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 인 로 커 dedicated to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and you 7 時 10 分 :: HASHEE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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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결벽과 굴절 main story 센도 + 사쿠라기 6 큐브 CUBE 25 수혈 38 재생을 꿈꾸다 52 포옹 66 side story 내일 81 이전 93 모호한 경계선 109 2. As Time Goes By Akira Sendoh 126 Hanamichi Sakuragi 178 3. 코인로커 Coin Locker 218
결벽과 굴절 main story 센도 + 사쿠라기 큐브 CUBE 수혈 재생을 꿈꾸다 포옹 side story 내일 이전 以 前 모호한 경계선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나의 세상에는 빛도 소리도 없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온통 안개가 드리워진 듯 자욱하게 흐려져 있다. 그 부연 세상 속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감각은 언제부터인지도 모를 정도로 오래 전부터 익숙해져 있는 손끝에 닿아오는 농구공의 감촉이 유일하며, 심장이 뛰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은 그 공 을 허공에 떠 있는 림 속에 거칠게 꽂아 넣는 찰나와도 같은 시간 뿐이다. 코트 위에서 달리고 있을 때만이 나의 몸은 격렬하게 율 동 했고, 정해진 40분의 시간 속에서만 마치 그림자 같았던 나의 존재가 실체를 얻는 것 같았다. 주위의 사람들은 목 잘린 시체 마냥 분별할 수 없는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물체에 불과했고 내게는 존재를 인식하는 힘이 결여되 어 있었다. 그 순간. 선명한 핏빛의 머리가 내 시야를 가득 채우던 그 순간까지는. 센도, 너는 내가 쓰러뜨린다! 삽시간에 시야가 확 트이고 뚜렷한 붉은 색을 중심으로 회색빛 의 내 세상에 색( 色 )이 번져나간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안개의 벽이 일순간에 부수어지는 듯 했다. 적막이 생명력 가득 찬 함성으로 바뀌고,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직접 닿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미 얼굴에 배어버린 가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나는 그에게 말
7 했다. 잘 부탁한다, 사쿠라기 하나미치. + 발끝으로 땅을 툭툭 차대면서, 센도는 벌써 몇 시간째 쇼호쿠의 교문 앞에 기대어 서 있었다. 사실 학교가 파하려면 꽤나 먼 이 시 간에 자신의 수업까지 모른 척 해 가며 서둘러 이곳으로 달려온 것 은 확실히 바보 같은 짓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흐르는 시간을 무작정 세어가며 가슴 졸이고 있기에 손바닥에 남겨진 감촉은 너무 나 뜨거웠다. 눈언저리가 치켜 올라간 날카로운 눈매의, 활화산처럼 뜨겁고 야생동물처럼 유연했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한껏 튀 어 올라 진정되지 않는 심장이 원망스럽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반해버린 것은 자신인 것이다. 한 번도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간 적은 없어도, 일단 이렇게 된 이상 주저 없이 손을 내뻗을 각오가 센도에겐 되어 있었다. 꼭 쥐고 있던 손을 펴고 흥건히 흐른 땀을 바지 깃에 무심히 문 질러 닦는다. 그를 만난 이후로 며칠 간 머리를 싸매 가며 준비해 온 자신의 이야기에, 그는 화를 낼지도 모르고 어쩌면 주먹이 날아올지도 모 른다. 아니면 아예 정신병자 취급을 당해 진심마저 전해지지 않을 우려도 있다. 그러니 손바닥에 땀이 흐를 정도로 긴장하고 있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해도 창피한 일은 아니라며 마음을 달랜다. 하늘에 긴 호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새 한 마리를 쳐다보다, 어 깨를 한 번 털고 손등까지 덮인 교복 자락을 걷고 시계를 바라보았 다. 그림자가 점점 짧아지고 해는 높게 솟아 하얗게 빛나고 있다. 이제 슬슬 수업이 끝날 시간이다. 오늘은 토요일이니 쇼호쿠도 부 활은 없을 것이다. 센도는 담벼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쭉 펴고, 손으로 흐트러진 매무새를 단정하게 가다듬었다. 남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던 간에, 자신이 지금 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바로 프러포즈 인 것이다. 그것도 자신과 같은 성별의 남자 에게. 갑자기 시간이 더욱 길게 늘어지는 것만 같았다. 좋아해. 사귀자. 네가 필요해. 반했어. 내 것이 되어줘. 입 속으로 의미는 별반 다르지 않을 여러 단어들을 중얼거려 본 다. 어쩌면 너무 직접적인 고백은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 원래 이런 저런 세간의 일반적 통념이라는 것에 그리 비중을 두고 살아오지 않은 센도에게 있어서는 동성에게 반했다는 것 정도 그다지 장애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 혈기왕성한 열혈소년 사쿠라기에 이르면 자신보다 키도 크고 체격도 좋은 남자에게서의 애정고백이라는 것
9 은 그야말로 청천날벼락 크로커다일 던디가 홀로 뉴욕 한 복판에 내던져진 듯한 문화적 충격일 수도 있는 것이다. 히코이치의 말에 따르면 사쿠라기의 고교 최대 소망은 자그마치 좋아하는 여자아이와 함께 하는 등교 라고 했다. 자신에게 흑 심이 있기 때문에, 그 말을 전해주며 마치 초등학생 아이 같다고 웃는 히코이치에게 동조할 수 없어 괜스레 짜증이 났었다. 거기에 까지 생각이 미치자 센도의 미간은 더욱 날이 선 각도를 그렸다. 팔짱을 끼고 심히 고민이 되는 태도로 처음부터 어떻게 말을 걸어 야 할지 걱정을 한다. 자신의 외모에 불만을 가져본 적은 없지만, 어디를 어떻게 보아도 자신은 귀여운 여자아이와는 수성과 명왕성 의 거리만큼이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바로 그 때, 고뇌 덕에 더욱 찌푸려져 있던 뇌의 주름이 하나하 나 펴지고 심려 끝에 피어오르던 연기마저 사라질 정도로 시원스럽 고도 커다란 목소리가 귓가로 파도치듯 밀려 들어왔다.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센도는 그만 냉동실에 넣어 진 멸치처럼 몸이 굳었다. 여, 센도. 우리 쇼호쿠에는 웬일이냐! 뻣뻣하게 경직한 근육 아래서 유달리 팔딱거리며 존재를 주장하 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살그머니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들고, 팔짱은 풀지 않은 채 스륵 뒤돌아선다. 바로 눈앞에, 며칠 간 그토록 선명하게 떠올라 사라지지 않던 사람의 실물이 있다. 여과 없이 시야에 가득 차 들어오는 태양보다 강렬한 빨간색에 눈 이 부시다. 강렬하면서도 깔끔한 선을 그리고 있는 짙은 눈썹과 맑은 눈동자를 담아내고 있는 날카로운 눈매, 시원스런 콧날과 의 외로 새치름한 색의 뚜렷한 선을 가진 입술. 시선이 여전히 무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어라 무어라 떠들어대고 있는 통에 살짝 벌려져 혀끝이 내보이는 입술에까지 닿자 센도는 그만 꿀꺽, 하고 침을 삼켰다. 상상이 아닌, 실재하고 살아 움직이는 사쿠라기의 생생함에 당 황했음을 감추기 위해 여유를 가장한 느릿한 자세로 주위를 둘러보 았다. 사쿠라기는 일명 사쿠라기 군단 이라 불리는 자신의 중학 시절 친구들과 함께 다소 흐트러진 차림새로 교문 앞에 서 있는 중 이었다. 센도는 고개를 잠깐 갸웃해 보이고, 손가락으로 사쿠라기 옆의 인물들을 하나하나 똑바로 짚어가며 이름을 불렀다. 아, 그러니까 미토 군, 다카미야 군, 오오쿠스 군, 노마 군. 맞지? 예상치 못한 호명에 오늘은 무슨 사건일까 기대하며 헤실헤실 웃고 있던 그들의 표정이 그대로 정지했다. 그 뚜렷한 놀라움의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센도는 최대한 호의적인 웃음을 띄워가며 그들의 손을 끌어당겨 억지로 악수를 했다. 앞으로 잘 부탁해. 요전의 연습시합 때 보았겠지만 나는 료난 의 센도 아키라야. 그린 듯한 센도의 미소에 공기는 더욱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원 래부터 아무리 웃어보아도 주위로부터 속을 알 수 없다. 는 말만 진득하게 들어온 센도였으니 이 정도의 반응은 오히려 가벼운 편인 지도 몰랐다. 실은 장수를 쏘려면 먼저 말을 쏘라했듯이, 직접 공략이 힘 들면 주위부터 노려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해 히코이치에게 사쿠라 기의 주변에 대한 정보를 간절하게 부탁한 센도였다. 척 보아도 사쿠라기는 의리가 있을 법한 타입이니 친구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 면 틀림없이 보다 효과적으로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11 있었다. 그러나 명백히 주위를 채우고 있는 무거운 적막에 히코이 치가 애써 알아다 준 정보도 소용이 없는 건가 싶어 센도는 절망했 다. 사실, 주변에서부터의 접근이라 생각해 사쿠라기에게의 인사 마저 잊고 막상 본인을 앞에 둔 채 느닷없이 친구들의 이름을 불러 버린 것도 꽤나 맹한 짓이었지만, 그것을 자각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지금의 센도에게는 없었다. 센도가 가타부타 반응이 없는 그들을 눈앞에 두고 이젠 또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으려니, 갑자기 사쿠라기의 얼굴이 가까워져 온다 싶은 순간 멱살이 쥐어졌다. 너, 이 자식! 앞 으 로 잘 부탁한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더구 나 네가 어떻게 내 친구 녀석들의 이름을 다 알고 있는 거지? 솔직 히 고백해!! 너 료난의 스파이지!!! 이마에 핏대가 세워진 채로 격분하고 있는 사쿠라기를 보고 있 자니 그 지나친 충격에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상기된 사쿠라기의 얼굴이 잔뜩 확대되어 눈앞에서 아른거리자 갑자기 그대로 끌어안 아 키스하고 싶다는 욕망이 불끈불끈 솟아올라왔지만, 여기서 그 마음을 결의에 옮겼다가는 자신은 살아서 돌아갈 수 없을는지도 몰 랐다.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단순하게 돌아가는 사쿠라기의 사고 회로를 귀엽다고 생각하며, 센도는 트레이드마크인 싱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참으로 불운하게도, 그것이 아마도 사쿠라기 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 한 듯 목을 틀어쥐고 있는 손아귀 힘은 더 욱더 강력해졌다. 너, 웃어?! 금세라도 주먹이 날아올 것 같은 절체절명의 때, 센도는 극적인 타이밍을 노려 그 무엇보다도 사쿠라기를 자극할 수 있는 질문을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풀쑥 던졌다. 연습은, 죽도록 하고 있어? 순간 사쿠라기의 얼굴이 멍해지더니, 쳇 하는 표정으로 센도의 옷깃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나 섰다. 멀어지는 온기가 어쩐지 서운하다. 다음엔 안 져! 한 마디지만 온 몸으로 분함의 오라를 강력발산하고 있는 뒷모 습을 바라보며, 센도는 또 다시 웃었다. 그리고 벼르고 별러왔던 대시를 했다. 농구하러 가지 않을래? 젠장! 사쿠라기는 또 다시 퉁, 하고 보기 좋게 튕겨 나간 볼을 잡으 려 허리를 숙이며 오늘따라 몇 번째일지 모를 불만 섞인 투덜거림 을 내뱉었다. 애초에 요헤이들과 함께 놀러나 가면 좋았을 것을, 센도의 농구하자는 말 한 마디에 이런 외각의 공원까지 끌려나와 땀을 흘리고 있는 자신이 조금은 바보처럼 느껴졌다. 사실 이리 생각할 거라면 처음부터 거절했으면 되었을 텐데, 얄 미울 정도로 여유 있어 보이는 센도의 표정 뒤에서 무언가 절박하 게 흔들리고 있는 감정의 파장을 읽어낸 것이 실수였다. 자신은, 아주 오래 전부터 그런 울림에는 약했다. 심장을 자극해 오는 미 묘한 마음의 흔들림. 몸을 일으키고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티셔츠를 끌어올려 이마를 훔치며, 사쿠라기는 다시 기세 좋게 소리쳤다. 아직 멀었다, 센도!
13 공을 그에게 건네주고 골대 밑으로 다가가 섰다. 시합 때도 여 실히 느꼈던 거지만, 센도의 농구실력이라는 것은 결코 그의 언동 처럼 흔들흔들 대충대충 호락호락 넘어갈 듯한 것은 아니었다. 느 긋해 보이는 것은 성격일지도 모르나, 그의 코트 위에서의 위압감 과 박력이라는 것은 농구를 시작한 지 한 달 남짓한 사쿠라기가 보 기에도 피나는 노력과 꾸준한 반복연습에 의해 쌓여져 온 것임에 틀림없었다. 사쿠라기는 솟구쳐 올라오는 억울함에 입술을 꽉 깨 물었다. 루카와를 볼 때마다 치밀어 오르곤 하는 조금 더 빨리 시 작했더라면 하는 욕심은, 이상하게도 센도를 마주 대할 때면 극에 달했다. 잘난 척하며 나서 쓰러뜨리겠다. 라고 말한 후에, 오히려 꺾이 어 버렸다. 사쿠라기에게 있어 그 이상의 수모는 없었다. 분하고 또 분한 마음에 악수하려 내민 그의 손을 지나칠 정도로 힘껏 잡아 주고 돌아섰지만, 사실 그것은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 같은 행동 에 지나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내내, 자신을 코트로 불러내던 센 도의 여유 만만한 웃음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던 것이다. 패배란 것은 참으로 그 독소가 짙은 것이었다. 그럼, 가볼까. 센도가 몇 번 공을 퉁기더니, 맹렬하게 드리블해 들어왔다. 온 몸을 탄력 있게 긴장시킨 후, 모든 정신을 센도에게 집중한다. 그 러한 자신을 바라보는 센도의 눈길이 어쩐지 즐거워 보인다고 생각 하자, 몸 속 저 끝에서부터 강렬한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시간 따위가 무슨 문제란 말이야! 소리를 한 번 지르고, 그를 막아섰다. 전해져 오는 열기가 너무 나 뜨거웠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후. 한계까지 긴장되었다 이완된 근육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사쿠라기는 그만 파란 하늘을 얼굴 위로 지고 코트 위에 대자로 누 워버렸다. 강렬하게 쏟아져 내리던 빛들이 어느새 어스름한 저녁 의 색을 머금고 온화한 노을빛으로 주위를 물들이고 있었다. 눈을 감자, 갑자기 시원한 감촉이 코끝에 닿아왔다. 마셔. 사쿠라기는 몸을 일으켜 주저 없이 센도에게서 내밀어진 음료수 캔을 받아들었다. 많은 땀을 흘린 탓에 안 그래도 목이 칼칼한 참 이었다. 갑자기 깊어지는 갈증을 느끼며 차가운 물방울이 맺혀있 는 알루미늄의 풀 탭을 젖히는 순간, 쏴아. 하고 청량한 소리와 함께 탄산음료의 기포가 한껏 터져 나왔다. 음료수를 마시려다 오 히려 뒤집어 쓴 사쿠라기의 모습을 보며 센도가 웃음을 터뜨렸다. 푸훗. 하하하하하하! 사쿠라기가 센도를 노려보며 눈을 깜박인다. 속눈썹이 물에 젖어 색이 더욱 짙어졌다. 붉은 머리칼 끝으로 뚝뚝 물방울이 듣는다. 멀리서 잊고 있던 매미소리가 시끄러울 정 도로 크게 들렸다. 센도가 똑바로 사쿠라기의 눈을 응시하자 혼 곤한 열기가 주위를 감싼다. 센도의 시선이 시간마저 붙잡고 둘이 서 있는 공간을 세상에서 유리시킨 듯했다. 움직임이 점 점 느려지다 마침내 정지했다 싶은 순간, 센도가 고백했다. 좋아해.. 센도의 손가락이 젖어서 흐트러진 사쿠라기의 머리칼을 쓸어 올
15 렸다. 센도의 손짓에는 주저함이 조금 남아있었으나, 사쿠라기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반응이 없다. 예상했던 욕설도 정신병자 취 급도 날아오는 주먹도 없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이 흐 른 뒤 사쿠라기는 센도의 손길을 가만히 내버려 둔 채로 미동도 않고 대답이 아닌 질문을 되돌렸다. 왜? 예기치 않았던 물음에, 센도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 실 뚜렷하게 이야기 해 줄 수 있는 까닭이랄 것도 없었다. 너는 내 인생 유일한 색( 色 )이었다고. 네 강렬한 생기가 죽어있던 내 심장 을 다시 두드리며 일깨워와 내 심장은 이제 너를 향해서만 박동하 고 있다고. 이야기하자면 못 할 것도 없겠지만, 명확하게 그래서 야. 라고 이 넘칠 것 같은 감정을 표현하기에 센도의 마음을 울리고 있는 단어들은 너무나 미진하고 또 미약했다. 그래서 그 냥, 다시 한 번 말했다. 좋아해. 그러면 안 돼? 시선을 피하지 않고 투명하게 젖어있는 사쿠라기의 눈을 응시하 며 조용히 거리를 좁히고 입술을 겹쳤다.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혀로 살짝 입가를 쓸고, 노곤한 열기와 점점 빨라지는 고동소리로 그에게 부딪혀갔다. 센도도 사쿠라기도 눈을 감지 않았다. 몇 분 인지 모를, 현실과 분리된 몽환의 시간이 흐르고 사쿠라기가 먼저 몸을 비켜내었다. 센도를 남겨두고 일어선 그의 뒷모습은 단호했다. 달갑지 않아. 해가 지고 있었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오늘따라 멀었다. 사쿠라기는 몇 번이고 소맷자락으로 입술을 훔쳐내며 신경질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시하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센도는 너무 진지했다. 그 녀석, 언제나 웃고 있지만 코트에서 자신과 마주 섰을 때 지었던 웃음만 은 무언가 틀리지 않나 생각했던 것이 옳았던 것이다.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신 후, 사쿠라기의 세상을 바 라보는 눈은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만 세 상을 보던 시야에 한 겹 얇은 막이 덧씌워진 듯 했다. 아무리 자책 해보아도 아버지는 다시 살아올 수 없었고, 아무리 사랑한다고 매 달렸어도 어머니는 자신을 버리고 나가버렸다. 과거에서부터 되풀 이되는 사랑을 잃은 혹은 버려진 트라우마가, 상처받는 것에 남달 리 예민한 성격을 만들어버렸다. 누구에게나 쉽게 다가서지만 누 구에게도 깊게 다가서는 것은 힘들었었다. 자신도 모르게 언제나 자신의 영역 이라는 것을 설정해 놓고 있었고, 그 안으로 받아들 인 사람들은 중학시절부터 자신의 삶을 모두 나누어왔던 사쿠라기 군단이 유일했다. 그 녀석들은 언제나 뜨거웠기에 냉담히 식어있 는 자신의 영혼에 늘 온기를 전해주었다.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열 ( 熱 ), 그것이 바로 친구라는 이름의 그들이었다. 요헤이는 가 끔 너무 가시를 세우다보면 포옹하는 법을 잊어버리게 돼. 라고 사쿠라기에게 충고했었지만, 달리 누군가를 자신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일 필요를 못 느꼈기에, 아직은 우정으로 후끈 달아오르는 심장만으로 충분했기에, 사쿠라기는 그럭저럭 호쾌한 다혈질의 꽤 나 불량스런 이미지로 이런저런 가벼운 친교관계를 유지한 채 별 부족함을 못 느끼며 살아왔던 것이다. 마음에 드는 여자아이들에게 숱하게 고백도 하고, 하루코 같은
17 귀여운 아이에게 반해도 보고. 바닥으로 깊게 잠겨있는 내면과는 달리 무척이나 거칠어 보이는 외견과 무성한 소문 덕에 성공해 본 적은 그다지 없지만 그래도 꽤 나 오래 사귄 연상의 애인이란 것도 있었다. 귀엽네. 하며 프러 포즈해 주었던 그녀도 결국은 차가워. 라며 떠나가 버렸지만. 자신도 모르는 새에 이런저런 생각으로 걸음이 느려졌다. 터벅 터벅 발소리를 내며 좁은 골목길을 걷고 있던 사쿠라기는 지친 표 정으로 길게 늘어진 담벼락에 등을 대고 주저앉았다. 그토록 직접적으로 부딪혀오는 좋아해 라는 말을 들어본 기억 은 없다. 닿아오는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뜨거웠다. 센도 아키라. 이름을 한 번 부르고, 사쿠라기는 또 한 번 입술을 훔쳤다. 그 래도 온기는 가시지 않았다. 일요일, 그만 늦잠을 자 버렸다. 사쿠라기가 잠에서 깬 것은, 요란스레 들려오는 현관문을 두드 리는 소리 때문이었다. 비척거리는 몸짓으로 일어나서 머리칼을 손으로 스윽 털어 내며 현관으로 향했다. 힐끔 시계를 보니 어느 새 11시가 넘어서고 있다. 밖에서 저렇게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 는 것은 틀림없이 요헤이일 것이다. 왜 안 들어오고 저렇게 옆집 에 민폐를 끼쳐가며 쾅쾅거리고 있는 것인지. 열쇠 있잖아! 투덜거리며 문을 열자, 전혀 의외의 인물이 눈앞에 서 있었다. 예기치 못한 일에 눈만을 깜박이는 것도 잠시, 열쇠로 문을 열기가 좀 뭣한 상황이어서.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요헤이의 목소리가 들리고, 센도의 뒤에서 그가 고개를 내밀었 다. 안 그래도 잠에서 갓 깨어 멍한 사쿠라기의 얼굴은, 이미 센 도의 얼굴을 시야에 담은 후부터 그야말로 입이 헤 벌어진 채로 가 관이다. 요헤이가 혀를 쯧쯧 차며 사쿠라기의 가슴 언저리를 팡팡 두드렸다. 올라오는데, 계단에 앉아있더라고. 너 만나러 온 거냐고 물었 더니 그렇다고 해서. 그 그래? 얼떨결에 요헤이에게 대답을 하고, 어느 정도 정신을 수습한 뒤 센도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막상 본인은 어떻게 된 신경인지 표정 에 변화도 없다. 사쿠라기가 추궁하는 듯한 얼굴로 계속 쳐다보자 니, 센도가 변명 같지도 않은 대답을 흘려보냈다. 너 나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같이 가자기에. 후. 쳇바퀴를 타는 것 같은 요헤이와 센도의 대답에 사쿠라기는 한 숨을 한 번 내쉬고 그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몸을 비켜섰다. 센도 가 먼저 발을 디디고 요헤이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자 그는 발 을 멈춘 채 손에 들었던 편의점 봉투만을 사쿠라기의 손에 건네어 준다. 원래 이것만 전해주고 가려고 했어. 좀 일찍 일찍 일어나서 끼 니 좀 챙겨먹으라고. 도대체 내가 언제까지 네 유모 소리를 들어 야 하냐! 사쿠라기가 머쓱한 표정으로 서 있자, 미토는 바닷바람처럼 시 원스러워 보이는 웃음을 짓더니 인사치레 마냥 센도의 몸을 툭 치 고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그러자 센도가 문을 닫고 신을 벗은 후
19 방 안으로 들어서 사쿠라기를 말끄러미 쳐다본다. 그 시선이 묘하 게 신경이 쓰인다. 안 그래도 어젯밤 내내 센도의 고백이 마음에 걸려 뒤척이다 새벽에야 간신히 잠든 사쿠라기였다. 그러니, 말도 곱게 나갈 리가 없다. 뭐야! 쏘아붙이자 센도는 밉살스럽게도 초연한 표정으로 사쿠라기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대답을 돌렸다. 그냥, 옷 좀 입었으면 해서. 센도의 말에, 그제야 사쿠라기는 자신이 박스팬티 하나만을 걸 쳐 입은, 잠자리에서 막 일어난 차림 그대로라는 사실을 깨달았 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화가 난 동작으로 거칠게 벽 쪽에 붙어있는 장으로 다가서더니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를 꺼내어 쿵 쾅거리며 욕실로 사라졌다. 센도는 그러한 사쿠라기의 동작을 내 내 지켜보다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욕실 문이 닫히자 그제야 천천히 바닥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꽤나 좁은, 가구랄 것도 변변히 없는 참으로 간소한 방이다. 그 러나 의외로 깨끗이 정리가 되어 있는 탓에 비루하다는 느낌은 조 금도 들지 않았다. 사쿠라기가 샤워를 하는지 물소리가 들려왔다. 물소리에 섞여서 달갑지 않아. 라고 단호히 자신의 감정을 잘 라버리던 사쿠라기의 목소리가 되살아난다. 무작정 찾아오긴 했지만 사실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없었 다. 그저 얼굴만이라도 볼까 했는데 다행히 미토를 만나 얼결에 방안까지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일단은 쫓겨나지는 않았으니 비록 그것이 함께 있던 미토의 덕분이라 해도 어쨌든 오늘 하루는 이 방 안에서 미적거려 볼 심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산이다. 넘어야 할 산이 멀고도 높다면 자신에게 필요한 것 은 무엇보다 느긋함과 끈질김이다. 센도는 아예 기지개를 한 번 켜고는 다다미 위로 드러누워 버렸다. 자러왔냐! 일어나. 툭툭 내질러지는 발차기에 눈을 떴다. 아마도 깜박 잠들었던 모 양이다. 졸린 눈을 비비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보자 사쿠라기 가 뚱한 표정을 하고 몸을 약간 기울인 채 서 있다. 밥 먹어라. 간단한 말만 던져놓고, 사쿠라기는 작은 상 하나를 밀어놓더니 자신도 맞은편에 앉았다. 센도가 비비적거리며 일어나 상 위를 보 자 갓 지은 듯한 쌀밥이 흰 접시 위에 덩그러니 얹혀 있고, 아마도 아까 미토가 전해주었지 싶은 레토르트 카레는 봉지 째 끓는 물 가 득한 냄비 속에 잠수해있다. 어쩐지, 무언가 부족한 듯하면서도 어색한 이 상황이 묘하게 마음에 들어, 센도는 살짝 웃었다. 그러 자 센도의 표정을 바라보고 있던 사쿠라기가 휙 시선을 돌린다. 왜 저렇게 웃는 거야, 저 녀석. 코트에서 마주 섰을 때 보여주던 여유 만만한 웃음과도, 맹렬히 공을 튀기며 돌진해 들어갈 때 보여주던 즐거운 웃음과도, 어쩌다 시선이 마주쳤을 때 친근감 있게 처진 눈매를 가늘게 접으며 보여 주던 난해한 웃음과도, 지금의 웃음은 질이 달랐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물에 비친 달이 동심원을 그리며 잔잔히 퍼지는 듯한 조 용한 웃음, 갓 부풀기 시작하는 초승달을 닮았다. 그 웃음에, 조금씩 체온이 올라가는 것 같다. 어쩐지 머쓱해진 사쿠라기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냄비에서 카레가 담긴 팩을 꺼내
21 어 가위로 성의 없이 잘랐다. 그리고 꽤나 그럴듯한 향이 풍겨 나 오는 카레를 주르륵 센도의 그릇에 쏟아 붓는다. 소복이 담겨있는 밥 위로 카레가 얹히는가 싶더니, 이내 접시 밖으로 뚝뚝 흘러내 렸다. 그러나 미끄러지듯 흘러 상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카레에 센도도 사쿠라기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먹어. 무뚝뚝한 사쿠라기의 목소리에, 센도가 아이처럼 응 하고 대답 하고는 수저를 들어 쓰윽 쓰윽 밥을 퍼먹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먹어본 그 어떤 카레보다 맛있다고 생각하며, 센도는 입 안 가득 밥알을 물고 다시 한 번 크게 웃었다. 어쩌면 지금 이대로도 좋을 지 모른다. 사쿠라기는 어제처럼 모질게 자신을 밀어내지 않으니, 시간을 자신의 편으로 삼아 찬찬히 사쿠라기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 가는 것이다. 혹시나 앞으로도 이리 소소한 상차림으로 또 마주앉 아 밥을 먹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센도의 웃음은 이제 아주 함박웃음이 되어 버렸다. 바보처럼 계속 웃어가며 쉬지 않고 수저질을 하는 센도를, 사쿠 라기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사쿠라기의 얼굴은 여전히 붉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어디서 앞치마까지 찾아내어 두르고, 센도는 양손에 고무장갑을 낀 채 사쿠라기를 밀어내었다. 몇 번 말리려 하다가 사쿠라기는 이내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센도를 볼 수 있는 위치에서 바닥 에 주저앉았다. 생활감 없어 보이는 단정한 외모에 비해 의외로 가사 일에 익숙한 듯, 그릇을 슥슥 닦아내고 헹구어 가지런히 정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리하는 손놀림이 꽤나 재다. 미간을 모으고, 팔짱을 낀 자세로 앉 아 센도의 하는 양을 죽 지켜본다. 어째서일까. 자신에게 있어서도 센도는 첫 만남부터 꽤나 뜨거운 스파크를 전해주었던 인물이었다. 천재 라고 그를 스스럼없이 칭하던 히코 이치의 말에 얼굴을 보기 전부터 혼자만의 라이벌의식에 불타올랐 고, 막상 얼굴을 본 순간에는 그 유들유들한 웃음에 발끈했으며, 코트 위에서는 도무지 꺾을 수 없음에 또 속이 상했다. 그러나 센 도가 자신에게 좋아해 라는 말을 들려주었을 때는. 뜨거웠다. 키스할래? 뜬금없이 물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행주로 싱크대 주변에 튄 물 기까지 꼼꼼히 닦아내고 있던 센도가 휘둥그레진 눈을 하고 사쿠라 기를 돌아보았다. 키스해 보자고. 말을 건네는 사쿠라기의 가라앉은 눈동자에서는 마음을 잡을 수 없다. 센도는 가만히 사쿠라기를 바라보다, 장갑을 벗고 손을 쓱 쓱 앞치마에 문지른 후 다가와 한 쪽 무릎을 세운 자세로 앉았다. 왜 키스하고 싶은데?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묻는다.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무엇을? 열( 熱 )을. 키스하면 알 것 같아? 글쎄.
23 나지막한 웃음소리와 함께 입술이 겹쳐졌다. 사쿠라기의 몸을 살짝 밀어 쓰러뜨리면서, 센도는 각도를 달리해 다시 한 번 입술 을 겹쳤다. 애태우는 연인에게 다가가는 듯한 열정이 아니라 신에 게 맹세하는 듯한 경건함으로 부드러운 피부에 입을 맞춘다. 살며 시 입가를 핥자 사쿠라기의 입술이 벌어졌다. 사이로 말캉한 살을 밀어 넣으며, 손가락으로는 만지면 데일 듯 불타는 빨간 머리칼을 애무한다. 유일한 색. 유일한 목소리. 너밖에 안 보여, 난. 정확히 표현하자면, 너밖에 볼 수 없어 인지도 모른다. 사쿠라기는 또렷하게 빛나고 있는 깊은 우물처럼 흔들림 없는 센도의 진중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괜찮을지도 모른다. 센도는 진심이다. 자신도 싫은 것은 아니 다. 조금 더 이 사람에 대해 알고 싶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잃을 수도 있음에 지레 겁먹지 않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연인 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영역 안으로 초대해도 좋을지도 모른다. 센도의 마음과 몸은 뜨겁다. 그의 온기를 전해 받으면, 자신도 따스해질 수 있을지 모른다. 굳기 시작한 심장을 다시 풀어내어 또 한 번 누군가에게 좋아해 라고 말을 건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용서를 빌 대상은 센도가 아 니나, 용서받고 싶은 대상은 자신의 마음을 두드려준 그라는 생각 이 갑자기 들었다. 사쿠라기는 눈을 감고, 센도의 어깨에 팔을 감아 그를 더 가까 이 끌어들였다. 더 잘 느낄 수 있도록, 좀 잘 해 봐. 열이, 다가온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볼에 스쳐오는 머리카락이 간지러웠다.
25 차르륵 차르륵 찰칵찰칵. 어린 시절 무척이나 좋아하던 장난감이 있었다. 형형색색의 육면체가 모여 더욱 커다란 육면체를 이루고, 윤이 나는 플라스틱 위로는 짙은 글씨로 숫자들이 뚜렷하게 쓰여 있었 다. 모든 숫자들을 색을 맞추어 차례대로 정렬하면 놀이가 끝이 나는 그 장난감을, 나는 아쉽게도 단 한 번도 완벽하게 맞추어 본 적이 없다. 내 손안에 쥐어진 그 장난감은 늘 어딘가 색 혹은 숫자 가 어긋나 있었고 이내 아무리 애써도 손쉽게 놀이를 끝낼 수 없음 에 실망했던 나는 미련 없이 그 장난감을 어딘가에 던져두었다. 아마도 아직도 그 장난감은, 무언가 하나가 어긋난 채로 집 안 의 구석 어디에선가 먼지에 쌓인 채 가만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CUBE 어, 이런 곳에 이게 있었네. 사쿠라기는 정리하고 있던 서랍의 한 구석에서, 마치 자신은 처 음부터 그 곳에 자리했었다는 듯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쿡 처박혀 있던 큐브 퍼즐을 찾아내었다. 언제 그 곳에 그런 것을 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두 손으로 잡기도 버거웠던 그 퍼즐은 이제는 사쿠라기의 한 손바닥 위에 무리 없이 얹힌 채 틈 사이사이로 먼지를 뒤집어 쓴 초라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언젠가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그리 오래되지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않았던 밤, 술에 취한 아버지가 던지듯 건네주었던 바로 그 장난 감. 너는 풀 수 있겠니? 그 때는, 그 의미를 잘 몰랐었다. 얽히고설킨 듯 무척이나 복잡 해 보여도 사실은 일정한 규칙에 의해 움직이게 되어 있는 퍼즐. 그리고 일그러져 있던 세상. 사쿠라기는 미간을 찌푸린 채 어찌 보면 울음처럼도 보이는 애 매한 웃음을 지었다. 후 하고 불어 소복하게 물체의 위에 쌓여있 는 먼지를 털어 내고 그것을 조심스레 가방 안의 트레이닝 복 틈으 로 감싸 넣는다. 원체 서랍 정리란 것도 집에 와서 머무는 날이 점 점 많아지는 센도의 옷가지라도 보관해줄까 해 시작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 한 자락을 잡고 있는 장난감. 까맣게 잊고 있던 그것이 어떻게 생각하면 센도 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우연에 의해 찾아진 것이 제법 신기했다. 센도에게 보여줄까.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가방을 두른 채 사쿠라기는 집을 나섰다. 땀이 가득 밴 공기지만, 탁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청량하다. 지역예선이 가까워져 오고 있기 때문인지, 늘 활기찬 사쿠라기 뿐 아니라 모든 부원들의 사기가 충천해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뜨겁게 달아올라 있는 코트의 위가 사쿠라기는 견딜 수 없이 좋았 다. 신경을 베일 듯 날카롭게 긴장시키고, 한 순간도 상대를 놓치 지 않으려 시선을 집중하고 있으면 마주서 있는 상대의 숨소리까지 도 전해져온다. 일정한 박자로 품어져 나오는 거친 호흡, 투지와 패기로 가득
27 차 있는 장중한 울림. 한 번도 무언가에 이렇게 몰두해 본 적이 없었다. 몰두할 수 있 으리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소모품처럼 무 심히 즐기며 흘려보내고 있었고, 또 그런 자기 자신의 모습에 나 름대로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숫자 하나가 어긋난 큐브처럼 자신은 어딘가 부족한 존 재였다는 것을, 그를 만나고 알았던 것이다. 지금까지 닿아왔던 누구보다도 뜨겁고 누구보다도 진지하며 누 구보다도 깊은 공명을 전해주는. 센도를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루카와가 바람을 일으키며 바로 옆으로 빠져나갔다. 호쾌하게 림 에 농구공을 꽂아 넣고서, 루카와는 기분 나쁜 듯 사쿠라기를 한 번 째려보더니 차갑게 내뱉었다. 멍청이, 한 눈 팔지 마. 사쿠라기의 눈썹이 치켜져 올라가고 대뜸 치고 들어오는 비난에 발끈할 틈도 없이 루카와는 잽싸게 라커룸 안으로 사라져버린다. 사쿠라기가 아무리 천재임을 스스로 외쳐댄다고 해도, 사실 루카 와나 센도와의 갭을 가장 크게 느끼고 있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속도로 자신이 성장해가고 있다는 것 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따라잡고 싶은 상대를 따라잡고 있지 못 함에 늘 분해하고 있는 사쿠라기에게 있어 가끔씩 툭툭 던져지는 루카와의 날카로운 일갈이라는 것은 꽤나 견디어내기 힘든 고통이 었다. 흥, 두고 봐라. 언젠가 내가 꼭 쓰러뜨려 줄 테니까. 지금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해 온 다짐을 또 한 번 가슴에 새기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고, 사쿠라기는 공을 튕기며 림을 향해 돌진해갔다. 있는 힘껏 달리고 있는 힘껏 점프한다. 공기를 가를 듯이 뛰어오를 때면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황홀 한 해방감이 몸을 감싼다. 눈앞에 목표가 보이는 순간이라면 그 어떤 것도 잊을 수 있다. 버림받았다는 것도, 잃었다는 것도. 푸욱 젖어버린 유니폼을 벗고, 갈아입을 새 티셔츠를 꺼내기 위 해 라커를 열어 가방 속을 뒤적거렸다. 수건이니 대체로 펴 보지 도 않는 교과서니 이런저런 잡동사니 틈에 파묻혀 버린 것인지, 좀처럼 찾고자 하는 티셔츠가 손가락 끝에 걸려주질 않았다. 그러 자 사쿠라기는 아예 가방 속의 물건들을 라커룸의 바닥에 엎어 버 렸다. 손으로 이 곳 저 곳을 헤쳐 가며 옷을 찾는 도중에 아침에 넣어두었던 큐브 퍼즐이 툭 하고 굴러 나왔다. 멈칫했던 것도 잠 시, 이내 무심한 태도로 퍼즐을 집어 다시 가방 속에 밀어 넣는 사 쿠라기의 손길에, 소리도 없이 옆에서 교복의 단추를 채우고 있던 루카와의 시선이 다가와 멎었다. 뭐야, 그거. 좀처럼 먼저 말을 걸어오는 일이 드문 루카와의 목소리에 사쿠 라기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루카와의 눈길을 좇아 그의 시 선이 머무는 것이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퍼즐이라는 것을 알아채 자, 사쿠라기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고는 대답을 했다. 큐브 퍼즐. 센도에게 보여주려고. 왜? 그 녀석, 이런 것 잘 할 것 같은 이미지잖아.
29 그게 아니고. 오늘따라 말이 꽤 많은 루카와라고 생각하며, 사쿠라기는 바닥 에 주저앉은 채 루카와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 투명 하게 얼어붙어 있는 루카와의 눈에서는 온기가 읽히지 않는다. 어째서 센도냐고.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사쿠라기의 시선을 받아내고만 있던 루카 와가, 마침내 말을 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면 아무렇지도 않은 말인데, 이상하게도 차가운 김 서린 긴장이 주변에 팽배해 있었다. 어느 정도의 시간 이 흘렀을까, 잔뜩 당겨져 있던 실을 먼저 이완시킨 것은 사쿠라 기였다. 태연한 척 하며 뒤적거리고 있던 소지품들 사이에서 원하 던 티셔츠를 찾아낸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부터 하얀 면 티 를 뒤집어쓰며 어눌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왜, 너도 퍼즐 잘 하냐? 멍청이, 모른 척 하지 마. 여우 따위에게 멍청이라 들을만한 일을 한 기억은 없어. 뒤돌아서 짐을 챙기는 사쿠라기의 어깨가 싸늘하다. 루카와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지만, 안타깝게도 사쿠라기에게는 보이지 않았 다. 대답, 하고 가. 끈질긴 루카와의 말에, 사쿠라기가 마침내 뒤돌아섰다. 어느 정 도의 거리를 두고 선 사쿠라기는, 한동안을 아무 말 없이 루카와 를 그저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대 답을 했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센도는, 요헤이를 미워하지 않아. 루카와의 표정이 부수어졌다. 몰랐던 것은 아닐지도 몰랐다. 자신의 시선이 루카와에게 따라 붙는 만큼 루카와의 시선도 언제나 자신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단 지 사쿠라기는 루카와를 향한 자신의 시선이 일종의 동경과 부러움 그리고 따라잡고 싶다는 욕망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 지하고 있는데 비해, 루카와의 자신을 향한 시선이 전해주는 감정 의 종류가 어떤 것인지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자신을 바라보는 센도의 눈길을 이해한 순간 자 연스레 루카와의 시선의 뜻도 사쿠라기는 깨달았던 것이다. 움직이지 않고 잠겨 있는 입 대신에 더욱 묵직한 감정의 무게를 실어 끝없이 다가오는 검은 눈동자. 차라리 알아차리지 못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 다. 조금씩 센도에게 젖어가고 있는 지금, 루카와의 시선은 틀림 없이 설렘이라기보다는 부담이었다. 그는 사쿠라기가 따라잡고 싶 은 상대이자 라이벌이지 사이좋게 손을 잡고 걷고 싶은 상대는 결 코 아니었다. 틀림없이, 앞으로 이대로 농구를 계속해도 저만큼 자신에게 승 부욕을 불러일으키는 상대를 만나긴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처 음에는 하루코 덕택에 시작된 경쟁심이었지만, 농구에 진지해지고 시합에서 이기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해진 지금은 눈앞에서 질투가 나기까지 하는 플레이로 늘 사쿠라기를 몰아붙이는 루카와의 존재 가 내심 고맙기까지 했다. 저 사람이 자신의 곁에서 농구를 하고 있는 한, 사쿠라기는 제자리에 멈추어 서 있을 수가 없다. 언제나
31 다그쳐지고 채근 당해서 앞을 향해 달려 나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것이고 이건 이것이다. 무엇보다도, 직선적인 사로잡는 듯한 격한 눈길에만은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는다. 센도는, 흔히 이야기하는 교제 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너무나 자연스레 사쿠라기의 일상 속으로 배어 들어왔었다. 굳이 사쿠라기를 바꾸려 시도하지 않고, 그렇다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도 아닌데 그는 어느새 사쿠라기의 하루 속에 진득하게 묻어있었 다. 미토와도 무언가 통하는 것이 있는 듯 가끔 필연적으로 얼굴 을 마주치게 될 때마다 서로를 툭툭 치며 다정스레 인사를 나누었 고, 다카미야, 오오쿠스, 츄우 등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려 마치 항 상 그 자리에 존재했던 것만 같은 익숙함까지 전해주고 있었다. 일일이 서로 맞추어가려 의견을 조율하지 않아도, 특별히 애쓰 며 감정을 소모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센도와 함께 있을 수 있다 는 사실이 사쿠라기에게는 무척이나 편안하고 또 감사한 것이었 다. 센도에게는, 어쩐지 너무나 급작스럽게 내달려 가는 것이 아 닌가 하는 자신의 불안함마저도 고요히 가라앉힐 듯한 나른함이 있 었다. 그에 비해 루카와의 시선은, 뚫어져라 자신만을 응시하고 혹여 요헤이와 어깨라도 두를라치면 불쾌한 기분을 가득 싫어 아플 정도 로 깊숙하게 박혀오는 그 시선만은,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흘러 도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져 내리는 물처럼 굴곡 없이 사쿠 라기 안으로 침윤해 들어오는 일이란 없을 것이다. 격정적인 불안 함보다는 늘 안심할 수 있는 안온함이 좋았다. 센도는 루카와처럼 사쿠라기의 무언가를 부수고 자극하며 침투해 들어오는 것이 아니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라, 미처 자각할 틈도 없는 사이에 사쿠라기의 삶 속으로 젖듯이 스며 들어왔다. 그토록 강렬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나 지 않고 섞이는 법을 센도는 알고 있는 듯 했다. 사쿠라기는 느릿한 걸음걸이에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가방의 끈 을 다시 들추어 매었다. 이제 몇 분만 더 걸으면 센도를 만날 수 있다. 아까부터 말이 없네? 간단하게 끼니라도 때울까 해 들어온 라면집에서, 사쿠라기는 쉬지 않고 젓가락질만을 했을 뿐 나란히 앉은 센도의 얼굴을 제대 로 쳐다보려고도 않고 있었다. 센도는 라면 몇 가닥을 입에 문 채 후루룩거리며 별 다른 긴장감이 없는 태도로 사쿠라기에게 물었 다.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있었어? 사쿠라기의 몸짓이 잠시 정지한다. 사쿠라기는 고개를 여전히 파묻은 채 센도에게 보이지 않도록 얼굴을 찡그렸다. 어쩐지, 루 카와의 그 표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고 있었다. 평상시와 별 다를 바 없어 보이는, 하지만 지독하게도 메말라 보였던 그 순간 의 그 표정. 그냥, 루카와가 말을 채 다 이을 수가 없었다. 마치 분필가루를 삼키기라도 한 듯 목이 까끌거렸다. 갈라져 나오는 사쿠라기의 목소리에, 센도가 웃으며 사쿠라기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그래. 알았어.
33 무엇을 알았다는 것인지 되물을 수가 없다. 자신의 등을 살짝 쓰다듬고, 짧게 정리되어 목 언저리에서 부드럽게 물결치고 있는 머리칼을 감아오는 센도의 손가락을 느낀다. 그 은밀한 간지러움 이 좋아 고양이처럼 목을 움츠리고 몸을 기울여 센도에게 기대었 다. 그래, 괜찮다니까. 다시 한 번 송진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감싼다. 그만 일어나자. 나 오늘 재워 줘. 루카와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센도는 그가 자신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었다. 화려한 플레이나 시선을 끄는 외모, 출중한 능력 같은 것이 아 니라 더욱 근원적인 부분에서, 센도는 자신과 같은 그림자를 보았 다. 코트에서는 그토록 강렬히 실체임을 뽐내지만, 일상으로 돌아 가는 순간 세상의 모든 일은 짙은 안개 속에 파묻혀 버린다. 틀림 없이 그도 농구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특별히 여기는 일 없이 십 수 년을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사쿠라기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사쿠라기와 나란히 걸어가면서 센도는 설핏 웃음을 흘리고 있었 다. 사쿠라기가 미처 끝내지 못했던 말을 어쩐지 듣지 않아도 모 두 알 수만 있을 것 같았다. 루카와가 사쿠라기를 만나고 겪었을 그 복잡하고도 끊임없는 감 정의 분수가 마치 자신의 것처럼 선선하게 잡혔다. 가장 깊은 곳 에서 둘은 같은 어둠을 뒤집어쓰고 있다. 단지 센도 자신은 무심 함을 가장하기 위해 스스로 외향의 포장을 두른 것뿐이었고 루카와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는 그러지 않았다는, 어떻게 보면 그저 선택의 차이일 뿐인 것이 다. 드러나는 표면이 다를 뿐 그 속에 감추어진 세상에 대한 밋밋 한 감정만은 한가지였다. 그러니 적요하기 짝이 없었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별 다를 바 없었던, 마치 녹아버린 시계처럼 늘어 져 있는 나날들 속에서 루카와에게 있어서의 사쿠라기란 그 얼마나 심장을 뒤흔들어대는 열렬함의 폭풍 같았을는지. 자신도 여전히 맨 처음 시야에 뛰어 들어왔던 생생한 붉은 머리 의 충격과 귓가에 쩌렁쩌렁 울려대었던 목소리의 파고를 기억하고 있다. 그 색과 소리는 자신의 세상을 부수고 생경한 감각의 세계 를 열어 줄 정도로 강렬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쿠라기의 그 활달함과 생명력이라는 것은, 필사적으로 감추고 있는 상처 입은 내면을 담보로 이루어진 것이다. 허물어진 적이 없는 것도 아닌 심장을 가지고 그래도 솔직한 시선으로 세상 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쿠라기의 성격은 알면 알게 될수록 더욱 센도를 잡아끌었다. 쉽게 다가오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밀어 내지도 않는다. 아픔을 모르는 것도 아니기 때문인지 다른 사람의 아픔에게까지 민감하다. 사쿠라기는, 본질적으로 상처를 이해하는 영혼을 가지고 있었 다. 그렇기에 수없이 무너져가고 또 무수한 아픔을 마음에 새겨가 면서도 기울어진 세상에 똑바로 발을 디디고 살아올 수 있었을 터 였다. 조금은 어두워도, 아직은 굴절되지 않은 맑은 시선. 바라보고 있고 닿아있노라면 센도 자신까지도 정화되는 것만 같 았다. 어떻게 해서든 아직은 굳게 닫혀있는 사쿠라기의 마음속까 지 파고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게 된다. 이미 자신은 문을
35 두드렸고, 조금씩 그 문이 자신을 향해 열리고 있다는 자신감이 센도에게는 있었다. 생각하느라 느려진 발걸음 탓에 벌써 저만치 앞서 있는 사쿠라 기를 달려가 잡았다. 무작정 목덜미에 팔을 두르고 잡아당긴다. 왜 그래! 화는 내지만, 사쿠라기의 얼굴은 붉어져 있다. 그는 일찍이 자 신에게 말했던 것이다. 너의 열( 熱 )이 좋아 라고. 나, 지금도 뜨겁지? 귓가에 훅 숨을 불어넣으며 물었다. 앗, 하는 사이에 주먹이 날아온다. 살짝 고개를 비켜 사쿠라기의 공격을 피하면서, 센도는 이번에는 정말로 크게 웃었다. 새벽의 푸르스름한 색이 조금씩 어둠위로 번져가고 있었다. 새어 들어오는 아침의 빛에 눈을 뜬 센도는, 곁에서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는 소중한 사람의, 명주실처럼 가느다랗 고 붉은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손가락 틈으로 그 가는 실이 파 고 들어올 정도로 돌돌 감아 본다. 상처랄 수도 있는 자욱이 손가 락에 새겨졌다. 피부가 약간 따끔하지만 지금의 이 감촉을 언제까 지나 잊고 싶지 않다. 자신의 몸에 흔적을 새긴다면, 센도는 사쿠 라기를 새기고 싶었다. 자신의 영혼에 자국을 남긴다면, 센도는 사쿠라기를 사랑하는 마음의 자국만을 남기고 싶었다. 뒤척거리며 잠을 잔 탓에 불규칙하게 흩어져 있는 사쿠라기의 앞 머리칼을 살짝 쓸어 올리며, 드러나는 단정한 이마에 입을 맞 추었다. 다시 한 번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 흘러 내려가 있는 이 불을 정리해 목까지 끌어 덮어 주었다.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를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정리하고 사쿠라기의 가방을 집어 들었다. 후우 기지개를 켰다. 팔을 위로 죽 뻗어 올리자, 무언가가 둔탁한 감 촉으로 손끝에 부딪혀 온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 몸을 틀자, 어제 센도에게 보여준다며 가방 속에 넣어놓았던 큐브 퍼즐이 어느 틈에 굴러 나온 것인지 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한 번 그에게 건네어주고 맞추어 보라고 할 심산이 었는데, 루카와 덕에 마음이 심란해 큐브의 일은 까맣게 잊고 있 었다. 어쩐지 무언가 허전한 기분이었다. 단 한 번도 맞추어 본 적이 없는 퍼즐, 누군가가 맞추어 준다면 어쩐지 구원받은 듯한 느낌마저 들것도 같았었다. 사리에 맞지 않 는 자신의 생각에 사쿠라기는 한 번 쓴웃음을 짓고 퍼즐을 집어 들 었다. 아무 생각 없이 다시 서랍 어딘가에 넣어두기 위해 시선을 비껴내던 순간, 퍼즐이 무언가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고개를 다시 화들짝 돌리고 뚫어져라 손위에 쥐어져 있는 퍼즐을 바라다본다. 어제만 해도 틀림없이 어긋나 있었던 퍼즐이, 어느새 색을 맞추 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펴보 자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던 옷가지들이 정돈되어 있고 어제 매고 다녀왔던 가방도 안이 깨끗하게 정리 된 채 얌전히 개켜져 있다.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한 사쿠라기는 저도 모르게 하하하 웃어 버렸다. 퍼즐은, 제 주인을 찾았던 것이다. 아마도 센도는 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새벽빛을 받으며, 잠 속을 헤매고 있던 자신의 옆에서 이 퍼즐을 맞추고 있었을 것이다. 지
37 금 그가 곁에 없기 때문인지 마치 어린 시절부터 계속 비틀어져 있 던 퍼즐이 스르륵 스스로 제 자리를 찾은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 다. 너는 풀 수 있겠니? 아버지의 말이 다시 한 번 생각났다. 무릎을 세우고 앉아 손에 퍼즐을 쥐어 잡은 채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두 볼이 축축해져 온 다. 어긋나 있던 자신의 한 부분이, 센도에 의해 풀려진 듯한 불가 사의한 기분. 사쿠라기는 타고 흐르는 눈물을 굳이 닦으려 하지 않았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나는 시인( 詩 人 )의 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인이란 우울 속에서 헤엄치는 존재들이고, 나는 근본적으로 심장이 창백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輸 血 센도는 최근, 하얗게 핏기를 잃고 메말라 있던 자신의 심장에 붉은 피의 윤기를 더해주는 존재를 만났다. 너의 열( 熱 )이 좋아. 라면서 다가온, 오히려 자신이 태양의 뜨거운 온기를 가지고 있는 그는 어느덧 센도의 심장 가장 뒤편에 문신처럼 새겨져 두근두근 그 존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 고 그 남자 때문에 센도는 요즘 참으로 열여섯 청춘다운 고민을 한 다. 열( 熱 )이라면, 내게는 더 뜨거운 부분도 있는데. 센도는 성( 性 )적인 면에서 어떤가하면, 결벽증인 타입이었다. 체질적으로 타인의 체온이 닿아오는 것을 싫어했고 혀가 섞이는 축 축한 느낌도 좋아하지 않았다. 만지는 것도 만져지는 것도 귀찮아 서 섹스에도 담백한 편이었고 마음이 닿지 않은 상대와의 스킨십에 는 본질적으로 신경질적인 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센도는 최근 사쿠라기에게 닿아가고 싶어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교제하기 시작하고부터 거의 하루도 거른 적이 없는 농구연습에서조차, 어쩔 수 없이 피부가 스치고
39 손가락이 닿는 것만으로도 두근 하고 느껴버린다. 마주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할 때에도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사쿠라 기의 목울대나 살며시 벌어지는 입가 사이로 보이는 혀끝에 민망할 정도로 얼굴이 붉어져 참을 수 없다. 수도 없이 주고받은 키스에 도 사쿠라기의 혀만은 달고 또 달아 서로 엉킬 때마다 그만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소원해 버린다. 이대로 간다면 나는 욕구불만으로 죽어버릴지도 몰라. 센도는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세상에 색이 입혀진다고 생각했었다. 드디어 마음을 바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았다고, 자신은 구원을 받았다고, 사쿠라기를 처음 보았던 순간 그렇게 생각했었다. 무엇 을 하든 진심보다는 그저 시간을 흘려보낼 수만 있으면 그것으로 좋았다. 그런 자신을 일러 주변 사람들은 여유가 있다거나 속을 알 수 없다거나 하는 말로 묘사했지만, 사실 센도에겐 삶에 대한 여유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고 자신의 속을 알 수 없는 것은 스스로 도 마찬가지였다. 무얼 원하는 걸까.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걸까. 왜 숨 쉬고 있을 까. 그렇게 고민해보면 사실 살아가야 할 까닭이라는 것조차 없었지 만, 그렇다 해서 굳이 죽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자 신은 마치 머리는 구름에 처박은 채 허공에 발을 대롱거리며 붕 떠 있는 듯 했고, 스스로의 삶조차도 똑바로 인지하지 못했었다. 그 러나 자신이 살아있음을 이토록 절절히 깨달을 수도 있다는 사실 을, 그와 손을 마주잡고 처음 알았던 것이다. 사쿠라기와 마주 선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순간부터, 잊고 있었던 심장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쿵쾅거리며 애 타게 주장하고 있다. 후. 한숨이 흩어진다. 그러나 달아오른 마음은 흩어 지지 않는다. 센도는 셔츠 자락을 입가까지 최대한 끌어올리고, 자신을 감추 기 위해 애썼다. 이런 순간은, 사쿠라기와 몸을 마주 안고 그를 끝까지 자신 속으로 흡수해 버리고 싶은 이런 순간은, 자신을 세 상으로부터 온통 가릴 수 있는 아주 커다란 무언가가 있었으면 좋 겠다. 혹에라도 이런 마음 들켜 처음으로 잡고 싶다고 생각한 상 대에게서 떨쳐지는 일이 없도록. 드디어 살아갈 수 있겠노라고 생 각한 세계가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져 또 한 번 마음을 잃은 채로 부유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그래도, 시선 안에 가득 찬 사쿠라기 의 선연한 얼굴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센도! 아득하다고 생각했다. 센도!!! 보다 강해진 목소리에 눈을 떴다. 조금씩 눈가에 초여름의 파란 하늘이, 신록으로 물들어 있는 나뭇가지가,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눈부신 붉은 색이 쏟아져 들어온다. 아, 사쿠라기. 웃으면서 저도 모르게 팔을 벌렸다. 그러나 굳게 팔짱을 끼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사쿠라기는 좀처럼 내민 팔을 잡아주지 않는
41 다. 너 이런데서 잘도 자는구나. 응? 사쿠라기의 곤란한 듯한 조금은 화가 난 듯도 한 말에 주위를 둘 러보았다. 센도가 등을 기대고 잠들어 있던 것은 쇼호쿠의 교문이 었고 내리쬐는 햇볕을 고스란히 받으며 잠들었던 탓에 얼굴은 화끈 거릴 정도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 미안. 도대체 너란 녀석은!!! 센도의 대중없는 사과에 버럭 소리를 지르며 무언가를 말하려던 사쿠라기는, 말을 잇기를 체념해 버린 듯 센도에게서 등을 돌렸 다. 그리고 뚜벅뚜벅 앞을 향해 걸어 나간다. 사쿠라기. 작은 목소리였지만, 사쿠라기는 금세 고개를 돌려 뒤돌아봐 주 었다. 사쿠라기! 벌떡 일어나 달려가 사쿠라기의 팔을 잡는다. 성가신 듯 훠이훠 이 휘둘러지는 손을 꽉 움켜잡고 놓지 않는다. 손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사쿠라기가 좋아서, 팔을 크게 돌릴 때마다 함께 흔들리는 붉은 머리칼도 너무 아름다워서, 센도는 고개를 숙이고 쿡쿡 웃었 다. 아직은 괜찮을지도 모른다. 곁에 있다. 바라보며 웃을 수 있다. 더 깊은 곳까지 닿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불안감은 자신만의 것일 뿐, 사쿠라기는 여전히 찬란하고 센도는 아직 달아 있었다. 그리 고 중요한 것은 찬란한 사쿠라기보다도, 여전히 뜨거운 자신이었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다. 그 까닭은 아마도 사쿠라기를 볼 때마다 심장에 새로운 피가 흐르기 때문일 거라며, 센도는 더욱 사쿠라기에게 달라붙었다. 언 제 사쿠라기를 향한 자신의 열이 식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공포도 단지 익숙하지 않음에서 오는 기우일 뿐일 테다. 어째서 나는 사 쿠라기가 될 수 없을까 하는 고민도 그저 하염없이 사쿠라기에게 닿아가고 싶은 자신의 마음의 파편일 뿐이다. 그리 쉽게 잃을 리 가 없다, 생애 단 한 번, 최초로 얻은 이 사람에 대한 자신의 마음 을. 날씨가 너무 더워 공원에서의 농구 연습은 생략하고 사쿠라기의 집으로 파고들었다. 사쿠라기는 센도가 이렇게 떼를 쓰듯 달라붙 을 때면 늘 귀찮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별 말없이 받아들여준다. 그 결과로, 지금은 샤워 후 나란히 다다미 위로 발을 뻗고 앉아 진 지한 얼굴로 TV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센도가 발을 움치럭 대는 통에 양말을 신지 않은 맨 발이 서로 마주 닿는다. 약간 서늘한 자 신의 발에 비해 조금은 따뜻한 사쿠라기의 발, 센도는 그 온기가 좋아 계속 발을 비벼대었다. 그러자 사쿠라기의 어깨가 흠칫 떨리 고, 사쿠라기는 이내 안 그래도 날카로운 눈매를 더 사납게 치켜 올린 채 센도를 쏘아본다. 하지만, 닿아 있는 게 좋은걸. 어리광도 이런 어리광이 없다. 센도는 움츠러뜨린다고 작아질 리도 없는 어깨를 가능한 한 움츠리고 작게 가르랑거리듯 속삭였 다. 그러자 사쿠라기는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다리를 움직여 센 도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나갔다. 그렇게 닿는 게 좋으면 네 발끼리 비벼대란 말이야! 도대체가
43 길거리에서 잠이나 자고! 아아, 또 잔소리의 시작이다. 센도는 사쿠라기에게는 들키지 않 을 정도로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얼른 키스를 했다. 하나! 하나미치! 이건 미토의 목소리다. 여전히 킥킥대며 사쿠라기와 장난을 치 고 있던 센도는 문 밖에서 들려오는 낯설지 않은 목소리에 동작을 멈추었다. 사쿠라기의 이야기로는 미토는 이 집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전에는 사쿠라기가 안에 있든 없든 상관없이 문을 벌컥벌컥 열고 잘도 들어왔던 듯한데, 센도와 사쿠라기가 이른바 연인 사이가 되고 나서는 미토는 늘 문 밖에 서서 사쿠라기의 이 름을 부르게 되었다. 그 마음이 묘하게 이해가 될 것도 같고 이해 할 수 없는 것도 같 아 센도는 작게 웃었다. 아마도 저런 점들이 자신이 사쿠라기의 일상에 파고들면서 생긴 소소한 변화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 둘씩 늘어난 벽에 붙이는 옷걸이라든가, 가지런히 맞추어져 TV 위에 올려져 있는 큐브퍼즐이라든가, 서랍 속에 나란히 개켜져 있는 자신의 운동복이라든가. 갑자기 가슴 가득 무언가가 치밀어 올라 센도가 헤실 거리며 웃 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미토가 들어섰다. 사쿠라기는 어느새 일 어나서 미토가 들고 온 이런저런 먹을거리들을 받아들고 있다. 덥지? 앉아있어. 사쿠라기는 미토에게 앉을 것을 권한 후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원체 좁은 방이라서 부엌이랄 것도 없지만, 일단 싱크대와 작은 냉장고가 놓여 있는 쪽은 부엌이고 도대체 치워지는 날이 없는 듯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늘 요가 깔려있는 창가 쪽은 침실인 거라고 사쿠라기는 농담처럼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오늘도 배달? 센도는 웃으며 미토에게 물었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 를 하고 있는 미토는 종종 끝날 시간에 들러 남은 음식들을 혼자 사는 사쿠라기에게 전해주고는 했다. 한껏 당겨진 활시위 마냥 팽 팽하고 꽤나 날카로운 이미지라서 섬세한 면은 없지 않을까 했는 데, 미토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사쿠라기에게 다정하고 무른 구석 이 있었다. 하긴 센도가 보기에 사쿠라기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사쿠라기에게 물렀다. 그런 거죠, 뭐. 저 녀석 정크 푸드 꽤나 좋아하거든요. 사실 사쿠라기는 정크 푸드를 좋아한다기보다는 음식을 가리지 않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혼자 사는 처지에 이것저것 가릴 형편이 안 되고, 몇 번 먹어본 사쿠라기의 음식 솜씨는 겉치레로 라도 맛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미각의 만족을 위해 서라기보다는 움직이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한, 글자 그대로 식사 라는 느낌. 아무튼 그런 까닭에 미토의 아르바이트 처가 바뀔 때마다 사쿠라기의 주식도 바뀌어 갔다. 지난 번 미토 가 케이크 가게에서 아르바이트 할 때는, 단 음식을 상당히 좋아 하는 사쿠라기조차 정말 케이크는 이제 질렸다며 인상을 찌푸렸을 정도였다. 그런데 저기. 네? 그 때의 사쿠라기 얼굴을 떠올리며 웃고 있던 센도는, 전부터 미토에게 궁금해 하고 있던 것을 오늘 하나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45 사쿠라기의 삶에 발을 딛고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던 미토와 사쿠라기 사이의 강한 결속감, 센도는 그것이 때로 부럽기도 하고 때로 원망스럽기도 했으나 늘 사쿠라기에게 있어 미토란 존재는 다 행인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쿠라기가 평탄하게 살아온 것만 은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씩 짐작하게 되면서, 항상 곁에서 지지해 줄 수 있는 친구의 존재가 고맙게 느껴지지 않았다면 거짓말인 것 이다. 그리고 그리 생각하는 만큼, 역으로 미토는 자신과 사쿠라 기에게 서운함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걱정이 들었다. 미토 군은 사쿠라기와 나 이렇게 된 거, 불편하지 않아? 미토는 센도의 질문을 듣더니 한 번 고개를 돌려, 등을 보인 채 무언가 열심히 담아내고 있는 사쿠라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센도를 찬찬히 마주보았다. 센도 상, 하나미치는 메마른 것에 비해서는 너른 심장을 가지 고 있는 아이예요. 센도 상의 위치가 하나미치 안에서 아무리 높 아져가도, 그 아이 안에 있는 제 위치가 낮아질 일은 없다고 생각 합니다. 저를 향해 있는 마음을 떼어내어 당신에게 주는 것이 아 니라, 새로운 사랑을 키워내 당신에게 주는 거라고 믿고 있어요. 대답하는 미토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뭐라고 해야 할 지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저나 사쿠라기 군단 녀석들은 하나에게 있어서 돌아갈 곳 인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 다. 삶 자체에 지쳤을 때,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나 불현듯 불안 해질 때, 언제라도 그 자리에 존재해 안심하게 해 줄 수 있는 그런 곳이요. 자라고 또 자라서 자신만의 생활 기반을 잡고 특정한 누 군가에게 마음을 주어도 우리 곁에서 저 아이가 멀어질 일은 없을 거예요.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바로 그런 자리를 지키고 싶어서, 저는 친구라는 입장을 선택한 겁니다. 사랑 받는 건 센도 상일지 모르지만 함께 살아가는 건, 저도 마찬가지지요. 대답을 하고, 미토는 웃음 지었다. 센도는 명치끝이 뻑뻑하게 저려오는 느낌이 들어 그저 미토를 바라보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센도 상, 우리 하나미치를 마음껏 사랑해주세요. 있 는 힘껏 그 아이를 잡아끌어 앞으로 달려가게 해 주세요. 설령 넘 어지더라도 그 애 뒤에는 우리가 있습니다. 말을 마치고, 미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나! 나, 간다. 어? 요헤이, 저녁 안 먹고 가? 부산하게 무언가를 준비하던 사쿠라기가 달려 나와 미토의 어깨 를 붙들었다. 오늘은 일찍 갈게. 미토는 사쿠라기의 머리칼을 살짝 쓰다듬고 문 밖으로 걸어 나 갔다. 바래다주려는지 사쿠라기가 나가는 모습과 함께 문이 닫히 는 소리를 들으며 센도는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사쿠라기에게 있어 미토가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는 곳이라면, 사쿠라기에게 있어 자신은 어떤 존재인 걸까. 또, 자신에게 있어 사쿠라기는 어떤 존재인 걸까. 바라보는 첫 순간에 마음을 빼앗겨 지금 이 순간까지 달려왔지 만, 앞으로 자신은 그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 것일까. 언제까 지나 지금처럼 함께 농구하고 천진하게 웃으며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고 소년은 언젠가 청년이 된다. 철없 고 고집스러웠던 아이는 세상에 적응해 가는 어른이 되는 것이다.
47 그 사실을 센도는 알고 있고 아마 사쿠라기도 알고 있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마침내 센도는 요 며칠 간 자신을 사로 잡고 있던 그 욕망의 정체를 새삼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은 역시 불안한 것이다. 시간이 흐르는 것이, 시간과 함께 변할지도 모르는 것이, 지금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쿠라기가 영원하지 않을 지도 모르는 것이. 그래서 필요하다. 힘껏 끌어안고, 그의 안으로 파고 들어가 사쿠라기 안에 자신을 새기고, 마침내는 자신의 영혼에 사쿠라기를 절대 잊을 수 없게끔 깊게 각인하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센도는 사쿠라기의 피를 갖고 싶었다. 두근 하고 심장이 박동 할 때마다 자신의 피를 타고 사쿠라기를 향한 마음이 흐르는 것처 럼, 사쿠라기의 피 속에도 자신이 흐르기를 바랐다. 사쿠라기의 피를 수혈 받아 자신의 창백한 심장이 붉게 물들어 깨어나기를 바 랐다. 사쿠라기를 만난 후로 자신의 심장에 조금씩 핏기가 돌고 있다는 믿음을 지키고 싶었다. 앞날은 알 수 없지만, 자신은 지금 사쿠라기가 없으면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사쿠라기! 사쿠라기가 다시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달려가 붙잡았다. 스 스로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어 오르는 열정에 온 몸이 타들 어 가는 듯 했다. 목이 마르다. 뇌가 요동친다. 사쿠라기가 갖고 싶다. 사쿠라기!!!!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채 언어가 되어 품어져 나오지 못하는 말들이 그대로 열이 되어 온 몸 속을 뛰어 다닌다. 너를 좋아해. 너를 안고 싶어. 네가 필요해. 네 피를 나에게 줘. 사쿠라기. 끌어안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뜨거운 바깥공기가 묻어있는 사쿠 라기의 옷 속으로 손을 들이밀었다. 무작정 얼굴에 입맞춤의 세례 를 퍼붓고 대답할 틈도 주지 않았다. 거친 키스에 사쿠라기의 입 술이 조금 찢어졌다. 센도! 당황한 사쿠라기의 목소리가 들리고 얼굴에 통증이 느껴졌다. 키스하고, 사쿠라기에게 맞았다. 이상하다. 사쿠라기의 얼굴이 일그러져 보인다. 바보 센도. 왜 이러는 거야, 갑자기. 안타까워하는 듯한 사쿠라기의 낮은 목소리가 들리고 사쿠라기 의 손가락이 다가와 센도의 얼굴을 쓸었다. 그 손가락에 축축한 물기가 묻어나는 것을 보고서야, 센도는 자신이 울고 있음을 알았 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른다. 자신은 그저 사쿠라기가 좋다. 그런데 사쿠라기를 좋아하고 있는 자신을 믿을 수가 없다. 상처를 주게 될 지도 모르고 미움 받을지도 모르는데, 지금은 그 저 간절하게 사쿠라기를 안고만 싶다.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다는 격렬한 욕망이, 그렇게도 나쁜 것일 까. 자신이 조금이라도 색채가 있는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는 사쿠 라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 하나를 바라는 것이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 것일까.
49 마치 끈이 떨어진 꼭두각시처럼 정지한 센도를 바라보며 사쿠라 기는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에게 처음 다가올 때의 이 사람은, 초조해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당당하고 아름다 워 보였다. 그러나 그 만큼 어딘가 비어 보였다. 꼭 먼지가 자욱이 쌓인 오래 된 인형처럼 가라앉아, 내밀어오는 손을 자신이 잡아주지 않으면 그대로 곰팡이가 슨 채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센도는 무척이나 뜨거웠지만 그의 뜨거움을 접하면 접할수록 이전까지 얼어붙어 있던 그의 심장을 보게 되는 듯 해 가 슴이 아팠다. 그래서 끝내 그의 손을 밀쳐낼 수가 없었다. 아픔으 로 물들어 지독히 메말라 가는 괴로움을, 사쿠라기 역시 지나칠 정도로 잘 알고 있다. 온기를 그리워하며 살아온 만큼, 스스로 불 태울 때 필요한 용기를 깨닫고 있다. 센도의 눈을 바라다본다.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진득하게 가라앉아 있는 짙은 색의 동공에 마음이 흔들린다. 어째서인지 사 쿠라기는 알 수 없었다. 어째서 말로 표현되지도 않은 자신을 향 한 센도의 감정이 이렇게 물결처럼 흔들리며 박혀들어 오는지, 이 토록 약하면서도 또 강한 존재를 자신이 붙들게 되었는지, 사쿠라 기는 진실로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끌어안았다. 한 손에 채 안기지도 않는 커다란 남 자의 몸이 열을 가지고 다가온다. 팔이 교차되어 둘러지고 자신이 센도를 가둔 것인지 센도 안에 자신이 갇힌 것인지 그저 서로를 꽉 붙들고 있을 뿐이다. 사쿠라기는 혼자서 서 있기도 벅찼었다. 자신의 심리적 외상과 고독에 흠뻑 젖어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마음을 열어줄 틈이 없었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다. 그런데 처음으로, 누군가와 자신의 상처를 나누며 함께 살아 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상처마저 끌어안아 해소시켜 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진심으로 이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고 싶다. 센도가 자 신의 어긋나있던 일부를 풀어준 것처럼, 자신이 이 사람의 온기를 지속하게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센도, 나는 너를 좋아하는 내가 좋아.. 네가 좋아서, 나도 좋아졌어. 미끄러지듯 가늘게 떨리고 있는 눈꺼풀에 키스했다. 사쿠라기. 마주 불러오는 센도의 목소리는 쉬어 있다. 까칠하게 메말라 금 세라도 바스락거리며 부서져버릴 듯한 낙엽과 같다. 왜 몰랐을까. 이 사람도, 외로운 사람이었다. 약하고 수줍은 심장을 가진 사람 이었다. 응. 자신의 눈가에도 눈물이 맺히는 것을 느끼며 사쿠라기는 가슴 가득 센도를 끌어안았다. 서로의 눈물이 겹쳐지는 지금에야말로, 비로소 센도 를 껴안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가 돼서 살자, 우리. 목덜미에 묻히는 센도의 입술이 뜨겁다. 자신의 옷 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센도의 손을, 사쿠라기는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함께 사는 것이다, 앞으로 이 사람과. 습하고 심해어처럼 깊숙이 가라앉아 있으며 한없이 약한 이 사 람과.
51 이제부터 사쿠라기가 수혈해주지 않으면 아니 될 이 사람과. 센도에게서 전해 받은 열을, 이제 사쿠라기가 그에게 돌려준다. 몇 배나 뜨거운 심장을 담아, 그가 격렬히 자신에게 부딪혀오는 것만큼 자신도 절실하게 매달려가면서, 이제 앞으로는 서로의 피 를 나누며 걸어가는 것이다. 센도와 만날 수 있었던 건 기적이라고, 사쿠라기는 센도의 가장 뜨거운 부분을 받아들이며 생각했다. 앞날은 모른다. 바로 눈앞의 내일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과 센도가. 밀려들어오는 열을 느끼며, 사쿠라기는 눈을 감았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나는 죽기보다 소멸하기를 바랐다. 내세에 대한 희망도 윤회에 대한 기대도 없이, 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고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고 그저 사라지고 싶었다. 마냥 행복하다고만 하는 천국도 싫었고 다시 태어나 살아야 한 다는 것도 진저리가 났다. 단지, 잊혀지고 싶었다. 그리고 잊고 싶었다. ( 再 生 ) 센도는 그늘 속에 숨어있었다. 숨어있다기보다 마침 멈추어 선 곳이 그늘이라는 편이 맞는 표 현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째서인지 사쿠라기를 발견했음에도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설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 까닭은 사쿠라기가 자신으로서는 처음 보는 서릿발 같은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고, 아니면 사쿠라기의 앞에 서 있는 낯선 인영( 人 影 )때문인 지도 몰랐다. 센도에게는 등을 돌리고 있는 그 사람은 대기업의 샐러리맨 같은 풍모의, 하지만 자신을 가꾸는 데도 게으르지 않아 꽤나 탄탄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의 세련된 남자였 고 사쿠라기는 미간을 찌푸린 채 팔짱을 끼고 그 남자의 앞에 굳은 듯 서 있었다. 계속 무언가 말을 건네는 남자에게도 사쿠라기는 묵묵부답이었고 마침내 그는 곱게 접힌 종이쪽지 하나를 사쿠라기 에게 건네 준 채 뒤를 돌아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돌아 선 그의 외모는 단정했지만 아무래도 순혈의 일본인 같지 않았으며 약간 흐트러져 내려온 머리칼에 가려 표정이 잘 보이지
53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던 탓인지 그는 센도를 지나쳐가며 어깨를 부딪쳤고, 시선조차 돌리지 않은 채 죄송합니다. 라고 나 직한 사과를 하고 멀어져갔다. 사쿠라기는 멀리서 손에 쥐어진 종 잇장을 펴보지도 않은 채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아무래도 관계없다 는 태도로 주머니에 그것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돌아서 계단을 오르려 하는 순간, 센도는 그를 불렀다. 사쿠라기!. 조금의 간격을 두고 천천히 사쿠라기가 센도를 돌아본다. 시선 이 마주쳤는데도 사쿠라기의 미간의 주름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센도는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척 타닥타닥 뛰어가 사쿠라기와 마주섰다. 그리고 웃었다. 어차피 얼굴 표정만으로 짓는 웃음 따 위 익숙해져버린 지 오래다. 왜 그렇게 웃어? 익숙해져버린 지 오래인데, 사쿠라기는 센도의 웃음이 거짓이라 는 것처럼 늘 까닭을 물어온다. 그럴 때마다 센도의 가라앉은 가 슴은 조금씩 앙금이 피어오른다. 누구야? 대답대신 질문을 되돌렸다. 사쿠라기에게는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것이 가장 좋다. 왜곡하지 않고 바로 맞받아 쳐 오는 올곧은 성격 때문에도 그렇고 진심을 품 은 채 떠보는 양 주변만을 뱅뱅 맴도는 태도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 에도 그렇다. 그런데 이번만은 사쿠라기에게서 바로 대답이 돌아 오지 않는다. 센도는 발로 몇 번 지면을 툭툭 차 대다가 다시 한 번 물었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아까 그 남자, 직장인인 것 같던데 꽤나 한가하네. 고등학생 의 하교시간에 맞추어 집까지 찾아오고. 가족이 죽었으니까 휴가라도 얻었겠지.. 응? 센도의 한 박자 늦은 반응에도 사쿠라기는 별 표정의 변화 없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미안. 모처럼 찾아와 줬는데 헛걸음했네., 에? 도대체 저 생면부지의 남자가 상( 喪 )을 당한 것과 센도의 발길 이 헛수고가 되는 것에는 무슨 개연성이 있는 걸까. 잘 가라. 연락할게. 센도가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사쿠라기는 계단을 올라 마치 거울 속으로 빨려드는 것처럼 스윽 하고 문 속으로 사라졌 고, 철커덩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센도는 문이 닫히고도 한 동안을 계단 아래에 서 있었다. 사쿠라기는 문을 닫자마자 현관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조금씩 떨리기 시작하는 왼손을 오른손으로 꽉 움켜쥔다. 그러자 오른손 까지 함께 떨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사쿠라기는 피식 웃음 지었 다. 잃는 것에는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상처가 생겨날 때마다 해묵은 상처까지 기억을 헤치고 올라와 욱신거린다. 조금 씩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행 복해져 가고 있는 거라고 센도를 알게 된 후 그리 생각했는데, 결 국 시간으로도 치료될 수 없는 무언가는 있는 것이다. 언젠가 잘
55 라내었던 마음이 이제 와서 또 다시 피를 흘리며 통증을 호소해 온 다. 아프다고 소리를 친다. 이래서 사쿠라기는 싫은 것이다. 소중 하게 여기는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갖게 되는 것이. 다시 그 감 정의 치사량 안으로 발을 디디는 것이. 부스럭거리며 아까 토오루에게 건네어 받은 쪽지를 펼쳤다. 적 혀 있는 것은 병원의 영안실 호수와 토오루의 연락처다. 토오루는 에리의, 그러니까 사쿠라기가 가장 오래 사귀었던 여자의 동생이 었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래서 잊고 있었던 그 가 집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때는 솔직히 놀랐었다. 그리고, 누나가 죽었어. 널 보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해서 데 리러 왔다. 는 말을 들었을 때는, 이미 온 몸의 신경기능이 정지 해 있었다. 아픈 걸까. 슬픈 걸까. 어머니가 집을 나갔을 때는 아팠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슬펐다. 그런데도 그 당시에는 사쿠라기는 자신이 아팠고 슬펐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세월이 아주 오래 흐르고 스스럼없이 눈물을 보 일 수 있는 상대를 만나고서야 그 때 자신이 아팠고 또 슬펐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에리는, 온통 눈물 속에 갇혀 있었던 것 같았던 그녀는, 죽기 전에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있었을까. 자신이 요헤이를 만나고, 농구를 하게 되고, 센도를 끌어안을 수 있었던 것처럼 그녀도 울음을 터뜨릴 수 있는 사람을, 몰두할 무언가를, 함께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할 누군가를 얻을 수 있었을 까.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같은 고통 속에서도 냉담하게 식어있던 자신과는 달리 에리는 뜨겁게 부풀어 있는 여자였다. 눈물을 감추고 있다는 점에서는 매 한가지였지만, 그래도 그녀는 화사하게 빛났다. 한참이나 연상이 었던 그녀에 비하면 아직 아이였던 사쿠라기를 귀엽다 며 품어 주 고, 마음을 나누어주고, 변하지 않는 사쿠라기에게 차가워 라며 인사하고 먼저 떠나갔다. 그 때의 사쿠라기는 그저 열( 熱 )을 갈구하고 있었을 뿐 다른 사 람에게 온기를 나누어 줄 줄 몰랐다. 아마도 이맘때쯤 에리를 만 났더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세상에 없 다. 그리고 센도가 다가와 주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아직까지도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운 채 잔뜩 움츠리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 해답이 없는 후회다. 사쿠라기는 여전히 주저앉은 채 한참을 물끄러미 해가 지기 시 작하는 창의 끄트머리를 바라보았다. 에리는, 저무는 노을 같은 여자였다. 타오르지만, 쓸쓸하다. 첫 만남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시기는 중학1학년 무렵, 아버지도 아직 돌아가시기 전으로 사쿠 라기는 실컷 세상을 부수며 돌아다니고 있을 때였다. 아마도 어울 리던 폭주족 선배의 여자였는지 아니면 자주 가던 술집의 아가씨였 는지 지금에 와서는 오래된 필름처럼 흐릿하다. 아무튼 그녀와는 이 곳 저 곳에서 종종 부딪히곤 했는데, 혼혈인 탓인지 표범처럼 늘씬하고 유연한 체형과 시원스럽고 강단 있어 보이는 뚜렷한 이목 구비 때문에 그녀는 항상 눈에 띄었다.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에 리는 늘 사쿠라기에게 윙크를 보내곤 했고 그럴 때마다 사쿠라기는
57 얼굴이 붉어져 시선을 돌리기 일쑤였다. 그런 사쿠라기를 보며 에리는 언제나 크게 웃었고 어쩐지 저 웃 음이 가슴에 맺혀든다 싶을 무렵 그녀는 직접 말을 걸어왔다. 너, 언제나 버려진 맹수 같은 눈을 하고 있는 것 알고 있니? 스스로 깨닫고 있지 못했던 부분인 만큼 당황했고, 그 당황스러 움은 분노로 표출되었다. 한껏 눈가에 힘을 담아 노려보는 사쿠라 기의 빨간 머리칼을 슥슥 쓰다듬으며 그녀는 더욱 크게 웃었었다. 버려진 강아지 같은 눈매가 아니라 버려진 맹수 같은 눈매라는 점이 마음에 들어. 귀엽구나, 너. 너도 역시 결손가정의 아이 맞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중학1년이라 해도 엔간한 고등학생들보다 도 더 키도 크고 체격이 좋은 자신을 아이취급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태연하게 상처를 건드려대는 점은 더욱 싫었다. 버 림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늘 초연한 척 애를 써왔던 사쿠라기에게 있어 그녀의 말은 역린에 꽂힌 바늘이었다. 더 이상 떠들어대면 아무리 여자라 해도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소 리를 질렀다. 시끄럿! 너 따위가 뭘 안다고 잘난 척이야!! 으르렁거리는 사쿠라기에게도 에리는 주눅이 들지 않았다. 오히 려 사쿠라기의 얼굴을 더욱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그녀는 똑 똑히 말했었다. 알 수 있어. 나도 부모가 없으니까.! 너를 보면 십대시절의 내가 떠올라서 자꾸 건져내 주고 싶어 져. 사실상 너는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 아닐지 모르는데도 자꾸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손을 잡고 끌어주고 싶어져. 너, 나하고 사귈래? 사쿠라기와 에리의 교제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생각해보면 지나칠 정도로 동류였던 것이 문제일지도 몰랐다. 둘 다 버림받은 존재였고, 둘 다 열( 熱 )을 그리워하고 있었으 며, 둘 다 부수어진 심장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에리는 자신의 거울 속 모습 같은 하나미치를 이끌어주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그녀와 사쿠라기는 서로에게 있어 동지는 될 수 있어도 구원 은 될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버리고 떠나갔을 때는 분명히 상처를 받았었지 만, 실상 사쿠라기도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뜨거운 그녀의 열정 은 포장일 뿐이었고 딱딱한 밀랍 속에서 사실은 그녀도 누군가가 자신의 두꺼운 벽을 녹여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에 리는 사쿠라기의 단단한 껍질을 벗겨냄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애초에 그녀에게도 사쿠라기에게 도 날개는 없었다. 그렇기에 서로에게 더욱 상처가 되었고, 그녀 가 떠났을 때의 사쿠라기의 충격이란 비록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었 다 해도 그 여파가 굉장했다. 마주보고 선 듯 같은 감정의 선상 위 에서 걷고 있는 사람에게서마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면, 도 대체 자신은 어디에서 빛을 찾아야만 하는 것일까. 누구에게서 존 재의 의미를 얻고 부활을 꿈꿀 수 있는 것일까. 에리와 헤어진 이후로 사쿠라기는 자신의 마음을 더욱 견고하게 결박했다. 자신도 에리도 서쪽으로 넘어가는 해, 다음에 찾아오는 것은 마녀의 커튼이 어둡게 드리워진 새카만 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쿠라기는 새벽(아키라)을 만났다.
59 톡. 어디선가 작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톡!! 소리가 좀 더 커졌다. 센도는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 다. 사쿠라기의 집 앞에서 돌아오자마자 씻을 겨를도 없이 침대로 파고들었었다. 아직도 잘 가라 던 사쿠라기의 목소리가 쟁쟁 울 리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몸을 겹쳤다. 그가 없으면 견딜 수 없다. 좋아하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닿아가고 있다는 확신이 없다. 뜨거운 사쿠라기의 몸을 부둥켜안던 그 순간 더 이상 내일은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했었다. 영원을 믿을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한 영혼도 모른 척 하기로 했다. 언젠가는 사그라질지 모르지만 불타고 있는 한은 그 뜨거운 온도에 모든 걸 내맡기기로 하고 순수하게 사쿠라기에게 돌진해갔다. 그런데 여전히 자신은 사쿠라기가 아니다. 그의 모든 것을 모른 다. 사쿠라기 를 빼앗고 싶은데, 흡수하고 싶은데, 씹어서 소화 시키고 싶은데, 아직도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는 것 같은 초조감이 온 몸을 감싼다. 사랑이란 원래 이런 것일까. 누군가에게 모든 것 을 드러내놓고 피가 흐르는 심장을 바친다는 건 이런 것일까. 어차피 사쿠라기에게 받은 피, 모조리 돌려주어도 관계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은 죽어버린다. 죽는 건 상관없지만 사쿠 라기를 향한 마음마저 사라져버린다. 쨍그랑!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상념에 빠져있을 무렵 파열음이 퍼졌다. 그제야 센도는 자신이 유리창에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에 움직였다는 사실을 기억해냈 다. 창문은 이미 작게 균열이 가 바람이 새어들어 오고 있다. 그 갈라진 틈 사이로 사쿠라기가 조각나 보였다. 어째서인지 교복을 입고 있다. 사쿠라기!!! 저도 모르게 닫혀 있는 유리창으로 얼굴을 들이밀다 쿵! 하고 이마를 찧었다. 창의 금은 더욱 커졌다. 사쿠라기가 어이없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는 것이 밤인데도 선명하게 시야에 잡혔다. 센도는 욱신거리는 이마를 살펴볼 겨를도 없이 밖으로 달려 나 갔다. 바보냐, 넌. 차가운 밤공기에 조금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사쿠라기가 숨을 몰아쉬며 달려 나온 센도에게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린다. 응. 바보인가 봐. 웃으면서 대답했지만, 이번에는 사쿠라기도 왜 그렇게 웃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하늘로 돌리더니 마치 센도가 아닌 은색으로 그물 어가는 달에게 말을 걸 듯 이야기한다. 검은 옷 있으면 입고 나와라. 여자 친구 소개시켜 줄게. 응? 여자친구? 빨리! 영문을 모르는 센도는 엉겁결에 사쿠라기에게 등을 밀려 옷까지 갈아입고 다시 나오는 처지가 되었다. 센도가 머뭇거리며 앞에 서 자 사쿠라기는 셔츠의 깃을 똑바로 세워주고 잘못 잠긴 블레이저의
61 단추를 다시 채워주었다. 그리고 센도의 손을 잡은 채 적막에 휩 싸여있는 밤거리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기, 어디 가는 건지 물어봐도 돼?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이쯤 되면 아무리 센도라도 한 마디쯤 불평을 하고 싶어진다. 낮에는 한기가 도는 표정으로 모르는 남자 와 마주서 있었고 센도를 잔인하게 밀어냈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찾아와 일언반구 설명도 없이 상복처럼 새카만 옷으로 도배를 하게 한 채 무작정 어디론가 끌고 간다. 도대체 저 사람은 자신이 오후 내내 해야 했던 고민의 일부라도 이해하고 있을까. 점차 소리 지 르고 싶을 정도의 불만이 켜켜이 쌓일 무렵, 센도의 생각이 어느 한 지점에서 멎었다. 상복 처럼 새카만. 틀림없이 낮의 그 남자, 가족이 죽었다고 말했었다. 역시 사쿠라기는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 센도는 고민을 멈추고 잠자코 사쿠라기를 따라 걷기로 했다. 어차피 그가 알아도 몰라도 달라질 일은 없다. 토오루. 참 쓸쓸한 곳이다. 흰 국화다발 속에서 한 여인이 미소 짓고 있었다. 사쿠라기는 한참 동안을 그 사진을 바라보더니, 에리, 사진이 실물보다 아니 구나. 손해네. 라며 웃었다. 웃다가 사레가 들렸는지 한참을 콜록 거렸다. 사쿠라기가 토오루라 부른 사람은 사쿠라기가 웃는 동안 에도 웃다 콜록거리는 동안에도 마침내 기침 탓인지 훌쩍거리는 동 안에도 말없이 계속 곁에 서 있었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와줘서 고마워. 그가 입을 연 것은 사쿠라기와 센도가 분향을 끝내고 복도 밖으 로 나왔을 때였다. 오고 싶었으니까. 사쿠라기는 토오루의 시선을 피한 채 대답했다. 낮의 데면데면 한 태도 때문에 토오루는 아마도 사쿠라기가 찾아와 주리라고는 생 각지도 못한 듯하지만, 사쿠라기로서도 에리의 가는 길은 지켜주 고 싶었다. 좋아한 사람이었고, 자신과 닮은 사람이 외롭게 떠난 다는 사실도 싫었다. 막상 토오루에게서 부고를 들었을 때는 충격 으로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되레 무덤덤해졌어도, 해가 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하염없이 에리가 생각이 났다. 토오루는 눈가가 이미 새빨개져 있는 사쿠라기와 조금 멍한 표 정으로 서 있는 센도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누나의 유언은 지켜진 것 같구나. 라고 다소 물기 배인 목소리로 말했다. 응? 되묻는 사쿠라기에게 토오루는 말없이 편지 한 장을 쥐어주었 다. 그리고 센도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돌아오는 길에 바다에 들렀다. 사쿠라기는 밤이슬에 젖어있는 모래 위에 주저앉아 토오루가 전 해준 편지를 뜯어 읽었다. 그리고 십 분이 넘는 시간을 넋을 놓고 앉아 있더니 이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사쿠라기의 웃음소리 에 하늘의 별이 흔들릴 지경이다. 사쿠라기? 어깨를 붙드는 센도에게 하나미치는 여전히 눈물이 쏟아질 정도
63 로 웃으며 들고 있던 편지를 내밀었다. 사쿠라기가 꼭 쥐고 있었 던 탓에 볼품없이 구겨진 편지에는 휘갈긴 듯한 글씨체로 단 한 줄 만이 적혀있었다. 사랑해라, 하나미치. 한 여자가 이전에 사쿠라기가 좋아했던 여자가 남긴 단 한 마 디의 말. 사랑해, 하나미치. 가 아닌 사랑해라, 하나미치. 담겨 있는 그녀의 마음이 모래 위에서 부수어지는 포말처럼 잘 게 잘게 가슴속으로 스미어든다. 내가 자기 이후로 50번이나 실연을 당했다는 걸 알면 에리 펄 펄 뛰겠지. 사쿠라기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멀리서 파도소리가 울린 다. 그리고 마침내 밤을 지나 새벽을 찾아냈다는 사실을 알면 바보 처럼 기뻐하겠지.. 센도, 죽는다는 건 뭘까. 파도소리가 가까워졌다. 밤을 온통 뒤집어쓴 바다는 밀려왔다 다시 밀려간다. 너는 죽고 싶다는 생각 해 본 적 있어? 사쿠라기의 말이 밀려왔다 밀려간다. 사쿠라기의 질문에 센도는 한참을 망설였다. 죽고 싶었냐고 물어보아도, 자신은 살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드물었다. 삶 도 죽음도 아무래도 좋았고, 정해진 수명이라는 것이 두렵지 않았 다. 오히려 내일이란 이름으로 한없이 뻗어있는 것만 같은 시간 이, 귀찮았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나는, 죽기보다 소멸하고 싶었어. 그런데 그 무겁기만 했던 시간이, 사쿠라기를 만난 이후로는 갑 작스레 흐르기 시작해 어리둥절하다. 조금이라도 덜 사랑하게 될 까봐 안타깝고 조금이라도 오래 머물고 싶어 애가 탄다. 이 마음 은, 사쿠라기를 소중하게 생각하게 된 이 마음만은 어딘가에 남겨 두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자신이 잊혀도 누군가가 사랑을 기 억할 수 있도록. 사쿠라기에 대한 사랑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런데 최근 재생을 꿈꾸고 있지. 센도는 일어나 옷에 묻은 모래를 털었다. 그리고 바닷가까지 다 가가 손을 담갔다. 나는 사라지고 싶었어. 잊혀지고 싶었어. 그저 죽는 것이 아 니라 내 존재 자체를 지우고 부디 이것이 나의 마지막 삶이길 바랐 어. 그런데 사쿠라기. 너를 좋아하게 되고 나는 재생하고 싶다는 소 망을 갖게 된 거야. 다시 태어나 너를 또 만나고 싶다는 생각까지 는 안 해. 하지만 말이야, 내 몸 한가득 너에 대한 내 마음을 새기 는 거야. 내 몸을 흐르고 있는 피에, 구석구석을 가득 채우고 있 는 체액에, 내 삶에 대한 기억을, 포기하지 않고 지금까지 걸어온 의지를, 너를 사랑하는 마음을 잔뜩 새겨서 죽은 이후에는 다시 흙으로, 물로 돌아가 자연으로 발신되고 싶어. 널 좋아했던 기억 을 기록한 채 씨앗을 틔우고 물이 되어 순환해 재생하고 싶어. 내 존재는 소멸해도 널 향한 내 마음은 생명을 타고 흐를 수 있도록. 너 정말 바보구나. 하지만 사쿠라기의 말에 비난의 기색은 없다. 아마도 사쿠라기 에 의해 다시 뛰게 된 자신의 심장은 알고 있을 것이다. 처음으로
65 존재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조금 더 기쁘고 조금 더 행복한 마음으로 사쿠라기를 바라보아, 온통 사랑하는 마음 투 성이인 격렬하고도 애틋한 이 애정이 스스로가 사라져도 마음만은 남아, 돌고 또 돌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면 덧없이 유한한 존재인 자신도, 영원을 그릴 수 있다. 손가락을 뻗어 머리칼을 매만져오는 센도의 손길을 느끼며, 사 쿠라기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사랑의 가장 큰 기적은, 아마도 타인의 존재를 긍정함으로써 자 신의 존재마저도 끌어안을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에리와는 그렇 게 할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 그럴 가능성조차 바라 본 적이 없 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자신도 말할 수 있다. 센도를 만나고 처 음으로, 사쿠라기 역시 재생을 꿈꾸게 되었다고 똑같은 대답을 되 돌려 줄 수 있다. 사랑해라, 하나미치. 사랑해, 센도. 충만한 느낌이 들었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그 붉은 빛이 눈앞에서 흔들리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이 없었다. 달리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울게 될 것이라고는 상 상해 본 적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 붉은 빛은 스러져갔고, 이제 그의 달리는 모습을 떠 올리며 울고 있다. 抱 擁 쇼호쿠가 제왕 산노오를 쓰러뜨렸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과 함 께 들려온, 쇼호쿠의 승리보다도 더 거짓말 같았던 그 이야기는 사쿠라기가 산노오 전에서 큰 부상을 입었다는 것이었다. 시합 중 도에 등을 다쳤으나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경기를 했다고 전해 들었을 때는 사쿠라기답다 며 웃을 여유가 있었으나, 시합 후에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몸이 둥실 허공으로 부유하고 발밑이 무한정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온 세상이 탈색되었다. 사쿠라기를 만나고 얻은 색( 色 )은 그가 쓰러지자마자 썰물처럼 센도의 세상에서 밀려나갔다. 센도 상? 센도 상!! 몇 번이고 이름을 불러오는 히코이치를 뒤로하고, 센도는 비틀 거리며 부활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귀가했다. 아무도 센도를 붙잡지 않았다. 어딜 보는 거야.
67 나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사쿠라기는 창가로 향했던 얼굴을 다 시 돌렸다. 침대 곁의 간이 의자에는 조금 부루퉁한 얼굴로 루카 와가 앉아 있었다. 산노오 전에서 입었던 상처가 어느 정도 회복 되고 드디어 재활훈련이 시작되었을 무렵 주니어 대표 팀 훈련에서 복귀해 일부러 그 유니폼을 입고 찾아왔던 저 성격 나쁜 녀석은, 어느새 매일같이 이 재활원으로 출퇴근을 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아무리 방학이라 하나 부활 후의 오후에, 카나가와 외각에 있는 이 재활원까지 왕복하는 일은 그리 간단할 리가 없다. 도대체 무 엇 때문에 이 귀찮은 일을 반복하는 거냐며 사쿠라기는 불쑥불쑥 루카와에게 묻고 싶어질 때가 있었지만, 돌아올 대답이 두려워 차 마 그리하지도 못했다. 언젠가 보았던, 루카와의 부서진 표정을 사쿠라기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끊임없이 부딪쳐오는 저 검은 눈동자는 순수하고 올곧다. 차라 리 직접적으로 입을 열어 무언가를 요구해오면 딱 잘라 거절할 수 도 있을 텐데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이니, 먼저 에두른 태도로 어 림짐작의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도 자의식 과잉일 테다. 그렇다고 해서 조금씩 잠식해 들어오는 것 같은 저 육중한 감정의 무게를 이 겨낼 자신도 없다. 해가 지는데 안 가냐? 결국 무뚝뚝한 질문이 나와 버렸다. 루카와는, 창에서 스며들어오는 저녁놀을 받아 황금색으로 빛나 는 사쿠라기의 머리칼을 한 번 바라보더니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의 등받이에 걸쳐놓았던 트레이닝복 을 걸쳤다. 가타부타 아무런 대꾸 없이 그저 묵묵히 돌아갈 준비를 하는 걸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보니 사쿠라기의 가슴 한 구석이 따끔거린다. 하지만 어쩔 수 없 는 것이다, 이런 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니 주지 않겠다고 선언할 수도 없지만, 마찬가지로 주어야 할 의무도 없다. 루카와와 함께 있을 때의 무 거운 공기의 눌림이 사쿠라기는 싫었다. 소리 없이 밀려들어오는 루카와의 감정에 질식사할 것 같다. 그렇다 해서 루카와가 그 감 정에 뚜렷한 이름을 붙여 사쿠라기에게 돌진해오는 것도 아니다.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이 애매한 상황에 먼저 지쳐버리는 것은 늘 사쿠라기였고, 그래서 루카와에게 귀가를 재촉하게 되는 것도 항 상 사쿠라기였다. 가라고 말을 하지 않는다면 루카와는 정말 돌아 가지 않을지도 몰랐다. 내일 또 올게. 필요한 것 있어? 하아. 사쿠라기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오지 말라 해서 오지 않을 녀석이라면 걱정도 없다. 주간 바스켓 최신호. 응. 짧은 대답과 함께 문이 닫혔다. 히코이치에게서는 몇 번 안부전화가 왔었다. 그 전화로 우오즈 미의 걸쭉한, 하지만 걱정이 배어있는 격려인사도 들었고 다른 료 난 부원들에게서도 위로를 받았다. 하지만 센도의 목소리가 없어 히코이치에게 물었더니 갑작스레 녀석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이야 기를 들어보니 요 근래에는 부활에도 드문드문하다는 것이다. 원래 목숨 걸고 농구하는 녀석은 아니지만, 그래도 센도는 농구
69 를 좋아했다. 정말 좋아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걱정도 되고, 그 일 때문에 자신에게도 문안조차 오지 못하는 것인가 추측해 보았지 만 사실 스스로의 마음속에서도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 다. 센도는 아마도 사쿠라기의 부상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일 테다. 센도에게 비추어지는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자각이 사쿠라기에게 는 있었다. 상처가 있지만, 달려 나간다. 그늘 진 부분이 더 많지만 소량의 빛만으로도 응달을 숨길 수 있다. 센도의 세상에 천연의 색을 가 득 채운다. 센도는 그런 사쿠라기를 보고 있는 것이다. 마치 하나미치를 자신의 세상의 빛처럼 여긴다. 센도에게는 늘 그런 위태로운 면이 있었다. 사람이란 스스로를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사쿠라기 는 생각한다. 그러는 자신도 죽 스스로를 좋아해 왔냐 하면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센도를 좋아하게 되면서부터는 그를 좋아하 는 자신이 사랑스럽다고, 그런 낯간지러운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센도는 사쿠라기를 좋아하면서도 그 때문에 스스로를 좋아 하게 되진 않은 것 같았다. 사쿠라기 때문에 세상을 좋아하게 된 것 역시 아닌 것 같았다. 그 점이 사쿠라기는 늘 불만이고 가슴 아 팠다. 센도의 세상에는 사쿠라기밖에 없는 것이다. 사랑 받는 건 기쁘지만 존재를 인정할 수 있는 세계 유일의 상대라니, 영원을 다짐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그런 건 아무래도 치사량이다. 잃으 면 죽어버린다. 먼저 좋아한다고 말을 걸어올 때도 센도는 불안정해 보였다. 처 음으로 몸을 겹치게 되었던 그 날에도 센도의 폭풍 같았던 키스에 는 젖은 울림이 있었다. 사쿠라기가 좋아한다고 말할 때면 슬픈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표정으로 웃음 지었다. 사쿠라기가 눈앞에 있으면 언제나 시선을 떼지 못하면서도 그 시선은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센도의 눈앞에서 물리적인 상처에 의해 자신이 사라져 있 다. 그 녀석은 그 간극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않다. 설 령 지금은 아니라 하더라도 틀림없이 언젠가는 사쿠라기가 사라지 리라는 두려움에 혼자서 떨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미소 짓고 있을지도 모른다. 바보 녀석! 사쿠라기는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창에서 사쿠라기의 머리칼 위로 떨어지던 저녁 햇살이 갈 곳을 잃고 이불 위에 그림자를 그렸 다. 센도도 마찬가지다. 사쿠라기는 얇은 천 하나로 가려져 있을 뿐인데 천을 젖힐 생각은 안 하고 표면 위에서 그림자를 그린다. 사쿠라기는 조용히 시간이 어서 흐르기만을 빌었다. 이 재활훈 련이 하루라도 빨리 끝나 센도의 얼굴에 대고 직접 화를 낼 수 있 기를 기도했다. 퉁. 몇 번을 해도 튕기어 나간다. 얼마나 오래 슛을 쏘고 있었는지 이제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 팔을 늘어뜨린 채 센도는 코트 위에 주저앉았다. 한 주 두 주 석 주 한 달. 주말에는 한 번도 사쿠라기와의 연습을 거른 적이 없었는데, 그 연습이 중단 된 지 어느새 한 달이 훌쩍 넘었다. 기 간을 헤아리며 자신이 그를 보지 못한 하루하루를 낱낱이 세고 있 었다는 것을 깨닫자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괜찮다고 했다. 히코이치의 말에 따르면 회복은 순조롭고 재활
71 훈련도 무리 없이 잘 진행되어 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은 무엇이 두려운 걸까. 사쿠라기를 처음 보았을 때 여과 없이 자신에게 가득 쏟아져 들 어오던 것은 그의 생명력이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가시광선, 그 빛을 받아 천연색으로 깨어나는 세상. 막상 다가선 이후에는 그가 그렇게 밝은 면만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 달았지만, 그래도 센도는 좋았다. 사쿠라기가 좋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에게 있어 무언가가 되고 싶었다. 사쿠라기가 자신을 채워주었듯이 자신도 사쿠라기의 공허를 조금씩 채워나가고 싶었 다. 그런데 막상 그 소망이 이루어지면 질수록 조금씩 불안해졌던 것이다. 시간이, 내일이, 두려워졌다. 세월이 흘러도 우리는 마 주보고 있을까. 내일이 되어도 사쿠라기는 웃어줄까. 사쿠라기의 삶에 묻어가면서도, 그의 일상에 흔적을 새기면서도, 뜨거운 그 몸을 하나 가득 끌어안으면서도, 센도는 무서웠다. 좋아하면 좋아 할수록 원하면 원할수록 허기진 공포는 커져만 간다. 자신의 심장 은 이전의 무감각했을 때와는 달리, 사쿠라기의 웃음 하나에 활짝 피어나고 울음 하나에 골로 팬다. 지독할 정도로 감정의 파고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이제는 사쿠라기가 없으면 살 수가 없다. 그런데 그 생명력이 흠집을 입었다. 사쿠라기가 다쳤다. 그의 질주가 멈추었다. 센도는 미칠 것만 같았다. 사쿠라기가 너무나 보고 싶은 동시에 차마 볼 수가 없다. 먼저 다가설 용기는 있었으면서도 왜 계속 그 를 지켜볼 용기는 갖지 못한 것일까. 앉아있던 코트위로 엎드렸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다. 골대의 그림자가 등위로 길게 드리워진다. 이곳에서 사쿠라기 에게 처음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사쿠라기에게 처음으로 키스를 했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툭툭. 무언가가 허리께를 내지르고 있다. 한참을 고개를 파묻고 있던 센도는, 반사적으로 사쿠라기?! 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 시선의 끝에 잡힌 것은,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루카와였다. 연습할 게 아니라면 꺼져라. 석양을 등지고 서 있는 루카와는 가느다랗게 늘어진 그림자 탓 인지 다른 어느 때보다도 크게 느껴졌다. 조금 놀랐지만, 센도는 아직도 젖어있는 얼굴을 훔칠 생각도 않 은 채 옷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사쿠라기에게 가지 않았네. 루카와가 매일같이 재활원까지 왕복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이미 전해 들어 알고 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들었었지만 이내 떨쳐버렸다. 루카와가 사쿠라기의 부상에 연연해하지 않을 수 있는 까닭은, 건강할 때의 사쿠라기도 어차피 자신의 손안에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사쿠라기 가 다쳤다 해서 루카와가 잃을 것은 없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이기적인지도 깨닫지 못한 채, 센도는 바닥을 구르고 있던 공을 집어 들었다. 난 연습 끝났어. 그럼.
73 멍청이에게는 오전에 다녀왔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부활이 없 으니까.. 원래 이 장소도 녀석과 너보다는 내가 먼저였어. 그런데 왜 그동안 한 번도 볼 수 없었느냐고 묻지 않아도 답은 뻔했다. 자신과 사쿠라기가 늘 여기에서 연습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루카와가 일부러 이곳을 찾았을 리 만무했다. 지금은 사 쿠라기가 재활원에 있으니 예전처럼 들른 것일 테다. 번연히 알고 있는 답인데도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자꾸 사쿠라기의 얼굴만 떠돌고 바로 뒤에는 오늘 아침에도 사쿠라기를 만나고 온 루카와가 서 있다. 울컥, 하고 까닭 모를 감정이 치밀 어 오르는 순간 루카와가 지친 어조로 물어왔다. 너, 왜 녀석을 만나러 가지 않는 거지. 센도는 천천히 루카와의 눈을 마주 보았다. 흑연을 녹여낸 듯 검은 눈동자에 분노가 출렁이고 있다. 화가 날 만도 하다. 루카와 입장에서 보면 센도는 가진 편인 것이다. 가졌는데도 불구하고 소 홀히 하고 있는 편인 것이다. 하지만 좋아서 그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너와는 달리 난, 다친 그 애를 똑바로 바라볼 자신이 없어. 루카와의 눈빛이 더욱 강렬해 졌다. 그건, 녀석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처 입기 싫은 네 마음을 위해 서일 뿐 아니냐? 녀석이라면 네가 아무리 지독한 꼴을 당해도 끝 까지 지켜보고 끌어안아 줄 거다. 비겁한 녀석. 엉망이 될 때까지 패 주고 싶어. 으득. 이 갈리는 소리와 함께 루카와가 씹듯이 내뱉었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그럼 그렇게 해 줄래? 센도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루카와의 주먹이 센도의 얼굴 에 작렬한다. 센도는 신음도 없이 나가떨어졌다. 너같이 자기본위인 놈은 질색이야. 루카와는 저벅저벅 멀어져갔다. 센도는 입가에 비린 맛을 느끼 면서 정신없이 웃었다. 정말로 자기본위의 애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등 뒤에서 다가오는 보이지 않는 미래가 어쩔 수도 없 이 무서운 것이다. 눈앞에서 기억되고 있는 사쿠라기와 함께 걸어 온 과거보다도, 아직 다가오지 않은, 어쩌면 사쿠라기가 없을 지 도 모를 미래가 무서울 뿐이다. 채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노심초사하는 노인네 같다고 비웃어도 할 말이 없다. 희망을 가질 줄 모르는 바보라 손가락질 해도 좋고 맞서 싸울 용기가 없는 겁쟁이라고 욕해도 좋다. 하지 만, 자신은 정말 사쿠라기가 없으면 안 된다. 부활도 나가지 않는 다. 마지막으로 식사를 한 것이 언제인지도 가물 했다. 주위는 하 나 가득 잿빛이고 신체는 점점 무감각해져 간다. 이미 자신은 정 상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되고서야 간신히 깨달았다. 자신의 사랑은 이타( 利 他 ) 가 아닌 이기( 利 己 )였다. 마주보게 된 순간 사쿠라기를 위해 살고 싶다고 바랐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살기 위해 사쿠라기를 사랑하고 있었다. 공기가 없으면 숨을 쉴 수 없는 것처럼, 물이 없으면 헤엄칠 수 없는 것처럼, 센도의 존재 자체가 사쿠라기를
75 필요로 한다. 그의 결락을, 자신은 도저히 견딜 수 없다. 슬픔은 마치 바오바브나무처럼 자라간다. 센도의 지구 중심까지 뿌리를 뻗고 센도의 우주 저 끝까지 가지를 증식한다. 어느 곳에 시선을 두어도 보고 싶은 사람이 없다. 어느 곳에 손을 내밀어도 잡고 싶은 사람이 없다. 센도는 끝까지 사쿠라기의 문안을 가지 않았다. 복귀 축하한다, 사쿠라기. 툭툭 격려하는 손짓과 함께 여기저기서 반기는 목소리가 들려온 다. 사쿠라기는 쑥스러운 웃음으로 답했다. 언제나 아이언 바디라 고 떠들었던 처지에, 아무리 그럴만한 상황이었다 해도 방학 내내 재활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는 건 사쿠라기에게 있어서는 이미 숨기 고 싶은 과거였다. 선생부터 시작해서 동급생과 농구부원들의 환 영의 목소리가 마냥 멋쩍고 부끄럽다. 하지만 머쓱한 태도로 머리 칼을 긁적이는 사쿠라기의 눈가는 약간 붉어져 있었다. 이 모든 건 농구를 시작하면서 얻게 된 것이다. 이전보다 조금 은 부드러워진 눈매, 서슴없이 다가와 말을 걸어주는 동급생과 문제 일으키지 마라. 면서도 퇴원을 축하해주는 선생, 그리고 한 없이 반가운 얼굴로 맞아주는 농구부원들. 돌아온 곳에서 기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사쿠라기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새삼, 자신이 다시 돌아가 설 자리가 있었 다는 사실이 기뻐졌다. 그래도 사쿠라기가 받아야 할 축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재활 훈련 내내 계속해서 머리에 떠올리고 있던 녀석이 아직 남아있는 것이다. 등교는 했다 해도 아직 본격적인 부 활동은 무리인 사쿠라기는,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안자이 선생과 부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체육관을 빠져나왔다. 느 릿하게 걷고 있던 발걸음이 어느새 조급해졌다. 센도의 얼굴을 보지 못한 지 석 달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의 손을 잡고 있던 시간보다, 오히려 길다. 더구나 공백의 시간은 굳 이 그래야만 했던 시간들도 아닌 것이다. 사귀게 되고, 키스하게 되고, 서로 몸을 겹치게 되면서 까지도 여전히 두려움에 굳어 있 는 그 녀석이, 사쿠라기는 미웠다. 밉지만 사랑스러웠다. 그렇게 숨고만 싶어 하는 그가 먼저 다가와 준 것이다. 밀어내 는 사쿠라기를 아랑곳하지 않고 끌어안아 준 것이다. 버석버석 메 말라가던 사쿠라기를, 애정의 비로 적셔준 것이다. 사랑을 갚는다 고 하면 이상하다. 애초에 물건처럼 교환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 만 사쿠라기는 갚고 싶었다. 돌려주고 싶었다. 자신은 소멸되어도 사쿠라기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생명을 타고 재생되었으면 좋겠다 는 이야기를 하는 센도에게, 아파하는 사쿠라기를 감내할 자신이 없어 도망쳐 버리는 센도에게, 사쿠라기를 만나면서부터 언젠가 사라졌던 그 텅 빈 미소를 다시 짓고 있을지도 모르는 센도에게, 자신의 마음으로 센도의 마음을 갚고 싶었다. 사쿠라기가 이렇게 강해질 수 있었던 것은, 요헤이와 친구들과 루카와와 농구와 그리고 센도 때문이다. 이렇게 마음을 활짝 열어 젖히게 해 놓고서 자신만은 모른 척 하는 것을 용서할 수가 없다. 받아 들여 달라고 잔뜩 두드려 열어 놓고서 혼자서만 도망쳐 버리 는 건 비겁하다. 헉헉헉. 어떻게 역까지 달려 전철을 타고 다시 료난고교의 앞까지 달려 왔는지 알 수가 없다. 체육관까지 쉬지 않고 달음박질해서 문을
77 활짝 열어젖혔다. 한 번도 이렇게 소리를 질러본 적이 없었을 정 도의 성량으로, 크게 그를 불렀다. 센도!!!!! 이 배은망덕한 녀석아!!! 사쿠라기의 외침에 체육관 안의 움직임이 모두 멎었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에 센도가 있었다. 사 쿠라기? 예수님의 부활 현장을 목격이라도 한 것처럼 의아하게 사쿠라기 를 쳐다본다. 한껏 달려온 탓에 가슴을 크게 들썩이며 사쿠라기는 문을 잡고 주저앉았다. 그러나 시선만은 센도에게서 떼지 않는다. 이 바보 녀석아. 사쿠라기의 목소리에 물기가 스며들었다. 환청일까 의심이 드는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센도는 명치끝을 세게 얻어맞은 듯 했다. 문이 열리며 함께 쏟아져 들어온 빛 사이 로, 사쿠라기가 서 있었다. 세상 그 무엇보다 선연한 극채색의 붉 은 머리, 뚝뚝 흘러 떨어지는 땀, 호흡을 따라 움직이는 신체. 살아있다. 살아있는, 너무나도 강렬하게 살아있는 사쿠라기인 것 이다. 망연하게 서 있는 센도의 등을 후쿠다가 밀어주었다. 센도 는 아주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사쿠라기에게로 다가왔다. 앉아 있는 사쿠라기 앞에 자신도 무릎을 꿇고 앉는다. 사쿠라기의 뺨으 로 향하는 손이 덜덜덜 떨리고 있었다. 사쿠라기!!! 손가락이 사쿠라기의 뺨에 닿는 순간, 참지 못하고 세게 끌어안 았다. 얼굴을 온통 사쿠라기의 어깨에 파묻고 계속해서 이름만을 부른다. 사쿠라기, 사쿠라기, 사쿠라기.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응, 다녀왔어. 사쿠라기는 젖은 미소와 함께 센도를 마주 안으며 속삭이듯 말 했다. 마주 닿아오는 체온을 느끼는 순간, 얼굴을 보게 되면 먼저 한 대 때려주고야 말겠다는 결심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제 절교 당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어. 사쿠라기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센도는 멍하니 말했다. 이 천재는 너처럼 속이 좁지 않아. 그런 게 아니라. 센도는 고통스러운 눈동자를 사쿠라기에게 돌렸다. 나는, 나를 믿을 수 없어. 다음에 네가 다치는 일이 또 생기면 나는 역시 필사적으로 모르는 척 하게 될지도 몰라. 마찬가지로 도망쳐 버리고 네게 다가가지 않을지도 몰라. 나는 이런 내가 무 섭고, 그래서 너를 잃는 것이 더욱 무서워. 사쿠라기는 한숨을 한 번 쉬고는, 응석부리듯이 센도의 가슴에 기대었다. 나도 너를 믿지 않아, 센도. 사쿠라기를 바라보는 센도의 눈이 한 층 더 어두워진다. 하지만 사쿠라기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너를 생각하는 마음은 믿음과는 틀려. 너는 그럴 녀석이 아니야. 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너라면 그런 녀석이라도 상관 없어. 라는 마음이야. 사쿠라기? 사쿠라기가 손가락으로 센도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하늘로 솟아있던 머리칼들이 사쿠라기의 손짓 탓에 대지에 인사를 한다.
79 알겠어? 나는 네가 어떤 녀석이라도 관계없다고 말하는 거야, 지금. 네가 너무 약해서 먼저 나를 뿌리치게 될 지라도, 나의 부재를 도저히 견디지 못해서 간신히 채웠던 네 심장을 다시 비워내더라 도, 관계없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네가 강한 녀석이라고는 생각 안 해. 하지만 강하지 않아도 괜 찮아. 그냥 이대로도, 지금의 너만으로도, 나는 네가 좋아. 너를 좋아 하는 나를, 믿을 수 있어. 센도는 눈을 감았다. 무어라 형언할 수조차 없는 충만함이 가득 밀려온다. 존재를 긍정 받았다. 먼저 다가온 주제에 한없이 머뭇거리고만 있었던 자신까지도, 괜찮다고 이 사람은 말해주는 것이다. 두려움 이 가시는 건 아니다. 사쿠라기를 품에 안은 지금도 센도는 내일 이, 미래가 불안하다. 하지만 이젠 관계없다. 자신을 못 믿는다 면,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여주는 사쿠라기를 믿으면 되는 것 이다. 두려워도 무서워도 마음만은 변하지 않는다. 모르는 척 사쿠라 기의 아픔을 외면하고 있을 때조차, 센도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 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영혼 속에 품을 수 있었던 사람, 더없이 나약한 자신을 통해 강해져 가는 사람, 그 사람이 센도가 다가간 사람인 것이다. 다행이다. 이 사람을 사랑해서 진심으로 다행이다. 센도는 웃었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정말 사랑해, 사쿠라기. 그래. 사쿠라기가 불쑥 나타난 이후로 부원들이 일찍 연습을 접고 모 두 귀가해버려 텅 비어있는 체육관의 마루 위로, 센도와 사쿠라기 는 서로를 포옹한 채 굴렀다. 심장이 맞닿아있는 가슴은 타오르는 것처럼 뜨겁고, 맨질맨질 등에 닿아오는 바닥은 서늘할 정도로 차 갑다. 앞으로도 손을 잡고 걸어가다 보면, 이렇게 뜨거운 날과 어 쩔 수 없이 차가운 날이 번갈아 가며 찾아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것은 관계없다. 서로를 붙들고 있는 이 팔만이 중요하다. 힘껏 포옹하고 있는 이 순간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언제라도 제 자리로 돌아 올 수 있는 것이다. 사쿠라기. 센도가 천천히 이미 붉어져 있는 사쿠라기의 입술위로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오랜 시간 끝의, 마치 바스러지는 사탕가루처럼 달콤하고 격렬 한, 바람이 이는 듯한 입맞춤이었다.
81 발치에 무언가가 툭, 하고 걸렸다. 미토는 담배를 물고 있던 입가를 신경질적으로 말아 올리며 눈 살을 찌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어둠이 눅눅히 내려앉 은 좁은 골목 안에서조차 확실히 그 윤곽을 잡을 수 있을 정도의 체격 좋은 남자가 마치 부수어진 인형처럼 널브러져 있다. 뻣뻣하 게 굳어 있는데다 아무렇게나 무방비하게 내던져 있는 팔다리가 마 음에 걸려 몸을 숙이고 자세히 남자를 살펴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훅 끼쳐오는 비릿한 피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안 그래도 찌푸려져 있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손을 내밀어 이마 언저리에 흩어져 있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자 말라붙은 핏줄기 가 보인다. 입고 있는, 원래는 흰색이었을 듯한 면 티도 먼지 범 벅에 피가 진득진득 묻어있는 형편이었다. 스스로도 싸움이라면 이골이 나 있는 처지라서, 그만 모른 척 하고 돌아설까 하던 미토 의 시선의 끝에 새빨갛게 물들어 있는 머리칼이 또 한 번 비추어졌 다. 피에 젖은 것일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의 선뜻한 머리색은, 그 이상으로 선명하고 진한 빛을 간직하고 있었다. 미토는 그 사 실을 깨닫자, 다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마도 80kg 이상은 되지 싶은 남자를 간신히 자신의 집까지 데 리고 들어왔다. 기실 데리고 왔다기보다는 질질 끌고 왔다는 표현 이 어울릴 정도로 그 남자를 운반하는 일은 단신의, 날렵한 체형 의 미토에게는 벅찬 일이었다. 몇 번이고 중도에 포기해 버릴까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생각하기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자신의 어깨에 둘러진 팔에서 전해 져오는 온기와 귓가에 간간이 스치는 머리칼의 감촉 등이 마음 한 구석을 움직여 그럴 수가 없었다. 알아차리고 보니, 저도 모르는 새에 집까지 끌고 들어와 버린 것이다. 넓지 않은, 미토 혼자만으로도 꽉 차는 느낌이 드는 방안의 한 복판에 그를 내려놓고 상처 자국을 씻어주기 위해 물수건을 만들어 왔다. 티를 벗기고 핏자국들을 지워나가다 보니, 묻어있는 피의 양에 비해 의외로 상처는 적었다. 혹시라도 큰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에 조마조마하고 있던 스스로의 긴장이 우스워져 미토는 피식 웃어버리고 기지개를 한 번 켰다. 슥슥 대충 몸을 닦 아주고 얼굴로 수건을 옮기자, 힘 있어 보이지만 단정한 이목구비 에 숱이 짙은 속눈썹, 무엇보다 어려 보이는 인상이 눈에 들어와 조금 놀랐다. 먼발치에서 우연찮게 가끔씩 그를 보게 되었을 때는 그 체격 탓이랄지 아니면 이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아서인지 꽤 나 나이 들어 보이는 타입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느새 고른 숨소리를 내며 기절해 있다기보다는 잠들어 있는 듯 보이는 무방비 한 얼굴을 보니 역시 자신과 같은 또래다. 오히려 안고 있었던 인 상에 대한 간극이 큰 만큼 더욱 어려 보이기도 한다. 이거, 여러 가지로 속은 것 아닌가 싶어 자조하면서 그래도 미토는 수건질을 멈추지 않았다. 손끝에 닿아오는 피부가 부드러웠다. 이마에 달라붙어 있는 머리칼을 떼어내고 조심스레 보다 아래로 손을 옮기자, 입가가 상흔으로 붉다. 분홍기가 채 가시지 않은 깨 끗한 피부위로 번져있는 그물 같은 선연한 핏빛 줄기가 시야를 어 지럽힌다.
83 사쿠라기 하나미치 아마도 그런 이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딱히 세상에 불만이 있는 것도, 그렇다 해서 자신에게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미토는 무언가를 부수 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별로 누군가에게 상처 입히는 걸 좋아하 지 않으면서도 어느새 고개를 돌려보면 무리 속에서 주먹을 휘두르 고 있다. 행인지 불행인지 몸을 쓰는 일에는 둔하지 않은 편이라 서, 지칠 정도로 싸우면서도 타인에게 무릎을 꿇어본 적이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싸움으로 저물어 가는 하루하루가 무료해졌다. 쇼바를 한껏 높인 바이크를 타고, 알루미늄 배트를 휘두르고, 입에는 담배를 꼬나물고 거칠 것 없이 거리를 질주하던 나날들의 어느 틈에 언뜻 언뜻 보이기 시작했던 붉은 머리. 그도 이 근방에 서는 꽤나 유명한 듯 이름 정도는 금세 알아낼 수 있었지만,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 정도의 강렬한 인상보다도 더욱 미토를 뒤돌아 보게 만들었던 것은 그의 몸 가득 배어있던 접근하지 마 의 강력 한 오라(aura)였다. 어딘가 상처 입은 듯한, 유일의 은신처를 잃은 맹수 같은 이미지. 직접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도, 주먹을 맞대어 본 적도, 심지어는 근거리에서 자세히 살펴본 적도 없지 만, 간간이 거리에서 혹은 학교에서 눈가에 새겨지던 그 붉은 머 리는 신기하게도 미토의 가슴속에 스며들어 잊히질 않았다. 결국, 오늘 이렇게 그를 지나치지 않고 주워오게 된 것도 그토록 시선을 끌었던 핏빛 머리칼의 공이 상당했으나 막상 마음속에서 호의와 흥 미를 가지고 있던 상대가 의아할 정도의 소년 같은 인상으로 이리 눈앞에 누워 있으니 어쩐지 심장이 두근거린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쳇.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는. 미토는 끝이 없는 눈앞의 남자에 대한 감상을 접고, 다시 바지 런히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지끈거리는 두통에 시달리며 사쿠라기는 눈을 떴다. 머리를 부딪쳤던 탓인지 초점이 잡히질 않아 눈을 가늘게 뜨자, 익숙하지 않은 모양새의 천장이 시야에 맺힌다. 무언가 까칠한 감 촉이 느껴져 이마에 손을 대어보니 붕대가 감겨있다. 몸을 그대로 둔 채 고개를 돌리자 싱크대의 앞에 서 있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눈 에 들어왔다. 바삐 움직이는 손놀림에 비해 무척이나 깔끔한 동 작.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전혀 없다. 꽤 작은 키지만, 단단해 보 이는 균형 잡힌 몸. 뭐야. 치밀어 오르는 의혹에 간신히 갈라진 목소리를 내었다. 지독스러울 정도의 난투 끝에 어딘가에 주저앉았던 기억은 나는 데, 막상 눈을 떠보니 이런 알 수 없는 곳에서 알 수 없는 사람의 뒷모습만이 눈가 가득하다. 어쩐지 초조해져 견딜 수가 없어 짜증 마저 솟는다. 뭐야. 다시 한 번 물었다. 보다 강한 목소리에, 첫 번째 목소리에는 반응이 없던 상대가 천천히 뒤돌아본다. 그러더니 사쿠라기에게 일단 시선을 맞추고,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리고, 미토 요헤이. 간단하게 말한 후에 살며시 입으로만 웃었다. 입가는 친근감 있게 말려 올라가지만, 날카롭게 째진, 윤기 없
85 는 눈동자는 본심을 내비치지 않는다. 미토 요헤이. 입 속으로 들은 이름을 중얼거려 보지만, 확실히 기억에 남아 있는 이름은 아니다. 의혹에 가득 찬 눈동자로 똑바로 쏘아보자, 미토는 이번에는 눈꼬리까지 접어가며 살짝 웃었다. 반갑다, 사쿠라기 하나미치. 모르는 사람에게서 불리는 이름은 달갑지 않다. 참으로 지겨울 정도로 치고받으며 돌아다녔고, 눈에 띄는 스스 로의 외모가 타인들에게 남기는 강한 인상도 충분할 정도로 알고 있다. 이 거리에서 자신에겐 타인이라 해도 사쿠라기의 이름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문 것도 아니었지만, 어쩐지 눈앞에 서 있는 남자는 무언가 분위기가 달랐다. 묘하게 가라앉은 인상 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날카로움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을 듯한, 강한 존 재감에 비해 체취가 무척이나 옅은 사람. 사쿠라기가 알고 있는 사람 중 저런 안개 같은 이미지의 사람은 없다. 알지 못하는 사람이고 우연찮게 도움을 받았다면 그저 고 맙다 한 마디 건네고 툭툭 일어서면 그뿐일지도 모르겠지만, 미 토라 소개한 사람의 그 부연 이미지가 어쩐지 가벼운 인사만을 남 긴 채 그 자리를 그냥 털고 일어서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배고파? 묵묵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쿠라기에게, 미토는 다시 등을 보이며 물었다. 변변한 게 없어서. 너 입 안 찢어진 것 같던데 수프 정도면 괜찮겠지?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잘 갈린 나이프 같은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의외로 다정하 고 따뜻하다. 사쿠라기는 그만 웃어 버렸다. 웃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울음이 섞여버렸다. 우욱. 채 삼키지 못한 오열이 스며 나온다.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사 쿠라기는 몸을 떨었다. 왜 울고 있는 걸까. 어째서 그런 곳에 쓰러져 있었을까. 생각하자, 피할 수도 없는 잔혹한 현실이 눈앞에 바로 들이대져 견딜 수가 없었다. 미토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어깨에 따스 한 온기가 얹히고 머리카락이 쓰다듬어진다.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서, 빛만 나면 스르륵 사라질 듯한 안개 같은 사람이라서 다행일지도 모른다. 사쿠라기는,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내 탓이야, 내가, 내가. 속죄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버린 어머니도, 자신 탓에 돌아가신 아버지도 아닌 생면부지의 타인. 하지만 용서받고 싶었다. 누군가가 괜찮다고 말해주었으면 했 다. 그래도 너는, 살아 있잖아. 사쿠라기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가득 맺힌 색소가 엷은 눈동 자가 미토를 응시한다.
87 사쿠라기는 늘 그 사실이 가장 괴로웠다. 낳아 준 사람에게 사랑 받지 못했는데, 살아 있다. 혈연이란 이름만으로 기댈 수 있던 넓은 가슴이 자신 탓으로 사 라졌는데, 살아 있다. 혼자서만, 계속, 상처입고 쓸쓸해하며 살아 있다. 맺혀 있던 눈물이 톡, 하고 구른다. 물기가 사라진 눈동자는 그 래도 맑다. 미토는 자신의 심장이 조금씩 그 박동을 빨리 하는 것을 느끼며 사쿠라기의 눈가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 촉촉한 감촉을 느끼며 진 심을 건넨다. 살아 있다는 것은, 살아 있어도 괜찮다는 뜻 일거야, 아마도. 미토의 팔 안으로 사쿠라기의 몸이 잠겼다. 사쿠라기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처음, 실컷 울었다. 두둑. 뼈가 부러지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사쿠라기를 향해 주먹을 날 리던 상대가 팔이 꺾인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신체가 부수어지는 기이한 소리, 그러나 이미 질리도록 익숙해진 소리를 다시 한 번 귓가에 담으며 사쿠라기는 이마를 타고 턱으로 흐르고 있는 피를 무심하게 닦아내었다. 그리고 이미 쓰러진 상대의 팔을 여전히 혈 관이 드러날 정도로 힘주어 쥐고 있는 미토에게 말했다. 끝났어, 가자. 벌써 몇 번째인지는 잘 모르겠다. 만났던 날 이후로, 사쿠라기는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미토 와 어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울리다 보면, 어째서인지 반드시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먼저 시비를 거는 일도 상대방이 걸어오는 일도 다반사여서, 마치 기억해내고 싶지 않은 무언가를 부수듯 폭 력을 휘두르고 나면 거친 숨소리만 가득한 기묘한 적막 가운데 자 신과 미토 둘 만이 서 있다. 서로 등을 마주 대고 서 있는 두 사람 의 발끝을 기준으로 세상은 마치 36 기울어져 있는 듯 했고, 사 쿠라기는 함께 이 비딱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동지가 생겼음이 기쁜 것인지 아니면 슬픈 것인지 감지할 수가 없었다. 원래부터 자신의 세상이 기울어져 있던 것인지 아니면 기울어져 있 던 미토의 세상으로 자신이 휘말려 들어갔는지 어쩌면 둘의 세계 전부가 처음부터 휘청거리며 기울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미토의 가슴에서 생전 처음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감정을 드러 내며 격렬히 눈물 흘리고 나서, 미토가 자신과 같은 학교라는 것 을 알았을 때는 솔직히 쿵 하고 심장이 떨어져 내리는 느낌이었 다.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좋을, 밀도가 옅은 분위기의 사람이라 서 털어 낼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 순간에는 누구라도 좋았다 고 생각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눈앞에 있던 사람이 미토였기 에 그리 마음을 쏟아내어 놓는 것이 가능했던 걸지도 모른다고, 최근의 사쿠라기는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미토에게는 무언가 그런 분위기가 있었던 것이다. 내보이지 않으려 긴장하지 않아도 억지로 탐색해오지 않았으며 보이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듯 했다. 영혼 한 자락 이 어디부턴가 이어져 있는 듯 이해( 理 解 ) 이전의 본질적인 동질 감으로 서로가 묶여 있는 것 같았다. 사쿠라기는 마치 자신이 태 어나면서부터 미토와 함께 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기시감마저도 느끼고 있었다.
89 쓰러져 있는 녀석들을 걸리는 대로 밟으며 피 냄새가 떠돌고 있 는 비좁은 골목을 빠져나와 밤하늘을 모자처럼 쓴 채 걸었다. 코 끝을 스쳐 가는 밤의 대기가 첫 눈이 피부에 닿아 녹아내리는 듯 선뜻하다. 한참을 눈앞을 보지 않고 발아래만을 선선히 내려다보며 걷고 있던 사쿠라기의 걸음이 점점 느려지더니 어느덧 멈추어 서서, 여 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불쑥 미토에게 물었다. 요헤이. 나, 이상하지 않아? 연결성 없는 질문에 미토도 걸음을 멈추고 대답한다. 무어가? 싸움 때문에 아버지 돌아가시게 해 놓고도 계속 싸움만 하고 있 는 내가. 미토는 아무 말 없이 긁히고 멍든 상처투성이에 군데군데 피까 지 묻어있는 사쿠라기의 손을 잡아 내리며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셔츠 안쪽을 뒤적거려 담배 한 개비를 꺼내고, 라이터로 불을 붙인 뒤 사쿠라기에게 물려준다. 그리고 자신도 한 개비를 꺼내어 문 뒤 사쿠라기의 담배로부터 불씨를 옮겨왔다. 후. 잿빛의 연기가 어두운 공기 아래 흩어진다. 한참을 녹아드는 듯 허공으로 사라져버리는 연기를 바라보고 있 더니, 미토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는 말이야, 하나미치.. 널 주웠던 날 전에도, 너를 몇 번 보았었어.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직접 마주한 적은 없었지만, 주먹질을 하고 있는 너도 꽤 여러 번 보았지. 그 때마다, 저 녀석은 세상을 부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부수고 싶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리고 지금도 너는 마찬가지야. 상처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처를 받기 위해서 주먹을 휘둘러.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사쿠라기는 멍하니 미토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나는 네가 신경이 쓰였었고, 금세 울 것 같은 얼굴로 싸 움질만 하는 네가, 언젠가 다른 무언가를 만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었어. 자신을 부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정도로, 이대로 살아 있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몰두할 수 있는 무언가를, 살고 싶다 고 생각하는 자신을 죄스러워 하지 않을 정도로 힘껏 끌어안을 수 있는 무언가를 말이야. 그런 것이, 정말 있을까? 물기가 배인 목소리로 의문을 가득 담은 채 속삭인다. 미토는 손을 뻗어 자신보다 높은 곳에 있는 사쿠라기의 머리칼 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틀림없이 있어. 그리고 나는 이미 찾은 것 같아. 마지막 말을 숨기고, 미토는 미소 지었다. 추워진다, 걷자. 그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계속 그 머리칼을 손가락에 감고 싶어 질 것 같아, 미토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91 사람 하나로 방안의 공기가 달라져버린다. 늘 습기가 차 눅눅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방이, 구석에 누워 새근거리며 잠을 청하고 있는 사람으로 인해 갑작스레 따스하고 보 송해진 느낌마저 들었다. 눈을 연신 깜박거리면서, 그래도 애써 졸음 참아가며 끝까지 자 신이 만들어 준 저녁을 다 먹고 잠든 사쿠라기를 바라보며 미토는 어쩐지 까닭 모를 온기가 가슴속에 스며든다고 생각했다. 심장으 로, 혈관으로, 뇌수로 점점이 스며들어 온 몸을 장악해 버리는 듯 한 따스한 기운. 신기하게도, 마음의 파장이 참 잘 맞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이 렇다고 생각하면 상대방도 이렇다고 생각하고, 내가 그렇게 해야 지 싶으면 상대방은 벌써 그렇게 하고 있는. 지켜봐 온 시간은 오래더라도 마주한 것은 그다지 오래지 않은 시간, 하지만 미토에 게는 사쿠라기와 자신은 꼭 그런 사이가 될 수 있으리라는 자신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기는 사쿠라기를 찾아냈고, 이해했고, 만났다. 그리고 사쿠라기는 미토를 믿고 그 앞에서 억지로 슬픔을 감추 지 않은 채 울어주었다. 스륵. 사쿠라기가 잠결에 고개를 움직이자, 붉은 머리칼이 춤추듯 흐 트러진다. 미토에게 아픔을 온전히 털어 내고, 자신의 모든 것을 연 채 눈앞에서 잠들어버린 저 남자. 미토는, 지치지도 않고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사쿠라기를 알 게 된 이후로 미토는 부수는 사람이 아니라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어졌다. 손가락 끝으로 부딪쳐오는 세상의 무게와 그 속의 자신을 바라보는 각도가, 이미 사쿠라기를 알기 전과 알게 된 후가 다르 다. 사쿠라기의 신뢰를 얻고 싶고, 늘 자신의 앞에서 저렇게 마음 놓고 잠들게 해 주고 싶다. 사쿠라기가 자신의 품안에서 어깨를 파들거리며 울던 그 순간이 미토에게는 너무나 감격스러웠지만, 이제는 두 번 다시 그럴 일 없도록 저 남자를, 지켜주고 싶다. 숨을 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 하는 사쿠라기의 가슴이 그가 살 아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해 준다. 시선을 돌리자, 살며시 벌어져 있는 선홍색의 입술이 눈에 맺혀 왔다. 눈가의 끝에 하나만이 선명하게 잡혀오던 그 순간, 미토는 숨을 멈추고, 닿았다. 촉촉함이 느껴지자마자 다시 떼었을 찰나의 시간, 하지만 입술 끝에는 언제까지나 지워지지 않을 사쿠라기의 잔향이 남는다. 처음인, 그리고 아마도 마지막일. 늘 지켜줄, 곁에 있을, 신뢰받고 싶은 최고의 친구 로 한 발 내딛기 전의 단 한 번의 욕심. 미토는 거품처럼 웃음 짓고, 자신도 사쿠라기의 옆에 몸을 뉘였 다. 사쿠라기로 인해 흠뻑 젖은 자신의 심장은, 내일이 되면 보다 견고하고 완만한 감정으로 또 다시 젖을 것이다. 이미, 조금 있으면 내일 이다.
93 以 前 그래서, 카나가와로 월경입학 하기로 했어요. 센도의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부모님의 수저질이 멈추었다. 센도 는 미소시루를 후루룩거리며 목안으로 넘겼다. 학교 근처에 체육 특기생들을 위한 기숙사가 있다니까 거처 문 제는 걱정 안 하셔도 되요.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남겨놓고 드르륵 의 자를 밀며 일어선다. 그럼, 먼저 올라갈게요. 처음부터 그다지 자신들에게 기대어오는 아들은 아니었지만, 진 학 문제까지 저렇게 혼자서 결정하여 통보하듯 끝내버릴 줄은 몰랐 다. 센도가 2층의 자기 방으로 사라진 후에도, 부모는 한동안을 말없이 서로의 얼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본질적으로 우울과 단조로움을 타고나는 사람들이 있 다. 열악한 환경에 의해 축축한 성격을 안게 되거나 누군가로부터의 가학에 의해 오히려 상처에 둔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태 어나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이란 슬픔이 순환하는 수조와 같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손끝에 닿아오는 현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 슬픔이어도 기쁨이어도 관계없는 옅은 농도의 심장을 지니고 있 다. 마치 샬레에 넣어져 배양되는 균처럼 오도카니 혼자만의 정신 세계에 들어앉아 자신을 담고 있는 세상을 그저 관망할 따름이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틀림없이, 자신의 발이 세상을 똑바로 디디고 있지 않더라도 관계 가 없을 것이다. 바라보고 있는 곳은 언제나 한 움큼 휘청 기울어 있다. 그리고 센도는 그런 사람이었다. 특별히 무언가에 대한 열정이나 소망을 안아 본 적이 없다. 삶 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살아 있으니까 살 아간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무엇이 자신에게 있어 특별 한 것인 지 자각할 수가 없다. 가족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무조건적인 애 정에도 무덤덤하다. 타인의 의식을 흡수할 뿐 스스로 방출하지 않 는다. 그래서 사실 료난고교의 타오카 감독이 스카우트 제의를 하 러 왔을 때도 센도는 아무 느낌이 없었다. 미래에 대한 욕구가 옅 기 때문에 진학에 대해서도 당연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흐르면 흐르는 대로 그저 휩쓸려가는 것만으로 좋았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란 하늘로 던져진 동전의 앞뒤나 책상위로 굴린 연필에 매겨진 번호처럼, 참으로 사소한 것으로도 그 앞날이 결정되기도 한다. 센도의 인생에 있어서 후에 돌이켜 보면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할 만한 그 순간, 막상 센도 자신은 학교의 상담실에서 무심히 타오카 감독의 어깨를 타넘어 들어오는 햇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고장 난 축음기가 느릿하게 정지하는 것 처럼, 쉬지 않고 주변을 울리고 있던 타오카 감독의 이야기 중 한 단어가 늘어난 음악 마냥 어슷하게 센도의 귓가에 스치었다. 뿐만 아니라 학교 근처에 바다도 있다네. 기숙사에서도 보이 지. 바다가, 있습니까? 계속 창밖을 향해 있던 시선이 처음으로 타오카 감독에게 머물
95 렀다. 갑자기 응시해오는 담흑색의 눈동자에 당황한 타오카 감독 은 말을 더듬었다. 그 그렇다네. 그럼. 응? 아닙니다. 료난에 진학하겠습니다. 센도는 어느 때부터인가 자연스레 익힌 사막의 모래 바람 같은 미소를 지었다. 부끄럽지도 않냐, 네 명이나 한꺼번에. 더구나 중학생을 상대 로. 상대를 칠 때 주먹이 잘못 맞았는지 손가락 관절 부분이 욱신거 렸다. 사쿠라기는 따끔거리는 손을 들어 혀로 살짝 핥았다. 입을 벌리자 약간 찢어져 있던 입술 가장자리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쳇. 낮게 내뱉는다. 피가 뒤섞인 타액이 도로에 눌어붙었다. 도대체 가 중학생이라고 늘 깔보고 있으면서도 그 중학생에게 무리까지 지 어 주먹을 휘둘러 오는 고등학생이란 무어란 말인가. 사쿠라기는 단 한 번도 걸어오는 시비를 비켜가 본 적이 없다. 어차피 이래저 래 아무래도 좋은 세상, 주먹을 휘두르고 상대를 굴복시키는 일은 때로는 즐겁기까지 했다. 싸움을 걸며 달려 들어오는 상대들은 그 들의 역량이 어쨌든 처음부터 사쿠라기를 이기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가슴에 미련을 안고 싸우는 것과 모든 걸 털어 내고 싸우 는 것은 실력 이전에 천양지차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사쿠라기는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자신에게 주먹질을 해대오는 상대들처럼 체면에 목숨 거는 것도 아 니고 싸움꾼의 명성에 집착하고 있지도 않았으며 신체적인 상처가 두렵지도 않았다. 유행처럼 몰려다니며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다. 부수고 싶은 것이 있어 주먹을 휘두르고 덤벼들어 오니까 쓰러뜨린 다.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도 안쓰러워하거나 안달복달할 어머 니도 없다. 아버지가 마음에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아들이랍시고 다정스레 품에 얼싸안고 키우는 타입의 부친도 아니 었다. 어머니와 헤어진 이후로 아버지의 동공은 물기 없이 메말라 있었고, 두 눈에 무엇이 비추어져도 그 사물이 아버지의 심장까지 가 닿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쿠라기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하 나뿐인 자식인지라 이토록 싸움질만 하고 돌아다니는 데 걱정을 하 지 않을 리는 없다. 하지만 자기가 이렇게까지 폭력을 휘두르고 다니는 까닭을, 자신이 아버지의 그늘을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아 버지 역시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사쿠라기는 늘 생각하고 있었 다. 멍들고 찢긴 혈흔에 온통 반창고투성이가 되어 집에 들어가도, 단 한 번도 혼이 나거나 잔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말없이 다가 와 다친 곳을 몇 번 쓰다듬고는 고통에 젖은 눈동자를 무기질의 얇 은 표피로 감춘 채 고개를 돌린다. 주저함조차 묻어 있지 않은, 세월이 남긴 고통의 파편만이 자욱하게 쌓인 것 같은 뒷모습에 차 마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사과와 연민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 같아서, 잠시 닿았다 서둘러 떨어져가는 아버지의 그 손길이 마음 에 걸려, 싸움을 하고 돌아가는 사쿠라기의 마음은 때때로 무거웠 다. 그래도 타인에게 향해지는 이 기묘한 자학행위를 멈출 수는
97 없었다. 그러고 보니 수요일인 오늘은 아버지의 귀가가 이른 날이다. 그 생각을 하자 보폭이 조금 좁아졌다. 갑작스레 무턱대고 시비를 걸 어왔던 녀석들 덕택에 얼굴에는 상처가 가득하다. 이미 돌아와 계 실 아버지가 신경 쓰여 속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벌컥 현관문을 열 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였음에도 시선 끝에 맺혀드는 검은 머 리칼을 보는 순간 그만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 절규가 되어 터져 나왔다. 피 속으로 펄펄 끓는 용암이 들이부 어진다. 뇌가 시끄러운 진동을 울리고 충격이 온 몸을 훑었다. 간 신히 바들거리는 몸을 추스르고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애쓴다. 아버 지는 현관을 향한 자세로 쓰러져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 더 이상 잃을 수는 없다. 간신히 자신을 지탱해주고 있는, 설사 입 밖으로 표현하지는 않더라도 세상과 통하는 유일한 통로인 아버 지였다. 온 몸을 얽어매고 있는 가혹한 현실의 동아줄 중에서, 그 래도 끝까지 매듭이 풀리지 않았음 하고 바랐던 유일한 버팀목이 다. 제대로 사고가 돌아가지 않고 공포만이 먹먹하게 뇌리를 잠식해 오는 속에서,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병원은 바로 요 앞이다. 전화보다 오히려 직접 달려가는 것이 빠를 것이다. 사쿠라기는 미친 듯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그 앞을, 여 덟 명의 남자가 가로막았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비켜!!!! 울음 섞인 비명이 내질러졌다. 학교에 적응하는 데 별로 무리는 없었다. 감독이 인선( 人 選 )에 열을 올리는 것치고는 무척 평범한 팀 동료들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말았다. 어차피 별로 팀 이라는 것에 얽매이는 성격이 아니다. 느릿하게 오르락내리락 같은 회전을 되풀이하고 있는 먼지 알갱 이처럼 나른한 일상 속에서, 그나마 달리고 있으면 자신의 몸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극한으로 점프하고 통 증을 느낄 정도로 팔을 회전해 림 속에 공을 꽂아 넣는다. 삼켜지 듯 그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공을 바라보며 땀으로 뒤범벅된 채 거친 호흡을 내쉬고 있노라면, 조금쯤은 살아 있다는 느낌도 들었 다. 그것이 비록 살아있구나! 라는 벅찬 감동이 아닌, 고통스러 울 정도로 빨라져 있는 심장 박동과 토해져 나오는 뜨거운 숨으로 인해 싫어도 물리적으로 감지하게 되는 지각( 知 覺 )일 뿐이라 해 도, 센도에겐 자신 역시 이 세상에 포함되어 있는 하나의 생물이 라는 것을 인지하게 해 주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코트에 서 있는 순간만은, 마냥 머물러 있는 자신의 시간이 격렬하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연습이 끝나고 조금씩 하늘이 어두운 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면 가끔 낚싯대를 메고 바닷가로 나갔다. 뜨거운 함성과 열기가 가득 한 코트 위와는 정반대로 파도소리만이 간간이 스치는 고요한 밤의 바다에서, 이미 하늘과의 경계마저 흐릿해진 새카만 물결을 바라
99 보며 미끼조차 달지 않은 가느다란 릴을 드리운다. 끓는 듯 타오 르는 지열뿐만 아니라 귓가에 스미어오는 소리의 경중에 있어서 도, 센도의 낮과 밤은 확실히 분리되어 있었다. 오롯이 포구에 앉 아 물결의 움직임에 맞추어 흔들리고 있는 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온통 숨죽인 듯 가라앉아 있는 밤의 세상보다 오히려 수선스러운 낮의 세상이 환상 같았다. 특별히 불행하지 않다. 그렇다고 행복하지도 않다. 사실,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을 뿐인 것인지도 모른다. 행복 이 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느낌인지 추상적으로는 인식할 수 있어 도 피부에 와 닿는 현실로서는 막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센도는 관계없었다. 사람이란 행복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는 있는 것이다. 센도의 망막에 비치는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비 내리는 날의 유리창을 사이에 둔 것처럼 희뿌옇게 흐려져 있다. 다른 표정 다른 목소리로 다가오고 말을 걸어오지만, 센도에게는 무엇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상대를 하나의 객체로서 구분할 수 있 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촉각으로 느껴져 오는 오늘이 꿈이어 도 좋고 현실이어도 좋다. 어슴푸레하게 혼합되어 있는, 다양한 색들을 지나치게 섞어대 본래의 색을 잃어버리고 온통 회색으로 물 들어버린, 열다섯의 센도는 그런 안개 자욱한 세상을 보고 있었 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웃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자신이 여전히 현실 에 속해 있음에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진절머리가 났다. 가위에 눌리는 갑갑한 공포를 몇 번이고 경험한 뒤에 식은땀에 흠뻑 젖어 잠에서 깨어날 때면, 가장 먼저 저미듯 머릿속으로 떠올라 오는 생각은 악몽에서 벗어난 안도감이 아니라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음에 대한 절절한 고통이었다. 어디서부터 어긋난 것인지 사쿠라기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셨을 때부터인지, 아니면 그 이전 어머 니가 편지 한 장 없이 집을 나갔을 때부터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태어나게 되었을 때부터인지. 처음부터 삶이 이토록 지독한 통증은 아니었다. 세계가 머리 위 로 하나 가득 펼쳐져 있는 것만 같았던 유년시절에는, 내일은 아 직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것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루하루 마냥 까르르 웃으며 활기차게 지낼 수 있었고 아이다운 활달함과 명랑한 생명력으로 금세 터져 나갈 폭죽처럼 부 풀어있었다. 그 때에는 무엇이든지 손에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 고 세상은 흡사 흥미로운 것들로 가득 찬 장난감 상자처럼 보였다. 그러나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세상은 무겁고 어두워졌으며 자신은 차츰 삶의 모퉁이를 도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누군가가 구원 해주기를 강렬하게 바라는 반면 이대로 소리 없이 죽어가기를 염원 하고 있었다. 아침이 찾아오는 것이 지독스러웠고 그럭저럭 세상 에 어울리는 모습을 가장한 채 오늘도 그 안에서 숨 쉬고 있는 자 신을 비웃고 싶었다. 거울을 쳐다보면 매서운 눈매의 낯선 소년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황폐함에 물들어 있는 얼굴로, 빚은 뒤 아 무도 호흡을 불어 넣어주지 않은 진흙인형처럼, 점점 바삭바삭 메 말라가고 있는 것이다.
101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해 겨울, 사쿠라기는 결국 집을 팔았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혹은 문을 닫고 나설 때마다 그 앞에 쓰 러져 있던 흐트러진 머리칼의 아버지의 모습이 고통스럽게 박혀들 어 견딜 수가 없었다. 사쿠라기에게 있어 어린 시절을 보낸 그 곳 을 버린다는 것은 혹시나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던 어머니를 버린다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였다. 하지만 더 이 상은 여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젠 돌아오지 않아도 관계없다고, 사쿠라기의 체념은 거기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새로 얻은 집은 낡은 목조 아파트였다. 좁아서, 공간에 겁먹을 필요가 없다. 벽이 얇기에 때때로 이웃의 목소리가 벽을 타넘어 들어오기도 한다. 사쿠라기는 가끔 부러 벽에 등을 딱 붙이고 길 게 앉아 있었다. 신경을 곤두세워 옆집의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 리, 남녀가 속삭이는 소리, 부스럭거리는 삶의 소리들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들이려고 애썼다. 다른 사람의 소리만으로 안심할 수 없게 되자 이번에는 될 수 있 는 한 큰 초침소리가 나는 시계를 골랐다. 그리고 반드시 시계를 자기 전 머리맡에 두었다. 짤깍짤깍 규칙적으로 울리는 시계소리 는 마치 심장소리와 닮아있었다. 지겨워. 센도는 이미 이름조차 잊은, 잠들어 있는 그녀 곁에서 몸을 일 으키며 생각했다. 몸을 섞는다는 것에 대해서 특별한 의미를 두어 본 적은 없다. 풀고 싶다고 생각할 때에 마침 누군가가 다가와 주 면 잠자리를 함께 한다. 그런 까닭에 센도의 파트너는 지속적이지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않았고 약간의 결벽증이 있는 센도는 이런 무의미한 섹스는 슬슬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차피 상대에 대해 별다른 느낌이 없다면 피부를 마주 댄다 해도 실상 자위행위와 다를 바 없 다. 오히려 하룻밤 이후에 끈질기게 걸려오는 여자들로부터의 전 화나 주변에서의 질책하는 시선들 때문에 더욱 귀찮아질 따름이었 다. 꼭 섹스를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소녀의 꽃잎 같은 분홍빛 입술이나 여인의 봉긋한 가슴을 보면서도 정욕을 느껴 본 적이 없는 센도에게 밤놀이를 끊는다는 것은 딱히 힘든 일이 아 니었다. 어차피 따스한 타인의 신체를 아무리 끌어안아도 자신의 본질적 인 부분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은 자각한 지 오래다. 상대의 체 온이 섞여 들어와 센도마저 따스해지는 것이 아니라, 닿아오는 온 기에 의해 자신은 차갑게 식어있다는 사실만 더욱 극명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 괴리가 괴롭다면 더욱 더 누군가의 열에 기대고 도 싶어지겠지만, 센도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굳어있는 심장 따위 는 이래저래 좋은 일이었다. 아직 해도 뜨지 않았지만 센도는 샤워를 하고 테이블 위에 숙박 비를 얹은 후 자신의 소지품만을 챙긴 채 모텔을 빠져 나왔다. 먼 동이 트이기 직전의 기묘한 잿빛의 새벽거리는 알록달록하고 천박 한 네온사인들로 가득했다. 좁다란 골목들 사이로 바다가 보이고, 바다는 끄트머리에 걸린 거대한 주홍빛 행성 덕분에 조금씩 황금색 으로 물들고 있었다. 흔들리는 바다는 밤새 어둑하게 가라앉아 있 다가 태양의 빛을 가득 빨아들여 물결 위로 연지를 칠한다. 팔을 내밀듯 길게 뻗어오는 햇살이 눈가에 닿아 센도는 살짝 미 간을 찌푸렸다. 먼지처럼 부수어지며 스며들어오는 햇살 때문에
103 남루한 거리가 조금씩 빛에 먹혀 들어간다. 반짝이는 햇살 탓에 마치 이 거리에도 희망이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시선을 바다에서 돌려내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아침 점호 이전 에 기숙사로 숨어 들어갈 수 없을지도 몰랐다. 룸메이트인 코시노의 잔소리가 떠올라 잠깐 어깨를 움츠린 센도 는, 타박타박 전철역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제 때에 맞추어 도착하려면, 첫 차를 타지 않으면 안 된다. 에리는 가끔 어머니를 생각나게 했다. 자신보다 덩치가 배는 큰 사쿠라기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아이 취급을 한다. 그리고 늘 이건 비밀이야. 라고 속삭이는 듯 한 낯간지러운 어투로 사쿠라기에게 들려주곤 했다. 나는 꼭 이 곳에서 벗어나고 말 거야. 그녀가 말했던 이곳이 협소한 그녀의 고향 자체를 말하는 건지, 아니면 그녀를 붙들어 매고 있는 현실 자체를 뜻하는 건지 사쿠라 기는 때로 궁금했다. 하지만 한 번도 소리 내어 물은 적은 없었 다. 속박되어 있는 장소가 어디이든, 그녀가 말하는 벗어난다. 는 의미만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듯했기 때문이다. 사쿠라기도 벗어나고 싶었다. 아버지를 끝내 돌아가시게 했다는 죄책감에서, 낳은 사람에게서 버려졌다는 절망감에서, 행복하지 않은데도 계속 살아있는 스스로에게서 쭉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하 고 있었다. 전에는 걸려오는 시비를 받아주는 정도였지만 최근에 는 먼저 시비를 거는 경우가 늘어났다. 멋대로 싸우다 언젠가 망 가져 버리면, 비록 엉망진창으로 가리가리 찢어진 이후에라도 무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언가 새로운 자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했다. 온통 피로 치덕치덕 해 지면, 눈물조차 흐르지 않을 정도로 모든 걸 소진해 버리면, 이제 그만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지 않을까 했다. 그러나 그런 건 꿈이었다. 사쿠라기가 가장 사과하고 싶은 사람은 이미 세상에 없다. 가장 받아들여졌음 싶은 사람이 남긴 것은 버려졌다는 고통과 극한의 고 독뿐이다. 아무리 도망치고 세상을 부수고 스스로의 심장에 상처 를 내도, 다음 날 눈을 뜨면 정확히 똑같은 제 자리로 돌아와 있 다. 처음부터 극복이란, 도망친 그 자리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사쿠라기가 복원시키고 싶은 시절은 아무리 돌아가고 싶어도 회귀할 수 없는 과거의 순간이었다. 인간에게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 따위는 없다. 죽은 사 람을 살아 돌아오게 할 수도 없고, 심지어 사랑 받고 싶은 사람에 게 반드시 사랑 받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데, 그것조차 뜻대로 되지가 않는다. 조금씩, 아직은 깨달을 수 없는 몸 어느 구석에서부턴가 썩어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바라도 구원은 없는 거라고, 사쿠라기의 언제까지고 달아오르지 않는 체온에 지쳐 떠나가는 에 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단념했다. 꿈은 꿈일 뿐, 현실과는 절대 연계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꿈을 꾸지 않으면 된다. 처음부터 두 손에 쥐지 않으면 손가락 틈새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스친 자국만을 남긴 채 잃게 되는 일도 없 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한 번 마음을 먹자 그 다음부터는 쉬웠다. 적당히 호쾌하고 적 당히 불량하게 뒤집어쓴 가면 속에서, 급속도로 심장은 얼어붙어
105 간다. 활발하게 웃으며, 진심이 아닌 이야기를 건네며, 아무 걱정 없는 듯 단순하게 세상을 사는 일은 간단했다. 적어도, 소리 없이 무너지는 심장을 끌어안으며 혼자라는 공포와 절망에 몸부림치는 것보다는 훨씬 더 편안했다. 잠시 모르는 척 하고 있는 것뿐이라 해도, 돌아다보면 자신의 발끝부터 슬픔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 져 있어도, 그림자란 해가 지면 묻혀버리는 것이다. 사쿠라기는 이미 밤을 건너고 있었다. 센도에게 있어 하루라는 것은 술 안의 술, 물속의 물 같았다. 무엇이 섞여 들어와도 그 이물질은 어느새 센도의 피와 동질로 화 해 센도의 가슴에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고 인식조차 없이 잦아 들어간다. 그런데 문득문득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힘차게 마음을 할퀴어 오는 순간이 생겼다. 그 통증의 원인은 무료함일 때도 있 고 허무함일 때도 있다. 마치 숨을 쉬지 않는 것처럼 흔들흔들 살 고 있는데 가끔 삶 자체에 대한 회의와 고독이 격렬하게 짓쳐들어 와 심장 부근에 뻐근한 동통을 안겨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렵부터 조금씩 모든 것이 식상해져갔다. 코트 위에 서조차 센도와 마주 설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료난에서의 1년은 나름대로 충실했다. 천재라 일컬어질 정도인 센도의 독보적인 농구 실력은 료난을 현 내 4강의 자리에 올려놓 았다. 타오카 감독은 센도에게 기쁜 기색을 감추지 않았고 선배로 부터도 동료로부터도 선망 어린 존경의 시선을 받았다. 하지만 센 도 자신은 스스로 성취해 낸 것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 었다. 달리는 것만을 목표로 해서 한계까지 신체를 혹사시킬 수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있었던 코트 위가 조금씩 지루해졌다. 힘껏 경기한 후의 벅찬 호 흡도, 달아오른 심장도, 근육의 통증도, 살아있다는 증거가 되기 에 부족해졌다. 센도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이 더욱 더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굳이 부수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계 속 이 석화( 石 化 )가 진행되면 자신은 어떻게 될까 하는 순수한 호 기심을 느꼈을 뿐이다. 그리고 쇼호쿠와의 연습 시합이 정해진 것 은 그 무렵이었다. 시합 당일은 별로 늦잠을 자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날따라 몸이 무거워 조금 뒤척이다보니 늦은 것이다. 어깨를 한 번 으쓱 하긴 했지만, 이미 늦은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도 기다리고 있 을 동료들과 한껏 열이 올라 있을 감독을 생각해 서둘러 샤워를 하 고 부랴부랴 교복을 챙겨 입고 기숙사에서 학교까지의 가파른 오르 막길을 달려 올랐다. 등 뒤에서는 하늘 가장자리까지 솟아난 해가 바다위로 은빛 가루를 뿌리고 있었다. 송골송골 이마에 땀이 맺히 기 시작했다. 덜커덩 소리를 내며 전철이 지나간다. 잠시 건널목 에서 숨을 내쉬었다. 언덕 위의 흰색 교사가 슬며시 보이기 시작 한다. 센도는 숨을 한 번 크게 내 쉬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뛰고 있기 때문인지 유달리 가슴이 두근거렸다. 늦잠 잤어요. 머쓱하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센도에게 있어서는 웃음 띤 얼굴 이 나름대로의 사과의 제스처다. 원래 시간관념이 뚜렷하지 않은 센도기 때문인지 가당치 않은 변명에도 감독은 별다른 소리는 하지 않았다. 내심으로는 시합이 시작되기 전에 와 준 것만으로도 다행
107 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원래부터 센도가 눈매 를 살짝 늘어뜨리며 싱긋 웃는 웃음에 분노로 대항할 수 있는 사람 이란 전무하다. 사심 없는 무방비함에 화를 내려던 사람마저 기운 이 빠져버린다. 센도가 호흡을 고르면서 주위를 둘러보자 순식간에 팀원들이 몰 려들었다. 센도 상. 아이다가 유니폼을 내밀었다. 그럼, 가볼까. 코트에 들어서려는 순간, 갑자기 시야가 붉어졌다. 비밀병기 사쿠라기다. 삽시간에 눈앞에 펼쳐진 진홍을 중심으로 색이 번진다고 생각했 다. 수묵으로 그려진 그림에 선명한 수채 물감을 한 방울, 물을 흠뻑 적신 붓으로 떨어뜨린 느낌이었다. 종이 결을 타고 촘촘히 액체가 번져가듯이, 모세혈관 속으로 피가 돌고 돌듯이, 센도의 온 몸으로 사쿠라기의 존재가 흐른다. 센도, 너는 내가 쓰러뜨린다! 적막하기 그지없었던 귓가로 갑자기 광풍이 몰아닥치는 느낌이 들었다. 쿵쿵쿵쿵. 한동안 눈을 깜박이고 있던 센도는 어디선 가 들려오는 저 커다랗고 무게 있는 울림이 다름 아닌 자신의 심장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잘 부탁해. 습관처럼 웃음 지으며, 이 사람에게는 조금 다른 웃음을 지어 보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센도는 생각했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결벽과 굴절이 부수어지기 이전( 以 前 ), 새벽을 알기 이전( 以 前 )의 노을, 센도와 사쿠라기의 첫 만남이었다.
109 세상은, 졸리다. 봄이 한창일 무렵 따스한 햇살이 드는 옥상은, 한층 더 졸리다. 이 녀석이 감히 누구한테!!!! 부유물이 잔뜩 떠 있는 어항처럼 흐릿한 물속에서 갑자기 불길 이 확 일어나는 것 같았다. 자신의 잠을 깨웠던 녀석들과는 확연 히 다른, 온통 뜨거운 색( 色 )으로 도배해 놓은 것 같은 강렬한 인 상의 남자가 눈앞에서 루카와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다. 몇 번 이고 박치기를 해 오는 통에 맞고 있기만은 억울해 자신도 주먹을 돌려주긴 했지만, 손끝에 전해져오는 느낌이 무언가 달랐다. 무턱 대고 주먹을 휘둘러 온 상대에 대해 아프다거나 화가 난다기보다 뭘까, 하는 호기심이 들었다. 직선적으로 감정을 숨기지 않고 부 딪혀오는 옅은 색소의 눈동자와, 그가 움직일 때마다 눈앞에서 어 른거리는 선홍색의 머리칼, 두드리듯 건네져오는 거친 말투와 까 닭 없는 시비, 하지만 뚜렷했다. 찰나의 순간에 망막에 그의 모 습이 너무나 선연하게 각인되어 버렸을 정도로, 눈앞의 남자는 선 명한 태양 빛으로 존재감을 주장하고 있었다. 루카와와 사쿠라기의 첫 만남은 피가 철철 흐르는 대 난투였다. 지금은, 아마 그 때 무시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 한다. 세상 속의 다른 사람들을 대하듯 얼굴 같은 것은 금세 잊어 버리고, 사쿠라기 하나미치라는 이름 따위 쓰지 않는 뇌 세포 어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딘가에 고이 묻어두었으면 좋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바 람일 뿐, 자신이 그를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루카 와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사쿠라기와 함께 있으 면 졸리지 않은 것이다. 지금까지 루카와의 에너지라는 것은 모두 농구에만 쏟아져왔고 다른 일 따위는 아무래도 관계없었다. 농구에 모든 여력을 들이붓 고 가외의 시간은 대부분 잠으로 보낸다. 십 오세 팔팔한 청춘의 인생치고는 지나치게 무료하지 않은가 생각하지만 달리 흥미를 끄 는 무언가가 없었다. 그런데 사쿠라기만은 달랐다. 농구부에서 그 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는 왠지 모를 안도감마저 들었다. 다짜고 짜 싸움부터 걸어왔던 그 덩치 큰 다혈질의 붉은 머리 녀석은 생전 처음으로 루카와에게 존재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했다. 그 궁금증 이 호의에서 우러나온 것이든 그렇지 않든, 타인에 대해 루카와가 어떤 감상을 갖게 된 것 자체가 생소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좋을 대다수의 사람 가운데, 아무래도 좋지 않은 단 한 사람이 생긴 것 이다. 어쩌면 그래서 계속 바라보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잘 웃 고 잘 떠들고 말보다 주먹이 빠르며 사사건건 자신을 노려보고 일 거수일투족에 흠을 달아 도발해 오는 그 녀석을. 하지만 그에게 시선을 두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었다. 그 정도로 소란스럽고 외견이 눈에 띄는 남자라면 어디에서라도 누구에게라 도 이목을 끌게 된다. 그래서 루카와는 자연스레 그에게 향하고 마는 자신의 시선을 특별히 여기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 선연 한 색채에 머물게 되는 눈길도 그저 아무런 의미 없는 호기심일 뿐
111 이라고 간주했다. 굳이 특별한 의미 운운하지 않아도, 자신이 무 언가에 호기심을 갖게 된 것 자체가 극히 드문 일이라는 사실을 간 과하려 애썼다. 자석의 N극과 S극이 이끌리듯 무의식중에 서로 시 선이 마주칠 때마다 치솟아 올랐다 곤두박질치는 심장의 박동을 무 시하면서, 루카와는 도대체 까닭을 모를 사소한 일로도 발끈하며 시비를 걸어오는 사쿠라기를 단순히 귀찮고 시끄러운 녀석이라고 정의 내렸다. 그러나.. 휴식을 잃은 점( 點 )은 선( 線 )이 되는 것이다.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시선을 뗄 수 없는 것으로도 모자라, 사 쿠라기와 함께 있지 않을 때조차도 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다. 마음이 휴식을 잃고 선이 되어 사쿠라기에게로 이어진다. 그 흐름은 마치 기나긴 장마 뒤의 범람하는 강물과 같아서 멈출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머릿속에 끈질기게 달라붙어 마침내는 자 신의 모든 시간을 지배하게 된 사쿠라기의 그림자에 루카와는 난감 해졌다. 하지만 지극히 둔하고 견고한 감성을 가진 그로서는 이 스윙 댄스를 추는 것만 같은 급격한 감정의 변화가 무엇에 기인한 것인지 도무지 깨달을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런 사쿠라기에 대한 자신의 감정의 종류를 루카와가 처음으로 자각하게 된 것은, 료난과의 연습시합이 있는 날이었다. 늘 표정변화라고는 없는 자신의 희멀건 얼굴에 주위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든 그 날은 루카와 나름대로 어느 정도는 긴장하고 있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었다. 무엇보다 고교에 진학해서의 첫 시합이고 더구나 상대는 현 내 4강이다. 상대가 강할수록 이기고 싶다는 마음은 뜨겁게 끓어 오른다. 료난이 강호라는 사실이 루카와는 더욱 만족스러웠다. 드 디어 도착한 료난에서 유니폼 때문에 사쿠라기와 티격태격하면서 도 마음 한 구석으로는 피가 끓어오를 만한 시합을 기대하고 있었 다. 조금쯤은 들뜬 기분이었다고 해도 좋다. 그리고 그 들뜬 기분이 새에게 쪼인 풍선처럼 피시식 식어버린 것은 사쿠라기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센도, 너는 내가 쓰러뜨린다! 웃음조차 나지 않았다. 당최 시합에 나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사쿠라기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드리블의 기초, 패스의 기초, 거기에 더해봤자 성공률이 극히 낮은 레이업슛과 어젯밤 벼 락치기로 배운 리바운드 뿐, 도대체 무엇으로 상대팀의 에이스를 쓰러뜨리겠다는 것일까. 어이가 없어도 보통 없는 것이 아니다. 아니, 사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사쿠라기의 저 말 한마디에 눈 에 독기가 오를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오르는 루카와 자신이다. 저 쓰러뜨린다. 는 말은 늘 사쿠라기가 자신에게 소리치며 들 려주었던 말이다. 분노와 선망을 담아서 맹렬히 타오르는 맑은 눈 으로 루카와만을 또렷하게 응시하며 도전하듯 외치던 말이다. 그 런데 저 멍청이는, 스스로보다 강한 상대 따위 수두룩한 주제에 조금 뛰어난 녀석이 나타나자마자 루카와에게 들려주었던 것과 똑 같은 말을 던져내며 바보처럼 하하하 천재라는 표정으로 웃고 있는 것이다. 루카와는 급속히 기분이 나빠졌다. 속으로 센도는 내가 이겨주고야 말겠다며 이를 갈았다. 루카와가 센도를 이기기만 하 면, 사쿠라기는 다시 루카와를 향한 투지를 불태울 것이다. 지금
113 은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는 저 눈을, 루카와에게만 고정시켜 줄 것이다. 안 그래도 날카로운 눈매를 더욱 사납게 치켜 올리고 코트로 들 어서며, 루카와는 사쿠라기가 자신에게만 몰두했으면 좋겠다는 마 음이 질투에 다름 아니며 그 원인은 사쿠라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존재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고 말았다. 충격은 없었다. 단지 심장 위로 기다란 바늘이 꽂혀드는 것 같았다. 첫사랑의 자각은 불에 달군 예리하고 뜨거운 칼날처럼 명치를 직각으로 뚫으 며 거세게 박혀 들어왔다. 갑작스레 세계 전체가 거꾸로 회전해 서, 조금 전까지 발을 디디고 서 있던 곳에 머리를 대고 물구나무 를 서게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세상이 갑자기 만화경처럼 변했 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자신의 인생에 사쿠라기 하나미치라는 남 자가 걸어들어 온 순간 운명처럼 정해진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원래 루카와의 마음이라는 것은 흐르는 강물이라기보다는 흙으 로 둘러싸여 있는 저수지에 가까웠다. 그 어떤 일에도 휘돌아나가 는 일 없이 항상 고여 있었다. 하지만 사쿠라기는 첫 만남부터 강 렬한 파문을 일으켜 왔다. 어쩌면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을 뿐 처 음부터 자신의 마음은 이런 식으로 그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처음이고, 아마도 마지막일거라고 루카와는 선선히 사쿠라기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애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시합은, 졌다. 분패라고 하면 분패고 석패라고 하면 석패지만 이미 끝난 시합 에는 미련이 없다. 오히려 루카와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료난과 의 연습시합이 뚜렷하게 가르쳐주었다. 사쿠라기를 붙들고 싶으면 누구보다 강해지면 된다. 사쿠라기에게도, 강해질 것을 요구하면 된다. 그러면 그 녀석은 투명한 눈동자를 짙게 물들이며 쏘아보듯 당당한 눈매로 도전해 올 것이다. 초심자인 주제에 루카와조차 깜 짝 놀랄 정도의 플레이로 숨 쉴 틈마저 없이 쫓아올 것이다. 친구를 사귀어 본 적은 없다. 하물며 연인이라면 더욱 더 거리 가 멀다. 루카와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면에 있어서는 너무하다 싶 을 정도로 서툴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타인이 란 존재를 필요로 해 본 적이 없었다. 선뜻 손을 내밀 수 없는 안 타까움은 켜켜이 쌓여가고, 센도를 바라보는 사쿠라기의 표정을 직시할 때마다 마음은 한없이 초조해졌다. 창이라고는 하나도 없 는 방 안에 갇힌 바람처럼, 감정의 분출구만을 찾아 계속해서 헤 매고 있다. 하지만 루카와는 강해질 것이다. 강해지고 싶다, 라는 것은 굳이 사쿠라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언 제나 루카와가 좇고 있는 목표였다. 이젠 그 목표에 더욱더 정진 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더해진 것이다. 강해지고, 강해지고 또 강해진다. 사쿠라기가 한눈팔 틈조차 없이, 언제나 자신의 등을 보며 달음박질하게 될 정도로 강해진다. 매일 매일의 부활에서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사쿠라기의 똑바른 시선도 다시 자신을 향해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뼈아픈 오산이었는지 루카와
115 가 깨닫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 달 정도가 흐른 후의 일요일이었 다. 처음에는 무엇을 보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농구 연습 정도라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러나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그 정도의 것이 아니었 다. 센도의 손이 사쿠라기의 땀에 젖어 더욱 붉어진 머리칼을 잡아 당기고, 사쿠라기의 고개가 자연스레 센도의 얼굴 쪽으로 기울어 진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는다. 오랜 시간을 들여 서로를 핥 고, 떨어진다. 그제야 루카와는 지난 연습 시합 내내 사쿠라기를 도발하는 듯 했던 센도의 태도를 기억해냈다. 센도를 향한 사쿠라기의 시선만 이 몹시 신경 쓰여서, 막상 사쿠라기에게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던 센도의 시선을 간과한 자신이 어리석었다. 눈물이 나진 않았지만 온 몸의 세포가 산산이 부수어져 흩어지는 냥 아팠다. 날카로운 송곳이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일직선으로 뚫고 지나가는 것 같았 다. 저도 모르게 꽉 깨물었던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조금 더 욕 심을 내고 보다 적극적으로 부딪쳐 가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사쿠라기는 오랜 시간을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가질 수 있는 상대 가 아니었다. 강제해서라도 마음을 받아들이게 했으면 좋았다. 억 지로라도 인연을 묶었으면 좋았다. 후회가 사무쳤지만, 그렇다 해서 입을 맞추고 있던 센도와 사쿠 라기의 모습이 허상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루카와는 두 번 다시 그 공원으로 농구를 하러 가지 않았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언제부턴가 자신에게 향하곤 하는 사쿠라기의 모호한 시선을 깨 달으면서, 루카와는 사쿠라기가 자신의 연정을 어렴풋이 눈치 채 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굳이 아닌 척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사쿠라기의 입에서 센도의 이름이 흘러나오는 순 간 울컥해서 있는 그대로의 절박한 마음을 드러내 보였다. 그런데 고작 돌아오는 것은 진심이 아닌 어물쩍 넘어가려는 태도다. 그것 이 싫어 왜 센도냐고 직설적으로 물었더니 가슴에 칼을 박는 대답 을 한다. 센도는, 요헤이를 미워하지 않아. 마음이 유리처럼 깨어진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미워하는 것이 무슨 잘못인가 생각했다. 미토는 루카와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사쿠라기의 곁에 있었다. 미토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쿠라기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아무 렇지도 않게 사쿠라기의 가장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금세라도 넘쳐흐를 듯한 과도한 애정을 담아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 이 마치 작은 새를 지켜보는 양 사쿠라기를 바라다본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나는 피를 토할 정 도로 다가가고 싶은 사람에게 해가 뜨면 아침이 오는 것처럼 당연 하다는 태도로 달라붙어 있는 사람을, 왜 미워하면 안 된다는 것 일까. 이 막다른 질투가 사라질 정도로 언제 사쿠라기가 자신에게 애정의 편린이라도 나누어 준 적이 있단 말인가. 센도와 사쿠라기의 관계를 알게 된 후 언젠가 옥상에서 마주쳤 던 미토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일이 아무렇 지도 않느냐고.
117 그 때 미토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나는 내가 하나미치와 어떤 관계든 상관없어. 그가 남자라는 것을 인식하기 전에 이미 반했으니까. 무슨 형태로든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좋아. 사쿠라기 가 내게 친구를 바라고 있다면 나는 생애 최고의 친구가 되어 줄 뿐이야. 담담한 그 고백에 미토를 향한 증오는 오히려 깊어졌다. 루카와 는 도저히 친구로 돌아설 수 없는데 미토는 그것을 해내고 태연한 얼굴로 사쿠라기의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다. 센도와는 달리 루카와는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미토뿐 아니 라 센도도 밉고 사쿠라기도 밉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마음에 담 지 않고 잘만 살아왔으면서, 이제 와서 저런 무정한 녀석에게 집 착하게 되어버린 자신도 밉다. 하지만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길들여지고 싶어 길들여지고 길들이고 싶어 길들이는 것이 아니다. 호흡을 하듯 봄이 오면 꽃이 피듯 밤이면 별이 뜨듯 이미 그렇게 사쿠라기를 좋아하게 되어 버렸다. 사쿠라기를 원하는 마음은 그 야말로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려서, 그 마음을 떼어내면 루카와는 이제 루카와가 아니다. 저 활발한 생명력을 가두고 싶다. 눈을 감지 않으면 멀어버릴 듯 눈부시게 빛나는 저 남자를 가지고 싶다. 그러나 사쿠라기와 루카와 사이에는 아주 두터운, 하지만 너무 나 투명해서 도저히 환상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잔혹한 유리벽 이 가로질러 있었다. 눈가에서 선명하게 어른거리지만 잡으려 손 을 내밀면 닿는 것은 차가운 유리의 감촉뿐이다. 사방의 막에 갇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혀서 루카와는 어쩔 수도 없이 사쿠라기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그저 시간만이 달음질친다. 세월은 어느 시인의 노래와 같이 활처럼 흘렀다. 1) 그러나 이 마음은 흐르는 세월 속에 도무지 묻히질 않는다. 찰 나면 사라지는 섬광과도 같은 것이 아니다. 잠시 어두워져도 아침 이면 또 다시 세상을 밝게 비추는 태양 빛처럼 유구( 悠 久 )한 것이 다. 늘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어제 연습 후 우연히 세면장에서 마주친 사쿠라기의 어깨 뒤 쪽 견갑골 부근에는, 울혈이 인 붉은 자국이 있었다. 저도 모르게 그 자국 위로 손이 가려는 것을 루카와는 있는 힘을 다해 억눌러야 했 다. 가끔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좋아한다. 너무 좋아한다. 죽을 만큼 좋아한다. 하지만 아마 센도도, 그렇게 사쿠라기를 좋아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사쿠라기도, 그렇게 센도를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째서 감정이란 이렇게 실타래처럼 엉켜 버리는 것일까. 루카와에게 가장 익숙한 일대일이 아니다. 더구나 사랑은, 빼앗 는다고 가지게 되는 것도 아니다. 가슴은 점점 혼돈 속으로 잠겨간다. 소리치는 사쿠라기가 좋다. 웃고 있는 사쿠라기가 좋다. 점프하 1) Henry Wadsworth Longfellow(1807-1882): The Arrow And The Song
119 는 사쿠라기가 좋다. 달리고 있는 사쿠라기가 좋다. 자신을 노려 보는 사쿠라기가 좋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이렇게 좋아하는 데, 그에게 닿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다. 어떻게 자 신 말고 다른 사람이 사쿠라기를 좋아할 수 있는지 납득할 수가 없 다. 될 수만 있다면, 언제까지고 사쿠라기를 쇼호쿠에 묶어두고 싶다. 함께 달리고 있는 지금에 결계를 치고, 자신의 인생은 평생 이 순간만을 되풀이해도 좋다. 하지만, 세월은 활처럼 흐른다. 나올 테면 나와라. 그 순간에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절실하게 예감하고 있다. 앞으로도 수많은 시합을 겪게 되겠지 만, 지금과 같은 시합은 두 번 다시 없다. 이렇게 금세라도 쓰러 질 듯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고 격렬하게 타오르며 승패보다 승부에 집착할 수 있는 시합은, 사쿠라기와 함께 모든 걸 떠나서 농구를 통해 교감할 수 있는 시합은, 틀림없이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운이 좋아 또 한 번 이렇게 자신을 온통 바칠 수 있는 경기를 하게 된다 하더라도, 녀석의 말처럼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우리의 영광 의 시대다. 누군가 지금까지 왜 살아왔느냐 고 묻는다면,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살아왔다 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순 간인 것이다. 그래서, 사쿠라기의 신체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 만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몸이 지쳐갈수록 정신은 또렷해진다. 코너에 몰릴수록 이기고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싶다는 욕심은 강렬해진다. 아무리 막히고 밀쳐져도 속에서 끓어 오르는 승리에 대한 집착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이미 이 시합은 전투에 가깝다. 자신이 사쿠라기와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인 코트 위에서, 이런 깊은 전율 속에서, 함께 승리하고 싶다는 욕 심이 너무나 컸다. 이건, 그 누구도 사쿠라기에게 줄 수 없는 것 이다. 미토도, 센도조차도 줄 수 없다. 오직 자신만이 그에게서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격정인 것이다. 루카와만이 그를 코트로 주저 없이 이끌어 낼 수 있다. 부상이 어떻단 말인가. 저 녀석은 사쿠라기다. 잘난 듯 천재라 고 떠들고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고 아이언 바디라고 멍청한 소리 만 지껄이는 사쿠라기 하나미치다. 그래. 사쿠라기 하나미치다. 승리하는 순간, 격렬하게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손끝에 전해져 온 뜨거운 감촉은, 평생 잊지 못할 정도로, 그 느낌 하나로 어디 까지라도 달려 나갈 수 있을 정도로 장렬했다. 그와 함께 달리고 농구하고 승리한 것은, 루카와 자신이었다. 행복이 어떤 것인지, 저 밑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환희를 느끼며 루카와는 생애 처음으로 절실하게 실감할 수 있었다. 짝사랑이란 대부분 이루어진 사랑보다 불행하지만 드물게 그보 다 더욱 행복한 순간도 틀림없이 있는 것이다. 대표 팀 합숙이 끝나자마자 사쿠라기가 있는 재활원으로 달려갔 다. 대표 팀 유니폼을 그대로 입고 온 자신을 보고 사쿠라기는 성 격 나쁜 녀석이라며 손가락질했지만, 이제 와서 이 성격을 바꿀
121 수는 없다. 다정한 말 한 마디보다 잘난 척 한 번 해 보여주는 것 이 저 단순한 녀석에게는 도움이 된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부활이 오전 중으로 당겨지면서, 오후에는 늘 사쿠라기를 찾아갔다. 사쿠라기는 루카와가 찾아갈 때마다 반 가운 건지 부담스러운 건지 잘 알 수 없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지만 루카와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좋아하지 않을 수 없 다면, 마음껏 좋아하면 되는 것이다. 가끔 자신을 밀쳐내려는 사 쿠라기의 태도가 눈에 띌 정도로 분명해질 때면 상처를 입곤 했지 만, 자신은 아직 단 한 번도 입 밖에 내어 너를 좋아해. 라고 직 접적으로 고백한 적은 없다. 차라리 루카와가 분명하게 고백을 해 와서, 그 마음을 깨끗하게 거절했으면 좋겠다고 사쿠라기가 생각 하고 있다는 것을 루카와는 알고 있었다. 저 멍청이는 그런 녀석 이다. 불분명하지 않은 감정의 모호한 상태에 꽤 스트레스를 받는 다. 하지만 루카와는 사쿠라기의 마음의 안도를 위해 고백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전하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그대로지만, 지 금 서 있는 이 자리조차 잃을 일은 없다. 고백을 한다면 그것은 시 작이 아니라 끝이 될 것이다. 아직 자신에게는 2년의 시간이 더 있다. 그 유예만큼 차곡차곡 함께 있는 순간을 쌓아나가면 된다. 바로 옆에서 달리고 팀을 이끌어 가면서, 사쿠라기에게 자신과 어 깨를 나란히 하고 한껏 질주할 수 있는 길을 인식시키는 것이다. 고백은 최후의 최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 여의치 않다면 평생 하지 않아도 관계는 없다. 어차피 전해져도 전해지지 않아도, 거절당해도 받아들여져도, 사쿠라기 하나미치 를 루카와 카에데가 좋아한다는 사실만은 절대불변의 진리이기 때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문이다. 에두르지 않아도 사쿠라기는 이미 알고 있다. 굳이 입 밖 으로 끌어내어 상처를 늘릴 필요는 없다. 비겁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며칠 전 공원에서 만난 센도에게 자기본위라고 경멸을 돌려주었 던 것처럼, 자신의 이 마음도 다분히 자기본위의 이기적 애정일지 도 모른다. 단지 애정의 방향이 타인일 뿐, 타협을 할지언정 무슨 짓을 해서라도 잃을 수는 없다는 스스로의 욕심에 충실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생 처음 누군가를 끌어안고 싶다고 생각했다. 닿으면 손가락이 물드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붉은 머리칼 을 흩트리고, 육식동물처럼 사나운 눈매를 사랑스럽게 애무하고, 아이 같은 고집스런 입술에 정신없이 키스하고, 탄탄한 몸이 격정 에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깊숙한 곳까지 파고 들어가고 싶다. 이제는 집착인지 애정인지도 불분명하다. 닿을 수 없는 상대를 너무나 갈구한 나머지 애정이 지나쳐 강박에 이르렀는지도 모른 다. 매일 사쿠라기를 생각하는 것도 이제는 습관에 지나지 않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루카와는 인내하고 있다. 욕심을 부려 강요하려면 강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쿠라기는 진심에 약하고 상처에 민감하 다. 하지만 그런 면을 굳이 파고들지 않으려는 자신이 자랑스럽 다.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사쿠라기를, 여전히 애틋하게 마음에 품고 변함없이 좋아할 수 있는 스스로의 마음에 감탄한다. 애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쿠라기는 있는 그대로의 루카와를 보
123 아 주고 있다. 조금 불편한 시선이지만 그래도 외면하지 않고 똑 바로 쳐다봐 준다. 설령 고백을 한다 하더라도, 단호하게 거절할 지언정 루카와의 마음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루카와는 사쿠라기의 그런 면이 좋아서 참을 수가 없다. 사랑 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도 증명해주지 않는다. 넘쳐흐르는 마음에는 경계가 없다. 어디서부터가 애정이고 어디 까지가 호감인 걸까. 왜 자신은 낯설기만 한 이 감정이, 최초의 다가가고 싶은 타인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상처투성이일 것 이 틀림없는 애정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걸까. 얻을 수 없다는 사 실이 이토록 잔인하게 눈에 보이는데도. 고민의 끝, 문득 시선을 들어 사쿠라기를 바라보면 까닭은 분명 해진다. 바로 저기 서 있는데 다가가 손을 잡을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 다. 그의 손길이 스치고 그의 웃음이 머무는 모든 사람들에게 질 투해버리는 자신을 깨닫는다. 사쿠라기의 시선이 닿는 곳 어디에 라도 존재하고 싶다. 좁다란 상자 안에 그를 가두고 상자 밖의 세상에는 루카와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식시키고 싶다. 하지만, 할 수가 없다. 심지 어는 흐르다 못해 몸 밖으로 뚝뚝 범람해버리는 이 마음을 고백조 차 할 수 없다. 눈동자가 머무는 곳 어디에든 사쿠라기의 잔영이 보인다. 언제까지 이 북받쳐 오르는 마음을 억누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지만, 어차피 앞날이란 언제나 불투명한 것이다. 사쿠라기를 향한 자신의 마음만이 확실하다면, 그 마음을 잃지 않는 방향으로 전진해 가면 된다. 좋아하게 되어버렸다면 그 감정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 자신은 미동도 하지 않았던 15년간의 굳어있던 심장을 버리고, 사랑으로 불안하게 파들거리는 피가 흐르는 심장을 가지게 되었 다. 아파도, 통증조차도 사랑스럽다. 상처가 폐부를 깊숙이 찔러 오는 순간, 살아있음을 더욱 간절하게 느낄 수 있다. 지금은 아직, 사랑하고 있는 자신만으로 견딜 수 있다.
As Time Goes by side A : Akira Sendoh side B : Hanamichi Sakuragi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나는 그 해 여름 마지막 바람이었고 너는 가을을 향해 가는 숲이었다. 나는 여전히 네 푸른 잎가에 스치기를 소망했으나 너 또한 네 신록을 잃기를 원한 건 아니었으나 밀려오는 가을에 너도 나도 가슴 가득 그리움만을 끌어안은 채 안타까운 이별을 고해야했다. As Time Goes by :: Akira Sendoh 추억이란 모래밭을 쓰다듬는 잔물결과도 같다. 물결은 발치까지 밀려와 발목을 은근히 감싸 안으면서도 몸을 숙이면 이미 성큼 달아나 파도 속으로 숨어 버리고, 추억은 기억 언저리까지 밀려와 살짝 마음을 어루만지면서도 향수에 젖을라치 면 언제 그랬냐는 듯 멀어져 간다. 지난 시절의 일들이라는 것은, 현실에 매몰되어 잊게 될 즈음이면 저 먼 곳에서 어렴풋이 흔들리 며 자신의 존재를 상기시키지만 결코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만은 허락하지 않는 무정한 것이다. 내 안에서는 세월 속에 무수히 파묻혀 버린 나날들 중에서도 고 등학교 때의 일들이 가장 진하게 물결치고 있다. 물론 십 년이 훌쩍 지나버린 지금에서는 그야말로 추억이라고
As Time Goes by 127 밖에 부를 수 없는 시간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때는 마치 영원할 것만 같았던 순간들은, 이제 와서는 끌어안는 것도 되풀이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바싹 마른 건조함으로 뜨겁게 달아올라 온 통 안타까운 사막의 열정으로 버석거렸던 소년기는 이제는 생생하 게 떠올리는 것조차 힘들게 되었다. 그 무렵의 애절함이라는 것은 마치 앨범에 켜켜이 꽂혀있는 빛바랜 사진들과도 같아서, 틀림없 이 존재했던 시절이란 것을 알고는 있어도 손안에 뚜렷한 실체를 쥘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마음을 지나간 시절에 두고 왔다 하 더라도, 그 때 그 순간의 기억과 열정은 순간 밀려왔다 금세 사라 지는 파도의 변덕일 뿐 현재에 살고 있는 내 심장은 더 이상 추억 만으로 두근거릴 능력을 잃어 버렸다. 단지 잊어도 좋을, 그래. 그랬던 적도 있었지, 라며 은은하게 잠겨들어도 좋을 어린 시절의 한 자락일 뿐이라면 향수만으로 충분 할지 모른다. 하지만 추억은 찰나에 멈추어 있어도, 한 때 사랑의 기쁨으로 극한의 행복을 맛보고 이내 무한의 고통 속으로 내팽개쳐 졌던 내 영혼은 지금까지도 그 시점에 머물러 꾸준히 시달리고 있 다는 점이 문제다. 과거는 되돌아갈 수 없는 자리에서 머물러 있 는데 시간과 함께 자라온 내 마음만은 여전히 소년 시절의 달뜬 통 증에 침몰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까닭은 틀림없이 그 때문이다. 사쿠라기. 간혹 그의 이름을 부르며 잠에서 깨어나기도 한다. 꿈결에 외친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소리가 되어 공기 중으로 울려나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독한 밤, 땀에 흠뻑 젖어 침대에서 일어나 어두운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한 구석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나를 감싸 안고 있는 대기 하 나 하나의 원자에 그토록 목메어 부른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 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 느낌은 나를 정신이 까마득해 질 정도 의 도취에 빠져들게 하면서도 부스스 부서지고 말 십일월 끝 무렵 의 포도( 鋪 道 ) 위 낙엽처럼 애처로운 면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사랑에 마비되어 있는 일종의 환각 상태와도 같아서 한없이 나를 괴롭힘과 동시에 또 한 번 사쿠라기에 대한 열로 달아오르게 했다. 그리고 한 순간이라도 내 눈가에서 가장 빛났던 그에게로 생각 이 이어지게 되면, 나는 때늦은 상실감에 온 몸이 저려와 도저히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만큼 사랑 받고 있었다고도 생각한다. 처음으로 손에 쥘 수 있던 사랑은 너무나도 조심스러워서 아무 리 아끼고 보듬어 안아도 모자라기만 했다. 비록 채 어른이 되지 못한 소년들의 풋사랑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사쿠라기와 나에게는 세상에 지지 않을 용기가 있었다. 서로를 품에 안기까지 몇 번이 고 흔들리는 자아를 붙들어 잡아매야 했고, 마침내 함께 얽힌 손 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을 때 우리는 매일매일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내 쪽에서만 흐르고 있던 사랑이 드디 어 사쿠라기를 거쳐 되돌아 흐르게 되자 온 세상이 나에게 활짝 열 려왔고, 마주잡은 서로의 손의 온기를 느끼며 입가에 웃음을 가득 담은 채 우리는 힘껏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문제였을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만으로 가득 차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 온기
As Time Goes by 129 를 나누어 줄 틈이 없었던 것이다. 쏟아져 내리는 감정의 폭포에 취해서 서로의 모든 것을 가지고 싶어 했고 어느 부분도 놓치길 싫 어했다. 단 한 사람에겐 이타적이면서도 모든 면에 걸쳐선 이기적 인 어린 애정에 함몰되어 현실보다 꿈 쪽에 가깝게 서 있었다. 그 순간에는, 눈 안에 상대만을 담기에도 벅차서 조금씩 다가오 고 있었던 가을을 눈치 챌 여력이 없었다. 얼굴을 스치는 뜨거운 한여름의 바람과 세상을 가득 뒤덮은 초록의 나뭇잎들이 영원할 줄 로만 알았다. 하지만 어느새 다음 계절은 바로 문 밖까지 다가와 있었다. 첫 키스를 한 것은 모래 먼지가 잔뜩 날리는 운동장에서였다. 그리고 그 때의 사쿠라기와 나는 아직 연인이 아니었다. 막 사랑을 시작한 사춘기의 소년들이 모두 그렇듯이 나는 늘 그 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마치 나의 뇌 세포들은 모두 사쿠라기 이외의 다른 일들은 인식하기를 포기해 버린 듯 했다. 꾸벅 꾸벅 수업시간에 졸면서도 꽃이 피듯 활짝 퍼지는 사쿠라기의 굴곡 없는 웃음을 생각했고 농구 연습을 하면서는 코트 위에서 가장 생동감 있게 빛나는 사쿠라기의 탄력 있는 아름다운 육체를 되새기고 있었 다. 떠오르는 사쿠라기의 모습은 너무나 생생해서 마치 손을 뻗으 면 닿을 듯 해 저도 모르게 허공으로 팔을 내밀어버린 적도 부지기 수다. 옆에서 보면 저 녀석 어딘가 올이 하나 풀려 버린 게 아닐까 걱정할 정도의 느슨한 상태로, 세포 끝에서 끝까지 전부 사쿠라기 가 새겨져버렸던 것이다. 몸부터 마음까지 온통 사쿠라기로 흐물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흐물 해져서 이대로라면 나는 완전히 노골해진 채 사쿠라기에 대한 사랑이라는 수액만 남기고 녹아버리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 였다. 그리고 쇼호쿠와의 연습시합이 정해진 것은 바로 그 무렵의 일 이었다. 생각해보면 그 연습 시합 전까지의 나는 아마 사쿠라기 금단 증 상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전국대회의 현 내 예선 전을 끝으로 자그마치 석 달이 넘는 기간을 그의 얼굴조차 보지 못 하고 지냈던 것이다. 그 사이 쇼호쿠와는 두어 번 연습 시합을 했 었지만 사쿠라기는 재활훈련이 끝나지 않아 늘 모습을 보이지 않았 다. 기대로 들떠 올랐다가 바늘 꽂힌 풍선처럼 사그라지어버리는 것도 수차례, 보고 싶다는 마음만이 점점 강렬해져 그 때 즈음의 나는 이미 어떻게 손을 쓸 수조차 없을 정도로 그리움에 푹 파묻혀 자칫하면 익사할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그 기습 키스가 전적으로 나만의 잘못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사쿠라기 입장에서 보면 뻔뻔하다고 화를 낼 지도 모르 겠지만, 나로서도 기적적인 인내를 발휘해 정말로 참고 또 참고 있었다.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후로 마음 편히 잠들어 본 적은 단 하루도 없었다. 주변에는 처세술 좋고 여자와도 거리낌 없는 사교적인 남자로 통하는 것 같지만, 비춰지는 외양이야 어떻든 간에 그렇게 누군가 를 좋아하게 된 것 자체가 쑥스럽지만 나로서는 정말 처음이었다. 여자는, 있으면 좋다고 생각해왔다. 타인에게 매력적으로 비치
As Time Goes by 131 는 스스로의 외모에 대한 자각도 있었고, 적당한 유희에 대한 어 느 정도의 흥미도 있었다. 다가오는 사람을 마다한 적도 없고 돌 아서 가는 사람을 잡은 적도 없다. 요컨대, 나는 그저 그 자리에 서서 달라붙어 오는 여자가 있으면 재미있게 놀아주고 그 놀이에 지치면 모른 척 하는 가벼운 장난을 되풀이 해 왔던 것이다. 그런 데 어느 한 순간, 스스로 발걸음을 움직여 필사적으로 달려가 움 켜쥐고 싶은 상대가 생겨 버렸다. 사랑은, 일단 시작되자마자 무자비하게 나의 모든 일상을 침식 해갔다. 사막의 모래가 순식간에 증식을 시작해 빌딩으로 빽빽한 도시를 백색으로 덮어버리는 것처럼, 사랑은 지금까지의 내 생활 을 부수고 관념을 뒤엎고 끝내는 영혼의 가장자리까지 침투해왔 다. 너무나도 강렬한 공격에 나는 정말로 어리둥절해져 버려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 싶다고 바라기 이전에 그저 좋아한다는 감정 자체에 정신없이 휩쓸리어 갔다. 그야말로 사쿠라기만으로 이루어 진 바다에 잔뜩 잠겨 머리만을 동동 내놓은 채 표류하고 있는 것과 같았다. 어떻게 다가서야 할까 수도 없는 고민 끝에 사쿠라기의 표리 없 는 성격을 고려해 직선적으로 부딪쳐 가기로 마음먹었지만, 모처 럼 결단한 후에도 혹여 사쿠라기가 혼란스러워할 것이 염려되어서 고백은 전국대회 뒤로 미루었었다. 그런데 그 대회가 끝난 후로도 사쿠라기는 부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코시노나 히코이치 말에 따르면 소식을 전해들은 후 며칠간의 나는 마치 유령 같았다 한다. 스스로는 깨닫지 못했었지만 틀림없이 신경 어딘가가 끊어졌던 모 양이다. 재활훈련 중이고 몇 달의 치료만 마치면 선수로 다시 복 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에 내가 간신히 제 정신을 차리자,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히코이치는 울먹이며 정말로 흐릿해진 센도 선배 뒤로 배경이 비 쳐 보이는 것 같았단 말이에요. 라고 얼토당토않은 소리까지 했었 다. 아무튼 자칫 귀신이 될 뻔했던 나는 사쿠라기의 복귀 소식을 듣 자마자 부랴부랴 쇼호쿠와의 연습 시합을 잡았다. 그리고 견디지 못하고 시합 당일 쇼호쿠가 도착할 시간이 될 즈음 전철역까지 그 들을 마중 나갔다. 플랫폼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그 순간의 설렘은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 날 정도로 간지럽고 또 애틋한 시간 이었다. 마치 봄철의 노란 배추나비가 코끝에서 꽃가루를 날리며 하늘하늘 팔랑이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 나의 것조차 아닌 사람을 기다린다는 일이 그토록 쑥스럽 고 행복할 줄은 사랑을 하기 전의 나는 미처 몰랐었다. 단지, 보 고 싶고 또 보고 싶을 뿐이었다. 온 몸을 엄습해오는 달콤한 통증 에 도무지 진득하니 앉아 있질 못하고 서성이던 내 눈가에 아무리 먼 곳에서도 눈에 확 뜨이는 새빨간 머리칼이 갑자기 튀어 들어왔 다. 짧게 잘랐던 머리는 꽤 많이 자라서 사쿠라기의 곧은 이마위로 보기 좋게 늘어져 있었다. 사쿠라기!!!!! 차마 소리는 되어 나오지 못하는 이름을 간절하게 마음으로 외 쳤다. 심장이 몸속에서 뛰쳐나와 바로 귓가에서 뛰고 있는 것처럼 그 어느 때보다도 쿵쾅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 격렬한 울림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멈춰서 있던 나를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던 쇼호쿠 일행도 마침내 발견했는지 손을 흔들어온다. 앗! 센도, 오랜만이다.
As Time Goes by 133 인사를 건네는 쇼호쿠의 목소리들 속에서, 싹이 발아하듯 톡 튀 어나온 사쿠라기의 원기 있는 목소리에 가슴이 뭉클해져왔다. 울고 싶었다. 하지만 울면 안 된다. 들키지 않게 젖어오는 눈가 를 슥슥 훔치고 웃는 얼굴로 다가가 마중했다. 하늘 높이 솟아있 는 하얀 태양의 햇살보다도 사쿠라기의 미소가 더욱 눈이 부셨다. 시합은 1점차로 우리가 이겼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도대체 시합이 어떻게 진행되고 마무리 되었는지 도저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저 같은 코트 안에 사쿠 라기가 있다는 것이 좋아서, 슛을 넣을 때마다 화난 듯 사쿠라기 가 소리쳐 불러오는 내 이름이 좋아서, 정신없이 기뻐하며 플레이 를 했던 느낌만 난다. 아마도 자신도 모르게 기합이 들어가서 무 척이나 평소 이상으로 움직인 끝에 그만 이겨버린 것 같다. 사쿠 라기를 다시 본 순간부터 시합이 끝난 시점까지도 황홀감에 침몰되 어 있었던 나로서는 결과는 아무래도 좋을 뿐이었지만, 정렬하려 고 서자 바로 앞에서 사쿠라기가 눈에 분함을 가득 담은 채 또렷한 눈동자로 나를 쏘아보아 왔다. 홍채의 테두리까지 선명하게 떠올 라 보일 정도로 타오르고 있는 번개 같은 시선에 처음 만났을 때의 사쿠라기가 기억났다. 그 때의 나는 사바나를 날렵하게 누비고 다 니는 야생동물처럼 본능적이고 힘찬 사쿠라기의 움직임에 감동조 차 받았었다. 그 감정은 문명의 감옥인 회색조의 건물들 틈에서만 늘 똑같은 하루를 보내며 평생을 지낸 샐러리맨이, 퇴직 후 지금 까지 번 돈을 모두 쏟아 부어 떠난 여행길에서 난생 처음 광대한 초원의 석양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도 비슷했 다. 무어라 형언키 어려울 정도로 가슴이 부풀어 올라서 생명 자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체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해지는 순간, 내겐 그 순간을 가져 다 준 것이 사쿠라기였던 것이다. 찰나와도 같고 영겁을 닮기도 했던 그 시간동안 나는 사랑스럽다는 것 외에는 눈앞의 존재에 대 해 그 무엇도 자각할 수 없었다. 그 순간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여전한 사쿠라기의 기개 가득한 눈빛에 가슴이 주체할 수 없이 두근거리기 시작해서 눈을 돌렸다. 하지만 다른 곳을 보고 있어도 사쿠라기의 시선이 아플 정도로 닿 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사쿠라기의 올곧은 열정과 의지가 자 기( 磁 氣 )처럼 찌릿찌릿 울려온다. 눈을 감고 생각했다. 역시 좋아하는 거야. 너무 좋아하는 거야. 손끝까지 부들부들 떨려올 정도의 금세라도 터져 나갈 듯한 환 희에 온 몸을 맡겼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사실 자체가 순수하게 녹아들어 영혼까지 지고한 행복이 밀려들어왔다. 온 세상에서 불 꽃이 터지고 모든 꽃이 일순간에 개화하는 것 같다. 아직 허락을 받은 것도 아닌데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이렇게 충만할 수 있다니, 그것은 사쿠라기의 기적이었다. 쇼호쿠의 부원들도 우리 부원들도 모두 돌아갔다. 토요일의 늦은 오후라서 학교 전체가 고요했다. 어느새 성큼 다 가온 가을 냄새 묻어있는 바람이 코끝을 스친다. 때때로 돌풍이 불어 시야가 흐릴 정도로 먼지가 자욱한 운동장 가운데 사쿠라기와 나는 마주보고 서 있었다. 시합 후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악수를 하고 돌아서려는 사쿠라기의 소맷자락을 나도 모르게 무심코 움켜 잡았던 것이다.
As Time Goes by 135 사실 정말로 의도했던 행동이 아니라서 그를 자신 쪽으로 끌어 놓고도 나는 한동안을 멍하니 사쿠라기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사 쿠라기도 처음에는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보았지만 아마도 내 표정에 는 그 한 순간의 절박한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는지 나와 함께 남아주었다. 할 말 있었던 거 아냐? 사쿠라기가 땅을 툭툭 차대며 물었다. 사쿠라기의 발이 닿는 곳 으로부터 먼지가 피어올랐다가 또 다시 사그라지어 갔다. 나는 대 답할 여유도 없이 그저 사쿠라기의 행동만을 묵묵히 응시하고 있었 을 뿐이어서, 사쿠라기는 약간 짜증이 난 듯 고개를 들어 나를 똑 바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움찔해서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저기, 그러니까. 지금 시점에서 고백을 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일까 망설이면 서 느릿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정말이지 이 상황에서의 고백은 너 무나도 느닷없이 가 아닌가. 조금 더 분위기를 탈 수 있는 상황이 라면 좋을 것 같다. 몇 달 만에 만난 라이벌 팀의 주장이 갑자기 사랑한다면서 매달려온다면, 일반인의 상식과는 꽤 동떨어져 보이 는 사쿠라기라 해도 놀랄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는 결코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다. 앞뒤 개 연성이 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아니다. 이미 사쿠라기를 좋아 한다는 마음은 너무도 자연스러워져서 잔뜩 배어들다 못해 뚝뚝 발 아래로까지 흘러넘치고 있었다. 이제는 제발 이 범람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좋으니 사쿠라기에게 스며들었으면 했다. 결심을 굳히긴 했지만 아무래도 똑바로 눈을 보며 이야기하기엔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부끄러워서 약간 비스듬히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이 어색한 상황이 자신으로서도 고역이었는지, 살짝 삐죽이고 있는 사쿠라기의 입술이 그만 시야에 가득 잡혀왔다. 그리고 그 다음은, 이미 한 길이었다. 나는 결국 퓨즈가 나갔고 정신이 들었을 때는 사쿠라기를 가득 끌어안고 폭풍처럼 키스하고 있었다. 머리 한 구석에서는 멈추어야 한다는 자각이 있었으나 일 단 닿아버리자 어쩔 수가 없었다. 젖은 소리가 잔뜩 울릴 정도로 삼키고 어루만지고 핥았다. 바람이 묻은 모래가 섞여 들어와, 사 쿠라기의 입술에서는 약간 매캐한 맛이 났다. 호흡이 곤란해져 마침내 떨어졌을 때는 사쿠라기의 얼굴이 새빨 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입술은 서로의 타액으로 흥건했다. 틀림없 이 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헉헉 숨을 고르며 사쿠라기를 바라 보자 사쿠라기는 분노와 창피가 뒤섞인 어린애 같은 표정을 하고 있어서 나는 일순 무슨 말을 꺼내어야 할지 몰랐다. 느닷없이 고 백하기가 어색하다고 느닷없이 키스를 해 버리다니, 그토록 격렬하게 닿아있던 순간이 꿈인가 싶을 정도로 갑작스레 현실만이 들이대어져 있었다. 치밀어 오르는 애정과 비쩍 마른 갑갑한 열기 속에서, 다만 곧이라도 울음을 터뜨려 버릴 듯한 그 얼굴이 사랑 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입을 맞추기 이전에 했어야할 고백을 했다. 좋아해, 사쿠라기. 사쿠라기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사쿠라기의 중심까지 가 닿 지도 못하고 다시 되밀려오는 것 같은 내 고백이 슬퍼서 이번엔 조 금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해!!!
As Time Goes by 137 사쿠라기는 내 얼굴을 한참 바라보더니 아무런 대답도 돌려주지 않고 뒤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터벅터벅 멀어지는 발소리가 마치 내 몸을 짓밟고 지나가는 소리 같았다. 정말 좋아해. 한 번 더 울음소리와도 닮은 신음이 새어나왔지만, 이미 그 곳 에는 나 혼자만이 서 있었다. 이제 와서 반추해 보면 십대의 에너지란 정말 강하게 약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참하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거절 당했지만, 고백 후에도 나는 좀처럼 식지 않았다. 어떤 일을 벌이 고자 할 때 미리 결과를 예상하고 손익분기점을 산출하고야 마는 어른들과는 달리, 아이들은 결과를 걱정하지 않는다. 하고 싶다고 생각될 때 무작정 하고자 밀고 나가는 그 플러스의 강력한 파동은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고 믿는 무모할 정도의 용기에서 나오는 것 이다. 그 바보 같을 정도의 열정은 내게도 예외가 아니어서, 좋아 할 수 있을 때 한껏 좋아하고 상처받을 수 있을 때 마음껏 상처받 아 버리는 직선적인 내달림이 그 때는 가능했다. 첫사랑에 짝사랑 그것도 또래의 남자아이를 상대로 하는 그 감정이 제대로 되어질 리 없건마는 어리다는 재산만으로 소년은 풍 차를 향해 돌진해 갈 우스꽝스러울 정도의 대담함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진심이니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이렇게 좋아하는 데 통하지 않을 리가 없다고 믿고 싶은, 무절제할 정도의 야트막 한 사고에서 흘러나오는 견고하고도 순수한 의지는 열여섯만의 특 권이며 죄악에 대한 면죄부일 수도 있다. 이미 그 정열에서는 이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만큼 밀쳐져 언제까지나 추억만을 끌어안은 채 불면증에 시달리는 스물일곱의 해쓱한 남자보다는 틀림없이 철없는 아이에 지나지 않 는 사랑에 도취한 건강한 소년이 아름다울 것이다. 지나간 시간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내려 하는, 단호하고 숭고한 결의에 가득 차 외길을 걸어가려 하는 그 무렵의 무모함을 가끔은 다시 찾고 싶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모 르기 때문에 불안정하고 서툴기 때문에 거칠어서 결국엔 정성 들여 쌓아올린 모래성을 하찮은 순간의 실수로 와르르 무너뜨릴 여지가 다분하다고 해도, 손이 더럽혀진다며 처음부터 몸을 사리는 비겁 함보다는 주저 없이 흙투성이가 되고 마는 그 때가 그리웠다. 이미 나는 그렇게 움직일 수가 없다. 내 삶의 원동력이었던 사쿠라기가 곁에 없는 것이다. 공들여 만들어 낸 커다란 모래성이 밀려오는 바닷물에 휩쓸려가 도, 무너지는 모습조차 즐거워하며 까르르 웃을 수 있는 건 아이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두 손 마주잡고 서로의 시선을 마주치며 관능 어린 미소를 나눌 수 있는 해변의 연인뿐이다. 혼자서 선선히 현실 위를 걸어와, 눈앞에 보이는 선명한 결과를 끌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이 나이가 되면 싫어도 어깨에 얹힌 삶의 무게를 자각하게 되고 사회라는 굴레 속에서 책임져야 할 자신의 몫을 짊어지게 된다. 무엇이든 얻는 데에는 희생이 필요하고 모든 생명은 다른 생명의 목숨을 발판으로 발돋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 게 된다. 사랑도 마찬가지여서 설령 함께 나누고 있는 마음이라고 해도, 그 마음을 언제까지나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As Time Goes by 139 그리고 노력 역시 사랑의 일부이며 그러한 노력은 자신의 눈에 비 친 이상( 理 想 )이 아닌 홀로 서 있는 상대의 고독 자체를 받아들이 려는 마음가짐을 요구한다. 지금까지 쌓아온 자신의 에고를 모두 부수고 처음부터 나신( 裸 身 )이 되어 낯선 존재를 끌어안아야 하는 것이다. 타인이 심연 언저리까지 침투해 오는 순간 마음은 면역 기능을 발휘해 밀어내려고 애쓰고 육체는 사랑하는 사람을 원해 괴 롭게 몸부림친다. 온전히 나 아닌 존재를 품는다는 일은 가능할 리가 없어, 처음부터 자신의 이기를 인정하고 들어가지 않으면 순 수함은 그 순도가 높을수록 상처받고 만다. 어느 누구도, 다른 누 구를 완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그것을 모른다. 마음만으로 모든 일이 해결될 것 이라고 믿고, 사랑을 얻기만 하면 금세 세상이 분홍빛으로 물들리 라고 의심조차 없이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은 사랑만으로 이겨내 기엔 너무나도 크고 무겁다. 포장된 환희만으로 지켜내기엔 사람 이라는 존재는 결코 녹록치 않다. 마음만이 전부가 아니라, 사랑 하는 순간 얻게 되는 수많은 현실적 고통까지도 짊어질 각오가 있 어야 비로소 연애는 가능해지는 것이다. 무엇이든 행복만으로 다가오는 일은 없듯이 사랑의 기쁨은 그 만큼의 고통 역시 필요로 한다. 그것은 비단 사랑뿐이 아닌 모든 일상에 걸쳐져 있는 인과응보의 원리로, 얻은 만큼 무언가는 내놓 아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첫 걸음을 내딛을 때의 나는 사쿠라기를 얻음으로 내가 함께 지게 될 십자가의 무게를 모른 채 솜털처럼 마냥 들떠 있었 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사물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정처 없이 헤매는 나그네처럼 이리저리 뻗어있는 골목길이 사쿠 라기에게로 이어지는 길이었기에 내게는 마치 오즈로 향하는 노란 벽돌 길처럼 보였고, 마침내 도착한 낡은 목조 아파트는 에메랄드 빛 성 같았다. 목적지에 다다르고도 나는 한참을 쭈뼛거리며 머리 를 긁적이고 서 있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솟아오르도록 달려 와 놓고는 막상 사쿠라기의 집에 이르자 멈칫거리지 않을 수가 없 었다. 나는 스스로를 겁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 지만, 사쿠라기에 대한 애정만은 나를 소심한 어린아이로 만들었 다. 하늘이 유달리 파랬던 날에 바지랑대 같은 소년이 땀을 뻘뻘 흘리며 몇 번이고 초인종에 손가락을 대었다 다시 떼곤 하는 장면 은 퍽 기묘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의 나는 더없이 진지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격렬하게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는 맥박을 달 래려 애쓰며 심호흡을 하고 벨에 손을 댄다. 하지만 며칠 전 입 맞췄을 때의 사쿠라기의 녹슨 파이프 같았던 표정을 떠올리고는 멈칫하며 손을 다시 뗀다. 그 동작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동안에 내 긴장은 더욱 높아만 졌고 마음은 고갈되어 갔다. 몸 속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지끈거 리는 둔통이 밀려왔고 성홍열을 앓는 아이처럼 머리가 어질어질 했 다. 흥분이 지나쳐 드디어 일종의 마비 상태에 이를 무렵에야 나 는 간신히 벨을 울릴 수 있었다. 낡은 탓인지 그 벨소리는 약간 먼 지가 낀 듯 기긱거리는 소리가 났고 그보다도 더 신경 거슬리는 소 리를 내며 둔중한 문이 열렸다. 느릿하게 문이 밀리는 시간은 기 다리다 못해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길었다. 그러나 늘
As Time Goes by 141 어진 시간보다 더욱 무정한 것은 열린 문틈으로 내 얼굴을 확인했 을 때의 사쿠라기의 반응이었다. 안 그래도 표정이 뚜렷한 사쿠라 기 치고도 두드러질 정도로 확 인상을 찌푸리며 문을 다시 닫으려 했던 것이다. 나는 너무나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힘을 주어 문을 내 쪽으로 당겼다. 그리고 엉겁결에 외쳤다. 사쿠라기, 미안해! 그러자 사쿠라기는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건조하게 갈라진 목소 리로 물었다. 뭐가? 막상 되물어오자 할 말이 없다. 나는 정말로 무엇이 미안한 것 일까. 키스한 것? 아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비록 고백과 순서 가 뒤바뀌긴 했지만 나는 그 도둑 키스를 전혀 미안해하고 있지 않 았다. 내게는 어떻게든 쌓아만 왔던 사쿠라기를 향한 감정을 폭발 시킬 계기가 필요했다. 그러지 않았으면 나는 산산조각이 났을 것 이다. 그렇다면 사쿠라기를 좋아하게 된 것? 더더구나 말도 안 된다.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움츠러들거나 미안해야 할 일이 절대 아니 다. 게다가 나는 이 애정에 모든 걸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듯한 사과의 이유가 떠오르질 않아서 나는 맥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 내 표정이 어지간히도 얼빠져 보였는지 사쿠라기는 한숨을 한 번 쉬더니 문을 열어주었다. 사쿠라기의 공간 안으로 첫 걸음을 내딛던 그 순간의 환희를 아마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 고 바로 첫 걸음이, 내가 사쿠라기의 삶 속으로 전진하게 된 최초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의 일보이기도 했다. 방은 조용하고 의외일 정도로 깨끗했다. 하지만 지난밤에 친구 라도 묵어 간 것인지 낡은 소반 위에는 구겨진 맥주 캔들과 안주거 리들이 흩어져 있었다. 머리칼이 덥수룩하게 흩어져 있는 사쿠라 기의 얼굴은 숙취 탓인지 조금 초췌해 보였다. 내가 사쿠라기를 방문한 것은 해가 한창 높을 무렵이었으나 친구들이 아침에 돌아간 후 사쿠라기는 아직까지도 자고 있었던 듯 방 한 켠에는 지금 막 일어난 듯한 이불 한 채가 놓여있었다. 어쩐지 두근거리는 마음으 로 두리번거리고 있자 사쿠라기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더니 까딱까 딱 손짓을 했다. 내게 저항할 수 있는 의지가 있을 리 없어서 나는 조용히 부르는 대로 다가가 상을 사이에 놓고 사쿠라기와 마주 앉 았다. 앉자마자 사쿠라기는 맥주 캔 하나를 밀어왔다. 그리고 자 신도 캔 하나를 땄다. 마셔라. 먼저 몇 모금을 넘긴 후에 사쿠라기가 말했다. 낮게 가라앉은 그 음성은 몹시도 허스키하고 관능적이어서 심장이 조여들었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나도 얼른 캔을 따서 꿀꺽꿀꺽 술을 넘겼 다. 식도를 타고 흘러 들어가는 느낌이 그 어느 때보다도 알싸하 고 진했다. 맥주를 삼키며 주위를 둘러보자 TV위에 덩그마니 얹혀있는 액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혹시라도 부모님일까 싶어 주의 깊게 바라 보니, 그것은 내게도 면식이 있는 사람으로 쇼호쿠의 매니저인 아 카기 뭐라든가 하는 여자였다. 그 우락부락한 주장의 동생답지 않 게 꽤나 귀엽네, 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몰랐었다. 사쿠라기가 좋
As Time Goes by 143 아하는 사람인 줄은. 갑자기 술맛이 지독하게도 썼다. 생각해 보면 좋아하는 여자아이쯤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는데 새삼스레 상처입고 있는 자신이 우습기도 하고 처연하기도 했다. 그대로 있 다가는 창피하게 눈물이라도 흐를 것 같아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내 모습을 계속 바라보고 있던 사쿠라기는 내 시선의 움직 임으로 고민의 원인을 이미 알아차렸는지 피식 웃었다. 짝사랑이야, 나도. 사쿠라기의 자조적인 어투에 심장의 골은 더욱 패였다. 나도 짝 사랑이라니, 무의식중에 보답 받지 못함을 전제로 내 마음과 자신 의 마음을 동일시해버리는 사쿠라기 때문에 진심으로 슬퍼졌다. 문득 내가 사쿠라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사쿠라기가 그 여자를 사랑 하고, 내가 사쿠라기를 만지고 싶어 하는 것처럼 사쿠라기가 그 여자를 만지고 싶어 하고, 내가 사쿠라기의 모든 것을 간절히 바 라는 것처럼 사쿠라기가 그 여자를 간절히 바란다고 생각하자 견딜 수가 없었다. 발끈해서 고개를 들자 잘 닦은 거울처럼 맑은 사쿠 라기의 눈동자와 정통으로 부딪혔다. 나는 저 사람, 귀여워서 좋아해. 닿으면 부드러울 것 같고, 상냥해 보이고, 여자답고, 어쩐지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 너는 도대체 왜 나를 좋아하냐? 순간 머릿속을 온갖 단어가 스치고 지나갔다. 확실히 사쿠라기 는 일반적인 의미로는 전혀 귀엽지 않다. 잘 단련된 근육질의 몸 매라서, 만진다고 부드러울 리도 없다. 상냥하기는커녕 소문난 깡 패의 정진가도를 달리고 있고, 여자다움 운운하기 이전에 훌륭한 남자다. 그리고 나는, 사쿠라기가 마냥 좋았을 뿐 행복하게 해 주 고 싶다거나 웃게 해 주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조차 해 본적도 없었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다. 그저 원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떨어져 걸어왔던 우리의 인생 이 앞으로는 함께 걸어갈 수 있는 하나의 길이 되기를, 언제나 가 장 가까운 자리에서 사쿠라기를 지켜보고 품에 안을 수 있기를 단 지 갈망하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그 여자를 좋아하는 사쿠라기의 마음과 사쿠라기를 좋아 하는 나의 마음 사이에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어쩌면 사쿠라기는 나의 좋아해 를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두터운 안개의 벽에 부딪히고 만 것 같아 서 절망했다. 하지만 사쿠라기는 진지하게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독일인의 사랑 2) 이라도 읊고 싶었지만, 내 마음이 다른 사람의 언어 따위로 담아질 리 없다. 어쩔 수 없이 나 는 설득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내 안에 새겨져 있는 그의 인상( 印 象 )만을 간략하게 표현했다. 아프리카의 석양 같아서. 사쿠라기의 눈썹이 의아한 듯 찌푸려졌다. 아프리카의 석양을 등에 지고 바람처럼 뛰어가는 표범 같아서.. 나한테는 그런 네가 생전 처음 본 살아있는 존재 같아서.. 그래서. 네 곁에서라면 나도 살 수 있을 것 같았어. 2)..,....
As Time Goes by 145 마지막 말을 결국 끝맺지 못하고 끝내 참으려 했던 눈물이 흘렀 다. 정말로 한심하게도 나는 한참 동안을 사쿠라기 앞에서 그렇게 울었던 것 같다. 마침내 울음을 그치고 쳐다보니 사쿠라기는 묘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무방비하면 서도 불가해해서 사쿠라기의 맨 얼굴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었다. 그것은 평상시에 그토록 선명하게 살아 움직이는 다양한 표정의 사 쿠라기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한 꺼풀 벗겨진, 정적( 靜 寂 ) 으로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사쿠라기 는 금세 표정을 덧씌운 평상시의 얼굴로 되돌아갔다. 사실 남자한테 고백을 받은 게 네가 처음은 아니지만. 그 말에 내 몸이 움찔 떨리자 사쿠라기는 작게 웃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슥슥 젖은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너처럼 이상하고 간지러운 고백은 처음이야. 사쿠라기의 대답이야말로 정말로 남자의 애정고백에 대한 것치 고는 이상한 것이었지만, 나는 이내 그것이 사쿠라기의 삶 속으로 의 내 침입을 허락하는 에두른 표현임을 알아차렸다. 그리고는 그 만 여전히 흠뻑 젖은 얼굴로 더 이상 얼굴을 일그러뜨릴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뜨리며 크게 웃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서로 끌어안는 것만이 남은 거라고, 그렇게 낙관 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애정과 우정의 경계는 안개로 인해 어슴푸레 흐려져 있는 수평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선처럼 모호하다. 어디서부터가 바다이고 어디까지가 하늘인지 아무리 눈을 찌푸 리고 바라보아도 정확하게는 그 이음 선을 판별해 낼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이만큼이나 시간이 흐른 후의 사쿠라기에 대한 내 마 음이라는 것도 조금씩 농도가 옅어져 과거의 경계 어디쯤 머물고 있는 것인가 궁금해질 때가 있다. 내 지갑 속에는 여전히 사쿠라기의 사진이 있다. 나는 언제나 사쿠라기를 생각하면서 잠들고 일어나자마자 사쿠 라기를 떠올린다. 이 감정의 어느 만큼이 추억에 대한 집착이고, 이 감정의 어느 만큼이 여전히 격렬하게 불타오르고 있는 사랑인 걸까. 때로는 갑 작스레 두려워질 때도 있다. 사실은 나를 사랑하는 사쿠라기의 마 음도, 내가 사쿠라기를 사랑하는 마음도 아주 오래 전 소실되어 버리고, 나는 그 그림자만을 끌어안은 채 습관처럼 사랑이라는 착 각 속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곁에 없는 그를 믿지 못하고 자신의 마음조차도 확신하지 못해 공포에 떨게 되는 것이다. 절실하게 그의 체온이 그리워지는 밤 아무리 독한 술로도 이 지긋할 정도의 그리움이 해갈되지 않는 밤이면 삶과 죽음의 경계조 차 애매해진다. 모든 것이 불분명하게 침수해 물체와 물체의 윤곽 마저도 이지러지듯 뭉개져버려 결국엔 살아있는 자신의 존재마저 도 믿을 수가 없다. 모든 것이 뒤돌아서고 손을 뻗어 잡을 것은 하 나도 없다. 단지 모든 열정도 용기도 시간 속에서 흙을 파내 묻어버리고 그 저 옛 시절만을 되풀이 해 떠올리는 패기 없는 늙은이처럼, 사랑
As Time Goes by 147 을 사랑이라고 믿는 마지막 희망만을 끌어안은 부식된 한 남자가 존재할 뿐이다. 아무래도 다시 잠들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 다. 거실로 나와 블라인드를 걷자 넓게 펼쳐진 어둠의 피막의 틈 새를 뚫고 밝은 불빛들이 촘촘히 박혀 있다. 야경은 마치 가장 짙 고 깊은 골짜기에 빛을 부수어 쏟아놓은 듯해서 저 먼 곳을 흐르고 있는 은하수처럼도 보였다. 화려하지만 음울하게 날개를 펴고 있 는 밤의 도시 위로 하늘을 헤엄치고 있는 별들이 내려앉은 듯한 착 각마저 들었다. 그러고 보면 사쿠라기는 유달리 밤이 그려내는 감촉 어린 적막 감을 좋아했었다. 내게 있어서 그는 그 누구보다도 한낮의 태양과 잘 어울리는 인물이었기에 그 사실은 조금 의외였다. 하지만, 워 낙 사쿠라기는 내게 있어 온통 의외 투성이였다. 아이인가 싶으면 어른이었고 단순한가 하면 그 밑에는 복잡다단한 본질을 숨기고 있 었다. 도무지 단일한 성향 하나로 규정할 수가 없는 다양성을 지 니고 있어서, 사쿠라기와 함께 하는 하루하루는 언제나 숨 가쁘고 새로웠고 그의 옆에 서 있는 나까지도 건강한 열기로 가득 차오르 게 했다. 사쿠라기와 함께 있을 때에는, 나는 매일매일 다시 태어 나는 갓난아이 같았다. 그로 인해 나조차도 모르고 있던 자신의 새삼스런 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고, 삶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을 모두 잊고 희망만을 끌어안은 채 정신없이 사랑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어쩌면, 사람은 바로 그런 삶의 활기를 얻기 위해서 사랑을 필 요로 하는지도 모르겠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한번쯤은 진정으로 살아보기 위해서, 다른 모든 일을 잊을 정도 로 단 하나의 무언가에 몰두해보고 싶어서, 자신에게도 이토록 강 렬한 정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어서, 끊임없이 꿈틀 대고 눈동자를 움직여 그 어떤 불행에도 끊어지지 않을 단단한 운 명의 고리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찾아내는 순간, 사랑만으로 삶은 희열에 가득 찬다고 착각하고 자신에게 눈부신 빛을 선사한 상대를 향해 끝없이 달려간다. 하지만, 언제고 그 빛이 쇠퇴하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은 동공에 씌워졌던 사랑의 비늘이 한 꺼풀 벗겨지는 때 일 수도 있고, 어쩌면 처음부터 자신의 머릿속에서 만들어 낸 이 미지를 사랑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때일 수도 있다. 가식 없는 눈으로 상대를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시간의 마법이기 도 하고 시간의 선물이기도 하다. 그 잔혹한 선물의 포장을 뜯은 후에도 여전히 상대를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진정한 사랑일 것이다. 그러나 사쿠라기는 내게 진정한 사랑을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내게 있어 늘 변함없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영롱해져만 가는 무지개와도 같았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그를 사랑했다. 그를 위해 노래를 불렀다. 나의 심장을 바쳤다. 차라리 환멸을 느 낄 여유라도 있었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욕심내지 않고 눈앞의 그만으로 만족했을 수도 있 는데, 놀랍게도 영속성을 가지고 있었던 사쿠라기의 다이아몬드와 도 같은 광채는 쉴 틈 없이 날 어지럽혔다. 수많은 빛줄기가 사쿠 라기에게 닿아 반사되었고, 나는 내가 그에게 있어 유일한 빛이 아니라는 사실에 상처 입었다. 그에게 낙인을 찍고 싶어 견딜 수
As Time Goes by 149 가 없었다. 애초부터 사람이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리 없는데 도, 너무나도 간절하게 그를 나의 것으로 소유하기를 바라고 있었 다. 그리고 사람은, 그래서 섹스를 하는 지도 모른다. 순간만이라도 상대를 손에 넣었다는 독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서, 사랑하는 사람을 잔혹하게 찢고 그 달콤한 선악과를 핥는다. 처음에는 너무나도 곤란했다. 물론 자신이 그런 의미로 사쿠라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사쿠라기의 땀에 젖은 팔에 닿았을 때 온 몸을 내달려가던 강렬한 욕망은 지나치게 커서 곤혹스럽기까지 했 다. 무엇보다, 나는 아직 사쿠라기와의 섹스를 바랄 수 있을 정도 로 깊은 사이도 아닌 것이다. 주말이면 만나서 농구를 하고 때로는 평일에도 만나서 같이 저 녁을 먹고, 가끔은 함께 낚시하러 갈 때도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른바 사귄다고 할 수 있는 사이일 수도 있겠지만, 드물게 스치 는 입술만을 제외하면 아주 보통의 남자 고교생들의 우정일 뿐이라 해도 무리가 없다. 고백한 이후로 사쿠라기에게서 확실한 답을 들 은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서로 마음이 통하게 된 것이라 는 바람은 온전히 나만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사쿠라기가 밀어내지 않고 함께 있어주는 것 자체가 일종의 허 락일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그래도 불안한 것만은 어쩔 수 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쿠라기는 아카기 하루코를 좋아하고 있었다. 물론 고집스레 과거형으로 말하는 것도 내 욕심이다. 그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러니까 사실 사쿠라기는 지금도 아카기 하루코를 좋아하고 있을지 도 모른다. 그 고통스런 가정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는 숨쉬기 가 힘들어졌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그녀 만은 절대 용서하고 싶지가 않았다. 내게 허락된 사쿠라기와의 시 간은 고작해야 주말과 방과 후의 몇 시간뿐인데, 그녀는 사쿠라기 와 동기고 농구부의 매니저기도 하다. 이래서야 시간적인 측면에 서도 내게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 뿐만 아니라 사쿠라기는 남자에게 고백 받은 것이 처음이 아니 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사쿠라기의 주변에는 사쿠라기에 게 고백을 했을 법한 위험분자들이 널리고 널렸다. 미토라는 소꿉 친구도 수상하다. 아카기 전 주장도 사쿠라기를 지나치게 귀여워 했다. 지금의 미야기 주장은 친근하게 사쿠라기를 이름으로 불러 대고, 3학년이면서 아직까지 부활에 남아있는 미쯔이 선배를 사쿠 라기는 밋찌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루 카와는 사쿠라기에게만 말을 건다. 비록 멍청이 라는 3음절의 간 단한 단어일 뿐이라 해도, 내게는 저 뒤에 하트라도 붙어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사쿠라기와의 신체접촉에 도가 지나칠 정도로 내가 과민 하게 반응하게 된 것은, 바로 저 의심과 초조가 극에 달했을 무렵 이었다. 원래부터 스킨십에 익숙한 듯 사쿠라기는 아무렇지도 않 게 어깨에 팔을 두르고 머리칼을 만져 오는데, 그 황홀함이 달콤 함을 넘어서 아슬아슬한 긴장상태까지 일직선으로 달려가 버리게 되면 이건 아무래도 코피라도 쏟을 것 같다. 더구나 잘 숨기지 않 으면 코피로는 끝나지 않는 더욱 망신스러운 꼴이 기다리고 있다. 사쿠라기를 만지고 싶어 죽을 것 같은데, 이대로 가다간 만져지다
As Time Goes by 151 죽어버린다. 이 욱신거리는 괴로움을 사쿠라기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어서, 사쿠라기와 만날 때의 스릴은 날이 갈수록 커져갔다. 그 리고 마침내 사건이 터져 버린 것은 어찌 보면 일목요연한 결과였 다. 그 날은 쉬는 토요일이라서, 사쿠라기와 나는 오전 일찍 공원에 서 만났다. 더워지기 전에 농구를 하고 조금 떨어져 있는 소문난 곳으로 라면을 먹으러 가기로 했던 것이다. 사쿠라기는 라면을 무 척이나 좋아해서 아침부터 들떠 있었고, 나는 또 다른 이유로 온 통 긴장해 있었다. 결국 농구연습도 제대로 되지 않아서, 세 시간 정도의 일대일이 끝났을 무렵에는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 이 바로 눈앞에서 사쿠라기가 헉헉 숨을 내쉬며 부딪혀오는데 이놈 의 신경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비록 사쿠라기가 흘리는 땀은 건전한 청춘의 산물이고 그의 거칠어진 숨소리는 격렬한 운동의 결 과일 뿐이라 해도, 나는 사쿠라기의, 애무로 인해 짙게 달아오른 피부에 촉촉하게 흘러내리는 땀과 격정적이고도 나지막하게 내질 러지는 신음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필사적으로 자신을 억누르느라 뇌혈관이 다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 마침내 쉴 시간이 되자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아무것도 모르는 사쿠라기가 상쾌한 얼굴 로 다가와 손을 뻗었다. 오늘 유달리 힘들어 보인다, 너. 머리도 다 흐트러졌어. 오싹, 하고 사쿠라기의 손끝이 머리칼에 닿는 순간 바늘 끝처럼 날카로운 전율이 등줄기를 내달렸다. 그대로 하반신을 직격해 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는 아찔한 감각에 저도 모르게 사쿠라기의 손을 찰싹 소리가 날 정 도로 뿌리쳤다. 센도? 뿌리쳐진 충격으로 입을 살짝 벌리고 도톰한 혀를 내보인 채 멍 하니 날 바라보고 있는 사쿠라기를 보자 이젠 정말 다급해졌다. 사과할 생각도 못하고 벌떡 일어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화장실을 향 해 달렸다. 맹세컨대, 이 순간만큼 자신이 남자인 것이 저주스러 울 때가 없었다. 산소 결핍증을 일으킬 정도의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 비어있는 아무 칸이나 벌컥 열고 들어갔다. 사쿠라기.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기대고 스스로를 어루만졌다. 닿는 감촉만으로도 순식간에 폭발할 듯 강하게 일어선 것을 격렬하 게 쓰다듬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애인은 내 오른손이라 니, 어쩐지 자신이 너무나 처량하게 느껴질 무렵 활화산 같은 열 기가 한순간에 식어버릴 정도의 망연한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 다. 센도?. 정신이 없어서 문을 채 닫지도 못한 모양이다.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어서 눈만 뻐끔히 뜨고 문가를 바라보자 10cm 정도 열린 틈 으로 사쿠라기가 내 손가에 시선을 못 박은 채 아연하게 서 있었 다. 저 저기. 변명의 여지가 없다. 꼴불견 중에서도 최고다. 창피함에 어떻게 추스르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자 사쿠라기가 손끝으로 내 허리춤 을 가리키며 물었다.
As Time Goes by 153 그거,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거냐? 너무나도 황망해서 간신히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러자 사쿠라기 는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문을 닫고 안쪽으로 들어왔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눈만 대록대록 굴리고 있는데, 하반신에 얹힌 채 그대로인 내 손위로 사쿠라기의 손이 겹쳐졌다. 너무 놀라 사쿠라 기의 표정을 확인하려 했으나, 이미 사쿠라기의 얼굴은 내 어깨위 로 묻혀 있었다. 그리고 천에 닿아 불분명해진 퉁명스런 음성이 들려왔다. 입으로는 못 해줘. 머릿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공원에서 어찌어찌 뒤처리를 한 후에 사쿠라기의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결국 그것만으로 멈출 수는 없었다. 기가 팍 죽어 비칠비칠 돌아오는 길은 무척이나 멀게 느껴졌지 만 아무 말 없이 주머니에 손을 꾹 질러 넣고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는 사쿠라기의 뒷모습을 바라보자니 조금씩 온 몸이 간지러워지 는 것 같았다. 지금은 감추어져 있는 저 탄탄한 손이 나를 훑었 고, 나는 신음을 흘리며 청결해 보이는 곧은 목덜미를 쓰다듬고 있었다. 흥분이 발끝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온 몸을 벌레에게 깨물리는 듯한 감각을 어찌할 수도 없어 달려가 사쿠라기의 손을 움켜잡았다. 돌아보는 사쿠라기의 눈은 옅게 붉 어져있다. 처음에 흥분한 것은 나뿐이었지만, 사쿠라기도 나를 도와주는 틈에 그럴 기분이 되어버린 모양이다. 서로의 손가락이 닿는 순간 사쿠라기의 팔이 흠칫 떨리는 것이 내게도 생생하게 전해졌다. 우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리는 달리기 시작했고, 집에 들어선 순간부터는 거의 격투나 다름 없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처럼 숨을 몰아쉬며 서로의 옷을 벗기고 차가운 다다미 위로 그대로 주저앉았다. 한 번 곧추선 욕 망은 도무지 끝을 몰라서, 돌이켜보면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서툴 고 굉장히 성급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상대의 몸을 어루만질 틈도 없이 고양된 사정감에 정신을 빼앗겨서 앗 하는 사이에 서로 의 손길만으로 간단히 폭발해 버렸다. 상대의 체액에 젖은 채 멍 하니 시선이 마주치자, 사쿠라기가 굉장히 한심하다는 듯이 뭐 야, 이게. 라고 말했다. 건장한 체격의 두 남자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인 채 로 무릎을 꿇은 채 마주 앉아서, 서로 상대의 것을 잡은 채 부끄러 워하고 있었던 그 순간은 지금 떠올려도 정말 웃음이 나올 정도로 어이없고 또 행복했다. 밤꽃냄새 가득한 방안에서 달아오른 열이 식을 정도의 시간이 흐를 때까지 그 자세 그대로 방심상태였던 우 리들은, 이내 몸에 쌀쌀한 기운이 느껴지자 그제야 달라붙었다. 등 뒤로 팔을 둘렀을 때 느껴지던 사쿠라기의 피부는 이미 맺혔던 땀이 식기 시작했는데도 무척이나 청량해서 마치 소다수의 기포가 터지는 듯한 상쾌한 느낌이었다. 나는 손끝으로 사쿠라기의 척추 를 더듬어 내려가며 살짝 턱 끝에 입을 맞췄다. 입술이 닿는 순간 경직되어버린 사쿠라기가 너무나 귀여워서, 귓가를 핥으며 달콤하 게 속삭였다. 이번엔 정말 제대로 하자. 제대로 하자니, 뭐, 뭘!!!! 사쿠라기는 일단 갈증이 해소되자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 했는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워했지만, 쑥스러워 할
As Time Goes by 155 거라면 아까 공원 화장실에서부터 그래야 했다. 대담하게 아무렇 지도 않게 나를 만져놓고선 이제 와서 발뺌이라니, 사쿠라기가 그 렇게 나온다면 그건 날 희롱한 것이다. 사쿠라기에게도 희미하게 나마 이번 일은 양방통행이었다는 자각이 있었는지 내가 손길을 멈 추고 뚫어져라 쳐다보자 슬쩍 시선을 피하며 딴전을 했다. 그러니까, 섹스. 센도!!! 직접적인 말에 사쿠라기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달아오른 볼이 너무나 기분 좋게 느껴져 내 볼과 마주 대고 비볐다. 전해지는 높 은 열에 행복해서 죽을 것 같다. 뭘 하자는 거냐고 물어봤잖아, 섹스 하자고. 으. 이미 다 벗었으니까 벗은 김에 하자. 천천히 사쿠라기의 온 몸을 뒤덮고 목덜미에서부터 가벼운 입맞 춤을 되풀이해 나갔다. 도드라진 결후를 지나서 미끈하게 뻗은 쇄 골을 거쳐 사쿠라기의 심장에 닿았다. 입술과 손바닥 안에 느껴지 는 탄력 있는 피부 밑에서 사쿠라기의 심장은 마치 갓 잡아 올린 은어처럼 팔딱였다. 그리고 내게는 그 사실이 무척이나 신선했다. 늘, 두근거리는 것은 나라고 생각했다. 닿고 싶어 애가 타고 눈 안에 가두지 못해 고통 받고 어떻게든 상대의 마음을 잡고 싶어 전전긍긍하는 것은 나뿐이라고 생각했 다. 하지만, 사쿠라기는 지금 두근거리고 있다. 자신 때문에 발기한 나를 비난하지 않은 채 주저 없이 감싸주었 고 이제는 나로 인해 발정하고 있다. 아무리 신체건강하고 혈기왕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성한 십대중반의 소년이라 해도 아무 감정조차 없는 누구에게나 이 토록 뜨겁게 반응할 리는 없다. 어떻게 해서도 좋아할 수 없는 사 람이라면 친구로서든 애인으로서든 근접해오는 것조차 애초에 받 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둘도 셋도 없는 법이다. 결국 처음부터 사쿠라기가 내게 말하고 있었던 것은 단 하나였다. 몸뿐이 아닌 마음도 이제 더 이상 일방통행이 아니 다. 사랑해, 사쿠라기. 벅차오르는 감격에 회오리바람처럼 온 몸을 휩싸 오르는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고백했다. 내 심장의 반대편에서 거세게 울리고 있 는 사쿠라기의 고동을 깨닫자, 이미 이어진 것 같은 느낌마저 들 었다. 섹스가 아니라, 사랑을 하자. 다시 한 번 속삭이자 사쿠라기가 눈물이 번진 눈동자로 마주봐 왔다. 비어 있는 그 표정은 언젠가 내가 보았던 사쿠라기의 맨 얼 굴과도 닮아 있었지만, 그 때와는 달리 저 깊은 곳에서부터 불안 과 안도가 뒤섞인, 사랑을 하는 사람 특유의 달짝지근함 또한 품 고 있었다. 사쿠라기의 동그란 동공에 내 모습이 가득 담긴다. 너 무 기뻐 울 듯한 얼굴로 웃자, 사쿠라기가 내 목에 팔을 두르며 입 맞춰 왔다. 그래, 사랑을 하자.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로 사쿠라기가 허락을 한다. 닿을 수 있는 부분을 모두 겹쳐서 온 몸으로 구애를 했다. 엉킨 부분에서부터 서로의 땀이 하나로 녹아 흘러내린다. 사쿠라기의 구석구석을 매 만지고 사쿠라기의 구석구석에 키스했다. 몇 번이고 공들여 애무
As Time Goes by 157 를 하고 수도 없이 사랑의 말을 속삭였다. 움직일 때마다 끌어안 아 오는 사쿠라기의 힘도 강해졌다. 크게 뜨여져서 계속해서 나만 을 바라보고 있는 사쿠라기의 눈가에 입을 맞추고 넓게 벌어진 다 리를 들어올렸다. 순간 긴장이 내달리는 사쿠라기의 허리를 부드 럽게 어루만지고, 사쿠라기가 이완된 틈을 타서 강하게 밀고 들어 갔다. 사쿠라기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지만, 나를 붙들고 있 는 손은 놓지 않았다. 연결되고서, 생각해보았다. 지금 이 순간을 경계로 우리 사이는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하고. 낙인을 찍고 찍히면서, 우리는 서로 의 영혼 속으로 얼마나 파고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하고. 하지만 틀림없이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다만, 깊어질 뿐이 다. 사쿠라기와 나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이. 가장 깊은 곳에 닿은 순간, 사쿠라기가 비명처럼 외쳤다. 센도! 무엇보다도, 그 순간 불린 내 이름이 가장 기뻤다. 가끔은 누군가를 향해 외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아무도 헤어지기를 원하지 않았는데 멀어져 가는 연인이 이 세 상에 있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느냐고, 혹시 알고 있다면 그 이 유를 내게 좀 알려달라고. 피곤에 지친 눈으로, 상복을 차려 입고 있던 하늘이 조금씩 희 뿌연 속내를 드러내는 시간까지 깨어있었다. 뜬눈으로 지새운 눈 가가 따끔거려 몇 번 눈을 깜박였다. 눈꺼풀의 움직임에 따라 닫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혔다 다시 열리는 세상은 여전히 사쿠라기가 곁에 없는 그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사실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 지는 않았다. 물론, 아프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좋아하는 사람을 손을 뻗어 만질 수가 없다. 아무리 간절히 불러 봐도 대답이 돌아 오지 않는다. 고독하게 홀로 선 감정이라는 것은 슬프고 또 슬픈 것이다. 다만, 내게는 지금까지 기다려 올 힘이 있었을 뿐이다. 그 까닭은 우리의 이별이 시간에 묻혀 사랑이 소멸했다거나 상 대의 어떤 부분을 견딜 수 없어졌다거나 하는 현상적인 부분에 기 인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본질적인 것에 치우쳐 있었다는 것에 기 인한다. 마치 낮이 지나면 밤이 찾아오고 아이가 자라나 청년이 되는 것처럼, 우리에게 있어 사랑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자 연스런 일이었던 것처럼, 이별도 그렇게 찾아왔었다. 결별 후 처음에는 괴로움에 온 몸을 뒤틀었었다. 손이 닿는 거 리에 그가 없다는 것을 어떻게 해서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사랑 하고 사랑받는 데도 불구하고 예고조차 없이 찾아온 헤어짐이라는 것은 내 이해의 범주 밖에 있었다. 하지만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문득 깨닫게 되었다. 이미 사쿠라기에 대한 마음은 몸 구석구석까지 스미어들어 버려 서 분리할 수도 모른 체 할 수도 없다. 상대가 곁에 있는 만큼 태 풍처럼 격렬하게 휘몰아쳤던 내 애정은, 사쿠라기가 곁에서 멀어 지는 순간부터 조용히 잦아들어 완전히 내 속으로 흡수가 되었다. 피부 밖에서 직접적인 자극을 얻을 수 있었던 순간보다도 오히려 온전한 형태로 나는 사쿠라기를 안게 된 것이다. 사쿠라기와 나와 의 틈새에 있는 수많은 생명을 통해 우리는 이어져 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들이마신 공기는 내 몸 안에서 순환해 다시 물이 되고
As Time Goes by 159 대기가 되어서 언젠가는 사쿠라기의 숨이 되어 줄 것이다. 호흡 할 때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내 안에서 사쿠라기에 대한 사랑이 배어 나온다. 이 사랑은 어떤 방식으로든 틀림없이 사쿠라기에게 전해진다. 알아차리자 평온해졌다. 내가 어디에 있어도 사쿠라기 의 것인 것처럼 그가 어디에 있어도 나의 것이다. 내가 살아있는 한은 내 안에 사쿠라기가 사랑이라는 형태로 존 재한다. 믿음이 생기자 이제는 인내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헤어 지던 그 순간에 사쿠라기가 했던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뒤늦게 이 해할 수 있었다. 문득문득 차가운 칼날로 살을 저며 내듯 지독한 외로움이 잠식 해 올 때면 나는 사쿠라기의 사진을 붙들고 운다. 도무지 견딜 수 가 없어 팽팽히 긴장된 신경이 끊어져 버릴 듯 할 때면 사쿠라기의 시합이 담긴 녹화 테이프를 몇 번이고 돌려보았다. 웃고 있고 움 직이고 있는 사쿠라기를 보고 있노라면 조금쯤 진정이 되었고, 죽 음과 한 올의 차로 마주보고 서 있는 듯한 끔찍스런 그 공포의 순 간이 지나가면 나는 이내 다시 기다릴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 리고 몇 번이고 되새겼다. 내가 그 시절 사쿠라기를 잃은 까닭은 자신의 나약함과 사쿠라기에 대한 허약한 믿음이 원인이었다는 것 을. 하나의 대상을 향한 노도와도 같은 애정이 온통 팽배해 있던 그 순간에는 세상이 사랑만으로 찬란하게 빛났었지만, 세상은 결 코 사랑만으로 아름답지는 않다는 것을. 아마도 열여섯 무렵의 그 때, 내가 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더 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 무렵의 나는 정서적인 결벽이 너무도 심해서, 사쿠라기를 사랑하게 되면서 진정으로 살게 되었 는데 또 한 편으로는 그 사랑만으로 살수는 없다는 사실을 근본적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것은 묘한 아이러니였다. 처음으로 끌어안게 된 사랑이 너무 커서 모르는 새에 나는 조금 씩 사쿠라기와 나 자신을 질식시켜 가고 있었다. 사랑에 도취한 순간 동이 터 왔던 세상이 사랑으로 인해 다시 저물어 갔다. 사랑 이 시작되었고 사랑을 얻었는데 마냥 행복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사쿠라기를 처음 본 순간부터 내 속에서 들끓기 시작했던 육식동물 의 광기에 그 원인이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하나로 채워지길 원 했고 사쿠라기는 내가 보다 많은 것들을 끌어안기를 원했다. 나는 일종의 편집증에 가까운 견고한 애정을 사쿠라기에게 요구했지만 본질적으로 삶에 대한 유연함을 지니고 있던 사쿠라기는 시선을 나 에게만 두지 않았다. 그는 무한히 펼쳐져 있는 시간을 향해 열정 적으로 달려 나갔다. 좋아하는 것들로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 다. 내게는 그 사쿠라기가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만큼 찬란해서 무척이나 슬펐다.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느끼면서, 어째서 사람이란 가지면 가질수 록 더욱 원하게 되는 생물인 걸까 고민했다. 사랑하게 되었을 때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시간이 흘러 한쪽으로 흐르는 감정이 고통이 되자, 그 때는 조 금이라도 좋으니 사쿠라기가 나의 이 좋아한다는 감정을 받아들여 주길 원했다. 그리고 그가 나를 좋아하게 되자, 이번에는 사쿠라 기의 모든 것을 바라게 된 것이다. 사쿠라기에게 근본적으로 깃들 어있는 자유로운 영혼이 좋아서 견딜 수 없으면서도, 반대로 그를
As Time Goes by 161 내게 구속하고 싶다는 열망이 피어올랐다. 결코 사냥할 수 없는 밀림의 포식자를 대상으로 사냥을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사쿠라기는 가지면 가질수록 허기가 져서, 그를 사랑하고 있는 나는 언제나 굶주려 있었다. 몸속에 사쿠라기가 아니면 채울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위( 胃 )가 하나 더 생겨 끊임없이 사쿠라기를 먹 고 싶다고 나의 온 신경을 닦달하고 있었다. 늘 의식의 표면에는 사쿠라기가 떠올라 있다. 연인이 되고 몸을 나누게 된 이후에도 사쿠라기에 대한 마음은 흐릿해지기는커녕 바라보는 만큼, 손을 붙잡는 만큼, 안는 만큼 그 부피를 증식해갔다. 이 사랑은 자라고 또 자라서 마침내는 나 의 세계를 모두 휘감아 나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온통 사쿠라기에 대한 사랑밖에 볼 수가 없었다. 내 세상은 사쿠라기의 세상이 되었고 다른 모든 것을 잃어도 사 쿠라기만 얻은 채로라면 관계없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다른 모든 의미들은 무가치해졌고 나의 중심에서 오로지 사쿠라기만 빛 났다. 그런데, 사쿠라기는 아니었던 것이다. 내게 있어 세상이란 사쿠라기를 통해 열려온 것이었지만, 사쿠 라기의 세상은 이미 나를 만나기 전부터 활짝 열려 있었다. 나는 단지 사쿠라기가 세상을 통해 얻은 무수한 삶의 가치 중 하나에 지 나지 않았다. 물론 그가 나를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의 무 게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나를 누구보다도 사랑했고, 소중하게 생각해 주었다. 다만, 이것은 점과 네트워크 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내게 있어 사쿠라기는 세상이라는 영역에서의 유일한 정점( 頂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點 )이었고 사쿠라기에게 있어 나는 네트워크상의 한 점이었다. 비 록 그 중에서 가장 가깝고 가장 애정을 깊게 준 것이라 해도, 사쿠 라기의 마음은 나에게만 흘러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회로를 타고 다른 네트워크로도 공평하게 퍼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 그를 보았을 때 느낀 그대로, 그는 바람이었고 표범이었 다. 언제라도 곧 출항할 준비가 되어 있는 아름다운 범선과 같았 다. 그를 정박하게 한 닻은 나였지만 그는 여전히 바다를 향하고 있다. 모처럼 연습이 일찍 끝나서, 사쿠라기를 놀래어 줄 마음에 쇼호 쿠로 발걸음을 옮겼던 나는 체육관 뒤쪽에서 사쿠라기와 루카와가 무언가를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자 다시 되돌아 나왔 다. 사쿠라기는 벤치에 앉아 농구공을 만지작거리며 열심히 이야기 하고 있었고, 루카와는 그 옆에 비스듬히 서서 사쿠라기의 머리칼 을 살짝 쓰다듬으며 뚫어져라 사쿠라기를 응시하고 있었다. 색이 묻어 날 듯한 붉은 머리칼을 매만지는 루카와의 손길은 너무나도 은근해서, 틀림없이 사쿠라기는 자신이 쓰다듬어지고 있다는 사실 조차 몰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런 식으로, 사쿠라기조차 자각하고 있지 못한 그를 향한 애정 을 내가 먼저 알아차리곤 하는 것은 꽤나 괴로운 일이었다. 어쩌 면 이것은 나 역시 그를 사랑하고 있기에 더욱 민감하게 감지해 낼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사쿠라기는 그것이 애정이든 우정이든 언제나 사람들로부터 악의 없는 순수한 호의를 홍수처럼 받고 있었 다. 단 한번이라도 사쿠라기와 이야기를 나누어 본 사람이라면 그
As Time Goes by 163 의 순정함과 야생적인 본능을 눈치 챌 수 있다. 비록 외견은 거칠 고 직선적으로 말하는 법 밖에 모르는 어린애지만, 그 안에는 항 구성을 지닌 불변의 영혼이 감추어져 있다. 그저 살아갈 뿐인 천연 그대로의 생명체를 진심으로 미워할 사 람은 없다. 길가에 피어 있는 꽃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웃음 짓게 되고 맑은 하늘을 바라보면 기분이 좋아지듯이, 사쿠라기에게는 보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행복해지게 하는 자연적인 힘이 있었 다. 그리고 틀림없이 그 까닭에 저토록 자석처럼 주변인들을 끌어 당기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이 기쁘지 않았다. 그를 사랑하는 것이 나뿐이었으면 했다. 그가 빛을 발하는 까닭 이 나였으면 했다. 결국 사쿠라기의 집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터벅터벅 길을 걸었 다. 열쇠는 얼마 전 사쿠라기에게 받았다. 너, 내가 없어도 여기 와서 기다리곤 하잖아. 너처럼 커다란 녀석이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으면 이웃에 폐가 된다고! 마치 꾸중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그건 부끄러워하고 있는 거였 다. 미토 같은 다른 친구들에게도 열쇠를 줬으면서 얼굴을 확 붉 힐 정도로 창피해하면서 열쇠를 건넨 건 나뿐이었다. 그 사실 자 체가 사쿠라기와 나와의 특별한 관계를 증명하고 있는 것 같아서 사쿠라기의 쑥스러움이 나는 진심으로 기뻤던 것이다. 잃어버리지 않도록 언제나 소중히 하고 있는 그 열쇠를 조심스럽게 꺼내어 문 을 열고 들어갔다. 사쿠라기의 연습은 꽤 오래 걸릴 듯해서 돌아 올 때까지 잠이나 자려고 교복 상의를 벗은 채 미적미적 이불 속으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로 밀고 들어갔다. 폭 파묻혀 얼굴만 내놓고 보니 저절로 TV위로 시선이 갔다. 얼마 전까지 그 소녀의 사진 액자가 놓여 있던 TV위 는 지금은 깨끗했다. 치우라고 종용한 적이 없는데도 어느 틈인가 그 사진은 사라져 있었다. 소녀를 상대로 가지기엔 조금 어긋난 감정이지만 나는 솔직히 이겼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사람을 유치 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유치함이 기쁘다. 눈을 감자 몰두해서 루카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사쿠라기의 모습이 다시금 떠올라왔다. 몇 번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보 아도 영상이 사라지지 않아서, 콧등에 잔뜩 주름이 생겨버릴 만큼 눈을 꽉 감았다. 지나치게 힘을 줘서 감은 눈 안쪽이 어지러웠다. 초조해하지 말자. 몇 번이고 다짐했다. 이 치졸한 질투를 사쿠라기에게 들켜선 안 된다. 온 세상에 그를 자랑하고 싶은 한편, 세상으로부터 그를 격 리시켜 오로지 나만을 인식하게 하고 싶다는 모순적인 감정으로 그 에게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된다. 대화의 내용이 궁금하다면 사쿠라 기가 돌아 온 후 물어보면 된다. 사쿠라기의 머리칼을 쓰다듬던 루카와의 손길이 마음에 걸린다 해도, 사실 나는 하루가 멀다 하 고 사쿠라기의 그보다 더한 곳을 쓰다듬고 있다. 어디서부터인가 피어오르는 불안을 애써 무시하면서 나는 잠을 청했다. 이어져 있 는 것은 나다. 센도. 센도! 부르는 소리에 눈을 깜박였다. 사쿠라기의 얼굴이 보였다 사라 졌다한다. 사쿠라기?
As Time Goes by 165 어눌하게 이름을 부르자 사쿠라기의 손이 다가와 이마를 어루만 졌다. 이제 그만 일어나. 벌써 9시 넘었어, 저녁 먹어야지. 애정이 퐁퐁 소리를 내며 솟아나는 친근한 어조가 기뻐, 비틀거 리면서도 벌떡 일어나 사쿠라기를 끌어안았다. 그래그래. 저 쪽에 앉아. 나를 매단 채 사쿠라기가 가리키는 쪽을 보니 편의점 도시락이 하나만 놓여있다. 얼굴을 바라보자 사쿠라기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나는 오면서 루카와하고 먹었거든. 집에 돌아와 보니 네가 있 기에 틀림없이 저녁 굶었을 것 같아서 다시 나가 사 가지고 온 거 야. 직접 만들어주고 싶어도 오늘은 피곤해서, 미안. 그리고 정말 피곤한 듯 사쿠라기는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그 쭉 뻗은 나른한 동작은 무척이나 유연하고 아름다웠지만 내게서 는 이미 식욕이 사라져버린 뒤였다. 하지만 한껏 가라앉아 버린 기분을 티를 낼 수도 없어서 시키는 대로 소반 앞에 앉아 도시락의 포장을 뜯었다.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밥을 가득 퍼 올려 우물거리 고 씹으면서, 나는 될 수 있는 한 자연스럽게 사쿠라기에게 물었 다. 루카와하고는 웬일로 저녁까지 함께 한 거야? 사쿠라기는 맞은편에 턱을 괴고 앉아 무심하게 허리춤을 긁으며 대답했다. 이번 겨울 선발 후에 함께 미국에 가기로 했었거든. 그 수속이 라든가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이야기할 게 좀 있어서. 툭, 하고 손끝에서 숟가락이 떨어졌다. 마치 내일은 비가 올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것 같아, 라는 날씨 이야기라도 하는 듯한 평이한 어조의 사쿠라 기의 말이 벼락처럼 다가와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나는 그런 얘 기를 들은 적이 없다. 루카와가 미국에 가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 는 언뜻 들은 것도 같지만, 그 때의 이야기는 틀림없이 사쿠라기 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미국 간다고? 응. 안 그래도 수속 끝나면 말하려고 했었어. 이번에는 테스트 겸 캠프에만 참가하는 거라서 한 달 정도 예정이지만, 만약에 합 격하게 되면 대학은 그 쪽으로 진학할까 해. 제대로 땅 위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사람다운 간결하고도 확고한 미래에 대한 의지였다. 정박되어 있던 배는 순풍이 불어오자 돛을 활짝 펴고 항해할 준비를 시작한 것이다. 깊은 바닷물에 잠겨 떠 내려가지 않도록 그를 지켜온 닻은 아무런 조짐도 없이 갑자기 끌 어올려졌다. 나는? 응? 나는!!!! 무엇이든 손에 잡히는 것을 집어던지고 싶은 파괴적인 욕망을 애써 억누르며 사쿠라기에게 소리쳤다. 나는, 네 미래에 포함되어 있지도 않았던 거야? 수속 끝나고 나면 말하려 했다니, 하다못해 내 의견을 물어볼 생각조차 없었던 거야? 갑작스레 폭발해버린 감정에 놀란 듯 사쿠라기는 앉은 자세 그 대로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난처한 듯이 어 깨를 움츠리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As Time Goes by 167 하지만, 이번엔 방학 때 잠시 다녀오는 거고, 굳이 미리 말해 야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무언가 특별히 달라지는 것도 아닌 데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야. 사쿠라기의 질문에는 정말로 의아하다는 궁금증이 묻어 있었다. 분하고 억울해서 그대로 산산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는 내 감정에 비해 사쿠라기는 잔잔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아파 죽을 것 같은데 사쿠라기는 내가 왜 아파하는지조차 이 해하지 못한다. 전혀 다르다. 내가 사쿠라기를 바라보는 방식과 사쿠라기가 나 를 바라보는 방식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한 달 이상을 떨어져 있 게 되는데도 사쿠라기는 변하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 이번의 미국 행을 계기로 앞으로는 수년 이상을 떨어져 있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굳이 말했어야 할 까닭을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숨 이 막혔다. 나는 싫어! 일분일초라도 떨어져있고 싶지가 않은데 루카와와 함께 한 달 이상이나 미국에 가 있겠다니. 안 그래도 불안한 데 이 이상 거리가 멀어졌다간 나는 틀림없이 말라죽어 버릴 거야! 못 가! 허락 못 해!!! 감정이 격해진 나머지 해서는 안 될 말까지 튀어나와 버리고 말 았다. 아니나 다를까, 내 말이 끝나는 순간 사쿠라기의 얼굴은 급 속도로 차가워졌다. 표정이 가신 그 얼굴은 라텍스 가면이라도 눌 러쓴 듯 무표정해서 나는 진심으로 두려워졌다. 사과해야 한다. 사쿠라기는 강요하는 감정에 얽매일 사람이 아니다. 그가 더 이상 화를 내기 전에 너무도 가슴 아파 홧김에 한 말이었다고 용서를 빌 어야 한다. 그 동안 켜켜이 쌓여 있던 우울이 갑작스레 폭발해 버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린 것뿐이라고, 내 진심은 이것이 아니라고 확실히 전해야 한다. 그러나, 보다 앞서 사쿠라기가 입을 열었다. 불안하다니, 무어가?.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네가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싫 어 너를 잃을까봐 초조해 지금 우리를 채우고 있는 사랑이 조 금이라도 흐려질까 무서워. 불안은 확실히 존재하지만 그 원인 중 어느 것도 현실이 아니다. 모두 나의 가난한 사랑으로부터 비 롯되는 흐릿한 공포인 것이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사쿠라기는 알아차린 것처럼 나를 몰아세웠 다. 떨어지기가 싫다니, 네가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라는 것은 물리 적 거리에 휘둘리는 그런 것이었어? 바로 눈앞에 있지 않으면 좋 아할 수도 없는 그런 야트막한 기분인 거야? 너는 지금 너를 좋아 하는 내 마음 뿐 아니라 네 자신까지 모욕했어! 허락이라니,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내가 내 인생을 결정하는 데 있어 누구도 허락 받아야 할 사람은 없어! 사쿠라기. 절망적인 기분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꽂혀오는 시선 은 그 어느 때보다도 냉랭했다. 논리적으로는 이해할 수도 있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 는 사람이 아니라서 몸이 떨어지는 것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 각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마음만 지키면 되는 거라고 바보처럼 순 수하게 진심으로 믿고 있다는 것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의 감정 메커니즘을 안다고 해서 나의 두려움이
As Time Goes by 169 희석되지는 않는다. 나는 사쿠라기처럼 강해질 수 없다. 사쿠라기 는 물과 같아서 그가 없으면 나는 헤엄칠 수가 없다. 사쿠라기는 대기와 같아서 그가 없으면 나는 숨을 쉴 수가 없다. 사쿠라기는 다리와 같아서 그가 없으면 나는 움직일 수가 없다. 그는 세포와 같아서 사쿠라기가 없으면 센도 아키라라는 내 존재는 구성조차 되 지 않는다. 안개가 걷힐 때처럼 순식간에 파삭 하고 흩어져버릴 것이다.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내일을 믿지 못할 뿐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시간과 함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조금씩 그 모습을 달리 해 간다. 사 쿠라기가 변하지 않아도 사쿠라기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변한 다. 나는 그것이 두려웠다. 내가 없는 곳에서의 사쿠라기의 모습 이 무서웠고, 그가 없는 곳에서 마음만으로 살아갈 자신이 없었 다. 함께 사랑하고 있는 이 순간 어째서 시간은 멈추어버리지 않 는 것일까. 갓 태어난 아이가 본능적으로 울음을 터뜨리는 것처럼 나 역시 오열을 터뜨리며 사쿠라기에게 매달렸다. 밀쳐내려는 사쿠라기를 억지로 붙잡고 물어뜯듯 키스했다. 사쿠라기는 모른다.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사쿠라기가 떠나는 순간 나는 죽지 않으려 해도 자연적으로 소멸해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는 매 순간 확신이 필요하다. 그가 나의 것이라는 확신, 그를 안 고 있다는 확신, 지금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 아무리해도 이 런 내 절박한 욕심이 전달되지 않는다면 몸이라도 결속되는 수밖에 없다. 아니라면 부디 누군가 내게 몸과 마음 이외에 연결될 수 있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는 부분을 가르쳐 줬으면 좋겠다. 3) 거친 소리를 내면서 사쿠라기의 티셔츠가 뜯겼다. 사쿠라기를 안고 쓰러져 구르는 와중에 몇 대인가 그에게 얻어 맞았지만 통증 을 느낄 수 없었다. 그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하려고 하는 행위 가, 반드시 그를 내게서 진심으로 멀어지게 하고야 말 이 행위가, 내게는 더욱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멈출 수는 없었 다. 아무리 이것이 사쿠라기를 모멸하는 짓이라 해도, 스스로를 영 원히 빠져나올 수는 없는 죄악감의 굴레에 던져 넣는 일이라 해도 바로 그 순간만큼은 나는 절실하게 그를 안고 싶었다. 지금이라도 이 흉포한 공격을 멈춰 간신히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해도, 결국 손안에 사쿠라기를 가둘 수 없는 나는 언젠가는 미쳐버릴 것 이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웃고 있어도 온 세상에 빛을 흩뿌리며 나날이 성장해 가는 사쿠라기를 바라보며 마음이 썩어 문드러져 갈 것이다. 차라리 세상에 사쿠라기와 나, 단 둘만이 존재하면 좋았 다. 하지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날의 섹스는 내가 사쿠라기에게 행한 처음이자 마지막 폭력 이었다. 끝까지 저항을 멈추지 않는 그를 잔인하게 뚫고 들어갔을 때, 사쿠라기는 결코 나를 보려 하지 않았고 나는 계속해서 울고 있었 다.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잊지 마. 3), Nervous Venus
As Time Goes by 171 돌아누운 등 뒤로 한겨울의 눈처럼 사쿠라기의 말이 흩날렸다. 먼저 버린 건, 먼저 의심한 건, 너야. 하지만 내게 있어 변한 건 없어. 부어오르고 까칠하게 터져 버린 입술로 감정의 편린조차 없는 밋밋한 어조로 선고한 사쿠라기는, 거친 행위 탓에 불안정한 걸음 걸이로 마치 막 걷기 시작한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집을 빠져나갔 다. 사쿠라기가 지나간 그 흔적은 괄태충이 지나가기라도 한 것처 럼 감성적으로 끈끈하고 뚜렷하게 젖어 나를 괴롭혔다. 군데군데 하얗게 말라붙은 정액이 내게 유죄를 선고하는 듯 했다. 나는 옷 을 입을 생각조차 못하고 팔다리를 자조적으로 내던진 채 창에 시 선을 보냈다. 희뿌옇게 흐려진 시야로 별빛조차 없이 온통 새카만 하늘이 들어왔다. 그 어둑한 하늘이 눈물 빛으로 밝아올 무렵까지 사쿠라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내게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온통 눅눅하게 습기 차 버린 머리로 생각하며 나는 부스스 일어 나 옷을 챙겨 입었다. 사지( 四 肢 )가 곰팡이가 슨 듯 삐거덕거렸 다. 받은 이후로 단 한시도 손에서 떼어놓은 적이 없었던 열쇠를 눈에 잘 띄도록 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위에는 사쿠라기가 나를 위해 사다주었던 도시락이 차갑게 식은 채 덩그러니 얹혀 있었다. 또 다시 눈물이 흐를 것 같아서 황급히 시선을 돌리고 현관으로 향하다 우연히 거울 속의 나와 눈이 마주쳤다. 거울 안에는, 단 하나의 희망조차 막 상실해버린 낯선 얼굴의 남자가 익지 않은 감 자처럼 파랗게 물든 표정으로 물끄러미 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자각했다. 틀림없이 이 날이 나의 소년기의 마지막 날인 것이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이제 나는 두 번 다시 아이가 될 수는 없다. 사랑을 믿을 수도 진심으로 살수도 없다. 모험을 할 수 있는 용기마저 잃었다. 사쿠라기와 함께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던 세상에 대한 온갖 환희 들은, 내가 어른이 됨과 동시에 달의 힘에 이끌려 저 멀리 사라져 갔다. 가시나무 위를 지나는 달팽이처럼 느릿하게 나는 그 방을 빠져나왔다. 그것이 그와 나의 최후였고, 사쿠라기는 루카와와 함께 미국으 로 떠났다. 새벽도 지났다. 진하게 내린 커피를 사기 컵에 가득 따르고 나는 테이블 위에 어 지럽게 흩어져 있는 잡지들로 손을 뻗었다. 잡지들은 패션에서부 터 건강,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고 있었지만 그 어느 잡지에든 공통적으로 실려 있는 기사는 최근에 갓 귀국한 일본계 NBA 스타에 대한 것이었다. 오른 손에는 컵을 들고 스윽 왼 손을 미끄러뜨렸다. 차가운 종 이 위로 사쿠라기의 새빨간 머리칼의 감촉이 느껴지는 듯 했다. 시간이 마치 십 년 전에 멈추어 있는 듯 유니폼을 입은 채 똑바로 눈앞을 응시하고 있는 사쿠라기의 옆모습은 여전히 대나무처럼 곧 고 아름다웠다. 그만이 영원을 통해 살아있는 것처럼 사쿠라기의 눈동자는 강한 의지로 빛났고 단정한 턱은 고집스레 치켜 올라가 그의 높은 자긍심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것이 단 한 번도 타협하 지 않고 끊임없이 최고를 향해 자신을 이끌어 온 남자의 얼굴인 것 이다.
As Time Goes by 173 살짝 고개를 숙여 굳게 다물려 있는 사진 속의 입술에 키스했 다. 매끄러운 종이의 무미한 감촉은 온통 모래로 서걱거렸던 사쿠라 기와의 첫 입맞춤을 상기시켰다. 눈을 감은 채 한참을 멈추어 있 다 고개를 들었다. 도미한 지 3년, 대학 졸업반이 되었을 즈음에 드디어 그 곳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사쿠라기는 루카와 와 함께 어렵지 않게 프로리그에 진출할 수 있었다. 개화는 사쿠 라기가 루카와보다 조금 늦었지만, 일단 피어나기 시작하자 사쿠 라기가 타고난 천혜의 운동신경은 일순간에 만개했다. 보는 사람 이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싶을 정도의 경이적인 신체 능력은 탄성 을 자아냈고 그는 코트가 마치 초원인 양 날렵하게 달리고 있었다. 나는 대학 진학과 동시에 농구를 그만두었지만 사쿠라기의 시합 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놓치지 않았다. 졸업 후의 시즌에는 스포 츠 기자인 자신의 입지를 이용해 본토까지 날아가 시합을 보고 온 적도 있었다. 같은 현 출신이라는 이유로 편집장이 아무리 권고해 와도 절대 직접 그와 인터뷰를 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을 통 해서라도 그늘 없는 시원한 웃음을 짓고 있는 그의 사진이 국내에 서도 뉴스거리로 다루어지는 것은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었다. 저 웃음을 위해 그 날의 사쿠라기와 나는 헤어졌던 것이다. 몇 년의 계약 기간이 끝난 후 그대로 구단과 재계약을 한 루카와 는 달리 사쿠라기는 귀국을 택했다. 그토록 화려하게 플레이를 즐 겨온 그가 아직 프로리그조차 없는 국내로의 이적을 결심할 까닭을 나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지만 그는 원래 자신의 뜻대로만 움직 이는 사람이었다. 그런 꼿꼿한 면조차 변함이 없어서 오히려 가슴 근처가 저릿해 왔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잡지를 소중하게 스크랩해 놓고 샤워를 한 후 전 날 세탁소에서 찾아 온 양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지갑에 갈무리 해 넣은 종이 에는 귀국 후 사쿠라기가 구입한 사택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언젠가 날개를 잃었던 숲, 이제 그 곳으로 돌아간다. 열 번을 되돌아 온 가을을 등지고 다시 봄부터 시작하기 위해 서, 순환하는 계절을 한 번 더 붙잡기 위해서, 사쿠라기를 찾아가 는 것이다. 그는 나의 청춘의 초상이었다. 내 삶의 가장 깊은 환희도 가장 진한 얼룩도 모두 그가 소유하고 있다. 내게 있어 시간을 되풀이 할 수 있는 기적이 주어진다면 그 열쇠는 반드시 사쿠라기가 쥐고 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는 계속해서 나의 시간을 지배해 왔기 때문이다. 그토록 멀리 떨어져서도 그는 언제나 내 심장을 틀어쥐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조차 변하지 않았다는 말 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말로 유예를 남겨놓고 떠난 사 람이었다. 그 잔혹한 진실은 내게서 잊고자 하는 의지조차 빼앗아 갔고 형벌과도 닮아있는 십 년 이상의 유배기간을 선사했다. 그리 고 나는 견디어 냈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물리적인 공간과 시 간의 격차를 넘어 온전히 지켜 내었다. 어릴 때의 나는, 생각했었다. 내일은 아무리 가깝게 다가와 있 어도 멀기만 해서, 그 시간의 틈새에서 무엇을 잃어버리게 될지 모르는 법이라고 시간이 흐르면 틀림없이 사람은 어디선가부 터 조금씩 변하게 될 것이라고. 그 빈한하기 그지없었던 사고는 나를 절망시켰고 사쿠라기를 다
As Time Goes by 175 그치게 만들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시간이 흘러 변하게 되 는 것과 마찬가지의 무게로 시간이 흐를수록 짙어지는 감정도 있다 는 것을 알고 있다. 시간이 흘러도 결코 퇴색하지 않는 마음이 내 게도 존재한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그 사실은 내가 사쿠라기와 맞바꾸어 깨닫게 된 것이다. 그 때 이미 그것을 알고 있던 사쿠라 기는 자신의 영속성을 알기에 그토록 손쉽게 내게 손을 흔들었지 만, 미처 영원을 믿지 못했던 나는 사쿠라기에게 상처를 입히고 자신도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월과 함께 나는 아 픔을 묻는 법을 배웠고 통증의 자리를 순수함으로 다시 메우고 싶 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저만치 밀려가 있던 추억이 다시 다가와 한 번 더 발목을 간질이 고 있다. 잊지 말라며 마음을 애무하고 있다. 과거를 감싸 안고 있는 것은 현실인 것이다. 멀리 돌아왔지만 이별을 통해 나는 배웠다. 계절의 끝 무렵이면 숲은 또 다시 봄을 준비하고 여름을 맞는다. 차로 지나는 너른 도로는, 처음으로 사쿠라기의 집을 찾아가던 그 날 달리고 있었던 좁은 골목길을 연상시켰다. 그에게로 가는 길은 내게 있어 여전히 오즈의 노란 벽돌 길이었고 사쿠라기가 머 물고 있을 곳은 틀림없이 투명한 신록으로 에메랄드처럼 빛나고 있 을 것이다. 한없이 들떠 내달러 가던 그 때와 정확히 같은 속도와 같은 기쁨 으로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며 창을 열어 놓은 채 시원한 바람을 온 몸으로 안았다. 세포가 곤두서 환희로 춤추고 있다. 사랑을 시작했을 바로 그 순간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는 예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측할 수 없는 결과보다도,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그를 보러가 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하늘 저 끝까지 날아오르게 했다. 잃 었던 열정이 되살아난다. 같은 땅 위로 돌아온 사쿠라기는 다시 한 번 나를 스물일곱의 무기력한 남자에서 희망으로 가득 부푼 열 여섯의 소년으로 만들었다. 몇 번이고 겹쳐져서 사쿠라기와의 일들이 물을 긷듯 솟아난다. 정말 좋아해. 울먹이며 텅 빈 운동장을 향해 고백하고 있는 소년의 뒷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지난 시간에 휩싸여 현실이 더욱 또렷하게 떠올 라 왔다. 정말 좋아해. 이번에는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해 보았다. 오랜 세월 동안 출 구를 찾지 못하고 언제나 몸속에서 돌고 있던 사쿠라기에 대한 마 음이 마침내 흐를 곳을 찾아 격렬하게 일어나기 시작한다. 통증에 가까울 정도의 벅찬 설렘이 다시금 온 몸을 잠식해왔다.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릴 것 같아서 나는 몇 번이나 핸들을 꽉 움켜쥐 고 한껏 흥분한 자신의 마음을 달래야했다. 드디어 시가지를 벗어 나 한적해 보이는 주택가로 들어서자, 속도를 떨어뜨리고 두리번 거리며 사쿠라기라고 적혀있는 문패를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시야에 그의 이름이 튀어 들어오는 순간 멈칫해 서 거칠게 차를 세웠다. 나는 될 수 있는 한 천천히 차에서 내렸 다. 조금 더 이 순간을 만끽하고 싶다. 다시 한 번 내 삶 중 가장 행복했던 그 때로 돌아가 순진하게 사랑하고 있었던 소년처럼, 수 줍음과 부끄러움을 꽃다발처럼 안아들고 문 앞에 섰다. 심호흡을 하고 아직 이른 아침의 햇살이 담뿍 비춰들고 있는 초
As Time Goes by 177 인종에 손을 올렸다. 벨이, 귀항하는 배의 고동소리처럼 울렸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환상이 가라앉으면 현실이 보인다. 그리고 지나간 현실은 때때로 환상 같은 법이다. As Time Goes by :: Hanamichi Sakuragi 돌이켜 보았을 때 그립지 않은 과거란 추억조차 되지 못하는 것 이다. 하지만 모래알마냥 흩어져 시간 너머로 사라져버린 지난 나날을 그대로 잊을지 아니면 소중한 기억으로 뇌세포 어딘가에 저장해 둘 지를 결정하는 것은 어느 정도 스스로의 선택에 달린 일이다. 그 리고 운이 좋게 체에서 걸러져 뇌리에 기억된 잊히지 않은 과거는, 상대와 자신이 살아있는 한은 다시 한 번 그 시간을 현재로 이어갈 기회를 부여해주기도 한다. 추억은 닫힐락 말락 하는 문틈으로 고 개를 빠끔히 내밀고 지나온 세월을 뛰어넘어 새로운 오늘이 되게 해달라고 커다란 눈으로 자신의 존재를 호소해 오곤 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과거가 현재와 가느다란 현을 타고 이어져 있다는 것은 사람에 따라 혹은 기억의 종류에 따라 축복이 될 수도 재앙이 될 수도 있다. 잊을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시간의 선물 과 같아서, 낡은 책들을 다락에 차곡차곡 쌓아놓듯 어제보다도 거 리가 먼 과거 속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지난 일들을 묻어 두는 것은 결코 부정적인 일만은 아닌 법이다. 그러나 시간의 실타래를 되감을 기회가 있다는 것은 언제나 내 게 있어서는 비틀거리는 몸을 기댈 수 있는 커다란 지팡이와도 같 았다. 비록 버리고 떠나온 것이라 해도, 저 멀리 두고 온 것이라
As Time Goes by 179 해도, 너무 달려와 버린 현실 속에서 언제라도 돌아가고 싶어. 라고 주문만 외우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행복했던 그 때로 날 아갈 수 있다는 희망은 현재의 내가 흔들리지 않고 오늘을 살도록 해 주는 원동력이었다. 다가오는 현실이 아무리 무겁고 각박해도, 잠깐 뒤를 돌아보고 행복했던 시절이 존재했었음을 확인하는 것만 으로도 나는 다시 앞으로 내달려갈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내게 있어 과거란 마땅히 잊혀도 좋을 시간의 부식물이 아니라, 언제나 거기 있어야 당연한 현재의 거울 같은 것이었다. 상처를 받았으면서, 상처를 주었으면서, 그래도 내가 이 굳건한 믿음을 십 년 가까이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은 먼지의 파편이 박혀있 는 것만 같은 회색조의 눈동자를 한 창백한 남자 때문이다. 나는 행복이 무엇인지 몰랐다. 삶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가파른 경사를 그리고 있는 울퉁불퉁한 돌계단 같았고, 나는 몇 번이고 넘어져 거친 층계참에 무릎이 부 서지곤 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정신적으로 지속적인 상처를 입 게 되면 마음이 먼저 죽는다. 아무리 심장이 팔팔하게 뛰고 있어 도 피는 혈관만을 타고 돌 뿐 더 이상 영혼까지는 산소를 운반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나의 유년기와 소년기는 초승달도 보름달도 아닌 시름에 젖은 그믐달이었다. 성큼 땅을 향해 기울어 부피를 잃고 가느다란 선이 되기만을 기다리는 그 처연한 달처럼, 나도 역시 바닥을 향해 기 울어진 마음을 가지고 비틀비틀 언젠가 필연적으로 찾아올 끝만을 기다리며 세상을 살고 있었다. 마치 두터운 마분지로 마름질 된 종이 상자 안에 갇혀있는 서글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픈 장난감병정처럼, 때로는 혹시 누가 나를 이곳에서 끌어내주지 않을까, 때로는 그냥 이대로 상자 째 태워지는 편이 좋지 않을까, 수도 없이 절망과 희망의 첨단을 오르내리며 빛을 낼 수 없는 반딧불처럼 우울하게 하루를 견디어 왔다. 그런데 단 한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 고 말하며 삶 속으로 파 고들어온 순간, 세상을 바라보는 내 시선은 일순간에 변하고 말았 다. 절망은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어제에 꼬리를 물고 저 너머로 사라지고, 극채색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화살 마냥 날카로운 오늘만이 남았다. 사람이란 단순한 건지 아니면 어 리석은 건지, 찰나의 행복만으로도 지난 모든 불행을 잊을 수 있 는 간교함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정말로, 나는 그 남자를 끌어안은 순간 깨달았던 것이 다. 나는 지금까지 불행 가운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행복해지는 과 정 중에 있었다는 것을. 그것은 기적이었고 내가 새로운 내일을 보게 되는 열쇠였다. 벅 차오르는 흥분으로 가득 차 나는 그의 손을 굳게 잡고 상자를 찢고 일어나 세상 속으로 달음질쳤다. 마음은 사랑만으로 불타올랐고 그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계절은 활짝 피어 신록 으로 빛났고 이마 위를 스치는 바람마저 우리를 축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솟구쳐 오르는 애정의 흥분으로 가득 차서, 가능하다면 나의 심장을 얇게 저며 그의 앞에 늘어놓고 핏방울과 함께 점점이 배어나올 내 사랑을 그에게 각인시켜 주고 싶었다. 바보처럼 그 시절의 나는 사랑은 시작이 전부인거라고 믿고 있
As Time Goes by 181 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시작된 사랑은 그 뒤에 더욱 날카로운 배덕의 칼날 을 숨기고 있었다. 그것은 연인이라 해도 결국 타인일 뿐 아무리 몸을 부비고 마음을 이어도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는 슬 픈 진실이었다. 이해하지 못해도, 알지 못해도, 사랑은 사랑만으 로 충분하다는 것을 열다섯의 나는 몰랐다. 두 사람이 함께 걷기 로 결심한 후에도 서로 보폭을 조율할 생각은 않은 채 그라면 당연 히 나의 걷는 습관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라는 이기적인 생각에 빠 져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꽃의 길에만 정신이 팔려, 어느새 그를 뒤에 남겨둔 채 혼자서만 내달리고 있다는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서 환상처럼 달기만 했던 나의 얄팍한 사랑은 어느새 등 뒤에서 어깨를 두드리고 있는 현실에 의해 무참하게도 조각났 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도 그 환상의 한 자락을 부여잡은 채 언젠가 그리운 그 때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낙천적으로 생각하는 내 가 있는 건, 그를 향한 나의 마음이 여전히 거미줄처럼 견고하고 촘촘히 짜여 자칫 잊힐 수도 있는 그와의 기억을 추억이란 이름으 로 세포 하나하나에 단단히 붙들어 매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마지막 순간의 그의 바삭거리며 찢어지는 백지장 같았 던 얼굴이 선명히 떠오른다. 한순간에 소년에서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았던, 통증에 얼룩진 그 얼굴을 두고 서늘하게 돌아설 수 있 었던 까닭은, 그 순간에마저도 그를 향한 내 마음과 나를 향한 그 의 마음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랑이란 세월의 흐름에 씻겨 먼지처럼 부서지기도 하지만, 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순간에서만은 놀라울 정도로 찬란한 영속성을 지니는 것이다. 그 리고 그 찰나의 반짝거림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에 무한의 정신을 부 여해준다. 그 광채를 믿었기에 나는 나 자신으로서 센도를 사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시작만큼은 당연하지도 평탄하지도 않았다. 부유하고 있는 정신과는 반대로 신체의 아픔을 겪어 본 적이 거 의 없는 내게 있어서 부상이란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물리 치료를 시작할 때마다, 뜨거운 통증이 전류처럼 내달려가는 척추보다도 나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던 것은 지금 이 순간 다른 사람들은 코트 위를 바람처럼 달리고 있을 것이라는 현실이었다. 나올 테면 나오라던 루카와의 얼굴과 자신을 이기려면 죽도록 연습하고 오라던 센도의 얼굴이 번갈아 뇌리를 스쳤고, 나의 정신 은 꼭대기로 달음질한 후 다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단 한 번 도 무언가를 이토록 격렬하게 달려가 붙잡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 이 없었다. 귀여운 여자아이에게 반해 시작하게 된 농구라는 것은 어느새 내 심장 한 귀퉁이를 움켜쥐어 이만큼이나 나의 마음을 빼 앗아가 버렸던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기대 받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그 누구 에게도 연루되지 않고 마치 흙에서 태어난 것처럼 홀로 세상위에 발을 딛고 서 있었던 나에게 땀을 흘리고 연습을 해서 자신의 힘으 로 얻어내는 결과라는 것은 치명적인 독이 될 정도로 달디 달았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내리닫고 마침내 혀끝에서 느껴본, 노력이 현 실이 되는 순간의 환희는 너무나 커서 나는 진심으로 농구에 매진 하게 되었고 그 안에서 센도를 만났다.
As Time Goes by 183 그를 처음 보았을 때의 나는 투지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나의 정면에서의 천재 선언에 비웃음이나 분노를 돌려 주지 않은 사람은 료난에서는 그 녀석이 유일했다. 인정해 주는 척 눈매를 가늘게 접으며 흘리는 그 실낱같았던 웃음이 마치 여유 처럼 보여서 혼자만의 경쟁심에 불타고 있던 속은 더욱 끓어올랐 다. 꺾고 싶다는 욕심으로 온 몸의 피부 한 조각 한 조각까지도 달 아올라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운 열을 가지고 그와 코트에 마주섰 을 때, 나는 마치 줄타기를 하고 있는 불안한 광대 같은 마음이었 다. 아슬아슬한 곡예를 선보이고 있다는 황홀감과 자칫하면 이 가 느다란 선 위에서 땅으로 추락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교차하 고, 그 반어적인 감정은 나로 하여금 더욱 그를 끈질기게 좇도록 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 봐도 그 순간의 나로서는 그를 이길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게 되자 나는 정말로 분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아마도 시합의 종료를 알리던 그 호루라기 소리는 평생이 가도 잊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 인생에 있 어 몇 안 되는, 그 전까지의 나 자신에 커다란 마침표를 찍는 상징 적인 소리였다. 처음에는 내심 농구를 만만히 보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으나, 실상 규칙이 있는 싸움이라는 것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센 도와 나의 전쟁터가 코트만 아니라면 나는 절대 그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실제로 거리에서는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자존 심이 꺾이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농구는 달랐다. 거칠한 가죽 으로 이루어진 동그란 물체 하나가 보여주는 세계는 너무나 광활하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고 넓어서, 그 안에서 만나게 되는 녀석들은 모두가 나보다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도저히 농구를 그 만둘 수가 없었다. 바닥보다도 꼭대기가 멀다는 사실은 내 영혼의 극단을 아슬아슬하게 건드렸고, 목표로 할 곳이 있다는 것은 무료 한 삶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아직 보지 못했던 경치와 미처 경험 하지 못했던 자극이 농구 안에 있었다. 그러나 나의 첫 시합은 미 지의 세계에 자신만만하게 뛰어든 나의 패배였다. 그리고 이 날을 경계로 내 목표에는 루카와를 꺾는 것에 센도를 쓰러뜨리는 것 하 나가 더해졌다. 드리블이나 패스 연습을 할 때에도, 루카와의 주변을 압도하는 강렬한 플레이에 속을 끓이며 남몰래 슛 연습을 할 때에도, 머리 한 구석에서는 늘 센도가 웃고 있었다. 하늘로 솟은 머리칼의 끝 을 산들산들 움직이며 마치 갓 가을이 시작되는 어느 새벽의 바람 처럼 소슬하게 웃고 있는 그 얼굴은 마치 만지면 손자국이 남을 듯 선명해서 패배의 쓰라림에 젖어있는 나를 더욱 괴롭히곤 했다. 료 난과의 연습시합 이후로 내 농구의 끄트머리에는 항상 센도가 서 있게 된 것이다. 어느새 그는 내 농구의 길에 있어서의 이정표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다음에는 절대 지지 않겠다고 수만 번의 다짐을 하고 기 력을 모두 끌어내어 돌진한 끝에, 비록 1대 1로는 아니었지만 마 침내 현 대회에서 료난에게 이길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결과로 드 디어 전국에 진출해 이 천재의 데뷔를 만방에 알리려던 찰라, 몸 이 움직이지 않게 된 것이다. 의지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는 것은 생각 이상의 고통이었다. 사
As Time Goes by 185 진 촬영 후 무너지듯 쓰러지는 내 몸을 받치면서 요헤이는 절규했 다. 여우까지도 창백해진 얼굴로 멍청이. 라고 토해내듯 속삭 이며 나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이 지독하게도 바보처 럼 보여서 이 천재를 우습게보지 말라고 한 소리 해 주고 싶었지 만, 입가에서는 단속적인 신음만이 새어나왔다. 눈을 감자 눈꺼풀 의 안쪽에 센도의 그 메마른 낯이 새겨져 흔들렸다. 얼굴이 온통 일그러져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울음을 꾹 참고 있으려니, 요헤이 가 두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감싸며 단호하게 말했다. 농구 좋아하지, 하나미치? 이제 와서 무슨 소리인가 생각했다. 말로는 나오지 않는 대답을 고개를 끄덕여 간신히 표현하자 요헤이는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애 써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재활훈련도 잘 이겨낼 거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도, 무서워할 필요도 없어. 너는 천 재고, 아이언 바디니까. 맹세처럼 또박또박 끊어서 말하는 요헤이의 목소리를 끝으로 의 식이 끊겼다. 하지만 추호의 망설임도 두려움도 용납하지 않는 그 목소리는 내 가슴에 또 하나의 다짐을 새겼다. 쓰러질 수는 있다. 하지만 쓰러진 채로 머물 수는 없다. 용기를 불러들이며 귓가에 머무는 요헤이의 목소리 덕에, 그리 고 번갈아가며 떠올랐다 사라지는 루카와와 센도의 얼굴 덕에 나는 끝까지 의지를 가지고 힘들고 지루했던 재활훈련을 마칠 수 있었 다. 아픔에 망설이고 있을 시간 따위는 없다. 루카와는 농구하고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있다. 센도도 농구하고 있다. 그리고 드디어 다시 한 번 센도를 꺾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마음먹은 대로 점프할 수도 달릴 수도 있었지만, 손끝의 감각만 은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틀림없이 성공이라고 생각한 슛이 몇 번이나 튕겨 나가는 것을 오랜만에 복귀한 연습에서도 뼈저리게 느 끼고 있었던 나는, 어쩔 수도 없었던 공백의 시간이 증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 몸에 익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 은 마치 한사리의 썰물처럼 부상과 함께 순식간에 빠져나갔던 것이 다. 그리고 몇 달만의 료난과의 시합에서, 쇼호쿠는 또 다시 졌다. 내가 복귀하기 전의 몇 번의 연습시합에서는 어찌어찌 이겼던 것도 같은데, 오늘의 센도는 무언가 다른 때와 긴장감이 달랐다며 료칭은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그 녀석은 정말로, 어딘가 들떠 머 리를 솜사탕에 처박은 아이 같은 표정으로 패스를 하고, 달리고, 슛을 넣었다. 그리고 힘든 플레이를 성공시킬 때마다 반드시 고개 를 돌려 나를 바라보고 웃었다. 그 함박눈 같은 웃음은 내 기억 속 에 남아있는 그것보다 더욱 뚜렷하고 밝았다. 칭찬이라도 바라는 것 같은, 한 편으로는 일부러 신경을 건드려오는 것 같은 센도의 표정이 너무나도 분해 있는 힘껏 기운을 담아 노려보면, 헤실헤실 풀어진 얼굴로 행복한 듯 표정을 허물어뜨렸다. 마치 다랑어 토막 을 물고 있는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쉴 사이 없이 센도는 움직였고 쇼호쿠에게 남겨진 것은 1점차의 패배였다. 입 안 가득 쓴맛이 퍼 졌다. 이를 힘껏 깨무는 동안 안쪽의 살까지 같이 씹혔는지 철분 섞인 피 맛이 느껴진다. 사람의 힘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일이란
As Time Goes by 187 것도 확실히 존재하지만, 그 순간만큼 부상 자체를 원망스레 되새 겨 본 적이 없었다. 땀을 씻어내고 다시 교복으로 갈아입은 후 인 사를 하기 위해 마주 서자, 센도는 어째서인지 시합에서의 달뜬 표정은 싹 지운 채 망설임과 번잡함이 묻어있는, 산 채로 태워진 시체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어머니가 마지막 순간에 보였던 표정과도 닮아있어서 나 는 순간 그의 그 회색 담벼락 같은 눈빛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 다. 멍하니 쳐다보자 그가 머뭇거리는 몸짓으로 내 소매 춤을 잡 아당기며 낮게 사쿠라기. 하고 불렀다. 몸이 가늘게 떨렸다. 짙고 갈라진 음성으로 불리는 이름이 마치 타인의 그것처럼 들 렸다. 한동안을 아무 말 없이 마주하고 서 있자, 우리 학교의 부 원들은 센도가 내게 볼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별다른 참 견 없이 먼저들 돌아갔다. 가을이 시작될 무렵의 운동장에서 발로 먼지바람을 일으킨다. 고개를 숙인 채 물었다. 할 말 있었던 거 아냐? 기다려도 대답이 없다.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라 초조해져 있던 나는 이번에는 얼굴을 들고 짜증스럽게 센도를 바라보았다. 센도 의 시선이 조금 흔들리고, 저기, 그러니까. 라며 머뭇거리 던 그가,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눈앞이 캄캄해져 이게 뭘까 생각한 순간 입 안으로 뜨겁고 까칠 한 센도의 혀가 파고 들어왔다. 조금 전 생긴 상처에 다른 사람의 타액이 닿아 입 안이 저려온다. 손으로 밀쳐보려 했지만 나의 두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팔을 움켜쥐고 있는 센도의 마른 손은 의외로 단단해서 좀처럼 풀 어지지 않았다. 몇 번이나 젖은 소리가 울렸다. 일렁이는 모래바 람처럼 거칠고, 부딪힌 이가 아플 정도로 뜨겁게 키스하던 센도가 마침내 입을 떼었을 때, 서로의 혀끝에서 이어진 타액이 길게 늘 어졌다. 센도의 턱에 달라붙어 있는, 석양을 받아 밀감 색으로 빛나는 액체를 보면서 나는 울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지끈지끈 울려오는 통증과 뒤죽박죽 엉킨 머릿속이 하나로 융합해 폭발 직전의 화산처럼 끓고 있었다. 잊고 싶은 과거가 현재와 뒤 엉켜 어지러운 곡선을 그렸다. 불안한 얼굴로 서 있는 센도의 윤 곽에 아버지를 바라보던 어머니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견딜 수 없 는 표정으로 센도를 바라보자 그의 얼굴은 마치 녹아내린 플라스틱 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그가 꺼 냈다. 좋아해, 사쿠라기. 순식간에 머리가 식었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좋아해!!! 말없이 뒤돌아서 걷는다. 센도의 비명 같았던 고백이 귓가를 깨 물고 있었지만 나는 차게 가라앉은 머리로 생각했다. 왜 나를 좋 아할 수 있는 거지. 내 어디 가 좋다는 거지. 하고. 알지도 못하면서 이해할 수도 없으면서 무작정 달려들듯 내뱉기 만 하는 저런 고백은, 그저 무책임할 뿐인 한 순간의 유희인거라 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주머니에 쑤셔 넣은 손끝은 조금씩 떨리 고 있었다.
As Time Goes by 189 나의 소망은 자유였다. 언젠가 TV에서 바람처럼 달려가고 있던 표범을 본 적이 있다. 낙조가 지는 황야를 배경으로 마치 다리에 이카로스의 날개라도 단 듯 날렵하게 질주하고 있던 그 동물은 너무도 매혹적이어서 나는 언제부터인가 저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닮고 싶다고 생각해 왔다.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목적조차 없이 그저 달리는 것 자체 에 몰두하고 있는 것만 같은 탄력 있는 모습은 곧 나의 이상이 되 었다. 나도 그렇게 거칠 것 없이 물처럼 살다 물처럼 가고 싶었다. 반 드시 이루어내야 할 목표도 삶에 대한 깊은 고민도 없이 그저 죽을 때까지 달리다 체력이 다하면 생을 마치는 그런 본능적인 삶을 살 길 바랐다. 어머니도, 몇 년 전 과로로 쓰러져 죽어버린 아버지도 모두 잊고,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에 만족하며 지는 석양을 배경으 로 일각수처럼 달리고 싶었다. 곁에서 함께 달리는 누군가가 있어 도 좋고 없어도 좋다. 달리고 있는 길이 갈림길이어도 좋고 하나 로 이어진 길이라도 좋다. 그저, 무겁게 발목을 잡아끌고 있는 현 실로부터 벗어나서, 몸에 걸친 모든 감정과 욕심을 버리고 머리를 바람소리로 가득 채운 채 비워진 생을 살고 싶었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주어졌던 모든 것이 족쇄가 되는 데는 그 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의 어머니는 자살했다. 그녀는 선천적으로 폐를 앓고 있었고 신경쇠약 증세까지 있었으 며 나의 아버지는 다혈질의 의심 많은 사람이었다. 빛이 떠오르면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금세라도 사라질 듯한, 마치 무지개로 만들어진 것 같았던 어머니 에게서는 병원의 약 냄새가 끊일 날이 없었고 아버지는 자신이 그 녀를 잃게 되지 않을까 언제나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건대 아마도 아버지의 어머니를 향한 그 끊임없 고 집요했던 의처증은 물리적인 죽음으로 그녀를 떠나보낼 수도 있 다는 가능성에 대한 반동이었던 것 같다. 나날이 파리해져가는 안 색을 보며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오래 그녀를 곁에 두고 싶다 는 욕망으로 가득 찬 아버지의 마음에는 틈이 생겼고, 그 낙차가 그로 하여금 단 한순간의 그녀의 부재도 견디지 못하게 만들었다. 원래 몸이 약하다 해도, 어린 시절의 나는 그녀가 누군가를 만나 기 위해 외출하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의 결혼 뒤 에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우리 가족은 교류하는 친척들도 없었고, 마치 도시 속의 섬에 거주하는 것처럼 사람들과 외따로 떨어져 살았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웃 간의 사귐 쯤은 있을 법 도 한데 아버지는 어머니가 자신만을 보기를 원하고 있었다. 세상 이 온통 어머니를 앗아갈 사악한 것들로 가득 찬 것처럼 아버지는 어머니를 격리시켰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말에 묵묵히 따랐 다. 어머니의 둘레에는 보이지 않는 쇠창살이 쳐져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실은 둘이서도 살 수 없 다. 그런데 아버지는 심지어 어머니가 당신 없이 혼자 병원에 다녀 오는 일에조차 민감한 반응을 보였고, 아버지가 그녀를 의심하며 소리칠 때마다 어머니의 낯빛은 조금씩 죽어갔다. 조금의 물기라 도 닿으면 녹아버릴 소금인형 같았던 어머니를 아버지는 언제나 울 렸다. 일방적인 질책과 호통의 끝에 온 세계에 울릴 듯한 거센 굉
As Time Goes by 191 음을 내며 문을 닫고 나가버리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어머 니의 눈에선 핏빛이 읽혔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보다는 하 루하루 죽어가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분함을 담고 있는 절망적 인 색이었다. 어머니는 어린 나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아 버지의 행동에 대해 화를 내지 않았다. 묵묵히 아버지의 폭력을 받아들이고 창자가 끊어질 만큼의 애절한 시선으로 닫힌 문을 응시 했다. 그것이 바로 내 유년시절의 온통 차지하고 있는 기억이다. 그리고 그녀가 목을 맨 것은 병원으로부터 더 이상의 치료는 무 의미하다는 사형선고를 받은 바로 그 날이었다. 병원이라는 것은 대체로 사람을 질환 이상으로 지치게 하는 것 이다. 병을 낫게 하기 위해 그 병 이상의 고통을 강요하고 살아야 할 것을 종용하면서도 끊임없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불어넣는다. 하지만 현관에서부터 드리워져 있는 온갖 화학약품의 냄새에 찌 든, 세상이 온통 환자로 가득 찬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무채색의 건물을 집보다도 자주 드나들면서도 어머니는 자신을 포 기하지 않고 있었다. 몇 번의 밤, 통증에 바닥을 긁어대고 몸을 뒤틀며 신음할 때조차도 어머니는 꺾이지 않는 시선으로 자신의 고 통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삶에 대한 그 의지가 자신을 믿지 못하는 남편에 대한 사랑을 지속하는 힘이 되었다. 부러지고 부당 하게 몰아세워지고 상처에 눈물 흘리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품어져 나오는 독기에 조금씩 심장을 죽여가면서도, 어머니는 세 상을 버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랑하고 있는 한, 아직 걸 수 있 는 희망이 남아있는 한, 그녀는 넘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의사의 이제 됐다. 는 한 마디로 그녀는 무너졌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진찰 후에 조용히 집으로 돌아와 망설임 없이 의자 위에 올라선 그녀는 올가미에 목을 걸기 전 단 한 번, 의아한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어린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 때는 아직 어려서 모 든 것을 시간이 흐른 후에야 이해할 수 있었던 나였지만 그 순간의 어머니의 표정만큼은 마치 낙인처럼 심장에 새겨져 잊을 수가 없었 다. 너무나도 슬퍼 보이는 하지만 어딘가 안도의 웃음을 띠고 있는 것 같은, 손가락으로 긁으면 돌가루가 떨어져 내릴 만큼이나 오래 된 벽돌담의 눈으로 그녀는 한참을 나를 응시했다. 한 때는 풍성 하게 늘어져 있었을 담쟁이덩굴조차 벌레에게 파 먹혀 세월에 부식 된 지저분한 벽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민낯의 얼굴로, 그녀는 그렇게 죽었다. 그리고 좋아해. 라고 공중에 흩뿌려진 물방울처럼 속삭이던 센 도의 얼굴은 그녀의 그 표정을 똑 닮아 있었다. 그래서 언제나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던 나는, 처음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혹시 그 순간 그녀가 나에게 마지 막으로 남기고 싶었던 말은, 실컷 화를 터뜨린 후에 그렇게 행동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혐오하며 도망치듯 나가버리는 아버지의 등 을 향해 고백하고 싶었던 말은, 센도처럼 좋아해. 가 아니었을까 하고. 그것은 내가 마침내 갖게 된 최초의 희망의 불씨였다. 짝사랑이야, 나도. 씁쓸함이 섞이긴 했어도, 나는 센도의 가슴에 상처 내는 것을
As Time Goes by 193 망설이지 않았다. 나는 사랑의 기쁨을 믿지 않는다. 어머니의 곁에서 떨어질 수 없어 그녀와 자기 자신 모두를 괴롭히던 아버지는, 아이러니하게 도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에 집에 없었다. 살을 발라내는 괴로움 속에서도 아버지에 대한 사랑만은 희석되지 않았던 어머니조차 끝 내는 죽음의 강 너머로 도망쳐 버렸다. 내가 보아 온 사랑이란 발 전적인 것이 아니라 폐쇄적이고 음울한 것이었다. 서로에게 마음 을 바치면서도 영혼 언저리만을 맴돈 채 핵에는 닿지 못하고 재가 바람에 날리듯 소멸해버렸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로 나는 강렬하게 사랑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다고 바랐다. 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사랑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동경하는 사랑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청결 한 비누향이 풍기고 풋풋한 어린아이의 미소를 잃지 않은 노오란 풍선 같은 소녀들에게만 시선이 갔다. 그것은 나와는 가장 먼 극 단의 끝에 서 있는 순수여서 당연히 잘 될 리는 없었다. 이 의미 없는 고백 행진은 진정한 연애도 하물며 유사 연애도 아니라는 것 을 알면서도 나는 쉼 없이 반하고 잊히고 다시 반하고 또 한 번 버 려짐을 반복했다. 그러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다. 같은 일이 반복 될 때마다 상처는 늘어갔지만, 그 따끔따끔한 통증만으로 나는 내 가 살아있음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눈물 뒤에서 다시 한 번 희망을 찾듯 누군가를 소원했다. 말하자면, 거짓 고백과 거짓 울음으로 진짜의 표정을 감춘 채 남몰래 갓 사춘기가 시작된 소녀처럼 운명적인 사랑을 꿈꾸고 있었 던 것이다. 첫 눈에 이 사람이다 하고 알아볼 수 있는 사랑, 내 가 먼저 찾지 않아도 나를 찾아내 줄 사랑,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구속하지 않고 바람처럼 자유롭게 해 주는 사랑. 하지만 센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어머니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해도 센도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내 가슴 속 에 있는 폐허도, 떠들썩하고 과장된 행동 속에 숨어 있는 핏빛 울 음도 무엇 하나 알 리가 없다. 나를 끝없이 과거로 돌아가게 하 는, 위장약의 신경질적인 파란 포장과도 같은 센도의 표정은 볼 때마다 내 상처의 말단을 자극해댔다. 그래서 나도 그에게 칼날의 끝을 들이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한 번 물었다. 너는 도대체 왜 나를 좋아하냐?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센도는 조금 당황한 듯 한참을 망설였다. 시선이 방 안을 배회하고 몇 분을 머뭇거리더니 결심한 것처럼 똑 바로 내 눈을 응시해온다. 그 시선은 갓 털이 돋기 시작한 복숭아 의 여린 껍질처럼 간지러웠다. 나는 숨을 멈추고 그의 대답을 기 다렸다. 아프리카의 석양 같아서. 두근 심장이 울렸다. 저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프리카의 석양을 등에 지고 바람처럼 뛰어가는 표범 같아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나한테는 그런 네가 생전 처음 본 살아있는 존재 같아서.. 그래서. 눈앞에 언제나 꿈꾸던 이상향이 피어올랐다. 낡고 색 바랜 벽지 위로 사바나의 초원이 떠오르고 센도의 등 뒤로 질주하는 표범의 환상이 보였다.
As Time Goes by 195 미칠 것 같았다. 울고 싶고 죽고 싶었다. 가장 들키고 싶지 않 은 일을 들켜버린 어린아이처럼, 슬픔과 분노가 동시에 임계점을 넘어 뜨겁게 범람해왔다. 마치 눈을 뜬 채로 해부되어 찢겨진 배 를 벌린 채 핀셋으로 고정된 개구리마냥, 그저 망연하게 메스를 쥔 남자를 바라다본다. 피부와 근육을 뚫고 뼈 마디마디를 부수며 가장 깊숙한 곳까지 그가 침투해 온다. 내 심장 안에 센도의 눈이 들어있었다. 가장 바랐던 일이었다. 그러나 가장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소원했던 자유로운 짐승의 이미지는, 나의 삶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오히려 간절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죽어버린 어머니의 얼굴로 센도가 말한다. 내가 그토록 원했던 모습을 내 안의 어딘가에서 발견하여 당연한 것처럼 그렇기 때문에 내가 좋다고 말한다. 그래서 마지막 영혼 한 자락까지도 내어준 것처럼 두려워졌 다. 무의식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내미는, 지금 바로 눈앞에 존 재하는 남자가 무서워 견딜 수가 없었다. 공포에 마음을 바들거리 며 금세라도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 것 같은 나약함을 다잡고 간신 히 고개를 들어본다. 그러자 또렷하게 선이 그어진, 극도의 긴장 을 담은 채 슬픔으로 넘실대고 있는 센도의 눈동자가 시선에 잡혔 다. 그 담갈색의 동공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쓰고 있던 가식의 가면이 벗겨져버린 나의 맨얼굴을 고스란히 담아 내고 있었다. 그렇기에 알아차렸다. 이 남자는 똑바로 나 를 응시하고 있다. 광장에서 혼자만 벌거벗고 있는 것 같은 충격에 굳어버린 나 자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신을,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은밀한 부분을, 나의 욕망을 넘어 희망까지도 어느새 한 손에 그러안아, 나를 바 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 시선으로, 나의 소망을 현실로 만들어 주 었다. 그것은 마치 뒤집어진 거울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 안에서 내가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의 심상을 끌어냄으로써 센도는 그 순간만큼은 나를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존재로 만들었다. 지금 이라면 정말로 표범처럼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방금 전까지의 두려움이 물밀듯 사라지고 같은 무게만큼의 환희가 가슴을 채우기 시작했다. 양의 무한대와 음의 무한대를 빛의 속도로 반복하는 급격한 감정의 폭풍에 어리둥절했 지만, 굳이 범람해 들어오는 격렬한 기쁨을 억누르려고 하지는 않 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얼굴 붉히며 소망하던 운명을 찾았다고, 이 사람이라면 나를 다른 무엇으로 변화시키지 않고도 나를 사랑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굳건히 믿을 수가 있었다. 점점 빨라지는 심장 의 박동을 억누르지 못한 채 다시 한 번 센도를 바라보자, 그는 눈 조차 깜박이지 않은 채 울고 있었다. 약간 상기된 뺨 위로 꽃잎에 맺힌 이슬처럼 구르는 투명한 물방울은 만지기가 무서울 정도로 아 름다웠다. 이미 나의 마음이, 심장이, 그에게로 흐르기 시작한 것 을 눈치 챈 나는 즉시 표표한 감정을 얼굴에 덧씌웠다. 그리고 장 난처럼 말했다. 사실 남자한테 고백을 받은 게 네가 처음은 아니지만. 센도의 몸이 작게 떨린다. 그가 생각하는 것이 잡힐 듯이 보여 나는 조금 웃었다. 동요를 감추고 손을 뻗어 그의 눈물을 닦는다. 너처럼 이상하고도 간지러운 고백은 처음이야.
As Time Goes by 197 단순한 언어가,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온 것이다. 센도의 고백은 형태를 가진 손이 되어 나의 몸을 어루만지고 마음까지 감 싸 안으며 쐐기를 박았다. 이 손을 잃지 않았으면 하고 나는 진심 으로 소원했다. 그는 한없이 헝클어지고 뒤죽박죽 엉켜 엉망진창 인 내게서 가장 무거운 매듭 하나를 풀어내었다. 발목을 붙들어 매고 있던 쇠사슬이 사라진 것처럼 몸이 가뿐해지는 것을 느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음에도 나를 바라봐주는 사람의 시 선 하나로 내 자신의 본질이 드디어 질긴 올가미에서 풀려난 종달 새처럼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은 달리 다른 말로는 표현할 수 없 는 기적 그 자체였다. 사랑 자체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내게 있어 센도의 두 번째 고백 은 넓고도 곧은 길을 내 눈앞에 열어 준 것과 마찬가지였다. 몸속 이 조금씩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이미 센도가 돌아가고 없는 방 안을 둘러보던 눈길이 TV 위에 얹힌 액자에 머물렀다. 피식, 작 게 웃음 짓고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액자를 치워버렸다. 이제 더 이 상 자신에게 억지로 증명할 필요가 없다. 남 보기에 충분히 사랑 스러운 작은 패랭이 꽃 같은 여자아이에게, 나도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첫 눈에 반할 필요가 없다. 나는 진심으로 좋아할 수 있는 상대를 손에 넣었다. 나를 배신하지 않 을,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났 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노력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센도가 보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기뻐서, 바보처럼 그 때까지만 해도 타인이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굳게 믿고 있던 자신의 신념을 일순간 에 던져버리고 센도의 본질을 파악하려고도 그에게 내 속을 보이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때부터 이미 우리의 발밑은 조 금씩 부서지고 있었다. 살다보면 불현듯 깨닫게 되는 진리가 있다.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데도 일상에 파묻혀 평소에는 잊게 되는 것들이다. 예를 들면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 우리는 다른 생 물의 목숨을 먹고 산다는 것, 누구라도 맞으면 아프다는 것 등이 다. 하지만 저런 사실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인데도 항상 실감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사실 이런 것들을 늘 깨닫고 있다면 인간 은 하루하루를 사는 것조차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죽는 다는 사실을 항상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다면 결코 희망찬 삶을 살 수는 없다. 지금 입 안에 넣고 위에서 소화시키고 있는 것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숨 쉬는 생명이었다는 것을 식사할 때마다 되 새겨야 한다면 틀림없이 영양실조에 걸릴 것이다. 그러나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세 번째의 진리다. 맞으면 아프다. 생명은 너나할 것 없이 상처 받으면 피를 흘린다. 악인이라 해 서 불행해도 좋을 까닭은 없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일단 태어났다면 모두 행복해질 권리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 사실을 간단하게 잊고, 자신을 위해 다른 생물의 희생을 강요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타인에게 상처 입힌다. 가끔 주위를 둘러보면 고의로든 무의로든 서로를 무관심의 톱날 로 갈아내고 말의 칼날로 찔러대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무리를 본 다. 처음부터 둘인 이상 어우러져 살아가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As Time Goes by 199 아픔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나, 서로를 피투성이로 만들기 전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자신과 다른 것이라도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관용의 자세다. 세상은 다양하다. 이 세계에 똑같은 것은 둘도 없다. 인종과 나 라와 성별을 넘어서 인간은 모두 개인이다. 그러므로 개인을 외국 인과 내국인, 흑인과 백인과 황인, 남자와 여자의 단위로 구분하 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자신이 사랑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이해할 수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구분하는 것도 옳지 않다. 사랑이란 감정적인 것으로 흐르는 대로 둘 수밖 에 없을 뿐 제어가 되지 않는 것이고, 처음부터 이해란 스스로의 위선을 포장하기 위한 허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랑해 줄 사람은 분명히 필요하다. 하지만 사랑해달라고 요구 한다고 해서 모두 사랑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해해 줄 사람은 필요하지 않다. 이해하지 않아도 나를 받아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깨닫고 나면 너무나도 자명한 이치를 나 역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서야 깨달았다. 센도와 나는 하나가 아닌데 나는 우리 둘을 하나로 생각했었다. 사랑이란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 라, 서로의 자아를 유지한 채 손을 잡고 걷는 것이다. 마음이 통 했다 해도 결국 남남인 것을, 지나치게 하나일 것을 요구하면 누 구라도 지쳐 버린다. 굳이 같을 필요는 없다. 자신을 몰라준다 해 서 원망할 것도 없다. 알리고 싶은 일이 있으면 이야기를 하고, 알 수 없는 일이 있으면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 다. 사랑은 논리도 아니고 사랑하는 법이란 이론이 있을 턱도 없 지만, 그래도 사랑하고 있으니까 모든 일이 만사형통이라고 생각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센도에게서 뒤돌아 설 때까지 이 진리를 몰랐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나와는 사 랑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랐던 센도를 이해하려 하지 않은 채 그를 절망의 끝까지 몰아붙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해도 어쩌 면 나는 같은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 첫사랑의 너울은 빛에 빛 나는 잠자리의 날개처럼 덧없이 아름다워서, 아주 작은 힘으로도 그것이 산산이 찢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보고 있던 사랑이 찬란했던 만큼, 그 뒤로 드리워진 그늘의 어둠을 깨달을 수 없었다. 더욱이, 나는 나를 폭력으로 짓누르고 나의 사랑마저 불안에 휩 싸여 부정하려 했던 센도를 아직도 용서하지 못했다. 다만 용서해 도 용서하지 않아도 분명한 것은 그를 생각하는 내 마음이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조금도 퇴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변함이 없다 는 말은 마치 나의 사랑을 위해 주어진 단어 같았다. 그리고 그 없이 살아온 십 년이란 세월의 거리와 그 사이 알아온 다른 이들의 수만큼, 강제적인 섹스를 통해서라도 자신의 의지와 나의 체온을 확인하려 했던 그 시절의 센도를 조금은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 까닭은 내가 아직도 센도를 향한 열을 단전 아래 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욕망이란 끝이 없다. 하나를 얻으면 둘을, 둘을 얻으면 넷을 원하는 것이 사람이라는 족속이다.
As Time Goes by 201 부상 후 잃어버렸던 농구 감각도 센도와 정기적으로 연습을 하 면서부터는 빠르게 돌아오고 있었고, 뒤돌아보면 언제나 구름 같 은 미소로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있고, 주위는 온기 가득한 눈동 자로 지켜봐주는 사람들로 북적한데도 나는 그만 전혀 생각지 않았 던 부분에서의 자신의 욕망을 인식하고 말았던 것이다. 뭐랄까. 얼굴을 약간 찡그리며 웃는 센도의 얼빠진 표정이나 문득문득 다가오는 마디가 두드러진 손가락 끝의 체온을 느낄 때마 다, 신체가 반응했다. 그가 머리칼을 쓰다듬어 오거나 어깨를 마 주 대 올 때면 저도 모르게 움찔 떨리는 몸을 감추기 위해 주먹을 꼭 쥐곤 할 때도 있다. 그리고 마침내 결정적으로 그 날이 왔다. 아마 계절이 막 바뀔 무렵이었을 것이다. 낚시라는 어울리지 않 는 듯 어울리는 취미를 가지고 있던 센도와 함께 바닷가에 다녀오 고 나서 교차로에서 헤어질 때였다. 신호기가 망가졌는지 넓게 뻗 은 십자로는 차들로 뒤엉켜 몹시도 소란스러웠고 주변 인도는 사람 들로 빽빽했다. 부두에서 낚시를 한 후에 모래사장에서 뒹굴며 실 컷 장난을 쳤던지라 센도의 옷에도 내 옷에도 모래 알갱이가 섞여 들어 버석거렸고, 둘 다 목덜미는 서늘한 기온에도 불구하고 땀으 로 젖어있었다. 그 때는 어서 집으로 가서 시원하게 씻고 잠들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내 눈은 반쯤 감겨 있었다. 마침내 서로 다른 각도로 돌아야 하는 모퉁이까지 왔을 때 센도는 피곤해 보이는 내 표정을 보고 살짝 웃더니 내게 빌려주려 가져왔 던 낚싯대를 자신의 어깨로 옮기며 벼락처럼 입을 맞췄다. 다만 1~2초도 되지 않을 짧은 시간이었는데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놀란 얼굴로 쳐다보자 센도는 머쓱한 웃음을 흘리며 바보처럼 웃었 다. 웃음이 사라지고는, 무섭도록 고요한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키스를 받은 때가 아니라, 그 표정을 본 순간 나는 발기했다. 당황해서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무작정 뒤돌아 뛰었지만 센 도는 아마도 도둑키스에 내가 화나서 그런 것이려니 생각하는지 별 다른 행동 없이 뒤돌아 가는 것 같았다. 잠깐 숨을 멈추고 돌아보 자 커다란 등 위에서 기다란 낚싯대 두 대가 흔들리고 있었다. 지 금까지 키스는 몇 번이나 해 왔어도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그리 고 무엇보다 나를 움직인 것은 센도의 행위라기보다는 얼굴이었 다. 치켜 올라간 내 두 눈과는 반대로 애교 있게 처진 눈매를 가졌 으면서도 오늘의 입맞춤 끝에 보인 센도의 표정에는 마치 중세의 수도사처럼 견고한 결벽이 묻어 있었다. 욕망이 고조되는 순간에 왜 저런 얼굴을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스치고 사정할 때도 마찬가 질까 하는 생각이 드니 급격하게 흥분이 솟아올랐다. 다시 집까지 달음질쳤다. 황급히 문을 닫고 주저앉아 자위를 했다. 눈을 감으 니 센도의 그 표정이 다시 또렷하게 떠올랐다. 조금은 괴로워 보 이는, 애써 자제하는 듯한 청렴한 얼굴이 더욱 흥분을 돋웠다. 마 침내 자신의 손에 분출하고 쓰러지듯 누워서, 까칠하게 올이 돋아 있는 다다미 바닥을 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나의 발정 메커니즘 은 센도가 가는 걸 보고 싶다는데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이런 생각 을 하는 나는 틀림없이 변태겠지 하고. 그 날 이후로 나는 빈번히 센도를 생각하며 하게 되었지만 그 사 실을 그다지 의식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 행동이 어색해진 것은 센도 쪽이었다. 그가 그렇게 행동할만한 까닭이 생각나지 않 아 나는 그대로 그를 내버려 두었다. 서로 만나는 횟수가 줄어든 것도 아니고 어차피 일상은 변함없었다. 그리고 그 날도 공원에서
As Time Goes by 203 농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센도가 이상했다. 원래 나만큼이나 운동량이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쉽게 지치지는 않는 그가 금세 숨을 헐떡거리고 녹초가 되어버린다. 혹시 몸이 안 좋은 게 아닌가 걱 정이 돼 머리칼을 쓰다듬자 그가 펄쩍 뛰며 내 손을 내리쳤다. 얼 얼한 통증보다도 격렬한 센도의 반응에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바라 보자 그는 고통스럽게 나를 바라보더니 화장실 쪽으로 어기적거리 며 뛰어갔다. 남겨진 채 망연히 뒷모습을 응시하다 정말로 몸이 안 좋은 거면 어떻게든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뒤를 따라 달렸 다.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센도를 부르려하자 안쪽의 문 하나가 약간 열려 있는 것이 보인다. 종류를 알 수 없는 예감에 소리 없이 다가갔다. 사쿠라기. 찢어진, 욕망에 잠긴 절박한 목소리가 들린다. 놀라서,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렇구나 싶은 묘한 안도감이 들어서, 열린 문틈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센도? 순간 전속력으로 달리다 담에 부딪힌 말처럼, 센도가 경련을 일 으킬 것만 같은 격렬한 동작으로 움직임을 멈추고 아연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떨리는 그 시선이, 자신을 제어할 수 없어 욕망 만을 좇고 있던 센도가, 좋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수습하 지도 못하고 말을 더듬는 센도의 곁으로 다가가 문을 닫았다. 그거,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거냐?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끄덕인다. 순간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사랑스러움이 솟구쳤다. 욕망에 몸을 태우는 것은, 만져지고 싶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고 열망하는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주저하지 않고 센도의 어깨 에 얼굴을 묻은 채 그의 손에 내 손을 겹쳤다. 조금씩 움직이자 센 도의 몸이 와들와들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표정을 들키지 않도록 더욱 얼굴을 파묻고 웅얼거리듯 말했다. 입으로는 못 해줘. 그리고 속으로 몰래 생각했다. 거짓말이야.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더라는 이야기는 흔한 일이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무언가를 안다 고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설령 자신 의 그 생각이 무한히 진실에 가깝게 접근해있다 해도 기실 그것은 자신만의 진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둘러싸여 살아간다. 생각하는 것도 보는 것도 느끼는 것도 모두 나 라는 필터를 거쳐 흡수되는 것이 므로 같은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이 백 명이라면, 그 사물에 대한 느낌도 백일 수밖에 없다. 그 격차는 사랑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 니어서, 어떤 이는 절대 사랑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다른 누 군가에게는 너무나도 절절한 사랑인 경우도 부지기수다. 그러니 결국 이 세상에는 사랑인 것도 사랑이 아닌 것도 없다. 모두 자신 에게 있어서의 감정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것이 격렬하게 휘몰아 쳐 일순에 몰려왔다 일순에 사라지는 폭풍 같은 것이든 아니면 샘 솟는 온천처럼 은근하고 지속적인 것이든, 사랑의 색은 개인의 특 성에 따라 달라지며 사랑하고 있는 동안의 마음가짐이나 행동도 당 연히 각각일 수밖에 없다. 사랑이 사람의 시야를 넓혀주는 것이라
As Time Goes by 205 면 그런 사실도 쉽게 깨달아 서로의 갈 길을 조금이라도 조율해 갈 수 있으려만 사랑은 잔혹해서 오히려 시야를 더욱 좁게 만든다. 그리고 일단 그 편협한 각도에 갇히고 나면 눈에 보이는 것은 자신 의 아집뿐 결코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조차도 알아차릴 수가 없는 것이다. 처음에는 불붙는 것 같았던 사랑도 그러한 단계에 들어서면 상 대마저도 의심하게 되고 이미 곁에 있는 사람을 더욱 구속하지 못 해 안달하게 된다.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랑보다도 묶이게 되는 사 랑으로의 길이 더욱 손쉽기에 대부분의 연인은 똑같은 파멸의 길을 걷는다. 헤어지는 원인은 제각각이라도 결국 본질은 하나뿐이다. 파국에 가까운 연인은 서로 상대가 변했다며 탓하고 이런 사람인 줄 몰랐다고 자신의 치졸함을 변명하지만, 실상 변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런 사람이리라 멋대로 착각하고 있던 자기 자신의 시각이 며, 그런 사람임에도 끝까지 그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스 스로의 안위에 대한 염려가 더욱 크기 때문이다. 원래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 대상의 근본이 어떤 것이든 전혀 관계가 없 다. 이것이어도 저것이어도 그저 좋아서 견딜 수가 없는 것, 그것 이 모든 사랑의 공통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애정의 언덕은 너무 높고 가팔라서 대부분의 사람은 오르기도 전에 포기해버린다. 그리고 청람색으로 익은 포 도를 뒤로 하고 투덜거리며 돌아서는 여우처럼, 어차피 인연이 아 니었다며 자기 최면을 걸고 미련마저 버린다. 슬프게도 인내는 대 부분 세월의 선물이기 때문에, 시간의 축복을 받지 못한 아직 어 린 연인들은 낮은 둔덕에만 도착해도 노력의 산길보다는 헤어짐의 평지를 택하게 되는 것이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그래서 운명적인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만 남을 지켜가는 것이다. 지금 함께 라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앞으로도 함께이기 위 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때로는 혹시 자신만이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닐까 불안감이 들어도, 사랑이라 생각하고 있는 이 감 정이 진정 옳은 것일까 의문이 생겨도, 온갖 의혹과 고뇌가 밀려 들어오는 그 순간에 해야 할 일은 사실은 상대와 스스로를 믿는 것 단 하나 뿐이다. 말은 쉬워도 인간은 마치 의심에서 태어난 동물 같아서 좀처럼 타인을 신뢰하지 못한다. 불확실한 내일만을 바라 보고 사는 틈에서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것은 그 이상으로 어렵다. 하지만 아무리 마음이 찢기고 상처투성이가 되어도, 결코 상대를 시험하는 일만은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상대와 자신 모두를 모 욕하는 것이며 찬란하게 빛나는 사랑을 순식간에 회색조로 바래게 만든다. 부모의 죽음을 보면서 서로 부딪히거나 표현하지 않는 사랑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지 깨달았던 나는 될 수 있으면 센도를 구속 하지 않으려 노력했고 그에게도 같은 것을 바랐다. 나는 조금이라 도 세상을 넓게 살고 싶었다. 좋아할 수 있는 것을 하나나 둘에 국 한시키지 않고, 그 중 어느 것 하나를 잃어도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손에 쥘 수 있는 것들을 차츰차츰 늘리고 싶었다. 마음은 우주를 여행하고 있었다. 눈에 미처 담지도 못할 정도의 광활함을 영혼에 새기고 새벽에 떠오르는 첫 별처럼 살기를 원했다. 하지만 아무리 높게 그리고
As Time Goes by 207 멀리 부유한다 하더라도, 결국 내가 돌아갈 곳은 하나였다. 배란 정박할 항구가 있기에 기나긴 항해를 떠나고 철새란 도래지가 있기 에 오랜 시간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센도는 나의 그런 기질을 불안해했다. 사랑의 순수와 결벽에 순교자처럼 젖어 있던 그는 세상을 둘이 서만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물리적인 거리에 집 착하고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것이 열여섯 소년의 사랑으로서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사랑이 종이로 만 든 날개처럼 찢겨져 나간 사람들의 파편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언제나 자유만을 바라며 하늘을 향해 끝없이 그네를 밀어올리고 있 던 4) 나 역시 슬프게도 센도의 불안을 이해하고 감싸줄 만한 여유 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나도 그도 헤어지기를 원하지 않았었지 만, 이별은 마치 그것마저 운명인 것처럼 우리에게 찾아왔다. 민물고기와 바닷고기는 뚜렷이 구분되지만, 간혹 바다에서 강으 로 강에서 바다로 일생 여행을 계속하는 물고기들이 있다. 그들은 결코 지금 머무는 곳에 안주하려 하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운 물줄 기를 타고 흐른다. 미국이라는 것은 내게 있어 그런 느낌이었다. 얼핏 사와키타와 루카와의 대화 속에서 엿들었던 그 나라는 지금 막 강 어귀에 도착 한 내가 앞으로 몸을 담그게 될 바다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미국행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었고 누군가가 그것 4),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에 대해 반대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부상 이후로 나를 대하는 태도가 상당히 바뀐 루카와도 내 유학 결심을 듣고 기뻐해주었고 한 발 먼저 도미했던 사와키타는 여러 가지 자료를 보내주며 독려해왔다. 예상치 못한 의견은 오히려 내 가 무슨 일을 결정해도 알아주리라 생각했던 요헤이에게서 나왔 다. 내가 캠프에의 참가에 대해 이야기 했을 때, 요헤이는 말없이 담배를 입에 물더니 기복이 사라진 목소리로 담담하게 물었다. 센도는? 응? 나는 진심으로 요헤이의 질문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리둥 절해 하는 내 표정을 보더니 요헤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울음 같은 한숨을 쉬었다. 쓸쓸해 할 거야. 뭐야. 요헤이, 바보. 쓸쓸하다면,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이와 떨어져 아 무렇지도 않을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 미국행은 그런 성격의 일 이 아니다. 더구나 센도가, 무엇보다도 나의 자유로운 본질을 사 랑한다고 말했던 센도가, 고작 물리적 단절감에 지리라고는 생각 할 수 없었다. 그는 나를 연처럼 날게 해 준다. 그리고 내 몸을 부 둥켜안고 있는 실의 끝은 언제나 센도가 들고 있는 얼레에 연결되 어 있다. 내 목표로 한 걸음 다가서는 여행이 우리의 사랑을 방해 하는 요소가 될 수는 절대 없다고 믿었다. 센도는 나를 알고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 날은 조금 더웠다. 연습 후에 루카와와 식사를 하면서 캠프
As Time Goes by 209 참가에 대한 수속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여니 커다란 농구화가 눈에 들어온다. 그 녀석이 왔나 싶어 즐거 워졌다. 마침 오늘에야 자세한 일정이 정해진 터라서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일이 확실해지면 바로 센도에게 말하고 싶어 캠프 이야 기가 나왔을 때부터 계속 초조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위해서 기뻐해 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이제 말할까 저제 말할까 들 떠 있었다. 마침내 확정된 사실을 알릴 수 있음이 반가워 센도를 부르려던 순간, 몸을 새우처럼 둥글게 말고 머리를 숨이 막힐 정 도로 이불에 파묻은 채 잠이 들어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긴장감이 라고는 전혀 없는, 고양이가 갖고 놀던 실몽당이처럼 무방비한 자 세로 잠들어 있는 것을 보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교복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편의점에서 입이 짧은 센도가 좋아하는 도시락을 골라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한참을 센도의 자는 모습을 바라보다, 어둑해질 때가 되서야 그의 몸을 흔들어 깨웠다. 센도. 센도! 사쿠라기? 아직도 잠이 덜 깬 듯 또렷하지 않은 시선으로 나를 응시해오는 센도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센도에게서 배어나온 땀이 내 손으로 옮겨왔다. 센도에게는 보이지 않도록 소금기 어린 손바닥을 살짝 핥고는 저녁을 먹으라고 채근했다. 갓 태어난 아이처럼 달라붙어 오는 센도의 체온이 기분 좋다. 그를 매단 채 사 온 도시락을 가리 키자, 그가 하나임에 틀림없는 포장을 보더니 의아한 듯 쳐다본 다. 오는 길에 루카와와 먹었노라고 간단히 이야기하니 갑자기 공 기가 조금 변했다. 뚜렷할 정도로 가라앉은 센도의 표정이 의아해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고개를 갸우뚱하며 쳐다보자, 센도가 드물게 시선을 피하며 밥을 입에 문 채 우물거렸다. 루카와하고는 웬일로 저녁까지 함께 한 거야? 이번 겨울 선발 후에 함께 미국에 가기로 했었거든. 그 수속이 라든가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이야기할 게 좀 있어서.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센도가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그다지 적 막하다고 느끼고 있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그 소리가 크게 울려 서, 나는 놀라움에 젖어 센도를 응시했다. 센도의 낯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창백했다. 미국 간다고? 응. 안 그래도 수속 끝나면 말하려고 했었어. 이번에는 테스트 겸 캠프에만 참가하는 거라서 한 달 정도 예정이지만, 만약에 합 격하게 되면 대학은 그 쪽으로 진학할까 해.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내친 김에 모두 말했다. 일의 절 차 때문에 늦긴 했어도, 원래 내가 이 소식을 가장 먼저 가장 기쁘 게 전해주고 싶었던 사람은 센도였다. 말을 마치고 축하해주기를 바라며 두근두근 센도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런데 센도는, 화를 냈다. 나는? 응? 나는!!!! 실핏줄이 터질 정도로 고통과 분노에 가득 찬 눈동자로 센도가 나를 추궁해온다. 나는, 네 미래에 포함되어 있지도 않았던 거야? 수속 끝나고 나면 말하려 했다니, 하다 못 해 내 의견을 물어볼 생각조차 없었
As Time Goes by 211 던 거야? 그가 좋아서, 언제까지라도 함께 살고 싶어서, 늘 나의 내일을 센도와 함께 생각하고 있던 나로서는 믿을 수 없는 센도의 반응에 놀라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캠프에의 참가나 유학은, 내게 있어 결코 센도를 떠나는 일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으로 있기 위 한, 그가 바라보는 자유로운 사쿠라기 하나미치를 지키기 위한 노 력이었다. 센도가 나의 결정을 조금도 기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가슴의 혈관이 한데 뭉친 듯 아파왔다. 센도가 왜 화를 내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센도의 격렬한 분노에 자 신이 상처 받았음을 깨달은 나는, 의기소침해져서 변명처럼 말했 다. 하지만, 이번엔 방학 때 잠시 다녀오는 거고, 굳이 미리 말해 야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무언가 특별히 달라지는 것도 아닌 데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야. 센도의 얼굴이 더욱 절망으로 물들었다. 마치 포기한 것처럼, 그 동안 한계까지 차올라 있던 감정이 단 한번 조율의 실패로 폭발 해버린 것처럼, 센도는 내게 소리쳤다. 나는 싫어! 일분일초라도 떨어져있고 싶지가 않은데 루카와와 함께 한 달 이상이나 미국에 가 있겠다니! 안 그래도 불안한데 이 이상 거리가 멀어졌다간 나는 틀림없이 말라죽어 버릴 거야! 못 가! 허락 못 해!!! 온 몸의 세포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심장이 공포로 오그라들 고 뇌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센도가 언제나 우리의 사랑에 대해 의심을 갖고 있었음을 알아 차린 지금, 그를 만난 이후로 내 안에서 첫 봄의 개나리처럼 피어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오르고 있던 무언가가 죽었다. 무심코 마주쳤던 그의 어린아이 같 은 눈동자가 생각났다. 어머니와 닮아보였던, 낙엽을 태운 재의 색을 한 표정도 생각났다. 어릴 때부터 익히 겪어왔던 상실감이 옴 몸을 휘감았다. 눈앞에서 다시 밧줄에 목을 매는 장면이 스쳤 다. 하지만 올가미에 목을 걸고 있는 사람은, 이번에는 나 자신이 었다. 어쩔 수도 없는 화로 가득 차서, 한계까지 차갑게 내려간 목소 리로 물었다. 불안하다니, 무어가?. 대답하지 않는 센도를 몰아붙였다. 떨어지기가 싫다니, 네가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라는 것은 물리 적 거리에 휘둘리는 그런 것이었어? 바로 눈앞에 있지 않으면 좋 아할 수도 없는 그런 야트막한 기분인 거야? 너는 지금 너를 좋아 하는 내 마음 뿐 아니라 네 자신까지 모욕했어! 허락이라니,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내가 내 인생을 결정하는 데 있어 누구도 허락 받아야 할 사람은 없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가장 잔혹한 방법 으로 배신당했다고 생각했다. 내 결정을 기뻐해주지 않는 것까지 는 좋다. 예고 없이 통보받은 헤어져야만 하는 시간들이 서운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을 의심한 것만은 용 서할 수가 없었다. 그 정신적 배반은 길고도 날카로운 손톱이 되 어 나의 심장에 깊숙이 박혀들었다. 사쿠라기. 대답하지 않았다. 아픔에 젖어 격렬히 뛰는 심장을 달래는 것만
As Time Goes by 213 이 고작이었다. 고개를 숙인 채 호흡을 고르고 있자, 마치 폭풍처 럼 센도의 키스가 들이닥쳤다. 뜨겁게 젖은 눈물이 그의 볼을 타 고 나의 입술로 흘러내렸다. 그의 열을 밀어내려 애쓰며 나는 생 각했다. 왜 센도가 울고 있는 거지, 버림받은 것은 나인데. 사랑하는 마음을 인정받지 조차 못한 것은 나인데. 머릿속에 밀려드는 혼돈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에, 거슬리는 소 리를 내며 티셔츠가 뜯겨져 나갔다. 바닥으로 밀어붙여져 거칠게 다뤄지는 틈에 몇 번인가 센도를 쳤지만, 제 정신을 잃은 듯 보이 는 그에게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분노로 가득 차서, 절망으로 가득 차서, 그리고 너무나 슬프게도 사랑으로 가득 차서, 센도는 나를 강간했다. 나는 몇 번이나 말했다. 그만둬, 제발 내가 네게 돌아갈 수 없게 만들지 마. 하지만 센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불안한 사랑을 끌어안은 채 남겨지는 것보다 나를 잃는 것을 택했다. 마지막 순간 그가 나를 꿰뚫었을 때, 마 치 심장마저도 함께 그의 손에 찢겨져 나가는 것 같았다. 울고 있 는 센도를 보고 싶지 않아서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센도는 짙은 삶의 굴곡을 이미 봐 온 나와는 달리, 그저 열여섯 의 어린 아이였다. 그는 아무 갈등 없는 순백의 존재가 아니었으 며, 내가 믿었던, 아무리 거센 빗줄기라도 자신의 안으로 받아들 이는 넓은 강도 또한 아니었다. 그는 한 여름 잠깐 풀숲을 누비다 생을 마치는 하루살이처럼 불 안한 존재였고, 사랑으로 온 몸을 적시면서도 그 감정의 온도를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의심할 수밖에 없는 심약한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내가 보고 있던 그가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것 을 깨닫고서도, 그가 지금 내게 행하고 있는 폭력에 저항을 느끼 면서도,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세상의 끝에 다다른 듯한 이런 순 간에조차,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깨닫고 나니 편해졌다. 틀 림없이 이것이 마지막이다. 그러나. 변한 것은 없다. 미국으로 유학 온 후 몇 년인가 지나서 치과 치료를 받으러 다닌 적이 있다. 참을 수 없는 통증에 바닥을 구르면서도 치과가 무섭다는 아이 같은 이유 하나로 병원 가기가 싫어 버티던 나는, 끝내 머리 꼭대 기까지 화가 난 루카와의 손에 질질 끌리다시피 해 학교 근처의 의 료원을 찾게 되었다. 오래 끌다 진료를 받으러 온 만큼 충치가 심 해서 마취 주사를 맞고 신경치료를 해야 했는데, 그 마취 주사라 는 것이 너무나 효과가 좋아서 틀림없이 귓가에서는 드릴로 이가 갈리는 쇳소리가 들리는데도 아무런 통증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 리고 나는, 아픔이 없음이 마냥 기뻐 바보처럼 치과도 의외로 올 만한 곳이구나, 하는 한가한 생각 따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것은 결국 약품이 보여주는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마침내 치료가 끝나고 물로 입안을 헹구어 내는 순간 후드득, 이 갈린 조각과 선연한 핏방울들이 세면대를 붉게 물들이며 떨어졌 던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멍하니 그 도륙난 내 신체 의 일부를 바라보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피를 흘리고 뼈
As Time Goes by 215 가 갈리면서도 나는 웃고 있었던 걸까 하는 망연함과 함께. 나는 아프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아픔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 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잊고 있나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바쁜 하루하루의 일 상에 매몰되어 센도의 웃음과 목소리가 희미해져 갈 때 심장이 기쁨보다 슬픔에 잠식되어 갈 때 어째서인지 정신이 마취라도 된 것처럼 이 사랑을 잊고 있나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 것은 잊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뿐 이다. 그리고 마취는, 언제나 깨어나는 순간이 가장 아픈 법이다. 프로팀에 입단해서 막 활약을 시작했을 즈음에 얼핏 관중석에서 센도의 익기 전의 벼처럼 하늘로 솟은 머리칼을 봤다고 생각한 적 이 있었다. 그 순간, 심장은 흉터도 아물지 않은 생생한 아픔으로 튀어 올랐다. 제대로 본 것도 아니고 하프 타임에 확인하려 했을 때는 일본에서 취재하러 온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버려서 결국 그 모습은 바람이 낳은 환각에 지나지 않나 돌려 생각하긴 했지만, 인두로 눌려진 것처럼 생생한 통증만은 심장에 확실하게 남았다. 십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서로에게 핏자국만을 남긴 채 헤어졌 어도, 사랑은 아직도 영혼 언저리에 남아 드문 자각의 순간이 찾 아올 때마다 날카로운 낫을 휘둘러댔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이 기뻤다. 그로 인해 내가 상처받고 있음이, 내가 여전히 사랑하고 있음을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증명해주는 통증이, 다행이라고 생각이 될 정도로 나를 안심시켰 다. 부모님이 이루지 못했던 영원한 사랑이라는 것이 시간이 흘러 도 여전히 내 안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음을 알았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그 흐름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을 손에 넣 었다는 것은 기적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돌아 가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 그 때의 뜨거 웠던 여름이 다시 내게 손짓하는 때에, 가을이 찾아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잃었던 그 계절로 돌아가리라 맹세했다. 그가 좋아했던 나의 모습 그대로 달릴 만큼 달리고 꿈을 이룰 만 큼 이룬 후에, 달려왔던 코트도 이루어진 꿈도 모두 버리고 다시 열다섯의 소년이 되어 센도에게 돌아가리라. 그 다짐은 내가 늘 동경해왔던,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표범 과도 닮은 것이었다. 사랑으로 인해 구속받고 그로 인해 다시 자 유로워진다는 진실을 십년의 세월을 제물로 바치고 얻었다. 양치기 소녀의 발아래서 한들거리는 들꽃처럼, 휘영청 은빛으로 번진 달빛 아래서 헤엄치는 반딧불처럼, 아련하고 어렴풋해도 나 의 정서가 늘 머물러 있던 그 곳으로 귀향한다. 한껏 펴든 흰 돛에 바람을 가득 담아 안녕하고 손을 흔들며 떠나왔던 그 곳으로 또 한 번의 여름과 함께. 계절은, 이미 다가오고 있다. 멀리서, 꿈처럼 벨이 울렸다.
코인로커 Coin Locker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0 zero 온통 목탄으로 칠해 놓은 듯한 밤이었다. 간혹 보이는 덧발라진 거친 입자들의 틈 사이로 어디선가 빛이 부서지듯 새어들어 오고 있었지만, 그 빛의 시작은 이곳과는 아득 히 거리가 멀어 비록 두터운 몇 겹의 어둠을 투과해 희미한 자취를 남기고 있다 하더라도 가냘픈 섬광은 그 근원을 알 수 없었고, 몸 을 웅크리고 울고 있는 소년에게 채 닿기도 전에 일출을 맞은 안개 무리처럼 사라져갔다. 짙은 암흑 속에서 오로지 울음에 흔들리고 있는 어깨의 선만이 간혹 바들거렸다. 혼자만의 밤이 처음은 아니었다. 커다란 천이 펼쳐지듯 검은 하 늘이 높은 곳에서부터 내려앉으면, 숨소리조차 없는 고요가 세상 과 포옹하고 사람은 수마가 손짓하는 대로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드 는 법이다. 모두 자신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아 깨어나면 기억조차 하지 못할 또 다른 세계 속을 헤매게 된다. 그런 적요한 순간에 홀 로 깨어 있다는 고독은 톡톡할 정도로 짙어서 언제나 소년을 뒤척 이게 만들곤 했다. 그러나 오늘 밤 누군가 감은 눈꺼풀을 간질 이는 것 같은 희미한 촉감에 잠에서 문득 깨어났을 때, 소년은 순 식간에 이미 경험해 온 고독 이상으로 물 밀 듯 밀려오는 커다란 공황과 낯선 두려움에 사로잡혀 버렸고 초점을 잃은 채 크게 뜨여 진 두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째서 수많은 밤, 하필 그 중의 이 밤 마땅히 그랬어야 할 계
219 기나 까닭조차 없이 마치 임계점 가까이까지 자극 당하고 있던 감 정이 일순 폭발해버리 듯 그 거대한 공포가 자신을 덮친 것인지 모 를 일이었다. 아찔할 정도의 본능적인 무서움에, 소년은 그저 휩쓸리어 갔다. 침잠한 밤 속에 촘촘히 줄기 지어 있는 어둠이 시야마저 가로막 고 시선이 닿는 끝마다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는 공간이 존재를 삼 켜 버릴 듯이 느껴졌던 순간, 온 세상에 손에 닿는 존재는 자기 자 신뿐이라는 절망감이 신경의 말단을 거쳐 모든 중심에까지 스미어 들어 소년은 폭포수처럼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의 홍수를 막을 여력조차 없었다. 그저 오들오들 떨리는 몸을 스스로의 팔로 껴안 고 밀려오기만 할 뿐 되돌아가지 않는 고립감에 몸을 맡겼다. 깨달아버린 것이다. 마치 갑작스레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는 듯한 강렬한 충격으로, 움직이지 않는 밤을 껴안은 채 넘쳐흐르는 외로움 속에서, 자신은 아무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심 지어 자신에게마저도 실낱만큼의 애정조차 기울여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어쩌면 이 온기 없이 고갈되어 있는 일상이 언제까지고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격한 두려움을, 필연적으로 혹은 우연하게도 깨달아버렸다. 사랑할 수 없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이, 평생 이대로 다른 사 람을 위해서는 뛰지 않는 차가운 심장을 몸속에 품고 살아야 할지 도 모른다는 것이, 도저히 똑바로 바라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무 서워졌다. 얼굴을 축축하게 적시는 눈물만으로 스스로에 대한 공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포는 사그라지지 않아, 소년의 입가에서는 눌러 죽인 슬픔의 소리 가 배어 나왔다. 늘 그렇듯이 곁에는 아무도 없는데 그래도 누군가 이 절박한 흐 느낌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년은 겁내며 숨죽여 울었 다. 어쩌면 들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온 몸을 떨며 울었다. 듣지 말아 줘 제발 들어 줘. 하지만 여전히 주위는 두터운 밤 의 휘장만이 소년을 감추기라도 하듯 드리워져 있었고 타인의 호흡 은 다가오지 않았다. 사각의 결계에 묶여 소년 혼자만 밤에 갇혀 단절되었다. 그러나 소년에게 있어서는 지독한 통증의 각성으로 점철된 이 밤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부드럽게 부풀어 올라 따스한 감촉으로 영혼을 감싸주는 은신처일 수도 있는 것이다. 고독이라는 것은 일 부의 사람들에게는 한정된 시간에만 아주 잠깐 베풀어지는 은혜이 기도 하다. 한낮의 시간이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들, 세상과의 열 렬한 접촉을 당연하다 생각하는 사람들, 축복 받은 용기와 오늘에 대한 의지로 빛나고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 있어서 밤은 감사해야 마땅할 휴식기였다. 이 어둠 속에서 무서움에 떠는 것은, 설령 이 침침한 밤이 새벽 의 빛에 밀려 사라지고 아침이 다시금 찾아올지라도 여전히 정신적 으로 고립되어 있을 자신뿐일 테다. 사람들로 가득한 태양이 다스 리는 낮에조차 눈을 마주칠 누구하나 알지 못하는 자신뿐이다. 표백되어버린 심장을 가진 소년에게 있어서는 자신 아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누군가와 손을 맞잡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보 였다. 어쩌면 흐릿하게 비춰 들어와 아련하게 흔들릴 뿐 결코 자 신에게까지는 머물러주지 않는 저 희뿌연 빛들도, 사실은 어디에
221 선가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만을 위해 태우고 있는 거대한 횃불의 편광인지도 몰랐다. 오래 전부터, 사랑하는 사람들의 그 커다랗고 반짝 반짝 빛나는 에너지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 소년은 늘 궁금하게 생각하곤 했었다. 그리고 자신도 저 축복 받은 생명 의 다발 속으로 스며들어가고 싶다고 바랐다. 깊은 물속에 가라앉 아 수면에 떠올라 있는 달그림자를 바라보는 기분으로 애정으로 가 득 차 있는 사람들을 동경했다. 하지만 덧없다는 것을 바로 이 순간에 알게 된 것이다. 선천적으로 핏기 없는 가난한 심장과 메마른 영혼의 우물을 타 고나서 사랑이란 세례로부터 완전히 제외되는 인간도 세상에는 존 재한다. 소년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 한순간도 스 스로에게 인지시킬 수 없었다. 사실은 사랑이 무엇인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뚜렷한 어휘로 표현이 되거나 구체적인 물리적 형태를 갖지 않는 모호한 그 감정은 소년에게는 단지 고통이었다. 그래서 더욱 갖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느끼고 싶고 움켜쥐고 싶었다. 어디에서나 내뿜어 지는 그 강렬하고 화사한 정서로부터 자신만 누락되고 싶지는 않았 다. 부모를 비롯해 자신에게 웃어주는 사람들로부터 쏟아져 들어 오는 그 열기만큼 자신도 방출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소년의 가 슴은 처음부터 공동( 空 洞 )상태였는지 아무리 흡수해도 채워지지 않았고 흡수한 감정을 증폭시켜 다시 세상으로 돌려보낼 수 있을 만큼 자라지도 않았다. 자신은 마치 감정의 블랙홀과도 같다. 탐욕스럽게 소화시키기만 할 뿐 배설할 줄을 모른다. 한껏 사랑 받아 아름답게 피어나는 아가씨들보다 보답 받지 못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하는 사랑의 고통에 비쩍 말라 시들어 가는 청년들 쪽이 소년에게 는 몇 배나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사랑할 수 있음의 축복을 깨닫지 못한다. 눈동자는 애정의 대상을 찾아 헤매고 있는데 심장은 수분이 마 르다 못해 바싹 갈라져간다. 피를 나눈 가족을 보아도 당연하게 솟아나야 할 친애의 정을 느낄 수 없다. 소년의 이름을 불러오는 사람들마저 언제나 낯설기만 하다. 애정에 흠뻑 젖어 무지갯빛으 로 빛나며 이명( 耳 鳴 )이 울릴 정도로 빠르게 돌아가고 있는 세상 속에서, 자신만 지면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너울너울 쓸쓸한 공기 속을 헤엄치고 있다. 사랑할 수 없음의 공포를 깨달은 이 밤을 계기로, 소년은 이런 식으로 자신은 말라비틀어진 미라가 되어 죽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진심으로 두려워하게 되었다. 언제까지나 정신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채 이 넓고도 넓은 우주 속에서 유일의 존재로 남겨진 시간 전부를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온 몸이 표현할 수 없는 무서움으로 오그라들었다. 사랑하고 싶다. 사랑 받느니보다 사랑하고 싶다. 모든 것을 다 태워 넋조차 공기 속으로 흩어지게 되더라도 소년 은 사랑하고 싶었다. 자신의 본질을 강렬하게 깨워, 이성( 理 性 )이 기능하기도 전에 폭풍과도 같은 정열의 해일 속으로 격렬하게 휩쓸려가게 해 줄 존 재를 진심으로 바랬다. 가능하다면 그 존재가 무엇 이기보다는
223 누구 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무리 간절하게 원해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은 소년에 게 찾아오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찾아낼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 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세계는 여전히 저 혼자서만 형형색색으 로 물들어 있었다. 무수한 사람들이 다가오고, 소년의 가슴에 아 무런 흔적을 남기지 못한 채 떠나갔다. 이별을 맞고 다시 아침이 오면, 어느새 소년은 자신의 곁에 누군가가 잠시나마 머물렀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단지 느껴지는 것은, 여전히 스스로는 비 어 있다는 고독의 극한이었다. 수많은 밤이 닫히고 다시 열린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흘러 더 이상 소년이 아니게 되었어도, 현실에 든든하게 발을 붙인 척 얼굴 위로 보통으로 보이게 하는 감 정의 분장을 하는 법을 배웠어도, 그는 여전했다. 그리고 자신의 심장이 피가 흐르는 따스한 덩어리라기보다는 버석거리는 지푸라 기단과 같다는 것을 느꼈을 때, 공포가 지나쳐 슬픔이 되고 슬픔 조차 범람해 모든 감각이 마비되었을 때, 더 이상 희망조차 가질 수 없게 된 그는 사랑을 모르는 쓸모없는 심장을 어느 역인가의 코 인로커에 동전 몇 개를 넣고 가둬 버렸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AND 언제부터인가 로맨스 소설을 좋아하게 되었다. 통속적이고 유치한 포장지로 감싸진 알록달록한 사탕 같은 사랑 이야기가, 둔한 미각의 센도에게도 얼마쯤은 달콤하게 다가오는 듯했기 때문이다.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어 오히려 비웃을 수조차 없는 그 비눗방울 같은 이야기들 안에는 그래도 운명이 존 재했고 뜨거운 열정이 흘러 넘쳤다. 종이로 감추어진 환상의 세계 에는 달이 비추는 밤, 발코니에 몸을 기대고 별빛에 어슴푸레 빛 나는 흰 모슬린 드레스를 입은 채 자신을 납치해 줄 기사를 기다리 는 청순한 아가씨가 존재했고, 그 아가씨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돈키호테의 풍차와도 같은 사랑을 향해 마치 순 교자처럼 숭고한 희생정신으로 가득 차 뛰어드는 얼빠진 청년이 존 재했다. 어떤 자극에도 무덤덤하고, 이제는 타인의 흘러 들어오는 감정 을 향해 환류( 還 流 )할 수 있는 심장조차 떼어 내어버린 센도에게 있어서 온 몸에 소름이 돋아 날 정도로 낯간지러운 그 드라마들은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마무리되는 그 세계가 아득한 꿈처럼 멀게만 느껴지는 동시에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으로 남았던 희망처럼 센도의 어딘가를 끌어당겼다. 도대체 어느 별나라 이야기인지 되묻고 싶어질 정도로 현실적인 개연성이 없는, 단지 꾸며 낸 판타지에 불과할 뿐인 그 소설들에 눈을 빛내 며 몰두하는 그를 보면 직장 동료들은 혀를 차며 센도를 진심으로 걱정해주곤 했다.
225 이 봐, 그런 건 현실이 아니야. 센도 씨, 그런 소녀 취향의 소설들만 끌어안고 있다간 평생 연 애 못 해요~. 특히 입사동기인 코시노의 잔소리는 귀가 따가울 정도여서, 그 는 어떻게 해서든 센도의 괴상한 취향을 고쳐주고 싶어서 안달을 했다. 오지랖이 넓은데다 맏형기질이 넘치는 코시노로서는, 어딘 가 곧 빠질 이( 齒 )처럼 흔들흔들해 보이는 센도를 두고 볼 수만은 없던 모양이다. 그는 센도가 틈틈이 읽으려 회사에 가져다 놓은 소중한 책들을 몰래 감추기도 했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다시피 자신의 후배라든가 먼 친척이라든가 하는 여자를 소개시켜 주기도 했다. 하지만 서류함이나 서랍 등을 온통 헤집어가며 숨겨놓은 책 들을 꿋꿋하게 찾아내고, 소개받는 자리에 나가서는 입을 꾹 다문 채 포만감에 가득 찬 조개처럼 되어버리는 센도를 보면서 마침내는 어지간히 끈기 있다고 정평이 나 있는 그도 센도의 정상적인 연애 생활은 포기해버린 듯 했다. 그러고는 이후로 아주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센도에게 보내곤 했 는데, 마치 저 녀석은 퇴근하면 집에서 리얼 돌(Real Doll)이라 도 껴안고 뒹구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는 불순한 눈빛이었다. 아마 도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어 보이는 센도가 도무지 주위에는 시선을 돌릴 줄 모른 채 사춘기 소녀조차 고개를 설레설 레 흔들 듯한 가상의 사랑 이야기에 푹 빠져 지내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일 테였다. 코시노의 머릿속에서는 어쩌면 로코코 스타일의 화려한 드레스가 근사하게 입혀진, 풍성한 컬을 늘어뜨린 금빛머리칼을 한 사랑스러운 인형 아가씨가 센도의 침대 에 등을 기대고 살포시 앉아 있는 장면이 실시간으로 상연되고 있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을지도 몰랐다. 여하 간에 동료의 머릿속까지 들여다 볼 재주 만무한 센도는, 친근하게 굴던 동료가 갑작스레 의심쩍은 눈길을 보내오는 것도 익 숙지 않은 일이라서 처음에는 몇 번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대신 코 시노로부터의 귀찮은 간섭도 눈에 띄게 줄었기에 어깨만 한 번 가 볍게 으쓱대었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글 속의 사랑과 현실의 사랑 은 다른 것이라고 끊임없이 센도를 설득하려 들지만, 어차피 그들 이 말하는 현실적인 사랑이라는 것도 센도에게 있어서는 꿈에 보다 가까웠다. 저 사람들은 센도에게 심장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이다. 결국 현실이든 소설이든 자신과는 거리가 멀다면, 불을 내 뿜는 용이 등장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법한 동화적 배경 속에서 어떤 장애라도 마음만으로 극복해내고 맺어져 마침내는 천년만년 행복해지는 어이없을 정도의 맥락 없는 이야기가 훨씬 취향에 맞았 다. 센도의 로맨스 취미는 현대물보다는 시대물 쪽에 치우쳐 있었 고, 그 까닭은 후자에서 운명적인 사랑은 더욱 생생하게 빛났기 때문이다. 일상 이라는 것을 깨우칠 수 없는 센도에게 있어서 사랑을 한다 는 것은 필연이나 당연이 아니라 기적이었다. 그리고 기적을 기대 할 수 있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현실과 동떨어진 소설이었다. 영업직의 특성상 외근이 많은 센도는 언제나 고급스러운 가죽 가방 안에 작은 로맨스 소설 한 두 권을 상비하고 다녔고, 읽고 싶 다면 한 낮의 지하철이나 북적거리는 길거리에서조차 책을 펴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190cm를 넘는 일본인답지 않은 신장에 균 형 잡힌 몸, 그 위에 브랜드의 슈트(suit)를 말쑥하게 걸치고 하
227 늘로 솟아오른 기묘한 머리칼을 한 채 남자의 한 손에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작은 소설을 들고 그 내용에 심취해 있는 그는 사람들 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으나, 그 따가운 눈총에 센도가 주의를 기울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원래 표정이 빈한한 얼굴이라서 온갖 음모가 극에 달해 터져 버릴 듯한 소설의 절정 부분에서도, 모든 갈등이 해소되고 바야흐로 사랑만이 넘치는 낙원으로 두 주인 공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순간에서도, 센도의 표정은 늘 눈꼬리를 아래로 살짝 늘어뜨린 애매한 웃음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 그나 마 다행일지도 몰랐다. 갖은 오해와 방해를 헤치고 마침내 연인이 맺어지는 순간 센도가 감동으로 눈물이라도 펑펑 흘리게 된다면 그 야말로 당혹을 감추지 못할 것이 틀림없는 주변에는 크나큰 민폐가 아닐 수 없다. 설령 그런 일이 벌어져도, 막상 스스로는 자신의 눈물조차 자각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는 점이 저 민폐의 가장 절 망적인 부분인 것이다. 센도는 일반적인 세간의 범주에서 동떨어져, 자신만의 시간을 헤치며 자신만의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 단지 하나의 단체에 속해 있는 척 하는 것을 배웠을 뿐, 그의 정신세계는 깊게 매몰되어 결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 곳까지의 깊이는 너무 깊어서, 이제는 자신조차 가려진 내면으로의 길을 찾아낼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은근하고 느릿하다 하더라도 누구에게나 변화의 기회는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만남은, 그것이 아무리 운명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우연 처럼 찾아온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그 날도 센도는 신간 로맨스 소설을 들고 지하철 계단을 바삐 내 려가는 중이었다. 일주일쯤 전에 제품의 수주를 계약했던 회사와 납품까지 끝낸 후의 결제 직전에 트러블이 생겨서, 황급히 상대 회사에 들러 구 체적인 원인을 알아본 뒤 문제를 수습하고 오라고 부장에게 지시를 받은 터였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아무리 느긋한 센도라도 서두르 지 않을 수가 없어서 책에 시선을 둔 채 부랴부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던 점이 나빴다. 반대로 계단을 오르고 있던 한 청년과 그만 정면으로 충돌해버 린 것이다. 그 쪽도 어지간히 바쁜 일이 있었는지 계단을 두세 칸씩 뛰어오 르고 있었기에 부딪혔을 때의 충격으로 센도는 그만 뒤로 고꾸라지 고 말았다. 다행히 층계참에 머리를 부딪치는 것만은 면했지만, 그래도 꽤나 세게 들이박아 버린 어깨는 욱신거려왔고 들고 있던 소설은 공중에서 멋지게 회전해 저 아래쪽으로 떨어져버렸다. 반 면 상대는 꽤나 운동신경이 좋은 편인지 아차 하는 순간에 아슬아 슬하게 균형을 잡아 센도의 옆쪽으로 손을 짚으며 넘어졌다. 까딱 하면 무척 깊은 계단을 굴러 떨어질 뻔 한 그는, 간신히 사고를 면 하자 휴 하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무릎을 털며 일어나 괜찮아? 라며 센도에게 손을 내밀어왔다. 비록 자신만의 잘못은 아니라 해도 꼴사납게 넘어져버렸다는 자 각은 있어서, 센도도 얼른 상대의 손을 잡으며 일어났다. 마주 닿 아오는 손은 언제나 차가운 센도의 손에 비해 달려왔기 때문인지 적당히 열기가 있었고 약간의 땀이 배어있었다. 커다랗지만 투박 하지 않은 느낌의, 가지런한 손이다. 의외일 정도로 잡힌 손의 감
229 촉이 좋아 물끄러미 청년을 바라보았다. 흰 편은 아니지만 비칠 듯이 깨끗한 피부에 진한 선글라스가 잘 어울렸다. 짙은 유리에 가려 눈빛을 읽을 수는 없지만, 깔끔하게 다듬어진 모양 좋은 눈 썹은 곤혹스러운 듯 살짝 찌푸려져 있다. 센도가 입을 열어 괜찮 다고 말하려 한 순간, 계단의 저 아래쪽에서 멍청이!!!! 라고 누군가 화난 목소리로 고함치는 것이 들렸다. 그러자 침착해 보였던 청년은 갑자기 허둥대기 시작했다. 충돌 탓인지 조금 매듭이 헐거워져 머리에서 흘러내린 두건을 다시 꽉 조이고, 먼지가 묻은 센도의 옷을 몇 번 매만져 준 후 미안! 치료 비 나올 것 같으면 연락해줘. 라고 외치며 다시 아까와 같은 속 도로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연락을 하라니, 어떻게? 멍하니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삼각으로 접혀 끝자락 이 마치 나비처럼 팔랑거리는 화려한 직물 사이로 붉은 머리칼이 언뜻 엿보였다. 그 색은 너무나도 선명해서 마치 가시광선이 거기 에만 머물고 있는 것 같았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채도가 높은 그 머리칼에 시선을 빼앗겨 넋을 놓고 있자, 바로 곁을 누군 가가 바람 소리를 일으킬 정도의 속도로 내달려가고, 죄송합니 다. 라는 사무적인 목소리가 조금 밑에서 들려왔다. 눈을 돌리니 옅은 갈색 머리칼의, 까다롭게 치수를 재어 마름한 공예품처럼 단정하면서도 차가운 인상의 한 남자가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다. 다치진 않으셨습니까? 병원진단에 이상이 있으면 이쪽으로 전 화 주세요. 센도가 떨어뜨린 책 위에 명함을 겹쳐서 내민다. 아마 청년이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연락하라고 했던 뜻은 이것이었나 보다. 어쩔까 망설이다가, 굳이 성의껏 내밀어 오는 명함을 되돌려 줄 필요도 없을 것 같아서 책과 함께 받아들었다. 그럼. 남자는 고개를 한 번 숙이고 자신도 아까의 청년을 쫓아 출구 쪽 으로 달려 나갔다. 멀리서 마치 찬바람에 지는 꽃처럼 사라지는 청년의 붉은 머리칼이 언뜻 보였다. 그 뒤 조금 못 미쳐서는 자신 못지않은 장신의 검은 머리칼의 남자가, 또 그 뒤로는 방금 명함 을 건네 준 갈색 머리칼의 남자가 술래잡기라도 하듯 달리고 있다. 청년은 티셔츠에 진이라는 스포티한 차림이었지만, 뒤를 쫓고 있는 두 남자는 슈트에 타이 그리고 윤이 날 정도로 손질이 잘 된 가죽구두라는 빈틈없는 정장 차림이어서 그 광경은 무척이나 기묘 하게 느껴졌다. 시야에서 붉은 점이 사라질 때까지 그 방향을 바 라보고 있던 센도는, 문득 자신이 거래처에 급히 들르러 가는 중 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예상치 못한 충돌에 십 분 가까운 시간을 소모해버려, 아무래도 책을 읽으며 갈 여유가 없을 듯해서 아쉬움에 혀를 몇 번 차고는 받은 명함을 갈피에 끼운 뒤 소설을 가방 안으로 집어넣었다. 서 둘러 계단을 내려가는 센도의 머릿속에는 이미 이 해프닝은 사라지 고 없었다. 하지만, 붉은 색의 잔상만은 눈 안쪽 끄트머리에 머물러 좀처럼 지워지질 않았다. 대학시절부터 부모로부터 독립해 자취를 하고 있던 센도는, 지
231 친 몸을 이끌고 터벅터벅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예상은 했었 지만 오늘 일은 무척이나 골치 아팠다. 센도의 회사는 IT 계열의 개발업체로, 말썽이 있었던 거래처에는 백여 대의 최신형 컴퓨터 를 납품하고 사내의 전산화 및 네트워크 설비까지를 맡았었다. 시 스템을 완성하고 인트라넷의 구축을 끝낸 것이 바로 며칠 전, 하 지만 상대 회사는 갑작스레 이대로는 경비를 지불할 수 없다는 통 보를 해 왔던 것이다. 센도가 직접 가보니 그 까닭이라는 것이 어 이가 없을 정도여서, 기기 등의 하드웨어 대금은 몰라도 설치된 소프트웨어 금액까지는 지불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이 업계에 서는 하드웨어보다는 소프트웨어 쪽이 월등히 비싸다. 틀림없이 계약 시에 보낸 견적서에는 프로그램 개발 대금까지 명시되어 있었 다. 도대체 항목에 명기되어 있던 오라클이니 ERP 5) 시스템이니 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나이 지긋하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사장의 얼굴로 짐작해 보면 무슨 최신의 모니터나 프린터 상표쯤 되겠지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제품 설명회 때는 실무진만이 참석했을 뿐 사장의 얼굴을 본 기억이 없다. 막 상 실질적으로 계약을 체결하고 발주를 냈던 시스템 관리부의 부장 은 미안한 얼굴로 센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분명히 자신도 사장에게 설명을 해 보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을 것이다. 소위 경영자라는 사람이 왜 계약 시에 모르는 내용을 꼼 꼼히 따져보질 않고 이제 와서야 불평을 늘어놓는 것인지 짜증이 5) Enterprise Resource Planning : ' '...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치밀었지만, 아무리 컴퓨터 문외한이라 해도 손님인 것이다. 어쩌 면 이 사람은 그저 책상 위에 오른 서류에 사인만 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처음에는 전산 시스템 구축이 가져올 이점에 무조 건 고개를 끄덕여가며 계약을 승인했지만, 지불을 해야 할 시점이 되니 눈에 보이지도 않는 프로그램들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야 한 다는 것이 불만스러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계약은 물론 납품까지도 이미 끝났다. 이제 와서 고집 부려 봐야 명분이 없을뿐더러 승산도 없는 이야기다. 다만 IT는커 녕 워드프로세서와도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사장은 당최 센도의 이야 기를 이해하려 하지 않아서, 센도는 분명히 사인이 되어 있는 계 약서를 흔들며 한참 동안을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차이점에 대 해 설명을 하고, 그 다음에는 회사의 유기적 전산시스템 구축에 있어서 데이터베이스와 통합 관리 솔루션의 필요성을 피력해야했 다. 하드웨어야 그렇다 쳐도, 개발과 판매보다 유지보수가 더욱 비용이 큰 소프트웨어 쪽의 문제는 상대의 납득 없이 유야무야 넘 겨보았자 앞으로 지속적으로 A/S를 해야 할 센도의 회사에 폐만 될 것이 뻔했다. 더구나 자신도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이 공론이 답답하고 면 목이 없었는지 그 쪽의 부장이 이야기를 도와준 것도 있고 해서 해 가 질 무렵에는 사장도 불만이 있는 표정이긴 하지만 센도의 이야 기에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조금 납득한 기미가 보이 자 센도는 얼른 본사로의 송금 요청을 하고, 결과를 확인한 즉시 영수처리를 해 주고 그 회사를 빠져나왔다. 간신히 문제가 해결되긴 했지만 결국 몇 시간이나 진을 다 빼가 며 시달린 결과라서, 센도는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상의만 벗고
233 침대위로 쓰러지듯 누워버렸다. 중소기업이긴 해도 한참 주식시장에서도 승승장구하고 있는 개 발업체의 영업사원이라 하면 듣기는 좋을지 모르지만, 이론적인 관리 기반 없이 직관과 경험에만 의지해 회사를 일구어 온 사오십 대의 경영진들에게 사무자동화에 대해 설득하고 계약을 따내는 것 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상대 쪽에서 철저하게 필요 성을 인식해오지 않으면 오늘과 같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빈번한 것이다. 언제나 느슨하게 웃는 얼굴의, 그다지 동요란 것이 없는 센도에게 이 일은 어느 정도 적성에 맞아 꾸준히 실적을 쌓아올리 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막무가내인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피곤 하지 않을 리 없었다. 한숨을 내쉬며 몸을 뒤척이는 순간, 오후에 계단에 부딪혔던 어 깨 쪽이 욱신 통증을 호소해왔다. 파스라도 붙일까 해 일어나 셔 츠를 벗어보니 목덜미에서 견갑골에 이르는 부근까지 처참할 정도 의 시퍼런 멍이 들어있다. 국지적으로 이미 빨갛고 노랗게 변색을 시작한 부분도 있어서 마치 어울리지 않는 색상의 꽃이 제 멋대로 피어있는 듯하다. 센도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지만 더듬어 만져보 니 그저 타박상일 뿐 뼈에는 별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일어난 김에 샤워를 마치고, 채 읽지 못한 소설이 생각나서 침 대 머리맡의 작은 등을 켜고 가방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 읽어야 할 부분을 찾기 위해 책장을 넘기고 있자 팔랑, 하고 작은 종잇조 각이 떨어진다. 무심결에 집어 들고 보니 낮에 받은 명함이다. 명 함은 일반적이라고 보기에는 꽤나 화려한 형태로 전면에는 천연색 으로 도식화 된 한 남자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똑바로 쏘아보 고 있는 눈 끝은 매섭게 치켜 올라가 있었지만, 그 끝에는 부드럽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다고도 사랑스럽다고도 표현할 수 있을만한 매혹적인 기운이 배어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일종의 감상에 젖게 하는 힘이 있었다. 희랍 신처럼 쭉 뻗은 콧날은 정결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흐드러 진 꽃처럼 순을 올리고 있는 입술은 살짝 벌어져 틈새로 엿보이는 혀가 금세라도 무슨 말인가 걸어올 것만 같다. 얼굴을 더듬어 제 멋대로 흐트러져 있는 새빨간 머리칼에까지 시선이 닿자, 그제야 센도는 이 사진의 남자가 자신에게로 돌진해왔던 바로 그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원래도 사내다운 생김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선글라스 에 가려져 있던 눈매가 또렷하게 드러나니 청년 특유의 날카롭고도 자신만만해 보이는 인상이 더욱 짙어진다. 마치 내리꽂히는 듯한 시선은 세상이 자신을 우러르고 숭배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지배자의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강렬한 이미지에 부분부분 교태가 어렸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고혹적인 섹스어필이 묻어 있는, 아 이와 소년과 남자가 혼재하고 있는 묘한 얼굴이었다. 강건함과 불 안정함이 뒤섞여 있는 표정이라고 하면 맞을 듯하다. 우측 하단의 SAKURAGI라는 도안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명함을 뒤집자, 이번엔 크림색 바탕에 고급스러워 보이는 서체로 후지마 켄지라고 새겨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틀림없이 자신에 게 명함을 건네준 당사자의 이름일 것이다. 그 옆에 병서 되어 있 는 이탤릭 로고는 대중문화 쪽에 문외한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센도조차 알고 있는 유명 기획사의 것이었다. 연예인이었던 건가. 중얼거리고는 언제나 지니고 다니는 업무상의 명함첩에 곱게 갈 무리했다. 전화번호와 함께 홈페이지 주소도 명기되어 있었기에 회사에서 틈 날 때 한 번 접속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235 가수든 배우든 연기자든 모델이든 지금까지 관심을 쏟아본 적은 없 었지만 청년의 올곧은 눈빛은 도전적인 정열로 빛나고 있었다. 센 도가 즐겨 읽는 로맨스 소설의 히어로보다도 더욱 무모한 사랑에 주저 없이 뛰어들 것 같은 그 열기가 안개가 피어오르듯 생명력 없 는 종이 위로도 복사( 輻 射 )되고 있었다. 센도는 눈을 감고 어딘가 알 수 없는 곳 아마도 명함에 닿아있 던 손끝으로부터 자신이 차츰 뜨거워진다고 생각했다. 어머! SAKURAGI!!! 센도의 등 뒤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점심시간이 끝나 갈 무렵의, 드문드문 웅성거리고 있던 사무실의 시선이 모두 센도 쪽으로 꽂히자 그는 난감해졌다. 하지만 원인 제공자는 자각이 있 는지 없는지 센도의 의자에 몸을 딱 붙이고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키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이거, 이번에 촬영한 화보집이잖아!! 유카리, 이쪽으로 와 봐! SAKURAGI 홈페이지에 새로운 사진이 올라왔어!!! 센도와는 동기기도 한 아야코의 시끄러운 소리에 몰려든 것은 비단 유카리만이 아니었다. 사쿠라기라는 이름에는 도대체 얼마만 큼의 위력이 있는지, 센도의 주위는 금세 여자들로 북적북적해졌 다. 귓가에서 질러대는 새된 소리들 통에 센도는 귀가 먹먹할 지 경이다. 저기, 다들. 어떻게든 진정시켜보려 하지만 막무가내다. 아야코는 아예 센도 로부터 마우스까지 빼앗아 화면 여기저기를 클릭하고 있었다. 세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련된 플래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홈페이지는, 초기화면을 가 득 차지하고 있는 사쿠라기의 얼굴과 드러난 상반신 위로 마우스가 스칠 때마다 간헐적으로 그의 다른 표정과 포즈를 보여주었고, 그 속에 숨겨져 있는 포인트를 찾아내면 다른 메뉴로 넘어가게끔 되어 있는 다소 복잡한 구조였다. 직관적으로 경로가 드러나는 방식이 아니라서 꽤나 불편할 텐데 오히려 여직원들은 찾아다니는 재미가 있는 듯 탐색하느라 난리가 났다. 무엇보다도 화면이 바뀔 때마다 다양한 각도로 함께 바뀌는 사쿠라기의 짧은 동화상들에 숨이 넘어 갈 듯 자지러진다. 센도는 아예 포기하고 의자에 편안히 기대앉아 아야코 덕에 자동으로 갱신되고 있는 모니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 았다. 뚜렷하게 의식하지 않고 보아도 갖가지 자태로 화면 속에서 움 직이고 있는 남자는 마치 쿠바의 무용수처럼 육감적이고 아름다 워, 태어날 때부터 유연함과 탄력 있는 곡선을 지니기라도 한 것 같았다. 전체적으로 모노톤으로 디자인되어 있는 정돈된 프레임 속에서 남자의 붉은 머리칼만이 눈을 찌를 듯 화려하게 빛난다. 이 페이지를 디자인 한 사람은 사쿠라기의 매력에 대해서 충분히 주지하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자연스러워 보이는 사진의 각 도 하나 하나에도 치밀한 계산이 묻어 있었으며 메뉴가 바뀔 때마 다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기억에 남아 있는 것보다는 다소 나지막하 고 허스키했다. 아마도 반응을 충분히 고려해서 연출한 저 사진들 처럼, 나른하고 섹시하게 가라앉아 있는 이 목소리가 그의 상업용 보이스(voice)일 것이다. 아. 역시 보는 즐거움이 있어.
237 마침내 탐색이 모두 끝났는지, 아야코는 한숨을 쉬듯 경탄을 담 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지한 화면 속에서는 사쿠라기가 이쪽 에 시선을 두고 눈을 깜박거리고 있었다. 그늘을 드리울 정도로 풍성하고 긴 속눈썹이 깜박일 때마다 밀 빛 눈동자가 구름의 흐름 을 좇지 못하는 보름달처럼 드러났다 사라졌다. 좋아하는 거야? 센도가 손가락으로 사쿠라기의 얼굴을 가리키며 여자들에게 물 었다. 그러자 유카리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대답한다. 좋아한다기보다, 멋지잖아요, 저 사람. 잘 생겼다, 섹시하다, 남자답다, 그런 한 마디로는 표현할 수 없는 보다 생물적인 매력이 있어요. 정말로 처음 봤을 때, 실제로 도 이런 어떤 범주에도 들어가지 않을 분방한 사람이 있구나, 생 각했다니까요. 유카리의 이야기에 여자들이 모두 맞아, 맞아 맞장구를 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살아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잖아. 예쁘장하기만 하고 생명력은 흐릿한 요즘 아이들과는 전혀 달 라! 탄생의 원자로 가득 찬 것 같다니까, 정말로! 검지를 세운 채 강하게 피력하는 아야코의 의견에 센도는 다시 한 번 화면 가득한 사쿠라기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자신도 처음 그를 만났던 그 순간 그의 강렬함에 압도되었었다. 온 몸의 세포를 들쑤시듯 밀물처럼 순식간에 휘몰아 들어왔던 그 격한 인상은, 아야코가 말하는 대로 사쿠라기 특유의 생명력이 었을지도 모른다. 센도 자신과 가장 거리가 먼, 태양과 비의 사랑 을 흠뻑 받아 하늘을 향해 부쩍부쩍 자라고 있는 대지의 아이 같은 천진함과 순정함. 마치 처음부터 다른 토질의 흙으로 빚어진 것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처럼 홀로 떨어져 빛나고 있는 그 존재를, 센도는 문득 다시 한 번 확인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차가운 LCD 화면 안에서도 저토록 생생하게 빛나고 있다면, 바 로 옆에서의 그의 에너지는 더욱 강해지지 않을까. 그만큼이나 태 양의 축복을 가득 받은 존재라면, 언제나 그늘 속에서 하늘을 향 해 뻗을 가지조차 없는 버섯처럼 웅크리고 숨어 있는 센도에게도 그가 안고 있는 빛의 다발 한 줄기쯤 나누어 줄 수 있을지도 모른 다. 그저 스쳐지나갈 뿐인 인연이 아니고 무언가 좀 더 튼튼한 관 계로 묶이고 싶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깨닫고 센도는 조금 놀랐다. 기대와는 반대로 빛 옆에 바로 서면 오히려 그늘이 드리울 수도 있 는데, 어째서 이토록 저 화려한 존재의 옆에 서고 싶은 마음이 드 는 지 알 수가 없다. 무언가를 원하는 욕망 자체가 너무나도 오랜 만이어서 생경하기 짝이 없었다. 막상 인연이 닿아 그와 절친한 사이가 된다 하더라도, 이렇게 하고 싶다 혹은 저렇게 하고 싶다 는 물리적인 행동 따위는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단지, 지금으 로서는 다가가고 싶다는 마음만이 다른 모든 의구심을 묻어버릴 정 도로 강했다. 원래부터 감정의 메커니즘이 극히 제한되어 있는 센 도는 그만큼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 주저함도 없었다. 마침내 업 무시간이 시작되어 모여들었던 여직원들도 모두 흩어지고 조용해 지자 센도는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이 쪽으로 오십시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사교적인 미소를 띤 채 후지마는 센도 를 안내했다. 들어선 곳은 후지마의 개인 사무실 같았지만, 그렇
239 다고 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사쿠라기의 사진이 잔뜩 붙어있었다. 지금보다는 조금 어려 보이는 무렵에서부터 마치 어제 찍은 것 같 은 사진까지, 결코 좁지 않은 사무실의 한 쪽 벽면을 사쿠라기의 사진들이 빽빽이 장식하고 있다. 센도가 사진들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후지마가 웃으며 물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네. 무의식중에 망설임 없이 대답해버린 센도에게, 후지마는 의외라 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크게 웃었다. 그 애를 좋아해 주시는 분들은 아주 많지만, 센도 씨처럼 사심 없는 얼굴로 주저 없이 긍정해 주시는 남자 분은 또 처음이군요. 입가에 떠올라 있는 만족스런 웃음은 아까의 영업용 미소와는 조금 질이 달랐다. 하지만 사쿠라기의 사진을 보느라 정신이 없는 센도에게는 후지마의 미묘한 표정의 변화가 포착되지 않았다. 앉으세요. 곧 실물이 올 겁니다. 비서에게 내온 차를 테이블 위에 차리도록 지시하면서, 후지마 가 센도를 향해 손짓했다. 계속해서 뚫어져라 사진만을 보는 것도 실례일 것이 당연해, 센도는 간신히 시선을 떼고 가죽 소파에 몸 을 앉혔다. 정적이면서도 우아하기 그지없는 동작으로 후지마가 찻잔을 들고 몸은 괜찮으십니까? 라고 묻는 찰라, 쾅 하고 출입 문이 거세게 열렸다. 지하철의 그 녀석이 왔다면서?! 폭풍처럼 쳐들어 온 것은 센도가 조금 전까지 2차원의 지면을 통해 응시하고 있었던 빨간 머리칼의 바로 그 남자다. 어라? 함께 있었어?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막상 센도를 확인하자, 사쿠라기는 자신의 소란스런 행동이 조 금 머쓱해졌는지 머리칼을 긁적거리며 다가왔다. 하나미치! 제대로 사과해야지, 그 말버릇이 뭐야. 후지마의 질타에 사쿠라기는 약간 의기소침해지더니 센도 곁으 로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 날은 정말 미안했어. 병원 진단은 괜찮았어?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제 멋대로 말까지 놓아버린 주제에, 진심 으로 걱정이 되는지 안절부절못한 눈빛으로 센도를 내려다보는 것 이 꼭 주인의 눈치를 보는 덩치 커다란 사냥개 같다. 표면은 당돌 하기 짝이 없는데 저 안쪽에서는 틀림없이 순수한 정열이 소용돌이 치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겉모 습은 오히려 두드러지게 건방지고 매력적인지도 모른다. 표리부동 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표리일체라 해야 할지, 조금 의아한 기분 마저 들어 센도는 저도 모르게 내밀어진 손을 잡으며 소리 내어 웃 어버렸다. 자신조차 까마득할 정도로 오랜만에 들은 웃음소리는 꽤나 낯설었다. 사쿠라기를 찾아오기로 결심한 이후부터는, 센도 에게 있어서는 놀라운 일들만 계속되고 있다. 괜찮아. 멍이 조금 심하게 들긴 했지만, 애초부터 계단을 내려 가며 책 같은 걸 읽고 있었던 내 잘못도 있으니까. 친근감 있게 말을 돌려주자, 사쿠라기의 얼굴은 금세 확 하고 풀려 생기로 빛났다. 정말? 다행이다. 내심 걱정했거든. 후에 후지마한테도 잔뜩 꾸지람 들었고. 그럼 오늘은 무슨 일이야? 어느새 센도의 옆에 걸터앉아 멋쩍은지 혀를 살짝 내밀며 오래
241 된 친구처럼 말을 거는 사쿠라기의 모습에는 한 조각의 어색함도 없었다. 원래 사람을 가리지 않는 성격일지도 모른다. 센도는 흘 깃 후지마 쪽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느긋하게 차를 즐기고 있었다. 뭐, 모처럼 유명인하고 옷깃이 스쳤으니 그 인연으로 사인이라 도 받을까 해서. 꽤나 빈약한 변명이지만 달리 할 말이 없다. 첫인상에 호기심이 생겨 홈페이지를 보다가 결국 호기심만으로 견딜 수 없어 직접 만 나기 위해 찾아왔다는 말은, 감정 표현에 있어 빈곤하기 그지없는 센도가 하기에는 무척 계면쩍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런 호기심 자체가 영 생소하기만 한 것이다. 다행히 사쿠라기는 비슷한 종류 의 호의를, 팬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로부터 수도 없이 받고 있을 터였다. 이래저래 그들과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해야 한다면 처음 부터 팬다운 평범함 속으로 매몰되는 것도 괜찮지 싶다. 낮의, 사 무실에서 쇳소리를 질러대던 여직원들을 떠올리면 자신도 같은 범 주인가 싶어 곤란하지만 원칙적으로 따지고 보면 그 감정의 뿌리는 사실 크게 다를 바도 없었다. 사쿠라기는 센도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 보더니, 좋아! 화보집에 사인해 줄게. 라며 책을 가져올 요량인 지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센도 씨는 어떤 일을 하시나요? 네? 이런, 실례했습니다.. 사쿠라기가 자리를 뜨자마자 후지마의 질문이 재개되었다. 사쿠 라기의 뒷모습을 시선으로 좇는 바람에 대답이 한 템포 늦긴 했지 만, 센도는 제 1선의 영업사원답게 사과를 하며 명함 케이스를 뒤 적거려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아, 료난이라면 들은 적이 있습니다. 틀림없이 IT 계열이었 죠? 혹시 서버 호스팅도 하십니까? 후지마는 흥미롭게 명함을 관찰하며 물었다. 네. 주된 서비스는 아닙니다만 패키지 형식으로 제공하고 있습 니다. 그렇습니까? 마침 잘 되었네요. 사실은 저 아이의 홈페이지 말 입니다만, 본격적으로 웹 게임과 모바일 콘텐츠, 고화질의 동영상 및 각종 관련 상품 판매 등 좀 더 본격적인 서비스를 하고 싶어서 위탁업체를 알아보고 있던 참이었거든요. 패키지 형식이라면 서버 운영에 필요한 부가 서비스와 솔루션들까지도 함께 서비스하십니 까? 그렇긴 합니다만. 갑작스런 업무 이야기에 센도가 대답을 흐리고 있을 때, 사쿠라 기가 활기차게 화보집을 휘두르며 들어왔다. 이번에도 센도의 옆 에 털썩 앉더니 대뜸 묻는다. 이름이 뭐야? 그러고 보니 사쿠라기와의 자기소개는 아직 이다. 센도 아키라. 사쿠라기에게도 명함을 한 장 내밀었다. 좋았어! 뭐가 좋다는 건지, 사쿠라기는 명함을 받아들고 기운차게 화보 집과 함께 들고 온 매직을 열더니 첫 장에 기하학적인 필체의 사인 을 해 나갔다. 그렇지 않을까 했지만, 사쿠라기는 역시 櫻 木 이 었다. 마치 일본의 상징 같은 화려한 이름이다. 본인과 정말 잘 어울린다. 달필은 아니지만 직선적이고 시원시원한 서체로 커다랗
243 게도 사인을 한 사쿠라기는 자신의 이름 아래쪽으로, 마치 애교 있는 여자 아이돌이었다면 하트로 테두리라도 할 것 같은 기세로 센도의 이름까지 적어 넣었다. 조금 빼뚤빼뚤하게 적혀진 자신의 이름을 바라보고 있자니 묘한 감흥이 든다. 벚나무 아래 신선의 길이라니, 운치가 있는 건지도 모른다. 묘한 조화다. 자. 사쿠라기가 화보집을 내밂과 동시에 후지마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하나미치. 네 홈페이지 개편 말이야, 여기의 센도 씨 회사에 맡길까 하는데, 어때? 후지마의 대중없는 이야기에 센도도 당황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눈앞에서 여유 있게 웃으며 앉아있는 남자의 속을 알 수가 없다. 보통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법은 없다. 더 구나 종전의 이야기로 미루어보면 단순한 서버 호스팅이 아니라 사 이트의 구축까지 수주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동영상이야 그렇다 쳐도 모바일 콘텐츠에 몰까지 제공한다면 결코 간단한 계약은 아니 다. 신분 인증은 물론 핸드폰으로의 각종 데이터 전송과 이용금액 결제까지, 최근 가장 두드러지는 웹 프로그램의 모든 분야가 집약 된다. 응? 몰라. 난 그 쪽에 문외한이니까 마음대로 해. 사쿠라기는 별 관심이 없는 듯 소파에 기대에 앉아 다리를 흔들 고 있다. 그럼 센도 씨. 일단 기본 패키지의 견적서를 보내주세요. 사양 을 체크해 본 후 함께 회의를 통해 서비스와 계약의 세부사항을 정 하도록 하지요. 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어떨 결에 대답을 해 버렸다. 사실 센도 쪽에 있어서 결코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누구나 알 정도의 대형 연예 기획사의, 아마 도 무척이나 잘 나갈 게 틀림없는 스타의 홈페이지. 그것도 대화 로부터 후지마의 계획을 유추해보면 그저 팬 서비스 차원의 사이트 정도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계약을 하게 되면 이래저래 사 쿠라기를 자연스레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날지도 모른다. 사쿠 라기와 자신 사이에 막연하게나마 안개로 이루어진 희미한 길이 생 겨나는 것 같았다.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던 직선이, 서서 히 겹쳐진다. 식사는 마음에 들었어? 번화가 부근의 회원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바(bar)쪽으 로 자리를 옮긴 직후 사쿠라기가 물었다. 차를 마신 후 되돌아가 려는 센도를 후지마가 만류한 뒤 충돌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 사쿠 라기가 저녁을 대접하도록 했던 것이다. 사쿠라기도 후지마의 제 안에 불만이 없었는지 흔쾌히 승낙하고 자신의 차에 센도를 태워 이곳까지 왔다. 슈트 차림인 센도는 그렇다 쳐도 오늘도 역시나 목덜미가 약간 늘어난 아이콘 티셔츠에 빈티지 진이라는 구색 없는 복장의 사쿠라기가 안내한 곳은 의외일 정도로 격조 있는 곳이었지 만, 아무래도 연예인이라는 까닭만으로 무사통과인지 매니저의 정 중한 안내까지 받았다. 결국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적확한 배합 법 으로 요리된 일종의 예술에 가까운 식사를 마치고 이렇게 재즈가 흐르고 있는 바에 기대앉아 사쿠라기와 마주보고 있자니, 어쩐지 시간의 흐름이 거친 급류에서 느릿하게 흐르는 완만한 조류로 바뀐
245 것만 같다. 늦은 봄비가 지면에 부딪쳐 튀어 오르듯이 기분마저 트럼펫 소리를 타고 박자를 맞추어 스프링처럼 튀어 오른다. 응. 좋았어. 사실상 꽤나 둔한 미각을 가진 센도였지만, 사쿠라기와 함께 한 식사는 정말로 즐거웠기 때문에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하지만 사 쿠라기에게 전해진 초점은 조금 어긋났다. 그렇지? 후지마는 음식에 까다롭거든. 미식가라고나 할까. 처음 귀국했을 때 그 녀석이 데리고 다닌 데는 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굉장한 곳뿐이었지. 미국에서 후지마를 만나기 전까지 고 기라고는 기껏해야 햄버거 정도밖에 몰랐던 내가 얼마나 충격을 받 았게. 그 무렵이 다시 떠올랐는지 사쿠라기는 고개를 숙이고 쿡쿡거리 며 웃었다. 듣기 좋은 소리의 파동을 따라 붉은 머리칼도 제각기 숨을 쉬기라도 하듯 춤을 췄다.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가, 센도는 의아한 생각이 들어 물었다. 사쿠라기, 미국에 있었던 거야? 미국도 미국이지만, 육류 요리가 넘쳐나는 나라에서 입에 댄 고 기류가 햄버거뿐이었다는 것도 이상하다. 센도와 알게 되기 전의, 일본으로 돌아오기 전의 사쿠라기는 도대체 어떤 생활을 하고 있었 던 걸까. 사쿠라기는 약간 찡그려진 센도의 표정엔 아랑곳 않고 활기차게 대답했다. 16살 때까지 뉴욕에 있었어. 들어온 건 이제 5년이야. 처음엔 일어라곤 한마디도 못해서 무지 고생했었다고. 후지마가 가정교사 까지 붙여줬지만 진도가 느려서 어찌나 혼났던지, 쳇. 회상하면 괴로울 뿐인지 사쿠라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그린 듯 정갈한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 그랬구나. 그럼 혼혈? 환경이야 어쨌든, 긍정도 부정도 분명한 나라다. 어딘지 일본인 답지 않은 경쾌한 몸놀림과 직선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는 그래서인 지도 모른다. 더욱이 사쿠라기는 보통의 일본인에 비해 눈동자의 색소가 옅고 피부가 투명하다. 몸에 흐르는 피 자체가 다를 수도 있다. 단편적으로 사쿠라기에 대해 알면 알수록 호기심은 채워지 는 것이 아니라 더욱 부풀어간다. 계속되는 센도의 질문에도 사쿠 라기는 별로 불쾌한 기색 없이 대답해주었다. 잘 몰라.? 모를 수도 있나 싶어 다시 물으려던 찰라, 하나미치, 주문은? 하고 바텐더가 말을 걸어왔다. 오늘은 차 가져 왔으니까 나는 알코올 없는 걸로 적당히 주고, 센도는? 체리 블로섬. 6) 센도의 주문에 사쿠라기의 한 쪽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지만 센도는 개의치 않고 유심히 바텐더를 바라보았다. 바로 눈앞에 앉 아 있는 붉은 머리 남자를 연상시키는 칵테일의 이름을 듣고 슬며 시 웃더니 잰 손놀림으로 셰이커를 흔드는 그의 가슴에 붙은 명찰 에는 미토 요헤이라고 쓰여 있다. 일본에 온 지는 5년 남짓이라고 하는 사쿠라기를 주저 없이 퍼스트 네임으로 부르는 그는 사쿠라기 와 무척 친한 사이인 듯하다. 센도의 시선을 눈치 챘는지, 사쿠라 6) Cherry Blossom : (Brandy Base)..
247 기가 밝게 웃으며 소개를 해 주었다. 요헤이는, 내가 갓 일본에 왔을 때부터의 친구야. 마치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자란 것처럼 마음이 잘 맞아서 이제는 지란지교를 나누고 있지. 과장스럽게 표현하는 사쿠라기에 미토는 실쭉한 미소를 짓고, 놀리듯 물었다. 그런데 차를 가져오다니, 금족령은 풀린 거야? 미토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쿠라기의 얼굴이 불만 가득한 표정으 로 쀼루퉁해진다. 금족령이라니? 사쿠라기가 대답하기도 전에 센도가 물었다. 사쿠라기는 말하기 가 싫은 듯 입술을 몇 번 삐죽이고는 거칠게 대답했다. 요즘 멋대로 돌아다닌다고 차 키를 압수당했었거든. 전에 너하 고 부딪혔을 때도, 그래서 지하철을 탔었던 거야. 도대체 후지마 도 여우 녀석도 완전히 삼십 년 된 마누라가 따로 없어. 얼마나 잔 소리가 심한지! 오늘은 너하고의 저녁 식사 덕에 특별히 사면 받 은 거야. 지하철을 탔었냐, 너? 사쿠라기의 불평에는 아랑곳 않고 미토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 다. 머리카락도 가리고, 선글라스까지 쓴 채 탔었다고! 반쯤 우기듯 소리치는 사쿠라기의 말은 센도가 듣기에도 억지 같았다. 자신은 몰랐지만, 직원들의 반응만 봐도 도저히 대중교통 을 이용할 만한 수준의 스타가 아니다. 러시아워는 피한 시간이었 다 해도 용케 사람들에게 둘러싸이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다. 미토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여자들이 몰려들기라도 했으면 어 쩔 뻔했냐며 날카롭게 사쿠라기를 질책했다. 그게, 그 때는 그런 상황은 미처 생각 못 했어. 미토의 꾸지람에 의아하다 싶을 정도로 사쿠라기가 침울해졌다. 물론 거리에서 군중들로 에워싸이는 거야 스타로선 달갑지 않은 일 이긴 해도, 조금 전까지의 발끈했던 기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순 식간에 의기소침해진 사쿠라기의 태도에는 의문이 남았다. 분위기 가 어색해졌다고 생각할 무렵 마침 사쿠라기의 핸드폰이 울렸다. 사쿠라기는 표시되는 번호를 보더니 한껏 싫은 표정을 지었다. 하 지만 아무래도 무시할 수는 없는 상대인지 벨이 몇 번이나 울린 후 툴툴거리는 기색으로 전화를 받았다. 받자마자 뭐야, 여우! 라 고 쏘아붙이는 폼이 마냥 어린애 같다. 그러니까, 후지마도 알고 있다니까! 그래, 녀석이 먼저 꺼낸 이야기라고. 뭐? 온다고?! 싫어! 오지 마!! 언제 들어가든 무슨 상관이야, 먼저 자면 되잖아!! 내일 스케 줄 잊지 않았으니까 신경 꺼! 에잇!! 끊어!!! 시끄럿! 통화 중에 무척이나 열이 받았는지 전화를 끊고도 한참을 씩씩 거린다. 핏대가 선 사쿠라기의 얼굴을 보더니, 미토가 사쿠라기에 게는 시브리즈 7) 를, 센도에게는 주문한 체리 블로섬을 내밀며 웃 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역시 루카와? 7) Seabreeze :,,..
249 더욱 일그러지는 사쿠라기의 표정이 아마도 바텐더의 말이 정답 인 듯하다. 루카와가 누굴까, 센도가 궁금한 얼굴로 바라보자 사 쿠라기가 미간을 누르며 대답해주었다. 루카와 카에데라고, 로드 매니저야. 사실 매니저라기보다는 감 시자라고 해야겠지만. 또렷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다를 바 없는데 말을 흐리는 표정이 어딘가 멀어 보였다. 대화를 할 때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 로 센도의 눈을 들여다보던 사쿠라기가, 센도가 아닌 센도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두고 대답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조금 발끝에서 부터 신경이 저려오는 것 같다고 느끼며 센도가 자신 앞에 놓인 술 을 들이켰다. 혀끝에서 느껴지는 맛은 잘 알 수 없지만 식도를 타 고 위까지 내려가는 짜릿한 기운이 뜨겁다. 맛을 모르는데 기운을 느낀다는 건, 어떻게 보면 센도의 일상과도 조금 닮아있다. 삶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변함없이 닥쳐오는 내일의 기운에 기진맥진 해져 있다. 하지만 이것도 모두 머리로 느껴지는 피상적인 나날의 파편일 뿐, 심장으로 느낄 수 없는 센도에게는 사실 이래도 저래 도 좋을 일인지 모른다. 휘저어진 바닷물 속의 모래알들이 천천히 가라앉듯이 분위기가 침잠해버려, 그 이후로는 서로 별다른 대화 없이 시간이 흘렀다. 사쿠라기가 입을 다물자 미토도 일부러 말을 걸진 않았고, 센도도 그다지 억지로 대화를 이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 저항감 없이 침 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센도의 잔이 비자 사쿠라기가 일어났다. 그럼, 가자. 바래다줄게. 요헤이, 다음에 또 봐. 그래. 잘 가, 하나미치.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작별인사인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요헤이가 부르는 하나미치는 후지마가 부르는 것보다 어쩐지 더욱 발음이 둥글고 부드러워서 센 도의 머릿속까지 울려왔다. 새삼 생각하지만, 하나미치라니 바 로 붙은 퍼즐의 조각처럼 성과 딱 들어맞는 이름이다. 벚나무 잎 이 날리는 꽃길 일본인의 노스탤지어에 다름 아니다. 곁에 서 있는 사쿠라기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입 속에서 굴리듯 이름을 불러보았다. 하나미치 사쿠라기 하나미치.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것만 같다. 체온과 똑같은 온도의 물이 정 수리부터 발끝까지 몸의 곡선을 타고 흐르는 듯한 기분. 온 몸 이 사쿠라기의 이름 하나로 젖는다. 관능마저 느껴질 정도의 노곤 한 이 열기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센도는 발걸음을 멈추고 멍 하니 계산을 하고 있는 사쿠라기를 바라보았다. 시야가 흐려 보였 다. 의식하지 못한 채 센도는 가슴 부근, 원래대로라면 피와 살이 뛰고 있을 그 부근을 움켜쥐었다. 늦은 시간이었기에 도로는 한적한 편이었다. 센도에게 집의 위 치를 물은 사쿠라기는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했다. 조금 열린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이 서늘하니 기분 좋았다. 아직 늦더 위가 남아있는 9월 초순이지만 해가 지면 더위에 짓눌려 있던 가 을이 빠끔히 고개를 내민다. 사쿠라기의 평균을 훨씬 웃도는 신장 때문인지 좌석은 한계까지 뒤로 밀려나 있었다. 4인승 차지만 이대로라면 뒷자리에는 불편해 서 아마 사람이 타기 힘들 것이다. 어쨌든 덕분에 조수석에 앉은 센도도 다리를 두기가 수월해서 온 몸을 쭉 뻗은 채 편안하게 시트
251 에 기대어 바람처럼 흘러가는 창 밖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 다. 겹쳐지고 또 다시 흩어지는 불빛들을 바라보며 사쿠라기와 보 낸 시간을 떠올려본다. 혼혈일지도 모르는 사쿠라기, 미국에 있을 때 아마도 순탄치 않은 생활을 한 듯한 사쿠라기, 거침없이 격류 처럼 밀고 들어와 파도치듯 자신의 어느 부분을 자극해 오는 사쿠 라기, 하지만 순간 가슴이 내려앉을 정도로 탈색된 표정을 지을 줄 아는 사쿠라기. 공통점은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양태지만 그 래도 일면 일면이 모두 사쿠라기에게서 뻗어 나오는 가지들이라는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오늘 알게 된 사쿠라기의 모든 조각들 이 남김없이 뇌에 생생하게 박혀들었다. 어쩌면 원래 사람이란 이 토록 다양한 개성을 가진 존재인지도 모른다. 단지 센도가 깨닫게 된 계기가 사쿠라기일 뿐, 모두가 생명을 끌어안은 채 미끄러지듯 저마다의 각도로 시간의 빙판 위를 회전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센도에게 다른 사람은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회전의 궤적이 센도의 마음까지 미쳐 오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을 미워할 수도 좋아할 수도 없는 센도에게 사쿠라기는 지금까 지의 밋밋한 정서적 반응을 일순간에 날려버릴 듯한 강렬하고 뚜렷 한 인상의 사람이었다. 주위에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결국엔 혼자인 것이다. 사랑이 노력한다고 가 능한 것이 아니듯 끈질기게 노력해 보아도 센도는 주위 사람들을 정신적 의미로 자각할 수 없었다. 그런 의미로 사쿠라기는 특별했 다. 센도가 일부러 노력한 것도 아닌데, 이미 아플 정도로 센도는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사쿠라기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다. 뚫고 들어온다. 타인일 뿐인 존재가, 사쿠라기라는 이름을 가지 고.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세상 모든 것들은 하얗게 지워지고 사쿠라기 하나만이 가득 들 어찬다. 탄생 이전부터 미리 준비된 만남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것을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센도는 머리 한 끝으로 생각했 다. 차가 크게 회전하며 센도의 아파트 앞에 정지했다. 골몰히 생각 에 잠겨 있는 틈에 도착해버린 것이다. 사쿠라기와 함께 한 오늘 이 끝나간다. 어딘가의 혈관으로부터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 으며 센도는 이미 익숙해진, 준비된 미소를 사쿠라기에게 보냈다. 고마워. 식사도 잘 했고 화보집도 소중히 간직할게. 시원스레 작별하네? 차 한 잔도 안 권하는 거야? 머뭇머뭇 센도가 내어놓은 인사에, 사쿠라기는 의중을 파악할 수 없는 애매한 미소를 띠며 질문을 돌렸다. 얼굴 전체로 웃는 것 이 아니라 입술 끝선만을 살짝 올린 유혹하는 표정이다. 마치 센 도의 답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아, 그럼. 마시고 갈래? 혼자 사니까, 들러도 괜찮아. 아냐, 됐어. 엎드려 절 받기는 싫은걸. 서둘러 대답했지만 오히려 거절당했다. 사쿠라기와의 대화는 지 금까지 센도가 살아오며 축적해온 패턴들과는 조금씩 달랐다. 먼 저 운을 띄운 것도 사쿠라기고 자신도 예의상 들러라 말하는 것이 아닌데, 사쿠라기는 그것을 알고 거절하는 것인지 모르고 거절하 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몰라서 멀뚱히 바 라만 보고 있자, 사쿠라기가 팔을 내밀며 센도를 살짝 밀었다. 안녕. 안녕. 조심해서 돌아가.
253 여기까진가 싶어 몸을 돌리고 문을 열려는 순간, 이미 가슴께로 뻗어와 있던 사쿠라기의 팔이 센도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갑작 스레 끌려가는 상체에 당황할 겨를도 없이 거품처럼 부드럽게 젖어 있는 사쿠라기의 입술이 센도의 입술에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이 해할 수 없는 전개에 넋이 나가 있자 사쿠라기가 작게 웃었다. 그 리고 센도의 귓가까지 얼굴을 가져다 대고는 속삭이듯 묻는다. 너, 나한테 반한 것 아니었어? 지척에서 사쿠라기의 숨소리가 느껴진다. 우주가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센도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가 견딜 수 없을 정 도의 밀도로 압축되어 버린 기분이다.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서 센도는 계속해서 지금까지 읽어온 연애소설에서 비슷 한 상황들을 떠올려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동료들이 늘 현실과 소설은 다르다며 충고해 주었던 것이 맞았던 것이다. 머릿속은 갓 뽑아낸 제지처럼 희게 비어 이미 움직임을 멈추어 버렸다. 진짜, 안녕. 또 봐.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다시 한 번 인사를 건네고 바짝 붙 은 자세 그대로 사쿠라기가 센도 편의 문을 열어주었다. 서늘하게 피어 있는 밤의 공기가 밀려든다. 비틀대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 도의 불안정한 자세로 센도는 차에서 내렸다. 관절에서 덜걱덜걱 소리마저 나는 것 같았다. 센도가 발을 떼자마자 사쿠라기의 차는 엔진 소리를 내며 달려가 버렸다. 가슴에 사쿠라기의 화보집을 안 은 채 센도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자신은 반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하지만 우연을 계기로 어떻게든 만남을 이어가려 하고 있 는 자신은 사쿠라기의 말대로 그에게 반한 것일 수도 있다. 안타 까울 정도로 옥죄어 오는 이 감정은 결코 꾸며 낸 것이 아니다. 온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통 당황스럽고 이해하기 힘든 일투성이지만 모든 일은 센도의 의지 의 개입 없이 자연스레 흐르고 있는 것이다. 사쿠라기와 함께 있 으면 표정을 만드는 법을 잊어버린다. 이십 오 년 동안 어색함 없 이 쓰고 있던 가면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얇은 피부 한 겹의 맨 얼 굴이 드러나 보인다. 하지만 그런 센도에 비해, 장난처럼 키스해 올 때의 사쿠라기는 가면을 벗고 있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쓰고 있 는 것이었을까. 해답이 나지 않는 고민 속에서 센도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 다. 아직도 입술 끝에 거품이 이는 감촉이 남아있는 것 같아 살짝 손가락을 대었다. 손가락 마디로 부풀어 오른 크림 같은 그 느낌 이 전이되어 오는 순간, 어딘가 멀리 떨어져 있는 코인로커에서 두근 하고 버려진 자신의 심장이 박동한 것 같았다. 틀림없이 루카와가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걸 알기에 사쿠라기는 차의 속도를 올렸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홍수처럼 쏟 아질 잔소리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기가 죽는다. 잠자리에 들지도 못하고 한동안 티격태격해야 할 것이 싫어서, 센도가 그토록 얼빠 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면 진심으로 그 집에서 묵어갈까 생각했었 다. 크게 다치지도 않았는데 일부러 만나러 온데다가 식사 내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기에 그 정도는 수 월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완전한 오산이었다. 타인이 자신에게 보내오는 감정의 파장을 판독하는 데는 자신 있는 사쿠라기라서, 비록 실패했다 하더라도 센도가 자신에게 흥 미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결론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단지, 감
255 정의 종류는 명백한데 센도의 반응이 흐릿한 것이다. 먼저 유혹해 오지도 않을 뿐더러, 기껏 유혹해 주었더니 눈앞에 있는 건 삐걱 거리는 양철 인형이다. 화술 자체에는 능숙한 것 같은데 직접적인 행동에 대한 반응은 굼뜨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요령이 없다. 입 을 맞추었을 때의 센도의 눈동자에는 욕망의 티끌도 없었다. 당혹 으로 딱딱하게 굳어 사쿠라기의 모습만을 그대로 반사해내고 있었 을 뿐이다. 예기치 못한 행동이었다면 당황하는 것은 이해가 가 도, 그 목석같은 반응만은 사쿠라기에겐 고개가 갸웃해질만한 일 이었다. 지금까지, 키스했을 때 저런 태도를 보인 사람은 센도가 처음이었다. 뉴욕에서의 생활방식 탓도 있고 귀국한 후의 배경도 연예계고 해서 사쿠라기는 사실 그다지 섹스에 큰 가치를 두지 않았다. 만 나는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 것도 빨랐다. 그런데 센도는 참으로 느릿하다. 느릿하다고 표현하기 이전에 움직이고 있긴 한 건가 의 문조차 든다. 늘 사랑 받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어서, 조 금이라도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것 같으면 서슴없이 상대와의 관계 를 진전시키고 싶어 하는 사쿠라기에 비하면 센도는 고슴도치 같았 다. 일부러 세운 가시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 뾰족한 털들에 상처받지 않으려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지도 모른다. 그 렇게 생각하자 사쿠라기는 불쑥 화가 났다. 이전의 불안정했던 시 기처럼 닥치는 대로 타인과 체온을 나눌 수 있는 관계를 맺길 원하 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사쿠라기는 센도가 꽤 마음에 든 것이 다. 처음에 부딪쳤을 때부터 멀뚱히 바보 같은 미소를 계속 짓고 있던 그 남자에게 관심이 동했다. 하얗다고 표현하기에는 밀랍처 럼 창백한 피부에 결벽까지 느껴졌던 유달리 마디가 두드러진 손가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락들, 손을 내밀어 잡았을 때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안타까움 이 사쿠라기의 체내로 스며들었다. 본능적으로 사쿠라기는 센도가 오랜 세월 자신의 본질을 숨기고 만들어 낸 얼굴로 모든 것을 버려가며 살아온 남자라는 것을 알아 차렸다. 사쿠라기는 피 냄새에 민감했다. 센도는 틀림없이 어딘가 에 무너져 내린 상처자국을 감추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호감을 줄 수 있을 법한 미소에 깔끔한 말씨, 하지만 얼굴 전체로 그려내는 미소 뒤에 숨은 눈동자는 이 세상의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사쿠 라기는 그런 눈빛을, 하나 더 알고 있다. 그건 어떻게 해도 사랑 받을 수 없었던 단 한 사람의 눈이었다. 생각이 과거로 흘러가자, 사쿠라기는 떨쳐버리려는 듯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저 밑에서 손짓하고 있는 어두운 골짜기로 빠져 들어서는 안 된다. 그 사람과 닮아서 센도에게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이라고 굳이 결론을 내릴 필요도 없다. 센도는 다르다. 먼저 다 가와 주었다. 그 멍해 보이는, 아무리 고개를 숙이고 몸을 굽혀도 바닥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게 어둠이 고여 있는 눈동자 위 로, 사쿠라기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반사되어 왔던 것은 꿈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더 이상 버림받은 초라한 영혼이 아 니다. 곁에는 틀림없이 가족이 있다. 굳이 생판 타인에게서 체온 을 구하려 애쓰지 않아도 원하면 언제든 주어지는 따스함을 손에 넣었다. 처음 만난 날, 차가운 겨울 공기에 하얀 숨이 토해질 정도로 달 려와 거리에 서 있던 자신을 세차게 끌어안아 주었던 후지마의 온 기를 아직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끊임없이 멍청이라 불러대 는 루카와도, 실제로 사쿠라기를 바보 취급하는 것은 아니다. 두
257 사람 다 사쿠라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알고 있다. 언제 어느 때 고, 사쿠라기가 절망으로 물들어 숨을 잃어갈 것만 같으면 지구 전체를 감싸고도 남을 만큼의 무한한 애정을 베풀어주었다. 그 애 정으로 인해 자각하게 된다. 자신은 쓸모없지 않다. 지금은 분명 히 사쿠라기의 존재 자체를 필요로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이 처음부터 지니고 태어나는 것은 울음뿐이라는 걸, 원하 지 않았는데도 너무나 일찍 깨달아버렸던 사쿠라기에게 있어서 두 사람은 가족 이상의 의미였다. 타인의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을 바 라보는 건 그 무엇보다도 큰 희열이었다. 그러니까 흔들리면 안 된다. 어떻게 해서도 주체할 수 없었던, 슬픔을 치장처럼 두른 채 분노와 절망으로 얼룩졌던 과거로 다시 자신을 회귀하게 두어선 안 된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똑바로 고개를 들었다. 루카와가 기다리고 있다. 문을 열자마자 품으로 사쿠라기가 쓰러져 왔다. 루카와. 라고, 어리광을 부리듯이 속삭이며 머리를 비벼온 다. 이것이 늦은 귀가에 대한 꾸지람을 피하려는 방편인 건지, 아 니면 진심으로 외로워서 매달리는 건지 알 수 없어서 루카와는 눈 을 가늘게 뜨고 사쿠라기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자신의 가슴에 기대다시피 안겨 있는 사쿠라기의 얼굴은 머리카락에 가려 잘 보이 질 않는다. 풍성하게 흐트러진 머리칼 속으로 손가락을 파묻으며 루카와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가 한없이 아이에 가까운 이 남자는, 언제나 제 멋대로의 예측불허인 것이다. 사실 자신에겐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일언반구도 없이 후지마가 금족령을 풀어버린 것에 대해서도, 사 쿠라기가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저녁 식사를 하고 돌아온 것에 대해서도 무척 화가 나 있었지만, 어쩐지 사쿠라기의 전신에 서 피어오르는 분위기만으로 지금은 화를 낼 계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시비를 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음에도, 루카와는 잘잘못을 가리지 않고 다시 한 번 사쿠라기의 머리칼을 쓰다듬은 후 등을 토닥여주었다. 어서 와. 짧지만, 무뚝뚝할뿐더러 감정 표현이 극히 드문 루카와로서는 가장 다정한 제스처였다. 그 말에 사쿠라기는 고개를 반짝 들더 니, 에헤헤 라고 바보처럼 웃었다. 순간 또 속아 넘어간 건가 싶 어 루카와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바로 자신에게서 떨어져 터덜터 덜 욕실 쪽으로 향하는 사쿠라기의 뒷모습에는 어딘가 위태로움이 떠돌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리는 것을 확인 하고 루카와는 전자레인지에 우유를 데웠다. 좀 전에 닿았던 사쿠 라기의 피부는 약간 차가워져 있었다. 사쿠라기는 원래 체온이 낮 아 한 여름에도 찬 물 샤워를 못 견디지만, 루카와는 적당히 달아 오른 사쿠라기의 피부를 좋아했다. 루카와보다도 싸늘한 사쿠라기 의 손에 닿으면 어쩐지 굉장히 애달픈 기분이 되는 것이다. 루카 와도 체온이 그리 높지는 않아서 자신이 그의 손을 마주 잡아주는 것만으로는 사쿠라기의 손은 좀처럼 따스해지지 않았다. 그런 까 닭에 자기 전에 조금이라도 몸을 녹일 수 있도록 우유를 데워주는 것이 루카와의 하루의 마지막 일과가 된 것도 벌써 오래된 일이다. 데워진 우유를 사기잔에 따르고 있자니 사쿠라기가 머리칼을 수 건으로 털며 다가왔다. 말없이 잔을 내밀자 사쿠라기가 두 손으로
259 받아들었다. 손끝에 직접적으로 닿아오는 온기에 마음이 놓이는지 아까보다는 훨씬 표정이 풀려 있었다. 하지만 루카와는 단도직입 적으로 물었다.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응? 기분 안 좋잖아, 너. 사쿠라기는 대답 없이 따끈한 우유를 할짝거리며 도대체 저 라 텍스 같은 무기질의 얼굴 어디에서 저토록 날카로운 관찰력이 나오 는 걸까 생각했다. 후지마도 그런 편이지만, 루카와는 그 이상으 로 사쿠라기의 감정에 예민했다. 조금이라도 사쿠라기의 기분이 우울해지거나 컨디션이 저조해지면 반드시 알아차리고 이유를 물 어온다. 때로는 은근슬쩍 감춰주고 넘어가는 후지마에 비해 일일 이 까닭을 탐색해 오는 루카와는 그만큼 귀찮았지만, 언제나 자신 을 바라봐 주고 있다는 점에서는 사쿠라기에게 가장 큰 안도감을 주는 존재였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 때문에 후지마가 자신과 루 카와의 동거를 허락한 것이라는 걸 사쿠라기는 잘 알고 있었다. 그냥. 모처럼 공격해 들어간 상대에게서 퉁, 하고 되 튕겨 져 나왔다고나 할까. 루카와의 표정이 미미하게 불쾌해졌다. 오늘 저녁 상대는 후지 마에게서 듣기론, 며칠 전의 사쿠라기 탈주 때 지하철에서 부딪혔 던 남자라고 했다. 사쿠라기를 뒤쫓느라 그 남자의 인상이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게 짜증스러웠다. 하지만 사쿠라기에게 호감을 갖 고 있지도 않은 상대와 둘이서 식사를 하라고 후지마가 보냈을 리 가 없다. 사람에게 거절당하면 보통의 곱절 이상으로 상처를 받는 사쿠라기임을 누구보다도 그가 잘 알고 있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어떤 사람이었는데? 루카와의 질문에 사쿠라기는 우유를 마시는 것조차도 멈추고 조 용해지더니, 간결하게 대답했다. 히토미 같은 사람. 침묵이 흘렀다. 사쿠라기는 루카와의 뻣뻣해진 얼굴을 바라보며 자조했다. 어린 시절의 정신적 외상으로 누구보다도 가장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사쿠라기 자신이다. 그런데도 그 과 거가 자신 외의 다른 사람에게도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것이 신기 했다. 처음에는 믿을 수도 없었다. 아픈 것도 자신이고 버림받은 것도 자신이었으며 학대당한 것도 자신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에는 미세한 거미줄 같은 것이 있어서, 자신의 통증도 환희도 자 신과 감정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진동으로 전달되어 영 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건 요 몇 년 사이의 일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과 함께 사쿠라기는 평온해졌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닌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누군가와 이어져 있다. 자신이 아파 하면 반드시 누군가가 알아차려 준다. 자신이 기뻐하면 역시 함께 기뻐해 주는 사람이 있다. 시선을 내리자 금세 흰 막이 생겨버린 데운 우유가 들어왔다. 사기잔을 들고 천천히 흔든다. 옅은 막이 파장을 견디지 못하고 찢어졌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많이 틀린 것 같아. 그녀는 자신만으로 가득한 사람이었지만, 오늘 만난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도 채울 수 없는 결락 된 부분이 있는 것 같았어. 그런 종류의 한없이 허기진 어둠을, 루카와는 바로 사쿠라기 안 에서 보았었다.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후지마가 타국 땅에까지 가서 데려왔던 붉은 머리의 아이는, 우울한 보라색을 닮은 음습한
261 정열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더할 나위 없이 강하고 또 렷한 눈동자로 세상을 직시하고 있기도 했다. 바위에 맺혀있는 금 강석 한 조각처럼 단단하게 보였던 눈빛은, 마치 혹한의 땅에서 피어나는 해바라기처럼 아름다웠다. 가장 차가운 땅에 뿌리를 뻗 었음에도 가장 뜨거운 빛을 향해 주저 없이 얼굴을 돌린다. 루카 와의 눈에는 그것이,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뚫고 비죽 튀어나온 고집스럽고 강인한 생명력으로 보였다. 사쿠라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이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는 것을 사쿠라기는 피하지 않았다. 어쩐지 그 사람이 마음에 들어. 보상심리만은 아닌 거라고, 생각하려고 해. 굴곡 없이 웃음 짓는 사쿠라기를 불만과 안도가 뒤섞인 모호한 감정으로 바라본다. 이 정도로 침착하게 사쿠라기가 히토미의 이 름을 꺼내게 된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다. 귀국한 뒤 심리치료를 시작하고도 1년 가까이는 사쿠라기는 비정기적으로 발작을 일으켰 었다.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눈물범벅이 된 채 공포로 자신을 자 해하려 드는 사쿠라기를 그저 힘으로 억압한 뒤 약물을 주사하며 느낄 수밖에 없었던 스스로의 무력함은 아직도 바래지 않고 루카와 의 가슴 한 구석에서 통증으로 소용돌이치고 있다.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치료와 신경 안정제 복용 사이에서 사쿠라기가 놓여 난 지 는 이제 가까스로 2년이 넘었다. 루카와는, 지니고 태어난 업보와 도 같은 상처를 이겨낸 사쿠라기를 존경했다. 그렇기에 사쿠라기 가 또 다시 그 불안한 과거 속으로 표류해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라면 무슨 짓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비로소 악몽으 로부터 해방된 듯 보이는 사쿠라기가 무작위로 다른 사람들에게 시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선을 돌려도 루카와는 자신만을 강제하지 않았다. 사쿠라기를 얻 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사쿠라기를 지키는 것이었다. 일반인은 상 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 속에서, 그래도 무너지지 않고 제 대로 현실에 발을 딛고 서게 된 사쿠라기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에게나 활짝 핀 웃음을 돌 릴 줄 알고, 활발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천성을 다시 되찾은 사쿠 라기는 드디어 태양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 해바라기였던 것이다. 어느새 우유를 다 마시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사쿠라기를 보 고, 루카와는 아주 자세히 관찰하지 않는 한 알아차릴 수 없을 정 도의 작은 미소를 지었다. 가볍게 사쿠라기의 어깨를 쳐서 깨운 후, 감싸 안듯이 해 침대로 데려가 누인다. 고마워. 반쯤은 입 속으로 잠겨 가는 흐릿한 인사를 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고른 숨소리를 내며 사쿠라기가 잠이 들었다. 침대 곁의 조 명으로 인해 더욱 선명하게 떠올라 보이는 사쿠라기의 얼굴을 한참 이나 바라보다가, 루카와는 사쿠라기의 어깨를 둘러앉은 채 자신 도 눈을 감았다. 부장은 쇼요 엔터테인먼트로부터 홈페이지 제작 의뢰를 받았다 는 말을 하자 뛸 듯이 기뻐했다. 후지마에게서 대략 들었던 구성 을 이야기하니 아무래도 기쁨은 더욱 커지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상당히 규모 있는 프로젝트인데다 전자결제 쪽의 솔루션은 벌 써 전 부문 개발되어 있는 상태에 거래하고 있는 PG 8) 사도 있었 고, 센도의 기억에 의하면 두어 달쯤 전 이동통신회사와도 계약을
263 했었으니 아마 모바일과 웹과의 연계 부문도 설계에 있어 상당부분 진척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디자인은 어차피 피부와 같아 프로그 램 위에 덧씌우면 될 일이고 콘텐츠는 쇼요 쪽에서 제공해 줄 예정 이어서, 결국엔 이미 개발되어 있는 모듈들의 재사용만으로도 사 이트 구축이 가능할뿐더러 센도의 회사 쪽에 굉장한 홍보효과를 가 져다 줄 것이 분명한 유명 기획사와의 계약이 이루어지게 된 셈이 었다. 언제 연예계에까지 인맥을 넓혀놓았냐며 어깨를 툭툭 두드 리는 상사의 얼굴을 보니, 오히려 외근 핑계를 대고 사쿠라기를 만나러 갔던 것이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센도가 쇼요를 찾 아가지 않았더라면 계약을 따내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 당연한 일 이라서, 센도는 자신을 탓하기보다는 두루두루 잘 된 일이라고 마 음을 고쳐먹었다. 어쨌든 일단은 기존의 패키지 상품 중에서 어느 정도 후지마가 요구한 것과 비슷한 레벨의 솔루션 카탈로그와 견적서를 쇼요에 보 내주는 것이 우선이다. 자료 보관실에 들러 쇼핑몰과 서버 호스팅 에 대한 팸플릿을 찾아내어 파일에 철을 했다. 모바일 쪽은 아직 완료된 시스템이 아니라 준비된 설명서가 없다. 이건 개발 팀에 따로 요청해야하나 생각하면서 사무실로 돌아오자, 갑작스레 아야 코가 센도! 라며 팔을 끌어당겼다. 덕분에 가슴에 안고 있던 서 류들을 떨어뜨릴 뻔 한 센도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아야코를 바 라보았다. 그러나 잔뜩 들떠있는 아야코는 그런 센도의 시선도 알 아차리지 못하고, 기대에 부풀어 있는 눈동자로 질문해왔다. 센도, 네가 사쿠라기의 사이트를 수주해 왔다는 거 정말이야? 8)Payment Gateway :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자료를 찾으러 다녀온 잠깐 사이에 소문이 퍼져버렸나 싶어 머 리가 아프다. 대답하려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아야코뿐 아니라 사무실의 대부분의 직원들이 몰려들어 흥미로운 시선으로 센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어쩐지 다들 사쿠라기에게 흥미를 보이는 것이 실큼한 생각이 들어 센도는 퉁명스레 그래.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물방울 터지듯 여직원들의 비명이 터진다. 그럼, 회의하러 우리 회사에도 올까? 센도의 시큰둥한 반응에는 아랑곳없이 아무래도 아야코 안에서 의 사쿠라기와의 조우에 대한 희망치는 계속해서 수직상승하고 있 는 모양이다. 어쩐지 심술을 부리고 싶다. 사쿠라기 본인이 기술 회의에까지 굳이 올 가능성도 희박하고, 온다 해도 미팅은 기획 팀이나 개발 팀하고 하게 되지 않겠어? 센도의 대답에 누군가가 우리 영업부는 늘 다른 부서 좋은 일만 시킨다니까. 라고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같은 회사의 일원이고 이쪽은 실적에 따른 인센티브를 가외로 받고 있으니 별로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건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센도 는 굳이 그 말을 입 밖에 낼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일단 준비된 자료만이라도 건네주자 생각해 묵묵히 외근 준비를 하고 있자, 아 직도 곁에서 떠나지 않은 아야코가 사탕을 눈앞에 둔 아이 마냥 눈 을 빛내며 쇼요에 가는 거냐고 묻는다. 성가신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에 주저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마치 마법처럼 순식간에 센도 의 책상 위로 흰 종이들이 수북하게 쌓였다. 개중에는 수첩이나 다이어리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센도, 꼭 사쿠라기 사인 받아와야 해!! 아야코를 위시해서 함께 머리를 주억거리고 있는 무리들에는 코
265 시노까지도 끼어 있었다. 센도가 추궁하는 눈길로 노려보자 그는 여자 친구가 팬이라는 어설픈 변명을 한다. 할 수 없어 한숨을 내 쉬고 서류가방 안으로 종이들을 쓸어 담았다. 사무실을 나서는 센 도의 등 뒤로, 지금까지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열렬한 배웅이 쏟 아졌다. 쇼요에 도착해서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후지마의 사무실로 안 내되었다. 책상 앞에서 무언가 포트폴리오 같은 것을 넘기고 있던 후지마는 센도가 들어서자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세요. 이쪽으로 앉으시죠. 자리를 권하고는 자신도 맞은편에 앉는다. 몸을 움직이는 내내 후지마의 시선이 끈질기게 달라붙어 조금 불편한 생각이 든다. 처 음 만나는 것도 아니건만 어째서 어시장에서 생선을 품평하는 중간 상인 같은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지 알 수가 없다. 곤혹해 하 는 센도의 기색을 눈치 챈 듯도 한데, 좀처럼 후지마는 센도를 관 찰하는 것을 그만두질 않았다. 안 오실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네? 센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후지마는 나른하게 웃었 다. 하지만 여전히 눈매는 날카롭게 치켜세운 채, 오셨으니 됐습니다. 자료를 보여주시겠습니까? 라며 자신이 던진 파문을 모른 척 하고 금세 사무적인 태도로 돌변했다. 센도 는 말끄러미 후지마를 바라보았지만, 그에게 자신의 의중을 설명 해 줄 의도가 없다는 것을 깨닫자 별다른 반응 없이 준비해 온 홍 보물들을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다. 그 사이에 비서가 차를 내왔으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나 두 사람 다 손을 대진 않았다. 자료의 배열이 끝나자 센도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 다. 이것이 일반적인 전자상거래 사이트에 대한 기획서입니다. 그 리고 오른쪽이 서버 호스팅에 대한 단계별 서비스 견적서입니다. 말씀하신 모바일 분야에 대한 솔루션도 보유는 하고 있지만 요구하 신 서비스를 모두 포함한 패키지 상품은 없기 때문에, 오늘 드리 는 자료는 참고로 삼으시고 기획 팀과 함께 프로젝트에 대한 업무 회의를 한 번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후지마는 서류를 집어 들고 눈으로 훑으며 간간이 센도에게 질 문을 던졌고, 성실하게 대답해 오는 센도를 날카로운 눈매로 응시 했다. 오전에 GQ 9) 의 표지 촬영 때문에 사쿠라기를 데리고 왔던 루카 와는, 눈앞의 이 남자에 대해 후지마에게 꼬치꼬치 캐물었었다. 사쿠라기 주변의 인물에 대해 탐색하는 것 정도야 서로 당연한 일 이기 때문에 익숙해져 있지만, 오늘의 루카와는 조금 지나치다 싶 을 정도로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어제 전화로 상황 설명을 할 때 만 해도 신경질적이긴 해도 과민하지 않던 루카와의 돌변에 어깨를 으쓱하며 까닭을 물어보니 사쿠라기가 센도와 만난 후 히토미를 떠 올려 기분이 저조해졌다한다. 그리고 루카와의 입에서 그 이름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후지마의 기분도 가라앉았다. 9) Gentlemen's Quarterly : 1957,,, 10.. GQ.
267 자신이 부족함 없는 사랑을 받고 자랐기 때문인지, 후지마는 대 부분의 타인에 대해서도 관대했다. 곁에 둘 사람을 가리긴 하지만 그렇다 해서 특정한 누군가를 깊게 증오해보거나 두려워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 후지마가 유일하게 피가 끓어오를 정도의 분노를 불 태우고 온 몸이 오싹해지는 공포를 느끼는 것이 바로 히토미였다. 그녀는 후지마의 이해 범주 밖에 있는 사람이었고, 만난 순간 끌 어안을 수밖에 없었던 사쿠라기의 유년시절을 지배하고 있는 여자 였다. 어떻게 해서든 사쿠라기의 기억 밖으로 몰아내고 싶은 그녀 를 이 남자가 상기시킨다면 자신은 선택을 잘못 한 것인지도 모른 다. 후지마는 사람의 어두운 면을 통찰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루카 와보다 서툴렀다. 만의 하나라도 말쑥하고 무심해 보이는 잔물결 같은 이 남자의 심장 깊숙이 히토미처럼 치유할 수도 없는 폐허가 자리하고 있다면 큰 낭패다. 그런 사람에게 사쿠라기의 손을 내밀게 하고 싶은 생 각은 추호도 없었다. 루카와의 말에 의하면 사쿠라기는 이미 센도 에게 흥미를 보이고 있는 듯하지만, 잘라버리려면 얼마든지 손쉽 게 잘라내 버릴 수 있는 것이 인간관계이기도 한 것이다. 대강의 업무적인 이야기를 끝내고 소파로 깊숙이 기댔다. 그리고 도대체 무엇으로 이 남자를 재면 좋을까 고민한다. 센도 씨, 혹시 외아들인가요? 지나가는 말처럼 물어본다. 센도는 사심 없는 눈으로 후지마를 응시하더니, 누나가 둘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대 답이 의외여서 후지마는 조금 놀랐다. 무심한 점이나 상당히 개인 주의로 보이는 면이 틀림없이 외아들일 것이라 생각했었기 때문이 다. 형제가 많은 집에서 자란 아이들 특유의 둥글둥글한 여유가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센도에게는 없었다. 누나가 두 분이라, 어린 시절 많이 시달리셨겠네요. 그래도 유일한 남동생에 막내라 사랑받으셨을 것 같아요. 특별할 것도 없는 질문이었는데 센도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 진다. 잘 모르겠어요, 사랑 같은 건. 후지마의 눈이 움찔 떨렸다. 제대로 짚었다 생각했지만 내색하 지 않고 재차 질문한다. 사이가 안 좋으신가 봐요. 한 사람의 인격형성 과정을 유추하는 데 있어 가족 관계만큼 좋 은 척도는 없다. 그것은 자신이나 사쿠라기만 보아도 일목요연하 게 알 수 있는 것이다. 후지마는 숨을 멈추고, 호기심으로 가장한 단호한 표정으로 센도를 바라보았다. 그 끈질긴 눈길에 센도는 잠시 어떻게 대답할까 주저했으나 어 쩐지 사쿠라기와 연관된 이 남자 앞에서 자신의 텅 빈 공동( 空 洞 ) 을 감추기 위해 꾸며낸 대꾸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 다. 사랑이 무엇인지, 아무리 흘러 들어와도 그 온도를 느낄 수 없어 절망하던 유년기는 이미 지났다. 이런저런 감정의 직접 경험 따위는 포기하고 소설만으로 만족하게 된 지는 벌써 언제인지 기억 조차 나지 않는다. 이제 와서 에둘러 거짓말해 보았자 오히려 허 무함만이 는다. 숨죽인 침묵만이 흘러 긴장감이 극에 달했을 무렵, 센도는 책을 읽는 듯한 어조로 건조하게 답했다. 저는, 어떻게 하면 당연한 듯 자신의 가족을 좋아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269 평온하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기복 없는 목소리는 공기에 울림조차 남기지 않은 듯했다. 후지마를 바라보는 푸른 기운이 돌 정도로 새카만 눈동자는 윤기조차 없이 반들거려서 마치 무기물처 럼 보일 지경이다. 섬뜩할 만큼 차가운 내용의 이야기임에도 표정조차 변화 없는, 날씨 이야기라도 꺼낸 것처럼 가볍게 자신을 응시하는 센도를 보며 후지마는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느꼈다. 인간이 부서지는 최초의 원인은 자신의 뿌리에 기인한다. 일부 에게는 당연하게 주어지는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어떤 사람에게는 치열한 전투 끝에 간신히 잡을 수 있는 극상의 행복이기도 한 것이 다. 있는 것이 마땅한 만큼, 없다면 치명적이다. 지극히 자연스러 워야할 가족에 대한 애정이라는 부분에서 센도의 정서는 이미 삐걱 거리고 있다. 센도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싶었다면 후지마의 화살 은 제대로 과녁에 적중했다. 순간 드러난 센도의 모습은 확실히 어떤 면에서는 히토미와도, 더욱이 사쿠라기와도 닮은 곳이 있었 다. 하지만 사쿠라기에게는 가족을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후지마는, 그런 참혹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걸 사쿠라기를 통 해 처음으로 배웠다. 처음 만났을 때의 사쿠라기는 들고양이처럼 날이 선 표정으로 세상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센도는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굴절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처럼 보이지 않는 다. 혹시 결손가정에서 자랐다거나 사생아라거나 하는 남다른 성 장환경을 가졌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가정의 아이들은 사랑을 할 수가 없어서 고통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고통 받는 것이다. 센도에게서는 환경이나 스키마와는 무관한 종류의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어떤 강박이 느껴졌다. 후지마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을 센도를 바라보았다. 후지마의 시선에 센도는 먼지처럼 나풀나풀한 미소로 응한다. 그 반사적인 웃음이 본질적인 자연스러움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거쳐 겹겹이 쌓이고 쌓인 노력으로 이루어진 분장이라는 것 을 후지마는 예민하게 알아차렸다. 지금의 표정이 인위적인 만큼 사쿠라기를 볼 때 센도가 저도 모르게 터뜨렸던 웃음이 더욱 뜨겁 게 느껴졌다. 센도는 수액을 가을에 잠식당한 낙엽처럼 메말라 있 는 동시에 강렬하게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다. 자신조차 깨닫지 못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굶주린 욕구가 사쿠라기를 채워줄 수 있을지 아니면 오히려 그에게서 물기를 앗아가기만 할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래도 때로는 도박을 걸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도 있 다. 자신이 구원할 수 없다면, 적어도 구원해 줄 수 있는 누군가 를 찾아주겠다고 후지마는 맹세했었다. 후지마는 눈을 한 번 감았다 뜨고 결심한 듯 말했다. 마침 아래 스튜디오에서 하나미치가 촬영 중인데 들렀다 가시 겠습니까? 그 말에 센도는 안심한 아이 같은 미소를 보였다. 아, 다행입니다. 동료들에게 이런 걸 잔뜩 부탁 받아 버렸거든 요. 살짝 보여주는 가방 안에는 사인용으로 보이는 메모지가 수두룩 했다. 곤란한지 멋쩍은 웃음을 짓고 있는 센도를 바라보며 후지마 도 너털웃음을 웃었다. 사실상 직원들이 너도 나도 두 세 장 이상씩 메모지를 건네주었 던 터라 그 종이 모두에 사쿠라기에게 직접 사인을 하게 하는 것은
271 어려웠는지, 후지마는 홍보용으로 비치되어 있던 미리 사인되어 있는 엽서를 한 움큼 집어주었다. 어쩐지 있는 대로 불평을 늘어 놓을 것만 같은 아야코 및 다른 동료들의 얼굴이 떠올라 일순 주저 했지만 어차피 업무에 개인적인 바람을 끼워 넣으려는 그들이 잘못 이다. 더구나 센도 자신은 화보집에 본인의 이름까지 적혀 있는 사쿠라기의 친필 사인을 이미 받았다. 개인적으로 미련이 있을 리 도 없어서 시원스레 후지마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1층에 있다는 스튜디오로 따라 내려갔다. 도중에 후지마는 사쿠라기의 이력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센도는 흥미롭게 경청했다. 내용으로 미루어보면 센도가 단순히 연예인 이라고만 짐작하고 있었던 사쿠라기의 본업은 모델인 듯 했다. 유달리 아름답고 균형 잡혔다고 감탄했던 사쿠라기의 일상적인 자세들이 그제야 이해가 갔다. 런웨이부터 시작했지만 최근에는 잡지는 물론 의류업체 카 탈로그나 TV CM 섭외도 쇄도하는 모양이다. 일견 차가워 보이는 외모의 후지마가 표정을 허물어뜨리며 자랑스러워 어쩔 수 없다는 듯 애정을 담아 이야기하는 모습에 센도는 설핏 웃음을 지었다.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정열적으로 빛나고 있는 남 자에게 사람들의 애정이 폭포수처럼 쏟아지지 않을 리 없다. 더구 나 사쿠라기는, 그 광활한 애정 모두를 무리 없이 흡수해 더욱 자 신을 빛나도록 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센도는 사쿠라 기의 그런 점이 가장 부러웠다. 센도는 자신을 향해 오는 애정이 언제나 부담스러웠다. 돌려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받는 것조차 죄악인 것 같았다. 하지만 사쿠라기는 있는 대로 끌어안고 마음껏 발산한다. 아직도 센도는 자신의 입술을 스쳤던 젖은 깃털 같은 감촉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었다. 떠올리자 얼굴에 열이 올라 센도는 괜스레 입술을 한 번 훔 쳤다. 스튜디오에 들어섰을 때는 촬영이 한창이었다. 붉은 머리를 마 치 낙뢰라도 맞은 것처럼 비죽비죽 치켜 올리고 도대체 누가 입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화려한 트로피컬 시 스루(see through) 소재의 셔츠를 멋지게 소화해낸 사쿠라기는 벽에 걸어 둔 흰 천 앞에서 뛰거나 점프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카메라맨 이 온후한 작업 스타일의 사람은 아닌 듯 구석에 놓여 있는 스피커 에서는 레게음악이 귀가 따가울 정도로 흘러나왔다. 후지마는 눈 이 마주친 몇몇 스태프에게 눈인사를 하고 센도와 함께 벽에 기대 어 섰다. 시끌벅적한 소음 속에서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사쿠라 기의 동선( 動 線 )은 울려 나오는 원시적인 타악기 소리보다도 경쾌 했다. 그만! 꽤나 빠른 스피드로 셔터를 눌러대던 남자가 소리를 치자 축제 처럼 들썩거리던 음악이 뚝 끊기고 분장 담당자가 메이크업 박스를 들고 사쿠라기에게로 달려간다. 아주 드물진 않겠지만, 그래도 남 자 메이크업 아티스트라니 특이하다고 센도가 생각할 무렵 사쿠라 기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사쿠라기는 센도가 부끄러워질 정도로 확 퍼지는 모란 같은 웃음을 지었다. 후지마가 손을 흔들자 자신 도 팔을 휘두르며 달려온다. 뒤에 남겨진 분장 담당자는 곤란한 듯 어깨를 으쓱했지만 별다른 간섭은 하지 않았다. 홈페이지 문제로 왔던 거야? 뜨거운 조명 아래서 격렬하게 움직인 탓에 송골송골 땀을 이마 에 매단 채로 사쿠라기가 숨 가쁘게 물었다. 원래의 피부가 맑은
273 편이기 때문인지 화장은 그다지 짙지 않아서 피부에서부터 스미는 물방울들은 얼룩조차 남기지 않고 이마에서 관자놀이를 지나 미끄 러진다. 문득 흘러내리는 자취를 따라 혀로 핥아보고 싶다는 생각 이 들어 센도는 쑥스럽게 응. 이라고 대답했다. 조금 혼이 빠진 듯한 센도의 대답에 사쿠라기는 몸을 뒤로 젖히며 쾌활하게 웃었 다. 어쨌든, 잘 왔어. 운 좋게도 이 사쿠라기님의 촬영을 보게 됐 구나. 초승달처럼 휘어지는 눈매 속에서 특수 렌즈라도 착용했는지 세 로로 길게 찢어진 고양이 같은 눈동자가 빛났다. 센도가 맞아. 라고 긍정하려는 찰라, 카메라맨이 커다란 소리로 사쿠라기를 불 렀다. 사쿠라기는 대답과 동시에 몸을 돌려 뛰어갔다. 슬라이드 필름을 보면서 무언가를 한참 이야기하더니, 아무래도 이것으로 촬영은 종료되었는지 스태프들이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사쿠 라기는 바닥에 주저앉아서 메이크업을 지우도록 얼굴을 내맡기고 있었다. 센도가 사쿠라기에게 시선을 팔고 있는 사이, 카메라맨이 다가와 후지마에게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내가 무거운 사설 장비들을 이 스튜디오까지 옮겨오 며 작업해야 하는 거야? 어디서든 좋으니 찍어만 달라는 모델들도 줄을 섰는데! GQ에서도 메이크업이든 코디네이터든 자신들의 스 태프를 쓰지 않는다며 디렉터가 불평하던데, 아무리 소중하다지만 너무 감싸 안고 키우는 것 아냐? 미안, 미쯔이. 후지마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했다. 후지마의 저자세에 더 이 상 화를 낼 수는 없었는지 미쯔이는 한숨을 내쉬고는 한결 가라앉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은 목소리로 충고했다. 나야 어차피 피사체로서의 사쿠라기에게 반해 있으니까 다소의 불편쯤은 감수하지만, 앞으로는 신경 좀 쓰는 게 좋을 거야. 유달 리 까다롭게 굴어봤자 이 바닥에서 도움 될 건 하나도 없어. 안 그 래도 사쿠라기는 스태프든 상대 모델이든 여자라면 질색하는 걸로 도 유명한데. 후지마는 묵묵히 미쯔이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바로 그런 점 들이 후지마의 고민거리기도 했던 것이다. 오늘처럼 표지 촬영이 라면 모델이 사쿠라기 혼자뿐이니 괜찮지만, 카탈로그나 쇼 무대 정도가 되면 무턱대고 사쿠라기에게 모든 기준을 맞출 수는 없는 것이 당연하다. 사쿠라기의 화보집 촬영도 맡아줬던 미쯔이는 해 외에서도 전시회를 열 정도로 명성이 있는 데다 깐깐하기로 유명한 사진작가지만, 처음부터 사쿠라기를 꽤나 마음에 들어 해서 쇼요 쪽의 어지간한 요구는 들어주는 편이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미쯔이 같을 리는 없는 것이다. 후지마의 얼굴에 드리워진 심려를 눈치 챘는지, 미쯔이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툭툭 쳐 왔다. 됐어. 어차피 쇼요라는 거대 기획사의 토대 위에 서 있을 뿐 더러 요즈음은 디자이너도 사진작가도 다들 저 녀석과 한 번쯤 작 업하고 싶어 안달인 듯 하니까. 사쿠라기도 사람에게 미움 받을 성격은 아니고. 다만 일에 있어서는 조금은 둥근 편이 서로 좋다 는 이야기야. 진지한 이야기라서 센도가 묵묵히 대화를 듣고 있는 동안 어느 새 샤워까지 마친 사쿠라기가 다가왔다. 아직 약간 젖은 듯 보이 는 피부에서는 아쿠아(aqua) 계열의 바디 샴푸를 썼는지 남만의 섬을 연상시키는 파란 향이 피어올랐고, 지금은 원래대로의 암갈
275 색 눈동자로 돌아와 있는 눈에는 렌즈에 익숙하지 않은 탓으로 붉 게 실핏줄이 떠올라 있었다. 촬영시의 맹수와도 같은 공격적인 이 미지가 한 꺼풀 벗겨져 무심코 볼을 비비고 머리칼을 쓰다듬고 싶 어지는 무방비한 모습이 되어 있다. 이거, 또 셔터를 누르고 싶어지는걸. 미쯔이가 장난스럽게 사쿠라기의 머리칼을 흩트렸다. 그 서슬에 남아있던 물방울이 떨어지자 사쿠라기가 얼굴을 찡그린다. 시시각 각 펼쳐지는 다채로운 표정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끊이지 않 는 센도의 시선을 의식하고 사쿠라기가 기운 좋게 말을 걸어왔다. 넌 촬영 보는 거 처음이지? 어땠어. 나 멋지지? 칭찬을 잔뜩 기대하는 아이처럼 들뜬 어조에 센도는 자신도 사 쿠라기의 머리칼을 매만지고 싶어지는 심정을 꾹 참고 대답했다. 응. 촬영하는 것도 신기하고, 사쿠라기는 진짜 멋있었어. 최 고야. 센도의 열의가 담긴 필사적인 긍정에 뜻밖에 사쿠라기의 얼굴이 홍옥처럼 빛을 내며 붉어졌다. 사쿠라기는 멋쩍은 듯 볼을 손가락 으로 긁으면서 뭐, 천재니까. 라고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오만한과 함께 표출되는 순수함이 사랑스러워 참을 수가 없다. 자 신은 피처럼 붉은 늪으로 한 발 한 발 빠져들고 있는 건지도 모르 겠다고 생각하며, 센도가 말을 이었다. 사쿠라기 점프력 굉장하더라? 원래 그렇게 움직이면서 촬영하 는 건지는 몰랐어. 그러자 사쿠라기는 힐끗 미쯔이 쪽을 바라보더니 쿡쿡 웃으며 대답한다. 작가마다 취향은 다 다른데, 점잖지 못한 밋찌는 원래 시끄러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운 걸 좋아해. 밋찌 이야기로는 내게는 움직이는 쪽이 더 어울린 다나. 뭐. 내가 아무리 생각 없이 멋대로 달리고 뛰어 올라도 밋 찌는 언제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포착해주니까, 나도 이편이 활 기 있고 재미있어. 그리고 일반 촬영은 오전 중에 다 끝낸 참이었 거든. 자신의 매력을 의심치 않는, 그러면서도 상대의 능력을 추어올 리는 사쿠라기의 이야기에 다소 버릇없는 호칭과 내용을 들어버린 미쯔이도 불쾌한 기색 없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 다. 미쯔이 정도의 사진작가가 왜 사쿠라기를 익애( 溺 愛 )하는 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때 갑작스레 사쿠라기의 머리 위로 보송보송 마른 수건이 푹 내려 덮여 왔다. 잘 말리지 않으면 감기 걸려, 멍청이. 뭐야! 루카와, 이거 치워!! 사쿠라기는 바동거렸지만 거칠게 물기를 털어 내는 손길이 좀처 럼 멈추지 않자 얌전해졌다. 그 광경을 보던 미쯔이는 커다란 웃 음을 터뜨렸다. 언제 봐도 변함없구나, 너희는. 미쯔이의 조롱도 무시하고 한참을 머리칼에 비벼대어 수건이 물 기를 흠뻑 빨아들인 후에야 루카와는 사쿠라기를 놓아주었다. 그 리고 센도 쪽으로 한 번 찌릿한 시선을 보내더니 후지마를 발로 툭 찬다. 루카와가 센도를 바라보고 있는걸 보고 후지마가 아, 소개 할게. 라며 입을 열었다. 센도 씨, 이쪽은 사쿠라기의 매니저인 루카와 군. 이 분은 이 미 아시겠지만 사진작가인 미쯔이 히사시 씨예요.
277 미쯔이, 루카와. 앞으로 사쿠라기의 웹 프로젝트를 맡게 될 회 사의 센도 아키라 씨야. 반갑습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센도에 비해 미쯔이는 벽에 기댄 채 가볍게 손 을 까닥거렸을 뿐이고 그나마 루카와에 이르면 무례하기 그지없는 눈짓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마도 두 사람의 그런 방약무인한 태도는 드물지도 않은 일인지 후지마도 사쿠라기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서 센도도 무안을 감추고는 슬쩍 웃고 말았다. 언제나 첫인상이 좋다는 호의적 표현에 익숙해 있는 센도라서, 미쯔이의 밋밋한 태도야 그렇다 쳐도 루카와의 적대적으로까지 보이는 차가 운 태도는 조금 의아했지만 그의 태도 따위는 어차피 자신과는 관 계없는 일이었다. 그것보다 방금 전 미쯔이와 후지마의 대화 내용 에 의문이 있어 사쿠라기에게 물어보려던 찰나, 사무적이면서도 고압적인 차가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후지마 씨. 키노시타 씨, 와 계셨군요. 우리 스태프들도 싫다, 지정해 준 스튜디오도 싫다, 결국 디렉 터인 내가 체크라도 하러 와야 하지 않겠어요? 후지마의 친근한 목소리에도 상대의 냉랭한 태도는 풀리지 않 아, 키노시타라 불린 맵시 있는 여성의 목소리는 서늘하기 짝이 없었다. 이 사람이 미쯔이가 말했던 GQ의 불평 가득한 바로 그 사 람인 듯 했다. 미안합니다. 후지마가 정중하게 사과했지만, 키노시타는 들은 척도 않고 사 쿠라기에게로 몸을 돌려 날카롭게 그를 노려보았다. 언제나 빗장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없이 활짝 열려 있는 대문처럼 호의적이던 사쿠라기의 얼굴이 빳빳 하게 굳는 것이 센도에게도 똑똑히 보였다. 사쿠라기 씨. 언제까지나 그런 어리광이 통할 거라는 생각은 버려요. 키노시타의 손가락이 사쿠라기의 가슴 근처를 쿡쿡 찌르는 순 간, 사쿠라기는 펄쩍 뛰다시피 해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났다. 심 혈을 기울여 빚은 듯 완벽한 조형미를 보이고 있는 몸이 갓 도축된 짐승처럼 뚜렷하게 경직했다. 공포에 질린 것이 틀림없는 사쿠라 기의 반응에 자신도 놀랐는지 키노시타는 손을 든 그대로 멈춰 있 었고 미쯔이는 옆에서 혀를 찼다. 갓 씻고 와서 엷게 홍조가 어려 있던 사쿠라기의 볼은 순식간에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눈밭처럼 새하얘졌다. 너무도 극적인 변화에 가장 먼저 대처한 것은 루카와였다. 그는 순식간에 사쿠라기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고 어깨를 끌어안은 채 귓가에 계속해서 무언가를 속삭였다. 다른 한 쪽 손으로는 경련을 일으키기 직전인 사쿠라기의 몸을 풀려는 의도인지 힘 있게 팔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러자 조금씩 굳어 있던 사쿠라기의 몸이 손끝 부터 풀리기 시작하고 얼굴에도 느릿하게 핏기가 되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사쿠라기가 루카와의 팔에서도 떨어져 심호흡을 하기 시작하자, 후지마가 낮지만 강한 목소리로 사쿠라기를 불렀 다. 평상시의 풍성한 목소리와는 무척 다른 엄격한 목소리였다. 사쿠라기는 날카롭게 불린 자신의 이름을 듣자 흠칫 했지만, 그래 도 쭈뼛쭈뼛 걸어와 키노시타에게 죄송합니다, 라고 머리를 숙였 다. 아무래도 어리광이 아니라 신경증인 모양이네요.
279 사과는 받아들인 듯해도 여전히 가시는 남아있다. 그녀의 질책 에도 사쿠라기는 말없이 고개만 떨어뜨리고 있었다. 키노시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양 손을 들어 올려 보이더니 미쯔이에게 사진에 대한 몇 가지 부탁을 하고 금세 돌아갔다. 그녀가 스튜디오 밖으 로 나서자마자 후지마가 사쿠라기를 와락 끌어안았다. 마치 아이 에게 하듯 머리칼을 쓱쓱 쓸어 올리며 몇 번이고 잘 했다고 칭찬을 한다. 채 걸을 수도 없는 아이가 부모를 의지하듯 후지마의 손길 에 자신을 맡기는 사쿠라기를 보며 센도는 둔하게 폐부에서 울려오 는 무거운 통증을 느껴야만 했다. 아무래도 사쿠라기가 여자를 기 피하는 것은 그 정도가 키노시타의 말대로 신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심한 것 같다. 이제야 미토가 여자에게 둘러싸이면 어쩔 뻔 했냐 며 나무랐을 때, 신기할 정도로 의기소침해졌던 사쿠라기가 이해 가 갔다. 이건 일종의 정신적 외상인 것이다. 봄비를 머금고 무럭 무럭 돋아나는 새싹처럼 물오른 초록 같은 사쿠라기의 의외의 폐쇄 적인 일면에 충격을 받은 것도 사실이었지만, 센도는 자신이 그 일 자체보다 사쿠라기에 대한 루카와와 후지마의 태도 그리고 그것 을 받아들이는 사쿠라기의 태도에 더욱 상처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달래주는 사람도 안아주는 사람도 자신이었으면 좋겠다는 어둡 고도 강렬한 욕망이 끓어올라 센도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런 식으로 내내 굳어있던 신경이 수지( 樹 脂 )가 열에 녹듯 흘러내려 버리면 난처하다. 사쿠라기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판별해내기도 전에 욕심이 먼저 찾아온 것이다. 자각한 순간, 갑자기 위( 胃 ) 부 근에 강렬한 통증이 달려 센도는 배를 움켜쥐고 주저앉았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좀 괜찮아졌어? 사쿠라기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어왔다. 급작스런 위경련에 센도 는 병원으로 실려 갔고 지금은 가벼운 위궤양이란 진단 후 약 처방 을 얻어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센도가 진찰 받는 동안 후지 마가 센도의 회사에 전화를 걸어 조퇴 처리를 해 준 데다, 현재도 루카와와 사쿠라기가 자신을 바래다주고 있는 형편이어서 쇼요에 굉장한 폐를 끼쳐버렸다는 생각에 센도는 꽤 풀이 죽어 있었다. 신경이 둔한 정도와 비례해 건강은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한 번도 이런 일로 속 썩여 본 적이 없는 센도로서는 이 돌발사고가 이래저 래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어째서 하필 그 때 경험해 본 적도 없는 통증이 찾아왔는지 원망스러웠다. 센도에게서 대답이 없자, 루카와에게 운전을 맡기고 센도와 나 란히 뒷좌석에 앉은 사쿠라기가 초조해하며 되물어왔다. 아직도 아픈 거야? 짙게 뻗은 눈썹이 걱정 때문에 불균형하게 이지러져 있다. 차게 빚은 도자기처럼 매끄럽고 단아한 이마에 어울리지 않는 줄이 움푹 팼다. 걱정이 드리워 명도가 낮은, 미간 아래에서도 또렷하게 빛 나고 있는 맑은 차( 茶 ) 같은 눈동자가 센도를 담은 채 흔들렸다. 센도가 보기에 사쿠라기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은 거울에 비치 는 그것보다 선명도가 떨어짐에도 더욱 자신의 본질에 가까운 것처 럼 보였다. 동공을 따라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둥글게 휘어진 남자 는, 어딘가 수심이 드리운 얼굴로 참을 수 없는 욕망을 간신히 억 제한 채 굶주린 표정으로 사쿠라기를 맹목하고 있다. 죽음이 목전 에 다가오면 오히려 지독했던 통증이 사신의 선물이라도 되는 양
281 사라지듯이, 센도는 마음이 온통 고통으로 바스러지기 직전임에도 자신의 욕구에 낭만적으로 도취되어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조소했 다. 밀주( 蜜 酒 )의 향기를 맡기조차 전에 이미 취해 있는 셈이다. 의사는 센도에게 최근 스트레스 받은 일이 있었냐고 물었었다. 사실 센도의 식생활은 담백한 편이었고 술을 즐기는 편도 아니었으 므로 달리 위벽이 헐 만한 일은 없기도 했다. 원래 스트레스니 트 라우마니 하는 심리적 상처와는 그다지 인연이 없는 센도여서 한참 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사쿠라기에게서 생각이 멎었었다. 자신의 통증의 근원은 바로 사쿠라기인 것이다. 그를 만난 이후로 미열에 들떠 제대로 수면을 취한 적이 없다. 아직도 아까의, 사쿠라기에 게 닿아있던 루카와의 손가락이나 귀에 스칠 듯 속삭이던 입술, 후지마의 다정한 손놀림을 생각하면 찌릿 가슴이 울려 왔다. 하지 만 참 아이러니 하게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위통으로 쓰러지고 말았다는 행각은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워도 폐부를 후벼 파고 추한 질투로 신경을 좀먹어 오는 통증 자체만은 환대하고 싶었다. 자신은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타인의 존재나 행 동으로 인해 아픔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감당할 수 없는 동통( 疼 痛 )에 파 먹혀도 좋으니 누군가를 힘껏 영혼 깊은 곳까지 끌어안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해서 센도는 하루하루 말 라갔던 것이다. 때로 센도는 자신의 몸속을 흐르고 있는 것은 피 가 아니라 색소 없는 투명한 액체가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었다. 칼로 살짝 그어본 손가락에서 붉은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것을 보 고서야 간신히 안심해서 잠들 수 있었던 밤도 있었다. 아무리 해도 타인을 물리적으로 구별할 수만 있을 뿐 정신적으 로 분별할 수 없음에 절망하면서, 서서히 자신의 존재가 흐릿해져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간다고 믿었다. 조금씩 응결도가 낮아져 공기 속으로 구름이 녹듯 스르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죽을 때까지 지금 이대로 리라 절망하고 심장마저 창조차 없는 어두운 철의 감옥에 가둬 버 렸다. 그런데, 아직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신경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사쿠라기의 시선이, 사쿠라기의 몸짓이, 사쿠라기의 목소리와 그 를 둘러싸고 있는 존재 하나 하나가 붉은 장기( 臟 器 )가 없어 텅 비어버린 센도의 가슴에 상처를 새긴다. 자국을 낸다. 잊고 있었 던 공동( 空 洞 )을 일깨워 바람 소리가 나게 만든다. 사쿠라기 때문에 상실을 깨달은 자기 자신이, 마음에 들었다. 사쿠라기가 주는 상처가, 기쁘다. 편집증 적인 생각에 그만 웃어버렸다. 센도의 발작적인 웃음에 영문을 모르는 사쿠라기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자신도 따 라서 웃는다. 그리고 센도를 툭툭 치며 장난조로 말을 걸었다. 너는 정말 이상해. 아파서 쓰러졌던 녀석이 뭐가 그리 좋아? 아무튼, 얼기설기 한 녀석이라니까. 이번에는 센도가 사쿠라기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되물었다. 얼기설기 라니 뭐야, 그게? 막상 질문이 돌아올 줄은 몰랐는지 사쿠라기는 미간을 짚은 채 짧게 신음하더니 무언가를 한참 고민하다가 간신히 대답을 들려주 었다. 그러니까 너는, 어딘지 이렇게 격자가 너무 넓은 그물 같은 기 분이 든단 말이야. 엄청 성의 없이 느슨해서, 그만 꽉 하고 씨실 과 날실을 당겨 촘촘히 만들고 싶어지거든. 사쿠라기의 표정이 정말로 심각해서 센도는 도리어 웃음이 나려
283 했지만 필사적으로 참았다. 사쿠라기의 행동 패턴으로 보건대 여 기서 웃거나 했다간 틀림없이 토라진다. 하지만 어색하기 그지없 는 표정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사쿠라기가 부루퉁해서 뭐야, 라고 중얼거렸다. 사쿠라기의 천진한 행동과 관찰에 어딘가 감동마저 느껴졌다. 그의 말대로 센도는 간격이 쓸데없이 넓은 그물인지도 모른다. 벌 어진 틈이 너무나 광활해서 아무도 안에 가둘 수가 없었다. 하지 만 사쿠라기처럼 활짝 자신을 펼치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디 한 군 데의 얄팍한 실에라도 살짝 걸려 줄지 모른다. 미안해, 얼기설기 느슨해서. 센도가 놀리는 것처럼 대꾸하자 사쿠라기의 볼은 불만으로 더욱 볼록해졌다. 폭 손가락으로 찔러보고 싶었지만 조금 겁난다. 이미 했던 키스로 미루어보면 사쿠라기는 스킨십에 익숙한 편인 것 같긴 해도, 그건 자신 쪽에서 의지를 가지고 행하는 경우만으로 한정되 는 것 같았다. 아까만 해도 키노시타의 아무렇지 않은 제스처 하 나에 그렇게나 급격한 거부반응을 띄었기에 손가락 하나뿐이라 해 도 대기가 더욱 망설여진다. 하지만 그 일이 떠오르자 아무래도 묻고 싶은 일 하나가 있어 눈치를 보았다. 자칫 무신경하게 아픔 을 건드릴 수도 있는 말을, 조금 머뭇거리다가 센도는 결심하고 입 밖으로 내어놓았다. 그런데, 사쿠라기가 그렇게 여자를 싫어하는 줄은 몰랐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루카와가 앉아 있는 앞좌석에서부터 소름 이 돋을 정도의, 남극에서 휘몰아치고 있는 바람처럼 차가운 공기 가 넘쳐 흘러왔다. 센도가 아마 이 세상에 눈에서 레이저 광선을 내 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틀림없이 루카와일거라고 생각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할 정도의 섬뜩한 서늘함이었다. 그러나 막상 당사자인 사쿠라기 는 태연해 보였다. 싫어한다기보다 무서워하는 거야. 사쿠라기! 루카와가 드물게 이름을 부르며 제지해 왔지만 사쿠라기는 괜찮 다는 표시로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함께 있는 거나 미리 각오한 스킨십 정도는 괜찮은데, 갑작스 런 신체적 접촉이 있게 되면 조금 힘들어. 더구나 키노시타 씨처 럼 여성적인 곡선의 사람은 예전에 알았던 여자가 생각나서 더 해. 표정은 느긋했지만 똑바로 앞을 바라보고 있는 윤곽은 에칭처럼 날카롭고 딱딱해 의식적으로 더 이상의 호기심을 차단하는 것 같았 다. 여기까지가 지금의 자신에게 사쿠라기가 허락한 영역이라고 센도는 민감하게 알아차렸다. 하지만 센도는 사쿠라기의 서슬에 상처받기보다도 그는 어떻게 이런 식으로 자유자재로 타인의 관심 을 끌고 한편으론 잘라내는 법을 배운 것일까 궁금해졌다. 자신은 심장을 버린 순간 그것이 가능해졌다. 무심하게 일정한 거리를 둔 채 경험을 통해 누적해 온 몇 가지의 사교적인 대화 양식만을 사용 해도 세상살이는 가능했다. 친구도 애인도 다른 종류의 그 어떤 친밀한 관계도 원하지 않은 센도였기에 지금까지는 전혀 무리 없이 호수 속에 빗방울이 녹아들 듯 둥실둥실 시간의 조류에 실려 지금 까지 살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사쿠라기가 자신처럼 훤히 뚫린 흉 부를 가졌으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러기에 사쿠라기의 눈동자는 너무 뜨거웠고 움직임은 눈이 부시도록 발랄했다. 할 수 만 있다면 훔치고 싶을 정도로 개방적인 호의를 흩뿌리고 있었다.
285 자신과는 반대로 사랑해 줘 의 오라를 온통 휘감고 있는 사쿠라기 는 센도에게는 기이할 정도로 낯설고 시선을 뗄 수 없는 생물이었 다. 그래서, 사랑 받고 싶어 하는 사쿠라기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자신도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미 포기했던 희망마저도 솟 아오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딘가의 코인로커에 심장을 팔아버리 기 전에 사쿠라기를 만났다면 혹시 지금의 자신과는 다른 모습으로 세상을 딛고 서 있지 않을까 하고, 센도는 건조하게 생각했다. 집에 도착하니 현관이 잠겨 있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것일까 놀 라 문을 열자 평상시의 차갑게 식어있는 실내와는 다른 따스한 공 기가 센도를 맞았다. 주방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냄새는 어릴 때부 터 익숙하게 맡았던 어머니의 장기인 파엘라 10) 다. 사프란이 비싸 서 자주 해 주시진 않았지만, 식욕을 돋우는 개나리 같은 색감과 미각보다도 먼저 후각을 자극해오는 진한 향이 좋아서 센도가 꽤 좋아하는 음식 중의 하나였다. 센도의 기척을 느꼈는지, 어머니가 앞치마를 두른 채 빠끔히 고개를 내밀었다. 아키라, 어서 와라. 얼굴 좀 보자, 우리 아들! 자신의 가슴 언저리에나 간신히 닿는 작은 체구의 모친이 달리 듯 종종종 다가와 불쑥 안겨 오자 센도는 반사적으로 어머니의 어 깨에 팔을 둘렀다. 그러고 보면 휴가 때도 명절 때도 본가에 내려 가지 않은 지 꽤 되었다. 간간이 전화로 안부는 전했지만 유달리 10) Paela :,..,.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정이 많은 어머니가 그걸로 납득할 리가 없었다. 안 그래도 한 번 쯤 찾아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던 무렵이어서, 어머니의 방 문은 갑작스럽긴 해도 반가웠다. 조금 몸을 떼고 차근히 포근한 인상의 여전히 고운 어머니를 바 라본다. 센도의 가족은 좋은 의미로 평범했다. 어머니는 선생님이셨고 아버지는 작은 치과를 개업하고 계셨다. 지금은 두 분 다 일선에 서 물러나 정원을 가꾸고 황혼의 산책을 즐기는 한적한 중년의 부 부가 되셨으나, 어쩐지 함께 계신 모습만 봐도 그동안의 세월과 함께 쌓여 온 두 분의 평온하고 따스한 사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센도의 위로는 누나가 둘이 있 었지만, 부모님은 더없이 공평하고 자애로운 사랑을 차별 없이 고 루 쏟아 부어 주었고 무슨 일이든 아이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려 애쓰는, 민주적이고도 자식에 대한 권위의식이 없는 좋은 사람들 이었다. 그런 교육 덕인지 두 누나들도 그야말로 반듯하게 자라서 큰누나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되었고 작은누나는 대학에서 조교로 근무하다 현재는 회사에서 해외로 파견 받은 남편을 따라 외국 생활 중이었다. 센도의 기억 속에는 남매끼리의 심각한 갈등이나 부모의 다툼 같은 것은 남아있지 않았고 큰 사고 한 번 없이 그린 듯 안온한 가 정은 지금까지도 지속되어 오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수조 속에서 소중하게 주인에게 사육되는 열대어들처럼 센도의 가족은 세상의 풍파와는 인연 없이 안락한 삶을 살아왔다고 해도 좋다. 물론 부 모로서도 두 누나들로서도 나름대로의 고민과 문젯거리를 안고 있 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것이 표면에 드러나 다른 가족 구성
287 원들에게 영향을 미친 적은 없었다. 고향의 본가에 대한 센도의 이미지는 폭신하게 부푼 솜사탕을 닮아 있었다. 오랜만에 펼친 동 화책에서 배어 나오는 약간은 낡고 간지러운 향과 사뿐사뿐 걸어야 만 할 것 같은 구름 같은 분위기가 자신의 성장기에 대한 센도의 단상이었다. 그래서 센도는 오히려 늘 의아했다. 이토록 애정을 붓으로 잔뜩 칠해놓은 듯한 지극히 보통의 가정 에서, 어째서 자신처럼 굳어버린 심장을 움켜쥐고 살아야만 하는 불구가 태어나 버린 것일까. 차라리 극히 불우한 환경이라도 가 졌더라면 자신의 이기적이고 흡수에만 익숙한 핏덩어리를 남의 탓 으로 돌릴 수라도 있었을 텐데, 센도에게는 그것조차 불가능했다. 데워진 물속에 푹 잠겨 있는 것처럼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그 따스 한 애정을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자신의 가족을 향해 그 사랑을 되돌려 보낼 수 없는 스스로를 원망해 왔다. 어느 한 순간 스쳐 지 나가는 섬광처럼, 이 부들부들하고 간지러울 정도의 온후한 울타 리가 일순간에 사라져버려도 틀림없이 센도는 아무런 고통 없이 처 음부터 가족이란 없었던 듯 유유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 찢어지는 죄책감과 자신에 대한 모멸을 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르는 척 하는 것이었다. 빙하보다도 견고하고 차갑게 얼어붙어 조금씩 안쪽에서부터 균열되고 있는 자신의 본질을 애써 외면하고 마치 사랑하는 것처럼,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 인 것처럼, 여전히 가슴 안에서는 심장이 뜨겁게 뛰고 있는 것처 럼. 하지만 이렇게 직접 죄의식의 대상이 눈앞에서 어른거리면 그것마저도 불가능해진다. 오랜만에 보는 어머니의 얼굴이 기쁘긴 해도, 기뻐하는 것 이상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의 그리운 느낌이나 살을 에는 혈육의 정은 느껴지질 않았다. 혼 자 살게 된 이후로 간혹 가족들에 대한 생각이 떠오를 때도 있긴 했지만 그것은 일종의 호기심에 근접한 감정일 뿐, 보고 싶다거나 혼자라서 쓸쓸하다거나 하는 향수에 가까운 지극히 당연한 감상조 차 센도는 가져본 적이 없는 것이다. 다행히도 센도는 연기에 능숙해져 있었다. 무리 없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보호막 없이 드러나 있는 근육을 얇은 표피로 감추어야 하는 법이다. 아들에 대한 사랑이 방울방울 흩어 떨어질 것 같이 붉게 달아올라 정으로 충만해 있는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며 센도 는 너무나 자연스러워 자신조차도 저의를 의심하지 않을 정도의 부 드러운 눈웃음을 지었다. 건강하셨어요, 어머니? 아버지도 안녕하시죠? 사전에 예문으로 실릴 만큼 틀에 박힌 인사에도 어머니는 함박 웃음을 지으며 발돋움을 해 장대같이 큰 아들의 머리칼을 쓰다듬었 다. 그럼. 더할 나위 없이 기력이 좋으시단다. 요즈음은 등산에 재미를 붙이셔서 얼마 전엔 골든트라이앵글 11) 에도 다녀오셨는걸. 그거, 굉장하신데요. 순수하게 감탄하는 아들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짓더니, 어머니 는 센도를 부엌으로 잡아끌었다. 네가 좋아하는 파엘라를 해 놓았지. 어서 씻고 오렴. 소녀처럼 웃는 어머니에게 센도는 곤란한 미소를 띠며 손에 든 11) Golden Triangle :,,.
289 약봉지를 들어 보였다. 죄송해요. 최근 위가 나빠져서. 증세가 심각한 건 아니지만, 오늘은 될 수 있으면 죽을 먹으라는 이야길 들었거든요. 십자마크가 새겨진 흰 봉투를 보더니 어머니의 표정이 심려로 흐릿해졌다. 하지만 잠시일 뿐, 굳이 이것저것 캐묻지 않고 활기 차게 센도의 어깨를 두드리며 욕실로 밀어 넣는다. 남자 혼자 살 려니 불규칙한 식생활에 소화기 장애가 생겨도 당연하다고 혼자서 납득하신 듯하다. 틀림없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냉장고 안 에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찬거리들이 즐비하게 채워질 것이다. 센도가 샤워를 마치고 나와 보니 식탁에는 어느새 계란죽이 끓 여져 있었다. 재료 손질부터 시작해 몇 시간이나 소요되었을 정성 스런 요리도 사기그릇에 담겨 깔끔하게 래핑이 되어 있다. 이건 속이 풀리면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으렴. 어머니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센도는 자리에 앉아 죽을 떠먹기 시작했다. 적당히 물기가 있어 촉촉한 죽은 부드럽고 약간 단 맛이 감돌아 무척이나 맛있었다. 맞은편에 앉아 한동안 물끄러 미 열심히 식사하는 센도를 바라보던 어머니는 짓궂게 웃더니 슬쩍 물어왔다. 그런데 아키라, 너 연인은 없니? 오늘 집 안을 정리하다 보니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여자 흔적이 없더구나. 혼자 사니까 연인 정도는 끌어들여도 좋으련만. 콜록! 센도는 그만 사레가 들려 버렸다. 기침으로 얼굴이 빨개져 어머 니를 쳐다보자 그녀는 한심하다는 듯이 물 잔을 내밀었다. 정말 아무도 없는 거니? 모처럼 이렇게 늘씬한 미남으로 낳아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줬는데. 진심으로 서운해 뵈는 어머니의 어투에 센도는 조금 기가 죽어 버렸다. 하지만 어머니의 공격은 그치질 않아서, 혼기에 이른 동 네 아가씨의 칭찬부터 시작해 끝내는 정녕 사귀는 사람이 없다면 선이라도 봐야하지 않겠냐는 강압에까지 이르렀다. 예기치 못했던 어머니의 상경에는 아무래도 이 맞선이라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나 보다. 사태가 이쯤 되자 센도는 귀찮기도 하고 화가 치밀기도 해 서 불쑥 아무도 없는 건 아니에요. 라고 말해버렸다. 말이 끝난 동시에 어머니의 눈동자가 반짝 빛나는걸 보고 내심 후회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대로 저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 요. 연인은커녕 가족조차 사랑할 수 없는데다가 이제는 심장마저 없는걸요. 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굳이 하려면 못 할 것도 없겠 지만, 반평생을 남편과 아이들을 사랑하며 살아 온 애정으로 넘실 대는 단지 같은 어머니가 센도를 이해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센 도 자신도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어 그토록 혼자일 것을 두려워하 고 공포에 떨었던 시절이 있는 것이다. 유전이나 혈연과는 관계없이 자신처럼 처음부터 불행하게 태어 나는 아이들도 있다는 것을, 세상과 조우할 때부터 이미 부석부석 부수어지는 낙엽처럼 메말라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도저히 그 녀에게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한 때 언젠가는 누군가 이런 지독 한 외로움을 알아주지 않을까 기대한 적도 있었지만, 소년기의 어 느 밤부터 센도는 그런 희망마저 버렸다. 사람이란 어차피 서로 일정한 부분만을 겹치며 살아갈 뿐, 심지어 가족끼리라 해도 완전 히 모든 영역을 동치( 同 値 ) 시키며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인 간은 태어나는 순간 모두와 타인이다. 그렇다면 센도처럼 그 누구
291 와도 교집합을 이루지 않은 채 사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다지 이상 한 일은 아닐지도 몰랐다. 그리고 사실은 어머니의 집요한 추궁 끝에 언뜻, 터지는 불꽃처 럼 타오르는 머리칼을 한 남자의 얼굴이 얄미운 봄바람처럼 팔랑팔 랑 스쳐 지나갔던 것이다. 그럼 아직 사귀지는 않아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니? 호기심과 희망으로 가득한 어머니의 눈동자를 보며 센도는 나지 막하게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요. 회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센도는 알 수가 없었다. 사랑하고 싶다. 기적을 울리며 돌진해오는 기관차처럼 강력하고도 빠르게 고독 과 고통에 침식당했던 그 밤 보다 훨씬 이전부터 그 이후로도 한참 동안을, 센도는 갈구하고 열망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 견 딜 수가 없었다. 자신도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머리가 아 닌 가슴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반드시 증 명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되지가 않았던 것이다. 타인에게 애정을 느끼는 것이 본 능이라면 센도에게는 그 본능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런데 사쿠라 기를 만났다. 그를 만남으로써 이미 예전에 버렸을 사랑하고 싶다 는 뜨거운 욕망이 다시 피어오르려 한다. 어쩌면, 오랜 시간 모른 척 해왔던 사랑해야만 한다는 절박하고 도 생물적인 욕망이 사쿠라기로 인해 다시 눈뜨게 된 것뿐인지도 모른다. 사람 을 사랑하는 것과 사랑 을 사랑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 다. 연인들은 어떻게 자신들이 나누고 있는 정신적 교류가 사랑이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일까 센도는 언제나 궁금했다. 자신이 좋 아하는, 그야말로 사랑 투성이 사랑 범벅의 로맨스 소설에서도, 히어로와 히로인이 자신들의 감정을 자각하게 되는 순간을 센도는 늘 꿈처럼 바라보았다. 아무도 사랑이라고 말해주지 않는데 본인 들은 자연스레 사랑이라고 느낀다. 그 뜨거운 각성은 전류와도 같 고 폭풍우와도 같았다. 순식간에 덮쳐와 모든 것을 하나의 감정으 로 뒤엎어 버린다. 그러나 그 감정에는 정해진 법칙이 없다. 일정한 궤도도, 구조 화된 절차도, 명백한 규정도 없다. 어느 만큼의 어디까지가 사랑 인 것인지 센도는 모른다. 강처럼 흐르는 감정의 어디부터가 사랑 인지도 알 수가 없다.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누군가 이 혼돈을, 애타는 마음을, 사랑 이라고 확증해 주었으 면 좋겠다. 여전히 궁금해서 못 견디겠다는 얼굴로 가슴을 두근거리며 눈앞 에 앉아있는 어머니를 두고, 센도는 먹다 만 죽을 앞에다 둔 채 자 신을 두드려오는 사쿠라기의 존재만을 하염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잔서가 유달리 지독한 날이었다. 에어컨디셔너가 쉴 사이 없이 찬바람을 사무실로 흘려보냈다. 빛이 모두 차단 된 어둑한 실내에서 몸을 의자에 푹 파묻은 채 후 지마는 료난 개발 팀의 기획 슬라이드를 강직한 목소리의 설명을 들으며 보고 있었다. 이미 센도를 통해 쇼요 쪽의 요구사항은 문 서화 해 전달해 놓은 터였기에, 팀장이라 소개받았던 마키라는 사 람의 설명은 구축하게 될 기능들의 세부요소와 서비스의 전체적인
293 레이아웃에 집중되어 있었다. 후지마는 자신이 별도로 준비해 온 체크 리스트와 마키가 제안하는 아우트라인에 오차가 없음을 파악 하자 느긋하게 프로젝트 개발 주기에 대한 의견을 경청하기 시작했 다. 한 시간 가까이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던 터라 목이 칼칼해져 와 이미 얼음이 모두 녹아버린 아이스티에 손을 뻗으며 힐끗 옆자 리의 사쿠라기를 바라보았다. 굳이 동행할 필요가 없었는데도 줄 기차게 따라 오겠다며 고집을 부리던 그는, 후지마의 예상대로 머 리를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조금 씩 가슴이 움직인다. 아마도 실무진이 아닌 스타 본인이라는 사실 때문인지 료난 측의 멤버들은 별달리 사쿠라기의 상식에 어긋난 오 수( 午 睡 )에 관심을 두지 않고 회의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내 이대로라면 후지마 자신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다. 아무래도 중간 휴식시간에 돌려보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후지마는 다시 슬 라이드로 눈을 돌렸다. 마키의 설명은 막바지에 접어들어 기술적 요소에 대한 제안을 마치고 몇 가지의 디자인 샘플들을 예시하고 있었다. 화면을 채우고 있는, 조악한 건 아니지만 세련되었다고도 할 수 없는 전형적 패턴의 실례를 보며 후지마는 살짝 미간을 찌푸 렸다. 확실히 일반 회사의 홈페이지로는 나쁘지 않지만, 연예인의 것으로는 지나치게 수수하다. 더구나 후지마가 대외적으로 구축해 온 사쿠라기의 이미지는 태양이 폭발하고 대지가 온갖 타악기의 소 리로 가득 차는 듯한 리드미컬한 선홍색이다. 기본적인 조형을 벗 어나 사쿠라기의 이미지만을 강렬하게 살려 줄 독특한 디자인이 필 요했다. 일단 마키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후지마는 손을 들고 발언했다. 디자인 말입니다만, 일정 개수의 기본 템플릿(template)을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두고 조금씩 변형해서 사이트를 구축하시는 것 같은데 완전히 새로 운 독자적인 형태를 저희 쪽에서 원하게 된다면 어떻게 됩니까? 안 그래도 조용했던 회의실이 더욱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틀림 없이 료난 측에서는 후지마의 이런 질문을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 다. 현재의 사쿠라기 홈페이지만 보아도 쇼요 쪽에서 어느 정도 레벨의 인터페이스를 원하고 있는지는 명백하다. 마키는 당황하지 않고 후지마에게 똑바로 시선을 두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저희 회사는 디자인 업체가 아닌 개발 업체이기 때문에 독창적 이고 획기적인 디자인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저희의 주 업 무는 외관의 장식이 아니라 내부의 시스템이니까요. 특별히 원하 시는 스타일이 있다면 그 쪽은 아웃소싱을 하셔도 좋습니다. 후지마로서도 마키의 대답을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불쾌한 기색 없이 시원스레 대답했다. 그럼 저희 쪽에서 디자이너를 소개하겠습니다. 추후 원활한 업 무 협조 부탁드립니다. 네. 그럼 개발에 대한 회의는 여기서 마치고 십 분간 쉰 후에 계약에 대한 사항을 마무리 짓도록 하지요. 휴식 시간을 가지기 위해 회의 스태프들이 빔 프로젝터의 가동 을 정지하고 조명을 밝히는 것을 바라보며 후지마는 새 디자이너로 나카무라 유고 12) 를 떠올리고 있었다. 미쯔이와 친분이 있는 그는 지금의 사쿠라기 홈페이지 레이아웃에도 약간의 도움을 주었었다. 12) :,, MONO*craft.. www.yugop.com
295 이번에는 디자인의 전체적 부분을 맡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 며 일어나 기지개를 켤 무렵, 옆에서 사쿠라기가 슈트의 허릿단을 잡아당겼다. 아마도 환해진 실내 탓에 잠에서 깨어난 모양이다. 내려다보자 눈가에 졸음을 졸망졸망 매단 채 불분명한 목소리로 물 어온다. 다 끝난 거야? 아직 계약이 남았어. 루카와를 불러 줄 테니 너는 그만 돌아가. 도대체 관심도 없으면서 왜 그렇게 따라오겠다고 우겼던 거야. 부드러운 어조이긴 해도 질책하는 것이 분명한 후지마의 이야기 에 사쿠라기는 불룩 볼을 부풀리고 무언가를 속으로 웅얼대었다. 후지마는 한숨을 한 번 쉬고 사쿠라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 의 고집에는 언제나 나름대로 분명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사쿠라 기는 아마 센도도 회의에 참석하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기술적 인 회의니까 센도가 참가할 이유는 없다는 것을, 미리 사쿠라기에 게 이야기 해 주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다만 후지마의 속마 음에도 어쩌면 이라는 가정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손발에 못이 박혀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것 같았던 아이가, 어느덧 상처 를 모두 치료하고 세상으로 뛰어들려 한다면 자신은 그 누구보다도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주고 싶었다. 사쿠라기는 자신을 향해 쏟아 지는 시선을 겁내지 않는다. 아무리 황량할 정도로 광폭하고 광활 한 애정이라도, 그 바탕에 좋아한다는 본심이 깔려 있다면 사쿠라 기는 반드시 받아주었다. 쉽게 표현하자면 아주 큰 허용량을 가진 흡수형의 인간라고 할 수 있다. 센도는, 그런 사쿠라기가 처음으 로 자신 쪽에서 적극적인 호기심을 표하고 있는 상대인 것이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사랑받고 싶다는 욕구가 강한 만큼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커서 절대로 먼저 손을 내밀지 않는 사쿠라기를 익히 알고 있는 후 지마였기에, 쭈뼛거리면서도 료난까지 따라온 사쿠라기가 더욱 기 특하고 대견스러웠다. 루카와가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니 영업부 쪽으로 센도 씨라도 찾아가보면 어때? 잠깐이라면 그다지 업무에 방해가 되지 도 않을 거야. 어차피 우리는 고객이니 그 쪽에서도 불평은 않을 테고. 그 그럴까? 침울해져 있던 사쿠라기의 표정이 순식간에 환하게 개었다. 거 리낌 없이 감정을 드러내놓는 사쿠라기에 후지마는 속으로 웃음을 참으면서 어서 가 보라는 손짓을 했다. 그럼, 먼저 갈게! 달음박질치듯 잰걸음으로 떠나는 사쿠라기의 등 뒤를 보니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해져왔다. 하지만 어떤 아이라도 부모 곁에서 자립 할 때가 오는 것이다. 한참을 사쿠라기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다 가 후지마는 다시 회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사쿠라기?! 아무 생각 없이 내선으로 걸려온 전화를 받은 센도는 깜짝 놀랐 다. 오늘 쇼요와 회의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사쿠라 기까지 참석할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다. 마침 외근이 없던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섰다. 료난은 개발 업체인 까닭에 보안에도 까다로워서 직원용 패스포트가 없으면 제 어 장치가 되어 있는 각 층의 출입문을 통과할 수가 없다. 방문객
297 은 접객실의 키폰을 사용해 직접 용건이 있는 사람을 호출하게 되 어 있었다. 사쿠라기가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져 성급히 뛰쳐나가려는 찰라, 단호한 손길이 센도의 팔을 잡아챘다. 혹시, 사쿠라기 씨가 온 거야? 지금까지 센도가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번득한 광채가 어린, 무 섭게까지 보이는 집요한 눈을 하고 아야코가 추궁하듯 물었다. 순 간 어찌할까 고민했지만 거짓말을 해 보았자 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센도는 어쩔 수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사쿠라기의 여 성에 대한 신경증이 떠올라 걱정스러웠으나 회사 사람들에게 그의 정신적 문제에 대한 이야기까지 늘어놓을 수는 없다. 스멀스멀 솟 아올라오는 불안감을 애써 무시하면서, 센도는 접객실로 향했다. 뒤에서는 모두들 업무시간인 것도 아랑곳 않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소란을 떨며 따라오고 있다. 어찌 된 것인지 점점 늘어나고 있는 무리에는 남자 직원들까지 섞여 있어 마치 군대의 행진과도 같은 장렬한 행보가 되어버렸다. 현기증을 느끼며 센도는 잠금장치를 해제하고 유리문을 밀었다. 약간 긴장한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사 내 회보를 뒤적거리고 있던 사쿠라기가, 소리를 듣고 돌아보았다. 센도. 반가운 듯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애수에 가까울 정도의 뜨거 운 통증을 느끼며 센도는 살짝 웃었다. 온 몸의 세포 사이사이가 들떠, 그 틈으로 사쿠라기의 목소리가 침식해온다. 그저 이름이 불렸을 뿐인데 이토록 격렬하게 몸 구석구석이 끓어오른다면, 앞 으로 자신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만 좋은 것일까. 점점 고도가 높 아져 마침내는 대기권마저 뚫고 터져나갈 것 같은 감정 때문에 결 국엔 폭사( 爆 死 )하게 될지도 모른다. 센도는 고민하며 손을 내밀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었다. 사쿠라기, 오늘 올 줄은 몰랐어. 소극적으로 놀람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 안에 묻어 있는 센도의 기쁨을 감지한 사쿠라기는, 보고 싶었으니까. 라며 아이 처럼 웃었다. 울창한 수풀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마냥 소리마저 해 맑다. 청정한 산소를 심호흡 하듯 사쿠라기의 웃음을 들이마셨다. 악수를 한 후에도 여전히 센도의 손을 잡은 채, 사쿠라기는 머쓱 한 듯 센도의 뒤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물어왔다. 동료 분들? 사쿠라기의 지적에 좀처럼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앞으로 몰려왔다. 가장 동작이 재빨랐던 것은 코시노로 어느 틈엔가 센도의 옆에 바짝 서서 센도의 동기라 며 자기소개를 하고 있다. 전에 전해준, 친필 사인이 아닌 엽서에 인쇄되어 있는 사인에 여자 친구가 화라도 낸 모양이다. 한 손에 는 메모지를 움켜쥔 채 이번에야말로! 라며 불타오르고 있다는 것 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 센도의 동기? 하지만 굉장히 작잖아, 어려 보이고. 바야흐로 사인 좀. 이라고 부탁하려던 찰라, 사쿠라기의 악의 없는 코멘트가 코시노를 직격했다. 코시노는 결코 일본인의 평균 신장에 뒤처지지 않는 키였지만, 190cm에 가까운 사쿠라기 에 비하면 확실히 그 높이가 낮았다. 더구나 평소 남몰래 신경 쓰 고 있던 동안( 童 顔 ) 콤플렉스까지 들춰져 처음의 기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코시노는 한여름 뙤약볕 아래 메말라가는 풀처럼 시들어 버렸다. 활기차게 말을 걸어오던 사람이 갑작스레 스위치가 꺼져 버렸으므로, 사쿠라기는 머리칼을 긁적거리며 난처한 듯이 센도를
299 바라보았다. 센도는 참을 수가 없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센 도는 어느 정도 사쿠라기의 직접화법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대부분 의 사람들이라면 틀림없이 그의 직선적인 표현과 태도에 당황할 것 이다. 사쿠라기의 솔직함에 뜻하지 않던 화살을 맞아버린 코시노 가 안쓰러워 무언가 위로를 해주려 했지만, 냉혹하게도 코시노는 그 잠깐 사이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멀찌감치 뒤로 밀려버렸다. 사쿠라기도 곤란한 듯 저기. 라며 코시노를 잡으려 했으나 어느 새 그 틈에는 다른 직원들의 산이 쌓였다. 사쿠라기 씨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성대를 통하면 저렇게 간살스러운 목소리 가 되는 걸까 싶을 정도의 간지러움으로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여자들에게 삽시간에 둘러싸인 사쿠라기는, 이번에는 정말로 패닉 을 일으킬 듯 했다. 사쿠라기가 자신의 손을 아플 정도로 힘주어 잡아오는 것이 센도에게도 뚜렷하게 느껴졌다. 다소 차가웠던 손 에는 축축하게 땀이 배기 시작한다. 그래도 맹목적인 팬이나 십대의 소녀들과는 달리 무턱대고 달려 들지는 않을 정도의 상식이 있는 사람들이라서 다행히 사쿠라기에 게 손을 뻗거나 접촉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그저 한창 세간에 이 슈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스타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고 목소리라도 듣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외의 다른 목적은 없는 것이다. 사쿠라 기도 가까스로 그 정도의 사실은 알아챘는지 심호흡을 하고 어떻게 든 상황에 적응하려 하는 모습이 보였다. 다소 거친 방법을 써서 라도 에워싸고 있는 사람의 장벽을 헤치고 사쿠라기를 데려가려던 센도는, 조금씩 사쿠라기의 숨소리가 차분해지는 것을 느끼며 내 심 안도했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여자라 하더라도 갑작스런 스킨십만 없으면 사쿠라기도 어느 정 도는 견딜 수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인사를 건네는 그 목소리 에는, 센도에게 말을 걸 때와는 조금 다르게 나지막하고 옅은 막 이 쳐져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센도는 저도 모르게 으쓱해졌 다. 자신은 사쿠라기에게 무언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피어 올라 마음이 훈훈해진다. 그 기분에 취해 들뜬 눈으로 사쿠라기를 바라보자, 그는 조심스레 상대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간격을 둔 상태에서 능숙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센도 를 잡고 있는 손에는 열이 있어서, 현재의 사쿠라기는 맞닿은 센 도의 손에서 안정을 얻어 간신히 사교적인 얼굴을 할 수 있을 정도 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쿠라기가 자신을 의지하고 있다는 생각 에 둥실 몸이 부유( 浮 游 )한다. 이제껏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충족감을 느끼며 센도는 살짝 사쿠라기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것 이 이 자리를 벗어나자는 신호라는 것을 파악한 사쿠라기는 할 말 을 잃게 하는, 마치 열대 지방의 색이 짙은 꽃처럼 화려한 웃음으 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가 몸을 막 돌리려는 찰나, 아야 코가 사쿠라기를 불렀다. 저도 모르게 뒤돌아본 사쿠라기는, 내내 교묘하게 여직원들과 시선이 마주치지 않도록 하고 있었던 보람도 없이 아야코를 직시하게 되었다. 다만 눈이 마주쳤다는 것뿐이라 서 느긋하게 아야코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던 센도는 사쿠라기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깜짝 놀랐다. 긴장한 탓에 체온이 높아져있던 몸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고 키노시타 때 이상으로 사 지가 경직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히 히토미?!
301 사쿠라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절망적으로 속삭였다. 생기와 핏기가 싹 빠져나간 사쿠라기의 얼굴은 마분지로 만들어 놓은 종이 인형처럼 보였다. 손으로 가볍게 치기만 해도 소리조차 없이 찢어 져 버릴 것 같은 덧없는 표정에 센도는 크게 당황했다. 서둘러 사 쿠라기를 잡아끌고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 는 사쿠라기의 몸은 센도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히토미, 왜. 누군지도 모를 여자의 이름만을 공포에 질려 되풀이하는 사쿠라 기에게 놀랐는지, 아야코가 괜찮으냐며 손을 내밀었다. 피하지도 못하고 다가오는 손만을 두려움에 떨며 바라보던 사쿠라기는 그녀 의 손이 닿는 순간, 소리조차 되지 않는 비명을 울리고 기절했다. 그 뒤는 아수라장이었다. 직원들은 놀라 웅성대었고, 사쿠라기를 받치고 있기 때문이긴 했지만 미처 아야코의 손길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센도는 뇌가 녹아내리는 고통을 느꼈다. 센도가 사쿠라기를 안은 채 예기치 못 한 사태를 어떻게 직원들에게 설명해야 좋을지 고민하고 있을 때 나서준 것은 아야코였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에게는 내가 어떻게든 설 명해 놓을게. 과로로 인한 탈진 등으로 얼버무리면 되겠지. 너는 어서 사쿠라기 씨를 쉴 수 있는 곳으로 옮겨. 천만다행하게도 사쿠라기의 목소리가 낮고 작았기 때문에 그가 부르던 히토미라는 이름은 바로 곁에 있던 센도와 다가오고 있던 아야코 외에는 듣지 못한 듯 했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서 있던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직원들의 눈에는 발작에 가까운 정신 상실이라기보다는 그저 갑작 스러운 실신 등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경련조차 일으 키지 못하고 뻣뻣하게 굳어버렸던 몸의 상태가 오히려 사태 수습에 는 도움이 되었다. 아야코가 급히 회의실 쪽으로 연락을 해 준 덕택에 사쿠라기를 숙직실에 뉘이고 얼마 안 되서 후지마가 달려왔다. 사쿠라기를 마 중 나왔던 루카와도 간발의 차이로 숨을 몰아쉬며 들이닥쳤다. 몇 번이고 수건을 물에 적셔 오한이 나고 있는 사쿠라기의 팔다리를 닦아주고 있던 센도는, 폭풍 같은 기세로 날아들어 온 루카와에 게 피할 겨를도 없이 얼굴을 얻어맞았다. 감정이 실린 주먹은 꽤 매서워서 찢어진 입술에서는 피가 흘렀다. 저항도 변명도 않고 묵 묵히 손으로 피를 닦아내는 센도의 모습에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 는지 루카와가 다시 달려들으려 하자 후지마가 날이 선 목소리로 그를 꾸짖었다. 센도 씨 잘못이 아니잖아! 그만 둬!! 하나미치 앞에서 소란 떨 지 마. 하지만 후지마의 냉정한 목소리도 루카와의 흥분을 가라앉힐 수 는 없었는지, 루카와는 분노로 가득 찬 얼굴로 이번에는 후지마를 향해 대들었다. 그럼, 누구의 잘못이라는 거야?! 이 녀석을 만난 이후에 사쿠 라기가 그 여자를 떠올려 불안정해졌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 지!!! 그런데도 너는 일부러 료난과 계약을 하고, 멍청이가 이 자 식을 만나도록 손을 쓰고,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너! 루카와에게 멱살이 잡혀진 채, 후지마는 차가운 눈길로 그를 올 려다보았다.
303 전언을 받고 료난에 막 도착한 루카와에게 연락을 한 후 회의실 에서 이쪽으로 다급하게 달려오다가, 후지마는 걱정스런 얼굴로 숙직실 밖에서 서성이고 있던 아야코를 만났다. 놀랄 만큼 히토미 를 빼다 박은 그녀의 모습에 후지마는 극심한 충격을 받았다. 후 지마가 히토미의 얼굴을 본 것은 오래된 사진을 통해서뿐이었지 만, 아야코는 바래고 낡은 십 수 년 전의 이미지를 마치 3차원으 로 옮겨 놓은 것처럼 히토미 그 자체 같았던 것이다. 그녀가 상황 정리를 도와주었다는 것을 알고 감사 인사를 하면서도 혼란스런 머 리는 정리되지 않았다. 대중 앞에 서는 일에는 엔간히 익숙해진 사쿠라기가 어째서 갑작스레 기절까지 했는지 그 원인을 한 번에 짐작할 수 있었다. 정신적인 상처는 쉽사리 아무는 것이 아니다. 상처를 입는 순간 은 찰나여도, 그 흉터는 평생을 간다. 기실 아무 잘못이 없는 아 야코에게까지 원망이 솟구치는 마음을 억누르며, 후지마는 다시 한 번 이 상태로는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었다. 과거를 떠 올리지만 않으면 괜찮은 것이 아니라, 떠올려도 아무렇지 않을 만 큼 사쿠라기는 강해질 필요가 있다. 후지마는 안개처럼 스산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루카와에게 대 답했다. 내가 무슨 생각인지는 네가 더 잘 알고 있어. 하나미치가 지금 이대로 괜찮다고 생각해? 간신히 사람들 앞에 태연한 척 서게 되었어도, 그늘 없는 웃음 을 웃게 되었어도, 그게 다가 아니야. 하나미치에게는 구원이 필 요해. 혈관이 튀어나올 정도로 손에 힘을 준 채, 이를 악물고 루카와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가 물었다. 그걸, 이 녀석이 할 수 있다는 거야? 너와 내가 있는데도, 타인에게 멍청이를 맡기겠다는 거야?!! 후지마는 표정이 보이지 않도록 머리를 숙이고는, 팔을 들어 자 신을 옭아매고 있는 루카와의 손을 털어냈다. 타인 이니까. 단정적인 후지마의 말에 루카와의 표정이 공허해졌다. 몸을 섞어도, 모든 부분을 겹치며 끌어안아도, 하나미치에게 우리는 가족이야. 네가 하나미치를 무어라고 생각하든, 내게 있어 서 하나미치는 육친이야. 세상에 하나뿐인 동생이다. 거짓말. 이가 갈리는 소리를 내며 루카와가 씹듯이 내뱉었다. 후지마는 할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추켜올려 보이며 응수했다. 마음대로 생각 해. 피가 섞였는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루카와의 지적에 후지마는 잠시 생각했다. 가족이란 혈연으로 자연스레 맺어지는 관계지만, 때로는 혈연 자체가 저주스러울 만 큼 파괴적인 가정도 존재한다. 사쿠라기가 살아온 환경이 그 대표 적인 예였다. 그렇다면, 설령 피가 섞이지 않았을지라도 누구보다 사쿠라기를 더 아끼는 후지마가 오히려 그의 가족으로서 어울리는 것이 아닌가. 골육 이상의 애정을 주겠노라고 사쿠라기를 입적할 때 후지마는 이미 맹세했었다. 루카와의 질타에 부끄러울 이유는 없다. 관계없어. 내 스스로 형 이 될 거라고 정한 거니까.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정성스레 양육된다고 해서, 그게 행복이
305 라고는 할 수 없어. 그걸 알기에 하나미치도 센도 씨에게 시선을 돌린 거라고 생각해. 그 애가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데도 계속 가둬두려 한다면, 그건 이미 안전을 위한 울타리가 아닌 감금을 위한 철창이야. 말을 마친 후지마는 넋을 놓다시피 하고 루카와와의 대화를 듣 고 있던 센도에게로 다가와 허리를 구부렸다. 아직 하나미치가 당신을 사랑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하지 만 적어도 그 아이는 당신을 원하고 있어요. 보고 싶어 하고, 그 리워합니다. 그러니 잘 부탁해요. 부드러운 어조에 비해 센도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데일 듯 격렬 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애정은 내맡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후지 마가 센도에게 원하는 것도 그런 것은 아니다. 후지마는 단지, 사 쿠라기의 사랑이 가족을 향한 무조건적이고 본위적인 것에서 상처 를 감수하고 스스로 결정해 움직이는 타인을 위한 것으로 진화하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후지마가 자신에게 부탁하려는 것의 무게를 느끼고, 센도는 고개를 숙였다.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사랑받는 만큼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 할 수 있을까. 불확실한 욕망만으로 짊어지기에는 후지 마의 마음과 루카와의 분노가, 사쿠라기에 대한 자신의 통증이 너 무나 무겁다. 머리를 들지 못한 채 고해성사를 하듯 용서를 바라 는 마음으로 속삭였다. 제게는 심장이 없습니다. 사랑하고 싶지만, 자신이 없어요. 지금 이 순간처럼 비어 있는 자신의 가슴이 원망스러운 적이 없 었다. 자신 역시 원하는데, 간절하게 갖고 싶은데, 스스로를 믿을 수 없어서 얻기도 전에 도망쳐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지독한 형벌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이었다. 남들처럼 자연스럽게, 아무렇지도 않게, 솟아오르는 마 음의 분수( 粉 水 )를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는 법을 잊 지 않았다면 센도는 울었을 것이다. 후지마는 가만히 몸을 웅크리고 성대가 망가진 사람처럼 거슬리 는 소리로 고백하고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사랑받고 싶어 하 는 하나미치와 사랑하고 싶어 하는 센도, 적어도 자신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고 믿고 싶었다. 몸을 낮추고 센도의 얼굴에 시선을 맞췄다. 찾고 싶다고는 생각합니까?? 당신의 심장, 다시 찾고 싶나요? 충혈 된 눈으로 후지마를 본다. 되찾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되찾고 싶다는 마음도 먹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사쿠라기를 사랑할 수 있다면, 모든 걸 걸고라도 언젠 가 버려두었던 심장을 고스란히 자신의 품으로 안아오고 싶다. 쓸 쓸하게 방치해 두었던 것을 사죄하고, 이제 네 주인을 찾았다고, 너를 뜨겁게 뛰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고 들려주고 싶다. 찾고 싶습니다. 진실한 마음이 물레로 실을 자아내듯 엮이어 흘러나왔다. 찾고 싶어요. 태어나면서부터 움켜쥐고 있던 단 하나의 소망이 이제야 두꺼운 벽을 깨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스며 나온다. 하나미치를 부탁합니다. 결단을 내리는 어조로 강하게 말하고, 후지마는 자리에서 일어 섰다. 아직까지도 상처 받은 얼굴로 어머니를 빼앗긴 아이처럼 망
307 연해 있는 루카와를 데리고 걸어 나간다. 사쿠라기와 단 둘이 남겨진 채 센도는 한동안을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후지마는 루카와를 자신의 저택으로 데리고 왔다. 처연하기 그 지없었던 난초 같은 어머니도, 여성편력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 으면서도 단 한 명의 여인을 잊지 못해 평생을 괴로워하던 아버지 도 이미 세상을 뜬 지 오래다. 오늘 같은 밤. 사쿠라기를 손에서 놓아 보내는 첫날밤에 어울리는 황량한 곳이 아니냐며 후지마는 혼 자 조소했다. 미간을 찌푸리고 돌 같은 침묵으로 온 몸을 휘감은 채 앉아 있는 루카와에게 술을 권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지금의 루카와의 마음 을 후지마는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었다. 루카와보다도 먼저 사 쿠라기를 찾아낸 것은 바로 자신인 것이다.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살던 아버지가, 마치 진실로는 아무것도 가져본 적이 없다는 표정으로 흠뻑 젖은 동판처럼 부식된 채 죽어 가며 찾아 달라 부탁했던 여자가 바로 사쿠라기의 친모인 히토미였 다. 처음에는 그 소원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자존심이 강하고 촛 대처럼 꼿꼿해 단 한 번도 아이에게 괴로움을 내비친 적이 없는 모 친이었지만, 수많은 여인들과 향락하듯 삶을 즐기며 사치를 누렸 던 아버지의 태도가 기꺼웠을 리 없다. 개방적이고 사교적이었던 후지마의 아버지인 사토루는 후지마에게는 후하고 좋은 부친이었 어도 결코 아내에게 있어 좋은 남편은 아니었다. 정적이고 내면적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가치를 중시했던 어머니와 활달하고 삶 자체를 도락처럼 생각하며 살았던 아버지 사이에는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영역이란 것이 없었 다. 화초처럼 자라서 사립 여대를 졸업하자마자 가문끼리의 인연 으로 시집을 왔던 어머니는 겉으로 드러나는 우아함을 잃지 않으며 조용히 메말라갔다. 그래서 사토루가 마침내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빼앗겼을 때, 후지마는 인과응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그 상대가, 치사량의 독소를 가진 난숙하고 풍만한 거리의 여자라는 걸 알았을 때는 아버지도 드디어 임자를 만났다고 내심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여자의 독기는 후지마의 생각보다도 훨씬 짙 었던 것이다. 사쿠라기 히토미라는 이름의 그녀는 불가해한 사람이었다. 그녀 는 화도( 花 道 )의 종가로 이름이 높은 사쿠라기가( 家 ) 출신이었고 케이오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재원이었다. 그럼에도 집안과는 절연 한 채 홍등가에 섰고, 사토루와 교제하면서도 다수의 남자들과 관 계하고 있었다. 아무리 사토루가 부탁을 하고 애원을 해도 그녀는 자신의 무절제한 생활 방식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히토미가 사토 루에게 안주하려 했으면, 틀림없이 그는 이혼마저 불사했을 것이 라는 걸 후지마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한 곳에 머무 르지 않았다. 무르익은 가을처럼 풍요로운 관능미에 이브의 교활 함까지 가졌던 히토미는 어떻게 하면 남자를 굴복시킬 수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여자였다. 그녀는 효율적으로 자신의 무기를 사용했으며 그로 인해 상처받고 피폐해지는 타인들에 대해서는 일 말의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도처에 치명적인 꽃가루를 흩날리며 내키는 대로 살던 어느 날, 그녀는 갑작스레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도미( 渡 美 )했다. 그리고 출산 시기를 역산해보면, 히토미는
309 그 때 이미 사쿠라기를 임신 중이었다. 후지마가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기로 결심한 것은 바로 그것 때 문이었다. 흥신소의 조사에 따르면 사토루가 그토록 애타게 찾았 던 여자는 이미 세상을 뜬 지 오래였고, 어쩌면 자신의 동생일지 도 모르는 소년만이 뉴욕에서 노숙자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조사 자료에 첨부되어 있던 사진은, 밤에 그것 도 원거리에서 찍은 것인지 흐릿했지만 그럼에도 피로 도장을 찍은 것처럼 선열하게 물들어 있는 붉은 머리칼만은 뚜렷하게 보였다. 약간 번져 있는, 머플러로 반쯤 가려진 옆모습은 그대로 음울한 환락의 거리에 녹아들어 침체된 감상을 불러일으켰고, 고집스러운 윤곽 안쪽으로 숨겨진 표정은 마치 안개 속으로 언뜻 언뜻 엿보이 는 비밀의 숲 같았다. 손으로 그 실루엣을 더듬으며, 후지마는 마침내 찾았다고 생각 했다. 태어날 때부터 누구라도 부러워할만한 유복한 환경이었고 지나 칠 정도로 사랑받으며 자랐지만, 아무에게도 드러내지 않는 후지 마의 속마음에는 언제나 얼룩처럼 아버지의 외도와 어머니의 고통 에 대한 상처가 남아있었다. 소리 지르고 화낼 기회를 놓쳐버려, 홀로 남겨진 후에도 치유되지 못하고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는 그 분노를 풀어낼 수 있는 상대를 드디어 발견했다고 후지마는 믿었던 것이다. 사촌이었던 루카와에게만 상황을 설명해두고, 후지마는 사쿠라기를 찾아 뉴욕으로 떠났다. 복수의 대상이 나타났다고 기 뻐하며, 손짓해서 불러들이듯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는 그 붉은색 의 향취에 담뿍 취해 바다를 건넜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었 던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깊게 골이 패인 생생한 사쿠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라기의 상처와 어쩔 수도 없이 굴복해버린 자신의 연민으로부터 시 작될 애정이었다. 히토미는 모친으로서도 심한 여자였다. 사쿠라기를 출산할 당시 그녀는 심한 알코올 중독이었고 자신의 몸조차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고 한다. 덕택에 사쿠라기는 FA S 13) 의 성향을 지니고 태어났다. 다행히 신체적 기형증세는 없었 고 중추신경이나 뇌에도 그 영향이 미치진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상당히 과민한 신경 증세를 보였다. 안 그래도 불안한 정서는 출 생 이후의 비참했던 생활 탓으로 더욱 날카로워졌고, 거기에 더욱 박차를 가한 것이 히토미였다. 미국에 도착해 처음으로 후지마가 접했던 소식은 사쿠라기가 어 린 시절 히토미에게 신체적 정신적으로 혹사당했다는 것이었다. 폭력은 물론이고 성적인 학대까지 당한 것 같다는 보호소 측의 이 야기에 후지마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싶었다. 사쿠라기가 처음 수용되었을 때 행해진 인터뷰에 의하면, 히토 미는 유아였던 사쿠라기만을 남겨두고 며칠씩 집을 비우기 일쑤였 다고 한다. 그저 울음소리로밖에 자신의 표현할 길이 없었던 어린 사쿠라기가 그 때마다 굶주림과 오물 속에 방치되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추측해낼 수 있었다. 히토미에게 사쿠라기의 존재는 없는 것과 같았던 것이다. 그녀는 사쿠라기에 아랑곳 않고 남자들 을 끌어들였고 양육이라고 할 수도 없는 최저한의 것만을 자신의 13) Fatal Alcohol Syndrome :
311 아들에게 주었다. 사쿠라기가 자세히 말하려 들지 않아서 가해진 폭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열 살 무렵부터 는 소아성욕의 대상이 되기까지 한 것 같다고 상담 내용을 기록한 당시의 담당자는 확신하고 있었다. 히토미가 죽은 후, 그녀와 사 귀던 몇 사람의 남자 중에 그나마 제대로 된 사람이 있어 그가 사 쿠라기를 이곳으로 데려왔다고 했다. 당시 열 셋이었던 사쿠라기 는 어린 시절의 심리적 외상으로 정신과 치료를 요할 정도까지 상 태가 악화되어 있었지만 스스로가 진찰을 격렬하게 거부했고 자신 들도 손 쓸 도리가 없어서, 결국 사쿠라기는 보호소에서 자의로 나갔다는 것이다. 히토미의 파행은 말할 것도 없고 아직 어린 아이를 만류조차 하 지 않고 거리로 내보낸 보호소의 처사와 이런 일은 매양 있는 것이 라는 듯 무덤덤하게 후지마를 응대했던 상담원의 태도에까지 상처 를 받아서, 후지마는 인간이란 존재 자체에 역겨운 신물이 올라오 는 것을 느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세상이 기쁨으로만 가 득 찬 아름다운 곳은 아니라 해도, 어떻게 저토록 잔혹하게 사람 이 사람에게 존재 자체를 긁어내리는 상처를 줄 수가 있단 말인가. 더구나 그것이 친모가 자신의 자식에게 행한 처사임을 생각해 보면 느닷없이 세상에 던져진 아이는 도대체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 가야하는지 마저 불분명해진다. 특별한 대상조차 정해지지 않은 근원적인 분노에 가득 차 눈물을 글썽이며, 후지마는 발걸음을 옮 겼다. 사쿠라기가 겪어온 일을 생각하면 자신이라도 그의 앞에 무 릎을 꿇고 사과하고 싶어졌다. 잠시나마 그를 보복의 대상으로 삼 으려 했던 자신의 옹졸함에 치가 떨렸다. 다만, 그토록 참혹한 환 경에서도 살아남아준 사쿠라기가 고마웠다. 이 흉악한 죄의 근원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은 아내를 사랑하지 못한 사토루에게 있었고, 애정의 편린조차 가 지지 않았음에도 아이를 낳아 힘껏 할퀴어놓기만 한 히토미에게 있 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흉터만을 잔뜩 지니고 비틀거리고 있을 사쿠라기를 생각하니 넘실대는 슬픔만이 온 몸을 감쌌다. 그저 무 턱대고, 어떻게든 그 아이를 찾아 보듬어 주고 싶었다. 틀림없이 그것이 후지마가 사쿠라기와 인연이 이어진 까닭일거라고 생각했 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가까운 사거리에 면한 가로등에 몸을 기댔 다. 이곳은 흥신소의 직원이 사쿠라기의 사진을 찍어왔던 곳이다. 반드시 오늘 만나리란 보장은 없지만 그를 찾을 때까지 며칠이고 지키고 서 있을 심산이었다. 하지만 신( 神 )조차도 사쿠라기의 고통은 이제 되었다고 생각했 는지, 그다지 시간이 흐르지 않았을 무렵 어둑한 골목의 모퉁이에 서 장미를 뿌려놓은 듯 활짝 핀 붉은색이 불쑥 나타났다. 지저분 하게 드리워진 머리칼 사이로 아몬드 형의 커다란 눈이 빛나고 있 었다. 자신을 숨기려는 것처럼 옷깃을 턱까지 세우고 발을 끌며 느릿하게 걸어온 그는 헐렁한 청바지에 손을 찔러 넣고 벽에 기대 어 섰다. 가끔씩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하얀 입김이 새어나왔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마치 봄처럼 눈으로 뛰어 들어온 그 존 재 자체에 가슴이 벅차 손을 내밀고 소리쳤다. 사쿠라기!!! 나른한 표정으로 힐끗 쳐다보는 사쿠라기를 무작정 달려가 안았 다. 품 안을 가득 채우는 몸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십오 년간 잃 었던 동생이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이제 없지만, 사쿠라기를 찾았 다.
313 속죄와 보상은 늘 그 대상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체온이 마 주 닿는 순간, 후지마는 그렇게 결심했다. 이 봐, 뭐야, 너. 귀찮다는 듯이 사쿠라기가 후지마를 털어내며 신경질적으로 물 었다. 제대로 된 생활을 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인지 몸은 꽤 말라 있었지만, 쏘아봐오는 눈동자는 횃불처럼 활활 빛났다. 그 광채는 어떤 고난과 모멸에도 절대로 굴하지 않는 육식동물을 닮았다. 사 쿠라기를 갉아먹고 있는 고통 위로, 그래도 삶에 대한 의지가 햇 살처럼 부서지고 있는 것을 보고 후지마는 감동했다. 더없이 지쳐 보이는 표정에 덧씌워진 사쿠라기가 지니고 있는 본연의 생명력에 감탄해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뺨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사쿠라기 가 애매한 표정을 짓더니, 너, 손님인거냐? 고 물어왔다. 그 질 문에 후지마는 이런 늦은 시간에 왜 사쿠라기가 어슬렁어슬렁 거리 로 걸어 나왔는지를 눈치 챘다. 수족이 잘려져 나가는 것 같았다. 오히려 자신보다도 키는 더 큰 이 아이가 애절하고 안타까워 미칠 것 같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는 사쿠라기에게, 후지마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혹시라도 놓칠까 두려워 사쿠라기의 옷자락 을 움켜 쥔 채 택시를 잡았다. 일단 따스한 곳으로 데리고 가 차근 히 이야기하고 싶었다. 깔끔해 보이는 후지마의 매무새에 사쿠라 기도 위험한 손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접었는지 얌전히 택시에 올랐다. 기사에게 인터컨티넨털 호텔을 부탁하고 무심하게 창밖을 바라 보고 있는 사쿠라기를 살폈다. 느닷없이 이름을 불러 온 상대에게 도 크게 놀라지 않는 걸 보면, 지명해오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입 안에 씁쓸함이 퍼지는 걸 느끼며 사쿠라기의 손을 잡았다. 사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쿠라기는 힐끔 잡힌 손을 보았을 뿐 일부러 떨쳐내려는 노력은 하 지 않았다. 호텔에 도착해 오전에 체크 인 해두었던 방으로 사쿠 라기를 안내했다. 트윈 룸으로 예약해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 다. 따스한 실내에 들어서자 사쿠라기는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코 트를 벗었다. 그 손이 멈추지 않고 셔츠의 단추까지 풀어 내리려 하는 걸 보고, 후지마는 당황해 엉겁결에 사쿠라기의 손목을 잡아 챘다. 오해하게 해서 미안! 널 사려던 게 아니야! 후지마의 만류에 사쿠라기의 얼굴이 순식간에 흉포해졌다. 너, 지금 사람 놀리는 거야?! 금세라도 주먹을 휘두를 것 같은 분위기에 후지마는 쩔쩔매다 가, 생각이 난 듯 테이블에 놓여있던 조사 자료를 집어 들었다. 저기, 갑작스럽고 이해가 안 될지도 모르겠지만 잘 들어줘. 혹 시 후지마 사토루라는 이름 들어 본 적 있어? 없어. 미심쩍은 눈길로 사쿠라기는 즉각 대답했다. 그러려니 짐작은 했지만, 상처를 입은 채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있는 이 아이에 게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면 좋을지 망설여진다. 자신이라도 생판 모르는 남이 훌쩍 나타나 혈연임을 설득하려 한다면 어이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사쿠라기를 이해시켜서 일 본으로 데려가야 한다. 하루라도 더 이런 생활을 지속하도록 두고 싶지 않았다. 참으로 빨리도 사쿠라기에게 마음을 줘버린 자신에 한심해 하면서 후지마는 사쿠라기에게 서류를 건넸다. 내키지 않 는 듯 서류를 바라보던 사쿠라기의 눈이, 클립으로 고정되어 있는 자신의 사진을 보자 날카로워졌다. 묻는 듯이 후지마를 바라보지
315 만 후지마는 어깨만을 으쓱해보였다. 하지만 사쿠라기는 짜증이 나는 듯 서류를 후지마쪽으로 집어 던지며 화를 냈다. 난 이런 글씨 못 읽어! 예상치 못했던 일에 후지마는 한층 더 당황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사쿠라기는 뉴욕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자랐다. 히 토미가 사쿠라기에게 친절하게 일어를 가르쳤을 리도 없다. 실제 로 지금까지도 후지마와 영어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점점 막막해 지는 것을 느끼며, 후지마는 고개를 감싸 안았다. 손님도 아니고, 설명도 하지 않을 거라면 난 가겠어. 일어서려 하는 사쿠라기를 황망히 잡아당긴다. 기다려! 사쿠라기, 넌 내 동생이야! 튀어나온 후지마의 말에 사쿠라기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바라 보았다. 그 표정은 울고 싶은데 소리를 낼 수 없는 박새 같아 보였 다. 박제처럼 어둡게 눈빛을 비워낸 채 경직한 사쿠라기를 끌어 바로 옆에 앉히고 후지마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네가 꼭 내 형이라는 보장도 없잖아. 그렇긴 하지만 거의 틀림없을 거라고 생각해. 형제라기엔, 전혀 안 닮았는걸. 더구나 임신 시기를 출산일에 서 역산했다고 했지? 히토미가 미국으로 건너 온 것은 초여름이었 고 내 생일은 4월 1일이야. 이곳에 와서 임신했을 가능성도 얼마 든지 있어. 더구나 일본에서도 너희 아버지하고만 관계한 건 아니 잖아. 의외로 조목조목 따져오는 사쿠라기에 후지마는 짐짓 난처해졌 다. 사쿠라기가 하는 말은 물론 일리가 있다. 사실 사쿠라기는 순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수한 일본인치고는 색소도 옅다. 하지만 모든 의문점보다, 절대로 후지마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사쿠라기 자신의 고압적 인 태도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설명을 한다 해서 자신을 얼 싸안아주고 형이라며 고개 파묻어 줄 거라 생각은 안 했지만, 사 쿠라기가 둘러치고 있는 방벽은 생각 이상으로 굳건하고 높았다. 후지마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사쿠라기. 히토미를 찾으라는 건 우리 아버지의 유일한 유언 이었어. 그녀가 죽고 없는 지금은, 너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보 호하는 것이 내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해. 미심쩍은 것도 이해하고 당황스러운 마음도 알겠지만 그저 편하 게 육친이 한 명 생긴 거라고 받아들여주면 안 되겠어? 함께 일본 으로 가면 더 이상 거리에 서지 않아도 되고 힘들었던 과거도 틀림 없이 잊을 수 있을 거야. 같이 가자, 사쿠라기. 애원하다시피 부탁하며 고개를 드는 순간, 퍽 하고 사쿠라기의 주먹이 날아와 얼굴을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제대로 힘이 실린 펀 치여서 후지마의 고개가 완전히 옆으로 꺾였다. 머리가 핑 돌 정 도의 충격에 놀라 후지마는 화도 내지 못하고 멍하니 사쿠라기를 바라보았다. 사쿠라기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주먹을 꽉 쥔 채 활화산 같은 눈매로 후지마를 노려보았다. 내 앞에서 가족 운운하지 마!! 내겐 부친 따위는 태어날 때부 터 없었고, 히토미는 내가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조차 허락해주지 않았어. 그녀가 날 어떻게 취급했는지 알아? 때리는 것도 굶기는 것도 괜찮았어. 하지만 그녀는,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태연하게 자 신의 아들과 섹스 했어!!! 핑, 하고 후지마의 눈앞에서 뭔가가 돌았다. 머릿속이 엉망진
317 창으로 헝클어지고 숨이 턱 막힌다. 맞은 자리에서 느껴지는 통증 마저 저 멀리 사라졌다. 얼빠진 표정으로 토해내듯 뱉어지는 사쿠 라기의 이야기만을 이해하려 애쓰는 것이 고작이었다. 사쿠라기는 점점 일그러지고 있는 후지마의 표정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계속 해서 절규했다. 지난 십오 년 동안 나라는 존재조차 몰랐으면서, 이제 와서 잘 난 척 나타나 혈연이랍시고 간살 떨며 다가오지 마. 힘든 과거를 잊을 수 있다고? 도대체 네가 내 힘든 과거에 대해 뭘 안다는 거 야?! 생모한테조차 인간 취급받지 못하면서도, 그래도 살겠다고 바득바득 기어온 내 시간의 일 분 일 초라도, 네가 정말로 이해할 수 있다는 거야?!! 그동안 쌓이고 쌓여 있던 사쿠라기의 분노가 폭풍처럼 후지마에 게로 휘몰아쳤다. 그것은 지금까지 억눌려 있던 삶에 대한 사쿠라 기의 희구였고 사랑받지 못한 절망이었다. 발작처럼 소리쳐대며 사쿠라기는 울었다. 사쿠라기는 지금까지 남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악에 받쳐 마땅한 고난의 나날들 끝에 사쿠라기에게 늘어 만 간 것은 절대 지지 않겠다는 질긴 오기와 결의였다. 비록 삶이 자신을 받아들여 주지 않을지라도 어떻게든 살아가고야 말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어째서 태어났는지, 왜 이런 몹쓸 꼴로 살아가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도 그저 태어났다 살아있다 는 명제만 이 사쿠라기에게 주어진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버팀목이었다. 안 그랬다면 어머니가 자신에게 행하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알았던 순 간 혀를 깨물었을 것이다. 어렸을 때는 아픔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사랑해주지 않는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지, 왜 때리는지, 왜 친아들을 안으려 드는지 그로서는 짐작할 수 도 없었다. 원래 그러려니 했다. 세상 모든 아이들이 자신처럼 자 라는 줄 알았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 순간의 공포는 이제 와서 다시 헤아리고 싶지도 않다. 갑자기 온 세상이 적으로 둘러싸였 다. 보호소에 맡겨지고서는 무신경한 탐색으로 모든 것을 파고들 어오려는 타인의 갈퀴에 몸이 찢기지 않기 위해 방어하는 것만으로 도 벅찼다. 충격이 희석되자 울화가 사쿠라기를 잠식했다. 경련이 일 정도의 강한 증오 속에서, 사쿠라기는 맹세했다.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반드시 이 지옥을 딛고 일어서주겠다고 수만 번을 다짐 했다. 그런데 유성이라도 떨어지듯 눈앞에 톡 튀어나온 이 남자가, 잊 으라는 것이다. 가족으로서 자신을 보호해주겠다는 것이다. 화가 폭발했다. 이 남자는 사쿠라기에게 가족이 어떤 의미인지 모른다. 과거를 버리고서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는 것조차도 모른다. 사쿠라기는 단지 사랑받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머니에게, 사람 들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그래서 더욱 자신을 괴롭히고 때리는 어머니가 싫었다. 순간순간 그녀를 향한 살의를 느낄 때마다 누군 가를 그렇게나 증오하는 스스로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어떤 때에 는 어머니를 미워하는 자신이 체벌을 당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 마저 들었다. 히토미의 폭력과 자신의 증오, 어느 것이 먼저 시작 되었는지 애매해졌다. 맞기 때문에 싫은 것인지 싫어하기 때문에 맞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나쁜 아이기 때문에 어머니에 게 사랑받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풀 수 없는 고민에 빠져 들었다.
319 술에 취한 히토미가 자신의 몸에 손을 뻗어오던 최초의 순간은, 그래도 어머니가 자신을 품어주는구나 싶어 기뻤다. 그러나 세상 어떤 어머니도 아들을 그런 식으로 안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 자 폭력을 휘두르는 손보다도 오히려 자신을 더듬는 손이 무서워졌 다. 그런데 방치가 계속되면 그 손길마저도 그리워졌다. 상식에서 벗어나 있는 하루하루가 사쿠라기의 정신을 균열시켜 갔다. 미움과 애정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한들거리는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히토미를 향한 상반된 마음이 전투를 벌이 고 있었다. 한껏 압축되어 있다 이제야 간신히 솟아나기 시작한 고통은 좀 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사쿠라기는 마치 성대가 갈가리 찢긴 가 수가 쇳소리만을 지르며 우는 것처럼 울었다. 몸 전체로 발산하는 단말마를 닮은 비명에 후지마의 가슴이 고통으로 먹먹해졌다. 키 만 훌쩍 클 뿐, 사쿠라기는 아직 열다섯에 불과한 어린 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내하기에는 지나치게 독한 아픔을 지금까지 혼자서 끌어안고 살아왔다. 세상의 누군가가 행복했던 만큼 사쿠 라기에게는 불행이 쏟아지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연민과 애정으로 가득 차, 후지마는 온 몸을 떨고 있는 사쿠라기를 힘껏 끌어안았 다. 자신의 아이를 어르듯 이름으로 부르며 부드럽게 달랬다. 그래, 내가 잘못했어. 하나미치. 내 잘못이야. 미워하고 싶지 않았어. 원망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너무 아파서 아파 서 하나미치. 미안해요, 엄마. 미안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그런 참혹한 대접을 받았으면서도 사쿠라기가 히토미에 대한 죄 책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후지마는 괴로웠다. 어머니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는 마음은 원죄( 原 罪 )처럼 사쿠라기를 구속해 그가 죄악감과 절망감 속에서 부유하게 만들었다. 버릴 수도 없는 혈연 이라는 철사가 날카롭게 사쿠라기의 살을 파먹어 들어가고 있었 다. 사쿠라기에게 핏줄이란 모순으로 점철된 애증의 대상인 것이 다. 패륜을 거듭하다가 결국엔 급성알코올중독으로 죽어버린 그녀 를 가슴에 묻고, 사쿠라기는 트라우마 운운하며 무신경한 탐색으 로 그를 교정하려 드는 사람들 틈새에서 지금까지 버티어 왔다. 암초를 돌아 흐르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계속해서 부딪치는 인생 만을 살아온 것이다. 끝없는 투쟁이었던 사쿠라기의 지난 시간을 단지 힘든 과거 로 치부해버리고, 가족을 언급하며 그를 설득하 려던 자신의 실수에 환멸이 들어 후지마는 더욱 괴로워졌다. 손을 뻗어 사쿠라기의 얼굴을 움켜쥐고 눈물로 흥건해진 그의 눈을 똑바 로 바라보았다. 잘 들어, 하나미치. 내가 잘못 말했어. 잊지 않아도 돼, 어머니를 미워해도 돼. 괜찮아. 아무도 너를 나무라지 않아. 너는 네 생각만큼 나쁜 아 이가 아니야. 네게 문제가 있어서 사랑받지 못한 게 아니야. 그 증거로 내가 너를 사랑해줄게. 함께 살자. 난 네가 필요해. 소중해. 몇 번이고 기도하듯이 되풀이해서 속삭였다. 고랑처럼 팬 흉터 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애정을 들이부어 그 골 사이로 흐르게 하는 것뿐이다. 어깨를 떨며 날개가 꺾인 새처럼
321 자신의 가슴에서 파들거리고 있는 사쿠라기를 껴안고, 후지마는 제발 자신의 진심이 사쿠라기에게 전해지길 바라며 사쿠라기에게 입을 맞추고 어깨를 쓰다듬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표면화한 적 없었던 감정을 한 번에 드러냈기 때문인지 사쿠라기는 이내 탈진하 듯 잠이 들었다. 은하수가 흘러내린 듯 현란한 야경이 빛을 발하 는 번잡한 도시에서, 후지마는 다음 날 아침까지 자신의 동생을 바라보며 계속 소중하다는 말을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의 사쿠라기는 조금 멍해 보였다. 어딘지 초 점이 맞지 않는 시선으로 옆에 누워있는 후지마를 응시하더니 이내 시선을 피했다. 후지마는 손을 뻗어 지금까지 사쿠라기가 받아온 상처만큼이나 붉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애정이 묻어 있는 손놀 림에 사쿠라기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후지마의 안색을 살폈다. 조마조마한 기색이 역력한 눈빛에는 약간의 기대와 두려움이 뒤섞 여있었다. 어제의 제어가 끊겼던 자신의 모습과 후지마의 손길을 받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스스로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어색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후지마는 웃으면서 사쿠라기의 볼 에 입 맞추고 인사를 했다. 잘 잤니? 하나미치. 매끈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구름이 걷히듯 사쿠라기의 눈동자 에서 불안함이 사라지고 부끄러움만이 남았다. 아 안녕. 저기, 미안.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응? 이라며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사 쿠라기가 살짝 어제 자신이 남긴 후지마의 입가의 상처를 매만져왔 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아파? 아니, 하나도 안 아파. 간지러운 웃음이 터질 것 같아 애써 참으며 후지마는 고개를 몇 번이고 가로 저었다. 고개를 숙이고 걱정스럽게 자신이 때린 상처 를 바라보는 사쿠라기의 맑은 눈동자를 보고 악몽은 이제 끝났음을 직감했다. 어제의 음습하게 흥분하던 사쿠라기와 지금의 온순한 사쿠라기는 너무도 달라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이지만, 분명 이 꾸밈없는 눈빛이 사쿠라기의 민낯일 것이다. 손쉽게 평온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사쿠라 기가 뒤집어쓰고 있던 경계의 가면이 한 꺼풀 벗겨졌다 해서 후지 마 자신이 완전히 받아들여진 것도 아닐 것이다. 다만, 그래도 어 제와는 무언가가 분명히 달라졌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고해성사일지도 모른다. 지고 걷다 가는 넘어질 수밖에 없는 무거운 짐을 내내 끌어안고 있지만 말고 스쳐가는 사람에게라도, 아무런 이해관계가 얽혀있지 않은 사람에 게라도, 그저 짐이 벅차다는 것을 털어놓는 것만으로 체감되는 무 게는 한결 가벼워질 수가 있다. 고통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기 에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에게는 고백한 자의 괴로움이 한 때 흥밋 거리조차 되지 못하는 사소한 것일 수도 있지만, 빈틈없이 엉키어 있던 실타래의 한 쪽 끝이 풀리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당사자에 게는 의미가 있다. 그것이 바로 시작인 것이다. 받아들여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손을 내밀 준비인지도 모르겠 다고, 하룻밤 사이에 어딘가 부드러워진 사쿠라기를 보며 후지마 는 생각했다. 그토록 오랜 시간동안 누적되어 온 아픔이 한 번의 비명과 눈물과 외침으로 조금씩 씻겨나간다. 아마도 이 때 사쿠라
323 기는 다시 태어난 것일 테다. 현실 탓에 가로막혀 있던 자신의 본 질을 알껍데기를 깨고 다시 찾아낸 것이다. 고통을 뚫고, 대지 밑 에 잠들어 있던 순수가 고개를 밀어 올리며 자란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단 한 번도 안심하고 기댈 수 있는 상대 를 갖지 못했던 사쿠라기는, 역시 후지마를 순순히 인정해주지는 않았다. 다정하게 대해준 건 고맙지만 어쨌든 난 가족 같은 건 필요 없 어. 라며 호텔을 나서려는 사쿠라기를 후지마가 얼마나 애를 써 잡아야했는지 모른다. 아무리 설득하고 달래도 말을 듣지 않아서, 결국 후지마는 돈을 내고 사쿠라기의 시간 한 달을 샀다. 그래봤자 넌 섹스도 안 하잖아. 못마땅한, 빚지는 게 싫다는 표정으로 노려봐온다. 아이다운 고 집이 귀여워 후지마는 웃었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말했다. 난 네 몸이 아니라 마음을 얻고 싶어. 그 때 잠시 놀란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홱 돌려버린 사쿠라기의 귓바퀴는,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애써 일본으로 함께 갈 것을 재촉하지 않으며 후지마는 사쿠라 기를 데리고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녔다. 센트럴 파크로 피크닉을 가고, 브루클린 브리지의 야경을 보고, 자유의 여신상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때로는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을 관람하고 록펠러 센터 앞으로 스케이트도 타러 갔다. 간혹 사쿠라기의 표정이 멀어 보일 때마다 힘껏 끌어안고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처음에는 머뭇거리고 주저하던 사쿠라기도 점차 후지마의 보살핌에 익숙해져 이제는 자 신 쪽에서 먼저 하고 싶은 일을 말해 오기도 했다. 그것이 후지마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는 기뻐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치 어리광 부리듯 살짝 후지마의 반응을 살피며 부탁해오는 그 모습에 온 몸이 갈라지는 것이 아닐 까 싶을 정도로 격하게 끓어오르는 마음을 느꼈다. 이리저리 치이며 살아온 탓에, 사쿠라기에게는 자신을 향한 사 람의 마음을 감지해내는 기술이 안테나처럼 발달해 있었다. 아낌 없이 쏟아지는 후지마의 애정에, 아마도 후지마라면 결코 자신을 향한 마음을 거두지 않을 것이라는 걸 민감하게 눈치 챈 듯 했다. 사랑은 애초부터 번지기 쉬운 것이다. 감추려야 감출수도 없는 오 라(aura)가 물안개처럼 피어오른다. 본능처럼 후지마의 애정을 감지하고 각인된 새끼 새처럼 종종거리며 자신에게 붙어오는 사쿠 라기가 참을 수 없이 귀여워 후지마의 가슴 속에서 싹트기 시작한 사쿠라기에 대한 사랑은 한도조차 없이 부풀어갔다. 후지마. 응? 사쿠라기를 위해 로브스터를 발라주고 있던 손길을 멈추지 않은 채 후지마는 다정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좀처럼 사쿠라기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최근 무슨 일에든 망설이지 않게 된 사 쿠라기의 유난한 머뭇거림이 의아해 고개를 들자 홍조가 어려 있는 사쿠라기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무언가 진지한 이야기를 하 려나 싶어 후지마는 손을 멈추고 사쿠라기를 응시했다. 나, 이제 히토미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처음 만 난 날 후지마에게 미워해도 괜찮다는 말을 들었잖아. 그랬더니 이 상하게도 오히려 히토미를 미워하지 않게 되었어. 하나미치?
325 태어나서 처음 들은 소중하다는 이야기에 어딘가 응어리진 것 이 풀렸나봐. 나, 후지마의 말대로 일본으로 함께 갈래. 후지마를 믿게 된 지금이라면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 조금 더 똑바로 세상을 보게 된 눈으로 사쿠라기가 손끝까지 발 갛게 물들이며 느릿느릿 쑥스럽게 이야기했다. 그 순간에 후지마 가 느꼈던 환희는 천상의 그 무엇을 준다 해도 바꾸고 싶지 않을 정도로 순수하고 순결한 것이었다. 며칠 간 신변정리를 하고 순순히 일본으로 따라온 사쿠라기는 정식으로 후지마가의 호적에 입적되었다. 양자 입적이라니 게이 결혼 같다면서 사쿠라기는 내내 킬킬거렸다. 서류상으로는 후지마 하나미치가 되었지만, 사쿠라기는 평상시에는 자신의 성을 그대로 쓰고 싶다고 했다. 히토미에게서 물려받은 사쿠라기라는 성은 평 생 지고 가야할 십자가 같은 것이다. 아직은 괴로운 일만 가득한 이름이지만, 이제부터라도 행복한 기운으로 가득 채워주고 싶다고 사쿠라기는 웃으며 말했다. 활짝 핀 봄의 정취가 어린 그 이름이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후지마도 사쿠라기의 기 특한 결심을 만류하지 않았다. 일본에서 살기 위해서는 이것저것 준비하고 배워야 할 것이 많 았지만 사쿠라기는 불평 한 마디 없이 잘 해나갔다. 루카와와는 첫 만남부터 티격태격했고 미토와는 스스럼없이 십년지기처럼 친 해졌으며, 사쿠라기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음울한 그림자도 조 금씩 사라져갔다. 지금까지 애정에 굶주리며 살았던 만큼 자신을 향해 부어지는 후지마와 루카와의 사랑을 굴절 없이 그대로 받아들 였다. 사쿠라기는 마침내 세상을 향해 뻗어나가기 시작했던 것이 다. 후지마가 재촉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먼저 심리치료를 받겠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다고 이야기를 꺼내 오기도 했다. 트라우마의 극복이라는 것은, 가장 괴로웠던 시절로 돌아가 몇 번이고 그 순간을 되풀이해야만 하는 것이라서 막상 치료가 시작된 이후로 사쿠라기의 발작은 더욱 잦아졌다. 하지만 마음 놓고 그 순간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는 안도감 때문인지 시간은 걸렸어도 사쿠라기는 차츰 안정되어갔 다. 그토록 처참한 유년기를 거쳤음에도 순백의 순정함을 잃지 않은 사쿠라기를 바라보면 마치 기적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애 정을 흡수하기 시작하자 사쿠라기는 무서운 속도로 자라갔다. 모 든 사람에게 공평한 웃음을 흩뿌렸고 돌아오는 보답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지켜봐 주는 것을 좋아했고, 자신의 웃음이 다른 사람의 웃음으로 번져가는 것에 희열을 느꼈다. 사쿠라기의 가장 놀라운 점은, 사랑 받지 못하고 자랐음에도 사 랑 받는 법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후지마는 성별도 혈연도 넘어선 근원적인 애 정을 사쿠라기에게 베풀어 주고 싶다고 간절하게 생각했다. 사쿠 라기가 더욱 세상을 사랑할 수 있도록, 자신이 그 아이를 아낌없 이 사랑해주고 싶었다. 달빛에 흐드러진 벚꽃처럼 매력을 발산하 기 시작하는 사쿠라기를 지켜보며 후지마는 SAKURAGI 프로젝트 를 기획했다. 누구보다도 사랑받게 해 주고 싶다. 후지마의 그 바 람은 이루어져 사쿠라기는 멋지게 세상을 정복했고 이제 스스로 서 서 걷기 시작한 것이다. 루카와의 잔이 빈 것을 깨닫고 후지마는 얼음을 다시 채운 후 술 을 따라주었다.
327 너무 서운해 하지 마. 하나미치는 우리의 애정을 토대로 현재 에 서 있는 거야. 그 애는 그걸 절대로 잊지 않을 거고, 앞으로도 우리에게서 멀어지지 않을 거야. 자기위로는 추해. 루카와의 냉정한 반응에 후지마는 웃었다. 네가 왜 DNA 검사도 하지 않는지 내가 모르는 줄 알아? 신경질적으로 술을 들이키며 루카와가 공격적으로 내뱉었다. 후 지마는 그 말에 숨어 있는 가시를 무시한 채 고개를 갸웃거리고 손 에 든 잔을 흔들었다. 글쎄. 나는 내가 하나미치의 형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롭기도 하고, 때로는 견딜 수 없이 행복하기도 해. 이 복합적이고도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굳 이 파헤치고 싶지 않아. 좋아하니까, 소중하니까, 가족이니까. 난 그걸로 만족해. 너도 슬슬 욕심을 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해. 루카와는 입술을 가늘게 깨물었다. 안아주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시선이 마주쳤을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다고 절실하게 바랐다. 알고 있다. 사쿠라기가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다. 단지, 시야 의 범위를 조금 더 확대하는 것뿐이다. 후지마의 말대로 그는 영 원히 루카와의 가족이고 아이이고 소중한 사람이다. 후지마와 루 카와에게 사쿠라기가 얼마만큼의 애정과 감사를 안고 있는지, 루 카와도 잘 알고 있다. 단지 그 색( 色 )이 루카와가 바라는 것과 조 금 다르다고 해서 애정마저 희석되는 건 아닌 것이다. 굴절되는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각도가 제각기라해도 빛의 근원이 사랑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루카와에게 있어 사쿠라기는 최초의 자기희생의 대상이었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상대의 행복을 생각 하라는 유치한 말이 가진 진리의 무게를, 루카와는 사쿠라기를 향 한 자신의 애정에 함몰되어가며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는 중이었 다. 요구하지 않고, 강압하지 않고, 심지어 세월에조차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사쿠라기를 사랑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바로 자신이 었다. 다른 이이게 보내는 것이 죽음보다 고통스러워도, 자신보다 그를 먼저 생각할 수 있음이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뒷모습을 바라봐야 할 순간이 온 것이다. 숨을 삼키고 몸을 소파에 기댔다. 이번에는 스스로 잔에 술을 찰랑찰랑하게 따라 그 흔들리는 파동을 보고 있었다. 오늘처럼 심 장이 덜컥 내려앉는 일은 이제 더는 사양이다. 사쿠라기가 과거로 부터, 자신의 상처로부터 완전하게 탈출할 수 있다면 이 정도 상 실감쯤은 이겨낼 각오가 얼마든지 되어있다. 생각이 사쿠라기의 갑작스런 실신에 미치자 루카와는 잊고 있었 던 것을 후지마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 아야코라는 여자는 어떻게 된 거야. 닿은 것도 아닌 데 멍청이가 느닷없이 쓰러졌다며. 순간 후지마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후지마의 내면에 감추어진 격렬하고 어두운 분노를 잠깐이나마 엿본 것 같아 루카와도 기분이 서늘해졌다. 얼굴을 봤는데, 히토미인줄 착각할 정도였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조금 알아봤더니, 어머니의 결혼 전 성이 사쿠라기더군.
329 루카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소란스런 와중에 신상까지 알 아낸 후지마도 후지마지만, 이제 와서 사쿠라기의 진짜 혈연일지 도 모르는 여자가 나타났다는 사실이 더욱 충격이었다. 히토미는 가문에서 절연당한 상태라 아야코 씨는 그녀의 존재 도 모르는 듯 했지만, 히토미는 아야코 씨의 이모야. 결국 아야코 씨와 하나미치는 사촌이라는 얘기지. 사쿠라기는 흔한 성이 아니다. 예상했던 대로의 대답에 루카와 는 어깨가 오싹해졌다. 한기가 등을 타고 기어 올라온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다니, 뭘? 후지마의 눈동자가 빙점 가까이 차가워졌다. 내쏘듯이 말하는 그에게는 한 점의 주저함도 없었다. 당연히 그 쪽이나 하나미치에게 알릴 생각 따윈 전혀 없어. 사 쿠라기가( 家 )는 히토미를 잘라낸 지 오래고 하나미치의 존재조차 도 몰라. 그 애의 가족은 우리지, 그들이 아니야. 그 애의 형이라 는 입장마저 양보할 마음은 추호도 없어. 어머니 쪽의 인척들에게 인정받는다면, 다른 의미로 사쿠라기의 본질적인 상처가 치유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얼핏 루 카와의 가슴을 스쳐갔지만 루카와 역시 그 생각을 겉으로 내어놓지 는 않았다. 육친의 애정은 자신들로 충분하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루카와는 후지마와 자신의 사쿠라기에 대한 마음의 깊 이에 자신이 있었다. 일견 이기적으로까지 보이는 후지마의 애정 이지만, 그에게도 물러설 수 없는 부분은 있는 것이다. 사랑은 뭉 뚱그려지고 뒤틀려서 그래도 사쿠라기만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센도는 코시노에게 차를 빌려 사쿠라기를 자신의 아파트까지 데 리고 왔다. 사쿠라기의 몸은 많이 이완이 되었지만 사쿠라기는 아 직 깨어나진 않았다. 후지마가 회사로 보내주었던 사쿠라기의 주 치의는, 잠이 든 것뿐이니 긴장이 완전히 풀리면 저절로 깨어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주차를 한 뒤 센도는 사쿠라기를 걸쳐 업었다. 등에 얹힌 남자 의 무게가 조금은 두렵고 조금은 행복하다. 집으로 들어서, 사쿠 라기의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레 침대에 눕힌다. 베개에 파 묻힌 얼굴은 눈썹 언저리까지 붉은 머리칼이 흩어져 있다. 손을 들어 쓸어 올려 주려다가, 센도는 자신이 떨고 있음을 자각하고는 자조어린 웃음을 지었다. 가볍게 만지는 것조차 이토록 감정이 증 폭하는 것이다. 껴안게 된 사쿠라기는 너무나 뜨거워서, 그동안 차디차게 얼어붙어 있던 자신의 모든 것이 순식간에 갈라져 버릴 것 같았다. 손끝만을 간신히 사쿠라기의 이마에 댄 채 가늘게 경 련하고 있자, 사쿠라기가 눈을 떴다. 센도? 눈을 찌푸리는 걸 보면 아직 시야는 흐릿한 것 같은데, 그래도 센도를 찾아준다. 형언할 수도 묘사할 수도 없는 북받쳐 오르는 감각에 센도는 그냥 몸을 맡겼다. 쉴 사이 없이 떨면서 사쿠라기 의 얼굴을 쓰다듬고 손을 잡았다. 금이 갈 것 같아. 응? 얼음이 갑자기 지나친 열에 닿으면 파열하는 것처럼, 너한테 닿아서 나도 금이 가 버릴 것 같아.
331 연기처럼 파르스름한 음성으로 센도가 속삭였다. 아직 몽롱한 정신으로 사쿠라기는 센도를 응시했다. 물기조차 없이 모든 종류 의 비애에 가득 차 여리게 흔들리고 있는 센도의 청람색 눈동자가 흘러 들어온다. 먼 곳으로 떠나는 방랑객으로 가득 찬 배가 떠 있 는 강처럼, 이별에 대한 애수와 재회에 대한 동경을 온 몸으로 얼 싸안은 채 고독의 정점에서 울지도 못하고 고통만을 호소하고 있는 센도를 바라보았다. 그의 쓸쓸함과 두려움이 여과되지도 않고 꾸준히 스며온다. 어 쩌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 창백한 남자의 절박한 구조신호에 사쿠라기는 반응해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그건, 금이 가는 게 아니라 녹는 거야. 팔을 뻗어 울음 대신에 온 몸을 갈대처럼 떨고 있는 남자를 끌어 안았다. 자신이 센도를 채워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자, 미처 알지 못했 던 강대한 힘이 몸속으로부터 용암처럼 끓어 넘치는 것을 느꼈다. 후지마나 루카와와는 또 다르다. 그들은 사쿠라기를 만나기 이전 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사쿠라기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는 것이 아니라, 사쿠라기가 도울 수 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사쿠 라기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매여 있던 히토미에 대한 애증의 굴레에서 조금씩 벗어나면서, 사쿠라기는 자신도 후 지마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루카와가 되고 싶었다. 누군가 자신처럼 똑바로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약간이라도 좋으니 보탬 이 되고 싶었다. 짐을 지우는 사람이 아니라 짐을 지는 사람이 되 고 싶었다. 그 때야말로 진정으로 자신은 히토미에게서 놓여 날 수 있을 것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같았다. 태어나고 살아있다는 사실을 그저 하나의 현상이 아니라 중요한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자신은 센도를 찾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 다. 이렇게나 절절하게 아픔을 호소해오는, 치유를 희망해 오는 존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센도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사쿠라기. 달라붙어오는 센도의 체온이 가슴이 아플 정도로 달다. 입술이 마주 닿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벌려 서로를 거칠고 격 하게 탐했다. 방울져 떨어지는 타액조차 안타까워 몇 번이나 혀로 훔치고 다시 겹쳤다. 센도에게서 오열에 가까운 흐느낌이 새어나 왔다. 심장을 찾고 싶어. 찾아서, 너에게 주고 싶어. 센도의 샘솟는 눈물이 사쿠라기의 눈꺼풀에도 젖어 들었다. 안 쪽으로 배어들어오는 눈물이 시큰거려 사쿠라기는 눈을 깜박였다. 얼음이 녹아 물이 되어 흐른다. 단단히 결박되어 있던 주술이 풀 리고 봄과 함께 사랑의 세례가 센도를 감쌌다. 센도. 사쿠라기의 팔이 둥글게 센도를 끌어안는다. 마음을 들이부어 정성스럽게 눈앞에 있는 남자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불렀다. 센도. 그 어떤 애무보다도 부드럽게 자신의 귓가를 적셔오는 사쿠라기 의 목소리에, 센도는 고개를 들고 눈동자를 마주했다. 젖어서 더
333 욱 투명해진 사쿠라기의 눈동자 뒤로, 지금까지의 고독하고 쓸쓸 했던 날들 모두가 하나하나 떠올랐다 다시 사라져갔다. 안녕, 안녕. 마치 작별을 고하는 것처럼 손을 흔들면서 혼자서 걸어왔 던 시간들이 사쿠라기의 안으로 삼켜져간다. 자신을 채우고 있던 두려움과 공포마저도 달아오르는 센도의 열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 밖으로 밀려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잿빛의 부분은 사그라지 고 몸 구석, 머리의 가장 깊은 곳까지 사쿠라기를 향한 마음 하나 만이 가득 들어찼다. 그것은 일생 보아온 그 어떤 빛보다도 더욱 환하고 희었다. 몇 번 눈을 깜박였다. 그래도 직시해오는 황금색 눈동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뜨거운 체온을 전해주고 있는 팔은 풀 리지 않는다. 사랑해. 센도는 평생 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단 한마디를 마침내 입 밖 에 낼 수 있었다. 사랑에는 일정한 궤도도, 구조화된 절차도, 명백한 규정도 없 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필요 없다는 것을 마침내 이해했다. 외 부로 드러나는 물리적 표현이 어떤 것이든, 내부에서 부딪히는 정 신적 갈등이 어떤 것이든, 스스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 마음 자체가 사랑이 된다. 어째서 좋아하게 된 건지 자신에게 물 을 필요도 없다. 좋아하는 이유 따위는 좋아하게 된 순간 잊는다. 고백은 마치 마법과 같아서 마음이 언어로 표현되는 순간 센도 는 자유롭게 해방되어 가장 높은 곳까지 날았다. 뜨거운 자각과 넘치는 행복이 시간 위로 각인을 새긴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다음 날은 마치 새로운 시작 같았다. 사쿠라기가 둔하게 울리는 하체의 통증을 느끼며 깨어났을 때, 센도는 사쿠라기의 머리를 감싼 채 옆에서 조용히 자고 있었다. 사쿠라기는 가만히 센도의 얼굴 윤곽을 쓰다듬었다. 누군가가 자 신을 이토록 절실하게 원하고 필요로 해 준다는 것이 이렇게나 행 복한 일이라는 걸 사쿠라기는 처음 알았다. 날 때부터 한없이 일그러져 있었던 세상은 더 없는 통증으로 사 쿠라기의 몸과 영혼을 짓눌러왔다. 더구나 자신이 처음으로 사랑 했던 본능적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생모에게 어떤 취급을 당했는가 생각해보면 먼저 흘려보내는 사랑이란 사쿠라기에게 있 어서는 정신적 치명상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절규하듯이 들 이부었던 애정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의 아픔을 사쿠라기는 태 어나면서부터 배웠다. 마디마디가 끊어지는 것만 같았던 그 고통 을 잘라내 준 것은 사쿠라기의 사랑이 아니라 사쿠라기를 향한 사 랑이었다. 필연적으로 조금 더 사랑 받고 싶었고 조금 더 많은 사 람을 원했다. 한 때는 병적일 정도로 누군가의 체온이 없으면 잠 들 수 없었다. 쓰다듬어주고 품어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발작이 계속 될 무렵에는 마치 사쿠라기를 다시 자궁에 넣으려 는 듯 거친 기세로 짓눌러오던 히토미의 무게와 얼굴을 뒤덮는 새 하얀 가슴이 떠올라 질식해 죽을 것만 같을 때도 있었다. 억눌린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몸을 뒤틀 때마다 자신이 두려운 과거와 직 면할 수 있도록 옆에서 붙들어준 것은 후지마와 루카와였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이 그 애정을, 모든 상처를 치유하는 힘을 지닌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을 정도로까지 자란 것이다.
335 센도. 손을 센도의 하체로 뻗었다. 손가락에 얽히어 오는 체모를 어루 만지자 갈라진 신음과 함께 센도가 눈을 떴다. 사쿠라기? 하자, 센도. 웃으면서 몸을 겹쳤다. 바닥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게 패 여 있다고 생각했던 센도의 눈동자가 사쿠라기만을 바라보고 있 다. 마치 손을 뻗으면 퍼 올릴 수 있을 정도로 야트막한 곳에 스스 로도 제어할 수 없는 정열을 가득 채우고, 불꽃처럼 일렁이며 시 시각각 변하는 다채로운 빛을 사쿠라기에게만 바치고 있다. 눈앞 에 있는 이 남자가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자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참을 수 없는 욕망의 물결이 달렸다. 증기처럼 피어오르는 열을 견디지 못하고 센도의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사랑을 하고, 또 하고, 그 다음에 네 심장을 찾으러 가자. 위에서 느껴지는 남자의 무게와 나비가 나풀대는 것 같은 은근 한 유혹에 센도의 세포도 들끓어 오른다. 힘차게 사쿠라기의 머리 칼을 감아쥐고 입술을 부딪쳤다. 지난 밤 몇 번이고 애무했던 등 위로 팔을 올리고 땀에 젖은 피부 위를 스르륵 손가락으로 미끄러 져간다. 단단한 척추부분을 하나하나 더듬듯 지나 희미하게 떨리 고 있는 둔부에까지 손이 닿자 사쿠라기의 몸이 일순 긴장했다. 센도는 작게 웃으며 사쿠라기의 목덜미를 핥았다. 자신의 숨소리 가 거칠어지는 것을 느끼며, 지금까지 담백하다는 말조차도 과분 할 만큼 밋밋하게 살아왔던 센도는 자신의 어디에 이런 탐욕이 숨 어있었나 자조했다. 하지만 가지고 싶은 것이다. 센도의 애무에 몸을 비틀며 음란하게 흐트러지는 이 남자를 구속하고 싶다. 전부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를 깨물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씹어 먹고 싶다. 닿을 수 있는 모 든 부분을 겹치고 살을 부비고 싶다. 뒤로 고개를 젖힌 탓에 더욱 도드라진 결후에 이를 대며, 살짝 사쿠라기의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아직 밤의 여운이 가시 지 않은 내부가 촉촉하게 센도의 손가락을 맞아들인다. 안에서 느 껴지는 감각에 사쿠라기가 저도 모르게 허리를 밀자, 자연스럽게 서로의 것이 마찰되었다. 딱딱하게 튀어 올라 부딪히는 감촉에 사 쿠라기가 신음하는 것을 들으며 센도는 손가락의 개수를 늘렸다. 매만지는 속도를 빨리 하면서 사쿠라기의 귓불을 삼키자 센도를 쥐 고 있는 손에 힘을 가하는 것으로 사쿠라기가 답해왔다. 사쿠라기. 욕망으로 지독하게 쉬어있는 목소리가 청각을 가른다. 센도. 달콤한 열을 품은 떨리는 한숨이 화답해온다. 이어진 마음만큼이나 끈적끈적하게 사쿠라기와 연결되고 싶다. 센도는 재촉하듯 사쿠라기의 허리를 잡아 세웠다. 눈가가 붉어져 가쁜 숨을 쉬고 있는 사쿠라기가 센도와 시선을 마주하더니 그것만 으로도 갈 수 있을 정도로 오싹하고 매혹적인 웃음을 짓는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이미 단단하게 굳어 있는 센도의 것에 입 을 살짝 맞추고 그 위에 무릎을 꿇듯 앉았다. 열에 녹은 젤리처럼 온통 젖은 진득한 사쿠라기의 내부가 센도를 감싸기 시작한다. 밀 어내는 것처럼 때로는 깊숙이 흡수하는 것처럼, 느릿하게 율동하 듯 센도의 페니스에 엉킨 살덩이가 움직였다. 전기가 찌릿, 척수 를 타고 번개처럼 올라온다. 자극을 참아내지 못하고 신음을 토하 며 센도가 허리를 흔들었다. 함께 연결된 사쿠라기의 몸도 굽이치
337 며 땀을 흘린다. 손가락으로 사쿠라기의 가슴에 둥근 원을 그렸 다. 조금씩 폭을 접히며 쓸 듯이 움직여 이내 한 점에 다가가자, 살짝, 도드라져 있는 가슴의 돌기를 손가락으로 퉁겼다. 그 서슬 에 등을 뒤로 초승달처럼 젖힌 사쿠라기는, 마침내 센도를 끝까지 삼켰다. 괴로운 듯 미간을 찌푸리는 사쿠라기가 안타까워 센도는 사쿠라기를 밀어 올리며 무릎을 세우고, 상체를 일으켜 사쿠라기 를 거세게 부둥켜안았다. 아래로부터 전해지는 갑작스런 충격에 사쿠라기가 작게 비명을 질렀지만, 센도는 멈추지 않고 사쿠라기 의 허리를 움켜쥔 채 그를 반대로 시트에 밀어붙였다. 순식간에 지지대를 잃은 사쿠라기의 다리가 허공에 뜨고 크게 벌어진 사이로 센도의 몸이 가라앉았다. 너, 너무 거칠어. 숨을 몰아쉬며 사쿠라기가 불평했지만, 센도는 무구한 웃음만을 돌려주고 허리를 크게 돌렸다. 일순 빠져나갔다 다시 거세게 짓쳐 들어오는 느낌에 사쿠라기가 어쩔 수도 없이 교성을 질렀다. 끈끈 하게 달라붙은 사쿠라기의 내부가, 센도를 따라 달려 나갔다 다시 안쪽으로 끌려 들어온다. 앗, 아아 센도!! 움직임에 더욱 힘을 넣으며 센도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쿠 라기의 입술을 막았다. 직접적으로 쾌감 신경을 자극해오는 접합 으로부터의 자극보다도, 표피가 얇게 찢길 정도로 거세게 부딪치 고 있는 입술보다도, 금속을 긁는 것처럼 소름 끼치는 감각으로 신경을 할퀴어 오는 사쿠라기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좋았다. 몇 번이고 사쿠라기를 올려붙이고 잡아당기며, 센도는 빛이 무지 개 색으로 격렬하게 파열하는 정점까지 내달려갔다.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닿아 있는 모든 부분이 안타깝고 이대로는 무언가가 부족한 것 만 같아 견딜 수 없다. 반면 마주 댄 부분으로부터 발생하는, 태 양을 직접 손으로 움켜잡기라도 한 듯 뜨거운 열이 지나치게 과한 것 같아 두렵기도 하다. 시야가 달아오르고 어질어질한 머릿속에 서 자신의 아래서 헐떡이고 있는 사쿠라기의 신음소리만이 몇 배로 증폭되어 울렸다. 한계까지 솟구치는 욕망을 참을 수가 없어서 사 쿠라기의 가슴 근처를 힘껏 깨물었다. 씁쓸한 철의 맛이 혀끝에서 느껴지고, 동시에 사쿠라기는 비명을 지르며 센도의 어깨에 손톱 을 박았다. 터졌다, 고 생각한 순간 사쿠라기도 몸을 힘껏 굳히며 도달했 다. 저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내쉬고 천천히 사쿠라기에게서 몸 을 떼자, 이어져 있던 부분에서 주르륵 느껴지는 질펀한 액체의 감각이 센도를 일종의 마취상태에서 현실로 밀어냈다. 아직 무딘 감각으로 멍하니 사쿠라기를 바라보니 사쿠라기가 미간을 찌푸린 채 소리 없이 웃는다. 충혈 된 눈매와 젖어서 부풀어 오른 입술 끝에 고드름처럼 매달 린 그 웃음은 마치 공작의 깃털 같았고 파란 하늘에 유일하게 떠 있는 흰 구름 같았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센도는 황급 히 고개를 숙였다. 사쿠라기의 탄탄한 손가락이 머리칼을 매만져 온다. 그대로 사쿠라기의 복부에 얼굴을 묻고 사쿠라기의 흔적을 핥았다. 흙 위에 떨어진 모란 꽃잎에서 풍겨오는 듯 독특한 풋내 에 센도 자신의 체향이 섞여있다. 그것은 기름 위에 물감을 떨어 뜨린 마블링처럼 서로 결코 섞이지 않은 채 윤( 淪 )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경계를 찾을 수 없게끔 하나로 뒤섞여 새로운 방
339 향( 芳 香 )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것이 하나가 된 사쿠라기와 센 도의 향인 것이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몰라서 센도는 입가 에 사쿠라기의 잔해를 묻힌 채로 사쿠라기의 얼굴에 한 여름의 장 대비처럼 무겁고 쉴 틈 없는 입맞춤을 퍼부었다. 몇 번이고 간절 하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려 애쓴다. 이만큼 사랑해, 이렇게 원해, 이토록 필요해. 몸짓으로 표현되는 센도의 마음이 가 닿았는지, 사쿠라기도 센 도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네가 좋아, 센도. 마주 대는 살만큼이나 마음에도 문질러진 손자국이 남는다. 여기야? 눌러 쓴 야구모자 밑으로 비죽 흐트러진 붉은 머리칼이 땀에 젖 어 목덜미에 달라붙어있다. 피부를 반짝이게 만들며 흘러내리는 저 땀을 혀로 매만진 뒤 핥아버리고 싶다. 하지만 아무리 통행이 적은 시간대라 해도 지하철 역사에서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어서, 센도는 손가락 끝으로 사쿠라기에게서 스며 나온 그 액체를 정성스 레 문지르는 것으로 대신했다. 뭐하는 거야! 간지러운 듯 목을 움츠리고 추궁해오는 사쿠라기의 목소리는 조 금 날카로웠지만 그래도 이목을 끌 정도로 크진 않았다. 대신, 모 자의 챙이 만드는 그늘 아래의 얼굴의 반을 가릴 정도로 커다란 선 글라스 밑으로 사쿠라기는 찌릿 센도를 노려보았다. 센도는 갈색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의 유리를 지나 투과되어 오는 그 매서운 눈길을 눈치 채지 못한 척 고개를 돌리며 손가락으로 작은 아파트처럼 줄지어있는 코인로 커를 가리켰다. 저기 끝 쪽에서 세 번째 줄, 위에서 두 번째 칸. 틀림없어. 사쿠라기는 흘겨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지만, 센도가 아랑곳 않 고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한 곳을 응시하고 있자 이내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뭘 망설이고 있어? 빨리 가서 찾아 와. 으음. 센도는 무언가 난처한 표정으로 좀처럼 발걸음을 떼지 않은 채 미적거린다. 서로 껴안은 지 이제 사흘 남짓, 모처럼 다음날 둘 다 스케줄이 없는지라 한 밤 느지막한 시간을 이용해 센도의 버려 진 심장을 찾으러 왔다. 그런데 출발할 때만 해도 어딘지 들떠보 이던 센도는 막상 그가 심장을 가두었던 코인로커가 있다는 곳에 도착하자 눈에 뜨일 정도로 풀이 죽어 있었다. 동전 없어? 묘하게 달관한 태도로 사쿠라기가 묻자, 센도는 바닥을 내려다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너무 오래 돼서, 이제 저기에 없을 것 같아. 보관기일이 지나 서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가 혹시 버려지기라도 했으면. 사쿠라기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센도의 심장 찾기는 이를테면 하나의 의식이다. 사쿠라기가 고 통스러웠던 시간으로 돌아가 자신의 끔찍스러운 과거를 하나하나 떠올려 극복해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처럼, 센도도 한 때 팔았 던 심장을 다시 스스로의 손으로 안아올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
341 랑할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에 아예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도 묻어버렸던 순간의 센도의 심정을 사쿠라기는 모른다. 하지만 사 막의 모래처럼 뜨겁고 버석하게 사쿠라기에게 자신의 공포와 불안 까지 밀어붙이며 모든 것을 내밀어왔던 센도라면 사쿠라기도 또렷 하게 알고 있다. 바들바들 떨면서 차마 시선조차 마주하지 못하고 통증을 호소하듯이 고백해왔던 센도의 사랑해 라는 말은, 날카로 운 바늘이 되어 사쿠라기에게 박혀들었다. 평생을 살고 죽음 이후 의 날들까지 모두 바쳐도 틀림없이 자신이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것 이라는 걸 사쿠라기는 선선히 인정했다. 순수와 각성을 무기로 찔 러 들어온 그 바늘 끝에 단단하게 매어진 실의 한쪽은 눈앞에 서 있는 이 남자의 손에 동여져 있는 것이다. 사랑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사랑하는 사람을 얻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매듭지을 수 없다. 사쿠라기는 센도가 꼿꼿한 시선으로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이 사랑에 대한 불안과 초조는 언제까지고 저 나약 하고 결벽증인 남자를 괴롭혀댈 것이다. 서로 안고 있는 순간에는 안식을 얻어도, 떨어지는 그 순간부터 자신의 심장을 의심하게 된 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감정의 본질과 원인 은 달라도, 사쿠라기에게도 세상이 무서워 견딜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어디에도 마음을 둘 수 없어서 한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 려갔던 경험이 있다. 그럴 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 어찌되었 든 믿는 것이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살아가야한다는 의지 를, 혼자가 아니라는 희망을, 가슴에 진리로 새기고 믿는다. 그러 기 위해서는 도망쳐왔던 그 시점으로 돌아가서 새롭게 마음의 타래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를 엮는 수밖에 없다. 틀림없이 있어. 그러니까 어서 가. 사쿠라기는 단호한 어조로 망설이고 있는 센도의 등을 밀었다. 센도는 처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무언가를 애원하듯 사쿠라 기를 바라보았으나, 사쿠라기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 외에 아 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센도는 어쩔 수가 없어 어색한 웃음 을 한 번 짓더니 겁먹은 아이 같은 표정으로 코인로커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돌아서고 싶은 듯 멈추어 섰지만, 뒷걸음질 치지 않고 시간을 들여 조금씩 확실히 앞으로 나아간다. 마침내 차가운 철조의 조형물 앞에 다다르자, 센도는 심호흡을 했다. 자신의 등 뒤로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시간만큼이나 길고 어 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을 것 같다. 몇 번을 망설이다 간신히 손을 내밀었다. 금욕적으로 보이는 기다란 손가락이 섬뜩한 냉기 에 닿는다. 고개를 돌려 사쿠라기를 바라보고 싶은 마음을 센도는 간신히 참아냈다. 드디어 사랑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몸속에 아무리 퍼 내어도 마르지 않을 정열과 욕정의 우물이 숨어있음을 알았다. 하 지만 순간순간 불안하다. 이것이 사실일까. 사실이기 이전에 진 실일까. 시간과 함께 사라지는 사소한 삶의 심술은 아닐까. 증명하는 방법은 심장을 되찾는 길밖에 없다. 붉게 맥동하는 핏덩이를 찾아서 사쿠라기에게 바치겠다고, 좁은 곳에 가득 들이부어진 물처럼 넘쳐흐르는 자신의 마음에 사랑이라 는 이름을 달던 순간 맹세했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은 스스로의 냉 기에 겁먹어 밤새 울어야했던 소년이 아니다. 사교적인 가면을 쓰 고 누구에게나 애매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인형처럼 살아왔던 청년
343 이 아니다. 동전을 꺼내들었다. 틈새로 밀어 넣는 순간, 찰칵 하 고 자신의 몸속에서 빗장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결심한 듯 눈을 크게 뜨고, 센도는 로커의 문을 힘주어 당겼다. 순간, 좁디좁은 사각의 방 안에서 붉은 안개가 무리지어 튀어 오르는 환각이 보였 다. 숲이 무너지고 대지가 솟아오른다. 눈앞으로 태초의 지구 마 냥 거대한 소리로 뒤범벅이 되어 요란하고 화려하게도 뒤흔들리고 있는 색색의 환영들이 스쳐지나간다. 숨을 몰아쉴 정도의 뜨거운 통증과 함께 두터운 감정의 소용돌이가 센도의 가슴으로 밀려들었 다. 두근두근두근. 저도 모르게 움켜쥔 가슴에서 확실하게 고동소리가 들렸다. 희 미하게 웃음 지으며 바닥으로 추락할 때에 멀리서 방금 손에 넣은 심장보다도 더욱 색채가 진한 적색( 赤 色 )이 날아오는 것이 보였 다. 센도! 모자가 벗어질 정도의 속도로 달려와 자신을 부둥켜안는 연인을 힘주어 잡았다. 긴장한 탓에 땀이 흠뻑 밴 얼굴로 사쿠라기의 얼 굴을 마주했다. 찾은 것 같아. 소리가, 너를 향해 뛰는 심장 소리가 들려. 바보. 이제 네 거야. 태어나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오래도록 갇혀 있었던 장기는, 제 주인의 가슴을 거쳐 연인의 손 안으로 스며들어간 것이다. 네 거야.
Akira Sendoh X Hanamichi Sakuragi 되풀이하자 사쿠라기가 금세라도 울음을 와락 터뜨릴 것 같은 아이의 표정으로 힘껏 끌어안아왔다. 얼굴을 적시는 자신의 것인 지 사쿠라기의 것인지 모를 눈물을 느끼며 천천히 일어났다. 시선 의 끝에 텅 빈 코인로커가 보인다. 세게 열어젖힌 탓에 문은 아직 도 약간 흔들리며 미세한 금속음을 발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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