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트랜스라틴 24호 (2013년 6월) 음악의 탈정치화, 다니엘 바렌보임 신예슬 음악과 정치 음악과 정치, 이 둘은 다소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음악은 유희성 만 보장된다면 음악가가 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도 사랑받는다. 19세기 말,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황제였던 프란츠 요 제프 황제는 음악이 그토록 진지한 문제인가? 난 항상 음악은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라고 말하기도 했다. 음악 의 추상성은 음악을 듣고 사고하게 만들기보다는 특정한 감정에 빠지게 한다. 일반적으로 음악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거나 좋은 감정을 이끌어 내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생각하게 만드는 음악보다는 듣기 좋은 음악을 선호하는 경우에는 음 악과 정치를 연결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의 방향을 바꾸 면, 음악만큼 정치적인 것도 없다. 1) 음악 작품은 실체도 없고, 증거도 없 다(악보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심지어 작품이 연주되는 순간은 귀를 막 지 않는 이상 꼼짝없이 들어야 하기에, 시간마저도 작품에게 지배당한다. 그런데 실체도 없고, 말로 완벽히 형용할 수도 없는 음악을 갖가지 이유 에서 말로 설명한다. 이런 설명은 도움이 되는 것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많다. 잘못된 꼬리표는 음악을 오해하게 만든다. 이 글에서는 음악 1) 여기서는 음악계를 둘러싼 권력관계는 잠시 접어두고, 음악의 본질적인 면에 대해 얘 기하겠다.
[문화예술] 음악의 탈정치화, 다니엘 바렌보임 97 을 둘러싼 오해와 편견에서 벗어나 고자 했던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에 대해서 얘기하고자 한다. 아르헨티나인이자 이스라엘인이 고 팔레스타인 여권을 소유한 바렌 보임은 1942년 아르헨티나에서 출생 해서 이스라엘에서 자라고 독일을 중심으로 세계무대에서 활동하고 있 다. 부모는 러시아계 유대인으로, 20 세기 초 러시아에서 유대인 학살이 일어났을 때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세대의 후손이다. 바렌보임은 어린 다니엘 바렌보임 시절 외가와 친하게 지냈는데, 외할머니는 결혼 후 자녀들을 데리고 팔레 스타인으로 성지순례를 갈 정도로 열렬한 시오니스트였다. 외가집은 유대 인이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해 자주 토론을 벌이던, 아르헨티나 시오니스 트의 회합장소였고, 어린 시절 외가를 자주 드나들던 바렌보임은 자연스 럽게 유대인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바렌보임의 부모는 이스라엘로 이주하 기로 결심하였고, 1952년 일가족이 모두 유대인이 있어야 할 곳 인 이스 라엘로 이주하였다. 이주 후, 바렌보임은 히브리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상 황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야말로 내 조국이며, 우리 사회이며, 우리 집 이 라는 유대인 정체성이 더욱 확고해졌다. 바렌보임은 이스라엘에서 유럽을 오가며 음악을 공부했는데, 음악작품이나 음악을 공부하는 장소에서도 독 일이라는 국가를 피할 수 없었다. 물론 정식으로 학교에 입학한 때는 1954년으로 2차대전이 끝난 후이지만 유대인과 독일인 간의 악감정은 완 전히 해소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98 트랜스라틴 24호 (2013년 6월) 어릴 때부터 두각을 나타낸 바렌보임은 20대에 화려하게 음악계에 데 뷔했다. 아직 유대인과 독일인 사이의 앙금이 남아있던 1960년대에 아르 헨티나인이자 이스라엘인이자 유대인인 바렌보임은 탁월한 재능으로 서유 럽의 음악계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바렌보임은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 을 공공연히 밝히는 등 대담한 언행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이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몇몇 사람들은, 바렌보임이 이스라엘 출신 의 음악가들과 만든 실내악단을 엉터리 유대인 약장수들 (Kosher Nostra)이라는 좋지 않은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 다수의 사람은 바렌보임의 음악적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의 활동무대는 점차 넓어졌다. 그는 파리 오케스트라, 시카고 심포니, 베를 린 국립 오페라단,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수석 객원 지휘자 등 쟁쟁한 오케스트라와 오페라단을 맡아서 지휘해왔다. 여러 오케스트라와 오페라 단을 지휘하며 생긴 해프닝도 꽤나 많았지만, 그중 가장 떠들썩했던 것은 역시 2001년 7월 바그너 음악 연주 사건이다. 서양음악사에서 빨간 딱지가 붙은 음악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돌프 히틀러가 사랑해마지않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 의 음악이다. 히틀러는 게르만족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데 리하르트 바그 너의 음악을 자주 이용했고, 심지어 유대 인을 가스실에 집어넣을 때도 뉘른베르 크의 명가수 를 틀어놓기도 했다. 물론 히틀러가 바그너의 음악을 적극적으로 사 용한 데는 얼마간 이유가 있었다. 바그너 는 반유대주의 성향을 보였고, 그러한 생 각을 적지 않은 글로 남겨놓았다. 나치가 정치적 선전에 사용할 음악을 선정할 때 이러한 바그너의 반유대인 성향은 분명히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게다가 바그너의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
[문화예술] 음악의 탈정치화, 다니엘 바렌보임 99 대표작은 대다수가 게르만 신화에 근거한 것이다. 이렇게 적합한 음악이 또 있었을까? 당연히 유대인은 히틀러가 애호하는 바그너의 음악을 견딜 수 없게 되었고, 이스라엘에서는 바그너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금기시 되었다. 예루살렘 공연을 두 달 정도 앞둔 2001년 5월, 바렌보임은 홀로코스 트 생존자와 이스라엘 정치가의 요청을 받아들여 바그너 음악을 연주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바그너를 정식으로 상연 프로그램에 포함하고자 했으나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자 바렌보임은 다른 수를 쓰기로 했다. 정식 공연이 모두 끝난 뒤, 바그너의 작품을 앙코르 곡으로 연주한 것이다. 물론 무작 정 연주한 것은 아니었다. 공연이 끝나자 바렌보임은 객석으로 돌아서서 저는 지금부터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을 연주할 예정입니 다. 듣기를 원치 않으시는 분들은 나가주십시오 라고 정중히 말했다. 이 내 객석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터졌고, 몇몇 사람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 어났다. 그러나 생각보다 많은 과반수 이상이 자리를 지켰고, 연주를 마 쳤을 때는 큰 박수를 받았다. 음악작품의 탈정치화 바렌보임은 바그너의 작품을 이스라엘 청중에게도 들려주고 싶었다. 바렌보임이 연주하려는 것은 히틀러의 선전에 사용되었던, 반유대주의 작곡가가 쓴, 게르만족 우월주의 등, 바그너의 음악을 둘러싼 말들이 제외된, 어떠한 정치적 함의도 없는 바그너 음악이었다. 바그너의 음악적 해석이 그동안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살펴보면 순전 히 직관과 감각으로 이루어진 일로, 이를 증명할 길은 없습니다 그 시대의 정신, 즉 시대정신 및 당시 사람들이 사로잡혀 있던 비음악적 사상들과 훨씬 더 단단하게 엮여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
100 트랜스라틴 24호 (2013년 6월) 물론 바그너는 명백한 반유대주의자였지만, 그의 오페라에는 유대인 등 장인물이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유대주의를 암시하는 장면이나 대 사도 전혀 없습니다. 바그너가 남긴 위대한 열 편의 오페라에서 샤일록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에 등장하는 악덕 유대상인)과 같은 인 물은 눈을 씻고 찾아도 볼 수 없습니다. 바그너와 반유대주의가 아닌 바그너의 음악과 반유대주의에 대한 문제에서는 우리의 상상 이 작품들 과 만나면서 어떻게 발전되었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2) 바렌보임은 바그너와 같은 뛰어난 음악가가 반유대주의 사상을 작품 에서도 표현하고자 했다면 작품에 분명하게 드러났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작품 자체에서는 반유대주의를 찾아볼 수 없으므로, 바그너가 반 유대주의와 음악을 완전히 별개로 생각했다는 것이 바렌보임의 견해이다. 바그너의 의도가 어찌되었건, 바그너의 음악을 견딜 수 없는 이스라엘 사 람들도 분명히 있었다. 어떤 사람은 바렌보임에게 내가 왜 그런 음악을 들어야하나요? 라고 물었고, 바렌보임은 이렇게 대답했다. 바그너의 음악과 관련하여 아픈 기억이 없는 누군가는, 무엇보다 바그 너는 이런 기억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기 때문에, 그 음악을 들을 권리 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기공연 이 아닌 특별공연 이라면, 듣고 싶은 사 람만 들으러 올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 정도도 타협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일종의 정치적 억압이며, 바그너 음악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 상을 꼬투리 삼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바그너와 유대주의에 관한 사건의 전말입니다. 3) 이스라엘에서 바렌보임이 바그너의 작품을 연주하여 객석에서 박수를 받긴 했지만, 혹독한 평도 뒤따랐다. 이스라엘 의회의 교육문화위원회는 이스라엘 문화기관은 바렌보임이 사과하지 않으면 배척해야 하며, 문화 적 기피인물로 선언해야 마땅하다 고 입장을 밝혔으나 몇일 뒤 바렌보임 2) 에드워드 사이드, 다니엘 바렌보임. 평행과 역설, 마티 2011, p.128, 149. 3) Ibid., p.157
[문화예술] 음악의 탈정치화, 다니엘 바렌보임 101 은 이스라엘 방송국 채널2TV와의 인터뷰 에서 사과를 하라고? 바그너를 엉터리로 연주했다면 사과할 용의가 있다 고 답하 며, 바그너의 작품은 클래식에 끼친 영향 이 너무 커 무시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4) 바렌보임은 이스라엘 민족의 편에 서는 것 이 아니라 음악의 편에 섰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에서의 바그너를 연주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논쟁을 가열시켰지 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그너의 음악을 듣고 수용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에드워드 사이드와 다니엘 바렌보임 음악가의 역할 바렌보임은 바그너의 음악작품에 붙어있는 정치적 편견을 제거하고 순수한 음악만을 들려주고자 노력했다. 이런 노력은 음악과 정치 양쪽 모 두에게 자극이 되었다. 바렌보임은 음악이 사회적 목적을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그렇다면 그 목적은 무엇인지, 사회와 관계없이 유희를 위한 것인 지, 아니면 연주자와 청중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지기 위한 것인지 스스로 에게 질문했고, 5) 음악이 할 일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많은 고 민에 대한 답으로서 조금은 특별한 음악적 활동을 해왔다. 바렌보임은 바그너의 작품을 정치적 함의로부터 탈출시켰다. 그러나 바렌보임이 추구한 음악의 탈정치화 는 비단 작품에만 해당되지 않았다. 1999년, 바렌보임은 팔레스타인 출신 학자인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와 함께 이집트, 이란, 이스라엘, 요르단, 레바논, 팔레스타인, 시리 4) 한국일보 2011년 7월 29일 기사, [이스라엘 바렌보임] 바그너 연주 사과 못해 5) 에드워드 사이드, 다니엘 바렌보임. 평행과 역설, 마티 2011, p.75
102 트랜스라틴 24호 (2013년 6월) 아 등 중동지역의 연주자로 구성된 서동시집 (West-Eastern Divan) 오 케스트라를 창단했다. 서동시집 은 괴테가 이슬람에 관한 열정으로 집필 한 시집으로 유럽 문화에서는 전례가 없는, 이슬람이라는 다른 존재 에 관심을 기울여 동서양의 조화를 이루고자 한 작품이다. 바로 이런 정신에 서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는 창단되었다. 오케스트라는 모두가 한 마음으 로 하나의 거대한 악기가 되어 한 작품을 연주해야 한다. 바렌보임과 사 이드는 오케스트라라는 한 악기가 될 구성원을 분쟁이 끊이지 않는 이 지 역 출신의 음악가로 충원하여, 음악가들이 소통하고, 화합하는 본보기를 만들고자 했다. 국경문제와 관련해서 과연 이곳에 평화란 것이 정착할 수 있는지 진짜 시험해보기 위해서는 달러나 정치적 해결만이 대수가 아닙니다. 진정한 시험은 이런 접촉이 결국에 얼마나 생산적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문화 적 사안을 가지고 문학이 포함될 수 있겠고,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음 악은 의견이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으니 더욱 좋겠군요 이런 접촉을 활성화 한다면, 사람들이 서로를 보다 가깝게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6) 이런 시도 역시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자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 다. 민족주의자들은 어째서 이스라엘에 총을 겨누는 민족과 함께 연주하 는지 의문을 제기했지만, 바렌보임은 문화적 인종적 편견을 적어도 음악에 서만큼은 극복하고자 했다. 이러한 취지 아래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는 음 악을 통해 인종 편견을 극복한 좋은 선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분쟁지역 연주회를 통해서도 화합의 메시지를 던졌다. 2001년에 있었던 9.11테러 이후에 중동 출신 음악가들의 국가 간의 이동이 까다로워져 한때 난항을 겪기도 하였으나 꾸준히 연주활동을 펼쳐왔다. 또한 2011년에는 이런 이 야기가 다니엘 바렌보임과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라는 이름의 다큐멘터 6) Ibid., pp.30-31.
[문화예술] 음악의 탈정치화, 다니엘 바렌보임 103 다니엘 바렌보임과 서동시집 오케스트라(2006년 베토벤 교향곡 9번 연주 모습) 리로 개봉되었고,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는 평화의 오케스트라, 바렌보임 은 평화의 지휘자 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다니엘 바렌보임은 음악과 정치의 관계에서 단연 핵심적인 인물이다. 바렌보임이 제기하는논란은 음악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큰 도전이다. 음 악작품과 음악가의 본질과 무관한 외부적 요인을 제거함으로서 편견 없이 음악작품과 음악가를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생기는 일은 정 치적 화합의 본보기가 된다. 바렌보임은 음악의 탈정치를 위한 정치적 활 동을 하고 있으며, 논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 해야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 하고자 하는 일을 분명히 알고 있으며, 적극적으로 실천한다. 바렌보임은 분명히 쉽지 않은 일을 해내고 있다. 이러한 활동이 가능한 것은 바렌보임의 문화정체성, 뛰어난 음악성, 이상을 실현하고자 의지 때 문이다. 신예슬 - 서울대학교 작곡이론과 재학중. 2013년 제15회 객석예술평론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