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표조사는국비를지원받아서실시한지표조사이며, 학술적또는공공의목적을위하여 지표조사보고서를공개하는데에동의함 경주상계리산 25 번지일원초지조성부지내 국비지원지표조사결과보고서 2015. 9
사업내용 지표조사 조사결과 문화재지표조사결과서 경주소현리산105-1번지단독주택사업명사업기간 2015. 09 ~ 신축부지국비지원지표조사사업지역 ( 38220 ) 경상북도경주시동남로 456-42( 양남면 ) 면적전체사업면적 23,580m2사업목적초지조성예정부지지표조사면적 23,580m2 사업시행자 기관명 양남한우영농조합법인 연락처 010-3565-3712 고고, 역사분야책임조사원서병국조사원이하유환성정미란 민속분야 책임조사원 조사원이하 조사기관 수중분야 책임조사원 조사원이하 조사기간 조사비용 * 계약금액고고 역사기준분야 주변문화재조사결과 고건축분야책임조사원조사원이하 자연문화재책임조사원조사원이하 지정문화재 비지정문화재 2015. 09. 21. ~ 2015. 09. 25. ( 사전조사 1 일, 현장조사 1 일, 보고서작성 1 일 ) 3,036,000원민속분야 원 수중분야 원 고건축분야 사업부지내문화재조사결과 유적있음 유적없음 지상문화재 기존없음신규없음 매장문화재 기존없음신규없음 건축물 기존없음신규없음 민속자료 기존없음신규없음 지표조사결과, 조사지역은지형상대부분급경사에해당하며, 구릉일 대와일부경계면에서는자연수로와곡부에의하여원지형이거의남아 있지않은상황이다. 그리고다소넓게분포하는곡부와지표및절개 면의단면토층에서도유구및유물이확인되지않았다. 따라서조사지 역 (23,580m2) 은유적의입지가능성이희박할것으로판단되기때문에 관련된공사를행정절차에따라진행하여도무방할것으로본다. 조사기관종합의견 지표조사의방법및절차등에관한규정별표 3 에따라문화재지표조사결과서를제출합니다. 2015 년 9 월일 기관명 : 재단법인서라벌문화재연구원 ( 인 ) 원 문화재청장 귀하
문화재지표조사결과표 1 연 번 2 문화재명 3 소재지 4 면적 5 시대 6 종류 7 유적 구분 기존신규 8 의견구분 9 조사 면적 조사의견 10 사유 11 비 고 1 - 경주양남면소현리산25번지일원 - - - - - 사업 시행 23,580 m2 조사지역은지형상대부분급경사에해당하며, 구릉일대와일부경계면에서는자연수로와곡부에의하여원지형이거의남아있지않은상황이다. 그리고다소넓게분포하는곡부와지표및절개면의단면토층에서유구및유물이확인되지않았다. 따라서조사지역 (23,580 m2 ) 은유적의입지가능성이희박할것으로판단되기때문에관련된공사를행정절차에따라진행하여도무방할것으로본다.
Ⅰ. 조사개요 조사명 : 경주상계리산 25 번지일원초지조성부지국비지원지표조사 조사경위및목적 : 양남한우영농조합법인 ( 대표 : 이상순 ) 은경주양남면상계리산25번지일원에초지조성부지를계획하였다. 그러나이를검토한경주시청에서는 신청지는문화재지정보호구역이외의지역이나매장문화재보호및조사에관한법률제6조, 같은법시행령제4조등의규정에의거문화재관련전문기관의문화재지표조사를실시하고그결과에따라조치할것 이라는내역을통보 ( 경주시청, 문화재과-14123) 하였다. 이에양남한우영농조합 ( 대표 : 이상순 ) 은사업대상지가국비지원에해당하는 30,000m2미만이기때문에, 국비지원대상으로한국문화재조연구기관협회에신청하였고, 회원기관인본연구원이해당사업을하게되었다. 문화재조사전문기관인본연구원에서는사업대상지인 23,580m2에대하여사전조사를거친후 2015년 9월 22일에현장조사를실시하였다. 이번문화재지표조사는건설공사시행전해당지역일원에대한지표상의문화적흔적과징후를확인ㆍ분석하여향후사업추진으로인하여훼손ㆍ멸실될우려가있는문화유산의보존ㆍ보호대책을수립하기위한기초자료를확보하는데그목적이있다. 조사지역및범위 : 경북경주시상계리산 25 번지 ( 임 ), 산 20-9 번지 ( 임 ), 산 27-2 번지 ( 임 ), 326-1 번지 ( 답 ). 조사면적 : 23,580 m2 조사기간 : 2015 년 9 월 21 일 ~ 2015 년 9 월 25 일 - 사전조사 1 일, 현장조사 1 일, 보고서작성 1 일 조사의뢰인 : 양남한우영농조합법인 ( 대표 : 이상순 ) 조사단구성 - 책임조사원 : 서병국 ( 서라벌문화재연구원유적조사실장 ) - 조사원 : 유환성 ( 서라벌문화재연구원팀장 ) - 준조사원 : 정미란 ( 서라벌문화재연구원연구원 ) 서라벌문화재연구원 1
Ⅱ. 조사지역위치및주변환경 1. 자연 지리적환경경주지역은경상북도의동남쪽에위치한신라의천년고도 ( 千年古都 ) 로, 경상남북도를연결해주는결절지 ( 結節地 ) 임과동시에다종다양 ( 多種多樣 ) 한문화유적이산재해있는문화ㆍ관광의도시이다. 북동쪽으로는포항시, 북서쪽으로는영천시, 서쪽은경산시와청도군, 남쪽으로는울산광역시, 동쪽으로는동해와각각연접하고있다. 수리적위치는동경 128 58 ~129 31, 북위 35 39 ~36 40 에해당한다. 총면적은 1,324.39km2로, 서울특별시의두배가넘는다. 인구는 2014년 3월말기준으로대략 26 만 3천여명으로추산되고있다. 지형은태백산맥 ( 太白山脈 ) 의지맥 ( 支脈 ) 인동대산맥 ( 東大山脈 ) 과주사산맥 ( 朱砂山脈 ) 등이남북으로주행 ( 走行 ) 하여동서의경계를이루고있다. 또한형산강 ( 兄山江 ) 구조곡과영천-경주간구조곡이교차하는지점에형성된화강암지층의침식분지에위치하여구릉성산지로둘러싸인자연요새를이루고있다. 가장높은산은건천읍과내남면의경계에위치한단석산 ( 斷石山, 827.2m) 과불국동과양북면의경계에위치한토함산 ( 吐含山, 742m) 등이다. 그밖에명활산 ( 明活山, 245m), 금오산 ( 金鰲山, 468m), 옥녀봉 ( 玉女峰, 214m), 선도산 ( 仙桃山, 381m), 소금강산 ( 小金剛山, 177m) 등의구릉성산지와도덕산 ( 道德山, 703m), 구미산 ( 龜尾山, 594m), 주사산 (622m), 황룡산 ( 黃龍山, 664m) 등이있다. 이중에서명활산, 선도산, 금오산, 소금강산등은경주시내권을에워싸며경주분지를형성하고있다. 경주지역의지세 ( 地勢 ) 에대한내용은문헌자료에소개되어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 新增東國輿地勝覽 ) 에는 신라시대에토함산을동악 ( 東岳 ), 선도산을서악 ( 西岳 ), 함월산을남악 ( 南岳 ), 금강산을북악 ( 北岳 ) 이라하였다. 라고전한다. 문헌비고여지고 ( 文獻備考輿地考 ) 에는 아국 ( 我國 ) 에는종주 ( 宗主 ) 가되는 12산과 12물이있다. 12종산중에태백산 ( 太白山 ) 이있다. 태백산맥이동남쪽으로뻗으면서응봉 ( 鷹峰 ), 육현 ( 六峴 ), 마북 ( 馬北 ), 운주 ( 雲住 ) 에이르고, 운주산에서성현 ( 成峴 ), 무학 ( 舞鶴 ) 에이르며, 주사 ( 朱砂 ), 사룡 ( 四龍 ), 지화 ( 只火 ), 단석 ( 斷石 ) 에이른다. 단석산이남쪽으로복안 ( 伏安 ), 열박 ( 咽薄 ) 에이르고, 열박산이동북쪽으로뻗어묵장 ( 墨匠 ), 치술 ( 審述 ) 에이르며, 치술령이다시북쪽으로달리며토함 ( 吐含 ) 과명활 ( 明活 ) 에이르러경주지역에이른다. 라고전한다. 동경통지 ( 東京通誌 ) 에는 경주의산은북쪽에서서쪽으로굽어가지가나누어지고, 남쪽으로지나고동쪽으로돌면서다시나뉘어져그동서사이로넓은평원을이루었고, 여기에도 서라벌문화재연구원 2
회 ( 都會 ) 가형성되었다. 라고전한다. 또한 북쪽으로는마북 ( 馬北 ), 비학 ( 飛鶴 ), 성현 ( 成峴 ), 자옥 ( 紫玉 ), 달성 ( 達城 ), 북형 ( 北兄 ), 사라 ( 舍羅 ), 금강산 ( 金剛山 ) 등이있고, 서쪽으로는선도 ( 仙桃 ), 고관 ( 高冠 ), 주사 ( 朱砂 ), 지화 ( 只火 ), 여근 ( 女根 ), 단석 ( 斷石 ), 울개산 ( 蔚介山 ) 등이있다. 남쪽으로는복안 ( 伏安 ), 열박 ( 咽薄 ), 묵장 ( 墨匠 ), 치술 ( 審述 ), 고위 ( 高位 ), 금오산 ( 金鰲山 ) 등이있고, 동쪽으로는성령 ( 筬嶺 ), 건대 ( 件代 ), 화산 ( 花山 ), 토함 ( 吐含 ), 추령 ( 楸嶺 ), 함월 ( 含越 ), 시령 ( 柿嶺 ), 팔조 ( 八助 ), 명활 ( 明活 ), 낭산 ( 狼山 ) 등이있다. 라고전한다. 하천은우선국가하천인형산강이있다. 일명서천 ( 西川 ) 으로, 경주시내권의서쪽을남쪽에서북쪽으로흘러간다. 상류에서부터고도 ( 高度 ) 에별다른차이가없기때문에, 운반능력이지극히저조하다. 다만호우 ( 豪雨 ) 시에비교적짧은본류에지류의우수 ( 雨水 ) 가집중되어하류의범람을빈번하게일으키는특징이있다. 다음으로동남쪽에서흘러와월성 ( 月城 ) 의남쪽을지나고, 다시서쪽으로흘러가형산강에합류하는남천 ( 南川 ) 이있다. 일명문천 ( 紋川 ) 으로, 원효 ( 元曉 ) 가다리를건너다가일부러빠진하천으로유명하다. 1) 형산강과마찬가지로급경사지에서완경사지로바뀌면서운반능력이약화된다. 이러한상태가대략 10여km나이어지기때문에, 경주시내권에들어서기도전에고운모래로만이루어진하천바닥을형성한다. 그리고동쪽의높은산지에서내려와금장대암각화가있는지점에서형산강과합류하는북천 ( 北川 ) 이있다. 일명알천 ( 閼川 ) 으로, 예전에는사금 ( 砂金 ) 채취가이루어지기도하였다. 홍수시에경주시내권을가장위협했던하천으로알려져있다. 왜냐하면전체유역면적은남천과거의비슷하나, 하폭 ( 河幅 ) 이남천보다훨씬넓은까닭으로인해하천깊이가더얕기때문이다. 이러한하천들은유역분지의규모가작고, 유량 ( 流量 ) 역시적다. 그러므로이동및교류에있어서큰장애요인이되지않았고, 오히려분지내에국한된지역뿐만아니라주변의지질구조선을따라전개된넓은하곡 ( 河谷 ) 지역을통합하는데에유리하였다. 평야는경주ㆍ내동ㆍ외동ㆍ내남ㆍ서면ㆍ안강평야등이있다. 경주평야는현시가지를둘러싼평야로서, 형산강의지류인인천 ( 麟川 ), 모량천 ( 牟梁川 ), 남천, 북천, 현곡천 ( 見谷川 ) 등이합류하고, 거의사질토양으로서지극히비옥하고관개 ( 灌漑 ) 가잘된다. 내동평야는남천상류의탑정동일대와배반리ㆍ평리ㆍ도지리ㆍ조양리등의구 ( 舊 ) 내동면일대, 외동읍방어리ㆍ북토리ㆍ신계리ㆍ제내리등을포함한지역으로, 동남쪽에서서북쪽으로전개되어있으며, 서북쪽은경주평야의연장으로보인다. 외동평야는외동읍의북부 4~5개마을을제외한일대로, 내동평야와의사이에낮고편평한구릉이계속되고지세가서로연접해있다. 내남평야는내남면의북부 1~2개마을과동서산간지대의 4~5개마을을제 1) 三國遺事 卷 4 義解 5 元曉不羈. 時瑤石宮 ( 今學院是也 ) 有寡公主勅宮吏覓曉引入宮吏奉勅將求之已自南山來過蚊川橋 ( 沙川俗云年川又蚊川又橋名楡橋也 ) 遇之佯墮水中濕衣袴 서라벌문화재연구원 3
외한대부분마을과현울산광역시울주군두동면봉계리, 두서면활천리등을포함하고있다. 서면평야는서면의대부분을차지하고있는지역으로, 동북쪽으로경주평야와연접하고있다. 안강평야는북쪽으로형산강을따라대략 10여km의협장 ( 狹長 ) 한하안평야 ( 河岸平野 ) 를지나전개된지역으로, 안강읍과강동면의대부분을포함하고있기때문에, 규모가가장크다. 지질은대부분경상분지지체 ( 慶尙盆地地體 ) 에속하고, 양북면어일리ㆍ범곡리와천북면등의일부지역은포항분지지체 ( 浦項盆地地體 ) 에속한다. 경상분지지역은퇴적암층을뚫고관입 ( 貫入 ) 한불국사관입암층 ( 佛國寺貫入巖層 ) 으로, 심성암의활동으로인해흑운모화강암과석영반암등이분포한다. 포항분지지역은신생대제3기에형성된지층으로, 화성암, 수성암, 역암, 사암, 응회암등으로되어있고, 화성암이비교적풍부하다. 조사지역은행정구역상경상북도경주시양남면상계리산25번지일원이다. 조사지역의북쪽에위치한해발 117.8m의구릉정상부에서남쪽으로급격하게떨어지는구릉일부지역과남쪽에위치한해발 107.2m의구릉정상부에서북쪽으로급격하게떨어지는구릉의일부지역, 그리고북쪽과남쪽의중앙에있는경작지의일부지역이조사지역에속한다. 조사지역주변으로구릉과구릉사이에는곡부가다수형성되어있고, 그곡부는수렴천으로이어지다가동해바다로합류하게된다. 요약하면조사지역을포함하는주변지형은경사가급한구릉을중심으로곡부가발달되어있고, 그곡부는수렴천으로이어지다가동해바다로이어지는형상이다. 조사지역중앙부의지리적좌표는동경 129 26 02.67 이며, 북위 35 41 35.73 이고, 해발고도는 76~107m이다. 조사지역에진입하기위해서는경주-울산간 7번국도를타고울산을지나서마우나리조트쪽으로좌회하여양남쪽으로직진해서내려오면상계리마을이나온다. 여기서수렴천을지나서대나무펜션과주변펜션촌이나오는데이곳을지나북쪽으로약 300m 정도오면조사지역이확인된다. 2. 고고ㆍ역사적환경경주지역에서인간이활동하기시작한것은구석기시대로알려졌지만, 제4기층위에서지표채집된추정긁개 1점이출토되었을뿐, 2) 관련유적은확인되지않고있었다. 그러다가 2007년에감포읍대본1리에서구석기시대유적이발굴조사됨에따라실례 ( 實例 ) 가확인되었다. 3) 신석기시대의유적은아직많은사례가보고되지는않았지만, 월정교남편농지유적 4) 과 2) 손보기, 1969, 새로이발견된구석기및구석기전통유물의몇예, 白山學報 7. 3)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2007, 경주감포관광단지조성부지내慶州臺本里舊石器遺蹟略報告書. 서라벌문화재연구원 4
황성동267번지유적 5) 등에서신석기시대의유물포함층이확인된바있다. 2007년에는양북면봉길리에서주거지 3기가발굴조사되었고, 6) 내남면용장리에서신석기시대만기 ( 晩期 ) 에해당하는수혈이확인되었고, 즐문토기와이중구연토기등이출토되었다. 7) 청동기시대의유적은현경주중심권과주변지역에서모두확인된다. 중심지역은현곡면금장리, 석장동, 황성동, 황룡사지전시관부지, 재매정지등지에서확인되었고, 주변지역에서는탑동, 사라리, 손곡동, 월산동, 구정동, 조양동, 안강읍갑산리, 강동면인동리등지가알려져있다. 대표적인유적은취락유적과유물산포지, 지석묘등이다. 취락유적은현재에도꾸준히확인되고있고, 구릉에입지한경우와자연제방에위치한경우로나누어진다. 8) 유물산포지는경주시내권과주변지역의낮은구릉을중심으로다수확인되고있고, 경주시리유적, 낭산유적, 천북면모아리, 북천면오야리등지가대표적이다. 9) 지석묘는천북면모아리, 북천면오야리ㆍ동산리, 강동면모서리ㆍ단구리ㆍ왕신리ㆍ안계리ㆍ사방리ㆍ노당리및내남면상신리등지에서확인되었다. 10) 이외에도안강읍갑산리유적에서는구릉정상부에입지한적석석관묘 1기가발굴조사되었고, 11) 석장동876-5 번지유적에서는대형구획묘로추정되는유구가발굴조사되는 12) 등경주지역을비롯한영남일대의지석묘연구에기폭제가될유적이확인되고있다. 그리고청동기시대의유적중하나인암각화또한경주지역을중심으로인근지역에서많이확인된바있다. 대표적인암각화는형산강변에위치한석장동의금장대암각화 13) 와내남면상신 3리에입지한상신리암각화 14) 등을들수있다. 초기철기시대 ~ 원삼국시대의유적은대부분분묘유적으로, 현시가지와주변구릉일대에걸쳐폭넓게분포하고있다. 특히조양동, 구정동, 황성동, 사라리, 인동리, 입실리, 죽동리, 안계리등지에서는한국형동검인세형동검 ( 細形銅劍 ) 을비롯한각종의청동제유 4)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1992, 월정교지남편농지발굴조사, 문화유적발굴조사보고 - 긴급발굴조사보고서 Ⅰ-. 5) 東國大學校慶州캠퍼스博物館, 2002, 慶州皇城洞 267 遺蹟. 6) 유환성, 2007, 경주시양북면봉길리신석기유적, 韓國新石器硏究 13. ; 신라문화유산조사단, 2008, 慶州陽北面奉吉里 13-1 蕃地遺蹟, 慶州의王京遺蹟 Ⅳ. 7) 신라문화유산조사단, 2010, 慶州茸長里月城朴氏齋室建立敷地內遺蹟. 8) 최근에발굴조사가진행된경주외동유적에서도청동기시대주거지가확인되었다 ( 성림문화재연구원, 2007, 경주외동 2 일반지방산업단지내유적 - 문화재발굴조사지도위원회자료 - ). 9) 최근에실시한남산정밀지표조사에서도남남산일대의낮은구릉에서청동기시대의각종무문토기와석기류등이산포하고있음을확인하였다 ( 경주시ㆍ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04, 慶州南山 - 精密學術調査報告書 - ). 10) 경주시ㆍ국립경주박물관, 2008, 文化遺蹟分布地圖 - 慶州市 -. 11)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2006, 安康 - 靑令間道路擴ㆍ鋪裝工事區間內慶州甲山里遺蹟. 12) 박영호, 2010, 경주석장동 876-5 번지다가구주택신축부지내유적, 移住의고고학, 한국고고학전국대회. ; 계림문화재연구원, 2012, 경주석장동 876-5 번지유적, 경주지역소규모발굴조사보고서 Ⅱ. 최근까지이일대에는지석묘가산재해있었으나, 공공주택건립으로인해일부가유실되었다. 13) 김길웅, 1995, 金丈臺岩刻畵에대한考察, 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論文集 16. ; 오춘영, 2000, 경주금장대바위그림의분석, 忠北大學校碩士學位論文. 14) 한국역사민속학회, 1996, 한국의암각화. ; 임세권, 1999, 한국의암각화 대원사. 울산암각화박물관, 2012, 한국의암각화 2. 서라벌문화재연구원 5
물과다량의철제유물등이출토되었고, 주변에다른분묘가위치하지않고단독으로분묘가위치하고있다는점이특색이다. 대표적인유적으로는죽동리고분군, 15) 조양동유적, 16) 구정동유적 17) 등이다. 이러한유적들은이후에사로국 ( 斯盧國 ) 건국의핵심세력이되는사로육촌세력의흔적으로추정되고있다. 18) 취락유적은월성과황성동등지에서확인되고, 주거지의주변에서는철생산과관련된생산유적이확인되고있다. 19) 황성동유적에서는원형과방형의주거지가발굴조사되었다. 전기에속하는원형수혈주거지내부에서는소규모의단야 ( 鍛冶 ) 작업이이루어졌고, 후기에속하는방형주거지에서는주거공간과분리된장소에서정련 ( 精鍊 ) 및단조 ( 鍛造 ) 작업이이루어졌던것으로추정된다. 특히현재까지발굴조사된약 30여기의노 ( 爐 ) 시설들은한곳에서제철 ( 製鐵 ) 과관련된공정이일괄적으로이루어졌음을확인시켜주었다는점에서중요한의미가있다. 이는 삼국지 ( 三國志 ) 위서동이전 ( 魏書東夷傳 ) 에기록된것처럼, 변진 ( 弁辰 ) 지역에서실제로철생산이이루어지고있었다는점을보여준다. 20) 삼국사기( 三國史記 ) 와 삼국유사 ( 三國遺事 ) 등의기록을토대로살펴보건대, 신라는사로육촌을기반으로하여기원전후한시기에사로국으로출발했던것으로보인다. BC 57년에육촌장이연합하여박혁거세를거서간 ( 居西干 ) 으로삼고국호를서라벌 ( 徐羅伐 ), 서벌 ( 徐伐 ), 사라 ( 斯羅 ), 사로 ( 斯盧 ), 계림 ( 鷄林 ) 등으로하였다. 21) 유리이사금대에영토가확장됨에따라알천양산촌 ( 閼川楊山村, 가 ) 을양부 ( 梁部 ) 로, 돌산고허촌 ( 突山高墟村, 나 ) 을사량부 ( 沙梁部 ) 로, 무산대수촌 ( 茂山大樹村, 다 ) 을점량부 ( 漸梁部 ) 로, 자산진지촌 ( 觜山珍 15) 國立慶州博物館, 1998, 慶州竹東里古墳群. 16) 崔鍾圭, 1995, 三韓考古學硏究, 書景文化社, 187~242 쪽. 17) 金元龍, 1952, 慶州九政洞出土金石竝用器의遺物에대하여, 慶州學報 1. ; 崔鍾圭, 1983, 慶州九政洞一帶發掘調査, 박물관신문 139. ; 國立慶州博物館, 2006, 慶州九政洞古墳. 18) 최근까지현시가지일대에서수장급의분묘유적이확인되지않았기때문에, 이청규는사로국최초의 국 은경주중심지구가아닌주변부에서 지구국 의형태로발전했다는가설을제시하였다 ( 이청규, 2005, 사로국의형성에대한고고학적검토, 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論文集 26). 그러나 2010 년에탑동에서사라리 130 호에버금가는유구가확인됨으로써 ( 최진녕, 2010, 경주탑동 21-3 ㆍ 4 번지유적, 영남지역문화재조사연구기관협외의 2010, 연구조사발표회 ), 사실상그런가설은무너지게되었고, 지역국 설이통설화되고있다 ( 이희준, 2002, 초기진ㆍ변한에대한고고학적논의, 진ㆍ변한사연구, 경상북도ㆍ계명대학교한국학연구원 ). 이희준은황성동유적을비교의축으로활용하여 지역국 설을보강하고있다 ( 이희준, 2011, 경주황성동유적으로본서기전 1 세기 ~ 서기 3 세기사로국, 新羅文化 38). 19) 울산의達川鐵場은고대에서조선시대를거쳐최근까지대량의철이생산된곳이다. 최근에달천철장에서서북쪽으로약 1.5 여km정도떨어진지점에위치한달천유적이발굴조사되었는데, BC 1 세기경의원삼국시대의環濠시설이확인되었다. 보고자는원삼국시대의환호가小國의중심지인國邑에해당되는곳에서주로확인된다는점을고려하여당시에달천철장을국읍에비견될정도로중요하게인식했다고보고있다 ( 울산문화재연구원, 2010, 蔚山達川遺蹟 -3 次發掘調査 - ). 한편최충기는울산지역의소국인于尸山國이달천철장의철생산을기반으로성장했다고보고있다 ( 최충기, 2011, 于尸山國의형성과변천, 新羅史學報 23). 20) 三國志 卷 30 魏書東夷傳韓. 國出鐵韓濊倭皆從取之諸市買皆用鐵如中國用錢又以供給二郡. 21) 三國遺事 卷 1 紀異 1 新羅始祖赫居世王. 國號徐羅伐又徐伐 ( 今俗訓京字云徐伐以此故也 ) 或云斯羅又斯盧初王生於鷄井故或云鷄林國以其鷄龍現瑞也. 한편신라의국호확정과정에대한검토는朱甫暾, 1994, 新羅國號의確定과民意識의成長, 九谷黃鍾東敎授停年紀念史學論叢. : 1998, 新羅地方統治體制의整備過程과村落, 신서원, 307~341 쪽, 참조. 서라벌문화재연구원 6
支村, 라 ) 을본피부 ( 本彼部 ) 로, 금산가리촌 ( 金山加利村, 마 ) 을한기부 ( 漢祇部 ) 로, 명활산고야촌 ( 明活山高耶村, 바 ) 을습비부 ( 習比部 ) 로각각바꾸어행정조직화하고, 각부마다이 ( 李 ), 최 ( 崔 ), 손 ( 孫 ), 정 ( 鄭 ), 배 ( 裵 ), 설 ( 薛 ) 등의성 ( 姓 ) 을내려주었다. 22) 육촌의위치에대해가-현시가지일대, 나-내남면, 다-외동읍, 라-서면, 마-양남면, 바-천북면등으로비정하기도하고, 23) 다와라를각각조양동일대와황성동일대등으로비정하기도하는 24) 등연구자들간에이견 ( 異見 ) 이있는실정이다. 현재까지고고학적으로조사된사로국단계의목관묘, 목곽묘유적의분포는황성동ㆍ하구리유적의경주분지지구, 사라라유적의서면지구, 인동리ㆍ안계리유적의안강지구, 덕천리유적의내남지구, 조양동ㆍ구정동 ( 정래동 ) ㆍ구어리유적의불국사지구, 입실리ㆍ문산리ㆍ죽동리ㆍ북토리ㆍ울산중산리유적의외동지구등크게 6개의지구로구분되고있는데, 육촌과관련지어해석해볼여지가있다. 이러한육촌을기반으로하여성장한사로국은지증왕대에국호를 신라 ( 新羅 ) 로확정했고, 25) 지증왕대와법흥왕대의체제정비를거치면서정치ㆍ사회적으로비약적인발전을이룩하였다. 진흥왕대에이르러서는한강유역일대로진출하였고, 가야제세력을병합함으로써, 고구려ㆍ백제와더불어한반도패권 ( 覇權 ) 을둘러싸고국운 ( 國運 ) 을건전쟁을수행할정도로급성장하였다. 26) 한편경주지역에는삼국시대의성곽유적이곳곳에산재해있다. 대표적인유적으로는왕성 ( 王城 ) 인월성 ( 月城 ) 을중심으로, 동쪽에명활산성 ( 明活山城 ), 서쪽에서형산성 ( 西兄山城, 현선도산성 ), 남쪽에남산신성 ( 南山新城 ), 북쪽에북형산성 ( 北兄山城 ) 등이다. 27) 신라는사비기백제와는달리왕성을둘러싼나성 ( 羅城 ) 의존재가확인되지않는데, 28) 4개 22) 三國史記 卷 1 新羅本紀 1 儒理尼師今 9 年春正月. 改六部之名仍賜姓楊山部爲梁部姓李高墟部爲沙梁部姓崔大樹部爲漸梁部 ( 一云牟梁 ) 姓孫干珍部爲本彼部姓鄭加利部爲漢祇部姓裵明活部爲習比部姓薛. 한편현재학계에서는사로육촌과신라육부의관계를둘러싸고두가지견해가대립하고있다. 하나는육촌과육부를계기적으로보는견해이고 ( 李鍾旭, 1982, 新羅國家形成史硏究, 一潮閣 ), 다른하나는육촌과육부를연결시킨것자체를후대의부회 ( 附會 ) 로보는견해이다 ( 朱甫暾, 1992, 三國時代의貴族과身分制 - 新羅를중심으로 -, 韓國社會發展史論, 一潮閣. ; 朱甫暾, 2006, 신라의部와部體制, 역사와세계 30). 최근까지발굴조사된고고학자료를검토해보면, 후자의견해가타당하다고생각된다. 23) 善生永助著ㆍ김기조譯, 2008, 조선총독부발간생활상태조사 (7) 국역慶州郡, 慶州文化院ㆍ慶州市, 34 쪽. 24) 권오영, 1997, 斯盧六村의위치문제와首長의성격, 新羅文化 14, 8~9 쪽. 25) 三國史記 卷 4 新羅本紀 4 智證麻立干 4 年. 冬十月群臣上言始祖創業已來國名未定或稱斯羅或稱斯盧或言新羅臣等以爲新者德業日新羅者網羅四方之義則其位國號宜矣. 26) 신라의한강유역진출에대한검토는이인철, 1997, 신라의한강유역진출과정에대한고찰, 鄕土서울 57. ; 주보돈, 2006, 5~6 세기중엽高句麗와新羅의관계 - 신라의漢江流域진출과관련하여 -, 北方史論叢 11. ; 심재연, 2008, 6~7 세기신라의북한강중상류지역진출양상, 新羅文化 31. ; 전덕재, 2009, 신라의한강유역진출과지배방식, 鄕土서울 73. ; 노중국, 2012, 신라진흥왕의한강유역점령, 鄕土서울 81. ; 張彰恩, 2012, 眞興王代新羅의北方進出과對高句麗領域向方, 新羅史學報 24, 참조. 27) 삼국사기 를보면, 서형산성은 593 년, 남산신성은 591 년, 북형산성은 671 년이라는初築연대가확인되고있다. 이는향후에관련성곽유적의발굴조사과정에서유념해야할대목이라고하겠다. 28) 현재에도부여지역에는사비기백제의나성인부여나성 ( 사적제 58 호 ) 이殘存하고있다. 부여나성에대한소개는차용걸, 2005, 백제지역의고대산성, 주류성, 161~162 쪽, 참조. 서라벌문화재연구원 7
의성이나성역할을수행한것으로여겨진다. 최근에명활성북문지에대한발굴조사를통해명활성의존폐 ( 存廢 ) 시기에대한귀중한자료를확보하였다. 29) 신라는태종무열왕대를거쳐문무왕대에이르러 660년과 668년에각각백제와고구려를병합하여 일통삼한 ( 一統三韓 ) 을달성했고, 30) 676년에는당군 ( 唐軍 ) 을한반도에서완전히축출하였다. 31) 이후통일신라시대에불국사 ( 佛國寺 ) 와석굴암 ( 石佛寺 ) 및남산일대의한단계진일보한불교문화를비롯하여찬란한민족문화를꽃피우면서, 32) 경주지역은명실상부한정치ㆍ경제ㆍ문화의중심지역할을수행하였다. 그러나통일신라는하대에접어들면서왕위계승분쟁과지방세력의발호 ( 跋扈 ) 로인해국운이기울기시작하였다. 급기야 892년과 901년에견훤 ( 甄萱 ) 과궁예 ( 弓裔 ) 가각각전주와철원을토대로후백제와후고구려를건국함으로써후삼국시대가도래했고, 최종승자는고려를건국한왕건 ( 王建 ) 이었다. 33) 고려는태조 18년 (935) 에신라경순왕이귀순해오자, 신라의수도를 경주 ( 慶州 ), 즉 경사스러운고을 이라는지명으로개칭하고, 경순왕에게식읍 ( 食邑 ) 으로주었다. 34) 이로써신라의천년사직은종언을고했고, 이때에 경주 라는명칭이역사상에서최초로사용되게되었다. 경주군을비롯한현경주시일대는태조 23년 (940) 에광평성리 ( 廣評省吏 ) 백문색 ( 白文色 ) 이안동대도호부 ( 安東大都護府 ) 로개호 ( 改號 ) 했고, 읍호 ( 邑號 ) 는경주사도독부 ( 慶州司都督府 ) 라고하였다. 35) 성종대에이르러동경유수관 ( 東京留守官 ) 으로다시개편되었다. 현종 3년 (1012) 에는영동ㆍ영남ㆍ산남등 3도의동경유수사와상주ㆍ진주의절도사 ( 節度使 ) 가모두혁파되었으므로, 동경유수를경주방어사 ( 慶州防禦使 ) 로, 상주절도사는안동대도호부 29) 최근에명활성북문지의발굴조사성과를검토한논고가제출되었다. 여기에는體城과補築, 谷城, 水口, 門止, 明活山城作成碑, 출토유물및운영시기에등에대한검토가망라되어있다 ( 류환성, 2014, 경주명활성의발굴성과와향후과제, 韓國城郭學會初代監査沈正輔敎授退任紀念論叢 ). 한편명활성은 647 년毗曇의난직후에廢棄된것으로보이는데 ( 朱甫暾, 1985, 雁鴨池出土碑片에대한一考察, 大丘史學 27. : 2002, 금석문과신라사, 지식산업사, 247~248 쪽 ), 反王的귀족세력에대한경계차원과남산신성으로의역할이전등이배경으로지적된다 ( 이영재ㆍ강재현, 2014, 明活城의廢棄시기와그배경, 新羅史學報 32, 324~332 쪽 ). 30) 삼국통일전쟁의과정에대한검토는노태돈, 2009,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참조. 31) 나당전쟁의과정에대한검토는國防軍史硏究所, 1999, 羅唐戰爭史. ; 서영교, 2006, 羅唐戰爭史硏究, 아세아문화사. ; 임기환, 2006, 7 세기동북아시아국제질서의변동과전쟁, 전쟁과동북아의국제질서, 일조각. ; 이상훈, 2012, 나당전쟁연구, 주류성, 참조. 32) 문명대는현재남산일대에잔존하는佛像과佛塔의상한연대를 7 세기전반기또는 650 년경으로편년하고있다 ( 文明大, 1994, 慶州南山佛蹟의變遷과佛谷龕室佛像考, 新羅文化 10 ㆍ 11). 이는남산일대가이미 7 세기초부터佛法을구현하는道場으로설계되고있었음을보여준다. 33) 고려태조의후삼국통일과정에대한검토는文暻鉉, 1987, 高麗太祖의後三國統一硏究, 螢雪出版社. ; 류영철, 2004, 高麗後三國統一過程硏究, 景仁文化社. ; 김갑동, 2010, 고려의후삼국통일과후백제, 서경문화사, 김명진, 2014, 고려태조왕건의통일전쟁연구, 혜안, 참조. 34) 高麗史 卷 2 世家 2 太祖 18 年 12 月. 及受羅王庭見之禮群臣稱賀聲動宮掖於是拜金傅爲政丞爲太子上歲給祿千碩創神鷰宮賜之 ( 中略 ) 除新羅國爲慶州仍賜爲食邑. 한편신라경순왕에대한검토는남무희, 2013, 김부대왕연구, 서경문화사, 참조. 35) 東都歷歲諸子記 後晋高祖. 天福五年庚子廣評省吏白文色以除羅號皆爲安東大都護府邑號慶州司都督府. 서라벌문화재연구원 8
사로, 진주절도사는안찰사 ( 按察使 ) 로각각바꾸었다. 이후신종 7년 (1204) 에반란사건에연루되면서경주지사 ( 慶州知事 ) 로강등되었다가, 고종 6년 (1219) 에다시동경이되었다. 충렬왕 34년 (1308) 에는계림부 ( 鷄林府 ) 로개칭하고, 부윤 ( 府尹 ) 을두었다. 고려시대의경주지역은주거지역의홍수범람을방지하기위해남고루 ( 南高壘 ) 를축조하기도하는등발전적모습을보이기도했으나, 이미왕도로서의기능은대폭축소되었다. 조선시대전기에도경주지역은계림부에속하였다. 태조 2년 (1393) 에각도의계수관 ( 界首官 ) 을신설 ( 新設 ) 할때에당시계림부의계수관을밀양도호부를비롯한양산ㆍ울산ㆍ청도ㆍ흥해ㆍ대구등의 5군과경산ㆍ동래ㆍ창녕ㆍ언양ㆍ기장ㆍ장기ㆍ영산ㆍ현풍ㆍ영일ㆍ청하등의 10현을소령 ( 所領 ) 으로하도록하였다. 태조 3년 (1394) 에는안강현이계림부에포함되었고, 36) 태종 15년 (1415) 10월에는계림부가경주부 ( 慶州府 ) 로개칭되었다. 중종 14년 (1519) 에는경상도를경상좌ㆍ우도로나누었고, 경상좌도의감영 ( 監營 ) 을경주부에두었다. 선조 26년 (1593) 에는경상도감영을성주로임시이전했다가, 선조 34년 (1601) 에대구로감영이확정됨에따라다시는경주에감영이두어지지않는다. 고종 32년 (1897) 에 13도제의시행으로인해경상북도경주군으로개칭되었다. 일제강점기하인 1914년 1월에경주지역은면제 ( 面制 ) 실시에의해지정면이된후, 1931년 3월에행정구역개편과동시에경주읍으로승격되었다. 한국전쟁종전직후인 1955년 9월 1일에는법률 390호로내동면전역과천북면황성리ㆍ용강리ㆍ동천리, 내남면탑리등이통합되어경주시로승격되었다. 1995년에시ㆍ군통합을통해경주시와월성군이통합되어현재에이르고있다. 본지표조사지역은행정구역상경북경주시양남면상계리산25번지일원이며, 문화재지정보호구역이외의지역이지만주변에유적이분포하고있어, 매장문화재가확인될가능성이있는지역이다. 현재조사지역주변으로반경 1,000m 이내에는남쪽으로근접한순으로 상계리고분군 37), 경주양남면상계리 333번지유적 38), 상계리동제유적 39), 상계리야철지 40) 등의삼국시대부터조선시대까지의유적이위치하고있다. 특히 경주양남면상계리 333번지유적 의경우, 상계리고분군의북서쪽에포함되어있고, 2009 년 2월 6일부터 2009년 5월 13일까지신라문화유산연구원에서시굴조사와발굴조사를시행하였다. 41) 그결과, 5~6세기대석관묘 8기, 석실묘 1기, 제사유구 1기등총 11기의유구가확인되었으며, 유개고배, 단경호, 대부장경호, 대부완, 파배, 연질소호, 금동제이식, 36) 太祖實錄 卷 5 3 年 3 月 7 日. 安康還屬鷄林. 37) 國立慶州博物館 慶州市, 2008, 文化遺蹟分布地圖 - 慶州市 ( 遺蹟槪要 )1:10,000-38) ( 재 ) 신라문화유산연구원, 2011, 慶州上溪里古墳群 - 경주양남면상계리 333 번지단독주택건립부지내유적 - 39) 國立慶州博物館 慶州市, 2008, 앞의보고서 40) 國立慶州博物館 慶州市, 2008, 앞의보고서. 41) ( 재 ) 신라문화유산연구원, 2011, 앞의보고서 서라벌문화재연구원 9
철제도자등의삼국시대유물이출토되었다. 이외에조사지역주변으로지표조사가다수이루었지만, 여기서는유적이확인되지않았다. 42) 그러나사전조사에서남쪽으로인접한지역에 상계리고분군 과 경주양남면상계리 333번지유적 이있기때문에삼국시대유적이잔존할가능성도있을것으로판단하였다. Ⅲ. 조사내용 1. 조사지역및주변문화재현황 1) 상계리고분군 ( 삼국 ) ; 조사지역남서쪽경계에서남쪽으로 78m 이격양남면상계리산21임일대이며, 북위35 40 36.4509, 동경129 25 01.6606 이다. 상계리서왕리마을동쪽능선에위치한다. 고분군내에서확인되는봉분의대부분이파괴된상태이며, 총 10기가확인된다. 특히남쪽사면에는봉분이집중적으로조영되어있었는데, 삭평되어확실하지않은봉분을제외하고도 6기의훼손된석곽이확인되며, 주변에는벽석과천석이흩어져있고토기편또한다량확인된다. 경주상계리고분군전경 경주상계리고분군내북서편 경주양남면상계리 333 번지유적 2) 양남면상계리 333 번지단독주택건립부지내유적 ( 삼국 ) ; 조사지역남서쪽경계에 서남쪽으로 190m 이격 42) ( 재 ) 중앙문화재연구원, 2006, 경주상계리공장조성부지내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 계림문화재연구원, 2010, 경주양남면상계리산 151 번지일원공장신축예정부지내문화재지표조사결과보고서 계림문화재연구원, 2011, 경주양남면상계리산 60 번지일원토사채취장부지내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 계림문화재연구원, 2011, 경주양남면상계리산 60 번지일원토사채취장추가부지내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 ( 재 ) 해동문화재연구원, 2011, 345kV 동울산분기송전선로건설사업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 서라벌문화재연구원 10
양남면상계리 333번지이며, 북위 35 40 38.11, 동경 129 24 55.90 이다. 2009 년단독주택건립을위해신라문화유산연구원에서발굴조사를시행하였다. 조사결과 5~6세기대석관묘 8기, 석실묘 1기, 제사유구 1기등총 11기이며, 유개고배, 단경호, 대부장경호, 대부완, 파배, 연질소호, 금동제이식, 철제도자등의삼국시대유물이출토되었다. 3) 상계리동제유적 ( 시대미상 ) : 조사지역남서쪽경계에서남쪽으로 453m 이격양남면상계리 415번지이며, 북위35 40 30.4081, 동경129 24 53.7999 이다. 당산나무는서왕리마을중앙에있는수령 400년정도된소나무이다. 동제는서왕리마을과양지마을, 화정마을이세곳이함께지내고있다. 나무는수고 15 수폭 20 둘레 3.5m로사방에돌담을둘렀으며, 당집이옆에있다. 동제는각마을에서제관을 1명씩선발하며길흉사를치르지않은깨끗한사람이지낸다. 매년음력 1월 14일밤자정에각마을별로돈을걷어비용을지원한다. 15일아침에는주민들이모여음복을하고사물놀이를한다. 4) 상계리야철지 ( 조선 ) : 조사지역남서쪽경계에서남쪽으로 620m 이격양남면상계리산143번지일대이며, 북위 35 40 22.6611, 동경129 24 48.2697 이다. 상계리서왕리마을남서쪽골짜기에위치하고있다. 골짜기좌우사면부는경작지로이용되고있고, 골짜기입구에는 50m 정도수로공사가되어있다. 서라벌문화재연구원 11
도면 1. 1918 년제작지도지표조사지역지형도 (S=1:50,000) 서라벌문화재연구원 12
도면 2. 지표조사지역지형및주변유적분포도 (S=1:25,000) 서라벌문화재연구원 13
도면 3. 지표조사지역및주변유적현황도 (S=1:10,000 경주문화유적분포지도인용ㆍ편집 ) 서라벌문화재연구원 14
2. 고고 역사분야조사지역은행정구역상경상북도경주시양남면상계리산25번지일원이며, 조사지역의중앙부분의일부가경작지대지만모두임야지대이다. 조사지역은앞서언급한중앙편의경작지를경계로북쪽의구릉지대와남쪽의구릉지대로구분할수있다. 북쪽의구릉지대는북쪽에위치한해발 117.8m의구릉정상부에서남쪽으로급격하게떨어지는구릉일부지역으로서, 동쪽에는자연수로와계곡에의한곡부가형성되어있다. 남쪽의구릉지대는남쪽에위치한해발 107.2m의구릉정상부에서북쪽으로급격하게떨어지는구릉의일부지역으로서, 북편과동편에는북쪽의구릉지대와마찬가지로자연수로와계곡에의한곡부가형성되어있다. 현재조사지역주변으로반경 500m 이내에는남쪽으로 상계리고분군, 경주양남상계리 333번지단독주택건립부지내유적 이위치하고있다. 여기서는지표조사 43) 와사굴 발굴조사 44) 에서삼국시대 (5~6세기) 고분군이확인되었다. 삼국시대고분군과이와관련한토기편등이확인되었다. 본지표조사는이러한유적의유존가능성을염두해두고실시하였다. 조사는도보로조사지역의북쪽구릉, 중앙편의경작지, 남쪽구릉순으로직접조사지역일대를육안으로관찰하면서절토면의토층, 지표면에유구 유물포함층및유물의분포유무등에대하여집중조사하였다. 조사지역은중앙편에약간의경작지를제외하면모두임야지대로서현재소나무, 등나무등잡목이일부우거져있고, 북쪽구릉지대의동편 서편경계면과남쪽구릉지대의북편 서편경계면에는곡부가형성되어냇물이흐르는상황이다. 전체적인지형으로볼때, 급경사에해당되는지형이며, 조사지역경계면으로곡부의유수에의하여원지형이다수침식되어있는상황이다. 또한조사지역내구릉에서도자연적인침수와곡부로인하여다수의자연수로와곡부가형성되어있고, 이로인하여구릉이침식되어원지형이남아있지않은상황이다. 절토면에서도표토층바로아래에서암반이드문드문확인되는상황이다. 그리고일부남아있는정상부의평탄한구릉일대에서도유구, 유물은확인되지않았다. 물론조사지역에서남쪽으로약 80m 떨어진지점에 상계리고분군 이있지만, 본지표조사지역은구릉의동사면에해당되기때문에고분군이주로입지하는구릉의서사면과남사면과지형과입지가다른양상이기때문에, 상대적으로유적이있을가능성이적다고판단된다. 이러한상황으로볼때본조사지역은원지형이일부남아있지않은상태이고, 유구및유물도확인되지않았다. 물론지표상잡목등이빽빽하게우거져있는구간이있어 43) 國立慶州博物館 慶州市, 2008, 위의보고서. 44) ( 재 ) 신라문화유산연구원, 2011, 위의보고서 서라벌문화재연구원 15
지표에서유구및유물확인이어려운점이있지만, 조사대상지내다소넓게분포하는곡부와지표및절개면단면토층에서유구및유물이확인되지않았다. 따라서조사지역 (23,580m2) 에대하여유적의입지가능성이희박할것으로판단되기때문에관련된공사를행정절차에따라진행하여도무방할것으로본다. 다만본조사는육안상확인하는지표조사의한계점으로인하여, 사업시행중유구및유물이확인될경우, 매장문화재보호및조사에관한법률에따라적절한조치를취해야할것이다. 3. 지명유래분야 45) 1) 양남면역사적기록을통한양남면의연혁을살펴보면신라 ( 新羅 ) 육부촌 ( 六部村 ) 중금산가리촌에속하였고, 고려시대에는성종 3년 (984) 삼경의하나인동경에속한다. 이후조선시대태종 13년 (1413) 에는경주부에속하게된다. 1895년에경주군동해면으로개칭되고, 1906 년경주군지역편성시장기군양남면으로개칭된다. 1914년에부군통폐합에따라경주군에귀속되고, 1953년 15개법정리동 22개행정리동으로나뉘게된다. 1955년 9월 1일에경주시제실시에따라경주군양남면에서월성군양남면으로개칭되고, 1987년 1월 1 일에양북면봉길리일부가 ( 월성원전부지 ) 양남면으로편입된다. 1989년 1월 1일에법률제 4050호로월성군을경주군으로개칭하고, 1995년 1월 1일법률제 4774호로도농복합형태의경주시양남면으로개칭된다. 2) 상계리 서왕리( 西旺里 ) 는신라석씨왕릉 ( 昔氏王陵 ) 이있는마을이라하여옛날에는 석왕리 ( 昔王里 ), 석왕릉리( 昔王陵里 ) 라고불렀으나, 마을이름에왕을넣기곤란하다고하여, 서왕리 로이어져내려오고있다고한다. 양지말 은해가떠서질때까지종일햇볕이내리쪼여양지가되므로 양지말, 양지동 ( 陽地洞 ) 이라부르게되었다고한다. 화림 ( 花林 ) 은이마을뒤에화봉 ( 花峰 ) 이라는산이있고, 마을입구에숲이울창하므로 화림 이라고부르게되었다고한다. 3) 지명 유적소개가리의골 골 멧돌배미밑에있어가루가된다는뜻을땃다고하는골짜기로, 청숫골남쪽에있다. 건는들 들 서왕리동쪽내건너에있는들로, 월평 ( 越坪 ) 이라고도한다. 고내기바우 바위 고내기 ( 고양이 ) 처럼생긴바위로, 밭무지기북쪽에있다. 45) 경주시 경주문화원, 2006, 慶州風物地理誌, pp 594~622. 서라벌문화재연구원 16
꼬약나뭇골 골 꼬약나무 ( 고염나무 ) 가있는골짜기로, 밭무지기동남쪽에있다. 꼴뚜들 골 꼴 ( 소풀 ) 이무성한골짜기로, 술방골남쪽에있다. 너구리바우 바위 너구리굴이있던바위로, 밭무지기에있다. 뒷골 골 맷골동쪽에있는골짜기. 맷골 골 지형이마치매처럼생긴골짜기라하여, 응곡 ( 鷹谷 ) 이라고도부르는데, 우두박얖동쪽에있다. 맷돌배미 논 지형이맷돌처럼생긴논으로, 가리의골위에있다. 맹마짓골 골 명매기 ( 칼새 ) 집이있던골짜기로, 밭무지기동북쪽에있다. 물받이 골 청숫골서쪽에있는골짜기. 밭무지기 골 청숫골위에있는골짜기. 불개밋등 등 술방골남쪽에있는등성이. 불맷골 골 불맷간 ( 풀뭇간 ) 이있었다고하는골짜기로, 청숫골남쪽에있다. 불썬는골 골 영검하므로불을밝혀놓고소원을빌었다고하는골짜기로, 청숫골동남쪽에있다. 뻑대만딩이 산 양남면상계리와신대리에걸쳐있는높이 283m의산. 측량대인뻑대 ( 포올 : Pole) 가박혀있었다고한다. 상섯골 마을 상계리, 신대리, 수렴리, 신서리, 서동리를통틀어일컫는마을이름으로, 상서지 ( 上西知 ), 웃섯골이라고도한다. 서녘들 들 양지말서쪽에있는들. 서왕리 ( 西旺理 ) 마을 석왕리 ( 昔王理 ), 석왕릉리 ( 昔王陵理 ) 라고도하며, 화림서북쪽에있는마을이다. 석왕릉 ( 昔王陵 ) 무덤 신라시대이름을알수없는어느석씨 ( 昔氏 ) 임금의능이라전하는데, 서왕리북쪽에있다. 성짓골 골 청숫골동남쪽에있는골짜기. 숙재내골 골 쑥이많다고하는골짜기로, 술방골남쪽에있다. 술방골 골 상계리에있는골짜기. 시비잇골 골 시비 ( 습지 ) 가많았던골짜기로, 밭무지기남쪽에있다. 양지말 마을 양지동 ( 陽地洞 ) 이라고도하며, 화림동북쪽에있는마을이다. 어븐골 골 밭무지기북쪽에있는골짜기. 우두 ( 牛頭 ) 박얖 골 꼴뚜들동쪽에있는골짜기. 지통골 골 한지를뜨는지통 ( 紙筒 ) 이있던골짜기로, 청수폭포서쪽에있다. 청수폭포 ( 淸水瀑布 ) 폭포 너비 2m, 높이약 20m의폭포로, 청숫골에있다. 피부병에좋다고하여많은사람들이물맞이를하러온다. 청숫골 골 청수폭포가있는골짜기로, 서왕리서쪽에있다. 춘굴문골 골 청숫골동남쪽에있는골짜기. 칠밭등 등 칡이많았다고하는등성이로, 양지말북쪽에있다. 서라벌문화재연구원 17
도면 4. 지표조사지역지형및주변유적현황도 (S=1:5,000) 서라벌문화재연구원 18
도면 5. 지표조사지역사진촬영위치도 (S=1:2,000) 서라벌문화재연구원 19
Ⅳ. 문화재보존대책현황및종합고찰 1. 문화재보존대책 역사 고고 ( 古考 ) 분야 - 총현황 조사기관 유적번호유적이름행정구역 ( 주소 ) 면적 ( m2 ) 유적성격조사기관의견비고 경주시ㆍ국립경주박물관 - 경주상계리고분군 경주양남면상계리산 21 번지일원 - 삼국시대고분군 영향없음 78m 이격 신라문화유산연구원 - 경주양남면상계리 333 번지단독주택신축부지내유적 경주양남면상계리산 333 번지 712 삼국시대고분군 영향없음 190m 이격 경주시ㆍ국립경주박물관 상계리동제유적 경주양남면상계리 415 번지 시대미상 영향없음 453m 이격 경주시ㆍ국립경주박물관 상계리야철지 경주양남면상계리산 143 번지 조선시대 영향없음 620m 이격 이격거리는조사지역경계와최단거리임. CAD 상산출면적으로실제와오차가있을수있음. 민속및지질 자연환경분야 : 해당사항없음. 2. 종합고찰우리연구원에서는양남한우영농조합법인 ( 대표 ; 이상순 ) 이추진중인경주상계리산 25번지일원초지조성부지에대한국비지원지표조사를진행하였으며, 종합적인고찰및조사단의견을정리하면다음과같다. 서라벌문화재연구원 20
1. 조사지역은행정구역상경상북도경주시양남면상계리산25번지일원이다. 조사지역주변으로반경 1,000m 이내에는남쪽으로근접한순으로 상계리고분군, 경주양남면상계리 333번지유적, 상계리동제유적, 상계리야철지 등의삼국시대부터조선시대까지의유적이위치하고있다. 2. 지표조사결과, 조사지역은전체적인지형으로볼때, 대부분급경사에해당되는지형이며, 조사지역경계면에서는곡부의유수에의하여원지형에서다수침식되어있는상황이다. 또한조사지역내구릉에서도자연적인침수와곡부로인하여다수의자연수로와곡부가형성되어있고, 이로인하여구릉이침식되어원지형이남아있지않은상황이다. 남아있는절토면의표토층바로아래에서도암반이드문드문확인되는상황이다. 3. 조사지역에서남쪽으로약 80m 떨어진지점에 상계리고분군 이있지만, 본지표조사지역은대부분구릉의동사면에해당된다. 고분군이주로입지하는지형은구릉의서사면과남사면으로서, 조사지역의지형과입지와는다른완만한지형이다. 그러므로본지표조사지역에서는지형으로볼때, 상대적으로유적이있을가능성이적다고판단된다. 4. 지표상잡목등이빽빽하게우거져있는구간이있어지표에서유구및유물확인 이어려웠지만, 조사지역내다소넓게분포하는곡부와수로, 절개면의단면토층에서 유구및유물이확인되지않았다. 따라서조사지역 (23,580m2) 은유적의입지가능성이희박할것으로판단되기때문에관련된공사를행정절차에따라진행하여도무방할것으로본다. 다만본조사는육안상확인하는지표조사의한계점으로인하여사업시행중유구및유물이확인될경우, 매장문화재보호및조사에관한법률에따라적절한조치를취해야할것이다. 2015 년 9 월 서라벌문화재연구원 21
사진 서라벌문화재연구원 22
사진 1. 지표조사지역위성사진 ( 문화재청 GIS 인트라넷시스템에서인용 ) 사진 2. 조사지역원경 ( 남 북 ) 서라벌문화재연구원 23
사진 3. 조사지역내북쪽구릉지대의북동편경계면근경 ( 도면 5 의 1) 사진 4. 조사지역내북쪽구릉지대의서편경계면진입로근경 ( 도면 5 의 2) 서라벌문화재연구원 24
사진 5. 조사지역내북쪽구릉지대의북편급경사면근경 ( 도면 5 의 3) 사진 6. 조사지역내북쪽구릉지대의북편구릉근경 ( 도면 5 의 4) 서라벌문화재연구원 25
사진 7. 조사지역내북쪽구릉지대의북편민묘전경 ( 도면 5 의 5) 사진 8. 조사지역내북쪽구릉지대의정상부근경 ( 도면 5 의 6) 서라벌문화재연구원 26
사진 9. 조사지역내북쪽구릉지대의서사면근경 ( 도면 5 의 7) 사진 10. 조사지역내북쪽구릉지대의정상부쪽절토면암반층노출근경 ( 도면 5 의 8) 서라벌문화재연구원 27
사진 11. 조사지역내북쪽구릉지대의남편경계면부근근경 ( 도면 5 의 9) 사진 12. 조사지역내북쪽구릉지대의서사면일대근경 ( 도면 5 의 10) 서라벌문화재연구원 28
사진 13. 조사지역내경작지일대근경 ( 도면 5 의 11) 사진 14. 조사지역내북쪽구릉의진입로및경작지근경 ( 도면 5 의 12) 서라벌문화재연구원 29
사진 15. 조사지역내북쪽구릉지대의경계면서편곡부암반노출근경 ( 도면 5 의 13) 사진 16. 조사지역내북쪽구릉지대의서편경계면곡부부근암반노출근경 ( 도면 5 의 14) 서라벌문화재연구원 30
사진 17. 조사지역내북쪽구릉지대의서편곡부근경 ( 도면 5 의 15) 사진 18. 조사지역내북쪽구릉지대의서편곡부주변암반노출근경 ( 도면 5 의 16) 서라벌문화재연구원 31
사진 19. 조사지역내북쪽구릉지대의북서편곡부주변암반노출근경 ( 도면 5 의 17) 사진 20. 조사지역내남쪽구릉지대의북동쪽원경 ( 도면 5 의 18) 서라벌문화재연구원 32
사진 21. 조사지역내북쪽구릉지대의남서쪽원경 ( 도면 5 의 19) 사진 22. 조사지역내남쪽구릉지대의북동쪽곡부근경 ( 도면 5 의 20) 서라벌문화재연구원 33
사진 23. 조사지역내남쪽구릉지대의북동쪽곡부주변절토면근경 ( 도면 5 의 21) 사진 24. 조사지역내남쪽구릉지대의북동쪽경계면근경 ( 도면 5 의 22) 서라벌문화재연구원 34
사진 25. 조사지역서편저수지근경 ( 도면 5 의 23) 사진 26. 조사지역내남쪽구릉지대의정상부근경 ( 도면 5 의 24) 서라벌문화재연구원 35
사진 27. 조사지역내남쪽구릉지대의북서편경계면근경 ( 도면 5 의 25) 사진 28. 조사지역내남쪽구릉지대의서편경계면근경 ( 도면 5 의 26) 서라벌문화재연구원 36
사진 29. 조사지역내남쪽구릉지대의남편경사면근경 ( 도면 5 의 27) 사진 30. 조사지역내남쪽구릉지대의남편곡부근경 ( 도면 5 의 28) 서라벌문화재연구원 37
사진 31. 조사지역내남쪽구릉지대의남편곡부축대근경 ( 도면 5 의 29) 사진 32. 조사지역내남쪽구릉지대의남편급경사면근경 ( 도면 5 의 30) 서라벌문화재연구원 38
사진 33. 조사지역내남쪽구릉지대의남편급경사면근경 ( 도면 5 의 31) 사진 34. 조사지역내남쪽구릉지대의중앙편곡부근경 ( 도면 5 의 32) 서라벌문화재연구원 39
사진 35. 조사지역내남쪽구릉지대의남동편및농로근경 ( 도면 5 의 33) 사진 36. 조사지역내남쪽구릉지대의남동편절토면근경 ( 도면 5 의 34) 서라벌문화재연구원 40
사진 37. 조사지역내남쪽구릉지대의북동편절토면암반노출근경 ( 도면 5 의 35) 사진 38. 조사지역내남쪽구릉지대의남서편근경 ( 도면 5 의 36) 서라벌문화재연구원 41
사진 39. 조사지역내북쪽구릉지대의경계면동편근경 ( 도면 5 의 37) 사진 40. 조사지역내북쪽구릉지대의경계면동편곡부근경 ( 도면 5 의 38) 서라벌문화재연구원 42