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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진: 노래를 좋아하는 분들은 많지만, 콘서트까지 가시는 분들은 많이 없잖아요. 석진: 네. 그런데 외국인들은 나이 상관없이 모든 연령대가 다 같이 가서 막 열광하고... 석진: 지 드래곤 봤어?, 대성 봤어?, 승리 봤어? 막 이렇게 열광적으로 좋아하더라고요.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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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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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북클럽 논쟁 * 1) 저자: 천정환_ 문화/과학 편집위원, 성균관대 국어국문과 교수(사회) 권보드래_고려대 국어국문과 교수 토론: 김항_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HK교수 조태성_ 서울신문 기자 일시: 2013년 3월 15일(금) 7시-9시 장소: 서울문화재단 대학로 연습실 천정환: 제4회 북클럽 시작하겠습니다. 금요일 저녁에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 니다. 사회를 맡은 저는 책을 같이 쓴 저자 중 한 사람이구요. 문 화/과학 편집위원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문화/과 학 편집인이신 이동연 선생님께서 간단히 인사말씀과 오늘 모임의 취지를 이야 기 해주시겠습니다. 이동연: 여러분 반갑습니다. 문화/과학 의 편집인으로 있는 이동연입니다. 오늘 북클럽 행사에 앞서 편집인으로서 인사드리고자 나왔는데요, 오늘 행사에 대한 진 행과 내용은 천정환 선생님께서 잘 해주실 것으로 믿고, 저는 대신 문화/과학 을 오늘 참석자들에게 잠시 소개할까 합니다. 문화/과학 을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 천정환 권보드래 지음, 천년의상상, 2012. 209

1992년에 창간된 후 현재 21년째 책이 나오고 있습니다. 국내 유일한 진보적 문화 이론지로 출발해서 지금까지 편집위원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작년에 20주년이 되면서 초창기 멤버이셨던 강내희, 심광현 선생님 이하 1세대 편집위원들이 물러나고 젊은 편집위원들로 새로 재구성되어 71호부터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73호가 나왔는데요, 새로운 편집위원들이 만든 세 번 째 책입니다. 표지 그림이 아주 현란하고 선정적인데요, 저희는 이런 문화를 추구 하고 있습니다.(웃음) 문화/과학 을 모르시거나 아셨어도 접하기 쉽지 않았던 북 클럽 참여자 분들이 계시다면 문화/과학 에 많이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오늘 북클럽의 선정 책인 에도 많이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잡지를 구매하시거나 구독하시면 좋은 정보 얻을 수 있을 것 같 습니다. 아무쪼록 저희가 네 번째 북클럽을 시작하는데요. 계속 시간이 갈수록 좋 은 호응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와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오늘 참여해주신 네 분 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천정환: 본격적으로 제4회 북클럽을 시작하겠습니다. 원래는 사회자가 따로 있 어야 하는데 저자가 두 사람이고, 패널도 두 사람이어서 사회자를 따로 두면 번거 롭지 않을까 해서 제가 사회를 맡게 되었습니다. 먼저 권보드래 선생님께서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나 책의 핵심적인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시구요. 그 다음에 제 옆에 앉아계신 김항 선생님과 조태성 기자님 께서 책을 읽은 소감과 오늘 논제에 대해 간략하게 발제형태로 말씀을 해주시겠습 니다. 그런 다음에 서로 자유롭게 상호토론과 이야기를 나누고 이후에 청중석에 계시는 여러분들한테 질문이나 코멘트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먼저 제 옆에 계시는 김항 선생님과 조태성 기자님 소개를 간단하게 하겠습니 다. 김항 선생님께서는 창작과 비평 이라는 잡지의 가장 젊은 편집위원이면서 근 래 가장 주목받는 정치사상사 연구자로서 활동을 활발히 하고 계십니다. 마루야마 마사오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셨고, 아감벤과 발터 벤야민에 관한 책을 74호 문화/과학 북클럽논쟁 210

번역하거나 쓰셨습니다. 옆에 계시는 조태성 기자님은 서울신문 문화부에 근무하 고 계십니다. 서울신문에서 문화부 사회부 등에서 일해오셨습니다. 1960년을 묻 다 가 나온 이후 몇 군데 신문에 서평이 실렸는데요. 그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고 날카로운 서평이 조태성 기자님 서평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조태성 기자님 블로그 (chotaisung.blog.me)에 방문해보니까 상당히 많은 책에 관한 좋은 리뷰가 올라와 있 더라구요. 또 언론 현장에 계시면서 이야기해 주실 수 있는 것 같아서 오늘 이 자 리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먼저 권보드래 선생님께서 10분 정도 책에 대해 말씀을 해주십시오. 권보드래: 예, 불러주셔서, 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문화/과학 은 정말 오랜만 에 손에 잡아봅니다. 천정환 선생님과 함께 라는 책을 쓴 덕에 오 늘 초대를 받았나 봅니다. 일부러 여기까지 와주신 분들이니 책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은 있겠거니 전제하고, 먼저 간단히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공저 쓸 생각을 어 떻게 했느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으니까 그것부터요. 천정환 선생님과 저는 같 은 학과 선후배 사이입니다. 친하냐고들 많이 물어보시는데 그다지 친하진 않은 것 같구요. 예컨대 천선생님이 문화/과학 편집위원이라는 사실은 조금 전에야 알았습니다.(웃음) 친하다기보다 늘 가까이 있는, 또 믿을 수 있는 동료이자 친구였 다고 생각합니다. 천정환 선생님은 좀 다른 것도 같지만, 저는 처음부터 작정하고 1960년대에 관 심을 가졌던 건 아닙니다. 이 책 이전에 책을 두어 권 냈습니다만 다 1900~1920년 대에 집중돼 있었거든요. 상대적으로 거리가 멀었던 셈입니다. 얼마 안 되는 역사 를 두고 그런 식의 분할을 한다는 게 좀 우습지만 특정 시기에서 출발하면 그쪽만 공부하는 게 통례처럼 돼있고 해서, 해방 이후 시기에는 오래도록 관심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연한 기회에 1950~60년대 신문기사를 쭉 훑어볼 일이 있었는 데, 이 시기도 기왕의 통념하곤 너무 다르더라구요. 그러던 차 학술대회 같은 데 동원 된 경험을 계기로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천선생님이 책 앞머리에 211

썼듯이 아, 이 시기야말로 나를 만든 근과거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달까요. 근대 초기나 1920~30년대도 오늘날과 겹치는 면모가 있지만, 오늘날 우리가 대 한민국 이라는 모델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 모델이 지니고 있는 장점과 문제 점을 낱낱이 겪고 있기 때문에, 그 모델의 기본형이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느냐 하 는 것이 문제될 수밖에 없는데, 그건 1960년대의 4.19세대가 만든 것이다 이런 생 각이 들더라구요. 모든 분야에서 그렇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시기를 파헤쳐보고 싶어졌습니다. 이것이 2차적인 출발이었는데요. 공저를 생각하게 된 데는 몇 가지 까닭이 있습니다. 제가 먼저 프러포즈를 했는데, 다행히 천선생님이 받아주었습니 다. 저도 글이 좀 쌓이고 천선생도 글이 쌓인 상황이었고. 그래도 공저는 흔히 사용하는 형식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각각 자기 글만 갖고도 책 한 권 만들 분량 이 되는데, 그러고 보니 천선생님이 왜 공저 제안에 동의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 다. 이따 물어봐야겠네요. 저는 뭐랄까 인문학이 침체기고 마땅히 발언해야 할 몫을 다 못하고 있는 건 분명한 시점이지요. 세상 탓을 하기 앞서 우리가 뭔가 놓 치고 있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습니다. 헌데 어떤 문제를 제기하려고 할 때 한 사람의 힘으론 안될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1960년대라는 시기 자체 를 문제적 대상으로 만들고 싶은데 그러려면 복수( 複 數 )의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 지요. 당연히 공저를 생각했는데, 그렇다고 1/n 같은 형식은 아닐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2인 공저를 제안했지요. 각 장을 누가 썼는지는 책 말미에 나와 있지만 얼 핏 보면 구분하기 어려우실지도 모릅니다. 딱 10년 전에, 천선생님은 근대의 책읽기 라는 책을 냈고 저는 연애의 시대 라 는 책을 냈습니다. 문화/과학 이란 잡지가 그보다 훨씬 앞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지 만, 저희 책도 문화로의 전환 에 조력했다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이후 작업 방법은 좀 달라서, 천선생님이 저변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데 열심이었다면 저 는 지식인 엘리트 중심의 접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 차이가 서로 보완적으로 작 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어요. 사회적 발언권을 확보하기 위해 어쨌거 74호 문화/과학 북클럽논쟁 212

나 노력을 한 거라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꼭 발언권을 기대했다기보다, 음, 그렇게 최대한 세상에 예의를 갖추고 싶었달까요. 비슷한 맥락에서 책을 대통령선 거 전에 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조태성 기자님께서 블로그에 그런 표현을 쓰신 것 같은데요, 우파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책, 좌파는 불편한 부분 다 걷어내고 써 먹을 책, 꼭 그 정도의 포지션을 가졌으면 했습니다. 1960년대를 보다 보면 지금 우리 사회를 점령하고 있는 온갖 분할들이 읽힙니 다. 보수와 진보, 개발과 민주, 순수와 참여, 밥과 자유 등등. 지금 누구나 통합을 말하고 있습니다만, 오래된 분할의 상상력을 넘어서기 위해 1960년대를 돌아봐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책에는 간첩 문제며 독서문화의 상황이며 한국학의 정초 내력 등 다양한 주제가 나옵니다만, 이 책을 꿰뚫고 있는 문제의식 중 하나는 4.19 와 5.16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저희 둘이 조금 입장이 달랐어요. 저는 4.19의 좌 절이 불가피한 역사적 코스에 가깝다는 생각을 한 편입니다. 박정희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도 좌절될 수밖에 없는 방향으로 4.19 후 대중이 움직이고 있지 않았나 생각했지요. 천선생님은 의견이 다르더라구요. 그 당시 국제 정세로도 그렇고 국내 혁신 세력의 가능성으로도 그렇고, 4.19의 가능성이 정치 사회적으로 현실화될 수도 있었다고 보는 편이었고. 책을 쓰는 과정에서 제가 천 선생님에게 조금씩 설 득당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4.19로 열렸던 가능성이 사상돼 버렸 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요. 산업 모델도 그렇고 삶의 모델도 그렇고. 우리가 살고 있는 체제는 한 미 일 사이 군사 경제 동맹 체제고, 보수와 진보가 분할 되어 있는 체제고, 남 북한이 이런 식으로 대면하고 있는 체제지요. 이제 박정희가 죽은 지 30년이 넘게 지났습니다. 지금 한국의 경제적 상황을 기 준으로 보자면, 적어도 박정희는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 다. 역설적으로, 이 절반의 성공에 기대, 그것이 성공하기 위해 밟아버렸던 가능성 을 돌아봐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이 막다른 길에 처해 있고 어디로 나가야 할지 도무지 불투명한 만큼 더더구나 1960년 을 성찰하고 재생시킬 필요가 213

있지 않을까요. 책에서도 무지에의 욕망, 이런 말을 썼습니다만, 지금 이대로나마 지키기 어렵다는 감각이 하도 만연한 시절이라 그래도 발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말을 건네고 싶었습니다. 1960년에 대해 생각해 보자, 성찰하고 반 성하고 실험해 보자, 그런 생각이 퍼져나가는 데 이 책이 조금이나마 역할을 했으 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천정환: 예, 감사합니다. 저자로서 책이 갖고 있는 위상이나 만들어진 과정에 대 해 잘 이야기 해주신 것 같습니다. 사실 가 두껍기도하고 60년대 의 문화나 문화사에 대한 약간의 배경지식이 없으면 읽기 쉽지 않습니다. 책 자체 에서 시의성을 찾는 것도 쉽지는 않습니다. 저는 요즘 신문이나 방송에서 박대통령 이라는 말이 나오면 깜짝깜짝 놀랍니다. 박대통령 시대 를 이미 겪었던 사람으로서 말이지요. 30년을 격하여 다시 두 명의 박대통령이 연결되는 이 시점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대선 때 사실 우 리는 나름대로 절실했지 않습니까? 이명박시대를 겪고 나서 말이지요. 하지만 절 실했으나 패배했다는 것. 지난 12월 19일 이후에 저한테는 이런 세상이 계속 지속 될지도 모른다는 초조함 같은 것이 생겼습니다. 앞으로 5년간은 지난 5년에 덧대 어진 것이니까요. 이 어떤 시대가 될지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이 책 1960년을 묻다 는 우리가 지나온 과거가 과연 어떤 가능성이 있었는지를 묻고자 한 책입니 다. 이제 김항 조태성 두 분 이야기를 듣고 그 가운데서 논점을 추려서 얘기할 수 있으면 추려보겠습니다. 김항: 예. 소개받은 김항입니다. 문화/과학 창간은 제 대학 초년 시절과 겹칩 니다. 아직까지 1, 2호 표지가 기억나네요. 그런데 2호 이후에는 안 봤던 것 같습니 다.(웃음) 이런 자리에 제가 와서 말을 하게 되어 감회가 새롭네요. 또 천선생님과 는 술을 자주 마시는 사이라 이런 자리에 와있는 게 쑥스럽기도 합니다. 이 책을 보면서 들었던 몇 가지 생각을 현재 상황과 겹쳐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소 개해주신 대로 저는 이 책에 등장하는 창작과 비평 이란 잡지의 편집위원 말석 74호 문화/과학 북클럽논쟁 214

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창작과 비평 편집위원들이 대선 이후 워크샵을 갔습니 다. 저는 안타깝게도 참가 못했는데요, 무슨 얘기가 오갔나 회의록 같은 걸 보니 백낙청 선생님께서 창비를 창간했던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다는 취지의 말씀을 하 셨더라구요. 그래서 창간의 정신으로 되돌아가자, 뭐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창비가 1966년 창간이 되었죠. 잘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백낙청 선생님께서는 2013년 체제 라는 말을 만들어내시면서 지난 대선 정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셨고 이겨보자 는 말을 많이 하셨습니다. 역시 그런 말들을 들으면 백선생님으로 대변 되는 지식인층이 갖고 있는 역사 인식이랄까 역사 철학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 은 헤겔적 의미의 역사철학을 바탕에 깔고 선거 국면이나 일상의 정치적 상황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이죠. 예를 들어서 정권교체를 역사의 진보로 해석하거나 하는 관점이죠. 물론 사변적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요는 현실 정치를 낡은 것과 새로 운 것의 대립으로 바라보는 프레임을 공유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런데 지금의 한국 상황이 과연 1966년도의 독재 대 민주 의 대립으로 포 착 가능한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있습니다. 오히려 지금의 한국 상황과 맞는 시기 를 생각해보면, 제 감각으로는 1920년대 독일이 떠오릅니다. 1920년대 독일의 여러 지식인들이 씨름했던 테마는 실존성의 위기 라는 것이죠. 여기서 실존이라는 것은 타인과 대체 불가능한 자아의 존재감각을 뜻합니다. 1920년대 독일은 그런 실존감 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는 상황이었다는 건데, 지금 한국도 그런 것 아니냐는 생 각이 듭니다. 선거가 저런 식으로 끝나버렸는데, 사실 그 이후 그렇게 뜨겁던 국면 은 가라앉아 대립 구도는 식었죠. 그리고 상대방이 이기면 세상이 끝날 것처럼 과 열되던 싸움도 큰 패배감이나 좌절감을 낳지는 않은 듯 보입니다. 다시 일상이 시 작된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선거나 정권교체 등 이른바 큰 정치 는 특정 국면이나 이슈를 둘러싸고 뜨겁고 강력하게 사람들 사이의 사고와 행동을 사로잡지만, 정작 일상적 수준을 크게 뒤흔들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일상적 수준을 강력하게 사 로잡는 정치의 수준은 무엇인가? 저는 대중사회의 스펙터클이라 생각합니다. 이 215

스펙터클은 개인의 삶과 사회 혹은 국가의 모습 사이에 큰 거리를 만들면서, 개인 의 삶을 한없이 초라하고 초조하게 만듭니다. 뭐냐하면, 다양한 미디어나 심리기제 를 통해 개인들은 국가 혹은 사회가 많이, 빠르게 발전했고 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선진국 이란 언설이 그렇죠. 그런데 개인인 나의 삶을 돌아보면 그것에 굉장히 못 미치는 삶을 살고있다는 괴리감을 강하게 느낍니다. 그리고 이 괴리감을 낳는 거 리는 개인의 힘으로 절대 뛰어넘을 수 없는 좌절과 불안을 만들어냅니다. 젊은층 도 마찬가지고, 노년층까지 지금 한국사회를 음울하게 뒤덮고 있는 불안 혹은 걱 정의 정체가 이런 괴리감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한국사회의 일상 에서 가장 심각한 정치적 문제는 이 스펙터클로 인한 실존성의 훼손이라 할 수 있 습니다. 다른 이들은 잘 나가는데 난 뭐냐는 좌절감이나 패배감이죠. 아마도 하이데거나 아렌트가 얘기했던 것이 바로 이런 실존성의 위기일 겁니다. 그리고 파시즘이나 전체주의는 이 불안, 좌절, 실존성의 위기를 거름으로 삼아 일 상 속에서 재생산되고 힘을 강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해야 할 일은 어떻게 하면 개인의 실존성 회복을 기초로 하여 정치의 토대를 재구성할 거냐의 문제라고 봅니다. 아마도 60~70년대로 돌아가서 모종의 계보를 다시 한번 짜야 되는 작업들 이 요청되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봅니다. 저는 이 책의 의의를 그렇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60~70년대는 당연히 독재 대 민주라는 역사 철학적 의미를 가진 시기이 기도 했지만, 개인의 실존성이 최초로 문학과 사상의 장에서 정치적으로 문제화되 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김승옥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 최인훈의 크리스마스 캐롤 이나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 등이 그렇죠. 일상이 획일화되어 가는 흐름이 포착되고 대중사회의 출현 속에서 전체주의의 싹 같은 것들이 피어나 는 시기이죠. 그래서 독재나 억압이란 이미지 하에서는 잘 발견되지 못했던, 김승 옥이 정말 잘 포착해냈던, 대중사회화와 샐러리맨의 전면적 등장 등을 다시 한 번 계보학적으로 새롭게 엮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각 개개인이 타인과 대체 불가능한 실존성을 지닌다는 의식의 발로인 한편, 다른 한편에서는 회사나 조직에 74호 문화/과학 북클럽논쟁 216

서 짤리면 다른 사람이 나 대신 올 수 있다는 실존성의 위기의식이 표출되기 시작 하는 시기라는 거죠. 결국 테일러리즘이나 포디즘이 전면화되기 시작하는 이 시기를 어떤 식으로 새 롭게 포착할 것인가가 관건인 셈입니다. 그것은 코제브식으로 얘기하면 역사의 종 말 이후, 즉 포스트히스토리의 형국이 이미 이 시기에 개시된다는 시간관입니다. 그 런 의미에서 보자면 한국의 경우는 히스토리가 전개되는 것과 동시에 포스트히스 토리가 시작되는 오묘하고 뒤틀린 시간성이 존재하는 것이고, 이 오묘한 중첩이 시 작되는 시기가 60년대, 70년대라고 할 수 있겠죠. 아마도 천선생님과 권선생님께서 앞머리와 끝에 강조해주신 문화연구적인 패러다임이 해야 할 일이 바로 이 시간성 에 대한 주목이라고 봅니다. 자본주의 체제와 정치권력 사이에서 사람들이 균질화 되고 대체가능하게 되고 실존성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정치 패러다임의 계보를 축 출하는 일을 문화연구에서 다뤄야 하는 것 같아요. 그것이 우리 시대 정치의 기초설 계, 즉 아렌트 식으로 얘기하면 세계를 구성하는 공동성의 재구축이 아닐까 합니다. 이 정도가 제가 파악한 이 책과 현재의 상황 사이의 상관성인데요, 한 가지 불만 이랄까, 이 책에서 다뤄주셨어야 하는데 누락된 부분을 지적하면서 마무리할게요. 불만이라는 이상한 용어를 썼지만 이 책에서는 자본주의 문제가 빠져있는 것 같습 니다. 저는 문화연구라는 시각 아래에서 1960년을 묻는다면, 역시 4.19/5.16과 자본 주의의 본원적 축적 같은 부분을 다뤄야 한다고 봅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 은 경제 통계수치나 경제학자들에 의해 주눅 든 그런 문화연구자의 자본주의 연구 는 그만둬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실 문화연구자만이 실제로 진정한 자본주의를 드 러낼 수 있다는 일종의 자존감과 실존성을 전면에 내세우며 자본주의 분석을 해나 가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입니다. 경제학자들의 이론이나 수치야말로 자본주 의를 오판하게끔 하는 가장 못된 스펙터클이니까요. 물론 앞으로도 선거라든가 하 는 큰 정치 는 지금처럼 굴러갈 겁니다. 그런데 일상을 지배하는 불안과 좌절, 그 리고 그것을 거름삼아 일상을 갉아먹는 파시즘과 전체주의는 문화연구의 자본주 217

의 일상 분석을 통해서만 비판 가능하다고 봅니다. 문화연구가 큰 정치 차원의 진보를 추동해낼 동력이 될 수는 없겠지만, 일상 차원의 실존성 회복을 위해서는 가장 강력한 비판의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새롭게 계보학적으로 짜이고 엮인 1960-70년 대의 문학/문화/사상적 자원은 큰 정치 의 연대와 다른 공동세계 의 창출로 이어 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위에서 말한 일상을 지배하는 불안과 좌절을 개인이 감당 하고 견뎌내고 극복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이때 국가나 사회가 제시하는 스펙터 클을 과감하게 부정할 수 있는 힘은 가까운 이웃들의 공동세계 혹은 연대 로부터 비롯된다고 봅니다. 이것을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새로운 관계를 모색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관계를 조금씩 비틀어가는 것이 일상을 크게 변화시 킬 수 있을테니까요. 그것이 파시즘의 소리 없는 침투를 막아내는 큰 힘이 아닐까 상상해봅니다. 이 정도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천정환: 감사합니다. 강조해주신 내용은 자본주의 현실이 주체에 강요하는 삶의 태도와 불안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삶의 근저적인 태도를 바꿔내느냐가 결국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을 짚어 주신 것 같습니다. 조태성 기자님 말씀을 듣고 추려 서 얘기해 보겠습니다. 조태성: 앞의 세 분 말씀을 듣다보니 역시 괜히 나왔구나 싶습니다. 제가 여기 불려나오게 된 이유는요, 두꺼운 책을 열심히 읽었고 기사를 썼었고 그 때문일 뿐 입니다. 아까 잠깐 블로그를 말씀하셨는데요. 제 스스로 생각했을 때 이 책의 진가 는 혼란스러운 회색지대 같은 느낌? 그런 느낌이 읽으면서 굉장히 좋았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엄청난 두께의 책을 겁 없이 읽었던 것 같습니다. 간단히 제 입장에서 느낀 점을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쓰신 분도 그렇고, 토론회 패 널로 나오신 분들, 이 자리에 오신 분들도 박근혜 시대 얘기를 가장 많이 할 것 같습니다. 제 주변도 그렇고, 여러분들 주변도 그렇고, 섬에 들어가네 이민을 가네 마네, 농반진반인 이런 얘기를 많이 하셨을 것 같습니다. 74호 문화/과학 북클럽논쟁 218

박근혜 시대가 개막했는데요. 모두가 어떻게 살까, 이런 얘기를 하는데, 잘~살 아야 한다. 말 그대로 잘 살아야 한다. 요즘 글을 보다 보면 내 이럴줄 알았다 이런 글들입니다. 말머리를 여는 말들이 박근혜 시대 들어서 아무말도 안하고 잠자코 있으려고 했는데, 이왕 대통령 됐으니 잘 됐어야 하는데. 하는 꼴을 보니 못 참겠 다 이런 얘기들이 많습니다. 정말 아무 말 안하고 있으려고 했던 건지, 정말 성공 하길 바랐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글을 보다보면 오랜만에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났다는 묘한 흥분감 같은 게 느껴지거든요. 제대로 된 선수가 나왔으니 글러브를 끼고 링에 올라 호흡을 고르는 느낌? 이명박 정권 같은 경우는, 정색하고 얘기하기에는 좀 뭣한 정권이었지요. 그에 비해서 박근혜가 가지고 있는 힘이랄까? 최근에 들어서 첫 내각을 만들어서 인사 청문회를 했는데 지금 이런저런 얘기 나오는데 사실 그 분들이 깨끗하리라고 기대 하는 분들 아무도 없잖아요. 그것이 크게 문제가 된다고 생각은 안 합니다. 제가 기자다 보니 사회부, 경제부 이런 데 돌아다니다 보니 잘 아시는 분도 계시고 여러 층이 있는데 그분들에 대한 제 느낌은 상대적으로 가장 엘리트다운 점잖고, 세련 되고, 주변에 두루두루 잘 하는 분들이라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만나면 참 괜찮다 싶을 정도의 분들이 되셨어요. 인사나 내각에 대해 비판을 하며 너 그럴줄 알았다 하는 사람은 특종을 노리는 기자나 글러브 끼신 분들이 아닐까. 박근혜 당선에 대 해 일방적인 의견, 응원 등이 있다 보니 충격을 얘기하시는 분들이 있는데요. 선거 결과 개표 방송이 나오면서 술집들이 참 대단했었죠. 어딘가에 보니까 남재희(전 노동부장관) 인터뷰를 하셨는데, 야당이 비슷하게 모은 것만으로 대단하다, 못할 짓을 한 것처럼, 죽을죄를 진 것처럼 싹싹 빌고 다니지 마라, 이런 말을 하셨더라구 요. 저는 그 말에 동의를 하는 편입니다. 해석에 따르면 51:48인가? 그 2%가 문재 인은 MB를 함부로 건드리지 않을 것 같아서 그쪽으로 갔다 이런 얘기도 있습니 다. 확실하게 해달라 뭐 이런 거였는데 저도 답답한 감은 있습니다. 저도 부정 하는 것은 아니구요. 험한 꼴을 꼭 당해봐야 5년도 아니고 10년을 당해봐야 알겠 219

다는데 방법은 없죠. 이런 얘기를 쭉 하다보면 제 주변에서 냉소적이다 패배적이 다 이런 얘기들을 희망을 얘기하면 대안을 얘기하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보고 이런 얘기들을 많이 하는데, 저는 그런 얘기들을 힘들어하는 편이거든요. 희망 대안을 얘기하는 게 지금 이 시대가 종말론적인 상황에 처해있다 를 전제로 하는 것 같아 요. 정말 이 상황이 종말론적인 상황인가. 남재희 선생님처럼 이 정도면 잘 한거다 라고 말할 수 있느냐 아니냐, 이런 차이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도 합니다. 이명박 시대에 대해 이런저런 말이 많지만 지금 같은 시대니까 그만큼 방어해냈다고 생각 합니다. 그 분이 만약 50~70년대에 집권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좀 다른 차원이지 만 우리가 그만큼 쌓아온 게 있으니까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았지만 싸워내고 버텨 내지 않았을까. 저는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최장집 선생님 이후 말도 많고 신자 유주의 안돼! 이런 말이 나오는데 저는 아무리 부족하고 모자라 보여도 우리가 쌓 아온 게 있지 않느냐. 그런 부분에 있어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저평가하거나 종말 론적으로 말씀을 많이 하시는 분들을 보면 저분들은 얼마만큼 메시아적인 찬란한 미래를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비관론에 젖지 말자! 이런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를 마감에 쫓기면서 겨우겨우 읽어냈던 이 유도 그 부분에 대한 가치가 아닌가 합니다. 욕망. 사람들이 욕망에 대한 참 얘기를 안 하죠. 욕망, 갈망, 존재론적 이야기 를 하시는데 존재라는 것이 인정받는 방식이 자기만족적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는 데 세속적인 기준으로 중산층 얘기하면 30평 아파트에, 중형차 이런 개념도 있을 수 있을 수 있을 것 같고 과연 욕망에 대한 질문들 해결이 됐는가. 지금도 다시 되짚어서 물어보면 정말 해결이 됐는가. 가장 재밌었던 구절은 5.16이 되어버린 4.19 라는 표현입니다. 내 안에 너 있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이런 표현들이 떠올랐는데요. 정말 해결된 게 있느냐, 변한 게 있느냐. 가장 근본적인 이야기일 것 같구요. 이 문제를 한 큐에 해결해서 찬란한 미래를 가져올 것 같지 않고요. 성왕 같은 74호 문화/과학 북클럽논쟁 220

대통령을 뽑고. 국회 개혁만 하면 다 풀린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해법이 아닌가. 미야지마 히로시 선생님 이야기가 잠깐 나왔었는데, 그 분을 7~8년 전에 인터뷰를 했을 때 이분이 하시는 말씀이 전통이 낡아서, 잘못돼서 문제가 아니라 내부적으 로 극복되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다. 라는 질문은 독재나 유신으로 가서 잘못된 게 아니라 1960년 같 은 상황을 지금은 내부적으로 극복했느냐, 극복해낼 수 있는 계기가 있느냐, 느낌 이나 힘이 있느냐, 이런 문제를 물은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모두가 고민해 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5.16이 되어버린 4.19. 되어버린 말을 여러 번 곱씹 었습니다. 뭔가 아쉬운 것 같고. 어~하다가 당한 것 같은 느낌이 많이 나는데 이 런 문제를 박근혜 시대에 투사해서 봐야 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마지막 부분에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찬반 아니라 비중 으로 저는 두고 싶은데 이런 얘기 나올 때 마다 진보진영에 혼란이 있었구 요. 이명박 박근혜의 가장 큰 장점은 권력이 시장에 갔다는 얘기 안나오는 것. 그거에 대한 희망 기대가 가장 큰 것이 아닌가. 그런 혼재된 부분, 역으로 투사된 부분에 대해 말씀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천정환: 마지막 말은 노무현 대통령이 한 유명한 말인데 그 함의를 좀 더 부연 해 주시면요? 조태성: 흔히 하는 말로 박근혜에 대해 아버지를 영원히 가슴에 품고 있다, 이명 박도 박정희식이었다 얘기를 하는 게, 입으로는 시장, 시장을 외치지만, 근본적으 로 국가를 중요하시는 사람들이라. 요즘 국가에 대한 재평가가 많은 상황에서 그 런 거꾸로 접합되는 부분을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천정환: 아 네, 감사합니다. 박근혜는 이를테면 자기 아버지 같은 국민주의자 내 지 국가주의자일 가능성이 높고 실제로 그런 것을 통치의 기본질료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노무현이나 이명박과 다른 양상을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말씀인 듯합니다. 저도 일부 그렇다고 봅니다. 이상 두 분께서 하신 말을 토대 221

로 대체로 두 가지 화제를 추릴 수 있다고 봤는데요. 하나는 박근혜 시대, 지금 우리가 호흡하고 있는 이 시대란 과연 무엇인가. 아까 김항 선생님께서는 386세대나 그 아버지 세대 격인 창비 류의 역사철학적 의식을 비판적으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아주 고질적인 보수 대 진보, 민주 대 반민주 의 구도로 역사를 해석하고 바라보는 관점 말이지요. (참고로 두 분 패널은 90년대 학 번들이십니다.) 또 그런 것들도 포함해서 박근혜시대란 무엇인가를 조태성 기자님 께서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내각을 짜는 모습을 보면서 박근혜시 대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봤습니다. 김모라는 미국에서 성공한 기업가를 미래창조과 학부 장관으로 임명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런 행태는 아버지 시대에는 있을 수 없는 행동이라는 것, 국적과 국민 을 초월한 자본가에게 미래와 창조와 과학을 맡길 수 있다는 것은 과성숙한 남한 자본주의의 현단계를 보여주는 상당히 놀라운 다른 행 태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박근혜는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아버지 시대의 패러 다임을 답습하고 반복합니다. 한강의 기적 같은 건 정말 창비 세대만큼 낡은 말이 죠. 이런 양가성이 우리가 맞닥뜨려야 할 앞으로의 5년일 듯합니다. 즉 박근혜 정권 의 통치성을 이야기해보면 좋을 것 같구요. 두 번째는 그것을 구성하거나 맞서는 5.16이 되어버린 4.19 즉 저항과 불안과 욕망이 뒤엉킨 한국사회의 대중들의 상황입 니다. 우리가 그런 불안을 탈출하고 다른 힘으로 바꿔낼 수 있겠는가. 일단 이렇게 둘로 정리하는데 먼저 권보드래 선생님께서 답변을 하시고 싶으신 것이 있으시면. 권보드래: 듣고 싶은 얘기가 더 많은데. 천정환 선생님께서 박근혜 시대에 뭐 가 바뀌고 또 바뀌지 않았는가 정리해 주셨는데요, 전 요즘 사이렌 소리만 나도 깜짝깜짝 놀랍니다. 워낙 겁이 많은 편이라, 예전부터 정세를 잘 읽던 친구들한테 전화해서, 괜찮겠지? 중 미 관계도 그렇고, 지금 북한도 개방의 수순을 밟고 있을 뿐이지? 이런 걸 새삼 확인받고 나서야 조금 마음을 놓고, 그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전 정치에 대한 관심이나 통찰력이 높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사우나 아줌마 에 가깝습니다. 그렇지만 나이 들어 투표권을 행사하면서 74호 문화/과학 북클럽논쟁 222

늘 마주해 왔던 여야 양당 구조는 참 의아스러웠습니다. 적대하면서 공존하는 구 조잖아요. 조태성 기자님께서 말씀하신 회색 지대 이런 걸 어렵게 하는. 남 북한 이든 보수 대 진보든, 저쪽을 공격하면 저절로 이쪽의 정당성이 확보되는 구조가 너무 오래 지속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꿔 말한다면 자기를 증명할 필요가 없는 구조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나 자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힘이 있는가? 그런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었던 거죠. 책을 쓰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너는 무엇으로써 너 자신을 증명할 것인가. 적잖은 선후배들이 여전히 부정과 비판을 입장인 양 착각하면서 살고 있는 걸 봅니다. 그래서 여러 해 전 차라리 행복한 중산층으로 살겠다 는 생각을 굳히기도 했지요. 자기 입장을, 그 근거를 만들어 갈 수 있는가, 이건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 니다. 재독 철학자인 한병철 선생이 쓴 피로사회 라는 책 있잖습니까, 책값도 비 싼데 희한하게 베스트셀러가 됐는데 여하튼 거기서도 적대성의 시대는 이미 끝 났다고 되풀이 쓰고 있지요. 그 말을 다 믿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제 내가 나와 싸 워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완전히 다른 발상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항 선생님께서 자본주의에 대한 성찰이 아쉽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저는 북 조선을 다루지 못한 점이 가장 아쉽습니다. 어떻게든 다루고 싶었는데 제대로 쓸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남북 상황을 보면 1966~68년 사이의 긴장 국면이 많이 생 각나는데요. 특히 1966년 11월인가는 거의 매일 충돌이 있었죠. 군사분계선을 넘어 와 병사를 살해하기도 하고, 박정희 죽이러 왔수다. 그 김신조 일행이 남파되고, 그 결과 남한에서 향토예비군이 창설되고 했던 게 다 그때죠. 남 북한 관계가 바 뀌면서 양쪽이 다 체제 전환을 이루었던 때입니다. 박정희는 5.16 직후 나는 자본 주의도 공산주의도 지지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은 제 3의 길, 민족적 번영의 길이다. 이런 투의 말을 여러 번 했는데요, 그런 제 3의 길 의 가능성이 남 북한 에서 모두 닫혀 버린 시기인 것 같습니다. 7.4 공동성명 같은 막간극이 있었습니다 만 이후 북조선은 저개발 독재 체제로 가고 남한은 유신 체제로 가면서 강남 개 223

발과 중화학 공업 육성 정책을 펴지요. 그러니까 결국 자본주의 문제와도 겹칩니 다. 김항 선생님 말씀대로, 경제학자들 앞에 주눅 들지 말고 우리 방식으로 그런 문제를 더 파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천정환: 김승옥의 60년대식 이라는 소설이 기억나는군요. 인간이 속물로 되어 가는 과정, 혹은 속물성에 저항하는 인간조차도 속물이 되어가는 풍경을 그려주고 있는데요. 그런데 흥미롭게도 단지 속물적 욕망과 호모에코노미쿠스만 경제개발 과 함께 커갔던 건 아닌 거 같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민주화 를 위한 투쟁도, 저항 도 불가능했겠지요. 1960~80년대 한국인들이 고도성장 하의 욕망 의 존재이면서 도 현재와 다른 건 두 가지 이유에서인 같아요. 한편으로는 그 사람들이 공동체에 살고 있다는 의식이 강했다는 것 일종의 제가 쓰는 용어로는 가난 공동체 인데, 모두가 가난하고, 가난하게 평등합니다. 그래서 (상상되는) 국가-공동체로 수렴되 고 또 국가가 전유할 만한 가난한 자들의 서사 가 있어요. 전태일이라든지 <엄마 없는 하늘 아래> 같은 이야기나 집안을 위해 희생하는 서울로 상경한 누이 공순 이 들의 이야기. 산업화가 만들어내는 이런 이야기들이 상당히 공감대를 넓게 형성 을 하고 있고, 거기 결부된 정서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거 같습니다. 요즘은 가난에 대한 태도가 달라서 불만이나 증오는 강하지만 개인화 파편화가 극심하죠.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고 분노배설의 공동창구만 있는 게 다른 듯해요. 그게 또다른 스펙터클을 만들어내기도 하고요. 두 번째는 위와 연관된 것으로, 1970년대 이후 좋은 의미의 민중주의가 정치 적 윤리적, 그리고 문화적인 측면에서 동시에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 보여요. 이 세 가지는 물론 따로 떨어진 게 아니고, 엘리트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한 맑스주의 의 영향이 아니라도 자연스레 민중에 대한 관심과 노동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고 있었던 거죠. 개발연대가 만들어낸 그 같은 양가적 효과가 1980년대까지 가는거죠. 그런데 박근혜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흔히 불안 과 세대를 가르는 다른 망탈리 테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정밀하게 층위를 나누어서 얘기를 해볼 필요도 있겠습니 74호 문화/과학 북클럽논쟁 224

다. 실제로 미래를 살아가야 하는 20~30대의 젊은 주체성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 가는 정말 중요한 주제이지요. 다시 김항 선생님께서 한번 이야기해 주시지요. 김항: 저 요즘 뉴스를 잘 안봅니다. 삶의 행복을 위해서. 오늘 계속 말씀해 주시 는 얘기에 대해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뭔가 통치성이 변화했다는 말씀 을 해주셨고, 조기자님께서는 종말이 왔다 는 비관적인 말은 삼가야 한다고 말씀 해 주셨는데. 저는 많은 게 망가져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이 세계를 읽는 문법 이라거나 타인을 대하는 법도라거나 아니면 자기 삶을 구성할 때에 무엇이 더 나 은 삶인가 하는 사고의 회로 같은 것들이 많이 망가진 것 같습니다. 저조차도 그런 것 같구요. 돌발적인 행동들도 하게 되구요. 그런 의미에서 권보드래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셨듯이 평온한 삶을 살려고 마음 먹을 수도 있는데 잘 안 되는 상황도 있는 것 같고, 말 그대로 예외상태, 다시 말 해 규칙이 많이 어그러진 상태인 것 같습니다. 그것이 비단 박근혜 탓이냐 하면 개인에게 환원될 수 없겠지만 그 이름이 상징하는, 에서 제기해주 신 모종의 역사성에 그 원인을 따져 물을 수도 있을 듯합니다. 즉 1960년 이래 드러 난 문제를 내부에서 깊이 있게 극복하지 못하고 표피적으로 민주화를 했다거나 하 는, 여전히 극복되지 못한 뿌리 깊은 유산인 것 같습니다. 그것이 기저음으로 작용 해서 삶의 문법,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법, 타인에 대한 배려. 어떤 삶이 더 나은 삶 인가 하는 기대나 희망을 엉망으로 만든 것이 지금 상황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 서 제가 보기에 비관적이거나 종말적인 상황이라기보다는 한마디로 개판이 된 것 같습니다. 여기서 그럼 어떤 규칙들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문법들을 만들어낼 수 있 느냐는 물음은 지금 시기에선 굉장히 성급한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이런 망가짐 위에 서 유일하게 한국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일종의 파괴적인 경쟁을 직시해야 합니다. 기 드보르가 195~60년대 프랑스의 고도 자본주의 성장을 보면서 스펙터클의 축적 이라는 말을 씁니다. 맑스의 자본의 축적이라는 말에서 빌려온 건데 굉장히 매혹적 인 개념이죠. 다양한 의미가 있는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자기의 삶의 조건과 스펙터 225

클화되어 축적되는 사회의 삐까번쩍한 모습 사이의 거리가 자본주의 지배의 근원 이라는 것이 기 드보르의 생각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집과 시 청자 개인의 삶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거리 같은 것들이죠. 그런 스펙터클을 어떤 식으로 개인이 지각하고 의미화할 것이냐가 관건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그 지각 과 의미화를 불안과 선망으로 몰아가면서 스스로를 지속시킵니다. 스펙터클화된 화 려한 삶의 모습과 그렇지 못한 나 사이에서 발생하는 자존감의 훼손이 자본주의를 지탱시키는 것이죠. 이 거리와 차이가 없으면 경쟁과 소비사회가 지탱될 수 없으니 까요. 스펙터클과 개인의 실존은 이런 식으로 관계 맺기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박근혜시대라는 것이 스펙터클과 개인의 관계 맺기 양상 이 더욱더 부정적으로 파괴적으로 갈 공산이 큰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전 정권에 만들어놓은 메커니즘이나 시스템이 인적 물리적으로도 지속될 것이고 그랬을 때 스펙터클과 개인 사이의 거리는 더 벌어지겠죠. 선망, 좌절, 불안 등 여 러 가지 정동의 흔들림이 증폭될 것이구요. 그리고 주체구성의 문제인데, 저는 주 체구성 이라기보다는 개인이 어떻게 삶을 견디고 지켜낼 것이냐의 문제라고 봅니 다. 이를 위해 아까 천정환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가난 공동체, 김수영이 거대 한 뿌리 에서 얘기했던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그런 연대성이 필요하겠죠. 연대성 이라고 말하기도 참 그렇지만 말입니다. 뭐 말하자면 의식되지 않은 공동체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망가진 문법을 다시 회복하기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견딜 것인가가 일차적으로 요청되는 일 같은데, 그런 의미에서 저는 비관적이기보다는 절박한 상 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천정환: 예, 개판 상태 (웃음). 김항 선생님은 자주 언급하거나 소개한 칼 슈미트 나 아감벤 등의 이론에서 많이 나오는 예외상태 를 패러디한 것처럼 들립니다. 어 찌 보면 김항 선생님은 더욱 어려운 요청에 대해 말씀하신 거네요. 삶 을, 내지는 삶의 태도 를 더 기저부터 고칠 것. 연대 같은 낡은 말을 쓰기 싫다고 하셨지만 어소시에이션 같은 다른 용어로도 표상되어야 할 어떤 새로운 공통성 또는 공동 74호 문화/과학 북클럽논쟁 226

성 의 회복을 말씀하신 겁니다. 아무튼 김선생님은 비관론자는 아니시네요. 서두에 서 조태성 기자님은 잘 살아야 한다 고 말씀하셨는데. 그게 어떤 겁니까? 과장 된 비관이 아닌 다른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말을 좀 더 부연해서 이야기해 주시죠. 조태성: 잘 살아야한다는 말은 말 그대로 진지한 말이구요. 비꼰다든가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잘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 다. 연대 얘기와 박정희에서 박근혜로 내려오는 역사성이 계속 논의되는데 욕망 의 가장 좋은 예가 짬짜면이죠. 도덕적이고도 싶고, 세속적으로 출세도 하고 싶고. 그 비중을 어떻게 조정하느냐는 사람들마다 다를 것이고, 사람마다 판단하는 게 다를 것입니다. 산에 가서 고고하게 도 닦아야 한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발에 흙 좀 묻히고 다 그렇게 사는 거 아니냐고 보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인데, 개인적인 선택이 좋은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계속 안 좋은 방향 으로 가는 것 같은 그럼 플러스가 되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연대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죠. 공통적인 것. 연대 는 정말 요즘은 잘 안 쓰이고 헌신, 공동체, 봉사 이런 말이 많이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아까 피로사회 거론하셨는데 안 그래도 얼마 전 한병철 선생과 간 단한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외국 같은 경우도 신자유주의 극복과 다시 어떻게 뭉칠 것이냐가 많이 논의된답 니다. 예전 좌파처럼 연대 를 외치기도 그렇고 어떻게 뭉칠 것이냐. 한병철 선생은 자꾸 종교 쪽 얘기를 했어요. 얼마 전 선출된 교황 프란치스코 얘기를 꺼내면서 청빈을 상징하는 종교적인 개념을 계속 얘기하시더라구요. 종교적 개념을 들이밀 면 현대적인 개념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아무래도 욕먹지 않느냐 이랬더니 오히려 환영을 많이 받는데요. 서구사회는 예전부터 가톨릭 공동체였기 때문에, 기 독교 공동체 개념이 있는 거죠. 지금은 다 없어졌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래서 남는 질문은 과연 우리는 그런 기독교 공동체 같은 경험을 가진 적이 있느냐는 겁니다. 어떤 중심축이 있고, 어떤 경험을 가져 본적이 있느냐. 227

되돌아가자면 입니다. 가능성의 시간 에 대해 언급하셨는데 박 근혜 시대를 잘 살아내기 위한 방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판단은 자유고 선택도 자유지만 어떻게 하든 우리 스스로 해내는 공동의 경험을 가질 수가 있느 냐. 또 그것을 공유할 수 있느냐. 그게 좀 틀릴 수도, 다를 수도 있지만. 기존의 공동체 운동에서 답답한 것 중 하나가 그게 결국 여유가 있고 자본이 있고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사람 들은 어디로 가야 하느냐. 그러면 다시 1960년을 물어야죠. 그때가 현재에 이어지 는 순간인 만큼 우리가 우리 일을 스스로 판단하고 의논해서 한 적이 있느냐 그 경험을 거기서 다시 찾아내야 한다, 그렇게 봅니다. 그것이 우리가 잘 산다는 의미 입니다. 천정환: 두 분 다 어려운 과제를 말씀하시네요.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삶을 공동 적인 것으로 재발견하고 같이 잘 산다는 것. 한 가지 덧붙이면 실제로 우리는 우리 의 경험과 공동체적 경험이 거의 없고. 그 경험을 민주화나 국가 에만 귀속시켜 왔지요. 박정희라는 표상이 갖고 있는 힘도 그와 관련되지요. 공동체와 인민주의적 인 경험의 수렴점 역할을 무려 18년 동안 했기 때문에. 권보드래: 연대, 협동조합, 어소시에이션 어떤 말로 하든 무겁게 들립니다. 누 구나 잘 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잘 살기 위해선 더불어 있음 이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도 기존의 단어는 단어 자체가 압박해 오는 느낌이 워낙 큽니다. 다른 개념 을 찾을 수는 없을까요? 전 가끔 원주 생각을 합니다. 잘 알진 못하지만, 신용협동 조합 같은 게 발달해 있고, 학교도 많고, 공동체적 뿌리가 튼튼한 지역이라고 들었 습니다. 아래가 튼튼하게 구성되면서 제도나 문화가 형성되는, 그런 과정이 필요할 텐데 한국 현대사를 보면 조건이 워낙 부족했지요. 해방 후 한국의 민주주의를 때 이른 민주주의 라고도 합니다만, 아직 민주주의적 이념이며 통치에 대한 학습과 합 의가 이루어지기 전인데 쫙 투표권이 내려오는, 그런 식의 과정이었다는 거죠. 4.19 도 그랬지만, 어찌 보면 오늘날까지 그 저변을 채우려는 고투를 뒤늦게 벌이고 있 74호 문화/과학 북클럽논쟁 228

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천정환: 저도 그런 고민을 최근에 하고 있습니다. 계속 인문학자들의 삶이 피폐 해지고 경쟁과 성과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도 행하지 못하는 개판 상태에 대 해서요. 준 벌거벗은 삶 을 살거나 삶이 인문학적인 것과는 완전히 별개의 것이 된 이런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누구나 쉽 게 모순과 상황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은 쉽지만, 거기서 단 한 발짝 나아가서 모이고 뭔가 공동성 을 위한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점입니다. 김항 선생님이 얘기해주셨던 것처럼 타인의 삶과 관계 맺는 방식이 완전히 망가져 있기 때문이지요. 뭐가 문제인지를 말하는 단계를 벗어나서 작은 뭐라도 해야 되는 것 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그런 실험을 해보려 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로 일단 이야기 하구요. 잠시 쉬겠습니다. 질문들 천정환: 여기 상당히 다양한 청중들이 와계신 걸로 짐작이 됩니다. 앞에 있는 네 사람 누구한테라도 질문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작은 주제든 큰 주제든 좋습니다. 청중 1: 오영진이라고 합니다. 오늘 북클럽 논쟁인데 시국논의가 된 것 같습니다. 저는 5.16이 되어버린 4.19 라는 이 책의 중요명제를 잘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방점을 5.16에 찍어버리면 5.16의 기원이 4.19였다니 이런 얘기가 돼버리니 냉소 적인 태도를 함의하게 됩니다. 방점을 4.19에 찍으면 5.16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겠 다는 가능성이 강조되는 것이겠죠. 4.19가 왔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뭐인가. 이런 질문을 하면 생산적이라고 봅니다. 제가 재미있게 읽었던 건 오히려 반대입 니다. 후반부 쪽에 자유교양운동이 나오는데 국가가 결국 대중들의 독서능력을 함 양시킨 것 아니에요. 역설적이게 이건 박정희에게 저항하는 힘이 된다는. 저는 229

이런 부분에 고무되며 읽었어요. 그래서 이 책의 절반은 5.16이 되어버린 4.19에 관 한 이야기이지만, 반대로 4.19가 될 수도 있는 5.16이라는 게 이 책의 메시지란 거 에요. 말장난 같지만 저는 그렇게 읽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천정환: 감사합니다. 책을 잘 요약해주신 상태구요. 초반에 말씀하셨던 것처럼 5.16이 되어버린 4.19 그 미묘한 명제에 대한 함의. 그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 했습니다. 청중 2: 북클럽 기대하면서 왔는데 논쟁 자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싶은데요. 좀 많이 실망스러웠습니다. 는 현재의 정치를 문제 삼고자 쓴 책 이 아닙니다. 북클럽 논의의 과정에서는 현재 정치와 별 매개 없이 책의 논의를 연결시킨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이 행사를 애초에 왜 기획하셨는지 듣고 싶어 졌고, 또 1960년과 지금 2013년을 연결시키는 고리에 대해선 계속 괄호를 치고 그 두 시점은 연결되는 것이다라고 전제하고 말씀하시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4.19와 5.16이 갖는 연속성이 내포한 현재적 의의를 논하는 것이 이 자리에 더 맞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이런 부분이 논의가 안된 게 아쉬웠구요. 책에서 제일 중요한 논문이 이청준의 소설 속에서 나타나는 자유와 허기를 다룬 거라 생각합니다. 이청준이 소설에서 1964년 시위를 보고 단식 투쟁을 하는 사람이 허기보다 자유를 더 중요시할 수 있는 시기가 왔다, 그때의 우리는 정신적인 것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먹고 사는 것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인간의 생활적인 부분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 주는 대비가 재밌었습니다. 박근혜 얘기로 뛴다던가 하는 건 추상적으로 느껴집니다. 굳이 이 책을 매개하지 않고서도 충분히 논의할 수 있는 건데요 권보드래: 그래도 연결이 돼 있는데 매개를 좀 더 탄탄하게 짚으면서 오늘날 정치 얘기를 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이겠지요? 5.16이 되어 버린 4.19 란 일종의 진동 속에 있는 표현이죠. 저는 그 진동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의미있을 거라고 생각했 습니다. 역사학자들 중 많은 분이 4.19의 가능성을 살리는 작업을 적극적으로 하셨 74호 문화/과학 북클럽논쟁 230

어요. 통일운동이 얼마나 활발했던가, 혁신의 정치가 어떻게 구상되었고 중립화론 이 어떻게 토의되었던가 하는 것. 그런 작업에 크게 힘입었지만, 문제를 더 폭넓게 보자고 제안하고 싶었고, 그래서 나온 게 5.16이 되어 버린 4.19 라는 표현이었습니 다. 가능성이 하나일 수는 없겠죠. 저희가 쓴 책 중에서도, 특히 천정환 선생님이 쓴 부분에 5.16 이후에도 살아남은 4.19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부분이 꽤 있습니다. 어떤 사건이 흔적 없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좀체 없습니다. 1960년은, 4.19는 더 더욱 그러할텐데, 다만 늘 5.16이 우세한 상태에서 두 사건을 겪어왔다고 생각합니 다. 그 경계에서 분열을 느껴왔다면 그걸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거죠. 4.19 직후의 기사를 보다 보면 어쨌거나 가능성 보다는 공포 가 훨씬 짙게 느껴집니다. 가진 자들이 주도한 목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가난에 대한 공포와 공산주의에 대 한 공포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4.19가 4.19 자체로서 지속될 수 없었던 거구요. 헌 데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공포는 뭘까요? 지금 이 상태 밖으로 한 발자 국도 디디지 못하게 하는 공포 혹은 불안. 지금 이 상태가 만족스러운 건 전혀 아 니지만, 뭔가 바꾸려 하다간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 지난 대통령선거 때 작동한 것 같은 공포요. 그런 걸 논의해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청준의 경우는 5.16 쿠데타를 전후해 많은 사람들이 차라리 밥을 이런 심 정이었던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 길을 따라오면 잘 살 수 있다, 마이카 시대에 국민소득 1천불 어쨌거나 박정희의 약속은 현실화된 셈입니다. 경제성장을 지표 로 할 때 한국은 세계에서도 예외적인 성공 사례입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만과 불안과 공포가 덜어지지 않았다는, 오히려 더해지고 있다는 사실일 테고. 이청준은 이런 밥 과 성장 의 노선에 정신주의로 맞섰던 대표적인 인물이죠. 차라리 굶을지 언정 개발독재의 노선에 동의할 수 없다는 건데, 다수가 그런 길을 택할 순 없잖아 요. 조태성 기자님께선 종교 얘기도 하셨습니다만. 반지의 제왕 이라는 소설 아시죠? 2차 대전 직후에 쓰여진 소설이지요. 몇 해 전 반지의 제왕 을 읽었는데 전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전까지 모험이란 뭔가를 획득하는 서사인데 반 231

지의 제왕 은 무언가를 버리기 위한 모험을 그렸더라구요.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퀘스트인데 그게 문제되기 시작한 거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2차 세계대 전 후 유럽이 그랬지요. 역사적 진보의 가능성이 사실상 봉쇄되고, 다른 지역을, 예컨대 중국이나 쿠바나 베트남을 통해 역사를 간접적으로 사는 양상이잖아요. 이 청준의 정신주의가 다수의 노선이 될 수는 없으리라고 여전히 생각합니다만, 획 득 이 아니라 폐기 가 문제되는 사회적 정황이라면 조금 문제가 다를지 모릅니다. 요즘은 이런 각도에서도 4.19와 5.16을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천정환: 2013년과 1960년은 꽤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쓰면서 사실 적으로도 개발연대에 대한 지배적인 담론과 상, 즉 근대화 세력 대 민주화 세력, 산업화와 민주화, 4.19 대 5.16 식의 논의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를 생각 많이 했습니다. 산업화와 민주화는 상호침투하는 과정과 서로를 전제하는 힘이 있습니 다. 욕망과 민주주의의 문제를 사고할 때 박정희의 딸이 그 양자의 낡은 결합을 새로 불러냅니다. 제2의 한강의 기적 담론이 대표적이고요. 저는 빵과 장미 의 문 제가 어느 한쪽의 선택이나 우세가 아니라 동시에 사고해야 할 것이라는 게 박정 희패러다임에서도 벗어나는, 현재의 과제라는 것입니다. 김항: 추상적인 얘기를 해서 기대를 저버려서 죄송합니다. 다만 천정환 선생 님께서 제안하실 때 현재에 대해 주로 논하자 해서 그런 논의가 된 것 같구요. 한 가지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자유와 허기, 빵과 장미라고 하는 것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이청준에서도 등장하고 다른 이야기에서도 등장하는데 이 책이 저한테 준 현재적인 의미를 매겨서 얘기를 하자면 자유와 허기를 대립으로 놓는 역사 혹 은 역사의 존재 이해방식이 패러다임으로서 이미 1960년대에 존재했다는 것이죠. 자유와 허기라는 것이 반드시 대립상이 아니라 60년대 이청준과 같은 혹은 백낙청 과 같은 혹은 여타 4.19 세대들이 자유와 허기라는 것을 대당으로 놓고 그 사이에 서 벌어지는 욕망의 드라마라거나 정치적인 전개 같은 것을 서술하는 굉장히 특징 적인 방식들이 존재했다는 것. 자유와 허기는 당연하게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이 74호 문화/과학 북클럽논쟁 232

양반들의 사고의 회로라거나 이런 것들 안에서 대립으로 언설화되고 사고의 어떤 회로를 강력하게 전통으로 남겼다는 것이죠. 아마 선생님들이 파악하신 게 그런 것들이고 우리가 지금 시대에 자유와 허기라는 것들을 당연히 또 대당으로 놓고 지금은 자유가 어떤가 허기가 어떤가 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유와 허기를 대당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60년대는 그 사고의 패러다임을 어떻게 전유를 하고 바꿀 것 인가가 문제인 듯합니다. 그 두 가지를 대립으로 놓지 않는 역사적 리얼리티라거 나 역사의 계보들이 아마도 현재상황을 얘기할 때 던져주는 함의가 클것이라는 것 이 제가 이 책을 매개로 1960년대와 현재를 중첩시키는 의의입니다. (또 추상적인 것 같지만) 자유와 허기라는 것으로 대립하지 말고 다양한 대립성의 양태를 발굴 해주시는 게 천, 권 선생에게 응답이 되지 않을까라는 거죠. 천정환: 네, 감사합니다. 또 다른 질문 없습니까? 이동연 선생님. 이동연: 이 책에 대한 저희 착시현상을 말씀드리는 것으로 시작하겠습니다. 북클 럽 웹 포스터 만들 때도 책 제목이 1960년대를 묻다 인 줄로 알았는데 나중에 다시 확인해보니, 인 걸 알았습니다. 그 제목이 함의한 바가 있다 고 생각하는데, 앞서 질문하신 분과 연관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혁명과 반동 이라는 역사적 반복은 1960년대만 있었던 건 아니거든요. 1980년대 광주의 봄도 있 었구요. 어느 시대든지 혁명이 있으면 반동이 오게 마련이고. 1960년대 일어난 일 은 어느 시대든지 있었던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4.19에서 5.16으로 전환하는 정치 적 작동방식에 대한 문제의식이 중요할 듯합니다. 문제는 다른 시기와는 다르게 1960년, 혹은 1960년대의 특이성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 래서 저는 1960년의 혁명과 반동의 특이성을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드리고 싶은 질문은 두 분이 국문학 전공자이시고, 문화연구자가 아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대체로 책에 나오는 것들이 1960년대 문화연구를 연구할 때 다루지 않 았던 문제들, 예를 들면 독서나 지성과 같은 문제를 중심으로 쓰여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갖는 좋은 점도 있었지만 통상 1960년대를 다룰 때, 언급되는 영화, 233

음악, 광고 등 대중문화 토픽들은 빠져 있는데요, 그 이유가 뭔지 궁금합니다. 권보드래: 혁명과 반동이라는 건 일반적인 상황이겠죠. 4.19 세대의 영향 하에서 4.19와 5.16을 대립 관계로만 배워 왔기에, 저로선 이 혁명과 반동 사이 전이( 轉 移 ) 랄까 길항이랄까 공모랄까, 그런 면모가 뜻밖이었습니다. 혁명과 반동이 어떤 양상 으로 오는 것인지, 혁명의 주체가 따로 있고 반동의 주체가 또 따로 있는 것인지, 그 정황의 미세한 차이가 문제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4.19와 5.16 경우는 더더구 나 그 기원이 많이 겹치는데, 이것들이 다른 노선으로 분기해 나가면서 1960년대 후반이 되면 독재냐 민주냐 이런 식의 문제 설정이 나오기 시작하고 결국은 겹 치는 양상이 지워졌던 셈이지요. 이동연 선생님 말씀대로 그것만으로 1960년대를 설명하려 하는 건 문제가 많을 텐데, 일단 그 대목에 관심이 끌렸습니다. 출발점이 었다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천정환: 이전에 제가 쓴 책 중에 김승옥의 시사만화 <파고다영감>을 갖고 쓴 혁명과 웃음 이라는 책이 있는데요. 그 만화는 1960년 가을부터 1961년 2월까지 의 매일매일의 사회와 보통사람들의 삶, 그리고 그에 대한 대학생 김승옥의 시각 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혁명 의 관점에서 보면 4.19혁명에는 주체가 없고, 혁명론 이 없고, 또한 조직론이 없었습니다. 가장 유력한 조직은 4.19부상자동지회 같은 단체였습니다. 뭘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야말로 자생적으로 혁명 은 전개되어 가고 민주주의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고달픈 투쟁이 벌어집니다. 못된 임금 인 이승만이 물러가고 그 비어버린 거대한 권력 자리를 민주당이 차지합니다. 그런 기회주의자에 친미주의자인 자들이 정권을, 그야말로 길가다 돈 줍는 꼴로 잡습니다. 끔찍한 일 아닙니까? 박정희 같은 자가 나타나기 딱 좋은 환경이지요. 대학생들은 좀 황당하게도 신생활 계몽운동 같은 일을 벌이기도 하고요. 교통정리 하고 요정 출입 않기, 양담배 피지말기 운동 같은 걸 벌이고요. 계몽운동과 민주 화, 반부패의 문제가 엉켜 있었던 거지요. 뭐 이런 것들이 60년대의 특이성인 것 같은데 1963년 대선 때 김승옥 김지하 등이 윤보선을 지지하지 않고 박정희를 74호 문화/과학 북클럽논쟁 234

찍었다는 등 이런 것이 당시의 특이성이다. 박정희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상황 에서 정치군인들이 민족주의를 전유할 수 있는 상황. 그 배면에는 거대한 가난이 있었겠지만요. 대중문화를 왜 안 다뤘느냐? 문제는 문화정치 에 초점을 맞추고 거기에 대중문 화가 구현된 걸로 간주했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교양이나 독서 같은 게 굉장히 크게 대중문화로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다루었던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영화나 소설, 스포츠 같은 대중문화 영역을 다루기엔 시간과 역량의 한계도 있었고요. 청중 3: 60년대가 다들 잘 살아보세에 동의 한거다 라고 하는데 그 당시 저항이 든 뭐든 젊은 주역을 이뤘던 50~60대가 이번에 박근혜를 찍었다는 것은 이해가 안돼요. 어떤 걸로도 씽크가 안 맞는 거예요. 그것에 대해 노골적인 답변을 원합 니다. 조태성: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제가 겪은 경험으로는 말투에서 표시가 팍팍 나듯이 부산쪽이구요. 평야지대에 가면 다 악마가 사는 줄 알고 그렇게 교육받고 살았습니다. 근데 글쎄요. 왜 그랬느냐? 여론조사를 통해 대선 이런저런 얘기가 많 이 나왔는데 5~60대 특히 아줌마 부대 가 한을 풀었다는 거. 생전에 투표 한번 안 하시던 양반들이 가서 박근혜를 찍으시던데요. 예를 들면 DJ때 처음 시행된 기초 연금 그런 거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이 큰 시스템에 대한 이해보다는 시혜로 받아 들이는 의식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젊었을 때 민주화 운동을 했는데 나 이 들고 자식 키우다 보니까 부동산 문제도 나오고 그러나 이게 따로 떨어져있 는 게 아니라 사실 하나였다. 민주화와 복지 문제가요. 어느 쪽 방향으로 가느냐는 상황이나 조건이나 개인판단에 따라 다를 것이다. 민주화 가 보수화가 된 것입니 다. 가 좋았던 점은 이런 점을 계속 묻게 한다는 데 있었지요. 잘 살고도 싶었고 도덕적이고도 싶은 짬짜면 상태로 계속 살아왔던. 그런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이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노골적으로 저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거부감이 있습니다. 과거에 민주화 운동을 했다고 다 민 235

주화 투사였을까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천정환: 50대는 잘 모르겠구요. 박근혜를 찍을 뻔한, 박정희 시대를 겪은 60대 어르신 두 분의 의견을 들었는데. 박정희의 딸에 대한 혐오감이 강하고 민주주의 에 대한 나름의 신념을 지녀오신 분들인데도 불구하고 박을 찍을 마음이 들기도 했다는 거에요. 즉 반대편, 민주당이 갖고 있는 매력지수가 너무 약하고 대안이 될 수 없었던 거죠. 노무현의 비서실장으로는 게임이 어려웠다는 겁니다. 천정환: 또 다른 의견 한 분 정도만. 청중 4: 자유와 빵 이라는 대비는 사실 뻔한 프레임이잖아요. 책에서 전향 문제 다룬 부분은 너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북한을 대하는 우리의 입장 문제는 계속 재생산될 거 같습니다. 두 번째는 김항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새로운 프 레임을 전유할 수 있는 것은 후학들의 몫이다 는 말에 대한 겁니다. 공감을 많이 했는데 구체적으로는 어떤 것이 가능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권보드래: 천정환 선생님이 간첩 문제 다룬 장에서 영화 <경계도시> 얘기를 했 지요. 그 영화를 보면서, 이미 21세기인데, 그런데도 남과 북 사이 는 없구나, 사이 를 고집한다는 게 저렇게 힘들구나 하는 암담한 기분이 들었었습니다. 사이가 있 어야 양쪽의 경계를 녹이는 전이 지대가 생길 수 있을 텐데 그게 불가능에 가깝다 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구요. 자유와 빵 이라는 문제는 자유와 밥 도 아니고 자유 와 빵 이잖아요. 상상력의 계보를 더 정밀하게 추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는데 더 추적하지는 못하고 말 았습니다. 4.19 이후, 한 석 달 후부터? 자유와 빵 이란 문제는 벌써 등장하기 시작 합니다. 그 둘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었을까, 그런 노선이 그대로 완성될 수 있었을 까, 그런 건 책을 쓰고 나서도 여전히 물음표로 남아 있는 질문입니다. 단언해 말씀 드릴 수 있는 게 별로 없네요. 박정희는 제겐 너무나 강력한 반( 反 ) 모델이어서, 박 정희를 포함해 질문을 구성한다는 것 자체가 참 어렵습니다. 앞으로는 어떨지 모 르겠습니다만. 74호 문화/과학 북클럽논쟁 236

김항: 자유와 빵 이라는 뻔한 프레임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아서 말씀 드리는데요. 자유와 빵 이 뻔한 프레임이라 다른 것을 찾아야 한다기보다 이 시기 사회상황과 쿠데타까지 포함한 자유와 빵이라는 대당으로 놓 고 비판하려고 하는 기획이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존재를 했었고 비판기획의 생명 력 혹은 한계 같은 것들을 가늠해본 작업이다라고 생각합니다. 60년대 비판기획이 갖고 있는 바이컬리티와 한계는 도대체 무엇이냐라는 것을 가늠하는 것이 두 분의 작업이었던 듯합니다. 이 당시 사회에서 어떤 가능성들 이 있었냐. 60년대 포텐셜의 문제죠. 흔적들이 어디 있었느냐, 그걸 찾는 것은 다른 프레임을 찾는다는 것보다는 가려서 안 보였던 흔적들을 찾는 거라고 봅니다. 우 리가 이것들을 어떻게 계보로써 받아들이고 비판기획들을 재조립할 수 있는 기회 가 되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천정환: 감사합니다. 청중 1: 천정환 선생님께 다시 질문합니다. 아까 자유교양운동이 역의 힘으로 전 화해나가는 부분에 대한 책의 논지가 좋으면서도 옅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다른 전망을 한두 줄 정도로 끝내셨더라고요. 그 힘이 강해지거나 과정들을 어떻게 쓰 고 잡아낼 수 없습니까? 천정환: 잡아낼 수 있죠. 그것은 단지 본격문학에 접속할 수 있는 교양의 수준이 나 독서의 힘이 커지는 게 아니라, 총제적인 수준에서 문학과 교양의 힘이 가장 낮은 계층부터 시작해서 고등교육을 받는(이를테면 고졸자) 사람들에게까지 전파 되어 그들이 민주주의의 주체가 되는 과정이 있죠. 문화적 민주주의가 불가역하게 커져서 전두환의 등장이 시대착오가 된 과정이죠. 그 커지는 과정은 너무 다양하 고 많습니다. 전두환의 졸업정원제가 전두환을 곤경에 빠뜨리게 되는 과정 등등요. 그 안에는 물론 속물화나 대중문화 자체가 힘을 얻게 되는 과정도 포함됩니다. 는 부족한 책인데 이리 금요일 밤의 시간을 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대표로 제가 감사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