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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김병로 평전 (1)* 오 선 근 1. 소모전에는 체구가 작다고 제외되지 않았을 것이고 김병로도 한 인간의 인생을 결정하는 데 언제 어디서 그가 태어났는 자기 키만한 AK 보총을 들고 어느 전선에 투입되어 인생을 마 지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 가령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함 감했을 수도 있었 그러나 다행하게도 휴전이 되었 그가 께 태어나서 자라는 대도시의 아이들은 서로 공유하는 환경이 고등학교 3학년 때였 같기 때문에 비슷한 삶을 살지도 모른 전쟁과 같은 엄청난 전쟁이 남긴 상처는 남이나 북이나 마찬가지였 남쪽에서 격랑이 몰아치고 삶과 죽음이 바로 옆 자리에서 갈라지는 시 는 남쪽대로 먹고 살기에 바빴고 북쪽에서는 북쪽대로 피폐해 대가 아니라면 그저 평탄한 삶일 수도 있 그러나 어떤 사람 진 삶을 추스르고 있었 형편은 남쪽이 조금 더 나았다고 볼 에게는 언제 어디서 그가 태어났는지가 그의 인생을 결정 수 있었 북쪽은 식량이 부족했고 복구사업에 투입될 인력도 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될 수도 있 부족했 전쟁의 와중에 남쪽으로 피난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 김병로 교수(이하 존칭 생략)는 1935년에 평양에서 태어났 당시의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남도 대동군 양화면 평리 문이 김병로의 집안은 피난하지 않고 평양에 그대로 있었 일제강점시대에 이 땅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질곡의 삶을 김병로는 1954년 대학에 입학하였 김일성대학이었 김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시대적으로는 일제강점시대와 일성대학은 주로 공산당 간부의 자제들처럼 특권층만 입학하는 육이오사변(한국동란)을 겪었 지리적으로는 남북분단이라는 대학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의문이 생겼 민족의 커다란 아픔을 겪었 그런 시대에 그런 땅에서 태어 그럼 교수님은 출신이 좋으셨습니까? 난 사람들이 살아온 인생 역정은 분명히 그 이후 60년대에 태 내가 물었었 여기서 출신이라면 공산당원이냐는 물음이었 어난 세대와는 다를 것이 그런 사람들 중에도 김병로의 인 평양 제1중학교에 제1고등학교에 아이를 보낼 정도였으면 생 역정은 더욱 남다르 왜냐하면 그는 본질적으로 고향을 집안이 빈농이거나 소작이 아니었기 때문이 그렇다고 노동 영원히 잃어버린 유랑자이기 때문이 자 출신도 아니었던 것이 1935년은 좀 아슬아슬한 해였 조금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아니야. 출신이 좋기는. 육이오사변에 끌려 나갔을 수도 있었고 태평양전쟁에 징용되었 거기는 공산당원만 들어간다고 하던데요, 을 수도 있었 그러나 1935년생이라 초등학교 때 해방을 맞 공부를 잘했다고 들어간 거지. 이하였고 중학생 때 육이오사변이 터졌 1950년 여름에 남 공부만 잘한다고 뽑아주었습니까? 쪽으로 내려간 전선은 곧 북쪽으로 밀렸고 그해 겨울에는 거 의 압록강까지 전선은 올라갔 중국이 참전하자 전선은 다시 그야 명색이 대학인데 공부 잘하는 학생들도 몇몇 있어야 지. 남쪽으로 내려가서 38도 분단 경계선 부근에서 교착상태에 빠 야... 그렇군요... 그렇다면 진짜로 공부를 잘하셨군요. 졌 그리고 두 해 뒤인 1953년에 휴전이 되었 나는 의문이 좀 남았 전쟁 발발 이듬해에 김병로는 고등학생이 되었 공부를 잘 했기 때문에 평양 제1중학교와 제1고등학교를 다녔 그러나 그래도 학생들은 모두 공산당원이거나 공산당원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모든 고등학생들은 전쟁의 회오리 속에 당원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고.. 특별한 신분이니까.. 서 군사훈련을 받았 공부는 뒷전이었 같은 김일성대학 학생이라고 똑같은 신분이 아니고 차이가 김병로는 체구가 작았 워낙 자그마한 몸매라 군대에 가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만일 휴전이 되지 않고 전쟁이 계속되었 더라면 김병로도 군대에 입대하였을 것이 한없이 질질 끄는 저자약력 오선근 교수는 한국과학기술원 이학박사로서(1981), 영국 Oxford 대학교 (1983-84) 및 독일 Aachen 공대 방문연구(1990-91)를 하였고, 현재 건 국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물리학회 APCTP 한국위원회 위원 장으로 활동 중이(sunkun@konkuk.ac.kr) 있다는 말이었 그때는 그랬어.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했지. *김병로 평전에 부쳐 본 글은 김병로 교수님 생전에 오랜 동안 함께 연구하셨던 건국대학교 오선근 회원님이 페이스북에 연재하신 글입니 분단이라는 비극적인 상황 때문에 해 외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인 물리학자에 대한 특별한 기록이라서 물리 학회에서 보관할 가치가 있는 글이라 생각되었습니 물리학과 첨단기술에 본 원고를 싣도록 허락해주신 오선근 회원님께 감사드립니 글의 길이가 다소 길 어서 두 번에 나눠서 게재했습니 물리학과 첨단기술 JANUARY/FEBRUARY 20 1 6 45

그때 남쪽은 미국의 도움으로 구호물자들이 들어오면서 전쟁 의 폐허를 지우고 있었고 북쪽은 소련의 도움으로 복구사업을 하고 있었 1인당 국민소득을 돌이켜 보면 당시의 경제사정 은 오늘날과 반대로 북쪽이 더 나았 일제강점시대에 북쪽에 수풍발전소와 흥남비료공장 등 공업시설을 건설한 반면 남쪽은 전형적인 1차 산업인 농업에 치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쟁 직 후의 형편은 북쪽이 그나마 덜 힘들었 경제사정이 좀 나아 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북한에서는 김일성대학에 다니던 학생들 을 선발하여 소련과 동독으로 유학을 보냈 대학 1학년인 김 병로도 선발되었 공부를 잘 하시긴 정말 잘 하신 모양이네요,, 하하 못하진 않았지.. 하하 김일성 정권의 태도는 전혀 뜻밖이었 한 사람의 인력이라 도 더 재건의 현장에 투입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국가유 학생을 선발해 보낸다는 것은 엄청난 결심이었을 것이 그렇다면 김일성이 자기 국민에게 잘한 일도 있었군요. 오로지 독재자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김일성의 다른 면모 를 발견한 것 같아서 나는 속으로 좀 놀랐 그러나 김병로의 회고는 달랐 꼭 그런 게 아니라고 볼 수 있어. 소련에서 사람들을 보내 라고 요구했을 수도 있으니까. 북한으로써는 거절할 수 없었 고. 그래도 김일성대학이라면 최고의 고급 인력 아닌가요? 그러니까 소련에서 그렇게 요구했겠지. 데려다가 써 먹으려 고. 김병로는 회고하였 어떻든 여기 계시게 된 것은 김일성 덕이라고 말할 수 있 지 않겠습니까? 하하. 그렇다고 봐야지. 그런데 서독으로 망명하셨으니 북한에서는 교수님을 퍽 괘 씸하게 생각했겠습니 물론이지. 국가유학생이라고는 하지만 북쪽에서 학비를 기대할 수 없었 기차를 타고 두만강을 건너면 그때부터는 소련 책임인 그 런 유학이었 그래도 국가유학생으로 선발된 것은 대단한 일 이었 전쟁으로 사람 사는 형편이 말이 아니던 차에 선진국 이던 소련과 동독으로 유학가게 되었으니 자부심과 희망에 가 득하였 1954년 초여름, 김병로와 약 20명의 학생들은 기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 평양역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는 사 흘이 걸렸 전쟁이 끝나고도 몇 년간 북쪽의 사회 인프라가 여전히 미비하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국가유학생이라 해도 공산 주의 사회에서 여행이 거의 통제되었었기 때문인지는 모른 아무튼 밤낮을 쉬지 않고 최대한 신속하게 여행하여 사흘 만 에 겨우 국경을 넘을 수 있었 평양역에서 어떻게 가족들과 헤어졌는지는 여쭈어보지 못했 떡과 주먹밥과 삶은 계란 정도는 손에 쥐고 떠났을까? 아 니면 북한의 화폐를 교복 안쪽 주머니에 몇 장 깊숙이 넣고 떠났을까? 아니면 삼엄한 경계 속에 딱딱한 분위기의 이별이 었을까? 열심히 잘 해라. 금의환향해야지. 예. 몸 다치지 마라. 예. 이런 말들을 나누었겠지만 생각해 보면 그때가 김병로와 가 족들의 영원한 이별이었 누님 되는 분이 그 이후 어떻게 해 서 중국을 경유하여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고 한 김병 로는 누님을 가끔 만났 나머지 가족들은 다시 만나지 못했 2. 내 나이가 벌써 쉰다섯이 넘었으니 10년 안에 통일이 된다 해도 부모님은 돌아가셨을 거야. 이 이야기는 서독과 동독이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던 1990 년에 나누던 이야기 독일이 통일을 향해 상황이 급박하게 변하던 1989년 초에는 이미 동독 사람들은 자유롭게 서독을 여행할 수 있었 그때 동독 사람이 첫 서독 방문인 경우에는 동독과 서독의 경계를 넘는 순간 서독 관리가 Begrüßungsgeld (Welcome money)라고 해서 지금 돈으로 약 10만원에 해당하 는 100 서독 마르크의 현금을 동독 사람들에게 쥐어 주었 수만 명인지 수십만 명인지 동독에서 건너와서 그 돈으로 서 독 물건도 사고 지내다가 갔 베를린의 장벽이 무너지고 정 식으로 통일을 이루기 직전의 일이었 독일의 통일은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산사태처럼 독일을 뒤덮고 있었던 때 그리 고 마침내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으며 이듬 해인 1990년 5월 18일에는 경제적 통합을 위한 조약이 맺어 졌고, 재통일을 위한 조약은 8월 31일에 조인된 뒤 9월 20일 에 동서독에서 각각 승인되었 그리하여 1990년 10월 3일 서독과 동독은 하나의 독일로 재탄생하였 아헨공대의 본부 건물을 비롯한 연구소와 단과대학은 아헨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 물리학과 건물은 따로 떨어져 약간 변두리 지역에 있었 주변은 눈부시도록 푸르른 목장지대였 고 언덕위에 우뚝 서 있 멀리서도 눈에 띄는 노란색이 주조 인 아방가르드 디자인의 건물군이었 그 건물군에는 제1물리연구소, 제2물리연구소, 제3물리연구 소 A, 제3물리연구소 B 등이 모여 있 김병로가 속한 제3물 46 물리학과 첨단기술 JANUARY/FEBRUARY 2016

리연구소 A는 그 건물군의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 김병로의 연구실은 4층(우리 식으로 5층)에 C 윙 쪽으로 있었 복도의 양쪽으로 방을 배치한 스타일인데, 한쪽으로는 김병로 이외에 Rudolf Rodenberg, L. M. Sehgal, Dieter Rein 등의 교수들의 연구실이 있었고 다른 쪽으로는 학생들의 연구실이 있었 마침 내가 방문했을 때 Rein이 포도주를 들고 김병로를 찾 아왔 This is my promise. Rein이 포도주에 대하여 설명하였 김병로와 Rein은 독일 의 통일의 시기에 대하여 내기를 하였었는데, 김병로는 그해 안으로 통일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 반면, Rein은 해가 바뀔 것이라고 예언했었 그래서 포도주를 걸고 내기를 하였 물론 Rein이 틀렸기 때문에 포도주를 들고 김병로를 찾아 온 것이 기분 좋은 내기였 이기든 지든 독일이 통일된 것이 이때 한국의 이야기도 물론 나왔 베트남도 통일되고 독일 도 통일을 이룬 마당에 이제 한국은 지구 위에 남은 유일한 분단국가였기 때문이 I bet that two Koreas will unite within five years. Rein이 말하자 김병로는 10년 안에는 어렵다고 말했 김일성이 살아 있는 한 남북한의 통일은 안 될 것이야. 독일의 통일에 대한 내기와는 반대로 김병로가 신중론, Rein 이 낙관론을 주장하였 Okay, if two Koreas would not unite within five years, I will buy another wine. Rein이 말했 물론 Rein은 또 틀렸 지금 2015년이 되어도 한반도의 통 일은 여전히 요원해 보이지 않는가. 아마 21세기가 시작될 즈 음에 Rein이 다시 포도주를 들고 김병로를 찾아갔을 것이 이때는 포도주의 맛이 씁쓸하였을 것이 왜냐하면 기분 좋은 내기가 아니라 우울한 결과를 가지고 승패가 갈렸기 때문이 김병로는 한반도의 통일에 대하여 기대하고 있지 않았 전 혀 통일을 기대하고 있지 않다가 갑자기 통일이 되었을 때의 그 엄청난 희열과 환희를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 그런 게 아니었다면 평양에 두고 온 가족과 일가친척을 만나 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 위하여 짐짓 통일이 되지 않는다는 핑계를 되뇌고 있었던 것일까. 아무튼 우리가 알고 있는 실향 민과는 아주 다른 멘털리티를 갖고 있었 실향민들은 고향에 대한 강한 집착이 있지 않은가. 언제든 통일이 되기만 하면 고 향을 찾아가는 것, 그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가슴 속에 간직하 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실향민이라면 김병로는 실향민이라기보 다 차라리 최인훈의 광장의 주인공과 비슷했 나는 김병로가 평양에 두고 온 가족 이야기를 하거나 평양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지 못했 가끔 지나가는 말로 한두 마 디 언제 다시 볼 수 있겠는가. 이런 식의 객관화된 제3자적인 독백만을 들을 수 있었 3.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까지는 다시 보름 가까이 걸렸 지금은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6일이면 주파하는 거리 한국에 서 유럽 여행을 하는데 일부러 블라디보스톡에 가서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침대칸을 타고 가는 사람도 있다고 한 그러나 김병로가 탔던 열차에 그런 낭만은 없었 고단하고 힘든 소 련의 극동 기지에 오고 가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만 가득했 김병로를 비롯한 20여 명의 북한 청년들도 마찬가지였 미 래에 대한 낭만 가득한 상상은 불가능한 호사였 블라디보스톡은 여름에도 덥지 않 평양보다도 평균 6도 낮 새벽의 블라디보스톡 역에서 짧게 깎은 머리에 부실한 옷차림의 북한 청년들은 떨리는 몸으로 기차에 올랐 딱딱한 3단 침대칸이었 단지 북국의 기온 때문에 떨고 있는 것이 아니었 미지의 세계로 가는 두려움과 새로운 환경에 대한 기대와 불안 때문에 그들은 이를 악물고 냉기를 견디고 있었 끝없이 이어지는 단조로운 열차의 리듬과 진동에 귀가 먹먹 해질 쯤 되면 열차는 한 번씩 정차하였 식사 배급을 열차 안에서 할 때도 있었고 정차한 역에 내려서 할 때도 있었 어떤 때는 어스름 저녁에 정차하였고 어떤 때는 새벽녘에 정 차하였 정차할 때마다 그들은 역에서 내렸 초여름이었지만 내릴 때마다 차가운 공기가 그들의 몸을 포 위하듯이 감쌌 낯설고 축축한 공기였 그리고 싸늘하였 그들은 땅을 딛고 서서 기지개를 하고 몸을 구르면서 정신을 가다듬었 우리 절반 정도 온 건가? 여기가 바이칼 호 부근일 텐데. 둥그렇게 둘러서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을까. 러시아 어는 해방 이후 중학교에서부터 배웠으므로 역 이름 정도는 충분히 읽었 역에 붙어 있는 지도를 보면 모스크바에 얼마 나 가까워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 털이 굼실굼실하게 손등까지 뒤덮고 팔뚝이 웬만한 한국사람 허벅지만한 남자들도 있었고 몸집이 엄청 뚱뚱한 할머니와 어 린 아이들도 있었 눈이 파랗고 피부가 유난히 흰 여자들도 있었고 제복을 입은 관리와 군복 차림에 가죽 장화를 신은 장 교와 병사들도 있었 김병로와 친구들은 그런 러시아인들 틈 에서 다짐하였 잘 해보자구. 물리학과 첨단기술 JANUARY/FEBRUARY 2016 47

평양에서 멀어질수록 외로움에 빠져드는 것을 떨쳐버리고자 그들은 주먹을 움켜쥐고 나지막이 그러나 강하게 외쳤 우리 성공해야지. 그리고 누군가가 다들 들으라는 듯이 충성스럽게 말했을 것 이 조국에 보답하려면 뼈가 으스러지도록 열심히 공부해야 해. 그런 말을 김병로가 하지는 않았으리라. 4.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배치된 곳은 대학이 아니라 임시 숙소 였 소련도 이차대전이 끝난 지 10년이 채 되지 않았으므로 폐허를 다 정리하지 못했지만 모스크바 시가지는 한국전쟁을 겪은 평양보다는 나았 총탄 자국이 남아 있는 임시 숙소는 천정이 높은 4층 건물 이었 천정이 높으니 계단도 높았 낡고 우중충한 건물이 었지만 동양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위압적으로 느껴지는 건물이 었 모스크바에서 일주일을 묵었 그들의 최종 행선지는 동독이었 북한의 젊은이들을 뽑아서 동독에 보내어 교육시 키는 것이니 소련은 중간에서 매개체 또는 전달자였 인력은 북한이 공급하고 교육은 동독이 담당한다는 측면에서 소련은 공산주의 종주국의 행세를 톡톡히 하고 있었 라이프치히. 동유럽의 중심지. 한때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였 으며 음악과 인쇄술이 번성하였던 도시였 동독 시절에는 비 중이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문화와 경제의 중심지로 남아있었 독일 통일의 과정에서 유명한 일화는 성 니콜라스 교회에 서 열린 월요집회였 김병로의 일행은 라이프치히에 배치되었 1953년 9월부터 라이프치히 대학 부속고등학교에서 독일어를 공부하였 당시 숙소는 거의 수용소 수준이었 한 방에 4명씩 거주하였 창문은 높았 까치발을 하고 내다보는 창밖의 경치는 을씨년 스러웠 다른 건물의 지붕들이 건너다 보였 하늘은 한 줌 정도 굴뚝들 틈으로 걸쳐 있었 그래도 그들은 열심히 독일 어를 공부하였 공부만이 그들을 현실로부터 눈을 돌릴 수 있는 상황이었 고향에서 얼마나 멀리 왔는지 알 수 없을 정 도로 머나먼 독일의 땅은 흙마저도 낯설었 축축하고 굵고 검은 색이었 고향의 흙처럼 부드럽고 가볍고 밝은 갈색이 아니었 그들은 성공을 다짐하면서 이를 악물고 독일어를 배 워나갔 1년이 지나자 그들은 곧 러시아어보다 독일어를 더 잘하게 되었 독일어 공부를 마치고 동독의 고등학교 졸업자격을 취득한 그들은 동독 각지의 대학으로 입학하였 김병로는 1954년 9 월에 드레스덴 대학에 입학하였 드레스덴은 이차대전 당시 엄청난 폭격을 받았던 도시 작센 왕국의 수도인 적도 있었 으니 화려한 궁전과 예술적인 건물들로 도시는 사치스러울 만 큼 아름다웠 별명이 엘베 강의 피렌체였 군수 공장은 아 니었지만 공장들도 많았던 탓에 이차대전 막바지에 연합군은 무차별적으로 공중 폭격을 가하여 민간인도 수만 명이 희생되 었 물론 도시도 남아나지 않았 드레스덴 대학은 1800년대 초에 설립된 대학으로써 명성 이 강했 대학 건물들은 도시의 남쪽에 모여 있어서 어느 정도 캠퍼스의 개념을 갖추고 있 김병로가 편입할 때에는 Königlich-Sächsisches Polytechnikum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 1961년부터 Technische Universität Dresden이라는 이름 을 사용하기 시작하였 김병로는 대학의 이름이 바뀌기 직전 까지 드레스덴 대학 전기공학과에서 1960년까지 육년을 지냈 석사시험까지 치렀으니 곧 석사학위를 받을 예정이었 그러나 김병로는 1960년이 끝나기 직전에 동독을 탈출하였 5. 김병로는 드레스덴에 있을 때 몸이 아픈 적이 있었 하르 츠(Harz) 지방으로 치료차 요양을 갔 지금은 독일의 중앙이 지만 독일이 분단되었을 때에는 하르츠 지방을 관통하여 동독 과 서독의 경계선이 지나고 있었 그때 김병로는 서독과의 경계선을 눈여겨 두었다고 한 김병로의 탈출 루트가 하르츠였 독일의 숲이 모두 유명한 데 하르츠 지방도 숲이 유명하 독일 남쪽 국경의 알프스를 제외하고 독일에서 가장 높은 산이 이곳에 있 전나무 숲이 나 가문비나무 숲은 깊어서 한낮에도 컴컴하고 헨젤과 그레텔 의 동화에 나오는 마녀들이 진짜로 살고 있음직하게 아주 울 창하였 요즘 도시에 사는 젊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데 전 통적으로 독일 사람들은 그런 숲길을 하루에 한두 시간 길게 는 서너 시간씩 산보하는 것이 생활의 습관이 그런 산보를 반더룽(Wanderung)이라 한 김병로도 하르츠에서 산보를 다 니면서 길을 익혔 1960년까지만 해도 동독은 이동에 제약이 엄격하였던 것은 아니었고, 베를린 장벽도 없던 때였 동서독 국경은 처음에 는 국경이라기보다 건너서는 안 되는 경계선 정도였는데, 차츰 장애물도 세우고 도랑을 파서 차가 다니지 못하게도 하고 나 무들도 뽑아 시계를 확보하고 있었 김병로 등도 서독과의 차단을 점점 실감하게 되었 독일의 여러 곳에 견학도 다녔 으므로 어느 정도 감각은 있었 김병로와 함께 북한에서 온 학생들 중에서 몇몇은 탈출할 결심을 하게 되었 뜻을 모은 이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기회를 찾아 실행에 옮겼 죽음을 무릅쓴다는 것은 동독의 초소병에게 총을 맞는다는 것이 아니 라 소련을 거쳐 북한으로 송환되는 것을 각오한다는 말이 48 물리학과 첨단기술 JANUARY/FEBRUARY 2016

그렇게 탈출한 북한유학생들이 여럿 있었 하르츠 같은 깊은 산중은 김병로가 탈출할 때에는 지키는 초소병도 없었고 시설을 설치하기도 어려웠 베를린 장벽은 1961년부터 건설되었으니 김병로가 탈출하기 직전이었 서 독 사람들은 물론 전 세계 사람들이 경악하였지만 동독에서는 단호하게 밀고 나갔 베를린 장벽의 건설과 함께 동서독 사 이의 장벽은 점차 견고해졌 동서독 전 국경에 걸쳐 통행금 지 시설을 설치한 것은 1962년이었 이들이 탈출하자 동독에 그냥 남아 있던 동료들이 피해를 입었 나머지 북한 출신 학생들은 모두 중도에 북한으로 돌 아갔 자발적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북한에서 귀국 명령이 떨어져서 마지못해 돌아간 것이 아마 감시하는 사람들이 곁 에 붙어서 평양까지 동행하였을 것이 이들의 입장에서는 김 병로 등이 야속하였 조국을 버리고 도망한 사람들은 김병로 등이었는데, 도리어 자기들이 애꿎게 의심을 받게 되어 죄인처 럼 송환되었기 때문이 평양에서 떠날 때에는 함께 공부하여 성공하자고 서로 부둥켜안고 다짐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냉 전의 세계는 이들의 순진한 맹세를 가만 두지 않았 서로 등 을 돌리면서 가는 길이 엇갈렸 전해 듣기로는 이때 강제 송 환된 사람들 중에는 평양에서 공부를 계속하여 김일성대학의 교수가 된 사람도 있었다고 하는데 아마 세상을 떠났는지 모 르지만 누군지 궁금하 6. 1970년대 초부터 한국 정부는 해외의 한인과학자들을 조직 화하기 시작하였 물론 그 이전에도 미국에서는 지역마다, 또 는 한인 유학생이 많은 대학은 대학 단위로 한인 학생회가 구 성되어 상호 교류와 정보교환 및 단합의 장으로 이용하였 미 국의 경우는 한국전쟁 이후 유학생들이 많이 건너갔기 때문에 그 조직이 깊고 넓고 다양하였 그러나 유럽지역은 상대적으 로 한인과학자의 숫자가 작아서 이때야 조직화되었던 것이 1973년 5월에 재독일과학기술자협의회(Verein Koreanischer Naturwissenschaftlicher und Ingenieure in der BRD e.v. 줄여서 VeKNI, 재독과협)가 결성되었 재독과협에 이어 재 영한인과학기술자협회(줄여서 재영과협)가 1974년 11월, 재불 한국과학기술자협회(줄여서 재불과협)가 1976년 결성되고 이들 을 아우르는 재구라파한국과학기술자연합회(줄여서 재구과련)가 1977년에 결성되었 재독과협에 참여한 과학기술자들 중에는 주로 한국에서 유학 가서 정착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동독에서 넘어와 서독에서 공 부하고 자리 잡은 사람들도 있었 물론 김병로도 그 중의 하 나였 재독과협은 하부 조직으로 당시의 서독의 지역 우편번 호에 따라 제1지부, 제2지부 등으로 나뉘어졌 예를 들면 아 헨을 포함한 지역의 우편번호가 52XXX였기 때문에 아헨공대 의 한인학생이나 김병로 같은 사람은 제5지부에 속했 김병 로는 재독과협에 참여하여 꾸준히 활동하다가 1989년 1월 1 일부터 약 2년간 제15대 회장을 맡았고 다시 1999년 1월 1 일부터 2년간 제21대 회장을 맡아서 일을 하였 재독과협 회장을 역임하는 동안 김병로는 재구과연 의장도 겸임하였 김병로가 재독과협 회장으로써 재구과연 의장을 맡았을 때 재 불과협의 회장은 민선식 박사였 한국의 경제력이 어느 정도 해외에서 인정받기 시작한 시기 가 바로 1970년대였 1974년도부터 세계 한민족 과학기술자 종합 학술대회가 열렸 초기에는 주로 재미과학기술자들을 중심으로 개최되었 곧, 재독과협 등이 조직되면서 유럽의 과 학기술자들도 초청하였 이들은 대부분 어려운 시기에 해외 유학을 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경제 발전에 대한 이 해가 부족하다고 판단한 주최 측은 이들을 한국에 초청하여 학 술대회에 이어 산업시찰도 시켰 1990년의 뉴스를 보면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는 미주와 유럽, 소련, 중국 등 세 계 여러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 고급 과학기술자 600여 명과 국내 과학기술자 등 모두 4,000명을 초청해 1990 세계 한민족 과학기술자 종합학술대회 를 시작하였습니 과학기술 자의 교류와 정보교환을 목적으로 한 이번 대회의 참가자들은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동력자원 연구소와 구미공업단지의 여러 산업 시설들을 돌아봤습니 1974년 이래 공산권 교포가 참 가하기는 이번이 처음입니 라는 기사가 있 2006년에 열렸던 대회를 마지막으로 그 이 후에는 소식이 없 김병로가 한국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1977년이었는데 이 대회를 통해서 한국을 방문한 것이었 김병로는 공산주의자가 아니 또한 김일성의 지시를 무시하고 서독으로 탈출하였으므 로 북한에서 보면 배반자나 다름없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 만 해도 김병로는 한국을 방문하는 것이 조심스러웠을 것이 어떻든 정치적인 시각에서 보면 매우 민감한 입장에 놓여 있었 왜냐하면 당시로부터 약 10년 전인 1967년 동베를린 간첩 사건이 터져서 독일의 한인 사회가 바짝 긴장하였기 때문이었 동베를린 간첩사건은 한국의 중앙정보부원들이 서독 내의 교민이나 유학생들을 간첩 혐의로 한국으로 강제 연행한 사건 이 이 때문에 한국과 서독 사이에 외교적인 마찰도 있었 이때 연행된 사람들 중에는 작곡가 윤이상과 화가 이응로가 포 함되어 있었 남한 사람들도 연행되는 마당에 이북 사람은 그 자체가 간첩일 수도 있었 김병로는 평양 출신이라는 점이 대 단히 심각한 제약이었고, 또한 감시를 피할 수 없는 꼬리표였 다만, 김병로는 국적이 독일인데다가, 동독을 탈출한 사람 이었으므로 반공( 反 共 )이 확실하여 아무 일이 없었 물리학과 첨단기술 JANUARY/FEBRUARY 2016 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