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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리 활동 결과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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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송(頌) 유자효 자작나무 잎은 푸른 숨을 내뿜으며 달리는 마차를 휘감는다 보라 젊음은 넘쳐나는 생명으로 용솟음치고 오솔길은 긴 미래를 향하여 굽어 있다 아무도 모른다 그 길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길의 끝은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여행에서 돌아온 자는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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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지(교사용) 4-6부

Transcription:

합천 1. 해인사소리길 2. 다라국황금이야기길 3. 남명조식선비길 4. 황강권역 5. 황매산기적길

해인사소리길 1. 입구-가야산 19경 중 16경을 품은 해인사 소리길 가야산 해인사 오르는 길 '홍류동'은 계곡물이 붉게 흐른다는 뜻입니다. 물에 비 친 가을단풍이 그만큼 붉고 아름답다는 뜻이겠죠. '해인사 소리길'은 대장경테마 파크에서 홍류동 계곡을 따라 해인사 입구 영산교에 이르는 6Km 남짓한 길입니 다. 1918년 해인사 주지로 부임한 회광스님은 최동식 거사와 함께 홍류동 계곡에서 가야산 정상에 이르는 길을 일일이 살피고 당시에 전해지던 설화 등과 비교해 19개의 명소를 찾아냈습니다. 표지석을 세우고 각 장소마다 직접 시를 지어 남 겨놓았죠. 그렇게 해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가야산 19경 중 16경이 현재의 해 인사 소리길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홍류동은 신라 말기 대학자 최치원이 생의 마지막을 보냈던 곳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조기 유학길에 올라 당나라에서 크게 문장을 떨친 최치원은 고국으로 돌아 와 기운이 쇠한 나라를 개혁하고자 했지만 6두품이라는 계급의 벽을 넘지 못했 죠. 결국 관료의 길을 포기하고 이곳 가야산에 은둔했습니다. 어느 날 해인사에 전나무 지팡이 하나 꽂아두고 홀연히 사라진 최치원을 두고 사람들은 그가 가야 산 신선이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해인사 소리길에는 울창한 송림이 있습니다. 그런데 소나무 허리마다 껍질이 벗 겨져 파헤친 상처 자국들이 드러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항공유와 화약재료로 쓰기 위해 송진을 마구잡이로 채취한 흔적입니다. 이후 60년대에도 어려운 시절을 견디기 위한 구황식품으로 속껍질을 채취하느라 소나무들에 남은 빗살무늬 상처가 지금까지 복구되지 않은 것이죠. 홍류동이 들려주는 자연의 소 리와 최치원의 흔적을 따라 이제 해인사 소리길을 천천히 걸어볼까요?

해인사소리길 2. 세속을 떠나온 자의 노래, 농산정 최치원은 가야산에 은둔할 때 홍류동 계곡가에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글을 읽거 나 수도하며 휴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정자 옆 바위에는 시 한 편을 남겨놓았죠. '광분첩석 후중만/ 인어난분 지척간/ 상공시비 성도이 /고교유수 진농산'이라는 28자의 칠언절구입니다. 미친 듯한 물결 바위치며 산을 울리어, 지척에서 하는 말도 분간하기 어렵네. 행여나 세상 시비 귀에 들릴까 두려워, 흐르는 물을 시켜 산을 감쌌네. 이 시의 제목은 '제가야산 독서당'입니다. 흔히 최치원의 '둔세시'라 부르는데, 한자로 '숨을 둔', '세상 세'자를 써서 세상을 벗어나 숨어사는 마음을 읊은 시라 는 거죠. 마지막 구절인 '고교유수 진농산'에서 '농산', 즉 '산을 덮어 감싸다'라 는 두 자를 따서 후대 사람들이 정자 이름을 '농산정'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후대의 문인들과 유학자들은 최치원의 흔적을 찾아 홍류동을 찾아오곤 했습니다. 그 중 조선시대 학자인 우암 송시열은 농산정 인근 바위에 최치원이 새겨놓은 친필 둔세시가 계곡물에 씻겨 마모되는 것을 염려해, 맞은편 석벽에 다시 시를 옮겨새겼습니다. 이것이 송시열의 필체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시를 되새겨보면, 시끄러운 세상일을 잊고 가야산에 묻혀 살다 외로운 구름처럼 홀연히 떠난 은둔자의 마음이 농산정 물소리와 함께 마음에 와닿을 것 입니다..

해인사소리길 3. 동남아 3국에서 모셔온 등신불과 적멸보궁, 길상암 해인사 주차장에서 출발해 소리길을 따라 오르는 600m 구간은 경관이 아름다울뿐만 아니라, 장애인이 걷기 에도 좋을 만큼 편안합니다. 이 길을 걷다 보면 바윗돌이 하늘을 향해 불 꽃이 일듯이 줄지어 있는 산 능선 아 래, 암자가 하나 보입니다. 길상암입 니다. 길상암은 오래된 절은 아닙니 다. 1972년에 창건된 절로 해인사 16개 암자 중 하나죠. 유서 깊은 절이 아닌데도 길상암이 사람들의 발길을 사로잡는 건 적멸보 궁과 등신불이 있기 때문입니다. '적 멸'이란 열반의 경지를 말하고, '보궁 '이란 말 그대로 보배스런 궁전을 뜻 합니다. 즉,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궁전이라는 뜻이지요. 스리랑카의 스님으로 부터 부처님 진신사리를 기증받아 봉안할 장소를 찾다가 천진보탑이라 이름붙인 자연석 큰 바위에 봉안하고 창건한 암자가 바로 길상암입니다. 지금 길상암 보궁 에는 몽골과 미얀마,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등신불이 모셔져 있습니다. 등신불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 있으시죠? 고승들 중에는 좌선을 한 채 입적한 후, 수 년이 지나도 썩지 않고 생전 모습 그대로인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스님 의 몸에 금을 입혀 부처처럼 모시는데, 이를 '등신불'이라 부릅니다. 우리나라에 서는 8세기 신라 왕자 출신으로 당나라로 건너가 당대 제일의 고승이 된 김교각 스님이 유명합니다. 99세에 입적한 후 3년이 지나도록 시신이 썩지 않아 등신불 이 되었다고 하죠. 지금도 중국4대 불교성지 중 하나인 구화산 육신보전에 봉안되어 있습니다. 길상암 적멸보궁에 가려면 대웅전과 나한전을 지나 위쪽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더 올라가야 합니다. 산길을 따라 오르는 돌계단이 조금 가파르지만, 여기까지 와서 적멸보궁을 보지 않고 가면 조금 후회하실 지도 모릅니다.

해인사소리길 4. 프랑스 대사가 사랑한 홍류동 계곡의 절경, 낙화담 해인사 소리길의 하이라이트를 꼽으라면 누구나 낙화담을 꼽습니다. 굉음을 내며 떨어지는 폭포와 기암절벽으로 둘러싸인 낙화담 앞에 서면 홍류동의 진면목을 볼 수 있죠. 어젯밤 폭우에 골짜기가 요란하더니, 못 가득히 흐르는 물에 낙화가 많더라. 도인도 오히려 정의 뿌리가 남아있어, 두 눈에 흐르는 눈물이 푸른 물결에 더해 지네. 낙화담 앞 표지판에 써있는 시입니다. 꽃잎이 떨어지면 쉽사리 흘러가버리지 않 고 뱅뱅 돌면서 머문다는 낙화담은 도인의 눈물이 물결에 더해져, 더욱 깊고 푸 릅니다. 이 낙화담과 홍류동 계곡을 사랑해, 죽고 나면 유골을 화장해 이곳에 뿌 려달라 유언한 이가 있었습니다. 초대 프랑스대사 로제 샹바르. 그는 1959년에 부임해 10년간 프랑스 대사로 한 국에서 근무했습니다. 고고학자이자 언어학자였으며, 법학사이자 문학박사였던 로제 샹바르는 한국에서 근무하는 동안 서울뿐 아니라 지방 곳곳을 여행하며 한 국을 더 잘 이해하려고 노력했죠. 특히 그는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에 감복해 홍류 동 계곡을 즐겨 찾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해서 제2의 고향인 한국의 홍류동 계곡에 뿌려달라. 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1982년 78세로 세상 을 떠나자 그의 유골은 유언대로 이곳으로 옮겨져 홍류동 계곡에 뿌려졌습니다. 지금도 낙화담을 떠나지 않고 물결 위에 맴도는 꽃잎은 도인의 눈물과 함께 프 랑스인 로제 샹바르가 남긴 사랑의 마음일 지도 모릅니다.

다라국 황금이야기길 1. 사라진 역사의 비밀을 열다, 옥전고분군 합천 황강변 지류 야트막한 야산에 예로부터 '옥전', 즉 구슬밭이라고 불리던 언 덕이 있습니다. 온통 리기다소나무로 덮여있던 곳이죠. 예부터 밭을 경작하다 보 면 땅을 얼마 파지 않아도 옥으로 만든 구슬들이 자주 발견되던 곳이었습니다. 옥전고분군이라 불리는 이곳 유적은 4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낙동강 동 서안에 분포하던 가야인들이 남긴 흔적이 분명했지만, 이곳의 무덤구조는 이웃 고령의 대가야와는 다른 형태였죠. 무덤구조가 다르다는 것은 지역이 가까워도 그들과는 다른 세력이 지배하는 나라였다는 것을 뜻합니다. 고령의 지산동 고분군은 구덩이를 파고, 관을 묻은 후 덮개돌을 덮었는데, 옥전 고분군은 덮개돌 없이 나무덮개를 올리고 봉분을 쌓았습니다. 대개 도굴꾼들은 이 덮개돌을 찾으면 계속 아래로 파내려 가며 도굴을 합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그 돌이 없으니 더 내려가지 못해 도굴을 하지 못했죠. 대가야 고분군에 비해 도굴당하지 않은 무덤이 많았던 이유입니다. 발굴팀에 의해 이곳 무덤구조가 기 존의 것들과 다르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자, 그 사이 도굴꾼들이 아직 발굴하지 않은 바로 옆 무덤을 훼손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옥전고분군에서는 무려 2,500여 점의 유물들이 출토되었습니다. 유물을 통해 이 곳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가야의 새로운 나라, '다라국'의 지배자 무덤이 라는 것이 밝혀졌죠. 발굴 과정에서 수많은 논쟁과 반향을 일으키며 '다라국'이 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린 옥전고분군의 지배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우 리나라 역사서에는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던 다라국은 과연 어떤 나라였을까요?

다라국 황금이야기길 2. 1,500년 전의 유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합천박물관 5세기 초에 세워져 약 2백 년 간 존속하다 사라진 나라, 다라국은 왜 이 시기에 갑자기 이곳에 성립됐던 것일까요? 서기 400년 전후,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신 라의 지원 요청에 의해 김해의 금관가야를 침공했습니다. 고구려 대군의 침공을 받은 금관가야는 거의 멸망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죠. 금관가야의 지배집단은 일 본으로 건너가거나 낙동강 물길을 따라 서부 경남의 여러 지역으로 이동했습니 다. 그 중 일부가 합천 지역에 정착하면서 다라국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가야는 여러 나라들의 연맹체였습니다. 백제나 신라처럼 중앙집권화된 나라들이 아니었죠. 금관가야나 대가야가 대외교역을 통해 보다 강력한 힘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서로를 정복하거나 복속될 정도는 아니어서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나라가 바로 다라국이죠. 우리나라 문헌에는 다라국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중국 양나라의 <양직공도> 라는 그림과 8세기에 편찬된 일본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만 다라국에 대한 기록 이 남아있죠. <양직공도>는 중국에 온 각국의 사신들을 그린 것입니다. 그 중 백 제사신이 백제 주위에 있는 소국들을 언급하는데, 여기에 '다라'라는 이름이 처 음 나옵니다. 안타깝게 우리나라 기록에는 없지만, <일본서기>에는 541년과 544년, 백제와 가야가 주도한 국제회의인 '임나부흥회의'에 참석한 나라들과 그 나라에서 온 대표자들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라국, 안라국, 다라국은 각 기 신하를 보냈는데, 나머지 나라들은 왕이 직접 가거나 왕의 아들이 참석했죠. 신하를 보낸 가라국, 안라국, 다라국의 위상이 다른 나라들보다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라국에 관한 역사기록이 이처럼 빈곤하기 때문에, 옥전고분군에서 발굴된유물

들은 역사를 추측하고 재구성하는데 더욱 소중한 자료들입니다. 합천박물관에 전 시되어 있는 고리자루큰칼과 말 투구, 철기, 옥제품과 장신구들은 후기 가야를 대표하는 대가야 연맹체의 일원이었던 다라국의 당당한 위상을 말해주고 있습니 다. 다라국 황금이야기길 3. 전국에서 유일한 다라국 테마 전시관, 합천박물관 합천박물관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다라국을 테마로 한 전시관입니다. 다라국의 유 물인 항아리그릇받침을 모티브로 설계된 중앙홀을 지나면 1층의 다라문화실과 2 층의 다라역사실로 이어집니다., 옥전고분군에서는 용과 봉황 문양이 장식된 고리자루큰칼이 여럿 출토되었습니 다. 가야 전체에서 발굴된 장식고리자루큰칼 중 가장 큰 116센티의 칼도 옥전고 분군에서 나왔습니다. 다라국의 수준과 역량을 보여주는 것이죠. 합천박물관에는 다양한 철제품들과 함께 철기를 만드는데 쓰인 망치와 집게, 숫돌 등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다라국이 철기를 통해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갖춘 나라였음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다라역사실에는 다라국 최전성기 왕의 무덤인 M3호분이 복원되어 있습니다. 구덩이를 크게 하나 파서 가운데에 돌로 벽을 쌓아 올리고 한쪽은 주곽, 나머지 한쪽은 부곽으로 사용한 것이 특이합니다. 주곽에는 무덤 주인공인 왕과 그의 권력을 상징하는 유물들이, 부곽에는 토기류를 묻었죠. 이 M3호분 부곽에서는 사슴 뿔이 발견되었습니다. 두 세 마리의 사슴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리나라에 많은 꽃사슴이 아니라 북방 시베리아에 서식하는 커다란 사슴 엘크 류로 분석되었죠. 북방과 어떤 교류가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옥전고분군에서는 40쌍의 귀고리도 출토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발굴 조사된 가야 고분군에서 나온 귀고리 중 가장 많은 양입니다. 세공기술과 장식이 당대 백제나 신라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화려하고 정교합니다. 그런데 이 중 가장 화 려한 귀고리는 한 쌍이 아니라 한 짝만 있습니다. 한 짝이 도굴되어 남은 하나 만 전시되어 있는 거죠. 지금까지 국내에서 5점밖에 없던 말 투구는 이곳에서 모두 6점이나 나왔으며,. 가야 고분군 전체를 통틀어 유일한 로만글라스도 출토되었습니다. 유물들만으로 다라국의 모든 것을 추측할 순 없지만, 인근 가야는 물론 신라, 백제, 고구려, 일 본과 중국과도 독자적으로 교류했던 다라국. 합천박물관을 나올 때쯤이면 역사에 서 사라져버린 나라 다라국이 더욱 궁금해질 것입니다.

남명조식 선비길 1. 합천과 영남권을 대표하는 선비가 태어난 곳, 남명 조식 생가터 남명 조식은 1501년 합천면 삼가면 외토리, 외갓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 어난생가터는 마치 토끼가 누워있는 형상이라 해서 '토골'이라고 불리던 곳입니 다. 여기서 태어나는 사람은 큰 현인이 될 거라는 예언이 있던 곳이죠. 남명 조식은 과거에 급제한 아버지를 따라 5살부터 서울과 함경도 등으로 옮겨 다니다, 26살에 부친상을 당해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30살에 처가가 있는 김 해로 옮겼다가 45살에 어머니 상을 당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죠. 61세에 산청 으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 고향에 머물며 학문을 닦고 후학을 가르쳤습니다. 그의 묘는 지리산 아래 산청에 있지만, 그가 가장 오래 살았던 곳은 다름아닌 고향 합천이었습니다. 남명 조식은 퇴계 이황에 버금가는 유학자였습니다. 경상 좌도에 퇴계 이황이 있 다면, 경상 우도에는 남명 조식이 있다고 할 정도였죠. 하지만 퇴계가 벼슬길에 나가 현실정치에 참여한 것과 달리, 남명 조식은 초야에서 후학을 기르는데 열중 했습니다. 그는 늘 두 개의 작은 쇠방울을 옷고름에 매달고, 품에는 칼을 품고 다녔습니다. 쇠방울에는 '성성자'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성'은 '깨닫다' 라는 뜻 입니다. 칼은'경의검'이라고 하여, '안으로 밝히는 것은 경건함이며, 밖으로 결단 하는 것은 의로움이다'라는 뜻의 '내명자경 외단자의' 라는 글을 새겨놓았습니다. 방울소리로 정신을 깨우쳐 안으로 자기수양을 하고, 밖으로는 세상의 불의와 사 악함을 칼로 베듯 베어내겠다는 정신, 이것이 남명의 대표적 사상이자 철학이었 죠. 그의 실천과 가르침은 제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가 타계하고 20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의령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의병 3 천 명을 모아 합천을 지킨 정인홍, 고령의 김면 등 영남의 3대 의병장이 모두 그의 제자였습니다. 그의 제자들 중 의병장만 50여 명이 넘습니다. 16세기 영남 학파를 대표하던 큰 현인 남명 조식이 태어난 생가터는 현재 복원되고 있습니다.

남명조식 선비길 2. 죽음을 각오하고 임금을 비판한 남명 조식의 가르침, 뇌룡정과 용암서원 남명 조식은 고향마을에 '뇌룡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뇌룡'이란 <장자>의 책에 나오는 글, '시거이용현 연묵이뢰성'에 서 따온 이름입니다. '주검처럼 가만히 있다가 용처럼 나타나고, 연못처럼 고요하다 우레처럼 울린다' 라는 뜻이죠. 실제로 남명 조식은 명종 10년인 1555년, 왕이 그를 단성현감이라는 자리에 임 명하자 뇌룡정에서 이를 거절하는 상소문을 올려 나라를 우레처럼 울렸습니다. '을묘사직소 단성소'라 불리는 이 상소문은 그를 유명하게 만든 사건이기도 합니 다. 전하의 나라 일이 이미 그릇되어서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고 하늘의 뜻은 가버렸으며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임금의 어머니이신 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깊숙한 궁중의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돌아가신 임금님의 어린 아드님일 뿐이니, 억만 갈래로 찢어진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하고 무엇으로 수습하시겠습니까? 이런 때에 보잘 것 없는 재주로 전하의 신하 노릇 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그가 벼슬을 마다한 이유였습니다. 왕은 노발대발하여 그를 처벌하려고 했으나, 조정 신하들이 만류하여 무사할 수 있었죠. 그는 왕도 무시 못할 존재였습니다. 을묘사직서는 지금 뇌룡정 옆 용암서원 입구 커다란 비석에 새겨져 있습니다. 용 암서원은 후대에 남명을 위해 지은 서원입니다. '경이 거처하는 공간'이라는 뜻 을 가진 강당 '거경당'과 '의가 집중하는 문'이라는 뜻의 '집의문'이 있는 용암서 원에서, 남명 조식의 가르침을 다시 되새겨보는 것은 어떨까요?

황강권역 1. 황강 은빛백사장길의 절경, 함벽루 합천의 역사는 황강의 역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강이 서울 한가운데를 가로지 르는 것처럼, 황강은 서울보다 1.6배나 큰 합천을 가로지르며 유유히 흐릅니다. 약 111km에 이르는 황강은 비가 많이 오면 황톳물이 흘러서 '누를 황'자를 써 서 황강이라 부르는데, 옛날에는 향기 나는 강이라 해서 '향강'이라고도 불렀죠. 합천읍내 황강을 따라가다 보면 해발 90m 높이의 황우산에 이릅니다. 황소가 엎드려 강물을 마시고 있다 하여 '황우산'이라고 하기도 하고, 피리를 분다는 뜻 의'취적산'이라고도 불리는 산입니다. 이 산 아래 함벽루가 황강을 바라보며 서 있습니다. 고려 때인 1321년에 창건된 정자죠. '젖을 함, 푸를 벽', 이름 그대로 푸르름에 잠길 듯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정자 뒤 암벽에는 커다란 한자로 '함벽루'라고 새겨져 있는데, 조선시대 학자 우암 송 시열의 글씨입니다. 누각 안에는 남명 조식, 퇴계 이황, 송시열 등이 쓴 시와 기 행문이 걸려있습니다. 조선시대 문인들은 이곳에 찾아와 눈앞에 넘실거리는 푸른 강물과 고운 모래사장, 황강 정양호를 한번에 바라보며 글을 지어 읊으며 풍류를 즐겼습니다. 지금도 함벽루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죠. 함 벽루는 비가 오면 처마의 물이 황강에 바로 떨어지도록 배치되어 있어, 비오는 날 빗물을 감상하기 좋은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무아지경에 이르진 못해도 강물은 아득하여 알 수 없구나. 뜬구름의 일을 배우 고자 하나 오히려 높다란 바람이 흩어버리네 남명 조식은 함벽루에 오른 소회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 옛날 함벽루에서 선 인들이 바라보던 황강이 세월이 흐른 지금도 유유히 흐르고 있습니다.

황강권역 2. 신라인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절, 연호사 황우산 혹은 취적산이라 불리는 야트막한 산에는 옛 성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산 전체가 대야성의 옛터죠. 642년 선덕여왕 때 이곳에서 백제와 신라가 격렬하 게 맞서 싸웠습니다. 이 전투가 바로 통일신라의 계기가 된 대야성 전투입니다. 대야성은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로, 신라가 대가야를 멸망시킨 후 백제군을 방어 하기 위해 쌓은 성입니다. 백제는 낙동강 서쪽 옛 가야 지역을 차지해 경주로 진출하기 위해 호시탐탐 이곳을 노리고 있었죠. 신라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김춘 추의 사위 김품석이 당시 대야성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642년 백제 의자 왕이 보낸 윤충 장군에 의해 김품석과 그의 아내, 그러니까 김춘추의 딸 고타소 랑 등이 모두 죽음을 당하고 성을 빼앗긴 것이죠. 이때 죽은 김품석과 고타소랑, 신라 장병 2천여 명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대 야성 전투 다음해인 643년에 와우선사가 지은 절이 연호사입니다. 이후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이 된 김춘추는 사위와 딸을 잃고 백제에 패배한 울분을 달래며 복수의 그날을 기다렸겠죠. 이 울분과 복수심이 마침내 신라의 삼국통일로 이어 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삼국사기>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백제 의자왕 2년 8월 장군 윤충을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 대야성 을 공격하였다. 성주 품석이 처자를 데리고 나와 항복하자 윤충이 그들을 모두 죽이고그의 목을 베어 서울에 보내고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아 서쪽 지방의 주 와 현에 나누어 살게 하고, 군사를 남겨 그 성을 지키게 하였다. 왕이 윤충의 공 로를 표창하여 말 20필과 곡식 1천 석을 주었다. 2009년에 인기리에 방영된 TV드라마 <선덕여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대야성 전투에 대한 기록입니다. 실제 드라마를 찍을 때도 이 일대에서 촬영해관 람객들이 많이 몰리기도 했습니다.

황강권역 3. 대나무처럼 굴하지 않은 충절, 신라충신 죽죽지비 대야성 전투는 역사상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 지만, 흥미로운 이야 기를 많이 간직한 드 라마틱한 전투이기도 했습니다. 김품석의 부하 중에는 검일 이라는 자가 있 었습니다. 품석에게 아내를 빼앗기고 불만 을 갖고 있던 자였죠. 백제군이 침입했을 때, 검일은 그 원한을 갚기 위해, 신라를 배 신하고 성 안에 불을 질렀습니다. 내부의 적에 의해 대야성은 위기에빠졌죠. 전의를 상실한 품석은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백제군의 약속을 믿고, 성문을 열어 항복을 하고자 했습니다. 신라 화랑 출신으로 품석을 보좌하던 죽죽장군이 그를 만류했 지만, 품석과 휘하의 장병들은 결국 항복을 하고 말았습니다. 백제군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이들을 모두 죽이고 말았죠.. 죽죽장군은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항전을 계속했습니다. 하지만 전세는 이미 백 제로 기운 뒤였죠. 아버지가 나를 '죽죽'이라 이름 지은 것은 추울 때도 대나무처럼 시들지 말고, 꺾어도 굴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어찌 죽음을 겁내 항복할 것인가! 죽죽장군은 성이 함락될 때까지 끝까지 대항하다 전사했습니다. 선덕여왕은 죽죽의 이야기를 듣고 매우 슬퍼하며, 그의 벼슬을 올려주었습니다. 죽죽장군이 백제군과 싸웠던 자리에는 그를 기리는 비석이 서있습니다. '신라충 신 죽죽지비'라 쓰여진 이 비석은 1522년 조선 중종 때, 합천군수 조희인이 건 립한 것입니다. 추위에도 결코 시들지 않고 대나무처럼 굴하지 않은 신라 장군의 충절이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것이죠.

황강권역 4. 합천댐이 만든 것들, 합천댐 물문화관 1988년 12월 31일, 황강에 합천댐이 완공되었습니다. 합천댐으로 당시 1천 700여 명이 살던 마을이 수몰지구가 되었습니다. 대신 황강을 막아 새로 생긴 합천호는 다양한 어종이 서식하는 낚시터이자, 낭만적인 드라이브 코스이며, 수 상레저를 즐길 수 있는 피서지가 되었죠. 합천호를 따라 달리다보면 합천댐 물문화관이 나옵니다. 합천댐에 대한 정보와 물에 대한 소중함을 알 수 있는 곳 입니다. 2층짜리 둥근 돔 건물이 푸른 물을 배경으로 서있어서,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일품입니다. 1층 전시실에 는 물과 사람이 함께 해온 역사를, 제2전시실에는 합천과 합천댐이 품고 있는 자연과 합천댐 수몰지역에 대해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강에 대한 정 보와 지구촌 물 부족에 관한 정보는 덤이죠. 합천댐은 세계최초로 저수지 수면을 활용한 수상태양광 시설을 준공해서 500kw 전력을 생산하고 상용화한 최초의 다목적댐이기도 합니다. 합천댐 모형도나 전기를 만드는 과정이 모형으로 전시되 어 있어서 자녀들을 동반한 가족여행이라면, 교육삼아 들를 만한 곳입니다. 합천댐이 생기며 바뀐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합천댐 아래 수변생태탐방로가 이 어진 보조댐이 사진 출사지로 유명해진 것이죠. 이른 아침이면 물안개가 내려앉 은 강물에 햇살이 엷게 비추고, 때마침 철새가 날아들면, 이곳에 모여든 사진작 가들의 셔터소리가 한꺼번에 터집니다.. 합천댐으로 가는 호반도로길은 백리벚꽃길입니다. 합천댐이 건설되며 합천읍에서 대병면 합천호를 거쳐 봉산면까지 이어지는 백리길에 벚꽃을 심어, 4월이면 호 반을 따라 구비 도는 벚꽃터널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30년이 채 되 지 않았지만 백리벚꽃길은 가야산, 해인사와 같은 천년 비경과 더불어 합천 8경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황강권역 5. 합천 의병들의 혼이 담긴 곳, 충의사 외적의 침략을 당했을 때 자발적으로 구성된 민간 무장조직을 '의병'이라 부릅니 다. 의병을 일으키는 것을 '창의'라고 하죠. 1592년부터 7년간 계속된 임진왜란 때는 의병활동이 특히 왕성했고 그 활약과 성과도 컸습니다. 당시 전국에서 의병 이 일어나긴 했지만 합천은 임진왜란 당시 가장 의병활동이 왕성했던 지역입니 다. 임진왜란 초기, 관군의 패배로 나라 전체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바다에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면 육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났습니다.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사 람이 경상도 의령의 곽재우와 합천의 정인홍입니다. 남명 조식의 수제자였던 그 는 고향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영남의병장으로 임명된 뒤 의병 3천을 이끌고 성주, 합천, 고령, 함안 등을 방어했죠. 덕분에 왜적이 식수로 쓰는 낙동 강 부근을 차단하고 곡창지대인 호남을 빼앗기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왜적이 다시 침입했을 때도 그는 또다시 의병을 모아 왜 적과 싸우고 전쟁이 끝난 뒤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84세에 그는 영의정까지 올랐죠. 합천댐 물문화관에서 1km쯤 거리에 있는 창의사는 의병장 정인홍과 의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2001년 합천군에서 건립한 곳입니다. 입구에서 사당까지 가려면 4개의 가파른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가야 합니다. 첫번째 계단을 오르면 17m 높 이의 '합천임란창의기념탑'과 농민의병 조각상이 우뚝 서있습니다. 두번째 계단을 올라 숭인문을 지나고, 세번째 계단을 오르면 당시 의병투쟁사에 대한 해설과 유물들이 전시된 유물관과 강당 건물이 나옵니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야 의병장 정인홍을 포함하여 총 112명의 위패를 모신 창의사가 보입니다. 한고비 한고비 넘으며 국난 극복에 앞장선 의병들의 발걸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합천은 '영남 3대 의병장' 중 한명인 정인홍을 비롯해 50여 명이 넘는 의병장을 배출한 곳입니다. 남명 조식의 정신을 이어받은 이들이 있었기에, 임진왜란으로 부터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무사히 지켜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황매산 기적길 1. 봄에는 철쭉, 가을에는 억새로 덮이는 황매평전 황매산은 가야산과 함께 합천의 2대 명산으로 불립니다. 산 색깔이 누른 색을 띈다 하여 '황뫼, '황산'이라 하다 황매산이 됐다고 하기도 하고, 산 중턱이 상당 히 넓어 '너른 뫼', '너른 산'이라고 불리다 황매산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 다. 조금 더 흥미로운 것은 동네 어른들께 구전되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산에 할머니 산신이 계셔서, 할머니산, 할미산, 할매산으로 불리다가 '황매산'이 되었 다는 거죠. 황매산의 정상 봉우리를 장군봉이라 하고 여기에 할미산성이라 불리 는 산성의 흔적이 있으며, 할머니의 품속 같은 산이라 해서 할미산이라 불렸던 것은 아닌가 해석되고 있습니다. 해발 800~900m의 황매산 중턱은 매우 광활합니다. 과거에는 목장이 있던 구릉 진 평원이었는데, 매년 5월이면 이곳 황매평전은 철쭉꽃으로 덮입니다. 철쭉군락 지 초입까지 찻길이 나있어 자동차로 오르내릴 수 있기 때문에, 5월 초순부터 중순이면 이곳을 찾는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철쭉군락지에는 목재데크가 이어져 어린이, 노약자도 편안히 산행을 즐길 수 있죠., 황매평전은 드라마나 영화촬영지로도 인기있는 곳입니다. TV 드라마 <주몽>과 <태왕사신기>가 이곳에서 촬영되었죠. 아름다운 산세에 길게 펼쳐진 능선, 그리 고 그 아래 말을 타고 달리기 좋은 평전이 있으니 무협드라마나 전쟁 씬을 찍기 에는 더할나위 없습니다. 봄에는 철쭉, 여름에는 오토캠핑장의 시원한 바람, 가 을에는 억새, 겨울이면 눈꽃나무로 덮여 사계절 아름다운 황매평전, 이곳을 차로 돌아보는 것도 좋지만 조금 더 시간여유가 있다면 황매산 기적길을 따라 정상까 지 걸어 올라가보는 것은 어떨까요?

황매산 기적길 2. 천하명당 무지개터 있는 모산재 해발 767m 모산재는 1,108m 황매산 자락 에 우뚝 솟은 바위산 입니다. 산봉우리인데 '봉'이 아니라 '재'라고 불리는 것이 조금 특 이하지만, 가야산에서 시작된 산줄기가 황매 산으로 이어지고 거침 없이 뻗어 그 기백이 모인 곳이어서 에너지 가 넘치는 곳이자 우리나라 최고 명당으로 손꼽히는 곳입니다. '모산재'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첫번째로는, 산이 신령스럽고 묘하게 생겼다 해서 '묘산'이라고 부르다가 '모산재'가 되었다고 합니다. 두번째 로는, 잔디보다 키가 크고 풀 중에 가장 순결한 풀이라는 '띠'를 의미하는 한자 ' 모'자를 써서 순결한 산이라는 뜻으로 '모산'이라고 했다는 거죠. 모산재에 순결 바위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라는 겁니다. 세번째 이야기로는 영암사 절 뒤로 '해 가 저무는 산'이라 하여, '저물 모'자를 쓴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정상 바로 밑에 있는 '무지개 터'와 관련된 이야기가 가장 흥미 롭습니다. 이곳에 사시사철 물이 고여 있어 '못이 있는 산' 즉, '못 재', '못 산' 으로 불렀다는 거죠. 옛부터 가뭄이 들면 동네사람들은 우리나라 최고의 명당자 리인 이곳에 디딜방아를 지고 올라와 기우제를 지냈습니다. 기우제를 지낼 때마 다 비가 내렸죠. 명당이라 누구든 이곳에 묘를 쓰면 자손대대로 영화를 누릴 수 있지만, 반대로 마을에는 가뭄이 든다고 해서 이곳에 개인의 묘를 쓰지는 못하도 록 했습니다. 모산재 정상에서 건너편을 바라보면 까마득한 바위절벽 위에 삼각형 모양의 거 대한 바위를 볼 수 있습니다. 돛대처럼 생겨서 돛대바위라고 부릅니다. 벼랑 끝 에 앉아있어서 아슬아슬하게 느껴지지만, 마치 하늘을 향해 순항을 시작하듯 돛 을 활짝 펼친 모습입니다. 님을 만나러 은하수를 건너다 황매산에서 그만 멈추고 말았다는데, 아래서 올려다보면 돛대바위라는 이름이 더 실감납니다. 돛대바위와 무지개 터를 지나 모산재 정상에 오르는 산행에 한번 도전해보시죠. 새로운 기 운과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황매산 기적길 3. 순결을 가리는 순결바위 황매산 기적길을 걷다 보면 모산재의 기기묘묘한 바위들 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위마 다 재미있는 사연을 품고 있 어 산행의 즐거움을 더해줍니 다. 모산재 정상에서 바위 능선을 따라 하산하는 길에는 '순결 바위'라는 이름을 가진 바위 를 만날 수 있습니다. 낭떠러 지 끝에 버티고 서있는 바위 죠. 이 바위덩어리는 웬일인 지 두 쪽으로 갈라져서 세로 로 길쭉하게 바위틈이 나있는 데, 사생활이 문란한 사람이 이 바위틈에 들어가면 바위가 오므라들어 빠져 나오지 못한 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오드리 햅번과 그레고리 팩이 주연한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왔던 대리석 가면 과 비슷하게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바위죠. 로마의 산타마리아델라 교회 입 구 벽면에 있는 '진실의 입'이라고 불리는 그 대리석 가면은 거짓말을 한 사람이 입 안에 손을 넣으면 손이 잘린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산재 에 올라 순결을 증명 받겠다고 괜히 바위틈으로 들어가지는 마세요. 순결과는 상 관없이 체격이 큰 사람이라면 틈이 좁아 괜한 고생을 할 지도 모르니까요. 순결바위를 지나 조금 더 내려가면 '득도바위'가 있습니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여기서 득도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문헌기록이나 전해오는 전설과는 무관한 이야기입니다. 그저 호방한 산세와 장쾌한 기암괴석들을 바라보며 몸과 마음을 유쾌하게 하는 것으로 만족해도 좋을 것입니다.

황매산 기적길 4. 조선 개국을 위해 무학대사가 기도하던 곳, 국사당 가야산 해인사에는 '국사단'이 있고, 황매산에는 '국사당'이 있습니다. 해인사의 국사단은 깨달음의 어머니라는 뜻을 가진 정견모주를 모신 곳입니다. 가야산신인 정견모주는 고령의 대가야와 김해의 금관가야를 세운 두 임금의 어머니입니다. 전설 속의 인물이죠. 황매산에 있는 국사당은 무학대사가 조선 개국을 위해 수도 하며 기도를 올렸던 곳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매년 지방관찰사가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고, 지금도 삼월삼짓날이면 모산재 아래 마을 주민들이 제사를 올립니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왕조 건국에 기여한 무학대사는 우리에게 너무나 유명하지만, 그가 합천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황매 산에는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여럿 전해집니다. 황매산을 '3무산' 즉 '세 가지 가 없는 산'이라고 부르는 것도 무학대사 때문이죠. 무학대사가 황매산에 들어 수도할 때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따라 산을 오가며 자식 수발을 도맡았습니다. 어머니가 산을 오르다가 땅가시와 칡넝쿨에 걸려 넘 어지고 눈앞에 나타난 뱀에 놀라자, 무학대사는 100일 기도를 드렸죠. 황매산에서 이들을 모두 없애달라고 말이죠. 덕분에 지금도 황매산에는 땅가시와 칡넝쿨, 뱀이 없어 황매산을 '3무산'이라고 부른다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황매산에 이 셋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국사당에서 곧장 산을 오르면 황매산 정상 옆에 나란히 솟아있는 세 개의 봉우 리가보입니다. 삼봉, 또는 서삼봉이라고 부르는 봉우리들입니다. 삼봉을 향해 정 성을 다해 기원하면, 본인이나 후손들 중 누구라도 훌륭한 현인이 세 명 태어날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합천에서 태어난 세 명의 훌륭한 인물에 대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 명 은 무학대사, 또 한 명은 남명 조식선생이라고. 그럼 나머지 한 명은 누구일까 요? 그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하니, 지금이라도 삼봉을 향해 지극정성으로 기 도하며 조금 더 기다려보시죠..

황매산 기적길 5. 모산재 아래 신령스러운 폐사지, 영암사지 모산재 아래 영암사지 이정표를 따라가면 600년 된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있습니다. 나무는 아직 강건한데, 한때 크게 번성했을 영암사는 언제 지어졌는 지, 또 언제 어떤 이유로 사라졌는지 정확한 기록도 없이 폐사지로 남아있습니 다. 영암사터가 폐사지이면서도 화려한 환상의 나라 유적지라는 느낌을 주는 것은 다름아닌 쌍사자석등이 있기 때문이다. 병풍처럼 둘러선 황매산을 향해 우뚝 서 있는 이 쌍사자석등은 폐허가 되어 모든 것이 사라진 폐사의 잃어버린 가치를 남김없이 복원해준다. 쌍사자석등은 영암사터의 중심이고 핵이고 꽃이다. 그 자 체로 아름답지만 놓인 위치가 이 유물을 더욱 빛나게 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우리나라 답사문화에 새로운 활력을 몰고 왔던 유홍준 교수는 영암사지를 소개하며 이곳의 쌍사자석등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쌍사자 석등은 국내에선 법주사와 중흥산성, 그리고 영암사지 단 3곳에만 남아있는데, 다른 두 곳의 쌍사자석등이 모두 국보로 지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석등 은 그보다 낮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이 석등의 사자들은 발 목 부분이 모두 부러졌던 흔적이 있습니다. 1933년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가져가 려고 자른 것을주민들이 막아 반출하지 못했다가 후에 다시 이곳에 세워졌기 때 문이죠. 국보로 지정되지 못한 것도 이때 잘린 흔적 때문입니다. 창건과 폐사의 비밀을 간직한 영암사지에는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요소들이 눈에 띕니다. 황매산 자락 비탈을 이용해 쌓아올린 석축을 고정하기 위 해,대못을 박듯 박아둔 사각돌과 돋을새김으로 새겨놓은 조각들도 눈길을 사로잡 습니다. 무엇보다 모산재의 기운을 듬뿍 받고 있는 절터 그 자체가 사라진 절집 을 더욱 아릅답고 신비스럽게 느끼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