익어 가는 만큼 우리들의 대화도 결실을 맺

50 민족무용 - 석 학과의 만남 었으며 춤 연구학자 세분과 함께 보낸 4일간은 학문적으로 또 인간적으 로 충실함을 만끽한 사간야었다. 한국적 가구들야 아름답게 배치된 전통 잣집에서 대추차와 향71 와 맛을 마시며 판소려를 배경음악으후 뜰으며 보냈던 망중한의 시간 속에서 선생님들은 참으후 거쁜 미소로 탱큐라고 인사하셨다. 다웅은 세분과의 좌답 내용을 기록한 글악다. CCDR파 찌1EDI의 활동 허영얼 : 조안 킬리노호모쿠 선생님악 성( 姓 )은 미국적이지 않은데 선생 님약 이름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어요? 조안 : 서명을 할 때는 킬리노호모쿠라고 하지만 호명을 할 때는 케알려 이노호모쿠라고 발음합니다. 내 성이 특이한 것은 하와여 남편 의 성을 따랐가 때문이에요 척영일 : 선생님께서 하와이 민족춤 연구에 올두하산 절대적 아유7} 이 해가 되는군요 선생님께서는 무용연구자로서 뿐딴 아니라 무 용가로서도 활동하셨고 지금은 지도자로서 활동하시는떼 지금 의 활통을 소개해주시겠어요? 조안 : 저는 ædr(cross Culture 않nce Resources)의 연구소장으로 있 습니다'. ædr애 대해서 소개를 할께요. l'잃1년에 아리조나에 셔 설립완 비영리단체로서 관성 있는 사람틀의 봉사참여와 소 규모의 정예 멤버로 운영됩니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춤은 모든 인간사회에 존재합니다. 시대의 존속을 위해셔는 얀류가 공통되게 나누는 가쳐틀이 필수적야기 때문에 춤은 사라져셔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æDR온 춤이 왜 만국공통의 언어얀지, 왜 사라져서는 안되는 것인지에 대해 연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우리는 춤을 조사하는 프로그램 통해 연구하고 그 연구 결과를 대중과 학자들과 널리 나둡 다다. 우려의 프로그램은 조사와 컨설링, 공연행사, 토론, 인턴

좌담 - 동서 양의 민족춤을 찾아서 51 프로그램, 2년에 한번 발칸되는 간행물어 있고 춤연구의 Eμ년 아란 책도 발간하였습니다. 연구소는 l200j권의 장서를 구바하 고 있어서 관심 있는 사랑들아 야용하고 있습냐다. α:dr은 공 연 예술을 통해 표현되는 얀생을 가치 있게 하는 중요한 가치 틀을 촉진사겁니다. 춤이 생생하고 활동적으로 전세계에 살아 있다는 맏음과 많은 협조자들의 힘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습니 다. 또한 무용수들과 판객들의 상호 교류룹 돕기 위해 활기 넘 치는 춤 에너지와 기회콜 공급하는 도구의 역할도 맡아왔습니 다, CCDR이 스폰서를 맡운 공연들은 워크삶, 심포지움, 강의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섞어 단순한 유흥을 넘어서서 보다 뜻 깊 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짜여져 있습니다. 춤과 공연 예술을 통해 표출되는 인간에 대한 이해는 얀류의 평안과 행복에 기여 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려고 보다 대종적이고 의미 있는 판심어 춤에 부여되고 지금까지 보다 훨씬 더 큰 학문적 관심 집중 될 것을 확신합니다, CCDR은 계속 영속 할 것이며 앞 으로 더 많은 성장을 꿈팝나다. 혀영알 : cc많은 춤연구로서의 가치 정립과 무한한 활동을 통해 세계 적인 연구 단체로 성장할 것으로 기때됩니다" CCDR 을 훌륭히 운영하고 계시는 조안 선생님께 경의를 표 합니다. 공연예술과 간행물과 학문토론회등을 통해서 CCDR은 설립목적을 완수해 간다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세계 민족무용연구소(찌1EÐD를 3년전얘 설립하여 만족무용학자로서 의 뜻을 심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WEDI는 그 동안 세 계민족무용을 초청하여 공연하였으며 수차례의 심포지움과 강 의 그라고 민족무용>연구지 창간호를 냈습니다. 특히 일본의 전통무용을 여러 차혜 초청 공연하여 한국전통무용과의 비교 연구의 가회를 가져 판삽 있는 사람들의 호응올 얻었습니다. W많)1는 세계각국의 민족무용연구와 공연 교류를 통해서 우리

52 먼족우용 - 석 학과의 만남 민족무용의 정체성의 확립과 학술적 체계정립과 아울랴 세계 민족무용 공연 활성회를 도모하는더l 뜻을 두고 있습니다. 세분 의 초청은 찌1EDI의 활동 목적에 크게 가여 할 것입니다. 조안 : 문화의 다양성과 다문호}주의에 관섭이 있는 깨안과 조직에 정보 를 제공하고 도움올 주는 것이 CCDR의 활동 목표의 하나이 기 때문에 WEDI에 연구자료를 기쁘게 보내겠습니다. 현저에서의 무용처I 혐과 연구 허영옐 : 대단히 감사합니다 머지 않아 마국을 방문하려 하는데 그때 조암 선생님외 연구소를 찾아가 소장 장서도 보고 많여 배우 고 오고 싶습녀다. 야채 두 분의 연구 방법론에 대하여 듣고 싶습니다. 아드랴앤 : 저와 킬리노호모쿠 선생님과는 다른 연구방법을 야용하여 인류학을 연구하였습니다. 저는 하와이 대학에서 공부 하였는헥 하와이는 다른 민족의 사람들어 모여 사는 지역업니다. 예를 들어 일본언, 중국안, 한국안, 미국 인, 유럽사람들 둥여 모여 사는 지역입니다. 미국에서 인류학 특히 문화인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1 년간 타지역으로 가서 그 지역의 생활습관 푼화 등을 체혐하는 것 이 필수로 행하여지고 있습냐다 저도 1년간 타지역을 체험하 기 위해 처음엔 뉴가니아를 선택하였으나 당시 마국의 안류학 자 한 명이 그곳에서 살해를 당하여 진로를 바꾸어 폴리네시 아 지역 중 당시 연구가 렬 된 통가지역을 션택하여 연구하러 3채월간 그곳을 찾았습니다. 처음 통가에 도착하여 그곳의 언 어와 예술에 대하여 공부하였고 통가에는 예술 형태 중 중요 한 부분어 음악, 무용, 의상야라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후 예술가를 직접 만나 연구하였고 그후 통가의 여성들이 하는 일들을 적접 해봉으로써 통거의 생활습관을 연구하였습니다.

좌담 - 똥서 양의 만족춤을 찾아서 5:1 통가에서는 왕이 아닌 여왕이 이 지역을 통치하며 여왕이 저 에째 이 지역의 사함들을 소캐시켜주며 연구에 도움을 주었습 니다. 그 후 다시 하와이에 폴아와 통가의 무용동작을 분석하 기 위해 라반노테이션을 배웠습니다. 다시 통가로 돌아가 1 년 간 생활하였고 차차 문화를 익혔습니다. 통가에서의 무용은 생 활의 중요한 일부분이었으며 그 때문에 통가의 무용구조를 익 혔습니다. 무용의 장르에 따라 어떠한 구조를 갖고 있으며 어 떠한 통작이 어떠한 장르에 들어가논지에 대하여 연구하였습 니다. 동작을 분석하는데 였어서 177r지 동작분석을 이용하여 분석하였습니다. 나의 박사논문은 통가의 무용구조에 대한 젓 이며 통작을 분석하는데 있야 단순하 풍작을 분석하는 것이 아닌 그 통작에 무슨 의미가 었는지에 대하여 연구하는 것압 니다. 조안 : 제가 공부할 당시 저의 지도교수였던 얄렌 머I 려엄(왜lan M없iam) 선생닙께서 저에게 무용이 무엇이냐?"라는 질푼을 하였습니 다. 물론 그 선생념은 알반화된 무용의 개녕을 이야기하시려고 하져는 않았습니다. 그분은 ;셔에게 무용이 무엇인가를 인류학 적인 접근을 하도록 지시해주셨고 저 또한 이것을 수년간 연구 하였습니다. 야것의 답을 얻기 위해 내가 접할 수 있는 전 세 계의 무용을 보며 가존의 일반화된 머학적인 접근이 아닌 시각 으로 보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무용작품을 보딴서 어떠한 이론 을 통하여 작품윷 분석할 수 있는지애 대하여 연구하였습나다. 당시 무용에 관한 연구는 한정되어 있었으며 인류학적인 접근 은 당시 큰 획을 긋는 것이었습냐다. 무용이 무엇얀가는 무용 수들이나 안무가들에게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닌 무용올 연구하 는 사랑들에게 무용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바 랴보길 희망하여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무용을 바라보는데 있어서 연구자들은 단지 자신의 시각에서 특히 서양의 눈으로 무용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가를 원하였습니다. 무용을 분석

54 민족무용 - 석 학과의 만남 용을 분석하는테 있어서 무용을 예술의 형태로 바라보는 관점 뿐 아나라, 사회적안 문화적언 관점에서 무용을 바라보는 것이 었습냐다. 무용은 단지 무용의 작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더 나아가 무용이 어떠한 영향을 받야 만들어졌고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에 관하여 연구하였습니다. 알렌 패리엄 선생님이 미국 의 1세댐의 인류학자인 쿠라드(kt표ath) 선생님을 소깨시켜주셔 서 쿠라드 선생님의 연구 방법을 꽁부하게 되었습나다. 우라드 선생님이 쓰산 무용 동작 분석볍은 그력 시스템을 사용하였는 데 이것은 라반노혜악션에서 발전한 것이었습니다. 이 방법은 그렴을 그리는 것과 사람의 실루엣을 그리는 밥법 그리고 라반 노태이션올 통한 동작 분석을 이용하여 무용을 하는 사람들의 공간 어동과 방향전환에 대하여 연구하였습니다. 저는 쿠라드 선생님의 방법을 배워서 현장실습을 하였습니다. 보통 인류학 자들은 현장실습을 아프리카, 연디언 지역을 선택하는데 벼해 나는 흑인의 교화문화 클럽문화에 관하여 연구하였습니다. 야 려한 것은 냐에게 좋은 경험여었으며 다른 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후 하와 01 에 가서 하와여언 남편 과 살면서 이잔에 연구하였던 방법과는 달라 그 문화에 대한 사람으로 그 안에 살면서 연구하였습니다. 저의 션생님인 얄렌 메리업 선생님께서 며국 인디언에 대하여 연구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선생님의 제안을 받아들여 호펴에 대하여 연구를 시작 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방법은 현장을 연구하고 난 후에 문헌 자료를 조사하여 다른 점과 같은 점을 비교 연구하는 것아었습 니다. 현장실습을 가가 전에 문헌자료를 통하여 연구하고 간다 변 조금윤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랴보는 판점이 생기기 때문에 현장실습올 우선으로 하였습니다. 문헌자료는 시대에 따라 다 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처와의 관점의 차이를 비 교 연구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문현정보의 오 류를 알 수 있었습니다. 연구방법론은 시간과 공간을 이용하여

좌담 - 동서 양의 민족춤을 찾아서 55 분석하였습니다. 저는 실루엣을 이용하여 분석하였으며 어떻게 그렴자만으로도 남녀의 성별 등을 분석 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교육을 통해서 삭벌할 수 있었으며 저는 실루엣을 통하여 이러한 문제를 해독하는데 관심윷 갖게 확였습니다. 무용 동작을 사진 찍어 가혹을 남기 고 설루엣을 만들어 이것을 역으로 해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 었습다다. 이러한 것을 설루그라프트라고 명칭을 하였고 저는 이 방법을 통하여 많은 연구흘 하였습니다. 살루그라표트를 통 하여 사진 또는 실제의 무용동작을 분석하는 것보다 다 많은 것올 해독할 수 있었습니다. 호피 지역의 무용은 사진을 찍을 수도 없고 또한 그렴도 그렬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서는 판객과 무용수의 개념 자체가 없고 모든 사람들이 참가자 였기 때문에 포든 것을 나의 기억을 통해 분석해야 했습니다. 이렇듯 다양한 방법을 야용하여 무용을 분석했으며 다음 세대 연구자들이 이러한 저의 연구를 이용하고 발전시켜서 무용 분 석에 많은 이바지를 하기 바랍니다. 춤과다른푼화와의 관계 허영얼 : 두 분의 연구논 인류학자의 입장에서 춤을 사회, 문화와 관련 시키고 계십니다. 춤올 사회와 연판사키는 각각의 입장에는 어 떠한 차이가 있습니까? 아드랴앤 : 좋은 질문입니다. 저의 경우 무용은 단지 우연이었습니다. 통가의 경우 모든 부족들이 무용을 즐거며 모두 무용수업니다. 무용은 일상 생활에 중요한 부분이며 통7}의 무용은 타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으며 마을 축제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 을 합니다. 통가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용을 꼭 얄아 야 하고 다른 문화에서는 또 아닐 수도 있기에 저에게는 무용 을 아용하여 분석한 것은 단지 우연의 일치였을 뿐입니다.

56 변족무용 - 석 학과의 만남 조안 : 져의 경우애는 무용은 문화 사회를 이해하는떼 아주 중요한 커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나다. 어느 푼화에서나 무 용은 행하여지고 있고 단지 목적이 다를 뿐입니다. 호 피의 경우 무용을 하는 것은 지구애 벼를 내려달라고 지원하는 의미에서 무용을 합니다. 호피 사람들은 이것 을 절대적으로 믿고 썼으며 자선들이 춤을 추져 않을 경우엔 지구의 종말이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둔 얀디언들이 같은 의미로 춤올 추는 것은 아닙니다. 아E려앤 : 덧붙이자면 지금 현재 통가에서는 모든 사함뜰이 같은 의미 로 생각하지는 않습냐다. 젊은 사람들온 타문화와 영향을 받아 예전의 고립된 시대의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갖지는 않습니다. 통가는 신을 향하여 무용을 하는 것이 아니고 계급주의 사회 애서의 통치자에 대한 경배의 의미에서 춤을 줍니다. 이렇기 때문에 현재 젊은 사람들온 통가의 계급주의사회에 반발하여 통치자를 위해 춤을 추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조안 : 호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존약 생각과 달리하는 사람들은 주로 밖에 나가서 살고 있습니다. 허영일 : 대중문화는 과연 민속무용에 속i>}는지 민족무용에 속하는지에 관하여 이야기 해주십서오. 아드라앤 : 범주에 관한 질문인 것 같습니다. 규정을 짓는데 있어서 각 기 다른 문화에 따라 범주를 정하는 것이 다를 것압니다. 저의 견해로는 대중 무용은 민속무용이라고 합니다. 민속무용은 모 든 사람이 즐기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협합이나 클렵무용은 민속무용이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달리 생각할 수 있 다고 생각합니다. 극장춤 이외의 춤 허영열 : 아드리앤 채플려 선생님째서는 인류학자로서 춤에 접근하신 학

좌담 - 동서 양의 민족춤윷 찾아서 57 문적 동기가 무엇이었습니까? 아E려앤 : 냐는 지난 몇 년 동안 대학 무용과들의 비중이 극장춤(암1얹tri않l 없nce)-발레, 현대무용, 포스토 모던 댄스-에 놓여았다는 것에 놀라고 있습냐다. 간혹 멕시코의 화려한 민속 발혜(Ballet FoJkorico)" 혹은 안도를 포함한 아시아의 고전 (classi,딩1 )'1 춤 플파 같이 극장화된 만속춤 형태가 눈에 띄기도 합나다. 그러 나 극장 무대에 올려지지 않는 춤 종목틀은 어떠합냐까? 춤 인류학자로서, 그리고 세계무용연맹 (World 않nce 삶liance) 의 연구 및 기록화 팀의 일원으로 춤을 연구하면서 우려들의 지 리학적 영역에서 대중적으로 많이 공연되지 않기 때문에, 그래 서 결국 우리틀의 관심권 밖으로 벌어졌기 때문에 우려들이 이란 춤 전통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았다는 점이 염려스럽습니 다. 실제로 아시아 아메리카 그 외 지역의 춤은 우리를이 무 대에 볼 수 았는 그 여상으로 많아 존재하고 았습냐다. 극장춤 이외의 춤으로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서 나는 움직임윷 연구하 는 인류학자들이 춤 야라눈 주제에 어떻게 접근하는지에 대해 연구하였습니다. 허영앨 : 선생님의 말씀 중에 극장춤 이외의 춤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려한 춤의 예를 들어주세요; 아드랴앤 : 극장춤 이와춤(Thm때Jg Beyond 암le 암lætre) 의 대표적언 예로는 남태평양의 통가(Tonga)로부터 나온 춤입니다. 또 하 나는 하와이로부터 나온 춤입니다. 통가나 하와이는 툴 다 폴 리네시아(Po1ynesia)라고 알려전 태평양의 얼부분압니다. 폴리 네시아의 춤은 그들어 미적연 것어나 랴듬 때문에 선택되어진 움직임의 공연에 의해 홍은 텍스트에서 선택된 언어를 양시하 는 시적 노래를 시각적 형태로 표현하고 었습니다. 무용수는 근본적으로 손파 활의 움직임에 의존해서 시적 헥스트를 전달 하는 이야기꾼압니다. 몸통과 다랴의 움직임은 리듬감과 미적 감각을 주져딴 일반적으로 이들 옵직업온 여야기 전달의 기능

58 민족무용 - 석학과의 만남 은 하지 못합냐다. 폴리네시약의 공연자들은 손과 팔의 웅직임 으로 텍스트에서 선택된 단어들을 암시하면서 서흘 멜로디적 으로, 리드미컬하거1.=1..리고 사 zf척으로 만들어서 이야지 전달 력을향상시컵니다. 허형얼 : 통가와 호피의 무용에서 기본적으로 내려오는 동작이 있는지에 관하여 이야71 해 주십시오 아E려앤 : 통가의 여성무용의 경우 다리를 옆으로 이롱하는 것입니다. 여것은 하와이 무용과는 다릅니다. 하와이 무용은 협을 이용하 지만 통7}에서는 협을 이용하지는 않습니다. 뉴기니아 무용의 경우 협을 돌려는 통작이 기본입니다. 하지딴 폴랴네시아 무용 의 특정은 다리를 절대 벌려지 않는 것이 특정입니다. 호펴 푸 용은 산을 경배하는 춤이라면 통가는 통치자를 위해 추는 춤 입니다. 두 가지 푸용을 보더라도 다른 목적에 의해서 무용을 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안 : 하와이 무용은 무릎을 구부리고 춤을 추기 때문에 해부학적으로 자연스럽게 협을 사용하채 됩나다. 호피 여성 무용은 팔을 붙 이고 다리를 모아서 춤을 줍니다. 호피와 경우 다리 구르기자 아주 중요한 동작입니다. 아 동작은 선을 깨우는 동작업니다. 구르기의 동작은 모든 것은 땅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보며 아러 한 의미에서 구르기자 기본입니다. 다른 문화는 다른 의마로 구르기를 할 것입니다. 호피의 경우 절대 관객이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모든 생각은 선을 위해 바치눈 것이기 때문 에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무용으로 신을 향하여 무용을 해야 합니다. 허영얼 : 극장춤 이와의 춤이란 민속 또는 민족춤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겠군요 중국에서는 이러한 춤을 어떻게 구분합니까? 등문영 : 그러한 무용을 중국에서는 팡장무용이라고 하는데 광장무용은 그 자체의 역사성, 시대성을 띠고 있습니다. 2m}년 전 공자는 í?oo명이나 되는 사랑틀을 모아 놓고 바당에서 춤을 시도하였

좌담 - 동서양의 민족춤을 찾아서 59 눈더l 여러한 행위는 민속의 풍습과 예의성이 결합된 하나의 행사로 출현펴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바꿔면서 이러한 행사 는 축제의 분위기로 바뀌게 됩니다. 허영열 : 만약 민속무용이 판광객들을 위해 광장에서 혹은 공공장소에서 추어진다면 이랴한 무용은 광장무용으로 볼 수 있습니까? 등문영 : 만약 보여주기 위해 춤을 춘다면 민속무용의 원류의 특성보다 는 관량의 요소가 터 많기 때문에 광장무용야라고 할 수도 있 지만 그 민속의 전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면 민속무용이 라 할수 있습니다. 허영일 : 중국애서는 민속 과 민족 이라는 개념의 다른 점을 어떻게 보 고 있습니까? 등문영 : 개냄이 다릅니다. 민족무용이란 그 속애 전통성을 포함하딴서 창조와 새로운 전문성이 포함이 되는 학과 파정과 같 습냐다. 만속무용은 민족마다의 원초적인 전통성에서 발산되는 민족 행위, 행사 및 법칙이 겸비된 하나의 표 현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와아안과 호피족와 춤 핵영일 : 조얀 선생님께서는 아메리카 토착민인 하와이언과 호펴족을 민 족무용학적 측면에서 비교하셨는데요 두 민족의 춤의 특정을 말씀해 주세요 조싼 : 원래 하와이는 며국의 일부가 아니고 독립된 계층사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호피족은 아메리카 인다언으로 동등주의 사회였습니다. 하와이의 경우는 미국의 한 주가 확면서 미국적 영향을 받게 되자 과거의 춤을 추던 목적과 형식이 많이 딸라 졌으나 서구 문화에 훨씬 영향을 덜 받은 호피족은 하와아인

60 민족우용 - 석학과의 만남 에 비해서 자신들의 고유문화콜 잘 지켜올 수 있었습니다. 하 와이 춤은 과거에는 노얀을 포함한 성얀들이 궁중의 특별한 행사에 맞추어 축하공연을 하였는돼 현채는 주로 젊은 성언들 이 무대나 체육관 등 공연장에서 춤을 줍니다. 관객에거} 보여 주거 위한 목적야므로 재서적이며 넓은 카네스피어를 사용합 니다. 호파춤은 주로 야외에서 관객이 없이 모툰 사랑들어 참 여하여 춤을 추는데 얼굴에 불감아나 활을 착용하고 좁은 카 네스펴어를 사용하여 극히 전통적 의상을 입고 춤을 줍니다. 호피춤의 전통춤은 비를 내려계 하기 위하여 추어지는데 인갇 어l 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비를 부표가 워하여 마을의 모든 사 람들이 참여한 기운데 가도를 바치는 와식처럼 춤의 의식을 행합니다. 호피족의 사교춤에는 여자와 그녀의 남자 조카가 한 쌍이 되는데, 여져는 며혼야어야 하고 조카의 경우는 나야나 기혼여부는 무관합니다. 춤을 위해서 조카는 여자의 화장과 의 상을 준비합니다. 허영알 : 선생님께서 사용하신 커펙스피어라는 용어의 뜻은 동작공간 또 는 부동과 동작 상태의 육체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을 뜻합니 다. 한국에서는 벼를 오게 하71 워하여 왕조시대에 임금과 신 하가 기우제를 올렸습니다. 아따 호피와 춤도 아와 같은 마음 에서 추어졌다고 봅나다. 호피와 춤이나 하와이의 춤은 민간 사이에서 형성되고 타민족과 구벌되므로 민족적 춤언더l 중국 애서는 면족무용과 면간무용을 어떻게 구분하고 았습니까? 중국악 민간우용과 민속무용 풍문 정 : 중국의 면간무용의 칩성을 이룬 저서 f사해( 離 海 )]에서 보면 ffi 개 민족들이 자체화 전통적얀 문화와 무용형식을 소유하고 았 으면서 그것에 명맥을 같이 하눈 만간무용이 만 여종에 달한 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여러한 민족무용의 총칭을 먼간무용

좌담 - 통서 양의 민족춤을 찾아서 61 이라고 합니다. 민속무용과 만간무용의 관계에 대하여 우용학 학자들은 사회학적얀 측면어l서 출발하여 민간의 정의를 민속 으로 담론하고 았습니다. 중국의 우평( 宇 平 )교수는 [무용생태 학]어란 글에서 중국민속무용의 역사와 문학에 대한 해석을 워하여 또한 민속학적인 접근을 위해 민속무용이라고 하는 것 여 더 바람직하다 라는 이론적얀 관접을 제사하였습니다. 하지 만 어러한 시각은 무용을 교육여라는 체계적인 실천을 동반하 는 민간무용 교과과정을 민속무용이라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 지 않습니다. 딴속무용은 원시적언 생태환경 속에서 형성된 만 간무용의 일종형식으로서 즉 민간의 전통생활시속을 그대로 보존하는데 그 의미틀 두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결혼삭, 풍수 를 위한 축제, 제사 등 다양한 풍습에서 행해잔 무용입니다. 그 렇다면 민간무용은 만속무용의 이러한 전통적언 풍습을 기반 으로 전문무용수뜰의 참여와 문화의 변화과정에서 산출되는 창조적안 무용형태라 할 수 았습니다. 즉, 중국민칸무용은 생태 적인 것, 가공되고 창작된 것 자아발생의 즉흉적인 것, 사교적 인 것 등의 성격적언 요인들이 모두 포함되는 것입니다. 대딴 의 토풍푸( 土 風 舞 ) 는 봉폐된 환경에샤 생활하고 있는 원주민 들의 모습옳 그련 무용으로서 원사적인 색채가 짙은 민깐무용 종목 중의 민속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허영일 : 작 나라의 민족무용에 대한 정의눈 그 나라의 특성에 맞게 내 려져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떤 무용을 특히 부각사키기 위한 수 단으로 만족무용에 대한 채념이 정해져서는 곤란하겠져요 중 국처럼 복잡다단한 민족형성과 사회구조에 었어서는 터욱 조 심해야 될 부분인 것 같습니다. 그럼 현재 중국민간무용확 교육은 어떻게 하고 었습니까? 등문영 : 민간무용이 북경무용대학교의 전문교과과정으로 채택되기는 1않4년입니다. 처음에는 민간무용야 하나의 부전공과목으로 선 택되었는데 많은 무용전문가틀의 30여년간 노력을 거쳐 1ffi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