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Summer 통권 9호 유엔난민기구(UNHCR)는 난민을 보호하고 영구적인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UN기구입니다. 1분, 생과 사가 결정되는 순간
표지이야기 1분, 생과 사가 결정되는 순간. 난민들은 생사를 가르는 전쟁, 폭력, 박해 속에서 집, 재산, 사랑하는 가족까지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발행인 더크 헤베커 발행처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 발행일 2013년 6월 제 공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 대외협력팀 디자인 slowalk * 2013년 더욱 새로워진 With You를 만나보세요! 월계관 형상은 UNHCR이 유엔 총회로부터 임무를 부여받은 UN 기구임을 A laurel wreath symbolizes UNHCR is mandated by the United Nations General Assembly 사람 형상은 난민을 비롯한 UNHCR의 모든 보호대상자를 The person symbolizes persons of concern to UNHCR 두 손 형상은 UNHCR의 난민보호 노력과 의지를 상징합니다. Sheltering hands symbolizes UNHCR s commitment and efforts to protect refugees and persons of concern. 목차 3 난민보호 캠페인 1분, 난민을 위한 시간 * 유엔난민기구 소식지 With You는 수신 동의를 하신 후원자분들께 연 4회(3월, 6월, 9월,12월) 우편으로 발송되고 있습니다. 후원자님의 주소가 부정확하거나 불충분한 경우 우편물이 반송되어 돌아옵니다. 한국대표부 홈페이지(www.unhcr.or.kr) 나의 후원(MY PAGE)에 들어가서 본인의 후원상태와 주소를 확인해주세요! 4 세계 8 유엔난민기구 10 속의 유엔난민기구 요르단 땅에서 시리아 난민을 만나다 한국대표부 소식 1 안토니오 구테레스 UN 난민고등판무관 방한 2 희망의 친구들 무지개 축제 3 6. 20 세계 난민의 날 행사 With You가 만난 사람 더크 헤베커 유엔난민기구 신임 대표 12 난민배움터 이들도 난민이었습니다 가수 미카(MIKA) 이 영화를 소개합니다 사막의 꽃(Desert Flower) 14 시리아 어린이 난민들에게 전달된 장난감, 따뜻한 미소를 선물하다! 소중한 후원이 가져온 기적, 후원소식 외 1분, 난민을 위한 시간 전쟁으로 상처입은 가족, 한 가족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 수많은 난민 가족들이 전쟁, 분쟁, 박해와 폭력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유엔난민기구는 2013년 6월 20일 UN이 정한 세계 난민의 날을 맞아, 전쟁이 남긴 수많은 난민 가족의 상처를 함께 나누고, 난민들이 겪는 고통의 1분을 유엔난민기구 후원자들이 만들어가는 희망의 1분으로 변화시켜 나가고자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여러 가지 선택으로 1분, 1초를 채워나갑니다. 우리가 수많은 선택 앞에서 고민하고 있는 매 시간 동안, 난민들은 생사를 가르는 전쟁, 폭력, 박해 속에서 집, 재산, 사랑하는 가족까지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매일 밤 폭격소리를 들으며 불안하게 잠자리에 들고, 사랑하는 가족이 다섯에서 넷, 넷에서 셋으로 한 명씩 줄어간다면,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의 눈 앞에 닥친 현실이라면 선택의 겨를도 없이 1분 1초라도 빨리 가족을 데리고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 잡고 있던 엄마의 손을 놓친 아이가 느끼는 1분의 무게는 얼마만큼 일까요? 1분, 난민 가족들에게 생명과 안전, 희망과 위안을 전할 수 있는 시간. 함께하는 손을 내미신 여러분의 1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찰나. 3
유엔난민기구는 시리아 내전이 발생한 2011년 이래 시리아의 상황을 대외적으로 계속 알리며, 더 많은 난민들을 보호하고 필요 물품과 서비스를 지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2013년 6월 현재, 시리아 국민 3명 중 1명이 인도주의적 보호와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올 연말에는 국민 절반에 해당하는 1,000만 명이 이러한 절박한 상태에 놓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나날이 심각해져만 가는 시리아의 상황을 요르단 현지를 방문하고 돌아온 한국대표부 직원의 글로 직접 전합니다. 보호와 지원을 찾아서,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사람들 3년째 계속되는 분쟁과 폭력을 피해 고국을 떠나는 시리아 난민 의 수는 무려 160만 명. 이들은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국경을 넘어 주변국으로 피난을 떠나고 있습 니다. 6월 현재 요르단에는 시리아 난민 47만 명이 거주중이며, 자트리 난민촌에는 매일 1,500명 이상이 유입되고 있어 며칠 내에 이루어지던 등록 과정이 수주 걸리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전례없이 많은 수의 난 민들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등록하고 관리하기 위해 모바일 등록방식도 이용하고 있지만, 모든 난민들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인 현실입니다. 난민 등록센터를 찾은 난민들은 이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은 벗어 났지만, 끝없는 기다림과 열악한 현지 상황으로 또 다시 사투를 벌이고 있 습니다. 이집트 레바논 요르단 시라아 자트리 난민촌 사우디아라비아 한 시리아 난민 가족이 난민 등록 절차를 밟고 있는 모습 글 박선민 요르단 자트리(Za atri) 난민촌 등록을 마친 난민들이 이송되는 곳은 자트리 난민촌. 텐트가 끝없이 늘어서 있는 난민촌의 상태는 난민 등록센터에서 훨씬 삭막하고 열악해 보였습니다. 물론 유엔난민기구를 통해 난민으로 등록되면 교육과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식량, 생활 물품 등을 지원을 받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됩니다. 하지만 난민촌에서 만난 현장 직원들과 난민들은 식수, 전기, 음식, 기본 생활물품, 거주시설, 위생시설, 운송시설 등 여전히 많은 것이 부족하다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유엔난민기구 및 협력기관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급증하는 난민들 모두를 돕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입니다. 더구나 수만 명의 난민들이 모여살고 있는 난민촌의 치안을 관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듯 보였습니다. 특히 무장 강도들의 무자비한 약탈 행위가 최근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고 난민촌 관계자는 전했습니다. 난민들에게 제공되는 지원 물품은 물론 텐트, 건물, 전기까지 약탈하고 있으며, 여성들은 인신매매의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고 말합니다. 도시 난민, 모하마드의 집을 방문하다 난민촌 내에서 유엔난민기구의 지원을 받아 살아가는 난민들도 있지만, 대다수의 난민들은 도시에서 공동주택 등을 빌려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요르단 정부와 유엔난민기구가 지원하는 교육과 의료 서비스, 소정의 현금을 바탕으로 낯선 곳에서 적응하여 생계를 꾸려가야 합니다. 도시 난민들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이해를 돕기 위하여 아래에 도시 난민 방문기를 실었습니다. 모하마드 씨와 그의 가족은 지금 요르단의 암만(Amman)에 살고 있지만, 원래 고향은 시리아입니다. 딸이 셋, 아들이 둘, 아내와 자신까지 일곱을 이끌고 요르단에 온 지 6개월째입니다. 모하마드 씨는 시리아에서는 도장공으로 일했습니다. 남의 집이나 건물의 내외벽 페인트를 칠하는 일인데, 기술이 있어 먹고 살만 하였습니다. 넉넉하지는 않았어도 남에게 폐끼치지 않고 살았었노라고 말하는 모하마드의 얼굴에는 가장으로서의 자부심이 어려있었습니다. 모하마드 씨는 가난했지만 평화로웠던 그의 일상에 큰 변화를 일으킨 그 때 시리아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2011년 1월부터 소규모로 시작된 민주화 시위는, 1970년부터 지속된 40여년의 장기 집권에 대항한 시민들의 요구를 담아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됩니다. 시민들의 요구라는 것은 민주주의와 자유의 보장, 정치범의 석방, 부패 4 5 자트리 난민촌에서 난민들이 생활하는 조립식 텐트의 모습 요르단 난민촌에 머무는 난민들에게 제공하는 식료품 모하마드씨 가족의 모습 * 모바일 등록방식: 난민 등록센터 혹은 난민촌으로 당장 들어오기 힘든 난민들을 위해 그리고 난민 등록과정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유엔난민기구 직원이 국경지역에 직접 나가 난민들을 등록하는 방식 입니다. * 도시 난민: 유엔난민기구의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 난민의 절반 정도가, 시리아의 경우 70~80%가 도심 지역의 슬럼가나 값싼 주거 지역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유엔난민기구는 이러한 도시 난민들도 적절한 보호와 의료, 교육 등 필요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지역 사회와 협력합니다.
저는 시리아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매일 신에게 기도합니다. 적어도 고향으로 돌아가서 죽고 싶습니다. 의혹 해결, 반정부시위를 폭력으로 진압하는 사람들에 대한 처벌 같은 것들 입니다. 발단은 청년 열댓명이 민주화 구호를 낙서했다는 이유로 감금되고 고문 당한 사건입니다. 본격적인 시위가 시작된지 얼마되지 않은 2011년 3월말에 시위진압을 위해 군병력이 투입되었고, 이 때부터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모하마드 씨도 시위대열에 합류하였습니다. 그러나, 친지, 이웃 등 자신이 알던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상황이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치달으면서, 그는 자기 가족의 생명도 위협을 받고 있다고 느꼈고 그래서 시리아를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정부군의 눈을 피해 겨우 국경을 넘어 요르단에 왔습니다.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마당에 아무 것도 제대로 챙겨올 수 없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막내딸이 팔을 다쳤고, 그의 형과 조카는 얼마 전에 죽었습니다. 물론 좋은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지금 세를 얻어 살고 있는 방 한칸도 암만 (Amman)에서 만난 요르단 사람이 소개해준 곳입니다. 유엔난민기구와 요르단 정부의 도움을 받아 살고 있지만, 시리아를 탈출한 사람들이 지금까지 160만 명을 넘는 상황이 계속 되다보니, 이러한 도움도 언제 끊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듭니다. 모하마드 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고 간결하게 전했습니다. 눈물을 보이지도, 도움을 구걸하지도 않았습니다. 살림에 필요한 최소한의 세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아내를 무심히 바라보기도 하고, 천진하게 재롱을 부리는 막내딸을 보며 가끔 미소를 짓기도 했습니다. 모하마드 씨 가족이 사는 방을 둘러보니 시 멘트 바닥에 깔린 카펫과 벽의 커튼, 차를 내 온 은색 쟁반과 작은 찻잔 몇 개, 옷 몇 가지 밖에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아랍 세계에서는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는 일은 지켜야할 예의라고 했습니다. 카펫과 커튼 같은 것들은 그나마 이 방에 원래 있던 것입니다. 그의 아내는 이 와중에도 청소나 빨래 같은 집안일과 아이들을 건사 하기 바쁘다고 하였고, 모하마드 씨는 하루 몇 번씩 사원에 오가며 기도를 하는 것 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운이 나빴다고 생각합니다. 떠날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저는 시리아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매일 신에게 기도합니다. 서로 돕고 살던 우리 마을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사실 시리아를 떠나온 것을 후회합니다. 나 자신이 아니라 내 가족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였다고 해도 말입니다. 적어도 시리아로 돌아가서 죽고 싶습니다. 시리아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다른 나라 사람들이 듣고 이해해주었으면 합니다. 모하마드 씨는 자신과 그의 가족이 짧게는 내일까지만, 길게는 어쩌면 평생을 이렇게 타지에서 떠돌게 될 지도 모른다는 것을 예감이라도 하는 듯이 희망과 슬픔이 뒤섞인 것 같은 어조로 말했습니다. 어떻게든 살아질 것입니다. 어디에서건 아이들은 자라고 부모는 늙고 세월은 갈 것입니다. 모하마드 씨 가족이 아프리카 어느 마을의 아사 직전 어린 아이만큼 불쌍한가 싶기도 하고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저 그들은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는 역사속에서 운 없이 거꾸로 가는 열차를 타게 된 사람들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우리는 무심해질 수 있습니다. 시리아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다른 나라 사람들이 듣고 이해해주었으면 합니다. 물론 시리아의 사정은 훨씬 복잡하지만, 생각해보면, 시리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영 낯선 것만도 아닙니다. 우리 나라도 광주를 비롯해 여러 지역에서 민주화 시위가 있었고, 보통 사람들의 소박한 바람과 평화로운 일상이 참혹하게 짓밟혔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매일 아침 눈부신 해가 떠올라도 그 세월속에 있었던 사람 어느 누구도 그러한 기억을 영원히 잊지는 않을 것입니다. 생각보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어렵고, 더구나 다른 나라 사람들이 올라탄 불운의 급행열차를 우리가 세울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 열차 안에 갇힌 사람들에게, 당신이 처한 고통을 이해한다고 힘들어도 버티어 보라고 할 수는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각자의 수준은 달라도 모하마드 씨를 이해하는 세상의 모든 고단한 아버지들은 아버지들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들대로, 모진 일을 겪었을 아이들에 대 한 측은지심이 일면 그러한 대로, 그리고 비슷한 역사의 터널을 지나온 사람들은 그 사람들대로 우리가 모하마드 씨와 같은 이들을 잊지 않았음을 행동으로 보여줄 것을 기대합니다. 그것이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도리이고, 이제 그들을 도와줄 우리의 차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시리아 난민 위기 구호 현장을 찾은 변화, 어떤 지원이 이루어 졌을까요? 지원 현황 출처 : UNOCHA, UNHCR 보고서, 2013년 6월 기준 물과 위생시설 500만 명 이상에게 제공 거주시설 100만 명 이상에게 제공 식량 및 기본물품 수백만 명 이상에게 제공 의료지원 수백만 명 이상에게 제공, 100만 명 이상 어린이 대상 예방접종 실시 교육지원 25만 명 이상 어린이들에게 제공 비식량물품 지원 217만 개 이상 제공(그래프 참고) * 위생 키트: 난민들의 필수 위생을 위한 치약, 치솔, 비누, 빗, 수건 등으로 이루어진 키트 필요 기금 현황 2013년 6월 기준 2013년 말이면, 보호와 지원을 필요로 하는 시리아 국민은 무려 1,000만 명. 서울시 인구에 해당하는 수의 사람들입니다. 단지 숫자가 아닌, 실제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생명을 구하고 긴급한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은 5조원(미화 50억 달러). 유엔난민기구를 비롯한 인도주의 기관들은 이러한 시리아 난민 위기 상황에 긴급 대처하기 위해, 올 연말까지 미화 50억 달러에 달하는 예산 조성을 위해 전례없는 기금을 국제 사회에 요청하고 있습니다. 후원을 결심한 여러분의 소중한 1분에 감사드립니다! 100만원이면 시리아 난민 3,300명에게 생명을 살리는 식수를 50만원이면 시리아 난민 3,000명을 살리는 긴급구호 의료키트를 10만원이면 시리아 난민 60명에게 취침용 매트를 5만원이면 시리아 난민 5명에게 비와 추위를 견딜 수 있는 방수천을 3만원이면 시리아 난민 8명에게 따뜻한 담요를 생리대 309,551 * 오락 키트: 아동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 제작된 볼펜, 책, 호루라기, 스폰지공, 축구공 등으로 이루어진 키트 침대보 180,571 매트리스 217,822 아동용 기저귀 293,634 비식량물품 2,175,667 2013년 6월 기준 이런 지원은 모두 후원자 여러분이 계셨기에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급증하는 난민들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도움의 손길이 절실합니다. 시리아 난민 현황 인도주의적 보호와 지원이 필요한 사람 수 난민 160만 명 국내실향민 425만 명 시리아 국민 3명 중 1명 680만 명 2013년 6월 기준 시리아 국민의 절반 1,000만 명 2013년 연말 추정치 취침용 매트 179,133 담요 516,536 이불 126,003 주변국별 등록난민 2013년 6월 기준 레바논 51만 명 요르단 47만 명 터키 38만 명 이집트 7만 명 이라크 15만 명 이집트 물통 80,021 방한복 58,730 위생 키트 * 60,609 방수천 46,068 조리도구 44,314 성인용 기저귀 43,463 카펫 10,033 4인용 텐트 6,629 손전등 1,000 오락 키트 * 740 위생랩 810 레바논 요르단 터키 시리아 이라크 지원할 수 있습니다. 6 동봉한 약정서를 작성하여 시리아 난민을 돕기 위한 일시후원에 동참해주세요. 기존 후원자를 비롯한 여러분 모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7 후원참여 홈페이지 www.unhcr.or.kr 블로그 blog.naver.com/unhcr_korea 해피빈 happylog.naver.com/unhcr * 박선민 님은 현재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 기업 파트너쉽 담당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기업후원 02-773-7075 후원계좌 국민은행 407537-01-004288 (예금주 : 유엔난민기구 혹은 UNHCR)
8 UNHCR Korea NEWS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 소식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 소식 UNHCR Korea NEWS 9 한국대표부 소식 1 안토니오 구테레스 UN 난민고등판무관 방한 한국대표부 소식 2 희망의 친구들 무지개 축제 Together, We Friends! 한국대표부 소식 3 6. 20 세계 난민의 날 행사 World Refugee Day 유엔난민기구의 수장 안토니오 구테레스 UN 난민고등판무관이 인터뷰도 가졌습니다. 구테레스 UN 난민고등판무관은 유엔난민 한국이주민건강협회는 어린이 날을 맞아 5월 4일(토) 난지한 2013 난민 주간에 초대합니다! 지난 5월 14일~15일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15일 오전 유엔난민기구 기구가 직면하고 있는 전 세계적 난제들을 언급하면서, 특히 시리아 강공원에서 <제 11회 희망의 친구들 무지개 축제>를 개최하였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6월 20일 UN이 정한 세계 난민의 날(World 한국대표부 사무실을 찾은 구테레스 UN 난민고등판무관은 한국 난민을 위한 지원이 시급하다고 강조했습니다. 2011년부터 전 세계 이번 행사에서는 희망바자회, 다문화 카페, 어린이 건강검진, 페이스 Refugee Day)이 다가왔습니다. 세계 난민의 날은 난민협약의 대표부 직원들의 활동 성과를 격려하고, 비호국으로서의 대한민국, 난민의 숫자는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시리아 위기상황은 냉전 페인팅 및 캐리커쳐, 마술쇼, 운동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 의미와 가치를 재확인하고, 난민보호라는 국제 사회의 책임을 민간모금, 한국정부의 지원현황 등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가 이후 가장 극적이고 위험한 사건으로, 이웃 국가들에 위협이 될 정도로 되었습니다. 이번 행사에는 23개국 출신 1,500 여 명의 다문화가족과 전 세계가 공유하는 날입니다. 유엔난민기구는 매년 세계 난민의 날에 앞으 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이날 오후, 큰 부담이 되고 있으며, 유엔난민기구는 인력 및 재정부족으로 많은 18개 관련 단체에서 함께했고,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도 코트 난민보호라는 기구 본연의 사명을 재다짐하며, 난민 및 여러 협력 구테레스 UN 난민고등판무관은 윤병세 외교부 장관을 예방하여 인도적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구테레스 UN 난민고등판무관은 시리아 디부아르, 미얀마 등지로부터 대한민국으로 비호를 찾아온 난민 기관들과 함께 다양한 주제로 각종 행사를 열고 있습니다. 유엔난민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파트너십 강화 방안, 탈북자 문제와 관련한 분쟁의 정치적 해결책을 찾고 시리아 난민을 보호하기 위해 국제사 16가족과 함께 참가하였습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축제를 통해 기구는 이러한 행사를 통해 전 세계 난민들이 처한 어려움에 대한 협력 방안 등을 논의하였습니다. 또한 고등판무관은 황교안 법무부 회의 노력이 절실하다고 전했습니다. 이주민 가구를 포함한 한국 사회의 모든 아이들이 차별과 소외없이 이해와 공감을 돕고 문제 해결을 위한 관심과 행동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장관을 예방하여 대한민국의 난민법 제정을 환영하고 이러한 국가적 차원에서의 지원과 노력이 아시아 지역에서의 선례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전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11월부터 유엔난민기구의 정책 및 예산을 승인하고 인사 행정을 감독하는 집행이사회(Executive Committee) 부의장을 맡고 있으며 올 10월부터는 의장직을 맡을 자신의 권리를 찾고 밝고 희망찬 미래를 가꾸어 나갈 수 있기를 꿈꾸어봅니다. 올해에는 2013 난민주간: 난민, 우리 곁에 있습니다 라는 주제로, 협력 기관들과 함께 광화문 광장에서 다양한 행사와 교육, 예술 체험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세계 난민의 날을 맞아 유엔난민기 한편, 더 많은 대중들에게 난민 문제를 알리고 전 세계 난민에 예정입니다. 앞으로도 대한민국이 전 세계 난민보호에 더욱 많은 구와 함께 난민을 위한 행사에 참여하세요! 대한 관심과 지원을 촉구하기 위해 KBS 와 연합뉴스 등 언론사와의 관심과 지원을 쏟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2013 난민주간: 난민, 우리 곁에 있습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악수하는 구테레스 고등판무관 황교안 법무부 장관을 예방한 구테레스 고등판무관 대표단 및 법무부 관계자 행사에 참가한 다문화 가족 어린이들 일시 장소 참여단체 특별 프로그램 상시 프로그램 6월 15일(토)~21일(금) 광화문 광장 난민지원네트워크(공감, 난센, 동천, 어필, 에코팜므, 피난처, 휴먼아시아, 따비에 등 12개 관련 단체) 및 유엔난민기구 (6월 15일, 오후 1시 ~6시) : 개막식, 플래시몹, 밴드공연, 다양한 공연 사진 전시회, 수공예품 전시 및 판매, 난민 체험 프로 그램 (다문화 음식, 버마 전통놀이 등 다양한 체험, 아프리카 전통 공예/전시, 모자이크 메시지 만들기, 난민에게 보내는 영상 메시지 녹화 등) * 위 프로그램은 일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통권 9호 With You 2013 Summer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 소식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 소식 With You 2013 Summer 통권 9호
interview With You가 만난 사람 8 더크 헤베커 유엔난민기구 신임 대표 여러분은 유엔난민기구와 함께 난민 가족들에게 1. 안녕하세요, 본인 소개를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생명과 안전, 위안과 희망을 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어렸을 적부터 외국과 외국어에 관심이 많아 외교 또는 국제관계와 관련된 장래 희망을 꿈꿨다는 더크 헤베커(Dirk Hebecker) 신임 대표. 베트남, 미얀마,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등 여러 지역 유엔난민기구 사무소를 거쳐, 이제 한국대표부를 이끌게 된 그를 With You가 직접 만나보았다. 안녕하세요, 한국 후원자 여러분. 저는 새로이 유엔난민기구 한국 대표로 부임한 더크 헤베커입니다. 지난 17년 동안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 여러 지역 유엔난민기구 사무소에서 일했습니다. 저는 특히 물, 식량, 의료, 교육, 주거 시설 등 난민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전달하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현장에서 주로 일해왔습니다. 2. 그동안 현장에서의 경험이 풍부한데, 현장에서 직접 난민들을 만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요? 난민들은 말그대로 모든 것을 필요로 합니다. 이들은 분쟁이 발생했을 때, 아무 것도 챙기지 못하고 빈 손으로 피난을 떠나온 사람들이에요. 난민들과 이야기해보면, 물, 음식, 주거시설, 옷 등 많은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죠. 또한 이들은 자신들이 난민으로 제대로 등록되었는지, 난민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갖추었는지 확인하고 싶어하죠. 한편, 난민들의 필요에 맞게 물품과 서비스를 조정하여 전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일방적 으로 결정하여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난민들과 의논하여 그들에게 선택권을 주어야 합니다. 유엔난민기구 윤리강령에 보면 난민의 삶과 관련된 모든 결정은 난민들과 함께 만들어져야 한다고 되어 있어요. 3. 현장 직원으로 일하기 위해 가장 필요하거나 갖추어야 할 역량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유엔난민기구는 전 세계 난민을 위해 일하는 기구로서, 각 현장마다 상황이 매우 다릅니다. 모든 난민들이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환경, 문화 등에 따라 상황이 다를 수 있지요. 현장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여러 가지가 필요합니다. 우선, 난민을 위한 열정과 신념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로는 자신의 개인적인 열망을 뒤로 하고, 난민 보호를 위한 기구의 가치와 목표를 우선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높은 수준의 전문성을 요구합니다. 난민들에게 양질의 서비스와 필요 물품을 제공하기 위해서 우리는 각 분야의 전문가를 필요로 합니다. 세 번째로, 실제 현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유엔 공식언어인 영어 혹은 불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것이 뒷받침 되어야 하겠지요. 마지막으로, 현장에서는 여러 가지 변수들과 문제들을 견뎌내야 합니다. 도시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고, 어느 정도의 도전과 신변의 위협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죠. 무엇보다 물리적으로 많이 이동하게 될 겁니다. 저의 경우 지금까지 7~8번 정도 거주 지역을 옮겼습니다. 매일 밤 새로운 곳에서 잠자리에 들면서 시차에 적응하고, 국경을 넘어 터전을 끊임없이 옮겨 다니는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역량과 의지가 필요합니다. 4. 그밖에 유엔난민기구와 일하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요? 유엔난민기구와 일하면서 겪은 에피소드는 무수히 많아요. 특히,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에피소드들을 들려드릴게요. 제가 그루지야와 체첸 공화국 국경에서 겪은 일입니다. 저희는 체첸공화국 난민들을 헬리콥터에 태워 피난시키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루지야 반군들이 나타나 총부리를 겨누며 자신들의 부상자들을 먼저 대피시키라고 위협했습니다. 부상자 들은 당장 병원으로 옮기지 않으면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반군들과 협상을 해야만 했습니다. 우선, 전쟁 부상자 문제는 유엔난 민기구의 임무가 아니며, 관계 정부와 국제적십자사의 임무라고 설득했 습니다. 그 당시 저는 난민들과 제 자신의 신변을 책임져야 하는 막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지요. 귀환민들과 얽힌 극적인 이야기들도 있어요. 말레이시아에서 고국 베트남으로 돌아가는 귀환민들을 태운 보트에서 한 남성이 고국으로 돌아가기 싫다며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유일한 유엔난민기구 직원이었고, 선장에게 즉시 구조활동을 펼치도록 요청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 남성은 무사히 구조되었고, 저는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릅니다. 몇 년이 지나 그 남성이 베트남 고향으로 돌아가 작은 사업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고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5. 지난 4월 한국 대표로 부임한 지 두 달이 되어가는데, 한국대표부와 다른 국가 사무소와의 차이점이 있다면요? 우선, 다른 유엔난민기구 사무소와 다르게 한국대표부에는 여자 직원이 훨씬 많은 것이 색다르네요. (웃음) 제가 일했던 다른 사무실들은 보통 남자 직원들이 더 많은 편이었거든요. 또한 이곳 직원들은 매우 높은 수준의 전문성을 갖추고 있고 기술과 지식 수준이 상당한 것 같습니다. 그밖에도, 다른 유엔난민기구 사무소들과 마찬가지로, 가족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서 좋습니다. 각 팀이 다른 업무를 하고 있지만 하나의 가족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6. 한국 대표로서 가장 이루고 싶은 변화, 혹은 대표로서 현재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현재 한국대표부는 무엇보다 현재 직원들, 그리고 저의 전임자들과 고등판무관의 지휘 아래, 한국 사회의 난민보호 동참을 위한 목표를 가지고 발전해가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변화를 천천히 만들어나갈 생각입니다. 우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원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더 효율성을 높여서 적은 것을 가지고 더 많은 것을 이루고자 합니다. 또, 사무실 내 각기 다른 팀이 하는 일 중에 연결고리를 찾아 보다 통합적인 옹호사업을 펼치고자 합니다. 그리고 금년 7월 1일 시행 예정인 난민법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지요.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법을 시행할 수 있도록 필요한 지원과 실질적인 협력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북한이탈주민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북한 사람들의 이동 경로인 러시아, 중국, 태국, 라오스 등 주변국들이 강제송환금지(non-refoulement) 원칙을 준수하도록 국제사회와 함께 협력해 나갈 것입니다. 7. 일반적으로 난민 은 이해하기 쉬운 주제가 아닌데요, 한국 후원자 및 파트너들이 난민을 어떻게 받아들이기를 원하는지요? 저는 이 문제를 너무 단순화해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마다의 분쟁, 폭력, 박해, 고통의 이야기를 가진 난민들이 전 세계 수백만, 수천만 명에 이르고 이들은 우리의 관심을 필요로 해요. 저는 우선, 한국 후원자 및 파트너들이 난민들에게 재정적인 지원 뿐 아니라 감정적인 공감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두 번째로, 장기화된 난민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어떤 난민 위기 상황이 새로이 발생 하면, 미디어의 집중조명을 받게 되죠. 하지만 1년, 2년, 혹은 10년, 20년씩 타지에서 머물고 있는 난민들도 분명 존재하며, 이들은 돌아갈 곳 없이 주변국 난민촌에서 기약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난민들은 각기 다른 요구를 지니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난민들을 만족시키는 하나의 해결책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문화, 민족, 종교적 배경에 따라, 또한 각 난민의 성별, 연령에 따라 난민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달라질 필요가 있어요. 난민 개개인의 특수한 요구를 고려해야 합니다. 8. 삶의 신조 혹은 지향하는 삶의 모습은 무엇인가요? 이런 말을 하기 좀 쑥스럽지만, 저는 늘 사랑을 전하고 미움은 버려라 라고 말합니다. 증오라는 것은 아마도 인류가 만든 가장 반인류적인 생산물이 아닌가 생각해요. 전쟁, 분쟁, 박해와 폭력 모두 증오에 바탕을 두고 있지요. 사람들이 서로를 포용하고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모든 갈등과 문제는 해결될 수 있어요. 결국 우리는 하나이고 같은 사람들이거든요. 세상에 미움과 증오가 사라지고 오직 사랑만이 존재한다면, 유엔난민기구의 존재도 결국 필요가 없겠지요. 9. 마지막으로 유엔난민기구 후원자 및 파트너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저는 그동안 전 세계 난민 구호 현장을 누비며 여러분의 후원이 가져온 극적인 변화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습니다. 한 어린 아이가 숨결을 되찾고, 한 가족이 몸을 누일 작은 쉼터를 얻어 안도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뭉클한 전율을 느꼈습니다. 이처럼 여러분은 유엔난민기구와 함께 난민 가족들에게 생명과 안전, 위안과 희망을 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이들이 계속해서 미래를 꿈꾸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가 필요하다는 것을 부디 기억해 주세요. 저는 아직 이곳에 부임한 지 얼마 안되었지만, 앞으로 대한민국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워나가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머무는 향후 몇 년 동안, 저는 이곳 유엔난민기구 활동에 제 자신을 아낌없이 투자해 나갈 것이며, 또한 후원자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어나가고 싶습니다. 인터뷰 하는 과정 내내, 그 누구보다 현장에서 난민을 가까이 접한 사람으로서 난민 한 명, 한 명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그의 세심한 마음이 전해졌다. Spread Love, Not Hate! 이러한 그의 신념과 가치 아래, 한국대표부라는 작은 보트는 향후 몇 년간 무리없이 순항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절로 들었다. 10 * 더크 헤베커 대표는 유엔난민기구 베트남 대표부, 그루지야 주그디디 현장사무소, 제네바 본부, 미얀마 마웅도 현장사무소, 스리랑카 대표부, 방글라데시 콕스 바자르 지역 11 사무소, 러시아 모스크바 유엔인권고등판무관사무소를 거처 서울에 위치한 한국대표부에 지난 4월 말 부임했다.
이들도 난민이었습니다 8 가수 미카 (MIKA) TV를 보다가 혹은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이 가수의 노래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화려하고 신나는 음색으로 가던 길의 발걸음을 더 가볍게 해주었을 것 같습니다. 국내의 TV방송, 라디오, 각종 CF 광고에서도 여러 번 등장 한 가수 미카는 뜻밖에도 레바논 출신의 난민입니다. 미카는 레바논 베이루트(Beirut)에서 미국인 아버지와 레바논인 어머니 사이의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레바논은 최근 시리아 내전으로 발생한 160여 시리아 난민 중, 약 51만 명 난민 들을 보호하고 있는 주변 비호국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주변국의 어려운 난민들까지도 수용할 수 있는 온전한 국가가 되었으나, 미카가 태어날 당시에는 레바논 내전이 최고조에 달해있었습니다. 1980년대의 레바논은 요르단에서 추방된 팔레스타인 게릴라 들이 이스라엘과 무장투쟁을 펼치던 때였습니다. 미카가 태어 나기 한 해 전인 1982년에 이스라엘은 미카의 출생지인 베이루 트에 거점을 둔 팔레스타인 세력을 무력화하고자 전면 침공을 가수 미카, 모델 와리스 디리와 같이 분쟁, 난민 통계 한국에도 난민이? 폭력, 박해 등의 이유로 고국을 떠나 타국 에서 난민지위를 신청한 사람들을 비호신청자 혹은 난민지위신청자(asylum seeker) 라고 부릅니다. 법무부 통계(2013년 5월 31일 기준)에 따르면, 이들 중 대한민국에서 난 민지위를 신청한 사람들의 수는 1994년 이후 현재까지 총 5,485명입니다. 이 중 329명 이 난민지위를 인정받았고, 173명은 인도적 체류 지위를 인정받았습니다. 현재 1,442 명은 심사 대기 중입니다. 대한민국에서 난민지위를 인정받은 사람들의 출신국은 미얀 감행하게 됩니다. 이 와중에 미카의 집도 폭격을 피해 갈 수 없 었습니다. 부모님은 25년이라는 세월을 전쟁과 함께 보내셨어요. 어느 날 밤, 집으로 돌아와 보니 폭격으로 누나의 방 한쪽 벽이 모두 사라졌다고 해요. 그리하여 미카는 태어난 지 일 년 만에 키프로스(Cyprus)로 가는 미 해군 부대의 도움을 받아 가족과 함께 프랑스 파리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7살 때 첫 번째 곡을 작곡한 미카는, 그것을 분노 라는 제목의 끔찍한 피아노 반주곡이었다고 회상합니다. 그가 9살 때에는 아버지가 출장 중 사담 후세인의 인질이 되어 쿠웨이트의 미국 대사관에 감금되는 일이 발생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의 비호를 받게 된 미카 일가는 다시 런던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런던에서 미카는 프랑스인 학교에 입학했지만 심한 따돌림에 난독증까지 겹쳐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미카는 굴하지 않고 자택에서 러시아인 소프라노 오페라 가수 밑에서 음악적 재능을 연마한 후, 유럽, 미국 등지에서 전설적인 팝가수로 떠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미카의 화려하고 흥겨운 노래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레바논 에서 태어났지만, 생 대부분을 타향살이했던 경험에서 비롯된 슬픔과 외로움, 좌절, 분노의 정서가 숨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Any Other World>라는 노래에 대해 미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곡은 제 친구, 라파에 관한 노래에요. 그녀는 레바논 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두 눈을 잃었죠. 저는 모든 사람의 인생에는 한 번, 또는 여러 번의 큰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 사람은 그 시점, 그 사건으로 인해 이제껏 살아 온 방식을 완전히 바꿔야 하게 되죠. 6개월만에 두 눈과 남편을 모두 잃은 라파처럼요. 미카는 언젠가 고국 레바논에서 노래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레바논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고국으로 돌아가, 발베크(Baalbek) 같은 멋진 도시에서 라이브로 공연하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국내 비호신청자수 5,485명 난민지위 인정 329명 인도적 체류지위 인정 173명 심사대기 1,442명 이 영화를 소개합니다 사막의 꽃 Desert Flower 당신의 삶이 완전히 바뀌게 된 날은 언제입니까? 당신은 위의 질문에 무엇이라고 답하시겠습니까? 당신의 인 생이 완전히 바뀌게 된 전환점 혹은 계기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결혼과 출산, 혹은 직업상의 변화나 종교적인 체험을 생각한 사 람도 있을 것이고 예기치 못한 질병이나 사고의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소말리아 난민 출신 유명 모델이자, 여성 인권운동가인 와리스 디리는 이 질문에 조심스럽게 입을 뗍니다. 제 삶이 바뀌게 된 날은 제가 매우 어렸을 적, 3살 때였습니다. 영화는 어린 와리스 디리가 고향 소말리아에서 목축을 하는 평화로운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와리스의 삶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할아버지뻘 되는 남성과의 조혼을 피하기 위한 한밤중의 가출, 수도 모가 디슈에 있는 할머니댁까지 이르는 험난한 여정, 고국 소말리아와의 이별, 냉대과 멸시, 외로움과 싸워야했던 영국 런던에서의 식모살이, 낯선 타지에서의 노숙자 생활, 어린 시절 할례의 부작용으로 갑자기 찾아온 복통과 수술, 유명 포토그래퍼의 모델 활동 제의, 불법 체류자 신분을 벗어나기 위한 위장결혼까지. 이러한 어려움들을 이겨내고, 합법적인 신분으로 이제 당당히 전문 모델로서 눈부신 커리어를 쌓게된 와리스. 자신의 성공에 관심을 갖고 삶의 배경을 궁금해하는 유명 잡지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여성 할례의 상처가 전 세계에 드러나게 됩니다. 3살 밖에 안된 어린 자신이 겪었던, 하지만 평생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그 사건을 와리스는 담담하게 전달합니다. 마치 바위 위에서 가축을 도살한 것처럼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어요. 잘려나간 내 살이 바위 위에서 햇빛을 받으며 말라가고 있었지요. 며칠 후 그 자리를 찾아가보니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어요. 새들이 먹어버린 것이지요. 이 후 와리스는 전 세계, 특히 아프리카에서 만연하고 있는 여성 할례 전통의 문제점을 알리고 그것을 근절하는 데에 앞장 서기 시작합니다. 여성 할례를 처음으로 공론화시킨 여성으로서,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으로부터 의해 유엔 특별대사로 임명된 와리스는 뉴욕 유엔본부에서 연설을 하게 됩니다. 저는 엄마와 가족, 아프리카를 사랑합니다. 3,000년이 넘도록 우리 민족은 여성의 생식기는 깨끗하지 않아서 할례를 안하면 불결하다고 믿었습니다. 할례 받지 않은 여성은 결혼도 안되고 마을에서 쫓겨나 창녀와 같은 취급을 받습니다. 코란에도 포함되지 않는 미신 때문에, 이 관습은 계속되고 있어 할례 받은 여성들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평생 고통을 안고 살아갑니다. 아프리카 여성도 똑같은 여성입니다. 유엔의 통계에 따르면 아직도 매일 6,000명의 소녀들이 할례로 고통받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문화적 상대주의에 관계 없이 여성을 향한 절대적인 인권 침해 행위입니다. 자신의 이름 와리스(사막의 꽃) 가 의미하듯 놀라운 생명력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더 나아가 본인이 평생 간직해온 가치와 신념을 깨고 올바른 것을 위해 용기있는 선택을 한 와리스. 난민은 가난 하고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용기와 의지를 지닌 특별한 사람이 라는 것을 이 영화는 다시금 일깨워 줍니다. 12 마, 방글라데시, 콩고민주공화국, 에티오피아, 이란 순입니다. 출처 : 법무부 2013년 5월 31일 기준 13
소중한 후원이 가져온 기적 시리아 어린이 난민들에게 전달된 장난감, 따뜻한 미소를 선물하다!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쿠아이 브랜리(Quai Branly Museum) 박물관에는 매년 아이들과 부모님들이 기부한 장난감들이 모입 니다. 이제는 연례 캠페인이 된 이 행사에서, 프랑스 어린이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장난감 하나를 가져와 여러 재료를 활용하여 새로운 장난감 하나를 만듭니다. 그리고 전쟁과 박해로 인해 자신 의 집을 떠나야만 했던 또래 난민 어린이들의 상황에 대해 배 웁니다. 이후 이 장난감들은 유엔난민기구와 다른 주요 협력 기 관들의 지원을 받아 세계 각지의 난민 어린이들에게 전달됩니다. 올해에는 프랑스 스카우트 연맹(Fédération des Associations d'anciens du Scoutisme) 덕분에 2,000여 개의 장난감이 모아 졌습니다. 지난 4월, 박물관과 프랑스 스카우트 연맹, 유엔난민기구는 박스 60개에 장난감을 옮겨담아, 국경없는 항공(Avion Sans Frontiere)이라는 자선단체의 도움으로 터키의 니집(Nizip) 난민촌 내 보육시설로 보냈습니다. 니집 난민촌 내 보육시설은 현재 3세에서 4살된 테스밈은 사자 인형을 받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테스밈은 부모님, 4명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고국 시리아에서의 분쟁을 피해 이곳 터키로 피난을 떠나왔습니다. 5세 사이의 시리아 어린이 난민 736명이 생활하고 있는 곳입니다. 아이들은 장난감을 보고 정말 기뻐했어요. 장난감을 가지고 아주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현장에서 장난감을 나눠주던 세린 우날(Selin Unal) 유엔난민기구 공보관은 말합니다. 터키는 현재 160만 여 시리아 난민들 중 약 38만 명을 보호하고 있는 비호국으로, 보호대상자 중 다수는 어린이들입니다. 가족과 함께 혹은 가족과 흩어져, 소중한 것을 모두 잃어버린 채 이곳으로 피난을 오게 된 시리아 난민 어린이들은 잠시나마 웃음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작은 인형 하나이지만, 이 아이들에게는 무서운 밤을 지켜주 는, 외로운 타지생활을 위로하는 든든한 친구가 되어줄 것입니다. 후원자 여러분의 관심과 참여로, 이와 같은 유엔난민기구의 활동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각지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섯 번째 보호손의 주인공, 세계를 내다보는 의젓한 고3, 안양고등학교 3학년 1반 친구들 시리아 난민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 나는 한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야. 대 학교에 가기 위해 공부를 하는 한국 학생들과는 달리 너 희는 너무나도 힘든 나날을 보내는 것 같아서 안타까워. 공부를 하며 힘들다던 내가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들기도 하고. 지금은 비록 환경도 어렵고 꿈을 키우는 일이 힘들겠지만, 계속 꿈을 위해 노력한다면 다 이루어질 수 있을거야. 가까이에서는 도울 수 없지만 먼 한국에서 응원하고 기도할게! * 시리아 난민들을 위해 따뜻한 응원의 메시지와 후원금을 전달해주신 안양고 3학년 1반 학생들과 담임선생님, 여러분의 정성이 값지게 전달될 수 있도록 유엔난민기구는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시리아 긴급구호를 위해 일시후원에 참여해주신 많은 후원자분들께도 더불어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여럿이 보내는 고마운 손길들 (주)경화상사,! (주)경화상사(임행준 대표)에서 전 세계 난민 보호를 위해 1,000만원을 전달해주셨습니다. 전달해주신 기금은 삶의 터전을 잃고 힘겹게 살아 가는 난민들에게 보호와 지원을 제공하는 데에 소중히 사용하겠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주)선진전력기술단,! (주)선진전력기술단(유해만 대표)에서 시리아 난민 돕기에 500만원을 전달해주셨습니다. 전달주신 기금은 내전으로 고통받는 시리아 난민 들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데에 값지게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유엔난민기구는 2011년 3월 31일 기획재정부 공고 제2011-57호에 의거하여 해외지정기부금단체 로 지정되었으며, 유엔난민기구에 보내주신 후원금에 대해서 연말 소득공제 혜택을 드리고 있습니다. 2013년 보내주신 후원금에 대해서는 유엔난민기구 홈페이지(www.unhcr.or.kr)-나의 후원 에서 조회 가능하며, 국세청 연말정산간소화 서비스(www. yesone.go.kr)를 통해서도 확인 및 출력이 가능합니다. 2013년 한 해에도 기부금 영수증을 포함한 후원 정보와 소식을 누락없이 받으실 수 있도록 유엔난민기구 홈페이지 및 전화 (02-773-7272)를 통해 개인 정보를 신속히 변경해주세요. 기업기부 사회공헌 안내 유엔난민기구는 전 세계 고통받는 난민을 보호하고 지원하는데 함께 할 기업의 참여를 환영합니다. 사회공헌, 직원참여 등에 대하여 개별 상담이 가능합니다. 14 15 윤소희 김민희 최서현 심현희 임예지 아프지 말고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라서 세상에 멋진 일을 하는 사람이 되길! 많은 돈은 아니지만 너희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게 되길 바랄게. 이 편지를 쓰면서 내가 더 마음이 따뜻해지게 된 것 같아 고마워! 비록 우리가 만날 수는 없지만 서로 힘을 내서 멋진 어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 지구 반대편에 있는 너희를 이번 기회를 통해 알게 되었다는 것에 감사해! 후원 소식 1 후원 소식 2 문의 전화 02-773-7075 2013 기부금 영수증 안내
얼음을 녹이는 사람들 유엔난민기구 거리 모금 활동가의 이야기 글 홍선혜 거리 모금 활동가, 차가운 얼음과 마주하다 시민 한 명 한 명은 모두 천의 얼굴을 가졌지만, 우리가 마주하는 대다수의 얼굴은 무표정한 얼굴이다. 때로는 바쁘다는 말이 고드름이 되어 마음에 박히고, 때로는 모진 말이 온 몸을 얼어 붙게 해도, 따뜻한 시민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아프지 않았고, 나의 일이 난민들 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자부심에 시민들의 반응을 받아 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거리에서 만난 얼음 같은 무관심과 냉대로 입은 상처는 자기 위안과 감정 절제로 스스로 치유하지 않는 한 쉽게 아물 줄 몰랐다. 얼음이 녹으면서 보이는 저마다의 이야기 거리 모금 활동가로서 활동을 하면서 얼음이 녹으면 시민들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에 매 순간 놀란다. 차가울 줄 알았던 얼음을 따뜻하게 껴안으면, 아이가 있는 시민들은 빈 젖을 물리는 난민 여성들의 아픔에 공감을 하게 되고, 고향을 떠나온 시민들은 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난민들의 슬픔에 공감한다. 누군가를 돕고 싶어하는 시민들은 삶에서 단 한 번도 선택 이 없었던 난민들을 위해 따뜻한 마음을 보탠다. 얼음을 36.5도로 껴안다 따뜻한 기부를 요청드렸지만 할 수 없다고 했던 할아버님은 시에 라리온에서 오랫동안 의료봉사를 해온 분이셨다. 현장에서 큰 사고로 갈비뼈가 부러지셔서 말 한마디 한마디를 잇기 힘겨워 보이셔도 거리 모금 활동가 한 명 한 명의 손을 잡아 주시며 좋은 일을 한다고 고맙다고 하셨다. 할아버님의 따뜻한 공감에 더없이 감사하면서도 얼음의 딱딱하고 차가운 면만 보려고 했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얼음을 36.5도로 껴안는 순간, 녹지 않을 것 같았던, 견고하고 차가 웠던 얼음이 스르르 녹아버렸다. 얼음을 녹이는 데에는 온수( 溫 手 )가 필요하다 거리 모금 활동가는 이처럼 시민들의 얼었던 마음을 녹이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짧은 순간 희로애락을 느끼면서도 자신이 마주했던 얼음이 따뜻하게 녹게 되면, 그 순간을 가장 오랫동안 간직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추운 겨울, 핫팩으로 무장하고 거리에 섰던 이유도 시민들을 에워 싸고 있는 얼음을 온수( 溫 手 )로 녹일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다. * (좌측부터) 홍선혜, 배준영, 한송희 님은 현재 유엔난민기구 거리 모금 활동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전화 02-773-7272 이메일 withyou@unhcr.or.kr 홈페이지 www.unhcr.or.kr 블로그 blog.naver.com/unhcr_korea 해피빈 happylog.naver.com/unhcr 페이스북 www.facebook.com/unhcr.korea 후원계좌 국민은행 407537-01-004288 (예금주 : 유엔난민기구 혹은 UNHCR) Print using soyink 유엔난민기구는 환경을 생각하여 콩기름 잉크를 사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