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전을 열며 이번 묻혀진 백제문화로의 산책 - 한성백제 특별전은 우리 박물관 개관 10주년을 기념하여 기획된 전시 입니다. 지난 겨울에 열렸던 우리 곁의 고구려 전에 이어 경기도의 삼국시대 문화를 조명하는 뜻 깊은 자 리이기도 합니다. 한성백제는 첫 도읍지인 한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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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을 열며 이번 묻혀진 백제문화로의 산책 - 한성백제 특별전은 우리 박물관 개관 10주년을 기념하여 기획된 전시 입니다. 지난 겨울에 열렸던 우리 곁의 고구려 전에 이어 경기도의 삼국시대 문화를 조명하는 뜻 깊은 자 리이기도 합니다. 한성백제는 첫 도읍지인 한성의 이름을 따 부르는 명칭으로 680여 년 간의 전 시기 중 전성기를 포함하여 500년 가량 지속되었지만 아직은 묻혀진 역사에 가깝습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한성백제는 당시 도읍이었던 서울 송파구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 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경기도와 충청도를 중심으로 여러 한성백제 유적이 발굴되어 수많은 유물이 확인 됨에 따라 이제는 한성백제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백제유 적은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했지만 현재는 경기도만 해도 약 360여 곳이나 확인되고 있으며 이러한 추세 로 볼 때 앞으로도 놀랄만한 유적과 유물이 계속 발굴될 것입니다. 이 전시는 한성백제의 여명, 한성백제인의 삶과 죽음, 한성백제의 생산, 한성백제의 대외관계 등 크 게 4가지 테마로 나누어 구성하였습니다. 한성백제의 여명 에서는 국가형성 이전의 기층문화를 다루었고, 한성백제인의 삶과 죽음 에서는 백제인의 의식주, 무덤과 제의에 관한 내용을 담았습니다. 그 다음 철기, 토기, 기와, 유리 옥을 다룬 한성백제의 생산 은 백제금동대향로를 만들었던 백제인의 우수한 생산기술 과 생산품을 소개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백제의 대외관계 에서는 중국의 선진유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 여 문화의 기틀을 다지고, 이를 일본에 전파하였던 백제문화의 국제성을 알리고자 하였습니다. 동아시아 사에서 볼 때, 한성백제의 문화는 세계화된 하나의 문화트렌드로써 현재 동아시아 전역에서 유행하는 한 류( 韓 流 ) 바람과 일맥상통하며 우리 민족문화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번 전시를 계기로 한성백제 연구를 위한 노력이 계속적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마지 막으로 귀중한 소장유물과 자료를 흔쾌히 대여해 주신 여러 기관과 관계자, 전시 기획에 참여해주신 자문 위원님, 전시 기간 중 강연회와 체험 행사를 진행해 주시고 전시 도록에 옥고를 보내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진심어린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2006년 9월 장 이 종 선

유물대여기관(가나다순) 강원문화재연구소 고려대학교박물관 국립공주박물관 국립문화재연구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청주박물관 국립춘천박물관 기전문화재연구원 단국대학교석주선기념박물관 서울대학교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세종대학교박물관 영집궁시박물관 원광대학교박물관 이천시립박물관 중원문화재연구원 한국고고환경연구소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한국토지공사토지박물관 한남대학교박물관 한림대학교박물관 한신대학교박물관 호암미술관 자료협조기관(가나다순) 고려문화재연구원 공주대학교박물관 국립부여박물관 도서출판 돌베게 도서출판 사계절 동아대학교박물관 복천박물관 숭실대학교한국기독교박물관 영남문화재연구원 예맥문화재연구원 중앙문화재연구원 철박물관 충북대학교박물관 충청문화재연구원 포스코역사관 한백문화재연구원 한양대학교박물관 호남문화재연구원 전시영상물 촬영협조 고려문화재연구원 국립문화재연구소 부여 백제요 후원 사)한국박물관협회 사)협의회 경기문화재단 서울경기고고학회 일러두기 1. 이 책은 2006년 5월 25일부터 7월 9일까지 에서 개최한 특별전 묻혀진 백제문화로의 산책, 한성백제 의 전시도록이다. 2. 도록은 5부로 나누어 편집하였으며, 여기에 전시실 조감도와 부대행사 내용, 전시유물 및 유적 목록, 연표 등 을 부록하였다. 3. 도록에 게재된 사진은 전시유물일 경우 새로 촬영하였으며, 유적 및 유구 사진은 해당기관으로부터 대여하여 사용하였다. 4. 전시되지 않은 일부 유물은 해당기관의 허락을 받아 사진을 게재하였다. 특별전을 열며 07 Ⅰ. 漢城百濟의 黎明 1. 한 사회의 형성 8 2. 중부지방 원삼국 문화 22 43 Ⅱ. 漢城百濟의 誕生과 國家權力의 發生 55 Ⅲ. 百濟人의 삶과 죽음 1. 도시와 마을 56 2. 의식주 66 3. 장제와 무덤 86 4. 제의 102 109 Ⅳ. 漢城百濟의 生産 1. 백제 철기 110 2. 백제토기 117 3. 백제 기와 132 4. 유리 옥 136 139 Ⅴ. 漢城百濟의 對外關係 1. 전쟁과 철제무기 140 2. 대외교류 145 부록 1. 전시실 조감도 152 2. 부대행사 156 3. 유물 목록 160 4. 유적 목록 164 5. 연표 186

I漢 城 百 濟 의 黎 明 1. 한 사회의 형성 2. 중부지방 원삼국 문화 한강 하류에서 백제( 百 濟 )라는 국가가 등장하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기철기시대와 원 삼국시대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서울, 경기지역에 알려진 초기철기시대 유적은 2000년대 에 들어와 유적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이들 유적 가운데 고지성 입지와 환호 유구의 존재는 취락 간에 발생하는 긴장의 고조와 분쟁의 양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는 권력의 등장으 로 이어져 국가가 태동하는 직전 단계의 모습을 알려주는 자료로 평가된다. 초기철기시대 분묘 유적은 수원 율전동, 화성 발안리, 안성 만정리, 파주 당하리유적에서 토광묘가 발견되었는데, 이 중 청동기가 부장된 토광묘는 지역 수장의 대두와 존재 양태를 설명하는 일등급 자료이다. 원삼국시대 유적도 1990년대 이후 취락과 무덤유적을 중심으로 조사 예가 꾸준히 증가하였다. 유적의 조사 예가 적었던 초기에는 한성백제의 기층문화를 중도유형문화( 中 島 類 型 文 化 )로 이 해하였으며 화성 발안리유적과 가평 대성리유적, 그리고 풍납토성 내부 등에 형성된 대규모 취 락을 중심으로 원삼국시대 연구의 획기를 마련하였다. 서울, 경기지역 원삼국시대 무덤에서 가 장 주목되는 점은 천안 청당동유적이 북한계선으로 여겨졌던 주구토광묘가 오산 수청동, 용인 두창리 상갈동유적 등 경기 남부지역에서 지속적으로 확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무덤에 묻 힌 자들은 마한의 수장과 그 지배하의 구성원들로 추정되며, 이들이 백제의 중앙세력의 압박에 어떻게 대응해 나갔는지를 밝히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이다.

1. 한 사회의 형성 점토대토기 단계 유적 분포의 특징 지석묘 사회가 쇠퇴하는 기원전 4~3세기 무 렵에는 한국식동검( 韓 國 式 銅 劍 )과 점토대토 기( 粘 土 帶 土 器 )로 대표되는 한( 韓 ) 사회의 문 화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중국 요령 지역의 주민이 한반도로 이주하면서 형성된 한 사회 는 기존의 청동기 또는 무문토기 문화를 급속 하게 대체하며 삼한시대( 三 韓 時 代 )를 열었다. 이 시기의 고고학적 특징은 토기의 구연부에 점토띠를 덧붙인 점토대토기( 粘 土 帶 土 器 )와 함께 흑색마연장경호( 黑 色 磨 硏 長 頸 壺 ), 두형 토기( 豆 形 土 器 ) 등이 제작되며, 요령식동검 을 대체하여 검신( 劍 身 )이 비교적 좁은 한국 식동검이 제작된다. 마을은 주로 높은 고지( 高 地 )에 형성되는데, 화성 동학산, 안성 반제리, 부천 고강동유적과 같이 산 정상부에 환호( 環 濠 )를 설치한 마을 공동체 단위의 제사 유적 이 발견된다. 무덤은 지석묘가 소멸하고 대신 에 목관묘( 木 棺 墓 )가 등장하는데, 묘광( 墓 壙 ) 과 목관 사이에 돌로 충전하기 때문에 위석식 목관묘( 圍 石 式 木 棺 墓 )로 불린다. 목관은 통나 무 관을 사용한 예가 많은데, 화성 발안리, 안 성 만정리유적에서 그 사례가 관찰된다. 거푸집 청동기 토기^석기 원형점토대토기 단계의 유적은 태백산맥에서 분지된 소백 산맥과 차령산맥 사이의 내륙지방을 제외하고 거의 전국에 분포한다. 특히 내륙지방보다는 서해안이나 동해안, 남해 안을 따라 해안이 인접한 곳에 집중적으로 확인되는데, 유 적이 입지한 곳은 산간벽지에서부터 도서지역, 조개더미, 충적지, 평지, 얕은 구릉 등 다양하다. 서울 및 경기 지역에서는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여러 유적 에서 원형점토대토기가 채집되면서 일찍부터 학계의 주목 을 끌어왔다. 2000년대 이후로는 많은 의 결과, 안성 반제리유적에서는 대규모의 집자리가, 파주 당하리, 수원 율전동, 화성 발안, 안성 만정리유적에서는 목관묘가 확인되기도 했다. 그리고 부천 고강동, 화성 동학산, 수원 율전동, 안성 반제리, 오산 가장동, 강릉 방동리유적에서는 환호 시설이, 용인 대덕골유적에서는 수혈유구를 비롯한 소성유구가 조사되어 자료가 급증하고 있다. 그동안 알려진 원형점토대토기 단계의 유적은 주로 산 정 상이나 구릉상과 같은 제한적인 입지 경향을 보이며, 그러 한 입지 경향 때문에 유적의 성격은 단기적 거주나 이동성 을 보이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그러 나 최근의 조사 성과에 따르면 충적지와 같은 평지나 얕은 구릉 등 입지의 선택 범위가 확대되고 있고, 반제리에서 대 규모 주거유적이 확인된 점, 그리고 율전동과 동학산에서 대규모 환호가 확인된 점으로 보아 이들이 중장기적인 거 주생활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원형점토대토기 단계의 매장유적의 분포는 한반도를 동서 로 이분하면 대부분 서쪽에 치우쳐 있다. 현재까지 가장 북 쪽에서 조사된 파주 당하리로 부터 수원 율전동, 안성 만정 리, 반제리, 화성 발안 등 경기권 유적들과 아산 남성리, 예 산 동서리, 부여 합송리, 대전 괴정동, 전주 갈동과 논산 원 북리, 군산 관원리 그리고 가장 남쪽의 함평 초포리, 화순 대곡리까지 모두 충청도의 금강 유역과 호남지방의 영산 강 유역에 치우쳐 있다. 이에 반해 생활유적은 남양주 수석 리나 안성 반제리, 보령 교성리, 춘천 칠전동, 합천 영창리, 사천 방지리, 김해 대청, 흥동, 경산 와촌 등 몇 개소에 지 나지 않지만 전국에 흩어져 분포하고 있다. 원형점토대토기 단계 이후 등장하는 삼각형점토대토기는 영남지역과 호남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었지만, 서울 및 경기지역에서는 시흥 오이도, 일산 가와지, 화성 반송리 행장골, 화성 향남 등 일부 지역에서만 확인되고 있다. 영 남지역에서는 점토대토기 단계 이후 와질토기 단계로의 문 화 전개 양상이 유물을 통해 확인되지만 서울 및 경기지역 에서는 원형점토대토기 단계 이후 삼각형점토대토기 단계 와 중도식무문토기 및 타날문토기 단계로의 전개 과정은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I. 漢 城 百 濟 의 黎 明 1. 한 사회의 형성 중부지방 점토대토기 단계 유적 분포도 거푸집 청동기 토기^석기 1. 고양 일산 가와지유적 2. 고양 일산 새말유적 3. 남양주 수석리유적 4. 부천 고강동유적 5. 수원 율전동유적 6. 시흥 오이도조개더미 7. 안성 만정리유적 8. 안성 망이산성 9. 안성 반제리유적 10. 양평 상자포리유적 11. 오산 가장동유적 12. 용인 죽전 대덕골유적 13. 용인 초부리유적 14. 화성 동학산유적 15. 인천 원당유적

점토대토기 단계 마을 입지 및 경관 안성 반제리유적 점토대토기 단계의 집자리가 조사된 중부지방의 유적은 보령 교성리와 남양주 수석리, 오산 가장동, 안성 반제리유적 등이 있다. 교성리유적은 산 정상에 위치하며, 9기의 집자리가 조사되었다. 유적 이 입지한 곳은 천수만 일대의 바다와 주변의 얕은 산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고지이다. 집자리 는 방사상으로 펼쳐져 분포하고 있다. 수석리유적은 남쪽에 한강이 인접해 있으며, 집자리는 주산이 한강가로 뻗은 해발 40m의 구릉상 에 조성되었다. 집자리는 산 사면에 5기, 산 정상부에 1기가 자리하고 있다. 평면 형태는 대체로 말각(장)방형이며, 경사면 아래쪽의 1면은 유실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집자리 내부에 서는 간단한 화덕 시설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구조는 확인되지 않았다. 산 정상에 위치한 6호 집자 리에는 2개의 원형 저장 구덩이가 설치되어 다른 집자리들과는 차별성을 보인다. 반제리유적은 동쪽에 있는 해발 99m의 매봉산 정상과 서쪽에 있는 91m의 봉우리 사이의 좁은 평 탄면을 중심으로 유구가 형성되어 있으며, 정상부 평탄면 양쪽 사면은 경사가 매우 급하다. 집자리 는 정상의 평탄면과 능선의 중상단부에 집중되어 분포하는데, 이와 같은 입지는 합천 영창리유적 의 입지와 유사하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점토대토기 단계의 마을은 급경사면의 산 정상에 위치하여 주변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 일반적이며, 집자리는 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배치되는 특징을 보 여준다. 산 정상부는 의례 행위 공간으로 비워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반제리유적의 경우 산 정상을 감싸고 있는 환호 또한 같은 용도였을 것으로 생각되며, 집자리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환호가 확인 되어 주거생활을 짐작케 하는 화성 동학산유적 또한 오르기 힘들 정도의 경사면을 가진 유적이다. 이러한 마을의 고지성 입지는 점토대토기인들이 한반도에 정착하는 과정을 기존 지석묘 사회와의 긴장과 갈등관계에 의한 결과로 보기도 하지만, 원형점토대토기의 등장과 한국식동검문화의 성립 과 확산이 불과 1~2세기 만에 이루어진 점에 착안하여 전국을 대상으로 광상조사를 하고 그러한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점거, 혹은 근거지로 삼았던 지역이 현재의 원형점토대토기 유적이었을 것이 라는 견해도 있다. 환호 유구 1 점토대토기, 흑도장경호 粘 土 帶 土 器, 黑 陶 長 頸 壺 높이(오른쪽) 15.5cm 안성 반제리 중원문화재연구원 반제리유적은 수석리와 교성리에서 일부 확인된 원형점토대토기 단계의 집 자리가 대규모로 조사되었다는 점, 생활유구와 더불어 매장유구가 같이 조사 되었다는 점에서 이 시기의 마을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산 능선 전체 가 발굴되지는 않았지만, 여기에서 원형점토대토기 단계 집자리 73기, 목관 묘 3기, 환호, 목책열, 구상유구 등이 조사되었다. 유적은 백운산의 동쪽 능선 정상부(해발 99m)에 위치하는데, 정상부를 중심 으로 환호가 원형으로 감싸고 있다. 원형점토대토기 단계의 집자리는 능선의 정상부와 중상단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목관묘는 능선의 남쪽 경 사면에 조성되어 있어 주거공간과 매장공간이 분할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집 자리의 평면 형태는 세장방형, (장)방형, 말각(장)방형, 타원형 등 다양하다. 절반 이상의 집자리에 화덕 자리가 설치되었으며, 기둥 구멍도 일부 확인되 었다. 유물은 원형점토대토기, 환상파수장경호, 석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목 관묘는 모두 묘광과 목관사이에 돌을 충전한 위석식목관묘이며, 원형점토대 토기와 흑도장경호가 출토되었다. 환호가 위치한 정상부 평탄면에는 상면이 편평한 자연 암반이 솟아있는데, 환호가 조성되었던 시기에는 집자리가 모두 환호 외부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환호는 제의와 관련된 신성한 장소를 구획했던 경계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집자리 간의 중복이 많고 환호 폐기 이후에도 점토대토기 단계의 집 자리가 조영된 점으로 미루어 마을의 존속 기간은 길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0 11 I. 漢 城 百 濟 의 黎 明 1. 한 사회의 형성 안성 반제리유적 전경

화성 동학산유적 동학산유적은 해발 100m 이상의 산 정상부에서 확인된 마을 유적으로 시기 는 공렬토기 단계와 점토대토기 단계로 구분되는데, 이 가운데 점토대토기 단계에 속하는 3중 환호 유구가 노출되었다. 3중 환호는 산 정상부를 에워싸 고 있으며, 여러 지점에 출입부가 마련되어 있다. 환호의 단면 형태는 U 자 형이며, 최대 폭 2.5m, 최대 깊이 1.2m 가량이다. 유물은 원형점토대토기, 두형토기, 흑도장경호, 조합식우각형파수 등의 토기류와 석촉, 석도, 유구석 부 등의 석기류 외에 동착( 銅 鑿 ) 거푸집이 출토되었다. 주목되는 것은 소형의 수혈유구는 조사되었으나, 환호와 관련된 집자리가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인데, 이러한 점은 안성 반제리유적에서도 관찰된다. 산 정상부에 위치하 여 주변을 조망하기 용이한 입지적 조건과 함께 3중 환호에 의해 출입을 엄 격하게 제한한 점 등으로 보아 제의와 관련된 공간으로 파악된다. 오산 가장동유적 가장동유적은 해발 80m 내외의 구릉성 산지와 주 변의 평탄면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에서 무문 토기가 출토된 집자리와 소형의 수혈유구, 구상유 구 등이 확인되었다. 이 중 24호 수혈에서는 점토 대토기가 거의 완형으로 출토되었으며 B-1호 집 자리에서는 무문토기와 함께 삼각형만입석촉 1점 이 출토되었다. 한편 구릉 정상부에는 자연 바위군 이 형성되어 있는데, 흥미롭게도 바위군 사이에서 석부 1점이 채집되었다. 안성 반제리유적의 환호로 둘러싸인 산 정상부에 바위군이 형성되어 있음을 감안할 때, 자연적인 바위군이 의례 행위의 대상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유적 전경 유적 전경 환호 유구 12 13 I. 漢 城 百 濟 의 黎 明 1. 한 사회의 형성 바위군 전경 3중 환호 환호 유구 분포도 바위군 내 석부 출토 상태

집자리 점토대토기 단계 집자리는 조사 예가 많지 않으나, 몇 가지 특징을 보이고 있다. 우선 청동기시대 집자 리와는 달리 평면 형태가 다양하여 정형성이 보이 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청동기시대의 집자리는 세 장방형 장방형 방형, 원형 순으로 평면 형태에 변화상이 관찰되지만, 점토대토기 단계의 집자리는 말각(장)방형이나 타원형, 부정형 등 다양한 평면 형태가 공존하고 있다. 또한 점토대토기 단계 집자리들은 대부분 오르기 힘든 급경사면에 조성되어 경사 아래쪽의 벽은 거 의 유실된 상태로 조사된 경우가 많은데, 가옥 조성 시 굴광을 L 자형으로 굴착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 다. 그러나 안성 반제리유적의 정상부 평탄면에 조 성된 집자리는 4벽이 모두 남아 있기 때문에 급경 사면에 조성된 대부분의 집자리는 경사 아래쪽 벽 이 유실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집자리의 내부 시설로 가옥의 상부 구조를 지탱할 수 있는 기둥 구멍과 같은 시설이 거의 확인되지 않 은 점도 특징이다. 합천 영창리, 남양주 수석리, 김 해 대청, 춘천 칠전동유적의 경우 기둥 구멍이 거의 확인되지 않았는데, 설령 몇 개의 기둥 구멍이 있다 고 하더라도 정형성은 관찰되지 않는다. 반제리유 적에서 조사된 25기 정도의 집자리에서는 기둥 구 멍이 확인되긴 하였지만 정형성은 관찰되지 않았다. 반제리 54호 집자리 집자리의 평면 형태는 말각장방형으로 장축은 남 북 방향이다. 집자리의 규모는 길이 5m, 너비 3.6m 가량으로 안성 반제리유적에서는 비교적 큰 편에 속한다. 북쪽 단벽에 저장공으로 보이는 여러 개의 구덩이가 노출되었으며, 남쪽에는 무시설식 노지가 위치한다. 집자리 내부에서 원형점토대토기편이 출 토되었다. 점토대토기 단계 주거 및 무덤유적 분포도 1. 파주 당하리유적 2. 남양주 수석리유적 3. 오산 가장동유적 안성 반제리 54호 집자리 4. 안성 반제리유적 5. 화성 동학산유적 6. 강릉 방동리유적 7. 춘천 칠전동유적 8. 수원 율전동유적 9. 안성 만정리유적 10. 양평 상자포리유적 11. 화성 발안리유적 주거유적 무덤유적 수원 율전동유적 전경 부천 고강동 적석환구 유구 수원 율전동유적 정상부가 해발 112m 내외에 달하는 구릉의 사면 부에서 1조의 환호와 함께 7기의 작은 구덩이 유구 가 조사되었다. 비교적 경사가 급한 사면부에 설치 된 환호는 단면 U 자형이며 해발 101~104m 선 에 걸쳐 구릉의 능선부를 에워싸고 있다. 환호의 규 모는 총 연장 길이 101.6m, 최대 폭 2m, 최대 깊 이 1.07m에 달한다. 환호 내외에서 함께 조사된 작 은 구덩이들은 용도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 나, 이 가운데 7호 구덩이 유구는 토광묘로 추정되 고 있다. 남쪽으로 구릉이 이어지는 동일 능선상에 서도 점토대토기 단계의 토광묘 2기와 구덩이 유구 5기가 조사되었다. 부천 고강동 적석환구 유구 해발 91.6m 구릉의 정상부에 위치한다. 중앙에 길이 6m 크기의 부정형 적석부를 중심으로 주변 에 도랑[ 溝 ]이 원형으로 돌아간다. 적석부는 세 차 례에 걸쳐 조성되었으며, 중심부가 가장자리보다 40~50cm 가량 높게 설치되어 있다. 외곽의 도랑 은 직경 30m 내외이며, U 자형의 단면을 이룬다. 도랑의 깊이는 0.8~1m 가량이며, 바닥면에서 불 탄 흙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도랑의 서쪽 일부가 끊 어져 있어 출입 시설로 판단된다. 마을 공동의 제의 행위가 이루어진 제사터로 추정된다. 용인 죽전 대덕골 소성유구 14 15 I. 漢 城 百 濟 의 黎 明 1. 한 사회의 형성 연도부, 소성실, 아궁이, 연소실로 이루어진 반지하 식의 굴가마로 규모는 길이 4.7m, 최대 폭 2.5m, 잔존 깊이 26cm 등이다. 평면 형태는 아궁이 부분 가장동 B-1호 집자리 집자리의 평면 형태는 장방형으로 추정되며, 규모 는 장축이 5.2m 가량이나, 단축은 유실되어 현재 2m 가량만 남아 있다. 집자리 내부에서는 무시설식 화덕으로 추정되는 소토부만 확인되었다. 출토 유 물은 소량의 무문토기편과 1점의 삼각만입석촉뿐 이다. 이 좁고 소성실이 배가 부른 장타원형이나, 연소실 까지 포함하면 일견 凸 자형으로 보인다. 소성실 바닥면의 경사도는 7~15도 가량이며, 소결 정도가 심하지 않아 기물을 낮은 온도에서 번조하였거나, 조업 기간이 그다지 길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에서 원형점토대토기, 두형토기, 이기재( 離 器 材 ) 등이 출토되어 점토대토기 단계의 토기 가마로 추정되나, AMS 연대 측정에서는 늦은 연대치가 나 와 초기철기시대의 토기 가마로 단정하기에는 어려 움이 있다. 오산 가장동 B-1호 집자리 용인 죽전 대덕골 소성 유구

점토대토기 단계 목관묘 목관묘는 점토대토기 단계의 대표적인 묘제이다. 경기 지역에서 목관묘가 조사된 유적은 파주 당 하리, 수원 율전동, 화성 발안리, 안성 만정리 반제리가 있으며, 모두 11기의 목관묘가 조사되었다. 이들 유적에서 조사된 목관묘는 군집을 이루는 경우가 드물며 대개 한 유적에서 1~3기 정도만 분 포할 뿐이다. 이러한 양상은 금강 및 영산강 유역의 점토대토기 단계의 무덤군 유적에서도 발견되 는데, 차이가 있다면, 경기 지역이 금강 및 영산강 유역과는 달리 청동기와 같은 위신재가 매납되 지 않고 주로 원형점토대토기와 흑도장경호와 같은 토기류만이 부장된다는 점이다. 다만 청동기가 부장된 예는 안성 만정리 4-1호 목관묘가 유일한데, 결입부 이하 병부와 봉부 끝부분만 매납되었다. 논산 원북리 10호 토광묘에서도 같은 예가 있어 매납 당시 의례 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 강 및 영산강 유역과 영남지방의 목관묘 유적은 주로 구릉상이나 평지성의 얕은 구릉에 입지하고 목관묘의 장축 방향이 등고선 방향과 직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화성 발안리유적에서와 같이 목관묘가 충적지인 평지에 조성된 경우도 있다. 경기 지역에서 조사된 목관묘는 순수 목관묘와 위석식목관묘로 구분되는데, 이외에도 수원 율전동 2호 무덤과 같이 목관을 사용하지 않고 시신을 바로 안치한 토광묘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파주 당하리와 안성 반제리유적에서는 위석식목관묘가 조사되었으며, 금강 및 영산강 유역, 그리고 영 남지방에서 조사된 적석목관묘( 積 石 木 棺 墓 )는 경기 지역 일원에서 아직 발견 예가 없다. 한편 화 순 대곡리유적을 비롯하여 영남지역의 여러 유적에서 확인된 통나무관이 화성 발안리, 안성 만정 리유적과 같이 경기 지역에서도 조사되었는데 대개 통나무관 목관묘에서 확인되는 관 고정용 쐐기 공이나 주로 부장 공간으로 이용되었던 요갱은 확인되지 않았다. 경기 지역 점토대토기 단계 목관묘 유적명 유구명 규격(cm) 길이 너비 깊이 특징 출토 유물 파주 당하리 1호 188 74 43 목관묘(충전석) 장경호, 원형점토대토기 수원 율전동 1호 250 85 40 목관묘 흑도장경호 수원 율전동 2호 (185) 82 35 토광묘 무문토기편 화성 발안리 1호 185 60 35 목관묘(통나무관) 장경호, 원형점토대토기 화성 발안리 2호 165 65 45 목관묘(통나무관) 장경호, 원형점토대토기 안성 만정리 2-1호 243 81 10 목관묘 동촉, 철촉, 삼각형석촉 안성 만정리 4-1호 220 76 73 목관묘(통나무관) 한국식동검 안성 만정리 6-1호 210 75 18 목관묘(통나무관) 변형점토대토기, 흑도장경호, 옥제장신구 안성 반제리 1호 220 60 60 목관묘(충전석) 흑도장경호, 원형점토대토기, 방추차 안성 반제리 2호 200 70 65 목관묘(충전석) 흑도장경호, 원형점토대토기 안성 반제리 3호 (175) 62 50 목관묘(충전석) 흑도장경호 16 17 I. 漢 城 百 濟 의 黎 明 1. 한 사회의 형성 안성 반제리 2호 목관묘 수원 율전동 1호 목관묘 안성 만정리 6지점 1호 목관묘 화성 발안리 1호 목관묘

목관묘의 기원과 지역적 차이 토기 요령식동검 단계의 주묘제인 지석묘와 석관묘는 한 국식동검, 점토대토기 문화의 출현과 함께 목관묘 로 대체된다. 중국 동북지방에서 원형점토대토기가 출토된 유적은 주로 요서지역과 요동지역에 분포하 고 있는데 두형토기, 장경호가 공반되고, 묘제는 목 관묘가 사용되었다. 이러한 목관묘는 목관의 외부 에 돌을 채우거나 봉토에도 적석을 하는 목관묘가 특징인데, 이는 한반도에서 나타나는 위석식 또는 적석목관묘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통나무관은 중국 동북지방에서는 발견되지 않았지 만, 중국의 서남부 지역과 남부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어 이 지역과의 관련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 나 현재의 자료로는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통나무 관과 이들 지역과의 연관성을 다루기에는 전파 경 위나 경로에 한계가 있다. 다만 대구 팔달동유적의 예에서 통나무관이 판재식관보다 빠르다는 사실이 입증된 바 있고, 성주 예산리유적에서도 이러한 사 례가 관찰되었다. 그리고 판재식관보다는 통나무 관에, 특히 통나무관 적석목관묘에 동검이나 청동 의기와 같은 위신재가 많이 부장되어 있어 판재식 관과는 차별을 보인다. 한반도에서 조사된 목관묘는 그 기원은 동일하지 만,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 차이가 있다. 먼저 금강 유역과 영산강유역에 분포하는 목관묘는 주로 1기 만 단독으로 존재하고 있는데, 철기가 부장된 장수 남양리유적에서만 유일하게 4기가 조사되었을 뿐 이다. 구조는 목관과 묘광 사이의 공간이나 목관 상 부 또는 목개 위에 돌을 쌓은 위석식 내지 적석목관 묘가 대부분이고, 다수의 동검, 동경, 청동의기 등 이 부장되어 있다. 남성리와 연화리의 목관묘는 바 닥에 납작한 돌을 깔기도 했다. 영남지역에서 조사 된 목관묘는 삼각형점토대토기 단계의 것으로 금강, 영산강유역에 위치한 유적들과는 차이가 있다. 그 리고 1기만 단독 존재하는 것과는 달리 대개 수십 기씩 군집을 이루고, 적석목관묘보다는 적석 시설 을 하지 않은 목관묘가 다수이다. 대구 팔달동이나 경주 조양동유적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적석목관묘 가 조사되었는데, 금강, 영산강유역에 분포하는 목 관묘의 계보를 잇는 것으로 보인다. 논산 원북리 나지구 1호 적석목관묘 점토대토기 단계의 토기 기종은 옹 기종의 점토대토기와 파수부호, 평저의 흑도장경호, 두형토기, 뚜껑, 완, 시루로 구성된다. 원형점토대토기는 그 기원이 중국 동북지방에 있으며, 남한 전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기형은 대부분 옹 기종이나, 용인 죽전 대덕골유적에서는 바닥이 평저이고 깊이가 얕은 발 기종의 원형점 토대토기가 출토되었다. 또한 경주 금장리유적에서도 기형은 약간 다르지만, 발 기종의 원형점토대토기가 출토되어 일부 발 기종에는 구연부에 점토띠 처리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안성 망이산성 출토품과 같 이 점토대토기 중에는 어깨에 뉴( 瘤 )가 부착되는 경우도 있다. 파수가 달린 호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환상 파수 조합우각형파수 우각형파수로 변화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양주 수석리유적에서는 환상파 수가 달린 호가 출토되었는데, 작은 저부에 동체부가 강조되어 구형을 이루며, 목 부분은 직립된 초기 형태 이다. 두형토기는 깊이가 얕은 배신부와 높은 대각으로 구성되는데, 일반적으로 배신과 대각의 형태에 시 간성이 반영되어 있다. 배신부는 직선적인 것에서 곡선적인 것으로 변화하며, 대각은 대각의 내부가 비어 있는 공심형( 空 心 形 )에서 차 있는 실심형( 實 心 形 )으로 변화한다. 중부지방에서 출토된 대부분의 두형토기 는 공심형의 대각부가 달려 있다. 흑도장경호는 굽과 동체부의 형태, 그리고 경부의 길이와 형태에 따라 편 년작업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기종이다. 다른 기종과는 달리 토기 표면을 흑색으로 채색한 후 마연을 하였는데, 보령 교성리 집자리에서 발견된 흑연 덩어리를 이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뚜껑은 주로 삼각형점토대토기 단계에 성행하지만 죽전 대덕골, 김해 대청유적에서는 원형점토대토기와 공반되었으며, 특히 금산 수당리 적석목관묘에서는 원형점토대토기 위에 뚜껑이 덮힌 채로 출토되기도 하였다. 뚜껑 형태 는 깊이가 얕은 발과 접시의 중간 형태가 일반적이다. 기타 파주 당동리유적에서 출토된 소형 발에는 구연 일부에 수평상 돌출된 전이 달려 있는, 매우 희소한 사례도 있다. 18 19 I. 漢 城 百 濟 의 黎 明 1. 한 사회의 형성 완주 갈동 3호 토광묘 대구 팔달동 99호 목관묘 2 점토대토기 단계 토기류 粘 土 帶 土 器 段 階 土 器 類 높이(오른쪽위) 35.3cm 1~4 안성 반제리, 5 수원 율전동, 6~9 용인 죽전동 1~4 중원문화재연구원, 5~9 기전문화재연구원 1 2 3 4 5 6 7 8 9

청동기와 거푸집 점토대토기 단계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한국식동 검을 비롯한 여러 청동기의 출현과 유행을 들 수 있 다. 청동기의 종류는 동검, 동모, 동과 등의 무기류 와 동사, 동부, 동착 등의 공구류, 동경, 방패형 동기, 검파형 동기, 나팔형 동기, 원개형 동기, 동탁, 쌍주 령, 팔주령 등의 의기류가 있다. 이러한 청동기는 주로 적석목관묘나 목관묘와 같은 무덤에서 출토된 경우가 많으나 간혹 제의와 관련된 수혈유구에서 출토된 경우도 있다. 서울 및 경기 지역에서 출토된 청동기의 특징은 호 서 지역과는 달리 청동의기가 발견되지 않고 한국 식동검, 동과, 동모, 동착, 동사 등 대부분 무기와 공구류라는 사실이다. 다만 연천 일대에서 다뉴조 문경( 多 鈕 粗 紋 鏡 )이 채집되었다고 전하나, 분명치 않다. 이들 청동기들이 출토된 유구는 양평 상자포 리 지석묘와 안성 만정리 목관묘와 같은 무덤 유구 만이 알려져 있을 뿐, 대부분은 지표에서 채집되거 나, 출토 위치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현재까지 출토 또는 채집된 청동기는 개성 남쪽 지 역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으며, 그 다음으로 서울 영등포, 구로동, 여의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과 서 울 상일동, 응암동, 구리 동구동(구 양주 사노리) 등 의 지역에서 청동기의 발견 예가 많다. 그러나 최근 의 에서는 화성 동학산에서 동착 거푸집이, 안성 만정리에서는 동착과 동사가 채집되었고, 특 히 만정리 목관묘에서 결입부와 절대 마디가 있으 며, 등날이 제1절대까지 이르는 한국식동검이 출토 되어 경기 남부 지역에서도 청동기 출토 예가 점차 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특히 화성 동학산유적의 동착 거푸집과 함께 용인 초부리유적의 한국식동검 거푸집의 사례로 볼 때, 경기 남부 지역에 청동기를 제작, 분배하였던 집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고양 원당리에서 동모 거푸집이, 강원도 고 성 거진리에서 한국식동검 거푸집이 채집되었다. 5 한국식동검 거푸집 韓 國 式 銅 劍 鎔 范 길이 27.8cm 용인 초부리 국립중앙박물관 6 동착 거푸집 銅 鑿 鎔 范 길이 16.9cm 화성 동학산 기전문화재연구원 20 21 I. 漢 城 百 濟 의 黎 明 1. 한 사회의 형성 3 한국식동검, 동사, 동착 韓 國 式 銅 劍, 銅, 銅 鑿 잔존 길이(왼쪽) 16.5cm 안성 만정리 기전문화재연구원 4 검파두식 劍 把 頭 飾 길이 6.3cm 남양주 삼패동

2. 중부지방 원삼국 문화 한성기 백제의 기층 문화로 기원전 1세기에서 백제가 고대국가로 등장하는 기원후 3세기 중 후반 무렵까지 해당되며, 지역적 범위는 서울, 경기 지역을 포함하여 영동, 영서지역에 이른다. 토기는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 제작 전통을 계 승하였으나, 굽는 온도가 높아 상대적으로 기벽 이 단단한 경질무문토기와 함께 중국 전국시대 ( 戰 國 時 代 )의 토기 생산 체제의 영향으로 기존 의 노천요( 露 天 窯 ) 단계에서 벗어나 밀폐된 오 름가마[ 登 窯 ]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낸 회색 또 는 회청색의 타날문토기가 제작되었다. 또한 낙 랑의 제작 기술을 반영한 낙랑계토기( 樂 浪 系 土 器 )가 경기도 전역에서 출토되었다. 출입 시설 이 있는 呂 자형 또는 凸 자형 집자리 내부에 는 일반적으로 부석식 화덕( 敷 石 式 爐 址 )가 설 치되었지만, 일부 집자리에서는 부뚜막과 함께 ㄱ 자 형태의 터널(Tunnel)형 화덕이 사용되 었다. 무덤은 점토대토기 문화 단계의 장제( 葬 制 )가 지속되어 토광목관 목곽묘( 土 壙 木 棺 木 槨 墓 )가 조영되었지만, 경기 남부 지역에서 는 무덤 주위에 구( 溝 )를 돌린, 마한계( 馬 韓 系 ) 의 주구토광묘( 周 溝 土 壙 墓 )가 축조되었다. 문헌에 따르면 백제가 고대국가로 출현하기 이 전, 삼한 소국의 하나인 백제국( 伯 濟 國 )이 한강 하류를 거점으로 성장하였는데, 풍납토성 내부 에서 조사된 다중 환호( 多 重 環 濠 ) 마을이 백제 국과 관련될 것으로 추정되며, 또한 경기 북부 와 영서 지역에는 말갈( 靺 鞨 )이 세력을 형성하 였는데, 백제국과 경쟁 관계이었던 것으로 보 인다. 22 23 I. 漢 城 百 濟 의 黎 明 2. 중부지방 원삼국 문화 중부지방 원삼국시대 유적 분포도 1. 개성 봉동유적 2. 가평 대성리유적 3. 시흥 오이도조개더미 4. 양평 앙수리 상석정유적 5. 여주 연양리유적 6. 연천 동이리유적 7. 연천 삼곶리유적 8. 연천 학곡리유적 9. 포천 금주리유적 10. 포천 성동리유적 11. 포천 영송리유적 12. 포천 자작리유적 13. 하남 미사리유적 14. 화성 기안리유적 15. 화성 발안리유적 16. 강릉 강문동유적 17. 강릉 안인리유적 18. 춘천 율문리유적 19. 춘천 중도유적 20. 횡성 둔내유적

풍납토성 내 환호 마을 중부지방 원삼국시대 중요 마을 유적 분포도 서울 풍납토성 내부에서 조사된 3중 환호의 마을 유적은 현재로써는 그 규모를 알 수 없으나, 현대아 파트 부지에서 조사된 3중 환호의 규모로 볼 때, 한 강 하류의 거점 마을로 파악된다. 강변의 충적지라 는 입지 조건과 다중 환호의 특징은 청동기시대의 진주 대평리 옥방유적에서도 확인되는데, 그 규모 는 주거 공간만 직경 0.8km 내외의 범위이기 때문 에 풍납토성 환호 마을의 규모 역시 이와 크게 다르 지 않을 것이라 판단된다. 특히 조사가 이루어진 미 래마을 부지와 삼화 및 경당지구에서도 환호와 동 일 시기의 유구와 유물이 검출되었기 때문에 이를 연결하면 그 규모는 옥방의 환호 마을에 가까워진다. 다만 풍납토성 내 환호가 전체 주거 지역을 에워싸 고 있었는지의 여부는 차후 조사에서 밝혀질 것으 로 기대된다. 환호 마을의 조성 시기는 2세기 말 또는 3세기 초 로 여겨지며, 풍납토성이 축성되기 시작하는 3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3중 환호 외곽에 축성된 성벽이 환호의 진행 방향과 동 일함에 비추어 환호를 만들었던 주민이 풍납토성을 축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풍납토성 내 환호 마을은 백제 국가의 전신인 백제국( 伯 濟 國 )의 국읍 중심촌일 개연성이 있다. 1. 가평 대성리유적 2. 양평 양수리 상석정유적 3. 포천 금주리유적 4. 포천 영송리유적 5. 포천 자작리유적 6. 하남 미사리유적 7. 화성 발안리유적 8. 강릉 안인리유적 9. 양양 가평리유적 10. 춘천 율문리유적 11. 춘천 중도유적 12. 횡성 둔내유적 13. 서울 풍납토성 환호 마을 유적 14. 여주 연양리유적 15. 철원 와수리유적 풍납토성 환호 토층 가평 대성리유적 전경 풍납토성 삼화연립 재건축 부지 도랑 유구 가평 대성리유적 북한강 서안을 따라 형성된 하안 충적지에 입지하고 있다. 조 사된 유구는 돌출된 출입구 시설을 갖춘 呂 자형 및 凸 자형 집자리와 함께 방형 집자리가 있으며, 이외에도 수혈유구, 구 상유구가 확인되었다. 呂 자형 집자리는 대체로 장단비가 2:1 내외이며 평면 형태는 오각형에 가깝다. 凸 자형 집자리 역시 呂 자형 집자리와 동일한 장단비를 유지하고 있는데, 7~9호 집자리의 경우 3기가 나란히 배치되어 일정한 군집 양상을 보 이기도 한다. 집자리 내부 시설로는 중도식 화덕, 부뚜막, 기 둥구멍 등이 있다. 주목되는 것은 구상유구인데, 동서 방향으 로 설치된 2호 구상유구를 경계로 남쪽과 북쪽에 분포하는 집 자리들이 평면 형태, 분포 양상에서 차이가 있을 것으로 추정 되기 때문에 마을 내부에서 공간이 분할되었을 개연성도 있다. 유물은 중도식무문토기를 비롯하여 타날문토기, 낙랑계토기 등의 토기와 철촉, 주조철부, 주조괭이, 철겸, 도자, 철착 등의 철기 외에 각종 옥제품이 출토되었다. 특히 낙랑계토기나 일 본 야요이 계통의 토기, 철경동촉, 수정 원석은 이 지역 집단 의 대외교류를 상징하는 자료로 추정된다. 아울러 철기와 함 께 노벽편( 爐 壁 片 ), 철재( 鐵 滓 ), 공이, 요석( 凹 石 ) 등이 출토 되었는데, 마을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제철 작업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24 25 I. 漢 城 百 濟 의 黎 明 2. 중부지방 원삼국 문화 서울 풍납토성 환호 마을 유적 전경 가평 대성리유적 A지구 전경

중부지방 원삼국시대 집자리의 특징과 변화 중도식( 中 島 式 ) 화덕과 부뚜막 이 시기 가옥의 특징은 남동쪽 내지 남서쪽에 돌출된 출입부 시설을 마련한 다. 그러나 중기 이후에는 둔내 2호 집자리와 같이 출입부 시설 반대쪽 단벽 凸 자형 또는 呂 자형의 집자리로 분포 범위는 서울, 경기 지역과 영동, 영 이 둥글게 처리되고 후기에는 둔각상으로 꺽이면서 전체적으로는 육각형의 서지방, 그리고 남한강 유역의 충청도 지역을 포함한다. 이전의 신석기시대 집자리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발생기의 육각형 집자리의 분포 범위를 보 와 청동기시대에도 돌출된 출입부 시설이 있는 집자리가 발견되었지만, 원삼 면 임진강 유역의 파주 주월리유적과 한탄강 지류의 포천 성동리유적이 북계 국시대만큼 집중적으로 축조된 예가 없다. 가옥에 출입부 시설이 출현한 원 ( 北 界 )이며, 춘천 중도, 삼천동유적, 횡성 둔내, 정선 예미리, 단양 수양개유 인은 분명치 않으나, 기원후 2~3세기경 한기( 寒 期 )로의 기후 변화에 적응하 적이 동계( 東 界 )를 이룬다. 기타 풍납토성 3중 환호 내 집자리, 여주 연양리 기 위한 전략으로 보는 경향이 있으며, 화덕의 규모가 커진 것도 같은 이유로 유적, 이천 효양산유적 등에서 발생기의 육각형 집자리들이 조사되었다. 따 보고 있다. 에서 확인된 사례는 없지만, 아마도 2중 문을 달아 겨울 라서 아직까지는 영동 지방에서 육각형 집자리가 조사되지 않았다. 철에 출입문이 열렸을 때, 실내 온도의 하강을 최소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凸 자형과 呂 자형 출입부 시설의 차이를 시간, 지역, 계층 차이로 보는 凸 자형 또는 呂 자형의 집자리는 중부지방 청동기시대 (장)방형계 집자리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는데, 어느 한 가지 요소를 일률적으로 적용하기에는 를 계승한 것으로 보이지만, 알레니 A유적, 끼예브까유적, 끄로우노브까유적 어려운 형편이다. 다만 현재까지의 조사 결과로 볼 때, 呂 자형 출입부 시설 등 연해주 남부의 초기철기 문화인 끄로우노브까문화기의 유적에서 동일한 의 발생은 영동 지방이며, 이러한 요소가 산맥을 넘어 한강유역에 까지 파급 형태의 집자리가 조사되어 이 문화와의 관련성도 지적되고 있다. 다만 북한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한양대에서 조사한 하남 미사리 A-1호 집자리와 지방에서 초기철기 및 원삼국시대에 이르는 집자리 가운데 이와 유사한 형태 같이 呂 자형의 출입부 시설이 있는 집자리는 대개 규모가 크고, 출토 유물 의 집자리가 조사되지 않아 중부지방 원삼국시대 집자리와 계보상으로 연결 이 많으며, 방제경과 같은 위신재가 포함되어 있어 높은 위계의 인물이 거주 하는 데에는 아직까지 어려움이 있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중부지방에서 원삼국시대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집자리는 출입부 시설 이 없는 순수 (장)방형 계통의 집자리이지만, 그 평면 형태가 점차적으로 변 화하여 늦어도 2세기 후반 또는 말경에는 육각형 모양의 집자리로 발전한다. 그 과정을 보면 먼저 이른 단계에는 출입부 반대쪽 단벽이 직선적으로 처리 된 형태로 하남 미사리, 철원 와수리, 강릉 동덕리유적의 집자리가 이에 속한 지역별 원삼국시대 집자리의 변화(송만영 안) 한강 하류 경기 북부 영서 지방 영동 지방 전 기 중부지방 원삼국시대 집자리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중도식이라고 불리는 화덕[ 爐 ] 시설이다. 춘천 중도 집자리에서 처음 조사되어 중도식이라는 명칭을 붙였으나, 일반적으로는 화덕 시설의 구조에 따라 부석식( 敷 石 式 ) 화덕이라 부른다. 화덕의 평면 형태는 타원형이며, 크기는 대략 1m 내외이 나, 춘천 중도 2호 집자리에서는 길이 1.7m, 폭 1.14m의 매우 큰 화덕 자리가 조사되기도 하였다. 구조는 바닥에 납작한 강자갈을 깔고 그 위에 점토를 얇게 덮었으며, 화덕의 주위로는 점토띠를 타 원형으로 돌렸다. 화덕의 북벽에는 바람막이로 생각되는 매우 크고 긴 판돌을 세워 놓았다. 화덕의 위치는 정형성을 띠는데, 대체로 집자리 중앙 축선상의 출입부 시설 반대쪽 2/3 지점에 위치하는 공통성이 있다. 중도식 화덕 시설은 전기에 속하는 하남 미사리유적의 88-1호 집자리(고려대 조 사)에서 조사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이른 단계부터 한강유역에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동 지방인 경우에는 양양 지경리유적과 같은 중기 단계 이후의 집자리에서 관찰되고 있어 한강유역의 중도식 화덕 시설이 파급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부뚜막 시설은 한성백제기의 대표적인 취사 및 난방 시설이지만, 그 출현은 원삼국시대 전기 에 까지 소급된다. 고려대에서 조사한 하남 미사리 88-1호, 010호 집자리에서 부뚜막 흔적이 확 인되었으며, 중기 유적인 포천 영송리유적에서도 부뚜막 시설이 조사되었다. 그러나 부뚜막 시설 이 상용화되는 것은 자비용기로써의 중도식무문토기( 中 島 式 無 文 土 器 )가 타날문토기로 대체된 원 삼국시대 후기 무렵으로 파악되는데, 이 무렵부터 중도식 화덕 시설은 소멸하기 시작한다. 여주 연 양리유적과 화성 발안리유적, 그리고 최근에 조사된 파주 당동리유적이 이에 속한다. 부뚜막은 대 개 집자리 출입부 시설 맞은편 벽면에 설치되는데 중앙에서 약간 우측에 편중되어 있으며, 규모는 집자리 규모와 비례한다. 부뚜막의 재료는 연양리 12호 집자리와 같이 점토로만 만든 것이 있는 반면, 당동리유적의 부뚜막과 같이 판석을 이용하여 골격을 만든 후, 그 외부에 점토를 덧발라 형 태를 완성한 것이 많다. 26 27 I. 漢 城 百 濟 의 黎 明 2. 중부지방 원삼국 문화 개성 봉동읍 집자리 철원 와수리 26호 집자리 강릉 동덕리 집자리 중 기 하남 미사리 한A-13호 집자리 중도식 화덕 단양 수양개 4호 집자리 중도식 화덕 하남 미사리 한A-1호 집자리 횡성 둔내 2호 집자리 강릉 안인리 19호 집자리 후 기 서울 풍납토성 가-2호 집자리 정선 예미리 10호 집자리 양양 지경리 2호 집자리 여주 연양리 12호 집자리 부뚜막 파주 당동리 7지점 6호 집자리 부뚜막

터널형 화덕 취사 기능의 부뚜막 시설에 난방 기능의 긴 연도부가 결합된 화덕 시설이다. 규모가 큰 부뚜막에는 일반적으로 난방 기능을 하는 긴 연도부가 달려 있기 때문에 부뚜막과 터널형 화덕을 구분하는 데에는 문제점이 있지만, 전체적인 평면 형태와 설치 위치에 차이가 있다. 부뚜막은 ㅣ 자형이지만, 터널형 화덕 은 부뚜막에 연도부가 직교하여 ㄱ 자형 온돌로 불린다. 또한 터널형 화덕은 동쪽 벽면에 긴 연도부를 잇대어 연기가 남쪽으로 빠져 나가게 하는 것이 일 반적인 특징이다. 터널형 화덕과 부뚜막은 초기철기시대 세죽리-연화보유형 의 형성과 함께 한반도에 등장하게 되는데, 연해주의 뻬뜨로바유적에서도 ㄱ 자형의 터널형 화덕이 관찰되기 때문에 그 계보를 찾는 데에는 간단치 않다. 중부지방에서는 수원 서둔동, 하남 미사리, 화성 발안리, 가평 대성리, 횡성 학 담리, 춘천 율문리, 개성 봉동읍 등지의 집자리에서 터널형 화덕이 조사되었는 데, 이 가운데 율문리 1호 집자리에서 조사된 ㄱ 자형의 터널형 화덕은 동벽 에 잇댄 부뚜막과 북벽에 잇댄 연도부가 특징이다. 또한 원삼국시대 및 한성 백제기 부뚜막은 일반적으로 화구의 방향과 부뚜막의 방향이 일치하지만, 율 문리의 터널형 화덕은 화구의 방향과 부뚜막의 방향이 직교하여 차이가 있다. 중부지방 마한 성장기의 무덤 한강 및 북한강, 남한강유역에서는 서울 석촌동 2호 토광묘, 가평 달전리 목 관 목곽묘, 원주 법천리 9호 목곽묘와 같이 토광묘가 주로 조사되었지만, 경 기 이남의 마한 지역에서는 소위 주구토광묘( 周 溝 土 壙 墓 )가 조사되었다. 주 구토광묘는 매장주체부 주위에 도랑[ 溝 ]을 두른 것으로서, 도랑 형태가 경사 면 위에 눈썹형으로 돌려진 청당동형과 사방에 방형으로 돌려진 관창리형으 로 구분된다. 청당동형은 용인 상갈동, 천안 청당동, 청주 송절동, 공주 하봉 리유적과 같이 경기 이남 및 충청 내륙지역에 주로 분포하며 낮은 구릉의 경 사면에 입지하고 있다. 묘광 규모는 깊이가 30~50cm로 얕은 것도 있으나, 송절동의 경우 깊이 1.5m 이상에 길이 5m, 너비 2m 이상되는 초대형 무덤 도 있다. 매장주체부는 목관이 대부분이지만 목곽도 사용되었다. 이러한 무 덤 구조와 함께 합장묘도 발견되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들 무덤이 서북한 지역의 토광묘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관창리형은 보령 관창리, 서천 당정리, 익산 영등동, 무안 인평리유적과 같이 서해안 및 충청 이남 지역에 주로 분포하며, 대개 낮은 구릉이나 능선 대지상 에 군집을 이루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 무덤에는 매장주체부가 남아 있지 않 은 경우가 많은데, 공주 장원리와 대전 궁동, 청주 송절동 등 관창리형과 청 당동형 주구가 같이 나오는 내륙지역 유적의 매장주체부가 일반적으로 토광 이어서 관창리형도 본래는 토광이 주체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낮 은 분구 상에 매장주체부가 주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이는 점에서 청당동형 과는 큰 차이점이 있다. 이들 무덤에서는 원저단경호, 경질무문의 심발형토기 등의 토기와 함께 길이 가 긴 직기형의 철모, 무경식 및 유경식 철촉, 소환두도 등의 무기류, 단조철부, 낫, 끌 등의 공구류 등이 주로 출토된다. 또한 천안 청당동, 오창 송대리 등 내륙지역의 3~4세기대의 무덤에서는 영남지역 및 왜( 倭 )와의 교류를 시사하 는 마형대구도 출토되고 있다. 주구토광묘는 4세기 이후 대개 주구가 없이 밀집 분포하는 토광묘에 이어 석 곽묘, 석실묘 등으로 변화하게 된다. 그러나 관창리형은 서산 부장리와 기지 리유적과 같은 서해안 일부 지역과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하여 5~6세기까 지 저분구에서 성토된 고총 분구로 지속적인 발전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춘천 율문리 1호 집자리 28 29 I. 漢 城 百 濟 의 黎 明 2. 중부지방 원삼국 문화 하남 미사리 한A-1호 집자리 터널형 화덕 춘천 율문리 1호 집자리 터널형 화덕 천안 청당동 45호 주구토광묘 개성 봉동읍 집자리 터널형 화덕 화성 발안리 11호 집자리 터널형 화덕 원주 법천리 9호 목곽묘 공주 장원리 1호 주구토광묘

가평 달전리유적 오산 수청동유적 서남쪽의 구릉성 산지와 동쪽의 북한강변 충적지 사이에 형성된 평탄 지형 에서 낙랑계 목곽묘 5기가 조사되었다. 무덤은 장축 방향이 북한강과 평행한 남-북 혹은 북동-남서 방향이며 모두 2단으로 굴광하였다. 묘광의 크기는 장축 3~3.2m, 단축 1.2~1.45m 내외이며 깊이는 0.7~1m 가량이다. 유물은 묘광의 북쪽 상단에 부장 공간을 두었으며, 하단의 목관 내부에 철기와 청동 기 등이 부장되었다. 특히 2호 토광묘에서는 화분형토기와 단경호와 함께 낙 랑계 철기로 보이는 철부 2점, 철겸 2점, 철극 1점, 환두소도, 안테나식 검파 두식을 단 철제단검 등이 출토되었다. 무덤 양식 및 출토 유물 양상으로 보아 서북한지역의 토광묘와 매우 유사하 기 때문에 달전리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기원전 1세기 후반경에 낙랑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최근 포천, 양평, 철원 등지에서 출토되는 철경동촉 과 함께 서북한지역과 북한강유역이 서로 교류했던 흔적으로 평가된다. 가평 달전리 2호 토광묘 내 유물 출토 상태 유적 전경 오산 수청동유적은 원삼국시대에서 한성백제기에 걸친 대규모 고분군으로 좁은 지역에 많은 수의 무 덤이 밀집되어 있다. 유적은 주구토광묘가 주로 밀 집된 서쪽 지역과 목관묘가 주로 조성된 북쪽 지역 으로 구분된다. 주구토광묘의 매장주체부는 등고선 과 직교하여 조성되었으며 주구가 없는 목관묘도 주구토광묘의 매장부와 동일한 방향으로 축조되었 다. 주구토광묘와 목관묘의 매장주체부는 전체적으 로 세장한 평면 형태이며, 폭은 0.7~0.9m 정도로 일정하나 장축 길이에 따라 크기가 다르게 나타난 다. 조성 방법은 굴광을 판 후 ㅍ 자형의 목관을 설 치하고 등고선이 높은 쪽에 유물 부장 공간을 마련 하였다. 부장된 유물은 맨 바닥에 두었는데 일부는 바닥이나 벽면을 굴착하여 유물을 고정시키는 경우 도 있다. 목관은 바닥판을 깔지 않고 굴광면을 그대 로 이용하였다. 유물은 원저단경호, 심발형토기, 직 구호 등의 토기와 함께 각종 철기류, 성시구, 마구 류 등이 있다. 목관 내에 부장된 철기와 구슬은 한 무덤에 한 종류씩만 출토되는데 이는 피장자의 성 별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30 31 I. 漢 城 百 濟 의 黎 明 2. 중부지방 원삼국 문화 7 화분형토기, 단경호 花 盆 形 土 器, 短 頸 壺 높이(왼쪽) 19.5cm 가평 달전리 한림대학교박물관 8 철극, 철부, 철겸 鐵 戟, 鐵 斧, 鐵 鎌 길이(왼쪽) 40.2cm 가평 달전리 한림대학교박물관 1호 주구토광묘 1호 주구토광묘 토기 출토 상태

원삼국시대 토기: 기원과 기종 구성 원삼국시대 철기 문화 중부지방에서 출토된 원삼국 토기는 크게 경질무문토 기( 硬 質 無 文 土 器 )와 타날문토기( 打 捺 文 土 器 )로 구분된 다. 이 가운데 경질무문토기는 청동기시대 이래의 무문 토기 기술 전통에 새로운 고화도 소성의 기술이 가미되 면서 출현한 토기 유형으로 기원전 100년 무렵에 중부 지방에 출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경질무문토기의 계보 는 일반적으로 서북지방 세죽리-연화보유형의 명사리 식토기와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으나, 연해주를 포함한 동북지방 철기시대 유적에서도 동일한 기종들이 출토되 고 있기 때문에 그 계보는 동북지방과도 관련되었을 가 능성이 있다. 경질무문토기의 기종은 평저외반구연호를 비롯하여 내반구연호, 시루, 완, 뚜껑 등이 있다. 타날문토기는 철기문화의 보급과 더불어 새로이 등장 하는 토기 유형이다. 전국계 토기 생산 체제의 영향으 로 중부지방에 등장하는데, 박자( 拍 子 )에 의한 타날문 의 시문과 회전판의 사용, 굴가마[ 登 窯 ]의 채용 등이 특 징이다. 그러나 가평 달전리 2호 토광묘에서 출토된 승 문 타날의 단경호와 같은 낙랑토기가 타날문토기 출현 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타날문의 종류 에는 격자문( 格 子 文 ), 승문( 繩 文 ), 승석문( 繩 蓆 文 ) 등이 있는데, 부위에 따라 서로 다른 문양을 시문하거나, 시 문 후 횡침선을 돌리는 경우가 있다. 타날문토기 기종은 자비용기로 사용된 산화염 소성의 심발형토기, 장란형 토기, 시루, 동이와 환원염 소성의 원저단경호, 대옹, 대 호 등이 있다. 화성 가재리유적 토기 가마 9 남근형파수 男 根 形 把 手 길이 7.5cm 고양 덕이동 토지박물관 10 경질무문토기, 타날문토기 硬 質 無 文 土 器, 打 捺 文 土 器 높이(중앙) 31.9cm 서울 풍납토성 한신대학교박물관 우리나라 철기 문화는 기원전 3세기경부터 중국 연( 燕 )나라의 영향을 받아 시작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위원 용연동( 龍 淵 洞 )유적 등 그와 관련된 유적들은 그 분포가 청천강 이북지역에 한정되어 있다. 이후 기원전 2세기 단계에는 다수의 청동기와 함께 주조 제품의 철부나 철착 등이 사용되기 시 작한다. 이와 같은 유물의 조합을 보이는 유적들은 현재까지 서북한과 금강 유역권에서만 확인되고 있으며, 그러한 주조철기의 전통이 원삼국시대로 들 어서면서 그대로 계승되는 지역은 북한강유역 이북지역과 낙동강유역권에 한정되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원삼국시대를 기원전 1세기~기원후 3세기로 새롭게 보는 경향이 많으 며, 이 시기는 병존했던 낙랑으로부터의 영향을 받으면서 철기 문화가 발전 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대 문화의 전개 양상은 한반도 전체 가 제일적( 齊 一 的 )이지 않고 지역색과 파행성을 보인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낙동강유역권에서는 창원 다호리( 茶 戶 里 )유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목관묘 단 계인 기원전 1세기부터 주조괭이, 따비, 판상철부 등의 농공구와 단검과 창 [ 鉾 ] 등의 무기류가 제작되기 시작한 후 점진적인 발전을 이룩하여 김해 양동 리( 良 洞 里 )유적 162호묘와 같은 목곽묘 단계에서는 대도( 大 刀 )가 출현하는 등 보다 발달된 양상을 보인다. 이에 비해 경기 남부, 충청 및 전라도 지역에 서는 기원후 2세기까지의 유적들이 거의 확인되지 않아 현재로서는 상당 기 간 동안 정체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상태이다. 남한의 서남부지역에서도 금강유역권의 경우는 기원후 2세기 후반 이후에 해당하는 천안 청당동( 淸 堂 洞 )유적을 통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대도( 大 刀 ) 11 주조철부, 철촉 鑄 造 鐵 斧, 鐵 鏃 길이(왼쪽) 7.4cm 철원 와수리 강원문화재연구소 12 원삼국시대 철기 原 三 國 時 代 鐵 器 길이(오른쪽 위) 10cm 가평 대성리 기전문화재연구원 와 대형 창 등의 보급이 급속히 확대되고 촉( 鏃 )도 다양해지는 등 철기 문화 의 급속한 발전이 이루어진다. 이는 환령지말( 桓 靈 之 末 )인 2세기 후반에 낙 랑과 대방이 약해진 사이에 한( 韓 )과 예( 濊 )의 세력이 크게 성장하여 군현이 제어하기 힘들어졌고, 한 지역으로 많은 주민이 유입해 들어갔다는 기록과 관련시켜 해석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최근 화성 기안리( 旗 安 里 )유적에서 확 인된 자료들은 그러한 유입민들 중에 제철과 관련된 집단이 경기도 지역으로 이주하여 이 지역에서 철 생산 활동을 하면서 철기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음 을 잘 보여주고 있다. 32 33 I. 漢 城 百 濟 의 黎 明 2. 중부지방 원삼국 문화

옥기 중부지방 마한 사회에 있어서 낙랑의 영향 목걸이[ 頸 飾 ] 등 주로 장신구에 사용된 옥기는 원삼국시대 이후 유리, 천하석, 마노, 연옥, 수정, 호박 등의 재료로 만들었다. 옥은 형태에 따라 둥근옥[ 丸 玉 ], 대롱옥[ 管 玉 ], 연주옥( 連 珠 玉 ), 다면옥( 多 面 玉 ), 굽은옥[ 曲 玉 ] 등으로 구분되 는데, 집자리, 무덤, 조개더미 등 다양한 유구에서 출토되었다. 유리옥의 제작 기법은 여러 방법 중에 거푸집에 찍어서 제작하는 방법과 녹 인 유리용액을 철봉에 말아서 일정한 크기로 잘라서 만드는 방법 등이 확인 되는데, 하남 미사리, 춘천 중도유적에서는 토제 거푸집이 출토되었으며, 이 외에도 전라도 해남 군곡리 조개더미 유적에서도 토제 거푸집이 출토되었다. 기타 연천 학곡리, 동해 송정동유적을 비롯하여 천안 청당동, 두정동, 완주 상운리유적 출토의 금박유리는 낙랑계 유물로 파악되는데, 연천 학곡리유적 출토의 청색 연주옥과 함께 유리 용액을 철봉에 말아서 만든 것이다. 기원전 108년 지금의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한 지역에 낙랑군( 樂 浪 郡 )이 설치되면서 한반도 중남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던 삼한( 三 韓 ) 사회는 한군현 ( 漢 郡 縣 )과의 교섭을 통해 선진문물을 접한 결과 사회 발전이 더욱 진전되기 에 이르렀다. 그간 낙랑과의 교섭을 입증하는 유적, 유물이 빈약하였기 때문 에 경기도 지역에 존재하였던 일단의 마한 소국( 馬 韓 小 國 )들은 낙랑군과 인 접하고 있어서 한( 漢 )의 기미책( 羈 靡 策 ) 등 강력한 정치적 영향으로 변진 지 역에 비해 낙후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었다.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적 조사 성과를 통해서 낙랑군 설치 이후 기원후 4세기까지 낙랑 문물이 마한 지역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낙랑 문물의 유입 양 상과 영향 관계는 크게 3단계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우선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의 단계이다. 이 시기는 변진 지역 에 비하여 자료가 많지 않아 이에 해당되는 유적의 부재론이 제기되었었다. 그러나 최근 낙랑목곽묘가 조사된 가평 달전리유적을 비롯하여 포천 금주리, 가평 대성리유적 등에서 화분형토기, 단경호, 철경동촉, 주조철부, 철겸, 소 찰 등 서북한 지역으로부터 직접 유입된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특히 철경동 촉은 양평 양수리, 시흥 오이도 조개더미, 서울 암사동, 철원 와수리유적 등 지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다음으로 2세기 중반 전후의 단계이다. 주로 생활 유적에서 낙랑토기 또는 낙랑토기를 모방한 타날문토기의 출토량이 많아지 고 있어 새로운 토기 제작 기술이 성행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외에도 유 리, 마노, 수정제 옥제품과 은제지환 등의 장신구류를 비롯하여 한경( 漢 鏡 ) 을 본뜬 방제경 등 낙랑의 영향으로 제작된 유물이 다수 확인되고 있다. 대표 적인 유적으로는 하남 미사리 한A-1호집자리, 가평 대성리, 수원 서둔동, 화 성 발안리유적 등을 들 수 있다. 3세기에 접어들면서 한 제국의 정치적 변화 와 더불어 낙랑군이 약화되는 시기로서 백제의 국가형성으로 귀결되는 단계 이다. 이때에는 화성 기안리유적을 비롯하여 시흥 오이도 조개더미, 화성 당 하리유적 등을 통해 볼 때 단편적인 유물에 한정되지 않고, 낙랑의 유이민 집 단이 대거 마한사회에 유입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화성 기안리유적은 제 철 또는 철기제작 기술을 가진 집단이 이주하여 형성된 것으로 이러한 기술 자 집단의 유입은 백제 국가형성의 토대가 되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중부지방 낙랑 유물 분포도(김무중 안) 13 목걸이 頸 飾 길이(왼쪽) 25cm 1 2 여주 연양리, 3 4 연천 학곡리 1 2 국립중앙박물관, 3 4 기전문화재연구원 1 2 3 4 34 35 I. 漢 城 百 濟 의 黎 明 2. 중부지방 원삼국 문화

적석분구묘의 구조 및 분포상의 특징 중부지방 특히 임진강 및 한강 중상류 유역에 분포 하는 무덤으로 강안 대지의 독립적인 자연 사구에 입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무덤의 분포 범위 는 임진강유역의 파주, 연천 지역, 북한강과 남한강 이 합류하는 양평 지역, 북한강 상류의 춘천 지역, 남한강 상류의 정선, 영월, 제천 지역에 국한되는데, 무덤군을 형성하지 않고 단독으로 축조된 경우가 많다. 축조 방법은 자연 사구의 상면부를 삭평하여 평지 조성하고 여기에 강돌을 얕게 쌓아 적석층을 형성 하였는데, 매장주체부가 있는 중심부에는 7~8겹 가량 두껍게 적석하고 주변부에는 1~2겹 가량 얕 게 적석하였다. 이러한 외형적 구조 때문에 학계에 서는 즙석묘( 葺 石 墓 ), 즙석총( 葺 石 塚 ), 즙석식적석 묘( 葺 石 式 積 石 墓 ), 적석총( 積 石 墓 ), 적석분구묘( 積 石 墳 丘 墓 ) 등 다양한 명칭이 사용되었는데, 비록 성 토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모래 언덕과 같은 자연 분구상에 매장주체부를 설치한, 즉 先 -분구 축조, 後 -매장주체부 설치 라는 매장 관념을 중시하여 적 석분구묘라는 명칭이 타당하다고 본다. 최근에 조사된 임진강유역의 연천 삼곶리, 학곡리 적석분구묘에서 매장주체부가 수혈식 석곽임이 확 인되었는데, 규모가 크지 않은 장방형의 묘곽, 다장 ( 多 葬 ) 등이 특징을 이룬다. 그러나 중도와 문호리 적석분구묘의 경우에는 매장주체부의 규모와 평면 형태에 차이가 있어 지역에 따라 또는 시기에 따라 매장주체부가 달랐을 가능성도 있다. 임진강유역의 적석분구묘에서 출토된 유물은 낙랑 계 토기, 금박유리옥 등 낙랑 관련 유물이 포함되어 있고 철기류가 적은 반면, 남한강 상류 지역의 경우 에는 낙랑계토기 출토예가 희소하지만, 많은 철제 무기류의 부장이 특징이다. 특히 철제 무기류 가운 데 유견철부는 양평리 2호 적석분구묘와 도화리 적 석분구묘 이외에도 원주 법천리 9호 목곽묘, 하천 리 F지구 1호 집자리, 가평 대성리 집자리, 가평 달 전리 목곽묘 등 주로 한강 중상류 지역에서 출토예 가 많은 편이다. 무덤의 연대는 연구자마다 견해 차이가 있지만, 유 적에서 출토된 유물을 근거로 대체로 3세기 전반에 서 중반까지 짧은 기간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견해 가 힘을 얻고 있다. 적석분구묘의 피장자는 지역 집 단의 수장층으로 추정되는데, 이들 지역 집단의 성 격에 대해서는 크게 백제의 지방 세력과 고구려 유 이민 집단, 삼국사기 에 말갈로 표현된 예계 집단 등으로 견해가 나뉘어져 있다. 최근에는 예계 집단 가운데 대방과 남부지방의 교역을 담당한 정치체로 파악한 견해도 있다. 적석분구묘 분포도 1. 연천 횡산리 2. 연천 삼곶리 3. 연천 삼거리 4. 연천 우정리 5. 연천 동이리 6. 연천 학곡리 7. 개성 장학리 8. 춘천 신매리 9. 춘천 중도 10. 남양주 금남리 11. 양평 문호리 12. 양평 양수리 13. 제천 양평리 14. 제천 도화리 15. 평창 하안미리 16. 평창 중리 17. 평창 응암리 18. 평창 마지리 19. 정선 덕천리 소사 20. 정선 덕천리 소동 21. 정선 덕천리 제장 22. 정선 여량리 아우라지 연천 학곡리 적석분구묘 연천 학곡리 적석분구묘 1호곽 4호곽 3호곽 1호곽 2호곽 연천 학곡리 적석분구묘 임진강유역에 분포하고 있는 적석분구묘 유적은 연 천 학곡리를 비롯하여 삼거리, 우정리, 동이리, 횡 산리, 삼곶리 등이 있다. 이들 무덤들은 강변의 자 연 사구에 단독으로 분포하고 있지만, 우정리유적 의 경우 가까운 거리에 2기의 적석분구묘가 분포하 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데, 대체로 3km 내외의 거리이다. 이 가운데 된 학곡리 적석분구묘는 홍수 시 급류로부터 무덤 보호를 위하여 남사면과 동사 면에만 시설한 즙석시설과 매장주체부를 이루는 적 석부로 구성된다. 적석부는 평면 형태가 장타원형 에 가까우며 중앙 경계부를 중심으로 동반부와 서 반부로 구분되는데, 적석부 외곽을 따라 기단을 조 성한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매장주체부는 동반 부에서 3기가, 서반부에서 1기가 노출되었으나, 서 반부의 훼손 지역을 감안하면 2기가 더 있었을 것 으로 추정되고 있다. 매장주체부의 조영 방식은 개 별 묘곽을 별도로 축조하지 않고 서로 연접하여 만 들었으며, 석곽은 가공하지 않은 30~50cm 크기의 하천석을 이용하여 종평적( 縱 平 積 ) 하였다. 특이한 것은 장벽 한 면에만 큰 하천석을 일정한 간격대로 벽면에 잇대어 세워 놓았는데, 그 기능은 분명치 않 다. 석곽 내부에서는 바닥 시설이 확인되지 않았다. 36 37 I. 漢 城 百 濟 의 黎 明 2. 중부지방 원삼국 문화 연천 학곡리유적 전경 연천 학곡리 적석분구묘 평^단면도

낙랑계토기의 제작 기법 중부지방에서 출토된 낙랑계토기 기종에는 평저호, 단경호, 분형토기 등이 있다. 이러한 토기들은 유입 품인지, 현지 제작품인지 육안상으로 구분이 어렵 기 때문에 낙랑토기의 제작 기술이 반영되어 있다 는 측면에서 낙랑계토기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낙랑계토기의 특징은 특정 기종 외에도 태토와 제 작기법에서 구분이 가능하다. 태토는 니질계, 활석 혼입계, 석영혼입계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출 토 빈도가 높은 니질계 토기는 성형 타날로 기본 형 태를 만든 다음 회전물손질이나 2차 성형 타날을 통해 기본 형태를 변형하는 방법으로 제작된다. 활 석혼입계는 천을 씌운 원형에 소지를 부착시켜 타 날을 가하는 형뜨기법으로 제작되는데 가평 달전리 목곽묘에서 출토된 화분형토기가 대표적이다. 석 영혼입계는 1차 성형 공정에서 이미 그릇의 형태를 잡아나가는 방법으로 중대형의 저장용 토기제작에 많이 쓰인다. 화성 기안리유적에서는 니질 태토와 석영혼입 태토 를 사용한 토기들이 다수 출토되었는데, 승문 타날 후 강한 회전조정, 저부 바닥의 사절기법( 絲 切 技 法 ), 저부와 동체 연결부의 깎기 조정 등의 낙랑토기 제 작 기법이 반영되어 있다. 17 원저호 圓 底 壺 높이 41.4cm 하남 미사리 한국고고환경연구소 18 낙랑계토기 樂 浪 系 土 器 길이(오른쪽) 12cm 1 포천 금주리, 2~4 연천 학곡리 1 세종대학교박물관, 2~4 기전문화재연구원 38 39 I. 漢 城 百 濟 의 黎 明 2. 중부지방 원삼국 문화 1 2 1 2 3 4 14 청동지환, 청동방울 靑 銅 指 環, 靑 銅 鈴 지름(왼쪽) 2.2cm 연천 학곡리 기전문화재연구원 15 금박유리 金 箔 琉 璃 길이(오른쪽) 1.4cm 연천 학곡리 기전문화재연구원 16 철경동촉 鐵 莖 銅 鏃 길이(왼쪽) 7.4cm 1 시흥 오이도, 2 철원 와수리 1 서울대학교박물관, 2 강원문화재연구소

19 낙랑계토기 樂 浪 系 土 器 높이 16.5cm 춘천 율문리 예맥문화재연구원 20 낙랑계토기 樂 浪 系 土 器 길이(오른쪽아래) 10cm 화성 기안리 기전문화재연구원 40 41 I. 漢 城 百 濟 의 黎 明 2. 중부지방 원삼국 문화

II 漢 城 百 濟 의 誕 生 과 國 家 權 力 의 發 生 42 43 II. 漢 城 百 濟 의 誕 生 과 國 家 權 力 의 發 生 백제의 국가 단계 정치체를 인지할 수 있는 고고학적 현상은 성곽의 등장, 대형무덤의 등장, 물질문화 의 양식적 통일 등으로 이해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三 國 史 記 百 濟 本 紀 ) 온조왕대 기사에 나타난 백제의 국가체계 근거는 왕에 의한 군사권의 장악과 대외전쟁 수행, 왕권 세습, 인접 정치체와의 대외 교섭, 도성( 都 城 )의 존재, 관료조직의 존재, 공역( 公 役 )징발, 국가제의 등을 통한 정통성 확보 등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삼국지 위지 동이전( 三 國 志 魏 志 東 夷 傳 ) 등 중국자료와 불일치하는 점이 많아 삼국사기에 기록된 초기기사가 후대의 사실을 소급 부회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고고자료로 볼 때 한성백제의 탄생은 한강유역의 서울, 강남지역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이 지 역은 주구토광묘로 대표되는 중서부지역의 마한계 문화와 적석분구묘로 대표되는 예계의 중도유형문 화가 공존하고 있었다. 건국주체는 양 문화와는 다른 토광목관묘를 주묘제로 채택한 집단이었는데 이 들은 북쪽에서 내려와 한강유역에 정착한 온조집단이었으며 점차 주변세력을 통합하여 3세기 중후반 경에 이르러 국가를 건국하였다.

성곽의 축조 시점으로 본 국가의 발생 성곽( 城 郭 )이란 내성외곽( 內 城 外 郭 ) 즉, 최고 지배자로서 왕이 거처하는 내성의 공간과 사서인( 士 庶 人 )들이 거주하는 공간인 외곽으로 이루어진 방어 취락유형을 말한다. 이는 중국 국가성립기의 전형적인 도성( 都 城 )의 형태이며, 나라 국( 國 )자는 성곽을 상형화한 한자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국가의 성립과 성곽의 등장은 밀접한 관련을 가지며, 백제의 경우 한강유역에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백제 건국 주도세력은 한강유역에 읍락 또는 이를 구성하는 취락으로 지내다가 국가가 성립되면 서 새로운 취락유형으로 성곽을 축조한다. 성곽 축조는 풍납토성의 예로 보아 연인원 약 100만명 이상의 공역이 동원되어야 하는 대역사이다. 이는 대규모 인력과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국가 행정 조직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로, 신라나 고구려는 물론이고 중국이나 유럽의 라 테느(La Tene) 시기 국가형성 과정에서도 관찰된다. 한강유역에 위치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각각 남성( 南 城 ) 대성( 大 城 ), 북성( 北 城 ) 왕성( 王 城 ) 으로 불리웠으며, 평시 왕궁 또는 유사시 행궁 별궁으로 각각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 두 개의 단위성은 주변의 취락과 더불어 한성백제의 도성제( 都 城 制 )를 구성하였다. 성곽의 축조 시점은 성 벽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로서 추정할 수 있다. 풍납토성은 중심 토루와 구지표면에서 출토된 토기 류를 근거로, 몽촌토성은 성벽 절개 지점에서 출토된 전문도기( 錢 文 陶 器 )로서 축조 시점의 하한을 판단할 수 있는데, 현재까지의 고고자료로 볼 때, 도성 지역에서는 3세기 중 후반에 이르러 성곽 의 축조가 완료된 것으로 잠정할 수 있다. 하지만 성벽 축조 시 특정 지점을 개보수하는 경우가 허 다하며, 많은 조사에도 불구하고 모든 지점을 대상으로 절개조사를 할 수 없는 현실적 한계를 고려 하면 성벽 축조의 상한을 단정하는 일은 여전히 어려운 실정이다. 내부 외부 외부 내부 44 45 II. 漢 城 百 濟 의 誕 生 과 國 家 權 力 의 發 生 서울 풍납토성 성벽 토층 서울 풍납토성 성벽 토층도 및 출토 유물(박순발 안)

고총고분의 등장과 국가의 발생 통일양식의 백제토기 출현 고총고분( 高 塚 古 墳 )은 지상에 규모가 큰 봉분을 가지고 있는 삼국시대의 분묘를 일컫는 것으로 대 형고분 과 동일한 의미이다. 흔히 왕릉( 王 陵, Princely Tomb)으로 지칭되는 대형고분은 초기 국가 단계 또는 국가 형성기에 나타나는 한 특징이며 일본의 전방후원분( 前 方 後 圓 墳 ) 체제나 남부독일 의 호이네베르크(Heuneberg) 힐포트(Hillfort)사회와 유사한 단계이다. 한강유역에 대형고분이 출현하기 이전에는 기원전 300년경 요령지방에 기원을 둔 토광묘가 점토 대토기와 함께 등장한다. 이러한 초기의 점토대토기 유적은 지석묘사회와 긴장관계를 이루다가 철 기가 공반되는 한국식동검기 후기에 이르게 되면 기존의 지석묘 지역군를 포괄한 광역한 지역 통 합의 주체로 발전한다. 이후 한강유역에 중도유형문화가 등장하면서 낙랑의 철기 및 토기제작기술 이 전래되며, 임진강과 한강 중 상류지역을 중심으로 적석분구묘가 나타나다가 3세기 무렵 한강 하류에 목관봉토분( 木 棺 封 土 墳 )이 등장하면서 소멸하게 된다. 한강유역의 첫 고총고분인 목관봉토분은 지상에 직경 15~30m 가량의 뚜렷한 봉분을 가지며 그 안에 목관 또는 옹관 등 복수의 매장주체부가 위치하는 점이 특징이다. 이런 예는 석촌동고분군을 중심으로 확인되는데, 석촌동 3호분 동쪽고분군의 즙석봉토분, 가락동1, 2호분, 석촌동 파괴분, 석 촌동 5~7호분 등 석촌동, 가락동 일대에 30여기가 밀집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석촌동 5호분만 남 아 있다. 고총고분의 출현 시점은 가락동 2호분 출토 흑색마연토기와 공반된 이중구연호로 추정가 능한데 대략 3세기 중 후엽에 발생하였다. 흑색마연토기는 그 기원이 중국 동북지방인 것을 감안 하면 한강유역의 정치엘리트에 의해 서진( 西 晋 )과의 원거리교섭을 주도한 결과로 판단되며, 이들 은 가족집단의 분묘로 목관봉토분을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가족집단묘는 신라의 대형고분 발생기에도 확인되는데 국가형성 과정에서 가족이 사회의 기본단위로 중요시된 정치 사회적 배 경으로 인해 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성백제 국가형성기 무렵 석촌동 일대를 중심으로 조성되 었던 목관봉토분은 천안 두정동, 익산 율촌리 등 중서부 이남지역으로 확산되며, 이는 한강유역에 서 진행된 국가정치체 형성의 파장으로 이해된다. 국가성립 이후 석촌동고분군에서는 목관봉토분 이 계단식적석총으로 대체되어 한성백제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중앙의 주 묘제로 자리잡았다. 서울 풍납토성 101호 유구 내 유물 출토 상태 21 풍납토성 101호 유구 토기 일괄 風 納 土 城 101 號 遺 構 土 器 一 括 크기(가운데) 41cm 서울 풍납토성 한신대학교박물관 백제토기의 출현은 백제토기가 양식적으로 통일되었음을 의미하며, 백제 국가의 형성 시점에 등장 하는 특징적인 일련의 토기는 한성양식 백제토기로 정의할 수 있다. 한성양식 백제토기는 원삼국 토기와는 달리 흑색마연토기의 형태로 출현하였는데, 백제토기 형성기에 접어들면서 고배, 직구단 경호, 직구광견호, 삼족기 등의 특정 기종으로 제작되기 시작한다. 이 가운데 직구호류와 삼족기는 백제토기의 핵심 기종으로 그 분포권이 곧 백제의 영역으로 보아도 좋을 정도로 백제 고유성을 지 니고 있기 때문에 이들 기종의 출현 배경으로 백제 국가형성의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직구단경호와 직구광견호를 포함하는 직구호의 기원은 중국 요령( 遼 寧 )지역에서 후한( 後 漢 )중 후 반기~위진( 魏 晋 )대(2세기중엽~3세기말)에 걸쳐 제작된 유사한 토기에서 찾을 수 있다. 한강유역 에서 직구호 출현의 의미는 대외교섭을 통한 한강유역 집단의 선별적 문화 수용의 결과로 생각되는 데, 이러한 백제 국가 성립기의 대외교섭은 진서 ( 晋 書 )의 무제기( 武 帝 紀 )나 삼국지 ( 三 國 志 ) 동이전( 東 夷 傳 ) 마한조( 馬 韓 條 )의 내용과 같이 마한 으로 표기된 세력과 요령의 동이교위부( 東 夷 校 尉 府 )간의 교류의 흔적으로 추정된다. 삼족기의 기원 역시 서진대의 청동반( 靑 銅 盤 )과 같은 금속 기를 토기 형태로 번안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입수 과정이 직구호와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된 다. 이러한 특정 기종의 등장과 흑색마연토기의 출현은 국가 성립기 한강유역의 엘리트들이 대외교 섭 과정에서 위신재로 수용된 후 한성양식 백제토기의 주요 기종으로 정착된 것으로 여겨진다. 한강유역의 풍납토성 경당지구 101호 유구는 백제토기 성립기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 이 유구의 내부에서는 고배, 삼족기, 무뉴식뚜껑, 중도식무문토기 등과 함께 중국제 시유도기 및 오수전이 출 토되었으며 한성양식 백제토기의 성립 시기가 3세기 중 후반 무렵에 이루어졌음을 증명하는 자 료로 평가된다. 46 47 II. 漢 城 百 濟 의 誕 生 과 國 家 權 力 의 發 生 서울 석촌동 3호분

한성백제의 시 공간적 범위 풍납토성 출토 외래토기 한성백제 영역 변천도(박순발 안) 한성백제의 초기 영역과 관련된 문헌기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조의 劃定疆場 한강하류의 작은 정치체에 불과하였던 백제는 고대 국가로 성장하면서 외부의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기사를 참고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기원전 5년 다양한 집단과 접촉하게 된다. 경기, 충청, 강원 지역에 자리잡아 문화적으로 무렵의 백제 영역으로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기 때문에, 고고학 자료의 시공적 분포 양상을 활 비교적 동질적인 집단과 진행한 근거리 교섭, 낙랑군이나 대방군, 영산강유역 용하는 방법이 필요하다. 보통 삼국시대의 경우 물질문화 양식상의 통일성 확인과 그 공간적 이나 전남 동부 지역처럼 비교적 먼거리의 집단과 진행한 교섭도 있다. 나아가 분포범위 파악을 통해 정치체의 영역 추정이 가능하다. 따라서 한성양식 백제토기의 공간적인 바다를 건너 중국 본토나 일본 열도를 무대로 한 국제교섭도 진행되었다. 분포를 근거로 한성기 백제의 시기를 나누면, 한성Ⅰ기(3세기후반~4세기중엽)와 한성Ⅱ기(4 이러한 교섭의 산물로서 풍납토성에서는 다양한 외래계 토기가 발견되었다. 세기후반~5세기3/4분기)로 구분되며, 두시기 간에는 분포 영역의 변화가 있다. 한성Ⅰ기는 동 홍성, 논산, 청주, 진천 등지의 충청 지역에서 유입된 토기류는 백제의 중앙 과 지방 사이에 이루어진 정치적 관계의 산물이다. 호남이나 서부 경남과 관 한성Ⅰ기 와의 전쟁기사를 참고하여 개성에서 연천을 연결하는 선의 이남으로 추정된다. 이후 한성Ⅱ기 련된 토기들은 한성백제의 영역 확장과 해상 활동의 산물이다. 가 되면 남으로는 익산 지역까지 이르지만 동쪽 영역은 크게 확대되지 않았다. 북쪽으로는 대 한편 형태적으로나 기술적으로 낙랑토기와 유사한 토기들도 보이는데, 이 경 방고지 대부분을 포함한 황주 지역까지 이르게 되었으며 이는 근초고왕대의 최대 강역이었던 우는 완제품을 들여온 경우와 낙랑의 기술자들이 이주하여 만든 경우가 모두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한성양식 백제토기의 기종 가운데 직구단경호와 삼족기는 백제 전시기에 걸쳐 지속되면 있을 것이다. 4~5세기에 들어와 백제는 왜와 긴밀히 교섭하였지만 이를 증 한성 Ⅱ기 명하는 유물은 그리 많지 않아서 몽촌토성에서 발견된 스에키[須惠器] 뚜껑 서 일정한 시기적 변화를 보이고 있어 편년 설정에 유용한 자료이다. 또한 특징적인 기종의 등 접시(蓋杯)가 유일하다. 장은 백제 중앙세력의 영향이 해당 지역에 미쳤음을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예를 들어 원주 법 중국에서 제작한 유물은 그 종류와 양이 다른 외래계 토기에 비해 압도적으 천리고분군이나 서산 부장리고분군, 공주 수촌리고분군 등에서 동진제 청자양형기, 금동관모, 로 많아서 한성백제와 중국의 긴밀한 관계를 잘 보여준다. 서진의 시유도기 식리 등 위세품과 직구단경호가 함께 출토된 현상은 해당 지역의 수장이 백제의 중앙세력과 일 및 전문도기, 청자류, 동진-유송대의 청자와 흑자가 수십 개체 이상 발견되 정한 정치적 관계를 형성하고 중앙정치 무대에 편제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한성양식 토기 었다. 이러한 도자기류는 백제 중앙 귀족과 지방 수장의 위세품이나 사치품 의 등장은 간접지배 성립 이후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으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백제토기의 새로운 기종 출현이나 기술혁신에 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상의 양상을 종합할 때, 풍납토성은 외래물품이 모이고 분배되는 물류의 거점기지이면서 동시에 각종 새로운 정보와 기술이 수입되고 실험을 거쳐 백제화되는 공간이기도 하였다. 한성기 백제토기 편년표(박순발 안) 22 마한계 고배 馬韓系 高杯 높이 8cm 서울 풍납토성 한신대학교박물관 23 가야계 토기 伽倻系 土器 48 49 길이(가운데) 15cm 서울 풍납토성 한신대학교박물관 II. 漢城百濟의 誕生과 國家權力의 發生 으로 원주, 남으로 천안과 홍성을 잇는 선의 이북으로 판단되며, 북으로는 문헌에 나타난 예계 풍납토성 서울 풍납토성 출토 외래토기(권오영 안)

한성백제의 지방통치 한성양식 백제토기의 확산과 모방 한성기 위세품 분포도 백제 중앙세력이 경기, 충청, 전라지역을 병합하는 과정은 단순하지 않았다. 한성양식 백제토기에는 여러 기종이 알려져 있는데 상호 호혜적인 입장에서 우호적인 동맹관계를 형성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고, 이들 양식의 토기들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적대적인 관계에서 전쟁을 치른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지배구조의 정비가 백제의 영역화 과정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 미흡하였던 한성기에는 중앙에서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여 직접 통치하는 방 성양식 백제토기의 출현은 3세기 중반 무렵이지만, 식이 용이하지 않았다. 그 대신 택한 방법이 값 비싸고 희소성 있는 고급 물품, 4세기를 전후한 시점이 되면 지방으로 확산되는 양 즉 위세품을 지방 수장에게 사여하여 그들을 회유, 통제하는 것이었다. 상을 보인다. 처음에는 직구단경호를 중심으로 지 여기에서 이용된 물품은 중국에서 수입한 외래 기성품(도자기, 금속용기, 거 방에서 사용되다가 4세기 중반 이후 고배, 광구호, 울, 의복 등), 중앙의 공방에서 제작한 최고급 장신구와 환두대도였다. 그 결 뚜껑, 병 등 다양한 기종으로 확대된다. 5세기에 이 과 원주 법천리, 천안 화성리와 용원리, 공주 수촌리, 청주 신봉동, 서산 부장 르면 북으로는 황해도 황주, 남으로는 완주 배매산 리, 익산 입점리, 나주 신촌리, 고흥 길두리 등 지방의 수장급 고분에서는 이 까지 확산되어 한성양식 백제토기로 점차 대체되는 런 물품들이 자주 발견되고 있다. 양상을 띤다. 이때부터 한성양식 백제토기를 각 지 위세품의 종류에 따른 차이도 보여서 백제 중앙의 통치력이 강하게 미치던 방에서 모방 제작하기도 하지만, 포천 자작리유적 지역에서는 관모, 신발과 함께 중국제 도자기가 부장되는 빈도가 높다. 고흥 과 같이 5세기 무렵까지 토기의 지역색을 유지하는 처럼 중앙의 힘이 강하게 파급되지 못하였던 고흥지역에서는 철제 갑옷, 청 경우도 있다. 한성양식 백제토기의 확산이 중국제 동 거울이 부장되지만 도자기는 보이지 않는다. 나주 신촌리 역시 도자기는 문물과 함께 사여되어 이동한 것인지 아니면 현지 부장되지 않는다. 장인집단을 장악하여 제작한 것인지는 앞으로 밝혀 최근 오산 수청동에서 동진제 청자와 철제 마구, 무기와 농공구류를 부장한 야할 과제이다. 목관묘가 발견되었다. 관모와 신발이 없기 때문에 지방의 최고 수장은 아니 한편 흑색마연토기는 위세품과 동일하게 중앙에서 지만 중앙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인물로 추정된다. 백제 중앙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인물을 통하여 지방을 통제해 나갔을 것이다. 24 성시구 盛 矢 具 폭(오른쪽) 5cm 청주 신봉동 국립청주박물관 25 금동용문환두대도 金 銅 龍 文 環 頭 大 刀 길이 80cm 천안 용원리 국립공주박물관 1. 포천 자작리유적 2. 화성 사창리유적 3. 홍성 신금성 4. 부안 죽막동유적 5. 청원 주성리유적 6. 청주 신봉동유적 7. 나주 신촌리유적 8. 고흥 길두리유적 9. 한성(풍납토성, 몽촌토성, 석촌동고분군) 중국수입 위세품 출토유적 중앙제작 위세품 출토유적 중국수입+중앙제작 위세품 출토유적 10. 원주 법천리유적 11. 서산 부장리유적 12. 천안 용원리유적 13. 천안 화성리유적 14. 공주 수촌리유적 15. 익산 입점리유적 16. 오산 수청동유적 제작되어 지방으로 이동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중 앙과 지방에서 출토된 흑색마연토기의 기형이 서로 차이가 있으며, 진천 삼룡리 토기 가마 내부에서 흑 색마연토기 완이 출토된 바 있어 지방의 재지세력 에 의해 자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결과는 토기에 대한 자연과학적 분석 결과에 의해서도 입 증되어 기존의 통설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26 직구호 直 口 壺 높이(오른쪽) 14.6cm 용인 죽전 대덕골 기전문화재연구원 27 직구호 直 口 壺 높이(오른쪽) 29cm 화성 마하리 호암미술관 50 51 II. 漢 城 百 濟 의 誕 生 과 國 家 權 力 의 發 生 28 고배 高 杯 높이 8.5cm 傳 황해도 황주 서울대학교박물관 29 흑색마연토기 黑 色 磨 硏 土 器 높이 6cm 진천 삼룡리 한남대학교박물관 25의 세부

철기 유통망 백제의 철기 유통망과 관련하여 먼저 고려하여야 할 것은 제철과 철기 생산 이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러한 작업은 주로 도성에서 관영적 수공업 방식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일부 철기는 상당히 먼 거리에 까지 공급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예를 들면 당시에 가장 중요한 농 기구였던 주조괭이는 풍납토성에서 주조되어 주변의 수십 km 범위 내에 각 지역으로 공급되었다. 진천 석장리의 사례로 볼 때, 원료가 확보되는 중요 거점 지역에서도 지방세 력에 의해 자체적으로 주조괭이는 물론 초강( 炒 鋼 )을 원료로 한 단조철기 등 이 생산되어 금강유역권의 일정한 지역에 보급되는 유통 구조를 형성했던 것 으로 생각된다. 금강유역권에서 이러한 유통의 양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 료가 당시 철소재로 사용되었던 철정( 鐵 鋌 )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와는 별도로 최근에 분석된 화성 반월리유적의 자료에서는 철광석과 같은 원료의 확보가 곤란한 지역의 경우 사철로 괴련철을 만드는 소규모의 제철을 실시하여 부족한 철소재를 충당하는 지엽적인 생산 공급 체계도 존재했을 가 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52 53 II. 漢 城 百 濟 의 誕 生 과 國 家 權 力 의 發 生 30 주조괭이 鑄 造 길이(오른쪽) 16.3cm 고양 멱절산 31 주조괭이 鑄 造 길이(오른쪽) 18.4cm 파주 육계토성 32 주조괭이 鑄 造 길이(오른쪽) 15.4cm 용인 수지 한신대학교박물관 서울 풍납토성 주변 주조괭이 유통망(이남규 안) 1. 파주 육계토성 2. 고양 멱절산유적 3. 서울 풍납토성 4. 용인 수지유적 5. 하남 미사리유적 6. 양평 대심리유적

III 百 濟 人 의 삶 과 죽 음 1. 도시와 마을 2. 의식주 3. 장제와 무덤 4. 제의 한성기의 신분이 높은 백제인들은 방어와 생산시설이 갖추어진 도성이나 지방의 거점성 내에 육각형 모양의 가옥을 짓고 살았다. 중앙의 귀족은 주로 외교, 행정, 전쟁, 제의 등 국가와 관련 된 주요 업무를 수행하였으며 지방의 유력 수장층은 중앙에서 수입된 중국물품이나 금동유물 등의 위세품을 사여받으며, 지역 내에서 나름의 세력을 유지하였다. 한성백제의 지배층은 국가 제의, 분묘제의 등을 국가차원에서 정기적으로 개최하여 지배 이데올로기를 유지해 나갔으며, 평민 역시 생활제의를 통하여 개개인의 소원을 빌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성기 백제인의 모습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다만 양직공도에 그려진 백제 사신이나 토기, 기 와에 새겨진 얼굴에서는 백제불상에서 보이는 온화한 모습을 느낄 수 있으며, 발굴된 금동관, 금동신발, 목걸이, 귀걸이, 허리띠장식 등의 장신구나 기록에 전해진 백제 관리의 비단옷을 통 해 백제 귀족의 의생활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백제 귀족들은 사후 세계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일정한 지역 내에 공동묘지를 형성하고 위계에 따라 고총고분이나 토광묘, 석곽묘, 석 실분 등의 무덤에 많은 유물과 함께 안치되었다. 이러한 한성백제의 귀족문화는 삼국사기 백제 본기 온조왕조의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았다 ( 儉 而 不 陋 華 而 不 侈 ) 는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1. 도시와 마을 백제도성의 경관 서울, 경기, 인천 지역 등 수도권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백제 유적은 360여 곳에 이른다. 이 가운데 규모와 성격상 도시 수준의 유적은 한성백제의 도성유적에 해당되는데, 풍납토성 몽촌토성과 함 께 그 서남쪽에 위치한 중요 고분군이 알려져 있다. 서울 풍납토성은 충적지에 위치한 평지 토성으로서 1925년의 을축년 대홍수 때 서벽이 유실되고 북벽, 동벽 및 남벽이 남아 있으며, 전체 길이는 약 3.5km에 달한다. 발굴이 실시된 동벽은 판축기 법을 이용하여 축조되었으며 폭 43m, 높이 11m에 달하는 대규모이고 외부에 해자를 설치하였다. 내부에서는 10여 개소에서 발굴이 실시되어 전체 지역에 집자리 등의 유구가 상당히 밀집 분포하는 사실이 확인되었으며, 특히 중심부에 해당하는 삼화연립지구와 경당지구에서는 대형의 제사구덩이 와 특수건물지가 다수에 달하는 집자리들과 함께 발굴되었다. 이 토성의 동남쪽 1km 정도 지점에 위치한 몽촌토성은 표고 44.8m의 잔구상 자연구릉을 이용하여 지점에 따라 삭토와 판축기법으로 성벽을 축조하였으며 전체 길이는 2,285m에 달한다. 이 성의 성 벽부와 관련된 주요 시설물들로는 치성( 雉 城 ), 4개소의 망대지, 3개소의 문지, 목책시설, 해자 등이 있으며, 내부에서는 건물지, 판축성토대지, 수혈집자리, 저장공, 적심유구, 지당지( 池 塘 址 ) 등이 발 굴되었다. 그리고 이곳으로부터 서남쪽 2.5km 정도의 지점에 위치하는 석촌동고분군은 표고 20m 정도의 대 지 위에 형성된 것으로서, 일제시대에는 이곳에 석총 66기를 포함하여 80기 이상의 고분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현재는 지상에 복원된 수 기의 적석총과 즙석봉토분만이 존재하며, 기타 토광 묘와 석곽묘도 발굴된 바 있다. 이와 같은 풍납토성, 몽촌토성 및 석촌동고분군은 한성백제기 도성 체제의 가장 중요한 시설물이기 는 하지만, 그 사이에 일반민들의 거주 구역, 농경지 및 생산시설 등이 산재해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 며, 중국 도성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주변 일대의 산림은 우선적으로 개간되어 넓은 개활지의 풍 경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56 57 III. 百 濟 人 의 삶과 죽음 1. 도시와 마을 서울, 경기, 인천 일원 한성기 백제유적 분포도 1. 고양 멱절산유적 2. 군포 부곡동유적 3. 오산 수청동유적 4. 용인 구갈리유적 5. 용인 두창리유적 6. 용인 마북리유적 7. 용인 상갈동유적 8. 용인 수지유적 9. 용인 죽전 대덕골유적 10. 의정부 민락동유적 11. 이천 설봉산성 12. 이천 설성산성 13. 파주 육계토성 14. 평택 현화리유적 15. 포천 자작리유적 16. 하남 광암동고분 17. 하남 미사리유적 18. 화성 마하리고분군 19. 화성 백곡리고분군 20. 화성 사창리고분군 21. 화성 석우리 먹실유적 22. 화성 장안리유적 23. 화성 화산고분군 24. 서울 몽촌토성 25. 서울 석촌동고분군 26. 서울 풍납토성 27. 강화 대룡리유적 28. 인천 동양동유적 29. 인천 불노동유적 30. 안성 도기동고분군

지방 마을의 경관 파주 육계토성 경기 남부지역에 대한 최근의 조사에서는 백제의 지역 정치체로 인정할 만한 여러 유적군이 확인되었다. 이들 유적군에는 크고 작은 마을과 고분군, 성곽, 생산시설들이 포함되는데, 지역에 따라 그 규모와 위계가 달랐던 것으로 보 인다. 특히 조사가 비교적 세밀하게 이루어진 화성 봉담읍 일대에는 여러 마 을유적과 토기 생산 유적, 대규모 고분군과 더불어 성곽이 확인되어 당시 마 을 경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지역은 지형적으로 북쪽에서 남쪽으 로 흐르는 발안천을 중심으로 좌우에 산악 지형이 형성되어 있어, 결과적으 로 남북상의 긴 계곡 지형을 이루고 있으나, 중류 지역에서는 비교적 넓은 충 적지가 펼쳐져 있다. 현재까지 조사된 내용으로 보면, 발안천 상류 지역에는 마하리와 왕림리고분 군, 당하리 백제토기 생산 유구와 함께 기초 단위의 마을이 분포하고 있으며, 그 중류 지역의 충적대지에는 발안리 백제 취락과 같은 대규모의 마을이 분 포하고 있다. 성곽은 충분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분명치 않지만, 왕림리 동쪽과 서쪽의 태봉산성과 건달산성에서 다량의 백제토기가 채집된 점으로 화성 마하리고분군 주변 유적 분포도 미루어 이 지역이 관방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건달산 정상에서 는 봉담읍 일대의 백제 유적군이 한 눈에 보일 정도로 조망이 양호한 지역이 다. 한편 이들 중심 유적군을 중심으로 직경 12~15km 범위 내에는 화성 상리, 보통리, 관항리, 오일리, 백리, 덕리, 수기리, 괘랑리 등지에서 백제토기 산포 지가 분포하고 있는데, 이들이 대부분 소촌, 또는 촌 단위의 마을유적으로 추 정되기 때문에 이 정도의 범위가 발안천 지역 정치체의 범위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발안천 지역 정치체의 북동쪽에는 대규모의 제철유적인 화성 기안리유 적과 마을유적인 고금산유적이 위치하고 있고 그 동쪽으로 마을유적으로 추 정되는 2~3개의 유물산포지가 세트를 이루며 또 다른 지역 정치체를 형성하 고 있다. 여기에는 중심에 화산고분군이 위치하고 있는데, 고분군의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에, 높은 위계의 신분층만을 위한 공동묘지라 판단되며, 일반 구성원들을 위한 별도의 공동묘지가 2~3개의 소촌 또는 촌으로 결집된 단위 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유적 전경(북에서) 유적 전경(남에서) 96-7호 집자리 부뚜막 육계토성은 파주시 적성면 주월리 일대에 위치한 강 안 평지토성( 平 地 土 城 )으로 기존에는 토성이 위치 한 행정구역명에 따라 주월리유적으로 불려졌다. 임 진강이 곡류하는 지점에 자리한 육계토성의 둘레는 약 1,858m로, 풍납토성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입지 나 평면 형태 등에서 유사점이 많다. 이 1996년부터 2005년까지 3차례에 걸쳐 시굴 및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는데, 1, 2차 조사에서는 성 내부에 서 집자리 9기를 포함하여 24기의 유구를 조사하였 다. 가장 중요한 유구( 遺 構 )인 96-7호 집자리는 육 각형의 평면 형태에 남쪽으로 출입 시설을 갖춘 중부 지방의 독특한 집자리 유형이다. 집자리 내부에서 부 뚜막과 함께 판재로 만든 벽체 시설이 확인되었으며, 대형옹, 고배, 시루, 철겸( 鐵 鎌 ) 등 각종 유물이 다량 으로 출토되었다. 특히 육계토성 내부에서는 소찰( 小 札 ), 삼각판( 三 角 板 ) 등의 갑옷편들과 함께 철모, 철 부, 철촉, 철겸 등의 철제 무기가 집중적으로 출토되 어 육계토성이 행정적 치소뿐만 아니라 방어 거점으 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육계토성과 관련된 유 물, 유구 갖춤새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한성백제기의 지방 통치의 거점과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으나, 하 북위례성의 거점 내지 백제와는 다른 마한 세력의 거 점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58 59 III. 百 濟 人 의 삶과 죽음 1. 도시와 마을 생활유적 생산유적 고분군 관방 1. 화성 마하리고분군 2. 화성 태봉산성 3. 화성 왕림리유적 4. 화성 왕림리 유물산포지 5. 화성 건달산 유물산포지 6. 화성 당하리유적 7. 화성 고금산유적 8. 화성 기안리유적 9. 화성 화산고분군 33 주조괭이, 철겸, 철촉, 철모 鑄 造, 鐵 鎌, 鐵 鏃, 鐵 길이(오른쪽) 29.8cm 파주 육계토성

화성 길성리토성 포천 자작리유적 길성리토성은 화성시 향남면 요리 일대에 분포하는 삼국시대 성곽으로서 경기 지역 최대의 토성이다. 성의 둘레는 2.2km에 달하여 서울의 몽촌토성과 비슷한 규모이며 자연 구릉을 최대한 이용하여 일 부 구간은 삭토하고 일부는 흙을 쌓아 만든 점도 동일하다.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으며 북, 동, 남에 걸쳐 문지가 확인된다. 성벽을 따라 장대와 건물지가 넓게 분포하며 가장 지대가 높은 서북쪽 성벽 에서는 멀리 수원과 오산 방면까지 조망된다. 정식으로 아직 된 적은 없지만 성 내부에서 원삼국기의 경질무문토기와 타날문토기, 그리고 한성백제기의 토기류 및 기와가 다량 채집되었다. 이 성곽의 가장 큰 특징은 외곽의 넓은 범위에 걸쳐 많은 백제 유적이 위성처럼 분포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은 유물 산포지로서 취락이나 묘역으로 판단되는데, 서남부의 백토리에서는 독립 구릉의 정 상부와 사면에서 많은 양의 백제토기와 기와가 채집되었다. 진식대금구( 晋 式 帶 金 具 )와 각종 철기 가 다량 출토된 사창리 산10-1번지는 길성리토성의 서남부에 인접하여 있기 때문에 사창리 일대 의 고분을 조성한 세력의 거성이 길성리토성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경기 지역에서 한성백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평지토성은 길성리토성을 제외하면 파주의 육계토성, 이천의 효양산토성 정도가 있을 뿐이다. 길성리토성은 외곽에 분포하는 유적의 범위, 사 창리 유물의 위상 등을 고려할 때, 경기 남부지역에서 정치적 위상이 가장 높았던 정치체가 남긴 것으로 이해된다. 지방의 거점도시라고 불릴 만한 유적을 남긴 이 정치체는 화성시 향남면과 양감 면 일대를 무대로 성장하였으며, 진식대금구의 존재로 볼 때, 4세기 이후 백제 중앙과 우호적 연맹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화성 길성리토성 주변 유적 분포도 유적 전경 34 귀걸이, 유리구슬, 도장구 耳 飾, 琉 璃 玉, 刀 裝 具 길이(오른쪽 아래) 5.2cm 화성 사창리 국립중앙박물관 유적 전경 자작리유적은 포천천 서쪽 해발 102m의 충적대지 위에 위치한다. 에서 2차에 걸쳐 시굴 및 를 실시한 결과, 원삼국시대에서 한성백 제기에 이르는 복합유적임을 확인하였으며, 백제 집 자리 2기와 소형유구 6기, 구상유구 4기, 굴립주 건 물지 1기 등 모두 13기의 유구를 조사하였다. 시굴 조사에서 확인된 대부분의 집자리는 평면 형태가 육 각형이며, 이 가운데 가 이루어진 2호 집자 리는 평면 육각형의 주거 공간에 사다리꼴 모양의 출입부가 통로로 연결된 대형의 呂 자형 집자리이 다. 출입부를 포함한 전체 길이가 23.87m이고 주거 공간의 동서 폭은 북쪽이 13.35m, 남쪽이 12.35m 가량으로 주거 공간의 면적은 49.25평이다. 이와 같이 자작리유적에서는 위계가 높은 육각형 집자리가 밀집 분포하고 있으며, 서울 풍납토성에 서도 그 사례가 없는 초대형의 집자리가 조사되었 다. 특히 1호 집자리에서 출토된 동진대( 東 晉 代 ) 중 국 청자편, 2호 집자리에서 출토된 기대와 다량의 기와편들은 자작리유적의 위계가 다른 일반 마을보 다 높았음을 의미하며, 구체적으로는 4~5세기 경 한성백제 중앙과 직접적인 영향 관계가 있었던 지 방 통치의 거점 마을로 판단된다. 자작리유적이 위 치한 포천천을 중심으로 주변에서 관련 생활유적 이나 무덤유적이 아직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인근 의 반월산성과 고모리산성과 같은 관방에서도 백제 토기가 출토되어 행정적 치소로서의 자작리 마을과 방어의 거점으로서의 반월산성, 고모리산성이 동일 세력에 의해서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60 61 III. 百 濟 人 의 삶과 죽음 1. 도시와 마을 유구 노출 모습 생활유적 고분군 관방 1. 화성 길성리토성 2. 화성 사창리고분군 3. 화성 소근산성 4. 화성 요리고분군 35 원저단경호 圓 底 短 頸 壺 높이 18.3cm 포천 자작리 36 장동옹 長 胴 甕 높이 44cm 포천 자작리

하남 미사리유적 용인 구갈리유적 미사리유적은 한강변에 형성된 충적대지에 위치하고 있다. 유적의 층위는 모 두 8개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가운데 제4층이 백제시대 문화층이다. 백 제시대 마을은 2개 지점에서 조사되었는데, 조성 시기가 서로 다른 것으로 확인되었다. 비교적 늦게 조성된 마을은 4~5동의 가옥이 한 단위를 이루며 주거 구역을 형성하고 있고 별도로 저장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유구는 집자리, 지상가옥, 저장공, 구상유구, 경작유구 등이 있다. 집자리는 평면 형태가 육각형, 원형, 타원형, 방형, 장방형 등 다양한데, 방형이나 타원 형의 집자리가 한 변이 5~6m 가량인 반면, 육각형 집자리는 이들보다 규모 가 훨씬 커서, 출입구를 포함한 전체 길이가 10m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집 자리 내부에는 부뚜막 시설을 갖추었는데 북벽에서 약간 동쪽으로 치우쳐 설 치한 경우가 많다. 저장공은 평면 형태가 원형과 방형이며, 단면은 U 자형과 플라스크형의 형태가 있다. 경작유구는 서로 다른 두 개의 밭이 층위를 달리 하여 나타나는데 상층 밭이 하층 밭보다 고랑과 이랑의 폭이 깊고 일정하며 발달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서 생산된 식량 자원은 인접한 도성에 지 속적으로 공급되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유물은 고배, 삼족기, 뚜껑, 광구장경호, 직구단경호, 장란형토기, 심발형토기, 시루, 완 등 전형적인 한성백제기 토기가 출토되고 있으나, 각 기종별 구성비 에 있어서 자비용기인 장란형토기나 심발형토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 다. 이는 몽촌토성이나 풍납토성과 구별되는데 이는 일반 마을이라는 유적의 성격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철기류는 철촉, 철부, 철도자, 철겸 등이 출토 되었다. 서울대 조사 B-2호 집자리 유적 전경 한성백제기의 소촌 규모의 마을유적이다. 집자리 12기, 구덩이 62기, 소형 수혈유구 19기, 구상유구 7기가 조사되었으며, 이외에도 토광묘와 옹관묘도 각 1기씩 조사되었다. 집자리는 평면 형태가 장타원형인 10호 집자리를 제외하면 모두 장방형의 소형 집자리로 화성 왕림 리유적과 고금산유적에서 조사된 집자리와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그런데 타원형의 집자리로 보고된 10호 집자리는 중복과 교란이 심하여 전체적인 형 태는 명확하지 않지만, 벽구 시설이나 기둥구멍의 배치 상태로 보아 육각형 집자리일 가능성이 있다. 육각형 집자리는 한성백제기 집자리 가운데 가장 위계가 높은 주거 유형으로 풍납토성, 몽촌토성, 포 천 자작리, 파주 주월리유적 등에서 확인되는데, 위 계가 높고 규모가 큰 집자리에서만 상부 목재 가구 를 결구하는데 철정과 꺽쇠를 사용한다. 실제 구갈 리 10호 집자리에서는 철정이 출토되었다. 한편 구덩이 시설로 보고된 유구 가운데 단면이 플 라스크형인 유구는 저장 시설로 추정되지만, 평면 형태가 원형이나 타원형이면서 깊이가 깊은 구덩이 들은 토실( 土 室 )로 이해하고 있다. 즉 삼국지 위 지 동이전의 居 處 作 草 屋 土 室 形 如 塚 其 戶 在 上 기 사에 묘사된 일종의 주거 시설로 파악되는데, 이들 유구들이 공주 장선리, 안영리유적 등 주로 중서부 지방에 분포하고 있기 때문에 마한과 관련된 문화 적 요소로 생각된다. 62 63 III. 百 濟 人 의 삶과 죽음 1. 도시와 마을 10호, 13호 집자리 노출 모습 미사리유적 층위와 백제 유구 노출 모습 22호~24호 구덩이 노출 모습

화성 발안리유적 화성 석우리 먹실유적 발안천이 곡류하는 지점의 충적지에 위치하고 있으 며 원삼국시대부터 한성백제기에 걸쳐 조영된 마을 유적이다. 50여기에 달하는 원삼국~백제시대의 집 자리와 40여기의 구, 굴립주건물지, 소형유구 등이 조사되었다. 집자리는 평면 형태에 따라 凸 자형, 장방형, 방형, 역오각형 등이 있으며 취사 및 난방 시설은 중도식 화덕과 터널형 화덕, 부뚜막이 있다. 중도식 화덕만이 있는 집자리에서는 경질무문토기 만 출토되며 중도식 화덕과 함께 부뚜막 또는 터널 형 화덕이 설치된 집자리에는 경질무문토기와 함께 타날문토기인 원저단경호나 대옹이 출토된다. 그리 고 부뚜막만 설치된 집자리에서는 백제토기만 출토 되어 취사 시설의 발전 과정을 추적하는데 좋은 자 료를 제공한다. 발안리 마을 유적에서도 다른 마을 처럼 구( 溝 )가 확인되는데, 마을 내부의 공간을 구 획하는 용도 외에 소규모의 구는 집자리나 굴립주건 물지와 관련된 배수 용도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유물은 심발형토기, 장란형토기, 시루 등의 자비용 기를 비롯하여 고배, 삼족기 등 한성양식의 백제토 기도 일부 출토되었다. 이외에 철촉, 도자, 철부 등 의 철기와 토제품, 기와 등이 소량 출토되었다. 유적 전경 유적 전경 화성 석우리 먹실유적은 한성백제기에 해당하는, 주거 공간과 경작유구가 결합된 마을유적이다. 총 1,000여 평에 달하는 밭과 150여 기에 달하는 수 혈유구는 생산과 저장의 형태 및 공간적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집자리는 방형 계통의 4주식 집자 리로 한성백제의 전형적 집자리 형태인 육각형 집 자리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집자리 내부에는 기둥 구멍과 출입구 시설이 있으며, 벽면을 따라서 벽구 ( 壁 溝 )가 돌려져 있다. 부뚜막은 크게 2가지 형태로 분류되는데, 10평 내외의 중소형 집자리에는 짧은 일자형 부뚜막이 달린 형태가 많으며, 30평 내외의 집자리에는 ㄱ 자 형태로 꺾인 긴 연도부를 갖춘 부뚜막을 시설하였다. 수혈유구는 기존에 저장공 으로 불리우는 단면 플라스크형 형태가 많다. 특히 24호, 61호 수혈유구 내부에서는 20여 개체의 토 기가 발견되었는데 식재료를 보관하는 저장용 토기 가 많았다. 그런데 식재료 보관용으로 바로 놓인 것 도 있었지만, 대형의 저장용기를 거꾸로 놓아 보관 한 예가 있어 식재료와 용기의 보관이 함께 이루어 졌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밭은 주거 공간보다 낮은 지역에 형성되어 있는데 대부분 구릉의 등고선 방 향과 평행하게 만들었다. 여러 차례 밭갈이를 한 흔 적이 발견되었으며 고랑의 간격은 좁은 편이다. 밭 이외에 경작면 상부의 발자국 흔적이 밀집되어 발 견된 곳이 있는데 식물규산체 분석 결과 벼를 재배 한 수전면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먹실유적은 농 경을 주 생계 수단으로 하는 마을 유적으로 육각형 집자리가 발견되는 마을유적보다는 위계가 낮지만, 전체 유적의 규모라든지, 유적에서 출토된 고배 기 종의 흑색마연토기, 기대 등의 존재로 볼 때, 이 시 기 기초 단위의 농경 취락보다는 상위의 마을이었 던 것으로 보인다. 64 65 III. 百 濟 人 의 삶과 죽음 1. 도시와 마을 도랑 유구 노출 모습 장방형 집자리 노출 모습 28호 집자리 조사 후 모습 조사 전경 사람 발자국 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