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과 안철수의 예정된 실패 지방선거 승리 후 이들에게 남는 것 1. 안철수 새정치 의 시작과 끝 2. 80년대의 두 가지 유산과 그들의 몰락 3. 반 새누리당 과 48%의 이념적 빈곤 4. 자기계발 열풍과 안철수의 비정치 5. 이번 통합은 잘못된 결정 인가? 6. 예정된 실패 이후 : 새로운 정치 세력의 형성 을 향해 1. 안철수 새정치 의 시작과 끝 지난 3월 2일 오전 갑작스럽게 민주당과 새정치연합의 통합 소식이 발표되었다. 이 두 세력 사이의 미묘한 관계 가 변화되어온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지난 대선 국면으로 잠깐 돌아가보자. 2012년 대선은 민주당과의 경쟁을 통 해 정치인 안철수가 등장한 계기이자 새정치 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정치세력이 형성되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 문재인 후보와의 단일화 협상 과정을 보면,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 안철수 진영의 행보에서 쉽게 이 해하기 힘든 몇 가지 양상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 안철수 후보는 몇 차례에 걸쳐 단일화 협상을 중단시켰지만, 민주 당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언제나 불명확했다. 그러면서도 민주당 내부의 인적 쇄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 는 은근슬쩍 흘리곤 했는데, 결국 협상이 재개되는 것은 그 요구가 일정 정도 받아들여졌을 때다. 초기에 협상이 교 착국면에 빠져들다가 10월 21일 친노 핵심참모 9명이 민주당 선대위에서 사퇴한 후에 일시 회복되었고, 그 후에도 안철수 후보 측은 무엇인가를 계속 기다리는 듯 하다가 11월 18일 민주당 최고위원 전원 사퇴 후에 다시 협상 테이 블로 나온다. 이러한 양상은 독립된 두 정치 세력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민주당과 정의당이 야권 연대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상대 정당의 지도부 사퇴나 선대위 인적 쇄신을 요구한다는 것이 납득 가능한 일 인가? 독립된 두 정당 사이의 협상이란 서로에 대한 요구사항을 제시하고 합의 가능한 수준을 찾기 위해 서로 얻을 것과 잃을 것을 계산하면 되는 것이지, 상대 진영의 내부 질서를 문제삼을 필요가 없다. 상대 정당 내부의 인적 쇄 신에 대한 요구는, 과거 2012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 한국노총, 시민운동 세력이 민주통합당을 창당한 것처럼 서 로 다른 세력들이 하나의 정당으로 통합하거나 외부 세력이 기존 정당 안으로 편입되는 경우에만 필요하다. 따라서 안철수 세력이 단일화 협상에서 보여준 것은, 민주당과 독립된 정치 세력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당 내부 계 파로 편입될 것을 가정하고 있는 집단의 그것에 가깝다. 대선 당시 안철수 세력 내부 인사들은 스스로를 일종의 민 주당 비주류 로 인식하고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심을 가질만하다. 단일화 협상 도중 인터넷 공간에서, 안철수의 1
진짜 목적은 자기 세력을 민주당으로 끌고 들어가, 당권을 장악하는 데 있다 는 음모론이 등장하기도 했는데, 이것 을 그냥 음모론으로 치부하기에는 여러가지 미심쩍은 부분들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대선 이후 안철수 후보가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신당 창당을 공식화하는 과정에서는, 사실상 독자 세력 화로 내부 노선을 변경한 게 아니냐는 추론이 가능했다. 그 와중에 급작스럽게 발표된 민주당-새정치연합의 통합 은, 그 결과만 놓고 보자면 지난 대선 기간 안철수 세력에 대해 제기된 의혹이 완전히 틀린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 고 있다. 표면적으로야 민주당과 새정치연합이 제3시대 신당 이라는 방식으로 통합하는 것이지만, 사실상 안철수 세력이 민주당 계파의 하나로 편입될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동안 안철수 의원이 주장해 온 독자 신당 창당 을 통한 새로운 야권 세력의 형성 이라는 과제는 이제 다시 민주당의 내적 혁신 으로 환원되고 말았으며, 정당과 정당 사이의 경쟁을 통한 상호 혁신 역시 민주당 내부 계파 사이의 경쟁을 통한 민주당의 혁신 으로 대체될 것이 다. 그렇다면 안철수 의원의 이번 결정은 새정치 지지자들에 대한 배신인가? 신당 창당을 공언해왔던 그간의 행 보는 단지 민주당과의 합당을 위한 몸집 불리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인가? 그는 결국 자신의 새정치 를 내던지고 민주당이라는 과거의 유산으로 회귀하고 만 것인가? 물론 여러가지 이유에서 그의 결정은 비난받을 수 있겠지만 민주당이냐 독자 정당 창당이냐가 가장 근본적인 쟁점으로 인식되어서는 안된다. 처음부터 이 두 가지 가능성은 열 려있었으며 그는 단지 전술적으로 이 둘 사이를 왔다갔다해왔을 뿐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다음 질문이다 - 안철 수 세력이 여전히 소리 높여 외치고 있는 민주당 혁신 이라는 목표는 과연 성공할 수 있는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의 답을 이미 알고 있다. 그 목표는 실패할 것이다. 우리 역시 단호하게 그의 실패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 름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가 주장한 민주당 혁신이라는 미래의 목표는, 현 시점에서 이미 실패가 예정되어 있다. 지 금 필요한 것은 그의 예정된 실패 를 필연적으로 산출해 낼 현 국면의 구조를 분석하는 일이다. 안철수의 새정치 가 아니라 진정한 새정치 를 위해서는 바로 그 국면에서 출발해야하기 때문이다. 2. 80년대의 두 가지 유산과 그들의 몰락 언제부터 민주당은 반드시 혁신해야할 골칫덩이 정도로 간주된 것일까? 민주당의 몰락 이 시작된 시점을 정확 히 하자면, 참여정부의 실패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로 각인된 바로 그 즈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때 실 패 라는 것은 무엇의 실패인가? 참여정부의 실패를 단지 당시 집권당 정치인들 몇 명의 실패로 상상한다면 혁신 은 비교적 간단하게 보이겠지만, 그 간단한 혁신을 위해 정당 지도부만 매번 갈아치우면서 그들이 실패한 바로 그 자리에서 한없이 맴돌게 될 것이다. 역사적 맥락에서, 그리고 정당 정치를 구성하는 세력들의 측면에서 참여정부의 실패는 80년대적 유산의 한쪽 축이 종말을 맞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인민들의 보편적 동의를 획득한 정치적 이념은 반독재 민주화 운동 속에서 탄생한 민족주의 와 (반독재) 민주주의 가 거의 유일하다. 이 두 가지 이념을 역사적 경험으로 체화하고 있었던 민주화 운동 세대는 87년 이후, 90년대를 거치며 양분되었다. 한 쪽은 자신의 경험을 시장주의 혹은 신자유주의 와 결합시키며 기존 정당 정치 체제로 편입되어 갔고, 다른 한 쪽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속에 내재되어 있던 민중주의 와 혁명주의 2
를 발전시키며 진보진영 이라고 불리는 세력을 형성하였다. 노무현 정부의 참혹한 실패는 전자 즉, 민주화 세대와 시장주의의 결합이 도달하게 된 종착지였다. 거시적 관점에서 참여정부의 이념적 지향과 인적구성은 지금 민주당 내에서도 큰 변화없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오히려 이들 시장주의적 486세대 는 이제 민주당 주류 의 자리에 올라와 있다. 민주당이 계속 우왕좌왕하며 분명한 정치적 비전도 없고 강력한 리더십도 형성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세대의 기본 정체성을 구성하는 정치적 지향과 역사적 경험 모두가 유효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참여정부가 청 산 해야할 과거에 맞서기 위해 불러낸 것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기억이었고, 현재를 운영하며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선택한 것은 시장주의였다. 하지만 민주화 투사로 살았던 왕년의 기억은 2000년대의 우파에 맞서기 위한 무 기가 될 수 없었고, 그들의 시장주의는 한국 사회를 회복 불가능한 나락의 길로 인도했다. 지금 민주당의 전략도 크 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박근혜 정부나 우파 세력에게 맞설 때는 반독재 투쟁의 기억을 되살리며 80년대로 돌 아가려하고, 한국 사회의 현재적 문제를 다룰 때에는 여전히 시장주의의 근처에서 머뭇거린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제 이들이 어떤 정확한 이념을 가지고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 이들이 말하는 민주주의 란 어떤 정치적 원리나 이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반독재 민주화 운동 이라는 자신들의 과거 경험을 지칭할 뿐이며, 이제는 그들을 신 자유주의자 라고 부를 만한 분명한 정치적 지향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이 헤게모니 집단이 될 수 있 는 것은 자체 역량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과 같은 어떤 정치적 사건이나 정국의 우발적 변 화 같은 외적 요인에 의해서일 뿐이다. 어쨌든 복잡한 분석이 없어도 친노이든 비노이든, 기존 민주당 내부 세력이 혁신의 주체가 될 수 없음은 유권자 대부분이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다른 한편, 민주노동당 분당과 지금의 통합진 보당 사태는 혁명주의 와 민족주의 의 결합이 도달하게 된 종착지다. 이 글에서 진보정당 운동의 현 상황에 대해 따로 논하지는 않겠다. 다만 민주당의 몰락과 진보정당 운동의 해체는 서로 독립적인 사건이 아니라, 한 뿌리에서 갈라져나온 두 가지 귀결이라는 것만 주목하면 된다. 즉, 80년대에 태동한 정치적 세력들과 이념들은, 그것이 시장 주의로 투항 했든 혁명주의로 급진화 했든 간에, 매우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각자의 종말을 고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민주당의 혁신 이란 애초에 이루어질 수 있는 목표인가? 한 정치 세력이 가장 급진적인 형태의 혁신을 이룬다고 해도, 자신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와 역사적 경험을 버릴 수 는 없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서 성장해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운영했던 세력 이라는 역사적 사실은 그 자체 로 영원히 존속할 것이며, 그것을 버린다는 것은 스스로 해체된다는 것과 다름 없다. 결국 민주당의 혁신 이란 기 존 민주당의 변화 가 아니라, 민주당의 죽음 과 새로운 정치 세력의 등장을 의미한다. 민주당 스스로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결정적 순간마다 외부의 새로운 세력을 내부로 편입시키는 전략을 취해왔다. 민주통 합당 창당이 그러했으며 이번 새정치연합과의 통합도 마찬가지다. 선거 때만 되면 민주당 구세력이 죽음을 맞이하 지 않고도 적절한 수준에서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피 들를 찾아헤매는 것이다. 시민사회 운동과 노동운동 등에서 민주당으로 수혈된 새로운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 덕택에 민주당은 매번 일정 정도의 승리 를 거둘 수 있 었다. 하지만 이들의 새로운 피가 수명이 다한 세력에게 부활을 가져다줄 수는 없다. 민주당 구세력에게 남은 길은 새로운 피를 찾아헤매는 좀비처럼 살아가거나, 죽어서 소멸하거나 이 두 가지 밖에 남지 않았다. 3
3. 반 새누리당 과 48%의 이념적 빈곤 결국 우리는 80년대적 유산과 단절된 새로운 정치 세력이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도달한다. 조 금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새로운 정치세력 이란 새로운 정치 이념 과 새로운 경험을 가진 사람 들로 구성된다. 물 론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다. 새로운 이념을 기존 정치세력에게는 이식시킬 수 없듯이 새로운 사람이란 곧 새로운 이 념의 구현체다. 새로운 정치 이념이나 집단의 형성은 점진적 과정을 거치며 이루어지지만, 그것이 결정적으로 정치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혁명이나 대규모 사회 운동 같은 정치적,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다. 그런 의미에서 이명박 정 부 초기 촛불시위는 새로운 정치 세력의 등장을 기대할 수 있는 거대한 사건이었다. 촛불시위를 몇 가지 개념으로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들을 촛불시위에 참여하게 만든 분노의 근저에는 일종의 민족주의가 깔려있었지 만 그것은 과거의 민족주의와는 분명히 달랐으며, 당시 정치권에 대한 반감은 정치 일반에 대한 불신이었지만 그것 을 단순히 반정치 라고 할 수도 없었다. 겉으로는 다양한 집단의 사람들이 하나의 대중운동을 구성한 것처럼 보이 기도 했지만 내부에서는 화해불가능한 적대가 공존하기도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촛불시위라는 현상 자체에 대 한 분석이 아니라 그것이 남긴 정치적 영향력을 이해하는 일이다. 우리의 평가는 매우 회의적이다. 결론적으로 말 하면 촛불시위는 전례없던 역사적, 정치적 사건이었고 매우 역설적이고 복잡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었지만, 불행 하게도 그것의 귀결은 새로운 정치를 위한 토대가 아니라 반 이명박 혹은 반 한나라당 이라는 빈곤하기 짝이 없 는, 하지만 다른 모든 생각들을 집어삼킨 괴물같은 감정과 정서였다. 이제 야권 지지자들에게 모든 나쁜 것의 원인 은 이명박 으로 돌려지고, 얼마 전까지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를 중얼거리던 사람들이 어느새 이게 다 이명박 때문 이라고 말을 바꾼다. 한국 사회를 운영해 갈 비전과 원리를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은 축소되고, 오로지 정권 교 체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만능 열쇠로 여겨진다. 이렇게 빈곤한 반우파 정서가 제 모습 그대로 드러난 것이 나는 꼼수다 에 대한 열광이었는데, 대중의 폭발적 반응에 비해 그 열광의 정치적 내용과 요구는 매우 빈약 한 것이었다. 2008년 촛불시위에서 탄생한 대중의 정치적 열망이 2012년 나꼼수 로 마무리된 것은 그야말로 비 극적 결말이다. 1 1 여기에 두 가지 유의사항을 추가하자. 1) 어떤 사람들은 이른바 촛불시위의 한계 를 기존 정당 정치와 사회 운동 세력의 책임 으로 돌린다. 촛불시위를 통해 분출된 대중의 열망 에 기존 정치세력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평가 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여전히 기존 정치 세력의 관점에서, 새로운 흐름을 어떻게 낡은 형식 속에 받아들일까를 고민하기 위한 평가일 뿐이다. 반면 새로운 정치 세력의 형성이라는 관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과거와 단절된 세력이 등장해 기 존 정치 세력을 대체할 것인가? 라는 물음이다. 따라서 촛불시위에서 새로운 정치 이념이나 집단이 태어나지 못했다는 말은, 그 냥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진술일 뿐이지 누군가에게 그 책임을 돌릴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촛불시위는 처음부터 주체없는 운동 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발언은 단순히 정치적, 문화적 현상에 대한 평가일 뿐, 어떤 당위적 기준에 따라 성 과 와 한계 를 논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2) 이 글에서 비판하는 것은 반 새누리당 이 표현하고 있는 정치적 이념 과 가치의 부재이지, 선거 전략으로서의 반 새누리당 이 아니다. 반우파 전선을 위한 야권연대 는 해당 국면에 따라 그 적절성 을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우리는 지난 몇 차례 선거에서 야권연대라는 전술은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고 평가한다. 4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을 지지한 48%의 유권자들은 지난 어떤 대선보다 가장 강력한 결집력을 보여주었는데, 그 원동력은 무엇보다 변화에 대한 갈망 즉, 이명박 정부와는 다른 정치 권력이 필요하다는 절박한 요구였다. 하지 만 불행하게도 이런 절박함을 채워줄 정치적 내용은 충분히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새누리당의 재집권을 막아야 한다 는 요구를 정당화 시켜줄 수 있는, 일반적으로 합의된 정치 논리나 공동의 가치를 발견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 때문에 당시 야권 지지자들의 정치 의식은 다양한 대체재 를 모색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80년대의 정치 이념으로 회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세대론 이 투표 행위를 강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논리로 차용된다. 당시 널리 퍼 져있었던 친일파 이명박 과 독재자의 딸 박근혜 라는 정치적 표상은 민족주의와 반독재 민주주의라는 80년대적 정신으로 회귀함으로써 우파에 대응하려고 한 무의식적 움직임이었다. 야권 유권자들의 표를 실질적으로 조직하 기 위해 창안된 이데올로기적 장치는 세대론 이었는데, 그것은 20, 30대를 하나의 세대 라고 이름 붙임으로써 이들을 투표에 참여하게 만드는 일종의 윤리적 규범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민족주의와 반독재 민주주의는 오래 전에 유효성을 상실한 이념들이고, 세대 라는 것은 아무런 정치적 내용을 갖지 않는 비어 있는 이름일 뿐이다. 다행히도 새로운 정치적 이념의 토대로 간주될 수 있었던 것이 단 한 가지 존재했는데, 바로 경제민주화다. 경 제민주화 라는 이름으로 포괄되었던 다양한 담론들은 새로운 정치적 이념과 가치, 윤리를 구성하기에 충분한 것들 이었다. 시장주의가 한국 사회를 지배한 이후 거의 20년 만에 경제민주화가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매우 놀라 운 사건이었다. 이명박 정부 초, 중반의 대중 운동이 그 역동성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정치적 지향을 제시해주지 못 했던 것에 반해, 경제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사회운동과 정치적 의식의 성장은 새로운 정치 이념과 세력의 등 장을 기대해볼 만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 경제민주화 담론이 생산, 소비되는 과정은 그런 기대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는데, 경제민주화를 선거정치 공간에서 먼저 헤게모니화한 것은 민주당이 아니고 새누리당이었으며 대선 국면에 이르렀을 때, 경제민주화는 이미 잊혀진 이름이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박근혜 정부가 경제민주화 공 약을 파기하든 말든 지지율 50% 이상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경제민주화 의 소멸과 정은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담론이 새로운 정치 이념으로 자리잡는데 필요한 조건들이 무엇인지, 그 중 결여된 것 들이 무엇인지를 알려줄 수 있는 가장 뼈아픈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지난 대선에서 가장 시급하게 평가해야할 문제 를 한 가지 꼽는다면, 야권의 패배 원인은 무엇인가? 따위가 아니라 경제민주화의 등장과 소멸과정일 것이다. 4. 자기계발 열풍과 안철수의 비정치 정치적 영역에서 이념의 빈곤함이 반 새누리당 으로 표현되었다면, 문화 영역에서 그와 동시에 발생한 것은 이 른바 자기계발 과 힐링 열풍이었다. 이 두 가지는 경쟁사회에서 승리하거나 최소한 낙오되지 않기 위한 동기부 여의 한 방법 혹은 정신력 재생산 을 도와주는 감정 상품인데, 기묘하게도 그것의 핵심 구성 요소 중 하나가 비정 치 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비정치성이 정치와 사회에 대한 무관심, 개인적 삶에만 몰두하는 태도 따위 와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힐링 열풍이 멘토 안철수를 정치인 안철수로 변신시킨 원동력이 되지 않았 5
는가? 자기계발과 힐링을 청년 세대의 정치적 무관심 과 연관짓는 것은 매우 단순한 발상이다. 그렇다면 자기계 발과 힐링 열풍의 비정치성 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자기계발은 기본적으로 전문 지식 의 절대 우위를 전제한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자기계발이란 그냥 스펙 쌓 기 와 다름 없는데, 그 스펙이라는 것은 사회가 공인한 전문 지식과 경험의 수준을 타인과의 경쟁을 통해 계속 높 여나가는 것이다. 학벌과 학점부터 어학시험, 자격증, 고시, 공모전 등과 봉사활동 및 인턴 경험까지, 한국 사회는 개인이 습득한 기술적 지식의 수준을 검증하기 위한 온갖 장치들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스펙 쌓기는 개인에게 고통스러운 스트레스를 부과하기 때문에 그것을 완화해줄 심리적, 감정적 회복제 즉, 힐링 이 필요하다. 힐링 은 위로와는 전혀 다른 것인데, 위로란 개인들 상호간의 연대과 동질감을 요구하는 반면, 힐링 은 자기보다 높은 서열에 대한 무한한 욕망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힐링을 정기적으로 투약 하면서 자기계발에 매진해야 하는 개인들이 바라보는 세계에 공동체의 삶을 운영하는 원리로서의 정치 란 필요없다. 모든 개인은 그들이 습득한 지 식 수준을 검증하는 사회 시스템에 따라 서열이 매겨지고, 그 서열이 모든 사회적 갈등과 합의 과정을 통제할 수 있 는 메커니즘으로 기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세계에서 정치적 의식을 가진 민주적 시민 이란 불필요하며, 사회 적 관계를 만들고 변화시키는 정치적 리더십이란 뛰어난 스펙을 가진 개인이 당연히 소유하게 될 부산물 정도로 여겨질 것이다. 안철수 의원이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멘토 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서울대 의대를 나온 대학교수 이자 안랩의 CEO인 안철수야 말로 지식 검증 시스템의 최정상에 올라있는 인물,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가장 높은 스펙 을 소유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인 안철수가 등장해야 한다 는 요구는 전문 지식인이 정 치적 공간을 주도해야 한다는 강력한 믿음, 일종의 기술지배주의(테크노크라시)를 동반한다. (물론 여기서 기술 은 흔히 말하는 과학기술 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늘날 기술적 요소가 전문 지식 이라고 불리는 대부분의 지식 체계에서 핵심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처럼.) 요컨대 정치에 대한 전문 지식의 우위 다. 이런 이유에서 안철수 의원 을 다른 기업인 출신 정치인들과 동일시하는 것은 그다지 정확하지 않다. 지난 대선 기간 내내 안철수 후보는 전 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반복했는데, 이것이 그의 정체성과 인식틀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준다 - 이제 한국 정치는 근본 없는 정치인들이 아니라 검증된 전문가 집단에 의해 운영되어야 한다. 이러한 입장 은 기술지배주의 신봉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기술지배주의의 비민주성에 대한 비판은 대체로 안철수 의 원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대선기간 전면에 내세웠던 국회의원 정수 축소나 최근의 기초 공천 폐지까지, 안철수 진 영이 제시한 새정치 의 내용은 대체로 정당과 의회라는 민주주의적 장치의 권한을 축소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는 데, 축소된 민주주의를 대체하는 것은 결국 기술 엘리트 집단이 될 수밖에 없다. 그는 이것을 정치권의 기득권 포 기 라고 부른다. 안철수 세력에 대한 비난을 아끼지 말아야 할 지점은, 민주당과 통합하기로 한 이번 결정이 아니라 이러한 비정 치성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계속 강화해왔다는 사실이다. 한국 사회의 척박한 이념적 토양에서 멘토 로서 갑자기 등장한 안철수 의원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정치적 내용을 살찌워줄 새로운 원천을 찾으려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자발 적으로 빈곤한 정치의 한 부분이 되어, 척박한 이념적 토양을 더욱 메마르게 만드는 악순환 속으로 지지자들을 몰 아넣었다. 안철수 세력에게는 최소한 두 번의 기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대선 국면에서 경제민주화를 적 6
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새누리당에게 빼앗긴 이념적 주도권을 찾아 올 잠재성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 지난 신당 창당 과정에서 최장집 교수가 제안한 진보적 자유주의 를 수용했다면, 아니 그 제안을 거부하더라도 또 다른 자신 의 이념을 찾으려 노력했다면, 그 실효성은 둘째치더라도 최소한 정당의 기본조건 을 갖춘 정치세력이 될 수 있었 다. 하지만 그는 이 두 번의 기회를 모두 다 거부했다. 그는 경제민주화 대신 국회의원 정수 축소 를 주장했고, 신 당 창당 과정에서 몰두한 것은 기초선거 정당공천제 폐지 였다. 민주당이 혁신 노력을 보여주었다고 찬사를 보내 는 근거가 기초공천 폐지 약속이라는 사실은 희극적인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가져올 정당 정치의 불행 한 미래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5. 이번 통합은 잘못된 결정 인가? 어떤 정치적 현상을 평가해야 할 때에는 현실 정치의 차원과 원리적 차원을 동시에 고려하되 반드시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당과 새정치연합의 이번 결정은 현실 정치의 조건을 고려했을 때에는 충분히 납득가능한 것이지 만, 원리적인 수준에서는 통합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을 결여하고 있다. 그러한 원리적 결여는 미래의 현실 정치에 서 또 다시 나쁜 결과 로 되돌아 올 것이다. 먼저 현실적 조건을 고려하면서 다양한 관점에서 이번 통합을 평가해보자. 첫째, 야권의 지방선거 승리를 바라 는 유권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두 세력의 통합은 분명히 환영할만한 일이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박원순 현 시장은 야권 내부에서 발생할 수 있는 골치아픈 문제에서 벗어나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게 되었으며, 경기도지사 선거 출마를 공식 발표한 김상곤 전 경기도교육감의 전망도 더욱 밝아졌다. 경상도와 몇몇 지역을 제외하면 결코 야권이 불리하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런 예측을 반영하듯이 최근 여론조사도 통합에 매우 호의적이다. 몇몇 조사에 서는 민주당, 새정치연합의 개별 지지율 합계보다 통합 신당 의 가상 지지율이 더 높게 나오기도 한다. 야권 지지 유권자들에게 민주당과 새정치연합의 통합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선택지 중, 최상의 지방선거 전술이라고 할 수 있 다. 둘째, 새로운 정치 세력을 형성하려는 사람들은 한국 정치의 양당 구조가 강요하는, 민주당으로의 편입 혹은 독 자 창당 이라는 양자택일 사이에서 고심할 수밖에 없는데, 전자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위에서 분석했다시피 반 새누리당 은 여전히 유권자들의 절대적 명령으로 작동할 것이며 야권 연대 는 그 구체적 방식이 어떠하든지, 앞으로도 선거 때마다 거스를 수 없는 요구로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독자 창당은 매 우 고통스러운 길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민주당과 새정치연합의 이번 통합을 두고, 이 두 세력과 그들을 지지하 는 유권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리고 결정 과정의 비민주성에 대한 문제를 별도로 한다면, 잘못된 결정 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한편, 상이한 두 정치 세력이 둘 사이의 차이를 유지하면서 연대하거나, 하나의 정당으로 통합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어떤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는가? 가장 이상적인 야권 연대의 형식은, 이질적 정치 세력 A, B, C 가 집권 여당과 자신들을 분명히 구별할 수 있는 어떤 상징 을 중심으로 연대함으로써, 자신들 사이의 차이를 보존하는 동 시에 공동의 적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전선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은 정당과 정당이 연대하는 경 7
우이든, 이질적인 정치 세력이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며 하나의 정당으로 통합하든 경우이든 모두 유효하다. 이때 통합의 구심이 되는 것은 비어있는 상징 일 수밖에 없다. 만일 그들이 실질적인 내용을 가진 정치적 기치에 합의한 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이질적 세력들의 연대가 아니라 이미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융합한 상태일 것이기 때문이 다. 이런 이유에서 안철수 세력과 민주당이 통합의 기치로 내세우고 있는 새정치 가 실질적 내용없는 비어있는 말 이라는 사실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이 새누리당과 통합 신당 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으로 기능할 수 있다 면 그걸로 족하다. 오히려 연대의 가장 기초적인 조건은 통합에 앞서 각각의 정치 세력이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가 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결여되어 있다면 통합 이후 이들을 규제하는 것은 매우 비정상 적인 요소들이 될 수밖에 없다. 즉, 민주당과 새정치연합 모두가 합의한 새정치 의 실질적 내용은 존재하지 않더라도, 각각은 반 드시 자신의 고유한 새정치의 내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민주당을 역사적 유효성 을 상실한 80년대의 유산 으로, 안철수 세력을 정치의 고유한 영역을 인정할 수 없는 기술지배주의자들 이라고 부 르지 않았던가? 이 두 세력 모두에게 새정치 란 그들의 빈곤한 정치적 이념을 가리키는 말일 뿐이다. 결국 통합 이후 이들의 행동을 규정하는 것은 우발적이고 외적인 사건들, 몇몇 지도자들의 개인적 성향, 계파들 사이의 이해 관계, 개별 정치인들의 사적 욕망 따위가 될 것이다. 이것은 현 민주당의 상황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미 잘 알려진 원소들을 적절히 혼합하면 그것들 사이의 화학적 결합이 새로운 물질을 창조해낼 수 있지만, 정 체가 모호한 원소들을 그냥 뒤섞어 놓으면 그것이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낼지 쓸모없는 폐기물이 될지 그냥 폭발해 버릴지 알 수 없다. 지난 지방선거와 총선을 거치며 민주당은 지지율 폭락-새로운 외부 세력 영입-선거 일부 승리 -지지율 폭락 이라는 패턴을 반복하고 있는데, 야권이 이번 지방 선거에서 승리하더라도 이러한 악순환에서 벗 어날 가능성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6. 예정된 실패 이후 : 새로운 정치 세력의 형성 을 향해 우리는 글의 서두에서 민주당과 새정치연합의 실패가 이미 예정되어 있다고 단언했다. 지금까지 그 이유는 충 분히 설명하였다. 요컨대 이번 통합은 시장주의적 486 의 수명연장을 위한 새로운 피 를 안철수의 비정치 로부 터 찾으려 한 것이다. 이미 역사적 유효성을 상실한 80년대의 유산과 정치의 고유한 영역을 인정할 수 없는 기술지 배주의자의 만남. 여기서 탄생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정치 가 아니라, 낡은 정치 이거나 비정치 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새로운 정치 세력 은 어떻게 탄생할 수 있는가? 새로운 정치 세력의 형성을 위해서는 새로운 정치 이념과 새로운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 들은 어떤 선도적 집단의 의식적인 노력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압축된 역사성으로 등장한 다. 과거에 한국의 민족주의나 민주주의가 그러했듯이. 정치적 행위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새로운 정치 세력을 위 한 역사적 조건은 마키아벨리적 의미에서 포르투나(fortuna)의 영역에 속한다. 앞서 말한 48%의 이념적 빈곤 과 전문 지식인에 대한 대중의 열광 따위는 정치적 행위에 앞서서 존재하는 객관적 국면이며, 몇몇 정당 정치 세력이 자기 혁신을 한다고 해서 그런 객관적 국면을 극적으로 뛰어넘을 수는 없다. 더구나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는 새로 8
운 정치를 위한 조건들이 파괴되는 방향으로 변화되어 왔다. 거대 우파 정당이 장기 집권에 들어가고 진보정당 운 동이 몰락하면서, 소수 정당이 생존할 공간은 더 협소해졌다. 노동 운동이나 시민 사회 운동도 더 이상 정당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역량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여러모로 우리는 참 쉽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정당 정치 영역에서 새로운 정치 세력의 형성 을 위해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분명히 존재한다. 무엇보다 새로운 정치적 이념의 형성이라는 과제가 이미 존재하는 정치적 이념들 중 하나를 선택 하는 문제로 환원되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오래전 진보정당 운동 내에서 흔히 발견되었던 경향이다. 여기서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정치적 이념이 나열되어 있는 어떤 목록이 가정된다. 극좌파, 좌파, 중도 좌파, 중도, 중도 우파 이제 정치적 이념의 수립은 이 목록 중에서 적당한 것을 하나 골라잡는 문제로 환원된다. 경쟁 세력에 대한 비판에서 문제 되는 것 역시 그들의 정치적 내용이 아니라 이념적 위치다. 결국 현실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의 해법은 단 두 가지로 제 시된다. 이념적 스펙트럼 위에서 왼쪽으로 가거나 오른쪽으로 가거나. 물론 이제는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최근에도 이것과 기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담론이 좌, 우파를 막론하고 유행했는데, 이 른바 사회 모델 이다. 진보정당들은 북유럽 복지국가 모델에 주목했었고, 민주당과 새누리당 정치인들 사이에서 는 이른바 독일 모델 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제 선진국 사회 의 전체 유형들이 하나의 표로 정리된다. 고 전적인 미국과 일본 모델부터, 독일식, 프랑스식, 스웨덴식, 네덜란드식 정당의 이념을 수립하는 것은 이 중 하나 를 골라잡는 걸로 다시 환원된다. 누군가는 북유럽식 복지국가 모델, 다른 누군가는 독일식 모델 등등. 우리는 두 가지 이유에서 이러한 경향을 비판한다. 첫째, 사회 모델 이라는 것은 한 사회의 압축된 역사성이므 로, 그것을 도구 처럼 빌려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컨대 독일식 사회, 경제 모델을 따른다는 것은, 한국 사회의 역 사 전체를 소거하고 독일의 역사를 통째로 옮겨와야 한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모델 은 특정 한 제도나 장치 같이 매우 제한적인 영역에 머물 수밖에 없다. 이것은 결코 유럽적 보편성 과 한국 사회의 특수 성 을 대립시키며, 우리식 모델을 창조해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독일식 정 당 정치 모델을 프랑스에 이식하자고 하든가, 스웨덴식 복지모델을 영국에 적용하자고 한다면, 그것이 과연 설득력 을 가질 수 있을까? 서구, 비서구 할 것 없이 모든 사회는 다 특수하며, 자신만의 고유한 역사성을 갖는다. 어떤 사 회의 미래를 위한 모델을 이미 존재하는 것들 중에서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은 그냥 헛된 바람일 뿐이다. 둘째, 사회 모델 은 정치적 이념이 아니다. 현존하는 정당들은 대체로 인간의 자유와 평등, 공동체성과 연대성 등을 자신이 추 구하는 궁극적인 가치로 제시한다. 그렇다면 정당들 사이의 차이는 어디서 발생하는가? 사람들은 흔히 정당의 이 념이란 대체로 다 비슷한 것들이고, 그들 사이의 차이는 구체적 정책이나 실천적 방법론에서 발생한다고 믿는 것 같다. 그래서 정책적 수준에서 어떤 사회 모델 을 수용하느냐가 자기 정당의 이념을 표현하는 것으로 믿는다. 하 지만 현대 정당들 사이의 차이가 단지 정책적 수준에서 존재하는 것이었다면, 20세기 인류 역사는 훨씬 조용히 지 나갔을 것이다. 하나의 정치 세력이 다른 세력과 구별되는 것은 정치적 이념의 수준이며, 거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 은 어떤 자유, 누구의 자유인가?, 자유와 평등은 어떤 관계인가?, 연대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애초에 자 유롭다는 인간 이란 정확히 누구인가? 등의 물음들이다. 이것들에 대한 상이한 대답들로부터 20세기의 피 튀기 는 대립과 갈등이 발생하지 않았던가? 안타깝게도 한국 정당 정치에서 이런 문제들이 진지하게 탐구된 것은 과거 9
민주노동당 창당 초기가 거의 유일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새로운 정치 세력 형성을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어떤 사회 모델이냐? 가 아니라 어떤 이념이냐? 는 물음이다. 예컨대 정당의 정책 수립을 위해 북유럽 복지국가 모델 이나 독일식 시장경제 모델 등을 참고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지만, 그것이 정치적 이념의 자리를 대체하 도록 해서는 안된다. 2 정치적 이념이라는 것은 어떤 이론적 연구의 결과물로 주어질 수 없다. 물론 이론과 지식은 이념의 중요한 구성 요소들이다. 하지만 정치적 이념의 핵심은 가치 에 있으며,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한 사회의 역사성 자체다. 인간 의 자유과 평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라는 물음의 답은 한 사회 전체가 역사적 시간 속에서 찾아갈 수밖에 없 으며, 그 과정이 곧 새로운 정치 집단이 형성되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정치 세력의 형성을 바라는 사람들이 감내해야 할 것이 바로 이렇게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다. 그 시간을 성공적으로 보내기 위해 서는 최소한 두 가지 규칙을 지켜야 한다. 첫째, 정치 세력에게 요구되는 조건들을 만족시키기 어렵다고 해서 결코 꼼수 를 부려서는 안된다. 요컨대 이제는 유효하지 않은 과거의 이념으로 돌아가려고 하거나, 정치적 이념 자체를 포기하거나, 정책적 수준의 내용으로 정치 이념을 대체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둘째, 어떻게든 의회 정치 라는 제도 내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들과 정치적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정당 정치 내에서 생존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결여하고 있다면 결국 사라져갈 수밖에 없다. 물론 첫째 규칙과 둘째 규칙 사이의 적절한 타협점 을 찾는 게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새로운 정치 운동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자신들의 적당한 장소를 찾아 내어 죽지 않고 살아남아, 매우 느리더라도 멈춤없는 성장을 지속해야만 한다. 소멸하지 않을 것 지금은 이것이 정 치 운동의 가장 우선적인 목표다. 2 흔히 정치적 이념에 대한 논의는 그냥 원리적이고 추상적 인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회 모델 에 대한 관심 에는, 정치적 이념 따위의 뜬구름 잡는 논의 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안 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 나 한번 생각해보자. 독일이든 스웨덴이든 강력한 노동조합 이 그 사회 운영의 핵심 기초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 사회에서 강력한 노동조합 의 존재가 의미하는 바는 단지 큰 규모의 노동자 조직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 계급 형성의 역사 적 결과물 이며 노동권에 대한 사회적 합의 를 핵심적인 존재 조건으로 요구한다. 어떤 정당이 유럽식 사회 모델 을 자신의 정 책적 방향으로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전제하고 있는 노동권을 자신의 이념과 가치로 깊이있게 이해해야 하며, 노동권에 대 한 사회의 일반적 합의 역시 이미 일정 정도 이루어져 있어야만 한다. 중요한 것은 사회 모델 에 대한 논의가 노동권에 대한 합 의를 자동적으로 도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정책적 수준에서 북유럽 복지국가 모델이 공감대를 얻는다고 해도 그것의 실 행에서 다시 부딪히게 되는 것은, 노동권에 대한 한국 사회의 몰이해와 적대적 문화 따위들이다. 노동권에 대한 사회적 합의라 는 것은, 단지 정책적 수준 뿐 아니라 이념과 가치의 수준에서, 혹은 문화적 수준에서 전면적으로 논의되었을 때 겨우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유럽식 사회 모델 에 필요한 것은 비단 노동권에 대한 합의 뿐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공정 이나 정의 와 구별되는 가치로서 인간의 평등 이 전제되어 있다. 사회 모델 에 대한 논의가 아무리 활발해진다고 해도, 그것이 이런 수준 의 이념과 가치에 대한 합의까지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