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1. 판결문 해제 운동 때 조선총독부의 재판소와 재판관 윤 선 자 1) 조선총독부의 재판소 재판제도 및 재판소는 일제가 합리적 사법을 가장하여 한민족을 탄압하기 위한 절차 및 시설이었다. 1909년 7월 12일 한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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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제 Ⅱ. 해제 자료총서Ⅰ 판결문 해제 수형기록카드 해제 37

2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1. 판결문 해제 운동 때 조선총독부의 재판소와 재판관 윤 선 자 1) 조선총독부의 재판소 재판제도 및 재판소는 일제가 합리적 사법을 가장하여 한민족을 탄압하기 위한 절차 및 시설이었다. 1909년 7월 12일 한국의 사법 및 감옥사무를 일본정부에 위탁하는 건에 관한 각서 가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사법권은 일제에게 장악되었다. 이에 따라 10월 16일 통감부재판소령 (일본칙령 제236호)이 공포되었고, 기존의 재판소는 10월 31일자로 폐지되었으며, 11월 1일자로 통감부재판소에 사법권이 이양되어 대한제국의 사법권은 일제에 의하여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통감부는 전국에 고등법원(이전의 대심원) 1, 공소원( 控 訴 院 ) 3, 지방재판소 8(경성 공주 광주 대구 부산 평양 함흥 해주), 구( 區 )재판소 103개소를 설치하였으며 11월 1일 개청하였다. 동시에 통감부 지방재판소 지부 설치의 건 (통감부령 제29호)을 공포하여 지방재판소지부 9개(목포 신의주 원산 인천 전주 진주 청주 청진 춘천)를 설치하여 지방재판소의 기능을 분담하고 각 구( 區 )재판소의 일부를 관할하였다. 1 강제 병합 이후 조선총독부는 1910년 10월 1일자로 통감부재판소를 조선총독부재판소로 개칭하고, 조선총독부재판소의 명칭, 위치 및 관할구역 (조선총독부령 제9호)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이는 통감부재판소령 을 대부분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 명칭만 변경한 것이었다. 103개였던 구( 區 )재판소는 35개를 폐지하고 68개만을 설치하였다. 반면 전남대 사학과 교수. 주요 논저로는 1920년대 초반 김경천의 항일무장투쟁,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2,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5 ; 나주독립운동사, 전남대학교출판부, 2015(공저) ; 한국독립운동과 권기옥의 비상, 한국근현대사연구 69, 한국근현대 사학회, 2014 ; 한말 박에스더의 미국유학과 의료활동, 여성과 역사 20, 한국여성사학회, 2014 ; 중국인 저술 안중근 전기 연구, 교회사학 9, 수원교회사연구소, 2012 ; 섬진강유역의 일본군 성노예 기념물 평화의 탑 건립배경과 주체 : 망각에서 기 억으로, 여성과 역사 16, 한국여성사학회, 2012 ; 영원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요인 김철, 역사공간, 2010 ; 광주 전남의 독 립운동사적지 I II,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0(공저) ; 국내항일유적지, 경인문화사, 2009(공저) 외 다수가 있다. 1 주상훈 전봉희, 일제강점기 사법시설의 계획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26, 대한건축학회, 2010, 187쪽. 38

3 해제 조선총독부 지방재판소지부 (조선총독부령 제10호)는 3개가 추가되어 12개가 운영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총독부의 재판소는 고등법원 1(경성), 공소원 3, 지방재판소 8, 지방재판소 지부 12, 구재판소 68개소 등 모두 92개소로 조직되었다. 그 내용이 조선총독부관보 에 다음과 같이 게시되었다. 조선총독부재판소의 명칭, 위치 및 관할구역 은 다음과 같다. <표 1> 조선총독부재판소의 명칭 위치 관할구역 고등 법원 공소원 지방재 판소 區 재 판소 道 관할구역 부 군 경성 경성부, 양주, 고양, 영평, 포천, 가평 개성 개성, 장단, 풍덕, 교하, 파주, 적성, 연천, 마전, 삭녕 여주 경기 여주, 음죽, 이천, 양평 경성 수원 인천 수원, 과천, 시흥, 안산, 남양, 광주, 용인, 양지, 진위, 음성, 안성, 죽산 인천부, 부평, 양천, 김포, 통진, 강화, 교동 춘천 춘천, 화천, 양구, 인제 철원 강원 철원, 안성, 이천, 평강, 금성, 회양, 김화 원주 원주, 횡성, 홍천, 평창, 정선, 영월 공주 공주, 정산, 연기 대전 회덕, 진잠, 연산 강경 석성, 부여, 노성, 은진, 임천, 한산, 오산(청도) 홍산 충남 홍산, 비인, 서천, 염포, 보령, 오산(청도 제외) 공주 홍주 서산 홍주, 결성, 청양, 대흥, 예산, 덕산, 면천, 당진 서산, 해미, 태안 경성 경성 천안 천안, 목천, 전의, 직산, 평택, 아산, 신창, 온양 청주 청주, 진천, 청안, 문의, 회인, 보은, 청산 영동 충북 영동, 옥천, 황간 충주 충주, 음성, 괴산, 연풍, 청풍, 제천, 영춘, 단양 함흥 함흥, 정평, 장진, 홍원 북청 원산 함남 북청, 이원, 서천, 갑산, 삼수 원산부, 문천, 안변, 강원도(고성), 통천 영흥 영흥, 고원 강릉 강릉, 양양, 간성 함흥 울진 울진, 평해, 삼척 청진 청진부, 무산 경성 강원 경성, 명천 성진 성진, 길주 회령 회령, 종성, 온성 경흥 경흥, 경원 39

4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고등 법원 경성 공소원 지방재 판소 평양 대구 평양 해주 대구 부산 광주 區 재 판소 평양 안주 덕천 진남포 재령 송화 신의주 의주 정주 영변 강계 초산 해주 서흥 황주 대구 김천 상주 안동 의성 경주 영덕 부산 울산 마산 밀양 용남 진주 거창 광주 순천 목포 장흥 제주 전주 금산 남원 군산 고부 道 평남 황해 평북 황해 경북 경남 전남 전북 관할구역 부 군 평양부, 중화, 상원, 강동, 성천, 양덕, 순안 안주, 숙천, 영유, 개천, 순천 덕천, 영원, 맹산 진남포부, 용강, 강서, 증산 재령, 안악, 신천 송화, 장연, 은율 신의주, 용천, 철산 신의주(고성면, 광성면, 고읍면, 비현면, 진유면, 위화면, 함 원면, 월화면 제외), 삭주, 창성 정주, 곽산, 선천, 구성, 가산, 박천 영변, 태천, 운산, 희천 강계, 자성, 후창 초산, 벽동, 위원 해주, 옹진, 연안, 백천 서흥, 수안, 곡산, 신계, 평산, 금천, 토산 황주, 봉산 대구부, 칠곡, 경산, 자인, 청도, 현풍, 고령, 성주 금산, 지례, 개녕, 선산, 인동 상주, 함창, 문경, 용궁 안동, 예천, 영천, 풍기, 순흥, 봉화, 예안, 영양, 진보, 청송 의성, 의흥, 군위, 비안 경주, 하양, 신녕, 영천, 연일, 흥해, 장기 영덕, 영해, 청하 부산부, 김해, 양산, 기장, 울도 울산, 언양 마산부, 함양 밀양, 영산, 창녕 용남, 고성, 거제 진주, 사천, 곤양, 하동, 남해, 단성, 삼가, 합천, 초계, 의녕 거창, 안의, 함양, 산청 광주, 장성, 담양, 창평, 곡성, 구례, 동복, 능주, 남평, 나주 순천, 광양, 여수, 돌산, 흥양 목포부, 지도, 영광, 함평 장흥, 영암, 보성, 강진, 해남, 완도, 진도 제주, 대정, 정의 전주, 금구, 김제, 익산, 여산, 고산, 진안, 장수 금산, 진산, 용담, 무주 남원, 순창, 임실, 운봉 군산부, 만경, 임피, 함열, 용안 고부, 부안, 태인, 정읍, 흥덕, 고창, 무장 출전 : 조선총독부관보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9호. 40

5 해제 2) 조선총독부의 재판관 3 1운동 참여자들에게 일본인 법관은 일본법 내지 조선총독부 법령에 의하여 중형을 내렸다. 통감부재판소령 에 의해 법관은 많은 숫자가 한인에서 일본인으로 대치되어 1909년 280명의 판사 중 일본인 판사 192명,(68.6%) 한인 판사는 88명이었다. 1910년에는 254명의 판사 중 일본인 판사 183명(72.1%), 한인 판사 71명이었고, 검사는 60명 중 일본인 검사 54명(90%), 한인 검사 6명이었다. 1912년에는 199명의 판사 중 일본인 판사 161명(80.9%), 한인 판사 38명이었고, 검사는 57명 중 일본인 검사 54명(94.7%), 한인 검사 3명이었다. 2 시간이 갈수록 판사의 숫자가 감소하였는데 특히 한인 판사의 숫자가 격감하였다. 판사의 숫자는 1909년 280명에서 1910년 254명으로 약 10%가 감소하였고 1912년에는 199명으로 1909년 대비 29%, 1910년 대비 약 22%가 감소하였다. 한인 판사는 1909년 88명에서 1910년 71명으로 약 20%가 감소하였고 1912년에는 38명으로 1909년 대비 57%, 1910년 대비 47%가 급감하였다. 검사는 일본인 검사가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조선총독부 편찬, 제국지방행정학회( 帝 國 地 方 行 政 學 會 ) 발행 1916년판 조선법령집람 ( 朝 鮮 法 令 輯 覽 )의 조선총독부재판소 및 검사국 정원표 (조선총독부훈령)에 의하면 고등법원판사는 8명으로 그 중 한인 판사는 1명(12.5%)이었다. 복심법원판사는 27명으로 그 중 한인 판사는 2명(7.4%), 지방법원 및 동 지청 판사는 161명, 그 중 한인 판사는 32명(19.9%)이었다. 총수는 196명이었다. 또한 광주지방법원과 지청에는 일본인 판사 21명, 한인 판사가 6명으로 총수는 27명이었다. 3 1운동 후인 1922년판 조선법령집람 의 조선총독부재판소 직원정원령 (1921년 5월 칙령 제209호)에 의하면, 고등법원판사 8명, 고등법원검사국 3명, 복심법원 32명, 복심법원검사국 9명, 지방법원 161명이었다. 3 고등법원판사는 8명으로 변함이 없고, 복심법원판사는 5명이 증가하여 32명이었다. 1932년판 조선법령집람 의 조선총독부재판소 직원정원령 (칙령)을 보면 고등법원판사는 8명으로 변함이 없고, 복심법원판사도 32명으로 같다. 지방법원 및 동 지청 판사는 2 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 시정연보, 1910, 97쪽 ; 1912, 63쪽 ; Grajdanzev, Modern Korea, 1944, 251 : 김운태, 일본제국주의의 한국통치, 박영사, 1986, 1999중판, 194쪽. 3 帝 國 地 方 行 政 學 會, 朝 鮮 法 令 輯 覽, 帝 國 地 方 行 政 學 會, 1922, 40쪽. 41

6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5명이 감소하여 156명이다. 총수는 196명으로 1916년과 같다. 따라서 3 1운동이 일어난 때의 재판관 총수도 196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이 3 1운동에 참여한 엄청난 숫자의 한인들을 단시간에 처리하였다 운동 판결문 1) 3 1운동 판결문 3 1운동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대부분 일제식민통치기관에 의해 만들어졌다. 3 1운동 당시 47,000여 명이 체포되어 단기간에 재판을 받았고, 이 때의 판결문이 많이 남아 있다. 3 1운동과 관련한 수많은 판결문은 일제의 잘못된 식민통치를 스스로 진단하고 스스로에게 철퇴를 내린 증거이고, 피고인이 되었던 한국인에게는 스스로의 권리보장과 나라의 독립옹호를 위해 싸운 증거이다 년 말 기준 국가기록원 소장 독립운동 관련 기록물 6 정리 현황을 보면 판결문은 19,167건이다. 재판소의 판결이 나오기까지는 경찰의 신문조서, 예심심문조서, 예심종결결정, 공판시말서 등 여러 가지 문서들이 만들어진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으로 1919년 3월 1일 서울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된 최정숙( 崔 貞 淑 )의 재판 관련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의 <표 2>는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의 판결이 있기까지 최정숙의 재판 관련 문서들을 정리한 것이다. 신문조서에는 최정숙 본인의 신문조서뿐 아니라 동료들의 신문조서도 포함된다. 신문조서는 3개월 동안 3번이나 만들어졌다.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체포된 모든 만세시위자들에게는 동료들의 신문조서도 만들어졌을 것이다. 또한 경찰이 그녀의 학교생활을 조사하였는데, 이러한 것도 모든 만세시위자들에게 같았을 것이다. 4 笹 川 紀 勝 저, 이제수 역, 삼일운동과 행정법학, 법사학연구 26, 한국법사학회, 2002, 80쪽. 5 김승일, 국가기록원 소장의 3 1운동 판결문의 가치와 보존상태, 한국학논총 35,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1, 102쪽. 6 국가기록원에서 홈페이지에 탑재하여 소개하는 독립운동 관련 기록물은 정확히 말하자면 일제강점기 형사소송 행형기록물 중 독립운동과 관련한 기록물이다.(국가기록원 홈페이지 참조) 42

7 해제 번호 문서종류 문서명 문서생산 비고 1 신문조서 최정숙 신문조서 2 최정숙 신문조서 3 최정숙 신문조서 4 최은희 신문조서 5 이명숙 신문조서 6 노순열 신문조서 <표 2> 최정숙의 재판 관련 문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 ) 경성지방법원 ( ) 경성지방법원 ( )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 )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 )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 ) 출전 및 소재지 한14, 1994 학교동료 한14, 1994 학교동료 한14, 1994 학교동료 한14, 경성여자고등 보통학교 시위 관련자 동정 8 및 성행 조회 최정숙 보고서 경성 종로경찰서장 ( ) 학생들의 동정과 품행 조회 한13, 청구의견 10 의견서 11 예심종결 결정서 12 공판시말서 판결문 15 수형인 명부 16 상소포기 신청서 경성지방법원 ( )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 ) 경성지방법원 ( ) 경성지방법원 ( ) 경성지방법원 ( ) 경성지방법원 ( )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 ) 서대문 감옥 ( ) 한16, 1994 한17, 1994 국가기록원 한18, 1994 국가기록원 국가기록원 한18, 출전 : 한금순, 최정숙의 3 1운동 재판 관련 문서 분석, 제주도연구 44, 제주학회, 2015, 34~35쪽. 비고 : 한13, 1994 는 1994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3권을 말한다. 43

8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신문조서 류는 체포된 후 받은 기록으로 경무총감부에서 작성하였다. 성명, 연령, 신분, 직업, 주소, 본적지 및 출생지 등을 확인한 후 만세운동에 참여한 사실을 신문하였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시위관련자 동정 및 성행 조회 는 학생들의 동정과 품행을 조회한 문서로 종로경찰서장이 1919년 3월 27일 경성지방법원 검사정에 보냈다. 청구의견 은 경성지방법원 예심계 판사가 예심으로 더 이상 취조할 것이 없으니 형사소송법에 의해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의 의견을 청구한다는 내용의 문서이다. 의견서 는 청구의견 에 대한 답장의 형태로, 신문 등의 조사 절차를 거쳐 예심한 결과를 받아보고 공판에 부치라는 의견을 경성지방법원으로 보낸 것이다. 예심종결 결정서 는 예심을 마치고 사건을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부치기로 결정한다는 문서이다. 공판시말서 는 공판을 어떻게 진행했는지 그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경성지방법원 공개 법정에서 판사와 검사 변호사가 등원하고 피고인들이 출정하였으며, 범죄 사실을 확인받고 판결을 언도하는 등의 재판 과정을 기록한 문서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작성되는 판결문 은 재판에서 판결 받은 사항이 기록된 문서이다. 판결 이후에도 만들어진 문서가 있었으니 판결 이후 수형 상태를 기록한 수형인 명부, 상소를 포기하겠다는 신청을 한 상소포기 신청서 로 서대문감옥에서 생산되었다 운동에 참여한 대부분의 여학생들에게 재판을 위하여 최정숙과 같은 과정이 적용되었고 같은 내용의 문서들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판결문 은 피의자가 재판에 회부되어 판사로부터 판결을 받은 내용을 적은 기록이다. 형을 치르게 된 원인과 판결 내용이 기록되었다. 판결문은 1 재판이 이루어진 법원의 이름, 2 판결 이라는 표제, 3 사건번호와 사건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사건 표시, 4 원고의 인적 사항, 5 피고의 인적 사항, 6 공판 관여 검사, 7 변호인, 8 원심 판결(상소심 판결에 한하여), 9 변론 종결 일자, 10 판결 선고 일자, 11 주문, 12 청구 취지 또는 항소 취지, 13 이유, 14 법관의 서명 날인으로 구성된다. 주문 에는 확정된 피고인의 범죄사실에 법률을 적용한 결과 피고인이 받게 될 제재의 구체적 내용이 표현된다. 즉 주문 은 재판의 대상이 된 사실에 대한 최종적인 결론 또는 재판의 결론적인 부분 이다. 이유 는 재판관(들)이 범죄 사실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즉 피고인의 범죄 행위를 증거 조사를 토대로 설명하는데, 이 때 범죄구성 요소들이 드러나는 개별 사실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주문 과 같은 판결을 7 한금순, 최정숙의 3 1운동 재판 관련 문서 분석, 제주도연구 44, 제주학회, 2015, 37쪽. 44

9 해제 내리는 이유를 제시한다. 그러므로 판결문의 내용을 파악하게 하는 부분이다. 8 이상과 같이 구성된 판결문에서는 다섯 가지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9 1 판결을 받은 사람의 인적 사항, 즉 피고인의 본적 주소 직업 인명 연령 등 개인의 신상정보, 2 판결 받을 당시의 죄명, 3 피고인에게 처해진 형량을 알 수 있다. 또한 4 판결 이유를 확인할 수 있는데 피고인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죄를 짓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알 수 있고,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한 이들을 파악할 수 있으며, 그것이 어떤 법률의 적용을 받아서 주문과 같이 판결을 받은 것인지 알 수 있으며, 5 언제, 어느 법원에서, 어떤 판사에 의해 판결을 받았는지도 알 수 있다. 3 1운동 판결문은 조선총독부의 의도를 충실히 대변하였다. 조선총독부는 판결문을 통해 제국 ( 帝 國 )질서를 위협하는 적대세력에 대한 탄압을 정당화하였다. 선동, 문란, 불온, 폭동 등의 부정적 언사로 점철된 3 1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판결내용은 조선총독부의 법정이 처음부터 객관적인 심판의 의도가 없었음을 드러냈다. 3 1운동 주동자들은 제국의 안위를 위해 희생되어야 할 존재로 사전에 결정되어 있었다. 10 그리고 이러한 판결은 3 1운동에 참여한 모든 한인들에게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3 1운동 판결문은 당시의 일반적인 사무서류용지를 둘러접은 갱지에 붓으로 때로는 펜으로, 그리고 종서( 縱 書 )로 쓰여져 있으며, 부책( 簿 冊 ) 형식으로 철되어 있다. 부책 별로 부책번호와 통하는 번호는 정수( 丁 數 )가 붙여져 있다. 부책에는 표지가 있는데, 표지에는 기재항목과 각 항목의 배치가 재판소 별로 통일되어 있지는 않다. 부책의 뒤표지는 조선총독부재판소가 작성한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명확하게 전후 정부기록보존소가 작성한 한글로 쓴 종이 조각의 부책이 첨부된 것도 있다. 부책의 보존과 열람의 편의를 위해서 판결문은 마이크로필름으로 복사되어 있다. 마이크로필름 중에는 판독할 수 없을 정도로 촬영 상태가 나쁜 것도 있는데, 촬영 이전의 원 자료 상태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다. 11 현재 국가기록원은 인터넷을 통하여 독립운동가들의 판결문을 공개하고 있다. 대부분의 8 박시현, 판결문의 특성, 열린정신 인문학연구 8, 원광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07, 181~182쪽. 9 김정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가출옥관계서류 에 대한 검토,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1,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2, 253쪽. 10 한기형, 법정의 기억 : 3 1운동, 법정서사 의 탈환 : 피검열 주체의 반식민 정치전략, 1919년 3월 1일에 묻다, 박헌호 류준필 편집,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9, 577쪽. 11 김승일, 국가기록원 소장의 3 1운동 판결문의 가치와 보존상태, 한국학논총 35,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1, 156쪽. 45

10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판결문이 원문과 함께 번역문도 탑재되어 있다. 몇 건의 판결문은 상고 기각된 내용이 고등법원 판결문의 뒷부분에 함께 철해져 있는데 분리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상고 기각된 내용이 번역문에는 첨부되지 않고, 판결문의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하는 첫 화면에도 언급이 없어 혼란스럽다. 인류가 저지른 많은 범죄들이 그 범죄자들에 의해, 범죄자들에게 고통당한 수많은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자료와 증거들에 의해 입증된다. 3 1운동 판결문들은 일본제국주의 국가권력이 한국 식민지민들에게 저질렀던 폭력의 실상을 그들이 작성하여 보여주는 자료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가 저질렀던 반인륜적인 행동들의 증거자료들이 폴란드의 아유슈비츠-비르케나우(Auschwitz-Birkenau Cincentration Camp) 수용소 등 많은 수용소의 전시실에, 독일의 뉘른베르그의 기념관(Memorium Nürenberger Prozesse) 12 에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그 자료들은 인류에게 경종을 울리고 진정한 반성과 참회를 요구한다. 3 1운동을 비롯하여 한국독립운동선상에서 저질러졌던 일제의 만행들에 대한 증거자료는 한국인들이 먼저 수집하는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을 토대로 폭력과 살상을 저질렀던 제국일본의 반성과 참회를 요구해야 한다. 1982년 당진군 대호지면 만세운동 참여자 34명의 경성복심법원 판결문(이인정 등 34명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이 발굴되고, 같은 해 대호지면 사무소에 소장되어 있던 수형인명부가 공개되고, 1990년에는 참여자들의 형사사건부(대전지검 공주지방 검찰청)와 남성우 판결문( , 공주지방법원 / , 경성복심법원)이 새롭게 발굴된 13 것처럼 3 1운동 참여자들의 자료 발굴 노력이 필요하다. 판결문을 비롯하여 관련 문서들의 발굴 가능성이 적지 않은데 특히 면사무소 등에 소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전반적인 조사가 요구된다. 반인륜적인 사고와 행동이 자행될 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고통당하고 피해를 입는 이들은 힘이 약한 어린이들과 여성들이다. 3 1운동 때도 마찬가지였다. 12 Bärenschanzstraße 72, Nürenberger Germany. 13 이성우, 대호지 3 1운동 자료의 성격, 충청문화연구 1,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2008, 240쪽. 46

11 해제 2) 3 1운동 판결문 공개 (1) 일제강점기 신문들에 공개된 3 1운동 판결문 3 1운동 판결문은 1919년 8월부터 매일신보 ( 每 日 申 報 )에 수록되었다. 1919년 8월 이전에는 피고인의 이름 형량 적용법규의 내용만을 알리는 짤막한 공판기사가, 8월 이후부터는 예심결정서의 부분 혹은 전문이 번역 게재되었다. 1919년 8월 3일, 조선총독부 판사 나가시마 무사시[ 永 島 武 藏 ]의 이름으로 작성된 만세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경성지방법원의 예심종결결정서 가 게재되었다. 제목은 손병희 등 47인 예심종결, 내란죄로 결정 이었다. 즉 소요사건에 관련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 중이던 손병희 이하 360명의 피고 중 손병희 외 46인에 대한 예심은 8월 1일로 결정하였더라 라고 앞에 쓰고 이어 47명의 행동이 내란죄에 해당한다고 설명하고, 47명을 경성부 가회동 170번지, 무직, 피고인, 손병희(63), 4월 8일생 과 같이 나열하였다. 이어 8월 8일과 8월 10일에는 수원사건 과 안성사건 의 예심결정서가 게재되었다. 14 9월 7일부터 11일까지 만세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의 예심결정서가 5회에 걸쳐 연재되었고, 15 9월 14일부터 17일까지 출판법 보안법 위반 피고인들의 예심종결결정서가 4회 게재되었다. 16 그리고 1920년 3월 23일부터 4월 14일까지 8회에 걸쳐 고등법원 손병희 이하 예심결정서 가 발표되었다. 17 매일신보 에 수록된 3 1운동 공판기의 특징은 조선총독부 사법기관의 입장을 부각시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조선총독부의 요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매일신보 의 준관보적 성격 때문이었다. 3 1운동 공판정이 제국과 식민지인의 투쟁하는 복수의 주체 공간이었지만 그 갈등을 묘사하지 않음으로써 매일신보 의 3 1운동 공판기는 식민지 재판정의 성격을 단성화( 單 性 化 )하였다 매일신보 , 수원소요사건 예심종결결정 ; , 안성의 최은식( 崔 殷 植 ) 등 126명 예심종결결정. 15 매일신보 , 소요학생의 예심종결서(1-5), 저저( 這 這 )히 판명된 피등( 彼 等 )의 죄상. 16 매일신보 , 출판보안법 위반범의 예심종결결정서. 17 매일신보 , 손병희 예심결정서 발표(1), 고등법원에서, 손( 孫 ) 이하 46명의 예심, 내란죄는 아니라고 ; , 손병희 예심결정서 발표(2) ; 손병희 예심결정서 발표(3). 18 한기형, 앞의 논문, 2009, 582쪽. 47

12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독립신문 은 1919년 10월 14일자에 철원독립군의 판결 이라는 제목으로 1919년 9월 25일 경성지방법원의 판결 결과를 다음과 같이 게재하였다. 거( 去 ) 4월 15일 강원도 철원군에 수백명의 독립군이 동 군수에게 시위운동에 참가하라 하고 대한국기를 가가에 양양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한 이학수( 李 學 洙 )씨 외 7명은 9월 25일에 좌기와 같이 언도되다. 이배근( 李 培 根 )씨 징역 6개월, 조덕근( 趙 德 行 )씨 2개월, 이학수씨 6개월, 송의선( 宋 義 宣 )씨 10개월, 이규정( 李 圭 貞 )씨 4개월, 이소희( 李 昭 姬 ) 여사 3개월, 윤상식( 尹 尙 植 )씨 6개월, 이각경( 李 珏 卿 ) 여사 4개월, 김경순( 金 敬 順 ) 여사 4개월, 곽진근( 郭 鎭 根 ) 여사 6개월, 김씨 3개월, 박창근( 朴 昌 根 )씨 6개월, 엄재형( 嚴 載 享 )씨 6개월, 박염응( 朴 廉 應 ) 4개월, 이용철( 李 容 喆 ) 이중근( 李 仲 根 ) 목기양( 睦 箕 陽 ) 罪. 19 그런데 독립신문 이 언급하고 있는 1919년 9월 25일자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은 현재 국가기록원에서 검색할 수 없다. 독립운동사자료집 제5권의 916~921쪽에서 해당 판결문을 찾을 수 있는데 번역문 뿐이다. 이 판결문에 언급된 이들 중 이학수와 곽진근의 1919년 11월 10일자 경성복심법원 판결문이 남아 있지만, 두 사람 외에는 위 날짜의 독립신문 에서 거론한 이들의 이름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독립신문 은 1920년 4월 1일자에, 매일신보 에 게재된 손병희 등 47인에 대한 예심결정서를 다음과 같이 일부 게재하였다. 지난 22일 적은 그 고등법원에서 손병희( 孫 秉 熙 )씨 이하 48지사( 志 士 )에 대한 예심결정서를 발표하였는데 소위 내란죄는 아니라 하여 본 사건의 소위 관할재판소를 경성지방법원으로 지정 하였다고. 48지사 경성 천도교 교주 손병희(60)(중략) 적지( 敵 紙 )에 게재된 예심종결결정서의 일부를 보건대 내란의 교사죄가 성립함에는 폭동을 수단으로 하여 정부를 전복하며 또는 방토( 邦 土 )를 참절( 僭 竊 )하며 기타 조헌( 朝 憲 )을 문란하는 목적을 달( 達 )할 것을 교사한 행위가 있음을 요한다. 고로 단( 單 )히 조선민족된 자는 최후의 1인 최후의 일각까지 독립의 의사를 발표하고 호상분기하야 제국의 패반( 覇 絆 )을 탈( 脫 )하고 조선의 독립을 도( 圖 )하여야 할 사( 事 )를 격려고무함에 지( 止 )하고 별( 別 )로히 폭동을 수단으로 하야 조선독립의 목적을 19 독립신문 , 철원독립군의 판결. 48

13 해제 달( 達 )할 것을 교사한 것이 아니면 비록 그 격려고무로 인하야 문득 폭행을 수단으로 하야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하는 거( 擧 )에 출( 出 )하는 자( 者 ) 있다 가정할지라도 이는 전( 專 )혀 그 자의 자발적 의사에 출( 出 )함이라 할지오 우( 右 ) 격려고무한 자에게 내란죄의 교사가 유( 有 )하다 할 것이 아니라 (하략) 20 동아일보 는 1920년 4월 창간 직후부터 3 1운동 판결문과 공판기를 집중적으로 게재하였다. 4월 6일부터 4월 18일까지 총 8회에 걸쳐 47인 예심결정서 를 연재하였다. 21 즉 손병희와 그 연루병( 連 累 並 ) 47인에 대한 고등법원의 예심이 결정되어 경성지방법원에 회부됨은 기위( 旣 爲 ) 세인이 공지하는 바이나 예심결정서의 전문은 아직 세간에 광포( 廣 布 )되지 아니하였기 사속구문( 事 屬 舊 聞 )이나 특히 이를 연재하여 해( 該 ) 공판의 진행에 주의하는 인사의 참고에 공( 供 )함 이라 하고 무직, 손병희, 60세 와 같이 손병희 등 47명을 언급하였다. 이어 해당 재판관의 이름을 언급하고 주문 을 수록하였다. 47인 이라는 표현은 만세운동 지도자를 뜻하는 표현이었다. 매일신보 가 사용한 손일파( 孫 一 派 ) 라는 표현과는 다른 내포를 갖고 있었다. 또한 매일신보 는 47명을 피고인 이라 하였지만, 동아일보 는 피고인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47명의 이름과 직업을 제시하였다. 결코 피고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47인 예심결정서 전문 공개는 3 1운동의 전모가 객관적으로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47인 예심결정서 는 3 1운동 참가자들의 불법성을 규명하기 위해 작성되었음에도 그 과정에서 운동지도자들의 성격, 그들의 사회적 이상과 활동 내용, 운동의 진행 상황 등을 상세하게 드러냈다. 7월 4일 지루한 예심 과정이 끝나고 3 1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본심 공판이 시작되었다. 동아일보 는 3 1운동 주동자 본심 공판기를 통해 피고인들의 자기 정당성을 스스로 진술하게 하고, 3 1운동의 촉발과 진행 과정에 대한 전면적인 재현을 묘사했으며, 주동자들에 대한 법적 처분의 부당성을 지속적으로 암시하였다 독립신문 , 대한민족대표 손병희씨 이하 48지사( 志 士 )에 대한 적의 예심결정 소위 내난죄는 아니라고. 21 동아일보 , 47인예심결정서 : 제1회, 전8회) ~ , 47인예심결정서 : 제8회, 전8회). 22 한기형, 앞의 논문, 2009, 585~591쪽. 49

14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즉 일제강점기에는 수많은 3 1운동 관련 판결문 중에 극히 일부가 신문들을 통하여 공개되었다. 일제의 철저한 독립운동 탄압으로 독립운동가 판결 내용은 대부분 공개되지 않았다. (2) 해방 이후 3 1운동 판결문 자료집 편찬 해방 이후 3 1운동 판결문은 1959년 이병헌 편집 출판의 3 1운동비사( 秘 史 ), 23 강덕상 편집 출판의 현대사자료 (26), 24 김정명 편집 출판의 조선독립운동 Ⅰ 25 에 수록되었다. 그런데 이들 책에서는 각 판결의 성격을 조명하는데 필요한 예심에서 고등법원 판결까지의 판결의 흐름을 알기에는 한계가 있다. 26 더구나 강덕상과 김정명이 편집 출판한 책은 일본에서 일본어로 출판되어 아쉬움이 있었다. 이후 1972년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에서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 5권으로 3 1운동 판결문이 한글로 번역 수록되었다. 삼일운동재판기록 이라는 부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자료집에는 1919~1921년에 기소 판시된 3 1운동 관계 형사사건 판결문이 수록되었다. 그러나 원문은 수록되지 않아 아쉬움이 있다. 또한 일제강점하 평양복심법원 관할 하에 있던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등 지역의 지방법원 판결문과 경성복심법원 관할 하의 함흥지방법원 판결문을 입수할 수 없었고, 경성지방법원 춘천지청 공주지방법원 부산지방법원의 판결문은 6 25한국전쟁 전후 인멸되어 수록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수록한 판결문은 약 700건, 피고 인원은 6,000명이었으니 1919년 5월 31일까지 보고된 피검자 총수 46,948명의 1/7이었다.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 5권이 간행된 지 약 20년 후인 1990년부터 1996년까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의 11권부터 27권으로 3 1운동 재판기록을 간행하였다. 3 1운동 (Ⅰ-ⅩⅦ)이라는 부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공판시말서, 예심조서, 검사조서 등 3 1운동 판결을 위한 문서들이 번역되어 원문과 함께 수록되었다.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이 간행된 지 20년 후인 2014년과 2015년에 3 1운동 판결문은 23 이병헌 편저, 3 1운동 비사, 시사시보사출판국, 姜 德 相 片 楮, 現 代 史 資 料 26( 朝 鮮 2), 東 京 : みすず 書 房, 김정명 片 楮, 朝 鮮 獨 立 運 動 1 分 冊 ( 民 族 主 義 運 動 篇 ), 東 京 : 原 書 房, 김승일, 앞의 논문, 2011, 151~152쪽. 50

15 해제 국가기록원에 의해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 3 1운동 I, II로 간행되었다. I은 국가기록원 소장 2,673권의 판결문 중 강원 경기 서울 충청 지역에서 활동하거나 또는 그 지역 출신 3 1운동자 55명의 판결문 원문과 번역문을 수록한 것이고, II는 경상 전라 지역에서 활동하거나 또 그 지역 출신 3 1운동자 286명의 판결문 원문(50건)과 번역문을 수록한 것이다. 3. 여성들의 3 1운동 판결문 1) 여성들의 3 1운동 참여 이 자료총서에 수록된 박용옥의 3 1운동에서의 여성 활약과 그 의의 참조 2) 3 1운동 참여 여성들의 특징 박은식은 3 1운동으로 46,948명이 피검되었고, 7,509명이 사망하였으며, 15,961명이 부상당하였다고 하였다. 27 박경식은 46,306명이 피검되었고, 1919년 3~12월 각 재판소가 수리한 처분자는 19,525명, 피기소자는 9,441명이라 하였다. 28 멕켄지(F.A. Mckenzie)는 1919년 3월 1일부터 7월 18일 사이에 소요죄로 검찰의 심문을 받은 수감자들의 숫자를 일제가 공표하였는데, 그 숫자에는 일제경찰에 체포되었다가 약식재판을 받고 석방된 사람들의 막대한 숫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하였다. 그리고 16,183명이 심문을 받았고, 그 중 8,351명이 기소되었으며, 5,858명은 검찰심문 후에 석방되었고, 1,778명은 다른 법정으로 이송되어 더 철저한 심문을 받고 있으며, 178명은 아직 판결이 끝나지 않았다고 하였다. 29 세 사람이 제시한 숫자가 각각 다른 이유는 조사의 대상 시기, 조사의 시점, 근거 자료 등등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1920년 1월에 조선총독부 법무국에서 편찬한 망동사건처분표 ( 妄 動 事 件 處 分 表 )에 27 박은식 지음, 김도형 옮김,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소명출판, 2008, 198쪽. 28 박경식, 조선3 1운동사, 東 京 : 平 凡 社, 1976, 쪽. 29 F, A, 멕켄지 저, 이광린 역, 한국의 독립운동, 일조각, 1969, 196쪽. 51

16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의하면, 1919년 3월부터 12월까지의 검거자 중에서 19,054명이 검찰로 송치되었고, 그 중 7,816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자료는 각 재판소에서 처리한 사건 중 조선총독부에 보고된 것을 조사 정리한 것이다. 크게 11가지 항목으로 조사하였는데, 검사처분, 예심처분, 제1심 판결, 제2심 판결, 제3심 판결, 유죄확정 판결, 피고인의 연령, 피고인의 종교, 피고인의 교육정도, 피고인의 직업, 범죄지 및 범죄시기이다. 이 자료에 의하면, 3 1운동으로 검거된 여성은 다음의 <표 3>과 같다. <표 3> 각 도별 남 여 검거자수 도별 남자 여자 합계 도별 남자 여자 합계 경기도 3, ,349 황해 2, ,495 충북 평북 1, ,180 충남 평남 1, ,541 전북 강원 1, ,156 전남 함북 경북 2, ,103 함남 1, ,383 경남 2, ,377 조선국경외 합계 18, ,054 출전 : 朝 鮮 總 督 府 法 務 局 編, 妄 動 事 件 處 分 表, 총 검거자는 19,054명이고 그 중 여성은 471명으로 전체의 2.5%이다. 남녀의 비율은 39:1이다. 여성 검거자 471명을 도별로 보면, 경기도가 29.0%이고, 이어 황해 18.1%, 경남 15.3%. 평남 9.8%, 평북과 함북 각 5.5%, 경북 4.7%, 전북 3.6%, 충남 2.8%, 전남 강원 조선국경외 각 1.3%, 함남 1.1%순이다. 충북에서는 검거된 여성이 없다. 경기도와 황해도의 비율이 높은 것은 이들 지역에 여성교육기관이 많았다는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여성교육에 주력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의 교육관은 한말 구국계몽운동의 차원에서 많은 사립학교들이 설립될 때에도 영향을 미쳐 여성교육기관 설립은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성교육기관은 상당히 적었고, 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여성도 많지 않았다. 그리고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여성들 상당수는 국가의 문제, 민족의 문제에 깊은 의식을 하기 어려웠고 독립운동에 나서기 어려웠다. 그러나 소수의 여성교육기관에서 교육받은 여성들 중에는 민족의 문제를 통절히 여기고 독립운동에 기꺼이 나서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52

17 해제 검거된 여성의 비율을 각 도별로 보면, 충남이 9%로 가장 높고 이어 함북 4.3%, 경기도 4.1%, 조선국경외 3.6%, 황해 3.5%, 경남과 평남 각 3.1%, 전북 2.9%, 평북 2.3%, 충남 2%, 경북 1.1%, 전남 0.8%, 강원 0.5%, 함남 0.4%순이다. 숫적으로는 경기도와 황해도 출신들이 많은데, 검거된 비율에서는 충남과 함북 출신자들의 비율이 높다. 같은 자료인 망동사건처분표 ( 妄 動 事 件 處 分 表 )에 의하면, 인텔리겐차가 205명으로 검거된 여성 총수의 약 1/2이었다. 남성은 1/5이 인텔리겐차였는데(남자는 3,542명 대 15,512명) 이는 당시 한국사회의 특수한 사회사정에서 오는 여성의 지위를 잘 반영하는 것이다. 검거된 여성들의 교육정도를 보면 다음의 <표 4>와 같다. <표 4> 3 1운동 참여 여성의 교육정도 교육정도별 여 남 계 고등교육을 받은 자 중등교육을 받은 자 보통교육을 받은 자 156 2,846 3,002 가정 및 서당에서 배운 자 3 3,751 3,754 한자 해득 불능자 46 1,220 1,266 무교육자 94 6,031 6,125 미상 94 4,428 4,522 상기 중 일본유학자 중국유학자 외국유학자 합계 ,054 19,525 출전 : 朝 鮮 憲 兵 司 令 部 編, 朝 鮮 三 一 騷 擾 事 件, 巖 南 堂, 1969, 450쪽 ; 정요섭, 한국여성의 민족운동에 관 한 연구, 아시아여성연구,1971, 307쪽 재인용. 고등교육 받은 여성 1명, 중등교육 받은 여성 77명, 보통교육 받은 여성 156명, 가정 및 서당에서 배운 여성 3명, 문자해득 불능여성 46명, 무교육 여성 94명, 미상 94명(이 중 일본유학 5) 등이다. 피검된 이들은 전체적으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0.4%, 중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4.0%, 보통교육을 받은 사람이 15.4%, 가정 및 서당에서 배운 사람이 19.2%로 약 40%가 문자를 해득할 수 있었다. 남자들의 교육 정도도 0.4%, 3.7%, 14.9%, 19.7%로 전체적인 비율과 비슷하다. 그런데 여성들의 교육 정도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즉 검거된 여성들 중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0.2%, 중등교육을 받은 여성은 16.4%, 보통교육을 받은 여성은 33.1%, 가정 및 서당에서 배운 여성은 0.6%로 약 50.3%가 문자를 53

18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해득할 수 있었다. 검거된 남성의 문자해득율 40%보다 약 10%가 높고, 특히 중등교육을 받은 여성의 비율은 중등교육을 받은 남성의 비율과 비교할 때 4배 이상 높다. 보통교육을 받은 여성의 비율도 보통교육을 받은 남성의 비율보다 약간 높다. 반면 가정 및 서당에서 배운 여성의 비율은 남성의 동( 同 ) 분야 비율과 비교할 때 1/32로 매우 낮다. 서당에서는 여성들의 교육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검거된 여성의 나이는 25세 미만이 311명으로 전체 여성검거자의 약 66%였고, 검거된 여성 중 여교사 여학생이 46%였다. 30 일제측 자료를 중심으로 3 1운동에 참가한 학교와 학생이 얼마나 되었는가를 다음의 <표 5>에서 확인할 수 있다. <표 5> 3 1운동 참여 학교와 학생 수 관립학교 공립학교 일반사립학교 종교사립학교 도별 참가학교 수 참가 학생수 참가 학교수 참가 학생수 참가 학교수 참가 학생수 참가 학교수 참가 학생수 경기 6 1, 충북 1 13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황해 평북 평남 ,851 강원 1 70 함북 함남 계 10 1, , , ,072 출전 : 朝 鮮 總 督 府 學 務 局, 騷 擾 と 學 校, 1921, 8~9쪽 ; 정래수, 충남지역 항일학생운동 연구( 년대), 충남대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1, 34쪽의 표4. 전국적으로 관 공립학교의 참가학교가 85개교이고, 참가학생수는 5,375명이다. 사립학교는 일반사립이 37개교, 종교사립이 98개교로, 참가학생수는 일반사립이 1,549명, 종교사립이 6,072명이다. 관 공립학교에 비해 사립학교 학생들의 참여가 많다. 이는 30 정요섭, 한국여성의 민족운동에 관한 연구 : 3 1운동을 중심으로, 아세아여성연구 10, 숙대출판부, 1971, 306~307쪽. 54

19 해제 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되었던 대부분의 종교계 사립학교는 1910년대에 일제의 통제를 비교적 덜 받는 상황에서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던 이유로 볼 수 있다. 31 종교사립학교 중 만세운동 참가학교수로는 평남이 가장 많고 이어 평북, 함남, 경기 경북 순이다. 참가학생수로는 평남, 평북, 함남, 황해도 순이다. 개신교 선교가 활발하였고,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 학교들이 많이 설립되었던 지역에서 참가학교도 참가학생도 많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의 <표 6>은 교사들을 포함하여 학교 근무자들이 참여하였던 만세운동의 상황을 보여준다. <표 6> 3 1운동 참여 학교직원 수 도별 공립학교 사립학교 敎 諭 訓 導 副 훈도 촉탁교원 계 설립자 교장 교원 계 합계 경기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황해 평북 평남 강원 함북 함남 계 출전 : 朝 鮮 總 督 府 學 務 局, 騷 擾 と 學 校, 1921, 7~8쪽 : 정래수, 충남지역 항일학생운동 연구( 년대), 충남대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1, 36쪽. 공립학교 직원과 사립학교 직원의 3 1운동 참여 비율은 17:83으로 사립학교 직원의 비율이 매우 높다. 이는 공립학교보다는 사립학교에서, 제한된 범위이기는 하지만 민족을 생각하는 직원들이 많았다는 의미이다. 또한 공립학교에 근무하려면 그러한 생각과 행동들의 제한이 사립학교에서 보다 훨씬 심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31 정래수, 충남지역 항일학생운동 연구(1910~1930년대), 충남대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1, 35쪽. 55

20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3) 3 1운동 참여 여성 중 독립유공 포상자 공훈전자사료관 홈페이지(( 의하면 독립유공자로 포상받은 이들은 다음과 같다. <표 7> 독립유공자 현황 운동계열 공훈자수 운동계열 공훈자수 운동계열 공훈자수 3 1운동 4,832 의열투쟁 131 만주 방면 2, 운동 지원 5 학생운동 409 중국 방면 258 의병 2,392 광복군 566 노령 방면 259 애국계몽운동 130 광복군 지원 8 미주 방면 218 계몽운동지원 1 임시정부 378 인도네시아 방면 12 국내항일 2,219 임시정부 지원 23 독립운동 지원 22 문화운동 106 일본 방면 223 계 14,262 비고 : 2015년 12월 8일 검색.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정보시스템에 있는 독립유공자 공훈자료 의 운동계열 분류에 는 아쉬운 점이 많다. 의병 학생운동은 독립운동의 중심인물을 기준으로 나눈 것이고, 애 국계몽운동 문화운동 의열투쟁은 독립운동의 방법을 기준으로 나눈 것이고, 일본 방면 만주 방면중국 방면 노령 방면 미주 방면 인도네시아 방면은 독립운동이 이루어진 지역 을 기준으로 나눈 것이다. 그런데 3 1운동 의병 애국계몽운동 국내항일 문화운동 의 열투쟁 학생운동은 대부분 국내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국내항일과 구분이 애매하다. 게다 가 이들 중에 국내가 아니라 위에 언급한 각 지역들에서 추진된 독립운동이라면 지역 방면에 넣어야 할지, 운동의 내용이나 방법에 넣어야 할지도 애매하다. 뿐만 아니라 만주를 중국과 구분하는 것도 애매하고, 광복군과 임시정부도 중국 방면에서 이루어진 독립운동인데 이들 에 대한 구분도 애매하다. 이와 같이 운동계열 분류에 많은 아쉬운 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현재 제시되어 있는 분 류 기준에 의하면 3 1운동 포상자는 4,832명으로 전체 포상자의 33.0%이다. 그리고 그 중 여성은 87명으로 3 1운동 포상자의 1.8%이다. 한편 국내항일 로 분류되어 있는 박현 숙을 이 자료총서에서는 3 1운동에 포함시켰다. 그것은 이 여성이 3 1운동에 적극 참여 56

21 해제 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이 3 1운동이 아니라 국내항일 로 분류된 것은 3 1운동 때보다 3 1 운동 이후 전개한 그들의 활동이 훨씬 풍부하였기 때문이다. 다음의 <표 8>은 3 1운동으로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여성들 87명과 국내항일 로 받았지만 3 1운동에 포함시키는 것이 합리적이라 여겨지는 1명을 포함하여 88명을 정리한 것이다. <표 8> 3 1운동에 참여한 여성 독립유공자 연번 이름 이명 훈격 1 곽진근( 郭 鎭 根 )* 대통령표창(1995) 2 구순화( 具 順 和 )* 애족장(1990) 3 권애라( 權 愛 羅 )* 애국장(1990) 4 김공순( 金 恭 順 )* 대통령표창(1995) 5 김나현( 金 羅 賢 )* 柳 丹 대통령표창(2005) 6 김난줄( 金 蘭 茁 ) 蘭 出 대통령표창(2015) 7 김덕순( 金 德 順 )* 대통령표창(2008) 8 김독실( 金 篤 實 )* 대통령표창(2007) 9 김락( 金 洛 ) 애족장(2001) 10 김반수( 金 班 守 ) 대통령표창(1992) 11 김복선( 金 福 善 ) 대통령표창(2015) 12 김봉애( 金 奉 愛 ) 대통령표창(2015) 13 김성일( 金 聖 日 ) 月 姬 대통령표창(2010) 14 김순이( 金 順 伊 ) 애국장(2014) 15 김신희( 金 信 熙 )* 恩 兆 대통령표창(2010) 16 김씨( 金 氏 ) 姜 太 成 夫 人 애족장(1991) 17 김씨( 金 氏 ) 洪 元 植 夫 人 애족장(1991) 18 김안순( 金 安 淳 )* 貞 淑, 酉 云 대통령표창(2011) 19 김애련( 金 愛 蓮 ) 대통령표창(1992) 20 김응수( 金 應 守 ) 壽 대통령표창(1995) 21 김인애( 金 仁 愛 )* 崔 氣 物 대통령표창(2009) 22 김종진( 金 鍾 振 )* 애족장(2001) 23 김해중월( 金 海 中 月 ) 用 性 대통령표창(2015) 57

22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24 김향화( 金 香 花 ) 順 伊 대통령표창(2009) 25 김현경( 金 賢 敬 )* 賢 卿, 順 点 건국포장(1998) 26 김화용( 金 花 容 ) 대통령표창(2015) 27 김효순( 金 孝 順 )* 淳 好 대통령표창(2015) 28 나은주( 羅 恩 周 )* 애족장(1990) 29 노순경( 盧 順 敬 )* 順 敎 대통령표창(1995) 30 노예달( 盧 禮 達 )* 대통령표창(2014) 31 동풍신( 董 豊 信 ) 애국장(1991) 32 문응순( 文 應 淳 ) 月 仙, 應 信 건국포장(2010) 33 문재민( 文 載 敏 ) 香 姬 애족장(1998) 34 민옥금( 閔 玉 錦 )* 泳 淑 애족장(1990) 35 박순애( 朴 順 愛 )* 대통령표창(2014) 36 박애순( 朴 愛 順 )* 애족장(1990) 37 박연이( 朴 連 伊 ) 蓮 伊 대통령표창(2015) 38 박우말례( 朴 又 末 禮 )* 永 子 대통령표창(2011) 39 박원경( 朴 源 炅 ) 애족장(2008) 40 박자선( 朴 慈 善 )* 애족장(2010) 41 박정수( 朴 貞 守 ) 대통령표창(2015) 42 박현숙( 朴 賢 淑 )* 애국장(1990) 43 송금희( 宋 錦 姬 ) 대통령표창(2015) 44 송명진( 宋 明 進 ) 대통령표창(2015) 45 신관빈( 申 寬 彬 )* 觀 彬 애족장(2011) 46 신분금( 申 分 今 )* 대통령표창(2007) 47 신특실( 申 特 實 )* 悳 心 건국포장(2014) 48 심순의( 沈 順 義 ) 順 只 대통령표창(1992) 49 심영식( 沈 永 植 )* 애족장(1990) 50 어윤희( 魚 允 姬 )* 애족장(1995) 51 오정화( 吳 貞 嬅 ) 愛 基 대통령표창(2001) 52 옥운경( 玉 雲 瓊 ) 彩 珠 대통령표창(2010) 53 왕경애( 王 敬 愛 )* 대통령표창(2006) 54 유관순( 柳 寬 順 )* 독립장(1962) 55 유예도( 柳 禮 道 ) 애다, 애덕 애족장(1990) 56 유점선( 劉 點 善 )* 대통령표창(2014) 57 윤악이( 尹 岳 伊 )* 대통령표창(2007) 58 윤형숙( 尹 亨 淑 )* 血 女 건국포장(2004) 58

23 해제 59 이도신( 李 道 信 )* 信 道 대통령표창(2015) 60 이명시( 李 明 施 ) 대통령표창(2010) 61 이벽도( 李 碧 桃 ) 대통령표창(2010) 62 이살눔( 李 살눔)* 撒 路 美 대통령표창(1992) 63 이소선( 李 小 先 )* 菊 嬉 대통령표창(2008) 64 이소제( 李 少 悌 ) 애국장(1991) 65 이아수( 李 娥 洙 )* 愛 主, 娥 珠 대통령표창(2005) 66 이효덕( 李 孝 德 )* 대통령표창(1992) 67 임명애( 林 明 愛 )* 애족장(1990) 68 임봉선( 林 鳳 善 )* 애족장(1990) 69 임진실( 林 眞 實 )* 대통령표창(2015) 70 전창신( 全 昌 信 ) 대통령표창(1992) 71 정막래( 丁 莫 來 )* 대통령표창(2008) 72 조옥희( 曺 玉 姬 )* 대통령표창(2003) 73 조인애( 曺 仁 愛 )* 대통령표창(1992) 74 조충성( 曺 忠 誠 )* 忠 聖 대통령표창(2005) 75 조화벽( 趙 和 璧 ) 애족장(1990) 76 진신애( 陳 信 愛 )* 애족장(1990) 77 채애요라( 蔡 愛 堯 羅 )* 蔡 惠 秀 대통령표창(2008) 78 최수향( 崔 秀 香 )* 賢 淑 애족장(1990) 79 최요한나( 崔 堯 漢 羅 )* 대통령표창(1999) 80 최은희( 崔 恩 喜 ) 애족장(1992) 81 최정숙( 崔 貞 淑 )* 대통령표창(1993) 82 최정철( 崔 貞 徹 ) 蔡 氏 애국장(1995) 83 탁명숙( 卓 明 淑 )* 瑪 里 亞 건국포장(2013) 84 하영자( 河 永 子 )* 判 今 대통령표창(1996) 85 한이순( 韓 二 順 )* 菊 江 애족장(1990) 86 함연춘( 咸 鍊 春 )* 대통령표창(2010) 87 홍씨( 洪 氏 ) 韓 鳳 周 婦 人 애국장(2002) 88 황금순( 黃 金 順 )* 錦 順, 賢 淑 애족장(2015) 비고 : *는 판결문이 남아있는 여성. 59

24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독립유공자 첫 서훈은 1949년 당시 부통령 이시영( 李 始 榮 )과 대통령 이승만( 李 承 晩 )에게 수여되었고, 이어 1950년 헐버트(Hulbert, H.B)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1950년대에는 1953 년에 장제스[ 蔣 介 石 ]에게 수여한 서훈이 전부였다. 이후 독립유공자 서훈은 1962년 재개되 어 204명이 수여하였다 운동에 참여한 여성으로 가장 먼저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여성은 유관순( 柳 寬 順 ) 으로 1962년에 포상을 받았다. 이후 2015년까지 3 1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여성의 숫자는 다음과 같다. 1962년 포상 이후 거의 30년만인 1990년에 16명이 포상을 받았고, 이후 포상자가 없는 해도 있었지만 여성들에 대한 포상은 계속되었고 2015년에 13명이 포상을 받았다. <표 9> 3 1운동 참여 여성의 독립유공자 포상 현황 연도 포상자수 연도 포상자수 연도 포상자수 연도 포상자수 연도 포상자수 계 88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훈격은 7가지로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 건국포장, 대통령표창이다. 2015년까지의 포상자 14,262명 중 대한민국장은 30명으로 1990년 이후에는 없다. 대통령장은 93명으로 0.6%이고 1999년 이후 중단되었다. 독립장은 823명으로 5.8%이다. 애국장은 4,142명으로 29.0%이고 1990년부터 시작되었다. 애족장은 5,360명으로 37.6%이고, 애국장과 마찬가지로 1990년부터 시작되었다. 건국포장은 1,142명으로 8.0%이고 1977년에 시작되었다. 대통령표창은 2,692명으로 18.9%이고 1963년에 시작되었다. 3 1운동으로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여성들의 훈격은 독립장 1명, 애국장 7명으로 7.8%, 애족장 23명으로 27.8%, 건국포장 5명으로 5.6%, 대통령표창 52명으로 57.8%이다. 32 윤선자, 광복 후 애국선열 선양정책 재조명, 사학연구 100, 한국사학회, 2010, 370쪽. 60

25 해제 독립유공자 전체로는 애족장의 비율이 가장 높고 이어 애국장인데, 여성은 훈격이 가장 낮은 대통령표창이 57.8%이다. 여성들의 훈격이 낮은 이유는 여성들의 독립유공자 포상 기준을 남성과 같은 수준으로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성들의 경우 최고의 폭력은 여성들의 증언에서 누누이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일제경찰들 앞에서 나체 를 만들고 나체인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하고, 나체로 기어다니게 한 것이었다. 그것은 여성들에게 최고의 수치였다. 그러나 포상 기준에 이러한 것들은 고려되고 있지 않다. 여성들에 대한 유공자 포상 기준에 대한 재고가 요구된다 운동 참여 여성 독립유공자의 재판 관련 기록 1) 판결문 3 1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88명(국내항일로 분류된 1명포함)의 여성들 중에 판결문이 남아 있는 이들은 54명이고, 그들의 판결문은 34건(예심종결서 2건 포함)이다. 판결문을 재판소별로 서울을 중심으로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 강원도, 함경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순으로, 그리고 각 도의 부 군은 가나다순으로, 해당 사건은 시간순으로 정리하면 다음의 <표 10>과 같다. <표 10> 34건 판결문(재판소별) 연번 판결문 이름 1 경성지방 예심종결서( ) 김독실( 金 篤 實 ) 노예달( 盧 禮 達 ) 신특실( 申 特 實 ) 유점선 ( 劉 點 善 ) 이아수( 李 娥 洙 ) 최정숙( 崔 貞 淑 ) 탁명숙( 卓 明 淑 ) 2 경성지방( ) 김독실( 金 篤 實 ) 노예달( 盧 禮 達 ) 최정숙( 崔 貞 淑 ) 3 경성지방( ) 신특실( 申 特 實 ) 탁명숙( 卓 明 淑 ) 4 경성지방( ) 유점선( 劉 點 善 ) 이아수( 李 娥 洙 ) 5 경성복심( ) 이아수( 李 娥 洙 ) 6 경성지방( ) 김효순( 金 孝 順 ) 노순경( 盧 順 敬 ) 이도신( 李 道 信 ) 7 경성지방( ) 김종진( 金 鍾 振 ) 8 경성지방( ) 박자선( 朴 慈 善 ) 9 경성지방( ) 조인애( 曺 仁 愛 ) 10 경성지방( ) 권애라( 權 愛 羅 ) 11 경성복심( ) 권애라( 權 愛 羅 ) 12 경성지방( ) 신관빈( 申 寬 彬 ) 어윤희( 魚 允 姬 ) 13 경성지방( ) 심영식( 沈 永 植 ) 61

26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14 경성지방( ) 이살눔( 李 살눔) 15 경성복심( ) 이살눔( 李 살눔) 16 경성지방( ) 임명애( 林 明 愛 ) 17 고등법원형사부( ) 나은주( 羅 恩 周 ) 18 고등법원형사부( ) 구순화( 具 順 和 ) 왕경애( 王 敬 愛 ) 19 고등법원형사부( ) 조충성( 曺 忠 誠 ) 20 고등법원형사부( ) 이효덕( 李 孝 德 ) 21 고등법원형사부( ) 박현숙( 朴 賢 淑 ) 채애요라( 蔡 愛 堯 羅 ) 22 경성복심( ) 곽진근( 郭 鎭 根 ) 23 공주지방 예심종결서( ) 김현경( 金 賢 敬 ) 24 공주지방( ) 김현경( 金 賢 敬 ) 25 공주지방( ) 민옥금( 閔 玉 錦 ) 한이순( 韓 二 順 ) 황금순( 黃 金 順 ) 26 경성복심( ) 유관순( 柳 寬 順 ) 27 대구지방( ) 임봉선( 林 鳳 善 ) 28 대구지방영덕지청( ) 신분금( 申 分 今 ) 윤악이( 尹 岳 伊 ) 29 부산지방통영지청( ) 이소선( 李 小 先 ) 정막래( 丁 莫 來 ) 30 광주지방 전주지청( ) 31 대구복심( ) 김공순( 金 恭 順 ) 김나현( 金 羅 賢 ) 김신희( 金 信 熙 ) 김인애 ( 金 仁 愛 ) 최요한나( 崔 堯 漢 羅 ) 함연춘( 咸 鍊 春 ) 김공순( 金 恭 順 ) 김나현( 金 羅 賢 ) 김신희( 金 信 熙 ) 김인애 ( 金 仁 愛 ) 최요한나( 崔 堯 漢 羅 ) 함연춘( 咸 鍊 春 ) 32 광주지방전주지청( ) 박순애( 朴 順 愛 ) 33 대구복심( ) 박순애( 朴 順 愛 ) 34 광주지방( ) 김덕순( 金 德 順 ) 김안순( 金 安 淳 ) 박애순( 朴 愛 順 ) 박우말례( 朴 又 末 禮 ) 윤형숙( 尹 亨 淑 ) 임진실( 林 眞 實 ) 조옥희( 曺 玉 姬 ) 진신애( 陳 信 愛 ) 최수향( 崔 秀 香 ) 하영자( 河 永 子 ) 62

27 해제 34건의 판결문을 54명의 여성독립운동가 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 11> 3 1운동 여성독립유공자와 판결문 연번 이름 이명 판결문 1 김독실( 金 篤 實 ) 2 노예달( 盧 禮 達 ) 경성지방 예심종결서( ), 경성지방( ) 3 최정숙( 崔 貞 淑 ) 4 신특실( 申 特 實 ) 悳 心 5 탁명숙( 卓 明 淑 ) 卓 瑪 里 亞 경성지방 예심종결서( ), 경성지방( ) 6 유점선( 劉 點 善 ) 경성지방 예심종결서( ), 경성지방( ) 7 이아수( 李 娥 洙 ) 愛 主, 娥 珠 경성복심( ) 8 김효순( 金 孝 順 ) 淳 好 9 노순경( 盧 順 敬 ) 順 敎 경성지방( ) 10 이도신( 李 道 信 ) 信 道 11 김종진( 金 鍾 振 ) 경성지방( ) 12 박자선( 朴 慈 善 ) 경성지방( ) 13 조인애( 曺 仁 愛 ) 경성지방( ) 14 권애라( 權 愛 羅 ) 경성지방( ), 경성복심( ) 15 신관빈( 申 寬 彬 ) 觀 彬 16 어윤희( 魚 允 姬 ) 경성지방( ) 17 심영식( 沈 永 植 ) 경성지방( ) 18 이살눔( 李 살눔) 撒 路 美 경성지방( ), 경성복심( ) 19 임명애( 林 明 愛 ) 경성지방( ) 20 나은주( 羅 恩 周 ) 고등법원형사부( ) 21 구순화( 具 順 和 ) 22 왕경애( 王 敬 愛 ) 고등법원형사부( ) 23 조충성( 曺 忠 誠 ) 忠 聖 고등법원형사부( ) 24 이효덕( 李 孝 德 ) 고등법원형사부( ) 25 박현숙( 朴 賢 淑 ) 26 채애요라( 蔡 愛 堯 羅 ) 蔡 惠 秀 고등법원형사부( ) 63

28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27 곽진근( 郭 鎭 根 ) 경성복심( ) 28 김현경( 金 賢 敬 ) 賢 卿, 順 点 공주지방 예심종결서( ), 공주지방( ) 29 민옥금( 閔 玉 錦 ) 玉 今, 泳 淑 30 한이순( 韓 二 順 ) 菊 江 공주지방( ) 31 황금순( 黃 金 順 ) 錦 順, 賢 淑 공주지방( ) 32 유관순( 柳 寬 順 ) 경성복심( ) 33 임봉선( 林 鳳 善 ) 대구지방( ) 34 신분금( 申 分 今 ) 35 윤악이( 尹 岳 伊 ) 대구지방영덕지청( ) 36 이소선( 李 小 先 ) 菊 嬉 37 정막래( 丁 莫 來 ) 부산지방통영지청( ) 38 김공순( 金 恭 順 ) 39 김나현( 金 羅 賢 ) 柳 丹 40 김신희( 金 信 熙 ) 恩 兆 41 김인애( 金 仁 愛 ) 崔 氣 物 광주지방 전주지청( ), 대구복심( ) 42 최요한나( 崔 堯 漢 羅 ) 43 함연춘( 咸 鍊 春 ) 44 박순애( 朴 順 愛 ) 광주지방전주지청( ), 대구복심( ) 45 김덕순( 金 德 順 ) 46 김안순( 金 安 淳 ) 貞 淑, 酉 云 47 박애순( 朴 愛 順 ) 48 박우말례( 朴 又 末 禮 ) 永 子 49 윤형숙( 尹 亨 淑 ) 血 女 50 임진실( 林 眞 實 ) 광주지방( ) 51 조옥희( 曺 玉 姬 ) 52 진신애( 陳 信 愛 ) 53 최수향( 崔 秀 香 ) 賢 淑 54 하영자( 河 永 子 ) 判 今 이들 판결문 중 예심종결서를 포함하여 16건이 1972년 간행된 독립운동사자료집 제5권에, 2건이 년에 간행된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 3 1운동 I, II에 수록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64

29 해제 <표 12> 3 1운동 참여 여성독립유공자 판결문의 간행 현황 이름 김독실( 金 篤 實 ) 노예달( 盧 禮 達 ) 최정숙( 崔 貞 淑 ) 신특실( 申 特 實 ) 탁명숙( 卓 明 淑 ) 유점선( 劉 點 善 ) 이아수( 李 娥 洙 ) 김현경( 金 賢 敬 ) 김효순( 金 孝 順 ) 노순경( 盧 順 敬 ) 이도신( 李 道 信 ) 민옥금( 閔 玉 錦 ) 한이순( 韓 二 順 ) 황금순( 黃 金 順 ) 박자선( 朴 慈 善 ) 신관빈( 申 寬 彬 ) 어윤희( 魚 允 姬 ) 심영식( 沈 永 植 ) 유관순( 柳 寬 順 ) 판결문과 게재처 경성지방 예심종결서( ) : 독 58 82쪽. 경성지방법원( ) : 독 95 99쪽. 경성지방법원( ) : 독 쪽. 경성지방법원( ) : 독 88 95쪽. 경성복심법원( ) : 독 쪽. 공주지방법원( ) : 독 쪽. 경성지방법원( ) : 독 쪽. 공주지방법원( ) : 판1, 쪽(번역), 쪽(원문). 경성지방법원( ) : 독 쪽. 경성지방법원( ) : 독 쪽. 경성지방법원( ) : 독 쪽. 경성지방법원( ) : 독 쪽. 경성복심법원( ) : 독 쪽. 이살눔( 李 살눔) 경성지방법원( ) : 독 327 ~ 331쪽. 이소선( 李 小 先 ) 정막래( 丁 莫 來 ) 부산지방통영지청( ) : 판2, 쪽(번역문), 쪽(원문). 임명애( 林 明 愛 ) 임봉선( 林 鳳 善 ) 조인애( 曺 仁 愛 ) 조충성( 曺 忠 誠 ) 경성지방법원( ) : 독 쪽. 대구지방법원( ) : 독 쪽. 경성지방법원( ) : 독 쪽. 고등법원형사부( ) : 독 쪽. 비고 : 독 = 독립운동사자료집 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판1 =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Ⅰ), 국가기록원, 판2 =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 1운동(Ⅱ), 국가기록원,

30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독립운동사 자료집 5에는 판결문의 원문이 수록되어 있지 않아 아쉬움이 많다. 또한 이들 자료집에는 3 1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여성들 중에 몇 명의 판결문만이 수록되어 있다. 3 1운동에 참여한 독립유공여성들 모두의 자료 수집이 요구된다. 이 자료총서에 수록된 3 1운동 참여 여성 중 독립유공자의 판결문은 34건이다. 그 중 고등법원형사부 판결문은 5건이고 7명이 해당한다. 즉 조충성( ), 나은주( ), 구순화 왕경애( ), 이효덕( ), 박현숙 채애요라( )이다. 복심법원 판결문은 7건에 12명이다. 즉 경성복심법원 판결문에 유관순( ), 권애라( ), 이살눔( ), 곽진근( ), 이아수( ) 등 5건 5명 그리고 대구복심에 김공순 김나현 김신희 김인애 함연춘 최요한나( ), 박순애( ) 등 2건 7명이다. 지방법원 판결문은 16건으로 경성지방법원 12건, 대구지방법원 1건, 공주지방법원 2건, 광주지방법원 1건이다. 지방법원지청 판결문은 4건으로 신분금 윤악이의 대구지방법원영덕지청 1건, 이소선 정막래의 부산지방법원통영지청 1건, 김공순 김나 현 김신희 김인애 최요한나 함연춘, 박순애의 광주지방법원전주지청 2건이다. 지방법원의 판결문이 가장 많아 47.1%이다. 지방법원의 판결문이 나오기까지 예심종결서가 있어야 하는데, 현재 확보된 예심종결서는 김독실 노예달 최정숙 신특실 탁명숙 유점 선 이아수 김현경의 것뿐이다. 다른 이들의 예심종결서도 확보하는데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외에 김독실, 노예달, 신특실, 유점선, 이아수, 최정숙, 탁명숙의 공판시말서, 예심조서, 검사조서 등이 있다. 이 자료들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한민족 독립운동사자료집 에 수록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66

31 해제 <표 13> 3 1운동 참여 여성독립유공자의 공판시말서 예심조서 검사조서 간행 현황 이름 문서종류 출처 김독실 공판시말서 한18, 279~280쪽(번역문), 565~566쪽(원문) 노예달 신특실 유점선 이아수 최정숙 탁명숙 예심조서 공판시말서 검사조서 예심조서 공판시말서 검사조서 예심조서 공판시말서 검사조서 예심조서 공판시말서(지방, 복심) 검사조서 예심조서(1,2회) 공판시말서 예심조서 공판시말서 한17, 132~134쪽(번역문), 415~417쪽(원문) 한18, 265~266쪽(번역문), 552~553쪽(원문) 한14, 쪽(번역문), 쪽(원문) 한17, 127~129쪽(번역문), 410~412쪽(원문) 한18, 232~233쪽(번역문), 521~522쪽(원문) 한14, 쪽(번역문), 쪽(원문) 한17, 129~132쪽(번역문), 412~414쪽(원문) 한18, 124쪽(번역문), 422쪽(원문) 한14, 쪽(번역문), 쪽(원문) 한17, 123~127쪽(번역문), 406~410쪽(원문) 한18, 124쪽(번역문), 421쪽(원문) 한18, 139~140쪽(번역문), 483쪽(원문) 한14, 52 53쪽(번역문), 쪽(원문) 한15, 쪽(번역문), 쪽(원문) 한17, 194~197쪽(번역문), 478~480쪽(원문) 한18, 267~268쪽(번역문), 555쪽(원문) 한17, 186~189쪽(번역문), 469~472쪽(원문) 한18, 237~238쪽(번역문), 526~527쪽(원문) 비고 : 한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한14 15는 1991년, 한 17 18은 1994년에 간행되었다. 한편 34건 판결문에는 54명의 여성을 포함하여 875명이 언급되어 있다. 여성들의 3 1운동이 각 지역의 독립운동가들과 긴밀한 협력 아래 추진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67

32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표 14> 3 1운동에 참여한 여성독립유공자들의 판결문 34건에 언급된 3 1운동 참여자 연번 이름 재판소(판결일) 판결문 제목 1 김독실( 金 篤 實 ) 2 노예달( 盧 禮 達 ) 3 최정숙( 崔 貞 淑 ) 경성지방 예심종결서( ), 경성지방( ) 경성지방 예심종결서 : 김형기 외 209인 경성지방 : 오세창 외 37인 4 신특실( 申 特 實 ) 5 탁명숙( 卓 明 淑 ) 6 유점선( 劉 點 善 ) 7 이아수( 李 娥 洙 ) 8 김효순( 金 孝 順 ) 9 노순경( 盧 順 敬 ) 10 이도신( 李 道 信 ) 경성지방 예심종결서( ), 경성지방( ) 경성지방 예심종결서( ), 경성지방( ) 경성복심( ) 경성지방( ) 경성지방 : 최흥종 외 31인 경성지방 : 신봉조 외 72 인 윤익선 외 71 인 박덕혜 외 3인 11 김종진( 金 鍾 振 ) 경성지방( ) 전협 외 35인 12 박자선( 朴 慈 善 ) 경성지방( ) 이동욱 외 8인 13 조인애( 曺 仁 愛 ) 경성지방( ) 유봉진 외 38인 14 권애라( 權 愛 羅 ) 15 신관빈( 申 寬 彬 ) 16 어윤희( 魚 允 姬 ) 경성지방( ), 경성복심( ) 경성지방( ) 권애라 어윤희 외 1인 17 심영식( 沈 永 植 ) 경성지방( ) 한종석 외 16인 18 이살눔( 李 살눔) 경성지방( ) 경성복심( ) 성태영 외 2인 성태영 외 2인 19 임명애( 林 明 愛 ) 경성지방( ) 김수덕 외 3인 20 나은주( 羅 恩 周 ) 고등법원형사부( ) 나은주 21 구순화( 具 順 和 ) 22 왕경애( 王 敬 愛 ) 고등법원형사부( ) 이봉서 외 16인 23 조충성( 曺 忠 誠 ) 고등법원형사부( ) 이경호 외 6인 24 이효덕( 李 孝 德 ) 고등법원형사부( ) 김준 외 7인 68

33 해제 25 박현숙( 朴 賢 淑 ) 26 채애요라( 蔡 愛 堯 羅 ) 고등법원형사부( ) 김찬흥 외 14인 27 곽진근( 郭 鎭 根 ) 경성복심( ) 이학수 외 1인 28 김현경( 金 賢 敬 ) 29 민옥금( 閔 玉 錦 ) 30 한이순( 韓 二 順 ) 31 황금순( 黃 金 順 ) 공주지방 예심종결서( ) 공주지방( ) 공주지방( ) 현석칠 외 18인 현석칠 외 17인 민옥금 외 7인 32 유관순( 柳 寬 順 ) 경성복심( ) 조인원 외 10인 33 임봉선( 林 鳳 善 ) 대구지방( ) 이만집 외 75인 34 신분금( 申 分 今 ) 35 윤악이( 尹 岳 伊 ) 36 이소선( 李 小 先 ) 37 정막래( 丁 莫 來 ) 38 김공순( 金 恭 順 ) 39 김나현( 金 羅 賢 ) 40 김신희( 金 信 熙 ) 41 김인애( 金 仁 愛 ) 42 최요한나( 崔 堯 漢 羅 ) 43 함연춘( 咸 鍊 春 ) 44 박순애( 朴 順 愛 ) 45 김덕순( 金 德 順 ) 46 김안순( 金 安 淳 ) 47 박애순( 朴 愛 順 ) 48 박우말례( 朴 又 末 禮 ) 49 윤형숙( 尹 亨 淑 ) 50 임진실( 林 眞 實 ) 51 조옥희( 曺 玉 姬 ) 52 진신애( 陳 信 愛 ) 53 최수향( 崔 秀 香 ) 54 하영자( 河 永 子 ) 대구지방영덕지청( ) 부산지방통영지청( ) 광주지방 전주지청( ), 대구복심( ) 광주지방전주지청( ), 대구복심( ) 광주지방( ) 윤악이 외 1인 정막래 외 1인 광주지방전주지청 : 최기물 (김인애) 외 12인 대구복심 : 최기물(김인애)외 11인 박순애 박애순 외 76인 69

34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혼자만을 대상으로 한 판결문은 권애라의 경성지방법원과 경성복심법원, 나은주의 고등법원형사부, 박순애의 광주지방법원전주지청과 대구복심법원의 판결문 등 3명의 판결문 5건이다. 2명을 대상으로 한 판결문은 곽진근의 경성복심법원, 신관빈 어윤희의 경성지방법원, 신분금 윤악이의 대구지방법원영덕지청, 이소선 정막래의 부산지방법원통영지청의 판결문 등 7명의 4건이다. 3명 이상 9명까지를 대상으로 한 판결문은 김효순 노순경 이도신의 경성지방법원, 민옥금 한이순 황금순의 공주지방법원, 박자선의 경성지방법원, 이살눔의 경성지방법원과 경성복심법원, 이효덕의 고등법원형사부, 임명애의 경성지방법원, 조충성의 고등법원형사부 등 11명의 판결문 8건이다. 30명 이상 69명까지를 대상으로 한 판결문은 김독실 노예달 최정숙의 경성지방법원, 신특실 탁명숙의 경성지방법원, 김종진의 경성지방법원, 조인애의 경성지방법원 등 7명의 판결문 4건이다. 그리고 김덕순 김안순 박애순 박우말례 윤형숙 임진실 조옥희 진신애 최수향 하영자의 광주지방법원, 유점선 이아수의 경성지방법원, 이아수의 경성복심법원, 임봉선의 대구지방법원은 각각 77명, 73명, 72명, 76명을 대상으로 한 판결문이다. 김독실 등의 예심종결서는 무려 209명의 만세운동 참여자를 다루고 있다. 3~9명까지, 그리고 11~19명을 판결대상으로 한 판결문이 각각 8건으로 둘을 합하면 전체 판결문의 45.7%이다. 그런데 30명 이상을 대상으로 한 판결문도 5건이나 되어 3 1운동으로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을 일제가 검거하고 재판에 회부하였는가를 알려준다. 2) 판결문 외 행형 자료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은 판결문 외에도 많은 자료들에서 확인된다. 2014년 말 기준 국가기록원 소장 독립운동 관련 기록물 33 정리 현황을 보면 19,167건의 판결문 외에도 형사사건부( 刑 事 事 件 簿 ) 11,890건, 집행원부 10,706건, 수형인 명부 22,144건이다 국가기록원에서 홈페이지에 탑재하여 소개하는 독립운동 관련 기록물은 정확히 말하면 일제강점기 형사소송 행형기록물 중 독 립운동과 관련한 기록물이다.(국가기록원 홈페이지 참조) 년 12월 2일 검색. 그런데 2013년에 간행된 박걸순의 논문에 의 하면 당시 독립운동관련기록물은 판결문 24,203건, 형사사건부 22,176건, 집행원부 10,694건, 수형인명부 11,799건, 가출옥서류 4,229건, 수용자 신분장 2,162건(박걸순, 충북 출신 독립유공자의 발굴과 향후 과제-국가기록원 소장 재판 판결문을 중심으로-, 역사와 담론 68, 호서사학회, 2013, 152쪽의 각주 5)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다,. 70

35 해제 국가기록원에서는 피의자가 기소되어 형을 판결 받고 그 형이 집행되는 과정에서 생산되는 기록물 모두를 아울러 행형기록 으로 지칭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수감과정에서 생성되어 감옥 수감자에 대한 신상을 알 수 있는 자료는 피체자의 지문을 채취하여 관리하였던 지문원지, 수감자에 대한 상세한 기본정보를 수록한 명적표( 名 籍 表 ), 형 집행의 전말을 기록한 집행지휘서, 재판 판결문, 판결등본, 수감자의 얼굴부터 발끝까지 온 몸의 특징을 인체 그림에 표시해 놓은 인상 및 특징표, 작업표, 행장표, 신상표, 건강진단표, 진료표 등 매우 다양하다. 엄격한 의미에서 행형은 감옥에 수감된 이후, 즉 수형 이후의 상황을 일컫는 것이므로 행형기록도 수형 이후의 기록만을 지칭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기록원은 판결문, 형사공소사건부 ( 刑 事 控 訴 事 件 簿 ), 수형인명부, 명적표 ( 名 籍 表 ), 범죄인명부 ( 犯 罪 人 名 簿 ), 행형원부 ( 行 刑 原 簿 ), 신분장지문원지 ( 身 分 帳 指 紋 原 紙 : 경찰청), 가출옥 관계서류 등을 행형기록에 포함하고 있다. 형사공소사건부 는 범죄의 의심을 피의자가 형사사건으로 공소 제기되어 검사의 처분에 따라 처리된 과정을 기록한 장부이다. 수형인명부 는 피고인이 재판에서 징역 판결을 받아 형을 얼마동안 살았는지를 기록한 장부로 대부분이 서대문감옥에 투옥되었던 사실들을 기록한 것으로 1면이 신상기록이고, 1면은 사진이 부착되어 있다. 범죄인 명부 는 본인의 본적지 또는 주민등록지의 시 읍 면 사무소에 비치되어 있는 벌금 이상의 형을 선고받은 사람의 성명을 기재한 명부이다. 신분장지문원지 는 일제강점기에 관할 경찰서나 감옥에서 범죄인의 지문과 함께 수형내용을 작성한 것으로 경찰청에서 관리하고 있던 문건이다. (1) 명적표 감옥에서는 수용자 신분장( 收 容 者 身 分 狀 ) 이라고 제목을 붙여 수감자의 입감에서 출옥까지 관리하였다. 수감자 개개인에 대에 입감 초기부터 출감 때까지의 모든 기록물을 모아놓은 일종의 문서철로 명적표, 집행지휘서, 판결등본, 인상 및 특징표( 人 相 及 特 徵 表 ), 작업표, 시찰표, 상여표, 징벌표, 행장표, 접견표, 서신표, 기타 서류 등으로 구성되었다 현재 이와 유사한 기록물로 수용자 신분카드 라는 명칭으로 수감자에 대한 상세한 신상조사 기록이 있다. 여기에는 이름, 주소, 생년 등 기본적 인적 사항과 수형 관련 내용 외에도 중요 경력 요약, 가족이나 연고자, 공범부호, 학력 등 매우 상세한 기재 내 용이 수록되어 있다.(백종진, 교정행정에 따른 수용기록실무의 고찰-수용기록(명적) 사무를 중심으로 1, 교정 372, 교정협회, 2007, 133쪽) 71

36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이 중 대표적인 자료는 명적표( 名 籍 表 ) 이다. 수감자의 기본정보를 담고 있는 것으로 앞뒤 양면, 한 장으로 되어 있다. 앞면에는 크게 3가지 분류로 수감자에 관한 구치( 拘 置 ) 관련 사항, 재판 및 형기 등 수형( 受 刑 ) 관련 사항, 개인 인적 사항이 기재되어 있다. 구치 관련 사항에는 구치감 입감 연월일, 사건명, 영장발부일, 담당검사, 예심종결일, 상소사항을 기재하도록 되어 있다. 수형 관련 사항에는 수감일, 판결죄명, 형명과 형기, 재판소명, 확정판결일자, 형기기산일, 형기종료일, 형기 1/3시점, 교부관서가 기재되어 있다. 개인 인적 사항은 국적, 본적, 주소, 생년지, 신분과 직업, 연령, 출감일시와 사유가 기재되어 있다. 뒷면에는 비고사항으로 신상을 조회한 경찰서 명과 일자, 해당 면사무소의 호적조회 일자, 법원에 행형참고자료 조회 일자 등을 기재하였다. 그리고 사진을 부착하고 체격과 신장을 기재하였다. 명적표는 해당 경찰관서나 법원 등에 각종 조회를 한 것으로 보아 해당 감옥에서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앞면 가장 앞 부분에는 담당, 서무과장, 감옥소장의 날인 난이 있어 기재 완료 후 결재를 받아 엄격하게 관리되었음을 알 수 있다. 36 명적표를 작성하고 사진촬영을 담당하였던 부서는 감옥의 서무과였다. 37 서무과에서 수감자에 대한 기록 업무 일체를 담당하였는데, 이를 명적업무( 名 籍 業 務 )라 한다. 명적업무 담당이 수감자 입감때 인계받은 서류를 토대로 수감자 신상정보를 기록하고 촬영기사를 대동하여 사진 촬영 후 인화하여 사진을 붙였다. 그리고 그 서류 일체를 명적업무 담당자가 일괄 정리하고 관리하였다. 38 (2) 신분장지문원지 신분장지문원지( 身 分 狀 指 紋 原 紙 )는 수감자의 지문을 채취하고 지문 분류법에 따른 지문번호를 기입, 수감자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서류이다. 한장의 용지에 앞뒤 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36 이영진 명적표, 1933(국가기록원 소장, 마이크로 필름 BA ). 37 서대문형무소직원교우회, 在 所 者 寫 眞 撮 影 及 取 扱 手 續, 서대문형무소 예규류찬, 1939, 74~75쪽. 38 최병설 구술(1928년생. 1944년부터 촉탁으로 서대문형무소 근무 시작. 1977년까지 근무). 현행 교도행정에도 별도로 규정된 명 적업무 처리 지침에 의해 수감자 기록 업무가 규정되어 있어 일제강점기 감옥 내지 형무소의 명적업무와 현행 교도소의 명적업 무가 유사하다.(법무부 예규 제714호, 수용자 명적업무 처리 지침, 제3장 수용자 신분장부 관리 업무 중 제12조 수용자 신분카 드 작성, 제13조 사진촬영, 제14조 수용자 신분카드 보관 등, 2004) 72

37 해제 앞면에는 수감자의 특징을 기록한 항목들이 있다. 주요 항목은 안두부외견특징 ( 顔 頭 部 外 見 特 徵 : 얼굴과 머리의 주요 특징), 인상( 人 相 ), 인치( 引 致 )연월일, 죄명, 범죄사실개요, 수형사항, 검찰 및 사법경찰(기타) 처분결과, 범죄상용수단( 犯 罪 常 用 手 段 ), 송치일, 석방일 등이 있다. 얼굴과 머리 특징부에는 수감자 얼굴의 앞면과 뒷면, 좌우측면 4컷의 그림이 들어가고, 상흔 피부 눈과 귀 입술 이빨의 주요 특징이 표기되었다. 인상란에는 눈의 형태, 미간의 형태, 머리스타일, 얼굴형, 귀의 모양, 코의 모양 및 입술과 눈의 크기, 피부 색깔 등이 표식되었다. 수형사항에는 수감자의 성명, 판결언도 연월일, 형의 시작일, 언도관서, 죄명, 형명형기, 집행관서, 출옥연월일이 기재되었다. 뒷면에는 지문이 날인되어 있고 지문분류번호, 성명 연령 본적 생지 주소 지문분류자 및 지문검사자의 날인, 조회원지( 照 會 原 紙 )번호 등이 기재되어 있다. 지문은 왼쪽 손과 오른쪽 손 10개 손가락의 지문이 모두 각각 날인되었고, 왼쪽 손의 지문이 상단, 오른쪽 손이 하단 그리고 가장 아래 부분에는 왼쪽 손과 오른쪽 손 전체의 지문이 한 데 날인되어 있다. 날인된 순서는 둘째 손가락[시지( 示 指 ) : 검지]부터 시작하여 셋째 손가락[중지( 中 指 ) : 중지], 넷째 손가락[환지( 環 指 ) : 약지], 다섯째 손가락[소지( 小 指 ) : 새끼]을 날인하고 마지막으로 첫째 손가락[무지( 拇 指 ) : 엄지]을 날인하였다. 그리고 각 지문마다 10지지문( 十 指 指 紋 ) 분류법에 의거하여 지문번호를 부여하였다. 독특하게 둘째 손가락부터 시작되는 지문표기법은 일제강점기에 사용한 독일 함부르크식 정리방식이다 종류의 지문 모양 구분은 크게 융선( 隆 線 ) 배열 모양을 분류하여 활 모양의 궁상문( 弓 狀 紋 ), 말 발굽 모양의 제상문( 蹄 狀 紋 ), 소용돌이 물결 모양의 와상문( 渦 狀 紋 )으로 나뉜다. 궁상문은 한 종류로 번호 1 을 부여하였고, 제상문은 다섯 종류로 2, 3, 4, 5, 6 번을, 와상문은 세 종류로 7, 8, 9 번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지문이 손상되었거나 위 모양에 해당되지 않을 때에는 0 번을 부여하였다. 40 이러한 지문의 채취와 관리는 1910년 11월 조선총독부 법무국 행형과에서 각 감옥에서 수감자를 대상으로 채취한 지문을 보관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1931년 6월 경기도 경찰부 형사과에 지문계가 신설되어 이 곳에서 피의자에 대한 지문 채취 및 관리가 39 김진대, 지문감식, 연합출판사, 1964, 40쪽. 40 임명순 조한필, 유관순 열사 신장 및 지문에 대한 연구, 유관순 연구 18, 백석대학교 유관순연구소, 2013, 36쪽. 73

38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이루어졌다. 41 이에 지문채취는 일제 강점기 식민지체제에 저항하였던 독립운동가들을 보다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일제는 변모할 수 있는 얼굴 및 외관상의 특징을 감안하여 언제든지 본인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감시시스템을 확보한 것이다. 따라서 신분장지문원지에 부여된 지문분류번호는 수형기록카드에도 그대로 기입되었다. 서류철을 일일이 대조하는 수고로움을 덜기 위해 간략히 작성된 카드에 사진과 지문번호 등을 넣어 본인 여부를 보다 쉽게 식별하기 위한 것이다. (3) 가출옥관계서류들 가출옥관계서류들은 가출옥할 때 상부에 보고하는 가출옥의 건 구신( 具 申 ), 형의 집행을 지휘한 집행지휘서, 법원에서 판결 받은 내용이 실려 있는 판결문, 가출옥하기 전에 해당 감옥에서 작성한 신상표( 身 上 表 ), 감옥 안에서 본인이 작성한 감상록( 感 想 錄 ) 등 전향관련 기록, 감옥 안에서 매달 인격과 작업 점수를 부여한 누진득점원부( 累 進 得 點 原 簿 ) 등이다. 이들 서류에는 다른 행형기록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많은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 특히 국가기록원 홈페이지에 있는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컬렉션에서 확인할 수 없는 판결문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사료적 가치가 크다. 신의주지방법원이나 평양복심법원 등 이북지역의 법원에서 판결 받은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운동가의 판결기록도 첨부되어 있어 중요하다. 일제 강점기에는 가출옥의 범위가 매우 좁았다. 일제 강점 초기에는 만기출소자에 대한 가석방자의 비율이 2% 미만이었다. 3 1운동이 있은 후 약간 확대되었으나 그 비율은 높지 않았다. 1911년부터 1943년까지 363,789명의 석방자 중 가석방자는 22,927명으로 전체의 6.4%였다. 일제강점기에 가출옥은 한국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보안법, 치안유지법, 1919년 제령 제7호, 출판법, 정치범처벌규칙 등 다양한 죄명으로 점점 늘어가는 수형인에 대한 처리방법의 하나였다. 일제는 시대적인 변화에 부응하여 감옥이라는 공간을 교정의 대상으로 인식, 한국을 철저하게 식민지화하려는 사상전향 41 김진대, 앞의 책, 1964, 45~46쪽. 74

39 해제 정책의 제도로 활용하였다. 국가기록원 소장 독립운동가 가출옥관계서류는 총 4,229건 중 지방법원, 복심법원, 고등법원 등 중복되는 건을 정리하면 3,700여 명의 독립운동가 서류이다. 전체 가출옥관계서류의 1/6 정도가 독립운동가 가출옥관계서류이고, 전체 가출옥관계서류의 70% 이상이 1930년대 활동한 사람들이었고, 55%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운동 수감자의 가출옥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만세시위운동을 하였다며 체포 수감하여 온갖 고통을 가한 후 재판까지 가지 않고 방면한 경우가 너무나 많았고, 재판에 회부하더라도 징역을 언도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징역형을 언도하더라도 집행유예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3 1운동에 참여하여 유공자 포상을 받은 54명의 여성의 독립운동도 판결문 외에 다음과 같은 행형 자료들에서 확인된다. <표 15> 3 1운동 여성 독립유공자들의 판결문 외 행형 자료 이름 판결문 외 행형 자료 곽진근( 郭 鎭 根 ) 형사사건부 : 경성지방( ), 경성복심( ) 구순화( 具 順 和 ) 身 分 帳 指 紋 照 會 回 報 書 ** 권애라( 權 愛 羅 ) 형사사건부 : 경성지방( , 경성복심( ). 김공순( 金 恭 順 ) 수형인명부 : 대구복심( ) 김나현( 金 羅 賢 ) 수형인명부 : 광주지방전주지청( ), 대구복심( ) 김덕순( 金 德 順 ) 身 分 帳 指 紋 原 紙 **, 수형인명부 : 광주지방( ) 김독실( 金 篤 實 ) 身 分 帳 指 紋 源 紙 ** 김신희( 金 信 熙 ) 수형인명부:광주지방전주지청( ), 대구복심( ) 김안순( 金 安 淳 ) 身 分 帳 指 紋 原 紙 **, 수형인명부:광주지방( ) 김인애( 金 仁 愛 ) 수형인명부:대구복심( ) 김현경( 金 賢 敬 ) 수형인명부:공주지방( ), 형사사건부:공주지방 ( ), 범죄 인명부** 김효순( 金 孝 順 ) 신상기록카드(한별집2, 203쪽) 나은주( 羅 恩 周 ) 身 分 帳 指 紋 照 會 回 報 書 **, 형사사건부:경성복심 ( ) 노순경( 盧 順 敬 ) 身 分 帳 指 紋 原 紙 **, 신상기록카드(한별집3, 332쪽) 42 김정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가출옥관계서류 에 대한 검토,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1,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2, 쪽. 75

40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노예달( 盧 禮 達 ) 수형인명부 : 경성지방( ) 민옥금( 閔 玉 錦 ) 身 分 帳 指 紋 照 會 回 報 書 **, 형사사건부 : 공주지방 ( ) 박순애( 朴 順 愛 ) 박애순( 朴 愛 順 ) 박우말례( 朴 又 末 禮 ) 수형인명부 : 대구복심( ); 형사사건부 : 광주지방전주지청 ( ), 대구복심( ); 집행원부 : 대구복심( ) 수형인명부 : 광주지방( ) 身 分 帳 指 紋 原 紙 **, 수형인명부 : 광주지방( ) 박현숙( 朴 賢 淑 ) 身 分 帳 指 紋 照 會 回 報 書 ** 신관빈( 申 寬 彬 ) 身 分 帳 指 紋 原 紙 ** ; 신상기록카드(한별집4, 504쪽) 신분금( 申 分 今 ) 身 分 帳 指 紋 原 紙 ** 유관순( 柳 寬 順 ) 형사사건부 : 공주지방( ), 경성지방 ( ), 경성복심 ( ); 신상기록카드(한별집5, 319쪽) 어윤희( 魚 允 姬 ) 신상기록카드(한별집5, 136쪽) 윤악이( 尹 岳 伊 ) 윤형숙( 尹 亨 淑 ) 수형인명부 : 대구지방 영덕지청( ) 수형인명부 : 광주지방( ) 이도신( 李 道 信 ) 신상기록카드(한별집6, 273쪽) 이살눔( 李 살눔) 형사사건부 : 경성지방( ), 경성복심( ) 이소선( 李 小 先 ) 身 分 帳 指 紋 原 紙 **, 집행원부 : 부산지방 통영지청 ( ) 이아수( 李 娥 洙 ) 형사사건부 : 경성지방( ), 경성복심( ) 이효덕( 李 孝 德 ) 身 分 帳 指 紋 照 會 回 報 書 ** 임명애( 林 明 愛 ) 신상기록카드(한별집7, 105쪽) 임봉선( 林 鳳 善 ) 임진실( 林 眞 實 ) 정막래( 丁 莫 來 ) 조옥희( 曺 玉 姬 ) 수형인명부 : 대구지방( ); 형사사건부 : 대구지방( ); 집 행원부 : 대구지방( ) 수형인명부 : 광주지방( ) 身 分 帳 指 紋 原 紙 **, 형사사건부 : 부산지방 통영지청 ( ); 집행원부 (부산지방 통영지청 ) 수형인명부 : 광주지방( ) 조충성( 曺 忠 誠 ) 身 分 帳 指 紋 原 紙 ** 진신애( 陳 信 愛 ) 수형인명부 : 광주지방( ) 채애요라( 蔡 愛 堯 羅 ) 身 分 帳 指 紋 原 紙 ** 최수향( 崔 秀 香 ) 최요한나( 崔 堯 漢 羅 ) 최정숙( 崔 貞 淑 ) 하영자( 河 永 子 ) 수형인명부 : 광주지방( ) 수형인명부 : 광주지방전주지청( ), 대구복심( ) 수형인명부 : 경성지방( ) 身 分 帳 指 紋 原 紙 **, 수형인명부 : 광주지방( ) 한이순( 韓 二 順 ) 身 分 帳 指 紋 照 會 回 報 書 **, 형사사건부 : 공주지방 ( )} 함연춘( 咸 鍊 春 ) 수형인명부 : 광주지방전주지청( ), 대구복심( ) 황금순( 黃 金 順 ) 형사사건부 : 공주지방 ( ) 비고 : **은 국가보훈처 소장. 그 외는 국가기록원 소장 / 한별집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76

41 해제 수형인명부 22개, 형사사건부 13개, 신분장지문원지 11개, 신문장지문조회회보서 6건, 신상기록카드 7건이다. 수형인명부는 수감된 모든 이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므로, 위에 제시한 수형인명부 외에도 이 자료총서가 대상으로 한 54명 여성독립운동가 모두의 수형인명부가 작성되었을 것이다. 다른 문서들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이들 문서를 조사 발굴하는데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표 16> 3 1운동 참여 여성독립유공자들의 직업 소속 도 부 군 이름 직업 소속 강원 철원 곽진근( 郭 鎭 根 ) 개신교 전도부인 강화 조인애( 曺 仁 愛 ) 재봉업, 개신교신자 권애라( 權 愛 羅 ) 개신교 유치원교사 신관빈( 申 寬 彬 ) 개신교(감리교) 전도부인 개성 경기 어윤희( 魚 允 姬 ) 개신교(감리교) 전도부인 심영식( 沈 永 植 ) 호수돈여학교 기예과 졸업, 무직, 개신교신자, 맹인 김포 이살눔( 李 살눔) 성서학원 학생 파주 임명애( 林 明 愛 ) 개신교(구세군) 신자 김공순( 金 恭 順 ) 기전여학교 학생 김나현( 金 羅 賢 ) 기전여학교 학생 김신희( 金 信 熙 기전여학교 학생 전북 전주 김인애( 金 仁 愛 ) 기전여학교 학생 최요한나( 崔 堯 漢 羅 ) 기전여학교 학생 함연춘( 咸 鍊 春 ) 기전여학교 학생 박순애( 朴 順 愛 ) 정신여학교 학생 김덕순( 金 德 順 ) 수피아여학교 학생 박우말례( 朴 又 末 禮 ) 수피아여학교 학생 윤형숙( 尹 亨 淑 ) 수피아여학교 학생 임진실( 林 眞 實 ) 수피아여학교 학생 전남 광주 조옥희( 曺 玉 姬 ) 수피아여학교 학생 최수향( 崔 秀 香 ) 수피아여학교 학생 하영자( 河 永 子 ) 수피아여학교 학생 박애순( 朴 愛 順 ) 수피아여학교 교사 진신애( 陳 信 愛 ) 수피아여학교 교사 김안순( 金 安 淳 ) 간호사 77

42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경기 충남 경북 경남 황해 평남 최정숙( 崔 貞 淑 )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김종진( 金 鍾 振 )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김독실( 金 篤 實 ) 이화여학교 교사 노예달( 盧 禮 達 ) 이화여학교 학생 신특실( 申 特 實 ) 이화여학교 학생 서울 유점선( 劉 點 善 ) 이화여학교 학생 이아수( 李 娥 洙 ) 정신여학교 학생 탁명숙( 卓 明 淑 ) 구세병원 간호사 김효순( 金 孝 順 ) 세브란스병원 간호사 노순경( 盧 順 敬 ) 세브란스병원 간호사 이도신( 李 道 信 ) 세브란스병원 간호사 박자선( 朴 慈 善 ) 무직 공주 김현경( 金 賢 敬 ) 영명여학교 교사 민옥금( 閔 玉 錦 ) 광명여학교 학생 천안 한이순( 韓 二 順 ) 광명여학교 학생 황금순( 黃 金 順 ) 광명여학교 학생 유관순( 柳 寬 順 ) 이화여학교 학생 대구 임봉선( 林 鳳 善 ) 신명여학교 교사 영덕 신분금( 申 分 今 ) 북장로교 신자 윤악이( 尹 岳 伊 ) 북장로교 신자 통영 이소선( 李 小 先 ) 기생 정막래( 丁 莫 來 ) 기생 금천 나은주( 羅 恩 周 ) 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신천 구순화( 具 順 和 ) 교사 왕경애( 王 敬 愛 ) 무직 옹진 조충성( 曺 忠 誠 ) 이발업( 理 髮 業 ) 이효덕( 李 孝 德 ) 양무학교 교사 평양 박현숙( 朴 賢 淑 ) 남산현교회 유사( 有 司 ) 채애요라( 蔡 愛 堯 羅 ) 사립학교 교사 * 비고 : 김안순은 판결문에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로 주소가 되어 있어 광주기독병원 간호사였던 것 같다. 구순화는 판결문에 학교 명칭이 언급되지 않았는데 주소는 신천군 신천읍 척서리였다. 왕경애는 판결문에 무직으로 되어 있는데 당시 57세였다. 나은주는 판결문에 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인데 주소는 황해도 금천군 백마면 장지리 장동( 黃 海 道 金 川 郡 白 馬 面 長 芝 里 長 洞 )이었다. 채애요라는 판결문에 사립학교의 주소가 평양부 육로리 24번지로 되어 있다. 78

43 해제 3) 34건 판결문 분석 3 1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54명의 3 1만세운동 전개 당시의 지역과 직업 소속은 다음과 같다. 학생이 26명, 교사 9명, 간호사 5명, 개신교 전도부인 3명, 교회 유사 1명, 기생 2명, 이발업 1명, 재봉업 1명, 무직 3명이었다. 그리고 개신교신자로 판결문에 표기된 여성이 3명인데, 이들은 개신교회 안에서 일정한 업무를 수행했던 것 같다. 기전여학교 수피아여학교 이화학당의 교사 학생들, 그리고 구세병원 세브란스병원의 간호사들도 개신교신자였을 가능성이 큰데 이들에게는 개신교신자라는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신교회 안에서 일정한 업무를 수행했던 이들은 모두 7명인 셈이다. 학생이 48.2%, 교사가 16.7%로 여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64.9%이다. 언급한 대부분의 여학교가 <표 17> 3 1운동 참여 여성유공자들의 본적 주소 연번 이름 생몰 본적 주소 1 곽진근 강원도 철원군 철원면 관전리 강원도 철원군 철원면 (1862)~미상 ( 郭 鎭 根 ) 131 관전리 구순화 황해도 신천군 신천면 황해도 신천군 신천면 척서리 ( 具 順 和 ) 척서리 3 권애라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 만월정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 ~ ( 權 愛 羅 ) 327 만월정 327번지 4 김공순 ( 金 恭 順 ) ~ 전북 정읍군 고부면 대정리 전북 전주군 이동면 화산리 5 김나현 ( 金 羅 賢 ) ~ 전북 정읍군 입암면 천원리 전북 전주군 이동면 화산리 6 김덕순 ( 金 德 順 ) ~ 전남 광주군 본촌면 본촌리 전남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7 김독실 경성부 정동 32 이화학당 ~미상 평남 용강군 지운면 진지리 351 ( 金 篤 實 ) 기숙사 8 김신희 ( 金 信 熙 ) 전북 전주군 이동면 화산리 전북 김제군 9 김안순 ( 金 安 淳 ) 전남 나주군 본량면 산수리 전남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10 김인애 ( 金 仁 愛 ) 충남 서천군 한산면 화산리 전북 익산군 채산면 채산리 11 김종진 ( 金 鍾 振 ) 평북 강계군 이서면 등공리 경성부 원동 김현경 ( 金 賢 敬 ) 충남 공주군 공주면 본정 충남 공주군 공주면 본정 13 김효순 황해도 재령군 재령면 향교리 경성부 남대문통 ~미상 ( 金 孝 順 ) 100 세브란스병원 79

44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나은주 ( 羅 恩 周 ) 노순경 ( 盧 順 敬 ) 노예달 ( 盧 禮 達 ) 민옥금 ( 閔 玉 錦 ) 박순애 ( 朴 順 愛 ) 박애순 ( 朴 愛 順 ) 박우말례 ( 朴 又 末 禮 ) 박자선 ( 朴 慈 善 ) 박현숙 ( 朴 賢 淑 ) 신관빈 ( 申 寬 彬 ) 신분금 ( 申 分 今 ) 신특실 ( 申 特 實 ) 심영식 ( 沈 永 植 ) 어윤희 ( 魚 允 姬 ) 왕경애 ( 王 敬 愛 ) 유관순 ( 柳 寬 順 ) 유점선 ( 劉 點 善 ) 윤악이 ( 尹 岳 伊 ) 윤형숙 ( 尹 亨 淑 ) 이도신 ( 李 道 信 ) 이살눔 ( 李 살눔) 이소선 ( 李 小 先 ) 이아수 ( 李 娥 洙 ) 황해도 금천군 구이면 송천리 ~ 황해도 송화군 풍해면 풍천동 하리 미상 충남 공주군 계룡면 경천리 80 황해도 금천군 백마면 장지리 장동 경성부 남대문통 세브란스병원 경성부 정동 이화학당 기숙사 충남 천안군 입장면 양대리 충남 천안군 입장면 양대리 ~미상 경기도 고양군 지도면 행주내리 경성부 연지동 정신여 학교 기숙사 전남 목포부 양동 전남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전남 순천군 순천면 옥천리 전남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미상 경성부 와룡동 1 경성부 안국동 114 (1896) 평남 평양부 평남 평양부 장별리 ~미상 ~미상 황해도 봉산군 서종면 연비리 160 경북 영덕군 지품면 원전동 ~미상 평남 평양부 아청리 ~ ~ (1863) 미상 경기도 장단군 군내면 본정 401 황해도 금천군 합탄면 매후리 황해도 신천군 신천면 척서리 경기도 장단군 대남면 장대리 경북 영덕군 지품면 원전동 146 경성부 정동 이화학당 기숙사 경기도 장단군 군내면 본정 401 황해도 금천군 합탄면 매후리 황해도 신천군 신천면 척서리 충남 천안군 동면 용두리 충남 천안군 동면 용두리 ~미상 ~ ~미상 경기도 강화군 화개면 읍내리 331 경북 영덕군 지품면 황장동 295 전남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평북 강계군 강계면 동부리 961 경기도 김포군 월곶면 월곶리 224 경남 통영군 통영면 조일정 평북 강계군 강계면 동부동 973 경성부 정동 이화학당 경북 영덕군 지품면 황장동 295 전남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경성부 남대문통 세브란스병원 경기도 김포군 월곶면 월곶리 224 경남 통영군 통영면 조일정 경성부 연지동 136 정신 여학교기숙사 80

45 해제 이효덕 ( 李 孝 德 ) 임명애 ( 林 明 愛 ) 임봉선 ( 林 鳳 善 ) 임진실 ( 林 眞 實 ) 정막래 ( 丁 莫 來 ) 조옥희 ( 曺 玉 姬 ) 조인애 ( 曺 仁 愛 ) 조충성 ( 曺 忠 誠 ) 진신애 ( 陳 信 愛 ) 채애요라 ( 蔡 愛 堯 羅 ) 최수향 ( 崔 秀 香 ) 최요한나 ( 崔 堯 漢 羅 ) 최정숙 ( 崔 貞 淑 ) 탁명숙 ( 卓 明 淑 ) 하영자 ( 河 永 子 ) 한이순 ( 韓 二 順 ) 함연춘 ( 咸 鍊 春 ) 황금순 ( 黃 金 順 ) ~ 평남 용강군 삼화면 율하리 경기도 파주군 와석면 교하리 578 경북 칠곡군 인동면 진평동 ~미상 전남 순천군 순천면 북문통 경남 통영군 통영면 조일정 전남 곡성군 옥과면 옥과리 ~ 평남 중화군 양정면 석양리 양무학교 경기도 파주군 와석면 교하리 578 경북 대구부 남산정 신명여학교 기숙사 전남 광주군 효천면 양 림리 경남 통영군 통영면 조 일정 전남 광주군 효천면 양 림리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501 황해도 옹진군 마산면 온천리 전남 광양군 다압면 신원리 전남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경성부 마포 염리동 108 평남 평양부 육로리 24 사립학교 전남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전남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전북 전주군 전주면 대화정 전북 전주군 전주면 대화정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황해도 옹진군 마산면 온천리 전남 제주도 제주면 삼도리 948 경성부 본정 2정목 27 수녀원기숙사 함남 함흥군 서호면 서도리 59 원산부 산제동 구세병원 전남 장성군 황룡면 화호리 전남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충남 천안군 입장면 양대리 충남 천안군 입장면 양대리 전북 전주군 난전면 추동리 전북 전주군 난전면 추동리 ~ 충남 천안군 입장면 양대리 충남 천안군 입장면 양대리 개신교측에서 설립한 학교이고, 구세병원 세브란스병원도 개신교측에서 설립하였으니 이들 학교와 병원에서 공부 교육 근무하고 있던 여성들의 상당수는 개신교신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54명 여성들의 나이와 본적 주소는 위의 <표 17>과 같다 여성들의 주소는 서울, 경기, 강원, 황해, 평남, 충남, 전남, 전북, 경남, 경북 등으로 전국에 걸쳐 있다. 평북 충북 함북 출신 내지 활동을 찾을 수 없는데, 이후 81

46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여성독립운동가들이 발굴되고 독립유공 포상자가 확대되면 이들 지역에서도 충분히 나올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54명 여성들의 나이를 보면 곽진근이 1862년생으로 3 1운동 당시 만 57세로 가장 많다. 이어 왕경애가 1863년생이고, 1877년생 1명, 1880년생 1명, 1883년생 1명, 1885년생 1명, 1886년생 3명, 1890년생 1명, 1895년생 1명, 1896년생 5명, 1897년생 6명, 1898년생 2명, 1899년생 3명, 1900년생 9명, 1901년생 4명, 1902년생 9명, 1903년생 3명, 1905년생 1명, 1906년생 1명이다. 3 1운동 당시 만 19살이던 1900년생과 1902년생이 9명으로 가장 많았다. 4) 3 1운동 참여 여성들에게 적용된 일제의 법령 3 1운동 판결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법의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 일제식민지법의 특징은, 년 공통법 제1조는 이 법률이 적용되는 지역을 내지, 한국, 대만, 관동주 또는 남양군도 로 분류하였다. 2 일본 본토와 한국에서는 재판소가 독립 별개로 조직되어 있었기 때문에, 같은 법률이 어디에서나 적용되었지만 적용 방식이 달랐다. 3 식민지법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예심제도 였다. 조선형사령에 의거하여 사용된 형사소송법(1890년)에 의하면, 공소는 기소, 예심, 공판 등 세 단계로 나뉘어져 있었다. 기소는 중죄의 경우 지방재판소 검사가 조사하고, 검사가 조사를 마치면 예심판사에게 예심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검사의 청구는 예심청구 로 해야 하였고, 이를 위해 작성된 서면을 예심청구서 라 하였다. 재판소 서기와 예심판사가 서명해서 작성된 조서를 심문조서 라 하였고, 예심종결을 결정하기 전에는 검사의 의견을 요구하였다. 예심판사가 예심종결 전에 검사에게 의견을 구하는 서면을 구의견서 ( 求 意 見 書 )라 하고, 이에 응해서 검사가 예심판사에게 돌려주는 서면을 의견서 라 하였으며, 예심판사가 예심종결을 판단하는 결정을 예심종결결정 이라 하였다. 예심종결결정에는 사실, 적용법조, 이유가 첨부되었다. 그런데 예심제도라 하더라도 지방법원의 예심제도와 고등법원특별형사부의 예심제도에는 진행 상황에서 약간의 다른 점이 있었다. 즉 지방법원 예심의 경우, 예심판사는 예심종결결정을 내리기 전에 검사의 의견 을 구해야 하지만, 고등법원특별형사부의 예심은 형사소송법 제7편 제314조에 의해서, 고등법원 예심판사는 고등법원검사장의 의견 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김승일, 일본제국주의 식민통치지역 재판소제도의 비교연구, 역사문화연구 38,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11, 97~99쪽. 82

47 해제 다음의 <표 18>은 경찰서에서 검사국으로 넘긴 사람들에 대한 검사국의 처분 결과이다. 전체의 약 70% 인원이 보안법으로 송치되었고, 이어 소요죄 위반 혐의가 24%였다. <표 18> 3 1운동 피검자의 검사처분 결과 (단위 명) 終 局 죄명 수리인원(%) 기소(기소율) 불기소 타청 송치 합계 未 終 局 보안법 13,096(68.7) 6,527(49.8) 5, , 제령 1,180(6.2) 355(30.1) , 소요 4,566(24.0) 2,275(49.8) 1, ,564 2 기타 212(1.1) 98(46.2) 합계 19,054(100.0) 9,255(48.6) 7,712 1,953 18, 출전 : 장신, 삼일운동과 조선총독부의 司 法 대응, 역사문제연구 18, 2007, 역사문제연구소, 153쪽. 다음의 <표 19>는 3 1운동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이들의 죄명과 형량을 나타낸다. 죄명 무 기 형 10 년 이 상 5 년 이 상 2년 이상 <표 19> 3 1운동 참가자의 죄명과 형량 1년 이상 유기형 6월 이상 6월 미만 계 집행 유예 벌 금 구 류 과 료 태형 합계 불경죄 공무 집행 방해 범인 은익 증거 인멸 1 1 소요 , ,700 방화 강간 도박 살인 협박 업무 방해

48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절도 강도 사기 공갈 횡령 훼기( 毁 棄 ) 보안법 163 1,093 2, , ,428 5,601 출판법 제령 제7호 경찰범 처벌규칙 도수( 屠 獸 ) 규칙 계 ,629 3, , ,674 7,816 출전 : 장신, 앞의 논문, 2007, 144쪽. 보안법 위반이 전체 유죄판결의 71.7%, 이어 형법의 소요죄가 21.8%, 출판법과 제령제7호는 각각 3.5%와 2.1%였다. 즉 3 1운동 참가자에게 적용된 22개의 죄명 중 보안법과 소요죄가 93.5%였고, 출판법과 제령제7호를 포함하면 99%를 상회하였다. 나머지 위반사항은 시위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이었다. 형량을 보면, 41%가 6개월 이상에서 1년 미만의 옥살이를 경험하였고, 태형에 처해진 이도 21.4%나 되었다. 최고 형량이 2년인 보안법 위반자 중에서 2년 이상 옥고를 치른 이들도 적지 않은데, 대개 이들은 다른 죄와 병합된 결과였다. 특히 방화죄나 살인죄가 병합될 경우 형이 무거워진다. 행위에 따른 법률의 적용과 형량은, 보안법의 형량은 집회의 성격뿐 아니라 집회에서의 역할과 행동 등에 따라서 달라졌다. 또 출판법의 최고 형량이 3년이었지만 출판물을 불법으로 간행 반포했다고 해서 모두가 최고형을 받지는 않았다. 3 1운동의 경우 그 출판물이 주로 독립선언서 이었고, 독립선언서 의 간행 반포에 관여하는 경우 대부분 주모자였기 때문에 보안법보다 높은 형량을 선고받았다. 44 보안법의 최고 형량인 2년 이상을 선고받은 피검자의 경우 대부분 소요죄나 출판법 위반 등으로 44 장신, 삼일운동과 조선총독부의 司 法 대응, 역사문제연구 18, 역사문제연구소, 2007, 쪽. 84

49 해제 병합처리되었다. 3 1운동 참여자들에게 가해진 주요 법령은 다음과 같다. 보안법(광무 11년 7월 29일, 법률 제2호) 제1조 내무대신은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에 결사의 해산을 명할 수 있다. 제2조 경찰관은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집회 또는 다중의 운동 혹은 군중의 모임을 제한 금지하거나 또는 해산할 수 있다. 제3조 경찰관은 제2조의 경우에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에는 무기와 폭발물 기타 위험한 물건의 휴대를 금지할 수 있다. 제4조 경찰관은 가로 기타 공개된 장소에서 문서 도화의 게시와 반포, 낭독 또는 언어 등 기타의 행위로 안녕질서를 문란케 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될 때는 금지를 명령할 수 있다. 제5조 내무대신은 정치에 관한 불온한 동작을 행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해 그 거주 장소에서 퇴거를 명령하거나 또 1개년 이내의 기간을 특정하여 일정한 지역 내에 출입을 금지할 수 있다. 제6조 제5조에 의한 명령을 위반한 자에는 40 이상의 태형( 笞 刑 ) 또는 10개월 이내의 금옥( 禁 獄 )에 처한다. 제3조의 물건이 범인의 소유일 때는 정상에 의해 그를 몰수한다. 제7조 정치에 관한 불온한 언론 동작 또는 타인을 선동 교사하거나 또는 타인의 행위에 간섭하여 치안을 방해한 자는 50 이상의 태형, 10개월 이하의 금옥 또는 2개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제8조 본법의 공소시효는 6개월간으로 한다. 제9조 본법의 명죄는 신분여하를 불문하고 지방재판소 또는 항시( 港 市 )재판소의 관할로 한다. 출판법(융희 3년 3월 26일, 법률 제6호) 제1조 기계 또는 기타 여하한 방법을 논하지 않고 발매 또는 반포를 목적으로 하는 문서 및 도화를 인쇄하는 것을 출판이라 하고, 그 문서를 저술하거나 또는 번역 편찬 혹은 도화를 만드는 자는 저작자라 하고, 발매 또는 반포를 담당하는 자를 발행자라 하고, 인쇄를 담당하는 자를 인쇄자라 한다. 제2조 문서 도화를 출판하려고 할 때는 저작자 또는 그 상속자와 발행자가 연대 날인한 원 고를 첨부하여 지방장관을 경유하여 내부대신에게 허가를 신청한다. (중략) 제11조 허가를 얻지 않고 출판한 저작자 발행자는 다음의 구별에 의하여 처단한다. 1. 국교( 國 交 )를 저해하거나 정체( 政 體 )를 변괴하거나 국헌을 문란케 하는 문서 도화를 출판한 때는 3년 이하의 역형( 役 刑 ) 2. 외교와 군사의 기밀에 관한 문서 도화를 출판한 때는 2년 이하의 역형 3. 제2호의 경우 이외에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또는 풍속을 괴란( 壞 亂 )하는 문서 도화를 85

50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출판한 때는 10개월 이하의 금옥 4. 기타의 문서 도화를 출판한 때는 백원 이하의 벌금. 전항 문서 도화의 인쇄를 담당한 자의 벌 역시 같다. 제12조 외국에서 발행한 문서 도화 또는 외국인이 내국에서 발행한 문서 도화로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또는 풍속을 괴란하는 것으로 인정될 때는 내부대신은 그 문서 도화를 내국에서 발매 또는 반포를 금지하고 그 인쇄본을 압수할 수 있다. 제13조 내부대신은 본법을 위반하여 출판한 문서 도화의 발매 또는 반포를 금지하고 그 각판, 인쇄본을 압수할 수 있다. 제14조 발매 반포를 금지한 문서 도화인 줄 알면서 그것을 발매 또는 반포하거나 혹은 외국에서 수입한 자는 6개월 이하의 금옥에 처한다. 단 그 출판물로 제11조 제1항 내지 제3항에 해당하는 때는 그 조례에 따라 처단한다.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대정 8년 4월 15일, 제령 제7호) 제1조 정치의 변혁을 목적으로 하여 다수 공동하여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또는 방해하려고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 단 형법 제2편 제2장의 규정(인용자 : 내란죄)에 해당한 때는 본령을 적용하지 않는다. 제2조 전조( 前 條 )의 죄를 범한 자가 발각 전에 자수하였을 때는 그 형을 경감 또는 면제한다. 제3조 본령은 제국( 帝 國 ) 밖에서 제1조의 죄를 범한 제국신민( 帝 國 臣 民 )에게도 이를 적용한다. 형법상의 소요죄 (1) 제6조 범죄 후의 법률로 인하여 형의 변경이 있는 때는 그 가벼운 것을 적용한다. (2) 제54조 1항. 1개의 행위가 수 개의 죄명에 저촉되거나 (중략) 범죄의 수단 내지 결과인 행위로서 타의 죄명에 저촉되는 때에는 그 중 가장 무거운 형으로서 처단한다. 형사소송법 제34조 재판소의 관할에 관한 규정 : 범죄의 성질, 피고인의 신분, 원수, 지방의 민심, 기타 중대한 사정으로 인하여 재판에 대하여 분요( 紛 擾 ) 또는 위험이 발생할 염려가 있는 때에는 공안을 위하여 그 사건을 동등한 타 재판소에 이전할 수 있다. 제36조 피고인의 신분, 지방의 민심, 또는 소송의 상황으로 인하여 재판의 공정을 유지할 수 없는 염려가 있는 때에는 혐의를 이유로 그 사건을 동등한 타 재판소에 이송할 수 있다. 86

51 해제 보안법은 1907년에 만들어진 법이다. 자강단체가 활발한 활동을 하던 한말의 정치적 상황을 반영한 법이었다. 곧 개개인의 정치적 언설과 행동을 통제하는 법이었다. 제7조는 정치 에 관해 불온한 언동이나 동작을 하거나 타인을 선동 교사하는 행위를 규제하였다. 독립만세를 부르거나 시위에 참여하는 게 대표적이었다. 최고 형량은 징역 2년이었다. 출판법 제11조는 허가를 받지 않고 출판한 저작자와 발행자를 처벌하였다. 주로 독립선언서 를 인쇄하거나 반포한 행위가 해당되었다. 최고 형량은 징역 3년이었다. 소요죄는 다중취합( 多 衆 聚 合 )하여 폭행 또는 협박 을 한 경우 최고 10년의 징역에 처할 수 있었다. 보안법에 해당되더라도 폭력시위로 전화되었을 경우 해당되었다.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 은 1919년 4월 15일 공포된 제령 제7호이다. 대정 8년 제령 제7호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 이 정식 명칭이었지만 제정 당시에는 3 1운동의 대응이라는 의미에서 소요처벌령 으로도 불렸다. 45 법의 제정에서 공포까지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던 것을 볼 때 기존의 법을 보완할 때 필요한 부분만 보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보안법은 최고 형량이 2년이었기에, 조선총독부는 2년의 징역형으로는 법률로서 제재하는 의의를 충분히 살릴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또 제령 제7호는 제3조에서 일본의 영토 밖, 곧 간도나 노령에서 전개되던 각종 독립운동을 탄압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조항은 해외에서의 3 1운동뿐 아니라 3 1운동 이전부터 활발하게 활동하던 독립운동단체를 겨냥한 것이었다. 또한 제국신민 인 일본인과 외국인에게도 효력을 미치도록 하였다. 그러나 경찰이 피의자들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송치했지만 검사의 기소율은 30%에 불과하였다. 50%에 육박하는 보안법이나 소요죄에 비하면 상당히 낮은 수치였다. 불기소의 주된 이유는 증거불충분이었다. 보안법 제7조와 제령 제7호 제1조는 범죄의 구성요건을 같이 하였다. 그리고 형법 제6조는 범죄 후의 법률에 의해 형의 변경이 있는 경우 가벼운 것을 적용하는 조항이 있었다. 따라서 최고 10년형의 제령 제7호가 아닌 최고 2년의 보안법을 적용해야 하였다. 즉 제령 제7호로 처벌하기 위해서는 1919년 4월 15일 이후에 시위가 발생했을 때만 가능하였다 운동 참여 여성독립유공자들 54명에게 적용된 법령은 다음의 <표 20>과 같다. 45 매일신보 , 소요처벌령. 46 장신, 앞의 논문, 2007, 149~153쪽. 87

52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표 20> 3 1운동 여성독립유공자들에게 적용된 법령 연번 이름 적용 법 연번 이름 적용 법 1 곽진근( 郭 鎭 根 ) 소요(형법 106조 2) 28 왕경애( 王 敬 愛 ) 보안법, 출판법 2 구순화( 具 順 和 ) 보안법, 출판법 29 유관순( 柳 寬 順 ) 보안법, 소요 3 권애라( 權 愛 羅 ) 보안법 30 유점선( 劉 點 善 ) 보안법, 출판법 4 김공순( 金 恭 順 ) 보안법 31 윤악이( 尹 岳 伊 ) 보안법 5 김나현( 金 羅 賢 ) 보안법 32 윤형숙( 尹 亨 淑 ) 보안법 6 김덕순( 金 德 順 ) 보안법 33 이도신( 李 道 信 ) 보안법 7 김독실( 金 篤 實 ) 보안법, 출판법 34 이살눔( 李 살눔) 보안법 8 김신희( 金 信 熙 ) 보안법 35 이소선( 李 小 先 ) 보안법 9 김안순( 金 安 淳 ) 보안법 36 이아수( 李 娥 洙 ) 보안법, 출판법 10 김인애( 金 仁 愛 ) 보안법 37 이효덕( 李 孝 德 ) 보안법, 출판법 11 김종진( 金 鍾 振 ) 보안법, 출판법, 정치범처벌령, 사기 38 임명애( 林 明 愛 ) 보안법, 출판법 12 김현경( 金 賢 敬 ) 보안법, 출판법 39 임봉선( 林 鳳 善 ) 보안법 13 김효순( 金 孝 順 ) 보안법 40 임진실( 林 眞 實 ) 보안법 14 나은주( 羅 恩 周 ) 보안법 41 정막래( 丁 莫 來 ) 보안법 15 노순경( 盧 順 敬 ) 보안법 42 조옥희( 曺 玉 姬 ) 보안법 16 노예달( 盧 禮 達 ) 보안법, 출판법 43 조인애( 曺 仁 愛 ) 보안법 17 민옥금( 閔 玉 錦 ) 보안법 44 조충성( 曺 忠 誠 ) 보안법 18 박순애( 朴 順 愛 ) 정치범처벌령 45 진신애( 陳 信 愛 ) 보안법 19 박애순( 朴 愛 順 ) 보안법 박우말례 ( 朴 又 末 禮 ) 채애요라 ( 蔡 愛 堯 羅 ) 보안법 보안법 47 최수향( 崔 秀 香 ) 보안법 21 박자선( 朴 慈 善 ) 보안법, 출판법, 정치범처벌령 48 최요한나 ( 崔 堯 漢 羅 ) 보안법 22 박현숙( 朴 賢 淑 ) 보안법 49 최정숙( 崔 貞 淑 ) 보안법, 출판법 23 신관빈( 申 寬 彬 ) 보안법 50 탁명숙( 卓 明 淑 ) 보안법, 출판법 24 신분금( 申 分 今 ) 보안법 51 하영자( 河 永 子 ) 보안법 25 신특실( 申 特 實 ) 보안법, 출판법 52 한이순( 韓 二 順 ) 보안법 26 심영식( 沈 永 植 ) 보안법 53 함연춘( 咸 鍊 春 ) 보안법 27 어윤희( 魚 允 姬 ) 보안법 54 황금순( 黃 金 順 ) 보안법 88

53 해제 54명 중 곽진근 박순애를 제외하고는 모두에게 소위 보안법 위반죄가 적용되었다. 곽진근에게는 소요죄, 박순애에게는 정치범처벌령 이 적용되었다. 정치범처벌령은 박순애 외에도 김종진과 박자선에게 적용되었는데, 3명 모두 이 법이 제정된 이후에 만세운동을 전개하여 체포되었기에 일제는 이 법을 적용하였다. 그러나 정치범 처벌령에 의한 최고 10년 징역형이 언도되지는 않아 박순애는 징역 1년, 김종진은 징역 6개월에 2년 집행유예, 박자선은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 김종진과 박자선은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죄도 적용되었다. 5) 3 1운동 참여 여성들에게 가해진 폭력 정한경의 한국의 사정 (The Case of Korea)에 의하면 1919년 3월 1일부터 이듬해 3월 1일까지 1년 동안 만세시위로 7,645명이 살해당하고, 45,562명이 부상당하였으며, 49,811명이 체포당하였다. 그리고 체포된 이들 중 9,078명(18.2%)이 헌병 즉결령에 의한 태형, 1,514명(3%)이 약식재판에 의한 태형, 5,156명(10.4%)이 징역형을 받았다 운동으로 체포되어 판결을 받고 무죄로 석방되었거나 유죄로 수감되었거나, 어떤 경우라도 독립운동가들은 수많은 폭행과 모욕을 당하였고 열악한 감방생활을 견뎌야 했다. 여성들은 그 정도가 훨씬 심하였다. 1919년 7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출판된 언론인 켄달(C. W. Kendal)의 한국독립운동의 진상 (The Truth about Korea)에는 여성들이 3 1운동 때 당한 폭행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10세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녀들과 아녀자들, 그리고 여학생들이 자기의 조국을 위해 정열을 발산하고 독립을 외쳤다는 단순한 죄목으로 치욕적인 대우를 받았고 체형( 體 刑 )을 받았으며, 또 고문을 당했다. 어린 소녀들이 고꾸라지고 잔혹하게 얻어맞았다. (중략) 트윙 목사의 증언이 목격한 바에 의하면, 20여 명의 여학생들이 조용히 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총을 맞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일본군이 덥치더니 그들의 총으로 야만스럽게 구타하여 고꾸라뜨리고는 모욕적으로 그들을 대했다고 한다. (중략) 어린 소녀들은 머리채를 휘어잡혀 47 이정은, 3 1운동의 학살만행, 역사비평 45, 역사문제연구소, 1998, 46쪽. 89

54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집에서 끌려나와 전신주에 묶인 채로 대중이 보는 앞에서 매를 맞았다. 아낙네들은 폭행을 당하고 비인도적인 악형을 겪었다. 48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에 의하면, 평양에서 체포 수감된 여학생에게 일제는 달군 쇠꼬챙이로 음문을 지지며 사내가 몇이냐고 묻는 등 갖은 악형과 폭언 등으로 욕을 보였다. 49 수감되었다가 석방된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감옥에서 일본인들이 한국여성들에게 통상적으로 행한 만행은 다음과 같았다. 1 여성들은 끈으로 머리채를 묶어 천정에 매달아 놓고, 엄지발가락이 겨우 땅에 닿을 듯 말 듯 하게 하였다. 2 여성들을 날마다 한 차례씩 감옥 마당에 나체로 세워놓고 헌병들이 한 시간씩 혹독한 매질을 하였다. 3 한인 여성이 수감되면 반드시 발가벗기고 심문을 하는데, 여학생이 판결을 받을 때에는 틀림없이 이미 강간 폭행을 당한 후였다. 4 경찰서에 잡혀온 여학생에게는 일본순사가 먼저 강간을 하고 나서 네가 처녀냐? 정녀( 貞 女 )냐? 라고 묻고, 대답이 없으면 갑자기 주먹으로 여자의 배를 때렸다. 5 여성을 알몸으로 두세 시간 거울 앞에 세워놓고 조금이라도 몸을 굽히면 심하게 때렸다. 6 여성의 옷을 다 벗겨 반듯이 눕히고 겨드랑이 털과 음모를 뽑기도 하고, 고약을 녹여 여자 음부에 붙였다가 식어 굳어지면 이를 갑자기 잡아 떼어 그 음모가 모두 빠지도록 하였다 년 3월 하순에 출옥한 31명의 서울 여학생들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처음 수감되어서는 무수하게 매를 맞고, 그 후에는 발가벗겨져 알몸으로 손발이 묶인 채 마굿간에 버려졌다. 밤은 길고 날씨는 혹독한데 지푸라기 하나도 몸에 걸치지 못했다. 왜놈들은 예쁜 여학생 몇 명을 몰래 잡아가서 윤간하고는 새벽에 다시 끌고 왔다. 눈은 복숭아같이 퉁퉁 붓고 사지는 옭아 맨 흔적이 남아 있었다. 신문할 때에는 십자가를 늘어놓고 말하기를 너희들은 신자이므로 마땅히 십자가의 고난을 받아야 한다 고 하였다. 또 그들은 C.W. 켄달 지음, 신복룡 역주, 한국독립운동의 진상, 집문당, 1999, 51쪽. 49 박은식 지음, 김도형 옮김,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소명출판, 2008, 250쪽. 50 박은식 지음, 김도형 옮김, 앞의 책, 260~262쪽.

55 해제 여자고등보통학교 노영렬( 盧 永 烈 ) 51 을 알몸으로 십자가 위에 반듯이 눕힌 다음, 이글거리는 화로를 십자가 옆에 놓고 쇠꼬챙이를 시뻘겋게 달구어 유두를 서너 차례 난자한 후에 결박을 풀어주었다. 그런 후에 칼로 사지를 오이 자르듯이 나누어 선혈이 비처럼 쏟아졌다. 또 다시 다른 십자가로 옮겨서 머리채와 함께 다섯 군데를 묶어 공중에 매단 채 누이고는 고약을 불에 녹여 머리털과 음문, 좌우 겨드랑이에 붙이고 이를 식힌 후에 힘껏 잡아떼었다. 털과 살갗이 함께 벗겨져 선혈이 땅에 그득하였다. 왜놈들은 이를 보고 크게 웃으며 즐거워하였다. 소위 우두머리라는 자가 너는 그래도 감히 만세를 부르겠는가? 라고 물었다. 노영렬이 대답하기를 독립을 이루지 못한다면 죽더라도 그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할 수 없이 원래의 감옥에 다시 가두고 며칠 동안 음식을 주지 않았다. 3일만에 다시 악형을 가하였는데 왜병 2명이 좌우에서, 한 사람은 여학생의 손을 꽉 잡고, 한 사람은 죽침으로 머리를 무수히 찔렀다 년에 간행된 신문기자 멕켄지의 책에는 다음과 같이 만세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이 당한 고통이 기록되어 있다. 대부분의 경찰서에서는 시위에 조금이라도 가담했으면, 여학생과 젊은 부녀자들의 옷을 벗기고 때리고 완전히 알몸으로 만들어,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일본 남자들 앞에 노출시키는 것이 예사였다. 한국 여자들은 백인 여자들처럼 자기의 몸을 남에게 보이기를 싫어하는데, 일본인들은 이것을 알고, 이런 방법으로 욕보이기를 좋아했다. (중략) 서대문 밖에 있는 감옥은 전형적인 일본식 감옥이었다. 여기에는 여자간수도 있었다. 남자들 앞에서 옷을 벗고, 그들의 검사를 받는다는 것은 여학생으로서 죽기보다 싫은 것 같았다. 아마 그들은 감옥의 의사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들에게 되도록 많은 수치를 주려고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략) 53 또 하나의 희생자는 기독교신자인 선생의 아내로 매우 총명하고 지성적인 부인이었는데 생후 넉 달된 어린애가 있고 거기에다 두세 달 된 태아까지 있었다. 그는 시위에 참가한 후에 51 해방 후 간행된 중앙신문 1946년 2월 28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당시 고등여학교 교원이던 노영렬( 盧 永 烈 ) 여 사는 왜놈의 헌병들이 잡아다가 묶어놓고 화저로 지지고 카롤 가슴을 찌르며 다리 사이와 겨드랑이 밑에 어름찜질을 하고 비틀 면서 이래도 만세를 부를테냐 하니까 노 여사는 독립이 되지 않으면 죽어도 셀 수 없이 부르겠다 하고 대답하여 할 수 없이 내놓았다고 한다. 52 박은식 지음, 김도형 옮김, 앞의 책, 2008, 248~249쪽. 53 F, A, 멕켄지 저, 이광린 역, 앞의 책, 1969, 209~210쪽. 91

56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붙들려간 다른 여자의 집에 가서 그 어머니를 위로해 주고 있었다. 여기에 경관이 들이닥쳐 그 여자에게 만세를 불렀느냐고 물었다. 그 여자가 불렀다고 하자 경관은 업고 있던 어린애를 떼어놓게 하고 경찰서로 끌고 갔다. 그 여자가 경찰서로 들어가자 한 사람이 뒤에서 세게 차는 바람에 그 여자는 방바닥에 엎어졌다. 엎어져 있는 그 여자에게 순경이 발로 목을 밟았고 그리고는 다시 일으켜 계속 때렸다. 옷을 벗으라고 했다. 그 여자가 망설이자 경찰이 발로 차고 괭이와 몽둥이를 들면서 너는 선생이지, 애들에게 반일감정을 일으키게 한 선생이니 때려서 죽일 작정이다 순경은 그 여자의 속옷을 찢어서 벗겼다. 그래도 찢어진 옷을 붙들고 벌거숭이 몸을 가리려 했다. 그것마저 빼앗아 찢어버렸다. 그 여자가 앉으려 하자 강제로 일으켰다. 그 여자는 벽으로 돌아서서 뭇사내들의 시선을 피하려 하였다. 다시 그 여자를 강제로 돌려세웠다. 그 여자가 손으로 몸을 가리려 하자 한 사람이 손을 비틀어 뒤로 돌려잡고 매질과 발길질을 계속했다. 그 여자는 몹시 몸을 다쳐 마루에 넘어질 지경이었으나 다시 잡아 세우고 매질을 계속했다. 그런 후에 다른 방으로 보냈다. 나중에 그 여자는 다른 여자들과 함께 사무실로 불려갔다. 경찰이 물었다. 만세를 부르면 어떻게 되는지 이제 알았나? 그런 짓을 감히 다시 하면 알지? 54 미국기독교연합회가 조사하여 미국상원에 제출한 3 1운동 조사보고서에 수록된, 어떤 여학생이 경찰에서 받은 악형은 다음과 같았다. 시위운동에 뛰어들어 덕수궁 앞에 다다랐을 때 일본순사가 달려들어 머리를 휘어잡아 낚아채 넘어뜨린 다음 사정없이 발길질을 하여 나는 기절했다. 그리고 머리를 잡혀 종로서까지 끌려갔을 때 20여 명의 순사가 달려들어 발길로 차고 뺨을 때리고 칼로 찌르고 해서 나는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다. 내가 맞는지 남이 맞는지 헤아릴 수 없었으며, 사지에서 피가 흐르고 전신에는 청점( 靑 點 )이 생겼다. 감옥에 끌려가서 또 같은 매질을 받고 방 한구석으로 던져졌다. 그 뒤에 내 기억은 없어졌다. 눈을 떠보니 다수의 남녀가 방에 있었다. 그들의 심문 방법을 말할 기분조차 없다. 두 발을 붙들어 매놓고 모진 매질을 하고 사람으로서 차마 견딜 수 없는 조롱을 한다. 그리고 손가락을 잡아매고 낚아채서 앞으로 거꾸러지면 호령 호령 하여 또 꿇어앉히고(중략) 난타를 가하면서 네가 독립을 하고 싶단 말이냐. 독립은 감옥 속에 있다. 네 목숨은 이 칼 한 자루에 있어 하면서 머리를 잡아 흔들고 귀를 잡아 끌고 그래도 부족하던지 큰 몽둥이로 머리를 쳤다. 까무러쳤다가 다시 정신이 들어 방으로 기어들어가면 54 F, A, 멕켄지 저, 이광린 역, 앞의 책, 1969, 쪽. 92

57 해제 순사들은 내 기어가는 꼴을 보고 웃으며 좋아한다. 이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가만히 기도를 올렸다. 이렇게 5월이 지난 후 서대문 감옥으로 압송되어 조그만 감방으로 들어갔다. 수일 후 나는 심문도 없이 그대로 방출되었다 년 내한하여 생활한 감리교 여선교사 노블(Noble)은 집에서 유인물이 발견되어 수감되었던 전도부인 이 헤스터가 그녀를 방문하여 증언한 바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들은 그녀를 종로결찰서로 끌고 갔고, 그녀는 어느 방으로 들어가 일본인 경찰과 책상을 사이에 놓고 마주 앉게 되었다. (중략) 그녀가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기다란 막대기로 그녀의 머리와 귀를 몇 차례 때리더니 다시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고, 그녀는 매를 맞을까봐 얼른 대답을 했다. (중략) 경찰은 그녀에게 다가와서 그녀의 머리를 막대기로 때렸고 막대기는 세 동강으로 부러졌다. 그러자 경찰은 주머니에서 밧줄을 꺼내면서 자신들이 묻는 것에 자백을 하지 않으면 그 밧줄을 세게 휘둘러 그녀를 때리겠다고 했다. 감옥에 2,000여 명이 갇혀 있었는데 경찰은 그들에게 그녀가 선동유인물을 배포했다고 말했고, 이에 그녀가 그 사실을 증명할 이를 데려오라고 되받았다. 그러자 경찰은 그녀의 머리와 얼굴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경찰은 그녀를 감방으로 끌고 갔고, 흙바닥인 그 감방에 그녀를 집어넣겠다고 겁을 주었다. 여러 개의 감방에 사람들이 수감되어 있었는데, 그들 역시 고문 당했음을 알 수 있었다. 경찰은 그녀를 다시 심문실로 데리고 가서는, 그녀를 조금 전에 본 것 같은 감방에 가두겠다고 다시 위협했다. 구타로 인한 고통으로 녹초가 된 그녀는 감방에 들어가면 몸이라도 눕힐 수 있겠다는 생각에 자신을 어서 빨리 감방에 넣어달라고 가정했다. (중략) 더 이상 증거를 찾아낼 수 없었던지라 (중략) 그녀를 풀어주었다. 56 어윤희는 경성지방법원에 끌려가 심문을 받는 자리에서도 검사에게 당당히 맞서 일침을 가했다고 한다. 즉 경찰에서 조사를 마치고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압송되어 재심문을 받았는데 그 때 저 앙큼한 년을 봐라. 다 알고 있는데도 거짓말을 하는구나. 저 년을 발가벗겨라 하고 검사가 호통을 치자 내 몸에 누가 손을 대느냐? 발가벗은 내 몸뚱이를 보기가 그렇게 소원이거든 내 손으로 옷을 벗으리다 하고는 옷을 훌훌 벗은 후 자 실컷 보시오. 당신 어머니도 나같을 거고 당신 부인도 나와 같을 거요 하고 소리를 55 정요섭, 한국여성의 민족운동에 관한 연구 : 3 1운동을 중심으로, 아세아여성연구 10, 숙대출판부, 1971, 327쪽. 56 매티 월콕스 노블 지음, 이양준 옮김, 노블일지 : 1892~1934, 이마고, 2010, 234~234쪽. 93

58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지르니 검사가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어서 옷을 입혀 데리고 나가라 고 간수에게 명령하였다고 한다. 57 판결문에도, 판결까지의 어떠한 문서들에도 기록되지 않은 일제의 폭력은 차마 기록으로 남기지 못할 정도로 가혹하였다. 여성들에게 큰 수치인 알몸을 하게 만들고, 알몸인 여성을 모욕하였다. 그런데 많은 여성들이 이렇게 참혹한 일을 겪으면서 여러 날 혹은 여러 달 수감되어 있다가 재판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방면되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그들의 고통과 모욕당함을 침묵하였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알 수 있는 그들의 아픈 기록은 매우 적다. 모욕당하고 고통당한 여성들의 잘못이 결코 아님에도 그 여성들은 침묵하였다. 그래서 독립을 위한 그녀들의 기꺼운 희생은 역사의 흐름과 함께 묻혀졌고 묻혀져갔다. 그녀들의 고통을 진정으로 가슴 아파하고 역사의 전면에 드러내어 그녀들이 당한 고통이 결코 그녀들의 모욕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를 저지른 일제의 악행임을 분명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후손들이 해야 할 당연한 책무이고, 평화를 향해 가야 하는 인류의 의무이다. 5. 지역별 3 1운동의 전개 양상 3 1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여성들 중 판결문이 남아 있는, 이 자료총서에 수록된 여성들이 3 1운동을 전개한 지역의 만세시위와 그녀들의 활동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서울 초기의 3 1운동 계획은 종교계와 학생들의 의해 각각 추진되었다. 일제가 한국강점 직후 독립운동세력을 제지하기 위하여 정치성을 띤 모든 사회단체를 강제해산 조치하였기에 그나 마 조직과 단체를 유지할 수 있었던 세력이 종교계와 학생층밖에 없었다. 이들 국내조직과 국외지역 독립운동자와 유학생의 구국에너지가 하나되어 펼쳐진 항쟁이 3 1운동이었다. 57 안경호 편, 어윤희 추모록, 유린회,

59 해제 천도교측의 권동진 손병희 오세창 최린 등은 1919년 1월 중순 경 시위운동을 일으키기 로 결의하고,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의 3대 원칙을 수립하였다. 58 대중화와 일원화 원칙 은 전 민족이 하나의 체계로 민족운동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발전양상이라고 평가 할 수 있다. 더구나 서로 다른 종교단체가 민족문제 해결을 중시하고 민족적 양심으로 뭉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선택한 비폭력원칙은 3 1운동 추진세력들의 계몽주의적 성향을 보 여주기도 하지만, 당시 어떠한 무력수단도 없었던 제약 때문에 취한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 다. 그러나 민중운동이 비폭력으로 진행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은 민족대표들이 가진 한계였다. 개신교측의 시위계획은 평안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상하이에서 파 견된 신한청년당원 선우혁의 활약이 연결고리로 작용하였다. 59 신한청년당이 파리강화회의 에 대표를 파견하는 한편 국내와 일본 만주 노령의 독립운동세력과 연결하였다. 선우혁은 1919년 1월말에서 2월 초순경 평안도로 들어와 이승훈 양전백 등 옛 신민회 동지들을 만났 다. 그는 그 자리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마무리와 이에 따른 국제회의 소식을 전하며 독립운 동방법을 협의하였다. 그 영향이 평양과 정주, 선천 일원의 개신교회와 개신교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갔다. 60 일본유학생의 2 8독립운동은 국내 천도교 인사들에게 자극을 주었다. 1918년말 유학생 들은 최팔용을 비롯한 10명의 실행위원을 선출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61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송계백을 국내로 파견하 여 현상윤과 최린 등을 접촉하게 하였다. 62 송계백은 그들이 준비하고 있던 독립선언과 투쟁 방향을 알렸다. 그리고서 1919년 2월 8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200여 명의 한국학 생들이 모여 한국의 독립과 일제와의 혈전을 선언하고 나섰다. 63 이후 국내 천도교 지도자들 58 최린, 자서전, 한국사상 4, 1962, 164쪽; 장효근일기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조선3 1독립소요사건, 독립운동사 자료집 6(3 1운동사자료집), 863쪽. 59 김희곤, 신한청년당의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중국관내 한국독립운동단체연구, 95-96쪽. 6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조선3 1독립소요사건, 독립운동사자료집 6(3 1운동사자료집), 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예심종결결정서(김형기 등 학생단), 독립운동사자료집 5, 69쪽. 6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자료 2, 655쪽. 62 전영택, 동경 유학생의 독립운동, 신천지 1권3호, 1946, 98-99쪽. 6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자료 2, 657쪽. 95

60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이 충격을 받아 독립운동을 본격화하였다. 천도교 인사들은 다시 김윤식 한규설 등 대한제 국시기 고위직을 지낸 인사들에게 사람을 보내 동참을 요구했지만, 별 소득을 얻지 못했다. 한편 학생들은 1919년 1월 하순부터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강기덕 김원 벽 등 전문학교 대표들이 회합을 갖고, 64 각 학교별로 대표를 선임하고 독립선언서의 기초 등 세부적인 계획을 수립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처럼 각기 추진되던 독립운동은 2월초 대통합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천도교측은 개신교측 이승훈에게 연합을 제의하 였다. 그 결과 조국독립이라는 명제 아래 교단과 종파의 차이를 극복하고 연합할 것에 동의 하였다. 65 이들은 거사 날짜를 3월 1일로 잡았다. 1월 22일 승하한 광무황제의 장례일이 3월 3일로 잡혀 있었는데, 여기에 참례할 많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서울로 모여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 다. 그 분위기를 이용하여 대규모의 시위를 벌이고자 했는데, 국장일 앞날이 3월 2일 일요일 이었다. 그래서 이 날을 피하자는 개신교측의 요구에 따라 하루를 앞당겨 3월 1일로 거사날 짜를 잡았다. 66 그들은 이 외에도 구체적인 활동방침을 확정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비롯한 각 종 문서의 기초와 인쇄 담당, 일본 정부와 의회 및 강화회의에 참가한 여러 나라 대표들에게 보낼 통고문과 청원서의 송부 방법, 독립선언서의 서울과 지방 배포의 역할분담, 민족대표 의 상징, 불교계의 동참 등이 그 내용이었다. 67 이들은 독립운동에 동참할 뜻을 밝힌 한용운의 노력으로 불교계와의 연합도 성사시켰다. 68 또 독자적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하던 학생들과도 연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학생대표들 은 회의를 열고 두 가지 활동전략을 수립하였다. 하나는 연합시위에 참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형편에 따라 학생의 독자적인 시위를 전개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천도교 개신교 6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조선3 1독립소요사건, 독립운동사자료집 6(3 1운동사자료집), 867쪽; 李 炳 憲 編 者, 손병희 조선 독립을 선언함, 3 1운동 비사, 삼일동지회, 1966, 64쪽. 65 이병헌 편저, 1919년 4월 7일 경성지방법원 예심에서의 최린 취조서, 3 1운동 비사, 589쪽; 1919년 3월 7일 경무총감부에 서의 최남선 취조서, 3 1운동 비사, 659쪽. 66 이병헌 편저, 1919년 3월 12일 경무총감부에서 검사의 함태영 취조서, 3 1운동 비사, 648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조선 3 1독립소요사건, 독립운동사자료집 6(3 1운동사자료집), 874쪽. 67 신용하, 3 1독립운동 발발의 경위, 일제강점기하의 사회와 사상, 신원문화사, 1991, 60-66쪽. 6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예심종결결정서(손병희 등 48인),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83, 19쪽; 김법린, 3 1운동과 불교, 3 1 운동 50주년 기념논문집, 동아일보사, 1969, 75-77쪽. 96

61 해제 불교 학생의 대연합이 결성되었다. 69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독립선언과 만세시위가 준비되어 갔다. 독립선언서는 천도교측에서 준비하기로 하여 최남선에 의해 초고가 작성되었다. 초고를 받은 최린은 이를 천도교측과 개 신교측에서 동의를 얻었다. 독립선언서는 인류의 양심에 비추어 볼 때, 한민족의 독립이 당 연하다는 점과 강력한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천명하는 것으로, 1910년대 독립운동의 이론 과 논리가 정리되었다. 70 완성된 독립선언서는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보성사에서 사장 이종일 의 책임 아래 2월 27일경 21,000여 장이 완성되었다. 71 독립선언서가 인쇄되고 독립선언을 위한 준비가 마무리되자 각 종단은 민족대표를 선임하였고, 선임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 서에 서명 날인하였다. 대표로 선임된 33인은 천도교측 손병희 외 14명, 개신교측 이승훈 외 15명, 불교측 한용운 외 1명이었다. 72 2월 28일 저녁 손병희 집에서 열린 마지막 모임에서 대표들은 계획을 변경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에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을 선언하기로 했던 것을 바꾸어 바로 이웃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이들이 시민들 앞에서 체포될 경우에 폭력사태가 일어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73 이들의 행위는 뒷날 엇갈리는 평가를 빚어냈다. 더구나 이들 가운데 불 교지도자를 비롯한 소수를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가 뒷날 친일분자로 변절했기 때문에 두고 두고 이들의 대표성이 부정되어 오기도 한다. 한편 파고다공원에서는 대표들을 기다리다가 학생들이 독립선언식을 주도해 나갔다. 수천 명의 학생과 시민이 모여 있다가 뒤늦게 독립선언장소가 변경된 사실을 알고 독자적인 선언 식을 거행하고 시위에 들어갔다. 시위대 중 일부는 덕수궁으로 들어가 광무황제의 영전에 조 례를 올리기도 하였고, 프랑스영사관에 들어가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본국에 통고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미국영사관 앞에서 혈서를 들고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74 서울의 만 세시위는 날이 저물도록 시내 도처에서 전개되었다. 그러나 공약삼장에 밝힌 그대로 질서정 6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판결서(손병희 등 48인), 독립운동사자료집 5, 46-47쪽. 70 이병헌 편저, 1919년 5월 8일 경성지방법원 예심에서의 한용운 취조서, 3 1운동 비사, 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판결서(손병희 등 48인), 독립운동사자료집 5, 20쪽. 71 이병헌 편저, 권동진 선생 취조서, 3 1운동 비사, 삼일동지회, 1966, 180쪽 72 최린, 자서전, 175쪽. 73 이병헌 편저, 1919년 3월 8일 경무총감부에서 검사의 이갑성 취조서, 3 1운동 비사, 쪽. 7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예심종결결정서(김형기 등 학생단), 독립운동사자료집 5, 72-74쪽. 97

62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연하게 비폭력 평화시위를 전개하여 한 건의 폭행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한 이 자료총서에 수록된 여성은 경성여자고등보통 학교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이화여학교 정신여학교의 학생과 교사들, 구세 병원 세브란스병원의 간호사들이었다. 3 1운동 1주년을 기념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서울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학교별로 그리고 독립운동가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화여학교에서는 교사 김독실( 金 篤 實 )과 노예달( 盧 禮 達 ) 신특실( 申 特 實 ) 유점선 ( 劉 點 善 )이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화여학교 이문회( 以 文 會 )는 2월 28일 정기모임에서 전교생이 모여 일제에 항거하는데 앞장설 것을 결정하였다. 다음 날 소복한 전교생이 덕수궁 대한문( 德 壽 宮 大 漢 門 ) 앞에 나가 망곡하고 학생대열에 끼어 독립만세를 고창하고자 계획하였으나 이를 눈치 챈 학교측이 문을 닫아버리고 외국인 교사들이 저지하였다. 그러나 저지하고 있던 수위를 밀치고 15명 이상의 학생이 학교 밖으로 뛰어나가 만세군중과 합류하였다. 이 때 서대문경찰서에서 즉각 출동하여 주동자를 색출하였고 잡지 못하자 두 선생을 조종자라 하여 연행해갔다. 교문 밖으로 나온 15명의 학생들은 남대문 앞에서 각급학교 학생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고 체포되었다. 당시 교사이던 박인덕( 朴 仁 德 ) 하복순( 河 福 順 )이 주모자로 몰려 투옥되었고, 28명의 여학생이 검거되어 그 중 5명이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이화여학교는 3월 10일 조선총독부의 명령으로 휴교를 당하였다가 그 해 10월 개교하였다. 김독실은 1919년 3월 1일 이화여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었는데 파고다공원에서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펼쳤다. 그리고 3월 5일 학생들의 제2차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19년 11월 1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고 3월 이상 옥고를 치렀다. 75 노예달은 1919년 3월 1일 이화학당 고등과 2학년, 신특실과 유점선은 같은 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는데 파고다공원에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고, 3월 5일 75 예심종결서 (경성지방법원, ) ;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매일신보 , 전무 후무한 대판결, 240명을 한 번에 언도해, 피고의 대부분은 모조리 학생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2, 독립유공자사 업기금운용위원회, 1979, 113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9,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9, 쪽 ; 독 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2, 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3,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84, 쪽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 동사자료집 17, 국사편찬위원회, 1994, 277쪽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8, 국사편찬위원회, 1994, 279쪽. 98

63 해제 남대문에서 학생들 주도의 제2차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1919년 11월 1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았다. 76 정신여학교에서는 이아수( 李 娥 洙 )가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녀는 1919년 3월 5일 서울 남대문역 앞에서 이화여학교 유점선 외 수십명과 함께 학생들의 제2차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언도받아 공소하였으나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 기각당하였다. 77 출옥한 후 동아일보 에는 출옥자의 감상 이라는 제목으로 이아수의 다음과 같은 글이 게재되었다. 나의 지난 바 감상은 너무도 뒤숭숭하여 대양에 홀홀히 움직이는 파도 모양으로 수란함으로 질서없는 말로 몇 말씀 여쭙겠습니다. 저는 그 쓸쓸하고 냉랭한 철창 속에서 지독한 괴로움을 당할 때에 설상가상으로 감기와 위병으로 더욱 괴로움을 당하였습니다. 짐승과 같은 대접을 받아가며 7,8개월 동안 예심인지 무엇인지 걸려있다가 13개월 되는 달에 몸에 붉은 옷을 걸게 될 때에 나는 다만 한 번 ㅁ고 달게 받았습니다. 붉은 옷을 입힌 후에 죽 둘러앉히더니 네가 소위 조선여자냐. 네까짓 것들이 건방지게 웬 정치에 상관을 하느냐. 아직 조선여자는 정치에 상관할 정도가 못된다. 너희는 지금 겨우 가정이나 개량하고 자녀나 잘 양육하여라 할 때에 조선여자 중 일 분자인 저는 가슴을 칼로 베는 듯이 느꼈습니다. 그래서 붉은 옷을 입은 후에 때를 따라 들어오는 콩밥 한 줌과 소금물과 구린내나는 무 몇 쪽을 주는데 처음에는 저것을 먹고 어떻게 사나 이전에 우리 집 개도 저러한 대접은 안 받았을 텐데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대접하냐 하고 이제는 꼭 죽었다 하였더니 모진 것이 목숨이요 배고프니 안 먹을 수 없어서 차차 행습이 되니까 평소에 우리 집에서 고량진미 먹을 때보다 더 맛이 나서 꿀보다도 맛난 것은 그 콩밥입디다. 이것을 먹고 날마다 목숨을 보전하여 나가는 중 날마다 하는 일은 피아노 테이블 위에 놓는 레이스 만드는 것인데 별별한 공상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고 끊어질 듯이 고픈 배를 쥐고 홀로 울 때는 금할 수 없이 세상의 무정함은 76 경성지방 예심종결서 ( ) ;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 ; 매일신보 , 전무후무한 대판결, 240명을 한 번에 언도해, 피고의 대부분은 모조리 학생 ; 이현희, 한국여성의 항일투쟁과 일제의 탄압고-3 1운동시의 여성항쟁을 중심으로-, 사학연구 31, 한국사학회, 1980, 78~80쪽. 77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 ;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 ; 매일신보 , 前 無 後 無 한 大 判 決, 240명을 한 번에 언도해, 피고의 대부분은 모조리 학생 ; 이현희, 한국여성의 항일투쟁과 일제의 탄압고-3 1운동시의 여성항쟁을 중심으로-, 사학연구 31, 한국사학회, 1980, 78~80쪽. 99

64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느끼게 되더이다. 아아 인정도 모르고 의리도 모르는 그 간수들? 다시 생각해도 이가 갈립니다. 지리한 세월이 유수같아 어언간 엄동설한이 되니까 사정없이 올라오는 인왕산의 혹독한 바람! 칼날같은 눈보라가 애처로운 우리의 살을 애는 듯할 때에 수족의 감각은 없어지고 갈 바를 모르고 나오는 애년한 생각은 끝이 없이 배회합디다. 철창을 새니 들어오는 밝은 달은 외로운 우리의 강산을 두루 비추고 고향의 부모형제도 비추련만 부모의 소식을 몰라 홀로 더운 눈물로 베개를 적실 때에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주님께 기도를 올려 스스로 위로하였나이다. 백두산에 쌓인 눈과 같이 쌓인 나의 원한을 다 말할 수 없음이 원통합니다. 옥중에서 지은 글 한 귀를 외우겠습니다. 해는 지고 바람은 찬데 몰려오는 눈조차 알고 맵도다. 정숙한 이 몸에 포박이 웬 일인가. 무죄한 이 몸에 악형이 웬 일인가. 귀히 기른 이 몸에 철창 생활 웬 일인가. 북악산 머리에 눈이 쌓이고 반야중천에 달은 밝은데 청춘의 끓는 피 참기 어려워 느껴 울음에 목맺히도다. 78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는 최정숙( 崔 貞 淑 )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최정숙은 학교 동료 최은희( 崔 恩 喜 )와 함께 동료들을 규합하여 3 1운동 참여를 권유하였다.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이 발표된 후 수천 군중이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내로 행진할 때 이에 참가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내를 행진하다 체포되어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에 3년간 집행유예를 받아 8월여 옥고를 치렀다. 79 최정숙과 함께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최은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즉 3 1만세시위에 전교생이 참가한 것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가 유일하였다. 고종의 국상을 당하여 전교생이 곡반( 哭 班 )에 나가기를 원하였으나 일본인 교장 시가[ 滋 賀 莊 三 郞 ]는 각 반에서 한 사람씩만 나가도록 조처하였고 이에 반발한 학생들은 대표가 다녀올 때까지 덕수궁 쪽을 향하여 엎드려 곡하였다. 인산 날까지 40여 일의 애도기간에 학생들은 망국의 한을 감추지 않았다. 최은희는 황해도 출신으로 78 동아일보 , 출옥자( 出 獄 者 )의 감상 예심종결서 (경성지방법원, ) ;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 ; 문일민, 한국독립운동사, 사단법인 애국동지회, 1956, 106쪽 ; 金 正 明, 朝 鮮 獨 立 運 動 Ⅰ( 民 族 主 義 運 動 編 ), 東 京 : 原 書 房, 1966, 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 동사 2,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9, 113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9,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9, 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2, 쪽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4, 국사편찬위원회, 1991, 쪽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 자료집 17, 국사편찬위원회, 1994, 쪽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8, 국사편찬위원회, 1994, 124쪽. 100

65 해제 동료들을 규합하기 위해 하숙을 나와 기숙사로 들어갔다. 그녀는 1학년이던 1917년부터 박희도( 朴 熙 道 )의 지도로 비밀서클을 만들어 활동하였다. 강평국 고수선 김숙자 김 일조 노순열 유재봉 이남재 이덕순 이덕요 이양전 이은 이정의 최정숙 등 본과와 사범과 기예과 학생 20여 명이 회원이었다. 최은희는 1919년 2월 28일 박희도를 만나 독립선언서 를 전달받고 내일 오정에 전체 학생을 이끌고 탑골공원으로 나오너라 하는 당부를 받았다. 그 날 저녁 제주 출신 남자유학생들이 비밀리에 기숙사로 찾아와 같은 고향인 소구선 최정숙을 만나고 갔다. 토요일인 3월 1일 수업은 긴장 속에서도 평상시와 같이 진행되었다. 그 날 새벽 독립선언서 뭉치가 학교 담 너머에 던져진 것을 발견한 학교당국은 심상치 않은 사태를 우려하여 긴급 교직원회를 열어 학생들을 하학시키지 않고 점심용 빵을 사러 보내는 등 부산하게 움직이고 교문을 폐쇄하였다. 학생들은 포기하지 않고 돌, 칼, 도끼 등을 찾아내어 교문을 부수고 혹은 기숙사 창문을 타고 나와 일단 덕수궁 쪽으로 향하였다. 경성여고보 학생들은 혼잡 속에서 몇 갈래로 헤쳐져 만세를 부르다가 32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전교생의 10%가 넘는 숫자였다. 3 1만세시위로 체포된 경성여고보 학생들은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었는데 학교당국의 급한 조처로 단순가담자라고 판단된 학생들은 대부분 방면되고 10여 명이 구금되었다. 일제경찰의 조서에는 강평국 고수선 김일조 유재룡 이명숙 최은희 최정숙 등을 주동자로 지목하고 그밖에 김애숙 유경숙 이금자 이순이 등을 구금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본과 사범과 기예과 학생들이 고루 포함되어 있었고 종로경찰서 외에 다른 지역의 경찰서에 연행된 학생도 있는 것으로 후에 밝혀지기도 했다. 이때 퇴교 혹은 휴학 징벌을 받은 학생들은 영친왕과 이방자의 결혼 발표로 특별사면되었다. 80 간호사들도 만세운동에 합류하였다. 탁명숙( 卓 明 淑 )은 구세병원 간호사 81 였는데 1919년 3월 5일 남대문역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붉은 깃발을 흔들며 시위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았다. 그 해 9월 보석 상태에서 사이토[ 齋 藤 實 ] 조선총독 처단을 시도했던 강우규( 姜 宇 奎 )를 서울 누하동( 樓 下 洞 ) 80 경기여고동창회(경운회)개교100주년기념사업회 편찬위원회, 경기여고 100년사, 도서출판 경운회, 2008, 58~60쪽. 81 세브란스병원에서 3년 6개월동안 실습하고 1917년에 구세병원의 간호사가 되었다.(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7, 1994, 187쪽(번역문), 469쪽(원문). 101

66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지인의 집에 피신시켰다가 체포되었다. 82 만세운동에 참여한 간호사로는 구세병원의 탁명숙 외에 세브란스병원의 김효순( 金 孝 順 ) 노순경( 盧 順 敬 ) 이도신( 李 道 信 )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들은 1919년 12월 2일 오후 7시경 서울 훈정동( 薰 井 洞 ) 종묘 앞에서 조선독립 만세 라고 주서( 朱 書 )한 헝겊을 흔들며 2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등 활동하다 체포되어 1919년 12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언도받았다. 83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는 김종진( 金 鍾 振 )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녀는 1919년 3월 1일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시가를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리고 그 해 11월 28일 전협( 全 協 ) 최익환( 崔 益 煥 ) 등이 주도 조직한 대동단( 大 同 團 )에서 의친왕 이강( 義 親 王 李 堈 ) 등이 서명하여 제2회 독립선언서 를 작성한 후 이를 서울 일대에 제작 배포하여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자 이에 참여하여 자신의 숙소를 거사 논의장소로 제공하였다. 또한 태극기 제작에 협력하는 등 거사를 준비하였으며 안국동( 安 國 洞 ) 경찰관주재소 앞 광장에 집결하여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처벌령 및 보안법,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언도받고 1년여 동안 옥고를 치렀다. 84 여성들은 3 1운동을 계속하여 기억하고 그 정신을 이어가고자 하였다. 43세의 박자선( 朴 慈 善 )은 1920년 3 1운동 1주년을 맞이하여 그 해 2월 이동욱( 李 東 旭 )이 제작한 학생들의 동맹휴학과 상인들의 철시를 주장하는 경고문 ( 警 告 文 )을 교부받아 이를 82 예심종결서 (경성지방법원, ) ;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 ; 독립신문 , 投 彈 老 壯 士 ; 신한민보 ( , 사이토 폭발탄사건의 후문 ; 매일신보 , 전무후무한 대판결, 240명을 한 번에 언도해, 피고의 대부분 은 모조리 학생 ; 매일신보 , 총독을 폭격하면 조선독립이 될 줄 알았더냐, 모사는 재인하고 성사는 재천이라 하 였으니 오직 하나님 명령만 쫓을 뿐이라고 강우규의 호어 ; 문일민, 한국독립운동사, 사단법인 애국동지회, 1956, 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9,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9, 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 립운동사자료집 5, 1972, 쪽 ; 독립운동사자료집 9, 1984, 쪽 ; 독립운동사자료집 11, 1984, 82 84쪽 ; 독립운동사자료집 13, 1984, 쪽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5, 국사편찬위원회, 1988, 220쪽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7, 1994, 쪽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8, ~238쪽. 83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독립유공자사업 기금운용위원회, 1972, 271쪽. 84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 ; 金 正 明, 朝 鮮 獨 立 運 動 Ⅰ, 東 京 : 原 書 房, 1966, 쪽 ; 최은희, 추계 최은희 전집 2 (한 국근대여성사 중), 조선일보사, 1991, 137쪽 ; 추계 최은희 전집 3(한국근대여성사 3), 조선일보사, 1991, 쪽 ; 국사편찬 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5, 국사편찬위원회, 1988, 쪽. 102

67 해제 대전 대구 마산 등으로 전달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12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처벌령,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 85 2) 경기도 경기도 지역은 3 1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것은 만세운동이 처음 일어난 서울과 지역적으로 인접하여 있고, 고종의 인산일에 참여한 사람들이 많았으며, 서울 통학생들이 많았고, 매일신보 ( 每 日 申 報 ) 둥 신문을 구독하는 식자층이 많았던 것 등이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86 조선소요사건총계일람표 ( 朝 鮮 騷 擾 事 件 總 計 一 覽 表 )에 의하면, 3 1운동이 일어난 618개 지역 중 경기도가 143개 지역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고, 만세운동 848회 중 225회가 경기도에서 일어났다. 또한 만세운동 참여자 587,641명 중 169,300명이 경기도인이었고, 시위군중에 의해 일제경찰 2명이 타살된 곳이 경기도였다. 87 이 자료총서에 수록한, 경기도에서 만세운동을 펼친 여성은 강화의 조인애( 曺 仁 愛 ), 개성의 권애라( 權 愛 羅 ) 신관빈 ( 申 寬 彬 ) 심영식( 沈 永 植 ) 어윤희( 魚 允 姬 ), 김포의 이살눔, 파주의 임명애( 林 明 愛 )이다. (1) 강화군( 江 華 郡 ) 강화의 3 1운동은 년 3월 18일 읍내 장터에서 대규모 시위 이후 4월 중순까지 거의 한 달간에 걸쳐 강화군 전역에서 면 리 단위로 전개되었다. 강화읍내 시위는 경남 진주( 晋 州 )의 경우와 더불어 규모 면에서 전국에서 수위를 다툴 만큼 대단히 컸다. 그리고 감리교와 성공회 등의 교회신자들이 강화군 전역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한 대표적인 세력이었다는 점도 강화군 만세시위의 특징이다. 강화에서의 만세시위는 감리교신자들인 염성오( 廉 成 五 ) 유봉진( 劉 鳳 鎭 ) 장윤백( 張 允 85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 ; 조선일보 ; 독립신문 , 9지사의 판결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 운동사자료집 5,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2, 쪽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47, 국사편찬 위원회, 2001, 쪽. 86 박환, (경기지역) 3 1독립운동사, 선인, 2007, 47쪽. 87 박헌옥, 서평 경기지역 3 1독립운동사 를 읽고, 북한 423, 북한연구소, 2007, 13쪽. 8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2,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9, 156~158쪽 ; 김정인 이정은, 국내 3 1운동 I - 중부 북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34~38쪽. 103

68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伯 ) 황도문( 黃 道 文 ) 황유부( 黃 有 富 ) 등에 의해 계획되었다. 이들은 강화읍 장날인 3월 18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준비를 하였다. 3월 11일 황유부의 집에서 염성오 황도문 등이 독립선언서 와 국민회보 ( 國 民 會 報 ) 등의 문건을 수백 매씩 인쇄하고, 황도문은 18일의 거사를 주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강화인민에게 라는 전단과 독립가 를 만들었다. 3월 18일 강화 장터에 모인 만세시위군중은 활동하기 편하게 발에 감발을 하였다. 군중 사이에는 만세시위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오후 2시가 되자 유희철( 劉 熙 哲 ) 황윤실 황일남 등이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강화 장터는 관청리와 신문리에 걸쳐 형성되어 있었는데, 그 사이에 냇물이 흐르고 돌다리[ 石 橋 ]가 있어 시위 주도자들은 돌다리 근처에서 시위를 주도하여 양쪽 장터 군중을 모았다. 유희철이 조선독립만세 를 선창하였고, 이어 장명순 조상문 황윤실 등이 독립만세를 연창하였다. 이들은 조선독립 이라 쓴 큰 깃발을 든 유희철을 선두로 신문리 시장을 한 바퀴 돌고 관청리 쪽으로 행진하였다. 시장 남쪽에서는 조기신( 趙 基 信 )이 손수 만든 태극기 십수매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종이로 만든 큰 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권태철( 權 泰 哲 ) 장상용( 張 相 用 )이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부르자, 군중이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열창하였다. 출동한 일제군경이 유희철 장상용 조기신을 체포하였으나 시위 열기를 꺾을 수는 없었다. 결사대장 이라고 쓴 태극기를 어깨에 두른 유봉진은 종루에 올라 큰 종을 쳐서 군중을 모았다. 웃장터 아랫장터는 시위군중으로 가득하였고, 시위대는 시장에서 향교를 거쳐 군청으로 진출하였다. 향교 앞에서 고익진과 유봉진은 독립의식 고취 연설을 하였고, 시위대는 향교에서 군청으로 진출하였다. 이 날 시장에 모인 군중은 1만 명에 이르렀고, 그 중 군청 앞 시위에 5~6,000명이 참여하였다. 군수 이봉종( 李 鳳 鍾 )도 시위대의 협박에 억지 만세를 불렀다. 3시간 동안 독립연설회와 시위행진을 하던 군중은 오후 5시경 경찰서를 포위하고 억류 인사들의 석방을 외쳤다. 시위대의 선봉에 선 온수리의 이봉석( 李 奉 石 )은 칼을 든 채 친일순사의 처단을 공언하고 일부 군중은 경찰서에 난입하려 하는 등 과격 양상을 보였다. 일제경찰은 시위대의 위세에 굴복하여 유희철 장상용 조기신을 석방하였다. 시위군중들은 밤 8시 30분 경찰서 앞에서 104

69 해제 한때 해산하였다가 다시 시장에 모여 늦은 밤까지 만세를 고창한 후 자진 해산하였다. 강화 읍내 시위를 주도한 유봉진은 그 후 마니산에 숨었으나 일제경찰이 그의 부모를 핍박하자 온수리로 내려와 체포되었다. 독립선언서 를 지참하고 귀향하여 만세시위를 촉발시킨 황도문은 시위 직후 강화를 탈출, 제물포를 거쳐 강원도 산골에서 3년간 숨어지냈다. 읍내시위로 인하여 유봉진 등 45명이 재판에 회부되었고, 그 중 33명이 12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또는 태형을 받아 고초를 겪었다. 18일 읍내에서의 대규모 시위소식을 접한 일제는 인천수비대 경찰 10여 명과 서울 용산 주둔군 40명을 강화도로 급파하였다. 현지에 도착한 일제군경은 19일 오전 9시부터 각 촌락을 샅샅이 수색하며 시위 참가자 63명을 체포하였으며, 길상면 온수리( 溫 水 里 )의 천도교구실을 수색하고 구덕희( 具 德 喜 )를 연행하였다. 그러자 이 날 오후 6시 온수리 천도교구에 태극기를 달고 천도교신자 등 수백 명의 주민이 과잉 탄압에 항의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온수리는 유봉진의 거주지이고 읍내 시위 당시 다음 시위장소로 약속된 곳이었다. 일제군경은 시위가 인근 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시위대 해산을 조건으로 구덕희를 석방하였다. 한편 부내면 출신으로 매일신보기자로 있던 조구원( 趙 龜 元 ), 고익진의 아들 고제몽( 高 濟 夢 )은 3월 20일 강화경찰서 경부 이해용( 李 海 用 )과 선박운송회사를 경영하던 유진식( 兪 鎭 植 )에게 시위운동 탄압을 경고하는 서한과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점포 폐쇄를 요구하는 서한을 각각 발송하였다. 보성고등보통학교 학생 오영섭( 吳 永 燮 )도 강화경찰서 순사부장에게 시위탄압을 경고하는 글을 보냈으며, 합일학교( 合 一 學 校 ) 교사 구연준( 具 然 濬 )을 비롯하여 김영희( 金 永 禧 ) 김한영( 金 翰 永 ) 조봉암( 曺 奉 岩 ) 등은 3월 20일경 자유민보 ( 自 由 民 報 ) 등 십수 종의 문건을 만들어 강화주민에게 살포하였다. 강화읍내에서 시작된 시위는 일제군경의 강력한 탄압에도 교동도 방면으로 파급되었다. 교동도에서는 21일부터 여러 날 만세시위가 계속되었다. 21일에는 화개면민 130여 명이 교동 경찰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고, 22일에도 화개면민 100여 명이 3시간 동안 일제경찰과 대치하며 시위하였다. 이로 인해 강화 본도에서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주민 35명이 체포되었다. 23일에는 시위가 교동도의 전역으로 확산되어 학생과 개신교신자 등 100여 명이 교동으로 몰려와 만세시위를 하였다. 24일에도 100여 105

70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명이 교동 읍내에 모여 공자묘( 孔 子 廟 )와 면사무소, 옛 군아( 郡 衙 ) 터 앞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해산하였다. 26일에는 화개면민 150여 명이 만세시위를 하였다. 27일에는 강화읍에서 2,000여 명이 만세시위를 하였는데, 부내면사무소를 습격하고 면서기를 폭행하는 등 시위 양상이 격렬해졌고 일제헌병의 발포로 한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29일에는 부내면 월곶리( 月 串 里 )에서 100여 명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시위 열기는 4월로 접어들자 강화군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4월 1일 양도면의 길정리( 吉 亭 里 )에서 만세시위가 있었고, 송해면 양오리( 陽 五 里 )에서도 100여 명이 만세시위를 하였다. 송해면 솔정리에서는 성공회의 중심인물인 고성근이 신자들과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면사무소 뒷산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운동을 벌였다. 양사면 산이포( 山 伊 浦 )에서도 수백 명이 야간에 등불과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해산하였다. 4월 2일에는 송해면에서 200여 명이 봉류산( 鳳 流 山 )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경찰주재소가 있던 양사면 철산리( 鐵 山 里 )에서도 개신교신자들과 주민 등 150여 명이 시위를 하였다. 4월 7일 삼산면 석모리에서 이안득( 李 安 得 )의 주도하에 십수명이 당산 산정에 올라 봉화를 피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4월 8일에는 삼산면 선원면 양도면 등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양도면에서는 인산리( 仁 山 里 )를 비롯한 면내 수 개 지역에서 100여 명씩 집결하여 산 위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선원면에서도 냉정리 등에서 산상에서 횃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불렀으며, 삼산면 석포리에서도 성공회 교회당 뒷산에서 7~80명이 횃불을 피우며 만세시위하였다. 4월 9일 이후에도 13일까지 불은면 삼산면 양도면 등에서 수십명이 주로 야간에 소규모의 산발적인 시위를 하였다. 이상과 같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강화에서 활동하였던 조인애( 曺 仁 愛 )는 1919년 3월 18일 강화군 강화읍에서 유봉진( 劉 鳳 鎭 ) 목사가 주동한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강화 장터에 모인 10,0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강화군청으로 가서 군수로 하여금 독립만세를 고창토록 하였다. 그리고 일제경찰에게 연행되어 있던 유희철( 劉 熙 哲 ) 조기신( 趙 基 信 )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만세를 계속하고 고창 106

71 해제 시위하다 체포되어 1919년 12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언도받았다. 89 (2) 개성( 開 城 ) 개성에서의 3 1만세운동은 90 3월 3일 시작되어 중간에 잠시 침체되기도 하였으나 3월 하순에 다시 활발하게 각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4월 초까지 시가행진에서 산상 횃불시위, 일제관헌을 압박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개성의 3 1운동은 여성 주도의 활약이 주목할 만하다. 개성은 서울의 3 1운동계획과 조직적으로 직접 연계는 약하였지만 경기도에서는 3월 1일 이전에 독립선언서 가 배포된 유일한 곳이다. 오화영( 吳 華 英 )이 남감리교 전도사 김지환( 金 智 煥 )을 통해 북부예배당 목사 강조원( 姜 助 遠 )에게 독립선언서 200장을 개성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강조원은 개성의 감리교에서 운영하던 호수돈여학교( 好 壽 敦 女 學 校 )의 서기 신공량( 申 公 良 )을 통해 개성에 독립선언서 를 배포하도록 하였고, 호수돈여학교의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독립선언서 를 배포하였다. 송도면( 松 都 面 )의 호수돈여학교 부속 남부소학교[유치원] 교사였던 권애라( 權 愛 羅 )로부터 독립선언서 를 전달받은 충교( 忠 橋 )예배당 전도부인 신관빈( 申 寬 彬 ) 어윤희( 魚 允 嬉 ) 등이 3월 1일 송도면의 만월정( 滿 月 町 ) 동본정( 東 本 町 ) 북본정( 北 本 町 )에 독립선언서 2,000장을 배포하였다. 이를 본 기숙사 사감 신권형( 申 權 形 )과 심명철( 沈 明 哲 )이 나서서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준비하였다. 호수돈여학교의 권애라 장정심( 張 貞 心 ) 조숙경( 趙 淑 景 ) 등은 조국 광복을 위해 일생을 바치기로 맹약하였다. 당시 조숙경은 신제( 新 制 ) 여고보 제3학년에 입학하였는데 89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 ; 매일신보 , 강화소요범, 십팔일에 판결언도 ; 姜 德 相, 現 代 史 資 料 25( 朝 鮮 1 : 三 一 運 動 ), 東 京 : みすず 書 房, 1967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2, 쪽. 90 金 正 明, 朝 鮮 獨 立 運 動 Ⅰ, 東 京 : 原 書 房, 1966, 328 ; 姜 德 相, 現 代 史 資 料 25( 朝 鮮 1 : 三 一 運 動 ), 東 京 : みすず 書 房, 1967, 92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2,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9, 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2, 193~123쪽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5(삼일 운동 5), 1991, 60~61쪽 ; 국내 3 1운동 Ⅰ- 중부북부, 18~22쪽 ; 안경호 편, 어윤희 추모록, 1996, 142쪽 ; 강영심, 어윤희 (1880~1961)의 생애와 독립운동, 한국문화연구 17, 2009, 271쪽. 107

72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이향화( 李 鄕 和 ) 통학생이 조숙경을 찾아와 충교예배당 지하실에 감추었던 독립선언서 를 건네주었다. 권애라 김정숙 류정희( 柳 貞 姬 ) 이영지 이향화 조숙경 조화벽 등은 구본관 4층 기도실에서 어두운 가운데 3월 3일의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기숙생 포섭은 나누어서 맡았다. 호수돈여학교 대표는 미리흠( 美 理 欽 )여학교에 알려 연명선서를 만들었다. 호수돈여학교에서 김신열( 金 信 烈 ) 류정희 이경자 이풍근( 李 風 根 ) 이호진 ( 李 好 進 ) 조숙경( 趙 淑 景 ), 미리흠여학교에서 이신애( 李 信 愛 ) 이영( 李 英 ), 부속학교에서 권명범( 權 明 範 ), 학생 김정임( 金 貞 任 ) 류순덕( 柳 順 德 ) 등 70여 명이 서명날인하였다. 경계가 심하여 기숙생들이 밖을 왕래할 수 없으므로 4층의 커튼을 뜯어내어 태극기를 만들고 기숙사 문을 잠가 외부와의 접촉을 금하면서 거사 시간을 기다렸다. 3월 3일 호수돈여학교와 한영서원( 韓 英 書 院 )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을 벌였다. 3월 3일 통학생 이향화는 약속한 시간에 학교 담 밖으로 와서 숨어 있었고, 총지휘자 조숙경은 다른 두 대장들에게 암호하여 학생들을 이끌고 나올 것을 지시하였다. 중부는 이향화, 동부는 조숙경, 서부는 권문범( 權 門 範 )의 세 대( 隊 )로 학생들을 나누어 책임을 맡았다. 세 대장은 그 날의 연설을 책임맡았고, 세 대장과 비밀회의에 참석한 학생들은 학교에 책임이 없도록 하기 위해 퇴학원서를 써서 한 자리에 묶어놓았다. 그리고 기숙사 담을 넘어 달려나가 모여든 군중을 향해 연설하였다. 지게꾼들도 작대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고 순사까지도 호응하여 만세를 부르며 시위대열에 합류하였다. 91 호수돈여학교 학생들은 3일 아침 기도회를 끝내고 약속한 대로 삼삼오오 짝을 지어 찬송가를 부르면서 헌병경찰서 앞으로 시위하였다. 전도강연인 줄 알았는데 민족자결주의의 연설을 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 일제경찰은 많은 여학생들을 경찰서 뒤뜰 운동장으로 연행하였다. 약 1천 명의 군중이 경찰서로 밀려들었고, 학교장 와그너(wagner)가 와서 학생들을 달랬다. 그러나 학생들은 각오하고 시작한 것이며 모두 학교에 퇴학계를 제출하였으니 교장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하였다. 와그너 교장은 일본인 군수에게 모든 것이 자기 책임이니 자기를 구속하고 여학생들을 돌려 보내달라고 간청하였다. 일본인 군수는 단 위에 올라 여학생들의 애국심을 높이 평가한다며 여학생들을 위해 만세삼창을 하고, 91 호수돈여자중고등학교, 호수돈 백년사, 홍익전자출판, 1999, 99쪽. 108

73 해제 여학생들과 일반 군중도 이에 화동( 和 同 )하여 부르게 하였다. 그리고 여학생들을 해산시켰다. 92 3월 4일 송도고등보통학교와 호수돈여학교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전개되었는데, 약 600명의 군중이 합세하였다. 밤에는 2,000여 명으로 증가하여 시가행진과 투석전을 전개하며 일제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도 하였다. 이후 송도면에서는 더 이상 시위운동이 일어나지 않은 것 같다. 송도면 동본정에 거주하는 김세중 김형렬 이형기 최두순 등은 상인들도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하고자 개성 상민( 商 民 )은 본서 도착과 동시에 폐점하라 는 권고문 6통을 작성하여 개성의 대상( 大 商 )들 상점에 투입하였다. 이에 개성의 상점들은 3월 27일부터 폐점하고 철시에 들어갔다. 일본인 상점들이 문을 열어도 개성 사람들은 일본인 상점을 이용하지 않아 일본인 상점들도 할 수 없이 문을 닫았다. 93 개성상인들이 철시하자 개성 외곽지역의 면 리 민들이 새롭게 시위운동을 벌였다. 3월 26일 진봉면 지금리( 進 鳳 面 芝 金 里 )에서 이재록( 李 在 祿 )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재록은 대한제국동포신문 대한신문 대한제국독립창가집 등을 만들어 마을사람들에게 회람시켰다. 94 이 날 중면 창내리 앞산에서도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하였다. 3월 28일 진봉면 대조족리에서 마을 사람들이 오관산에 올라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29일과 30일에도 산상 횃불시위를 하였고, 산에서 내려와 면사무소 앞으로 나아가 면장에게 독립만세 고창을 요구하고 일장기를 불태웠다. 이들은 31일 밤에도 횃불시위를 벌였는데 백전리 탄동리 주민들도 참여하였다. 이 날 광덕면의 고천리 사분리 중연리 황강리에서도 수백 명이 만세시위를 하였다. 3월 29일에는 상도면 상도리의 300여 명 군중이 풍독리의 헌병분견소로 나아가 건물을 에워싸고 시위를 벌이며 전선을 끊고 전신주를 넘어뜨리고자 하다가 일제의 총격을 받았다. 3월 31일부터 4월 2일까지 중면 대룽리 뒷산에서는 태극기를 꽂아놓고 밤마다 봉화를 올리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4월 1일 중서면 곡령리( 中 西 面 鵠 嶺 里 )의 청년 수십 명이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시위를 92 호수돈여자중고등학교, 앞의 책, 1999, 96~97쪽. 9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2,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9, 190~191쪽. 9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79, 194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5,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 회, 1972, 543쪽. 109

74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주도한 허내삼( 許 迺 三 )은 우리가 지금 만세시위를 벌이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는데 우리의 행동을 저지하는 자가 있으면 각자 준비한 곤봉으로 막아야 한다 고 하며 방어용 도구 준비를 격려하였다. 만세시위대는 만월대를 지나 북본정 당교( 堂 橋 ) 앞에서 일제경찰과 충돌하였다. 만세시위대는 총칼로 위협하는 일제경찰에 맞서 돌을 던지며 대항하였고, 일제경찰과 격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총칼의 위협 앞에 주도자 17명이 체포 해산되었다. 95 4월 1일부터 6일까지 영북면 길수리( 嶺 北 面 吉 水 里 )에서도 여러 차례 만세시위가 있었고, 4월 6일 홍교면 사곡리에서는 개신교신자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있었는데 일제경찰의 발포로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운동을 사찰한 일제의 비밀기록은 개성의 3 1만세시위를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개성 예수교 부속 호수돈여학교 생도 35명은 3일 오후 2시경부터 삼삼오오를 이루어 찬미가며 독립가를 부르며 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운동을 개시함으로써 경찰서에 연행되어 설유를 받았다. 그러던 중 약 1천명의 군중이 몰려오므로 문전에서 막고 설유를 했지만 쉽게 응하지 않아 교장을 출두케 하여 설유케 한 바 생도들은 오늘의 거사는 깊이 각오한 바 있어 학교에 대하여는 이미 어제 퇴학계를 제출함으로써 학교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고로 교섭에 응치 않아 서장과 군수의 간곡한 설유에 의하여 점차 학교로 귀환케 함. 97 이상과 같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개성에서는 권애라 신관빈 어윤희 심영식이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권애라는 1919년 3월 1일 개성군 송도면의 독립만세 운동시위에 주동자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1919년 5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언도받아 공소하였으나 1919년 7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6개월 형이 확정되었다. 또한 1920년 7월 9일에는 서울시내 여러 교회에서 애국사상 고취를 위한 강연을 하여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었고, 1922년 1월 러시아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회의( 極 東 人 民 代 表 會 議 )에 한국족( 韓 國 族 ) 여성대표로 참석하였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79, 192쪽. 96 이병헌, 3 1운동비사, 시사시보사출판국, 1959, 868쪽. 97 金 正 明 編, 朝 鮮 獨 立 運 動 Ⅰ, 東 京 : 原 書 房, 1967, 32쪽. 98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 ;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 ; 동아일보 , 5.13, 5.17, 5.19, 5.25, 5.27 ; 독립운 동 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79, 189쪽. 110

75 해제 신관빈은 남감리파 전도부인이었고 호수돈여학교의 사감으로 1919년 3월 1일 개성읍 만월정 동본정 북본정에서 어윤희와 함께 독립선언서 2,000매를 마을 주민 등에게 배포하였다가 체포되어 1919년 4월 1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 99 그녀가 출옥 후 동아일보 에는 출옥자의 감상 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게재되었다. 별로 이렇다는 특별한 감상을 말할 것이 없습니다. 원래 작년 3월 이래로 수백명의 여자가 입옥하였으나 대개는 방면되고 지금은 소요범인으로 남은 사람은 십여인밖에 남지 못하였습니다. 옥중에서 지내는 생활은 의례히 그러할 줄 알았으니까 별로 놀랄 것도 없고 별로 고통을 느낄 것도 없었습니다. 저는 작년 3월 초순에 개성에서 선언서를 배부하고 그 이튿날 예배당에 갔다가 잡혀 옥중에 들어가 1개년 동안 복역하고 나왔습니다. 마루바닥 위에 다다미를 깔고 그 위에서 자는데 사람 4명 앞에 일본이불 하나씩을 주옵니다. 그러나 어떻게 추운지 몸이 모두 얼어서 죄다 터지고 아파 참아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중 더욱이 간수의 가혹한 폼은 무엇이라 말해야 옮을지 그도 사람인가 인정을 가진 동물인가 의심할 만큼 냉혹하옵니다. 물론 그 속에서 하고 지내는 폼이나 대우받는 것은 사람으로는 받지 못할 만큼 망측합니다. 이제 우리의 할 일은 아무조록 교육을 많이 시켜 수용할 인재를 양성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제일 통절히 느낀 것은 우리의 사회에 인재의 결핍이올시다.(하략) 어윤희 100 는 1877년 음력 6월 30일 충북 충주군 서태면 덕근리에서 어현중( 魚 玄 仲 )의 무남독 녀로 태어났다. 9살까지 아버지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2세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16세에 결혼 하였으나 남편이 결혼 3일만에 동학 의병으로 나아가 싸우다가 전사하여 청상과부가 되었다. 17세에는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되었다. 그녀는 고향을 떠나 해주를 거쳐 개성에 안주 하였고, 1910년 32세 때 개성 북부교회 신자가 되어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였다. 그는 교회생활 을 통하여 배움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갖게 되어 34세의 나이에 개성 미리흠여학교 기예과에 입 99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 매일신보 , 평강과 개성의 소요범공판 ; 동아일보 , 출옥자의 감상( 一 ) 신관빈 여사의 말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72, 쪽. 100 어윤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연구들이 있다. 장병욱, 한국감리교여성사 : , 성광문화사, 1979 ; 이순자, 떠난 자 리가 아름다운 고아들의 어머니 어윤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엮음, 믿음 그리고 겨레사랑, 2000 ; 박용옥, 3 1운동에서 의 여성 역할, 아시아문화 15, 2000 ; 최은희, 어윤희, 여성을 넘어 아낙의 너울을 벗고 - 한국 최초의 여기자 추계 최은희 의 개화여성 열전-, 문이재, 2003 ; 이덕주, 독립운동과 유린보육원설립자 어윤희, 한국교회 처음 여성들-개화기 여성 리더 들의 혈전의 역사, 홍성사, 2007, ; 강영심, 어윤희(1880~1961)의 생애와 독립운동, 한국문화연구 17,

76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학하여 신학문을 접하였다. 그리고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몸을 아끼지 않겠다는 굳은 신념을 갖게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면서 외딴섬에 살고 있는 무지한 사람들을 깨우쳐야 한다는 사명감 과 신념을 가지고 주로 외딴섬을 찾아 전도활동과 더불어 애국사상을 깨우쳤다 년 2월 26일 어윤희는 개성읍 성경학원 기숙사에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독립선언서 2,000매를 교부받아 읍내에 배부하도록 부탁받고 3월 1일 신관빈과 함께 읍내 거리에 배포 하다가 체포되어 1919년 4월 1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언도 받았다. 개성의 만 세운동에 대해서는 두 개의 다른 서술이 있는데 거사일시와 함께 행동한 행동대원의 차이는 있지만 두 개의 서술 모두 어윤희를 개성지역 독립선언서 배포 책임자로 인정하였고, 개성 의 만세운동 최전선에서 개성시민과 학생을 이끌었다고 파악하고 있다는 점은 동일하다. 하 나는, 경성에서 전해온 독립선언서 를 수령한 강조원 목사가 호수돈여학교 졸업생이자 교회 유치원교사로 있던 권애라에게 이를 전했으며, 권애라는 호수돈여학교 상급생 최옥순을 통 해 어윤희에게 전달하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박희도의 밀명으로 서울에서 내려온 안 병숙이 호수돈여학교 학생들을 포섭하고 서울에서 진행되는 독립선언식과 만세운동 계획을 알려주었고 이들 학생들은 어윤희를 찾아가 상의하여 어윤희를 중심으로 개성의 만세시위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어윤희는 3월 3일 오후 2시를 거사시간으로 잡고 교회청년들을 동원하여 독립선언서 를 배부하였고 호수돈여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로 개성의 만세시위가 시작되었 다는 것이다. 102 권애라 신관빈 어윤희는 서대문감옥 8호 감방에 수감되었다. 당시 그 방에는 노백린( 盧 伯 麟 ) 장군의 딸 노순경, 유관순, 정신여학교 학생 이아수, 구세군신자 임명애 등이 투옥되 어 있었다 호 감방은 투철한 항일정신으로 무장한 여성투사들이 수감되어 옥중투쟁의 본부라 칭할 정도였다. 104 어윤희는 1920년 3월 1일 3 1운동 1주년기념 만세투쟁을 감행하였다. 통방이라는 감방 안에서 비밀통신방법을 통해 17개 여자감방 전체에 비밀리에 연락하였다. 1920년 3월 1일 선도자찬하회, 구원의 횃불, 중앙여자중고등학교, 1971, 109~112쪽 : 박용옥, 3 1운동에서의 여성 역할, 아시아문화 15, 2000, 38쪽 102 박용옥, 한국여성항일운동사, 지식산업사, 1996, 70~74쪽. 103 이장낙, 우리의 벗 스코필드, 정음사, 1962, 95~96쪽 : 강영심, 어윤희( )의 생애와 독립운동, 한국문화연구 17, 2009, 274쪽. 104 김삼웅, 서대문형무소 근현대사, 나남출판, 2000, 113~122쪽 : 강영심, 앞의 논문, 17, 2009, 274쪽. 112

77 해제 오후 2시 8호 감방에서 대한독립만세 소리를 신호로 감방에서 감방으로 만세소리가 이어졌 다. 서대문감옥에 1년 넘게 투옥되었던 어윤희는 특별사면령 105 에 의해 1920년 4월 28일에 석방되었다. 106 심영식은 맹인여성으로 호수돈여학교 기예과를 졸업하였다. 1919년 3월 3일 송도면에서 호수돈여학교 학생들과 군중의 선두에서 시위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1919년 5월 6일 경성 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을 받았으나 미결기간을 합산하여 1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07 (3) 김포군( 金 浦 郡 ) 김포 지역은 구한말 이래 사회경제적으로 일본의 침탈을 지속적으로 받아오던 지역이었으며 항일의병투쟁과 애국계몽운동이 활발히 전개된 지역이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김포 지역에서도 3 1운동이 전개되었다. 김포군의 3 1운동은 108 월곶면 군하리( 月 串 面 郡 下 里 ), 양촌면 양곡리( 陽 村 面 陽 谷 里 )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외에도 고촌면 신곡리( 高 村 面 新 谷 里 )와 양동면 양화리에서도 시위가 전개되었다. 3월 22일 월곶면 군하리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군하리의 만세운동은 박용희( 朴 容 羲 ) 백일환( 白 日 煥 ) 성태영( 成 太 永 ) 이살눔( 李 살눔)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즉 월곶면 군하리의 만세운동은 박용희가 성태영 이병린( 李 炳 麟 )에게 독립운동을 권유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또 다른 기록에는 이경덕(이살눔)이 박용희 성태영 윤종근 조남윤 최복석에게 비밀리에 독립선언서 를 배포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월곶면 군하리의 만세운동은 누가 운동을 105 일본정부는 1920년 4월 28일 왕세자 영친왕 이은과 일본왕실 이본궁방자의 결혼에 맞추어 약 5천명의 한국정치범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하였다.(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37 ; 독립군자금모집6, 대한독립의군부 군자금모집사건, 1999, 3-42쪽 ; 조선총독부관보 ) 106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0,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9, 832쪽 ; 독립 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쪽 ; 독립운동사자료집 13, 1984, 127쪽. 107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9,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9, 223쪽 ; 독립 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2, 518~523쪽. 10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2,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9, 153~156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72, 315~326쪽 ; 김포군사편찬위원회, 김포군지, 김포군, 1993, 238~239쪽 ; 김정인 이정은, 국내 3 1운동Ⅰ- 중부 북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40~42쪽 ; 조성운, 김포지역 3ㆍ1운동의 역사적 의의 : 김포지역사적 관점에서, 숭실사학 22,

78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주도하였는가에 대해 두 가지의 설이 있다. 만약 이살눔이 중앙에서 독립선언서 를 가지고 왔다면 군하리의 만세운동은 중앙과 연계하여 전개된 것이다. 이는 이살눔이 경성예수학교 학생이었으므로 이살눔이 개신교 계통의 연락과 지시를 받고 자신의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김포군의 3 1운동이 일정하게 개신교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3월 22일 대곶면 초원지리에서도 정인섭( 丁 寅 燮 )이 먹으로 쓴 독립만세 깃발과 태극기를 들고 동리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장꾼들이 모여 들어 300여 명의 시위대가 형성되었고 주재소와 면사무소 등지로 나아가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주도자의 한 사람인 임철모는 고문을 받고 서대문감옥에 갇혀 그곳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일제에 항거하다 5월 10일 서대문감옥에서 순사하였다. 3월 28일 조남윤( 趙 南 潤 )이 29일 오전 11시 통진 읍에 모여 조선독립만세를 부른다 는 통문 7통을 작성하여 동리에 돌렸다. 다음날 오전 11시 통진 읍내에 400여 명의 주민이 모였다. 시위대는 향교와 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불렀고 일제경찰이 압박을 가해오자 이 날 밤 수십 명과 함께 인근의 함방산에 올라가 횃불을 올리며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3월 29일 정오 갈산리 조강리 등에서 수백 명이 갈산리에 모여 최복석( 崔 復 錫 )을 선두로 통진 읍내로 들어가 향교 보통학교 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하였다. 109 이후에도 이화학당 재학생 이경덕이 서울에서 3 1운동에 참여한 후 박용희 성태영 윤종근 조남윤 최복석 등과 함께 4월 5일 군하리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김포지역 3 1운동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시위가 평화적인 방법에 의하여 전개되었다가 일제의 탄압에 의해 점차 격렬하게 되었으나 수원이나 안성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주재소나 면사무소에 대한 폭력의 행사는 보이지 않았다. 2 오라리 장터 만세운동의 경우 박충서 등이 조직체계를 갖추어 책임을 부여하였다고는 하나 그것이 민중을 시위에 대대적으로 동원하려 했던 것이라기보다는 만세운동에 참가를 독려하는 수준이었다. 3 경성의 지도부와의 연계 가능성이 보인다. 그것은 박충서나 이살눔이 경성제1고등보통학교와 경성예수학교의 학생이었고, 박충서는 3월 1일부터 경성에서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이살눔은 독립선언서 를 가지고 김포에 와서 운동을 주도했다는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4 운동의 주도세력이 지역사회의 유지 출신으로서 유식자였다. 10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2, 315쪽. 114

79 해제 5 다른 지역에서도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이지만, 장날을 이용하여 대규모의 만세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이상과 같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김포군에서 활동하였던 이살눔은 1919년 3월 초 김포군 월곶면 고양리에서 백일환 성태영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3월 22일 군하리 장날에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배부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하다가 체포되어 1919년 7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1919년 8월 1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 기각당하였다. 110 (4) 파주군( 坡 州 郡 ) 파주의 3 1운동은 111 3월 10일 교하공립보통학교에서 처음 만세시위가 일어났고, 이후 3월 26일부터 30일까지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3월 10일 와석면( 瓦 石 面 )의 공립보통학교 교정에서 구세군신자 임명애( 林 明 愛 )가 주도하는 가운데 100여 명의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하였다. 3월 25일 임명애 염규호( 廉 圭 浩 ) 부부는 학생 김수덕( 金 守 德 ), 농민 김선명( 金 善 明 ) 김창실( 金 昌 實 ) 등과 자신의 집에서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염규호는 오는 28일 이민 일동은 윤환산으로 집합하라. 이에 불응하면 방화할 것이다 는 내용의 문서 60매를 인쇄하여 그 일부를 와석면의 당하리( 堂 下 里 ) 와동리(( 瓦 東 里 ) 등에 배포하였다. 그러나 시위는 하루 앞당긴 3월 27일에 일어났다. 3월 26일 임진면 문산리에서 500여 명이 만세시위를 하여 이기남이 피격되어 사망하였다. 이 날 주내면에서는 파주리 장날이었는데, 파주리와 인근 주민 500여 명이 곤봉으로 무장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하였다. 일제헌병이 주도자를 체포하려 하자 시위대원들이 달려들어 일제헌병에게 타격을 가하고 보호하여 체포를 저지시켰다. 일제헌병은 개성헌병대에 지원병을 요청하였다. 이 날 밤에는 청석면( 靑 石 面 )의 높은 봉우리에 일제히 봉화가 오르며 독립만세 소리가 높았다. 110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 ;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 ; 이용락, 三 一 運 動 實 錄, 동지회, 1969, 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79, 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72, 327~331쪽. 11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79, 196~198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1972, 555~558쪽 ; 姜 德 相, 現 代 史 資 料 25( 朝 鮮 1 : 三 一 運 動 (1), 東 京 : みすず 書 房, 1977, 152~ ~335쪽 ; 이병헌, 3 1운동비사, 1959, 883쪽 ; 김정 인 이정은, 앞의 책, 2009, 64~67쪽 ; 파주군사편찬위원회, 파주군사, 파주군, 247쪽. 115

80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3월 27일 청석면 심학산에 약 300명의 군중이 흰 옷을 입고 집결하여 독립만세를 불렀고, 정오를 지나 산에서 내려와 오후 2시경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벌이며 면장의 참여를 요구하였다. 일부 시위대는 면사무소 판자문과 기와 일부를 부수었다. 시위대는 교하주재소로 향하였는데, 출동한 주재소 헌병들이 발포하자 해산하고, 밤이 되자 다시 봉화를 올리고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이 날 교하공립보통학교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던 임명애 염규호 부부, 학생 김수덕, 농민 김선명 김창실이 만세시위 집결을 알리는 격문을 등사하여 돌린 후 700여 명의 동 리 민을 모아 면사무소로 행진하였다. 이들은 면서기들에게 업무 중단을 요구하며 유리창을 부수었다. 시위대는 1,500여 명으로 증가하였고, 교하헌병주재소로 행진하였다. 교하주재소 헌병들은 파주헌병분소에서 병력을 지원 받아 시위대를 향하여 발포하였다. 당하리 최홍주( 崔 鴻 柱 )가 사망하자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이 날 광탄면에서도 발량리 주민들을 중심으로 수백 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신산리 면사무소로 행진하였다. 3월 28일 광탄면 신산리에서 권중환( 權 重 煥 ) 김웅권( 金 雄 權 ) 심상각 심의봉( 沈 宜 鳳 ) 등 19명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들은 광탄면에 본부를 두고 고양군민 일부까지 참여시키는 군중동원계획과 시위계획을 세워 2,000여 명의 군중을 집결시켰다. 이들은 신산리의 광탄면사무소 앞에 집결하여 조리면 봉일천 시장으로 행진하여 봉일천 장에 모인 1,000여 명과 합세하여 3,000여 명의 군중을 이루었다. 시위대는 조리면사무소 건물과 집기 일부를 파손하고 면장과 면서기를 붙들어 봉일천 시장까지 앞장세웠으며, 봉일천 헌병주재소도 공격하였다. 헌병들이 시위대에 발포하여 광탄면의 박원선 등 6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3월 30일 광탄면의 봉일천 시장에서 일본헌병대의 만행을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많은 주민들이 합세하여 시위대는 3,000명에 이르렀다. 시위대는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여 구금 인사 한 명을 일시 탈환하였다. 이 날 천현면 법원리에서는 만세시위에서 희생된 김남산의 장례를 치른 후 일제의 만행에 항의하는 추모 만세시위가 열렸다. 시위대는 법원리에서 문산 방면으로 향하였는데 도중에 일제군경의 발포로 강복산( 姜 福 山 ) 등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상과 같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파주군에서 활동하였던 임명애는 1919년 3월 10일 파주군 와석면 교하리의 공립보통학교운동장에서 100여 명 학생을 지휘하여 116

81 해제 독립만세시위를 강행하다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6월 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확정받았다 ) 황해도 황해도에서는 3월 1일 해주읍 남본정 예배당에서 독립선언서 의 낭독과 대한독립만세의 고창이 있은 후 도내 각 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월 2일 황주 읍내에서의 만세시위 운동을 비롯하여, 3일에는 수안봉 산해주 옹진 겸이포( 兼 二 浦 )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만세운동은 도내에서 매일 계속 일어났으며, 3월 10일을 전후하여서는 송화 신천 안악 은율 장연 재령 해주 각 군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3월 중순 하순경에도 연백 은율 해주 등에서 1천 명 이상이 참여한 만세운동이 있었다. 만세운동은 4월에 더욱 격화되어 3월 중에 잠잠하던 금천 신계에서도 일어났고, 해주에서는 기생들까지 시위행렬에 참여하였다. 3 1만세운동이 격렬해지자 일부의 순사 및 면직원들은 사직 의사를 표시하였고 주민들의 태도는 많이 격화되어, 면직원 등에게 모욕을 주고 세납을 거부하기도 하며 일본인 상점과의 거래를 끊고, 대다수가 대한 국민임을 공공연히 말하면서 일본인에 대하여는 왜놈[ 倭 奴 ]이라고 불렀다. 3월 말 4월 초를 고비로 맹렬히 전개되던 만세운동은 차츰 잦아들었는데, 일제의 무력에 의한 강제적 행동과 행정력을 통한 회유 공작의 영향이 컸다. 113 이 자료총서에 수록한, 황해도에서 만세운동을 펼친 여성은 금천의 나은주( 羅 恩 周 ), 신천의 구순화( 具 順 和 ) 왕경애( 王 敬 愛 ), 옹진의 조충성( 曺 忠 誠 )이다. (1) 금천군( 金 川 郡 ) 금천군의 3 1운동은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월 3일 서천면 시변리( 西 泉 面 市 邊 里 )에 독립선언서 를 붙인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3월 10일 천도교신자 200여 명이 112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79, 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72, 쪽. 11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79, 328쪽. 11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79, 250~253쪽 ; 김정인 이정은, 앞의 책, 2009, 190~191쪽. 117

82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천도교당에 모여 1세 교주 최제우( 崔 濟 愚 )의 순도 기념식을 마치고 독립선언서 를 낭독한 후 만세를 부르다가 해산 당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3명이 체포되었다. 이 날 이후 인근 각 마을에서는 밤이면 산마다 불을 놓고 만세를 부르는 봉화시위를 계속하였다. 개신교 신자들도 평양사리원 등과 연락하며 동요하였다. 3월 7일 토산을 중심으로 천도교신자들의 만세시위가 있었다. 서북면 원산리의 서당교사 등이 각 면과 리의 구장들에게 3월 7일에 시위하자는 격문을 보냈으나 불발에 그쳤다. 금천군의 만세시위는 4월에 시작되었다. 4월 1일 백마면 용성리( 白 馬 面 龍 城 里 )에서 80여 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면사무소로 달려가 시위하다가 해산하였다. 2일부터는 더 많은 시위가 일어났다. 오후 1시경에 백마면의 개신교신자들을 중심으로 80여 명이 현내면 송정리( 縣 內 面 松 亭 里 ) 방면을 향해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헌병대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고 30여 명이 구속되었다. 합탄면 매후리( 合 灘 面 梅 後 里 ) 부근에서는 오후 2시경 약 300명이 모여 독립만세라고 쓴 기를 앞세우고 독립선언의 취지와 경위를 설명하며 독립을 경축하는 의미로 만세를 불렀다. 시변리의 공립보통학교 학생들도 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이 날 고동면 구성리에서도 2회에 걸쳐 만세시위가 있었다. 4월 3일 오후 2시경에 현내면 송정리에 300여 명이 모여 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하다가 헌병주재소에 구속된 사람들 탈출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체포된 사람들이 금천읍 헌병분견대로 이송된 후였기에 해산하였다. 이 날 오후 1시경 금천읍 부근에서 약 80명이 만세시위를 하였다. 오후 7시경에는 약 200명의 만세시위대가 읍내로 몰려들었는데 일제헌병의 무력 제지로 해산되었다. 같은 날 새벽에 구이면의 관문리 문성리 주민 300여 명이 만세를 부른 후 잠시 흩어졌다가 아침 9시경에 다시 모여 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시도하였다. 헌병들이 저지하자 흥분한 군중들이 돌을 던져 저항하였고, 헌병의 발포로 1명이 사망하고 3명이 다쳤다. 오후 5시경에는 같은 면의 미당리에서도 100여 명이 만세시위를 하였다. 숙인면 행정리( 宿 仁 面 杏 亭 里 )에서도 약 300명이 만세시위를 하였고, 경의선( 京 義 線 ) 계정역( 鷄 井 驛 ) 부근에서는 약 600명이 만세를 불렀다. 4월 4일 고동면에서는 병점 장날을 기하여 면민이 모두 참가하는 대규모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는데 헌병대가 미리 탐지하여 시장 골목을 지키고 통행을 금지하여 실패하였다. 오후 3시경에 300여 명의 면민들이 시장 입구에 모여 만세를 부르고 해산하였다. 금천군의 118

83 해제 만세운동은 5일과 6일에도 계속되었는데 금천면을 중심으로 수백명이 참가한 세 차례의 만세시위에는 여자잠업지도원( 蠶 業 指 導 員 )들도 참가하였다. 6일에는 산외면 신명리( 山 外 面 新 明 里 )에서 600여 명이 만세시위를 하였다. 이상과 같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금천에서 활동하였던 나은주는 1919년 4월 2일과 3일 양일간에 걸친 금천군 현내면의 독립만세시위에서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고 구금자 석방을 위하여 활동하다 체포되어 1919년 6월 13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형을 언도받아 상고하였으나 1919년 8월 21일 기각당하였다. 115 (2) 신천군( 信 川 郡 ) 신천군의 3 1운동은 116 문화면( 文 化 面 )에서 시작되었다. 문화면의 개신교신자들과 천도교신자들은 3월 초부터 태극기를 준비하고 인근 지역에 연락을 취하는 등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11일 오전 11시경 문화 장날을 기해 개신교신자 300여 명이 장터인 읍내 동각리( 東 閣 里 )에 모여 독립을 선언한 후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장꾼들의 호응으로 만세시위대는 천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황급히 출동한 일제헌병의 무력 저지로 만세대열은 무너지고 주동자들은 체포되었다. 다음날인 12일 아침 500여 명의 시위대는 헌병주재소로 몰려가 탄압을 규탄하며 구속자 석방 요구 담판을 하였다. 일본인 주재소장이 요구를 들어주기로 하면서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3월 16일 장날을 이용하여 천도교신자 약 200명이 독립선언서 를 살포하며 만세를 부르자 천여 명의 군중이 호응하여 만세를 부르며 시위하다가 해산당하고 10여 명이 체포되었다. 3월 15일 초리면 달천리( 草 里 面 達 泉 里 ) 장날에는 긍흥면 문화면 초리면 사람들이 주도하는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300여 명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자 장꾼들도 합류하였다. 독립신문 과 독립선언서 가 배포되는 가운데 시내를 몇 차례 돌며 시위하다가 일제헌병대의 제지로 해산하였다. 3월 19일 용진면 유천리( 用 珍 面 柳 川 里 ) 장날에는 서당교사 김화선( 金 化 善 ) 등이 비밀리에 태극기를 그려서 나와 장꾼들에게 배부하며 115 판결문 (고등법원형사부, ) ; 身 分 帳 指 紋 照 會 回 報 書 ; 이병헌, 앞의 책, 1966, 962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79, 쪽. 11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79, 284~291쪽 ; 김정인 이정은, 앞의 책, 2009, 201~203쪽. 119

84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독립만세를 부르니 장꾼들이 적극 호응하였다. 그러나 일제헌병대의 출동으로 시위대열은 해산하였고 주동자들은 구속되었다. 한편 신천읍은 황해선( 黃 海 線 )의 중심역으로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는데 개신교신자들의 주도로 장날인 3월 27일에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정오경 무정리( 武 井 里 ) 훈련원 장터에서 200여 명이 모여 독립선언서 를 낭독하고 만세를 불렀다. 이에 장터에 모인 장꾼들은 물론 군수인 장유( 張 裕 )도 감격하여 만세를 불렀다. 큰 거리로 뛰쳐나온 시위대열은 점차 증가하였고, 헌병과 충돌이 시작되면서 상점들은 철시하였다. 헌병들이 발포를 시작하자 시위대열 중에 총에 맞아 쓰러지는 사람들이 생겼고 시위대열은 무너졌으며 10여 명 주동자도 검거되었다. 시위는 밤에도 계속되었고, 이튿날에도 산발적인 시위가 이어졌다. 이틀간의 만세시위로 75명이 체포되었다. 4월 6일 장날에 다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읍내 상인들이 4월 3일부터 태극기를 만들며 준비한 시위였다. 약 30명이 장터에서 태극기를 나누어주며 만세를 부르다가 일제헌병들에게 체포되었다. 4월 7일에는 읍내를 비롯하여 용문면 사창리, 용진면 유천리, 북부면 석당리 등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신천읍에서는 약 400명이 태극기를 들고 큰 거리를 행진했으며 유천리에서는 300여 명, 사창리에서는 약 200명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사창리에서는 헌병주재소 부근에서 만세를 부르던 군중과 헌병 간에 충돌이 일어나 흥분한 군중이 주재소 유리창을 부수기도 하였다. 4월 8일에는 가련면 조우리( 加 蓮 面 棗 隅 里 ) 헌병주재소 앞에 약 400명이 모여 시위를 하였고, 두라면 원동리( 斗 羅 面 院 洞 里 )와 가산면 간성리( 加 山 面 干 城 里 )에서도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상과 같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신천군에서 활동하였던 구순화는 1919년 3월 12일 신천읍 경신학교( 儆 信 學 校 )에서 학생과 주민 다수와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하다 체포되어 1919년 7월 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8월을 언도받고 상고하였으나 1919년 9월 11일 고등법원형사부에서 기각당하였고 미결기간을 합산하여 1년의 옥고를 치렀다. 117 왕경애는 1919년 3월 27일 신천군 읍내에서 김영호( 金 永 昊 ) 이용규( 李 容 圭 )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가 체포되어 1919년 7월 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8월을 언도받고 상고하였으나 1919년 9월 11일 고등법원형사부에서 기각당하였다 판결문 (고등법원형사부, ) ; 身 分 帳 指 紋 照 會 回 報 書 ; 31여성동지회, 한국여성독립운동사 : 31운동 60주년 기념, 1980, 쪽. 118 판결문 (고등법원형사부, )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79, 287쪽. 120

85 해제 (3) 옹진군( 甕 津 郡 ) 옹진군의 3 1운동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119 옹진군에는 해주를 경유하여 3월 1일에 독립선언서 가 전달되었다. 박희도는 그의 처남인 김명신( 金 明 信 )에게 독립선언서 450장을 주어 옹진 해주 지역의 개신교회들에 전달하게 하였다. 김명신은 2월 28일 아침에 독립선언서 를 가지고 서울을 떠나 그 날 오후 해주에 도착하여 독립선언서 를 전하고, 3월 1일에는 옹진읍 마산 온천( 馬 山 溫 泉 )의 교회에 전달하였다. 이 날 교회에서는 신자들을 모아 독립선언서 의 주지를 설명하며 나누어주었다. 독립선언서 는 그 날 읍내와 흥미면( 興 嵋 面 ) 등에 배포되었다. 3일 옹진읍 장날에 몇 명이 독립만세를 불렀는데, 전날 마산온천교회 사람들이 헌병대에 검속당하고 감시가 엄중하여 본격적인 시위를 준비하지 못하였다. 이처럼 개신교측의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좌절되자, 천도교 신자들이 다음 장날인 3월 8일에 시위를 일으켰다. 천도교 교구장 정한영( 鄭 漢 泳 )의 주도로 교정면( 交 井 面 ) 동남면 ( 東 南 面 ) 부민면( 富 民 面 ) 북면( 北 面 ) 용연면( 龍 淵 面 ) 용천면( 龍 泉 面 ) 흥미면 등의 대표들이 읍내에 모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3월 8일 천도교신자들을 비롯한 군중 100여 명이 읍내 고천잡화점( 古 川 雜 貨 店 ) 앞 네거리에 모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일제헌병대의 탄압으로 군중은 곧 해산되고 주동자들은 체포되었다. 천도교신자들은 3월 13일에도 시위를 전개하였다. 읍내 시위에 이어 만세운동은 옹진군의 각지로 퍼져나갔다. 4월 7일 가천면 장현리( 茄 川 面 長 峴 里 )에서 약 200명이 모여 시위를 벌이려다가 해산당하였다. 4월 13일에는 흥미면 안락리( 安 樂 里 )에서 60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14일에도 안락리에서 시위가 있었다. 15일에는 흥미면 식여리( 食 餘 里 )의 율목동( 栗 木 洞 )교회에서 500여 명이 모여 독립선언서 를 낭독하고 시가행진을 하였다. 16일에는 용천면 원산리( 院 山 里 )에서 만세시위가 있었다. 이상과 같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옹진군에서 활동하였던 조충성은 해주 의정학교( 懿 貞 學 校 )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919년 3월 1일 마산면에서 이경호( 李 京 鎬 )로부터 독립선언서 를 교부받아 소지하고 교회당에서의 고종황제 봉도식에 참석하였다가 체포되어 11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79, 320~325 ; 김정인 이정은, 앞의 책, 2009, 211~212쪽. 121

86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1919년 6월 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3월의 형을 언도받고 상고하였으나 1919년 7월 10일 고등법원형사부에서 기각당하였다 ) 평안남도 평안도 지역의 3 1운동은 3월 1일 평양 진남포( 鎭 南 浦 ) 안주읍내( 安 州 邑 內 ) 선천 시내( 宣 川 市 內 ) 의주읍내( 義 州 邑 內 ) 중화군( 中 和 君 ) 상원( 祥 原 ) 신읍( 新 邑 )을 시작으로 4월 21일 개천읍내( 价 川 邑 內 ) 시위까지 거의 매일 평안도의 모든 지역에서 일어났다. 121 이 자료총서에 수록한, 평안남도에서 만세운동을 펼친 여성은 평양의 이효덕( 李 孝 德 ) 박현숙( 朴 賢 淑 ) 채애요라( 蔡 愛 堯 羅 )이다. (1) 평양( 平 壤 ) 평양의 3 1만세시위는 122 3월 1일 세 곳에서 시작되어 가두에서 합류하였다. 즉 장대현교회( 章 臺 峴 敎 會 ) 앞마당인 숭덕학교( 崇 德 學 校 ) 교정에서는 장로교신자들이, 광성학교( 光 成 學 校 ) 근처 감리교 남산현교회( 南 山 峴 敎 會 ) 뜰 안에서는 감리교신자들이, 시내 설암리( 薛 岩 里 ) 구 대성학교( 舊 大 成 學 校 ) 뒷자리인 천도교구당에서는 천도교신자들이 각각 독립선언식을 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장로교측에서는 이승훈( 李 昇 薰 )이 서울 평양 선천 등지를 왕래하며 민족대표단 구성과 동지 규합에 진력하였다. 1919년 2월 14일부터는 1주일간 병을 핑계로 평양시내 기홀병원( 紀 笏 病 院 )에 입원하면서 장로교 길선주( 吉 善 宙 ) 목사, 감리교 신홍식( 申 洪 植 ) 목사 등과 밀의를 계속하였다. 선천의 양전백( 梁 甸 伯 ) 목사와 평양 기독교서원 총무 안세환( 安 世 桓 )에게 서울로 올라가 협력하도록 하였다. 또한 평양시위는 윤원삼( 尹 原 三 )과 도인권( 都 寅 權 )에게 책임을 맡기고, 진남포에 살고 있던 임치정( 林 蚩 正 )과 연락하여 그 곳 120 판결문 (고등법원, )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 매일신보 , 이화교 졸업식, 졸업생 20명, 유창한 영어의 연설 ; 매일신보 , 해주녀청 혁신총회 간부도 신선 ; 동아일보 , 해주녀자토론 성황을 일워 : 문화를 발 전함에는 말이냐? 글이냐? 演 士 金 道 善 金 淑 仁 李 孝 珠 曹 忠 成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72, 쪽 ; 3 1여 성동지회, 한국여성독립운동사, 3 1여성동지회, 1980, 쪽. 12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79, 503~505쪽 참조. 12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79, 359~376쪽 ; 김정인 이정은, 앞의 책, 2009, 219~224쪽. 122

87 해제 시위도 조직하였다. 2월 12일 기독교서원에서 준비회담을 한 후 안세환은 서울의 개신교측 수뇌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하였다. 2월 20일에는 기독교서원에서 제2차 준비회담이 열렸고, 2월 24일에는 길선주 목사 집에서 제3차 준비회담을 개최하였는데 서울의 진행상황을 들었다. 2월 25일 숭현여학교에서 제4차 준비회담을 열고 3월 1일 시위에 관한 구체적 계획을 수립하였다. 26일 시내 각 교회에, 3월 1일 오후 1시부터 고종황제 봉도식을 장대현교회 옆 숭덕학교 교정에서 거행할 것이니 참석하라는 통지서를 발송하였다. 그리고 숭덕학교와 숭현학교 남녀학생들을 동원하여 두 학교 천정에서 극비리에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독립선언서 는 28일까지 서울에서 보내준다 하였으니 기다리기로 하였다. 27일 숭현학교에서 최종 회합을 열고 그동안의 준비 작업을 점검하였다. 3월 1일 정오 평양시내 각 교회 종각에서 종이 울리며 만세시위의 봉화가 올랐다. 장로교측에서는 서울에서 독립선포식을 거행한 시각과 동일한 오후 1시에 집회를 시작하였다. 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고종황제 봉도식이라는 명목 아래 남녀 교인들과 유지들이 식장인 숭덕학교 교정으로 모였다. 장내는 1,000여 명의 사람들로 가득 찼다. 선교사 모펫(Moffet)도 내빈석에 와 앉았고 일본인 사복형사도 진을 치고 있었다. 봉도식은 찬송가와 기도로 간단히 조의를 표하며 끝났다. 그러자 갑자기 대형 태극기가 단상에 게양되었다. 독립선언서 가 낭독되었고 독립운동에 관한 연설이 이어졌으며, 애국가도 불렀다. 숭덕학교 교사들이 준비했던 태극기를 나누어주었다. 일제경찰의 해산 요구에도 시위군중은 큰 거리로 행진을 시작하였다. 주민들의 호응으로 시위행렬은 점점 증가하였다. 군중에게는 선언서와 태극기가 공급되었다. 남녀 중학생이 각자 태극기 10개씩과 선언서 20장씩을 가지고 거리마다 서 있다가 시위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상인들도 철시하고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보통학교 학생들도 시위에 합류하였다. 시위 도중 설암리 천도교구장 집회에서 모인 군중과 합류하여 남문거리 평양경찰서 앞까지 이르렀다. 이 곳은 당시 신시가라 불리던 일본인 상가와 일본인들의 거주지 입구였다. 여기서 군중은 경찰서쪽을 향하여 혈성가( 血 誠 歌 ) 123 를 부르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123 국가보훈처, 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 25 (일본편 7 : 3 1운동 독립선언서와 부문), 2002, 89~91쪽에 한글 원문과 일본어 역문이 수록되어 있다. 123

88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접근하였고, 경찰과 헌병은 경찰서 건물의 앞뒤에 막아서고 기마대를 앞장 세워 군중을 큰 거리 쪽으로 몰아냈다. 여기서 남산현 감리교회에서 집회를 마치고 진출한 행렬이 합류하면서 일본인 거리인 신시가로 나아갔다. 한 갈래는 도청과 재판소 앞 큰 거리를 누비며 평양역 광장까지 나아갔고, 다른 한 갈래는 평양부청 옆과 일본인 중학교 옆 거리를 거쳐 평양감옥 뒷거리와 서성리, 서문 밖 큰 거리를 돌았다. 이렇게 평양거리는 하루 종일 들끓었다. 학교별로 또는 동네별로 개별적으로 시위를 조직하여 오후 7시경에는 낮보다 배가 되는 군중이 평양경찰서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였다. 경찰이 소방대를 동원하여 물을 뿌려 군중을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군중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돌이 날아들어 경찰서 유리 창문이 깨지자 이를 빌미로 경찰이 발포를 시작하면서 군중을 체포하였다. 발포에 분격한 군중이 달려들어 난투극이 벌어졌고, 경찰은 소방대원을 시켜 불 끄는 쇠갈고리로 구타하며 무수한 부상자를 발생시켰다. 수백 명이 검거되면서 군중은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 날 밤 한 무리의 학생들이 서문 밖에서 악대를 앞세우고 행진하면서 만세를 부르고 다른 학생 무리들은 남문 밖에서 이에 호응하여 만세를 불렀다. 그 날 밤 군부대가 출동하여 경찰과 함께 만세군중을 탄압하였다. 3월 1일 남산현 감리교회에서도 장대현 장로교회 집회와 같은 시간, 같은 방식으로 독립선언식을 진행하였다. 독립운동에 관한 연설과 독립선언문 을 낭독한 후 행진에 나선 군중은 남대문경찰서 앞에서 장대현 장로교회 시위대와 합세하여 일본인 신시가로 진출하였다. 군중은 일본인 거주지역을 지나면서도 인명이나 가옥 등에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았다. 감리교측 집회에 광성학교와 숭의학교 학생들이 참여하였다. 설암리 천도교구당 집회는 서울 천도교중앙총부로부터 직접 연락을 받아 준비되었다. 2월 하순에 평양에서 대교구장이 모여 계획하고 2월 28일 오후 천도교 선천교구장 김상열( 金 相 悅 )로부터 평양역에서 중앙총부가 밀송한 독립선언서 를 전달받았다. 평양대교구는 미리 준비하였던 등사판으로 수천 장을 인쇄하여 그 중 약 7,500장을 개신교측에 보내고 남은 것을 시내에 살포하기 위해 산하 각 교구에 발송하였다. 3월 1일 천도교 집회는 고종황제 봉도식을 구실로 모여 진행되었다. 집회 후 가두시위에 나서면서 장대현교회측 시위군중과 합류하였다. 3월 1일 이후 상가 철시도 계속되었고 학교들은 일제히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124

89 해제 개신교회 경영 학교 교원은 대부분 검거되었고 개신교신자들과 천도교신자들은 행동을 감시당하였다. 그러나 평양시내에서는 3월 2일부터 9일까지 매일 시위가 벌어졌다. 3월 2일 오후 1시부터 평양경찰은 대거 출동하여 검거에 나섰다. 3월 1일부터 8일까지 평양 시내에서 4백여 명이 검거당하였는데 그 중 일부는 경찰에서 고문당한 후 구류 또는 석방되고 나머지는 즉결재판으로 태형( 笞 刑 )을 받고 48명은 검찰에 넘어가 기소되었다. 기소된 사람은 학생 9명, 개신교신자 11명, 천도교신자 10명, 직공 3명, 학교 교원 9명, 기타 6명이었다. 평양에서의 만세시위는 3월 26일과 4월 1일 다시 일어났다. 3월 26일에는 극장에 있던 청년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자 일반이 이에 호응하면서 시작되었다. 군중들은 시가지로 나가서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일제경찰은 헌병대와 수비대 재향 군인 소방수 거류민들을 총출동시켜 철저히 경계하는 한편 친일경력이 있는 자의 가족과 관청에 있는 사람의 가족은 농촌지대로 피난시키는 등 비상사태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4월 1일 오후 2시경에는 신창리 시장에서 수백명이 만세를 부르고 시위행진을 하였다. 이상과 같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평양에서 활동하였던 박현숙은 숭의여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3년 김경희( 金 敬 熙 ) 황애덕( 黃 愛 德 ) 등이 주도 조직한 비밀결사 송죽회( 松 竹 會 ) 124 에 가입 활동하였다. 졸업 후 1915년 4월 전주 기전( 紀 全 )여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여 교내에 송죽회지부를 조직하고 제3대 회장에 선임되었으며, 과외수업으로 한국사를 가르치는 등 구국교육에도 진력하였다. 1919년 1월부터 남산현교회의 신홍식 목사 집에서 여러 차례 평양의 만세운동을 논의하였다. 그러다가 신홍식 목사로부터 고종의 인산을 기해 거족적인 독립운동이 있음을 알게 되어 태극기 제작과 애국가 등사 일을 맡았고 권기옥( 權 基 玉 ) 김명덕( 金 明 德 ) 김순복( 金 順 福 ) 김옥석( 金 玉 石 ) 박정인( 朴 貞 仁 ) 배인 수( 裵 仁 洙 ) 장성심( 張 聖 心 ) 차진희( 車 診 姬 ) 최순덕( 崔 順 德 ) 한선부( 韓 善 富 ) 등과 함께 124 송죽결사대의 초대 회장은 김경희 선생, 2대는 황애시덕 선생, 3대는 박현숙 선생이었다. 황애시덕은 원죽( 源 竹 ), 박현숙 선생 은 청해( 靑 海 ) 등의 암호명을 썼다.(숭의90년사편찬위원회, 숭의 90년사 : , 숭의학원, 1993, 119쪽) 125

90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해냈다. 125 기숙사 2층에 기거하고 있던 일본인 교사 호시코[ 星 子 ]의 눈을 피하기 위해 미술교사 구순 선( 具 順 善 )의 방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애국가 가사를 등사하였다. 200여 개의 태극기를 3일 동안 만들었다. 2명씩 조를 짜서 흰 치마폭 속에 태극기 묶음을 감추고 숭덕학교 지하실까지 옮겼고, 길선주 목사 등이 태극기를 인수하였다. 또 다른 이들은 박현숙의 지도를 받아 3일 동안 밤을 새워 태극기를 만들어 대찰리( 大 察 里 )에 있는 교우 이성실의 집 장롱 속에 감추었 다. 이렇게 준비한 태극기는 빨래 광주리와 물지게에 넣어 운반하였다. 그리하여 숭덕학교에 서와 같은 시간, 같은 방법으로 거사하기로 약속한 남산현교회까지 무사히 옮길 수 있었다. 126 박현숙은 3월 1일과 2일의 만세시위에는 앞장서지 않고 3월 3일 남산현교회에서 본격적인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하였다. 3월 3일 남산현교회에서 유력한 어느 가정의 결혼식이 있다는 내용의 안내장을 평양 주민들에게 보냈다. 결혼식을 구실로 만든 주민 집회에서 독립선언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계획 때문에 박현숙은 은밀히 행동했고 표면에 나타나지 않았다. 3월 1일 박현숙은 남산현교회의 독립선언이 있은 후 사람들 속에 끼어 거리로 나갔다. 교우 오인 근( 吳 仁 根 ) 집에서 할머니 옷으로 변장하고 시위군중 속에서 동정을 살피며 시위대열을 지 휘하였다. 2일에는 만수대에서 만세운동과 시가행진이 있었는데 역시 변장하고 참여하였다. 이렇게 이틀간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집으로 돌아온 박현숙을 형사 2명이 찾아와 남대문경찰 서로 연행되었다. 그 곳에는 신홍식 목사 집에서 함께 계획을 세웠던 동지들이 먼저 잡혀와 악명높던 고등계 형사 나까무라에게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나까무라의 첫 질문은 혈성가를 누가 지었느냐 는 것이었다. 박현숙은 대답 대신 혈성가 를 1절부터 4절까지 심한 구타와 욕설 속에서도 불렀다. 나까무라는 거사계획, 활동상황 등 을 하나하나 캐물었고, 그녀는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여러 달 전부터 지하활동을 한 125 身 分 帳 指 紋 照 會 回 報 書 ; 김승학, 한국독립사 하, 독립문화사, 1970, 152쪽 ; 金 正 明, 앞의 책, 1967, 462쪽 ; 문일민, 한국 독립운동사, 사단법인 애국동지회, 1956, 166쪽 ; 독립운동사 2, 1979, 366쪽 ; 독립운동사 8, 1979, 쪽 ; 독립운동사 10, 1979, 863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4,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84, 쪽 ; 박찬일, 심은대로 : 청해 박현숙 선생의 걸어온 길, 심은대로출판위원회, 1968, 58~85쪽 ; 3 1선도자찬하회, 구원의 횃불, 중앙여자중고등학교, 1971, 198~202쪽 ; 숭의90년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93, 120쪽. 126 숭의90년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93, 124~125쪽. 126

91 해제 사실이 드러나고 3일의 계획이 절망적임을 깨닫자 우리나라가 독립해야 하기 때문에 할 일 을 한 것뿐 이라고 대답하였다. 그 날 밤 암정 본감( 岩 町 本 監 ) 동( 東 )감옥에 수감되었다. 박 현숙은 이 만세운동으로 체포되어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1919년 7월 2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언도받고 상고하였으나 1919년 9월 29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기각당하였다. 127 남자들에게는 2년의 징역이 언도되었는데 여성이니까 정상 특별히 참작하여 가볍게 처벌 한다 는 것이었다. 박현숙은 남성들과 똑같이 독립운동을 했는데 왜 여성들에게만 배려를 하느냐? 나라를 위해 내가 독립운동을 했는데 그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 라고 주장하며 고등 법원에 상고하였는데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128 이효덕은 1919년 3월 1일 평양 양무학교 교사로 학생 교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양무 학교장의 지휘로 만세삼창을 부른 후 행렬을 지어 경찰주재소로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불렀 다. 그리고 다음 날인 2일에도 계속하여 독립만세운동을 한 후 3월 3일 체포되어 1919년 7월 18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을 언도받아 상고하였으나 1919년 9월 27일 고등법원형사 부에서 기각당하였다. 129 채애요라는 평남 대동군 범수리에서 채규현과 김덕윤의 2녀로 태어나 1904년 평양 숭의여 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서울 이화학당 대학 예과를 9회 졸업하고 1917년 숭의여학교와 삼 승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였다. 방학을 맞아 집에서 쉬고 있던 중 이화학당 선배인 김애은이 찾아와 독립운동 참여를 권유하였다. 이에 밥주발로 원을 그려 태극기를 그리고, 혈성가와 독립선언서 를 복사하였다. 준비할 사람들이 부족하여 새벽차를 타고 평양 남산현교회 목사 집으로 가서 교사, 청년들과 함께 태극기 대 꼬치를 만들었다. 그리고 3월 1일 고종황제 붕 어식 추념식에 참여하기 위해 남산현교회에 모였는데 태극기 10개, 선언서 혈성가 각 5장 씩을 치마 속에 숨기고 참석하였다. 참석한 교인들에게 태극기 선언서 혈성가가 분배되고 붕어식 추념식이 끝나갈 무렵 청년 20여 명이 일어나 혈성가를 부르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 자 모두가 함께 하였다. 낌새를 채고 미리 와 있던 일본형사들이 구두발로 밟고 태극기를 빼 127 판결문 (고등법원형사부, ) 128 숭의90년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93, 128~129쪽. 129 판결문 (고등법원형사부, ) ; 身 分 帳 指 紋 照 會 回 報 書 ; 박대희 편, 일제하 옥중회고록 2(그 분노의 기록들), 정음사, 1977, 241~250쪽 ; 3 1여성동지회, 한국여성독립운동사 : 3 1운동 60주년기념, 1980, 448~452쪽. 127

92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앗고 칼과 총대머리를 휘둘렀는데 채애요라도 머리를 맞아 피투성이가 되었다. 교회를 간신 히 빠져나온 그녀는 어느 교인 집에 숨어있다가 약 한 달 후 전영택과 재회하였고, 서둘러 교 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다음날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데 2명의 형사가 찾아와 경찰 서로 끌려가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1919년 7월 21일 평 양복심법원에서 감형이 없었고, 1919년 9월 29일 고등법원형사부에서 상고 기각당하였다. 감방 안은 추웠고 오물과 뒤섞여 더러웠다. 그녀는 폐렴과 피부병이 겹쳐 잠시 보석으로 풀 려나왔다가 다시 수감되어 3개월의 형을 더 살고 8개월 후 병보석으로 풀려나왔다 ) 강원도 강원도 지역의 3 1운동은 1919년 3월 10일 철원에서 시작되어 11~12일 김화 회양 방면에서, 화천 횡성 원주 홍천 춘천 등으로 확산되었다. 이어 4월 1일 강릉, 3일 양구와 통천, 4일 양양 이천 평창, 7일 정선, 10일 울진, 15일 삼척 회양, 18일 간성, 21일 영월 등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하루 평균 4,5개소에서 만세시위가 있었고, 5월 9일 양양을 기점으로 만세운동이 수그러들었다. 131 회수는 144회, 참가 인원은 5~6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까지 총 65,400명이었다. 사망자는 37명 이상이었다. 만세운동이 발생한 것은 고종 국장에 참례하고 서울의 만세운동을 목격한 유림과 학생들이 귀향하면서였다. 초기에는 종교단체에 의해 발생하였지만 점차 각 지역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졌다. 강원도 지역은 교통수단이 다른 지역에 비해 발달하기 어려운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 조금 늦게 3 1운동이 시작되었다. 강원도 지역의 3 1운동은 천도교측에서 주도하였으며 개신교측에서는 각 군마다 교회를 설립하기는 했지만 대중들에게 뿌리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강원도 지역에서 서울과 연결된 곳은 평강군뿐이었다. 1919년 2월 26일 신문관에서 조판하고 보성사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 2만 1천매 중 6~700매를 천도교 본부의 안상덕( 安 相 德 )에게 강원도로 전달하게 하였다. 이렇게 전달된 독립선언서 가 만세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양양철원통천홍천 등에서는 개신교측에서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양양 철원 통천 130 판결문 (고등법원, )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 3 1선도자찬하회, 앞의 책, 1971, 쪽 ; 박옥란 원장, 채애 요라(본명 채혜수) 시모님 뜻을 기리며, 3 1여성동지회, 3 1여성 45년사, 2012, 243~246쪽. 131 오영교 왕현종, 원주독립운동사, 원주시, 2005, 252쪽. 128

93 해제 등에서는 여성들의 만세운동이 활발하였다. 132 만세운동을 펼친 여성은 철원의 곽진근( 郭 鎭 根 )이다. 이 자료총서에 수록한, 강원도에서 (1) 철원군( 鐵 原 郡 ) 철원군의 만세운동은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133 철원군은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을 일으킨 곳이다. 경원선 철도가 읍내를 지나 서울의 정보가 빨리 들어오는 곳인데, 3월 2일과 3일 천도교신자들이 철원군 내에 독립선언서 를 배포하여 민중을 계몽하였기 때문에 곧 만세운동을 계획할 수 있었다. 3월 1일 평강천도교 교구실을 통해 천도교 철원교구 교훈( 敎 訓 ) 최병훈( 崔 炳 勳 )에게 독립선언서 200매가 전달되었다. 최병훈은 철원읍 관전리( 官 田 里 )의 천도교 교구실에서 이석구( 李 錫 九 )와 협의한 후 이튿날인 3월 2일 천도교 시일( 侍 日 )에 모이는 교인 중 철월면의 김명식( 金 明 植 ) 김현구( 金 炫 九 ) 김현일( 金 縣 一 ), 무장면 산명리( 畝 長 面 山 明 里 )의 이정구( 李 鼎 九 ) 이순철( 李 淳 喆 ) 부자와 서순봉( 徐 淳 鳳 )이성구( 李 成 九 ), 동송면 이평리( 東 松 面 二 坪 里 )의 한홍준( 韓 弘 俊 ), 갈말면( 葛 末 面 ) 상경리의 정동해( 鄭 東 海 ) 등을 통해 철원군의 각지에 배포하였다. 그러나 독립선언서 배포 사실이 발각됨으로써 천도교 철원교구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만세운동의 강력한 조직적 구심점 하나를 잃었는데 철원농업학교와 철원보통학교 학생들, 개신교회와 청년들이 나서서 3월 10일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학생측에서는 철원농업학교 박용철( 朴 容 喆 ) 이해종( 李 海 鍾 ) 등, 철원보통학교 이규정( 李 圭 貞 ) 임응렴( 林 應 廉 ) 등이 연합하여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학생들은 옥양목으로 태극기 하나를 만들고, 3월 10일 약 250명이 북간산( 北 看 山 )에 모였다. 이들은 서문 거리로 나와 만세시위를 하였다. 한편 개신교 전도사 곽진근( 郭 鎭 根 ), 정의학교 교사 엄재형( 嚴 載 亨 )과 김경순( 金 敬 順 ), 개성 호수돈여학교 출신 이각경( 李 珏 卿 ), 청년으로서 박창근( 朴 昌 根 ) 윤상식( 尹 尙 植 ) 이배근( 李 培 根 ) 이학수( 李 學 洙 ), 의병 출신의 132 윤정란, 강원지역 기독교 여성교육사업과 3 1운동, 여성과 역사 10, 한국여성사학회, 2009, 86쪽. 13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2, 1979, 530~541쪽 ;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916~923쪽 ; 金 正 明, 앞의 책, 1966, 353쪽. 129

94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송의선( 宋 義 宣 )이 학생들과 별도로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오후 3시경 학생들이 먼저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성인들이 이끄는 시위대는 오후 4시경에 합류하였다. 두 계통을 통해 군중이 북간산 아래 철원군청에 모였을 때 약 500명을 헤아리게 되었으며 군청으로부터 헌병분견소까지의 길이 군중으로 메워졌다. 성인 시위대는 이배근 이학수의 주도하에 군청 안으로 들어가 군청 안에 걸린 일본기를 뽑고 미리 준비한 커다란 태극기를 단 후 만세를 불렀다. 군청 안팎에서 학생과 일반인이 하나가 되었다. 군청에서는 군수 등 군 직원들 모두가 도망쳤고, 그 날 숙직이던 서기 김규환( 金 圭 煥 )과 최인옥( 崔 麟 玉 )만 남아 있었다. 엄재형 이배근 이학수가 독립운동에 대한 연설을 하였다. 군중은 다시 만세시위에 들어가 헌병분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불렀고 태극기를 앞세우며 군수 오태환( 吳 台 煥 )의 집으로 몰려갔다. 군중은 군수를 끌어내어 만세를 부르게 하고 구타하였다. 군수가 군중에게서 도망쳐 민가에 숨자 만세시위대는 군수가 숨은 윤태항( 尹 泰 恒 )의 집을 포위하고 군수를 끌어냈다. 군수는 끌려나와 군청에 와서 굽신거리며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시위대는 월하리의 친일파 박의병( 朴 義 秉 )의 집으로 몰려갔고, 송의선은 박의병을 죽이자고 외쳤다. 박의병은 구한말 한성판윤( 漢 城 判 尹 )을 지낸, 친일파로 이완용( 李 完 用 )과 가까운 사이였다. 시위대는 그를 위협하여 숨겨놓은 이완용을 내놓도록 하자고 외쳤다. 시위대가 집에 들이닥쳤을 때 박의병은 헌병분견소의 군조( 軍 曹 )와 같이 있었다. 군중은 이튿날 다시 모이기로 하고 헤어졌다. 3월 11일 아침 시위군중은 서문거리에 모여 철원역으로 갔다. 철원역은 읍에서 4킬로 떨어져 있었는데 역에 모인 군중은 일제측 기록에 700명이었다고 한다. 군중은 마침 역에 정차하여 있는 기차를 향해 만세를 불렀고, 기차에 탔던 사람도 손을 흔들며 만세군중을 격려하였다. 이 날 기차에는 호수돈여학교 학생 조화벽( 趙 和 璧 )이 타고 있었는데, 그녀는 울면서 손을 흔들었다고 증언하였다. 시위군중은 철원역에서 다시 읍내로 들어와 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전날의 주동 인물이 앞에 섰는데, 농업학교와 보통학교의 학생 중에 역으로 못 왔던 학생들이 합세하였다. 보통학교 학생이라고 해도 20세 전후의 청년이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많아진 군중이 읍내로 들어가니 처음에는 자전거를 탄 헌병 5명이 나와 길을 막았다. 그러나 시위군중의 행진을 막을 수 없자 기마 헌병이 나왔다. 그래도 군중을 해산시키지 못하자 130

95 해제 군중이 서문 거리에 이르렀을 때 헌병들은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이 날 총을 쏘았다는 것은 어느 기록에도 없으나 증언자들은 모두 발포하였다고 말한다. 사망자가 없고 부상자를 확인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아서 공포탄이었을지도 모른다. 총소리가 나자 군중의 대열은 혼란해졌고, 그런 중에 주동 인물들이 체포되니 군중들도 해산하였다. 이 날 12명이 체포되었다고 하는데 134 판결문에 의하면 기소된 사람만도 이보다 훨씬 많으니 그 뒤에 검거선풍은 계속되었고, 그 중에 곽진근 김경순 이곽경 등 6명의 여자가 있었다. 그리고 당시 헌병사령부 서류에 철원의 검거자를 71명이라고 하였는데 그것도 철원군 전체의 통계라고 보면 기소자 숫자일 것이다 월 11일 갈말면의 만세시위는 서당훈도 신성규( 申 聖 奎 )가 발의하고 보성전문학교 학생 김칠용( 金 七 龍 )이 뜻을 함께 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3월 1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각 동리에 사람을 보내 면사무소 앞으로 모이게 연락한 후 밤 11시경 문혜리( 文 惠 里 )에서 면민 800명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각 마을에서 집집마다 한 사람씩 참가하도록 연락하여 내대리 도창리 동막리 통성리 주민은 청양리 주재소가 있는 지경터로 모이게 하고, 군탄리 문혜리 등 남부의 주민은 문혜리 면사무소가 있는 어음재로 집결시켰다. 3월 12일 동막리에서는 새벽에 삼베 주머니에 도시락을 싸가지고 청양리 주재소로 왔다. 청양리 주재소 앞, 즉 지경터에서 토성리로 뻗쳐 있는 벌판에 모인 군중은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만세를 불렀다. 136 김경삼 김상보 김순복 김학길 윤호병 임낙호 전사진 등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으며, 윤호병 임낙호는 대열의 앞에 서서 열광적으로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3월 17일 인월면 금사리의 이병준( 李 炳 準 )은 철원 장날에 다시 만세시위를 일으킬 계획을 하고 이 날 읍내 시장으로 달려가서 시장에 모인 군중 앞에서 만세시위를 선도하며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4월 8일 내문면 독검리( 乃 文 面 篤 儉 里 )에서 천도교신자 박용득( 朴 龍 得 ) 이주붕( 李 周 鵬 ) 등이 전날 밤 이민들에게 독립만세 부를 것을 촉구하고, 독검리 구장 윤선삼( 尹 先 三 )을 134 金 正 明, 앞의 책, 1966, 353쪽. 135 조동걸, 3 1운동의 역사, 역사공간, 2010, 141쪽. 13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2, 1979, 537쪽. 131

96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통해서 이민들에게 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방화한다는 통지를 보냈다. 이들은 다시 마장면( 馬 場 面 ) 인목면( 寅 目 面 )의 면민에게도 통지하여 3개 면이 합동으로 석교리( 石 橋 里 ) 헌병파견소를 습격하려는 계획을 하였다. 4월 8일 오후 1시경 약 700명의 독검리 주민들과 인근 지역 주민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내문면 면사무소로 모여들었다. 이들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에 돌입하자 철원분견소와 안협파견소 헌병이 출동하였다. 이상과 같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철원에서 활동하였던 곽진근은 1915년 서울성서학원을 졸업하고 그 해부터 철원교회의 전도부인으로 137 철원읍 관전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만57세의 나이로 1919년 3월 10일 철원읍내에서 수백 명의 군중과 더불어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다가 군중이 군청으로 가서 기물을 파괴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일 때 친일파 박의병의 집에 가서 이완용이 분명 이 집에 숨어 있으니 내놓으라 고 소리치고 그 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과 시위를 하였다. 그리고 다음날인 11일에도 철원역 부근에서 시위에 참여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는 등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1919년 9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징역 6월을 언도받고 공소하여 11월 1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4월에 벌금 10원으로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운동 직후 철원에 거주하게 된 한 선교사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우리들은 독립운동이 있은 후 즉시 철원에 왔는데, 많은 구역장들과 전도부인들과 기타 교인들이 체포도 되고 혹은 은신도 하여 사람들이 마치 목자 잃은 양과 같이 전부 흩어졌습니다 ) 함경도 함경남도의 3 1운동은 주로 천도교 지도자에 의하여, 함경북도의 3 1운동은 천도교 개신교 지도자에 의하여 인도되었다. 3 1운동에 참여한 학교는 전국적으로 98개교인데 함경도에서는 관립학교 1(함남 1), 공립학교 12(함남 7, 함북 5), 일반사립학교 137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여성사연구회 엮음, 한국교회 전도부인 자료집,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9, 145쪽. 138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 ; 독립신문 , 철원독립군의 판결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9, 1979, 244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916~921쪽. 139 윤정란, 강원지역 기독교 여성교육사업과 31운동, 여성과 역사 10, 한국여성사학회, 2009, 87쪽. 132

97 해제 17(함남 14, 함북 3), 종교사립학교 12(함남 9, 함북 3) 개교가 참여하였다. 전국 일반사립학교 참가 수의 45.9%이다. 3 1운동에 참가한 교원은 전국적으로 164명인데, 함경도에서는 31(함남 20, 함북 11)명으로 전국 교원 참가자의 18.9%였다. 140 (1) 원산( 元 山 ) 원산의 3 1운동은 141 원산 남촌동( 南 村 洞 ) 남감리교회 목사 정춘수( 鄭 春 洙 )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는 1919년 1월에 서울에 갔다가 신석구( 申 錫 九 ) 오화영( 吳 華 英 ) 등과 만나서 독립운동에 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2월 20일경 서울 영신( 永 信 )학교 사무실에서 박희도 오화영 이승훈과 만나 계획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 의견을 나누었다. 거사 일정은 다른 동지들과 의논하여 확정되는 대로 오화영이 통지해 주기로 하고 정춘수는 원산으로 돌아왔다. 2월 23일 정춘수에게 서울의 박희도 오화영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거사일은 3월 1일, 거사의 주동은 개신교 불교 천도교 등 종교단체가 함께 맡기로 하였다는 내용이었다. 정춘수는 같은 교회 전도사 곽명리( 郭 明 里 )를 서울로 보내 사실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였다. 2월 27일 서울로 출발한 곽명리에게서는 28일 아침까지도 연락이 없었다. 장로 차준승( 車 準 繩 )을 서울로 보내 서울의 상황을 알리도록 하였다. 한편 곽명리는 오화영을 만나 독립선언서 300매를 받았고, 3월 1일 오후 2시경 만세시위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들은 후 28일 오후 원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날 밤 차준승으로부터도 전보가 도착하였다. 곽명리로부터 직접 전후 상황을 들은 정춘수는 밤중에 김계술( 金 啓 述 ) 김기헌( 金 基 憲 ) 김장석( 金 章 錫 ) 이가순 이순영( 李 順 榮 ) 이진구( 李 鎭 九 ) 인이극( 印 利 極 ) 차광 은 차용운( 車 用 運 ) 정연수( 鄭 延 壽 ) 함태영( 咸 泰 塋 ) 등 14명을 진성여학교에 회합시키고, 다음 날인 3월 1일에 만세시위를 하기로 하고 밤을 세워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3월 1일은 원산의 장날이었다. 오후 2시 각 교회에서 종이 울리자 13명의 주동 인물들이 약속한 장소에서 독립선언서 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르며 장촌동( 場 村 洞 ) 시장으로 행진하였다. 이 때 오경달[고물상]이 자기 집에 있던 북과 나팔을 학생들에게 나누어 14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2, 1979, 661~667쪽. 14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79, 669~673쪽. 133

98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주자 학생들은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시위대열의 선두에 나섰다. 군중은 7~800명을 헤아렸는데 일본인 마을을 지나 원산경찰서로 향하였다. 도중에 일제 경찰 헌병 소방대 등이 합세하여 소방 호스로 물감[ 色 水 ]를 뿌리며 군중을 해산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들어 전진하였다. 당황한 일제군경이 공포를 쏘자 군중 일부가 흩어지고 나머지는 역전으로 몰려가 만세를 부르다가 저녁 6시경 해산하였다. 이 날 원산 시내의 만세시위에 참가한 사람은 약 2,000명이었으며, 50명이 체포되었다. 그 후 원산에서는 한동안 만세시위가 잠잠하다가 4월 5일 모든 상가가 철시하여 무언의 항의를 하였다. 주동 인물은 김진수( 金 鎭 洙 )였는데, 그는 같은 마을에 사는 황종성( 黃 鍾 聲 )을 찾아가서 일제에 대한 항의로 시내의 모든 한인 점포가 철시할 것을 합의하고 상가에 격문을 써 붙였다. 격문이 나붙자 시장은 일제히 문을 닫았다. 7) 충청남도 충남 지역의 3 1운동은 3월 3일 예산에서 처음으로 일어났다. 예산군 예산리에 있는 윤칠영 등 5명이 모여 서울의 독립만세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날 밤 11시 30분경에 부근 동산에 올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충남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어 111회의 시위가 일어났다. 시기별로 보면 3월에 28회, 4월에 43회의 시위가 있었고, 4월 1일부터 8일까지 40회가 발생하였다. 그 과정에서 39명이 사망하고, 154명이 부상당하였으며, 681명이 체포되었다. 142 이 자료총서에 수록한, 충청남도에서 만세운동을 펼친 여성은 공주의 김현경( 金 賢 敬 ), 천안의 민옥금( 閔 玉 錦 ) 유관순( 柳 寬 順 ) 한이순( 韓 二 順 ) 황금순( 黃 金 順 )이다. 142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6(3 1운동 6), 1993, 536쪽 ; 김진봉, 호서지방 3 1운동의 성격, 한국독립운동 사연구 1, 1987 ; 김진봉, 3 1운동사 연구, 국학자료원, 2000 ; 김진호, 공주지역의 3 1운동, 공주의 역사와 문화, 공주 대학교 박물관, 1995 ; 김진호, 대전지역의 3 1운동, 대전문화 8, 대전광역시사편찬위원회, 1999 ; 정래수, 충남지역 항일 학생운동 연구( 년대), 충남대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99 해제 (1) 공주( 公 州 ) 공주에서의 3 1운동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월 12일 공주읍 시장의 장날에 독립만세를 부르려는 시도가 있었다. 공주 부근에서 천도교신자 중심으로 경찰서를 공격 하려고 하였다. 3월 17일 오후 5시 김희봉( 金 喜 鳳 )이 공주 시장에 나가 군중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권유하고 자신이 앞장서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1,000여 명이 함께 대한 독립만세를 불렀다. 3월 24일 오후 9시경 영명학교( 永 明 學 校 )에서 목사 현석칠( 玄 錫 七 ), 안창호( 安 昌 鎬 ), 영명학교 교사 김관회( 金 寬 會 ) 현언동( 玄 彦 東 ), 영명여학교 교사 이규상( 李 圭 尙 ), 동경 유학생 김사현( 金 士 賢 ) 안성호( 安 聖 鎬 ) 오익표( 吳 翼 杓 ) 등 9명이 회합하여 현석칠을 중심으로 독립선언서 를 인쇄하고, 4월 1일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3월 25일 김관회는 김수철을 만나 영명학교 학생들을 참여시키는데 동의를 얻고, 독립선언서 1,000매 제작을 부탁하였다. 김수철은 영명학교 학생 유준석( 柳 俊 錫 ) 윤봉균( 尹 鳳 均 ) 등에게 독립만세운동 참여를 권유하고, 29일에 이규남( 李 圭 南 )을 만나 태극기 제작을 부탁하였으며, 30일에는 자택에서 양재순( 梁 載 淳 ) 유준석 등을 만나 김관회의 뜻을 전하여 동의를 얻었다. 31일 오후 3시경 노명우 등은 학교 기숙사에서 윤봉균이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 로 약 1,000매를 인쇄하였다. 이규남은 자택에서 태극기 4개를 만들어 김수철에게 3개, 이규상에게 1개를 전달하였다. 현석칠은 전체적인 지휘를 하고, 김관회는 영명학교와 공주공립보통학교의 남학생들을 담당하며 독립선언서 를 인쇄 반포하고, 현언동은 공주농업학교 학생들을 담당하고, 이규상은 영명여학교와 공주공립보통여학교를 담당하여 학생들의 만세운동 참여를 유도하기도 하였다. 4월 1일 오후 2시경 김수철 노명우 윤봉균 등은 이규남이 제작한 태극기를 하나씩 가지고, 강윤 노명우 류준석 양재순은 독립선언서 를 100매씩 가지고 공주 시장으로 가서 장에 모여든 군중 속에서 독립선언서 를 살포하는 한편, 태극기를 휘두르면서 14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2, 1979, 107~108쪽 ;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1154~1155쪽 ; 대한민국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3 1운동편 1), 1979, 35 52쪽 ; 김진호 박이준 박철규, 국내3 1운동Ⅱ-남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 운동사연구소, 2009, 13~18쪽 ; 김진호, 충남지방 3 1운동 연구, 충남대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2, 382~384쪽 ; 박철희, (충절의 고장) 공주지역 항일독립운동사 : 공주영명학교중심, 고구려,

100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이규상에게 전해듣고 만세운동에 참가할 것을 결의한 김현경( 金 賢 卿 )도 이규남이 제작한 태극기를 이규상으로부터 받아 집에 모여 있던 영명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시장으로 가서 김수철 등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144 이 날의 만세운동은 일제경찰의 출동으로 제지당하였고, 강윤 김관회 김수철 김현경 노명우 양재순 유준석 윤봉균 이규남 이규상 등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상과 같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공주에서 활동하였던 김현경은 공주군 공주면 본정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1일 공주면의 공주 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여러 동지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등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19년 8월 2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145 (2) 천안( 天 安 ) 천안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은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년 3월 14일 오후 4시경 목천보통학교의 학생 약 120명이 교정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고, 주동자 4명이 체포되었다. 3월 20일 아침 광명여학교( 光 明 女 學 校 )의 교사와 학생 수십 명이 직산금광( 稷 山 金 鑛 )의 광부와 부근 주민 약 70명과 함께 양대리( 良 垈 里 ) 시장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하장리( 下 場 里 )의 입장시장( 笠 場 市 場 )으로 향하여 약 6~700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선언서 를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출동한 천안헌병대에게 남자 40명, 여자 10명이 체포되었다. 3월 28일 아침 7시 반경 직산금광회사의 광부 약 200명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저지하는 일제헌병과 충돌하면서 양대 헌병주재소를 습격하고 일제헌병의 무기를 빼앗으려 하고 전화줄도 절단하였다. 이때 8명이 체포되고 일제헌병의 발포로 6명이 부상당하였는데 그 중 2명은 사망하였다. 144 그런데 만세운동 당시 충청남도청 순시 김봉인( 金 鳳 仁 : 44세)이 영명여학교에 통학하는 자신의 맏딸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조사를 받자 자식교육을 잘못한 자신의 책임이라며 면도칼로 자신의 배를 갈라 자살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수록되었다. ( 매일 신보 , 면목이 없다고 할복한 순경 ) 145 예심종결결정서 (공주지방법원, ) ; 판결문 ( , 공주지방법원) ; 수형인명부 ; 매일신보 , 공주소 요범인 판결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1979, 108 ; 독립운동사 9, 1979, 256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 운동사자료집 5, 1972, 1137~1140쪽 ; 독립운동사자료집 13, 1984, 70쪽. 146 金 正 明, 朝 鮮 獨 立 運 動 Ⅰ, 1966, 375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2, 1979, 116~126쪽 ; 김진호 박이준 박철규, 앞의 책, 2009, 95~96쪽 ; 천안문화원, 천안독립운동사, 1995, 91~92쪽 : 정래수, 박사학위논문, 2001, 40쪽. 136

101 해제 3월 29일 천안 읍내에서 약 3,000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경찰의 발포로 26명이 체포되었다. 3월 30일 입장에서 약 300명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일제경찰이 출동 발포하여 6명이 체포되었다. 같은 날 풍세면 풍서리( 豊 歲 面 豊 西 里 )를 중심으로 주변의 산 위 20여 개소에서 수백 명이 횃불을 올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였는데, 그 중 약 200명이 풍서리 시장으로 시위행진하였고 일제는 발포하였다. 3월 31일 밤 성환면( 成 歡 面 )에서 수천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일제 경찰과 헌병이 총칼로 제지하였다. 4월 1일 갈전면( 葛 田 面 ) 병천( 並 川 ) 시장에서 약 3,000명의 장꾼이 독립시위운동을 하였다. 이 운동에 유관순( 柳 寬 順 )이 있었기에 세칭 유관순사건 이라 한다. 이 날의 만세운동은 다음과 같았다. 오후 1시경 약 3,000명의 시위군중이 대한독립 이라고 쓴 태극기를 앞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하였다. 이에 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은 주재소로 향하는 시위군중에게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 뿐만 아니라 천안에서 헌병과 수비대가 출동하여 발포와 총검으로 찌르는 만행을 벌여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오후 4시경 시체를 주재소로 운반한 시위군중은 투석하고 철조망을 파괴하며 항의하였는데 일제경찰은 발포하였다. 그 후 시위군중은 부근의 산과 시장에 모여 천안과 병천 간의 전선을 절단하고 면사무소와 우편소에서도 시위를 하였다. 이상과 같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천안에서 활동하였던 민옥금 한이순 황금순은 입장면의 광명여학교에 재학 중이었는데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태극기를 준비하여 1919년 3월 20일 10시경 같은 학교 학생 80여 명을 규합하여 양대리 장터에서 독립만세시위를 하였다. 이어 입장면 장터로 진출하여 장터에 모인 300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하다가 체포되어 1919년 4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민옥금은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르고 1920년 2월 7일 가출옥하였다. 147 한이순은 징역 1년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고, 148 황금순도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 149 유관순은 공주 영명여학교에서 공부한 후 공주교회( 公 州 敎 會 ) 부인선교사( 婦 人 宣 敎 師 )의 147 판결문 (공주지방법원, ) ; 身 分 帳 指 紋 照 會 回 報 書 ; 민병달, 천안과 함께 한 역사인물, 천안문화원, 판결문 (공주지방법원, ) ; 分 身 帳 指 紋 照 會 回 報 書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1979, 117쪽. 149 판결문 (공주지방법원, ). 이후 황금순은 1930년 2월 충남 홍성군에서 홍성공립공업전수학교학생들의 광주학생운동 동조 동맹휴학을 배후 지도한 혐의로 체포되었다(공훈전자사료관 포상자공적조서 황금순 참조). 137

102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주선으로 이화학당의 교비생( 校 費 生 )으로 편입되었다. 고등과 1학년 때 3 1운동이 일어나자 3월 5일 남대문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제의 명령으로 이화학당이 휴교되자 독립선언서 를 감추어가지고 귀향하였다. 그리고 인근의 교회와 청신학교( 靑 新 學 校 ) 등을 순방하며 만세운동 참가를 권고하였다. 그리하여 4월 1일 아우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4월 1일 오전 9시 3,000여 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조인원( 趙 仁 元 )이 긴 장대에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높이 달아 세우고 독립선언서 를 낭독한 후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아우내 장터는 시위군중의 만세소리로 가득하였다. 이 때 그녀는 미리 만들어 온 태극기를 시위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시위대열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행진하였다. 오후 2시경 헌병 분견대원과 수비대원 30여 명이 총검을 휘두르고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만행으로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 柳 重 權 )과 어머니 이씨( 李 氏 )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그녀는 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공주검사국으로 송치되었는데 여기서 공주 영명학교 학생대표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가 체포된 오빠 유우석( 柳 愚 錫 )을 만났다. 그녀는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받고 공소하여 1919년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서대문감옥 8호 감방에서 수감되었다. 8호 감방에는 김향화, 신관빈, 어윤희, 이순화 등 3 1운동의 여성 투사들이 함께 있었다. 1919년 7~8월에 감방 동료들이 모두 가출옥되었고, 12월에 대동단사건으로 이신애가 8호 감방으로 들어왔다. 유관순은 이신애와 함께 감방 동지들과 비밀리에 연락하여 3 1운동 1주년 기념식을 준비하였다. 1주년이 되는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에 감옥이 떠나갈 듯이 만세를 부르자 3,000명이 넘는 수감자들이 호응하여 만세를 불렀다. 이 사건으로 이신애와 유관순은 감방 밖으로 끌려가 심하게 매를 맞았다. 유관순은 끝내 굴하지 않았고 더욱 심하게 매를 맞아 방광이 파열되었다. 그리고 그 해 9월 28일 감옥에서 순절하였다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 ; 판결문 (고등법원형사부, ) ; 김승학, 한국독립사 하, 독립문화사, 1970, 198쪽 ; 문일민, 한국독립운동사, 사단법인 애국동지회, 1956, 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2, 1979, 113쪽 ; 독립운동사 3, 1979, 쪽 ; 독립운동사 9, 1979, 257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 운동사자료집 5, 1972, 1162~1165쪽 ; 박용옥,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31 : 여성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140~149쪽. 138

103 해제 8) 경상북도 경북 지역의 3 1운동은 3월 8일 대구에서의 만세운동 이후 5월 7일 청도군 매전면 구촌동 만세운동까지 두 달 동안 80곳이 넘는 곳에서 90회 이상 일어났다. 151 이 자료총서에 수록한, 경상북도에서 만세운동을 펼친 여성은 대구의 임봉선( 林 鳳 善 ), 영덕의 신분금( 申 分 今 ) 윤악이( 尹 岳 伊 )이다. (1) 대구( 大 邱 ) 대구에서의 3 1만세운동은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152 대구 지역은 경북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3월 8일 서문시장을 시작으로 3월 10일 남문 밖 시장, 그리고 달성군 팔공산 동화사 소속 지방학림 학생들에 의한 3월 30일 남문 밖 시장, 이어 4월에는 수성면 대명동과 공산면 미대동에서 독립만세가 펼쳐졌다. 또 상인들의 철시투쟁과 비밀결사 혜성단의 활동이 약 두 달 동안 전개되었다. 대구에서 3 1운동이 처음 일어난 서문시장의 독립만세는 2월 24일 밤 개신교측 대구경북지역의 독립선언서 배포책임자인 이갑성이 비밀리에 남성정( 南 城 町 )교회를 방문하고 목사 이만집, 조사 김태련, 그리고 계성학교( 啓 聖 学 校 ) 교사 백남채 등을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이갑성은 파리강화회의가 열리는 기회를 이용하여 독립을 청원할 것이며, 이를 응원하기 위해 서울 및 전국에서 독립만세가 준비되고 있으니, 대구에서도 독립만세를 일으킬 것과 대구를 대표해 이만집이 서명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선언서 가 발표되고, 이갑성은 독립선언서 200매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 이용상( 李 容 祥 )을 통해 3월 3일 이만집에게 전달하였다. 그러자 이만집은 독립만세를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남산교회의 김태련과 신정교회 장로이자 계성학교 교감인 김영서( 金 永 瑞 )를 만났다. 세 사람은 장날인 3월 8일 오후 3시 서문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전개할 것을 합의하고, 동지를 모으는데 나섰다. 신정교회 목사 정재순( 鄭 在 淳 )과 장로 정광순( 鄭 光 淳 ), 계성학교 교사 백남채, 최상원( 崔 相 元 ), 권의윤( 權 義 允 ), 최경학( 崔 敬 學 )을 참여시켰다. 이어 김태련 이만집 정광순 정재순은 151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안동독립운동기념관, 경북독립운동사 III, 경상북도, 2013, 35쪽. 15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2,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9, 347~352쪽 ; 독립운동사 3, 1979, 350쪽 ; 권 영배, 대구지역 3 1운동의 전개와 주도층, 조선사연구 6, 조선사연구회, 1997 ; 김진호 박이준 박철규, 앞의 책, 2009, 308~310쪽 ;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앞의 책, 2013, 54~65쪽. 139

104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교회신자들에게, 권의윤 김영서 백남채 최경학 최상운은 계성학교 학생들에게 독립만세 소식을 알리면서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신명여학교 학생들을 참여하게 한 인물은 김구생과 신명여학교 교사 이재인( 李 在 寅 ), 졸업생으로 교사인 임봉선( 任 鳳 善 ), 그리고 학생 이선애( 李 善 愛 )였다. 그리하여 계성학교 대구고등보통학교 신명여학교 학생들과 성경학교 강습생들이 3월 8일 서문 시장 독립만세에 참여하게 되었다. 3월 8일 김태련 이만집 등은 교회측 인사 수십명과 함께 시장의 군중 사이에서 학생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먼저 수업을 마친 계성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귀가하는 척하면서 시장 주변으로, 기숙사생들은 동산 산림 속을 지나 시장 안으로 띄엄띄엄 흩어져 들어왔다. 신명여학교 학생 일부도 동산의 서쪽과 북쪽의 가파른 언덕길을 더듬어 내려왔다. 그리고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 백남기 신현욱 하범 등은 수업하는 교실을 돌며 손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이에 전교생이 교사들의 제지를 물리치고 교문을 나와서 계성학교 학생들과 합류하여 서문 시장으로 들어갔다. 이어 박장호( 朴 章 鎬 )가 성경학교 강습생을 이끌고 뛰어왔다. 그러자 경계태세로 감시 중이던 일제경찰들은 학생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면서 제지하였다. 이상과 같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대구에서 활동하였던 임봉선은 대구 신명여학교 교사로서 1919년 3월 8일 여학생 50여 명을 주동하여 대구 서문 시장에서 계성학교 남학생과 합세하여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운동하다 체포되어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53 (2) 영덕군( 盈 德 郡 ) 영덕의 3 1운동은 154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평양으로 가던 중에 잠시 서울에 머물렀다가 서울의 3 1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온 지품면 낙평동( 洛 坪 洞 ) 장로교회 조사 김세영( 金 世 榮 )에 의해 시작되었다. 평양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어 신학교가 휴교에 153 판결문 (대구지방법원, )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1979, 쪽 ; 독립운동사 9, 1979, 270~271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쪽. 154 경상북도경찰부 편, 고등경찰요사, 1934, 32~33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영덕의 독립운동사, 영덕군, 2003 ; 김진호 박이준 박철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318~321쪽 ;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안동독 립운동기념관, 경상북도, 2013, 404~428쪽. 140

105 해제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낙평동 본가로 돌아왔다. 서울의 만세운동을 목격한 인물은 김세영 외에 구세군 정위( 正 尉 ) 권태원( 權 泰 源 ), 병곡면 송천동 장로교회 조사 정규하( 丁 奎 河 ), 남녀명( 南 汝 明 ), 남효직( 南 孝 直 ), 권상호( 權 相 鎬 ) 등도 있었다. 이들이 소식을 가져오면서 영덕의 3 1운동은 추진되었다. 3월 18일에 영해면의 시장과 주재소에서 시작한 독립만세운동은 주재소, 보통학교, 소학교, 우편소,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일제경찰들과 순사보들을 응징하였으며, 영해를 출발하여 병곡으로 가서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파괴하였다. 영덕면에서는 강우근( 姜 佑 根 ) 이승구( 李 承 玖 )의 주도 아래 영덕면과 남정면, 영양군 석포면 포산동의 개신교신자들 중심으로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19일에는 창수면에서 이종구( 李 鍾 龜 ) 등이 주도하여 창수주재소와 면사무소를 공격하였다. 지품면에서는 주명우( 朱 明 宇 )의 주도 하에 황장동( 黃 腸 洞 )의 장로교회를 중심으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3월 21일에는 지품면에서 문의향( 文 義 鄕 )의 주도 아래 문씨들과 마을민들이 신안동( 新 安 洞 ) 일대를 행진하면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4월 4일에는 남정면에서 박명방( 朴 命 方 )의 주도 아래 개신교신자들과 장사동 마을청년들이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상과 같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영덕에서 활동하였던 신분금 윤악이는 남편들이 독립운동을 계획하다가 검거된 후 함께 만세운동을 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3월 24일 영덕군 지품면 원전동 시장에서 함께 한국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16일 대구지방법원영덕지청에서 신분금은 징역 6월, 155 윤악이는 징역 8월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 경상남도 경남의 3 1운동은 1919년 3월 3일에 시작하여 4월 말 일단락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3월 11일 부산의 개신교계 일신여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된 시위를 시발점으로 3월 중순 이후 경남의 3 1운동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3월 13일 동래 영산 밀양, 14일 의령 창녕 통영, 17일 함안, 18일 진주 통영 하동 합천 등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김해 양산 창원 함양에서는 155 판결문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 )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156 판결문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 ). 141

106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3월 하순, 남해 울산에서는 4월 상순에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3월 중순부터 4월 하순까지 179회의 크고 작은 시위가 거의 매일 전개되었고, 연인원 10만명이 시위에 참여한 경남의 3 1운동은 충북에 이어 전국에서 가장 늦은 시기에 점화되었지만 어느 곳 못지 않게 치열하고 완강하게 전개되었다. 179회의 시위 중 44회는 일제의 발포에 맞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20회는 관공서와 일본인 집, 일본인 관공리와 친일파들을 공격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81명이 사망하고, 233명이 부상당하였으며, 754명이 검거되었다. 또한 시위군중에 의하여 경찰서 15개소, 헌병분견소 7개소, 군 면사무소 7개소, 우편소 6개소, 기타 8개소 등이 파괴되어 일제의 통치기반에 큰 타격을 주었다. 157 이 자료총서에 수록한, 경상남도에서 만세운동을 펼친 여성은 통영의 이소선( 李 小 先 ) 정막래( 丁 莫 來 )이다. (1) 통영군( 統 營 郡 ) 통영군의 만세운동은 년 3월 9일 통영면 서정에 사는 개신교신자 진평헌 외 19명이 독립선언서 를 시내에 배포하고 만세운동을 기도하면서 시작되었다. 18일에는 통영면 신정 출신의 개신교 신자 이봉철 외 2명이 통영 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날의 만세시위에 통영면 신정의 한문학당인 관란재( 觀 瀾 齋 )의 학생 박상건(당시 17세) 등 서당학생 20명이 적극 참가하였다. 22일에는 일제의 하급행정기관의 관공리들도 시위준비에 참가하거나 만세운동을 직접 주동하였다. 면서기 3명, 군청 직원 3명, 산림 기수 1명 등이 청년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모의하다가 검거되었다. 28일 오후 5시경에는 통영면 박성일 조일정 외 7명이 부도정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다 검거되었다. 김재욱은 조선독립만세 라고 쓴 종이 깃발을 작성하여 재봉업자인 박성일 등과 함께 장날에 모인 1,000여 명의 군중에게 나누어주고 운동을 주동하였다. 이 날의 만세운동은 포목상 해물상 재봉업자 등 중소상인과 자영업자가 사전에 계획하고 조직한 것이었다. 31일에는 경남독립회 명의로 통영면장에게 경고장이 발송되었는데 지식인, 청년, 학생들의 김상환, 경상남도 3 1운동의 전개양상과 특징, 지역과 역사 29, 부경역사연구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2, 1979, 254~300쪽 ; 김상환, 일제시기 통영의 3 1운동과 민족운동의 전개, 도서출판 제일, 2005 ; 김진호 박이준 박철규, 앞의 책 2009, 275~277쪽 ; 이동근, 1910년대 기생 의 존재양상과 3 1운동, 한국민 족운동사연구 74, 2013, 156쪽.

107 해제 선전 선동 작업으로 통영 지역의 반일의식이 한층 고양되었다. 3월에 일어난 만세운동으로 고조된 지역주민의 분위기는 4월 2일 만세운동에서 절정에 달하였다. 3월 18일 서당학생들의 시위를 주도한 박상건과 강윤조 고채주 등이 이 날의 만세운동을 다시 주동하였다. 만세운동은 오후 3시 30분경 부도정 시장에 수천여 명의 군중이 집결하면서 시작되었다. 만세운동의 주동자들은 서당학생, 어민, 제조업자, 해외독립운동 출신자 등이었다. 이 날의 시위에는 시장상인들이 동조하여 철시하였고, 예기조합의 기생들은 금비녀 금팔찌를 팔아 소복차림으로 시위대열에 함께 하였다. 시위군중 수는 4~5,000명을 헤아렸는데 빈민들이 다수를 이룰 만큼 기층민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이상과 같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통영에서 활동하였던 이소선과 정막래는 통영군의 기생으로 1919년 4월 2일 오전 10시경 통영군 통영면 길야정( 吉 野 町 ) 기생조합소에서 기생 5명과 함께 기생단( 妓 生 團 )을 조직하였다. 정막래는 가지고 있던 금붙이를 팔아서 상복과 짚신을 구입하고 다른 기생들에게 나누어 준 후 상복 차림으로 기생조합소를 출발하여 4월 2일 오후 3시경 통영면 부도정( 敷 島 町 ) 시장에서 만세운동의 선두에 서서 군중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소선과 정막래는 바로 검거되어 군중을 선동한 죄로 1919년 4월 18일 부산지방법원통영지청에서 징역 6월을 언도받았다. 159 마산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1919년 10월 18일 출옥하였다. 160 기생들은 지역의 만세운동에 동참하면서 독자적인 또는 주도적이며 상징적인 만세운동을 펼쳐나갔다. 기생들이 수천여 명의 만세운동 물결 속에서 선봉에 섰던 것은 기생들만의 민족적 정서와 함께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 등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운동을 전후하여 기생 중에는 애국기생도 상당히 많았다. 이런 기생을 사상( 思 想 )기생이라 불렀다. 31운동 당시의 치안 책임자 치바[ 千 葉 了 ]는 3 1운동 이후 기생들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1919년 9월(3 1운동이 난 해) 우리들이 처음으로 부임했을 때의 서울 화류계는 술이나 마시고 춤이나 추는 그런 놀아나기만 하는 눈치는 조금도 볼 수 없었다. 약 800명의 이 기생들은 화류계 여자라기보다 독립투사였다. 이 기생들의 빨간 입술에서는 불꽃이 159 이동근, 1910년대 기생 의 존재양상과 3 1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74, 2013, 157~158쪽. 160 판결문 (부산지방법원 통영지청, )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 매일신보 , 통영소요기생, 징역 6개월에, 부산의 소요공판 ; 신한민보 , 막래, 소선은 나라를 위하여 충의를 다하다가 징역. 161 이동근, 앞의 논문, 2013, 147쪽. 143

108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튀기고 놀러오는 조선청년들의 가슴 속에 독립사상을 불러 일으켰다. 화류계에 출입하는 조선청년치고 불온한 사상을 가지지 않은 자 없게 되고 서울시내 백여 군데 요정들은 어느덧 불온한 이들의 음모를 위한 소굴로 화하였다. 간혹 일본인들이 기생집에 놀러가는 일이 있어도 그 태도는 냉랭하기가 얼음같고 이야기도 않거니와 웃지도 않는다. 더구나 노래와 춤을 청해도 받아 주지도 않는다. 잔을 내밀면 묵묵히 술을 따를 뿐, 때가 되면 묵묵히 사라지고 만다. 그 분위기야말로 유령들이 저승에서 술을 마시는 기분이다. 독립만세 후의 서울 장안 화류계는 이처럼 불온하고 험악한 공기로 더욱 조성되었다. 총독부가 아무리 좋은 정치를 하고 군대와 경찰이 아무리 호령을 해도 사회의 이면에 이와 같은 불온한 소굴이 남아 있는 한 조선사회의 치안유지는 성절( 成 切 )될 듯 싶지가 않다 ) 전라북도 전북에서의 3 1운동은 3월 3일 군산 이리 전주 등에 독립선언서 가 일반인들에게 배포되면서 시작되었다. 서울에서 독립선언서 2,000장을 간사인 인종익( 印 宗 益 )이 가지고 와 3월 2일 이리에서 이중달( 李 仲 達 )에게 일부를 전하고, 나머지는 전주로 가져와 전북의 천도교 조직망을 통하여 금마 김제 여산 용안 이리 함열 등 10여 개 지방에 나누어 주었다. 3월 5일 군산 옥구를 비롯하여 13일과 14일 전주, 16일 태인, 23일 오수, 4월 4일 이리와 만경 등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163 이 자료총서에 수록한, 전라북도에서 만세운동을 펼친 여성은 기전여학교의 학생 김공순( 金 恭 順 ) 김나현( 金 羅 賢 ) 김신희( 金 信 熙 ) 김인애( 金 仁 愛 ) 최요한나( 崔 堯 漢 羅 ) 함연춘( 咸 鍊 春 ), 그리고 정신여학교 학생 박순애( 朴 順 愛 )이다. (1) 전주( 全 州 ) 전주에서의 3 1운동은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164 전주에는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졌다. 3월 1일 서울 천도교구 인종익이 전주 천도교 교구실에 독립선언서 를 전달하자, 162 千 葉 了, 朝 鮮 獨 立 運 動 秘 話, 帝 國 地 方 行 政 學 會, 1925 : 정요섭, 한국여성의 민족운동에 관한 연구 : 3 1운동을 중심으로, 아세아여성연구 10, 숙대출판부, 1971, 312~313쪽. 163 홍석영, 3 1독립선언과 임시정부, 전북지역 독립운동사, 전북지역독립운동추념기념탑건립추진위원회, 1994, 쪽. 16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1979, 496~501쪽 ; 최종삼, 전주3 1운동 회고록, 신동아 1965년 3월 ; 김진호 박 이준 박철규, 앞의 책, 2009, 145~147쪽 ; 이재근, 남장로교의 전주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설립과 발전( ), 한국기 독교와 역사 42,

109 해제 배상근( 裵 祥 根 ) 김진옥( 金 振 玉 ) 등이 인근 임실 익산 이리 김제 옥구 정읍 부안 등지로 이를 전파하면서 확산되었다. 3월 2일 김태경( 金 太 京 )은 전주 천도교 교구실에서 독립선언서 9매를 받아, 유원( 柳 源 ) 외 4명에게 나누어 주는 한편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유원 민영진( 閔 泳 軫 ) 등은 서호순( 徐 鎬 淳 ) 이달수( 李 達 洙 ) 유명선( 柳 明 善 ) 양영화( 梁 永 化 ) 이완옥( 李 完 玉 ) 유선태( 柳 先 泰 ) 등에게 독립선언서 를 배포하였다. 한편 개신교측에서는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 紀 全 女 學 校 ) 165 등이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3 1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김가전( 金 嘉 全 ) 김종곤( 金 鍾 坤 ) 윤건중( 尹 建 重 ) 이수연( 李 守 淵 ) 최종삼( 崔 宗 三 ) 등은 학생들을 동원하는 한편 김한순( 金 漢 淳 ) 박 태련( 朴 泰 鍊 ) 유병민( 柳 秉 敏 ) 최종삼 함의선( 咸 義 善 ) 등은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의 일부 학생들과 신흥학교 지하실 등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를 준비하였다. 이들은 3월 13일 전주읍 장날을 만세시위날로 정하고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천도교측에서도 김진옥 배상근 등이 천도교 교구실 등사판을 이용하여 독립선언서 수천 장을 등사하는 등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13일 12시 30분경 강선칠( 姜 善 七 )이 태극기가 든 가마니 1개를 보통학교 교정에 갖다 놓음으로써 만세시위 준비는 끝났다. 오후 1시경 이들은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전주면 서정에 위치한 공립제2보통학교 부근에서 대정정 우편국 부근까지 가두시위를 하였다. 이운영( 李 云 泳 )이 선두에서 태극기를 높이 흔들며 독립만세를 선창하였으며, 강선칠 강준구( 姜 俊 求 ) 김병학( 金 炳 學 ) 김봉추( 金 鳳 樞 ) 김재흥( 金 在 興 ) 김정희( 金 錠 熙 ) 김진영( 金 鎭 永 ) 박덕주( 朴 德 柱 ) 서병규( 徐 丙 珪 ) 서봉운( 徐 奉 雲 ) 유완진( 柳 完 鎭 ) 이승우( 李 承 祐 ) 이영직( 李 英 稙 ) 등도 함께 만세를 부르며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들은 출동한 일제경찰에 의해 우체국 부근에서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3월 14일에는 오후 3시경 권봉화( 權 奉 和 ) 김경신( 金 敬 信 ) 김대희( 金 大 熙 ) 김봉호( 金 鳳 昊 ) 김수천( 金 壽 千 ) 김인철( 金 仁 喆 ) 김점쇠( 金 點 釗 ) 노성용( 盧 成 用 ) 박상선( 朴 尙 鮮 ) 박찬문( 朴 贊 文 ) 배순길( 裵 順 吉 ) 배윤명( 裵 允 明 ) 백남두( 白 南 斗 ) 이판쇠( 李 判 釗 ) 최갑쇠( 崔 甲 釗 ) 최병태( 崔 炳 台 ) 등이 전주 완산교 부근에서 한국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며 본정 쪽으로 가두행진을 하였다. 출동한 일제경찰이 주동자들을 체포하자, 시위대는 년 1월 전주군 이동면 화산리( 伊 東 面 華 山 里 )에 설립되었다. 초대 교장은 윌리엄 전킨(William M. Junkin)의 아내 메리 레 이번 전킨(Mary Leyburn Junkin) 여사였다. 이들 부부는 1902년 군산 영명학교, 멜본딘 여학교를 설립하여 가르쳤다.(이재근, 남장로교의 전주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설립과 발전( ), 한국기독교와 역사 42, 2015, 55쪽) 145

110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해산하였다. 당시 전주교 부근에서도 만세시위가 전개되었으며 이명수( 李 明 洙 )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3월 17일에는 초포면 송전리 들판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고, 21일에는 봉동면 장기리 장터에서 만세시위가 있었다. 23일에는 전주 장날을 이용해 수천 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군청 경찰서 재판소가 위치한 큰 거리를 지나며 시위행진을 하다가 일제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으며 20여 명이 체포되었다. 24일에는 삼례면 삼례 장날에 수백 명의 군중이 만세행진을 전개하고 삼례역을 습격하였다. 이상과 같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전주에서 활동하였던 기전여학교 김공순 166 김나현 167 김신희 168 김인애 169 최요한나 170 함연춘 171 의 만세운동을 기전80년사 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919년 3월 13일 기전여학교 학생들은 남문의 인경소리 가 울리기를 남문 밖 최요한나 집(현 전동 295번지) 안방에서 기다렸다. 졸업반(3학년) 김신희의 어머니와 다른 학생들의 어머니는 자그마한 장바구니를 들고 남문 밖 길가를 왕래하면서 신흥학교 학생들과 신간회원들이 오는가를 살폈다. 곧 남문 밖에서 신흥학교 학생들과 만나 합세하였다. 전주 장날이었기에 많은 장꾼들이 몰려들었다. 하얀 치마저고리에 머리에는 하얀 끈을 동여맨 166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 ;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 ; 문일민, 한국독립운동사, 사단법인 애국동 지회, 1956, 182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1979, 쪽 ; 독립운동사 9, 1979, 281쪽 ; 독립운동사 10, 1979, 841쪽. 167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 ;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 ; 金 正 明, 朝 鮮 獨 立 運 動 Ⅰ, 1966, 661쪽 ; 문 일민, 앞의 책, 1956, 182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1979, 쪽 ; 독립운동사 9, 1979, 쪽 ; 독립운동사 10, 1979, 841쪽. 168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 ;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 ; 신한민보 , 세계 자유사상에 처음 보는 십만명 애국 여자의 대활동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1979, 쪽 ; 독립운동사 9, 1979, 281쪽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자료 4, 1994, 237쪽. 169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 ;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 ; 문일민, 앞의 책, 1956 ; 단국대학교 부설 동 양학연구소, 박은식 전서 상, 단국대학교출판부, 1975, 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1979, 499쪽 ; 독립운동사 9, 1979, 281쪽. 김인애는 옥고를 치른 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나라[ 奈 浪 ]고등사범학교를 마치고 서울 정신여학교 에서 교사로 활동하다가 기전여학교 성경 담당교사로 부임하였다.(기전80년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82, 201쪽) 170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 ;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1979, 쪽. 최요한나( 崔 堯 漢 羅 )는 최요한[ 崔 約 翰 ], 최요한나( 崔 約 漢 那 ) 등 한자 표기가 여러 가지이다.(기전80년 사편찬위원회, 기전80년사, 전주기전여자중학교 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 기전여자전문대학, 1982, 196~197쪽.) 171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 ;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1979, 496쪽 ; 독립운동사 9, 1979, 280쪽. 146

111 해제 기전여학교 학생들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를 장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시위군중은 우편국 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일제경찰은 공포를 쏘고 말을 탄 채 총대를 휘둘러 시위군중을 해산시켰다. 이 때 앞장서 달리던 임영신(4회 졸업)이 경찰에 맞아 기절하였고, 김공순(3회 졸업), 김신희(졸업반), 송순이(졸업반), 최금주(졸업반), 최애경, 최요한나(2학년), 정복수(2학년), 함연춘 함연순(2학년) 자매 등이 체포되었다. 172 그 날 오후 500여 명이 오목대에 모여 본정우체국으로 몰려가자 일제경찰은 일본도를 휘둘렀고, 소방대원도 소방차를 이끌고 와서 갈쿠리로 찍어댔으며 빨간 물감을 만세시위군중의 옷에 뿌리고, 해산한 사람들 중에서 물감 묻은 사람만 체포하였는데 200여 명이었다. 그 날 밤 9시경 기전여학교의 강정순 김나연 김순실 김인애 함의선(당시 교사이며 3회 졸업생) 등이 주동이 된 230명의 시위대가 도청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구속된 동포들을 석방하라고 외치다가 검거되었다. 그 날 밤 12시경 일제는 체포한 만세시위자들에게 용수를 씌우고 일본 짚세기를 신겨 반대미에 있는 감옥에 구속하였다. 감옥은 퀴퀴한 냄새가 가득하였고 시멘트 바닥에 가마니를 깔았다. 여간수가 입회하여 강제로 모두 옷을 벗게 하고 성경, 찬송가, 약간의 돈을 모두 빼앗았다. 저고리 옷고름도 떼어갔다. 먹을 수 없는 콩과 보릿덩이에 소금절인 무 한 쪽을 아침밥으로 주었다. 김신희는 내 일생에 그 때처럼 밥 맛 없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고 회고하였다. 강정순 김공순 김나연 김순실 김신희 김인애(최기물) 송순희 임영신 정복수 최금주 최애경 최요한나 함연춘 등 기전 여학생 13명은 10일만에 검찰에 송치되었다. 20여 일 동안 일제검찰이 문초하였으나 어떠한 소득도 얻지 못하자 기소하였다. 재판에 회부되어 첫 번 법정에 출두하던 날 광주지방법원전주지청은 인파로 붐볐다. 전주민들의 입과 입을 통해 기전여학교 학생들의 행동이 알려진 때문이었다. 그녀들의 얼굴에는 용수가 씌워져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기전 여학생들을 설득하기 위해 시학관 다나까[ 田 中 ]를 감옥에 보내 미국 등에 유학시켜 준다고 회유작전을 폈으나 실패하였다. 3개월 후인 6월 10일 갑자기 보석이 허가되었다. 미리 보석을 알게 된 부모들이 인력거를 보냈다. 집이 서원 너머인 김신희 집에서는 가마를 두 쌍 갖고 나와 임영신과 함께 데리고 172 기전80년사편찬위원회, 기전80년사, 1982, 186~188쪽. 147

112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갔다. 집에서 오랫동안 옥독을 치료하였다. 6월 30일 전주지방법정에서 결심 공판이 열렸다. 개정된 후 학생들에게 최후 진술 기회가 주어지자 임영신은 재판장님, 방청객 여러분, 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또한 우리 조국의 앞날을 위해 만세를 부른 것이 무엇이 잘못입니까? 그런데도 우리에게 갖가지 고문과 옥살이로 죄인 대접을 하는 것은 만고의 죄가 된다는 것을 당신네들은 알아야 합니다. 내 나라 내 강산에서 만세를 불렀다는 죄목으로 당신들 일본은 우리를 재판할 권리가 없습니다 라고 열변을 토했다. 재판장은 6개월 징역에 3년의 집행유예를 선고하였다. 불복한 하시모토 검사는 대구고등법원에 공소하였는데 173 기각되었다. 1919년 4월 26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작성한 소요사건에 관한 민정보고서 제9호 비밀 911호는 만세운동에 참여한 기전여학교 학생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1919년 4월 18일 총독부 시학관 다나까는 전주감옥을 찾아가 수용 중인 임영신을 주모자로 하는 기전여학교 만세사건 관련자들을 심문실로 호출하였다. 다나까는 그들에게 그릇된 불온사상을 가지고 소요를 일으킨 결과 이런 고생을 하게 되니 후회하지 않느냐? 속히 기전에 돌아가도록 해 줄 터이니 모든 것을 털어 놓아라 하고 회유했으나 그 중 주모자 임영신은 우리들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조선의 독립을 기도하였으니 몸은 비록 어떻게 되든 독립운동은 결코 중지할 수 없다 고 했다. 그러므로 본건 만세사건에 관련된 주모자들은 도저히 회유할 수 없는, 용납지 못할 악질분자들이다 174 박은식은 기전 여학생들의 행동을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전주군의 여학생 임영신 정복수 김공순 최애경 김인애 최약한 강정순 함의선 함연순 최금주 송순의 김순실 김신희 정월초 등 14명은 3월 13일에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투옥되었다. 그 학생들은 반드시 죽겠다는 결심으로 4일 동안 밥을 먹지 않았다. 일본인 검사가 위압적으로 승복시키려 엄히 신문하였다. 학생들은 모두 평온한 기색으로 대담한 말로 답하였다. 우리들이 어찌 너희들의 판결에 복종하겠는가. 너희들은 우리의 강토를 173 기전80년사편찬위원회, 기전80년사, 1982, 186~192쪽. 174 姜 德 相, 現 代 史 資 料 25( 朝 鮮 1 : 三 一 運 動 ), みすず 書 房, 1967, 403쪽. 148

113 해제 모두 빼앗고 우리들의 부모형제를 학살한 강도이다. 도리어 삼천리의 주인이 되는 우리들을 불법이라고 하니 이것은 법적인 판결도 아니다 라고 하였다. 일본인 검사는 크게 노하여 칼을 빼들고 학생들의 왼쪽 귀를 잘라버리고 모든 학생들의 옷을 벗기고 알몸으로 세워놓고 조롱까지 하였다. 학생 임영신은 손을 들어 일본 관리를 때리며 야만인 이라고 말했다. 일본인 검사가 또 신문하기를, 너희 조선은 군함도 군대도 대포도 철도도 없다. 완전한 독립은 절대 불가능하다 고 하자 학생이 대답하기를 이후에는 군함, 대포, 군대, 철도 등의 물건들은 모두 머지 않아 없어질 것이다. 너희들이 이런 따위의 것을 묻는 것을 보니 그 어리석음을 가히 알 수 있다 고 하였다. 검사가 다시, 누가 너희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가르쳤느냐? 라고 묻자 학생들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전국이 정의를 떨치고 일어나 모두가 함께 만세를 부른 것이다. 무슨 부탁을 받았다는 것인가. 너희들은 참으로 세계적인 관점에 어두운 섬 사람이구나 라고 대답하였다. 일본 관리들은 이렇게 아픈 곳을 찔리자 심문을 멈추고 도로 가두어버렸다. 175 박순애는 정신여학교 학생으로 1919년 12월 28 30일에 기전여학교에서 1920년 1월 5일 군중과 조선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계획하였다가 체포되었다. 1920년 2월 20일 광주지방법원전주지청에서 소위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령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 공소하였으나 1920년 4월 1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당하였다. 176 본적은 경기도 고양군 지도면 행주내리( 知 道 面 幸 州 內 里 ), 주소는 경기도 경성부 연지동 정신여학교 기숙사였다. 11) 전라남도 전남 지역의 3 1운동은 평안도나 경기도 등에 비해 그리 격렬한 양상을 띠지는 않았다. 그것은 진남 지역의 천도교나 개신교의 교세가 상대적으로 미약하였으며, 유생층도 한말 의병봉기로 인해 큰 손실을 보았기 때문에 운동을 주도할 만한 역량이 충분하지 않았던 때문이다. 따라서 청년층이나 보통학교 학생층이 직접 만세운동의 주도층으로 나선 경우가 많았다. 177 이 자료총서에 수록한, 전라남도에서 만세운동을 펼친 여성은 수피아여학교 교사 박애순( 朴 愛 順 ) 진신애( 陳 信 愛 ), 수피아여학교 학생 김덕순( 金 德 順 ) 박우말례( 朴 又 末 禮 ) 175 박은식, 김도형 옮김,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소명출판, 2008, 322쪽. 176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 ;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 177 박찬승, 전남지방의 3 1운동, 전라남도지 8,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103쪽. 149

114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윤형숙( 尹 亨 淑 ) 임진실( 林 眞 實 ) 조옥희( 曺 玉 姬 ) 최수향( 崔 秀 香 ) 하영자( 河 永 子 ), 그리고 간호사 김안순( 金 安 順 )이다. (1) 광주( 光 州 ) 광주에서의 3 1운동은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년 2월경 동경유학생 정광호( 鄭 光 好 )가 조선청년독립단 명의의 2 8 독립선언서 를 가지고 광주에 들어왔다. 정광호는 서울 유학 중이던 김범수( 金 範 洙, 경성의전 재학) 박일구( 朴 一 求 ) 최정두( 崔 正 斗 ) 등과 만나 만세시위를 논의하였다. 정광호는 2월 중순경 광주에 와 정상호를 비롯해 신문잡지종람소 회원들을 만나 만세시위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뜻을 같이하였다. 이들은 먼저 거사를 위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를 준비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2월 하순경 서울에서 김범수 등이 함께 거사하자고 제안해 왔다. 이에 정광호 등은 독립선언서 를 가마니에 담아 광주로 돌아와 최한영(광주농업학교 재학) 집에 숨겨 두었다. 같은 시기, 이들과 교유하였던 김필수 목사와 개신교신자 김철( 金 鐵, 일명 김복현) 최흥종( 崔 興 琮 ) 등이 서울로 올라가 김범수 등을 만나 운동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서울만세시위에 참가하였던 최흥종이 시위 도중 일제경찰에 붙잡히자 김철 최정두 등은 3월 5일 광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양림동 남궁혁( 南 宮 赫 )의 집에 모인 강석봉( 姜 錫 峰 ) 김강( 金 剛 ) 최병준( 崔 炳 俊 ) 김용규( 金 容 圭 ) 김태열( 金 泰 烈 ) 서정희( 徐 廷 禧 ) 최영균( 崔 瑛 均 ) 최한영( 崔 漢 泳 ) 한길상( 韓 吉 祥 ) 홍 승애( 洪 承 愛, 수피아여학교 교사) 황상호( 黃 尙 鎬 ) 등은 3월 8일 광주 큰장날에 거사할 것을 결의하였다. 독립선언서 태극기 준비는 김용규 범윤두( 范 潤 斗 ) 최정두 최한영 한길상 등이 맡고, 일반시민 동원은 서정희가 책임자로 선정되었다. 개신교신자 동원은 김강, 수피아여학교 학생 동원은 수피아여학교 교사 박애순( 朴 愛 順 )과 홍승애, 숭일학교 학생 동원은 숭일학교 교사 최병준( 崔 丙 浚 ), 그 외학교의 학생 동원은 김용규 김태열 최영균 등이, 준비자금은 이기호( 李 基 浩 )가 각각 맡기로 하였다. 그러나 광주에서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준비하기에는 기간이 너무 짧아 거사일을 3월 10일 작은 장날로 연기하였다 3월 10일 오후 2시경 김강 김복현 등이 독립선언서 배포를 시작으로 부동교 17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2, 1979, 555~562쪽 ; 김진호 박이준 박철규, 앞의 책,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185~189쪽. 150

115 해제 아래 작은 장터에서 1,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대는 각 방향에서 조직적으로 만세시위를 진행하였다. 양림동 쪽에서는 송흥진을 중심으로 개신교 신자들과 숭일학교수 피아여학교 학생들이 광주천을 따라 시위행진하였으며, 북문 쪽에서는 광주농업학교 학생과 시민들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지산면 쪽에서는 범윤두 이주상( 李 周 祥 ) 등이 일곡 생용 일대에서 농민들을 동원하여 시위행진에 합류하였다. 만세시위는 오후 5시경까지도 농업학교 숭일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계속되었다. 당시 시위대 행렬에는 상인들은 물론 친일 행각을 하던 한인들까지 가세하였다. 시위대가 우편국 앞으로 행진을 계속하자, 일제 기마 헌병대와 소방대 재향군인회까지 강제 진압에 나서 100여 명을 체포하였고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4월 25일에는 숭일학교 학생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자 수백명의 시민들이 동조하였다. 이에 일제경찰은 기마부대를 출동시켜 총칼을 휘두르는 등 강제 진압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20여 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상과 같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광주에서는 수피아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의 만세운동이 두드러졌다 년 2월 중순경 김마리아(1910년경 수피아여학교 교사)가 수피아여학교에 들러 당시 교사로 있던 언니 김함나에게 2 8독립선언서 를 전해주었다. 교사 박애순은 파리강화회의의 상황과 매일신보 에 실린 독립운동에 관한 기사를 읽어주고,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학생들에게 역설하였다. 3월 6일 밤 남궁혁 목사의 집에 12명이 모여 광주의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는데 수피아여학교 교사 박애순과 진신애가 참여하였고, 박애순이 수피아여학교 학생 동원과 독립선언서 배포를 책임 맡았다. 수피아 여학생들은 기숙사 상급생들인 박영자 양태원 최경애 홍순남 등이 중심이 되어 기숙사 지하실에서 밤 12시가 넘은 후 태극기를 만들었는데 태극기의 재료는 고종황제 인산날 입었던 치마를 뜯어 한 사람이 10개씩 만들었다. 3월 10일 광주의 작은 장날에 교사 박애순은 박영자 홍순남에게 독립선언서 50부씩을 나누어 주고 오후 2시까지 부동교 밑 큰 시장으로 모이도록 하였다. 그 곳에서 오후 3시 30분에 일반 시민, 숭일학교 농업학교 학생들과 함께 독립선언서 를 낭독하기로 하였다. 저마다 가슴에 태극기를 품은 수피아 여학생들이 양림동 쪽에서 광주천변으로 내려와 장날이라 모인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며 만세를 부르자고 하였다. 시민 학생 등 179 광주수피아여자중 고등학교, 수피아 백년사 : 1908~2008, 광주수피아여자중 고등학교, 2008, 248~250쪽. 151

116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1천여 명이 모여 독립선언서 를 낭독한 후 태극기를 흔들며 서문통에서 시위를 계속하다 광주경찰서 마당으로 들어서서 더욱 맹렬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경찰은 남들은 종이 태극기인데 네년들은 돈이 어디서 나서 베로 태극기를 만들었느냐. 서양 놈들에게 돈을 받았느냐 며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이 날의 만세운동으로 수피아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 중에 16세 이상 23명이 구속 기소되어 1919년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다음과 같이 형이 언도되었다. 박애순 징역 1년 6월, 180 진신애는 징역 10월, 181 박영자(박우말례) 182 홍순남은 각 징역 8월, 양태원 최경애는 각 징역 8월에 2년 집행유예, 김덕순 183 김안순 184 김필호 박성순 양순희 윤형숙 185 이태옥 임진실 186 조 옥희 187 하영자 188 는 각 징역 4월, 강화선 고연흥 김양순 이나혈 이봉금 최수향 189 은 각 징역 4월에 2년 집행유예, 홍승애는 무죄였다. 특히 박애순은 1911년 목포 정명여학교 보통과를 제1회로 졸업하고 1915년 수피아여학교 고등과를 제1회로 졸업한 후 서울에서 사범교육을 받고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9일 김강 김복현 등과 같이 광주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3월 10일 광주의 독립만세시위에 수피아여학교 학생을 규합 참가시키고 독립선언서 을 시위군중에게 배포하며 활동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언도받았다. 복역 중 잔여 기간 6개월을 남겨 두고 모범수로 석방되었다. 그녀는 옥중에서 매일 조국광복을 위해 기도하였고 성경책을 180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 ; 수형인명부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1979, 쪽 ; 독립운동사 9, 1979, 288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3, 1984, 88쪽 ; 여수여천향토지편찬위원회, 여수여천향토지, 1982, 쪽. 181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 ; 수형인명부 ; 광주시사편찬위원회, 광주시사 2, 1980, 281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1979, 558쪽 ; 독립운동사 9, 1979, 289쪽. 182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 수형인명부 ; 매일신보 , 광주소요공판, 수모자 팔 십명은 재기소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9, 1979, 289쪽. 183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 수형인명부 ; 매일신보 , 5.4 ; 이용락, 三 一 運 動 實 錄, 동지회, 1969, 쪽 ; 국사편찬위원회,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4, 1969, 434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 동사 9, 1979, 쪽. 184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 ; 身 分 帳 指 紋 原 紙 ( 警 察 廳 ) ; 수형인명부 ; 매일신보 , 광주소요 공판, 수모자 80명은 재기소. 185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 ; 수형인명부. 186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 ; 수형인명부. 187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 ; 수형인명부. 188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 ; 身 分 帳 指 紋 原 紙 ( 警 察 廳 ) ; 수형인명부. 189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 ; 수형인명부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9, 1979, 289쪽. 152

117 해제 읽었는데 현재 독립기념관에 있다. 윤형숙은 만세시위를 하다가 일제경찰의 군도에 오른팔을 절단당한 후 잠시 땅에 쓰러졌다가 일어나 왼팔로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더욱 크게 부르다 체포되어 징역 4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53

118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수형기록카드 해제 박 경 목 1. 머리말 일명 수형기록카드 는 일제 강점기 생산된 낱장의 종이 재질로 된 가로 15cm, 세로 10cm 의 카드형식의 기록물이다. 여기에 기재된 대상은 일제 경찰에 피체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 감되었던 인물들이다. 수형기록카드의 앞면에는 수감자의 상반신 사진을 붙였고, 뒷면에는 이름, 나이, 신분, 본 적, 생지( 生 地 ), 주소지 등의 신상( 身 上 )정보와 죄명, 형명( 刑 名 )과 형기( 刑 期 ), 언도( 言 渡 )관 서, 언도연월일, 입소( 入 所 )연월일, 출소( 出 所 )연월일, 형무소명 등의 수형( 受 刑 )사항이 상세 히 기록되었다. 사진은 상반신 정면과 측면이 있는 것과 정면만 있는 것이 있는데, 대상자가 경찰에 피체 되었을 시점과 감옥에 수감되었던 시점에 촬영되었다. 경찰서에서 찍힌 사진은 평상복 차림 그대로의 모습이 담겨 있으며, 감옥에서 찍힌 사진은 수인복을 입고 머리는 삭발당한 차림이 다. 여성은 쪽진 머리 형태이다. 사진 하단에는 촬영일자와 장소, 사진 보존원판 번호가 기 재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 수감자의 사진과 신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 사료적 가치가 크기 때문에 1992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를 영인하여 총 9권의 자료집으로 발간하였다. 1 여기에 수록된 수형기록카드는 총 5,343장이며 인물 한 사람당 1장으로 앞면과 뒷면 총 2 면으로 구성되어 있고, 예외적으로 인물 한 사람에 2장 이상의 카드가 있는 경우도 있다. 수 록순서는 인명 가나다순으로 배열하였고, 수형기록카드 원본은 별도로 이미지화하여 파일로 보존하고 있다. 이 카드 2 에 기재된 인물들은 일제 강점기 소위 사상범( 思 想 犯 ) 의 혐의를 받고 수감된 사람 서대문형무소역사관장 1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9, 이하 필요에 따라 자료집으로 약칭함. 2 이하 필요에 따라 카드로 약칭함. 154

119 해제 으로, 대부분 항일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 독립운동사에 널리 알려진 인물도 있 으나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들이 다수이다. 따라서 카드에 기재되어 있는 기록은 일 제 강점기 항일운동으로 수감되었던 독립운동가의 면면을 파악하는 데 매우 유용한 기초 자 료로 활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사 연구에도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특히 자료가 부족한 여성 독립운동가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수형기록카드는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 이를 통해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 독립운동가를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본 해제를 통해 수형기록카드의 수량과 형식, 사료적 가치에 대해 살펴보고, 카드에 기 재된 다양한 정보를 분석하여 일제 강점기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여성 독립운동가의 현황과 특징, 3 1운동으로 수감된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수형기록카드 분석 1) 보존 수량 파악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수형기록카드 자료집에 수록된 카드는 총 5,343장이지만 실 제 보존되어 있는 수량은 총 6,264장으로 발표되었다. 3 원본은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촬영, 디지털 이미지화하여 카드 1장당 앞면과 뒷면 2컷의 사진 파일이 생성되었다. 카드 6,264장에 대한 이미지는 총 12,528컷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실제 보관하고 있는 이미지 파일은 총 12,521컷으로 확인된다. 4 위 이미지 수량 대 비 7컷의 차이가 있다. 이미지의 보관 과정 중 누락되었거나 카드 수집 초기 이미지화 과정 에서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미지 파일에 일련번호를 부여하여 순서대로 파일 을 생성하였고, 파일 전체를 하나의 폴더로 관리해왔기 때문에 파일의 보관 과정이나 이미지 화 과정에서 인위적으로 누락시켰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또 다른 문제로 각 카드 1장당 2장의 이미지가 있으므로 이미지 파일 수량의 합계는 짝수 3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992, 간행사 ; 이애숙,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해제, 국사편찬위원회, 수형기록카드 원본과 이미지 파일은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155

120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여야 하는데, 확인 결과 위와 같이 12,521 컷으로 홀수라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 이미지 파일의 일련번호 부여 방식을 확인하고 그 일련번호에 누락된 결번이 없는지 점 검해 보았다. 우선 이미지 파일 7컷의 차이는 카드에 파일번호를 매겼던 방식을 이해하면 그 원인을 찾 을 수 있다. 카드 정리자가 수집 초기 가나다순으로 배열하여 카드 1장당 1개의 일련번호를 부여하였다. 그 순서에 따라 다음 사진 1 과 같이 첫 이미지 파일은 가경덕 SJ 번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파일은 황옥명 SJ 번으로 끝난다. 사진 1 카드 파일번호 첫 번째와 마지막 일련번호 [ SJ _001 ] [ SJ _002 ] [ SJ _001 ] [ SJ _002 ] 156

121 해제 앞면과 뒷면의 구분은 파일번호 끝자리에 앞면은 _001, 뒷면은 _002를 부여하는 방식 을 사용하였다. 각 이미지 파일번호 끝자리가 홀수이면 카드의 앞면, 짝수이면 카드의 뒷면 을 표시한 것이다. 한 인물의 카드가 2장 이상인 경우에는 동일 일련번호 끝자리를 _003, _004, _005, _006 의 식으로 표기하였다. 이에 다음 인물의 카드 파일번호는 앞의 인물과 중복되는 수량만큼 번호를 건너뛰고 그 다음 번호를 부여하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한용운 카드의 경우 다음 사진 2 와 같이 2장이 있어 8203_001, 8203_002, 8203_003, 8203_004로 파일번호가 부여되었다. 5 동일 인물이므로 두 번째 중복 카드에 _003 과 _004 를 매겼다. 같은 인물이므로 순서상 매겨져야 되는 다음 번호인 8204번을 빼고 8203번을 그 대로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다음 인물인 한운석 카드는 앞서 한용운에서 중복되었던 카드 수량 1개 연번 8204번을 건너뛴 다음 연번 8205번을 부여하였다. 사진 2 한 인물의 카드가 2장 이상인 경우 파일번호 부여 방식 [ SJ _001 ] [ SJ _002 ] [ SJ _003 ] [ SJ _004 ] 5 이하 이미지 파일번호 앞자리 SJ 은 경우에 따라 생략함. 157

122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 SJ _001 ] [ SJ _002 ] 이러한 방식에 의하면 전체 카드 수량은 이미지 파일번호 시작인 2290번부터 끝번호 8553번까지 산술적으로 계산되는 6,264장이 되는 것이다. 이 계산방식에 의하면 자료집을 발간할 당시 파악한 카드 수량 6,264장과 일치하게 된다. 그런데 이미지 파일의 일련번호를 점검한 결과 사실관계가 맞지 않는 몇 가지 오류가 발견 되었다. 첫째, 중간에 결번된 파일번호가 확인되었다. SJ , SJ , SJ , SJ , SJ 총 5개의 연번이 누락되었다. 이는 앞 인 물 카드가 중복되지 않았음에도 연번이 누락된 것이다. 각 파일번호 마다 _001, _002 두 컷 의 이미지가 있으므로 총 10컷의 이미지 파일이 차이나는 것이다. 6 카드를 이미지화하는 과 정에서 잘못 매긴 단순 실수인지, 관리 과정에서의 누락인지 알 수 없으나 전체 이미지 파일 수량에서 10컷, 카드 수량으로는 5장이 허수인 것이다. 둘째, 파일번호가 중복된 것이 발견되었다. 다음 사진 3 의 전숙희 카드로 SJ _001, SJ _002, SJ _003, SJ _004, SJ _005번 총 5컷의 이미지가 있다. 그런데 위 파일번호의 부여 방식에 의하 면 다음 카드의 번호는 앞 인물에 중복된 카드가 있으므로 7048번을 건너뛰고 7049번으 6 최근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에 공개된 카드는 SJ , SJ , SJ , SJ , SJ 번이 결번이다. 게시 과정에서 일정한 조정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일련번호는 차이가 있지만 결번된 수량은 같다. 158

123 해제 로 매겨져야 하나 다음 인물 전순병 카드의 번호는 7048번이 부여되었다. 즉, 7047_003, 7047_004, 7047_005 3컷의 이미지가 7048번을 대신함에도 불구하고 다음 전순병 카드에 7048번이 매겨져 결국 파일번호 부여 방식상 7048번이 두 번 중복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 3 컷의 이미지가 중복된 것으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자료집 발간 당시 발표한 카드 수량에 반 영되지 않았다. 이는 단순 계산으로는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전숙희 카드의 이미지가 총 5컷으로 마지막 연번이 7047_005 홀수로 끝난다. 카 드의 일련번호가 짝수는 앞면, 홀수는 뒷면이라는 기재 방식에 어긋나 있다. 그 기재 내용을 살펴보면 7047_003, 7047_004, 7047_005의 3컷은 통상적인 수형기록카드가 아닌 전숙희 와 관련된 사건 개요를 설명하는 부가적인 별지 기록이다. 앞서 제시한 이미지 파일 총 수량 이 12,521 컷이라는 홀수로 집계되었던 원인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사진 3 카드 파일번호 7047번(전숙희), 7048번(전순병) 카드 [ 전숙희, 7047_001 ] [ 7047_002 ] [ 7047_003 ] [ 7047_004 ] 159

124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 7047_005 ] [ 전순병, 7048_001 ] 이러한 검증 과정을 통해 자료집을 영인할 당시 파악되었던 수형기록카드 수량 6,264장 (이미지 파일 12,528컷)에 오류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미지 파일번호 부여 방식을 살펴본 결과 이미지 파일의 수량은 누락된 연번 5개에 대한 허수 -10컷과 연번이 중복되어 계산에 반영되지 않은 전숙희 별지 기록 +3컷을 반영하면 -7컷의 오류가 있다. 따라서 자료집에서 제시한 카드 6,264장의 이미지 파일 12,528컷과 7컷의 차이가 있다. 즉 이미지 파일의 수량 은 12,521컷이 정확한 수치임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 사진 3 전숙희 카드 가운데 7047_03, 7047_04, 7047_05 는 수형기록카드가 아닌 별지의 기록이므로 이 -3컷을 제외하면 수형기록카드의 이미지 파일 수량은 12,518컷 이다. 이를 2로 나누면 수형기록카드는 총 6,259장으로 확인된다. 이것이 유효한 수치이며, 6,264장과 5장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를 반영하여 본 해제에서 분석 대상으로 삼은 수형기록카드의 수량과 중복된 카드를 제 외한 인물의 숫자는 아래 표 1 과 같다. 카드는 6,259장이며 이중 1인당 2장 이상 작성된 중 복 카드를 제외하면 인물의 숫자는 4,837명으로 파악된다. 이 가운데 여성 수형기록카드는 234장이며, 역시 중복 카드를 제외하면 인물 숫자는 180명으로 4,837명 대비 3.72%의 비율 로 나타난다. 160

125 해제 <표 1> 수형기록카드 수록 인원 현황 성별 보존카드(비율) 인원수(비율) 1인당 2장 이상 작성된 카드 여자 234장(3.74%) 180명(3.72%) 54장 남자 6,025장(96.26%) 4,657명(96.28%) 1,368장 합계 6,259장 4,837명 1,422장 2) 작성 시기와 양식 수형기록카드를 언제부터 작성하였는지 그 시기를 알 수 있는 단서는 카드 앞면의 사진 촬영 날짜와 뒷면의 언도연월일이다. 두 항목의 기록 시점으로 가장 앞선 것은 촬영 일자가 1913년 6월 로 기재된 이일영( 李 一 榮 ) 과 이정노( 李 鼎 魯 ) 의 카드 2장이다. 이들은 독립의군 부( 獨 立 義 軍 府 ) 활동으로 수감되어 시기가 일치한다. 그러나 1919년 이전 시기의 카드가 단 2장이고, 카드 양식도 1919년 이후의 것과 동일한 것으로 보아 1913년 당시 작성되었는지, 1919년 이후에 소급하여 작성되었는지 단정하기 어렵다. 다음 시기로 언도연월일이 1919년 으로 기재된 카드가 582장, 1920년 으로 기재된 카드가 211장이 확인된다. 일제가 3 1운동 참가자들에 대해 대대적으로 구속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같은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사진과 이름, 죄명, 수감 감옥만 기재되고 나 머지 항목이 생략된 카드도 283장이 있다. 그러나 위 카드와 동일한 양식을 사용하였고 동 일한 죄명 보안법 범( 保 安 法 犯 ) 으로 기재되어 있어 3 1운동 관련자들의 카드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작성 시기가 미상인 카드 가운데 3 1독립선언에 참여한 권동진, 권병덕, 김완 규, 김창준, 나용환, 박동완, 신석구, 이필주, 양전백, 유여대, 이갑성, 이명용, 이승훈, 이종 일, 임예환, 오세창, 오화영, 정춘수, 최린, 한용운, 홍병기, 홍기조 등의 카드도 포함되어 있 다. 이외에 다수의 인물들이 모든 항목이 기재된 카드와 생략된 카드 2장이 있어, 작성 시기 미상인 카드도 3 1운동 관련자들임을 알 수 있다. 전자의 카드는 형 언도 이후 기재된 것이 고, 후자의 카드는 형 언도 이전 미결 당시 기재된 것으로 보인다. 미결이었기 때문에 구체 적인 죄명, 언도일, 형량 등을 기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기재항목이 생략된 것이다. 이는 사진 4 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신석구에 대한 2장의 카드인데, 상단이 상세한 내역 이 기재된 것이고 하단이 모두 생략되고 이름, 죄명, 형무소명만이 기재된 것이다. 161

126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이렇게 수형기록카드는 1919년 3 1운동을 기점으로 항일운동으로 인한 수감자가 급증하 자 3 1운동 참가자 및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리와 감시의 필요성에 따라 1919년과 1920년 사이에 본격적으로 작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진 4 신석구 카드 [ 언도연월일 등 상세항목이 기재된 카드 ] [ 죄명과 집행 감옥만 기재된 카드 ] 카드의 양식은 대정( 大 正 ) 기간에 사용하였던 두 가지 유형과[A형, B형], 소화( 昭 和 ) 기간 에 사용하였던 두 가지 유형[C형, D형] 으로 총 4가지 양식이 사용되었다. 각 양식별 카드의 수량은 다음 표 2 와 같다. <표 2> 카드 양식별 수량 양 식 A형 B형 C형 D형 합 계 수 량 992장 476장 654장 4,137장 6,259장 * 다음 사진 5 의 카드 양식에 따라 분류함. 162

127 해제 수형기록카드의 기재 항목은 이를 작성하기 시작하였던 1919년과 1920년대 [A형]에는 앞 면에 사진과 이름, 나이, 신장, 특징, 지문번호를 기입하였다. 뒷면에는 본적, 출생지, 거주 지, 신분의 인적 사항과 직업, 죄명, 형명형기, 언도연월일, 형의 시작, 언도재판소, 집행 감 옥, 출소연월일, 출소 사유의 수형 사항과 전과, 비고 등 총 19개의 항목을 기재하였다. [A 형] 양식은 1921년 2장, 1923년 1장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이후 1926년을 전후하여 크게 바뀐 [B형] 양식이 등장한다. [A형]의 항목 외에 이명( 異 名 ), 호주와의 속병( 續 柄 ; 가족 관계), 호주의 이름, 부모의 이름과 비고란에 전과 종별 및 범 죄 횟수, 범죄의 수단, 공범자 이름, 출옥 후 거주할 주소, 기타와 사진 보존원판 번호 등 10 여 개 항목이 추가되었다. 가족 관계에서부터 공범자, 출옥 후 동향까지 기재하도록 상세화 된 것이 특징이다. 시기 순으로 1923년 6장을 시작으로, 1924년 7장, 1925년 19장, 1926년 54장, 1927년 32장, 1928년 294장, 1929년 43장, 1930년 19장, 1931년 1장, 미상 1장 등 총 476장이 있다. 1923년 처음 등장하여 1931년까지 사용되었기 때문에 사진 촬영 일자란에 대정 연호가 인 쇄된 것과 소화 연호가 인쇄된 것 두 종류가 있다. 이 때문에 1926년 이후 작성하였지만 남 아있던 대정 연호가 인쇄된 [B형] 양식의 카드를 그대로 사용한 경우가 있다. 이때 기록자가 대정을 지우고 수기나 혹은 스탬프로 소화를 기입하여 사용하였다. 간혹 대정 연호를 지우 지 않아 소화 연호에 작성되었음에도 대정 연호에 작성된 것으로 오인될 수 있는 카드가 있 어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 예로 카드 앞면에 대정 3년(1914)으로 기재된 박병두, 독고전 등 의 경우 실제 사진 촬영 일자는 소화 3년(1928)이었다. 그러나 기재 항목이 29가지나 되어 일선 실무 현장에서 담당자가 이 모두를 기재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호주의 이름, 부모의 이름, 비고(전과 종별 및 범죄 수, 범죄 수단, 공범자 이름, 출옥 후 귀거할 주소, 기타)는 대부분 생략하여 기재하지 않았기 때문이 다. 기민하게 수감자들의 동향 파악을 위해 작성된 것이라면 위와 같은 복잡한 항목은 오히 려 방해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1930년을 기점으로 [B형] 양식은 줄어들고 [C형] 양식으로 전환되었다. 1928년 1장, 1929 년 62장, 1930년 512장, 1931년 54장, 미상 25장 등 총 654장이 있다. [C형] 양식은 실무상 기재하기 어려웠던 위 몇몇 항목을 조정하여 기재 항목을 29항목에서 22항목으로 7개 줄였 다. 대신 수구원지번호( 手 口 原 紙 番 號 ; 범죄의 수법별 원지번호)와 수구( 手 口 : てぐち ; 범 163

128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죄 수법), 배회지( 徘 徊 地 ), 특징 등의 항목이 추가되어 수감 인물의 출옥후 사후 관리와 추후 사건발생시 수사 자료로의 활용이 가능하게 하였다. 이후 세로쓰기의 [C형]을 가로쓰기로 바꾼 [D형] 양식이 나와 1930년 전후로 해방 직전까 지 이용되었다. [D형] 양식은 총 25가지 항목이 있으며 상용수구개요( 常 用 手 口 槪 要 ; 범죄 수법의 개요) 란이 추가되어 기록 대상자의 주요 활동 내역과 사상적 특징, 관련 인물 등에 대해 기재하도록 되어 있다. 이후 양식의 변화 없이 1944년의 카드를 마지막으로 [D형] 양식 카드는 총 4,137장이 있다. 그런데 사진 촬영 일자에 소화 연호가 인쇄되어 있는 [D형] 양식 카드에 수록된 인물들 가 운데 사진 촬영 시기가 1919년 25장, 1920년 19장, 1923년 2장, 1925년 1장이 있어 시기적으 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D형] 카드를 사용하던 시기에 대정 연호에 수감된 인물 정 보를 소급하여 기록한 것이다. 이 카드들은 인쇄된 소화 글자 위에 수기로 대정 을 기입하 여 사진 촬영 일자를 적었다. 즉 카드의 작성 시기가 수감자의 피체 직후뿐만 아니라 그 이후 에도 재정리 또는 재작성되었던 경우도 있었음을 의미한다. 개성 3 1운동으로 수감되었던 어윤희 의 경우도 소화 연호가 인쇄된 [D형]양식 카드에 기 재되었다. 이에 인쇄된 소화 연호 위에 수기로 대정을 써 넣었다. 이는 소화 연호의 시작 시 점인 1926년 이후부터 [D형] 양식이 쓰였던 1930년대 전후 사이 어떠한 계기가 있어 그 전 시기의 주요 인물에 대해 카드를 신규 또는 재작성하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1925년 4월 22일 치안유지법( 治 安 維 持 法 )이 제정공포되 고, 1925년 5월 12일부터 일제는 이 법을 한국에 적용하여 소위 사상범 에 대한 엄벌주의( 嚴 罰 主 義 )적 법 적용과 행형을 도모하였던 정책적 흐름을 볼 수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1928년 을 기점으로 일제 경찰과 사법조직 내에 사상( 思 想 ) 단속을 위한 전문 인력과 부서가 편성되 면서 일제 사상통제정책의 기본 틀이 갖추어지기 시작하였다는 점도 수형기록카드 양식 변 화와 재정리 또는 재기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7 따라서 본격적인 사상 통제가 시작되었 던 1926~1928년을 계기로 기존 수감자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강화되면서 수형기록카드 양 식에 이를 반영하였고, 이에 따라 카드 정리 작업이 다시 진행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각 카드 양식의 변화는 다음 사진 5 를 통해 볼 수 있다. 7 장신, 1920년대 民 族 解 放 運 動 과 治 安 維 持 法, 學 林 19,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1998, 93~98쪽. 164

129 해제 사진 5 카드 양식 변화 [ [A형] 양식, 노순경 ] [ [B형] 양식 대정 연호, 김영희 ] [ [B형] 양식 소화 연호, 강달영 ] 165

130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 [C형] 양식 1930년 사용, 박성여 ] [ [D형] 양식 1931년 ~ 년 사용, 이옥란 ] 수형기록카드에 기록된 다양한 정보는 6,259장의 카드 중 가장 많은 비율을 보이는 [D형] 양식(4,137장, 66.1%)을 기준으로 작성 항목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앞면에는 총 4 가지의 정보가 기재되어 되어 있어 작성 시기와 장소에 대한 기초 정보를 제공한다 사진 촬영 연월일 : 소화( 昭 和 ) 년 일 2. 사진 촬영 장소 : ( )에서 촬영으로 기재 경찰서인 경우 - 종로서, 동대문서, 형사과 등 감옥인 경우 - 서대문형무소, 경성형무소 등 3. 보존원판 번호( 保 存 原 板 番 號 ) : 소( 小 ) 또는 중( 中 )으로 구분. 번으로 기재 4. 사진 : 경찰서 찍은 경우, 형무소에 찍은 경우 8 박경목, 일제 강점기 서대문형무소 여수감자 현황과 특징, 한국근현대사연구 68, 한국근현대사학회, 2014, 50~51쪽. 166

131 해제 정면 1컷+측면 1컷 총 2컷인 경우와 정면 1컷만 있는 경우, 사진이 부착되지 않은 경우가 있음 다음 뒷면에는 총 23가지의 기재 항목이 있다. 1. 씨명( 氏 名 ) : 본명 기재. 1940년대 이후에는 창씨개명 이름도 기재되어 있음 가명이 기재된 경우도 있음 2. 이명( 異 名 ) : 본명 이외의 가명 기재 3. 지문번호( 指 紋 番 號 ) : 앞자리 5개, 뒷자리 5개 총 10개의 번호 기입 4. 연령( 年 齡 ) : 명치, 대정, 소화( 明 治, 大 正, 昭 和 ) 년 월 일 기재 5. 수구번호( 手 口 番 號 ; 범죄수법번호) : 기재된 수형기록표 없음 6. 신분( 身 分 ) : 양반, 상민으로 기재 7. 직업( 職 業 ) : 학생, 여급, 여공, 간호부, 교원 등으로 기재 8. 신장( 身 長 ) : 척( 尺 ) 단위와 미터( 米 ) 단위가 함께 쓰임. 30%가량이 기재되어 있음 9. 특징번호( 特 徵 番 號 ) : 기재된 수형기록표 없음 10. 본적( 本 籍 ) : 현, 시, 정, 촌( 縣, 市, 町, 村 )의 단위와 도, 군. 면, 리( 道, 郡, 面, 里 )가 함께 기재되어 있음 거의 모든 수형기록표에 기재되어 있음. 번지까지 기재 11. 생지( 生 地 ; 태어난 곳) : 상동 12. 주거( 住 居 ; 살고있는 곳) : 상동 13. 죄명( 罪 名 ) : 보안법 위반, 치안유지법 위반 등 기재 14. 형명형기( 刑 名 刑 期 ) : 징역, 금고 년 월 일 기재 15. 언도관서( 言 渡 官 署 ) : 해당 재판장 명칭 기재 16. 언도연월일( 言 渡 年 月 日 ) : 년 월 일 기재 17. 입소연월일( 入 所 年 月 日 ) : 년 월 일 기재 18. 출소연월일( 出 所 年 月 日 ) : 년 월 일 기재 19. 형무소명( 刑 務 所 名 ) : 수감 형무소 기재 20. 검거관서( 檢 擧 官 署 ) : 道 警 察 署 기재 21. 기타전과( 其 他 前 科 ) : 공란 22. 검거( 檢 擧 ) : 공란에 검거일자를 기재 23. 상용수구개요( 常 用 手 口 槪 要 ; 범죄수법개요) : 주요 관계자, 사상적 특징, 범죄의 혐의 등을 기재 167

132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위 항목 가운데 5. 수구번호( 手 口 番 號 ) 와 9. 특징번호( 特 徵 番 號 ) 는 단 한 장의 카드에도 기록되지 않아 실제 사용되지 않은 항목이다. 카드에 기재된 인물들이 대부분 항일운동으로 피체되었기 때문에 범죄수법을 별도로 분류할 필요가 없었고, 이와 관련하여 특정할 특징번호를 부여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또는 항일운동에 대해서는 번호로 기재할 수 있는 특정 유형과 특징에 대한 분류 기준 자체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1. 기타 전과 와 23. 상용수구개요( 常 用 手 口 槪 要 ) 도 일부 카드에만 단편적으로 남아있는데, 이는 대상자가 검거된 직후나 수감된 직후 현장에서 기재하여 상세 내용을 실무선에서 기록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14. 형명형기 부터 19. 형무소명 까지의 6가지 기재 사항은 재판 절차를 거쳐 형이 확정된 기결수에 한에 기재되었다. 따라서 위 항목이 기재되지 않은 인물은 형 확전 이전의 미결수로 볼 수 있다. 6. 신분 은 후대로 가면서 그 의미가 퇴색되었고, 수감자의 감시관리에 큰 의미가 없으므로 생략된 경우가 많았다. 7. 직업 은 기록 대상자의 직업이 있어도 무직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10. 본적 과 11. 생지, 12. 주거 는 혼동되어 기재된 경우가 있다. 이 역시 1차적으로 수감자의 진술 또는 기 확보된 정보나 자료에 의해 실무 현장에서 기재되어 3가지 사항을 간혹 혼동하였다. 위 항목은 대부분 사실과 다름없게 기재되어 있으나, 식민통치를 하였던 일제 측의 기록이라는 측면에서 몇몇 항목은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대표적인 사항으로 18. 출소연월일 은 재판 과정에서 형이 확정되면서 기록하였다. 출감 직전이나 그 후에 기록한 것이 아니라 재판을 언도받았던 시점에서 출소날짜를 미리 계산하여 기록해 놓은 것이다. 따라서 수감 과정에서 항소에 의해 출소일이 변동되는 경우, 기타 사유로 출소일이 늦어지는 경우, 역으로 어떤 사유로 출소일이 앞당겨 지는 경우 등이 발생하여도 반영되지 않는 사례가 다수 있다. 이 때문에 카드의 기록상 출소날짜와 실제 출소날짜가 다른 경우가 있다. 특히 수감 중 심한 고문 또는 병으로 옥사( 獄 死 )한 경우나 수감자가 사망하기 직전에 소위 병보석( 病 保 釋 ) 의 명목으로 어쩔 수 없이 방면된 경우에 그러한 사례가 발생하였다. 카드 기록상으로는 단순히 출소한 것으로 기재되었기 때문에 수형기록카드의 출옥 기록만으로는 마치 감옥 안에서 병사( 病 死 ) 하였거나, 감옥에서의 처우 중 죽음의 사유가 되는 어떠한 행위도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168

133 해제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 獄 死 ), 순국한 유관순 이 그러한 사례이다. 9 사진 6 의 유관순 수형기록카드 기록상 출소연월일이 1921년 1월 2일로 기재되어 있어 사실과 다른것이다. 잘 알려진 인물이므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사실이 밝혀졌으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면 유관순은 고문으로 옥사한 것이 아니라 카드 기록에 근거해 1921년 1월 2일 출소한 것으로 알려졌을 것이다. 사진 6 유관순 카드 [ 출소연월일이 1921년 1월 2일로 기재되어 있음 ] 이러한 사례는 다음 사진 7 고수복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다. 그녀는 부영버스 차장으로 근무하면서 파업을 주도하고 공산당 재건 적위대 사건 으로 1932년 10월 18일 피체되었다. 10 그녀의 카드 출소연월일 항목에는 출소날짜가 1933년 7월 17일로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출소날짜는 카드상 기록보다 이틀 늦은 7월 19일로 확인된다. 사유는 병보석 으로 명시되어 있다. 2심 과정에서 어떠한 원인에 의해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자 감옥측에서 뒤늦게 고수복을 출소시킨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출소 10여 일 만인 1932년 7월 28일 새벽 2시경 복막염으로 23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11 고수복이 죽음에 이르게 된 구체적 정황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수감 직전 건강하였던 9 경향신문, , 일제 강점기 피해자 명부 공개 "유관순, 3 1운동으로 왜병에 피검되 옥중 타살" 상세히 기록. 10 <부영버스 종업원의 책동에 관한 건, 동대문경찰서, <보석출옥자 사망에 관한 건>, 동대문경찰서, ; 동아일보, , 적위대의 고양, 보석 중에 영면. 169

134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사람이 수감 6개월여 만에 죽을 만큼 심각한 병에 걸렸다는 점, 감옥 안에서의 복막염은 주로 물고문 등 고문에 따른 후유증으로 발생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단순한 병사( 病 死 )가 아닌 고문치사일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일제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였던 사람들에게 감옥은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곳이었다. 사진 7 고수복 카드 [ 병보석 : 1933년 7월 19일 / 출소연월일 : 1933년 7월 17일 ] 시기적으로 변화되는 수형기록카드의 양식은 일제의 식민정책 변화에 따른 독립운동가에 대한 대응 양상과 그로 인한 수감 인원의 증가 및 관리 양상의 변화에 따른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우선 카드의 작성은 3 1운동을 기점으로 독립운동가가 급증하고 기존 헌병경찰제도에서 보통경찰제로 전환됨에 따라 일선 경찰관서에서 일제에 저항하는 인물에 대한 지속적인 통제와 관리의 필요성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일종의 항일운동가 감시 및 관리에 대한 체계화의 시도인 것이다. 양식의 변화중 [A형]에서 [B형]으로의 변화는 1925년 치안유지법( 治 安 維 持 法 ) 제정, 발효를 기점으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자인 사상범 에 대한 감시통제 강화 정책에 따라 수감자 개개인에 대한 신상정보 파악을 상세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B형]에서 [C형]으로의 변화는 1928년을 기점으로 본격화된 사상 통제로 수감자의 급증과 일반인의 저항이 늘어남에 따른 과도기적 현상으로 일선 실무 현장에 불필요한 기재 사항을 과감히 삭제하였던 것이다. [C형]에서 [D형]으로의 변화는 식민지 경영의 공고화와 소위 사상범 급증에 따른 수감자 170

135 해제 사이의 인적 관계망 파악과 소속 조직 혹은 단체를 주도면밀히 파악하고, 주요 수감자를 지속적으로 감시관리하려는 목적이 담겨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일제가 독립운동가 관리 및 감시를 위해 생성한 기록물인 수형기록카드가 현재 시점에서는 오히려 독립운동가의 면면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3) 성격과 사료적 가치 수형기록카드는 이것을 입수할 당시 개별 인물에 대한 신상정보가 수록되었다는 점에 의미를 두어 신상기록카드 12 라고 하였다. 이후 서대문형무소 연구 과정에서 카드에 수록된 대부분의 인물이 감옥에 수감된 자들이고, 카드의 기재 내용 가운데 수형사항( 受 刑 事 項 ) 이 대부분이라는 점에 주안점으로 두어 수형기록카드 라고 지칭되었다. 13 또 일반적으로 수형기록표 라고 지칭되기도 하는 등 용어 사용에 있어 일치되지 않았다. 최근에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카드를 일반에 공개하면서 일제 감시대상 인물 카드 로 지칭하였다. 14 감옥에 투옥되었던 수감자 외에 경기도 경찰부나 동대문경찰서, 서대문경찰서, 종로경찰서 등 경찰관서에서 촬영된 사진이 부착된 카드도 있고, 수감되지 않았던 수배자 카드도 있기 때문에 이를 수감자 관련 수형기록만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카드의 주 작성 목적을 일제 경찰관서에서 주목하는 주요 감시 인물을 관리하기 위한 것으로 본 것이다. 15 자료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비교적 객관적으로 접근하여 타당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카드의 성격을 일제 경찰의 주요 인물 감시 로만 규정짓는다면, 대부분의 카드가 감옥 수감자에 대한 수형( 受 刑 )기록이라는 점을 반영할 수 없다. 이에 작성 주체와 담당부서, 카드의 기재 내용 등을 분석하여 수형기록카드의 성격과 그 사료적 가치를 살펴보고자 한다. 12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991, 범례. 13 박경목, 일제 강점기 서대문형무소 여수감자 현황과 특징, 한국근현대사연구 68, 한국근현대사학회, 2014, 44쪽. 1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홈페이지. 15 이애숙,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해제,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136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카드는 사진 8 과 같이 수록 대상자가 일제 경찰에 피체된 직후 경찰관서에서 촬영한 사진을 부착하여 1차로 작성되었다. 경찰서에서 일정 기간 조사가 끝나면 관련자를 검찰에 기소하고, 감옥으로 이송하였다. 그리고 감옥에 투옥된 며칠 후 다시 수인복( 囚 人 服 )을 입고 촬영한 사진을 부착하여 2차로 작성되었다. 따라서 수감자 1명당 경찰서 촬영본 1장과 감옥 촬영본 1장, 즉 2장의 카드가 작성되었다. 16 그렇다면 카드는 어디에서 작성하였을까? 사진 8 경찰서와 감옥에서 찍은 동일인 카드 [ 피체 직후 경기도 경찰부 형사과에서 촬영 (강정희, ) ] [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 촬영 ( ) ] [ 피체 직후 종로경찰서에서 촬영 (이효정, ) ] [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 촬영 ( ) ] 16 형량이 긴 경우, 다른 감옥에서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 경우 등 1명에 대해 2~7장까지 작성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원칙 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6,259장의 자료에 나타나는 4,837명의 인물 중 2장 이상 카드가 있는 인물은 1,422명이고 3,415명 은 한 장만의 카드만 남아 있다. 각 인물에 대해 한 장만 작성한 것인지 보관 과정에서의 누락인지는 알 수 없다. 172

137 해제 우선 경찰관서에서 촬영한 경우 카드 앞면 사진 촬영 장소에 경기도 경찰부 형사과로 명시되어 있는 카드가 600장 있다. 이외 서대문, 종로, 용산경찰서 등 해당 사건 관할경찰서 형사과로 명시된 카드가 433장이 있다. 감옥에서 촬영한 경우에는 주로 서대문형무소(2,686장)이고 일부 경성형무소(155장), 대구형무소(15장), 인천소년형무소(12장)이다. 표 3 과 같이 카드 전체 수량 6,259장 중 사진 촬영 장소가 기재된 3,901장 가운데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한 전국 4개 감옥에서 작성된 것이 2,868장(73.52%),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 경찰서 22개소에서 작성된 것이 1,033장(26.48%)이다. <표 3> 사진 촬영 장소 구분 연번 사진찍은 장소 카드 수량 비율(%) 1 경성형무소(경성감옥 포함) 155장 2 대구형무소(대구감옥 포함) 15장 형무소 3 서대문형무소(서대문감옥 포함) 2,686장 73.52% 4 인천소년형무소 12장 소계 2,868장 5-1 경기도 경찰부 102장 5-2 경기도 경찰부 형사과 344장 5-3 경기도 경찰부 형사과에서 복사 154장 6 경기도 양주경찰서 1장 7 경북 경주경찰서 3장 8 경북 대구경찰서 3장 9 경북 문경경찰서 1장 10 경북 봉화경찰서 1장 11 경북 안동경찰서 13장 12 경북 울릉도 2장 13 경성 동대문경찰서 34장 경찰서 14 경성 본정경찰서 49장 26.48% 15 경성 서대문경찰서 107장 16 경성 용산경찰서 102장 17 경성 종로경찰서 104장 18 경성 창덕궁 2장 19 인천경찰서(형사과) 1장 20 전북 고창경찰서 1장 21 충남 강경경찰서 1장 22 충남 조치원경찰서 1장 23 평남 평양경찰서 1장 24 함남 단천경찰서 6장 소계 1,033장 합 계 3,901장 173

138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카드에 기재된 사진 촬영 장소는 경기도 경찰부 형사과, 서대문형무소, 경성형무소 등 총 24개 기관으로 광범위하다. 그러나 사진 촬영 장소를 근거로 전국 각지의 경찰서와 감옥에서 이 카드를 각각 별도로 작성하였다고 보기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카드에 기재된 사진의 보존원판 번호가 순서대로 중복 없이 일련번호로 매겨져 있기 때문이다. 전체 보존 카드 6,259장 가운데 단 한 장도 중복 번호가 없다. 그리고 이것이 한 장소에서 발견되었다. 이는 카드의 작성과 관리처가 여러 곳이 아니라 한 곳이었음을 시사한다. 작성 주체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로 카드의 발견 장소, 카드의 기재 내용, 수배자용 카드의 존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카드가 1980년대 후반 치안본부에서 발견되었다는 점 17 은 작성 주체에 대한 의문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서대문형무소 등 감옥에서 생산된 기록물이라면 감옥관서에서 관리하였기 때문에 그 소속 부처인 법무부 관할의 교정 관련 기관이나 혹은 그 상급 기관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그러나 카드가 경찰관서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은 그것의 보존과 작성 주체가 감옥관서가 아니고, 경찰관서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둘째, 카드의 항목 중 범죄수법 원지번호, 범죄수법 개요에 대한 소관업무가 어디인가이다. 이러한 업무는 주로 범죄자 의 수사와 체포를 목적으로 하는 일선 경찰서였다. 그리고 위 항목 기재는 체포 인물의 재범에 대비해 향후 원활한 수사 및 검거를 위한 일종의 범죄 경력 데이터를 축적하기 위한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또 카드 앞면에 수감자의 이감이나 출감 등의 기록을 수기로 적어 놓은 경우가 있다. 감옥에서 작성되었다면 해당 수감자의 이감이나 출감 시 당연히 별도의 관계 서류가 있었기 때문에 카드에 수기로까지 별도 기록을 유지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셋째, 수배자용 카드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카드의 작성이 감옥 아닌 경찰관서일 가능성이 높다. 수배 업무는 피의자 검거를 위한 것으로 감옥관서의 업무와는 전혀 무관하다. 넷째, 앞서 사진3 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숙희 수형기록카드에 첨부되어 있는 별지 사건 개요의 작성처가 경성 서대문경찰서( ) 로 명시되어 있고, 담당 주임 요시노(길야 吉 野 ) 의 도장이 찍혀있다. 카드에 첨부된 기록으로 일선 경찰관서에서 수감자에 대한 카드를 작성하고 관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17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992, 간행사. 174

139 해제 이상의 사항을 고려할 때 수형기록카드의 작성과 관리 주체는 서대문형무소 등의 감옥관서가 아닌 일선 경찰관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사진 보존원판 번호의 중복이 없는 것으로 보아 각 경찰관서에서 작성한 것을 취합하여 한 부서에서 일괄 관리하였던 것이다. 그 기관은 일제 강점기 서울경기 지역을 총괄하였던 경찰관서의 상급 기관인 경기도 경찰부로 추정된다. 18 카드에 부착된 사진의 원판은 일부 지방을 제외하고 같은 것을 사용하였다. 경기도 경찰부에서 일괄 관리하였기 때문에 각 경찰서와 감옥에서 촬영한 원판을 수집하고, 그 원판에 그들의 관리 일련번호를 기입하고 다시 인화하여 사용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사진 촬영 장소가 24개소로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사진 보존원판 일련번호가 중복되지 않았던 이유이다. 19 한편 서대문형무소 외에 다른 지역의 감옥과 경찰관서에서 촬영된 것이 1,215장이 있는데, 관할 지역이 아님에도 이들의 카드를 왜 경기도 경찰부에서 작성보관하였을까? 이는 카드에 수록된 타 지역의 인물들에 대해 적어도 경기도 경찰부가 담당해야 하는 사유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주된 사유는 어떤 이유로 해당 인물이 경기도 경찰부의 관할지역에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타 지역에 수감된 것으로 기재된 인물이라 하더라도 검거된 지역과 초기 수감된 지역이 서울경기 지역이었던 것이다. 경찰서에 피체되어 기소된 경우, 미결수이기 때문에 서울경기 일원의 유일한 미결감이었던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형 확정 이후 기결감이었던 경성형무소, 대전교도서 등 타 지역으로 이감되었다. 반대로 다른 지역의 수감자가 경기도 경찰부 관할지역으로 이감된 경우이다. 일제 강점기 서대문형무소는 경성복심법원이 소재한 지역의 감옥으로, 다른 지역에 수감되었던 수감자가 항소할 경우 복심이 있었던 서울지역 내 감옥에 이감되었다. 이때 미결수의 신분으로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기 때문에 관할 경찰관서인 경기도 경찰부에서 해당 인물에 대한 카드를 작성 또는 관리하였던 것이다 이애숙,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해제,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조선일보, 고등요시찰인 사진표 5천여 장, 한 시간에 1백여 장 구어 내는 정교한 사진기계 놓고 제작 (이애숙, 일 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해제,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2015 재인용). 20 유관순의 경우도 1919년 공주감옥에 수감되었다가 항소하여 서대문감옥에 이감되어 카드가 작성된 사례이다. 175

140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따라서 카드에 기록된 감옥의 사진 촬영 장소는 경성형무소(경성감옥 포함), 대구형무소 (대구감옥 포함), 서대문형무소(서대문감옥 포함), 인천소년형무소 단 4곳뿐이지만 표 4 와 같이 수감형무소는 총 19개소로 전국적인 분포 현황을 보인다. 서대문형무소에서 타 지역으로 이감되었거나 반대로 이감되어 온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카드에 수감 감옥이 기재된 2,879장을 분석하면 가장 많은 분포를 차지하는 것은 서대문형무소(서대문감옥 포함) 2,271장으로 79.88%이고, 다음으로 경성형무소(경성감옥 포함) 415장으로 14.42%이므로 서울지역 두 감옥의 비율이 94.3%로 대부분을 차지한다. <표 4> 수감 형무소 연번 형무소명 카드 수량 비율(%) 1 개성소년형무소 2장 0.07% 2-1 경성감옥 251장 8.72% 2-2 경성형무소 164장 5.7% 3 공주형무소 2장 0.07% 4 공주형무소 청주지소 1장 0.03% 5 광주형무소 5장 0.17% 6 김천소년형무소 29장 1.01% 7-1 대구감옥 1장 0.03% 7-2 대구형무소 21장 0.73% 8 대전형무소 51장 1.77% 9 대판(오사카)형무소 1장 0.03% 10 부산형무소 2장 0.07% 11-1 서대문감옥 610장 21.19% 11-2 서대문형무소 1,661장 57.69% 12 신의주형무소 1장 0.03% 13 원산지소 4장 0.14% 14 인천소년형무소 14장 0.49% 15 전주형무소 1장 0.03% 16 청진형무소 2장 0.07% 17 평양감옥 2장 0.07% 18 함흥형무소 53장 1.84% 19 해주형무소 1장 0.03% 합계 2,879장 100% 176

141 해제 1932년 윤봉길의 상해의거에 연루, 피체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안창호의 경우도 국내 압송 직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대전교도소로 이감된 사례이다. 또 그동안 경성형무소에 수감된 것으로만 알려졌던 이규채의 경우, 다음 사진 9 와 같이 카드를 통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1924년 임시정부 의정원, 1932년 만주 한국독립당 총무위원장을 지냈으며, 1932년 9월 제1차 쌍성보 전투에서 참모장을 역임하였던 그는 1934년 11월 상해에서 피체된 후 국내로 압송되었다. 21 압송 직후 서울 본정경찰서 형사과에서 찍은 사진으로 1차 카드가 작성되었고, 검찰에 기소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후 미결수로 찍은 사진으로 2차 카드가 작성되었다. 그리고 3년 후 기결감이었던 경성형무소에서 기결수로 찍은 사진으로 3차 카드가 작성되었다. 각 시기마다 카드를 작성한 것은 피체 당시의 모습, 수감되었을 당시의 삭발한 모습, 수형 기간이 긴 경우 중간의 변화된 모습을 시시각각 담아 추후 재범 시 바로 해당 인물을 알아보기 위한 조치였다. 22 사진 9 이규채 카드 [ 1935년 1월 25일 본정경찰서 형사과에서 촬영 23 (1차) ] 21 박경목, 독립운동가의 회고 기록 이규채 연보 해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7,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4, 239 쪽 ; 이규채 신문조서(2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43, 국사편찬위원회, 2000, 42쪽. 22 장기수의 경우 용모와 기타 특징의 변화 파악을 위해 5년 이내 재촬영하였다(서대문형무소직원교우회, 在 所 者 寫 眞 撮 影 及 取 扱 手 續, 서대문형무소 예규류찬, 1939, 75쪽). 23 이 카드의 촬영 날짜가 소화 9년(1934)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소화 10년(1935)의 오기이다. 이규채가 피체된 날짜는 1934년 11월 2일이고, 상해에서 서울로 압송되어온 시점은 1934년 11월 18일 이었기 때문이다(박경목, 앞의 글, 2014, 240~242쪽). 177

142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 1935년 2월 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2차) ] [ 1938년 3월 경성형무소에서 촬영(3차) ] 다른 지역으로 이감된 또 다른 사례로 다음 사진 10 민공호의 경우 1933년 8월 서대문형 무소에 수감되었으나, 형 확정 후 1934년 8월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이에 카드 뒷면의 형무소명(刑務所名)이 대전형무소로 기재되어 있지만 초기 검거와 수감은 경기도 경찰부와 서대문형무소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경기도 경찰부에서 카드를 작성하고 관리한 것이다. 사진 10 민공호 카드 [ 서대문형무소에소 촬영 ] 178 [ 형무소명 : 대전형무소 ]

143 해제 다른 지역에서 서울 지역으로 이감되어 온 사례로는 김구은 을 볼 수 있다. 그는 1932년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이를 연구하는 과학연구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함남 원 산경찰서에 피체되어 1심의 판결에 불복, 항소하여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어 왔다. 24 이감 후 경성복심법원에서 2년 형을 언도받고, 다시 기결수가 되어 1933년 6월 김천소년형무소로 이감되었다가 1934년 3월 함흥형무소 원산지소에 이감되었다. 반면 경찰서에서 찍은 사진은 경북, 전북, 충남, 평남, 함남 지역 등 전국을 망라하고 있 다. 그 수량은 34장으로 많지 않지만 다른 지역에서 검거되어 서울로 이감되어 온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때 별도로 사진의 원판을 구할 수 없는 경우에는 사진 보존원판 번호를 생략하였다. 위와 같이 카드에 수록된 인물들은 경기도 경찰부에서 담당하였던 인물들로 볼 수 있고, 이들은 그 관할 지역이었던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던 수감자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서대문형무소 수감과 무관하게 수배용으로 작성된 카드가 있다. 수배용 이라고 명 시된 67장의 카드가 있다. 25 이 가운데 일제가 주요 요시찰로 지목한 인물로 강병학, 권충일, 신현정, 이순섬, 이영호, 장기준, 최용혁 등이 확인된다. 26 이들은 주로 해외 지역에서 독립 운동을 전개한 혐의로 일제 경찰에 수배되었다. 일제는 이들을 검거하기 위한 수사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수배용 카드를 작성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카드는 대상 인물의 관리 목적 외 에 주요 요시찰 인물에 대한 수배의 목적이 부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수배용 카드 사례로 다 음 사진 11 이순섬 카드를 볼 수 있다. 이 카드 뒷면에는 고등과 수배용( 高 等 課 手 配 用 ) 이 라고 기재되어 있어 카드를 수배용으로 사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24 김구은 경성복심법원 판결문 (국가기록원 소장, CJA ). 동아일보 , 원산청년학관맹휴 공소공판판결, 원산청년학과의 스트라익과 선생에게 폭행한 사건으로 제1심판결을 불복하고 공소한 김구은 등 4명에 관한 치안유지법위반 폭력행위취체규칙위반 사건은 작 1일 오전에 경성복심법원에서 末 廣 재판장으로부터 좌기와 같은 언도가 있었다. 김구은(20세) 2년, 최인석(21세) 2년, 이영훈(20세) 1년, 박두초(20세) 1년. 각 피고 에게 180일의 미결구류통산이 있었다. 25 수배용 카드 명단(67명)은 다음과 같다(가나다순). 가경덕, 강석영A, 강원호, 강지섭, 강병학, 계 원, 권대형, 권충일(한백호), 김계옥, 김두백, 김두환B, 김명현, 김성일, 김순태, 김 암해, 김영문, 김용원, 김윤황, 김한동, 박득준, 백정호, 선우균, 선우섭, 선우훈, 성옥손, 신현정, 안정식, 염응택, 오세창A(오수 영), 원세만, 윤익헌, 이규복, 이리타, 이병희A, 이상규, 이순섬, 이어몽, 이영호, 이형태, 이희성, 임인식, 이 헌, 장기준, 장달산, 장동선, 장순명, 장시철, 장규진, 정재달, 정희동, 조두원, 조성은, 조영희, 지상일, 차재정, 최석진, 최원배, 최용혁, 최용운, 한길 수, 한두기, 한석관, 한웅주, 한인식, 허용만, 허일, 허자준(동명이인이 있는 경우 이름뒤에 A, B로 구분하였음). 26 國 ニ 於 ケル 外 容 疑 朝 鮮 人 名 簿, 조선총독부 경무국,

144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사진 11 이순섬 수배용 카드 27 수배자용 카드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사진 12 석경덕의 경우 공산당 조선국내공작위원회 조직 사건으로 관계자들이 1931년 12월 피체되었으나, 이때 붙잡히지 않아 전국에 수배령이 내려진 인물이었다. 이후 1932년 10월 5일 간도에서 국내로 잠입하여 서울 한일여관( 韓 一 旅 館 )에 머물던 중 정보를 탐지한 용산경찰서 직원에 의해 10월 8일 피체되었다. 그리고 서대 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 상황이 사진 12 석경덕 카드에 담겨 있다. 그녀가 피체되자 일 제 경찰당국은 그간 내려졌던 수배령을 1932년 10월 25일자로 해제하였는데, 통보 대상 관 서가 함안, 횡성, 신흥, 북청, 명천, 대전, 의령, 예천 경찰서 등으로 광범위하였다. 28 이때 수 배용 카드를 관할 경기도 경찰부에서 여러 장 제작하여 각 지역 경찰관서에 배부, 수사용으 로 활용하였던 것이다 년생. 1922년 상해 임시정부 재무부장 金 渡 源 과 결혼. 1931년 조선에 귀국하여 활동하다가 다시 망명하여 수배됨( 國 ニ 於 ケ ル 外 容 疑 朝 鮮 人 名 簿, 조선총독부 경무국, 1934, 320쪽). 28 <공산당 조선국내공작위원회 후계조직사건 미체포자 수배해제 건>, 경성본정경찰서, ; <석경덕 예심청구>, 경성지방 법원,

145 해제 사진 12 석경덕 카드 한편, 당시 수감자 또는 수배자와 전혀 관련이 없었던 김옥균, 윤봉길, 이봉창의 카드도 있 다. 일제 경찰당국이 주요 독립운동가에 대해 일선 경찰관서에서 실무자들이 인지할 수 있도 록 카드를 활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수형기록카드는 그 대부분이 서대문형무소 수감자를 중심으로 작성되었고, 작성 관서는 일선 경찰관서이며 관리 주체는 경기도 경찰부로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작성 목적은 소위 주요 사상범 의 수형기록 및 독립운동 경력 파악과 사후 관리에 두었다. 수감되었던 주 요 독립운동 인물에 대한 소위 범죄 및 수형( 受 刑 ) 경력 관리와 일제 경찰관서의 신속한 수 사 및 용의자 파악을 위한 수사경력 관리 용도로 작성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부가적으로 수배 및 정보수집 용도로도 이용되었다. 그 성격과 용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일제 경찰관서에서 독립운동가에 대한 범죄 및 수형 경력을 파악하기 위한 관리용 자료 2 일제 경찰이 독립운동 사건 발생 시 신속히 수사 및 체포에 만전을 기하기 위한 수사용 자료 3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독립운동가에 대한 출옥후 일제측의 지속적 감시를 위한 자료 4 주요 독립운동가 검거를 위한 수배용 자료 즉 수형기록카드는 일제 경찰관서에서 사상범 곧 독립운동가에 대한 피체에서부터 감옥 의 투옥 및 출소 이후의 동향까지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파악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또 유사 한 독립운동 사건 발생 시 이들의 용모를 즉시 확인하여 검거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수사용 자료로 만들어진 것이고, 수배용 자료로 이용되었다. 181

146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카드의 성격은 일제측의 입장에서 본다면 주요 사상범에 대한 범 죄 및 수사 경력 자료 카드 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독립운동사의 측면에서 본다면 범죄 및 수 사 경력 이라는 표현을 대신하여 다른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일제측이 인지하는 사 상범의 범죄 경력 은 독립운동가가 감옥에 수감되었던 수형 관련 기록이고, 수사 경력 이라 는 점은 일제의 감시의 측면이 크다. 따라서 카드의 성격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수형기록 관리 및 감시 카드 의 성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 살펴본 수형기록카드는 다음과 같이 독립운동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첫째, 카드가 본격적으로 작성되었던 시점에 의하면, 1919년 3 1운동을 기점으로 독립운 동가에 대한 일선 경찰관서에서의 자료 축적과 수형기록 관리가 시작되었던 점을 알 수 있 다. 거족적인 항일운동에 대응하고자 독립운동가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를 도모하였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카드의 양식 변화를 통해 식민통치의 노선 변화에 따른 유기 적인 독립운동가 신변 확보와 정보 파악이 이루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치안유지법의 발효와 사상적 통제 강화, 식민지의 공고화를 위한 독립운동가 세력 색출을 위한 주변 관계망 파악 등이 확인된다. 셋째, 카드의 작성 관서와 목적을 통해 그 성격이 궁극적으로 독립운동가에 대한 철저한 수형기록 관리과 감시체제의 강화, 향후 재범 시 신속한 수사를 위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일제 말기로 갈수록 그들의 식민통치가 흔들리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한 국인들의 독립운동을 식민통치에 큰 장애로 인식하였고, 이에 독립운동가에 대한 철저한 통 제와 감시에 주력하였던 것이다. 네째, 카드에 기재된 개개인에 대하여 20여 항목 이상의 정보가 기록되어있기 때문에 일 제 강점기 독립운동사의 인물연구와 사건연구에도 중요한 사료이다. 특히 수형기록카드에 기재된 인물들이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각계 각층의 일반 대중이 대다수로 한국독립운동이 곧 민족운동이었다는 점을 반증하기도 한다. 그리고 향후 각 항목분석을 통해 수감 인물 사 이의 연관관계와 수감시기, 수감사유, 형량분포, 연령분포 등 다양한 분석 방법론을 대입하 여 일제가 식민통치를 위해 일반 사회에서 격리시키려 했던 독립운동가의 세세한 현황과 특 징, 대상 사건 등을 밝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182

147 해제 3. 서대문형무소 수감 여성 독립운동가 현황과 특징 1) 여성 수감 감옥 일제 강점기 감옥은 대부분 남성과 여성을 모두 수감하였으나, 각 감옥별로는 수감 대상 자의 성별과 형기에 따라 구분하였다. 그중 여성들이 수감되었던 감옥은 형기 1년~10년 사 이는 대전 광주 함흥형무소 3개소에 수감하였다. 반면 서대문 평양 대구형무소는 형량 ( 刑 量 )에 상관없이 유기( 有 期 ) 또는 무기( 無 期 )의 모든 여성이 수감되었다. 그리고 형기 1년 미만의 여성은 이외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서울의 경성형무소를 비롯하여 몇몇의 지소와 인 천소년형무소, 개성소년형무소, 김천소년형무소에서는 여성을 수감하지 않았다. 29 서대문형무소, 평양형무소, 대구형무소 3개소의 감옥에서 형량과 무관하게 모든 여성을 수감하였던 이유는 서울 평양 대구에 복심법원이 소재하여 피고인이 항소할 경우 복심법 원이 있는 해당 지역으로 이송되어 재판전까지 관할 감옥에 수감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미결 수에서부터 여타의 유기형은 물론 무기사형수까지 수감되었다. 따라서 위 3개소의 감옥에는 타 감옥에 비해 많은 여성들이 수감되었다. 그중 가장 많은 여성을 수감하였던 곳은 서대문 형무소였다. 표 5 와 같이 1937년의 전국 감옥 내 여성 수감 인원 현황을 보면 위와 같은 현 황이 잘 드러난다. 연번 감옥명 <표 5> 전국 감옥 여성 수감자 수(1937년 12월 기준) 여성 수감자 전국 여성 수감자 대비 주요 감옥 여성 수감자 비율 남성 수감자 1 경성형무소 미수용 965명 965명 2 서대문형무소 186명 30.34% 2,484명 2,670명 3 춘천지소 3명 325명 328명 4 공주형무소 71명 11.58% 654명 725명 5 청주지소 4명 300명 304명 6 대전형무소 미수용 1,102명 1,102명 7 함흥형무소 30명 4.89% 1,036명 1,066명 합계 29 법무부 교정본부, 대한민국 교정사 Ⅰ, 2010, 289~290쪽. 183

148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8 원산지소 3명 417명 420명 9 청진형무소 23명 3.75% 859명 882명 10 평양형무소 103명 16.80% 1,069명 1,172명 11 진남포지소 1명 128명 129명 12 금산포지소 미수용 145명 145명 13 신의주형무소 24명 3.92% 1,066명 1,090명 14 해주형무소 8명 530명 538명 15 서흥지소 미수용 152명 152명 16 대구형무소 57명 9.309% 1,197명 1,254명 17 안동지소 미수용 208명 208명 18 부산형무소 10명 1.63% 976명 986명 19 마산지소 1명 268명 269명 20 진주지소 6명 319명 325명 21 광주형무소 53명 8.65% 815명 868명 22 소록도지소 2명 40명 42명 23 목포형무소 10명 1.63% 555명 565명 24 전주형무소 8명 603명 611명 25 군산지소 8명 556명 564명 26 인천소년형무소 미수용 487명 487명 27 개성소년형무소 미수용 752명 752명 28 김천소년형무소 2명 737명 739명 합 계 613명 18,745명 19,358명 * 기결수, 미결수 및 노역장 유치자 등 모두 포함. * 조선총독부, 朝 鮮 總 督 府 統 計 年 報 (1937년), 362~363쪽. 1937년 12월 전국 감옥 재감자 19,358명 가운데 여성은 613명으로 전체 대비 3.17%의 비 율을 보인다. 이 가운데 서대문형무소에는 여성이 186명 수감되어 전체 여성 재감자 613명 대비 30.34%가 수감되었다. 서대문형무소가 일제 강점기 전국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 수감 되었던 것에 비례하여 여성 수감자 또한 전국에서 가장 많이 수감되었던 것이다. 서대문형무소에 여성들이 수감되었던 구역은 남성 수감 구역과 별도로 분리되었음을 도 면 1 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서대문형무소 경내 중앙의 하단부 여구( 女 區 ) 라고 표시되고 별도의 담장으로 구획된 곳이 여성수감 공간이었다. 184

149 해제 도면 1 서대문형무소 배치도(1940년대) 30 여성 수감 공간 내 관련 시설은 간수가 근무하였던 중앙간수소( 中 央 看 守 所 ) 1개동과 감방 ( 監 房 ) 2개동, 공장 1개동, 교장( 敎 場 ; 교회당 敎 誨 堂 ) 1개동이 있었다. 도면 2 의 오른쪽 중 앙간수소를 중심으로 왼쪽과 아래쪽에 감방( 監 房 ) 이라고 표기된 옥사( 獄 舍 )가 연결되어 있 고, 왼쪽 끝에 공장, 중앙 하단부에 교당이 위치하였다. 공장은 여성 수감자들이 노역( 勞 役 ) 했던 작업장이고, 교당은 일종의 교화 및 의식 교육 을 받는 교육 장소이다. 30 이하 도면 국가기록원 소장. 185

150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도면 2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배치도(1936년) 2개동의 여성옥사는 기결수가 수감되었던 기결감(旣決監)과 미결수가 수감되었던 구치감 (拘置監 ; 미결감未決監)이 있다. 건축연도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도면 3 의 당시 설계도 면을 보면 도면의 제목에 서대문감옥 이라는 기록이 있어 서대문형무소가 서대문감옥 으로 불리던 시기인 1912년~1923년 사이에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여성들의 수감기록이 1919년부터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1912년부터 1919년 사이 건축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구체적인 형태로 도면 3 에서 상단부가 기결감, 하단부가 구치감의 설계도면이다. 위 도 면 2 에 대입해 보면 가운데 감방이 기결감, 오른쪽 하단부의 감방이 구치감이다. 도면 3 상단부 오른쪽의 증축 도면은 여성 수감인원이 초과되어 감방을 늘리는 증축하려는 설계도 면이고 도면 2 에서 빗금친 곳이 증축 예정지이다. 여자 기결감은 초기 (43.79평)에 큰 감방(8.74 ;2.65평) 8개와 작은 감방(4.08 ;1.23평) 2개로 구성되었다가 1936년 증축되어 큰감방 4개(크기 위와 동일)가 늘어났다. 구치감(미결감)은 79.9 (24.21평)에 큰 감방(크기 위와 동일) 2개와 작은 감방 6개로 구성되 186

151 해제 었다. 따라서 서대문형무소 내 여성 수감공간은 큰 감방 14개(122.36m2;37.1평)와 작은 감방 8개(32.64m2;9.8평) 총 155m2(46.9평)의 공간이 있었다. 도면 3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도면 [ 서대문감옥 여감방 신축설계도(기결감, 1910년대) ] [ 서대문형무소 여감방 증축 기타설계도(1936) ] [ 서대문감옥 여구치감방 신축설계도(미결감, 1910년대) ] 수용 시설 대비 수감인원의 밀도는 앞서 표 5 의 1937년 서대문형무소의 여성 수감자가 186명이므로 여성 수감 공간 49.6평과 비교하면 평당 수용 밀도는 3.75명이나 되었다 평 남짓의 큰 감방에 10명, 1.23평의 작은 감방에 5명 이상이 수용되었다. 1930년대 전국 감 옥의 수용밀도가 1평당 3.12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여성의 수용 밀도는 0.64명 많았다. 또한 당시 일본 감옥의 수용 밀도가 1.19명 이었던 것에 비하면 식민지 한국 여성들은 1평당

152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명이나 많은 밀도로 수감되었다. 31 이는 일제 강점기 여성의 항일운동이 일제가 판단했던 것 이상으로 활발하였고 남성 못지않게 거세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각해져 1938년이 되면서 여성 수감인원이 211명 32 으로 18명이 늘어 났고 식민지 말기로 갈수록 수감자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였기 때문에 감옥의 열악함은 사회 적으로도 큰 문제가 되었다. 33 식민지 권력에 대한 한국민의 저항이 더욱 늘어나고, 폭력적인 수감실태는 점점 심해진 것이다. 2) 출신 지역과 연령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여성 가운데 수형기록카드는 234장이 남아 있다. 이중 앞서 사진 3 의 전숙희 별지기록과 1인 2장 이상의 중복 카드를 제외하면 180명의 인물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대상으로 출신 지역과 연령 등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이들의 출신 지역 분포 는 다음 표 6 과 같다. <표 6> 여성 수감자 본적지 분포 지 역 인 원 비 율 지 역 인 원 비 율 강 원 도 18명 10% 평안남도 4명 경 기 도 34명 18.89% 황 해 도 18명 10% 서 울 26명 14.44% 평안북도 2명 충청남도 8명 함경남도 14명 7.78% 충청북도 5명 함경북도 18명 10% 경상남도 10명 5.56% 해 외 3명 (러시아 2명, 일본 1명) 경상북도 7명 전라남도 2명 전라북도 3명 제 주 도 3명 소 계 116명 소 계 59명 미 상 5명 합 계 180명 31 이종민, 식민지하 근대감옥을 통한 통제 메카니즘 연구-일본의 형사처벌 체계와의 비교-, 연세대 박사학위 논문, 1999, 113쪽. 32 법무부 교정본부, 대한민국 교정사 Ⅰ, 2010, 288쪽 재인용( 치형 17, 1939, 96쪽). 33 박경목, 1930년 서대문형무소의 일상, 한국근현대사연구 66, 한국근현대사학회, 2013, 88쪽. 188

153 해제 이를 통해 서대문형무소 여성 수감자의 출신 지역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수형기록카드 가 남아 있는 180명 가운데 가장 많은 지역은 경기도 34명(18.89%)이며, 그 다음은 함경도 32명(17.78%), 서울 26명(14.44%)의 순이다. 서대문형무소가 서울에 위치하여 서울, 경기 출신자들 많은 숫자를 차지하는 것은 지리상 연관성이 있다 하겠다. 그러나 함경남북도의 인원이 전체 대비 두 번째로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특이한 현 상이다. 서대문형무소와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충청남북도(13명, 7.22%)나 경상남북도(17명, 9.44%)의 2개 권역 출신의 합(30명, 16.67%)보다 수감 비율이 높은 수치이다. 이러한 현상은 수형기록카드가 남아있는 인물 전체에 대한 분석에서도 동일한 양상이 확 인된다. 출생지 확인이 가능한 4,481명 중 함경도 출신 인물들이 1,391명, 31.1%를 차지하여 가장 많은 비율을 보인다. 서울경기권역 1,140명(25.4%)보다 251명(5.7%) 많은 숫자이다. 34 한편, 1930년 함경남북도의 인구는 전국 인구 20,256,563명 대비 2,157,814명, 10.65%였 다. 35 수감자 중 함경도 출신 비율이 전국 인구 대비 비율보다 20.45% 높은 비율을 보이고 있다. 함경도 지역민의 일제에 대한 저항이 타 지역보다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원인은 함경도 지역의 당시 인구 이동 현황, 함경도 지역에 1920년대부터 시작된 일본 독점자본의 광산 개발과 비료공장 등의 설치에 따른 활발한 노동운동, 이에 따른 수감 자들의 증가와 항소에 의한 서대문형무소로의 이감 등과도 연관이 있다. 특히 여성 수감자들의 다수중 학생과 노동자의 비율이 많기 때문에 함경도의 지역적 정서 도 검토되어야 한다. 함경도의 개방적인 지리적 특성과 활달한 대륙적 기개, 강인한 생활력 과 실천력, 높은 교육열 등 지역성이 배경이 될 수 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송 계월(1910년생)이다. 그녀는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면 출신으로 부친 송치옥이 북청노동연맹 집행위원으로 신창만세운동에 조력한 인물이었다. 또 신창공립보통학교 재학 시절 스승 김 용식은 신교육 보급 운동에 앞장서 신창공회당을 건축하였고, 1919년 3월 12일 신창만세운 동을 주도하였으며, 이후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펼치다가 피체되어 고문으로 순국한 인물이었다 박경목, 일제 강점기 서대문형무소 연구, 충남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5, 89~90쪽. 35 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통계연보(1930년), 1932, 22쪽. 36 국가보훈처 공훈록 참조. 189

154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이러한 가정 환경과 교육 배경으로 그녀는 지속적인 사회 서적을 접하였고 교육에의 열의 를 가지게 되었다. 집안에서도 그녀의 지속적 교육을 위해 1926년 15세 때 서울로 보내 경성 여자상업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 시절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성격으로 교장의 독단적 인 교사 채용 반대와 한국인 교사의 부당 파면 철회, 학교 설비의 개선을 주장하면서 3번의 동맹휴학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행동 지향적 성격은 결국 폭행과 수업 방해로까지 이어져 재 학 시절 서대문형무소에 2번이나 구류된 경력을 가지고 있다. 또 1930년 서울 시내 여학생 만세운동 당시 경성여자상업학교의 대표로 학생들을 모으고, 그녀의 하숙집에서 회합하는 등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일로 피체되어 6개월 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집 행유예로 2개월 만에 풀려나왔다. 37 출소 후 개벽사에서 기자이자 작가로 활동하면서 여성의 사회 진출과 근대를 지향하는 글, 그리고 고향 북청 관련 글을 다수 남겼다. 38 사진 13 송계월의 수형기록카드는 1930년 작성된 것으로 평상복을 입고 있어 피체 직후 경찰서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뒷면에 본적은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면 신창리 번지미 상, 주소는 경성부 가회동 48번지, 직업은 여자상업 3년생, 인치관서( 引 致 官 署 )는 서대문 경찰서, 인치사유는 보안법 위반 으로 기재되었다. 구체적인 형기와 재판 언도연월일 등이 미기재된 것으로 보아 미결상태에 기재되었던 카드이다. 사진 13 송계월 카드 37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51, 2002, 65~66쪽, 204~209쪽. 38 송계월, 우리 가을은 내일 아침에, 신여성 5권 9호, 1931 ; 직업여성의 술회, 학원시대와 현재생활, 신동아, 1932 ; 북청의 점묘, 삼천리 3권 12호, 1931 ; 신창 바닷가, 신여성 6권 11호, 1932 등. 190

155 해제 위와 같이 송계월의 성향은 함경도 지역의 역사적 전통과 지리적, 문화적 환경에 영향을 받았으며, 또 그 영향을 받은 인물들로부터 양육되어 자연스럽게 생성된 것이다. 이에 그녀 는 식민지 현실의 모순을 인식하고 자신의 신념대로 이를 타계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맹휴와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즉 신념의 실천성, 높은 교육열 등의 함경도 기질이 그 안에 내재되 어 있었다. 39 이와 같은 함경도인의 서울과 경기 지역으로의 이동은 전체 수형기록카드 중 주 소지가 기재된 인물 가운데 163명이다. 그중 10대가 26명, 20대가 90명, 30대 32명, 50대가 1명, 나머지는 미상이다. 10~20대의 이주가 116명으로 가장 많은 것은 주로 학업을 위하여 상경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상경 인물 가운데 박선숙과 한정희는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주소지가 경성 인사동 192 번지로 동일하여 함께 서울로 진학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1930년 서울 시내 여학생 만 세운동으로 수감되었는데, 함흥여자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에 입학하였다. 40 이밖에 서울 시내 여학생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피체, 수감되었던 인물 가 운데 함경도 출신은 이들 박선숙(함남 함흥)과 한정희(함남 함흥)를 비롯하여 이순옥(함북 경 성), 송계월(함남 북청), 윤옥분(함북 종성), 최현수(함남 원산), 안임순(함남 함흥), 김금남 (함북 명천) 등 8명으로 함경도인의 기질적 성향을 알 수 있다. 41 그러나 함경도 출신의 독립운동 참여 비율이 높은 사유는 이런 사항 외에도 일제 강점기 사회적, 문화적 혹은 타 분야와의 연관 관계 등 다양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는 향후 한국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검토해야 할 하나의 과제로 제시하고자 한다. 이외 수형기록카드의 활용 측면에서 주목한 방법론은 여성 수감자들의 직업과 수감 일자, 출신지 등의 정보를 순차로 정렬하여 상호 어떤 연관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180명의 출신 지역과 수감 일자를 정렬해 보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된다. 표 7 은 180명 가운데 직업이 학생인 사람들을 먼저 추출하고, 다음으로 검거일, 본적지 순으로 정 리한 것이다. 그 결과 공통적 특징이 보이는 17명을 선별할 수 있다. 이들 17명은 1930년 1월 15일 서울 시내에서 광주학생운동 지지를 위해 펼쳤던 서울 시내 여학생 만세운동 으로 수감 되었던 학생들이었다 진선영, 식민지 시대 북청 의 지역성과 함경도적 기질성,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65, 한국문학이론과 비평학회, 2014, 279쪽. 40 동아일보, , 시내여교만세사건 금일검사국송치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 자료집 51, 2002, 189~191 쪽, 198~200쪽. 41 동아일보, , 기소유예된 여학생 24명 당야 출옥. 42 중외일보, , 여학생만세사건의 27명 필경 송국 ; 동아일보, , 시내 여학교 만세운동 검거자 명단. 191

156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표 7> 서울 시내 여학생 만세운동 관련 수감자 연번 이 름 생 년 검 거 일 직 업 본적지 1 조금옥 숙명여고보4년생 경기 개성 2 최윤숙 학생 경기 이천 3 김덕순 학생 경남 마산 4 최복순 이화여고보4년생 경남 부산 5 안갑남 동덕여고보4년생 전남 보성 6 김진현 이화여고보4년생,교생 제주도 7 민금봉 이화여학교생도 충북 청주 8 최현수 이화여고보3년생 함남 원산 9 안임순 이화여고보3년생 함남 함흥 10 한정희 학생 함남 함흥 11 박선숙 학생 함남 함흥 12 윤옥분 이화여고보3년생 함북 경성 13 이순옥 함북 경성 14 최정옥 학생 함북 경성 15 송계월 여자상업3년생 함북 북청 16 이영자 학생 황해 17 조숙현 학생 황해 서흥 이들 중 다수는 이화여고와 동덕여고 출신들이었다. 한정희, 박선숙은 동덕여고, 43 최현수, 안임순, 윤옥분, 조숙현은 이화여고, 송계월은 경성여자상업고(현 서울여상) 학생이었다. 본 적지가 함남, 함북, 황해 등 북쪽 지역 학생이 10명으로 총 17명 가운데 59%를 차지한다. 180명의 여성 수감자 중에서도 함경도의 비율이 높았던 것처럼 동일 사건의 참여자들 중에 서도 이 지역 출신 인물의 비율이 높았다. 함경도 지역 학생들의 참여 비율이 높았던 것은 당시 만세운동의 준비 과정이 비밀리에 전 파되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학생의 경우 주로 기숙사생을 대상으로 기숙사 방 안에서 43 <박선숙 신문조서>, 서대문경찰서,

157 해제 은밀히 전파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44 따라서 기숙사 생활을 했던 같은 고향 출신 들이 상호 연대를 통해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던 것임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이들의 거주지 또한 해당 학교 기숙사의 주소로 되어 그 정황을 뒷받침한다. 일제 강점기에 는 지역적 관계, 즉 지연( 地 緣 )이 일제에 저항하는 단결력을 제공하는 요인이 되었다. 본적지 외에 거주지 정보를 통해서도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카드에 기재된 여성 180명을 거주지별로 분류하여 정렬하면 표 8 과 같이 거주지가 동일한 경우가 6건 확인된 다. 그리고 거주지가 같은 이들의 검거일자 또는 언도일자, 직업을 살펴보면 그 또한 같은 날짜와 같은 직업임을 확인할 수 있다. 즉 거주지가 같은 인물들은 동일한 사건에 연계되어 피체, 수감된 것이다. <표 8> 여성 수감자 동일 거주지 분 분류 A B 사진 검거일 보존원판 이 름 생 년 직 업 또는 언도일 번호 거주지 주소 김순호 간호사 (김효순) 경성 세스란스 연합 의학 이도신 간호사 전문학교 부속 간호부 (이신도) 양성소 기숙사 368 노순경 간호사 515 이수희 학생 516 윤경옥 학생 경성 배화여학교 517 최란씨 학생 기숙사 518 왕종순 학생 519 박하경 학생 520 소은숙 학생 경기 연천 군내 남계 안희경 학생 522 김마리아 학생 523 성혜자 학생 경성 배화여학교 524 손영선 학생 기숙사 525 김경화 학생 526 이신천 학생 527 김성재 학생 528 소은명 학생 경기 연천 군내 남계 안옥자 학생 경성 배화여학교 기숙사 530 지은원 학생 강원 춘천 신남 송암 <최현수 신문조서>, 서대문경찰서,

158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분류 사진 보존원판 번호 이 름 생 년 직 업 검거일 또는 언도일 거주지 주소 531 박경자 학생 532 이용녀 학생 533 문상옥 학생 B 534 한수자 학생 535 박신삼 학생 경성 배화여학교 기숙사 536 박양순 학생 537 김의순 학생 538 이남규 학생 C D E F 김명순 신명예 여공 박소순 여공 최화순 조사공녀 ( 朝 糸 工 女 ) 이효정 이병희 김완흥 이운향 심재순 여공 박순임 여공 정갑복 여공 채정희 여공 이정남 여공 최광순 여공 황영임 여공 민인숙 여공 차양순 여공 경성 신설 경성 청량88 경성 화동47 경성 휘경

159 해제 표 8 A의 김순호, 이신도, 노순경 세사람은 거주지가 경성 세브란스 병원의 연합의학전 문학교 간호부 양성소 기숙사로 되어있다. 함께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항일운동에 참여한 것 이다. 45 B의 이수희, 김경화 등 24명 가운데 소은숙, 소은명, 지은원 세사람을 제외한 21명은 거주 지가 모두 배화여학교 기숙사로 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같은 학교 동료들로서 항일운동에 참여하였고, 제외된 세사람도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점과 언도일이 같은 점으로 보아 같이 활동한 것이다. 46 C에서 거주지가 신설동 번지로 기재되어 있는 최화순과 신명예, 김명순, 박소순 등 4명은 직업이 모두 여공( 女 工 )이었고, 1934년 5월 20일 동시에 검거되었다. 관련 자료를 추적해 보면 이들은 소위 조선 내 적화공작사건 에 연계되어 함께 수감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47 D의 이병희와 이효정은 이재유의 지도를 받으며 노동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효정이 먼저 검거되었고 1년여 후에 이병희가 검거되었다. 그럼에도 주소지가 청량리 88번지로 같은 것 은 이들이 고종사촌간이라는 점을 감안할 수 있다. 48 E의 화동 47번지로 기재되어 있는 이운향과 김완흥은 신사참배를 집단적으로 거부한 등 대사 사건으로 수감된 인물이다. 이들의 거주지 화동 47번지가 해당 종교의 교회였는지 일 반 가정집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종교적 활동을 같이 한 사람들의 모임 장소로 볼 수 있다. F의 휘경동 189번지는 심재순, 민인숙, 박순임, 차양순, 정갑복, 황영임, 최광순, 이정남, 채정희 등 9명이 같은 주소지를 썼고, 이들의 직업은 모두 공장 노동자였다. 이들은 검거일 이 별도로 기재되지 않았으나 카드에 기재된 사진 촬영 날짜가 모두 1941년 6월 24일로 같 은 점으로 보아, 1941년 6월경 검거되었다가 동시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피체 당시 이들의 나이는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의 여공들이었다. 이들 가운 데 박순임은 1941년 11월 12일 출소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최광순은 1942년 2월 5일, 민 인숙은 같은 해 3월 2일, 나머지 6명은 같은 해 3월 6일자로 출소일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 45 <노경순, 이도신, 김효순, 박덕혜 경성지방법원 판결문>, <이수희 등 경성지방법원 판결문 <경성제국대학 교수 삼택녹지조를 중심으로 한 조선 내 적화공작사건 검거에 관한 건>, 경기도 경찰부, 이병희 증언. 195

160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이 어떤 활동을 하였는지 상세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으나, 1930년대 불어 닥친 공산주의자, 노동운동가 검거 열풍에 의한 여파로 1941년에 수감된 것 같다. 기록상 이들의 거주지가 동 일했던 것은 직업이 모두 여공이었던 것으로 보아 해당 공장의 기숙사 주소로 추정된다. 여성 수감자들의 출생 연도별 인원 분포 현황은 다음 표 9 와 같다. 카드가 작성되기 시 작했던 시점이 1919년 3 1운동 이후임을 감안하고, 1930년대 들어서 수감 인원이 급격이 증가하는 현상으로 보아 이 표에서 보이는 1900년대생과 1910년대생이 전체 대비 81% 이상 을 차지하는 것은 예상 가능한 결과이다. 이들 중 1900년대생은 주로 1919년 3 1운동, 1920년 3 1운동 1주년 기념 만세운동, 1930년 광주학생운동지지 서울 시내 여학생 만세운동으로 수감된 인물 등이 많은 비율을 차 지한다 년대생과 1920년대생 대부분은 1930~40년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노동운 동, 학생운동 등에 참여하였던 인물이다. 한편 이들 중 1870년대생 3명, 1880년대생 5명, 1890년대생 8명이고, 이들의 수감 연대는 주로 1919년 전후로 파악된다. 그러나 이 가운데 국가총동원법 위반으로 1940년대에 수감된 인물로 1880년대생 1명, 1890년대생 3명이 있 다. 50~60대의 연장자들의 수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표 9> 여성 수감자 출생 연대 출생연도 인원 비율 1870년대 3명 1.67% 1880년대 5명 2.78% 1890년대 8명 4.44% 1900년대 66명 36.67% 1910년대 82명 45.56% 1920년대 8명 4.44% 미 상 8명 4.44% 합 계 180명 100% 49 동아일보, , 경성부내 여학생들이 광주학생운동. 196

161 해제 여성들의 수감 당시 나이는 다음 표 10 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카드 정보에 의하면, 최 연소 수감 나이는 15세로 소은명, 왕종순, 임순득 등 3명이 있다. 소은명과 왕종순은 1920 년 3월 배화여학교 만세운동으로, 임순득은 1931년 공산주의 운동과 노동운동으로 피체되었 다. 최고령 수감 나이는 66세에 수감되었던 황학열로 1939년 신사참배 거부 혐의로 피체되 었다. 50 그녀를 포함한 60대 수감자는 3명, 50대 수감자는 4명인데, 이중 4명은 신사참배 거 부, 3명은 국가총동원법 위반으로 수감되었다. 이외에 40대 수감자 7명, 30대 수감자 22명, 20대 수감자 72명, 10대 수감자 64명으로 주로 10대와 20대(180명 대비 136명, 75.56%)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주역으로 활발히 나섰음을 알 수 있다. <표 10> 여성 수감자 연령대 연령대 10대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 미상 합계 인원 64명 72명 22명 7명 4명 3명 8명 180명 비율 35.56% 40.00% 12.22% 3.89% 2.22% 1.67% 4.44% 100% 수감자들의 직업도 연령대와 관련이 있다. 10대인 경우 학생, 20대인 경우 여공( 女 工 )이나 급사( 給 仕 ; 회사원 또는 점원)들이 대다수였다. 직업이 기재된 카드 96장 가운데 절반가량 이 학생으로 47명, 그다음 공장 노동자와 회사원이 26명이다. 이외에 23명은 다음과 같다. 간호사(5명 : 김순호, 노순경, 이신도 51, 최승원, 함귀래 52 ), 교원(5명 : 고강순, 김경애 53, 남 궁경순, 오일순 54, 노함풍 55 ), 기자(2명 : 허정숙 56, 수판수혜 57 ) 목사(1명 : 신관빈), 선교사 또 는 전도사(3명 : 계화성, 박정선, 이신애 58 ), 사행상( 糸 行 商, 2명 : 강간난, 안순이), 직물상 50 <등대사사건 관계자 검거에 관한 건>, 경기도 경찰부, ; <후계 등대사사건 검거에 관한 건>, 경기도 경찰부, 김순호, 노순경, 이신도는 당시 세브란스 병원에서 근무하였다. 노순경은 노백린의 차녀이다. 52 강원도립의원 근무. 53 동아일보, , 간도 동흥중학교 교원 김경애 석방. 54 <조선공산당재건동맹사건 발각 건>, 서대문경찰서, <조선공산당고려공산당청년회 검거>, 경기도 경찰부, 동아일보, , 근우회 제1회 중앙위원회 임원개선 ; <허정숙 신문조서>, 경성지방법원, <조선반제동맹 경성지방 준비위원회>, 동대문경찰서, <토요연구회 사건판결>, 사상월보, <박정선 조서>, 경성지방법원,

162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 織 物 商, 2명 : 김씨, 박옥희), 농업(2명 : 김성남, 임명애) 등이다. 다양한 직종의 여성들이 그들의 생업과 환경에 따라 각기 다른 수단과 방법으로 일제에 저항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3) 형량 1919년부터 1945년까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여성 수감자들은 대부분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수감되었다. 여성 수감자 180명 가운데 치안유지법 위반(99명), 보안법 위반(48 명), 출판법 위반(1명)이 148명(82.22%)으로 대부분 사상범 의 혐의였다. 다음으로 국가총동 원법 위반이 17명으로 많은 숫자를 보인다. 기타 살인사체유기 1명, 미상 9명, 수배자 5명이 었다. 이들의 활동은 살인사체유기를 제외한 죄명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반하는 치안유지 법 위반과 보안법 위반, 국가총동원법 위반 등으로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였던 항일투쟁 으로 수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가운데 형기 형명( 刑 期 刑 名 )이 기재된 96명의 형량을 살펴보면 다음 표 11 과 같다. <표 11> 여성 수감자 형량 형명 형량 인원수 비율 징역 (집행유예 포함) 구류 기타 합계 무기 1명 4년 2명 3년 3명 2년 6개월 4명 4.17% 2년 10명 10.42% 1년 6개월 6명 6.25% 1년 10명 10.42% 10개월 1명 8개월 6명 6.25% 6개월 35명 36.45% 4개월 4명 50일 1명 39일 1명 20일 1명 13일 1명 구류취소 4명 기소유예 4명 예심면소 2명 96명 198

163 해제 가장 많은 인원이 받은 형량은 징역 6개월로 35명이고, 그 다음 2년 10명과 1년 10명의 순 이다. 6개월 형이 많이 있는 것은 남아있는 카드 가운데 1920년 배화여학교 만세운동 참여 자 24명중 22명이 6개월 형으로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59 또 여성들의 연령대별 특징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0대와 20대가 총 136명으로 전체 180명 가운데 75.56%의 비율 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어리고, 주로 학생들과 노동자 및 회사원들로 평화적 방법으로 투쟁 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비교적 적은 형량이 선고되었다. 한편 주동자들은 이보다 많은 형량을 받았는데, 배화여학교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수희와 김경화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 서울 시내 여학생 만세운동을 주도한 최복순은 징역 8개 월을 선고받았다. 60 이 가운데 배화여학교 만세운동 참여 학생들 이수희, 김경화 등 24명은 실형과 집행유예 를 같이 받았는데, 이 때문에 1920년 4월 5일 형이 확정되고 그 다음날 6일 출소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배화여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전개한 시점이 1920년 3월 1일이고 이 직후 구속되었다면 출소일이 1920년 4월 6일이므로 집행유예를 받았다 하더라도 실제로 는 약 한달 정도의 수감 생활을 한 것이다. 집행유예나 위 표에서 보이는 구류취소, 기소유 예, 예심면소 등에 대해서도 수감생활을 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하면 곤란한 이유이다. 위 판 결도 일정한 재판 과정을 거친 후에 확정되어 수형기록카드에 기재된 것이므로, 재판을 기다 리고 진행하는 과정-미결 기간-동안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구류( 拘 留 )취소자 4명(차양순, 채정희, 최광순, 황영임)도 사진 촬영 일자가 1941년 6월 24 일이고 출소 일자가 1942년 3월 6일과 1942년 2월 5일로 기록되어 있다. 판결은 구류취소로 나왔지만 실제 미결수로 약 8개월간 수감 생활을 하였다. 기소유예자 4명(유해길, 이옥란, 최경창, 홍종례) 중 이옥란을 제외한 3명은 검거 일자가 1936년 12월이고 기소유예 판결 일 자가 1937년 5월 11일로 약 5개월여 수감 생활을 하였다. 예심면소 2명(이미순, 황학열)도 위 와 같은 사유로 각각 1년 2개월, 2개월 여의 미결 기간 동안 수감되었던 것을 수형기록카드 를 통해 알 수 있다. 미결로 구치된 기간은 형이 확정되면 미결통산( 未 決 通 算 ) 이라 하여 확정 형기에서 미결 59 신한민보, 배화여학교 여학생들의 공판. 60 <최복순 신문조서>, 서대문경찰서,

164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기간의 일부를 감했는데, 이러한 미결통산이 카드에 기록되어 있는 여성은 표 12 와 같이 12명 확인할 수 있다. 미결통산은 미결 기간 전부를 감해주었던 것이 아니라 미결 기간의 1/2이나 혹은 1/3을 계 상하여 감해주었다. 따라서 실제 미결 기간은 통산 기간보다 많게는 3배, 적게는 2배까지 고려해야 한다. 61 <표 12> 미결통산 미결통산 500일 400일 300일 350일 247일 성명 임춘자 김성녀A 박 온 이병희 한계순 고강순 미결통산 100일 90일 60일 59일 성명 김조이 이경선 김상석 박옥희 안순임 현금열 다음의 사진 14 에서 보이는 미결통산이 300일인 박온과 이병희는 검거 일자와 사진 촬 영일자, 언도 날짜, 출소 날짜, 형량 등이 모두 같아 동일 사건으로 구속, 수감되었던 인물이 다. 이병희는 이재유의 조선공산당 재건 경성준비그룹 경성트로이카 의 지도하에 종연방직 ( 鐘 涓 紡 織 )의 파업을 주도하다가 구속되었고, 62 박온도 함께 활동하다가 구속되었다. 63 그런 데 이들은 1936년 12월 검거되어 1939년 4월 14일 형이 확정되었다. 형량은 징역 1년, 집행 유예 3년 형이었다. 그러나 미결 기간이 2년 5개월로 이미 형량을 초과하였다. 따라서 이 형 량은 명분에 불과하였고, 두 사람은 실제 2년 5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그런 데 미결통산 기간은 300일로, 실제 수감 기간 870여 일의 1/3에 불과하였다. 일제가 독립운 동가의 미결 기간을 실 기간 그대로 계상해 주지 않았던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61 김광섭, 사상범, 나의 옥중기, 창작과 비평사, 1976, 204쪽, 214쪽. 62 <의견서>, 경기도 경찰부, <치안유지법 위반 범인 이재유 검거>, 경기도 경찰부, 박온은 해방 후 이중간첩 혐의로 무기징역을 받았다( 동아일보, , 여간첩 제1호 박온에 사형을 구형 ; 동아일보, , 여간첩 박온에 무기징역 언도 ) 200

165 해제 사진 14 미결통산이 기록된 카드 [ 박온 ] [ 뒷면의 검거일과 미결통산 기록 ] [ 이병희 ] [ 뒷면의 검거일과 미결통산 기록 ] 이같이 일제는 독립운동의 혐의가 있는 피의자에게 필요 이상으로 조사 과정을 길게 가져 가거나, 항소 시 재심 판결 일정을 일부러 길게 함으로써 미결 기간을 늘렸다. 이 시기 이미 3년, 4년, 5년의 미결구금은 일상이 되어 열악한 감옥 생활과 전향을 강요하면서 수감자 스 스로 지치게 하는 방법을 쓴 것이다. 64 그리고 소위 사상범 중 개전의 정이 보이지 않는 수 감자에게는 미결통산 을 계상해 주지 않는 수법으로 실질적으로 수감 기간을 늘렸다. 치안 유지법 위반 등 사상범 혐의를 쓴 독립운동가들의 수감 기간은 일제의 의도에 따라 얼마든 지 조절이 가능했던 것이다. 65 이러한 점은 향후 독립운동가의 공훈 여부를 판단할 때 감안해 야 할 사항이다. 일제측 기록의 맹점과 그들의 미결 기간 늘리기 수법을 인지하여 실제 수감 64 동아일보, , 옥사자 격증에 대하여 미결 기간을 단축하라. 65 박경목, 1930년 서대문형무소의 일상, 한국근현대사연구 66, 한국근현대사학회, 2013, 85쪽. 201

166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기간을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 한편 한국민을 일제가 통제하고 처벌하였던 양상은 1938년 중일전쟁 이후 식민지 지배 정 책이 전시체제로 전환되면서 매우 강화되었다. 특히 그해 4월 국가총동원법이 제정되어, 전 시 총동원체제 위반에 대해 강도 높은 형량을 구형하였다. 여성 수감자 가운데 국가총동원법 위반 인물은 다음 표 13 과 같이 17명으로, 180명 대비 9.44%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 이 가 운데 징역 10개월 1명, 8개월 4명, 6개월 8명, 4개월 4명의 분포를 보인다. 6개월형 이상이 13명으로 17명 대비 76.47%를 차지한다. 이들의 형량은 1920년 3월 배화여학교 학생들의 만세운동 참여자 24명 중 주동자 2명이 연 번 <표 13> 국가총동원법 위반 수감자 이 름 생년 직업 형량 언도일 입소일 출소일 1 강간난 糸 行 商 6월 김귀현 월 김성녀A 월 김씨 織 物 商 4월 박오매 월 박입분 월 박정식 월 박춘도 월 백선옥 월 안순이 사행상 6월 오순이 월 오창례 월 유채옥 월 이기순 월 이옥덕 월 이현애 월 최용자 월

167 해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 22명이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고, 1930년 1월 서울 시 내 여학생들의 광주학생운동 지지 만세운동을 전개한 학생들이 훈계나 미결로 끝났던 것에 비하면 엄중한 처벌이었다. 더욱이 표 13 과 같이 국가총동원법 위반자들에 대한 구형은 집 행유예 없이 모두 실형을 선고하였고, 실제 형량대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매우 엄격하 게 형이 집행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1920년대나 1930년대의 보안법 위반, 치안유지법 위 반에 비해 1940년대의 국가총동원법의 위반이 이 시기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더욱 큰 장애 가 되었던 것이다. 일제 강점 말기로 갈수록 한국인을 보다 엄격하게 처벌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수감 당시 연령대는 박입분(당 26세)을 제외하고는 모두 30대 이상, 평균 연령 38.9세이다. 10대와 20대가 75% 이상을 차지하는 여성 수감자의 비율과 비교해보면 상대적 으로 나이가 많은 편이다. 과연 평범해만 보이는 이들의 죄 가 무엇이었는지, 몇 개월씩 옥살 이해야 할 만큼 일제 식민체제에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 무엇인지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국가총동원법 위반 사례로 표 13 의 박정식, 안순이는 형량(6개월), 언도일( ), 출 소일( )이 모두 같아 동일 사건으로 검거수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순이의 직업이 사행상( 糸 行 商 )인 것으로 보아 박정식 또한 같은 직업에 종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같 은 직업을 가진 강간난도 언도일, 출소일, 거주지역이 두 사람과 유사하여 같이 활동한 인물로 추정된다. 김귀현과 이현애도 형량과 출소 시기는 다르지만 같은 날 언도받고( ), 카 드의 사진 촬영 일자와 장소가 같고( /서대문형무소), 거주지역(목단강 애하 66 )이 같 은 것으로 보아 이들도 동일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의 직업이 사행상인 것으로 보아 가격통제령 위반으로 추정해 볼 수 있지만, 구체적 자료의 미비로 단정할 수 없다. 이 여성들의 국가총동원법 위반에 대해서 여러 명의 공동 대 응의 형태로 전개되었는지 여부를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들이 1940년대 일제의 전시체 제 동원에 어떠한 형태로 저항한 인물인지 역사적 판단과 의미 부여가 필요하다. 즉, 여성들의 국가총동원법( 國 家 總 動 員 法 ) 위반 에 대해 일 개인이 단순하게 일제의 명령 에 불복종하여 수감된 것이 아닌, 2명 이상의 공동 대응 내지는 반대 투쟁이 전개되었는지의 여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적극적인 해석으로 항일운동으로서의 가능성에 대해 열어 놓고 검토해야할 것이다. 66 현 중국 黑 龍 江 省 牧 丹 江 愛 河. 203

168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사진 15 국가총동원법 위반 수형기록카드 [ 강간난 ] [ 김귀현 ] 4) 항일투쟁 유형 여성 수감자 180명의 수형기록카드에 기재된 정보를 취합하여 분석하면 그들 사이의 인과관계 를 추적, 항일투쟁의 유형도 살펴볼 수 있다. 그 방법론으로 착안한 것이 수형기록카드 앞면에 기 재되어 있는 사진 보존원판 번호 의 활용이다. 사진을 촬영하고 그 원판에 일련번호를 부여한 것 으로 사진 원판에 매긴 번호인 동시에 카드를 순서대로 정리하기 위해 부여하였던 일련번호이다. 이 일련번호가 카드 양식에 공식적인 기재 항목으로 반영된 시점은 대정(大正) 연호가 인 쇄되었던 카드가 쓰이기 시작했던 [B형] 양식, 1926년부터이다. 보존원판( 原板( )第 )제 호(保存 號) 의 형식으로 카드 앞면 오른쪽 하단에 인쇄되어 있다. 일제가 1925년 5월 치안유지법 시행을 기점으로 사상범 에 엄벌주의(嚴罰主義)적 행형(行刑)을 적용하자, 일제 경찰이 그들을 체계적으로 감시통제하기 위해 카드에 연번을 부여하여 관리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1926년 이전의 카드에도 연번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카드에 그 항목이 인쇄된 것 이 아니라 사진 유리원판에 직접 기재하였거나, 카드의 빈 공간 사이에 연번을 기입하였다. 204

169 해제 즉 1926년부터 [B형]의 새로운 양식의 카드가 사용되었던 시점에서 기존의 것을 소급하여 연번을 정리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사례는 사진 16 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진 16 의 1919년 3 1운동으로 수감된 김순 호 카드는 원판에 직접 보존원판 번호를 기입하였고, 1920년 3 1운동 1주년 기념 만세시위 로 수감된 이수희 카드는 사진 사이의 공백란에 수기로 기입하였다. 반면 1926년 수감된 김 영희 카드는 大 正 年 月 日 ニ 於 テ 撮 影 保 存 原 板 ( ) 第 號 가 앞면 하단에 인쇄되 어 촬영 일시, 장소, 보존원판 번호를 기록하도록 되어있다. 사진 16 사진 보존원판 번호 기록 사례 [ 김순호 카드 ] [ 사진 원판에 번호 기재 ] [ 이수희 카드 ] [ 카드 빈 공간에 번호 기재 ] [ 카드 공식 항목으로 기재 ] [ 김영희 카드 ] 205

170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이 사진 보존원판 번호는 어느 시점에서 수형기록카드를 재정리 또는 재작성하면서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부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번호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인 물들은 동일사건으로 피체되었거나 피체 시기가 비슷할 가능성이 크다. 이 점에 착안하여 여 성 수감자 180명을 가나다 순서로 배열한 표 14 를 사진 보존원판 번호 순서대로 재배열 해 보면 표 15 와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재배열 결과를 분석해 보면 첫째, 카드가 남아있는 여성 수감자는 서대문형무소에 1919년 4 월부터 수감되기 시작하여(어윤희) 년 8월경까지 수감(백선옥)되었다. 여성 수감자 카드 의 가장 빠른 보존원판 번호는 366번(김순호)이고, 가장 마지막 번호는 65,036번(백선옥)이다. 둘째, 사진 보존원판 번호를 통해 연대별 수감 인원과 그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1920년 대는 보존원판 번호가 366번~9,188번(강정희)까지로 약 10,000여 명의 인원이 수감되었 고, 1930년대는 보존원판 번호가 11,548번(이영자)~42,378번(한계순)까지 약 30,000여 명 이 수감되었다. 1920년대에 비해 1930년대는 수감 인원이 3배나 증가하였다. 식민지 지배가 장기화될수록 강화되었던 일제의 사상범 감시와 탄압의 결과가 수감자 수치로 드러난 것이 다. 1940년대는 1944년까지 4년간 보존원판 번호 44,662번(김성녀B)~65,036번(백선옥)까 지 약 20,000여 명이 수감되었다. 1930년대 10년간 30,000여 명이 수감되었던 것에 비하면 1940년대는 4년간 20,000여 명이 수감되었으므로 수감 인원은 75% 증가하였다. 해를 거듭 할수록 심해졌던 식민지 대민 통제가 감옥 수감 인원의 증가로 나타났던 것이다. 67 <어윤희 등 2인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71 해제 <표 14> 서대문형무소 여수감자 수형기록카드 명단 가나다순 배열(1919 ~ 1944) 연번 이름 생년 직업 형량 검거일 언도일 출소일 1 강간난 사행상 징역 6월 강귀남 여급 3 강정신 강정희 구류 39일 강혜숙 경석호 노동 7 계화성 선교사 징역 1년 고강순 고사찰 교원 (소학교) 징역1년, 통산247일 고수복 버스차장 보석 11 김경애 교원 12 김경화 학생 징역 1년 김계향 학생 14 김귀현 징역 8월 김규옥 보석 김덕순 학생 17 김마리아 학생 징역 6월 김만순 여공 19 김명순 김모개 구류 50일 김복순 김봉녀 징역2년6월 김상석 징역 2년 김성남 농업 징역 4년 김성녀A 징역 6월 김성녀B 징역2년 6월 김성재 학생 징역 6월 김순호 간호사 징역 6월 김영문 30 김영원 김영희 김완흥 징역1년 6월 김원정 김월옥 타이피스트 김의순 학생 징역 6월

172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36 김재선 학생 37 김조이 징역 3년 김진현 이화여고보 4.생,교생 (인계) 39 김현 김천고성 41 김화순 무기 42 김씨 직물상 징역 4월 남궁경순 남영실 급사 45 남인희 노숙인 학생 노순경 간호사 징역 6월 노함풍 교원 맹계숙 고무여공 50 문상옥 학생 징역 6월 민금봉 이화여학교 생도 훈계방면 민인숙 여공 박경자 학생 징역 6월 박계남 징역 2년 박선숙 학생 56 박성녀 징역 1년 박소순 여공 박숙용 박순임 여공 박신삼 학생 징역 6월 박양순 학생 징역 6월 박오매 징역 6월 박옥희 직물업 징역 2년 박 온 징역 1년 박입분 징역 4월 박정선 전도사 67 박정식 징역 6월 박진홍 징역1년6월, 징역1년 , , 박춘도 징역 4월 박하경 학생 징역 3월 박호진 백선옥 징역 8월

173 해제 73 백정호 74 서병인 징역1년 6월 석경덕 징역 2년 성혜자 학생 징역 6월 소은명 학생 징역 6월 소은숙 학생 징역 6월 손영선 학생 징역 6월 송계월 송봉우 여자상업 3년생 신경애 신관빈 목사 징역 1년 신명예 여공 심계월 여공 심재순 여공 구류 13일 안갑남 동덕여고보 4년생 안순이 사행상 징역 6월 안순임 징역2년 6월 안옥자 학생 징역 6월 안임순 이화여고보 3년생 안희경 학생 징역 6월 어윤희 징역1년 6월 오순이 징역 8월 오일순 동덕여교사 오창례 징역 10월 옥정상 왕종순 학생 징역 6월 유관순 학생 징역 3년 유덕희 유채옥 징역 4월 유해길 여급 기소유예 윤경옥 학생 징역 6월 윤금자 윤옥분 이화여고보 3년생 이갑문 학생 징역 6월 이경선 여공 징역1년 6월 이경희 이기순 징역 8월

174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110 이남규 학생 징역 6월 이리타 112 이병희 징역 1년 이설혜 이수희 학생 징역 1년 이순금 징역 2년 이순섬 이순옥 이신도 간호사 징역 6월 이신애 전도사 120 이신천 학생 징역 6월 이영자 학생 구류 20일 122 이예분 직공 이옥덕 징역 6월 이옥란 기소유예 이용녀 학생 징역 6월 이운경 집행유예 이원봉 학생, 여공 징역 2년 이정남 여공 이정숙 여공 이정순 이현애 징역 6월 이미순 예심면소 이황월 징역 1년 이효정 임명애 농민 징역1년 6월 임순득 학생 137 임춘자 징역 2년 전근숙 전선녀 징역 6월 전숙희 정갑복 여공 정계원 화신백화점 점원 정종명 산파 144 정형길 학생 145 조금옥 숙명여고보 4년생

175 해제 146 조복애 숙명여고보생 조성은 고등과수배용 148 조숙현 학생 149 조순이 구 류취소출소 150 조신녀 징역 2년 주보배 (주정원) 지은원 징역 6월 차양순 여공 구류취소 채정희 여공 구류취소 최경창 여급 기소유예 최광순 여공 구류취소 최란씨 학생 징역 6월 최복동 불기소 최복순 최상화 이화여고보 4년생 징역8월, 8월 , 최승원 간호부 최용자 징역 최윤숙 학생 징역 6월, 3년간 집행유예 164 최정옥 학생 훈계방면 165 최현수 최화순 이화여고보 3년생 조사공녀 ( 朝 糸 工 女 ) 한계순 징역2년 6월 한수자 학생 169 한정희 학생 징역6월, 집행유예 170 함귀래 간호부,산파 예심면소 허균 고무공장직공 징역 2년 허분적 년6월22일 허연죽 단기2년6월, 장기4년6월 허정숙 기자 징역 1년 현금열 징역 8월 홍종례 여급 기소유예 황영임 여공 구류취소 황학열 예심면소 황흥임 여공 180 수판수혜 기자 (문호사) 211

176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표 15> 서대문형무소 여수감자 수형기록카드 사진 보존원판 번호순 배열 연 사진보존 이름 생년 직업 사진 촬영날짜 활동내용 번 원판번호 1 김순호 간호사 추정 3 1운동(세브란스병원) 이신도 간호사 추정 3 1운동(세브란스병원) 노순경 간호사 추정 3 1운동(세브란스병원) 임명애 농민 추정 3 1운동(파주 교하리) 어윤희 운동(개성) 유관순 학생 추정 3 1운동(충남 천안 병천시장) 이수희 학생 추정 배화여학교 기숙사 만세운동 윤경옥 학생 추정 배화여학교 기숙사 만세운동 최란씨 학생 추정 배화여학교 기숙사 만세운동 왕종순 학생 추정 배화여학교 기숙사 만세운동 박하경 학생 추정 배화여학교 기숙사 만세운동 소은숙 학생 배화여학교 기숙사 만세운동 안희경 학생 추정 배화여학교 기숙사 만세운동 김마리아 학생 추정 배화여학교 기숙사 만세운동 성혜자 학생 추정 배화여학교 기숙사 만세운동 손영선 학생 추정 배화여학교 기숙사 만세운동 김경화 학생 추정 배화여학교 기숙사 만세운동 이신천 학생 추정 배화여학교 기숙사 만세운동 김성재 학생 추정 배화여학교 기숙사 만세운동 소은명 학생 추정 배화여학교 기숙사 만세운동 안옥자 학생 추정 배화여학교 기숙사 만세운동 지은원 학생 배화여학교 기숙사 만세운동 박경자 학생 추정 배화여학교 기숙사 만세운동 이용녀 학생 추정 배화여학교 기숙사 만세운동 문상옥 학생 추정 배화여학교 기숙사 만세운동 한수자 학생 추정 배화여학교 기숙사 만세운동 박신삼 학생 추정 배화여학교 기숙사 만세운동 박양순 학생 추정 배화여학교 기숙사 만세운동 김의순 학생 추정 배화여학교 기숙사 만세운동 이남규 학생 추정 배화여학교 기숙사 만세운동 신관빈 목사 1920.추정 3 1운동(개성) 박정선 전도사 1920.추정 3 1운동(안국동 광장 만세운동) 이신애 전도사 1920.추정 3 1운동(안국동 광장 만세운동) 송봉우 북풍회, 공산주의운동 김영희 근우회 김영문 고등계수배용 조성은 고등과수배용, 흥사단 백정호 고등계수배용 이순섬 고등과수배용 노함풍 교원 조선공산당 유덕희 근우회 강정희 근우회 이영자 학생 서울시내 여학생 만세운동

177 해제 44 이순옥 서울시내 여학생 만세운동 송계월 여자상업 3년생 서울시내 여학생 만세운동 최복순 이화여고보 년생 서울시내 여학생 만세운동 최윤숙 학생 서울시내 여학생 만세운동 김진현 이화여고보 4년생, 교생 서울시내 여학생 만세운동 조금옥 숙명여고보 4년생 서울시내 여학생 만세운동 안갑남 동덕여고보 4년생 서울시내 여학생 만세운동 최현수 이화여고보 3년생 서울시내 여학생 만세운동 안임순 이화여고보 3년생 서울시내 여학생 만세운동 윤옥분 이화여고보 3년생 서울시내 여학생 만세운동 민금봉 이화여학교 생도 서울시내 여학생 만세운동 최정옥 학생 서울시내 여학생 만세운동 이리타 고등수배 허정숙 기자 근우회 김덕순 학생 서울시내 여학생 만세운동 한정희 학생 서울시내 여학생 만세운동 정형길 학생 조선공산당 박선숙 학생 서울시내 여학생 만세운동 주보배 조선공산당 박숙용 근우회 고사찰 조선공산당 이원봉 학생, 여공 근우회 김화순 미상 박성녀 근우회 최상화 간도공산당 사건 석경덕 공산주의운동, 중국공산당 연계 신경애 근우회 정종명 산파 북풍회, 공산주의운동 김계향 학생 서울계공산당 재건 임순득 학생 이재유일파 적화후계사건 조숙현 학생 서울시내 여학생 만세운동 이정순 이재유일파 적화후계사건

178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76 김만순 여공 서울계공산당 재건 김경애 교원 근우회 전숙희 이화여고맹휴 이미순 미상 박진홍 경성노조, 이재유 전근숙 간도공산당 사건 수판수혜 기자(문호사) 공산주의운동 고수복 버스차장 부영버스 파업, 노동운동 조신녀 공산주의운동, 중국공산당 연계 황흥임 여공 공산주의운동 이순금 경성노조, 이재유 남영실 급사 미상 이설혜 미상 남인희 미상 임춘자 조선공산당 함귀래 간호부, 산파 조선공산당, 신간회 김월옥 타이피스트 이재유일파 적화후계사건 박호진 미상 김명순 이재유일파 적화후계사건 강정신 경성노조, 이재유 맹계숙 고무여공 경성노조, 이재유 정계원 화신백화점 점원 미상 이예분 직공 경성노조, 이재유 이경선 여공 이재유일파 적화후계사건 김현 경성노조, 이재유 이정숙 여공 경성노조, 이재유 강혜숙 조선공산당 오일순 동덕여고교사 경성노조, 이재유 경석호 노동 미상 신명예 여공 미상 박소순 여공 경성노조, 이재유

179 해제 107 최화순 조사공녀 ( 朝 糸 工 女 ) 이재유일파 적화후계사건 최승원 간호부 경성노조, 이재유 노숙인 학생 경성노조, 이재유 김상석 근우회 최복동 의열단 허균 고무공장직공 1935.추정 근우회 김조이 공산주의운동, 중국공산당 연계 이갑문 학생 이재유일파 적화후계사건 심계월 이재유일파 적화후계사건 이효정 경성노조, 이재유 유해길 여급 이재유일파 적화후계사건 강귀남 여급 경성노조, 이재유 남궁경순 무궁화노래 전파 김영원 이재유일파 적화후계사건 김재선 학생 이재유일파 적화후계사건 김성남 농업 미상 이병희 경성노조, 이재유 홍종례 여급 경성노조, 이재유 최경창 여급 경성노조, 이재유 박온 이재유일파 적화후계사건 이옥란 경성노조, 이재유 전선녀 백백교 사건 김천고성 천황숭배 거부 안순임 미상 한계순 미상 김성녀B 신사참배거부(등대사 사건) 서병인 신사참배거부(등대사 사건) 김규옥 신사참배거부(등대사 사건) 김완흥 신사참배거부(등대사 사건) 황학열 신사참배거부(등대사 사건) 이운경 신사참배거부(등대사 사건) 김봉녀 신사참배거부(등대사 사건) 옥정상 미상 심재순 여공 경성노조, 이재유 박순임 여공 미상 정갑복 여공 미상

180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144 채정희 여공 미상 이정남 여공 미상 최광순 여공 미상 황영임 여공 미상 민인숙 여공 미상 차양순 여공 미상 조복애 숙명여 고보생 미상 이경희 공산주의 운동 박계남 여호와의 증인 신사참배거부 (등대사 사건) 현금열 미상 조순이 여호와의 증인 신사참배거부 (등대사 사건) 김복순 여호와의 증인 신사참배거부 (등대사 사건) 이황월 미상 계화성 선교사 미상 윤금자 이재유일파 적화후계사건 박입분 국가총동원법 위반 박정식 국가총동원법 위반 강간난 사행상 국가총동원법 위반 안순이 사행상 국가총동원법 위반 허분적 미상 허연죽 미상 김씨 직물상 국가총동원법 위반 고강순 교원 (소학교) 천황숭배 거부 김성녀A 국가총동원법 위반 이기순 국가총동원법 위반 오창례 국가총동원법 위반 이현애 국가총동원법 위반 유채옥 국가총동원법 위반 김귀현 국가총동원법 위반 오순이 국가총동원법 위반 박춘도 국가총동원법 위반 최용자 국가총동원법 위반 박오매 국가총동원법 위반 이옥덕 국가총동원법 위반 백선옥 국가총동원법 위반 김모개 미상 미상 216

181 해제 셋째, 사진 보존원판 번호가 연속적으로 이어지고, 사진 촬영 날짜가 동일한 인물들은 서 로 동일사건으로 수감되었거나 관련이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따라서 그들을 그룹화하여 항 일투쟁의 활동 유형별로 표 16 과 같이 분류가 가능하다. 그룹 인 물 항일 투쟁 유형(수감사유) A B <표 16> 여성 수감자의 항일투쟁 유형(사진 보존원판 번호순) 김순호 이신도 노순경 임명애 신관빈 어윤희 유관순 이수희 윤경옥 최란씨 왕종순 박하경 소은숙 안희경 김마리아 성혜자 손영선 김경화 이신천 김성재 소은명 안옥자 지은원 박경자 이용녀 문상옥 한수자 박신삼 박양순 김의순 이남규 3 1운동 서울 종묘(세브란스 간호사) 파주 개성 천안 병천 배화여학교 만세운동 C 박정선 이신애 3 1운동, 서울 안국동 D 이영자 이순옥 송계월 최복순 최윤숙 김진현 조금옥 안갑남 최현수 안임순 윤옥분 민금봉 최정옥 김덕순 한정희 69 정형길 박선숙 서울 시내 여학생 만세운동 70 E 조성은 백정호 흥사단 관련, 고등과 수배용 카드 F 노함풍 유덕희 강정희 근우회 G 김계향 임순득 조숙현 이정순 김만순 서울계공산당 재건, 이화여고 맹휴 H 이미순 박진홍 경성노조, 이재유 관련 I 조신녀 황흥임 공산주의 운동 J 남영실 이설혜 남인희 미상 73 K 임춘자 함귀래 조선공산당, 신간회 L 김월옥 박호진 김명순 강정신 맹계숙 정계원 이예분 이경선 김 현 이정숙 강혜숙 오일순 경석호 신명예 박소순 최화순 경성노조, 이재유 관련 M 최승원 노숙인 경성노조, 이재유 관련 217

182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74 N 이효정 유해길 강귀남 경성노조, 이재유 관련 O 김영원 김재선 경성노조, 이재유 관련 P 이병희 홍종례 최경창 박 온 이옥란 경성노조, 이재유 관련 Q 안순임 한계순 미상 R S T 김성녀B 서병인 김규옥 김완흥 황학열 이운향 김봉녀 옥정상 심재순 박순임 정갑복 채정희 이정남 최광순 황영임 민인숙 차양순 박정식 강간난 안순이 김귀현 이현애 신사참배 거부 운동 미상 국가총동원법 위반 인원합계 : 119명(여성 수감자 180명 대비 66.11%) * 표 15 에서 사진 보존원판 번호가 연속하여 이어진 인물들을 그룹화하고, 그들의 행적을 추적하여 분류하였음. 동일한 사건으로 수감된 인물들을 분류하면 표 16 의 A그룹에서 T그룹까지 20가지의 유 형으로 나눌 수 있다. 운동의 종류별로 크게 3 1운동(1920년대 만세운동 포함)과 1930년대 광주학생운동 지지 만세운동(A, B, C, D), 흥사단(E), 근우회(F) 75, 서울계공산당 재건 76 및 68 매일신보, , 세브란스 병원 간호부 4명 판결언도 ; <노순경 등 경성지방법원 판결문, <학생공산당조직 계획에 관한 건>, 용산경찰서, 조선중앙일보, , 이재유 애인 박지홍 등 심문. 71 <조신녀 등 공산주의운동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 동아일보, , 함남 고원 김명섭, 조신녀 검거. 72 조선중앙일보, , 개성공산당사건 11명 공판 개정. 73 동생 함홍래에 의하면 누이가 평소 신간회 노래를 즐겨 불렀다고 한다. 함홍래 증언. 74 동아일보, , 송국된 적색노조 12명 예심회부. 75 동아일보, , 근우회 중앙위원회 중앙집행위원. 76 <서울계공산당 재건설계획 검거의 건>, 경기도 경찰부,

183 해제 이화여고 맹휴 77 (G), 조선공산당 재건 그룹 관련 노동, 학생운동(H, L, M, N, O) 78, 신사참배 거부(R), 국가총동원 거부(T), 공산주의 운동(I), 조선공산당, 신간회(K) 79 등 9가지로 볼 수 있다. 개인적인 활동으로 간도공산당 사건(전근숙 80, 최상화 81 ), 의열단 활동(최복동 82 ), 무궁화 노 래 전파(남궁경순 83 ), 북풍회(송봉우, 정종명 84 ), 천황 모독 및 숭배거부(고강순, 김천고성 85 ), 부영버스 파업(고수복) 등이 있다. 자료가 발견되지 않은 미상 가운데 Q그룹의 안순임과 한계순은 같은 고향 출신(함경북도 성진시 학동)이고 20대 초반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수감되었으며, 두 사람의 사진 촬영일 ( ), 언도일( ), 형량(2년 6개월)이 같은 것으로 보아 동일 사건으로 함께 수감된 것으로 추정된다. S그룹은 9명의 주소가 모두 서울 휘경동 189번지로 동일한 것으로 보아 공장 기숙사에 함께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며, 노동운동 참여자들로 보인다. 이와같이 수형기록카드의 정보 분석을 통해 여성 수감자들의 특징과 항일투쟁 활동을 주 요 유형으로 그룹화하여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사진 보존원판 번호의 특성을 활용하여 여성 수감자 사이의 상호 관계를 파악할 수 있으며, 그 행적 추적도 가능하였다. 이는 추후 서대 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여성 독립운동가의 행적을 밝히는 데 유용한 연구 방법론이 될 것이다 운동 관련 여성 수형기록카드 수형기록카드가 남아있는 서대문형무소 여성수감자 180명 가운데 3 1운동 관련인물들은 총 33명이 확인된다. 수감자 전원에 대한 수형기록카드가 남아 있지 않고 일부만 발견되었 77 <사립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생도 맹휴에 관한 건>, 서대문경찰서, <경성사건 재건운동 검거에 관한 건>, 용산경찰서, ; <이재유일파 적화공작후계조직 검거>, 경기도 경찰부, ; 매일신보, , 경성좌익노조사건 12명 공판회부 ; <조선공단산재건운동 협의 사건>, 사상휘보, ; <조 선공산당재건 경성 준비 그룹 사건>, 경기도 경찰부, <조선공산당재건동맹사건 발각 건>, 서대문경찰서, 신한민보, , 간도사건 제6회 기소. 81 조선중앙일보, , 중국 공당관계 최상화 출감. 82 <의열단 관계 불령선인 검거의 건>, 경성 본정 경찰서, ; <최복동 신문조서>, 경성 본정 경찰서, <남궁경순 신문조서>, 홍천경찰서, <북풍회 창립총회에 관한 건>, 종로경찰서, <고강순 경성복심법원 판결문>,

184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연번 성명 이명 생년월일 <표 17> 3 1운동 관련 서대문형무소 수감 여성 독립운동가 수형기록카드 내용 수감당시 나이(세) 신장 (cm) 지문번호 본 적 출생지 거주지 신분 직업 1 김순호 김효순 황해 재령군 재령면 향교리 황해 재령군 재령면 향교리 경성 남대문정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 부속 간호부 양성소 기숙사 경성 남대문정 세브란스병원 2 이신도 이도신 평북 강계 강계 동부 862 평북 강계 강계 동부 862 의학전문학교 부속 간호부 양성소 기숙사 경성 남대문정 세브란스 3 노순경 황해 송화 풍천 풍천 성하20 황해 송화 풍천 풍천 성하20 연합의학전문학교 부속 간호부 양성소 기숙사 4 임명애 경기 파주 와석면 교하리 578 경기 파주 와석면 교하리 578 평민 평민 평민 간호부 간호부 간호부견습 경기 파주 와석면 교하리578 평민 농민 5 어윤희 경기 개성 송도 동본 100 충북 충주 황해 금천 금탄 매계 62 양반 6 유관순 충남 천안 동면 용두 충남 천안 동면 용두 충남 천안 동면 용두 평민 정동여자고등 보통학교생도 7 이수희 경성 용산 한강통 경성 용산 한강통 경성 배화여학교 기숙사 평민 학생 8 윤경옥 강원 춘천 신북 천전 강원 춘천 신북 천전 경성 배화여학교 기숙사 양반 학생 9 최난씨 경기 가평 상 행현 818 경기 가평 상 행현 818 경성 배화여학교 기숙사 평민 학생 10 왕종순 강원 철원 철원 월하 52 강원 철원 철원 월하 52 경성 배화여학교 기숙사 평민 학생 11 박하경 경성 인사 199 경성 인사 199 경성 배화여학교 기숙사 평민 학생 12 소은숙 경기 연천 군내 남계 109 경기 연천 군내 남계 109 경기 연천 군내 남계 109 학생 13 안희경 경기 포천 소흘 이동교140 경기 포천 소흘 이동교140 경성 배화여학교 기숙사 평민 학생 14 김마리아 경기 포천 이동면 노곡 1198 경기 포천 이동면 노곡 1198 경성 배화여학교 기숙사 평민 학생 15 성혜자 경성 행촌동162 경성 종로 경성 배화여학교 기숙사 평민 학생 16 손영선 황해 장연 속달 태탄6 황해 장연 속달 태탄6 경성 배화여학교 기숙사 평민 학생 17 김경화 강원 양양 사현 광석83 강원 양양 사현 광석83 경성 배화여학교기숙사 양반 학생 18 이신천 황해 장연 속달 태탄 8 황해 장연 속달 태탄 8 경성 배화여학교 기숙사 평민 학생 19 김성재 황해도 장연군 읍내리 17 황해도 장연군 읍내리 17 경성 배화여학교 기숙사 평민 학생 20 소은명 경기 연천 군내 포은192 경기 연천 군내 남계 109 경기 연천 군내 남계 109 평민 학생 21 안옥자 경기 포천 소흘 이동교 203 경기 포천 소흘 이동교 203 경성 배화여학교 기숙사 양반 학생 22 지은원 강원 춘천 신남 송암 222 강원 춘천 신남 송암 222 강원 춘천 신남 송암 222 상민 학생 23 박경자 강원 김화 금성 방충 강원 김화 금성 방충 경성 배화여학교 기숙사 평민 학생 24 이용녀 황해 장연 속달 태탄 22 황해 장연 속달 태탄 22 경성 배화여학교 기숙사 양반 학생 25 문상옥 경북 김천 본소요 봉계 경북 김천 김천 황금정75-7 경성 배화여학교 기숙사 양반 학생 26 한수자 강원 양구 양구 중리 50 강원 양구 양구 북면 서호 경성 배화여학교기숙사 평민 학생 27 박신삼 충북 충주 산척 원월 평북 철산 읍내 경성 배화여학교 기숙사 양반 학생 28 박양순 경기 시흥 북 노량진 177 경기 시흥 북 노량진 177 경성 배화여학교 기숙사 평민 학생 29 김의순 경성 필운동 18 경성 남대문정 1정목 경성 배화여학교 기숙사 평민 학생 30 이남규 강원 통천 학이 화통 3통 5호 강원 통천 학이 화통 3통 5호 경성 배화여학교 기숙사 평민 학생 31 신관빈 신관채 황해 봉산 서종 동둔 황해 봉산 서종 동둔 경기 장단 대남 장좌 706 평민 목사 32 박정선 서울 동사헌 전도사 33 이신애 평북 구성 전도사 220

185 해제 죄명 형명형기 언도연월일 형의시작 언도재판소 집행감옥 출소연월일 사진 촬영일 분 류 공훈여부 특이사항 보안법 위반 징역 6월 경성지방법원 서대문감옥 운동(서울 종묘) 2015년 대통령표창 세브란스 간호사 366 사진 보존원판 번호 보안법 위반 징역 6월 경성지방법원 서대문감옥 운동(서울 종묘) 2015년 대통령표창 세브란스 간호사 367 보안법 위반 징역 6월 경성지방법원 서대문감옥 운동(서울 종묘) 1995년 대통령표창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세브란스 간호사 노백린 차녀 징역 1년 6월 경성지방법원 서대문감옥 운동(파주 교하리) 1990년 애족장 369 보안법 위반 징역 1년 6월 경성지방법원 서대문감옥 운동(개성) 1995년 애족장 보안법 위반 소요 징역 3년 경성지방법원 서대문감옥 운동(충남 천안 병천) 1962년 독립장 371 보안법 위반 징역 1년 경성지방법원 배화여학교 만세운동 집행유예 3년 515 보안법 위반 징역 6월 경성지방법원 배화여학교 만세운동 집행유예 2년 516 보안법 위반 징역 6월 경성지방법원 배화여학교 만세운동 집행유예 2년 517 보안법 위반 징역 6월 경성지방법원 배화여학교 만세운동 집행유예 2년 518 보안법 위반 징역 3월 경성지방법원 서대문감옥 배화여학교 만세운동 집행유예 2년 519 보안법 위반 징역 6월 경성지방법원 배화여학교 만세운동 집행유예 2년 520 보안법 위반 징역 6월 경성지방법원 배화여학교 만세운동 집행유예 2년 521 보안법 위반 징역 6월 경성지방법원 배화여학교 만세운동 집행유예 2년 522 보안법 위반 징역 6월 경성지방법원 배화여학교 만세운동 집행유예 2년 523 보안법 위반 징역 6월 경성지방법원 배화여학교 만세운동 집행유예 2년 524 보안법 위반 징역 1년 경성지방법원 배화여학교 만세운동 집행유예 3년 525 보안법 위반 징역 6월 경성지방법원 배화여학교 만세운동 집행유예 2년 526 보안법 위반 징역 6월 경성지방법원 배화여학교 만세운동 집행유예 2년 527 보안법 위반 징역 6월 경성지방법원 배화여학교 만세운동 집행유예 2년 528 보안법 위반 징역 6월 경성지방법원 배화여학교 만세운동 집행유예 2년 529 보안법 위반 징역 6월 경성지방법원 배화여학교 만세운동 집행유예 2년 530 보안법 위반 징역 6월 경성지방법원 배화여학교 만세운동 집행유예 2년 531 보안법 위반 징역 6월 경성지방법원 배화여학교 만세운동 집행유예 2년 532 보안법 위반 징역 6월 경성지방법원 배화여학교 만세운동 집행유예 2년 533 보안법 위반 징역 6월 경성지방법원 배화여학교 만세운동 집행유예 2년 534 보안법 위반 징역 6월 경성지방법원 배화여학교 만세운동 집행유예 2년 535 보안법 위반 징역 6월 경성지방법원 배화여학교 만세운동 집행유예 2년 536 보안법 위반 징역 6월 경성지방법원 배화여학교 만세운동 집행유예 2년 537 보안법 위반 징역 6월 경성지방법원 배화여학교 만세운동 집행유예 2년 538 보안법 위반 징역 1년 경성지방법원 서대문감옥 운동(개성) 2011년 애족장 560 보안법범 징역 1년 서대문감옥 운동(서울 안국동) 2007년 애족장 851 보안법범 징역 3년 서대문감옥 운동(서울 안국동) 1963년 독립장

186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기 때문에 33명이 전부가 아니고, 이 외에도 많은 인물들이 수감되었음을 타 자료를 통해 확 인되고 있다. 판결문 등을 통해 확인된 인물들에 대해서는 위 편에서 살펴보았으므로 본 장 에서는 수형기록카드가 발견된 서대문형무소 수감 인물에 대해서만 살펴보고자 한다. 운동 계열별로 살펴보면 우선 각지에서 3 1운동을 펼치다가 수감되었던 어윤희( 魚 允 嬉 ) 와 신관빈( 申 寬 彬, 개성), 유관순( 柳 寬 順, 천안 병천), 임명애( 林 明 愛, 파주), 박정선( 朴 貞 善 ) 과 이신애( 李 信 愛, 서울 안국동)가 있다. 다음으로 세브란스 병원 간호사 노순경( 盧 順 敬 ), 김 순호( 金 順 好 ), 이신도( 李 信 道 ) 3명의 서울 종묘 앞 만세운동 주동사건이 있다. 마지막으로 1920년 3 1운동 1주년 기념 투쟁을 전개하였던 이수희, 김경화 등 24명의 배화여학교 여학 생 만세운동이 있다. 각 인물의 수형기록카드에 기록된 세부 정보는 다음 표 17 과 같다. 1) 각지의 만세운동 3 1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여성 독립운동가 가운데 수형기록카드가 남아 있는 인물 중 각 지역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인물로 어윤희와 신관빈, 임명애, 유관순, 박정 신과 이신애가 있다. 어윤희와 신관빈은 개성 지역 3 1운동을 주도하다가 피체되었다. 어윤희는 기독교 남감 리교 전도사로서, 1919년 2월 26일 개성 시내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기숙사에서 권애라로 부터 독립선언서 80여 매를 받아 개성 지역 주요 인사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성경학원 기숙사에서 독립선언서 2,000여 부를 인쇄하여 1919년 3월 1일 2시경부터 개성 시 내 각지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여 3월 3일 1,500여 명이 참여한 개성 만세운동을 주도하 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때 목사였던 신관빈도 함께 참여하여 개성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두 사람은 피체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1919년 4월 1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1년 6개월 형을 받았다. 86 그리고 어윤희는 1919년 7월 4일 경성복심법원 항소심에 서 초기 형량보다 높은 3년을 선고 받았다. 같이 주도한 권애라는 판결문을 통해 수감사실은 86 어윤희, 신관빈 경성지방법원 판결문,

187 해제 확인되나 수형기록카드는 발견되지 않았다. 임명애는 구세군 사령의 부인으로 1919년 3월 10일 경기도 파주군 와석면 교하리 공립보 통학교에서 학생 100여 명을 모아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지역에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한 격문을 주민들에게 배포하여 1919년 3월 26일 700여 명의 군중이 모이게 하여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파주 일대 만세운동의 주동자로 피체되어 1919년 9월 29일 소위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으로 1년 6개월을 받았다. 87 그런데 그는 피체 당시 임신상태였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 1919년 10월 보석으로 잠시 풀려나 출산을 하고 11월 다시 수감생활을 하였다. 88 당시 수감중 출산한 신생아의 경우 옥 중에서 1년간 양육이 가능하였다. 유관순과 같은 감방을 썼던 그녀의 회고에 의하면, 겨울철 추운 감방안에서 귀저기가 얼어 잘 마르지 않자 유관순이 언 귀저기를 몸에다 감아 차고 녹 여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박정선과 이신애는 기독교 전도사로서 대동단( 大 同 團 )에 가입하여 활동 중, 대동단의 제2 차 독립선언계획에 참여하였다. 이에 두사람은 제2차 독립선언의 독립선언문에 여성대표로 참여하였고, 1919년 11월 28일 서울 안국동 광장에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하면서 만 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으로 피체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대동단 관련 재 판과 함께 연루되어 장기간 미결수로 있다가 1920년 12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1년형을 선고받았다. 89 유관순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919년 이화학당 재학시절 서울에서 일어난 3 1운동에 참 여하였고, 고향인 충남 천안군 병천면(아우내)에 내려가 1919년 4월 1일 아우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일로 그의 부모가 현장에서 순국하였으며, 그도 옆구리를 칼로 찔리는 부상 을 당했다. 결국 피체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선고받자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고, 이에 따라 서울로 이감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0년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 서 3년형을 받고 다시 상고하였으나 그해 9월 11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었다. 이들은 모두 3 1운동으로 수감되었으나, 운동의 시기는 각각 다르고 입감 시기도 각각 다 87 임명애 경성지방법원 판결문, 이정은, 3 1운동의 얼 유관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0, 28~29쪽. 89 전협 등 판결문,

188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르다. 다만 사진 보존원판 번호 369번 임명애, 370번 어윤희, 371번 유관순의 사진 배경이 감옥 창살 아래 벽돌건물로 모두 같은 것으로 보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사진을 찍었고, 일제는 이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연번을 부여한 것으 로 보인다. 상대적으로 사진 보존원판 번호가 분리된 560번 신관빈은 사진 배경이 나무 건물인 것으 로 보아 이들과 별도로 촬영한 것이다. 사진 보존원판 번호 851번 박정선, 852번 이신애는 입감 시기가 상대적으로 늦기 때문에 연번이 위 인물들과 떨어져 있다. 그러나 두 사람 역시 연속된 번호로 같은 사건으로 수감되었음과 사진의 배경으로 보아 두 사람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촬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유관순과 어윤희, 신관빈은 서대문형무소 여옥사(여구치감) 8호 감방에 함께 수 감되었다. 이때 같이 수감된 인물은 유관순, 어윤희, 신관빈과 더불어 권애라, 임명애, 김향 화, 심명철 총 7명으로 확인된다. 여옥사 8호 감방에 수감되었던 이들은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경 유관순, 어윤희의 주도 로 3 1운동 1주년 옥중투쟁을 함께 전개하였다. 여옥사에서 울려 퍼진 만세의 함성은 모든 여옥사는 물론 남옥사에까지 번져 서대문형무소 모든 옥사의 만세운동으로 발전되어 일제를 당혹하게 하였다. 90 이로 인하여 유관순은 심한 고문에 시달렸다. 그의 수형기록카드상 사진은 이때 왼쪽안면 부위를 손바닥과 주먹으로 집중적으로 20여 차례 이상 가격 당한 며칠 후 촬영된 것이다. 따 라서 그의 얼굴, 특히 왼쪽 뺨은 5~6mm가량이 부어 오른 안면부종( 顔 面 浮 腫 )인 상태였고, 코 안도 부어서 제대로 숨을 쉴 수 없는 호흡곤란 때문에 사진을 촬영할 때도 입을 약간 벌리 고 있는 모습으로 찍었던 것이다. 사진을 보다 확대하여 보면 왼쪽 눈 부위의 충혈도 확인할 수 있다. 91 이러한 상황에서의 촬영으로 유관순의 얼굴은 좌우의 비례가 맞지 않는 비대칭의 모습으로 찍혔다. 따라서 18세 소녀 유관순 평소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때 여성 수감자들의 혹독한 감옥생활과 처우는 신관빈의 회고를 통해 볼 수 있다. 그는 90 이정은, 3 1운동의 얼 유관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0, 32~37쪽. 91 조영진, 박경목, 박진호, 최원호, 유관순 얼굴의 3D 디지털 복원과 활용방안, 충청문화연구 13,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168~172쪽. 224

189 해제 옥중에서는 마룻바닥에 다다미를 깔고 그 위에서 자는데, 사람 4명에 일본 이불 하나씩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추운지 몸이 모두 얼어서 죄다 터지고 아파 차마 견딜 수 없었습 니다. 라고 하여 겨울철 난방도 되지 않는 싸늘한 감방에서 추위에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상 황이었음을 회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보다도 더 힘들었던 것은 일본인 간수들의 가혹 한 태도였다. 신관빈은 그러한 중 더욱이 간수의 가혹한 품( 品 ; 태도)은 무엇이라 말하여야 옳은지, 그도 사람인가, 인정을 가진 동물인가 의심할 만큼 냉혹하였습니다. 물론 그 속에서 하고 지내는 품이나 대우받은 것은 사람으로서는 받지 못할 만큼 망측한 것 이었습니다 라 고 하여 감옥에서의 처우가 망측 이라고 표현할 만큼 가혹했던 것을 알 수 있다. 92 이러한 상황에서 유관순은 1920년 3월 1일 옥중 만세운동의 주동자로 가혹한 고문을 당해 결국 1920년 9월 28일 감옥 안에서 옥사, 순국하고 말았다. 그러나 수형기록카드의 출옥연 월일 기재란에 그녀의 출옥일은 1921년 1월 2일로 기록되어있다. 1919년 7월 4일 경성복심 법원에서 3년형을 받았으나 1920년 4월 28일 영친왕과 일본 왕실과의 결혼을 기념한 사면 령으로 1/2이 감형되어 기록된 것이다. 하지만 기록과 달리 유관순은 출옥을 3개월 여 남겨 놓고 끝내 순국하고 말았다. 독립운동가에 대한, 특히 여성에게도 일말의 예외가 없었던 일제 식민지 감옥 운영과 처우 가 매우 엄혹( 嚴 酷 )하였던 것이다. 2) 세브란스 간호사 만세운동 일제 강점기 남대문에 위치하였던 세브란스 병원의 간호사로 근무하였던 노순경, 김순호, 이신도, 박덕혜는 기독교인으로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고 3 1운동에 동조하였다. 이 가운데 노순경, 김순호, 이신도의 수형기록카드가 발견되었고 그 기록에 의하면 거주지는 경성 남 대문정 세브란스병원 의학전문학교 부속 간호부 양성소 기숙사 로 되어 있어 함께 간호사로 활동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1919년 12월 2일 종로구 훈정동 대묘( 大 廟 ; 종묘 宗 廟 )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전개한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에 참여하기 위해 미리 깃발을 준비하였다. 태극기 92 동아일보, ( 일제하 옥중회고록2-그 분노의 기록들, 박대희 편, 정음사, 1977, 175~176쪽). 225

190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로 만든 깃발 1기와 붉은 글씨로 조선독립만세 라고 쓴 깃발 1기, 총 2개의 기( 旗 )를 만들어 1919년 12월 2일 오후 7시 경 종묘앞으로 향하였다. 그곳에서 2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 세를 부르며, 노순경은 태극기를 들고 김순호는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기를 휘두르며 군중들을 독려하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박덕혜도 동료로서 함께 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93 이 일로 4명은 일제 경찰에 피체되어 1919년 12월 18일 경성지방법원 2호 법정에서 카나가 와(금천 金 川 ) 판사가 각 6월 구형하였다. 죄명은 소위 대정 8년 제령 제7호 위반 이었다. 이 에 불복하여 다시 항소하였으나 경성복심법원에서 동일한 형량을 받았다. 94 이들의 수형기록카드 사진 보존원판 번호가 366번 김순호, 367번 이신도, 368번 노순경 으로 연속하여 기입되어 동일 사건으로 수감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활동으로 노 순경은 그 공적을 인정받아 1995년 대통령표창을 서훈 받았다. 노순경은 노백린( 盧 伯 麟, 1875~1926)의 둘째딸로 익히 알려져 인물로 공적을 인정받는데 일정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김순호, 이신도는 수형기록카드상 이름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 )상의 이름이 명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김순호는 수형기록카드 상에는 김효순( 金 孝 順 ), 김순호( 金 淳 好 )라고 기재되어 그간 김순호로 알려져 있으나 판결문에는 김효순만 기록되어 있다. 이신 도 역시 수형기록카드에는 이도신( 李 道 信 ), 이신도( 李 信 道 )라고 기재되어 있어 그간 이신도 로 많이 알려졌으나 판결문에는 이도신만 기록되어 있어 판결문 상에는 이신도가 확인되지 않았다. 다행히 2015년 김순호(김효순)과 이신도(이도신)도 노순경과 함께 전개한 3 1운동 의 공적을 인정받아 공훈이 추서되었다. 그러나 수형기록카드가 확인되지 않는 박덕혜( 朴 德 惠 )는 아직까지 그 공적을 인정받지 못 하였다. 수형기록카드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판결문에 노순경, 김순호, 이신도와 함께 활동 상이 기재되어 있어 3 1운동의 행적이 분명하다. 수형기록카드와 판결문에서 이들의 만세 운동이 확인되고, 공적을 인정받은 노경순 등과 함께 활동하였으므로 박덕혜의 공적에 대해 서도 향후 적극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93 <노경순, 이도신, 김효순, 박덕혜 경성지방법원 판결문>, 매일신보 보안법 위반범 4명은 각 징역 6개월 ; 소요범 4명 제1심에 불복하고 다시 공소신립. 226

191 해제 3) 배화여학교 만세운동 1919년 3 1운동 이후 대중들의 지속적인 만세운동은 해를 넘어서도 지속되었다. 그 가운 데 배화여학교 학생이었던 이수희, 김경화 등은 독립운동에 호응하고 3 1운동 1주년을 기 념하면서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95 이에 1920년 3월 1일 오전 같은 학교 학생 들 20여 명과 함께 학교 기숙사 뒤편 언덕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고 운동장으로 내려와 조 선독립만세를 외쳤다. 96 이 일이 일제 경찰에 탐지되어 여기에 참여하였던 24명의 여학생 모 두 전격, 구속되었다. 이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이수희( 李 壽 喜 ), 김경화( 金 敬 和 ), 손영선( 孫 永 善 ), 한수자( 韓 壽 子 ), 이신천( 李 信 天 ), 김마리아( 金 瑪 利 亞 ), 안희경( 安 喜 敬 ), 안옥자( 安 玉 子 ), 윤경옥( 尹 璟 玉 ), 박하경 ( 朴 夏 卿 ), 문상옥( 文 相 玉 ), 김성재( 金 成 才 ), 김의순( 金 義 順 ), 이용여( 李 龍 女 ), 소은숙( 召 恩 淑 ),지은원( 池 恩 源 ), 박신삼( 朴 信 三 ), 최란씨( 崔 蘭 氏 ), 소은명( 召 恩 明 ), 박양순( 朴 良 順 ), 박경자( 朴 景 子 ), 성혜자( 成 惠 子 ), 왕종순( 王 宗 順 ), 이남규( 李 南 奎 ) 위 24명의 수형기록카드를 분석하여 보면 앞면의 사진 보존원판 번호가 연속적으로 이어 져 있다. 즉 앞서 표 15 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진 보존원판 번호가 연속적으로 이어진 경 우, 동일 사건으로 수감된 인물들임을 알 수 있다. 위 인물들의 나열 순서가 곧 사진 보존원 판 번호순이다. 515번 이수희, 516번 윤경옥부터 마지막 538번 이남규까지 이다. 위 인물들의 만세운동은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들의 수형기록카드가 남아있어 당 시 이 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사실을 전하고 있다. 수형기록카드의 기록에 의하면 이들의 주소는 3명을 제외하고 모두 경성 배화여학교 기숙사 로 기재되어 있다. 대부분 기숙 사에 머물면서 같은 학교인 관계 즉, 학연( 學 緣 )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이들 가운데 소은숙과 소은명은 출생지와 주소지가 경기도 연천군 군내면 남계리 109번 지 로 같다. 성과 돌림자, 주소가 같고 나이차이가 2살 있는 것으로 보아 자매 관계임을 확인 할 수 있다. 소은숙은 1903년 11월 7일생, 소은명은 1905년 6월 12일 생이다. 안희경과 안옥자는 본적과 출생지가 각각 경기도 포천군 소흘면 이동교리 140번지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2, 고려서림, 1983, 121쪽. 96 이수희 등 경성지방법원 판결문,

192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번지로 자매관계는 아니지만 같은 지역 출신임을 알 수 있다. 둘다 1902년 생으로 또래 친구 관계 또는 동족마을 친족관계로 추정된다. 이러한 경우는 손영선과 이신천, 이용녀에서도 보인다. 세 사람의 본적과 출생지는 황해도 장연군 속달면 태탄리로 손영선은 6번지, 이신천은 8번지, 이용녀는 22번지이다. 출생연도 는 손영선이 1902년생, 이신천은 1903년생, 이용녀는 1904년생이다. 황해도 장연군 속달면 태탄리는 1919년 4월 5일 12시부터 오후 2시까지 태탄리 장터일대에서 약 1,000명의 군중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지역이기도 하다. 97 이러한 지역 출신들로 그들 고향의 3 1운동을 경험하였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진학을 위해 서울로 상경한 동일 지역 출신들이 적극 호응 하여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이같이 배화여학교 학생들의 1920년 3월 1일 만세운동은 지역적 연결관계와 같은 학교 학 생이라는 점이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즉 일제 강점기에는 지연( 地 緣 )과 학연( 學 緣 )이 독립운 동을 계획하고 결속을 다지는 주요 동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수형기록카드의 기록은 그간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독립운동사의 이면을 밝히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임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는 사례이다. 한편, 배화여학교 여학생 24명은 위 독립운동으로 소위 보안법 7조, 조선 형사령 제42조 에 해당되는 보안법 범 으로 기소되었다. 1920년 4월 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주동자로 보이 는 이수희와 김경화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 나머지 22명은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 을 언도받았다. 98 그러나 안타깝게 이들의 독립운동에 대한 공적은 아직까지 인정받지 못하였다. 대부분 어 린 여학생들로 실형을 언도 받았으나 정상이 참작되어 집행유예를 받으면서 실제 옥고를 치 루지 않은 것이 주요인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이들이 만세운동을 전개한 1920년 3월 1일부 터 형량이 구형된 1920년 4월 5일까지 적어도 1개월 이상의 옥고를 서대문형무소에서 치루 었음을 수형기록카드가 증명하고 있다. 어린 여학생들의 평화로운 만세시위까지 1년 또는 6 개월의 실형을 선고할 만큼 엄혹했던 식민지 시대를 감안한다면, 금번 자료집 발간을 계로 이들 배화여학교 여학생들의 만세운동을 독립운동의 선상에서 재평가해야할 필요가 있다. 97 이규헌, 임찬규 고등법원판결문, <이수희 등 경성지방법원 판결문, ; 매일신문, , 배화여학교의 만세호창 여성, 작일 판결언도 ; 신한민 보, 배화여학교 학생들의 공판. 228

193 해제 5. 맺음말 이상 현재 보존되어 있는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의 형태를 분류하고 기재 항목의 정 보를 분석해 보았다. 이 가운데 그간 연구의 대상에 소외되었던 180명의 여성 수감자에 대해 수형기록카드를 통해 수감되었던 옥사의 형태, 출신지역, 연령대, 연대별 수감인원, 죄명과 형량, 항일투쟁의 유형, 3 1운동 참여 여성독립운동가 등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과정에서 일제의 독립운동가 수감은 그들의 식민지배 정책 변화에 따라 민감하게 변화 되었고, 특히 사상적 동향의 감시체제 강화와 전시체제로의 전환 등 민감한 시기에, 전자는 수형기록카드 양식 자체의 변화로, 후자는 식민지 초기에 비해 매우 엄격한 실형선고로 대응 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들 수형기록카드가 남아 있는 180명이 여성 수감자 가운데 정부로부터 독립운동의 공훈 을 인정받은 인물은 총 15명으로 8.33%에 지나지 않는다. 다행인 것은 3 1운동 관련 인사 들이 9명으로 절반을 넘는다는 것이다. <표 18> 여성수형기록카드 보존 여성 수감자 중 국가독립유공 서훈자 99 연번 이름 생년 공적 포상 1 고수복 부영버스 파업, 노동운동 2010애족장 2 김조이 공산주의운동, 중국공산당 연계 2008건국포장 3 노순경 운동(서울 종묘) 1995대통령표창 4 박정선 운동(서울 안국동) 2007애족장 5 신경애 근우회 2008건국포장 6 신관빈 운동(개성) 2011애족장 7 심계월 경성노조 2010애족장 8 어윤희 운동(개성) 1995애족장 9 유관순 운동(충남 천안 아우내) 1962독립장 10 이병희 경성노조 1996애족장 11 이신애 운동(서울 안국동) 1963독립장 12 이효정 경성노조 2006건국포장 13 임명애 운동(파주 교하리) 1990애족장 14 김순호(김효순) 운동(서울 종묘) 2015대통령표창 15 이신도(이도신) 운동(서울 종묘) 2015대통령표창 99 국가보훈처 공훈록 참조. 229

194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그러나 수형기록카드 해제를 통해 다루었던 주요 여성 가운데 같은 활동으로 수감되었어 도 어떤 인물은 공훈을 받았고, 어떤 인물은 받지 못하였다. 그 사례로 노순경과 함께 3 1 운동을 펼친 세브란스 간호사 박신혜 등이 있다. 1920년 3월 1일 배화여학교 만세운동의 이수희, 김경화를 비롯한 24명 또한 독립운동의 행 적이 분명함에도 공훈을 받지 못하였다. 이외 1920년대 이후에는 이러한 경우가 다반사 이다. 2015년 현재 독립운동가 포상 인원 전체 14,264명 가운데 여성에 대한 포상인원은 270명 으로 1.89%밖에 되지 않는다. 100 수형기록카드가 남아있는 인물 4,837명 대비 여성이 180명, 3.72%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여성독립운동 포상자는 적어도 전체 포상자 대비 3.72%이상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포상 인원은 전체 대비 1.89%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전체 포상자 대비 여성 포상자를 수치로 비교한다면 약 1.83%가 부족하고, 숫자로는 260 여 명 가량이 부족한 실정이다. 또 금번 해제에서는 남겨진 수형기록카드만을 분석대상으로 하였지만, 이들만이 독립운 동가로 검토할 대상 전부가 아니다. 수형기록카드의 사진 보존원판 번호 중 1944년대 말에 65,000번대까지 번호가 매겨져 있으므로 일제 강점기 서대문형무소에는 최소 65,000여 명 이상이 수감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카드에 수록된 인물이 4,800여 명으로 전체 수감인원의 8~9%정도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180명 보다는 훨씬 상회하는 숫자의 여성 독립운동가가 존재하였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현실은 수형기록카드에 수록된 여성 수감자 180명 가운데 단 15명만이 공훈을 받 고 나머지 인물들은 상세한 활동상마저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이다. 수형기록카드가 보존되 어 있는 인물들만이라도 시급히 그 행적을 밝히고 공적에 대한 검토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금번 자료집 발간을 계기로 향후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연구자들의 관심과 연구 활동이 진작되고 이를 기반으로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되찾아지길 기대해 본다 월 기준. 230

195

196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 1운동 편) 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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