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전통놀이 서영대 이용범 허용호
인천의 전통놀이
인천의 전통놀이 서영대 이용범 허용호
인천의 전통놀이 를 발간하며 인천은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아왔던 역사 깊은 땅이자 많은 사 람들이 살고 있는 대도시입니다. 인간과 놀이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점 을 고려한다면 인천에서 행해졌던 놀이는 그 역사만큼이나 무궁무진할 것입니다. 인천문화재단은 앞으로도 인천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기록뿐만 아니 라 생활사적인 가치가 있는 놀이나 무형문화재 등에 대해서도 기록과 점검을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놀이는 문화현상의 기원이자 문화창조의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 고 있습니다. 전통 놀이 범위의 한계와 인천의 행정구역 변화 등으로 인해 인천 고유의 특색이 돋보이는 전통놀이가 많지 않다는 점, 문헌조사에 한정 되어 있다는 점이 아쉽지만 인천의 전통놀이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첫 결과물이라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추후 보다 깊이있는 인천만의 놀이에 대한 조사와 생생한 현장조사가 다양하게 이뤄지길 기대합니다. 2011.02 (재)인천문화재단
차례 발간사 _ 5 Ⅰ. 총론 _ 9 Ⅱ. 일상놀이 1. 시회( 詩 會 ) _ 24 2. 경로회( 敬 老 會 ) _ 26 3. 숨바꼭질 _ 28 4. 진치기 _ 33 5. 공기 _ 35 6. 팽이치기 _ 41 7. 썰매타기 _ 46 8. 소설읽기 _ 50 9. 돈치기 _ 55 10. 화전놀이 _ 59 11. 버들피리 불기 _ 63 12. 농악 _ 65 13. 고누 _ 71 14. 천렵( 川 獵 ) _ 75 15. 풀싸움 _ 78 16. 제기차기 _ 80 17. 약수놀이 _ 86 18. 망둥이 낚시 _ 88 19. 버섯따기 _ 89 20. 산놀이 _ 90
21. 닭잡기 _ 92 22. 어락( 漁 樂 ) _ 94 23. 인천 전통 편사놀이 _ 96 24. 곱사치기놀이 _ 101 25. 석전( 石 戰 ) _ 104 26. 총알껍질 따먹기 _ 106 27. 비석치기 _ 107 28. 자치기 _ 109 Ⅲ. 명절놀이 1. 윷놀이 _ 112 2. 널뛰기 _ 116 3. 연날리기 _ 120 4. 달맞이 _ 124 5. 다리밟기 _ 126 6. 논두렁태우기 _ 129 7. 취군( 聚 軍 ) _ 131 8. 그네뛰기 _ 135 9. 씨름 _ 140 10. 종경도( 從 卿 圖 ) 놀이 _ 146 11. 복놀이 _ 151 12. 호미씻이 _ 153 13. 선화( 船 火 ) _ 156 14. 강화산성 성돌이 놀이 _ 164
Ⅳ. 제의적 놀이와 음악 1. 은율탈춤 _ 168 2. 용동 큰 우물제 _ 174 3. 강화도 외포리 곶창굿 _ 180 4. 황해도 평산 소놀음굿 _ 189 5. 서해안 풍어제 _ 196 6. 동막도당굿 _ 203 7. 부평도당굿 _ 209 8. 경서동 고잔 도당굿 _ 211 9. 왕길동 안동포 도당굿 _ 215 10. 산제( 山 祭 ) _ 219 11. 삼현육각( 三 絃 六 角 ) _ 223 12. 장봉 띠뱃놀이 _ 230 13. 인천 근해 갯가노래 뱃노래 _ 234 14. 주대소리 _ 239 15. 강화 용두레질노래 _ 242 16. 연평도 뱃치기 _ 246 17. 소금밭 일놀이 _ 247 색인 _ 250
Ⅰ. 총론
1 인간을 가리키는 여러 말 중에 호모 루덴스(homo ludens) 가 있다. 호모는 라틴어로 사람이란 뜻이고, 루덴스 역시 놀이를 뜻하는 라틴어 루두스(ludus)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러므로 호모 루덴스는 놀이하는 인간 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 말은 네덜란드 출신의 유명한 문화사학 자 요한 호아징하(Johan Huizinga; 1872~1945)의 저서 호모 루덴 스 (1938년)를 통해 널리 알려졌는데, 이 책에 의하면 놀이는 문화현상 의 기원일 뿐만 아니라 문화 창조의 원동력이며, 인간의 생활 자체가 놀 이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물론 놀이는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의 식 주를 얻는 것과 직접 관련이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의 식 주를 얻기 위한 노동을 방해하 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은 하루 종일 일만 하면서 살 수 없다. 일에 필요한 에너지의 재충전을 위해 밥도 먹고 휴식도 취하고 잠도 자야만 한다. 나아가 재충전된 에너지의 활성화가 필요한데, 놀이 가 바로 이러한 역할을 한다. 즉 놀이의 재미는 반복되는 일상의 무료함 을 벗어나게 하여,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뿐만 아니라 놀이는 참여하 는 사람들을 연결시켜 인간관계 형성에 기여하는 면도 있다(물론 놀이 가 대립과 반목을 부추기는 면도 없지는 않다). 그렇다고 한다면 놀이는 인간의 삶에 필요불가결한 요소로서 인간과 인간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인천의 전통놀이를 주목하 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10 인천의 전통놀이
2 놀이가 인간의 생활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요소라고 한다면, 놀이의 역사는 인류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해도 잘못은 아니다. 그런 데 인천은 사람들이 산 흔적이 신석기시대부터 확인된, 오랜 역사를 가 진 지역이다. 또 인천은 광역시로서 8개의 구와 강화 옹진 두 개의 군 을 가지고 있는 대도시이다. 조선시대로 치면, 경기도의 인천도호부 부평도호부 강화도호부 남양도호부 교동현, 황해도의 장연현( 長 淵 縣 )에 걸친 지역이다. 이렇듯 역사가 오래고 면적이 넓기 때문에, 인천 지역에는 일찍부터 다양한 놀이들이 전승되었을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 지 않다. 그러나 근대 이전, 다시 말해 조선시대까지는 인천지역에 구체적으로 어떤 놀이들이 전승되고 있었는지를 확인하기 어렵다. 전통시대에는 놀 이에 대해 기록할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던 만큼, 이러한 현상은 인천에 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인천지역에는 전문 놀이꾼 인 광대가 있었고, 나아가 이들이 집단을 이루어 살았던 자취들이 확인 된다. 이러한 자료로는 우선 1899년판 인천부읍지 (장서각 소장)의 선생 안( 先 生 案 ) 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인천의 역대 수령의 명단을 정리한 것으로, 이 중 윤우신( 尹 又 新 )은 1582년(선조 15년) 7월 25일 인천도호 부사로 부임했다가 1583년 6월 27일에 12개월 만에 파직되었는데, 그 이유는 중국에서 사신이 왔을 때 달아난 산대군( 山 臺 軍 )을 잡아 보내지 Ⅰ. 총론 11
못했기 때문이라 한다. 1 산대군이란 가면극과 같은 한국의 전통적 민속 놀이를 하던 광대나 재인( 才 人 )를 말한다. 이들은 국가나 관청의 행사에 수시로 동원되었으니, 중국에서 사신이 오거나 국왕의 대궐 밖 행차 또 는 수령의 부임 때 산대희( 山 臺 戱 )를 벌렸고, 연말에는 잡귀를 몰아내는 궁중의 나례희( 儺 禮 戱 )에 불려갔다. 이때 동원되는 광대의 인원은 수백 명에 달했기 때문에 행사 때마다 광대는 전국으로부터 차출되었는데, 중앙 산대희에 동원된 광대들은 상재인( 上 才 人 ), 즉 전국에서 기량이 우 수한 광대로 선별된 자들이다. 2 따라서 중앙 산대희에 인천의 광대가 동원되었다는 것은 기량이 우수한 전문 놀이꾼이 인천에 있었음을 의 미한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차출의 책임은 해당 고을의 수령에게 있었다. 국 가나 관의 행사에 참가하는 것이 광대에게 영예가 되었고, 경우에 따라 서는 명예직 벼슬과 같은 보상이 따르기도 했다. 그러나 중앙 산대희에 차출되는 것은 광대들에게 명예나 보상보다 부담이 더 컸고, 때문에 이 를 회피하려는 경향이 많았던 것 같다. 특히 경기도는 서울과 가깝다는 이유로 다른 지역에 비해 차출 횟수가 많았으므로 더욱 그러했을 것이 다. 그래서 할당된 광대의 인원을 채우지 못하면 그 책임은 고을의 수령 이 지고 감봉 등의 처벌을 받았다. 3 윤우신의 경우는 중국 사신이 왔을 때 인천에 할당된 광대 인원을 채우지 못해 파직을 당했다는 것으로, 이 1 天 使 時 山 臺 軍 趂 不 捉 送 事 罷. 2 손태도, 광대의 가창문화 (집문당, 2003), 298쪽. 3 손태도, 광대의 가창문화 (집문당, 2003), 277~354쪽. 12 인천의 전통놀이
를 통해 인천에도 광대가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1626년(인조 4년) 중국 사신이 왔을 때, 산대희를 한 좌우산대 도감( 左 右 山 臺 都 監 ) 중 좌산대도감에서 남긴 나례청등록( 儺 禮 廳 謄 錄 ) 이란 자료이다. 여기에는 이때 산대희를 위해 동원된 약 600명의 광 대 중, 좌산대도감에 속한 286명의 출신지와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경기재 인( 京 畿 才 人 )으로 부평의 2명( 方 丑, 戊 仁 ), 강화의 1 명( 許 善 五 )이 포함되어 있 다. 그러므로 이를 통해 부 평과 강화 광대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 나례청등록 의 표지와 부평 강화 부분> 셋째, 재인촌에 관한 구전자료이다. 광대들은 일의 성격상 집단을 이 루어 사는 예가 많다. 인천의 경우, 이러한 사실을 전하는 문헌 기록은 없다. 그러나 전래 지명 가운데 인천 재인촌의 존재를 시사하는 것이 있 다. 남동구 구월동의 남쪽 바닷가 쪽의 전재동(전자동, 전재울)이란 지 명이 바로 그것인데, 전재동은 마을 사람 전부가 재인이기 때문에 붙여 진 이름이라 한다. 나아가 전재동이 배출한 대표적인 재인으로 김상봉 ( 金 上 峯 ) 등의 이름까지 전하고 있다. 즉 김상봉은 약 200년 전의 인물 인데, 국가 경사에 불려가 줄타기를 잘해서 현종으로부터 우두머리란 뜻의 상봉이란 이름을 하사받았고, 줄타기의 중시조로 많은 제자들을 Ⅰ. 총론 13
<강화산성 남장대에서 발견된 윷판 전돌> 배출했다고 한다. 4 이상과 같은 문헌과 구전자료들을 종합하면, 전통시대 인천에도 광대 혹은 재인들이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5 4 인천광역시, 인천의 지명유래 (1998), 166쪽. 5 최근 강화도 강화산성 남장대 조사 과정에서 전돌 위에 새긴 윷판이 발견되었다. 이 윷판은 숙종 때 건물에서 발견되었는데, 인천지역에서 발견된 전통시대 민속놀이 관 련 실물자료로서 의미가 있다. 윷판 전돌의 사진을 비롯한 자료 일체는 국립민속박 물관의 장장식 선생으로부터 제공받았다. 14 인천의 전통놀이
3 인천의 놀이들이 조사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대부터이다. 일제는 효 과적인 식민통치를 위해 한국의 민속에 대한 조사를 조직적으로 진행했 으며, 그 일환으로 1936년부터는 민속놀이를 비롯한 향토오락 조사에 착수했다. 조사는 각도 도지사를 통해 각 지방의 보통학교에 의뢰하여 자료를 수집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이를 통해 수집된 자료를 정리 하여 무라야마 지쥰[ 村 山 智 順 ]이 1941년 조선의 향토오락( 朝 鮮 の 鄕 土 娛 樂 ) (조선총독부 조사자료 47집)을 간행했다. 6 여기서는 전국을 15개 시도로 나누고, 이를 다시 226개 지방으로 세 분하여 각 지방의 민속놀이들을 제시했다. 226개 지방 중에는 강화 지 방이 있고, 윷놀이를 비롯한 강화의 놀이 30가지가 소개되어 있다. 그 러나 당시 인천이란 행정구역이 분명히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천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인천에 전승되는 놀이가 정말 없었기 때문이란 해석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1914년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부평의 부 와 인천의 천 을 따서 부 평군(현재의 부평구, 계양구, 서구 및 부천시)과 인천부의 대부분 지역 (현재의 남동구, 연수구 전체 및 남구, 중구, 옹진군 일부)을 관할로 하 는 부천군을 신설하고, 인천부는 외국인들이 거주하는 조계지와 그 부 근에 한정하였기 때문에 인천 지방에 대한 언급이 빠졌다는 해석이다. 6 1992년 집문당에서 박전열에 의한 한글 번역본이 조선의 향토오락 이란 이름으로 나왔다. Ⅰ. 총론 15
그러나 놀이 없는 사회란 생각하기 어려우므로, 첫 번째 해석은 개연성 이 적다. 그래서 후자의 해석을 따른다면, 조선의 향토오락 중 부천 지방의 놀이 중 상당수는 원래 인천에서 전승되던 것일 가능성이 크다. 인천 지역의 전통놀이들은 해방 이후 발간된 인천 관련 지방지에서 해당 서적의 한 항목으로 언급된다. 특히 인천이 발전하면서 시 차원에 서 뿐만 아니라, 구 군 면 단위까지 지방지를 간행함으로서 인천의 전통놀이에 대한 정보는 꾸준히 축적되어왔다. 그리고 인천의 전통놀이 에 대한 학술적 조사가 실시되고, 그 결과가 하나씩 논문 등으로 제시되 고 있다. 7 이렇듯 인천의 전통놀이에 대해서는 조사와 그 성과가 축적되어가고 있는 중이지만, 아직까지 이를 종합적으로 정리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급속한 사회 변화로 말미암아 전통놀이들이 변질되거나 소멸되는 상황 에서, 이러한 사실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이에 인천문화재단에서는 서 영대 이용범 허용호 3인에게 인천의 전통놀이에 관한 자료의 집성을 의뢰했다. 우리 세 사람은 여러 차례 모임을 갖고 작업의 원칙과 방향을 논의하 였고, 이를 토대로 역할을 분담하였다. 논의 과정에서 도출된 사항은 다 음과 같다. 첫째, 인천의 범위이다. 주지하다시피 인천의 지역적 범위는 시대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어느 시기의 인천을 기준으로 하느 7 조성선ㆍ이현복, 경기도 강화지방의 민속 기전문화연구 11(인천교대 기전문화 연구소, 1980), 104~107쪽. 최윤영, 서해안 배연신굿의 연행양상 한국극예술연 구 28(한국극예술학회, 2008). 16 인천의 전통놀이
냐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에 있어 우리들은 현재의 인천광 역시 지역을 기준으로 했다. 다시 말해 과거에는 인천이란 이름의 행정 구역에 포함되지 않았더라도, 현재 인천광역시 소속에서 전승되었거나 현재 전승되는 놀이라면 인천의 놀이에 포함시켰다. 나아가 역사시대까 지도 인천의 영역에서 전승되는 놀이가 아니었지만, 남북분단으로 말미 암아 현재는 전승자의 주소지가 인천으로 되어있는 놀이들(예컨대 은율 탈춤이나 평산 소놀음굿)이 있는데, 이 경우도 이번 조사에 포함시키기 로 했다. 둘째, 시대적 범위이다. 놀이는 최근에도 생겨나고 있다. 예컨대 컴퓨 터와 휴대폰이 보급되면서 젊은 층을 중심으로 이를 이용한 놀이가 급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것들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 번 조사 결과의 제목을 인천의 전통놀이라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셋째, 놀이의 범위이다. 놀이의 개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으므로, 어 떤 개념을 사용하는지에 따라 놀이의 범위가 달라진다. 예컨대 마을공 동체 단위의 굿에 포함된 유희적 요소를 놀이로 볼 수 있는지 하는 문제 인데, 여기서는 놀이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도당굿이나 대동굿 같은 마 을굿은 비록 놀이를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놀이성과 축제성이 강 조되고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반면 같은 마을공동체 단위의 제 의라 할지라도 당제나 산신제 같은 유교식의 동제는 제외하였다. 유교 식 동제는 정숙성과 엄숙함이 두드러지고 놀이적 요소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놀이에서 불리어진 일부 노래(소리)를 포함시켰다. 넷째, 조사 방법이다. 인천의 전통놀이에 대한 가장 바람직한 조사 Ⅰ. 총론 17
및 연구의 방법은 문헌 조사와 현장 조사를 병행하는 방법이다. 그러 나 이번 조사의 목표는 인천지역의 놀이를 가능한 한 망라하여 편람을 만드는 것인데 비해, 허용된 조사 기간은 극히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양자를 병행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기왕에 알려진 조 사 자료를 종합하는 데 중점을 두고, 현장 조사는 일부 놀이에 한정하 기로 했다. 다섯째, 체제의 통일이다. 한국의 전통놀이는 종류가 다양할 뿐만 아 니라, 놀이마다 성격이나 놀이 방법이 다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인천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므로 인천의 전통놀이를 종합하고 정리하다 보면, 체재나 서술에서 통일성을 결하기 쉽다. 더구나 조사에 여러 사람 이 참여할 경우, 이러한 위험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들 은 인천 놀이문화의 다양성을 드러내고 조사자들 간의 역할 분담을 위 해 인천의 전통놀이를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기로 했다. 놀이의 분류 방법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노 는 사람의 나이 성별 숫자에 따라, 혹은 목적에 따라(놀이 자체가 목 적인 놀이, 풍농 기원을 위한 놀이, 승부 겨루기가 목적인 놀이 등), 혹 은 노는 시기에 따라 분류가 가능하다. 8 그러나 우리들은 인천의 전통 놀이들을 일상 놀이 명절 놀이 9 제의적 놀이로 분류하였다. 명절 놀 이란 설날 정월 대보름 사월 초파일 수릿날 백중날 한가윗날 8 김광언, 한국의 민속놀이 (인하대학교 출판부, 1982), 16~32쪽. 9 명절 놀이 와 일상 놀이 로 분류하는 방식은 김선풍의 견해에 따른 것이다(임동 권 정병호 김선풍, 민속놀이론, 민속원, 1997, 45~57쪽). 18 인천의 전통놀이
시월 상달 등을 전후해서 행해지는 놀이이다. 일부 명절이 아닌 특정일 이 놀아지는 경우도 일단 명절 놀이 에 포함시켰다. 이 명절 놀이 는 그 목적에 따라 풍농 기원( 豐 農 祈 願 ) 놀이 풍어 기원( 豊 漁 祈 願 ) 놀 이 벽사진경( 辟 邪 進 慶 )을 위한 놀이 제액초복( 除 厄 招 福 )을 위한 놀이 오락을 위한 놀이 등으로 더 세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 게 세분할 경우, 정리가 더 번잡해질 우려가 있어, 일단 명절 놀이 로 통합하여 정리했다. 일상 놀이 는 명절을 전후해서 벌어지는 놀이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놀아지는 것이다. 물론 일상 놀이 역시 주로 노는 시기가 있기는 하지 만, 특정 명절이나 특정 날짜에 구애받지 않고 일상적으로 놀아진다는 점에서 일상 놀이 라 칭하고 분류했다. 일상 놀이 역시 비승부 놀 이 승부 놀이 내기 놀이 전문인 놀이 등으로 세분할 수 있 다. 하지만 세분할 경우 발생하는 번잡함 때문에 일상 놀이 로 통합하 여 정리했다. 제의적 놀이란 기본적으로 초자연적 존재와의 소통을 통하여 당면한 문제 해결이 목적이지만, 놀이나 축제적 성격이 두드러진 것들을 말한 다. 이렇게 해서 정리한 놀이의 가지 수는 일상 놀이 26종, 명절 놀이 17 종, 제의적 놀이와 음악이 17종, 합계 60가지이다. 그리고 이들 각각의 놀이는 제각기 성격과 특징이 다르기 때문에 서술 방법도 달라야 하겠 지만, 놀이마다 1 놀이 명칭과 정의 2 전승 위치 3 내용 4 전 승 현황 5참고문헌의 순으로 기술함으로서 서술 체제의 통일을 기하 Ⅰ. 총론 19
기로 하였다. 여섯째, 업무 분장이다. 우리는 각자의 전공을 고려하여 허용호가 일 상 놀이와 명절 놀이를, 이용범이 제의적 놀이와 노래를, 서영대가 사료 조사와 총괄 업무를 담당하기로 했다. 관련 도판 자료는 해당 놀이의 담 당자가 맡아 수집하기로 했다. 4 이번 조사는 기간도 짧고 주로 문헌에 의거한 것이란 점에서 한계가 많다. 그러나 조사 과정에서 발견한 한계들은 향후의 과제가 될 수 있는 바, 이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미 알려졌지만 충분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한 놀이에 대해 서는 체계적인 조사가 필요하다. 충분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거의 끊어졌거나 놀이가 활발하게 계속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으로는 우선 1930년대 조사를 통해 확인된 취군( 聚 軍 )이나 선화( 船 火 )가 있다. 취군은 강화 지역 농악의 일종으로 무동을 타고 노는 것이 특징이며, 10 선화는 부천 지역의 놀이로 다른 지역에서는 확인되지 않은 독특한 것인데, 11 사월 초파일 연등회가 어촌의 특성에 맞게 세속화되고 10 村 山 智 順 (박전열 역), 조선의 향토오락 (집문당, 1992), 48쪽과 101쪽에 의하면, 취 군은 강화와 개성에서만 확인되는 놀이이다. 11 村 山 智 順 (박전열 역), 조선의 향토오락 (집문당, 1992), 99쪽. 20 인천의 전통놀이
놀이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취군의 경우 현재 강화 풍물보존회에서 그 복원에 힘쓰고 있어 다행이지만, 선화는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또 서곶 들노래 경서동 호상놀이 소금 밭일놀이 강화 갑비고차 농악 등이 있는데, 서곶 들노래나 강화 갑비고차 농악은 이미 인천시 문화재로 지 정되었고 그에 대한 재현 행사도 이뤄지고 있지만, 아직 전체적인 내용 과 성격을 밝힌 조사보고서나 연구 성과가 이뤄지지 못하였다. 경서 호 상놀이와 소금 밭일놀이 역시 그 존재가 알려졌지만, 그 자세한 모습을 일반에 소개하는 조사보고서나 연구 성과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그 존재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놀이들에 대한 조사와 자료화가 시급하다. 현재 인천 지역의 제의 가운데 널리 알려진 것은 황해도 굿 형식의 풍어제나 강화의 곶창굿이다. 그러나 황해도 굿 형식이 아닌 다 른 형식의 제의나 강화 이외 지역의 마을굿에 대해서는 현황조차 제대 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발굴과 조사가 필요하다. 음악 역시 지금까지는 해안 지역의 음악이 주로 알려졌다. 이런 점에서 인천 내륙지방의 전통음악에 대한 관심과 발굴 작업이 필요하다. 인천의 전통놀이를 가능한 한 찾아내어 편람을 만드는 작업은 일차적 으로 인천의 전통문화를 발굴하고 전통놀이문화의 다양성과 풍요로움 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러한 작업이 앞으로 놀이 문화의 올바른 방향 설정에도 기여할 수를 바라는 것이 우 리의 욕심이기도 하다. 끝으로 인천 전통놀이 조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계기를 만들어 주 었고, 이를 진행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인천문 Ⅰ. 총론 21
화재단, 그리고 부족한 원고를 보시고 지도해주신 김윤식 이선주 조 우성 감수위원님들께도 충심으로 감사드린다. 22 인천의 전통놀이
II. 일상놀이
1 시회( 詩 會 ) 놀이 명칭과 정의 산과 들이나 강변에 모여 옛사람의 시를 낭송하거나 자연이나 계절, 세상일 등을 주제로 시를 지어 낭송하고 서로 비평하며 노는 것. 전승 위치 조선의 향토오락 에서는 인천 지역의 부천과 강화에서 시회 시회(홍필우( 洪 必 遇 )의 오로도( 五 老 圖 ). 서울 개인 소장) 24 인천의 전통놀이
를 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내용 조선의 향토오락 에서 조사된 바에 의하면, 인천 지역의 부천과 강화에서 수시로 시회가 이루어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 구체 적인 내용은 기록되지 않고, 경기도의 다른 지방과 같다 고만 언급이 되어있다. 이에 따라 경기도의 다른 지방의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 다. 우선 개성의 경우, 유림( 儒 林 )들이 시흥이 솟아오르는 계절에 술 과 음식을 갖추고 아름다운 기생을 불러서 꽃이나 달을 감상하며, 한시 ( 漢 詩 )를 읊거나 시( 詩 )를 지으면서 하루 혹은 하룻저녁을 논다 고 조사 되어 있다. 광주에서는 유림들이 주연을 베풀어, 옛사람의 시를 낭독 하고 또한 즉석에서 지은 시를 낭송하기도 하면서, 하루를 즐긴다 고 한 다. 양주의 경우, 유림들이 산과 들이나 또는 강변에 모여 자연이나 계 절, 세상일 등을 주제로 시를 지어 서로 비평하기도 하고 혹은 낭송하며 논다 고 기록되어 있다. 양평의 경우, 주로 여름과 가을에 시문동호노 인( 詩 文 同 好 老 人 )들이 나무 그늘 등 적당한 곳에 모여서 시를 짓거나 읊 으며 즐겁게 논다 고 한다. 전승 현황 조선의 향토오락 에서 인천지역의 강화와 부천에서 시회를 한다고 기록되었다. 부천과 강화에서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수시로 시 회를 한다는 것이다. 참고(관련) 문헌 무라야마 지준, 조선의 향토오락 (조선총독부, 1941). Ⅱ. 일상놀이 25
2 경로회( 敬 老 會 ) 놀이 명칭과 정의 마을의 노인들을 한자리에 초대하여 술과 음식을 베 풀고 각종 여흥으로 위안하는 잔치. 노인을 공경하는 모임 혹은 잔치 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전승 위치 조선의 향토오락 에서는 인천 지역의 부천과 강화에서 경 로회를 한다고 기록되었다. 내용 조선의 향토오락 에서 조사된 바에 의하면, 인천 지역의 부천과 강화에서 수시로 경로회가 이루어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 구 체적인 내용은 기록되지 않고, 경기도의 다른 지방과 같다 고만 언급 이 되어있다. 이에 따라 경기도의 다른 지방의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 과 같다. 우선 고양의 경우, 가을에 마을 사람들이 추수 후 마을의 60 세 이상 된 남녀 노인들을 불러서 술과 음식을 베풀며, 노래 춤 시 ( 詩 ) 등의 여흥으로 환대한다 고 조사되어 있다. 포천에서는 11월에 6~70세 이상의 노인을 한자리에 초대하여 주연을 베풀고 각종의 여흥 을 개최하여 노인들을 위안한다 고 조사되어 있다. 26 인천의 전통놀이
전승 현황 조선의 향토오락 에서 인천 지역의 강화와 부천에서 경로 회를 한다고 기록되었다. 부천과 강화에서 수시로 경로회를 한다는 것 이다. 참고(관련) 문헌 무라야마 지준, 조선의 향토오락 (조선총독부, 1941). Ⅱ. 일상놀이 27
3 숨바꼭질 놀이 명칭과 정의 술래가 된 아이가 숨어 있는 아이들을 찾아 잡는 놀 이. 술래잡기라 부르기도 한다. 남자 어린이나 여자 어린이끼리만 하는 경우가 많지만 때에 따라서 남녀 어린이가 어울려 같이 하는 수도 있다. 전승 위치 조선의 향토오락 에서는 인천 지역의 부천과 강화에서 숨바 꼭질을 한다고 기록되었다. 남동구 20년사 에서도 인천광역시 남동구 일대에서는 일상적으로 숨바꼭질을 했다는 언급이 있다. 내용 뜰이나 골목길, 마을 앞 한길에 아이들이 많이 모이면 숨바꼭질하 자고 해서 동그랗게 서서 가위 바위 보로 술래를 정한다. 술래가 정해지 면 그 술래는 집기둥, 벽, 담벽 등에서 술래 집을 마련하고 얼굴을 댄 채 눈을 가리고는 미리 정해진 수를 센다. 대개의 경우는 열까지 세지만 지 역에 따라서는 자기 나이만큼 세는 곳도 있다. 이 때 다른 아이들은 재 빨리 술래에게 들키지도 않고 술래 집으로 빨리 뛰어갈 수 있는 곳에 숨 는다. 그러면 술래는 눈을 뜨고 두리번거리면서 아이들이 숨을 만한 곳 을 찾아 나선다. 28 인천의 전통놀이
이 때 숨어 있는 아이가 뛰어 나와 술래보다 먼저 술래 집을 손으로 짚으면 살게 된다. 그러나 술래가 먼저 짚거나 그 아이의 몸을 손으로 때리면 죽게 되는 것이다. 또 술래가 숨어 있는 아이를 찾아내어 그 이 름을 부르면 당연히 죽게 되어 밖으로 나와야 하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밖으로 뛰쳐나와 술래보다 먼저 집을 짚으면 살게 된다. 이 때에도 술래 가 그 아이의 몸을 때리면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든지 술래가 없는 사이 몰래 뛰쳐나와 집을 짚거나 술래가 있더라도 먼저 뛰 어 나와 술래에 잡히지 않고 집을 짚으면 살게 되어 다음 놀이 때 술래 를 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놀이 전에 미리 정한 지역을 벗어나서 숨거나 또는 술래에 들켰을 때 멀리 도망가면 실격이 된다. 이렇게 해서 숨어 있었던 아이들이 모두 밖으로 나오게 되면 놀이가 끝나게 되고 잡 힌 아이들끼리 가위 바위 보로 해서 다음 차례의 술래를 정하여 또 놀이 가 시작된다. 편을 갈라서 하는 경우에는 양편 대표자가 나와서 가위 바위 보로 술 래 편과 숨는 편을 정한다. 술래 편이 된 쪽은 몸이 날래고 눈치가 빠른 아이를 골라 술래를 세우고 나머지는 집 근방에 앉아 구경한다. 술래가 눈을 감고 수를 세는 사이 숨은 편의 아이들은 모두가 숨는다. 술래가 눈을 뜨고 찾아 나설 때 술래 몰래 집을 짚거나,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술래의 손에 맞지 않고 먼저 집을 짚으면 살게 되는데, 이 때 산 아이들 은 흩어지지 않고 제일 먼저 산 아이가 한 손으로 집을 짚고 어깨를 뻗 으면 다음 아이가 또 다른 손을 잡아 일렬로 선다. 이 때 숨어 있는 아이 는 집까지 가지 않고 늘어선 자기편의 손을 잡으면 살게 되므로 훨씬 유 Ⅱ. 일상놀이 29
리하게 되고 술래는 잡기가 무척 힘들게 된다. 만약 하나라도 잡게 되면 술래가 바뀌지만 못 잡는 경우에는 또 술래 편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숨바꼭질도 하지 못하고 앉아 구경만 하는 자기편을 위해서라도 찾아내 고 잡아야 한다. 잡지 못하면 술래 편은 언제까지나 술래만 되어야 하므 로 교대까지 하면서 술래를 면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이 놀이도 지역 에 따라서는, 살아남은 아이들이 손을 잡고 늘어서지 않고, 달음질을 잘 치어 살려내는 놀이 방법도 있다. 물론 이 때도 술래에게 잡히면 죽게 되므로 빨리 손을 맞추고 집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전승 현황 조선의 향토오락 에는 인천 지역의 강화와 부천에서 숨바꼭 질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시로 어린이들이 중심이 되어 숨바꼭질을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구체적인 숨바꼭질의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고, 경기도의 다른 지방 과 같다 고 되어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 경기도 다른 지방의 사례를 살 펴보면 다음과 같다. 광주의 경우,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이긴 사람은 숨고, 진 사람이 술래가 되어 숨은 사람들을 찾는다. 들킨 사람은 다시 술래가 되어 숨은 사람을 찾는다. 곳에 따라서는, 술래를 정할 때, 모인 사람을 정렬하게 되고 순서대로 하날 때 두날 때 사마중 날 때 륜날 거 지 팔대 장군 고두래 뻥 이라는 문구를 외쳐 마지막 구를 외치게 된 사 람이 술래가 되게 하기도 한다. 연천에서는 가위 바위 보로 술래를 정 하고 다른 사람은 모두 숨는다. 좋아 라는 소리를 신호로 하여 술래는 숨은 사람들을 찾아다닌다. 숨었던 사람은 발견되어 술래에게 잡히지 30 인천의 전통놀이
않고 먼저 원래의 집으로 돌아오면 살고, 술래에게 잡히면 죽는다. 이렇 게 하여 잡힌 사람이 다음 술래가 된다. 잡히지 않고 돌아온 사람은 아 직 숨어있는 사람에게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라는 노래를 부르 며 들키지 않도록 주의를 준다 고 조사되어 있다. 가평에서는 남자 어린 이들이 중심이 되어 논다고 되어 있으며, 술래에게 다 숨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로, 깡통을 차 멀리 날려 보내어 소리를 낸다. 술래는 그 깡 통을 주워 자기가 눈을 감고 있던 곳에 가져다 놓고 나서 숨은 사람들을 찾기 시작한다. 고 조사되었다. 강화사 를 보면 강화 지역의 숨바꼭질이 조사되었는데, 앞에서 정리 한 경기 지역의 놀이 방식 가운데 연천 지역의 놀이 방식과 유사하다. 그 놀이 방식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숨바꼭질은 5~6명 이상이 한 다. 놀이 방법은 먼저 가위, 바위, 보 를 하여 진 아이가 술래가 된다. 그러면 나무, 기둥, 또는 전봇대 같은 데를 술래의 집으로 정하고 붙어 서서 눈을 감고 50이나 70 정도를 세고 있으면 그동안에 다른 아이들은 달아나 숨는다. 그러면 술래가 숨은 아이를 찾아내는 것인데, 맨 처음 에 붙잡힌 아이가 술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술래가 숨은 아이를 찾기 전에 술래의 집을 숨은 아이 중에 하나가 먼저 와서 짚으면 술래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숨은 자리를 찾아서 달아날 때는 꼭꼭 숨어라 머리카 락 보인다. 꼭꼭 숨어라 옷자락이 보인다. 살금 살금 달아나자. 빨리 빨 리 달아나자 라는 노래를 부른다. 남동구 20년사 에도 남동구 일대에서 숨바꼭질이 일상적으로 행해 진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그 구체적인 놀이 방법은 조사되지 않았다. Ⅱ. 일상놀이 31
참고(관련) 문헌 무라야마 지준, 조선의 향토오락 (조선총독부, 1941). 강화사편찬위원회, 강화사 (강화문화원, 1976).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한국민속의 세계 5(2001). 김광언, 동아시아의 놀이 (민속원, 2004). 남동구20년사편찬위원회, 남동구 20년사 (인천광역시 남동구, 2010). 32 인천의 전통놀이
4 진치기 놀이 명칭과 정의 두 패로 나누어 일정한 장소에 진을 치고 상대편을 잡아오거나 상대편의 진을 점령하는 놀이. 지역에 따라 진뺏기 진잡 이 진똘이라고도 한다. 전승 위치 조선의 향토오락 신편강화사 등에서 강화 지역의 놀이 로 소개되어 있다. 유래와 역사 진치기는 선조들의 전쟁에서부터 유래되었다고 한다. 옛날 부터 전투를 할 때 높은 산이나 고지에 진을 치고 적과 전투를 하였다. 이를 흉내낸 놀이로 처음에는 남자 어린이들끼리만 하는 놀이였으나, 점차 세월이 지나면서 여자 어린이들도 함께 하는 놀이로 변하였다. 내용 신편강화사 에 소개된 놀이 방법은 다음과 같다. 아이들이 여럿 모여서 가위, 바위, 보로 편을 가른다. 양편은 서로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자기네 본부(진) 을 정한다. 그런 다음 동시에 서로 간에 자기 진 에서 나와 상대방의 진 속으로 파고든다. 한 팀 선수가 먼저 나와 서 있 Ⅱ. 일상놀이 33
을 때 다른 편 선수가 늦게 나와서 먼저 나온 사람을 손으로 붙잡으면 그 사람은 포로가 되어 데리고 와서 자기 집 진을 세워둔다. 먼저 달리 기를 못하는 사람이 먼저 나와서 돌아다니면 상대방이 뛰어나올 때 달 리기를 잘하는 사람이 곧바로 뛰어나가 상대방을 붙잡는 전략을 짜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식으로 놀다가 자기들 포로의 손을 잡으면 그 포로 들은 다시 살아서 돌아오기도 한다. 승리하는 방법은 상대팀을 전부 포 로로 잡거나 상대방 진을 손으로 붙잡으면 이기는 놀이이다. 전승 현황 조선의 향토오락 과 신편 강화사 에서 강화도 어린이의 놀이로 진치기가 언급되어 있으나, 현재는 널리 전승되지 않는다. 참고(관련) 문헌 무라야마 지준, 조선의 향토오락 (조선총독부, 1941). 장장식, 민속놀이 신편 강화사 중(강화군, 2003). 34 인천의 전통놀이
5 공기 놀이 명칭과 정의 밤톨만한 다섯 개 의 작은 돌을 가지고 땅바닥이나 방, 마루 위에서 손으로 받고 노는 놀이. 이 놀이의 명칭을 오주연문 장전산고( 五 洲 衍 文 長 箋 散 稿 ) 에는 공기( 拱 碁 ), 조선의 향토오락 에는 석유( 石 遊 ) 라고 기록하고 있 다. 지역에 따라 공개, 꽁기 라 부르기도 한다. 강화도에서는 콩 돌 집어먹기 라 부르기도 한다. 전승 위치 조선의 향토오락 에서 조사된 바에 따르면, 인천 지역에 공기놀이(기산 김준근의 자셰 고, 기산 김준근 조선풍속도: 스왈른 수집본, 숭실대학교 한국기독 교 박물관, 2008) Ⅱ. 일상놀이 35
서는 강화와 부천에서 공기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종 용유민속 조사보고서 에서는 영종도와 용유도 지역의 공기놀이 사례가 조사되었 다. 한국의 어촌민속지 에서는 콩돌 집어먹기 라 불리는 강화 지역의 사례가 조사되었다. 공기는 인천광역시 남동구 일대에서도 일상적으로 행해졌다고 한다. 내용 공기를 위해서는 우선 밤톨만한 둥그런 돌 다섯 개를 마련한다. 자 연석의 검정 차돌이 있는 도서 해안 지방에서는 그대로 사용하나, 내륙 지방에서는 적당한 돌을 주워 모난 곳을 단단한 돌에 문질러 둥글둥글 하게 만들기도 하고 또 깨진 기왓장 같은 것으로 둥글게 만들기도 한다. 일부 지방에서는 해패류( 海 貝 類 )를 그대로 활용하는 곳도 있다. 이 다 섯 개의 밤톨만한 돌을 가지고 편편한 땅바닥이나 방바닥, 마루 위에서 놀이를 한다. 대개의 경우, 두 사람이 마주 앉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여럿이 두 편으로 갈라서 하는 수도 있다. 공기의 놀이 방법은 오주연문장전산고 를 보면, 돌을 공중으로 던져 손으로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공기 놀이의 가장 일반적이고도 기본이 되는 방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은행알만한 5개의 작은 돌 을 손바닥에 쥐고, 그 중 하나를 위로 던져 올리고 다른 네 개를 땅바닥 에 놓고 던져 올린 돌이 떨어지기 전에 잡는다. 그리고 첫째로 손에 잡 은 한 알을 던져 올리면서 땅바닥의 것 한 알씩과 내려오는 돌과 같이 잡기를 네 번 한다. 다음에 두 번째로 두 알씩 잡기를 두 번 하고, 다음 은 세 번째로 세 알 잡기 한 번에 나머지 한 알을 잡고, 다음에는 네 번 36 인천의 전통놀이
째로 땅바닥의 네 알을 한꺼번에 잡고, 다음에 다섯 번째로 다섯 알을 다 쥐었다가 올려서 손등으로 받고 나서 다섯 알을 다 한꺼번에 채어 잡 기를 한다. 이렇게 할 때 떨어지는 돌을 잡지 못하거나 손등에 올릴 때 떨어뜨 린다거나, 한 알, 두 알, 세 알씩 집을 때 옆의 알을 건드리면 실격되고 상대방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이러한 기본형의 놀이 순서 바탕 위에 지역에 따라 또 다른 놀이가 추가되기도 하고 또 약간의 변형을 이루기 도 한다. 전승 현황 조선의 향토오락 에서 인천 지역의 강화와 부천에서 공기를 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수시로 어린이들이 중심이 되어 공기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공기의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고, 경기도의 다른 지방과 같다 고 되어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 경기도 다른 지방의 사례 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용인의 경우, 다섯 개의 작은 돌을 여러 가 지 방법으로 던져 올려서 떨어지기 전에 바닥에 있는 돌을 줍는 놀이 라 고 공기를 소개하고 있다. 광주에서는 여자 어린이가 수시로 하는 놀 이 로 소개되어 있는데, 작은 돌을 가지고 한 손으로 논다. 손바닥과 손등을 써서 공기를 집어 올리거나 받는데, 많이 잡은 쪽이 이긴다. 놀 이 방법은 다섯 가지가 있다 고 한다. 양주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세하게 조사되어 있는데, 다섯 개의 작은 돌멩이를 손바닥에 쥐고 있다가 한 개를 공중에 던져 올린 다음 다른 네 개를 땅바닥에 놓고, 떨어지는 돌 을 받는다. 다시 그 돌을 공중에 던진 후, 돌이 떨어지기 전에 땅바닥에 Ⅱ. 일상놀이 37
있는 돌 한 개를 줍고, 떨어지는 돌을 받는다. 이렇게 던져 올린 돌이 바 닥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면서 바닥의 돌 전부를 주워 손에 쥔다. 다음은 바닥에 놓은 돌을 한 번에 두 개씩 줍고, 다음은 세 개와 한 개를 두 번 만에, 다음은 네 개 전부를 한 번에 줍는다. 던져 올린 돌을 떨어뜨리면 지고, 떨어뜨리지 않고 다 주워 올려야 이기게 된다 고 조사되었다. 이 러한 경기도의 공기 사례를 보면 지역적으로 특별한 양상이 나타나기보 다는 공기의 기본적인 놀이 방식이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강화사( 江 華 史 ) 를 보면 강화 지역의 공기가 조사되어 있다. 그 놀이 방식이 위에서 정리된 것과는 다른 방식이어서 흥미롭다. 강 화사 에는 공기받기 라 하여 공기가 조사되어 있는데, 이를 정리해 보 면 다음과 같다. 공기받기는 보통 2명 이상이 하는데, 여러 사람일 경우 에는 편을 가른다. 대체로 늦은 봄과 여름에 많이 한다. 공기는 둥그스 름한 바둑돌이나 기와 조각을 깨트려 둥그스름하게 눈깔사탕 큰 것만 큼씩 만든다. 공기 놀이를 하는 방법은 우선 먼저 를 정하는 것으로 시 작된다. 두 사람이 각각 열 개씩 공기 돌을 가지고 손등에 얹힌 것을 많 이 받은 사람이 먼저 가 된다. 많이 받은 사람이 먼저가 되면 두 사람 일 경우에는 공기 돌 20개를 가지고 두 손으로 쥐어서 공중에 치뜨리고 한 손을 엎어서 떨어지는 공기를 손등에 받은 뒤에 그것이 몇 개가 얹히 든지 다시 돌을 공중으로 던지는 동시에 손을 제쳐 한 개만 받는다. 받 은 그 한 개로 땅에 떨어져 있는 공기를 세 개씩 집되, 그 한 개를 공중 에 던지고 공기가 떨어지기 전에 땅에 있는 공기 세 개를 잡음과 동시 에 공중에 던졌던 공기를 받는다. 그리고 공기 셋을 가지고 공중에 던져 38 인천의 전통놀이
서 손등에 받아 가지고 다시 공중에 던져 돌을 땅에 뿌리고 셋 중에 한 개만 손을 제쳐 받는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그것을 자꾸 반복한다. 그 런데 셋을 집을 경우엔 옆에 돌을 건드리면 안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열 개 이상을 따면 이긴다. 대개 이기면 딴 공기 수대로 진 사람의 팔뚝을 때린다. 이것을 양국 이라 부른다. 여러 사람이 할 경우에는 편을 짜서 둘 혹은 셋씩 한편이 된다. 이러한 강화 지역의 공기받기 는 인천 문학 동과 율목동에서도 행해졌는데, 이 지역에서는 공기 치기 라 불렀다고 한다. 한국의 어촌민속지 에는 콩돌 집어먹기 라는 불리는 강화 지역의 공기놀이가 조사되었다. 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소녀들이 편편 한 땅바닥에 원을 그려놓고 그 안에 콩돌을 많이 넣어 놓는다. 원을 중 심으로 빙둘러 앉아 가위, 바위, 보로 차례를 정한 후 2~5개의 콩돌 집 어먹기를 한다. 돌 한 개를 공중으로 던지면서 약속한 수의 돌을 집고, 동시에 공중에서 내려오는 돌까지 손아귀에 넣은 후 돌 1개씩을 모아 놓는다. 이렇게 되풀이하면서 많은 돌을 가져오는 사람이 이기게 되는 데 놀이를 하는 중에 다른 돌을 건드리게 되면 실격이 된다. 참고(관련) 문헌 무라야마 지준, 조선의 향토오락 (조선총독부, 1941). 강화사편찬위원회, 강화사 (강화문화원, 1976). 인천광역시 인천대학교 지역사회연구소, 永 宗 龍 遊 民 俗 調 査 報 告 書 (1995). Ⅱ. 일상놀이 39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의 어촌민속지(Ⅲ) -인천광역시 강화군 편-(1996).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한국민속의 세계 5(2001). 남동구20년사편찬위원회, 남동구 20년사 (인천광역시 남동구, 2010). 40 인천의 전통놀이
6 팽이치기 놀이 명칭과 정의 겨울철에 눈이나 얼음판 위에서 아이들이 팽이를 돌 리며 노는 놀이. 넓은 뜰이나 한길에서, 또는 방안에서 놀기도 한다. 숙 종 16년(1690년)에 쓰여진 역어유해( 譯 語 類 解 ) 에는 핑이돌리다 라 는 기록이 있고, 또 영조 말에 간행된 한청문감( 韓 淸 文 鑑 ) 에는 핑이 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핑이는 어떤 물체가 빙빙 돈다 또는 핑핑 돈다 는 뜻에서 파생된 말로 볼 수 있다. 이로 보아 최소한 17세기 말에 서 18세기 말까지는 핑이 라는 명칭이 통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핑이로 부르다가 17세기 말 이후에 팽이라고 부르게 된 것으로 추정된 다. 팽이의 명칭은 지역에 따라 다양하다. 서울 경기 충청 지방에서 는 팽이, 경남 지방에서는 뺑이, 경북 지방에서는 핑딩, 전남 지 방에서는 뺑돌이, 전북 지방에서는 뺑이, 제주에서는 도래기 등 으로 불린다. 이처럼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불기기도 하지만, 오늘날에 는 일반적으로 팽이라는 말로 통칭한다. 전승 위치 팽이치기는 전국에서 벌어졌던 놀이이다. 조선의 향토오락 에서는 인천 지역에서 부천과 강화에서 팽이치기를 한다고 기술되어 있 Ⅱ. 일상놀이 41
다. 영종 용유민속조사보고서 에서는 영종도와 용유도에서의 팽이치 기 사례가 조사되었다. 팽이치기는 인천광역시 남동구 일대에서도 행해 졌다고 조사되었다. 유래와 역사 팽이치기는 도토리나 상수리 따위를 돌리며 장난한 놀이에 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그 유래가 정확하지는 않다. 팽이가 우리 나라 에서 어느 때부터 있었던가에 대해서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720년(신라 성덕왕 19년)에 씌어진 일본의 일본서기( 日 本 書 紀 ) 라는 문헌에 일본의 팽이 는 고려로부터 전해 왔다는 기록이 있어, 최소한 신라 시대에 팽이치기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내용 팽이의 종류에는 그 모양과 기능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대표적 인 것으로 원추형의 형태에, 밑 부분에는 못을 박아 닳지 않고 잘 돌아 가도록 만들거나 나무 그대로 둔 것이 있다. 또 윗 부분에는 여러 색깔 의 원을 그려 돌릴 때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든 것도 있다. 이 팽이를 돌 릴 때에는 팽이채로 몸통을 때려 돌게 한다. 팽이채를 이용하지 않고 돌 리는 팽이도 있다. 위쪽의 중심부에 쇠로 된 심봉( 心 棒 )을 세우고 여기 에 노끈을 칭칭 감은 다음, 노끈 한 쪽 끝을 힘껏 잡아당겨 혼자 돌게 하 는 것이 있다. 팽이치기의 놀이 방법은 다양하지만 주로 중심축을 통해 동체가 회전 운동을 하도록 한다. 혼자서 하거나 여럿이 하지만 여럿이 노는 경우에 는 팽이가 넘어지지 않고 오래 도는 내기를 많이 한다. 팽이를 누가 더 42 인천의 전통놀이
오래 돌리는지 겨루는 것이 가장 보편 적인 놀이 방법이다. 놀이 장소는 주로 마당이나 골목이며, 얼음 팽이치기이 경우 공간은 따라 없고 겨울의 강가, 연 목, 논바닥의 얼음판에서 한다. 축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팽이를 잘 돌리려면 팽이채를 적절하게 쳐주어야 한다. 팽이를 손으로 돌린 다음 팽이채 로 쳐서 계속 돌아가게 한다. 멀리 던 져 돌리기는 팽이끈을 위에서부터 아 래로 가지런히 감은 다음 바닥에 힘차 팽이 치는 모양( 기산풍속도 팽이 치는 모양, 프랑스 기메 박물관 소장. 출처: 김 광언, 동아시아의 놀이, 민속원, 2004) 게 던지는 놀이다. 이외에도 목표 지점을 설정해 놓고 팽이 허리를 쳐 서 빨리 돌아오기, 돌고 있는 팽이를 맞부딪쳐서 상대방의 팽이를 쓰 러뜨리는 싸움놀이, 아래 위에 심이 박힌 팽이를 팽이줄로 감아 머리 위로 또는 팔을 옆으로 비켜서 마치 야구공을 던지듯이 팽이를 던져 돌 려 서로 맞부딪치게 하는 팽이찍기가 있다. 이때 팽이가 먼저 쓰러지 면 지게 된다. 전승 현황 조선의 향토오락 에 따르면, 부천과 강화에서 팽이치기를 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겨울 혹은 정월에 어린이들을 중심으로 팽이치 기를 한다는 것이다. 남동구 20년사 에서는 남동구 일대에서 겨울에 팽이치기를 했다고 조사되었다. 영종 용유민속조사보고서 에서는 영 Ⅱ. 일상놀이 43
종도와 용유도에서의 팽이치기 사례가 조사되었다. 전통적인 팽이놀이 는 점차 사라지고 시중에서 판매하는 팽이를 사서 하는 놀이로 변해가 고 있다고 한다. 한국의 어촌민속지 나 강화사 에도 강화에서 팽이치 기를 한다고 조사되었다. 강화사 에서는 비교적 자세하게 그 놀이 방 식이 조사되어 있는데, 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팽이치기를 위 한 재료로는 나무, 막대기, 헝겊 오락지가 쓰인다. 팽이는 나무를 깎아 서 둥글둥글하고 갸름하게 깎고 끝을 뾰족하게 깎아 만든다. 팽이채는 나무 토막을 쪼개서 만드는데, 약 30cm 이상의 길이의 막대기 형태이 다. 이 막대기 끝에 헝겊 오락지를 잘 빠지지 않게 매어서 팽이채를 만 든다. 팽이치기는 혼자서도 하고 여럿이도 할 수 있는 놀이이다. 대개는 넓은 행길에서 하지만, 겨울에는 얼음 위에서 또는 방 안에서 하기도 한 다. 놀이 방식은 팽이를 왼손에 쥐고, 오른손에는 팽이채 오락지로 팽이 허리를 칭칭 감아가지고 양손으로 잡아당기면, 그 팽이는 땅바닥을 향 하여 떨어져 빙빙 돌게 된다. 그리고 팽이채로 팽이가 계속 돌아가도록 자꾸 때린다. 팽이를 치는 어린이들은 제각기 자기 팽이가 다른 동무의 팽이보다 더 오래 돌아가게끔 힘을 쓴다. 누구의 팽이가 더 오래도는가 하는 시합을 하기도 하고, 두 팽이를 접근시켜 부딪치게 하여 먼저 죽 는 팽이가 지는 것으로 하는 시합을 하기도 한다. 팽이가 오래 돌아가도 록 시합을 할 때 팽글 팽글 잘도 돈다. 요리 저리 잘도 돈다. 고추 먹고 맴-맴, 담배 먹고 맴-맴. 이라는 노래를 부른다. 44 인천의 전통놀이
참고(관련) 문헌 무라야마 지준, 조선의 향토오락 (조선총독부, 1941). 강화사편찬위원회, 강화사 (강화문화원, 1976). 인천광역시 인천대학교 지역사회연구소, 永 宗 龍 遊 民 俗 調 査 報 告 書 (1995).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의 어촌민속지(Ⅲ) -인천광역시 강화군 편-(1996).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한국민속의 세계 5(2001). 김광언, 동아시아의 놀이 (민속원, 2004).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세시풍속사전 겨울편(2006). 남동구20년사편찬위원회, 남동구 20년사 (인천광역시 남동구, 2010). Ⅱ. 일상놀이 45
7 썰매타기 놀이 명칭과 정의 겨울철에 눈이나 얼음판 위에서 아이들이 설매를 타 고 노는 놀이 행위. 썰매는 사람이나 물건을 싣고 끌거나 미끌어지게 만 든 기구를 말한다. 지역에 따라 썰매는 서르매, 산서르매, 설매라고도 부른다. 한자어 표기인 설마( 雪 馬 ) 설응( 雪 鷹 )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썰매는 눈 위를 말이나 매처럼 빠르게 달린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전승 위치 조선의 향토오락 에서 인천 지역의 썰매타기는 부천과 강화 에서 행해졌다고 기술되어 있다. 종류 및 형태 썰매는 짐을 실어 나르는 썰매, 발에 신는 썰매, 아이들 이 타고 노는 썰매 등이 있다. 물건을 실어 나르는 썰매는 바닥이 둥글 게 휘어지도록 깍고 앞뒤 끝 부분은 위로 향하도록 굽혀 미끄러지기 쉽 게 만든다. 좌우에 두툼한 판자를 세우는데, 좌우 판자의 사이는 두 자 정도로 하고 이것을 6~7개 정도의 가로대로 연결한다. 제일 앞 가로대 에 끈을 매어 이 끈을 잡아끈다. 이 썰매는 조선시대의 건축 공사장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수원 성곽 공사에서 썰매 9틀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을 46 인천의 전통놀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창경궁, 창덕궁의 재건 공사에서도 물건을 나르는 도구로서 썰매를 확인할 수 있다. 발에 신는 썰매는 크기가 일정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100cm 전후의 것을 사용하지만, 어린이 용으로 50cm 정도 되는 것도 있다. 너비는 12 cm 정도이며 두께는 5cm가 보통이다. 썰매의 앞쪽은 스키 부리처럼 위 쪽으로 들려지도록 휘어 굽힌다. 중간 네 곳에 구멍을 뚫고 끈을 달아서 발을 죄도록 되어 있다. 창을 스키의 스틱처럼 사용한다. 발은 옆 부리 만 고정시키고 뒤꿈치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어 있다. 좌우로 회 전하거나 제동할 때는 뒤꿈치를 쓴다. 이 썰매를 신으면 잡목림 속에서 도 움직이기 쉬워 사냥을 할 때 매우 편리하다. 아이들이 타고 노는 썰매는 어린이가 앉을 만한 크기의 판자 밑에 각 목을 나란히 붙여 대나무나 쇠줄을 박아 만든 것으로 눈이나 얼음 위에 서 잘 미끄러지도록 되어 있다. 이 썰매 모양은 다양하지만 가장 일반적 인 것은 어린이가 앉을 만한 널판의 바닥에 적당한 높이의 각목을 나란 히 붙이고, 그 밑에 대나무나 쇠줄을 박아서 눈이나 얼음판 위에서 잘 미끄러지도록 한 것이다. 썰매를 탈 때에는 양손에 기다란 송곳의 막대 기를 쥐고 이것으로 바닥을 찍어 앞으로 나가기도 하고 방향 전환을 하 거나 멈추기도 한다. 내용 썰매를 탈 때에는 송곳으로 양쪽의 얼음을 찍어 가며 움직이거나 방향을 바꾸고 멈춰서는 동작을 한다. 송곳을 따로 마련하지 않고 썰매 의 좌우 양 끝에 못이 박힌 주걱 모양의 나무를 붙여서 방향을 바꿀 때 Ⅱ. 일상놀이 47
이것을 잡아당기도록 고안한 것도 있다. 눈이 많은 곳에서는 굵은 대나 무를 반으로 쪼개어 구부린 다음 댓가지에 양발을 얹어 얼음을 지치기 도 한다. 평평한 데서는 썰매 위에 올라앉아서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 서 타고, 비탈진 장소에서는 엎드리거나 누워서 탄다. 이때 힘을 적게 들이고 빨리 달리도록 하려면 썰매 바닥의 날이 정확하게 평행을 이루 도록 해야 한다. 또한 기차처럼 여러 어린이의 썰매를 한 줄로 이어 붙 여서 밀거나 당기며 놀기도 한다. 눈밭이나 얼음판이 좁은 곳에서는 썰 매 자체의 바닥을 높게 하고 나무토막을 붙여 사용한다. 이는 썰매가 서 로 부딪치는 일이 많아 그럴 때 충격이나 위험을 적게 하기 위함이다. 전승 현황 조선의 향토오락 에는 인천 지역의 부천과 강화에서 설매타 기를 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겨울철에 어린이들을 중심으로 썰매타기가 행해진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놀이 방법은 기록되지 않고 경기도의 다 른 지방과 같다 고 언급되어 있다. 이를 감안한다면, 썰매타는 방법 이 조사된 개성 지방의 경우가 참고가 된다. 개성 지방의 경우, 썰매타는 방법에는 서서 타기, 앉아서 타기, 뛰어 오르며 타기, 편을 짜서 타기, 눈감고 타기 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서울 지방의 썰매타기 방법과 같다고도 언급이 되어 있는데, 서울의 경우 얼음판에서 썰매나 날이 달린 신을 신고 탄다. 썰매는 30cm 정도의 네모 널빤지의 아래에 철사를 단다. 그 널빤지 위에 타고 썰매채를 이용해 달린다 고 기록되어 있다. 48 인천의 전통놀이
참고(관련) 문헌 무라야마 지준, 조선의 향토오락 (조선총독부, 1941).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한국민속의 세계 5(2001).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세시풍속사전 겨울편(2006). Ⅱ. 일상놀이 49
8 소설읽기 놀이 명칭과 정의 소설 낭독꾼이 소설을 낭독하는 것을 여러 사람들 이 모여 들으면서 즐기는 것. 소설을 낭독하는 낭독꾼을 전기수( 傳 奇 叟 ), 얘기장사 라 부르기도 한다. 전승 위치 조선의 향토오락 에는 인천 지역의 강화에서 소설읽기가 행 해진다고 기술되어 있다. 유래와 역사 소설 낭독꾼이 소설읽기에 관한 기록은 우선 박지원( 朴 趾 源 )의 열하일기( 熱 河 日 記 ) 관제묘기( 關 帝 廟 記 ) 에서 그 자취를 더듬 어 볼 수 있다. 그 기록을 보면, 중국의 구요동성( 舊 遼 東 城 ) 밖 관제묘 ( 關 帝 廟 )에서 소설 낭독꾼이 소설 내용을 암송하여 연행하는 양상이 나 타난다. 또한 소설 낭독뿐만 아니라 악기 연주도 동반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소설 읽기가 소설 낭독자 한 명에 의해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악기 연주자의 연주와 함께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소설 읽기 연행의 방식은 우리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얘기장사의 연행이 그 것인데, 옛날 얘기 구연자와 1~3인의 잽이가 한 패거리를 이루어 집집 50 인천의 전통놀이
을 방문하여 옛날 얘기를 들려주고 얼마간의 사례를 받았다고 한다. 조수삼( 趙 秀 三 )의 추재집( 秋 齋 集 ) 에서는 동대문 밖에서 이루어지는 전기수( 傳 奇 叟 )의 소설 읽기 양상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서울 의 상업 중심지를 돌아다니며 숙향전, 소대성전, 심청전, 설인 귀전 등의 소설읽기 연행을 하는 전기수의 모습이 나타난다. 소설 낭 독꾼의 소설 읽기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상업 중심지, 담배 가게 등의 야외 공간뿐만 아니라 각 가정에서도 이루어졌다. 이옥( 李 鈺 : 1760-1812)의 鳳 城 文 餘 나 소설 낭독자 이업복( 李 業 福 )과 관련된 한문 단편 을 보면 가정에서의 소설읽기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俚 鄕 見 聞 錄 에서 언급된 이자상( 李 子 常 ) 역시 가정에서 소설읽기를 잘했던 소설 낭독꾼 으로 알려져 있다. 소설읽기는 전문적인 소설 낭독꾼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 다. 조재삼( 趙 在 三 )의 송남잡지( 松 南 雜 識 ) 나 창선감의록( 倡 善 感 義 錄 ) 서두를 보면, 집안에서 상대적으로 소설을 잘 읽는 이가 다른 가족 들을 위해 소설읽기를 했음이 나타나고 있다. 내용 소설읽기와 관련된 문헌을 종합해 보면, 소설읽기 연행의 주체는 그 규모에 따라 집단과 개인으로 나눌 수 있다. 연행 주체가 집단인 경 우 그 반주자를 대동하게 되며, 직업적인 소설읽기 연행패라 할 수 있 다. 개인인 경우는 직업적일 수도 비직업적일 수도 있다. 소설읽기 연행 을 하는 주체의 사회적 지위는 흥행을 목적으로 하거나 후원자를 두고 있는 경우는 하층민이다. 하지만 친지나 이웃을 대상으로 하거나 집안 Ⅱ. 일상놀이 51
에서 벌어지는 비흥행적인 연행일 경우는 일정하지가 않다. 이 경우는 대개가 그 지위에 관련 없이 소설 읽기에 능한 사람이 연행 주체가 되었 을 가능성이 많다. 소설읽기 연행을 듣고 보는 관중 계층과 성별은 다양하다. 남녀노소 모두가 소설 낭독 연행의 관중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연행 장소에 따라, 연행의 성격에 따라 변별될 수 있다. 대체로 야외에서 이루어지는 흥행 적 연행인 경우 남성들이 주축을 이룬다. 중인이나 양반 남성들인 경우 는 후원자가 되어 연행자를 집안으로 불러들여 공연을 볼 수 있다. 여성 들인 경우 역시 집안에서 벌어지는 연행에 관중으로 참여할 수도 있고, 따로 방문 낭독꾼을 집안으로 불러들일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는 여성 이 그 관중을 이루기에 이른바 안글 이라 불리는 소설책이 낭독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소설읽기 연행의 장소는 야외와 집안으로 나눌 수 있다. 개방적인 공 간인 야외는 시장판, 거리, 나루터, 담배가게, 상업의 중심지 등의 시정 공간이 연행 장소가 된다. 이러한 곳에서 벌어지는 연행은 모두가 흥행 을 목적으로 한 연행이다. 폐쇄적인 공간인 집안이 연행 장소가 되는 경 우는 흥행적인 연행과 비흥행적인 연행으로 대별된다. 흥행을 목적으로 하는 연행인 경우 후원인의 집에서 연행을 하는 경우와, 소설 낭독꾼이 직접 방문하여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집안에서 이루어지는 비흥행적인 연행의 경우는 이웃이나 친지 간 혹은 집안 어른의 여흥을 위한 자연스런 연행이다. 낭독되는 연행의 대본은 다양하지만, 그 대부분이 여항( 閭 巷 )에서 많 52 인천의 전통놀이
이 읽히는 한글 통속 소설이다. 영웅 소설, 군담 소설류 등 주인공의 파 란만장한 생애를 그린 것이 주류를 이룬다. 물론 관중의 성격에 따라 그 구체적인 낭독 대본은 변별이 되었을 것이다. 소설을 읽는 연행 기교는 일상적인 어투의 낭독에서부터 고도의 청각적 효과를 발휘하는 낭독에 까지 다양하다. 대개 후원자를 둔 직업적인 낭독자의 연행의 경우가 그 세밀한 청각적 기교가 많이 사용되었을 듯하다.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연행의 경우 요전법( 邀 錢 法 )이라는 흥행 기교가 사용된다. 요전법은 소 설읽기 연행을 보고 듣는 관중을 연행의 상황 속으로 몰입시킴으로써 긴장감을 최고조로 이끈 다음에 이야기를 중단하여 궁금증을 자극시킨 후, 일정한 보상이 이루어져야만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는 방식이다. 소 설읽기를 하면서 부채를 사용한다든지, 악기 연주를 병행하는 경우도 있다. 전승 현황 조선의 향토오락 에는 인천 지역의 강화에서 소설읽기를 한 다고 기술되었다. 장 노년층을 중심으로 정월에 소설 읽기가 행해진다 는 것이다. 기록된 바에 의하면, 한 사람이 신소설 혹은 구소설을 낭독 하고, 다른 사람들은 이를 경청하며 즐긴다 고 한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추론해 볼 때, 강화에서의 소설읽기는 집안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 다. 이는 정월이라는 시기가 야외에서 소설읽기를 하기에는 접합치 않은 기후이기 때문이다. 소설 낭독꾼이 외부에서 들어 온 전문적인 연행자인 가 아니면 집안이나 마을에서 상대적으로 소설읽기를 잘하는 사람인가 는 분명하지가 않다. 후자인 것으로 추정이 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Ⅱ. 일상놀이 53
특기 사항 소설읽기는 다른 지역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놀이이다. 소설읽기의 경우, 조선의 향토오락 에는 강화 이외의 지역에서는 언급 되지 않고 있다. 소설읽기는 앞서 살핀, 전기수나 얘기장수와 일정한 연 관성이나 영향 관계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 놀이로 파악된다. 참고(관련) 문헌 무라야마 지준, 조선의 향토오락 (조선총독부, 1941). 허용호, 고소설 낭독 연행에 대한 한 연구 서강어문 13(서강어문학 회, 1997). 54 인천의 전통놀이
9 돈치기 놀이 명칭과 정의 청소년이나 남자들이 양지 바른 곳에 모여서 서로 동 전 한 개를 내어 던지고 맞춰서 따먹는 놀이. 대표적인 명칭은 돈치기 이고, 동전치기 또는 엽전( 葉 錢 )치기 라고도 한다. 전승 위치 조선의 향토오락 에는 인천 지역의 강화와 부천에서 돈치기 를 하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남동구 20년사 에 따르면 인천광역시 남동구 일대에서도 일상적으로 돈치기를 했던 것으로 전한다. 내용 돈치기는 동국세시기( 東 國 歲 時 記 ) 의 상원조( 上 元 條 )에 기록되어 있다. 땅을 파서 구멍을 만들고 어른과 아이들이 편을 갈라서 돈을 구 멍 가운데 던진다. 그리고 왕대전( 王 大 錢 )을 던져서 그 돈을 맞힌다. 맞 힌 자는 그 돈을 가지며 이긴 것으로 한다. 상원날에 이 놀이가 더욱 성 했다. 어린 아이들은 깨진 도기 조각을 사용해서 돈으로 삼고 이것을 던진다. 예나 지금이나 놀이 방법에는 큰 차이가 없지만, 어른과 아 이들이 편을 갈라서 놀았다고 했는데, 이 놀이의 기본적인 성격은 개 인 놀이이기 때문에 그 표현에 약간의 어긋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Ⅱ. 일상놀이 55
위 기록들을 바탕으로 하되, 약간의 보완을 하여 돈치기의 일반적인 놀 이 방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돈치기는 2~3명에서 7~8명까지 사람들이 모였을 때에 더욱 재미있는 놀이가 된다. 인원수대로 구멍 앞 3~4m 지점의 가로로 그은 선 위에서 동전 한 개씩을 던지고 구멍에 들 어간 사람이 첫 번째가 되고 구멍에 더 가까운 사람 차례로 다음 순번들 이 정해진다. 차례가 된 사람은 동전을 다 거두어 쥐고 구멍에 던져서 들어간 것은 가지고, 다음은 동료가 지적하는 돈을 납작한 돌로 맞히는 대로 가진다. 못 맞히면 다음 순번으로 넘어가되, 잘못 맞히면 벌금을 내는 수도 있다. 조선의 향토오락 에도 돈치기의 방법의 기록되어 있다. 서울 지역의 경우, 땅바닥에 작은 구멍을 파놓고, 5~6m 떨어진 곳에서 이 구멍을 향해서 돈을 던져 놀이 상대방이 내놓은 돈을 맞힌다. 혹은 구멍에 돈을 던져 넣거나, 구멍 바깥에 있는 상대방이 정한 물건에 큰 동전이나 둥 근 돌을 던져서 맞히면 그 물건을 차지하게 된다. 일종의 승부겨루기 놀 이 라고 기술되어 있다. 경기도 양주 지역 역시 조사되어 있는데, 여럿 이 동전을 서로 내어 순번에 따라 그 동전을 2m 정도 앞에 있는 구멍에 던져 넣는다. 구멍에 들어가지 않은 동전은 대왕전( 大 王 錢 )을 던져 맞힌 사람이 다 차지하게 된다 고 기술하고 있다. 전승 현황 조선의 향토오락 에 따르면, 강화와 부천 지역에서 돈치기 를 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부천의 경우 정월, 2~3월에 남자들이 돈치 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강화의 경우에는 정월에 청소년을 중심으로 56 인천의 전통놀이
돈치기를 한다고 되어 있다. 강화 사 에도 돈치기가 조사되었는데, 비교적 자세하게 그 놀이 방법이 정리되어 있다. 강화사 에 조사된 바에 따르면, 2명 이상의 사내 아 이들이 많이 하던 놀이가 돈치기라 고 한다. 놀이 방법은 땅바닥에 반 월형( 半 月 形 )을 그리고 그 안에다 자그마하게 구멍을 파놓고 5~6m 떨어진 투선( 投 線 )이 있는 곳에서 부터 이 구멍을 보고 놀이 하는 사 왼쪽에서 아이들이 돈치기를 하고 있다( 기산풍속도 아이들 노는 모양, 독일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 소장. 출처: 조흥윤, 민속에 대한 기산의 지극한 관심, 민속원, 2004) 람이 내논 구리돈[ 銅 錢 ] 한 푼씩을 거두어 모아 쥐고 구멍에 던진다. 그 러면 구멍의 것이나 또는 그 밖에 있는 돈을 상대방이 지정을 해주면 정 해진 동그스름한 돌을 던져서 그 돈을 맞히면 맞힌 그 돈을 한 푼 따가 지고 또 계속하는 것이다. 맞히지 못하면 다음 사람이 번갈아 돌아가면 서 돌을 던진다. 처음 시작할 때는 가위, 바위, 보 를 하여 이긴 사람부 터 먼저 하며, 그 돈이 누구든 따 가질 때까지 계속한다. 돈치기는 인천 광역시 남동구 일대에서도 행해졌었다. 참고(관련) 문헌 무라야마 지준, 조선의 향토오락 (조선총독부, 1941). 강화사편찬위원회, 강화사 (강화문화원, 1976). Ⅱ. 일상놀이 57
張 籌 根, 韓 國 의 歲 時 風 俗 ( 螢 雪 出 版 社, 1984).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세시풍속사전 정월편(2004). 조흥윤, 민속에 대한 기산의 지극한 관심 (민속원, 2004). 남동구20년사편찬위원회, 남동구 20년사 (인천광역시 남동구, 2010). 58 인천의 전통놀이
10 화전놀이 놀이 명칭과 정의 봄에 교외나 산 같은 경치 좋은 곳에 가서 음식을 먹 고 꽃을 보며 노는 꽃놀이. 진달래꽃으로 화전( 花 煎 )을 지져 먹고 가무 를 즐기는 놀이로 주로 여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화류( 花 柳 ), 회취 ( 會 聚 ), 꽃놀이 등으로도 불린다. 조선의 향토오락 에는 花 見 遊 び 또는 花 煎 遊 び 로 기록되어 있다. 전승 위치 조선의 향토오락 에는 인천 지역의 강화와 부천에서 화전놀 화전놀이 나가는 모습(신윤복의 연소답청( 年 少 踏 靑 ) ( 혜원풍속도첩 중). 간송미술관 소장) Ⅱ. 일상놀이 59
이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강화의 경우 花 煎 遊 び 라 기록되어 있으 며, 부천의 경우는 花 見 遊 び 라 기록되어 있다. 화전놀이는 인천광역 시 남동구 일대에서도 행해졌다. 유래와 역사 화전놀이의 전통은 이미 신라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교남 지( 嶠 南 誌 ) 권4, 경주 산천조에는 화절현( 花 折 峴 )이라는 고개가 나오 는데, 그 이름은 신라의 궁인( 宮 人 )들이 봄놀이를 하면서 꽃을 꺾은 데 서 비롯하였다고 한다. 한편 같은 책 고적조에서는 재매곡( 財 買 谷 )을 소 개하면서, 김유신의 맏딸 재매부인을 청연( 靑 淵 )의 위에 있는 골짜기 에 묻었으므로 이 이름을 붙였는데, 매년 봄에 같은 집안의 부녀자들이 그 골짜기의 남쪽 물가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이 시기에는 수많은 꽃들 이 만발하고 송화( 松 花 )가 골짜기에 가득하였다. 고 했다. 이렇듯 이미 신라 시대에 모습을 갖춘 화전놀이의 전통은 조선 전기 에도 크게 다를 바 없이 이어진다. 조선왕조실록 7권, 세조 3년 4월 22일(을묘)의 기록을 보면, 이때에 금령( 禁 令 )이 자못 간략하므로 무풍 ( 巫 風 )이 성행하였으니, 도성의 남녀들이 떼 지어 술을 마시는 것을 싫 어하지 않았다. 매양 한 번 술자리를 베풀면 반드시 음악을 베풀고 해가 저물어서야 헤어져 돌아갔다. 남녀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큰 소리 로 떠들면서 태평시대의 즐거운 일이라고 하였다. 귀가( 貴 家 )의 부인들 도 또한 많이 본받아서 장막을 크게 설치하고는 며느리들을 다 모아서 호세( 豪 勢 )와 사치를 다투어 준비하는 것이 매우 극진하였다. 진달래꽃 이 필 때에 더욱 자주 그러하니 전화음( 煎 花 飮 )이라고 하였다. 고 한다. 60 인천의 전통놀이
집안의 여성들, 특히 시집온 며느리들이 함께 모여 놀이를 위해서 장 막을 세우고 참꽃으로 지짐을 지져 먹으며, 질펀한 음주와 가무악을 즐 겼으니 이때의 봄나들이는 신라의 화전놀이는 물론 후대의 화전놀이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화전놀이는 여성들만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 16세기의 시인 임제( 林 悌 )는 홍만종의 순오지( 旬 五 志 ) 상권( 上 卷 )에, 작은 개울가에 돌 고여 솥뚜껑 걸고, 기름 두르고 쌀가루 얹어 참꽃[ 杜 鵑 花 ]을 지졌네. 젓가락 집어 맛을 보니 향기가 입에 가득, 한 해 봄빛이 배속에 전해지 네. 라는 시 한편을 남겼다. 이 시로 미루어 보아, 남성들도 화전놀이를 즐겼음을 알 수 있다. 내용 조선의 향토오락 에 나와 있는 기록에 의하면, 부천과 강화 지역 의 화전놀이의 구체적인 내용 언급은 없다. 부천 지역의 경우 4월에 일 반이 주체가 되어 논다고 되어 있으며, 강화 지역은 3월에 중류층 이상 이 부녀자가 중심이 되어 논다고 되어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경기도 의 다른 지방과 같다 정도의 언급만 되어 있을 뿐이다. 이 기록을 염 두에 두고 경기도의 다른 지방 사례를 보면, 양평 이천 연천의 기록 이 주목된다. 이들 지역의 기록을 보면, 산과 들에 진달래꽃이 필 무 렵, 여럿이 어울려 산에 올라가 꽃구경도 하고 참기름에 진달래꽃을 부 쳐 먹으면서 하루를 즐겁게 논다. 꽃을 보며 봄을 즐기는 놀이이다 라고 되어 있다. 부천과 강화 지역의 화전놀이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남동구 일대에서 행해졌던 화전놀이 역시 구체적인 내 Ⅱ. 일상놀이 61
용은 조사되지 않았다. 다만 봄에 했다고만 알려져 있다. 전승 현황 조선의 향토오락 에 따르면, 강화와 부천 지역에서 화전놀 이를 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강화의 경우 화전놀이( 花 煎 遊 び)라 하여, 3 월에 중류층 이상의 부녀자가 중심이 되어 논다고 되어있다. 부천의 경 우는 꽃구경놀이( 花 見 遊 び)라 하여, 4월에 일반이 중심이 되어 논다고 기록되어 있다. 남동구 20년사 에서 언급된 화전놀이의 경우, 남동구 일대에서 봄에 화전놀이를 한다고 되어있다. 특기 사항 화전놀이는 보통 부녀자들의 놀이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 전승 양상을 보아도 부녀자들이 중심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데 부천 지역의 경우 일반이 중심이 되어 화전놀이를 즐겼다고 되어 있 다. 그 시기 역시 삼월 삼짇날을 전후한 시기가 아니라 4월이라 되어 있 는 것이 특이하다. 앞서 역사와 유래 대목에서 화전놀이가 여성들만의 놀이가 아니라 남성들도 즐겼던 놀이라고 언급했는데, 부천의 사례가 이에 해당하는 경우라 할 수 있겠다. 참고(관련) 문헌 무라야마 지준, 조선의 향토오락 (조선총독부, 1941).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세시풍속사전 봄편(2005). 남동구20년사편찬위원회, 남동구 20년사 (인천광역시 남동구, 2010). 62 인천의 전통놀이
11 버들피리불기 놀이 명칭과 정의 봄철에 물이 오른 버드나무나 미루나무 가지를 꺾어 그 껍질로 피리를 만들어서 부는 놀이. 지방에 따라 호두기불기, 휫대 기불기, 호띠기불기, 호띠기불기, 풀피리불기, 날라리불기 등으로도 부른다. 전승 위치 조선의 향토오락 에는 인천 지역의 강화와 부천에서 버들피 리불기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의 어촌민속지 에서도 강화에서 버들피리불기를 한다고 조사되었다. 내용 봄이 되면 시냇가에 자라는 버드나무에 물이 오른다. 그 가지를 꺾 어 한쪽 끝의 껍질을 일정한 길이로 벗긴다. 그런 다음 벗겨낸 부분을 잡고 비틀면 물이 오른 나무껍질이 조금씩 돌아간다. 이어서 그 껍질을 칼로 잘라낸 뒤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 잡아당기면 마치 뱀이 허물을 벗 듯이 속이 텅 빈 껍질만 남고 나뭇가지는 빠져나온다. 이것을 적당한 크 기로 잘라 한쪽 끝의 표피를 칼이나 앞니로 긁어내고 납작하게 입구를 좁히면 버들피리가 완성된다. Ⅱ. 일상놀이 63
버들피리는 그 길이와 굵기에 따라 음의 높낮이와 강약을 조절할 수 있 다. 가령 길이가 짧은 버들피리를 입에 대고 불면 호득호득 하고 외마디 소리를 내지만, 반대로 길게 만들면 그 음도 긴 여운을 띠게 된다. 또 버들 피리의 구멍이 가늘면 고음이 나고, 굵은 버들가지를 이용하면 저음이 난 다. 솜씨가 좋은 이는 실제 피리처럼 여러 개의 구멍을 내어 불기도 하는 데, 전승 지역과 만드는 사람에 따라서 각양각색의 모양과 소리가 난다. 전승 현황 조선의 향토오락 에는 강화와 부천 지역에서 버들피리불기 를 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강화에서는 봄에 어린이가 중심이 되어 버들 피리불기를 한다고 되어 있다. 부천의 경우 역시 동일한데, 여름까지 버 들피리불기가 이어진다는 점이 다르다. 한국의 어촌민속지 에서도 강 화 지역의 버들피리불기가 조사되었다. 3월이 되면 사내아이들이 물 오 른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비틀어서 껍질을 통째로 뽑고는 속대는 내버 리고 그 껍질로서 피리를 만들어 불고 돌아다니면서 논다고 한다. 참고(관련) 문헌 무라야마 지준, 조선의 향토오락 (조선총독부, 194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의 어촌민속지(Ⅲ) -인천광역시 강화군 편-(1996).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세시풍속사전 봄편(2005). 64 인천의 전통놀이
12 농악 놀이 명칭과 정의 농민들 사이에서 예부터 전하여 온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 농악이란 말은 농민들이 농사를 지을 때 행하는 음악이라는 뜻이 다. 매구, 풍장, 풍물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김매기, 논매기, 모심기 등 힘든 일을 할 때 일의 능률을 올리고 피로를 덜며 나아가 협동심을 불 러일으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농악은 집단적이고 대중적인 놀이라서 여러 사람이 넓은 뜰이나 들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논다. 사람이 많아야 좋고 특별한 재주가 없어도 함께 끼어서 신나게 놀 수 있는 놀이다. 뿐만 아니라 각종 명절이나 마을굿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기도 하다. 전승 위치 조선의 향토오락 에는 인천 지역의 강화와 부천에서 농악을 한다고 기술되어 있고, 하음지 에는 강화군 하음면의 농악놀이가 소 개되어 있다. 인천광역시 남동구에서도 농악과 관련된 조사가 이루어졌 다. 특히 장수동 장자골의 경우 지금도 정월달과 7월 고사 때 동네 느티 나무 앞에서 농악을 친다고 한다. 용유도 을왕리에서도 기꺾기 농악 이 조사되었고, 영종도에서 역시 전래하는 농악이 있었다고 한다. Ⅱ. 일상놀이 65
유래와 역사 농악의 기원을 추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고대 국가의 풍속 을 기록한 진수( 陳 壽 )의 삼국지( 三 國 志 ) 위서( 魏 書 ) 동이전( 東 夷 傳 ) 에 보이는 부여의 영고( 迎 鼓 ), 고구려의 동맹( 東 盟 ), 예의 무천( 舞 天 ) 같 은 제천 의식에서 농악의 기원을 찾기도 하는데, 이는 악가무( 樂 歌 舞 )를 수반한 제천 의식이 현재의 농악과 비슷한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 나 현재와 같은 농악이 형성된 것은 아마도 조선 후기에 이앙법이 널리 보급되면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된 시기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대 규모의 집단 노동이 이루어지면서 노동의 신명을 돋우기 위한 풍물패의 음악이 시작되었고, 이것이 노동 현장뿐만 아니라 각종 의식이나 놀이 에 두루 쓰이기 시작하면서 농악이 발전했을 것이다. 농악의 기원에 관해 군대 기원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농악에는 실제 로 군대와 관련된 용어와 연행이 많다. 농악패는 여러 모양의 진( 陣 )을 짜고, 농악패의 기수가 드는 깃발도 군대의 영기( 令 旗 )와 각종 깃발에서 비롯된 것이고, 농악패가 쓰는 전립( 戰 笠, 상모 혹은 벙거지)은 군대의 유풍이다. 또한 농악패의 악기도 군대와 관련된 것이다. 징과 북은 군대 의 전진과 후퇴를 알리는 악기이고, 나발은 멀리까지 소리를 내는 군대 의 신호용 악기이며, 태평소도 예전에는 군영에서 연주하던 악기이다. 이렇게 농악패에 남아있는 군대 문화의 흔적은 농악이 조선 후기 군대 의 음악 문화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내용 농악패는 악기를 연주하는 치배(잽이)와 여러 종류의 분장을 하고 춤을 추면서 흥을 돋우는 잡색(뒷치배) 그리고 각종 깃발을 드는 기수 66 인천의 전통놀이
( 旗 手 )로 구성된다. 치배는 쇠(꽹과리, 깽매기, 꽹쇠), 징, 장구, 북, 소 고의 순서로 편성된다. 마을에 따라 법고(벅구), 태평소(호적, 날라리, 새납), 나발, 영각( 令 角 ) 등을 편성하는 곳도 많다. 상쇠는 농악패의 행 렬과 음악을 주도하는 역할 외에도 집안의 가신( 家 神 )을 위한 고사소리 나 덕담도 할 줄 알아야 한다. 잡색을 주도하는 대포수는 경우에 따라서 는 상쇠 대신에 고사소리나 덕담도 해야 하는 중요한 인물이다. 농악패 의 깃발은 농기( 農 旗 )와 영기가 기본이고, 용( 龍 )을 그려 넣은 용기( 龍 旗 )를 편성하는 곳도 있다. 조선의 향토오락 에는 부천과 강화 지역의 농악에 대한 구체적인 내 용 언급은 없다. 김매기철에 농민이 주체가 되어 논다고 되어 있는 정 도이다. 구체적인 놀이 방식 역시 경기도의 다른 지방과 같다 는 언급 만 되어 있을 뿐이다. 이 기록을 염두에 두고 경기도의 다른 지방 사례 를 보면, 고양과 광주의 기록이 주목된다. 고양의 경우 사이갈이나 김 매기 등의 공동 작업을 할 때, 일터로 가는 길, 오는 길 혹은 점심 후 쉬 는 시간, 중간 쉬는 시간 등에 일꾼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한다. 갈 때, 올 때에는 먹으로 농자천하지대본야( 農 者 天 下 之 大 本 也 ) 라고 쓴 농기 를 선두로 해서 악대의 주악에 맞추어 손짓 발짓을 익살스럽게 하며 행 진하다가, 일하고 있는 밭둑에 이르러서는 농기를 세우고 그 둘레를 돌 면서 춤추며 논다. 악대는 각 농촌진흥회 또는 두레를 중심으로 조직되 며, 피리 북 징 등의 악기를 쓴다 고 조사되어 있다. 광주 지역의 경 우, 마을 사람들이 모내기, 김매기 등의 공동 작업을 할 때, 아침 일찍 집합하여 악기를 울리며 한데 어울려서 일터로 향한다. 일을 시작하기 Ⅱ. 일상놀이 67
전이나 점심 식사 후에도 농악을 울린다. 역시 저녁에도 일이 끝나면 아 침과 같이 농기를 앞세우고 악기를 울리면서 돌아간다. 사용하는 악기 는 징 큰북 작은북 장고 피리 등이며, 곡은 행진곡, 무도곡( 舞 蹈 曲 ) 등 5~6종이 있다 고 조사되어 있다. 이러한 경기도의 대표적인 두 지역의 기록을 보면, 두레농악 혹은 두레굿이 조사된 것으로 보인다. 부 천과 강화 지역의 농악이라 조사된 것 역시 김매기철에 농민들이 중심 이 되어 놀아진다고 조사된 것으로 보아, 두레농악 혹은 두레굿의 모습 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종도 농악 역시 두레농악의 성격을 띠었다. 영종도에도 전래의 농 악이 있었는데, 공동으로 모를 심거나 논을 맬 때 한 편에서 농악으로 흥을 돋구어 주고 했다는 것이다. 또한 명절 때가 되면 마을 단위로 농 악을 즐겼으며, 당제나 동제가 있을 때도 농악을 놀았다고 한다. 한편 인천광역시 남동구에서 조사된 농악인 경우, 정월에 지신밟기를 한 것으로 되어있다. 정월 대보름에 농악패가 농악을 치면서 집집마다 도는 지신밟기를 했다는 것이다. 농자천하지대본 기를 들고 집집을 돌면서 지신밟기를 하며 마을 기금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을왕리에서는 기꺾기 농악 이라 불리는 농악이 전승되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때만 해도 각 마을별로 농악대가 있어서 논 김맬 때 농악을 치는 것은 물론, 마을 대항 농악 경합이 성행했었다고 한다. 이때 깃대 꺾기 싸움이 벌어지는데, 주로 정초에서 보름 사이에 행했다. 농악 경합 은 마을 단위로 100여 명이 참여하는 동네의 큰 잔치였다고 한다. 을왕 리에서는 주로 남북리와 덕교리 농악대와 경합을 벌였다. 기뺏기 놀이 68 인천의 전통놀이
를 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마을끼리 협의를 거쳐 승낙을 받아야 했다. 넓 은 들에 모인 농악대들이 징을 두드리며 상대방에게 싸움을 걸면 상대 편 마을에서는 맞서 완력으로 대항할 것인지 아니면 항복을 할 것인지 를 의논한다. 도전해 온 상대 마을을 살펴보아 장정들의 완력이나 기량 등이 자신들보다 나아 보여 불리하다 판단되면 스스로 농자천하지대 본 이라 쓰인 깃대를 뉘어서 항복을 하며 싸움을 포기한다. 만약에 상대 를 힘으로 누를 승산이 있다 싶으면 농악대원들, 젊은 청년들이 나아가 상대 깃대를 눕히기 위해 밀고 당기는 힘겨루기가 벌어진다. 그러면 주 위에서는 농악을 치고 응원을 하면서 흥겨움을 더한다. 이렇게 상대편 의 깃대를 먼저 눕힌 편이 승리를 하게 되는 것이고, 진편은 음식을 내 어 이날 하루를 잘 놀게 되는 것이다. 전승 현황 조선의 향토오락 에 따르면, 강화와 부천 지역에서 농악을 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두 지역 모두에서 김매기철에 농민이 중심이 되 어 농악을 한다고 되어 있다. 영종도에서도 전래적인 농악이 있었던 것 이 확인되었다. 하음지 에는 강화군 하음면의 농악놀이가 소개되어 있 다. 을왕리에도 기꺾기 농악이 전승되었었다고 한다. 인천광역시 남동 구에서도 농악과 관련된 조사가 이루어졌다. 정월 대보름에 농악패가 농악을 치면서 집집마다 도는 지신밟기가 있었으나, 1980년대 이후 없 어졌다고 한다. 사람들이 타지로 다 빠져나가면서 농악대 구성이 어려 워진 때문이라 한다. 이전에는 농자천하지대본 기를 들고 집집을 돌 면서 지신밟기를 하며 마을 기금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남동구 장수 Ⅱ. 일상놀이 69
동 장자골의 경우 지금도 정월달과 7월 고사 때 동네 느티나무 앞에서 농악을 친다고 한다. 마을에 정우회와 장수농악회라는 두 개의 친목 농 악 조직이 있어 농악을 전승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관련) 문헌 무라야마 지준, 조선의 향토오락 (조선총독부, 1941). 鄭 昞 浩, 農 樂 ( 悅 話 堂, 1986). 하점면 하음지편찬위원회, 하음지 (1994) 인천광역시 인천대학교 지역사회연구소, 永 宗 龍 遊 民 俗 調 査 報 告 書 (1995). 김용덕, 한국민속문화대사전 상권(도서출판 창솔, 2004).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세시풍속사전 가을편(2006). 남동구20년사편찬위원회, 남동구 20년사 (인천광역시 남동구, 2010). 70 인천의 전통놀이
13 고누 놀이 명칭과 정의 땅이나 밭에 그린 판에 말을 움직여 상대편 말을 잡거 나 가두어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는 놀이. 전국적으로 행해지는 여름 고누놀이(김홍도의 고누놀이, 단원풍속도첩 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Ⅱ. 일상놀이 71
철 민속놀이이다. 주로 어린이들의 놀이이지만 어른들이 즐기기도 한 다. 고누는 지역에 따라 꼬누 고니 꼬니 꼰 꿘 등으로도 불리는 데, 이는 방언에 따른 이칭으로 뜻에는 차이가 없다. 전승 위치 고누의 경우 전국적으로 행해졌던 민속놀이이다. 조선의 향 토오락 에는 인천 지역의 강화에서 고누를 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고누 는 인천광역시 남동구 일대에서도 행해졌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유래와 역사 고누에 대한 어의( 語 義 )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견주다 또는 겨누다 라는 옛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와는 달 리 중국 소수 민족의 놀이인 루치나 몽골의 보거인지러거에서 어원을 찾으려는 시도도 있다. 루치와 보거인지러거에서 양편의 말을 각각 개 [ 狗 ]와 사슴[ 鹿 ]으로 부르는 점에 주목하여, 개와 사슴을 갖고 노는 놀이 라는 뜻의 구록( 狗 鹿 )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해석이다. 고누가 언제부터 놀이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몇 가지 유물 을 통해 연원이 오랜된 놀이였음을 추정할 수는 있다. 고누의 존재를 알 수 있는 최고의 유물은 북한 학계가 보고한 10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되 는 갑자이다. 이것은 황해도 봉천군 원산리 청자 가마터에서 수습된 것 으로 도자기를 만드는 데 쓰던 것인데, 여기에 참고누판이 뚜렷하게 그 려져 있다. 이 유물만으로 본다면 고누는 10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 는 오랜 역사를 가진 놀이가 된다. 72 인천의 전통놀이
내용 고누는 놀이 방법이 가장 단순한 우물고누(샘고누)를 비롯하여 밭 고누, 호박고누, 참고누(곤질고누), 네바퀴고누, 팔팔고누, 장수고누, 왕고누 등과 같은 다양한 놀이가 있다. 다양한 고누 방법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우물고누이며, 좀 더 놀이의 흥미를 더하여 즐길 수 있는 것이 참고누이다. 우물고누는 우물이라 불리는 장애물을 설정했는데, 이를 샘 또는 강 이라 하여 샘고누 혹은 강고누라 부르기도 한다. 놀이 방법은, 놀이자 가 각각 두 개의 말을 가지고 노는데 순서대로 한 칸[ 目 ]씩 이동하여 상대방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길을 막아야 한다. 물론 우물을 뛰어넘을 수 없다. 우물고누 혹은 샘고누보다 다소 복잡한 놀이 방법을 가진 것이 참고 누이다. 지역에 따라 곤질고누, 짤고누, 꽂을고누라 불리기도 한다. 놀 이 방법은, 놀이자가 순서에 따라 말 하나씩을 24개의 목에 놓아 나가 는데, 일직선 상에 종횡 혹은 사선으로 세 개가 한 줄이 되도록 한다. 세 개의 말이 한 줄이 되었을 경우 곤, 고니, 꼰이라 하여 상대의 말 하나를 집어낼 수 있다. 준비된 말을 다 놓았을 경우, 목에 놓인 말을 한 목씩 움 직이면서 곤을 만들어 나간다. 상대의 말이 2개가 되면 판이 마감된다. 경기도 지역의 경우 위에서 설명한 샘고누(우물고누)와 곤질고누(참 고누) 이외에도 사선고누(사목고누), 오선고누(오목고누), 육선고누(육 목고두) 등이 조사되었다. 전승 현황 조선의 향토오락 에는 인천 지역의 강화에서 고누놀이가 행 Ⅱ. 일상놀이 73
해진다고 기술되어 있다. 여름철에 어린이들이 중심이 되어 고누놀이를 했다고 한다. 조선의 향토오락 에는 강화의 고누놀이와 관련한 특별한 내용은 보고되지 않았다. 경기도 다른 지방과 같다는 언급으로 보아 경 기도 지역의 고누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남동구 20년사 에는 인천광역시 남동구 일대에서 고누를 했다고 전한다. 구체 적인 놀이 방법은 나와 있지 않지만, 일상적으로 고누를 했다고 언급하 고 있다. 참고(관련) 문헌 무라야마 지준, 조선의 향토오락 (조선총독부, 1941). 스튜어트 컬린, 윤광봉 역, 한국의 놀이 (열화당, 2003). 김광언, 동아시아의 놀이 (민속원, 2004).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세시풍속사전 여름편(2005). 남동구20년사편찬위원회, 남동구 20년사 (인천광역시 남동구, 2010). 74 인천의 전통놀이
14 천렵( 川 獵 ) 놀이 명칭과 정의 더위를 피하거나 여가를 즐기기 위하여 뜻이 맞는 사 람들끼리 냇가에서 고기를 잡으며 하루를 즐기는 놀이. 천렵은 봄이나 가을에도 즐기지만 여름철, 특히 삼복( 三 伏 ) 중에 주로 이루어진다. 천렵(김득신( 金 得 臣 )의 강변회음( 江 邊 會 飮 ), 간송미술관 소장) Ⅱ. 일상놀이 75
전승 위치 조선의 향토오락 에는 인천 지역의 강화와 부천에서 천렵을 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유래와 역사 천렵은 고대의 사냥과 고기잡이 습속이 후대에 여가를 즐 기는 풍속으로 변모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내용 뜻이 맞는 사람끼리 삼복 중에 냇물이나 강가에서 헤엄도 치고 그 물을 쳐 놓고 고기도 잡고, 그 잡은 고기를 솥에 걸어 놓고 매운탕을 끊 여 먹으며 하루를 즐긴다. 정학유( 丁 學 游 )의 농가월령가( 農 家 月 令 歌 )에 앞내에 물이 주니 천렵을 하여보세. 해 길고 잔풍( 殘 風 )하니 오늘 놀이 잘되겠다. 벽계수 백사장을 굽이굽이 찾아가니 수단화( 水 丹 花 ) 늦은 꽃 은 봄빛이 남았구나. 촉고[ 數 儉 ]를 둘러치고 은린옥척( 銀 鱗 玉 尺 ) 후려내 어 반석( 磐 石 )에 노구 걸고 솟구쳐 끊여내니 팔진미( 八 珍 味 ) 오후정( 五 候 鯖 )을 이 맛과 바꿀소냐. 하여 그 재미를 노래하고 있다. 전승 현황 조선의 향토오락 에서는 인천의 강화와 부천 지역에서 천렵 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름에 일반인이 천렵을 한다고 되어 있다. 강화도에서는 여름에 친구나 마을 사람들이 모여 투망 혹은 소쿠리를 가지고 냇가로 몰려가서 민물고기를 잡는다. 두레나 물을 품을 수 있는 도구를 가지고 가서 물고기를 잡아 매운탕을 만들어 농주를 마시면서 씨름도 하고 목욕도 하며 하루를 보낸다. 76 인천의 전통놀이
참고(관련) 문헌 무라야마 지준, 조선의 향토오락 (조선총독부, 1941). 張 籌 根, 韓 國 의 歲 時 風 俗 ( 螢 雪 出 版 社, 1984).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세시풍속사전 여름편(2005). Ⅱ. 일상놀이 77
15 풀싸움 놀이 명칭과 정의 풀잎이나 화초를 꺾어서 승부를 겨루는 놀이. 옛 문헌 에는 초전( 草 戰 ), 초희( 草 戱 ), 투초( 鬪 草 ), 교전희( 較 戰 戱 ) 등으로 기록 되어 있다. 풀싸움에 주로 이용되는 식물은 잔디, 자귀풀, 억새, 갈대, 질경이, 토끼풀, 제비꽃 등과 같은 산과 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풀이지 만, 더러는 잎사귀가 여럿 달린 나뭇잎이나 꽃망울을 이용하기도 한다. 전승 위치 조선의 향토오락 에는 인천 지역의 강화에서 풀싸움을 한다 고 기술되어 있다. 한국의 어촌민속지 에서도 강화의 풀싸움이 풀쌈 이라 해서 조사되었다. 내용 풀싸움은 지역에 따라 매우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그 대상 이 되는 풀도 백초( 百 草 )가 등장할 정도로 각양각색이다. 근래까지 아이 들 사이에 널리 전승되었던 풀싸움 놀이로는 물방울뺏기, 무늬맞추기, 잎사귀따기, 줄기끊기, 풀잎맞추기, 줄기 멀리 던지기, 많은 종류의 풀 뜯어오기, 꽃망울 따기, 풀이름 알아맞히기 등이 있다. 경기도의 경우 광주 지역에서 조사된 풀싸움이 조선의 향토오락 에서 비교적 자세하 78 인천의 전통놀이
게 조사되었다. 이에 따르면, 두 편으로 나뉘어, 모아온 풀의 가짓수가 많음을 겨루는데, 가능한 여러 가지 풀꽃을 모아서, 풀꽃 하나씩을 비 교하여 양쪽이 같은 것은 버리고 상대 쪽에 없는 풀꽃만을 세어 그 수가 많은 쪽이 이긴다. 한국의 어촌민속지 에는 풀쌈 이라 해서 강화도의 사례가 조사되었다. 이에 따르면, 아이들이 잔디나 마디가 있는 풀을 꺾 어서 끝에 맺히는 물방울 크기로 승부를 내는 놀이이다. 전승 현황 조선의 향토오락 에서 인천지역의 강화에서 풀싸움을 한다 고 기록되어 있다. 주로 여름철에 어린이들이 중심이 되어 풀싸움을 한 다고 되어 있다. 구체적인 놀이 방법은 기술되어 있지 않은데, 경기도 의 다른 지방과 같다 는 언급으로 보아 위에서 언급한 광주 지역의 방식 과 유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그 이외의 다양한 풀싸움 방식이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 한국의 어촌민속지 를 보면, 풀을 꺾 어서 끝에 맺히는 물방울 크기로 승부를 내는 풀쌈 이 강화도에서 조 사되었다. 참고(관련) 문헌 무라야마 지준, 조선의 향토오락 (조선총독부, 194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의 어촌민속지(Ⅲ) -인천광역시 강화군편-(1996).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한국 민속의 세계 5(2001). 김광언, 동아시아의 놀이 (민속원, 2004).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세시풍속사전 봄편(2005). Ⅱ. 일상놀이 79
16 제기차기 놀이 명칭과 정의 제기를 가지고 발 로 차는 놀이. 제기는 엽전이나 쇠 붙이에 얇고 질긴 종이나 천을 접어 서 싼 다음, 끝을 여러 갈래로 찢어 너풀거리게 한 놀이기구이다. 주로 겨울에서 정초에 걸쳐 어린이와 청 소년이 노는 놀이이다. 전승 위치 조선의 향토오락 과 한 국의 어촌민속지 에서는 인천 지역 의 강화와 부천에서 제기차기[ 打 毬 ] 를 한다고 기술되어 있으며, 하음 지 에는 강화군 하음면의 제기차기 제기차기(기산 김준근의 젹이차고, 기산 김준근 조선풍속도: 스왈른 수집본, 숭실대학교 한국기독 교박물관, 2008) 80 인천의 전통놀이
가 소개되어 있다. 또한 영종 용유민속조사보고서 에서는 영종도와 용유도에서의 제기차기가 조사되었다. 인천광역시 남동구 일대에서도 일상적으로 제기차기가 행해졌다고 한다. 유래와 역사 제기는 고대의 공차기인 축국( 蹴 鞠 )에서 비롯된 놀이이다. 제기 또는 제기차기라는 말도 축국을 우리말로 표현한 것이다. 원래를 공을 차는 축국을 조선 초기에는 뎌기 라고 했다가 18세기 이후 져 기 또는 젹이 를 거쳐 제기 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공을 제기로 사용 하다가, 공 이외에 새로이 건( 毽 ) 건자( 鞬 子 ) 척건자 같은 제기가 출 현하였다. 특히 척건자는 무거운 물체에 종이나 털을 엮어 만든 아동용 제기였다. 공을 쉽게 구하거나 만들 수 없었던 상황에서 아이들이 간단 하게 만들 수 있는 제기가 등장한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내기를 위한 엽전 제기가 등장하다가 근대 이후 쇠붙이에 플라스틱을 합쳐 만든 제품 이 사용되고 있다. 축국의 방식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공중으로 높이 차서 떨어뜨리지 않는 방식이고, 둘째는 땅에 구멍을 파놓고 공을 넣는 방식 이다. 셋째는 공문을 만들고 차 넣는 방식이 그것이다. 첫 번째가 주로 민간의 놀이로 행해졌다면, 두 번째와 세 번째의 방식은 주로 군사 훈련 의 일환으로 발달하였다. 제기차기는 이처럼 축국의 발달 과정에서 분 리되어 나온 놀이이다. 우리나라는 제기차기 방식이 주로 성행한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 고 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 모두 축국을 즐겼다는 기록이 확인되는데, 특 Ⅱ. 일상놀이 81
히 신라의 축국 기록에서 확인되는 놀이의 형태는 제기차기의 방식이었 던 것으로 짐작된다. 제기차기 방식의 축국이 왕실에서 민간에 이르기 까지 놀이문화로 성행했기 때문이다. 축국은 고려 때에 이르러 돼지 방 광으로 만든 기구( 氣 毬 )라고 불리는 공기공을 사용하였다. 고려 때까지 비교적 다양한 계층의 놀이였던 축국은 조선 시대에 들 어와 변화를 맞는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성리학 이념의 확산으로 인해 놀이가 곧 잡희( 雜 戱 )로 인식되면서 축국은 아이들의 놀이로 굳어졌다. 그런데 공을 구하기가 어렵게 되자 새로운 놀이 도구인 엽전 제기가 출 현하였다. 중종 22년(1527년) 최세진( 崔 世 珍 )이 편찬한 훈몽자회( 訓 蒙 字 會 ) 에 건 을 뎌기 건 이라 풀이하면서, 소아( 小 兒 )들이 차는 것으 로 민간에서는 척건자라 부른다. 고 설명하였다. 종래 죽방울이라고 불 리던 공[ 毬 ] 이외에 별도로 건 건자 척건자 같은 새로운 제기가 출현 한 것이다. 특히 천건자는 무거운 물체 위에 종이나 털을 엮어 만든 아 동용 제기였다. 그 결과 축국이라고 불리는 제기차기는 공을 이용한 방 식과 척건자를 이용한 방식 두 가지 형태로 발전해 나갔다. 제기차기는 조선 시대에 아동들의 놀이로 크게 유행하였다. 실제로 조선 시대 재상을 지낸 이항복( 李 恒 福 )이 어린 시절에 씨름과 축국을 좋 아했다는 기록이 있다. 제기차기가 아이들의 놀이로 발전한 사실은 19 세기에 편찬된 아희원람( 兒 戱 原 覽 ) 에서 축국, 곧 제기를 아이들의 놀 이로 소개한 데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제기차기는 어디에서나 아무 때나 가능했으나 주로 겨울에서 봄 사이 에 즐기는 놀이로 더 발전하였다. 추운 날씨에 집 밖에서 공을 차면서 82 인천의 전통놀이
땀을 내고 체력을 기르며 건강도 유지한 것이다. 이미 신라 때 김춘추와 김유신이 정월 오기일에 축국을 한 것도 그같은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 그래서 제기차기는 조선 후기에는 아예 겨울철 세시풍속으로 정착하였 다. 19세기 중엽에 편찬된 동국세시기( 東 國 歲 時 記 ) 에는 그 같은 사실 을 잘 말해준다. 당시 공기공에 꿩의 깃을 꽂아 만들었다고 해서 이를 축치구( 蹴 雉 毬 )라 불렀다. 조선 후기에는 청년들이 내기 축국을 자주 한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 다 보니 아예 엽전 제기가 만들어졌다. 소위 돈제기라고 불리는 엽전제 기는 내기 축국에 좋은 수단이자 상품이었던 셈이다. 제기차기가 전국 적으로 발달한 탓으로 그 칭호도 매우 많았다. 순조 때 편찬된 재물보 ( 才 物 譜 ) 에는 축국이 농주, 답국, 척국, 백타, 건자, 행두, 축융, 원사, 척구, 원정 따위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축국이 얼마나 성행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민간에서 성행한 제기차기는 근대 이후에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특히 제기차기는 석전( 石 戰 )과 함께 구한말 서양의 선교사들이 가장 신기해 한 풍경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다가 서양의 근대식 축구가 도입되면서 공을 이용한 제기차기 형식의 축국은 점차 사라져 갔다. 그 결과 돈 제기만 남 은 셈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제기라고 하면 엽전 제기를 생각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엽전 제기는 오늘날 전국적으로 제기라 부르지만, 평안도에 서는 테기 체기, 전라도에서는 재기, 제주도에서는 쪽기라고도 한다. 내용 오늘날 제기차기는 축국이 발전해오는 과정에서 공 대신 제기로 Ⅱ. 일상놀이 83
바뀐 형태이다. 제기는 구멍이 뚫린 엽전을 얇은 미농지( 美 濃 紙 )로 싸고 종이의 두 끝을 한 구멍의 같은 방향으로 꿰어서 그 끝을 갈래갈래 찢어 서 만든다. 헝겊에 흙이나 마른 말똥을 싸서 잡아매고 꿩의 꽁지깃을 꽂 아 만들기도 한다. 오늘날은 비닐로 된 상품을 많이 쓴다. 제기를 차는 방법에는 발들고 차기, 양발 차기, 외발 차기, 뒷발 차기 가 있다. 제기는 한 사람씩 차기도 하고 여러 사람이 모여서 마주 차기 도 한다. 보통 제기를 차는 방법은 한 번 차고 땅을 딛고 또 차고 땅을 딛는 방법, 두 발을 번갈아가며 차는 방법, 땅을 딛지 않고 계속 차는 방 법이 있다. 이 방법 중에서 어느 한 가지만을 미리 정해 차기도 하고, 위 의 세 가지를 모두 차서 합계를 내어 승부를 짓기도 한다. 진 쪽에서는 종들이기라는 벌칙을 받는다. 종들이기는 진 사람이 상대의 서너 걸음 앞에서 제기를 발 앞부리에 던지면, 이긴 사람은 이것을 앞으로 멀리 차 낸다. 진 쪽이 그것을 잡지 못하면 몇 번이고 반복해서 제기를 드려야 했다. 이긴 쪽에서 찬 제기를 잡히거나 헛발질을 하면 죽는데, 이때 진 쪽은 종의 입장에서 벗어나게 된다. 발로 차는 제기놀이는 남자들이 주로 놀았던데 비해, 여자들은 발로 차지 않고 두꺼운 책이나 딱딱한 받침(공책)을 양손에 들고 그 위에서 제 기를 위로 올려 높이 치면서 놀았다. 이와 같은 올려치는 제기 놀이는 두꺼운 책의 책장이 다 찢어지고 구멍이 팰 정도로 오래 놀았다고 한다. 전승 현황 조선의 향토오락 에는 인천 지역의 부천과 강화에서 제기차 기를 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부천의 경우, 11월에 어린이가 중심이 되 84 인천의 전통놀이
어 제기차기를 한다고 기록되었다. 강화에서는 가을, 겨울에 청소년이 중심이 되어 제기차기를 한다고 기록되었다. 강화사 에도 제기 차기가 조사되었는데, 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2명 이상이 노는 것이다. 놀이 방식은 가운데 구멍 뚫린 엽전( 葉 錢 )을 습자지( 習 字 紙 )나 한지( 韓 紙 )로 싸서 구멍으로 나온 종이를 7~8가닥쯤 되게 술을 만들어 차는 것 이다. 먼저 가위, 바위, 보 를 하여 이긴 사람부터 시작하는데, 오른쪽 발의 안 가장이로 차고 받으면서 수를 세어 많이 차 받은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차 받다가 제기를 땅에 떨어뜨리면 상대방이 차 받는다. 제기차 기는 영종도와 용유도, 그리고 남동구 일대에서도 조사되었다. 참고(관련) 문헌 무라야마 지준, 조선의 향토오락 (조선총독부, 1941). 강화사편찬위원회, 강화사 (강화문화원, 1976). 인천광역시 인천대학교 지역사회연구소, 永 宗 龍 遊 民 俗 調 査 報 告 書 (1995).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의 어촌민속지(Ⅲ) -인천광역시 강화군 편-(1996). 스튜어트 컬린, 윤광봉 역, 한국의 놀이 (열화당, 2003). 김광언, 동아시아의 놀이 (민속원, 2004). 조흥윤, 민속에 대한 기산의 지극한 관심 (민속원, 2004).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세시풍속사전 겨울편(2006). 남동구20년사편찬위원회, 남동구 20년사 (인천광역시 남동구, 2010). Ⅱ. 일상놀이 85
17 약수놀이 놀이 명칭과 정의 유명한 약수가 있는 곳에 가서 더위를 피하며, 음식을 먹으면서 악기 등을 연주하면서 노는 것. 전승 위치 조선의 향토오락 에는 인천 지역의 강화와 부천에서 약수놀 이를 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내용 조선의 향토오락 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인천 지역의 강화와 부 천에서 약수놀이를 한다고 한다. 부천의 경우 일반인들이 봄에서 가 을에 걸쳐 약수가 있는 곳에 가서 더위를 피하며, 음식을 먹으면서 악 기 등을 연주하며 논다 고 기록되었다. 강화의 경우에는 한여름에 부녀 자들이 중심이 되어 약수놀이를 한다고 기록되었다. 그 구체적인 내용 은 언급되지 않고 경기도의 다른 지방과 같다 고만 언급하고 있다. 이 에 따라 경기도의 다른 지방의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고양 지역의 경우, 한여름에 부인들이 중심이 되어 옛부터 유명한 약수터를 찾아가 피서, 유람, 치료를 겸해서 하루 또는 여러 날을 놀면서 지낸다 고 조사되었다. 양주에서 역시 8월에 여자들 여럿이 어울려서 음식을 86 인천의 전통놀이
만들어 가지고 유명한 약수터를 찾아가서, 약수로 머리를 감거나 목욕 을 하면서 하루 종일 즐겁게 논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건 대 강화 지역 역시 고양이나 양주의 사례와 큰 차이는 없는 것으로 보인 다. 부녀자들이 유명한 약수터를 찾아가서 더위도 피하고 음식도 나누 어 먹으며 즐겁게 놀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전승 현황 조선의 향토오락 에서 인천 지역의 부천과 강화에서 약수놀 이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부천의 경우 봄에서 가을까지 일반인들이 약수가 있는 곳에서 음식을 나누어 먹고 놀았으며, 강화에서는 부녀자 들 중심으로 한 여름에 유명한 약수터에서 약수놀이를 했다는 것이다. 특기 사항 부천 지역의 약수놀이인 경우, 경기도에서도 독특한 양상을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그 놀이 시기가 경기도의 다른 지역과는 달 리 봄에서 가을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그 놀이의 주체 역시 부녀자만이 아니라 일반인으로 확대되어 있다. 그 놀이 방법 역시 비교적 구체적으 로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부천 지역에서는 비교적 성행하였던 놀 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관련) 문헌 무라야마 지준, 조선의 향토오락 (조선총독부, 1941). Ⅱ. 일상놀이 87
18 망둥이 낚시 놀이 명칭과 정의 늦여름부터 가을에 염전에 서식하는 망둥이를 낚는 것을 말한다. 전승 위치 조선의 향토오락 에서 부천 지역에서 행해진다고 기술되어 있다. 내용 늦여름부터 가을에 염전에 서식하는 망둥이를 낚는 놀이이다. 일 반인이 중심이 돼서 행하는 놀이로 조사되어 있다. 특기 사항 조선의 향토오락 에서 유일하게 부천에서만 행해진다고 기 술된 놀이이다. 참고(관련) 문헌 무라야마 지준, 조선의 향토오락 (조선총독부, 1941). 88 인천의 전통놀이
19 버섯따기 놀이 명칭과 정의 가을에 산림에서 여러 가지 버섯을 따며 노는 놀이. 전승 위치 조선의 향토오락 에서 부천 지역에서 행해진다고 조사되었다. 내용 가을에 산림에서 여러 가지 버섯을 따며 노는 놀이이다. 일반인이 중심이 돼서 행하는 놀이로 조사되어 있다. 전승 현황 조선의 향토오락 에 부천에서 버섯따기를 한다고 조사되었 다. 가을에 일반인들이 산림에서 여러 가지 버섯을 딴다고 한다. 특기 사항 조선의 향토오락 에서 유일하게 부천에서만 조사된 놀이이다. 참고(관련) 문헌 무라야마 지준, 조선의 향토오락 (조선총독부, 1941). Ⅱ. 일상놀이 89
20 산놀이 놀이 명칭과 정의 산으로 가서 풍경을 감상하며 노는 것을 산놀이 또는 유산( 遊 山 )이라고 한다. 전승 위치 조선의 향토오락 에는 부천 지역에서 행해진다고 기술되어 있다. 내용 조선의 향토오락 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인천 지역의 부천에서 산놀이를 한다고 되어있다. 부천 지역에서 여름에 일반인들이 산놀이를 한다는 것이다. 산놀이의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되지 않고, 경기도의 다른 지방과 같다 고만 되어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 경기도 다른 지역의 산놀이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포에서는 봄에 일반인들이 산에 올라가서 꽃을 감상한다. 농악을 연주하며, 음식을 즐기면서 논다 고 한다. 고양에서는 남자들이 중심이 되어 산과 들에 꽃이 필 무렵, 마을 전체가 산놀이 비용을 모은다. 모두 가 같은 모양의 옷을 입고, 악대를 앞세워서 젊은이가 앞에, 노인들이 뒤를 이어서 행렬한다. 북한산 봉우리들을 돌면서 2~3일 동안, 산중의 90 인천의 전통놀이
절이나 암자에 머물며 가지고 온 음식을 먹으며 노래를 부르고 논다 고 기록되어 있다. 양주에서는 봄에 일반인들이 꽃놀이를 겸하여 등산한 다. 산이나 들의 경치 좋은 곳에서 주연을 베풀어 즐긴다 고 했다. 포천 에서는 봄, 가을로 일반인들이 산놀이를 즐기는데, 봄에는 꽃, 가을에 는 단풍을 감상하면서 하루를 즐긴다 고 조사되었다. 양평에서는 봄에 청년들이 근처의 높은 산에 술과 안주를 가지고 올라가서 논다 고 되어 있으며, 시흥에서는 봄에 마을 청년들이 서로 줄지어 농악을 연주하면 서 산에 올라 음식을 함께 먹으며 유쾌하게 논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경기 지방의 여러 산놀이 양상을 참고해 본다면, 부천 지역 역 시 인근 산에서 산의 풍경을 감상하며 놀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그 시기가 경기도의 다른 지역과 달리 여름이라는 점이 독특하다. 전승 현황 조선의 향토오락 에는 인천 지역의 부천에서 산놀이를 한다 고 기술되어 있다. 부천에서 여름에 일반인들이 산놀이를 한다는 것이다. 특기 사항 보통 산놀이는 봄에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기도의 여러 지역 역시 봄에 산놀이를 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하지만 부천의 경우 여름에 한다고 조사되었다. 다른 지역과 달리 여름에 산놀이를 한다는 점이 독특하다. 참고(관련) 문헌 무라야마 지준, 조선의 향토오락 (조선총독부, 1941). Ⅱ. 일상놀이 91
21 닭잡기 놀이 명칭과 정의 닭과 닭을 잡는 동물을 설정하여 닭을 쫓는 과정을 흉 내 내는 놀이. 여러 사람이 둥그렇게 원을 만들어 그 안에 닭으로 설정 된 사람이 자리잡게 하고, 원 밖에 닭을 잡는 동물로 설정된 사람이 닭 으로 설정된 사람을 쫓으며 잡으려하는 놀이를 말한다. 전승 위치 조선의 향토오락 에는 인천 지역의 강화에서 닭잡기 놀이를 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내용 조선의 향토오락 에 기술된 바에 따르면, 강화에서 닭잡기 놀이 를 했다고 한다. 자세한 놀이 방법은 경기도 다른 지방과 같다 고 되어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 다른 지방의 놀이 방법을 본다면, 안성과 용인 그리고 광주 지역이 주목된다. 안성 지방의 경우, 정월 보름날 여자들이 한다고 하는데, 손을 서로 잡아서 만든 원 가운데 있는 닭을 밖에 있는 솔개가 잡으려고 한다는 놀 이 라고 조사되어 있다. 용인 지방의 경우는 보다 자세하게 조사되어 있 다. 봄, 가을 달밤에 어린이들이 중심이 되어 노는 놀이라고 한다. 그 92 인천의 전통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