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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는 그 도장에 예왕지인( 濊 王 之 印 : 예왕의 인장)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 나라에는 오래된 성이 있는데, 이름을 예성( 濊 城 )이라 고 한다. 본래 예맥의 지역인데, 부여가 그 가운데 왕으로 있었다.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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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대흥( 大 興 ) 56년(792) 여름 6월 9일에 사망하였는데, 당시 나이는 36세였다. 이에 시호를 정 효 공주라고 하였다. 황상( 皇 上 )은 조회마저 금하고 비통해 하시며 침식을 잃고 노래와 춤추는 것도 중지하였다.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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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읍, 녹읍은 귀족들의 경제적 기반이었죠. 왕족 공신 지급 규모는 식읍이 훨씬 더 넓었어요. 금관가야의 왕족인 김구해는 신라에 항복한 뒤 금관군(김해) 전체를 식읍으로 받기도 하였습니다. 관리 금관군 식읍, 녹읍을 차지한 귀족은 그곳에 거주하 는 백성에게서 조세를 징수할 수 있었고 그 토지에 딸린 백성의 노동력까지도 징발 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이 있었죠. 이러한 모습은 토지의 생산성이 낮았던 고 대 사회에서 노동력이 주요 수취 대상이었 음을 잘 보여 줍니다. 또일시키게?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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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를 방문한 여행자는 누구나 정착해 다시 나오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곳은 매우 풍족하고 이로운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개나 원숭이의 목줄도 금으 로 만든다.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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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만난 한국 고대 문화의 숨결 일본의 나라(奈良) 현 아스카 촌 일대는 아스카 문화의 중심지였다. 아스카 문화가 화려하게 꽃피기까지 삼국 과 가야에서 건너온 사람들의 공이 컸다. 도래인(渡來人)이라고 표현되는 이들은 일본에 정착하며 다양한 문화를 전파하였다. 일본 속에 살아 숨 쉬는 우리 고대 문화의 흔적은 어떤 것이 있을까? 우리나라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왼쪽, 국립중앙박물관)과 고구려의 승려 담징이 그린 호류 사 금당 벽화 호류 사는 쇼토쿠 태 일본 고류 사 목조 미륵보살 반가 자가 건립한 사찰로, 백제 장인이 건축에 많이 참여하였다. 원본은 1949 사유상(오른쪽) 반가부좌 자세로 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재 남아 있는 그림은 복원된 것이다. 명상에 잠긴 미륵보살을 조각한 상이다. 두 불상은 재료만 다를 뿐 제작 기법이 쌍둥이처럼 닮았다. 칠지도(일본 나라 현 이소노카미 신궁) 4세기 백제에서 만들 어 일본에 전한 것으 로 두 나라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 준다. 고구려 수산리 고분 벽화(위, 평남 강서)와 일본 다카마쓰 고분 벽화(아래, 일본 나라 현) 벽화 제작 기법을 비롯하여 그림 속 저 고리와 색동 주름치마 등 여인들 의 옷차림이 비슷하다. 1 48 가야 토기(왼쪽)와 일본의 스에키(오른쪽) 스에키란 흑청색을 띤 일본의 단단 한 토기를 말한다. 가야 토기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의 문화 교류를 보여 주는 사례로 이 외에 어떤 것이 있는지 조사해 보자.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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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바람에 괴롭게 읊조리나니 / 세상에 날 알아주는 이 적구나. 창밖에는 밤 깊도록 비만 내리는데 / 등불 앞 마음은 만 리( 萬 里 ) 밖을 내닫네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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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3. 4. 무령왕릉 내부 복원 모습 중국 남조의 벽돌무덤 양식을 이용하였으며, 왕과 왕비의 관은 일본에서 자라는 금 송으로 만들어졌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동 신발(왼쪽)과 일본 에다후나 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 신발(오른쪽) 오수전 고대 중국의 화폐로, 무령왕이 서거하던 해에 주조되어 백제로 전해졌다. 통일 신라 시대에 만들어 진 석조 아미타여래 좌상과 석 조 미륵보살 입상은 인도 굽타 양식의 영향을 받아 옷주름과 신체 굴곡이 섬세하게 표현되 었다. 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