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문제연구 2013년 상반기(통권 제59호) 북한의 대일인식과 재일총련 정책 변화 연구* 1) - 로동신문 기사목록(1946~2010) 분석과 50년대 정책 변화를 중심으로 - 진 희 관** 2) Ⅰ. 서론 Ⅱ. 로동신문 통계 분석 및 추이 Ⅲ. 50년대 북한의 대일인식 Ⅳ. 50년대 북한의 재일동포 및 재일 총련 정책 Ⅴ. 결론 국문요약 이 논문의 연구목적은 1946년부터 2010년까 지 로동신문 기사 추이 분석을 통해 일본 및 북일관계에 대한 인식과 아울러 북한이 주장하는 북일관계 개선의 핵심쟁점 중 하나인 재일조선인 문제에 대한 북한의 인식이 무엇이며, 어떠한 변 화추이 및 특징을 보여 왔는지를 분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50년대 북한의 대일 및 총련 정책의 특징을 분석하는데 있다. 일본 을 포함하는 기사 를 보면 아홉 번의 큰 폭의 증가를 확인할 수 있는 데, 1951년, 1956년 1959년, 1967년, 1972 년, 1983년, 1992년, 2001년, 2005년을 주목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재일 을 포함하는 기사를 보면 다섯 번의 큰 폭의 변곡점을 확인할 수 있는데, 1959년, 1967년, 1972년, 1995년, 2010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재일총련에 대한 초기의 인식과 정책들을 살펴 본 결과 재일총련에 대한 북한의 정책 방향은 북한이 정책 지향을 대 행할 수 있는 역할을 담당하도록 하는 데 있는 것 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관련 기사 들은 대부분이 단신성 방문 기사들이라는 점에서 볼 때, 과거 총련이 북한 정책 노선을 대변하는 창 구 역할을 담당했다면, 최근에는 관계를 유지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평가된다. 주제어: 북한, 북일관계, 조일관계, 총련, 재 일총련, 로동신문, 재일조선인, 재 일동포 신문기사, 추이분석 * 이 논문은 2008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 행된 연구임 (NRF-2008-327-B00023) ** 인제대학교 통일학연구소 소장, 통일학부 부교수. 저서 및 논문: 재일동포사회의 문제와 북일 관계: 60년대 한일수교 시기를 중심으 로, 한국사연구 제131호(2005) 외.
362 통일문제연구 2013년 상반기(통권 제59호) Ⅰ. 서론 이 글의 연구목적은 1946년부터 2010년까지 로동신문 기사 추 이 분석을 통해 일본 및 북일관계에 대한 인식과 아울러 북한이 주장하 는 북일관계 개선의 핵심쟁점 중 하나인 재일조선인 문제에 대한 북한 의 인식이 무엇이며, 어떠한 변화추이 및 특징을 보여 왔는지를 분석하 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50년대 북한의 대일 및 총련정책의 특징을 분 석하는데 있다. 북일관계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 도 북한의 조선로동당 기관지를 통한 북한의 대일인식과 재일총련에 대 한 정책 등에 대해 조사한 연구는 처음의 시도라 할 수 있다. 재일동포 에 대한 연구는 일부 진행되어 왔지만, 해방 후부터 일본의 1955년 체 제 이전 또는 1965년 한일수교까지의 연구(김태기, 박정진) 1) 등이 주 류를 이루며, 재일조선인에 대한 연구가 일반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재일총련을 중심에 두고 전개된 연구는 전준, 진희관(1999) 2) 외에 일 부 존재하고 있으나, 로동신문 과 조선신보 의 자료를 총체적으 로 검토한 연구는 아직 시도된 바가 없다. 다만 신정화의 연구 3) 가 가 장 근접한 연구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신정화는 북일관계를 로동 신문 을 주로 분석하면서 조선신보 (총련 기관지)를 보완적으로 1) 金 太 基, 戰 後 在 日 朝 鮮 人 問 題 の 起 源 -SCAPの 對 在 日 朝 鮮 人 政 策 1945 年 ~1952 年, 一 橋 大 學 博 士 學 位 論 文, 1996; 朴 正 鎭, 冷 戰 期 日 朝 關 係 の 形 成 (1945-65 年 ), 東 京 大 學 博 士 學 位 論 文, 2009. 2) 전준, 조총련연구 1,2권 (서울: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1972); 진희관, 조총련 연 구 -역사와 성격을 중심으로-, 동국대 박사학위논문, 1999; 진희관, 북일관계연구 - 북한의 대일인식 변화를 중심으로-, 통일문제연구 제9권 1호(1997). 3) 신정화, 김정일 정권의 대일정책: 로동신문 과 조선신보 분석을 중심으로, 한국시민윤리학회보 제24집 1호(2011).
북한의 대일인식과 재일총련 정책 변화 연구 363 활용하여 분석하는 시도를 전개했다. 다만 분석자료인 로동신문 과 조선신보 에 대한 범위를 한정하지 않았고, 분석 시기 역시 김정일 정권에 맞추어져 있어, 총체적인 분석이 아니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고 하겠다. 따라서 대략 시기적으로 김일성 사후 1995년부터 약 10여 년 간의 기간을 다루었다. 또한 이 시기 로동신문 전체에 대해 분 석결과를 제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논문 전개과정에서 주요한 신문 자료 들을 활용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로동신문 의 주요 추이를 나타내 는 방식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은 북일관계의 분석기간을 1946년부터 4) 2010년까지 로 설정하여 로동신문 기사검색을 전개하고 이를 바탕으로 논문을 전개하며, 이에 필요한 기존 연구자료들을 활용하는 방식을 취하였 다. 5) 다만 이 글에서 모든 시기를 다루기에는 지면상의 한계로 인해 주요 변곡점(기사 증가율 급상승)들을 찾아 이 시기를 중심으로 배경과 내용들을 설명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검색은 주요 키워드를 설정하여 검색하였으며, 크게 네 가지로 설정하였다. 즉 재일, 대일, 일조(조 일), 일본 이라는 단어가 포함되는 기사목록을 모두 검색하였고 이중 중복되는 기사를 삭제하여 총 4만 1,944건의 기사를 1차 분석대상으 로 설정하였다. 이중 4~6면에 실리는 단순보도 기사들 보다는 1~3면 4) 로동신문 의 일본에 대한 언급은 1946년 2월 6일자에서 처음 발견되며 (구호) 이 후에도 주로 3.1절 기념식에 맞추어 반일 또는 일제잔재척결과 관련된 기사들이 나 타난다. 물론 1940년대의 로동신문 기사는 유실된 날짜분이 많아 전체 기사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1946년의 경우 전체기사가 41건에 불과하며, 1947년 1,051 건, 1948년 649건이었다가 1949년이 되면서 5,168건 그리고 1953년에는 1만 1,524건으로 증가한다. 5) 로동신문 의 경우 2002~2004에 이루어진 한국연구재단 기초학문 연구( 로동신 문 을 통해본 북한사회 변화 연구: 1945-2002, 동국대학교 북한학연구소)의 기사목 록 DB를 활용하여 1946년~2002년까지의 기사를 검색하였으며, 이후 시기인 2003 년~2010년까지의 8년간의 로동신문 은 새롭게 기사목록 작업을 전개하였다.
364 통일문제연구 2013년 상반기(통권 제59호) 등에 실리는 노선과 정책 관련 기사들을 주요 분석대상으로 판단하였 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우선 로동신문 (1946년~2010년) 기사에 서 나타는 일본 및 재일총련 관련 신문기사의 추이를 먼저 언급하고, 다음으로는 시기를 한정하여 50년대 북한의 대일본 인식의 내용과 특 징 그리고 재일총련 정책으로 볼 수 있는 기사들의 내용을 기존의 연구 들을 활용하여 분석함으로써 내용과 특징을 찾아보고자 한다. Ⅱ. 로동신문 통계 분석 및 추이 아래의 <표 1>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키워드로 분류해낸 기사의 총 수는 4만 1,944건으로 대략 전체 로동신문 기사의 5% 내외로 추 정된다. 6) 설명한 바와 같이 이 기사 수는 크게 네 가지 키워드가 포함 된 기사제목들을 추려낸 결과이며, 로동신문 이 발간된 1946년부 터 2010년까지의 기간이 해당된다. 4만 여건의 기사들 중 가장 비중이 높은 것은 일본 이라는 단어를 포 함하는 기사로 3만 4,216건으로 분석대상 전체 기사 중 81.6%이다. 다음으로는 재일 을 포함하는 기사가 5,843건으로 14%이며, 다음이 일조(조일) 1,591건으로 3.8%, 마지막으로 대일 294건으로 0.7%에 해당된다. 아래의 <표 1>을 보면 네 가지 분류된 기사들 중 갑자기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경향들을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6) 1946년~1972년까지 로동신문 전체 기사건수가 26만 2,278건이며 같은 기간 일본, 재일, 대일, 조일(일조) 4가지로 검색한 기사건수가 1만 4,063건이어서 5.3%에 해당한다. 이를 확대 적용할 경우 대략 5% 내외의 기사분량을 차지하는 것 으로 추정하도록 한다. 고유환 외, 로동신문을 통해 본 북한 변화 (서울: 선인, 2006) p.272 참조.
북한의 대일인식과 재일총련 정책 변화 연구 365 년도 키워드 <표 1> 로동신문 기사 통계 : 1946~2010 일본 재일 대일 일조 / 조일 계 키워드 일본 재일 대일 일조 / 조일 년도 1946년 1 0 0 0 1 1981년 559 98 2 45 704 1947년 28 0 9 0 37 1982년 639 120 4 35 798 1948년 3 1 1 0 5 1983년 965 92 3 31 1,091 1949년 51 45 2 1 99 1984년 895 120 12 24 1,051 1950년 114 12 6 0 132 1985년 729 119 7 17 872 1951년 157 6 116 0 279 1986년 564 67 10 38 679 1952년 295 7 12 0 314 1987년 599 85 2 16 702 1953년 225 23 2 0 250 1988년 423 72 0 2 497 1954년 132 23 3 2 160 1989년 448 67 1 20 536 1955년 306 52 5 17 380 1990년 425 62 2 49 538 1956년 427 50 1 33 511 1991년 556 40 3 148 747 1957년 360 36 0 12 408 1992년 815 63 6 80 964 1958년 297 79 0 12 388 1993년 624 70 9 17 720 1959년 515 284 0 25 824 1994년 676 73 8 22 779 1960년 461 133 0 20 614 1995년 643 115 10 46 814 1961년 374 83 0 9 466 1996년 465 56 5 27 553 1962년 407 170 1 17 595 1997년 483 66 2 38 589 1963년 512 193 1 15 721 1998년 614 75 5 19 713 1964년 644 141 1 25 811 1999년 661 47 6 10 724 1965년 777 161 3 25 966 2000년 675 39 5 52 771 1966년 828 147 2 19 996 2001년 815 44 0 4 863 1967년 916 210 2 31 1,159 2002년 413 31 0 48 492 1968년 532 145 0 22 699 2003년 552 15 0 0 567 1969년 471 105 0 19 595 2004년 548 14 1 8 571 1970년 470 63 2 12 547 2005년 747 24 4 10 785 1971년 613 132 0 39 784 2006년 620 51 0 19 690 1972년 1,048 200 0 74 1,322 2007년 490 50 0 4 544 1973년 1,017 241 11 65 1,334 2008년 231 44 0 10 285 1974년 833 199 1 44 1,077 2009년 180 50 0 4 234 1975년 614 119 0 56 789 2010년 257 101 0 8 366 1976년 687 142 0 34 863 1977년 700 186 4 48 938 1978년 725 206 1 19 951 1979년 612 160 0 11 783 1980년 753 119 1 34 907 계 건수 34,216 5,843 294 1,591 41,944 비율 81.6% 14.0% 0.7% 3.8% 100.1%
366 통일문제연구 2013년 상반기(통권 제59호) 1. 일본 키워드를 포함하는 기사추이와 변곡점 분석 일본 을 포함하는 기사를 보면 아홉 번의 큰 폭의 증가를 확인할 수 있는데, 1951년, 1956년 1959년, 1967년, 1972년, 1983년, 1992 년, 2001년, 2005년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951년도는 패망한 일본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국가들과 샌프 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조인한(9월 8일) 해이며, 이에 대한 비판적 기사 들이 상당히 급증하였다. 이 시기는 특히 대일 기사가 가장 높이 게재 된 특징도 보이고 있다. 내용들은 미국 주도의 강화조약에 대한 비판과 일본 재무장에 대한 비난을 실은 기사들이 상당수 나타나고 있다. 대일 강화조약을 제외한 일본 만을 포함한 기사들 157건 중 24건(15.3%) 이 재무장에 대한 우려와 비난 기사이다. 1956년도는 전년대비 39.5%증가했으며, 이미 1955년도는 전년대 비 172.2% 증가한 바 있다. 1955년도의 증가는 조일 관계정상화와 재 일총련 결성(1955.5.25)과 유관하다. 특히 당시 북한은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를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1954년 12월 요 시다( 吉 田 ) 내각이 총사퇴(1954.12.10)하면서 북일관계 개선의 청신 호가 켜진 시기이다. 1955년 2월 26일 남일 외무상 성명이 나오면서 지속적으로 북일관계 개선을 위한 기사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10월에는 일본 국회의원단이 평양을 방문하여 공동코뮤니케(1955.10.21)에 합 의하였고, 일주일 후 2차 일본 국회의원단 방문시에도 공동코뮤니케 (1955.10.30)에 합의한 바 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이 당시 일본 적십자와의 교류 관련 기사가 상당수 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체 427건이 일본 기사 중 63건 (14.8%)이 재일조선인의 귀국 7) 에 대해 다루거나 이에 대한 일본 적 7) 1959년 12월 시작되어 1984년 종료될 때까지 재일동포 9만 3천여명이 북한으로
북한의 대일인식과 재일총련 정책 변화 연구 367 십자사와의 논의에 대한 내용, 그리고 북한 체류 중인 일본인들의 귀국 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1959년도는 12월에 이르러 귀국사업 이 처음 시작된 해이며, 귀국 이 이루어질 때까지 북한 당국으로부터 지속적으로 귀국이 실현돼야 한 다는 주장이 년초부터 제기되었다. 북한 당국의 입장, 사회 저변의 반 응, 일본정부 및 일본 적십자사에 대한 비난 그리고 12월에 이르러서 는 귀국이 결정된 이후 환영의 메시지와, 1, 2차 귀국자들에 대한 환영 대회 기사들이 상당수 게재되었다. 일본 키워드 기사 515건 중 215건 이 귀국사업 관련 기사로 약 41.7%에 해당된다. 또한 관련기사들로 는 오무라 수용소의 수용자들에 대한 핍박 8) 과 한국으로 귀국한 귀국자 들에 대한 비판적 기사 9) 들을 통해 북한으로의 귀국의 정당성 을 주장 하고 있으며, 또한 북한 귀국자들을 재일조선공민 으로 표현하고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10) 60년대에는 꾸준히 기사가 증가하는 추이를 보이고 있는데, 1961년 374건에서 1961년에는 916건으로 대비 244.9%의 기사 증가를 보이 고 있다. 1968년부터는 다시 감소세로 변화한다. 1967년에 일본 이라 는 키워드가 포함된 기사가 가장 많이 등장하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 북 영구 귀국한 소위 북송사업 을 일컫는다. 영구 귀국한 동포들 중 대부분인 약 98% 의 고향이 남한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사업은 일본 적십자사의 적극적인 동조 하에 이루어졌다. 진희관, 재일동포의 북송문제, 역사비평 겨울호(2002), p.82 참조. 8) 로동신문, 일본 오무라 수용소에 있는 조선 공민들에 대한 테로 행위를 즉시 중 지시키라, 1959년 8월 30일. 9) 위의 신문, <미제 강점하의 남조선> 일본으로부터 남조선에 강제 송환된 조선 공민 들이 집단 도주, 1959년 1월 14일; 같은 신문, 일본에서 남조선으로 끌려간 조선 공민들이 겪고 있는 참상, 1959년 2월 5일. 10) 위의 신문, 아까하다 지 재일 조선공민들의 귀국 실현을 위하여 계속 투쟁할 것 을 일본의 각 사회단체들에 호소, 1959년 6월 18일. 이 외에도 7월 21일, 7월 29 일 등.
368 통일문제연구 2013년 상반기(통권 제59호) 송사업에 대한 일본정부의 금지조치, 즉 북일간의 귀국협정 폐기 에 기 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북송사업 즉 귀국사업은 북일간 협정에 의해 이루어져왔으나, 일본 측이 1965년 한일수교협상 이후 반대해오다가 1967년 4월 각료회의를 통해 폐기를 결정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과 사 건 전후의 연장 요구 11) 및 결정에 대한 비판 기사 12) 들이 상당수 증가 되었다. 1967년에 귀국협정 이 포함된 기사제목 건수는 141건으로 일본 을 포함한 기사 총수 916건의 15.4%에 이른다. 또한 재일본 조 선인 단체들에 대한 기사가 152건으로 전년 83건 대비 83.1%가 증가 했는데, 이 역시 귀국협정 폐기와 상당부분 관련이 있는 것으로 평가된 다. 155차 귀국선이 12월 26일자에 청진항 도착 기사가 실린 이후 3 년 4개월 간 운항이 중단되었고, 1971년 5월 재개되었다. 13) 1972년 일본 키워드를 포함하는 기사는 1,048건으로 가장 많을 뿐 만 아니라 전년 1971년 대비 435건이 증가하여 증가폭 역시 71.0%로 가장 높게 나타나고 있다. 추출된 기사 총수는 1973년의 1,017건과 유 사하다. 이 시기 로동신문 이 8면으로 발행되는 경우가 나타나고 있 지만 일본 키워드로 검색되는 기사목록 중에 8면에 해당되는 경우는 5 건에 불과하므로, 지면의 증가와는 크게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재일본 조선인 단체들과의 교류가 더욱 활발해짐을 알 수 있다. 총 135건으로 12.9%이며, 다음으로는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에 대한 11) 위의 신문, 귀국협정의 연장은 인도상 문제, 1967년 1월 22일; 같은 신문, 재일 조선공민들의 민족교육을 무조건 보장하라 귀국협정을 무수한 연장하며 조국에로 자유롭게 오갈수 있게 하라!, 1967년 3월 20일 등. 12) 위의 신문, 우리는 일본정부가 부당한 <각료회의 결정>을 철회하고 재일 조선공민들 의 귀국사업을 계속 보장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 1967년 4월 22일. 이 외에 4월 24일. 13) 위의 신문, 일본반동정부는 재일 조선 공민들의 귀국사업을 파괴하려는 음흉한 책동 을 당장 걷어치우라, 1967년 12월 26일; 같은 신문, 경애하는 수령님의 육친적인 배려에 의하여 재일조선공민들의 귀국의 배길이 다시 열렸다, 1971년 5월 12일.
북한의 대일인식과 재일총련 정책 변화 연구 369 비판적 기사가 112건으로 10.7%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일 본 언론과의 교류에 해당되는 기사들이 증가한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104건으로 9.9%에 이르며 이중 요미우리신문사 일행과의 면담 및 이에 대한 김일성의 발언에 관련된 기사가 68건에 이르며, 이 외에도 마이니치신문사 일행과 면담에 대한 기사가 31건, 세카이(월간 世 界 ) 관련 기사 7건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밖에도 일본의 단체들과의 서신교류에 대한 기사가 모두 102건으로 9.7%에 이르며, 출입국관리 법 개정을 통한 재일조선인에 대한 압박 의도를 비판하는 기사들이 34 건(3.2%)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일본에 대한 군국주의적 개념규정과 아울러 출입국관리법 개정 의도에 대한 비판이 약 14%에 이르고 있는 데, 이와는 달리 일본의 정당, 언론을 비롯한 제 단체들과의 교류 및 서 신교환에 관한 기사가 약 20%에 이르고 있다. 14) 요컨대 일본에 대한 양면 외교전술 을 전개하는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의도는 요미 우리신문 기자와의 면담 및 세카이 편집국장과 한 담화 15) 에서도 잘 나 타나고 있다. 즉 김일성 주석은 일본의 적대시 정책에 대해 비난하지만, 일본의 우호적 단체들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하면서 북일관계에서 정상 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좋은 일 이라고 표명하고 있다. 이 시기는 김일 성 주석이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의 언론 뉴욕타임즈, 워싱턴포스트 기자 들과 담화를 나누면서 관계 개선의 의지를 표명한 바 있다. 이러한 배경 은 당시 미국과 중국의 데탕트 분위기 그리고 남북대화 전개(7.4남북공 14) 1971년 11월 집권당인 일본의 구노 슈지( 久 野 忠 治 )의원을 임시 의장으로 하는 자 민, 사회당 234명으로 구성된 日 朝 우호촉진의원연맹 이 설립되었다. 이로써 일본 사회당과 공산당에 국한되었던 북일간의 정치적 교류가 집권자민당으로까지 확대되 게 되었다. 그리고 1972년 출범한 다나까( 田 中 )내각은 일본의 기존 외교정책의 틀 을 유지하면서 서울과 평양에 대하여 보다 유연한 자세를 표명하고 나섰다. 15) 로동신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당면한 정치, 경제 정책들과 몇가지 국제문 제에 대하여 김일성, 1972년 1월 15일; 같은 신문,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일본정치 리론잡지 세까이 편집국장을 만나시였다, 1972년 10월 7일.
370 통일문제연구 2013년 상반기(통권 제59호) 동성명)의 상황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1983년은 965건으로 전년대비 326건이 증가하여 51.0%의 높은 증 가율을 보이고 있다. 이 시기는 한반도 주변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던 시점이라 할 수 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한미일 3국의 군사동맹(49 건), 군사연습(팀스피리트)(25건) 그리고 핵기지화, 항모,잠수함(39 건) 및 일본의 군국주의화(59건)에 대한 기사건수가 172건으로 17.8% 에 이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 건수는 전년 군사동맹(2건), 군사연습(7 건), 핵기지화(20건), 군국주의화(9건)의 합이 38건에 비하면 4.5배나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3각 군사동맹에 대한 기사는 1983년 미일안전 보장협의회에 따라 시작된 극동사태에 대한 대비방안에 대해 북한이 비 판하는 기사 내용이다. 16) 이로 인해 일본 사세보와 요코스카항이 핵항 공모함 및 핵잠수함 기지로 변화한다는 우려를 섞어 비난하고 있다. 17) 이 밖에 미국의 레이건(레간) 대통령의 동아시아 정책 및 순방계획 등에 대한 비난 기사가 67건이며, 일본 아사히신문 기자와의 담화 내 용이 22건으로 2.3%로 나타나고 있다. 당시 11월 레이건 대통령의 일 본과 한국 방문에 대한 비판과 전두환 군사정권을 비호 하는 미 레이건 행정부의 입장을 비난하는 기사들의 내용이다. 18) 그리고 아사히 신문 과의 담화는 조선의 통일을 이룩하고 아세아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 16) 위의 신문, 미일남조선 3각군사동맹 체제를 완성하려는 책동, 1983년 1월 21일; 같은 신문, 미일남조선사이의 3각군사동맹조작책동을 저지파탄시키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리자, 1983년 2월 26일 등. 17) 위의 신문, 일본신문이 사세보항을 핵항공모함의 기지로 만들려는 미국을 규탄, 1983년 1월 8일; 미제의 항공모함 <미드웨이>호와 핵잠수함이 일본사세보항에 기 여들었다, 1983년 1월 30일 ; 일본 요꼬다미공군기지에 핵무기 수송용짐함 반입 (일본신문이 폭로), 1983년 4월 29일 등 18) 위의 신문, 호전광 레간이 삼엄한 경계하에 일본땅에 기여들었다, 1983년 11월 10일; 연세대학교 성균관대학교에서 레간방문반대시위 학생들이 투석전으로 경찰 과 충돌 (일본신문들이 보도), 1983년 11월 11일 등.
북한의 대일인식과 재일총련 정책 변화 연구 371 기 위한 현실적인 방안 이라고 주장하면서 여러 나라들에서 이를 보도 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게재되고 있다. 19) 1992년 815건으로 전년대비 259건이 증가하여 46.6%의 높은 증 가율을 보이고 있다. 이 시기는 일본의 핵무장 및 기지화(108건)에 대 한 관심이 높아 13.3%를 보이고 있는데 전년 38건 대비 2.8배 증가를 보이고 있다. 특히 일본의 플루토늄 도입 계획에 대한 비난 가사가 이 중 57건에 이르고 있다. 20) 또한 종군위안부 문제가 국제적으로 쟁점 이 된 시기에 맞물려 북한 역시 이에 대한 비판과 문제제기가 다수 기 사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전년에는 관련기사가 전혀 없었다는 점 에서 볼 때, 기사 증가의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 두 61건(위안부, 정신대)으로 7.5%에 이르며, 과거죄행(48건) 및 강 제련행(14건)의 기사 62건을 포함할 경우 15%에 이르는 빈도를 보이 고 있다. 21) 이 밖에 자위대 및 해외파병 관련 기사가 51건으로 6.3% 에 이르고 있다. 22) 2001년은 815건으로 전년대비 130건이 증가하여 19.3%의 증가율 을 보이고 있다. 증가된 건수의 상당수는 일본의 력사(교과서) 외곡책 19) 위의 신문,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일본 <아사히신붕>편집국장이 제기한 질문에 주신 대답, 1983년 1월 8일. 이 외에 1983년 1월 11일, 1983년, 1월 12일 등. 20) 위의 신문, 미국핵전문가가 일본의 플루토니움구입계획의 위험성을 폭로, 1992년 1월 18일; 같은 신문, 일본은 조선인민에 대하여 핵위협을 조성하는 행위를 당장 중지하여야 한다, 1992년 1월 20일 등 21) 위의 신문, 태평양전쟁시기 조선녀성들이 일본군의 위안부 로 끌려갔던 사실이 최근 일본방위청 문서고에서 밝혀졌다, 1992년 1월 16일; 같은 신문, 일본수상을 비롯한 정부당국자들 위안부 문제에 국가가 관여한 사실 인정하고 사죄, 동일; 같은 신문, 조선인 종군위안부 관계자료 계속 발견, 1992년 2월 23일 등 22) 위의 신문, 일본군국주의재생을 반대한다 재일교포단체들 일본 자위대 의 해 외파병책동을 규탄, 1992년 6월 16일; 일본중의원이 자위대 해외파병을 허용 하는 법안 승인, 1992년 6월 17일; 같은 신문, 일본 신문들 자위대 의 해외파 병법채택을 비난, 1992년 6월 21일 등.
372 통일문제연구 2013년 상반기(통권 제59호) 동 에 대한 95건의 기사로 11.7%의 빈도를 보이고 있다. 23) 그 밖에는 자위대 해외파병 기사가 37건(4.5%)로 전년대비 20건이 증가한 것을 볼 수 있으며, 유사시법제를 정비하려는 의도에 대한 비판 기사가 9건 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 외에는 특별한 빈도를 보이는 기사는 발견되 지 않고 있다. 2005년은 747건으로 전년대비 199건이 증가하여 36.3%의 증가율 을 보이고 있다. 군국주의 부활 우려의 기사가 48건(6.4%)으로 높은 빈도를 보이고 있고, 해외팽창에 대한 기사(9건)을 포함하면 7.6%의 빈도를 보이고 있다. 다음으로는 일본의 독도침탈에 대한 기사가 45건 으로 6.0%이며, 역사 왜곡 관련 기사가 39건으로 5.2%, 그리고 야스 쿠니 신사참배 관련 기사가 36건으로 4.8%의 빈도를 보이고 있다. 특 히 독도 침탈 관련 기사는 2000년대에 가장 높은 비중을 보이고 있는 데 전년대비 4.5배의 빈도이며 이며 다른 기간에는 1~2건의 기사가 전부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 역사 왜곡 관련기사도 급증한 것으 로 보이며 이전 3년간 5~6건인데 비해 급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한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기사는 2006년이 47건으로 더 높은 건 수를 보이고 있는데, 상대적으로 2005~2006년 2년간이 다른 시기보 다 많은 빈도를 보이고 있다. 2. 재일 및 기타 키워드를 포함하는 기사추이와 변곡점 분석 1) 재일 키워드 분석 재일 을 포함하는 기사를 보면 다섯 차례 큰 폭의 변곡점을 확인할 수 있는데, 1959년, 1967년, 1972년, 1995년, 2010년을 주목할 필 23) 위의 신문, 일본반동들의 파렴치한 력사 외곡책동을 단호히 단죄규탄한다, 2001년 3월 3일. 이 외에 2001년 3월 5일, 2001년 4월 2일, 2001년 5월 9일 등.
북한의 대일인식과 재일총련 정책 변화 연구 373 요가 있을 것이다. 1959년도는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12월에 이르러 귀국사업 이 처 음 시작된 해이며, 귀국이 이루어질 때까지 북한 당국으로부터 지속적 으로 귀국이 실현돼야 한다는 주장이 년초부터 제기되었다. 재일 키워 드 기사 284건 중 179건이 귀국사업 관련 기사로 약 63.0%에 해당 된다. 로동신문 에서 귀국문제가 언급된 것은 1955년 북일 적십자 간 교류 24) 이후 1956년이 처음이며, 1957년에는 해방후 귀국한 동포 들이 일본의 친척,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귀국을 종용하는 내용들 이 게재되었다. 25) 그리고 1959년에 귀국사업이 실행되었는데, 이 과 정에서 귀국사업의 조속한 실행을 요구하는 기사들이 상당수 게재 된 것이다. 그리고 귀국과 관련된 기사 중 가장 많은 내용은 재일동포들로 부터 김일성 수상에게 보낸 편지 및 전문 관련 기사이며 모두 96건에 이른다. 26) 결국 8월 18일자에 일본적십자 측과의 협정 조인 기사가 게재된다. 27) 1967년은 210건으로 전년대비 63건이 증가하여 42.9%의 높은 증 가율을 보이고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북송사업에 대한 일본정부 의 금지조치, 즉 북일 간의 귀국협정 폐기 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반발과 사건 전후의 연장 요구 28) 및 결정에 대한 비판 기 24) 위의 신문, 조선 적십자회와 평화 옹호 전국 민족위원회에서 태풍의 피해를 받은 일 본 주민들에게 위안의 전문, 1955년 10월 9일; 같은 신문, 조선적십자회 대표단과 일본 적십자사 대표단과 예비회담, 1956년 2월 2일. 25) 위의 신문, 우리는 희망찬 생활을 누리고 있다, 1957년 3월 8일; 같은 신문, 귀국 한 조선 학생들 일본 학우들에게 편지, 1957년 3월 23일. 26) 위의 신문, 김일성 수상께 편지, 1959년 1월 8일의 사례. 27) 위의 신문, 재일 조선 공민들의 귀국에 관한 협정에 조인하기 위하여 조선 적십자회 대표단 단장 칼커타로 출발, 1959년 8월 8일; 같은 신문, 재일 조선 공민들의 귀 국에 관한 협정 조인, 1959년 8월 14일. 28) 위의 신문, 어떤 역경속에서도 민족교육과 귀국의 권리를 끝까지 고수해 나갈 것 이다, 1967년 3월 20일; 같은 신문, 재일 동포들의 귀국사업은 무조건 보장되여
374 통일문제연구 2013년 상반기(통권 제59호) 사 29) 들이 상당수 증가되었다. 1967년에 귀국 이 포함된 기사제목 건수 는 67건으로 31.9%의 빈도를 보이고 있다. 이 밖에 교육원조비 및 장 학금 지원 열돐에 대한 기사가 19건(9.0%)으로 나타나고 있다. 30) 또 한 이 시기는 총련동포들이 처음으로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된 시기이도 하며 이에 대한 기사가 한 건 31) 게재되고 있다. 1972년 200건으로 전년 대비 68건이 증가하여 증가폭이 51.5%로 가장 높게 나타나고 있다. (건수로는 1973년이 241건으로 가장 많음) 1972년은 김일성이 환갑을 맞는 해로 일찍이 2월부터 선물을 실은 선 박이 2월 25일자에 일본 요코하마를 출항하여 26일자에 남포항에 도 착한 것으로 게재되었다. 32) 그리고 재일조선인축하단이 3월 29일자에 평양에 도착하여 6월 16일자에 출국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무려 80 일간 북한에 체류하면서 연회에 참석하는 등 각 기념관, 박물관, 명승 지 등을 관람하면서 이에 대한 기사가 37건(18.5%)에 이르고 있다. 야 한다, 1967년 6월 26일, 등. 29) 위의 신문, 우리는 일본정부가 부당한 <각료회의 결정>을 철회하고 재일 조선공민들 의 귀국사업을 계속 보장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 1967년 4월 22일; 같은 신문 <사설> 일본정부는 비법적 결정을 즉시 철회하라, 1967년 4월 24일; 같은 신문, <귀국협정을 페기할데 대한 일본정부의 결정은 무효다> 귀국의 권리를 고수하기 위 하여 재일 동포들 계속 강력히 투쟁, 1967년 4월 24일 등 30) 위의 신문, 조국에서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보내준 열돐을 뜻깊게 맞이하고 있는 재일 동포들, 1967년 4월 8일; 같은 신문, 김일성 원수께 드리는 편지, 1967년 4월 12일 등. 31) 위의 신문, 각지 선거구들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후보자로 추천된 총련 간부들과 재일 조선상공인, 녀성, 교육자들을 열렬히 환영, 1967년 11월 19일. 32) 위의 신문, 위대한 수령 김일성원수님의 찬생 예순돐에 즈음하여 그이께 산가 드릴 재일동포들의 충성의 선물을 실은 동해호 가 조국을 향하여 요꼬하마를 출발, 부 두에서는 성대한 환송모임이 있었다, 1972년 2월 25일; 같은 신문, 위대한 수령 김일성원수님의 탄생 예순돐에 즈음하여 그이께 삼가 드리는 재일동포들의 충성의 선물을 실은 동해호 가 남포항에 도착, 부두에서 환영모임이 있었다, 1972년 2 월 26일.
북한의 대일인식과 재일총련 정책 변화 연구 375 1995년은 김일성이 사망한 이듬해로서 최고영도자가 된 김정일 국 방위원장이 재일총련에게 서한 33) 을 보내었고, 이에 관한 해외의 반응 및 총련단체 내에서의 토론회 개최 등의 기사가 14건(12.2%)으로 나 타나고 있다. 서한의 내용은 로동신문 에 게재하지 않았지만 김 정일선집 (14권) 34) 에 문건이 실려 있다. 이 외에는 교육원조비 및 장학금 지원에 대한 기사가 7건(6.1%)의 빈도를 보이고 있다. 신년과 김정일 생일(2.16), 태양절(4.15) 그리고 공화국수립기념일(9.9) 모 두 네 차례 보낸 내용이 게재되었다. 35) 2010년 101건으로 전년대비 51건이 증가하여 102.0%의 높은 증 가율을 보이고 있다. 101건의 기사 중 재일동포 모국(북한) 방문단의 기사가 57건(56.4%), 예술단이 14건(13.9%)로 모두 71건으로 70.3%의 빈도를 보이고 있어서, 대부분의 기사가 모국방문단의 출도 착을 알리는 단신성 기사들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2008년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으며 2008년 18건(44건 중 40.9%), 2009년 24건(50건 중 48.0%)으로 기사의 절반 가량이 단 신성 출도착 보도이며, 이 밖에 김일성 동상 참배 기사가 2008년 6건 (13.6%), 2009년 10건(20.0%) 그리고 2010년에는 21건(20.8%) 에 이른다. 즉 200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단신성 방문에 따른 출도 착과 김일성 동상 참배 기사 외에는 특징적인 기사를 찾아보기 어려운 33) 위의 신문,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서한 재일조선인운동을 새로운 높은 단계 에로 발전시킬데 대하여 에 대한 연구보급사업 여러 나라에서 광범히 진행, 1995 년 4월 8일. 34) 재일조선인운동을 새로운 높은 단계에로 발전시킬데 대하여, (1995.5.24) 김정일 선집 14권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2000), pp.29-47. 35) 로동신문,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 재일동포자녀들을 위하여 교육원조비 와 장학금을 보내시였다, 1995년 1월 1일; 같은 신문,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원수 님께서 보내주신 교욱원조비와 장학금의 배려에 감사를 드리는 재일 조선 교육일군, 과학자, 류학생들의 모임 도꾜에서 진행, 1995년 1월 24일.
376 통일문제연구 2013년 상반기(통권 제59호) 실정이다(2010년의 경우 77.2%). 2) 대일, 조일 (일조) 키워드 분석 대일 키워드를 분석하는 이유는 1951년 미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 약의 의미를 파악하고 이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입장을 분석하기 위한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표 1>에서 보았듯이 로동 신문 에서는 거의 기사가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다만 강화조약이 체 결된 1951년에 116건의 기사를 찾을 수 있다. 이는 전체 연구대상 기 간인 64년간 총 294건의 기사인점을 볼 때, 대단히 집중적으로 나타나 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기간 중 20년간은 단 1건의 기사도 발견되 지 않고 있다) 기사들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미국 중심의 강화조약에 대한 비판적(항의, 반대, 비판, 규탄) 기사들이며 74건으 로 63.8%에 이르며, 소련의 입장을 지지하는 기사가 15건(12.9%)이 며 나머지 23% 가량의 27건의 기사는 미, 일에 대한 단순 사실(승인) 보도에 해당된다. 조일 또는 일조 를 키워드로 검색할 경우 전체 1,591건의 기사가 확인되고 있으며, 1972년(74건)과 1991년(148건)은 가장 많은 기사 증가를 보이고 있다. 1972년은 74건으로 전년대비 35건이 많아 89.7%의 높은 증가율 을 보이고 있다. 북일관계 촉진을 위한 단체들의 북한방문이 줄을 이었 다. 일조우호촉진의원련맹 관련기사 25건, 일조협회 11건, 일조체육 교류촉진련맹 9건, 일조우호친선청년실업계대표단 8건, 일조무역회 3 건 등이다. 이 밖에도 일조사회과학자련대위원회, 일조문화교류협회, 일조과학기술협력위원회, 일조로동자교류련대 등의 활동 기사가 각 1 건씩 게재되었다. 1972년도는 김일성의 환갑을 맞아 특히 해외의 단체 들로부터의 방북이 빈번한 것으로 평가된다.
북한의 대일인식과 재일총련 정책 변화 연구 377 1991년 1월 북일국교정상화 1차 본회담(1.31자)이 개최되면서 어 느때 보다 북일수교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다. 36) 1년간 모두 5차례 의 본회담이 개최된 것이다. 따라서 국교정상화에 관련된 기사가 모두 57건으로 33.8%의 가장 높은 빈도를 보이고 있다. Ⅲ. 50년대 북한의 대일인식 1. 요시다 시게루( 吉 田 茂 ) 내각 시기 37)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과 관련된 네 가지 키워드로 검색되는 최초의 기사는 1946년 12월 6일자이며 1면에 <구호> 일본제국주의가 남겨 놓고간 일체 타락적 말세기적 퇴폐적 유습과 생활태도를 청산하고 생기 발랄히 향상하며 약진하는 새로운 민족적 기풍을 창조하자! 이다. 38) 이것은 당시 북한이 반제반봉건혁명 을 단행하던 시대적 성격과 맥을 같이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요시다 내각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위 의 구호와 마찬가지로 일찍이 나타나고 있으며, 일본공산당에 의한 비 판적 기사가 확인되기도 하였다. 39) 이 밖에 미국의 대일정책에 대한 비판적 기사들이 단신으로 게재되었다. 40) 36) 위의 신문, 조일국교정상화를 위한 정부간 제1차 본회담 진행, 1991년 1월 31일. 37) 이 시기 중 1947.5~1948.10까지는 사회당이 제1당이 되어 1년여 간 사회당과(가 타야마 데츠, 片 山 哲 ) 민주당(아시다 히토시, 芦 田 均 ) 내각이 들어선 바 있다. 다만 1954년까지의 시기를 요시다 내각 시기로 편의상 분류하도록 하였다. 38) 1947년 3월 1일자 <구호>에서도 유사한 내용이 발견된다. 일본제국의 야만적 압제 에 대하여 전민족이 항쟁한 3.1정신을 생산증산으로 기념하자! (3.1운동 28주년 기 념일을 맞으며). 39) 로동신문, 길전( 吉 田 ) 불신임정책견지를 일본공산당에서 재성명, 1947년 3월 1일. 40) 1947-1948년도에는 외신을 인용한 비판적 기사들이 게재되었다(1947년 8월 27일 /8월 30일/9월 23일/12월 24일/1948년 5월 30일/6월 16일).
378 통일문제연구 2013년 상반기(통권 제59호) 1954년 12월 요시다 내각 총사퇴에 처하는 보도 41) 에 이르기까지 약 8년여 간 일본정부에 대한 비판적 보도로 일관해왔다. 그 이유는 무 엇보다 국제공산주의 흐름에 따른 제국주의적 요소에 대한 반대가 주요 하다고 하겠으며, 이 밖에도 재일동포조직 조련 등의 해산(1949.9)을 비롯한 재일조선인 탄압과 강제송환(1953.5), 일본공산당 탄압 및 대 일강화조약 추진 관련 기사들이다. 2. 하토야마( 鳩 山 一 郎 ) 내각 출범과 북일관계 활성화 하토야마( 鳩 山 一 郎 ) 내각 42) 이 들어서면서 분위기는 급반전되었다. 1955년 2월 26일 북한의 남일 외상의 성명 43) 이 발표되면서 북일관계 개선을 위한 요구들이 로동신문 의 상당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같 은 날 1면에는 조일관계 정상화의 가능성은 성숙되고 있다 라는 기사 가 게재되었고 이어 로동신문 동년 3월 5일자에는 남일 외상의 성 명과 관련하여 무역성 김광 부상 담화, 3월 7일자에는 문화선전부상의 담화가 이어 게재되었다. 또한 이러한 담화에 찬동하는 내용으로 3월 9일자 조국전선 의장단 김천해의 담화, 3월 10일자 직업총동맹 부위원 장 강설모의 담화로 이어지며 광범위한 교류가 시작되었다고 평가된다. 즉 정당, 국회의원단, 적십자사 그리고 일조교류협회 등의 교류가 다 양하게 전개되었다. 41) 로동신문, 일본 검찰청 요시다를 호출 예정, 1954년 11월 20일. 이 외에 12월 10일, 12월 11일, 12월 12일 등. 42) 하토야마 이치로( 鳩 山 一 郎 ) 내각은 1954년 12월부터 1956년 12월까지이며 민주당 이 자유당과 통합하여 현 자유민주당으로 변화하는 격변기의 내각이라 할 수 있다. 43) 1955년 2월 25일 북한의 남일 외무상의 성명이 게재되었다....제반관계를 수립 하는 것은 조일 량국 인민의 절실한 리해관계에 부합될 뿐만 아니라 극동의 평화유 지와 국제긴장상태의 완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위의 신문, 대일관계에 관한 조선 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상의 성명, 1955년 2월 26일.
북한의 대일인식과 재일총련 정책 변화 연구 379 정당 간 교류로는 조선로동당과 일본공산당 간의 서신교환이 있었으 며( 로동신문 1995년 7월 27일자, 9월 14/15일자) 사회당을 포함 하는 기타 정당 소식들이 게재되었다. 10월에 이르러서는 일본 국회의원단 일행이 북한방문(10월 19일 자)이 이루어졌고 10월 21일자 로동신문 에는 김응기 최고인민회 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과 일본 국회의원단 단장 후루야 사다오( 古 屋 貞 雄, 사회당) 44) 간의 공동콤뮤니케 가 체결된 바 있으며 동월 30일자 에도 제2차 방문단 방문시 김응기와 당시 단장 호아시 게이( 帆 足 計, 사 회당) 45) 간의 공동콤뮤니케 가 체결되었다고 게재되었으며 1, 2차 방 문단에 대해서는 당시 김일성 수상과 김두봉 위원장이 직접 접견 한 것 으로 게재되었다(10월 21/28일자). 또한 5월 평양에서 개최된 아세아 제국회의 에 참가한 일본대표단이 조선적십자회 중앙위원회 를 방문(5월 22일자)한 기사의 내용을 계기 로 북일 적십자 간 교류의 배경이 된 것으로 판단된다. 46) 그리고 동년 10월 북한의 조선적십자회가 일본의 태풍피해에 대한 위안의 전문 을 보내고(10월 9일자, 3면), 이어 일본 적십자사로부터 답전이(10월 15 44) 후루야 사다오(1889~1976)는 50년대 말 북송사업이 시작될 때 적극 지지한 정치 인이자 변호사이다. 1920년대의 조선공산당 사건 때 서울에 장기 체류하면서 변호 한 인물이며 일본경찰의 소환조처를 받은 바 있다. 인터넷 한겨레 [김효순컬럼] 2011년 2월 20일 참조. 45) 호아시 게이(1905~1985)는 북송사업에 대한 일본의 국민운동을 주도한 12개단체 중 사회당 대표자격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동아일보, 일본서 국민운동 -교포북한 송환을 기도, 1958년 10월 4일, <1면>. 46) 로동신문, 1955년 5월 22일. 이외의 자료로는 朴 正 鎭, 冷 戰 期 日 朝 關 係 の 形 成 (1945-65 年 ), 東 京 大 學 博 士 學 位 論 文, 2009, pp.109-113 참조. 박정진에 의하면 일본 적십자회는 1954년 1월 국제적십자사(ICRC)를 통해 북한에 전문을 보내었고, 북한 잔류 일본인의 귀국에 대한 협조요청과 함께 일본에 있는 귀국을 희망하는 재 일조선인의 귀국을 원조하겠다는 의사를 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일본 요시다 내각 하에서는 일회성으로 중단되었다가 1955년 2월 25일 남일 외상의 성 명 이후 일본 적십자측이 적극적 지지를 표명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 것이다.
380 통일문제연구 2013년 상반기(통권 제59호) 일자, 1면) 오가면서 상호적십자사 간의 교류가 전개되었다. 일본의 일조협회와의 교류는 1955년 11월 1일 일조협회가 결성되 기 이전인 동년 7월 21일자에 이미 일조협회의 서한이 북한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47) 일조협회는 이미 1951년 9월 이후 유사한 성격의 단체들의 일본의 각 지역마다(도쿄, 오사카, 교토 등)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며, 54년 1월에는 도쿄의 일조협회 산하로 통합되었고 주 로 북한사정 조사연구 및 소개, 문화교류, 재일조선인단체와의 교류와 동시에 일중, 일소우호협회와의 교류도 밀접하게 하게 되었다. 48) 또한 8.15해방 10주년 축하편지 도착에 대해 동년 9월 5일자 1면에 게재하 고 있으며 9월 16일 일조협회로 답신을 보낸 것에 대해 1면에 게재하 고 있다. 또한 10월 5일자에 일조협회 전국대회 준비를 알리는 기사가 게재되었고, 10월 15일자에는 북한에 체류중인 일본인 송환문제에 대 해 일조협회가 성명을 발표한 것을 게재하고 있다. 이어사 11월에 이 르러서는 일조협회 제1차 전국대회 소식과 결의문, 축전 등에 대한 기 사가 게재되고 있다. 49) 이 밖에도 북일관계 개선에 대한 긍정적인 기사들을 다수 게재하고 있다. 조일관계 정상화에는 어떠한 예비적 조선도 요구되지 않는 다 (1955.3.27), 조일 량국간의 경제문화교류의 실현을 일본 사회계 47) 위의 신문, 재조선 일본 거류민 귀국 문제와 관련하여 일조협회로부터 서한, 1955 년 7월 21일. 48) 朴 正 鎭 (2009), pp.77-79 참조. 49) 로동신문, 일조 협회 제 1차 전국 대회에 재일 조선인 조국 방문단 축전, 1955 년 11월 2일; 같은 신문, 일조 협회 제1차 전국 대회 도꼬에서 개막, 1955년 11 월 3일; 같은 신문, 일조 협회 제1차 전국 대회에서 채택된 결의문들, 1955년 11 월 9일; 같은 신문, 일조 학술 협회 결성 대회에 축전, 1955년 11월 20일; 같은 신문, 일본의 어업 단체들 일조 협회에 집단적으로 가입, 1955년 11월 17일; 같 은 신문, 조선인민은 평화를 고수하고 있다.(일조 협회 기관지 닛뽕또 죠센 에 게재된 조선을 방문하였던 일본 인사들의 인상담), 1955년 12월 15일.
북한의 대일인식과 재일총련 정책 변화 연구 381 에서 계속 요구 (1955.6.22), 조일 량국간의 관계의 정상화를 위하 여 (1955.10.21), 조일관계 개선은 량국 인민의 리익에 부합된 다 (1955.10.30) 등의 기사들이 게재되고 있다. 이러한 활성화된 관계는 1956년에도 계속 이어졌다. 특히 북일 적십 자사 간 교류 및 재일동포들 희망자의 귀국문제와 북한 체류 일본인의 귀국 문제에 대한 문제가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1956년도의 관련기 사 511건 중 80건으로 15.7%를 보이고 있다. 본격적인 제기는 1955 년 12월 29일 남일 외무상의 성명 50) 에 기인하며, 1956년 2월 10일 자 북일 적십자사 간 정식회담 이 처음 개최된 기사가 게재되었다. 당 초 북한체류 일본인들의 귀국 문제가 일본적십자 측의 관심사였고, 4 월 20일부터 26일 사이에 모두 귀국하게 되었다. 51) 그리고 이와 때 를 같이하여 재일동포 귀국 희망자에 대해 일본 적십자측이 노력할 것 을 약속했다는 기사를 4월 20일자 1면에 게재하고 있다. 또한 4월 23 일자에는 일본 중의원 의원들과 당국자 및 적십자 대표들 간에 북한으 로 희망하는 재일조선인 문제를 협의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밖에 일조 협회 관련 기사가 26건으로 5.1%, 정당간 교류(사회당, 공산당)가 20 건으로 3.9%를 보이고 있다. 3. 기시( 岸 信 介 ) 내각 시기의 대립과 귀국사업 실행 기시( 岸 信 介 ) 내각 52) 시기 미국의 유도탄의 배치문제로 자민-사회 50) 위의 신문, 재일 조선 공민들의 합법적 권리는 보장되여야 한다, 1955년 12월 30일. 51) 위의 신문, 일본인 귀국자들이 북측에 무사히 도착한 데 대하여 일본 적십자사 사장 으로부터 감사 전문, 1956년 4월 26일; 같은 신문, 조선 적십자회 중앙 위원회에 일본 적십자사로부터 감사 편지, 1956년 5월 19일. 52) 제1차 기시 내각은 1957년 2월 25일~1958년 6월 12일, 제2차 기시 내각은 1958년 6월 12일~1960년 7월 19일까지이다.
382 통일문제연구 2013년 상반기(통권 제59호) 당 간 갈등의 깊었으며 북한 역시 이에 대해 반발이 적지 않았다. 이와 는 달리 북일간의 양적 교류는 점차 증가하였고, 재일동포의 귀국문제와 이로 인한 일조협회와의 교류의 증가 등이 나타난 시기라 할 수 있다. 1957년에는 초청에 의한 여러 사절단 형태의 북한 방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이치현 평화친선사절단의 방문(1.10일자), 일분문화사절 단 초청(4.21), 김일성 수상이 후쿠오카현 평화사절단 접견(5.17), 일조협회의 일본경제사절단의 서신 및 방문(8.18, 9.4, 9.6, 9.7), 홋 가이도 평화사절단 방문(11.2) 등이 그것이다. 이 시기는 북일관계의 교류가 매우 정체된 시기라 판단되며, 또한 재일동포의 북한으로의 귀 국 문제가 일시 정체 국면을 맞이하였고, 분위기를 조성하는 편지를 보 내는 정도의 사례만이 기사화되어 있었다. 53) 12월에 이르러 북한의 적십자회에서 일본 측에 징용, 징병자의 생사확인을 타진하는 편지를 보낸 기사(12.8)을 제외하고는 이렇다할 진전을 나타내는 기사는 찾아 보기 어렵다. 이러한 환경은 1958년 하반기에 이르면서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9월 16일(17일자) 남일 외상이 성명 54) 을 발표하고 적극적으로 귀국 사업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게 되었고, 재일총련은 이미 1958년 8월 26일 귀국대책중앙위원회 를 발족하여 본격적인 귀국운동을 전개하였 고, 북한 공화국수립 10주년을 맞이하여 10주년기념사업요강 을 채택 하면서 조직력을 총동원하기에 이르렀다. 55) 1958년 귀국 을 포함하 53) 위의 신문, 우리는 희망찬 생활을 누리고 있다, 1957년 3월 8일; 같은 신문, 귀국 한 조선 학생들 일본 학우들에게 편지, 1957년 3월 23일. 54) 위의 신문,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외무상 성명, 1958년 9월 17일; 같은 신 문, 김일성 수상에게 재일 조선인 총련합회 각 지부들로부터 편지(8.15해방 13주년 과 공화국 창건 10주년을 축하하여), 같은 날; 같은 신문, 허국봉 외무 부상 재일 조선 동포들의 귀국 문제와 관련한 외무상 성명을 조선 주재 각국 외교 대표들에게 전달, 같은 날. 55) 朴 正 鎭 (2009), pp.264-266.
북한의 대일인식과 재일총련 정책 변화 연구 383 는 기사건수는 일본 관련 388건의 기사 중 66건으로 17.0%의 높은 비율을 보이고 있으며 2건을 제외하면 모두 9월 이후의 기사로 하반기 에 집중되어 나타나고 있다. 1959년에는 귀국을 포함하는 기사건수가 폭발적으로 급증하였다. 일본관련 전체기사 824건 중 349건으로 42.4%의 대단히 높은 비율 을 보이고 있다. 8월 14일자 기사에서 재일조선공민들의 귀국에 관한 협정 조인 이 등장하며 결국 12월 14일(15일자 기사)에 첫 귀국선이 니이가타항을 출항하여 16일(17일자 기사)에 청진항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Ⅳ. 50년대 북한의 재일동포 및 재일총련 정책 1. 총련 결성 이전 시기 기사 분석 (1946.10~1955.5) 앞의 표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해방 직후 1949년까지의 로동신 문 은 상당수가 보관되어 있지 못하며, 일본 관련 전체기사가 142건 (1946~1949년)에 불과하다. 따라서 충분한 내용을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매우 귀중한 기사들이 발견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기사는 재일조선인학교 폐쇄 에 관한 기사이 다. 56) 1948년 문부성의 1.24통달 에 이어 4월에는 지역별(오사카, 효고, 도쿄, 고베 등) 조선인학교 폐쇄를 결정한 사건 57) 으로 이후 재 건과정에서 도쿄지역의 학교 가조인 과정에 대해 일본 문부상의 태도를 56) 로동신문, 재일조선인학교폐쇄사건 동경에서 1단가조인성립, 1948년 6월 5일. 57) 金 德 龍, 朝 鮮 學 校 の 戰 後 事 ( 東 京 : 社 會 評 論 社, 2004), pp.78-81; 김덕룡, 바람 의 추억 (서울: 선인, 2009), pp.102-120.
384 통일문제연구 2013년 상반기(통권 제59호) 비판하는 내용의 기사이다. 다음으로 확인이 되는 기사는 1950년 1월 25일자로 재일조선인련 맹에 대한 일본반동정부의 폭거 라는 기사제목으로 1949년 9월 재일 조선인련맹(이하 조련)에 대한 강제해산 이후 재일동포 단체에 대한 요 시다( 吉 田 ) 정부의 탄압에 대한 비판 기사를 게재하고 있다. 이처럼 1950년까지의 재일동포 관련 기사는 몇 몇 주요 사건들에 대해 다루고 있으나 13건에 불과하며 58) 1951년에도 6건 59) 에 불과하다. 다만 1951년에는 일본 요시다 내각이 재일조선인들에게 한국인 으로의 등 록을 강제 한다고 하며 이를 비판하는 기사가 처음으로 게재되고 있다 는 점을 특징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952년에도 8건 60) 에 그 치고 있다. 1953년에도 23건에 불과하지만 처음으로 재일동포 대중 조직인 재 일조선통일민주전선 (이하 민전)에 대해 3건의 기사를 통해 처음 다루 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61) 민전은 1951년 1월 9일 비공식 적으로 결성된 단체로 조국전선 에 가입하였고, 조련의 강령과 규약을 58) 로동신문, 재일조선인 련맹에 대한 일본반동정부의 폭거, 1950년 1월 25일; 같 은 신문, 재일동포들은 리승만과 야합한 요시다정부의 폭압을 반대하여 공화국기치 높이들고 투쟁한다, 1950년 1월 30일. 이 외에도 1950년 3월 10일, 3월 29일, 5월 5일, 5월 7일, 5월 9일, 5월 16일, 5월 20일, 5월 24일, 5월 25일, 7월 9 일. 59) 위의 신문, 새해를 우리들의 종국적 승리의 해로 결속 지우자 리승만 괴뢰도배들 재일동포 추방에 광분, 1951년 1월 15일. 이 외에도 5월 26일, 7월 6일, 7월 29 일, 12월 10일, 12월 31일. 60) 위의 신문, 재일 조선인들의 권리 옹호 투쟁을 일본 경찰 당국 무력으로 탄압 시도, 1952년 3월 6일. 이 외에도 3월 16일, 3월 28일, 3월 30일, 6월 17일, 8월 21 일, 8월 25일. 61) 3건의 기사이다. 로동신문, <축전>재일 조선 통일 민주 전선 제4차 전체 대회에 보내는 축전, 1953년 11월 3일; 같은 신문, 각 정당 사회 단체들에서 조선 통일 민주 전선 제4차 전체 대회에 축전, 1953년 11월 6일; 같은 신문, 재일 조선 통 일 민주 전선 제4차 전체 대회, 1953년 12월 13일.
북한의 대일인식과 재일총련 정책 변화 연구 385 계승하였으나 일본공산당의 민족대책부에 많은 영향은 받고 있는 단체 였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민전이 결성되었던 1951년경부터 로동신 문 에 관련기사가 게재되지 않고 있다. 물론 한국전쟁기간 동안 재외 동포 조직 활동을 게재할 여건이 곤란했을 수 있겠으나, 민전이 1953 년 8월 25일 민전 11차 중앙위원회 이전까지 일본노농전선(일본공산 당) 입장을 고수할 것인지, 조국을 지지할 것인지에 대해 논란의 여지 가 없었다. 그러나 이후 이러한 논란이 수면위로 나타나면서 점차 친북 성향의 주장들이 강화되어 갔다고 볼 수 있다. 62) 이러한 민전 내부의 흐름이 로동신문 기사 게재에도 영향을 미 쳤을 것이라는 개연성이 제기된다. 첫 기사는 1953년 10월 31일(11 월 3일자 기사),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명의로 민전 4차 대회에 축전을 보내는 기사이다. 이어서 11월 6일에는 각 정당 사회단체들이 보내는 축전 내용을 게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후에도 민전에 관한 기사는 9건 확인되는 기사 전부라 할 수 있다. 63) 2.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총련) 결성 초기(1955.5~1959) 기사 분석 50년대 총련에 관한 기사들은 몇 가지 패턴으로 나누어진다고 하겠다. 대외 및 대일 행위에 관한 기사, 북한 및 내부 조직에 대한 행위 기사 그리고 일반 단신과 북한과의 서신 기사 그리고 기타 다른 단체와의 관 계를 표현하는 기사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특히 행위에 관한 기사는 총 62) 진희관 (1999), pp.47-48. 63) 1954년 7건, 1955년 2건의 기사가 게재된 것이 전부이다. 로동신문, 8 15해 방 9주년을 맞이하여 재일민전중앙 상임위원회에서 전체 재일 동포들에게 보내는 호 소문 발표, 1954년 8월 5일; 같은 신문, 재일 조선 민전을 해체하고 재일 조선인 총련합회를 결성, 1955년 6월 20일 등
386 통일문제연구 2013년 상반기(통권 제59호) 련의 정체성과도 관련이 있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이는 총련 독단의 행 동보다는 북한 당국(조국전선)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행위로 미루어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행위들을 통해 북한의 총련 정책을 가늠 해보고자 한다. 64) 1) 대외 및 대일 행위에 관한 기사 우선 대외 및 대일 행위들에 관한 기사는 성명 발표가 가장 대표적이 라 할 수 있다. 즉 국제적 쟁점, 일본에 대한 비판적 제기 그리고 대남 메시지 등으로 구분되고 있다. 국제적 쟁점에 대한 기사는 다음과 같 다. 즉 반미, 반핵, 친중동 행위 등이 해당되고 있다. 1956.11.16, 01 <조선 인민은 애급 인민의 편에 서 있다> 재일조선 인총련합회 중앙상임위원회에서 성명 발표-애급 에 대한 무력 침공을 합의하며 1957.07.02, 03 미제의 정전 협정 파괴를 규탄하여 재일본조선인 총련합회 성명을 발표 1957.08.21, 04 원자 및 수소탄 금지 세계 대회에 참가한 외국 대 표들을 초대(재일조선인총련합회에서) 이와는 달리 중국의 행위에 대해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사례도 나타난다. 64) 왜냐하면 북한의 총련에 대한 정책은 공식문서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이 밖에는 북 한의 최고권력자인 김일성 주석의 담화 내용을 확인하는 방법이 있겠지만, 대부분 김일성의 발언록(저작집류) 역시 70년대 이후에 제작된 것이라고 할 때, 사실성을 검증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는 당초에 목표와 같이 로동신문 만을 중심으로 검토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북한의 대일인식과 재일총련 정책 변화 연구 387 1958.03.05, 04 조중 량국정부 공동성명을 지지하여 재일조선일총 련합회 중앙위원회 성명 발표 일본 당국에 대한 비판적 제기 기사는 아래와 같이 귀국사업에 대한 제약에 대한 비판적 주장을 펴고 있으며, 일부 오무라 수용소에 대한 석방 주장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실제 일본의 정치행위자들을 방 문하여 주장을 관철하려는 행동을 보이고 있다. 1956.07.30, 01 귀국하는 재일 조선 동포들에 대한 승선 중지와 관 련하여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에서 성명 발표 1958.09.05, 03 오무라 수용소에 억류된 조선 공민들을 즉시 석방 귀국시키라(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성명 발표) 1958.10.07, 03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대표들 재일 동포들의 귀국 문제와 관련하여 일본 중의원 의장을 방문 1958.10.12, 06 재일 조선 동포를 금년내로 귀국시킬 조치를 취할 것을 일본 정부에 요구(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대 변인의 기자 회견담) 1959.09.05, 03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재일 조선 공민들의 귀국 문제와 관련한 협정에 대한 일본측의 위반 행동을 규탄련합회 대표들 일본 외상을 방문 1959.10.11, 03 귀환안내 에 포함되여 있는 부당한 조항들을 철회하라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중앙 상임위원 회 성명) 그리고 일본의 우당인 사회당과의 교류 및 간담회에 관한 기사도 확 인되고 있다.
388 통일문제연구 2013년 상반기(통권 제59호) 1957.02.27, 03 재일 조선인 총련합회 대표들이 일본 사회당 대표 들과 간담회 대남 비판 및 주의 주장의 기사는 이승만정부와 미국의 대남정책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고 있다. 1956.12.26, 03 재일조선인총련합회 중앙상임위원회의 성명 (매국 적 한미 우호, 통상 및 항해 조약 을 규탄하며) 1958.07.27, 04 남조선에서의 미군의 유도 무기 기지 설치를 반대 하여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성명 발표 1959.02.14, 05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리승만 도당의 <이민> 책동 을 규탄하여 성명 발표 (남조선 신문 사진 기자단 이 리승만 도배의 파쑈적 언론 탄압에 항의) 이와는 달리 남한 수해이재민에 대한 지원을 결정하는 전술도 구사 하고 있다. 1959.09.28, 03 남조선 리재민들에게 보내는 재일본 조선 공민들 의 따뜻한 동포애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에서 구 제금 164만원을 보내기로 결정) 2) 북한 및 내부 조직에 대한 행위 기사 북한에 관한 기사는 <서신>이 가장 많은 양태를 보이고 있다. 1955 년부터 1959년까지 106건의 총련 관련 기사들 중 36건(34.0%)으로 높은 빈도를 보이고 있다. 1955년의 경우 주로 김일성 수상에게 보내 는 편지 등이 일반적이며, 이 외에는 민주전선의 서신을 받고 답전을 보내는 형태를 띠고 있다. 무엇보다 총련을 지도하는 기관이 민주전선
북한의 대일인식과 재일총련 정책 변화 연구 389 이라는 점이 반영된 결과라 판단된다. 다음으로는 북한을 지지하는 성 명을 발표하는 기사들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1956.05.23, 01 제3차 당 대회 선언을 지지하여 재일본 조선인 총 련합회 성명 발표 1956.05.25, 04 조국 전선 중앙 위원회 확대 회의에서 한 토론-조 선 직업 총동맹 중앙 위원회 위원장 서 휘(요지), 재일본 조선인 총련합회 대표 황 봉구(요지), 전 남조선 정치 활동가 송 호성(요지), 과학원 원장 백 남운(요지) 1957.10.23, 01 김일성 원수를 수반으로 하는 조선 로동당과 공화 국 정부를 열렬히 지지한다 (재일 조선인 총련합회 중앙 위원회 결의문) 1958.09.26, 02 남일 외무상의 성명을 지지 환영하여 재일 조선인 총련합회 성명을 발표 이상에서 볼 때 재일 총련에 대한 북한의 정책 방향은 북한이 정책 지향을 대행할 수 있는 역할을 담당하도록 하는 데 있는 것으로 평가된 다. 따라서 북한이 추구하는 대외, 대일, 대남 행위들을 대행하도록 지 도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즉 당시 정세 변화에 따라 북한을 대변하는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Ⅴ. 결론 북한의 대일정책의 특징을 보면, 첫째, 북한은 일본과 선린관계 유지 를 원하고 있지만 일본은 미국의 노선에 추종하여 남북분단정책을 쓰고 있기 때문에 관계개선이 어렵다고 인식해 왔다. 둘째, 일본이 남한과
390 통일문제연구 2013년 상반기(통권 제59호) 북한에 대한 차별적인 외교관계를 설정함에 따라서 관계개선이 어렵다 는 입장을 펴왔다. 셋째, 조총련에 대한 차별적 대우를 철폐해야 한다 는 조건 등 일본정부의 대미 자주성의 필요를 강하게 언급해 왔다는 점 을 알 수 있다. 65) 로동신문 을 통해 분석한 결과 북일관계는 크게 네 가지 키워드 를 통해 분석했을 때 몇 가지 변곡점들이 나타나며, 그 시기마다 특징 들을 보이고 있다. 일본 을 포함하는 기사를 보면 아홉 번의 큰 폭의 증가를 확인할 수 있 는데, 1951년, 1956년 1959년, 1967년, 1972년, 1983년, 1992년, 2001년, 2005년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재일 을 포함하 는 기사를 보면 다섯 번의 큰 폭의 변곡점을 확인할 수 있는데, 1959년, 1967년, 1972년, 1995년, 2010년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북일관계에서 주요한 분기점은 요시다 내각의 사퇴를 들 수 있다. 1954년 12월 요시다 내각 총사퇴에 처하는 보도에 이르기까지 약 8년 여 간 일본정부에 대한 비판적 보도로 일관해왔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탈일제( 脫 日 帝 )의 원인이 주요하다고 하겠으며, 이 밖에도 재일동포조 직 조련 등의 해산(1949.9)을 비롯한 재일조선인 탄압과 강제송환 (1953.5), 일본공산당 탄압 및 대일강화조약 추진 관련 기사들이다. 하토야마( 鳩 山 一 郎 ) 내각이 들어서면서 분위기는 급반전되었다. 1955년 2월 26일 북한의 남일 외상의 성명 66) 이 발표되면서 북일관계 개선을 위한 요구들이 로동신문 의 상당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재일총련에 대한 초기의 인식과 정책들을 살펴 본 결과 재일 65) 진희관 (1997) 참조. 66) 1955년 2월 25일 북한의 남일 외무상의 성명이 게재되었다....제반관계를 수립 하는 것은 조일 량국 인민의 절실한 리해관계에 부합될 뿐만 아니라 극동의 평화유 지와 국제긴장상태의 완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로동신문, 대일관계에 관한 조 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상의 성명, 1955년 2월 26일.
북한의 대일인식과 재일총련 정책 변화 연구 391 총련에 대한 북한의 정책 방향은 북한이 정책 지향을 대행할 수 있는 역 할을 담당하도록 하는 데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대외적으로는 대미, 대 일 노선에 대한 총련의 역할을 중요시하고 있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으 며, 내부적으로는 총련과 북한과의 유대를 강화할 수 있는 방향에서 정 책을 전개해 온 것으로 평가된다. 시기적으로 1950-1960년대의 경우 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서신교환 및 노선에 대한 지지표명 기사들이 대다 수였으며, 주요 이슈에 상호(북한-총련) 대응하는 기사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관련 기사들은 대부분이 단신성 방문 기 사들이라는 점에서 볼 때(2010년의 경우 77.2%), 과거 총련이 북한 정책 노선을 대변하는 창구 역할을 담당했다면, 최근에는 관계를 유지하 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평가된다. 접수일: 4월 12일 심사완료일: 5월 1일 게재확정일: 5월 10일
392 통일문제연구 2013년 상반기(통권 제59호) 참 고 문 헌 강상중.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과 북일관계, 창작과비평 제31권 제 3호, 2003. 강태훈. 북일수교의 전망과 한일관계, 일본학연구 제19집, 2006. 고유환. 2005년 한반도 정세 전망: 북미, 북일 관계 정망: 북한이 생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미국, 일본 등 서방과 대립하는 것, 북한 통권397호, 2005. 金 德 龍. 朝 鮮 學 校 の 戰 後 史. 東 京 : 社 會 評 論 社, 2004. 김덕룡. 바람의 추억. 서울: 선인, 2009. 김성철. 북핵 문제와 일본의 안보정책: 북일관계와 6자회담의 전개, 세종정책연구 제1권 제1호, 2005. 김용복. 북일관계 정상화의 정치 경제: 북일경협과 동아시아 경제협 력, 일본연구논총 제14호, 2001. 金 太 基. 戰 後 在 日 朝 鮮 人 問 題 の 起 源 -SCAPの 對 在 日 朝 鮮 人 政 策 1945 年 ~1952 年. 一 橋 大 學 博 士 學 位 論 文, 1996. 남창희. 90년대 북일수교 교섭 분석과 북일관계 전망, 국방정책연 구 2000. 류길재. 남북한관계와 한일협력, 통일부 연구용역. 통일부, 2009. 박광득. 제21장 북한의 대일협상전랙과 우리의 대응전략, 통일전 략 2009. 박정진. 한일회담과 북일관계, 1950~1957, 일본공간 통권6호. 논 형, 2009. 朴 正 鎭. 冷 戰 期 日 朝 關 係 の 形 成 (1945-65 年 ). 東 京 大 學 博 士 學 位 論 文, 2009. 박창건 외. 북한의 대( 對 )일 협상전략-약소국과 중견국의외교행태와 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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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대일인식과 재일총련 정책 변화 연구 395 Abstract The Relations of Japan-North Korea and Chongryon Policy of North Korea : Through the analysis of Rodong Shinmun (1946-2010)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analyze the newspaper report trend of Rodong-Sinmun during 1946-2010 to analyze North Korea s perception on the Jainichi-Korean issue, which is one of the core issues in the improvement of North Korea-Japan relations asserted by North Korea, as well as analyze the trend of change and characteristics. In addition, the purpose is to analyze the characteristics of North Korea s policies toward Japan and Chongryon in the 50s. As for the reports that include the term Japan, there were nine major increases, specifically in 1951, 1956, 1959, 1967, 1972, 1983, 1992, 2001, and 2005. As for the reports that include the term Jaeil, there were five major inflection points, specifically in 1959, 1967, 1972, 1995, and 2010. With regards to the intial perception on Chogryon and related policies, it was revealed that North Korea s policy direction is that Chogryon is to play the role of acting on behalf of North Korea with its policy direction. Considering, however, that related reports since the 2000s were mostly news brief visit reports, it is thought that its limitation of not being able to do more than simply maintaining relation
396 통일문제연구 2013년 상반기(통권 제59호) is being shown in recent, whereas Chongryon had played the role of representing North Korea s policy line in the past. Key words: Chongryon, North Korea-Japan relations, Rodong-Sinmun, Rodong-Newspaper, Jainichi-Korean, Japanese Korean, newspaper report, tr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