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Autumn 통권 18호 유엔난민기구(UNHCR)는 난민을 보호하고 영구적인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UN 기구입니다. 지중해 난민 위기, 죽음의 바다에서 이 아이를 구해주세요!
* The Office of the United Nations High Commissioner for Refugees - 유엔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UNHCR) 난민보호 캠페인 월계관 형상은 UNHCR이 유엔 총회로부터 임무를 부여받은 UN 기구임을 2015 세계 인도주의의 날 캠페인 A laurel wreath symbolizes UNHCR is mandated by the United Nations General Assembly 사람 형상은 난민을 비롯한 UNHCR의 모든 보호대상자를 The person symbolizes persons of concern to UNHCR 두 손 형상은 UNHCR의 난민보호 노력과 의지를 상징합니다. Sheltering hands symbolizes UNHCR s commitment and efforts to protect refugees and persons of concern. 목차 03 난민보호 캠페인 2015 세계 인도주의의 날 캠페인 04 세계 속의 유엔난민기구 시리아 난민 도아의 이야기 난민을 향한 인류애 Holding Humanity 지중해 난민 위기 08 With You가 만난 사람 분쟁지역 전문가 김영미 프로듀서 10 난민배움터 이들도 난민이었습니다: 나디아 코마네치 (전 루마니아 체조선수) 놓을 수가 없습니다. 12 한국대표부 소식 2015 토크 콘서트: 난민, 우리의 이웃 하나의 인류, 하나의 마음으로 14 고맙습니다 소중한 후원이 가져온 기적: 캠프에서 캠퍼스로, 남수단 난민 소녀 에스더의 이야기 함께 변화를 만들어갑니다. 16 이들의 손을, 이들의 꿈을 후원소식 & 후원감사 함께 배우는 난민 이야기 표지 이야기 아빠, 너무 무서웠어요 울먹이며 땅 위로 발을 내딛는 시리아 난민 아이의 눈에서 그동안 느꼈을 공포와 두려움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고무보트를 타고 터키를 떠나 그리스 레스보스(Lesbos) 섬에 도착한 이 아이는 2015년 지중해를 거쳐 간 41만 명 중 한 명입니다. UNHCR/Andrew McConnell 전 세계 분쟁과 재난 현장에서 순직하거나 여전히 위험을 무릅쓰며 * 유엔난민기구 소식지 With You 는 수신 동의를 하신 후원자분들께 연 4회(3월, 6월, 9월, 12월) 우편으로 발송됩니다. 임무를 다하고 있는 모든 인도주의 활동가들의 희생과 노고를 기리기 위해, * 주소가 부정확한 경우 우편물이 반송되니, 주소 변경 시 한국대표부 홈페이지(www.unhcr.or.kr) 나의 후원 에서 후원상태와 주소를 확인해주세요! 유엔은 8월 19일을 세계 인도주의의 날 로 지정해 2008년부터 기념하고 있습니다. 발행인 전 세계 125여 개국에서 난민보호를 위해 일하고 있는 더크 헤베커 발행처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 발행일 2015년 9월 제공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 대외협력(PSFR)팀 디자인 (주)인디엔피 유엔난민기구 직원들의 모습을 상단 QR 코드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03
세계 속의 유엔난민기구 - 시리아 난민 도아의 이야기 이탈리아 해경에 의해 구조되기 직전, 수백 명의 난민과 이주민들이 꽉 들어차 있는 어선의 모습 The Italian Coastguard / Massimo Sestini * 유엔난민기구는 구조된 난민들에게 식수, 식량 등 필요한 물품과 응급 서비스를 제공하고, 관련국이 국제법 기준에 맞게 구조 작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도록 바다 위의 영웅이 된 19세 여성, 해경과 수색 대원들을 대상으로 난민법, 국제 해양법, 인권법 등을 교육하고 있습니다. 시리아 난민 도아의 이야기 도아의 이야기는 2015년 죽음의 바다 지중해를 건넌 도아(Doaa)는 19세 시리아 난민입니다. 그녀는 고국 41만 명의 이야기, 그리고 그 여정에서 목숨을 잃은 의 내전을 피해 가족과 주변국 이집트에서 기약없는 2,900명의 이야기입니다. 그 누구도 분쟁과 박해를 타향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매일 두려움과 위험에 피해 안전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어서는 맞서 보내야 했지만, 이런 모든 어려움 속에도 도아 안 됩니다. 이들이 애초에 본국에서 안전하게 살 수 는 다른 난민인 바심(Bassem)과 사랑에 빠졌고 있었다면, 밀항업자의 손에 운명을 맡긴 채 위험한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바심은 유럽으로 건너가 여정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혼도 하고 새 삶을 꾸리자고 했습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이들은 부모의 허락을 맡고 낡은 어선 지금 이 순간에도 도아와 같은 사람들이 한 척에 운명을 걸었습니다. 수영도 할 줄 모르는 바다를 표류하고 있습니다. 도아는 그렇게 또다시 불안한 마음으로 피난길에 이들이 차가운 바닷속에서 소중한 삶을 올랐습니다. 마감하지 않도록 지켜주세요. 우리의 작은 도움으로 바심은 도아와 자신이 낡은 어선에 탑승하는 대가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어선은 전복되었고 가라앉기 시간이 흘러 낮이 밤이 되고 또다시 낮이 되었 도아의 눈앞 에서 가라 앉 았습니다. 같은 날, 또 물 위에 떠 있은 지 나흘째 되던 날, 도아의 눈에 배 로, 그동안 모아온 미화 5,000달러의 거금을 밀항 시작했습니다. 갑판 아래에는 300명의 사람이 갇혀 습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희망을 잃기 시작했습 다른 여성이 도아 쪽으로 힘겹게 헤엄쳐 왔습니다. 한 척이 들어왔습니다. 두 시간 동안 목이 터져라 누군가의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업자에게 지불했습니다. 어선은 사람들로 꽉 들어차 있었습니다. 물은 점점 차올랐고 사람들은 비명을 니다. 도아는 사람들이 사라져가는 모습을 그저 그녀는 18개월 된 여자아이, 마사(Masa)를 건네며 구 해달라고 소리를 지른 끝 에, 사 람들 은 어둠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있어서 도아는 배 한구석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어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지켜봐 야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단념한 듯한 한 말했습니다. 이 아이를 구해주세요. 저는 살아남지 속에서 그녀의 위치를 찾아내었고 어린아이 두 끈을 놓지 않은, 뜨거운 심장을 가진 팔레스타인 남성이 다가와, 9개월 된 손녀 말렉 못할 것 같아요. 명을 껴안고 물 위에 떠 있는 이 여성을 발견하고 도아와 같은 사람들을 말입니다. 했습니다. 선상에서 나흘째 되던 날, 다른 한 척의 배가 어선 근처로 다가 왔습니다. 배 위에 있던 도아는 한 아이가 프로펠러에 끼어 죽는 모습을 (Malek)을 도아 에게 건네며 말 했습니다. 이 밀항업자들은 낡고 녹슨 배로 갈아타라고 위협했고,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심이 구해온 아기를 제발 받아주세요. 이제 너무 힘들어서 더는 수영도 하지 못하는 이 열아홉 살 여성은 자신의 치료를 받던 중 목숨을 잃었지만, 마사는 끝까지 겁에 질린 사람들은 배에서 내리기를 거부했습니다. 구명튜브 덕분에 도아는 간신히 물에 떠 있을 수 버틸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 남성은 바닷속으로 약혼자를 떠나보낸 슬픔을 달래기도 전에, 어린 두 견뎌내어 살 아 남 았습니다. 위험하고 절망적인 밀항업자 들은 화가 나서 어선에 구멍을 내었고, 있었지만, 곳곳에 시신들이 떠다니고 있었고, 이제 자취를 감췄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 아, 도아의 생명을 책임지는 역할을 떠안게 되었습니다. 아이 순 간에도 어린 생명을 구해낸 도아의 이야기는 고 기 밥 이 나 되 라. 며 코웃 음 을 치면 서 떠 나 100여 명으로 줄어든 생존자들은 몇 군데로 모여 약혼자 바심도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내 사랑, 정말 들은 불안해했고, 먹을 것, 마실 것을 찾아 울어 그리스 미디어의 조명을 받았고 그녀는 그리스의 * 위 이야기의 원문은 아래 유엔난민기구 사이트 갔습니다. 구조되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미안해. 나를 용서해줘. 바심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댔습니다. 도아는 계속 말을 걸면서 아이들을 안심 가장 권위 있는 기관인 아테네 아카데미로부터 (http://tracks.unhcr.org/2015/06/the-death- 시켰습니다. 그렇게 하루, 또 하루가 지나갔습니다. 무공 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boats-a-survivors-tale/)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04 놀라 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9개월 된 말렉은 05
세계 속의 유엔난민구기구 - 시리아 난민 이야기 세계 속의 유엔난민기구 - 지중해 난민 위기 오스트리아 지중해 난민 위기, 해상 난민 주요 이동 경로 그리스 해상 유입 인구 월별 현황 헝가리 (2015년 9월 초 기준) 크로아티아 바닷속에서 차가운 죽음을 맞이한 모든 난민에게 날개를 41만 명 2014년 2015년 (단위: 명) 루마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2015년 현재까지 지중해를 건너 유럽에 도착한 사람 수 몬테네그로 2,900 명 알바니아 실종된 사람 수 2월 5월 3,452 31,037 6월 421 50,242 7월 7,111 80,662 2차 이동 통로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이동 경로 3월 4월 1,892 18,678 터키 주 이동 통로 일 평균 발칸지역 유입 인구수 1,171 2,982 1,391 13,556 그리스 2,000-3,000 명 1월 1,604 7,775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2015년 지중해 상에서 사망 혹은 코소보 1,033 1,724 8월 각국에서는 비호권을 보장하는 것을 포함하여 국제법 및 EU법에 상응하는 국경 관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안토니오 구테레스 유엔난민고등판무관 - 지원 현황 지중해 난민 위기에 맞서, 유엔난민기구는 여러분의 도움으로 신속한 난민 구조 및 보호, 지원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긴급구호 키트(담요, 수건, 물, 옷, 신발, 고열량 에너지바) 지원 임시 거처 제공 보호자 없는 난민 아동 보호 및 지원 신속한 난민 등록을 위한 등록센터 개소 및 인력 파견 의료 지원 팽창식 고무보트를 타고 터키에서 그리스 레스보스 섬으로 들어오고 있는 시리아 난민들의 모습 UNHCR/Andrew McConnell 마치 침대에 얼굴을 묻고 잠을 청하는 듯한 모습 이 넘는 1,000만 명 이상이 자국 내에서 혹은 주변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헝가리와 같은 국가 들의 으로 짧은 생을 마감한 아일란 쿠르디. 이 작은 난민 국에서 피난 중입니다. 터키, 레바논, 요르단 등 시리 난민 수용 역량과 대응 시스템에 큰 영향을 미쳤 아 이의 사진은 전 세계 수많은 사 람의 가 슴 을 아 주변국에 머물던 난민들조차 더는 기댈 곳이 습니다. 이러한 사태에 맞서 유엔난민기구는 2015년 울렸고, 위험한 바닷길로 피난을 떠날 수밖에 없었 없어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위험한 바닷길을 통해 6월 이후 그리스,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헝가리 4개 던 난민들의 이야기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습니다. 유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국을 긴급구호 2단계 지역으로 지정하고, 관련국 모금 현황 (2015년 9월 기준) 유럽을 비롯한 아프리카, 중동 지역 관련국 지원을 목표로 내년 연말까지 필요한 금액 지난 몇 개월간 지중해를 건너 발칸반도에 들어 오랜 피난 여정으로 취약해진 난민들을 보호하고 과 이주민의 수는 41만 명이 넘습니다. 이들 중 80% 온 난민과 이주민의 수가 매일 평균 2,0 0 0 - 지원하는 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또한, 최근 난민 는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에리트레아, 소말리아 등 3,000명에 이르렀고, 이들은 충분한 임시거처, 문제에 대한 전 세계적 관심과 이목이 집중되면서 난민 발생국에서 온 사람들이며, 특히, 그리스에 위생 시설, 음 식과 물 없이 살 아가 면 서 최 종 유럽 국가 들이 난민을 추가로 받 아 들이겠다는 도착한 20만 명 이상의 사람 중 90%는 시리아 목적지인 서유럽 혹은 북유럽 국가를 향해 버스, 정책을 발표하자, 유엔난민기구 는 관 련국 들 이 난민입니다. 2011년부터 시작된 내전과 이슬람 기차 를 타고 혹 은 걸어서 험난 한 여정을 이어 적합한 비호와 보호를 제공할 수 있도록 전문적 국가(IS)의 위협으로, 현재 시리아 전체 인구의 절반 갔습니다. 이는 난민들의 이동 경로에 있는 그리스, 조언과 지원, 옹호 활동도 펼치고 있습니다. 2,780만 추가 미화 3,050만 달러 중, 270만 달러가 모금되어 91%가 부족한 상태 달러 필요금액 91% 모금액 우리와 다르지 않은 부모, 아이,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또 다른 아일란이 발생하지 않도록, 여러분의 관심과 참여가 지금 이 순간 절실합니다. 정부 및 협력 기관, 단체, 지역 커뮤니티와 함께 2015년 올 한 해에만, 지중해를 건너 이동한 난민 $$$ 10만 원이면, 30만 원이면, 난민 27명에게 담요를 50만 원이면, 난민 16명에게 긴급구호 키트 100만 원이면, 난민 두 가족에게 침낭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제공할 수 있습니다. (물, 옷, 수건 등)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제공할 수 있습니다. 난민 두 가족에게 텐트를 위의 금액은 후원금 사용 예시이며, 소식지에 동봉한 약정서를 작성해 우편으로 보내주시거나 사진을 촬영해 문자(1666-5147)로 보내주시면 기존 후원자를 비롯한 여러분 모두 긴급구호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좌)그리스에 도착한 난민과 이주민들이 그리스-마케도니아 국경 앞에 줄지어 있는 모습 UNHCR/Ivor Prickett (중)한 시리아 남성이 아이를 꼭 안고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떠나 걸어서 오스트리아 빈으로 향하고 (좌)탈수된 아기를 레스보스 섬 모이라(Moira) 난민촌으로 데려가고 있는 유엔난민기구 직원의 모습 UNHCR/Andrew McConnell (중)그리스 치오스(Chios) 섬 항구에 도착한 시리아 여성이 아이에게 물을 먹이 있는 모습 UNHCR/Mark Henley (우)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 국경에 도착한 시리아 난민들이 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버스 주위를 둘러싼 모습 UNHCR/Mark Henley 는 모습 UNHCR/Aikaterini Kitidi (중)요르단 암만 공항에서 그리스발 항공기에 긴급구호 물품을 가득 싣고 있는 UPS와 유엔난민기구 직원의 모습 UNHCR (우)치오스 섬에 도착한 시리아인들이 유엔난민기구 직원으로부터 법적, 절차적 정보를 듣고 있는 모습 UNHCR/Aikaterini Kitidi 06 07
With You가 만난 사람 - 분쟁지역 전문가 김영미 프로듀서 (좌)터키에서 에게해를 건너 그리스 레스보스 섬에 도착한 시리아인들의 모습 UNHCR/Ivor Prickett (우)터키에서 그리스 레스보스 섬에 도착한 한 시리아 여성이 세 아이를 안고 안도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 UNHCR/Ivor Prickett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 글 _ 김영미 프로듀서 (분쟁지역 전문가) 매일 지중해와 에게해에 쏟아지는 난민들에게 최소한 인간의 목숨은 부지할 수 있는 구명조끼는 있어야 한다. 바로 여러분들이 그 일을 할 수 있다. 이룬다. 이들이 찾아가는 사람은 난민 브로커. 이탈리아로 가는 배를 알선해주는 업자이다. 1인당 뱃삯이 200불에서 1,000불까지 다양하다. 그래도 난민들이 이렇게 위험한 배에 몸을 의지하며 코바니를 보고 필자가 느낀 것은 아 저 마을에 그리스까지 데려다주지 못했다. 보트가 파도에 다시 바다 저 끝에서 달려드는 파도를 보았다. 왜 이렇게 가격 차가 크냐고 물었더니 배의 상태에 유럽으로 가는 이유는 자신들의 나라에서는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겠구나. 라는 것이다. 도시 뒤집혀 아일란의 엄마와 형까지 모두 사망하고 만 모하메드는 발버둥 치다가 마침 어디서 떠내려온 따라 가격이 다르게 매겨진다는 것이다. 크고 도저히 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시리아의 경우 전체가 폭격에 무너져 있었다. 단 한 채도 멀쩡한 것이다. 듯한 고무 부표를 보았다. 그걸 부둥켜안고 파도를 괜찮은 배는 뱃삯이 비싸지만, 폐선에 가까운 배는 5년 가까이 내전이 계속되고 있고 소말리아나 건물이 없었고 마치 해골을 보는 느낌이었다. 타며 육지로 밀려 나왔다. 그러나 그의 친구 2명은 리비아, 튀니지, 이탈리아, 그리스를 1년 전부터 싸다는 것이다. 지중해를 거쳐 리비아에서 이탈리아 에리트레아 같은 나라는 오랜 기근으로 식량이 아일란의 부모는 지옥 같은 그곳을 탈출해 아일란이 해변에 얼굴을 파묻고 죽어있는 사진은 흔적도 없이 바다가 삼켜버렸다. 모하메드는 돌아다니며 난민 취재를 하면서 나는 영화보다 더 까지 난민을 배로 태워 나르는 사업이 성행하자 바닥난 상황이다. 터키 난민촌으로 갔다. 하지만 언어도 다르고 전 세계를 울렸다. 국적과 인종을 초월하여 세상 온몸이 흠뻑 젖어 해변에 앉아 몇 시간을 멍청하게 영화 같은 그들의 사연을 듣는다. 그런 제각각의 사연을 가지고 유럽으로 몰려드는 난민의 숫자는 북아프리카 일대의 배란 배는 모두 집합해 있다는 것이 현지인들의 말이다. 문제는 배에 탈 수 있는 굶어 죽거나 전쟁 중 폭격이나 전투에 애꿎은 일자리도 없는 터키에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을 하염없이 기다리기는 쉽지 않다. 조국이 아빠, 엄마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하지만 매일 또 다른 아일란이 에게해를 건넌다. 15세 시리아 바다만 바라보았다. 어릴 때부터 한 동네에서 컸던 친구들을 찾아야 하는데 나는 어떻게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다. 이미 시리 아 정원을 훌쩍 넘겨 많게는 8배까지 난민들을 태우는 민간인들이 사망하고 있다. 그래서 목숨을 안정되리라는 희망은 사라지고 아일란 가족들은 소년인 모하메드가 친구 2명과 함께 아일란이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며 슬프게 울었다. 그는 난민만도 4백만이다. 그나마 시리아 난민들은 데 있다. 부지하려면 그들은 고향 땅을 떠나야 한다. 사실 유럽행을 결정했다. 가족들은 터키 남부에 있는 갔던 바로 그 경로를 통해 이동하기 위해 보드롬 친구의 시신조차 찾지 못한 채 그리스 경찰에게 다른 북아프리카 난민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다. 이들은 부족국가 사회에 살기 때문에 서구 사회에 보드롬(Bordrum)으로 갔다. 보드롬 해안에서 해안가를 찾았다. 그는 해변가 숲 속에 숨어 있다가 끌려가 강제 추방 서류에 서명하고 그리스를 언론의 주목을 받으니 유럽 국가에서 관심을 가지며 욕심 많은 난민 브로커들이 이렇게 정원을 초과해 있는 사람들보다 더 고향 땅에 대한 애착이 많다. 에게해를 건너 불과 20키로 밖에 안 떨어진 그리스 페이스북을 통해 고무보트 파는 업자와 비밀리에 떠나 마케도니아를 거쳐 현재는 헝가리에 있다. 난민지위를 쉽게 내준다는 것이다. 북아프리카나 난민을 태운다. 이런 배는 위험한 항해를 할 수밖에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수백 년 살아온 코스(Kos)섬으로 가면 유럽으로 들어갈 수 있기 만났다. 그는 일명 난민 브로커였다. 고 말했다. 구명조끼만 있었어도 우리 친구들은 살았을 소말리아, 에리트레아 같은 나라에서 온 난민들은 없다. 돈을 조금 더 내면 좀 더 안전한 배의 한가운데 마을을 등질 때 그들도 눈물을 흘리며 집을 나선다. 때문이다. 모하메드는 가장 파도가 잔잔하고 날씨가 좋은 날을 거예요. 라고 말하는 모하메드는 세상 사람들에게 난민지위조차 받기 힘들다. 탈 수 있지만, 뱃삯을 적게 내면 파도에 언제든 재산인 가축도 버리고 보따리 달랑 하나 들고 디데이로 잡았다. 그와 2명의 친구가 탄 고무보트는 모두 알려서 구명조끼라도 나눠주세요. 라고 휩쓸릴지도 모르는 배의 가장자리에 앉을 수밖에 아이들 손을 잡고 단지 안전하게 살 나라 를 찾아서 그들 가족이 보드롬에서 그리스로 가기 위해 탄 10인승이지만 탐욕스런 난민 브로커는 이미 20명을 필자에게 부탁했다. 이들 난민이 유럽으로 피난 올 때 가장 많이 이용 없다. 구명조끼나 그 어떤 안전장치도 없이 맨 떠난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무보트는 공짜가 아니었다. 보드롬에는 이미 넘게 태웠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보드롬 해안가를 하던 바닷길은 리비아 트리폴리(Tripoli) 해안에서 몸으로 가슴을 떨어가며 항해를 하다가 배가 파도에 난민은 바로 그렇게 발생한다. 난민들을 고무보트와 각종 배에 태워주는 난민 출발한 이 보트는 섬에 거의 다 와서 문제가 생겼다. 매일 지중해와 에게해에 쏟아지는 난민들에게 이탈리아 남부의 람페두 사(Lampedusa) 섬 뒤집히기 십상이다. 브로커 들이 성행 중이다. 2,000유로를 내면 좀 더 최소한 인간의 목숨은 부지할 수 있는 구명조끼는 까지 이르는 경로였다. 거리가 불과 300여 킬로 세 살짜리 시리아 난민 아일란 쿠르디도 비슷한 안전한 쾌속정을 탈 수 있지만 아일란의 가족들은 모하메드는 섬이 보이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는데 있어야 한다. 이제 세계 어느 나라든, 누구든 나서서 밖에 안 되어 배 타고 하룻밤이면 도착할 수 있는 북아프리카나 중동의 사막에서 온 난민들은 보통 경우다. 아이가 잉태되던 그 순간에도 이미 시리아 그것의 반값에 해당하는 1,000유로를 냈다. 값이 갑자기 엄청나게 큰 파도가 보트를 덮쳤다. 바닷물이 이들에게 구명조끼를 주어야 한다. 바로 여러분들이 유럽으로 가는 최단 거리 코스이다. 그렇다 보니 수영을 할 줄 모른다. 파도에 휩쓸려 수장되는 는 전쟁터였다. 아기가 태어나서 산 3년은 포격과 싸면 그만큼 안전하지 못하다. 하지만 그들 거꾸로 달려드는 듯했다. 그리고 우리는 순식간에 그 일을 할 수 있다. 난민도 우리와 같은 생명을 가진 리비아 트리폴리 해안가는 북아프리카와 시리아, 숫자가 무사히 섬에 도착하는 숫자보다 많다고 살인만이 난무했다. 아일란의 고향 시리아 북부 도시 가족은 가진 돈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1,000 바다로 빠졌다. 고 말했다. 이들 모두 구명조끼를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이라크 등지에서 몰려온 난민들로 북새통을 난민들은 말한다. 코바니(Kobani)는 필자도 취재를 했다. 유로짜리 고무보트는 아일란의 가족들을 안전하게 입고 있지 않았다. 물속에서 버둥거리고 있다가 08 09 * 좋은 글을 통해 전 세계 난민 보호 활동에 힘을 보태주신 김영미 프로듀서님께 감사를 전합니다!
난민배움터 - 이들도 난민이었습니다: 나디아 코마네치 (Nardia Comaneci) 전설이 된 체조 요정, 나디아 코마네치 열정, 노력, 그리고 의지가 있으면, 불가능한 일도 이뤄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불가능을 이뤄낸 소녀 새 출발 영원한 금메달리스트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체조 경기장은 충격에 휩싸 떠도는 소문은 10대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가혹 나디아는 미국에서 힘든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가족을 떠나 보호해줄 사람 하나 현재 나디아는 남편과 함께 미국에서 체조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미래 체조 였습니다. 키 153cm의 14살 작은 소녀가 평행봉 사이를 했 습니다. 선수 생 활 이 더는 불가 능 해 보이던 중, 없이 살아남아야 했던 그녀는 다른 난민들처럼 자신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에게 꿈나무들을 위해 많은 기부를 하고 있습니다. 아디다스에서는 나디아의 10점 날아다니는 환상적인 연기를 펼쳤으나 점수판에 1.0이 나디아는 다시 카롤리 코치를 만나 더욱 혹독한 훈련 시달렸는데, 그녀의 명성이 오히려 그녀를 더 힘들게 하였습니다. 탈출에 도움을 만점 체조 영상을 가지고 불가능은 아무것도 아니다 는 광고를 제작하기도 나타난 것입니다. 이에 관중들이 항의하자 심판위원장 을 거듭해 1980년 다시 모스크바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 준 콘스탄틴 페니는 나디아를 이용해 돈을 벌 생각이었습니다. 나디아가 다른 하였으며, 나디아는 최고의 스포츠 스타들에게만 가입을 허가하는 올타임 은 점수는 1.0이 아닌 10.0이며, 원래 체조에서 만점은 2개, 은메달 1개를 따 는 저력을 보였습니다. 후에 지인들과 연락을 끊게 하였고, 여러 이벤트와 선정적인 행사에 참여하게끔 레전드 클럽에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최근 한국인 최초로 김연아 선수가 가입한 나올 수 없다 는 생각에 점수판은 9.99까지만 표기하게 나디아는 이 올림픽이 첫 올림픽보다 더 소중한 경험 했습니다. 게다가 언론은 페니가 유부남이라는 사실로 나디아를 질타했습니다. 이 클럽에는 수영선수 마이클 펠프스, 농구선수 야오밍, 육상선수 칼 루이스 등도 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다른 종목에서 이었다고 말합니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나디아는 2008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 체조 갈라쇼를 결국, 나디아는 페니를 떠나 캐나다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그곳에서 또 다른 10점 만점을 여섯 번이나 더 기록하면서 몬트리올 올 림픽 3 관 왕 에 오른 이 소녀의 이 름 은 나 디 아 올림픽 체조 선수였던 바트 코너(Bart Conner)를 만나 같이 스포츠 사업을 위험한 탈출 시작 하게 되었습니다. 사 실 둘의 인연은 나디아가 14살 때 올림픽 직전에 코마네치(Nardia Comaneci)로, 인간의 몸을 빌려 지상에 나타난 요정 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화려한 영웅의 뒷모습 총연출하고 진행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어려움을 이겨내고 다시 선수로서 재개하였지만, 정부 참가했던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시작되었고, 그 후 세계 대회 때마다 몇 번 만난 의 압박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카롤리 코치가 적 있던 둘은 긴 시간이 지나 재회하여 현재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전설의 체조 요정 나디아 코마네치. 그녀도 한때는 난민이었습니다. 정부와의 갈등으로 미국으로 도피해버리자, 정부는 나디아 또한 타 국으로 도피할 것을 우려해 감시와 올림픽 인터뷰에서 경기 후 실컷 먹고 친구들과 놀고 핍박의 수위를 더욱 높였습니다. 전화는 언제나 도청 싶다고 한 나 디아 의 말 에 서 어린 나 이부 터 힘든 당하고 편지도 모두 검열받았으며, 외출하면 항상 감시 훈련을 견뎌낸 대한민국 김연아 선수가 연상됩니다. 인력이 따라붙었습니다. 심지어 외국으로 나가는 것 하지만 나디아는 6살부터 시작된 벨라 카롤리(Bela 자체가 금지되었고, 은퇴하게 되었습니다. Karolyi) 코치의 혹독한 훈련 외에도 독재정권 또한 한국에도 난민이? 견뎌야 했습니다. 조국 루마니아의 니콜라스 차우 가족 을 떠날 생각에 주저하였지만 나디아는 결국, 셰스쿠(Nicolae Ceausescu)* 독재하에 나디아는 루 마니아 출 신 미국 시민권자 였던 콘스탄틴 페니 10대 소녀가 아닌 스 포 츠 영웅으 로서 선전도구로 (Constantine Penny)의 도움을 받아 올림픽 영웅이 사람들을 비호신청자 혹은 난민지위 신청자라고 부릅니다. 대한민국에서 비호신청을 하려면 사용되었습니다. 올림픽 영웅으로 호의호식할 것이라는 아닌 한 사람의 난민으로서, 여권도 없이 국경 수비대의 난민지위 신청서를 대한민국 출입국관리사무소 중 한 곳에 제출해야 합니다. 체류지역 출입국 대중의 믿음과는 달리 궁핍한 생활 속에서 정부의 총알을 피해 한겨울 얼어붙은 벌판을 건너 미국으로 관리사무소, 외국인 보호소에 있는 경우 외국인 보호소장에게 신청서를 제출해야 하며, 2013년 엄격한 통제와 감시, 핍박을 받아야 했습니다. 도망 치게 되었습니다. 때 는 1989년, 독재정권이 7월 난민법 시행에 따라 출입국항에서도 신청서를 제출하고 심사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최근 혁명으로 무너지기 겨우 20일 전이었습니다. 효과적인 정치 선전을 위해 정부는 나디아를 카롤리 나디아 코마네치처럼 분쟁, 폭력, 박해 등의 이유로 고국을 떠나 타국에서 난민지위를 신청한 * 니콜라스 국내 비호신청자 및 난민 숫자는 아래와 같습니다. (출처: 법무부, 2015년 7월 31일 기준) 차우셰스쿠(Nicolae Ceauses cu): 1965년부터 1989년까지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코 치로부터 떨어뜨려 수도 부 쿠레슈티로 보냈고, 처음엔 루마니아에 가족을 두고 떠나는 것을 상상 의 국가 원수(1974년부터는 대통령)를 지냈으며, 그로 인해 나디아는 선수생활이 불가능해 보일 만큼 조차 못했어요 많이 무섭고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감시, 친위조직 등을 이용해 공포정치를 일삼았다. 폭 식으 로 살이 쪘습니다. 게다가 차우셰스쿠와 그 있었기에 탈출을 결정하기까지 굉장한 용기가 필요 1989년 정권이 무너지자 도주를 시도하다 총살 아 들은 나디아를 성적 노리개로 삼았고, 언론에서 했어요. 되었다. 10 비호신청자: 난민지위 인정: 11, 명 명 인도적 체류: 심사 대기: 명, 명
한국대표부 소식 (좌, 중)행사에 참석한 난민 가족 출연진들의 모습 (우)(맨 앞줄 좌측부터) 김도훈 후원자, 정우성 친선대사, 더크 헤베커 한국 대표를 비롯해 행사에 참석한 관객들의 모습 2015 토크 콘서트, 난민, 우리의 이웃 (Refugees are Among Us) 한국은 우리에게 제2의 고향 지난 9월 3일, 씨네코드 선재에서 2015 토크 콘서트 난민, 더크 헤베커 한국 대표는 난민들은 평범한 사람들이며 우 이번 콘서트에서는 콩고민주공화국 출신의 욤비(Yiombi) 욤비 씨는 당시 코리아라고 하면 북한으로 생각하는 경우 물론 한국에서 난민으로 살면서 여러 가지 설움과 어려움 이번 토크 콘서트는 우리 가까이에 살고 있는 난민들이 처 우리의 이웃 이 열렸습니다. 방송인 박경림 씨의 사회로 1시 리의 이웃이다. 이들은 여러분의 친구가 되길 바라고 있다. 씨, 방글라데시 소수민족 줌머족 출신의 로넬(Ronel) 씨, 가 많아서 처음 한국에 도착했을 때 서울이 아닌 평양에 도 도 겪었지만, 이들 모두는 한국인들에게 많은 감동과 자극 한 현실을 알리고, 난민이 더 이상 연민의 대상이 아닌 우리 간 반여 동안 진행된 콘서트에는 더크 헤베커 유엔난민기구 라며 직접 한국말로 인사말을 전했고, 이어서 정우성 씨는 그리고 코트디부아르 출신의 숨(Sum) 씨 가족과 함께 그 착한 줄 알았다는 에피소드와 또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나이 을 받았다면서, 한국은 우리에게 제2의 고향 이라고 입 친구이자 가족,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로넬 씨의 말처럼 다 한국 대표, 친선 대사 배우 정우성 씨, 그리고 난민 출신 세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전시 상황이 발생했었다. 난민은 결 들이 각자 한국에 오게 된 사연과 난민으로서 한국에서 살 와 출신국, 한국에 온 이유 등 개인적인 정보를 묻는 사람 을 모았습니다. 특히, 욤비 씨의 세 자녀는 여느 한국 사춘 른 지역에 새로운 지식과 기술, 경험을 전해주는 사람들 임 가족이 자리했고 법무부 외교부 관계자와 시민들을 포함해 코 남이 아닌 우리의 이웃이며 난민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면서 겪어온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이들의 어려움 들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점, 서툰 언어 때문에 직장에서 실 기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빨리빨리 문화 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의미 있고 가슴 따뜻한 자리가 되 300여 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이면을 생각해야 한다. 고 소회를 전했습니다. 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수했던 경험 등을 들려주었습니다. 로넬 씨와 숨 씨도 사람 가 인상적이었다는 숨 씨는 수십 개 언어로 갈등이 끊이지 었습니다. 들의 인식 부족, 다른 언어와 문화 때문에 겪은 어려움을 않는 자국과 달리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는 한국은 축복받 나눴습니다. 은 나라라고 부러움을 내비치기도 했습니다. 이번 토크 콘서트에 참석한 전반적인 소감은 어떠셨나요? 숨 씨 >>> 한국 사람들로 가득 찬 관객석을 보고 놀랐고 매우 기뻤 습니다.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외국인, 특히 난민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로넬 씨 >>> 비록 시간과 콘텐츠가 제한적이었지만, 매우 의미있었 습니다. 또 각자 다른 삶의 길을 걸어온 출연진들이 눈에 띄었습니 다.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콘텐츠들이 더 많이 있었더라면 더 인 상적이었을 것 같습니다. 실라 마마두 숨 (Silla Mamadou Sum) 출신국: 코트디부아르 피난 이유: 2002년 무역일로 한국 거주 중 자국 내전 발발 로 위협을 느껴 난민 신청 난민 인정: 인도적 체류 허가 직업: 현 방송인 및 수산시장 노동자 욤비 씨 >>> 만족스러웠고,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이 함께 할 수 있다 토크 콘서트, 이들의 못다한 이야기 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또 토크 콘서트를 열면 어떨까 요? 행사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혹은 기억에 남는 순간은 무엇이었나요? 차크마 나니 로넬 (Chakma Nani Ronel) 출신국: 방글라데시 줌머족 피난 이유: 소수민족 출신으로 위협을 느껴 피난 난민 인정: 2000년 입국, 2004년 난민 인정, 2011년 귀화 직업: 현 김포시 외국인센터 이주민 공동체 담당 및 인권활동가 욤비 씨 >>> 많은 관객분이 저희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셨습니 다. 그들에게 결정권이 있다면, 많은 난민 문제들이 그날 저녁으로 해결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로넬 씨 >>> 욤비 씨의 자녀들과 같은 청소년 출연진들이 각자의 삶과 미래에 관해 이야기한 것이 인상적이었고 또 행사에서 필요 한 부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난민 자녀들에게 신경을 많이 욤비 토나 (Yiombi Thona) 출신국: 콩고민주공화국 피난 이유: 정보요원으로 정치적 이유로 피난 난민 인정: 2002년 입국, 2008년 난민 인정 직업: 현 광주대 교수 쓰는 편입니다. 그들의 상황과 미래가 그들의 부모의 경우와는 다 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정서적 기반은 한국에 있기 때문에 다른 난민들보다 더 한국인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부모보다 한국의 사회 문화적 환경에 맞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 니다. 숨 씨 >>>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은 화면 속 영상이었습니다. 자신들 의 이기적인 욕심만 생각한 사람들의 잘못 때문에, 무고한 아프리 카 어린이들이 보호 없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났습니 다. 부모와 함께 집과 음식, 옷도 없이 살아가는, 눈앞에서 죽음을 목격한 아이들. 너무 잔인한 일입니다. 신이시여, 저와 아이들을 이곳에 머물 수 있게 해주심에 감사드리고, 한국에 깊은 감사를! 고국이 가장 그리울 때는 언제인가요? 그리고 가장 그리운 것은 무엇인가요? 욤비 씨 >>> 저는 콩고가 항상 그립습니다. 한국 뉴스를 볼 때마다 항상 콩고로 돌아가 한국을 모델 삼아 자국에 변화를 일으키고 싶 다는 생각을 합니다. 한국은 지금까지 사람과 자연환경을 가지고 나라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자원이 풍부한 콩고도 가능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숨 씨 >>> 종교적인 축제 기간이면 고국이 가장 그립습니다. 그리고 고국에 보호막 없이 홀로 남겨진 딸아이가 가장 그립습니다. 아이 의 미래가 걱정도 되고요. 로넬 씨 >>> 제 고향인 방글라데시 치타공 산악 지대는 한국과 환 경, 문화, 종교가 비슷합니다. 치타공은 70%가 언덕, 산, 푸른 숲, 다채로운 야생화, 시내, 그리고 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저는 제 고향이 언제나 그립습니다. 봄에는 꽃과 아름다운 새들, 여름 에는 제가 어린 시절 친구들과 수영하며 놀던 강과 연못, 가을에는 안개 낀 아침과 메마른 나뭇잎들, 그리고 겨울에는 자주 왕래하던 친척들과 친구들이 그립습니다. 본인의 인생 목표는 무엇인가요? 10년, 20년 후에 본인은 어떤 모습이었으면 하는지? 욤비 씨 >>> 2020년쯤에는 제가 한국 내 난민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 후 자국으로 돌아가서 같은 해결책을 적용할 겁니다. 몇 년 안에 제가 콩고의 개발사업에 앞장 서는 사람 중 한 명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로넬 씨 >>> 저는 사회복지사로서, 빈곤한 이들을 돕는 사람으로서 더 똑똑하고 훌륭한 한국인이 되고 싶고, 또 아들에게 최선을 다 하는 좋은 아빠, 그리고 가족을 사랑하는 최고의 남편이 되고 싶 습니다. 또한, 자유 줌머족 국가를 세우기 위한 건전한 시위운동을 벌여서 자랑스러운 줌머족 이 되고 싶습니다. 숨 씨 >>> 10년 혹은 20년 후에는 한국이든 코트디부아르든 상관 없이 제 사업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또한, 아이들이 좋은 교육, 좋 은 직장을 통해 독립적으로 잘 자라는 것을 지켜보는 행복한 아버 지이고 싶습니다. 한국 사회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요? 욤비 씨 >>> 한국인들은 국제 사회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외국인들에게 더 호의적이고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로넬 씨 >>> 한국에 사는 난민으로서 저는 우선 한국인들에게 감 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한국인들 덕분에, 그리고 한국인들 의 자유를 향한 투쟁 덕분에 저는 난민이 되어 이곳에서 자유를 누 리고 있습니다. 저는 저와 같은 난민들이 평생 난민으로 남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난민들이 때로는 누군가의 위안이 되어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숨 씨 >>> 한국 사회에 좋은 것이라면 모두 바랍니다. 한국인들은 매우 열심히 일합니다. 젊은 세대도 부모님 세대처럼 더 열심히 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글을 보고 있을 유엔난민기구 후원자와 파트너들께 한 마디 해주신다면? 로넬 씨 >>> 난민은 본인의 잘못 때문에 난민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 이면에는 공동 사회 간의 분쟁, 전쟁, 또 는 사살로 이어지는 차별이나 박해와 같은 이유가 있습니다. 난민 들은 안전을 위해 자국을 떠납니다. 그들은 여러분의 나라에서 임 시 쉼터가 필요하지만, 자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자국의 차별, 박해, 전쟁을 멈출 영구적인 해결책 또한 필요합니다. 저희를 지지 해주시고 목소리를 높여주세요! 욤비 씨 >>> 유엔난민기구의 후원자와 파트너분들은 평화 중재자 입니다. 난민의 삶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여러분의 후원에 대단 히 감사를 드립니다. 아태난민권리네트워크 부의장으로서, 절망적 인 상황에 놓여 있는 난민들이 여러분의 후원을 받고 얼마나 행복 해할지가 그려집니다. 고마워요, 한국! 숨 씨 >>> 유엔난민기구 후원자와 파트너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 다. 유엔난민기구가 난민을 알리고 관심을 제고하는 이런 행사를 개최할 수 있는 것도 여러분의 후원과 관심 덕분입니다. 당신들 모두에게 신의 축복이 있기를! 세 살 난민 아이의 죽음을 비롯해 최근 난민 이슈가 많이 보도되고 있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안전을 찾아 피난 중인 전 세계 난민들에게 응원의 한 마디 해주세요. 욤비 씨 >>> 현대 사회라고 불리는 오늘날, 그 세 살배기 아이의 죽 음은 믿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난민들에게 제가 전하고 싶은 말은, 권리를 존중받을 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서 노력하라는 것입 니다. 수용국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자국과 접촉을 이어가면서 본 인이 자국으로부터 탈출했던 원인을 해결시키기 위해 노력하세요. 그래야만 자국에서 더 이상 난민이 발생하지 않을테니까요. 숨 씨 >>> 폭력, 갈등을 피해 피난길에 오른 난민들에게 신에게 의 지하고 기도하라고 전하고 싶습니다. 우리도 당신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겠습니다. 로넬 씨 >>> 난민 아이 쿠르디에게 이렇게 전하고 싶습니다. 네 생 명을 구할 수 없어서 너무나 안타깝지만, 세상은 너의 죽음으로 인 해 많은 것을 배웠단다. * 본인의 경험담과 생각을 솔직하고 성심성의껏 전달해주신 숨 씨, 로넬 씨, 욤비 씨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12 13
고맙습니다 - 소중한 후원이 가져온 기적 고맙습니다 - 후원소식 & 후원감사 캠프에서 캠퍼스로, 남수단 난민 소녀 에스더의 이야기 변화를 일으킬 준비가 된 성공한 국민 한 사람으로서 고국에 돌아가고 싶어요. 남수단의 첫 여성 신경외과 의사가 되기 위한 꿈을 유엔난민기구 사무실로부터 배급 카드를 받을 수 UNHCR 시간, 자유시간으로 둘러싸인 환경과 학교생활을 후원소식 종이 없는 연말정산 안내 2015년 후원금에 대한 기부금영수증 우편발송 서비스가 종료됩니다. 유엔난민기구와 함께 해주시는 후원자님의 따뜻한 마음에 항상 감사드리며, 우편발송 경비를 절감하여 더 많은 난민에게 도움을 전달하고자 합니다. 주민등록번호 13자리가 등록된 경우, 2015년도 기부금영수증은 유엔난민기구 홈페이지 또는 국세청 연말정산간소화서비스 (www.hometax.go.kr)를 통해 2016년 1월부터 확인 및 출력 가능합니다. 주민등록번호 등록이 안 되어 있는 후원자님께서는 유엔난민기구 홈페이지 또는 전화(후원관리팀 02-773-7272)로 등록해주시기 바랍니다. * 기부금영수증 발급용 주민등록번호 등록 여부 확인 방법 유엔난민기구 페이지 중앙 나의 기본정보 홈페이지 나의 후원 클릭 후 회원정보 조회/변경 www.unhcr.or.kr 로그인 쫓아 에스더 냐콩(Esther Nyakong)은 케냐 북서부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이러한 카드 덕분에, 에스더의 매우 즐기고 있습니다. 도서관 반장이기도 한 에 있는 카쿠마(Kakuma) 난민촌에서 공부에 전념 해 왔습니다. 반 아이들 사이에 앉아 호쾌하게 웃고 있는 이 열일곱 살 소녀의 두 눈은 열정과 총기로 가족은 한 명당 매달 옥수수 300g, 꼬투리를 벗긴 완두콩 85g, 옥수수와 콩 혼합물 60g, 식용유 50g 그리고 소금 7g씩을 받게 되었습니다. 에스더는 대부분의 시간을 시사 자료를 읽거나 과제를 하는 데에 보냅니다. 후원감사 여러분의 소중한 후원금, 전 세계 난민들을 위해 값지게 사용하겠습니다! 반짝거립니다. 현재, 에스더를 제외한 가족들은 남수단으로 어머니는 곧장 에스더와 언니들을 난민촌 학교에 돌아간 상태이며, 에스더는 2년이 넘게 가족들을 accompany 연극 뮤지컬을 사랑하는 분들이 모여 난민들을 위한 GSFA in DIMIGO 세계 난민의 날 교내 행사를 통해 마련한 제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더 나은 삶이에요. 등록시켰습니다. 어머니는 좋은 교육이 더 나은 보지 못했습니다.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특히 따뜻한 마음 보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수익금을 난민보호 활동을 위해 보내주신 한국디지털미디어 고등학교 남은 인생 동안 난민으로 낙인되고 싶지 않아요. 남수단 주바(Juba)에서 세 자매 중 막내로 태어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에스더는 그녀가 태어나기 전에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에스더의 어머니는 나라가 점점 삶을 살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믿으세요. 사실 전 공부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는 편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어머니가 스트레스를 못 이기고 난민촌에서 제조되는 값싼 불법 주류에 의존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에스더는 남수단이 그리워요. 에스더의 지인 중 대부분은 이미 결혼을 해서 아이가 있습니다. 그녀는 본인이 계속 남수단에 남아있었다면 공부를 계속 해나갈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희 문화권에서는 여자들이 집에서 아이들을 키워야 한다고 인천목향초등학교 네팔 지진 피해자들을 위해 학생들의 따뜻한 마음 모아 보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긴급구호 후원자 지중해 난민 위기 대응을 위해 긴급구호에 참여 해주신 모든 후원자님께 감사드립니다. 동아리 GSFA in DIMIGO에 감사드립니다. 미래나무어린이집 어린이집 아이들에게 나눔교육 기회를 만들어주시고, 아이들이 알뜰시장을 열어 직접 모은 돈을 어려운 난민들을 위해 보내주신 후원자님께 감사드립니다. 불안정해지자, 2009년 세 자매를 데리고 카쿠마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모든 걸 포기한 생각해요. 저는 이 틀을 깨고 여자아이들에게도 난민촌으로 왔습니다. 불과 10살이었지만 에스더는 난민촌에 도착하기까지의 험난했던 여정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도착하기까지 거의 상태이셨고 가끔씩 밤새 앉아 울곤 하셨죠. 전 어머니가 삶의 어떠한 희망도 남아있지 않다고 느끼고 계실까 겁이 났어요. 에스더는 이런 미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에스더는 종종 시간이 날 때면 삼촌과 함께 강변을 여름 프로젝트 캠페이너 여러분, 고맙습니다! 일주일이 걸렸어요. 저희는 입고 있는 옷 외에는 어머니가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실 수 있도록 따라 긴 저녁 산책을 나갑니다. 전 과학과 수학을 아무것도 없이, 어느 날 저녁에 주바를 떠났어요. 공부에 전념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사람들은 정말 좋아하고 제 자신을 믿어요 앞으로 사람 그들은 우간다, 케냐 나이로비를 거쳐 카쿠마 난민촌에 도착했습니다. 한번은 저희가 타고 있던 버스가 숲 속에서 고장이 났는데 저희는 구조대가 올 때까지 의자 밑에 숨어 있었어요. 카쿠마 난민촌에서는 에스더의 삼촌인 철(Chol)이 제가 문맹인 어머니를 두고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잘 해낼 수 없을 것이라고 했어요. 너희 어머니가 글을 읽지 못하는데 네가 어떻게 학교에서 잘 해낼 수 있겠니? 라고 말이죠. 굳은 결심과 함께 에스더의 성적은 점차 오르기 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다주는 미래를 그려보곤 해요. 에스더는 어린 시절 공포심 가득했던 마음 으로 떠나야만 했던 고국 남수단으로, 언젠간 돌아갈 수 있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난민촌에서 기숙학교 캠퍼스까지 꿈을 이뤘으니, 앞으로 남수단의 첫 여성 신경외과 의사가 되기 위해 유엔난민기구는 지난 7-8월 두 달간 여름 프로젝트 캠페이너들과 함께 기구의 활동을 알리고 시민들의 따뜻한 관심과 동참을 구했습니다. 이번 여름 캠페이너들은 2015년 한 해 동안 계속 진행되고 있는 한 가족 (1 Family) 캠페인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급증하고 있는 난민 현황과 이들이 처한 긴급 상황을 알리며 꾸준한 모금 활동을 진행하였습니다. 유엔난민기구는 앞으로도 성실하고 열정적인 분들의 참여를 기대합니다. 계절별로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 그들을 반겼습니다. 90년대 초 카쿠마에 도착한 시작했고, 그녀는 난민촌에서 최신 시설을 갖춘 노력할 거예요. 유난히 더웠던 올여름 동안, 시민분들께 시원한 미소로 다가갔던 여름 캠페이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우측 QR 코드를 잃어버린 아이들 첫 무리 중 한 명이었던 철 유일한 여자 기숙 고등학교의 입학 허가를 받게 * 위 이야기의 원문은 유엔난민기구 사이트(http://tracks. 캠페이너 18명 한 분 한 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참조하세요! 삼촌은 에스더의 가족에게 쉼터를 제공해주었고 되었습니다. 에스더는 각종 도서와 친구들, 토론 unhcr.org/2015/08/from-camp-to-campus/)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14 15
함께 배우는 난민 이야기 퀴즈 1 11살 난민 소녀, 하난과 함께 푸는 난민 퀴즈 5년째 계속되고 있는 전쟁으로 우리 가족은 위험을 피해 고향을 떠나서, 이웃 나라 레바논에서 살고 있어요. 저희처럼 다른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이 무려 400만 명이 넘는다고 해요. 서울 거주 총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예요. 저는 어느 나라 출신일까요? 1 시리아 2 독일 3 미국 4 일본 퀴즈 2 가로세로 낱말 퀴즈 2 가로 1. 21세기 최악의 비극 으로 불리는, 2011년 발발 이후 5년째 계속되고 있는 이 전쟁으로 1 3 국 내 전 400만 명이 넘는 난민이 발생. OOO 내전 4. 난민을 보호하고 난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UN 총회에 의해 설립된 UNHCR의 공식 국문 명칭 7. 유엔난민기구의 글로벌 친선대사. 아프가니스탄 난민 출신 작가로 연을 쫓는 아이 6 긴 급 8 9 그리고 산이 울렸다 등 집필. 칼레드 OOOO. 8. 자신을 낳아 준 남성을 이르거나 부르는 말. 어머니 말고 OOO. 4 5 세로 2. 유엔난민기구 글로벌 특사이자 유명 헐리우드 여배우. OOOO 졸리. 7 3. 고향을 잃고 자국 내에서 안전한 곳을 찾아 피난 중인 사람. 국내 OOO. 비호를 구하기 위해 난 민 상 국경을 넘지 않았다는 점이 난민과 다르다. 한국 전쟁 당시 우리나라에도 많은 OOO이 발생했다. 5. 국제연맹의 초대 난민고등판무관을 지낸 프리됴프 난센(Fridtjof Nansen)의 정신을 이어받아 전 세계 난민 문제에 기여한 개인 혹은 단체에 매년 수여하는 상. OO 난민상. 6. 갑작스러운 분쟁 또는 자연재해 등 위기 상황에 맞서 대응하는 활동으로 유엔난민기구의 주요 임무 중 하나. 유엔난민기구는 긴급OO를 위해 위기 발생 72시간 내 현장에 전문 인력을 파견하고 필요 물품 및 서비스를 지원하고 있다. 8. 아시아 서남부 이란 고원의 동북부에 있는 나라로 수도는 카불. 1996년 이슬람 원리주의를 표방하는 탈레반이 정부를 해산한 후 회교국가를 수립하였다. 2001년 미국과의 전쟁으로 많은 난민이 발생했으며, 주변국 파키스탄에 여전히 150만 난민이 머물고 있다. 나도 풀 수 있어요! 9.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세 대륙에 둘러싸인 바다. 최근 많은 수의 난민과 이주민이 OOO를 통해 유럽 국가로 이동하고 있다. (힌트: 6-7페이지 참조) 퀴즈의 정답을 사진 촬영해 문자(1666-5147)로 보내주신 분들께는 소정의 상품을 전달해드립니다. (퀴즈별 참여 가능) 후원문의 전화 02-773-7272 이메일 withyou@unhcr.or.kr 홈페이지 www.unhcr.or.kr 블로그 http://blog.naver.com/unhcr_korea 해피빈 http://happylog.naver.com/unhcr 페이스북 www.facebook.com/unhcr.korea 기업후원 02-773-7075 후원계좌 국민은행 407537-01-004288 (예금주: 유엔난민기구 혹은 UNHCR) 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무교로 6 (을지로 1가) 금세기빌딩 7층 유엔난민기구 Print using soyink 유엔난민기구는 환경보호를 위해 콩기름 잉크를 사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