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gazine of panjeon Vol.68 May 2013 www.bongeunsa.org 20 월악산 사자빈신사지 봄날, 아름다운 사자빈신비구니를 뵙다 Sajabinsinsa temple site on Woraksan mountain, Encounter with beautiful Sajabinsin Buddhist nun on a spring day 26 전남 화순 내 얼굴이 거기에 있었네 Hwasun-gun in Jeollanam-do, There was to be found my face... 62 봄의 설레임, 사찰의 맛 사찰건강도시락 경연대회 A tingle of excitement of spring, and a taste of Buddhist temple, 당신은 부처님 월간 판전 2013 05 월간 판전 01
목차 table of contents 02 산사의 미학 경주 기림사 글 권중서 사진 박보하 02 08 절집의 꽃 기림사 대적광전의 꽃문살 10 봉은사 선교율 대법회 지상 법문 월암 스님의 선종사와 간화선 이야기 무비 스님의 법화경 도일 스님의 계율에서 배우는 인생의 행복 정리 김명수 14 14 옛 지명에 나타난 불교 여수 영취산 글 이휘종 사진 안홍범 20 절터를 찾아서 사자빈신사지 글/사진 이지누 26 26 풍경( 風 磬 )과 풍경( 風 景 ) 전남 화순 글 김동옥 사진 박보하 34 마음으로 만난 인연 조르주 루스 글 한담 사진 안홍범 38 한국의 불탑 처음 세운 돌탑, 요절한 백제 석탑 글 소재구 사진 Studio 711 34 42 현진오의 우리 땅 우리 꽃 여행 동강 글/사진 현진오 46 정관 스님의 사찰음식 이야기 느티떡과 산나물찌개 글 한차현 사진 Studio 711 42 50 암자기행 남산 칠불암 글 한정엽 사진 Studio 711 56 오늘의 봉은사 부처님 오신 날 글 조미영 사진 문용백/소은희/Studio 711 50 60 봉은 뉴스 봉은사마스터플랜 글 조미영 사진 Studio 711 사찰도시락경연대회 글 조미영 사진 김명희/Studio 711 봉은사의 T.I.(Temple Identity) 심볼마크는 한국불교의 정통성과 역사성을 나타내며 열린 공간, 열린 수행처로서 내 안의 나와 마주하는 봉은사를 의미합니다. 표지 칠불암 마애삼존불 관음보살의 정병 02 층층나무. MAY 2013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발행일 2013년 5월 1일(통권 68호) 발행인 진화 편집위원장 진경 편집부위원장 남일 덕일 묵산 에디터 박보하 조미영 편집기획위원 강민수 박종학 이경자 이 명희 허외숙 사진 박보하 안홍범 객원기자 김명희 문용백 소은희 정현미 편집디자인 Studio 711 발행처 봉은사 주소 135-870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73번지 전화 02-3218-4831 팩스 02-544-2141 홈페이지 www.bongeunsa.org
산사의 미학 경주 기림사 신화가 흐르는 부처님의 집 Buddha s place where mythic legends flow, Kirimsa monastery in Gyeongju city 글 권중서(불교문화학자) 사진 박보하 기림사는 함월산( 含 月 山 )에 포근히 안겨 있다. 함월산은 달을 품은 산으로 달은 부처님을 상징하기 때문에 기림사는 항상 부처님께서 상주하는 곳임을 함월이란 지명이 일러준다. 또한 불국사가 있는 서쪽 토함산( 吐 含 山 )의 동쪽에서 뜨는 달을 머 금었다가 토해내면 동쪽 함월산이 달을 품어 진리의 당체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머물러 계신 곳임을 알게 한다. 신라인들은 멀리 인도에서 부처님을 찾지 않았다. 바로 우 리의 지명( 地 名 )에서 우리 곁에 부처님이 계신다는 강력한 믿 음을 바탕으로 불교를 발전시켰다. 그래서 부처님의 나라 불 국사( 佛 國 寺 )가 생겨났고 황룡사에 있는 가섭불연좌석은 과 거 칠불인 가섭불이 좌선하던 바위라 하였다. 또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금강경 등 많은 경전을 설하시며 19년을 보내신 곳을 기림사라 하였다. 그래서 금강경 의 첫마디에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 祇 樹 給 孤 獨 園 )에서 큰 비 구들 1250인과 함께 계시었다. 불교경전에 수없이 나오는 기 원정사를 우리나라에서는 기타 태자의 숲이란 뜻으로 기림사 ( 祇 林 寺 )라 하였다. 2600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의 머무르신 곳이 2억만 리 인도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바로 이곳 신라 기 림사라 증명하였다. 잡아함경 급고독경 에 급고독 장자가 기원정사를 마련하 게 된 이야기가 나온다. 급고독 장자가 생각하길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심은 작은 일이 아니다. 그리고 바른 법을 믿 고 들을 수 있는 것도 또한 작은 일이 아니다. 그래서 천신은 내게 물러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권한 것이다 하며 기 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급고독 장지를 맞이하여 모든 법은 무상하다고 생각하는 일, 보시하는 일, 계를 잘 지키는 일, 탐 욕을 벗어나는 일 등은 복된 일 이라고 말씀하셨다. 부처님께 서 장자의 이름을 묻자 제 이름은 수닷타로 외로운 사람에게 보시하기를 좋아하여 남들이 급고독 장자 라 부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장자가 부처님을 코살라국 사위성 자신의 집으 로 초대하기를 원하자 그대가 있는 곳에 정사를 세워 여러 비 구들을 머물게 하라 는 부처님의 말씀을 받들어 수닷타는 파 사익 왕의 아들 기타 태자의 숲에 황금을 깔아 땅을 사니 이에 감동한 태자가 자신의 숲을 부처님께 바쳐 집을 지은 것이 바 로 기원정사다. 이뿐만 아니라 조선 숙종 때 혜총, 축홍 스님이 편찬하여 영 조 16년(1740년)에 간행된 신라 함월산 기림사 사적기 에 따 르면 기림사는 신라 선덕왕 12년(643년)에 천축국 승려 광유 성인이 창건하여 임정사라 하였고 이후 원효대사가 기림사로 바꾸었다. 기림사 동편 약사전에는 사라수왕탱( 娑 羅 樹 王 幀 ) 이 봉안되어 있다 는 내용이 바로 기림사가 부처님이 상주하 고 계시는 곳임을 알게 해주는 신화다. 광유성인은 누구이고 사라수왕탱이 무엇인가? 조선시대 우리나라에서 지어낸 석가 모니불의 전생담 안락국태자전 을 그림으로 그린 불화를 사 라수왕탱이라 한다. 그럼 잠시 안락국태자전 을 살펴보자. 범마라국 임정사의 광유성인은 500 제자를 거느리고 꽃밭 수리를 위해 승열바라 문을 서천국으로 보낸다. 서천국 사라수대왕과 원앙 부인, 승 열바라문은 임정사의 꽃밭 수리를 위해 서천국에서 범마라국 으로 향한다. 도중에 임신 중인 원앙 부인이 발병이 나서 동행 할 수 없게 되자 사라수대왕은 죽림국 자현장자의 집에 종으 로 판다. 사라수대왕은 원앙 부인이 아들을 낳자 이름을 안락 국이라 지어주고 승열바라문과 함께 임정사로 향한다. 원앙 부인은 왕에게 항상 왕생게를 외울 것을 당부한다. 한 편 자현장자는 동침을 거부하는 원앙 부인과 그의 아들 안락 국에게 온갖 시련을 안긴다. 안락국은 아버지를 찾아 범마라 국 임정사로 떠나고 원앙 부인은 장자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대적광전의 소조비로자나불.ㅣ 약사불회도에 그려진 나한상. 04 MAY 2013 월간 판전 05
왼쪽 면 절 뒤편 언덕 위로는 피나물꽃이 무리지어 봄동산을 이루고 있다.ㅣ칠이 사라진 대적광전의 솟을매화꽃문살은 세월의 깊이가 더해 더 깊고 은은한 멋을 풍긴다. 현재 면 삼천불전과 관음전의 기와가 봄 산을 배경으로 밝게 빛난다.ㅣ진남루와 맞닿은 요사채 담장의 정겨운 느낌이 신록의 색과 조화를 이룬다.ㅣ약사전 좌측 내벽의 차 공양도. 충담 스님이 부처님께 차를 올리고 있다. 충담 스님은 신라 경덕왕 때의 고승으로 찬기파랑가, 안민가 등을 지은 스님이다. 무수한 시련 끝에 안락국은 임정사에서 꽃밭을 가꾸는 아버지 사라수대왕을 만난다. 또한 안락국이 광유성인을 뵙자 광유성 인은 다섯 가지 꽃을 주며 어머니 원앙 부인을 환생시키라한 다. 죽림국으로 돌아온 안락국은 대나무 숲에 버려진 어머니 원앙 부인을 꽃으로 살려낸다. 그러자 번개가 몰아치고 억수같은 비가 쏟아져 천지가 물에 잠기자 모자( 母 子 )는 나무 위에 올라가 밤을 지샌다. 이때 아 미타불이 반야용선을 타고 내려와 다 같이 광유성인이 계시는 임정사로 돌아가 즐겁게 지내고 죄를 지은 자현장자는 무간지 옥으로 떨어진다. 이때 광유성인은 석가모니불이고, 사라수 대왕은 아미타불, 원앙 부인은 관세음보살, 안락국은 대세지 보살, 승열바라문은 문수보살이며, 500 제자는 500 아라한이 다 라는 설화다. 광유성인이 머무르는 동쪽 범마라국은 바로 신라이고, 임정 사( 林 井 寺 )는 숲 속에 오종수가 있는 기림사를 의미하여 석가 모니불이 이곳에 상주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아미타불이 꽃으로 장엄된 연화장 세계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여 기림사는 화엄사찰임을 알 수 있다. 성대중( 成 大 中, 1732~1809)은 청 성잡기 靑 城 雜 記 에서 경주( 慶 州 )의 일곱 가지 괴이한 일을 말 하였는데 그 가운데 기림사의 감로수( 甘 泉 )의 신이함과 오색 작약은 옮겨 심으면 제 빛깔이 나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아마 기림사의 오색 작약은 안락국이 어머니를 살린 신령스 런 꽃이기 때문에 괴이하다 하였는지 모를 일이다. 감로수 또 한 사라수대왕이 임정사 꽃밭에 준 다섯 가지 물 오종수로 감 로( 甘 露 ), 화정( 和 靜 ), 장군( 將 軍 ), 명안( 明 眼 ), 오탁( 烏 啄 )수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러한 창건연기 설화와 안락국태자전 의 신앙적 맥락에서 살펴보면 기림사의 사찰 전각 배치는 신화적 인 내용을 그대로 나타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들어가는 입구 부터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이 재미있게 자라고 있어 기타 태 자의 숲을 연상케 한다.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커다란 졸참나 무 뿌리와 석축을 의지처로 삼은 서어나무는 참고 살아가는 사바의 모습을, 천왕문 앞 누운 소나무는 하심( 下 心 )을, 대적 광전 앞 반송은 공양물을 올리는 예경심을, 삼천불전 앞 가이 즈카 향 나무는 향공양을, 범종루의 왕벚나무는 분소의를 입 은 두타 가섭존자를 생각하게 한다. 또한 유물관 주변 쥐똥나 무 생울타리는 옹기종기 모여 앉아 부처님 말씀을 듣는 1250 아라한들의 모습처럼 보인다. 천왕문을 사이에 두고 흘러내리는 명안수( 明 眼 水 )나 오탁수 ( 烏 啄 水 )가 눈에 띈다. 마음의 눈이 밝아지고 번뇌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맛있는 한 잔의 물을 마시고 바라보니 긴 전각이 앞을 가로막는다. 사찰 공간을 바로 보여주질 않는다. 수많은 승군들이 도열하여 선 듯 길고 당당한 모습의 진남루( 鎭 南 樓 ) 는 남쪽 동해의 왜구를 진압하고자 한 문무대왕의 호국불교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진남루와 응진전의 건물 사이를 끼고 들 어서면 신라시대의 단아한 삼층석탑과 부챗살처럼 가지를 뻗 은 반송이 법신의 모습으로 푸름을 토해낸다. 대적광전을 중심에 두고, 바라보아 오른쪽에는 약사전, 왼쪽 에 응진전, 마주한 남쪽으로는 진남루를 배치해 ㅁ 자형을 이 루고 있다. 단청이 사라진 대적광전은 전면 5칸 측면 3칸으로 금당답게 크고 힘차며 내부는 비교적 넓은 공간에 17세기 전 06 MAY 2013 월간 판전 07
왼쪽 면 용파당 대선사 진영. 성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ㅣ 삼층석탑과 대적광전.ㅣ 대적광전의 소조 비로자나삼존불상.ㅣ 기림사 건칠 관세음보살 반가좌상. 현재 면 응진전 천장에 그려진 다섯 송이 꽃. 부처님이 안락국 태자에게 주었다는 꽃이다.ㅣ 응진전의 나한상. 반에 진흙으로 만든 크고 당당한 체구의 지권인을 한 비로자 나불을 중심으로 약사불, 아미타불이 오른손을 들어 설법인의 모습을 하고 앉아 계신다. 사각형 얼굴에 큼직한 코와 반쯤 뜬 눈, 떡 벌어진 어깨 등 조선 중기 불상의 근엄한 표정이 잘 나 타나 있다. 불상 뒤, 1718년에 그린 비로자나불화와 아미타불화, 약사불 화의 삼불회도는 중앙의 주불을 중심으로 화면 가득히 수많은 보살과 제자, 천신들을 점차 화면의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배 치하여 원근감과 입체적인 공간감을 살리고 있다. 약사전 내부 좌측 벽에는 스님이 부처님께 차를 공양하는 벽 화가 있어 이채롭다. 임정사의 오종수로 끓인 차를 바치고 있 는 분이 삼월 삼짇날과 구월 구중 일에 삼화령 미륵부처님께 차를 바친 충담 스님인가? 정수리에서 흰빛 광명을 뿜으며 차 를 받으시는 부처님이나 차를 바치는 충담 스님, 이 모습을 바 라보는 아난의 합장한 모습 또한 거룩하다. 기림사 응진전에는 500 나한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범마라국 임정사의 광유성인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거느린 500 제자들 이 옛 모습 그대로 계신다.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이 협시 로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데 아라한의 모습은 천태만상이다. 특히 바보 동생 주리반특가가 아라한을 성취하여 반특가와 주리반특가 형제가 서로 손을 잡고 기뻐하는 모습이 재미를 준다. 또한 천장에는 부처님이 안락국 태자에게 준 다섯 송이 꽃이 하늘을 떠다니는 듯 신이함을 느끼게 한다. 기림사 유물관에는 1501년(연산군 7년)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건칠 관세음보살 반가좌상( 半 跏 坐 像 )이 있다. 머리 에는 원통형 보관을 쓰고 목에는 영락이 걸려 있다. 오른발은 아래로 내리고 왼발은 편안하게 오른쪽 무릎 옆에 둔 반가좌 로 오른손은 무릎 위에, 왼손은 대좌를 짚고 있는 편안한 모습 이다. 사라수대왕에게 항상 왕생게를 외울 것을 당부한 원앙 부인의 화현인가. 또한 유물관에는 원앙 부인을 죽인 죽림국 자현장자가 지옥 에서 고통을 당하는 장면인 듯한 지옥시왕도 도 눈여겨볼 만 하다. 염라대왕을 포함한 열 명의 지옥의 왕들이 상단에서 근 엄한 심판을 관장하는 가운데 하단에는 옥졸들에게 죄를 받고 있는 지옥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관위 망자의 몸에 못을 박거 나 창자를 빼는 형벌 집행, 절구에 넣고 찧어버리거나 혀를 빼 내어 쟁기로 갈아버리는 등 고통을 준다. 지옥의 판결이 끝나 면 다음 생에 태어날 곳을 투구를 쓴 제10 오도전륜대왕이 윤 회판을 돌려 육도윤회의 세계로 보낸다. 이처럼 기림사에는 안락국태자전 의 신화나 기수급고독원 의 이야기를 참배객의 눈으로 보여줌으로써 한층 사실감을 불 러일으킨다. 부처님께서 인도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한 국에서 태어나셨다는 자부심을 기림사를 통하여 느껴볼 만하 다. 무량원겁 즉일념 일념즉시 무량겁은 아닐까? 권중서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에서 불교미술 전공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불 교방송 TV, 조계종 디지털대학, 불교대학 등에서 불교미술을 강의하고 있다. 1993년부 터 문화사랑 걸망 메고 를 운영하며 우리문화 알리기에 주력하는 한편, 조계종 전문포 교사, 불교문화해설사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저서로는 불교미술의 해학, 사 찰의 문과 다리, 용의 원형과 병용 등이 있다. 08 MAY 2013 월간 판전 09
절집의 꽃 기림사 대적광전의 꽃문살 Flower pattern on the door of Silent Illumination Hall of Kirimsa monastery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산417 기림사 대적광전은 지혜의 빛으로 세상을 밝힌다는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신 법당이다. 기림사 대적 광전의 꽃문살은 자연스럽고 단정한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칠을 올리지 않은 꽃문살의 수수함에 세월의 깊이가 더해져 더 깊고 은은한 멋을 풍긴다.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건물의 앞면 5칸을 장식한 문살에는 솟을금강저문살과 솟을매화꽃문살이 반복적으로 섞여 있다. 10 MAY 2013 월간 판전 11
월암 무비 도일 스님의 4월 법문 요약 봉은사 선교율 대법회 지상 법문 Monthly relay of the special Dharma talk series on Seon, Gyo and Yul at Bongeunsa 정리 김명수(고려대장경연구소 선임연구원) 계율은 사다리와 같고 고해를 건너는 배와 같고 전장에 나갈 때의 갑옷과 같고 비올 때 우산과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계율 정신이 없으면 행동으로 구체화되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함께 정화하는 가장 좋은 이치와 방법이 바로 계율입니다. 월암 스님의 선종사와 간화선 이야기 (4) 방금 우리도 부처님같이 라는 찬불가를 불렀는데 사실 우리 의 마음자리가 그대로 부처님입니다. 다만 무명에 미혹되고 경계에 끄달려서 중생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 있는 모든 중생은 견문각지( 見 聞 覺 知 ) 하고 있습니다. 보고 듣고 느 끼고 알 때 그 경계와 대상에 집착해버리면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주인공으로서 스스로 깨어 있지 못하게 됩니다. 중생은 인연의 모임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참 나의 모습 이 아니다. 중생은 내가 지은 업의 결과로서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생의 삶을 업으로 살아가는 업생( 業 生 )이 라고 말합니다. 업생은 항상 업력에 의해 끄달리며 자기가 지 은 업에 따라서 끊임없이 육도를 윤회합니다. 육도라 하여 전 생이나 후생의 일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의 현전일념( 現 前 一 念 ), 즉 내가 일으키고 있는 이 한 생각에 따라서 하루에도 만 번 나고 죽으며 육도를 윤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는 지금 이 한 생각에 집착하면 삼계육도가 드러나 지만, 그 한 생각이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고 머묾이 없다면 이 미 육도에 살되 육도를 떠난 보살의 삶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업력으로 살아가는 업생( 業 生 )을 원력으로 살아가는 원생( 願 生 )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지금 한 생각 집착과 머묾이 없는 현전일념의 본래 부처 자 리에서 돌이켜 보면 세상일이 마치 꿈속의 일과 같다고 말합 니다. 꿈속에서 아무리 즐겁고 괴로운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 건 꿈속의 일입니다. 보통 기도를 올릴 때, 안 좋은 일은 없어 지고 좋은 일이 생기게 해달라고 하는데, 이것은 마치 악몽은 말고 길몽을 꾸게 해달라고 비는 것과 같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면 성취는 되겠지만 그러나 악몽도 길몽도 꿈 속의 일일 뿐입니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길몽을 꾸라고 가르 침을 펼치신 것이 아니라, 악몽이든 길몽이든 꿈속의 일이니 꿈을 깰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꿈속에서 꿈꾸는 자는 꿈에 지배되고 매몰되어 꿈속에서 헤 매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부처님과 불보살의 원력을 나의 원 력으로 받아들여 스스로 부처님임을 자각하고 살아간다면, 그 것이 그대로 깨달음의 삶이고 꿈을 깨는 삶이요 원생이 될 것 입니다. 고통과 즐거움을 함께 받는 것은 선악의 인연을 지었기 때문 에 그 인연이 다하면 마음은 본래 더함도 덜함도 없는 본래 평 등한 법이다. 우리의 본래 참마음은 지금 중생이 되어도 줄어들지 않고 부 처가 되어도 늘어나지 않는 항상 그대로라는 말입니다. 그래 서 조사는 백천 겁이 지나도 옛날이 아니며, 천세에 걸쳐 앞으 로 나아가더라도 항상 지금 여기 의 현전일념이라고 말합니 다. 이것은 시작이 없는 옛날로부터 오늘까지 살아온 내 모든 삶의 총화로서의 현전일념입니다. 눈앞에 벌어지는 한 생각을 떠나 달리 수행이나 깨달음이나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안 이 비 설 신 의가 색 성 향 미 촉 법을 향해 부딪치고 있는 한 생각이 일어나는 삶의 현장이 곧 수행의 선방입니다. 바깥을 향해 집착하지 말고, 현전일념을 잘 돌이켜서 일념으 로써 깊이 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함이 있으면 중생이요 구함이 없으면 부처입니다. 유원( 有 源 ) 율사가 대주혜해( 大 珠 慧 海 ) 스님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깨달은 큰스님도 노력하는 바가 있습니까? 있지. 어떻게 노 력합니까?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잔다. 보통 사람은 밥 먹으면서 온갖 생각을 하고 잠자면서 온갖 번뇌망념을 짓지 만, 도인은 밥 먹을 때 밥만 먹고 잠잘 때 잠만 자고 걸어갈 때 걸어만 간다는 말입니다. 일체 유위법은 꿈과 같고 환,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갯불 과 같아서 무상하기 짝이 없다고 했습니다. 거기에 목숨 걸 것 이 아니라, 현전일념의 깨달음과 수행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구한 바 없이 구하는 무소구행의 실천입니다. 칭법행은 자성청정심을 회복하는 것이며 자성청정심이란 곧 본래 부처를 말합니다. 결국 부처님 법대로 살아가는 것이 칭 법행입니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을 자세하고 분명하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불자는 부처님 법을 널리 배우고 또 널리 행해야 합니다. 보원행, 수연행, 무 소구행, 칭법행의 실천이 달마 스님이 일러준 실천행으로써 도에 들어가는 문입니다. 여유가 있다면 선방에 앉아서 일체를 놓아버리고 한 생각을 챙기는 화두로써 참선을 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바 쁜 현대인들이 굳이 형상의 선방이 아니라 삶의 현장의 선방 에서 한 생각을 챙길 수 있다면, 이것보다 더 값진 보배는 없 습니다. 바깥 경계에 수연행을 잘 행하면서, 안으로는 항상 한 생각의 현전일념을 챙기는 수행을 한다면, 내가 있는 이 자리 가 부처님 법당이자 선방이 될 것이며, 또한 나날이 좋은 날이 되고 나날이 부처님 오신 날이 될 것입니다. 월암 스님 선 수행자로서는 드물게 중국 북경대학에서 돈오선 연구 로 학위를 받았으 며, 현재 문경 한산사 용성선원장으로 선 수행을 지도하고 있다. 저서로는 친절한 간화 선 을 비롯해 돈오선, 간화정로 등이 있다. 12 MAY 2013 월간 판전 13
무비 스님의 법화경 (17) 도일 스님의 계율에서 배우는 인생의 행복 (18) 법화경 은 모든 존재의 실상을 밝히는 가르침입니다. 법화 을 없애버리고 말하였느니라. 앞으로 나아가자. 보물이 있는 사람답게 함께 더불어 공존하며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법계연기( 法 界 緣 起 )입니다. 해인사와 같은 큰 절에서는 결제 경 에서는 적문( 迹 門 )과 본문( 本 門 )의 두 가지 입장을 이야기 곳이 멀지 않으니라. 아까 있던 마을은 임시로 쉬어가기 위한 해주는 것이 바로 계율의 근본정신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율 기간 중 마지막 일주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하는 용맹정 하는데, 저는 이것을 궁극적 차원과 역사적 차원이라고 표현 것이었다. 의 정신을 세 가지로 요약하셨습니다. 첫째는 어떤 일에 부딪 진을 합니다. 용맹정진이 3일을 넘어가면 무의식중에 과거의 합니다. 부처님을 이해하는 데 본불( 本 佛 )과 적불( 迹 佛 )의 두 좋은 식사를 하고 목욕을 한 후 한숨 자는 것도 쉬는 것이겠 혔을 때 그 일이 나의 수행에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먼저 습관이나 자신의 본래 성품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 가지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만,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를 통해서 한순간이 파악하는 것입니다. 재가불자 여러분들에게는 내 삶의 질을 은 방바닥에 떨어져 있는 빵조각이 점점 커져 보이고 그것을 본래 부처로서의 궁극적 차원의 입장이 있는 동시에 30년 전, 라도 마음을 편안히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험난한 인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가 판단의 기준이 될 집어먹는다고 헛손질을 하기도 하는데 옆에서 뭐하느냐고 하 50년 전에 태어난 사람이라고 하는 역사적이고 현상적인 차 생길에서 참으로 제대로 쉬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쉬었으면 것입니다.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의 비난을 받지 않도록 행동하 면 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자기가 만들어낸 세계에 빠져 있는 원의 입장이 있습니다. 다시 일어나 나아가야 합니다. 봄이 되면 풀과 나무도 성장하 는 것입니다. 승가는 재가 신도로부터, 재가 신도들은 다른 사 거예요. 즉 그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의 경계가 벌어지고 있는 봄에 파릇파릇 돋아나는 풀을 보고 우리는 그 풀이 이제 비 기 위해 꿈틀댑니다. 살아 있는 생명의 본래 임무는 끊임없이 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계율의 정 것입니다. 그 한 경계를 일러 법계( 法 界 )라고 합니다. 로소 돋아난 것이라고 하지만, 풀이 가진 본래적인 성질은 이 성장하고 변화하고 발전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신입니다. 세 번째는 승가와 불법이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는 하나의 생각이 열리면 하나의 법계가 열립니다. 거기에서 더 미 수억만 년 전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만물을 구성하는 지수 불교에서 최후의 목표는 성불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한 생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재가 신도로서는 이웃과의 공존을 생 깊은 세계로 들어가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무의식의 세계 화풍 사대의 어느 것 하나도 4월이라는 올봄 이 계절에 비로 각 더 돌이켜보면 사실 성불도 화성과 같이 잠깐 쉬었다가 가 각하며 행동하는 삶을 뜻합니다. 가 겹겹으로 열리며 중중무진( 重 重 無 盡 )의 세계가 펼쳐집니 소 처음 생긴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존재의 두 측면을 어디에 는 곳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태자 출신으로 부족함 없이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와 같은 구체적인 계 다. 이러한 법계는 우주 삼라만상을 가득 채울 정도로 첩첩이 도 치우치지 않고 바르게 이해하는 것을 일러 바른 견해 라 하 자랐지만 보다 높은 차원의 삶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출 율의 밑바탕에 놓여 있는 것이 바로 계율 정신입니다. 계율 정 많지만 그것은 결국 한 생각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것이 바 고 중도적 견해 라고 합니다. 가하여 고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고행을 그만둔 후에는 보리 신은 불교의 도덕률일 뿐만 아니라 세계인이 다 함께 살아가 로 일체유심조( 一 切 唯 心 造 ), 한 생각이 온 세상을 창조한다는 과학자들도 이 세상 어떠한 것도 이것과 저것을 종합하거나 수나무 아래에서 비로소 도를 이루고 깨달음을 성취했습니 기 위해 지켜 나가야 될 근본 정신이기도 합니다. 사실 율장 것인데, 그게 결국 옆에서 보면 공이거든요. 그런 세계를 초월 화학적인 변화를 가해서 변화시킨 것일 뿐, 새로 무엇을 만들 다. 다시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뒤 다섯 비구에게 깨달음을 정신은 곧 공존을 위한 정신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고 나면 보현법계( 普 賢 法 界 )라는 것이 열립니다. 이것은 부 어내거나 없앨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알고 보면 유구한 전하기 위해 바라나시로 갔으며, 80 생애를 통해 쉼 없는 중 처님의 지혜가 가득한 세계로 번뇌망상을 완전히 벗어난 청정 세월 동안 숱한 얼굴을 바꿔가면서 이 세상에 오고 가고 하는 생제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중생을 제도하는 방법으로 불교 가르침의 근본 핵심은 연기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무구한 세계를 말합니다. 이것이 화엄경 에서 말하는 법계연 것입니다. 수많은 경전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가셨습니다.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삶 기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 한 분의 일생, 역사를 통해 보더라도 성장 이 과거의 삶과는 다르게 변화되어 나타납니다. 그러한 자기 우리는 업감연기에서 말하는 업의 굴레를 벗어나 보현법계 화성유품 의 처음에는 오랜 세월 이전부터 있어왔다고 하는 하고 변화하고 발전하고 계획하고 정진하는 것, 이것이 살아 삶의 변화가 곧 연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해야 저것이 의 연기법을 통달하기 위해 공부하고 수행합니다. 그런데 그 대통지승불( 大 通 智 勝 佛 )의 이야기가 나오고, 끝에 가서 그 부 있는 모든 생명의 특성인 동시에 해야 할 일입니다. 불교는 변 생기고, 이런 행위를 하지 않으면 저런 결과가 나올 수 없습니 러한 공부의 근본 바탕은 바로 계율입니다. 계율은 사다리와 처님의 열여섯 왕자들 중 마지막 왕자가 석가모니 부처님이었 화의 이치를 가르치는 종교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본질 다. 바꾸어 말하면 과거에 안주하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미래 같고 고해를 건너는 배와 같고 전장에 나갈 때의 갑옷과 같고 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화성의 비유가 등장 은 변화가 없지만 현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기에 그 변화에 맞 가 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래에 변화 발전하려면 지금 비올 때 우산과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계율 정신이 없으면 합니다. 대통지승불의 이야기는 사실 우리가 오랜 세월에 걸쳐 추어 우리도 변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의 나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으로 구체화되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함께 얼굴과 모습을 바꿔가면서 이렇게 흘러가며 살아가고 있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나아갈 길을 바르게 열어주는 길 일을 끝까지 하는 노력을 통해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정화하는 가장 좋은 이치와 방법이 바로 계율입니다. 것을 대통지승불을 빌려 말하는 것입니다. 말은 간단하지만 그 잡이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법당에 와서 위대한 일입니다. 것이 가슴에 와 닿도록 이해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 부처님 가르침을 통해 나의 삶의 성장과 발전을 도모할 방법 자신이 과거에 행한 대로 미래에 거둔다는 것에 연기법을 적 오늘은 계율의 세 가지 근본 정신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서 다시 화성의 비유를 끌어다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을 참구하는 것입니다. 바르게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 용시킨 것을 일러 업감연기( 業 感 緣 起 )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내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타인으로부터 비난받지 않으며, 다 비유컨대 많은 사람들이 오백 유순이나 되는 험난하고 무서운 아야 세상도 바르게 됩니다. 소나무 사이에서 자라는 칡넝쿨 후대로 오면서 아뢰야연기( 阿 賴 耶 緣 起 )로 발전합니다. 전에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 곧 재가 불자로서 계 곳을 지나서 보물이 있는 곳으로 가고자 하였느니라. 사람들이 은 소나무를 타고 올라가기 때문에 하늘을 향해 바르게 솟아 도 말씀드렸지만 아뢰야식은 마치 저금통과 같아서 자신이 행 율 정신을 지키며 사는 삶입니다. 그러한 계율 정신을 바탕으 도중에 물러갈 마음이 생겨 돌아가겠다고 하였느니라. 인솔하 올라갑니다. 종교인 특히 불교인은 세상에서 그런 소나무와 동하고 경험하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저금해두고 있습니다. 로 업 속에서의 삶이 아니라 그 업에서 완전히 해탈하여 보현 는 이가 방편으로써 삼백 유순을 지나서 한 마을을 변화하여 만 같은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저금이 만기가 되면 자신이 한 좋고 나쁜 행위의 결과인 법계의 연기법을 구현해야 합니다. 일체유심조이기 때문에 무 들어놓고 말하였느니라. 저 마을에 들어가면 편안히 살 수 있 고통과 복덕을 받는 것입니다. 다시 그것이 발전해서 여래장 엇보다도 마음을 잘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 앞으로 더 나아가면 보물이 있는 곳에도 갈 수가 있으리라. 사람들은 변화하여 만든 마을[ 化 城 ]에 들어가서 이미 지나왔 다 는 생각을 하고 편안하다 는 생각을 하였느니라. 사람들이 더 이상 피로하지 않은 줄을 알고는 인솔하는 사람은 그 마을 무비 스님 부산 범어사에서 여환 스님을 은사로 출가, 해인사 강원 졸업, 해인사 통도 사 등 여러 선원에서 안거하였다. 탄허 스님의 법맥을 이은 대강백으로 통도사 범어사 강주, 조계종 승가대학원장, 조계종 교육원장, 동국대 역경원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동 화사 한문불전승가대학원장으로 후학을 양성하고 계시며, 범어사 화엄전에 주석하시면 서 전국의 수많은 법회와 인터넷 카페 염화실에서 불자들의 마음 문을 열어주고 있다. 연기( 如 來 藏 緣 起 )가 나오게 됩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본래 완 벽하게 구족된 부처의 성품인 여래장, 즉 부처의 종자가 있으 며 그것의 성품에 따른 연기법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 고 아뢰야연기와 여래장연기가 다시 하나로 뭉뚱그려진 것이 도일 스님 1973년 양산 미타암에 입산하여 75년 통도사에서 사미계를, 78년 비구계를 수지하였다. 태국 왕립 마하출라롱콘대학을 졸업하고 영국 런던대학 객원연구원을 역 임했다. 원조 각성 스님께 전강을 받고 범일 보성 스님께 전계를 받았다. 현재 조계총림 송광사 율학승가대학원 원장으로 있다. 14 MAY 2013 월간 판전 15
옛 지명에 나타난 불교 영취산 염화미소처럼 그윽한 진달래 Yeongchwisan mountain in Yeosu city, Fragrance of azaleas, as profound and subtle as Kasyapa's smile at Buddha's holding of a flower 글 이휘종(자유기고가) 사진 안홍범 모르는 게 약 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것도 모르면 차라리 속 영취산(510미터)도 꽃 산행지로 사랑을 받는 곳이다. 이 산은 이 편하다는 뜻이다. 자신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거나 불가항 진달래가 특히 아름답다. 20년 이상 된 진달래 수만 그루가 력의 사안이라면 그것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 산을 뒤덮고 있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진달래 군락 중에서 가 지 않은 경우 아는 게 병 이 될 일은 없다. 알아야 더 넓은 세 장 밀도가 높지 않을까 싶다. 영취산 진달래는 가을의 단풍보 상을 볼 수 있고, 대상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고대 인도 다 더 곱고 맑고 그윽한 선홍빛으로 산객들의 마음을 삽시간 의 마가다국에는 부처가 법화경 을 설하였다는 영취산이 있 에 훔친다. 다. 낯익은 지명이다. 그렇다. 이 땅에도 똑같은 이름을 가진 여수 영취산은 부처가 법화경 을 설하였다는 옛 인도 마가 산이 여럿 있다. 그중 여수의 영취산을 특별히 살펴보고자 한 다국 영취산의 이름을 차용한 산이다. 마가다국은 인도에 있 다. 이 산이 껴안은 흥국사의 내력과 사회적 역할에 주목할 필 던 고대 왕국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비하르 남부에 해당한다. 요가 있어서다. 만약 이러한 사실들을 알게 된다면 영취산이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곳이 마가다국의 니련선하(尼連禪河) 새로운 의미로 다가올 것이 분명하다. 언덕이다. 마하가섭이 선정에 든 계족산을 비롯해 불교 교학 의 중심이 된 나란다사(那爛陀寺) 등 초기 불교와 떼려야 뗄 부처가 법화경을 설했던 바로 그 산 수 없는 지역이 바로 이 왕국이라 할 수 있다. 마가다국의 수 도인 왕사성 북동쪽에는 부처가 그 제자들에게 법화경 을 강 16 꽃은 참 고마운 선물이다. 세상사의 고단함을 잠시나마 잊게 론했다는 영취산(靈鷲山)이 있다. 산정에 신령(靈)스런 기운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봄이면 먼 길일지언정 꽃 이 감돌고 독수리(鷲)가 많아 그 같은 이름을 가지게 됐다는 을 찾아 주저 없이 나서곤 한다. 전남 여수 삼암동에 자리한 산이다. 마하가섭에 얽힌 염화미소 일화의 장소도 여기다. MAY 2013 도솔암에서 진례봉 방향으로 가는 길에 내려다본 영취산 자락 월간 판전 17
마하가섭은 부처님의 제자로 항상 대중의 틈바구니에서 두타 행을 실천해온 인물이다. 그는 부처님으로부터 삼처전심(부 처 설법 49년 동안 세 곳에서 가섭에게 마음을 전한 일)을 받 았는데, 그중 하나가 영취산에서의 염화미소였다. 영취산에 모인 이들을 향해 부처님이 말없이 연꽃을 들어 올리자 가섭 이 그 뜻을 깨닫고 미소로 답했다는 데서 유래한 표현이 염화 미소다. 진리 혹은 깨달음이 말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획득 되는 것이 아님을 이 일화가 가르쳐준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여수의 영취산은 이처럼 대단한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까. 영취산에 대해 알려면 이곳 서남쪽에 좌정 한 흥국사의 사적기를 들여다봐야 한다. 1195년(고려 명종 25 년) 흥국사를 창건한 보조국사 지눌이 영취산의 이름 또한 지 었기 때문이다. 흥국사 사적기는 모두 두 장으로 앞뒷면에 글 씨를 양각한 경판 형식을 취하고 있다. 1691년 통일이 대웅전 을 중창하면서 흥국사의 중요한 자취를 목판에 새긴 것이다. 창건에 관한 부분의 내용인즉 이렇다. 보조국사가 국리민복 과 정혜쌍수를 위한 절을 세우고자 하였는데, 신묘한 노승이 홀연히 나타나 하늘이 아끼고 땅이 보호하여 불법이 크게 일 어날 지점을 일러주었다. 더불어 노승은 절이 잘되면 나라도 잘되고 나라가 잘되면 절도 잘될 것 이라며 그곳에 절을 일으 키고 흥국사( 興 國 寺 )라 부르길 당부했다고 한다. 이에 보조국사가 노승의 말대로 실행하는데, 산의 형상이 고 대 인도 마가다국의 영취산과 닮은 것을 알고 그 이름을 똑같 이 지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름 따라 간다고 했던가. 실제로 흥국사는 외침이 발생하자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서며 이름 값어치를 톡톡히 해냈다. 보물 못잖게 자부할 만한 흥국사 의승수군 흥국사는 홍교에서부터 사역이 시작된다. 조선 중기에 축조된 무지개 모양의 이 돌다리는 속인의 세계와 부처의 세계를 나 누는 경계 지점이다. 예전에는 이 홍교를 건너야만 절로 들어 갈 수 있었을 터이나 현재는 그 옆으로 찻길이 나 있어서 홍교 의 역할이 유명무실해졌다. 홍교를 지나면 왼쪽으로 부도 밭 이 나타난다. 12기의 부도가 있는데 창건자인 보조국사, 중창 자인 법수대사, 승군대장 응운당과 음암당 등이 주인이다. 석종형이 대부분으로 지붕돌에 다양한 표정의 귀면이 새겨 져 있다. 그것이 무섭다기보다 친근함마저 준다. 일부 귀면은 마치 하회탈 중에서 이매 혹은 초랭이를 닮기도 했다. 개울의 기분 좋은 소란을 즐기며 걷다 보면 영취교, 천왕문, 봉황루, 법왕문을 차례로 통과해 대웅전으로 이어진다. 그 배치가 굉 장히 직선적이다. 흥국사는 규모가 그리 큰 편은 아니지만, 대단히 많은 보물 을 간직하고 있다. 흥국사의 가장 중심 되는 대웅전이 보물 39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내부에 봉안된 목조석가여래삼 존상이 보물 1550호, 불상 뒤편의 후불탱화가 보물 578호다. 이 탱화는 1693년(숙종 19년)에 천신( 天 信 )과 의천( 義 天 )이 제 작한 영산회상도로, 마가다국의 영취산에서 석가모니불이 여 러 제자에게 법화경 을 설법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공교롭게도 흥국사를 품은 곳이 영취산이니만큼 이보다 완 벽히 어울리는 그림도 없다. 흥국사에는 이 외에도 응진전의 16 나한탱이 보물 1333호, 수월관음도가 보물 1332호, 동종이 보물 1556호, 입구의 홍교도 보물 563호로 그 가치를 인정받 고 있다. 비록 보물의 명단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유독 눈길이 가는 것은 대웅전 불단 고주 뒷면의 관음벽화다. 가로 336센티미터, 세로 389센티미터의 크기로 벽면 전체를 차지한 이 그림은 토벽 위에 한지를 덧바르고 그 위에 그렸다. 흥국사의 수많은 벽화에 비해 화려함이 덜하지만, 그런 점이 오히려 매력으로 다가온다. 백의관음은 33관음 가운데 하나 로 아이의 출산과 생명을 관장하는데, 자애의 미소가 은은하 다. 마치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이를 바라보는 듯하다. 앞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흥국사는 보물 못잖게 자부할 만한 역사를 지닌 절이다. 흥국사는 임진왜란 당시 승군의 본영 역 할을 했던 주진사( 駐 鎭 寺 )였다. 주지하다시피 임진왜란이 일 어났을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민초들이 자발적으로 무기를 들어 의병을 일으켰다. 풍전등화의 나라 앞에 스님이 라고 예외가 없었다. 1593년 1월과 1594년 1월에 충무공 이순 신이 조정에 올린 장계를 보면,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마자 스님들이 의승수군을 조직해 전투에 임했음을 밝히고 있 다. 순천의 송광사, 구례의 화엄사 등과 함께 전라좌수영이 있 던 여수에서는 흥국사가 그 거점이 되었다. 그렇지만 전투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다. 의승수군은 1597 년 전라 지방의 관문이었던 석주관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153 명이 전몰당하는 아픔을 당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흥국사 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지금까지 수륙재를 열며 승군을 비롯해 전란으로 희생된 모든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한편 영취산에는 도솔암이라는 암자가 하나 있다. 이 암자의 이름 역시 두말할 것 없이 불교에서 유래한 것이다. 욕계육천 중에서 넷째 하늘을 도솔천 이라고 한다. 석가모니가 인간 세 계로 내려오기 전에 머물던 곳이다. 흥국사는 모두 14개의 암 흥국사 홍교. 현재 남아 있는 우리나라 홍교 가운데 그 규모가 으뜸이다. 18 MAY 2013 월간 판전 19
자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중 남아서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도솔암이 유일하다. 이 암자는 영취산 진례봉 바로 아래에 자 리하고 있다. 흥국사로부터는 약 한 시간을 걸어 올라가야 한 다. 창건 연대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1759년 제작된 흥 국사 노사나괘불탱에도 도솔암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적어 도 그 이전에 지어진 것만은 확실하다. 도솔암에는 비로전, 나한전, 극락전, 선방, 요사 등의 건물이 있다. 각 전각은 손바닥만 하지만 불사를 이룬 정성이 한눈에 보일 만큼 잘 지어졌다. 특히 나한전과 극락전 창문의 조각은 아주 일품이다. 비로전 내에는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 중 오른편의 부처는 종이를 압착해서 조성한 것이다. 비구니 암자로서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도의 스님의 공이 크다. 성철 큰스님의 제자인 그는 속명인 희자 로 더 알려져 있다. 1986년 도의 스님이 공부에 진력하기 위해 도솔암을 찾 았을 때는 거의 허물어지기 직전이었다. 공부는 둘째 치고 도 무지 머물 거처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그만 내려가려는데, 꿈 에 비를 맞고 서 계신 부처가 나타나더라는 것이다. 부처를 받 드는 이로서 모른 체한다는 것이 도리가 아닌 것 같아 중창불 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영취산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동북쪽으로 제석산과 연결되는 데, 이 역시 불교와 연관된 지명이다. 수미산 도리천을 관장하 는 제석천 에서 유래했다. 제석산은 악산( 惡 山 )의 끝 이라 불 릴 정도로 험하다. 이 산은 영취산과 함께 광양만을 껴안고 있 는데, 40여 년 전만 하더라도 고기가 지천인 황금바다였다. 그러나 광양제철을 비롯해 율촌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부터 바다가 죽었다. 아니 바다는 55년 전 이미 죽었는지도 모른 다. 이곳 주민들은 1948년 여수순천사건의 희생자들이 제석 산 앞바다에 수장됐다고 전한다. 광양만의 초입으로 물살이 아주 세서 마치 사람이 우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는 곳이다. 어쩌면 수장된 군인의 넋들이 하늘에 오르지 못하고 그 바다 에서 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들 또한 수륙재를 열어서 그 넋을 달래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현재 면 일반 대중에게 기억되는 영취산은 봄이면 진달 래 꽃불이 활활 일어나는 곳이다. 해오름에 영취산 정상에서 제석산 쪽으로 바라 본 풍경. 이 두 산이 껴안은 바다에는 여수순천 사건 당시 희생자들이 수장되었다고 전한다. 영취산 기슭에서 본 노루귀. 잎이 노루의 귀와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른쪽 면 흥국사 원통전의 고양이. 주인 노릇을 하는지 한 참을 노려보며 경계하였다. 대웅전 뒤편에서 바라본 흥국사. 신록의 향연이 펼쳐진다. 이휘종 여행칼럼니스트로 우리의 전통문화유 산을 차근차근 정리해 나가는 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옛절터 또한 그가 오랫동안 관심 을 가져온 분야다. 안홍범 사진가 샘이깊은물 사진팀장을 지냈 으며 4번의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 다. 한국판 내셔널지오그래픽 등 여러 매체에 사진을 기고했으며 현재 대한항공, 코리아나 등 여러 기업체의 사진을 담당하고 있다. 20 MAY 2013 월간 판전 21
절터를 찾아서 월악산 사자빈신사지 봄날, 아름다운 사자빈신비구니를 뵙다 Sajabinsinsa temple site on Woraksan mountain, Encounter with beautiful Sajabinsin Buddhist nun on a spring day 글/사진 이지누(전 불교신문 논설위원) 4월이 되면 언제나 등명불( 燈 明 佛 )을 떠올리곤 했다. 그는 과거세에 나타나 현세의 석가모니 부처님과 함께 묘법연화경 을 설하시던 부처님이다. 그의 제자인 문수보살은 그가 법화경을 설할 때 법화육서( 法 華 六 瑞 )라고도 불리는 부사의( 不 思 義 )한 여섯 가지 상서로운 일이 벌어지는 모습을 목격하곤 했다. 그 일은 설법서( 說 法 瑞 ), 입정서( 入 定 瑞 ), 우화서( 雨 華 瑞 ), 지동서( 地 動 瑞 ), 중희서( 衆 喜 瑞 ), 방광서( 放 光 瑞 )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봄만 되면 등명불이 생각나는 까닭은 세 번째 상서로운 일인 우화서, 꽃비 때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정각을 이루자 하늘 에서 꽃잎이 흩어졌다. 범천들이 흩은 꽃잎이 석가모니 부처 님 곁에 1백 유순( 由 旬 )이나 쌓이고, 바람이 불면 향기를 잃 은 꽃잎은 날아가고 다시 새로운 꽃잎이 쌓였다. 또 영취산에 서 문수 관세음 미륵보살을 따라 모인 8만 명의 보살과 훌 륭한 비구들의 무리 1만 2천 명을 비롯하여 많은 대중 앞에서 무량의경 을 설하신 다음 무량의삼매( 無 量 義 三 昧 )에 드셨을 때도 꽃잎이 비처럼 내렸다고 한다. 그뿐이랴. 석가모니 부처 님이 묘법연화경 을 설하실 때 큰 탑이 땅에서 솟아올라 허 공에 머물렀다. 그때 탑 주위에는 과거세의 모든 부처님과 보 살이 보배와 꽃을 지니고 부처님에게 꽃잎을 흩어 비처럼 내 리게 하지 않았던가. 그 장면이 너무도 아름답게 여겨져 4월이면 큰 꽃나무 아래 를 찾아가 앉곤 한다. 맥없이 떨어지는 꽃잎이 나를 뒤덮고 또 주위를 에워쌀 때까지 앉았다가 온몸에 꽃향기를 묻힌 채 돌 아오면 그날 작은 공부방은 법향이 흘러 넘쳤다. 올해도 어김 없이 나섰다. 경북 문경, 관음사터다. 그곳, 너른 사과과수원 가운데에 은둔하여 사과꽃 향기가 듬뿍 밴 부처님을 뵐 요량 이었다. 서둘러 부처님 앞에 다다랐지만 어이없게 아직 꽃이 피지 않았다, 이미 환하게 피어 부처님 또한 밝은 미소로 맞이 할 것이라고 들떠 있었지만 오래는 일주일 이상 꽃이 늦다며 농부도 걱정이 한 아름이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갓 영글기 시작한 푸른 사과 같은 미소로 자 신을 찾아온 순례자를 반겼다. 예전 부처님이 계신 곳에는 관 음원이 있었으며, 관음사가 함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선비들이 이곳을 지나다녔다. 조선 성리학의 거두인 이황은 물론 주세붕도 이 곳 관음원에서 하루를 묵고 충주 방향으로 하늘재라는 고개를 넘어갔으며, 고려의 이규보는 고개 너머에 있는 미륵원에서 묵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하늘재는 해발 525미터 남짓한 낮은 고개다. 신라가 한강 유역인 충주로 진출하기 위해 서기 156년인 신라 아달라왕 3년에 개척한 고갯길이다. 곧, 경북에 서 충북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셈이다. 또 조선 후기, 호를 옥소( 玉 所 )로 썼던 권섭이라는 선비는 문 경의 화지동에 살면서 관음원과 하늘재 그리고 미륵원을 거쳐 큰아버지인 수암 권상하가 살던 월악산 기슭의 황강까지 무시 로 드나들었다. 그는 문경읍에서 하늘재 너머에 있는 미륵원 까지의 아름다운 경치 중 아홉 곳을 선정하여 화지구곡( 花 枝 九 曲 )을 경영하기도 했는데 그 구곡 중 관음원이 8곡이며 미 륵원이 9곡이다. 원이란 나그네들이 묵어가는 곳이기는 하지 만 대체로 사찰에서 운영하는 복지시설과도 같은 것이었다. 곧, 사찰에서 대중들을 위해 펼치는 보시행이어서 원 곁에는 항상 사찰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늘재를 중심으로 한 관음 원과 미륵원이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곳 관음 송계계곡 골뫼골의 사자빈신사터 석탑은 사사자석탑으로 본디는 9층이었지만 지금 은 4층만 남았다. 하층기단갑석 위의 인물상.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다. 이는 부처님이 아니라는 방증은 아닐까. 명문에 따르면 탑은 태평 2년, 1022년(현종 13년) 4월 사자빈신사에 세워졌다. 22 MAY 2013 월간 판전 23
네 마리의 사자가 탑신을 받치고 있는 상층기단갑석 윗면에는 16판의 연꽃이 조각되었다. 24 MAY 2013 월간 판전 25
왼쪽 면 지권인을 하고 있지만 비로자나불이라기보다는 사자빈신비구니로 보인다. l 사자 네 마리가 탑신을 받치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기 단부 중석에 탑을 조성한 시기가 밝혀져 있는 드문 석탑이다. l 앞쪽의 사자는 입을 벌리고 있고 뒤의 사자는 입을 다물고 있다. 아 와 훔이다. l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50호인 관음리석조반가사유상은 큰 바위에 부조로 새겨졌다. 원 곁에 관음사가 있었고, 그 흔적이 반가사유상으로 남았듯 이 고개 너머 미륵원 곁에는 마의태자 설화가 어린 미륵대원 사가 있었다. 그곳 또한 지금은 폐사가 되었지만 고개 양쪽에 원과 사찰이 동시에 있었던 흔적이 남은 것이다. 꽃도 피지 않아 부처님과 함께 있기가 머쓱하였다. 관음사터 반가사유상으로부터 천천히 걸어 하늘재를 넘는 데 채 두 시 간이 걸리지 않았다. 미륵사터에 다다랐지만 눈인사만 올리고 송계계곡을 따라 걸었다. 듬성듬성 진달래가 피어난 닷돈재를 넘자 이내 골뫼골 들머리였다. 미륵사터는 들르지도 않은 채 골뫼골로 찾아든 까닭은 이곳 사자빈신사터(( 獅 子 頻 迅 寺 址 ) 에 아름다운 비구니 한 분이 계시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꽃 귀 한 봄에 작은 절터가 온통 꽃으로 환하게 밝혀졌으니 더할 나 위 없지 않은가. 얼른 산 목련나무 아래로 가서 앉았다. 살랑거리는 바람결에 묻어오는 뭇 향기들이 코를 간질였다. 채 못다 핀 꽃망울도 아름답기는 매한가지다. 마치 분기탱천 한 듯, 곧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른 모습이 귀엽기 짝이 없다. 고개 너머 문경 관음사터에서 만난 반가사유상이 그랬듯이 이곳의 사자빈신비구니도 마치 이웃 여인네와 같이 수더분하 다. 그에 비하면 미륵대원사터의 석불입상의 상호는 너무도 유려하다. 그리고 덩치도 크다. 또 절터도 화려하여 몸 하나 감출 곳이 없으니 이곳으로 깃든 것이다. 사자빈신비구니는 나라 안에서 몇 안 되는 사사자석탑 안에 앉아 계신다. 문화재 안내판에는 그를 두고 비로자나불이라고 한다. 비로 자나불은 법신불( 法 身 佛 )이자 화엄경 의 교주이다. 연화장세 계( 蓮 華 藏 世 界 )를 지배하고 우주 전체를 총괄한다. 그러므로 비로자나불의 크기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넓어서 우 주 전체에 가득 차 있다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리수나무 아래서 정각을 이루자 곧 비 로자나불과 일체를 이루며, 사자좌에 앉았다. 그러고 보현보 살을 비롯한 수많은 보살들에게 비로자나불의 무량한 광명으 로 설법을 하였다. 그러나 눈앞의 탑은 어떠한가. 만들어질 때 는 9층이었지만 허물어져 지금은 4층으로 남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탑을 부처님이라고 볼 때 지금 이 탑의 어디에 부처님이 계시느냐가 관건이다. 물론 경우의 수가 있겠지만 탑신에 부처님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더구나 조금 전 말 했듯이 비로자나불은 사자좌 위에 앉아 설법을 시작했다. 그 런데 이 탑의 경우 탑 안에 계신 인물상이 앉은 곳은 사자좌가 아니다. 사자좌 위에 상층기단갑석이 있는데 그 윗면에 16판 의 연꽃이 조각되었다. 그러니까 사자좌 위에 연화대가 놓이 고 그 위에 탑신, 곧 부처님이 계신 것이다. 그렇다면 인물상은 무엇인가. 그는 하층기단갑석 위에 앉은 것이다. 갑석에는 아무런 조각도 새겨져 있지 않다. 물론 사자 빈신비구니 또한 사자좌에서 법문을 했다. 그러나 어찌 이 모 습을 두고 사자빈신비구니가 사자좌에 앉았다고 할 것인가. 사자에 둘러싸인 것뿐이다. 또 만약 인물상이 비로자나불이 라면 그는 어째서 아무런 조각도 되어 있지 않은 판석 위에 앉 았을까. 궁금한 일이다. 더러 인물상의 수인이 비로자나불의 수인인 지권인을 하고 있기 때문에 비로자나불이라고 한다. 그러나 묻자. 비로자나불이 머리에 두건을 쓰고 계신가 하고 말이다. 그렇지 않다. 일체의 부처님은 두건을 쓰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리 깨우침이 큰 성문이나 나한이라 할지라도 불보 살 외에는 연화대에 앉지 못하지 않던가. 그가 누구인지는 스스로의 깜냥에 따라 판단할 일이긴 하다. 그러나 그가 사자빈신비구니라면 그는 구도행을 떠난 선재동 자가 가르침을 구했던 53선지식 중 유일한 비구니 스님이다. 그는 수나국의 가능가( 迦 陵 迦 ) 숲에 살며, 온갖 성스러운 나 무들과 꽃으로 장엄된 일광( 日 光 )동산에 머물렀다. 그를 찾 아간 선재동자는 사자빈신비구니가 앉아 계신 사자좌의 오른 쪽으로 한량없이 돌았다. 선재동자가 돌자 동산의 모든 나무 와 꽃들도 따라 돌았으며, 백천만 번을 돌고서야 합장하고 섰 다. 그리곤 진실로 법을 구했다. 그러자 사지빈신비구니가 설 한다. 선남자여, 나는 모든 중생을 보아도 중생이라는 분 별을 내지 않았으니, 지혜의 눈으로 보는 까닭이다. 모든 말을 들어도 말이라는 분별을 내지 않으니 마음에 집착이 없는 까 닭이다. 모든 여래를 뵈어도 여래라는 분별을 내지 않으니 법 의 몸( 法 身 )에 대해서 통달한 까닭이다. 그런데 나는 무엇인가. 이 아름다운 곳에 와서 비로자나불이 네 아니네 하는 분별의 마음만 내놓았으니 말이다. 그래도 마 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은 무슨 까닭일까. 아마 마음속에 뭉쳐 놓았던 분별심을 차디 찬 계곡물에 흘려버렸기 때문 아닐까. 이지누 사진도 찍고 글도 쓴다. 구산선문을 공부하며 불교를 익혔고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 돌들이 끄덕였는가 꽃들이 흔들렸다네 그리고 나와 같다고 옳고 다르면 그른 것인가 와 같은 폐사지 답사기를 썼다. 지금은 경주 일대에 대 한 작업을 위해 경주에 머물고 있다. 26 MAY 2013 월간 판전 27
풍경( 風 磬 )과 풍경( 風 景 ) 전남 화순 내 얼굴이 거기에 있었네 Hwasun-gun in Jeollanam-do, There was to be found my face 글 김동옥(여행칼럼니스트) 사진 박보하 탐닉의 찰나가 끝나면 밀려올 허무함을 어찌 감당하려고 꽃에 집착하는가. 그러나 오로지 꽃 때문에 그리 향한 것은 아니다. 그곳에는 수많은 표정의 부처가 있고, 그중 나를 닮은 어느 하나로부터 진정 위로를 받고 싶었다. 동으로 곡성과 순천, 서로 나주, 남으로 보성, 북으로 담양과 광주에 접한 전남 화순은 봄이면 꽃이 참으로 소박하게 핀다. 걷잡을 수 없이 들고일어나 미혹의 지경으로 몰아넣는 꽃불과 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화순의 봄은 더없이 고상하다. 세량지는 새벽마다 물안개를 밀어 올리며 몽환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물가에 핀 벚꽃은 거울처럼 수면을 응시하며 거 기 비친 자신의 모습에 감탄함과 동시에 못내 아쉬워한다. 시 간을 붙들어 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아름다운 모습을 영원히 간직할 방법은 없을까. 그러나 절정의 한때를 넘어서 자마자 가벼운 바람에도 꽃잎을 떨군다. 용두리 지석천변의 벚꽃도 마찬가지다. 용암산과 예성산 사 이를 말발굽처럼 남쪽에서부터 거꾸로 휘돌아 흐르는 지석천 은 화순의 그 어디보다 봄을 먼저 실어온 만큼 꽃을 거둬들이 는 손길도 바쁘다. 도웅리의 복사꽃은 그나마 조금 더 기다려 주었다. 자그마한 산간마을인 도웅리는 다홍빛 복사꽃 구름 속에서 4월을 넘긴다. 절을 품은 공간들도 꽃이 좋다. 특히 쌍봉사를 꼽을 만하다. 이양면 증리의 쌍봉사는 고요하고 아늑한 가운데 한가로이 꽃 을 즐기기에 적당하다. 쌍봉사는 통일신라 48대 경문왕 8년 (868)에 창건한 사찰로 대웅전과 칠감선사부도가 유명한 곳이 다. 대웅전은 탑 형식의 3층으로 이루어진 전각이다. 이런 형 태의 건축은 법주사 팔상전과 쌍봉사 대웅전 2동만 현존하고 있다. 칠감선사부도는 대웅전 뒤편 왼쪽으로 난 대밭을 따라 오르면 있다. 칠감선사는 육두품 이하 향족 출신으로 법호가 쌍봉, 그러니까 이 사찰의 주인이다. 부도는 상륜부가 없어지 고 추녀도 손상됐지만 우리나라 부도 중 최고 걸작으로 꼽힐 만큼 아름답다. 쌍봉사에는 목련이 아름답다. 해탈문을 들어 서기 전 오른쪽 담장 앞에 목련 네댓 그루가 하얀 자태를 뽐낸 다. 경내로 들어서면 벚꽃이 절 마당을 밝힌다. 한낮의 꿈처럼 순식간에 꽃은 사라지고 말지언정, 봄은 새로 돋는 잎들로 더욱 풍성해진다. 사평리 임대정원림의 정자 주 변은 꽃보다 더 빛나는 연초록 수양버들의 물결로 싱그럽기 그지없다. 조선 철종 때 병조참판을 지낸 민주현 선생이 귀향 하여 조성한 이 원림은 아담한 두 개의 연못을 안고 있다. 위쪽 못의 물이 수구를 통해 아래 못으로 흘러든다. 하나로 이어붙일 수도 있었겠으나 억지로 그러지 않았다. 자연을 지 형 그대로 활용하는 조선의 정원 문화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남면의 벽송리 고인돌을 찾아가는 길도 신록이 좋다. 화순 은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고인돌 군락지다. 고 인돌은 전 세계적으로 15만 개 정도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우리나라에서만 10만 개가량 발견되었다. 무려 3분의 2가 우 리나라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고인돌 천지인 우리나라에서 도 전라도 지역이 1만 6000여 개로 가장 많은데, 화순 고인돌 군은 도곡면 효산리와 춘양면 대산리, 남면 벽송리 일대에 집 중 분포해 있다. 동복호 주변으로도 나무들이 푸르다. 특히 옹성산 아래에 는 가수리와 신율리가 있는데 한 번 들러볼 만하다. 두메마 을답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생동하는 봄을 만끽하기 에 부족함이 없다. 그중 가수리에는 독특한 장승 한 쌍이 서 산벚이 흐드러진 용두리 지석천변의 풍경. l 쌍봉사 지장전에서 바라본 풍경. 28 MAY 2013 월간 판전 29
이른 아침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세량지. 30 MAY 2013 월간 판전 31
쌍봉사 철감선사 부도. 석굴암 조각에 견줄만큼 대단한 미감을 지녔다. 또 그 정교함은 비교할 수 없는 으뜸을 보인다. 사라진 상륜부가 남아 있었더 라면 그 모습이 어떠했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남는다.ㅣ세량지에서 화순읍으로 넘어오는 도웅리의 풍경.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쌍봉사 철감선사 부도의 지붕돌에 새겨진 연꽃 막새 문양. 돌에 새겨진 정교함으로 치 자면 고달사지 부도의 땅속에 뭍혀 있던 여 의주 문양과 더불어 나라 안에서 최고로 꼽 힌다. 운주사 와불. 다 만들었지만 일으켜 세우지 못한 채 지금껏 그대로 누워 있다. 몇 해 전 산불로 주위 풍경이 을씨년스럽다. 운주사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 길에 걸린 연 등이 봄날 꽃처럼 아름답다. 있다. 동방대장군과 서방대장군이다. 동방대장군이 남자, 서방대장군이 여자다. 키가 2미터쯤 되는데, 절반을 얼굴이 차지하고 있다. 장승은 한마디로 마을의 초병과 같은 역할을 한다. 액운이 마을로 침입하지 못하도록 밤낮없이 지키고 서 있다. 조선 후기 들어서는 석불이 장승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했다. 화순과 보성을 오가는 대리마을 어귀에 이러한 석불이 있다. 불교와 민간신앙이 습합된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가수리 바로 아래에 자리한 신율리 탑동마을에는 한산사지 삼층석탑이 있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삼층석탑으로 옹성산을 배경 삼아 앉아 있다. 백제 양식을 계승한 석탑으로 언뜻 상륜 부가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유실된 상태고 그 모양이 비슷한 자연석이 올려져 있다. 한산사의 폐사는 뒤로 보이는 옹성산과 연관이 있다고 전한다. 옹성산의 바위틈에서 매일 하루 먹을 분량의 쌀이 나왔다는데, 어느 욕심쟁이가 더 많은 쌀을 받기 위해 그 틈을 크게 벌려놓았다는 것이다. 이에 쌀 대신 빈대가 쏟아졌고, 결국 그 빈대를 잡기 위해 절 에 불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언제나 욕심이 문제다. 일찍이 부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적게 먹고, 음식을 절제하고, 적은 것에 만족하고, 욕심을 부리지 말아라. 욕망 이 사라지면 평화의 고요함이 찾아온다 고 말이다. 연둔리의 숲정이를 지나칠 수는 없다. 숲정이 는 마을 근처 에 우거진 수풀을 일컫는 우리말이다. 동복천을 따라 이 숲정 이가 조성돼 있다. 연둔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지만 이 마을은 아직까지도 옛 지명인 둔동으로 더 많이 불린다. 타지 사람들 에게 땅을 빌려줘 경작하던 둔전 이 있어 갖게 된 이름이다. 연둔리 숲정이는 700미터가량 이어져 있다. 개천의 범람과 바람을 막기 위해 만든 숲정이에는 느티나무, 검팽나무, 왕버 들, 서어나무 등 227그루의 아름드리 나무들이 있다. 어린 나 무들까지 합하면 그보다 훨씬 많다. 마을 사람들은 요즘도 나 무를 심는다. 이제는 생존보다 여유를 위해서다. 숲정이는 이 곳 사람들의 가장 좋은 쉼터다. 숲정이의 그 나무들이 새 옷을 입으며 그늘의 크기를 점점 키워가고 있다. 꽃과 신록으로 들뜬 마음은 운주사를 찾아가는 것으로 차분 히 가라앉힌다. 단 한 기의 불상을 일으켜 세우지 못해 미완의 도장으로 남은 곳이다. 누군들 마침표를 찍고 싶지 않았으랴. 그러나 때론 다 차지 않은 것이 꽉 들어찬 것보다 여유롭고 아 름답다. 운주( 雲 住 ), 구름이 머무는 이곳에는 수많은 부처가 살 아 있다.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표정이 있듯 부처들도 저마다 의 품새가 있고 표정이 있다. 염화미소의 부처가 있는가 하면 무뚝뚝한 부처도 있고, 화난 듯 입꼬리가 내려간 부처도 있다. 석불의 표정은 깨달은 부처가 아니라 깨닫는 과정의 중생을 닮았고 그 얼굴 중 하나는 정말로 나를 닮았다 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운주사로 가는 길은 단순한 여행길이 아니라 나 를 찾아가는 여행 이 된다. 치장 따위는 사치일 뿐이라고 말하 는 듯, 운주사는 있는 그대로 제 몸을 내어 보인다. 굳이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다. 수많은 불상과 탑들은 이끼가 끼면 낀 대로 부스러지면 부스러지는 대로 보수하거나 가꾸기보다 자 연과 더불어 성장하고 또 늙어간다. 천불천탑으로 이름이 알려진 운주사는 그러나 현재 17기의 석탑과 80여 기의 석불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 자체로도 다 32 MAY 2013 월간 판전 33
왼쪽 면 동복면 가수리 마을 어귀의 목장승. 길을 가운데로 동방대장군과 서방대장군이 서 있다.ㅣ동복면 신율리의 한사사지 삼층탑. 오래전 폐사지가된 이곳에 탑은 그대로 서 있다. 마을 이름이 탑동이다.ㅣ벽나리 민불로 더 알려진 대리 석불입상. 화순소방서에서 공설운동장 가는 길 논 가운데에 있다. 남면 벽송리의 고인돌. 화순은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고인돌 군락지다. 현재 면 쌍봉사 지장전의 판관상. 1667년 운혜 스님이 조성했다는 기록이 조성 발원문과 쌍봉사사적기에 기록되어 있다.ㅣ능주면의 죽수절제아문. 조선시대 지방 관청인 녹의당의 정문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른 어떤 도량에 비해 많은 수의 석조물이지만 전설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한 숫자다. 전설로만 치부하기에는 천불천탑은 고 증되어 나타난다. 1481년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이나 1632년 발간된 능주읍지 에는 운주사에 석불과 석탑이 1천 개씩 있 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그 많던 불상과 석탑은 다 어디 로 갔을까? 정유재란과 갖은 재난으로 운주사의 석조물들은 된서리를 맞았다. 부서지고, 훔쳐가고 심지어 광복 후에는 인 근 농가의 주춧돌로 쓰이기도 했다. 천불천탑을 만든 이는 신라 말 실재했던 도선국사라고 하는 데, 명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누가 언제, 어떻게 운주사를 창건하고 천불천탑을 만들었는지 학술적으로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 만큼 운주사는 비밀에 싸여 있다. 어쨌든 운주사는 전설에 따르면 도선국사가 세상의 태평성대를 위하여 하루 동 안 천 개의 탑과 천 개의 불상을 만들었는데, 그 마지막이 와 불이었다고 한다. 조각이 끝난 채 누워 있는 불상만 일으키면 모두 완성이 되는 순간, 멀리서 닭 울음소리가 들려와 끝내 운 주사는 미완의 도량으로 남게 됐다. 지금이라도 그 와불이 일 어선다면 태평성대가 올까. 전설을 따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 자신이 전설의 한복판에 있으며 전설이 살아 숨 쉰다는 것을 느낀다. 또한 와 불이 기적처럼 일어서주었으면 하는 꿈을 꾸게 된다. 그래서 운주사는 마침표가 아닌 쉼표이고, 진행형이다. 운주사의 멋 은 속박당하지 않는 자연스러움에 있다. 어쩌면 천편일률적인 부처의 모습을 보는 이들은 자비로움을 느끼도록 강요당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 운주사는 그런 것이 없다. 그러나 그게 운 주사의 매력이다. 촌스럽고 유치함의 극치. 정형의 틀이 무너 진 파격미. 이것이야말로 서민들의 삶과 유리되지 않았던 당 시의 불교를 말해주는 증거물일 것이다. 귀족들을 위한 그들 만의 종교 가 아니라 서민과 더불어 살아가는 부처, 운주사가 펼치고자 했던 광명이다. 석불과 석탑들은 운주사 내 이곳저곳 아무 데나 널려 있다. 산 중턱에 있는가 하면 큰 바위를 떠받치듯 머리에 이고 있기 도 하다. 석불 앞에는 현세의 사람들이 쌓아놓은 작은 돌탑들 이 보인다. 이 돌탑은 석불과 등가물이다. 현세구복의 목적으 로 볼 때, 부처와 돌탑은 운주사에서 만큼은 동일하다. 운주사의 부처들은 우리의 거울이다. 한없이 자비로운 부처 에서부터 뾰로통한 부처, 들여다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부처 의 얼굴은 바뀐다. 그래서 마음이 편안한 자만이 부처를 안고 돌아간다. 내 얼굴을 찾는 자만이 운주사의 부처가 된다. 김동옥 여행칼럼니스트. 여행하면서 글 쓰고 사진 찍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남 보 기에는 팔자 좋은 길 위에서 노는 사람, 주간 일요신문 레저면을 책임지며 현대기아 차그룹, 아주그룹, 한화건설 등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박보하 사진을 시작한 이후 4회의 개인전과 여러 단체전에 참가했다. 1993년에는 월간 사진예술 에서 올해의 사진가상을 받았고 1999년 영국 여왕이 방한했을 때 영국 측 공 식 전담사진가로 활약한 바 있다. 2000년부터 2007년까지 팔만대장경,초조대장경,화 엄석경의 디지털화 작업을 맡아 진행했다. 잠시 대학 강단에 서기도 했다. 저서로는 산 사의 숨겨진 미학을 사진과 에세이로 보여준 산사의 미를 찾아서 가 있다. 34 MAY 2013 월간 판전 35
마음으로 만난 인연 있으나 없고, 없으나 있는 프랑스 예술가 조르주 루스 French artists Georges Rousse, What doesn't exist while existing, and that does while not 글 한담(시인) 사진 안홍범 다시 한 번 본다는 것의 의미 에 대해 이야기해볼 기회가 생겼다. 몇 달 전 이 문제를 평생의 화두로 삼고 있는 사진가 이갑철(판전 1월 호 마음으로 만난 인연 편)에게 그 생각을 들은 바 있다. 이갑철은 스스로를 비우고 편견이나 상념이라는 의식의 개입을 차단함으로써 대상의 본질을 포착해낸다고 했다. 이번에 만난 이는 특정 지점에 대해 말했다. 방향과 방법에 따라 대상은 달리 보이는데, 그것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는 접점 지대가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그는 프랑스의 설치미술가이자 사진가인 조르주 루스였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세계적 예술가 조르주 루스를 만난 것은 매서운 꽃샘추위가 찾아온 날이었다. 3월 중순 내한한 그는 예술의전당에서 펼쳐 질 그의 전시 <공간 픽션 사진> 展 (4월 15일~5월 25일)를 준비 중이었다. 날씨가 좋지 않은 게 내 탓이 아님에도 나는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한국의 봄이 이렇지만은 않다 고 애써 변명을 했다. 그는 다 이해한다는 투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곧 꽃피는 찬란한 날이 올 거야. 나는 오래도록 머물 것이고. 매사에 긍정적이고 느긋한 조르주 루스는 1947년 파리 태생으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예술가다. 딱히 어떤 분야라고 집어 말하지 않는 이유는 장르를 넘나드는 그 작업의 유연성 때문이다. 그는 건축, 설치, 회화, 사 진을 융합해 자신만의 독보적인 예술 영역을 창조한 인물로 유명하다. 특정 공간 속에서 자신만의 예술 세 계를 구현한 후, 그 결과물을 사진으로 기록한다. 그는 비엔날레 단골 초대 작가이며 프랑스 사진그랑프리 와 미국 국제사진센터 ICP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파리 국립현대미술 관, 루브르박물관, 비엔나 현대미술관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런 그를 기려 지난 2008년 파리 유럽 사진인의 집 에서는 대규모 회고전을 열기도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가 예술가가 되리라고 생각했던 가족이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의사 집 그의 작업은 불교의 공( 空 ) 사상과도 통한다. 비어 있는 동시에 궁극적 실재가 발견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36 MAY 2013 월간 판전 37
안에서 태어났고 자신도 의대에 진학했다. 망치와 붓과 카메라 대신 메스와 청진기를 들고 있어야 정상인 사람이다. 그가 가족에게 예술을 할 것이라고 말하자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다. 미쳤니? 동서고금을 불문 하고 이 반응이 정상이다. 이제 60을 훌쩍 넘긴 조르주 루스에게도 당신의 자식이 그런 소리를 한다면 뭐 라고 할 거냐? 고 물었더니 자신의 답도 같을 것이란다. 그러면서 그는 아쉽다고 했다. 일찌감치 아들 녀 석이 음악을 시작해서 그 말을 못해봤지 뭐야. 그가 일차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벽이나 캔버스가 아니라 바로 대형 카메라 의 뷰파인더다. 이는 이것을 바탕으로 여러 벽이나 설치물 등을 수도 없이 왕복 하면서 그림의 조각들을 배치하고 색을 입힌다. 사라지는 작품, 영원히 남는 사진 조르주 루스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작업 과정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낡고 버려진 장소를 물색하는 것으로부터 작업을 시작한다. 그는 1981년 데뷔 이래로 지난 30여 년 동안 세계 60여 개 국의 다양한 도시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일단 작품의 무대가 결정되면 그는 그곳에 그릴 그림을 구상 한다. 여기까지는 특별할 것이 없다. 주목할 부분은 그 다음이다. 그가 일차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벽 이나 캔버스가 아니라 바로 대형 카메라의 뷰파인더다. 이는 이것을 바탕으로 여러 벽이나 설치물 등을 수 도 없이 왕복하면서 그림의 조각들을 배치하고 색을 입힌다. 아무렇게나 선을 긋는 것 같지만 모든 작업을 마쳤을 때, 놀랍게도 그것은 완전한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난다. 부분의 해체가 전체의 완성을 가져오는 아 이러니를 낳는 셈이다. 일반적으로 그림은 평면성을 띠는 법이다. 그렇지만 위의 절차를 통해 그의 그림은 입체성을 획득한다. 하나의 공간 속에 또 하나의 공간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작품을 카메라 파인더 속 공간에 또 다른 공간을 창조하는 그의 작품은 2차원이 3차원으로 다시 2차원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반복한다. 사진에 담음으로써 기꺼이 무대가 되어준 장소를 기록해둔다. 이를 끝으로 마침내 2차원이어야 할 그림이 3차원으로 승화하고, 3차원이었던 그림과 공간이 다시 2차원의 사진이 되는 모든 작업이 끝난다. 그런데 설치로서의 작품은 생명력이 그리 길지 않다. 건물의 철거와 함께 그의 작품은 산산이 부서진다. 아쉽지 않을까. 그는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전혀. 왜냐하면 나는 어떤 공간도 소유할 마음이 없 기 때문이지. 세상의 버려진 모든 공간은 내 작품의 장소인 동시에 아틀리에라고 여길 뿐이야. 내 작품은 그곳을 기억하는 나만의 방식이고 말이야. 그리고 사진으로 찍었으니 비록 건물이 사라지긴 했어도 작품 은 영원히 남게 된 것 아닐까. 웃자는 말이지만 버려진 건물은 내가 살 수도 없는 데잖아. 작품을 이해하는 두 개의 열쇠 이쯤 되면 그의 작품을 어떻게 감상해야 할지 알 수 있을 터다. 시야각이 넓다고 자랑하는 평판 TV라면 어 디에서 봐도 또렷한 영상을 비추겠지만, 그의 작품은 반드시 감상 지점이 따로 정해져 있다. 거기를 벗어 나면 선과 면과 색이 삽시간에 분리되어서 공중이며 벽이며 바닥을 떠돈다. 그러므로 그가 작품을 만들 때 의 시점을 찾아내야만 한다. 앞 뒤 좌우상하로 움직이다 보면 대상이 일그러짐 없이 완전체로 드러나는 곳 이 있다. 이것은 그가 관람객에게 제시한 일종의 놀이다. 있지만 없는 것, 없지만 있는 것을 찾아내는 흥미 진진한 놀이, 이는 불교의 공( 空 ) 사상과도 통한다. 비어 있는 동시에 궁극적 실재가 발견된다는 점에서 그 렇다. 누구도 시도한 바 없는 작업이지만, 조르주 루스는 스스로 리차드 롱, 해미시 풀턴, 월터 드 마리아, 말래 비치 등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말래비치는 큐비즘(대상을 입체적으로 나누어 재구성하는 양식)의 대 가이고, 리차드 롱, 해미시 풀턴, 월터 드 마리아는 대지( 大 地 )를 이용한 예술의 선구자들이다. 그가 나열 한 이들의 특징이 작품에서 보이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누구로부터도 자유롭고 독창적 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의 작품 속에서 명징한 이미지를 찾아내는 것만으로 다 된 것일까 하는 의문이다. 단순히 똑바로 보는 데 집착한 나머지 단지 그 속에서 어떤 글자나 도형을 발견했노라고 마 냥 기뻐한 것은 아닌가 싶었다. 한층 더 깊이 들어가야 진정 그의 작품을 이해했노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안 의 기호에 대해서 생각을 닫아버린다면 그것은 분명 작가와의 접점에 완전히 성공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 의 작품에는 특히 도형이 자주 등장한다. 그것들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걸까. 그는 특정 장소에 가 면 그곳에 어울리는 이미지들이 떠오르는데, 그것을 기호화한 것으로 는 상승, 열망 는 안정, 땅 는 본질, 집중 등을 의미한다 고 귀띔했다. 조르주 루스는 한국 전시 이후 프랑스, 독일, 멕시코, 칠레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할 예정에 있다. 각 나라 에서 특별히 염두에 두고 있는 곳은 없다. 버려진 공간이 있다면 거기를 아틀리에 삼을 생각이다. 그리고 다시금 관객들과 즐거운 놀이를 벌일 것이다. 참, 올봄 꽃이 좋았다. 먼 이국땅에서 독한 꽃샘추위를 맛보았지만, 그걸 잊게 만들었을 아름다운 봄도 누 렸으리라 생각하니 그에 대한 미안함이 조금은 가신다. 다행이다. 38 MAY 2013 월간 판전 39
한국의 불탑 처음 세운 돌탑 The first stone pagoda built at Iksan area 글 소재구(국립문화재연구소) 사진 Studio 711 공든 탑이면 뭐하나. 공들여 쌓은 만큼 공들여 지켜도 전쟁에 무너지고 화재에 잿더미가 되니. 공든 탑도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더구나 목탑은 나무 값, 목수 값, 단청 값, 벽화 값, 기와 값 등 경비가 엄청나게 드는 공사였다. 그렇게 물질과 정성을 바쳐 탑을 지었어도 허망하게 무너지니 전쟁에도 화재에도 끄떡없는 견고한 탑을 세우고픈 열망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방법은 하나. 불에 타지 않고 견고해 무너지지 않는 재료로 탑을 쌓는 것이다. 돌탑을 쌓는 일이었다. 천지에 널린 게 돌이었다. 과거로부터 돌로 고인돌도 만들고 선돌도 세웠으며 길마다, 동구 밖마다 서낭당 옆에 돌무더기 탑도 만들어보았다. 돌 다루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민족이니 잘하면 돌탑 쌓는 일은 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연장이 필요했다. 예전에 그 육중한 고인돌도 들어 올려 고이는 기술도 마스터했는데 그때는 자연석으로 고임돌 도 놓고 덮개돌도 놓았을 뿐 돌을 자르고 다듬을 줄은 몰랐다. 청동기시대에는 약한 청동기로는 도저히 돌을 다룰 수 있는 연장을 만들 수 없었던 것이다. 불교가 들어온 뒤로는 시대가 달라지고 새로운 문명이 들어 왔다. 지금은 철기시대다. 돌을 깨뜨리고 다듬는 쇠망치와 정 을 만드는 것이 가능해졌다. 중국으로부터 연장 만드는 법, 돌 을 깨뜨리고 예술적으로 다듬는 법도 배워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수입 연장과 수입 기술로 우리의 돌 을 쳐보니 돌이 깨지는 것이 아니라 연장이 돌에 맞아 날아가 는 것이 아닌가. 실수였다. 우리의 돌은 중국 돌과는 성질이 달랐다. 중국에서 석굴사원을 뚫고 불상을 다듬는 돌은 물속 에서 모래가 굳어져 형성된 보드라운 사암이었지만 우리의 돌 은 화산이 분출할 때 용암이 지하에서 굳은 강도 높은 화강암 이었다. 보드라운 중국 돌에 쓰이는 연장으로 거친 화강암을 공격했으니 연장이 부러지고 날아갈 수밖에. 어려웠다. 석탑 만드는 작업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굳 센 연장을 만들어야 했다. 시험에 시험을 거치면서 최대한의 강도로 철을 단련해 연장을 만드는 기술과 석재를 다듬어 조 립하는 기술을 개발해냈다. 얼마나 걸렸을까. 화강암을 다룰 수 있는 기술과 거기에 알맞은 연장이 나오기까지는 무려 200 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이제 산에서 돌을 알맞게 잘라 운반해 오기만 하면 된다. 운 반할 수 있는 크기로 돌을 끊어야 하는데 이를 어쩐다. 머리를 썼다. 우선 운반할 수 있는 크기로 금을 그어놓고 일정한 간 격으로 암석 위에 홈을 팠다. 그리고 거기에 나무 말뚝을 박고 매일매일 말뚝에 물을 주었다. 말뚝이 물을 먹어 퉁퉁 불어 오 르더니 마침내 그 힘에 못 이겨 돌이 쩍 갈라지는 것이다. 가져온 돌덩이를 설계 도면대로 다듬어 탑의 부재를 만들었다. 탑이라고는 목탑밖에 본 적이 없으니 목탑의 부재와 똑같이 석재를 다듬어 쌓아 올렸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역사상 처음 90년대에 촬영한 사진이다. 백제 탑의 원형을 보여주는 탑이다. 40 MAY 2013 월간 판전 41
오른쪽 면 미륵사지동원구층석탑. 미륵사지 동쪽의 또 다른 탑이 있던 자리에 새로이 복원된 석탑이다. 1991년에 시작되어 1993년에 완공되었다. 해체 복원 중인 미륵사지석탑과는 다른 탑이다.ㅣ 미륵사지석탑. 우리나라 최고의 석탑이다.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함께 백제계 탑의 원형을 보여 준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는 탑으로 현재는 해체 복원 중이다. 으로 석탑이 탄생했다. 누가 처음 만들었는가. 백제 사람들이 었다. 백제 땅에서도 질 좋은 화강암이 많이 나오는 그곳은 전 라북도 익산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은 익산 미륵 사에 세워진 것이다. 이 석탑의 형태는 나무기둥에 기와지붕을 올린 과거의 목탑 과 너무도 비슷하다. 그중에서도 법주사 팔상전과 많이 닮아 있다. 지금은 오랜 세월에 못 이겨 한쪽이 무너져버렸지만 그 래도 우리의 석탑 중에서는 가장 오래되고 또 가장 규모가 큰 석탑으로 남아 있다. 전쟁에도 화재에도 홍수에도 끄떡없이 견뎌온 석탑, 그 염원이 성취된 것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이 석탑에 벼락이 떨어지면서 탑 한쪽이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무너진 채로 일제강점기까지 버텨왔 다. 1917년 일제는 이 탑을 수리했다. 그런데 당시 공사를 감 독한 익산군청 관리가 공사비를 떼먹고 탑의 부서진 쪽을 복 원하지 않은 채 시멘트로 발라버렸다. 그 관리는 바로 파면되었다. 그 후로 다시 87년이 지난 뒤에 야 우리는 비로소 이 석탑의 완전 복원에 착수하게 되었고 이 로부터 22년이 지난 후 마지막 1층 탑신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백제 무왕 때 이 석탑이 만들어졌다는 기록과 함께 눈부신 사 리장엄구가 발견되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백제인의 우직하고 투박스 러운 손맛을 제대로 살리면서도 능란한 솜씨와 저 역동적인 자태로 탑을 복원할 수 있을지, 당시의 백제 석공은 저리도 투 박하게 석재를 주물렀음에도 멋지고 우람하고 당당한 탑을 조 성했으니 그는 목조 건축에도 석탑 건축에도 도가 튼 귀재임 에 틀림없다. 요절한 백제 석탑, 망국의 한을 새기고 한 번 돌탑을 쌓아 성공하더니 순식간에 희열에 찬 석공의 손 에 신기가 붙었다. 돌을 분질러 우지끈 뚝딱 척척 쌓아도 그 거칠고 우람한 자태에 생명의 핏줄이 돋는 듯하더니 이제 세 련된 맵시에 정세한 재주를 더하매 이리도 말쑥해지고 아름다 운 탑이 되었다. 초층 탑신은 맏형처럼 듬직하고 2층 이상은 어여쁜 누이동 생들처럼 옹기종기 오라버니의 넓은 등에 업혔다. 평사낙안 기러기처럼 너른 지붕은 넉넉하고 한가로운 정경, 지붕 끝마 다 드러난 추임새는 어느 여인이 진양조 느린 가락으로 춤을 추다가 불현듯 손끝을 튀기는 악센트, 위층으로 오를수록 지 붕은 넓고 몸뚱이는 가냘퍼 저 꼭대기의 긴장은 아름답다 못 해 애틋하고 속이 타들어간다. 아, 미치도록 내 발길을 붙드는 백제의 탑이여, 그대는 어쩌자고 남의 나라에 짓밟혀 젊은 나 이로 요절했느뇨. 높이 11미터가 넘는 거대한 탑, 아파트 3층보다도 더 높은 탑 을, 그것도 돌탑으로 지으려 했던 백제의 석공. 그동안 그 누 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돌탑을 처음부터 저리도 거대하게 지 으려 했던 야망과 부처님을 향한 헌신의 정성, 당시 백제 사람 들은 저 미륵사 탑을 짓는 석공을 보고 미쳤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1300년 기나긴 세월이 흐른 뒤에도 우리에게 국보로 대접받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위대한 돌탑을 남겨주 었다. 어떤 목탑은 촛불 하나에 사라졌지만 이 석탑은 수만 개 의 촛불보다 수만 배나 무서운 번개를 맞고도 오늘날까지 존 재하고 있는 것이다. 익산에서의 돌탑의 출현은 백제의 왕도 부여에서는 충격적 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감히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도 시 도해보지 못한 새로운 탑의 패션을 익산의 미술대학에서 먼저 선을 보인 셈이나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부여의 석공들은 자 존심을 걸고 석탑 공부를 연마하였을 것이다. 적어도 미륵사 탑을 능가하는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여야 했다. 백제의 왕도 부여의 자존심이 걸린 석탑 설계 경기의 한 판 승부가 시작된 것이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이런 분위기에서 탄생되었을 것 이다. 왕도 한가운데 국찰 정림사를 짓고 백제 역사상 가장 멋 드러진 석탑을 세웠으니, 석탑을 자세히 보면 각 부분의 석재 를 자로 잰 듯, 대패로 깎은 듯 매끈하게 다듬고 기둥은 양 끝 에 하나씩 딱 두 개만 올렸는데 기둥 아래가 넓고 위가 좁아 안정감 있는 형국을 취했다. 처마 밑의 처리 또한 새로운 디자 인으로 깔끔하게 석재를 짜 맞추고 지붕은 새의 날개처럼 여 유롭다. 그러나 마냥 여유로우면 재미없는 법. 그래서 처마 끝 을 귀솟음 기법으로 마감했으니 그 감칠맛이 살아 있다. 뿐만 아니라 위층으로 오를수록 몸집은 적고 지붕은 넓어 그 균형 감각과 긴장감이 한데 어우러져 도무지 보는 이의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돌아서려는 사람을 다시 붙잡는 마력이 있다. 탑의 규모는 미륵사 탑보다 작아졌지만 그 디자인은 실로 탁 월하다. 사실 미륵사 탑은 최초의 석탑이긴 하나 목탑의 모방 작이다. 그러나 이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그야말로 창조작이 다. 이렇듯 높은 수준의 작품이 어찌 나올 수 있었는지. 백제 인의 미의식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백제는 시절을 잘못 만나 요절하고 말았다. 서기 660 년 음력 8월 오곡은 무르익고 백성들은 풍요로운 수확을 꿈꾸 고 있을 때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의자왕 은 궁성을 빠져나와 6일 동안 피신했지만 결국 백관을 거느리 고 나와 당나라 장수 소정방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때 의자왕과 함께 항복한 신하 중에는 흑치상지( 黑 齒 商 之 ) 란 인물이 있었다. 흑치상지는 포로가 된 후 일주일 만에 부여 를 탈출했다. 그리고 임존성에서 다시 거병하여 백제 부흥을 위한 저항운동을 개시했다. 이때 흑치상지를 따른 무리가 무 려 3만여 명. 당나라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잘못했다가는 백 제의 점령이 유야무야 될 판이었다. 마치 이라크의 민병대 저 항에 부딪힌 어느 점령국처럼. 당나라는 머리를 굴렸다. 얼른 전쟁이 종결되고 백제가 점령되었음을 만방에 선포해서 백제 인의 동요를 막아야 했다. 그리하여 강대국 당나라는 다시 한 번 비열한 행위를 저질렀 다. 백제의 국보인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1층 탑신을 뺑 둘러 가며 <당평백재국비명( 唐 平 百 濟 國 碑 銘 )>을 새겨버린 것이다. 위대한 당나라가 백제국을 평정했다는 내용이다. 이리하여 백 제의 국보 정림사 탑에는 적국이 새겨놓은 글씨로 가장 탄탄 한 1층 탑신이 곰보처럼 상처를 입은 채 오늘날까지 그 자리에 서 있다. 한때는 처량했을지언정 이 나라 역사와 후손들은 정녕 나를 알아줄 것이라 예감하고 의연히 서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망 국의 한이 맺혀 저리도 꼼짝 않고 서 있었던 것일까. 돌도 응 당 할 말이 있으련만. 42 MAY 2013 월간 판전 43
현진오의 우리 땅 우리 꽃 여행 17 현재 면 솔체꽃 Scabiosa tschiliensis Grung 산토끼꽃과 강원도, 충청북도, 경상북도, 제주도 및 북부지방에 자라는 두해살이풀이다. 늦여름부터 꽃이 피며, 보 통 고산에 자라지만 석회암 지대에서는 저지대에도 자란다. 황금 Scutellaria baicalensis Georgi 꿀풀과 북방계 여러해살이풀로 남한에서는 동강과 단양 석 회암 지대에서 야생한다. 8~9월에 아름다운 꽃이 핀다. 돌단풍 Mukdenia rosii (Oliv.) Koidz. 범의귀과 잎이 단풍나무 잎을 닮아서 우리말 이름이 붙여진 여러해살이풀로 동강의 바위 겉에 흔하게 자란다. 이른 봄에 꽃이 핀다. 층층둥굴레 Polygonatum stenophyllum Maxim. 백합과 동강에서 대규모 자생지가 발견된 북방계 여러해살 이풀로 꽃은 5월 하순부터 피기 시작한다. 강변 모래 땅에 자라며, 키가 100cm에 이른다. 환경부 지정 멸 종 위기 야생생물이다. 동강, 댐 건설 막은 귀한 산들꽃들의 보금자리 Donggang river, the precious nest of wildflowers that stopped the dam construction Jeongseon, Pyeongchang, and Yeongwol-gun in Gangwon-do 글/사진 현진오(동북아식물연구소장) 강원도 정선군 평창군 영월군 댐을 지을 것인가 말 것인가 라는 문제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동강은 강원도 정선군, 평창군, 영월군에 걸쳐 흐르는 길이 40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강으로 남한강 상류에 해당한다. 영월에서 서강을 만나 남한강이 된 후 계속 흘러 경기도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합쳐져 한강이 된다. 댐 건설 백지화 이후 동강의 수많은 희귀 동식물을 보전하기 위해 정부는 이곳을 생태경관 보전 지역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동강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은 것은 1997년 무렵이 다. 숨어 있는 강 이던 동강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정부가 이곳에 물을 6억 톤쯤 저장할 수 있는 대형 댐을 짓겠다고 발 표한 후부터였다. 이처럼 큰 댐을 한강 상류에 지으려는 계획 이 알려지자 환경단체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곳 생태계 에 대한 학술조사가 진행되었다. 학자들은 동강 곳곳을 조사하며 놀라운 사실들을 밝혀냈다. 그동안 한반도에서 멸종한 것으로 알려졌던 여러 동물과 식물 이 다시 발견되었고, 세계 어느 곳에서도 발견된 적이 없거나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발견되지 않은 생물들도 새로 확인되었 다. 굽이쳐 흐르는 강과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만들어내는 아 름다운 경치가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물을 확보하기 위해 댐을 지어야 한다 는 찬성파와 생태계 훼손이 심하기 때문에 안 된다 는 반대파로 나뉘어 4년 동안 벌어졌던 논쟁은 2000년에 드디어 막을 내렸다. 그해 환경의 날 대통령은 동강의 동식물 생태계를 보전하기 위해 댐을 건 설하지 않을 것 이라고 발표한 것이다. 이후 환경부는 이 지역을 생태 경관 보전 지역으로 지정해 희귀 동식물을 보호하고 있다. 댐을 지으면 안 될 정도로 중요 한 동강의 생물들은 과연 무엇일까? 동물부터 살펴보면 동강 에는 하늘다람쥐, 대륙목도리담비, 수달 등 포유류가 42종류 나 살고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포유류의 80퍼센트에 이르는 것으로 지리산, 설악산보다도 많은 숫자다. 또한 원앙, 새홀 리기, 파랑새 같은 희귀한 새들이 번식한다. 철새로만 알려졌 던 비오리가 남한에서 번식하는 사실이 이곳에서 처음 밝혀지 고, 대형 맹금류인 검독수리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번식하 는 장소라는 것도 밝혀졌다. 양서류와 파충류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사는 곳도 동강이다. 천연기념물 어름치가 무리 지 어 사는 등 이곳에 사는 민물고기들은 우리나라 특산종의 50 퍼센트에 이른다. 식물을 살펴보면 동강 생태계의 중요성을 더욱 실감할 수 있 다. 한마디로 동강의 식물은 수수께끼 같다. 그 첫 번째 식 물은 동강할미꽃이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동강에서 처음 발견되었는데, 동강댐 건설을 막은 대표적인 생물이다. 동강 바위틈에서 꽃을 피운 이 식물을 만났을 때 식물학자들 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꽃이 하늘을 향해 피고, 꽃 색깔은 분홍색에 가까웠는데 세상 어디에도 없는 할 미꽃 종류였기 때문이다. 연구 결과 이 식물은 세계적으로 우 리나라에만 자라는 한국 특산식물로 밝혀졌다. 후에 동강할미꽃이 사는 동강 절벽에서 또 하나의 신종이 발 견되었는데, 동강고랭이가 그것이다. 이 식물 역시 세계적으 로 우리나라에만 사는 특산식물로 기록되었으며, 최근에는 정 선, 단양 등지에서도 발견되었다. 동강에서 발견된 나무 가운 데도 특별한 것이 있는데, 향나무가 그것이다. 향나무는 집에 서 심어 기르기 때문에 그리 낯설지 않아 흔한 나무처럼 생각 되지만 이 나무가 저절로 자라는 곳, 즉 자생지는 남북한을 통 틀어 울릉도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 내륙 동강에서 자생 향나무 500여 그루가 발견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44 MAY 2013 월간 판전 45
왼쪽 면 동강할미꽃 Pulsatilla tongkangensis Y. N. Lee & T. C. Lee 미나리아재비과 동강의 바위틈에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동강에 서 처음 발견되었으며,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만 사는 특산식물이다. 꽃은 4월 초순에 핀다. 병아리풀 Polygala tatarinowii Regel 원지과 석회암 지대에서 드물게 볼 수 있는 한해살이풀 로 가을에 꽃이 핀다. 현재 면 뻐꾹채 Rhaponticum uniflorum (L.) DC. 국화과 석회암 지대에서 비교적 흔하게 자라는 여러해살 이풀로 5-6월에 머리모양꽃 한 개가 달린다. 자주쓴풀 Swertia pseudochensis H. Hara 용담과 전국의 산과 들에 자라는 두해살이풀로 동강 일대의 산과 들에 흔하며 뿌리가 쓴맛이 나 므로 쓴풀이라 한다. 가을에 꽃이 핀다. 층층둥굴레라는 희귀식물의 발견도 동강 생태계가 수수께끼 같은 곳임을 증명한다. 남한에서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던 이 식물이 동강에서는 큰 무리를 지어 자라는 게 확인되었다. 이밖에도 동강에서는 비술나무, 꼬리진달래, 털댕강나무 등 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면적으로 자라고 있다. 또한 법으 로 보호받고 있는 개병풍, 개불알꽃, 백부자를 비롯해 세계에 서 우리나라에만 자라는 노랑갈퀴, 세잎승마, 참골담초, 참좁 쌀풀, 한국사철란, 그리고 멸종 위기 또는 희귀식물이라 할 수 있는 고비고사리, 빗살서덜취, 사창분취, 솔체꽃, 청부싯깃고 사리, 큰제비고깔, 황금, 회목나무 등이 생육하고 있다. 동강에 살고 있는 식물의 숫자는 950여 종류에 이른다. 이는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내장산, 북한산, 계룡 산, 속리산, 오대산 등의 식물 숫자보다 더 많다. 이것은 동강 에 사는 식물의 종류가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매우 많다는 것 을 증명하는 것으로써, 이것만 보더라도 동강 생태계가 얼마 나 귀중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동강이 이처럼 많은 희귀식물을 간직하게 된 이유는 먼저 동 강 일대가 대부분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지질구조를 갖고 있어 이런 지역에만 자라는 특별한 식물이 많기 때문이다. 충청북 도, 강원도 일대의 석회암 지대에 북방계 식물들이 많이 자란 다는 특징도 동강에 수수께끼 같은 식물들이 살아가는 한 이 유가 된다. 동강에 자라는 식물 가운데 석회암 지대라는 점과 연관지어 볼 수 있는 것으로는 개부처손, 개버무리, 개아마, 금털고사리, 꼭지연잎꿩의다리, 대극, 마키노국화, 병아리풀, 뻐꾹채, 시베리아살구, 자주쓴풀, 털댕강나무, 큰제비고깔 등 을 들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호석회식물의 90퍼센 트에 이른다. 다음은 사람들 간섭이 없는 상태에서 오랫동안 고립된 채로 고유한 환경을 유지하며 보존되어 왔기 때문이 다. 지질학자들에 따르면 동강은 4~5억 년쯤 전 고생대에 바 다가 육지로 변한 곳이라고 한다. 깎아지른 절벽에 구불구불 흐르는 독특한 지형 때문에 탄생 이후 오랫동안 외부와 차단된 채 식물들이 독특한 변화를 가 능케 하는 여건이 마련됐던 것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바닷가 식물과 비슷하지만 다른 특징을 보이는 식물들이 자랄 수 있 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봄철의 동강 식물 탐사는 마을 주변 저지대와 석회암이 드러 난 곳 가운데 해가 잘 드는 곳을 찾아가야 한다. 동강의 중심 에 자리 잡은 문희마을에서 칠족령까지 올라가 보거나, 진탄 나루에서 문산나루까지 강변을 따라 걷거나, 평창군의 고마루 일대를 탐사하거나, 정선군 광하교에서 고성산성까지 구간을 나누어 걸어가며 강변의 식물을 관찰하면 좋다. 이즈음 동강에서는 동강할미꽃을 시작으로 돌단풍, 동강고 랭이, 산민들레 같은 봄꽃들이 꽃을 피운다. 동강 절벽에 무리 지어 자라는 떨기나무 회양목도 봄볕이 들자마자 꽃을 피운 다. 잎이 채 나기도 전에 꽃을 피우는 비술나무는 꽃이 화려하 지 않기 때문에 놓치기 십상인데, 북부지방에서는 두만강이나 압록강 변에서는 흔하게 자라지만 남한에서는 드문 큰키나무 다. 생물 다양성을 보전하기 위해 댐을 짓지 않기로 한 동강이 오래도록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현진오 동아식물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산과 들에 피어나는 아름다운 우리꽃 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식물 전도사로서 이를 위해 꽃산행 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 서 동북아식물연구소의 생태여행을 이끌고 있기도 하다. 식물분류학을 전공했고, 이 학박사학위를 멸종위기식물 연구로 받은 후 현재는 멸종위기종 연구에 몰두하고 있 는 보전생물학자다. 봄에 피는 우리꽃 386 등 20여 권의 저서가 있다. http://www. koreanplant.info 46 MAY 2013 월간 판전 47
정관 스님의 사찰음식 이야기 느티떡과 산나물찌개 초파일이면 절로 떠오르는 행복한 추억들 Happy memories floating naturally on every Buddha s Birthday Rice cake made with leaves of Zelkova, and Stew made with wild edible greens 느티나무와 느티떡 은행나무와 함께 시골 동구 밖에 정자나무로 흔히 볼 수 있는 느티나무는 우리나라의 명목( 名 木 )으로도 으뜸 에 속하는 나무다. 예로부터 초파일이면 봄철에 올라오는 느타나무 새순을 이용해 느티떡과 미나리강회 콩조림 등을 준비해 마을 사람들과 함께 먹는 풍속이 있었다. 글 한차현(소설가) 사진 Studio 711 예전에는 마을마다 당산나무가 있었잖아요. 마을 어귀에 딱 서서 나쁜 기운으로부터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같 은 나무. 마을 사람들이 마을 밖으로 나설 때면 당산나무에 절을 하고, 마을로 돌아올 때도 절을 하곤 했지요. 당 산나무가 주로 느티나무였잖아요. 그래서 4월 초파일이 되면 이 느티나무 잎으로 떡을 만들곤 했답니다. 어려웠던 시절에 신도들이 공양미라고 부처님에게 바치던 모습. 그 정성이 얼마나 갸륵해요. 스님들은 귀한 공 양미를 최대한 아껴 사원 경제를 꾸려가고, 그렇게 겨울 보내고 초파일이 다가오면 남은 쌀로 떡을 만들어 나누 었던 거지요. 초파일 즈음이면 쌀이 얼마나 귀할 때인가요. 이때 떡을 지어서 시주하신 분들에 베풀고 회향하는 마음이었지요. 느티나무 꽃이 피기 전에 따야 해요. 잎의 섬유질이 강해지면 독성이 생기고 먹기도 좋지 않으니까. 초파일 앞 둔 이 시기가 딱 적당하지요. 뾰족뾰족 나오는 잎들을 적당히 따서 떡을 만들어볼게요. 어린 느티나무 잎이 씹어 보면 아무 맛도 안 나지만 떡으로 찌면 은은한 향기가 나죠. 순하고 부드러운 게 이상하게 입에 착 감기는 그런 맛이에요. 갓 빻은 떡가루를 채 쳐서 입자를 곱게 해주세요. 그래야 떡이 더 고슬고슬 부드러워지거든요. 여기에 다듬은 느티나무 잎을 잘 섞어줍니다. 간은 소금간만 조금 할게요. 고려시대부터 전해진 음식인데, 요즘은 느티떡 하는 절이 거의 없더라고요. 저도 한 10년 전부터 문헌을 찾아서 다시 만들어본 것인데, 신도들 반응이 참 좋아요. 처 음에는 이게 무슨 떡이냐 며 신기해하다가, 요즘은 초파일 돌아오면 이 떡이 가장 먼저 생각나신대요. 이 잎이요? 며칠 전에 창원 성주사에 갔을 때, 명부전 앞에 선 느티나무 세 그루에 올라가서 손수 땄어요. 그럼 요, 직접 올라갔죠. 내가 나무를 얼마나 잘 탄다고. 원숭이 띠니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지만 원 숭이띠는 절대 안 떨어지거든요. 비빔밥 미각의 색다른 화룡점정, 미역튀김 가루 초파일 되면 또 대중공양 할 때 특히 있기 있는 메뉴가 비빔밥이었지요. 들어가는 재료는 직접 기른 콩나물과 미 나리, 햇고사리와 말려놓은 도라지 그리고 묵은 김치. 묵은 김치는 물에 담가서 짠 기를 빼고 꼭 짜서 들기름에 볶아요. 아삭아삭 씹는 맛이 특히 좋죠. 비빔밥이라는 음식이 의미가 참 각별하지요. 저마다 다른 맛, 다른 기운을 가진 재료들이 한데 섞여 하나의 조 화된 맛을 내는 게 비빔밥이잖아요. 서로 다른 것들이 한데 모여 같은 마음을 내는, 말하자면 화합의 의미니까. 동화사 양진암에 있을 때, 초파일이면 준비하는 성연 노스님 표 비빔밥에는 뭔가 각별한 게 있었답니다. 위의 48 MAY 2013 월간 판전 49
정관 스님 사찰음식 전문가로 조계종 문화사업단 향적세계에서 전통사찰음식 강의를 하고 있다. 대구 홍련암 산사 음식관 관장 을 역임했으며 각종 방송사 및 음식 전문 채널(BBS 맛있는 절밥 코너 출연)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전통사찰음식을 널리 알리고 있 다. 현재 삼척 신흥사 주지 소임을 맏고 있다. 한차현 소설가. 북한산 가까운 서울 구석 동네에서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취미로 삶을 풀어가는 방식으로 다독이며 아내, 딸과 살고 있다. 1998년 장편소설 괴력들 로 등단한 뒤 사랑 그 녀석, 변신, 여관, 영광전당포 살인사건 등 장편소설 사랑이라니, 여 름 씨는 미친 게 아닐까, 대답해 미친 게 아니라고 등의 단편집을 펴냈다. 다섯 가지 재료와 더불어, 특별한 게 하나 더 들어갔거든요. 바로 미역 가루였지요. 바닷가라서 미역이며 다시마 파래 김 같은 해초들을 많이 접했지요. 정월 보름에 해제하고 미역 값이 쌀 때쯤, 기장에 나가서 미역을 한 포대 사 와요. 그걸 소금기 없도록 잘 씻고 널어 말려서 보관해두었다가, 초파일 앞두고는 꺼내서 튀각을 만듭니다. 양이 상당하니까 절 뒷마당 같은 데 가마솥을 걸고 바삭하게 튀기는 거예요. 그 미역튀각을 그대로 먹는 게 아 니라, 절구에 넣고 미역의 형태가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곱게 가루를 만들어 비빔밥에 한 숟가락씩 넣어서 공양 했죠. 찬 성질을 가진 야채들만 들어가는 비빔밥에, 기름기 먹은 미역 가루를 더해 균형을 맞추었던 거죠. 그 비 빔밥,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소했어요. 절집 나물은 매운 양념이 들어가면 맛이 감해지거든요. 풋나물이 들어갈 때나 고추장을 쓰고, 그런 나물 비빔밥에는 고추장 대신 집간장으로 간을 했어요. 거기에 미역 가루로 고소하고 짭짤하며 담백한 맛을 더한 거죠. 나물만으로는 모자라는 맛과 영양을 미역튀각 가루로 보충해주는 지혜. 성연 노스님이 직접 고안하고 개발한 조리법이었지요. 음식 하나도 그냥 관성으로 만 들지 않고 어떻게 하면 더 맛있게 더 몸에 좋게 연구하는 자세에서 그런 기막힌 아이디어가 나왔을 겁니다. 인간아, 그만 투덜대고 참이나 해 와라 참취와 두릅나무 새순. 정월대보름 지나고 초파일까지 3개월 동안, 절집은 연꽃등을 만드느라 손이 쉴 새가 없어요. 요즘에야 기성품을 구입하는 경우가 흔하지만 예전만 해도 철사로 등살을 만들고 습자지에 직접 분홍 물을 들이고 재단하고 해서 팔모등을 만들었잖아요. 그런데 제가 연등 만드는 일은 정말로 하기가 싫었어요. 자꾸 꾀가 나더라고요. 그래서 연등 만드는 시간이면 내내 투덜대곤 했지요. 그러고 있으면 노스님이 혀를 끌끌 차면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인간아, 그만 투덜대고 나가서 참이나 좀 해 와라. 그러면 저는 신이 나서 공양간으로 달려갔지요. 음식 만들어 먹이는 일이야 언제 해도 즐거운 일이니까. 초파 일 앞둔 4월 초. 들로 산으로 나가면 먹을 게 얼마나 많아요. 일단 염불암 뒤로 올라가면 산취가 막 올라오곤 했 지요. 그걸 한 바구니 뜯고, 두릅도 보이면 캐고, 방아나물도 뜯고, 산으로 더 올라가면 고개를 내민 햇고사리도 뜯고. 돌아와서는 겨우내 말려둔 호박고지와 가지를 물에 불려요. 그럼 별식 재료들이 뚝딱 장만되는 거예요. 먼저 맛국물을 내야죠. 표고버섯과 가죽나물 말려놓은 것을 끓이면 구수한 맛이 참 좋아요. 뜯어온 풋나물 중 에서 취나물과 고사리는 데쳐서 들기름과 간장에 무쳐요. 가지 말린 것과 호박 말린 것도 들기름과 간장에 무치 고요. 나물을 무칠 때, 손바닥 가운데에 나물이 닿지 않도록 하는 게 좋아요. 우리가 합장할 때 모으는 양 손바닥 가운데 부분은 특히 체온이 높고 에너지가 활발한 부위거든요. 여기 나물이 닿으면 상하거나 모양이 흐트러지기 쉽지요. 그러니 어떤 나물이건, 열 손가락 끝으로만 무치는 게 좋아요. 두릅은 데쳐서 간을 하지 않고 준비하고, 방아나물과 가죽나물은 생으로 넣을 거니까 씻어서 다듬어요. 이제 준비 끝. 중간 불에서 맛국물이 끓으면 냄비 가장자리에 빙 둘러가며 나물을 담아요. 그리고 15분 정도 끓 이면 되요. 양이 많으면 더 오래 끓이는 게 좋겠지요. 나물에 미리 간을 했으니 국물에는 약간 심심하게 간장을 조금만 넣으세요. 이때 마른고추를 넣으면 칼칼하고 깔끔한 맛이 더 좋아지죠. 나물 전체가 푹 물러진 느낌이 들면, 찹쌀가루를 물에 개서 골고루 부어주세요. 걸쭉 하고 되직한 국물이 되도록 농도를 잘 맞춰주세요. 마지막으로 들깨가루를 듬뿍 뿌리고 들기름을 한두 방울 떨 구면 완성. 민가에서는 보기 힘든 전통 사찰 영양식. 산나물찌개가 완성되었습니다. 갓 따서 산과 들의 봄기운 가득한 산 나물들이 한데 어우러져 맛과 향이 구수하고, 잘 물러져서 소화도 잘되는 별식입니다. 초파일 앞두고 연등 만드 느라 허리 펼 시간도 없던 시절. 귀한 습자지 한 장 찢어질 새라 마음 졸이며 손은 바삐 놀리면서도 화기애애한 정담이 오가던 선방 풍경. 그렇게 만들어 올린 새참 한 그릇씩을 맛있게 드시던 얼굴들. 지난 이야기하다 보니 그 시간들 시절이 그립고 더불어 그 당시 함께했던 분들이 그리워지네요. 50 MAY 2013 월간 판전 51
암자기행 남산 칠불암 무명씨의 태도를 기리며 Chilbulam hermitage on Namsan mountain in Gyeongju city, Paying a tribute to unknown one's attitude 글 한정엽(자유기고가) 사진 Studio 711 송림( 松 林 ) 사이, 드문드문 섞여든 개살구나무 사이, 이제 막 터온 먼동이 맑은 선혈을 묻히고 있다. 완만한 산중은 고요하 고, 날짐승과 정체 모를 뭇것들의 짧은 파열음만이 산발적으 로 왔다가 걷힌다. 동행하던 사진가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 러댄다. 똑같은 눈인데 저이는 대체 어떤 풍경을 보는 걸까? 아직 햇빛이 산중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시간. 밤 동안 숨 죽였던 생기가 그늘 속에서 조용히 입을 풀기 시작하려는 참 이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나무 등걸에 고인 햇살이 누군 가의 눈에는 카메라에 담을 영묘한 풍경으로 비춰지는가 보 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눈도 덩달아 주의 깊어져, 둘러보니 어느 빛은 나무 등걸에 흥건하고, 또 어느 빛은 턴 붓에서 흩 뿌려진 물감처럼 산꽃 여기저기에 가 맺힌 풍경이다. 저 꽃 이름이 뭐죠? 방금 카메라 렌즈에 들꽃 하나를 담고 돌아서는 그에게 물었 다. 제비꽃 이란다. 일명 오랑캐꽃 으로도 불린다는 그게 저 거였나. 녀석은 사람 다니는 길의 어느 작은 돌 틈에서 연보랏 빛으로 서 있었다. 딱 제 몸 하나 가누면서, 아침 공기에 조용 히 흔들리던 모습으로. 무심히 짓밟고 지나갈 발길을 피해 용 케도 여전히 거기에 피어 있는 품이 애처롭고 한편 장하기도 했다. 누군가를 알면 그의 자리를 함부로 밟고 다니기가 힘들 어진다. 우리가 아는 그 누군가의 존재 를 가리켜 시인 김춘수 는 이름 이라고 했다. 어느 누구에겐 이름 없던 들꽃이 누군 가에게로 가면 애지중지 카메라에 담을 존재가 되는 이치이리 라. 그러고 보면 우리가 흘겨본 어느 무명씨가 누군가에겐 또 따스한 살붙이였을 게다. 그걸 더 깊이 체득한다면 세상의 다 툼이 조금은 수그러들 수 있으려나. 경주 남산의 칠불암은 무명의 암자다. 칠불( 七 佛 ) 이라는 이 름도 이곳에서 일곱 개의 불상이 발견됐다 하여 그저 임의로 지어진 이름이란다. 가락국 일곱 왕자가 입산해서 성불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긴 하지만 누가 지었는지, 언제 지었는지 정확한 기록도 없다. 불상과 암자 인근에서 발견된 이런저런 출토물로 보아 대략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어 림할 뿐이다. 아침 일찍 찾아든 행인에게 산나물과 국으로 범박한 밥상을 차려준 보살님의 얘기로는 나물 캐러 온 할머니가 흙을 파헤 치다 불상의 손을 발견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흙더미 속에 무명으로 잠자던 절집 하나가 다시 중생의 곁으로 돌아왔다는 식이었다. 불상 주변에 주춧돌 놓인 자리를 좀 보세요. 아마 예전에는 규모가 꽤 큰 절이었을 거예요. 이 근처에서 금강경을 새긴 석 경( 石 經 )이 발견된 것으로도 그렇고요. 웬만큼 규모가 있는 사 찰이 아니면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거든요. 실제로 절 마당에 작게 쌓아올린 탑을 보면 보살님의 말이 억지춘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예전 탑의 잔해들을 모아 새로 작은 탑을 쌓아올린 것인데, 원래 있던 네 개의 옥개석 중 하 나를 기단으로 쓰고 있었다. 4분의 1 크기로도 작은 탑의 기단 을 삼을 정도인데 옥개석 전부를 이어붙인다면 원래 탑신의 위용이 어떠했을까 조금은 짐작이 간다. 그런 정도의 사찰이 어떤 내력으로 이름을 잃게 된 것일까? 또, 그만한 규모의 공간을 감쪽같이 흙으로 덮어버릴 만한 세 월의 풍파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한때 찬란했던 왕조의 후예 들이 지금은 명맥조차 유지하기 힘든 역사의 변전을 마주한 듯한 느낌이랄까. 잠시, 빠르게 도는 필름처럼 오랜 시간이 찰 나 간에 오버랩되며 현기를 불러일으킨다. 오색의 찬란한 문 양과 육중한 탑신과 경건한 불자들로 가득했던 옛 시절의 영 광, 이윽고 해와 달이 순식간에 뜨고 지기를 수만 번, 어느새 52 MAY 2013 월간 판전 53
정병을 들고 있는 관음보살입상. 마애삼존불의 우협시보살이다. 마애의 미소 속 민초의 마음자리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암자 뒤로 돌아서 올라가면 수직의 절벽을 앞에 두고 앉은 마애불을 만난다. 한국을 사랑했던 동양미술사학자 고( 故 ) 존 카터 코벨 여사도 한반도의 돌부처와 석탑을 보며 그런 말을 남겼을 게다. 이름도 없고 부르지 못한 노래처럼 민간 장인들은 유명해지려는 바람도 없이 오직 지워지지 않는 불교적 헌신의 증표로 돌조각을 남긴 것이다. 사치스런 불교용품도 아니고 부자들을 위한 호사스런 기호품도 아닌, 그저 선한 의지의 표현일 뿐이다. 54 MAY 2013 월간 판전 55
오른쪽 면 칠불암 마애불상군. 마애삼존불은 가운데의 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관세음보살이 왼쪽에 대세지보살이 협시로 되어 있다.ㅣ 마애 불 앞쪽의 사방불에는 동쪽에 약사여래가 서쪽에는 아미타여래 남쪽에는 석가여래 그리고 북쪽은 미륵여래가 조각되어 있다.ㅣ신선암에 서 내려다본 칠불암. 한정엽 농촌 총각.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는 시골에서 평일에도 동네를 쏘다니며 주민들의 궁금증을 사곤 했다. 출판편집자로 시작해 편집 과 글짓기를 투 트랙으로 해오다 얼마 전부터 아예 글쓰기에 주력하고 있다. 출판 단행본 작업 외에 여러 매거진에 명사 인터뷰 칼럼을 기 고해오고 있다. 쏟아져 내린 무수한 흙더미 아래로 자취를 감춘다. 얼마나 암 전( 暗 轉 )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늙은 노파의 손이 흙을 헤 집으며 다시 빗살 한 줄기를 끌어들일 때까지. 해가 중천을 향해 한 계단 올라선 시각. 나무 그늘에 가려 있 던 마애삼존불이 바위 위로 미소를 띤다. 그 앞의 사방불( 四 方 佛 )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다. 마애삼존과 사방불이 모여 칠불이 된 자리, 이곳에서 조금만 더 거슬러 오르면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이 중천 위로 좌정 한 채 중생을 맞는다. 몇 걸음만 가면 수직으로 내닫는 벼랑이 라 얼핏 보면 먼 산과 구름을 배경으로 유유히 자적하는 모양 같다. 오른손에는 꽃가지를 들고 왼손으론 설법하는 차림새로 오른 다리는 아예 대좌 아래에 늘어뜨려 놓았다. 그 천연덕스 러운 자태에다 얼굴의 볼살과 넉넉한 살집까지 잡혀 있으니, 부처의 위엄보다는 마음 넉넉한 벗님을 대하는 듯 하달까. 생각해보면 경주 남산은 참 희한한 무명 지대다. 터만 남은 채 암자로 불리는 신선암이나 오랜 시절의 휴면을 견뎌낸 이 곳 칠불암이 그렇고, 산 곳곳에 나뒹구는 수많은 돌부처와 석 탑의 잔해를 보아도 그렇다. 그들은 소속이 없이 한 자리를 차 지하고 앉아 오가는 비바람을 맞으며 수백 수천의 시간을 함 께 흘러왔다. 그들이 속한 자리라면 어느 번듯한 유명의 공간 이 아닌, 그저 이름 없는 민초들의 마음자리였을 게다. 그래서 한국을 사랑했던 동양미술사학자 고( 故 ) 존 카터 코 벨 여사도 한반도의 돌부처와 석탑을 보며 그런 말을 남겼을 게다. 이름도 없고 부르지 못한 노래처럼 민간 장인들은 유 명해지려는 바람도 없이 오직 지워지지 않는 불교적 헌신의 증표로 돌조각을 남긴 것이다. 사치스런 불교용품도 아니고 부자들을 위한 호사스런 기호품도 아닌, 그저 선한 의지의 표 현일 뿐이다. 신라 천년의 역사와 더불어 무수히 많은 왕과 귀족과 예술가 와 학자들이 유명의 기록을 남겼을 터이다. 그리고 그 유구한 시간의 한편에선 이처럼 유명해지려는 바람도 없이 오직 지 워지지 않는 종교적 열망과 선한 의지 로 삶을 살아낸 무명씨 들이 훨씬 더 많았으리라. 칠불암 마당의 마애에 불상을 새기 던 손을 떠올려본다. 고단한 삶을 선( 善 )한 희원의 선( 線 )으로 바꾸며, 그는 단단한 화강암 표면에 부처의 둥근 미소와 흘러 내릴 듯한 옷자락을 띠게 했을 것이다. 이미 세월 너머 사라져버린 그가 이제 와 구태여 그 손이 나 아무개의 것이요 라며 알리고 싶어 할까. 노자의 도덕경 에 이르기를 지극히 높은 것은 그것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太 上 不 知 有 之 ) 고 했다. 그 지극히 높은 무명씨가 어느덧 셈법에 익숙해져버린 21세기의 행인 앞에서 부처의 미소를 피워 올리 고 있다. 칠불암은 지금 한창 이름 찾기에 골몰하고 있다. 찾아오는 불자와 행인의 수가 늘어나면서 약간의 공간이 더 필요해진 것이 이유다. 고작 스무 명 남짓한 인원만으로도 템플스테이 한 번 치르기가 어려울 만큼 여유 공간이 없다. 경주시의 지원으로 불자들을 위한 자그마한 수행 공간이라 도 마련하게 되나 싶었는데, 전통 사찰이 아니라는 이유로 선 뜻 증축 허가가 나지 않았다. 국보 제312호 칠불암 마애불상 군에 대한 각별한 애정으로 스스로를 국보지킴이라 하는 칠불 암 주지 예진 스님을 비롯해 절 일을 돕는 보살님과 처사님들 의 고민이 이만저만 아닌가 보았다. 결국 전통 사찰임을 입증하는 것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건만, 주변에서 출토된 의미 있는 유물 가운데 정작 이곳이 예전부터 있어 온 이름 있는 사찰임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단서는 아직 나오지 않았단다. 하루 빨리 옛 이름을 찾아 보다 많은 이들이 저 은은한 마애의 미소를 보며 수행할 수 있기를 빌어본다. 무명의 너른 마음을 배우기 위해 다시 제 이름을 찾아야 하 는 칠불암의 역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살며 마주하게 되는 많은 인생 국면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인생을 올바르게 사 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이름의 높고 낮음이 아닐 것이다. 자 신의 이기를 무명으로 돌릴 줄 아는 마음의 다스림이 있다면, 우리는 세상의 어떤 무명씨에게도 이름 을 붙여주며 살 수 있 지 않을까? 칠불암이 그런 마음을 배우는 수행의 터가 될 수 있기를. 그 렇다면 그때, 옛 이름을 찾아도 칠불암은 언제까지고 무명의 암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저 마애의 미소처럼 말이다. 56 MAY 2013 월간 판전 57
특집 부처님 오신 날 부처님과 함께하는 행복한 세상 불기 2557년 부처님 오신 날 Buddha s Birthday of the year of 2557 in Buddhist era, Happy world along with the Buddha 글 조미영(판전 에디터) 사진 문용백/소은희/Studio 711 부처님 세상에 오신 2637번째 봄 하늘 위 하늘 아래 모든 생명이 존귀하다. 세상의 고통받는 중생들을 내 마땅히 편안케 하리라. 룸비니 동산 무우수 나무 아래서 태어나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두 손을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외친 사자후다. 불교를 모르 는 이에게는 단지 위인을 묘사하는 특별한 표현 정도로 여겨질지도 모르나 실제 싯다르타는 태자의 신분을 버리고 긴 수 행을 거쳐 깨달음을 얻은 이래 지혜와 실천의 선구자였고 안내자였다. 싯다르타 태자가 태어난 닷새 후 상서로운 조짐에 먼 길을 달려온 아시타 선인은 태자에게 예를 갖춘 후 유심히 태자의 58 MAY 2013 월간 판전 59
관상을 보더니 갑자기 서러운 듯 슬피 울었다. 이유를 묻는 슈도 다나 왕과 왕비에게 이시타 선인은 대답한다. 저의 목숨이 다 하여 머지않아 죽을 것인데 부처님이 나오심도 보지 못하고 진 리의 말씀도 듣지 못할 것이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아득한 옛날 아시타 선인이 갈구했던 진리의 말씀은 2600년 동안 미망으로 헤매는 중생들에게 참된 삶, 참 나의 길을 제시했 다. 그 진리의 말씀은 풍요로우나 속도와 편리라는 작은 행복 대 신 더 큰 행복을 잃어버린 지금의 우리에게 더없이 소중한 이정 표다. 일신의 행복을 넘어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 안락을 위해 온 생애를 바친 석가모니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이 제 감로의 문을 여노라. 너희도 이리 와서 함께 이 길을 가고 이것을 실천함으로써 번뇌를 없애고 해탈을 얻도록 하라 부처 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일 것이다. 오월의 밤, 아름다운 봉은사 일 년 중 오월의 밤이면 봉은사는 가장 아름답다. 부처님 오신 날 봉축 기간 동안 봉은사 마당을 수놓은 다채로운 전통 등은 오 월의 꽃향기와 어울려 설레는 봄날을 축제로 만들어준다. 진여 문에는 한 달여 전부터 우람하고 늠름하면서도 귀여운 사천왕 등이 저마다 개성 있는 자세와 은은한 빛으로 부처님이 이 세상 에 오신 의미를 전한다. 가지가지 개성 있고 아름다운 모양새로 봉축 기간 내내 봉은사 경내를 장식한 전통 등은 밤이 깊을수록 더욱 아름답게 빛나 화려하지만 차갑게 느껴지는 도시와 도시 인들에게 위안의 빛이 되어줄 것이다. 또한 전통 등 전시 공간에는 올해 처음으로 마련된 강남 어린 이 연등 꾸미기 대회에서 입상한 작품들도 함께 전시된다. 아이 들의 특권인 상상력과 창의력을 마음껏 뽐내는 작품들은 서툴 지만 천진한 손길에 보는 이의 마음이 즐겁고 행복해진다.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연등회를 위해 신도회 봉 사자들이 정성 들여 만든 연등은 온 국민의 축제로 자리 잡은 연 등 행렬의 밤을 아름답게 밝힌다. 세상에 희망이 되고 마음에 행 복을 주시는 부처님의 말씀이 어둔 세상에 빛이 되고 우리들 마 음에도 은은하게 번지기를. 60 MAY 2013 월간 판전 61
Bongeun news 봉은사 마스터플랜 한 걸음 내딛다, 봉은사 42년의 꿈 One step forward, A Bongeunsa s dream of 42 years 글 조미영(판전 에디터) 42년간 봉은사를 규제해온 도시공원법이 완화되었으나 여전히 과제는 남아 있다. 세계의 국빈, 수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드나드는 봉은사가 한국의 전통문화와 불교문화를 알리는 데 제 역 할을 하자면 도시공원법 철폐가 간절하다. 3000여 봉은사 신도들이 한 공간에서 예를 올릴 수 있는 법당의 꿈이 드디어 현실이 되었 다. 봉은사 사부대중이 한마음 한 목소리로 기원하고 주지스님이 동분서주한 덕에 결실을 맺은 것이다. 다라니기도 1년 8개월 만에 이룬 봉은사 신도들의 성취이자 42년의 숙원이었 던 과제가 이제 막 한 걸음을 내디뎠다. 현재 봉은사 스님들은 슬레이트 가건물에서 지내고 있다. 석면 이 건강에 얼마나 나쁜지는 알지만 어쩔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봉은사 신도들은 현재의 법당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대웅전 앞 마당에 마련된 임시 천막 법당에서 더위와 추위를 감내하며 법 회를 올려야 한다. 재래식처럼 보이는 허름한 화장실은 하루 200~300명씩 드나드는 외국인에게 민망하지만 어쩔 수 없다. 가장 최근에 지은 법왕루나 보우당도 실은 종교시설이 아닌 교 양시설로 편법을 적용해 간신히 올린 건물이다. 2010년에는 서 울시 경쟁력 강화를 위해 봉은사 템플스테이를 활성해 달라는 서울시장의 부탁이 있었다. 그럼에도 외국인들을 위한 변변한 템플스테이를 위한 번듯한 공간도 마련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렇듯 봉은사 곳곳이 편법, 불법으로 얼룩지게 된 배경에는 봉은사의 발을 족쇄처럼 묶고 있는 도시공원법 때문이다. 이처럼 봉은사의 발전을 옥죄고 있던 족쇄 하나가 느슨해졌다. 지난 3월 28일 서울특별시 도시공원 조래 가 개정되어 새로이 법당과 요사채 등 전통사찰과 관련한 건물이 들어설 수 있게 된 것이다. 1971년에 도시공원으로 지정된 이래 공원 총량제를 위한 단지 명목상의 공원 면적을 유지하기 위해 엄연한 종교 시설인 봉은사가 42년 동안이나 희생된 것이다. 이처럼 도시공원에 묶인 봉은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화 스 님은 2006년 총무국장 소임으로 일하던 때부터 국회, 서울시를 비롯해 여러 단체와 관련자들을 만나며 동분서주해야 했다. 그간 만난 관련 인사들만 해도 100여 명이 넘는다니 적잖은 속 앓이를 해왔을 소임자들의 마음고생이 더욱 진하게 와 닿는다. 지난 4월 4일 교계 기자들과 함께한 간담회 자리에서 진화 스님 은 2011년 9월부터 시작한 42대원 성취 다라니독송 정진기도를 통해 보여준 사부대중의 원력의 결과라고 하시면서 자신의 수고 를 낮추셨다. 천막 법당에서 고생하는 신도들의 형편을 보면 여법한 신행활 동을 할 수 있는 이 같은 성과만 해도 기쁜 일이기는 하지만 풀 어야 할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법이 개정되었다고는 해도 봉 은사가 여전히 수용을 전제로 하는 도시공원으로 규정되어 있는 한 도시공원위원회 심의, 문화재보호법 심의라는 규제가 걸림돌 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는 봉은사가 단지 강남의 전통 사찰을 넘어 지구촌 여러 나 라의 손님들이 찾는 한국의 대표 사찰로서 갖춰야 할 면모를 생 각한다면 하루 빨리 시정되어야 마땅한 일이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1999년 재기된 위헌소원에 대해 봉은사와 같이 장기간 미집행되고 있는 도시계획 시설은 해지하도록 판결 한 바 있다. 이에 따라 2020년 7월 1일까지 서울시가 공원 계획 을 집행하지 못할 경우 봉은사의 도시공원 지정은 해지해야 된 다. 천년 역사의 전통 사찰을 행정기관이 수용해 공원으로 관리 하겠다는 발상도 이해받을 수 없는 일이거니와 이러한 정책이 과거 공원 총량제에 따른 발상을 고수하고 있었다니 사유재산 권, 종교의 자유에 대해 높으신 분들은 어찌 생각하는지 우려하 는 목소리들이 높다. 역사공원의 본래 취지를 진지하게 따져보 고 한류 열풍과 더불어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세계인들의 뜨 거운 관심을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지난해 9월부터 시작한 봉은사 가람정비 중창불사를 위한 42 대원 성취 다라니독송 기도 는 3년 일정으로 지금도 여전히 3000여 신도들의 우렁우렁한 발원이 진여문 너머까지 울리고 있다. 그 울림 속 수천 명의 간절한 발원이 하루 빨리 봉은사 가 람정비 문제에 책임 있는 이들의 마음에 가 닿기를. 62 MAY 2013 월간 판전 63
Bongeun news 봄의 설레임 사찰의 맛 사찰건강도시락 경연대회 글 조미영(판전 에디터) 사진 김명희/Studio711 A tingle of excitement of spring, and a taste of Buddhist temple, Contest of Healthy Lunch box of Buddhist temple food 4월 24일 봉은사 향적원에서는 눈과 입이 즐거워지는 특별한 요 리 경연 대회가 마련되었다. 사찰음식과 도시락의 만남으로 사 찰음식의 대중화를 기대하며 봉은사에서 기획하고 추진한 이번 경연대회는 기대 이상의 반응으로 봄날의 설레임을 축제로 변 신시켰다. 소풍의 계절, 나들이를 더욱 설레게 하는 건 뭐니 뭐니 해도 도 시락일 것이다. 그런데 사찰 음식이 도시락으로 탄생한다니 말 만 들어도 힐링 이 떠오른다. 내가 먹는 음식이 나를 만든다, 먹 는 일로도 수양을 한다는 것이 불가의 믿음이다. 패스트푸드와 인스턴트 음식으로 제 몸을 함부로 대했던 현대인들이 최근 슬 로푸드나 사찰음식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번 경연대회는 사찰음식을 단순히 오신채를 쓰지 않는 값비싼 채식, 건강에는 좋지만 맛은 없다는 생각, 만들기 어렵다는 편견 을 깨트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이다. 건강도 지키면서 다이 어트를 하고 싶은 사람, 배만 채울 수 있으면 아무 거나 먹어야 했던 직장인들, 자라는 아이들 건강을 위해 집에서도 쉽게 만들 수 있는 사찰음식 조리법이 궁금했던 이들에게 이번 경연대회 는 더없이 반갑고 신선한 소식이었다. 사찰음식과 도시락의 만 남이라는 이색적인 주제로 취재 열기도 대단해서 교계 신문은 물론이고 공중파 3개 방송사까지 취재에 나서고 경연자들의 열 기까지 더해져 향적원이 그야말로 후끈했다. 시절의 간절한 소망을 반영이라도 한 것인지 경연에는 사찰음 식의 정신이 담긴 재료와 조리법, 맛과 영양은 기본이고 도시락 아이템과 포장에서 참신한 아이디어가 돋보였다. 42개 팀이 도 전장을 던진 경쟁을 뚫고 본선에 오른 참가자들은 대학 재학 중 인 20대 청년부터 호텔 셰프, 엄마와 딸, 아들 친구와 함께 나온 엄마, 사찰음식 연구생 등 다양한 개성들이 한자리에 모여 사찰 향기로운 봄날, 사찰음식이 예쁜 도시락으 로 변신해 도시인의 일상 속으로 한층 가까 이 들어왔다. 봉은사에서 마련한 사찰건강 도시락 경연대회는 경연자들의 재기발랄한 아이디어에 관람객들의 뜨거운 호응으로 축제를 방불케 했다.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 리치고 박희경 김보연 씨의 봄과 꽃들의 향 연 이 대상을 차지하는 영광을 누렸다. 아들의 친구와 경연에 참가한 멋쟁이 엄마. 산사의 추억 으로 최우상을 수상했다. 64 MAY 2013 월간 판전 65
대상을 차지한 박희경 김보연 씨의 봄과 꽃들의 향연 음식의 아름다운 의미를 전하는 선의의 경쟁을 펼쳤다. 재료비 3000원에서 2만 원대까지, 도시락 용기 또한 칠기 그릇부터 대 나무 바구니, 한지 도시락, 비단 보자기 등 소박한 것부터 고급 스러운 선물용 도시락 등 다양한 친환경 아이디어가 시선을 사 로잡았다. 본선에 오른 10개 팀은 심사 기준인 사찰음식 조리법과 재료 사용, 건강은 물론 완성된 음식을 담아내는 모양새에 이르기까 지 무엇 하나 정성스럽지 않은 것이 없어 심사위원들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봉은사 총무국장 진경 스님을 비롯해 한국전통사찰음식연구소 소장 적문 스님과 사찰 음식 전문점 대표 대안 스님, 파르나스 호텔 신승균 셰프, 문성 실 파워블로거 등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은 요리가 진행되는 동안 참가 팀들을 꼼꼼히 살피면서 칭찬과 조언으로 사기를 북 돋웠다. 70분간의 조리 과정이 끝나고 완성된 도시락으로 대중 앞에 전시된 도시락들은 보는 것만으로 당장 나들이를 떠나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이 저마다 맛과 멋을 한 껏 뽐내는 가운데 영예의 대상은 놀랍게도 사찰음식 연구생도 요리 전공자도 아닌 박희경 김보연 팀의 봄과 꽃들의 향연 이 차지했다. 앙증맞은 크기의 대나무 도시락에는 쌈장을 올린 한 입 크기의 곰취쌈밥, 홋잎나물 등이 어우러져 입맛을 돋웠고 아 들 친구와 참가해 최우수상을 받은 산사의 추억 은 묵은지초밥 과 깻잎장아찌쌈밥으로 관람객 시식 때 불티나는 인기를 얻었 다. 새벽부터 대전에서 올라와 5개의 가스레인지를 동원해 열정 을 다한 산에 들에 도시락 은 우리 땅에서 나는 갖은 나물을 이 용한 방울밥과 귀한 산야초 효소들을 이용한 요리로 시선을 모 아 우수상을 차지했다. 녹차 잎을 이용한 영양밥으로 직장인을 위한 간편 도시락을 출품한 콩 이야기 는 관람객들로부터 가장 많은 표를 얻어 인기상을 차지했다. 이번 경연을 통해 상품화 가능한 사찰음식은 초파일에 판매를 통해 독거 어르신 돕기 기금을 마련하는 데 쓰일 예정이라니 단 순히 요리 경연대회 이상의 회향의 진정한 의미를 실천하는 뜻 깊은 행사 아닌가 싶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언제, 어떻게 먹는 것 이 중요하다고 불교는 말한다. 처음 열리는 대회인지라 소소 한 실수나 미숙한 면도 있기는 했지만 음식을 통해 육신과 마음 을 건강하고 맑게 유지해나가기 위한 물질이라는 인식의 지평 을 넓히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는 가운데 내년의 대회가 벌 써부터 기대되고 기다려진다는 즐거운 표정들이 향적원을 더욱 향기롭게 했다. 66 MAY 2013 월간 판전 67
68 MAY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