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사람들의 입장에서 본 우리역사 - 난국을 돌파한 최고의 경영자 이순신 - 그는 난세가 키운 영웅이었다. 이름 없는 하급 무인으로 출발해 늦게까 지 제대로 된 자리 하나 차지하지 못하고 지냈다. 그러다가 그는 임진왜란 을 만나 국가의 명운을 개척한 공로를 세웠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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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역사란 흘러가 버린 시간이 아니라 괴어 있는 시간, 미래를 향해 도리어 흘러 내려오는 그런 시간이다.(이어령) 2015. 5. 14.(목) 전남도립도서관 제 60 회 주 제 보통사람의 관점에서 본 역사 강 사 백 승 종 ㆍ학력) 독일 튀빙겐대학교 대학원 한국학 철학박사 ㆍ경력)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 독일 보흠대학교 교수, 경희대학교 객원교수 등 ㆍ현) 역사학자, 한국기술교육대학교 대우교수 ㆍ수상) 한국출판평론학술상, 한국출판문화상 ㆍ저서) 금서, 시대를 읽다 / 정감록 미스터리 / 역설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 등 전 라 남 도 도 립 도 서 관 JEOLLANAMDO PROVINCIAL LIBRARY

보통사람들의 입장에서 본 우리역사 - 난국을 돌파한 최고의 경영자 이순신 - 그는 난세가 키운 영웅이었다. 이름 없는 하급 무인으로 출발해 늦게까 지 제대로 된 자리 하나 차지하지 못하고 지냈다. 그러다가 그는 임진왜란 을 만나 국가의 명운을 개척한 공로를 세웠다. 어린 시절 친구 유성룡( 柳 成 龍, 1542-1607, 호는 西 厓 )의 정치적 후원도 여기에 한몫했지만, 이순 신 자신의 경영능력이 탁월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장터에서 이순신은 그 어떤 장수보다 부하들을 성공적으로 지휘하였 다. 작전지역에 파견된 지방관들과 현지 양반들의 지지와 동의를 얻는데도 으뜸이었다. 이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백성들의 절대적 신뢰와 사랑 을 한 몸에 받았다는 점이다. 그에게는 전쟁으로 뿔뿔이 흩어진 각계각층 을 하나로 묶어 전쟁에 동원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었다. 이순신만큼 인적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조직 관리할 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따지고 보면 그의 리더십은 탁월한 공감능력에서 비롯되었다. 광화문 네 거리에 우뚝 서 있는 우람한 구릿빛 동상과는 딴판으로 이순신의 내면에는 달빛만 고와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섬세한 시인이 살고 있었다. 1. 난세의 영웅 이순신 그는 싸워서 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단다. 그러려면 신무기도 있어야 하고 군사들도 제대로 먹여야 되었다. 전쟁수행에는 비용이 많이 들었다. 하지만 당시 조정은 그에게 군자금을 넉넉히 지원하지 못하였다. 도리어 일본에 보낼 사신의 배를 만들어내라, 다른 장수들의 군량을 지급하라는 식으로 성가시게 굴기 일쑤였다.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작전지역 안 에서 필요한 모든 물자와 비용을 스스로 조달하였다. 만약 모든 장수들이 이순신처럼 스스로 전쟁비용을 조달할 수 있었다면, 임진왜란은 7년씩이나 지지부진할 이유가 없었겠다. 그는 나무랄 데 없는 경영의 귀재였다. - 1 -

경영자 이순신의 성공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선비 이순신! 여기에 답이 있 었다. 그는 꼼꼼한 선비답게 매사에 빈틈이 없었다. 탁월한 문장가이기도 하였다. 18세기의 실학자 이덕무( 李 德 懋, 1741-1793, 호는 靑 莊 館 )는 역 대 한국의 대표 문장가들 가운데 그 이름을 포함시켰다. 간결하고 섬세한 이순신의 문예적 감수성, 이것이 인간이해로 승화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 다. 공감능력은 그의 보물이었다. 전란에 대한 백성들의 공포심은 물론, 지방 실력자들인 양반들의 고충도 그는 십분 이해하였다. 혈혈단신으로 지방으로 파견된 관리들의 애로 역시 그만큼 진정으로 공감한 사람이 드물었다. 폭넓은 인간이해를 바탕으로 그 는 각계각층의 친구요, 보호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 사람들과 함께 누란 의 위기에서 나라를 지켜냈다. 그가 용장 또는 지장이라서 성공했다고 보 기는 어렵다. 그는 인간경영에 성공하였기 때문에 불패의 신화를 쓸 수 있 었다. 여기에 경계할 점이 있다. 이순신의 삶은 지금껏 끝없이 미화되었고, 실 상과 달리 전해진 부분도 없지 않다. 일일이 설명할 겨를은 없지만 그에게 도 단점은 있었다. 우선 경쟁심이 너무 지나쳤다. 전쟁 중 그는 원균과 공을 심하게 다투느 라 불필요한 잡음을 불러일으킨 측면도 있었다. 이해심이 많은 그였지만 어떨 때는 부하들에게 너무 가혹하였다. 좋은 말로 그냥 넘어가기에는 곤 란한 중벌을 그는 되풀이해서 시행하였다. 난중일기 곳곳에서 우리는 부 하들을 매질하고, 심지어 백성들의 목을 베는 이순신을 만난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의 상관들에 대한 그의 태도는 순순하지 않았다. 상관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그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그가 미관말직만 전전한 데는 이러한 약점들이 일정한 역할을 하였을 것도 같다. 요컨대 이순신은 틀림 없이 훌륭한 지도자였지만 각도를 달리하여 보면, 크고 작은 단점이 없지 않았다는 말이다. - 2 -

2. 시작은 평범한 무관이었다 무관 이순신의 출발은 평범하다 못해 초라하였다. 그의 집안 덕수이씨 ( 德 水 李 氏 )는 조선의 명문가였다. 대대로 훌륭한 학자와 관리들을 배출하 였다. 하지만 그의 할아버지 이백록( 李 百 祿 ) 대에 이르러 가운이 기울기 시작했다. 이백록은 중종 때 개혁정치가 조광조 일파에 속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목숨을 잃자 이백록에게도 기회가 사라졌 다. 아버지 이정( 李 貞 )은 벼슬길에서 더욱 멀어져 서울 생활마저 어려워졌 다. 그들은 서울 한복판 건천동(현재 인현동)에 대대로 살았지만, 생활이 어려워지자 하는 수없이 이순신의 외가(초계변씨)를 따라 아산(충남)으로 낙향하였다. 어릴 적 이순신은 건천동에서 유성룡을 만나 친구가 되었다. 세 살 위인 유성룡과 그는 5년 동안 함께 지냈다. 유성룡이 기억하는 십대의 이순신은 문무를 겸비한 재목이었다. 순신은 어린 시절 얼굴 모양이 뛰어나고 기풍 이 있었으며 남에게 구속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라 치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하였 다.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하여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그의 문 앞을 지나려 하지 않았다. 또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 며 무과에 급제하여 발신( 發 身 )하려 하였다. 말 타고 활쏘기를 좋아하였으 며 더욱이 글씨를 잘 썼다. (유성룡, <<징비록>>) 유성룡은 이러한 이순 신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이 아산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그들은 한 동안 서로 연락을 주고받지 못하였다. 이순신의 무과급제는 비교적 늦은 편이었다. 32살에야 겨우 급제했다. 무과는 문과나 생원진사시험과는 달리 뽑는 인원도 많았다. 때로 수백 명 을 뽑기도 했고, 합격자들 가운데는 평민들도 적지 않았다. 그의 무과급제 는 주위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다. 급제한 뒤에도 그의 벼슬길은 암담하였다. - 3 -

그는 자기 확신이 강했다. 상관이 조금이라도 부당한 명령을 내리면 절 대 따르지 않았다. 윗사람들의 눈에 들지 못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보통 의 무부( 武 夫 )들과 달리 시문( 詩 文 )을 즐기고 독야청청( 獨 也 靑 靑 )한 선비 스타일이라, 동료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한 것 같다. 결국 변방으로 변방으 로만 빙빙 겉돌았다. 그와 같이 집안배경이 좋은 무관이라면 서울에 남아 요직을 섭렵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였다. 하지만 융통성이 없는 청년 이 순신은 함경도로 쫓겨나 동구비보권관( 董 仇 非 堡 權 管 ) 따위 하급 장교 노릇 만 하게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의 재주 없고 고지식함을 비웃었을 것이다. 조산보만호( 造 山 堡 萬 戶 ) 시절에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하였다. 여진족이 쳐들어 왔는데 이순신이 속한 부대가 완전히 참패를 당했다. 그 일에 대해 이순신 쪽 설명이 다르고, 그 상관의 해명이 달랐다. 분명한 사실은 문제의 전투에서 조선 병사 11명이 죽었고, 160명이 포로로 끌려갔으며, 말도 15 필이나 약탈당했다는 것이다. 이순신의 진술에 따르면, 사전에 그는 지역사 령관인 이일( 李 鎰, 1538-1601)에게 병력의 증파를 요구했다 한다. 이일의 주장은 달랐다. 현장의 책임자 이순신의 무능으로 전투에 졌기 때문에 그 목을 베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백의종군( 白 衣 從 軍 ) 을 명했다. 즉, 장교의 품계는 유지하되 지휘권을 박탈한 채 보직 대기 를 명령하였다. 이순신은 나중에 또 한 차례 백의종군하였다. 다시 보임을 받았지만 역시 미관말직이었다. 그가 쓸 만한 벼슬을 얻은 것은 45살이나 되었을 때다.(1589년) 그때야 겨우 선전관이 되었다. 이 직 책은 무관 벼슬 중 노른자에 해당하였다. 가문 좋고 능력이 탁월한 장교에 게 주는 벼슬이었다. 빠르면 20대, 늦어도 30대에 거쳐 가는 요직이었건마 는 이순신은 왜란이 일어나기 4년 전에야 선전관이 되었다. 그때부터 막혔 던 벼슬길이 열렸다.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순신은 정읍(전북) 현감이 되었다. 그런 다음, 이순신에게 기회가 왔다. 전쟁의 기운이 감돌자 조정에 서는 무관을 발탁하는 특별인사를 단행하였다. 조정의 실력자로 발돋움한 유성룡은 옛 친구 이순신을 잊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전라좌수사 (정3품)로 발탁되었다. - 4 -

앞서 조정에서는 황윤길( 黃 尹 吉, 1536년생)과 김성일( 金 誠 一, 1538-1593, 호는 鶴 峰 )을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해 적정을 탐지하였다. 유명한 이야기 지만 그들의 보고는 완전히 엇갈렸다. 황윤길은 일본이 쳐들어올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김성일은 그럴 걱정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조정의 실권을 쥔 동인들은 김성일(동인)의 말을 믿고 전쟁을 크게 염려할 필요는 없다고 결 론지었다. 그래도 께름칙한 점이 있었던지 만약의 사태를 전혀 대비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이 유성룡의 생각이었다. 그 바람에 이순신은 전라좌 도수군절도사, 즉 좌수사가 되어 이를테면 여수지역 해군사령관으로 부임 하게 된 것이었다. 3. 이순신, 전쟁을 준비하다 부임하자마자 이순신은 전함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거북선도 짓게 하였 다. 그 당시 수군은 엉망이었다. 조선 초기만 해도 전함도 말짱하고 군사도 어느 정도는 훈련이 되어 있어 전투준비태세가 웬만큼 갖춰져 있었다. 그 러나 평화가 오래 지속되자 군사들의 기강은 점점 흐트러졌다. 이순신이 부임했을 무렵에는 완전히 오합지졸이었다. 이순신은 그들을 독려하여 백 방으로 노력하여 군비를 확충하였다. 가까스로 거북선을 완성하자 공교롭 게도 임진왜란이 터졌다. 아슬아슬한 일이었다. 거북선의 완공이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그릇되고 말았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조선 수군의 주력은 판옥선 이었다. 이 배는 바닥이 평평하고 높이가 껑 충하였다. 그 위에 대포를 장착하였다. 이순신의 수군은 왜군에 비해 화력 이 월등하였다. 이미 여러 종류의 대포를 개발하였기에 가능하였다. 그런 화포가 탑재된 판옥선은 수적으로 우세한 왜선을 제압하였다. 전투 시에는 판옥선의 주위에 여러 척의 협선 을 배치하여 전투수행의 효과를 높였다. 특수함정 거북선의 활약도 눈부셨다. 수자는 많지 않았지만 돌격전의 최 강자가 바로 거북선이었다. 거북 모양의 이 배는 기동성이 탁월한데다 선 체가 견고하고 기동성이 뛰어났다. 덩지가 큰 왜선과 부딪혀도 부서지기는 커녕 상대방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또한 거북선에는 다양한 총포가 비치 - 5 -

되어 있어 어떤 상황에서도 적선을 타격할 수 있었다. 거북선은 키가 큰 배는 아니었다. 하지만 선체 위에 단단한 뚜껑을 덮었고 거기에 뾰족한 창 칼 등을 꽂아두었기 때문에, 누구도 그 위로 뛰어내릴 수 없었다. 거북선은 왜군의 두통거리였다. 판옥선과 거북선을 거느린 이순신은 늘 바다에서 왜적을 상대하였다. 당 시 왜군들은 수전( 水 戰 ) 즉, 해상전투라는 개념조차 몰랐다. 그들은 뭍에 상륙한 다음 해안에서 싸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의 전쟁개념은 달랐다. 뭍에 상륙한 적은 크든 적든 현지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기 마련이므로, 저들이 상륙하기 전에 물속에 빠뜨릴 방법을 이순신은 개발하였다. 그는 무조건 싸우고 보자는 식의 전형적인 맹장이 아니었다. 그는 피차 가 구사할 수 있는 모든 전략전술을 미리 부하들과 함께 여러 모로 검토하 였다. 이쪽에 승산이 충분하다고 판단될 때만 출격하였다. 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전장터에서도 그는 언제나 침착하였다. 부하들 역시 사전에 여러 전술을 충분히 협의하고 공유하였기 때문에 우왕좌왕하는 적이 없었다. 조 선 수군의 승리는 우연이 아니었다. 전략의 공유와 소통이야말로 이순신의 승리제조기였다. 이순신은 군량확보에도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본디 수군의 군량은 바닷 가에 설치된 여러 고을이 대주도록 되어있었다. 하지만 비상시에는 그것이 원활할 리가 없었다. 이를 미리 내다본 이순신은 일찌감치 자급자족의 방 책을 마련하였다. 농지개발이 제대로 되지 않은 빈 땅을 찾아 수군이 직영 하는 농장을 설치했던 것이다. 임진왜란 중에 다른 장수들의 휘하에서는 굶어죽는 병사들이 속출하였 다. 그러나 만반의 준비를 갖춘 이순신의 수군은 무사하였다. 권율과 원균 등 군량부족으로 애로를 겪는 여러 장수들에게 이순신의 수군은 수시로 군 량을 지급해주었다. 굶주림을 호소하는 해당지역 양반들에게도 자주 은전 을 베풀었다. 이순신의 경영능력은 탁월하였다. - 6 -

그에게는 또 한 가지 장점이 있었다. 지형지물을 충분히 활용했다는 점 이다. 그는 오랜 기간 동안 함경도에서 장교생활을 하였다. 남해안에서는 잠시 수군장교를 역임한 것이 전부였다. 바다를 잘 모르는 이순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서남쪽 드넓은 바다를 관리하게 되었다. 그로서는 당황스런 일이었지만, 곧 돌파할 방법을 찾았다. 틈이 날 때마다 그는 술과 떡을 마련하여 가지고 각지의 노인들을 초빙 해 음식을 대접하였다. 바다에 관한 자신의 지식을 넓히기 위해서였다. 이 지역의 물살은 어떻습니까? 이곳에는 배를 숨기기에 편리한 곳이 있습 니까? 바람은 계절별로 어떻게 달라집니까? 암초는 어디에 많습니까? 그 는 이런 궁금증을 그들에게 호소하였다. 이순신은 작전지역에 관해 상세한 지식을 수집 정리하였다. 부임한지 불과 수개월 만에 그는 이 모든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였다. 이제 그는 내 바다 안으로 오는 적들은 반드시 무찌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4. 임진왜란 : 이길 수 있을 때만 싸웠다 전쟁은 1592년 음력 4월에 터졌다. 기왕 이순신 같은 인재를 배치하기 로 작정하였다면 적의 침입 루트로 예상되는 경상도 해안에 배치하는 것이 옳았다. 그를 동래(부산)로 보냈더라면 임진왜란이란 전쟁은 불발에 그쳤 을 것이다. 초전에 이순신이 쳐들어오는 적들을 몽땅 물속에 수장시켜버렸 을 것이다. 조정의 실수로 일이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은, 국가의 큰 불행이 었다. 그때 경상도 해안에는 이순신 같은 장수가 없었다. 그곳의 조선 수군들 은 전쟁을 치를 준비가 전혀 안 되었다. 그들은 쉽게 뚫렸다. 경상도의 어 느 수군절도사는 적을 막을 엄두가 나지 않자 자신의 전함들을 몽땅 물속 에 집어넣고, 불 질러 없애버리고는 육지로 도망쳤다. 원균도 그런 처지였 다. 싸울 뜻은 있었다지만 부하고 전함이고 다 잃어버린 불쌍한 장수가 되 고 말았다. 그는 허겁지겁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 7 -

전라도 수군을 경상도 바다로 투입해서 적군을 방어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런 요청을 듣고서도 이순신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순신다움이란 그 런 것이었다. 원균은 대책 없이 서둘러 움직이는 용장에 불과했으나, 이순 신은 그와 체질적으로 전혀 다른 선비였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함부로 벌일 만큼 그는 무모하지 않았다. 낯선 남해 바다 동편에서 전라좌수영 소 속의 전함 기백 척으로 천척이 넘는 왜적을 갑자기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이순신은 전라우수영의 함대와 연합작전을 펴기로 하였다. 사정이 아무리 급박하더라도 연합함대가 아니고서는 승리의 가망이 전무하였다. 1592년 5월, 원균의 요청을 받은 지 보름 정도 지나서 이순신은 적선을 찾아 움직 였다. 그들의 연합함대는 이기고 또 이겼다. 전라도에서 그랬듯, 개전 초기 낯선 경상도 바다에서도 그는 익숙한 노 인들의 도움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적응속도는 놀라울 정도였다. 1592년 5월 7일, 옥포에서 왜선 30여척을 격파했다. 그달 말 사천포 해전에서는 거북선을 투입하여 왜선 13척을 깨뜨렸다. 그 다음 달에는 당포에서 왜선 20척을 수장시켰다. 뒤이은 제1차 당포해전에서도 26척을 격파하였다. 잇 따라 그해 7월 초에는 한산도에서 70척을 물리쳤다. 두 달 뒤 부산포해전 에서는 무려 100여척을 침몰시켰다. 불과 다섯 달 사이에 이순신의 함대는 무려 200척도 넘는 적선을 격파하였다. 왜군들은 공포에 빠지고 말았다. 조선 수군이 나타나기만 하면 적들은 싸울 의지를 잃었다. 그들은 연전 연패를 거듭하며 매번 수십 척 또는 1백 척씩이나 되는 귀중한 전함을 상 실했다. 하루아침에 그 많은 배들을 다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왜군 은 보급로가 차단될 위기에 빠졌다. 이순신 덕분에 전쟁은 전혀 다른 국면 에 돌입하였다. 1592년 4월, 큰 저항 없이 부산에 상륙했던 적군은 육지에서 승리의 행 렬을 이어나갔다. 20만 명을 헤아리는 왜군은 길을 나누어 북상하였다. 그 들이 부산에서 서울까지 쳐들어가는데 걸린 시간은 채 20일도 안 걸렸다. 왜군은 달아나는 선조를 맹추격했다. 자신감을 잃은 선조는 압록강 너머 명나라 땅으로 망명할 생각까지 하였다. 대신들이 거듭 말리는 바람에 그 - 8 -

일은 유야무야 되었지만 국운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이때 남쪽에서 승전보 가 연거푸 올라왔다. 이순신이었다. 조정은 그에게 삼도수군통제사 라는 높 은 벼슬을 내렸다.(1593) 수군의 주력은 이순신의 직속관할인 전라좌수영 소속이었다. 여기에 이 름뿐인 원균의 경상도 수군과, 여로 모로 미약하였던 충청도 수군들이 합 세하였다. 이순신이 건재함으로써 조선의 바다가 평안하였다. 그는 특히 전 라도 해안을 철통같이 방어하였기 때문에 왜군은 어디서고 수륙연합작전을 펼 수 없었다. 저들의 육군은 이미 중부지방까지 올라갔지만 저들의 수군은 이순신에게 길이 막혀 미동도 하지 못하였다. 만약 저들이 육해군 공동작전을 펼칠 수 있었더라면, 조선은 여지없이 유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라도, 충청도 쪽으로는 상륙조차 불가능했기 때문에, 조선은 되살아날 여지가 있었다. 전 라도는 물론 충청도까지도 이순신 덕분에 무사하였던 것이다. 조정은 이들 지역에서 군사를 징발하고, 군량을 조달할 수 있었다. 명나라 군대가 조선의 거듭된 요청에 따라 참전하였다. 조선의 국력으로 는 도저히 왜군을 격퇴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 의 나라 전쟁에 끼어든 명나라 군대가 적극적으로 싸울 리는 없었다. 한양 은 수복되었지만 전쟁은 곧 소강상태에 빠졌다. 이런 와중에 일본은 이중 간첩을 보내 조선의 조정을 흔들어댔다. 적들은 한편으로 휴전하겠다며 강 화회담을 벌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 내부에 균열을 내고자 온갖 노력 을 다하였다. 요시라 라고 하는 쓰시마 섬 출신의 이중간첩이 암약하였다. 그는 조정 에 대강 다음과 같은 정보를 주었다. 일본군의 주축은 가토기요마사( 加 藤 淸 正 )과 고니시유키나가( 小 西 行 長 ) 두 장군이 거느리고 있는데, 두 사람이 서로 앙숙이다. 요시라 자신은 고니시 편이라서 내부 사정을 환히 알고 있 다. 고니시는 서둘러 평화협정을 맺고 일본으로 무사히 퇴각하기를 바라지 만, 가토가 조선 정복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어 문제가 복잡하다. 가토가 군 - 9 -

대를 이끌고 조선에 상륙하는지 시각과 날짜를 알려줄 테니, 이순신을 출 동시켜서 그를 죽이라. 이런 첩보를 믿고 선조와 조정 대신들은 이순신에 게 출동명령을 내렸다. 이순신은 그 명령을 듣지 않았다. 적중에서 흘러나온 첩보를 믿고 움직 이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그는 판단하였다. 가토가 상륙하려다가 조 선 수군을 발견하면 달아날 테니까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며, 만일 그게 아 니라도 저들이 미리 요소에 군대를 매복시켜두었다가 출동한 조선 수군을 협공할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시라가 말한 그 날은 출동 하기에 여건이 원체 나빴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요시라의 말만 믿고 이순신을 한양으로 압송한 다음 모진 고문을 가했다. 선조는 이순신을 죽이려고 했다. 선조는 개전 초기부 터 이순신을 미워했다. 왕은 그가 너무나 잔꾀를 부린다고 생각하였다. 선 조의 눈에 비친 그는 거짓말쟁이고 공명심이 지나친 사람이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에게도 실수는 있었다. 수많은 보고서를 올리다 보니, 몇 가지 사소한 착오가 발생하였다. 선조는 그 점을 기억하고 있었다. 왕은 이순신이 조정을 기만했다면 죄명을 정했다. 임금을 무시했다는 죄 도 추가하였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 적을 토벌하지 않고 나라를 저버린 죄. 다른 사람(원균)의 공을 빼앗고 모함한 죄까지 보탰다. 방자해서 거리 낌이 없는 죄, 즉 상관들과 조정대신들에게 오만불손 하게 군 죄까지 죄목 에 덧붙였다. 과연 이순신에게는 윗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는 단점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 남쪽 바다에서 그가 세운 전공( 戰 功 )에 비하면 아 무 것도 아닌 일이었다. 하지만 선조는 이런 여러 가지 죄를 모두 더해가 지고 이순신을 아예 죽일 작정이었다. 그러나 선조의 미움을 사적 감정으로만 축소하려든다면 그 또한 사태를 잘못 읽은 것이다. 이순신에 대한 논죄는 조정 대신들 사이의 권력투쟁이 불거져 나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조정이 당파싸움에 휘말려든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이순신은 동인의 영수 유성룡의 후원을 받았다. 따라서 반대파 - 10 -

인 서인들은 그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더욱 큰 문제는 북인들에게 있었다. 그들은 조식(호는 남명)의 제자들이었는데, 누구보다 앞장서 이순신을 시 기하고 미워했다. 조정의 정치적 싸움에 이순신이 걸려든 것이다. 우의정 정탁( 鄭 琢, 1526-1605, 호는 藥 圃 )이 동인을 대표하여 선조에게 애원하였다. 이런 일로 명장을 죽이는 것은 지나칩니다. 아직도 전쟁이 끝 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순신은 다시 백의종군하였다.(1597) 그는 맡은 일도 없이 도원수 권율( 權 慄, 1537-1599)의 막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 초대형사건이 일어났다. 칠천량해전이었다. 이순신이 압송된 다음, 그의 라이벌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원균은 평소 이순신이 상부 의 명령을 무시하고 제때에 수군을 출동시키지 않았다고 불평했다. 심지어 그는 선조에게도 이순신을 비방하고 헐뜯는 글을 올린 적이 많았다. 그런 데 이번에는 원균이 바로 그 문제에 봉착하였다. 권율은 원균에게 칠천량 으로 출동하여 적과 싸우라고 명했다. 원균이 재빨리 움직이지 않자 권율 은 그를 붙들어다 매를 때렸다. 할 수 없이 원균은 대군을 거느리고 출동 하였지만 대참패를 당하였다. 그 자신도 칠천량에서 전사했다. 수년간 이순 신이 길러놓은 조선 수군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어떤 사람들은 조선 수군이 거둔 승리의 원인을 우세한 화력과 장비 등 물적 능력에서 찾는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원균의 칠천량 패전 에서 보듯, 지휘관의 능력이 더욱 중요하였다. 원균은 경험이 많은 수군사 령관이요, 용맹한 장수였다. 그러나 그는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것 도 아주 대참패를 하였다. 이순신이라면 이길 수 있는 싸움이라 해서, 원균 이나 또는 그밖에 다른 장수도 이길 수 있다고 보면 착각이다. 왜적과의 싸움은 항상 수적으로 우위를 점한 적들과의 조우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쪽의 전략전술과 판단력, 그리고 인적 화합이 승리의 관건이었다. 요컨대 이순신의 리더십이 조선수군을 승리로 이끈 견인차였다.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용되었으나, 자신의 함대는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고작 12척이었다. 조정에서는 아예 수군을 폐지 - 11 -

하자는 주장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배도 다 없어졌으니 상륙한 왜군들 이나 상대하라는 것이었다. 이순신은 강력히 반대하였다. 바다에서 적을 막 아야 백성의 피해를 막을 수 있다. 배는 12척밖에 없지만 이것으로 최선을 다해보겠다는 것이 이순신의 취지였다. 칠천량에서 원균이 대패한 바람에 왜군이 전라도로 쏟아져 들어왔다. 정 유재란이었다. 그로 인해 온전했던 전라도와 충청도를 왜적이 분탕질하였 다. 목포의 동쪽 바다는 모두 적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껍데기만 남은 수군 을 가지고 장차 나라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이순신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태에서 이순신은 명랑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13척 의 배로 133척의 적군을 대적하였다. 우선 정확히 몇 시에 바다의 조류가 얼마나 빨라지는지를 조사하였다. 물살의 흐름을 적절히 이용해서 적전함 31척을 침몰시켰다. 역시 이순신이었다. 그는 남해안의 여러 지역을 차례 로 수복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퇴각하는 왜적을 노량해전에서 소탕하고 장렬하게 전사하였다.(1598)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말들이 무성하다. 자살이냐, 아니면 전사냐, 아니 면 죽을 생각을 가지고서 무방비 상태로 그렇게 당했던 것이냐, 말들이 많 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전사가 확실했다. 전사할 당시 그의 모습에 대해 서는 여러 가지 다른 기술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이순신이 마지막까지 전 투를 독려하던 중 적탄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쓰러지자 부장 송희립이 이순신을 대신 군대를 지휘하여 마지막 전투를 대승으로 이 끌었다. 5. 난중일기 를 보면 경영자 이순신이 보인다 이순신은 장군이 아니었다. 그는 활을 든 선비였다. 난중일기 에서 나 는 그런 이순신을 만났다. 일기장에서 본 그는 아름다운 문체의 소유자다. 그 글은 간명하면서도 아름답다. 곳곳에 시도 등장한다. 일반적인 무사의 모습과는 완연히 구별된다. 그는 탁월한 문사였다. - 12 -

일기장이 보여주는 이순신은 호랑이처럼 엄격하면서도 어머니처럼 자상 하다. 서로 대립된 개념이 그 안에 있었다. 자상하고 친절한 사람은 대개 엄 격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순신은 양면적이었다. 이순신다움이 여기 있었다. 특히 강조할 점은 이순신의 섬약함이다. 그의 정서적 예민함은 병적일 정도로 지나쳤다. 일기장마다 그 흔적이 선명하다. 피리소리를 좋아한 그는 조카더러 밤새 연주를 부탁하기도 하였다. 나이 50도 넘은 그가 잔잔한 바 다에 비단처럼 고운 달빛이 퍼질 때면 한 잠도 이루지 못했다. 바람소리만 크게 일어도 그는 잠을 못 잤다. 이것은 우리가 떠올리는 용감한 장수, 광 화문 네거리를 호령하는 동상 속의 그 모습이 아니다. 그는 유약하다 해도 좋을 만큼 매사에 지나치게 민감하고 섬세하다. 이순신은 파토스의 인물이 다. 그래서 그는 조정에 보낼 허다한 보고서도 자신이 직접 쓸 때가 대부 분이었고, 밤새워 시를 읊조리며 뜬눈으로 보낸 적이 많았다. 그는 강철 같은 체력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자주 아팠다. 아파도 오래오 래 끙끙 앓았다. 난중일기 를 보면 그가 칼을 빼들고 검술을 연마했다 는 구절은 눈에 띠지 않는다. 그는 그저 활시위만을 당기고 또 당겼다. 그 밖에 다른 어떤 무기도 다룬 자취가 없다. 활쏘기는 무사들만의 독점물이 아니었다. 활쏘기는 공자도 강조한 선비들의 수련 과목이었다. 이러한 이순신이었기에 경영자로서 그는 유난히 꼼꼼하였다. 군량을 조 달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워 놓고 농장경영을 하였다. 군량미로 쓸 쌀 을 직접 되질하기도 하였다. 멀리 제주도까지 사람을 보내 농사지을 소를 사오기도 하였다. 전투가 없을 때는 부하들에게 고기잡이를 권유하였다. 때 로 그들은 1만 두름도 넘는 청어를 비축하였다. 소금을 굽기 위해 솥을 만 들기도 하였다. 이순신은 전란 중에 5천 명이나 되는 3도의 수군들을 먹여 살리는 아버지였다. 그 외에도 전함을 만들고 집을 짓고 화살과 조총을 만들고, 화약을 확보 하는데도 그는 열심이었다.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도리어 군인의 징발이 어려웠다. 붙잡아온 군인들도 다 도망가는 판이었다. 수군의 핵심은 노를 - 13 -

젓는 격군 들이었다. 필요한 수자만큼 격군을 확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였 다. 이런 난제들도 이순신은 훌륭히 해결하였다. 인간이해를 바탕으로 한 그의 경영은 성공적이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그는 기업체든 지방자치단체 든, 아니 우리나라 전체를 부흥시키고 말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는 인맥관리도 잘했다. 이 점은 일반이 추측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부분이다. 수백 개의 부채를 미리 만들어두었다가 그는 요로의 대신들에게 선물로 보냈다. 유자 또는 귤을 대신들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전복이나 미역도 대량으로 확보해 두었다가 팔기도 하고 선물도 하였다. 이순신은 지기 유성룡뿐만 아니라 자기를 위험에서 구해준 정탁 등 20명 가량의 조정 대신들과 늘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편지를 들고 한양을 오가 는 종의 발길은 멈출 새가 없었다. 그는 명나라 장수들도 능수능란하게 잘 다루었다. 지나치게 아부하지는 않았지만 선물공세며 기 싸움으로 그들의 마음을 녹이고 평정하였다. 그리 하여 명나라 조정에까지 명성이 알려져 제독 이라는 높은 관직을 얻었다. 노년의 이순신은 청년시절처럼 청백하기만 하였던 것이 아니다. 그는 점 점 노회해진 관리자로 변신하였다. 끝내 버리지 못한 안타까운 점도 있었다. 질투심이 너무 강했다고나 할 까. 그는 원균의 약점을 수집하였다. 원균이 죽은 다음에는 경상도 수사로 부임한 다른 장수와도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지휘체계상 자 신보다 높은 사람들, 즉 도원수, 순찰사, 체찰사 등과는 끝내 불화하였다. 이순신은 자신의 직계 부하들하고만 평화를 유지하였다. 너무나도 자존심 이 강한 선비라서 그렇게 되고만 것이 아닐까. 여간해서는 윗사람을 인정 하지 못하는 성격은 이순신의 단점이었다. 그로 인해 이순신은 숱한 애로 를 겪었다. 정조는 그의 생애를 짧게 평하면서, 전쟁이 일어남으로써 그는 비로소 능력을 발휘하였다고 말하였다. - 14 -

6. 영웅의 아이콘이 된 이순신 워낙 공적이 뚜렷하였던 만큼, 사후에 수없이 많은 찬사가 쏟아졌다. 관 작도 높아졌다. 1604년(선조37)에는 선무1등공신 에 봉해졌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광해군 때는 영의정으로 높아졌다. 그를 추모하는 사당도 많아 졌다. 고향 아산에는 충신문과 사당이 세워졌다. 통영(경남 충무)에는 충렬 사가, 여수에는 충민사가 건립되었다. 이순신의 유물은 보물 제326호로 지 정되었다. 이와 별도로 난중일기 는 국보 제76호가 되었다. 충무시에 보 관된 유물은 보물 제440호가 되었다. 정조는 어명을 내려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해 영구히 그를 기념하 게 하였다. 구한말에 나라가 어려워지자 사람들은 그를 성웅이라며 기렸다. 신채호와 이광수 등 허다한 문인 학자들이 많은 글을 썼다. 최근에도 김훈 의 소설 칼의 노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등 이순신을 소재로 한 소 설과 영화는 끝이 없다. 그 많은 작품과 연구서들은 우리를 일깨우기에 족하다. 이순신은 과연 난세가 키운 영웅이었다. 그는 탁월한 장수, 최고의 경영자였다. 그런데 내 가 보기에 이순신의 리더십은 선비라서 가능한 것이었다. 섬약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그의 문사적 기질을 바탕으로 그는 소통과 공유에 능하였다. 이로써 연전연승의 기적을 연출하였다. 우리는 그의 인문정신을 본받아야 될 것이다. 이순신의 맨 얼굴이 궁금한 독자들은 난중일기 를 다시 한 번 읽어보는 것이 어떨까. - 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