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천아카데미는 국제교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해마다 해외강좌여행을 실시 하고 있다. 해외연수를 통하여 회원의 세계화 교육을 실시하고, 상호 친목을 달성하는 것이다. 15번째인 이번 여행에 참가한 30여명의 회원들은, 아카데 미의 동서인문고전강좌에서 그리스 신화를 강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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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터키강좌여행 글 : 하태무 객원기자 / 고전 3기 사진 : 김홍근 주간 6

성천아카데미는 국제교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해마다 해외강좌여행을 실시 하고 있다. 해외연수를 통하여 회원의 세계화 교육을 실시하고, 상호 친목을 달성하는 것이다. 15번째인 이번 여행에 참가한 30여명의 회원들은, 아카데 미의 동서인문고전강좌에서 그리스 신화를 강의한 유재원 교수의 인솔로 1 월 13일부터 25일까지 12박 13일 동안 터키의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그 자세한 일정을 하태무 본지 객원기자가 정리하였다. 이스탄불 성 소피아 사원 앞에서 여행보다 더한 공부가 있을까 누구나 터키를 여행할 수 있다. 어디에나 터키에 대한 기록은 많다. 다른 사람의 기행문을 읽을 수도 있고, 여행 안내 책자를 읽을 수도, 인터넷에서 정보를 뽑을 수도 있 다. 보통 사람들처럼 가이드의 설명으로 그곳에 대한 모든 상식을 대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한 13일 간의 터키 여행은 여러 가 지 면에서 특별한 여행이라 생각된다. 성천아카데미에서 함께 공부한 회원들끼리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함께 숨쉬며 한국사람으로서는 처음 가보는 시골 구석구석까지 다녔던 것이다. 박학한 유재원 교수의 그리스 로마 신화 해설과 함께 유적지의 돌덩이를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 던 그 순간, 우리는 늘 성천의 이념인 호학 친교 위공 ( / 交 / 公 ) 을 훈장처럼 가슴에 달고 다녔다. 여행 만한 공부가 어디 있으랴. 그 멋진 학습의 순간을 여기에 기록해 본다. 터키의 역사 터키 땅에는 아득한 옛날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 구약 시대 아라랏 에 노아의 방주가 있었다고 믿고 있을 정도 이니 말할 것도 없다. 소아시아의 아나톨리아 반도에는 예 로부터 여러 민족들이 다양한 문명을 형성하면서 살고 있 었고, 지금의 터키인들은 기원 후 1000년경에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기록상으로는 기원전 2,500년경 청동기 시대부터 도시 국가가 생성 발전하여, 기원전 17세기 경부터는 쵸룸 지역 (앙카라 동북방)을 중심으로 히타이트 제국이 번성하였 다. 기원전 12세기 이후에는 서쪽의 에게 해를 배경으로 희랍(헬라) 세계가 천년 가까이 찬란한 문명을 건설하였 다. 그와 함께 서부 및 중부 내륙지방에서는 프리기아 왕 조를 비롯하여 우랄루트, 리디아 그리고 이오니아 왕조들 에 의해 맥이 이어져 오다가, 기원전 2세기에 이르러서는 전 지역이 마침내 로마 제국의 속지로서 동로마 제국 시절 을 포함하면 천 수백년 동안이나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 다. 그 후 수세기에 걸쳐 동쪽에서 이동해 온 투르크족이 11세기 초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마침내 15세기에는 동 로마 제국의 멸망과 함께 아나톨리아 반도는 터키를 새 주 인으로 맞아 오늘에 이르게 된다. 앙카라 아나톨리아 박물관에서 기원 전 7,000년 전 세계 최초의 도시인 차탈휘육의 유 물과 기원 전 15세기 전후의 고대 히타이트 왕국의 유물이 보관된 박물관이었다. 특히 관심을 끈 것은 미다스 왕의 묘였다. 그는 BC 800년 경 프리기아의 왕으로 앙카라 서 남쪽 100킬 지점 고르디온에 나라를 세웠다. 황량한 벌판 에 대형 고분으로 누워 있던 미다스. 그의 묘를 1950년 미 국인 고고학자가 발굴했지만, 바깥 공기와 접하는 순간 모 든 것은 산화되고 미다스는 뼈만 남았다 했다. 박물관 내 의 거대한 석묘 앞에서 그에 관한 신화를 떠올린다. 신화 1. 장미덩굴 아래서 잠자는 실레누스를 잘 대접해 보 냈다고 술의 신 디오니소스는 미다스의 소원을 들어주 게된다. 무엇이든지 만지면 금이 되게 해주시오. 그 러나 먹을 것 마저 금이 되어버리자, 소원을 거둬달라 고 빈다. 디오니소스의 충고, 강가에 가서 손을 씻어 라. 이것이 강모래에서 사금이 나온 원인이란다. 신화 2. 신들이 벌이는 음악 경연. 정겹고 소박한 팬의 풀 피리와 은빛 아름다운 아폴로의 칠현금 중에서 미다스 왕의 귀는 풀피리 소리가 더 고와 팬에게 점수를 줬다. 아폴로는 화가 나 미다스의 귀는 당나귀 귀가 되어 라. 그 뒤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라는 설화가 이 어진다. 신화 3. 예부터 프리기아 땅을 지나려면 고르디온의 매듭 을 풀어야만 했다. 알렉산더 대왕은 칼로 매듭을 쳐 끊 어버린다. 드디어 전쟁은 시작되고, 알렉산더는 파죽 지세를 몰아갔다. 7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 하투사 언덕에서 전쟁이 많았던 시절답게, 히타이트의 수도는 험준한 산악지형에 자리잡고 있었 다. 지겹도록 눈이 쌓인다는 산꼭대기 옛 도시는 다행히 포근한 날씨로 눈이 녹아 있 어 차량이 올라갈 수 있었다. 무시무시한 절벽 위에 자리 잡은 성채로 계곡의 찬바람 가파도키아 (비둘기계곡) 이 불어온다. 가끔 희끗희끗 한 눈발도 날린다. 사자의 문에 조각되어 있는 사자상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인근에 있는 야질리카야(글씨가 새겨 진 바위) 계곡은 기원 전 15세기 경 폭풍우의 신에게 바쳐 진 히타이트 최고의 성소였다. 가파도키아에서 가파도키아는 6,000만년 전, 터키의 중앙부에 있는 에 스지에르 과 하산 등의 화산활동으로 화산재와 용암이 퇴적되었다가 오랜 기간동안 빗물에 녹아내려, 그랜드 캐 넌 같은 협곡 속에 버섯이나 남근 모양의 바위들이 늘어선 기묘한 공간이다. 요정이 사는 마을 파샤바. 예쁘고 아기자기한 바위들이 마을을 이룬 듯 밀집되어 서 있어 마치 동화 속의 무대 같 았다. 괴뢰메 골짜기. 가파도키아 지역 중, 이곳은 특별히 유 네스코에서 야외박물관으로 지정한 곳이다. 365개의 암굴 교회가 있어서 날마다 기도가 끊임없이 이어져 왔던 곳이 다. 괴뢰메 암굴교회의 형성은 기원 후 4세기부터 시작되 었는데, 11세기 이슬람이 기독교를 핍박하기 시작하자 박 해를 피해온 성 바실리오스 성인과 그레고리스 성인이 이 유니크한 지형을 이용해서 굴을 파고 수도원을 세웠다. 비둘기 계곡. 점심 식사를 한 식당에서 내려다보이는 비 둘기 계곡도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주었다. 또한 우리가 묶 은 호텔은 이름부터 요정(페리)의 호텔인데 그 외관이나 내부 구조가 마치 암굴 교회처럼 되어 재미있었다. 지하도시 데린구유. 개미집처럼 신비스런 지하인공굴인 데린구유는 숨어 들어온 기독교인의 삶의 현장이었다, 로 마의 카타콤브가 죽은 자의 것이라면 이곳은 산 자들을 위 한 공간이다. 삶이 얼마나 질긴 것인지, 신앙이 얼마나 절 실한 가치요 덕목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현장이다. 이 신 비의 도시는 지하 20층까지 파여 있으나, 우리가 볼 수 있 는 곳은 지하 9층까지였다. 미로처럼 얼기설기 파 들어간 이 지하공간에는 빛도 새어들고 공기도 충분하여 숨이 막 히지 않았다. 가파도키아 (파샤바), 요정의 마을 콘야에서 메블라나와 함께 중간에 카라반사라이를 거쳐 오후 네시쯤 회교 신비주 의의 성지 콘야에 도착했다. 11-14세기 셀주크 터키의 수 도였던 이 도시는 로마시대에는 이코니아로 알려졌던, 터 키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의 하나이다. 이 콘야에는 터키 이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코드인 수피즘 이있다. 터키민족이 이슬람을 접한 것은 8-9세기 경이나 오스만 제국 이전 셀주크제국 때부터 샤머니즘적인 세계는 터키 민족 신앙체계 속에 굳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 샤머니즘과 이슬람이 결합하여 나온 것이 회교 신비주의인 수피즘이 8

다. 우리는 수피즘을 창시한 메블라나 기념 박물관을 방문 했다. 녹색타일이 아름다운 이 영묘에는 메블라나 잘랄라 딘 루미의 묘가 모셔져 있었다. 신비주의 철학자, 종교가이자 시인인 그가 세운 데르비 쉬 교단은 특히 세마(하늘) 춤을 통해 신과 하나가 되는 수 련을 쌓는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는 그 세마 춤을 보면서 어떤 영적인 감동을 받았다. 춤추는 사람들(데르비쉬)은 영적인 합일을 위해 양팔을 벌인다. 오른쪽 손바닥은 위로, 왼쪽 손바닥은 아래로 펴고 왼손은 오른손보다 약간 아래 로 내린다. 신에 대한 사모의 정과 데르비쉬들의 믿음을 뜻 하는 동작이다.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콘야를 떠나 안탈리아로 가는 대장정이다. 타우루스 산 맥(황소대간)을 넘어야 한다. 터키의 등줄에 해당하는 산 맥이다. 시데의 아폴로 신전 이번 여행을 함께 했던 구자명 회원은 이 수피의 춤에 대해 다음 과 같은 단상을 적어주었다. 터키! 자연이나 인간의 얼굴이 놀라울 만치 여럿이라 가는 곳마 다 숨고르기에 바빴던 나라. 돌아온 지 일주일밖에 안 되는데 다시 가고 싶은 충동이 문득 문득 입니다. 특히, 콘야의 밤은 제게 있어 그 여행의 정점이었습니다. 낮에 아득한 평원을 이상스레 서글픈 두근거림을 안고 달려온 끝에 들어선 수피의 메카, 콘야. 다소 침울 한 인상의 그 고도에서 첫 발을 들여놓은 수피 사원에서 만난 아라 비아 문자들. 신의 온갖 이름들을 혼신의 힘으로 적어 내려간 인간 의 처절한 의지 의 의지. 그 역동하는 신공 功 의로고 (calligraphy)에 압도 당해 저도 모르게 제 넋의 한 쪽을 내준 채 얼떨결에 맞닥뜨린 메블라나 춤. 비록 관광객을 위한 쇼에 불과한 것이라지만, 그 구도 求 의 승무를 추는 이들의 표정과 몸짓, 그리고 음악은 저로 하여금 짧은 순간이나마 여러 생을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여행을 하기에 충분한 에너지 파장을 지닌 강력한 것이었습니 다. 터키 전통 플루트의 첫 음이 울리고부터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 리던 눈물. 영혼의 본향을 찾아 장도 에 오른 지 오래건만 헤매고 헤매어도 그곳이 가까워지기는 커녕 점점 더 아득하게만 여겨지는 우리, 존재의 나그네들이 가엾고 안타까워 가슴이 미어지는 듯 했 습니다. 콘야의 밤, 그것은 본향 회귀에의 향수, 과거 아닌 미래 에의 향수로 가슴 벅찬 밤이었습니다. 이튿날 타우루스 산맥을 넘 으면서부터 다시 만나게 된 지극히 인간적인 영고성쇠의 현장들에 서 세속의 얼을 되찾은 뒤 무사히 귀환하게 된 우리네 살림터. 깊은 숨을 내쉬며 다시 한 번 감격합니다. 고통스럽고 아름다운 이곳에 너와 나 살고 지고, 어디에 있는지 모를 그곳이 바로 이곳에 도래할 때까지. 콘야, 데르비쉬의 세마춤 9

페르게의 보름달, 낭만적인 고고학 산책 폭포에서 주스 한잔씩을 마시고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 우스가 자주 들렀었다는 시데의 유적을 보러 간다. 들어가 는 입구부터 심상치 않은 돌들이 석축을 이루며 서 있다. 고린도식 기둥 문양이 새겨진 아폴로 신전의 기둥들이 탁 트인 바다를 보며 훤칠한 자태를 자랑한다. 아스펜도스 원형극장 연이 이루어지는 이 극장은 가장 많게는 4만 명의 관람객이 들었던 적도 있다한다. 극장의 오케스트라 석에서 동전 하 나를 떨어트리면 모든 복도에서 그 소리를 똑같이 명백하 게들을수있다. 일 행 중에서 노장 백대 현 선생님이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멋들어진 하숙생 한 곡을 뽑 고, 이어 남명희 회 원이 사안타아루우 치아 산타루치아 를 부른다. 멀리 원 형극장의 꼭대기에 앉은 유럽 관광객이 브라보를 외친다. 버스를 타고 아고라를 지나 옛 수로를 바라보면서 셀주 크 다리를 넘어 로마 평화시대의 아스펜도스 원형극장으로 갔다. AD 2세기 건축가 제논에 의해 1만 4천명이 들어가 는 대 극장으로 세워져서 2천년이 흐르도록 아직도 계속 공 페르게 고대도시에 뜬 보름달 성서 상에 버가 로 표기된 페르게는 뮤라의 고대무덤 10

안탈리아에서 동쪽으로 16Km 지점에 위치하 고있다. 이도 시는 성벽을 쌓 지 않았으므로 알렉산더 대왕 에 의해 쉽게 정복되었고, 그 후 셀레시드 왕조 때 처음으 로 요새를 구축하여 번성하였다. 페르게는 유명한 수학학 자 아폴로니우스(Appollonius 250-220 BC)와 철학자 바 루스(Varus AD 2C)의 출생지이다. 사도 바오로 시대에 는 페르게와 지중해를 배로 오갈 수 있어, 사도 바오로가 제 1차 전도 여행 때 (45-49년경) 바나바와 방문했던 곳 이다. 으스름 저녁 무렵에 고대 유적을 돌아보는데, 마침 허물어진 돌기둥 위로 보름달이 떴다. 말 그대로 낭만적인 고고학 산책! 일행 모두의 가슴이 울렁거렸다. 안탈리아 보드룸까지 550킬로의 대 장정을 강행해야 하므로 새벽 7시 30분부터 버스를 탔다. 소아시아 반도 남부의 지중해 연안에 있는 안탈리아는 페르가몬의 앗딸루스 2세 (Attalus 160-139 BC)에 의해 세워진 도시이다. 이 일대 는 거친 해안선과 작고 안전한 정박지가 많은 관계로 해안 무역을 괴롭히고 약탈하는 해적들의 천국으로 오랫동안 지속되기도 하였다. 우리는 안탈리아의 상징이며 이정표 역할을 한 아울리 탑을 보고, 하드리안 문을 거쳐 오스만 터키의 전통가옥들이 즐비한 동네를 둘러보았다. 밀레투스 휴양 도시 보드룸에 도착했다. 다도해란 뜻의 에게 바다는 터키의 서부지역에 위치해 있으며 인구밀도가 비교적 높 아서 성경 요한 묵시록의 일곱 교회가 이 지역에 몰려있 다. 터키에서 가장 풍요로운 지역이고 관광명소 고대도시 들이 몰려 있는 곳이다. 쪽빛 바다에 아름다운 흰색집들이 늘어선 보드룸의 옛 이름은 할리카르나수스다. 이곳 카리아 왕조의 가장 강력 한 권위를 세운 왕 마우솔로스(Mausolus)의 영묘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였는데, 아쉽게도 십자군 전쟁으 로 허물어졌다. 이곳은 세계적인 대 역사학자 헤로도투스 (Herodotus BC 484-420: 그리스와 페르시아간 투쟁의 연대기를 서술함)와 디오니시우스(Dionysius BC 8세기: 로마의 신화적인 탄생으로부터 3세기 중엽까지의 역사를 기록)의 출생지로도 유명하다. 뮤라의 성 니콜라우스 교회와 고대 무덤 뮤라에는 성탄절의 수호성인 성 니콜라우스, 즉 산타클 로스 기념교회가 있다. 서기 270년경 유복한 곡물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니콜라우스는 서기 300년경 뮤라의 주교로 선출됐다. 이때부터 니콜라우스는 여러 종류의 선행과 기 적을 베풀었다. 고대도시 뮤라의 무덤은 사람들이 살고있는 건물의 모 습과 똑같게 입구를 장식했기 때문에 마치 고층 아파트를 보는 느낌을 갖게 한다. 에게 해안의 보드룸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밤늦게 터키 최고의 여행의 중간 시점, 오늘은 휴식을 위해 오후는 자유시간 이다. 새벽 바다가 보고 싶어, 함께 온 글라라 님과 택시를 타고 시내를 돌아 골목골목을 누비며 바닷가로, 낮에 가게 될 할리카르나소스 성으로, 원형극장을 돌아 풍차가 있는 언덕에서 에게해 남부 도시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휴양 지의 비 오는 해안선을 바라보다가 호텔로 돌아 왔다. 밀레투스 이오니아 문화의 중심지이며 부유한 항구도시였던 밀 레투스 를 찾은 것은 이곳이 서양철학의 탄생지이기 때문 11

에페스 아르테미스 여신 이다. 여기서 태어난 탈레스는 기원 전 6세기의 사람으로, 사 람의 키와 그림자의 모양이 일정하게 변하는 사실을 이용 하여 피라미드의 높이를 정확하게 계산해 내었다. 만유의 근원이 물이며 불변이라는 학설을 주장하여 그의 학문과 사상은 그리스 철학의 시조를 이루었다. 한편 만유의 근원 이 공기라고 주장하여 탈레스의 학설과 쌍벽을 이루게 했 던 아낙시메게스(Anaximenes)나, 만유의 근원은 무한자 라고 주장한 철학자 아낙시멘데르(Anaximender), 이집 트 서남아시아 등을 여행하여 그 견문으로 세계안내기 界 內 記 를 저술하고, 최초의 세계지도를 제작하여 각 지의 지지 풍속을 기록한 헥카테우스(Hecataeus)도 이 곳에 살았다. 또한 위대한 기하학자 이시도루스(Isidorus-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사원 건축가)도 이 도시의 출신 이었다. 에페스 너무나 아름다운 고대도시 에페스에 대한 역사적 사료 는 기원전 13세기경 히타이트 비문에서 나오는데, 아파사 스(Apasas)라고 불렸다. 이 도시의 이점은 이오니아 지방의 중간으로 아르테미 스 신전 가까이의 항구였으므로, 많은 순례자들이 들려 돈 을 뿌리고 가는 점이다. 로마가 지배하면서 소아시아의 수 도를 페르가몬에서 이 에페스로 옮기고 도시를 아름답게 꾸며 나갔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 다. 그리스 신화의 아르테미스(Artemis-성서의 아데미) 여신은 원래 달의 여신으로 로마 신화의 다이아나(Diana) 여신에 해당된다. 그러나 아나톨리아의 지중해 도시국가 에서는 아르테미스가 풍요를 상징하는 여신으로 가장 숭 배 받는 존재였다. 이 여신의 가슴 모습은 처음에는 유방 으로 생각되었으나, 후에 씨앗과 풍요 를 상징하는 황소 의 고환임이 판명이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세계 최초의 광고판이 에페스 시를 관통 하는 대리석 도로의 바닥에 새겨져있는 점이다. 왼발(이 크기보다 작은 미성년자는 사절) 그리고 점 찍힌 하트 모 양의 그림(사랑이 그리운 사람은)과 한 여자의 모습(예쁜 여자가 있어요)과 아코로디아(나를 따라오세요)라는 문자 와 화살표가 그려져 있고 동전구멍(돈을 가져오세요)을 뚫어 놓았으며 네모로 줄친 자국(어음/카드도 괜찮아요) 도 있는데 꿈보다 해몽이 더 해학적이었다. 이것은 비잔틴 시대의 것으로 창녀촌을 광고하는 모습이란다. 실제로 유 명한 셀수스 도서관 왼쪽이 창녀촌이었다 하는데, 도서관 과 지하로 연결되었단다. 참 기가 막혀서. 성모 마리아의 집 불불(Bulbul) 산 쪽의 산길로 난 포장도로를 따라 5Km의 산꼭대기에 성모 마리아가 말년을 보낸 성모 마 리아의 집이 있다. 캐더린 에멀리히 라고 하는 독일 수녀 가 꿈속에서 계시를 받은 내용을 1878년 <성모마리아의 생애>라는 이름으로 책을 펴냈다. 1891년 융이라는 신부 12

의 인솔 아래 에페스 남쪽의 산 을 조사하게 되었는데, 이 결과 오늘날의 성모 마리아의 집이 밝혀졌다. 1951년 교황 요한 23세는 마리아의 집의 위치에 대한 논쟁을 종식시키고, 이곳 을 성지로 공식 선포했다. 1967 년 교황 바오로 6세 및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이곳을 방문했다. 사도 요한의 교회 AD 7-42년 사이에 그리스도 교 전도에 주력하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당 하게 되자, 사도 요한은 성모 마 베르가마의 원형극장, 높은 절벽 위에 건설되었다. 리아를 돌볼 임무를 부여받고 성모님과 함께 고향 에페스 베르가마 (버가모-페르가몬) 에 와서 살면서 말년을 보냈다. 또한 사도 바오로도 그의 성서에서 버가모로 나오는 이 도시는 높은 언덕 위 자연 2-3차 전도 여행에 에페스를 방문하여 선교를 하면서 교 성채 위에 세워져 있었다. 페르가몬에는 옛날부터 세 가지 회를 세우기도 하였다. 64년 사도 바오로가 로마의 성밖에 큰 자랑거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큰 저택과 아름다운 궁전 서 순교하자 요한은 그를 대신해 에페스 교인들의 지도자 과 큰 도서관이다. 베르가마의 도서관에는 약 20만 권의 가 되었으나, 도미티안 황제 때에 로마로 끌려가 고문을 서적이 소장되어 있었다고 하며 이집트로부터 갈대로 만 당하고 지중해 연안의 파트모스섬(성서에 밧모섬)으로 유 든 파피루스를 수입하여 썼는데, 알렉산드리아의 궁중 도 배되어 그곳에서 대리석을 채취하는 중노동을 하면서 <묵 서관보다 더 큰 도서관을 지으려는 유메네스 2세의 광적 시록>을 쓰게 된다. 그 후 도미티안 황제가 피살되자 유배 인 관심을 알게된 이집트 왕은 파피루스 공급을 중단했다. 에서 풀려나 에페스로 돌아와 <요한복음>을 썼다. 비잔틴 그러자 페르가뭄 사람들은 양의 가죽을 얇게 펴서 양피지 제국 시대에 그의 무덤이 있는 자리에 사도 요한의 교회가 를 고안해 책을 만들었다. 영어의 parchment(양피지) 세워졌다. 라는 단어의 어원도 pergamon 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것이라 하니 이곳의 중요성을 짐작하겠다. 사르디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 옛날 화려했던 아스클레피온 종합병원 도시, 지금은 폐허인 초대 7대 교회(에페소, 서머나, 버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의료의 신 아스클레피우스에서 모, 두아디라, 빌라델비아, 사데, 라오디게아)였던 사데 교 유래한 이 종합병원에 들어온 환자들은 우선 맨발로 대리 회로 간다. 사데의 현지 이름은 사르디스였다. 사르디스는 석 기둥이 즐비한 성스러운 길 의 대리석 바닥을 한 걸음 리디아 왕국의 수도이며 역사적으로 처음으로 금화를 제 한 걸음 천천히 걸어 들어온다. 이 과정이 벌써 치료의 시 조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에 금화를 제조했던 건물은 작이다. 죽음의 신인 하데스로부터 멀어지고 건강의 신인 아직도 작은 시내가 흐르는 한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다. 아스클레피우스신에게 가까이 간다는 믿음 때문에 그들은 당시의 신전터에 남은 기둥들은 어찌나 큰지 전체 건물의 안도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정원 한 가운데서 흘러나오는 크기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샘물로 목욕을 한다. 음악요법, 명상요법, 목욕요법, 심리요법 등의 치료시설 13

을 갖춘 이 대형 전문병원은 1967년에 발굴되었다 하는 데, 환자들에게 삶의 의욕과 희망을 주기 위한 야외 원형 극장이 남아 있었고, 목욕요법으로는 진흙목욕을 시켰다 한다. 고대인의 의학은 기본적으로 몸과 마음을 하나로 보아 죄에대한벌 로 질병을 보는 도덕적 질병관을 가지고 있 었다. 이에 비해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는 질병을 자 연적인 원인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보았다. 오늘날 의사 가 되기 위해 그의 이름으로 선서를 하는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도 이곳에서 일했고, 사티로스나 갈레누스와 같이 유명한 의사들이 이곳에서 활약했다한다. 아이발륵 바닷가의 생일파티 여행 도중 아이발룩 호텔에서 생일파티가 벌어졌다. 여 행기간 동안 생일을 맞은 사람과 1월이 생일인 사람 8명이 축복을 받았다. 케이크가 차려지고 여덟 개의 촛불이 켜졌 다. 샴페인 여덟 잔, 행복에 겨운 술잔이 부딪치며 찰랑댄 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 어. 터키에서의 생일 잔치. 또 새로운 만남, 또 새로운 나 날이 시작된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시작이다. 언제나 생 일이다. 트로이와 슐리만 아무 것도 본 것이 없다고 그냥 들판에 커다란 엉터리 목마만 있었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무엇을 볼 것인가? 그 러나 슐리만 이야기를 읽고도, 트로이에 아무 것도 없었다 고는 말할 수 없으리라. 1822년 독일 메클렌부르크의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목 사 집안에 태어난 하인리히 슐리만 소년은 아버지로부터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 에 나오는 영웅들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일리아드란 일리온에 관한 시 라는 뜻인데, 일리온은 소아시아 서북부에 있는 트로이라는 옛 도시를 말한다. 일리아드 는 오늘날의 서양 문학을 낳았으며, 헤브라 이즘과 함께 서양 문명을 이끌어온 헬레니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2,700년 동안 알 렉산더 대왕을 비롯하여 일리아드 를 즐겨읽은사람들 은 이 이야기를 그저 호메로스라는 시인이 전설을 모아 엮 은 옛날이야기라고 생각해왔다. 엄청난 보물을 찾아내고, 자칫 사라질 뻔한 문명을 밝혀 트로이, 백대현 / 김종순 부부회원 내는 꿈 같은 이야기가 19세기에 실현되었다. 그리스 영웅 들의 용맹했던 옛날 이야기를 읽으면서 일곱살의 독일소 년이 품었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어른이 되면 5000년 전에 이미 불타버린 트로이 성과 왕의 보물들을 찾겠다던 꿈을 이루기 위해, 1868년 마흔 여섯 살의 백만장자 슐리 만은 트로이를 찾아 나섰다. 뉴 일리엄, 오늘날에는 히사를리크(궁전)라고 불리는 언덕을 자세히 살펴본 슐리만은 그곳이야말로 3,000년 전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 용사들이 조국의 명예를 걸고 10 년 동안 싸운 트로이 성터라고 굳게 믿었다. 평생을 별러 온 일이 눈앞에 닥치자 슐리만은 온몸을 내던져 트로이 찾 는 일에 매달렸다. 1869년 그는 꿈에 본 헬레네처럼 아름 다운 그리스 처녀 소피 엥가스트로노메스와 결혼했다. 그 녀는 남편이 바라는 대로 아름답고 가난하고 헌신적이며, 일리아드 를 아주 잘 알고 줄줄 외우는 여자였다. 1870년 4월, 슐리만과 그의 아내는 히사를리크 언덕에 14

서 첫 삽을 떴다. 언덕은 마치 거대한 양파의 껍질을 벗기 듯이 파들어 갈수록 층층이 다른 유적지를 드러냈다. 폐허 를파면그밑에또다른폐허. 1873년 6월 어느 더운 날 아침, 슐리만은 그가 평생 꿈 꾸어 온 트로이의 보물을 손에 넣었다. 슐리만이 찾아낸 유물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팔찌, 브로치, 목걸이, 접시, 단추 등 금으로 만든 온갖 것이 쏟아져 나왔다. 자그마치 8,700여 점이나 되는 금붙이 가운데서도 가장 눈부신 것 은 순금 조각으로 이루어진 금관이었다. 그는 죽기 얼마 전에야 그것이 트로이보다 1,000년 앞선 시대의 유물이라 는 것을 알았다. 슐리만이 사망하자 그가 찾고자 했던 전설의 트로이가 어디인가에 관심이 모아졌다. 여섯 번째 도시가 바로 그들 이 찾던 도시였다. 그곳에서 발견된 벽은 안쪽으로 약간 경사가 져 있는데, 그것은 호머의 묘사와도 일치한다. 학 자들은 그리스인들이 왜 10년 동안이나 성을 점령할 수 없 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언덕 정상에 우뚝 솟은 트로이 성은 전쟁이 일어났던 시대의 전투 기술로는 접근 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견고했던 것이다. 콜린 윌슨은 트로이의 멸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트로이 전쟁이 일어났던 시기는 소아시아에서 전쟁이 많이 일어나던 때였다. 당시 트로이의 후견인이자 강력한 제국이었던 히타이트 제국은 쇠퇴 기미를 보여 영향력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는데, 이를 틈타서 그리스인들이 각 지 역의 반란을 부추겼다. 이때 트로이의 왕자인 파리스가 스 파르타로 아가멤논의 동생인 메넬라우스를 찾아갔고, 메 넬라우스의 아내인 헬렌은 자신의 남편보다 더 매력이 있 는 파리스와 함께 야반도주를 해 버렸다. 아내가 도망을 가자 미넬리우스는 씩씩거리며 형인 미 케네의 아가멤논 왕을 찾아갔다. 당시 그리스의 맹주였던 아가멤논 왕은 동생의 하소연을 듣고 나서, 트로이의 후견 인인 히타이트가 마침 아시리아를 비롯한 여러 주변 국가 들과 전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트로이 지역을 공격하기 에 적기라고 판단했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트로이를 공격했다. 그의 예상대로 히타이트 제국 은 지원군을 보낼 여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로 이는 난공불락이었다. 그러다가 전쟁이 일어난 지 10년째 되던 해에 지진이 일어나서 성안은 혼란 상태에 빠졌고, 그 틈을 타서 그리 스인들이 성을 점령해 버렸다. 남자들은 모두 살해되었고 여자와 어린이들은 노예로 끌려갔다. 트로이는 불탔고 집 들은 파괴되었다. 그렇다. 트로이 전쟁을 끝으로 신화는 끝이 났다. 사람 은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것이다. 우리의 이 여행에서 볼 것이 없다는 것은 상상할 것이 없 다는 것이다.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얼마나 부질없는 여행인 것인가? 상상력 없이 어떻게 이 터키를 볼 수나 있겠는가? 우리는 사실을 믿지 않고,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또 그것을 살아가는 것 이 아니라 그것을 꿈꾸어 가는지도 모른다. 우리도 이 여 행에서 몇 가지의 에피소드를 남긴 채, 아나톨리아 반도의 대장정을 끝내고 아시아와 유럽을 가르는 다다넬스 해협 을 건너 이스탄불에 입성하게 된다. 이스탄불, 이만우 회장(우)과 임봉아 회원 이스탄불 지구상에 인류가 살고 있는 한 언제까지나 살아있을 도 시! 일찍이 17세기에 러시아의 피터(Peter the Great)대 제는 이스탄불을 지배하는 것은 세계의 반을 차지하는 것 이라고 했고, 18세기 프랑스의 나폴레옹도 자연의 축 복 받은 선물이요, 역사적 유적을 동시에 간직한 곳이 이 스탄불말고 또 있겠는가! 하고 극찬한 이 도시는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보스포러스 해협을 경계선으로 동양과 서 양으로 나뉘어 있다. 이 축복 받은 도시는 세계의 역사를 좌우했던 로마제국, 15

술탄의 궁녀들이 거주하던 톱카프 궁전의 하렘 비잔틴제국, 오스만제국의 수도로서 약 1500년간 영화를 누려왔고, 두 제국의 국교였던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문명 이 서로 맞닿은 도시이다. AD 330년 로마의 콘스탄티누 스 황제가 이곳으로 수도를 옮겨서 콘스탄티노플이라 불 리게 되고, 1453년 돌궐족의 후예 오스만투르크가 정복하 여 도시 이름을 이스탄불이라 부르게 되었다. 성 소피아 성당 약 1.000년 동안 콘스탄티노플의 대성당으로 사용된 성 소피아 성당은 비잔틴제국의 중심지였다. 그 후 오스만제 국의 정복으로 약 5세기 동안 아야 소피아 자미(Aya Sofia Camii)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이스탄불 왕실의 모스 크 중 첫 번째로 꼽혔으며, 터키 공화국 초기까지 모스크 로 사용되었으나 1935년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안 황제는 전무후무한 대성전을 짓기 위하여 당대에 유명한 트랄레스의 건축가 안데미우 스와 밀레투스의 기하학자 이시도루스를 책임자로 임명하 고 가능한 한 모든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황제가 직접 측 량에 나서기도 하면서 매일 100명의 기술자와 만 명의 인 부가 동원되어 5년(537년 12월 27일)만에 완성하게 된 것이다. 그 후 약 천년간 세상에서 가장 큰 건물이라는 명 예를 얻게 되었다. 준공식에서 유스티안 대제는 너무나 감격하여 오, 솔로 몬이여! 내가 당신을 앞질렀오. 하고 외쳤다 한다. 그 후 잦은 지진으로 계속 위협을 받고 손상되기도 했으나 아직 까지도 건재하며, 세계에서 4번째로 큰 건물이다. 그리스 정교회 총대주교 알현 그리스 정교회 한국전도 10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던 해 서울을 다녀갔던 총대주교(교황)의 통역을 맡으셨던 유교 수님의 주선으로 우리는 특별한 경험을 하기로 했다. 다양 성의 세계에 살면서 내 것도, 남의 것도 알 필요가 있는 것 이다. 더구나 정교회의 총본산에서 가장 어른이신 분을 뵈 옵는 자리임에랴. 한참을 기다리는데 총대주교가 나오셨 16

청거리던 이 실크로드의 끝자락에서 IMF의 길고 어두운 터널을 아직도 빠져 나오지 못한 터키 경제의 어두운 그늘이 보였다. 많은 한국관광객 중에는 100불 달라는 물건을 20불 주고 샀는데도 더 싸게 산 사람 때문에 속상해 하는 사람도 보였다. 그랜드 바자르엔 정말 아무 것도 살 것이 없었다. 이스탄불에 가거든 그랜 드 바자르엔 가지 않는 게 좋겠다. 가더 라도 눈요기만! 다. 여러분 만나 뵙게 되어서 대단히 반갑습니다. 저는 한 국을 두 번 다녀갔습니다. 여기에 여러 종교를 가진 분들 이 오셨지만 모두 환영합니다. 우리 정교회는 모든 종교인 을 존중하며 평화를 사랑합니다. 여러분, 이스탄불에서 즐 거운 여행이 되십시오. 우리는 맛있는 초코렛과 작은 십 자가 하나씩을 선물로 받았다. 톱카프 궁전과 지하저수조 보스포러스 해협, 골든 혼과 마르마라해가 서로 만나는 곳에 정복자 마흐메트 2세에 의해 건설돼 1467년에 완성 된 톱카프 궁전이 있는데, 오스만제국의 영화의 극치를 보 여주었다. 보석전시장에는 86캐러트짜리 세계 최대의 다 이아몬드가 있었다. 술탄의 궁녀들이 기거하던 하렘 (Harem)도 인상적이었다. 지하 저수조 예레바탄 사라이 는 비잔틴 제국시대에 8만 입방미터의 물을 저장하는 목 적으로 만들어진 거대하고 화려한 건축물이며 파리의 고 고학자가 발견했다고 한다. 이 거대한 지하 저수조의 맨 마지막 부분에 희랍 신화의 메두사가 조각된 주춧돌이 있 었다. 고고학 박물관 고고학 박물관은 톱카프 궁전 제1정원 의 내측에 위치하여 있다. 이 박물관에는 메소포타미아의 세계 최초의 도시 국가 였던 수메르와, 수메르 도시 국가를 멸망시키고 세계 최초 의 중앙 집권 국가를 건설했던 아카디아 왕국, 히타이트,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트로이, 페르시아, 고대 그리스, 마 케도니아, 로마, 비잔틴 제국의 유물들을 약 6만 점이나 소장하고 있다한다. 특히 알렉산더 대왕의 석관은 BC 4세기 후반의 것인데 내부의 그림에는 페르시아 군대와 그리스 군대간의 전투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또 석관의 외부에는 알렉산더 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 군대를 이수스 평야에서 대 파한 전투를 묘사했다. 석관 옆의 네 면에는 18명의 여인 들이 대왕의 죽음을 슬퍼하는 모습이 마치 지금도 살아있 는듯했다. 블루모스크(Sultan Ahmet Camii) 오스만 터키 제국의 14번째 왕인 아흐멧 1세가 20세 때 성 소피아 사원을 모방하여 세운 회교 사원으로 이스탄불 에서 가장 큰 사원이다. 아흐멧 1세는 당시 유명한 건축가 였던 시난의 제자 메흐멧 아아(Mehmet Aga)에게 명하여 1609년 건축을 시작하였고, 7년 후 1616년에 완성하였다. 그랜드 바자르 돔과 석벽으로 가득한 20만 평방미터 부지에 3500여 개의 가게가 밀집한 곳이다. 도자기, 가죽, 악세사리, 양탄 자, 여자들이 좋아하는 파시미나숄 등을 팔고 있는 시장이 다. 그 옛날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자랑하던 대상들의 흥 보스포러스 해협을 따라 크루즈를 하면서 여행의 일정 을 마감했다. 터키 노래에 나오는 우스크달라 항을 들러 해안의 어느 풍광 좋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우리는 이스 탄불과 아쉬운 작별을 나누었다.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