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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서 대해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느덧 交 通 放 送 은 96 年 상반기도 한 달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 交 通 專 門 放 送 으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자 모든 일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委 員 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 더욱더 사랑 그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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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총 설 중부 지역의 3 1운동과 지역별 전개 상황 Ⅰ. 머리말 Ⅱ. 3 1운동의 의미 Ⅲ. 중부 지역 3 1운동의 전개 Ⅳ. 판결문을 통해 본 3 1운동 Ⅴ. 맺음말

총 설 중부 지역의 3 1운동과 지역별 전개 상황 김진호 * Ⅰ. 머리말 3 1운동은 우리 민족사에 일찍이 없었던 주권 침탈과 식민지 직접 통치 체제 하의 억압과 탄압 속에서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회복하려는 민족적 독립 운동이었다. 20세기 초 세계사 적인 흐름인 제국주의시대에 일제는 강압적인 수단으로 한반도를 강탈하고 무소불위의 조선 총독부를 통하여 한민족을 지배하였고, 이에 한민족은 거국적인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가 개항 이후 침략의 야욕으로 경제적 침탈을 시도하며 청 일간의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려는 갖은 수단을 강구하는 과정에서 민족적 침해도 심하여 갔다. 특히 동학농민운동 에 대한 일제의 무자비한 진압은 그들의 본색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어 청 일전쟁에서 승기 를 잡은 일제는 내정 간섭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한편, 국제 사회에서는 제국주 의 국가 간에 대립하면서 타협을 통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 보장을 받아냈다. 그 결과 일제는 한민족의 민족운동을 철저히 무력으로 진압하고 국가 통치권을 무력화시키고 마침내 주권을 강탈하였다. 일제는 헌병무단통치를 통한 식민지 직접 지배 체제를 구축하여 한민족을 억압하고 탄압 하였다. 일제의 지배 하에서도 민족의 독립을 되찾기 위한 민족운동은 줄기차게 전개되었지 만 일제의 잔혹한 진압으로 고초를 겪으며 고난을 감내하여야만 하였다. 그 암울한 10년간의 헌병들의 무단 통치 아래에서 민족과 국가의 자주 독립을 위한 염원을 버리지 않았던 한민족 은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대내 외적으로 자주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을 위한 힘찬 발걸음 내딛었다. 따라서 3 1운동은 전 민족적이고 거족적인 독립 운동이고, 그 방법으로는 대한독 립만세를 고창하는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 충남대학교 사학과 졸업, 충남대학교 대학원 문학석사 문학박사, 충남대 강사 역임,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20, 국내3 1운동Ⅱ, 공저), 경북독립운동사Ⅲ (3 1운동, 공저), 충남지방 3 1운동 연구 등 관련 논문 다수. 11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3 1운동은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영역으로 일찍부터 다루어졌다. 3 1운동 직후 중국 상 해에서 박은식( 朴 殷 植 )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韓 國 獨 立 運 動 之 血 史 ) (1920)와 김병조( 金 秉 祚 )의 한국독립운동사략( 韓 國 獨 立 運 動 史 略 ) (1921)은 대표적인 자료집이면서 선구적 연구물 이다. 3 1운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동아일보사의 3 1운동 50주년기념논집( 三 一 運 動 50 周 年 記 念 論 集 ) 은 연구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후 1970년대 관련 자료집의 발간은 3 1운동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사 연구의 전성기를 이루었 다. 특히 1980년대 독립기념관의 설립과 한국독립운동연구소 설치에 따라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1987) 발간은 3 1운동의 전반적 연구와 각 지방에 대한 사례 연구에 많은 기여를 하 였다. 각 지방의 3 1운동 연구는 1970년대 초반부터 시작하여 1980년대는 사례 연구가 집 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에 정부에서도 국가기록원을 중심으로 3 1운동 관련 자료를 정리 하고 필요한 자료와 정보를 제공하여 왔다. 특히 최근에 인터넷을 통한 국가기록원 홈페이지 중 나라기록포털의 독립운동관련판결문 에서 원본 보기 과 번역본 보기 는 일반 국민뿐만 아니라 연구자들에게 필요한 자료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금년도에는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3 1운동Ⅰ) 을 편찬하게 되었다. 본서는 총설, 판결문 번역문, 원문으로 구성되었다. 총설은 서울 경기 강원 충청남북도의 3 1운동에 한하여 서술하였다. 5개 지방의 3 1운동을 전체적으로 개관하는데 한계점이 있어 각 지방 의 주요 3 1운동을 판결문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이는 각 지방의 각지에서 전개된 3 1운동 의 실상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방과 지역별로 나열식 사건 기술이 아니라 구체적인 독립만세운동 실상을 서술하여 3 1운동 전개의 실제 모습들을 이해하는데 중점을 두고자 하였다. 12

총 설 Ⅱ. 3 1운동의 의미 3 1운동은 일제의 식민지 무단통치하에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되찾으려는 민족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3 1운동은 민족운동으로 민족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첫째, 3 1운동은 민족독립운동사의 최대 민족운동이었다. 일제의 지배 하에서 전개된 민 족운동 가운데 3 1운동은 지역적으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동 시기에 전개된 민족 운동이고, 참여 인원에서도 200만 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한 민족운동이며, 일제의 탄압으로 사망자 7,500명, 부상자 15,000명, 피검자 47,000명 이상의 인적 피해를 입은 민족운동이 었다. 따라서 3 1운동은 우리 민족사에 길이 남을 최대의 민족독립운동이었다. 둘째, 3 1운동은 민족독립운동사의 분기점 역할을 하였다. 일제의 침략 과정에서 민족운 동이 이념적으로 대립적 양상을 보이던 의병의 무장투쟁론과 애국계몽가들의 실력양성론이 1910년대부터 상호 보완적으로 통합되면서 민족독립운동의 역량과 저변을 확대시켰다. 그러 한 민족운동이 3 1운동으로 통합되었고 이어 새로운 민족운동이 전개되었다. 즉 종전의 단 체나 개인별 민족독립운동이 전 국민과 전 민족의 구성원이 민족독립운동에 참여자가 된 것 이 3 1운동이다. 또한 민족독립운동이 3 1운동으로 수렴만 된 것이 아니라 3 1운동 이후 다양한 형태의 민족독립운동 발산에 기폭제이자 민족운동의 용광로 역할을 하였다. 셋째, 3 1운동을 계기로 개개인이 국가과 민족의 구성원으로 뿐만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주체자가 되었다. 3 1운동이 전 국민과 전 민족의 참여로 전개되었던 만큼 남녀노소는 물 론이고 다양한 계층과 직업인이 참여하였다. 3 1운동이 확산되면서 누구나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누구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다. 이는 개개인이 국가와 민족의 한 구성 원으로서 뿐만 아니라 당당히 국가와 민족에 책임을 자각하는 주체자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3 1운동을 통하여 한민족 개개인이 바로 우리 역사의 주체가 되었다. 넷째, 3 1운동은 최초의 공화정부가 생겼고, 각 공화정부를 통합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3 1운동 이후 정치체제는 종전의 군주제와 같은 정부 형태가 아니 라 공화정체를 근간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한성 상해 연해주 등지에 만들어졌다. 이를 통 합하여 상해에 민족독립운동을 주도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13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다섯째, 3 1운동은 1920년대 국내에 다양한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기반이 되었다. 3 1운 동 이후 농민운동 노동운동 사회운동 학생운동 여성운동 등과 같은 다양한 계층별 사 회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는 3 1운동을 통하여 다양한 계층이 민족독립운동에 참여한 경험 이 그 바탕이 되었고, 누구나 역사의 주체자임을 자각하였기 때문이다. 여섯째, 3 1운동은 1920년대 국외의 독립군 무장 투쟁을 강화시켰다. 만주와 연해주 일 대에 독립군단이 결성되고, 이들 지역 이주민뿐만 아니라 국내 인사들도 독립군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성과는 청산리 대첩과 봉오동 전투로 나타났다. 일곱째, 3 1운동은 한민족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인정하게 하였다. 3 1운동은 일제 식민 통치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렸을 뿐만 아니라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만천하에 표출하여 국 제사회에서 한민족의 독립운동 자체 뿐만 아니라 한민족의 독립에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덟째, 3 1운동은 일제의 식민지 정책의 변화를 가져왔다. 1910년대 헌병무단통치로 일 관한 일제는 3 1운동으로 식민 통치 체제의 한계를 드러냈다. 그들은 아무리 억압적 무단통 치를 하여도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문화정치라 는 간교한 허울로 민족독립운동을 회유하고 친일파를 육성하여 민족 분열을 조장하였다. 다음으로 3 1운동은 중국의 5 4운동의 발발, 인도의 국민회의파의 비폭력, 인도지나반 도 필리핀 아랍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이로써 3 1운동의 세계사적 의의로 첫째 전승국 일제의 지배 하에서 전개되어 세계 식민지 반식민지 약소 민족의 독립운동에 자극 제가 되었다. 둘째, 3 1운동은 비폭력적 독립혁명을 지향한 점에서 세계혁명사에 하나의 신 기원을 이룩하였다. 14

총 설 Ⅲ. 중부 지역 3 1운동의 전개 1. 서울 1) 3 1운동 발의와 준비 1 천도교측 발의 : 1919년 1월 하순 손병희( 孫 秉 熙 ) 집에서 최린( 崔 麟 ) 권동진( 權 東 鎭 ) 오세창( 吳 世 昌 ) 등이 독립운동 협의가 있었다. 그 내용은 일제로부터 독립국 건설을 위한 동 지 규합, 조선민족대표자 손병희 등 명의의 조선 독립 선언과 전국 배포, 독립만세운동으로 독립 열망 표현, 일제 정부 귀중 양의원 조선총독부 및 강화회의 열국위원에게 조선 독립 의견 제출, 미국대통령 윌슨에게 독립청원서 제출 등이었다. 그 계획과 실행은 최린이 담당 하였다. 최린은 2월 상순 중앙학교장 송진우( 宋 鎭 禹 ) 교사 현상윤( 玄 相 允 ) 최남선( 崔 南 善 ) 과 회합하였다. 2~3일 후 이들은 박영효( 朴 泳 孝 ) 윤용구( 尹 用 求 ) 김윤식( 金 允 植 ) 등 한말 요직자, 기독교도 천도교 주요 인사를 조선민족대표자로 독립을 선언하고, 그 명의로 독립 선언서 의견서 청원서를 작성하며, 문서의 기초는 최남선, 인물 교섭은 최린 최남선 송 진우, 기독교측 교섭은 최남선이 담당하기로 하였다. 2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합 : 최남선은 장로교 이승훈( 李 昇 薰 )에게 연락을 하였다. 그는 2 월 7일 오산학교 경영 관계로 이승훈의 상경을 현상윤에게 의뢰하자, 현상윤은 정노식 집으 로 김도태를 찾아가 부탁하고, 김도태는 다음날 출발하여 2월 9일 정주에서 오산학교 교사 박현환( 朴 賢 煥 )을 만났고, 박현환은 선천에 있는 이승훈에게 전달하였다. 이승훈은 2월 11일 상경하여 김성수( 金 性 洙 ) 별채에서 송진우를 만나 기독교측 참가와 동지 규합을 부탁받고, 즉시 선천으로 갔다. 그는 2월 12일경 양전백( 梁 甸 伯 ) 집에서 양전백 이명룡( 李 明 龍 ) 유여 대( 劉 如 大 ) 김병조( 金 秉 祚 ) 등에게 독립운동계획을 알려 유여대 김병조는 이승훈에게 일 임하고, 양전백 이명룡은 함께 상경하기로 하였다. 또 14일에는 평양 기홀병원에서 길선주 ( 吉 善 宙 ) 신홍식( 申 洪 植 ) 등과 만나 경성으로 가기로 하였다. 2월 17일에 재차 상경하여 김 승희( 金 昇 熙 ) 집에서 한 두 번 만난 송진우의 태도와 최남선을 만나지 못하여 의혹을 갖기도 하였다. 2월 20일 밤 박희도( 朴 熙 道 ) 집에서 남감리파 오화영( 吳 華 英 ) 정춘수( 鄭 春 洙 ), 북 15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감리파 오기선( 吳 基 善 ) 신홍식( 申 洪 植 ) 등과 기독교 동지 규합과 일제 정부에 독립청원서 제출에 합의하고, 원산의 동지 규합은 정춘수가 맡기로 하였다. 같은 날 함태영 집에서 함태 영( 咸 台 永 ) 이갑성( 李 甲 成 ) 안세환( 安 世 桓 ) 오상근( 吳 尙 根 ) 현순( 玄 楯 ) 등과 회합하였으 나 결의는 없었다. 2월 21일 이승훈은 최남선과 처음 만나 최린 집에서 전날 협의사항을 전 달하였다. 이에 최린은 독립운동은 민족 전체에 관한 문제이므로 종교의 종류를 불문하고 합동함이 가하다 며 천도교와 기독교의 합동을 요구하였다. 이승훈은 동지와 협의 후 여부 를 전달하기로 하고, 독립운동비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날 밤 이갑성 방에서 이갑성 박희 도 오기선 오화영 신홍식 함태영 김세환 안세환 현순 등이 철야로 협의하여 합동 문제는 천도교측 방법을 확인 후 결정하되 이승훈 함태영에게 일임하고, 독립청원서 제출 동지 모집과 서명 날인을 위해 이갑성을 경상도로 김세환을 충청도로 파견하고, 파리강화회 의 형세 탐문과 보도 및 유럽에 문서 발송을 위해 현순을 상해로 파견하기로 하였다. 이에 현 순은 2월 23일 상해로 출발하였다. 한편 최린이 독립운동비 5,000원 요청을 손병희에게 전달하자, 손병희는 대도주 박인 호( 朴 寅 浩 ) 금융관장 노헌용( 盧 憲 容 )에게 지출을 명하였다. 2월 22일 최린은 독립운동비 5,000원을 받은 즉시 이승훈에게 전달하였다. 이어 이승훈은 함태영과 최린 집에서 천도교 측 독립운동 방법을 타진하였다. 최린은 독립청원서 제출만으로 불충분하며 독립선언을 하 지 않을 것 같으면 합동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승훈 함태영은 오기선 박희도 안세환과 숙의하여 천도교측 주장을 수용하고, 2월 24일 이승훈 함태영이 최린에게 전달 하였다. 이로써 3 1운동에서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의 연합이 2월 24일에 성립되었다. 3 독립선언 준비와 민족대표 선정 : 최린 이승훈 함태영이 협의하여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 선언, 독립선언서는 3월 1일 배부하고 독립만 세 고창, 지방에서 독립선언 일시와 선언서 배부는 경성의 예를 따를 것, 선언서 기타 서류 기초와 인쇄는 천도교측, 선언서 배부는 천도교 기독교측, 일제 정부 귀중 양의원 서면 제 출은 천도교측, 미국 대통령과 열국 강화위원 서면 제출은 기독교측이 담당하고, 민족 대표 자는 천도교측 기독교측 각각 십수 명, 불교도도 가입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최남선은 2월 상순경부터 최린과 자주 회합을 가졌다. 그는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는 독립선언서, 일제정부 조선총독부 귀중 양의원 의견서, 미국 16

총 설 대통령 청원서, 파리강화회의의 열국위원 의견서 초안을 최린에게 제출하고, 최린이 2월 26 일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등에게 보여 동의를 얻어 3 1운동 문서들이 최종 완성되었다. 천도교 측은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이 협의한 다음 2월 25~27일에 임예환( 林 禮 煥 ) 나 인협( 羅 仁 協 ) 홍기조( 洪 基 兆 ) 박준승( 朴 準 承 ) 양한묵( 梁 漢 黙 ) 권병덕( 權 秉 悳 ) 나용환 ( 羅 龍 煥 ) 김완규( 金 完 圭 ) 이종훈( 李 鍾 勳 ) 홍병기( 洪 秉 箕 ) 10명과 이종일의 권유로 오세창 ( 吳 世 昌 )이 대표자로 선정되어 최린을 포함한 15명을 확정하였다. 최린 오세창 임예환 권병덕 나인협 홍기조 김완규 나용환 홍병기 박준승 양한묵 11명은 2월 27일 김상 규( 金 相 奎 ) 집에서 선언서 관련 서류의 별도 지면에 날인하고, 손병희는 타인을 시켜 날인하 였다. 기독교측은 2월 26일 한강 인도교에서 이승훈 박희도 오화영 함태영 안세환 이갑성 최성모( 崔 聖 模 ) 이필주( 李 弼 柱 ) 8명을 선정하고, 일제에 서류 제출을 위해 안세환 을 동경에 파견하기로 하였다. 2월 27일 이필주 집에서 이승훈 박희도 이갑성 오화영 최성모 이필주 함태영 김창준( 金 昌 俊 ) 신석구( 申 錫 九 ) 박동완( 朴 東 完 ) 10명이 회합하 였다. 함태영이 독립 서류 초안을 회람시키고, 연명 인사로 참석자 중 함태영을 제외한 9명 과 신홍식 양전백 이명룡 길선주 김창준 이필주 정춘수 7명 합계 16명을 대표로 확 정하고 함태영은 연명자가 체포될 경우 그 가족 보호 임무를 맡기로 하여 제외하였다. 그날 밤 함태영은 9명과 이승훈이 받은 유여대 이명룡 김병조 양전백 길선주 신홍식 인장 을 갖고 최린 집에서 별지에 날인하였다. 불교측은 한용운이 2월 24~27일 최린에게 독립운 동계획을 듣고 서류 초안을 보고 찬성하여 2월 27일 백상규의 찬성을 얻은 후 2명을 지면에 날인하였다. 최남선은 신문관 직공을 시켜 독립선언서 활자판을 짜서 최린 집에 가져다 놓았다. 2월 27 일 이종일은 보성사 감독 김홍규( 金 弘 奎 )에게 활자판을 가져다 인쇄하게 하였다. 김홍규는 신영구( 申 永 求 )를 시켜 오후 5~11시 무렵까지 21,000매를 인쇄하여 2월 28일 이종일에게 교부하였다. 2월 28일 밤 손병희 집에는 양전백 길선주 이명룡 김병조 정춘수 나인협 호기 조 양한묵 백상규 9명을 제외한 대표자와 함태영이 참가하였다. 이 회합에서 3월 1일 학 생 집합을 듣고 분요( 紛 擾 )를 염려하여 장소를 파고다공원에서 명월관지점으로 변경하고, 3 월 1일 이갑성이 조선총독부에 의견서를 제출하고, 독립선언 장소에서 일동이 포박될 것을 17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약속하였다. 4 학생 참여 : 박희도 이갑성은 독립운동에 학생을 규합하여 실행을 맡기로 하고 동정 을 살폈다. 박희도는 1월 27일 연희전문학교 김원벽( 金 元 璧 )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 강기덕 ( 康 基 德 ) 경성의학전문학교 한위건( 韓 偉 健 ) 김형기( 金 炯 璣 ) 경성공업전문학교 주종의( 朱 鍾 宜 ) 경성전수학교 이공후( 李 公 厚 )를 관수동 대관원에 초청하고, 주익( 朱 翼 ) 윤화정( 尹 和 鼎 )도 참석시켰다. 그는 독립의 기회가 왔으니 논의를 계속하여 결속할 필요가 있고, 독립 운동에 힘쓸 것을 권하였다. 그리고 조선독립운동을 할 좋은 시기인가 아닌가에 대해 협의가 있었다. 2월 초 신문에서 민족자결주의 제창으로 비록 약소국도 활동할 수 있는 상황이며 일본 유 학생의 활동 개시를 알고 이에 국내 학생도 활동해야한다고 생각하여 뜻있는 학생 간에 서로 교류가 있었다. 강기덕 한위건 김원벽은 모임을 여러 번 갖고 각자가 중등 정도 학생 대표 자를 선정하여 결속시켰다. 김원벽은 경신학교 강우열( 康 禹 烈 ) 강창준( 姜 昌 俊 )과 경성고등 보통학교 박쾌인( 朴 快 仁 ) 등을 설득하였다. 강기덕은 서북친목회 회원임을 활용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규합하였다. 경성고등보통학교 김백평( 金 栢 枰 ) 박노영( 朴 老 英 ), 중앙학교 장기욱 ( 張 基 郁 ), 선린상업학교 이규송( 李 奎 宋 ), 보성고등보통학교 장채극( 張 彩 極 ) 전옥결( 全 玉 玦 ) 등을 박희용( 朴 熙 容 ) 집으로 소집하였다. 우리 조선도 국제연맹에서 주창되는 민족자결주의 에 따라 독립할 수 있을 것이며, 지식 계급자 사이에 그 기획이 진행 중이다 지금부터 각각 자기 학교 학생에게 대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여 이에 대비함이 긴요한다 고 설명하였다. 그 리고 동창들에게 개인적 또는 집회 방법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조선독립운동에 분기하여 참 가시키도록 하였다. 이갑성은 2월 12일과 14일에 음악회를 빌려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구내 자택에 김원벽 한위건 김형기 윤자영( 尹 滋 瑛 ) 김문진( 金 文 珍 ) 배동석( 裵 東 奭 ) 등 을 초청하여 해외독립운동 정세와 일본 유학생의 독립운동 등을 알렸다. 강기덕은 2월 16일 종로청년회관에서 박희도에게 천도교 예수교도 공동으로 민족자결주의에 의한 조선인의 독립 희망을 각국에 발표할 독립운동계획을 들었다. 그는 이를 2월 17일 한창환에게 전하고, 한창환은 한위건을 강기덕에게 소개하였다. 이로써 전문학교 학생의 본격적 3 1운동 참여 논의가 시작되었다. 박희도가 천도교측과 독립운동을 진행시키며 강기덕 김원벽 등과 회합하여 그 진행 사항 18

총 설 을 수시로 알려 학생들을 결속시켰다. 강기덕 등은 전문학교의 대표 인물을 조직화하는 것 이 초미의 급선무라 생각하고 각자 지기( 知 己 )나 그 중개로 경성전수학교 전성득( 全 性 得 ) 윤자영, 경성의학전문학교 김형기 한위건,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김문진 이용설( 李 容 卨 ), 경성공업전문학교 김대우( 金 大 羽 ),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 강기덕 한창환, 연희전문 학교 김원벽 등을 대표자로 2월 20일 승동예배당에서 제1회 간부회를 개최하였다. 회의에 서 전성득 김형기 김문진 김대우 강기덕 김원벽은 대표로 책임을 지고, 이용설 한위 건 윤자영 한창환은 학교 대표자가 체포될 경우 뒷일을 처리하며, 동창생 규합을 담당하 기로 하였다. 이후 김원벽 이용설 김문진 김대우 김형기 한위건 주익 등은 학생들도 독립선언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김원벽은 2월 23일 박희도에게 손병희 등의 독립선언서 발표에 한 구역인 경성에서 2개의 선언서를 발표하는 것은 좋지 않으니 학생단의 선언서 발표를 중지하라 는 말을 듣고 강기덕 에게 전달하였다. 이후 승동예배당에서 한위건 김형기 김대우 김성득 김문진 김원벽 등과 만나 한위건의 제안으로 천도교도 예수교도의 독립운동에 참가하여 행동할 것과 학 교 대표로 학생들의 참가 권유를 지휘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어 3월 초순 독립선언과 만세운 동 결정이 학생측에 통고되었다. 각 대표자 및 한위건 한창환 윤자영 등은 2월 25일 이필 주 집에 모여 3월 1일 전문학교 및 중등 정도 학생이 모두 정각에 파고다공원에 집합하여 독 립만세운동에 참가하고, 상황에 따라 계속 각 전문학교를 중심으로 일대 독립운동을 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튿날 다시 이필주 집에서 김문진 이용설 윤자영 김탁원( 金 鐸 遠 ) 최경하 ( 崔 景 河 ) 나창헌( 羅 昌 憲 ) 박윤하( 朴 潤 夏 ) 김영조( 金 榮 洮 ) 등 학생들은 제2회 독립운동에 분발하여 학생을 규합하고 참가할 것, 제1 2회 독립운동에 관헌에 체포되지 않은 자는 뜻을 굽히지 말고 더욱 독립운동을 계속하여 최후 목적을 완수할 것을 결정하였다. 2월 27일에도 정동예배당에서 김원벽 강기덕 한위건 등이 모였다. 강기덕은 2월 28일 오후 2시경 세브란스병원에서 이갑성에게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공 원에서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시내에 중등 정도 학생들이 선언서를 배포하도록 김문진에게 의뢰하여 두었으니 선언서 배포를 지원하여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이를 한위건에게 전 하여 중등 정도 학생을 모이도록 하였다. 밤에 김문진이 이갑성에게 선언서 1,500매를 받아 승동예배당으로 가져왔다. 승동예배당에 전문학교 대표자 김문진 김형기 한창환 이용설 19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외 2, 3명과 중등 정도 학생 김백평 장채극 전옥결 이규송 장기욱 전동환( 全 東 煥 ) 이용재( 李 龍 在 ) 등 십수 명이 모였다. 강기덕이 3월 1일 오후 2시 조선독립선언을 하고 선언 서를 발표하며 만세운동을 할 것이니 각자는 학생을 결속하여 참가함과 독립선언서를 학교 중심으로 배포하라고 전하였다. 이어 김문진이 각 배포 장소를 지정하여 학생 12~3명에게 독립선언서 100~300매를 교부하였다. 그리고 김원벽 강기덕 한위건은 3월 1일 이어 3월 5일 학생단에서 제2회 독립운동을 할 것을 대략적으로 결정하였다 2) 독립선언 3월 1일 오후 2시 무렵 민족대표자 33인 가운데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4명을 제외한 29인이 명월관에 모였다. 이갑성은 사람을 시켜 조선총독부에 의견서를 제출케 하 고, 이종일은 독립선언서를 볼 수 있게 탁상에 약 100매를 놓았다. 독립선언서의 낭독은 생 략하고 한용운이 일어나 무사히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게 되어 크게 경하합니다. 더 한층 독 립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는 인사말을 하고 일동은 일어나 만세를 삼창하였다. 식탁에 앉으려고 할 때 일경들이 들어와 민족대표들을 체포하였다. 3) 3월 1일 독립만세 3월 1일 정오 이후 학생들을 비롯하여 수만 군중이 파고다공원에 집결하였다. 오후 2시 30 분경 파고다공원 육각당에서 경신학교 정재용( 鄭 在 鎔 )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여 조선의 독 립국임을 선언한다고 하자, 군중은 조선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또는 독립만세를 고창하여 일제정부 및 세계 각국에 조선인은 모두 독립 자유민이다. 조선은 한 독립국이 될 것을 요망 한다 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만세 군중들은 파고다공원 앞에서 동서 두 갈래로 나뉘었다. 서쪽으로 이동한 군중들은 종로 1정목 전차 교차점에서 나뉘어졌다. 한 갈래는 남대문 역 전 의주통 정동 미국영사관 이화학당 대한문 광화문 조선보병대 서대문정 프랑 스영사관 서소문정 장곡천정을 지나 본정 2정목 부근에 이르러 경찰관 제지로 대부분은 해산하였다. 다른 갈래는 무교정 대한문에 이르러 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미국영사관에 갔 다가 다시 대한문 앞에 이르렀다. 다시 한 군중들은 광화문 조선보병대 서대문정 프랑스 영사관 서소문정 장곡천정을 거쳐 본정으로 들어갔다. 다른 군중들은 무교정 종로통 20

총 설 창덕궁 앞에 이르렀다가 안국동 광화문 프랑스영사관 서소문정 서대문정 영성문 등 을 지나 대한문 장곡천정으로부터 본정으로 돌아와 해산하거나, 다시 영락 명치정으로 향 하고 혹은 남대문통 동대문으로 향하여 이동하였다. 동쪽으로 이동한 군중은 창덕궁 안국동 광화문 서대문정 프랑스영사관에 이르러 일 부는 서소문정, 일부는 미국영사관 또는 영성문 대한문 장곡천정을 거쳐 본정으로 들어가 일부는 경찰관의 제지로 해산하고, 일부는 종로통 동아연초회사 동대문으로 이동하였다 가 해질 녘에 해산하였다. 4) 독립선언서 배포 1 천도교 : 천도교측은 이종일이 2월 28일 배부하여 인종익이 전주 청주, 안상덕이 강원 도 함경도, 이경섭이 황해도, 이관이 경성시내, 김홍렬이 평안도 등에 배포하였다. 인종익 ( 印 宗 益 )은 2,000매를 받아 전주교구실에서 1,700매를 김진옥( 金 振 玉 )에게 교부하였다. 그 는 3월 2일 청주교구실에서 300매를 교부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고 286매를 압수당하였다. 김진옥은 2월 28일에 약 200매를 임실교구장 한영태( 韓 永 泰 )에게 교부하여 3월 2일에 배부 하도록 하였다. 나머지는 민영진( 閔 泳 鎭 ) 조성덕( 趙 聖 德 ) 김성문( 金 成 文 ) 등이 3월 1~2일 밤까지 전주 읍내에 배포하였다. 안상덕( 安 商 德 )은 2,000매를 받아 2월 28일에 평강천도교구장 이태윤( 李 泰 潤 ) 등에게 약 700매를 배포하고, 이태윤 등이 채장숙( 蔡 章 淑 ) 김천일( 金 千 鎰 ) 등에게 김화 금성 회 양 철원 평강 등에 배포하게 하였다. 이어 3월 1일에는 영흥교구장에게 약 1,300매를 교 부하였다. 이경섭( 李 景 燮 )은 약 1,000매를 받아 3월 1일 서흥교구실에서 박동주( 朴 東 周 )에게 약 750 매를 교부하여 해주 사리원에 배포하고, 나머지는 수안교구장 안봉하( 安 鳳 河 ) 등에게 약 250매를 교부하여 절반은 수안에 절반은 곡산에 배포를 홍석정에게 의뢰하였다. 이관( 李 瓘 )은 2월 28일에 이종일에게 배포를 의뢰받고 3월 1일에 52매를 받아 3월 1일~10 일 국장에 온 지인들에게 각 1매씩 배포하였다. 김홍렬( 金 洪 烈 )은 약 3,000매를 평안도에 배포하여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리고 이종일 은 1,500매를 이갑성 김성국을 거쳐 강기덕에게 교부하였다. 21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2 기독교 : 기독교측에서는 이갑성 김창준 함태영 박희도 중심으로 배포하였다. 김성 국은 2월 28일 이갑성에게 약 100매를 받아 승동예배당에서 강기덕에게 교부하였다. 김진호 ( 金 鎭 浩 )는 2월 28일 이필주의 요청을 받고 3월 1일 오후 2시경 러시아 미국 프랑스영사 관에 보낼 독립선언서 봉투를 오흥순( 吳 興 順 ) 등 학생에게 교부하였다. 오흥순은 러시아영사 관으로 가서 통역을 통해 봉투를 사환에게 전달하였다. 김동혁( 金 東 赫 )은 오후 1시경 김진호 집에서 임창준( 林 昌 俊 )에게 6매를 받아 오후 2시경 남대문 5~6호 민가에 배포하였다. 함태영( 咸 泰 英 )은 2월 28일 이종일에게 1,200~1,300매를 받아 절반 정도를 평양기독교회 사환에게 교부하였고, 나머지는 김창준 집으로 보냈다. 김창준은 2월 28일 약 900매를 이종 일 함태영에게 받아 300매를 이계창( 李 桂 昌 ), 600매를 이갑성에게 교부하였다. 이계창은 오전 9시 반경 중앙예배당에서 선천 목사 백시찬( 白 時 瓚 )에게 전달 의뢰와 여비 20원을 받 아 오전 10시 반경 출발하여 밤에 선천 신성학교 김지웅( 金 志 雄 )에게 전하였다. 김지웅은 양 전백 집 뒤 길가에서 백시찬에게 독립선언서를 전하고 3월 1일 오후 1시 결행한다 고 말하 였다. 그는 3월 1일 학생에게 독립선언서 취지를 알리고 기 1개씩을 들고 시내에서 선두에 조선독립단( 朝 鮮 獨 立 團 ) 기를 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한편 의주에서는 3월 1일 오후 2시 30분 서교회당 공지에 7~800명이 모여 찬미가를 부르고 김병농( 金 炳 穠 )의 기도 중 선천에 서 독립선언서 약 200매가 도착하여 유여대가 낭독한 후 강용상( 康 龍 祥 ) 등이 군중에게 배 포하였다. 이갑성은 김창준에게 받은 600매 가운데 2월 28일 4, 5매를 이용설( 李 容 卨 ), 3월 1일 400 매를 이굉상( 李 宏 祥 )에게 교부하였다. 이굉상은 3월 1일 오전 8시경 출발하여 대구 이만집 ( 李 萬 集 )에게 200매를 교부하여 김태련( 金 泰 練 )이 3월 8일 서문 밖 시장에서 배포하였다. 밤 에 마산 임학찬( 任 學 瓚 ) 집에서 200매를 교부하였다. 김용환( 金 容 煥 )은 3월 2일 배포를 맡겠 다는 뜻을 말하고 이형재( 金 炯 宰 )를 임학찬 집으로 보냈다. 이형재에게 30매를 받은 김용환 은 3월 3일 무학산 국장 요배식의 군중에게 20매를 배포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김병수( 金 炳 洙 )는 2월 28일 이갑성에게 200매를 군산 박연세( 朴 連 世 淵 世 )에게 전달 의 뢰를 받았다. 그는 3월 1일 박연세에게 200매를 전달하여 박연세 이두열 등은 3월 2~3일 에, 양기철( 梁 基 哲 ) 고준상( 高 俊 相 ) 등은 3월 5일에 군산에 배포하였다. 오화영( 吳 華 英 )은 2월 28일 김창준에게 독립선언서 약 100매를 받아 동생 오은영( 吳 殷 英 ) 22

총 설 을 시켜 개성 강조원( 姜 助 遠 )에게 보냈다. 강조원이 3월 1일 아침 신공량에게 부탁하였으나 배포자 물색이 어렵다며 반환하여 북부예배당 지하실에 감추었다. 신공량은 정오경 권애라 ( 權 愛 羅 )에게 배포자가 없어 곤란하다고 알렸다. 이를 권애라에게 들은 어윤희( 魚 允 姬 )가 그 선언서 배포의 임무를 맡겠다 고 하였다. 이에 신공량은 지하실에서 6~70매를 꺼내어 권애 라를 통해 어윤희에게 교부하고, 어윤희는 북본정과 남대문사이에 통행인에게 배포하였다. 또 오화영은 박희도 집에서 독립선언서 약 2~300매를 받아 곽명리( 郭 明 理 )에게 원산에 전달을 부탁하였다. 정춘수는 2월 28일 밤 곽명리가 가져 온 독립선언서를 보고 곽명리 이 가순에게 배부를 촉구하였다. 이가순은 3월 1일 원산시장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배포 하였다. 윤원삼은 2월 27일 평양 숭현여학교에서 정일선( 丁 一 善 ) 도인권( 都 寅 權 ) 박인관( 朴 仁 寬 ) 등과 회합하고, 2월 28일 정경필( 鄭 京 弼 )에게 독립선언서 200매를 받았다. 3월 1일 오후 2시 천수백 명이 숭덕학교 운동장에 모여 김선두( 金 善 斗 )가 독립운동발표식을 한다 선포하 고, 정일선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강규찬( 姜 奎 燦 )이 연설을 하고, 윤원삼은 선언서를 배 포하였다. 3 불교 : 한용운( 韓 龍 雲 )은 2월 28일 이종일에게 3,000매를 받아 자택에서 오후 8시경 중 앙학교 오택언( 吳 澤 彦 ) 정병헌( 鄭 秉 憲 ) 등 수명에게 전달하였다. 오택언은 기숙사생 40여 명에게 1매씩 배포하고,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공원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내를 행진하라는 뜻을 전하고, 3월 1일 밤 수명과 선언서 100매를 청진동 기타 민가에 배포하였 다. 4 학생 : 2월 28일 밤 승동예배당에서 중등 정도의 학생들에게 독립선언서가 배부되었다. 중앙학교 장기욱 선린상업학교 이규송 조선약학교 전동환 이세룡이 약 70매, 김백평이 약 200매를 받았다. 장기욱은 3월 1일 이춘학( 李 春 鶴 )에게 교부하고, 이규송은 파고다공원 에서 남정채 박인옥 김철환을 만나 남정채에게 약 20매를 봉래정, 박인옥에게 약간을 동 막, 김철환에게 약 60매를 남대문 안과 동막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김철환은 오후 2시쯤 마 포에서 쌀가게 이발소 및 통행인 등에게 배포하였다. 나머지는 이규송 자신이 조선상업은 행 부근에 배포하였다. 5 일본과 중국 : 임규는 최남선의 권유로 독립선언서 등 초안을 보고 조선독립의견서를 23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제국정부 귀중 양의원에 제출하기로 하였다. 그는 2월 26일 최남선에게 언문체 의견서 및 독립선언서 초안을 받아 의견서는 가다가나를 혼용한 일문( 日 文 )으로 번역하고 독립선언서 는 일문으로 주를 달았다. 2월 27일에 33명 기명날인한 지면 3매를 받아 오후 8시 출발하여 3월 1일에 도쿄 상마애장( 相 馬 愛 藏 ) 집에 투숙하였다. 3월 3일 번역 의견서와 주를 달은 선 언서 각 3통을 정서하여 통고문 으로 의견서와 연명자 기명날인한 지면을 첨부하여 내각 귀중 양의원에 우송하였다. 안세환은 이승훈 등을 만나 기독교측 대표자로 선정되어 2월 27일 오전 8시에 출발하여 3월 1일 도쿄 용명관에 투숙하였다. 3월 4일에 경시청 총감에게 조선독립 이유를 누차 진 술하였다. 김지환은 2월 22~24일 무렵에 오화영 이승훈의 권유로 강화회의 열국위원 의견서 미 국 대통령 청원서 초안과 독립선언서를 안뚱현 목사 김병농을 통해 상하이 현순에게 우송하 는 것을 맡았다. 2월 28일에 서류를 함태영에게 받아 3월 1일에 신의주를 거쳐 안뚱현에 갔 으나 김병농이 의주에 있어 아들 김태규( 金 泰 圭 )에게 교부하였다. 5) 3 1운동 전개 1 3월 초순 : 3월 2일 고희준이 3월 1일에 이어 오전 11시에 약 50명 군중과 종각 부근에 서, 김영진( 金 永 鎭 )도 보신각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3월 5일에는 남대문에서 종로에 걸쳐 학생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학생 간부들은 제2회 독립운동을 3월 5일로 결정하였다. 한위건 강기덕 김원벽 등이 전문학교와 중등학교 및 기타 학교 대표자를 3월 4일 오전에 배재고등 보통학교 기숙사로 불러 명 3월 5일 오전 9시에 남대문 역전을 집합지로 학생 주도의 독립 만세운동을 하고, 강기덕 김원벽이 지휘를 담당하니 각자는 각 학교 학생 또는 잘 아는 사 람을 규합하여 참가하라 는 뜻을 전하였다. 밤에는 한위건 강기덕 한창환 장기욱 전옥 결 등이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구내에서 결속을 다졌다. 3월 5일 오전 8시 전후 남대 문 역전에 수만의 군중이 모였다. 강기덕 김원벽이 인력거를 타고 조선독립기 를 휘날리 며 달려와 제2회 시위운동을 선포하고, 이들의 지휘에 따라 군중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부르 며 남대문으로 향하였다. 일부 인사는 독립운동자 표시로 적포( 赤 布 )를 다수 살포하며 이를 24

총 설 흔들었다. 일경들이 군중들을 제지하고 강기덕 김원벽 등 다수를 체포하였다. 그러나 일경 을 피한 군중들은 남대문에서 대한문 앞 무교정을 지나 보신각 앞에서 합류하여 독립만세 를 고창하였다. 또 유생들이 청량리 반우식( 返 虞 式 )에 상소를 올리려 시도하였다. 유준근( 柳 濬 根 ) 송주헌( 宋 柱 憲 ) 백관형( 白 觀 亨 ) 등 14명이 3월 2일 수창동 모 여관에서 지금 독립선 언이 일조에 진동하고 이미 패연히 이를 막을 자 없다 따라서 대위( 大 位 )를 복구하여 일국 에 호령하며 각국에 통고하라 는 상서를 작성하였다. 3월 5일 반우식( 返 虞 式 )에서 송주헌이 상소를 올리려 하고, 어대선이 독립 연설을 할 때 고종의 연( 輦 )이 통과하므로 군중과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정호석( 鄭 浩 錫 )은 오전 9시 반경 왼손 무명지를 깨물어 태극장( 太 極 章 )을 그 려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는 동막 흥영학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박성철( 朴 性 哲 ) 오정엽( 吳 貞 燁 )에게 참가를 요구하였다. 이들은 학생 수십 명과 공덕리까지 만세 행진을 하였다. 김경준( 金 敬 俊 )은 이왕직 양악대 악수로 삼청동 및 팔판동 주민들은 왜 독립만세를 부르지 않는가? 조선은 장차 독립하려고 하고 있다. 모름지기 노력 분투하지 않 으면 안된다 고 연설을 하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3월 26~7일에도 김재완( 金 在 完 )과 삼청동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2 3월 하순 : 일제의 무력적 탄압과 검거 작전으로 3월 중순에는 독립만세운동이 활발하 지 못하였다. 3월 12일 김백원( 金 百 源 ) 문일평( 文 一 平 ) 차상진( 車 相 晋 ) 문성호( 文 成 鎬 ) 조형균( 趙 衡 均 ) 김극선( 金 極 善 ) 백관형 등 유생들이 서린동 영흥관에서 회합하고 조선13 도대표자 명의로 조선 독립은 동포 2천만의 요구다. 우리들은 손병희 등의 후계자로서 조선 독립을 요구한다 는 애원서 를 만들었다. 차상진 문성호가 이를 조선총독부에 제출하고, 김백겸 문일평 김극선 조형균 백관형은 보신각에서 모여 문일평이 낭독하여 독립 의지 를 표출하였다. 3월 하순에 다시 본격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20일 김상직( 金 相 稷 )이 오후 5시경 이백룡( 李 白 龍 ) 집에서 양지에 태극기를 그리고 대한제국 만세! 이 사직은 이전에는 조선총독부 경영이었으나 금년부터는 대한민국의 소유로 돌아왔다. 대황제폐하 만세! 국민 이 씀 이라 쓰고 밤에 사직단문 앞 기둥 높이에 부착하였다. 3월 22일에는 김공우( 金 公 瑀 )가 3월 21일 정지현( 鄭 志 鉉 )에게 명 22일 봉래정 공지에서 노동자대회가 개최된다 고 들었다. 그는 이틀간 중림 화천정 노동자를 모아 수백 명과 의주 25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통에서 아현고개로 만세 행진을 전개하였다. 엄창근( 嚴 昌 根 )이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신형균( 申 衡 均 )이 프랑스영사관 등에서 조선 독립을 꾀함은 바로 이때이다. 각자는 이를 위 하여 몸과 목숨을 버릴 것을 각오하라 연설을 하고, 염수완( 廉 壽 完 )은 가게를 닫으라! 빨리 만세를 부르라! 하여 문을 닫고 만세를 불렀고 설규성( 薛 奎 成 ) 김공로( 金 公 璐 ) 신화순( 申 化 順 ) 박효석( 朴 孝 錫 )도 동참하였다. 조덕인( 趙 德 仁 )은 죽첨정에서, 안흥성( 安 興 成 ) 변장 성( 邊 長 城 ) 김덕봉( 金 德 奉 ) 등은 금화산 꼭대기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3월 23일에는 종로통 일대를 중심으로 5~60, 100명, 2~300명씩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종로 3정목 5정목 동대문통 재교 동묘 동대문 돈화문통 나무시 장 숭정보통학교 연건동 숭이동 수은동 훈련원 광희정 석교 안암동 안암천 부근에 서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또한 10~30명씩 군중들은 전차를 공격하였다. 종로통 재 교에서 이규민( 李 圭 敏 ), 종로 1정목에서 유성옥( 柳 成 玉 ), 수표교 입구에서 백창길( 白 昌 吉 ) 신명국( 申 明 國 ), 종로 3정목에서 이천봉( 李 千 奉 ), 광화문과 종로 사이에서 김사철( 金 四 哲 ) 원병준( 元 炳 埈 ) 김복동( 金 福 同 ), 공업전습소 입구에서 정필모( 鄭 必 謨 ) 등이 군중과 전차에 투석하였다. 그 결과 제71 77 90 101 112 122 123호의 유리창 덧문 등이 파손되었 고 10여대 전차가 정차되었다. 3월 24일에는 김수근( 金 壽 根 ) 안중식( 安 重 植 ) 박지양( 朴 至 陽 ) 허진( 許 榛 ) 등이 돈화문 통 및 그 부근 도로에서 수십명 군중과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3월 25일에는 양주흡( 梁 周 洽 )이 경복궁 부근에서 모인 약 25명과 중학동에서, 조장록( 趙 長 錄 )이 3월 25~6일 수십 명과 팔판 삼청동에서 만세를 고창하였다. 3월 26일에는 시내 각지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전차를 공격하였다. 서계동 노상에서 임 춘식( 林 春 植 ), 중림동 공지에서 박효석( 朴 孝 錫 ), 광화문통 기념비 부근에서 김교승( 金 敎 承 ), 명월관에서 김규정( 金 奎 正 ) 정만성( 鄭 萬 成 ), 누하동 신명학교 마당에서 박순장( 朴 淳 璋 ) 김진영( 金 鎭 永 ), 적선동에서 박흥준( 朴 興 俊 ), 종교파출소 부근에서 장석영( 張 錫 永 ), 안국동 에서 박학준( 朴 韓 俊 ), 무교정에서 박진갑( 朴 辰 甲 ), 서대문 1정목 부근에서 김동익( 金 東 益 ) 송병철( 宋 秉 喆 ) 등이 5~100명의 군중과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박학준은 30명 가량과 만세를 부르고 양준식( 梁 俊 植 ) 집에서 순사보에게 만세를 부르는 자를 체포하는 순사보 헌병 보조원 집은 불 태워 버린다 고 소리치고, 일본인이나 관리에게 음식을 파는 양준식과 26

총 설 다퉜다. 박진갑은 30명 가량과 동대문행 전차에 돌을 던졌다. 유인수( 兪 仁 洙 仁 承 ) 이한 준( 李 漢 準 ) 김찬희( 金 瓚 熙 ) 이종엽( 李 鍾 燁 )은 서대문 1정목 부근에서 300여명 군중과 2집 단으로 나뉘어 만세를 부르며 전차에 투석하여 4~5대를 정지시키고 유리창을 부쉈다. 유인 수는 광화문통에서 5~60명과 만세를 부르고 2~30명에게 돌을 던져라, 던져라 며 전차에 투석하였다. 또 광화문통파출소 부근에서 전차에서 부인이 떨어져도 차장이 운행하자, 군중 들은 격렬히 투석하고 기마순사 말을 맞췄다. 이한준도 운전수를 괘씸하게 여겨 30명 가량과 유리창에 돌을 던졌다. 김찬희는 7~80명과 만세를 부르고 2~30명쯤과 전차에 투석하였다. 이종엽은 당주동 입구에서 하수구에 빠져서도 독립만세를 불렀다. 박귀돌( 朴 貴 乭 )은 오후 8 시 반경 약 50명을 이끌고 종교파출소를 포위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투석하였다. 그가 순사 보 박재봉( 朴 在 鳳 )에게 밖에 나와 만세를 부르라. 만약 부르지 않으면 죽인다 고 하였다. 3월 27일에도 시내 여러 곳에서 야간에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우명철( 禹 命 哲 )은 오 후 7시 30분 약 50명과 동양협회 신축장 뒤쪽 언덕, 김종옥( 金 鍾 玉 )은 광화문 경찰관 연습 소, 박계갑( 朴 桂 甲 )은 태극기를 흔들며 등불을 들고 이효선( 李 孝 善 ) 김은호( 金 殷 鎬 ) 등 약 100명과 재동파출소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유창덕( 劉 昌 德 )은 오후 9시 30분 광화 문에서 약 10명과 서대문에서 종로행 전차에 투석하였다. 윤희용( 尹 喜 用 ) 김윤식( 金 允 植 ) 은 공업전문학교 앞길에서 학교가 조선총독부 건물로 보기가 징그러워 자갈을 투석하여 유 리를 깨뜨렸다. 이봉하( 李 鳳 夏 )는 종로 네거리에서 혼자 국장을 슬퍼하며 나라 독립을 위해 울며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박범룡( 朴 範 龍 ) 최도학( 崔 道 學 )은 관훈동에서 소림( 小 林 ) 이 전선에 달린 태극기를 떼려는 순사에게 장대를 빌려 준 것을 분개하여 소림 집에 투석하 여 유리창 전등 식기류 등을 파손시켰다. 3월 30일에는 박홍기( 朴 泓 基 )가 종로 장사동 입구에서 큰 소리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옆에 있는 사람에게도 만세를 권유하였다. 3 3월 이후 : 4월 1일에는 강봉석( 姜 鳳 錫 )이 오후 2시경 황금정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박창룡( 朴 昌 龍 )은 낙타산( 駱 駝 山 ) 산길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4월 23일에는 3월 1일, 3월 5일 이후 최대의 독립운동인 국민대회가 있었다. 한남수( 韓 南 洙 ) 김사국( 金 思 國 ) 홍면희( 洪 冕 禧 ) 이규갑( 李 奎 甲 ) 등은 국민대회를 조직하고 각계 독 립운동자로 가정부를 수립하여 계통적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3월 중순 이후 대표자를 선정 27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하였다. 이들은 4월 2일 인천부 각국(만국)공원에서 가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안상덕은 천 도교, 박용희( 朴 容 熙 ) 장붕( 張 鵬 ) 이규갑은 예수교, 김규( 金 奎 )는 유생, 이종욱( 李 鍾 郁 )은 불교 대표자로 하며, 한남수 홍면희는 대회 주선을 맡았다. 수일 후 김규 한남수 김사국 등이 국민대회개최취지서를 작성하기로 하였다. 4월 3일 안상덕 소개로 상해의 홍진의( 洪 鎭 儀 )가 참여하고, 이후 이규갑 김규가 윤이병( 尹 履 炳 ) 이용규( 李 容 珪 ), 이헌교가 이성수( 李 成 修 ) 최전구( 崔 銓 九 )에게 권유하고, 김사국은 전협( 全 協 ) 이동욱( 李 東 旭 ) 현석칠( 玄 錫 七 ) 등과 접촉하였다. 한남수는 상해와 연락을 위해 4월 8일 출발하며 후사를 이규갑 등에게 일임하였다. 이동욱( 李 東 郁 )은 조선13도대표자 명의로 각 지방 대표자를 규합하여 본회를 열고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더욱 더 독립운동에 노력할 것 이라는 국민대회취지서 와 파리강 화회의 출석 위원을 선정하고 약법( 約 法 )을 제정하는 선포문 을 만들고, 현석칠이 목판으로 약 6,000매를 인쇄하였다. 김유인 김사국 등은 서린동 봉춘관에서 조선13도대표자 집회, 학생시위운동, 노동자 3,000명의 독립만세 고창, 자동차로 시내 인쇄물 배포 등을 결정하였 다. 4월 19일에는 안성덕 현석칠이 천도교 예수교 대표로 각각 600원을 제공하고 민강( 民 橿 )이 출납을 맡았다. 이튿날 안상덕의 500원은 민강을 통해 밤에 김유인에게 교부되었다. 이춘균( 李 春 均 )은 4월 17~18일경 조선은 독립국이므로 이에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적국 인 일본에게 납세하지 말라. 그 재판 및 경찰과 행정의 명령을 받지 말라! 의 임시정부선포 문 임시정부령 제1호 제2호 2종 약 100매를 받아 장채극에게 의뢰하고, 장채극 김유 인은 배포에 부족함을 느껴 윤좌진에게 부탁하여 4월 20~22일 김종석 나종하( 羅 鍾 河 ) 전옥결과 김태정( 金 泰 鼎 ) 집에서 2종을 1매로 약 1,500매를 인쇄하였다. 4월 22일 김유인은 장채극에게 4월 23일 국민대회 개최, 자동차 3대로 국민대회 공화만세( 共 和 萬 歲 ) 각 2기 씩을 들고 동대문 서대문 남대문을 출발하여 유인물을 배부하며 정오에 종로 보신각 앞에 집합, 노동자 3,000인을 보신각에 배치하여 지휘자 3명에게 국민대회 등 기를 게양하고 정 오에 독립만세 고창, 봉춘관에서 조선13도대표자의 조선가정부 선언, 봉춘관 앞에 국민대회 간판 게시 등을 알리고, 활동 비용 200원을 교부하였다. 이에 장채극 등은 활동자 주선을 최 상덕에게 의뢰하였다. 최상덕은 50원을 받아 박수봉( 朴 壽 奉 ) 이만봉( 李 萬 奉 ) 등을 자동차 탑승자 지휘자 만세 수창자, 유태응( 劉 泰 應 )을 노동자 지휘자, 전철백( 全 徹 伯 ) 주병봉 ( 朱 炳 鳳 )을 간판 게시자로 의뢰하였다. 장채극은 밤에 방덕환( 方 德 煥 ) 방에서 선포문 국민 28

총 설 대회취지서를 인수하고, 김사국과 함께 이경문( 李 景 文 ) 방에서 인쇄물 약 4,000매, 간판 1개 를 꺼내 숙소 신용식 집에 가지고 갔다. 그는 임시정부선포문, 임시정부령 제1호 제2호 등 3매철을 전옥결 이철 강우열( 康 禹 烈 ) 등 4명에게 배부하게 하였다. 장채극은 백포( 白 布 ) 를 사서 자동차 탑승자 지휘자용 9기를 만들고, 전옥결은 국민대회 공화만세 기와 국민 대회 간판을 제작하였다. 4월 23일 장채극 김유인은 숙소에서 유태응 박수봉 등에게 5원 씩과 공화만세 조선독립 1기씩을 교부하고, 보성고등보통학교에서 탑승자 이만봉 35원 기타 2명 30원씩과 인쇄물철 약 10매씩 깃발 2기씩을 교부하였다. 강우열은 동대문 김병 호( 金 炳 鎬 )는 서대문 유기원( 柳 基 元 )은 창덕궁 김홍식( 鴻 弘 植 )은 시내에서 배포할 인쇄물 350부씩을 교부하였다. 정오에 유태응 박수봉 등 3명은 보신각에서 기를 흔들며 독립만세 를 부르고, 이만봉 등 3명은 서대문 동대문 남대문에서 기를 흔들며 인쇄물을 배포하고, 김병호 등도 유인물을 배포하였다. 장채극 전옥결은 인력거를 타고 봉춘관에 간판을 들고 가서 전백철 주병봉에게 게시하게 하였다. 이관우( 李 寬 宇 )는 4월 23일 국민대회 개최를 듣 고 4월 22일 밤 윤화병( 尹 華 炳 ) 윤정식( 尹 正 植 ) 등에게 참가를 권유하였다. 4월 23일 정오 경 종로에서도 국민대회 기를 들고 학생들과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다시 5월 31일에는 윤여옥( 尹 餘 玉 ) 차대유( 車 大 輶 ) 등이 연해주 대한국노인단( 大 韓 國 老 人 團 ) 으로 독립운동을 위해 5월 31일 경성에 도착하여 오전 11시경 보신각 앞에서 각자 태극 기를 휘두르면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6) 유인물 배포 1 유인물 : 조선독립신문은 이종인이 2월 28일 독립선언 전말, 독립사상 고취, 독립만세 운동 권유 등을 내용으로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작성하였다. 그는 박인호와 협의하여 3월 1일 오전 10시경 윤익선( 尹 益 善 )의 동의로 김홍규가 보성사에서 약 10,000매를 인쇄하였다. 각성호회보( 覺 醒 號 回 報 ) 는 양재순( 梁 在 順 ) 김호준( 金 鎬 俊 )이 3월 8~11일까지 4일간 김 호준 집에서 조선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분기하여 독립운동에 참가하라 는 내용으로 제1~4호 까지 매일 밤 각호 약 80매씩을 만들어 양재순이 광희정에 배포하였다. 제1호에 2천만 동포 여! 이제야 깊은 밤의 꿈 속에서 깨어났다 활발 용감한 우리 3천리 강산 2천만 동포여! 태 극기를 손에 들고 활동하라!, 제2호에 제1호와 같은 취지, 제3호에 천하에 두려워 할 것이 29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어디 있겠느냐! 제군은 적수무지( 赤 手 無 智 )함을 염려하지 말라! 분발하라! 분발은 사는 길 이다, 제4호에 우리 동포 형제여! 자신과 자기 나라를 사랑하고 중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누구냐! 각자 분발하라. 건국 4252년 을 게재하였다. 동포여 일어서라! 는 박노영( 朴 老 英 )이 3월 6일 김세룡( 金 世 龍 )과 격문을 발행하여 조선 독립운동을 격렬히 하자는 협의하였다. 3월 7일 전준희( 全 俊 禧 )는 한위건 원고를 김세룡 방 에서 박노영 등에게 교부하였다. 3월 1일 우리들 선배 33명은 조선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 는데 동포여! 오늘날은 평화적 정도가 오는 시대이다. 민족적 자결이 일어나는 시대이다, 동포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분기하라 는 조선독립단 명의로 3월 7일 밤중부터 8일 오전 1시까지 약 800매를 인쇄하였다. 경고 조선국민학생단발동 비법행동 은 이병주 주도로 제작되었다. 그는 3월 4일 최 강윤( 崔 康 潤 ) 등과 경고 약 400매를 인쇄하여 최강윤이 수송 송현동 약 20매, 김종현( 金 宗 鉉 )이 중학동 약 100매, 채순병( 蔡 順 秉 )이 소격동에 약간을 배포하였다. 이어 3월 5일 독 립만세를 부른 후 이필주 집에서 5일 오전 9시 남대문 정거장에서 수만의 남녀 학생이 조선 독립만세를 부르며 경성내 남녀 소 중등학교 학생은 조선독립의 희생이 되었다. 조선독립 만세! 건국 4252년 3월 일. 조선학생대표 의 조선국민학생단발동, 국민의 항상 지녀야 할 독립사상과 천연의 조국 정신을 가진 남녀 학생을 체포하는 자는 누군가? 우리들도 천부의 양심에서 스스로 울어난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선량한 학생에게 폭행을 가하는 관리를 하늘 이 어찌 벌하지 않느냐? 조선건국 4252년 3월 일 의 비법행동 원고 2매로 이묘묵( 李 卯 默 ) 과 수백 매를 인쇄하였다. 이병주는 정동에서, 이묘묵은 시내에 배포하였다. 경고문 은 강일영( 姜 日 永 ) 등이 3월 27~8일경 우리들은 이때를 틈타 상해 재류동포와 책응하여 시위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를 약 100매 인쇄하고, 이튿날 강일영은 황금정, 김용희( 金 用 熙 )는 내자동, 김영식( 金 英 植 )은 시내에 배포하였다. 반도의 목탁 은 장용하( 張 龍 河 ) 이춘봉( 李 春 鳳 ) 서정기( 徐 廷 基 ) 등이 발행하였다. 이들 은 4월 1일 제1호 약 100매와 4월 12일 제2호 약 100매를 만들었다. 이춘봉 염형우( 廉 亨 雨 ) 등 6명이 4월 13일 8면에서 관찰한 조선의 참상 에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이래로 조선 민 족은 일본인 때문에 여러 방면에서 압박을 당하고 있다 는 1부 8매씩 20부, 이춘봉 염형우 등 5명이 4월 22일 제3호 조선은 조선인의 조선이다. 조선인은 이의 독립을 힘쓰지 않으면 30

총 설 안된다 는 100매 4월 25일 특별호 내부무 장관이 조선에 있는 서양인 7명을 초청하여 시 국에 관한 의견을 질문하였는데, 그 서양인들이 조선인에게 동정하는 답변을 하였다 는 약 70매를 인쇄하였다. 경고 와 자유민보 는 최석인( 崔 碩 寅 ) 백광필( 白 光 弼 ) 유연화( 柳 淵 和 )가 3월 하순부터 4 월 중순까지 인쇄 배포하였다. 이들은 3월 5일 남대문 독립운동에 참가하고, 최석인 백광 필은 3월 하순경 조선국민자유단( 朝 鮮 國 民 自 由 團 ) 의 근래 조선인 유지자 사이에서 조선인 에게 출판 언론의 자유를 주고 조선에 대하여 식민지의 이름을 삭제하고 대의사를 제국의 회에서 선출하게 하며 헌병제도를 폐지할 것 을 요구하여 우리는 최후의 1인에 이르기까지 분투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고 협의하였다. 최석인이 경고 를 집필하여 최석인 백광 필은 약 300매를 인쇄하였다. 다시 자유민보( 自 由 民 保 ) 를 협의하고 유연화가 논설, 최석인 이 기타 기사를 담당하여 4월 1일부터 중순까지 소위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조선은 독립하지 않으면 안된다 등의 자유민보 제1~제5호까지 각호 약 1,000매씩을 인쇄하여 직접 또는 의 뢰하여 광화 동대문 부근에 투입하였다. 전경석( 全 景 錫 )도 자유민보 제5호 인쇄를 도왔다. 조선민국임시정부포고문( 朝 鮮 民 國 臨 時 政 府 布 告 文 ) 도령부령 제1호 도령부령 제2호 는 4월 7일에 박이근( 朴 理 根 ) 권희목 허익환 박형건( 朴 泂 鍵 )이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박 이근은 2월 20일경 독립운동을 들었으나 독자적인 실행을 추진하였다. 대련의 이정( 李 晸 )과 허익환을 통한 천도교와의 교섭도 여의치 않았다. 4월 7일 밤 허익환이 조선국민대회 자 유당 연합회의 결과 손병희를 조선 정도령으로 선출하고 조선민국임시정부 창립 장정을 의 정하였음을 선언한다 는 조선민국임시정부포고문 조선민국임시정부 창립 장정에 의하 여 각부 경( 卿 ) 및 부관을 임명하였음을 포고한다 는 도령부령 제1호 파리만국국제연맹 회의에 참석할 의원을 지정할 것을 포고한다 는 도령부령 제2호 원고, 백지 1,600매, 등사 판을 박이근 집으로 가져왔다. 밤에 합철하여 400통을 인쇄 배포하였다. 국민신보( 國 民 新 報 ) 국치기념( 國 恥 記 念 ) 은 이일선( 李 日 宣 )이 4월 중순부터 8월 하순경 까지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그는 독립사상 전파에 인쇄물 출판 반포가 상책으로 생각하고 집과 근무처에서 국민신보( 國 民 新 報 ) 제1~26호 국치기념( 國 恥 記 念 ) 특별호로 조선은 중국과 함께 동양 문명의 연원이다 지금 인류는 자유 평등이어서 강약의 구별없이 다 같이 낙을 누릴 때가 왔다. 조국을 광복하고 국치를 말끔히 씻어라 라는 내용으로 1회 약 300여매 31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씩 인쇄하고 대개 낮에 종로통 동대문 등지에 배포하였다. 이외에 김윤식( 金 允 植 )이 청원서를 작성하여 일제측 일본 신문사 국내 신문사 및 일 부 인사들에게 배포하였다. 그는 3월 20일 이번 소요는 도저히 설유로써 돌이킬 수는 없으 며 위력으로써도 복종시킬 바가 아니므로 천심에 따라 일본은 모름지기 조선 독립을 인정하 지 않으면 안된다 는 청원서를 만들었다. 이어 3월 22일 이용직( 李 容 稙 )에게 보이고, 3월 25 일 김기수( 金 麒 壽 )가 2통을 정서하여 김윤식 이용직 날인을 받고, 김유문( 金 裕 問 ) 김기수 는 등본을 만들었다. 밤에 김윤식은 이계태( 李 啓 泰 )에게 내각총리대신앞 봉서 1통과 조일( 朝 日 ) 시사( 時 事 ) 보지( 報 知 ) 대판매일( 每 日 )신문사 등본 4통을 교부하여 일본에서 우송할 것과 동경에서 사본을 다른 신문사에도 송부를 부탁하며 여비 200원을 주었다. 이건태는 3 월 26일 부산에서 경부 이홍순( 李 弘 淳 )을 만나 위험하다는 말을 듣고 3월 27일 5통을 일본으 로 발송하였다. 김유문은 3월 25 26일 24통을 복사하여 3월 25~28일에 모씨 1매, 김유정 ( 金 裕 定 ) 2매, 이흥규( 李 興 珪 ) 1매, 김진하( 金 鎭 夏 ) 2매, 김진한( 金 鎭 漢 ) 2매, 기타 6~7명에 게 1매씩을 교부하였다. 김기수도 복사본을 서정순( 徐 貞 淳 ) 이철상( 李 哲 相 )에게 1매씩을 교 부하고, 3월 27일 경성일보사 매일신보사에 위탁서와 함께 우송하였다. 이용직은 김기수 의 복사본 2통을 받아 3월 25일 이충규( 李 忠 珪 )에게 사본 약 30통을 작성케 하고, 3월 29일 대판( 大 阪 ) 모신문 기자에게 교부하였다. 2 유인물 배포 : 조선독립신문 은 임준식 김상규를 통해 학생 등이 파고다공원 등에 배포하였다. 장채극 전옥결 이철은 약 200매를 이인식 등 십수 명에게 전달하여 송현 간 안국 인사동에 배포하였다. 이들은 3월 2일 독립신문 제2호 독립가 수백 매를 보 성고등보통학교 학생을 통해 배포하였다. 3월 5일 전옥결이 한위건에게 제3호 약 80매를 받 아 강창준 등이 배부하였다. 이어 3월 하순부터 4월 초순까지 독립신문 제17~23호까지 매 일 격일 4~5일에 약 200매를 인쇄하고 김춘남( 金 春 南 )이 배포하였다. 이어 조민언( 趙 敏 彦 ) 원고로 장채극 김홍식 등이 4월 10~17 8일까지 제24~27호 수백 매씩을 인쇄하고 학 생들이 배포하였다. 또 임승옥은 조선독립신문 제2호는 서적조합 사무실, 제5 6호는 유 병륜 집에서 인쇄를 도왔다. 김동혁은 3월 2 5일 허신( 許 信 )에게 조선독립신문 제2호 10 매 제3호 7~8매를 받아 낙원동에 배포하였다. 한경익( 韓 景 翊 )은 3월 1~6일까지 이지익( 李 枝 翼 )에게 조선독립신문 제1호 약 300매 제2호 약 100매, 국민회보 약 100매, 3월 20일 32

총 설 경 최석관( 崔 碩 寬 )에게 자유민보 경고문 6~70매, 5월 1일 유기선( 柳 基 先 )에게 혁신공 보( 革 新 公 報 ) 70매를 받아 배포하였다. 오흥순은 3월 3일 배재학당 기숙사 뒤에서 국민회 보 20매를 받아 파고다공원 북동쪽 길가에서 배포하였다. 최윤창( 崔 潤 昌 )은 3월 5일 이동 규( 李 東 奎 )와 국민회보 50여 통을 김봉철( 金 奉 哲 ) 등에게 배포하였다. 최중경( 崔 中 庚 )은 3 월 7일 김준희( 金 俊 禧 )에게 경고문 50여 매를 받아 정민영( 鄭 敏 英 )에게 교부하고, 정민영 은 청년동맹회( 靑 年 同 盟 會 )의 조선독립선언취지 문서 약 33통 우리 동포여! 약 20통을 시 내에 배포하였다. 고희준은 3월 8일 밤 임창준에게 독립선언서 10매와 상인도 매호 폐점 하고 이에 참가하라 라는 시민대회 10매를 받아 3월 9일 봉익동과 종로통 사이에서 배포하 였다. 박노영 등은 동포여 일어서라! 800매 중 3월 8일 약 250매를 견지 인사동에, 250 매를 모씨에게, 100매를 최사렬에게 배포하게 하였다. 김학봉( 金 學 鳳 )은 3월 10일 김도리 ( 金 道 吏 )에게 경고문 40매 조선독립신문 5매를 교부받아 경고문 5매를 김창순( 金 昌 順 ) 에게, 8매를 서인필( 徐 仁 弼 )에게, 나머지는 장교 황금정에서 배포하였다. 서인필은 경고 문 8매 중 2매를 관철동 이근호 집 장교정에 배포하고, 김창순은 5매 중 1매를 모씨에게 배 포하였다. 김진성( 金 振 聲 ) 권철( 權 鐵 ) 요영국( 姚 永 國 )은 3월 10~25일 경까지 3~4회 걸 쳐 조선독립신문 반도의 목탁 백 수십 매를 공흥문에게 받아 배부하였다. 요영국은 3월 10 13 20 25일경 4회에 조선독립신문 반도의 목탁 을 받아 김진성 권철에게 배포 를 의뢰하였다. 요영국도 3월 10일경 조선독립신문 십수매, 3월 20 25일 2회 반도의 목 탁 십수 매를 배포하였다. 김진성은 조선독립신문 을 3월 10일 10매 13일 15매 20일 24 매, 권철은 3월 10~25일경까지 4회 조선독립신문 반도의 목탁 을 매회 20~45매를 운 니동에 배부하였다. 손공린( 孫 公 璘 )은 3월 14일 중앙학교 이남두( 李 南 斗 )에게 독립신문 약 60매를 교부받아 적선 체부동에 배포 교부하였다. 이태형( 李 台 炯 )은 3월 16일 조병덕( 趙 秉 德 )과 산보 중 대한문에서 모씨에게 아! 동포의 관리 및 형사에게 고함 30매를 받아 숙소에 서 양규섭( 梁 奎 涉 )과 함께 읽고 부근 모 전당포에 10매, 양규섭은 낙원 부근에 3매를 교부하 고 나머지는 소각하였다. 김공우은 3월 17일 정지현에게 노동회보 를 의뢰받고, 배희두( 裵 熙 斗 )와 함께 3월 20일경 노동회보 11매를 화천정에서 배포하였다. 허정묵( 許 丁 默 ) 김상 우( 金 相 禹 ) 최덕종( 崔 悳 鍾 )은 3월 20일경부터 4월 상순까지 두 번 최하현( 崔 夏 鉉 )에게 반 도목탁 을 의뢰받고, 허정묵은 3월 12매와 4월 상순 10매 합계 22매 김상우는 15매를 안국 33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동, 최덕종은 30매를 운니동에서 배포하였다. 김창진( 金 昌 珍 )은 자유민보 제1~5호까지 약 100매씩을 최한석( 崔 漢 錫 )에게 교부하여 동대문에 배포하였다. 최진순( 崔 瑨 淳 )은 4월 2~3 일 김기선( 金 箕 鮮 )에게 받아 둔 경고문 반도의 목탁 조선독립신문 등을 이동석( 李 東 錫 ) 등에게 교부하였다. 김기영( 金 基 英 )도 반도의 목탁 을 4월 10~14일 사이에 송현동 기 타 주민에게 배포하였다. 허익환이 4월 7일 밤에 조선민국임시정부포고문 도령부령 제 1호 도령부령 제2호 을 합철한 400통을 배포하였고, 4월 9일에는 남미창정에 조선민국 임시정부포고문 도령부령 제1호 가 배포되었다. 서대순( 徐 大 順 )은 4월부터 10월까지 배 운성( 裵 雲 成 ) 김해룡( 金 海 龍 )의 자유민보( 自 由 民 報 ) 약 2,000매, 혁신공보( 革 新 公 報 ) 약 3,000매를 학교 소사실에서 인쇄하였다. 2. 경기도 1) 개성군 개성에서 독립선언서는 3월 1일 어윤희( 魚 允 姬 )에 의해 배포되었다. 그녀는 2월 26일경 독 립선언서 배포를 부탁받고 3월 1일 신관빈( 申 寬 彬 )에게 협조를 부탁한 후 오후 2시경 독립선 언서 2,000매를 받아 만월 북본 동본정에 배포하였다. 개성에서는 3월 3일 4일 양일간 학생들의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3일 에 송도고등보통학교와 호수돈여학교 학생들이 남대문부터 읍내까지 독립만세를 고창하여 참여 군중이 약 2,000명에 이르렀다. 오후 6시경 약 50명 학생이 일장기를 찢고, 9시 30분 무렵에 남본정파출소에서 약 1,000명이 만세를 불렀으며, 자전거를 타고 가는 우편배달부를 폭행하였다. 강부성( 姜 富 成 ) 신동윤( 申 東 潤 ) 등이 읍내를 활보하며 헌병대 경찰서 등에서 만세를 부르고 일장기를 파기하며 일본인을 구타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튿날에 도 오후 2시 무렵에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정에서 4학년이 주도한 약 100명 학생을 중심으로 약 500명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며 북본정에서 병교 식산은행 고려교 남대문 부근까지 여러 곳에서 독립 연설을 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34

총 설 2) 인천부 3월 6일 이후 인천공립보통학교는 동맹 휴교를 단행하였다. 교직원과 경찰서는 전화로 동 태를 조사 훈계하는 등 협조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3학년 김명진( 金 明 辰 )은 통신 체계를 방해하고자 3월 8일 오후 9시경 학교에서 박철준( 朴 喆 俊 )에게 망을 보게 하고 2층 전화선을 절단하고 사무실 수화기를 파손하였다. 내리에서는 4월 1일부터 3일까지 3일간 김삼수( 金 三 壽 ) 임갑득( 林 甲 得 ) 등 주도로 독립 운동으로 폐점( 閉 店 ) 운동을 전개하였다. 인천에서는 3월 30~31일 일부 상점이 폐점하였으 나 일경의 설유로 개점하였다. 이들은 폐점자가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4월 1일에 인천 의 체면상 점포를 닫지 않으면 최후 수단을 취하겠다 는 협박문 18통을 오후 8시 이후 주명 서( 朱 明 瑞 ) 이복현( 李 福 鉉 ) 등을 통해 15개 점포에 투입하였다. 이튿날에도 계속 개점하자, 인천에 있는 상업가가 폐점하지 않으면 인천 시가는 초토화할 것이다 는 경고 20통을 장지 섭( 張 智 燮 ) 등의 점포에 투입하였다. 이어 4월 3일에는 속히 폐점하지 않으면 최후의 수단 을 취할 것이다 는 최후통첩을 배포하려다가 체포당했다. 3) 양주군 미금에서는 3월 13~14일 양일간 이승익( 李 昇 翼 )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3월 13일에 주민에게 총독 고유( 告 諭 )를 읽어주고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이튿날 오후 1시 무렵에 이승익 정기섭( 丁 基 燮 ) 등은 평내리 밖 주막에서 주민과 독 립만세를 부르고 면내를 순회하였다. 금곡리로 가는 도중에 헌병 비전임길( 飛 田 林 吉 )의 해산 명령에 주민들은 2천만 동포가 조선 독립을 기뻐하여 만세를 부름은 당연하지 않느 냐?, 특히 이석준( 李 錫 俊 )은 조선독립만세를 부름은 당연하지 않느냐? 며 독립만세의 정당함을 주장하였다. 와부에서는 3월 14일 이정성( 李 正 成 ) 등이 협의하고 이튿날 이른 아침 송촌리와 부근 주민 들 100여명이 모였다. 이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이어 조안리와 부 근 주민들이 합류하여 덕소리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백석에서는 3월 27일 김대현( 金 大 鉉 ) 등이 연곡리 주민과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안 종태( 安 鍾 泰 鍾 台 )가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 고 연설을 하고 이튿날 약 600 35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명이 오산리 대들벌과 면사무소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구리에서는 3월 28일 이강덕( 李 康 德 ) 심점봉( 沈 點 奉 )이 오후 5시경 아천리 주민 수십 명 과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이어 토평 교내리로 가서 독립만세를 연호 하였다. 3월 29일에도 아차산 꼭대기에 태극기를 세우고 주민과 독립만세를 외쳤다. 진접에서는 3월 29일 봉선사에서 이순재( 李 淳 載 )의 발의로 조선독립단임시사무소 명의의 조선도 이 기회에 극력 소요를 영속시켜 독립의 목적을 달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는 문서 약 200매를 만들었다. 강완수( 姜 完 洙 ) 등 4명은 오후 9시경부터 다음날 오전 5시경까지 진벌 중촌리 등 4개 마을에 배포하였다. 밤에는 이재일( 李 載 日 )이 부평리의 이민 일동이 광릉천 강가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라 는 통문 1통을 주민들에게 보이고, 3월 31일 양삼돌( 梁 三 乭 ) 등 주민 100여명과 광릉천변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시둔에서는 3월 29일 조염호( 趙 念 鎬 )가 자일리 주민 약 30명과 한국독립만세를 외쳤다. 별내에서는 3월 하순 유해정( 柳 海 正 )이 고산리 집에서 한국을 강탈한 나머지 태황제 폐하 를 독살까지 하였으니 자기도 한 자루의 칼을 품었으니, 한번 죽음으로써 원한을 씻을 날이 있을 것이다 는 봉서를 작성하였다. 그는 글 중에 이태왕 전하(고종)를 태황제폐하( 太 皇 帝 陛 下 ) 라 칭하는 등 민족 자존의 정신을 표출하였다. 4) 가평군 북면에서는 3월 15~16일 양일간에 정흥교( 鄭 興 敎 興 龍 ) 정성교( 鄭 聖 敎 ) 장기영( 張 基 榮 ) 등의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상순에 음력 2월 14일 아침 9시 가평에 집합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라! 는 밀통( 密 通 ) 을 이윤석( 李 胤 錫 )이 2통, 정흥교가 1통씩 작성하였다. 이윤석은 목동 소법 화악리에 1통씩을 교부하고 이곡리에 직접 말로 전하 고, 정흥교는 정성교 이영헌( 李 英 憲 ) 등에게 권유하였다. 면민들은 성황당을 거쳐 면사무 소에 800명쯤 집합하였다. 군중들은 많은 사람이 독립운동을 하면 독립되는 것 (정재명), 독립만세를 부르면 조선이 독립될 것 (정흥교 홍종선), 조선이 이제부터 독립한다 (장호 리( 張 浩 利 ))고 인식하였다. 이윤석 정흥교 주도로 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읍내로 향하 였다. 군수와 헌병 소장의 제지를 받으면서도 독립만세를 정당한 일로 생각하였다. 정흥교 의 신호에 따라 군중들은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군청 면사무소 헌병분견소 우편소 금 36

총 설 융조합 보통학교 천도교구실 등을 순회하였다. 분견소 헌병들은 해산 명령을 내리고 이 윤석 정흥교 등 십수 명을 구금하였다. 이어 3월 16일에는 구금 인사 탈출을 위한 독립운 동이 있었다. 정성교가 동생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동지들의 활약으로 성황당 과 목동리에 약 200명이 모였다. 장기영 정성교 인솔로 군중들은 헌병분견소로 이동하다 가 당고개에서 경성에서 파견된 헌병들과 충돌하였다. 군중들은 헌병의 멱살을 쥐며 죽일 테면 죽이라!, 오히려 죽여 달라! 고 덤벼들었고, 돌을 던지는 등 격렬히 저항하였다. 이 에 헌병들은 공포를 발포하여 제지하였으나 군중들은 오히려 총기 탈취를 위해 격투를 벌 였다. 이에 주춤하던 헌병들은 지원 보병이 도착하자, 주도 인사를 체포하며 만세 군중들을 해산시켰다. 5) 강화군 부내에서는 3월 18일 오후 2시 읍내시장에서 10,000여명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인사들이 참여한 독립운동이었다. 유봉진( 劉 鳳 鎭 )은 3월 8일경 이 진형( 李 鎭 亨 ) 집에서 황유부( 黃 有 富 ) 황도문( 黃 道 文 ) 등과 동지 규합과 역할 분담을 협의하 였다. 이후 그는 동지들과 결속을 강화하며 독립선언서 국민회보 등을 지역민에게 배포 하였고, 황일남( 黃 日 男 ) 황윤실( 黃 允 實 ) 등은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독립운동을 준비하였 다. 3월 18일 주도 인사들이 각기 태극기를 가지고 삼삼오오 시장으로 모였다. 오후 2시경 신문리 시장 쪽에서 조대신( 趙 垈 信 )이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시작하니 군중들은 중앙 돌다리 부근을 중심으로 태극기를 흔들며 큰소리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유봉진은 조금 늦게 백마를 타고 시장에 와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왕래하고, 종루의 종을 쳐서 분 위기를 고조시켰다. 독립만세가 한층 고조되자, 순사와 순사보 8명이 유봉진 유희철 조대 신 등을 체포하고 군중을 제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군중들은 순사보를 찌르고 구타하여 유 봉진을 탈출시키고, 태극기를 탈취하려는 순사보의 따귀를 갈기는 등 일경들의 진압에 항거 하였다. 이어 군청에서 유봉진이 약 2시간 반쯤 독립 연설을 하였다. 군중들은 군수 이봉종 ( 李 鳳 鍾 )에게 만세를 부르라, 부르지 않으면 밤이 밝아도 가지 않겠다, 만약 불응하면 군 청 청사를 파괴하겠다 며 독려하여 결국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사환의 급보를 받은 순사 순사보 십 수 명이 군청에 출동하여 군중을 제지하였다. 또 유봉진이 향 37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교에서 강화경찰서에 검속된 유희철 조대신 등의 석방을 요구하자 고 제의하여 5시경 약 5~6,000명이 경찰서에 도착하였다. 이어 계속된 구금자 석방 요구와 항의는 일경과 다툼으 로 이어졌다. 유봉진이 석방 교섭을 한 결과 약 2시간 후에 석방되었다. 그러자 군중들은 서 장에게 만세를 부르라 요구하여 서장도 독립만세를 불렀다. 삼산에서는 이안득( 李 安 得 )이 4월 7일 오후 8시경 석모리 당산 꼭대기에 올라 주민 십수 명과 함께 횃불을 올리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6) 연천군 백학에서는 3월 21일 조우식( 趙 愚 植 )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 그가 두일리 장날 오 후 6시경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 이낙주( 李 洛 周 ) 등이 호응하여 만세를 합창하므로 군중들 이 모였다. 그는 면장 윤규영( 尹 圭 榮 )의 만세 고창을 제안하였다. 이에 정현수( 鄭 賢 秀 )가 면 장을 찾아왔고, 이낙주( 李 洛 周 )도 면장 손을 잡고 우리들과 행동을 같이 하라! 고 강요하고, 조우식 홍순겸( 洪 淳 謙 ) 등도 같이 만세를 부르라! 며 구타하므로 면장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정현수가 시장 부근 집 대문을 돌로 두들겨 참가를 권유하고, 박영학( 朴 永 鶴 ) 등이 참가하지 않으면 살해 또는 방화한다 고 소리치고, 이어 구금룡( 具 今 龍 )이 소방용 경종( 警 鐘 )을 쳐서 150~160명이 모였다. 이들이 면사무소로 가서 면서기 정기만( 鄭 基 萬 )에게 만세 를 부르라고 요구하였으나 그는 불응하였다. 이에 조우식 정현수 등이 투석하여 유리창 1 장, 방문 1개 등을 파손하였다. 헌병들의 제지에도 약 200명 군중들은 계속 만세를 연호하였 다. 10시경에는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를 부르며 미산 마전리로 향하여 이튿날 오전 3~4 시경 마전리 문묘(향교)에서 새벽 닭이 울 때까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해산하였다. 백천 기( 白 天 基 )도 밤에 통구리 주민 약 60명을 모아 독립만세를 부르고, 이어 마전리 헌병주재소 로 가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중면에서는 3월 31일 나용기( 羅 龍 基 )가 이홍식( 李 洪 植 )을 불러 명 4월 1일 오전 7시경 세 야골에 집합하라 는 격문 6통을 만들어 한씨동( 韓 氏 童 )이 횡산 중사리, 나성돈( 羅 聖 敦 )이 삼관리, 나개동( 羅 開 童 )이 합수리 등 2개리 구장에게 배부하였다. 오전 7시경 삼관리에 모인 면민 약 400명은 나용기가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읍내를 향하여 만세 행진을 하던 중 헌병의 제지를 받았다. 38

총 설 7) 김포군 양촌에서는 3월 19일에 누산리 박충서( 朴 忠 緖 )가 박승각( 朴 勝 珏 ) 등과 격문 경고문 십수 통을 작성하여 오인환( 吳 仁 煥 ) 정억만( 鄭 億 萬 ) 등과 면내에 배포하였다. 이어 3월 23일에 는 양곡시장에서 군중 수백명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월곶에서는 3월 22일, 28~29일과 4월 9일에 각기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 3월 22일에 는 성태영( 成 泰 永 )이 박용희( 朴 容 羲 )와 결의하고 군하리 장날 군중에게 공자묘(향교)로 모이 라고 권유하였다. 향교에 200명이 모이자, 성태영 백일환( 白 日 煥 )은 마을을 순회하며 조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300명 군중이 면사무소로 갔다. 성태영이 면서기 조원석( 趙 元 錫 ) 등 4명에게 만세를 선창하라 요구하여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백인환은 약 400명 군중 과 주재소로 이동하였다. 성태영이 독립 연설을 할 때 순사 산전중양( 山 田 重 洋 )이 제지하자, 백일환은 순사의 따귀를 때리고 호신용 총을 빼앗으려고 밀어 넘어뜨리고 수명이 십수회 난 타하는 등 폭행을 가하였다. 또 당신은 조선인이니 독립만세를 외쳐라 는 군중들의 요구에 불응한 순사보 이성창( 李 聖 昌 )을 끌고나가 넘어뜨리고 발길질 등을 하였다. 박용희 등은 재 차 면사무소에서 면서기에게 한국 국기를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3창하라 고 요구하였다. 조 원석이 먼저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불렀고 이어 면서기 3명도 차례로 만세 3창을 하였 다. 이병린( 李 炳 麟 )도 박용희의 권유를 받고 약 200명을 이끌고 통진보통학교 면사무소 주재소 등에서 만세 행진을 하였다. 그는 순사보 이성은( 李 聖 恩 )에게 독립만세를 요구하였 다. 최우석( 崔 禹 錫 )도 고정리 주민 300명과 군하리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3월 28 일에는 조남윤( 趙 南 潤 ) 당인표( 唐 寅 杓 ) 등이 명 29일 오전 11시에 전 통진 읍내에 집합하 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라 는 문서 7통을 면내에 배포하였다. 또 정인교( 鄭 仁 敎 ) 등은 주민 수십 명과 함반산에서 만세를 외쳤다. 이어 3월 29일 오전 11시경 400여명을 지휘하여 공자 묘 면사무소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정오경 갈산리에 모인 수백 명도 오후 2시경 공 자묘 보통학교 면사무소 등으로 이동하며 만세를 고창하였다. 4월 9일에는 임용우( 林 容 雨 )가 명덕학교 운동회 개최를 기회로 참관자 이재관( 李 載 寬 ) 차경창( 車 敬 昌 )과 협의하여 학생 주민 수십 명과 진리 해안에서 만세를 외쳤다. 대곶에서는 3월 22일 정인섭( 丁 寅 燮 )이 독립만세 라 쓴 태극기를 만들고, 이튿날 오후 4시 경 시장에서 300여명 속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어 주재소 면사무소로 이동하 39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다가 시장 입구에서 일경의 제지를 받았다. 고촌에서는 3월 24일 김정국( 金 正 國 ) 윤재영( 尹 在 英 )은 50여명과 신곡리 뒷산에서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이튿날에는 김정의( 金 正 義 ) 김남산( 金 南 山 ) 이흥돌( 李 興 乭 )이 태극기 2기를 교대로 들고 주민 약 50명과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8) 고양군 한지에서는 3월 9일과 23일에 독립만세운동과 유인물 배포가 있었다. 정철근( 鄭 鐵 根 )이 3월 9일에 춘천으로 귀향하던 중 왕십리 보통학교 앞에서 약 100명과 독립만세를 고창하 였다. 3월 22일에는 이두현( 李 斗 鉉 ) 등이 서빙고리에서 태극기 3기를 만들고, 이때 이민 ( 里 民 )은 반드시 독립만세를 높이 부르라 는 경고 를 게시판에 붙였다. 이어 3월 24일에는 동 서빙고리의 각 상점은 문을 닫고 음 2월 27일을 기하여 마을 주민 전부가 조선독립만 세를 높이 부르지 않으면 안된다 는 유지가 일동에게 를 권중섭( 權 重 燮 )에게 보내는 등 독립 만세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3월 23일에는 홍광옥( 洪 光 玉 ) 등이 왕십리 산에서 주민들과 독 립만세를 외쳤다. 용강에서는 3월 9일 이영준( 李 永 俊 )이 중동학교 앞에서 조선인 헌병 보조원 및 순사보는 각자 그 직장을 사직하고 조선 민족의 독립운동에 힘쓰라 는 경고문 약 30매를 받아 합동 부 근 민가에 투입하고, 또 헌병 보조원 이용석( 李 用 奭 )에게 당신도 조선인이라면 이 때에 독 립운동에 참가하라 며 교부하였다. 독도에서는 3월 12일과 26일에 손흥복( 孫 興 福 ) 김완수( 金 完 守 ) 등 주도로 독립만세운동 이 있었다. 3월 12일에 손흥복 등이 농학교 뒤에서 간이농학교 보통학교 학생들과 결의하 여 하교 후 학생 약 30명과 보통학교 우편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3월 26일 밤 에는 김완수가 수천명을 이끌고, 신원룡( 申 元 龍 ) 최자근동( 崔 者 斤 同 )이 선두에 서서 동독도 리 수개소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헌병의 발포로 군중들이 이탈하자, 김완수는 피하 지 말라! 피하지 말라! 고 외쳤다. 숭인에서는 3월 23일 김철배( 金 哲 培 ) 임수학( 林 壽 學 ) 이경혁( 李 慶 赫 )이 용두리에서 군 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40

총 설 9) 시흥군 서이에서는 3월 27일 이영래( 李 永 來 )가 일동리 백기화( 白 基 和 ) 집에서 이종교( 李 鍾 敎 ) 등 에게 다른 동리에서는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불러 당신들은 짚신만 삼고 있어 되겠는가? 하며 설유하였다. 이들은 오후 8시경 마을 서쪽 언덕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서면에서는 3월 27일 밤 이정석( 李 貞 石 )이 만세를 불러 다음날 노온사 경찰주재소 순사보 최우창( 崔 禹 昌 ) 금택성웅( 金 澤 成 雄 )에게 구금되었다. 이종원( 李 宗 遠 )은 저녁 때 최호천( 崔 浩 天 )에게 아들 이정석의 탈환을 부탁하였다. 최호천은 그러면 오늘 밤 이민들을 모아서 주 재소로 몰려가 찾아 줄터이니 안심하라. 당신도 동행하자 며 부친을 안심시켰다. 이순만( 李 順 萬 )의 탈환 계획을 듣고 온 윤의병( 尹 宜 炳 )은 20명을 이끌고 소하리 내대촌 주막리로 갔 다. 오후 7시경 최호천과 약 50명이 면사무소 아래에 모이자, 이종운이 아들의 석방을 호소 하였다. 최호천 윤의병은 인원이 부족하니 내가리대리 주민도 규합하자는 제의를 하였다. 이들은 가리대리 어구에서 만세를 외치고, 이정석의 탈환을 소리쳤다. 최호천은 주민에게 일경의 무력 발포가 있으면 대항하라고 알리고, 윤의병과 함께 주민들에게 돌과 막대기를 준 비시켜 11시 주재소에 도착하였다. 주민들이 주재소를 포위하고 불태워라! 순사와 순사보를 죽이라 고 외쳤지만 순사 적송( 赤 松 ) 순사보 최우창 금택 등은 등불을 끄고 없는 듯이 가 장하였다. 이에 군중들은 2개 집단으로 나뉘어 순사보를 찾았으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하였 다. 약 200명은 다시 주재소로 가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게시판 숙직실 뒷벽 문짝 등을 파 괴하였다. 그러자 적송순사가 나와 용무를 묻자, 최호천이 우리들은 이정석을 탈환하러 왔 다. 이정석을 내어 달라 고 하였다. 순사는 명 29일 본서에 들어가니 그때 이정석의 신병 취 하를 출원하겠다 고 하였다. 이에 최호천 윤의병은 오늘 저녁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면 내일 밤 다시 습격하기 위해 몰려 와서 불태워 버리고 죽이는 행동을 하여도 괜찮겠는가? 하 고, 이종원은 말로 약속하여서는 효과가 없으니 계약서를 쓰라 고 요구하였다. 순사는 관 리인데 약속을 어기겠는가? 그런 것을 하지 않아도 틀림없으니 속히 해산하라 고 하였다. 최 호천은 계약한 것이나 다름없다 고 하며 군중들과 독립만세를 외치고, 이어 보통학교 뒤에 서도 만세를 부르고 해산하였다. 수암에서는 3월 30일 격문을 통해 모인 18개 마을 면민들이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전 개하였다. 윤병소( 尹 秉 昭 )가 이봉구( 李 鳳 求 )에게 3월 29일 화정리에 명 30일 수암리 비립 41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동에 모이라 는 격문이 돌았다고 듣고, 그날 밤에는 동생에게 능곡리 부친 집에도 통문이 왔 다고 들었다. 홍순칠( 洪 淳 七 )은 3월 30일 임학신( 林 學 信 )에게 통지를 받고 국유지 소작인들 에게 격문을 알리고 조선이 독립하면 국유지는 소작인의 소유지가 되니, 이때 만세를 부르 는 것이 득책이다 고 권고하였다. 유익수( 柳 益 秀 ) 윤동욱( 尹 東 旭 ) 김병권( 金 秉 權 ) 등은 성 포 능곡 화정리 주민들과 격문 권유로 비림동으로 갔다. 성포리 구장이 군중 지휘를 유익 수에게 부탁하였다. 유익수는 도살장에서 홍순칠이 만든 기를 받았고, 홍순칠은 인원을 조 사하고 만세를 부르는 이유와 읍내로 가자고 연설하였다. 그때 순사가 해산을 명령하며 읍 내로 갈 경우 발포하겠다 고 협박하여 해산 여부로 의견 대립이 있었다. 결국 유익수가 선두 에서 읍내쪽으로 향하여 모두 뒤를 따랐다. 윤동욱이 선두에서 이끌고, 유익수가 태극기를 흔들며 지휘하여 읍내로 갔다. 윤병소는 와리에서 읍내로 가고, 홍순칠은 허치선( 許 致 善 ) 집 에 모인 30명을 이끌고 수암 남쪽 밭에 이르렀다. 면내 18개 마을 2,000명은 주재소 서쪽 밭 에서 큰 깃발들을 받들고 각자 작은 기를 가지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특히 유익수 윤병소 윤동욱 등이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일경들이 해산 을 명령하였으나 홍순칠 김병권( 金 秉 權 ) 등 군중들은 수암주재소 면사무소를 불태워버리 자! 고 외치며 주재소 면사무소 보통학교 공자묘 앞으로 행진을 하였다. 윤동욱은 보통 학교 앞에서 순사 임건호( 任 健 鎬 )에게 당신도 조선인이니 만세를 부르라 권유하였다. 일경 들은 해산이 곤란해지자, 발포 위협을 가하여 군중을 해산시켰다. 이봉문( 李 奉 文 )은 2~3명 과 음주하다가 수암리 구장의 불참에 오후 10시경 집으로 찾아가 따지기도 하였다. 과천에서는 이복래( 李 復 來 )가 각자 관솔불을 가지고 남태령에 와서 같이 만세를 부르라 는 격문을 돌리고 태극기 15기를 만들었다. 그는 3월 30일 오후 8시경 남태령에서 50여명에 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관솔불을 든 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며 읍내에서 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 보통학교를 순회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군자에서는 4월 4일 5일 양일간 독립만세운동과 유인물 배포가 있었다. 4월 4일 강은식 ( 姜 殷 植 )이 거모리 면사무소 주재소에서 수백명과 태극기를 흔들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 였다. 김천복( 金 千 福 )는 죽율리 주민에게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기 위해 거모리 면사무소 부 근에 집합하라, 만약 불응하는 때는 후환이 있을 것이라 며 약 30명과 거모리로 향하였다. 일경의 발포로 주민은 흩어졌으나 김천복과 2~3명은 거모리로 가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42

총 설 튿날에는 권희( 權 憘 )가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이래로 받은 10년간의 학정에서 벗어나 독립 하려 한다 각 이민은 구 한국기 1개씩을 휴대하고서 와서 모이라 는 비밀통고 를 각 마을 에 회람시켰다. 장곡리에서 장수산( 張 壽 山 )이 구장 이종영( 李 鍾 榮 ) 집 앞에 놓아 주민 회람을 시켰고, 이종진( 李 鍾 振 )은 오후 3시경 통고를 발견하여 이종형( 李 鍾 亨 ) 이덕증( 李 德 增 )을 거쳐 오후 6시경 월곶리 구장에게 보냈다. 10) 부천군 계양에서는 3월 24일 심혁성( 沈 爀 誠 )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오후 2시 장기리시장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약 600명에게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라 권유하고 함께 만 세를 고창하였다. 부내주재소 순사 이궁희삼차( 二 宮 喜 三 次 ) 순사부장 화뢰훈( 花 瀨 勳 ) 순 사 2명이 심혁성 정태용( 鄭 台 鎔 )을 면사무소로 인치하고 해산을 명령하여 일부 군중들은 흩어졌으나 약 300명쯤은 계속 심혁성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5시경 일경들이 심혁성을 주 재소로 옮길 때 군중들은 심혁성을 반환하라 며 순사들을 강박하며 시장 5~60간( 間 ) 지점 에서 막아 세웠다. 이어 순사들을 붙잡고서 머리와 기타 신체를 주먹으로 치고 찌르며 폭행 을 가하였다. 10여분간 다툼으로 포승줄이 풀려 심혁성은 벗어났으나 계속되는 충돌로 이은 선( 李 殷 先 )이 칼에 찔려 현장에서 순국하고 윤해영( 尹 海 榮 )은 머리 등에 부상을 입었다. 사 태 악화를 염려한 일경들은 5시 30분경 철수하였다. 이은선의 조카 이금산( 李 今 山 )이 면장 안병혁( 安 炳 赫 )에게 원수를 갚아 달라 하고, 아내도 피살된 원인을 확인하러 부내주재소 로 가자 고 주장하였다. 이담( 李 墰 泰 鉉 泰 連 )은 해진 후 6촌 이은선이 피살된 사실을 듣 고 면사무소로 갔다. 면장이 귀가하려 하자, 이담이 쫓아가서 구장에게 통지하여 이민들을 모아 주재소로 가서 피살된 원인을 확인하여 달라 고 압박하였다. 이에 면장은 면서기 이경 응( 李 敬 應 ) 임대규( 林 大 圭 )를 데리고 이담과 송희진 집에 가서 이담의 말대로 이경응이 죽 은 사람에게 동정을 표시하는 자는 오후 12시까지 면사무소에 집합하라 는 초안으로 만들었 다. 초안을 쓴 이경응은 모친의 근심을 핑계로 집에 갔다. 면장과 임대규는 6~7매 통문을 만 들어 구장들에게 회부하였다. 12시경 약 200명이 면사무소에 집합하였다. 이경응이 오지 않 자, 이담 면장 등이 그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그러자 이담이 이경응의 집을 부수자고 제안하고 면장의 동행을 요구하여 100명이 집으로 가서 지붕과 기둥만 남기고 철저히 파괴 43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하고 가재 도구도 밭에서 불태웠다. 이후 군중들은 면사무소로 갔다. 이담이 면장에게 이 은선의 죽은 원인을 확인하러 주재소에 가 달라 고 하자, 이경희( 李 敬 凞 )가 명일은 순사도 올 것이니, 면사무소 게시판에 우리들이 모인 것은 이은선의 죽은 원인을 확인하기 위한 것 이다 는 뜻을 써 붙여 두고, 명일 오전 9시를 기하여 모이자 고 하여 일동은 찬성하고 해산 하였다. 용유에서는 3월 28일 조명원( 趙 明 元 )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3월 23 4 일경 조종서( 趙 鍾 瑞 )를 만나고 이어 최봉학( 崔 奉 學 ) 문무현( 文 武 鉉 )을 남북리로 불러 밤에 혈성단( 血 誠 團 ) 명의로 3월 28일 거사를 결정하였다. 이들은 대형 태극기에 혈성단 주모자 조명원 조종서 문무현 최명교( 崔 明 敎 ) 라 쓰고, 조선독립운동을 거사할 것이니, 28일 관청리 광장에 모이라 는 격문 80여통과 신서( 信 書 ) 1통을 남북 거잠 을왕 덕교리에 배 부하였다. 3월 28일 관청리 광장에 150여명이 모였고, 을왕리 주민들도 태극기를 흔들며 합 세하였다. 이들이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자, 면민들도 연호하였다. 대부에서는 3월 31일 김윤규( 金 允 圭 ) 등이 오후 11시경 태극기를 만들고, 다음날 오전 3시 경 집 밖으로 나와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동리( 東 里 ) 주민 십수명이 주막에서 태극기 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남동에서도 3월 31일 송성용( 宋 聖 用 )이 김춘근( 金 春 根 ) 등과 4월 1일 남동면 질천시장에 주민을 모아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라 는 통지서 수매를 구장들에게 배부하였다. 11) 양평군 고읍에서는 2월 13일경 최대현( 崔 大 鉉 )이 고종 제사비 기부금을 모금하는 활동을 전개하 였다. 그는 강( 姜 )모에게 글을 부탁하고, 양자 최윤식( 崔 允 植 )은 십 수매를 만들어 2월 하순 경 11개 면장에게 배부하였다. 이어 3월 27일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나 3월 31일에는 통지를 받고 오후 11시경 면사무소 부근에 나가 300여명과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튿날에 도 오전 4시경 도곡리 면사무소 헌병주재소에서 2,000여명과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4월 3일에는 윤기영( 尹 璣 榮 ) 등과 주도하여 창리에서 강상 강하 양서 고읍 4개 면민 약 4,000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읍내 독립만세 여부를 논 의할 때, 최대현은 경성 사람이 양평에서 오늘 아침 피살된 모양인데, 그 사람은 국가를 위 44

총 설 해 순절한 것 이라 주장하고, 또한 양자가 사망하였는데도 군중이 머뭇거리므로 고읍 면사 무소에서 양근 읍내로 가지 않으면 안된다 고 호소하였다. 군중들은 옹암리와 용암리의 언 덕까지 만세 행진을 하였다. 청운에서는 3월 23일 용두리 장날 신재원( 申 在 元 ) 정경시( 鄭 慶 時 )가 시장 길에서 김종학 ( 金 鍾 學 ) 민주혁( 閔 周 爀 )에게 권유하여 4명은 여물리 다리 아래에서 조선독립기 3기를 만 들었다. 이들은 오후 3시 40분경 김종학 민주혁이 조선독립기를 흔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에 이르러 150여명 군중과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헌병 상등병 좌좌목정길 ( 佐 佐 木 政 吉 ) 등이 군중을 해산시키고, 주도 인사를 체포하였다. 갈산에서는 3월 24일 양근리시장에서 약 1,000명이 조선독립만세운동을 고창하였다. 이 신규( 李 藎 珪 )는 독립선언서 수십매와 대한독립회( 大 韓 獨 立 會 )의 격문 수십매를 가지고 3월 23일 경성을 출발하여 다음날 양근리에 도착하였다. 그가 시장 큰 길에서 조선 민족은 이 기회를 타서 일본 제국의 굴레를 벗어나 독립하지 않으면 안된다 고 연설하고 선언서와 격 문 수십매를 배포하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 군중들도 호응하였다. 오후 2시경부터 약 400명이 헌병분견소 면사무소 군청 박희영( 朴 熙 英 ) 집을 다니며 공격 파괴하는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군청에서는 유리창 국세 및 제세금부징수 정리부 등이 파손되었다. 2 시 40분경 시장에서 이진규 곽영준이 헌병분견소에 인치되자, 군중들은 체포자를 내 놓으 라! 고 외치며 사무실 등을 파괴하였다. 김경성( 金 慶 星 )은 3시경 3~40명과 면사무소로 가서 면장 김찬제( 金 讚 濟 )에게 만세를 부르라 고 요구하고, 군중도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라 고 강박하였다. 이용준( 李 容 俊 )은 면장과 면서기를 밖으로 끌어내고, 이용준 김경성이 면장을 폭행하고 군중도 가세하여 약 30분간 옥신각신하였다. 군중들은 사무실 창문 유리를 부쉈 다. 군중들은 다시 양근리시장에서 만세를 불렀고, 한봉철( 韓 奉 喆 ) 등은 우편소 유리를 부수 고, 김석봉( 金 石 鳳 ) 등은 박희영 집에서 군수와 면장이 잠복하였을 것이다 며 방을 뒤지기 도 하였다. 이 독립운동으로 시장이 열리지 못하였다. 강상에서는 3월 29일 신석영( 辛 錫 永 )이 교평리 주민 약 100명과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 다. 갈산 양근리 장( 場 )이 정지되어 한강 건너편 교평리 도선장에 주민들이 모였다. 그는 조 선이 이미 독립하였다 며 도선장에 세워 둔 태극기를 뽑아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이어 군중도 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45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용문에서는 3월 30일 광탄리 신순근( 辛 淳 根 )이 한국독립기를 흔들며 주민과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조영호( 趙 瑛 鎬 )는 독립은 천운이니, 사람의 힘이 미칠 바가 아니다. 일본인은 모 두 본적지에 귀국하라 는 일본인 퇴각을 주장하였다. 양서에서는 4월 2일 여운긍( 呂 運 兢 ) 여광현( 呂 光 鉉 )이 정오쯤 면사무소에서 1,000여명 군중 속에 들어가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경성 학생과 주민들이 3일에도 독립만 세를 결의하고 고읍 창리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12) 수원군 수원의 대표적 독립운동으로 3월 28일 송산에서, 4월 3일 장안 우정면에서 순사를 응징 하였다. 송산에서는 먼저 3월 26일 오후 5시경 홍면( 洪 土 冕 冕 玉 )이 사강리 면사무소 부근에 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왕광연( 王 光 演 國 臣 ) 등 수십 명도 면사무소에서 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이어 홍면 왕광연 등은 3월 28일 오후 2시경 면사무 소 뒷산 및 부근에서 홍관후( 洪 寬 厚 在 範 ) 문상익( 文 相 翊 ) 등 1,000여명과 태극기를 흔들 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순사부장 야구광삼( 野 口 廣 三 )이 홍면 등 3명을 체포하고, 홍면 의 행동을 제지하려고 권총을 발사하여 홍면의 등에 명중시켰다. 홍면은 격노하며 군중에게 자기를 쏜 순사를 쳐 죽이라 고 외쳤다. 김용준( 金 容 俊 用 俊 ) 민용운( 閔 龍 雲 ) 문상익 왕광연 등도 계속 순사를 응징하라 고 또는 쳐 죽이라 고 주장하였다. 순사부장은 일시 피 난을 위해 오후 3시경 자전거를 타고 탈출을 시도하였다. 순사부장이 주재소에서 동쪽 약 60간( 間 ) 떨어진 지점까지 도주하였다. 그러자 왕광연 홍관후 홍준옥( 洪 埈 玉 ) 김명제( 金 命 濟 明 濟 道 鉉 ) 등이 돌을 던져 순사부장을 자전거에서 떨어뜨리고 돌 몽둥이 등으로 난타하여 사망시켰다. 장안 우정에서는 4월 3일 장안 우정 면민들이 각 면사무소와 화수주재소를 파괴하고 순 사를 응징하는 독립운동이 있었다. 먼저 4월 2일 밤 장안 우정 면내 각처 산에서 횃불을 올 리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때 차병혁( 車 炳 赫 ) 차병한( 車 炳 漢 ) 등은 장안 우정 면사무소 및 화수주재소를 습격하기로 결의하고, 이튿날 오전 장안 면민에게 몽둥이를 가지고 면사무 소로 집합하라고 통지하였다. 우선 면사무소로 가서 면장 김현묵( 金 賢 默 )에게 면사무를 중 지하고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권유하였다. 한편 차희식( 車 喜 植 鳳 習 ) 장소진( 張 韶 鎭 鳳 46

총 설 來 ) 김흥식( 金 興 植 德 致 ) 장제덕( 張 濟 德 順 明 順 命 )은 장안면사무소에 집합하라는 통 지를 받고 우정 면민들에게 통지하여 약 200여명이 다수가 몽둥이를 가지고 장안면사무소 로 갔다. 차병혁 차병한은 면장에게 조선을 독립시킬 목적으로 독립만세를 외칠 것 을 권 유하였다. 면장은 조선 독립의 목적을 달성함에는 결사로써 일에 임하지 않으면 안된다 고 격려하였다. 군중들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몽둥이 돌로 면사무소를 공격하여 서류 집기들 을 파기하여 불태웠고 유리문 바람벽 등을 파괴하였다. 이후 차병한 등은 쌍봉산에 올라 독 립만세를 외쳤다. 오후 3시경 1,000여명 군중은 우정면사무소로 이동하였다. 군중들은 면사 무소를 공격하여 유리문 창 바람벽 등을 파괴하였고, 정순영은 힘껏 만세! 오늘이 밥 먹 는 마지막이다 고 외치며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이어 차병한의 지휘로 군중들은 한각리를 거쳐 5시경 화수경찰관주재소에 도착하고, 군중은 2,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차인범( 車 仁 範 ) 등이 독립만세를 외치고, 차병한 김흥식 장소진 등이 투석하고, 이영쇠( 李 永 釗 ) 등은 일 본 기와집에 불을 놓았다. 그러자 주재소에서 순사 천단풍태랑( 川 端 豊 太 郞 )은 총을 쏘며 나 와 도망쳤다. 차희식 장소진 이영쇠 등이 추적하여 몽둥이로 구타하고 돌로 처서 뇌진탕 과 두개골 출혈로 사망시켰다. 성호에서는 3월 29일 오산 장날 김경도( 金 敬 道 ) 정규환( 鄭 奎 煥 ) 공칠보( 孔 七 甫 ) 등이 오 후 5시경 우시장에서 300여명 군중과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고, 이어 면사무소 주재소 부 근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순사 대목희시( 大 木 喜 市 ) 등이 시장에서 해산을 강요하였으 나 군중들은 불응하였다. 대목순사가 태극기를 빼앗으려 하자, 유진홍( 兪 鎭 弘 ) 등이 반항하 였다. 이어 순사는 유진홍 안낙순( 安 樂 淳 樂 順 ) 등 6 7명을 인치하였다. 6시경 군중들은 인치된 자를 석방하라. 그렇지 않으면 이 곳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겠다 고 맞섰다. 대 목순사가 인수할 대표자를 내라 하여 김경도 이성구( 李 成 九 ) 등이 대표자가 되어 해산을 조건으로 구금 인사들을 석방하였다. 군중들은 만세를 부르고 해산하였다. 이성구 이규선 ( 李 圭 璇 ) 김용준( 金 用 俊 ) 등은 경찰도 이와 같은데 유독 면장 유진렬( 劉 鎭 烈 )만 반대한다 며 500여명과 면사무소로 이동하였다. 유진홍이 면서기 심원직( 沈 遠 稷 )에게 면장의 소재를 물었으나 모른다고 대답하자, 군중들은 돌을 던져 사무실 창유리 창문 등을 부수어 파괴하 였다. 곧 대목순사가 철도원호대와 급히 면사무소로 출동하고, 면장 집으로 가는 군중들을 제지하였다. 그러자 7~800명의 군중들은 재차 주재소에 투석하고, 우편소를 공격하여 유리 47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창 63장과 기타 기물 십수 점을 파괴하고 또 부근 일본인 상점과 주택에도 돌이나 몽둥이로 공격하여 유리창 판자문 등을 파손시켰다. 반월에서는 3월 31일 유익수( 柳 益 秀 )가 시장에서 면서기를 만나 어제 시흥 수암리 독립만 세를 이야기하자, 면서기는 군중 지휘를 부탁하였다. 그는 5~600명에게 폭행 협박을 말도 록 주의하고 군중과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해산하였다. 13) 파주군 와석에서는 3월 10일에 임명애( 林 明 愛 )가 교하보통학교 운동장에서 학생 100여명에게 조 선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25일에는 김수덕( 金 守 德 ) 등이 염규호( 廉 圭 浩 ) 원고로 오는 28일 이민 일동은 윤환산으로 집합하라 는 유인물 60매를 만들고, 김창실이 구당 당하리에 배부 하였다. 광탄에서는 3월 27일 조무쇠( 曺 茂 釗 ) 등이 발랑리 주민 수백명과 면사무소에서 만세를 외치 고, 이튿날에는 면민 1,000여명과 면사무소에서 봉일천 시장까지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14) 광주군 동부에서는 3월 20일 26일 마을 구장들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20일 에 망월리 구장 김교영( 金 敎 永 )이 타인의 권유를 받아 주민 9명과 면사무소 앞에서 오후 1시 경부터 4시경까지 3시간 동안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3월 26일에는 김홍렬( 金 弘 烈 )이 오후 10시경 풍산리 주민 약 20명과 산에서 횃불을 올리고 다음날 오전 3시경까지 조선독립 만세를 연호하였다. 교산리 구장 이대헌( 李 大 憲 )은 면사무소 길가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주 민에게 만세를 부르러 모이라 고 전달하였다. 다음날 오전 2시경 십수 명과 태극기를 흔들 며 앞산에서 횃불을 올리고 약 1시간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오전 3시경 하산하여 3시 30분 경 면사무소에서 약 30분 가량 만세를 연호하고 일단 해산하였다. 그리고 11시경 30여명과 다시 면사무소에 가서 오후 2시경까지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즉 그는 12시간 동안 교 산리 일대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중대에서는 3월 21일 장덕균( 張 德 均 ) 김준현( 金 俊 賢 )이 선언서 20매와 조선독립신문 30매를 인쇄하였다. 장덕균은 3월 25일 정석호( 鄭 錫 浩 )에게 유인물 2매, 건너편 한강에서 48

총 설 미상자에게 독립신문 1매를 교부하였다. 3월 25일에는 이시종( 李 時 鍾 )이 저녁 때 이윤종 ( 李 胤 鍾 )에게 조선은 독립해야만 한다 는 12개 항목이 기재된 조선독립신문 을 빌려 읽었 다. 그는 다음날 오후 3시부터 6시경까지 천중선( 千 重 善 仲 善 ) 등 송파리 주민 300여명과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이어 7시경 대왕 수서리로 가서 주민 약 2~30명 선두에서 만세 를 외치며 마을을 순회하였다. 또한 100여명을 이끌고 대왕면사무소에서 약 20분간 독립만 세를 외치고 남포 등불을 켜서 조선은 독립하지 않으면 안된다 는 독립신문 일부를 읽고 조선이 독립하면 부역 세금 등이 필요없게 될 것이라 고 주장하였다. 서부에서는 3월 27일 구희서( 具 羲 書 )가 감일리 주민 약 40명과 면사무소에서 조선독립만 세를 고창하고, 상일리 헌병주재소 앞에서도 독립만세를 외쳤다. 돌마에서는 3월 28일 한백봉( 韓 白 鳳 )이 율리 주민 약 50명과 인근 주민들이 합세한 수백 명과 오후 8시경부터 이튿날 저녁때까지 면내를 순회하며 태극기를 흔들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오포에서는 3월 28일 고산 문형 양벌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정제신( 鄭 濟 莘 )은 오전 1시경 고산리에서 약 40명과 뒷산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고, 11시경 약 1,000명과 면사무소 군청 앞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김인택( 金 仁 澤 ) 임무경( 林 武 京 ) 은 오전 1시 문형리에서 약 30명과 부근 산위에서 횃불을 올리고 약 30분간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고, 오후 2시 군청 앞에서 약 1,000명과 독립만세를 부르고 경안리 일대를 순회하였 다. 유면영( 柳 冕 永 )은 오전 9시경 양벌리에서 약 600명에게 금후 조선이 독립하면 이런 경 사는 또 없을 것이니, 일동은 만세를 부르라, 이번에 독립을 할 터이니, 이 만큼 기쁜 일은 없을 것이라 고 연설을 하였다. 이어 군청에 가면 만일 헌병과 보조원이 군중에게 발포하더 라도 반드시 일심동체가 되어 그런 자는 체포하자 며 군청에 가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실촌에서는 4월 6일 이선리 구장 오수식( 吳 壽 軾 )이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경까지 약 50여 명과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만선리 주민 약 200여명도 합세하였다. 15) 장단군 장도에서는 3월 25일부터 30일까지 각 마을 산에서 횃불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수봉( 李 壽 奉 ) 등이 3월 25일부터 3일 동안 반룡산에서, 이택신( 李 澤 新 )이 3월 28 29일경 49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약 30여명과 태학산에서, 이윤성( 李 潤 成 )이 3월 30일 약 10명과 신촌동 동산에서 횃불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병성( 李 炳 星 )은 3월 29일부터 주민과 반룡산에서 횃불을 올리고 대한독립 만세를 약 1시간 정도씩 3일 밤을 불렀다. 그는 3월 30일 면사무소 앞에 집합하라 는 통문 을 각 마을에 배포하고, 이튿날 태극기를 게시판에 게시하고 약 20명을 이끌고 면사무소로 갔다. 정오경 면사무소에 약 200명이 모였고, 이병성 등은 태극기를 문기둥에 세우고 조선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어 면장 윤좌영( 尹 佐 榮 )에게 면사무를 보지 말라 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게 하고, 면장에게 국기(일장기)를 내 놓으라 하여 소사에게 건네 받았다. 일장기를 태 우라는 요구를 면장이 거절하자, 지금부터 이병성은 대일본 국기를 불태워 버린다 말하고 부근 밭에서 태웠다. 우정시( 禹 楨 時 ) 우정화( 禹 楨 和 )는 3월 29일 밤 항동리에서 주민 수십 명을 이끌고 도덕암산 시라위산에서 횃불을 올리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이튿날 밤에도 주민 약 70명과 태극기를 앞세우고 고덕리 면사무소에서, 오후 11시경에는 주민 약 150명과 면장 윤좌영 집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또한 4월 2일 오전 10시부터 정오 무 렵까지 구시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주민들과 고랑포시장에 가는 약 100명과 조선독립만 세를 고창하였다. 진남에서는 3월 26일 이창영( 李 昶 永 ) 등이 오후 10시 동장리 성화학교 뒤에서 주민 100 여명과 대한국독립만세를 외치고 그의 제의로 면사무소로 갔다. 이창영 강규수( 姜 奎 秀 ) 는 면장은 나오라, 면사무소를 쳐부숴라! 고 외치고, 군중들은 투석하여 유리 21장를 깨 뜨렸다. 진서에서는 3월 29일 이봉철( 李 奉 哲 )이 오후 11시경 100여명과 면사무소에서 한국독립만 세를 외쳤다. 면장 송원섭( 宋 遠 燮 )에게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고, 이봉철 등은 한국독립만세 를 부르며 일장기 2기를 면민 앞에서 불태워 버렸다. 대남에서는 4월 1일 함정원( 咸 貞 元 ) 이재삼( 李 在 三 )이 이날 밤 동면 각자는 작은 태극기 1기, 5명마다 횃불 1개, 각동마다 대형 태극기 1기를 가지고 대남면 위천리 용산동에 집합하 라 는 통지 수통을 동장들에게 보내 주민 회람을 시키고 밤에 약 100명과 면사무소 명성학 교 앞마당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4월 3일에도 오후 1시경 약 1,000명과 용산동에서 한국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상도에서는 4월 9일 공세영( 孔 世 榮 )이 경성결사단( 京 城 決 死 團 ) 파견원으로 이헌영( 李 憲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