光 州 Rites of passage Gangwon-do 홍 천 군 의 일 생 의 례 Hongcheon
洪 川 홍천군의 일생의례 Ⅰ. 출산 의례 出 産 儀 禮 가. 기자 祈 子 지금 70~80대 노인들은 젊었을 때 혼인을 하면 저절로 아이가 생기고, 낳게 되는 것으로 알았다. 그리고 대부분 혼인한 후에 쉽게 임신하고 출산을 하여 부모가 되었다. 하지만 혼인을 하고 몇 해가 지나도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서둘러 자식을 갖기 위해 여러 노력을 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노력은 아이를 원하는 여자뿐 아니라 그녀의 시 어머니에 의해서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저기에서 들었던 여러 가지 방법 을 통해 임신을 할 때까지 노력한다. 이중 아들을 갖고자 하는 방법은 더욱 구체적 이고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실제로 마을에서 들을 수 있었던 기자 행위는 대부분 아들을 얻고자 할 때 행해졌던 것들이다. 아들을 낳고자 하는 이러한 노력 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들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노인들은 그래도 결국 아들은 지 팔자에 있어야 가질 수 있는 거 라고 말씀하신다. 치성 致 誠 아들을 빌기 위해 인근에 소문난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린다. 동면에는 천년 고찰 인 수타사( 壽 陀 寺 )가 자리하고 있어, 인근에서 아들을 원하는 부인들이 많이 다녔다. 이곳에서 스님과 함께 백일기도를 드리거나 또는 홀로 다니며 아들을 빌었다. 절 외에도 산에 가서 치성을 드린다. 깊은 산으로 들어가 마음이 닿는 곳을 정하 거나 특별히 나무를 정해 치성을 드린다. 아들을 원하는 부인은 좋은 날을 정해 아 침 일찍 깨끗이 씻고 산으로 향한다. 가는 길에 마음에 드는 돌을 하나 주워서 간다. 774 한국인의 일생의례
깊은 산 속에 적당한 장소를 찾으면 그곳에 작은 돌탑을 쌓고 맨 위에 길에서 주워 온 돌을 올린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참을 빌고 내려온다. 이렇게 정한 곳에서 백일 기도를 드리면 아들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치성을 드리기 위해 나무를 정할 때는 깊은 산속에 물이 있는 주변의 나무가 좋다. 아들을 원하는 내외가 함께 가는 것이 좋고, 집에서 실과 창호지, 쌀을 준비해 간다. 적당한 나무를 발견하면 길게 접은 창호지를 실로 나무에 묶는다. 그리고 가지고 간 쌀로 메를 지어 올리고 정성을 드린다. 이는 삼짇날이나 초파일에 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나무를 정하면 아들을 낳은 후에도 일 년에 한번씩 가서 정성을 드린다. 그러나 근래에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러한 일들이 없 어졌다고 한다. 주술 呪 術 아들을 갖고자 할 때는 아들이 많은 집에 가서 몰래 바가지를 훔쳐 와 사용한다. 이왕이면 푸른색을 띠고 있는 것이 좋다. 이렇게 한 후에 만약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들의 백일 떡을 훔쳐 온 바가지에 담아 주인이 모르게 살짝 되돌려 준다. 이 외에 작두의 날과 손잡이를 연결하는 쇠를 베개 속에 넣어 사용한다. 이는 아들을 낳고 자 하는 사람의 주변 사람이 몰래 해 주어야 효과가 있다. 또 처음으로 장이 서는 곳 을 찾아가 그곳에서 팬티를 사서 입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하면 아들을 낳는 데 효험이 있다고 전한다. 아들을 낳기 위해 무당을 찾기도 한다. 무당은 가장 흔한 방법으로 부적을 써 준다. 부적을 몸에 지니고 다니도록 하거나 삼거리에 있는 나무에 걸어 놓도록 시킨다. 또는 개울에 가서 정성을 드리도록 시키기도 하는데, 이를 물제사 라고 한다. 별다 른 제물 없이 물이 좋은 곳을 찾아 메를 지어 올리고 정성을 드리면 된다. 나. 산전 産 前 태몽 및 태아의 성별 임신이 확인될 즈음 본인, 가족 또는 가까운 이웃 사람이 태몽을 꾼다. 꿈 중에 강원도 홍천군 775
유독 잊혀지지 않고, 열매를 따거나 주워서 집으로 가져오는 꿈을 꾸면 태몽이라 여 긴다. 짐승을 보아도 태몽인데, 그 짐승이 품에 들어오거나 집으로 들어오는 꿈이 어야 한다. 태몽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를 가지고 태아의 성별을 짐작한다. 꿈이 기억에 선명 하고 길( 吉 )한 것으로 여겨지면 태아가 아들이라 생각하고, 시시하고 별것 아닌 것 같으면 딸이라 여겼다. 과일을 따더라도 꼭지가 있고, 잘 익은 것이면 아들이다. 하 지만 꼭지가 떨어지고, 설익은 것은 딸이다. 밤을 줍더라도 잘 익은 것을 주우면 아 들이고, 밤송이를 주우면 딸이다. 이 외에도 호랑이, 산토끼와 같이 산에서 사는 짐 승을 보면 아들을 낳을 것으로 여기고 실, 미영보댕이[물레 잣는 실] 같은 것을 보면 딸을 낳을 것으로 여긴다. 태아의 성별은 임신부의 배 모양과 태아가 노는 모습을 가지고 살피기도 한다. 임신부의 배꼽이 안으로 쏙 들어가고, 배 모양이 가슴 아래가 톡 불러 오르고 허리 가 두루뭉술하면 아들이다. 반대로 임신부의 배꼽이 위로 톡 튀어나오고, 배 모양이 아래로 쳐진 상태에서 볼록 튀어 나오면 딸이다. 아들인 태아는 여섯 달부터 놀기 시 작하여 가끔 움직이며, 여아는 다섯 달부터 방정맞게 놀기 시작한다. 또 위 형제가 하는 행동을 보고 동생의 성별을 가늠하기도 한다. 아이에게 칼자 루와 방망이를 동시에 줘 본다. 아이가 방망이를 먼저 잡으면 남동생을 볼 것이고, 칼자루를 잡으면 여동생을 볼 것이라 여긴다. 또 아이가 어른들 무릎에 앉을 때 달 려오면서 정면으로 안기면 여동생을 보고, 달려오다가 바로 앞에서 획 돌아서 앉으 면 남동생을 본다고 한다. 태중 금기 胎 中 禁 忌 임신을 하면 이것저것 하지 말고, 먹지 말아야 할 것들이 많다. 하지만 실제로 먹 을 것이 풍부하지 않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임신부라고 하여 음식이나 행동을 가리 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곳 없이 건강한 아이를 낳기 위해 가릴 수 있는 것들은 가렸다고 한다. 임신을 하면 가장 먼저 음식을 함부로 먹지 않았다. 쉰 음식이나 짠 음식은 되도 록 먹지 않는다. 임신을 한 상태에서 이런 음식을 많이 먹으면 나중에 아이가 태어 나서 열이 많이 날 수도 있다. 또 음식의 끝 부분은 먹지 않는다. 이왕이면 가운데 좋 776 한국인의 일생의례
은 것을 먹어야 아이가 바르게 자란다고 여겼다. 특히 임신부는 뼈가 없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오징어, 낙지, 버섯 같은 것을 먹지 않는다. 태아의 뼈가 제대로 생기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닭고기를 먹을 때 그 뼈는 먹지 않는데 아이가 태어 난 후 뼈가 살을 뚫고 튀어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오리고기도 먹지 않는다. 오리고 기를 먹으면 손가락이 붙은 아이가 태어난다. 임신부는 불구경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만약 그리 하면 나중에 아이가 꼭 한번 은 불에 덴다고 한다. 또 절구공이나 체를 넘지 않도록 한다. 체를 넘으면 열한 달이 되어야 출산을 하게 되고, 절구공이를 넘었는데 아들을 낳게 되면 아이의 성기에 문 제가 생긴다. 그리고 나무에 달린 과일을 따지 않는다. 그러면 과일나무의 원망이 태아에게 미치게 되는데, 그 나무가 죽어야만 아이에게 해가 미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임신부가 직접 과일을 따는 일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산달[ 産 月 ]에는 임신부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도 조심해야 한다. 보강지[부 뚜막] 를 고치지 않고,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보강지를 고치면 허청구[언청이] 를 낳고, 개고기를 먹으면 부정이 타서 아이가 개 시늉을 하고 심하면 죽기까지 한다. 그리고 상가( 喪 家 )에도 가지 않는다. 유산 流 産 방지 및 유산법 임신부의 자궁이 약하면 유산이 쉽게 된다. 또 첫아이는 유산이 잘 되므로 특히 더 조심해야 한다. 산달이 되지 않았는데 배가 아프면 서둘러 은반지를 삶아 그 물을 마신다. 아이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데 효과가 있다. 마찬가지로 동곳이나 호박죔 살이[호박넝쿨] 삶은 물을 마시기도 한다. 또는 밀가루를 물에 탄 밀풀을 먹는다. 하지만 유산은 순식간에 된다고 한다. 수하리 한 제보자는 임신을 하고 물을 길 어 오는데 물동이를 머리에 인 상태에서 걷다가 순간 쿵 하고 발을 디뎠다. 별다른 생각 없이 하루 일을 마치고 밤에 자는데 갑자기 배가 아파오기 시작하더니 유산을 했다. 유산을 한 임신부는 몸의 상태가 출산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몸조리를 더 잘해야 한다. 미역국도 많이 끓여 먹고, 잘 쉬어야 한다. 그리고 유산한 아이의 시 신을 잘 처리한다. 아무 곳에나 묻으면 또다시 유산을 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집 에서 평상시 설거지물을 버리는 곳에다 묻는 것이 탈이 없다. 반대로 낙태를 원할 때 는 담뱃잎을 태워서 그 재를 물에 타 마신다. 또는 민들레를 찧어서 즙을 내 마신다. 강원도 홍천군 777
다. 해산 解 産 해산 준비 산달이 되면 산모와 아이를 위해 준비를 한다. 우선 산모가 출산 후 끓여 먹을 미 역을 장에서 미리 사다 놓는다. 이를 해산미역 이라고 한다. 해산미역은 한 오리[뭇] 또는 세 오리를 사서 짝을 맞추지 않는다. 또 중간을 접지 않고 길게 그대로 가지고 와서 방 안의 시렁 같은 높은 곳에 둔다. 해산미역을 산모가 먹기 전에 누구든 끊어 먹으면 아이가 태어나서 사람들을 잘 문다고 한다. 이 외에도 아이가 처음 입을 배 냇저고리, 베개, 이불 등을 만들어 놓는다. 이는 첫아이일 때 주로 만들고, 둘째부터 는 형이 쓰던 것을 잘 두었다가 사용한다. 잘사는 집에서는 소청을 한 필 끊어서 기 저귀를 미리 만들어 놓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헌 옷가지를 가지고 아이 의 기저귀를 만들었다. 이 또한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산실 産 室 출산을 하려면 태아가 배 속에서 방향을 틀어 머리를 아래쪽으로 향해야 하는데, 이때 임신부는 통증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통증이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나타나기 시작하면 임신부는 사용하던 방을 정리하고 아이 낳을 준비를 한다. 방바닥이 피에 젖지 않도록 자리를 깔고, 태를 자르기 위해 가위와 실, 아이를 닦기 위해 물과 수 건 등을 챙긴다. 지금 노인들의 전( 前 ) 세대 때에는 방바닥에 짚을 깔았으나, 지금 70~80대 노인들은 지직[기직] 이나 비닐을 깔고 아이를 낳았다. 평소 사용하던 지직 을 깔고, 후에 태와 함께 태운다. 만약 차를 타고 가다가 출산을 하면 차 주인에게 길( 吉 )하다 하여, 차 주인이 산 모에게 태어난 아이에게 필요한 물건이나 미역을 구입해 주기도 하였다. 산모 産 母 와 산파 産 婆 예전 어른들은 아이를 낳을 때 사잣밥을 이마에 쳐 대야 아를 낳는다. 고 하였다. 출산하는 일이 너무 고통스러워 죽음 직전까지 갔다 와야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여 겼던 것이다. 예전에는 모두 집에서 출산을 하였기 때문에 따로 산파를 부르는 경우는 드물었다. 778 한국인의 일생의례
안산법 배가 아파오기 시작하면 해산 직전에 먼저 이슬이 비친다. 이때 이슬이 하얀색 이면 아들이고, 빨간색이면 딸이 태어날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슬이 비쳐도 이 삼 일 후에 출산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이슬이 비치고 모래잿물[양수] 이 터져 나오 면 아이가 곧이어 나오게 된다. 그런데 모래잿물이 터졌는데도 아이가 나오지 않으 면 산모가 고생을 한다. 출산이 더뎌지면 시어머니가 소당[솥뚜껑] 을 들고 뒤껏[뒤란] 으로 가서 얼른 나와라, 얼른 나와라. 라고 말하며 왔다 갔다 한다. 아니면 구들[방] 에 깨끗한 물을 한 그릇 차리고 삼신께 순산하게 해 달라고 빈다. 또 마을에 출산을 쉽게 잘 하는 여 자의 치마를 얻어다가 산모에게 입힌다. 후산이 잘 되지 않을 때는 산모가 모말을 깔고 앉는데, 모말 안에는 쥐가 파낸 흙을 담아야 한다. 출산을 시작하면 이웃사람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심한다. 출산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면 아이가 더디게 나오기 때문이다. 태 胎 의 처리 아이가 태어나면 제일 먼저 태를 자르는데 이를 삼 가른다. 고도 한다. 보통은 자 를 곳에 있는 피를 세 번 훑어 내고 실로 아이 쪽과 엄마 쪽을 동친다[묶는다]. 그런 데 동면 성수리의 한 제보자는 첫아이의 태를 자를 때 피를 훑지 않아야 한다고 말 한다. 처음 엄마의 문을 열고 나온 아이의 태를 훑으면 아이가 자라면서 열이 자주 나기 때문이다. 태 양쪽을 동치면 그 가운데를 가위로 자른다. 가위 대신 낫으로 자 르면 아이의 명이 길어진다 하여 일부러 낫을 이용하기도 한다. 또 아들을 낳으면 낫으로 자르고 딸을 낳으면 가위로 자르기도 한다. 태를 자르는 위치는 아이를 기준으로 하는데 아이의 무릎까지 태를 남기고 자른다. 만약 이보다 더 짧게 남기면 아이가 오줌을 너무 자주 눈다고 한다. 태는 태반과 함께 출산 후 곧바로 태운다. 주로 아이의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방 위를 보아 손 없는 곳에서 태운다. 손은 1일부터 동쪽에서 생겨 이틀 단위로 움직 인다. 1 2일에는 동쪽에, 3 4일에는 남쪽에, 5 6일에는 서쪽에, 7 8일에는 이동 하다가 사라진다. 그래서 9 10일에는 손이 없다. 따로 방향을 가리지 않고자 할 때 는 첫국밥을 끓이는 아궁이에 넣어 태우면 된다. 태를 태울 때는 다 탈 때까지 잘 지 강원도 홍천군 779
켜야 한다. 태가 폐병에 약이 된다고 하여, 이를 훔쳐가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이의 배꼽에 붙어 있는 태는 일주일 정도 지나면 말라 떨어진다. 이를 잘 보관 해 두었다가 후에 아이가 태열이 나거나 볼거리를 할 때 약재로 사용한다. 산시 産 時 아이는 띠와 시를 잘 타고 나야 팔자가 편하다. 띠와 상관없이 점심 먹는 시간에 태어난 아이는 모두 좋다. 하지만 호랑이와 쥐띠는 그들이 활동하는 시간인 밤에 태 어나는 것이 좋고 닭과 뱀띠, 말띠는 낮이 좋다. 또 해가 뜨는 시간에 태어나는 아이 들은 명이 길고, 해가 지는 시간에 태어나는 아이들은 명이 짧다고 여긴다. 그리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은 곡소리가 나는 날이라 하여 이날 태어나는 것을 좋지 않게 여 긴다. 옛날에는 대부분 삼년상을 지내서 초하루와 보름에는 여기저기서 제사를 지 내며 곡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첫국밥 산모는 출산 후 기운을 차리면 첫국밥을 먹는다. 첫국밥에 내는 미역국은 기름 간도 하지 않고, 쌀뜨물이 아닌 맑은 물로 끓인다. 첫국밥은 삼신께 올리지 않고 산 모가 먼저 먹기도 한다. 금줄 아이가 태어나면 부정을 막기 위해서 금줄을 친다. 아이의 조부모나 아버지는 왼 새끼로 꼰 짚으로 금줄을 만든다. 이때 태어난 아이의 성별에 따라 금줄에 끼우는 것 이 달라진다. 아들이 태어났으면 고추와 솔가지, 숯을 끼고, 딸이 태어났으면 솔가지 와 숯만 끼운다. 고추를 일부러 세 개 끼우는 집도 있고, 숯을 아예 끼지 않는 집도 있 다. 숯이 까맣기 때문에 아이가 숯처럼 흐리멍덩해질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금줄은 보통 일주일을 쳐 두었으며, 간혹 이주일을 치기도 한다. 금줄을 걷어 내 면 둘둘 말아서 대문이나 나무에 걸어 둔다. 금줄이 쳐져 있으면 외부 사람들은 되도록 그 집 출입을 삼간다. 특히 부정하다 고 여겨지는 사람은 절대 들어가지 않는다. 또한 집 안에서도 부정한 일을 하지 않 는다. 살생을 하지 않고, 기름진 음식도 만들어 먹지 않는다. 만약 금줄이 쳐져 있는 780 한국인의 일생의례
기간에 집안에서 기름질을 하여 음식을 하면 아이의 얼굴이 울긋불긋해져 지름꽃[ 기름꽃] 이 핀다고 한다. 예전에는 딸보다 아들을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딸을 낳으면 아예 금줄을 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또는 금줄 대신 그냥 소나무 아지[잔가지] 를 하나 뚝 잘라다가 대문 한 쪽에 걸쳐 두기도 하였다. 라. 산후 産 後 삼신상[ 産 神 床 ] 아이가 태어나고 삼 일째 되는 날은 삼 나가는 날 이다. 삼신이 나가는 날인지, 태를 태우는 날이라 삼 나가는 날이라고 하는지 구체적으로 그 내용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이날은 삼이 나가는 날이기 때문에 삼신께 상을 차린다. 밥과 미역국, 물을 한 그릇씩 차려 놓는다. 산실의 윗목께 또는 눕혀 놓은 아이의 머리 위에 상을 차린다. 지직이나 산모의 속우티[속바지] 를 깔고 차린다. 또는 아무것도 깔지 않고 작은 상 에 차리기도 한다. 홍천 지역에서는 삼신이 특히 두부를 좋아한다고 해서 삼신상을 잘 차리고자 하면 두부를 한 판 해서 그대로 올렸다. 삼신께 올린 두부는 식구들이 먹을 때 칼을 대지 않고 수저로 뚝뚝 떼어 먹는다. 삼신상에 올렸던 국과 밥을 말아 태어난 아이의 위 형제에게 먼저 먹이면 형이 동생을 시샘하지 않는다고 한다. 삼신상을 올리고 나면 산모는 비로소 목욕을 할 수 있다. 그전까지는 그냥 간단 히 씻는 정도만 하였다. 산모는 깨끗이 씻고 나면 이후 집안일을 시작한다. 몸조리 1950년대에는 대부분 3일 정도 몸조리를 하고 집안일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3일 을 채 하지 못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몸조리를 할 때는 산실에서 가능한 한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산모는 하루에 세 끼와 그 사이 참을 챙겨 먹는다. 먹는 거라고 해 봐 야 미역국과 밥이 다이지만 그래도 잘 먹어야 서둘러 기운을 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았더라도 개고기는 한 달 정도 먹지 않는 것이 좋다. 또 호박을 먹지 않는 데, 산모가 몸이 약해진 상태에서 호박을 먹으면 이가 빠지기 때문이다. 강원도 홍천군 781
수유 授 乳 산모는 출산하고 3일 정도 지나면 젖이 돌기 시작한다. 그전에 아이가 울면 빈 젖 을 물리거나, 설탕 탄 물을 먹인다. 처음 젖을 물릴 때 영사[경면주사] 를 물에 개어서 아이의 입에 먼저 발라 주면 아이가 자라면서 경기를 하지 않는다. 마. 육아 育 兒 아기의 옷 아이의 배냇저고리는 할머니가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과거에는 주로 할머니가 아이를 돌보고 엄마는 집안일을 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배냇저고리에는 동정과 고름, 단추를 달지 않는다. 고름 대신 실타래를 사용해 옷을 여미어 주는데, 실처럼 명이 길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 배냇저고리는 아이의 엄마가 혼인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해 손에 끼웠던 긴 수 건으로 만들어 주면 좋다. 아니면 융이나 명주를 구입해서 만든다. 융을 사용하는 것은 집안 형편이 넉넉한 사람이나 가능했기 때문에 매우 드물었다. 더러 새 천을 구하기 어려우면 할아버지가 입었던 헌 옷으로 만들어 준다. 기저귀도 천을 구해 만 들어 주었지만 형편이 안 되면 기저귀 대신 밑포대기[요] 만 하나 만들어서 아이를 눕혀 놓았다. 배냇저고리는 잘 두었다가 아이가 커서 중요한 시험을 보러 갈 때 몰래 넣어 주 면 효험이 있다고 한다. 작명 作 名 아들을 낳았을 때는 신경 써서 이름을 짓는다.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집안의 항 렬을 따라 이름을 짓는가 하면, 전문으로 이름을 짓는 사람을 찾아 돈을 내고 좋은 이름을 짓기도 한다. 하지만 딸이 태어나면 이름을 짓는 데 신경을 덜 쓴다. 심지어 딸이 많을 경우에는 돌이 되도록 이름을 지어 주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또는 태어 난 딸이 남동생을 봤으면 하는 바람에서 여자아이의 이름을 남자 이름으로 지어 부 르기도 하였다. 어렸을 때는 정식의 이름을 지어 부르지 않고 그냥 편히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782 한국인의 일생의례
예를 들어 잿간[화장실] 에서 태어났다고 재둥이 라고 부르거나, 여자아이라고 햇 간낸이 라고 부르는 것 등이다. 목욕 손발톱 두발 頭 髮 처리 우선 아기가 태어나면 물수건으로 대충 닦는다. 그리고 3일이 지난 후에야 비로 소 아이를 물로 닦는다. 아이를 씻을 때 한번 위에서부터 씻기 시작하였으면 다음 에 씻을 때는 아래에서부터 씻기기 시작한다. 그래야 아이의 몸에 살이 골고루 붙 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아기를 위한 잔치 아이가 태어난 지 백일이 되면 백일잔치를 하고, 만 일 년이 되면 돌잔치를 한다. 백일에는 백설기를 하는데, 이를 백 명이 나누어 먹으면 아이가 명이 길어진다고 여 겨 주로 손이 귀한 집에서 그렇게 했다. 돌에는 백설기 외에도 형편이 되는 대로 수 수경단, 송편, 찹쌀경단 등을 더 해서 상을 차린다. 특히 수수경단은 열 살이 될 때까 지 생일에 아이에게 해 주면 좋다고 하여 생일상에 빠지지 않았다. 백일이나 돌에 떡 을 잘 얻어먹지 못한 아이는 크면서 잘 넘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이가 자 꾸 넘어지면 백일 떡을 못 얻어 먹었나, 애가 왜 이리 잘 넘어져. 소리를 심심찮게 했다. 특히 돌상에는 삼신이 좋아하는 두부를 만들어 올리기도 한다. 이는 삼신상에 올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칼을 대지 않고, 만든 것을 그대로 올린다. 또 돌상에는 아 이가 장차 어떻게 자랄 것인지를 점쳐 보기 위해 돌잡이를 한다. 돈, 실, 연필, 책 등 을 놓고 아이가 돈을 집으면 부자가 될 것이고, 실을 집으면 명이 길 것이고, 연필이 나 책을 집으면 공부를 잘 할 것이라고 여긴다. 1950년대 후반만 하여도 집에서 돌상을 받는 아이 의 사진을 찍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사진기가 흔 하지 않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아이의 사진을 찍고 싶 어도 맘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돈도 있어야 하지만, 일부러 장날 아이를 데리고 나가 사진1. 남면 남노일리 황인선씨 아들 돌사진 (약 1958년경) 야 했고, 또 시어른들의 허락을 받아야 할 수 있는 일 이었다. 강원도 홍천군 783
첫나들이 아이의 첫 외출은 대부분 외가에 가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바깥출입을 하는 것 이라 외가에 간 아이들은 잘 울고, 아프다고 한다. 그래서 집에서 나갈 때 부뚜막에 걸려 있는 솥의 거멍[그을음] 을 아이의 이마에 칠한다. 그러면 아이가 아프지 않다 고 한다. 건강과 장수 長 壽 기원 아이가 태어났는데, 운이 좋지 않거나 명이 길지 않다는 소리를 듣게 되면 아이 를 쇠경[소경, 복술] 에게 판다. 즉 아이에게 수양부모를 삼아 주는 것이다. 우선 쇠 경을 찾아가 수양자식을 삼아 줄 것을 부탁하고 허락을 받는다. 그리고 날을 잡아 수양 잔치를 한다. 형편이 되는 만큼 음식을 장만하여 차리고 수양부모와 동네 사람 을 청해 잔치를 한다. 돈이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수양부모에게 따로 돈 을 주지는 못했다. 다만 이후로 수양부모의 대소사를 챙기고, 수양부모가 돌아가시 면 수양아들은 상주가 된다. 아이의 사망 아이의 사망은 대부분 홍역으로 인한 것이었다. 마을에 홍역이 돌기 시작하여 한번 걸리게 되면 별다른 약을 쓰지도 못하고 대부분 죽었다. 아이가 죽으면 묻으러 갈 때 개울을 건너지 않는다. 그리고 이왕이면 양지쪽에 묻는다. 아이의 시신을 안 고 개울을 건너면 아이의 엄마가 다시 임신을 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묻은 곳을 애총 이라고 한다. 애총을 만들 때는 시신을 묻고 평지로 다져 지면 그 위에 솔깝[솔가지] 를 깔고 돌로 눌러 놓는다. <오선영> 784 한국인의 일생의례
Ⅱ. 혼례 婚 禮 가. 의혼 議 婚 혼인 적령기 1950~60년대에는 집안에 열다섯 살이 넘기 시작한 자식이 있으면 부모나 친척 들은 서서히 그 아이의 혼인에 대해 생각하고 준비를 시작한다. 특히 자녀가 여자라 면 스물이 넘기 전에 혼인을 시키려고 했다. 여자가 스물이 넘도록 결혼을 하지 않 으면 노처녀라는 소리를 듣는 것뿐만 아니라, 간혹 마을 사람들이 그 집 아이에게 뭔 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남자의 경우 보통 스물에서 스물셋 사이에 대부분 결혼을 하였다. 하지만 막상 혼인을 하게 될 당사자는 결혼에 대한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1950년대를 전후하여 혼인에 대한 결정권은 거의 부모에게 있었다. 그 이전 세 대에는 물론이었고, 1960년대 중반까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자식들을 결혼 시 키고자 할 때, 부모들은 대부분 윗형제부터 순서대로 보내고자 했다. 그래서 간혹 오빠가 장가를 가지 않아 동생이 혼인을 하지 못하고 나이를 먹는 경우도 있었다. 청량리의 한 제보자는 스무 살이 넘도록 혼인을 하지 못하였는데, 당시 전쟁에 나 갔던 오빠가 혼인을 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어머니가 혼담이 들어와도 거절했 다고 한다. 중매 仲 媒 1950~1960년대 중반까지의 혼인은 거의 중매로 성사되었다. 196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조금씩 연애를 통한 혼인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으며, 결혼하는 당사자의 의견이 반영되기 시작하였다. 홍천 지역 마을들은 산촌( 散 村 )의 특징을 보이고, 더 구나 1950년대에는 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비교적 가까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서 로 혼인을 하는 편이었다. 특히 딸을 멀리 시집보내려 하지 않았다. 중매는 주로 평소 집안에서 알고 있던 사람에 의해 시작된다. 한 사람이 양가( 兩 家 ) 를 모두 알고 있어 혼담을 넣기도 하고, 두 명이 각각 한쪽 집을 알아 서로 연결해 주 강원도 홍천군 785
기도 한다. 대부분 신랑집에서 먼저 이야기를 듣고 신부가 마음에 들면 중매를 넣어 신붓집의 허락을 얻는다. 홍천 지역에서는 중매를 서 주는 사람을 성별에 관계없이 준애비 라고 부른다. 예전에는 준애비의 말을 통해서만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평 소에 잘 알고 지내던 사람을 준애비로 세워 속아서 혼인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였다. 이 지역에서는 준애비가 신랑집의 형편을 속이고 신부를 데려오는 다음과 같은 이 야기가 무척 흔하게 나타난다. 준애비가 신붓집에 신랑집을 소개하면서 신랑감이 멀쩡하고 성실하며, 집안 형편 또한 넉넉하여 자리를 열두 개나 깔고 살 정도라고 이야기 하였다. 그래서 신붓집에서 허락을 하고 혼인을 한 뒤에 신행을 갔는데, 방 에 온전한 돗자리 열두 개가 깔린 것이 아니라 조각으로 열두 개 깔려 있는 아주 작 은 방이었다고 한다. 뒤늦게 속은 것을 알았지만, 이미 잔치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냥 살았다고 한다. 이 외에도 준애비가 신랑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다 좋은데, 멀어서 걱정이야. 라고 하니, 신붓집에서는 그 말을 듣고 혼인을 하였다. 그런데 막 상 결혼식 날 신랑이 왔는데, 눈이 안 보이는 봉사였다고 한다. 1950~60년대 만하여도 대대로 양반인 집안에서는 여전히 신분을 가렸다. 그래 서 준애비는 혼담을 넣을 때 가장 먼저 양가( 兩 家 )의 신분이 차이가 나지 않도록 고 려한다. 하지만 신분을 엄하게 따지지 않는 보통의 가정에서는 다만 상대가 남의 집 종살이만 하지 않았으면 된다고 여겼다. 준애비를 통해 혼담이 성사되면 감사의 인사를 하지만 별도로 사례를 하는 경 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준애비에게 돈을 주거나 선물을 하는 것을 당연하 게 여기는 추세이다. 그래서 요즘 중신을 잘 하면 술이 석 잔, 안 되면 뺨이 세 대 라 는 말이 생겨났다. 선보기 궁합 宮 合 준애비를 통해 혼담이 진행되면 간혹 신랑집에서 신붓감을 보기 위해 신붓집에 들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신붓집에서 허락을 해야 가능하다. 신랑의 어머니가 와 서 볼 때는 지나가듯 살짝 보고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아버지가 와서 보는 경우 에는 집 안으로 들어가 간단히 술상을 대접 받기도 한다. 그래서 신랑 아버지가 와 서 신부를 보는 경우는 혼담이 성사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786 한국인의 일생의례
양가에서는 혼사를 결정하기 전에 신랑 과 신부의 궁합을 본다. 마을에 한학을 하 시는 어른이 있으면 찾아가 신랑과 신부의 사주를 알려 드리고 궁합을 살핀다. 궁합은 혼인의 기본 조건이 되기 때문에 궁합이 잘 맞지 않으면 혼담이 성사되지 않았다. 1970 년대 중 후반부터는 혼담이 성사되면 신 사진2. 내면 자운리 탁현영씨 동생 약혼 사진(1970년대) 랑과 신부가 만나 사진관에서 약혼 사진을 찍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별도로 약혼식 을 하는 일은 드물었다. 나. 납채 納 采 연길 涓 吉 납폐 納 幣 납채 納 采 혼사가 정해지면 신랑집에서는 길( 吉 )한 날을 받아 신붓집으로 사주를 보낸다. 보통 준애비를 통해 전하는데, 사정이 있으면 다른 사람을 통해 보내기도 한다. 사주를 전할 때 팔자가 좋은 사람이나 자식을 많이 낳고 건강한 사람에게 부탁한다. 1950년대에는 사주에 신랑과 신부의 생년월시를 모두 적어 넣었다. 종이의 오른 쪽에 乾 자를 쓰고 그 아래에 신랑의 사주를 적고, 그 오른쪽에 坤 자를 적고 신부 의 사주를 적는다. 사주는 종이 한 장에 적는데, 이를 접는 방법이 정해져 있다고 한다. 잘 접은 사주는 책가지[싸리나무가지] 를 쪼개어 그 사이에 끼우고, 청실홍실 로 감는다. 청실홍실로 사주를 감지 않을 것 같으면 사주와 함께 봉투에 넣는다. 간혹 책가지는 생략되기도 한다. 사주를 잘 접어 봉투에 넣으면 사주보로 싼다. 근래에는 이러한 옛 방식을 지키기도 하지만 종이에 신랑의 사주만 적고, 기성품으 로 판매되는 사주보에 사주를 넣어 보내기도 한다. 신랑집에서는 사주를 보낼 때 사주조고리[사주저고리] 를 함께 보낸다. 1950년 대 중반부터 서서히 사주조고리를 보내기 시작하였는데, 그 전에는 이러한 풍습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주조고리를 보내는 것이 당연시 여겨지던 때에도 신랑집 형편이 어려우면 보낼 수 없었다. 사주조고리는 저고리를 만들 수 있는 옷감으로 보 강원도 홍천군 787
낸다. 잘사는 집에서는 양단을 보내는데, 저고리를 한 개 또는 세 개를 만들 수 있는 만큼 보내, 옷가지의 수가 짝이 되지 않도록 하였다. 그래서 신붓집에서는 한 개 감 을 받으면 웃저고리[겉저고리] 를 하나 만들고, 세 개 감을 받으면 웃저고리와 웃치 마, 받침저고리[속저고리] 를 만들었다. 혼례식 때 신부가 입는 웃저고리는 노란색 또는 빨간색 저고리나 색동저고리를 만들었다. 신붓집에서는 대청이나 안방에서 사주를 받는다. 대부분 대청에서 받는데, 겨울 또는 날씨가 좋지 않을 때 안방에서 받는다. 신붓집에서는 미리 사주를 받을 장소 에 작은 상을 펴 놓고, 물을 한 그릇 떠 놓는다. 사주를 상 위에 올리면 신부 아버지 가 이를 펼쳐 보고 부인에게 준다. 신부 어머니는 이를 농 안에 넣어 둔다. 신부 어 머니가 보관하고 있으면 혼인 후 신부가 친정에 왔을 때 어머니 몰래 사주를 훔쳐 가는 것이 좋다고 한다. 신부 는 사주를 가지고 와서 의장 ( 衣 欌 ) 깊은 곳에 평생을 보 관해 두는데, 이는 후에 내외 ( 內 外 ) 중 먼저 죽은 사람의 사진3. 서석면 청량리 김창옥씨 딸 사주(1990년대) 관에 넣어 함께 보낸다. 사진4. 서석면 청량리 김창옥씨 딸 사주(1990년대) 연길 涓 吉 예전에는 수확을 끝낸 가을에 주로 혼인을 하였다. 아무래도 집안에서 잔치를 하려면 먹을 것이 풍부할 때가 좋다. 혼인 날짜는 주로 신랑집에서 가리는데, 이를 날택이 또는 날택일을 한다. 고 하였다. 우선 날택일을 할 때 부모님이 결혼한 달, 윤달을 제외하고, 한학 하시는 분을 찾아 신랑과 신부의 사주를 알리고 좋은 날을 받 아 온다. 신랑집에서는 사주를 보낼 때 택일한 날짜도 함께 알린다. 납폐 納 幣 날이 정해지면 신랑집에서 신부에게 함을 보낸다. 함을 보내는 방법이나 시기는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데, 사주조고리를 보낸 경우 함을 생략하거나 사주조 고리에 맞춰 치마를 만들 수 있도록 함에 치맛감을 보낸다. 이는 함준애비[함진애 비] 에게 들려 보내며, 혼롓날을 며칠 앞두고 보내거나 혼례 당일 신랑 일행에 앞서 788 한국인의 일생의례
도착하게 한다. 과거에는 하인들에게 함을 들고 가도록 하였으나, 반상( 班 常 )의 구 분이 없어지면서 신랑집 사람들이나 신랑의 친구들이 함준애비가 되었다. 이왕이 면 함준애비는 자식을 많이 낳고, 특히 첫아들을 낳은 사람이 좋다. 함에 들어 있는 것은 모두 신부에게 보내는 것으로 신랑집 형편이 좋다면 옷감 외에도 신부가 사용 할 수 있는 것들이 들어있다. 또한 청실홍실을 넣어 신랑과 신부가 금실이 좋기를 바라고, 혼서지가 들어 있다. 혼서지는 신부가 평생 보관을 한다. 간혹 혼서지는 사 주를 보낼 때 미리 보내기도 한다. 신붓집에서는 사주를 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함도 상 위에 물을 떠 놓고 받는다. 만약 혼례 당 일 함을 받으면 서둘러 치맛감을 꺼내 대충 말 기를 잡아 바느질을 해서 신부에게 입혀 식에 나갈 수 있게 한다. 사진5. 서석면 수하리 김옥녀씨 혼서지(1956년) 다. 혼례식 婚 禮 式 혼례식을 치르는 것을 두고 잔치 치른다., 전안 한다. 고 하였다. 대개 잔치는 신 붓집 마당에서 치르는데 이 경우를 마당 빌려 준다. 고 한다. 신랑이 마당을 빌려서 잔치를 치르면 첫날밤을 신붓집에서 치르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신붓집에 서는 딸을 시집보내고 나면 떨어져 살아야 하는 아쉬움에 어떻게든 신랑에게 마당 을 빌려 주어 잔치를 치르려고 하였다. 하지만 신붓집이 가난하여 마당을 빌려 주지 못할 것 같으면 신랑은 신부를 싸 데려 간다. 잔칫날 신랑이 신붓집에 가서 신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 잔치를 치르는 것이다. 신부를 싸 데려 갈 때는 당연히 신부가 준비하는 혼수가 없다. 그래서 신붓집에서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으니 신부라도 싸 데 려 가라고 해서 신랑집에서 잔치를 치르는 것을 두고 싸 데려 간다. 고 말한다. 과거에는 추수가 끝나고 잔치를 많이 치렀기 때문에 한 마을에서 여러 집이 잔 치를 치르는 경우도 많았다. 여러 집이 서로 날짜가 겹치면 먼저 하는 사람이 좋다 하여 늦어지지 않도록 서둘렀다. 강원도 홍천군 789
초행 初 行 1940년대에는 초행길에 나선 신랑과 상객은 말을 타고 신붓집으로 갔다. 신랑은 집에서 혼례복을 갖춰 입고 나서며, 말을 끄는 정매 두 명이 각각 신랑과 상각[상객 ( 上 客 )] 의 말을 이끈다. 이 뒤를 함진애비와 하님이 따라 나서면 신랑 일행은 사람 들에게 큰 구경거리였다. 상각은 신랑의 아버지이거나 집안의 남자 어른이며, 하님 은 신행 올 때 신부의 시중을 들 사람이다. 해방을 맞고 1950년대로 들어서면서 신 랑은 초행길에 가마를 타고 다니게 되었으며, 점차 트럭 또는 대중교통과 가마를 함 께 이용하게 되었다. 먼 길은 차를 이용하고, 신부의 마을 앞에서 가마를 타고 들어 가는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는 신랑 일행에 신랑의 친구들이 함께 하기 시작하였 다. 이들을 우인 대표 라 하여 가마나 함을 들기도 하고, 잔치에 참여하여 축하의 글 을 낭독하기도 하였다. 신랑은 혼례복 성장( 盛 裝 )을 하지 않은 채 새 옷을 입고 간 다. 신부 마을에 도착하면 신붓집에서 정해 놓은 새손방 으로 들어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혼례복을 입는 등 준비를 마치면 신붓집 마당으로 나온다. 새손방은 신붓 집 사랑이 되기도 하고, 신붓집과 가까운 집의 사랑에 정하기도 한다. 신랑과 신부의 혼례복과 가마는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도 록 마련해 놓은 것을 빌려서 사용한다. 양가( 兩 家 )가 미리 의논하여 어느 마을의 것을 사용할 사진6. 내면 자운리 탁현영씨 초행 사진(1959년) 지 정해 놓는다. 신부 화장 잔치를 이틀 정도 앞두면 신부는 얼굴의 잔털을 뽑고 단장을 한다. 신부의 얼굴 에 재를 칠해서 명실로 잔털을 뽑아 얼굴이 동그래 보이게 만든다. 신부의 단장은 집안 부인들이 해 주는데, 혼인을 하고 복 있게 잘 사는 사람이 좋다. 신부 단장을 해 준 사람이 잔칫날도 신부 화장을 해 주고, 신부의 성장( 盛 裝 )을 돕는다. 신부는 신 랑이 보낸 함에서 옷감을 꺼내 마련한 웃저고리, 웃치마를 입고, 혼례복을 입는다. 신부가 입는 혼례복을 흔히 내삼족두리 라고 말하는데, 신부는 내삼족두리를 입고 손에 낯수건(한삼의 용도로 사용하는 것으로 길게 늘어뜨린다.)을 낀다. 신부는 낯 수건을 잘 보관해 두었다가 첫아이를 낳았을 때 첫저고리[배냇저고리] 를 만든다. 790 한국인의 일생의례
초례청 醮 禮 廳 초례청은 신붓집 마당이다. 멍석을 깔고 다리가 긴 상을 초례상으로 놓고 신랑, 신 부가 설 자리에 왕골자리를 깐다. 그리고 집 쪽으로 병풍을 치고, 채알[차일( 遮 日 )] 을 친다. 하늘이 잔치 치르는 것을 내려다보면 신랑과 신부에게 좋지 않다고 하여 이를 막기 위한 것이다. 더불어 하늘에 날아다니는 독새를 가리기 위해서도 채알을 친다. 초례상에는 용떡을 두 개 만들어 놓는다. 떡을 둥그렇게 말아 용의 모양으로 만 들고, 대추로 눈을 표시한다. 용떡을 만들기 어려우면 달떡으로 대신한다. 달떡은 모양을 내지 않고 둥그렇고 납작하게 만든 떡을 몇 겹 쌓아 놓는 것이다. 산 닭도 암 수로 두 마리를 놓는데, 신랑, 신부 쪽에서 각각 사람이 붙잡고 있고, 팥이나 콩 같 은 곡식을 닭 앞에 두어 쪼아 먹게 하였다. 또 시누대[대나무 가지] 와 소나무 잔가 지를 꽂은 병도 신랑, 신부 쪽에 각각 놓는다. 내외( 內 外 )가 송죽( 松 竹 )처럼 변치 말 고 오래 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병 옆에 초를 켜 놓는다. 이 지역은 50년대 말 까지 초가 그리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에서 직접 벌집을 녹여 만든 황초를 사용 했다. 황초도 구하기 어려우면 나무껍질을 이용해 사용하였다. 이 외에 밤, 대추, 곶 감 등을 차린다. 초례상에 놓았던 곶감을 가져다 아이들에게 먹이면 홍역에 좋은 약 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신랑과 신부가 설 자리의 앞에 작은 상을 각각 놓아 술잔을 둔다. 술잔의 받침에 청실홍실을 감아서 늘어뜨려 놓는데, 이것은 식이 끝나면 신부의 받침저고 리 옷고름에 매어 준다. 잔치 신랑은 혼례시( 婚 禮 時 )를 맞춰 비단 보자기에 싼 나무 오리를 안고 신붓집 마당으로 나간다. 신랑을 앞서 들어가 는 사람이 바가지를 깨고 들어가기도 하는데, 이를 하지 않 는 집이 더 많다. 서석면 일대에서는 신랑이 마당으로 들어 올 때 재를 싼 종이를 신랑에게 던지기도 하는데 이를 잿봉 친다. 고 한다. 이는 신붓집 마을 사람들이 장난을 치는 것 인데, 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신랑은 초례상 앞에 서면 나 무오리를 상에 올려놓는다. 그러면 보통은 신부의 어머니 사진7. 내면 자운리 탁현영씨 혼례 사진(1960년대) 강원도 홍천군 791
사진8. 내면 자운리 탁현영씨 동생 의 혼례 사진(1960년대) 사진9. 남면 남노일리 황인선씨 딸 혼례 사진(1984년) 사진10. 남면 남노일리 황인선씨 딸 혼례 때 찍은 가족사진(1984년) 가 신부가 초례청에 나오기 전에 나무오리를 치마폭에 싸 서 집 안으로 들어가 쌀독에 넣는다. 하지만 더러 식이 끝 날 때까지 나무오리를 초례상에 두었다가 식을 마친 후 닭 을 날릴 때 신부의 어머니가 위와 같이 한다. 신랑은 신부가 나오기 전에 먼저 하늘을 보고 절을 한 다. 안에서 준비를 마친 신부는 친척들에게 업혀서 초례청 에 나오거나, 식을 하는 동안 옆에서 도와주는 이들에게 인 도되어 나온다. 신부는 낯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오기 때문에 신랑은 식이 끝날 때까지 신부의 얼굴을 제대로 보 지 못한다. 하지만 부끄럼을 타지 않는 신부일 경우 낯수건 을 살짝 살짝 내려 사람들 몰래 신랑의 얼굴을 본다고 한 다. 신부가 자리를 잡으면 신랑과 신부는 마주보고 절을 한 뒤 잔을 주고받고 다시 절을 한다. 식이 모두 끝나면 닭을 들고 있던 사람들이 마당을 향해 닭을 날리고, 초례상에 놓 았던 청실홍실을 신부의 저고리 옷고름 에 달아 준다. 형편이 좋은 집에서는 식 이 끝나면 사진 촬영을 하고, 신랑과 신 부는 각자 방으로 들어가 신랑은 큰상을 받고, 신부는 저녁이 될 때까지 앉아 있 는다. 신부는 불을 땐 방에서 한참을 앉 아 있어야 하므로 짚을 높게 쌓아 놓고 그 위에 앉아 있었다. 라. 신행 新 行 현구고례 見 舅 姑 禮 재행 再 行 근친 신행 新 行 1950년대 이전에 혼인한 신부는 친정에서 첫날밤을 치르고 며칠 머물고 신행을 떠났지만, 1950년대 말부터는 혼례 당일 신행을 떠났다. 이 시기에도 간혹 첫날밤을 792 한국인의 일생의례
친정에서 치르는 경우가 있었지만 극히 드물었다. 혼례식이 끝나고 신랑이 신붓집 어른들께 인사를 마치면 떠날 채비를 한다. 신부는 식을 치를 때 복장 그대로 가마를 타고 간다. 신부 어머니는 가마 안에 목화 를 가득 채운 요강을 넣어 준다. 신부와 함께 웃손[상객( 上 客 )] 으로 신부 아버지 또 는 집안의 남자 어른이 함께 가는데, 이를 후객 이라고 한다. 신부는 신행을 떠날 때 미리 준비해 둔 혼수를 가지고 간다. 혼수는 집안 형편껏 하는데, 기본적으로 신랑과 신부가 쓸 식기와 신부가 입을 속옷가지들, 시집 식구들 에게 드릴 버선 등을 준비한다. 혼수를 잘 해 가는 경우에는 시아버지께 드릴 자부 동[방석] 과 퇴침, 이불 등을 준비했다. 친정에서는 시집에 가서 폐백 드릴 음식을 준 비해서 보낸다. 이는 삶은 닭을 밤과 대추 등을 술과 함께 보낸다. 신랑과 신부의 식 기에는 찹쌀과 팥과 같은 곡물을 넣어 가는데, 신부가 시집에서 삼 일 만에 부엌에 나와 밥을 할 때 꺼내서 사용한다. 신랑과 신부 일행이 도착하면 신랑이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간다. 신랑이 들어오 면 집안 부인들이 신랑을 끌고 굴뚝으로 데 리고 간다. 신랑은 부인들이 시키는 대로 굴뚝에 다리 한쪽을 걸쳐 놓고, 바가지에 담긴 국수를 먹어야 한다. 신랑이 장가를 갔다 와서 먹는 국수를 뺏어 먹으면 좋다 사진11. 서석면 청량리 노인순씨 혼수-속저고리, 속바지 고 해서 부인들은 신랑이 국수를 먹으려고 할 때 이를 서로 뺏어 먹으려고 하였다. 또 신랑에게 장난을 치느라 국수를 주고는 젓가락으로 두꺼운 나무를 줘서 애를 먹 이기도 한다. 신부의 가마가 집으로 들어오려고 하면 대문 앞에 짚불을 놓아 가마꾼 이 이를 밟고 들어오게도 한다. 또 신부가 들어올 때 액땜을 해야 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운이 그렇게 닿는 신부만 하는데, 가마가 집으로 들어올 때 팥을 가마에 세 번 뿌리거나, 신부가 가마에서 내릴 때 박바가지를 밟아 깨도록 시킨다. 시어머니는 신 부가 들어올 때 이를 쳐다보지 않고 장독대에 가서 장독을 끓어 안고 있기도 하는데, 그러면 신부가 시집살이를 하면서 자신에게 말대답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신부가 들어오면 안방으로 데리고 가서, 손이 없는 방위에 앉히는데, 앉을 자리에 요를 높 게 쌓아 놓는다. 방에 들어가 자리를 잡으면 꿀물을 신부에게 주는데, 미숫물 이라 강원도 홍천군 793
고도 한다. 신부가 이를 몇 모금 마시면 신부의 시누이들, 동서들이 나누어 먹도록 준다. 신부에게 먹이는 것은 시부모께 말대답을 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고, 동기 간에 나누어 먹는 것은 서로 사이가 좋기를 바라는 것이다. 신부는 가만 앉아 있다 가 시집에서 차려 주는 큰상을 받는다. 신부는 이날 색시 놀음을 한다. 후객은 신랑 집에 도착하면 사돈어른들과 인사를 나누고, 신랑집 형편이 좋으면 큰상을 받은 뒤 하루 묶고 집으로 돌아온다. 후객이 큰상을 받고 이를 물리면 신랑 마을 사람들이 함 께 나누어 먹는다. 후객은 집으로 돌아갈 때 신부가 받았던 큰상을 그대로 싸서 가지 고 간다. 더러 준애비도 신랑집에서 상을 받고, 집으로 싸가지고 간다. 사당 차례 신부는 큰상을 받고 나면 친정에서 준비해 온 음식을 차리고 사당 차례를 올린다. 신랑집안의 조상께 새 식구가 되었음을 고( 告 )하는 것이다. 닭과 밤, 대추 등은 신 부가 가지고 온 것을 차리고 신랑집에서 국수를 삶아서 올린다. 나물과 탕도 준비 가 되면 올리지만 메와 자반은 올리지 않는다. 신랑과 신부가 함께 절을 하지만 잔 은 신부가 올린다. 폐백 幣 帛 신부는 사당 차례를 마치면 곧바로 시부모님께 폐백을 올린다. 시조부모가 생존 해 계셔도 시부모님께 먼저 인사를 드린다. 그 뒤 촌수가 높은 집안 어른부터 순서 대로 절을 올리며 인사를 드린다. 신부에게 절을 받은 어른들은 아들딸 많이 낳고 잘 살라는 덕담을 해 준다. 초야 初 夜 신랑과 신부가 방에 들어가면 마을 사람들이 신방을 지킨다. 고 하여 밤이 늦도록 신방 밖에서 구경을 한다. 이는 첫날밤에 관해 전해오는 이야기 때문이다. 옛날에 첫날밤에 들어간 신부가 밤새 신음 소리를 내는데, 이를 집안 식구들이 첫날밤에는 원래 그런 것이라며 그냥 두었다. 다음 날 날이 새서 보니 어린 신랑이 신부의 피부 를 다 벗겨 놓아 신부가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후로는 첫날밤을 무사히 치르도록 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신방을 지켰다고 한다. 794 한국인의 일생의례
신부는 족두리를 쓴 채로 신방에 들어간다. 신부가 들어간 신방에는 주안상이 차려져 있는데, 간단한 술과 안주 외에 뚜껑을 덮은 식기가 서너 개 올려져 있다. 이는 신방에 들어온 신랑이 열어보게 되는데, 신랑과 신부의 앞날을 점치기 위한 것 이다. 식기 안에는 쌀, 돈, 물, 팥 콩 등이 들어 있다. 신랑이 쌀이나 곡식을 열면 부 부가 앞으로 잘 살 것이라 여기고, 물을 열면 좋지 않다. 돈을 열면 부부의 살림이 헤 플 것으로 여겼다. 신랑은 자리에 들기 전에 신부의 족두리와 옷을 벗겨 준다. 신랑은 특히 족두리 를 풀어 줄 때 땅바닥으로 떨어뜨리지 않도록 조심한다. 족두리를 풀기 위해서는 비 녀를 잘 빼야 하는데, 신방에 들기 전에 방법을 이야기 듣지 못한 신랑은 꽤 애를 쓰 고, 이러한 모습을 보며 신방을 지키는 마을 사람들이 한참을 놀린다. 만약 족두리 를 땅에 떨어뜨리면 첫딸을 낳는다고 한다. 첫날밤에 먼저 잠드는 사람이 먼저 죽는 다는 말이 있지만 대개 신랑이 먼저 잠자리에 든다. 문안 인사 첫날밤을 치른 신부는 다음 날부터 아침 일찍 일어나서 옷을 가지런히 하고 식전 ( 食 前 )에 시어른들께 문안 인사를 올린다. 이는 시어머니가 그만 해도 된다고 허락 할 때까지 계속 한다. 시집온 지 삼 일이 되는 날 아침에 신부는 처음 부엌에 가서 밥 을 짓는다. 첫밥을 짓기 전에 신부는 시댁의 솥뚜껑을 먼저 만지는데, 그러면 그릇 을 깨지 않는다고 한다. 첫밥을 지을 때 친정에서 가지고 온 잡곡을 함께 넣는다. 재행 再 行 신랑 달기 재양[재행] 은 신랑과 신부가 신랑집에 온 지 3일 만에 신붓집으로 가는 것으로 3일 근친 이라고도 한다. 신붓집에서 신부를 데리고 가기 위해 3일이 되는 날 사람 을 신랑집으로 보내기도 한다. 신랑집 형편이 좋으면 재양을 갈 때 음식을 싸서 보 내기도 한다. 신붓집에서는 재양 온 신랑에게 송편을 먹이면 좋다고 해서 송편을 비 롯하여 여러 음식들을 장만한다. 신붓집에 모인 마을 청년들은 신붓집의 잔치 분위 기가 고조되면 신랑을 달아맨다. 신랑을 거꾸로 달아 마을의 처녀를 데리고 갔으니 책임을 지라는 취지로 발바닥을 때리며 장난을 치는데, 술을 한 상 받아먹기 위한 것 이었다. 재양을 온 신랑과 신부는 하루를 묵고 신랑집으로 돌아간다. 강원도 홍천군 795
근친 覲 親 신부는 시집온 지 일 년이 되어 가을걷이가 끝나면 시어머니의 허락을 받아 친정 으로 근친을 간다. 시댁에서는 근친을 보낼 때 음식을 잘 해서 보내는데 떡과 엿 등 을 해서 동구리에 예쁘게 담아서 보내고, 버선도 지어서 보낸다. 그 수는 집안 형편 에 따른다. 근친 올 때 엿동구리는 절대 빠지지 않았기 때문에 예전에는 딸을 낳으 면 엿동구리를 낳았다. 고 했다. 딸을 키워서 시집보내면 엿동구리를 받게 되기 때 문이다. 친정에 간 신부는 시어머니가 허락한 기간만 머물고 돌아온다. 근친 온 딸 이 돌아갈 때 친정어머니는 딸이 가져온 것만큼은 꼭 해서 보낸다. 이를 두고 사돈 네 음식은 꽁것[공것]이 없다. 고 했다. 반설기 신부를 맞이한 집안과 가까운 친척이나 마을사람은 반설기 를 차려 새댁을 초 대한다. 점심이나 저녁을 차려 새댁과 함께 먹는 것으로 집도 알리고, 서로 친해지 기 위한 자리이다. <오선영> 796 한국인의 일생의례
Ⅲ. 수연례 壽 宴 禮 가. 회갑 回 甲 1980년대까지만 하여도 만60세가 되면 그 해 생일에 회갑( 回 甲 ) 잔치를 했다. 과거에는 사람이 60년을 살면 수( 壽 )를 누리고 잘 살았으며, 그 이후의 나이는 덤으 로 사는 것이라 하여 부모의 회갑에 자식들이 잔치를 크게 해 드렸다. 하지만 의학 의 발달로 수명이 점차 늘기 시작하면서 근래에는 환갑은 잔치를 하지 않고 그냥 넘 어가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이제 60세는 경로당에서도 젊은이 취급을 받을 정도의 나이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회갑보다는 칠순이나 팔순에 친지들 과 당사자의 친구들을 청해 잔치를 하는 편이다. 과거 회갑 잔치를 치르려 하면 자식들이 경비를 모아 부모의 선물을 마련하고 음 식을 장만하였다. 회갑 잔치는 수( 壽 )를 기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갖은 음식을 괴어 올려 높이 쌓고, 종류도 여러 가지를 준비해 푸짐하게 한다. 집 앞 마당에 멍석을 깔고 상을 차리는데, 마당이 좁으면 집 밖에 넓은 장소를 택해 잔칫상을 차리기도 한다. 가운데 차린 상에 회갑을 맞은 부모를 앉게 하고, 장자부터 순서대로 부모의 수( 壽 )를 기원하며 절을 올린다. 그리고 손님들이 덕담을 하거나, 절을 올리기도 하며 즐겁게 지낸다. 잔치 음식이 많이 남으면 다음날 동네 사람들이 뒷잔치를 하기도 한다. 사진12. 남면 남노일리 황인선씨 모친 회갑(1967년) <오선영> 강원도 홍천군 797
Ⅳ. 상 장례 喪 葬 禮 가. 초종 初 終 임종 臨 終 과거에는 어른이 돌아가실 때 병을 앓고 계시다가 숨이 끊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부모님이 돌아가시려는 기미가 보이면 자식들은 자리를 지키고, 멀리 떨어 져 있는 자손들을 불러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시집간 딸의 경 우 대부분 부고를 받고서야 친정으로 오는 경우가 많았다. 어른이 돌아가시려고 하면 성별( 性 別 )에 관계없이 모두 안방으로 모신다. 남자 어른들은 평상시 사랑에 기거하고 있지만 예전부터 사람이 죽는 자리는 안방이어야 한다고 했다. 심지어 사랑에서 죽어도 객사( 客 死 )로 여겨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경우 도 많았다. 안방으로 모시고 눕힐 때는 대체로 머리의 방향을 동쪽으로 두는데, 집 안에 따라 살이 있는 방향을 피해 자리를 잡기도 한다. 임종을 앞둔 부모를 방으로 모시면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혀 드리고, 자식들은 자리를 뜨지 않는다. 예부터 부모 의 임종을 지켜야 효( 孝 )를 하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부모의 임 종을 지키는 것을 모든 자식이 다 할 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사람이 죽을 때 모습은 각양각색이다. 조용히 편안하게 돌아가시기도 하고, 숨 을 놓지 못해 몸에 힘을 주며 애를 쓰다 죽기도 한다. 또 귀와 코가 위로 올라붙는 듯 이 보이며 얼굴의 주름이 싹 펴지기도 한다. 마지막 숨이 떨어지면 상주들은 슬픔에 겨워 곡을 터트리고, 상을 치르기 위해 집안 어른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상주들은 성복을 할 때까지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유지하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 이 머리를 풀어 준다. 남자 상주들은 겉옷을 하나 더 입는데, 소매를 한쪽 빼고 입 는다. 부상( 父 喪 )과 모상( 母 喪 )을 구분하여 빼는 팔을 달리 하는데 이를 정확히 기 억하는 제보자가 없었다. 수시 收 屍 죽음이 확인되면 시신을 바른 자세로 놓기 위해 수시( 收 屍 )를 하는데, 이를 수 798 한국인의 일생의례
세 걷는다. 고 한다. 시신의 자세를 반듯하게 해 놓음으로써 염을 할 때 힘들이지 않 고, 입관 또한 손쉽게 할 수 있게 된다. 수세를 걷기 위해서 우선 방바닥에 나무토막 을 놓고 그 위에 송판( 松 板 )을 깔아 놓는다. 만약 급하게 송판을 구하기 어려우면 번 지(농기구의 일종)를 떼어서 임시로 사용하였다. 송판 위에 시신을 반드시 눕히고, 코, 귀 등 시신에 있는 구멍을 솜으로 막는다. 그리고 시신을 주물러 팔과 다리 등을 반듯하게 펴고, 양손과 양발을 각각 나란히 놓고 소창을 이용해 묶는다. 수세를 걷 고 나면 아궁이 반대편에 시신을 놓고, 병풍을 세워 가려 놓는다. 홍천 지역에서는 수시를 할 때 시신을 놓기 위해 까는 것을 송판이라 하며 칠성판과 구분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염을 할 때 송판을 빼고 칠성판을 깐다. 수시를 마치면 병풍 앞에 팥죽을 한 그릇 가져다 놓고 팥죽 제사 를 지낸다. 부인들에 의해 팥죽 제사라고 불리지만 제사의 형식을 갖추지는 않았다. 다만 팥죽 만 한 그릇 차려 놓는 것으로 부정을 풀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초혼 招 魂 안에서 수세를 걷는 동안 밖에서는 초혼을 한다. 초혼은 망인의 혼을 부르고, 또 사자( 使 者 )와 마을 사람들에게 초상을 알리기 위한 것으로 집안사람이 아닌 타인이 하는데, 시신을 보지 않은 사람이어야 한다. 예전에는 대부분 마을마다 초혼을 잘 하 는 어른이 한두 명씩 있어 상( 喪 )이 나면 으레 초혼을 할 줄 아는 어른을 모셔 왔다. 초혼을 부를 때 옆에 사자상을 차려 놓는다. 초혼을 부르는 이는 망인( 亡 人 )의 속적 삼을 하나를 들고 마당에 서거나, 지붕에 사다리를 걸쳐 놓고 사다리에 올라선다. 속 적삼을 흔들며 망인의 주소와 본관을 부르고 속적삼 가지고 가시오. 를 세 번 말하 고, 이어 복 을 세 번 말한다. 대부분 이러한 형식으로 초혼을 부르는데 마을에 따 라 대동소이하다. 남면 화전리에서는 주소를 말할 때 맨 앞에 해동 강원도 홍천군 을 넣으며, 서면 길곡리에서는 아예 주소를 말하지 않는다. 초혼을 마치면 손에 들 고 있던 속적삼을 지붕 위로 던져 올린다. 간혹 지붕이 높으면 속적삼 안에 돌을 넣 어 던지기 쉽게 하였다. 초혼을 부른 사람은 일이 끝나면 상가( 喪 家 )에 남아 있지 않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간다. 지붕에 올린 속적삼은 발인 후 내려서 망인의 물건 과 함께 태운다. 초혼을 하여 상가의 지붕에 망인의 흰 적삼이 보이기 시작하면 마을 사람들은 상 강원도 홍천군 799
이 끝날 때까지 일체 빨래를 하지 않았다. 사자상 使 者 床 사자상은 초혼을 부를 때 차리며 마당 또는 문 밖에 놓거나, 살이 없는 방향을 가 려서 놓는다. 사자상에는 밥 세 접시, 나물 세 접시, 짚신 세 켤레 또는 한 켤레를 놓 게 되며 대부분 이를 상에 차리는데, 서면 길곡리와 남면 남노일리에서는 상 대신 치[키] 에 차리며 위의 것들 외에 철전[동전] 을 세 개 또는 일곱 개를 더 놓는다. 동면 성수리에서도 치에 사자상을 차리기도 한다. 짚신을 사용하던 시절에는 사자 상에 짚신을 놓았지만 이를 사용하지 않게 되면서 종이로 접은 신으로 짚신을 대신 하였다. 그러다가 근래에는 종이로 만은 신 대신 운동화를 놓거나, 아예 신을 놓지 않는 집들도 있다고 한다. 사자상에 올릴 밥은 별도로 짓게 되는데 이는 사자상을 차릴 사람 또는 초혼을 하는 사람이 쌀을 퍼서 직접 지어야 한다. 사잣밥을 짓는 사 람 또한 초혼을 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시신을 보지 않은 사람이어야 하며 타인이 어야 한다. 동면 성수리에서는 사잣밥을 짓기 위해 쌀을 뜰 때 반드시 손다리미를 사용하며 그 양을 세 홉 정도를 한다. 사자상을 치우는 시기는 두 가지 중에 하나이 다. 초혼을 마치면 곧바로 치우거나 발인 후에 치운다. 사자상을 치울 때는 놓았던 자리에 밥과 나물을 엎어서 버리거나 길가에 엎어 버린다. 또는 대문 밖의 삼거리 에 엎어 놓기도 한다. 상주 喪 主 및 호상 護 喪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자식들은 상주가 되며, 맏아들은 맏상제(맏상주)가 된다. 만약 맏아들이 부재중이거나 없으면 맏손자가 맏상주가 된다. 맏손자 또한 없을 경 우 둘째 아들이 맏상주가 된다. 부인이 죽었는데 남편이 살아 있어도 맏상주는 맏 아들이다. 호상은 상가( 喪 家 )의 일을 책임지며, 장례의 진행을 맡게 된다. 때문에 상이 나 면 상가에서는 우선 호상을 세운다. 집안을 잘 알고, 마을에서 이름이 알려진 노인을 호상으로 세우는 것이 좋다. 호상은 우선 사람들에게 부고를 쓰고 이를 각 마을에 전 하도록 시킨다. 부고에는 호상의 이름을 적기 때문에 상가와 직접적으로 알지 못하 더라도 호상의 이름을 보고 문상을 오기도 한다. 예전에는 사람이 부고를 들고 집집 800 한국인의 일생의례
마다 다니며 전하였다. 부고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며 대문에서 사람을 불 러 안에서 사람이 나오면 부고임을 알리고 삽짝에 끼운다. 부고를 받은 집에서는 이 를 가지고 온 사람을 그냥 보내지 않고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것을 차려 주었다. 만약 상가에서 양봉을 하고 있으면 벌통에 거성[상복( 喪 服 )] 을 입혀 주어야 하는 데 부고를 낼 즈음에 삼베 헝겊을 잘라서 왼새끼로 꼰 짚으로 벌통에 묶어 둔다. 벌 들은 영물( 靈 物 )이라 주인이 죽고 이렇게 거성을 입혀 주면 몸에 흰 띠를 두르고 나 오는데, 이를 하지 않으면 벌들이 다 나가서 돌아오지 않거나 죽는다고 한다. 수의 壽 衣 와 관 棺, 장지 葬 地 의 준비 수의는 생전에 미리 만들어 놓으면 좋다고 하였다. 생전에 만들 때는 윤달에 좋 은 날을 잡아서 동네 아주머니들을 청해서 만든다. 홍천 지역에서는 여자가 시집올 때 신랑의 두루마기를 해 오지만 이것을 남편이 죽을 때 수의로 입히지 않는다. 관을 미리 짜 놓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다만 관을 짤 낭구[나무] 를 미리 베어 놓는 경우는 혹 있었다. 이를 잘 보관해 두었다가 돌아가시고 나면 곧바로 목수를 불러 관을 짰다. 나. 염습 殮 襲 염습 殮 襲 염은 돌아가신 지 3일째 되는 날, 날이 어두워지기 직전에 시작한다. 해가 질 즈음 에 염을 마치면 곧바로 제사를 지내고 성복( 成 服 )을 하는데, 이를 성복 제사 라고 한다. 간혹 망인의 자식이 멀리 있어 오는데 시간이 걸리면 5일 만에 염을 하기도 하였다. 염은 시신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담력이 없으면 하기 어렵다. 그래서 마을 또 는 집안에 염을 담당하는 사람이 정해져 있었으며, 대부분 남자이다. 남자 둘이 시 신을 가운데 두고 서로 도와가면서 염을 하며, 염을 할 때 사용할 칼이나 가위를 각 자 가지고 사용한다. 시신의 위로 쇠를 넘기면 안 되기 때문이다. 염을 시작하면 가족들은 방 한쪽에 앉아 이를 지켜보는데, 소리를 내지 않는다. 염을 하기 위해 우선 신체를 칠성판에 올린다. 수세를 걷을 때 깔았던 송판을 빼고 강원도 홍천군 801
북두칠성을 그려 놓은 칠성판을 신체의 아래에 깔아 놓는다. 예전에는 칠성판에 북 두칠성을 반드시 그렸지만 언제부터인가 점차 그리지 않고 그냥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집안에 따라 신체를 묶을 때 칠성판과 함께 묶어 관에 넣기도 하였는데 이렇 게 하는 것을 칠포 라고 말한다. 이 경우 관의 크기가 신체에 비해 조금 더 커서 보공 ( 補 空 )을 해야 하는 공간이 넓어지게 된다. 염을 시작할 때는 신체[시신] 위에 홑이불을 덮어 망인의 살이 보이지 않도록 조 심하며 제일 먼저 신체의 구멍을 막아 놓았던 솜을 모두 뺀다. 그리고 신체의 몸을 깨끗이 닦는다. 예전에는 이때 향을 불려 놓은 물을 풀솜(누에고치에서 나는 솜)이 나 수건에 묻혀서 시신을 닦았는데, 지금은 알코올을 구입해서 사용하고 있다. 신체 의 손발톱과 머리카락은 각각 작은 주머니에 넣어서 신체에 수의를 입히고 나면 각 각 손과 발, 머리가 있는 부근에 넣는다. 수의는 신체에 입히기 편하도록 상의와 하 의를 속옷부터 겉옷까지 미리 다 끼워 놓아 한 번에 입힐 수 있도록 해 놓는다. 수의 를 입히고 나면 곧이어 신체의 입에 반합쌀[반함( 飯 含 )] 을 넣는다. 미리 불려 놓은 쌀을 버드나무를 깎아 만든 숟가락으로 떠서 신체의 입에 넣는 것으로 맏상주가 하 게 된다. 반합쌀을 드리는 것을 서면 길곡리 정재수씨는 군양미 드리는 것 이라고 말씀하신다. 반합쌀은 세 번에 걸쳐 넣어 드리며, 한번 넣을 때마다 백 석이요, 천 석이요, 만 석이요. 라고 말한다. 더불어 동전도 세 조각을 내어 쌀과 마찬가지로 세 번에 걸쳐 넣는다. 이는 망인이 저승 가는 길에 사용하도록 넣어 주는 것이라고 한다. 이를 마치면 신체의 얼굴에 명맥[멱목( 幎 目 )] 을 씌운다. 이어 곧바로 장매로 신체를 싸고 묶는다. 장매는 신체와 같은 방향으로 삼베를 깔고 신체를 싸는 것을 말하며, 장매로 싼 신체를 다시 삼베로 묶게 된다. 우선 장매 를 하기 위해 삼베를 신체의 길이만한 것 두 장과 신체보다 두 배 정도의 길이가 되 는 것을 한 장 바닥에 깐다. 긴 것을 가운데 놓고, 신체 길이가 되는 것을 양옆에 놓 는다. 그리고 그 위에 이불을 깔고 신체를 놓고 요를 덮는다. 그리고 가운데 장매 로 신체의 머리와 다리를 둘러 감싸고 양옆의 장매로 신체의 팔과 다리를 감싼다. 장매로 신체를 감싸고 나면 삼베를 가로로 일곱 장을 깔고 신체를 묶기 시작한다. 일곱 장의 삼베 끝을 다시 찢어서 신체를 묶는데, 염을 하는 사람에 따라 한 장의 삼 베 끝을 한번 찢기도 하고, 두 번을 찢기도 한다. 그래서 매끼는 총 14매끼 또는 21매 끼가 된다. 양쪽에서 삼베를 힘껏 잡아당겨 신체의 위에서 두 줄을 꼬아 매끼를 만 802 한국인의 일생의례
드는데, 이는 양쪽의 삼베 끈을 서로 묶는 것이 아니라 돌려서 끼워 넣는 방식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삼베를 끼워 넣을 때 빠지지 않고 단단히 고정이 될 수 있도록 한 지를 꼬아 만든 줄을 사용한다. 손을 집어넣어 당기게 되면 그만큼 틈이 커지기 때 문에 얇지만 단단한 한지 줄을 사용해 잡아당기는 것이다. 신체를 묶을 때는 상체부터 묶는데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며 묶어 허리에서 멈추고 다시 발부터 시작해 위로 올라가며 묶다가 허리에서 멈춘다. 이는 한쪽에 치 우치지 않고 고르게 하기 위해서인데, 만약 한쪽에 치우치게 되면 신체에 부정이 생 기게 된다고 한다. 신체를 치우치지 않게 잘 묶으면 허리 부위를 들어 올렸을 때 신 체가 반듯하게 들린다. 신체를 관에 넣으면 창호지와 헌 옷, 볏짚 등을 묶어 보공( 補 空 )을 한다. 퇴롱[토롱] 신체를 관에 넣고 나면 관을 방밖으로 내어 퇴롱[토롱] 을 만든다. 더러 겨울에는 관을 그냥 방에 두기도 하지만 여름에는 반드시 토롱을 했다. 여름에 관을 그대로 방 에 두면 불을 지펴 뜨거워진 방의 온도와 여름 날씨가 더해져 시신이 빨리 부패되기 때문이다. 퇴롱을 만드는 장소는 집 안이나 밖, 어느 곳이든 상관없으며 그늘이 지 고 볕이 잘 안 드는 곳이 좋다. 장소를 정하면 땅을 조금 파고 그 안에 관을 놓고 멍 석으로 덮어 놓는다. 홍천의 대부분 지역에서 관을 방에서 내올 때 하는 양밥은 없 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동면 성수리와 남면 남노일리에서는 관을 방에서 내올 때 문 앞에 바가지를 엎어 놓고 깨고 나온다. 퇴롱을 만들면 발인을 할 때까지 상주들이 돌아가며 지킨다. 또 집안에 따라 망 인의 다음 생( 生 )을 알아보기 위해 관을 낸 직후에 치[키] 에 문종이를 깔고 그 위에 재를 얇게 펴 놓아 방 안에 넣어 둔다. 그리고 잠시 후에 치를 꺼내 보아 재에 나 있 는 자국을 보고 무엇으로 환생했는지를 알아본다. 혼백 魂 帛 및 지청[제청 祭 廳 ] 관을 밖으로 내면 혼백을 접고 지청(또는 제상)을 차린다. 혼백은 창호지나 삼베 를 가지고 접는데, 삼베로 접을 경우 삼베의 길이는 한 자 세 치가 된다. 혼백을 접 는 방법은 정해져 있으며 이를 접다가 완성하지 못하면 접던 사람에게 해( 害 )가 미 강원도 홍천군 803
칠 수도 있어 함부로 접지 않는다고 한다. 혼백을 다 접으면 앞을 표시하기 위해 앞 쪽의 윗부분에 종이로 上 자를 만들어 붙인다. 다 접은 혼백은 혼백상자에 넣는다. 흔히 구할 수 있는 종이상자에 백지를 발라 혼백상자를 만들고, 조문객이 없을 때와 발인 후 평상시에는 혼백상자를 덮어 놓는다. 형편이 좋은 집에는 혼백틀이 있어 따 로 혼백상자를 만들지 않는다. 지청은 지관( 地 官 )이 집의 좌향을 살펴 자리를 정해 준다. 굳이 지관이 자리를 정하지 않을 것 같으면 손이 없는 방향에 지청을 차리거나, 해가 뜨는 동쪽에 차리 는 것이 좋다. 지청을 만들 장소가 정해지면 사방의 벽을 깨끗한 종이로 다시 바 른다. 그리고 다리가 긴 상을 두고 그 위에 혼백을 모신다. 상의 둘레에는 광목을 쳐 놓는다. 다. 성복 成 服 과 발인 發 靷 성복 成 服 예전에는 대부분 사망을 하면 3일 후에 염을 하고, 염을 마치면 곧이어 상주들이 성복을 하였다. 그래서 삼 일 성복 이라는 말을 흔하게 사용하였는데, 지금은 돌아 가신 당일 염을 하는 경우가 더 빈번해져서 댕일 성복[당일 성복] 이라고 한다. 이는 상의 기간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대개 5일장의 경우 삼 일 성복을 하게 되며, 삼일장 의 경우 댕일 성복을 하게 된다. 상복( 喪 服 )을 거성옷 이라고 부른다. 상주들은 성복 전까지 머리를 풀고 있고, 끼니를 먹을 때도 상을 받치지 않는다. 성복 전까지 남자 상주들은 입고 있던 옷에 두루마기를 하나 걸치고, 건( 巾 )을 쓴 다. 이때 두루마기의 한쪽 팔을 끼우지 않은 채 빼고 있으며, 건도 위를 꿰매지 않은 채 쓴다. 하지만 서면 길곡리 함양 여씨 집안에서는 성복 전에 건을 쓰지 않는다. 입 관을 마치고 혼백을 접어 지청을 차리면 곧바로 제상을 차린다. 주로 마루나 마당에 제상을 차리는데 집의 구조와 상황을 봐 가며 위치를 정한다. 하지만 대부분 지청 앞 에 차리는 것이 맞다고 여긴다. 성복 제사의 제물은 큰딸 즉 사위가 차리는 것으로 정성껏 잘 차린다. 제상이 차려지면 마당 가운데에 물동이 하나를 상에 바쳐 놓는다. 그러면 상주들은 물동이의 물로 손을 씻고, 물동이를 사이에 두고 남녀가 마주 선다. 804 한국인의 일생의례
곧이어 서로 맞절을 하고, 동서남북을 돌아가며 절하는데, 이때 옆에 있던 사람들이 상주들의 머리를 다시 묶어 주고, 거성[상복] 을 입혀 준다. 상주들은 지청에 들어 성 복 제사를 지낸다. 제를 마치고 나면 포와 잔만 남기고 이외의 제물을 모두 치운다. 상주들은 거성을 입고 상장( 喪 杖 )을 짚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면 대나무 지 팡이를 짚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면 버드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짚는다. 만약 남자 상주가 장가를 가지 않았으면 건을 쓰지 않고 삼 을 섞어 꼰 테를 머리에 두른다. 복인들은 남자 의 경우 행전과 건을 쓰고, 여자의 경우 행주치 마를 두른다. 한번 상을 치르며 사용했던 거성옷을 태우지 않고 보관해 두었다가 다시 사용하려면 불에 옷 사진13. 남면 남노일리 황인선씨가 보관 중이 거성옷 [상복] (1976년 사용) 을 넘겨 부정을 가시고, 뒤집어서 보관한다. 조상(조문 弔 問 ) 상( 喪 )이 나면 마을 사람들은 상가로 모여들어 초상을 치르는 동안 일손을 돕는다. 하지만 예전부터 상가에는 여러 가지 부정이 많이 낀다 하여 자신의 집안에 출산이 있었거나, 가까운 시일에 기제사가 있는 사람은 상가에 가지 않는다. 만약 장사를 치르기 전까지 조상을 가지 못했으면 후에 빈소( 殯 所 )를 찾아 조문을 해도 무방 하다. 혹 망인과 매우 가까운 사이여서 조문을 갔으면 집안 제사를 지내지 않거나, 참여하지 않는다. 대체로 홍천 지역에서는 상가에 갈 때 집집마다 정해진 양의 쌀을 가지고 가는 데, 이를 굴반미 또는 군바미쌀 이라고 한다. 이는 마을에 따라 쌀 또는 보리로 정 해져 있으며 대부분 한 되 정도이다. 더러 형편이 어려운 집에서는 옥수수쌀을 보 내기도 하였다. 상가에서는 굴반미를 한 곳에 모아 두었다가 발인하는 날 지어서 모인 사람들과 함께 먹는다. 이 외에 상가와 친한 정도에 따라 부조( 扶 助 )를 한다. 팥죽을 쑤어 오거나, 술을 한 동이 해 오기도 한다. 또는 국수로 부조를 한다. 팥죽은 상가의 액( 厄 )을 떼어 준다고 하여 상가를 찾은 사람들이 꼭 먹고 집으로 돌아갔다 고 한다. 이러한 현물( 現 物 )의 부조 외로 학식이 있는 사람들은 만장을 써 갔다. 망 인을 기리는 글귀를 적은 것으로 작은 종이에 써 가서 상가에 전하기도 하고, 아예 강원도 홍천군 805
곧바로 대에 달아 들고 갈 수 있도록 큰 종이에 써 가기도 한다. 만장은 망인의 명성 을 높이는 잣대가 되었기 때문에 만장으로 부조를 하는 것이 떡으로 부조 하는 것 보다 낫다. 고 할 정도였다. 조상(조문)은 때가 정해져 있지 않지만 주로 염이 끝났을 즈음에 간다. 염을 하 기 전에 조상을 가게 되면 시신이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가거나, 그 앞에서 조문을 해 야 하기 때문에 불편하고, 또 염을 하기 전까지는 상가에서 조상을 받을 만큼의 여 유가 아직 생기지 않은 때이다. 염을 마치면 상주들이 성복을 하고 지청이 꾸며지게 되므로 조상객들은 지청에서 조상을 한다. 상여 놀이 홍천 지역에서는 발인 전날 상여 놀이를 하지 않는다. 다만 마을에서 상여를 처 음 구입해서 들여올 때 상여 일체를 꾸며서 군정[상두꾼] 들이 이를 들고 마을을 한 바퀴 돈다. 저녁 제사 발인 전날 밤이 되면 저녁 제사를 지내는데, 이는 상가에서 장만할 수 있는 모든 음식들을 다 차려 놓고 지내는 것이다. 제를 올리고 나면 제물을 모두 헐어서 밤새 사람들이 둘러 앉아 먹고 마시는데, 이를 밤포 한다. 고 말한다. 밤포를 할 때는 음식 이 넉넉하기 때문에 누가 뭘 먹어도 탓하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동네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까지 모두 상가에 모여 밤을 지새우며 밤포를 했다고 한다. 만약 성복을 지내 고 다음 날 발인을 하게 된다면 성복제상을 그대로 밤까지 두었다가 저녁 제사를 다 시 지내고 밤포를 한다. 이때는 제사 음식을 형편 되는 대로 고일 수 있는 만큼 고여 높게 쌓아 푸짐하게 차린다. 그래서 저녁 제사를 지낼 때까지 남자들이 과방( 果 房 ) 에 모여 음식을 고이는 것도 일이었다고 한다. 음식을 고일 때는 한 자 또는 자두 치 (한 자 두 치), 자과 옷(한 자 반)을 올리는데, 세 가지 중에 형편껏 하였다. 한편 남면 남노일이 황인선씨는 밤포를 두고 서무둠 이라고 하였다. 황인선씨에 의하면 발인 전날 저녁이 되면 저녁 제사를 지내고, 밤 열두 시경에 밤참 제사를 지 내게 되는데, 이는 중식 제사라고도 한다. 그리고 발인하는 날 새벽에 새벽 제사를 한 번 더 지낸다. 이렇게 발인 전날 제사를 지내는 것들을 서무둠 이라고 한다. 황인 806 한국인의 일생의례
선씨가 이야기하는 이러한 풍습은 강원도 해안가 지역인 양양과 속초에서 나타나 는 초아뢰기 풍습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발인 發 靷 발인은 장지( 葬 地 )와의 거리를 생각하여 하관시( 下 棺 時 )를 맞출 수 있도록 시간 을 가늠하여 출발한다. 퇴롱에 있던 관을 상여에 올리고 나면 간단히 제물을 차려 발 인제를 지낸다. 발인제를 지내고 발인을 하기 직전에 상가 사람들과 군정[상두꾼] 들이 먹을 수 있도록 밥을 짓는데, 상가의 부정을 막기 위해서 팥을 섞는다. 이 밥은 군정들이 묘를 쓰고 돌아오기 전까지 다 먹어야 해서 발인을 하고 나면 남은 사람들 이 집으로 돌아갈 때 싸 가지고 가기도 하였다. 상여 행렬의 맨 앞은 명정과 공포가 나선다. 그 뒤를 망인을 기리는 글귀를 적 은 만장을 든 사람들이 따라 나서고, 이어 혼백과 선소리꾼, 상여, 상주가 순서대로 뒤따른다. 혼백은 사위가 들고 가고, 선소리꾼은 요령을 들고 소리를 메긴다. 상여 는 마을에서 공용으로 사용하는 것을 주로 이용했으며, 상가에서 상여를 묶을 줄 을 낸다. 망자의 의복 처리 및 부정 不 淨 씻기 발인을 하여 상여가 상가에서 나가면 집에 남은 사람들이 망인의 의복과 물건들 을 정리하고 불사른다. 간혹 이때 불 연기가 상여가 나간 방향으로 따라가기도 한다. 라. 치장 治 葬 발인하는 날 아침 일찍 산일을 하는 사람들은 지관과 함께 장지( 葬 地 )로 간다. 미리 가서 상여가 도착하기 전에 땅을 파 놓고, 떼를 준비하기 때문이다. 간혹 장지 가 멀거나 겨울이라 땅이 얼었을 경우 발인 하루 전에 가서 땅을 파 놓기도 한다. 또 여름이나 가을에 장사를 지낼 경우 떼를 입히지 않고 이듬해 봄에 사초( 莎 草 )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 경우 날도 지관에게 가서 받아 정하고, 산신제를 지내고 봉 분을 헐어 다시 올리고 떼를 입힌다. 강원도 홍천군 807
지관은 산에 도착하면 땅을 팔 곳과 방향을 지시한다. 산일 하는 사람들은 지관 의 지시를 받으며 일을 진행하는데, 본격적으로 땅을 파기 전에 산신제를 지내고 참파토를 한다. 묘를 쓸 자리보다 조금 높은 곳으로 올라가 산신께 주과포를 차리 고 잔을 올리는 것으로 땅을 다루게 되었음을 산신께 알려 산신이 노여워하지 않도 록 한다. 산신제는 타성( 他 姓 )이 올리는 경우가 많다. 산신제를 지내고 내려오면 땅 을 팔 곳에서 참파토를 한다. 이때 술을 한 잔 따르기도 하지만 대부분 산신제를 지 냈기 때문에 술을 따르는 것은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땅을 팔 곳에서 참파토 하오. 참파토 하오. 참파토 하오. 라고 말하면서 괭이로 땅을 세 번 두드린다. 그리 고 모두 함께 땅을 파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땅을 넓게 파고 점차 깊어질수록 시신 이 들어갈 만큼의 내광을 판다. 땅을 다 파면 위에 멍석을 덮어 상여가 도착할 때까 지 기다린다. 상여가 산에 도착하면 지관은 제일 먼저 지청을 만들 자리를 정한다. 묘를 만드 는 동안 혼백을 모셔 놓아야 하고, 또 조문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광을 다시 한 번 깨끗하게 정리하고 하관을 한다. 이때 지관은 하관을 보지 않아야 하는 생( 生 ) 을 말해 피하도록 시킨다. 탈관( 脫 棺 )의 여부는 가풍( 家 風 )에 따라 결정된다. 내광 의 바닥에는 별도로 까는 것이 없고 다만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게 한다. 하관을 하 면 곧이어 내광을 덮기 위해 횡대를 깔게 되며, 횡대의 수는 짝을 맞추지 않고, 시신 의 머리에서 허리로 내려가며 깔고, 다시 시신의 발에서 허리로 올려가며 깐다. 마 지막 가운데 횡대를 깔 자리가 남으면 시신의 위에 폐백을 드린다. 청 홍색 헝겊 을 직사각형의 모양으로 접고 그것을 각각 청실홍실을 사용해 동심결로 묶은 것을 시신의 가슴에 올린다. 폐백은 맞상주가 드린다. 맞상주가 물러서면 마지막 횡대를 덮고 그 위에 명정을 덮고 나면 다시 한번 맞상주가 흙을 세 번 뿌린다. 대부분 공포 는 관을 닦거나 내광을 깨끗이 치우는데 사용되는데, 간혹 집안에 따라 명정과 함께 공포를 묻기도 한다. 상주가 자리를 비켜서면 산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묘를 다 지고, 봉분을 만든다. 봉분이 다 만들어 지면 곧바로 지청에서 평토제를 지낸다. 지청에 모셨던 혼백 을 봉분의 오른쪽에 묻고, 대신 지방( 紙 榜 )을 써 놓고 그 앞에서 평토제를 지낸다. 평토제가 끝나면 지방은 집으로 모시고 돌아가 다시 지청에 모시고 삼년상을 난다. 한편 혼백을 탈상 때까지 사용하는 집안도 있다. 808 한국인의 일생의례
마. 우제 虞 祭 와 탈상 脫 喪 삼우제 三 虞 祭 : 초우제 재우제 삼우제 발인을 하면 더러 여자 상주들도 산까지 함께 간다. 하지만 반혼( 返 魂 )을 하기 전에 먼저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제사 준비를 한다. 집 안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망 인의 물건들을 정리하기도 하고, 상가의 정리를 돕는다. 묘를 다 만들고 집으로 돌아올 때 상주와 요여는 반드시 상여가 갔던 길로 돌아 온다. 상가에서 이들이 돌아오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면 여자들은 곡을 하며 집 밖 으로 나아가 맞이한다. 집 안에 차려 놓은 지청에 지방( 紙 榜 )을 모시면 곧바로 초우 제를 지낸다. 초우제를 지내고 나면 아침, 저녁으로 상식( 上 食 )을 올리는데 탈상 때 까지 매일 올린다. 초우를 지낸 다음 날 오전에는 재우를 지내며, 다음 날도 마찬가 지 방법으로 삼우제를 지낸다. 삼우제를 지내고 나면 집안 식구들이 산에 올라 산 소를 살핀다. 이때 미처 산소에 가지 못했던 여자 상주들은 꼭 가는 편이었다. 또 베 로 접은 혼백을 묘에 묻지 않고 가지고 왔으면 삼우제를 지내고 산소에 가지고 가 서 태우기도 하였다. 상식은 집안 식구들이 먹는 음식을 소박하게 차려 지청에 올리는 것이다. 한편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는 삭망 제사를 올리는데 이때는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내듯 이 한다. 상식을 올릴 때는 평상복을 입고 있지만 삭망 제사와 소상, 대상을 지낼 때 는 상복을 갖춰 입는다. 소상 小 祥 대상 大 祥 망인이 돌아가신 지 만 일 년째 되는 날 소상을 지내고, 이 년째 되는 날 대상을 지낸다. 소상과 대상은 망인을 기리는 큰 제사이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과 친지들이 모두 모인다. 그래서 이날은 집안의 형편에 따라 제사를 지내게 되는데, 잘 하면 저 녁 제사, 중식 제사, 새벽 제사까지도 지낸다. 탈상 脫 喪 대상을 지내고 나면 곧바로 탈상을 한다. 부친상의 경우 무조건 소상과 대상을 모두 지내고 만 삼 년 만에 탈상을 하지만 부친이 살아 계신데 모친상을 당하였다 강원도 홍천군 809
면 소상만 지내고 탈상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탈상을 하면 지청을 치우고 지방도 불사른다. 탈상 후 백일이 지나면 담제사를 지낸다. 담제사는 지청을 치우고 없앴기 때문 에 기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방 안에 상을 차려 지낸다. 담제사 때 곡을 하며 제를 지 내기 때문에 이를 곡 제사 라고도 한다. 바. 기타 화장 火 葬, 객사자 客 死 者 와 미혼자 未 婚 者 의 죽음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화장( 火 葬 )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마을마다 공동묘지도 없는 편이었다. 일제 강점기 이후부터 마을에 공동묘지가 생겨나기 시작하였고, 화 장을 하는 경우도 서서히 생겨났다. 성년이 되지 않은 10세 전후의 아이들과, 영아 들이 죽으면 별도의 장례 절차 없이 시신을 묶어서 묻었는데, 이를 애총 이라고 하 였다. 예전에는 산에 여우가 많아 애총을 파고 아이의 신체를 훼손하는 경우가 많아 이를 막기 위해 아이를 묻고 나면 솔가지를 깔고 그 위에 큰 돌을 눌러 놓았다. 혼인 적령기에 미혼의 상태로 죽은 남녀를 묻을 때는 예방을 한다. 별도로 수의를 만들지는 않지만 적당한 옷을 입혀 자루에 넣어 묶고, 매장을 할 때 엎어서 묻는다. <오선영> 810 한국인의 일생의례
Ⅴ. 제례 祭 禮 가. 제례 일반 홍천 지역에서는 오래전부터 설과 추석 차례를 주로 지내오고 있다. 섣달그믐 밤 에 별도로 올리는 제사는 없으며 다만 이날 친지 어른들께 묵은세배를 하러 다녔다. 하지만 지금은 묵은세배를 하지 않고 있다. 기제사는 4대조의 기일을 챙겨 밤에 올 리고 있으며, 시제는 5대조 이상 조상의 묘소를 찾아 올린다. 여자들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제사에 참여하지 않으며, 제사 음식을 만들 때 부 정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특히 머리카락이 들어가지 않도록 신경을 썼으며, 양 념으로 고춧가루를 사용하지 않는다. 홍천은 바다가 멀기 때문에 제물로 올리는 어 물( 魚 物 )이 조기뿐이었다. 이 외의 어물과 김 같은 것은 구하기가 어려워 제상에 올 리지 않았다. 또 상( 喪 ) 기간 중에 떡을 안 했다면 기일( 忌 日 ) 제상에도 떡을 올리 지 않는다. 나. 차례 茶 禮 명절에 올리는 차례는 설과 추석에 지내고 있다. 강릉 지역에서는 단오와 동지 에도 지내지만 홍천에서는 예전부터 이때에는 지내지 않았다. 원래 차례는 집 안에 서 기제를 모시고 있는 조상께 드리는 것이다. 하지만 근래에 기제를 지내는 것이 현 실적으로 어렵다고 여기는 집 안에서는 기제를 생략하고 차례만 모시기도 한다. 차례는 명절 아침에 지내게 되며 제사 음식은 기제사 때 준비하는 것과 대동소 이하다. 다만 명절 음식을 더 장만하여 올리는데 설에는 메 대신 떡국을 올리고, 추 석에는 송편을 더 올린다. 한편 집안에 따라 설에 메와 떡국을 같이 올리기도 하며, 만약 메를 올리지 않았으면 떡도 올리지 않는다. 차례를 지내는 방법은 집안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데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가장 윗대 조상 내외( 內 外 )께 먼저 제를 올리고 다음에 아랫대 조상을 순서대로 모시는 강원도 홍천군 811
경우와 차례를 지내는 조상을 모두 한 상에 함께 모시는 경우이다. 두 경우 모두 제 물은 한 몫으로 차리지만 순서를 달리해 제를 올릴 경우 대( 代 )가 바뀔 때마다 지방 을 다시 쓰고 메, 잔, 포, 시접을 새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제의 절차는 강신으로 시작된다. 잔에 술을 부어 퇴주그릇에 쏟고 빈 잔을 다시 올린 뒤 헌관이 재배를 하면 뒤에 모인 참례자들이 모두 재배를 한다. 차례는 단잔 ( 單 盞 )을 올린다. 그래서 헌관이 다시 잔을 채워 올리고 재배를 하면 곧이어 삽시( 揷 匙 )를 하고 저( 箸 )는 전에 올려 둔다. 이어 헌관이 재배를 하면 탕을 숭늉으로 갈아 드리고 일동 굴복( 屈 伏 )을 한다. 잠시 후 헌관이 기침을 하면 모두 일어나고, 헌관은 숟가락을 내리고, 저를 바로 놓는다. 이후 일동 재배를 올리면 차례를 마친다. 여러 대( 代 )의 조상께 차례를 모두 올리고 난 후에 지방은 한꺼번에 모아서 태운다. 철상 을 하고 음복을 하면 모인 사람들이 함께 묘소를 찾아 성묘를 하고 돌아온다. 섣달그믐에는 마을 사람들이 서로 묵은세배를 하러 다녔다. 이날 제를 올리는 집은 없다. 다. 기제사 忌 祭 祀 조상의 기일( 忌 日 )에 올리는 제사는 주제( 主 祭 )하는 사람으로부터 고조까지 모 시는 것이 보통이다. 아직은 대부분 시골에서 60~70대 어른들이 기제를 지내고 있 는 경우가 많아 주제자에게는 고조라 하여도 그들의 손자들에게는 6대조가 된다. 그래서 기제를 모시는 조상의 대( 代 )는 집안의 형편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기제를 올리는 것을 정성이라 생각하는 경우 손자가 생겨도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에는 자신의 고조께 제를 올리겠다고 하는 이들이 많다. 반대로 기제는 4대조께 올 리는 것이기 때문에 손자가 나면 당연히 시제로 올려야 한다는 이들도 있다. 한편 근래에는 과거처럼 모든 조상의 기제를 챙겨 지내는 일을 어렵게 여기기도 한다. 타지( 他 地 )로 나간 자손들이 기제 때문에 써야 하는 시간과 경비를 생각하면 매번 기제를 챙기는 일이 자식들에게 어렵고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 서 기제의 횟수가 점차 줄고 있는 실정이다. 즉 조상 내외의 제사를 남자의 기일에 합쳐 한번 지내거나, 아예 집안의 기제를 모두 합쳐 일 년에 한번만 지내는 경우도 812 한국인의 일생의례
생겨나고 있다. 조상을 생각하면 그리하면 안 되지만 자식들이 고생하는 것을 생각 하면 어쩔 수 없다고 여긴다. 기제는 장남이 모시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집안의 형편과 사정에 따라 차손 이 모셔도 흉이 되지 않는다. 집 안에서 모시던 기제를 다른 집 안으로 옮겨 갈 때 별 도의 절차는 없다. 다만 그 집 안에서 지내는 마지막 기제 때 제를 다른 곳에서 지내 게 되었음을 고유( 告 由 ) 한다. 홍천 지역에서는 대부분 각각의 기일에 제를 올릴 때 내외( 內 外 )를 함께 모시고 제를 드렸다. 근래에는 내외의 제사를 합친 집이 많아 한번에 지내지만 과거 각각 모실 때에서 지방을 함께 쓰고, 메와 잔을 각각 드렸다. 혹 부인이 두 명씩 있는 어른 의 경우 삼위( 三 位 )를 모두 모시고 제를 지냈는데, 남면 화전리 조남영씨 집안에서 는 이 제사를 세 그릇 제사 라고 불렀다. 제사 준비는 며칠 전부터 제기( 祭 器 )인 놋그릇을 꺼내 닦고, 장을 보러 다니며 집 안을 청소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지금은 다 사라졌다. 요즘은 대부분 제기도 나무나 스뎅[스테인리스강] 으로 된 것을 사용하고 제물 장만도 하루 면 시내에 나가 구입을 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기제사는 돌아가신 전날 밤 열두 시를 기점으로 지낸다. 제를 지낼 때 지방( 紙 榜 ) 은 한 장에 내외분을 함께 쓴다. 집사자(또는 지방을 쓰는 사람)를 기준으로 남자를 왼쪽에 쓰고, 여자를 오른쪽에 쓴다. 세 그릇 제사 를 지내는 경우 할아버지를 가운 데 쓰고 그 왼쪽에 첫째 부인을, 오른쪽에 둘째 부인을 쓴다. 지방은 제사 당일 제상 을 차리기 직전에 쓴다. 예전에는 지방을 제상 뒤에 펴 놓은 병풍에 붙였는데, 지금 은 대부분 신주틀을 장만해 놓고 사용하고 있다. 제사를 시작하기 전에 집 안으로 들어오는 대문과 방문을 열어 놓는데 이때 불 을 밝혀 놓으면 조상이 찾아오기가 더 쉽다. 제물의 진설은 가풍( 家 風 )을 따르면 된 다. 북방면 하화계리 이종호씨 댁에서는 집사자, 즉 제를 지내는 사람을 기준으로 좌동우서( 左 東 右 西 )가 정해져 왼쪽이 동쪽이고, 오른쪽이 서쪽이 된다. 이를 기준 으로 홍동백서( 紅 東 白 西 ), 어동육서( 魚 東 肉 西 ), 조율이시( 棗 栗 梨 柹 ), 좌포우혜( 左 脯 右 醯 )로 진설한다. 진설을 마치면 분향강신을 하고 초헌, 축, 아헌, 종헌, 첨작을 드린다. 초헌은 장자( 長 子 )가 하고 아헌은 둘째 아들이, 종헌은 장손이 맡게 되지만 이 또한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 특히 집안에 새로운 며느리가 들어왔으면 아헌을 강원도 홍천군 813
새 식구가 드리기도 한다. 제를 마치면 지방과 축을 불사르고 음복( 飮 福 )한다. 기제사는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있거나 많이 아픈 사람이 있으면 지내지 않는다. 라. 묘제 墓 祭 서면 모곡리는 함열 남궁씨가 많이 거주하고 있다. 모곡리 함열 남궁씨의 시제는 매년 10월 초하루와 5일 이틀에 걸쳐 지내고 있다. 10월 1일에는 입향조인 격자할아버지 묘소에서 시제를 지내고, 10월 5일에는 11대 조부터 5대조까지의 시제를 지내고 있다. 격자할아버지의 묘소는 모곡리 점말 뒷산 에 자리하고 있는데, 배위와 합묘로 조성되어 있고, 그 옆에 둘째 부인의 묘소가 함 께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시제를 이틀에 끝내고 있지만 과거에는 격자할아버지 시제를 지내고 며 칠을 더 지냈다. 남궁주씨의 기억에 자신이 어려서 시제를 따라 다닐 때에는 먼저 제 물을 차려 격자할아버지 산소에 가서 시제를 지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며칠에 걸 쳐 어른들과 함께 조상들의 산소에 들러 절을 하고 산소를 살피고 내려왔다. 그러면 또 다른 조상의 산소에 들러 똑같이 하고 내려온다. 그렇게 하루에 몇 위의 산소를 돌고 내려오면 계장에 해당하는 어른의 집에 모여 지방을 써 놓고 제사상을 차려 한 꺼번에 시제를 올렸다. 지금은 모든 시제를 재실에서 지내고 있다. 격자할아버지도 산소에서 제를 올리지 않은 지가 약 5년이 되었다. 제물은 한 상을 차려 올리고, 한 번에 3대 정도 조상을 함께 모시고 제를 올린다. 메, 탕, 주 만을 각각의 조상께 올리 고 있다. 한번 제를 올리고 나면 다시 아랫대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제를 올리는 방 식으로 하고 있다. 제가 끝나면 음식을 조금씩 싸서 집집마다 봉숭을 돌렸다. 시제를 위한 문중회의는 매년 음력 10월 11일로 정해져 있다. 이날 각각의 위토 에서 나온 소출에 대한 결산과 함께 종중 재산과 관련된 상의도 하고 여러 사항들 에 대해 회의를 한다. <오선영> 814 한국인의 일생의례
Ⅵ. 홍천군 일생의례의 특징 1) 출산 의례의 특징과 변화 홍천 지역에서는 기자( 祈 子 )를 위한 주술( 呪 術 )적인 방법이 많이 찾아졌다. 아들을 낳고자 할 때 마을에서 아들이 많은 집의 바가지를 몰래 훔쳐 와 사용한다. 그리고 아들을 낳으면 그 아이의 백일 때까지 바가지를 사용하다가 백일떡을 담아 서 자연스럽게 바가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준다. 또 작두의 날과 손잡이를 연결하 는 쇠를 임신을 해야 하는 여자의 베개 속에 몰래 넣어 준다. 또 임신을 원하는 여자 가 장이 처음으로 서게 되는 곳을 직접 찾아가 그곳에서 팬티를 사서 입고 집까지 돌아온다. 그러면 아들을 낳는 데 효험이 있다. 무당을 찾아 부적을 몸에 지니고 다 니기도 하고, 물제사 를 지내기도 한다. 임신을 하고 태아의 성별을 점치는 것은 태몽, 임신부의 배 모양, 태아의 윗형제 의 행동을 통해 가늠한다. 어느 것이든 길( 吉 )한 것으로 여겨지고, 크고 굵고 좋은 것은 아들로 여겨지며, 시시하고 별 볼일 없는 것은 딸로 여긴다. 그리고 모양이나 행동이 남성적이면 아들, 여성적이면 딸로 여긴다. 임신부는 산달까지 먹는 것을 특히 조심한다. 음식 재료의 성격이 태아의 형성 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쉰 음식과 짠 음식을 먹으면 아이가 태어나서 열 이 많이 날 수 있고, 뼈가 없는 것인 오징어, 낙지, 버섯 등을 먹으면 태아의 뼈가 잘 여물지 않는다. 또 오리고기를 먹으면 아이의 손가락이 붙어버린다. 유산의 기미가 보이면 은반지를 삶은 그 물을 마시고, 동곳이나 호박죔살이를 삶아 그 물을 마신다. 또는 밀가루를 물에 탄 밀풀을 먹는다. 반대로 낙태를 원하면 담뱃잎을 태워서 그 재를 물에 타서 마시거나 민들레를 찧어서 즙을 내 마신다. 산모가 먹을 미역을 해산미역 이라고 하는데 해산 전에 미리 구입하며, 짝을 맞 추지 않는다. 아이를 낳는 일은 생사( 生 死 )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예전 어른 들은 아이를 낳는 일을 두고 사잣밥을 이마에 쳐 대야 아를 낳는다. 고 했다. 산고 ( 産 苦 )가 오래 지속되면 시어머니가 솥뚜껑을 들고 뒤란으로 가서 얼른 나와라, 얼 른 나와라. 라고 말하며 양밥을 했다. 또는 마을에 출산을 쉽게 잘 하는 여자의 치 마를 얻어다가 산모에게 입힌다. 후산이 더디면 산모가 쥐가 파낸 흙을 담은 모말 강원도 홍천군 815
을 깔고 앉는다. 아이는 띠와 시를 잘 타고 나야 팔자가 편하고 운이 좋다. 태어나는 날은 초하루 와 보름은 좋지 않다. 이날은 상중( 喪 中 )인 집안에서 삭망제( 朔 望 祭 )를 지내느라 곡 소리가 나는 날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태어난 지 삼 일이 되는 날에 삼이 나간다. 그래서 이날 삼신께 삼신상을 차리는데, 홍천 지역에서는 삼신이 특히 두부를 좋아 한다고 해서 잘 차리고자 하면 두부를 한 판 해서 그대로 올렸다. 삼신께 올린 두부 는 식구들이 먹는데 칼을 대지 않고 수저로 뚝뚝 떼어 먹는다. 그래서 아이의 돌상 에도 두부를 올리기도 한다. 삼신상에 올렸던 국에 밥을 말아 아이의 윗형제에게 먼 저 먹이면 형이 동생을 시샘하지 않는다. 2) 혼례의 특징과 변화 이 지역에서는 혼례를 잔치 치른다., 전안 한다. 고 하며, 대부분 신붓집 마당에 서 잔치를 치렀기 때문에 마당 빌려 준다. 고 하였다. 만약에 신붓집에서 잔치를 치 르지 못하고 신랑집에서 잔치를 치를 경우 싸 데려 간다(온다). 고 하였다. 조사된 1950~60년대 혼례는 대부분 당사자들의 부모에 의해 결정되었고, 당사 자들은 상대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혼인을 하였다. 혼담은 중매로 상대자를 소개 받고, 어른들 특히 신랑의 부모가 신붓감을 선보고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혼담이 성사되면 신랑집에서 신붓집으로 사주, 함 등을 옷감과 함께 보낸다. 이는 신부의 부 모가 받아서 사주와 함께 온 옷감으로는 사주조고리를 만들고, 함과 함께 온 옷감으 로는 저고리와 치마 등을 만들어 잔치하는 날 신부에게 입힌다. 사주와 혼서지 등은 신부의 어머니가 보관을 한다. 홍천 지역에서는 이 사주와 혼서지를 혼인을 한 후에 신부가 신랑과 함께 재행을 오거나 근친으로 친정에 왔을 때 어머니 몰래 훔쳐 가면 잘 산다고 한다. 사주와 혼서지는 신부가 평생을 보관하고 있다가 부부 중 먼저 죽 는 사람의 관에 함께 넣어 준다. 1940년대에는 신랑과 상객, 정매, 함진애비, 하님이 초행길에 나섰고, 50년대 중 후반부터 말을 타지 않게 되면서 말을 끄는 정매가 빠지고, 신랑 친구들이 우인 대 표로 함께 나섰다. 우인 대표는 혼례식에 가마를 메기도 하고, 잔치에서 축하의 글 을 읽기도 하였다. 신랑 일행이 신부 마을에 도착하면 신붓집에서 마련한 새손방에 머물며 잔치 준비를 한다. 816 한국인의 일생의례
첫날밤은 1950년 말을 전후하여 전에는 신붓집에서 치렀고, 후에는 신랑집에서 치렀다. 신행을 온 신랑은 집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굴뚝으로 가서 한쪽 발을 굴뚝 에 걸친 채 국수를 한 그릇 먹는다. 신부는 신랑집에 들어올 때 신부를 태운 가마꾼 이 짚불을 밟고 들어오기도 하고, 신부의 가마에 팥을 세 번 뿌리기도 한다. 신부가 가마에서 내려 방으로 들어가 앉으면 미숫물이라고 불리는 꿀물을 먹이고, 이를 시 누이, 동서지간에 서로 나누어 먹도록 한다. 그러면 서로 사이가 좋고, 또 새로 들어 온 신부가 시어머니에게 말대답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시집에 온 신부는 삼 일이 지나서 신랑과 함께 친정으로 재행을 가는데, 3일 근친 이라고도 한다. 친정에서 하 루나 이틀 정도 머물고 시댁으로 돌아와 시집살이를 시작하며, 일 년 후 농사를 마 치고 근친을 간다. 3) 상 장례의 특징과 변화 보통 수( 壽 )를 누리고 큰 변고 없이 돌아가시면 호상( 好 喪 )이라고 하였는데, 홍천 지역에서는 이 외에도 상을 치르는 동안 조상꾼(조문객)이 많아도 호상이라 고 하였다. 망인의 수세를 걷을 때는 송판을 바닥에 깔고 시신을 눕히는데, 이 송판은 칠성 판과는 다른 것이다. 이곳에서 칠성판은 염을 할 때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홍천 지역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상례 풍습으로 팥죽 제사 를 들 수 있다. 제사 의 형태를 띠고 있지는 않지만 부녀자들에 의해 팥죽 제사라고 불리는 것으로 수세 를 걷은 시신 앞에 팥죽을 한 그릇 가져다 놓는다. 이는 상가의 부정을 없앤다고 한 다. 이 외에도 팥이 상가의 부정을 없앤다는 인식은 상례의 과정 중에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은 상가에 부조로 팥죽을 끓여 오고, 발인 직전에 군정[상 두꾼] 과 모인 사람들에게 대접하려고 하는 밥을 지을 때 팥을 섞는다. 특히 발인 때 먹는 이 팥을 섞은 밥은 군정이 묘를 쓰고 돌아오기 전까지 다 먹어야 해서 상가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 싸가기도 한다. 이 외의 특징으로는 상여를 들기 위해 묶는 줄을 낙다우 라고 하는데 보통 광목 으로 사용했으며 이는 묘를 다 쓰고 난 후에 군정이 서로 나누어 갖기도 하였다. 하관을 하고 횡대를 깔 때는 시신의 머리부터 횡대를 놓고 허리 쪽으로 내려오고, 다시 발에서부터 깔아 허리 쪽으로 올라가며 놓는다. 이는 염을 할 때 시신을 묶는 강원도 홍천군 817
방법과 동일하다. 상례의 변화는 제례의 변화와 마찬가지로 간소해졌다는 것이다. 장례식장을 이 용하는 것이 간편하고 쉬워지면서 상가( 喪 家 )에서 해야 하는 절차들이 대부분 사라 져가고 있다. 그리고 상례에 필요한 것들을 손쉽고 빠르게 구입을 할 수 있게 되면 서 삼일장으로 마치는 경우가 많아졌다. 4) 제례의 특징과 변화 제례는 가가례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 또한 이를 담당하고 있는 세대의 생 각과 판단이 가장 중요하게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례로 서면 모곡리 남궁주씨의 모친은 기독교인이다. 모친은 조부모가 생존해 계실 동안에는 집안의 기제사를 지내왔다. 하지만 조부모가 모두 돌아가시고는 기제사를 지내지 않고 기 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또한 앞으로도 자신의 기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아들에게 늘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남궁주씨는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야 하기 때문에 모친의 기제사는 지내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본인은 조상을 기 리는 기제사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제를 본격적으로 일임하게 되 면 모친을 제외한 조상들께는 기제사를 올릴 생각이라고 한다. <오선영> 제보자 정보 홍현옥(여, 86세). 서석면 검산리에서 태어나 17세에 생곡리로 시집을 오셨다. 출산 의례와 혼례에 대해 제보했다. 김옥녀(여, 74세). 내촌면 몰안골에서 태어나 7세에 서석면 풍암리로 이주했 다. 출산 의례와 혼례에 대해 제보했다. 이순남(여, 81세). 강릉에서 태어나 서석면 청량리로 시집을 오셨다. 출산 의례 와 혼례에 대해 제보했다. 고부예(여, 82세). 서석면 청량리에 거주, 출산 의례와 혼례에 대해 제보했다. 김창옥(여, 78세). 강릉 삼척동에서 태어나 8세에 서석면 하군두리로 이주했 고, 다시 청량리로 이사해 이곳에서 한 동네 청년과 혼인을 하였다. 출산 의례 818 한국인의 일생의례
와 혼례에 대해 제보했다. 노인순(여, 77세). 22세에 내촌 서곡리로 시집을 갔다가 26세에 청량리에 정착 하였다. 출산 의례와 혼례에 대해 제보했다. 김경호(남, 75세). 내촌면 서곡리 여창동에서 태어났고 24세에 청량리에 정착 하였다. 노인순씨와 부부지간이다. 혼례에 대해 제보했다. 용덕주(여, 74세). 홍천읍 와동1리에서 태어나 21세에 성수리로 시집을 왔다. 출산 의례와 혼례에 대해 제보했다. 김복순(여, 75세). 춘천 동면에서 태어나 26세에 양평 단월면으로 시집을 갔다. 출산 의례와 혼례에 대해 제보했다. 남궁주(남, 73세). 서면 모곡리에서 태어나 거주하고 있으며 한서 남궁씨이다. 혼례와 상 장례 및 제례에 대해 제보했다. 조남영(남, 75세). 남면 화전리에서 태어났으며, 상 장례와 제례에 대해 제 보했다. 고옥순(여, 76세). 남면 남노일리에서 태어나 동향( 同 鄕 )의 청년과 혼인을 하였 다. 혼례와 상 장례 및 제례에 대해 제보했다. 황인선(여, 69세). 남면 굴지리에서 태어나 17세에 혼인을 하여 남노일리로 들 어왔다. 상 장례와 제례에 대해 제보했다. 여운혁(남, 73세). 함양 여씨이며 서면 길곡리에서 태어나 자랐다. 상 장례와 제례에 대해 제보했다. 정재수(남, 87세). 서면 길곡리에서 태어났으며 젊어서 서울에서 약 10년간 공 직에 있었으며 고향으로 돌아왔다. 상 장례와 제례에 대해 제보했다. 이종호(남, 76세). 성주 이씨이며 북방면 하화계리에서 태어나 자랐다. 상 장 례와 제례에 대해 제보했다. 박명선(남, 75세). 횡성 공근면에서 태어나 12세까지 그곳에서 자랐고, 이후 동 면 성수리로 이주해 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 상 장례와 제례에 대해 제보했다. 김학경(남, 82세). 남면 노일리에서 태어나 처가인 동면 성수리에 와서 살고 있 다. 상 장례와 제례에 대해 제보했다. 탁현영(남, 세). 내면 자운리에 거주, 혼례와 상 장례 및 제례에 대해 제보 했다. 강원도 홍천군 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