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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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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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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고이유 제1점에 대하여 구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법률 제9444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이하 구 도시정비법 이라 한다) 제4조 제1항, 제3항은 시 도지사 또는 대도시의 시장이 정비구 역을 지정하거나 대통령령이 정하는 경미한 사항을 제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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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역비논단 현앨리스 이야기 어느 진보주의자의 삶과 파국적 종말 정병준 매혹적 상상의 주인공 현앨리스 이 글은 현앨리스 의 삶과 행적을 다뤘다 하와이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랐으며 상해 일본 하와이 미국에서 교육 받은 후 하와이 노동 운동 미 육군 군속 주한미군 정보참모부 민간통신검열단 군속 등 을 거쳐 북한에서 생을 마친 이 여성의 일생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북 한의 기록과 주장에 따르면 현앨리스는 년 상해 시절 박헌영의 첫 애 인 차 세계대전기 미군 공작원 해방 후 주한미군 및 요원 체 코슬로바키아를 통해 북파된 미국의 공작원이었다 그녀는 사랑 공산주의 혁명 첩보기관 공작 음모 등 거론되는 것만으로도 매혹적 상상을 불러일 으키는 단어의 주인공이 되었다 현앨리스는 박헌영을 미제의 고용간첩 으 로 옭아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지만 정작 남로당 박헌영의 재판 과정에 는 등장하지 않았고 그의 생사 역시 명확하게 공개되지 않았다 이 글은 필자가 년 박헌영 재판기록에서 현앨리스의 이름을 발견한 현앨리스 이야기 373

이래 가졌던 상상과 의문에 대한 오랜 추적의 결과이다 현앨리스가 누구 인지 박헌영과의 관계는 어떤 것이었는지 과연 그녀는 미국의 공작원이고 박헌영은 미국 공작원에 포섭된 간첩 이었는지 등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이 글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이다 한편으로 이 글은 한국의 독립 해방을 염원하고 해방 후에는 주어진 상 황 아래 진정한 민주주의 를 추구했던 재미한인 진보주의자가 사회주의 북한에서 평양식 공산주의와 조우한 후 맞게 된 비극적 결말에 대한 보고 서이다 이 여성의 비극적 운명은 한국현대사가 마주한 극단적 상황을 보 여줄 것이다 년 평양에선 현앨리스가 미국의 간첩으로 몰린 반면 에선 그의 남동생 현피터가 공산주의자로 몰렸다 앨리스는 행방불명되고 피터는 가까스로 생존했다 이 글은 파편화되고 분산된 자료에 따라 현앨리스의 삶을 따라가면서 생존자가 남긴 회고와 다양한 기록에 많이 의지하고 있다 그 때문에 현앨 리스에 대한 전체적 조망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며 착오와 과장 오류와 빈 공간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한 양해를 구한다 상해 시절의 현앨리스 하와이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라다 현앨리스 의 한국 이름은 현미옥 玄 美 玉 이며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중요한 기여를 한 감리교 목사 현순 玄 楯 의 큰딸이다 현순은 모두 남매를 두었는데 큰딸 현앨리스 미옥 부터 차례대로 현엘리자베스 명옥 현피터 준섭 현순옥 현폴 기섭 현조슈아 환섭 현데이비드 화섭 현메리이다 374 역비논단

<그림 1> 현앨리스(현미옥)의 가계도 玄 覃 胤 시조 고려 玄 德 秀 세 玄 守 세 조선 玄 在 明 세 玄 鎰 세 玄 濟 昶 세 玄 楯 이마리아 玄 美 玉 정준 미상 玄 明 玉 정웰링턴 玄 駿 燮 玄 順 玉 玄 麒 燮 玄 驩 燮 玄 驊 燮 玄 메리 출전 보는 애국지사 현순 목사의 대한 독립운동 한국독립역사협회 데이빗 현 지음 김영목 편집 사진으로 현순은 갔으며 년 두 번째 하와이행 이민이 실시될 때 통역으로 하와이에 년 귀국했다 정동제일교회와 상동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던 현순은 년 운동 직전 상해로 망명해 운동의 발발과 임시정부 수립 소식을 미주에 전달했다 년에는 워싱턴에 건너가 구미위원부 위 원장으로 활동했고 년 하와이 마닐라를 거쳐 다시 상해로 돌아왔다 현앨리스 이야기 375

년까지 상해에 머물던 현순은 하와이 감리교의 초청을 받고 또다시 하와이로 건너가 호놀룰루 와 카우아이섬 에서 목사로 활동했다 년 목사직에서 은퇴한 현순은 년에 현앨리스와 현피터 가 거주하는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1 현순의 이동에 따라 가족들의 거주지도 변화했다 현앨리스는 년 월 일 쿠울라우 지역에서 태어났다 현앨리스 는 하와이에서 출생한 첫 번째 한국 아이 즉 한국계 미국인이었으며 년 월 일 속지주의에 따라 미국 시민이 되었다 현순은 자녀 여덟을 두었 는데 그중 위의 세 자녀 앨리스 엘리자베스 피터 가 하와이에서 태어났다 년 하와이에서 한국으로 귀국할 때 현앨리스는 다섯 살이었다 서울 에서 이화고녀를 마치고 이화대학을 다니다가 상해로 건너갔다고 되어 있 다 이화여자중고등학교 동창회명부 에 따르면 현미옥은 년 월 일 년제 여자고등보통학교 제 회 졸업생으로 되어 있다 2 대학은 졸업하 지 않았으므로 이화여대 졸업생 동창명부에는 이름이 올라 있지 않다 현순은 년 운동이 발발하기 직전인 월 일 가족들에게 강원 도로 지방 전도를 간다고 말한 후 상해로 건너갔다 년 월부터 그해 말까지 현순은 독립임시사무소를 설립해 상해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미주에 운동 소식과 임시정부 수립 소식을 최초로 전한 바 있다 현순은 임정 의 대표로 만주에 파견되어 활동했다 현앨리스의 상해행 현순이 상해 만주 워싱턴 하와이 상해로 전전하는 동안 그의 가족 들 역시 어려움을 겪었다 가족들은 우여곡절 끝에 현순을 찾아 상해로 떠 났다 3 현앨리스가 상해에서 처음 이름을 알린 것은 년 월 일 상해 376 역비논단

한국인 민단에서 개최한 이승만 대통령 환영회 석상에서였다 현앨리스는 현미옥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손정도의 딸 손진실 孫 眞 實 과 함께 이승만에게 화환을 증정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4 운동기 상해 내 한국민족주의 진영 과 기독교 진영을 대표하는 현순 목사와 손정도 목사의 딸들이 이승만에게 화환을 증정하는 장면은 상해 내 이승만 지지 세력을 비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현피터는 현앨리스의 상해 시절 교육에 대해 두 가지 사실을 기록했다 첫째 앨리스와 엘리자베스가 상해의 여자기숙학교를 다녔다는 점이다 현 순 부부는 대도시 상해가 위험하다고 생각해 과년한 딸들이 시장에 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지만 근대식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 자기숙학교에서 앨리스는 중국 여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며 주말에만 집에 찾아왔다 현앨리스는 연극과 음악을 배우며 이 학교를 끝까지 마쳤다 5 년 박헌영과 결혼한 주세죽도 년 상해로 건너와 공동조계 북사천 로 北 四 川 路 에 있던 안정씨여학교 晏 鼎 氏 女 學 校 에서 년 월까지 영어와 음악 을 배운 바 있는데 6 공동조계에는 중국 여학생기숙학교가 많지 않았으므로 현앨리스가 이 학교를 다녔을 개연성이 있다 둘째 년 어머니가 현앨리스에게 근대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 유학 자금을 충분히 마련하고 비밀리에 그녀를 일본에 보냈다고 기록했다 7 현앨 리스가 유학을 한 정확한 학교명은 알 수 없다 다만 일본에서 대학졸업생 인 정씨를 만났다는 사실은 확인된다 현앨리스는 사랑에 빠져 연인이 된 이 남자를 상해로 데리고 가 가족에게 소개했고 년 상해의 한인교회 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현순 집안의 가승 家 乘 에 따르면 이 남자의 이름은 정 준 이었다 8 현피터의 회고록에 따르면 년 상해에서 결혼한 현앨리스는 남편을 현앨리스 이야기 377

따라 한국 남부지방에 있는 정씨 집으로 들어갔다 시댁에서 현앨리스는 안채에 갇혀 살았고 남편은 사랑채에서 친구들과 놀기만 했다 남편 가족 은 소작인들을 부리는 지주 집안이었으며 남편은 대학 교육까지 받았지만 봉건적 구식 생활에 만족하며 술과 여흥으로 소일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앨리스는 딸을 낳았다 년 현재 딸의 나이가 세라고 했으므로 년경에 출산했을 것이다 한국에서의 생활을 견딜 수 없었던 현앨리스는 남편을 떠나기로 결심했으나 딸을 데리고 나올 수는 없었다 현앨리스는 상해로 돌아왔다 9 년 일본 유학 년 결혼 년 딸 출산 년 상해 귀환으 로 이어지는 현앨리스의 대 초반의 행적은 파란만장한 것이었고 정확한 실체는 여전히 미궁 속에 놓여 있다 박헌영과의 관계, 혹은 사회주의와의 대면 북한의 박헌영 재판기록에 따르면 검사총장 리송운은 국가 검사의 론고 에서 특히 박헌영은 년 월 하지에게 간첩 련락으로 파견 했던 서득은을 통하여 박헌영이가 년도 상해 생활에서 조선 민족으로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으며 기독교 신자이던 현애리스를 자기의 첫 애인으 로 했다고 주장했다 10 박헌영과 현앨리스의 관계가 애인 사이였다고 규정 한 것이다 이에 대해 현씨 집안의 얘기를 들어보자 현피터의 박헌영에 대한 회상은 매우 상세한데 그는 솔직하게 박헌영이 자신의 매형이 되어주길 마음속 깊이 희망했다고 쓰고 있다 11 현피터는 상 해 시절 박헌영과 관련된 세 가지 에피소드를 적었다 첫 번째는 박헌영이 현순 가족과 함께한 봄나들이다 박헌영은 현순을 존경하고 현앨리스와 현 엘리자베스를 흠모하던 청년들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다른 청년들과 달리 378 역비논단

진중하고 잘 웃지 않지만 점잖고 친절한 모습이었다 현피터는 그는 내 이상형이었으며 모든 한국인들의 영웅이 되었다 라고 썼다 12 다음으로 박헌영은 현순과 현피터를 프랑스 조계 감옥에서 꺼내준 구원 자였다 현순 부자는 한국인들을 망국노 亡 國 奴 라고 부르는 중국 아이들을 혼내다 프랑스 경찰 보조에게 끌려가 경찰서에 수감되었고 판사로부터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때 박헌영이 나타나 뇌물을 쓴 끝에 이 들 부자를 꺼내주었는데 현순은 박헌영이 자기들을 구해줄 것임을 믿고 있었다 13 세 번째 에피소드는 소년혁명단에 관한 것이었다 소년혁명단은 상해 인 성학교에 다니던 안중근의 아들 안원생 안준생의 오류 김규식의 아들 김필립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세 자식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소년혁명단 의 목적은 한국독립운동에 기여하는 것이었으며 주요 활동은 모든 종류의 체육을 통한 신체 단련 대중집회를 알리는 전단 배포 밀정 및 반역자 색 출 등이었다 우리 가족의 오랜 친구였으며 과묵했던 박헌영 이 소년혁명 단의 지도자가 되면서 중국공산당과 관련을 맺고 후원을 얻어냈다 박헌영 은 젊은 한국혁명가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해서 새로운 혁명 이론을 가르치 는 한편 선전 선동의 실제 활동을 수행하게 했다 14 그것은 주로 중국공산 당이 공장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조직하도록 돕는 일이었다 현피터는 박헌영의 지시에 따라 중국공산당이 주최하는 대중집회 참석을 요청하는 전단지를 배포하다가 프랑스 경찰에 체포될 뻔하기도 했다 현피터의 회고 에 따르면 그가 세 때인 년이었다 박헌영은 현피터를 격려하며 그 에게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소련으로 유학할 수 있는 여권을 건네주었다 얇은 종이 위에 양파잉크로 작성된 이 여권은 개 국어로 작성되었는데 현피터 등 명은 이 여권을 가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일 예정이었다 현앨리스 이야기 379

그러나 어머니가 이 여권을 불태움으로써 모스크바 유학은 좌절되었다 15 현앨리스가 결혼한 해였으므로 이는 년의 일이었을 것이다 현데이비드는 상해 시절 박헌영과 여운형이 모두 앨리스에게 구애를 했 지만 부유한 집안의 정씨 정준 에게 패배하였다고 주장했는데 16 년생인 현데이비드는 가족들 속에서 전설처럼 회자되던 박헌영과 여운형의 이름을 이런 방식으로 기억했을 것이다 박헌영은 년 상해에서 주세죽과 만나 년 결혼했고 여운형은 이미 재혼한 중년으로 년 이래 가족들과 함께 상해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현앨리스는 상해 시절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을 접했을 뿐만 아니라 운 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년 월 그녀는 상해 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러시아 의용함대 증기선 심페라폴 호에 탑승했다가 일본 후쿠오카 모지 門 司 항에서 일본 관헌의 심문에 걸렸다 후쿠오카 지사는 현앨리스가 한국에 거주하며 여러 차례 상해를 왕복했던 것으로 파악했고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현앨리스가 고려 공산당과 관련된 연락 임무를 띠고 조선 일본 상해는 물론 블라디보스 토크를 왕래했던 것으로 추정했다 17 현앨리스뿐만 아니라 현순의 가족들이 이 시기 상해의 사회주의 공산주 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적잖은 활동에 관여했다 이는 현순이 모 스크바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하고 현피터가 박헌영의 서클에서 열심 히 활동하면서 모스크바 유학을 꿈꿨으며 현앨리스가 조선 일본 상해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며 공산당 관련 연락 임무 를 수행한 것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상황은 모두 현순의 집안이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현앨리스와 현피터는 모두 해방 이후 재미한인사회에서 가장 급진적인 380 역비논단

그룹에 속하게 되었고 나아가 년에는 미국공산당의 당원으로 기록되 었다 이들은 년대 대공황 이후 미국 사회의 좌파적 흐름에 영향을 받 았거나 해방 이후 한국 상황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좀 더 근본적으로는 이들이 상해에 거주하던 년 동안 한인사회의 혁 명적 분위기와 시대 상황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고 이미 상해 시절에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고 그 운동에까지 깊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와이 미국에서의 교육과 사회활동 하와이 정착과 대학 교육 현앨리스는 년 월부터 년 월 사이에 하와이에 들어왔다 년 하와이에 들어온 현앨리스의 흔적은 호놀룰루의 한인감리교회 엡 엣청년회 서기로 등장한 것을 제외하고는 나타나지 않는다 년부터 년에 이르는 기간에는 한국과 중국을 오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앨리 스는 년에 남편과 딸이 있는 한국으로 돌아갔다 형제들의 회고록에 따르면 한국의 남편은 다른 여자와 살고 있었고 그 상황을 견딜 수 없었던 현앨리스는 결국 이혼을 선택했다 그리고 년 딸을 남편에게 남겨둔 채 호놀룰루로 돌아가는 배를 탔 다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현씨 집안의 모녀는 잉태한 채 호놀룰루행 배를 타는 운명의 주인공이 되었다 어머니가 임신한 채 호놀룰루행 이민선을 탄 지 년 뒤에 다시 딸이 임신한 몸으로 호놀룰루행 배를 탔던 것이다 현앨리스는 년 월 일 아들을 낳았다 현순은 첫 손자의 이름을 웰 현앨리스 이야기 381

링턴 이라고 지었는데 이는 영국 정치가가 아니라 중국의 외교관 으로 명성이 높은 웰링턴 쿠 顧 維 鈞 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한 때 외교관 생활을 했던 현순은 웰링턴 쿠의 정치적 견해와 수완을 존경했 다고 한다 18 정웰링턴 은 윌리 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현씨 가문의 맏손자이자 자랑이었다 현앨리스가 갓난아이 정웰링턴과 찍은 사 진이 현데이비드의 회고록에 남아 있다 현앨리스는 년 월 하와이에 들어온 뒤 미국 대학 진학을 결심했다 미국 귀화기록인덱스 에 따르면 현앨리스는 년 월 일 하와이에서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19 시민 권을 획득한 현앨리스는 곧바로 년 월 일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뉴 욕으로 향했다 20 현앨리스는 년 하와이로 돌아갈 때까지 학업에 몰두 했다 해방 후 현앨리스는 자신이 뉴욕대학 을 마쳤다고 기자 에게 밝혔다 21 현피터는 현앨리스가 뉴욕대학에 등록해 세계문학과 창작을 공부했으며 가정부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기억했다 22 재미유학생들 이 간행한 년도 한국유학생 주소록에 따르면 현앨리스는 뉴욕시에 있 는 헌터 칼리지 영문과 학년생이었다 23 현앨리스는 미국 시 민이 되었지만 오랜 기간 한국 중국 일본에서 생활했기에 정통 영어 습득 에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다 현데이비드는 현앨리스가 대학에서 영어 공부 를 할 때 접속사 전치사 숙어 등 문법에 어려움을 가졌다고 회고했다 현 앨리스가 문법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면서 영문학을 전공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24 현앨리스가 뉴욕에 도착한 이후 하와이를 돌아다녔지만 년에 현피터는 캠브리지와 년 동안 노동자실험극단과 뉴욕연합극 382 역비논단

단 등 좌파 극단에서 활동하며 누나와 함께 뉴욕에서 거주했다 현앨리스 는 서른을 넘긴 나이에 아들까지 딸린 이혼녀로서 어렵게 대학 생활을 유 지했으나 동생들에게는 제 의 엄마 또는 멘토와 같은 존재였으므로 형제 들과도 긴밀한 접촉을 유지했다 년 이후 현앨리스와 현피터가 같은 길을 걸어가게 된 이유는 가깝게는 년대 초반 이들 남매가 뉴욕에서 공통적으로 경험한 생활세계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하 와이에서 이들의 생활과 활동의 터전은 노동운동 노동조합과 관련된 분야 로 특화되었다 하와이 노동운동 공산주의운동과의 조우 년 하와이로 돌아온 현앨리스는 카우아이섬으로 들어가지 않고 호 놀룰루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남동생들을 건사하며 생활전선에 뛰어들었 다 25 년 이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현앨리스는 하숙집을 운영했고 목 수였던 남동생 조슈아와 함께 호놀룰루 펀치보울에 집을 마련했다 26 현피터는 년 하와이로 돌아왔는데 이후 년 현앨리스가 북한으 로 들어갈 때까지 같은 행로를 걸었다 현앨리스의 하숙집은 하와이에 정 박한 선원과 군인들의 휴식처로 주말과 휴가 등에 활용되었다 피터에 따 르면 이들은 뉴잉글랜드 뉴욕 시카고 인디아나 및 서부 해안의 주 워싱 턴 오레곤 캘리포니아 등지에서 왔다 이들은 주로 노동조합 관련자로 미 국노동조합연합 미국 산업별노동조합회의 관련자였다는 것이다 27 그녀의 집을 찾 아오는 사람은 피터나 앨리스를 아는 누군가로부터 소개받은 이들이었다 피터의 표현을 빌리자면 곧 우리 집은 자유주의적 경향이 있는 모든 서비 스맨의 정보센터가 되었다 선우학원은 현앨리스 현피터 남매가 하와이 현앨리스 이야기 383

노동조합운동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였으나 미국 본토의 진보운동과는 관련이 없었다고 했는데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28 이 시기에 앨리스와 피터는 미국공산당 하와이 지부의 당원으로 활동했 다 29 현앨리스는 년 이래 호놀룰루에서 노동조합원 등을 상대로 하숙 을 치며 생활을 영위했으며 노동조합과의 관계를 통해 생계와 사회활동을 모두 해결했다 현앨리스가 언제 어떤 경로로 미국공산당에 가입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현앨리스 남매가 하와이 국제부두창고노동조합 노동자 전용식당 지역토론그룹 등의 합법 표면 단체를 통해 지역사 회의 노동조합운동 활동가들과 연계되었으며 나아가 미국공산당과 연계되 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현앨리스가 관련을 맺은 하숙집 노동자전용식 당 지역토론그룹 노동조합 등의 교집합에 공산당의 영향과 그림자가 어려 있었다 이들은 하와이에서 출생했으므로 이민 세에 해당했지만 식민지 한국과 년간 상해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았기 때문에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좀 더 강했을 것이다 또한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미국 시민이 었으나 이들의 인생 행로가 이끈 실질적 정체성과 정신은 미국인도 일본 인도 아닌 동양계 이민으로서 한국인이었다 이것이 이들의 강점이자 동시 에 약점이 되었다 존재는 미국 사회에 속한 미국 시민이면서도 그 정신은 한국의 해방을 지향했다 문제는 이들이 한국을 택했을 때 발생했다 남한 혹은 북한에서도 이들은 동화되기 힘든 특이한 존재였다 한국인들의 눈에 이들은 어색한 한국말을 구사하는 미국화된 동양인이었을 뿐이다 이들은 한국을 지향하고 소원했으나 남과 북은 이들의 고향이나 이상향이 될 수 없었다 384 역비논단

태평양전쟁 참전과 주한미군 군속 활동 전시 미 육군부 복무 현앨리스는 년 월 이후 미 육군부에서 정보 관계에 종사했다 당시 나이는 마흔 살이 넘었다 남동생 현피터는 년부터 년까지 하와 이에서 측량사로 일했으며 년 세의 나이로 입대했다 현피터는 미 네소타주 포트 스넬링 군사언어학교에서 일본어를 공부한 후 위 스콘신주 캠프 맥코이에서 한국인 포로들을 감시하는 일을 맡았다 30 피터는 육군 군사정보국 소속 언어전문가로 활동했고 앨리스도 일본어 관련 정보 업무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앨리스와 피터는 년 까지 한국에서 교육받았기에 한국어와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었으며 년에는 중국 상해에서 중국어를 배웠고 년 이후 미국에 서 공부하고 대학을 졸업했으므로 영어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에 두루 능통 했다 가장 유창하게 구사한 언어는 한국어와 영어였으나 학교교육을 통해 습득한 일본어 실력도 상당했을 것이다 즉 전쟁 당국이 요구하는 일본어 재능과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처음에는 현앨리스가 여성군단 의 일원으로 입 대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여성군단은 아니었다 그녀는 일본인 세 여성들과 함께 하와이의 미 육군부 정보 관련 부서에서 언어전문가 로 활동하다가 전쟁이 끝난 뒤 도쿄로 파견되었다 년 월 일자 미 중부태평양사령부 명령에 의해 일군의 일본인 세 여성들이 일본에 배속되었다 이들은 소위에 해당하는 군속 급에 해당하는 급료와 대우를 받게 되었다 현앨리스 이야기 385

이 여성들은 공식적으로는 육군에서 제대해서 연합통역번역대 의 민간요원으로 복무하게 된 것이다 이들의 장교복은 옷깃에만 라는 기장을 달았고 이들은 여성군단 이 아니라 육군부군속 으로 간주되었다 이들의 배속 명령은 다음과 같다 아래에 명기한 여성 언어전문가 급의 전쟁부 군속들은 소위 계급에 해당하며 월 일경 정부 항공기로 일본 도쿄로 가서 도착하자마자 태평양방 면미육군사령부 의 민간검열관 에게 보고해야 할 것이 다 릴리 리 치사토 후루카와 도로시 나카마 아이네스 안 수미 세리자와 마사에 그린 데이지 야마나카 미도리 가와구치 델마 토와타 밀드레드 야마모토 랭코 다케타 앨리스 현 미사오 쿠와예 여성들은 년 월 하와이 히캠 기지를 출발해 태평양을 일간에 걸쳐 횡단해 일본에 도착했다 이들은 콰젤린에서 존슨섬 사이판을 거쳐 일본 아츠기 비행장에 도착했다 일본에서 이들의 주요 임무는 편지 검열 이 었다 31 이 가운데 란코 다케다 그리고 밀드레드 야마모토 의 남편 과 인터뷰했는데 란코 다케다는 현앨리스가 연장자 386 역비논단

였고 말이 없었으며 괜찮았다고 기억했다 32 이상의 내용에 기초해 태평양전쟁기 현앨리스의 행적을 추정하면 년 월 이후 하와이의 미 육군부 정보부서에서 근무했고 년 월 일 미 육군 군속으로 도쿄에 파견되었으며 월 일 도쿄에 도착한 후 맥 아더 사령부 연합통역번역대 민간통신검열관 밑에서 군속으로 소위 대우로 일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앨리스의 태평양전쟁기 입대 및 전시 복무에 대 한 정확한 자료는 파악되지 않았다 33 주한미군에서의 활동과 추방 일본인 세 여성들과 함께 일본에 배속되었던 현앨리스는 도쿄에서 년 월 중순 다시 한국으로 배속되었다 해방 후 현앨리스 피터 남매 는 년 월 서울신문 인터뷰에 나란히 등장했는데 현앨리스는 전 쟁 중에는 육군성에서 정보 관계의 일을 보았으며 전쟁이 끝나자 작년 월 중순 조선여성으로선 처음이라고 할 군복을 입고 년만에 그리운 조선 에 진주 했다고 밝혔다 34 남한에 배치된 현앨리스가 근무하게 된 곳은 주한미 군 정보참모부 예 하의 민간통신검열단 이었다 원래 일본어 전문가로 교육을 받았으 므로 일본 민간통신 검열을 담당해야 했으나 한국에 배치되면서 한국인 민간통신을 검열하는 임무를 맡게 된 것이었다 그녀의 비극적 운명은 여 기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군정기 그녀의 행적을 보여주는 자료 세 개가 존재한다 이 자료들은 현앨리스의 민간통신검열단 활동에 대해 전혀 다른 방식의 설명과 접근 방 법을 보여준다 먼저 북한의 박헌영 공판기록 에는 현앨리스가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현앨리스 이야기 387

一 기소장 최고검찰소 검사총장 리송운 박헌영의 보장하에 입국한 현애리스에 대하여 증인 현효섭의 진술에 의하면 그는 제 二 차 대전 시부터 미국 군대에 종사했고 八 一 五 후는 역시 미군에 배속되여 서울에 와서 미군 씨 씨 아이 지 케라는 시민 우전 郵 電 검열기관에서 조선 사람들의 편지와 통신련락을 검렬하는 비밀사업에 종사했다 기록 페지 三 국가 검사의 론고 박헌영이가 년도 상해 생활에서 조선 민족으로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으며 기독교 신자이던 현애리스를 자기의 첫 애인으로 했고 제 차 대전 후 미군이 남반부에 상륙했을 때 상면했던 씨 씨 아이 지 케에서 미국 군대로 비밀공작하던 현애리스 35 는 우편 통신에 대한 검열 감청을 담당하는 부서였으며 미 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예하의 조직으로 방첩대 와도 긴밀한 연관을 가진 조직이었다 북한 당국의 입장에서 볼 때 미군 에서 근 무한 한국인은 당연히 미국의 스파이 정보원 공작원으로 보일 가능성이 높 았다 더구나 박헌영을 정치적으로 숙청하기 위한 공작의 시기였으니 박헌 영을 미국 정보기관과 연결하는 핵심고리였던 현앨리스가 미국의 첩자로 규정되는 것은 피하기 힘든 결과였다 다음으로 민간통신검열단으로 통칭되는 에 대해 주한미 군단 정보참모부장이던 니스트 대령이 작성한 의 목적 이라 는 비망록 을 살펴보자 니스트의 설명에 따르면 는 남한 의 민간우편물을 검열해서 첩보를 획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조직이었다 년 월 한 전쟁부 민간고용원이 조선에 들어와서 이북 출신인 북에서 온 그녀의 친구들 의 대다수를 고용함으로써 의 임무를 파괴하는 데 388 역비논단

거의 성공했다 그녀는 미국으로 송환되었고 획득된 다량의 정보와 활동은 차근차근 회복되기 시작했다 36 다른 기록에는 니스트 대령의 발언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대령은 전 기간 동안 검열된 항목 수에 관한 도표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월에 특별히 급속한 하강이 있었던 점에 대해 당시 전쟁부가 한 여성을 고용해 한국에 왔는데 그녀가 그들의 임무를 망친 악마로 자라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이북 출신인 북에서 온 그녀의 친구들 의 대다수를 고용함으 로써 의 임무를 파괴하는 데 거의 성공했다 그들은 그녀를 제공했고 획득된 정보와 활동량은 차근차근 회복되기 시작했다 37 전쟁부 고용 여성이 다름 아닌 현앨리스였다 니스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앨리스는 년 월 의 활동을 파괴하는 데 거의 성공한 악 마 였으며 그 방법은 북한 출신 인사들을 대거 에 받아들이는 것 이었다 의 임무 수행에 가장 필요한 것이 늘 수준 높은 한국인 통 역 번역자를 구하는 것이었는데 진주 후 주 동안 는 여 명의 평범한 통역자와 여 명의 수준 낮은 번역자들을 구한 바 있다 38 영어 한국어 일어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언어전문가 현앨리스는 다수의 북한 출신 공산주의자들을 통역 번역자로 선발하는 데 관여했던 것이다 즉 현 앨리스는 박헌영 재판 과정에서 북한이 주장한 것과는 정반대로 에 근무하면서 검열 임무를 방해하고 붕괴시키려 노력했던 것이다 또한 이는 현앨리스의 독자적인 선택이었다기보다는 공산주의자들과 협력에 의 한 것으로 생각된다 현앨리스 이야기 389

세 번째 자료는 현앨리스가 서울에 들어오자마자 박헌영을 비롯한 여운 형 등 좌파의 거물들과 긴밀한 연락 연계활동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주한 미군이 조선공산당 본부에서 압수한 공산당 일지 음과 같은 흥미로운 내용들이 들어 있다 에는 다 1월 2일 박헌영 동지와 방 이름 미상 동지가 서울로 귀환했다 주석 앞의 항목에는 이들의 국외 출발이 월 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방인식은 박의 경호원이 분명하다 1월 4일 박헌영 동지가 명의 미국 기자들과 회견한다 그중 한 명은 당원이다 시부터 스노우 를 만나다 시부터 시까지 미국 공산당원들과 회견한다 1월 11일 박 동지가 현 미국인과 회견하다 주석 이는 아마도 전쟁부 고용원이었으며 훗날 하와이로 돌아간 앨리스 현 을 언급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의 월 일자 및 일자 참조 3월 2일 오후 시 분 제플린 노만 클론스키 현앨리스 정 김과 이야기했다 방은 병원에서 퇴원했다 주석 제플린 노만 클론스키는 미국 공산당원으로 알려진 명의 사병이며 제대를 위해 미국으로 귀환했다 3월 6일 오후 시 여씨의 집에서 여씨는 현 앨리스 와 회견했다 주석 이는 여운형이다 아래의 월 일자를 참조 39 현앨리스는 년 월 중순 남한에 배속되었는데 년 월 일 과 월 일 박헌영과 조선공산당 당사에서 만난 것이 당 상임근무자의 일 지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월 일에는 여운형과 만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 다 공식기록에 기록된 횟수가 박헌영 회견 회 여운형 회견 회라고 한다 면 기록되지 않은 다른 회합은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월 일 현앨리스가 박헌영을 만났을 때 제플린 노만 클론스키라는 명의 390 역비논단

미국인 공산당원이 함께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현앨리스가 한국에 들어온 후 조선공산당은 물론 미군 내 공산당원들과도 긴밀한 접촉을 가졌 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현앨리스의 이런 행적은 당연히 주한미군 정보 당국의 주목을 받았고 그에 따른 미행과 감시가 뒤따랐다 주한미군 정보 당국에 따르면 년 공산당 주최의 절 기념식에 참석한 미군 특히 로버트 클론스키 가 주목을 끌었고 미국 공산당원이던 그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현앨리스 오누이 등의 행적이 드러나게 되었다 40 현앨리스 오누이의 한국 근무는 두 사람의 체포 추방으로 종결되었다 년대 상해 시절을 기억하는 현앨리스와 현피터는 한국의 혁명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공개적으로 유지했고 이는 미군정의 눈에 공산주의 활동으 로 비쳐졌다 년 미국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생활 근거지와 활동 무대 를 하와이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이동했다 재미한인 진보진영에서의 활동과 북한행 독립 신문 재미조선인민주전선에서의 활동 미국으로 돌아온 현앨리스는 하와이에 머물다 년 월 로스앤젤레스 로 건너왔다 현앨리스는 천 달러를 빌려 현피터와 함께 로스앤젤레스 벙 커 힐 에 라는 주류판매점을 열었다 이들은 외곽에 집을 샀고 하와이의 부모와 남동생 조슈아를 초청했다 하와이대학을 나온 남동생 데이비드는 다시 남가주대학 에 들어가 건 축학을 공부했고 현앨리스의 아들 정웰링턴은 백인학교인 마셜고등학교 를 졸업했다 41 현앨리스 이야기 391

로스앤젤레스로 이동한 후 이들은 본격적으로 재미한인 진보운동과 함께 하기 시작했다 현앨리스가 전후 재미한인 사회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년 월 일 로스앤젤레스 한인 감리교 교회에서 한국 사정에 대한 강연 자 리였다 로스앤젤레스 한인 감리교회는 해방 전후 재미한인 진보진영의 본 거지였다 42 현앨리스는 이후 독립 을 중심으로 한 재미한인 진보진영과 행동을 같 이했다 현앨리스와 현피터 현순은 년 이후 독립 을 중심으로 한 재 미한인 좌파의 흐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년 월 독립신문사 임원 이 새로 선출되었는데 현순 가족이 모두 중요한 직위를 점했다 현앨리스 는 이사부 서기 상무위원 서무 겸 서기 편집부원 현피터는 이사원 편집부원 현순은 하와이사우회 서기에 선임되었다 43 현앨리스가 이사부 상무위원 편집부원 등 개의 직책을 맡을 정도로 독립 신문의 핵심 인물이 되었음 을 알 수 있다 현앨리스는 년에도 미주 이사원 서기 편집부원를 맡았 고 현피터는 이사원 편집부원을 맡았다 44 한편 현앨리스는 년 월 조직된 재미조선인민주전선의 핵심으로도 활동했다 이는 년 남한에서 조직된 민주주의민족전선을 모델로 한 미 주판 통일전선 조직을 의미했다 년에 접어들어 현순은 재미조선인민 주전선 위원장 현앨리스는 서기 현피터는 총무부원을 담당함으로써 현순 가족이 재미조선인민주전선의 지도부가 되었다 45 북한과의 연계 및 북한행 년 말에 이르러 독립 의 쇠락 재미조선인민주전선의 사실상 활동 정지 재미한인 좌파의 미국 내 입지 축소가 확연해졌다 일제하에서 항일 무장투쟁과 강력한 독립운동을 주창했고 해방 후 진정한 민주주의 를 추 392 역비논단

구했던 이들의 현실적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46 이들의 선택은 분명한 사회 주의 공산주의 노선의 채택 북한과의 연계였다 이때 북한과의 연계 통로로 등장한 사람이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서 고 고학자로 활동하던 한흥수였다 당시 빈대학 조교수였던 한흥수는 년 월부터 년 월까지 독립 신문에 체코의 사정 마르크스 레닌주의 북한 고위관료와의 접촉 경과 북한 실정 등에 대해 다수의 글을 게재했다 이 당시 활동이 위축되던 독립 에 가장 많은 기고를 한 인물이었다 재미한인들에게 한흥수의 등장은 북한과 연결되는 지름길의 발견과 같았 다 한국전쟁기에 미군은 평양의 내각 정부합동청사 에서 이사민 선우학원이 김일성 박헌영에게 쓴 년 월 일 자 편지를 노획했다 년 월 일 미국 극동군사령부 군사정보국 연 합통역번역대 가 이 편지를 접수하 여 번역했다 미농지에다 타이프라이터로 작성된 쪽 분량의 이 편지에는 년간 재미한인사회와 북한과의 연락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47 가 번역한 이 편지는 훗날 의 수중으로 들어가 편지에 이름이 거 론된 재미한인 공산주의자들을 수사하고 국외 추방하는 데 직접적으로 활 용되었다 년간 이 편지에 등장하는 김강 선우학원 신두식과 현앨리스의 동생 현피터 등이 미 하원 비 非 미국활동조사위원회 의 청 문회에 증인으로 소환되었다 이 편지에 따르면 재미한인 공산당원은 로스앤젤레스 명 샌프란시스 코 명 시애틀 명 시카고 명 뉴욕 명 워싱턴 명 등 총 명이었으 며 당원 대표로 이름이 밝혀진 인사는 로스앤젤레스의 변준호 김강 현앨 리스 시애틀의 선우학원 이사민 뉴욕의 신두식 곽정순 등 명이었다 재 미조선인민주전선 민주인민전선연맹 으로 표기 은 당의 외곽 조직으로 묘사되어 현앨리스 이야기 393

있다 이들은 한흥수를 통해 북한과 연락을 시도했다 이 편지에 따르면 총 차례에 걸쳐 북한과 연락 시도가 있었다 이 편지에서 이사민과 선우학원이 지적했듯이 이제 재미한인 진보진영 의 유일한 관심사는 북한에 가는 것이었다 해방 후 남한으로 귀국 수속을 했으나 다 불허된 미국 동지들은 거의 전부가 귀국을 희망 하고 있으며 일단 구라파로 가서 동구를 통하여 귀국하는 것이 유일한 길 이었다 여 기에 체코 프라하에 있던 한흥수의 역할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정웰링턴이 프라하 의대에 재학 중이었으므로 현앨리스는 아들을 만나 러 간다며 길을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선우학원도 년 가을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서 개최된 세계인권대회를 계기로 프라하 소재 체 코국립대학 박사과정에 입학했고 년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선우학원은 박정애를 만나 평양행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년 월 미국으로 귀환했다 48 박헌영 사건에 연루 년 평양에 들어간 현앨리스의 이후 행적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객 관적인 자료는 없다 프라하에서 현앨리스를 만났던 선우학원은 그녀가 평양 체류 중에는 박헌영의 비서로 근무했다는 소문 을 들었다고 했다 49 현피터는 현앨리스가 입북 후 박헌영의 개인비서가 되었다고 적었으며 데 이비드 역시 그녀가 박헌영의 동료가 되어 가깝게 일했다고 적었다 50 년 박헌영에 대한 미국 간첩 혐의 및 북한 정권 전복 혐의 재판이 열렸을 때 현앨리스의 이름이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북한의 재판기록에 따 르면 현앨리스는 이사민 목사와 함께 박헌영이 미제국주의자들을 위하여 감행한 간첩 행위 의 주요 연결고리였다 물론 가장 중요한 증인이자 관련 394 역비논단

자인 현앨리스와 이사민은 재판정에 증인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북한 기소 장에는 박헌영이 년 월 서울에 갔다 온 서득은 편을 통해 하지의 지 시를 전달받았으며 이에 따라 정치적 망명객을 가장하고 미국으로부터 구 라파에 와 있던 미국 간첩 현애리스와 리사민의 정체를 기만하여 그들을 미국에서 추방당한 진보적 인사로 은폐하고 입국을 보장했으며 그 후 현 애리스를 중앙통신사 또는 외무성에 리사민은 조국전선의 중요 직위에 배 치시켜주면서 그들의 간첩 활동을 백방으로 보장했다 고 되어 있다 51 박헌영 재판은 블랙코미디와 같았다 박헌영에게 씌워진 여러 가지 혐의 를 종합하면 북한 정권 전복과 미국의 간첩이라는 혐의 두 가지였다 북한 정권 전복 혐의 및 남로당 인자 이승엽의 미군 연관 혐의에 대해서는 북한의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말할 수 없겠지만 박헌영을 미제의 간첩 으 로 엮은 것은 권력투쟁의 냉혹한 결과로 받아들이기엔 설득력이 현저히 떨 어졌다 북한의 설명에서 사실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은 현앨리스가 박헌영 의 보증으로 입북한 후 중앙통신사와 외무성에서 일했다는 정도이다 이는 박헌영의 개인비서 였다는 여러 증언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면 현앨리스는 언제 북한 당국에 체포되었는가 북한 측의 기록에 따르면 현앨리스는 년 월 벌어진 남로당 계열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이미 미국의 북파 공작원으로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현앨리스는 년 월 남로당 주요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 체포가 진행되는 시점에서 함께 검 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남로당 재판이 종결된 이후 당원들에게 배포된 절대비밀 자료에 따르면 해방 직후 박헌영은 노불의 지도하에 있는 미 군 소좌 현 피드와 그의 누이 현 애리스와 루차 접견하였으며 현 애리스가 미국 간첩 기관들의 모략에 의하여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체코슬로바키야를 통하여 북조선에 들어올 것을 요청하였을 때 박헌영은 이를 허락하였으며 현앨리스 이야기 395

그를 외무성에 취직시켰 다고 한다 52 현피터와 현앨리스가 함께 거론된 것 은 이 자료가 유일한데 여기에는 박헌영 재판 과정에서 등장하는 년 월 하지의 지령 운운하는 대목은 들어 있지 않다 훗날 박헌영을 간첩으 로 몰기 위해 혐의가 구체적으로 윤색된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남로당 계열 재판 과정에서 현앨리스는 이강국과 관련된 부분에서 만 네 차례 등장했다 53 이강국은 년 재판 과정에서 현앨리스와 이윌 리엄을 만났지만 간첩 연계는 맺지 못했다고 발언했다 그렇지만 년 박헌영 재판 과정에서는 년 봄부터 박헌영이 입북시킨 현앨리스와 연 계를 가지고 군사기밀을 두 차례 제공했다고 발언한 것으로 되어 있다 54 박헌영의 간첩 혐의를 확정하기 위해 이강국의 엇갈린 증언을 고쳐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북한의 재판문건 외에 현앨리스에 대해 구체적으로 지목한 것은 전 조선 노동당 고위간부를 지낸 신경완이었다 신경완은 이미 년 서울신문 에 이사민 현앨리스가 재미동포 부부이며 이사민의 본명이 이경선 미국명 이 윌리엄 이라고 증언한 바 있었다 55 이에 기초해 서울신문 은 이사민 현앨 리스 부부가 미국의 간첩으로 월남했다 사이공으로 탈출한 위장간첩 이수 근 사건 과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년 신경완의 증언은 년 출간된 단행본에 거의 그대로 재현되었다 현앨리스와 이사민이 북에 들어온 것은 년 월이다 이들은 해방 이후 남한에 와서 년쯤 미군정의 정보 계통에서 활동한 사람들이었다 전형적인 직업적 첩보원이었다 이들은 다시 미국으로 되돌아갔다가 체코의 프라하로 가서 체코 정부에 북조선으로의 정치적 망명을 요구했다 이때가 년 월이 었다 396 역비논단

이들의 망명 허락은 개월의 시간이 걸렸는데 이것은 체코 정부가 이들의 정치적 망명을 불순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체코의 안전기관은 이들의 정치적 망명은 동기가 불분명하고 북한이 부모의 고향이라고 밝혔으나 근거 없는 것으로 판명되자 이들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결국 체코 안전기관의 의견을 토대로 당시 북한 내무성 안전국도 이들의 망명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통고했다 그러나 당시 외무상이었던 박헌영이 내무성의 판단을 무시하고 입국사증을 내주었다 현앨리스와 이사민이 북에 도착했을 때 외무성 측이 나서서 환영행사를 해주기까지 했다 그 후 이사민은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조사연구부 부부장으로 현앨리스는 중앙통신사 번역부장을 거쳐 년 월에 외무성 조사보도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대우였다 56 신경완의 증언은 사실과 허구 해석과 과장을 뒤섞어 놓은 것으로 북한 공판기록에 근거한 북한 측 인식의 확대판이었다 먼저 현앨리스가 미군정 에 근무한 것은 개월 미만이고 이사민은 미군정에서 일한 바 없었으므로 두 사람이 년간 미군정 정보 계통에서 활동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또한 두 사람이 전형적인 직업적 첩보원 이란 주장도 우리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사실과 거리가 있다 다만 현앨리스가 년 봄 체코에서 정치적 망명객으로 북한행을 택했으며 입북 후 현앨리스는 중앙통신사와 외무성 에서 이사민은 조국전선에서 일했다는 증언은 박헌영 재판기록과 일치하 며 사실이라고 판단된다 문제는 이들의 체포 시기와 체포 이유에 대해 이 어지는 증언 부분이다 이들은 이북에 들어와 개월 동안은 아주 성실한 태도를 보이며 어느 지방을 고향이라고 찾아가는 등 주변 사람들이 믿게끔 행동했다 그러다가 현앨리스 이야기 397

년 말부터 수상스런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입국 때 체코 정부가 신원이 애매하다 고 통보해옴에 따라 내무성 안전국이 이들을 계속 주시했는데 두 사람이 인적이 드문 곳에서 비밀리에 만나는 것이 포착되었다 이상하리만치 자주 구라파에 편지를 했는데 답장은 한 차례도 없었다 이들이 단파라디오를 듣는다는 사실도 포착되었다 결국 년에 들어서는 감시와 편지 검열을 강화했다 이들은 년 월경 당국에 구라파 여행을 요청했다 내무성에서 불가 통보를 하자 계속 졸라댔다 그러나 박헌영의 외무성 측은 월에 출국사증을 내주었다 그러자 안전국은 사람을 붙여 이들을 계속 미행했다 이들이 출국할 때 모스크바를 경유하도록 하고 모스크바 공항에서 이들의 몸과 짐을 샅샅이 수색했다 의심했던 대로 이들의 몸에서 그동안 이들이 수집한 자료가 쏟아져 나왔다 군대 관계 비밀자료도 다수 발각되었다 이들은 그 길로 이북에 강제 귀환되었다 내무성 안전국은 이들을 다그쳐 미 정보기관으로부터 정보 수집 임무를 띠고 침투한 정보요원임을 밝혀냈다 이들은 다른 임무를 부여받으려고 체코에 가려다 고리가 잡혀 되돌아온 것이다 이들이 체포되자 입국 경위가 문제가 됐다 체코 정부의 신원 불분명 지적과 안전국의 고향 불명 판단에도 불구하고 박헌영이 입국사증을 내준 사실이 곧 드러났다 박이 이에 그치지 않고 이들의 입북 환영행사를 열고 고위직책까지 준 것도 드러났다 그러나 박헌영이 이들과 직접 연결되었음은 당시에는 드러나지 않았다 나중에 박헌영 사건이 터지자 이 문제가 다시 거론되지 않을 수 없었다 57 내용을 요약하자면 1 현앨리스와 이사민은 인적 드문 곳에서 비밀리에 만났다 2 구라파에 자주 편지했으나 답장이 없었다 3 단파라디오를 들 398 역비논단

었다 4 년 월 구라파 여행을 신청했고 박헌영이 출국사증을 줘서 월 출국했다 모스크바 공항에서 군대 비밀자료를 포함한 수집 자료가 발 각되어 강제 송환되었다 5 조사 결과 미 정보기관의 정보요원임이 드러났 는데 이들은 다른 임무를 부여받기 위해 체코로 가는 길이었다는 것이다 신경완이 언급한 1 3의 진위 여부는 판단할 길이 없다 현앨리스와 이사민 두 사람은 미국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하던 열성당원이었지만 년 이후 북한에서 접한 공산주의와는 잘 융합하기 힘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북한의 입장에서 판단할 때 현앨리스와 이사민은 모두 미국의 정보 공작요 원일 수밖에 없었다 현앨리스는 태평양전쟁기 미 육군부 정보부서 출신이 며 미군정기에는 주한미군 정보참모부 예하의 민간통신검열단의 행정부 책임자로 일한 전쟁부 소속 군속이었다 이사민 역시 태평양전쟁기 미 전 략첩보국 소속 요원으로 충칭 重 慶 에 파견되었던 공작전문가였다 58 이 들은 한때 미군 정보기관 첩보기관에서 일했지만 공산주의적 이념을 지닌 탓에 미군정에서 추방되거나 에서 쫓겨난 인사들이었다 에서 현앨리스의 대활약은 이를 잘 보여준다 열성적 공산주의자로 온갖 모험과 우여곡절을 겪어 공산 조국을 찾아 평 양에 도착한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좌절과 스파이 혐의였다 년대 미국과는 전혀 다른 평양에서 이들이 겪어야 했던 문화적 정신적 심리 적 충격은 불을 보듯 명확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미국 시절을 얘기하고 심 리적 위안과 동료애를 느끼기 위해 만났을 가능성이 높고 현앨리스는 아들 이 공부하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로 여러 차례 편지를 썼을 것이 분 명하다 또한 가족이 살고 있는 미국과 유일한 연결 통로가 체코였으므로 당연히 편지를 썼을 것이다 위의 증언 가운데 이들이 년 월 모스크바로 출국했다가 공항에서 현앨리스 이야기 399

비밀문건이 발각되어 체포 송환되었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적어 도 이사민은 년 월 현재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서기국의 간부 로 재직 중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사민이 모스크바로 출국했다가 체포되 었다는 년 월에는 북한 내각 직속 중앙지도간부학교에 입교해 공부 중이었다 이러한 정보는 년 초 주일미군 가 체포한 북한 공작원 김규호로부터 나왔다 59 즉 이사민은 년 월 모스크바에서 체포된 것 이 아니라 년까지 조국전선에서 건재한 상태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신경완이 증언한 4와 5는 가공의 사실이며 북한의 재판기록을 정당화하 기 위한 진술이었다 자료에 근거한다면 년 월 남로당 간부에 대한 대대적 검거가 이루 어지기 전에 현앨리스와 이사민은 외무성 조국전선 등의 기관에서 그대로 근무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60 이들이 북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을 가 능성 북한이 이들을 미국의 공작원으로 흘겨봤을 가능성이 현저히 높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이 미국의 공작원으로 입북하고 활동 했다는 북한의 주장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현앨리스가 당면한 파국적 종말은 그녀가 선택한 진정한 민주주의의 북한식 귀결이었다 분단과 전쟁 권력투쟁 음모와 공작이 뒤엉킨 한국현대사의 우여곡절은 의지와 열정으 로 가득 찼던 한 여성의 삶을 파탄으로 종결지었던 것이다 평양과 의 스파이 소동 현앨리스는 년 미국을 떠난 뒤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평양에서 그녀의 행적은 북한의 남로당 박헌영 재판기록과 증언에서만 파편적으로 400 역비논단

드러날 뿐이다 현앨리스의 이름은 년 이강국 이승엽 등 남로당계 간 부들의 재판과 년 박헌영 재판에서 부각되었지만 정작 그녀는 재판정 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강국 박헌영 등을 미제의 고용간첩 으로 규정하는 데 가장 핵심 증인이자 본인 자체도 미제의 스파이 고 규정되었지만 그 녀는 재판 과정에 소환되거나 증언하지 않았다 현앨리스의 혐의와 관련해 그녀의 재판기록이 공개된 바 없으므로 그녀가 정당한 법적 절차를 거쳤 는지는 알 수 없다 현앨리스 이사민 이경선 이윌리엄 이득환 등 태평양전쟁기부터 해방 직후 까지 재미한인 진보진영의 핵심 인물이자 스스로 진실한 공산주의자라 확 신했던 재미한인들은 남한의 상황에 절망했고 북한이 자신들의 희망이자 조국이며 정치 사상적 이상향이라 생각했다 이들은 년 사이 미국에서 체코슬로바키아와 소련을 경유하는 실낱같은 경로를 개척해 북한 을 찾아갔다 역경을 딛고 북한에 진입한 이들의 사례는 재미한인 공산주 의자들에게 행운으로 비쳐졌다 그러나 몇 년 뒤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이 들의 운명은 모두 비극으로 종결되었다 스스로 운명의 개척자라고 생각했으며 사상의 조국을 찾았다고 생각한 이들은 한결같이 미제의 정탐꾼 스파이 공작원으로 몰렸다 현앨리스와 이 윌리엄은 이강국 재판 과정에서 미국 스파이로 등장했다 그리고 현앨리스 는 다시 이사민과 함께 박헌영 재판 과정에서도 미국 간첩으로 지목되었다 태평양전쟁기 이래 한국의 독립을 위해 중경임시정부를 후원했으며 나아 가 무장투쟁만이 한국독립의 길이라 생각해 스스로 미군에 입대했던 그들 의 이력은 모두 미국의 공작원을 입증하는 증거로 이용되었다 년 이사민 선우학원이 김일성 박헌영에게 보낸 편지에서 거론된 재 미한인 공산주의자들은 로스앤젤레스의 변준호 김강 현앨리스 시애틀의 현앨리스 이야기 401

선우학원 이사민 뉴욕의 신두식 곽정순 등 모두 명이었다 이 가운데 현 앨리스와 이사민은 북한행을 선택했고 그곳에서 미제의 간첩 으로 낙인찍 힌 후 행방불명되었다 김강 신두식 선우학원 곽정순 부부는 미 하원 청 문회에 소환되어 증언했으며 그중 김강 신두식 곽정순 부부는 북한으로 추방되었다 현앨리스의 동생인 현피터와 현데이비드도 청문회에 소환되었 다 현피터와 선우학원은 미국 시민권자였으므로 추방을 면했다 태평양전쟁기 대활약을 보였던 재미한인 진보진영은 이렇게 막을 내렸 다 지구의 정반대편에서 현앨리스와 이사민은 미국의 스파이로 현피터와 김강 등은 소련의 스파이로 몰렸고 그 사회에서 행방불명되거나 추방되었 다 이 비극적 한국인들의 운명은 정확하게 기억되지 않았다 거친 시대가 남긴 상처라기엔 너무 가혹한 것이었고 남겨진 스파이 의 오명은 그 비극 을 우화로 만듦으로써 치열했던 삶들에 모욕적 기억만을 남겼다 정병준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현대사를 전공했고 최근에는 현앨리스 이사민 김강 등 진보적 재미한인들의 비극적 운명을 추적하고 있다 대표 저서에 몽양 여운형 평전 우남 이승만 연구 한국전쟁 광복 직전 독립운동 세력의 동향 독도 등이 있다 402 역비논단

주 1 한규무 玄楯 한규무 의 인물과 활동 현순 玄楯 의 신앙과 활동 국사관논총 제 집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기독교와 역사 운동 이전을 중심으로 제 호 2 이화여자중고등학교 동창회 이화여자중고등학교 동창회명부 3 망명객의 가족 참혹한 현목사 가족 동아일보 쪽 현피터는 어머니 이마리아가 일본교회에 배치된 미국인 선교사를 찾아가 여행권을 얻어달라고 간청했고 그 결과 상해행이 가능했다고 회고했다 데이비드는 마리아가 전 재산을 뇌물로 제공했고 스파이가 따라가 현순의 주소를 알아내는 조건으로 한국을 떠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데이빗 현 지음 김영목 편집 사진으로 보는 애국지사 현순목사 의 대한 독립운동 한국독립역사협회 4 高警 제 호 上海ニ於ケル李承晩歡迎會ノ狀況 埴原正直 外務次官 쪽 朝鮮總督府 警務局長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ノ部 上海假政府 5 6 新義州警察署 被疑者 朱世竹 審問調書 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기 역사비 쪽에서 재인용 평사 7 데이빗 현 앞의 책 8 9 10 피소자 박헌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음모와 미제국주의자들을 위한 간첩행 위 사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이하 최고재판소 미제국주의 고용간첩 박헌영 리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전복 음모와 간첩사건 공판 문헌 국립출판사 쪽 11 12 13 14 현피터는 년 회고록에서 박헌영이 년간 중국공산당과 접촉해 재정 후원을 얻어냈으며 학교를 설립해 한인청년들에게 농업 산업경제과 노동계급 계급투쟁에 대해 가르쳤다고 썼다 15 16 데이빗 현 앞의 책 쪽 현앨리스 이야기 403

高警 제 17 知事 호 露國義勇艦隊汽船船客鮮人ニ關スル件 澤田牛麿 福岡縣 水野鍊太郞 內務大臣 內田康哉 外務大臣 赤池濃 警視總監 高警 제 疑鮮人婦人浦潮旅行ニ關スル件 スル件 朝鮮總督府警務局 不逞團關係雜件 高警 제 朝鮮人ノ部 在西比利亞 데이빗 현 앞의 책 18 호 容 호 容疑鮮人婦人浦潮旅行ニ關 쪽 19 20 현순목사의 두따님 도미후 발정 신한민보 21 解放된 故土 밟은 軍服의 朝鮮男妹 美軍으로 빗나는 歸國 서울신문 22 23 24 현앨리스가 하와이대학에서 잠시 공부했을 가능성도 있다 년 독립 은 현앨리스가 하와이대학에서 수학했다고 보도했다 25 26 27 28 선우학원 아리랑 그 슬픈 가락이여 대흥기획 쪽 29 30 31 32 일레인 야가와 인터뷰 인터뷰 33 로버타 장 자택 그랜트 이치가와 버지니아주 비엔나 자택 은 이 연구를 위해 미군에서 복무했던 하와이 한인여성들을 수소문한 결과를 보내주었다 로버타 장은 장이 정병준에게 보낸 편지 34 서울신문 35 최고재판소 앞의 책 404 년 입대해 미국 본토에서 근무했던 마가렛 과 인터뷰했지만 앨리스 현을 알지 못한다는 답변을 들었다 로버타 양 역비논단 쪽

36 정용욱 편 해방 직후 정치 사회사 자료집 제 집 다락방 쪽 37 편 위의 책 정용욱 쪽 38 39 40 데이빗 현 앞의 책 41 42 선우학원 앞의 책 쪽 쪽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와 민족혁명당 미주 지부의 주요 한인감리교회의 교인들이었다 구성원이 나성 43 금년도 독립신문사 신임원 44 독립신문사 차 사우총회 45 재미조선인민주전선 독립 독립 독립 현순 부부는 년 월 로 이주했다 독립 46 정병준 년대 재미한인 독립운동의 노선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집 47 李思民 鮮于學源이 金日成 朴憲永에게 보내는 편지 48 선우학원 앞의 책 쪽 49 선우학원 위의 책 쪽 선우학원 인터뷰 자택 데이빗 현 앞의 책 50 51 一 기소장 최고검찰소 검사총장 리송운 쪽 최고재판소 앞의 책 쪽 52 절대비밀 최근 당내에서 발로된 리승엽 배철 박승원 윤순달 조일명 리강국 등 반당 반국가적 간첩 도당들의 사건에 관하여 일자 불명 쪽 53 피소자 리승엽 조일명 림화 박승원 리강국 배철 윤순달 리원조 백형복 조용복 맹종호 설정식들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음모와 반국가적 간첩 테로 및 선전 선동 행위에 대한 사건 최고재판소 앞의 책 쪽 54 피소자 박헌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음모와 미제국주의자들을 위한 간첩행 위 사건 최고재판소 위의 책 55 서울신문 특별취재반 쪽 새로 쓰는 한국현대사 이사민 현앨리스 사건 서울신문 국내에서 북한의 남로당 재판기록에 등장하는 리윌리엄을 이사민으로 잘못 특정한 것은 서울신문 의 보도 이후였다 리윌리엄은 독립 신문의 열성적 지지자이자 현앨리스 이야기 405

재미한인 중 제일 먼저 북한에 들어간 이득환 李 得 煥 이란 인물이다 56 정창현 박헌영 권력투쟁의 희생양인가 미제의 간첩 인가 인물로 본 북한현대사 민연 쪽 57 정창현 위의 책 쪽 58 최기영 년대 미주 기독교인의 민족운동과 사회주의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 호 59 60 이경선의 사위인 윤심온 尹 心 溫 목사 미국 거주 는 이경선이 년 월 입북했으며 전쟁 다음 날인 년 월 일 구속되었다고 증언했다 윤 목사는 이경선의 장녀인 이영옥 李 永 玉 의 남편으로 본인은 피신 중이었으므로 이경선이 끌려가는 것을 목격하지는 못했으며 부인이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윤심온 전화 인터뷰 윤심온 인터뷰 자택 이경선의 입북과 체포 일시는 사실과 다르다 406 역비논단

참고문헌 독립 동아일보 서울신문 신한민보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ノ部 上海假政府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ノ部 在西比利亞 절대비밀 최근 당내에서 발로된 리승엽 배철 박승원 윤순달 조일명 리강국 등 반당 반국가적 간첩 도당들의 사건에 관하여 일자 불명 李思民 鮮于學源이 金日成 朴 憲永에게 보내는 편지 정병준 정창현 한국민족운동사연구 년대 재미한인 독립운동의 노선 박헌영 권력투쟁의 희생양인가 미제의 간첩 인가 최기영 년대 미주 기독교인의 민족운동과 사회주의 한규무 玄楯 한규무 현순 玄楯 의 신앙과 활동 의 인물과 활동 국사관논총 운동 이전을 중심으로 집 인물로 본 북한현대사 민연 한국기독교와 역사 호 집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 호 데이빗 현 지음 김영목 편집 사진으로 보는 애국지사 현순목사의 대한 독립운동 한국독립역 사협회 서울신문 특별취재반 새로 쓰는 한국현대사 이사민 현앨리스 사건 서울신문 선우학원 아리랑 그 슬픈 가락이여 대흥기획 현앨리스 이야기 407

이화여자중고등학교 동창회 이화여자중고등학교 동창회명부 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기 역사비평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미제국주의 고용간첩 박헌영 리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 의인민공화국 정권전복 음모와 간첩사건 공판 문헌 국립출판사 그랜트 이치가와 인터뷰 버지니아주 비엔나 자택 선우학원 인터뷰 자택 윤심온 인터뷰 자택 윤심온 전화인터뷰 란코 다케다 결혼 후 일레인 야가와 인터뷰 자택 로버타 장이 정병준에게 보낸 편지 408 역비논단

현앨리스 이야기 어느 진보주의자의 삶과 파국적 종말 Untold story of Alice Hyun: Life and Tragic Last of a Korean-American Communist (pp. 373~408) 정병준 Jung, Byung Joon Alice Hyun was the first Korean-American who was born in Hawaii, 1903. Her father was Rev. Hyun, Soon, one of the famous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leaders. She was educated in Seoul, Shanghai, and U.S. Also she experienced the shift of Korean movement from nationalism to communism during her stay in Shanghai in early 1920s. She endeavored for the cause of Korean independence and liberation. After she settled in Hawaii, she was involved with the labor movement as well as communist party movement in Hawaii. After the Pearl Harbor, she served as a Japanese linguist of U.S. War Department. After the end of World War II, she was sent to Tokyo as a member of 13 Japanese Nisei Women linguists who reported to the Allied Translator and Interpreter Service(ATIS), Headquarters of Army Forces in Pacific. Alice was transferred to Seoul in December 1945, and attached to the Civil Communication Intelligence Group-Korea(CCIG-K), G-2 Intelligence,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She was banished from Korea in the middle of 1946, because of her paralyzing of CCIG-K work as well as her connection with Korean Communist Party. Then she became an active member of radical Korean-American group in LA. The Korean Independence, weekly newspaper was the organ of the group, and Hyun family became the key member of the group. She became more radical, and she was one of the Korean Communists in U.S. according to the letter written by Harold Sunwoo and Lee Samin to Kim Il Sung and Park Hon Young of North Korea in 1948. She went to Pyongyang in 1949, via Czechoslovakia and Soviet Russia. In August 1953, the trial on South Korean Labor Party members was opened, she was named as an key spy who was the leader of U.S. spies ring in North Korea. In 1955, the trial on the ex-vice Premier of Park Hon Young was started. Park was accused as long time U.S. spy and Alice Hyun as also accused of Park Hon Young s first lover in early 1920 as well as connection key to U.S. intelligence agency. 주제어 현앨리스(Alice Hyun), 박헌영(Park, Hon Young), 이사민(Lee, Sa Min), 독립신문(Korean Independence), 민간통신검열단(Civil Communication Intelligence Group-Korea, CCIG-K), 조선공산당(Korea Communist Party), 1955년 박헌영 재판(Trial on Park, Hon Young in 1955) 투고 120315 / 심사완료 120409 / 게재결정 120413 Abstract 4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